유란시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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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번역
2016 Korean Translation
ISBN: 978-0911560-404 (고급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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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 Das Urantia B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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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어 – Az Urantia köny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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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분류 번호: UF-KOR-001-2016-1
출판 스탬프: UF-20170101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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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부
지역 우주 [7]
구원자 별의 가브리엘에서 권한을 받아 활동하는 네바돈 지역 우주 성격자 군단의 후원을 받았다
제 3 부
유란시아의 역사 [8]
구원자 별의 가브리엘의 권한으로 활동하는 지역 우주 성격자 군단이 이 논문집을 후원하였다
제 4 부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 [9]
이 논문집은 멜기세덱 계시 지휘자의 감독 밑에서 행동하는 유란시아의 열두 중도자로 구성된 위원회의 후원을 받았다.
이 이야기의 근거는 한때 사도 안드레를 초인간적으로 보호하는 데 배치된 한 2차 중도자가 제공하였다.
000. 머리말 [10]
- I. 신과 신성 [207]
- II. 하나님 [208]
- III. 첫째 근원 중심 [209]
- 일곱 절대자
- 실체
- 스스로 계시는 이 개념
- IV. 우주의 실체 [210]
- 파라다이스
- V. 성격 실체 [211]
- VI. 에너지와 원본 [212]
- VII. 최상 존재 [213]
- VIII. 칠중 신 [214]
- IX. 궁극위 하나님 [215]
- X. 절대자 하나님 [216]
- XI. 세 절대자 [217]
- XII. 여러 삼자일체 [218]
- 인정하는 말씀 [219]
001. 우주의 아버지 [11]
- 1. 아버지의 이름 [220]
- 2. 하나님의 실체 [221]
- 3. 하나님은 보편적 영 [222]
- 4. 하나님의 신비 [223]
- 5. 우주의 아버지의 성격 [224]
- 6. 우주의 성격자 [225]
- 7. 성격 개념의 영적 가치 [226]
002. 하나님의 성품 [12]
- 1. 무한한 하나님 [227]
- 2. 아버지의 영원한 완전성 [228]
- 3. 응보와 공정 [229]
- 4. 신의 자비 [230]
- 5. 하나님의 사랑 [231]
- 6. 하나님의 선하심 [232]
- 7. 신성한 진리와 아름다움 [233]
003. 하나님의 속성 [13]
- 1.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234]
- 2. 하나님의 무한한 힘 [235]
- 3. 하나님은 만물을 아신다 [236]
- 4. 하나님은 한계가 없다 [237]
- 5. 아버지의 최상 통치 [238]
- 불가피한 것
- 6. 아버지의 수위성 [239]
- 축복
004. 하나님과 우주의 관계 [14]
- 1. 우주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 [240]
- 섭리
- 2. 하나님과 자연 [241]
- 3. 하나님의 변치 않는 성질 [242]
- 4. 하나님을 깨닫는 것 [243]
- 5. 하나님에 관한 그릇된 관념 [244]
005.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 [15]
- 1. 하나님께 다가가는 법 [245]
- 2. 하나님의 계심 [246]
- 3. 참된 예배 [247]
- 4. 종교에 나타나는 하나님 [248]
- 5. 하나님을 의식함 [249]
- 6. 성격자의 하나님 [250]
006. 영원한 아들 [16]
- 1. 영원한 아들의 신분 [251]
- 2. 영원한 아들의 성품 [252]
- 3. 아버지의 사랑의 직분 [253]
- 4. 영원한 아들의 속성 [254]
- 전능, 두루 계심, 전지(全知)
- 5. 영원한 아들의 한계 [255]
- 6. 영 지성 [256]
- 7. 영원한 아들의 성격 [257]
- 8. 영원한 아들의 현실화 [258]
007. 영원한 아들과 우주의 관계 [17]
- 1. 영 인력 회로 [259]
- 2. 영원한 아들의 행정 [260]
- 3. 영원한 아들과 개인의 관계 [261]
- 4. 사람을 완전하게 만드는 신의 계획 [262]
- 5. 수여되는 영 [263]
- 영원한 아들의 수여
- 최초의 미가엘의 여러 수여
- 6. 하나님의 파라다이스 아들 [264]
- 7. 아버지를 최상으로 계시하는 것 [265]
008. 무한한 영 [18]
- 1. 행동의 하나님 [266]
- 2. 무한한 영의 성품 [267]
- 3. 영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268]
- 4. 신성한 봉사의 영 [269]
- 창조 딸
- 5. 하나님의 계심 [270]
- 6. 무한한 영의 성격 [271]
009. 무한한 영과 우주의 관계 [19]
- 1. 셋째 근원 중심의 속성 [272]
- 2. 두루 계시는 영 [273]
- 3. 우주의 조종자 [274]
- 4. 절대 지성 [275]
- 5. 지성이 베푸는 봉사 [276]
- 6. 지성 인력의 회로 [277]
- 7. 우주의 거울 작용 [278]
- 8. 무한한 영의 성격자 [279]
- 셋째 근원 중심의 기능적 가족
010.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20]
- 1. 첫째 근원 중심의 자기 분배 [280]
- 2. 신의 성격화 [281]
- 3. 세 분의 신 [282]
- 4. 신의 삼위일체 연합 [283]
- 5. 삼위일체의 기능 [284]
- 유한자에 대한 태도, 초한자(超限者)에 대한 태도, 절대적 태도
- 6. 삼위일체의 고정된 아들 [285]
- 응보, 증거, 심판
- 7. 최상위의 전반적 통제 [286]
- 8. 유한을 넘는 삼위일체 [287]
- 인간 운명의 한계
011. 영원한 파라다이스 섬 [21]
- 1. 신성한 거소 [288]
- 2. 영원한 섬의 본질 [289]
- 3. 위 파라다이스 [290]
- 4. 가장자리 파라다이스 [291]
- 5. 아래 파라다이스 [292]
- 6. 공간의 호흡 [293]
- 무물(無物) 공간
- 7. 파라다이스의 공간 기능 [294]
- 중부 공간 지대
- 8. 파라다이스 인력 [295]
- 물력, 에너지, 동력
- 9. 파라다이스의 독특성 [296]
012. 온 우주 [22]
- 1. 총우주의 여러 공간 수준 [297]
- 2. 무제한 절대자의 영토 [298]
- 3. 우주의 인력 [299]
- 4. 공간과 운동 [300]
- 5. 공간과 시간 [301]
- 6. 우주의 전반적 통제 [302]
- 7. 부분과 전체 [303]
- 8. 물질과 지성과 영 [304]
- 9. 성격 실체 [305]
013. 파라다이스의 신성한 여러 구체 [23]
- 1. 아버지의 신성한 일곱 세계 [306]
- (1) 신(神)별
- (2) 아들별
- (3) 영(靈)별
- (4) 대관(代官)별
- (5) 외톨이별
- (6) 천사별
- (7) 승천자별
- 2. 아버지의 세계들의 관계 [307]
- 3. 영원한 아들의 거룩한 여러 세계 [308]
- 4. 무한한 영의 여러 세계 [309]
- 으뜸 영들의 집행부 거처
014. 신성한 중앙 우주 [24]
- 1.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체계 [310]
-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표준일
- 검은 인력체
- 2. 하보나의 구조 [311]
- 3. 하보나의 여러 세계 [312]
- 4. 중앙 우주에서 사는 생물 [313]
- 하보나 원주민
- 5. 하보나의 생활 [314]
- 단조로움과 모험
- 6. 중앙 우주의 목적 [315]
015. 일곱 초우주 [25]
- 1. 초우주 공간 수준 [316]
- 2. 초우주의 조직 [317]
- 3. 오르본톤 초우주 [318]
- 4. 성운―우주들의 선조 [319]
- 5. 공간 물체의 기원 [320]
- 6. 공간의 구체 [321]
- 7. 건축된 구체 [322]
- 초우주 시간
- 8. 에너지의 통제와 조절 [323]
- 9. 초우주의 회로 [324]
- 지역 우주 회로
- 10. 초우주 통치자 [325]
- 11. 심의하는 집회 [326]
- 12. 최고 재판소 [327]
- 13. 구역 정부 [328]
- 14. 일곱 초우주의 목적 [329]
016. 일곱 으뜸 영 [26]
- 1. 삼자일체인 신과 가지는 관계 [330]
- 2. 무한한 영과 가지는 관계 [331]
- 3. 으뜸 영들의 신분과 다양성 [332]
- 4. 으뜸 영의 속성과 기능 [333]
- 5. 생물과 가지는 관계 [334]
- 6. 우주 지성 [335]
- 원인 작용, 의무, 예배
- 7. 도덕과 미덕과 성격 [336]
- 8. 유란시아 인격 [337]
- 9. 인간 의식의 실체 [338]
017. 일곱 최상 영 집단 [27]
- 1. 일곱 최상 집행자 [339]
- 인간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
- 2. 위엄자―거울 작용의 우두머리 [340]
- 3. 거울 영 [341]
- 4. 거울 영상 보조자 [342]
- 5. 일곱 회로 영 [343]
- 6. 지역 우주의 창조 영 [344]
- 7. 보조 지성 영 [345]
- 8. 최상 영의 기능 [346]
018. 최상 삼위일체 성격자 [28]
- 1. 삼위일체가 낳은 최상위의 신비 [347]
- 2. 영원부터 늘 계신 이 [348]
- 3. 옛적부터 늘 계신 이 [349]
- 4. 늘 완전한 이 [350]
- 5. 요즘부터 늘 계신 이 [351]
- 6. 늘 하나된 이 [352]
- 7. 늘 충실한 이 [353]
019.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동급의 존재 [29]
- 1. 삼위일체 교육 아들 [354]
- 2. 지혜 완성자 [355]
- 3. 신성한 조언자 [356]
- 4. 우주 검열자 [357]
- 삼위일체의 고정된 아들
- 5. 영감 받은 삼위일체 영 [358]
- 6. 하보나 원주민 [359]
- 7. 파라다이스 시민 [360]
020. 하나님의 파라다이스 아들 [30]
- 1. 내려오는 하나님의 아들 [361]
- 2. 심판 아들 [362]
- 3. 사법 행위 [363]
- 4. 심판관 임무 [364]
- 5. 하나님의 파라다이스 아들의 수여 [365]
- 6. 필사자로 수여하는 생애 [366]
- 7. 삼위일체 교육 아들 [367]
- 8. 데이날의 지역 우주 직분 [368]
- 9. 데이날이 행성에 베푸는 봉사 [369]
- 10.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연합된 직책 [370]
021. 파라다이스 창조 아들 [31]
- 최초의 미가엘
- 1. 창조 아들의 기원과 성품 [371]
- 2. 지역 우주의 창조자 [372]
- 3. 지역 우주의 통치권 [373]
- 4. 미가엘의 수여 [374]
- 5. 주 아들과 우주의 관계 [375]
- 6. 주 미가엘의 운명 [376]
022. 삼위일체를 체험한 하나님의 아들 [32]
- 1. 삼위일체가 품었던 아들 [377]
- 삼위일체를 체험한 달성의 아들
- 삼위일체를 체험한 선택의 아들
- 삼위일체를 체험한 완전의 아들
- 2. 막강한 사자 [378]
- 3. 고등 권위자 [379]
- 4. 이름도 번호도 없는 자 [380]
- 5. 삼위일체를 체험한 관리자 [381]
- 6. 삼위일체를 체험한 대사 [382]
- 7. 삼자일체화 기법 [383]
- 승천자가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
-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주민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
-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운명의 아들
- 8. 인간이 삼자일체로 낳은 아들 [384]
- 9. 천상의 보호자 [385]
- 10. 높은 아들 조수 [386]
023. 외톨 사자 [33]
- 1. 외톨 사자의 성품과 기원 [387]
- 2. 외톨 사자의 임무 [388]
- 3. 외톨 사자의 시공 근무 [389]
- 천사의 속도와 기타 공간 속도
- 4. 외톨 사자의 특별한 봉사 [390]
-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운명의 아들
024. 무한한 영의 고등 성격자 [34]
- 1. 우주 회로 감독자 [391]
- 2. 통계 지휘자 [392]
- 3. 무한한 영의 개인 보조자 [393]
- 4. 부검열자 [394]
- 5. 지정된 파수 [395]
- 6. 졸업생 안내자 [396]
- 그랜드판다, 첫 승천자
- 7. 졸업생 안내자의 기원 [397]
025. 공간의 사자 무리 [35]
- 1. 하보나 일꾼 [398]
- 2. 우주 화해자 [399]
- 3. 화해자의 멀리 미치는 봉사 [400]
- 4. 법률 고문 [401]
- 5. 파라다이스의 기록 관리자 [402]
- 6. 하늘 기록자 [403]
- 7. 상물질 동반자 [404]
- 8. 파라다이스 동반자 [405]
026. 중앙 우주에서 봉사하는 영 [36]
- 1. 봉사하는 영 [406]
- 중앙 우주의 봉사하는 영
- 초우주의 봉사하는 영
- 지역 우주의 봉사하는 영
- 2. 막강한 상천사 [407]
- 3. 3차 상천사 [408]
- (1) 조화 감독자
- (2) 우두머리 기록자
- (3) 방송자
- (4) 사자
- (5) 정보 조정자
- (6) 수송 성격자
- (7) 예비군
- 4. 2차 상천사 [409]
- 승천자가 하보나에 도착함
- 5. 순례자 조수 [410]
- 6. 최상위 안내자 [411]
- 7. 삼위일체 안내자 [412]
- 8. 아들 탐지자 [413]
- 신을 발견하는 데 실패하는 것
- 9. 아버지 안내자 [414]
- 10. 상담자와 고문 [415]
- 실패한 후보자의 배치
- 11. 휴식 보완자 [416]
- 인간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
027. 1차 상천사의 봉사 [37]
028. 초우주의 봉사하는 영 [38]
- 1. 3품 천사 [424]
- 2. 전천사 [425]
- 3. 2품 천사 [426]
- 4. 1차 2품 천사 [427]
- (1) 합동 행위자의 목소리
- (2) 일곱 으뜸 영의 목소리
- (3) 창조 아들들의 목소리
- (4) 천사 무리의 목소리
- (5) 방송 수신자
- (6) 수송 성격자
- (7) 예비군
- 5. 2차 2품 천사 [428]
- (1) 지혜의 목소리
- (2) 철학의 혼
- (3) 혼의 연합
- (4) 조언의 핵심
- (5) 생존의 기쁨
- (6) 봉사의 만족
- (7) 영 분별자
- 6. 3차 2품 천사 [429]
- (1) 기원의 중요성
- (2) 자비의 기억
- (3) 시간의 중요성
- (4) 책임의 존엄
- (5) 봉사의 고결
- (6)과 (7) 위대함의 비결과 선한 혼
- 7. 2품 천사의 봉사 [430]
029. 우주 동력 지휘자 [39]
- 1. 일곱 최상 동력 지휘자 [431]
- 2. 최상 동력 중심 [432]
- (1) 최상 감독 중심
- (2) 하보나 중심
- (3) 초우주 중심
- (4) 지역 우주 중심
- (5) 별자리 중심
- (6) 체계 중심
- (7) 분류되지 않은 중심
- 3. 동력 중심의 영토 [433]
- 4. 물리 통제사 [434]
- (1) 동력 부지휘자
- (2) 기계적 통제자
- (3) 에너지 변압자
- (4) 에너지 발송자
- (5) 1차 결합자
- (6) 2차 분리자
- (7) 생계기
생시계- 5. 물력 조직책 [435]
- 궁극에 이른 1차 물력 조직책
- 초월 물력 부조직책
030. 대우주의 성격자 [40]
- 1. 살아 있는 존재에 관한 파라다이스의 분류 [436]
- I. 삼위의 기원을 가진 존재
- II. 이중 기원 존재
- III. 단일 기원 존재
- IV. 궁극에 이른 초월 존재
- V. 신의 분신이 된 통일체
- VI. 초월 성격 존재
- VII. 분류되지 않은 서열과 밝혀지지 않은 서열
- 2. 유버르사 성격자 등록부 [437]
- I. 파라다이스 신
- II. 최상 영
- III. 삼위일체 기원의 존재
- IV. 하나님의 아들
- V. 무한한 영의 성격자
- VI. 우주 동력 지휘자
- VII. 영구 시민 군단
복합 성격자 무리- 3. 우대 거류민 [438]
- (1) 별 연구자
- (2) 하늘 예술가
- (3) 회상 지도자
- (4) 연장 학교 강사
- (5) 다양한 예비군
- (6) 학생 방문자
- (7) 하늘 가는 순례자
- 4. 하늘 가는 필사자 [439]
- (1) 행성의 필사자
- (2) 잠자는 생존자
- (3) 저택 세계 학생
- (4) 상물질 진보자
- (5) 초우주의 피보호자
- (6) 하보나 순례자
- (7) 파라다이스에 도착한 자
031. 최후 군단 [41]
- 1. 하보나 원주민 [440]
- 2. 인력 사자 [441]
- 3. 영화롭게 된 필사자 [442]
- 4. 입양된 세라핌 [443]
- 5. 영화롭게 된 물질 아들 [444]
- 6. 영화롭게 된 중도인 [445]
- 7. 빛의 전도사 [446]
- 8. 초월자 [447]
- 9. 총우주 건축가 [448]
- 10. 궁극의 모험 [449]
032. 지역 우주의 진화 [42]
- 1. 우주들의 물리적 출현 [450]
- 2. 우주 조직 [451]
- 3. 진화 관념 [452]
- 4. 하나님과 지역 우주의 관계 [453]
- 5. 영원하고 신성한 목적 [454]
033. 지역 우주의 행정 [43]
- 1. 네바돈의 미가엘 [455]
- 2. 네바돈의 군주 [456]
- 3. 우주 아들과 우주 영 [457]
- 4. 가브리엘―최고 집행자 [458]
- 5. 삼위일체 대사 [459]
- 6. 일반 행정 [460]
- 지역 우주 시간
- 7. 네바돈의 법정 [461]
- 8. 입법 및 집행 기능 [462]
034. 지역 우주의 어머니 영 [44]
- 1. 창조 영의 성격화 [463]
- 2. 신성한 봉사자의 성품 [464]
- 3. 시공의 아들과 영 [465]
- 4. 지역 우주 회로 [466]
- 5. 영의 봉사 [467]
- 6. 사람 안에 있는 영 [468]
- 사람의 이중 성품
- 7. 영과 육체 [469]
- “이것이 길이라.”
035. 하나님의 지역 우주 아들 [45]
- 1. 아버지 멜기세덱 [470]
- 2. 멜기세덱 아들 [471]
- 3. 멜기세덱 세계 [472]
- 4. 멜기세덱의 특별 임무 [473]
- 멜기세덱의 육신화
- 5. 보론다덱 아들 [474]
- 6. 별자리 아버지 [475]
- 7. 보론다덱 세계 [476]
- 8. 라노난덱 아들 [477]
- 1차 라노난덱
- 2차 라노난덱
- 3차 라노난덱
- 9. 라노난덱 통치자 [478]
- 10. 라노난덱 세계 [479]
036. 생명 운반자 [46]
- 1. 생명 운반자의 기원과 성품 [480]
- 2. 생명 운반자 세계 [481]
- 3. 생명의 이식 [482]
- 4. 멜기세덱 생명 운반자 [483]
- 중간 초한자
- 구원자별의 최후자 세계
- 5. 일곱 보조 지성 영 [484]
- (1) 직관의 영
- (2) 이해의 영
- (3) 용기의 영
- (4) 지식의 영
- (5) 상담의 영
- (6) 예배의 영
- (7) 지혜의 영
- 6. 살아 있는 물력 [485]
037. 지역 우주의 성격자 [47]
- 1. 우주 보조자 [486]
- 2. 찬란한 저녁별 [487]
- 창조된 저녁별
- 승천하는 저녁별
- 저녁별의 세계
- 3. 천사장 [488]
- 천사장의 세계
- 4. 최고 조수 [489]
- 5. 고등 위원 [490]
- 종족 위원
- 네바돈 완전 군단
- 영이 융합한 필사자의 세계
- 6. 천상의 감독자 [491]
- 네바돈 교육 체계
- 7. 저택 세계 선생 [492]
- 8. 배치된 높은 영 계급 [493]
- 외톨 사자
- 우주 회로 감독자―안도본시아
- 인구 조사 지도자―살사시아
- 부검열자
- 지정된 파수
- 우주 화해자
- 법률 고문
- 하늘 기록자
- 상물질 동반자
- 9. 지역 우주의 영구 시민 [494]
- (1) 수사시아
- (2) 일생자
- (3) 물질 아들
- (4) 중도인(中道人)
아반돈터- 10. 다른 지역 우주 집단 [495]
- 영 일꾼
- 씨앗 일꾼
- 우대 거류지
038. 지역 우주의 봉사하는 영 [48]
- 1. 세라핌의 기원 [496]
- 2. 천사의 성품 [497]
- 3. 밝혀지지 않은 천사 [498]
- 4. 천사의 세계 [499]
- 5. 천사의 훈련 [500]
- 6. 천사의 조직 [501]
- 7. 케루빔과 사노빔 [502]
- 8. 케루빔과 사노빔의 승진 [503]
- (1) 승천 후보자
- (2) 중간 단계 케루빔
- (3) 상물질 케루빔
- 9. 중도인 [504]
- (1) 1차 중도자
- (2) 2차 중도자
039. 천사 무리 [49]
- 1. 최상 세라핌 [505]
- (1) 아들 및 영 봉사자
수여 수행원- (2) 법정 고문
- (3) 우주 예비 교육자
- (4) 교육 상담자
- (5) 배치 지도자
- (6) 기록자
- (7) 무소속 봉사자
- 2. 우수 세라핌 [506]
- (1) 정보 군단
- (2) 자비의 목소리
- (3) 영 조정자
- (4) 조교
- (5) 수송자
천사 수송 기법- (6) 기록자
방송자- (7) 예비군
- 3. 감독 세라핌 [507]
- (1) 감독 조수
- (2) 법률 예측자
- (3) 사회 조성자
- (4) 윤리 감각 향상자
- (5) 수송자
- (6) 기록자
- (7) 예비군
- 4. 행정 세라핌 [508]
- (1) 행정 조수
- (2) 응보 안내자
- (3) 우주 시민권 해석자
- (4) 도덕 촉진자
- (5) 수송자
- (6) 기록자
- (7) 예비군
- 5. 행성 조수 [509]
- (1) 동산의 목소리
- (2) 형제 정신의 영
- (3) 평화의 혼
- (4) 신뢰의 영
- (5) 수송자
천사 수송기의 출발- (6) 기록자
- (7) 예비군
- 6. 과도기 봉사자 [510]
- 7. 미래의 세라핌 [511]
- 8. 천사의 운명 [512]
- 9. 완결 천사 군단 [513]
040. 하늘 가는 하나님의 아들 [50]
- 1. 진화 세라핌 [514]
- 2. 하늘 가는 물질 아들 [515]
- 3. 변신한 중도자 [516]
- 4. 인격이 된 조절자 [517]
- 5. 시공의 필사자 [518]
- 조절자가 일시로 또는 경험으로 머무르는 필사자
- 조절자가 융합하지 않는 종류의 필사자
- 조절자가 융합하는 잠재성을 가진 필사자
- 무번호 계열
- 6. 하나님의 믿음의 아들 [519]
- 7. 아버지가 융합한 필사자 [520]
- 8. 아들이 융합한 필사자 [521]
- 9. 영이 융합한 필사자 [522]
- 기억을 되살리는 기법
- 10. 승천자의 운명 [523]
041. 지역 우주의 물리적 모습 [51]
- 1. 네바돈의 동력 중심 [524]
- 2. 사타니아의 물리 통제자 [525]
- 3. 우리의 별 이웃 [526]
- 4. 태양의 밀도 [527]
- 5. 태양의 방사 [528]
- 6. 칼시움―공간의 떠돌이 [529]
- 7. 태양 에너지의 근원 [530]
- 8. 태양 에너지의 반응 [531]
- 9. 태양의 안정성 [532]
- 10. 사람이 사는 세계의 기원 [533]
042. 에너지―지성과 물질 [52]
- 1. 파라다이스 물력과 에너지 [534]
- 2. 우주의 비영적 에너지 체계 [535]
- (1) 공간 잠재력
- (2) 원초 물력
- (3) 태동 에너지
가. 유력(有力) 에너지 나. 인력 에너지- (4) 우주 동력
- (5) 하보나 에너지
- (6) 초월 에너지
- (7) 일력(一力)
- 3. 물질의 분류 [536]
- 4. 에너지와 물질의 변질 [537]
- 5. 파동 에너지의 명시 [538]
- 6. 극자와 전자와 원자 [539]
- 7. 원자 물질 [540]
- 8. 원자의 밀착 [541]
- 9. 자연 과학 [542]
- 10. 우주의 비영적 에너지 체계 [543]
- (1) 보조 영 이전의 지성
- (2) 보조 영 지성
- (3) 진화하는 상물질 지성
우주 지성- 11. 우주의 기계적 작용 [544]
- 12. 원본과 형태―지성의 지배 [545]
043. 별자리 [53]
- 1. 별자리 본부 [546]
- 2. 별자리 정부 [547]
- 3. 놀라시아덱의 최고자 [548]
- 4. 산상 집회―늘 충실한 이 [549]
- 5. 루시퍼 반란 뒤에 에덴시아 아버지 [550]
- 6. 하나님의 동산 [551]
- 7. 일생자 [552]
- 8. 에덴시아의 훈련 세계 [553]
- 9. 에덴시아 시민권 [554]
044. 하늘 예술가 [54]
- 1. 하늘 음악가 [555]
- 2. 하늘 재생자 [556]
- 3. 신성한 건축자 [557]
- 4. 생각 기록자 [558]
- 5. 에너지 조종자 [559]
- 6. 설계자와 치장자 [560]
- 7. 조화 작업자 [561]
- 8. 필사자의 소망과 상물질계의 성취 [562]
045. 지역 체계의 행정 [55]
- 1. 과도기 문화 세계 [563]
- (1) 최후자 세계
- (2) 상물질 세계
- (3) 천사 세계
- (4) 초월 천사 세계
- (5) 아들들의 세계
- (6) 영의 세계
- (7) 아버지의 세계
- 2. 체계 군주 [564]
- 3. 체계 정부 [565]
- 4. 24 상담자 [566]
- 5. 물질 아들 [567]
- 6. 아담의 승천자 훈련 [568]
- 부모 체험
- 사타니아의 보호 관찰 보육원
- 7. 멜기세덱 학교 [569]
046. 지역 체계 본부 [56]
- 1. 예루셈의 물리적 측면 [570]
- 2. 예루셈의 물리적 모습 [571]
- 3. 예루셈 방송 [572]
- 4. 거주 지역과 행정 지역 [573]
- 5. 예루셈 동그라미 [574]
- (1) 하나님의 아들의 동그라미
- (2) 천사의 동그라미
- (3) 우주 보조자의 동그라미
- (4) 물리 통제사의 동그라미
- (5) 하늘 가는 필사자의 동그라미
- (6) 우대 거류지의 동그라미
- (7) 최후자의 동그라미
- 6. 집행 및 행정 정사각형 [575]
- 7. 직사각형―씨앗 일꾼 [576]
- 8. 예루셈 삼각형 [577]
047. 일곱 저택 세계 [57]
- 1. 최후자의 세계 [578]
- 필요한 부모 체험
- 2. 시험 육아원 [579]
- 3. 제1 저택 세계 [580]
- 상물질 동반자
- 4. 제2 저택 세계 [581]
- 5. 제3 저택 세계 [582]
- 6. 제4 저택 세계 [583]
- 7. 제5 저택 세계 [584]
- 8. 제6 저택 세계 [585]
- 조절자 융합
- 9. 제7 저택 세계 [586]
- 10. 예루셈 시민권 [587]
048. 상물질 생명 [58]
- 1. 상물질계 물질 [588]
- 2. 상물질 동력 감독 [589]
- (1) 회로 규제자
- (2) 체계 조정자
- (3) 행성 관리자
- (4) 통합 통제자
- (5) 연락 안정자
- (6) 선택 분류자
- (7) 부기록원
- 3. 상물질 동반자 [590]
- (1) 순례자를 수호하는 자
- (2) 순례자를 영접하는 자와 자유로운 친교자
- (3) 천상의 방문자를 영접하는 자
- (4) 조정자와 연락 지휘자
- (5) 통역자와 번역자
- (6) 소풍 및 회상 감독자
- (7) 지역과 건물 관리자
- 4. 회상 지도자 [591]
- 하늘 유머
- 필사자의 유머
- 5. 저택 세계 선생 [592]
- 6. 상물질 세계의 세라핌―과도기 봉사자 [593]
- (1) 전도 천사
시편 23편 원문- (2) 종족 해석자
- (3) 정신 계획자
- (4) 상물질 상담자
상지혜의 입체 효과- (5) 기술자
- (6) 기록자인 선생
진리와 사실- (7) 봉사 예비군
성공, 실패, 자만- 7. 상물질계의 상지혜 [594]
- 8. 상물질 진보자 [595]
049. 사람 사는 세계 [59]
- 1. 행성에서 사는 생명 [596]
- 2. 행성의 물리적 종류 [597]
- (1) 대기(大氣) 종류
- (2) 원소 종류
- (3) 인력 (引力) 종류
- (4) 기온 종류
- (5) 전기 종류
- (6) 에너지 공급 종류
- (7) 이름 없는 종류
- 3. 비호흡자의 세계 [598]
- 4. 의지를 가진 진화 인간 [599]
- 5. 행성의 필사자 계열 [600]
- (1) 행성 환경에 대한 적응
타바만시아가 검열한 실험 계열- (2) 두뇌 종류 계열
- (3) 영적 감수성 계열
- (4) 행성의 필사자 시대
- (5) 생물의 연속된 유사성
- (6) 조절자 융합 계열
- (7) 땅을 벗어나는 기법
- 6. 땅을 벗어나기 [601]
- (1) 섭리 시대 서열이나 집단 서열로 살아남는 것
- (2) 개별로 승천하는 서열
- (3) 시험 중인 서열과 승천하는 서열
- (4) 수정된 2차 승천 서열
- (5) 수정된 1차 승천 서열
050. 행성 영주 [60]
- 1. 영주의 임무 [602]
- 2. 행성의 행정 [603]
- 3. 영주의 유형 참모진 [604]
- 4. 행성의 본부와 학교 [605]
- 5. 진보하는 문명 [606]
- 6. 행성의 문화 [607]
- 7. 고립으로부터 얻는 보상 [608]
- 불굴자
- 타바만시아는 불굴자
051. 행성의 아담 [61]
- 1. 하나님의 물질 아들의 기원과 성품 [609]
- 2. 행성 아담의 이동 [610]
- 3. 아담의 임무 [611]
- 4. 여섯 진화 종족 [612]
- 5. 종족의 혼합―아담 [613]
- 6. 에덴의 체제 [614]
- 7. 연합된 행정 [615]
052. 행성 필사자의 일곱 시대 [62]
- 1. 원시 인간 [616]
- 2. 행성 영주 이후의 인간 [617]
- 3. 아담 이후의 인간 [618]
- 4. 심판 아들 이후의 인간 [619]
- 5. 수여 아들 이후의 인간 [620]
- 6. 유란시아의 수여 이후 시대 [621]
- 7. 교육 아들 이후의 인간 [622]
053. 루시퍼 반란 [63]
- 1. 반란의 주동자 [623]
- 2. 반란의 원인 [624]
- 3. 루시퍼 선언문 [625]
- 4. 반란이 터지다 [626]
- 5. 투쟁의 성질 [627]
- 6. 충실한 천사 사령관 [628]
- 7. 반란의 역사 [629]
- 8. 유란시아에 오신 사람의 아들 [630]
- 9. 반란의 현재 상태 [631]
054. 루시퍼 반란의 문제점 [64]
- 1. 참된 자유와 거짓된 자유 [632]
- 2. 자유를 도둑질하기 [633]
- 3. 응보의 시간 지연 [634]
- 4. 자비로운 시간 지연 [635]
- 5. 지연의 지혜 [636]
- 열두 가지 이유
- 6. 사랑의 승리 [637]
055. 빛과 생명의 구체 [65]
- 1. 상물질 성전 [638]
- 2. 죽음과 변신 [639]
- 3. 황금 시대 [640]
- 4. 행정의 재조정 [641]
- 행성에서 일곱 단계
- 중도자의 해방
- 아담의 출발
- 5. 물질적 발전의 절정 [642]
- 6. 개별 필사자 [643]
- 7. 제1 단계, 행성 단계 [644]
- 8. 제2 단계, 체계 단계 [645]
- 9. 제3 단계, 별자리 단계 [646]
- 10. 제4 단계, 지역 우주 단계 [647]
- 11. 소구역 및 대구역 단계 [648]
- 12. 제7 단계, 초우주 단계 [649]
- 최상위의 무제한 감독자
056. 우주의 통일성 [66]
- 1. 물리적 조정 [650]
- 2. 지적 통일 [651]
- 3. 영적 통일 [652]
- 4. 성격의 통일 [653]
- 5. 신의 통일성 [654]
- 6. 진화하는 신의 통일성 [655]
- 7. 진화가 우주에 미치는 영향 [656]
- 8. 최상의 통일자 [657]
- 9. 우주의 절대적 통일 [658]
- 10.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함 [659]
057. 유란시아의 기원 [67]
- 1. 안드로노버 성운 [660]
- 2. 성운의 1차 단계 [661]
- 3. 성운의 2차 단계 [662]
- 4. 3기와 4기 단계 [663]
- 별의 기원
- 5. 몬마시아―유란시아 태양계―의 기원 [664]
- 역행(逆行) 운동
- 6. 태양계 단계―행성을 형성하는 시대 [665]
- 행성을 형성하는 시기
- 조수(潮水) 같은 마찰
- 인력(引力) 조수의 폭발
- 7. 운석 시대―화산 시대 [666]
- 화산 시대
- 행성의 원시 대기(大氣)
- 8. 땅 껍질의 안정 [667]
- 지진(地震) 시대
- 세계적 대양과 처음 대륙
058. 유란시아에서 생명이 자리를 잡다 [68]
- 1. 물리적 생명의 선행 조건 [668]
- 2. 유란시아의 대기 [669]
- 3. 공간 환경 [670]
- 4. 생명이 시작되는 시기 [671]
- 5. 대륙의 표류 [672]
- 6. 과도기 [673]
- 7. 지질학 역사책 [674]
059. 유란시아의 해양 생명 시대 [69]
- 1. 얕은 바다에 있던 초기의 해양 생명 [675]
- 삼엽충 시대
- 2. 제1 대륙 홍수 단계 [676]
- 무척추 동물 시대
- 3. 제2 대홍수 단계 [677]
- 산호 기간
- 완족류 시대
- 4. 육지가 솟아오르는 큰 단계 [678]
- 식물성 육지 생명기
- 물고기 시대
- 5. 지각 이동 단계 [679]
- 고사리 숲의 석탄기
- 개구리 시대
- 6. 기후 과도기 단계 [680]
- 씨앗 식물 시기
- 생물학적 시련기
060. 초기 육지 생명 시대의 유란시아 [70]
- 1. 초기 파충류 시대 [681]
- 2. 후기 파충류 시대 [682]
- 3. 백악기 단계 [683]
- 꽃피는 식물의 시기
- 새의 시대
- 4. 백악기의 끝 [684]
061. 유란시아의 포유동물 시대 [71]
- 1. 새로운 대륙 단계 [685]
- 초기 포유동물의 시대
- 2. 최근의 홍수 단계 [686]
- 상급 포유동물의 시대
- 3. 현대의 산 단계 [687]
- 코끼리와 말의 시대
- 4. 최근의 대륙 융기 단계 [688]
- 포유동물의 마지막 대이동
- 5. 초기 빙하 시대 [689]
- 6. 빙하 시대의 원시인 [690]
- 7. 이어지는 빙하 시대 [691]
062. 원시인의 초기 혈통 [72]
- 1. 초기의 리머 종류 [692]
- 2. 시조 포유동물 [693]
- 3. 중간 포유동물 [694]
- 원숭이 부족의 기원
- 4. 영장목(靈長目) [695]
- 5. 처음 인간 [696]
- 6. 인간 지성의 진화 [697]
- 7. 사람이 사는 세계로서 인정받다 [698]
063. 첫 인간 가족 [73]
- 1. 안돈과 폰타 [699]
- 2. 쌍둥이의 도망 [700]
- 3. 안돈의 가족 [701]
- 4. 안돈 씨족 [702]
- 5. 안돈 족속의 분산 [703]
- 6. 오나가―진리를 가르친 첫 선생 [704]
- 7. 안돈과 폰타가 살아남다 [705]
064. 진화하는 유색 인종 [74]
- 1. 안돈 토착민 [706]
- 2. 폭스홀 종족 [707]
- 3. 바도난 부족 [708]
- 4. 네안데르탈 종족 [709]
- 5. 유색 인종의 기원 [710]
- 6. 유란시아의 여섯 산긱 인종 [711]
- (1) 홍인
- (2) 주황인
- (3) 황인
- (4) 녹색인
- (5) 청인
- (6) 남인종
여섯 인종을 두는 목적- 7. 유색 인종의 분산 [712]
065. 진화의 전반적 통제 [75]
- 1. 생명 운반자의 기능 [713]
- (1) 물리적인 전기 화학 수준
- (2) 보통 때 반 상물질 존재로 있는 중간 단계
- (3) 상급의 반영(半靈) 수준
- 2. 진화의 전체 모습 [714]
- 3. 진화를 보살피기 [715]
- 4. 유란시아 모험 [716]
- 5. 생명 진화의 성쇠 [717]
- 6. 생명이 진화하는 기법 [718]
- 7. 진화된 지성 수준 [719]
- 기계적이고 가르칠 수 없는 지성
- 기계적이 아니고 체험하는 지성
- 8. 시간과 공간에서 생기는 진화 [720]
066.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 [76]
- 1. 칼리가스티아 영주 [721]
- 2. 영주의 참모진 [722]
- 3. 달라마시아―영주의 도시 [723]
- 4. 1백인의 초기 시절 [724]
- 5. 1백인의 조직 [725]
- (1) 식품과 물질 복지 회의
- (2) 동물 길들이고 이용하는 위원회
- (3) 육식 동물 정복에 관한 조언자
- (4) 지식 전파 및 보존 담당 교직원
- (5) 산업 및 무역 위원회
- (6) 계시 종교 대학
- (7) 건강과 생명의 수호자
- (8) 행성의 예술 과학 회의
- (9) 향상된 부족 관계의 관리자
- (10) 부족 조정과 종족 협동의 최고 법정
- 6. 영주의 통치 [726]
- 7. 달라마시아 생활 [727]
- 8. 칼리가스티아의 불운 [728]
067. 행성의 반란 [77]
- 1. 칼리가스티아의 배반 [729]
- 2. 반란이 터지다 [730]
- 3. 중대한 7년 [731]
- 4. 반란 이후의 칼리가스티아 1백인 [732]
- 5. 반란의 직접 결과 [733]
- 6. 반―신념이 굳은 자 [734]
- 7. 멀리 미치는 죄의 영향 [735]
- 8. 반란 중의 인간 영웅 [736]
068. 문명의 시작 [78]
- 1. 사람을 보호하는 사회 생활 [737]
- 2. 사회 발전의 요인 [738]
- 3. 사회를 만드는 귀신 공포증의 영향 [739]
- 4. 도덕 관습의 진화 [740]
- 5. 토지 이용 기술―유지하는 예술 [741]
- (1) 수집 단계
- (2) 사냥 단계
- (3) 목축 단계
- (4) 농업 단계
- 6. 문화의 진화 [742]
- 인구 밀도
069. 원시적 인간 제도 [79]
- 1. 기본적 인간 제도 [743]
- (1) 자아 유지 제도
- (2) 자아 영속 제도
- (3) 자아의 욕구를 충족하는 제도
- 2. 산업의 시작 [744]
- 3. 노동의 전문화 [745]
- 4. 무역의 시작 [746]
- 5. 자본의 시작 [747]
- 6. 불과 문명의 관계 [748]
- 7. 동물 이용 [749]
- 8. 문명의 한 요소인 노예 제도 [750]
- 9. 사유 재산 [751]
070. 인간이 만든 정부의 진화 [80]
- 1. 전쟁의 발생 [752]
- 2. 전쟁의 사회적 가치 [753]
- 현대 산업주의와 군사주의
- 3. 초기의 인간 관계 [754]
- 4. 씨족과 부족 [755]
- 5. 정부의 시작 [756]
- 6. 군주제 정부 [757]
- 7. 원시의 클럽과 비밀 사회 [758]
- 8. 사회 계급 [759]
- 9. 인간의 권리 [760]
- 10. 응보의 진화 [761]
- 11. 법과 법정 [762]
- 12. 국가 권한의 분배 [763]
071. 국가의 발전 [81]
- 1. 초기의 국가 [764]
- 2. 대의 정치의 진화 [765]
- 3. 이상적인 국가 [766]
- 4. 진취적 문명 [767]
- 5. 경쟁의 진화 [768]
- 6. 이익을 얻으려는 동기 [769]
- 7. 교육 [770]
- 8. 국가의 성질 [771]
072. 이웃 행성에 있는 정부 [82]
- 1. 대륙 국가 [772]
- 2. 정치 조직 [773]
- 3. 가정 생활 [774]
- 4. 교육 제도 [775]
- 5. 산업의 조직 [776]
- 6. 노령 보험 [777]
- 7. 세금 [778]
- 8. 특별 학부 [779]
- 9. 보통 투표 계획 [780]
- 10. 범죄 다루기 [781]
- 11. 군대의 준비 상태 [782]
- 12. 다른 여러 나라 [783]
073. 에덴 동산 [83]
- 타바만시아의 검열
- 1. 놋 족속과 아마돈 족속 [784]
- 2. 동산을 짓는 계획 [785]
- 3. 동산의 위치 [786]
- 4. 동산을 세우다 [787]
- 5. 동산의 집 [788]
- 6. 생명나무 [789]
- 7. 에덴의 운명 [790]
074. 아담과 이브 [84]
- 1. 예루셈 시절의 아담과 이브 [791]
- 2. 아담과 이브의 도착 [792]
- 3. 아담과 이브가 행성에 대하여 배우다 [793]
- 4. 첫 소동 [794]
- 5. 아담의 행정 [795]
- 6. 아담과 이브의 가정 생활 [796]
- 7. 동산의 생활 [797]
- 8. 천지 창조의 전설 [798]
075. 아담과 이브의 실패 [85]
- 1. 유란시아의 문제 [799]
- 2. 칼리가스티아의 계략 [800]
- 3. 이브에게 뻗은 유혹 [801]
- 4. 실패를 깨닫다 [802]
- 5. 실패의 영향 [803]
- 6. 아담과 이브가 동산을 떠나다 [804]
- 7. 아담과 이브의 지위가 낮아지다 [805]
- 8. 이른바 사람의 타락 [806]
076. 둘째 동산 [86]
- 1. 에덴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로 들어가다 [807]
- 2. 카인과 아벨 [808]
- 3. 메소포타미아 생활 [809]
- 셋 사람 사제
- 4. 보라 인종 [810]
- 5. 아담과 이브의 죽음 [811]
- 미가엘의 말씀
- 6. 아담과 이브가 살아남다 [812]
077. 중도인 [87]
- 1. 1차 중도자 [813]
- 2. 놋 민족 [814]
- 3. 바벨 탑 [815]
- 4. 놋 족속 문명의 중심 [816]
- 5. 아담손과 라타 [817]
- 6. 2차 중도자 [818]
- 7. 반역한 중도자 [819]
- 8. 연합한 중도자 [820]
- 9. 유란시아의 영구 시민 [821]
078. 아담 시절 이후의 보라 인종 [88]
- 1. 종족과 문화의 분산 [822]
- 2. 둘째 동산의 아담 족속 [823]
- 3. 아담 족속의 초기 팽창 [824]
- 4. 안드 족속 [825]
- 5. 안드 족속의 이동 [826]
- 6. 안드 족속의 마지막 분산 [827]
- 7. 메소포타미아에서 터진 홍수 [828]
- 노아 이야기
- 8. 수메르인―마지막 안드 족속 [829]
079. 동양에서 팽창하는 안드 족속 [89]
- 1. 투르키스탄의 안드 족속 [830]
- 2. 안드 족속의 인도 정복 [831]
- 3. 드라비다인의 인도 [832]
- 4. 아리아인의 인도 침공 [833]
- 5. 홍인과 황인 [834]
- 6. 중국 문명이 밝아오다 [835]
- 7. 안드 족속이 중국으로 들어가다 [836]
- 8. 후일의 중국 문명 [837]
080. 서양에서 팽창하는 안드 족속 [90]
- 1. 아담 족속이 유럽으로 들어가다 [838]
- 2. 기후와 지질의 변화 [839]
- 지중해의 범람
- 3. 크로마뇽 청인 [840]
- 4. 안드 족속의 유럽 침공 [841]
- 5. 안드 족속의 북 유럽 정복 [842]
- 6. 나일 강가의 안드 족속 [843]
- 7. 지중해 섬들의 안드 족속 [844]
- 8. 다뉴브 강의 안돈 족속 [845]
- 9. 세 백인 종족 [846]
081. 현대 문명의 발전 [91]
- 1. 문명의 요람 [847]
- 2. 문명의 도구 [848]
- (1) 불을 다루기
- (2) 동물 길들이기
- (3) 포로를 노예로 만든 것
- (4) 사유 재산
- 3. 도시와 제조업과 상업 [849]
- 4. 섞인 종족 [850]
- (1) 준코카서스 인종
- (2) 준몽고 인종
- (3) 준흑색 인종
- 5. 문화가 있는 사회 [851]
- 힘과 정의(正義)
- 6. 문명의 유지 [852]
- (1) 자연 상황
- (2) 자본재
- (3) 과학 지식
- (4) 인간 자원
- (5) 물질 자원의 효율성
- (6) 언어의 효율성
- (7) 기계 장치의 효율성
- (8) 횃불 쥔 자들의 인격
- (9) 종족의 이상
- (10) 전문가들을 조정하는 것
- (11) 일자리를 찾는 장치
- (12) 기꺼이 협동하는 정신
- (13) 효과적이고 지혜로운 지도력
- (14) 사회의 변화
- (15) 과도기 붕괴의 예방
082. 결혼의 진화 [92]
- 1. 짝짓는 본능 [853]
- 2. 제한하는 금기 [854]
- 3. 옛날의 결혼 관습 [855]
- 4. 재산 관습과 결혼 [856]
- 5. 동족 결혼과 족외혼 [857]
- 6. 종족의 혼합 [858]
083. 결혼 제도 [93]
- 1. 사회 제도인 결혼 [859]
- 2. 구혼과 약혼 [860]
- 3. 아내 사들이기와 지참금 [861]
- 4. 결혼식 [862]
- 5. 여럿과 결혼하기 [863]
- 6. 참 일부일처제―부부의 결혼 [864]
- 7. 혼인의 취소 [865]
- 8. 결혼의 이상화 [866]
084. 결혼과 가족 생활 [94]
- 1. 원시적 부부 결합 [867]
- 2. 옛날의 모계 가족 [868]
- 3. 아버지의 지배 하에 있는 가족 [869]
- 4. 옛 사회에서 여자의 지위 [870]
- 5. 발전하는 도덕 관습 하에서 여자의 지위 [871]
- 6. 남자와 여자의 협동 [872]
- 7. 가족 생활의 이상 [873]
- 8. 자아 욕구 충족의 위험 [874]
085. 숭배의 기원 [95]
- 1. 돌과 산을 숭배하기 [875]
- 2. 식물 및 나무 숭배 [876]
- 3. 동물 숭배 [877]
- 4. 자연력 숭배 [878]
- 5. 천체 숭배 [879]
- 6. 사람 숭배 [880]
- 7. 예배 보조자와 지혜 보조자 [881]
086. 종교의 초기 진화 [96]
- 1. 우연: 행운과 불운 [882]
- 2. 우연의 의인화 [883]
- 3. 죽음―설명할 수 없는 것 [884]
- 4. 죽음과 생존의 개념 [885]
- 5. 몸이 없는 혼 개념 [886]
- 6. 귀신과 영이 있는 환경 [887]
- 7. 원시 종교의 기능 [888]
087. 귀신 숭배 [97]
- 1. 귀신 공포증 [889]
- 2. 귀신 달래기 [890]
- 3. 조상 숭배 [891]
- 4. 좋은 귀신과 나쁜 귀신 [892]
- 5. 진보하는 귀신 숭배 [893]
- 6. 강제와 귀신 쫓아내기 [894]
- 7. 종파 예배의 본질 [895]
088. 주물과 부적과 마술 [98]
089. 죄와 희생과 속죄 [99]
- 1. 금기 [902]
- 2. 죄의 개념 [903]
- 3. 극기와 굴욕 [904]
- 절제 종파
- 4. 희생의 기원 [905]
- 5. 희생물과 식인 풍습 [906]
- 6. 사람 바치기의 진화 [907]
- 7. 사람 제물의 수정 [908]
- 성전 매춘
- 8. 되찾기와 약속 [909]
- 9. 제물과 성찬 [910]
- 10. 죄의 용서 [911]
090. 주술 신앙―주술사와 사제 [100]
- 1. 처음 샤먼―주술사 [912]
- 2. 주술 관습 [913]
- 3. 병과 죽음에 대한 샤먼 이론 [914]
- 4. 샤먼이 쓰던 의술 [915]
- 5. 사제와 의식 [916]
091. 기도의 진화 [101]
- 1. 최초의 기도 [917]
- 2. 진화하는 기도 [918]
- 기도와 마술
- 3. 기도와 타아 [919]
- 4. 윤리에 맞는 기도 [920]
- 5. 기도의 사회적 영향 [921]
- 6. 기도의 범위 [922]
- 7. 신비주의와 황홀경과 영감 [923]
- 8. 기도는 몸소 겪는 체험 [924]
- 9. 효과 있는 기도의 요건 [925]
092. 후일의 종교의 진화 [102]
- 1. 종교의 진화적 성질 [926]
- 2. 종교와 도덕 관습 [927]
- 3. 진화된 종교의 성질 [928]
- 4. 사람에게 내린 계시 [929]
- (1) 달라마시아의 가르침
- (2) 에덴의 가르침
- (3) 살렘의 멜기세덱
- (4) 나사렛 예수
- (5) 유란시아 논문집
- 5. 위대한 종교 지도자 [930]
- 6. 복합 종교 [931]
- 당대에 믿었던 11가지 종교
- 7. 종교의 계속된 진화 [932]
093. 마키벤타 멜기세덱 [103]
- 1. 마키벤타의 육신화 [933]
- 2. 살렘의 현자 [934]
- 3. 멜기세덱의 가르침 [935]
- 4. 살렘의 종교 [936]
- 교리
- 일곱 계명
- 5. 아브라함을 고르다 [937]
- 6. 멜기세덱이 아브라함과 맺은 서약 [938]
- 7. 멜기세덱의 선교사 [939]
- 8. 멜기세덱이 떠나다 [940]
- 9. 멜기세덱이 떠난 뒤 [941]
- 10. 마키벤타 멜기세덱의 현재 지위 [942]
094. 멜기세덱의 가르침이 동양에 미친 영향 [104]
- 1. 살렘의 가르침이 베다 시대 인도에 미친 영향 [943]
- 릭 베다
- 2. 브라만교 [944]
- 환생(還生) 교리
- 3. 브라만의 철학 [945]
- 4. 힌두교 [946]
- 5. 중국에 있었던 진리를 위한 투쟁 [947]
- 6. 노자와 공자 [948]
- 7. 고타마 싯달타 [949]
- 8. 불교도의 신앙 [950]
- 고타마의 복음
- 도덕 계명
- 9. 불교의 전파 [951]
- 10. 티벳에 있던 종교 [952]
- 11. 불교도의 철학 [953]
- 12. 불교에 있는 하나님 개념 [954]
095. 멜기세덱의 가르침이 레반트에 미친 영향 [105]
- 1. 메소포타미아의 살렘 종교 [955]
- 2. 에집트의 초기 종교 [956]
- 3. 도덕 개념의 진화 [957]
- 4. 아메니모피의 가르침 [958]
- 5. 주목할 만한 이크나톤 [959]
- 6. 이란의 살렘 교리 [960]
- 7. 살렘의 가르침이 아라비아에 미친 영향 [961]
096. 야웨―히브리인의 하나님 [106]
- 1. 셈 족속의 신 개념 [962]
- 2. 셈 종족 [963]
- 3. 비할 데 없는 모세 [964]
- 4. 야웨를 선포하다 [965]
- 5. 모세의 가르침 [966]
- 물질적 섭리
- 6. 모세가 죽은 뒤의 하나님 개념 [967]
- 7. 시편과 욥기 [968]
097. 히브리인 사이에서 진화된 하나님 개념 [107]
- 1. 사무엘―처음 히브리 선지자 [969]
- 2. 엘리야와 엘리사 [970]
- 3. 야웨와 바알 [971]
- 4. 아모스와 호세아 [972]
- 5. 첫 이사야 [973]
- 미가와 오바디야
- 6. 두려움 없는 예레미야 [974]
- 7. 둘째 이사야 [975]
- 8. 신성한 역사와 세속의 역사 [976]
- 9. 히브리인의 역사 [977]
- 에브라임과 유다
- 사울과 다윗
- 솔로몬과 세금
- 이스라엘과 유다
-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 유다 왕국의 종말
- 바빌로니아 포로 생활
- 10. 히브리 종교 [978]
098. 멜기세덱의 가르침이 서양에 미친 영향 [108]
- 1. 그리스인 사이에 남은 살렘 종교 [979]
- 2. 그리스의 철학 사상 [980]
- 3. 멜기세덱의 가르침이 로마에 미친 영향 [981]
- 4. 신비교 [982]
- 쿠벨레와 아티스를 믿는 프리지아 종파
- 오시리스와 이시스를 믿는 에집트 종파
- 미트라를 믿는 이란 종파
- 5. 미트라 종파 [983]
- 6. 미트라교와 기독교 [984]
- 7. 기독교 [985]
099. 종교의 사회적 문제 [109]
- 1. 종교와 사회의 재건 [986]
- 2. 제도화된 종교의 약점 [987]
- 3. 종교와 신자 [988]
- 4. 과도기의 어려움 [989]
- 5. 종교의 사회적 모습 [990]
- 6. 제도적 종교 [991]
- 7. 종교의 기여 [992]
100. 인간이 체험하는 종교 [110]
- 1. 종교적 성장 [993]
- 2. 영적 성장 [994]
- 3. 최상의 가치에 관한 여러 개념 [995]
- 4. 성장의 문제 [996]
- 5. 감화와 신비주의 [997]
- 6. 종교적 생활의 표시 [998]
- 7. 최고의 종교 생활 [999]
101. 종교의 참 본질 [111]
- 1. 참된 종교 [1000]
- 2. 종교적 사실 [1001]
- 3. 종교의 특징 [1002]
- 영적 믿음의 12가지 실례
- 4. 계시의 한계 [1003]
- 5. 계시로 확대된 종교 [1004]
- 6. 진보적 종교 체험 [1005]
- 구원의 일곱 가지 모습
- 7. 개인의 종교 철학 [1006]
- 8. 믿음과 관념 [1007]
- 9. 종교와 도덕성 [1008]
- 10. 사람을 해방하는 종교 [1009]
102. 종교적 믿음의 기초 [112]
- 1. 믿음의 확신 [1010]
- 2. 종교와 실체 [1011]
- 3. 지식과 지혜와 통찰력 [1012]
- 4. 체험에 관한 사실 [1013]
- 5. 의도한 잠재성의 우월성 [1014]
- 6. 종교적 믿음의 확실성 [1015]
- 7. 신다운 자의 확실성 [1016]
- 8. 종교의 증거 [1017]
103. 종교적 체험의 실체 [113]
104. 삼위일체 개념의 성장 [114]
- 1. 유란시아의 삼위일체 개념 [1027]
- 2. 삼위일체의 통일성과 여러 신 [1028]
- 3. 삼자일체와 삼자일치 [1029]
- 4. 일곱 가지 삼자일치 [1030]
- 5. 삼극일치 [1031]
105. 신과 실체 [115]
- 1. 스스로 계신 이에 관한 철학적 개념 [1032]
- 2. 스스로 계신 이는 삼자일치이자 칠중자 [1033]
- 3. 무한한 일곱 절대자 [1034]
- 4. 통일과 이원과 삼자일치 [1035]
- 5. 유한한 실체의 선포 [1036]
- 6. 유한한 실체의 반응 [1037]
- 7. 초월자의 결말 [1038]
106. 실체의 우주 수준 [116]
- 1. 유한한 기능의 1차 연합 [1039]
- 칠중의 하나님
- 2. 최상위의 2차 유한 통합 [1040]
- 최상 존재
- 3. 초월적 3차 실체 연합 [1041]
- 궁극 삼자일체
- 4. 궁극위의 4차 통합 [1042]
- 궁극의 신
- 5. 공동 절대 단계, 곧 다섯째 단계의 연합 [1043]
- 절대 삼자일체
- 6. 절대 단계, 곧 여섯째 단계의 통합 [1044]
- 무한한 우주
- 7. 운명의 마지막 [1045]
- 8. 가장 높은 삼자일체 [1046]
- (1) 세 가지 삼자일체의 수준
- (2) 체험적 신의 수준
- (3) 스스로 계신 이의 수준
- 9. 실존적인 무한한 통일 [1047]
107. 생각 조절자의 기원과 성품 [117]
- 1. 생각 조절자의 기원 [1048]
- 2. 조절자의 분류 [1049]
- 3. 조절자의 신별 집 [1050]
- 4. 조절자의 성품과 계심 [1051]
- 5. 조절자의 지성 소유 [1052]
- 6. 순수 영인 조절자 [1053]
- 7. 조절자와 인격 [1054]
108. 생각 조절자의 사명과 봉사 [118]
- 1. 선택과 배치 [1055]
- 2. 조절자가 깃드는 필수 조건 [1056]
- 유란시아에서
- 다른 세상에서
- 3. 조직과 행정 [1057]
- 타바만시아의 찬사
- 4. 조절자와 다른 영적 영향의 관계 [1058]
- 5. 조절자의 사명 [1059]
- 6. 사람 속에 계시는 하나님 [1060]
109. 조절자와 우주에 있는 인간의 관계 [119]
- 1. 조절자의 성장 [1061]
- 2. 스스로 행동하는 조절자 [1062]
- 3. 조절자와 필사자 종류의 관계 [1063]
- 4. 조절자와 사람의 인격 [1064]
- 5. 조절자의 깃드심에 생기는 물질적 장애 [1065]
- 6. 참된 가치의 영속 [1066]
- 예수에게 깃들었던 조절자
- 7. 인격이 된 조절자의 운명 [1067]
- 총 성격 존재
110. 조절자와 개별 필사자의 관계 [120]
- 1. 필사 지성에 깃들기 [1068]
- 2. 조절자와 인간의 의지 [1069]
- 3. 조절자와 협동하기 [1070]
- 4. 지성 속에서 조절자가 하는 일 [1071]
- 5. 조절자의 안내에 대한 그릇된 개념 [1072]
- 6. 정신의 일곱 수준 [1073]
- 7. 불멸의 성취 [1074]
- 조절자가 혼에게 주는 탄원
111. 조절자와 혼 [121]
- 1. 지성은 선택하는 무대 [1075]
- 2. 혼의 성질 [1076]
- 3. 진화하는 혼 [1077]
- 4. 정신 생활 [1078]
- 5. 선택을 거룩하게 바치는 것 [1079]
- 6. 인간의 역설 [1080]
- 7. 조절자가 부딪치는 문제 [1081]
- 운명 수호자의 진술
112. 살아남는 인격 [122]
- 인격의 14가지 모습
- 1. 인격과 실체 [1082]
- 2. 자아 [1083]
- 3. 죽는 현상 [1084]
- 4. 죽음 뒤의 조절자 [1085]
- 5. 인간의 자아가 살아남는가 [1086]
- 6. 상물질 자아 [1087]
- 7. 조절자와 융합하는 것 [1088]
113. 운명 수호 천사 [123]
- 1. 수호 천사 [1089]
- 2. 운명 수호자 [1090]
- 3. 다른 영의 영향 [1091]
- 4. 세라핌의 활동 분야 [1092]
- 5. 세라핌이 필사자에게 베푸는 봉사 [1093]
- 6. 사람이 죽은 뒤에 수호 천사는 [1094]
- 7. 세라핌, 그리고 하늘 가는 생애 [1095]
114. 행성의 세라핌 정부 [124]
- 1. 유란시아의 통치권 [1096]
- 2. 행성 감독자 위원회 [1097]
- 3. 거주하는 총독 [1098]
- 4. 관찰하는 최고자 [1099]
- 최고자의 섭정
- 5. 행성 정부 [1100]
- 6. 행성을 감독하는 으뜸 세라핌 [1101]
- (1) 시대 천사
- (2) 진보 천사
- (3) 종교 수호자
- (4) 국가 생활의 천사
- (5) 종족의 천사
- (6) 미래의 천사
- (7) 계몽의 천사
- (8) 건강의 천사
- (9) 가정 세라핌
- (10) 산업 천사
- (11) 오락 천사
- (12) 초인간 봉사의 천사
- 7. 운명 예비군 [1102]
115. 최상 존재 [125]
- 1. 개념 구조의 상대성 [1103]
- 2. 최상위의 절대 기초 [1104]
- 3. 최초와 실재와 잠재 [1105]
- 4. 최상 실체의 근원 [1106]
- 5. 최상위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관계 [1107]
- 6. 최상위와 삼극일치의 관계 [1108]
- 7. 최상위의 성품 [1109]
116. 전능한 최상위 [126]
- 1. 최상위의 지성 [1110]
- 우주 지성
- 2. 전능자와 칠중 신 [1111]
- 3. 전능자와 파라다이스 신 [1112]
- 4. 전능자와 최상 창조자 [1113]
- 5. 전능자와 칠중 통제자 [1114]
- 균형 문제
- 6. 영의 지배 [1115]
- 7. 대우주는 살아 있는 유기체 [1116]
117. 최상위 하나님 [127]
- 1. 최상 존재의 성품 [1117]
- 2. 진화적 성장의 근원 [1118]
- 생물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과 성장
- 3. 우주의 인간에 대한 최상위의 중요성 [1119]
- 4. 유한한 하나님 [1120]
- 우주 도덕성―최상의 의무
- 5. 창조의 대혼 [1121]
- 최후자의 초월화
- 인간 성장의 반향
- 6. 최상위를 찾기 [1122]
- 7. 최상위의 앞날 [1123]
118. 최상과 궁극―시간과 공간 [128]
- 1. 시간과 영원 [1124]
- 체험적 (주관적) 시간 단위
- 2. 두루 계심과 어디에나 계심 [1125]
- 3. 시공 관계 [1126]
- 진리와 사실
- 공간과 원본
- 4. 1차 원인과 2차 원인 [1127]
- 5. 전능과 공동 가능성 [1128]
- 6. 전능과 모든 일을 행하심 [1129]
- 7. 전지(全知)와 숙명 [1130]
- 8. 통제와 전반적 통제 [1131]
- 진보에서 시간을 규제하는 것
- 9. 우주의 기계 장치 [1132]
- 10. 섭리의 기능 [1133]
119. 그리스도 미가엘의 자신 수여 [129]
- 1. 첫째 수여 [1134]
- 2. 둘째 수여 [1135]
- 3. 셋째 수여 [1136]
- 4. 넷째 수여 [1137]
- 5. 다섯째 수여 [1138]
- 6. 여섯째 수여 [1139]
- 7. 일곱째이자 마지막 수여 [1140]
- 8. 수여 이후의 미가엘의 지위 [1141]
120. 미가엘의 유란시아 수여 [130]
- 1. 일곱째 수여 임무 [1142]
- 2. 자신 수여에 주어진 제한 [1143]
- 3. 계속된 상담과 조언 [1144]
- 4. 육신화―둘을 하나로 만들기 [1145]
121.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했던 시대 [131]
- 1. 그리스도 이후 1세기의 서양 [1146]
- 2. 유대 민족 [1147]
- 3. 이방인의 형편 [1148]
- 4. 이방인의 철학 [1149]
- (1) 쾌락주의자
- (2) 금욕주의자
- (3) 견유학파
- (4) 회의주의자
- 5. 이방인의 종교 [1150]
- 신비 종파
- 6. 히브리 종교 [1151]
- 7. 유대인과 이방인 [1152]
- 8. 이전에 쓴 기록 [1153]
- (1) 마가가 쓴 복음
- (2) 마태의 복음
- (3) 누가가 쓴 복음
- (4) 요한의 복음
인정하는 말씀
122. 예수의 탄생과 아기 시절 [132]
- 1. 요셉과 마리아 [1154]
- 2. 가브리엘이 엘리자벳에게 나타나다 [1155]
- 3.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알리다 [1156]
- 4. 요셉의 꿈 [1157]
- “다윗의 집”
- 5. 예수의 지상 부모 [1158]
- 6. 나사렛에 있던 집 [1159]
- 7. 베들레헴 여행 [1160]
- 8. 예수가 태어나다 [1161]
- 목자들의 전설
- 우르에서 온 세 사제
- “베들레헴의 별”
- 9. 성전에서 아기를 보이다 [1162]
- 10. 헤롯의 행동 [1163]
- 에집트로 도망하다
123. 예수의 어린 시절 초기 [133]
- 에집트에서 머무르다
- 1. 나사렛으로 돌아와서 [1164]
- 예수가 네 살 되던 해
- 2. 다섯 살 되던 해 (기원전 2년) [1165]
- 아이 기르기
- 3. 여섯 살 되던 해의 사건들 (기원전 1년) [1166]
- 4. 일곱 살 되던 해 (서기 1년) [1167]
- 물질적 사고
- 5. 나사렛에서 보낸 학교 시절 [1168]
- 6. 여덟 살 되던 해 (서기 2년) [1169]
124. 예수의 어린 시절 후기 [134]
- 1. 예수가 아홉 살 되던 해 (서기 3년) [1170]
- 마루 바닥에 그린 그림
- 갈릴리의 기후
- 2. 열 살 되던 해 (서기 4년) [1171]
- 석공의 아들 야곱
- 3. 열한 살 되던 해 (서기 5년) [1172]
- 스키토폴리스 에피소드
- 4. 열두 살 되던 해 (서기 6년) [1173]
- 개인의 도덕성과 집단 충성심
- 5. 열세 살 되던 해 (서기 7년) [1174]
- 6.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 [1175]
-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
125. 예루살렘에 가신 예수 [135]
- 1. 예수가 성전을 구경하다 [1176]
- 2. 예수와 유월절 [1177]
- 3. 요셉과 마리아의 출발 [1178]
- 4. 성전에서 보낸 첫째 날과 둘째 날 [1179]
- 5. 성전에서 보낸 셋째 날 [1180]
- 6. 성전에서 보낸 넷째 날 [1181]
126. 고난의 두 해 [136]
- 1. 열네 살 되던 해 (서기 8년) [1182]
- 2. 요셉의 죽음 [1183]
- 3. 열다섯 살 되던 해 (서기 9년) [1184]
- “주의 기도”의 기원
- “사람의 아들”
- 누가 메시아인가?
- 4. 회당에서 한 첫 설교 [1185]
- 5. 재정 문제와 싸우다 [1186]
127. 청년 시절 [137]
- 1. 열여섯 살 되던 해 (서기 10년) [1187]
- 2. 열일곱 살 되던 해 (서기 11년) [1188]
- 열심당 에피소드
- 3. 열여덟 살 되던 해 (서기 12년) [1189]
- 유월절에 야고보와
- 엘리자벳과 요한의 방문
- 아모스의 죽음
- 4. 열아홉 살 되던 해 (서기 13년) [1190]
- 아이들을 기르기
- 5. 에즈라의 딸, 레베카 [1191]
- 6. 스무 살 되던 해 (서기 14년) [1192]
-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다
128. 예수의 어른 시절 초기 [138]
- 1. 스물하나 되던 해 (서기 15년) [1193]
- 신성을 차츰 의식함
- 유월절에 요셉과 함께
- 2. 스물둘 되던 해 (서기 16년) [1194]
- 세포리스에서 대장장이로서
- 3. 스물셋 되던 해 (서기 17년) [1195]
- 유월절에 시몬과 함께
- 예수가 스테반을 만나다
- 4. 다마스커스 사건 [1196]
- 5. 스물넷 되던 해 (서기 18년) [1197]
-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의 제안
- 6. 스물다섯 되던 해 (서기 19년) [1198]
- 유월절에 유다와 함께
- “요수아 아저씨, 우리에게 이야기를 해 주어요.”
- 7. 스물여섯 되던 해 (서기 20년) [1199]
- 야고보의 결혼
- 미리암의 결혼
- 야고보가 요셉의 집에서 가장(家長)이 되다
129. 예수의 어른 시절 후기 [139]
- 1. 스물일곱 되던 해 (서기 21년) [1200]
- 가버나움의 세베대
- 배 만드는 사람 예수
- 2. 스물여덟 되던 해 (서기 22년) [1201]
- 예수가 예루살렘을 방문하다
- 고노드와 가니드를 만나다
- 3. 스물아홉 되던 해 (서기 23년) [1202]
- 로마로 가는 여행의 목적
- 4. 사람인 예수 [1203]
130. 로마로 가는 길 [140]
- 1. 요파에서―요나에 대한 강연 [1204]
- 선과 악에 관한 토론
- 2. 케자리아에서 [1205]
- 몽골리아에서 온 상인
- 그리스인 노동자와 로마인 반장
-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
- 3. 알렉산드리아에서 [1206]
- 4. 실체에 대한 강론 [1207]
- 5. 크레테 섬에서 [1208]
- 6. 두려움에 빠진 젊은이 [1209]
- 7. 카르타고에서―시간과 공간에 대한 강론 [1210]
- 8. 나폴리와 로마로 가는 길에서 [1211]
- 신앙을 버린 유대인 에즈라
131. 세계의 종교 [141]
- 1. 견유주의 [1212]
- 2. 유대교 [1213]
- 3. 불교 [1214]
- 4. 힌두교 [1215]
- 5. 조로아스터교 [1216]
- 6. 수두안교 (자이나교) [1217]
- 7. 신도 [1218]
- 8. 도교 [1219]
- 9. 유교 [1220]
- 10. “우리의 종교” [1221]
132. 로마에서 머무르는 동안 [142]
- 종교 지도자 32명에게 준 영향
- 1. 참된 가치 [1222]
- 2. 선과 악 [1223]
- 3. 진리와 믿음 [1224]
- 4. 개인적 봉사 [1225]
- 로마인 상원 의원에게
- 로마 군인에게
- 포럼에서 연설하는 자에게
- 거짓되게 고발당한 가난한 사람에게
- 5. 부자에게 조언을 주다 [1226]
- 6. 사회 봉사 [1227]
- 7. 로마 근처에서 한 여행 [1228]
- 생각 없는 이방인
- “당신과 내가 새 종교를 만듭시다.”
133. 로마에서 돌아오는 여행 [143]
- 인도의 카스트 제도
- 1. 자비와 응보 [1229]
- 2. 타렌툼에서 배를 타다 [1230]
- 제 아내를 학대하는 남자
- 3. 고린도에서 [1231]
- 주회당장 그리스보
- 상인 유스도
- 두 매춘부
- 4. 고린도에서 개인적으로 한 일 [1232]
- 방앗간 주인에게
- 로마인 백부장에게
- 미트라교 지도자에게
- 에피쿠로스 학파의 선생에게
- 그리스인 계약자에게
- 로마인 판사에게
- 그리스 여인숙 안주인에게
- 중국인 상인에게
- 브리톤에서 온 나그네에게
- 집을 뛰쳐나온 소년에게
- 선고받은 범죄자에게
- 5. 아테네에서―과학에 대한 말씀 [1233]
- 6. 에베소에서―혼에 대한 강론 [1234]
- 7. 키프러스에서 머무르면서―지성에 대한 말씀 [1235]
- 8. 안티옥에서 [1236]
- 9. 메소포타미아에서 [1237]
134. 과도기 [144]
- 1. 서른 살 되던 해 (서기 24년) [1238]
- 나사렛으로 돌아가다
- 시몬의 결혼. 유다의 결혼
- 2. 카스피까지 가는 카라반 여행 [1239]
- 3. 우르미아 강의 [1240]
- 4. 통치권―신과 인간의 통치권 [1241]
- 5. 정치적 통치권 [1242]
- 6. 법과 자유와 통치권 [1243]
- 7. 서른하나 되던 해 (서기 25년) [1244]
- 혼자 이리저리 다니다
- 8. 헤르몬산에서 머무르다 [1245]
- 루시퍼 반란의 끝
- 네바돈의 통치권
- 9. 기다리는 시간 [1246]
- 요한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하다
- 세베대의 배 작업장에서 일하다
135. 세례자 요한 [145]
- 1. 요한이 나지르인이 되다 [1247]
- 2. 사가리아의 죽음 [1248]
- 3. 목자의 생활 [1249]
- 4. 엘리자벳의 죽음 [1250]
- 5. 하나님의 나라 [1251]
- 6. 요한이 전도를 시작하다 [1252]
- 7. 요한이 북으로 가다 [1253]
- 8. 예수와 요한이 만나다 [1254]
- 예수가 세례받음
- 9. 사십일 동안의 전도 [1255]
- 10. 요한이 남쪽으로 가다 [1256]
- 11. 요한이 갇히다 [1257]
- 12. 세례자 요한의 죽음 [1258]
136. 세례와 사십일 [146]
- 1. 사람들이 기대하던 메시아 개념 [1259]
- 2. 예수가 받은 세례 [1260]
- 3. 사십일 [1261]
- 가브리엘과 가진 회담
- 우주 통치권의 완전 취득
- 4. 대중 사업을 위한 계획 [1262]
- 아버지의 길
- 5. 처음 내린 큰 결정 [1263]
- 인격이 된 조절자가 지휘권을 가짐
- 조절자가 시간에 둔감함
- 6. 둘째 결정 [1264]
- 정상으로 땅에서 존재하는 길
- 7. 셋째 결정 [1265]
- 자연 법칙에 복종함
- 8. 넷째 결정 [1266]
- 악과 타협하기를 물리침
- 9. 다섯째 결정 [1267]
- 다윗의 보좌를 물리침
- 10. 여섯째 결정 [1268]
- “나는 내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리라.”
137. 갈릴리에서 기다리는 때 [147]
- 1. 처음 네 사도를 고르다 [1269]
- 안드레와 베드로
- 야고보와 요한
- 2. 빌립과 나다니엘을 고르다 [1270]
- 3. 가버나움 방문 [1271]
- 4. 가나에서 있은 결혼식 [1272]
- 5. 가버나움으로 돌아와서 [1273]
- 6. 안식일의 사건 [1274]
- 7. 넉 달 동안의 훈련 [1275]
- 8. 하늘나라에 대한 설교 [1276]
138. 하늘나라 사자의 훈련 [148]
- 1. 마지막 지시 [1277]
- 2. 여섯을 고르다 [1278]
- 3. 마태와 시몬을 부르다 [1279]
- 올바른 자가 아니라 죄인을
- 4. 쌍둥이를 부르다 [1280]
- 5. 토마스와 유다를 부르다 [1281]
- 6. 맹렬히 훈련받는 주간 [1282]
- 7. 또 한 번 실망하다 [1283]
- 8. 열두 사도의 처음 활동 [1284]
- 9. 다섯 달 동안의 시험 [1285]
- 10. 열두 사도의 조직 [1286]
139. 열두 사도 [149]
- 1. 안드레, 처음 선택된 사도 [1287]
- 2. 시몬 베드로 [1288]
- 3. 야고보 세베대 [1289]
- 4. 요한 세베대 [1290]
- 5. 호기심 많은 빌립 [1291]
- 6. 정직한 나다니엘 [1292]
- 7. 마태 레위 [1293]
- 8. 토마스 디디머스 [1294]
- 9 - 10. 야고보와 유다 알패오 [1295]
- 11. 열심당원 시몬 [1296]
- 12. 가룟 유다 [1297]
140. 열두 사도를 세우다 [150]
- 1. 예비 교육 [1298]
- 2. 임명식 [1299]
- 3. 임명 설교 [1300]
- “산상 설교”
- 4.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1301]
- 5. 아버지 사랑과 형제 사랑 [1302]
- 마음이 낮아져 있는 자―겸손한 자―는 행복하나니
- 올바름을 간절히 바라고 목마르게 찾는 자는 행복하나니
- 온유한 자는 행복하나니
- 마음이 깨끗한 자는 행복하나니
- 슬퍼하는 자는 행복하나니
- 자비로운 자는 행복하나니
- 화평하게 하는 자는 행복하나니
- 박해를 받는 자는 행복하나니
- 6. 임명식이 있던 날 저녁 [1303]
- “나는 행위를 넘어서 보느니라.”
- 이혼에 관하여
- 응보와 자비
- “저희는 잘 하느니라―그냥 두어라”
- 7. 임명식 다음 주 [1304]
- 8. 목요일 오후 호수에서 [1305]
- (1)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
- (2) 정치적 태도
- (3) 사회적 태도
- (4) 경제적 태도
- (5) 개인적 종교
- 9. 성직에 임명하는 날 [1306]
- 10. 성직 임명식이 있던 날 저녁 [1307]
141. 대중 전도의 시작 [151]
- 1. 갈릴리를 떠나다 [1308]
- 2. 하나님의 율법과 아버지의 뜻 [1309]
- 3. 아마투스에서 머무르다 [1310]
- 예수의 인격
- 예수의 모습
- 4. 아버지에 대한 가르침 [1311]
- 아픈 자를 보살피기
- 5. 영적으로 하나됨 [1312]
- 6. 아마투스에서 보낸 마지막 주 [1313]
- 페르샤인 테헤르마
- 7. 요단강 건너 베다니에서 [1314]
- 하늘나라에 대하여 가르치기
- 믿음으로 얻는 구원. 진리를 통하여 얻는 해방
- 8. 예리고에서 일하다 [1315]
- 9.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다 [1316]
142.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보내다 [152]
- 안나스를 방문함
- 1. 성전에서 가르치다 [1317]
- 2. 하나님의 진노 [1318]
- 크레테의 야곱
- 3. 하나님에 대한 개념 [1319]
- 하나님에 대한 히브리인의 여섯 가진 개념
- 초기의 십계명
- 4. 플라비우스와 그리스 문화 [1320]
- 5. 확신에 대한 강연 [1321]
- 6. 니고데모와 이야기하다 [1322]
- 7. 가족에 대한 교훈 [1323]
- 8. 남쪽 유대 땅에서 [1324]
- 겟세마네 공원에서 야영하다
143. 사마리아를 거쳐서 [153]
- 1. 아켈라이스에서 전도하다 [1325]
- “저희가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가벼이 여겼나이다.”
- “너희가 허약자를 닮았느냐?”
- 2. 자제에 대한 교훈 [1326]
- 3. 오락과 휴식 [1327]
- 사르타바 산에서 사흘을
- 4.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1328]
- 5. 시카의 여인 [1329]
- 6. 사마리아의 부흥 [1330]
- 게리짐 산의 캠프에서
- 7. 기도와 예배에 관한 가르침 [1331]
144. 길보아와 데카폴리스에서 [154]
- 1. 길보아에서 야영하다 [1332]
- 2. 기도에 대한 강연 [1333]
- 3. 믿는 자의 기도 [1334]
- 4. 기도에 대하여 더 하신 말씀 [1335]
- 5. 다른 형태의 기도 [1336]
- 다른 세상들에서 온 일곱 가지 기도
- 6. 요한의 사도들과 가진 회의 [1337]
- 7.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에서 [1338]
- 8. 펠라 근처의 캠프에서 [1339]
- “요한에게 그가 잊혀지지 않았다고 이르라.”
- 9. 세례자 요한의 죽음 [1340]
145. 가버나움에서 사건이 많았던 나흘 [155]
- 룻과 이야기를 나누다
- 1. 물고기를 잡아올리다 [1341]
- 2. 오후에 회당에서 [1342]
- 종교는 개인이 겪는 체험
- 젊은 간질병자
- 베드로의 장모
- 3. 해질 때의 병 고침 [1343]
- 4. 그날 저녁 [1344]
- 5. 일요일 이른 아침에 [1345]
146. 첫 번째 갈릴리 전도 여행 [156]
- 1. 림몬에서 전도하다 [1346]
- 2. 요타파타에서 [1347]
- 기도와 감사와 예배
- 응보와 자비
- 기도와 개인의 노력
- 윤리에 맞는 기도
- 3. 라마에서 멈추다 [1348]
- 종교와 과학과 철학
- 진리의 확신
- 스불론 방문
- 4. 이론에서 복음을 전하다 [1349]
- 광산에서 일하기
- 문둥병 걸린 남자를 고치다
- 5. 가나로 돌아와서 [1350]
- 귀인 타이투스
- 6. 나인과 과부의 아들 [1351]
- 7. 엔도르에서 [1352]
147. 막간의 예루살렘 방문 [157]
- 1. 백부장의 종 [1353]
- 2.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다 [1354]
- 요한의 사도들과 갈라짐
- 3. 벳세다 물웅덩이에서 [1355]
- 4. 인생을 사는 법칙 [1356]
- 황금률에 관한 나다니엘의 물음
- 5. 바리새인 시몬을 찾아보다 [1357]
- 돈 빌려 주는 자에 관한 비유
- 지위와 진보
- 6. 가버나움으로 돌아가다 [1358]
- 여섯 간첩
-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졌느니라.”
- 7. 가버나움에 돌아와서 [1359]
- 8. 영적 선의 잔치 [1360]
148. 전도사 훈련을 벳세다에서 [158]
- 1. 새 선지자 학교 [1361]
- 2. 벳세다 병원 [1362]
- 3. 아버지의 일 [1363]
- 4. 악과 죄와 불의 [1364]
- 5. 질병의 의미 [1365]
- 6. 고통에 대한 오해― [1366]
- 7. 손이 마른 사람 [1367]
- 8. 벳세다에서 보낸 마지막 주 [1368]
- 박다드에서 온 키르메스
- 9. 중풍병자를 고치다 [1369]
- 세 간첩이 세례받다
149. 두 번째 전도 여행 [159]
- 다윗의 정보 조직
- 1. 널리 알려진 예수의 이름 [1370]
- 병 고치는 현상
- 2. 사람들의 태도 [1371]
- 초기 기독교가 저지른 두 가지 잘못
- 병 고치는 자로서 예수의 명성
- 여성이 동등함을 그가 인정함
- 그의 인격의 매력
- 3. 종교 지도자들의 적개심 [1372]
- 4. 전도 여행의 진행 [1373]
- 성 내는 것에 관한 논평
- 잘 균형된 인격에 관하여
- 5. 만족에 관한 교훈 [1374]
- 6. “주를 두려워하는 것” [1375]
- 7. 벳세다로 돌아가다 [1376]
150. 세 번째 전도 여행 [160]
- 1. 여전도단 [1377]
- 2. 막달라에서 멈추어 [1378]
- 3. 티베리아스에서 지낸 안식일 [1379]
- “마술과 미신”에 관한 연설
- 4. 사도들을 둘씩 보내다 [1380]
- 5. 구원을 받으려고 무엇을 해야 하나이까? [1381]
- 6. 저녁 수업 [1382]
- 7. 나사렛에서 머무르다 [1383]
- 8. 안식일 예배 [1384]
- 9. 나사렛의 거부 [1385]
151. 바닷가에서 머무르며 가르치다 [161]
- 1. 씨 뿌리는 자의 비유 [1386]
- 2. 비유의 풀이 [1387]
- 3. 비유에 대하여 더 하신 말씀 [1388]
- 4. 바닷가에서 말씀한 다른 여러 비유 [1389]
- 5. 케레사를 방문하다 [1390]
- 호수에서 있은 폭풍
- 6. 케레사의 미치광이 [1391]
152. 가버나움의 위기까지 이끈 사건들 [162]
- 케자리아 빌립비의 베로니카
- 1. 야이루스의 집에서 [1392]
- 2. 5천 명을 먹이다 [1393]
- 3. 임금으로 세우려는 사건 [1394]
- 4. 시몬 베드로가 밤에 본 환상 [1395]
- 5. 벳세다에 돌아가서 [1396]
- 6. 게네사렛에서 [1397]
-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관하여 더 말씀하심
- 7. 예루살렘에서 [1398]
153. 가버나움에서 위기가 [163]
- 1. 무대의 배경 [1399]
- 2. 획기적인 설교 [1400]
- “나는 생명의 빵이라.”
- 3. 예배 후의 모임 [1401]
- 4. 회당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 [1402]
- 악한 귀신에 들린 소년
- “어찌 사탄이 사탄을 내쫓을 수 있느냐?”
- 5. 토요일 저녁 [1403]
- 반쯤 믿는 추종자들이 버리고 가다
154. 가버나움에서 보낸 마지막 삼주 [164]
- 1. 한 주 동안의 회의 [1404]
- 2. 한 주의 휴식 [1405]
- 회당을 닫음
- 3. 둘째 티베리아스 회의 [1406]
- 4. 토요일 밤에 가버나움에서 [1407]
- “우리가 예수를 어떻게 할 것인가?”
- 5. 사건이 많았던 일요일 아침 [1408]
- 6. 예수의 가족이 도착하다 [1409]
- 7. 서두른 탈출 [1410]
155. 갈릴리 북부를 거쳐서 달아나다 [165]
- 1. 어째서 이교도가 격분하느냐? [1411]
- 2. 전도사들이 코라진에서 [1412]
- 3. 케자리아 빌립비에서 [1413]
- 진리와 신조
- 종교적 전통의 기원
- 4. 페니키아로 가는 길 [1414]
- 5. 참 종교에 대한 말씀 [1415]
- 6. 종교에 대한 둘째 강론 [1416]
156. 티레와 시돈에서 머무르다 [166]
- 1. 시리아 여인 [1417]
- 2. 시돈에서 가르치다 [1418]
- “이 세상은 겨우 다리일 뿐이라.”
- 3.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 [1419]
- 4. 티레에서 [1420]
- 5. 티레에서 예수가 가르침 [1421]
- 어리석은 목수의 비유
- 유혹과 인간의 성품
- 물질적 성공의 필수 조건
- 영적 생활과 자존심
- 이상과 아이디어
- 요령과 매력과 지혜
- 6. 페니키아에서 돌아오다 [1422]
- 유대인 지도자들의 태도
157. 케자리아 빌립비에서 [167]
- 예수가 가족을 만나려고 애쓰다
- 1. 성전의 세리 [1423]
- “세겔을 입에 문 물고기”
- 2. 벳세다 줄리아스에서 [1424]
- 3. 베드로의 고백 [1425]
- “사람들은 내가 누구이라 말하느냐?”
- 4.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 [1426]
- 5. 새로운 개념 [1427]
- 6. 이튿날 오후 [1428]
- 예수의 일생에서 네 단계
- 권한을 가진 새로운 선포
- 7. 안드레의 회담 [1429]
158. 변모의 산 [168]
- 1. 모습의 변화 [1430]
- 2. 산에서 내려오다 [1431]
- 3. 변모의 의미 [1432]
- 4. 간질병 있는 소년 [1433]
- 사펫의 야고보
- 5. 예수가 소년을 고치다 [1434]
- “주여 내가 믿나이다.내가 믿지 못함을 도와 주소서.”
- 6. 셀수스의 집 뜰에서 [1435]
- 7. 베드로의 항의 [1436]
- 8. 베드로의 집에서 [1437]
159. 데카폴리스 여행 [169]
- 1. 용서에 관한 설교 [1438]
- “얼마나 자주 내 형제가 내게 죄 지을 것이나이까?”
- 집사와 계산하는 것에 대한 비유
- 개인적으로 판단하는 것의 위험
- 2. 이상한 설교자 [1439]
- 3. 선생과 신자를 위한 가르침 [1440]
- 4. 나다니엘과 한 이야기 [1441]
- “성서에 관하여 무엇이 진실이나이까?”
- 5. 예수의 종교의 적극적 성질 [1442]
- “.짐을 5리를 더 나르라.”
- 6. 마가단으로 돌아오다 [1443]
160. 알렉산드리아의 로단 [170]
- 1. 로단의 그리스 철학 [1444]
- 생활의 세 가지 큰 욕구
- 문제 해결과 예배하는 명상에 잠기는 것
- 편견, 그리고 진리를 인식하는 것
- 2. 살아가는 기술 [1445]
- 우정의 교제하는 가치
- 결혼의 큰 가치
- 3. 성숙으로 이끄는 유혹 [1446]
- 4. 균형을 이룬 성숙 [1447]
- 현세 생활의 필수 조건
- 물질적 성공의 요인
- 실패의 의미
- 5. 이상적인 자의 종교 [1448]
- 무엇이 종교인가?
- 하나님에 관한 관념과 하나님에 관한 이상
- 아버지는 최종의 가치이다
- “그러나 우리가 그 값을 기꺼이 치르겠는가?”
161. 로단과 계속한 토론 [171]
- 1. 하나님의 성격 [1449]
- 나다니엘의 다섯 가지 논점
- 2. 예수의 신다운 성품 [1450]
- 나다니엘과 토마스의 강론
- 3. 예수의 인간 지성과 신 지성 [1451]
- 중도자들의 관점
162. 천막 축제에서 [172]
- “주여,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게 하소서”
- 1. 예루살렘 방문의 위험 [1452]
- 2. 성전에서 처음 하신 말씀 [1453]
- 산헤드린의 관리, 이버
- 3. 간통 중에 잡힌 여자 [1454]
- 4. 천막 축제 [1455]
- 5. 세상의 빛에 관한 설교 [1456]
- 6. 생명의 물에 대한 강연 [1457]
- 7. 영적 자유에 대한 강연 [1458]
- 8. 마르다와 마리아와 가진 담화 [1459]
- 9. 베들레헴에서 아브너와 [1460]
163. 마가단에서 칠십인을 세우다 [173]
- 1. 칠십인을 세움 [1461]
- 수확은 풍성하나 일꾼이 적도다
- 2. 부유한 젊은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 [1462]
- 부, 그리고 재물 사랑
- 3. 재산에 관한 토론 [1463]
- 포도원에 있는 일꾼들에 관한 비유
- 4. 칠십인과 작별하다 [1464]
- 예수의 가르침
- 베드로가 한 임명 설교
- 5. 캠프를 펠라로 옮기다 [1465]
- 6. 칠십인이 돌아오다 [1466]
- 7. 마지막 전도를 위한 준비 [1467]
164. 헌당 축제에서 [174]
- 1.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1468]
- 2. 예루살렘에서 [1469]
- 3. 눈먼 거지를 고치다 [1470]
- 4. 산헤드린 앞에 선 요시아 [1471]
- 5. 솔로몬의 회랑에서 가르치다 [1472]
165. 페레아 선교가 시작되다 [175]
- 1. 펠라 캠프에서 [1473]
- 2. 선한 목자에 대한 설교 [1474]
- 3. 펠라에서 하신 안식일 설교 [1475]
-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 “너희의 머리털도 다 세었느니라.”
- 4. 유산을 나누기 [1476]
-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느니라.”
- “너희가 온 세상을 얻으면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 5. 재산에 관하여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 [1477]
- “백합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라”
- 6. 베드로의 물음에 대한 대답 [1478]
166. 마지막 북 페레아 방문 [176]
- 1. 라가바의 바리새인들 [1479]
- 예식으로 손씻기
- 2. 열 명의 문둥병자 [1480]
- 3. 게라사에서 하신 설교 [1481]
- 곧고도 좁은 길
- 처음인 많은 사람이 나줄이 되리라
- “내가 문에서 서서 두드리나니.”
- 4. 사고에 대한 가르침 [1482]
- 5. 필라델피아의 회중 [1483]
- 후기의 봉사와 아브너의 죽음
167. 필라델피아 방문 [177]
- 1. 바리새인들과 아침을 먹다 [1484]
- 믿는 사람을 고치다
- “상석에 앉지 말라.”
- 2. 큰 만찬의 비유 [1485]
- 3. 정신이 허약한 여자 [1486]
- 4. 베다니에서 온 소식 [1487]
- 5. 베다니로 가는 길 [1488]
- 바리새인과 세리
- 결혼에 관한 가르침
- 6.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심 [1489]
- 아름다움은 예배하도록 이끄는 충동
- 7. 천사에 대한 이야기 [1490]
168. 나사로의 부활 [178]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1. 나사로의 무덤에서 [1491]
- 2. 나사로의 부활 [1492]
- 3. 산헤드린 회의 [1493]
-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도다.”
- 4. 기도에 대한 응답 [1494]
- 5. 나사로는 어떻게 되었는가 [1495]
169. 펠라에서 주신 마지막 가르침 [179]
- 산헤드린이 예수를 고발한 죄목
- 1.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1496]
- 2. 기민한 집사의 비유 [1497]
- 3. 부자와 거지 [1498]
- 4. 아버지와 그의 나라 [1499]
-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를 실천하였다
- 엘로힘과 야웨
170. 하늘나라 [180]
- 1. 하늘나라 개념 [1500]
- 2. 예수의 하늘나라 개념 [1501]
- 죄와 용서
- 3. 하늘나라와 올바름의 관계 [1502]
- 4. 하늘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1503]
- 5. 후일의 하늘나라 관념 [1504]
- 사회적 형제 정신과 영적 형제 정신
- 또 다른, 더 위대한 세례자 요한
- 기독교와 예수의 복음
171.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181]
- “이 내 아들들이 영예를 얻을 것을 약속하소서.”
- 1. 펠라를 떠나다 [1505]
- 다윗 세베대의 여생
- 안티오크와 필라델피아
- 2. 비용 계산에 대하여 [1506]
- 3. 페레아 여행 [1507]
- 아브너에게 작별함
- 4. 리비아에서 가르침 [1508]
- 베드로와 시몬과 칼 100 자루
- 친절한 바리새인들의 경고
- 5. 예리고에 있던 소경 [1509]
- 6. 삭개오를 찾아보다 [1510]
- 7. “예수가 지나가는 동안” [1511]
- 8. 파운드의 비유 [1512]
- 나다니엘이 비유를 풀이함
172.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다 [182]
- 1. 베다니에서 안식일을 [1513]
-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기름을 바르다
- 예수가 유다를 꾸짖음
- 2. 일요일 아침 사도들과 함께 [1514]
- 3.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다 [1515]
- 4. 성전 둘레를 방문하다 [1516]
- 과부가 바친 동전
- 5. 사도들의 태도 [1517]
173. 월요일에 예루살렘에서 [183]
- 1. 성전을 깨끗이 치우다 [1518]
- 2. 주의 권한에 대한 도전 [1519]
-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 3. 두 아들의 비유 [1520]
- 4. 부재한 지주의 비유 [1521]
- 건축자들이 버린 돌
- 5. 결혼 잔치의 비유 [1522]
- “이 성전을 부수라.내가 다시 일으키리라.”
174. 화요일 아침 성전에서 [184]
- 열두 사도에게 개별로 말씀을 주심
- 1. 신의 용서 [1523]
- 2. 유대인 권력자들이 던진 질문 [1524]
- 케자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 3. 사두개인과 부활 [1525]
- 4. 큰 계명 [1526]
- 구원자는 누구의 아들인가?
- 5. 수소문하는 그리스인들 [1527]
- “밀 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아니하면.”
- “내가 너희의 생활에서 들어올려지면.”
175. 마지막 성전 강연 [185]
- 1. 강연 [1528]
- “대대로 우리가 선지자를 보내었느니라.”
- “너희 가운데서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 “너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 “너희는 잔의 겉을 딲는구나.”
- “그리고 이제 내가 너희를 떠나노라.”
- 2. 개별 유대인의 지위 [1529]
- 3. 운명의 산헤드린 회의 [1530]
- 4. 예루살렘의 상황 [1531]
- 유다의 마지막 결정
176. 화요일 저녁 올리브산에서 [186]
- 1. 예루살렘의 멸망 [1532]
- 2. 주의 재림 [1533]
- 마태 복음에 있는 이야기
- 3. 캠프에서 나중에 있은 토론 [1534]
- 달란트의 비유
- “내가 올 때까지 계속하라.”
- 살아 있는 진리의 성장에 대한 논평
- 4. 미가엘의 돌아오심 [1535]
177. 수요일, 쉬는 날 [187]
- 1. 하루를 혼자 하나님과 [1536]
- 요한 마가와 점심 바구니
- 2. 어릴 때의 가정 생활 [1537]
- 3. 캠프에서 하루 [1538]
- 4. 유다와 주사제들 [1539]
- 5. 마지막 친교 시간 [1540]
- 군중의 지지를 조심하라
178. 캠프에서 마지막 날 [188]
- 1. 아들 신분과 시민 자격에 대한 강연 [1541]
- 번영하는 가운데서도 충실하기를 배우라
- 너희를 감시하는 천사들을 시험하지 말라
- 2. 점심 뒤에 [1542]
- 다윗이 유다의 돈 자루를 넘겨받다
- 마지막 만찬을 위한 주선
- 3.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 [1543]
179. 마지막 만찬 [189]
- 1. 우대를 받으려는 욕망 [1544]
- 2. 만찬을 시작하다 [1545]
- 3. 사도들의 발을 씻다 [1546]
- 4. 배반자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 [1547]
- 5. 기념 만찬을 선례로 만들다 [1548]
180. 작별의 말씀 [190]
- 1. 새 계명 [1549]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 2. 포도나무와 가지 [1550]
- 3. 세상이 적대함 [1551]
- “너희는 마음 속에 걱정하지 말라.”
-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 4. 약속된 돕는 이 [1552]
- 5. 진리의 영 [1553]
- 황금률에 대한 논평
- 6. 떠나야 할 필요 [1554]
181. 마지막 훈계와 경고 [191]
- 1. 마지막 위안의 말씀 [1555]
- “너희가 받을 모든 것을 너희 각자에게 주노라.”
- “너희는 마음 속에 근심하지 말라.”
- 2. 개인적으로 주신 작별의 훈계 [1556]
182. 겟세마네에서 [192]
- 1. 마지막 집단 기도 [1557]
- 예수가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계시를 확대하다
- 2. 배반당하기 이전의 마지막 시간 [1558]
- 아브너에게 주자를 파송함
- 다윗 세베대의 작별
- 3. 겟세마네에서 혼자서 [1559]
- 정신은 간절해도 육신이 약하나이다
183. 예수가 배반당하고 체포되다 [193]
- 1. 아버지의 뜻 [1560]
- 2. 유다가 도시에서 [1561]
- 3. 주가 붙잡히다 [1562]
- 4. 올리브 기름집에서 있은 토론 [1563]
- 5. 대사제의 저택으로 가는 길 [1564]
184. 산헤드린 법정 앞에서 [194]
- 1. 안나스의 심문 [1565]
- 2. 안뜰에서 베드로가 [1566]
- 3. 산헤드린 회원의 법정 앞에서 [1567]
- 4. 굴욕의 시간 [1568]
- 사람을 하나님께 새롭게 드러내다
- 5. 법정의 2차 회의 [1569]
185. 빌라도 앞에서 열린 재판 [195]
- 1. 본디오 빌라도 [1570]
- 2. 빌라도 앞에 예수가 나타나다 [1571]
- 산헤드린 법정이 작성한 죄목
- 3. 빌라도의 개인 심문 [1572]
- 4. 헤롯 앞에 선 예수 [1573]
- 5. 예수가 빌라도에게 돌아오다 [1574]
- 6. 빌라도의 마지막 호소 [1575]
- 예수를 채찍질하다
- “이 사람을 보라!”
- 7. 빌라도의 마지막 회견 [1576]
- 8. 빌라도의 비극적 굴복 [1577]
186. 십자가에 못박히기 바로 전 [196]
- 베다니에 있는 예수의 가족
- 1. 가룟 유다의 마지막 [1578]
- 은화 서른 닢
- 2. 주의 태도 [1579]
- “예수 앞에서 재판받는 빌라도.”
- “하나님인 사람을 보라!”
- 3. 믿음직한 다윗 세베대 [1580]
- 4. 십자가 처형을 위한 준비 [1581]
- 5. 예수의 죽음과 유월절의 관계 [1582]
187. 십자가에 못박히다 [197]
- 1. 골고다로 가는 길 [1583]
-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 키레네에서 온 시몬
- 2. 십자가에 못박히다 [1584]
- 3. 십자가 처형을 구경한 사람들 [1585]
- 4. 십자가에 달린 도둑 [1586]
- 예수가 요한에게 한 부탁
- 5. 십자가에 달린 마지막 시간 [1587]
- 6. 십자가 처형 뒤 [1588]
188. 무덤에 있던 시간 [198]
- 요셉과 니고데모가 빌라도 앞에 나타남
- 1. 예수를 무덤에 안치하다 [1589]
- 2. 무덤을 지키기 [1590]
- 3. 안식일에 [1591]
- 예수가 아버지의 손에 무엇을 맡기었는가?
- 예수의 인격의 지위
- 4. 주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의미 [1592]
- 5. 십자가로부터 얻는 교훈 [1593]
189. 부활 [199]
- 1. 상물질 모습으로 [1594]
- 2. 예수의 물질 몸 [1595]
- 3. 섭리 시대의 부활 [1596]
- 인격이 된 조절자가 떠나다
- 4. 빈 무덤의 발견 [1597]
- 다섯 여인
-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다
- 5. 무덤에 간 베드로와 요한 [1598]
- 두 번째로 나타나다―막달라 마리아에게
190. 예수가 상물질 모습으로 나타나다 [200]
- 1. 부활의 전령 [1599]
- 2. 베다니에 예수가 나타나다 [1600]
- 아우 야고보에게 나타나다
- 그의 지상 가족에게 나타나다
- 3. 요셉의 집에서 [1601]
- 4. 그리스인들에게 나타나다 [1602]
- 5. 두 형제와 함께 걷다 [1603]
191. 사도와 다른 지도자들에게 나타나다 [201]
- 개별 사도들의 반응
- 1. 베드로에게 나타나다 [1604]
- 2. 사도들에게 처음으로 나타나다 [1605]
- 3. 상물질 인간들과 함께 [1606]
- 상물질계에서 진보한 여러 단계
- 4. 열 번째 나타나다 (필라델피아에서) [1607]
- 5. 사도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다 [1608]
- “다가올 시대에 복을 받을 자들.”
- 6. 알렉산드리아에서 나타나다 [1609]
192. 갈릴리에서 나타나다 [202]
- 1. 호숫가에서 나타나다 [1610]
- “아이들아, 너희는 무엇이라도 잡았느냐?”
- 2. 사도들과 둘씩 이야기를 나누다 [1611]
- 3. 사도들을 세운 산에서 [1612]
- 4. 호숫가에서 모이다 [1613]
193. 마지막 출현과 승천 [203]
- 열여섯 번째 나타나다 (니고데모의 집 뜰에서)
- 1. 시카에서 나타나다 [1614]
- 2. 페니키아에서 나타나다 [1615]
- 3. 예루살렘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나다 [1616]
- 4. 유다가 패망한 원인 [1617]
- 5. 주의 승천 [1618]
- 6. 베드로가 모임을 소집하다 [1619]
194. 진리의 영을 수여하다 [204]
- 예수에 관한 새 복음
- 1. 오순절 설교 [1620]
- 2. 오순절의 중요성 [1621]
- 진리의 영의 사명
- 사람이 받은 세 가지 영적 재산
- 일곱 가지 상급 영적 영향
- 3. 오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622]
- 4. 기독교 교회의 시작 [1623]
195. 오순절 뒤에 [205]
- 기독교가 서양에서 승리한 이유
- 기독교가 초기에 타협한 것들
- 1. 그리스인의 영향 [1624]
- 2. 로마인의 영향 [1625]
- 3. 로마 제국 밑에서 [1626]
- 4. 유럽의 암흑 시대 [1627]
- 5. 현대의 문제 [1628]
- 6. 유물론 [1629]
- 7. 유물론의 취약성 [1630]
- 8. 세속적 전체주의 [1631]
- 9. 기독교의 문제 [1632]
- 10. 앞날 [1633]
196. 예수의 믿음 [206]
- 하나님을 믿는 예수의 팔팔한 믿음
- “먼저 하늘나라를 찾으라.”
-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 기도가 예수에게 뜻한 것
- 예수가 아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
- 1. 인간 예수 [1634]
- 2. 예수의 종교 [1635]
- 예수에 관한 종교
- 몸소 겪는 체험인 종교
- 3. 종교의 우월성 [1636]
- 사실·관념·관계
- 논리·지혜·믿음
- 사물·의미·가치
- 사랑을 주는 신다운 자가 사람 속에 살지 않으면.
- 도덕성과 종교
- 아버지는 살아 있는 사랑.
0:0.1 (1.1) 유란시아―이는 너희 세계의 이름이니―거기에 사는 필사자(必死者)의 머리 속에는 하나님ㆍ신성(神性)ㆍ신과 같은 용어의 뜻에 관하여 큰 혼란이 존재한다. 수많은 호칭으로 부르는 신성한 성격자들의 관계에 대하여, 인간은 더욱 혼동이 되고 확신이 없다. 아주 많은 관념의 혼란과 관련된 이 개념의 빈곤 때문에 나는 오르본톤의 진리 계시단이 유란시아의 영어로 옮기도록 인가받은 여러 글에서 지금부터 쓰일 수 있는 특정한 여러 낱말 표현에 붙여야 하는 뜻을 설명하는 취지로, 이 서론을 적으라고 지시를 받았다.
0:0.2 (1.2) 우주에 대한 의식(意識)을 기르고 영적 통찰력을 키우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이 영역의 한정된 언어를 쓰도록 제한을 받고 있는 가운데 우리가 확대된 여러 개념과 상급 진리를 발표하기는 지극히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명령은, 영어의 낱말 표현을 사용하여 우리의 뜻을 전하는 데 어떤 노력도 아끼지 말라고 타이른다. 묘사할 개념에 어울리게 그러한 개념을 부분적으로 전하거나, 얼마큼 뜻을 왜곡하더라도 쓸 수 있는 용어가 영어에 전혀 없을 경우에만 새 용어를 소개하라고 우리는 지시를 받았다.
0:0.3 (1.3) 이 여러 글을 정독할까 싶은 모든 필사자의[1] [1637] 편에서 이해하는 것을 돕고 혼란을 방지하고 싶은 희망으로, 신(神), 그리고 우주에 실재하는 사물ㆍ의미ㆍ가치에 관한 어떤 관계된 개념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될 수많은 영어 단어에 붙일 뜻의 윤곽을 이 서언에서 제시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우리는 판단한다.
0:0.4 (1.4) 그러나 여러 용어의 뜻과 한계에 관한 이 머리말을 적기 위해서, 이러한 용어들이 다음에 발표되는 글에서 어떻게 쓰일까 예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 머리말은 자체로서 끝난 글이 아니라, 다만 신과 온 우주를 다루는, 뒤잇는 여러 논문을 읽을 사람들을 도우려고 고안된, 낱말 설명 안내서이며, 이 목적으로 유란시아에 파송된 오르본톤 위원회가 이 여러 논문을 작성하였다.
0:0.5 (1.5) 너희 세계 유란시아는 네바돈 지역 우주를 구성하는 행성, 사람이 사는 비슷한 많은 행성 중에 하나이다. 이 네바돈 우주는 다른 비슷한 우주들과 함께, 오르본톤 초우주(超宇宙)를 구성하며, 우리 위원회는 그 서울 유버르사 출신이다. 오르본톤은 시간과 공간에서 진화하는 일곱 초우주 중의 하나이다. 이 일곱 초우주는 결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신성하게 완전한 창조―하보나 중앙 우주―를 돌고 있다. 이 영원한 중앙 우주의 중심에 움직이지 않는 파라다이스 섬이 있으며, 이는 무한의 지리적 중심이요, 영원한 하나님이 거하는 곳이다.
0:0.6 (1.6) 중앙의 신성한 우주와 관련된, 진화하는 일곱 초우주를 우리는 보통 대우주라고 말하며, 이것들은 지금 조직되어 있고, 사람이 사는 우주이다. 이 초우주들은 모두 총우주의 일부이고, 총우주는 또한 사람이 살지 않지만 바깥 공간에서 동원되는 우주들도 포함한다.
0:1.1 (2.1) 온 우주는 우주 실체, 지성의 의미, 영적 가치의 다양한 수준에서 신이 활동하는 현상을 제시하지만, 이 모든 보살핌은―개인적이거나 다른 방법으로―신성하게 조정된다.
0:1.2 (2.2) 신은 하나님으로서 성격화할 수 있고, 사람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선(先)인격이며 성격을 초월한다. 신의 특징은 실체의 모든 초물질 수준에서 ―실제로 또는 잠재적으로―통일된 성질을 가졌다. 하나로 만드는 이 성질이 신성(神性)이라고 인간은 가장 쉽게 이해한다.
0:1.3 (2.3) 신은 성격, 선(先)인격[2] [1638], 초월 성격 수준에서 활동한다. 총체적 신은 다음 일곱 수준에서 활동한다.
0:1.4 (2.4) 1. 정적(靜的) 수준―독립되고 스스로 존재하는 신.
0:1.5 (2.5) 2. 잠재 수준―스스로 의지(意志)하고 스스로 의도하는 신.
0:1.6 (2.6) 3. 연합 수준―스스로 성격을 갖추고 신답게 친교하는 신.
0:1.7 (2.7) 4. 창조 수준―스스로를 나눠주고 신답게 계시하는 신.
0:1.8 (2.8) 5. 진화 수준―스스로 확장하고 인간과 일체가 된 신.
0:1.9 (2.9) 6. 최상 수준―스스로 체험하고 인간과 창조자를 하나로 만드는 신. 대우주에서 전반적 시공 통제자로서 인간과 일체가 되는 첫째 수준에서 활동하는 신, 때때로 이를 최상위 신이라고도 부른다.
0:1.10 (2.10) 7. 궁극 수준―스스로 계획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신. 전능하고 전지하고 두루 계시는 신.[3] [1639] 총우주 전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초한(超限) 방법으로 지원하는 자로서, 신성의 표현을 통일하는 둘째 수준에서 활동하는 신. 신들이 대우주에 베푸는 봉사와 비교하여, 총우주에서 이 초한 활동은 우주의 전반적 통제와 초월적 지원에 해당하며, 때로는 궁극위 신이라고 부른다.
0:1.11 (2.11) 실체의 유한 수준의 특징은 인간의 생명과 시공 제한이 있는 것이다. 유한한 실체는 끝이 없을지 모르지만, 반드시 처음이 있다―그들은 지음을 받는다. 최상 신의 수준은 유한한 존재들과 관계된 기능으로 보아도 좋다.
0:1.12 (2.12) 실체의 초한 수준의 특징은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사물과 존재들이 있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초한자는 창조되지 않으며, 궁극에 이른다―그들은 다만 궁극에 이를 뿐이다. 궁극의 신 수준은 초한 실체들과 관계된 활동을 뜻한다. 총우주의 어느 부분에 있거나 상관 없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때는 언제나, 그러한 초한 현상은 궁극위 신의 행위이다.
0:1.13 (2.13) 절대 수준은 처음이 없고 끝이 없으며, 시간도 공간도 없다. 예를 들면, 파라다이스에는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파라다이스의 시공 지위는 절대적이다. 파라다이스 신들이, 실존적으로 이 수준을 삼위일체로서 성취하였다. 그러나 통일하는 신 표현의 이 셋째 수준은, 체험적으로 완전히 하나가 되지 않았다. 절대 수준의 신이 활동하는 데는 언제 어디서나, 어떻게 하든지, 파라다이스의 절대 가치와 의미가 분명히 나타난다.
0:1.14 (3.1) 신은, 영원한 아들의 경우처럼 실존적이고 최상 존재와 같이 경험적이며, 칠중 신처럼 연합하고,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서 보다시피 나누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0:1.15 (3.2) 신은 모든 신다운 것의 근원이다. 신은 신다운 특징이 있고, 또 변함없이 신답지만, 신다운 모든 것이 반드시 신은 아니다. 하지만 신성한 것은 신과 함께 조정되고, 신과 하나가 되는 어떤―영, 지성 또는 성격―단계로 지향할 것이다.
0:1.16 (3.3) 신성(神性)은 신의 특징을 나타내는 성질, 하나로 만들고 조정하는 성질이다.
0:1.17 (3.4) 인간은 신성을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성격자의 경우에 사랑ㆍ자비ㆍ봉사와 연결되며, 비성격 수준에서는 응보ㆍ권능ㆍ통치권으로 나타난다.
0:1.18 (3.5) 파라다이스의 완전함을 갖춘 실존적[4] [1640] 수준과 창조자 수준에서 보다시피, 신성은 완전―완벽―할 수 있다. 신성은 시공에서 진화하는 체험적 인간 수준에서 보다시피 불완전할 수도 있고, 또한 실존과 체험이 관련된 어떤 하보나 수준처럼 상대적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완전하지도 않고 불완전하지도 않을 수 있다.
0:1.19 (3.6) 모든 상대적 단계와 형태로 완전을 파악하려고 애쓸 때,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일곱 종류에 부딪치게 된다:
0:1.20 (3.7) 1. 모든 면에서 절대로 완전함.
0:1.21 (3.8) 2. 어떤 단계에서 절대로 완전하고, 모든 다른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완전함.
0:1.22 (3.9) 3. 다양한 관계에서, 절대적이고 상대적이며 불완전한 모습.
0:1.23 (3.10) 4. 어떤 면에서 절대로 완전하고, 기타 모든 면에서 불완전함.
0:1.24 (3.11) 5. 어떤 방향에서도 절대로 완전하지 않고, 모든 명시가 상대적으로 완전함.
0:1.25 (3.12) 6. 어떤 단계에서도 절대로 완전하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완전하고, 다른 면에서 불완전함.
0:2.1 (3.14) 진화하는 필사 인간은 하나님에 관한 유한한 개념을 상징으로 나타내고 싶은 견딜 수 없는 충동을 체험한다. 사람의 도덕적 의무 의식(意識)과 영적 이상(理想)은 어떤 가치 수준―체험적 실체―를 대표하며, 이것은 상징으로 나타내기 어렵다.
0:2.2 (3.15) 우주를 의식하는 것은, 하나의 첫째 근원, 곧 원인 없이 생긴 유일한 실체를 인식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 곧 우주의 아버지는 무한 이하의 가치와 상대적 신성을 표현하는 세 가지 신 성격 수준에서 활동한다:
0:2.3 (3.16) 1. 선(先)인격―생각 조절자처럼, 아버지의 분신이 베푸는 봉사의 경우.
0:2.6 (3.19) 하나님은 신의 모든 성격화를 가리키는 낱말 표현이다. 이 용어는 신이 활동하는 각 성격 수준에서 다른 정의(定義)를 요구하고, 이러한 각 수준에서도 더 자세히 다시 규명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용어가 예를 들면, 파라다이스 창조 아들, 곧 지역 우주의 아버지들에서 보다시피, 신의 다양한 동급 및 종속된 성격화를 가리키는 데 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0:2.7 (4.1) 우리가 사용하는 하나님이라는 용어는 다음과 같이 이해해도 좋다:
0:2.9 (4.3) 문맥에 따라―어느 한 신 수준 또는 관계를 이야기할 때 쓰듯. 하나님이란 낱말의 정확한 해석에 관하여 의심이 들 때, 그 낱말을 바로 우주의 아버지로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0:2.10 (4.4) 하나님이라는 낱말은 언제나 성격을 표시한다. 신이라는 말은 신(神) 성격자를[5] [1641] 가리키거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0:2.11 (4.5) 하나님이라는 낱말은 이 여러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0:2.12 (4.6) 1. 아버지 하나님―창조자ㆍ통제자ㆍ지원자. 우주의 아버지, 신의 처음 분.
0:2.13 (4.7) 2. 아들 하나님―동위 창조자, 영적 통제자, 영적 관리자. 영원한 아들, 신의 둘째 분.
0:2.14 (4.8) 3. 영 하나님―합동 행위자, 우주 통합자, 지성 수여자. 무한한 영, 신의 셋째 분.
0:2.15 (4.9) 4. 최상위 하나님―사실화하거나 진화하는, 시공의 하나님. 인간과 창조자가 연합하여 일치됨을 시공(時空)에서 체험으로 이루는, 성격을 가진 신. 최상 존재는 시공의 진화하는 인간에게 진화하고 체험하는 하나님으로서, 신의 통일을 성취하는 체험을 몸소 겪고 있다.
0:2.16 (4.10) 5. 칠중 신―시공에 어디에나 실제로 활동하는 신 성격자. 성격을 가진 파라다이스 신들과 그 창조 동료들은 중앙 우주의 테두리 안과 바깥에서 활동하며, 시공에서 통일하는 신을 드러내는 첫째이자 생물 수준에서 최상 존재로서 권능을 가지고 성격화된다. 이 수준, 즉 대우주는 진화하는 인간이 시공에서 올라가는 것과 반대 관계로 파라다이스 성격자들이 시공에서 내려오는 분야이다.
0:2.17 (4.11) 6. 궁극위 하나님―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궁극에 이르는 하나님. 통일하는 신이 나타나는, 둘째의 체험 수준이다. 궁극위 하나님은, 초한(超限)하고 성격을 초월하는 가치, 시공을 초월하는 가치, 궁극에 이른 체험적 가치의 통합을 실현하고, 이것이 신 실체의 마지막 창조 수준에서 조정된 것을 암시한다.
0:2.18 (4.12) 7. 절대자 하나님―초월 성격의 가치와 신성의 의미를 체험으로 만드는 신은 지금 신 절대자로서 실존적이다. 이것은 통일하는 신을 표현하고 확장하는 셋째 수준이다. 창조를 초월하는 이 수준에서, 신은 성격화할 수 있는 잠재성이 소모됨을 체험하고 완성된 신성에 부딪치며, 연속되어 진보하는 수준, 달리 성격화하는 수준까지 자아를 드러내는 능력이 소모됨을 체험한다. 이제 신 절대자는 무제한 절대자를 만나고, 그에 부딪치고, 그와 동일함을 체험한다.
0:3.1 (4.13) 무한한 총 실체는 일곱 단계에서, 그리고 동급의 일곱 절대자로서 실존한다:
0:3.9 (5.8) 하나님은 첫째 근원 중심으로서, 총 실체와 가지는 관계에서 아무 조건 없이 으뜸이다. 첫째 근원 중심은 영원ㆍ무한하며, 따라서 오직 의지(意志)해야 제한되거나 조건을 받는다.
0:3.10 (5.9) 하나님―우주의 아버지―는 첫째 근원 중심의 성격이요, 이것만으로, 모든 동급 및 종속 근원 중심을 무한히 통제하는 성격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한 통제력은 몸소 지닌 것이요 그 잠재성은 무한하다. 하지만 동급 및 종속 근원 중심과 성격자들이 완벽하게 활동하기 때문에, 그런 통제력이 결코 실제로 작용하지 않을지 모른다.
0:3.11 (5.10) 따라서 첫째 근원 중심은 모든 영토, 신이 되거나 신이 되지 않거나, 성격이거나 비성격이거나, 실재하거나 잠재하거나, 유한하거나 무한한 영토에서 으뜸이다. 첫째 근원 중심의 수위성과 직접ㆍ간접으로 관련 없이, 또 그에 의존하지 않고는 어떤 사물이나 존재도, 어떤 상대성이나 최종의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0:3.12 (5.11) 첫째 근원 중심은 다음과 같이 우주와 관계된다.
0:3.13 (5.12) 1. 물질 우주의 인력(引力)의 힘은 아래 파라다이스의 인력 중심에서 모인다. 이것이 바로 어째서, 그의 몸의 지리적 위치와 파라다이스 아래쪽, 곧 물질 평면의 물력 및 에너지 중심, 이 둘의 절대적 관계가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가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신의 절대 성격은 파라다이스의 윗면, 곧 영적 평면에 존재한다.
0:3.14 (5.13) 2. 지성 세력들은 무한한 영 안에서 모인다. 차별되고 갈라지는 우주 지성은 일곱 으뜸 영 안에서, 그리고 최상위의 현실화되는 지성은 하나의 시공 체험으로서 위엄자(威嚴者) 안에서 모인다.
0:3.15 (5.14) 3. 우주의 영(靈) 세력들은 영원한 아들 안에서 모인다.
0:3.16 (5.15) 4. 신이 활동하는 무제한 능력은 신 절대자 안에 거한다.
0:3.17 (5.16) 5. 무한히 반응하는 무제한 능력은 무제한 절대자 안에 존재한다.
0:3.18 (5.17) 6. 두 절대자―제한 절대자와 무제한 절대자―는 우주 절대자 안에서, 또 그로 인하여 조정되고 하나가 된다.
0:3.19 (5.18) 7. 진화하는 도덕적 존재나 어떤 다른 도덕적 존재라도, 그 잠재 성격은 우주의 아버지의 성격에 집중된다.
0:3.20 (5.19) 유한한 존재들이 이해하는 실체는 부분적ㆍ상대적이고 그림자와 같다. 유한한 진화 인간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신 실체는 최상 존재 안에 담겨 있다. 그렇기는 해도, 이에 선행(先行)하는 영원한 실체, 유한을 뛰어넘는 실체도 있으며, 이들은 시공에서 진화된 인간의 이 최상 신의 조상이 된다. 보편적 실체의 기원과 본질을 그리려고 시도하면서, 유한한 지성 수준까지 미치기 위하여, 우리는 시공 논리 기법을 쓸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동시에 생긴 영원의 사건들을 우리는 연속된 거래로서 제시해야 한다.
0:3.21 (6.1) 시공 세계의 인간이 실체의 기원과 분화를 보건대, 영원하고 무한한 스스로 계신 이는 본래의 영원한 자유 의지를 행사함으로 제한 없는 무한의 사슬을 벗어나 신의 해방을 얻었다. 제한 없는 무한으로부터 이렇게 분리된 것은, 처음으로 절대 신성의 긴장을 일으켰다. 우주 절대자가 이러한 무한의 차이로 생긴 긴장을 풀었고, 우주 절대자는 총체 신의 동적(動的) 무한과 무제한 절대자의 정적(靜的) 무한을 통일하고 조정하려고 작용한다.
0:3.22 (6.2) 이 최초의 거래에서 이론적인 스스로 계신 이는 최초의 아들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어 성격을 실현하였고, 그와 동시에 파라다이스 섬의 영원한 근원이 되었다. 파라다이스가 있는 앞에서, 아들을 아버지와 구별할 때부터 공존하는, 무한한 영의 몸과 하보나 중앙 우주가 나타났다. 공존하며 성격을 가진 신, 즉 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이 나타남과 함께, 아버지는 하나의 성격자로서, 총체 신의 잠재성 전역에 걸쳐서,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피한 분산을 피했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오로지 대등한 두 신과 삼위일체 관계에서만 모든 신 잠재성을 채우며, 한편 체험적 신은 최상ㆍ궁극ㆍ절대 신성 수준에서 갈수록 더 현실화된다.
0:3.23 (6.3) 스스로 계신 이의 개념은, 시간에 묶이고 공간에 매인, 사람의 유한한 지성에게, 그리고 영원에 있는 존재―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실체 및 관계―를 인간이 이해하기 불가능한 것에 대하여 우리가 철학적으로 양보한 것이다. 시공의 인간이 보기에는, 원인 없이 계신 이―원초적 원인 중의 원인―만 제쳐놓고, 만물은 처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철학적 가치 수준을 스스로 계신 이라는 개념으로 만들고, 아울러 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은 스스로 계신 이와 함께, 공동으로 영원하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계신 이가 아들의 아버지가 아니고, 아들과 함께 영의 아버지가 아니었던 때가 결코 없었다고 우리는 모든 생물에게 가르친다.
0:3.24 (6.4) 무한자는 첫째 근원 중심의 수위성의 충만한―최종―의미를 나타내기 위하여 쓰인다. 이론적인 스스로 계신 이는 “의지의 무한”이 인간의 철학으로 연장된 것이지만, 무한자는 우주의 아버지의 절대적이고 묶이지 않는 자유 의지의 참된 무한의 강도, 영원의 강도를 나타내는 실제 가치 수준이다. 이 개념을 때때로 아버지 무한자라고 부른다.
0:3.25 (6.5) 높고 낮은 모든 계급의 존재들이 아버지 무한자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면서 생기는 많은 혼동은, 그들의 이해하는 한계에 본래부터 있다. 우주의 아버지의 절대적 수위성은 무한 이하 수준에서 명백하지 않다. 그러니까 아마도 오직 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이 아버지가 하나의 무한자인 것을 참으로 이해할 것이다. 모든 다른 성격자에게 그러한 개념은 신앙 연습에 지나지 않는다.
0:4.1 (6.6) 실체는 다채로운 우주 수준에서 다르게 현실화된다. 실체는 우주의 아버지 안에서 그의 무한한 의지에 따라서 생겨나며, 우주가 현실화되는 여러 다른 수준에서 세 가지 주요 단계로 실현될 수 있다.
0:4.2 (6.7) 1. 신이 되지 않은 실체는 비성격인 것의 에너지 영토에서부터,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성격화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실체 분야까지, 아니 무제한 절대자의 계심에까지도 미친다.
0:4.3 (7.1) 2. 신이 된 실체는 성격의 영역 전체를 통해서, 가장 낮은 유한자로부터 가장 높은 무한자에 이르기까지, 위로 무한한 신 잠재성 전부를 포함하며, 따라서 성격화할 수 있는 것과 그보다 더한 모든 것의 영토를―신 절대자의 계심에 이르기까지도 ―포함한다.
0:4.4 (7.2) 3. 서로 연합된 실체. 상상하건대, 우주 실체는 신이 되든지, 또는 신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이 되지 못한 존재들에게는, 잠재하고 현실화되는 실체, 확인하기 어려운 서로 연합된 실체의 광대한 영토가 존재한다. 이 나란히 있는 실체의 상당 부분은 우주 절대자의 영역에 들어간다.
0:4.5 (7.3) 다음이 기원이 되는 실체의 근원적 개념이다: 아버지는 실체를 비롯하고 유지한다. 실체의 근원적 분화는 신이 된 자와 신이 되지 않는 자―신 절대자와 무제한 절대자이다. 근원적 관계는 이 둘 사이의 긴장이다. 아버지가 비롯한 이 신성의 긴장은 우주 절대자가 완전히 해결하고 우주 절대자로서 영원하게 된다.
0:4.6 (7.4) 시간과 공간의 관점에서 볼 때, 실체는 다음과 같이 더 세분될 수 있다:
0:4.7 (7.5) 1. 실재하는 것과 잠재하는 것. 완전히 표현되어 존재하는 실체, 이와 반대로 밝혀지지 않은 성장 능력을 지니는 실체. 영원한 아들은 하나의 절대적 영적 사실이며, 필사 인간은 대체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의 영적 잠재성이다.
0:4.8 (7.6) 2. 절대적인 것과 절대 이하의 것. 절대 실체들은 영원의 존재이다. 절대 이하의 실체는 두 수준에서 계획된다: 초한자―시간과 영원에 대하여 상대적인 실체. 유한자―공간에서 계획되고 시간 속에서 현실화되는 실체.
0:4.9 (7.7) 3. 실존적인 것과 체험적인 것. 파라다이스 신은 실존적이지만, 솟아나는 최상위와 궁극위는 체험적이다.
0:4.10 (7.8) 4. 성격인 것과 비성격인 것. 신의 확장, 성격의 표현, 우주의 진화는 언제까지나 아버지의 자유 의지에 따라 조절된다. 아버지의 자유 의지는, 영원한 아들에 집중되는, 실재하고 잠재하는 가치와 의미를 지닌 지성ㆍ영ㆍ성격, 그리고 영원한 파라다이스 섬에서 모이고 본래부터 생기는 것들, 이 두 가지를 영원히 분리하였다.
0:4.11 (7.9) 파라다이스는 우주 실체의 모든 단계에서 성격 및 비성격 초점이 되는 절대자들을 포함하는 용어이다. 파라다이스는 엄밀하게 규명했을 때, 어떤 형태의 실체, 아니 온갖 형태의 실체도, 곧 신ㆍ신성ㆍ성격, 그리고―영이든, 지성이든 물질이든―에너지를 뜻할 수도 있다. 가치와 의미와 사실적 존재에 관계되는, 기원ㆍ활동ㆍ운명의 장소로서 모두가 파라다이스를 공유한다.
0:4.12 (7.10) 파라다이스 섬―달리 조건을 붙이지 않고서 파라다이스―는 첫째 근원 중심의 물질 인력(引力)을 통제하는 절대물이다. 파라다이스는 가만히 있고, 온 우주에서 유일하게 움직이지 않는 물체이다. 파라다이스 섬은 우주에서 위치가 있지만, 공간에 자리가 없다. 이 영원한 섬은―과거ㆍ현재ㆍ미래의―물리적 우주의 실제 근원이다. 중심에 있는 빛의 섬은 신으로부터 파생된 물건이지만, 도저히 신이라 할 수 없다. 여러 물질 우주도 신의 일부가 아니요, 하나의 결과이다.
0:4.13 (7.11) 파라다이스는 창조자가 아니다. 파라다이스는 여러 우주 활동을 독특하게 통제하며, 반응하기보다는 통제하는 물건에 훨씬 더 가깝다. 물질 우주에 두루, 파라다이스는 물력ㆍ에너지ㆍ동력과 상관 있는 모든 존재의 반응과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우주들 가운데 파라다이스 자체는 독특하고, 배타적이고 고립되어 있다. 파라다이스는 아무것도 대표하지 않고, 아무것도 파라다이스를 대표하지 않는다. 물력도 계심도 아니요, 그저 파라다이스일 따름이다.
0:5.1 (8.1) 성격은 신이 된 실체의 한 수준이며, 필사자 및 중도자의 예배와 지혜를 촉진하는 상급 지성 수준에서부터 상물질(上物質) 및 영적 수준을 거쳐서, 성격이 최후에 달성하는 지위에까지 미친다. 이것이 필사자 및 친척 생물 성격자가 진화로 승천하는 것이지만, 수많은 다른 계급의 우주 성격자가 있다.
0:5.2 (8.2) 실체는 우주의 팽창에 지배되고, 성격은 무한한 분화에 지배된다. 이 두 가지에 거의 한없이 신의 조정과 영원한 안정이 가능하다. 비성격 실체가 변화하는 범위는 뚜렷이 한정되어 있으나, 우리가 알건대, 성격 실체의 점진적 진화에는 아무런 한계가 없다.
0:5.3 (8.3) 도달한 체험 수준에서, 모든 성격 계급이나 가치는 서로 연합할 수 있고, 공동 창조성도 있다. 그리스도 미가엘―사람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아들―의 현재 지위에서 아주 자세히 나타난 바와 같이, 하나의 통일된 성격 안에서는 하나님과 사람도 함께 있을 수 있다.
0:5.4 (8.4) 무한 이하 성격자의 모든 계급과 단계는, 연합하여 달성이 가능한 자이고, 공동 창조 잠재성을 가진다. 선(先)인격인 자, 성격인 자, 초월 성격인 자들은 서로 가진 잠재성, 나란히 달성하고, 점진적으로 성취하고, 공동으로 창조하는 능력 때문에 모두 함께 연결된다. 그러나 비성격자는 결코 성격자로 바로 변화되지 않는다. 성격은 결코 저절로 생겨나지 않으며,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선물이다. 성격은 에너지 위에 겹쳐 놓으며, 오직 살아 있는 에너지 체계와 연합된다. 신분은 살아 있지 않은 에너지 형태와 결합될 수 있다.
0:5.5 (8.5) 우주의 아버지는 성격 실체, 성격 수여, 성격 운명의 비밀이다. 영원한 아들은 절대 성격자요, 영적 에너지, 상물질 영, 완전해진 영들의 비밀이다. 합동 행위자는 영(靈) 지성을 가진 성격자요, 지능과 이치와 보편적 지성의 근원이다. 그러나 파라다이스 섬은 비성격이고 영적 범위를 벗어나며, 파라다이스는 우주 몸의 본질이요, 물리적 물질의 근원이자 중심이요, 우주의 물질 실체의 절대 원본이다.
0:5.6 (8.6) 우주 실체의 이러한 성질은 다음 수준에서 유란시아의 인간 체험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0:5.7 (8.7) 1. 몸. 사람의 물질적 또는 육체적 유기체. 동물의 성질과 기원을 가진, 살아 있는 전기 화학 작용.
0:5.8 (8.8) 2. 지성. 인간 유기체의 생각하고 파악하고 느끼는 작용. 의식하는 경험과 무의식의 경험 전체. 예배와 지혜를 통해서 위로 영 수준까지 미치는, 감정이 있는 생명과 관계된 지능.
0:5.9 (8.9) 3. 영. 사람의 지성 속에 깃드는 신다운 영(靈)―생각 조절자. 이 불멸의 영은 선(先)인격이다―인격이 아니다. 하지만 살아남는 필사 인간 성격의 일부가 될 운명을 가졌다.
0:5.10 (8.10) 4. 혼. 사람의 혼은 체험으로 얻는다. 필사 인간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 행하기”를 택함에 따라서 그 깃드는 영은 인간의 체험에서 새로운 실체의 아버지가 된다. 필사자의 물질 지성은 바로 이 태어나는 실체의 어머니가 된다. 이 새 실체의 알맹이는 물질도 영도 아니다―상물질이다. 이것은 생겨나는 불사의 혼이며, 필사자가 죽은 뒤에 살아남아서 파라다이스로 비로소 올라갈 운명을 가졌다.
0:5.11 (9.1) 인격. 필사 인간의 성격은 몸도 지성도 영도 아니며, 혼도 아니다. 인격은 다른 면에서 늘 변하는 인간의 체험 속에서 하나의 변치 않는 실체이고, 개성의 모든 다른 관련된 요소들을 하나로 만든다. 인격이란 우주의 아버지가 물질ㆍ지성ㆍ영의 에너지, 살아 있고 연결된 에너지 위에 주는 특유한 선물이요, 상물질 혼이 살아남을 때 함께 살아남는다.
0:5.12 (9.2) 상물질은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개재하는, 광대한 수준을 표시하는 용어이다. 이것은 성격 실체나 비성격 실체, 살아 있거나 살아 있지 않은 에너지를 가리킬 수도 있다. 상물질의 날줄은 영이요 씨줄은 물질이다.
0:6.1 (9.3) 아버지의 성격 회로(回路)에 반응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우리는 성격이라 부른다. 우리는 아들의 영 회로에 반응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영이라 부른다. 합동 행위자의 지성 회로에 반응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지성이라 부른다. 곧 무한한 영의 한 속성인 지성, 그 모든 단계의 지성을 말한다. 아래 파라다이스에 집중하는 물질 인력 회로에 반응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우리는 물질―온갖 변화된 상태에 있는 에너지와 물질―이라 부른다.
0:6.2 (9.4) 우리는 에너지를 영ㆍ지성ㆍ물질의 영역에 적용되는, 모든 것을 담는 용어로서 쓴다. 물력(物力)도 또한 이처럼 넓은 뜻으로 쓰인다. 동력은 대우주 안에서 전자(電子) 수준의 물질, 또는 직진 인력(引力)에 민감한 물질을 표현하는 데 보통 한정된다. 권능은 또한 통치권을 가리키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너희가 두루 쓰는 물력ㆍ에너지ㆍ동력이라는 말의 정의를 우리는 따를 수 없다. 언어가 너무 빈약해서, 우리는 이 용어들에 여러 가지 뜻을 부여해야 한다.
0:6.3 (9.5) 물리적 에너지는 어떤 단계와 형태로 있든, 현상의 움직임ㆍ활동ㆍ잠재성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0:6.4 (9.6) 물리적 에너지가 겉으로 명시되는 것을 말할 때, 우리는 우주 물력, 태동 에너지, 우주 동력, 이 세 가지 용어를 널리 쓴다. 이것들은 흔히 다음과 같이 쓰인다:
0:6.5 (9.7) 1. 우주 물력은[6] [1642] 무제한 절대자로부터 파생되지만 아직까지 파라다이스 인력에 민감하지 않은 모든 에너지를 포함한다.
0:6.6 (9.8) 2. 태동 에너지는 파라다이스 인력에 민감하지만 지역 인력, 곧 직선 인력에 아직 민감하지 않은 에너지를 포함한다. 이것은 전자가 생기기 전 수준의 에너지와 물질이다.
0:6.7 (9.9) 3. 우주 동력은 파라다이스 인력에 아직도 반응하면서, 직진 인력에 직접 반응하는 모든 형태의 에너지를 포함한다. 전자 수준의 에너지 물질과 그후에 그로부터 생기는 모든 진화를 포함한다.
0:6.8 (9.10) 지성은 다양한 에너지 체계에 덧붙인, 살아 있는 봉사가 존재하거나 작용하는 것을 가리키는 현상이고, 이것은 모든 수준의 지능의 경우에 참말이다. 성격자의 경우에, 지성은 늘 영과 물질 사이에 개재한다. 따라서 우주는 물질적 빛, 지적 통찰력, 영적 빛, 이 세 종류의 빛으로 밝게 된다.
0:6.9 (10.1) 빛―영적 빛―은 다채로운 계급의 영 존재의 특징을 가진 성격이 겉으로 표현되는 것을 가리키는 낱말 표현, 비유적 표현이다. 이 빛의 방출은 지적 통찰력이나 물리적 빛이 나타나는 것과 어떤 면에서도 관계가 없다.
0:6.10 (10.2) 원본은 물질ㆍ영ㆍ지성 에너지, 또는 이 여러 에너지의 어떤 조합으로도 계획될 수 있다. 원본은 성격자ㆍ신분ㆍ개체, 또는 무생물에 스며들 수 있다. 그러나 원본(原本)은 원판이요, 원판으로 남아 있고, 오로지 복사판이 늘어난다.
0:6.11 (10.3) 원본은 에너지를 넣어서 지을 수 있지만, 원본이 에너지를 통제하지는 않는다. 인력이 에너지와 물질을 유일하게 통제한다. 공간도 원본도 인력에 민감하지 않지만, 공간과 원본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 공간은 원본도, 원본의 가능성도 아니다. 원본은 이미 인력에 대하여 빚을 다 갚은 실체의 배치이다. 어떤 원본의 실체도 그 에너지ㆍ지성ㆍ영, 또는 물질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0:6.12 (10.4) 전체의 모습과 반대로, 원본은 에너지 및 성격의 개별 모습을 드러낸다. 성격이나 신분 형태는 (물리적ㆍ영적, 또는 지성) 에너지로부터 생기는 원본이지만, 이러한 에너지에 본래부터 들어 있지는 않다. 원본이 나타나게 만드는 에너지나 성격의 질은 하나님―신―, 파라다이스 물력의 부여, 성격과 권능이 공존하는 탓으로 돌려도 좋다.
0:6.13 (10.5) 원본은 설계의 원판이며, 그로부터 복사판이 만들어진다. 영원한 파라다이스는 절대 원본이요, 영원한 아들은 원본 성격자요, 우주의 아버지는 이 둘의 직계 조상이자 근원이다. 그러나 파라다이스는 원본을 수여하지 않고, 아들은 성격을 수여할 수 없다.
0:7.1 (10.6) 총우주에서 신의 작용은 영원의 관계에서 두 가지로 관련된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영 하나님은 영원하고―실존적 존재이고―한편 최상위 하나님, 궁극위 하나님, 절대자 하나님은, 총우주가 진화로 확대되는, 시공의 구체와 시공을 초월한 구체(球體)들에서, 하보나 이후 시기에 현실화하는 신 성격자이다. 영원한 파라다이스 신들이 연합하여 창조 잠재성의 체험적 현실화 기법으로, 성장하는 우주에서 이 현실화하는 신 성격자들이 권능을 가지고 성격화할 때부터,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미래 영원자가 된다.
0:7.2 (10.7) 따라서 신의 계심은 두 가지이다:
0:7.3 (10.8) 1. 실존적―과거ㆍ현재ㆍ미래에 영원히 있는 존재.
0:7.4 (10.9) 2. 경험적―하보나 이후에 현재 현실화하지만 모든 미래 영원을 통해서 내내, 끝없이 있는 존재.
0:7.5 (10.10) 아버지ㆍ아들ㆍ영은 실존적이다―사실로 실존적이다. (하지만 모든 잠재성은 경험을 거친다고 생각된다.) 최상위와 궁극위는 전적으로 체험적 존재이다. 신 절대자의 현실화는 체험적이지만, 그의 잠재성은 실존적이다. 신의 요소는 영원하지만, 오직 처음 신 세 분이 조건 없이 영원하다. 모든 다른 신 성격자는 기원이 있지만, 그 운명이 영원하다.
0:7.6 (10.11) 실존적 신으로서 자신의 표현을 아들과 영 안에서 이루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이제까지 비성격이고 밝혀지지 않은 신 수준에서, 최상위 하나님, 궁극위 하나님, 절대자 하나님으로서, 이제 체험적 표현을 성취하고 계신다. 그러나 경험을 거치는 이 신들은 지금 온전히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현실화하는 과정에 있다.
0:7.7 (11.1) 하보나에 계신 최상위 하나님은 삼자일치 파라다이스 신의 영이 성격으로 반영된 것이다. 이 연합하는 신 관계는 이제 칠중 신 안에서 바깥으로 창조적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대우주에서 전능한 최상위의 체험적 권능으로 통합되고 있다. 따라서 세 분으로서 실존적인 파라다이스 신은 최상위의 두 단계에서 체험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한편 이 두 단계는 하나의 주, 최상 존재로서, 권능과 성격을 통일하고 있다.
0:7.8 (11.2) 우주의 아버지는 삼자일체화 기법, 곧 세 신으로 성격화함으로, 무한의 굴레와 영원의 사슬을 벗어나, 자유 의지로 해방을 성취하신다. 대우주의 시공 구역에서, 신의 일곱 가지 명시를 영원 이하의 성격자로 통일한 것으로서 최상위는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0:7.9 (11.3) 위엄자의 아버지인 것을 제쳐놓고, 최상 존재는 직접 창조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과 창조자 사이에 생기는 모든 우주 활동을 통합하는 조정자이다. 최상 존재는 이제 진화하는 여러 우주에서 현실화하고 있고, 시공의 최상 창조자들과 체험적 관계를 가지면서 삼자일치 파라다이스 신의 시공 신성을 상관시키고 통합하는 신이다. 마침내 현실화되었을 때, 이 진화하는 신은 유한자와 무한자의 영원한 융합―체험적 권능과 영 성격의 영원한 끊을 수 없는 연합―이 될 것이다.
0:7.10 (11.4) 진화하는 최상 존재의 지도하는 재촉을 받으면서, 모든 유한한 시공 실체는 유한한 실체의 모든 단계와 가치를 항상 더 동원하고 이를 완전히 통일하는 일에 (권능과 성격을 합성하는 데) 종사하고 있다. 이것은 파라다이스 실체의 다양한 단계와 관련하여, 인간을 초월하여 달성하는 초한[7] [1643] 수준까지 미치려는 노력을 나중에 개시할 의도와 목적을 위한 것이다.
0:8.1 (11.5) 지위의 유한성을 보충하고 인간의 개념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서, 우주의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진화하는 인간이 신에 이르는 일곱 가지 접근법을 마련하셨다:
0:8.9 (11.13) 시공에서, 그리고 일곱 초우주에 대하여 신이 이렇게 일곱 가지로 성격화한 것은 필사 인간으로 하여금, 영이신 하나님이 계신 앞에 이를 수 있게 한다. 언젠가 최상 존재 안에서 권능을 가지고 성격화하는 유한한 시공 인간에게 이 일곱 신은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생애를 가진 진화하는 필사 인간에게 기능적 신이다. 하나님을 깨닫는 생애, 체험으로 발견하는 생애는 지역 우주 창조 아들의 신성을 인식하는 것을 비롯하여, 초우주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을 통해서 올라가고, 일곱 으뜸 영 가운데 한 분의 몸을 거쳐서, 파라다이스에 계신 우주의 아버지의 신다운 성격을 찾아내고 인식하기에 이른다.
0:8.10 (12.1) 대우주는 최상 삼위일체, 칠중 신, 최상 존재에게 세 가지로 신의 영토이다. 최상위 하나님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안에서 잠재하며, 삼위일체로부터 그의 성격과 영적 속성을 끌어낸다. 그러나 그는 이제 창조 아들, 옛적부터 늘 계신 이, 으뜸 영들 안에서 현실화하고 있고, 이들로부터 시공의 여러 초우주에 대하여 전능자로서 권능을 얻어낸다. 진화하는 인간이 마주치는, 하나님의 이러한 힘의 명시(明示)는 실제로 인간과 함께 시공에서 진화된다. 비성격 활동의 가치 수준에서 진화하고 있는 전능 최상위와 최상위 하나님의 영적 몸은 하나의 실체이다―최상 존재이다.
0:8.11 (12.2) 칠중 신과 신으로서 관계된 창조 아들들은 필사자가 불사자가 되고 유한자가 무한자의 품에 이르게 하는 장치를 마련해준다. 최상 존재는 권능과 성격자를 동원하는 기법, 이 모든 다양한 거래를 신성하게 통합하는 기법을 마련해 준다. 이처럼 최상위는 유한자로 하여금 초한자에 이르게 하고, 앞날의 다른 가능한 현실화를 통하여, 궁극위에 이르는 것을 시도하게 만든다. 창조 아들 및 관련된 신성한 봉사자들은 이 최고의 사업에 참여하지만,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과 일곱 으뜸 영은 대우주에서 영구 행정가로서 아마도 영원히 고정되어 있을 것이다.
0:8.12 (12.3) 칠중 신의 기능은 일곱 초우주가 조직될 때부터 비롯하며, 그 기능은 바깥 공간의 우주들이 앞날에 진화하는 것과 관련하여 아마 확대될 것이다.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첫째ㆍ둘째ㆍ셋째ㆍ넷째 공간 수준에서 이 미래 우주들이 조직되면, 의심할 여지 없이, 신에 이르는 초월적 초한 접근법이 개시됨을 구경할 것이다.
0:9.1 (12.4) 둘러싼 대우주의 에너지 및 성격 잠재성의 재산, 선행(先行)하는 신(神)의 재산으로부터 최상 존재는 점진적으로 진화한다. 마찬가지로 궁극위 하나님은 총우주의 시공 초월 영토에 거하는, 신의 잠재성으로부터 궁극에 이른다. 궁극 신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첫째 체험적 삼자일체가 초한적으로 통일되었음을 가리키며, 창조적 자아 실현이 있는 둘째 수준에서, 통일하는 신이 확대됨을 뜻한다. 이것은 궁극에 시공을 초월한 가치에 이르는 수준에서, 파라다이스의 초한 실체들이 우주에서 체험적 신으로 현실화하는 것과 성격 및 권능 면에서 대등하다. 이러한 체험적 전개가 끝나는 것은 최상 존재가 현실화를 마침으로, 그리고 칠중 신이 베푸는 봉사로 초한 수준에 이른, 시공의 모든 인간에게 궁극에 봉사하는 운명을 주도록 고안되어 있다.
0:9.2 (12.5) 궁극위 하나님은 초한자의 신성 수준에서,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우주 분야에서 활동하는, 성격을 가진 신을 가리킨다. 궁극위는 최상을 초월하여 궁극에 신이 되는 것이다. 최상위는 유한한 존재들이 이해하는, 삼위일체의 통일이요, 궁극위는 초한 존재들이 이해하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통일이다.
0:9.3 (13.1) 진화하는 신의 작용을 통해서, 우주의 아버지는 유한자, 초한자, 아니 절대자의 신성한 실체 가치도, 각자의 우주 의미 수준에서 성격에 집중하고 권능을 동원하는, 엄청나고 놀라운 행위에 실제로 종사한다.
0:9.4 (13.2) 영원한 과거를 가진 처음 세 파라다이스 신―우주의 아버지, 영원한 아들, 무한한 영―은 영원한 미래에, 진화하는 동료 신들이―최상위 하나님, 궁극위 하나님, 그리고 아마도 절대자 하나님이―체험으로 현실화함으로, 성격자들로 보완될 것이다.
0:9.5 (13.3) 최상위 하나님과 궁극위 하나님은 현재 체험적 우주에서 진화하고 있으며, 실존적이 아니다―이들은 과거 영원자가 아니라, 오직 미래 영원자, 시간과 공간에 조건을 받고 초월성이 제한된 영원자이다. 최상, 궁극, 아마도 최상 궁극의 자질을 가진 신이지만, 그들은 우주에서 역사적 기원을 겪었다. 이들은 결코 끝이 없을 터이지만, 성격의 시초가 있다. 정말로 영원 무한한, 신 잠재성이 현실화하는 것이지만, 이들 자체는 조건 없이 영원하지도 무한하지도 않다.
0:10.1 (13.4) 신 절대자의 영원한 실체에는, 시공의 유한한 지성에게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특성이 있다. 그러나 절대자 하나님이 현실화하는 것은 둘째 체험적 삼자일체, 절대 삼자일체가 통일되는 결과일 것이다. 이것은 절대 신성의 경험적 실현, 즉 절대 수준에서 절대적 의미를 가진 것들의 통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제한 절대자가 무한자와 대등하다는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으니까, 모든 절대 가치의 범위에 관하여 확실하지 않다. 궁극을 초월하는 운명들은 절대 의미와 무한한 영적 위엄과 관계되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이 두 실체가 없이, 우리는 절대 가치를 확정할 수 없다.
0:10.2 (13.5) 절대자 하나님은 초한을 뛰어넘는 모든 존재가 실현하고 달성할 목표이다. 그러나 신 절대자의 권능과 성격 잠재성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며, 우리는 체험으로 현실화되는 것과 거리가 먼 그러한 실체들에 대하여 논하기를 꺼린다.
0:11.1 (13.6)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의 통합된 생각이 행위의 하나님 안에서 활동하면서 신성한 중앙 우주를 창조했을 때, 아버지는 그의 하보나 계심을 무한한 잠재성과 구별함으로, 아버지의 생각이 표현되는 대로 아들의 말씀과 합동 집행자의 행동을 따라가셨다. 드러나지 않은 이 무한의 잠재성은 무제한 절대자의 공간에 감춰져 있고, 신 절대자 안에 거룩하게 가려져 있다. 한편 이 둘은 우주 절대자가 활동할 때 하나가 되며, 이 우주 절대자는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밝혀지지 않은 무한성이 통일된 것이다.
0:11.2 (13.7) 체험적 성장으로, 그리고 우주 절대자가 체험적인 것과 실존적인 것을 서로 연결지음으로 총 실체가 강화되는 동안에, 우주 물력의 세력과 영 물력의 세력은 모두 점진적으로 계시되고 실현되는 과정에 있다. 균형을 이루는 우주 절대자의 계심 덕분으로 말미암아, 첫째 근원 중심은 체험적 권능을 연장하고, 그의 진화하는 인간과 일체가 됨을 누리며, 최상ㆍ궁극ㆍ절대 수준에서 경험적 신을 확대한다.
0:11.3 (14.1) 신 절대자를 무제한 절대자와 완전히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이들의 통합된 활동이나 나란한 계심으로 생각되는 것은 우주 절대자의 행동이라고 부른다.
0:11.4 (14.2) 1. 신 절대자는 전능한 시동자(始動者)인 듯하며, 한편 무제한 절대자는 최상으로 통일되고 궁극에 조화된 온 우주를, 아니 이미 지었거나, 짓는 중이거나, 아직 지을 허다한 우주들까지, 전적으로 유능하게 기계화하는 자로 보인다.
0:11.5 (14.3) 신 절대자는 어떤 우주 상황에 대해서도, 절대 이하의 방법으로 대처할 수 없거나, 적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어떤 주어진 상황에 대한 이 절대자의 모든 반응은 언제나 그 지금 존재 상태 뿐 아니라, 모든 미래 영원의 무한한 가능성에 비추어서, 모든 창조의 사물 및 존재들의 복지를 고려하여 이루어지는 듯하다.
0:11.6 (14.4) 신 절대자는 우주의 아버지가 자유 의지로 선택함으로 무한한 실체 전부로부터 분리된 그 잠재성이며, 그 안에서 신의 모든 활동―실존적ㆍ경험적 활동―이 일어난다. 이 잠재성은 무제한 절대자와 반대로 제한 절대자이다. 그러나 모든 절대적 잠재성을 포함하는 우주 절대자는 이 둘을 더한 것보다 크다.
0:11.7 (14.5) 2. 무제한 절대자는[8] [1644] 성격이 아니요, 신다운 것 바깥에 있고, 신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제한 절대자는 성격과 신성, 그리고 창조자의 모든 특권이 결여되어 있다. 사실이나 진실도, 체험이나 계시도, 철학이나 초한성도, 우주의 자격 제한을 받지 않는 이 절대자의 성질과 특성을 꿰뚫어볼 수 없다.
0:11.8 (14.6) 무제한 절대자는 대우주를 채우는 분명한 실체라는 것을 뚜렷이 밝혀두자. 이 실체는 일곱 초우주 바깥에 어지럽게 뻗어 있는 공간 지역에서, 공간에 한결같이 있으면서, 물력의 활동과 물질 이전의 진화가 생기는 쪽으로 확장하는 듯하다. 무제한 절대자는, 조건을 받지 않는 것과 제한 받지 않는 것들이 보편적이고 우세하고 우선한다는 형이상학적 억지 가정(假定)에 근거한 철학 개념을 단순히 부정한 생각이 아니다. 무제한 절대자는 무한하고 분명한 전반적 우주 통제력이다. 이러한 전반적 통제는 공간과 물력에 제한이 없지만, 생명ㆍ지성ㆍ영ㆍ성격의 계심에 따라 분명히 조절되고,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의지한 반응, 그리고 의도하는 명령에 따라서 더욱 조절된다.
0:11.9 (14.7) 무제한 절대자는 형이상학의 범신(汎神) 개념, 또는 과학에 언젠가 있었던 에테르설과 견줄 수 있는, 차별 없이 만물에 침투하는 영향력은 아니라 우리는 확신한다. 무제한 절대자는 한이 없는 물력, 신의 조절을 받는 물력이다. 그러나 이 절대자와 우주의 영 실체들의 관계를 우리는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다.
0:11.10 (14.8) 3. 우리가 논리적으로 추정하건대, 아버지의 절대적 자유 의지 행위로, 우주의 실체들을 신이 된 가치와 신이 되지 않은 가치로―성격화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구별하는 가운데 우주 절대자는 불가피하였다. 우주 절대자는 우주의 실체를 이처럼 구별하는 자유 의지 행위로 생긴 긴장이 해결됨을 가리키는, 신의 현상이며, 이 절대자는 이 실존적 잠재성의 총합을, 연합 방법으로 조정하는 자로서 활동한다.
0:11.11 (15.1) 우주 절대자가 긴장 상태에 계심은 신(神) 실체와 신이 되지 않은 실체의 차이가 조정됨을 뜻한다. 이러한 차이는 자유 의지를 가진 동태적 신성을, 제약 받지 않는 정태적 무한으로부터 분리할 때 본래부터 생긴다.
0:11.12 (15.2) 잠재 무한은 절대적이고 영원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늘 기억하여라. 시간 속에서 실제 무한은 결단코 부분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틀림없이 절대적이 아니다. 무제한 신의 경우를 제외하고, 실재하는 무한한 성격도 절대적일 수 없다. 무제한 절대자와 신 절대자에게 있는 무한한 잠재성의 차이가 바로 우주 절대자를 영원하게 하며, 이렇게 함으로 물질 우주들을 공간에 두는 것을 우주에서 가능하게 하고, 또한 시간 세계에 유한한 성격자들을 두는 것을 영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0:11.13 (15.3) 유한자가 무한자와 더불어 우주에서 공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주 절대자의 연합하는 계심이, 시간과 영원, 유한과 무한, 실체의 잠재성과 실체의 사실성, 파라다이스와 공간,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긴장을 아주 완전히 평준화하기 때문이다. 연합 방법으로, 우주 절대자는 무한 이하로 신이 나타나는 시공 우주와 시공 초월 우주에 존재하는, 진보하는 진화적 실체의 지대가 있다는 확인이 된다.
0:11.14 (15.4) 우주 절대자는 정적(靜的)이고 동적(動的)인 신의 잠재성이다. 이 잠재성은 시간 수준에서 유한하고 영원 수준에서 절대적인 가치로서, 그리고 경험적ㆍ실존적 접근법이 가능한 것으로서, 기능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신은 정적이고 잠재하고 연합하는 모습이 있을지 모르지만, 총우주에서 지금 활동하는 지적 성격자들이 관여하다시피, 체험으로 창조하거나 진화하지 않는다.
0:11.15 (15.5) 절대자. 두 절대자―제한된 절대자와 제한되지 않은 절대자―는 지성을 가진 인간이 지켜보는 바와 같이, 겉보기에 그 기능이 아주 다르지만, 우주 절대자 안에서, 또 그로 인하여 완전히 신성하게 하나가 된다. 모든 것을 고려하고, 끝까지 이해했을 때, 모두 셋이 하나의 절대자이다. 그들의 기능은 무한 이하 수준에서 차이가 있지만, 무한 속에서 하나이다.
0:11.16 (15.6) 무엇의 반대로서, 또는 어떤 것을 부인하는 것으로도, 우리는 절대자라는 용어를 결코 쓰지 않는다. 우리는 우주 절대자를 자율성이 있는, 일종의 범신적 비성격 신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우주 성격자에 관한 모든 면에서, 이 절대자를 삼위일체가 엄격히 제한하고 신이 지배한다.
0:12.1 (15.7) 최초의 영원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실존적이며 불가피했다. 결코 시작이 없는 이 삼위일체는 아버지의 구속받지 않은 의지로 성격인 것과 비성격인 것을 구별하는 사실에 본래부터 있었고, 그가 친히 의지함으로 이 두 가지 실체를 지성으로 조정할 때 사실이 되었다. 하보나가 생긴 뒤의 삼자일체들은 체험을 거친다―이들은 총우주에서 권능과 성격자가 나타나는 절대 이하의 두 가지 진화 수준이 창조됨으로 저절로 생긴다.
0:12.2 (15.8)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우주의 아버지, 영원한 아들, 무한한 영의 영원한 신 연합―은 사실로 실존적이지만, 모든 잠재성은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삼위일체는 무한을 포함하는 유일한 신 실체가 되며, 따라서 최상위 하나님, 궁극위 하나님, 절대자 하나님이 현실화하는 우주 현상이 일어난다.
0:12.3 (15.9) 제1 및 제2 체험적 삼자일체[9] [1645], 곧 하보나 이후에 생긴 삼자일체들은 파생된 신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무한할 수 없다. 이 신들은 실존적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창조하거나 궁극에 얻는 실체들이 체험으로 현실화함으로 진화된다. 인간의 체험이 유한하고 창조자의 체험이 초한하기 때문에, 무한한 신성은 커지지는 않더라도, 늘 강화된다.
0:12.4 (16.1) 여러 삼자일체는 신이 나란히 나타나는 관계의 진실이자 사실이다. 삼자일체의 기능은 신 실체들을 포함하며, 신 실체들은 언제나 성격화함으로 실현과 표현을 찾는다. 따라서 최상위 하나님, 궁극위 하나님, 그리고 절대자 하나님조차 신으로서 불가피한 것이다. 체험하는 이 세 신은 실존적 삼위일체, 곧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안에 잠재했으나, 이들이 권능을 가진 성격자로서 우주에서 솟아나는 것은, 일부는 권능과 성격자가 있는 우주에서 바로 그들이 체험으로 활동하는 데 달려 있고, 일부는 하보나 이후의 창조자들, 그리고 삼자일체들의 체험적 업적에 달려 있다.
0:12.5 (16.2) 하보나 이후의 두 삼자일체, 곧 체험적 궁극 삼자일체와 절대 삼자일체는 지금 충분히 뚜렷이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데, 이들이 우주에서 실현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이 여러 신 결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도 좋다:
0:12.6 (16.3) 1. 궁극 삼자일체는 지금 진화하고 있고, 궁극에는 최상 존재, 최상 창조 성격자들, 초한 총우주 건축가들로 구성될 것이다. 이 건축가들은 창조자도 지음받은 자도 아닌, 독특한 우주 설계자이다. 궁극위 하나님은 거의 한없는 총우주의 확대되는 영역에서, 이 체험적 궁극 삼자일체가 통일되는 결과, 신이 통일되는 결과로서 궁극에, 또 불가피하게, 권능을 얻고 성격화할 것이다.
0:12.7 (16.4) 2. 절대 삼자일체―둘째 체험적 삼자일체―는 지금 현실화하는 과정에 있고, 최상위 하나님, 궁극위 하나님, 그리고 밝혀지지 않은 우주 운명 종결자로 구성될 것이다. 이 삼자일체는 성격 수준과 성격 초월 수준에서, 아니 비성격의 경계에서도 활동하며, 삼자일체의 보편적 통일은 체험으로 절대 신을 만들 것이다.
0:12.8 (16.5) 궁극 삼자일체는 완성되었을 때 체험적 통일성이 있지만, 절대 삼자일체가 그렇게 완전히 통일될 수 있는가 우리는 참으로 의심이 든다. 그러나 우리의 영원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개념은, 달리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신의 삼자일체화가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을 늘 생각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최상위와 궁극위가 언젠가 출현하고 절대자 하나님이 아마도 삼자일체화로 현실화할 것이라고 가정해 본다.
0:12.9 (16.6) 여러 우주에 있는 철학자들은 가장 높은 삼자일체, 곧 실존적이고 체험하는 무한 삼자일체를 가정해 보지만, 이것이 성격화되는 일을 상상해 볼 수 없다. 아마도 스스로 계신 이 개념의 수준에서 우주의 아버지의 몸과 대등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과 상관 없이, 우주의 아버지가 실제로 무한하니까, 처음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잠재성은 무한하다.
0:12.11 (16.8) 완전한 중앙 우주와 그 둘레를 도는 일곱 초우주에 관하여 기술하려는 시도와 함께, 우주의 아버지의 특성 및 그의 파라다이스 동료들의 성품을 묘사하는 것과 상관되는 뒤따르는 발표문을 작성하면서 우리는 초우주 통치자들의 지침을 따라야 한다. 이 지침은 진리, 그리고 이와 나란히 필수 지식을 계시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면서, 발표되는 주제와 관련되는 바 사람의 가장 높은 기존 개념에 특혜를 주라고 지시한다. 제시되는 개념을 인간의 지성이 알맞게 표현한 선례가 없을 때에만 우리는 순전한 계시에 의존해도 좋다.
0:12.12 (17.1) 신성한 진리를 행성에 연달아 주는 계시는, 행성의 지식을 새로이 더 낫게 조정하는 방안의 일부로서, 영적 가치를 가진 가장 높은 기존 개념들을 반드시 포함한다. 따라서 하나님과 그 우주 동료들에 대한 이 발표문을 작성하면서, 우리는 이 여러 논문의 기초로서, 영적 가치와 우주 중요성이 있는, 가장 높고 가장 진보된 행성 지식을 대표하는 개념, 인간이 가진 개념을 1천 가지가 넘게 선택하였다. 지난날과 오늘날, 하나님을 아는 필사자들로부터 모은 이 인간적 개념들이, 우리가 드러내라고 지시 받은 대로 진리를 묘사하기에 적당하지 않을 경우에, 이 목적을 위하여, 파라다이스 신들의 실체와 신성(神性), 그리고 그들이 거하는 초월 우주에 대하여 바로 우리가 가진 상급 지식을 이용하여, 서슴지 않고 그러한 개념들을 보충하겠다.
0:12.13 (17.2) 우리의 과제가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는 충분히 헤아린다. 신성과 영원의 개념들을 담은 말을 필사 지성의 유한 개념을 담는 언어의 기호(記號)로 제대로 옮기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지성 속에 하나님의 분신이 계시고, 사람의 혼과 함께 진리의 영이 머무르는 것을 알고 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러한 여러 영적 세력이 물질 인간으로 하여금 영적 가치가 있는 실체를 움켜잡고, 우주적 의미가 있는 철학을 이해하도록 서로 돕는 것을 안다. 하지만 더욱 확실히, 개인의 종교적 체험―하나님 의식(意識)―의 늘 전진하는 현실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모든 진리를 영적으로 사용하도록, 이 신성한 계심의 영들이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0:12.14 (17.3) [오르본톤의 한 신성한 조언자가 작성하였다. 그는 파라다이스 신들과 온 우주에 관하여 진리를 유란시아에서 묘사하려고 배치된 초우주 성격자 집단의 우두머리이다.]
오르본톤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권한을 받아 활동하는 유버르사의 초우주 성격자 군단의 후원을 받았다
1:0.1 (21.1) 우주의 아버지는 온 우주의 하나님이요, 모든 사물과 존재의 첫째 근원 중심이다. 먼저 하나님을 창조자로, 다음에 통제자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무한한 지원자로 생각하여라. “하나님, 주는 홀로 계시며, 주 외에 아무도 없나이다. 주는 하늘을 짓고, 가장 높은 하늘과 거기에 있는 모든 무리를 지으셨나이다. 주는 저희를 보존하고 통제하나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우주들을 만드셨나이다. 창조자는 옷을 입듯 빛으로 스스로를 덮고, 하늘을 장막처럼 펼치나이다.” 어느 선지자가 이렇게 말했을 때, 우주의 아버지에 관한 진리의 빛이 인류에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오로지 우주의 아버지―여러 신 대신에, 유일한 하나님―개념이 필사 인간으로 하여금 아버지가 신성한 창조자요 무한한 통제자인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1:0.2 (21.2) 허다한 행성 체계들이 모두 궁극에, 많은 다른 종류의 지적(知的) 인간, 하나님을 알고 신의 사랑을 받으며 그에 응답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들이, 살도록 지어졌다. 온 우주는 하나님의 작품이요, 그의 다채로운 생물이 사는 곳이다. “하나님은 하늘을 만들고 땅을 빚으셨도다. 우주를 세우고 이 세상을 헛되이 창조하지 않았고, 사람이 살라고 세상을 지으셨도다.”
1:0.3 (21.3) 깨우친 모든 세계가 우주의 아버지, 모든 우주의 영원한 창조자, 무한한 지원자를 헤아리고 예배한다. 수많은 우주에, 의지(意志)를 가진 인간은 파라다이스로 기나긴 나그네 길을 떠났으니,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께 도달하려고 영원히 모험하는 황홀한 투쟁이다. 시간 세계 자녀들의 초월 목표는 영원한 하나님을 찾아내고, 신의 성품을 이해하고, 우주의 아버지를 헤아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인간은 최고의 포부를 오직 하나, 온 몸을 불태우는 열망을 꼭 하나 가졌으니, 즉 하나님의 성격이 파라다이스처럼, 그리고 최상으로 올바른 그의 우주 구체에서 완전한 것 같이, 그들이 사는 구체에서 그들의 처지에서 하나님을 닮는 것이다. 영원에 거하는 우주의 아버지로부터 최고의 명령이 떨어졌다, “내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사랑으로, 자비롭게 파라다이스의 사자(使者)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그리고 우주를 통해서 바깥으로, 아니 유란시아 인류처럼 비천한 동물 기원을 가진 인간에게도 이 신의 가르침을 전해 왔다.
1:0.4 (22.1) 신의 완전함을 달성하려고 애쓰라고 하는, 이 훌륭한 보편적 명령은 완전한 하나님이 지으신, 투쟁하는 모든 인간의 첫째가는 의무이며, 가장 높은 포부가 되어야 한다. 신의 완전함에 이르는 이 가능성은, 사람의 모든 영원한 영적 진보의 운명, 마지막이자 확실한 운명이다.
1:0.5 (22.2) 유란시아의 필사자는 무한한 의미에서, 도저히 완전하기를 바랄 수 없다. 그러나 이 행성에서 한 것처럼 시작하여, 무한한 하나님이 필사(必死) 인간을 위하여 예비한 숭고하고 신성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인간에게 전적으로 가능하다. 바로 하나님이 무한ㆍ영원한 구체에서 충만하신 것 같이, 필사자는 이 운명을 달성할 때, 자아의 실현과 지적(知的) 달성에 관계되는 모든 면에서, 신답게 완전한 자기 영역에서 똑같이 충만하게 된다. 그러한 완전은 물질적 의미로 보편적이거나, 한없는 지적 깨우침이거나 최종의 영적 체험은 아닐지 모르지만, 의지가 신답고, 인격자의 동기가 완전하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모든 유한한 면에서 최종이요 완벽하다.
1:0.6 (22.3) 이것이 “내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신이 내린 명령의 참 뜻이다. 이 말씀은 갈수록 높아지는 수준의 영적 가치와 참된 우주 의미를 달성하기 위한 그 길고도 황홀한 투쟁에서 필사 인간에게 전진하라고 늘 재촉하고, 안으로 손짓하여 부른다. 우주들을 만든 하나님을 이렇게 숭고하게 찾는 것은, 모든 시공의 거주민이 겪는 최상의 모험이다.
1:1.1 (22.4) 우주에 두루, 아버지 하나님은 온갖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중에서 하나님을 첫째 근원이요 우주 중심이라고 지칭하는 이름을 가장 많이 마주친다. 처음 아버지는 다른 우주에서, 또 같은 우주의 다른 지역에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인간이 창조자에게 붙이는 이름은, 그 인간의 창조자 개념에 많이 달려 있다. 첫째 근원 우주 중심은 스스로를 이름으로 나타낸 적이 없고, 오직 성품으로 나타냈다. 우리가 이 창조자의 자녀임을 믿는다면, 궁극에 우리가 그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바로 우리가 고르는 이름이요, 첫째 근원 중심과 우리의 개인적 관계를 인식함으로 생겨난다.
1:1.2 (22.5) 우주의 아버지는 우주에서 의지를 가진 총명한 인간에게, 어떤 형태로든지, 멋대로의 인식이나 형식적 예배나 노예 같은 수고를 결코 강요하지 않는다. 여러 시공 세계에서 진화하는 주민은 저절로―마음 속에서 우러나서―아버지를 알아보고 사랑하고 자원해서 예배해야 한다. 창조자는 물질 인간이 영적 자유 의지를 바치라고 강제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인간의 의지를 사랑에 넘쳐 바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선물이다. 사실, 인간이 그렇게 의지를 거룩히 바치는 것은 사람이 파라다이스 아버지께 드릴 수 있는 선물, 참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선물이다. 하나님 안에서, 사람은 살고 움직이고, 제 존재를 가진다. 아버지의 뜻을 따른다는 이 선택 외에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것이 하나도 없다. 우주에서 의지를 가진 총명한 인간이 내리는 그러한 결정은 사랑에 지배된 창조자인 아버지 성품에 아주 흐뭇한, 그 참된 예배의 실체가 된다.
1:1.3 (22.6) 일단 너희가 참으로 하나님을 의식하게 되고 나서, 너희가 위엄 있는 창조자를 정말로 발견하고 신다운 통제자의 깃드는 계심을 비로소 깨달은 뒤에, 그때 너희의 깨우침에 따라서, 그리고 신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그 절차와 방법에 따라서, 너희의 위대한 첫째 근원 중심 개념을 알맞게 표현하는 이름, 우주의 아버지의 이름을 찾아낼 것이다. 그래서 다른 세계와 다양한 우주에서, 창조자는 수많은 명칭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명칭은 관계를 나타내는 정신으로 보면 다 같은 뜻을 가졌지만, 각 이름의 단어와 상징은 어떤 주어진 영역에서 인간의 가슴 속에 그의 보좌가 어느 정도, 얼마나 깊이 자리잡았는가를 나타낸다.
1:1.4 (23.1) 온 우주의 중심 가까운 데서, 우주의 아버지는 대체로, 첫째 근원이라는 뜻으로 여겨도 좋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공간 우주에서 바깥으로 더 멀리 나가면, 우주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데 쓰이는 호칭은 우주 중심을 뜻하는 일이 더 흔하다. 너희 지역 우주의 본부 세계와 같이, 별들이 있는 창조에서 더욱 멀리 나가면, 우주의 아버지는 첫째 창조 근원이자 신성한 중심으로 알려져 있다. 근처의 한 별자리에서는 하나님을 우주들의 아버지라 부른다. 또 다른 별자리에서는 무한한 지지자로, 동쪽에서는 신성한 통제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빛의 아버지, 생명의 선물, 전능자라고도 부른다.
1:1.5 (23.2) 파라다이스 아들이 자신을 수여(授與)한 생애를 산 적이 있는 세계에서, 하나님은 대체로 개인적 관계, 부드러운 사랑, 아버지다운 헌신을 가리키는 어떤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너희 별자리 본부에서 하나님은 우주의 아버지로서 언급되고, 사람 사는 행성들로 구성된 너희 지역 체계의 다른 행성들에서 하나님은 여러 가지로, 가장 높은 아버지, 파라다이스 아버지, 하보나 아버지, 영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파라다이스 아들이 수여된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자는, 인간과 창조자의 친교를 나타내는, 마음에 닿는 관계의 감상적 매력에 결국은 손들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른다.
1:1.6 (23.3) 남녀로 구분되는 인간이 사는 행성, 그 총명한 존재들의 가슴 속에서 부모 감정의 욕구가 본래부터 있는 세계에서, 아버지라는 호칭은 영원한 하나님을 잘 나타내는 적절한 이름이 된다. 너희 행성 유란시아에서, 그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고, 가장 널리 인식된다. 그에게 붙인 이름 자체는 중요성이 거의 없다. 중요한 것은 너희가 그를 알고 그처럼 되고 싶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의 옛 선지자들은 참으로 그를 “영원한 하나님”이라 불렀고, “영원에 거하는 분”이라 언급하였다.
1:2.1 (23.4) 하나님은 영 세계에서 근본적 실체이다. 하나님은 지성 분야에서 진리의 근원이다. 하나님은 물질 영역에 두루, 만물을 능가한다. 지음받은 모든 지적 존재에게 하나님은 성격자요, 온 우주에게 하나님은 영원한 실체의 첫째 근원 중심이다. 하나님은 사람 같지도, 기계 같지도 않다. 처음 아버지는 우주의 영, 영원한 진리, 무한한 실체, 아버지 성격자이다.
1:2.2 (23.5) 영원한 하나님은 이상이 된 실체, 또는 인격화된 우주보다 무한히 크다. 하나님은 단지 사람이 품는 최고의 소망, 필사자가 추구하는 목표가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단지 하나의 개념, 권능을 가진 정의의 잠재성도 아니다. 우주의 하나님은 자연과 비슷한 말도 아니요, 자연 법칙이 성격화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초월 실체요, 단지 사람의 전통적 최고의 가치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적 의미를 심리적으로 집중한 것이 아니요, “사람이 만든 가장 고귀한 작품”도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이 중에 어떤 개념일지도 모르지만, 그보다 더 크다. 땅에서 영적 평안을 누리는 모든 사람에게, 죽고 나서 인격이 살아남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하나님은 구제하는 이요 사랑의 아버지이다.
1:2.3 (24.1) 신성한 존재의 깃드심이 하나님이 존재하는 사실을 인간의 체험 속에서 입증한다. 이 존재는 사람의 필사 지성 속에 살면서, 거기서 영원히 살아남는 불사(不死)의 혼이 생성되는 것을 도우라고, 파라다이스로부터 파송된 영 훈계자이다. 세 가지 경험적 현상이 이 신다운 조절자가 인간 지성 속에 계심을 드러낸다.
1:2.4 (24.2) 1. 하나님을 아는 지적 능력―하나님을 의식하는 것.
1:2.5 (24.3) 2. 하나님을 찾으려는 영적 욕구―하나님을 추구하는 것.
1:2.6 (24.4) 3. 하나님을 닮고 싶어 하는 인격자의 갈망―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바라는 것.
1:2.7 (24.5)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은, 과학적 실험이나 이치를 따지는 순수 논리로 결코 증명할 수 없다. 오로지 인간이 체험하는 영역에서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실체의 참된 개념은 논리적으로 합당하고, 철학적으로 있음직하고, 종교에 기본이며, 인격이 살아남는 희망을 조금이라도 가지는 데 필수이다.
1:2.8 (24.6) 하나님을 아는 자는 그가 계시는 사실을 체험한 적이 있다. 하나님을 아는 그러한 필사자는 자기 개인의 체험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증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내밀 수 있는 유일하게 확실한 증거를 지닌다.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 지성의 하나님 의식(意識), 그리고 하나님으로서 계시는 생각 조절자 사이의 접촉 외에, 도무지 보여줄 가능성이 없다. 생각 조절자는 필사자의 지능에 깃들고, 우주의 아버지가 거저 주는 선물로서 사람에게 수여된다.
1:2.9 (24.7) 이론적으로 너희는 하나님을 창조자라고 생각해도 좋으며, 하나님은 파라다이스와 완전한 중앙 우주를 친히 지으신 분이다. 그러나 시공(時空)의 우주들은 모두 파라다이스의 창조 아들 집단이 짓고 조직한 것이다. 우주의 아버지는 네바돈 지역 우주를 친히 지으신 분이 아니다. 너희가 살고 있는 우주는 그의 아들 미가엘이 지었다. 아버지는 진화 우주를 손수 짓지 않아도, 진화 우주의 여러 관계와 그 우주의 물질ㆍ지성ㆍ영 에너지의 어떤 표현을 통제한다. 아버지 하나님은 파라다이스 우주를 손수 지으신 분이요, 영원한 아들과 연합하여, 다른 우주들을 몸소 지은 창조자들의 창조자이다.
1:2.10 (24.8) 물질적인 온 우주에서 물리적 통제자로서, 첫째 근원 중심은 영원한 파라다이스 섬의 여러 원본 속에서 작용한다. 이 절대 인력의 중심을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은 중앙 우주에서, 그리고 온 우주에 두루, 물리적 수준에서 똑같이 전반적으로 우주를 통제한다. 지성으로서, 하나님은 무한한 영의 신 속에서 일한다. 영으로서 하나님은 영원한 아들의 몸에, 또 영원한 아들의 신성한 자식들의 몸에 나타난다. 이 첫째 근원 중심과 파라다이스에 계시는 동등한 성격자 및 절대자들의 상호 관계는 모든 창조에 두루, 그리고 창조의 모든 수준에 우주의 아버지가 직접 친히 활동하는 것을 조금도 막지 않는다. 그의 분신이 된 영의 계심을 통해서, 창조자 아버지는 인간 자녀들과, 그리고 그가 지은 우주들과. 직접 연락을 유지한다.
1:3.1 (25.1) “하나님은 영이라.” 하나님은 보편적 영적 계심이다. 우주의 아버지는 무한한 영적 실체이다. 그는 “지고(至高)하고 영원ㆍ불멸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자손”이기는 하지만, “그의 모습을 따라” 지어졌다―영원히 계신 그의 중앙 거처에서 파송된 신비의 훈계자가 너희에게 깃든다―는 말이 있다고 해서, 아버지의 형태나 모습이 너희와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피와 살이 있지 않더라도, 영 존재들은 실재한다.
1:3.2 (25.2) 옛날의 예언자가 말했다: “보라, 그가 내 옆을 지나가도, 나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며, 또한 그가 떠나도 나는 그를 깨닫지 못하노라.” 항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지켜보고 그의 장엄한 행위의 물질적 증거를 상당히 의식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의 신성(神性)이 눈에 띄게 명시되는 것을 보기 드물고, 사람 속에 깃드는, 그가 맡긴 영의 계심조차 구경할 수 없다.
1:3.3 (25.3) 물질적 장애나 제한된 영적 자질을 가진 비천한 인간을 떠나 숨어 지내기 때문에 우주의 아버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상황을 말하자면, “너희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어느 필사자도 나를 보고 나서 살 수 없음이라.” 어떤 물질 인간도, 영 하나님을 뵙고 나서, 필사 존재를 버틸 수 없다. 신다운 성격자의 계심이 얼마나 영화롭고 영적으로 눈부신지, 낮은 무리의 영 존재나 어떤 계급의 물질 성격자도 가까이 가기가 불가능하다. 아버지가 몸소 계신 데서 나오는 영적 빛은 “어떤 필사 인간도 가까이할 수 없는 빛, 어떤 물질 인간도 본 적이 없고, 볼 수도 없는 빛이라.” 그러나 영적으로 변화된 지성의 믿는 시력으로 하나님을 헤아리기 위해서, 육체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필요는 없다.
1:3.4 (25.4) 우주의 아버지의 영 성품은, 공존하는 자아, 곧 파라다이스의 영원한 아들과, 완전히 공유한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아들은 그들과 공동으로 동위 성격자인 무한한 영과 더불어, 보편적이고 영원한 영을 충분히, 아낌없이 공유한다. 하나님의 영은, 그 자체로서 저절로 절대적이다. 아들 안에 계신 그 영은 제한이 없고, 영 안에서 보편적이요, 이들 모두 안에서, 그리고 모두로 인하여, 무한하다.
1:3.5 (25.5) 하나님은 보편적 영이요, 하나님은 보편적 성격자이다. 유한한 우주에서 최고의 성격 실체는 영이며, 성격자의 우주에서 궁극의 실체는 초한(超限) 영이다. 오로지 무한 수준이 절대적이고, 오로지 무한 수준에서 최종으로 물질ㆍ지성ㆍ영이 하나가 된다.
1:3.6 (25.6) 여러 우주에서 아버지 하나님은 잠재적으로 물질ㆍ지성ㆍ영을 두루 통제하는 분이다. 오로지 그의 멀리 미치는 성격 회로의 수단으로, 하나님은 의지를 가진 인간이 사는 광대한 우주에서 성격자들을 직접 상대한다. 그러나 (파라다이스 바깥에서) 오로지 그의 분신이 된 개체의 계심 속에서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들은 바깥 우주에서 하나님의 뜻이다. 시간 세계에서 필사자의 지성 안에 깃들고, 거기서 살아남는 인간의 불멸하는 혼의 진화를 보살피는 이 파라다이스 영은 우주의 아버지의 성품과 신성(神性)으로부터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진화 인간의 지성은 지역 우주에서 비롯하고, 영적으로 달성하는 체험적 변화를 겪음으로 신다운 완전함을 얻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를 선택함으로 반드시 생기는 결과이다.
1:3.7 (26.1) 사람의 정신적 체험에서, 지성(知性)은 물질에 붙어 있다. 이렇게 물질과 연결된 지성은 사람이 죽은 뒤에 살아남을 수 없다. 살아남는 기법은 인간 의지의 어떤 조정과 필사자의 지성 속에서 생기는 어떤 변화에 포함되어 있으며,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을 의식하는 지능이 차츰차츰 영의 가르침을 받고, 궁극에 영의 인도를 받는다. 물질과 연결된 상태로부터 영과 결합하기까지 사람의 지성이 이렇게 진화하는 것은, 필사 지성의 잠재적 영 단계를 불멸하는 혼의 상물질(上物質) 실체로 변화시킨다. 물질에 굴종하는 필사자의 지성은 갈수록 더 물질적이 되며, 그 결과로 궁극에 인격이 소멸될 운명을 가진다. 영에게 굴복한 지성은 갈수록 더 영적으로 변화되고, 살아남아서 안내하는 신다운 영과 궁극에 하나가 되고 이 방법으로 인격 존재가 살아남고 영원을 얻을 운명을 가진다.
1:3.8 (26.2) 나는 영원자로부터 나왔고, 우주의 아버지가 계신 앞에 거듭하여 돌아갔다. 나는 첫째 근원 중심, 영원한 우주의 아버지가 사실이고 성격인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위대한 하나님이 절대적이고 영원ㆍ무한한 한편, 하나님은 또한 선하고 신성하고 인자함을 알고 있다. “하나님은 영이라,”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위대한 선언이 진실임을 나는 알고 있고, 이 두 속성은 우주에게, 영원한 아들 안에서 아주 완벽하게 드러난다.
1:4.1 (26.3) 하나님은 무한히 완전해서 하나님을 영원히 신비로 만든다. 깊이를 잴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것은 필사자의 지성 속에 신이 깃드는 현상이다. 우주의 아버지가 시간 세계의 인간과 함께 머무르는 그 방식은 모든 우주 신비 가운데 가장 깊은 것이다. 사람의 지성 속에 신이 계시는 것은 신비 중의 신비이다.
1:4.2 (26.4) 필사자의 육체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군주인 창조 아들이 사람 사는 세계의 인간에게 가까이 와서,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데도,” 의식(意識)의 “문 앞에 서서,” “두드리며,” “마음 문을 열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들어가기를 기뻐하고, 창조 아들과 필사 인간 사이에 이 깊은 개인적 교통이 있지만, 그런데도, 필사 인간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무엇인가를 받는데, 이것은 인간 안에 실제로 거하며, 사람의 몸은 그 성전이다.
1:4.3 (26.5) 너는 여기 아래에서 인생이 끝나고, 땅에서 임시 모습을 입고 너의 과정을 다 마치고, 육체를 입은 연습 여행이 끝나고, 필사자의 천막을 구성하는 티끌이 “온 곳으로 되돌아갈 때,” 계시된 바와 같이, 그때 깃드는 “영은 그 영을 주신 하나님한테로 돌아갈지니라.” 이 행성에서 태어난 도덕적 인간 각자 안에, 하나님의 분신이, 신의 한 부분이자 소포(小包)가, 머무른다. 소유권으로 따지면, 아직 네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분신은 네가 필사 존재를 거치고 살아남으면 너와 하나가 되라고 일부러 의도한 것이다.
1:4.4 (26.6)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이 신비에 부딪친다. 그의 무한한 선(善), 끝없는 자비, 비할 데 없는 지혜, 숭고한 성품이 담긴, 끝없는 진실의 모습 전체가 더욱 펼쳐지는 것을 보고 우리는 어쩔 줄 모른다.
1:4.5 (26.7) 신의 신비는 유한자와 무한자, 일시적인 자와 영원한 자, 시공의 인간과 우주 창조자, 물질인 자와 영적인 자, 사람의 불완전과 파라다이스 신의 완전 사이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차이에 있다. 어떤 인간에게도, 신이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성질을 영적으로 깨닫는 인간의 능력이 한껏 미치는 데까지, 모두를 사랑하는 하나님은 어김없이 스스로를 나타낸다.
1:4.6 (27.1) 온 우주의 어느 구체, 어느 세계에 사는 어떤 영 존재나 어떤 필사 인간에게도, 우주의 아버지는 그러한 영 존재와 그러한 필사자가 헤아리고 이해할 수 있는, 인자하고 신성한 자아의 전부를 드러낸다. 영적이든 물질이든, 하나님은 성격자를 차별하는 분이 아니다. 우주의 어떤 아이가 어떤 주어진 순간에 신의 계심을 누리더라도, 그 계심은 오직 그러한 인간이 물질을 초월하는 세계가 영적 사실임을 받아들이고 헤아리는 능력에 따라서만 한정된다.
1:4.7 (27.2) 인간의 영적 체험에 있는 실체로서, 하나님은 신비가 아니다. 영 세계의 실체들을 물질 계급의 물질적 지성에게 쉽게 설명하려고 시도할 때 신비가 생긴다. 신비가 아주 미묘하고 깊어서, 오직 하나님을 아는 필사자의 믿음의 힘으로, 유한자가 무한자를 인식하는 기적(奇蹟), 시공의 물질 세계에서 진화하는 필사자가 영원한 하나님을 헤아리는 철학적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1:5.1 (27.3) 하나님이 위대한 것, 무한한 것만 보고 그의 성격을 희미하게 보거나 간과하지 말라. “귀를 만들려고 계획한 분이, 못 들으실까? 눈을 만든 분이, 못 보실까?” 우주의 아버지는 가장 높은 신다운 성격자이다. 그는 모든 창조 전역에 걸쳐, 성격의 기원이요 운명이다. 하나님은 무한하고 성격을 가졌으며, 무한한 성격자이다. 그의 몸이 무한하여 유한한 물질 존재들이 언제까지나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데도, 아버지는 참으로 성격자이다.
1:5.2 (27.4) 하나님은 인간의 머리가 이해하는 것과 같은 성격자보다 훨씬 크다. 어떤 가능한 초월 성격자 개념보다도 훨씬 더 크다. 그러나 물질 인간의 지성과 함께 그러한 이해할 수 없는 신다운 성격자 개념을 이야기하는 것은 도무지 헛일이니, 이는 존재의 현실에 대한 사람의 가능한 최고 개념이, 성격 개념 및 이상(理想)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물질 인간의 가능한 최고의 우주 창조자 개념은, 신다운 성격자개념, 이 높은 개념의 영적 이상에 담겨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성격자 개념보다 훨씬 높은 것이 틀림없음을 너희가 알지도 모르지만, 우주의 아버지는 영원ㆍ무한하며,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성격자보다 못한 어떤 것도 도저히 될 수 없다는 것을 너희는 똑같이 잘 안다.
1:5.3 (27.5) 하나님은 어떤 인간도 피하여 숨어 계시지 않는다. 수많은 계급의 존재들이 그를 가까이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물질 인간도 가까이 할 수 없는 빛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진화하는 필사자의 완전해지지 않은 지성은 신성한 성격자의 엄청나고 장엄함을 깨달을 수 없다. 하나님은 “손바닥으로 바다를 재고, 손뼘으로 우주를 재시나이다. 그는 지구의 둥근 천장[1] [1646] 위에 앉으시고, 하늘을 커튼처럼 늘이고 거할 우주로서 하늘을 펼치는 분이로다.” “하늘 높이 네 눈을 들라. 누가 이 모두를 지었고, 누가 저희의 세계를 번호로 드러내며, 저희 모두를 이름으로 부르는가 볼지어다.” 그래서 “지음받은 사물은 하나님의 불가시(不可視)한 것들을 부분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참말이다. 오늘날, 너희 처지 그대로, 하나님의 다양하고 다채로운 창조를 통해서, 그리고 그의 여러 아들 및 그 수많은 하위 존재들의 계시와 봉사를 통해서, 너희는 볼 수 없는 조물주를 깨달아야 한다.
1:5.4 (28.1) 물질인 필사자는 비록 하나님의 몸을 볼 수 없더라도, 그가 성격자인 것을 확신을 가지고 기뻐해야 하며, 우주의 아버지가 세상을 너무 사랑해서 그 비천한 거민에게 영원한 영적 진보의 길을 마련하였고, “그의 자녀들을 매우 기뻐하신다”는 진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완전하고 영원하며, 사랑이 깊고 무한한 창조자 성격을 구성하는 속성, 인간을 초월하는 신다운 속성 중에 하나도, 하나님은 모자라지 않는다.
1:5.5 (28.2) (초우주 직원을 제외하고) 사람이 사는 세계의 아버지이자 지역 우주의 군주인 파라다이스 창조 아들들은 별도로 하고, 여러 지역 우주에서 하나님은 몸소, 즉 거주함으로 나타나는 적이 없다. 인간의 믿음이 완전하다면, 창조 아들을 보았을 때 그가 우주의 아버지를 보았음을 확실히 알 것이다. 아버지를 찾으면서, 아들 외에 다른 이를 보려고 요구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필사 인간은 단지 그가 완전히 영으로 변화되고 실제로 파라다이스에 다다를 때까지 하나님을 볼 수 없을 따름이다.
1:5.6 (28.3) 파라다이스 창조 아들들의 성품은 위대한 첫째 근원 중심의 무한한 성품이 가진, 보편적으로 절대적 무제한 잠재성을 다 포함하지 않지만, 우주의 아버지는 모든 면에서 창조 아들들 안에 신성하게 계신다. 아버지와 그의 아들들은 하나이다. 미가엘 계급의 이 파라다이스 아들들은 완전한 성격자요, 밝은 아침별을 비롯하여 진보하는 동물의 진화를 거치는 가장 비천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역 우주 성격자의 원본이 되기도 한다.
1:5.7 (28.4) 하나님이 안 계시고 그의 큰 중심 성격이 없다면, 광대한 온 우주 전역에 걸쳐서 성격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성격자이다.
1:5.8 (28.5) 하나님이 영원한 힘이요, 위엄 있는 계심, 초월적 이상(理想), 영화로운 영인데도, 이 모든 것이요, 모두를 무한히 넘는데도, 그는 참으로 영원히, 창조자인 완전한 성격자이다. 곧 하나님은 “이해할 수 있고 또한 다른 자가 그를 이해할 수 있으며,” “사랑할 수 있고 사랑을 받을 수 있으며,” 우리에게 친구가 될 수 있는 분이다. 한편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친구인 것을 우리가 아는 것처럼, 너희도 친구인 것을 남들이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참 영이요 영적 실체이다.
1:5.9 (28.6) 우주의 아버지가 그의 우주에 두루 드러나는 것을 볼 때, 그가 무수한 인간 안에 깃드심을 우리가 헤아릴 때, 그의 군주 아들들의 몸 안에 하나님이 계심을 바라볼 때, 여기저기, 가까이, 멀리, 그의 신성한 계심을 우리가 계속 느낄 때, 하나님이 첫째 성격자임을 의심하거나 의문을 가지지 말자. 이렇게 널리 온통 분산되었는데도, 하나님은 참 성격자로 남아 있고, 온 우주에 두루 흩어진 수없이 많은 인간 무리와 언제까지나 친히 연락을 유지한다.
1:5.10 (28.7) 우주의 아버지가 성격자라는 관념은 확대된 좀더 참다운 하나님 개념이며, 주로 계시를 통해서 인류에게 전해 내려왔다. 논리, 지혜, 종교적 체험은 모두 하나님이 성격자임을 가리키고 암시하지만, 이를 전적으로 정당화하지 못한다. 안에 깃드는 생각 조절자조차 선(先)인격이다. 어느 종교라도 그 진실성과 성숙도는 하나님의 무한한 성격에 대한 그 종교의 개념, 그리고 신이 절대로 하나임을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높아진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라는 개념을 종교가 처음으로 형성한 뒤에, 성격자인 신 개념은 종교가 얼마나 성숙했는가를 재는 자가 된다.
1:5.11 (29.1) 원시 종교는 인격을 가진 신이 많이 있었고, 이 신들은 사람의 모습을 따라 만들어졌다. 계시(啓示)는 하나님이 성격자라는 개념이 타당함을 확인한다. 이 개념은 오직 첫째 근원이 있다고 과학적으로 가정해야 가능하며, 우주의 하나라는 철학 관념 속에 임시로 암시되었을 뿐이다. 오로지 성격자로서 접근함으로 누구나 하나님이 하나임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첫째 근원 중심이 성격자임을 부인하는 것은, 사람에게 유물론(唯物論)과 범신론, 이 두 가지 철학적 궁지 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한다.
1:5.12 (29.2) 신을 깊이 생각할 때, 성격자 개념은 형체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벗어나야 한다. 물질인 몸은, 사람이나 하나님의 성격에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형태가 있다는 잘못은 인간 철학의 두 극단에서 나타난다. 유물론에서는 사람이 죽을 때 몸을 잃어버리니까 사람이 성격자로서 존재하기를 그친다. 범신론에서 하나님은 육체가 없으니까, 따라서 성격자가 아니다. 초인간 종류의 진보하는 성격자는 지성과 영이 연합된 가운데 활동한다.
1:5.13 (29.3) 성격은 단순히 하나님의 한 속성이 아니다. 성격은 조정된 무한한 성품과 통일된 신의 뜻 전부를 대표하며, 이의 완전한 표현은 영원 속에, 그리고 보편적으로 드러난다. 최상의 의미에서, 성격은 하나님이 온 우주에게 주는 계시이다.
1:5.14 (29.4) 하나님이 영원ㆍ무한하고 보편ㆍ절대적이니까, 하나님의 지식은 자라거나 지혜가 늘지 않는다. 하나님은 유한한 인간이 추측하거나 이해하는 것처럼 경험을 얻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영원한 성격 테두리 안에서, 하나님은 자아 실현을 계속 확대하며, 이것은 어떤 면에서, 진화 세계에서 유한한 인간이 새로운 경험을 겪는 것과 견줄 만하고 그와 비슷하다.
1:5.15 (29.5) 넓은 우주에 신의 도움을 받아 하늘에 영적으로 완전한 세계들로 올라가기를 추구하는, 모든 불완전한 혼이 겪는 인격 투쟁에 우주의 아버지가 직접 참여하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무한한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성은 그로 하여금 조건 없는 최종의 완전에 끔찍한 제약을 받게 만들 것이다. 온 우주에 두루, 어떤 영 존재와 어떤 필사 인간이 겪는 이 진보하는 체험도, 끊임없는 자아 실현 수준, 결코 그치지 않는 신의 영역에서, 아버지의 늘 확대되는 신 의식(意識)의 일부가 된다.
1:5.16 (29.6) 이것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너희가 어떤 고통을 받아도 그가 고통을 받으며,” “너희가 어떤 승리를 얻어도, 그도 너희 안에서 너희와 함께 승리를 거두느니라.” 하나님의 선(先)인격인 신성한 영은 너의 실제 일부이다. 파라다이스 섬은 온 우주에서 생기는 모든 물리적 변화에 반응한다. 영원한 아들은 모든 창조의 영적 충동을 담고, 합동 행위자는 팽창하는 우주의 모든 지성 표현을 포함한다. 우주의 아버지는 진화하는 시공 우주 전체에서 모든 개체ㆍ존재ㆍ성격자의 확대되는 지성과 하늘 가는 영들의 진보하는 투쟁에서, 모든 개인적 경험을 신으로서 충만히 의식함을 깨닫는다. “우리 모두가 그 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우리의 존재를 가지기” 때문에 이 모두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1:6.1 (29.7) 인간의 성격은, 신성한 창조 성격자가 시간과 공간에 던지는 모습의 그림자이다. 어떠한 사실이라도 그 그림자를 검사해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참 알맹이에 따라서 그림자를 풀이해야 한다.
1:6.2 (30.1) 하나님은 과학에 대하여 원인이요, 철학에 대하여 개념이요, 종교에 대하여 성격자요, 아니 사랑의 하늘 아버지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과학자에게 시초의 물력이요, 철학자에게 통일의 가정(假定)이요, 종교가에게 살아 있는 영적 체험이다. 우주의 아버지의 성격에 대한 사람의 부적당한 개념은 오직 우주에서 사람이 영적으로 전진해야 개선될 수 있고, 오로지 시공의 순례자가 파라다이스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신성한 품에 마침내 이를 때에야 참으로 적절하게 될 것이다.
1:6.3 (30.2) 하나님과 사람이 파악하는 정반대의 성격자 관점들을 결코 간과하지 말라. 인간은 유한한 자리에서 무한한 것을 바라보면서 성격자를 보고 이해하며, 하나님은 무한한 자리에서 유한을 바라본다. 사람은 가장 낮은 종류의 성격을 소유하고, 하나님은 가장 높은 성격, 아니 최상ㆍ궁극ㆍ절대 성격을 소유한다. 그러므로 신다운 성격에 대한 상급 개념은, 인격에 대한 개선된 관념이, 특히 창조 아들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자신을 수여한 생애에서 인간답고 신다운 성격이 더욱 잘 드러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했다.
1:6.4 (30.3) 필사자의 지성에 깃드는 신의 선(先)인격 영은, 바로 그 계심 속에 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타당한 증명을 지니고 있지만, 신 성격자 개념은 오직 개인의 진정한 종교적 체험으로 얻는 영적 통찰력으로만 겨우 파악할 수 있다. 인간이든 신이든, 어떤 성격자라도, 그의 대외 반응이나 물질적 계심과 아주 별도로, 다른 자가 그를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다.
1:6.5 (30.4) 어느 정도 비슷한 도덕과 영적 조화는 두 사람의 친구 관계에 필수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인격자는 사랑이 없는 자에게 도저히 스스로를 드러낼 수 없다. 신다운 성격자를 알려고 접근하는 것조차 사람의 모든 인격 재산을 그 노력에 온통 거룩하게 바쳐야 한다. 마음 내키지 않는 부분적 헌신은 소용이 없을 것이다.
1:6.6 (30.5) 사람이 철저히 자신을 이해하고 동료들의 인격 가치를 헤아리게 될수록 사람은 더욱 최초의 성격자를 몹시 알고 싶어 하며, 하나님을 이해하는 그러한 인간은 갈수록 더 진지하게 최초의 성격자처럼 되려고 애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에 대한 견해를 논의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 가지는 체험, 하나님 안에 있는 체험은, 인간의 모든 논쟁과 단순한 지적 논리를 뛰어넘고, 지적 논리로 헤아릴 수 없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불신자에게 확신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를 교화시키고 서로 만족을 얻으려고 자기의 영적 체험을 묘사한다.
1:6.7 (30.6)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 우주가 이해 가능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곧 지성이 우주를 만들고 성격자가 우주를 관리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사람의 지성은 오로지, 인간이든 초인간이든, 다른 지성의 지성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의 인격이 우주를 체험할 수 있다면, 그 우주에 어딘가, 신의 지성과 실제 성격자가 감추어져 있다.
1:6.8 (30.7) 하나님은 영이요, 영 성격자이다. 사람도 영이다―잠재 영 성격자이다. 나사렛 예수는 인간의 체험 속에서, 이 영 성격자의 잠재성을 충분히 실현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그의 일생은, 사람에게 하나님 성격을 가장 생생하게 이상적으로 계시한 것이 된다. 우주의 아버지의 성격은 오로지 실제로 종교적 체험을 겪어야 이해할 수 있어도, 예수가 땅에서 사는 동안 참으로 인간다운 체험을 하면서, 그가 하나님의 성격을 그렇게 실현하고 계시하는 완전한 시범을 보인 것에 우리는 감화를 받는다.
1:7.1 (31.1) 예수가 “살아 계신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했을 때, 그는 성격을 가진 신―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언급했다. 신이 성격자라는 개념은 친교를 수월하게 만들고 총명하게 예배하는 것을 쉽게 만들며, 신선한 신뢰를 촉진한다. 성격이 아닌 사물 사이에 상호 작용은 있을 수 있어도 친교는 있을 수 없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처럼, 둘이 성격자가 아니면 친교할 수 없다. 오로지 성격자들이 서로 사귈 수 있다. 하지만 생각 조절자와 같이 바로 그런 비성격 개체의 계심으로 인하여, 이 개인적 교통이 대단히 용이하게 될 수도 있다.
1:7.2 (31.2) 물 한 방울이 대양(大洋)과 하나가 되는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을 성취할 수는 없다. 점진적이고 서로 주고받는 영적 교통으로, 개인적으로 대하는 하나님과 성격 교류를 가짐으로, 신의 뜻에 마음을 다하고 총명하게 순응함을 통하여 갈수록 더 신다운 성품을 얻음으로써, 사람은 신과 연합된다. 그러한 숭고한 관계는 오직 성격자들 사이에 존재할 수 있다.
1:7.3 (31.3) 진리의 개념은 아마도 성격과 따로 생각해 볼 수도 있고, 아름다움의 개념은 성격 없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이 선하다는 개념은 오직 성격자와 가지는 관계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오로지 성격자만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아름다움과 진실이 성격을 가진 하나님, 곧 사랑을 주는 아버지의 속성이 아니라면, 이것들조차 살아남는 희망이 없어질 수 있다.
1:7.4 (31.4) 하나님이 근원적이고 변함없고 전능하고 완전하면서, 어떻게 동시에 늘 변하며, 겉보기에 법에 제한되는 듯한 우주, 비교적 불완전한 진화 우주에 둘러싸일 수 있는지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우리의 개인적 체험 속에서 그러한 진실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바로 우리와 우리의 환경이 항상 변하는데도, 우리 모두가 인격 신분과 통일된 의지(意志)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1:7.5 (31.5) 궁극의 우주 실체는, 수학이나 논리나 철학이 아니라, 오로지 개인적으로 대하는 하나님의 신성한 뜻에 점진적으로 순응하는 것을 몸소 체험해야 이해할 수 있다. 과학이나 철학이나 신학(神學)도 하나님이 성격자임을 입증할 수 없다. 오로지 하늘 아버지의 믿음의 아들들이 몸소 겪는 체험이, 하나님의 성격을 실제로 영적으로 깨닫게 만들 수 있다.
1:7.6 (31.6) 우주 성격자에 관한 상급 개념은 신분, 자의식, 자아 의지를, 그리고 자기 계시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 여러 특징은 더 나아가서, 파라다이스 신들의 성격 관계에 존재하는 것과 같이, 다른 대등한 성격자들과 친교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합이 너무 완전히 절대로 통일되어, 신성(神性)은 불가분성(不可分性), 하나됨으로 알려지게 된다. “주 하나님은 하나이라.” 성격의 불가분성은, 필사 인간의 마음 속에서 살라고 하나님이 그의 영을 수여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인간 아버지의 인격이 불가분한 것은 필사의 아들딸을 낳는 것을 막지 않는다.
1:7.7 (31.7) 통일 개념과 관련하여 이 불가분성 개념은 궁극위 신이 시간과 공간 모두를 초월함을 뜻한다. 따라서 공간도 시간도 절대적이거나 무한할 수 없다. 첫째 근원 중심은 모든 지성ㆍ물질ㆍ영을 무조건 초월하는 그 무한이다.
1:7.8 (31.8)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계신 사실은 신이 하나가 되어 있다는 진리를 어떠한 방법으로도 어기지 않는다. 모든 우주 실체에 대한 반응에서, 그리고 인간과 가지는 모든 관계에서, 파라다이스 신의 세 성격자는 하나와 같다. 이 영원한 세 성격자의 존재는 신이 불가분하다는 진리를 어기지도 않는다. 이 우주 문제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필사자의 머리가 알아듣도록 분명히 설명하기에 적절한 용어를 전혀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십분 알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낙심해서는 안 된다. 이것들 전부가, 내 집단의 파라다이스 존재에 속하는 높은 성격자들에게도 온통 뚜렷하지는 않다. 너희가 파라다이스까지 필사자로서 오랫동안 승천하는 연속된 여러 시대에, 너희의 생각이 점진적으로 영답게 변화됨에 따라서, 신과 관계된 이 깊은 진리가 갈수록 뚜렷해질 것을 늘 기억하여라.
1:7.9 (32.1) [한 신성한 조언자가 발표하였다. 그는 이번에 발표하는 이 계시 중에서, 네바돈 지역 우주의 경계 바깥에서 생기는 사무와 상관되는 부분을 감독하기 위해서, 제7 초우주 본부 유버르사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로부터 배치받은 하늘 성격자 집단의 일원이다. 나는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그리는 여러 글을 후원하라고 위임받았는데, 이는 사람이 사는 어떤 세계에서도 내가 그러한 목적에 소용되는 정보의 가장 고급 근원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나는 모두 일곱 초우주에서 신성한 조언자로서 봉사해 왔고, 만물의 파라다이스 중심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우주의 아버지가 친히 계신 바로 그 앞에서 머무르는 최고의 기쁨을 여러 번 누려 보았다. 어느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나는 아버지의 성품 및 속성의 실체와 진실을 묘사한다. 무엇에 관해 말하는지 나는 사정을 알고 있다.]
2:0.1 (33.1) 사람이 가진 가능한 최고의 하나님 개념이, 최초의 무한한 성격자에 대한 인간의 개념과 이상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신의 신분을 구성하는 신다운 성품의 어떤 특징을 연구해도 좋고, 이것은 유익할지도 모른다. 네바돈의 미가엘이 준 다양한 가르침에서, 그리고 육신을 입은 그의 훌륭한 필사 생애에서 펼쳐진 바와 같이, 아버지를 계시한 것을 보고서, 하나님의 성품을 최선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이로 보고, 파라다이스 창조자를 참된 영적 아버지로 우러러본다면, 사람은 또한 신의 성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2:0.2 (33.2) 하나님의 성품은 최상의 개념이 계시된 데서 연구할 수 있고, 신의 신분은 숭고한 이상(理想)을 묘사한 것으로서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신의 성품의 온갖 계시 가운데 가장 많이 우리를 깨우치고 영적으로 교화시키는 것은, 자기가 신이라는 것을 충분히 의식하기 전과 후에 나사렛 예수가 보인 종교 생활을 이해하는 데서 발견해야 한다. 육신화된 미가엘의 일생을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계시의 배경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신의 성품에 관계된 어떤 개념과 이상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려고 애써도 좋고, 이러한 개념과 이상은 우주의 아버지 성격의 성질 및 신분에 관한 인간의 개념을 더욱 조명하고 통일하는 데 아마도 기여할지 모른다.
2:0.3 (33.3) 인간이 가진 하나님 개념을 확대하고 영적으로 높이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은 필사 지성의 제한된 능력에 엄청나게 지장을 받는다. 사람의 유한한 필사 지성에게 신의 가치를 표현하고 영적 의미를 제시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언어의 한계로 인하여, 실례(實例)를 들거나 비교할 목적으로 쓸 수 있는 자료가 빈곤하여, 과제를 수행하는 데 심각한 지장을 받고 있다. 우주의 아버지가 수여한 조절자가 필사 지성 속에 깃들고, 창조 아들의 진리의 영이 그 지성에 스며든다는 사실이 아니라면, 인간의 하나님 개념을 키우려는 우리의 온갖 노력은 거의 무익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개념의 확대를 돕기 위하여 인간의 마음 속에 신성한 이 영이 계신 것을 믿고서, 하나님의 성품을 인간의 지성에게 더 묘사해 보라는 명령을 나는 즐겁게 실행한다.
2:1.1 (33.4) “우리는 무한자를 만지면서 그를 알아보지 못하며, 신의 발자국은 알려지지 않았도다.” “그는 무한히 이해하고 그의 위대함은 헤아릴 수 없도다.” 아버지의 계심에서 나오는 빛이 눈부시게 밝아서, 비천한 인간에게는 아버지가 “짙은 어둠 속에서 사시는” 것과 같다. 그의 생각과 계획은 헤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는 수없이 크고 놀라운 일을 하시도다.” “하나님은 크시며, 우리는 그를 깨닫지 못하고, 그의 연세도 알아낼 수 없도다.” “하나님이 땅 위에 거하겠느냐? 보라, 하늘과 가장 높은 하늘이 (우주와 가장 높은 우주가) 그를 담을 수 없도다.” “그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려운가, 그의 길은 찾아낼 수 없구나!”
2:1.2 (34.1)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무한한 아버지가 계시고, 그는 또한 충실한 창조자이라.” “신성한 창조자는 또한 우주 처분자, 혼의 근원이요 운명이라. 그는 최상의 혼, 시초의 지성, 모든 창조의 무제한 영이라.” “위대한 통제자는 실수가 없으며, 위엄과 영광 속에 찬란히 빛나도다.” “창조자 하나님은 두려움과 적의(敵意)가 도무지 없느니라. 그는 불멸하고 영원하며, 스스로 존재하고, 신성하고 풍성하시니라.” “만물의 지고한 조상은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다운가, 얼마나 깊고 측량할 수 없는가.” “무한자는 스스로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니, 아주 뛰어나시도다.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요, 선하고 완전한 모든 목적을 가진 아버지라.” “하나님에게 모든 일이 가능하고 영원한 창조자는 가장 높은 원인이라.”
2:1.3 (34.2) 아버지의 영원한 보편적 성격이 엄청나게, 무한히 명시되는데도, 아버지는 그의 영원ㆍ무한함을 무조건 스스로 의식한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그의 완전함과 권능을 충분히 아신다. 신성한 동위자들을 제쳐놓고, 하나님은 우주에서 완전히, 적절히, 완벽하게 자아를 평가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2:1.4 (34.3) 총우주의 다양한 구역에서, 바로 아버지에 대한 다른 요구가 때때로 변함에 따라서, 아버지는 그러한 필요를 늘 어김없이 채운다. 위대한 하나님은 스스로를 알고 이해하며, 그의 모든 완전한 시원적 속성을 무한히 자의식한다. 하나님은 우주에서 어쩌다가 생긴 이가 아니며, 또한 우주를 실험하는 이도 아니다. 우주 군주는 모험에 들어갈 수 있고, 별자리 아버지는 실험할 수도 있고, 체계의 우두머리는 연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주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끝을 보며, 그의 신성한 계획과 영원한 목적은 광대한 영토의 어떤 우주에, 어떤 세계ㆍ체계ㆍ별자리에 있는 어떤 하위 존재가 겪는 어떤 실험과 어떤 모험도, 실제로 알아차리고 이해한다.
2:1.5 (34.4) 하나님에게는 아무 일도 새롭지 않고, 어떤 우주의 사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이 영원의 궤도에서 사시기 때문이다. 그는 시작하는 날도 끝날도 없이 계신다. 하나님에게는 지난날도 오늘도 앞날도 없다. 어느 시간도 어느 주어진 순간에만 존재한다. 하나님은 위대하고 유일한 스스로 계신 이이다.
2:1.6 (34.5) 우주의 아버지의 모든 속성은 절대로, 아무 조건 없이 무한하다. 이 사실은, 그 자체로서 저절로, 유한한 물질 존재와 기타 낮게 창조된 지적 존재들과 직접 친히 교통할 수 없게, 자동으로 자신을 차단한다.
2:1.7 (34.6)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의 다양한 생물과 접촉하고 교통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주선을 필요로 한다. 첫째로, 이 주선은 하나님의 파라다이스 아들들이 지은 성격자들 속에 예정되었고, 그들의 신성(神性)은 완전하지만, 때때로 행성 민족들의 바로 그 피와 살의 본질을 취하고, 너희 사이에 하나가 되고 또한 너희와 하나가 된다. 그래서 말하자면, 미가엘의 수여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하나님이 사람이 되며, 미가엘은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기도 하고 사람의 아들로 부르기도 한다. 둘째로, 무한한 영의 성격자들, 곧 다양한 계급의 천사 무리와 기타 하늘의 지적 존재들이 있으며, 이들은 낮은 기원을 가진 물질 존재들에게 가까이 가서, 많은 방법으로 그들에게 시중들고 봉사한다. 그리고 셋째로, 비인격(非人格)인 신비의 훈계자, 곧 생각 조절자가 있으며, 이들은 아무 공고도 설명도 없이, 유란시아의 인간과 같은 자들에게 깃들기 위하여 위대한 하나님 자신이 실제로 보낸 선물이다. 끝없이 풍부하게 그들은 영화로운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와서, 하나님을 의식할 능력이 있거나 그러한 잠재성이 있는 필사자의 겸손한 지성을 꾸미고 거기에 깃든다.
2:1.8 (35.1) 이런 방식과 기타 여러 방법으로,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유한자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을 통해서, 자녀인 인간의 유한한 지성에게 더 가까이 가도록 파라다이스 아버지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내려오거나, 또는 그의 무한성을 수정하고, 묽게 하고, 희박하게 만든다. 그래서 절대성이 줄어들면서 일련의 성격 분산을 통하여, 무한한 아버지는, 방대한 우주의 여러 영역에 있는 다양한 지적 존재들과 가까운 접촉을 가질 수 있게 된다.
2:1.9 (35.2) 그가 무한 영원하고 첫째라는 사실과 현실을 조금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지금까지 해왔고, 지금도 하며,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계속할 것이다. 이것이 알아듣기 어렵기는 해도, 신비 속에 가려 있어도, 또는 유란시아에 사는 부류와 같은 인간들이 충분히 이해하기 불가능해도, 이러한 일은 절대로 참말이다.
2:1.10 (35.3) 처음 아버지의 계획이 무한하고 그의 목적이 영원하기 때문에, 어떤 유한 존재도 이러한 신의 계획과 목적을 언제라도 충분히 파악하거나 이해하기가 본래부터 불가능하다. 우주에서 진보하는 연속된 단계에서 인간의 승천 계획이 진행되는 것과 관련하여 아버지의 여러 목적이 드러남에 따라서 필사 인간은 그 목적을 이따금, 여기저기에 얼핏 볼 수 있다. 사람은 무한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지만, 무한한 아버지는 온 우주에 있는 모든 자녀의 유한함을 아주 확실히, 충분히 이해하고 사랑으로 감싼다.
2:1.11 (35.4) 아버지는 신성(神性)과 영원을 많은 상급 파라다이스 존재와 함께 가지지만, 동위에 있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동료들을 제외하고, 무한, 그리고 그에 따라 우주에서 첫째인 신분을, 아버지가 누구와도 함께 가지는지 우리는 의문을 품는다. 성격의 무한성은, 어쩔 수 없이, 모든 유한 성격을 포함한다. 따라서 “아버지 안에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며, 우리의 존재를 가지니라” 선언하는 가르침은 진리요, 글자 그대로 진리이다. 필사 인간에게 깃드는, 우주의 아버지의 순전한 분신, 신의 그 분신은 위대한 첫째 근원 중심, 곧 가장 높은 아버지 무한성의 일부이다.
2:2.1 (35.5) 너희의 옛 선지자들조차 우주의 아버지의 성품, 영원하고, 시작과 끝이 없이 순환하는 성품을 알아차렸다. 하나님은 글자 그대로, 영원히 온 우주에 계신다. 모든 절대적 위엄과 영원한 위대함을 가지고, 아버지는 현재의 순간에 거하신다. “아버지는 몸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시니, 이 생명은 영생이라.” 영원한 세월 전체를 통해서, “모든 생명에게 주시는” 분은 아버지였다. 신의 모습 전체에 무한한 완전성이 있다. “나는 주요, 변하지 않노라.” 온 우주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그가 빛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행성 사이의 사무 집행에 “변동이 없고 변화의 그림자도 없음”을 드러낸다. 그는 “처음부터 끝을 선언하시니라.” 아버지가 말씀하신다, “나의 권고는 유효하며,” “내 아들 안에서 내가 뜻한 모든 영원한 목적에 따라서,” “내가 기뻐하는 모든 일을 실행하리라.” 그러므로 첫째 근원 중심의 계획과 목적은 그 자신처럼 영원하고 완전하며, 언제까지나 변함이 없다.
2:2.2 (35.6) 아버지가 내리는 명령은 궁극에 완벽하고 완전히 충만하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영원하리라, 거기에 아무것도 더할 수도 덜할 수도 없느니라.” 우주의 아버지는 지혜롭고 완전한 최초의 목적을 뉘우치지 않는다. 그의 계획은 견고하고, 그의 권고는 바뀔 수 없으며, 그의 행동은 신답고, 잘못이 있을 수 없다. “그의 눈에는 천년이, 지나버린 어제 같고 밤 중에 망보기와[1] [1647] 같으니라.” 신이 얼마나 완전하고 영원이 얼마나 긴 것인가 필사 인간의 한정된 머리는 언제까지라도 도저히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
2:2.3 (36.1) 그의 영원한 목적을 수행하면서, 변함없는 하나님의 반응은 그가 지은 지적 존재들의 태도가 바뀌고 마음이 변함에 따라서 달라지는 듯 보일지 모른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반응이, 겉보기에, 겉으로 바뀔지 모르지만, 그 표면 밑에, 바깥으로 나타나는 모든 표현 밑에, 영원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목적, 영구한 계획이 여전히 있다.
2:2.4 (36.2) 바깥에 여러 우주에서, 완전은 반드시 상대적 용어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중앙 우주, 그리고 특히 파라다이스에서, 완전은 묽어지지 않고, 어떤 단계에서 절대적이기도 하다. 삼위일체가 나타나는 모습은 신의 완전함을 다르게 펼쳐 보이지만, 묽게 만들지 않는다.
2:2.5 (36.3) 하나님이 시초부터 완전한 것은 그가 올바르다는 가정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다운 성품이 본래부터 완전히 선함에 있다. 그는 마지막이요, 완벽하고 완전하다. 그의 올바른 기질에는 아름다움과 완전함이 전혀 모자라지 않는다. 공간 세계의 살아 있는 존재들에 대한 계획 전체가, 파라다이스에서 아버지의 완전함을 함께 체험하는 높은 운명으로, 의지를 가진 모든 인간을 높이 올리는 신성한 목적에 중점을 둔다. 하나님은 자기 중심이지도 않고, 독립되어 있지도 않다. 그는 광대한 온 우주에서 자의식을 가진 인간 모두에게, 결코 그치지 않고 스스로를 주신다.
2:2.6 (36.4) 하나님은 영원히, 무한히 완전하며, 자신의 체험으로 불완전을 몸소 겪을 수 없지만, 모든 파라다이스 창조 아들이 짓는 진화 우주에서 투쟁하는 어떤 인간이 겪는 어떤 불완전한 체험도, 하나님은 함께 의식한다. 완전한 하나님의 개인적이고 해방하는 손길은, 도덕적으로 분별하는 우주 수준까지 올라간 모든 필사 인간의 마음을 보호하고 그들의 성품을 둘러싼다. 이 방법으로, 또 신성한 계심의 접촉을 통해서, 우주의 아버지는 우주 전체에서 모든 도덕적 존재의 진화 생애에서, 미숙하고 불완전한 특징을 가진 체험에 실제로 참여한다.
2:2.7 (36.5) 인간의 한계, 악(惡)의 잠재성은 신의 성품의 일부가 아니다. 그러나 필사자가 겪는 악의 체험, 그리고 사람과 악의 관계는 모두, 시간 세계의 자녀들 ―파라다이스를 떠나는 모든 창조 아들이 창조하거나 진화시킨 인간, 도덕적 책임을 가진 인간―속에서 아주 확실히, 늘 확대되는 하나님의 자아 실현의 일부이다.
2:3.1 (36.6) 하나님은 올바르며, 따라서 공평하다. “주는 모든 일에 올바르시니라.” “‘내가 행한 어떤 일도 까닭 없이 하지 않았노라’ 주가 말씀하시니라.” “주의 판단은 진실하고 아주 올바르시니라.” 우주의 아버지의 응보는 인간의 행동과 실적에 영향을 받을 수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께 불의가 없으며, 그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선물을 받지 않음이라.”
2:3.2 (36.7) 그러한 하나님께, 그의 변함없는 법령을 고치라고, 그래서 그의 현명한 자연 법칙, 그리고 올바른 영적 명령의 작용으로 생기는 마땅한 결과를 우리가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철없이 호소하다니,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가! “속지 말라. 하나님을 조롱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무엇을 뿌리든지 사람이 또한 이를 거둘 것임이라.” 잘못의 결과를 거두는 응보의 경우에도, 이 신의 응보는 언제나 자비로 인하여 무디어진다. 무한한 지혜는 어떤 주어진 경우에 내릴 응보와 자비의 비율을 영원히 중재한다. 하나님의 정부에 대항하는 잘못과 계획하여 반항한 것에 대한 가장 큰 벌은 (실제로는 피할 수 없는 결과인데) 그 정부에서 개별 백성의 존재를 잃는 것이다. 마음을 다하여 죄를 지은 마지막 결과는 소멸이다. 결국, 죄의 편을 드는 그런 사람들은 불의를 품어서 온통 비현실적이 됨으로 스스로를 파괴해 왔다. 그러나 그 우주에서 통용되는 예정된 사법(司法) 질서가 충분히 이행될 때까지, 그러한 인간이 사실로 실종되는 일은 언제나 늦춰진다.
2:3.3 (37.1) 존재의 정지(停止)는 보통 그 영역, 또는 여러 영역에서 섭리 시대나 새 시대의 판결이 있을 때 공포된다. 유란시아와 같은 세계에서, 이 판결은 행성의 한 섭리 시대 끝에 온다. 행성 회의로부터 창조 아들의 법정을 거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재판소에 이르기까지, 사법권을 가진 모든 법정이 나란히 행동함에 따라서, 존재의 정지가 그런 때에 공포될 수 있다. 사멸(死滅)하라는 명령은, 죄인이 거주하는 구체에서 시작되는 고발을 연달아 확인하고 나서, 초우주 고등 법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나서, 상부에서 소멸 선고가 확인될 때, 초우주 본부에서 거주하고 거기에서 활동하는 판사들의 직접 행위에 따라서, 그 집행이 일어난다.
2:3.4 (37.2) 이 선고가 마지막으로 확인될 때, 죄의 편을 들었던 자는, 순간에 마치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된다. 그러한 운명으로부터는 부활이 없고, 그 운명은 영구하고 영원하다. 신분의 산 에너지 요소들은 시간이 흘러 변하고 공간에서 변형되어 그 요소들이 언젠가 출현했던 그 우주 잠재성으로 돌아가서 분해된다. 불의한 자의 인격에 관해서 말하자면, 영생(永生)을 보장했을 뻔했던 선택과 최종 결정을 그 인간이 내리지 못함으로, 계속하는 생명이 타고 다닐 몸을 잃어버린다. 붙어 있던 지성이 줄곧 죄를 품어 마침내 완전히 불의와 한편이 될 때, 생명이 정지되고 나서, 우주에서 해체되고 나서, 따로 떨어진 그러한 인격은 창조하는 대혼(大魂)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최상 존재의 진화하는 체험의 일부가 된다. 그 부분은 결코 다시 인격자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 신분은 마치 태어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된다. 조절자가 깃들었던 인격자의 경우에, 그 경험적 영의 가치는 계속하는 조절자의 실체 속에서 살아남는다.
2:3.5 (37.3) 실체의 여러 사실 수준 사이에서 어떤 우주 경쟁이 생기더라도, 높은 수준의 성격자는 궁극에 낮은 수준의 성격자를 이긴다. 우주의 투쟁에서 피할 수 없는 이 결과는, 질 높은 신(神)이, 의지를 가진 어떤 인간이 아무리 현실이거나 사실이라도, 그에 필적한다는 사실에서 본래부터 생긴다. 순전한 악, 철저한 잘못, 고의(故意)로 짓는 죄, 수그러지지 않는 불의는 본래부터, 자동으로 자살이다. 비현실적인 그러한 태도가 우주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올바르게 판결하는 우주 법정의 장치, 응보를 결정하고 공평을 찾는 장치가 작용할 때까지, 일시 자비와 관용을 베풀기 때문이다.
2:3.6 (37.4) 지역 우주에서 창조 아들의 통치는, 사람을 창조하고 영답게 변화시키는 통치이다. 이 아들들은 점진적으로 필사자가 올라가는 파라다이스 계획을 효과적으로 집행하고, 반역자 및 그릇되게 생각하는 자들을 회복시키는 데 전념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의 노력이 모두 마침내, 영원히 거부될 때,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사법권 밑에서 활동하는 세력이 소멸하라는 최종 선포를 집행한다.
2:4.1 (38.1) 자비는 다만, 유한한 인간의 자연스런 약점과 환경의 장애를 완전히 숙지(熟知)하고 충분히 인식하여 생겨나는 바로 그 지혜로 응보가 가볍게 된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동정심이 가득하고 품위가 있으며, 오래 참고 자비가 풍성하시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를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받으리니,” “그가 넘치게 용서하실 것임이라.” “주의 자비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니라.” 그렇다, “그의 자비는 언제까지나 이어지도다.” “나는 땅에서 자애와 심판과 옳은 일을 행하는 주라, 내가 이것들을 기뻐하는 까닭이라.” “나는 사람의 자손을 일부러 괴롭히거나 가슴 아프게 하지 않으니,” “내가 자비의 아버지요, 모든 위로를 주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2:4.2 (38.2) 하나님은 본래 친절하고 자연히 동정심이 많고, 언제까지나 자비롭다. 결코 그의 자애심을 불러일으키려고 하나님한테 어떤 영향을 미칠 필요가 없다. 인간의 필요는 아버지의 부드러운 자비와 그의 유익한 은혜가 가득 흘러내릴 것을 보장하기에 온통 충분하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에 관하여 모든 것을 아시니까, 하나님은 쉽게 용서하신다. 사람이 이웃을 이해하면 할수록, 이웃을 용서하는 것, 아니 사랑하는 것까지도 더욱 쉬워진다.
2:4.3 (38.3) 오로지 무한히 지혜로운 분별력으로, 올바른 하나님은 동시에, 그리고 어떤 주어진 우주 환경에서도, 응보와 자비를 베풀 수 있다. 하늘의 아버지는 결코 우주에 있는 자녀들에 대하여 모순되는 태도를 가져서 마음의 갈등을 겪지 않는다. 하나님은 결코 상반되는 태도로 고통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시니 그의 영원한 성품의 모든 신다운 속성과 무한한 성질이 요구하는 것을 완전히, 동시에, 똑같이 만족시키는 우주 행위를 택하라고 그의 자유 의지를 틀림없이 인도한다.
2:4.4 (38.4) 자비는 선과 사랑에서 자연히, 불가피하게 생기는 산물이다. 사랑의 아버지는 좋은 성품 때문에 우주에 있는 자녀들 가운데 어느 집단의 어떤 구성원에게나, 지혜롭게 자비 베푸는 것을 도저히 아까워할 수 없다. 영원한 응보와 신의 자비를 합친 것은 인간의 체험에서 공평이라 부를 것이다.
2:4.5 (38.5) 신의 자비는 우주에서 완전과 불완전 수준 사이에 공평하게 조정하는 방법을 나타낸다. 자비는 진화하는 유한자의 형편에 최상위의 응보가 적응된 것이요, 시간 세계 자녀들의 가장 고귀한 관심과 우주 복지를 만족시키려고 영원의 정의가 수정된 것이다. 자비는 응보를 어기는 것이 아니라, 진화 우주에서 하위 영적 존재와 물질 인간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다시피, 오히려 최상의 응보를 내릴 요구를 이해심을 가지고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비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시공 창조의 다양한 지적 존재들에게 지혜롭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리는 응보이며, 이러한 응보는 우주의 아버지, 그리고 그와 관계된 창조자들 모두의 신다운 지혜가 고안하고, 만사를 아는 그들의 지성과 통치하는 자유 의지로 결정된다.
2:5.1 (38.6) “하나님은 사랑이라.” 따라서 우주 사무에 대하여 하나님이 유일하게 친히 가지는 태도는, 언제나 신의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의 생명을 우리에게 줄 만큼 우리를 넉넉히 사랑하신다. “그는 악한 자와 선한 자에게 태양이 비치게 하고, 올바른 자와 그릇된 자에게 비를 보내시니라.”
2:5.2 (39.1) 아들들이 희생되거나 하위 생물이 중재한다고 해서 너희가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도록 설득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되니, 이는 “바로 아버지가 너희를 사랑하는 까닭이라.” 이 아버지 사랑에 반응하여 하나님은 놀라운 조절자를 인간의 지성에 깃들라고 보낸다.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적이며,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와도 좋으니라.” 그는 “진리의 지식을 얻게 됨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하고자 하시니,” 그는 “누구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시니라.”
2:5.3 (39.2) 창조자들은 신의 법칙을 어리석게 어겨서 생기는 재난의 결과로부터 사람을 구하려고 제일 먼저 애쓴다. 하나님의 사랑의 성질은 아버지다운 애정이다. 그러므로 가끔 그는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를 꾸짖어서, 우리가 그의 거룩함을 함께 가질 수 있게 하시니라.” 너희의 불같은 시련 속에서도, “우리가 어떤 고통을 받아도 그도 같이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2:5.4 (39.3) 하나님은 죄인에게 신답게 친절하다. 반역자들이 옳은 길로 돌아설 때, 이들을 자비롭게 받아들이며, “우리의 하나님이 풍성하게 용서하시기 때문이라.” “나는 자신을 위하여 너희의 범죄를 지워버리는 자니, 너희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다니, 아버지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보라.”
2:5.5 (39.4) 결국, 하나님이 선하다는 가장 큰 증거요 하나님을 사랑할 최고의 이유는 우리에게 깃드는 아버지의 선물―조절자―이며, 그는 둘이 영원히 하나가 되는 그 시각을 아주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네가 찾는다고 해도 하나님을 찾아낼 수는 없지만, 깃드는 영이 이끄는 대로 따르면, 파라다이스에 우주의 아버지의 성격이 계신 앞에 네가 마침내 설 때까지, 한 걸음 한 걸음, 한 생명 한 생명, 우주를 거치고 또 우주를 거쳐서, 한 시대 한 시대, 너는 어김없이 안내를 받는다.
2:5.6 (39.5) 인간 본성의 한계와 물질 창조의 장애물이 네가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만든다고 해서 네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너와 하나님 사이에는 건너야 할 끔찍한 거리가 (물리적 공간이) 있다. 마찬가지로, 큰 영적 차이가 있어 다리를 놓아야 한다. 그러나 너와 파라다이스에 하나님이 몸소 계신 앞을 물리적ㆍ영적으로 떼어놓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멈추어 하나님이 네 안에 산다는 이 엄숙한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은 그분 나름대로 그 사이에 이미 다리를 놓았다. 네가 영원한 우주 생애를 추구하는 동안, 네 안에 살고 너와 함께 고생하라고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의 영을 보냈다.
2:5.7 (39.6) 그토록 위대하고, 동시에 비천한 인간을 향상시키는 봉사에 그렇게 사랑으로 헌신하는 분을 예배하는 것이 나는 쉽고도 즐겁다. 그렇게 창조력과 통제력이 막강하고, 그래도 완전히 선하고, 그토록 충실히 우리를 항상 보호하는 자애심을 보이는 분을 나는 자연히 사랑하게 된다. 그렇게 위대하고 막강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선하고 자비롭기만 하다면, 나는 아마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리라 생각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속성을 인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성품 때문에 우리 모두가 아버지를 더욱 사랑한다.
2:5.8 (39.7) 공간 우주의 진화에 본래 있는 다양한 시간 세계의 어려움을 이기려고 아주 용감히 투쟁하는 창조 아들과 그 하위 행정가들을 관찰할 때, 우주의 이 작은 통치자들에게 내가 크고 깊은 애정을 가졌음을 나는 발견한다. 결국, 그 영역의 필사자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우주의 아버지와 신이든 인간이든 모든 다른 존재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성격자들이 참으로 우리를 사랑함을 깨닫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체험은, 대체로, 사랑받는 체험에 대한 직접 반응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함을 알고 있으니, 비록 하나님이 최상ㆍ궁극ㆍ절대성과 같은 이 모든 속성을 벗어버린다 하더라도, 나는 계속 그를 지극히 사랑할 것이다.
2:5.9 (40.1) 현재, 그리고 영원한 시대의 끝없는 영역에 두루,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를 따라온다. 너희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성품을 깊이 생각할 때, 그 사랑에 대하여 인격자의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반응은 하나 밖에 없다: 너희는 갈수록 더 조물주를 사랑하게 될 터이고, 어린아이가 땅에서 부모에게 주는 것과 비슷한 사랑을 하나님께 바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아버지, 참된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아이들을 사랑하며, 마찬가지로 우주의 아버지는 그가 창조한 아들딸을 사랑하고, 언제까지나 그들의 복지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2:5.10 (40.2)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총명하고 멀리 내다보는, 부모의 사랑이다. 우주의 아버지의 완전한 성품이 지닌 신다운 지혜와 모든 다른 무한한 특징과 조화되어, 신의 사랑이 작용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지만, 사랑이 하나님은 아니다. 생각 조절자의 수여에서 신이 필사 존재를 사랑하는 가장 큰 표현을 지켜볼 수 있지만, 너희가 받는 아버지 사랑을 가장 크게 계시한 것은 미가엘 아들이 땅에서 이상(理想)처럼 영적 일생을 살았던 수여 생명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사랑을 각 인간 혼에게 개인적으로 주는 분은 안에 깃드는 조절자이다.
2:5.11 (40.3) 사랑이라는 낱말, 인간적 상징을 이용하여, 하늘 아버지가 우주의 자녀에게 품는 신의 애정을 묘사하라고 강요받으니 나는 이따금 거의 비명(悲鳴)이 나올 지경이다. 이 용어는 존경하고 헌신하는 필사자의 관계를 나타내는, 사람의 가장 높은 개념을 뜻하지만, 온통 저열하고 전혀 부적당한 허다한 인간 관계를 표시하는 일이 아주 빈번하기 때문에, 어떤 표현을 빌리더라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주의 인간에게 품는 비할 수 없는 애정을 가리키는 데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은 부당하다!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신다운 애정의 참된 성질과 지극히 아름다운 의미를 인간의 머리에 전할 낱말, 더할 나위 없고 꼭 맞는 몇 가지 낱말을 내가 쓸 수 없으니 얼마나 유감인가!
2:5.12 (40.4) 개인적으로 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이 깨닫지 못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선한 나라가 될 뿐이다. 신의 성질이 무한히 통일되어 있기는 해도, 사랑은 하나님이 인간과 친히 가지는 모든 교류에 지배적 특징이다.
2:6.1 (40.5) 우리는 물리적 우주에서 신의 아름다움을 볼 수도 있고, 지적 세계에서 영원한 진리를 헤아릴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은 개인이 종교적 체험을 가지는 영적 세계에서 발견된다. 종교의 참 본질은 하나님이 선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철학에서 하나님은 위대하고 절대적일 수 있고, 아니 어떻게든 총명하고 개인적으로 대할 수 있지만, 종교에 있는 하나님은 또한 도덕성이 있고 선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이 크다고 두려워할지 모르지만, 선한 하나님이라야 믿고 사랑한다. 하나님의 이 선하심은 하나님 성격의 일부이고, 이 선의 충만한 계시는 오로지 믿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몸소 겪는 종교적 체험에서 나타난다.
2:6.2 (40.6) 종교는 영적 성질을 가진 초월 세계가 인간 세계의 근본적 필요를 인식하고 그에 민감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진화된 종교는 윤리가 있게 될지 모르지만, 오직 계시된 종교가 참으로, 영적으로 도덕성이 있게 된다. 하나님이 임금다운 도덕을 지키는 신이라는 오래 된 개념을, 예수는 부모 자식 관계에서 생기는 친밀한 가족 도덕의 수준, 대단히 감동적인 수준까지 올려놓았으며, 필사자의 체험에서 이보다 더 부드럽고 아름다운 관계는 없다.
2:6.3 (41.1) “하나님이 넘치게 선한 것은 잘못하는 사람을 뉘우치게 하느니라.” “모든 좋은 재능, 모든 완전한 재능은 빛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느니라.” “하나님은 선하며, 그는 사람의 혼이 영원히 쉴 안식처로다.” “주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니라. 오래 참고 넘치게 선하고 진실하도다.” “주의 선함을 맛보고 눈으로 볼지어다! 그를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동정심이 가득하도다. 그는 구원의 하나님이로다.” “마음이 상한 자를 치료하고, 혼의 상처를 고치시도다. 그는 사람에게 전능한 후원자이로다.”
2:6.4 (41.2) 하나님을 왕이자 재판관으로 보는 개념은 높은 도덕 기준을 육성하고 한 집단으로서 법을 존중하는 민족을 만들었지만, 이 개념은 시간 세계와 영원 속에서 그가 어떤 지위를 가졌는가에 대하여 개별 신자를 딱한 불안한 처지에 버려두었다. 후기의 히브리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선포했고, 예수는 하나님이 각 사람의 아버지라는 것을 드러냈다. 예수의 일생은 필사자의 하나님 개념 전체를 초월적으로 비춰주었다. 자기를 잊는 것은 부모의 사랑에 본래부터 있다. 하나님은 아버지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사랑한다. 그는 우주의 어떤 성격자에게도 파라다이스 아버지이다.
2:6.5 (41.3) 하나님이 올바르심은 그가 우주의 도덕 법칙의 근원임을 암시한다. 진리는 하나님이 계시자요, 선생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랑은 애정을 주고 사랑을 갈망하며, 부모와 자식 사이에 존재하는 그러한 분별 있는 친교를 찾는다. 올바름은 신다운 생각일지 모르지만, 사랑은 아버지의 태도이다. 하나님의 올바름이 하늘 아버지의 사심 없는 사랑과 양립할 수 없다는 그릇된 추측은, 신의 성품이 통일되지 않았다고 미리 전제(前提)하며, 속죄(贖罪) 교리를 공들여 다듬는 길로 바로 이끌었는데, 이 교리는 하나님의 통일성과 자유 의지, 이 두 가지에 대한 철학적 공격이다.
2:6.6 (41.4) 애정이 많은, 하늘 아버지의 영은 땅에 있는 자녀들 안에 깃들며 그는―한편으로 응보를 찾으면서 한편으로 자비로운―분열된 성격자가 아니다. 그의 은혜나 용서를 얻기 위하여 중재자가 필요하지도 않다. 신의 올바름은 엄중히 처벌하는 응보에 지배되지 않는다. 아버지인 하나님은 재판관 하나님을 초월한다.
2:6.7 (41.5) 하나님은 결코 격노하거나, 복수심이 가득하거나, 성을 내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비가 거부되었을 때 응보가 그 자비를 조절하고, 흔히 지혜가 그의 사랑을 절제하는 것이 참말이다. 그가 올바름을 사랑하는 것은 그만큼 죄를 미워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모순된 성격이 아니며, 신의 통일성은 완전하다. 하나님과 동위에 있는 자들이 영원한 독자성이 있는데도,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안에는 절대적 통일이 있다.
2:6.8 (41.6)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한다. 이러한 말은 철학적으로 참말이지만, 하나님은 초월 성격자요, 성격자는 다른 성격자를 사랑하고 미워할 수 있을 따름이다. 죄는 인격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는 것은, 그가 (영원의 잠재성을 가진) 인격 실체이기 때문이요, 한편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사사로운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은, 죄가 영적 실체가 아니요, 죄는 인격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응보는 죄의 존재를 인식할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법은 죄를 없애버린다. 필사자의 지성이 그에게 깃드는 영 조절자와 완전히 한 편이 될지 모르는 바와 같이, 바로 그 죄인이 또한 마침내 온통 죄와 한 편이 될 때, 이 신다운 성품의 태도가 변하는 듯이 보인다. 이렇게 죄의 편이 되는 필사자는 전적으로 비영적 성품이 되고 (따라서 몸소 비현실이 되고), 궁극에 존재의 말소를 맛보게 된다. 점진적으로 현실이 되고 갈수록 영답게 변화되는 우주에서, 비현실성은, 아니 불완전한 인간 성품도, 언제까지나 존재할 수는 없다.
2:6.9 (42.1) 성격자의 세계와 얼굴을 마주 대하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성격자인 것이 밝혀진다. 영적 세계를 마주 보면, 하나님은 친히 베푸는 사랑이요, 종교적 체험에서는 하나님이 이 두 가지이다. 사랑은 하나님이 뜻하는 의지를 확인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신의 자유 의지에, 곧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참을성을 보이고 용서를 베푸는 보편적 성향에, 기초를 둔다.
2:7.1 (42.2) 모든 유한한 지식과 인간의 깨달음은 상대적인 것이다. 높은 근원에서 얻었다 하더라도 지식과 정보는 상대적으로 완벽하고, 지역 안에서 정확하고, 개인적으로 참일 뿐이다.
2:7.2 (42.3) 물리적 사실은 상당히 확고하지만, 진리는 우주의 철학에서 살아 있고 유연한 요소이다. 진화하는 인격자들의 의사(意思) 소통은 겨우 부분적으로 현명하고, 상대적으로 참될 뿐이다. 인격자들은 오직 체험이 미치는 데까지만 확신할 수 있다. 한 곳에서 전적으로 참인 듯한 것이 다른 창조 구역에서는 오직 상대적으로 참일 수도 있다.
2:7.3 (42.4) 신성한 진리, 최종의 진리는 변치 않고 보편성이 있지만, 여러 구체에서 온 수많은 개인이 말하다시피, 영적 일에 관한 이야기는, 지식의 상대적 완벽성 때문에, 그리고 그 개인적 체험의 길이와 범위 뿐 아니라 그 체험의 상대적 충만함 때문에, 때때로 그 세부가 다를 수 있다. 위대한 첫째 근원 중심의 법칙과 법령, 생각과 태도는 영원히, 무한히, 보편적으로 참되다. 동시에 각 우주ㆍ체계ㆍ세계, 그리고 지음받은 지적 존재에게 이것들을 적용하고 또 그에 대하여 조정하는 것은, 창조 아들들이 각자의 우주에서 작용하는 그들의 계획과 기법을 따르며, 또한 무한한 영과 기타 관련된 모든 하늘 성격자가 마련한 지역 계획 및 절차와 조화된다.
2:7.4 (42.5) 유물론(唯物論)이란 거짓 과학은 필사 인간을 우주에서 추방된 자가 되도록 선고(宣告)하려 한다. 그러한 부분적 지식은 악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것은 선과 악, 두 가지로 이루어진 지식이다. 진리가 아름다운 것은 진리가 충만하고 균형이 있기 때문이다. 진리를 찾을 때, 사람은 신성하게 실재하는 것을 추구한다.
2:7.5 (42.6) 추상의 허위는 실체의 한 모습에만 집중하고 그러한 고립된 모습이 진리 전체라고 선언하는 버릇이요, 이런 버릇에 빠질 때 철학자는 아주 끔찍한 잘못을 저지른다. 현명한 철학자는 언제나 모든 우주 현상 뒤에 있는, 선재(先在)하는 창조적 설계를 찾으려 할 것이다. 창조자의 생각은 반드시 창조 활동보다 앞서 간다.
2:7.6 (42.7) 지적 자의식(自意識)은 진리 개념의 철학적 일관성 뿐 아니라, 상존하는 진리의 영의 어김없는 반응에 따라서, 진리의 아름다움, 진리의 영적 품질을 더욱 확실히,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진리를 인식하고 나서 행복이 뒤따르며, 이는 진리를 실행에 옮길 수 있고 진리를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에는 실망과 슬픔이 뒤따른다. 실체가 아닌 까닭에, 잘못은 체험 속에서 실체가 될 수 없다. 신성한 진리는 그 영적 향기로 가장 잘 분별된다.
2:7.7 (42.8) 영원한 추구는 통일, 신과 일치되기를 찾는 것이다. 방대한 물리적 우주는 파라다이스 섬 안에서 한데 모이고, 지적 우주는 지성의 하나님, 곧 합동 행위자 안에서 한데 모이며, 영적 우주는 영원한 아들의 성격 안에서 단합한다. 그러나 시공에서 고립된 필사자는, 깃드는 생각 조절자와 우주의 아버지의 직접 관계를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된다. 사람의 조절자는 하나님의 분신이며, 언제까지나 신과 하나가 되기를 추구한다. 조절자는 첫째 근원 중심의 파라다이스 신과 함께, 또 그 안에서 일치된다.
2:7.8 (43.1) 최고의 아름다움을 식별하는 것은 실체를 발견하고 통합하는 것이다: 신이 선한 것이 영원한 진실임을 분별하는 것, 이것이 궁극의 아름다움이다. 인간 예술의 매력조차도 그 통일성이 주는 조화에 있다.
2:7.9 (43.2) 히브리 종교의 큰 잘못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과학의 사실적 진리, 그리고 예술의 매력 있는 아름다움과 연결짓지 못한 것이다.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그리고 종교가 진리를 상대적으로 배척하고 아름다움을 소홀히 여길 정도로 하나님의 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길, 지혜롭지 않은 바로 그 길을 줄곧 추구해 왔기 때문에,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고립된 선 개념, 추상적이고 단절된 개념을 멀리하는 경향이 갈수록 더 생기게 되었다. 현대 종교에서 지나치게 강조되고 고립된 도덕은 많은 20세기 인간의 헌신과 충성을 붙잡지 못하고 있으며, 그 도덕적 명령에 덧붙여, 과학과 철학과 영적 체험의 진리, 물리적 창조의 아름다움, 지적 예술의 매력, 진정한 인품 성취의 중대성을 똑같이 고려한다면, 그 도덕은 스스로 회복할 것이다.
2:7.10 (43.3) 이 시대의 종교적 도전은, 영적 통찰력으로 멀리, 앞을 내다보는 남녀, 곧 우주의 진리, 우주의 아름다움, 신의 선하심에 관한 확대되고 지극히 통합된 현대적 개념으로부터 새롭고 흥미 있는 생활 철학을 감히 만들 자들을 향한 것이다. 이처럼 도덕에 관한 새롭고 올바른 선견은 사람의 머리 속에서 모든 선한 것을 끌어당기고, 인간의 혼에서 최선을 끌어내려고 도전할 것이다.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은 신다운 실체요, 사람이 영적 생활의 눈금을 올라감에 따라서, 영원자의 이러한 최고의 품질은 사랑인 하나님 안에서 갈수록 더 조정되고 통일된다.
2:7.11 (43.4) 모든 진리―물질적 진리, 철학의 진리, 또는 영적 진리―는 아름답고도 선하다. 모든 참된 아름다움―물질적 예술이나 영적 균형―은 참되고도 선하다. 모든 진정한 선은―개인적 도덕이든, 사회의 형평이든, 또는 신성한 봉사이든―똑같이 참되고 아름답다. 건강과 건전한 정신과 행복은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이 인간의 체험 속에서 섞임에 따라서, 이 셋이 통합된 것이다. 그러한 수준의 효율적 생활은 에너지 체계, 개념 체계, 영 체계, 이 셋을 통일함으로 생긴다.
2:7.12 (43.5) 진리는 일관성이 있고, 아름다움은 사람을 끌어당기며, 선은 안정을 가져온다. 실체인 것의 이러한 가치가 인격자의 체험 속에 조정될 때, 그 결과는 지혜로서 조절되고 충성으로 자격을 갖춘, 높은 수준의 사랑이 된다. 모든 우주 교육의 참 목표는 여러 세상에서 고립된 아이가 확대되는 체험에서 나타나는 더 큰 실체들에 더 잘 순응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체는 인간 수준에서 유한하고, 더 높은 신 수준에서는 무한하고 영원하다.
2:7.13 (43.6) [유버르사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권한으로 활동하는 한 신성한 조언자가 발표했다.]
3:0.1 (44.1)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며, 우주의 아버지는 영원의 궤도를 다스린다. 그러나 바로 파라다이스 창조 아들들을 통해서 생명을 수여하다시피, 하나님은 지역 우주에서 이 아들들의 몸 속에서 다스린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고, 이 생명은 그의 아들들 안에 있도다.” 하나님의 이 창조 아들들은 시간 구역에서, 공간의 진화하는 우주에서 소용돌이치는 여러 행성의 자녀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몸소 표현한 것이다.
3:0.2 (44.2) 높이 성격화된 하나님의 아들들은 낮은 계급의 창조된 지적 존재들이 똑똑히 알아볼 수 있으며, 그래서 무한하고, 따라서 더 알아보기 어려운 아버지의 불가시성을 아들들이 보상한다. 우주의 아버지의 파라다이스 창조 아들들은, 다른 방법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계시한 것이요, 영원의 궤도에, 그리고 파라다이스 신들의 성격에, 본래부터 있는 절대성과 무한성 때문에, 아버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3:0.3 (44.3) 창조자 신분은 도저히 하나님의 속성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그 신분은 하나님의 행동하는 성품의 집합이다. 창조자 신분의 이 보편적 기능은, 첫째 근원 중심의 무한하고 신성한 실체의 모든 조정된 속성에 제약을 받고 통제되어 영원히 명시된다. 신성한 성품 중에서 어느 한 특징이 다른 것보다 먼저 있었다고 간주할 수 있는지 우리는 진지하게 의문을 가진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다면, 신의 창조자 성품이 모든 다른 성품ㆍ활동ㆍ속성보다 앞설 것이다. 신의 창조자 신분은 궁극에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보편적 진리가 된다.
3:1.1 (44.4) 우주의 아버지가 어디에나, 그리고 동시에 계실 수 있는 능력은, 그의 두루 계심을 이룬다. 하나님 혼자서 두 곳에, 셀 수 없이 많은 장소에, 동시에 계실 수 있다. 시편(詩篇)의 저자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리이까? 주가 계신 앞에서 어디로 달아나리이까?” 외쳤듯이, 하나님은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에” 동시에 계신다.
3:1.2 (44.5) “‘나는 멀리 있을 뿐 아니라 가까이 있는 하나님이라,’ 주가 말씀하시니라. ‘내가 하늘과 땅을 채우지 아니하느냐?’” 우주의 아버지는 방대한 창조에서 모든 구석,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늘 계신다. 그는 “만물을 채우고, 만물 안에서 채우시는 가득한 계심”이요, “모든 사람 안에서 만사를 이루시고,” 더 나아가서, 그 성격 개념은, “하늘과 가장 높은 하늘이 (우주와 가장 높은 우주가) 그를 담을 수 없도다”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모두이고, 그가 모든 것 안에 계신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하나님의 전부는 아니다. 무한자는 오직 무한 속에서 마침내 드러날 수 있으며, 결코 결과를 분석한다고 원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속박을 받지 않는 그의 자유 의지 창조 활동의 결과로 생긴, 그 창조의 총합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이 크다. 하나님은 우주에 두루 계시지만, 그 우주는 결코 무한한 하나님 전체를 담거나 둘러쌀 수 없다.
3:1.3 (45.1) 아버지의 계심은 끊임없이 총우주를 순회한다. “주는 하늘 끝에서 출발하시고, 하늘의 저 끝까지 순회하시니라. 아무것도 그의 빛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도다.”
3:1.4 (45.2) 인간은 하나님 안에 존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은 또한 인간 속에서 산다. “그가 우리 안에서 사시므로 우리가 주 안에서 거하는 것을 우리가 알며, 그는 우리에게 그의 영을 주셨도다. 파라다이스 아버지가 준 이 선물은 사람에게 떼어낼 수 없는 동반자로다.” “그는 늘 계시고, 만물에 침투하는 하나님이라.” “영구한 아버지의 영은 모든 필사 아이의 지성 속에 감추어져 있느니라.” “사람이 친구를 찾으러 떠나지만, 바로 그 친구는 그의 마음 속에 사느니라.” “참된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으니, 그는 우리의 일부요, 그의 영은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니라.” “아버지는 아이 속에서 살며,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도다. 그는 영원한 운명을 안내하는 영이로다.”
3:1.5 (45.3) 인류에 대해서 참으로 이런 말이 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느니라.” 이는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속에 거하고,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죄를 저지를 때에도 너희는 깃드는 하나님의 선물을 괴롭히는데, 그가 인간 지성 속에 갇혀 있고 그 지성과 함께 생각 조절자가 악한 생각의 결과를 반드시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3:1.6 (45.4) 하나님의 두루 계심은, 실제로 그의 무한한 성품의 일부이다. 공간은 신에게 전혀 장벽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직 파라다이스와 중앙 우주에서만 완전히, 아무 제한 없이, 남이 알아볼 수 있게 계신다. 따라서 하보나를 도는 여러 우주에서 하나님은 이처럼 지켜볼 수 있게 계시지 않는다. 이는 시공 우주를 다스리는 동급 창조자와 통치자의 군주권과 신성한 특권을 인정하려고, 하나님이 직접, 실제로 계심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원한 아들, 무한한 영이 계시는 회로들과 파라다이스 섬을 포함하여, 신의 계심 개념은 겉으로 나타나는 방식과 경로의 범위가 넓은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주의 아버지의 계심과 그의 영원한 동위자(同位者) 및 대리자들의 활동을 반드시 구별할 수 있지는 않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불변하는 목적의 무한한 필요 조건을 모두 너무나 완벽하게 수행한다. 하지만 성격 회로와 조절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여기서 하나님은 독특하게, 직접, 혼자서 활동한다.
3:1.7 (45.5) 우주 통제자는 우주의 모든 부분에 있는 파라다이스 섬 인력(引力) 회로에, 항상 같은 정도로, 질량에 따라서, 잠재적으로 계시며, 이것은 이 계심을 물리적으로 요구하는 데 반응하여, 그리고 만물이 하나님 안에 달라붙고 존재하게 만드는 모든 창조의 본래 성질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첫째 근원 중심은 무제한 절대자 안에 잠재적으로 계시며, 이 절대자는 영원한 미래 우주, 아직 빚어지지 않은 우주의 저장소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물리적 우주를 잠재적으로 침투한다. 그는 이른 바 물질 창조가 엉겨 붙는 시원적 기초가 된다. 신의 독점 대리자들 가운데 누구인가 이유를 알 수 없이 우주 활동 단계에 간섭함으로, 이 비영적 신 잠재성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수준에 두루, 여기저기에 사실이 된다.
3:1.8 (45.6) 하나님이 지성 안에 계신 것은 합동 행위자, 곧 무한한 영의 절대 지성과 서로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계심은, 유한한 창조에서, 파라다이스의 으뜸 영들의 우주 지성이 어디서나 활동하는 데서 더 잘 파악된다. 첫째 근원 중심이 합동 행위자의 지성 회로에 잠재적으로 계신 것 같이, 그는 우주 절대자의 긴장 속에 잠재적으로 계신다. 그러나 인간 서열의 지성은 합동 행위자의 딸, 곧 진화 우주의 신성한 봉사자가 수여한 것이다.
3:1.9 (46.1) 어디에나 계시는 영, 우주의 아버지의 영은, 영원한 아들의 보편적 영 계심의 작용, 그리고 신 절대자의 영구한, 신의 잠재성과 함께 조정된다. 그러나 영원한 아들 및 그의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영적 활동이나, 무한한 영이 지성을 수여하는 것도 생각 조절자의 직접 활동을 배제하지 않는 듯하며, 조절자는 자녀인 인간의 마음 속에 깃드는 하나님의 분신이다.
3:1.10 (46.2) 한 행성ㆍ체계ㆍ별자리, 또는 지역 우주에 하나님이 계신 것에 관하여 말하자면, 어떤 창조 단위에서도 그러한 계심의 정도는 최상 존재의 진화하는 계심이 어느 정도인가를 재는 척도가 된다: 이것은 체계와 행성들 자체에까지 미치는 광대한 우주 조직 편에서, 대규모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충성을 바치는 것으로 결정된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이 단계에 하나님의 고귀한 계심을 아끼고 보호하려는 희망으로, 어떤 행성들이 (또는 체계들까지) 영적 암흑으로 깊이 굴러떨어졌을 때, 이들이 더 큰 창조 단위와 교제하지 못하고 어떤 의미에서 차단되거나 부분적으로 고립된다. 이 모든 것은, 유란시아에서 작용하는 것처럼, 고집 세고 사악하고 모반하는 소수(小數)의 이간 행동으로, 고립되는 결과를 가능한 한 당하지 않도록, 대다수의 세계들이 자구(自求)하려는 영적 방어 반응이다.
3:1.11 (46.3) 아버지는 부모로서 그의 아들―인격자―들을 모두 회로로 연결하지만,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신의 둘째 분과 셋째 분으로부터 그들의 기원이 얼마나 먼가에 따라서 한정되며, 그들이 달성하는 운명이 그러한 수준에 가까이 감에 따라서 그 영향은 확대된다. 인간의 지성 속에 하나님이 계신 사실은, 그들에게 신비의 훈계자와 같은 아버지 분신이 깃드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실질적 계심은, 이 깃드는 조절자가 머무르는 그 지성이 조절자와 얼마나 협조하는가에 따라서 좌우된다.
3:1.12 (46.4) 아버지의 계심이 변동하는 것은 하나님이 변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소홀히 여김을 받았다고 해서 아버지가 물러나서 따로 계시지 않는다. 인간이 죄를 짓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멀어지지 않는다. 그보다 (자신에 관해) 선택하는 힘을 받았기 때문에, 그 선택권을 행사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의 마음과 혼 속에서 아버지의 신성한 영향이 미치는 정도와 한계를 직접 좌우한다. 아버지는 제한 없이, 그리고 차별 없이, 자신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셨다. 아버지는 사람이나, 행성이나, 체계나, 우주를 차별하는 분이 아니다. 시간 구역에서 아버지는 오직 칠중 신을 구성하는 파라다이스 성격자들에게 다른 영예를 수여하며, 그들은 유한한 우주들을 지은 동급의 창조자이다.
3:2.1 (46.5) “전능한 주 하나님이 군림하심”을 온 우주가 알고 있다. 이 세계와 기타 세상의 사무는 신성하게 감독을 받는다. “그는 하늘 군대 속에서, 땅의 거주민 사이에서 뜻대로 행하시니라.” 이것은 영원히 참말이다, “하나님의 권능 외에 아무 권능이 없느니라.”
3:2.2 (46.6) 신의 성품과 일치하는 한계 안에서 이것은 글자 그대로 진실이다, “하나님에게 모든 일이 가능하도다.” 민족과 행성과 우주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겪는 진화 과정은 지역 우주 창조자 및 행정가의 완전한 통제를 받으며, 우주의 아버지의 영원한 목적에 따라 펼쳐지고 조화되고, 질서 있게 하나님의 전적으로 슬기로운 계획에 따라서 진행된다. 입법자는 오직 한 분 계신다. 그는 공간 속에서 세계들을 떠받들고, 끝없이 순환하는 영원한 회로 둘레에 우주들을 빙그르르 돌린다.
3:2.3 (47.1) 신의 모든 속성 가운데, 특히 그의 전능하심이 물질 우주를 지배하니까, 사람들은 전능(全能)을 가장 잘 이해한다. 비영적 현상으로 볼 때, 하나님은 에너지이다. 물리적 사실을 이렇게 선언하는 것은 첫째 근원 중심이 모든 공간에서 보편적 자연 현상의 시초 원인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에 기초를 둔다. 이 신의 행동으로부터 모든 물리적 에너지와 기타 물질적 명시가 파생된다. 빛, 열이 없는 빛은, 신들의 또 다른 비영적 표현이다. 그리고 유란시아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형태의 비영적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아직까지 인식되지 않았다.
3:2.4 (47.2) 하나님은 모든 힘을 통제한다. 그는 “번개가 갈 길”을 만들고, 모든 에너지의 회로를 예정하였다. 모든 형태의 에너지와 물질이 언제, 어떻게, 나타나는가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 모두가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영구한 손아귀에, 아래 파라다이스에 집중되는 인력 통제에 붙들려 있다. 영원한 하나님의 빛과 에너지는 이처럼 그의 웅장한 회로 둘레를 언제까지나 돌며, 이것은 온 우주를 구성하는 별 무리의 행렬, 끝이 없지만 질서 있는 행렬이다. 모든 사물과 존재의 파라다이스 성격 중심을 모든 우주가 영원히 돈다.
3:2.5 (47.3) 아버지의 전능하심은 절대 수준에서 어디서나 지배하는 성질과 관련되며, 절대 수준에서 물질 에너지, 지성 에너지, 영 에너지, 이 세 가지는 아버지와―만물의 근원과―가까운 거리에서 구별할 수 없다. 인간의 지성은 파라다이스의 일력(一力)도 파라다이스의 영도 아니니까, 우주의 아버지에 대하여 직접 반응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불완전한 지성에 맞추어―생각 조절자를 통해서 유란시아 필사자에 맞추어―조절한다.
3:2.6 (47.4) 우주의 아버지는 일시적 물력이나 바뀌는 힘, 또는 변동하는 에너지가 아니다. 아버지의 힘과 슬기는 우주의 어떤 긴급 사태도, 이 모두를 이겨 나가기에 전적으로 넉넉하다. 인간의 체험에서 긴급 사태가 생기는 대로 아버지는 그 사태를 모두 예견했고, 따라서 초연하게 우주 사무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지혜가 지시하는 대로, 그리고 무한한 판단이 명령하는 대로, 반응한다. 겉모습에 상관 없이, 하나님의 힘은 앞뒤를 분별하지 않는 물력으로서 작용하지는 않는다.
3:2.7 (47.5) 긴급 판결이 내리고, 자연 법칙이 중단되고, 그릇된 적응이 인지되고, 그 상황을 시정하려고 어떤 노력을 기울인 듯한 상황이 일어나기는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러한 하나님 개념은, 네 관점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고, 너의 이해력이 한계가 있고, 너의 조사 규모가 제한된 데서 생긴다.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오해는, 그 영역에서 더 높은 법칙의 존재, 아버지의 관대한 기질, 그의 무한한 속성, 그가 자유 의지를 가진 사실에 대하여 네가 전혀 무지(無知)하기 때문이다.
3:2.8 (47.6) 하나님의 영이 깃드는, 행성의 인간은 여기저기, 공간의 여러 우주에 두루 흩어져 있고, 그 수와 계급이 거의 무한하다. 그들의 지능은 너무 다양하고, 지성은 너무 제한되어 있고 때때로 너무 거칠며, 상상력은 너무 단축되고 지역화되어 있다. 그래서 아버지의 무한한 속성을 적절히 표현하면서, 동시에 이 창조된 지능이 어느 정도라도 이해할 수 있는 그러한 법칙을 일반화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간인 너에게, 전능한 창조자의 많은 활동이 멋대로이고, 초연하고, 뜸하지 않게 냉혹하고 모질게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참말이 아님을 나는 너에게 다시 보증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목적이 있고 총명하며, 현명하고 친절하며, 영원히 최선을 고려한다. 반드시 한 개인 존재나, 개별 민족이나, 개별 행성, 아니 개별 우주의 최선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로부터 가장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관계된 모든 자의 복지와 최선을 위한 것이다. 시간 시대에는 부분의 복지가 때때로 전체의 복지와 다른 듯 보일지 모르지만, 영원의 궤도에서 그렇게 명백한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3:2.9 (48.1)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가족의 일부이며, 따라서 가끔 가족 훈련을 함께 해야 한다. 우리를 아주 불안하게 하고 혼란에 빠지게 하는 사고, 자연 발생하는 많은 사고는 총 지혜의 결정과 최종 판결의 결과이며, 이것은 무한한 지성의 의지, 결코 그르칠 수 없는 의지의 선택을 집행하기 위하여, 완전한 성격자의 결정을 실행하기 위하여, 합동 행위자에게 권한을 부여한다. 완전한 성격자의 조사ㆍ선견ㆍ염려는 광범위하고 방대한 모든 창조의 영원한 최대 복지를 포함한다.
3:2.10 (48.2) 그래서 초연하고, 부분적이고, 유한하고, 거칠고 상당히 유물주의인 너의 관점, 그리고 네 존재의 성품에 본래부터 있는 한계가 너무 장애가 되어서, 너는 신의 많은 행위에 담긴 지혜와 친절을 보거나, 이해하거나, 깨달을 수 없다. 너에게는 신의 행위가 사람을 짓밟는 잔인성으로 가득 차 있고, 너의 동료 인간이 누리는 위안과 복지, 행성의 행복, 개인의 번영에 아주 철저히 무관심한 특징이 있는 듯이 보인다. 네가 하나님의 동기를 오해하고 그 목적을 왜곡하는 것은 인간의 선견이 한정되었기 때문이요, 너의 견문이 제한되고 이해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의 아버지가 친히 행하지 않는 많은 일이 진화 세계에서 일어난다.
3:2.11 (48.3) 신의 전능은 하나님 성격의 다른 속성과 함께 완전히 조정된다. 하나님의 힘이 우주에서 영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보통 세 가지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서 제한을 받는다:
3:2.12 (48.4) 1. 하나님의 성품에 따라서, 특히 그의 무한한 사랑에 따라서, 진실하고 아름답고 선함에 따라서.
3:2.13 (48.5) 2.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자비를 베푸는 데 따라서, 우주 성격자들에게 아버지인 관계에 따라서.
3:2.14 (48.6) 3.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서, 영원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공정함과 응보에 따라서.
3:2.15 (48.7) 하나님의 권능은 한이 없고 성품은 신성하며, 의지는 최종이고 속성은 무한하며, 지혜는 영원하고 그 실체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우주의 아버지의 이 모든 특징은 신 안에서 통일되고,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안에서, 그리고 삼위일체의 신다운 아들들 속에서 보편적으로 표현된다. 그 외에 파라다이스와 하보나 중앙 우주의 바깥에서,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을 최상위의 진화적 계심이 제한하며, 궁극위의 궁극에 이르는 계심이 조절하고, 실존적인 세 절대자―신 절대자, 우주 절대자, 무제한 절대자―가 조정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심은 이처럼 제한되어 있으니,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3:3.1 (48.8)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신의 지성은 모든 창조의 생각을 의식하고 또한 알고 계신다. 사건들에 관한 하나님의 지식은 전반적이고 완전하다. 그로부터 나가는 신다운 개체들은 그의 일부분이며, “구름을 저울로 다는” 하나님은 또한 “지식도 완전하도다.” “주의 눈은 어디에나 있도다.” 하찮은 참새에 대하여, 너희의 위대한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저희 가운데 하나도 내 아버지가 모르고서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또한 “네 머리에 있는 바로 그 머리털의 수도 계산되었도다.” “그는 별의 수를 세고, 모든 별을 이름으로 부르시니라.”
3:3.2 (49.1) 우주의 아버지는 공간에 있는 별과 행성의 수(數)를 실제로 아는, 온 우주에서 유일한 분이다. 어떤 우주의 어떤 세계도 항상 하나님은 의식하고 있다. 그는 또한 말씀하신다: “나는 분명히 내 민족의 고난을 보았고 저희의 외침을 들었으며, 저희의 서러움을 아노라.” 왜냐하면 “주는 하늘에서부터 보고, 사람의 아들들을 모두 보며, 그의 거처에서 땅에 있는 모든 거주민을 내려다보시니라.” “그는 내가 가는 길을 아시며, 그가 나를 단련하고 나서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하고 인간의 자식은 누구나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며, 멀리서 우리의 생각을 이해하고, 우리의 길을 모두 아시니라.” “만물이 벌거벗었고, 우리가 상관해야 하는 분의 눈에 열려 있도다.” 그리고 “그는 너의 뼈대를 알고, 네가 티끌인 것을 기억하시니라,” 이를 이해하는 것이 어떤 인간에게도 위로가 될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언급할 때, 예수는 말씀했다: “너희의 아버지는 너희가 청하기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니라.”
3:3.3 (49.2) 하나님은 만물을 아는 무제한 능력을 소유하며, 모든 것을 의식한다. 그의 성격 회로는 모든 성격자를 포함하고, 비천한 인간에 관한 그의 지식도, 내려오는 계열의 신다운 아들을 통해서 간접으로, 그리고 깃드는 생각 조절자를 통해서 직접, 보충된다. 더군다나 무한한 영은 항상 어디에나 계신다.
3:3.4 (49.3) 하나님이 죄가 일어나는 사건을 미리 알기를 선택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우리는 온통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비록 자기 자녀들의 자유 의지 행동을 하나님이 미리 안다 하더라도, 그러한 선견은 그들의 자유를 털끝만큼도 취소하지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하나님은 결코 놀라지 않는다.
3:3.5 (49.4) 전능(全能)은 할 수 없는 것, 즉 신답지 않게 행위하는 힘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지(全知)도 알 수 없는 것을 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도저히 유한한 머리가 알아듣게 만들 수 없다. 인간은 창조자의 의지가 미치는 테두리와 한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3:4.1 (49.5) 우주들이 생겨남에 따라서 거기에 자신을 연달아 수여하는 것은, 그 우주들이 계속 신의 중심 성격 안에 거하고 머무름에 따라서 권능의 잠재성이나 지혜의 저장을 전혀 줄이지 않는다. 파라다이스 아들들, 그에 종속된 여러 우주, 그리고 거기에 있는 다양한 생물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수여한 결과로서, 아버지는 소유한 물력ㆍ지혜ㆍ사랑의 잠재성을 결코 조금도 줄인 적이 없고, 그의 영화로운 성격의 어떤 속성도 잃어버린 적이 없다.
3:4.2 (49.6) 새 우주를 창조할 때마다 새로운 인력(引力)의 조정이 요구된다. 그러나 창조가 무기한으로 영원히, 아니 무한까지 이어져 궁극에 물질 창조가 제한 없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파라다이스 섬에 머무르는 통제하고 조정하는 힘은, 그렇게 무한한 우주를 통달하고 통제하고 조정하기에 충분하고 적절함이 발견될 것이다. 그리고 한계 없는 우주에 그지없는 물력과 힘을 이처럼 부여한 다음에, 무한자는 여전히 똑같은 정도의 물력과 에너지로 넘치게 충전되어 있을 것이다. 무제한 절대자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은 채로 있을 것이요, 마치 물력과 에너지와 힘을 허다한 우주 재산에 결코 쏟은 적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여전히 똑같이 무한한 잠재성을 가지고 계실 것이다.
3:4.3 (50.1) 지혜도 마찬가지다: 지성이 그 영역의 생각 과정에 아주 아낌없이 분배된다는 사실은, 전혀 신의 지혜의 중심 근원을 빈곤하게 만들지 않는다. 우주의 수가 늘어나고, 그 영역에 사는 존재들의 수가 이해할 수 있는 한계까지 늘어남에 따라서 높고 낮은 지위를 가진 이 존재들에게 지성이 줄곧, 끝없이 수여된다면, 여전히 하나님의 중심 성격은 바로 그 영원ㆍ무한하고 전적으로 지혜로운 지성을 품을 것이다.
3:4.4 (50.2) 너희의 세상과 기타 세계에서 남녀에게 깃들라고 하나님이 영 사자를 자신으로부터 내보낸다는 사실은, 신성하고 전능한 영 성격자로서 활동하는 그의 능력을 조금도 줄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낼 수 있고 보내도 좋은 그러한 영 훈계자의 범위나 숫자에도 절대로 아무 제한이 없다. 이처럼 자신을 인간에게 주는 것은, 신성하게 자질을 받은 이 필사자가 점진적으로 연속하여 존재할 수 있는, 한없고 거의 상상할 수 없는 미래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봉사하는 이 영 개체로서, 자신을 이처럼 헤프게 분배하는 것은, 온통 슬기롭고 전지ㆍ전능한 하나님의 몸 안에 머무르는 슬기, 완전한 진리와 지식을 어떤 방법으로도 줄이지 않는다.
3:4.5 (50.3) 시간 세계의 필사자에게는 앞날이 있지만, 하나님은 영원에 거하신다. 나는 신이 거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가까운 곳에서 왔지만, 신의 여러 속성이 무한한 것에 관하여, 나는 주제넘게 완전히 이해하고 말할 수 없다. 오직 무한한 지성이 무한한 존재와 영원한 행위를 넉넉히 이해할 수 있다.
3:4.6 (50.4) 필사 인간은 하늘 아버지의 무한함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유한한 지성은 그러한 절대 진리나 사실을 꿰뚫어볼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유한한 인간은, 그러한 무한한 아버지 사랑의 영향, 충분하고 줄어들지 않은 영향을 실제로 느낄 수 있다―글자 그대로 맛볼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을 참으로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체험의 질이 무한한 한편, 그러한 체험의 양은 인간의 영적 감수(感受) 능력, 그에 응답하여 아버지를 사랑하는, 관련된 능력에 따라서 엄격히 제한된다.
3:4.7 (50.5) 유한자의 무한한 품질 이해력은 논리적으로 한정된 인간의 능력을 훨씬 초월하는데, 필사 인간이 하나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진 사실 때문이다―안에 무한의 분신(分身)이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다가가는 가장 가깝고 귀중한 방법은, 사랑으로, 사랑을 통한 접근이니, 하나님이 사랑인 까닭이다. 그러한 모든 독특한 관계는 우주의 사회학에서 사실적 체험이다, 창조자와 인간의 관계이다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사랑이다.
3:5.1 (50.6) 하보나 이후의 창조들과 연락하는 경우에, 우주의 아버지는 직접 전함으로 그의 무한한 힘과 최종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과 그 하위 성격자들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모두를 자신의 자유 의지로 하신다. 아버지가 맡긴 어떤 권한도, 필요가 생기고 신의 지성이 그렇게 택한다면, 직접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오직 위임받은 성격자가 신이 맡긴 책임을 이행하지 못하는 결과로서 그러한 행위가 일어난다. 그런 때에, 그러한 태만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보된 신의 권능과 잠재성의 한계 안에서, 아버지는 따로 행동하고, 스스로가 선택한 지시에 따른다. 그 선택은 언제나 어김없이 완전하고, 무한히 슬기로운 선택이다.
3:5.2 (51.1) 아버지는 그의 아들들을 통해서 다스린다. 우주 조직을 통해서 밑에까지 끊어지지 않은 일련의 통치자들이 있는데, 이것은 행성 영주에서 끝나며, 이들은 아버지의 광대한 영토에서 진화하는 구체들의 운명을 지도한다. “땅과 거기에 가득한 것이 주의 것이요,” “그는 왕을 폐하고 왕을 세우시니라.” “최고자들은 사람의 나라에서 다스리도다”하는 외침은 단지 시(詩) 같은 표현만은 아니다.
3:5.3 (51.2)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경우에 우주의 아버지는 반드시 뜻대로 못할지 모르지만, 한 행성의 운영과 운명의 경우에 신의 계획이 지배하며, 지혜와 사랑의 목표, 영원한 목표는 승리를 거둔다.
3:5.4 (51.3) 예수는 이렇게 말씀했다: “저희를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누구보다 크시며,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저희를 탈취할 수 없도다.” 너희가 하나님의 거의 끝없는 창조의 다양한 작용을 얼핏 보고 어지럽게 광대한 창조를 바라보면서, 너희는 하나님이 제일 먼저라는 개념에 멈칫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물의 파라다이스 중심에서, 확실하고 영구하게 보좌에 앉아 계시고 모든 지적 존재의 은혜로운 아버지인 것을 너희가 받아들이지 못하면 안 된다. 오직 “한 분의 하나님, 모든 이의 아버지”가 계시고, 그는 “만물 위에, 만물 안에 계시니라,” “그리고 그는 어느 것보다 먼저 계시고, 그분 안에 만물이 존재하느니라.”
3:5.5 (51.4)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생, 그리고 존재의 흥망은 어떤 면에서도, 하나님이 우주를 통치한다는 개념과 모순되지 않는다. 진화 인간의 생명은 모두 어떤 불가피한 것들에 시달린다. 다음을 생각해 보아라:
3:5.6 (51.5) 1. 용기―건전한 인품―은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어려움에 부딪치고, 실망에 반응하기를 요구하는 환경 속에서 사람을 길러야 한다.
3:5.7 (51.6) 2. 이타심―동료에게 봉사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인생의 체험은 사회에서 불공평한 상황에 부닥치게 만들어야 한다.
3:5.8 (51.7) 3. 희망―큰 신뢰―는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는 불안에, 그리고 되풀이하여 불확실한 상황에 늘 부딪쳐야 한다.
3:5.9 (51.8) 4. 믿음―인간의 생각을 최고로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사람의 지성은, 아는 것보다 믿을 수 있는 범위가 항상 더 큰 어려운 곤경에 빠져야 한다.
3:5.10 (51.9) 5.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가 이끄는 데로 어디든지 기꺼이 가려는 마음은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사람은 잘못이 있고 거짓이 언제나 가능한 세상에서 자라야 한다.
3:5.11 (51.10) 6. 이상주의―신다운 것에 가까이 가는 개념―은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사람은 비교적 선하고 아름다운 환경 속에, 더 나은 것을 향하는 억제할 수 없는 추구를 자극하는 환경 속에서 싸워야 한다.
3:5.12 (51.11) 7. 충성―최고의 의무에 헌신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사람은 배반당하고 버림받을 가능성이 있는 가운데에서 견디어야 한다. 의무에 헌신하는 용기는 수행하지 못하는 위험이 암시되는 데 있다.
3:5.13 (51.12) 8. 사심(私心) 없는 태도―자기를 잊는 정신―은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필사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자아가 인정과 명예를 받으려고 끊임없이 외치는 소리를 귀가 따갑게 듣고 살아야 한다. 버려야 할 자기 생활이 없다면, 사람은 신다운 생활을 힘차게 택할 수 없다. 대조가 되어 선을 높이고 구별할 악의 잠재성이 없다면, 사람은 결코 올바름을 유익하게 움켜쥘 수 없다.
3:5.14 (51.13) 9. 기쁨―행복으로부터 얻는 만족감―은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사람은 고통스러운 다른 길과 고통받을 가능성을 늘 체험할 수 있는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
3:5.15 (52.1) 우주 전역에 걸쳐서, 어떤 단위도 전체의 일부분으로 여긴다. 한 부분이 살아남는 것은 전체의 계획과 목적에 협조하는 데, 곧 아버지의 신성한 뜻을 행하기를 마음을 다하여 바라고, 충분히 기꺼이 그렇게 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잘못이 (지혜롭지 못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없는 유일한 진화 세계는 자유로운 지능이 없는 세계일 것이다. 하보나 우주에는 완전한 거주민이 사는 완전한 세계가 10억개 있다. 그러나 자유를 누리려면 진화 인간은 틀릴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자유롭고 경험이 없는 지적 존재는 처음에 도저히 한결같이 지혜로울 수 없다. 오로지 인간의 의지가 일부러 비도덕적 판단을 의식하면서 지지하고, 알면서 고를 때에야 잘못된 판단(악)의 가능성이 죄가 된다.
3:5.16 (52.2) 완전한 신성한 우주에는 누구나 본래부터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보나 세계들의 거주민에게는 선택의 자극으로서, 비교가 되는 가능한 여러 가치 수준이 필요 없다. 그러한 완전한 존재들은, 대조되고 생각을 강요하는 모든 도덕적 상황이 없어도 선을 찾아내고 선을 고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그러한 완전한 존재의 도덕적 성품과 영적 지위는, 그렇게 존재하는 사실 덕분으로 그러하다. 오직 그들의 선천적 지위 안에서 그들은 체험으로 승진해 왔다. 필사 인간은, 하늘 가는 후보자 지위조차도, 자신이 믿고 소망함으로 얻는다. 인간의 머리가 파악하고 인간의 혼이 얻는 신다운 것은 무엇이나 체험으로 얻은 것이다. 그것은 몸소 체험하는 실체이며, 따라서 잘못이 없는 하보나 인격자의 선천적 선과 올바름과 반대로, 독특한 재산이다.
3:5.17 (52.3) 하보나의 인간들은 용감하게 타고났지만, 사람다운 의미에서 용감한 것은 아니다. 날 때부터 친절하고 생각이 깊지만, 인간적 방법으로 도저히 이타심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즐거운 앞날을 기대하지만, 불확실한 진화 세계에서 믿음 있는 필사자처럼 절묘한 방법으로 희망을 걸지 않는다. 그들은 우주가 안정되어 있음을 믿지만, 필사 인간을 동물의 지위로부터 파라다이스 문 앞까지 올라가게 하는 유익한 신앙을 도무지 모른다. 진리를 사랑하지만, 혼을 구원하는 진리의 성질을 전혀 모른다. 그들은 이상주의자이지만, 그렇게 태어났다. 환희에 이르는 선택으로 이상주의자가 되는 최고의 기쁨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충성스럽지만, 불이행의 유혹에 부딪쳐서, 마음을 다하여 총명하게 의무에 헌신하는, 떨리는 기쁨을 결코 맛본 적이 없다. 그들은 사욕(私慾)이 없지만, 싸우기 좋아하는 자아를 당당하게 정복함으로, 결코 그런 수준의 체험을 얻은 적이 없다. 그들은 쾌락을 즐기지만, 고통 받을 뻔했다가 달아나는 기쁨이 얼마나 단지 알지 못한다.
3:6.1 (52.4) 신으로서 사심없이 완전히 너그러운 마음으로, 우주의 아버지는 권한을 버리고 권력을 넘겨주신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래도 제일 먼저이니, 그의 손은 우주 영역의 상황을 조종하는 강력한 지렛대에 가 있다. 하나님은 모든 마지막 결정권을 쥐고 있으며, 바깥으로 뻗고 소용돌이치는, 항상 회전하는 창조의 복지와 운명에 대하여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권한으로, 그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서 전능한 거부권을 어김없이 행사한다.
3:6.2 (52.5) 하나님의 통치권은 제한이 없고, 그 통치권은 모든 창조의 근본적 사실이다. 우주가 필연적으로 생긴 것은 아니다. 우주는 어쩌다가 생기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우주는 지은 작품이요, 따라서 창조자의 뜻에 통째로 지배된다. 하나님의 뜻은 신성한 진리요, 살아 있는 사랑이다. 따라서 진화하는 여러 우주에서 완성되는 창조들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니, 하나는 선―신에 가까움―이요, 하나는 잠재하는 악―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3:6.3 (53.1) 모든 종교 철학은, 시간이 지나면, 유일한 하나님이 우주를 통일하여 다스린다는 개념에 도달한다. 우주의 원인은 우주의 결과보다 낮을 수 없다. 우주의 생명과 우주 지성이 흘러나오는 그 근원은 이것들이 나타나는 수준보다 높아야 한다. 인간의 지성은 그보다 낮은 계급 존재의 형편으로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없다. 사람의 지성은, 오로지 상급의 생각, 그리고 목적을 가진 의지(意志)가 현실로 있음을 인식해야 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주의 아버지가 현실임을 인정하지 않고서 도덕적 존재인 인간을 설명할 수는 없다.
3:6.4 (53.2) 기계론적 철학자는 보편적 최고의 의지가 있다는 관념을 거부한다고 공언하며, 우주 법칙을 공들여 설명하면서 바로 그 최고 의지의 작용을 깊이 숭배한다. 그러한 법칙이 스스로 작용하고 자명하다고 생각하다니, 그 기계론자는 그 법의 창조자에게 영문도 모르고 얼마나 존경을 표하는가!
3:6.5 (53.3) 사람에게 깃드는 생각 조절자의 개념을 제외하고, 하나님을 인간처럼 여기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첫째 근원 중심의 개념을 철저히 기계로 보는 것처럼 어리석지는 않다.
3:6.6 (53.4) 파라다이스 아버지는 고통을 받는가? 나는 모른다. 창조 아들은 필사자처럼 고통받을 수 있는 것이 아주 확실하고, 때때로 고통받는다. 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은 다른 의미에서 고통을 받는다. 나는 우주의 아버지가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고통을 받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마 성격 회로를 통하든지, 또는 생각 조절자의 개성을 통해서, 그리고 그의 영원한 성품을 다르게 수여함으로 그럴 것이다. 그는 필사 민족들에 관하여 이르셨다, “너희가 어떤 고통을 받아도 내가 고통을 받노라.” 의문할 여지 없이, 그는 아버지답게, 동정하는 느낌을 가진다. 그는 참으로 고통받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고통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3:6.7 (53.5) 무한하고 영원한 통치자, 온 우주의 통치자는 힘이요 형태이며, 에너지요 과정이며, 원본이자 원칙이요, 계심이자 이상화된 실체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넘는다. 그는 성격 존재이며, 최고의 의지를 행사하고, 신(神)의 자의식을 체험하며, 창조 지성이 내리는 명령을 실행하고, 영원한 목적을 이루는 만족감을 추구하며, 우주에 있는 자녀들에게 아버지의 사랑과 애정을 보인다. 그리고 더 개인적인 아버지의 이러한 특성은, 미가엘, 곧 너희 창조 아들이 유란시아에서 육신화했을 때 그의 수여 생애에서 드러난 특성을 살펴봄으로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3:6.8 (53.6) 아버지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고, 아들 하나님은 사람에게 봉사한다. 영 하나님이 베푸는 은총을 통해서 신의 아들들이 예정한 방법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찾는 모험, 늘 올라가는 모험을 하라고 영 하나님은 우주의 자녀들에게 영감을 준다.
3:6.9 (53.7) [우주의 아버지를 계시하는 발표에 배치된 신성한 조언자이므로, 나는 계속하여 신의 속성에 관하여 이 글을 썼다.]
4:0.1 (54.1) 우주의 아버지는 온 우주의 물질ㆍ지성ㆍ영의 현상과 관계되는 영원한 목적을 가졌고 언제까지나 이를 집행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최고의 자유 의지로 우주들을 창조했고, 온통 슬기롭고 영원한 목적에 따라서 이 우주들을 창조했다. 파라다이스 신들과 가장 높은 그 동료들을 제외하고, 누가 참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그다지 많이 이해하는가 의심스럽다. 파라다이스의 높은 시민들조차, 신들의 영원한 목적의 본질에 관하여 아주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4:0.2 (54.2) 하나님이 완전한 하보나 중앙 우주를 창조한 목적은, 순전히 신의 성품을 만족시키는 것이었다고 추론하기는 쉽다. 하보나는 모든 다른 우주 창조를 위한 원본 창조로서, 그리고 파라다이스로 가는 길에 있는 시간 순례자들을 위하여 최종 학교로서 쓰이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하늘의 우주는 근본적으로 완전하고 무한한 창조자들이 기뻐하고 만족하기 위해서 존재함이 틀림없다.
4:0.3 (54.3) 진화하는 필사자를 완전하게 만드는 놀라운 계획, 그리고 그들이 파라다이스와 최후 군단에 이른 뒤에, 밝혀지지 않은 어떤 앞날의 과업을 위해서 그들을 더 훈련하는 계획은 현재, 일곱 초우주와 그 여러 종속 부서에서 주요한 관심거리의 하나이다. 시공의 필사자를 영적으로 변화시키고 훈련시키는 이 승천 계획은, 결코 우주의 지적 존재들의 유일한 직업이 아니다. 정말로 하늘 무리들의 시간을 차지하고 에너지를 요구하는, 매력 있는 다른 일거리가 많이 있다.
4:1.1 (54.4) 오랜 세월에 걸쳐서, 유란시아 거주민은 하나님의 섭리를 잘못 알고 있었다. 너희 세계에 신성하게 작용하는 섭리가 있지만, 그 섭리는 필사자가 상상해 왔던 것처럼 유치하고 멋대로이고 물질적인 봉사는 아니다. 하늘 존재와 신성한 영들이 연결되어 활동하는 데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그들은 우주 법칙에 따라서, 하나님의 명예와 우주에 있는 자녀들의 영적 진보를 위하여 끊임없이 수고한다.
4:1.2 (54.5) 하나님이 사람을 상대하는 개념을 생각할 때, 너희는 우주의 표어가 진보인 것을 깨닫는 수준까지 나아갈 수 없는가? 오랜 세월을 통해서 인류는 현재 위치에 이르려고 투쟁해 왔다. 이 수천 년에 걸쳐서 섭리는 점진적 진화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다. 두 가지 생각은 실제로 서로 반대되지 않지만, 반대된다고 사람이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신의 섭리는 결코 세속적이거나 영적인, 인간의 참된 진보를 반대하지 않는다. 섭리는 언제나 최고 입법자의 변치않고 완전한 성품과 일치된다.
4:1.3 (55.1) “하나님은 충실하고,” “그의 모든 계명은 정당하니라.” “그의 충실하심은 바로 그 하늘에서 정해졌도다.” “아 주여, 언제까지나 주의 말씀은 하늘에 정착되었고, 주는 모든 세대에게 충실하나이다. 주가 땅을 세우신즉 땅이 버티고 있나이다.” “그는 충실한 창조자로다.”
4:1.4 (55.2) 아버지는 그의 목적을 지원하고 인간을 부양하려고 아무 제한 없이 세력과 성격자들을 이용해도 좋다. “영원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그 밑에 영구한 팔이 있도다.” “최고자의 은밀한 곳에서 사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서 머물리로다.” “볼지어다. 우리를 지키는 분은 졸지도 자지도 아니하리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룸을 우리가 아노라.” “주의 눈이 올바른 자 위에 머무르고, 그의 귀는 저희의 기도를 들으려고 열려 있음이라.”
4:1.5 (55.3) 하나님은 “모든 것을 권능의 말씀으로” 떠받드신다. 새로운 세계들이 태어날 때, “그는 아들들을 보내시며, 세상이 창조되도다.” 하나님은 지으실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보호하시니라.” 하나님은 모든 물질과 모든 영적 존재를 항상 떠받드신다. 우주들은 영원히 안정되어 있고, 겉보기에 불안정한 와중에 안정이 있다. 별들이 있는 영역에서 생기는 에너지 파동과 물리적 대변동 가운데 기초적 질서와 안전이 있다.
4:1.6 (55.4) 우주의 아버지는 우주를 관리하는 일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놀고 있는 신이 아니다. 하나님이 모든 창조를 현재 지원하는 자로서 물러나신다면, 즉시 우주의 붕괴가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라면, 실체 같은 것이 하나도 있을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득한 지난 시대와 영원한 앞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줄곧 떠받드신다. 신의 손길은 영원의 궤도 둘레에 미친다. 우주는 시계처럼 태엽이 감겨서 얼마까지만 가다가 그만 작동을 멈추지 않으며, 만물이 항상 새롭게 되고 있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에너지와 빛과 생명을 방출한다. 하나님은 영적인 일 뿐 아니라 글자 그대로의 일을 하신다. “그는 북쪽을 빈 공간에 늘여 펴시고, 지구를 허공에 걸어 놓으시느니라.”
4:1.7 (55.5) 내 서열의 존재는, 우주 행정의 일상 사무에서 궁극의 조화를 발견하고, 널리 미치는 뜻깊은 조정이 있다는 것을 탐지할 수 있다. 필사 지성이 보기에 연결되지 않고 우연처럼 보이는 많은 것은, 내가 보건대, 질서 있고 건설적이다. 그러나 내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일이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역 우주와 초우주에서 이미 인정된 물력ㆍ에너지ㆍ지성ㆍ상물질ㆍ영ㆍ성격자들에 관하여 나는 오랫동안 연구해 왔고, 이들에 대하여 나는 얼마큼 정통하다. 이 대리자와 성격자들이 어떻게 활동하는가 대체로 이해하고, 대우주에서 인가받은 영(靈) 지능 존재들이 하는 일을 나는 소상하게 알고 있다. 우주들의 현상에 관하여 지식이 있는데도, 내가 넉넉히 헤아릴 수 없는 우주 반응을 나는 늘 보게 된다. 물력과 에너지, 지성과 영의 상호 관계가 우연히 들어맞는 듯한 일을 계속 구경하는데, 나는 이를 흡족하게 설명할 수 없다.
4:1.8 (55.6) 우주의 아버지, 영원한 아들, 무한한 영이 활동하신 직접 결과로 생기는 모든 현상의 작용, 그리고 대체로 파라다이스 섬의 작용을 찾아내고 분석하는 일에 나는 전적으로 유능하다. 그들의 신비스러운 동급자, 세 잠재 절대자의 솜씨로 보이는 것을 구경하고 나는 당혹하게 된다. 이 절대자들은 물질을 갈아치우고, 지성을 초월하고, 영을 압도하는 듯하다. 이러한 까다로운 조치들을 이해할 수 없어서 나는 항상 헛갈리고 자주 당황하는데, 이것을 나는 무제한 절대자, 신 절대자, 우주 절대자의 계심과 행위의 탓으로 돌린다.
4:1.9 (56.1) 이 절대자들은 우주에서 널리,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존재임이 틀림없고, 이 때문에, 공간 잠재력의 현상에서, 그리고 기타 초월 궁극자들의 활동에서, 시초 형태의 물력, 개념 또는 영들이 최상의 적응과 궁극의 가치가 관련되는 복잡한 현실 상황의 요구에 대하여 도대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물리학자, 철학자 또는 종교가도 확실히 예측하기 불가능하게 만든다.
4:1.10 (56.2) 시공의 여러 우주에는 우주 사건들의 전체 구성의 기초가 되는 듯한 유기적 통일성이 있다. 겉보기에 관계 없는 우주 사건들이 놀랍게도 우연히 조정되어 보이는 것으로 인하여, 진화하는 최상 존재의 이 살아 있는 계심, 곧 신의 계획된 불완전 내재는[1] [1648] 때때로 설명할 수 없이 명시된다. 이것은 섭리의 작용―최상 존재와 합동 행위자의 분야―임이 틀림없다.
4:1.11 (56.3) 우주 활동의 모든 단계 및 형태를 조정하고 서로 연결짓는, 널리 미치고 대체로 파악할 수 없는 이 통제 작용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 사람과 천사의 이익을 위하여, 아주 다채롭고 겉보기에 희망 없이 혼란에 빠진, 잡다한 물리ㆍ정신ㆍ도덕ㆍ영 현상이 한 치도 어김없이 해결되게 만든다고 나는 믿고 싶다.
4:1.12 (56.4) 크게 보아서, 우주에서 겉보기에 “우연한 사건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절대자들을 영원히 조종하는 무한자의 시공 모험에서 벌어지는 유한한 드라마의 일부이다.
4:2.1 (56.5) 좁은 의미에서, 자연은 하나님의 물리적 버릇이다. 하나님의 행위나 행동은 한 지역 우주, 별자리, 체계 또는 행성의 실험 계획과 진화 형태에 따라서 제한되고, 임시로 조정된다. 널리 퍼지는 총우주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은, 잘 규명되고 변하지 않고 변경할 수 없는 법칙에 따라서 행동한다. 그러나 진화로 펼쳐지는 유한한 사업들의 지역 목적ㆍ목표ㆍ계획에 따라서, 각 우주ㆍ별자리ㆍ체계ㆍ행성, 그리고 성격자가 나란히 균형되어 행위하는 데 이바지하도록, 하나님은 그의 행동 방식을 수정한다.
4:2.2 (56.6) 그러므로 필사 인간이 이해하는 자연은 변함없는 신과 그의 변경할 수 없는 법칙의 바탕이 되는 기초와 근본적 배경을 제시한다. 이러한 배경은 지역 우주, 별자리ㆍ체계ㆍ행성에 있는 세력 및 성격자들이 개시하고 실행해 온 지역 계획ㆍ목적ㆍ형태ㆍ조건의 작용으로 수정되고, 그 때문에 바뀌며, 이를 통해서 대격변을 겪는다. 예를 들면, 네바돈에서 예비된 하나님의 법칙은 이 지역 우주의 창조 아들과 창조 영이 세운 계획에 따라서 수정된다. 이 모든 것 외에도, 너희의 행성에 살고, 너희의 직계 사타니아 행성 체계에 속하는 어떤 존재들의 잘못, 임무 불이행, 불복종 때문에 이 법칙의 작용은 더 영향을 받는다.
4:2.3 (56.7) 자연은 두 가지 우주 요인(要因)이 시공에서 일으키는 결과이다. 첫째는 파라다이스 신이 변할 수 없고 완전하고 정직한 것이며, 둘째는 가장 높은 자에서부터 가장 낮은 자에 이르기까지, 파라다이스 바깥에 있는 생물의 실험적 계획, 집행 실수, 반란을 일으키는 잘못, 불충분한 발육, 불완전한 지혜이다. 따라서 자연은 한결같고 불변하고 훌륭하고 놀라운 완전의 실을 영원의 궤도로부터 가져온다. 그러나 각 우주, 각 행성, 각 개인의 생활에서 이 자연은 수정(修正)되고 제한되며, 진화하는 체계 및 우주의 생물이 저지르는 행위와 실수와 불충 때문에 어쩌다가 상처를 입는다. 그래서 자연은 늘 변하는 기분에 젖어 있어야 하고, 한 지역 우주의 운영 절차에 따라서, 밑에는 안정되어 있어도, 동시에 변덕스럽고 달라야 한다.
4:2.4 (57.1) 자연이란 파라다이스의 완전함을 완성되지 않은 우주들의 불완전ㆍ악ㆍ죄로 나눈 결과이다. 따라서 이 나눈 값은 완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 영원한 것과 현세의 것, 양쪽을 표현한다. 지속되는 진화는 파라다이스처럼 완전한 내용을 늘이고 상대적 실체의 악ㆍ죄ㆍ부조화의 내용을 줄임으로 자연을 수정한다.
4:2.5 (57.2) 하나님은 자연이나, 자연의 어느 물력 속에도 몸소 계시지 않는다. 이는 자연 현상이 하나님이 세운 우주 법칙의 파라다이스 기초 위에, 점진적 진화를 겪는 불완전한 것, 그리고 때때로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결과를 겹쳐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유란시아와 같은 세계에서 보이는 것처럼, 절대로 자연은 전적으로 슬기롭고 무한한 하나님을 적절히 표현하고, 참되게 대표하고, 충실히 묘사할 수 없다.
4:2.6 (57.3) 너희 세계에서 자연은, 지역 우주의 진화 계획이 완전한 법칙을 제한한 것이다. 한정되고 제한된 의미에서 하나님이 자연에 스며드니까, 자연이 보편적인, 따라서 신다운, 권능의 한 국면이니까, 자연을 예배하는 것은 얼마나 옹졸한 시늉인가! 자연은 또한 우주의 진화에서, 한 우주 실험의 발전ㆍ성장ㆍ진보가 아직도 진행되고 불충분하고 어설프게 작용함을 표시한다.
4:2.7 (57.4) 자연 세계의 결점으로 보이는 것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그에 상당하는 티가 있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렇게 관찰된 결점은 오히려, 늘 돌아가는 바퀴가 무한의 그림을 전시하면서 생기는 불가피한 정지 순간에[2] [1649] 불과하다. 물질 인간의 유한한 지성이 시공에서 신의 실체를 얼핏 보게 만드는 것은, 완전의 연속에 있는 바로 이 결점이자 중지(中止)이다. 사람의 진화된 지성에게, 신의 물질적 모습에 흠이 있어 보이는 것은, 오직 필사 인간이 자연 현상을 자연의 눈을 통해서 보고, 상물질의 상지혜나 또는 계시, 곧 시간 세계에서 보완적 대용품의 도움이 없이, 인간의 시력을 통해서, 계속 보기 때문이다.
4:2.8 (57.5) 자연의 일부인 생물, 세월이 지나자 자연의 얼굴을 보기 싫게 만들어버린 수많은 생물의 반란, 그릇된 행위, 잘못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자연은 다쳤으며, 그 아름다운 얼굴은 상처를 입고 그 모습은 그슬렸다. 아니, 자연은 하나님이 아니다. 자연은 경배 받을 대상이 아니다.
4:3.1 (57.6) 너무나 오랫동안,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과 비슷한 자로 생각해 왔다. 하나님은 사람이나 온 우주에 있는 어떤 다른 존재도, 시샘하지 않고, 시샘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결코 시샘하지 않을 것이다. 창조 아들의 의도는 사람이 행성의 창조에서 걸작품이자 온 땅의 통치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를 알기 때문에, 사람이 자신의 저열한 격정에 지배되어 있는 모습, 그리고 나무ㆍ돌ㆍ금, 이기적 포부의 우상 앞에 사람이 절하는 광경―이 더러운 장면들이 하나님과 그 아들들을 자극하고 사람을 위하여 경계하게 만들지만, 결코 사람을 질투하게 만들지 않는다.
4:3.2 (57.7) 영원한 하나님은 인간적 감정의 의미로, 또 사람이 그런 반응을 이해하는 바와 같이, 진노와 분노의 감정을 느낄 수 없다. 이런 감정은 저열하고 비웃을 만하고 신답기는커녕, 도저히 사람답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한 태도는 우주의 아버지의 완전한 성품과 인자한 성질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4:3.3 (58.1) 유란시아 필사자들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겪는 어려움 중에 상당 부분은, 루시퍼 반란과 칼리가스티아 배반의 널리 미치는 결과 때문이다. 죄로 인하여 격리되지 않은 세계에서, 진화 민족들은 우주의 아버지에 대하여 훨씬 좋은 관념을 형성할 수 있다. 그들은 개념의 혼동ㆍ왜곡ㆍ곡해를 덜 겪는다.
4:3.4 (58.2) 하나님은 그가 일찍이 하신 일, 이제 하시는 일, 앞으로 하실 일 가운데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전능할 뿐 아니라 온통 슬기롭다. 사람의 지혜는 인간 체험의 시행 착오에서 생겨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그의 무한한 우주 통찰력이 조건 없이 완전한 데 있다. 그리고 이 신의 선견(先見)은 효과적으로 창조적 자유 의지를 지도한다.
4:3.5 (58.3) 우주의 아버지는 나중에 슬퍼하거나 후회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나 결코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깥에 있는 여러 우주에서 창조 성격자들이 계획하고 만드는, 의지를 가진 인간은 불행한 선택으로, 부모인 창조자의 성격에 때때로 신으로서 슬픈 느낌이 생기게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잘못하거나 뉘우치거나 슬픔을 느끼지 않더라도, 아버지의 사랑을 가진 분이다. 우주의 영적 성취 계획과 필사자 승천 정책에 따라서 아주 아낌없이 마련해준 도움을 받고서, 미칠 수 있는 영적 수준까지 그의 자녀들이 미치지 못할 때, 의심할 여지 없이 아버지의 마음은 슬퍼진다.
4:3.6 (58.4) 아버지의 무한한 선은 시간 세계의 유한한 지성이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단계의 상대적 선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언제나 (죄가 아니라) 상대적 악과 대조가 되는 것이 마련되어야 한다. 신이 완전히 선한 것은 필사자의 불완전한 통찰력으로 식별될 수 있으며, 이는 오로지 공간 운동에 있는 시간과 물질의 관계에서, 그 선이 상대적 불완전과 대조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4:3.7 (58.5) 하나님의 성질은 무한히 인간을 초월한다. 따라서 사람의 유한한 머리가 미처 믿음으로 깨닫기 전에, 그러한 신다운 아들들의 경우처럼, 신의 성품이 인격화되어야 한다.
4:4.1 (58.6) 하나님은 온 우주 전체에서 정지해 있고, 독립되어 있고, 변함없는 유일한 존재이며, 그에게는 바깥이 없고, 지나는 것도 없으며, 또한 과거도 미래도 없다. 하나님은 목적이 있는 에너지(창조적 영)이자 절대 의지이며, 이 두 가지는 스스로 존재하며 보편적이다.
4:4.2 (58.7)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니까, 절대로 독립되어 있다. 하나님의 바로 그 신분은 변화와 거리가 멀다. “나, 주는 변하지 않노라.” 하나님은 변할 수 없다. 그러나 네가 파라다이스 지위를 얻기까지, 하나님이 어떻게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동일성에서 변화로, 고요함에서 움직임으로, 무한에서 유한으로, 신다운 것으로부터 사람다운 것으로, 그리고 하나에서 이원(二元)과 삼자일치로 넘어갈 수 있는가 너희는 이해할 엄두도 낼 수 없다. 신의 불변성이 움직일 수 없음을 뜻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처럼 그의 절대성의 명시를 수정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의지가 있다―하나님은 바로 의지이다.
4:4.3 (58.8) 하나님은 절대로 스스로 결정하는 존재이다. 스스로 부과하는 것 외에, 그의 우주 반응에 제한이 없으며, 오직 본래부터 영원한 그의 성품의 특징을 나타내는 신다운 질과 완전한 속성에 따라서, 하나님의 자유 의지 행동이 조절된다. 그러므로 최종의 선과 무한히 창조하는 자유 의지를 더한 존재로서, 하나님은 우주와 관계된다.
4:4.4 (58.9) 아버지 절대자는 중앙의 완전한 우주를 지으신 분이고, 모든 다른 창조자의 아버지이다. 하나님은 성격, 선, 그리고 다른 수많은 특징을 사람과 기타 존재들과 함께 가지지만, 무한한 의지는 하나님 홀로 지닌다. 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오직 그의 영원한 성품의 감정에, 그리고 그의 무한한 지혜가 내리는 명령에, 제한을 받는다. 하나님은 무한히 완전한 것만 친히 선택하며, 따라서 중앙 우주는 하늘처럼 완전하다. 창조 아들들은 하나님의 신성, 아니 그의 절대성 단계까지도 충분히 함께 가지지만, 아들들은 아버지의 무한한 의지(意志)를 지도하는 최종의 지혜에 전적으로 제한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미가엘 계급 아들의 창조적 자유 의지는 더욱 활발하고, 온통 신답고, 절대적이 아니라면, 궁극성에 가깝게 된다. 아버지는 무한하고 영원하지만, 의지로 자아를 제한하는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버지의 절대 의지, 바로 이 개념을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4:4.5 (59.1) 하나님의 절대성은 모두 일곱 수준의 우주 실체에 스며든다. 이 절대 성품 전체는 창조자와 우주 생물 가족의 관계에 종속된다. 온 우주에서 삼위일체의 응보는 정밀한 특징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우주의 하나님이 시간 세계의 인간과 가지는 광범위한 모든 가족 관계는 신의 감정에 지배된다. 통틀어서―영원히―무한한 하나님은 아버지이다. 하나님을 부를 만한 모든 가능한 적절한 칭호 가운데, 나는 모든 창조의 하나님을 우주의 아버지로 묘사하라고 지시를 받았다.
4:4.6 (59.2) 아버지 하나님 안에서, 자유 의지 행위는 힘으로 통제되지 않으며, 지능의 안내만 받지도 않는다. 신다운 성격은, 영으로 이루어져 있고 우주에게 사랑으로서 자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우주의 인간 성격자들과 가지는 모든 개인적 관계에서, 첫째 근원 중심은 언제나, 한결같이 사랑의 아버지이다. 하나님은, 가장 고귀한 의미에서 아버지이다. 하나님은 신의 사랑의 완전한 이상(理想)에 영원히 자극 받으며,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그 부드러운 성품의 가장 좋은 표현이요, 거기서 가장 큰 만족을 얻는다.
4:4.7 (59.3) 하나님은 과학에서 첫째 근원이요, 종교에서 보편적이고 인자한 아버지이다. 철학에서 그는 혼자 힘으로 계시는 한 분이며, 존재하려고 어느 누구에게도 매달리지 않으나, 만물과 모든 다른 생명에게 너그럽게 존재의 실체를 부여한다. 그러나 과학에서 첫째 근원과 철학에서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가, 종교에서 하나님, 곧 자비와 선이 가득하고 지상의 자녀들이 영원히 살아남게 만들기를 서약한 하나님인 것을 보여주는 데는 계시가 필요하다.
4:4.8 (59.4) 우리는 무한자 개념을 몹시 바라지만, 하나님을 체험한다는 생각, 곧 우리의 가장 높은 신 개념의 성격 및 신성 요소를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파악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존중한다.
4:4.9 (59.5) 땅에서 승리에 넘친 인생을 산다는 의식은, 존재에서 삽화적 사건이 되풀이될 때마다, 이에 감히 도전하는 인간의 그 믿음에서 생겨난다. 인간적 한계인 끔찍한 광경에 부딪쳤을 때, 그 믿음은 “나는 이를 할 수 없어도, 이를 할 수 있고 또 하실 분, 온 우주의 아버지 절대자의 일부가 내 안에 사신다” 하고 어김없이 외친다. 바로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 너희의 믿음조차 이기는 승리”이다.
4:5.1 (59.6) 종교적 전통은 지난 시대에 하나님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체험이 허술하게 보존된 기록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종교 생활의 안내서로, 또는 우주의 아버지에 관한 참된 정보의 원천으로서 믿을 만하지 않다. 원시인이 신화를 지어낸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그러한 고대의 관념들은 항상 수정되어 왔다.
4:5.2 (60.1) 하나님의 성품에 관하여 유란시아에서 생긴 혼란의 가장 큰 근원 중의 하나는, 너희의 거룩한 책들이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성격자들을 뚜렷이 구분하지 못하고, 또 파라다이스 신과 지역 우주의 창조자 및 행정가들을 뚜렷이 구별하지 못하여 생겨난다. 부분적으로 이해했던 과거의 섭리 시대에, 너희의 사제와 선지자들은 행성 영주, 체계 군주, 별자리 아버지, 창조 아들, 초우주 통치자, 최상 존재, 우주의 아버지를 뚜렷이 구별하지 못했다. 생명 운반자 및 여러 천사 계급과 같은 하위 성격자들이 전해준 많은 말씀은 너희의 기록에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처럼 쓰여 있다. 유란시아의 종교 사상(思想)은 신의 동료 성격자들과 우주의 아버지 자신을 아직도 혼동하고 있고, 그래서 모두가 한 이름 안에 포함되어 있다.
4:5.3 (60.2) 유란시아의 사람들은 원시적 하나님 개념의 영향에 계속 시달린다. 폭풍 속에서 날뛰는 신들, 진노하여 땅을 잡아 흔들고, 성이 나서 사람을 치고, 기근과 홍수가 있을 때 불만으로 심판을 내린다―이것들은 원시 종교의 신이요, 살아 있고 우주를 다스리는 신들이 아니다. 그러한 개념은 우주가 그와 같은 가상(假想)의 신들이 변덕에 영향을 받고 지배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던 시절의 유물이다. 그러나 최상 창조자와 최상 통제자들의 행정 정책과 운영에 관한 한, 필사 인간은 자기가 비교적 질서 있는 영역에서 산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4:5.4 (60.3) 성난 하나님을 구슬리고, 기분 상한 주를 달래며, 희생 제물과 고행(苦行)을 통하여, 또 피까지 흘려서, 신의 은혜를 얻으려는 야만스런 생각은 통째로 유치한 원시 종교를 대표하며, 이것은 과학과 진리의 시대, 깨우친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철학이다. 그러한 관념은 우주에서 봉사하고 다스리는 하늘 존재와 신다운 통치자들에게 온통 불쾌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얻으려고, 또는 가상하는 신의 노여움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서, 죄 없는 자의 피를 흘려야 한다고 믿거나, 우기거나,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다.
4:5.5 (60.4) 히브리인은 “피를 흘리지 않고는 죄가 용서될 수 없다”고 믿었다. 히브리인은 피를 구경하지 않고서 신들을 달랠 수 없다는 낡은 이교도 관념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하지만 모세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금하고, 어린아이 같은 그 베두인 추종자들의 원시적 머리로 생각하기에, 이를 대신하여 동물을 잡아바치는 예식으로 갈아치웠을 때, 모세는 뚜렷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4:5.6 (60.5) 너희 세계에 한 파라다이스 아들이 수여되는 것은, 행성에서 한 시대의 막을 내리는 상황에 본래 있다. 이 일은 피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얻으려는 목적에 필요하지 않았다. 이 수여는 자기 우주의 체험적 통치권을 얻는 긴 모험에서, 우연히 한 창조 아들이 마지막으로 친히 하신 활동이었다. 하나님의 무한한 성질에 얼마나 큰 먹칠이었는가! 온통 준엄하게 차갑고 굳은 모습으로 인간이 겪는 불운과 서러움을 보고도, 아버지다운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아서 흠없는 아들이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어가는 것을 볼 때까지 하나님이 부드러운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고 이렇게 가르치다니!
4:5.7 (60.6) 그러나 유란시아의 주민들은 우주의 아버지의 성품에 관한 이러한 옛 시대의 잘못과 이교도의 미신에서 벗어날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진리의 계시가 다가오고 있다. 인류는 유란시아에서 사람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아들로서 머물렀던 창조 아들이 그렇게 훌륭하게 묘사한, 모든 아름다운 성질과 사랑스러운 속성을 가진 우주의 아버지를 이해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5:0.1 (62.1) 우주의 아버지로서 그렇게 크고 위엄 있는 하나님이, 어떻게 무한히 완전한 영원의 거처로부터 개별 인간과 사귀려고 내려올 수 있는지 사람의 유한한 머리가 이해할 수 없다면, 정신이 멀쩡하고 도덕 의식이 있는 모든 유란시아 필사자의 지능 안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실제 조각이 거한다는 참된 사실에 근거를 두고, 그러한 유한한 지능은 신과 친교함을 확신해야 한다. 사람에게 깃드는 생각 조절자는 파라다이스 아버지, 영원한 신의 일부이다.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와 교통하기 위해서 사람은 이 영적 실체의 계심을 혼이 숙고하는, 마음 속의 체험보다 더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5:0.2 (62.2) 하나님은 동급인 여섯 절대자의 실존적 실체를 통해서 그의 영원한 성품의 무한성을 분배했으나, 하나님은 선(先)인격 분신의 기능을 통해서, 창조의 어느 부분이나 단계나 종류와도 언제라도 직접 친히 연락할 수 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은 또한 온 우주의 신다운 창조자 및 살아 있는 인간들에게 성격을 수여하는 특권도 따로 남겨 두었고, 나아가서 하나님은 성격 회로를 통해서, 이 모든 성격 존재와 직접, 부모로서 연락을 유지하는 특권을 남겨 놓았다.
5:1.1 (62.3)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아버지에게 가까이 갈 수 없는 것은, 아버지의 초연함이 아니라, 지음받은 존재들의 유한성과 물질적 한계에, 선천적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가장 높은 성격자와 하등 집단의 창조된 지능들의 큰 영적 차이는 상상할 수 없다. 바로 아버지가 계신 앞으로, 하등의 지적 존재들을 한 순간에 데려가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들은 자기가 그 자리에 서 있는 줄도 모를 것이다. 지금 있는 곳과 똑같이, 우주의 아버지가 자리에 계심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거기에 있을 것이다. 파라다이스에 계신 우주의 아버지 앞으로 안전히 안내받기를 변함없이, 그리고 가능한 범위 안에서 요구할 수 있기 전에, 필사자의 앞에는 머나먼 길이 놓여 있다. 일곱 으뜸 영 가운데 어느 한 분이라도 보게 하는 영적 시력(視力)을 주는 수준에 다다를 수 있기 전에, 사람은 영적으로 여러 번 변신을 겪어야 한다.
5:1.2 (62.4) 우리 아버지는 숨어 있지 않으며, 멋대로 은둔하지 않는다. 그의 우주 영토에 있는 자녀들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결코 그치지 않는 노력으로 그는 신의 지혜 자원을 동원했다. 무한한 위대함과 말할 수 없는 관용이 그의 장엄한 사랑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의 사랑은 하나님을 이해하거나, 사랑하거나, 그에게 가까이 올 수 있는 모든 창조된 존재와 사귀는 것을 하나님이 동경하게 만든다. 따라서 네가 필사자로 승천하는 여행 목적지에 이르고, 만물의 중심에서 아버지 앞에 서는 그 시간과 장소와 경우를 정하는 것은, 너의 타고난 한계요, 이는 너의 유한한 인격과 물질적 존재로부터 뗄 수 없다.
5:1.3 (63.1) 파라다이스에 아버지가 계신 앞으로 가까이 가는 것은, 네가 영적으로 진보하는 가장 높은 유한 수준에 이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네 안의 혼, 그리고 영답게 변하는 너의 자아와 아주 밀접히 관련된 영, 아버지가 수여한 영과 즉시 교통하는 상존(常存) 가능성을 깨닫고 너는 기뻐해야 한다.
5:1.4 (63.2) 시공 영역의 필사자들은 타고난 능력과 지적(知的) 자질이 크게 다를 수 있다. 사회적 진전과 도덕적 진보에 특별히 유리한 환경을 누릴 수도 있거나, 또는 교양이 되는 거의 모든 인간적 혜택, 그리고 문명의 예술 면에서 예상된 진보가 부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늘 가는 생애에서, 영적 진보 가능성은 만민에게 평등하다. 진화 세계에서 다채로운 물질 환경에서 보는 모든 그러한 사회적 도덕의 차이와 아주 별도로, 높아지는 수준의 영적 통찰력과 우주 의미가 달성된다.
5:1.5 (63.3) 유란시아 필사자들의 지적ㆍ사회적ㆍ경제적 기회, 아니 도덕적 기회와 자질에 어떤 차이가 있더라도, 그들의 영적 재산은 한결같고 독특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 그들은 모두 똑같이, 아버지의 선물인 신성한 계심을 누리고 있다. 그들은 신의 기원을 가진, 안에 깃드는 이 영과 가까이 몸소 교통하는 특권을 똑같이 누리며, 한편 그들 모두가 이 신비의 훈계자의 한결같은 영적 인도를 똑같이 받아들여도 좋다.
5:1.6 (63.4) 필사 인간이 진심으로 영적 자극을 얻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아낌없이 헌신한다면, 그 사람에게 깃드는 신다운 조절자가 영적 자질을 아주 확실히, 아주 효과적으로 부여했으니까, 갈수록 더 하나님을 닮아가는 진취적 체험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아는 숭고한 의식, 그리고 하나님을 찾아낼 목적을 가지고 살아남는다는 하늘같은 확신이 그 개인의 체험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5:1.7 (63.5) 사람에게는 살아남는 생각 조절자가 영적으로 깃든다. 그러한 인간 지성이 진지하게 영적 자극을 받으면, 그러한 인간의 혼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닮기를 바라고 정직하게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바라면, 인간적 결핍이 가져오는 어떤 부정적 영향도, 간섭할 수 있는 긍정적 세력도, 그렇게 신성하게 자극받은 혼이 파라다이스 입구까지 안전히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5:1.8 (63.6) 아버지는 모든 인간이 그와 몸소 교통하기를 바란다. 살아남는 지위와 영적 성품으로 보아서 그런 달성이 가능한 모든 사람을 받아들일 장소를 아버지는 파라다이스에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그리고 영원히, 너희의 철학을 가지고 안심하여라: 하나님은 너희 하나하나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도달이 가능한 분이다. 아버지께 가까이 갈 수 있고, 그 길은 열려 있다. 어떤 우주에, 자격 있는 어떤 지적 존재라도, 파라다이스의 우주의 아버지가 계신 앞까지 올라가는 것을 쉽게 만들려는 노력으로, 신의 사랑의 힘, 신의 행정부의 수단과 방법이,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다.
5:1.9 (63.7) 하나님께 도달하는 데 방대한 시간이 든다는 사실은, 무한자의 계심과 성격을 조금도 비현실로 만들지 않는다. 네가 올라가는 것은 일곱 초우주 회로의 일부요, 너는 그 둘레를 수없이 돌게 될 터이지만, 영적으로 그리고 지위로 보아서, 너는 언제나 안쪽을 향하여 도는 것을 기대해도 좋다. 이 구체에서 저 구체로, 바깥 회로에서 안쪽의 중심으로 늘 가까이 옮겨진다는 것을 너는 믿어도 좋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네가 신성한 중심 앞에 서서, 비유로 말하자면, 얼굴을 마주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말라. 그것은 실제로, 글자 그대로 영 수준에 도달하는 문제이다. 신비의 훈계자가 안에 깃들어 온 존재, 그리고 그 생각 조절자와 나중에 영원히 합친 자는 누구나 이 영적 수준에 다다를 수 있다.
5:1.10 (64.1) 아버지는 영적으로 숨어 있지 않다. 그러나 아주 많은 인간이 스스로 일부러 결정한 안개 속에 숨어버렸다. 자신의 비뚤어진 길을 고르고, 참을성 없는 생각과 비영적 성질의 자기 주장에 빠짐으로, 그들은 아버지 영과 그 아들 영과 교통하지 않고 당분간 떨어져 나갔다.
5:1.11 (64.2) 필사 인간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도 있고, 선택의 힘이 남아 있는 한, 신의 뜻을 거듭 저버릴 수도 있다. 사람이 아버지의 뜻을 택할 힘을 잃어버릴 때까지 사람의 마지막 멸망은 정해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마음이, 언제라도 자식들의 필요와 탄원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 닫힌 적은 없다. 신의 뜻을 실행하려는―하나님을 알고 그와 같이 되려는―바람을 마지막으로 영원히 잃어버릴 때, 이 자녀들은 아버지의 당기는 힘을 물리치고 영원히 마음 문을 닫는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승천자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겠다고 마침내 돌이킬 수 없이 선택한 것을 조절자 융합이 우주에 선포할 때,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보장된다.
5:1.12 (64.3) 크신 하나님은 필사 인간과 바로 접촉하며, 무한ㆍ영원하고 헤아릴 수 없는 자아의 일부를 그 사람 안에 살고 머무르라고 주신다.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영원한 모험을 떠났다. 네 안에, 너의 둘레에 있는 영적 세력이 인도하는 데 네가 굴복하면, 공간의 진화 세계로부터 하늘 가는 인간이 다다를 우주 목표로서, 너는 사랑의 하나님이 예정한 운명을 달성하는 데 실패할 수 없다.
5:2.1 (64.4) 무한자의 물리적 계심은 물질 우주의 현실이다. 지성 속에 신의 계심은 개인의 지적 체험의 깊이와 진화하는 인격자의 수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틀림없다. 신의 영적 계심은 마땅히 우주에서 차별되어야 하며, 영적 감수 능력에 따라서, 또한 신의 뜻을 행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얼마나 거룩하게 바쳤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5:2.2 (64.5) 영에게서 태어난 어떤 아들 속에도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파라다이스 아들들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 바른 편”에 언제나 다가갈 수 있고, 인간 성격자는 누구나 “아버지의 품”에 다가갈 수 있다. 이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방법으로나 접촉하는 성격 회로를 언급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중앙 거처나 파라다이스의 거룩한 일곱 구체 중 어느 한 곳과 같은 다른 지정된 장소에서, 우주의 아버지와 몸소 자의식하는 접촉과 교통을 수반한다.
5:2.3 (64.6) 그러나 신의 계심은, 자연에 어디서나, 아니 하나님을 아는 필사자의 일생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깃드는 신비의 훈계자, 파라다이스의 생각 조절자와 네가 교통을 시도할 때, 아주 충분히, 아주 확실히 발견할 수 있다. 우주의 아버지의 영이 바로 너의 지성 속에 사는데, 창공에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님을 꿈꾸는 것은 얼마나 큰 잘못인가!
5:2.4 (64.7) 네 안에 깃드는 바로 이 하나님의 분신 때문에, 네가 조절자의 영적 인도와 조화되어 진보하는 동안, 너를 둘러싸고 네가 부닥치지만 너를 구성하는 일부로서 활동하지 않는 다른 영적 영향의 존재, 그리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그 힘을 너는 더욱 잘 식별하기를 바랄 수 있다. 깃드는 조절자와 가지는 가깝고 밀접한 연락을 네가 지적으로 의식하지 않는 사실은, 조금도 그러한 숭고한 체험이 그릇되다는 증거는 아니다. 신다운 조절자와 사귀는 것은 전적으로 개별 신자의 일생 체험에서 맺는 영의 열매가 좋은가, 그리고 얼마나 열리는가, 이것이 증명한다. “너희는 열매로 사람을 알지니라.”
5:2.5 (65.1) 필사 인간의 지성, 빈약하게 영적으로 변화된 물질 지성은, 파라다이스 조절자와 같이 그러한 신다운 개체의 영적 활동을 뚜렷이 의식하기가 지극히 힘들다. 지성과 조절자가 공동으로 빚어낸 혼의 존재가 더욱 뚜렷해짐에 따라서, 새 단계의 혼 의식이 또한 진화되며, 이것은 신비의 훈계자의 영적 인도하심과 기타 초물질 활동이 있음을 체험하고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
5:2.6 (65.2) 조절자와 교통하는 체험 전부가 도덕적 지위, 정신적 자극, 영적 체험이 따르는 체험이다. 그러한 성과를 자아가 이룩하는 것은, 순전히 그렇지는 않아도, 주로 혼 의식의 영역에 국한된다. 하지만 그 증거는 마음 속의 영과 연락하는 그런 모든 사람의 생활에서, 영의 열매를 맺음으로 풍부하게 장차 나타난다.
5:3.1 (65.3) 우주의 관점에서 볼 때 파라다이스 신들은 비록 하나와 같지만, 유란시아에서 사는 부류의 존재와 가지는 영적 관계에서 신들은 또한 서로 다르고, 따로 있는 세 분의 성격자이다. 개인적으로 호소하고 교통하는 문제, 그리고 기타 밀접한 관계에서, 신위(神位) 사이에 차이가 있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우리는 우주의 아버지, 오직 그분을 예배한다. 그의 창조 아들들 안에서 나타나는 아버지를 우리가 예배할 수 있고, 또 예배하는 것이 참말이지만, 직접 또는 간접으로 예배와 찬미를 받는 분은 아버지이다.
5:3.2 (65.4) 모든 종류의 간청은 영원한 아들, 그리고 아들의 영적 조직의 분야에 속한다. 기도, 모든 정식 교통은, 우주의 아버지를 찬미하고 예배하는 것을 제외하고, 지역 우주의 관심거리이다. 이러한 기도(祈禱)는 보통 한 창조 아들의 관할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 없이, 예배는 아버지의 성격 회로의 작용으로 인하여 창조자의 몸으로 연결되고 전해진다. 우리는 더욱 나아가서, 조절자가 깃드는 인간이 표현하는 경의(敬意)를 기록하는 것은 아버지 영의 계심으로 용이하게 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관념을 보여줄 증거는 엄청나게 많이 존재하고, 모든 계급의 아버지 분신들은 그 백성의 진정한 찬미를 우주의 아버지가 계신 앞에 알맞게 기록할 권한을 받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조절자는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선(先)인격 경로도 또한 이용하며, 이들은 영원한 아들의 영 인력 회로도 마찬가지로 쓸 수 있다.
5:3.3 (65.5) 예배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기도는 자신이나 인간의 이익 요소를 담고 있으며, 이것이 예배와 기도의 큰 차이이다. 참된 예배에는, 자신을 위한 요청이나 기타 개인적 이익 요소가 아예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헤아리는 그대로 하나님을 예배할 뿐이다. 예배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예배하는 사람을 위해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렇게 존경심을 보여 우리가 무언가 얻을까 싶어서 아버지를 예배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비할 데 없는 성격을 깨달음에 따라서 자연스럽고 저절로 우러나오는 반응으로서, 또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성품과 찬미받을 속성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그와 교통하고 그를 예배한다.
5:3.4 (65.6) 자기 이익의 요소가 예배에 끼어드는 그 시각, 그 순간에, 교통은 예배에서 기도로 바뀌고, 더욱 적절하게 영원한 아들이나 창조 아들의 몸을 향해서 드려야 한다. 그러나 실제의 종교적 체험에서, 진정한 예배의 일부로서 아버지 하나님한테 기도를 드리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5:3.5 (66.1) 일상 생활의 실무를 다룰 때 너는 셋째 근원 중심에 기원을 가지는 영 성격자들 손에 맡겨지며, 너는 합동 행위자의 대리자들과 협조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너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아들에게 기도하고 그와 교통하며, 네가 사는 세계에서, 너의 우주 전역에서 일하는 무한한 영의 지적 존재들과 연락하여, 네가 땅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생기는 세부를 해결해 나간다.
5:3.6 (66.2) 지역 우주의 운명을 주관하는 창조 아들이나 군주 아들은 파라다이스에 계신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 이 두 분을 대신한다. 이 우주 아들들은 각자의 창조 전역에 걸쳐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예배하는 찬미를 받고, 탄원하는 백성의 간청에 귀를 기울인다. 한 지역 우주의 자녀들에게, 모든 실질적 의도와 목적에서 볼 때, 미가엘 아들 한 분이 하나님이다. 그는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이 지역 우주에서 성격화된 것이다. 무한한 영은 우주 영을 통해서 이 영역의 자녀들과 개인적 접촉을 유지하며, 이들은 파라다이스 창조 아들의 행정 및 창조의 동료가 된다.
5:3.7 (66.3) 진지한 예배는, 진화되는 혼의 지배 밑에서, 그리고 관계된 생각 조절자의 신성한 방향 지도를 받고, 인격의 모든 힘을 동원함을 뜻한다. 물질적 한계가 있는 지성은, 참 예배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결코 깊이 의식할 수 없다. 예배하는 체험의 현실을 사람이 깨닫는 것은, 진화하는 그 불사의 혼의 발육 상태에 주로 좌우된다. 혼의 영적 성장은, 지적 자의식과 전혀 상관 없이 일어난다.
5:3.8 (66.4) 신을 예배하는 체험은 약정한 조절자가 사람의 혼이 말할 수 없는 소망과 입 밖에 낼 수 없는 희망을 신성한 아버지께 전하려는 숭고한 시도이며, 하나님을 찾는 필사 지성과 하나님을 계시하는 불사의 조절자가 공동으로 이 혼을 창조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관계된 영의 인도를 받고서, 영적으로 높아지는 자아가 우주의 아버지의 아들, 믿음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교통하려고 애쓰는 데 그 물질적 지성이 찬성하는 행동이다. 필사자의 지성은 예배 드리는 데 찬성하고, 불사의 혼은 예배를 갈망하고 개시한다. 신다운 조절자의 계심은 필사자의 지성과 생성되는 불사의 혼을 위하여 그러한 예배를 지휘한다. 최종으로 분석해 보면, 참된 예배는 지성ㆍ상물질ㆍ영ㆍ인격, 이 네 가지 우주 수준에서 실현되는 체험이 된다―지성과 혼과 영이 의식(意識)하고, 인격 안에서 이 세 가지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5:4.1 (66.5) 하나님을 찾아 떠나는 여행에서, 진화 종교의 도덕은 두려움의 추진력으로 사람을 앞으로 민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몹시 바라니까, 계시 종교는 사랑의 하나님을 찾으라고 사람을 끌어당긴다. 그러나 종교는 단지 “절대로 의존”하고 “살아남기를 보장”받는 소극적 느낌이 아니다. 종교는 인류에 봉사하는 데 기초를 두고 신에 도달하는, 생생하고 힘찬 체험이다.
5:4.2 (66.6) 참 종교가 당장에 주는 큰 도움은 인간의 체험 속에서 지속되는 통일성, 곧 오래 가는 평화와 깊은 확신이 서는 것이다. 원시인에게는, 다신교조차도 신에 대한 진화적 개념이 비교적 통일된 것이며, 다신교에서 일신교의 싹이 튼다. 머지 않아 하나님이 가치 있는 실체요, 중요한 본질이요, 진실한 생명이라고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다.
5:4.3 (67.1) 하나님은 운명 결정자일 뿐 아니라, 사람의 영원한 목표이다. 인간의 모든 비종교 활동은, 우주를 구부려서 자신의 그릇된 용도에 쓰기를 추구한다. 참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자아를 우주와 동일시하기를 구하며, 그리고 나서 이렇게 통일된 자아의 활동을 우주 가족의 동료 존재, 인간 및 초인간 존재에게, 봉사하는 데 바치려고 애쓴다.
5:4.4 (67.2) 철학과 예술의 분야는, 인간 자아의 비종교 활동과 종교 활동 사이에 끼어 있다. 예술과 철학을 통해서, 물질에 머리를 쓰는 사람은 영원한 의미를 담은 영적 실체와 우주의 가치를 숙고하라고 유혹을 받는다.
5:4.5 (67.3) 어떤 종교도 신을 예배하기를 가르치고 인간이 구원 받는다는 어떤 교리를 가르친다. 불교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끝없는 평안을 약속한다. 유대교는 어려움에서 벗어난다, 사람이 올바르면 번영한다는 것을 약속한다. 그리스인의 종교는 아름다움을 실현함으로 부조화와 더러움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약속했다. 기독교는 죄로부터 구원, 거룩하게 됨을 약속하고, 모하메드교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준엄한 도덕 기준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예수의 종교는 자아를 벗어나는 것이요, 시간 세계와 영원 속에서 인간이 고립되는 잘못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다.
5:4.6 (67.4) 히브리인의 종교는 선에 기초를 두고, 그리스인은 아름다움에 두었으며, 두 종교가 진리를 추구했다. 예수는 사랑의 하나님을 보여주었고, 사랑은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 모두 포함한다.
5:4.7 (67.5) 조로아스터 교인에게는 도덕률을 가르치는 종교가 있었다. 힌두 교인에게는 형이상학의 종교가 있고 공자(孔子)의 추종자에게는 윤리의 종교가 있었다. 예수는 봉사하는 종교를 실천했다. 이 모든 종교가 예수의 종교에 이르는 올바른 접근법이므로 가치가 있다. 종교는 인간의 체험에서 선하고 아름답고 참된 모든 것을 영적으로 통일하는 실체가 될 운명을 가졌다.
5:4.8 (67.6) 그리스인의 종교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표어가 있었고, 히브리인은 “너의 하나님을 알라”는 가르침에 집중했으며, 기독교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목표를 둔 복음을 전파했다. 예수는 “하나님을 알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라”는 복음을 선포했다. 종교의 목적에 대하여 이처럼 다른 개념들은 다양한 생활 상황에서 개인의 태도를 결정하고, 예배의 깊이, 그리고 사람이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버릇의 성질이 어떠한가 예시한다. 어떤 종교이든 그 영적 지위는 어떤 성질의 기도를 드리는가에 따라 측정해도 좋다.
5:4.9 (67.7) 얼마큼 인간답고 질투하는 하나님 개념은, 다신교에서 숭고한 일신교로 넘어가는 사이에 불가피한 과도기 현상이다. 신을 인격화하는 높은 개념은, 순전한 진화 종교가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이다. 기독교는 신의 인격화 개념을 인간의 이상으로부터 초월적 신 개념,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 인격 개념의 높이까지 들어올렸다. 이것이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까지 신을 인격화한 것이다.
5:4.10 (67.8) 기독교의 하나님 개념은 세 가지 다른 가르침을 통합하려는 시도이다:
5:4.11 (67.9) 1. 히브리인의 개념―도덕적 가치의 옹호자인 하나님, 올바른 하나님.
5:4.14 (68.2) 따라서 기독교의 복합 교리는 일관성을 얻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이 뻔하다. 이러한 어려움은 초기 기독교의 교리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나사렛 예수, 타르수스의 바울, 다른 이 세 사람이 몸소 겪은 종교적 체험에 대체로 기초를 두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악화되었다.
5:4.15 (68.3) 예수의 종교적 일생을 연구하면서, 예수를 긍정적으로 보라. 그가 죄 없다는 것보다 그의 올바름과 사랑으로 봉사를 베푼 것을 생각하라. 예수는 히브리인의 하늘 아버지 개념에서 나타나는 소극적 사랑을, 죄짓는 사람조차 포함하여 모든 사람의 아버지인 하나님의 더 높은 사랑, 적극적이고 인간을 사랑하는 애정의 높이까지 들어올렸다.
5:5.1 (68.4) 도덕은 자의식하는 이성(理性)에 그 기원이 있다. 도덕은 동물을 초월하지만 온전히 진화된 것이다. 인간의 진화는 그 진화가 전개되면서, 조절자가 수여되고 진리의 영이 퍼부어지기 전까지 얻은 재산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도덕 수준에 도달한다고 해서 사람이 필사자로 사는 진짜 투쟁을 벗어나게 하지는 않는다. 사람의 물리적 환경은 살기 위한 싸움을 수반하고, 사회적 배경은 윤리적 조정을 필요로 한다. 도덕적 상황은 이성의 가장 높은 분야에서 선택하기를 요구하며, 영적 체험은 (하나님을 깨달았으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찾고 그처럼 되려고 진지하게 애쓰기를 요구한다.
5:5.2 (68.5) 종교는 과학적 사실, 사회에 대한 책임, 철학의 가정(假定), 또는 도덕이 암시하는 의무에 기초를 두지 않는다. 종교는 인간이 생활 상황에 대처하는 독립된 분야이며, 종교는 도덕이 생긴 뒤 인간이 성장하는 모든 단계에서, 어김없이 겉으로 드러난다. 종교는 가치를 실현하고 우주와 친교를 가지는 다음 네 수준 모두에 침투한다: 자아를 보호하는 물리적 수준, 곧 물질 수준. 친교하는 사회 수준, 곧 감정 수준. 이성이 작용하는 도덕 수준, 곧 의무 수준. 신을 예배함으로 우주와 친교함을 의식하는 영적 수준.
5:5.3 (68.6) 사실을 추구하는 과학자는 하나님이 첫째 근원, 힘을 가진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다감한 예술가는 하나님이 아름다움의 이상(理想), 심미감을 가진 하나님이라고 본다. 이치를 따지는 철학자는 때때로, 우주를 통일하는 하나님, 아니 범신적 신까지도 가정해 보고 싶어 한다. 믿음을 가진 종교가는 살아남는 것을 보살피는 하나님, 하늘에 계신 아버지,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
5:5.4 (68.7) 도덕적 행위는 언제나 진화된 종교보다 먼저 생기며, 계시된 종교의 일부가 되는 일도 있지만, 결코 종교적 체험의 전부는 아니다. 사회에 봉사하는 것은 도덕적 생각과 종교적 생활에서 생기는 결과이다. 도덕성은 생물학적으로 더 높은, 영적 수준의 종교적 체험으로 이끌지 않는다. 추상적 아름다움의 찬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격찬도 통일성의 존중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5:5.5 (68.8) 진화된 종교는 과학ㆍ예술ㆍ철학의 어머니요, 이것은 조절자가 수여되고 진리의 영이 오는 것까지 포함하여, 계시된 종교를 받아드리는 수준까지 사람을 높여 주었다. 인간 존재가 진화하는 그림은, 종교에서 시작하고 종교에서 끝난다. 종교의 질이 아주 다르지만, 하나는 진화로 생긴 생물학적 종교요, 다른 하나는 시대적으로 계시되는 종교이다. 그래서 종교가 사람에게 정상이고 자연스러운 한편, 종교는 또한 사람이 선택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뜻을 거역하여 신앙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5:5.6 (69.1) 종교적 체험의 본질이 영적 체험이니까, 결코 물질적인 머리로 이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신학, 곧 종교의 심리학이 생긴다. 인간이 하나님을 깨닫는다는 기본 교리는 유한자가 이해하기에 역설(逆說)을 만들어낸다. 인간의 논리로 따지고 유한자가 추리해도 신이 안에 계신다는 개념, 하나님이 모든 개인 안에 계시고 그 일부라는 개념을 하나님의 초월 관념, 신이 온 우주를 지배한다는 관념과 조화시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지적 예배를 정당화하고 인격자가 살아남을 희망을 확인하기 위해서, 성격을 가진 하나님이라는 초월 개념을 믿음으로 이해하고, 바로 그 하나님의 분신(分身)이 마음 속에 계심을 깨닫는 가운데, 이 두 가지 주요한 신 개념이 통일되어야 한다. 종교의 실체를 필사자가 지적으로 이해할 능력이 도무지 없다는 사실에, 종교의 어려움과 역설이 본래부터 생긴다.
5:5.7 (69.2) 필사자는 땅에서 현세에 머무르는 시절에도, 종교적 체험에서 세 가지 큰 만족을 얻는다:
5:5.8 (69.3) 1. 지적으로 사람은 인간 의식이 좀더 조화되어 만족감을 얻는다.
5:5.9 (69.4) 2. 철학적으로 사람은 도덕적 가치에 대한 그의 이상이 실현되는 것을 즐긴다.
5:5.10 (69.5) 3. 영적으로 신이 동반하는 체험을 맛보면서, 참된 예배로 영적 만족감을 얻으면서 사람은 잘 자란다.
5:5.11 (69.6) 영역의 진화하는 필사자가 체험하는 하나님 의식은 세 가지 다른 요소, 곧 실체를 의식하는 세 가지 차별되는 수준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첫째로, 지적 의식―하나님 관념을 이해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혼 의식―하나님의 이상을 깨우치는 것이 뒤따른다. 마지막으로, 영 의식―하나님이 영 실체임을 비로소 깨닫는다. 아무리 어설피 신을 깨닫더라도, 그에 필요한 이 요소들을 조화시킴으로 필사자의 인격은 항상 어떤 의식 수준에서도 하나님의 성격을 깨닫는다. 최후 군단에 도달한 필사자의 경우에, 시간이 지나면 이 모두가 하나님이 최상인 것을 깨닫도록 이끌고, 그 뒤에 궁극에 하나님의 궁극성을 깨닫게 될지 모르며, 이것은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초한하게, 초월 의식하는 어떤 단계이다.
5:5.12 (69.7) 하나님을 의식하는 체험은 대대로 똑같지만, 인간의 지식이 향상되는 새 시대마다 하나님에 대한 철학적 개념과 신학적 정의가 바뀌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 종교적 의식(意識)은 하나의 우주 현실이다. 그러나 종교적 체험이 아무리 정당(진실)하더라도, 그 체험은 기꺼이 지적 비판을 받고 이치에 맞는 철학적 해석을 허락해야 한다. 종교적 체험이 인간의 체험 전체와 동떨어진 것이 되기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5:5.13 (69.8) 인격이 영원히 살아남는 것은 전적으로 필사자의 지성이 선택하는 데 달려 있고, 그 결정은 불멸의 혼이 살아남는 가능성을 좌우한다. 지성이 하나님을 믿고 혼이 하나님을 알 때, 보살피는 조절자와 함께, 지성도 혼도 하나님을 바랄 때, 그때 살아남는 것이 보장된다. 지능의 한계, 교육의 부족, 교양의 결핍, 내세울 수 없는 사회적 지위, 아니 불행하게도 교육ㆍ교양 및 사회적 혜택을 받지 못하여 생기는 인간의 열등한 도덕 기준조차, 그렇게 불운하고 인간의 조건이 불리해도 믿는 개인 속에 신의 영이 계신 것을 무효로 만들 수 없다. 신비의 훈계자가 깃드는 것은 시작이며, 불멸의 혼이 자라고 살아남는 잠재 가능성을 보장한다.
5:5.14 (70.1) 필사 부모가 자식을 낳는 능력은 그들의 교육 지위, 문화적ㆍ사회적 또는 경제적 지위에 달려 있지 않다. 자연 조건 밑에서 부모 요인들의 결합은 자식을 낳기에 아주 넉넉하다. 그러한 영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처럼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정직하게 택한다면, 그 필사자 안에서 살아남는 자질을 가진 불사의 혼을 비로소 생산하고 기르는 데는 신다운 조절자와 연합하여, 옳고 그른 것을 헤아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의 지성 외에 필요한 것이 없다.
5:6.1 (70.2) 우주의 아버지는 성격자의 하나님이다. 인격 지위를 가지고 가장 비천한 필사 물질 인간을 비롯하여 창조자의 위엄과 신의 지위를 가진 가장 높은 성격자에 이르기까지, 우주 성격자의 분야는 그 중심과 테두리가 우주의 아버지 안에 있다. 아버지 하나님은 모든 성격을 주고 보존하는 분이다. 마찬가지로, 파라다이스 아버지는 마음을 다하여 신의 뜻 행하기를 택하는 모든 유한 성격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처럼 되기를 몹시 바라는 자가 돌아갈 운명이다.
5:6.2 (70.3) 성격은 우주에서 풀리지 않은 신비 중에 하나이다. 다양한 계급과 수준의 성격을 구성하는 데 들어가는 요소에 대하여 우리는 적당한 개념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바로 성격의 정말 본질이 무엇인가 넉넉히 알지 못한다. 한데 합쳐서 인간 성격이 타고 다니는 몸을 이루는 수많은 요소를 우리는 뚜렷이 파악하고 있지만, 그러한 유한한 인격의 본질과 의미를 우리는 넉넉히 이해하지 못한다.
5:6.3 (70.4) 최소한의 자의식으로부터 최대한의 하나님 의식에 이르기까지, 인격은 지성 자질을 소유하는 모든 인간에게 잠재한다. 그러나 지성 자질만으로 인격이 아니요, 영이나 물리적 에너지도 인격이 아니다. 인격이란 물질ㆍ지성ㆍ영 에너지가 결합되고 조정된 이 살아 있는 조직에 아버지 하나님이 혼자 수여한, 우주 실체의 그 질과 가치이다. 인격은 점진적으로 얻는 것도 아니다. 물질 인격이거나 영적 인격일 수 있지만, 인격은 있든지 아니면 없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인격이 아닌 다른 것들은, 파라다이스 아버지가 직접 행위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결코 인격을 가진 자의 수준에 다다르지 못한다.
5:6.4 (70.5) 인격의 수여는 우주의 아버지의 독점 기능, 곧 살아 있는 에너지 체제를 인격화하는 것이며, 그 체제에 우주의 아버지는 상대적 창조 의식과 거기에 자유 의지로 통제하는 속성을 준다.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따로 떨어진 성격자는 아무도 없고,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 성격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성격에 있는 절대적 조절자 알맹이뿐 아니라, 인간 자아의 근본적 속성은 우주에게 우주의 아버지가 혼자 베푸는 성격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주신 것이다.
5:6.5 (70.6) 선(先)인격 지위를 가진 조절자는 수많은 종류의 필사 인간에게 깃들며, 그처럼 바로 이 존재가 죽음을 겪고 살아남아서, 궁극에 영에 도달하는 가능성을 가진 상물질 인간으로 인격화되는 것을 보장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격을 받은 인간의 지성에, 영원한 하나님 영의 분신, 성격자인 아버지의 선(先)인격 선물이 깃들 때, 그때 이 유한한 인격은 신답고 영원한 자의 잠재성을 소유하고, 궁극위와 비슷한 운명을 바라고, 아니 절대자를 깨달으려고 손을 뻗기도 하기 때문이다.
5:6.6 (71.1) 신다운 성격을 수용할 능력은 선(先)인격 조절자에게 본래부터 있다. 인간의 성격을 받을 능력은, 인간 존재가 부여받은 우주 지성 자질에 잠재한다. 그러나 필사 인간의 물질 생명이 타고 다니는 수단이, 사람을 해방하는 우주의 아버지의 신성에 영향을 받고, 이처럼 자의식을 가지고 (비교적)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창조하는 인격자로서 체험의 바다로 나가기까지, 필사 인간의 체험적 인격은 활동하는 기능적 실체로서 관찰될 수 없다. 물질적 자아는 참으로, 그리고 아무 조건 없이 인격을 가졌다.
5:6.7 (71.2) 물질적 자아는 인격과 신분, 현세의 신분이 있으며, 선(先)인격 영 조절자도 신분, 영원한 신분이 있다. 이 물질적 인격과 선(先)인격 영(靈)은 그들의 창조 속성을 모아서, 살아남는 불사의 혼 신분을 빚어낼 수 있다.
5:6.8 (71.3) 이처럼 불사의 혼이 자라도록 마련하고, 사람의 속 자아를 선행(先行)하는 원인에 절대로 의존하는 사슬로부터 풀어놓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옆으로 비켜서신다. 이제 적어도 영원한 운명에 관한 한, 원인에 대하여 반응하는 사슬로부터 사람이 이처럼 풀려나고, 불멸의 자아, 곧 혼이 성장하도록 준비가 되었기 때문에, 바로 그 사람은 살아남는 영원한 자아의 창조를 의지(意志)하거나 그 창조를 억제하기만 하면 되며, 이 영원한 자아는 택하는 대로 자기 것이 된다. 넓은 온 우주에서 어떤 다른 존재, 물력, 창조자, 또는 대리자도, 필사자의 자유 의지가 가진 절대 주권에 조금도 간섭할 수 없으며, 이는 선택하는 필사자 인격의 영원한 운명에 관하여, 선택하는 영역 안에서 그 자유 의지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영원히 살아남는 것에 관하여 말하자면, 하나님은 물질적 필사자의 의지가 최고 권한을 가졌음을 선포했고 이 선포는 절대적이다.
5:6.9 (71.4) 인간의 성격을 수여하는 것은, 선행하는 원인에 대하여 종처럼 반응하지 않도록 사람을 비교적 해방시킨다. 그러한 모든 도덕적 존재의 인격은, 진화된 존재이든 아니든, 우주의 아버지의 성격에 집중된다. 영원한 하나님의 광대한 보편적 가족 사회와 친교 집단을 구성하는, 존재의 그 친족 관계로 말미암아, 그들은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 앞으로 늘 이끌린다. 모든 성격에는 신답게 저절로 생기는 친족 관계가 있다.
5:6.10 (71.5) 온 우주의 성격 회로는 우주의 아버지의 몸에 집중된다. 파라다이스 아버지는 자의식하며 존재하는, 모든 수준의 성격자를 모두 친히 의식하고 그들과 친히 연락을 가진다. 그리고 성격자가 온 창조를 이렇게 의식하는 것은 생각 조절자의 임무와 별도로 존재한다.
5:6.11 (71.6) 모든 인력이 파라다이스 섬에서 회로로 연결되고 모든 지성이 합동 행위자에, 그리고 모든 영이 영원한 아들 안에서 연결되는 것과 같이, 모든 성격은 우주의 아버지가 몸소 계신 앞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회로는 어떤 성격자가 예배를 드려도 이를 최초의 영원한 성격자에게 어김없이 전해 준다.
5:6.12 (71.7) 조절자가 깃들지 않는 성격자에 관하여 말하자면, 우주의 아버지가 선택하는 자유의 속성도 수여했고, 그러한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신의 사랑의 큰 회로, 곧 우주의 아버지의 성격 회로에 둘러싸인다. 하나님은 모든 참 성격자가 주권을 가지고 선택하게 한다. 인격을 가진 어떤 인간에게도 영원한 모험을 하라고 강제할 수 없다. 오로지 자유 의지의 하나님의 아들, 자유 의지를 가진 아들들이 자유 의지로 선택하는 데 반응하여 영원의 문이 열린다.
5:6.13 (72.1) 이것이 살아 계신 하나님과 시간 세계 자녀들의 관계를 발표하려는 나의 노력을 나타낸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보건대, 하나님이 너희의 우주 아버지요, 너희는 모두 행성에서 낳은 자식임을 되풀이하는 것보다 나는 더 유익한 일을 할 수 없다.
5:6.14 (72.2) [이 글은 유버르사의 한 신성한 조언자가 우주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발표한 시리즈의 다섯째이자 마지막 글이다.]
6:0.1 (73.1) 영원한 아들은 우주의 아버지의 “처음” 성격 개념이자 절대적 개념을 완전히 최종으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친히, 절대로 표현할 때는 언제든지, 어떻게 하든지, 아버지는 영원한 아들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 영원한 아들은 언제나 살아 있는 신성한 말씀이었고, 이제도 그렇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것이다. 이 영원한 아들은 영원한 우주의 아버지와 함께, 그리고 그의 몸소 계심을 바로 덮으며, 만물의 중심에 거하신다.
6:0.2 (73.2) 인간의 지능이 생각하는 경로에 접근하려는 목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처음” 생각에 관하여 말하며, 영원한 아들의 불가능한 시간적 기원을 언급한다. 이러한 언어의 왜곡은, 필사 인간의 지성, 시간에 제약받는 지성과 접촉하고 절충하려는 우리의 최선의 노력을 가리킨다. 순서를 따지는 의미에서, 우주의 아버지에게 처음 생각이 있을 수 없고, 영원한 아들도 계시기 시작한 적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생각의 상징으로, 시간에 제한을 받는 필사자의 머리가 알아듣도록 영원의 실체들을 묘사하고 그러한 시간적 순서 개념으로 영원에 있는 관계들을 표현하라고 지시를 받았다.
6:0.3 (73.3) 영원한 아들은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신다운 실체, 무제한의 영, 그리고 절대 성격자에 관한 개념, 보편적이고 무한한 개념이 영으로 성격화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아들은 우주의 아버지 창조자 신분의 신성한 계시가 된다. 아들의 완전한 성격은 실제로 아버지가, 영적인 것, 의지가 있는 것, 목적이 있는 것, 성격이 있는 것들의 모든 의미 및 가치의 영원하고 보편적 근원임을 드러낸다.
6:0.4 (73.4) 시간 세계의 유한한 지성이,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영원ㆍ무한한 존재들의 관계에 대하여 어떤 순서 개념을 가질 수 있게 하려는 노력으로, “아버지의 개념, 성격이 있고 보편적이고 무한한 처음 개념”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우리는 개념을 함부로 사용한다. 신들의 영원한 관계에 대하여 어떤 적당한 개념이라도 인간의 머리가 알아듣게 전하는 것이 나에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영원한 존재들의 관계에 대하여, 후세에 유한한 지성에게 얼마큼의 관념이라도 허락할 그러한 용어들을 사용한다. 우리는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솟아나왔다고 믿는다. 아무 조건 없이 두 분은 영원하다고 우리는 가르침을 받았다. 따라서 아버지로부터 생겨나고, 바로 그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영원한, 아들의 이 신비를 어떤 시간 세계의 인간도 결코 충분히 깨달을 수 없는 것이 명백하다.
6:1.1 (73.5) 영원한 아들은 하나님이 최초에 하나만 얻은 아들이다. 그는 아들 하나님, 신의 둘째 분이며, 만물의 공동 창조자이다. 아버지가 위대한 첫째 근원 중심인 것처럼, 아들은 위대한 둘째 근원 중심이다.
6:1.2 (74.1) 영원한 아들은 온 우주의 영적 정부에서 영적 중심이요 신다운 행정가이다. 우주의 아버지는 처음에 창조자이고 다음에 통제자이다. 영원한 아들은 처음에 공동 창조자이고, 다음에 영적 행정가이다. “하나님은 영이며,” 아들은 그 영을 성격으로 계시한 것이다. 첫째 근원 중심은 절대 의지이며, 둘째 근원 중심은 절대 성격이다.
6:1.3 (74.2) 우주의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하거나 아들이 나란히 행동하지 않고는 결코 창조자로서 몸소 활동하지 않는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었더라. 만물을 그가 만드셨고, 창조된 아무것도 그가 아니고는 창조되지 않았더라” 했을 때 신약의 저자(著者)가 영원한 아들을 언급했더라면 그 말이 진실이었을 것이다.
6:1.4 (74.3) 영원한 아들의 한 아들이 유란시아에 나타났을 때, 사람의 모습을 입은 이 신다운 존재와 사귄 사람들은, 그가 “처음부터 계셨고, 우리가 소문을 들은 적이 있고, 우리의 눈으로 본 적이 있으며, 우리가 우러러보았고, 우리의 손으로 만져본 적이 있는 분, 아니 생명의 말씀까지도 되시는 분”이라고 언급했다. 최초의 아들과 마찬가지로, 이 수여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왔고, 이것은 그가 땅에서 드린 기도 중 하나에서 비춘 바와 같다. “자 이제, 아 내 아버지여, 아버지 자신으로, 이 세계가 생기기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영광으로, 나를 영화롭게 하소서.”
6:1.5 (74.4) 영원한 아들은 여러 우주에서 다른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 우주에서 그는 동위 근원, 공동 창조자, 준 절대자로 알려져 있고, 초우주 본부 유버르사에서 우리는 아들을 동위 영 중심, 영원한 영 행정가로 부른다. 너희 지역 우주 본부 구원자별에서 이 아들은 영원한 둘째 근원 중심이라 기록되어 있다. 멜기세덱들은 그를 아들 중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사는 너희 체계의 구체들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너희 세계에서는 이 최초의 아들과 한 동급의 창조 아들, 유란시아의 필사 민족들에게 자신을 수여했던, 네바돈의 미가엘을 혼동해 왔다.
6:1.6 (74.5) 어떤 파라다이스 아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아들”이라는 칭호를 이 최초의 아들, 둘째 근원 중심을 부르는 데 쓰도록 남겨놓는 습관에 젖어 있다. 이 분은 우주의 아버지와 함께, 힘차고 완전한 중앙 우주를 공동으로 창조하신 분이며, 이 무한한 신들로부터 솟아나오는 다른 모든 신다운 아들을 공동으로 창조하신 분이다.
6:2.1 (74.6) 영원한 아들은 우주의 아버지와 똑같이, 변치 않고 무한히 믿을 만하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영적이고, 똑같이 참으로 제한이 없는 영이다. 낮은 기원을 가진 너희에게는, 아들이 우주의 아버지보다 너희가 접근하기가 한 걸음 가까우니까, 그는 더 친히 대하는 듯 보일 것이다.
6:2.2 (74.7) 영원한 아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다. 그는 온전히 아버지와 같다. 사실, 영원한 아들은 온 우주에게 친히 나타나는 아버지 하나님이다. 그래서,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도다”하는 것은 영원한 아들, 그리고 그와 동격인 어느 창조 아들에 대해서도 참말이었고, 이제도 참말이요, 언제까지나 참말일 것이다.
6:2.3 (74.8) 아들의 성품은 영 아버지와 온통 같다. 우주의 아버지를 예배할 때, 우리는 실제로 아들 하나님과 영 하나님을 동시에 예배한다. 아들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신성하게 실재하며 그 성품이 영원하다.
6:2.4 (75.1) 아들은 아버지의 무한하고 초월적인 올바름을 모두 가졌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거룩한 성질도 또한 모두 반영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완전함을 함께 가지며, 모든 불완전한 인간이 신의 완전함에 도달하려는 영적 노력을 돕는 책임을 공동으로 가진다.
6:2.5 (75.2) 영원한 아들은 아버지의 신 특성과 영적 속성을 모두 소유한다. 아들은 하나님의 절대적 성격과 영이 충만히 된 분이며, 아들은 온 우주의 영적 정부를 친히 관리할 때 이 성질을 드러낸다.
6:2.6 (75.3) 정말로, 하나님은 보편적 영이다. 하나님은 영이며, 하나님의 이 영적 성품은 영원한 아들의 신 안에 집중되고 성격화된다. 모든 영적 특징은 첫째 근원 중심의 보편성과 구별함으로, 아들 안에서 크게 돋보인다. 아버지가 그의 영 성품을 아들에게 나눠주는 것 같이, 두 분은 함께 신성한 영을 넉넉히, 그리고 아낌없이 합동 행위자, 무한한 영에게 나누어준다.
6:2.7 (75.4) 아들이 보편적으로 가치 있는, 순전한 영적 아름다움의 실현에 더 헌신하는 듯이 보이는 것을 제외하고, 아버지와 아들은 똑같이 진리를 사랑하고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6:2.8 (75.5) 신답게 선한 면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나는 아무런 차이를 식별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그의 우주 자녀들을 사랑하고, 영원한 아들은 아버지로서 또한 형으로서, 모든 생물을 바라본다.
6:3.1 (75.6) 아들은 삼위일체의 응보와 올바름을 함께 가지지만,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무한히 성격화함으로 신의 이 두 가지 특성이 빛을 잃게 만든다. 아들은 우주에게 신의 사랑이 계시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인 것처럼, 아들은 자비이다. 아들은 아버지보다 더 사랑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다른 방법으로 인간에게 자비를 보일 수 있으니, 이는 그가 아버지처럼 시초의 창조자일 뿐 아니라, 또한 바로 그 아버지의 영원한 아들이며, 이로서 우주의 아버지의 다른 모든 아들이 가지는 아들 체험을 함께 가지기 때문이다.
6:3.2 (75.7) 영원한 아들은 모든 창조에게 크게 자비를 베푸는 봉사자이다. 자비는 아들의 영적 특성의 본질이다. 영원한 아들의 명령이 둘째 근원 중심의 영 회로를 타고 떠나감에 따라서, 그 명령은 자비의 음정을 띤다.
6:3.3 (75.8) 영원한 아들의 사랑을 헤아리기 위하여 너희는 먼저 그 신다운 근원, 사랑인 아버지를 파악해야 하고, 다음에 무한한 영과 거의 한없는 그의 봉사 성격자 무리가 널리 베푸는 봉사에 이 무한한 애정이 펼쳐지는 것을 보아야 한다.
6:3.4 (75.9) 영원한 아들의 사명은 온 우주에게 사랑의 하나님을 드러내는 데 집중된다. 신다운 이 아들은, 인자하신 아버지에게 비천한 인간을 사랑하라고, 시간 세계의 죄인들에게 자비를 보이라고 설득하려고 애쓰는 천한 일에 종사하지 않는다. 공간의 물질 세계에서 사는 신분 낮은 인간에게 자비를 보이라고 우주의 아버지에게 호소하는 영원한 아들을 상상하다니 얼마나 잘못인가! 그러한 하나님 개념이야말로 촌스럽고 괴상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들이 베푸는 모든 자비로운 봉사가, 두루 사랑하고 무한히 동정심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을 직접 드러낸다는 것을 너희는 깨달아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이 베푸는 자비의 진정하고 영원한 근원이다.
6:3.5 (75.10) 하나님은 사랑이요, 아들은 자비이다. 자비는 사랑을 응용한 것이며, 영원한 아들의 몸 안에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우주의 아들의 사랑은 마찬가지로 보편적이다. 남녀의 구별이 있는 행성에서 사랑을 이해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과 견줄 만하고, 영원한 아들의 사랑은 어머니의 애정에 가깝다. 그러한 실례(實例)는 정말로 투박하지만, 내가 이 예를 드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사랑에 신다운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질과 기법에 차이가 있음을 인간의 머리가 알아듣게 전달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6:4.1 (76.1) 영원한 아들은 영적 수준의 우주 실체를 자극한다. 모든 우주에 실재하는 것들과 가지는 관계에서, 아들의 영적 힘은 절대적이다. 아들은 영 인력(引力)을 절대로 장악함으로, 차별화되지 않은 모든 영 에너지의 상호 관계, 그리고 현실화된 모든 영 실체를 완전히 통제한다. 순수하고 조각이 되지 않은 모든 영, 모든 영적 존재와 가치는 근원적 파라다이스 아들의 무한한 인력에 민감하다. 만일 영원한 미래에 한없는 우주의 출현을 구경하게 된다면, 최초의 아들의 영 인력과 영 동력은, 그러한 한없는 창조의 영적 통제와 효율적 관리에 전적으로 적절한 것이 드러날 것이다.
6:4.2 (76.2) 아들은 오로지 영의 분야에서만 전능하다. 우주 행정을 담당하는 영원한 체제에서, 헤프고 필요 없는 기능의 중복은 결코 구경하지 못한다. 신들은 우주에게 베푸는 봉사를 쓸모없이 되풀이하는 사치에 빠지지 않는다.
6:4.3 (76.3) 최초의 아들의 두루 계심은 온 우주를 영적으로 통일한다. 모든 창조의 영적 단결은 영원한 아들의 신다운 영의 계심, 어디서나 활약하는 계심에 달려 있다. 아버지의 영적 계심을 상상할 때, 우리는 이를 영원한 아들의 영적 계심과 구별하여 생각하기 힘든 것을 발견한다. 아버지의 영은 영원히 아들의 영 안에 거한다.
6:4.4 (76.4) 아버지는 영적으로 두루 계신 것이 틀림없으나 그러한 두루 계심은 영원한 아들이 어디서나 영으로 활동하는 것과 뗄 수 없는 듯하다. 그러나 두 가지 영적 성질로 아버지와 아들이 계시는 어떤 상황에도 우리는 아들의 영이 아버지의 영과 조화된다고 믿는다.
6:4.5 (76.5) 성격자들과 연락할 때, 아버지는 성격 회로에서 활동한다. 영적 우주와 개인적 연락이 있고 이를 탐지할 수 있을 때, 아버지는 신 총체의 분신 속에 나타나며, 이 아버지 분신(分身)들은, 우주에서 언제 어디서 나타나든지, 홀로 독특한 혼자만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모든 그러한 상황에서, 아들의 영은 분신이 된 우주의 아버지의 계심이 가진 영적 기능과 조화된다.
6:4.6 (76.6) 영원한 아들은 영적으로 두루 계신다. 영원한 아들의 영은 너와 함께, 너의 둘레에 있는 것이 아주 확실하지만, 신비의 훈계자처럼, 네 안에, 너의 일부로서 있지 않다. 안에 깃드는 아버지의 분신은 인간 지성을 점진적으로 신의 태도에 맞추어 조절하고, 그리고 나서, 하늘 가는 그런 지성은 둘째 근원 중심의 전능한 영 인력 회로가 당기는 영적 힘에, 갈수록 더 민감하게 된다.
6:4.7 (76.7) 영원한 아들은 보편적인 영적 자의식을 가진다. 지혜 면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완전히 동일하다. 지식, 곧 전지(全知)의 분야에서, 우리는 첫째 근원과 둘째 근원을 가릴 수 없다. 아버지처럼 아들은 모든 것을 안다. 그는 우주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결코 놀라지 않고, 처음부터 끝을 이해한다.
6:4.8 (77.1) 아버지와 아들은 온 우주의 모든 영과 영답게 변화된 존재의 수와 장소를 정말로 안다. 두루 계시는 자신의 영 덕택으로 아들은 모든 것을 알 뿐 아니라, 아버지와 합동 행위자와 똑같이, 아들은 최상 존재의 광대한 거울같은 지능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최상 존재의 지능은 일곱 초우주의 어떤 세계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도 항상 의식하고 있다. 그리고 파라다이스 아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모든 것을 안다.
6:4.9 (77.2) 인자하고 자비롭고 봉사하는 영적 성격자로서, 영원한 아들은 우주의 아버지와 온전히, 무한히 대등하다. 한편 낮은 영역에서 하늘 가는 존재들과 자비롭고 애정 깊은 모든 개인적 접촉을 가지면서, 영원한 아들은 지역 우주에 있는 그의 파라다이스 아들들과 똑같이 친절하고, 생각 깊고, 똑같이 참을성 있고 오래 견디는데, 이 파라다이스 아들들은 진화하는 시간 세계에 아주 빈번히 자신을 수여한다.
6:4.10 (77.3) 영원한 아들의 속성에 관하여 이제 더 늘어놓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예외를 이미 언급했으니, 아들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하고 올바르게 평가하려면 단지 아버지 하나님의 영적 속성을 연구하기만 하면 된다.
6:5.1 (77.4) 영원한 아들은 물리적 영토에서 친히 활동하지 않으며, 합동 행위자를 통할 경우를 제외하고, 인간 존재에게 지성을 베푸는 수준에서도 활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자격 제한은, 영원한 아들이 영적 전지(全知), 두루 계심, 전능, 이 모든 신의 속성을 충분히,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달리 어떤 방법으로도 제한하지 않는다.
6:5.2 (77.5) 영원한 아들은 신 절대자의 무한에 본래 있는 영 잠재성을 몸소 침범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잠재성은 현실화될 때, 아들의 영 인력 회로의 전능한 손에 붙잡히게 된다.
6:5.3 (77.6) 성격은 우주의 아버지가 홀로 주시는 선물이다. 영원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성격을 얻지만, 아버지 없이는 성격을 수여하지 않는다. 아들은 광대한 영의 무리를 낳지만, 그러한 파생물은 성격자가 아니다. 아들이 성격자를 창조할 때, 그는 아버지와 함께 창조하든지, 아니면 그러한 관계에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행동해도 좋은 합동 창조자와 함께 창조한다. 그러므로 영원한 아들은 성격자를 공동으로 창조하는 분이지만, 그는 아무 존재에게도 성격을 주지 않고, 결코 스스로, 혼자서, 성격 존재를 창조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 제한은 성격이 아닌 어떤 실체, 또는 모든 그런 실체를 창조하는 능력을 아들에게서 빼앗지 않는다.
6:5.4 (77.7) 영원한 아들은 창조자의 특권을 전해 주는 데 제한이 있다. 최초의 아들을 영원하게 만들면서, 아버지는 창조 속성을 가진 아들들을 나중에 더 생산하는 신의 행위에 아버지와 함께 참여하는 권능과 특권을 아들에게 주었고, 이러한 일을 두 분은 해 왔고 지금도 하신다. 그러나 이 동급의 아들들이 출산되고 나서, 창조자 특권은 더 물려줄 수 없는 듯하다. 영원한 아들은 오직 처음 성격화, 곧 직접 성격화할 경우에만 창조 능력을 물려준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이 공동으로 한 창조 아들을 성격화하려고 뭉칠 때 두 분은 목적을 이룬다. 그러나, 가장 높은 지역 우주 아들들의 경우에 한 창조 아들의 창조 속성이 아주 제한되어 반영되는 것처럼 보이는 데도, 그렇게 생겨난 창조 아들은 그 창조 특권을, 나중에 그가 창조해도 좋은 여러 계급의 아들들에게 결코 전해 주거나 넘겨줄 수 없다.
6:5.5 (78.1) 무한하고 순전한 성격 존재로서, 영원한 아들은 그의 성품을 조각낼 수 없고, 우주의 아버지와 무한한 영이 하는 것처럼, 그의 자아의 개별화된 부분을 다른 개체나 성격자에게 분배하고 수여할 수 없다. 그러나 아들은 한없는 영으로서 모든 창조를 비추도록 스스로를 수여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며, 모든 영 성격자와 영적 실체를 끊임없이 자신에게로 끌어당긴다.
6:5.6 (78.2) 영원한 아들은 모든 창조에 대하여 영 아버지를 몸으로 묘사한 그림이라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여라. 아들은 성격이며, 신의 의미에서 성격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처럼 신다운 절대 성격자는 부서지거나 조각날 수 없다. 아버지 하나님과 영 하나님은 진실로 성격을 가졌지만, 그들은 그러한 신 성격자인 외에, 모든 다른 것이기도 하다.
6:5.7 (78.3) 영원한 아들은 생각 조절자의 수여에 몸소 참여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는 영원한 과거에 우주의 아버지와 함께 의논하였고, 생각 조절자의 수여를 기획하면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우리의 모습을 따라서 필사 인간을 만들자”고 제안했을 때, 그 계획을 승인하고 끝없이 협조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영 분신이 네 안에 사는 것처럼, 아들의 영 계심도 너를 감싸고, 한편 이 둘은 하나가 되어 너의 영적 전진을 위해서 언제까지나 일한다.
6:6.1 (78.4) 영원한 아들은 영이요 지성을 가졌지만, 필사 지성이 이해할 수 있는 지성이나 영이 아니다. 유한ㆍ우주ㆍ물질ㆍ성격 수준에서 필사 인간은 지성을 깨닫는다. 사람은 또한 인격 이하 (동물) 수준에서 활동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에서 지성 현상을 지켜보지만, 초물질 존재와 결합되었을 때, 그리고 순전한 영 성격자의 일부인 지성의 본질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지성이 영 수준의 존재를 언급할 때, 그리고 지능의 영적 활동을 표시하려고 쓰일 때, 지성은 달리 구별되어야 한다. 영과 직접 연결된 지성 종류는, 영과 물질을 조정하는 지성이나 또는 오직 물질과 연합된 지성과도 비교할 수 없다.
6:6.2 (78.5) 영은 신분의 다양한 단계를 늘 의식하고, 이를 염두에 두며, 이에 열중한다. 어느 단계에서 지성이 없다면, 영 존재들의 단체에 영적 의식이 있을 수 없다. 지성에 상당하는 것, 즉 인식할 수 있고 남에게 인식될 수 있는 능력은, 신에게 저절로 생긴다. 신은 성격이거나, 선(先)인격, 초월 성격, 또는 비성격일 수 있지만, 신은 결코 지성이 없이 계시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결코 적어도 비슷한 개체나 존재나 또는 성격자와 교통하는 능력을 잃고 지내지는 않는다.
6:6.3 (78.6) 영원한 아들의 지성은 아버지의 지성과 같지만, 우주에서 어떤 다른 지성과도 다르며, 아버지의 지성과 함께, 합동 창조자가 낳은 다양하고 광범위한 지성들의 조상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지성, 곧 셋째 근원 중심의 절대 지성의 조상인 지능의 가장 좋은 예는 아마 생각 조절자의 선(先)지성인데, 이는 이 아버지 분신들이 전적으로 합동 행위자의 지성 회로 바깥에 있기는 해도 그들이 어떤 형태의 선지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이 그들의 신분을 이해하는 그대로 이해하고, 또한 인간의 생각 과정과 비슷한 것을 누린다.
6:6.4 (78.7) 영원한 아들은 온통 영답다. 사람은 아주 거의 전적으로 물질이다. 따라서 영원한 아들의 영 성격, 파라다이스를 도는 일곱 개의 영적 구체, 그리고 파라다이스 아들이 창조한 비성격인 것들의 본질에 관한 많은 것은, 너희가 네바돈 지역 우주에서 상물질(上物質) 승천을 마치고 나서, 영 지위를 얻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초우주를 거쳐서 하보나까지 계속 가는 동안에, “영의 지성”―영적 통찰력―을 비로소 부여받음에 따라서, 영이 감춘 많은 이러한 신비가 밝혀질 것이다.
6:7.1 (79.1) 영원한 아들은 무한한 성격자이며, 우주의 아버지는 삼자일체화 기법으로, 바로 그 무제한 성격의 사슬을 벗어버렸다. 이 기법의 덕택으로 그 뒤로 내내, 창조자와 생물로 가득 찬 항상 팽창하는 우주 위에, 아버지는 한없이 풍부하게 자신을 줄곧 수여해 오셨다. 아들은 절대 성격이요, 하나님은 아버지 성격이다―성격의 근원이요, 성격 수여자, 성격의 원인이다. 최초의 아들이 파라다이스 아버지로부터 그의 성격을 영원히 얻은 것 같이, 성격 존재는 누구나 우주의 아버지로부터 성격을 얻는다.
6:7.2 (79.2) 파라다이스 아들의 성격은 절대적이고 순전히 영답다. 이 절대 성격자는 또한 신답고 영원한 원본이니, 처음에 우주의 아버지가 합동 행위자에게 성격을 수여할 때 원본이었고, 그 뒤에 방대한 우주에 두루 존재하는 수많은 생물에게 성격을 수여할 때 그 원본이다.
6:7.3 (79.3) 영원한 아들은 참으로 자비로운 봉사자요 신다운 영이며, 영적 동력, 참 성격자이다. 아들은 하나님의 영적 성격의 본질이 여러 우주에게 표현된 것이다―비성격이고 신답지 않은 것, 비영적이고 순전한 잠재성인 모든 것을 벗어 버린 첫째 근원 중심의 그 총합과 알맹이이다. 그러나 영원한 아들의 하늘 같은 성격이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가 언어로 표현한 그림을 인간의 머리가 알아듣게 전달하기는 불가능하다. 우주의 아버지를 가려서 잘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은 무엇이나 거의 똑같은 영향력으로, 영원한 아들을 개념으로 인식하는 것을 막는다. 너희는 파라다이스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그때 어째서 이 절대 성격자의 특징을 유한한 지성이 이해하도록 내가 그려보일 수 없었는가 너희는 깨닫게 될 것이다.
6:8.1 (79.4) 성격의 신분ㆍ성품, 그리고 그 밖의 속성에 관하여 말하자면, 영원한 아들은 우주의 아버지와 완전히 대등한 분이요, 완전한 보완자, 영원한 짝이다. 하나님이 우주의 아버지인 것과 같은 의미로, 아들은 우주의 어머니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지위가 높던 낮던, 그들의 우주 가족을 이룬다.
6:8.2 (79.5) 아들이 어떤 분인가 이해하려면, 너희는 아버지가 어떤 분으로 계시되었는가 연구해야 한다. 두 분이 언제까지나 뗄 수 없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낮은 계급의 지능은, 신다운 성격자 두 분을 거의 구별할 수 없다. 바로 신들의 창조 활동에서 비롯된 자에게는 두 분을 따로 식별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중앙 우주에서 태어난 존재와 파라다이스에 있는 존재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우주를 통제하는 하나의 통일된 성격으로 볼 뿐 아니라, 우주 행정의 명백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따로 두 분의 성격자로서 인식한다.
6:8.3 (79.6) 성격자인 너희는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을 따로 된 분들로 파악해도 좋은데, 그들이 정말로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 행정에서 두 분이 한데 얽혀 있고 서로 연관이 있으니까, 두 분을 구별하는 것이 반드시 가능하지는 않다. 우주 사무에서, 헛갈리는 상호 관계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마주칠 때, 두 분의 활동을 분리하려는 시도가 반드시 유익하지는 않다. 다만 하나님은 창시하는 생각이요, 아들은 잘 표현된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여라. 각 지역 우주에서 이 불가분성은 창조 아들의 신성으로 성격화되고, 그 아들은 사람이 사는 1천만 세계의 인간들에게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을 대표한다.
6:8.4 (80.1) 영원한 아들은 무한하지만,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몸을 통해서, 그리고 무한한 영의 참을성 있는 봉사를 통해서, 우리는 영원한 아들에게 접근할 수 있다. 파라다이스 아들들이 수여하는 봉사와 무한한 영이 낳은 생물이 사랑으로 베푸는 봉사가 없다면, 물질 기원을 가진 존재는 도저히 영원한 아들을 만날 희망이 없다. 이것은 똑같이 참말이다: 하늘 대리자들의 도움과 안내가 있으면, 하나님을 의식하는 필사자는 분명히 파라다이스에 다다르고, 언젠가는 위엄 있는 이 아들 중의 아들이 몸소 계신 앞에 설 것이다.
6:8.5 (80.2) 영원한 아들은 비록 필사 성격자가 도달해야 하는 원본이지만, 너는 아버지와 영의 실체를 파악하기가 더 쉬움을 알아차릴 것이다. 이는 아버지가 너의 인격을 실제로 수여하는 분이고, 무한한 영은 너의 필사 지성의 절대 근원인 까닭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진보하는 파라다이스 여행길에 네가 올라감에 따라서, 영원한 아들의 성격은 너에게 더욱 현실이 되고, 점진적으로 영답게 변화되는 너의 지성은 무한히 영다운 그의 지성의 실체를 더욱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6:8.6 (80.3) 영원한 아들의 개념은 결코 너의 물질 지성이나, 그 뒤에 상물질 지성 안에서 밝게 빛날 수 없다. 네가 영(靈)이 되고 영으로서 승천을 시작하기까지, 영원한 아들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은 파라다이스의 기원을 가진 창조 아들의 성격에 대하여 네가 가진 개념만큼 비로소 눈에 선할 수 없다. 이 창조 아들은 몸소, 한 인격자로서, 한때 유란시아에서 육신화하고 사람들 사이에 한 사람으로서 살았다.
6:8.7 (80.4) 사람은 창조 아들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 더 순수하게 영답지만 여전히 성격자인, 파라다이스의 영원한 아들의 중요성을 네가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것을 창조 아들은 너의 지역 우주 체험 전체를 통해서 보충해 주어야 한다. 네가 오르본톤과 하보나를 거쳐서 진보함에 따라서, 너의 지역 우주 창조 아들의 모습, 눈에 선한 그 모습과 뜻깊은 기억을 남겨두고 떠날 때, 이 물질적 체험과 상물질 체험은, 파라다이스의 영원한 아들에 대하여 늘 개념이 확대되고 이해가 강화됨으로 보충될 것이다. 네가 파라다이스를 향하여 진보함에 따라서, 영원한 아들의 실체와 친밀감은 언제나 커질 것이다.
6:8.8 (80.5) 영원한 아들은 위대하고 영화로운 성격이다. 그렇게 무한한 존재가 성격인 사실을 파악하는 것은 비록 필사자의 물질 지성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지만, 의심하지 말라, 영원한 아들은 성격자이다. 내가 무엇에 관해서 말하는지 나는 사정을 알고 있다. 거의 셀 수도 없이 여러 번 나는 이 영원한 아들의 신성한 계심 앞에 서 보았고, 그리고 나서 그의 인자한 명령을 집행하려고, 우주에서 여행길을 떠났다.
6:8.9 (80.6) [파라다이스의 영원한 아들을 묘사하는 이 글을 작성하라고 배치된 한 신성한 조언자가 글로 적었다.]
7:0.1 (81.1) 다양한 무리의 살아 있는 존재들이 거하는 진화 우주의 현상에서 아버지의 영원한 목적이 점진적으로 펼쳐짐에 따라서, 최초의 아들은 그 목적의 영적 면을 집행하는 데 늘 관심을 가진다. 우리는 이 영원한 계획을 넉넉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파라다이스 아들은 이해한다.
7:0.2 (81.2) 아들은 동급의 아들 및 종속되는 아들들에게 가능한 자신의 모든 것을 주려고 애쓰므로, 그는 아버지와 같다. 아들은 두 분에게 공동으로 집행자인 무한한 영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수여하는, 아버지의 자신 분배 성품을 함께 가진다.
7:0.3 (81.3) 영 실체들을 지원하는 자로서, 둘째 근원 중심은 파라다이스 섬의 영원한 평형추이며, 파라다이스 섬은 모든 물질적인 것을 훌륭하게 지원한다. 그래서 첫째 근원 중심은 가운데 섬의 절묘한 원본들의 물질적 아름다움에서, 그리고 영원한 아들의 하늘 같은 성격의 영적 가치에서 언제까지나 드러난다.
7:0.4 (81.4) 영원한 아들은, 영적 실체와 영적 존재들이 거하는 광대한 창조를 실제로 지원하는 분이다. 영 세계는 아들의 버릇, 개인적 행위이며, 영 성질을 가진 비성격 실체들은 언제나 절대적 아들의 완전한 성격의 의지와 목적에 민감하다.
7:0.5 (81.5) 그러나 아들은 모든 영 성격자의 행위에 몸소 책임을 지지 않는다. 성격을 가진 생물의 의지는 비교적 자유롭고, 따라서 그러한 의지하는 존재들의 행동을 좌우한다. 그러므로 유란시아에서 자연이 파라다이스와 신의 완전함과 불변성을 참되게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자유 의지를 가진 영 세계는 영원한 아들의 성질을 반드시 참되게 나타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나 천사가 자유 의지로 하는 행동의 특징을 무엇이 표현하든 상관 없이, 아들의 영원한 손아귀는 모든 영 실체에 대한 우주 인력을 계속하여, 절대로 통제한다.
7:1.1 (81.6) 하나님의 우주 내재성(內在性)[1] [1650], 두루 계심, 전능, 전지(全知)에 관하여 가르침 받은 모든 것이 영적 분야에서 아들에게 똑같이 참말이다. 모든 창조의 순수하고 보편적인 영 인력, 순전히 영적인 이 회로는, 파라다이스에 계신 둘째 근원 중심의 몸으로 직접 인도한다. 그는 모든 참된 영 가치에 대하여, 상존하며 틀림없이 영적으로 장악하는 힘과 작용을 주관한다. 그래서 영원한 아들은 절대적ㆍ영적 통치권을 행사한다. 글자 그대로, 모든 영 실체, 그리고 영적으로 변화된 모든 가치를, 말하자면, 그의 손바닥에 쥐고 있다. 우주의 영 인력을 통제하는 것은 우주의 영적 통치권이다.
7:1.2 (82.1) 영적 사물에 대한 이 인력 통제는 시간과 공간에 상관 없이 작용한다. 따라서 영 에너지는 전달하면서 줄어들지 않는다. 영 인력은 결코 시간의 지연을 겪지 않고, 공간을 지나면서 감소를 겪지도 않는다. 전달하는 거리의 제곱과 비례해서 줄어들지 않는데, 이는 물질 창조의 질량이 순전한 영 동력의 회로를 늦추지 않기 때문이다. 순전한 영 에너지가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은 아들의 절대성에 본래 있으며, 이것은 셋째 근원 중심의 반인력(反引力)의 힘이 중간에 끼어들기 때문이 아니다.
7:1.3 (82.2) 영 실체들은 그 질적 가치에 따라서, 그들의 실제 영적 성품의 정도에 따라서, 영적 인력 중심의 당기는 힘에 반응한다. 조직된 물리적 물질(양)의 에너지가 물리적 인력에 민감한 것과 똑같이, 영 알맹이는(질) 영 인력에 민감하다. 영적 가치와 영 세력은 실재한다. 성격자의 관점에서 보면, 영은 창조에 담긴 혼이요, 물질은 그림자 같은 물리적 몸이다.
7:1.4 (82.3) 영 인력의 반응과 변동은 한 치도 틀림없이, 늘 영적 가치의 내용, 곧 한 개인이나 한 세계의 영적 지위의 질이 얼마나 높은가를 가리킨다. 이 당기는 힘은 어떤 우주 상황이나 행성 조건에서도, 영 사이의 가치와 영 안의 가치에 순간적으로 반응한다. 하나의 영적 실체가 우주에서 사실화될 때마다, 이 변화는 즉시 한 순간에 영 인력의 재조정을 필요하게 만든다. 그러한 새 영(靈)은 실제로 둘째 근원 중심의 일부이다. 필사 인간이 영으로 변한 존재가 되는 것과 똑같이 확실하게, 그는 영적 아들, 영 인력의 중심과 근원에 도달할 것이다.
7:1.5 (82.4) 아들의 영적 인력은 많은 파라다이스 아들의 계급에 약한 정도로 본래부터 있다. 이는 절대적 영 인력 회로 안에, 작은 창조 단위에서 작용하는 지역 체계의 영 인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 인력이 그렇게 절대 이하에서 집중되는 것은 시공의 창조 성격자들의 신성의 일부이며, 최상 존재의 태동하는 체험적 통제와 서로 관계된다.
7:1.6 (82.5) 영 인력의 당기는 힘과 그에 대한 반응은, 그 우주 전체에 작용할 뿐 아니라, 또한 개인 사이에, 그리고 개인들의 집단 사이에서도 작용한다. 어느 세계ㆍ민족ㆍ국가, 또는 신자 집단에도, 영적 성격자와 영의 감화를 받은 성격자들 사이에 영적 단합이 있다. 같은 취향과 소망을 가지고 영적 생각을 하는 성격자들 사이에는, 영적 성질을 가진 직접 매력이 존재한다. 친척 영[2] [1651]이라는 용어는 전적으로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7:1.7 (82.6) 파라다이스의 물질 인력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아들의 영적 인력은 절대적이다. 죄와 반란은 지역 우주 회로의 작용에 간섭할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영원한 아들의 영 인력을 중단할 수 없다. 루시퍼 반란은 사람이 사는 너희 체계의 여러 세계와 유란시아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 결과로서 너희 행성의 영적 격리가 영원한 아들의 두루 계시는 영이나, 관련된 영 인력 회로의 존재와 작용에 티눈 만큼이라도 영향을 미친 것을 우리는 관찰하지 못한다.
7:1.8 (82.7) 대우주의 영 인력 회로의 모든 반응은 예측이 가능하다. 우리는 영원한 아들의 두루 계시는 영의 작용 및 반응을 인식하며, 이것들이 믿을 만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사람이 유한한 물질 인력의 작용을 계산하려고 애쓰는 것 같이, 잘 알려진 법칙에 따라서 우리는 영적 인력을 잴 수 있고, 또 재기도 한다. 아들의 영은 모든 영적 사물ㆍ존재ㆍ성격자에게 변함없이 반응하며, 이 반응은 반드시 모든 그러한 영적 가치가 사실화된 정도에 (실체의 질적 정도에) 따라서 일어난다.
7:1.9 (83.1) 그러나 영원한 아들의 영적 계심의 작용, 아주 믿을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는 이 작용과 함께, 그 반응을 그렇게 예측할 수 없는 현상도 마주치게 된다. 그러한 현상은 아마 솟아나는 영적 잠재성 영역에서 신 절대자가 나란히 활동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영원한 아들 영의 계심이 위엄 있는 무한한 성격의 영향인 것을 알지만, 신 절대자의 행위라고 짐작되는 것과 관련된 반응을 우리는 도저히 성격 반응이라고 간주할 수 없다.
7:1.10 (83.2) 성격자의 관점에서, 성격자들이 보건대, 영원한 아들과 신 절대자는 다음과 같이 관계된 듯하다. 영원한 아들은 실재하는 영적 가치 분야를 지배하는 한편, 신 절대자는 광대한 영토, 잠재 영 가치의 영토를 채우는 듯하다. 영적 성질을 가진 모든 실재 가치는 영원한 아들의 인력 손아귀에 던져지지만, 잠재 가치라면, 신 절대자의 앞에 던져지는 듯하다.
7:1.11 (83.3) 영(靈)은 신 절대자의 잠재성으로부터 솟아나는 듯하다. 생성되는 영은 최상위와 궁극위의 체험적이고 불완전한 손아귀에서 상관 관계를 찾는다. 결국 영의 마지막 운명은 영원한 아들의 영적 인력의 절대적 손아귀에 들어간다. 이것이 체험적 영의 주기(週期)로 보이지만, 실존적 영은 둘째 근원 중심의 무한성에 본래부터 있다.
7:2.1 (83.4) 파라다이스에서 최초의 아들의 계심과 친히 행하는 활동은 심오하며, 영적 의미에서 절대적이다. 파라다이스로부터 바깥으로 하보나를 거쳐서, 일곱 초우주 영역으로 지나감에 따라서, 영원한 아들이 친히 행하는 활동이 점점 적어지는 것을 우리는 탐지한다. 하보나 이후에 창조된 여러 우주에서, 영원한 아들의 계심은 파라다이스 아들들로 성격화되고, 최상위와 궁극위의 체험적 실체에 따라 조건을 받으며, 신 절대자의 한없는 영 잠재성과 함께 조정된다.
7:2.2 (83.5) 중앙 우주에서 최초의 아들이 친히 하시는 활동은 그 영원한 우주의 지극히 아름다운 영적 조화 속에서 탐지할 수 있다. 하보나는 아주 놀랍게 완전해서 이 원본 우주의 영적 지위와 에너지 상태는 완전하고도 영구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7:2.3 (83.6) 아들은 초우주에 몸소 계시거나 살지 않는다. 이 여러 창조에서 그는 오로지 초월 성격 대표를 유지할 뿐이다. 아들이 이렇게 영으로 명시된 것들은 성격이 아니며, 우주의 아버지의 성격 회로 안에 있지 않다. 이들을 초월 성격자라 칭하는 것보다 더 좋은 용어가 없다. 이들은 유한한 존재이며, 초한자도 절대자도 아니다.
7:2.4 (83.7) 초우주에서 영원한 아들의 행정은 순전히 영적이며 성격을 초월하니까, 인격자들이 이를 식별할 수 없다. 그런데도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영토 전역의 각 단계 활동에서, 아들의 개인적 영향, 만물에 스며드는 영적 충동을 마주치게 된다. 그러나 지역 우주에서, 우리는 영원한 아들이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몸 안에 친히 계신 것을 지켜본다. 여기서 무한한 아들은, 웅장한 군대를 이루는 동급의 창조 아들들의 몸 속에서 영적으로, 창조적으로 일한다.
7:3.1 (84.1) 지역 우주에서 올라가면서, 시간 세계의 필사자는 영원한 아들의 성격을 대표하는 창조 아들에 의존한다. 그러나 초우주 훈련 체제로 비로소 올라갈 때, 시간 순례자는 영감을 주는 영원한 아들 영의 고귀한 계심을 더욱 탐지하게 되며, 영적 에너지를 주는 이 봉사를 받아들임으로 이득을 얻을 수 있다. 하보나에서는 만물에 스며드는 최초의 아들 영이 사랑으로 감싸는 것을 승천자들이 점점 더 의식하게 된다. 필사자의 승천을 통하여 내내 어느 단계에서도, 영원한 아들 영은 시간 순례자의 지성이나 혼에 깃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은혜는 늘 가까이 있고, 승진하는 시간 세계 자녀들의 복지 및 영적 안전에 언제나 관계된다.
7:3.2 (84.2) 영원한 아들의 영적 인력이 당기는 힘은 살아남는 인간의 혼이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데 본래부터 있는 비밀이다. 모든 참된 영 가치, 그리고 진정한 영적으로 변화된 개인들은 영원한 아들의 어김없는 영 인력 손아귀에 붙들려 있다. 예를 들면, 필사 지성은 하나의 물질적 장치로서 생애를 비롯하며, 이 체험 전부를 겪는 동안 물질 인력에 점진적으로 적게 지배되고, 그에 따라서 영 인력의 힘, 안으로 당기는 힘에 갈수록 더 민감하게 되면서, 궁극에 거의 완전해진 영 존재가 되어 최후 군단에 소집된다. 영 인력 회로는 사람의 혼을, 글자 그대로, 파라다이스 방향으로 잡아당긴다.
7:3.3 (84.3) 영 인력 회로는 인간 의식의 수준으로부터 실제 신을 의식하는 수준까지, 믿는 인간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기도를 전달하는 기본 경로이다. 너희의 간구 중에서 참된 영적 가치를 나타내는 것은 영 인력을 가진 우주 회로가 잡아내고, 관심을 가진 모든 신성한 성격자에게 즉시, 동시에 전달된다. 각자 친히 담당하는 분야에 속하는 것에 전념할 것이다. 따라서 너의 실질적 종교 체험에서, 간청을 드릴 때, 너희 지역 우주의 창조 아들을 마음에 그리는가, 아니면 만물의 중심에 계시는 영원한 아들을 그리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7:3.4 (84.4) 영 인력 회로의 구별하는 작용은 아마도 물질적 인체에서 신경 회로의 기능과 견주어도 좋다. 오감(五感)은 신경(神經)의 길을 타고 안으로 여행한다. 어떤 감각은 묶여 있다가, 하부의 자동 척추 중심에서 반응을 받고, 다른 감각은 자동성이 덜하지만 뇌 하부에 버릇으로 훈련된 중심에 전달되며, 한편 들어오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정보는 이러한 하부 중심들을 휙 지나서, 인간의 가장 높은 의식 수준에 즉시 기록된다.
7:3.5 (84.5) 그러나 영적 세계의 훌륭한 기법은 얼마나 더 뛰어난가! 최상의 영적 가치를 담은 어떤 것이라도 너의 의식에서 생기면, 일단 네가 이를 표현하면, 모든 창조를 다스리는 절대 영 성격자에게 바로 번개처럼 전해지는 것을 우주에서 아무 힘도 막을 수 없다.
7:3.6 (84.6) 반대로, 너의 기도가 순전히 물질적이고 온통 자신에 집중하면, 그렇게 쓸모 없는 기도를 영원한 아들의 영 회로에 투입할 수 있는 계획은 전혀 없다. “영적으로 짓지 않은” 어떤 기도의 내용도, 우주의 영적 회로에서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그렇게 순전히 이기심으로 드리는 물질적 요구는 죽어 버린다. 이런 기도는 참된 영 가치를 담는 회로를 타고 올라가지 못한다. 그러한 말은 “소리나는 징과 울리는 심벌”과[3] [1652] 같다.
7:3.7 (85.1) 동기가 되는 생각, 영적 내용이 바로 필사자의 간청을 정당하게 만든다. 말은 하나도 가치가 없다.
7:4.1 (85.2) 신성한 진보 계획을 성공적으로 집행하는 영원한 아들은 아버지와 영구한 연락을 유지하며, 이것은 의지를 가진 인간을 창조하고, 진화시키고, 승천시키고, 완전하게 만드는 우주 계획이다. 신답게 충실한 가운데, 아들은 아버지와 영원히 대등한 분이다.
7:4.2 (85.3) 시간 세계의 물질 존재를 영원의 완전한 수준까지 승진시키기 위하여,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가 되어, 이 거대한 성취 계획을 작성하고 집행한다. 공간에서 하늘 가는 혼들을 영적으로 높이려는 이 사업은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이 공동으로 만든 것이다. 무한한 영의 협조를 얻어서, 이 두 분은 그 거룩한 목적을 연합하여 집행하는 데 종사한다.
7:4.3 (85.4) 완전에 도달하게 하는 이 신의 계획은, 독특하지만 놀랍게 서로 관계된 사업, 우주에서 모험하는 세 가지 사업을 포함한다:
7:4.4 (85.5) 1. 점진적 달성 계획. 이것은 우주의 아버지가 세운, 진화로 승천하는 계획이며, “바로 우리의 모습을 따라서 필사 인간을 만들자”는 아버지의 제안에 찬성했을 때, 영원한 아들이 무조건 받아들인 계획이다. 시간 세계의 인간을 향상시키려는 이 준비에는 아버지가 생각 조절자를 수여하고 물질 인간에게 성격 특권을 부여하는 일이 뒤따른다.
7:4.5 (85.6) 2. 수여 계획. 그 다음 우주 계획은, 영원한 아들, 그리고 동격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계시하는 큰 사업이다. 이것은 영원한 아들의 제안이며, 이 계획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들을 진화된 창조에 수여하고, 거기서 그들이 인격화되고 사실이 되고 육신이 되어, 모든 우주의 생물에게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자비를 현실로 만드는 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수여 계획에 본래부터 있고 사랑을 베푸는 이 일에 잠정적 조치로서, 파라다이스 아들들은 잘못 인도된 생물의 의지가 영적 위험에 빠뜨린 것을 회복하는 자로서 활약한다. 달성 계획의 작용에 지연이 있을 때는 언제 어디서나, 만일에 반란이 이 사업을 해치거나 까다롭게 만든다면, 수여 계획의 긴급 조치가 당장 활성화된다. 파라다이스 아들들은 반란이 일어난 바로 그 지역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그 구체들의 영적 지위를 회복하는 구출자로 활동할 것을 서약하며, 그렇게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통치권을 얻는 체험적 수여 생애와 관련하여, 동급의 한 창조 아들이 유란시아에서 그렇게 영웅다운 수고를 베풀었다.
7:4.6 (85.7) 3. 자비를 베푸는 계획. 달성 계획과 수여 계획이 작성되고 선포되고 나서, 무한한 영은 혼자서, 또 스스로, 자비를 베푸는 엄청난 우주 사업을 기획하고 운영하였다. 이것은 달성 사업과 수여 사업을 실질적으로 효과 있게 운영하는 데 아주 요긴한 봉사이다. 셋째 근원 중심의 영적 성격자들은 모두 자비를 베푸는 봉사 정신을 가지며, 이것은 신의 셋째 분의 성품에 자연스러운 일부이다. 창조 뿐 아니라 행정 면에도, 무한한 영은 참으로, 글자 그대로, 아버지와 아들에게 공동 집행자로서 활동한다.
7:4.7 (86.1) 영원한 아들은 인간을 승천시키는 아버지의 우주 계획을 몸소 맡은 수탁자요 신성한 관리자이다. “내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는 우주 지시를 공포하고 나서, 아버지는 이 엄청난 사업의 집행을 영원한 아들에게 맡겼다. 영원한 아들은 이 하늘 사업을 돌보는 것을 신다운 동위자, 무한한 영과 나누어 맡는다. 그래서 신들은 창조ㆍ통제ㆍ진화ㆍ계시ㆍ봉사 작업은 물론이고―필요하다면 회복하고 구제하는 일에도―효과적으로 협동한다.
7:5.1 (86.2) “하보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는 이 엄청난 명령이 모든 창조에 방송될 때, 영원한 아들은 아무 조건 없이 함께 하였다. 그 뒤로 이 초청이자 명령은 영원한 아들, 그리고 동격인 아들 및 관련된 아들들의 광대한 가족이 세운 모든 생존 및 수여 계획에 자극을 주었다. 바로 이렇게 자신을 수여함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모든 진화 인간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었다.
7:5.2 (86.3) 아버지가 선(先)인격 생각 조절자를 선사하여 연락하는 것처럼 영원한 아들은 인간과 바로 연락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 앞에 서게 될 수 있기까지, 신의 아들이 되는 정도를 단계적으로 차츰 연속하여 낮춤으로, 때때로 바로 사람이 되어, 영원한 아들은 지음받은 성격자들에게 가까이 간다.
7:5.3 (86.4) 영원한 아들의 본질, 순전히 성격인 본질은 조각낼 수 없다. 영원한 아들은 영적 영향이나 성격자로서 봉사하며, 결코 다른 방법으로 하지 않는다. 아들은 아버지인 조절자가 인간의 체험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인간 체험의 일부가 되기가 불가능함을 발견한다. 그러나 영원한 아들은 수여 기법으로 이 한계를 보충한다. 분신이 된 개체의 체험이 우주의 아버지에게 의미하는 것은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육신화 체험이 영원한 아들에게 의미하는 것과 같다.
7:5.4 (86.5) 영원한 아들은 신의 뜻으로서, 인간의 지성에 깃드는 생각 조절자로서 필사 인간에게 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아들, 네바돈의 미가엘이 신다운 성격자로서, 나사렛 예수라는 인간의 성품을 입고 육신화했을 때, 영원한 아들은 유란시아의 필사 인간에게 오셨다. 창조된 인격자의 체험을 함께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파라다이스 아들들은 그러한 인간의 바로 그 성품을 입고, 스스로 그들의 신다운 성격을 실제 인간으로 육신화해야 한다. 육신화는 아들별의 비밀이며, 만물을 둘러싸는 절대 성격의 사슬로부터 아들이 달아나는 기법이다.
7:5.5 (86.6) 아주 오래 전, 영원한 아들은 하늘 가는 시간 순례자도 포함하여, 하보나의 모든 거주자와 순례자를 깨우치고 승진시키기 위하여, 중앙 창조의 각 회로에 자신을 수여하였다. 이 일곱 수여 가운데 어디서도 그는 승천자나 하보나 주민으로서 활동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으로서 존재했다. 그의 체험은 독특했다. 그 체험은 사람이나 다른 순례자와 함께 한 것도 아니요, 또한 사람이나 다른 순례자로서 한 것도 아니지만, 성격을 초월하는 의미에서 어떤 방법으로 친교하였다.
7:5.6 (86.7) 그는 하보나 내부 회로와 파라다이스 기슭 사이에 끼어 있는 나머지 지역을 지나가지도 않았다. 절대 존재인 그는 성격 의식을 그치는 것이 불가능하며, 이는 모든 영 인력선이 그분 안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수여 기간에 영적으로 빛나는 중앙 파라다이스의 숙소는 흐려지지 않았고, 우주의 영 인력을 쥐는 아들의 힘은 줄어들지 않았다.
7:5.7 (87.1) 하보나에서 영원한 아들이 여러 번 자신을 수여한 것은 인간이 상상하는 범위를 벗어나며, 이는 초월적 수여였다. 그는 그때, 그리고 후일의 모든 하보나 체험에 기여했지만, 그의 실존적 성품이 가졌다고 생각되는 체험 능력이 늘어났는지 우리는 모른다. 이것은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수여 신비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이 여러 수여 임무에서 무엇을 얻었든지, 영원한 아들이 이를 그 뒤로 늘 지니고 있었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7:5.8 (87.2) 신의 둘째 분의 수여를 이해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든지 상관 없이, 우리는 영원한 아들의 한 아들이 하보나에 수여된 것을 이해한다. 그는 글자 그대로 중앙 우주의 회로들을 거쳤고, 한 승천자가 신에 도달하는 준비로서 그러한 체험을 함께 하였다. 이분은 최초의 미가엘, 곧 처음으로 낳은 창조 아들이며, 그는 모든 필사자 가운데 처음으로 하보나에 도달한 그랜드판다가 살던 시절에, 한 회로에서 다른 회로로, 하늘 가는 순례자들의 생활 체험을 거치고, 필사자들과 함께 각 영역의 한 단계를 몸소 여행했다.
7:5.9 (87.3) 이 최초의 미가엘이 그밖에 무엇을 계시했는가 상관 없이, 그는 어머니인 최초의 아들의 초월적 수여가 현실인 것을 하보나 인간들에게 보여주었다. 그 수여가 너무 현실적이어서, 점진적으로 하보나를 달성하는 일곱 회로에서 시공 순례자들의 체험에 참여하려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파라다이스의 권력과 영광을 일곱 번이나 버렸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서, 하보나 회로를 순회하는 모험으로 수고하는 각 시간 순례자가 언제까지나 기운을 내고 힘을 얻는다.
7:5.10 (87.4) 영원한 아들은 시공 우주에 두루, 수여 봉사를 베푸는 모든 하나님의 아들에게 모범적 영감이 된다. 동격의 창조 아들 및 그 동료 심판 아들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아들 계급과 함께, 다양한 계급의 생물 생명에게, 그리고 바로 그 생물로서, 기꺼이 수여하려는 이 놀라운 태도를 모두 같이 가진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 각자가 공간 세계에 자신을 수여할 때, 이 수여 안에서, 이를 통해서, 그리고 이렇게 수여함으로, 영원한 아들이 정신적으로, 기원의 사실 뿐 아니라 성품이 비슷한 이유로, 우주에서 의지를 가진 지적인 생물에게 자신을 수여했다는 것이 진실이 된다.
7:5.11 (87.5) 모든 속성은 아니라도, 영과 성품 면에서 파라다이스 아들 하나하나가 최초의 아들을 신답게 묘사하는 완전한 초상이다. 한 파라다이스 아들을 본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을 보았다는 것이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7:6.1 (87.6) 하나님의 아들이 여럿임을 모르는 것은 유란시아에서 큰 혼란의 근원이다. 이 신다운 성격자들의 집회 기록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쁨을 외치고, 모든 아침별이 함께 노래하였도다”와[4] [1653] 같은 말씀이 있는데도, 이와 같은 무지(無知)가 계속 남아 있다. 구역의 표준 시간으로 1천 년에 한 번씩, 다양한 계급의 신다운 아들들은 정기 집회를 하려고 모인다.
7:6.2 (87.7) 영원한 아들은 자비와 봉사를 베푸는 찬미할 속성의 성격 근원이다. 모든 계급의 내려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창조 전역에 두루 활동함에 따라서, 이 속성은 아들들의 특징을 풍부히 나타낸다. 영원한 아들은, 모든 무한한 속성은 아니라도, 모든 신다운 성품을 어김없이 파라다이스 아들들에게 전해주며, 이들은 영원한 아들의 성품을 보여주려고 영원한 섬에서 바깥으로, 온 우주로 나간다.
7:6.3 (88.1) 최초의 영원한 아들은 우주의 아버지의 완벽하고 무한한 “처음” 생각에서 생긴, 자식 성격자이다.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이, 새롭고 독창적이고, 동일하고 독특한 절대 성격 관념을 함께 기획할 때마다, 바로 그 순간에 이 창조적 생각은 새롭고 독창적인 창조 아들의 존재와 성격으로 완전히, 마침내 성격화된다. 영 성질, 신다운 지혜, 동등한 창조 능력 면에서, 이 창조 아들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잠재적으로 대등하다.
7:6.4 (88.2) 창조 아들은 파라다이스로부터 시간 우주로 나가서, 셋째 근원 중심의 통제하는 창조 대리자의 협조를 얻어,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지역 우주의 조직을 마친다. 이 아들들은 물질ㆍ지성ㆍ영을 중앙에서 보편적으로 통제하는 데 소속되어 있지 않으며, 그에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아들들의 창조 행위는 첫째 근원 중심, 그리고 그와 동격인 절대자들이 선재하고, 우선하고, 우위인 것에 제한을 받는다. 이 아들들은 그들이 만들어 내는 것만 관리할 수 있다. 절대적 관리는 존재의 우선권에 본래부터 있으며, 영원한 계심과 떨어질 수 없다. 아버지는 우주에서 계속 첫째 자리로 남는다.
7:6.5 (88.3) 아버지와 아들이 창조 아들을 성격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들과 영은 심판 아들을 성격화한다. 그들은 생물로 육신화하는 체험을 거치면서, 시공 창조에서 생존을 좌우하는 재판관으로 일할 권리를 얻는 아들이다.
7:6.6 (88.4)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또한 다능한 삼위일체 교육 아들을 성격화하기 위하여 뭉친다. 이 아들들은 모든 성격자, 인간 및 신다운 성격자를 가르치는, 하늘의 교육자로서 대우주를 다닌다. 그리고 유란시아의 필사자들이 아직 주목하지 않은, 다른 수많은 파라다이스 아들 계급이 있다.
7:6.7 (88.5) 어머니인 최초의 아들과 모든 창조에 두루 흩어져 있는 이 파라다이스 아들 집단 사이에 직통이자 전용(專用)의 통신 경로가 있다. 이 경로의 기능은 영적 친척 관계의 질에 본래 있고, 이 관계는 절대에 가까운 영적 관계의 끈으로 그들을 뭉치게 한다. 이 아들들 사이의 회로는 영 인력(引力)을 가진 우주 회로와 전혀 다르며, 영 인력도 둘째 근원 중심의 몸에 집중된다. 파라다이스 신들의 몸에 기원이 있는 모든 하나님의 아들은 어머니인 영원한 아들과 직접, 항상 교통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교통은 순간적이며, 때때로 공간에 제약을 받기는 하지만,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
7:6.8 (88.6) 영원한 아들은 모든 계급의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지위, 생각 및 다채로운 활동에 관하여 완전한 지식을 항상 가졌을 뿐 아니라, 영원한 1차적 중앙 창조에 있는 모든 생물의 마음 속에 존재하고, 동급의 창조 아들들이 만든 2차적 시간 우주에 존재하는, 영적 가치를 가진 모든 것에 관해서 아들은 항상 완전히 알고 있다.
7:7.1 (88.7) 영원한 아들은 우주의 아버지의 영과 성격을 보여주는, 완벽하고 순전한 보편적 최종 계시이다. 아버지에 대한 지식과 아버지에 관한 정보는 모두 영원한 아들과 그의 파라다이스 아들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틀림없다. 영원한 아들은 영원부터 계시며, 전적으로, 영적 제한이 없이, 아버지와 하나이다. 두 분의 신다운 성격은 동위이며, 두 분의 영적 성질은 대등하고, 두 분의 신성은 동일하다.
7:7.2 (89.1) 신성한 아버지가 무한히 완전하니까 하나님의 성질은 아들의 몸 안에서 도저히 본질적으로 더 나아질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성질과 성격은, 생물 존재에게 계시하기 위하여 비성격인 것과 비영적인 것을 벗어버림으로, 확대된다. 첫째 근원 중심은 성격자를 훨씬 뛰어넘지만, 그 아버지 성격자의 모든 영적 품질은 영원한 아들의 절대 성격 안에 영적으로 존재한다.
7:7.3 (89.2) 시초의 아들과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영적이고 성격인 본질을 모든 창조에게 보편적으로 계시하는 일에 종사한다. 중앙 우주, 초우주, 지역 우주에서, 또는 사람이 사는 행성에서, 사람과 천사들에게 우주의 아버지를 드러내는 이는 파라다이스 아들이다. 영원한 아들과 그의 아들들은, 생물이 우주의 아버지에게 가까이 가는 길을 드러낸다. 높은 기원을 가진 우리조차도 영원한 아들, 그리고 영원한 아들의 아들들이 계시하는 아버지의 성질과 성격을 연구하면서 아버지를 훨씬 더 잘 이해한다.
7:7.4 (89.3) 오직 영원한 아들의 신다운 아들들을 통해서, 아버지는 너에게 한 성격자로서 내려오신다. 그리고 바로 이 생명의 길을 거쳐서 너는 아버지께 도달한다. 이 신다운 아들 집단의 안내를 받고서 너는 아버지께로 올라간다. 너의 바로 그 성격을 우주의 아버지가 직접 수여했는데도, 이것은 계속 참말이다.
7:7.5 (89.4) 영원한 아들의 멀리 미치는 영적 행정부의 광범위한 이 모든 활동에서, 아버지가 성격자인 것 같이 아들도 참으로, 실제로 성격자임을 잊지 말라. 정말로 한때 인간 계급이었던 존재에게는, 우주의 아버지보다 영원한 아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하보나 회로를 거치는 시간 순례자의 진보 과정에서, 너희가 아버지를 알아볼 준비가 되기 훨씬 전에, 아들에게 도달할 능력이 너희에게 생길 것이다.
7:7.6 (89.5) 바로 너희의 창조 아들이 사랑으로 봉사함으로 드러낸 이 신의 속성을 명상하면서, 너는 영원한 아들의 성질과 자비로운 성품을 더욱 이해해야 한다. 이 창조 아들은 한때 땅에서 사람의 아들이었고, 이제는 높아진 너희 지역 우주의 군주이다―사람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다.
7:7.7 (89.6) [파라다이스의 영원한 아들을 그리는 이 글을 작성하라고 임명받은 한 신성한 조언자가 적었다.]
8:0.1 (90.1) 영원히 오래 전에, 우주의 아버지의 “처음” 생각, 무한하고 절대적인 생각은 그 신다운 표현에 아주 완전하고 적당한 말씀을 영원한 아들 속에서 발견하신다. 그때 생각 하나님과 말씀 하나님에게 서로 뜻을 표현하고 함께 행동할 대리자, 보편적이고 무한한 대리자를 바라는 최고의 소망이 뒤이어 생긴다.
8:0.2 (90.2) 영원이 시작될 때,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은, 그들이 서로 기대고, 영원히 절대로 하나임을 무한히 의식하신다. 따라서 두 분은 신의 협동 서약, 무한하고 영구한 서약을 하신다. 영원의 궤도 전역에 걸쳐서 그들의 통일된 개념을 집행하기 위하여 결코 끝이 없는 이 협정이 이루어진다. 이 영원의 사건 뒤로, 아버지와 아들은 이 신 연합 속에서 계속 지내신다.
8:0.3 (90.3) 이제 우리는 무한한 영, 신의 셋째 분의 영원한 기원과 얼굴을 마주한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이 동일하고 무한한 행동―절대적 생각이자 계획을 집행하는 것―을 공동으로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무한한 영이 완전히 성숙한 모습을 갖추고 솟아난다.
8:0.4 (90.4) 신들의 기원 순서를 이렇게 늘어놓으면서, 나는 다만 너희가 그들의 관계를 알아들을 수 있게 하려고 그렇게 할 따름이다. 실제로, 이 세 분 모두가 영원부터 존재하며, 그들은 실존적이다. 비롯하거나 끝나는 날이 없는 분들이다. 그들은 동격이며, 최상ㆍ궁극이요 절대적이고 무한하다. 지금 계시고, 언제나 계셔 왔고, 또 앞으로도 늘 계실 것이다. 그들은 뚜렷하게 개별화되었지만, 영원히 연합된 세 분,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영 하나님이다.
8:1.1 (90.5) 영원한 과거에 무한한 영이 성격화되고 나서, 신 성격자 집합이 완전하고 완벽하게 된다. 행동의 하나님이 존재하며, 공간의 광대한 무대가 엄청난 창조 연극―우주의 모험―을 위하여, 영원한 세월 속에 신의 파노라마를 위하여 마련된다.
8:1.2 (90.6) 무한한 영의 처음 행위는 그의 신성한 부모, 아버지인 아버지와 어머니인 아들을 살펴보고 알아보는 것이다. 그는, 곧 영은 무조건 두 분의 신분을 확인한다. 그는 두 분의 통합된 성품과 연합된 기능은 물론, 그들의 따로 된 성격과 무한한 속성을 넉넉히 인식하고 있다. 다음에 초월적으로 자진하여 영감을 주도록 시원스럽게, 자청해서, 신의 셋째 분은 처음 분과 둘째 분과 동등한데도, 아버지 하나님에게 영원히 충성할 것을 기쁘게 서약하고 아들 하나님에게 언제까지나 의존함을 인정한다.
8:1.3 (90.7) 이 거래의 성질에 본래부터, 그리고 각자가 독립된 성격이고 세 분 모두가 집행적 단결이 되었음을 서로 인정하여, 영원의 집단이 확립된다.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실존한다. 영원한 아들의 성격을 통해서, 그리고 행동의 하나님이 집행함으로, 우주의 아버지의 목적을 창조로 펼치는, 다채롭고 결코 그치지 않는 파노라마를 위하여 우주 공간의 무대가 마련된다. 이 행동의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창조자 협동 관계를 현실로 연출하는 집행 대리자이다.
8:1.4 (91.1) 행동의 하나님이 움직이며, 고요하던 공간 저장소가 술렁인다. 10 억 개의 완전한 구체가 번쩍 생긴다. 가상적인 이 영원의 순간 이전에, 파라다이스에 본래부터 있는 공간 에너지는 존재하고 잠재적으로 작용하지만, 사실로서 존재가 없으며, 끊임없이 당기는 힘에 대한 물질 실체들의 반응으로 재지 않으면, 물리적 인력도 잴 수 없다. 영원히 아득한 이 (가정된) 시각에 물질 우주는 전혀 없지만, 10억 세계가 물질화되는 바로 그 순간에, 이것들을 파라다이스의 영구한 손아귀에 붙들어 두기에 충분하고 적당한 인력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다.
8:1.5 (91.2) 이제 신들이 창조한 것을 통해서, 둘째 형태의 에너지가 번쩍 생긴다. 넘쳐흐르는 이 영은 순간적으로 영원한 아들의 영적 인력에 붙잡힌다. 그래서 두 가지 인력으로 둘러싸인 우주는 무한의 에너지와 닿으며 신의 영 속에 잠긴다. 이 방법으로 무한한 영의 관계된 지성 회로에 나타나는 지성이 의식(意識)하도록 생명을 심을 토양이 마련된다.
8:1.6 (91.3) 신들의 중앙 창조에 두루 뿌려진, 존재 잠재성을 가진 이 씨앗들 위에 아버지가 행동하고, 생물 성격자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나서, 파라다이스 신들의 존재는 조직된 공간 전체를 채우며, 모든 사물과 존재를 파라다이스 방향으로 비로소 실질적으로 끌어당긴다.
8:1.7 (91.4) 무한한 영은 하보나 세계들의 탄생과 동시에 영원하게 되며, 이 중앙 우주는 아버지와 아들의 통합된 생각과 뭉친 뜻에 복종하여, 영이, 영과 함께, 영 안에서 창조된다. 합동하여 창조하는 바로 이 행위로 셋째 분은 신이 되며, 이처럼 그는 언제까지나 합동 창조자가 된다.
8:1.8 (91.5) 이때는 함께 동료이자 독점 집행자, 셋째 근원 중심의 행위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의 행위 속에 아버지와 아들이 창조로 팽창하는 거창하고 두려운 시대이다. 이 풍운의 시절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이 없다. 우리는 이 막대한 사건들을 입증하기 위하여 무한한 영이 준 빈약한 자료를 가졌을 따름이다. 무한한 영은 다만, 그가 성격과 의식하는 존재를 얻음과 동시에, 중앙 우주와 그에 관련된 모든 것이 영원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8:1.9 (91.6) 간추려 말하면, 무한한 영은, 자기가 영원하니까, 중앙 우주도 영원하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이것이 온 우주 역사(歷史)의 전통적 출발점이다. 만물의 중심에 존재하며, 아주 절묘하게 작용하는 광대한 우주를 구체화한 그 창조 에너지와 행정 지혜가 이렇게 엄청나게 터지기 전에 어떤 사건이나 거래가 있었는지 절대로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고, 아무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사건 건너에는, 탐구할 수 없는, 영원의 사건들과 무한의 깊은 연못이―절대 신비가―깔려 있다.
8:1.10 (91.7) 그리고 시간에 묶여 있고 공간에 제약 받는 필사 인간의 지성에게 친절을 베푸는 해석으로서, 우리는 셋째 근원 중심의 기원이 생긴 순서를 이렇게 묘사한다. 우주의 역사를 마음 속에 그리기 위해서 사람의 머리는 출발점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영원의 역사적 개념에 접근하는 이 방법을 마련하라고 지시를 받았다. 물질 지성에는, 일관성을 위하여 첫째 근원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우주의 아버지가 모든 창조의 첫째 근원이자 절대 중심이라고 가정하며, 동시에 우주 역사의 모든 단계에서, 창조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아들과 영은 아버지와 공동으로 영원하다고 모든 생물 지성에게 가르친다. 파라다이스 섬, 그리고 무제한 절대자, 우주 절대자, 신 절대자가 실재하고 영원하다는 것을 어떤 의미에서도 무시하지 않고서, 우리는 이렇게 가르친다.
8:1.11 (92.1) 영원에 계신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은 시간 세계 자녀들의 물질적 머리에는 충분히 벅찬 일이다. 먼저 부모와 자식 상황에서 생기는 관계를 통달하고, 그리고 나서 이 개념을 확대하여 가족 전체를 포함함으로, 어떤 아이든지 가장 쉽게 현실과 연결지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나중에 그 아이의 자라는 지성은 가족 관계에, 공동체ㆍ민족ㆍ세계의 관계에 적응할 수 있고, 다음에 우주ㆍ초우주 아니 온 우주의 관계에도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8:2.1 (92.2) 합동 창조자는 영원부터 계시며, 온통, 아무 제한 없이,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과 하나이다. 무한한 영은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성품 뿐 아니라 최초의 아들의 성품도 완전히 반영한다.
8:2.2 (92.3) 셋째 근원 중심은 수많은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우주의 영, 최상 안내자, 합동 창조자, 신다운 집행자, 무한한 지성, 영 중의 영, 파라다이스 어머니 영, 합동 행위자, 최종 조정자, 두루 계시는 영, 절대 지능, 신의 행위. 그리고 유란시아에서 그는 때때로 우주 지성과 혼동되고 있다.
8:2.3 (92.4) 신의 셋째 분을 무한한 영이라고 지명하는 것은 아주 적절하며, 하나님이 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질 인간은 물질을 기본 실체로 보며, 영과 함께 지성은 물질에 뿌리를 둔 가설(假說)이라고 잘못 여기는 경향이 있다. 무한한 실체, 우주의 조직자, 또는 성격 조정자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른다면, 물질 인간은 무한한 영을 이해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8:2.4 (92.5) 신성(神性)이 우주에 계시된 것으로서, 무한한 영은 사람이 탐구할 수 없으며, 인간이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영의 절대성을 느끼기 위해서, 너희는 오로지 우주의 아버지가 무한한 것을 깊이 생각하고, 최초의 아들이 영원한 것을 경외할 필요가 있다.
8:2.5 (92.6) 무한한 영의 몸에 정말로 신비가 있지만, 아버지나 아들만큼 신비가 많지는 않다. 합동 창조자는 아버지 성품의 모든 모습 중에서 무한을 아주 놀랍게 드러낸다. 궁극에 총우주가 무한히 확장된다 하더라도, 합동 행위자의 영적 계심, 에너지 통제력, 지성 잠재성은 그처럼 한없는 창조의 요구를 채우기에 적당함이 발견될 것이다.
8:2.6 (92.7) 무한한 영은 모든 면에서 우주의 아버지의 완전성ㆍ올바름ㆍ사랑을 함께 가지지만, 그는 영원한 아들의 자비 속성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대우주에 대하여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자비를 베푸는 분이 된다. 늘, 언제나―보편적으로 영원히―영은 자비를 베푸는 분이니, 이는 신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 같이, 신성한 영은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8:2.7 (93.1) 모든 선(善)이 아버지에게서 기원을 가지니까, 영이 아버지보다 더 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영의 활동을 보면, 우리는 그러한 선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무한한 영이 거느리는 성격자들의 자애로운 직분과 끊임없는 봉사로 인하여, 아버지의 충실함과 아들의 불변함은 구체들에 사는 영 존재와 물질 인간에게 아주 현실적이 된다.
8:2.8 (93.2) 합동 행위자는 아버지의 아름다운 생각과 진실한 특성을 모두 물려받는다. 신의 이 모든 숭고한 특성은, 셋째 근원 중심의 지성, 제약 없고 한없는 지성의 무한‧ 영원한 슬기에 복종하면서, 우주 지성 수준, 최상에 가까운 수준에서, 조정된다.
8:3.1 (93.3) 영원한 아들은 우주의 아버지의 생각, 절대적이고 무한한 “처음” 생각이 말씀으로 표현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합동 행위자도 완성된 “처음” 창조 개념 또는 계획이 완전히 집행된 것이며, 이것은 절대적 생각과 말씀을 통합하는 아버지와 아들, 두 성격이 동맹함으로 통합하여 활동하기 위한 것이다. 셋째 근원 중심은 중앙 창조, 다시 말해서 명령으로 지어진 창조와 동시에 영원하게 되며, 우주들 가운데 오로지 이 중앙 우주만 영원히 존재한다.
8:3.2 (93.4) 셋째 근원이 성격화한 뒤로, 첫째 근원은 더 이상 우주 창조에 친히 참여하지 않는다. 우주의 아버지는 될 수 있는 대로 모든 것을 영원한 아들에게 맡긴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아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모든 권한과 권능을 합동 창조자에게 수여한다.
8:3.3 (93.5) 협동자로서, 그리고 동급의 성격자들을 통해서, 영원한 아들과 합동 창조자는 하보나 이후에 존재하게 된 모든 우주를 계획하고 모양을 빚었다. 처음 지은 중앙 창조에서 아들이 아버지와 유지하는 것과 똑같은 성격 관계를 그 뒤에 생긴 모든 창조에서 영이 아들과 유지한다.
8:3.4 (93.6) 영원한 아들의 한 창조 아들과 무한한 영의 한 창조 영은 너희를, 그리고 너희의 지역 우주를 지었다. 아버지는 그들이 조직한 것을 충실히 지원하지만, 그들의 작품을 기르고 유지하고, 또한 바로 그들이 지은 인간에게 봉사하는 일은 이 우주 아들과 이 우주 영에게 맡겨진다.
8:3.5 (93.7) 무한한 영은 모두를 사랑하는 아버지와 온통 자비로운 아들의 유능한 대리자, 모든 시공 세계에서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자신들에게로 이끄는 합동 사업을 집행하는 대리자이다. 우주의 인간을 완전에 도달하게 만드는 아버지의 계획을 영원한 아들이 받아들인 바로 그 순간, 그 시각에, 승천 계획은 아버지와 아들의 계획이 되었고, 그 순간에 무한한 영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그들의 통일된 영원한 목적을 집행하는 합동 행정가가 되었다. 그렇게 하면서, 무한한 영은 그의 모든 자원, 곧 그의 거룩한 계심과 영 성격자들을 아버지와 아들에게 바치기로 서약하였다. 의지를 가지고 살아남는 인간을 파라다이스처럼 완전한 수준, 신의 수준으로 높이려는 엄청난 계획에 무한한 영은 모든 것을 바쳐 왔다.
8:3.6 (93.8) 무한한 영은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을 완벽하게, 유일하게, 보편적으로 계시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협력 관계에 대한 모든 지식은, 무한한 영을 통해서 얻는 것이 틀림없고, 그는 통합된 신의 생각과 말씀의 합동 대리자이다.
8:3.7 (93.9) 영원한 아들은 우주의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유일한 길이며, 무한한 영은 영원한 아들 앞까지 도달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오로지 영의 참을성 있는 봉사로 시간 세계의 승천자들은 아들을 발견할 수 있다.
8:3.8 (94.1) 하늘 가는 순례자는 만물의 중심에서, 파라다이스 신들 중에서 무한한 영에게 먼저 도달하게 된다. 셋째 분은 둘째 분과 처음 분을 덮는다. 따라서 아들과 아버지께 인사드릴 후보자들은 모두, 반드시 셋째 분을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
8:3.9 (94.2) 그리고 다른 여러 방법으로, 영은 아버지와 아들을 똑같이 대표하며, 두 분에게 비슷하게 봉사한다.
8:4.1 (94.3) 물질 세계에서는 파라다이스 인력이 만물을 함께 붙들어 둔다. 이와 평행하는 것은 영적 세계이니, 거기서 아들의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을 풀이하며, “육체가 되었을” 때, 그 말씀은 관계된 창조자들의 통합된 성품이 애정으로 베푸는 자비를 보여준다. 그러나 물질이고 영적인 이 창조 전체에서, 그리고 그 창조를 통해서 하나의 광대한 무대가 있으며, 거기서 무한한 영과 그의 영 자손은 신(神) 부모가 협동하여 설계하고 창조한 총명한 자손에게, 그들의 자비와 인내, 영구한 사랑의 총체를 보여준다. 지성에게 베푸는 영구한 봉사는, 영의 신다운 성품의 본질이다. 그리고 합동 행위자의 영 자손은 모두 보살피려는 욕구, 봉사하고 싶은 이 신다운 욕망을 함께 가진다.
8:4.2 (94.4) 하나님은 사랑이요, 아들은 자비요, 영은 봉사이다―모든 지적 창조에게 신다운 사랑과 끝없는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영은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자비가 성격이 된 것이다. 우주에게 봉사하려고 두 분은 이 영 안에서 영원히 뭉친다. 영은 창조된 인간에게 적용된 사랑, 곧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 통합된 것이다.
8:4.3 (94.5) 유란시아에서 무한한 영은 두루 계시는 영향, 보편적 계심으로 알려져 있지만, 하보나에서 너희는 무한한 영이 실제로 봉사를 베풀고 몸소 계신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파라다이스 영이 베푸는 봉사는 그와 동등한 영들, 그리고 여러 시공 세계에서 지음받은 존재들에게 봉사하는 하위 성격자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영감을 주는 원본이 된다. 이 신성한 우주에서, 무한한 영은 영원한 아들이 일곱 번 초월적으로 나타나신 일에 충분히 참여했다. 마찬가지로 최초의 미가엘 아들이 하보나의 여러 회로에서 일곱 번 수여할 때 무한한 영이 참여하였고, 이렇게 함으로 하늘의 완전한 이 영역을 통과하는 어떤 시간 순례자에게도 공감하고 이해심 있는 영 봉사자가 되었다.
8:4.4 (94.6) 하나님의 한 창조 아들이, 계획한 한 지역 우주를 책임지는 창조자 직분을 받아들일 때, 이 미가엘 아들이 창조 모험을 하는 사명을 띠고 떠날 때, 무한한 영의 성격자들은 그에게 지치지 않고 봉사하는 자로서 일하기를 서약한다. 특히, 창조 딸,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의 몸에서, 우리는 물질 인간이 갈수록 높아지는 영적 달성 수준까지 올라가는 것을 후원하는 과제에 무한한 영이 헌신하는 것을 발견한다. 이 지역 우주 창조 아들들의 목적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면서, 또 그들을 위해 일하는 성격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인간을 보살피는 이 봉사 작업이 모두 진행된다.
8:4.5 (94.7)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사랑하는 성격을 한 우주에 계시하는 거창한 일에 힘쓰는 것 같이, 무한한 영은 각 우주에 사는 모든 자녀의 개별 지성에게, 아버지와 아들 모두의 사랑을 계시하는 끝없는 봉사에 헌신한다. 이 지역 창조에서 어떤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는 것처럼, 영은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물질 민족들에게 내려오지 않는다. 그러나 무한한 영, 그리고 동급의 영들은 스스로를 낮추어서, 그들이 너희 옆에 서고, 땅에서 사는 비천한 길을 통해서 너희를 안내하는 천사로 나타날 때까지, 연속하여 신성을 묽게 만드는 놀라운 과정을 기쁘게 겪는다.
8:4.6 (95.1) 바로 이렇게 연속된 감소를 거쳐서, 무한한 영은 실제로, 하나의 성격자로서, 동물이 기원을 가지는 구체에 있는 어떤 존재에게도 아주 가까이 다가간다. 만물의 중심에서 신의 셋째 분으로서 그의 존재를 조금도 다치지 않으면서, 영은 이 모든 일을 한다.
8:4.7 (95.2) 합동 행위자는 참으로, 또 언제까지나, 위대한 봉사 성격자요, 보편적으로 자비를 베푸는 분이다. 영의 직분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가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과 아들의 영원한 자비를 합쳐 놓은 모습이라는 진리를 깊이 생각해 보아라. 그러나 영이 베푸는 봉사는 오직 영원한 아들과 우주의 아버지를 대표하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무한한 영은 또한 자신의 이름과 권한으로, 그 영역의 인간에게 봉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셋째 분은 신의 위엄을 가졌고, 자신을 위하여 우주에 자비를 베푼다.
8:4.8 (95.3) 이 무한한 영의 하위 생물 가족이 애정으로 지칠 줄 모르고 봉사하는 것을 더욱 알게 됨에 따라서, 사람은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의 이 통합된 행위의[1] [1654] 초월 성품, 그리고 비할 데 없는 성질에 더욱 감탄하고 이를 찬미하게 될 것이다. 정말로 이 영은 “올바른 자에게 늘 머무르는 주의 눈”이요, “저희의 기도에 언제나 열려 있는 신의 귀”이다.
8:5.1 (95.4) 무한한 영의 뛰어난 특징은 두루 계심이다. 온 우주에 두루, 만물에 스며드는 이 영은 어디에나 있고, 보편적이고 신다운 지성의 계심과 아주 비슷하다. 신의 둘째 분과 셋째 분의 늘 계시는 영들이 두 분을 모든 세계에서 대표한다.
8:5.2 (95.5) 아버지는 무한하다. 따라서 그는 오직 의지함으로 제한을 받는다. 조절자를 수여하고 성격을 회로로 연락하는 데 아버지는 홀로 행동하지만, 영 세력이 지적 존재들과 접촉하는 경우에, 아버지는 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의 영 및 성격자들을 이용한다. 그는 뜻대로, 아들과 또는 합동 행위자와 함께 똑같이, 영적으로 계신다. 아들과 함께, 영 안에 계신다. 아버지는 아주 확실히 어디에나 계시며, 다양하지만 관련된 이 물력ㆍ영향ㆍ계심 가운데 어떤 것으로도, 그리고 이 모두로 인하여, 이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의 계심을 알아본다.
8:5.3 (95.6) 너희의 신성한 기록에는, 하나님의 영이라는 용어가 파라다이스에 계시는 무한한 영과 너희 지역 우주의 창조 영, 이 둘을 표시하고 서로 교환할 수 있는 듯하다. 성령은 파라다이스의 무한한 영의 이 창조 딸이 계시는 영적 회로이다. 성령은 각 지역 우주에 토착(土着) 회로이며, 그 창조의 영적 영역에 국한된다. 그러나 무한한 영은 두루 계신다.
8:5.4 (95.7) 여러 가지 영적 영향이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하나와 같다. 생각 조절자가 하는 일도, 모든 다른 영향과 상관 없기는 하지만, 무한한 영과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의 통합된 영향을 나타내는 영적 봉사와 변함없이 조화된다. 이 여러 가지 영적 계심이 유란시아인의 생활에서 작용하는 동안에, 이것들은 분리할 수 없다. 그들은 기원이 다채로운데도, 너희의 지성 속에, 너희의 혼 위에, 하나의 영으로서 활동한다. 이 연합된 영적 봉사를 체험할 때, 그것이 너희에게 최상위의 영향이 되며, 최상위는 “늘 너희가 실패하지 않도록 지키고,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 앞에 너희를 티없이 내놓을 수 있는 분이라.”
8:5.5 (96.1) 무한한 영이 합동 행위자인 것을 늘 기억하여라. 아버지와 아들은 모두 그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활동하신다. 그는 자신으로서 계실 뿐 아니라, 또한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또 아버지와 아들로서 계신다. 이 이유,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무한한 영의 영 계심은 흔히 “하나님의 영”이라 언급된다.
8:5.6 (96.2) 모든 연결된 영적 봉사를 하나님의 영이라 말하는 것도 일관성이 있다. 이는 그러한 연락이 참으로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영 하나님, 그리고 칠중 신의 영을―아니 최상위 하나님의 영까지―포함하여, 이 영들의 연합이기 때문이다.
8:6.1 (96.3) 셋째 근원 중심이 널리 수여되고 방대하게 분산된다고 해서 이것이 그가 성격자인 사실을 가리게 하거나 달리 손상하지 말라. 무한한 영은 우주에 하나의 계심이요, 영원한 행위, 우주의 힘, 거룩한 영향, 보편적 지성이다. 그는 이 모두이고, 이보다 무한히 더 크지만, 또한 참되고 신다운 성격자이다.
8:6.2 (96.4) 무한한 영은 완벽하고 완전한 성격자요,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과 신으로서 대등한 분, 나란히 계신 분이다. 우주의 상급 지성에게, 합동 창조자는 아버지와 아들과 마찬가지로 실체이며 눈에 보인다. 정말로 더 잘 보이니, 이는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께 다가가기 전에, 모든 승천자가 먼저 만나야 하는 분이 영이기 때문이다.
8:6.3 (96.5) 무한한 영, 신의 셋째 분은 너희가 성격자와 연결 짓는 그 모든 속성을 소유한다. 영은 절대 지성을 가지고 있다: “영은 모든 것, 하나님의 깊은 것들조차 살피느니라.” 영은 지성 뿐 아니라 의지도 있다. 그의 선물을 수여하는 일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바로 그 영이 하시고, 각 사람에게 따로, 영이 뜻하는 대로 나누어 주시니라.”
8:6.4 (96.6) “영의 사랑”은 실재하며, 그의 슬픔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우리가 무한한 영을 파라다이스 신으로 보든, 지역 우주의 창조 영으로 보든, 우리는 합동 행위자가 셋째 근원 중심일 뿐 아니라 신다운 분임을 발견한다. 이 신성한 성격은 또한 하나의 성격자로서 우주에 반응한다. “귀가 있는 자는 영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바로 영이 너를 위하여 중재하시니라.” 영은 지음받은 존재들에게 직접 개인적 영향을 미치니, 이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마다 하나님의 아들인 까닭이라.”
8:6.5 (96.7) 우리는 온 우주에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에서도 무한한 영이 봉사하는 현상을 바라본다. 우리는 셋째 근원 중심에서 유래하는 수없이 많은 군대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활동하는, 바로 이 조정하는 신을 상상한다. 영이 두루 어디에나 계심을 우리는 인식한다. 그렇기는 해도 우리는 마찬가지로, 바로 이 셋째 근원 중심이 성격자요, 모든 사물, 모든 존재, 모든 우주의 합동 창조자인 것을 여전히 확인한다.
8:6.6 (96.8) 여러 우주를 관리하는 과제에서, 아버지ㆍ아들ㆍ영은 완전히, 영원히 서로 결합되어 있다. 비록 모든 창조에게 각자가 몸소 봉사하고 있지만, 세 분 모두가 창조하고 통제하는 봉사에 신답게, 절대로 얽혀 있고, 이것이 세 분을 언제까지나 하나로 만든다.
8:6.7 (97.1) 무한한 영의 몸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언제나 조건 없이 완전히 함께 계시니, 이는 영이 아버지와 같고 아들과도 같으며, 두 분이 언제까지나 하나인 것 같이 또한 영이 아버지와 아들과 같기 때문이다.
8:6.8 (97.2) [무한한 영의 성품과 그가 하는 일을 묘사하라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로부터 임명받은, 유버르사의 한 신성한 조언자가 유란시아에서 발표했다.]
9:0.1 (98.1)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이, 파라다이스가 있는 가운데 자신들을 성격화하려고 뭉칠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이 영원의 상황에서 아무것도, 절대 지성과 조정되고 에너지를 조종하는 고유한 특권을 부여받은 무한한 영적 존재로서, 합동 행위자가 성격화할 것을 예시하지 않는다. 그의 출현은, 중앙에 모인 완전의 사슬로부터, 그리고 성격 절대성의 속박으로부터, 아버지를 완전히 해방시킨다. 이 해방은 나중에 진화하는 여러 우주의 물질 인간도 보살피는 영으로서 일하기에 잘 적응된 존재들을 합동 행위자가 창조하는 놀라운 능력에서 드러난다.
9:0.2 (98.2) 아버지의 사랑과 의지, 영적 생각과 목적은 무한하며, 그는 우주 만물의 지원자이다. 아들의 지혜와 진리, 영적 표현과 해석은 무한하며, 그는 만물에게 계시자이다. 파라다이스는 물력을 부여하는 가능성, 에너지를 지배하는 능력이 무한하며, 파라다이스는 우주의 안정 장치이다. 합동 행위자는 통합하는 독특한 특권, 곧 존재하는 모든 우주 에너지, 모든 실재하는 우주 영, 모든 진정한 우주 지능을 조정하는 무한한 능력을 소유한다. 셋째 근원 중심은 우주의 아버지의 신성한 계획과 영원한 목적의 결과로서 나타난, 다양한 에너지와 다채로운 창조를 보편적으로 통일하는 자이다.
9:0.3 (98.3) 무한한 영, 합동 행위자는 보편적이고 신성한 봉사자이다.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안정되고 변함없는 올바른 응보와 조화를 이루면서, 영은 그치지 않고 아들의 자비와 아버지의 사랑을 베푼다. 그의 영향과 성격자들은 늘 너희와 가까이 있다. 너희를 정말로 알고 참으로 이해한다.
9:0.4 (98.4) 우주 전체에 두루, 합동 행위자의 대리자들은 모든 공간의 물력과 에너지를 끊임없이 조종한다. 첫째 근원 중심과 마찬가지로, 셋째 근원 중심은 영적인 것과 물질인 것, 모두에 민감하다. 합동 행위자는 하나님의 통일성이 계시된 것이요, 만물이―사물과 의미와 가치, 에너지와 지성과 영이―그분 안에 존재한다.
9:0.5 (98.5) 무한한 영은 모든 공간을 침투한다. 그는 영원의 궤도에 깃들고, 아버지와 아들처럼 영은 완전하고 변화가 없다―절대적이다.
9:1.1 (98.6) 셋째 근원 중심은 여러 이름으로 알려져 있고, 모두가 관계를 가리키고 기능을 인정하는 이름이다. 영 하나님으로서, 아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 성격이 동위이고, 신으로서 대등하다. 무한한 영으로서, 그는 두루 계시는 영적 영향이다. 우주의 조종자로서, 동력을 통제하는 생물의 시조(始祖)이며, 공간의 우주 물력을 활성화하는 분이다. 합동 행위자로서, 아버지와 아들의 공동 대표이며 조합의 집행자이다. 절대 지성으로서, 우주에 두루, 지능을 부여하는 근원이다. 행위의 하나님으로서, 그는 운동ㆍ변화ㆍ관계의 명백한 시조이다.
9:1.2 (99.1) 셋째 근원 중심의 어떤 속성은 아버지로부터, 어떤 것은 아들로부터 얻으며, 한편 더러는 아버지나 아들의 몸에 활발하게 있는 것이 관찰되지 않았다―셋째 근원 중심을 영원하게 만드는 아버지ㆍ아들의 조합 관계가, 파라다이스가 절대적이라는 영원한 사실과 조화되고, 또 이를 인식하고서, 일관성 있게 작용한다고 가정하는 외에, 이러한 속성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합동 창조자는 신의 처음 분과 둘째 분의 통합된 무한 개념을 충만히 몸에 담고 있다.
9:1.3 (99.2) 너희는 아버지를 최초의 창조자로서, 아들을 영적 행정가로서 상상하는 한편, 셋째 근원 중심을 하나의 만물 조정자, 무한히 협조하는 봉사자로 생각해야 한다. 합동 행위자는 실재하는 모든 실체를 서로 상관시키는 분이다. 아버지의 생각과 아들의 말씀을 두는 신의 저장소이며, 활동하면서 가운데 섬이 절대 물질임을 영원히 주목한다.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진보하는 우주 질서를 예정하였고, 하나님의 섭리는 합동 창조자와 진화하는 최상 존재의 영토이다. 실재하거나 현실화되는 어떤 실체도 셋째 근원 중심과 궁극에 관계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9:1.4 (99.3) 우주의 아버지는 에너지 이전(以前), 영 이전, 성격의 분야를 주관하고, 영원한 아들은 영적 활동 분야를 지배하며, 파라다이스 섬의 존재는 물리적 에너지와 물질화하는 동력의 분야를 통일한다. 합동 행위자는 아들을 대표하는 무한한 영일 뿐 아니라, 파라다이스의 물력과 에너지의 보편적 조종자로서 일하며, 따라서 보편적 절대 지성이 생겨나게 한다. 합동 행위자는 대우주에 두루, 분명하고 독특한 성격자로서, 특히 영적 가치, 물리적 에너지 관계, 참된 지성 의미를 가진 상급 영역에서 활동한다. 구체적으로, 그는 에너지와 영이 연합하고 서로 작용하는 데는 언제 어디서나 활동한다. 그는 지성으로 모든 반응을 지배하고, 영적 세계에서 위력을 떨치며, 에너지와 물질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다. 셋째 근원은 항상 첫째 근원 중심의 성품을 표현한다.
9:1.5 (99.4) 셋째 근원 중심은 첫째 근원 중심의 두루 계시는 성질을 완전히, 아무 제한 없이 함께 가지며, 때때로 두루 계시는 영이라 부른다. 특이하고 아주 개인적 방법으로, 지성의 하나님은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의 전지(全知) 능력을 공유한다. 영이 가진 지식은 깊고 완벽하다. 합동 행위자는 우주의 아버지의 어떤 전능 단계를 표현하지만, 실제로 오직 지성 영토에서만 전능하다. 신의 셋째 분은 지성 영역의 지적 중심이요, 보편적 행정가이다. 지성 영역에서 그는 절대적이다―그 통치권은 무제한이다.
9:1.6 (99.5) 합동 행위자는 아버지ㆍ아들의 조합(組合)에 자극을 받는 듯이 보이지만, 그의 모든 활동은 아버지와 파라다이스의 관계를 인식하는 듯하다. 때때로, 그리고 어떤 기능적 면에서, 그는 체험적 신들―최상위 하나님과 궁극위 하나님―의 불완전한 발육을 보충하는 듯하다.
9:1.7 (100.1) 여기에 무한한 신비가 있다. 무한자는 아들 안에서, 그리고 파라다이스로서, 동시에 그의 무한성을 드러냈다. 그리고 나서, 신성이 하나님과 똑같고 아들의 영적 성품을 반영하며 파라다이스 원본을 활성화할 수 있는 존재, 통치권은 임시 종속되어 있으나, 여러 방법으로, 가장 다능하게 활동하는 듯이 보이는 존재가 솟아난다. 그렇게 겉으로 나타나는 활동의 우월성은 셋째 근원 중심의 한 속성에서 드러나며, 이 속성은 물리적 인력보다―파라다이스 섬이 우주에서 명시되는 것보다―더 우월하다.
9:1.8 (100.2) 에너지와 물리적 사물의 이러한 초월적 통제 외에, 무한한 영은 인내ㆍ자비ㆍ사랑의 속성을 뛰어나게 지니며, 이러한 속성은 영적 봉사에서 아주 정교하게 나타난다. 영은 사랑을 베풀고, 자비로 응보를 완화시키는 데 뛰어나게 유능하다. 영 하나님은 최초의 영원한 아들의 하늘 같은 친절과 자비로운 애정을 모두 소유한다. 너희가 태어난 우주는 응보의 모루와 고통의 망치 사이에서 단련을 받는다. 그러나 망치를 휘두르는 자들은 자비의 자식이요, 무한한 영의 영 자손이다.
9:2.1 (100.3) 하나님은 세 가지 의미에서 영이다. 바로 하나님이 영이며, 하나님은 아들 안에서 조건 없는 영으로서, 합동 행위자 안에서는 지성과 연합한 영으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영적 실체 외에도, 우리는 체험적 영 현상의 여러 단계―최상 존재, 궁극 신, 신 절대자의 영들―을 분별한다고 생각한다.
9:2.2 (100.4) 아들이 우주의 아버지의 보완자인 것처럼, 무한한 영은 영원한 아들의 보완자이다. 영원한 아들은 아버지가 영적으로 성격화된 것이다. 무한한 영은 영원한 아들과 우주의 아버지가 성격을 갖추어 영답게 된 것이다.
9:2.3 (100.5) 유란시아의 사람들과 파라다이스 신들을 직접 연결하는, 방해받지 않는 영적 세력의 줄과 초물질 동력의 근원이 많이 있다. 생각 조절자와 우주의 아버지를 직통으로 잇는 연결이 존재하고, 영원한 아들의 영적 인력의 충동이 미치는 광범위한 영향, 그리고 합동 창조자의 영적 계심이 있다. 아들의 영과 영의 영은 기능 면에서 차이가 있다. 영적 봉사를 베풀 때, 셋째 분은 지성과 영의 합으로서 활동하든지, 또는 영 혼자서 활동할 수 있다.
9:2.4 (100.6) 이 여러 가지 파라다이스 계심 외에도, 유란시아인은 지역 우주와 초우주의 영적 영향 및 활동으로 인하여 혜택을 받으며, 이 우주들에는 목적이 참된 자와 마음이 곧은 자를 신의 이상과 최상의 완전에 도달하는 목표를 향하여 위로, 안으로 늘 인도하는 충실한 성격자들의 행렬이 거의 끝없이 있다.
9:2.5 (100.7) 우리는 영원한 아들의 보편적 영의 계심을 알고 있다―어김없이 알아볼 수 있다. 무한한 영, 곧 신의 셋째 분의 계심은 필사 인간조차 알 수 있으니, 지역 우주에서 인류의 종족들에게 수여한 성령으로서 활동하는 이 신성한 영향의 은혜를 물질 인간이 실제로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또한 생각 조절자, 우주의 아버지의 비성격 계심을 어느 정도 의식할 수 있다. 사람을 격려하고 영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일하는 이 신다운 영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완전히 협조하여 활동한다. 필사자를 승천하게 하고 완전에 이르게 만드는 계획을 실행하는 영적 작전에 이들은 하나처럼 일한다.
9:3.1 (101.1) 파라다이스 섬은 물리적 인력의 근원이자 본질이다. 이것은 물리적인 온 우주 전체에서 인력이 가장 현실적이자 영원히 의존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임을 너희에게 알리기에 충분할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공동으로 후원하는 물력과 에너지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인력을 수정하거나 취소할 수 없다. 물력과 에너지는 셋째 근원 중심의 몸에 맡겨졌고, 그와 기능적으로 관련이 있다.
9:3.2 (101.2) 무한한 영은 독특하고 놀라운 힘―반인력(反引力)―을 가지고 있다. 이 힘은 아버지나 아들에게 기능적으로 (관측할 수 있도록)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 인력의 당기는 힘을 저항하는 능력은 셋째 근원에 본래부터 있고, 합동 행위자가 어떤 단계의 우주 관계에 몸소 반응할 때 드러난다. 이 독특한 속성은 무한한 영의 어떤 고급 성격자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다.
9:3.3 (101.3) 반인력은 한 지역 구조 안에서 인력을 취소할 수 있고, 똑같은 물력의 존재를 운동시킴으로 그렇게 한다. 반인력은 물질 인력에 관해서만 작용하며, 지성의 작용은 아니다. 자이로스코프가 인력에 저항하는 현상은 반인력의 효과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지만, 반인력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는 쓸모가 없다.
9:3.4 (101.4) 이밖에도 합동 행위자는 물력을 초월하고 에너지를 중화(中和)하는 능력을 나타낸다. 그러한 능력은 물질화되는 점까지 에너지를 늦추어, 그리고 너희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다른 기법으로 작용한다.
9:3.5 (101.5) 합동 창조자는 에너지가 아니며, 에너지의 근원도 운명도 아니다. 에너지 조종자이다. 합동 창조자는 행동이다―운동ㆍ변화ㆍ수정ㆍ조정ㆍ안정ㆍ균형이다. 파라다이스의 직접 또는 간접 통제를 받는 여러 에너지는, 본질적으로 셋째 근원 중심과 그의 다양한 대리자들의 행위에 민감하다.
9:3.6 (101.6) 온 우주는 셋째 근원 중심의 생물, 동력을 통제하는 생물로 가득 차 있다: 물리적 에너지의 조절과 안정에 상관하는 물리 통제자, 동력 지휘자, 동력 중심, 그리고 행위의 하나님의 다른 대표자들이 있다. 물리적 기능을 가진 독특한 이 여러 생물은 반인력과 같은, 정도가 다른 동력 통제 속성을 모두 소유하며, 대우주의 물질과 에너지의 물리적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으로 반인력을 활용한다.
9:3.7 (101.7) 행위의 하나님의 이 모든 물질적 활동은, 그의 기능을 파라다이스 섬에 관련시키는 듯하다. 정말로, 동력 대리자들은 영원한 섬이 절대적인 것을 모두 존중하며, 아니 그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러나 합동 행위자는 파라다이스를 위해서나 그에 반응해서 행동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을 위하여 몸소 행동한다. 파라다이스는 성격자가 아니다. 셋째 근원 중심의 활동, 성격이 없고 비성격이고 그밖에 몸소 하지 않는 활동은 모두 합동 행위자 스스로 의지한 행위이며, 이것은 어느 사물이나 누구에 대한 반영도, 파생물도, 반응도 아니다.
9:3.8 (101.8) 파라다이스는 무한의 원본(原本)이다. 행위의 하나님은 그 원본을 활성화시키는 분이다. 파라다이스는 무한의 물질적 지레받침이요, 셋째 근원 중심의 대리자들은 지능 있는 지렛대요, 이 지렛대는 물질 수준을 동원하고 물리적으로 창조된 장치 속에 자발성을 불어넣는다.
9:4.1 (102.1) 셋째 근원 중심에게는 물리적ㆍ영적 속성과 뚜렷이 다른, 지적 성품이 있다. 그러한 성품은 도저히 접촉이 가능하지 않지만, 그 성품과―몸소는 아니라도 지적으로―연결할 수 있다. 기능의 지성 수준에서, 이 성품은 셋째 분의 물리적 속성 및 영적 특징과 구별할 수 있지만, 성격자가 식별하기에, 이 성품은 결코 물리적 표현이나 영적 표현과 따로 작용하지 않는다.
9:4.2 (102.2) 절대 지성은 셋째 분의 지성이며, 영 하나님의 성격과 분리할 수 없다. 활동하는 존재들의 경우에, 지성은 에너지나 영, 또는 이 두 가지와 따로 분리되지 않는다. 생각하는 머리는 에너지에 자생하지 않는다. 에너지는 지성을 받아들이고 지성에 민감하다. 에너지 위에 지성을 겹쳐놓을 수 있으나, 의식(意識)은 순전한 물질 수준에 본래부터 있지 않다. 지성을 순수한 영 위에 덧붙여 놓을 필요는 없는데, 이는 영이 날 때부터 의식이 있고 사물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영은 언제나 총명하며, 어떤 면에서 머리를 쓰고 있다. 영은 이런 지성 또는 저런 지성일 수 있고, 선(先)지성 또는 초월 지성일 수도, 아니 영 지성일 수도 있지만, 영은 생각하고 아는 것에 상당하는 일을 한다. 영의 통찰력은 지성의 의식을 초월하고, 의식 위에 가며, 이론적으로 의식보다 앞서 간다.
9:4.3 (102.3) 합동 행위자는 지성의 분야, 우주 지능의 영역에서만 절대적이다. 셋째 근원 중심의 지성은 무한하며, 온 우주에서 활성적이고 작용하는 지성 회로를 철저히 초월한다. 일곱 초우주의 지성 재산은 일곱 으뜸 영으로부터 파생되며, 이들은 합동 창조자의 주요 성격자이다. 이 으뜸 영들은 지성을 우주 지성으로서 대우주에 분배하며, 너희의 지역 우주는 오르본톤 부류, 우주 지성의 네바돈 변종으로 가득 차 있다.
9:4.4 (102.4) 무한한 지성은 시간을 무시하고, 궁극의 지성은 시간을 초월하며, 우주 지성은 시간에 제약을 받는다. 공간도 또한 그러하니, 무한한 지성은 공간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지만, 무한 수준에서 지성의 보조 수준까지 내려감에 따라서, 지능은 공간이 있다는 사실과 그 한계를 더욱 고려해야 한다.
9:4.5 (102.5) 우주 지성이 영에 반응하는 것 같이, 우주 물력은 지성에 반응한다. 영은 신의 목적이며, 영 지성은 활동하는 신의 목적이다. 에너지는 사물이요, 지성은 의미, 영은 가치 기준이다. 시공 세계에서도, 지성은 영원 속에서 서로 친척 관계가 있음을 가리키는 관계, 에너지와 영 사이의 상대적 관계를 확립한다.
9:4.6 (102.6) 지성은 영의 가치 기준을 지능이 깨닫는 의미로 바꾼다. 의지는 물질과 영의 분야에서 지성이 의미하는 것을 열매 맺게 하는 힘을 가졌다.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것은 영ㆍ지성ㆍ에너지 면에서 상대적이고 다른 성장을 수반한다. 성격은 이러한 체험적 개성의 구성 요소들을 통일하는 무엇이다.
9:5.1 (102.7) 셋째 근원 중심의 지성은 무한하다. 우주가 무한까지 성장하더라도, 그의 지성 잠재력은 한없는 수의 생물에게 적당한 지성, 그리고 지능의 다른 필수 조건을 부여하기에 넉넉할 것이다.
9:5.2 (102.8) 창조된 지성의 분야에서, 셋째 분은 동격 및 하위 동료들과 함께 최고로 다스린다. 인간 지성의 영역은 셋째 근원 중심에 순전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는 지성을 수여하는 분이다. 무한한 영의 지성 행위와 영적 기능으로 말미암아 길이 적당히 준비될 때까지, 아버지의 분신조차도 사람의 지성에 깃들기가 불가능함을 발견한다.
9:5.3 (103.1) 지성(知性)의 독특한 모습은 아주 넓은 범위의 생명에게 지성이 부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창조하는 동료와 생물 동료들을 통해서, 셋째 근원 중심은 모든 구체의 온갖 지성에게 봉사한다. 그는 지역 우주의 보조자들을 통해서 인간 및 인간 이하의 지능에게 봉사하며, 물리 통제자의 매체를 통해서, 살아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원시 형태, 가장 낮고 체험하지 않는 개체에게도 봉사한다. 지성이 지휘하는 것은 반드시 지성 영, 또는 지성 에너지 성격자가 베푸는 봉사이다.
9:5.4 (103.2) 신의 셋째 분이 지성의 근원이니까, 의지를 가진 진화 인간이 영원한 아들이나 우주의 아버지보다 무한한 영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을 더 쉽게 형성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합동 창조자의 실체는, 인간 지성의 바로 그 존재 속에 불완전하게 드러난다. 합동 창조자는 우주 지성의 조상이며, 사람의 지성은 개별화된 회로이다, 곧 셋째 근원 중심의 창조 딸이 지역 우주에서 수여하는 그 우주 지성의 비성격 부분이다.
9:5.5 (103.3) 셋째 분이 지성의 근원이라고 해서 지성의 모든 현상이 신성하다고 상상하지 말라. 인간의 지능은 동물 종족의 물질적 기원에 뿌리가 있다. 물질적 자연이 파라다이스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참되게 드러내지 못하는 것처럼, 우주 지능은 지성인 하나님을 참되게 계시한 것이 아니다. 완전은 자연 속에 있지만 자연은 완전하지 않다. 합동 창조자는 지성의 근원이지만, 지성은 합동 창조자가 아니다.
9:5.6 (103.4) 유란시아에서, 지성은 완벽한 생각의 본질과 너희의 미숙한 인간 성품의 진화하는 정신을 절충한 것이다. 너희를 지적으로 진화시키는 계획은 정말로, 숭고하게 완전한 계획이지만, 너희는 임시 거처인 육체 안에서 활동하는 동안에 그 신성한 목표에 훨씬 못 미친다. 지성은 참으로 신성한 기원에서 생겼고 신성한 운명을 가졌지만, 너희의 필사 지성은 아직까지 신다운 기품이 없다.
9:5.7 (103.5) 너무나 빈번히, 너무나 자주, 너희는 성실하지 못함으로 너희의 지성을 다치며, 불의(不義)로 너희의 지성을 시들게 한다. 너희는 지성이 동물 같은 두려움에 빠지게 하고, 쓸데없는 걱정으로 지성을 왜곡한다. 그러므로 지성의 근원은 신성하지만, 너희가 사는 승천 세계에서 아는 지성은, 찬미나 숭배는커녕, 도저히 크게 칭찬 받을 대상이 될 수 없다. 미숙하고 한가한 인간 지능에 관하여 숙고하면 오로지 겸손한 반응이 생길 것이다.
9:6.1 (103.6) 셋째 근원 중심, 곧 우주 지능은 모든 창조에 있는 각 지성과 각 지능을 친히 의식하고 있으며, 방대한 우주에서 지성을 부여받은 모든 육체적, 상물질 및 영적 생물과 친히 완전한 연락을 유지한다. 이 모든 지성 활동은, 셋째 근원 중심에 집중하는 절대 지성 인력의 회로에 붙잡히며, 무한한 영이 친히 의식하는 일부가 된다.
9:6.2 (103.7) 아버지가 모든 성격자를 자신에게로 잡아당기는 것 같이, 또 아들이 모든 영적 실체를 끌어당기는 것 같이, 합동 행위자는 모든 지성에게 인력(引力)을 행사한다. 그는 우주의 지성 회로를 무조건 지배하고 통제한다. 모든 참다운 진정한 지적 가치, 모든 신다운 생각과 완전한 관념은, 어김없이 이 절대 지성 회로로 끌려 들어온다.
9:6.3 (104.1) 지성 인력은 물질 및 영적 인력과 상관 없이 작용할 수 있으나, 언제 어디서 이 물질 및 영적 인력이 부딪치든지 지성 인력이 반드시 활동한다. 세 인력이 모두 관계될 때, 성격 인력은 물질 생물―물리적 생물이나 상물질 생물, 유한 생물이나 초한 생물―을 포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상관 없이, 비성격 존재의 경우에도, 지성의 부여는 생각할 자격을 갖추게 하며, 성격이 전혀 없는데도 의식(意識)을 부여한다.
9:6.4 (104.2) 그러나 성격 위엄을 가진 자아는, 인간이든 신이든, 불멸하든 불멸 가능성이 있든, 영이나 지성이나 물질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그런 자아는 우주의 아버지가 수여한다. 영과 지성과 물질 인력의 상호 작용도 성격 인력의 출현에 전제 조건은 아니다. 아버지의 회로는 영 인력에 민감하지 않은, 지성과 물질을 겸한 존재를 용납할 수도 있고, 물질 인력에 민감하지 않은 지성 영의 존재를 포함할 수도 있다. 성격 인력의 작용은 반드시 우주의 아버지가 뜻하는 행위이다.
9:6.5 (104.3) 지성은 순전한 물질 존재에서는 에너지와 결합되어 있고, 순전한 영적 성격에서는 영과 연합되어 있지만, 사람을 포함하여 수많은 성격자 계급은, 에너지와 영, 양자와 연합된 지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 지성의 영적 면은 어김없이 영원한 아들의 영 인력의 당김에 반응하며, 지성의 물질적 모습은 물질 우주의 인력 자극에 반응한다.
9:6.6 (104.4) 우주 지성은 에너지나 영과 연합되지 않을 때, 물질 회로나 영 회로의 인력 요구에 지배되지 않는다. 순수한 지성은 오직 합동 행위자의 보편적 인력에 지배된다. 순수한 지성은 무한한 지성과 가까운 관계에 있고, 무한한 지성은 (이론적으로, 영 및 에너지 절대자와 동등한 것) 겉보기에 그 자체로서 하나의 법이다.
9:6.7 (104.5) 영과 에너지의 사이가 크게 벌어질수록, 지성의 관측할 수 있는 기능은 더 커진다. 에너지와 영의 차이가 적을수록, 지성의 관측할 수 있는 기능은 적어진다. 우주 지성의 최대 기능은 시공 우주에 있는 듯하다. 여기서 지성은 에너지와 영 사이의 중간 지역에서 활동하는 듯하다. 하지만 상급 수준의 지성은 그렇지 않다. 파라다이스에서는 에너지와 영이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9:6.8 (104.6) 지성 인력의 회로는 믿을 만하다. 이 회로는 파라다이스에 계신 신의 셋째 분으로부터 방출되어 나오지만, 관측할 수 있는 지성 기능이 모두 예측이 가능하지는 않다. 지금까지 알려진 창조 전체에 걸쳐서, 이 지성 회로와 평행하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어떤 계심이 있는데, 그 기능은 예측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예측 불능이 어느 정도 우주 절대자의 작용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 기능이 무엇인지 모른다. 무엇이 이 기능을 자극하는지 오직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기능과 생물의 관계에 대해서, 겨우 짐작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9:6.9 (104.7) 유한한 지성의 예측할 수 없는 어떤 면은 최상 존재의 불완전 때문인지도 모른다. 합동 행위자와 우주 절대자가 아마도 서로 닿을 수도 있는 넓은 활동 지역이 있다. 지성에 관하여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지만, 우리는 다음에 대하여 분명하다: 무한한 영은 모든 생물에 대한 창조자 생각의 완전한 표현이며, 최상 존재는 창조자에 대한 모든 생물의 생각이 진화로 표현된 것이다.
9:7.1 (105.1) 정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 영적인 것의 동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으로, 합동 행위자는 우주에서 일어나는 사실성의 모든 수준을 조정할 수 있다. 이것은 우주 거울 현상이며, 초우주에 두루, 모든 사건이 벌어짐에 따라서, 이를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며, 이 모든 정보와 지식을 어떤 원하는 초점에 모으는 능력, 독특하고 설명할 수 없는 능력이다. 거울 작용은 일곱 초우주의 각 본부 세계에서 완전히 입증된다. 또한 여러 초우주의 모든 지역에 걸쳐서, 그리고 지역 우주의 테두리 안에서 작용한다. 마지막으로 거울 작용은 파라다이스에 집중된다.
9:7.2 (105.2) 초우주 본부 세계에서 머무르는 거울 성격자들의 놀라운 연기(演技)에서 나타나다시피, 거울 현상은, 모든 창조에서 발견되는 모든 존재 단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상호 관계를 대표한다. 영의 줄은 아들에게로, 물리적 에너지의 줄은 파라다이스로, 지성의 줄은 셋째 근원에게로 유래를 추적할 수 있다. 우주를 비치는 특별한 거울 현상에는 모두 세 가지가 독특하고 드물게 통일되고 연합되어 있어서 우주 통치자들로 하여금 멀리 떨어진 곳의 상황을 순간적으로, 그런 상황이 일어남과 동시에 알게 해준다.
9:7.3 (105.3) 우리는 거울 작용의 기법을 많이 이해하지만, 우리를 참으로 어리둥절하게 하는 여러 단계가 있다. 우리는 합동 행위자가 지성 회로의 우주 중심이요, 우주 지성의 조상이요, 우주 지성은 셋째 근원 중심의 절대 지성 인력의 지배를 받으며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더 나아가서, 우주 지성의 회로는 모든 알려진 존재의 지적 수준에 영향을 미치며, 그 회로가 우주의 공간 보고서를 포함하고, 똑같이 확실하게 이 회로가 일곱 으뜸 영 안에 집중되고, 셋째 근원 중심에서 만나는 것을 알고 있다.
9:7.4 (105.4) 유한한 우주 지성과 신의 절대 지성의 관계는 최상위의 체험적 지성 안에서 진화하는 듯하다. 세월이 시작될 때, 무한한 영이 최상위에게 이 체험적 지성을 수여했다고 우리는 가르침을 받았다. 거울 현상의 어떤 모습은 오로지 최상위 지성의 활동을 가정(假定)해야 설명할 수 있다고 추측한다. 최상위가 거울 작용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우주가 의식(意識)하는 복잡한 거래와 어김없는 작용을 어떻게 설명할까 우리는 알 수 없다.
9:7.5 (105.5) 체험적 유한자의 한계 안에서 거울 작용은 전지(全知)로 보이며, 거울 작용은 최상 존재의 계심과 의식이 솟아나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이 가정이 참말이라면, 어느 단계에서도 거울 작용의 이용은 최상위의 의식과 부분적으로 접촉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9:8.1 (105.6) 무한한 영은 많은 능력과 특권을 동급 및 하위(下位) 성격자와 대리자들에게 전해 주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
9:8.2 (105.7) 삼위일체와 따로,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어떤 밝혀지지 않은 관계에서 활동하면서, 무한한 영이 신으로서 한 첫 창조 행위는 파라다이스의 일곱 으뜸 영의 존재로 성격화되었는데, 이들은 무한한 영을 우주에 분배하는 자이다.
9:8.3 (106.1) 초우주 본부에는 셋째 근원 중심을 직접 대표하는 자가 아무도 없다. 이 일곱 초우주는 각각 파라다이스의 한 으뜸 영에게 의존하고, 그는 초우주 서울에 자리잡은 일곱 거울 영을 통해서 활동한다.
9:8.4 (106.2) 무한한 영이 다음에 계속한 창조 활동은 때때로 창조 영들의 생산에서 드러난다.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이 한 창조 아들의 부모가 될 때는 언제나 무한한 영이 한 지역 우주 창조 영의 조상이 되며, 창조 영은 다음에 모든 지역 우주 체험에서 그 창조 아들의 가까운 동료가 된다.
9:8.5 (106.3) 영원한 아들과 창조 아들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는 것 같이, 무한한 영과 창조 영들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지역 우주에서, 창조 영은 창조 아들과 동격자이다. 무한한 영과 창조 전체의 관계는, 한 창조 영과 한 지역 우주의 관계와 같다.
9:8.6 (106.4) 물리적 성질, 상물질 성질, 영적 성질을 가진 특정 회로의 감독자들과 함께, 광범위한 집단의 봉사하는 영ㆍ사자(使者)ㆍ교육자ㆍ판관ㆍ조수ㆍ고문들은 대우주에서 셋째 근원 중심을 대표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존재들 모두가 성격자는 아니다. 유한한 생물의 성격은 다음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9:8.9 (106.7) 창조하는 성격자와 창조된 성격자들이 있고, 이 두 가지 기본 종류 외에도 셋째 근원 중심 성격자들이 있다. 그들은 무한한 영에 대해서 성격이지만, 생물 존재들에 대하여 조건 없이 성격은 아니다. 이 셋째 근원 성격자들은 아버지 성격 회로의 일부가 아니다. 첫째 근원 성격자와 셋째 근원 성격자는 서로 접촉할 수 있는데, 이는 모든 성격자가 접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9:8.10 (106.8) 아버지는 자유 의지로 친히 성격을 수여한다. 아버지가 왜 성격을 주는지 우리는 짐작만 할 수 있고, 그가 어떻게 성격을 주는지 모른다. 어째서 무한한 영이 아버지가 수여하는 성격과 다른 성격을 수여하는지 모르지만, 무한한 영은 자신을 위해서, 영원한 아들과 창조적으로 연결하여, 그리고 너희에게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방법으로, 이렇게 한다. 무한한 영은 또한 첫째 근원 성격이 수여될 때에도 아버지를 위해서 활동할 수 있다.
9:8.11 (106.9) 셋째 근원 성격자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다. 어떤 동력 지휘자들처럼, 아버지의 성격 회로에 포함되지 않은 수많은 무리에게 무한한 영은 셋째 근원 성격을 수여한다. 마찬가지로, 무한한 영은 수많은 무리의 존재들을 성격자로 대우한다. 창조 영이 그 예이며, 이들은 아버지와 회로가 연결된 생물의 관계와 따로 독립된 계급이다.
9:8.12 (106.10) 첫째 근원 성격자와 셋째 근원 성격자는 모두, 사람이 성격 관념과 관련짓는 모든 것,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이 부여받는다. 이들은 기억ㆍ논리ㆍ판단, 창조적 상상력, 관념 연결, 결정, 선택을 비롯하여, 필사자에게 도무지 알려지지 않은, 추가된 수많은 지능의 능력을 포함하는 지성을 소유한다. 거의 예외 없이, 너희에게 드러난 계급들은 형태와 뚜렷한 개성이 있으며, 실재하는 존재이다. 대다수는 모든 계급의 영 존재들의 눈에 보인다.
9:8.13 (107.1) 너희가 현재 가진 물질적 눈의 제한된 시력을 벗어나고, 영적 사물의 실체에 더 민감한 상물질 형태를 부여받자마자, 너희도 하위 등급의 영적 동료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9:8.14 (107.2) 이 여러 이야기에서 밝히다시피, 기능적으로 분류한 셋째 근원 중심의 집단은 다음 세 무리로 나누어진다:
9:8.15 (107.3) I. 최상 영. 다른 자들 가운데 다음 계급을 포함하여, 복합 기원을 가진 집단:
9:8.19 (107.7) II. 동력 지휘자. 모든 조직된 공간에서 두루 활동하는, 통제하는 생물 및 대리자 무리.
9:8.20 (107.8) III. 무한한 영의 성격자. 이들 중에 더러는 의지를 가진 생물로서 독특하지만, 이 명칭은 이 존재들이 반드시 셋째 근원 성격자임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보통 3대 등급으로 분류된다:
9:8.24 (107.12) 이 무리들은 파라다이스에서, 중앙 우주, 곧 거주(居住) 우주에서, 그리고 초우주에서 봉사하며, 지역 우주에서, 아니 별자리ㆍ체계ㆍ행성에서 활동하는 계급들까지 포함한다.
9:8.25 (107.13) 신성한 무한한 영의 방대한 가족에 속하는 영 성격자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아들의 자비를 시공의 진화 세계에서 모든 지적 인간에게 베푸는 직무에 언제까지나 헌신한다. 이 영 존재들은 살아 있는 사다리이며, 이것을 타고 필사 인간은 혼돈으로부터 영광으로 올라간다.
9:8.26 (107.14) [무한한 영의 성품과 하는 일을 묘사하라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로부터 임명받고서, 유버르사의 한 신성한 조언자가 유란시아에서 계시하였다.]
10:0.1 (108.1) 파라다이스에 계신 영원한 신들의 삼위일체는 아버지가 성격의 절대성을 벗어나는 것을 용이하게 만든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무한한 개인적 의지의 한없는 표현을 신의 절대 성질과 완전히 결합한다. 영원한 아들, 그리고 신에 기원을 가진 다양한 아들들은, 합동 행위자 및 우주에 있는 그의 자손들과 함께,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버지가 먼저이고, 완전하고 불변하며, 영원하고 보편적이며, 절대적이고 무한한 데 본래부터 있는 한계로부터, 실질적으로 아버지를 해방시킨다.
10:0.2 (108.2)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신의 영원한 성품을 충만히 표현하고 완전히 계시하는 길을 실질적으로 마련해 준다. 마찬가지로, 삼위일체의 고정된 아들들은 신의 응보를 충분하고 완전하게 계시할 수 있게 한다. 삼위일체는 신이 하나가 되는 것이요, 이러한 통일은 동위이자 공존하는 최초의 세 성격자,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영 하나님이 신으로서 하나 되는 절대적 기초에 영원히 의존한다.
10:0.3 (108.3) 영원의 궤도에서, 현재 상황에서 끝없는 과거를 돌아보면, 우리는 우주의 사건 중에 유일하게 피할 수 없는 필연성을 발견할 수 있으니, 바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이다. 나는 삼위일체가 불가피했다고 판단한다. 시간 세계의 과거ㆍ현재ㆍ미래를 보건대, 나는 온 우주에서 이 외에 아무것도 불가피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거나 앞을 내다보거나, 삼위일체가 없이는 현재의 총우주를 생각할 수 없다. 일단 삼위일체가 계시면, 우리는 만사(萬事)를 행하는 다른 방법, 아니 여러 방법까지도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ㆍ아들ㆍ영의 삼위일체가 없다면, 어떻게 무한자가 신이 절대로 하나라는 사실이 있는데도, 동위의 세 분으로 성격화를 달성할 수 있을까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어떤 다른 창조 개념도 삼위일체의 기준, 곧 하나의 신이 본래 가진 절대성이 완벽해야 할 뿐 아니라, 신을 삼위로[1] [1655] 성격화하는 데 본래부터 의지를 완전히 해방해야 한다는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
10:1.1 (108.4) 영원한 과거에, 아버지가 심오한 자아 분배 정책을 개시한 듯 보일 것이다. 우주의 아버지의 성품, 사심 없고 남을 사랑하는 사랑스러운 성품 안에는, 오직 그가 양도하거나 남에게 수여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권능ㆍ권한의 행사만 자신에게 남겨 놓도록 만드는 무엇이 본래부터 있다.
10:1.2 (108.5) 우주의 아버지는 지금까지 어떤 다른 창조자나 생물에게 수여할 수 있는, 자신의 각 부분을 다 벗어버렸다. 아버지는 신다운 아들과 그 동료 지성들에게 양도할 수 있는 모든 권능과 권한을 넘겨주었다. 실제로, 각자의 우주에서 사는 군주 아들들에게, 전해 줄 수 있는 행정 권한의 모든 특권을 양도하였다. 최초의 중앙 우주에서 영원한 아들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지역 우주 사무에서 군주인 각 창조 아들을 똑같이 완전하고, 유능하고, 권한이 있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성격을 소유하는 위엄과 신성함을 가지고, 온갖 방법으로, 어느 시대에나, 어디서나, 어떤 성격자에게나, 그리고 그가 가운데 거하는 우주를 제외한 모든 우주에서, 자신의 모든 것과 모든 속성, 벗을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것을 나누고 실제로 주었다.
10:1.3 (109.1) 신다운 성격은 자기 중심이 아니다. 스스로 성격을 분배하고 나누어 주는 것은 자유 의지를 가진 신의 자아의 특징이다. 생물은 성격을 가진 다른 생물과 몹시 사귀고 싶어한다. 창조자들은 우주에 있는 자손에게 신성을 나누어 주도록 마음이 움직인다. 무한자의 성격은 우주의 아버지로서 드러나며, 동위 성격자 두 분, 영원한 아들과 합동 행위자와 더불어, 존재의 실체, 그리고 자신과 동등함을 함께 가진다.
10:1.4 (109.2) 아버지의 성격과 신의 속성에 관한 지식을 얻으려면, 우리는 언제나 영원한 아들의 계시에 의존할 터인데, 이는 합동 창조 행위가 일어났을 때, 신의 셋째 분이 성격 존재로 솟아나서 신성한 부모의 통합된 개념을 집행했을 때, 아버지가 무제한 성격자로 존재하기를 그쳤기 때문이다. 합동 행위자가 존재하게 되고 창조의 중앙 핵심이 모습을 갖추자, 어떤 영원한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님은 절대 성격자인 자신을 영원한 아들에게 주셨다. 이렇게 아버지는 하나만 얻은 아들에게 “무한한 성격”을 수여하며, 또한 두 분은 영원히 연합한 그들의 “합동 성격”을 무한한 영에게 수여한다.
10:1.5 (109.3) 이러한 까닭으로, 그리고 유한한 지성이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여러 이유로, 하나님의 성격이 영원한 아들 안에서 보편적으로 드러나고, 아들과 함께 무한한 영 안에서 보편적으로 활동할 때를 제외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아버지 성격을 이해하기가 극도로 힘들다.
10:1.6 (109.4) 파라다이스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여러 진화 세계를 찾아오며, 때때로 거기서도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살기 때문에, 또 이 수여가 필사 인간에게 신다운 성격의 성품과 특징에 대하여 무언가 실제로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여러 행성 구체에서 인간은 아버지ㆍ아들ㆍ영에 관하여 믿을 만하고 신빙성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하여 이 파라다이스 아들들이 수여되기를 고대(苦待)해야 한다.
10:2.1 (109.5) 삼자일체화 기법으로 아버지는 무제한의 영 성격을 벗어버리는데, 그 영 성격이 아들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자신을 바로 이 아들의 아버지로 만들고, 이렇게 함으로 자신이, 나중에 창조되거나, 궁극에 이르거나, 또는 달리 성격화된 종류의 인간, 의지(意志)를 가진 지적 인간의 신다운 아버지가 되는 한없는 능력을 소유한다. 절대적 무제한 성격인 아버지는 오직 아들로서, 그리고 아들과 함께 활동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격을 가진 아버지로서 그는 다른 수준의 인간, 의지를 가진 지적 인간의 다양한 무리에게 성격을 줄곧 수여하며, 방대한 이 우주 자녀 집단과 사랑으로 친교하는 개인적 관계를 언제까지나 유지한다.
10:2.2 (109.6) 아버지가 아들의 성격 위에 자신을 충만히 수여한 뒤에, 이 자기 수여 행위가 완료되고 완전할 때, 아버지ㆍ아들의 연합에 이처럼 존재하는 무한한 능력과 성품 중에서, 영원한 두 동업자는 합동하여 자신들과 같은 또 다른 존재를 구성하는 질과 속성을 수여한다. 그리고 이 합동 성격, 무한한 영은 신의 실존적 성격화를 마친다.
10:2.3 (110.1) 아들은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데 꼭 필요하다. 영은 둘째 분과 셋째 분의 친교에 필수이다. 세 분은 최소의 사회 집단이지만, 이것은 합동 행위자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믿는 여러 이유 중에서 아주 작은 것이다.
10:2.4 (110.2) 첫째 근원 중심은 무한한 아버지 성격, 무제한의 근원 성격이다. 영원한 아들은 조건 없는 절대 성격, 곧 성격을 가진 하나님의 성질을 완전히 계시한 자로서, 온 세월을 통해서, 그리고 영원히 두루 지속하는 신성한 존재이다. 무한한 영은 합동 성격, 곧 아버지ㆍ아들이 영구히 연합한 결과로 생긴 독특한 성격이다.
10:2.5 (110.3) 첫째 근원 중심의 성격은 무한한 성격에서 영원한 아들의 절대 성격을 뺀 것이다. 셋째 근원 중심의 성격은 해방된 아버지 성격과 절대 아들 성격을 더한 것보다 더 큰 결과이다.
10:2.6 (110.4) 우주의 아버지, 영원한 아들, 무한한 영은 독특한 성격자이다. 아무도 중복되지 않고, 각자 고유(固有)하고 모두 하나가 되어 있다.
10:2.7 (110.5) 영원한 아들 홀로, 신성한 성격 관계, 곧 아버지의 아들인 것과 영에게 아버지인 것, 그리고 조상인 아버지와 동료인 영과, 신으로서 동등한 것을 충만히 의식한다. 아버지는 자기와 대등한 아들을 가지는 체험을 맛보지만, 아버지는 그보다 먼저인 조상이 없다. 영원한 아들은 아들이 되는 체험을 가지며, 성격의 조상을 인식하고, 동시에 아들은 함께 무한한 영에게 어버이인 것을 의식한다. 무한한 영은 두 성격 조상을 의식하지만, 동위의 어떤 신 성격에게도 어버이가 되지 않는다. 영과 함께, 신으로 성격화된 실존적 집단이 완성된다. 셋째 근원 중심으로부터 나온 1차 성격자는 체험을 겪으며 그 수는 일곱이다.
10:2.8 (110.6) 나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 기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삼위일체가 하나가 된 신임을 알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존재하며, 그들의 뚜렷한 성격자 자격으로 활동하는 것을 알고 있다. 세 분이 개별로, 또 집합으로 활동할 뿐 아니라, 여러 조합을 지어 행동을 조정함으로, 그래서 마지막에 세 분이 일곱 가지로, 혼자이든지 여럿의 다른 자격으로 활동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이 일곱 가지 결합이 그러한 신의 조합 가능성을 모두 소모하니까, 우주의 실체들이 가치, 의미, 성격 면에서 일곱 가지 다양한 변종이 나타날 것은 불가피하다.
10:3.1 (110.7) 오로지 하나의 신이 있는데도, 신은 분명하고 신성한 세 분으로 성격화되어 있다. 사람에게 신다운 조절자를 부여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면, “우리의 모습대로 필사 인간을 만들자”하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유란시아의 여러 기록을 보면, 여럿인 신의 활동과 행적에 관하여 이러한 언급이 되풀이되는데, 세 근원 중심이 존재하고 활동함을 인정했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준다.
10:3.2 (110.8) 삼위일체의 연합에서, 아들과 영은 아버지에 대하여 똑같고 대등한 관계를 유지한다고 우리는 가르침을 받아 왔다. 영원 속에서, 그리고 신으로서 세 분은 의심할 바 없이 그런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시간 세계에서, 그리고 성격자로서, 세 분은 대단히 다양한 성질의 관계를 분명히 드러낸다. 파라다이스에서 바깥으로 우주들을 내다보면, 이 여러 관계는 아주 비슷해 보이지만, 공간의 영토에서 볼 때 아주 다른 듯하다.
10:3.3 (111.1) 신다운 아들들은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영의 아이들은 참으로 “하나님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고, 아들과 함께 무한한 영을 통해서 행위한다. 한편 모든 우주 활동에서 아들과 영은 지극히 친하며, 또한 명예롭고 신성하게 존경받는 공통된 아버지를 위해, 대등한 두 형제로서 찬미와 사랑으로 일한다.
10:3.4 (111.2) 아버지ㆍ아들ㆍ영은 확실히 동일한 성품을 가졌고, 동위의 존재이다. 그러나 그들의 우주 활동에 명백한 차이가 있다. 혼자서 활동할 때, 신 세 분은 각자 절대성이 제한된 듯하다.
10:3.5 (111.3) 아들과 영을 구성하는 성격ㆍ동력ㆍ속성을 스스로 뜻하여 벗기 전에, 우주의 아버지는 (철학적으로 보건대) 제한 없고 절대적이고 무한한 신이었던 듯이 보인다. 그러나 아들이 없이, 그러한 이론적 첫째 근원 중심은 어떤 말뜻으로도 우주의 아버지라고 생각할 수 없으니, 아들 없는 아버지는 현실이 아니다. 더군다나, 총체적 의미에서 절대적이었다면, 아버지는 영원히 오래 전 어느 순간에 혼자 존재했어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결코 그렇게 혼자 계셨던 적이 없다. 아들과 영, 두 분은 아버지와 함께 영원하다. 첫째 근원 중심은 최초의 아들의 영원한 아버지였을 뿐 아니라, 아들과 함께 무한한 영의 영원한 조상이었고, 또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다.
10:3.6 (111.4) 우리는 아버지가 절대로 아버지인 것과 절대적 의지만 제쳐놓고, 절대성을 직접 나타내는 어떤 모습도 벗어버렸음을 관찰한다. 의지가 아버지로부터 떼어낼 수 없는 속성인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오로지 아버지가 자신에게서 의지를 벗어버리지 않은 것을 지켜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한 의지의 무한성은 첫째 근원 중심에 영원히 본래부터 있었음이 틀림없다.
10:3.7 (111.5) 영원한 아들에게 절대 성격을 수여하면서 우주의 아버지는 성격 절대성의 사슬을 벗어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아버지는 절대 성격자로서 혼자 행동하는 것을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드는 첫 걸음을 내디딘다. 공존하는 신―합동 행위자―가 마침내 성격화하면서, 절대 신 기능 전체에 관련하여, 신다운 세 성격자 사이에 삼자일체가 되는 중대한 상호 의존성이 따른다.
10:3.8 (111.6) 하나님은 온 우주에서 모든 성격자에게 아버지 절대자이다. 아버지가 몸소 행동하는 자유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이미 만들어졌고, 만들어지고 있고, 아직 만들어야 할 시공의 여러 우주에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경우를 제외하고, 아버지는 총체적 신으로서 절대적인 것이 식별되지 않는다.
10:3.9 (111.7) 첫째 근원 중심은 하보나 바깥의 여러 우주의 현상에서 다음과 같이 활동한다:
10:3.10 (111.8) 1. 창조자로서, 손자인 창조 아들들을 통해서.
10:3.11 (111.9) 2. 통제자로서, 파라다이스의 인력 중심을 통해서.
10:3.12 (111.10) 3. 영으로서, 영원한 아들을 통해서.
10:3.13 (111.11) 4. 지성으로서, 합동 창조자를 통해서.
10:3.14 (111.12) 5. 아버지로서, 성격 회로를 통해서, 어버이로서 모든 인간과 연락을 유지한다.
10:3.15 (111.13) 6. 성격자로서, 창조에 두루, 독점적 분신으로―생각 조절자를 이용하여 필사 인간 속에서―그는 직접 활동한다.
10:3.17 (112.1) 우주의 아버지가 이렇게 관할권을 모두 버리고 넘겨준 것은 온전히 자원하고 스스로 부과한 것이다. 전능한 아버지는 일부러 이 우주 권한의 제한을 받아들인다.
10:3.18 (112.2) 하나님의 분신을 수여하는 것과 기타 선(先)인격 활동을 제외하고, 모든 영적 면에서, 영원한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서 활동하는 듯하다. 아들은 물질 인간의 지적 활동이나 물질 우주의 에너지 활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지 않는다. 절대적인 아들은 한 성격자로서 영적 우주 분야에서만 활동한다.
10:3.19 (112.3) 무한한 영은 놀랍게도 보편적이고, 믿을 수 없이 모든 활동에 다능하다. 그는 지성ㆍ물질ㆍ영의 분야에서 행동한다. 합동 행위자는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을 대표하지만, 또한 자신으로서 활동한다. 물리적 인력, 영적 인력, 또는 성격 회로에 직접 아랑곳하지 않지만, 다른 모든 우주 활동에 다소 참여한다. 무한한 영은 실존적이며 절대적인 세 가지 인력 통제에 의존하는 듯한 한편, 세 가지를 초월적으로 통제하는 듯하다. 이 세 가지 자질은 여러 방법으로 이용되어서, 궁극을 넘는 절대 한계에 바로 미치기까지, 1차 물력 및 에너지의 표현조차도 초월하고 겉보기에 중화하는 듯하다. 어떤 상황에서, 이 초월적 통제는 우주 실체의 1차적 표현도 절대로 초월한다.
10:4.1 (112.4) 모든 절대적 연합 가운데,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제1 삼자일치)는 순전히 성격을 가진 신의 결합으로서 독특하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과 가지는 관계에서, 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자들과 가지는 관계에서, 하나님으로서 활동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안에서, 그리고 우주 총체와 가지는 관계에서, 절대적 신으로서 활동한다.
10:4.2 (112.5) 영원한 신은 완전히 통일되어 있다. 그런데도 완전히 개별화된 신 세 분이 계신다.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첫째 근원 중심과 영원한 동위자들이 가진 성품의 특징 및 무한한 능력의 온갖 다양성, 그리고 갈라지지 않은 신의 우주 기능의 신다운 통일성을 모두 동시에 표현할 수 있게 만든다.
10:4.3 (112.6) 삼위일체는 비성격 자격으로, 그러나 성격을 침해하지 않고서 활동하는 무한한 성격자들의 결합이다. 예는 투박하지만 아버지ㆍ아들ㆍ손자가 함께, 인격자가 아닌 법인, 그런데도 각자의 개인 의지에 지배되는 법인(法人)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10:4.4 (112.7)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실재한다. 삼위일체는 아버지ㆍ아들ㆍ영, 이렇게 신의 연합으로서 존재한다. 그래도 아버지나 아들이나 영, 아니면 이 중에 어느 두 분도 이 동일한 삼위일체와 관련되어 활동할 수 있다. 아버지ㆍ아들ㆍ영은 삼자일체가 아닌 방법으로 함께 일할 수 있지만, 세 분의 신으로서 하는 것은 아니다. 성격자로서, 세 분은 뜻하는 대로 함께 일할 수 있지만, 그것은 삼위일체가 아니다.
10:4.5 (112.8) 무한한 영이 행하는 일은 합동 행위자의 기능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여라.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은 모두 영 안에서, 영을 통해서, 그리고 영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신비를 밝히려 애쓰는 것은 무익할 것이다: 한 분과 같은 세 분, 또한 한 분 안에 계시는 세 분이며, 한 분이 두 분으로서, 또한 두 분을 위해서 행동한다.
10:4.6 (112.9) 삼위일체는 우주 사무 전체에 밀접히 관련되기 때문에 어느 고립된 우주 사건이나 성격 관계 전체를 설명하려고 애쓸 때, 삼위일체를 계산에 넣어야 한다. 삼위일체는 우주의 모든 수준에서 활동하며, 필사 인간은 유한 수준에 국한되어 있다. 따라서 사람은 유한 삼위일체 개념이 삼위일체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10:4.7 (113.1) 너는 육체를 입은 필사자로서, 너 개인의 깨우침에 따라서, 너의 정신 및 혼의 반응과 조화를 이루면서 삼위일체를 보아야 한다. 삼위일체의 절대성에 관하여 너는 거의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파라다이스를 향해 올라가는 동안, 절대 삼자일체는 아니더라도, 최상의 삼위일체와 궁극의 삼위일체가 연달아 계시되는 것에, 그리고 이를 뜻하지 않게 발견하고서 너는 여러 번 놀라게 될 것이다.
10:5.1 (113.2) 성격이 있는 신들은 속성이 있지만, 삼위일체가 속성이 있다고 말하면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다. 신다운 존재들의 이러한 연합은 응보의 시행, 전체의 태도, 나란히 하는 행동, 우주의 전반적 통제와 같은 기능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적당하다. 이러한 기능은 성격 가치를 가진 모든 살아 있는 실체가 관련된 한, 활발하게 최상이자 궁극의 기능이요, (신의 한계 안에서) 절대적 기능이다.
10:5.2 (113.3)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기능은, 겨우 겉보기에 아버지가 부여한 신성에 아들과 영의 성격 존재에 고유한, 특화된 속성을 합친 것이 아니다. 세 파라다이스 신의 삼위일체 연합은 보편적 계시ㆍ활동ㆍ행정을 위하여, 새로운 의미와 가치, 권능과 능력을 진화하고 궁극에 이루고 신으로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살아 있는 결합, 인간 가족, 사회 집단, 또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단순한 산술 합계로 늘어나지 않는다. 집단의 잠재성은 언제나 그 구성원들의 속성을 단순히 합계한 것보다 크다.
10:5.3 (113.4) 삼위일체는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우주 전체에 대하여 삼위일체로서 독특한 태도를 가진다. 삼위일체의 기능은 삼위일체가 우주를 대하는 태도와 관련하여 고려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한 태도는 동시에 나타나며, 어느 독립된 상황이나 사건에 관하여 몇 가지일 수 있다:
10:5.4 (113.5) 1. 유한자에 대한 태도: 삼위일체가 최대로 자체를 제한한 것은 유한자에 대한 태도이다. 삼위일체는 성격자가 아니며, 또한 최상 존재는 삼위일체의 유일한 성격화도 아니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삼위일체를 동력을 가진 성격자로 집중하는 데는 최상위가 가장 가까운 길이다. 따라서 유한자와 가지는 관계에서, 삼위일체를 때때로 최상 삼위일체라고 말한다.
10:5.5 (113.6) 2. 초한자에 대한 태도: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유한을 넘지만 절대 이하에 있는 존재 수준을 존중하며, 이 관계를 때때로 궁극성 삼위일체라[2] [1656] 부른다. 궁극위도 최상위도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를 온전히 대표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한된 의미에서, 각자의 수준에 대하여, 체험적 권능이 성장하는 선(先)인격 시대에, 두 분은 각자 삼위일체를 대표하는 듯하다.
10:5.6 (113.7) 3.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절대적 태도는 절대 존재들과 관련되어 있고, 궁극에 총체 신의 활동을 낳는다.
10:5.7 (113.8) 무한 삼위일체는 첫째 근원 중심의 모든 삼자일치 관계―신화(神化)된 관계와 신화되지 않은 관계―가 나란히 활동하는 것을 포함하며, 따라서 인격자들이 파악하기가 대단히 힘들다. 삼위일체를 무한이라고 생각할 때, 일곱 가지 삼자일치를 무시하지 말라. 이렇게 함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점들을 피할지 모르고, 어떤 역설이 어느 정도 해결될지도 모른다.
10:5.8 (114.1) 그러나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완전한 진실과 영원한 의미, 그리고 무한히 완전한 세 분의 끝없는 상호 관계가 어떤 성질이 있는가 제한된 인간의 머리가 알아듣도록 전달하기에는 내 말재주가 충분하지 않다.
10:6.1 (114.2) 모든 법칙은 첫째 근원 중심에 기원을 가지며, 그는 법칙이다. 영적 법칙의 행정은 둘째 근원 중심에 본래부터 생긴다. 법칙의 계시, 곧 신의 법령을 선포하고 해석하는 것은 셋째 근원 중심의 기능이다. 법의 응용, 곧 판결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분야에 속하며, 삼위일체의 어떤 아들들이 이를 수행한다.
10:6.2 (114.3) 응보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우주 통치권에 본래부터 생긴다. 그러나 선ㆍ자비ㆍ진리는 신성한 성격자들이 우주에 베푸는 봉사이며, 신들의 연합은 삼위일체를 이룬다. 응보는 아버지나 아들이나 영의 태도가 아니다. 응보는 사랑ㆍ자비ㆍ봉사를 베푸는 이 성격자들이 삼위일체로서 가지는 태도이다. 파라다이스 신들 가운데 어느 분도 재판을 집행하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응보(應報)는 결코 개인의 태도가 아니며, 언제나 다수의 기능이다.
10:6.3 (114.4) 증거는 공정(자비와 조화된 응보)의 기초이며, 셋째 근원 중심의 성격자들이 증거를 제공한다. 셋째 근원 중심은 모든 영역에 대해서, 모든 창조에 있는 지적 존재들의 지성에 대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합동 대표자이다.
10:6.4 (114.5) 심판은 무한한 영의 성격자들이 제출한 증거에 따라서 마지막에 재판을 시행하는 것이고, 삼위일체의 고정된 아들들이 하는 일이며, 이들은 아버지ㆍ아들ㆍ영이 하나된 삼위일체의 성질을 가진 존재이다.
10:6.5 (114.6) 이 집단의 삼위일체의 아들은 다음 성격자를 포함한다:
10:6.6 (114.7) 1. 삼위일체가 낳은 최상위의 신비.
10:6.7 (114.8) 2. 영원부터 늘 계신 이.
10:6.8 (114.9) 3. 옛적부터 늘 계신 이.
10:6.16 (114.17) 우리는 삼위일체로서 활동하는 세 파라다이스 신의 자손이다. 왜냐하면, 나는 마침 이 집단의 제10 계급, 우주 검열자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계급들은 보편적 의미에서 삼위일체의 태도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집행부 판결의 분야에서만 신의 이 집단 태도를―재판을―대표한다. 배치받은 데 꼭 맞는 일을 하기 위해서, 삼위일체가 특정한 목적으로 그들을 고안하였고, 그들은 오직 어떤 활동에서만 삼위일체를 대표하며, 이를 위해서 성격화된다.
10:6.17 (115.1)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 그리고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그 동료들은 일곱 초우주에 대하여 최고로 공정한 판결을 내린다. 중앙 우주에서 그런 기능은 이론으로만 존재한다. 이는 거기에 공정은 완전히 자명하며, 하보나의 완전성이 어떤 불화의 가능성도 물리치기 때문이다.
10:6.18 (115.2) 재판은 올바른 것에 관한 집단의 생각이며, 자비는 올바름을 몸소 표현하는 것이다. 자비는 사랑의 태도이며, 정확성은 법 운영의 특징을 나타낸다. 신의 판결은 공정의 정신이요, 항상 삼위일체의 응보에 순응하며 늘 하나님의 신다운 사랑을 성취한다. 충분히 파악하고 완전히 이해했을 때, 삼위일체가 내리는 올바른 응보와 우주의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은 일치한다. 그러나 사람은 신의 응보를 넉넉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보다시피, 시간 세계의 체험적 우주에서 사랑과 율법을 베푸는 것을 조절하기 위해 삼위일체 안에서, 아버지ㆍ아들ㆍ영의 성격자들이 조정된다.
10:7.1 (115.3) 신의 처음 분, 둘째 분, 셋째 분은 서로 대등하며, 세 분은 하나이다. “우리의 주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로다.” 영원한 신들의 신성한 삼위일체 안에서 목적은 완전하고 집행은 통일된다. 아버지와 아들과 합동 행위자는 참으로 신답게 하나이다. 한 가지 진리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되었다. “나는 처음이고 마지막이니, 나 외에 아무 하나님이 없느니라.”
10:7.2 (115.4) 유한 수준에서 사물이 필사자의 눈에 보이다시피,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최상 존재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총체에―행성 전체, 우주 전체, 초우주 전체, 대우주 전체에―관심을 가진다. 이렇게 총체의 태도가 존재하는 것은 삼위일체가 신의 총체이며, 또 기타 여러 이유 때문이다.
10:7.3 (115.5) 최상 존재는 유한한 여러 우주에서 활동하며, 삼위일체보다 작은 무엇, 삼위일체와 다른 무엇이다. 그러나 어떤 한계 안에서, 동력의 성격화가 불완전하게 이루어지는 현시대에, 이 진화하는 신은 최상 삼위일체의 태도를 비치는 듯하다. 아버지ㆍ아들ㆍ영은 최상 존재와 함께 친히 활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 우주 시대에 이분들은 삼위일체로서, 최상위와 협력한다. 그들이 비슷한 관계를 궁극위와 유지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최상위 하나님이 마침내 진화를 마쳤을 때, 파라다이스 신들과 최상위 하나님이 무슨 개인적 관계가 있을까 가끔 추측해 보지만, 우리는 정말 모른다.
10:7.4 (115.6) 우리가 보기에, 최상위의 전반적 통제는 전적으로 예측이 가능하지는 않다. 게다가, 이 예측할 수 없는 성질은 어떤 불완전한 발육의 특징이 있는 듯한데, 의심할 여지 없이 최상위의 불완전,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 대해서 최상위가 나타내는 유한한 반응이 불완전한 것을 가리키는 자국이다.
10:7.5 (115.7) 필사자의 머리는 수많은 일―큰 물리적 이변, 끔찍한 사고(事故), 무서운 재난, 고통스러운 병, 세계적 천벌―을 즉시 생각할 수 있고, 최상 존재의 있음직한 이 기능의 미지의 움직임 속에서, 찾아오는 그러한 재앙들이 서로 관련 있는가 물어볼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모른다. 정말로 확실치 않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어렵고 얼마큼 신비스러운 이 모든 상황이 우주들의 복지와 진보를 위해서 반드시 해결되어 가는 것을 우리는 지켜본다. 최상위의 활동과 삼위일체의 전반적 통제로 말미암아, 존재의 여러 상황, 생명의 설명할 수 없는 변천이 모두 서로 얽혀서 의미 깊은 귀중한 무늬를 만들지 모른다.
10:7.6 (116.1) 너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행적 속에 친히 사랑하는 태도를 헤아릴 수 있다. 그러나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우주 활동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이 공간의 진화 세계에서 각 필사자의 복지에 이바지하는지 반드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원 속에 진보하면서, 삼위일체의 행위는 전적으로 의미 있고 생각이 깊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시간 세계의 인간에게는 삼위일체의 행위가 반드시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10:8.1 (116.2)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 관계되는 많은 진실과 사실은, 유한한 것을 초월하는 기능을 인식해야 일부라도 이해할 수 있다.
10:8.2 (116.3) 궁극성 삼위일체의 기능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롭지 않을 터이지만, 궁극위 하나님은 초월자들이 이해하는 그러한 삼위일체의 명시라는 것을 밝혀도 좋다. 총우주가 통일되는 것은 궁극위가 궁극에 이르는 행위이며, 아마도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전반적 초한 통제가 있는, 모든 단계는 아니라도, 어떤 단계를 반영한다고 우리는 믿고 싶다. 최상위는 유한자와 관계하는 삼위일체를 부분적으로 대표한다. 같은 의미에서, 궁극위는 초한자와 관계하는 삼위일체가 제한되어 표현된 것이다.
10:8.3 (116.4) 우주의 아버지, 영원한 아들, 무한한 영은 어떤 의미에서, 신의 총체를 구성하는 성격자이다.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안에서 그들의 연합과 삼위일체의 절대적 기능은, 신 총체의 기능에 상당하게 된다. 그러한 신의 완성은 유한한 것과 초한한 것을 초월한다.
10:8.4 (116.5) 파라다이스 신들 중에 어느 한 분도 신의 모든 잠재력을 실제로 채우지 않지만, 집단으로 세 분 모두가 그렇게 한다. 무한한 세 분은, 신의 총체―신 절대자―의 선(先)인격이자 실존적인 잠재력을 활성화하는 데 필요한 최소의 존재인 듯하다.
10:8.5 (116.6) 우리는 우주의 아버지, 영원한 아들, 무한한 영이 성격자인 것을 알지만, 나는 신 절대자를 개인적으로 모른다. 나는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며, 한편 신 절대자를 존경하고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10:8.6 (116.7) 나는 한때 어느 우주에 살았는데, 거기에는 어떤 무리의 존재들이, 영원 속에서 최후자들이 궁극에 신 절대자의 자녀가 되리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최후자의 미래를 가리는 신비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10:8.7 (116.8) 최후 군단은 다른 존재들 중에서, 하나님의 뜻에 관계된 모든 면에 완전을 성취한 시공의 필사자를 포함한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능력 한계 안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충분히, 참되게 이해한다. 그렇게 모든 인간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찾았으니까, 이 최후자들은 유한을 초월하는 아버지를 찾는 일을 언젠가 시작해야 된다. 그러나 이 원정에는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궁극의 속성 및 성품의 초한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한 도달이 가능한가는 영원이 밝혀줄 것이다. 그러나 최후자가 이 궁극의 신성을 파악한다 하더라도, 절대 신의 수준, 궁극을 뛰어넘는 수준에 아마 이르지 못하리라 우리는 확신한다.
10:8.8 (116.9) 최후자는 신 절대자에게 부분적으로 도달하는 것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온 영원에 걸쳐서 우주 절대자의 문제는, 승천하고 진보하는 최후자들의 흥미를 끌고, 신비감으로 휩쓸며, 어쩔 줄 모르게 만들고 도전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건대, 물질 우주와 그 영적 행정부가 계속 확대됨에 따라서, 우주 절대자의 우주 관계가 깊이를 알 수 없이 비례하여 커지는 방향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10:8.9 (117.1) 오로지 무한이 아버지 무한자를 밝혀줄 것이다.
10:8.10 (117.2) [유버르사에 거하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권한으로 활동하는 한 우주 검열자가 후원했다.]
11:0.1 (118.1) 파라다이스는 온 우주의 영원한 중심이며, 우주의 아버지, 영원한 아들, 무한한 영을 비롯하여, 그들의 신다운 동격자와 동료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이 가운데 섬은 총우주 전체에서 우주 실체 중에 가장 거대한 조직체이다. 파라다이스는 영적 거처일 뿐 아니라 물질 구체이기도 하다. 우주의 아버지의 지적 생물은 모두 물질적 주거에서 거한다. 따라서 절대로 통제하는 중심도 또한 물질, 실질이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되풀이해야 하는데, 영 사물과 영적 존재들은 실재한다.
11:0.2 (118.2) 파라다이스의 물질적 아름다움은 파라다이스가 엄청나게 물리적으로 완전한 데 있다. 하나님의 섬이 웅대한 것은 그 주민들의 뛰어난 지적 업적과 지성의 발전에서 나타난다. 가운데 섬의 영화로움은 신다운 영 성격자의 무한한 자질―생명의 빛―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물질 인간의 제한된 머리는 이 장엄한 총체의 깊은 영적 아름다움과 놀라움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신의 거처의 영광과 영적 눈부심을 필사자는 이해할 수 없다. 파라다이스는 영원으로부터 있다. 중심에 있는 이 빛과 생명의 섬의 기원에 관해서는 기록도 없고 전통도 없다.
11:1.1 (118.3) 파라다이스는 우주 영역의 행정부에서 여러 가지 목적에 쓰인다. 그러나 지음받은 존재들에게 파라다이스는 1차적으로, 신이 거하는 장소로서 존재한다. 우주의 아버지는 아주 거의 둥글지만 구체는 아닌, 신들의 거소(居所)의 위쪽 표면 한 가운데 친히 계신다. 파라다이스에 우주의 아버지의 계심을 영원한 아들의 친히 계심이 바로 둘러싸며, 한편 두 분은 무한한 영의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덮여 있다.
11:1.2 (118.4) 하나님은 바로 이 중앙의 영원한 거처에 거하며, 지금까지 거했고, 또 언제까지나 거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거기서 찾았고, 언제나 거기서 만나 뵐 것이다. 우주의 아버지는 우주에서 초점이 되어 있고, 영적으로 성격화되어 있고, 지리적으로 온 우주의 이 중심에서 거한다.
11:1.3 (118.5) 우리는 모두 우주의 아버지를 찾기 위하여 추적할 직통 경로를 안다. 너는 신의 거처에 대하여 많이 이해할 수 없는데, 이는 그 거처가 너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 막대한 공간이 개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엄청난 거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자들은, 유란시아에 뉴욕ㆍ런던ㆍ로마 또는 싱가포르와 같이 분명히 지리적으로 자리잡은 도시들의 위치를 네가 아는 것 같이, 똑같이 확실하게, 글자 그대로, 하나님의 위치와 거처를 알고 있다. 네가 선박과 지도와 나침반을 가진 총명한 항해사라면, 이 도시들을 쉽사리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네가 시간과 여행 수단이 있고, 영적 자격을 갖추고 필요한 안내를 받는다면, 너는 많고 많은 우주들을 통해서 안내받을 수 있고, 이 회로에서 저 회로를 거쳐, 마침내 우주의 아버지의 영적 영광이 중심에서 빛나는 앞에 설 때까지, 별이 많은 지역을 지나 늘 안으로 여행할 것이다. 여행을 위한 모든 필수품이 마련된다면, 바로 너의 행성에서 먼 도시들을 찾는 것처럼, 너는 만물의 중심에 하나님이 친히 계신 앞을 똑같이 찾아낼 수 있다. 네가 이 장소들을 찾아본 적이 없다는 것은 그 장소들이 현실이거나 사실로 존재하는 것을 전혀 반증하지 않는다. 파라다이스에 계신 하나님을 찾아낸 우주 인간이 거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이 존재하는 현실이나 만물의 중심에 그의 영적 몸이 사실로 있다는 것을 결코 반증하지 않는다.
11:1.4 (119.1) 아버지는 이 중앙 위치에서 언제나 발견될 것이다. 그가 움직이면, 우주가 대혼란에 빠질 터이니, 창조의 끝으로부터 보편적 인력선(引力線)들이 이 주거 중심에 계신 하나님 안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러 우주를 통해서 성격 회로를 거꾸로 추적하든지, 또는 하늘 가는 성격자들이 아버지를 향해 안으로 여행하는 동안 그들을 따라가든지, 아래 파라다이스까지 물질 인력선을 추적하든지, 또는 밀려 들어오는 우주 물력의 주기를 따르든지, 영원한 아들의 영적 인력선을 추적하든지, 또는 안으로 향하는 하나님의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행렬을 따라가든지, 지성 회로를 추적하든지, 또는 무한한 영으로부터 솟아난 몇 조(兆)의 하늘 존재들을 따라가든지―이 여러 가지 관측 중에 어느 것이나 또는 모든 관측 결과로, 우리는 아버지가 계신 앞까지, 그의 중앙 거처로 직접 이끌려 간다. 여기에 하나님은 친히, 글자 그대로, 실제로 계신다. 이 무한한 존재로부터, 생명ㆍ에너지ㆍ성격의 홍수 같은 물줄기가 모든 우주로 흘러나간다.
11:2.1 (119.2) 너희의 천문학적 위치, 별이 가득한 체계들에 자리잡은 너희 공간 위치에서도, 물질 우주가 거대하다는 것을 너희가 어렴풋이 비로소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엄청나게 큰 물질 우주가 적당하고 마땅한 서울, 곧 물질 세계와 살아 있는 존재들이 가득한 창조, 광대하고 멀리 퍼진 이 모든 창조를 다스리는 우주 통치자의 위엄과 무한함에 어울리는 본부가 틀림없이 있다는 것이 너희에게 명백해질 것이다.
11:2.2 (119.3) 파라다이스의 형태는 사람이 사는 공간 물체들과 다르며, 파라다이스는 구체가 아니다. 분명히 타원체이며, 남북 지름이 동서(東西) 지름보다 6분의 1이 길다. 가운데 섬은 본질적으로 납작하며, 위 평면과 아래 평면 사이의 거리는 동서 지름의 10분의 1이다.
11:2.3 (119.4) 이 규격의 차이는, 파라다이스의 고정된 지위와 섬 북쪽 끝에 있는, 물력 에너지의 더 큰 외향 압력과 관련하여, 총우주에서 절대 방향을 잡을 수 있게 한다.
11:2.4 (119.5) 가운데 섬은 지리적으로 세 가지 활동 영토로 나누어져 있다.
11:2.8 (119.9) 성격자 활동에 쓰이는 파라다이스 표면을 위쪽이라 하고, 그 반대 표면을 아래쪽이라고 한다. 파라다이스의 가장자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성격이 아닌 활동, 곧 비성격 활동을 위해서 마련되어 있다. 삼위일체는 성격 평면, 곧 위의 평면을 지배하며, 무제한 절대자는 아래 평면, 곧 비성격 평면을 지배하는 듯하다. 우리는 도저히 무제한 절대자를 성격자로 상상하지 않지만, 이 절대자의 기능적 공간 계심이 아래 파라다이스에 집중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11:2.9 (120.1) 영원한 섬은 한 가지 형태의 물질―정지된 체계의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 파라다이스의 이 실질 바탕은 넓은 온 우주 전체에 다른 데서 발견되지 않는 공간 잠재력을 지닌, 동질의 조직이다. 다른 우주에서 이 물질은 여러 가지 이름을 받았고, 네바돈의 멜기세덱들은 절대 원소라 부른 지 오래다. 파라다이스의 이 근원 물질은 죽지도 살아 있지도 않으며, 첫째 근원 중심의 최초의 비영적 표현이다. 이것이 파라다이스이며, 파라다이스의 복사품은 없다.
11:2.10 (120.2) 무한의 한계로부터 자신을 해방하는 기법의 일부로서, 무한 이하의 창조, 아니 시공 창조까지도 가능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첫째 근원 중심은 우주 실체를 만드는 모든 절대 잠재성을 파라다이스에 집중한 듯이 우리에게 보인다. 그러나 온 우주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다는 이유로 파라다이스도 이 성질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없다. 파라다이스는 시간 바깥에 존재하며, 공간 속에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11:2.11 (120.3) 대체로, 겉으로 보기에 공간은 아래 파라다이스 바로 밑에서 생겨나며 시간은 위 파라다이스 바로 위에서 생겨나는 듯하다. 너희가 이해하는 시간은 파라다이스에서 존재하는 특성이 아니다. 하지만 가운데 섬의 시민들은 사건들의 비시간적 순서를 충분히 의식한다. 운동은 파라다이스에 본래부터 있지 않으며, 의지로 생긴다. 그러나 거리 개념은, 절대 거리조차, 파라다이스에서 상대적 위치에 적용될 수 있으므로 대단히 의미가 많다. 파라다이스는 비공간이다. 그러니까 그 면적은 절대적이며, 따라서 필사자의 머리가 이해할 수 없는 여러 방법으로 쓸모가 있다.
11:3.1 (120.4) 위 파라다이스에는 세 가지 거대한 활동 지역이 있는데, 신이 계신 곳과 가장 거룩한 지역과 거룩한 지역이다. 신들이 계신 곳을 바로 둘러싸는 광대한 지역은 가장 거룩한 지역으로 정해져 있고, 예배, 삼자일체화, 높은 영적 달성, 이 세 가지 기능을 위하여 자리가 예비되어 있다. 이 지대에는 물질 구조나 순전히 지적 창조는 전혀 없고, 그런 것들은 거기에 존재할 수 없다. 신의 성품과 파라다이스의 가장 거룩한 지역의 아름다운 웅장함을 인간이 깨닫도록 그리려고 내가 애써 보았자 쓸데없는 일이다. 이 영역은 온전히 영적이며, 너희는 거의 전적으로 물질이다. 순전한 물질 존재에게는 순전한 영적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11:3.2 (120.5) 가장 거룩한 지역에는 물리적으로 물질화된 것이 전혀 없지만, 여러 성지(聖地) 구역에 너희의 물질 시절의 기념품이 풍부하게 있고, 가장자리 파라다이스에, 옛날을 회상하게 하는 역사적 지역에 더욱 많이 있다.
11:3.3 (120.6) 거룩한 지역은 바깥 지역, 곧 주택 지역이고, 일곱 동심(同心) 지대로 나누어진다. 파라다이스를 가끔 “아버지의 집”이라 부르는데, 거기가 아버지의 영원한 거처이기 때문이다. 이 일곱 지대를 “아버지의 파라다이스 저택”이라 부른다. 안쪽 지대, 곧 첫째 지대는 파라다이스 시민과 파라다이스에 어쩌다가 살게 되는 하보나 원주민이 차지하고 있다. 다음 지대, 둘째 지대는 시공의 일곱 초우주 원주민이 주거하는 지역이다. 이 둘째 지대는 굉장한 일곱 분할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고, 이것은 진화로 진보하는 우주 출신의 영 존재와 하늘 가는 인간의 파라다이스 집이다. 이 각 지역은 오로지 단일 초우주에서 온 성격자들의 복지와 승진에 순전히 전념한다. 그러나 이 시설은 현재 일곱 초우주의 필요 조건보다 거의 무한히 크다.
11:3.4 (121.1) 파라다이스의 일곱 지역은 각각 주거 단위로 다시 분할되는데, 이것은 영화롭게 된 10억 개별 작업 집단의 숙박 본부로서 쓰기에 적당하다. 이 단위 1천개가 하나의 구분(區分)을 이룬다. 10만 구분이 한 회중(會衆)이 된다. 1천만 회중이 하나의 집회가 된다. 10억개의 집회가 하나의 대단위(大單位)가 된다. 이 상승하는 시리즈는 제2 대단위를 지나고, 제3 대단위를 지나고, 이런 식으로 제7 대단위까지 계속된다. 일곱씩 대단위가 하나의 모(母)단위를 이루며, 일곱 모단위가 하나의 상(上)단위를 이룬다. 그리고 이렇게 일곱씩 상승하는 시리즈는 상단위, 초상(超上)단위, 천상(天上) 단위, 초천상(超天上) 단위를 지나서 최상 단위까지 커진다. 그러나 이것도 비어 있는 공간을 다 쓰지 못한다. 파라다이스에 있는 주거 명칭의 어지러운 숫자, 너희가 상상할 수 없는 숫자는, 성지로 지정된 지역의 1퍼센트보다 훨씬 적게 자리를 차지한다. 안으로 향하는 도중에 있는 자, 영원한 미래 시절까지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걸음을 내딛지 못할 자를 위해서도, 충분히 자리가 아직도 있다.
11:4.1 (121.2) 가운데 섬은 가장자리에서 가파르게 끝나지만, 그 크기가 너무 거창해서 둘레의 어느 지역 안에서도 이 모서리의 각도를 비교적 헤아리기 힘들다. 파라다이스의 가장자리 표면의 일부는 여러 집단의 영 성격자들을 위하여 착륙장과 파송장이 차지한다. 무물(無物) 공간 지대가 가장자리에 거의 부딪치니까, 파라다이스로 향하는 모든 성격자 수송기는 이 지역에서 착륙한다. 위 또는 아래 파라다이스는 수송 상천사(上天使)나 다른 종류의 공간 통과자가 가까이할 수 없다.
11:4.2 (121.3) 일곱 으뜸 영은 영의 일곱 구체에 그들 개인의 권능과 권한의 자리가 있다. 이 구체들은 아들의 빛나는 천체들과 하보나의 안쪽 회로 세계들 사이의 공간에서 파라다이스를 돌지만, 그들은 파라다이스 가장자리에서 물력 초점의 본부를 유지한다. 여기서 천천히 도는 일곱 최상 동력 지휘자의 계심은, 일곱 초우주로 떠나가는 어떤 파라다이스 에너지를 위해서 일곱 신호(信號) 역의 위치를 가리킨다.
11:4.3 (121.4) 여기 가장자리 파라다이스에는 창조 아들들에게 할당된 거대한 지역, 역사적 전시 지역과 예언적 전시 지역이 있고, 이 전시는 시공의 지역 우주들을 위한 것이다. 꼭 7조(兆)의 역사적 보류지가 이미 세워져 있거나 따로 예비되어 있지만, 이 시설은 모두 합쳐서, 이렇게 지정된 가장자리 지역 부분에서 약 4퍼센트를 차지할 뿐이다. 우리가 추측하기에 이러한 광활한 보류지는, 현재 알려지고 사람이 사는 일곱 초우주의 테두리 바깥에 자리잡을, 언젠가 생길 우주들에 속한다.
11:4.4 (121.5) 파라다이스에서 기존 우주들이 쓰도록 할당된 부분은 겨우 1퍼센트에서 4퍼센트만 입주되어 있지만, 이 활동에 배당된 지역은 그러한 목적을 위해 실제로 필요한 것의 최소한 1백만 배나 된다. 파라다이스는 거의 무한한 우주에서 생기는 활동을 수용하기에 충분히 크다.
11:4.5 (121.6) 그러나 파라다이스의 영광을 너희에게 보여주려고 더 애쓰는 것은 헛일이다. 너희는 기다려야 하고, 기다리는 동안에 올라가야 한다. 왜냐하면 참으로 “시공에서 육체를 입은 일생을 마치고 살아남는 자들을 위하여 우주의 아버지가 마련한 것을 사람의 눈이 본 적이 없고 귀가 들은 적이 없으며, 필사 인간의 머리 속에 떠오른 적도 없기 때문이라.”
11:5.1 (122.1) 아래 파라다이스에 관해서, 우리는 밝혀진 것만 알고 있다. 성격자들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영 지능을 가진 존재들의 일과 아무 상관도 없고, 신 절대자도 거기에서 일하지 않는다. 모든 물리적 에너지와 우주 물력의 회로는 아래 파라다이스에 기원이 있으며,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고 우리는 들었다:
11:5.2 (122.2) 1. 아래 파라다이스의 가운데 부분에, 삼위일체의 위치 바로 밑은, 미지이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무한의 지대이다.
11:5.3 (122.3) 2. 이 지대를 이름 없는 지역이 바로 둘러싼다.
11:5.4 (122.4) 3. 표면의 바깥 테두리는 주로 공간 잠재력과 물력 에너지와 상관되는 지역이 차지한다. 타원형으로 생긴 이 광활한 물력 중심의 활동은 어느 삼자일치의 알려진 기능인지 확인할 수 없으나, 공간의 원초적 물력 전하(電荷)가 이 지역에 집중하는 듯하다. 이 중심은 3개의 동심(同心) 타원 지대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안쪽은 파라다이스 자체의 물력 에너지 활동의 초점이며, 맨 바깥쪽은 아마도 무제한 절대자의 기능으로 확인될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 중간 지대의 공간 기능에 관하여 확실치 않다.
11:5.5 (122.5) 이 물력 중심의 내부 지대는 그 맥박이 물리적 공간의 가장 바깥 테두리까지 전류를 지휘하는 거대한 심장으로서 활동하는 듯하다. 이 지대는 물력 에너지의 방향을 지휘하고 수정하지만, 그 에너지를 운전한다고 할 수 없다. 이 원초 물력의 실체 압력과 존재는 파라다이스 중심의 남쪽 지역보다 북쪽 끝에서 분명히 더 크며, 이것은 한결같이 기록된 차이이다. 이 기본형의 물력 에너지 분산과 관계된 어떤 알려지지 않은 순환 체계의 작용을 통해서, 공간의 모체 물력은 남쪽에서 흘러 들어오고 북쪽으로 흘러 나가는 듯하다. 때때로 동서 압력에서도 눈에 띄게 차이가 있다. 이 지대에서 방사되어 나오는 물력은 관측할 수 있는 물리적 인력에 민감하지 않지만, 언제나 파라다이스 인력에 복종한다.
11:5.6 (122.6) 물력 중심의 중간 지대가 이 지역을 바로 둘러싼다. 이 중간 지대는 세 가지 활동의 주기를 통해서 커지고 줄어드는 것 외에는 정지된 듯하다. 이 맥박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은 동서 방향에 있고 그 다음은 남북 방향이며, 한편 가장 큰 파동은 각 방향으로 퍼지며, 팽창과 수축이 일반화되어 있다. 이 중간 지대의 기능은 한 번도 정말로 정체가 확인된 적이 없지만, 물력 중심의 안 지대와 바깥 지대 사이의 상호 조정과 무슨 상관이 있음이 틀림없다. 중간 지대는 총우주의 연속되는 공간 수준을 분리하는 중부 공간, 곧 조용한 지대를 통제하는 장치라고 다수가 믿는다. 그러나 아무 증거나 계시도 이를 확인하지 못한다. 이 추론은 이 중간 지역이 어떤 방법으로 총우주의 무물(無物) 공간 작용의 기능과 관련된다는 지식으로부터 유래한다.
11:5.7 (122.7) 바깥 지대는 확인되지 않은 공간 잠재성을 가진 3개의 동심 타원 띠 가운데 가장 크고 활동적이다. 이 지역은 상상하지 못한 활동이 있는 장소, 곧 중앙 회로에서 방사물이 나오는 점이며, 이 방사물은 공간을 향해서 모든 방향으로, 일곱 초우주의 가장 바깥 테두리까지 진행하며, 거기를 지나서, 모든 바깥 공간의 거창하고 이해할 수 없이 너른 영역까지 흩어진다. 무한한 신들이 삼위일체로서 활동할 때, 밝혀지지 않은 어떤 방법으로 이 공간의 존재가 그들의 의지와 명령에 간접으로 반응하는 듯한데도, 이 공간 존재는 온통 비성격이다. 이것은 무제한 절대자가 공간에 계시는 중앙 초점, 파라다이스 중심이라고 믿어진다.
11:5.8 (123.1) 모든 형태의 물력과 모든 단계의 에너지는 회로로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 이것들은 우주를 통해서 퍼지며 분명한 통로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무제한 절대자의 활성화된 지대의 방사물 경우에, 바깥으로 나가든지 아니면 들어오기만 한다―결코 동시에 두 가지가 일어나지 않는다. 엄청나게 큰 규모와 오랜 세월에 걸친 주기를 통해서 이 바깥 지대가 맥박친다. 유란시아 시간으로 10억년이 조금 넘는 동안에 이 중심의 공간 물력은 바깥으로 나간다. 그리고 나서 비슷하게 긴 기간에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이 중심의 공간 물력의 명시는 보편적이고, 침투할 수 있는 모든 공간에 뻗는다.
11:5.9 (123.2) 자연의 물력ㆍ에너지ㆍ물질은 모두 하나이다. 모든 물력 및 에너지는 최초에 아래 파라다이스에서부터 진행했고 그 공간 회로를 마치고 나서 궁극에 거기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온 우주의 에너지와 물질 조직은 오늘날 현상의 상태로 아래 파라다이스로부터 모두 나오지는 않았다. 공간은 몇 가지 형태의 물질과 선(先)물질이 생겨난 자궁(子宮)이다. 파라다이스 물력 중심의 바깥 지대는 공간 에너지의 근원이지만 공간은 거기서 생기지 않는다. 공간은 물력도 에너지도 동력도 아니다. 이 지대에서 생기는 파동은 공간의 호흡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지대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국면은 20억년에 걸쳐 공간이 커지고 줄어드는 주기와 동시화된다.
11:6.1 (123.3) 우리는 공간의 호흡이 어떻게 실제로 작용하는가 모른다. 단지 온 공간이 번갈아서 줄어들고 늘어나는 것을 관찰할 뿐이다. 이 호흡은 유물(有物) 공간의 수평 연장(延長)과 무물(無物) 공간의 수직 연장에 영향을 미치며, 무물 공간은 파라다이스 위와 아래에 있는 광대한 공간 저장소에 존재한다. 이 공간 저장소의 부피가 얼마나 큰가 그 윤곽을 상상하려 할 때, 너희는 모래 시계를 생각해도 좋다.
11:6.2 (123.4) 유물 공간의 수평 연장에 있는 우주들이 팽창함에 따라서, 무물 공간의 수직 연장의 저장소는 줄어들며, 반대의 경우에는 늘어난다. 아래 파라다이스 바로 밑에는 유물 공간과 무물 공간이 함께 흐르는 점이 있다. 거기서 두 종류의 공간은 변질시키는 조정 경로를 통해서 흘러가며, 이 경로에는 우주가 축소하고 확장하는 주기 안에서, 유물 공간을 무물 공간으로 만드는 변화, 또 그 반대로 만드는 변화가 생긴다.
11:6.3 (123.5) “무물” 공간은 유물 공간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물력ㆍ에너지ㆍ동력, 그리고 계심으로 채워져 있지 않음을 뜻한다. 수직 (저장소) 공간이 언제나 수평 (우주) 공간의 균형추로서 활동하도록 예정되어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무물 공간에 관해서 무엇을 창조할 의도가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공간 저장소에 대해서 정말로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오직 공간 저장소가 존재하며, 온 우주의 공간이 늘어나고 줄어드는 주기에 균형을 잡아주는 듯 보인다는 것만 알 뿐이다.
11:6.4 (123.6) 공간이 호흡하는 주기는 유란시아 시간으로 각 단계에 10억년이 조금 넘는 동안 계속된다. 한 단계에 우주들이 늘어나고 다음 단계에 우주들이 줄어든다. 유물 공간은 지금 확장 단계의 중간 지점에 가까이 가고 있으며, 한편 무물 공간은 축소 단계의 중간 지점에 다가가고 있다. 그리고 양쪽 공간 연장의 가장 바깥 한계는 이론적으로, 현재 파라다이스로부터 대체로 같은 거리에 있다고 우리는 들었다. 우주의 유물 공간이 가장자리 파라다이스로부터 제4 바깥 공간까지 바깥으로, 그리고 거기도 지나서 밖으로, 수평으로 뻗는 거리만큼, 무물 공간의 저장소는 지금 위 파라다이스의 위로, 그리고 아래 파라다이스 밑으로 수직으로 뻗는다.
11:6.5 (124.1) 유란시아 시간으로 10억년 동안 공간 저장소는 줄어들고, 한편 총우주와 모든 수평 공간의 물력 활동은 늘어난다. 그러니까, 늘어나고 줄어드는 전체 주기를 마치려면, 유란시아 시간으로 20억년보다 조금 더 걸린다.
11:7.1 (124.2) 파라다이스 표면 어디에도,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파라다이스의 위 표면에서 똑바로 위를 “쳐다본다면,” 무물 공간이 나가거나 들어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구경할” 수 없을 터이고, 바로 지금, 무물 공간이 들어오고 있다. 공간은 파라다이스에 스치지 않는다. 오직 고요한 중부 공간 지대가 가운데 섬에 닿을 뿐이다.
11:7.2 (124.3) 파라다이스는 실제로, 유물 공간과 무물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비교적 고요한 지대의 움직이지 않는 핵심이다. 지리적으로, 이 여러 지대는 파라다이스를 상대적으로 연장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 아마 조금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지대들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공간의 움직임이 약화된 이 여러 지대가 유물 공간과 무물 공간을 차단하는 것을 주목한다. 한때는 비슷한 지대들이 유물 공간 수준 사이에 존재했지만, 이 여러 지대는 이제 덜 고요하다.
11:7.3 (124.4) 전체 공간의 수직 단면(斷面)은, 몰타인의 십자가와 조금 비슷하며, 수평의 팔이 유물 (우주) 공간을 대표하고 수직의 팔이 무물 (저장소) 공간을 대표한다. 중부 공간 지대들이 유물 공간과 무물 공간을 갈라놓는 것과 얼마큼 비슷하게, 네 팔 사이의 지역은 네 팔을 갈라놓는다. 조용한 이 중부 공간 지대들은 파라다이스에서 멀어짐에 따라, 갈수록 더욱 커져서 궁극에 모든 공간의 경계를 둘러싸며, 공간 저장소와 유물 공간의 수평 연장 전체를 완전히 캡슐처럼 싼다.
11:7.4 (124.5) 공간은 무제한 절대자 안에 있는 절대 이하의 조건도 아니고 그의 계심도 아니며, 궁극위의 작용도 아니다. 공간은 파라다이스의 선물이며, 대우주의 공간과 모든 바깥 지역의 공간은 무제한 절대자의 원시 공간 잠재력으로 실제로 차 있다고 믿어진다. 가장자리 파라다이스에 가까운 길에서부터, 이 유물 공간은 수평으로 바깥으로, 제4 공간 수준을 통해서 총우주의 테두리를 지나서 연장되지만, 이 테두리를 얼마나 지나는지 우리는 모른다.
11:7.5 (124.6) 유한하지만 상상할 수 없이 큰 V자 모습의 평면이, 파라다이스의 위와 아래 표면에 모두 직각으로 처해 있고 그 정점이 가장자리 파라다이스에 거의 닿아 있는 것을 네가 상상하고, 다음에 이 평면이 파라다이스 둘레를 타원형으로 도는 것을 상상한다면, 그 회전이 유물 공간의 부피가 무슨 윤곽을 가졌는가 대강 나타낼 것이다.
11:7.6 (124.7) 우주에서 어떤 특정한 장소를 기점으로 해도, 수평 공간에는 위 한계와 아래 한계가 있다. 누가 오르본톤 평면에 직각으로 위쪽이나 아래쪽으로 충분히 멀리 갈 수 있다면, 결국 유물 공간의 위 한계나 아래 한계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 총우주의 알려진 규격 안에서 이 두 한계는 파라다이스로부터 멀어질수록, 서로 거리가 더욱 벌어진다. 공간은 짙어지며, 공간은 창조의 평면, 곧 우주들의 평면이 짙어지는 것보다 얼마큼 더 빨리 짙어진다.
11:7.7 (125.1) 일곱 초우주와 제1 바깥 공간 수준을 갈라놓는 지대처럼, 여러 공간 수준 사이에 비교적 고요한 지대들은, 공간 활동이 정지된 거대한 타원형 지역이다. 이 지대들은 질서 있는 행렬을 지어 파라다이스 둘레를 달리는 광대한 은하들을 갈라놓는다. 너희는 지금 무수한 우주들이 형성되는 과정에 있는 제1 바깥 공간 수준을 마음 속에 그려볼 수 있다. 이 우주들은 파라다이스 둘레를 빙그르르 도는 광대한 은하들의 행렬로서, 위에도 아래에도 조용한 중부 공간 지대로 막혀 있고, 또한 안쪽과 바깥쪽 테두리는 비교적 고요한 공간 지대로 막혀 있다.
11:7.8 (125.2) 이처럼 한 공간 수준은, 어느 방향에도 비교적 정지된 상태에 둘러싸여 있는 타원형의 운동 지역으로서 작용한다. 운동과 고요함의 그러한 관계는, 운동에 대하여 저항이 약화된, 곡선으로 된 공간 행로를 만들며, 그런 길을 보편적으로 따라서 우주 물력과 태동하는 에너지가 언제나 파라다이스 섬 둘레를 돈다.
11:7.9 (125.3) 은하들이 시계 바늘 방향과 그 반대 방향으로 번갈아 흐르는 것과 관련해서, 총우주에서 번갈아 있는 이 띠가 형성된 것은 물질 인력을 안정시키는 요소이다. 이것은 파괴하고 분산하는 활동이 생기는 점까지 인력의 압력이 강화되는 것을 막도록 고안되어 있다. 이러한 배치는 반인력(反引力) 작용을 일으키며, 그렇지 않으면 위험할 속도에 브레이크로서 작용한다.
11:8.1 (125.4) 피할 수 없이 당기는 인력의 힘은 온 공간의 모든 우주, 모든 세계를 실질적으로 붙잡는다. 인력은 파라다이스의 물리적 존재가 행사하는 전능한 움켜잡는 힘이다. 인력은 전능한 새끼줄이며, 그 줄 위에 빛나는 별, 타오르는 태양, 소용돌이치는 구체들이 매달려 있다. 이 천체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치장, 우주의 물리적 치장이니, 하나님은 만물이요, 만물을 채우며, 만물은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
11:8.2 (125.5) 절대적 물질 인력의 중심이자 초점은 파라다이스 섬이며, 하보나를 도는 검은 인력체들이 이를 보완하고, 위와 아래의 공간 저장소가 균형을 이루게 한다. 아래 파라다이스에서 나오는 모든 알려진 방사물은, 총우주의 타원형 공간 수준의 끝없는 회로에 작용하는 중앙 인력의 당기는 힘에, 변함없이, 어김없이 반응한다. 알려진 모든 형태의 우주 실체는 오랜 세월의 성향, 곧 순환하는 경향, 큰 타원형의 움직임이 있다.
11:8.3 (125.6) 공간은 인력에 반응하지 않지만, 인력에 대하여 평형력으로서 작용한다. 공간 쿠션이 없다면, 폭발하는 행위는 둘러싼 공간 물체를 휙 잡아챌 것이다. 또한 유물 공간은 물질 인력, 곧 직선 인력에 대하여 반인력(反引力)의 영향을 미친다. 공간은 그런 인력 행위를 늦출 수 없어도 실제로 중화할 수 있다. 절대 인력은 파라다이스의 인력이다. 지역 인력, 곧 직선 인력은 에너지나 물질의 전기(電氣) 단계와 관련된다. 적당히 물질화가 일어난 곳은 어디에나, 중앙 우주, 초우주, 바깥 우주 안에서, 직선 인력이 작용한다.
11:8.4 (125.7) 수많은 형태의 우주 물력, 물질 에너지, 우주 동력, 그리고 다양한 물질화는 완전히 뚜렷하지 않아도, 파라다이스 인력에 대하여 세 가지 일반 단계의 반응을 드러낸다:
11:8.5 (126.1) 1. 인력 이전 단계 (물력). 이것은 공간 잠재력을 에너지 이전 형태인 우주 물력으로 개별화하는 처음 단계이다. 이 상태는 공간의 원초적 물력 전하(電荷)의 개념과 비슷하며, 때로는 순수 에너지 또는 분리력이라 부른다.
11:8.6 (126.2) 2. 인력 단계 (에너지). 파라다이스의 물력 조직자의 행위가 공간 물력 전하의 이러한 수정을 일으킨다. 이것은 파라다이스 인력의 당기는 힘에 민감한 에너지 체계가 나타남을 알린다. 이 태어나는 에너지는 처음에 중립이지만 더 변질을 겪은 뒤에, 이른바 음성과 양성의 질을 나타낼 것이다. 이 단계들을 우리는 극력(極力)이라 부른다.
11:8.7 (126.3) 3. 인력 이후 단계 (우주 동력). 이 단계에서, 에너지와 물질은 직선 인력의 통제에 반응함을 드러낸다. 중앙 우주에서 이러한 물리적 체계는 삼력(三力)이라고 알려진 세 겹 조직이다. 이것은 초월 동력을 가진, 시공 우주들의 근원 체계이다. 우주 동력 지휘자와 그 동료들이 초우주의 물리적 체계를 동원한다. 이 물질 조직은 2중으로 구성되어 있고 우주력(宇宙力)이라고[1] [1657] 알려져 있다. 하보나를 도는 검은 인력체들은 삼력도 아니고 우주력도 아니다. 이것들의 당기는 힘은 물질 인력의 두 가지 형태, 곧 직선 인력과 절대 인력을 모두 드러낸다.
11:8.8 (126.4) 공간 잠재력은 어떤 형태의 인력의 상호 작용에도 지배되지 않는다. 파라다이스의 이 1차 자질은, 사실로 나타나는 수준의 실체가 아니지만 모든 상대적 기능을 가진 비영(非靈) 실체―물력과 에너지의 온갖 표현, 그리고 동력 및 물질의 조직―의 선조가 된다. 공간 잠재력은 규명하기 힘든 용어이다. 공간의 선조가 되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는 공간 속에 존재하는 잠재력과 가능성의 관념을 전해야 한다. 그것은 대체로 파라다이스에서부터 방사되고 무제한 절대자의 공간 계심을 구성하는 모든 절대 영향과 가능성을 포함한다고 생각해도 좋다.
11:8.9 (126.5) 파라다이스는 온 우주에서 모든 에너지 및 물질의 절대 근원이며 영원한 초점이다. 무제한 절대자는 근원과 기원을 파라다이스에 둔 것들의 계시자ㆍ통제자요 저장소이다. 무제한 절대자의 보편적 계심은 인력을 잠재적으로 무한히 연장하는 개념, 곧 파라다이스 존재의 탄력성 있는 긴장과 대등한 개념인 듯하다. 이 개념은 만물이 파라다이스를 향하여 안으로 당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돕는다. 이 예는 투박하지만, 그래도 쓸모가 있다. 이 예는 또한 질량에 직각을 이루는 평면에서 어째서 인력이 반드시 우선하여 작용하는가 설명한다. 이 현상은 파라다이스와 이를 둘러싼 우주들의 다른 규격을 가리킨다.
11:9.1 (126.6) 파라다이스는 모든 영 성격자에게, 최초의 기원이 있는 영역이자 운명의 마지막 목표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지역 우주의 모든 하급 영 존재가 즉시 파라다이스로 가도록 정해지지 않은 것이 참말이지만, 그래도 파라다이스는 초물질 성격자가 모두 가고 싶어 하는 목표가 된다.
11:9.2 (126.7) 파라다이스는 무한의 지리적 중심이요, 우주 창조의 일부가 아니며, 영원한 하보나 우주의 참 일부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가운데 섬이 신성한 우주에 속한다고 말하지만, 정말로 그렇지 않다. 파라다이스는 영원하고 유일한 존재이다.
11:9.3 (127.1) 영원한 과거에, 우주의 아버지가 그의 영 자아의 무한한 성격을 영원한 아들의 존재로 표현했을 때, 아버지는 동시에 그의 비성격 자아의 무한한 가능성을 파라다이스로서 나타냈다. 비성격이고 비영인 파라다이스는 최초의 아들을 영원하게 만든 아버지의 뜻과 행위에 따라 불가피하게 생긴 반응이었던 듯하다. 그래서 아버지는 두 가지 실제 단계로―성격 및 비성격 단계, 영적 및 비영적 단계로―실체를 계획하였다. 이들 사이의 긴장은, 아버지와 아들의 행위하는 의지에 직면하여, 합동 행위자 뿐 아니라, 물질 세계와 영적 존재들이 있는 중앙 우주를 낳게 되었다.
11:9.4 (127.2) 실체가 성격인 것과 비성격인 것으로 (영원한 아들과 파라다이스로) 구별될 때, 어떻게 조건을 붙이지 않으면, 비성격인 것을 “신”이라 부르는 것은 도저히 마땅치 않다. 신의 행위로 생기는 에너지와 물질적 반응을 도저히 신이라 부를 수 없다. 신은 신이 아닌 많은 것을 일으키며, 파라다이스는 신이 아니다. 필사 인간이 이러한 표현을 언제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궁금하지만, 파라다이스는 의식하지 못한다.
11:9.5 (127.3) 파라다이스는 어떤 존재나 살아 있는 개체의 선조가 되지 않으며, 파라다이스는 창조자가 아니다. 성격과 지성 영의 관계는 물려줄 수 있지만, 형태는 그렇지 않다. 형태는 결코 거울처럼 비치는 것이 아니고, 형태는 복사한 것이다―재생한 것이다. 파라다이스는 절대 원본이며, 하보나는 이 가능성을 사실로 전시한 것이다.
11:9.6 (127.4) 하나님의 거처는 가운데 있고 영원하며, 영화롭고 이상적이다. 하나님의 집은 모든 우주의 본부 세계를 짓기 위한 아름다운 원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직접 거하시는 중앙 우주는 이상(理想)과 조직과 궁극의 운명으로 볼 때 모든 우주를 위한 원본이다.
11:9.7 (127.5) 파라다이스는 모든 성격자 활동의 우주 본부이며, 모든 물력 및 공간과 에너지 표현의 근원이자 중심이다. 지금까지 있어 왔던 것, 지금 있는 것, 앞으로 생길 것, 이 모두가 영원한 신들이 계신 이 중앙 거처에서 나왔거나, 지금 나오거나, 또는 앞으로 나올 것이다. 파라다이스는 모든 창조의 중심이요, 모든 에너지의 근원이요, 모든 성격자의 처음 기원이 있는 곳이다.
11:9.8 (127.6) 결국, 영원한 파라다이스에 관하여 필사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주의 아버지의 이 완전한 거처가 필사이자 물질인, 하나님의 아들, 곧 시공의 진화 세계에서 하늘 가는 인간의 불멸하는 혼이 찾아가는 운명, 실재하는 머나먼 운명이라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생애를 지지한, 하나님을 아는 필사자는 누구나 신을 추구하고 완전을 달성하는 여행, 파라다이스로 가는 기나긴 나그네 길을 이미 떠났다. 그리고 동물 기원을 가진 그런 존재가 파라다이스에서 신들 앞에 설 때, 지금도 수없이 많은 사람이 서 있다시피, 공간의 비천한 구체에서 올라왔으니까, 그러한 업적은 최상의 한계에 다가가는 영적 변화의 현실을 가리킨다.
11:9.9 (127.7) [유버르사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로부터 이렇게 일하도록 임명받은 한 지혜 완성자가 발표하였다.]
12:0.1 (128.1) 우주의 아버지의 널리 퍼진 창조가 얼마나 거대한가 유한한 상상력을 가지고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총(總)우주가 얼마나 거창한지 내 계급 존재의 개념으로도 이해하기가 벅차다. 그러나 필사자의 지성은 여러 우주의 계획과 배열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너희는 그 물리적 조직과 놀라운 행정에 관하여 얼마큼 이해할 수 있다. 시간 세계의 일곱 초우주, 그리고 영원에서부터 있는 중앙 우주에 거하는 여러 무리의 지적 존재들에 대하여 너희는 많은 것을 배울 수도 있다.
12:0.2 (128.2) 이론적으로, 다시 말해서, 영원한 잠재성으로 보면, 우리는 물질 우주가 무한하다고 상상하는데, 아버지가 실제로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 우주 전체를 연구하고 관찰함에 따라서, 너희의 유한한 생각에는 그것이 비교적 제한이 없고 거의 한이 없지만, 우리는 어떤 일정한 순간에도 물질 우주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12:0.3 (128.3) 자연 법칙을 연구하고 별이 있는 지역을 관찰함으로, 무한한 창조자가 표현하는 우주가 아직도 최종으로 명시되지 않았다는 것, 무한자가 만들 우주 잠재성의 상당 부분은 아직도 따로 독립되어 있고 드러나지 않았다고 우리는 확신한다. 지음받은 존재들에게는 총우주가 거의 무한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완성되려면 아직 멀었다. 물질 우주에는 아직도 물리적 한계가 있고, 영원한 목적을 가진 체험적 계시는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12:1.1 (128.4) 온 우주는 무한한 평면이 아니요, 한없는 입방체도, 한계 없는 동그라미도 아니며, 분명히 크기가 있다. 물력 및 에너지와 물질 및 동력의 광대한 집합 전부가 궁극에 하나의 공간 단위로서 조직되고 조정된 전체로서 작용한다는 것을 물리적 조직 및 관리의 법칙이 확고히 증명한다. 물질 창조의 관측 가능한 행위는 물리적 우주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증거가 된다. 우주가 둥그렇고 한정되어 있다는 마지막 증명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실, 온갖 형태의 기본 에너지가 끊임없는 절대적 파라다이스 인력의 당기는 힘에 복종해서, 총우주 공간 수준의 곡선 행로를 늘 돈다는 사실이 마련해 준다.
12:1.2 (128.5) 총우주의 연속되는 공간 수준은 유물(有物) 공간―이미 조직되어 있고 일부 사람이 살거나, 또는 아직 조직되고 사람이 살아야 할 전체 창조―의 대단위들을 구성한다. 총우주가 동작에 대하여 저항이 줄어든 일련의 타원형 공간 수준이고 비교적 고요한 지대들이 번갈아 있지 않다면, 우주 에너지의 얼마큼은, 무한한 범위 안에서 치솟아 일직선의 길을 밟으며, 자국 없는 공간 속으로 튀어나가는 것을 관측할 것이라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행동하는 물력이나 에너지나 물질을 우리는 결코 찾아내지 못한다. 이것들은 거대한 공간 회로인 경주로에서, 늘 소용돌이치며 언제나 계속 돌고 있다.
12:1.3 (129.1) 파라다이스에서부터 유물 공간의 수평 연장을 통해서 바깥으로 진행하면서, 총우주는 여섯 개의 동심(同心) 타원으로 존재하며, 이것들은 가운데 섬을 도는 여러 공간 수준이다:
12:1.6 (129.4) 3. 제1 바깥 공간 수준.
12:1.7 (129.5) 4. 제2 바깥 공간 수준.
12:1.10 (129.8) 하보나 중앙 우주는 어느 시간에 창조된 것이 아니요, 영원한 존재이다. 시작한 적도 없고 끝나는 때도 없는 이 우주는 훌륭하게 완전한 10억 구체로 이루어져 있고, 거창한 검은 인력체들에 둘러싸여 있다. 하보나 중심에는 고정되고 절대로 안정된 파라다이스 섬이 있고, 이것은 21개의 위성에 둘러싸여 있다. 중앙 우주의 테두리를 도는 굉장한 덩어리, 검은 인력체의 덩어리들 때문에, 이 중앙 우주의 질량 내용은 모두 일곱 구역에 있는 대우주의 알려진 총 질량보다도 훨씬 더 크다.
12:1.11 (129.9)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체계, 영원한 섬을 도는 영원한 우주는, 총우주의 완전하고 영원한 핵심을 이룬다. 일곱 초우주 전부와 바깥 공간의 모든 지역은 확정된 궤도에서 파라다이스 위성과 하보나 구체들의 거창한 중앙 집합체를 돈다.
12:1.12 (129.10) 일곱 초우주는 근본적 물리적 조직은 아니다. 아무 데서도 초우주들의 테두리가 성운 집단을 갈라놓지 않으며, 또한 기본 창조 단위인 지역 우주를 통과하지도 않는다. 각 초우주는 단지, 조직되고 일부 생명이 사는 우주, 하보나 이후에 만든 우주에서 약 7분의 1이 모여 있는 지리적 공간일 뿐이고, 각 초우주가 포함하는 지역 우주들의 수와 둘러싸는 공간은 대체로 같다. 너희의 지역 우주 네바돈은 일곱째 초우주 오르본톤에서 요즈음에 생긴 우주들 중에 하나이다.
12:1.13 (129.11) 대우주는 현재 조직되어 있고 사람이 사는 창조이다. 대우주는 일곱 초우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들은 중앙 우주의 영원한 구체들은 물론이고, 사람이 사는 행성이 약 7조개나 되는 총 진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이 잠정적 추정치는 건축된 행정 구체들을 계산에 넣지 않았고, 또한 조직되지 않은 바깥 집단의 우주들을 포함하지도 않는다. 현재 울퉁불퉁한 대우주의 변두리, 고르지 않고 마무리되지 않은 가장자리는, 전체 천문학적 구상의 엄청나게 불안정한 조건과 함께, 별을 공부하는 우리 학자들에게 일곱 초우주조차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우리가 안으로부터, 신성한 중심으로부터, 바깥으로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든지, 결국 우리는 조직되고 사람이 사는 우주의 바깥 테두리에 다다르며, 우리는 대우주의 바깥 테두리에 이른다. 그리고 이 바깥 가장자리 가까이, 아주 장엄한 창조의 아주 먼 구석에서 너희 지역 우주는 파란 많은 존재를 유지한다.
12:1.14 (129.12) 바깥 공간 수준. 공간에서 멀리 바깥에, 사람 사는 일곱 초우주에서부터 굉장히 떨어진 거리에, 광대하고 믿을 수 없이 막대한 회로, 물력과 물질화되는 에너지의 회로들이 집합하고 있다. 일곱 초우주의 에너지 회로, 그리고 물력 활동이 있는 이 거창한 바깥 지대 사이에 비교적 고요한 공간 지대가 있으며, 이것은 그 넓이가 다르지만 평균 약 40만 광년이 된다. 이런 공간 지대들에는 별 먼지―우주 안개―가 없다. 이 현상을 연구하는 우리 학자들은 일곱 초우주를 둘러싸는 비교적 고요한 이 지대에 존재하는 공간 물력의 정확한 상태에 대하여 의심을 품는다. 그러나 현재 대우주 가장자리를 지나서 약 50만 광년의 거리에, 우리는 믿을 수 없는 에너지 활동이 있는 지대가 시작되는 것을 지켜보는데, 이 에너지 활동의 부피와 강도는 2천5백만 광년이 넘는 거리까지 늘어난다. 충전하고 있는 이 엄청난 물력의 바퀴들은 제1 바깥 공간 수준에 자리잡고 있고, 이것은 이미 알려지고 조직된, 사람 사는 창조 전체를 도는 지대, 우주 활동이 있는 연속된 지대이다.
12:1.15 (130.1) 이 지역을 지나서, 더 큰 활동이 일어나고 있다. 왜냐하면, 유버르사 물리학자들은 제1 바깥 공간 수준에서 생기는 현상의 가장 바깥 한계를 넘어서, 약 5천만 광년이 넘는 거리에 물력이 명시되는 초기 증거를 탐지했기 때문이다. 이 활동은 의심할 여지 없이, 총우주의 제2 바깥 공간 수준에 물질 창조들이 조직되고 있음을 예시한다.
12:1.16 (130.2) 중앙 우주는 영원에 창조된 것이요, 일곱 초우주는 시간 세계에서 창조된 것이다. 4개의 바깥 공간 수준은 의심할 여지 없이, 결국 궁극의 창조가 되고 진화할 운명을 가졌다. 그리고 무한자는 무한에 이르지 않으면 충분한 표현을 결코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니까 이들은 넷째이자 가장 바깥 공간 수준을 지나서 또 다른 밝혀지지 않은 창조, 다시 말해서 아마 늘 확장하며 결코 끝없는 무한한 우주가 있으리라 가정한다. 이론적으로, 우리는 창조자의 무한성이나 잠재적으로 무한한 창조를 어떻게 제한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총우주가 존재하고 관리되다시피, 우리는 총우주가 한계를 가졌고, 분명히 제한되어 있고, 그 바깥 테두리를 열린 공간이 막고 있다고 본다.
12:2.1 (130.3) 갈수록 더 강력한 망원경으로 바깥 공간의 신비스러운 지대를 살피고, 거기서 거의 수없는 물리적 우주들이 놀랍게 진화하는 것을 볼 때, 총우주 건축가들의 탐지할 수 없는 계획의 힘찬 진행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유란시아 천문학자들은 깨달아야 한다. 현재 이 바깥 지역의 특징인 광대한 에너지가 나타나는 현상에 두루, 여기저기 특정한 파라다이스 성격자의 영향이 있음을 가리키는 증거를 우리가 소유한 것은 참말이다. 그러나 더 큰 관점에서 볼 때, 일곱 초우주의 바깥 테두리를 넘어 연장된 공간 지역들은 대체로 무제한 절대자의 영토로 인정된다.
12:2.2 (130.4) 맨눈으로 오르본톤 초우주의 테두리 바깥에, 겨우 두세 성운을 볼 수 있지만, 너희의 망원경은 형성되고 있는 이 물리적 우주들을 글자 그대로 수백만개 드러낸다. 오늘날의 너희 망원경으로 조사할 때,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별이 가득한 영역의 대부분은 오르본톤에 있다. 그러나 사진 기술을 가지고, 더 큰 망원경은 대우주의 경계를 훨씬 지나서 바깥 공간의 영토를 침투하며, 거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우주가 형성되는 과정에 있다. 너희의 현재 도구가 미칠 수 있는 범위를 지나서, 수백만의 다른 우주들이 또 있다.
12:2.3 (130.5) 멀지 않은 장래에, 새로운 망원경은 놀라워하는 유란시아 천문학자의 눈앞에, 바깥 공간의 먼 지대에 3억7천5백만 이상의 새 은하계들을 드러낼 것이다. 동시에 더 강력한 이 망원경들은 바깥 공간에 있다고 전에 믿었던 많은 섬 우주가 정말로 오르본톤 은하 체계의 일부라는 것을 나타낼 것이다. 일곱 초우주는 아직도 자라고 있다. 각 초우주의 둘레가 차츰 팽창하고 있고, 새로운 성운이 항상 안정되고 조직되고 있다. 유란시아 천문학자들이 은하계 바깥의 것으로 보는 어떤 성운들은 실제로 오르본톤의 가장자리에 있고, 우리를 따라 여행하고 있다.
12:2.4 (131.1) 유버르사의 천문학자들은 대우주가 일련의 별과 행성 집단의 조상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관측하는데, 이것들은 수많은 바깥 우주들의 동심원으로서, 사람이 사는 현재의 창조를 완전히 둘러싼다. 유버르사의 물리학자들은 지도에 없는 이 바깥 지역의 에너지와 물질이 이미 일곱 초우주 모두에 포함된 총 물질의 질량과 에너지 전하의 여러 배가 된다고 계산한다. 우리는 이 바깥 공간 수준에서 생기는 우주 물력의 변질은 파라다이스 물력 조직자들의 활동이라고 들었다. 또한 이러한 물력이 현재 대우주를 활성화하는 물리적 에너지의 선조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오르본톤 동력 지휘자들은 멀리 떨어진 이 영역과 아무 상관이 없고, 거기에 있는 에너지의 움직임은, 조직되어 있고 사람이 사는 우주들의 동력 회로와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12:2.5 (131.2) 바깥 공간의 엄청난 이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거의 아는 것이 없다. 미래의 더 큰 창조가 형성되는 과정에 있다. 우리는 그 거대함을 지켜볼 수 있고, 그 범위를 식별하고, 그 웅장한 규모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밖에 유란시아 천문학자들보다 이 영역에 대하여 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우리가 알기로, 이 바깥 동그라미의 성운ㆍ태양ㆍ행성들에는 인간 수준의 물질 존재나 천사나, 다른 영 생물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아득히 먼 이 영토에는 초우주 정부의 관할과 행정이 미치지 않는다.
12:2.6 (131.3) 새로운 종류의 우주, 곧 집결하고 있는 최후 군단이 미래에 활동할 장면이 되도록 예정된, 그런 서열의 우주들이 형성되는 과정에 있다고 오르본톤 전역에서 믿는다. 우리의 예측이 맞다면, 끝없는 과거가 너희의 연장자와 선배들을 위해 간직했던 것과 똑같이 황홀한 광경을, 끝없는 미래가 너희 모두를 위해서 간직할지 모른다.
12:3.1 (131.4) 모든 형태의 물력과 에너지는 똑같이―물질이든, 지성이든, 영이든―움켜쥐는 힘, 보편적으로 있는 것의 지배를 받으며, 바로 이것을 우리는 인력(引力)이라 부른다. 성격도 또한 인력―아버지의 독점 회로―에 민감하다. 그러나 비록 아버지가 이 회로를 혼자 쓰지만, 아버지는 다른 회로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우주의 아버지는 무한하며, 총우주의 네 가지 절대 인력 회로 어디에나 작용한다:
12:3.2 (131.5) 1. 우주의 아버지의 성격 인력.
12:3.3 (131.6) 2. 영원한 아들의 영 인력.
12:3.6 (131.9) 이 네 가지 회로는 아래 파라다이스의 물력 중심과 관계가 없다. 이 회로들은 물력도 에너지도 아니요, 동력 회로도 아니다. 이 회로들은 절대로 자리에 있는 회로이며, 하나님과 같이, 시간과 공간과 상관 없다.
12:3.7 (132.1)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인력 연구단이 유버르사에서 요즈음 몇천년 동안에 얻은 어떤 관찰 결과를 기록하는 것이 흥미가 있다. 이 전문 작업자 무리는 총우주의 다른 인력 체계들에 관하여 다음 결론에 도달했다:
12:3.8 (132.2) 1. 물리적 인력. 대우주의 물리적 인력의 전체 용량의 합계를 추산한 뒤에, 그들은 고심하여 이 결과를 지금 작용하는 절대 인력 존재 추정치의 총합과 비교했다. 이 계산은 대우주에서 총 인력의 작용이 파라다이스 인력의 힘 추정치의 아주 작은 일부라는 것을 가리키며, 이 추정치는 우주 물질의 기본 물리적 단위의 인력 반응에 근거하여 계산되었다. 이 학자들은 중앙 우주와 이를 둘러싼 일곱 초우주는 현재 시점에서 파라다이스의 절대 인력의 힘이 작용하는 기능의 약 5퍼센트만 쓰고 있다는 놀라운 결론에 다다랐다. 다시 말하면, 이 총체 이론(理論)에 근거를 두고 계산해서, 지금 시점에서 파라다이스 섬의 작용하는 우주 인력 활동의 약 95퍼센트는, 현재 조직된 우주들 테두리 바깥의 물질 체계들을 통제하는 데 관여한다. 이러한 계산은 모두 절대 인력을 말한다. 직선 인력은 실제 파라다이스 인력을 알아야만 계산할 수 있는 상호 작용의 현상이다.
12:3.9 (132.3) 2. 영적 인력. 똑같은 비교 추정(推定) 및 계산 방법으로, 이 학자들은 영 인력의 현재 반응 용량을 탐구해 왔으며, 외톨 사자를 비롯하여 다른 영 성격자들의 협조를 얻어서, 둘째 근원 중심의 작용하는 영 인력의 총합을 얻었다. 작용하는 영 인력의 현재 총합에 대해서 가정한 것과 대략 똑같은 값을, 그들이 대우주에 실제로 있고 작용하는 영 인력의 존재에 대해서 얻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교훈이 된다. 다시 말하면, 현재 시점에서, 총체(總體) 이론에 기초를 두고 계산해서, 영원한 아들의 전체 영 인력은 실질적으로, 대우주에서 활동하는 것이라 관측할 수 있다. 이 조사 결과가 믿을 만하다면, 우리는 바깥 공간에서 현재 진화하는 우주들은 현재 시점에서 전적으로 비영적이라 결론을 내려도 좋다. 이것이 참말이라면, 광대한 에너지 현상이 물리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별도로 하고, 영을 부여받은 존재들이 어째서, 이러한 에너지 현상에 대하여 거의 또는 도무지 정보가 없는가 만족하게 설명할 것이다.
12:3.10 (132.4) 3. 지성 인력. 비교하여 계산하는 바로 이 여러 원칙에 따라서, 이 전문가들은 지성 인력의 존재와 반응 문제에 착수했다. 지성 인력을 추정하기 위한 기본 단위를 구하려는 노력에는 동력 지휘자와 그 동료들에게서 발견되는 지성 형태가 방해 요인이라는 것이 판명되었지만, 세 가지 물질 형태와 세 가지 영적 형태의 정신력을 평균해서, 지성의 추정치를 얻었다. 이 총체 이론에 따라서, 지성 인력의 작용을 위하여 셋째 근원 중심의 현재 용량의 추정을 방해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 물리적 인력과 영적 인력을 추정할 경우처럼 아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비교해서 생각할 때, 이 경우의 조사 결과는 몹시 유익하며, 아니 흥미를 자아내기도 한다. 이 연구자들은 합동 행위자의 당기는 지적 힘에 대한 지성 인력 반응의 약 85퍼센트는 기존의 대우주에서 나온다고 추정한다. 이것은, 바깥 공간 영역에 두루 지금 진행 중인 관측할 수 있는 물리적 활동과 관련하여, 지성 활동이 관련되는 가능성을 비칠 것이다. 이 추정치는 아마도 정확하다고 하기 어렵지만, 원칙적으로 대우주의 현재 바깥 테두리를 지나서 펼쳐지는 공간 수준에서 총명한 물력 조직자들이 우주의 진화를 현재 지휘하고 있다는 우리의 믿음과 일치한다. 이 가정된 지능의 본질이 무엇이든, 그 지능은 영 인력에 민감하지 않은 듯하다.
12:3.11 (133.1) 그러나 이 모든 계산은, 기껏해야 가정된 법칙에 기초를 두고 얻은 추정치일 따름이다. 우리는 이 추정치가 꽤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바깥 공간에 몇몇 영 존재가 있다고 해도, 그들 집합의 존재는 이렇게 거대한 측량에 관계되는 계산에 뚜렷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12:3.12 (133.2) 성격 인력은 계산할 수 없다. 우리는 이 회로를 인식하지만, 그에 민감한 질적 실체나 양적 실체를 잴 수 없다.
12:4.1 (133.3) 모든 우주 에너지 단위는 우주 궤도를 빙그르르 돌면서, 1차 회전을 하며 그 임무의 집행에 종사한다. 공간의 우주 및 그 구성 체계와 세계들은 모두 회전하는 구체이며, 총우주 공간 수준의 끝없는 회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 하보나 한 가운데, 인력의 중심인 영원한 파라다이스 섬을 제외하고, 총우주 전체에서 절대로 아무것도 가만히 있지 않다.
12:4.2 (133.4) 무제한 절대자의 기능은 공간에 한정되어 있지만, 이 절대자와 운동의 관계에 대하여 우리는 그다지 확실치 않다. 운동이 그 관계에 본래부터 있는가? 우리는 모른다. 운동이 공간 속에 본래부터 있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공간의 움직임조차도 타고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제한자와 운동의 관계에 대하여 그다지 확실치 않다. 현재 일곱 초우주의 테두리를 지나서, 바깥에서 지금 진행되는 활동, 물력과 에너지를 변화시키는 거대한 활동을, 누가 또는 무엇이 일으키는가? 운동의 기원에 관하여 우리는 다음 의견을 가지고 있다:
12:4.3 (133.5) 1. 합동 행위자가 공간 속에서 운동을 비롯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12:4.4 (133.6) 2. 합동 행위자가 공간의 움직임을 낳는다면, 우리는 이를 증명할 수 없다.
12:4.5 (133.7) 3. 우주 절대자가 시초의 운동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운동으로 생기는 모든 긴장을 평준화하고 통제한다.
12:4.6 (133.8) 바깥 공간에서, 물력 조직자들은 지금 별을 진화시키는 과정에 있는 거대한 우주 바퀴들을 생산하는 데 책임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들이 그렇게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은 무제한 절대자의 공간 계심을 더러 수정함으로 가능하게 되었음이 틀림없다.
12:4.7 (133.9) 공간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무(無)이다―없는 것이다. 오로지 분명하고 비공간인 어떤 것과 관계하여 공간이 존재한다. 그러나 공간은 실재한다. 공간은 운동을 담고 조절한다. 공간은 움직이기도 한다. 공간의 움직임은 대략 다음과 같이 분류되어도 좋다:
12:4.8 (133.10) 1. 1차 운동―공간 호흡, 공간 자체의 움직임.
12:4.9 (133.11) 2. 2차 운동―연속되는 공간 수준의 방향이 번갈아 바뀌는 것.
12:4.10 (133.12) 3. 상대적 운동―파라다이스를 기점으로 해서 평가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상대적이다. 1차 운동과 2차 운동은 절대적이며, 움직이지 않는 파라다이스와 가지는 관계에서 보는 운동이다.
12:4.12 (134.1) 너희의 태양, 그리고 관련된 행성들의 현재 관계는, 공간에서 많은 상대적 운동과 절대적 운동을 드러내는 한편, 관찰하는 천문학자들에게, 너희가 비교적 공간에서 가만히 있고, 공간에서 바깥으로 너희의 계산이 진행됨에 따라서 둘러싼 별 집단과 별 흐름이 늘 속도가 빨라지면서 바깥으로 비행한다는 인상을 주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너희는 유물 공간 전체에 있는 물리적 우주들이 지금 바깥쪽으로 한결같이 팽창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바로 너희의 지역 우주는 (네바돈) 보편적으로 바깥으로 팽창하는 이 운동에 참여한다. 일곱 초우주 전체가 총우주의 바깥 지역을 따라서, 20억 년의 주기를 가진 공간 호흡에 참여한다.
12:4.13 (134.2) 우주들이 늘어나고 줄어들 때, 유물(有物) 공간에 있는 물질 덩어리들은 파라다이스 인력의 당기는 힘과 반대 방향, 같은 방향으로 번갈아 움직인다. 창조에 있는 물질 에너지 덩어리를 움직일 때 행해지는 작업은 공간의 작업이요, 동력과 에너지가 하는 일이 아니다.
12:4.14 (134.3) 너희가 분광기로 얻는 천체 속도의 추정치는, 너희 초우주 및 관련된 초우주들에 속하는, 별이 있는 지역에 적용될 때 상당히 믿을 만하지만, 바깥 공간 영역의 경우에 그런 계산은 도무지 신빙성이 없다. 다가오는 별은 여러 분광선을 정상으로부터 보라 방향으로 바꾸어 놓는다. 마찬가지로, 물러나는 별은 이 선들을 붉은 빛 방향으로 바꾼다. 여러 가지 영향이 가운데 끼어들어, 거리가 1백만 광년이 늘어날 때마다, 바깥 우주들의 후퇴 속도가 1초에 160킬로미터 넘는 비율로 빨라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 방법으로 계산하면, 더 강력한 망원경이 완성된 뒤에, 멀리 있는 이 체계들이 우주의 이 부분으로부터 1초에 48,000킬로미터 넘는 속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비행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명백한 후퇴 속도는 현실이 아니다. 그런 속도는 관측하는 각도와 기타 시간 및 공간의 왜곡을 포함하여 수많은 잘못된 요인 때문에 생긴다.
12:4.15 (134.4) 그러나 모든 그러한 왜곡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일곱 초우주 영토 다음 영역에 있는 바깥 공간의 광대한 우주들이 대우주가 도는 방향과 반대로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무수한 성운들과 이를 따르는 태양과 구체들은 현재 시점에서 중앙 우주를 시계 바늘 방향으로 돌고 있다. 일곱 초우주는 파라다이스를 시계 바늘의 반대 방향으로 돌고 있다. 제2 바깥 우주의 은하들은, 일곱 초우주와 마찬가지로, 파라다이스를 시계 바늘의 반대 방향으로 돌고 있는 듯하다. 유버르사에서 관찰하는 천문학자들은 아주 멀리 떨어진 공간에 제3 바깥 지대에서 회전 운동이 있다는 증거를 탐지한다고 생각하며, 이 지대는 시계 바늘 방향의 성질을 비로소 나타낸다.
12:4.16 (134.5) 공간에서 연달아 우주 행렬의 방향이 이렇게 번갈아 바뀌는 것은 우주 절대자가 가진, 총우주 안의 기법, 물력을 조정하고 공간의 긴장을 평준화시키는 우주 인력 기법과 아마 무슨 상관이 있는 듯하다. 공간 뿐 아니라, 운동은 인력을 보충하는 힘, 균형을 잡는 힘이다.
12:5.1 (134.6)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은 파라다이스의 선물이지만, 같은 의미가 아니라, 다만 간접으로 그렇다. 운동의 덕분으로, 그리고 지성이 본래부터 연속성을 의식하니까, 시간이 온다. 실질적 관점에서 볼 때, 운동은 시간에 기본이다. 파라다이스와 하보나의 표준일이 임의로 그렇게 인정된 경우를 제외하고, 운동에 기초를 둔 보편적 시간 단위는 하나도 없다. 공간 호흡 전부가 시간의 근원으로서 그 표준일의 지역적 가치를 없애버린다.
12:5.2 (135.1) 공간은 파라다이스로부터 기원이 생겼지만, 무한하지 않다. 공간은 절대적이 아니니, 무제한 절대자가 공간을 채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간의 절대 한계를 모르지만, 절대 시간이 영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12:5.3 (135.2) 오로지 시공 창조인 일곱 초우주에서, 시간과 공간은 떨어질 수 없다. 비시간 우주는 (시간이 없는 공간) 이론으로 존재하지만, 유일하게 참으로 비시간적 장소는 파라다이스 지역이다. 비공간적 시간은 (공간이 없는 시간) 파라다이스 수준에서 활동하는 지성 안에서 존재한다.
12:5.4 (135.3) 파라다이스에 부딪치며 유물 공간과 무물(無物) 공간을 분리하는, 비교적 움직임이 없는 중부 공간 지대들은 시간으로부터 영원에 이르는 과도기 지대이다. 따라서 파라다이스 순례자들이 이러한 이동 중에 무의식이 될 필요가 생기며, 그때 이 이동은 마침내 파라다이스 시민이 됨으로 끝난다. 시간을 의식하는 방문자는 이렇게 잠들지 않고 파라다이스로 갈 수 있지만, 시간 세계의 인간으로 남는다.
12:5.5 (135.4) 시간과 가지는 관계는 공간에서 움직임 없이 존재하지 않지만, 시간 의식은 존재한다. 운동이 없을 경우에도 일의 순서는 시간을 의식하게 할 수 있다. 사람의 지성은, 지성의 선천적 성질 때문에, 공간보다 시간에 덜 묶여 있다. 육체를 입고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사람의 지성은 엄격하게 공간에 묶여 있지만, 인간의 창조적 상상력은 비교적 시간에 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 자체는, 유전(遺傳)으로 볼 때, 지성의 질이 아니다.
12:5.6 (135.5) 세 가지 다른 수준의 시간 의식이 있다:
12:5.7 (135.6) 1. 머리가 파악하는 시간―순서와 운동을 의식하는 것과 지속하는 기간의 감각.
12:5.8 (135.7) 2. 영이 의식하는 시간―하나님을 향한 움직임을 보는 통찰력, 그리고 높아지는 신성 수준으로 올라가는 움직임을 의식하는 것.
12:5.9 (135.8) 3. 실체를 보는 통찰력으로부터, 인격은 독특한 시간 감각, 그리고 현재 있다는 의식과 지속함을 깨닫는 의식을 창조한다.
12:5.10 (135.9) 비영적 동물은 오로지 과거만 알고 현재에 산다. 영이 깃드는 사람은 미리 보는 눈(통찰력)이 있으며, 앞날을 내다볼지 모른다. 오로지 앞을 내다보는 진취적 태도가 개인적으로 실재한다. 고정된 윤리와 전통적 도덕은 동물을 조금 넘을 뿐이다. 금욕주의는 상급의 자아 실현이 아니다. 오로지 활기와 진취성이 있고, 우주 실체와 함께 살아 있을 때, 윤리와 도덕은 참으로 사람답게 된다.
12:5.11 (135.10) 사람의 인격은 단지 시공의 사건들에 부수되는 물건이 아니다. 사람의 인격은 또한 그러한 사건들의 우주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다.
12:6.1 (135.11) 우주는 가만히 있지 않다. 안정은 활동의 부재로 생기는 결과가 아니라, 균형된 에너지, 협동하는 지성, 조정된 상물질, 영의 전반적 통제, 그리고 인격의 통일에서 생기는 산물이다. 안정성은 전적으로, 언제나 신성의 정도에 따라 늘어난다.
12:6.2 (135.12) 파라다이스 섬을 통하여 우주의 아버지는 총우주를 물리적으로 통제하는 일에 우선권과 수위권을 행사한다. 영원한 아들의 성격 속에서 하나님은 절대로 우주를 영적으로 다스린다. 지성 분야에 관해서 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합동 행위자 안에서 나란히 활동한다.
12:6.3 (136.1) 셋째 근원 중심은 그의 우주 지성을 절대로 장악함으로, 그리고 그에게 본래부터 있고 보완하는 보편적 물리적 인력과 영 인력을 행사함으로, 통합된 물리적 에너지 및 영 에너지의 균형을 유지하고 조정하도록 돕는다.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이 연결될 때는 언제 어디서나, 그러한 지성 현상은 무한한 영의 행위이다. 지성 혼자서, 물질 수준에 있는 자연 물력 및 에너지를 영적 세력과 영 수준의 존재들과 서로 연결시킬 수 있다.
12:6.4 (136.2) 어떤 우주 현상을 곰곰이 생각하더라도, 물리적 에너지, 지적 에너지, 영적 에너지의 상호 관계를 반드시 고려하도록 하라. 또한 성격이 이 여러 에너지를 통일하는 데 따르는 예기치 못한 현상, 그리고 체험적 신 및 절대자들이 행위하고 반응하는 결과로 생기는 예측할 수 없는 현상을 마땅히 참작해야 한다.
12:6.5 (136.3) 우주는 오로지 양적 의미, 곧 인력을 측정하는 의미에서 아주 예측이 가능하다. 원시적 자연 물력조차도 직선 인력에 민감하지 않고, 궁극의 우주 실체들이 가진 상급의 지적 의미와 참된 영 가치도 그렇지 않다. 물리적, 지적, 또는 영적 물력의 새로운 관계에 대하여 말하면, 우주는 질적으로 쉽게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관찰했을 때 에너지나 물력의 그러한 조합은 얼마큼 예측이 가능하다. 물질ㆍ지성ㆍ영이 통일되어 인간의 성격이 되면, 그러한 자유 의지 존재가 내리는 결정을 우리는 완전히 예측할 수 없다.
12:6.6 (136.4) 원초적 물력, 미숙한 영, 그 밖에 비성격인 궁극의 것들의 모든 단계는 비교적 안정되었지만 어떤 미지의 법칙에 따라서 반응하는 듯하며, 제한되고 고립된 상황의 현상으로 마주쳤을 때 흔히 기대에 어긋나게, 행동 범위가 넓고 신축성 있게 반응하는 특징이 있다. 태어나는 이 우주의 실재물이 드러내는, 예측할 수 없는 이 반응의 자유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알지 못하고 헤아릴 수 없이 예측이 불가능한 이것들은―원초적 물력 단위의 행동이든, 확인되지 않은 지성 수준의 반응이든, 또는 바깥 공간 영토에서 아직 우주가 되기 전의 광대한 현상과 관련이 있든―아마도 모든 우주 창조자들의 기능이 아니라, 선행하는 궁극위의 활동과 절대자들의 계심과 행위를 나타낸다.
12:6.7 (136.5) 우리는 정말 모르지만, 그렇게 놀라운 신축성과 그렇게 심오한 조정은 절대자들이 계시고 행위함을 의미한다고 추측한다. 겉보기에 한결같은 원인으로부터 그렇게 다채로운 반응이 생기는 것은, 직접적이고 상황적 원인에 대해서뿐 아니라, 총우주 전체에 걸쳐서 관계된 모든 다른 원인에 대한 절대자들의 반응을 드러낸다고 우리는 추측한다.
12:6.8 (136.6) 개인들은 자기의 운명 보호자가 있다. 행성ㆍ체계ㆍ별자리ㆍ우주ㆍ초우주는 각각 자기 영토의 이익을 위하여 수고하는 통치자가 있다. 하보나, 아니 대우주도, 이렇게 높은 책임을 맡은 분들이 주시(注視)하고 있다. 그러나 파라다이스로부터 넷째이자 가장 바깥의 공간 수준에 이르기까지, 누가 총우주 전체를 육성하며, 그 기본적 필요를 보살피는가? 실존적으로 그러한 책임은 아마도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게 있다. 그러나 경험적 관점에서 볼 때, 하보나 이후에 생긴 우주의 모습은 다음에 달려 있다:
12:6.9 (136.7) 1. 잠재성은 절대자들에게.
12:6.13 (137.3) 무제한 절대자는 모든 공간에 스며든다. 신 절대자와 우주 절대자의 정확한 지위가 무엇인지 우리는 완전히 뚜렷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나 신 절대자와 무제한 절대자가 활동할 때는 어디서나, 우주 절대자가 활동함을 알고 있다. 신 절대자는 보편적으로 계실지 모르지만, 도저히 공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없다. 궁극위는 제4 공간 수준의 바깥 테두리에까지, 공간 속에 계시거나, 또는 언젠가 계실 것이다. 궁극위가 과연 총우주 가장자리를 지나서 공간에 계심을 가질까 우리는 의문을 가진다. 그러나 이 한계 안에서 궁극위는 세 절대자의 잠재성의 창조적 조직을 점진적으로 통합하고 있다.
12:7.1 (137.4) 모든 시간과 공간에 걸쳐서, 무슨 성질을 가졌든지, 모든 실체에 작용하는 용서 없는 비인격 법칙이 있으며, 이것은 우주 섭리의 작용에 상당한다. 자비는 개인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태도의 특징을 나타내지만, 공정은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움직인다. 하나님의 뜻은 한 부분에서―어느 한 인격자의 마음 속에서―반드시 이기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뜻은 전체를, 온 우주를 실제로 다스린다.
12:7.2 (137.5) 어떤 존재와 무슨 거래를 가져도 하나님의 법칙은 본래부터 멋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시력이 제한되고 관점이 한정된 너희에게, 하나님의 행위는 가끔 독재적이고 멋대로인 듯 보임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법칙은 다만 하나님의 버릇, 하나님이 되풀이해서 일하는 방법이며, 하나님은 항상 모든 일을 잘 하신다. 하나님이 같은 일을 거듭하여 같은 방법으로 하심을 너희가 지켜보는데, 그것이 주어진 상황에서 바로 그 특별한 일을 하기에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최선의 방법은 옳은 방법이다. 따라서 무한한 지혜는 빈틈없고 완전한 바로 그 방법으로 그 일이 행해질 것을 명령한다. 자연은 신이 혼자서 행위한 결과가 아님을 너희는 또한 기억해야 한다. 사람이 자연이라고 부르는 현상에는 다른 영향이 존재한다.
12:7.3 (137.6) 어떤 종류의 질의 저하를 겪거나, 또는 순수하게 개인적인 어떤 활동을 열등한 방법으로 집행하도록 한 번이라도 허락하는 것은 신의 성품에 싫은 느낌을 일으킨다. 그러나 만약 어느 신성한 상황, 어느 극도의 상황에, 최고로 지혜로운 과정이 다른 행위가 필요하다고 가리키는 어떤 경우에도―다시 말해서, 완전하라는 요구가 어떠한 이유에서든 다른 방법으로, 더 좋은 방법으로 반응하라고 명할 때, 그때 그 자리에서 온통 지혜로운 하나님은 더 좋고 더 적당한 바로 그 방법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똑똑히 밝혀야 한다. 이것은 더 높은 법칙의 표현이요, 낮은 법칙의 취소가 아니다.
12:7.4 (137.7) 하나님은 자원하는 행위를 되풀이하는 고질에 버릇이 된 노예는 아니다. 무한자의 여러 법칙 사이에는 아무런 대립이 없다. 이러한 법칙은 모두, 결코 틀릴 수 없는 성품의 완성이요, 잘못 없는 결정을 표현하는 의심받지 않는 행위이다. 법은 무한하고 완전한 신의 지성의 한결같은 반응이다. 겉으로 이렇게 같아 보이는데도, 하나님의 행위는 모두 뜻한 것이다. 하나님 안에는 “아무 변동도, 변화의 그림자도 없느니라.” 우주의 아버지에 대하여 어떻다고 참으로 말할 수 있는 이 모든 것을, 모든 하위 지능 존재나 모든 진화하는 인간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똑같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는 없다.
12:7.5 (137.8)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니까, 어떤 보통 상황에도 하나님이 같은 일을, 바로 그 동일한 보통 방법으로 하는 것을 너희는 기대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된 사물과 존재에게 안정성을 보장한다. 그는 하나님이요, 따라서 변하지 않는다.
12:7.6 (138.1) 이렇게 행위가 확고하고 행동이 한결같은 것은 모두 개인적이고 의식하는 것, 상당히 의지로 행하는 것이니, 이는 크신 하나님이 자신의 완전함과 무한함에 무력한 노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행동하는 자동 물력이 아니며, 하나님은 노예처럼 법칙에 묶인 힘이 아니다. 하나님은 수식(數式)도, 화학 공식도 아니다. 하나님은 자유 의지를 가진 근원 성격자이다. 우주의 아버지, 성격으로 가득 충전된 존재요, 우주에서 모든 생물 성격자의 근원이다.
12:7.7 (138.2) 하나님을 찾는, 물질 필사자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한결같이 이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간의 틀이 순간을 지나서, 첫째 일생 전체를 포함하도록 커진다면, 영에게 인도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일생에서 열리는 영의 열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갈수록 더 식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나서, 인생이 더 확장되어 상물질 체험을 포함하면, 사람의 인격과 우주의 아버지 성격의 관계를 체험하는 신성한 기쁨을 비로소 맛본 시간 세계의 인간들이 영적으로 깨끗이 되는 행위에서, 신의 뜻이 더욱 밝게 빛나는 것을 관찰하게 될 것이다.
12:7.8 (138.3) 하나님이 아버지요 사람이 형제라는 것은 인격자 수준에서 부분과 전체의 역설(逆說)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각 개인을, 하늘 가족의 한 개별 자식으로서 사랑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개인을 사랑해도, 인격자들을 차별하지 않으며, 만민을 그가 사랑하는 것은 전체의 관계, 만민의 형제 관계가 생기게 한다.
12:7.9 (138.4) 아버지의 사랑은 각 인격자를 우주의 아버지의 독특한 아이, 무한 속에서도 되풀이되지 않는 아이, 모든 영원을 통해서도 갈아치울 수 없는, 의지(意志)가 있는 인간으로서, 절대로 개별화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이 하나하나를 영화롭게 만들며, 하늘 가족 각 구성원을 비추고, 만물의 아버지의 친교 회로 바깥에 있는 비인격 수준과 반대로, 각 인격 존재의 독특한 성품을 날카롭게 그림자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의지 있는 각 인간의 초월적 가치를 놀랍게 묘사하며, 파라다이스 지위를 가진 가장 높은 창조 성격자를 비롯하여, 어떤 진화하는 시공 세계에서 인류가 비롯할 때 야만족 중에서 의지의 위엄을 가진 가장 낮은 인격자에 이르기까지, 그의 자녀 하나하나에게, 누구에게나, 우주의 아버지가 부여한 높은 가치를 어김없이 드러낸다.
12:7.10 (138.5) 하나님이 개인에게 쏟는 바로 이 사랑은, 모든 개인으로 이루어진 신의 가족, 곧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자녀, 자유 의지를 가진 자녀들 사이에 보편적 형제 관계가 생기게 한다. 이 형제 단체는 보편적이니까, 전체의 관계이다. 보편적일 때, 형제 단체는 각자의 관계가 아니라, 전체의 관계를 드러낸다. 형제 관계는 전체의 한 현실이며, 따라서 부분의 질과 대조해서, 전체의 질을 드러낸다.
12:7.11 (138.6) 형제 관계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성격자 사이에 있는 관계의 사실이다. 어느 인격자도, 다른 인격자들과 가지는 관계에서 생기는 이득(利得)이나 손해를 벗어날 수 없다. 전체와 함께 부분은 어느 정도 이득이나 손해를 본다. 각 사람의 훌륭한 노력은 모든 사람에게 이득을 주며, 각 사람의 잘못이나 악은 모든 사람의 시련을 더해 준다. 부분이 움직이는 대로, 전체가 움직인다. 전체의 진보가 어떠하면, 부분의 진보도 그러하다. 부분과 전체의 상대 속도는 그 부분이 전체의 관성(慣性) 때문에 늦어지는가, 아니면 우주의 형제 정신의 운동량 때문에 앞으로 밀려가는가 결정한다.
12:7.12 (139.1) 하나님이 상당히 사사롭게 대하고, 스스로 의식하고 거주 본부를 가진 존재이며, 동시에 아주 방대한 우주에 몸소 계시고, 거의 무한한 수의 존재들과 직접 연락하는 것은 신비이다. 그러한 현상이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라는 사실이 조금이라도 너희의 믿음을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비할 수 없는 성품이 무한히 크고 엄청나게 영원하며 웅대하고 영화롭다고 해서 너희는 압도되거나, 어지러워지거나, 낙심하지 말라. 왜냐하면, 아버지는 너희 가운데 어느 누구와도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 안에 계시고, 그분 안에서 우리 모두가, 글자 그대로 움직이고, 실제로 살며, 진실로 우리의 존재를 가지기 때문이다.
12:7.13 (139.2) 파라다이스 아버지는 신다운 창조자 및 창조된 자식들을 통하여 활동하지만, 아버지는 또한 너희와 가장 밀접한 마음 속의 연락을 즐기신다. 이러한 연락은 아주 숭고하고, 상당히 개인적이니까, 아버지의 분신이 사람의 혼, 그리고 그 분신이 실제로 깃드는 필사자의 지성과 가지는 신비한 교통은, 나도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이 선물을 가지고 너희가 무엇을 하는지 아니까, 따라서 너희는 아버지가 신 동료들 뿐 아니라, 시간 세계에서 진화하는 필사 자식들하고도 밀접히 연락하는 것을 안다. 아버지는 정말로 파라다이스에 거하지만, 그의 신성한 계심은 사람의 지성 속에서도 거한다.
12:7.14 (139.3) 비록 한 아들의 영이 모든 육체에 퍼부어지고, 한 아들이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한때 너희와 함께 거했고, 세라핌이 몸소 너희를 지키고 안내하더라도, 둘째 중심과 셋째 중심의 이러한 신다운 존재들 가운데 누구도 아버지처럼 어떻게 너희에게 가까이 오고, 너희를 완전히 이해하기를 바랄 수 있는가? 이 아버지는 너의 참되고 신성한 자아, 아니 너의 영원한 자아가 되라고 자신의 일부를 너희 안에 있으라고 주셨다.
12:8.1 (139.4) “하나님은 영”이지만, 파라다이스는 영이 아니다. 물질 우주는 언제나 모든 영적 활동이 일어나는 무대이다. 영 존재와 영 승천자들은 물질 실체로 이루어진 물리적 구체(球體)에서 살며 일한다.
12:8.2 (139.5) 우주 물력은 우주 인력의 분야요, 이 우주 물력을 수여하는 것은 파라다이스 섬의 기능이다. 모든 최초의 물력 및 에너지는 파라다이스로부터 진행하며, 수많은 우주를 만드는 물질은 유물(有物) 공간의 물력 전하를 구성하는 초월 인력 존재의 형태로, 총우주 전체에 두루, 지금 순환하고 있다.
12:8.3 (139.6) 바깥에 놓인 여러 우주에서 물력이 어떤 변화를 거치든지 상관 없이, 그것은 파라다이스로부터 나가 버렸으니까, 계속 여행하며, 결코 그치지 않고 상존하는, 영원한 섬이 어김없이 당기는 힘의 지배를 받으면서, 충실하게 선천적으로, 우주들의 영원한 공간 행로를 언제까지나 빙 돌고 있다. 물리적 에너지는 참되고 끈질기게 우주 법칙에 복종하는 한 실체이다. 생물 의지의 분야에서만, 신의 길과 최초의 계획을 벗어난 일이 있었다. 동력과 에너지는 중앙 파라다이스 섬이 안정되고 불변하고 영원함을 나타내는 보편적 증거이다.
12:8.4 (139.7) 영을 수여하고 성격자들을 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영 인력의 분야는 영원한 아들의 영역이다. 모든 영적 실체를 늘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아들의 이 영 인력은, 파라다이스 섬의 전능한 물질적 장악과 마찬가지로, 실재하며 절대적이다. 그러나 물질에 머리를 쓰는 사람은, 혼의 영적 통찰력으로만 구별되는, 영적 성품의 작용, 똑같이 실재하는 막강한 작용보다 물리적 성질을 가진 물질적 명시에 자연히 더 익숙하다.
12:8.5 (140.1) 우주에서 어느 성격자라도 영적으로 더 높아짐에―하나님처럼 됨에―따라서, 그의 지성은 물리적 인력에 덜 민감해진다. 물리적 인력의 반응으로 측정하는 실체는 영적 내용의 질에 따라서 결정하는 실체와 정반대이다. 물리적 인력의 활동은 비영 에너지의 양을 결정하며, 영 인력의 행위는 살아 있는 신성한 에너지를 재는 질적 척도이다.
12:8.6 (140.2) 파라다이스와 물리적 창조의 관계, 그리고 영원한 아들과 영적 우주의 관계는, 합동 행위자와 지성 영역―물질ㆍ상물질ㆍ영적 존재 및 성격자가 있는 지적(知的) 우주―의 관계와 같다.
12:8.7 (140.3) 합동 행위자는 물질 실체와 영적 실체 모두에 반응하며, 따라서 본래부터 모든 지적 존재, 곧 창조의 물질 단계와 영적 단계의 연합을 대표할 수 있는 존재들에게 보편적 봉사자가 된다. 지능을 부여하는 것, 곧 지성의 현상에서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보살피는 것은 합동 행위자의 독점 분야이다. 따라서 합동 행위자는 영적 지성의 협동자가 되며, 이 영적 지성은 상물질 지성의 본질이요, 시간 세계에서 진화 인간이 가진 물질 지성의 알맹이이다.
12:8.8 (140.4) 지성의 기법으로 영 실체는 인격자에게 체험적인 것이 된다.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인간 지성의 경우에도 그 통일하는 가능성, 곧 사물과 관념과 가치를 조정하는 능력은 물질을 초월한다.
12:8.9 (140.5) 필사 지성이 일곱 수준의 상대적 우주 실체를 이해하는 것은 도저히 가능하지 않지만, 인간의 지능은 세 가지 수준에서 작용하는 유한한 실체의 의미를 많이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12:8.10 (140.6) 1. 물질. 운동이 수정하거나 지성이 조절할 경우를 빼고, 직선 인력의 지배를 받는 조직된 에너지.
12:8.11 (140.7) 2. 지성. 통째로 물질 인력에 지배되지는 않지만, 영이 수정했을 때, 참으로 해방되는 조직된 의식(意識).
12:8.12 (140.8) 3. 영. 가장 높은 성격 실체. 참된 영은 물질 인력에 지배되지 않지만, 궁극에 성격 위엄을 가진 모든 진화하는 에너지 체계를 자극하는 영향이 된다.
12:8.13 (140.9) 모든 성격자의 존재 목표는 영이요, 물질의 명시는 상대적인 것이며, 우주 지성은 우주의 이 두 가지 반대물 사이에 있다. 지성의 수여와 영의 봉사는 신의 동료 성격자들, 곧 무한한 영과 영원한 아들이 하는 일이다. 총체 신의 실체는 지성이 아니요, 영 지성―성격이 하나로 만든 영 지성이다. 그런데도 절대 영과 절대 사물은 모두 우주의 아버지의 몸에서 한데 모인다.
12:8.14 (140.10) 파라다이스에서 물질ㆍ지성ㆍ영, 이 세 가지 에너지는 대등하다. 진화하는 우주에서는, 인격의 경우에 지성의 중재를 통해서 영이 지휘하려고 애쓰는 것을 제외하고, 에너지와 물질이 지배한다. 모든 인간의 인격 체험에서 영은 근본적 실체인데, 하나님이 영이기 때문이다. 영은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성격 관계에서 영은 지성과 물질 모두를 초월하며, 이것들은 진보하여 달성하는 과정에 체험적 변수이다.
12:8.15 (140.11) 우주의 진화에서, 물질은 신을 깨닫게 하는 영의 빛 앞에서 지성이 던지는 철학적 그림자가 되지만, 이것은 물질과 에너지가 실체인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지성ㆍ물질ㆍ영은 똑같이 실재하지만, 신에 도달하는 데 인격자에게 똑같은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신을 의식하는 것은 차츰 진행되는 영적 체험이다.
12:8.16 (141.1) 영적으로 변화된 인격자(우주에 계신 아버지, 곧 개별 인간 안에 있는 잠재 영 인격자인 분신)의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사이에 끼는 지성이 입은 물질 옷에 던지는 그림자는 더 커진다. 시간 세계에서, 사람의 몸은 지성이나 영과 마찬가지로 현실이다. 그러나 죽을 때 지성(신분)과 영은 살아남고, 한편 육체는 살아남지 못한다. 한 가지 우주 실체는 인격의 체험에서 부재(不在)할 수 있다. 그래서―물질이 그보다 더 현실인 영 알맹이의 그림자라―하는 너희 그리스인의 비유적 표현은 과연 철학적 의미가 있다.
12:9.1 (141.2) 영은 여러 우주에서 기본적 성격 실체이며, 성격은 영적 실체를 겪는 모든 진보 하는 체험에 기본적이다. 우주가 진보하는 어떤 연속된 수준에서도, 어떤 국면의 성격 체험도 매혹하는 성격 실체들을 발견하는 실마리로 가득 차 있다. 사람의 참된 운명은 새로운 영적 목표를 만들고, 다음에 비물질 가치를 가진 그런 훌륭한 목표로 인도하는 우주의 유혹에 반응하는 데 있다.
12:9.2 (141.3) 사랑은 인격자들 사이에서 유익한 관계의 열쇠이다. 너희는 꼭 한 번 접촉한 결과로서 한 인격자를 정말로 알 수 없다. 음악이 일종의 수학적 리듬이기는 하지만, 너는 수학적 추론을 통해서 음악을 음미할 수 없다. 전화(電話)가 있는 사람에게 배당된 번호는 어떤 면에서도 그 사람의 인격을 확인하거나, 그 인품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다.
12:9.3 (141.4) 물질 과학인 수학은 우주의 물질적 모습에 대한 지적 토론에 필수이지만, 그러한 지식은 진리의 상급 깨우침이나, 영적 실체들을 몸소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 생활의 영역 뿐 아니라 물리적 에너지의 세계에서도, 두 가지 이상의 합계는 그러한 연합으로 예측할 수 있는 덧셈의 결과보다 더 큰 무엇, 또는 다른 것이 되는 일이 아주 흔하다. 수학 전체, 철학 전체 분야, 최상급의 물리학이나 화학도, 가스 상태의 두 수소 원자(原子)와 한 산소 원자가 뭉치면 새롭고 질적으로 덧셈을 능가하는 물질―액체인 물―이 생기리라는 것을 예측하거나 알 수 없다. 이 한 가지 물리 화학의 현상을 이해하는 지식은, 유물론적 철학과 기계론적 우주론의 성장을 막았어야 했다.
12:9.4 (141.5) 기술적 분석은 한 인격자나 한 물건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드러내지 않는다. 예를 들면, 물은 불을 끄는 데 효과 있게 쓰인다. 물이 불을 끄리라는 것은 날마다 체험하는 사실이지만, 물 자체를 아무리 분석해도 결코 물의 그러한 성질을 밝힐 수 없다. 분석은 물이 수소와 산소로 이루어진 것을 결정할 뿐이다. 이 원소들을 더 분석하면 산소는 연소(燃燒)를 정말 지원하며, 수소 자체는 자유롭게 타리라는 것을 드러낸다.
12:9.5 (141.6) 두려움에 노예가 되고 미신의 사슬에 묶였던 상태를 벗어나고 있으니까, 너희의 종교는 현실적이 되고 있다. 너희의 철학은 독단과 전통으로부터 해방되려고 애쓴다. 너희의 과학은 오랜 세월에 걸쳐 계속된 싸움, 진리와 오류의 싸움에 말려들어 있고, 한편으로 추상(抽象)의 사슬, 수학(數學)에 노예가 된 처지, 비교적 눈이 먼 기계론적 유물론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투쟁한다.
12:9.6 (142.1) 필사 인간은 영 핵심을 가지고 있다. 지성은 신성한 영 핵심 둘레에 존재하며 물질 환경 속에서 작용하는, 인격을 가진 에너지 체계이다. 인격을 가진 지성과 영 사이에 그러한 생생한 관계는 영원한 인격이 되는 우주 잠재성이다. 자아 개념이 가운데 영 핵심의 통치권을 완전히 주제넘게 갈아치우고, 그렇게 함으로 인격 신분을 주는 우주 계획을 뒤엎은 뒤에야, 진정한 문제, 오래 가는 실망, 심각한 패배, 또는 필연적 죽음이 다가올 수 있다.
13:0.1 (143.1) 가운데 파라다이스 섬과 가장 안쪽의 하보나 행성 회로 사이의 공간에는 특별 구체들로 이루어진 3개의 작은 회로가 있다. 가장 안쪽 회로는 우주의 아버지의 일곱 비밀 구체로 이루어져 있다. 둘째 집단은 영원한 아들의 빛나는 일곱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바깥에는 무한한 영의 거대한 일곱 구체가 있는데, 이것들은 일곱 으뜸 영의 집행 본부 세계이다.
13:0.2 (143.2) 각각 일곱 세계로 구성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이 세 회로는, 비할 데 없이 웅장하고 상상할 수 없이 영화로운 천체(天體)들이다. 이 천체들의 물질 건축, 곧 물리적 건축조차, 너희에게 아직 밝혀지지 않은 체제에 속한다. 각 회로의 물질은 다양하고, 물리적 바탕이 서로 같은 아들의 일곱 세계를 제쳐놓고, 각 회로의 각 세계는 다르다. 21세계 모두가 거대한 천체이며, 일곱 천체로 이루어진 각 회로는 다르게 영원하게 되었다. 우리가 알기로 이 천체들은 늘 있어 왔고, 파라다이스와 마찬가지로 영원하다. 이 세계들의 기원에 대하여 기록도 없고 전통도 없다.
13:0.3 (143.3) 우주의 아버지의 일곱 비밀 구체는 영원한 섬 가까이 파라다이스를 돌고 있고, 영원한 신들의 중심 광원에서 나오는 영적 빛을 상당히 반사하며, 파라다이스에 두루, 아니 하보나의 일곱 회로에도 이 신성한 영광의 빛을 뿌린다.
13:0.4 (143.4) 영원한 아들의 거룩한 일곱 세계에는, 영적 빛을 비추는 비성격 에너지가 기원이 있는 듯하다. 아무런 성격 존재도 이 빛나는 일곱 세계 어디에도 머무르면 안 된다. 이 세계들은 파라다이스와 하보나 전체를 영적 영화로움으로 비추며, 순수한 영 빛을 일곱 초우주로 방향을 돌려준다. 마찬가지로, 둘째 회로에서 빛나는 이 구체들은 파라다이스 쪽으로, 그리고 일곱 회로에 있는 중앙 우주의 10억 세계로 자체의 빛(열이 없는 빛)을 보낸다.
13:0.5 (143.5) 무한한 영의 일곱 세계는 일곱 으뜸 영이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은 일곱 초우주의 운명을 주관하고, 이 시공 창조들까지 신의 셋째 분의 영적 빛을 보낸다. 파라다이스 섬을 제외하고, 온 하보나가 영적으로 변화시키는 이 영향 속에 젖는다.
13:0.6 (143.6) 아버지의 세계들은 아버지가 부여한 모든 성격자에게 궁극의 지위를 가진 구체이지만, 이것이 이 구체들의 순전한 기능은 아니다. 많은 존재, 그리고 성격이 없는, 많은 개체가 이 세계에서 머무른다. 아버지 회로와 아들 회로의 각 세계에는 다른 종류의 영구 시민이 있다. 그러나 아들의 여러 세계에는 균일한 종류의 존재, 성격이 아닌 존재들이 살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아버지 분신들은 신(神)별의 원주민에 속하며, 다른 서열의 영구 시민은 너희에게 밝히지 않는다.
13:0.7 (143.7) 21개의 파라다이스 위성은 중앙 우주와 초우주에서, 이 이야기에서 밝히지 않는 여러 가지 목적에 쓰인다. 이 천체들에 사는 생명들에 관하여 너희가 아주 조금밖에 이해할 수 없으니까, 성질이든 기능이든, 그들에 관하여 일관적 견해 비슷한 무엇도 너희는 얻기를 바랄 수 없다. 너희에게 밝히지 않는 수천 가지 활동이 거기에서 벌어진다. 이 21 구체는 총우주 기능의 잠재성을 포함한다. 이 여러 논문은 대우주―아니 대우주의 일곱 지역 중 어느 지역―에서, 현재 우주 시대에 관련하여, 어떤 제한된 활동을 얼핏 훑어보게 할 뿐이다.
13:1.1 (144.1)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 구체들의 회로는 온 우주에서 유일한 선천적 성격 비밀을 담고 있다. 세 회로 가운데 가장 안쪽에 있는 이 파라다이스 위성들은, 중앙 우주에서 성격자와 관련하여 유일하게 금지된 구역이다. 아래 파라다이스와 아들의 세계들도 마찬가지로 성격자들이 가지 못하게 닫혀 있지만, 이 영역들 가운데 어느 것도, 어떤 면에서도 성격자와 직접 관련이 없다.
13:1.2 (144.2) 가장 높은 서열인 삼위일체의 고정된 아들들, 곧 삼위일체가 낳은 최상위의 신비들이 아버지의 파라다이스 세계들을 지휘한다. 나는 이 세계들에 관해서 별로 말할 수 없고, 그 다양한 활동에 대해서는 더군다나 그렇다. 그러한 정보는 오로지 거기서 활동하고 거기에서 출발하는 존재들의 관심거리이다. 나는 이 특별 세계들 가운데 여섯을 얼마큼 알고 있지만, 한 번도 신별에 내린 적이 없고, 이 세계는 전적으로 나에게 금지되어 있다.
13:1.3 (144.3) 이 세계들이 비밀에 싸인 이유 중에 하나는, 이 신성한 구체들은 각기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를 이루는 신들의 특화된 표현이나 명시를 누리기 때문이다. 하나의 성격자가 아니라, 그 특별한 구체에 거하거나 거기에 입장할 수 있는 특별한 지능 존재들의 무리가 존중하고 이해할 수 있는, 신의 독특한 계심을 말한다. 삼위일체가 낳은 최상위의 신비들은 이러한 특화되고 비성격인, 신 계심의 개인적 대표자이다. 최상위의 신비들은 상당히 성격을 가진 존재이며, 훌륭한 자질을 가졌고, 고상하고 힘드는 일에 놀랍게도 적응되어 있다.
13:1.4 (144.4) 1. 신별. 이 세계는 독특한 의미에서, “아버지의 품”, 곧 우주의 아버지가 친히 교통하는 구체이며, 거기에 그 신성의 특별한 표현이 있다. 신별은 생각 조절자들이 파라다이스에서 집결하는 장소이지만, 또한 우주의 아버지로부터 파생된 수많은 다른 개체ㆍ성격자, 그리고 다른 존재들의 집이기도 하다. 영원한 아들 외에도 많은 성격자가 우주의 아버지의 단독 활동으로 인하여 직접 기원을 가진다. 이 거처에서, 아버지의 분신, 그리고 순전히 우주의 아버지로부터 직접 기원이 생긴 성격자, 그리고 다른 존재들이 사귀며 활동한다.
13:1.5 (144.5) 신별의 신비는 생각 조절자의 수여와 임무의 비밀을 간직한다. 그들의 성품과 기원, 그리고 진화 세계의 하등 인간과 연락하는 기법은 이 파라다이스 구체의 비밀이다. 이러한 놀라운 거래는 나머지 우리가 개인적으로 상관할 바는 아니다. 그러므로 위대하고 신성한 이 봉사의 어떤 모습을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도록 간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신들이 판단한다. 신의 활동의 이 단계에 우리가 접촉하는 한, 이러한 거래가 있음을 충분히 아는 것이 허락되지만, 우리는 이 위대한 수여의 세부에 대하여 충분히 정보를 받지 않았다.
13:1.6 (145.1) 이 구체는 또한 모든 다른 형태의 아버지 분신, 인력 사자, 그리고 너희에게 밝히지 않은 다른 존재 무리의 성질ㆍ목적ㆍ활동에 관한 비밀도 간직한다.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신별에 관한 진실이 만일 밝혀진다면, 그 진실이 나의 현재 과제를 행하는 데, 단지 나를 혼란에 빠뜨리고 방해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뿐 아니라, 그런 진실은 내 계급 존재의 생각하는 능력을 아마 뛰어넘을 것이다.
13:1.7 (145.2) 2. 아들별. 이 구체는 “아들의 품,” 영원한 아들의 개인적 영접 세계이다. 여기는 하나님의 내려오는 아들과 하나님의 올라가는 아들들이 완전히 인가받고 마침내 인정받았을 때, 그리고 그후에 그들의 파라다이스 본부이다. 이 세계는 파라다이스에서 영원한 아들의 모든 아들, 그리고 그와 동격이며 동료인 아들들의 집이다. 수많은 신성한 아들 계급이 이 하늘 거처에 부속되어 있고, 이 거처가 필사자에게 밝혀지지 않는 것은, 그들이 여러 우주를 거쳐서 계속 파라다이스까지, 인간이 영적으로 진보하는 승천 계획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13:1.8 (145.3) 아들별의 신비는 신의 아들들의 육신화 비밀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가 사람의 아들이 될 때, 1천 9백 년 전에 너희 세계에서 일어난 바와 같이, 글자 그대로 여자에게서 태어날 때, 이것은 우주의 신비이다. 이러한 일은 우주에 두루, 끊임없이 일어나며, 아들별의 비밀, 신다운 아들 신분의 비밀이다. 조절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신비이다. 신다운 아들들의 육신화는 아들 하나님의 신비이다. 이것은 아들별의 제7 구역에 잠가 놓은 비밀이며, 이 구역은 몸소 이 독특한 체험을 거친 자 외에 아무도 침투할 수 없다. 다만 너희의 하늘 가는 생애와 관련되는 육신화 단계만 너희의 눈앞에 제시되었을 뿐이다. 너희에게 밝히지 않은 우주 봉사 임무를 띤, 밝혀지지 않은 부류의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육신화 신비에 다른 여러 단계가 있다. 아들별의 또 다른 신비들도 있다.
13:1.9 (145.4) 3. 영별. 이 세계는 “영의 품,” 순전히 무한한 영을 대표하는 높은 존재들이 파라다이스에서 지내는 집이다. 여기서 일곱 으뜸 영과 모든 우주에서 온 그들의 어떤 자손이 모인다. 이 하늘 거처에서 수많은 밝혀지지 않은 계급의 영 성격자를 발견할 수 있고, 그들은 시간 세계의 필사 인간을 파라다이스의 영원 수준까지 끌어 올리는 계획과 관계하지 않고, 다양한 우주 활동에 배치된 존재이다.
13:1.10 (145.5) 영별의 신비는 꿰뚫을 수 없는, 거울 작용의 신비를 포함한다. 우리는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거울 현상, 특히 일곱 초우주의 본부 세계에서 작용하는 거울 현상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결코 이 현상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데,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것, 허다한 것을 이해하지만, 많은 기초적 세부가 아직도 우리에게 신비스럽다. 거울 작용은 영 하나님의 비밀이다. 필사자가 살아남는 승천 계획과 관련된 거울 현상에 대하여 너희는 가르침을 받아 왔고, 그렇게 작용하지만, 거울 작용은 또한 수많은 다른 단계의 우주 직종이 정상으로 일하는 데 필수 특징이다. 무한한 영의 이 자질은 또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배하는 외에 다른 경로에도 쓰인다. 그리고 영별의 다른 비밀들이 있다.
13:1.11 (145.6) 4. 대관별. 이 행성은 “아버지와 아들의 품”이며, 아버지와 아들의 행위에서 기원을 가지는, 밝혀지지 않은 어떤 존재들의 비밀 구체이다. 여기는 또한 파라다이스에서, 복합 조상을 가진 영화롭게 된 많은 존재가 있는 집이며, 일곱 초우주에서 작용하는 많은 다채로운 기법 때문에, 그들의 기원이 복잡하다. 유란시아 필사자에게 신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무리의 존재가 이 세계에서 모인다.
13:1.12 (146.1) 대관별의 신비는 삼자일체화의 비밀을 포함하는데, 삼자일체화는 삼위일체를 대표하는, 신들의 대관(代官)으로서 활동하는 권한의 비밀이다. 삼위일체를 대표하는 권한은 삼위일체의 어느 두 분이나 세 분 모두가 삼자일체화하거나, 창조하거나, 궁극에 이르거나, 또는 영원하게 만든, 알려진 존재와 알려지지 않은 존재에게만 부여된다. 어떤 부류의 영화롭게 된 인간의 삼자일체 행위로 태어난 인격자들은 그 삼자일체화 과정에서 동원된 개념의 잠재성보다 더 많이 대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은 그들 부류 모두에게 열려진, 신의 품에 안기는 길로 올라갈지 모른다.
13:1.13 (146.2) 삼자일체 체험을 겪지 않은 존재들은, 어느 둘이나 세 창조자, 또는 어떤 인간들이 삼자일체화하는 기법을 넉넉히 이해하지 못한다. 아주 먼 앞날에 너의 영화롭게 된 생애에서, 삼자일체화 모험을 시도하고 성공하지 않으면, 너는 결코 그러한 현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터인데, 그렇지 않다면 이 대관별의 비밀이 너에게 언제나 금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높은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나에게는, 대관별의 모든 구역이 열려 있다. 나는 내 기원과 운명의 비밀을 충분히 이해하고, 똑같이 이 비밀을 충분하고 신성하게 지킨다.
13:1.14 (146.3) 유란시아 민족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또 다른 형태와 단계의 삼자일체화가 있다. 그들의 개인적 견지에서 이러한 체험은 대관별의 비밀 구역에서 마땅히 지켜지고 있다.
13:1.15 (146.4) 5. 외톨이별. 이 세계는 “아버지와 영의 품”이며, 우주의 아버지와 무한한 영의 합동 행위로 기원이 생긴, 훌륭한 집단의 밝혀지지 않은 존재들이 집결하는 곳이다. 이들은 영의 자질 뿐 아니라 아버지의 특성도 취하는 존재들이다.
13:1.16 (146.5) 여기는 또한 외톨 사자를 비롯하여 다른 초월 천사 계급의 성격자들이 있는 집이다. 너희는 이 존재들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으며, 유란시아에 밝혀지지 않은 광대한 수의 계급이 있다. 이들이 제5 세계에 정주한다고 해서, 아버지가 외톨 사자와 그 초월 천사 동료들을 창조하는 데 무슨 상관이 있으리라고 반드시 잘라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현재 우주 시대에, 아버지는 이들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 지금 우주 시대에, 외톨이별은 우주 동력 지휘자들이 지위를 가진 구체이다.
13:1.17 (146.6) 이 외에도 수많은 계급의 영 성격자, 필사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존재들이 있으며, 외톨이별을 그들의 파라다이스 집 구체로서 우러러본다. 필사 인간을 신성한 파라다이스 운명으로 올라가도록 도와주는 일에 관계하는 분야에 영 봉사자들이 예비된 것처럼, 모든 부문과 수준의 우주 활동을 위해서 영 봉사자들이 똑같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3:1.18 (146.7) 외톨이별의 신비. 삼자일체 체험의 어떤 비밀을 제외하고, 이 세계는 셋째 근원 중심의 어떤 높은 자손과 무한한 영이 몸소 가지는 관계의 신비를 간직한다. 외톨이별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계급이 아버지ㆍ아들ㆍ영의 영들과 가지는 관계, 삼위일체의 세 가지 영과 가지는 관계, 그리고 최상위, 궁극위, 최상 궁극위의 영들과 가지는 밀접한 관계의 신비가 간직된다.
13:1.19 (146.8) 6. 천사별. 이 구체는 “아들과 영의 품”이며, 아들과 영이 창조한, 밝혀지지 않은 광대한 존재 집단의 집이 되는 세계이다. 여기는 또한 상천사, 2품 천사, 세라핌을 포함하여, 봉사하는 계급의 모든 천사 무리가 가는 운명 구체이다. 중앙 우주와 여러 바깥 우주에는, “구원 받을 자에게 봉사하는 영”이 아닌, 많은 계급의 훌륭한 영들이 봉사한다. 모든 수준과 분야의 우주 활동에서 봉사하는 이 모든 영들은 천사별을 그들의 파라다이스 집으로 우러러본다.
13:1.20 (147.1) 천사별의 신비는 세 가지 신비를 포함하는데, 나는 그 중에 한 가지, 천사 수송기의 신비만 언급해도 좋다. 여러 계급의 세라핌 및 연합한 영 존재들은, 그들의 영 모습 안에 모든 계급의 비물질 성격자를 둘러싸고, 행성간의 긴 여행에 싣고 가는 능력이 있는데, 이것은 천사별의 신성한 구역에 잠겨 있는 비밀이다. 수송 세라핌은 이 신비를 이해하지만, 그들을 제외한 우리에게 그 신비를 일러 주지 않든지, 아니면 아마도 일러줄 수 없는 듯하다. 천사별의 다른 신비는, 필사자에게 아직 밝히지 않은 영 봉사자 부류가 몸소 겪는 체험과 관련된다. 너희가 그렇게 가까운 존재 계급들을 거의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현상에 대하여 우리의 부분적 지식을 발표하는 것조차도 신뢰를 저버림에 가까울 터이니, 우리는 그렇게 가까운 관계를 가진 존재들의 비밀을 삼가 논하지 않는다.
13:1.21 (147.2) 7. 승천자별. 이 독특한 세계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품”이며, 공간에서 하늘 가는 인간의 집결지, 곧 파라다이스로 가는 길에 하보나 우주를 거쳐 가는 시간 순례자를 받아들이는 구체이다. 시공 세계의 하늘 가는 혼들이 파라다이스 지위를 얻을 때까지, 승천자별은 이들에게 실제로 파라다이스 집이다. 너희 필사자는 승천자별에서 너희의 하보나 “휴가”의 대부분을 보낼 것이다. 너희가 지역 우주와 초우주에서 올라가는 동안에 회상(回想) 지도자들이 하던 역할을, 너희가 하보나에서 사는 동안 승천자별이 너희에게 해줄 것이다. 여기서 너는 수천 가지 활동에 종사하게 되는데, 이것은 필사자가 상상할 수 없다. 하나님을 향하여 올라가면서 이전의 모든 단계에 진급할 경우처럼, 여기서 너의 인간 자아는 신다운 자아와 새로운 관계에 들어갈 것이다.
13:1.22 (147.3) 승천자별의 신비는 물질적 필사 지성 속에서, 영적이며 잠재적으로 불멸하는 부분, 인격과 신분에 상당하는 부분이, 차츰차츰 확실히 자라는 그 신비를 포함한다. 이 현상은 가장 알기 어려운 우주 신비 가운데 하나―필사이자 물질인 인간의 지성 안에서 불사의 혼이 성장하는 신비―이다.
13:1.23 (147.4) 너희는 승천자별에 이를 때까지, 결코 이 신비스러운 거래를 십분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이 어째서 승천자별 전체가, 놀라워하는 너희의 눈앞에 열려질 것인가 하는 이유이다. 승천자별의 7분의 1은 나에게 금지되어 있고, 그 구역은 너희 부류 존재의 독점 체험과 소유물인 (또는 앞으로 그렇게 될) 바로 이 비밀과 관련된 구역이다. 이 체험은 너희 인간 계급의 존재에 속한다. 내 계급의 성격자는 그러한 거래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구역은 내게 금지되어 있고, 결국 너희에게 밝혀진다. 그러나 너희에게 밝혀진 다음에도, 어떤 이유로 언제까지나 너희의 비밀로 남게 된다. 너희는 이를 우리에게, 또 기타 어느 다른 계급의 존재에게도 밝히지 않는다. 우리는 신다운 조절자와 인간의 기원을 가진 불멸의 혼이 영원히 융합하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하늘 가는 최후자는 바로 이 체험을 절대로 현실임을 알고 있다.
13:2.1 (147.5) 다양한 계급의 영적 존재의 고향인 이 세계들은 엄청나고 굉장한 구체이다. 이 구체들의 비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화려한 영화로움은 파라다이스에 필적한다. 이 구체들은 집결 세계, 재회하는 구체이며, 영구한 우주 주소로서 쓰인다. 최후자로서, 너희는 파라다이스에 거주할 터이지만, 바깥 공간의 근무에 들어갈 때조차도, 승천자별은 언제나 너희의 집 주소가 될 것이다. 모든 영원을 통해서, 너희는 승천자별을 감상적으로 기억하고 돌이켜 회상하는 집으로 여길 것이다. 너희가 제7 단계의 영 존재가 되면, 아마 파라다이스에서 거주 지위를 버릴 것이다.
13:2.2 (148.1) 바깥의 우주들을 짓고 있고, 거기에 승천 가능성을 가진 시간 세계의 인간이 살 것이라면, 우리는 이 미래의 아이들도 또한 승천자별을 파라다이스 고향 세계로 우러러보도록 운명이 정해질 것이라 추측한다.
13:2.3 (148.2) 승천자별은 파라다이스에 도달한 자로서, 네가 살펴보라고 아낌없이 열려 있을 유일한 신성한 구체이다. 대관별은 내가 살펴볼 수 있도록 전적으로 아낌없이 열려 있는 유일하고 신성한 구체이다. 그 비밀은 나의 기원에 관계되지만, 지금 우주 시대에, 나는 대관별을 내 집으로 여기지 않는다.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존재와 삼위일체를 체험한 존재들은 같지 않다.
13:2.4 (148.3)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존재는 아버지의 세계들을 완전히 공유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파라다이스 섬에, 가장 거룩한 지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그들이 전용하는 집들이 있다. 그들은 가끔 “아버지ㆍ아들ㆍ영의 품”인 승천자별에 나타나며, 거기서 공간의 낮은 세계로부터 올라온 형제들과 사귄다.
13:2.5 (148.4) 창조 아들들은 아버지와 아들한테서 기원을 가졌으니까, 대관별을 자기 집으로 여길 것이라 너희가 가정할까 싶지만, 칠중 신이 활동하는 이 우주 시대에는 그렇지 않다. 너희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비슷한 문제들이 많이 있는데, 이는 파라다이스에 아주 가까이 있는 이러한 일을 이해하려 애쓰면서 너희가 많은 어려움에 부닥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해내는 데 성공할 수도 없다. 너희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리고 너희가 아버지 세계들에 관하여 더 안다고 해 보았자, 너희가 전부를 알기까지, 다만 더욱 많은 문제에 부딪칠 것이다. 이 신비 세계들 어디에서도, 지위는 기원의 본질 뿐 아니라 봉사함으로 얻게 된다. 연속되는 여러 우주 시대에 이 성격자들의 어떤 집합을 다시 분배할지도 모르며, 그렇게 하기도 한다.
13:2.6 (148.5) 안쪽 회로의 세계들은, 실제로 거주하는 구체라기보다 정말로 친교 세계, 곧 지위 세계이다. 필사자는 한 세계만 빼고, 아버지 세계들의 각 곳에서 어떤 지위를 얻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너희 필사자들이 하보나에 다다를 때, 너희는 승천자별에 가도록 허락되며, 거기서 너희는 크게 환영받는다. 그러나 다른 신성한 여섯 세계를 찾아보라고 허락되지 않는다. 파라다이스 체제를 너희가 거친 뒤에, 그리고 최후 군단에 가입 허가가 내린 뒤에, 너희가 승천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니까―그보다 더하니까―너희는 아들별에 들어갈 허가를 받는다. 그러나 아들별의 7분의 1, 신다운 아들들의 육신화 비밀을 가진 구역이 언제나 남아 있을 터이고, 거기는 너희에게 둘러보라고 열리지 않을 것이다. 결코 이러한 비밀은 하늘 가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13:2.7 (148.6) 결국 너는 승천자별에서 완전한 출입권을 가지고, 신별을 제외하고 다른 아버지 구체들에서 부분 출입권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최후자가 되고 나서, 나머지 다섯 비밀 구체에 내릴 허가를 받을 때에도, 너는 그런 세계들의 모든 구역을 찾아보는 허가를 받지 않을 것이다. 너는 분명히 “아버지의 바른 편”에 여러 번 서게 될 터이지만, “아버지의 품”인 신별의 가장자리에 내릴 허가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 모든 영원을 통해서, 네가 생각 조절자 세계에 발을 들일 필요는 결코 생기지 않을 것이다.
13:2.8 (149.1) 이 여러 구체에서, 온전히 우리의 체험 영역 바깥에 있는 이 단계의 입장을 타협하지 말라고 우리가 요청받은 한도까지, 이 영 생명의 집결 세계들은 금지(禁止) 구역이다. 우주의 아버지가 신으로서 완전한 것 같이, 너희는 인간으로서 완전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너희가 모든 다른 계급의 우주 성격자들이 체험하는 비밀을 모두 알아서는 안 된다. 창조자가 생물과 어떤 체험적 성격자의 비밀을 가질 때, 창조자는 영원히 그 비밀을 지킨다.
13:2.9 (149.2) 이 모든 신비가, 추측하건대, 삼위일체가 낳은 최상위의 신비의 단체에게 알려져 있다. 이 존재들은 오로지 이들의 특별한 세계 집단에게 완전히 알려져 있고, 다른 계급은 이들을 거의 파악하지 못한다. 파라다이스에 다다른 뒤에, 너희는 승천자별을 지휘하는 최상위의 신비 10명을 알고 뜨겁게 이들을 좋아할 것이다. 신별을 제외하고, 승천자별의 경우처럼 완전히 이해하지는 않더라도, 아버지의 다른 세계들에서 최상위의 신비들에 대하여, 너희는 또한 얼마큼 이해하게 될 것이다.
13:2.10 (149.3) 삼위일체가 낳은 최상위의 신비들은, 그 이름이 넌지시 비치는 바와 같이, 최상위와 관련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궁극위, 그리고 미래의 최상 궁극위와 관련이 있다. 이 최상위의 신비들은 최상위의 신비요, 또한 궁극위의 비밀이요, 아니 최상 궁극위의 비밀이기도 하다.
13:3.1 (149.4) 영원한 아들의 빛나는 일곱 구체는 순수한 영 존재의 일곱 단계의 세계들이다. 이 빛나는 구체들은 파라다이스와 하보나의 세 가지 빛의 근원이며, 이 구체들의 영향은 다 그렇지는 않아도, 대체로 중앙 우주에 국한된다.
13:3.2 (149.5) 이 여러 파라다이스 위성(衛星)에는 성격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순수한 영의 거처들에 관해서, 필사의 물질 성격자에게 제시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이 세계들은 영원한 아들의 존재, 성격이 아닌 생명의 존재로 붐빈다고 우리는 가르침을 받았다. 우리는 이 개체들이 바깥 공간에서 계획된 새 우주들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집합하고 있다고 추측한다. 유란시아 시간으로 약 20억년이 되는 파라다이스 주기마다, 영원한 아들의 여러 비밀 세계에서 이 계급들의 추가 예비군이 창조되는 것을 구경한다고 파라다이스의 철학자들이 주장한다.
13:3.3 (149.6) 내가 들은 바로는, 어느 성격자도 영원한 아들의 이 구체들 중에 어느 한 군데도 가본 적이 없다. 파라다이스에 출입하는 오래 된 경험을 통해서, 나는 이 세계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방문하라고 결코 배치된 적이 없다. 영원한 아들이 공동으로 창조한 성격자들도 이 세계들로 가지 않는다. 모든 부류의 비성격 영들은―조상에 상관 없이―이 영의 거처에 입장이 허가된다고 우리는 추측한다. 나는 성격자이고 영 형태를 가지고 있으니까, 내가 이곳을 찾아보는 것이 허락된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그러한 세계가 비어 있고 버려진 땅으로 보일 것이다. 높은 영 성격자들은 목적 없이 호기심을 채우는, 순전히 쓸모 없는 모험에 한눈팔지 않는다. 흥미를 많이 자아내고 의미 있는 모험이 항상 아주 너무 많아서, 쓸모 없거나 비현실인 사업에 큰 관심이 생기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
13:4.1 (149.7) 하보나의 안쪽 회로와 영원한 아들의 빛나는 구체들 사이에는 무한한 영의 일곱 공이 돌고 있다. 이 세계들에는 무한한 영의 자손, 영화롭게 된 지음받은 인격자들이 삼자일체화로 낳은 아들들,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우주 활동을 하는 많은 사업체의 효과적 운영에 관여하는, 밝혀지지 않은 다른 부류의 존재들이 살고 있다.
13:4.2 (150.1) 일곱 으뜸 영은 무한한 영의 최상ㆍ궁극의 대표자이다. 그들은 파라다이스 가장자리에, 개인 부서와 동력의 초점을 둔다. 그러나 대우주의 관리와 지도에 관련된 모든 작업은 무한한 영의 특별한 일곱 집행 구체에서, 그리고 거기서부터 처리된다. 일곱 으뜸 영은 실제로, 온 우주의 지성 영의 균형 바퀴, 곧 모두를 감싸고 모두를 둘러싸며 모두를 조정하는, 중앙에 자리잡은 권력이다.
13:4.3 (150.2) 이 일곱 특별 구체로부터 으뜸 영들은 대우주의 우주 지성 회로를 평준화하고 안정시키려고 일한다. 그들은 또한 대우주에 두루, 신들의 차이 나는 영적 태도 및 계심과 상관이 있다. 물리적 반응은 한결같고 불변하며, 언제나 즉시 일어나고 자동이다. 그러나 체험적인 영적 계심은 그 영역에 있는 개별 지성들에 본래 있는 영적 감수성의 기본적 조건이나 상태에 따라서 생긴다.
13:4.4 (150.3) 물리적 권한ㆍ계심ㆍ기능은 모든 우주에서, 크던 작던, 변하지 않는다. 영적 계심이나 반응에서 차이 나는 요소는 의지를 가진 인간이 이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변동하는 차이이다. 절대적이고 실존적인 신의 영적 계심은, 지음받은 존재 편에서 보이는 충성이나 불충의 태도에, 절대로 어떤 방법으로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동시에, 절대 이하의 체험적 신의 활동하는 계심은 그러한 유한한 생물 존재들의 결심과 선택과 의지하는 태도에―개별 존재ㆍ행성ㆍ체계ㆍ별자리, 또는 우주의 충성과 헌신에―분명히, 직접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신의 이 영적 계심은 변덕스럽거나 멋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 체험적 변화는 인격을 가진 인간의 자유 의지 자질에 본래부터 있다.
13:4.5 (150.4) 영적 계심의 차이를 결정하는 요인은 바로 너희의 마음과 지성에 존재하며, 바로 너희가 선택하는 방법, 너희 지성이 내리는 결정, 자신의 의지가 보이는 각오에 있다. 이러한 차이는 지적 인격 존재의 자유 의지 반응에 본래부터 있고, 우주의 아버지가 예정하신 존재들은 이러한 선택의 자유를 행사할 것이다. 신들은 인간이 선택하는 이 차이에서 생기는 조건과 요구를 충족시키고 채울 때 그들의 영을 보내고 물러나는 정도가 언제나 정확하다. 한때는 신의 계심을 간절히 바라는 데 반응하여 계심을 더욱 퍼붓기도 하고, 신이 준 선택의 자유를 행사하면서 인간이 거슬러 결정하는 대로 그 마당에서 다시 물러나기도 한다. 이처럼 신의 영은 그 영역의 인간의 선택에 겸손히 복종한다.
13:4.6 (150.5) 일곱 으뜸 영의 집행부 거처는 실제로, 일곱 초우주와 바깥 공간의 관련된 지역들의 파라다이스 본부이다. 각 으뜸 영은 한 초우주를 주관하고, 이 일곱 세계는 각각 으뜸 영들 가운데 한 분에게 독점으로 배치되어 있다. 일곱 초우주의 행정, 파라다이스 이하의 행정에서 이 집행부 세계가 보살피지 않는 단계는 글자 그대로 하나도 없다. 이 세계들은 아버지나 아들의 구체들처럼 그렇게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거주 자격이 본토 존재와 거기에서 일하는 자에게 국한되지만, 이 일곱 행정 행성은 언제나, 이 행성들을 찾아보고 싶어 하는 자와 필요한 수송 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존재에게 열려 있다.
13:4.7 (151.1) 파라다이스 바깥에서는 이 집행 세계들이 나에게 가장 흥미 있고 호기심을 끄는 장소이다. 아주 많은 다양한 수준에서 하는 작업, 곧 동시에 물질적ㆍ지적ㆍ영적인 직종들과 관련이 있고 그렇게 많은 다른 계급의 생물 존재를 포함하는 다양한 활동을 넓은 우주에 다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직책에서 벗어나 쉬는 기간을 얻을 때, 어쩌다가 파라다이스나 하보나에 있게 된다면, 나는 일곱 으뜸 영의 이 바쁜 세계들 가운데 한 곳으로 보통 찾아간다. 거기서 그러한 사업, 헌신과 충성, 지혜와 효율성이 있는 그런 광경을 보고, 나의 지성에 영감을 주려는 것이다. 우주 실체의 모두 일곱 수준에서, 성격자들이 직무를 수행하는 아주 놀라운 상호 작용을 다른 아무 데서도 볼 수 없다. 자기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잘 아는 자와 그렇게 속속들이 즐기면서 일하는 자들의 활동은 언제나 나를 자극한다.
13:4.8 (151.2) [유버르사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에게 이렇게 활동하라고 위임받은 한 지혜 완성자가 발표하였다.]
14:0.1 (152.1) 완전하고 신성한 우주는 모든 창조의 중심을 차지한다. 영원한 핵심이요, 시공의 광대한 우주들이 그 둘레를 돈다. 파라다이스는 절대로 안정된, 핵심에 있는 거대한 섬이고, 웅대하고 영원한 우주의 한 가운데서 정지해 있다. 중앙에 있는 이 행성 집단은 하보나라고 부르며, 네바돈 지역 우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하보나는 엄청나게 크고 거의 믿을 수 없는 질량을 가졌으며, 사람이 상상하지 못할 만큼 아름답고 뛰어나게 화려한 10억의 구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광활한 창조의 참 크기는 정말로 인간의 머리가 이해할 수 없다.
14:0.2 (152.2) 하보나는 유일하게 안정되고, 완전하고, 확립된 세계들의 집합체이다. 하보나는 온전히 창조되고 완전한 우주이며, 진화로 발전한 것이 아니다. 하보나는 영원한, 완전한 핵심이다. 굉장한 진화적 실험을 구성하는 끝없는 우주들의 행렬이 그 둘레를 빙그르르 돌고 있다. 이 실험은 하나님의 창조 아들들의 대담한 모험이요, 이들은 원본 우주를 시간 세계에서 모방하고 공간 속에서 복사할 포부를 가진다. 이 우주는 신의 완벽함, 최상의 결과, 궁극의 실체, 영원한 완전의 이상(理想)이다.
14:1.1 (152.3) 파라다이스의 가장자리로부터 일곱 초우주의 안쪽 테두리까지, 다음 일곱 가지 공간 조건과 운동이 있다:
14:1.2 (152.4) 1. 파라다이스에 부딪치는 고요한 여러 중부 공간 지대.
14:1.3 (152.5) 2. 세 파라다이스 회로(回路)와 일곱 하보나 회로가 시계 바늘 방향으로 움직이는 행렬.
14:1.4 (152.6) 3. 하보나 회로들을 중앙 우주의 검은 인력체들로부터 분리하는, 반 고요한 공간 지대.
14:1.5 (152.7) 4. 시계 바늘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안쪽의 검은 인력체들의 띠.
14:1.6 (152.8) 5. 검은 인력체들의 두 공간 행로를 가르는 독특한 둘째 공간 지대.
14:1.7 (152.9) 6. 파라다이스 둘레를 시계 바늘 방향으로 도는, 검은 인력체들의 바깥 띠.
14:1.8 (152.10) 7. 검은 인력체들의 바깥 띠와 가장 안쪽에 일곱 초우주의 회로들을 분리하는 셋째 공간 지대―반 고요한 지대.
14:1.9 (152.11) 하보나의 10억 세계는 파라다이스 위성들의 세 회로를 바로 둘러싸는 7개의 동심 회로에서 줄지어 있다. 가장 안쪽의 하보나 회로에는 3천5백만이 넘는 세계가 있고, 맨 바깥 회로에는 2억 4천5백만이 넘는 세계가 있으며, 그 사이에 있는 세계들의 수는 비례하여 커진다. 각 회로는 다르지만, 모두가 완전히 균형되고 절묘하게 조직되어 있으며, 무한한 영의 특화된 대표, 곧 일곱 회로 영 중에 한 분이 각 회로를 가득 채운다. 다른 기능 외에도, 이 비성격 영은 각 회로에서 두루 하늘 사무의 집행을 조정한다.
14:1.10 (153.1) 하보나 행성 회로들은 겹쳐 있지 않다. 이 회로의 세계들은 질서 있게 한 줄의 행렬을 지어 서로 따른다. 중앙 우주는 동심(同心)을 가진 10개의 안정된 단위로―파라다이스 구체들의 세 회로와 하보나 세계들의 일곱 회로로―구성되며, 하나의 광대한 평면에서 고정된 파라다이스 섬 둘레를 소용돌이치며 돌고 있다. 물리적으로 보면, 하보나와 파라다이스 회로들은 모두 동일한 체계이다. 이것들을 구분하는 것은 기능과 행정의 분리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14:1.11 (153.2) 시간은 파라다이스에서 계산되지 않는다. 이어지는 사건들의 차례는 가운데 섬에서 태어난 자들의 관념에 본래부터 있다. 그러나 시간은 하보나 회로에, 거기서 머무르는 존재, 하늘이나 땅에서 기원을 가진 수많은 존재에게 상관이 있다. 하보나의 각 세계는 그 회로에서 결정되는, 자체의 지역 시간이 있다. 어느 일정한 회로에 있는 여러 세계에서 한 해의 길이는 모두 같은데, 이 세계들이 한결같이 파라다이스 둘레를 빙 돌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성의 한 해의 길이는 가장 바깥에서부터 가장 안쪽의 회로에 이르면서 줄어든다.
14:1.12 (153.3) 하보나 회로 시간 외에도 파라다이스와 하보나 표준일이 있고 다른 시간 명칭이 있는데, 이 시간들은 무한한 영의 일곱 파라다이스 위성에서 결정되고, 거기로부터 시간이 전달된다. 파라다이스와 하보나 표준일은 첫째 회로, 곧 안쪽의 하보나 회로에서, 거처인 행성들이 파라다이스 섬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에 기초를 둔다. 그 속도가 굉장하지만, 검은 인력체들과 거대한 파라다이스 사이에 자리잡은 덕분에, 이 구체들은 회로를 한 바퀴 도는데 거의 1천년이 걸린다. 너희의 눈이 “하나님에게는 하루가 천년 같고, 밤 중에 망보기와 같도다”하는 기록을 보았을 때, 너희는 영문도 모르고 진리를 읽었다. 파라다이스와 하보나의 하루는 오늘날 윤년이 있는 유란시아의 달력으로 따져서, 1천년에서 7분, 3과 8분의 1초가 모자란다.
14:1.13 (153.4) 각 초우주는 자체 내의 기준 시간을 유지하지만, 이 파라다이스와 하보나의 하루는 일곱 초우주에게 표준 시간 측정법이다.
14:1.14 (153.5) 이 광대한 중앙 우주의 변두리에는, 하보나 세계들의 일곱째 띠를 훨씬 멀리 지나서 믿을 수 없이 많은, 굉장한 검은 인력체들이 소용돌이친다. 이 무수한 검은 덩어리들은 여러 특성으로 볼 때 다른 공간 물체들과 아주 다르고, 그 모습조차 아주 다르다. 이 검은 인력체(引力體)들은 빛을 반사하지도 흡수하지도 않는다. 이 검은 인력체들은 물리적 에너지 빛에 반응하지 않으며, 하보나를 완전히 둘러싸고 가려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사는 여러 시공 우주에서도, 하보나를 가려서 보이지 않게 만든다.
14:1.15 (153.6) 검은 인력체들의 큰 띠는, 독특한 공간의 침입으로 인하여, 두 개의 대등한 타원 회로로 나누어져 있다. 안쪽의 띠는 시계 바늘 반대 방향으로 돌고, 바깥의 띠는 시계 바늘 방향으로 돈다. 서로 반대인 이 운동 방향은 검은 인력체들의 특별한 질량과 함께, 하보나 인력선들을 아주 효과 있게 평준화하여, 중앙 우주를 물리적으로 균형되고 완전히 안정된 창조로 만든다.
14:1.16 (153.7) 검은 인력체의 안쪽 행렬은 튜브처럼 배열되어 있고, 세 개의 둥그런 집단으로 되어 있다. 이 회로의 단면은 밀도가 대체로 같은 세 개의 동심원을 드러낼 것이다. 검은 인력체의 바깥 회로는 수직으로 배열되어 있고, 내부 회로보다 1만 배가 높다. 외부 회로의 아래 위 직경은 횡단 직경의 5만배가 된다.
14:1.17 (154.1) 이 두 인력체 회로 사이의 공간은 넓은 우주 전체에 다른 어디서도 그와 같은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독특하다. 이 지대의 특징은 오르내리는 경향을 가진 굉장한 파동이 있고, 알려지지 않은 체제의 엄청난 에너지 활동이 거기에 침투한다.
14:1.18 (154.2) 우리의 의견에는, 중앙 우주의 검은 인력체들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바깥 공간 수준에서 있을 미래 진화의 특징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엄청난 인력 균형체들의 엇갈리는 행렬은 총우주에서 독특하다고 생각한다.
14:2.1 (154.3) 영 존재들은 어렴풋한 공간에서 거하지 않는다. 에테르 같은 세계에 거하지 않는다. 그들은 물질의 성질을 가진 실제의 구체, 필사자가 사는 것과 똑같이, 실재하는 세계들에 주거가 있다. 하보나 세계들은 실제로 있고 실질을 가졌다. 하지만 하보나 세계들의 실질 내용물은 일곱 초우주의 행성들을 이루는 물질 조직과 다르다.
14:2.2 (154.4) 하보나의 물리적 실체는, 공간에서 진화하는 우주에 있는 어떤 것과도 근본적으로 다른 계열의 에너지 조직을 대표한다. 하보나 에너지는 3중이다. 초우주의 에너지와 물질의 단위는, 한 에너지 형태가 음성과 양성 단계로 존재하지만, 2중 에너지 전하를 포함한다. 중앙 우주의 창조는 3중(삼자일체)이다. 지역 우주는 (직접) 창조 아들과 창조 영이 지은 창조이고, 2중이다.
14:2.3 (154.5) 하보나의 물질은 정확히 1천 개의 기본 화학 요소로 조직되어 있고, 일곱 형태의 하보나 에너지의 균형된 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기본 에너지는 각각 일곱 가지 흥분 단계를 나타내며, 그래서 하보나 원주민은 49가지 다른 감각 자극에 반응한다. 다시 말해서, 순전히 물리적 관점에서 보면, 중앙 우주의 원주민은 49가지의 특화된 형태의 감각이 있다. 상물질 감각은 70가지이며, 상위 영적 서열의 반응 작용은 다른 부류의 존재에 따라 다르고, 70가지에서 210가지에 이른다.
14:2.4 (154.6) 중앙 우주에 있는 어떤 물리적 존재도 유란시아인의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머나먼 그런 세계에서는 어떤 물리적 자극도 너희의 괴상한 감각 기관(器官)의 반응을 자극하지 않을 것이다. 유란시아의 한 필사자가 하보나에 수송될 수 있다면, 거기서 그는 듣지 못하고 눈도 보이지 않고, 모든 다른 감각의 반응이 도무지 없을 것이다. 이 사람은 모든 환경의 자극을 잃고 전혀 반응하지 못하는, 제한되고 자의식하는 존재로서만 활동할 수 있다.
14:2.5 (154.7) 중앙 우주에는, 유란시아와 같은 세계에서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물리 현상과 영적 반응이 일어나고 있다. 3중 창조의 기본 조직은 시간과 공간에서 창조된 우주들의 2중 구성과 도무지 다르다.
14:2.6 (154.8) 모든 자연 법칙은 진화하는 우주의 2중 에너지 체계와 전혀 다른 기초에서 조정된다. 중앙 우주 전체는 완전하고 대칭되어 통제하는 3중 체계에 따라서 조직되어 있다. 파라다이스와 하보나 체계 전체에 걸쳐서, 모든 우주 실체와 모든 영적 물력 사이에 완전한 균형이 유지된다. 물리적 창조를 절대로 움켜쥐면서 파라다이스는 이 중앙 우주의 물리적 에너지를 완전히 규제하고 유지한다. 만물을 감싸는 영적 손아귀의 일부로서, 영원한 아들은 하보나에 사는 모든 자의 영적 지위를 아주 완전히 지탱한다. 파라다이스에는 실험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파라다이스와 하보나 체계는 완전하게 창조된 단위이다.
14:2.7 (155.1) 중앙 우주에 두루, 영원한 아들의 보편적 영 인력은 놀랍게 작용한다. 모든 영 가치와 영적 성격자는 끊임없이 신들의 거처를 향하여 안으로 이끌린다. 하나님을 향한 이 욕구는 강렬하고 피할 수 없다. 하나님에게 도달하려는 포부는 중앙 우주에서 더 강하다. 영 인력이 바깥에 있는 우주들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보나에 도달한 존재들이 충만하게 영답게 되었고, 따라서 영원한 아들의 보편적 영 인력의 행위, 늘 끌어당기는 행위에 더 민감하기 때문이다.
14:2.8 (155.2) 마찬가지로, 무한한 영은 모든 지적 가치를 파라다이스 방향으로 이끈다. 중앙 우주에 두루, 무한한 영의 지성 인력은 영원한 아들의 영 인력과 연결하여 작용하며, 이것들은 함께 하나님을 발견하고 신에 도달하며 파라다이스에 이르고 아버지를 알려고 하는, 승천자들의 통합된 욕구가 된다.
14:2.9 (155.3) 하보나는 영적으로 완전하고 물리적으로 안정된 우주이다. 중앙 우주는 완전히 통제되고 균형을 이루어 안정된 듯하다. 물질이거나 영적인 것은 무엇이나 완전히 예측이 가능하지만, 지성 현상과 인격자의 의지는 그렇지 않다. 죄는 일어날 수 없다고 추리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추리하는 것은 하보나에서 태어난,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이 한 번도 신의 뜻을 어기는 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 것에 근거를 둔다. 모든 영원을 통해서 이 하늘 존재들은 영원부터 늘 계신 이들에게 한결같이 충성해 왔다. 순례자로서 하보나에 발을 디딘 어느 인간에게도 결코 죄가 나타난 적이 없다. 중앙의 하보나 우주에서 일찍이 창조되었거나 거기에 들어갈 허락을 받은 어떤 인격자 집단의 어느 인간도 부당한 행위를 저지른 경우가 결코 없다. 시간 세계의 우주에서 선택하는 방법과 수단이 너무 완전하고 신답기 때문에, 하보나의 기록에 따르면 잘못이 일어난 적이 없다. 아무 실수도 생긴 적이 없다. 하늘 가는 어떤 사람도 결코 때 이르게 중앙 우주에 발을 디디도록 허락된 적이 없다.
14:3.1 (155.4) 중앙 우주의 정부에 관하여 말하자면, 아무 정부도 없다. 하보나는 지극히 완전해서, 지적(知的) 정부 체제가 전혀 필요 없다. 때마다 구성되는 법정도 없고, 법을 제정하는 집회도 없다. 하보나는 오로지 행정 지침이 필요하다. 여기서 참된 자치의 이상(理想)이 절정에 이른 것을 지켜볼지도 모른다.
14:3.2 (155.5) 그렇게 완전한 지적 존재와 거의 완전한 지적 존재들 사이에는 정부가 필요 없다. 아무런 규제가 필요 없으니, 그들이 완전하게 태어난 존재이고, 그 사이에 섞여 있는 진화 인간들은 초우주 최고 법정의 검사에 합격한 지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14:3.3 (155.6) 하보나의 행정은 자동이 아니지만, 놀랍게 완전하고 신성하게 효율이 있다. 그 행정은 주로 행성 단위이며, 거주하는 영원부터 늘 계신 이에게 행정권이 맡겨진다.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이 성격자들 중에 한 분이 각 하보나 구체를 지도한다. 영원부터 늘 계신 이들은 창조자가 아니라, 완전한 행정가이다. 그들은 최상의 기술로 가르치며 절대에 가까운 완전한 지혜로 행성에 있는 아이들을 지도한다.
14:3.4 (156.1) 중앙 우주의 10억 구체는 파라다이스와 하보나에서 태어난 높은 성격자들을 훈련하는 세계이며, 또한 진화하는 시간 세계로부터 올라가는 인간을 위하여 마지막 시험 장소로서 사용된다. 우주의 아버지의 위대한 계획, 인간을 승천시키는 계획에 따라서, 시간 순례자들은 바깥 회로, 곧 제7 회로의 영접 세계에 착륙한다. 증가된 훈련과 확대된 체험을 겪고 나서, 순례자들은 마침내 신들을 만나 뵙고 파라다이스에서 거주 자격을 얻을 때까지, 한 행성 한 행성, 한 회로 한 회로, 안을 향하여 점진적으로 승진한다.
14:3.5 (156.2) 현재, 일곱 회로의 구체들은 하늘의 영화로움을 갖추어 유지되지만, 행성들의 총 수용 능력 중에 겨우 약 1퍼센트가 필사자의 승천을 위해 마련된 아버지의 우주 계획을 추진하는 데 쓰인다. 이 거대한 세계들에서 약 1퍼센트의 10분의 1 되는 지역은 최후 군단의 생활과 활동에 전적으로 쓰인다. 이들은 여러 하보나 세계에서 흔히 머무르고 봉사하는 자, 영원히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존재이다. 이 고귀한 존재들은 파라다이스에 개인 주거를 유지한다.
14:3.6 (156.3) 하보나 행성들의 구조는 공간에 있는 진화 세계 및 체계들의 구조와 전혀 다르다. 대우주 전체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그렇게 거대한 구체들을 생명 세계로 쓰는 것은 불편하다. 삼력(三力)으로 된 물질 구성은, 굉장한 검은 인력체들의 균형하는 효과와 더불어, 이 엄청난 우주의 물리적 힘을 아주 완전히 평준화하고, 아주 절묘하게 여러 가지 인력의 균형을 가능하게 한다. 이 굉장한 세계들의 물질적 기능과 영적 활동을 조직하는 데는 반인력도 또한 이용된다.
14:3.7 (156.4) 하보나 구체들의 생물학적ㆍ예술적 치장 뿐 아니라 건축ㆍ조명ㆍ난방은 인간의 상상을 가능한 최대로 늘이더라도 이해할 수 없다. 너희에게 하보나에 대해서 별로 일러줄 수 없고, 그 아름다움과 웅대함을 이해하려면 너희가 하보나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완전한 세계들에는 진짜 강과 호수가 있다.
14:3.8 (156.5) 영적 면에서 이 세계들은 이상적으로 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중앙 우주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계급의 다른 존재들을 두는 목적에 알맞게, 이 세계들이 적응되어 있다. 이 아름다운 여러 세계에서 인간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다채로운 활동이 진행된다.
14:4.1 (156.6) 여러 하보나 세계에는 일곱 가지 기본형의 생명체와 존재가 있고, 이 기본형은 각자 세 가지 다른 단계에서 존재한다. 이 세 단계는 각각 다시 70 대부문으로 나누어지고, 각 대부문은 1천 소부문으로 구성되며, 이것은 다시 종속 부문으로 나뉘고, 이렇게 계속된다. 이 기본적 생명 집단은 다음과 같이 분류해도 좋다:
14:4.9 (157.1) 여러 하보나 세계에서, 부패와 죽음은 생명의 주기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중앙 우주에서 하등 생명체들은 물질화의 변화를 겪는다. 그들의 형태와 겉모습이 바뀌지만, 썩어서 세포가 죽는 과정으로 분해되지 않는다.
14:4.10 (157.2) 하보나 원주민은 모두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자손이다. 부모인 인간이 없고, 자식을 낳지 않는 존재이다. 우리는 중앙 우주에서 사는 이 시민들, 결코 창조된 적이 없는 존재들이 어찌 창조되었는가 묘사할 수 없다. 하보나 창조 이야기 전체가, 필사자가 이해하는 시간이나 공간과 도무지 관계 없는, 한 영원의 사실을 시공화(時空化)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철학이 시작할 점을 허용해야 한다. 인간 수준을 훨씬 넘는 성격자들조차 “시작”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그렇기는 해도 파라다이스와 하보나 체계는 영원하다.
14:4.11 (157.3) 다른 계급의 영구 시민이 각자의 본토 구체에서 산다는 의미로, 하보나 원주민은 중앙 우주의 10억 구체에서 산다. 한 초우주에서 물질 계급의 아들들이 10억 지역 체계의 물질적ㆍ지적ㆍ영적 체제를 이끌어나가는 것처럼, 크게 보아서, 하보나 주민은 중앙 우주의 10억 세계에서 살며 활동한다. “물질”이라는 낱말의 의미가 확대되어 이 신성한 우주의 물리적 실체를 묘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너희는 아마도 이 하보나 주민을 물질 인간으로[1] [1658] 보아도 좋다.
14:4.12 (157.4) 하보나에 토착이며 원래 그 자체로서 중요성을 가진 생명이 있다. 하보나 주민은 여러 방법으로 파라다이스에서 내려가는 자와 초우주에서 올라오는 자들을 보살피지만, 그들은 또한 중앙 우주에 고유하며, 파라다이스나 초우주들과 아주 달리, 상대적 의미가 있는 생애를 산다.
14:4.13 (157.5) 진화 세계에서 믿음의 아들들의 예배가 우주의 아버지의 사랑을 만족시키는 데 기여하는 것 같이, 하보나 주민이 드리는 고귀한 찬미는 신성한 아름다움과 진리, 이 완전한 이상을 만족시킨다. 필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것 같이, 중앙 우주의 이 존재들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이상을 이루려고 산다. 그들의 바로 그 성품은 하나님의 뜻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선하심을 기뻐하지만, 하보나 주민은 신의 아름다움을 크게 기뻐하며, 한편 너희 모두가 살아 있는 진리로 해방되는 혜택을 누린다.
14:4.14 (157.6) 하보나 주민은 선택하는 현재 운명과 알려지지 않은 미래 운명을 가지고 있다. 중앙 우주에만 특별히 있는, 원주민의 진보, 곧 파라다이스로 올라가지도 않고 초우주를 통과하지도 않는 진보가 있다. 하보나에서 상급 지위로 향하는 이 전진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도 좋다:
14:4.15 (157.7) 1. 제1 회로로부터 제7 회로까지 바깥으로 가는 체험적 진보.
14:4.18 (157.10) 하보나 원주민 외에도, 중앙 우주의 거주자는 다채로운 우주 집단―그들 부류에게, 그리고 창조 전체를 통해서 그들 부류에게 고문ㆍ지도자ㆍ선생인 자들―에게 수많은 등급의 원본이 되는 존재들을 포함한다. 어떤 우주의 어떤 존재도, 하보나의 10억 세계 중에 어느 한 세계에서, 어느 한 계급의 원본 생물의 줄기를 따라서 모습을 만들었다. 시간 세계의 필사자조차 하늘에 있는 이 원본 구체들의 여러 바깥 회로에서, 인간으로 존재하는 목표와 이상을 가지고 있다.
14:4.19 (157.11) 그 다음에, 우주의 아버지에 도달한 존재가 있고, 출입 자격을 가진 자가 있으며, 이들은 특별한 봉사 임무를 띠고 여러 우주에 여기저기 배치된다. 어떤 하보나 세계에도 도달 후보자가 발견될 터인데, 이들은 중앙 우주에 물리적으로 도착했지만 파라다이스 거주 자격을 청구할 수 있도록 영적 성장을 아직 이룩하지 못한 자이다.
14:4.20 (158.1) 한 무리의 성격자, 품위 있고 영광스러운 존재들이 여러 하보나 세계에서 무한한 영을 대표하는데, 이들은 중앙 우주의 복잡한 지적 사무와 영적 사무의 세부를 관리한다. 신성하게 완전한 이 세계들에서, 이들은 이 광대한 창조의 정상 운영에 자생하는 일을 수행하며, 그밖에도 공간의 어두운 세계로부터 영광으로 올라 온, 굉장한 수의 승천 인간을 가르치고, 훈련하고, 보살피는 다채로운 과업을 수행한다.
14:4.21 (158.2) 파라다이스와 하보나 체계에서 출생하고, 인간을 완전에 이르게 만드는 승천 계획에 어떤 면에서도 직접 관련되지 않은 수많은 집단의 존재들이 있다. 그러므로 필사 민족들에게 제시하는 성격자 분류에서 이들은 제외된다. 오직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들의 주요한 집단과 너희의 살아남는 체험과 직접 연결된 계급들만 여기에 발표된다.
14:4.22 (158.3) 하보나에는 모든 단계의 지적 존재의 생명으로 붐비며, 그들은 거기서 상급 수준으로 신성의 실현을 이루고, 최상의 의미, 궁극의 가치, 절대적 실체를 더욱 깨달으려는 노력으로, 낮은 회로에서 높은 회로로 승진하려고 애쓴다.
14:5.1 (158.4) 유란시아에서 물질로 존재하는 초기 생명을 사는 동안에, 너는 짧고도 격렬한 시험을 거친다. 저택 세계와 너희의 체계, 별자리, 지역 우주를 거치기까지, 너는 하늘 가는 상물질 단계를 거친다. 초우주의 여러 훈련 세계에서 너는 진보하는 참된 여러 영적 단계를 지나가며, 궁극에 하보나로 이동하기 위하여 준비된다. 하보나의 일곱 회로에서, 너의 달성은 지적ㆍ영적ㆍ체험적인 것이다. 이러한 각 회로의 각 세계에는 성취해야 할 분명한 과제가 있다.
14:5.2 (158.5) 중앙 우주의 신성한 여러 세계에서 생활은 너무 값지고 충만하며 아주 완전하고 충실하니까, 그 생활은 지음받은 존재가 아마 체험할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한 인간의 관념도 통째로 뛰어넘는다. 이 영원한 창조에서 일어나는 사회 활동과 경제 활동은 유란시아와 같은 진화 세계에 있는 물질 인간의 직업과 온통 다르다. 하보나에서 생각하는 기법조차도 유란시아에서 생각하는 과정과 같지 않다.
14:5.3 (158.6) 중앙 우주의 규칙은 적절히, 그리고 본래부터 자연스러우며, 행동 규율은 멋대로 정해진 것이 아니다. 하보나의 모든 요구 사항에는 올바른 논리와 정의의 법칙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이 두 요소는 합하여, 유란시아에서 공정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너희는 하보나에 도착할 때, 처리해야 하는 방법대로 사물을 처리하는 것을 자연히 즐길 것이다.
14:5.4 (158.7) 중앙 우주에 처음 도착할 때, 지적 존재들은 제7 하보나 회로의 안내 세계에서 영접받고 거기서 정주한다. 새로 온 자들이 영적으로 진보하고, 그들 초우주 으뜸 영의 신분을 이해하게 되면, 제6 회로로 옮겨진다. (인간의 지성에서 진보하는 여러 수준을 이름지은 것은 중앙 우주에 있는 이러한 주선으로부터 유래한다.) 최상위를 깨닫고, 그렇게 함으로 신을 만나는 모험을 위하여 준비된 뒤에 하늘 가는 자는 제5 회로로 옮겨진다. 무한한 영에 도달한 뒤에, 제4 회로로 이동된다. 영원한 아들에 도달하고 나서, 제3 회로로 옮겨진다. 우주의 아버지를 인식하고 나서, 제2 회로의 세계들로 가서 머무르며, 거기서 파라다이스 무리들에 대하여 더 익숙해진다. 하보나의 제1 회로에 도착하는 것은, 시간 세계 후보자를 파라다이스의 봉사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무기한으로, 인간이 승천하는 길이와 성질에 따라서, 그들은 차츰 영적 성장이 있는 안쪽 회로에서 머무를 것이다. 이 안쪽 회로로부터, 하늘 가는 순례자는 파라다이스에 거주하고 최후 군단에 입단하려고 안쪽으로 간다.
14:5.5 (159.1) 하늘 가는 순례자로서 하보나에 머무르는 동안, 배치된 회로의 세계들 사이에서 너는 마음대로 방문하는 허가를 받을 것이다. 또한 이전에 지나간 회로의 행성들로 되돌아가는 것도 허락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두가, 상천사의 품에 안기지 않고서, 하보나의 여러 궤도에 머무르는 자에게 가능하다. 시간 순례자는 “도달한” 공간을 지나갈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출 수 있지만, “도달하지 못한” 공간을 타협하는 데는 예정된 기법에 의존해야 한다. 수송하는 상천사의 도움 없이, 순례자는 하보나를 떠나거나, 자기가 배치된 회로를 넘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14:5.6 (159.2) 이 광대한 중앙 우주에는 신선한 독창성이 있다. 물질의 물리적 조직과, 기본 서열의 지적 존재와 기타 생체들의 근본적 구성을 제쳐놓고, 하보나 세계들 사이에 아무 공통점이 없다. 이 행성들은 하나하나 독창적이고 독특하고 유일한 창조이며, 각 행성은 비할 데 없이 훌륭하고 완전한 작품이다. 이 다채로운 개성은 행성에 존재하는 물리적ㆍ지적ㆍ영적 국면의 모든 모습에 연장된다. 완전한 이 10억 구체는 각각 거주하는 영원부터 늘 계신 이의 계획에 따라서 개발되고 꾸며졌다. 바로 이것이 어느 두 구체도 비슷하지 않은 까닭이다.
14:5.7 (159.3) 네가 하보나의 최종 회로를 거치고 마지막 세계를 방문하기까지, 모험이라는 강장제와 호기심이 주는 자극은 너의 생애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 욕구, 영원을 향하여 전진하려는 충동이 그 선구자, 곧 시간 세계에서 모험하는 유혹을 대체할 것이다.
14:5.8 (159.4) 단조로움은 창조적 상상력이 미숙하고, 영적 자질과 지적 조정이 활발하지 않음을 가리킨다. 하늘 가는 필사자가 이 하늘 세계들을 탐험하기 시작할 때가 되면,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더라도, 감정적ㆍ지적ㆍ사회적으로 성숙에 이미 이르렀다.
14:5.9 (159.5) 너는 하보나에서 한 회로에서 다음 회로로 올라가면서 꿈도 꾸지 못한 변화와 마주치는 것을 발견할 뿐 아니라, 각 회로 안에서 한 행성에서 다음 행성으로 진보하면서, 너의 놀라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이 10억 연구 세계는 각자 놀라움으로 가득한 진정한 대학이다. 계속되는 놀라움, 끝없는 경이는 이 회로들을 거치고 이 거대한 구체들을 여행하는 자가 겪는 체험이다. 단조로움은 하보나 생애와 거리가 멀다.
14:5.10 (159.6) 모험을 좋아하는 성향, 호기심, 단조로움을 싫어하는 것―이러한 특성은 날 때부터, 진화하는 인간 성품에 있다. 땅에서 잠시 머무르는 동안, 단지 너희를 성나게 하고 골탕먹이려고 이 특성을 인간에게 투입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죽음은 다만 끝없이 모험하는 생애, 무엇인가 기대하는 영원한 생명, 탐험하는 영원한 항해의 시작이라는 것을 너희에게 넌지시 비치려 한 것이다.
14:5.11 (160.1) 호기심―조사하는 정신, 탐구하는 욕구, 탐험하는 정력―은 공간의 진화 인간에게 선천적이며 신이 준 자질의 일부이다. 이 자연스러운 충동을 단지 좌절되고 억제되라고 너희에게 주지 않았다. 이 거창한 욕망을 너희가 땅에서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흔히 자제해야 하고, 실망을 자주 겪어야 하는 것은 참말이다. 그러나 먼 후일에, 그 소망은 충분히 이루어지고 영화롭게 채워질 것이다.
14:6.1 (160.2) 일곱 회로로 이루어진 하보나의 활동 범위는 엄청나다. 대체로 이 활동은 다음과 같이 기술해도 좋다:
14:6.5 (160.6) 현재 우주 시대에 하보나에는 수없이 다채로운, 초한(超限) 단계와 기타 지성 및 영 활동을 포함하는, 유한 초월 활동이 많이 일어난다. 창조된 지성이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방법으로 중앙 우주가 작용하다시피, 중앙 우주는 나에게 밝혀지지 않은 여러 목적에 쓰이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기는 해도 이 완전한 창조가 어떻게 일곱 계급의 우주 지능의 필요를 보살피고 충족하는 데 이바지하는가 묘사하는 노력을 기울여 보겠다.
14:6.6 (160.7) 1. 우주의 아버지―첫째 근원 중심. 아버지 하나님은 중앙 창조가 완전한 것에 어버이로서 최상의 만족감을 느낀다. 그는 거의 대등한 수준에서 사랑이 충족되는 체험을 누린다. 완전한 창조자는 완전한 인간의 찬미에 신답게 기쁨을 느낀다.
14:6.7 (160.8) 하보나는 아버지에게 최상으로 달성하는 기쁨을 허락한다. 하보나에서 완전의 실현은 무한히 확대하려는 영원한 의욕이 시공 세계에서 늦어지는 것을 보상한다.
14:6.8 (160.9) 아버지는 하보나가 신다운 아름다움으로 답례함을 즐긴다. 모든 진화 우주에게 아름다운 조화의 완전한 원본을 마련해 주는 것은 신의 지성을 만족시킨다.
14:6.9 (160.10) 중앙 우주가 온 우주에 있는 모든 성격자에게 영적 실체의 훌륭한 계시이니까, 우리 아버지는 충만한 기쁨으로 중앙 우주를 바라본다.
14:6.10 (160.11) 우주들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에서 생기는 모든 차후의 우주 확장을 위하여 영원한 동력의 핵심으로서, 하보나와 파라다이스를 좋게 여긴다.
14:6.11 (160.12) 영원한 아버지는 시간 세계에서 승천하는 후보자들을 위한 훌륭하고 매력있는 목표로서, 하보나 우주를 끊임없이 만족스럽게 바라본다. 이 후보자들은 창조자인 아버지의 영원한 집에 이르는, 공간의 필사 손자ㆍ손녀이다. 신과 그 가족의 영원한 집으로서, 하나님은 파라다이스와 하보나 우주를 기뻐하신다.
14:6.12 (160.13) 2. 영원한 아들―둘째 근원 중심. 영원한 아들에게, 훌륭한 중앙 우주는 신의 가족―아버지ㆍ아들ㆍ영―의 조합이 효과적인 것을 영원히 증명한다. 중앙 우주는 우주의 아버지를 절대로 신뢰하는 영적ㆍ물질적 기초가 된다.
14:6.13 (160.14) 하보나는 늘 확대되는 영 권능의 실현을 위하여, 영원한 아들에게 거의 무제한의 기초를 마련해 준다. 중앙 우주는 동료 파라다이스 아들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자신 수여로 봉사하는 정신과 기법을 안전하고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무대를 영원한 아들에게 마련해 주었다.
14:6.14 (161.1) 하보나는 영원한 아들이 온 우주를 영 인력으로 통제하는 데 실체의 기초가 된다. 이 우주는 아들의 어버이 욕구, 영적으로 자식을 낳는 욕구를 만족시킨다.
14:6.15 (161.2) 하보나 세계들과 거기에 있는 완전한 거주민은, 아들이 아버지의 말씀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처음이자 영원히 마지막 증명이다. 이렇게 함으로 아버지의 무한한 보완자인 아들의 의식은 완전히 만족된다.
14:6.16 (161.3) 이 우주는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 사이에 동등한 친교를 서로 나누는 기회를 마련해 주며, 이것은 각자가 무한한 성격자라는 영원한 증명이 된다.
14:6.17 (161.4) 3. 무한한 영―셋째 근원 중심. 하보나 우주는 무한한 영에게 그가 합동 행위자, 곧 하나된 아버지와 아들의 무한한 대표자라는 증거를 마련해 준다. 하보나에서는 무한한 영이, 하나의 창조 행위로서 활동하는 통합된 만족을 느끼며, 한편 이 신성한 성취와 함께 절대로 공존하는 만족감을 누린다.
14:6.18 (161.5) 무한한 영은 그가 장래에 자비를 베푸는 자로서 수고할 능력과 의도를 보여줄 수 있는 무대를 하보나에서 발견했다. 이 완전한 창조에서, 영은 진화 우주에서 봉사하는 모험의 예비 연습을 가졌다.
14:6.19 (161.6) 이 완전한 우주는 무한한 영에게 두 분의 신 부모와 함께 우주 행정에 참여할 기회―동료 창조자인 자식으로서 한 우주를 관리할 기회―를 마련해 주었고, 이렇게 함으로 창조 아들의 창조 영 동료로서, 지역 우주의 공동 관리를 위하여 준비하였다.
14:6.20 (161.7) 하보나 세계들은 우주 지성의 창조자,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생물의 지성에게 봉사하는 자들에게 지성의 실험실이다. 지성은 각 하보나 세계에서 다르고, 모든 영적 지능과 물질 생물의 지능에게 원본으로서 쓰인다.
14:6.21 (161.8) 이 완전한 세계들은 파라다이스 사회로 가기로 예정된 모든 존재에게 지성 대학원이다. 이 세계들은 안전한 상담 성격자들에게 지성을 베푸는 기법을 시험할 기회를 영에게 풍부히 마련해 주었다.
14:6.22 (161.9) 하보나는 공간의 여러 우주에서 광범위하게 사심 없이 무한한 영이 일하는 것에 대한 보상이다. 하보나는 시공 세계에서 지칠 줄 모르는 지성 봉사자에게 완전한 집이요 피난처이다.
14:6.23 (161.10) 4. 최상 존재―체험적 신이 진화로 통일된 것. 하보나 우주는 최상 존재가 영적 실체라는 영원하고 완전한 증명이다. 이 완전한 창조는, 경험적인 시공 우주에서 파라다이스 신들이 유한하게 비친 모습을 동력을 가진 성격자로 통합하는 일이 시작되기 전에, 최상위 하나님의 완전하고 균형된 영 성품을 계시한 것이다.
14:6.24 (161.11) 하보나에서 전능자의 동력 잠재성은 최상위의 영적 성품과 하나가 된다. 이 중앙 창조는 최상위가 영원한 앞날에 통일되는 것을 나타내는 한 본보기이다.
14:6.25 (161.12) 하보나는 최상위의 잠재적 보편성의 완전한 원본이다. 이 우주는 최상위의 미래 완전성을 완벽하게 나타낸 묘사이며, 궁극위의 가능성을 넌지시 비친다.
14:6.26 (162.1) 하보나는 최상의 완전한 자제력을 가진, 살아 있고 의지가 있는 생물로서 존재하는 최종의 영 가치, 궁극에 영과 대등한 것으로서 존재하는 최종의 지성, 그리고 무제한 잠재성을 가진 지능의 최종 실체 및 통일을 나타낸다.
14:6.27 (162.2) 5. 동위의 창조 아들. 하보나는 나중에 지역 우주를 창조하는 모험을 위해서, 파라다이스 미가엘들이 준비되는 교육 훈련 장소이다. 신성하고 완전한 이 우주는 모든 창조 아들을 위한 본보기이다. 창조 아들은 자신의 우주를 궁극에 이 파라다이스와 하보나 수준까지 완전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14:6.28 (162.3) 창조 아들은 자신의 필사 자녀와 영 존재들을 위해서, 인격자의 원본 가능성으로서 하보나의 인간들을 이용한다. 미가엘을 비롯하여 다른 파라다이스 아들들은, 파라다이스와 하보나를 시간 세계 자녀들의 신성한 운명으로 바라본다.
14:6.29 (162.4) 창조 아들들은 중앙 우주가 그들의 지역 우주를 안정시키고 통일하는 근원, 꼭 필요한 지역 우주 통제의 진짜 근원임을 안다. 그들은 최상위와 궁극위의 상존하는 영향이 하보나에 몸소 계심을 알고 있다.
14:6.30 (162.5) 하보나와 파라다이스는 미가엘 아들의 창조하는 권능의 근원이다. 여기에 그와 함께 지역 우주를 창조하는 데 협동하는 존재들이 살고 있다. 파라다이스로부터 우주 어머니 영, 곧 지역 우주의 공동 창조자들이 온다.
14:6.31 (162.6) 파라다이스 아들들은 중앙 우주를 신성한 부모의 집으로―그들의 집으로 ―생각한다. 그들이 때때로 즐겁게 돌아가는 곳이다.
14:6.32 (162.7) 6. 동위의 봉사하는 딸. 우주 어머니 영, 곧 지역 우주의 공동 창조자는 회로 영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여러 하보나 세계에서 성격을 얻기 전의 훈련을 확보한다. 지역 우주를 짓는 딸 영은 중앙 우주에서 늘 아버지의 뜻에 지배를 받으면서, 파라다이스 아들과 협동하는 방법을 마땅히 훈련받았다.
14:6.33 (162.8) 하보나의 여러 세계에서 영과 그 딸들은 모든 영적ㆍ물질적 지능 집단을 위한 지성의 원본을 발견한다. 이 중앙 우주는 한 우주 어머니 영 및 관계된 한 창조 아들이 공동으로 후원하는 인간들이 언젠가 가야 할 운명이다.
14:6.34 (162.9) 지역 우주의 어머니 창조자는 파라다이스와 하보나를 태어난 출생지로서, 무한한 어머니 영의 집, 곧 무한한 지성의 성격이 계시는 거처로서 기억한다.
14:6.35 (162.10) 또한 이 중앙 우주로부터 개인적으로 창조하는 특권이 왔고, 신성한 우주 봉사자는 의지를 가진 생물을 창조하는 일을 하면서 한 창조 아들을 보완하기 위하여 이 특권을 사용한다.
14:6.36 (162.11) 마지막으로, 무한한 어머니 영의 이 딸 영들은 파라다이스의 집으로 결코 돌아갈 듯하지 않으니까, 보편적 거울 현상으로부터 크게 만족을 얻는다. 이 현상은 하보나에서 최상 존재와 관련이 있고, 파라다이스에서 위엄자로서 성격화되었다.
14:6.37 (162.12) 7. 승천 생애를 가진 진화 필사자. 하보나는 모든 필사 종류의 원본 성격자의 고향이며, 필사자들과 관계를 가지면서 시간 세계 우주에 토착이 아닌 모든 초인간 성격자의 집이기도 하다.
14:6.38 (162.13) 이 세계들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실체 수준에서 참된 영 가치 기준을 달성하는 방향으로, 모든 인간적 충동을 자극한다. 하보나는 하늘 가는 모든 필사자에게, 파라다이스로 가기 전의 훈련 목표이다. 여기서 필사자는 파라다이스 이전의 신―최상 존재―를 만난다. 하보나는 의지를 가진 모든 인간에게 파라다이스와 하나님에게 도달하는 입구로서 존재한다.
14:6.39 (163.1) 최후자에게 파라다이스는 집이며, 하보나는 일터이자 놀이터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모든 필사자는 몹시 최후자가 되고 싶어한다.
14:6.40 (163.2) 중앙 우주는 사람의 정해진 운명일 뿐 아니라, 최후자의 영원한 생애가 시작되는 장소이다. 그들은 우주의 아버지의 무한성을 탐구하는 체험을 겪으려고, 미지의 우주 모험을 하려고 언젠가 떠나게 될 것이다.
14:6.41 (163.3) 미래 우주 시대에는 유한 초월 수준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공간 순례자들을 구경할지도 모르며, 그때에도 하보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초한(超限) 의미를 가지고 줄곧 활동할 것이다. 하보나는 초한 존재들을 훈련시키는 우주로 쓰일 수용 능력이 있다. 일곱 초우주가 바깥 공간의 초등 학교 졸업생들을 위하여 중학교로서 작용할 때, 하보나는 아마도 최종 학교가 될 것이다. 영원한 하보나의 잠재성은 정말 무제한이며, 하보나는 모든 과거, 현재, 또는 미래 부류의 창조된 존재들을 체험으로 훈련하는 우주로서 쓰일 영원한 수용 능력이 있다는 견해를 우리는 지지하고 싶다.
14:6.42 (163.4) [유버르사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로부터 이렇게 활동하라고 위임받은 한 지혜 완성자가 발표했다.]
15:0.1 (164.1) 우주의 아버지가―아버지로서―관련된 한, 우주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성격자들을 상대하고 그가 성격자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이―협동하는 창조자로서―관련된 한, 우주들은 창조 아들과 창조 영들의 공동 통치를 받으면서 지역화되고 개별성을 띤다.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관계된 한, 하보나 바깥에는 사람이 사는 우주가 꼭 일곱 있으며, 이 일곱 초우주는 하보나 이후 첫째 공간 수준의 궤도에 대하여 관할권을 가진다. 일곱 으뜸 영은 가운데 섬으로부터 바깥으로 영향력을 방출하며, 이렇게 광대한 창조를 하나의 거대한 바퀴로 만든다. 그 바퀴의 중심은 영원한 파라다이스 섬이요, 바퀴의 일곱 살은 일곱 으뜸 영의 빛이요, 가장자리는 대우주의 바깥 지역이다.
15:0.2 (164.2) 우주가 창조되어 물질화하는 초기에, 초우주를 조직하고 다스리는 일곱 가지 계획이 세워졌다. 하보나 이후의 첫째 창조는 굉장한 일곱 구역으로 나누어졌고, 이 초우주 정부들의 본부 세계가 설계되고 지어졌다. 현재의 행정 계획은 거의 영원 시절부터 있어 왔고, 이 초우주의 통치자들은 마땅히 옛적부터 늘 계신 이라 부른다.
15:0.3 (164.3) 초우주들에 관한 광대한 양의 지식에 관해서 나는 너희에게 별로 일러주기를 바랄 수 없지만, 이러한 영역에 두루 물질적ㆍ영적 물력을 총명하게 통제하는 한 기법이 작용하며, 거기서 우주 인력의 존재는 장엄한 힘으로 완전히 조화되어 작용한다. 먼저 초우주 영토의 물리적 구조와 물질 조직에 관하여 적당한 관념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너희는 이를 다스리는 영적 정부, 그리고 이 일곱 초우주에 두루 여기저기 흩어진, 사람이 사는 수많은 행성에 거하는, 의지(意志)를 가진 인간의 지적 승진을 위하여 마련된 놀라운 조직이 얼마나 중요한가 파악할 준비가 더 잘 될 것이기 때문이다.
15:1.1 (164.4) 너희의 짧은 해로 따져서 1백만 년이나 10억 년 동안의 세대들이 얻은 제한된 범위의 기록ㆍ관측ㆍ기억으로 보면, 유란시아와 그것이 속한 우주는 모든 실질적 의도와 목적으로 볼 때, 하나의 긴 모험, 지도(地圖)에도 올라 있지 않은 채로 새 공간 속으로 텀벙 빠지는 모험을 겪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유버르사의 기록에 따르고 더 오래 된 관측과 일치하며, 우리 계급의 폭 넓은 경험 및 계산과 조화된다. 이를 비롯하여 다른 조사에 기초하여 결론을 얻은 결과로서, 우리는 우주들이 질서 있고 훤히 알려지고 완전히 통제된 행렬 속에 끼어 있고, 이 우주들이 위대한 첫째 근원 중심과 그가 거주하는 우주의 둘레를 당당한 위엄 속에 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15:1.2 (165.1) 일곱 초우주가 커다란 타원, 거대하고 길쭉하게 된 궤도를 따라서 움직이는 것을 우리가 발견한 지 오래 된다. 너희 태양계를 비롯하여 다른 시간 세계들은, 지도도 나침반도 없이, 지도에 그려지지 않은 공간으로 곤두박질하고 있지 않다. 너희 체계가 속하는 지역 우주는 중앙 우주를 둘러싸는 광범위한 길 주위에, 분명하고 잘 알려진 행로, 시계 바늘 반대 방향의 행로를 따르고 있다. 유란시아 천문학자들이 너희 태양계를 구성하는 행성들의 궤도를 알고 있는 것과 똑같이, 이 우주의 길은 도표에 잘 표시되어 있고 초우주의 별 관측자들은 이를 샅샅이 알고 있다.
15:1.3 (165.2) 유란시아는 한 지역 우주에, 완전히 조직되지 않은 한 초우주 안에 자리잡고 있다. 너희의 지역 우주는 부분적으로 완성된 수많은 물리적 창조 바로 곁에 있다. 너희는 비교적 요즈음에 생긴 우주들 중 하나에 속한다. 그러나 오늘날 너희는 미지의 지역으로, 지도에 없는 공간으로 사납게 곤두박질하거나, 눈감고 휙 뛰쳐나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초우주 공간 수준에서 질서 있고 예정된 길을 따르고 있다. 너희의 행성 체계나 그 전신(前身)이 오랜 세월 전에 지나갔던 바로 그 공간을 너희가 지금 지나고 있다. 먼 앞날에 언젠가, 너희의 행성 체계, 아니면 그 후계자들이, 너희가 지금 아주 빨리 돌진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공간을 다시 지나갈 것이다.
15:1.4 (165.3) 이 시대에, 유란시아에서 방향을 따지는 대로, 제1 초우주는 위대한 근원 중심들의 파라다이스 거처 및 하보나 중앙 우주의 대체로 맞은 편에, 동쪽 방향에서, 거의 정북(正北) 방향으로 빙 돌고 있다. 이 위치는, 서쪽에서 그와 대칭되는 위치와 함께, 시간 세계의 구체들로부터 영원한 섬에 이르는,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접근이 된다. 제2 초우주는 북쪽에 있고, 서향 회전을 위하여 준비하고 있으며, 제3 초우주는 남향의 돌진을 인도하는 굽은 부분을 이미 돌았고, 현재 큰 공간 행로의 가장 북쪽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제4 초우주는 비교적 곧게 남쪽으로 비행하고 있고, 그 전진 지역은 지금 위대한 중심들에 대하여 충(衝)이[1] [1659] 되기에 가까워진다. 제5 초우주는 만물의 중심 건너편 자리를 거의 떠나고 있고, 동향 회전을 하기 직전에 곧은 남향 행로를 계속하고 있다. 제6 초우주는 남쪽 곡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거기를 너희 초우주는 거의 지나가 버렸다.
15:1.5 (165.4) 너희의 네바돈 지역 우주는 제7 초우주 오르본톤에 속하고, 그것은 초우주 1번과 6번 사이에 도는데, 초우주 공간 수준의 남동쪽 굽은 곳을 돈 지 (우리가 시간을 따지는 대로) 얼마 되지 않는다. 오늘날 유란시아가 속하는 태양계는 남쪽의 커브 둘레를 돌아서 지나간 지 몇십억 년이 되며, 그래서 너희는 지금 막 남동쪽 굽은 곳을 지나서, 길고도 비교적 곧은 북쪽 행로를 통하여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셀 수 없이 긴 세월 동안, 오르본톤은 거의 곧은 이 북향 행로를 따를 것이다.
15:1.6 (165.5) 유란시아는 너희 지역 우주의 경계지를 향하여 썩 바깥에 나와 있는 한 체계에 속한다. 지금 너희 지역 우주는 오르본톤 가장자리를 거쳐 가고 있다. 너희를 지나서 또 다른 우주들이 있지만, 위대한 근원 중심에 비교적 가까이서 큰 궤도 둘레를 도는 물리 체계들로부터 너희는 공간 속에 멀리 떨어져 있다.
15:2.1 (165.6) 오직 우주의 아버지만 공간에서 사람이 사는 세계들의 위치와 실제 숫자를 알고, 이들 모두를 이름과 번호로 부르신다. 나는 이미 사람이 살거나 살 수 있는 행성들의 어림수만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어떤 지역 우주는 지적 생명이 살기에 적당한 세계를 다른 지역 우주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계획된 지역 우주들이 모두 조직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내가 제시하는 어림수는 오로지 물질 창조가 얼마나 거대한가 얼마큼의 개념을 주기 위한 것이다.
15:2.2 (166.1) 대우주에는 일곱 초우주가 있고, 대체로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5:2.3 (166.2) 1. 체계. 초우주 정부의 기본 단위는 사람이 살거나 또는 살 수 있는, 약 1천개의 세계로 이루어진다. 타오르는 태양, 추운 세계, 뜨거운 태양에 너무 가까이 있는 행성, 인간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은 다른 구체들은 이 집단에 들어가지 않는다. 생명을 부양하는 데 적응된 이 1천 세계를 한 체계라 부른다. 그러나 젊은 체계에는 이처럼 사람 사는 세계들의 수가 비교적 적다. 한 행성 영주가 사람이 사는 각 세계를 다스리고, 본부로 쓰이는 건축된 구체가 각 지역 체계에 있으며, 한 체계 군주가 이를 다스린다.
15:2.4 (166.3) 2. 별자리. 1백 체계가 (사람이 살 수 있는 행성 약 100,000개) 한 별자리를 이룬다. 건축된 본부 구체가 각 별자리에 있고, 최고자인 보론다덱 아들 세 분이 이를 주관한다. 각 별자리에는 또한 관찰하는 늘 충실한 이가 한 분 있으며, 그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대사이다.
15:2.5 (166.4) 3. 지역 우주. 1백 별자리가 (사람이 살 수 있는 행성 약 10,000,000개) 한 지역 우주를 구성한다. 웅장한 건축된 본부 세계가 각 지역 우주에 있고, 동등한 미가엘 계급의 창조자인 하나님의 아들 한 분이 이를 다스린다. 각 우주는 늘 하나된 이 한 분이 계시는 축복을 받으며, 그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대표이다.
15:2.6 (166.5) 4. 소구역. 1백 지역 우주는 (사람이 살 수 있는 행성 약 1,000,000,000개) 초우주 정부의 한 소구역을 구성한다. 소구역에는 놀라운 본부 세계가 있고, 거기서 그 통치자, 요즘부터 늘 계신 이들이 소구역의 사무를 돌본다. 각 소구역 본부에 요즘부터 늘 계신 이가 세 분 계시며 이들은 최상 삼위일체 성격자이다.
15:2.7 (166.6) 5. 대구역. 1백 소구역이 (사람이 살 수 있는 세계 약 100,000,000,000개) 한 대구역을 이룬다. 화려한 본부가 각 대구역에 마련되어 있고, 최상 삼위일체 성격자인 늘 완전한 이 세 분이 대구역을 주관한다.
15:2.8 (166.7) 6. 초우주. 10 대구역이 (사람이 살 수 있는 행성 약 1,000,000,000,000개) 한 초우주를 구성한다. 각 초우주에는 거대하고 영화로운 본부 세계가 있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 세 분이 다스린다.
15:2.9 (166.8) 7. 대우주. 일곱 초우주는 현재 조직되어 있는 대우주를 이루며, 대우주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약 7조의 세계와 건축된 구체들, 그리고 존재들이 거하는 10억개의 하보나 구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곱 으뜸 영이 초우주들을 파라다이스로부터 간접으로, 거울 작용으로, 통치하고 관리한다. 영원부터 늘 계신 이들이 하보나의 10억 세계를 직접 관리하고, 그러한 최상 삼위일체 성격자 한 분이 이 완전한 구체들 가운데 하나를 주관한다.
15:2.10 (167.1)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구체들을 제외하고, 우주를 조직하는 계획은 다음 단위들을 고려한다:
15:2.11 (167.2) 초우주 . . . . . . . . . . . . . . . . . . .7
15:2.12 (167.3) 대구역 . . . . . . . . . . . . . . . . . . 70
15:2.13 (167.4) 소구역 . . . . . . . . . . . . . . . . .7,000
15:2.14 (167.5) 지역 우주 . . . . . . . . . . . . . . 700,000
15:2.15 (167.6) 별자리. . . . . . . . . . . . . . 70,000,000
15:2.18 (167.9) 일곱 초우주는 각자 대체로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 있다.
15:2.19 (167.10) 한 체계가 포함하는 숫자는 대략 . . . . . . 1,000 세계.
15:2.20 (167.11) 한 별자리 (100 체계) . . . . . . . . .100,000 세계.
15:2.21 (167.12) 한 우주 (100 별자리) . . . . . . . 10,000,000 세계.
15:2.22 (167.13) 한 소구역 (100 우주) . . . . . .1,000,000,000 세계.
15:2.25 (167.16) 이 모든 추정치는 기껏해야 어림한 값이니, 새로운 체계들이 항상 진화하며, 한편 다른 조직들은 일시적 물질 존재 단계를 지나버리기 때문이다.
15:3.1 (167.17) 유란시아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별 있는 지역들의 거의 대부분은 대우주의 제7 지역, 오르본톤 초우주에 속한다. 별이 많은 광대한 은하수 체계는 오르본톤의 중앙 핵심을 대표하고, 대체로 너희 지역 우주의 테두리 바깥에 있다. 태양, 공간의 어두운 섬, 2중성(二重星), 공 모양의 성단(星團), 별 구름, 나선형과 기타 성운으로 이루어진 이 큰 집합은, 수많은 개별 행성들과 함께, 시계처럼 길어진 동그라미 집합을 이루며, 이것은 사람이 사는 진화 우주들의 약 7분의 1이다.
15:3.2 (167.18) 유란시아의 천문학적 위치로부터, 큰 은하수에 가까이 있는 체계들의 단면을 꿰뚫어보면, 너희는 광대한 길쭉한 평면, 넓이가 두께보다 훨씬 더 크고, 길이는 넓이보다 훨씬 큰 평면에서 오르본톤의 구체들이 여행하는 것을 관찰한다.
15:3.3 (167.19) 이른바 은하수를 지켜보면, 하늘이 한 방향에서 볼 때, 오르본톤의 별의 밀도가 비교적 높아지지만, 한편 양 옆 어느 쪽에서든지 그 밀도가 낮아짐이 드러난다. 우리의 물질적 초우주의 주요 평면에서 멀어지면, 별과 기타 구체들의 수는 줄어든다. 관찰하는 각도가 좋을 때, 최대 밀도를 가진 이 영역의 몸통을 꿰뚫어볼 때, 너희는 신이 거주하는 우주와 만물의 중심을 향하여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15:3.4 (167.20) 유란시아의 천문학자들은 오르본톤의 10개 분할 구역 가운데 여덟 개를 대체로 확인하였다. 나머지 둘은 따로 구분하기 힘든데, 너희가 이 현상을 어쩔 수 없이 안에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멀리 떨어진 공간의 위치에서 오르본톤 초우주를 바라볼 수 있다면, 너희는 제7 은하의 10개 대구역을 즉시 알아볼 것이다.
15:3.5 (168.1) 너희 소구역의 회전 중심은 엄청나고 짙은 궁수(弓手) 자리 별 구름 속에, 멀리 떨어져 있다. 너희 지역 우주 및 그와 관련된 창조들이 모두 이 둘레를 움직이며, 이 광대한 궁수 자리, 종속 은하 체계의 맞은 편으로부터 너희는 굉장한 별 소용돌이에서 솟아나오는 두 개의 큰 별 구름의 흐름을 관찰할지 모른다.
15:3.6 (168.2) 너희의 태양과 그에 관련된 행성들이 속하는 물리적 체계의 핵심은 옛날 안드로노버라는 성운(星雲)의 중심이다. 한때 나선형이었던 이 성운은 너희 태양계의 출산에 따르는 사건과 관련된 인력의 교란으로 인하여 조금 일그러졌는데, 이 사건은 한 커다란 이웃 성운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일어났다. 거의 충돌에 가까운 이 사건은 안드로노버를 어느 정도 공 모양의 집합체로 만들었지만, 두 줄로 이루어진 태양들 및 그와 관련된 물리적 집단의 행렬을 전적으로 파괴하지는 않았다. 너희 태양계는 지금 일그러진 이 소용돌이의 한 팔에서 상당히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며, 그 중심으로부터 바깥으로 별 흐름의 가장자리를 향하여 거의 가운데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15:3.7 (168.3) 궁수 자리 구역과 오르본톤의 모든 다른 구역 및 분할 지역들은 유버르사 둘레를 돌고 있다. 유란시아의 별 관측자들이 겪는 혼란 중에 더러는 다음의 몇 겹의 회전 운동으로 생기는 착시(錯視)와 상대적 왜곡 때문에 일어난다.
15:3.8 (168.4) 1. 유란시아가 그 태양의 둘레를 도는 것.
15:3.9 (168.5) 2. 예전의 안드로노버 성운의 핵심 둘레를 도는 너희 태양계의 회로.
15:3.10 (168.6) 3. 안드로노버 별 집단, 그리고 관련된 성단이 네바돈 별 구름의 회전 및 인력의 복합 중심을 도는 것.
15:3.11 (168.7) 4. 네바돈의 지역 별구름 및 그에 관련된 창조들이 그 소구역의 궁수 자리 중심을 빙 도는 것.
15:3.12 (168.8) 5. 궁수 자리를 포함하여 1백 소구역이 그 대구역 둘레를 도는 것.
15:3.13 (168.9) 6. 오르본톤의 유버르사 본부 둘레를 10 대구역이 소용돌이치며 도는 것, 이것을 이른바 별의 떠돌이라 한다.
15:3.14 (168.10) 7. 오르본톤, 그리고 관련된 여섯 초우주가 파라다이스와 하보나 둘레를 도는 것, 초우주 공간 수준에서 시계 바늘의 반대 방향으로 도는 행렬.
15:3.15 (168.11) 이 몇겹의 운동은 몇 가지 질서에서 생긴다. 너희 행성과 너희 태양의 공간 행로는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것이며 그 기원(起源)에 본래부터 있다. 오르본톤이 절대로 시계 바늘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도 유전이며, 총우주의 건축 계획에 본래부터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 개재하는 운동은 복합 기원이 있고, 일부는 물질과 에너지를 초우주들로 만드는 구조적 분열로부터 유래하며, 일부는 파라다이스의 물력 조직자들의 총명한 의도적 활동으로 생겨난다.
15:3.16 (168.12) 하보나에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서, 지역 우주들은 더욱 서로 가까워진다. 회로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나고, 이 회로들은 갈수록 더, 한 층 한 층, 겹쳐진다. 그러나 영원한 중심으로부터 바깥으로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체계ㆍ층ㆍ회로ㆍ우주들의 수는 자꾸 줄어든다.
15:4.1 (169.1) 창조와 우주 조직은 언제까지나 무한한 창조자들과 그 동료들의 통제를 받고 있지만, 그 현상 전체는 예정된 기법에 따라서 물력ㆍ에너지ㆍ물질의 인력 법칙에 순응하면서 진행된다. 그러나 공간의 우주 물력 전하에 관련하여, 어떤 신비와 비슷한 것이 있다. 우리는 극자(極子) 단계 이후의 물질 창조들의 조직을 잘 알지만, 극자의 우주 조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조상이 되는 이 물력이 파라다이스의 정확한 거대한 윤곽을 따라서 유물(有物) 공간을 통해서 언제까지나 빙 도니까, 그것이 파라다이스에 기원을 가진다고 우리는 확신한다. 파라다이스 인력에 반응하지 않아도, 공간의 이 물력 전하, 곧 모든 물질화의 조상은, 아래 파라다이스의 존재에 언제나 반응하며, 아래 파라다이스 중심으로 들어오고 거기서 나가서 순회하는 듯하다.
15:4.2 (169.2) 파라다이스의 물력 조직자들은 공간의 잠재력을 원초 물력으로 바꾸고, 이 물질 이전 잠재성을 물질 실체의 1차 및 2차 에너지 모습으로 진화시킨다. 이 에너지가 인력에 반응하는 수준에 이를 때, 초우주 체제의 동력 지휘자와 그 동료들이 그 장면에 나타나서 끝없는 조종을 시작하며, 이것은 시공 우주들의 다채로운 동력 회로와 에너지 경로를 확립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이처럼 물리적 물질이 공간에 나타나며, 그렇게 우주 조직을 개시하기 위하여 무대가 마련된다.
15:4.3 (169.3) 이 에너지의 분리는 네바돈의 물리학자들이 결코 해답을 얻지 못한 현상이다. 그들의 주요한 문제점은 파라다이스 물력 조직자들이 비교적 접근하기 힘든 데 있으며, 이는 살아 있는 동력 지휘자들이 공간 에너지를 다루는 데 유능하지만, 그렇게 솜씨 있게, 총명하게 조종하는 에너지가 어디서 왔는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5:4.4 (169.4) 파라다이스 물력 조직자들은 성운(星雲) 창시자이다. 자기가 있는 공간 주위에 그들은 엄청난 물력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데, 이것이 일단 비롯되면, 만물을 침투하는 물력이 동원되어서, 궁극에 극자 단위의 우주 물질이 나타나기까지 결코 그치거나 제한될 수 없다. 이렇게 나선형을 비롯하여 다른 성운들이 생기게 되며, 이것들은 직접 기원을 가지는 태양과 그 다양한 체계들의 모체가 되는 바퀴이다. 바깥 공간에서는, 10가지 다른 모양의 성운, 곧 1차적 우주 진화의 단계를 구경할지 모른다. 그리고 이 광대한 에너지 바퀴들은 일곱 초우주에 있는 에너지 바퀴들과 똑같은 기원을 가졌다.
15:4.5 (169.5) 성운들은 크기, 그리고 그 결과로 생기는 별 및 행성 자손의 수와 총 질량 면에서 크게 다르다. 오르본톤 테두리의 바로 북쪽에 있지만 초우주 공간 수준에서 태양을 만드는 한 성운은 이미 약 4만개의 태양을 생산했고, 그 어미 바퀴는 아직도 태양들을 내던지고 있는데, 이 태양들의 대다수는 너희 태양의 몇 배나 된다. 바깥 공간에서 더 큰 어떤 성운들은 많은 태양을, 10만개나, 생산하고 있다.
15:4.6 (169.6) 어떤 지역 우주는 단일 성운의 산물로서 조직되지만, 성운들은 소구역이나 지역 우주와 같은 어떤 행정 단위와도 직접 관련이 없다. 성운 관계와 상관 없이, 각 지역 우주는 그 초우주의 총 에너지 전하(電荷)의 꼭 10만분의 1을 담고 있는데, 이는 에너지가 성운에 따라 조직되지 않기 때문이다―에너지는 보편적으로 분산된다.
15:4.7 (170.1) 나선형 성운들이 모두 태양을 만드는 일에 말려들지는 않는다. 더러는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간 많은 별 자식에 대하여 고삐를 쥐고 있다. 이들의 나선형 모습은 그 태양들이 밀접한 대형(隊形)을 이루어 성운의 팔을 떠나지만, 다양한 길로 돌아온다는 사실 때문에 생기며, 이처럼 이 성운들을 한 지점에서 관찰하기 쉽게 만들지만, 태양들이 성운의 팔로부터 더 멀리 바깥으로 떨어진 다른 귀로에 널리 흩어져 있을 때, 이 성운을 더 보기 어렵게 만든다. 현재 시점에서 오르본톤에는 태양을 형성하는 활발한 성운이 많지 않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그 초우주 바깥에 있는 안드로메다는 아주 활발하다. 멀리 떨어진 이 성운은 육안으로 보이며, 이를 바라볼 때, 네가 보는 그 빛은 그 먼 태양들을 거의 1백만년 전에 떠났다는 것을 멈춰 생각해 보아라.
15:4.8 (170.2) 은하수는 막대한 수에 달하는 성운, 예전의 나선형이나 다른 형태의 성운들로 이루어져 있고, 많은 성운이 아직도 최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내부의 대이변과 외부 인력의 결과로서, 다수가 크게 일그러지고 다시 배열되어서, 이 굉장한 집합체들은, 마젤란 구름처럼, 불타는 태양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빛의 덩어리처럼 보이게 만든다. 오르본톤의 바깥 테두리 가까이에는 공 모습의 별 집합들이 주류를 이룬다.
15:4.9 (170.3) 오르본톤의 광대한 별구름은 은하수 바깥 공간 지역에서 지켜볼 수 있는 분리된 성운들과 견줄 만한, 별개의 물질 집합체로 여겨야 한다. 그러나 공간에 이른바 별구름이라는 것들의 다수는 기체(氣體)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별 가스 구름의 에너지 잠재성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굉장하며, 그 중의 일부는 근처의 태양에게 잡혔다가 태양의 방사물로서 공간에 다시 던져진다.
15:5.1 (170.4) 초우주의 태양 및 행성에 포함되는 물질의 대부분은 성운의 바퀴에서 생긴다. 열린 공간에서 생기는 물질의 양은 항상 변동하지만, (건축한 구체들의 구성과 같이) 동력 지휘자들의 직접 행위로 조직되는 초우주 물질은 거의 없다.
15:5.2 (170.5) 기원에 대해서 말하면, 태양과 행성 및 다른 구체들의 대다수는 다음 10 집단 가운데 하나로 분류될 수 있다:
15:5.3 (170.6) 1. 축소하는 동심 고리. 성운이 모두 나선형은 아니다. 다수의 굉장한 성운은 2중성으로 갈라지거나 나선형으로 진화하지 않고, 몇 겹의 고리 형태로 압축된다. 오랫동안 그러한 성운은 하나의 거대한 중심의 태양이, 회전하는 고리처럼 보이는 물질 형태를 가진 거대한 수많은 구름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15:5.4 (170.7) 2. 소용돌이 별은 상당히 가열된 기체인, 거대한 어미 바퀴로부터 던져진 태양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별은 동그라미로서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우행렬과 좌행렬로 던져진다. 소용돌이치는 별은 나선형이 아닌 성운에서 기원이 생기기도 한다.
15:5.5 (170.8) 3. 인력에 폭발하는 행성. 나선형이나 막대기 형의 성운에서 태양이 하나 태어날 때, 태양이 상당히 멀리 던져지는 일이 뜸하지 않다. 그러한 태양은 상당히 가스 상태에 있고, 그 뒤에 어느 정도 식고 응축되고 나서, 거대한 태양이나 공간의 어두운 섬과 같은 어떤 거대한 물질 덩어리 근처에 어쩌다 휙 던져질 수도 있다. 이러한 접근은 충돌을 일으킬 만큼 가깝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충분히 가까워서, 둘 중에서 큰 물체의 인력이 당기는 힘이 작은 물체에서 파도치는 경련을 시작하게 만든다. 이렇게 함으로 일련의 파도치는 대변동이 시작되며, 이것은 경련하는 태양의 마주 보는 양쪽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이 폭발하는 분출이 절정에 오를 때, 크기가 다른 일련의 물질 집합체를 생산한다. 이것들은 분출하는 태양이 인력으로 다시 회수할 수 있는 지대 바깥에 던져질 수도 있으며, 이렇게 이 사건에 관계된 두 물체들 중 하나의 궤도에서 안정된다. 나중에 좀더 큰 물질의 집합체는 뭉치며, 작은 물체를 차츰 끌어당긴다. 이 방법으로, 작은 체계들에서 많은 고체 행성이 태어난다. 너희의 태양계도 바로 그러한 기원을 가졌다.
15:5.6 (171.1) 4. 원심적 행성 자손. 거대한 태양은 어느 성장 단계에서, 회전 속도가 크게 가속되면 대량의 물질을 던지기 시작하는데, 이것들은 나중에 뭉쳐서 부모 태양을 계속 도는 작은 세계들을 형성할지 모른다.
15:5.7 (171.2) 5. 인력 부족 구체. 개별 태양의 크기에는 위험한 한계가 있다. 한 태양이 이 한계에 다다르면, 그 회전 속도가 줄어들지 않으면, 갈라지게 되어 있다. 태양 분열이 일어나고, 이 종류의 새로운 2중성이 태어난다. 이 거대한 분열의 부산물로서, 나중에 수많은 작은 행성이 형성될 수도 있다.
15:5.8 (171.3) 6. 수축하는 별. 작은 체계에서, 변두리의 가장 큰 행성은 때때로 그 이웃 세계들을 끌어당기며 한편 태양에 가까운 행성들은 태양으로 마지막 돌진을 시작한다. 너희 태양계에서, 그러한 종말은 태양이 안쪽의 네 행성을 회수하고, 한편 큰 행성, 목성이 나머지 세계들을 사로잡아서 몹시 커지게 될 것을 뜻한다. 한 태양계의 그러한 종말은 크기가 다른 두 개의 인접한 태양을 생산하며, 이것은 2중성이 생기는 한 형태이다. 바깥에 별이 많은 초우주 집합체의 변두리를 제외하고 그러한 이변은 흔치 않다.
15:5.9 (171.4) 7. 누적된 구체. 공간에서 떠도는 광대한 양의 물질로부터 작은 행성들이 천천히 누적될 수도 있다. 이 행성들은 운석의 부착과 사소한 충돌로 말미암아 커진다. 어느 공간 구역에서는 이렇게 행성의 출산에 조건이 유리하다. 사람이 사는 많은 세계가 그러한 기원을 가졌다.
15:5.10 (171.5) 밀도가 높은 어떤 어두운 섬들은 공간에서 변하는 에너지가 누적되어 직접 생기는 결과이다. 이 어두운 섬들의 또 다른 집단은 차가운 물질, 곧 공간을 통해서 떠도는 단순한 조각과 운석들이 대량으로 축적됨으로 생겨 왔다. 이러한 물질 집합체들은 한 번도 뜨거운 적이 없으며, 밀도 외에는 그 구성이 유란시아와 아주 비슷하다.
15:5.11 (171.6) 8. 타 버린 태양. 공간에 있는 어떤 어두운 섬들은 타 버린 고립된 태양이며, 가지고 있던 공간 에너지를 다 발산해 버렸다. 조직된 물질 단위는 완전히 응축되어, 사실상 완전한 고체화에 가깝다. 이렇게 대단히 응축된 물질의 거대한 덩어리가 공간 회로에서 다시 충전되어서, 충돌이나 그와 비슷하게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 어떤 우주 사건을 겪고 나서, 새로이 우주에서 활동하는 주기를 위해 준비되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
15:5.12 (171.7) 9. 충돌 구체. 두텁게 모여 있는 성단의 지역에서는, 충돌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그러한 천문학적 재조정에는 엄청난 에너지 변화와 물질의 변질이 뒤따른다. 죽은 태양과 충돌하는 것은 광범한 에너지 변동을 일으키는 데 특별히 영향력을 미친다. 충돌로 생기는 조각들은, 흔히 필사자가 거주하기에 적응된 행성 무리를 나중에 형성하는 물질 핵심을 구성한다.
15:5.13 (172.1) 10. 건축된 세계. 너희의 지역 우주 본부인 구원자별과 우리의 초우주 정부 자리가 있는 유버르사처럼, 이것들은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계획과 명세에 따라서 지은 세계이다.
15:5.14 (172.2) 태양을 생성하고 행성을 분리하는 수많은 다른 방법이 있다. 그러나 위에 말한 과정은 대다수의 별 체계와 행성 집단이 생겨나는 방법을 가리킨다. 별이 변형하고 행성이 진화되는 데 관계되는 모든 다양한 기법을 적고자 하면, 거의 1백 가지 다른 방법으로 태양이 형성되고 행성이 기원을 가지는 것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너희의 천문학자들이 하늘을 둘러보면서, 별이 진화하는 이 모든 형태를 가리키는 현상을 관찰할 터이지만, 작고 빛나지 않는 물질 덩어리들이 형성되는 증거를 탐지하는 일은 드물 것이다. 이것들은 광대한 물질 창조 가운데 가장 중요한 행성, 사람이 사는 행성으로서 쓰인다.
15:6.1 (172.3) 기원에 상관 없이, 공간의 다양한 구체들은 다음 대분과로 분류할 수 있다:
15:6.3 (172.5) 2. 공간에 있는 어두운 섬.
15:6.4 (172.6) 3. 작은 천체―혜성ㆍ운석ㆍ소행성.
15:6.7 (172.9) 건축된 구체들을 제쳐놓고, 모든 천체는 진화로 생겼으며, 신의 명령으로 생겨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진화적이고, 신이 창조한 많은 지적 존재와 궁극에 다다른 지적 존재들의 작업을 통하여, 시공 기법으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이 펼쳐졌다는 의미에서 진화적이다.
15:6.8 (172.10) 태양. 태양은 공간에, 모든 다양한 존재 단계에 있는 별이다. 더러는 혼자 진화하는 공간 체계이고, 더러는 2중성, 수축하거나 사라지는 행성 체계이다. 공간의 별들은 천 가지 이상의 다른 상태와 단계로 존재한다. 너희는 열을 내면서 빛을 내는 태양에 익숙하지만, 열이 없이 빛나는 태양도 있다.
15:6.9 (172.11) 하나의 보통 태양이 몇조(兆) 년 동안 줄곧 열과 빛을 낸다는 것은 각 물질 단위가 얼마나 광대한 에너지를 저장하고 있는가 잘 설명한다. 물질의 이 불가시한 분자들 속에 저장된 실제 에너지는 거의 상상할 수 없다. 타오르는 태양의 내부를 지배하는 굉장한 열 압력과 그에 관계된 에너지 활동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 에너지는 거의 모두 빛으로서 쓰일 수 있다. 또 다른 조건하에서 이 태양들은 확정된 공간 회로에서 자기들의 길로 오는 공간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변화시키고 내보낸다. 태양 발전기는 여러 단계의 물질 에너지와 온갖 형태의 물질을 끌어당기고 나중에 분산한다. 이 방법으로 태양들은 에너지를 순환하는 지방(地方) 가속기로서 쓰이며, 자동으로 동력을 통제하는 정거장으로 작용한다.
15:6.10 (172.12) 오르본톤 초우주는 10조가 넘는 타오르는 태양들의 빛을 받고 따듯하게 된다. 이 태양들은 너희가 지켜볼 수 있는 천문 체계의 별이다. 2조개가 넘는 태양들은 너무 멀고 너무 작아서 유란시아에서는 결코 볼 수 없다. 그러나 너희 세계의 대양(大洋)에 있는 물을 컵으로 센다면, 그 만큼 많은 수의 태양이 총우주에 있다.
15:6.11 (173.1) 공간의 어두운 섬. 이 섬들은 죽은 태양과 기타 빛과 열이 없는 큰 물질 집합체이다. 어두운 섬은 때때로 그 질량이 굉장히 크며, 우주의 균형과 에너지의 조종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다. 이 큰 덩어리 중에 어떤 것의 밀도는 거의 믿을 수 없이 높다. 이 커다란 질량의 집합체는 이 어두운 섬들로 하여금, 이웃의 큰 체계들을 실질적 끈으로 붙들어 놓는 강력한 균형 바퀴로서 작용하게 만든다. 이 어두운 섬들은 많은 별자리에서 인력의 세력 균형을 유지한다. 이 섬들이 없으면 이웃의 태양들 속으로 빠르게 파멸로 뛰어들 많은 물리 체계가, 보호자인 이 어두운 섬들의 인력 손아귀에 단단히 잡혀 있다. 이 기능 때문에, 우리는 어두운 섬들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우리는 빛을 내는 천체들의 인력을 재어 왔고, 따라서 공간에 있는 어두운 섬들의 정확한 크기와 위치를 계산할 수 있으며, 이 섬들은 일정한 체계를 그 행로에 단단히 잡아 두도록 아주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15:6.12 (173.2) 작은 천체. 공간에서 떠돌며 진화하는 운석(隕石)을 비롯하여 다른 작은 물질 분자들은 굉장한 에너지와 물질 내용을 가진 집합체를 구성한다.
15:6.13 (173.3) 많은 혜성(彗星)은 어미인 태양의 바퀴가 낳은, 정착되지 않은 야생 자식이며, 차츰 중심에 지배하는 태양의 통제 밑에 들어온다. 혜성도 수많은 다른 기원을 가진다. 혜성의 꼬리는 잡아당기는 물체나 태양의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상당히 팽창된 가스의 전기 반응 때문이며, 또 태양에서 방사되어 나오는 빛, 그리고 다른 에너지의 실제 압력 때문이다. 이 현상은 빛의 실체와 그에 관련된 에너지를 분명히 증명하며, 빛이 무게가 있음을 보여준다. 빛은 실재하는 물질이고, 단지 가상된 에테르의 물결이 아니다.
15:6.14 (173.4) 행성. 행성들은 한 태양이나 어떤 다른 천체 둘레의 궤도를 따르는, 좀더 큰 물질의 집합체이다. 행성의 크기는 소행성으로부터 굉장히 큰 기체ㆍ액체, 또는 고체로 된 구체들에 이른다. 떠다니는 공간 물질의 집합으로 만들어진 추운 세계들은, 어쩌다가 가까이 있는 태양과 적당한 관계에 있을 때, 지적인 주민을 품기에 좀더 이상적인 행성이다. 죽은 태양은, 일반적으로 생명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다. 생생하고 빛나는 태양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게다가 너무 부피가 크며, 표면에 인력이 엄청나다.
15:6.15 (173.5) 너희 초우주에는 추운 행성 40개 중 하나에도 너희 계급의 존재가 살 수 없다. 물론, 과열된 태양과 가장자리의 얼어붙은 세계들은 고등 생명을 품기에 적당하지 않다. 너희 태양계에는 지금 세 행성만 생명의 보금자리가 되기에 적당하다. 유란시아의 크기와 밀도와 위치는 여러 모로 사람이 살기에 이상적이다.
15:6.16 (173.6) 물리적 에너지가 행동하는 법칙은 기본적으로 보편성이 있으나, 지역 영향은 개별 행성 및 지역 체계를 지배하는 물리적 조건과 많은 상관이 있다. 거의 끝없이 다채로운 생물 생명 및 다른 생물이 나타나는 것은 셀 수 없이 많은 공간 세계의 특징이다. 그러나 한 주어진 체계 안에서, 관계 있는 세계들의 집단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고, 한편 지적(知的) 생명의 우주 원본이 있기도 하다. 같은 물리적 회로에 속하고 우주들의 궤도를 끝없이 휙 돌면서 서로를 가깝게 따르는 행성 체계들 사이에는 물리적 관계가 있다.
15:7.1 (174.1) 각 초우주 정부는, 그 공간 구역에 있는 진화 우주들의 중심 가까이에서 주관한다. 한편 그 정부는 주문받아서 만든 한 세계를 차지하며, 인가받은 성격자들로 채워져 있다. 이 본부 세계들은 건축된 구체, 곧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특정하게 지어진 천체이다. 근처에 있는 태양들의 빛을 나눠받기는 하지만, 이 구체들은 따로 조명되고 따듯하게 된다. 각 구체는 파라다이스의 위성들처럼, 열이 나지 않는 빛을 비쳐 주는 태양이 있고, 한편 각자에게 구체의 표면 가까이 있는 어떤 에너지 흐름의 순환으로 열을 공급받는다. 이 본부 세계들은 각 초우주의 천문학적 중심 가까이 자리잡은, 더 큰 체계들 중 하나에 소속된다.
15:7.2 (174.2) 시간은 초우주의 본부에서 표준화되어 있다. 오르본톤 초우주의 표준일은 유란시아 시간으로 거의 30일이며, 오르본톤의 1년은 1백 표준일이다. 이 유버르사의 한해는 제7 초우주에서 표준이고, 유란시아 시간으로 3천일에서 22분이 모자라며, 너희의 햇수로 따져서, 약 8과 5분의 1년이 된다.
15:7.3 (174.3) 일곱 초우주의 본부 세계들은, 중심에 있는 완전한 원본, 곧 파라다이스의 성질과 위엄을 따른다. 실제로, 본부 세계들은 모두 천국 같다. 본부 세계들은 정말로 하늘 같은 거처이며, 예루셈으로부터 가운데 섬에 이르기까지, 물질적 크기, 상물질 아름다움, 영적 영화로움이 더해진다. 이러한 본부 세계의 위성들도 모두 건축된 구체이다.
15:7.4 (174.4) 여러 본부 세계에는 물질 창조와 영적 창조의 모든 단계가 마련되어 있다. 모든 종류의 물질ㆍ상물질ㆍ영적 존재가 우주의 이 재회 세계에서 편안히 지낸다. 필사 인간이 우주를 올라갈 때, 물질 영역으로부터 영적 세계로 지나가면서, 예전의 존재 수준을 이해하는 마음이나 그 즐거움을 결코 잃지 않는다.
15:7.5 (174.5) 예루셈은 너희 사타니아 지역 체계의 본부이고, 일곱 과도기 문화 세계가 있다. 이 세계들은 각자 일곱 위성에 둘러싸여 있고, 이 위성들 중에 상물질로서 억류되는 일곱 저택 세계가 있는데, 이곳은 사람이 죽은 뒤에 첫 거처이다. 하늘이라는 용어가 유란시아에서 쓰이다시피, 처음 저택 세계는 처음 하늘이라 부르고, 그런 식으로 일곱째까지 계속하여, 하늘은 때때로 이 일곱 저택 세계를 의미했다.
15:7.6 (174.6) 에덴시아는 너희 놀라시아덱 별자리의 본부이며, 친교하는 교양과 훈련을 담당하는 70개 위성이 있다. 하늘 가는 자들은 인격을 자극하고 통일하고 실현하는 예루셈 체제를 마치고 난 뒤에 거기에 머무른다.
15:7.7 (174.7) 구원자별은 너희 지역 우주 네바돈의 서울이고, 10개 대학 집단에 둘러싸여 있으며, 이것은 각자 49 구체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은 자기 별자리에서 사교 과정을 마치고 난 뒤에, 여기서부터 영적 변화를 겪는다.
15:7.8 (174.8) 제3 U-소서울은 너희 엔사 소구역 본부이고, 승천 생애의 상급 물리적 연구를 담당하는 일곱 구체에 둘러싸여 있다.
15:7.9 (174.9) 제5 U-대서울은 너희 스플랜돈 대구역의 본부이고, 초우주의 진보하는 지적 훈련을 담당하는 70 구체에 둘러싸여 있다.
15:7.10 (175.1) 유버르사는 너희 초우주 오르본톤의 본부이며, 의지를 가진 하늘 가는 인간에게 상급의 영적 훈련을 시키는 높은 일곱 대학이 이를 바로 둘러싼다. 놀라운 일곱 구체 집단은 각각 특화된 70 세계로 구성되어 있고, 이 세계들은 우주 훈련과 영적 교양에 전념하는, 수천에 이르는 충만한 단체와 조직을 포함한다. 여기서 시간 순례자는 하보나로 가는 긴 비행에 대비하기 위하여, 다시 교육받고 다시 검사받는다. 관련된 이 세계들에서, 도착하는 시간 순례자는 언제나 영접되지만, 떠나는 졸업생은 언제나 유버르사 기슭에서 하보나로 직접 파송된다.
15:7.11 (175.2) 유버르사는 대략 1조(兆)에 이르는 세계, 이미 사람이 살거나 살 수 있는 세계들의 영적 본부요 행정 본부이다. 오르본톤 서울의 영광과 장려함과 완전함은 어떤 시공 우주의 경이도 뛰어넘는다.
15:7.12 (175.3) 계획된 지역 우주와 그 구성 부분들이 모두 자리잡으면, 일곱 초우주에는 5천억보다 조금 적은 수의 건축된 세계가 있게 될 것이다.
15:8.1 (175.4) 초우주의 본부 구체들은 그 다양한 구역을 위해서 동력 에너지를 규제하는 효과적 장치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어져 있고, 구성 분자인 지역 우주들까지 에너지를 향하게 하는 초점으로 쓰인다. 본부 구체들은 조직된 공간을 순환하는 물리적 에너지의 균형을 잡고 통제하는 데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15:8.2 (175.5) 초우주의 동력 중심과 물리 통제자들이 연장된 규제 기능을 수행하며, 이들은 각자 이 명백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생명 있는 지적 존재와 반(半) 살아 있는 지적 존재이다. 이 동력 중심과 통제자들은 이해하기 힘들다. 낮은 계급은 의지를 표현하지 않는데, 그들은 의지가 없고, 선택하지도 않으며, 그들의 기능은 아주 영리하지만, 겉보기에 자동이며 상당히 전문화된 조직에 본래부터 있다. 초우주의 동력 중심과 물리 통제자들은 우주력(宇宙力) 분야를 구성하는 30개 에너지 체계를 지휘하고 어느 정도 통제하는 일을 맡는다. 유버르사의 동력 중심들이 관리하는 물리적 에너지 회로는 초우주를 한 바퀴 도는 데 9억 6천 8백만년보다 조금 더 걸린다.
15:8.3 (175.6) 생성되는 에너지는 내용이 있고 무게가 있다. 하지만 무게는 회전 속도, 질량, 반인력에 따라서, 언제나 달라진다. 물질의 질량은 에너지의 속도를 늦추는 경향이 있고, 어디에나 있는 에너지 속도는 다음을 나타낸다: 초기의 주어진 속도에서, 이동 중에 부딪치는 질량으로 인한 지연을 빼고, 초우주의 살아 있는 에너지 통제자의 규제하는 기능, 그리고 근처에 상당히 가열되거나 무거운 전하(電荷)를 가진 물체들의 물리적 영향을 더한 것이다.
15:8.4 (175.7) 물질과 에너지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우주 계획은 작은 물질 단위들을 늘 만들고 파괴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우주 동력 지휘자들은 다른 양의 에너지를 응축하고 억류하거나, 또는 확대하고 방출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15:8.5 (175.8) 지연하는 영향이 충분히 오래 지속될 경우에, 다음의 두 가지 요인이 없다면, 인력은 결국 모든 에너지를 물질로 바꿀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첫째, 에너지 통제자의 반인력(反引力) 영향 때문이고, 둘째로, 아주 뜨거운 별에서 발견되는 어떤 조건 밑에서, 그리고 응축된 물질로 이루어지고 큰 에너지를 가진 찬 물체 근처의 공간에서 어떤 특별한 조건 밑에서, 조직된 물질은 부서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15:8.6 (176.1) 물질이 지나치게 집합하고, 에너지의 균형을 깨뜨리고 물리적 동력 회로를 소모하려고 위협할 때, 공간에 있는 죽은 거성(巨星)들 사이에 충돌이 생겨서 누적된 인력의 집합을 한 순간에 완전히 분산함으로, 에너지를 지나치게 물질화하는 인력 자체의 계속된 경향이 무효가 되지 않는 한, 물리 통제자들이 개입한다. 이러한 충돌 사건에서 막대한 질량의 물질은 갑자기 가장 보기 드문 형태의 에너지로 바뀌며, 우주의 균형을 얻으려는 투쟁이 새로 시작된다. 결국, 큰 물리 체계들은 안정되고, 물리적으로 정착되며, 초우주의 균형되고 확정된 회로에 던져진다. 이 사건이 일어난 뒤에, 그러한 자리 잡힌 체계에서는 더 이상 충돌이나 주위를 놀라게 하는 다른 대변동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15:8.7 (176.2) 에너지가 늘어나는 기간에는 동력이 교란되며 열의 변동이 있고 전기(電氣)의 명시가 뒤따른다. 에너지가 줄어드는 기간에는 물질이 집합하고 응축하며, 아주 절묘하게 균형된 회로에서 통제를 벗어나는 경향이 늘어난다. 그 결과로 파도 같거나 충돌하는 조정이 따르며, 이것은 순환하는 에너지와 더 실질적으로 안정된 물질 사이의 균형을 재빨리 회복시킨다. 불타는 태양과 공간에 있는 어두운 섬들이 일으킬 듯한 그러한 작용을 예측하고 그밖에 이해하는 것은 하늘의 별 관측자들이 맡는 임무의 하나이다.
15:8.8 (176.3) 우리는 우주의 균형을 다스리는 법칙의 대부분을 인식할 수 있고, 우주의 안정에 관하여 많은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실제로 말해서, 우리의 예측은 믿을 만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에너지 통제와 물질 작용의 법칙에 온전히 복종하지 않는 어떤 물력에 우리는 언제나 부딪친다. 모든 물리 현상의 예측은, 우리가 파라다이스로부터 우주에서 바깥으로 나감에 따라서, 갈수록 더 힘들어진다. 파라다이스 통치자들이 친히 관리하는 테두리를 넘어서 갈 때, 우리는 확립된 표준, 그리고 근처에 있는 천문 체계의 물리적 현상과 순전히 관계된 관찰과 관련하여 얻은 체험에 따라서 계산할 수 없는 그런 현상과 마주친다. 일곱 초우주의 영역에서도, 우리는 물력 행위와 에너지 반응 가운데서 살고 있으며, 이러한 행위와 반응은 통일된 균형 상태에서 우리의 모든 영토를 침투하고 바깥 공간 지역 전체에 두루 뻗는다.
15:8.9 (176.4) 더 바깥으로 멀리 갈수록, 더욱 확실히, 우리는 변동하고 예측할 수 없는 현상에 부닥치는데, 이것은 절대자와 체험적 신들의 측량할 수 없는 계심과 활동의 특징을 어김없이 나타낸다. 그리고 이 여러 현상은 만물에 대한 어떤 보편적 전체 통제가 있음을 가리킴이 틀림없다.
15:8.10 (176.5) 겉으로 보기에 오르본톤 초우주는 쇠약해지고 있고 바깥의 우주들은 전례 없는 미래의 활동을 위하여 정돈되고 있는 듯하다. 중앙의 하보나 우주는 영원히 안정되어 있다. 인력과 열의 부재(추위)는 물질을 조직하고 한데 뭉치게 만든다. 열과 반인력은 물질을 분열시키고 에너지를 분산시킨다. 살아 있는 동력 지휘자와 물력 조직자들은 우주를 만들고, 부수고, 다시 만드는 끝없는 변형을 특별히 통제하고 영리하게 지휘하는 비결이다. 성운은 흩어지고, 태양은 타 버리고, 체계는 사라지고, 행성은 없어질지 모르지만, 우주는 쇠약해지지 않는다.
15:9.1 (176.6) 파라다이스의 보편적 회로들은 일곱 초우주 영역을 실제로 침투한다. 이러한 계심의 회로들은 다음과 같다: 우주의 아버지의 성격 인력, 영원한 아들의 영적 인력, 합동 행위자의 지성 인력, 그리고 영원한 섬의 물질 인력이다.
15:9.2 (177.1) 파라다이스의 보편적 회로, 그리고 절대자와 체험적 신들의 계심과 행동 외에도, 초우주 공간 수준 안에서 두 가지 에너지 회로 부문, 곧 분리된 동력이 작용하는데, 초우주 회로와 지역 우주 회로이다.
15:9.4 (177.3) 1. 파라다이스의 일곱 으뜸 영 가운데 한 분의 통일하는 지능 회로. 그러한 우주 지성 회로는 단일 초우주에 국한된다.
15:9.5 (177.4) 2. 각 초우주에서 일곱 거울 영의 비치는 봉사가 있는 회로.
15:9.6 (177.5) 3. 신비의 훈계자의 비밀 회로. 어떤 방법으로, 신별이 이 회로들을 파라다이스에 계신 우주의 아버지와 서로 관련시키고 연결해 준다.
15:9.7 (177.6) 4. 영원한 아들이 그의 파라다이스 아들들과 서로 교통하는 회로.
15:9.8 (177.7) 5. 무한한 영의 순간적 계심.
15:9.12 (177.11) 1. 파라다이스 아들이 수여하는 영, 수여 세계의 위로자. 진리의 영, 유란시아에 계신 미가엘의 영.
15:9.13 (177.12) 2. 신성한 봉사자, 지역 우주의 어머니 영, 너희 세계의 성령이 쓰는 회로.
15:9.14 (177.13) 3. 다양하게 활동하는 보조 지성 영들의 계심을 포함하여, 지능에게 봉사하는 지역 우주 회로.
15:9.15 (177.14) 한 지역 우주 안의 개별 및 통합된 회로가 초우주의 회로들과 구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지역 우주에 영적 조화가 생길때, 그러한 동일한 기능과 통일된 봉사가 실제로 행해질 때, 그 지역 우주는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회로로 즉시 넘어가며, 초월 우주의 완전히 연합된 영적 연방(聯邦)에 가입할 자격이 당장에 생긴다.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회의에 가입하는 필수 조건, 곧 초우주 연방의 회원 조건은 다음과 같다:
15:9.16 (177.15) 1. 물리적 안정. 한 지역 우주의 별과 행성들은 균형 상태에 있어야 한다. 즉시 별이 변형하는 시기는 지나야 한다. 그 우주는 뚜렷한 행로에서 진행하고 있어야 한다. 그 궤도는 안전하게, 마침내 안정되었어야 한다.
15:9.17 (177.16) 2. 영적 충성. 그러한 지역 우주의 사무를 주관하는 군주인, 하나님의 아들을 보편적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충성하는 상태가 존재해야 한다. 그 지역 우주 전체의 개별 행성ㆍ체계ㆍ별자리들 사이에 화목한 협동 상태가 생겼어야 한다.
15:9.18 (177.17) 너희의 지역 우주는, 초우주 정부의 알려진 영적 가족에서 회원 자격을 가지기는커녕, 초우주에서 물리적으로 안정된 등급에 속한다는 인정조차도 받지 못한다. 네바돈은 아직도 유버르사에 대표가 없지만, 내가 유버르사로부터 유란시아로 직접 온 것처럼, 초우주 정부에서 우리는 때때로 특별 임무를 띠고 네바돈의 여러 세계에 파송된다. 너희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제로, 우리는 너희의 지도자와 통치자들에게 될 수 있는 대로 모든 도움을 준다. 우리는 너희 우주가 초우주 가족의 관계된 우주들 안에 완전히 가입하도록 자격 갖추는 것을 보고 싶다.
15:10.1 (178.1) 초우주의 본부는 시공 영토의 높은 영적 정부가 있는 자리이다. 초우주 정부의 집행부는 삼위일체 회의에서 기원을 가지며, 최고의 감독을 맡는 일곱 으뜸 영 가운데 한 분이 직접 지휘한다. 그들은 파라다이스 권한을 가진 자리에 앉아서, 무한한 영의 일곱 특별 세계, 곧 파라다이스의 가장 바깥에 있는 위성들에 주둔하는 일곱 최상 집행자를 통하여 초우주들을 관리한다.
15:10.2 (178.2) 초우주 본부는 거울 영과 거울 영상 보조자들이 거하는 곳이다. 이 중간 위치로부터 이 놀라운 존재들은 엄청난 거울 작업을 행하며, 이렇게 위로 중앙 우주와 아래로 지역 우주들에게 봉사한다.
15:10.3 (178.3) 옛적부터 늘 계신 이 세 분이 각 초우주를 주관하며, 그들은 공동으로 초우주 정부의 최고 집행자이다. 그 집행 부서에서, 초우주 정부의 직원은 일곱 가지의 다른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15:10.11 (178.11) 옛적부터 늘 계신 이 세 분은 10억 명의 지혜 완성자 군단의 직접 도움을 받으며, 이들은 30억 명의 신성한 조언자와 관련되어 있다. 10억 명의 우주 검열자는 각 초우주의 행정에 소속된다. 이 세 집단은 동급의 삼위일체 성격자이고,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 직접, 신성한 기원이 있다.
15:10.12 (178.12) 나머지 세 계급, 곧 막강한 사자, 고등 권위자, 이름도 번호도 없는 자는 영화롭게 된 하늘 가는 필사자이다. 이 여러 계급에서 처음 된 자들은 그랜드판다 시절에 승천 제도를 통해서 올라오고 하보나를 거쳐갔다. 파라다이스에 이르고 나서, 그들은 최후 군단에 소집되었고,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품에 안겼으며, 그 뒤에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을 위한 고귀한 근무에 임명되었다. 이 세 계급은 한 등급으로서, 2중 기원을 가졌지만 지금은 삼위일체를 위해 근무하는, 삼위일체를 체험한 달성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초우주 정부의 집행부는 확대되어 영화롭고 완전하게 된 자녀, 진화 세계 출신의 자녀를 포함하였다.
15:10.13 (178.13) 초우주에서 나란히 있는 회의는 앞에 언급한 일곱 집행부 집단과 다음의 구역 통치자 및 다른 지역 감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15:10.14 (179.1) 1. 늘 완전한 이―초우주 대구역의 통치자.
15:10.15 (179.2) 2. 요즘부터 늘 계신 이―초우주 소구역의 지휘자.
15:10.16 (179.3) 3. 늘 하나된 이―지역 우주 통치자에게 조언하는 파라다이스 고문.
15:10.17 (179.4) 4. 늘 충실한 이―별자리 정부를 통치하는 최고자들의 파라다이스 상담자.
15:10.18 (179.5) 5. 초우주 본부에서 우연히 근무하는 삼위일체 교육 아들.
15:10.19 (179.6) 6. 초우주 본부에 우연히 있는 영원부터 늘 계신 이.
15:10.20 (179.7) 7. 일곱 거울 영상 보조자―일곱 거울 영의 대변자, 그리고 이들을 통하여 파라다이스의 일곱 으뜸 영을 대표하는 자들.
15:10.21 (179.8) 거울 영상 보조자는 또한, 초우주 정부에서 영향력이 있지만 현재 여러 가지 이유로 개인 자격으로 완전히 활동하지 않는 수많은 존재 무리의 대표로서 활동한다. 이 집단에 포함되는 자들은 다음과 같다: 초우주에서 최상 존재의 진화하는 성격 모습, 최상위의 무제한 감독자, 궁극위의 제한된 대관, 위엄자의 이름없는 연락 반영자, 영원한 아들의 초월 성격 영 대표자들이다.
15:10.22 (179.9) 초우주의 여러 본부 세계에서는 거의 언제나, 모든 집단의 창조된 존재를 대표하는 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막강한 2품 천사, 그리고 무한한 영의 광대한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이 초우주에서 일상적인 봉사 작업을 수행한다. 초우주의 행정ㆍ통제ㆍ봉사 및 집행 판결을 담당하는 이 놀라운 중심들의 작업에서 효과적 봉사, 현명한 관리, 사랑의 봉사, 정당한 판결을 위하여, 우주 생명이 사는 모든 구체의 지적 존재들이 서로 섞인다.
15:10.23 (179.10) 여러 초우주는 어떤 종류의 대사(大使) 대표부도 두지 않는데, 그들이 완전히 서로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일곱 으뜸 영이 유지하는 파라다이스 정보 교환소를 통해서, 그들은 겨우 서로의 일에 관하여 소식을 듣는다. 우주 창조의 다른 구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상관 없이, 자체 초우주의 복지를 위하여, 초우주 통치자들은 신다운 지혜를 가진 자문 회의에서 일한다. 진화하는 체험적 최상 존재의 성격과 통치권이 완전히 사실화됨으로 초우주 사이에 조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초우주들의 이러한 고립은 계속될 것이다.
15:11.1 (179.11) 완전한 독재 정치와 진화로 이룬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자들이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은 유버르사와 같은 세계들에서 일어난다. 초우주 정부의 집행부는 완전의 영역에서 기원이 생긴다. 진화하는 우주들이 한창 번성하면서 입법부가 싹튼다.
15:11.2 (179.12) 초우주의 심의 집회는 본부 세계에 국한된다. 이 입법 회의, 곧 자문 회의는 일곱 의회(議會)로 구성되어 있고, 초우주 회의에 가입된 모든 지역 우주는 각 의회로 보내려고, 본토의 대표자 하나를 뽑는다. 하보나로 이동하도록 인가 받고 유버르사에 머무르는 졸업생, 오르본톤에서 하늘 가는 순례 졸업생 가운데서 그러한 지역 우주의 고등 회의가 이 대표자들을 뽑는다. 평균 근무 기간은 초우주 표준 시간으로 약 1백년이다.
15:11.3 (180.1) 나는 오르본톤 집행자들과 유버르사 집회 사이에 한 번이라도 의견 차이가 생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우리 초우주의 역사에서, 초우주 정부의 집행부가 수행하기 꺼려하는 추천 항목조차 심의 집회가 가결한 적이 아직 한 번도 없다. 언제나 가장 완전한 조화와 실용적 협정이 지배했고, 이 모든 것은 진화 존재들이 완전하게 된 지혜의 높이까지 정말로 다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며, 완전하게 된 지혜는 이들에게 완전한 기원과 신다운 성품을 가진 성격자들과 사귈 자격을 준다. 초우주 본부에 심의하는 여러 집회가 있는 것은 우주의 아버지와 그의 영원한 아들의 광대한 진화 개념 전체에 담긴 슬기를 나타내며, 그것이 궁극에 승리할 것을 예시한다.
15:12.1 (180.2) 유버르사 정부의 집행 및 심의 기관에 대하여 말할 때, 어떤 형태의 유란시아 국가 정부와 비슷한 점에 비추어서, 너희는 우리가 셋째 분과, 곧 사법부를 가졌음이 틀림없다고 추론할까 싶은데, 우리는 사법부를 가졌다. 그러나 사법부는 독립된 직원이 없다. 우리의 법정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 있다: 사례(事例)의 성질과 중요성에 따라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나, 지혜 완성자나, 또는 신성한 조언자 한 분이 주관한다. 검열자들이 한 개인ㆍ행성ㆍ체계ㆍ별자리, 또는 우주에 유리하거나 불리한 증거를 제시하고 풀이한다. 막강한 사자들이 시간 세계의 자녀들과 진화하는 행성의 변론을 제공하는데, 그들은 지역 우주 및 체계들에 대하여 초우주의 공식 관찰자이다. 고등 권위자들이 상급 정부의 태도를 설명한다. 그리고 보통 경우에, 이름도 번호도 없는 자들과 심의하는 회의에서 뽑은 공감하는 성격자들의 무리가 절반씩 차지하는, 크기가 다른 위원회에서 판결문이 작성된다.
15:12.2 (180.3)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법정은 구성하는 모든 우주에 영적 판결을 내리기 위하여 재심(再審)하는 고등 재판소이다. 지역 우주의 군주 아들은 자신의 영토 안에서 제일 높으며, 의지를 가진 인간의 소멸에 관계되는 일을 제외하고, 군주 아들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상담과 판결을 받으려고 문제를 자진해서 제출할 경우에만 초우주 정부에 지배된다. 판결하는 명령은 지역 우주에서 시작되지만, 의지를 가진 인간을 말소하는 데 관계되는 선고는 반드시 초우주 본부에서 작성되고 거기에서 집행된다. 지역 우주의 아들들은 사람이 살아남는 것을 선포할 수 있지만, 오로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영원한 생사(生死) 문제에 집행적 판단을 내려도 좋다.
15:12.3 (180.4) 재판이, 곧 증거의 제시가, 필요없는 모든 문제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나 그 동료들이 판결을 내리며, 이러한 판결은 언제나 만장 일치이다. 여기서 우리는 완전한 회의를 다루고 있다. 이 최상ㆍ최고의 법정이 내리는 선고에는 의견의 불일치도 소수(小數)의 의견도 없다.
15:12.4 (180.5) 거의 예외 없이, 초우주 정부들은 각자의 영토에 있는 모든 사물과 존재에 대하여 사법권을 행사한다. 초우주 당국의 판결과 결정에는 항소(抗訴)가 생기지 않는데, 이는 이러한 결정이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 그리고 파라다이스로부터 관계된 초우주의 운명을 주관하는 으뜸 영이 찬성한 의견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15:13.1 (181.1) 대구역은 한 초우주의 10분의 1이며, 1백 소구역, 1만 지역 우주, 사람이 살 수 있는 약 1천억 세계로 이루어진다. 늘 완전한 이 세 분이 대구역을 관리하는데, 그들은 최상 삼위일체 성격자이다.
15:13.2 (181.2) 늘 완전한 이들의 법정은, 그들이 그 영역에 영적 심판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법정과 비슷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 대구역 정부의 일은 주로, 방대한 창조의 지적(知的) 상태와 관계된다. 그 영역의 영적 행정이나 파라다이스 통치자들이 필사자 승천 계획을 수행하는 것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일, 일상적이고 행정의 성질이 있는, 초우주에서 중요한 모든 일을 대구역이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법정에 보고하기 위하여, 유보하고 판결하고 처리하고 요약한다. 대구역 정부의 인사(人事)는 초우주 정부의 인사와 별다르지 않다.
15:13.3 (181.3) 유버르사의 웅장한 위성들이 하보나로 가기 위한 너희의 마지막 영적 준비에 관여하는 것과 같이, 제5 U-대서울의 70 위성은 너희 초우주의 지적 훈련과 개발에 전념한다. 오르본톤 전체로부터, 영원의 생애를 향하여 더욱 진보하려는, 시간 세계의 필사자를 준비시키기 위하여 지치지 않고 일하는 현자들이 여기에 함께 모여 있다. 하늘 가는 필사자가 겪는 이 훈련의 대부분은 70 연구 세계에서 행해진다.
15:13.4 (181.4) 요즘부터 늘 계신 이 세 분이 소구역 정부를 주관한다. 그들의 행정부는 주로 구성 분자인 지역 우주들의 물리적 통제ㆍ통일ㆍ안정, 그리고 일상적 행정의 조정에 관여한다. 각 소구역은 1백 소우주, 1만 별자리, 1백만 체계, 곧 사람이 살 수 있는 약 10억 세계를 포함한다.
15:13.5 (181.5) 소구역 본부 세계들은 물리 통제사들의 거대한 회합 장소이다. 이 본부 세계들은 초우주에 입학하는 학교인 일곱 교육 구체에 둘러싸여 있고, 이 구체들은 온 우주에 관하여 물리적 지식과 행정 지식을 훈련시키는 중심이다.
15:13.6 (181.6) 소구역 정부의 행정가들은 대구역 통치자의 직계 관할 밑에 있다. 요즘부터 늘 계신 이들은 지역 우주의 본부 구체에서 삼위일체 관찰자나 고문으로서 주둔하는 늘 하나된 이들로부터, 그리고 별자리 본부에서 최고자들의 자문 회의에 비슷하게 부속된 늘 충실한 이들로부터 초우주까지 올라오는 모든 관측 보고서를 받고, 모든 추천을 조정한다. 그러한 보고서는 모두, 대구역에 계시는 늘 완전한 이들에게 전달되며, 나중에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법정에 전해진다. 그래서 삼위일체 체제는 지역 우주의 별자리로부터 초우주 본부까지 연장된다. 지역 체계의 본부에는 삼위일체 대표들이 없다.
15:14.1 (181.7) 일곱 초우주의 진화에는 일곱 가지 큰 목적이 펼쳐지고 있다. 초우주 진화에서 각 주요 목적은 일곱 초우주 중에 오직 한 군데에서 완전히 표현되며, 따라서 각 초우주는 특별한 기능과 특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15:14.2 (182.1) 제7 초우주 오르본톤은 너희 지역 우주가 속하는 초우주이며, 주로 그 영역의 필사자들에게 엄청나게 아낌없이 자비로운 봉사를 베푸는 것 때문에 이름이 알려져 있다. 이 초우주는 자비로 부드러워진 응보(應報)가 지배하고, 인내(忍耐)로 조절된 권력이 다스리는 그 방법 때문에 이름이 나 있고, 한편 영원한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서 시간을 아낌없이 쓴다. 오르본톤은 사랑과 자비가 우주에서 전시된 것이다.
15:14.3 (182.2) 그러나 오르본톤에서 펼쳐지는 진화의 목적의 참 성질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설명하기 아주 어렵지만, 다음과 같은 말로 제시해도 좋다. 우리는 이 초월 창조에서, 관련된 여섯 초월 창조에서 나타난 우주 진화의 여섯 가지 특유한 목적이, 여기서 전체의 의미로서 서로 연결된다고 느낀다. 바로 이 때문에, 진화되고 완전히 성격화된 최상위 하나님이 먼 앞날에, 유버르사로부터, 그때 성취된 전능한 군주권의 모든 체험적 위엄을 가지고, 완전하게 된 일곱 초우주를 다스릴 것이라 우리는 때때로 추측해 왔다.
15:14.4 (182.3) 오르본톤이 특유한 성질과 개별 운명을 가진 것 같이, 그와 관계된 여섯 초우주도 각자 그렇다. 그러나 오르본톤에서 일어나고 있는 아주 많은 일이 너희에게 밝혀지지 않는다. 오르본톤 생명에서 밝혀지지 않은 이러한 모습 가운데, 허다한 것은 어떤 다른 초우주에서 아주 완전한 표현을 찾을 것이다. 초우주를 진화시키는 일곱 가지 목적은 일곱 초우주 모두에 두루 작용하지만, 각 초월 창조는 이 가운데 오직 한 가지 목적만 완전히 표현할 것이다. 이 초우주의 목적을 더욱 이해하려면, 너희가 알아듣지 못하는 많은 것이 노출되어야 하겠고, 그렇게 했을 때에도, 너희는 별로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 이야기 전체가 거대한 창조를 얼핏 훑어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너희 세계와 지역 체계는 그 창조의 일부분이다.
15:14.5 (182.4) 너희의 세계는 유란시아라고 부르고, 사타니아 행성 집단, 곧 사타니아 체계에서 606번째이다. 이 체계에는 현재, 사람 사는 세계가 619개 있고, 2백이 넘는 다른 행성들이 미래 시대에 언젠가 사람 사는 세계가 되는 방향으로 순조롭게 진화하고 있다.
15:14.6 (182.5) 사타니아는 예루셈이라고 부르는 본부 세계가 있고, 사타니아는 놀라시아덱 별자리에서 24번 체계이다. 너희의 놀라시아덱 별자리는 1백 지역 체계로 이루어져 있고, 에덴시아라고 부르는 본부 세계를 가지고 있다. 네바돈 지역 우주는 1백 별자리로 구성되어 있고, 구원자별로서 알려진 서울이 있다. 네바돈 우주는 엔사 소구역에서 84번이다.
15:14.7 (182.6) 엔사 소구역은 1백 지역 우주로 구성되어 있고, 제3 U-소서울이라고 부르는 수도가 있다. 이 소구역은 스플랜돈 대구역에서 3번이다. 스플랜돈은 1백 소구역으로 구성되어 있고, 제5 U-대서울이라고 부르는 본부 세계가 있으며, 대우주에서 일곱째 부분, 오르본톤 초우주에서 다섯째 대구역이다. 이처럼 너희는 온 우주의 조직 및 행정 계획에서 너희 행성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다.
15:14.8 (182.7) 너희 세계 유란시아의 대우주 번호는 5,342,482,337,666이다. 이것이 유버르사와 파라다이스에 있는 등록 번호, 사람이 사는 세계들의 목록에서 너희의 번호이다. 나는 그 물리적 구체의 등록 번호도 알고 있지만, 그 규모가 특별히 크니까, 필사자의 생각에는 실용적 의미가 거의 없다.
15:14.9 (183.1) 너희의 행성은 거대한 우주의 한 구성원이다. 너희는 거의 무한한 세계들의 집단에 속하지만, 마치 너희의 구체가 모든 존재 중에서 사람이 사는 유일한 세계인 것처럼, 똑같이 정밀하게 관리되고 사랑으로 양육되고 있다.
16:0.1 (184.1) 파라다이스의 일곱 으뜸 영은 무한한 영이 낳은 주요 성격자이다. 자아를 복사(複寫)하는 이 일곱 번의 창조 행위에서, 무한한 영은 신 세 분이 사실로 존재하는 데 수학적으로 본래 있는 연합 가능성을 다 소모해버렸다. 으뜸 영을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 가능했더라면 생산하였을 터이나, 꼭 일곱 가지 연합 가능성이 있을 뿐이며, 세 신에게는 오로지 일곱 가지 가능성만 본래부터 있다. 그리고 이것이 어째서 우주가 일곱 대부문을 이루어 운영되는가, 어째서 일곱이라는 수가 그 조직과 행정에서 기초적으로 근본이 되는가 설명해 준다.
16:0.2 (184.2) 이처럼 일곱 으뜸 영은 다음 일곱 가지 모습에 기원을 가지며, 이로부터 개별 특징을 뽑아낸다:
16:0.10 (184.10) 으뜸 영들이 창조될 때 아버지와 아들이 무슨 활동을 했는지 우리는 거의 아는 것이 없다. 그들은 겉보기에 무한한 영이 친히 활동하여 생긴 듯하지만,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이 모두 그들의 기원에 참여했다고 우리는 분명히 가르침을 받아 왔다.
16:0.11 (184.11) 영 성품과 성질 면에서 이 파라다이스의 일곱 영은 하나와 같지만, 신분의 모든 다른 면에서 그들은 서로 대단히 다르고, 초우주에서 그들이 활동한 결과는 각자의 개별 차이점이 뚜렷이 구별될 정도이다. 대우주의 일곱 구역의 모든 이후 계획은―그리고 바깥 공간에 있는 서로 상관되는 구역들조차―최상ㆍ궁극의 감독을 맡은 이 일곱 으뜸 영의 비영적 다양성에 따라서 조절되었다.
16:0.12 (184.12) 일곱 으뜸 영은 많은 기능이 있지만, 현재 그들의 특유한 분야는 일곱 초우주를 중심에서 감독하는 것이다. 각 으뜸 영은 거대한 물력의 초점이 되는 본부를 유지한다. 이 본부는 파라다이스 가장자리를 천천히 돌며, 언제나 직접 감독하는 초우주의 맞은 편에서, 그리고 특화된 그 동력을 통제하고 구역 에너지를 분배하는 파라다이스 초점에서 자리를 유지한다. 어느 한 초우주의 방사(放射) 형태의 경계선도 감독하는 으뜸 영의 파라다이스 본부에서 실제로 한 점에 모인다.
16:1.1 (185.1) 합동 창조자, 곧 무한한 영은 갈라지지 않은 신의 삼자 성격화를 마치는 데 필요하다. 이렇게 신이 세 가지로 성격화하는 데는 개별로, 또 연합하여 표현하는 일곱 가지 가능성이 본래부터 있다. 따라서 아버지ㆍ아들ㆍ영을 마땅히 표현하는 존재, 총명하고 영적 잠재성을 가진 존재들이 거하는 우주들을 창조하려는 나중의 계획은 일곱 으뜸 영의 성격화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신이 세 가지로 성격화하는 것을 절대 필연성이라 부르게 되었고, 한편 일곱 으뜸 영이 나타나는 것을 절대 이하의 필연성으로 보게 되었다.
16:1.2 (185.2) 일곱 으뜸 영은 도저히 세 가지 신을 표현한다고 할 수 없지만, 그들은 칠중 신의 영원한 초상이며, 이 칠중 신은 늘 계시는 세 분 신의 기능, 활동하고 결합하는 기능이다. 이 일곱 영으로 말미암아, 그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우주의 아버지나 영원한 아들이나 무한한 영, 아니면 어떤 둘의 결합도 그렇게 활동할 수 있다.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이 함께 행동할 때, 그들은 으뜸 영 7번을 통해서 활동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지만, 삼위일체로서 활동하지는 않는다. 단독으로, 그리고 집단으로, 으뜸 영들은, 어떤 가능한 신 기능도, 단독 기능과 몇 가지 기능도 대표하지만, 집합의 활동, 삼위일체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으뜸 영 7번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와 관련하여 몸소 활동하지 않으며, 바로 이것이 그가 최상 존재를 위해서 친히 활동할 수 있는 이유이다.
16:1.3 (185.3) 그러나 일곱 으뜸 영이 그들 개인의 권능과 초우주 권한을 가진 각자의 자리를 비우고, 파라다이스 신의 삼자일체 계심 앞에서 합동 행위자 둘레에 모이면, 그때 거기서, 진화하는 우주들에 대하여, 그 우주들 안에서, 그들은 나누어지지 않은 신―삼위일체―의 기능적 권능ㆍ슬기ㆍ권한을 집단으로 대표한다. 신의 일곱 가지 원초적 표현이 파라다이스에서 이렇게 연합되는 것은, 최상위와 궁극위 안에서 영원한 세 신의 모든 속성과 태도를 실제로 포함하며, 글자 그대로 둘러싼다. 모든 실용적 의도와 목적으로 볼 때, 일곱 으뜸 영은 그때 거기서, 총우주에 대하여, 그리고 총우주 안에서, 최상 궁극위의 기능적 영토를 포함한다.
16:1.4 (185.4)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한, 이 일곱 영은 영원한 세 분 신의 신성한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 절대자의 영원한 세 국면의 작용하는 계심과 직접 결합되었다는 증거를 우리는 탐지하지 못한다. 결합했을 때 대체로 유한 행동 분야라고 생각해도 좋은 범위 안에서, 으뜸 영들은 파라다이스 신들을 대표한다. 이 영역은 궁극의 것을 많이 품을지 모르지만, 절대적인 것을 품지는 않는다.
16:2.1 (185.5) 영원한 최초의 아들이 항상 수가 늘어나는 신다운 아들들의 몸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무한하고 신성한 영은 일곱 으뜸 영,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영 집단의 경로를 통해서 드러난다. 가장 가운데서, 무한한 영을 접근할 수 있지만, 파라다이스에 다다르는 자가 모두 그의 성격과 차별화된 계심을 즉시 분별할 수 있지는 않다. 그러나 중앙 우주에 도달하는 자는 누구나 일곱 으뜸 영 가운데 한 분, 곧 새로 도착한 공간 순례자의 고향인 초우주를 주관하는 분과 즉시 교통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한다.
16:2.2 (186.1) 파라다이스 아버지는 온 우주에게 오직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고, 한편 아버지와 아들은 오직 무한한 영을 통해서 합동으로 행동한다. 파라다이스와 하보나 바깥에서, 무한한 영은 오직 일곱 으뜸 영의 목소리로 말씀한다.
16:2.3 (186.2) 무한한 영은 파라다이스와 하보나 체계의 울타리 안에서 몸소 계시는 영향을 미친다. 다른 곳에서 무한한 영의 몸소 계심은 일곱 으뜸 영 가운데 한 분이 행사하고, 또 그를 통해서 일어난다. 따라서 어느 세계에나 어떤 개인 안에 셋째 근원 중심이 초우주 영으로 계신 것은 그 창조 부분을 감독하는 으뜸 영의 독특한 성품에 따라 조절된다. 거꾸로 말하면, 영 세력 및 지능의 통합된 선은 일곱 으뜸 영을 거쳐서, 신의 셋째 분에게 안으로 전달된다.
16:2.4 (186.3) 일곱 으뜸 영은 집단으로 셋째 근원 중심의 최상ㆍ궁극의 속성을 부여받았다. 각자가 개별로 이 자질을 취하는 한편, 오로지 집단으로 그들은 전능, 전지, 두루 계심의 속성을 나타낸다.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렇게 보편적으로 활동할 수 없다. 개체로서, 이 최상ㆍ궁극의 능력을 행사할 때 각자는 직접 감독하는 초우주에 몸소 국한되어 있다.
16:2.5 (186.4) 합동 행위자의 신성(神性)과 성격에 관해서 너희에게 일러준 모든 것이, 일곱 으뜸 영에게 똑같이, 완전히 적용된다. 그들의 신다운 자질에 따라서, 다르고 개별적으로 독특한 그들 성품의 방식으로, 그들은 아주 효과적으로 무한한 영을 대우주의 일곱 부분에 분배한다. 그러니까 일곱 분의 집합체에게 무한한 영의 어떤 이름을 적용하는 것도 마땅할 것이다. 모든 절대 이하 수준에서, 집단으로 그들은 합동 창조자와 하나이다.
16:3.1 (186.5) 일곱 으뜸 영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존재이지만, 뚜렷하게, 명백히 성격이 있다. 그들은 이름이 있지만, 우리는 번호로 소개하려고 한다. 그들은 무한한 영이 최초에 성격화한 자로서, 비슷하다. 그러나 삼자일체 신의 일곱 가지 가능한 연합의 근본적 표현으로서, 그들의 성품은 본질적으로 다양하다. 이 성품의 다양성은 초우주 경영의 차이를 결정한다. 이 일곱 으뜸 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도 좋다:
16:3.2 (186.6) 으뜸 영 1번. 특별한 방식으로, 이 영은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직접 대표이다. 그는 우주의 아버지의 권능ㆍ사랑ㆍ지혜의 독특하고 유능한 표현이다. 그는 신비의 훈계자의 우두머리에게 가까운 동료이자 고귀한 조언자이며, 이 우두머리는 신별에서 성격화된 조절자 학부를 주관하는 존재이다. 일곱 으뜸 영의 모든 관계에서, 우주의 아버지를 대변(代辯)하는 이는 언제나 으뜸 영 1번이다.
16:3.3 (186.7) 이 영은 제1 초우주를 주관하며, 무한한 영이 최초에 성격화한 신다운 성품을 어김없이 나타내는 한편, 그 성품은 우주의 아버지를 특별히 닮은 듯하다. 그는 제1 초우주 본부에서 일곱 거울 영과 언제나 몸소 연락을 가진다.
16:3.4 (187.1) 으뜸 영 2번. 이 영은 영원한 아들, 모든 창조 중에 첫 아들의 비할 데 없는 성품과 매력 있는 기질을 알맞게 나타낸다. 모든 계급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개인으로서, 또는 즐거운 집회에서, 거주(居住) 우주에 어쩌다가 있게 될 때는 언제나, 그는 이들과 항상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일곱 으뜸 영의 집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언제나 영원한 아들을 대변하고, 그를 위해서 말씀한다.
16:3.5 (187.2) 이 영은 2번 초우주의 운명을 지휘하며, 마치 영원한 아들이 하는 것처럼 이 광대한 영역을 다스린다. 제2 초우주의 서울에 자리잡은 일곱 거울 영과 언제나 연락을 가진다.
16:3.6 (187.3) 으뜸 영 3번. 이 영 성격자는 특별히 무한한 영을 닮았고, 무한한 영의 많은 높은 성격자들의 움직임과 일을 지휘한다. 그는 이들의 집회를 주관하며, 셋째 근원 중심에 순전한 기원을 가진 모든 성격자와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 일곱 으뜸 영이 회의할 때, 무한한 영을 언제나 대변하는 분은 으뜸 영 3번이다.
16:3.7 (187.4) 이 영은 3번 초우주를 책임지며, 마치 무한한 영이 하는 것처럼 이 지역의 사무를 처리한다. 제3 초우주 본부에서 거울 영들과 언제나 연락을 가진다.
16:3.8 (187.5) 으뜸 영 4번. 아버지와 아들의 통합된 성품을 취하면서, 이 으뜸 영은 일곱 으뜸 영 회의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정책과 과정에 관하여 결정하는 영향력을 미친다. 이 영은 무한한 영에 다다르고, 따라서 아들과 아버지를 만날 후보자가 된, 하늘 가는 존재들의 우두머리 지도자요 조언자이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에 기원을 가지는 거대한 성격자 집단을 보살핀다. 일곱 으뜸 영의 관계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대표할 필요가 있을 때, 말씀하는 분은 언제나 으뜸 영 4번이다.
16:3.9 (187.6)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의 속성을 특별히 연합하는 데 따라서, 이 영은 대우주의 넷째 부분을 보살핀다. 제4 초우주 본부에 있는 거울 영들과 언제나 몸소 연락을 유지한다.
16:3.10 (187.7) 으뜸 영 5번. 우주의 아버지와 무한한 영의 성품을 지극하게 혼합하는 이 신다운 성격자는, 동력 지휘자, 동력 중심, 물리 통제자로 알려진 거대한 집단의 존재들에게 조언자이다. 이 영은 또한 아버지와 합동 행위자에 기원을 가지는 모든 성격자를 보살핀다. 일곱 으뜸 영의 회의에서, 아버지와 영의 공동 태도에 대해 물음이 생길 때, 말씀하는 분은 언제나 으뜸 영 5번이다.
16:3.11 (187.8) 이 영은 우주의 아버지와 무한한 영의 통합된 행동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제5 초우주의 복지를 지도한다. 제5 초우주 본부에서 거울 영들과 언제나 연락을 가지고 있다.
16:3.12 (187.9) 으뜸 영 6번. 이 신다운 존재는 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의 통합된 성품을 나타내는 듯하다. 아들과 영이 공동으로 창조한 생물이 중앙 우주에서 모일 때, 그들의 조언자는 이 으뜸 영이다. 그리고 일곱 으뜸 영의 회의에서, 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이 공동으로 말씀할 필요가 있을 때는 언제나, 대답하는 분은 으뜸 영 6번이다.
16:3.13 (188.1) 이 영은 마치 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이 하는 것처럼, 제6 초우주의 사무를 지도한다. 그는 제6 초우주 본부에서 거울 영들과 언제나 연락을 가지고 있다.
16:3.14 (188.2) 으뜸 영 7번. 제7 초우주를 주관하는 영은 우주의 아버지, 영원한 아들, 무한한 영을 독특하게 골고루 나타내는 초상(肖像)이다. 일곱째 영은 삼자일체 기원을 가진 모든 존재를 돌보는 조언자이며, 또한 승천하는 모든 하보나 순례자, 곧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통합된 봉사를 통해서 영광의 뜰에 다다른 낮은 존재들에게 조언자요 지도자이기도 하다.
16:3.15 (188.3) 일곱째 으뜸 영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를 유기적으로 대표하지 않는다. 그의 성격과 영적 성품은, 합동 행위자가 무한한 세 분을 똑같은 비율로 나타낸 초상이며, 세 분의 신 연합은 바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요, 그와 같은 그들의 기능은 최상위 하나님의 성격 및 영적 성품의 근원이라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일곱째 으뜸 영은 진화하는 최상위의 영적 몸과 개인적ㆍ유기적 관계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으뜸 영들의 회의에서, 아버지ㆍ아들ㆍ영, 세 분의 통합된 성격의 태도를 나타내는 투표를 하거나, 최상 존재의 영적 태도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게 될 때, 활동하는 분은 으뜸 영 7번이다. 이처럼 그는 파라다이스에서 일곱 으뜸 영의 회의를 본래부터 주관하는 우두머리가 된다.
16:3.16 (188.4) 일곱 으뜸 영 가운데 어느 누구도 유기적으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를 대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칠중의 신으로서 뭉칠 때, 이 뭉침은, 신의 의미에서―개인적 의미가 아니라―삼위일체의 기능과 관련지을 수 있는 기능 수준에 상당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곱 영”은 기능 면에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와 관련지을 수 있다. 또한 이런 의미에서, 으뜸 영 7번은 가끔 삼위일체의 태도를 확인하여 말씀하거나, 또는 오히려 세 신의 연합된 태도, 곧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태도에 대하여 일곱 영의 연합된 태도를 대변하는 자로서 말씀한다.
16:3.17 (188.5) 따라서, 제7 으뜸 영의 여러 가지 기능은 아버지ㆍ아들ㆍ영의 개인적 성품을 통합한 초상(肖像)으로부터, 최상위 하나님의 개인적 태도를 대표하는 것을 포함하여,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신으로서 가진 태도를 노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이 주관하는 영은 비슷하게, 궁극위와 최상 궁극위의 태도를 표현한다.
16:3.18 (188.6) 나누어지지 않은 최상위 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 시간 세계에서 온 승천 후보자의 진보를 여러 자격으로 친히 후원하는 분은 으뜸 영 7번이다. 그러한 이해는 최상 삼위일체의 실존적 통치권을 파악하는 것을 포함하며, 이것은 최상위의 통일성을 인간이 깨닫도록 최상 존재의 성장하는 체험적 통치권 개념과 조정된다. 인간이 이 세 가지 요인을 깨닫는 것은 삼위일체의 실체를 하보나에서 이해하는 것과 같고, 시간 순례자에게 궁극에 삼위일체를 파악하고 무한한 세 분의 신을 발견하는 능력을 부여한다.
16:3.19 (188.7) 일곱째 으뜸 영은 하보나 순례자들이 최상위 하나님을 충분히 찾아낼 능력이 없는 것을 보상해 준다.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이 으뜸 영의 삼자일체 성품은 최상위의 영 몸을 드러낸다. 최상위의 몸과 연락이 불가능한 현재 우주 시대에, 으뜸 영 7번은 개인적 관계를 다루는 문제에서 하늘 가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활동한다. 그는 하늘 가는 모든 자가 영광의 중심에 다다를 때, 승천자가 분명히 알아보고 얼마큼 이해하는 하나의 높은 영 존재이다.
16:3.20 (189.1) 이 으뜸 영은 바로 우리의 창조 부분, 제7 초우주의 본부 유버르사에 있는 거울 영들과 언제나 연락을 가진다. 오르본톤에 있는 그의 행정부는 아버지ㆍ아들ㆍ영, 세 분의 신다운 성품을 나란히 섞은 놀라운 균형미를 드러낸다.
16:4.1 (189.2) 일곱 으뜸 영은 진화 우주에 대하여 무한한 영을 충분히 대표한다. 그들은 에너지ㆍ지성ㆍ영의 관계에서 셋째 근원 중심을 대표한다. 그들은 합동 행위자의 보편적 행정 통제를 담당하는, 조정하는 우두머리로서 활동하지만, 파라다이스 신들의 창조 행위에 기원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이 일곱 영이 삼자일체 신의 물리적 동력, 우주 지성, 영적 계심이 성격화된 것, “온 우주에 파송된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16:4.2 (189.3) 으뜸 영들은, 절대 수준을 제외하고, 우주의 모든 실체 수준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독특하다. 그러니까 그들은 모든 수준의 초우주 활동에서, 모든 단계의 행정 사무를 유능하고 완전하게 감독하는 자이다. 필사자의 머리는 으뜸 영들에 관해서 많이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그들이 하는 일이 대단히 전문화되어 있어도 모든 것을 포함하고, 대단히 예외적으로 물질적이고, 동시에 아주 지극히 영적이기 때문이다. 우주 지성을 만든 이 다능한 창조자들은 우주 동력 지휘자들의 조상이요, 바로 이들은 방대하고 널리 퍼진 영 생물의 창조를 최상으로 지휘하는 자이다.
16:4.3 (189.4) 일곱 으뜸 영은 우주 동력 지휘자 및 그 동료들의 창조자이며, 그 동료들은 대우주의 물리적 에너지를 조직하고 통제하고 조절하는 데 필수인 존재이다. 바로 이 으뜸 영들은 지역 우주를 형성하고 조직하는 과제에서 대단히 물질적으로 창조 아들들을 돕는다.
16:4.4 (189.5) 우리는 으뜸 영들의 우주 에너지 작업과 무제한 절대자의 물력 작용 사이에 어떤 개인적 연락이 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으뜸 영들의 관할 밑에서 에너지의 명시는 모두 파라다이스 가장자리에서 지휘를 받는다. 이것은 파라다이스의 아래 표면에서 생기는 것으로 확인된 물력 현상과 직접, 어떤 방법으로도 관계가 없는 듯이 보인다.
16:4.5 (189.6) 물어 볼 여지 없이, 다양한 상물질 동력 감독들의 기능적 활동과 마주칠 때, 우리는 으뜸 영들의 어떤 밝혀지지 않은 작용에 직면하고 있다. 물리 통제자와 영 봉사자의 이러한 조상을 제쳐놓고,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던 단계의 우주 실체―상물질 물체와 상물질 지성―을 만들려고 어느 누가 궁리하여 물질 에너지와 영 에너지를 그렇게 합치고 관련지을 수 있었을까?
16:4.6 (189.7) 영적 세계의 많은 실체는 상물질 서열이며, 이것은 유란시아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단계의 우주 실체이다. 인격이 존재하는 목표는 영적인 것이다. 그러나 상물질 창조들이 언제나 사이에 개재하며, 이것은 필사자의 기원이 있는 물질 영역과 전진하는 영적 지위를 가진 초우주 구체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바로 이 영역에서, 으뜸 영들은 사람을 파라다이스로 승천시키는 계획에 크게 이바지한다.
16:4.7 (190.1) 일곱 으뜸 영은 대우주에서 두루 활동하는 개별 대표자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하위 존재들의 대부분이 파라다이스의 완전을 향하는 길로 필사자가 진보하는 승천 계획에 직접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 관해서 거의 또는 아무것도 알려진 적이 없다. 일곱 으뜸 영의 활동 가운데 많은 것, 허다한 것이,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가려져 있는데, 이는 그런 것이 결코 너희가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문제와 직접 관계되지 않기 때문이다.
16:4.8 (190.2) 우리는 분명한 증거를 내놓을 수 없지만, 오르본톤의 으뜸 영이 다음 분야의 활동에서 결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아주 높다:
16:4.9 (190.3) 1. 지역 우주 생명 운반자들의 생명 창시 과정.
16:4.10 (190.4) 2. 지역 우주의 창조 영이 여러 세계에 수여한 보조 지성 영들이 생명을 활성화시키는 것.
16:4.11 (190.5) 3. 직선 인력에 반응하는 조직된 물질 단위가 드러내는 에너지 명시의 변동.
16:4.12 (190.6) 4. 무제한 절대자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해방될 때 솟아나오는 에너지의 행동. 이것은 직선 인력의 직접 영향에, 그리고 우주 동력 지휘자 및 그 동료들의 조종에 민감하게 된다.
16:4.13 (190.7) 5. 지역 우주 창조 영이 봉사하는 영을 수여하는 것. 이 창조 영은 유란시아에서 성령(聖靈)으로 알려져 있다.
16:4.14 (190.8) 6. 수여 아들이 나중에 영을 주는 것. 이 영을 유란시아에서는 위로자 또는 진리의 영이라 부른다.
16:4.15 (190.9) 7. 지역 우주와 초우주의 거울 작용. 합동 행위자와 최상 존재와 관련하여, 으뜸 영들의 활동을 가정(假定)하지 않고서, 이 특별한 현상에 관련된 많은 특성을 도저히 타당하게 설명하거나, 합리적으로 이해하기가 힘들다.
16:4.16 (190.10) 일곱 으뜸 영의 여러 작업을 우리가 적절히 이해하지 못하는데도, 광대한 우주 활동의 범위 안에서 그들이 아무 상관하지 않는 두 영역이 있다고 우리는 확신한다. 이는 생각 조절자들의 수여와 봉사, 그리고 무제한 절대자의 헤아릴 수 없는 기능이다.
16:5.1 (190.11) 대우주의 각 부분, 각 개별 우주와 세계는 모두 일곱 으뜸 영의 일치하는 상담과 지혜로부터 이득을 얻지만, 그 가운데 오직 한 분의 개인적 손길과 빛깔을 받는다. 각 으뜸 영의 개별적 성품은 그 초우주 전체에 미치며 그 초우주를 독특하게 조절한다.
16:5.2 (190.12) 일곱 으뜸 영의 이 개별적 영향을 통해서, 어떤 지적 존재 계급의 어떤 생물이라도 파라다이스와 하보나 바깥에서, 이 일곱 파라다이스 영 가운데 어느 한 분의 조상 성품을 가리키는 도장(圖章), 개성의 특징을 나타내는 도장을 지녀야 한다. 일곱 초우주에 관하여 말하면, 각 본토 생물은, 사람이든 천사이든, 출생을 증명하는 이 표지를 언제까지나 달고 있을 것이다.
16:5.3 (191.1) 일곱 으뜸 영은 공간의 진화 세계에서 개별 생물의 물질적 지성을 직접 침범하지 않는다. 유란시아의 필사자는 오르본톤 으뜸 영의 지성 영의 영향이 친히 있는것을 체험하지 않는다. 사람이 사는 한 세계에서 진화 시대 초기에, 이 으뜸 영이 개별 필사 지성과 어떤 종류의 연락이라도 취한다면, 그 지역 우주 창조 영의 봉사를 통해서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이 틀림없다. 이 창조 영은 각 지역 우주의 운명을 주관하는, 창조자인 하나님의 아들의 배우자요 동료이다. 그러나 바로 어머니인 이 창조 영의 성질과 성품은 오르본톤의 으뜸 영과 상당히 비슷하다.
16:5.4 (191.2) 한 으뜸 영의 물리적 도장(圖章)은 사람의 물질적 기원의 일부이다. 상물질 생애 전체를 바로 이 으뜸 영의 지속되는 영향 밑에서 보낸다. 그러한 하늘 가는 필사자가 다음에 거치는 영 생애가, 감독하는 바로 그 영의 특징을 나타내는 자국을 결코 완전히 지워버리지 못하는 것은 도저히 이상한 일이 아니다. 으뜸 영의 날인은 필사자가 하보나에 이르기 전 어떤 승천 단계에서도 바로 그 존재에 기본이다.
16:5.5 (191.3) 진화한 필사자의 일생의 체험에서 나타나는 뚜렷한 인격의 경향은 각 초우주의 특징을 나타내며, 지배하는 으뜸 영의 성품을 직접 표현한다. 이 경향은 그러한 승천자들이 하보나의 10억 교육 구체에서 마주치는 오랜 훈련과 통일하는 단련을 받고 난 뒤에도, 결코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그 뒤에 집중된 파라다이스 교양을 받아도 초우주 기원을 나타내는 표시를 없애기에 충분하지 않다. 하늘 가는 필사자는 세월이 지나도 영원히 그가 출생한 초우주를 주관하는 영을 가리키는 특성을 나타낼 것이다. 최후 군단에서도, 진화된 창조와 삼위일체의 완벽한 관계를 얻거나 묘사하는 것이 바람직할 때는 언제나, 각 초우주에서 한 명씩, 일곱 최후자로 이루어진 한 집단이 소집된다.
16:6.1 (191.4) 으뜸 영들은 우주 지성의 일곱 가지 근원이요, 대우주의 지적 잠재성이다. 이 우주 지성은 셋째 근원 중심의 지성이 절대 이하에서 표현된 것이며, 어떤 면에서, 진화하는 최상 존재의 지성과 기능적으로 관련된다.
16:6.2 (191.5) 유란시아와 같은 세계에서, 우리는 인류의 사무에 일곱 으뜸 영이 직접 영향 미치는 것을 구경하지 않는다. 너희는 네바돈 창조 영의 직접 영향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 그런데도 바로 이 으뜸 영들은 모든 인간 지성의 기본 반응을 지배하는데, 이는 그들이 진화하는 시공 세계에 거하는 개인들의 생활에서 작용하는, 지역 우주에서 특화된 지적ㆍ영적 잠재성의 실제 근원이기 때문이다.
16:6.3 (191.6) 우주 지성이 있다는 사실은 다양한 부류의 인간 및 초인간 지성에 친척 관계가 있음을 설명한다. 친척 영들이 서로 이끌릴 뿐 아니라, 친척 지능들도 또한 대단히 형제답고, 서로 협동하는 성향이 있다. 인간의 지성은 때때로 놀랍게 비슷하고 까닭을 모르게 동의하는 그러한 경로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 관찰된다.
16:6.4 (191.7) 우주 지성의 모든 성격자 관계에는 “실체 반응”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는 그러한 성질이 존재한다. 의지를 가진 인간의 바로 이 보편적 우주 자질이 과학ㆍ철학ㆍ종교에서 암시된 선천적 가정(假定)에 그들이 무력한 희생자가 되지 않게 만든다. 에너지와 물질이 인력에 반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체에 대한 이 우주 지성의 민감성은 어떤 국면의 실체에 반응한다. 그래도 이 초물질 실체들이 우주의 지성에 대하여 그렇게 반응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16:6.5 (192.1) 우주 지성은 어김없이 세 가지 수준에서 우주 실체에 반응한다 (반응함을 인식한다). 이러한 반응은 분명히 추리하고 깊이 생각하는 지성에게 자명하다. 이 실체의 수준은 다음과 같다:
16:6.6 (192.2) 1. 인과 관계―물리적 감각의 실체 분야, 논리적으로 변치 않는 과학의 영역, 사실인 것과 사실이 아닌 것의 구분, 우주의 반응에 바탕을 두고 숙고하여 얻는 결론이다. 이것이 우주에서 분별하는 수학(數學) 형태이다.
16:6.7 (192.3) 2. 의무―철학 분야에서 도덕이 작용하는 실체 영역, 분별력이 활동하는 무대, 비교적 옳고 그른 것의 인식. 이것이 우주에서 분별하는 사법(司法) 형태이다.
16:6.8 (192.4) 3. 예배―종교적으로 체험하는 실체의 영적 분야, 신과 친교함을 몸소 깨닫는 것, 영적 가치의 인식, 영원히 살아남는다는 확신, 하나님의 종 위치에서 올라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기쁨과 자유를 얻는 것. 이것이 우주 지성의 가장 높은 통찰력이요, 우주에서 분별하는, 신을 존중하고 숭배하는 형태이다.
16:6.9 (192.5) 이 과학적ㆍ도덕적ㆍ영적 통찰력, 이 우주적 반응은 우주 지성에 본래부터 있고, 우주 지성은 의지가 있는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다. 사는 체험은 반드시 이 세 가지 우주 직관을 개발하며, 이것들이 돌이켜 생각하는 자의식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란시아에서는 거의 아무도 용감하고 독자적인, 우주적 사고 방식을 기꺼이 개발하지 않는다고 기록하니 유감이다.
16:6.10 (192.6) 지역 우주의 지성이 수여될 때 우주 지성의 이 세 가지 통찰력은 선천적 가정(假定)이요,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과학ㆍ철학ㆍ종교 분야에서, 합리적이며 자의식을 가진 인격으로서 활동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달리 말하면, 무한자가 이 세 가지로 명시되는 현실은 스스로 계시하는 우주 기법으로 인식된다. 수학적 감각 논리는 물질과 에너지를 인식한다. 지성과 논리는 직관으로 자체의 도덕적 의무를 안다. 영의 믿음(신을 예배함)은 영적 체험의 현실을 믿는 종교이다. 지난 일을 돌이켜볼 때 이 세 가지 기본 요소는 통일되고 조정되어 인격을 발달시킬 수도 있고, 아니면 균형을 잃고 각자의 기능이 거의 무관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요소들이 통일될 때, 사실에 근거를 둔 과학, 도덕적 철학, 진정한 종교적 체험을 상관시키는 튼튼한 성품을 만들어낸다. 사물ㆍ의미ㆍ가치를 맛보는 체험, 그리고 이것들을 겪는 인간의 체험에 객관적 타당성 및 실체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 세 가지 우주 직관이다.
16:6.11 (192.7) 인간 지성의 이 타고난 자질을 개발하고 연마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요, 이를 표현하는 것이 문명의 목적이며, 이를 실현하는 것이 인생의 체험의 목적이요, 이를 고귀하게 하는 것이 종교의 목적이며, 이를 통일하는 것이 인격의 목적이다.
16:7.1 (192.8) 지능만으로는 도덕적 성품을 설명할 수 없다. 도덕, 미덕은 인간의 성격에 토착으로 생긴다. 도덕적 직관, 곧 의무를 깨닫는 것은, 인간 지성 재산의 한 구성 요소이며, 인간의 성품 가운데 빼앗을 수 없는 다른 것들, 곧 과학적 호기심과 영적 통찰력과 관계된다. 사람의 정신력은 그 동물 사촌의 정신력을 훨씬 넘지만, 동물 세계와 사람을 특히 구별하는 것은 사람의 도덕적ㆍ종교적 성품이다.
16:7.2 (193.1) 한 동물의 선택하는 반응은 행위의 운동 수준에 제한을 받는다. 고등 동물이 가졌다고 생각되는 통찰력은 운동 수준에 있고, 보통은 운동으로 시행착오를 경험한 뒤에 나타난다. 사람은 모든 탐험이나 실험에 앞서 과학적ㆍ도덕적ㆍ영적 통찰력을 사용할 수 있다.
16:7.3 (193.2) 오로지 성격자만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일을 하기 전에 알 수 있다. 오로지 성격자들만 체험에 앞서 통찰력을 가진다. 인격자는 뛰기 전에 살펴볼 수 있고, 따라서 뛰는 체험으로부터 배울 뿐 아니라 살펴봄으로 배울 수 있다. 인격이 없는 동물은 보통, 뛰어야만 배운다.
16:7.4 (193.3) 체험한 결과로서, 동물은 한 목표를 달성하는 다른 방법들을 살펴보고, 쌓인 체험에 비추어서 한 접근법을 고를 수 있다. 그러나 인격자는 또한 목표 자체를 살펴볼 수 있고, 그 목적이 보람 있는가, 얼마나 가치 있는가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지능만으로 무차별한 목적을 달성하는 최선의 방법을 분별할 수 있다. 그러나 도덕적 존재는 수단 뿐 아니라, 다른 목적도 구별할 수 있게 하는 통찰력을 가졌다. 그렇기는 해도 미덕을 고르는 도덕적 존재는 영리하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어째서 그 일을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거기로 갈 것인지 안다.
16:7.5 (193.4) 사람이 필사자로서 투쟁하는 여러 목표를 분별하지 못하면, 자신이 동물 수준의 존재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의 인격 존재로서 그 사람은 그의 우주 지성 자질의 필수 부분인 바로 그 물질적 총명, 도덕적 분별, 영적 통찰력과 같은 우수한 장점을 이용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16:7.6 (193.5) 미덕(美德)은 올바름이다―우주에 순응하는 것이다. 미덕을 이름짓는 것은 미덕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요, 미덕의 실천이 미덕을 아는 것이다. 미덕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요, 아직 지혜도 아니며, 오히려 올라가는 수준의 우주 업적을 이룩하여 진취적 체험을 겪는 현실이다. 필사 인간의 일상 생활에서, 미덕은 악보다 선을 한결같이 선택함으로 실현되며, 그러한 선택 능력은 사람이 도덕적 성품을 지녔다는 증거이다.
16:7.7 (193.6) 사람이 선과 악 사이에 선택하는 것은 그의 도덕적 성품이 얼마나 날카로운가에 달려 있지만 또한 무지와 미숙(未熟)함과 망상에도 영향을 받는다. 균형 감각도 미덕의 실천과 관련되는데, 이는 왜곡하고 속이는 결과로서, 큰 잘못보다 작은 잘못을 선택할 때, 잘못이 영속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덕 영역에 속하는 미덕을 실천하는 데는 상대적 평가, 곧 비교하여 측정하는 기술이 들어간다.
16:7.8 (193.7) 측정하는 기술, 곧 의미 있는 것들을 자세히 헤아리는 능력에 담긴 분별력이 없이, 사람의 도덕적 성품은 무력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적 가치를 의식하게 하는 우주 통찰력이 없이, 도덕적 선택은 쓸모없을 것이다. 지능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은 인격을 부여받기 때문에 도덕적 존재 수준까지 올라간다.
16:7.9 (193.8) 법이나 무력(武力)으로 결코 도덕을 향상시킬 수 없다. 도덕은 개인적이고 자유 의지의 문제이며, 도덕적으로 좋은 영향이 있는 인격자가, 도덕적 반응이 떨어지지만 또한 어느 정도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싶어 하는 자와 접촉하여 전염시킴으로 전파되어야 한다.
16:7.10 (193.9) 우수한 목적을 선택하는 것 뿐 아니라 그 목적을 달성하는 도덕적 수단을 고르는 일에도, 도덕적 행위는 선택하는 분별력에 지도를 받는 행위, 가장 높은 지능의 특징을 가진, 인간의 행위이다. 그러한 행위는 미덕이다. 최상의 미덕은, 그렇다면, 마음을 다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 행하기를 택하는 것이다.
16:8.1 (194.1) 우주의 사실인 것들의 다양한 수준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계급의 존재들에게 우주의 아버지는 성격을 수여한다. 유란시아의 인간은 하늘 가는 하나님 아들 수준에서 활동하는, 유한한 필사 종류의 인격을 부여받았다.
16:8.2 (194.2) 우리가 인격이 무엇이라고 도저히 정의(定義)를 시도할 수는 없어도, 물질ㆍ정신ㆍ영 에너지의 총체를 구성하는 데 들어가는, 알려진 요소에 관하여 우리가 이해하는 바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에너지의 상호 관계는 한 기계 장치를 구성하며, 그 안에서, 그 위에, 그 장치를 가지고 우주의 아버지는 그가 수여한 인격이 활동하게 만든다.
16:8.3 (194.3) 인격은 독창적 성품을 가진 독특한 재산이며, 그 성품이 존재하는 것은 생각 조절자의 수여와 상관이 없고, 그에 선행(先行)한다. 그런데도 조절자의 계심은 인격의 질적 표현을 향상시킨다. 아버지로부터 올 때, 생각 조절자들의 성품은 동일하지만, 인격은 다채롭고 독특하고 유일하다. 인격이 명시되는 유기체의 몸을 구성하는 물질적ㆍ지적ㆍ영적 성품과 관련된 에너지의 성질과 품질에 따라서, 인격의 명시는 더욱 조절되고 제한을 받는다.
16:8.4 (194.4) 인격자들은 비슷할지 모르지만, 결코 같지 않다. 일정한 계열ㆍ부류ㆍ계급, 또는 형태는 서로 닮을 수 있고, 닮기도 하지만, 결코 동일하지 않다. 인격은 우리가 아는 바, 한 개인의 모습이며, 형태, 지성, 또는 영적 지위가 어떤 성질이고 얼마나 변하는가 상관 없이, 어떤 미래 시기에 그러한 존재를 우리가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인격은, 어떤 개인이라도, 그의 인격을 표현하고 겉으로 표시하는 몸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 상관 없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전에 알았던 자로서, 그 사람을 알아보고 분명히 확인하게 만드는 그의 일부이다.
16:8.5 (194.5) 필사자의 반응 행위를 저절로 나타내고 그 특징을 나타내는 두 가지 현상이 있으니, 곧 자의식, 그리고 관련된 상대적 자유 의지, 이 두 가지에 따라서, 사람의 인격이 구별된다.
16:8.6 (194.6) 자의식은 인격이 사실임을 지적(知的)으로 인식하는 데 있다. 자의식은 다른 인격자들이 현실임을 인식하는 능력을 포함한다. 자의식은 우주 실체들 안에서, 그 실체들과 함께, 개체로서 체험할 능력이 있음을 가리키며, 우주의 인격 관계에서 신분의 지위를 얻는 것에 상당한다. 자의식은 지성이 수고한 사실을 인식하고, 창조적이고 결정하는 자유 의지가 비교적 독립을 얻은 것을 의미한다.
16:8.7 (194.7) 상대적 자유 의지는 인격이 자의식하는 특징을 나타내며, 다음에 관여한다:
16:8.8 (194.8) 1. 도덕적 결정, 가장 높은 지혜.
16:8.9 (194.9) 2. 영적 선택, 진리를 분별하는 것.
16:8.10 (194.10) 3. 사심(私心) 없는 사랑, 형제에게 봉사하는 것.
16:8.11 (194.11) 4. 의도하여 협동하는 것, 집단에 충성하는 것.
16:8.12 (194.12) 5. 우주를 보는 통찰력, 우주 의미를 파악하는 것.
16:8.13 (194.13) 6. 인격자의 헌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것.
16:8.14 (195.1) 7. 예배, 신성한 가치를 추구하고 마음을 다하여 신성한 가치 수여자를 사랑하는 것.
16:8.15 (195.2) 유란시아 부류의 인격은, 전기ㆍ화학적으로 생명을 활성화시킨 계열에 속하며, 부모가 출산하는 형태로, 오르본톤 시리즈, 네바돈 계급의 우주 지성을 부여받고, 네바돈 부류의 유기체를 행성에서 수정한 물리적 장치 안에서 활동한다고 보아도 좋다. 지성을 받은 그러한 필사 장치에 신의 선물로서 인격을 수여하는 것은 우주 시민의 위엄을 부여하며, 그러한 필사 인간에게 당장에 우주의 세 가지 기본적 지성 실체를 구조적으로 인식하는 데 반응할 수 있게 만든다:
16:8.16 (195.3) 1. 물리적 인과 관계가 변치 않음을 수학적으로, 곧 논리적으로 인식하는 것.
16:8.17 (195.4) 2. 도덕적으로 행위할 의무를 합리적으로 인식하는 것.
16:8.18 (195.5) 3. 신과 사귀는 예배를 믿음으로 깨닫고, 이와 관련하여, 인류에게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
16:8.19 (195.6) 그러한 인격 자질이 충분히 활동하는 것은 신과 친척 관계가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선(先)인격 분신이 깃드는 그러한 자아는 진실로, 사실로, 하나님의 영적 아들이다. 그러한 인간은 신이 선물로 계심을 받을 능력이 있음을 드러낼 뿐 아니라, 모든 성격자의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성격 인력 회로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16:9.1 (195.7) 우주 지성을 부여받고, 조절자가 깃드는 인격을 가진 사람은 에너지 실체, 지성 실체, 영 실체를 인식하고 깨닫는 선천적 능력을 소유한다. 따라서 의지를 가진 인간은 하나님의 사실ㆍ법칙ㆍ사랑을 헤아릴 장비가 갖춰져 있다. 인간의 의식에서 빼앗을 수 없는 이 세 가지를 제쳐놓고, 인간의 모든 체험은 정말로 주관적이다. 다만 직관으로 얻는 타당성의 깨달음은, 우주를 인식하는 이 세 가지, 우주 실체 반응을 통일한 것에 달라붙는다.
16:9.2 (195.8) 하나님을 깨닫는 필사자는, 살아남는 혼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이 세 가지 우주 품질의 통일된 가치를 감지할 수 있다. 이 혼의 진화는 육체인 천막 안에서 사람이 시작하는 최고의 사업이며, 거기서 필사의 지성은 불멸의 혼을 2중으로 만들려고,[1] [1660] 깃드는 신다운 영과 함께 일한다. 아주 일찍 싹이 틀 때부터, 혼은 실재한다. 혼은 우주에서 살아남는 품질을 지닌다.
16:9.3 (195.9) 필사 인간이 자연사 뒤에 살아남지 못하면, 그의 인간 체험의 참 영적 가치는 생각 조절자의 계속하는 체험의 일부로서 남는다. 그렇게 살아남지 못하는 자의 인격 가치는, 현실화하는 최상 존재의 성격에 한 요소로서 남는다. 그렇게 지속하는 인격의 품질은 신분을 빼앗기지만, 육체를 입은 필사 생애 동안에 쌓인 체험적 가치를 잃지는 않는다. 신분이 살아남는 것은 상물질 지위, 그리고 갈수록 더 신다운 가치를 가진 불사의 혼이 살아남는가에 달려 있다. 살아남는 혼 속에, 또 혼이 살아남음으로 인격의 신분이 살아남는다.
16:9.4 (195.10) 인간의 자의식은 의식하는 자아 외에 다른 자아들의 실체를 알아보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 자아들이 그렇게 서로 의식하는 것, 그 자아가 아는 대로 그 자아를 남이 아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사람의 사회 생활에서, 순전히 인간다운 방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네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현실을 네가 확신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한 동료 존재의 실체를 네가 절대로 확신하게 될 수는 없다. 사회적 의식은 하나님 의식(意識)처럼 사람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의식은 문화적으로 개발된 것이며, 지식과 상징에 달려 있고, 또한 인간을 구성하는 자질―과학ㆍ도덕ㆍ종교―의 기여에 달려 있다. 이렇게 사회에 퍼진 우주의 선물은 문명을 이룬다.
16:9.5 (196.1) 문명은 우주 규모로 개발되지 않으니까, 불안정하다. 문명은 민족의 개인들이 타고난 것이 아니다. 인간을 구성하는 통합된 요소―과학ㆍ도덕ㆍ종교―의 기여로 문명이 육성되어야 한다. 문명은 오고 가지만, 과학과 도덕과 종교는 언제나 문명이 붕괴한 뒤에 살아남는다.
16:9.6 (196.2) 예수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계시했을 뿐 아니라, 사람을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새롭게 드러냈다. 예수의 일생에서 너는 최선에 도달한 사람을 본다. 이처럼 사람은 아주 아름답게 현실이 되며, 이는 예수가 일생에 하나님을 아주 가득히 지녔고, 하나님 의식(인식)은 모든 사람에게 빼앗을 수 없는 것이요 체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16:9.7 (196.3) 부모의 본능을 제쳐놓으면, 사심 없는 마음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연히 사랑을 받거나 사회의 보살핌을 받지 않는다. 사심 없는 이타적 사회 질서를 세우려면, 이치ㆍ도덕ㆍ종교의 재촉, 하나님을 아는 정신이 필요하다. 사람이 자신의 인격을 의식하는 것, 곧 자의식은 또한 타고난 타의식(他意識)의 바로 이 사실에 직접 의존하며, 이것은 사람으로부터 신에 이르기까지, 다른 성격자의 실체를 인식하고 파악하는 타고난 능력이다.
16:9.8 (196.4) 사심 없는 사회적 의식은 그 밑바닥에 종교적 의식임이 틀림없다. 사회 의식이 객관적이면 그렇다는 말이다. 객관성이 없으면, 사회 의식은 순전히 주관적 철학에서 추출된 것이며, 따라서 사랑이 모자란다. 오로지 하나님을 아는 개인이, 제 몸을 사랑하는 것 같이, 다른 인격자를 사랑할 수 있다.
16:9.9 (196.5) 자의식의 본질은, 하나님과 사람, 아버지와 아들, 창조자와 인간 사이에 있는 공동체 의식이다. 인간의 자의식에서 네 가지 우주 실체를 깨닫는 것은 잠재적이며 본래부터 있다:
16:9.10 (196.6) 1. 지식의 추구, 과학의 논리.
16:9.11 (196.7) 2. 도덕적 가치의 추구, 의무 감각.
16:9.12 (196.8) 3. 영적 가치의 추구, 종교적 체험.
16:9.13 (196.9) 4. 인격 가치의 추구, 곧 하나님이 성격자인 현실을 인식하는 능력, 동시에 우리가 동료 인격자들과 친교하는 관계를 깨닫는 것.
16:9.14 (196.10) 네가 사람이 너의 인간 형제임을 의식하게 되는 것은 네가 이미 하나님을 너의 아버지인 창조자로 의식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라는 관계로부터 사람이 형제임을 깨닫도록 우리는 자신을 설득한다. 아버지 자격은 모든 도덕적 인간에게 한 우주 실체이거나, 또는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이는 바로 아버지가 모든 그러한 존재에게 인격을 수여했고, 보편적 성격 회로의 손아귀에 그들을 연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먼저, 하나님이 계시니까,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16:9.15 (196.11) 우주 지성이 그 자체의 근원, 곧 무한한 영의 무한한 지성을 자의식하여 깨닫고 동시에, 방대한 우주들의 물리적 실체, 영원한 아들의 영적 실체, 우주의 아버지의 성격 실체를 의식하다니, 이것이 이상한 일인가?
17:0.1 (197.1) 일곱 최상 영 집단은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진 대우주 행정부에서 보편적인 조정하는 지휘자이다. 모두가 무한한 영의 기능적 집단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다음 세 집단은 보통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자식으로 분류된다:
17:0.5 (197.5) 나머지 네 집단은 무한한 영의 창조 활동이나 또는 창조 지위를 가진, 무한한 영의 동료들로 인하여, 존재하게 된다.
17:0.10 (197.10) 이 일곱 계급은 유버르사에서 일곱 최상 영 집단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이 활동하는 영역은 영원한 섬 가장자리에 일곱 으뜸 영이 몸소 계신 것을 비롯하여, 영의 일곱 파라다이스 위성, 하보나 회로, 초우주 정부, 지역 우주의 행정 및 감독을 포함하고, 아니 시공에서 진화하는 지성의 영역에 수여된 보조자들의 비천한 봉사에까지도 미친다.
17:0.11 (197.11) 일곱 으뜸 영은 이 방대한 행정 영역에서 조정하는 지휘자이다. 조직된 물리적 동력, 지성 에너지, 영의 비성격 봉사의 행정적 규제에 관한 어떤 문제에서, 그들은 몸소, 직접 활동하며, 기타 문제에는 다방면의 동료를 통해서 활동한다. 집행 성질을 가진 모든―판결ㆍ통제ㆍ조절, 그리고 행정적 결정―문제에서 으뜸 영들은 일곱 최상 집행자의 몸 속에서 행동한다. 중앙 우주에서 으뜸 영들은 하보나 회로의 일곱 영을 통해서 활동할 수도 있다. 일곱 초우주의 본부에서 으뜸 영은 거울 영의 경로를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몸을 통해서 행동하며, 이들과 으뜸 영들은 거울 영상 보조자를 통해서 개인적 교통을 유지한다.
17:0.12 (197.12) 일곱 으뜸 영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법정 밑에 있는 우주 행정부와 친히 직접 연락을 취하지 않는다. 오르본톤 으뜸 영이 너희 지역 우주를 우리 초우주의 일부로서 관리하지만, 네바돈에서 출생한 존재들과 가지는 관계에서 너희 지역 우주 본부, 구원자별에 거주하는 창조 어머니 영이 이 으뜸 영의 기능을 즉시 수행하고 친히 지도한다.
17:1.1 (198.1) 으뜸 영들의 집행 본부는 무한한 영의 일곱 파라다이스 위성을 차지하며, 이 위성들은 영원한 아들의 빛나는 구체들과 가장 안쪽 하보나 회로 사이에서, 가운데 섬의 둘레를 빙 돌고 있다. 최상 집행자들이 이 집행 구체들을 지도하고 있으며, 이 일곱 명의 집단은 일곱 으뜸 영의 우주 대표로 활동할 수 있는 부류의 존재로서 일곱 으뜸 영이 준 명세에 따라서, 아버지ㆍ아들ㆍ영이 삼자일체화로 낳았다.
17:1.2 (198.2) 으뜸 영들은 이 최상 집행자들을 통해서, 초우주 정부의 다양한 부서와 연락을 유지한다. 바로 그들이 일곱 초우주의 기본적 구성의 경향을 대체로 결정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신답게 완전하지만, 또한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주관하는 우두머리가 없다. 만날 때마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 골라서 그 합동 회의를 주관하도록 한다. 정기적으로, 그들은 일곱 으뜸 영과 함께 회의하려고 파라다이스로 여행한다.
17:1.3 (198.3) 일곱 최상 집행자는 대우주의 행정 조정자로서 활동한다. 그들은 하보나 이후에 생긴 창조에서 전무(專務) 이사회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들은 파라다이스 내부의 사무에 관여하지 않고, 일곱 회로 영을 통해서, 하보나 활동을 담당하는 그들의 제한된 구체들을 지도한다. 이밖에는 감독하는 범위에 거의 제한이 없다. 그들은 물리적ㆍ지적ㆍ영적 사물의 지휘에 종사하며, 일곱 초우주에서, 그리고 하보나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아니 모두 알기도 한다.
17:1.4 (198.4) 이 최상 집행자들은 정책을 세우지 않고, 우주 절차를 바꾸지도 않으며, 일곱 으뜸 영이 선포한 신의 계획을 집행하는 데 관여한다. 초우주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통치나 지역 우주에서 창조 아들의 통치권에도, 간섭하지 않는다. 그들은 조정하는 행정가이며, 그 기능은 대우주에서 정식으로 수립된 모든 통치자의 통합 정책을 수행하는 것이다.
17:1.5 (198.5) 각 집행자와 그가 맡은 구체의 시설은 단일 초우주의 효율적 관리에 관여한다. 집행 구체 1번에서 활동하는 최상 집행자 1번은 전적으로 제1 초우주의 사무에 몰두한다. 그런 식으로 최상 집행자 7번까지 이르는데, 그는 영의 일곱째 파라다이스 위성에서 일하며, 제7 초우주를 관리하는 데 에너지를 쏟는다. 이 제7 구체의 이름은 오르본톤이니, 영의 파라다이스 위성들은 그들이 관계된 그 초우주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여러 초우주의 이름은 그들을 따라서 지었다.
17:1.6 (198.6) 제7 초우주의 집행 구체에서 오르본톤의 사무를 똑바로 유지하는 직원들의 막대한 수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으며, 실지로 모든 계급의 하늘 지능을 포함한다. 성격자를 파송하는 모든 초우주 서비스는 (영감을 받은 삼위일체 영과 생각 조절자를 제쳐놓고) 파라다이스로 오가는 우주 여행에서 이 일곱 집행 세계 중에 하나를 거친다. 그리고 초우주에서 활동하며 셋째 근원 중심이 창조한 모든 성격자의 중앙 등록부가 여기에 유지된다. 영의 이 집행 세계들 중 하나에서 물질 기록, 상물질 기록, 영적 기록을 남기는 체계는 내 계급의 존재조차도 놀라게 한다.
17:1.7 (199.1) 최상 집행자들의 직속 부하들은, 상당히 큰 부분이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인격자들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들, 그리고 시공의 승천 계획에 따라 오랜 세월에 걸친 훈련을 마치고 영화롭게 된 필사 졸업생들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자손들로 구성되어 있다. 파라다이스 최후 군단의 최고 회의 우두머리가 삼자일체 체험으로 태어난 이 아들들을 최상 집행자들과 함께 근무하도록 지정한다.
17:1.8 (199.2) 각 최상 집행자는 조언하는 두 내각이 있다. 각 초우주 본부에 있는 무한한 영의 아이들은, 최상 집행자의 제1 자문 내각에서 1천 년 동안 봉사할 대표들을 그들의 계층 가운데서 뽑는다. 시간 세계의 하늘 가는 필사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사무에는 제2 내각이 있고, 이것은 파라다이스에 다다른 필사자들, 그리고 영화롭게 된 필사자들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들로 이루어진다. 일곱 초우주 본부에 일시 거하는, 완전하게 되는 승천 존재들이 이 단체를 선택한다. 최상 집행자들이 다른 사무를 담당하는 모든 우두머리를 임명한다.
17:1.9 (199.3) 영의 이 여러 파라다이스 위성에서 때때로 큰 집회가 열린다. 이 세계들에 배치된, 삼자일체화로 태어난 아들들은, 파라다이스에 다다른 승천자들과 함께, 하늘 가는 생애에서 투쟁하고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재회에서 셋째 근원 중심의 영 성격자들과 함께 모인다. 최상 집행자들은 언제나 그러한 친교 모임을 주관한다.
17:1.10 (199.4) 파라다이스 시간으로 1천 년에 한 번, 일곱 최상 집행자는 그들의 권한의 자리를 비우고 파라다이스로 가며, 거기서 창조에서 지적인 무리들에게 보편적으로 인사하고 성공을 빌려고, 1천 년마다 집회를 연다. 이 중대한 행사는 모든 거울 영 무리의 우두머리인 위엄자가 계신 바로 앞에서 행해진다. 보편적 거울 작용의 독특한 기능을 통해서, 최상 집행자들은 대우주에 있는 모든 동료와 이렇게 동시에 교통할 수 있다.
17:2.1 (199.5) 거울 영은 신성한 삼위일체에 기원이 있다. 독특하고 어느 정도 신비스러운 이 존재들은 50명이 있다. 이 비범한 성격자 7명이 한 번에 창조되었고, 그러한 창조 사건은 각각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와 일곱 으뜸 영 가운데 한 분이 연결함으로 일어났다.
17:2.2 (199.6) 세월이 시작될 때 생긴 이 막중한 거래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와 함께 공동 창조자로서 활동하기 위하여, 으뜸 영들이 대표하는 최상 창조 성격자들이 처음으로 기울인 노력을 나타낸다. 최상 창조자들의 창조 능력과 삼위일체의 창조 잠재력의 이러한 연합은 최상 존재가 사실화되는 바로 그 근원이다. 그러니까 반영하는 창조의 주기(週期)가 그치고, 으뜸 영 각자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와 함께 완전히 창조하는 걸음을 맞추었을 때, 49번째 거울 영이 성격화되었을 때, 그때 새롭고도 멀리 미치는 반응이 신 절대자 안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최상 존재에게 새로운 성격 특권을 부어 주었고, 결국 위엄자의 성격화를 초래하였다. 이 위엄자는 온 우주에 두루, 거울 작용의 우두머리이며 거울 영 49명과 그 동료들이 하는 모든 일에 파라다이스 중심이 된다.
17:2.3 (200.1) 위엄자는 참된 성격자이며, 시공의 일곱 초우주 전체에서 거울 현상의 성격 중심, 결코 틀리지 않는 중심이다. 그는 만물의 중심 가까이, 일곱 으뜸 영의 회합 장소에서, 영구한 파라다이스 본부를 유지한다. 그는 광범위한 창조에서, 오로지 거울 봉사를 조정하고 유지하는 데만 아랑곳하고, 달리 우주 사무의 행정에 관여하지 않는다.
17:2.4 (200.2) 위엄자는 파라다이스 성격자 목록에 들어가 있지 않는데, 이는 그가 신 절대자와 기능적으로 연락하여 최상 존재가 창조한, 유일하게 존재하는 신성한 성격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격자이지만, 순전히, 겉보기에는 자동으로, 이 한 단계의 우주 체제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는 현재, 기타 (비거울) 계급의 우주 성격자들과 관련하여 어떤 개인 자격으로도 활동하지 않는다.
17:2.5 (200.3) 위엄자의 창조는 최상 존재가 처음으로 행한 최상 창조 활동이라는 신호가 되었다. 행동하려는 이 의지(意志)는 최상 존재가 의도한 것이었지만, 신 절대자의 엄청난 반응은 미리 알려지지 않았다. 하보나가 영원에 출현한 뒤로, 권능이 그렇게 거대하고 방대하게 정렬되고 기능적 영 활동의 조정이 그렇게 엄청나게 현실화하는 것을 우주가 구경한 적이 없다. 최상 존재와 그 동료들의 창조 의지에 대한 신 절대자의 반응은, 그들이 목적한 의도를 크게 뛰어넘고, 그들이 예측한 개념을 크게 뛰어넘었다.
17:2.6 (200.4) 미래 시대에 최상위와 궁극위가 새로운 신성(神性) 수준에 도달하고, 성격 활동이 있는 새 영토로 올라갈지 모른다. 우주의 조정을 향상하는, 상상하지 못한 힘을 가지고, 예상하지도 꿈도 꾸지 않은 또 다른 존재들이 신이 되는 영역에서, 이러한 미래 시대가 무엇을 구경할 것인가, 우리는 그 가능성에 두려운 마음이 든다. 체험적 신과 실존적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관계가 그렇게 통일되는 것에 대하여 신 절대자가 반응하는 잠재성에는 한계가 없는 듯하다.
17:3.1 (200.5) 거울 영 49명은 삼위일체에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출현한 일곱 번의 창조 사건은 각각, 한 부류의 존재들을 생산했는데, 이들의 성질은 공동으로 조상인 그 으뜸 영의 특징을 닮았다. 그래서 그들은 우주의 아버지, 영원한 아들, 무한한 영, 이 세 신의 특징을 연합하는 일곱 가지 가능한 조합(組合)의 성질과 성품을 다양하게 나타낸다. 이 때문에, 각 초우주 본부에는 이 거울 영 7명이 계시는 것이 필요하다. 파라다이스 신 세 분의 모습, 어떤 단계의 어떤 가능한 모습이라도 이를 완전히 반영하기 위해서, 그러한 현상이 일곱 초우주 어느 부분에서나 생길지 모르니까, 일곱 종류 가운데, 각 종류마다 한 분씩 필요하다. 따라서 각 종류 가운데 한 분이 각 초우주에서 봉사하도록 배치된다. 서로 다른 일곱 거울 영으로 이루어진 이 무리들은, 초우주의 서울에, 각 영역의 거울 작용 초점에서 본부를 유지하며, 이것은 영적 극점(極點)과 동일하지 않다.
17:3.2 (200.6) 거울 영들은 이름이 있지만, 이 명칭은 공간 세계에 공표되지 않는다. 이 이름은 이 존재들의 성질과 성품에 관계되며, 파라다이스의 여러 비밀 구체에 있는 일곱 가지 우주 신비 중 하나의 일부분이다.
17:3.3 (201.1) 거울 작용의 속성은 합동 행위자, 최상 존재, 으뜸 영들의 지성 수준에서 생기는 현상이며, 이 광대한 우주 정보 계획의 작용에 관련된 모든 존재에게 전달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큰 신비가 있다. 으뜸 영이나 파라다이스 신들도, 혼자서나 집단으로, 위엄자의 이 연락 성격자 49명에게 나타난 것과 똑같이 우주에 반영하는 이 힘을 동등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도 그들은 놀랍게 자질을 부여받은 이 모든 존재의 창조자이다. 신이 물려주는 유전(遺傳)은 창조자에게 찾아볼 수 없는 어떤 속성을 때때로 생물 안에서 드러낸다.
17:3.4 (201.2) 위엄자와 거울 영들을 제외하고, 거울 봉사를 베푸는 직원은 모두, 무한한 영과 그의 직계 동료 및 부하들이 만든 생물이다. 각 초우주의 거울 영들은 자기의 거울 영상 보조자를 창조하며, 이 보조자들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법정에서 그들의 개인적 목소리가 된다.
17:3.5 (201.3) 거울 영은 그저 전하기만 하는 대리자가 아니다. 그들은 또한 보존하는 성격자이기도 하다. 그들의 자손, 2품 천사들도 보존 성격자, 즉 기록하는 성격자이다. 참된 영적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이나 2중으로 기록되고, 한 벌은 거울 영의 광대한 직원에 속하는 수많은 2품 천사 성격자 계급 중 한 계급에, 어떤 구성원 자신의 장비에 보존된다.
17:3.6 (201.4) 우주의 공식 기록은 천사 기록자들이 전하고, 그들을 통해서 전달되지만, 참된 영적 기록은 거울 작용으로 수집되고, 무한한 영의 집단에 속하는 적당하고 적절한 성격자들의 머리 속에 보존된다. 우주의 죽은 정식 기록과 대조해서, 이들은 살아 있는 기록이며, 이러한 기록은 무한한 영의 기록 성격자들의 머리 속에 생생하게, 완전하게 보존된다.
17:3.7 (201.5) 거울 작용의 조직은 또한 온 창조에서 뉴스를 수집하고 법령을 퍼뜨리는 장치이다. 다양한 방송 업무가 정기적으로 활동하는 것과 반대로 이 조직은 항상 작용한다.
17:3.8 (201.6) 한 지역 우주 본부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것은 무엇이나 본래부터 그 초우주 서울에 비친다. 또 거꾸로, 지역 우주에 중요한 것은 무엇이나, 그 초우주 본부에서부터 바깥으로, 지역 우주 서울까지 비친다. 시간 세계의 우주들로부터 초우주까지 반영하는 서비스는 겉으로 보기에 자동이며 저절로 작용하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모두 아주 개인적으로 행해지고, 머리를 써서 하는 것이다. 그 정확성은 성격자들의 완전한 협동으로 생기는 결과이며, 따라서 도저히 이것을 절대자들의 비성격 계심과 성과로 돌릴 수 없다.
17:3.9 (201.7) 생각 조절자는 우주의 반영 체계의 운영에 참여하지 않지만, 우리는 아버지 분신이 모두 이 거래를 충분히 인식하고, 그 내용을 이용할 수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17:3.10 (201.8) 현재 우주 시대에, 파라다이스 바깥으로 나가는 거울 봉사가 미치는 공간의 범위는 일곱 초우주의 테두리에 제한을 받는 듯하다. 이 외에 이 서비스의 기능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듯하다. 모든 알려진 절대 이하의 우주 회로와 상관이 없는 듯하다.
17:3.11 (201.9) 각 초우주의 본부에서, 거울 조직은 하나의 분리된 단위로서 활동한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경우에, 한 지역 우주 전체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어 벌어지는 기념제의 경우와 일곱 최상 집행자가 1천 년마다 인사할 때처럼, 위엄자의 지시 하에 모두 일곱 단위가 우주에서 한 목소리로 행동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한다.
17:4.1 (202.1) 거울 영들이 거울 영상 보조자 49명을 창조하였고, 각 초우주 본부에는 보조자가 꼭 7명 있다. 유버르사에서 일곱 거울 영의 첫 창조 행위는 일곱 영상 보조자를 낳는 것이었고, 각 거울 영은 자신의 보조자를 창조한다. 영상 보조자의 어떤 속성과 특징은 어머니인 거울 영을 완전히 재현한 것이다. 그들은 실질적 복사판에서 비치는 속성을 뺀 것이다. 그들은 진정한 영상이며, 늘 거울 영과 초우주 당국 사이에 교통하는 경로로서 활동한다. 영상 보조자는 그저 보조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영 조상을 실제로 대표하는 자이다. 그들은 영상이며, 그 이름에 어긋나지 않는다.
17:4.2 (202.2) 거울 영 자신은 참된 성격자이지만, 물질 존재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러한 서열에 속한다. 한 초우주의 본부 구체에서도, 그들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 및 그 동료들과 가지는 모든 개인적 교류에서, 영상 보조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영상 보조자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 사이에 접촉이 있을 때, 때로는 한 보조자가 쓸 만하게 활동하며, 그들에게 전달하라고 맡겨진 통신문을 충분하고 적절하게 전하기 위해서, 둘, 셋, 넷, 아니 모두 일곱까지도 요구되는 경우가 있다. 마찬가지로, 통신 내용이 요구하는 대로, 영상 보조자들의 소식을 다양하게, 옛적부터 늘 계신 이 한 분, 두 분, 또는 모두 세 분이 받는다.
17:4.3 (202.3) 영상 보조자는 언제까지나 조상인 영의 곁에서 시중들며, 믿을 수 없이 큰 무리의 보조하는 2품 천사들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 영상 보조자는 하늘 가는 필사자를 훈련하는 세계들과 관련하여 직접 활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필사자를 진보시키는 우주 계획의 정보 서비스와 밀접히 관련되지만, 너희는 유버르사 학교에서 머무르는 동안 그들과 개인적으로 접촉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겉보기에 성격을 가진 이 존재들에게 의지(意志)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택하는 힘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들은 참된 그림이요, 개별 영 조상의 성격과 지성을 온전히 반영한다. 한 등급으로서, 하늘 가는 사람들은 거울 작용과 밀접한 접촉을 가지지 않는다. 비치는 성품을 가진 어떤 존재가 언제나 너희와 그 서비스의 실제 작용 사이에 낄 것이다.
17:5.1 (202.4) 하보나 회로(回路)의 일곱 영은 중앙 우주의 일곱 회로에 대하여, 무한한 영과 일곱 으뜸 영을 합동으로, 비개인적으로 대표한다. 그들은 으뜸 영들의 하인이며, 집단으로 으뜸 영들의 자손이다. 으뜸 영들은 일곱 초우주에서 뚜렷하고 다양화된 행정적 개성을 마련해 준다. 한결같은 이 하보나 회로의 영들을 통해서, 중앙 우주를 위하여, 통일되고 한결같고 조정된 영적 감독을 제공할 수 있게 된다.
17:5.2 (202.5) 일곱 회로 영은 각자 단일 하보나 회로에 스며들도록 제한된다. 그들은 개별 하보나 세계를 통치하는 영원부터 늘 계신 이의 체제에 직접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곱 최상 집행자와 연락을 가지며, 최상 존재의 중앙 우주 계심과 동시화되어 활동한다. 그들의 일은 전적으로 하보나에 국한되어 있다.
17:5.3 (203.1) 이 회로 영들은 그들이 개인적으로 낳은 자손, 곧 3차 상천사(上天使)들을 통해서, 하보나에 머무르는 자들과 접촉을 가진다. 회로 영들은 일곱 으뜸 영과 공존하지만, 3차 상천사를 창조할 때 그들의 역할은, 그랜드판다 시절에 시간 세계의 첫 순례자들이 하보나의 바깥 회로에 도착했을 때까지, 큰 중요성을 차지하지 않았다.
17:5.4 (203.2) 너희는 하보나에서 한 회로에서 다음 회로로 승진하는 동안에, 회로 영들에 대하여 듣게 될 터이나, 개인적으로 그들의 영적 영향을 받고 그 비성격 계심을 인식할지 모르지만, 그들과 친히 교통할 수 없을 것이다.
17:5.5 (203.3) 회로 영과 하보나의 본토 거주민의 관계는, 생각 조절자와 진화 우주의 여러 세계에서 사는 필사 인간의 관계와 아주 비슷하다. 생각 조절자와 마찬가지로, 회로 영은 비성격이며, 하보나 존재들의 완전한 지성과 사귄다. 이는 우주의 아버지의 비인격 영이 필사 인간의 유한한 지성에 깃드는 것과 같다. 그러나 회로 영은 결코 하보나 인격자의 영구한 일부가 되지 않는다.
17:6.1 (203.4) 지역 우주 창조 영들의 성품 및 기능에 관한 많은 것은 지역 우주를 조직하고 관리하는 과제에서 창조 영과 창조 아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에 속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 놀라운 존재들이 지역 우주가 생기기 전에 겪는 체험 가운데 많은 특징을 일곱 최상 영 집단에 관한 이 이야기의 일부로서 이야기할 수도 있다.
17:6.2 (203.5) 우리는 한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의 생애에서 여섯 단계에 관하여 정통하며, 있음직한 일곱째 단계의 활동에 관하여 많이 추측해 본다. 이 다른 존재 단계들은 다음과 같다:
17:6.3 (203.6) 1. 파라다이스에서 초기의 구별.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의 공동 행위로 한 창조 아들이 성격화될 때, 동시에 무한한 영의 몸에, 이른바 “보완하는 최상의 반응”이 일어난다. 우리는 이 반응이 무슨 성질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합동 행위자의 창조 잠재성 안에 포함된, 성격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선천적으로 수정(修正)됨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동격의 한 창조 아들이 출생하는 것은 무한한 영의 몸 안에, 이 파라다이스 아들에게 미래에 지역 우주 배우자가 될 잠재성이 태어나는 것을 알린다. 우리는 새로운 이 선(先)성격 신분의 개체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이 사실이 그러한 창조 아들의 생애에 관하여 파라다이스 기록부에 언급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17:6.4 (203.7) 2. 창조자 예비 훈련. 우주의 조직과 행정에 관하여 한 미가엘 아들이 오랫동안 예비 훈련을 받는 동안, 그의 미래 배우자는 개체의 성장을 더 겪고, 운명에 대하여 집단 의식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모르지만, 추측하건대, 그러한 집단 의식을 가진 개체는 공간을 인식하게 되고, 우주 창조와 행정 면에서 보완하는 미가엘과 공동으로 일하는 미래 과제에서 영의 기술을 얻는 데 필수인 그 예비 훈련을 시작한다.
17:6.5 (204.1) 3. 물리적 창조 단계. 영원한 아들이 한 미가엘 아들에게 창조자 책임을 지울 때, 이 새 창조 아들이 가기로 예정된 초우주를 지휘하는 으뜸 영은, 무한한 영이 계신 앞에서, “신분 확인의 기도”를 말씀하신다. 나중에 창조 영이 되는 그 개체는 처음으로 무한한 영의 몸과 구별되어 보인다. 탄원하는 으뜸 영의 몸까지 바로 다가가면서, 이 개체는 이내 우리가 인식할 수 없이 사라져 버리며, 겉보기에는 이 으뜸 영 몸의 일부분이 된다. 새로 신분이 확인된 창조 영은, 공간의 모험을 하려고 창조 아들이 떠나는 순간까지 그 으뜸 영과 함께 머무른다. 그후에 그 으뜸 영은 이 새 영 배우자를 그 창조 아들의 보호에 맡기며, 동시에 그 영 배우자에게 영원히 충실하고 끝없이 충성할 책임을 지워준다. 다음에 파라다이스에서 일찍이 생긴 가장 깊이 감동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가 일어난다. 우주의 아버지가 그 창조 아들과 창조 영의 영원한 연합을 인정하며, 그리고 초우주를 관할하는 으뜸 영이 어떤 합동 관리 권력을 수여한 것을 확인한다고 말씀하신다.
17:6.6 (204.2) 다음에 아버지가 연합한 그 창조 아들과 창조 영은 우주를 창조하는 모험을 하려고 떠난다. 그들의 우주의 물질을 조직하는 길고도 벅찬 기간을 통해서, 그들은 이 형태의 관계를 가지고 같이 일한다.
17:6.7 (204.3) 4. 생명 창조 시대. 창조 아들이 생명을 창조하려는 의사(意思)를 선포하고 나서 파라다이스에서 “성격화 예식”이 뒤따르는데, 여기에 일곱 으뜸 영이 참여하며 감독하는 으뜸 영이 몸소 이를 체험한다. 이것이 그 창조 아들의 영 배우자의 개성에 파라다이스 신이 기여하는 것이며, 이는 무한한 영의 몸에서 생기는 “1차 분출” 현상으로 우주에 명백히 나타난다. 파라다이스에서 이 현상이 생김과 동시에, 창조 아들의 영 배우자, 이제까지 비성격이었던 영 배우자는 모든 실질 의도와 목적으로 보아서 진정한 성격자가 된다. 앞으로, 언제까지나, 바로 이 지역 우주의 어머니 영은 성격자로 여겨질 터이고, 뒤이어 생명을 창조함으로 생기는 모든 성격자 무리와 개인적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17:6.8 (204.4) 5. 수여 이후 시대. 한 창조 영의 그치지 않는 생애에서 또 하나의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그 창조 아들이 일곱째 자신 수여를 마친 뒤, 그리고 완전한 우주 통치권을 얻고 난 뒤에, 그가 우주 본부로 돌아올 때이다. 그 기회에 모인 우주 행정가들 앞에, 승리한 창조 아들은 우주 어머니 영을 공동(共同) 통치자로 높이 올리고 그 영 배우자를 자기와 대등한 자로 인정한다.
17:6.9 (204.5) 6. 빛과 생명의 시대. 빛과 생명의 시대가 정착되고 나서, 그 지역 우주의 공동 군주는 창조 영의 생애에서 여섯째 단계에 들어간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위대한 체험의 성질을 설명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것들은 네바돈에서 앞날의 진화 단계에 관한 것이다.
17:6.10 (204.6) 7. 밝혀지지 않은 생애. 우리는 한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의 생애에서, 이 여섯 단계를 알고 있다. “일곱째 생애가 있는가?” 우리가 묻지 않을 수 없다. 필사자가 올라가는 마지막 운명으로 보이는 것에 다다를 때, 최후자가 여섯째 단계 영(靈)의 생애로 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우리는 염두에 둔다. 우주의 배치에서 아직도 또 하나의 밝혀지지 않은 생애가 최후자를 기다린다고 우리는 추측한다. 마찬가지로, 우주 어머니 영들이 앞으로 어떤 밝혀지지 않은 생애를 가졌고, 이것은 그들이 우주에서 봉사하는 일을 친히 체험하고 창조자 미가엘의 서열과 함께 충성으로 협동하는 일곱째 단계이리라 우리가 간주하기를 기대해야 한다.
17:7.1 (205.1) 이 보조 영들은 한 지역 우주의 어머니 영이, 한 창조 아들과 그러한 창조 영이 합동으로 창조한 살아 있는 생물에게, 일곱 가지로 지성을 수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여는 그 영이 성격 특권을 가지는 지위로 승진할 때 가능하게 된다. 일곱 보조 지성 영의 성질과 기능에 관한 이야기는 너희 네바돈 지역 우주의 이야기에 속하는 것이 더 마땅하다.
17:8.1 (205.2) 최상 영의 일곱 집단은 셋째 근원 중심의 기능적 집단의 핵심을 구성하며, 그는 무한한 영이자 합동 행위자이다. 최상 영의 범위는 파라다이스의 삼위일체가 계신 앞으로부터, 공간의 행성에서 진화하는 필사자 계급의 지성 작용에까지 미친다. 그러니까 그들은 내려오는 행정 수준을 통일하며, 그 직원의 다양한 기능을 조정한다. 한 거울 영 무리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과 연락하든지, 한 창조 영이 한 미가엘 아들과 어울려서 활동하든지, 또는 일곱 으뜸 영이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둘레를 회로로 연결하든지 상관 없이, 중앙 우주, 초우주, 지역 우주 어디에나 최상 영들의 활동을 구경하게 된다. 이들은 마찬가지로 “늘” 서열의 삼위일체 성격자, 그리고 “아들” 서열의 파라다이스 성격자들과 함께 활동한다.
17:8.2 (205.3) 무한한 어머니 영과 함께, 최상 영의 집단은 셋째 근원 중심의 방대한 생물 집단을 직접 창조한 자들이다. 모든 계급의 봉사하는 영들은 이 연합으로부터 태어난다. 1차 상천사는 무한한 영에서 기원을 가지고, 이 계급의 2차 존재는 으뜸 영들이, 그리고 3차 상천사는 일곱 회로 영이 창조한다. 거울 영들은 집단으로, 놀라운 계급의 천사 무리, 곧 초우주에서 근무하는 막강한 2품 천사들의 어머니인 창조자이다. 창조 영은 한 지역 우주에서 천사 계급의 어머니이다. 그러한 천사 봉사자들은 중앙 우주에 있는 원본을 따라서 만들었지만, 그들은 각 지역 우주에 고유하다. 무한한 영의 중앙 거점은 봉사하는 영들을 지은 이 모든 창조자를 오직 간접으로 원조하며, 무한한 영은 모든 천사 봉사자의 최초의 어머니요, 영원한 어머니이다.
17:8.3 (205.4) 일곱 최상 영 집단은 사람이 사는 우주를 조정하는 자이다. 그들을 지휘하는 우두머리인 일곱 으뜸 영의 모임은 칠중 신의 광범위한 활동을 조정하는 듯하다:
17:8.4 (205.5) 1. 집단으로, 으뜸 영들은 파라다이스 신들의 삼위일체 신성(神性) 수준과 거의 대등하다.
17:8.5 (205.6) 2. 개별적으로, 그들은 삼자일체 신의 1차 연합 가능성을 모두 써버린다.
17:8.6 (206.1) 3. 합동 행위자의 다채로운 대표로서, 그들은 최상 존재가 아직 친히 행사하지 않는 바로 그 영ㆍ지성ㆍ동력의 통치권을 저장한 자이다.
17:8.7 (206.2) 4. 거울 영들을 통해서, 그들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초우주 정부를 위엄자와 동시화하는데, 그는 우주 거울 작용의 파라다이스 중심이다.
17:8.8 (206.3) 5. 지역 우주의 신성한 봉사자를 개별화하는 과정에 참여할 때, 으뜸 영들은 칠중 신의 마지막 수준, 곧 지역 우주의 창조 아들과 창조 영의 결합에 이바지한다.
17:8.9 (206.4) 합동 행위자 안에 본래부터 있는 기능적 통일성은 그의 주요 성격자인 일곱 으뜸 영 속에서, 진화하는 우주들에게 드러난다. 그러나 앞날에 완전하게 된 초우주에서, 의심할 여지 없이 이 통일성은 최상위의 체험적 통치권과 분리할 수 없을 것이다.
18:0.1 (207.1) 최상 삼위일체 성격자들은 모두 특정한 봉사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어떤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신성한 삼위일체가 그들을 고안하였고, 그들은 완전한 기술과 지극한 헌신으로 봉사할 자격을 갖추었다. 일곱 계급의 최상 삼위일체 성격자가 있다:
18:0.2 (207.2) 1. 삼위일체가 낳은 최상위의 신비.
18:0.3 (207.3) 2. 영원부터 늘 계신 이.
18:0.4 (207.4) 3. 옛적부터 늘 계신 이.
18:0.9 (207.9) 행정적으로 완전한 이 존재들의 수는 정해졌고 늘어나지 않는다. 그들이 창조된 것은 지난 일이며, 아무도 더 성격화되지 않는다.
18:0.10 (207.10) 대우주에 두루, 이 최상 삼위일체 성격자들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행정 정책을 대표한다. 그들은 응보를 대표하며,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집행적 판결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파라다이스 구체들로부터 지역 우주의 본부 세계까지, 그리고 그 구성 분자인 별자리의 서울까지, 서로 연결된 완전한 행정 계열을 형성한다.
18:0.11 (207.11)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존재들은 모두 파라다이스의 완전함을 갖추고 모든 신다운 속성을 입고 창조된다. 오로지 체험 영역에서, 우주에 봉사하기 위하여 그들의 장비에 시간의 경과가 더해졌을 뿐이다.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존재는 결코 아무런 이탈의 위험이나 모반의 가능성이 없다. 그들은 신성의 본질을 지녔고, 신답고 완전하게 행동하는 성격자의 길에서 결코 벗어난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18:1.1 (207.12) 파라다이스 위성들의 가장 안쪽 회로에는 일곱 세계가 있는데, 삼위일체가 낳은 최상위의 신비 10명의 단체가 이 높은 세계 하나를 주관한다. 그들은 창조자가 아니라, 최상ㆍ궁극의 행정가이다. 이 일곱 형제 구체의 사무를 운영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 최상 지도자 70명의 단체에게 맡겨진다. 삼위일체의 자손이 파라다이스에서 가장 가까운 이 신성한 일곱 구체를 감독하지만, 이 집단의 세계들은 우주의 아버지의 성격 회로로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다.
18:1.2 (208.1) 삼위일체가 낳은 최상위의 신비는 10명씩 무리를 이루어, 각자의 구체에서 동등한 공동 지도자로서 활동하지만, 또한 특별한 책임 분야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한다. 각 특별 세계의 일은 일곱 대분과로 나누어지고, 이 동등한 통치자들 중에서 한 분이 특화된 활동을 담당하는 그러한 부서 하나를 주관한다. 나머지 세 분은 다른 일곱 분과 가지는 관계에서, 삼자일체 신의 개인적 대표로서, 한 분은 아버지, 한 분은 아들, 한 분은 영을 대표하여 행동한다.
18:1.3 (208.2) 삼위일체가 낳은 최상위의 신비를 상징하는 분명한 등급 유사성이 있지만, 그들은 또한 일곱 가지 뚜렷한 집단 특징을 드러낸다. 신별의 사무를 맡는 최상 지도자 10명은 우주의 아버지의 성격 특징과 성품을 반영하며, 이 일곱 구체가 각각 이런 식이다: 곧 10명으로 된 각 집단은 그들 분야의 특징을 나타내는 신이나 또는 신 연합을 닮는다. 승천자별을 다스리는 지도자 10명은 아버지ㆍ아들ㆍ영의 통합된 성품을 반영한다.
18:1.4 (208.3) 아버지의 신성한 일곱 세계에서 이 높은 성격자들이 하는 일에 관하여 나는 별로 밝힐 수 없는데, 그들이 참으로 최상위의 신비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아버지, 영원한 아들, 또는 무한한 영에게 이르는 접근법과 관련하여, 멋대로 정해진 비밀이 하나도 없다. 신의 완전함에 도달하는 자에게는 누구나 신들이 펼쳐진 책과 같지만, 결코 최상위의 신비 전체를 완전히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일곱 가지 창조된 존재의 집합과 신이 관계하는 성격의 비밀을 포함하는 분야를 언제나 완전히 꿰뚫어 볼 수 없을 것이다.
18:1.5 (208.4) 이 최상 지도자들이 하는 일은, 이 일곱 기본 집단의 우주 존재가 이 일곱 특별 세계에 거주하거나 대우주 전역에서 활동하는 동안, 신들이 그들과 친밀하게 몸소 가지는 접촉과 상관이 있다. 그러니까 이러한 아주 개인적 관계와 특별한 접촉을 신성하게 비밀로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 파라다이스 창조자들은 비천한 인간의 경우에도, 인격자의 사생활과 거룩함을 존중한다. 이것은 개인에게, 또 다양한 독립된 계급의 성격자들에게도 참말이다.
18:1.6 (208.5) 우주에서 높이 달성한 존재들에게도 이 비밀 세계들은 언제나 충성의 시험으로 남아 있다. 영원한 신들을 충분히 몸소 알고 그들의 신답고 완전한 특징을 숨김없이 아는 것은 우리에게 허락되지만, 파라다이스 통치자들이 모든 창조된 존재와 가지는 모든 개인적 관계를 우리가 완전히 꿰뚫어 보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18:2.1 (208.6) 하보나의 10억 세계의 각 곳에 최상 삼위일체 성격자 1명이 지휘한다. 이 통치자들은 영원부터 늘 계신 이로 알려져 있고, 그들의 수는 정확히 10억, 각 하보나 구체에 하나이다. 그들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자손이지만, 최상위의 신비처럼, 그 기원에 관하여 아무런 기록이 없다. 전적으로 지혜로운 이 두 집단의 아버지들은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체계에 있는 아름다운 세계들을 언제까지나 다스려 왔고, 자리가 바뀌거나 다시 배치되지 않고 활동한다.
18:2.2 (208.7) 영원부터 늘 계신 이들은 자신의 영토에서 사는, 의지를 가진 모든 생물의 눈에 보인다. 그들은 정규 행성 회의를 주관한다. 정기적으로, 돌아가면서, 일곱 초우주의 본부 구체들을 찾아본다. 그들은 일곱 초우주 정부의 운명을 주관하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과 가까운 친척 관계에 있고, 또 이들과 대등하게 신다운 자이다. 영원부터 늘 계신 이가 자기 구체에서 자리를 비울 때, 한 삼위일체 교육 아들이 그의 세계를 지도한다.
18:2.3 (209.1) 하보나 주민과 중앙 우주의 다른 생물과 같은 정착된 계급의 생명을 제외하고, 거주하는 영원부터 늘 계신 이는 전적으로 자기 개인의 생각과 이상에 따라서, 각자의 구체를 발전시켜 왔다. 서로의 행성을 찾아보기도 하지만, 베끼거나 흉내내지 않으며, 그들은 언제나, 전적으로 독창성이 있다.
18:2.4 (209.2) 건축물, 자연의 치장, 상물질 구조, 영적 창조물은 각 구체에 한정되며 독특하다. 이런 세계 각자가 영구히 아름다운 곳이며, 중앙 우주의 어느 다른 세계와도 전혀 다르다. 너희가 하보나를 거쳐서 파라다이스까지 안으로 가는 길에, 독특하고 흥분을 자아내는 각 구체에서 너희는 각자, 오래 또는 잠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너희 세계에서는 파라다이스를 향하여 위쪽으로 향한다 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안쪽으로 신성한 승천 목표를 향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18:3.1 (209.3) 시간 세계의 필사자들이 한 지역 우주 본부를 둘러싸는 훈련 세계들을 졸업하고 초우주의 교육 구체들까지 가도록 승진할 때, 그들의 영적 성장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을 포함하여, 이 상급 영역의 높은 영적 통치자와 지도자들을 인식하고 그들과 교통할 수 있는 데까지 진보한 것이다.
18:3.2 (209.4)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삼위일체의 통합된 성품과 통일된 성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개성이 있고 성격이 다양하지만, 그들은 일곱 으뜸 영이 다른 것처럼 서로 다르지 않다. 그밖에 다른 일곱 초우주에 대하여 그들은 한결같이 지도한다. 이 초우주들은 각자 뚜렷하고 분리되고 독특한 창조이다. 일곱 으뜸 영은 성품과 속성이 서로 다르지만, 초우주를 몸소 통치하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자손, 모두 한결같고 완전을 뛰어넘는 자손이다.
18:3.3 (209.5) 높은 곳에 계시는 일곱 으뜸 영은 각자 초우주의 성질을 좌우하지만,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은 바로 이 초우주의 행정을 지시한다. 그들은 다양한 초우주에 균일한 행정을 부과하며, 대우주의 일곱 가지 분할된 배치에 근본적 창조의 차이가 있는 가운데, 전체의 조화를 보장한다.
18:3.4 (209.6)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은 모두 같은 때에 삼자일체화로 태어났다. 그들은 온 우주의 성격자 기록에서 처음을 대표한다. 따라서 이름이 옛적부터 늘 계신 이이다. 너희가 파라다이스에 이르러서 만물의 시작에 관한 문서 기록을 찾을 때, 성격자 부문에 나타나는 맨 처음 기록은 이 옛적부터 늘 계신 이 21명이 삼자일체화로 태어난 이야기임을 발견할 것이다.
18:3.5 (209.7) 이 높은 존재들은 언제나 세 명의 집단으로 통치한다. 그들이 개인으로서 일하는 많은 단계의 활동이 있고, 어느 두 분이 일할 수 있는 다른 단계도 있다. 그러나 높은 행정 영역에서, 그들은 함께 활동해야 한다. 그들은 결코 거주하는 세계를 몸소 떠나지 않지만, 게다가 그럴 필요가 없는데, 이는 이 세계들이 광범위한 거울 체계의 초우주 초점이기 때문이다.
18:3.6 (209.8) 옛적부터 늘 계신 이의 삼원조(三員組)가 몸소 계시는 거처는 그들의 본부 구체의 영적 극점(極點)에 있다. 그러한 구체는 70 행정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때때로 거주하는, 지방 수도가 70개 있다.
18:3.7 (210.1) 권력, 권한의 규모, 사법권의 범위로 보면,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은 시공 우주를 직접 통치하는 자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막강하다. 광대한 온 우주에서 그들에게만, 의지(意志)를 가진 생물의 영원한 소멸에 관하여, 최종의 집행 판결을 내릴 높은 권력이 주어진다. 그리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 세 명이 모두 한 초우주의 최고 법정이 내리는 마지막 선포에 참석해야 한다.
18:3.8 (210.2) 신들과 그 파라다이스 동료들을 제쳐놓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은 시공의 모든 존재 가운데 아주 완전하고, 가장 다능하며, 가장 신다운 자질을 부여받은 통치자이다. 겉보기에, 초우주의 최상 통치자이지만, 이 다스리는 권리를 체험으로 얻지 않았고, 따라서 언젠가 최상 존재에게 대체될 운명을 가지고 있다. 최상 존재는 체험적 군주이며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의 대관(代官)이 될 것이다.
18:3.9 (210.3) 한 창조 아들이 체험으로 그의 지역 우주 통치권을 얻는 것 같이, 최상 존재는 체험하는 봉사로 일곱 초우주의 통치권을 달성하고 있다. 그러나 최상위가 진화를 마치지 않은 지금 시대에,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진화하는 시공 우주에게, 조정되고 완전한 전반적 통제를 마련해 준다. 독창적 지혜와 개성 있는 주도권이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모든 법령과 판결의 특징을 나타낸다.
18:4.1 (210.4) 늘 완전한 이는 꼭 210명 있으며, 각 초우주의 10개 대구역의 정부를 주관한다. 그들은 초우주 지도자들을 보조하는 특별한 일을 위하여 삼자일체화로 태어났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에게 직속이자 개인적으로 대표하는 대관으로서 다스린다.
18:4.2 (210.5) 늘 완전한 이 세 분이 각 대구역의 서울에 배치되지만,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과 달리, 세 분 모두가 늘 자리에 있을 필요는 없다. 이따금 이 삼원조의 한 분이 자기 영역의 복지에 관하여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과 친히 의논하기 위하여 자리를 비울 수도 있다.
18:4.3 (210.6) 대구역의 이 삼자일치 통치자들은 행정 세부를 통달하는 데 특별히 완전하며, 따라서 이름이 늘 완전한 이이다. 영적 세계에 있는 이러한 존재들의 이름을 기록할 때, 우리는 너희의 언어로 옮기는 문제에 부딪치며, 마음에 들게 번역하기가 극도로 힘든 경우가 아주 빈번하다. 우리는 너희에게 의미가 없을, 멋대로 지어진 호칭을 쓰기 싫다. 따라서, 적당한 이름, 곧 너희에게 뜻이 분명하고, 동시에 원명(原名)을 어느 정도 나타내는 이름을 고르기가 어려움을 때때로 발견한다.
18:4.4 (210.7) 늘 완전한 이들은 그들의 정부에 부속된 군단, 신성한 조언자, 지혜 완성자, 우주 검열자로 이루어진 적당한 크기의 군단을 거느리고 있다. 그들은 막강한 사자, 고등 권위자, 이름도 번호도 없는 자를 더욱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구역 사무에서 일상적인 많은 일은 천상의 보호자와 높은 아들 조수들이 수행한다. 이 두 집단은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인격자나[1] [1661] 또는 영화롭게 된 필사 최후자가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자손으로부터 뽑는다. 인간이 삼자일체화로 낳은, 이 두 계급 존재에 속하는 어떤 자들은 파라다이스 신들에게 다시 삼자일체화를 겪으며, 다음에 초우주 정부의 행정에서 보조하라고 파송된다.
18:4.5 (211.1) 천상의 보호자와 높은 아들 조수의 대부분은 대구역과 소구역 근무에 배치되지만, 삼위일체를 체험한 관리자(삼위일체의 품에 안긴 세라핌과 중도자)들은 3분과 전체의 법정에 있는 직원이며, 옛적부터 늘 계신 이, 늘 완전한 이, 요즘부터 늘 계신 이들의 법정에서 활동한다. 초우주에 어디서나 삼위일체를 체험한 대사(아들이나 영과 융합된 성질을 가졌고 삼위일체의 품에 안긴, 하늘 가는 필사자)들과 마주칠 수 있으나, 그 대다수는 소구역에서 일하고 있다.
18:4.6 (211.2) 일곱 초우주의 정부 계획이 완전히 펼쳐지는 시대가 오기 전에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을 제외하고, 이 정부의 여러 부서에서 일하는 거의 모든 행정관은, 완전한 하보나 우주의 여러 세계에서 영원부터 늘 계신 이들 밑에서 길거나 짧게 견습 훈련을 거쳤다. 나중에 삼자일체화된 존재들도 마찬가지로, 옛적부터 늘 계신 이, 늘 완전한 이, 요즘부터 늘 계신 이들의 근무에 부속되기 전에, 영원부터 늘 계신 이들 밑에서 한 계절 동안 훈련을 거쳤다. 그들은 모두 노련하며, 시험을 거치고, 경험을 쌓은 행정관이다.
18:4.7 (211.3) 여러 소구역 세계에서 체류를 마치고 난 뒤에 스플랜돈 본부로 나아갈 때, 너희는 일찍 늘 완전한 이들을 만나 볼 터인데, 이는 이 고결한 통치자들이 시간 세계에서 온 승천하는 인간을 위하여 고등 훈련을 시키는 대구역의 70 세계와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늘 완전한 이들은 대구역의 여러 학교에서 하늘 가는 졸업생들에게 친히 집단 서약을 시행한다.
18:4.8 (211.4) 대구역 본부를 둘러싸는 여러 세계에서 시간 순례자들이 하는 일은 주로 지적 성질을 가진다. 이것은 소구역의 일곱 교육 구체에서 행하는 더 물리적이고 물질적 특징을 가진 훈련, 그리고 초우주 본부의 490개 대학 세계에서 행하는 영적 사업과 대조가 된다.
18:4.9 (211.5) 비록 너희는 스플랜돈 대구역의 기록부에만 기입되지만, 스플랜돈은 너희가 기원을 가진 지역 우주를 포함하며, 너희는 우리 초우주의 10개 대부서를 모조리 거쳐야 할 것이다. 유버르사에 다다르기 전에, 너희는 오르본톤의 늘 완전한 이 30명을 모두 만날 것이다.
18:5.1 (211.6) 요즘부터 늘 계신 이는 초우주의 최상 지도자 가운데 가장 젊은 분이며, 3명씩 집단으로 소구역 사무를 주관한다. 그들의 성품은 늘 완전한 이와 동급이지만, 그들의 행정 권한은 아래에 있다. 성격이 영화롭고 신답게 유능한 이 삼위일체 성격자는 꼭 21,000명 있다. 동시에 창조되었고, 그들은 함께 영원부터 늘 계신 이들 밑에서 하보나 훈련을 거쳤다.
18:5.2 (211.7) 요즘부터 늘 계신 이들은 늘 완전한 이들의 경우와 비슷하게, 한 군단의 동료와 조수들을 거느리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굉장한 수에 달하는, 여러 종속 계급의 하늘 존재들을 자체에게 배치하였다. 소구역을 관리하면서 그들은 큰 무리의 거주하는 승천 필사자, 여러 우대 거류지의 직원, 그리고 무한한 영에 기원이 있는 여러 집단을 이용한다.
18:5.3 (211.8) 소구역 정부는 순전히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로, 초우주의 큰 물리적 문제들에 관심을 가진다. 소구역 구체들은 물리 통제사들의 본부이다. 이 여러 세계에서, 하늘 가는 필사자는 제3 계급의 최상 동력 중심과 모두 일곱 계급의 물리 통제사들이 하는 활동을 검사하는 것과 상관되는 연구와 실험을 수행한다.
18:5.4 (212.1) 한 소구역 체제가 아주 널리 물리적 문제에 관여하니까, 요즘부터 늘 계신 이 세 명이 서울 구체에서 같이 있는 일은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에, 감독하는 대구역의 늘 완전한 이들과 의논하려고, 한 명이 떠나 있거나, 또는 높은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존재들이 파라다이스에서 집회할 때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을 대표하는 동안에, 자리를 비운다. 그들은 파라다이스의 최고 회의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을 대표하면서 늘 완전한 이들과 교대한다. 그동안에, 다른 요즘부터 늘 계신 이가 그의 관할에 속하는 지역 우주의 본부 세계들을 검열하는 여행으로 떠나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통치자들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은 한 소구역 본부에 언제나 당직(當直)으로 머문다.
18:5.5 (212.2) 너희는 모두 언젠가 엔사 소구역을 담당하는, 요즘부터 늘 계신 이 세 명을 알게 될 터인데, 이는 너희가 대구역의 훈련 세계들까지 안으로 가는 길에, 그들의 손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유버르사로 올라갈 때, 너희는 소구역 훈련 구체들 가운데 꼭 한 집단만 통과할 것이다.
18:6.1 (212.3) “늘” 계급의 삼위일체 성격자는 초우주 정부 수준 밑에서, 행정 자격으로 활동하지 않는다. 진화하는 지역 우주에서, 그들은 오로지 조언자나 고문으로서 활약한다. 늘 하나된 이들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인가를 받고서, 지역 우주의 두 통치자에게 연락을 취하는 성격자 집단이다. 조직되어 있고 사람이 사는 각 지역 우주는 이 파라다이스 조언자 가운데 한 명을 배당받는데, 그는 삼위일체의 대표로서, 어떤 면에서는, 지역 창조에 대하여 우주의 아버지의 대표로서 행동한다.
18:6.2 (212.4) 모두가 임명받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700,000명이 존재한다. 늘 하나된 이의 예비군은 파라다이스에서 우주 조절 최고 회의로서 활동한다.
18:6.3 (212.5) 특별한 방법으로, 이 삼위일체 관찰자들은, 지역 우주의 일을 비롯하여 구역 정부를 거쳐서 초우주의 일에 이르기까지, 우주 정부의 모든 부서의 행정 활동을 조정한다. 따라서 이름이 늘 하나된 이이다. 그들은 상관들에게 세 가지로 보고서를 작성한다: 자기 소구역의 요즘부터 늘 계신 이들에게 물리적이고 반(半)지적 성질을 가진 관계된 자료를 보고하며, 자기 대구역의 늘 완전한 이들에게 지적 사건과 준(準)영적 사건을 보고한다. 그들의 초우주 서울에 있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에게 영적 문제와 얼마큼 파라다이스와 관련된 문제를 보고한다.
18:6.4 (212.6)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존재이니까, 그들은 모든 파라다이스 회로를 교신하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언제나 서로 연락이 되며, 파라다이스 최고 회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다른 필요한 성격자와 연락이 된다.
18:6.5 (212.7) 늘 하나된 이는 배치된 지역 우주의 정부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관찰자로서 맡은 임무를 제쳐놓으면, 그는 지역 당국의 요청을 받고 나서야 행동한다. 지역 우주의 모든 기본 회의와 모든 중요한 집회에 직권상 일원이지만, 그는 행정 문제의 기술적 고찰에 참여하지 않는다.
18:6.6 (213.1) 한 지역 우주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될 때, 거기에서 영화롭게 된 존재들은 늘 하나된 이와 자유롭게 사귀는데, 그는 진화로 완전해진 그러한 영역에서 확대된 자격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1차적으로 삼위일체 대사(大使)요 파라다이스 조언자이다.
18:6.7 (213.2) 2중의 신 기원을 가진 한 신다운 아들이 한 지역 우주를 직접 다스리지만, 그는 항상 곁에 파라다이스 형제, 곧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한 성격자를 두고 있다. 한 창조 아들이 그의 지역 우주 본부에서 잠깐 자리를 비우는 경우에, 대행 통치자들은 큰 결정을 내릴 때, 대체로 늘 하나된 이의 조언으로 지도를 받는다.
18:7.1 (213.3) 삼위일체의 기원을 가진 이 높은 성격자들은 각 지역 우주에서 1백 별자리의 통치자들에게 조언하는 파라다이스 고문이다. 늘 충실한 이는 7천만명 있는데, 늘 하나된 이들처럼, 모두 근무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파라다이스 예비군은 우주간 윤리 및 자치 자문 위원회이다. 늘 충실한 이들은 그들 예비군의 최고 회의의 판결에 따라서 돌아가며 봉사한다.
18:7.2 (213.4) 늘 하나된 이와 지역 우주의 창조 아들의 모든 관계는, 늘 충실한 이와 그 지역 우주의 별자리를 다스리는 보론다덱 아들들의 관계와 같다. 그들은 배치된 별자리의 복지에 지극히 헌신적이고 신답게 충실하다. 따라서 이름이 늘 충실한 이이다. 그들은 오직 상담자로서만 행동하고, 별자리 당국의 초청을 받을 경우를 제외하고, 결코 행정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다. 한 별자리의 본부를 둘러싸는 건축된 여러 훈련 구체에서, 하늘 가는 순례자에게 베푸는 교육 봉사에 직접 관여하지도 않는다. 그러한 사업은 모두 보론다덱 아들들의 감독 하에 있다.
18:7.3 (213.5) 한 지역 우주의 별자리에서 활동하는 늘 충실한 이는 모두 늘 하나된 이의 관할 밑에 있고, 직접 그에게 보고한다. 그들은 광범위한 상호 통신 체계가 없고, 보통 한 지역 우주 테두리 안에서 서로 교류하는 데 스스로를 국한시킨다. 네바돈에서 근무하는 늘 충실한 이는 누구나 이 지역 우주에서 근무하는, 같은 계급에 속하는 어떤 다른 이와도 통신할 수 있고, 그렇게 한다.
18:7.4 (213.6) 우주 본부에 있는 늘 하나된 이와 마찬가지로, 늘 충실한 이들은 그러한 영역의 행정 지도자들의 주소와 따로, 별자리 서울에 개인 거주를 유지한다. 그들의 거처는 별자리의 보론다덱 통치자들의 집과 비교해서, 정말로 수수하다.
18:7.5 (213.7) 만물의 중심 가까이 있는 우주의 아버지의 신성한 구체들로부터 지역 우주의 1차 부문에 이르는 행정적 자문 계통에서, 늘 충실한 이들은 마지막에 연결된 자이다.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체제는 별자리에서 끝나며, 그러한 파라다이스 고문들은 아무도 그 구성 분자인 체계나 또는 사람 사는 세계에 영구하게 자리잡지 않는다. 사람 사는 세계의 행정 단위는 전적으로 지역 우주에서 태어난 존재들의 관할 밑에 있다.
19:0.1 (214.1)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동급의 존재라 부르는 이 파라다이스 집단은, 삼위일체 교육 아들 (이들은 또한 하나님의 파라다이스 아들 등급에도 속한다), 세 집단의 높은 초우주 행정가, 그리고 얼마큼 비성격인 영감 받은 삼위일체 영들의 부류를 포함한다. 하보나 원주민도 파라다이스에 거주하는 수많은 무리의 존재들과 함께, 이 삼위일체 성격자 분류 속에 적절히 포함되어도 좋다. 이 이야기에서 다루는 삼위일체의 기원을 가진 존재들은 다음과 같다:
19:0.9 (214.9) 삼위일체 교육 아들과 아마 영감 받은 삼위일체 영을 제외하고, 이 무리들의 구성원 수는 일정하며, 그들의 창조는 끝났고 지나간 일이다.
19:1.1 (214.10) 너희에게 밝혀진 모든 높은 계급의 하늘 성격자 가운데, 삼위일체 교육 아들만 홀로 2중 자격을 가지고 행동한다. 삼위일체 성질의 기원 때문에, 그들의 기능은 신다운 아들의 근무에 거의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이다. 그들은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성격자와 2중 기원 성격자 사이의 우주 간격에 다리를 놓는, 연락하는 존재이다.
19:1.2 (214.11) 삼위일체의 고정된 아들의 수는 채워졌지만, 교육 아들의 수는 항상 늘어난다. 교육 아들의 최종 숫자가 얼마나 될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유버르사에 보낸 최근의 정기 보고서에 따르면, 파라다이스의 기록부가 이 아들이 21,001,624,821명이나 근무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19:1.3 (214.12) 이 존재들은, 기원이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 가운데 너희에게 밝히는 유일한 집단이다. 그들은 중앙 우주와 초우주를 다니며, 엄청나케 큰 한 군단이 각 지역 우주에 배치된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다른 파라다이스 아들들처럼, 개별 행성에 봉사를 베푼다. 대우주 계획이 완전히 개발되지 않았으니까, 다수의 교육 아들이 파라다이스에서 예비군에 머물러 있으며, 대우주의 모든 부문에서, 공간의 따로 떨어진 세계에서, 지역 우주와 초우주에서, 그리고 하보나 세계에서, 긴급 임무나 특별 봉사에 자원한다. 그들은 또한 파라다이스에서도 활약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파라다이스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그들에 대한 자세한 고려를 미루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19:1.4 (215.1) 그러나 이러한 맥락에서, 교육 아들이 삼위일체의 기원을 가진, 최고의 조정 성격자라는 것을 적어도 좋다. 그렇게 방대한 온 우주에는 한정된 관점의 잘못, 그리고 실체와 신성(神性)을 좁게 부분적으로 파악하는 데 본래부터 생기는 잘못에 굴복할 큰 위험이 언제나 있다.
19:1.5 (215.2) 예를 들면 인간의 생각하는 머리는 보통, 간단하고 유한한 것으로부터 까다롭고 무한한 것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기원으로부터 신성한 운명까지 나아감으로, 이 계시에 묘사된 우주 철학에 접근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영적 지혜로 이끌지 않는다. 그러한 과정은 일종의 기원적 지식에 도달하는 가장 쉬운 길이지만, 기껏해야 사람의 기원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요, 사람이 어떤 신성한 운명을 가졌는가 거의 또는 아무것도 드러낼 수 없다.
19:1.6 (215.3) 유란시아에서 사람의 생물학적 진화에 관한 연구에도, 오늘날에 인간의 지위와 현재의 문제에 관한 순전히 역사적 접근 방법에 대하여 심각한 반대가 있다. 어떤 실체의 문제라도―인간의 문제나 신의 문제나, 지상의 문제나 우주 문제나―이를 보는 참된 시각(視覺)은 우주 실체의 세 가지 국면, 곧 기원ㆍ역사ㆍ운명에 관하여 충만히 편견 없이 연구하고 상관 관계를 지어야만 얻을 수 있다. 이 세 가지 체험적 실체를 적절히 이해하는 것은 현재 상태를 지혜롭게 측정할 기초를 마련해 준다.
19:1.7 (215.4) 생물학이든 신학(神學)이든, 인간의 머리가 낮은 데서 출발하여 더 높은 데로 접근하는 철학적 수법을 따르려고 시도할 때, 그 생각은 언제나 다음 네 가지 논리적 잘못을 저지를 위험을 안고 있다:
19:1.8 (215.5) 1. 인간의 머리는 개인적 달성이나 우주 운명의 목표, 최종이자 완성된 진화적 목표를 전혀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19:1.9 (215.6) 2. 우주의 진화적 (체험적) 실체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봄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진리를 곡해하고 운명을 착각하는, 최대의 철학적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
19:1.10 (215.7) 3. 원인의 연구는 역사(歷史)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나 한 존재가 어떻게 되는가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러한 존재의 현재 지위와 참된 인품이 어떤가 총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는다.
19:1.11 (215.8) 4. 역사만으로 앞날의 발전―운명―이 어떤가 적절히 드러내지 않는다. 유한한 기원은 유익하지만, 오로지 신의 원인이 마지막 결과를 보여준다. 시작되는 시점에서는 영원한 목표가 보이지 않는다. 오직 지난날과 앞날을 연결하여 비추어 봄으로 오늘날을 참되게 해석할 수 있다.
19:1.12 (215.9) 그러므로 이러한 까닭과 그밖의 이유로, 모든 성격자 실체와 모든 우주 존재의 무한ㆍ영원ㆍ신성한 파라다이스 근원 중심으로부터 시공 세계로 여행을 떠남으로, 우리는 사람과 그의 행성 문제에 접근하는 수법을 이용한다.
19:2.1 (215.10) 지혜 완성자는 초우주에서 신의 지혜를 성격으로 나타내려고 고안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특화된 창조이다. 이러한 존재가 꼭 70억 명 있으며, 10억 명이 각 초우주에 배치되어 있다.
19:2.2 (215.11) 동급인 신성한 조언자와 우주 검열자와 공통으로, 지혜 완성자는 파라다이스와 하보나의 지혜를 거쳤고, 또한 신별을 제외하고, 아버지의 파라다이스 구체들의 지혜를 거쳤다. 이러한 체험을 겪은 뒤에, 지혜 완성자들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을 위한 근무에 영구히 배치된다. 그들은 파라다이스에서나,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회로에서 근무하지 않으며, 초우주 정부의 행정을 돌보는 데 온통 몰두한다.
19:2.3 (216.1) 지혜 완성자가 활동할 때는 언제 어디서나, 그때 그 자리에서, 신의 지혜가 작용한다. 막강하고 훌륭한 이 성격자가 하는 일에는 지식과 지혜가 실제로 있고 완전히 명시된다.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지혜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바로 그 지혜이다. 그들은 우주 지식을 응용하는 모든 선생에게 지혜의 근원이며, 모든 우주에서 학문과 통찰력을 가르치는 단체에게 분별의 샘물이요 헤아림의 근원이다.
19:2.4 (216.2) 지혜의 근원은 두 가지이니, 지혜는 완전한 존재들에 본래 있는 신의 완전한 통찰력으로부터, 그리고 진화하는 인간이 몸소 체험을 얻는 데서 생긴다. 지혜 완성자는 신의 통찰력을 가진, 파라다이스처럼 완전해진 신다운 지혜이다. 유버르사에 있는 행정 동료, 곧 막강한 사자, 이름도 번호도 없는 자, 고등 권위자는 함께 행동할 때, 경험을 쌓은 우주 지혜이다. 한 신다운 존재는 신의 지식을 완전히 알 수 있다. 진화하는 필사자는 언젠가 승천자의 완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존재 중에 누구도 혼자서 모든 가능한 지혜의 잠재성을 소모할 수 없다. 따라서, 초우주 운영 문제에서 최대의 행정 지혜를 얻는 것이 바람직할 때는 언제나, 신의 통찰력을 가진, 이 지혜 완성자들은 진화로 진보하는 체험적 시련을 통해서 초우주 권한의 높은 자리에 이른, 하늘 가는 성격자들과 반드시 손잡는다.
19:2.5 (216.3) 지혜 완성자는 자신의 행정적 지혜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하여, 체험적 지혜를 가진 이 보완자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파라다이스 최후자가 언젠가 제7 단계의 영적 존재로 진입하고 난 뒤에, 그들은 높고도 이제까지 다다르지 못했던 지혜 수준에 아마 도달할지 모른다고 추측되어 왔다. 만약 이 추측이 맞는다면, 진화로 올라온 그런 완전해진 존재는, 의심할 여지 없이, 모든 창조에서 이제까지 알려진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우주 행정가가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이 최후자의 고귀한 운명이라고 믿는다.
19:2.6 (216.4) 지혜 완성자의 다능함은 그들로 하여금 하늘 가는 인간을 위하여 거의 모든 천상 근무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지혜 완성자와 내 계급 성격자인 신성한 조언자는 우주 검열자와 함께, 개별 행성과 체계들이 그 초기 시대에 있거나 또는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어 있거나, 그들에게 진리를 계시하는 일에 종사해도 좋고, 또 그렇게 하는 가장 높은 계급의 존재를 구성한다. 이따금 초기의 생명을 기르는 행성으로부터, 위로 지역 우주와 초우주, 특히 후자를 통과하면서, 우리는 모두 하늘 가는 필사자들에게 베푸는 봉사와 접촉한다.
19:3.1 (216.5)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이 존재는 일곱 초우주의 영역에게 주는 신의 조언이다. 삼위일체의 신성한 조언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바로 그 조언이다. 2백10억 명의 조언자가 복무하고 있으며, 30억 명이 각 초우주에 배치되어 있다.
19:3.2 (217.1) 신성한 조언자는 우주 검열자와 지혜 완성자의 동료요 대등한 자이며, 하나에서 일곱에 이르는 조언자가 각 지혜 완성자에게 배치된다. 세 계급 모두가 대구역과 소구역을 포함하여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정부에, 지역 우주와 별자리에, 그리고 지역 체계 군주의 회의에 참여한다.
19:3.3 (217.2) 내가 이 발표문을 쓰면서 하는 것처럼 우리는 개인으로서 행동하지만, 또한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나, 우리는 삼원조(三員組)로서 활동하기도 한다. 우리가 집행 자격으로 행동할 때는 언제나, 지혜 완성자 1명, 우주 검열자 1명, 그리고 하나에서 일곱에 이르는 신성한 조언자가 함께 관련된다.
19:3.4 (217.3) 지혜 완성자 1명, 신성한 조언자 7명, 우주 검열자 1명은, 삼위일체 신의 법정을 구성하는데, 이것은 여러 시공 우주에서 가장 발이 빠른 고문단이다. 이러한 9명의 집단은 사실을 확인하거나 진실을 밝히는 법정으로 알려져 있다. 이 법정이 한 문제에 관하여 재판하고 판결을 내릴 때, 그것은 마치 옛적부터 늘 계신 이 한 분이 그 문제를 판결한 것과 같으니, 이는 모든 초우주 연대기에서 그러한 재판 결과를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한 번도 뒤집어엎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19:3.5 (217.4) 옛적부터 늘 계신 이 세 명이 활동할 때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활동한다. 연합 심의를 거친 뒤에 9명으로 이루어진 법정이 판결을 내릴 때, 모든 의도와 목적에서 보면,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말씀한 것이다. 이 방법으로, 파라다이스 통치자들은 행정 문제와 정부의 규제를 다룰 때 개별 세계ㆍ체계ㆍ우주와 친히 연락을 가진다.
19:3.6 (217.5) 신성한 조언자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주는, 신의 완전한 조언(助言)이다. 우리는 완전한 조언을 대표하며, 사실 우리는 완전한 조언이다. 진화적 승천으로 완전하게 되었고 삼위일체가 품에 안은 존재인 동료들이 체험적 조언으로 우리를 보조했을 때, 우리의 통합된 결론은 완벽할 뿐 아니라 충분하다. 한 우주 검열자가 우리의 연합된 조언을 참작하고, 판결하고, 확인하고 이를 선포했을 때, 그 결과는 보편적 총합에 가까이 갈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러한 재판 결과는 관계된 상황과 관련된 문제의 시공 한계 안에서, 신의 절대적 태도에 가능한 가장 가까운 접근법을 대표한다.
19:3.7 (217.6) 삼위일체가 품에 안았던 진화 삼원조―막강한 사자, 고등 권위자, 이름도 번호도 없는 자―와 연결하여, 신성한 조언자 일곱 명은 영적 의미와 실체 가치 수준, 파라다이스에 가까운 수준에서, 인간의 관점과 신의 태도를 합치는 가장 가까운 초우주 접근법을 대표한다. 오로지 자신을 수여하는 파라다이스 아들이 인간과 창조자의 연합된 우주 태도에 더 가까이 접근하며, 그들은 인격자 체험의 모든 단계에서, 하나님이자 사람이다.
19:4.1 (217.7) 정확히 80억 명의 우주 검열자가 존재한다. 이 독특한 존재들은 신의 판단이다. 단지 완전한 결정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판단이다.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조차 우주 검열자와 관계하지 않고는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19:4.2 (217.8) 중앙 우주에 있는 10억 세계의 각 곳에 한 검열자가 임명되며, 거주하는 영원부터 늘 계신 이의 행성 행정부에 부속된다. 지혜 완성자도 신성한 조언자도, 하보나 행정부에 이처럼 영구히 소속되지 않는다. 우리는 어째서 우주 검열자들이 중앙 우주에 주둔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의 현재 활동은 그들이 어째서 하보나에 배치되는가 도저히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보나 인구가 부분적으로 바뀔지도 모르는 어느 미래 시대에 생길 필요를 예상하여 그들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19:4.3 (218.1) 각 초우주에 10억 명의 검열자가 배치된다. 개인 자격으로, 지혜 완성자 및 신성한 조언자들과 손잡고, 그들은 일곱 초우주의 모든 부문에 걸쳐서 활동한다. 따라서 검열자들은 완전한 하보나 세계로부터 체계 군주들의 회의에 이르기까지, 대우주의 모든 수준에서 활동하며, 진화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섭리 시대 심판의 유기적 일부이다.
19:4.4 (218.2) 한 우주 검열자가 계실 때는 언제 어디서나, 그때 그 자리에서 신의 재판이 있다. 검열자가 반드시 지혜 완성자와 신성한 조언자들과 연결하여 평결을 선고하니까, 그러한 결정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연합된 지혜ㆍ조언ㆍ판단을 포함한다. 이 사법권의 삼원조에서, 지혜 완성자는 “지난날”이고, 신성한 조언자는 “앞날”이겠지만, 우주 검열자는 언제나 “지금”일 것이다.
19:4.5 (218.3) 검열자는 우주에서 합계하는 성격자이다. 증인 1천―또는 1백만―명이 증언했을 때, 지혜의 목소리가 말씀하고 신성한 조언이 기록되었을 때, 승천자의 완전한 증언이 보태졌을 때, 그때 검열자가 활동하며, 그때까지 벌어진 모든 일의 합계, 어김없는, 신의 합계(合計)가 이내 나타난다. 그러한 발표는 신의 결론, 곧 마지막이자 완전한 결정의 총합과 내용을 대표한다. 그러니까 한 검열자가 말씀하고 나서, 아무 다른 이도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 검열자가 앞에 생겼던 모든 일의 참되고 어김없는 총합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검열자가 말씀할 때, 아무런 상고(上告)가 없다.
19:4.6 (218.4) 아주 충분히 나는 지혜 완성자의 생각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이해한다. 그러나 분명컨대 우주 검열자의 판결하는 머리가 어찌 작용하는가 나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우주 사건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제시된 사실, 진실 및 조사 결과를 연결함으로, 검열자들은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나에게 보인다. 우주 검열자는 아마도, 창조자의 완전한 통찰력과 완전해진 인간 체험의 조합을 독창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 그럴 듯하다. 파라다이스의 완전함과 우주 체험의 이러한 연합은 의심할 여지 없이, 궁극의 것들 안에서 새로운 가치에 이른다.
19:4.7 (218.5) 그러나 이것은 우주 검열자의 생각 작용에 관하여 우리가 마주치는 최종의 어려움이 아니다. 어떤 주어진 우주 상황에서, 한 검열자의 활동에 관해서 우리가 알거나 짐작하는 모든 것을 마땅히 참작하고 나서, 그래도 우리는 결정을 내다보거나 판결을 예측할 수 없음을 발견한다. 창조자의 태도와 인간의 체험을 관련시킴으로 있음직한 결과를 우리는 아주 정확히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이 반드시 검열자의 발표를 정확히 예상하지 못한다. 검열자들은 어떤 방법으로 신 절대자와 연락이 있는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검열자들의 많은 결정과 판결을 우리는 설명할 수 없다.
19:4.8 (218.6) 지혜 완성자, 신성한 조언자, 우주 검열자는 일곱 계급의 최상 삼위일체 성격자들과 더불어, 때때로 삼위일체의 고정된 아들이라 부르는 10개 집단을 구성한다. 그들은 함께, 삼위일체의 행정가와 통치자, 집행자와 고문, 조언자와 재판관으로 이루어진 대군단을 구성한다. 그들의 수는 370억을 조금 넘는다. 20억 70명이 중앙에, 그리고 각 초우주에 50억 명이 조금 넘게 주둔한다.
19:4.9 (219.1) 삼위일체의 고정된 아들들의 기능의 한계를 묘사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들의 행동이 유한하고 제한되었다고 말하면 틀릴 터인데, 그렇지 않음을 가리키는 거래가 초우주 기록에 올라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의 조건에 따라서 필요할 수도 있고 총우주의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진화에 관계되는 어떤 수준의 우주 행정이나 판결에서도 그들이 행동한다.
19:5.1 (219.2) 영감 받은 삼위일체 영에 관하여 나는 너희에게 일러 줄 것이 거의 없으니, 그들이 극소수로 존재하고 전적으로 비밀스런 계급 존재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밀에 싸여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들 가운데 기원이 그들의 창조 근원과 아주 가까운 자들에게도 그들이 자신을 충분히 드러내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행위로 존재하게 되며, 세 분 신 모두 뿐 아니라, 어느 한 분이나, 두 분에게도 이용될 수 있다. 우리는 이 영들의 수가 찼는지, 아니면 항상 늘어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수가 고정되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19:5.2 (219.3) 우리는 영감 받은 영이 무슨 성품을 가졌는지, 무엇을 하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도 그들은 초월 성격을 가진 영 부류에 속할지 모른다. 그들은 모든 알려진 회로에서 활약하는 것으로 보이고 시간과 공간에 거의 상관 없이 활동하는 듯하다. 그들이 하는 활동의 성질로부터 그 성품을 어림하는 외에, 우리는 그들에 관하여 거의 아는 것이 없다. 우리는 그들의 활동으로 생기는 결과를 분명히 우주 여기저기에서 관찰한다.
19:5.3 (219.4) 어떤 조건 하에서, 이 영감 받은 영은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존재들이 인식하도록 스스로를 충분히 개별화할 수 있다. 나는 그들을 본 적이 있지만, 더 낮은 계급의 하늘 존재들은 결코 이들 중에 하나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진화하는 우주들을 경영하면서, 이따금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어떤 존재이든, 자기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이 영들을 직접 고용해도 좋은 어떤 상황이 생긴다. 그러니까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 어떤 조건 하에서 우리가 그들의 도움을 요청해도 좋고 또 도움 받는 것을 우리가 알며, 어떤 때는 그들이 있음을 식별한다. 그러나 그들은, 물질 창조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될 때까지, 그러한 시공 우주의 경영을 맡은 조직, 겉으로 나타나고 분명히 드러난 조직의 일부는 아니다. 진화하는 일곱 초우주의 현재 체제나 행정에서, 그들은 뚜렷이 식별될 수 있는 자리를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한 비밀이다.
19:5.4 (219.5) 네바돈의 멜기세덱들은 영감 받은 삼위일체 영이 언젠가 영원한 앞날에, 외톨 사자를 대신해서 활동하도록 예정되었다고 가르치는데, 어떤 삼자일체화된 종류의 아들의 동료로서 활약하는 책임 때문에, 외톨 사자 등급의 수는 느리지만 확실히 줄어들고 있다.
19:5.5 (219.6) 영감 받은 영들은 온 우주에서 홀로 있는 영이다. 그들은 영으로서, 외톨 사자가 뚜렷한 성격자인 것을 제외하고, 이 사자들과 아주 비슷하다. 영감 받은 영에 관하여 우리가 가진 지식의 상당 부분은 외톨 사자로부터 얻는다. 외톨 사자는 영감 받은 영의 계심에 본래부터 민감한 덕분에 그들이 가까이 있음을 탐지하며, 이 민감성은 마치 자석 바늘이 남북을 가리키는 것과 똑같이 어김없이 작용한다. 외톨 사자는 영감 받은 삼위일체 영에 가까이 있을 때, 그러한 신다운 존재의 질적 표시와 또한 아주 분명한 양적 기록을 의식하는데, 이것은 외톨 사자로 하여금 실제로 영의 존재나 존재들의 등급과 수를 알 수 있게 한다.
19:5.6 (220.1) 나는 더욱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이야기할 수도 있다. 유란시아처럼, 생각 조절자가 거주자 안에 깃드는 행성에 외톨 사자가 있을 때, 그는 영 존재를 탐지하는 민감성이 질적으로 흥분함을 의식한다. 그러한 경우에, 아무런 양적 흥분이 없고, 다만 질적 동요가 일어난다. 조절자가 오지 않는 행성에서 원주민과 접촉하면 이러한 반응을 도무지 일으키지 않는다. 이것은 생각 조절자가 어떤 방식으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영감 받은 영과 관련이 있거나 연결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어떤 방법으로, 생각 조절자는 아마 그들이 하는 일의 어떤 단계에 관계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는 모른다. 두 존재가 만물의 중심과 근원 가까이에서 태어나지만, 같은 계급의 존재는 아니다. 생각 조절자는 오직 아버지로부터 생겨난다. 영감 받은 영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자손이다.
19:5.7 (220.2) 영감 받은 영은 겉보기에 개별 행성이나 우주의 진화 계획에 속하지 않는 듯하다. 그래도 이들은 거의 어디에나 있는 것 같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일에 몰두하는 사이에도 이 계급 영의 존재를 가리키는, 나와 관계된 동료 외톨 사자의 개인적 민감성은 바로 이 순간에 우리와 함께, 8미터 넘지 않는 거리에, 영감 받은 계급, 그리고 셋째 수준의 동력 존재를 가진 영이 있음을 가리킨다. 셋째 수준의 동력 존재는 아마도 영감 받은 영 3명이 연결하여 활동하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비친다.
19:5.8 (220.3) 이 시간에 나와 관계하는 12 계급이 넘는 존재들 가운데, 외톨 사자가 유일하게, 삼위일체의 신비스러운 이 존재들이 자리에 있음을 느끼고 있다. 더군다나, 이 신성한 영들이 가까이 있음을 이렇게 통지받지만, 우리는 모두 그들의 임무가 무엇인가, 똑같은 정도로 아는 것이 없다. 그들이 다만 우리가 하는 일을 흥미 있게 보는 관찰자인지, 아니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방법으로, 실제로 우리가 시도하는 일이 성공하도록 기여하는지 우리는 정말로 모른다.
19:5.9 (220.4) 삼위일체 교육 아들이 우주의 인간이 의식하면서 깨우침을 얻는 데 헌신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나는 영감 받은 삼위일체 영이, 상의식(上意識) 기법으로, 그 영역의 교육자로서 또한 활동하고 있다는 확실한 결론에 이르렀다. 광대한 양의 기본적 영적 지식, 곧 높은 영적 수준의 달성에 필수인 진리가 있으며, 이러한 지식은 의식하면서 받을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자의식은 확실한 수용을 실질적으로 위태롭게 할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생각이 옳고 내 계급의 존재 전부가 그러한 의견을 가졌다면 이 문제를 극복하는 것, 도덕적 깨우침과 영적 진보를 추진하는 우주 계획에서 이 간격을 메우는 것이 이 영감 받은 영들의 임무인지 모른다.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이 두 종류의 교육자가 활동하면서 어떤 연락을 취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정말 모른다.
19:5.10 (220.5) 나는 초우주 훈련 세계들과 영원한 여러 하보나 회로에서, 완전하게 되는 필사자―진화 영역으로부터 영적으로 높아진 하늘 가는 자―들과 사귀어 보았다. 그러나 외톨 사자에 거하는 탐지 능력이 영감 받은 영들이 때때로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음을 가리키는데도, 이 필사자들은 한 번도 그들을 의식하는 적이 없다. 나는 높고 낮은 모든 계급의 하나님의 아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어 왔는데, 그들도 마찬가지로 영감 받은 삼위일체 영의 훈계를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의 체험을 돌이켜볼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며, 이러한 영들의 활동을 고려하지 않으면 설명하기 힘드는 사건들을 되새긴다. 그러나 외톨 사자, 그리고 때때로 삼위일체의 기원을 가진 존재들을 제외하고, 하늘 가족 중에 아무도 영감 받은 영들이 가까이 있음을 느낀 적이 없다.
19:5.11 (221.1) 나는 영감 받은 삼위일체 영들이 나와 숨바꼭질을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내가 그들과 교통하려고 애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아마 내게 자신을 나타내려고 몹시 애쓸 것이다. 우리의 어려움과 한계는 공통된 것이고, 타고난 것이 틀림없다. 우주에 멋대로 정해진 비밀이 하나도 없다는 것에 나는 마음이 흡족하다. 따라서 내 계급의 창조에 속하는 이 영들이 고립되어 있는 신비를 풀려는 노력을 나는 결코 그만두지 않겠다.
19:5.12 (221.2) 이 모든 것으로부터, 영원한 나그네 길에서 첫걸음을 바로 지금 내딛고 있는 너희 필사자들은, “눈으로 보고” “물질적” 확신을 얻어서 승진하기 전에, 너희가 한참이나 진보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빠르고 안전하게 진보하기를 바란다면, 너희는 오랫동안 믿음을 이용하고 계시(啓示)에 의존할 것이다.
19:6.1 (221.3) 하보나 원주민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직접 창조한 존재이며, 그들의 수는 너희의 제한된 머리가 상상하기 어렵다. 영원한 우주에서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이 민족처럼 그렇게 신답게 완전한 인간이 선천적으로 지닌 자질을 유란시아인이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너희는 결코 이 영화로운 인간을 참으로 상상할 수 없다. 하보나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그때 너희는 그들에게 동지(同志)인 영으로서 인사를 나눌 것이다.
19:6.2 (221.4) 하보나 문화를 가진 10억 세계에서 오래 머무르는 동안, 너희는 이 훌륭한 존재들과 영원한 우정을 개발할 것이다. 공간 세계에서 올라온 가장 낮은, 인격을 가진 인간과 중앙 우주의 완전한 구체들에서 태어난 이 높은 인격 존재 사이에 자라는 우정(友情)이 얼마나 깊은지! 하늘 가는 필사자가 하보나 원주민과 오랫동안 사랑에 넘친 교제를 가지면서, 필사자로서 승진하는 초기 단계의 영적 영양 부족을 그들이 많이 보충해 줄 것이다. 동시에, 하늘 가는 순례자와 접촉함으로, 하보나 주민은 신답게 완전한 삶을 늘 살아 온 체험적 장애를 적잖게 극복하는 경험을 얻는다. 하늘 가는 필사자와 하보나 원주민은 서로에게 큰 이득을 준다.
19:6.3 (221.5)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모든 다른 성격자와 마찬가지로, 하보나 원주민은 신답게 완전하도록 계획되었고,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다른 성격자들의 경우처럼, 시간이 경과할수록 그들의 체험적 재산은 늘어난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고정된 아들의 경우와 달리, 하보나 주민의 지위는 진화할 수도 있고, 그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래 영원의 운명을 가질지도 모른다. 조절자가 아닌 아버지 분신과 융합하는 능력을 봉사로 현실화하고, 그렇게 필사 최후 군단의 단원이 될 자격을 갖추는 하보나 주민이 이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중앙 우주의 이 원주민에게 열린 다른 최후자 군단들이 있다.
19:6.4 (221.6) 하보나 원주민 지위의 진화는 유버르사에서 많은 추측을 낳았다. 그들이 여러 파라다이스 최후 군단으로 항상 침투하고 있고 이제 더 창조되지 않으니까, 하보나에 남아 있는 원주민의 수가 항상 줄어드는 것이 뻔하다. 이러한 거래의 궁극의 결과는 결코 우리에게 밝혀진 적이 없지만, 우리는 하보나가 언젠가 그 원주민을 전부 잃어버릴 것이라 믿지는 않는다. 바깥 공간 수준에서 창조가 연속되는 시대에 언젠가, 우리는 하보나 주민이 아마 최후자 군단에 가입하기를 그만둘 것이라는 이론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또한 이러한 차후의 우주 시대에, 중앙 우주가 혼합된 거주민의 무리로 가득 차고, 최초의 하보나 원주민이 겨우 시민의 일부를 이룰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품어 보았다. 그래서 어떤 계급이나 형태의 인간이 미래의 하보나에서 거주 지위를 얻도록 예정될까 모르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았다:
19:6.5 (222.1) 1. 일생자(一生者), 이들은 현재 지역 우주 별자리의 영구 시민이다.
19:6.6 (222.2) 2. 빛과 생명의 시대가 한창일 때, 사람이 사는 초우주의 여러 구체에서 태어날지 모르는 미래 종류의 필사자.
19:6.8 (222.4) 우리는 예전 우주 시대에 하보나는 현재 우주 시대의 하보나와 얼마큼 달랐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중앙 우주에서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예시하는 그러한 느린 변화를 우리가 구경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 만큼이나 일리가 있다고 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으니, 우주는 정지(靜止)되어 있지 않다. 오로지 하나님이 변화가 없다.
19:7.1 (222.5) 파라다이스에는 수많은 무리의 훌륭한 존재, 곧 파라다이스 시민이 거한다. 그들은 의지를 가진 하늘 가는 인간을 완전하게 만드는 데 직접 관계되지 않고, 따라서 유란시아 필사자에게 완전히 밝혀지지 않는다. 3천 계급이 넘게 이러한 하늘 지능 존재들이 있으며, 최근의 집단은 시공의 일곱 초우주를 창조하는 계획을 선포한 삼위일체의 명령과 동시에 인격화되었다.
19:7.2 (222.6) 파라다이스 시민과 하보나 원주민을 때때로 통틀어서 파라다이스ㆍ하보나 인격자라고 부른다.
19:7.3 (222.7) 이것이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생기게 한 존재들의 이야기를 마친다. 그들 가운데 아무도 길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래도 여전히, 가장 높은 의미에서, 그들은 모두 자유 의지를 부여받았다.
19:7.4 (222.8)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존재들은 수송 특권을 가졌고, 이것은 그들을 세라핌과 같은 수송 성격자에 의존하지 않게 만든다. 우리는 모두, 온 우주에서 자유롭게 빨리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영감 받은 삼위일체 영을 제외하고, 우리는 외톨 사자의 속도, 거의 믿을 수 없는 속도에 다다를 수 없다. 그러나 공간에 있는 총 수송 시설을 이용할 수 있으니까, 우리는 한 초우주의 어느 곳이라도, 본부로부터 유란시아 시간으로 1년 안에 다다를 수 있다. 내가 유버르사로부터 유란시아까지 여행하는 데 너희 시간으로 109일이 걸렸다.
19:7.5 (222.9) 바로 이 길을 통해서, 우리는 한 순간에 통신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우리의 창조 계급 전부가, 영감 받은 영만 제외하고,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자손의 모든 부서 안에 포함된 개인들과 다 연락이 된다.
20:0.1 (223.1) 오르본톤 초우주에서 활동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들은 세 항목으로 분류된다:
20:0.2 (223.2) 1. 내려오는 하나님의 아들.
20:0.5 (223.5) 내려오는 계열의 아들 신분은 직접 신이 창조한 성격자를 포함한다. 필사 인간과 같이 하늘로 가는 아들은, 진화로 알려진 창조 기법에 체험으로 참여하여 이 지위를 얻는다. 삼위일체를 체험한 아들은 복합 기원을 가진 무리이며, 이는 삼위일체에 직접 기원을 가지지 않더라도,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품에 안긴 존재를 다 포함한다.
20:1.1 (223.6) 내려오는 하나님의 아들은 모두 높고 신다운 기원을 가진다. 그들은 시공 세계와 체계에서, 내려가서 봉사하는 직분에 헌신하며, 거기서 진화의 기원을 가진 비천한 인간―하늘 가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파라다이스로 오르는 길에서 승진하는 것을 도와준다. 수많은 계급의 내려오는 아들 가운데, 일곱 계급이 이 이야기에서 묘사된다. 가운데 빛과 생명의 섬에 계신 신들로부터 오는 아들은 하나님의 파라다이스 아들이라 부르고, 다음 세 계급을 포함한다:
20:1.5 (223.10) 나머지 네 계급의 내려오는 아들 신분은 지역 우주 하나님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20:1.10 (223.15) 멜기세덱은 한 지역 우주의 창조 아들, 창조 영, 아버지 멜기세덱이 합동으로 만든 자식이다. 보론다덱과 라노난덱은 한 창조 아들과 동료 창조 영이 출산한다. 보론다덱은 최고자, 곧 별자리 아버지로서, 라노난덱은 체계 군주로서, 그리고 행성 영주로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3중 계급인 생명 운반자는 한 창조 아들과 창조 영이 담당 초우주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 세 분 중의 하나와 결합하여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 우주 하나님의 아들들의 성품과 활동은 지역 우주 사무를 다루는 논문에서 기술하는 것이 더 적당하다.
20:1.11 (224.1) 하나님의 파라다이스 아들들은 세 가지 기원을 가진다. 1차 아들, 곧 창조 아들은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이 존재하게 만든다. 2차 아들, 곧 심판 아들은 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의 자손이다. 삼위일체 교육 아들은 아버지ㆍ아들ㆍ영의 자식이다. 봉사ㆍ예배ㆍ간청의 관점에서 보면, 파라다이스 아들들은 하나와 같은데, 그들의 영이 하나이고, 하는 일의 질과 완벽함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20:1.12 (224.2) 파라다이스의 “늘” 계급이 신다운 행정가임이 입증된 바와 같이, 마찬가지로 파라다이스 아들 계급은 그들이 신다운 성직자―창조자요 봉사자, 수여자요 재판관, 교육자이자 진리 계시자―인 것을 드러냈다. 그들은 온 우주에 걸쳐서, 영원한 섬의 나라에서부터 사람이 사는 시공 세계들까지, 이 이야기에서 밝혀지지 않는 여러 가지 수고를 중앙 우주와 여러 초우주에서 베푼다. 베푸는 봉사의 성질과 장소에 따라서 그들은 다르게 조직되지만, 한 지역 우주에서, 심판 아들과 교육 아들은 모두 그 영토를 주관하는 창조 아들의 지휘 하에 봉사한다.
20:1.13 (224.3) 창조 아들들은 몸 안에 집중되는 영적 자질을 소유하는 듯하다. 바로 너희 창조 아들이 유란시아의 모든 필사 육체에게 그의 영을 퍼부었을 때 한 것 같이, 그들은 이 자질을 통제하고 수여할 수 있다. 창조 아들은 각자 자신의 영역 안에서 영적으로 당기는 이 힘을 부여받았고, 그의 영토 안에서 봉사하는, 내려오는 어떤 하나님의 아들의 행동과 감정도 다 친히 의식한다. 영원한 아들의 바로 그 절대 영적 인력(引力)을 신성하게 반영한 자, 지역 우주에서 복사(複寫)한 자가 여기 있다. 영원한 아들의 영적 인력은 어느 파라다이스 아들이 이 온 우주에 어디 있든지, 그와 연락하고 연락을 유지하도록 손을 뻗게 한다.
20:1.14 (224.4) 파라다이스의 창조 아들들은 봉사하고 자신을 수여(授與)하는 직분, 내려오는 직분에 아들로서 일할 뿐 아니라, 수여 생애를 마쳤을 때 각자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우주의 아버지로서 활동한다. 한편, 다른 하나님의 아들들은 우주의 아버지가 사랑으로 통치함을 기꺼이 인정하기까지, 행성들을 하나하나 쟁취하도록 고안된 봉사, 자신을 수여하고 영적으로 향상시키는 봉사를 계속한다. 이러한 쟁취는 마침내 인간이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에 성스럽게 헌신하고, 마침내 행성이 창조 아들의 우주 통치권에 충성하게 만든다.
20:1.15 (224.5) 칠중(七重)의 창조 아들 경우에 창조자와 인간은 이해하고 공감하며 자비로운 관계로 언제까지나 섞인다. 미가엘, 곧 창조 아들 계급 전체는 아주 독특하니까 그들의 성품과 활동에 관한 고려는 이 시리즈의 다음 논문에서 다루도록 남겨 두겠다. 한편 이 이야기는 주로 나머지 두 계급의 파라다이스 아들, 곧 심판 아들과 삼위일체 교육 아들에 관계될 것이다.
20:2.1 (224.6) 영원한 아들이 표현한 독창적ㆍ절대적 존재 개념이, 무한한 영이 품은, 사랑으로 봉사하는 새롭고 신성한 이상과 뭉칠 때마다, 새롭고 독창적인 하나님의 아들, 곧 파라다이스 심판 아들이 하나 생산된다. 이 아들은 미가엘, 곧 창조 아들 서열과 대조해서, 아보날 서열을 이룬다. 친히 생산한다는 의미에서 창조자는 아니지만 그들은 모든 일에 미가엘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아보날은 행성에서 봉사자요, 재판관, 다시 말해서, 시공 영역―모든 민족, 모든 세계, 모든 우주―에서 심판관이다.
20:2.2 (225.1) 우리는 대우주에 심판 아들의 총 숫자가 약 10억 명이라고 믿을 만한 까닭이 있다. 그들은 자치하는 계급이며, 파라다이스에 있는 자체의 최고 회의의 지도를 받는다. 이 최고 회의는 모든 우주의 근무에서 선택된 노련한 아보날로 구성된다. 그러나 한 지역 우주에 배치되고 거기에 임명되고 나서, 그들은 그 영토의 창조 아들의 지휘 밑에서 봉사한다.
20:2.3 (225.2) 아보날은 지역 우주의 개별 행성에게 봉사하고 자신을 수여하는 파라다이스 아들이다. 각 아보날 아들이 독특한 성격을 가졌고, 어느 두 명도 비슷하지 않으니까, 그들이 하는 일은 머무르는 영역에서 개별적으로 독특하다. 거기서 그들은 흔히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육신화되며, 어떤 때는 진화 세계에서 땅에 있는 어머니에게 태어난다.
20:2.4 (225.3) 상급 행정 수준에서 봉사하는 외에도, 아보날은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세 가지 역할을 한다:
20:2.5 (225.4) 1. 사법(司法) 행위. 이들은 행성의 여러 섭리 시대가 끝날 때 행동한다. 시간이 되면, 수십―수백―의 그러한 임무가 각 개별 세계에서 집행될 수도 있고, 그들은 섭리 시대의 종결자로서, 잠자는 생존자들의 해방자로서, 수없이 여러 번, 같은 세계나 다른 세계들에 가도 좋다.
20:2.6 (225.5) 2. 심판관 임무. 이 종류의 행성 방문은 보통 한 수여 아들이 도착하기 전에 일어난다. 그러한 임무가 있을 경우에 한 아보날이 필사자로서 출생하지 않고 육신화 기법으로 그 영역에 어른으로서 나타난다. 이렇게 심판관이 처음으로 보통 방문을 한 뒤에, 아보날은 같은 행성에 심판관 자격으로, 수여 아들이 나타나기 전과 후에, 거듭하여 봉사해도 좋다. 이러한 추가 심판관 임무가 있을 때, 아보날은 물질적이며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중에 어떤 임무에도 하나의 무력한 어린아이로서 그 세계에 태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20:2.7 (225.6) 3. 수여(授與) 임무. 아보날 아들은 모두 적어도 한 번, 어떤 진화 세계의 어떤 필사 민족에게 자신을 수여한다. 사법(司法) 방문은 수없이 있고 심판관 임무는 여러 번일지 모르지만, 각 행성에는 단 하나의 수여 아들이 나타난다. 수여 아보날은, 네바돈의 미가엘이 유란시아에서 육신화한 것처럼, 여자에게서 태어난다.
20:2.8 (225.7) 심판관 임무와 수여 임무로 아보날 아들이 몇 번 봉사해도 좋은가에 제한이 없지만, 보통 그 경험을 일곱 번 거치면, 그런 봉사를 적게 받은 행성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하여 수여가 중지된다. 그러면 여러 번 수여 체험을 겪은 이 아들들은 한 창조 아들의 높은 개인 회의에 배치되고, 이렇게 그들은 지역 우주 사무의 행정에 참여한다.
20:2.9 (225.8) 사람이 사는 세계들을 위해서, 또 거기서 하는 모든 일에 심판 아들은 두 계급의 지역 우주 생물, 곧 멜기세덱과 천사장들의 보조를 받는다. 한편 수여 임무의 경우에, 마찬가지로 지역 창조에서 기원을 가진 찬란한 저녁별들도 그들을 따라온다. 2차 파라다이스 아들, 곧 아보날은 행성에서 어떤 노력에도, 그들이 근무하는 지역 우주 창조 아들인 한 1차 파라다이스 아들의 충만한 권력과 권한으로 지원을 받는다. 모든 의도와 목적으로 보아서, 필사자가 사는 그러한 세계에서 한 창조 아들이 베푸는 봉사와 같이, 사람이 사는 구체에서 그들이 하는 일은 똑같이 효율이 있고 흡족하다.
20:3.1 (226.1) 아보날은 심판 아들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들이 그 영역의 높은 심판관, 곧 시간 세계에서 연속되는 섭리 시대의 재판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잠자는 생존자를 깨우는 일을 주관하고, 그 영역을 재판하며, 응보(應報)가 중지된 섭리 시대를 끝내고, 시험적 자비 시대의 명령을 집행하며, 행성에서 봉사하는 공간 생물을 새 섭리 시대의 과제에 다시 배치하고, 임무가 끝난 뒤에 그들의 지역 우주 본부로 돌아간다.
20:3.2 (226.2) 한 시대의 운명을 재판할 때, 아보날은 진화 민족들의 운명을 선포한다. 비록 인격을 가진 인간들의 신분 말소 판결을 내리더라도, 그들은 그러한 선고를 집행하지는 않는다. 초우주 당국을 제외하고, 아무도 이 성질을 가진 선고를 집행하지 않는다.
20:3.3 (226.3) 한 섭리 시대를 끝마치고 행성이 진보하는 새 시기를 시작하는 목적으로 진화 세계에 파라다이스 아보날이 도착하는 것은 반드시 심판관 임무나 수여 임무는 아니다. 심판관 임무는 가끔, 수여 임무는 반드시, 육신화(肉身化)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임무의 경우에, 아보날은 물질 형태를―글자 그대로―입고 한 행성에서 봉사한다. 그들의 다른 방문은 “기술적”인 것이며 이 자격을 가진 아보날은 행성에서 봉사하려고 육신화하지 않는다. 오직 섭리 시대의 재판관으로서 온다면, 심판 아들은 한 영적 존재로서 행성에 도착하며, 그 영역의 물질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기술적 방문은 사람이 사는 한 세계의 긴 역사에서 되풀이해서 일어난다.
20:3.4 (226.4) 심판관 및 수여 체험에 앞서, 아보날 아들은 한 행성의 재판관으로서 행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심판관이나 수여 임무의 경우에, 육신화된 아들은 지나가는 행성 시대를 재판할 것이다. 필사(必死) 육체의 모습을 입고 수여 임무로 육신화했을 때에는 창조 아들도 그렇게 한다. 창조 아들이 진화 세계를 방문하고 그 사람들 가운데 하나처럼 될 때, 그의 계심은 한 섭리 시대를 마치고 그 영역에 대한 재판이 된다.
20:4.1 (226.5) 수여 아들이 행성에 나타나기 전에, 사람이 사는 세계는 보통, 심판관 임무를 띠고 오는 파라다이스 아보날의 방문을 받는다. 그것이 처음 심판 방문이라면, 그 아보날은 반드시 하나의 물질 존재로서 육신화된다. 그는 배치된 행성에, 필사 민족 사이에 완전히 성장한 남자, 곧 그 시대와 세대의 필사 인간에게 완전히 눈에 보이고, 육체를 입고 그들과 접촉하는 존재로서 나타난다. 심판관으로 육신화하는 동안 내내, 아보날 아들과 그 지역 및 우주의 영적 세력과 완벽하고 단절되지 않은 연락을 가진다.
20:4.2 (226.6) 수여 아들이 나타나기 전과 후에, 한 행성은 심판관의 방문을 여러 번 받을 수도 있다. 섭리 시대의 재판관으로서 행동하는, 똑같은 아보날이나 다른 아보날이 그 행성을 여러 번 찾아볼 수도 있지만, 그러한 법적 재판 임무는 수여도 아니고 심판도 아니며, 아보날은 그러한 때 결코 육신화되지 않는다. 한 행성이 거듭해서 심판관 임무의 축복을 받을 때에도, 아보날이 반드시 필사자로 육신화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수고할 때, 그들은 언제나 그 영역의 어른으로서 나타나고,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는다.
20:4.3 (227.1) 수여 임무나 심판관 임무를 띠고 육신화할 때, 파라다이스 아들은 경험 있는 조절자를 소유하며, 이 조절자는 육신화할 때마다 다르다. 육신화한 하나님의 아들의 지성을 차지하는 조절자는 결코 그가 깃드는, 사람답고 신다운 존재와 융합하여 인격을 얻기를 바랄 수 없다. 그러나 그 조절자는 흔히 우주의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서 인격화된다. 그러한 조절자들은 사람이 사는 영역에 대하여 신비의 훈계자들의 관리, 신분 확인, 파송을 지도하는 신별 최고 회의를 형성한다. 땅에서 거하던 몸이 필사의 분해를 겪고 나서, 이들은 또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조절자들을 받아들이고 인가한다. 이 방법으로, 세상 재판관의 충실한 조절자는 그들 부류의 높은 우두머리가 된다.
20:4.4 (227.2) 유란시아는 심판관 임무를 띠고 오는 아보날 아들을 접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사람이 사는 세계들의 일반 계획을 유란시아가 따랐더라면, 아담 시절과 그리스도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하던 시절 사이에 언젠가, 심판관 임무의 축복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1천9백 년 전에, 최종 수여의 임무를 띠고 너희의 창조 아들이 나타나서, 너희 행성에서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정상 순서는 완전히 예정된 길에서 벗어났다.
20:4.5 (227.3) 유란시아는 심판관 임무로 육신화하라고 임명받은 아보날 한 분이 아직도 찾아올지 모르지만, 파라다이스 아들들이 미래에 나타나는 것에 관해서는, “하늘의 천사들도 언제 어떻게 그러한 방문이 있을지 모르나니” 이는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한 세계가 주 아들이 개인적으로 친히 돌보는 행정 구역이 되기 때문이며, 그것만으로 바로 미가엘의 계획과 판결에 전적으로 지배된다. 너희 세계에서 아보날의 방문은 미가엘이 돌아온다는 약속으로 더욱 까다롭게 되었다. 네바돈의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머무른 것에 대하여 너희가 무슨 오해를 하든 상관 없이, 한 가지―너희 세계로 돌아오겠다는 그의 약속―은 분명히 진정하다. 이 가망성을 보건대, 유란시아에서 하나님의 파라다이스 아들들이 앞날에 찾아오는 순서는 오로지 시간이 지나야 알게 될 것이다.
20:5.1 (227.4) 영원한 아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다. 영원한 아들은 영원한 아버지의 절대적이고 무한한 “처음” 생각이 완전히 표현된 것이다. 이 최초의 아들을 몸소 복사한 이, 곧 신답게 연장한 이가 필사자로 육신화하는 수여 임무를 시작할 때, 신성한 “말씀이 육체가 되고” 따라서 그 말씀이 동물 기원을 가진 비천한 존재들 사이에 거한다는 것이 글자 그대로 참말이 된다.
20:5.2 (227.5) 한 아들이 자신을 수여한 목적이 어떤 방법으로 우주의 아버지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려는 것이라는 믿음이 유란시아에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너희의 깨우침은 이것이 참말이 아님을 지적해야 한다. 아보날 및 미가엘 아들의 수여는, 그들을 시공의 민족과 행성들에게 안전하고 공감하는 심판관과 통치자로 만들려고 고안된 체험 과정의 필수 부분이다. 일곱 번 자신을 수여하는 생애는 어떤 파라다이스 창조 아들에게도 최상의 목표이다. 그리고 심판 아들은 누구나 1차 창조 아들과 파라다이스에 계신 영원한 아들의 특징을 아주 풍부히 나타내는, 바로 이 봉사 정신에 마음이 움직인다.
20:5.3 (227.6) 필사자가 사는 각 세계에는 어떤 계급의 파라다이스 아들이 수여되어야 하며, 이것은 생각 조절자가 그 구체에 사는 모든 정상 인간의 지성 안에 깃드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모든 육체 위에 진리의 영이 부어질 때까지, 조절자가 모든 진정한 인간에게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의 영을 보내는 것은, 진화 세계에서 사람으로서 자신을 수여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파라다이스 아들이 우주 본부로 돌아오는 데 달려 있다.
20:5.4 (228.1) 사람이 사는 한 행성의 긴 역사 과정에서, 섭리 시대의 판결은 여러 번 생길 터이고 심판관 임무는 한 번을 넘을 수도 있지만, 수여 아들은 보통 그 구체에서 꼭 한 번 봉사한다. 사람이 사는 각 세계에 한 수여 아들이 와서,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필사자의 생애를 끝까지 사는 것이 요구될 뿐이다. 머지 않아, 영적 지위에 상관 없이, 각 지역 우주에서 한 창조 아들이 필사자로 자신을 수여하려고 택하는 행성 하나를 제외하고, 사람이 사는 세계는 각기 수여 임무를 띤 심판 아들을 맞아들이는 세계가 되도록 정해져 있다.
20:5.5 (228.2) 수여 아들에 관하여 너희가 더욱 알게 되었으니까, 네바돈 역사에서 어째서 그렇게 지대한 관심이 유란시아에 모이는가 너희가 헤아린다. 작고도 하찮은 너희 행성이 지역 우주의 관심거리가 되는 것은, 다만 유란시아가 나사렛 예수가 필사자로 살던 고향 세계이기 때문이다. 거기는 너희 창조 아들의 마지막이자 승리한 수여 생애가 펼쳐진 무대, 미가엘이 네바돈 우주를 친히 다스리는 최상 통치권을 얻어낸 경기장이었다.
20:5.6 (228.3) 한 창조 아들은 그의 지역 우주 본부에서, 특히 자신을 필사자로 수여하는 일을 마치고 난 뒤에, 동료 아들, 곧 심판 아들 및 다른 자들이 다니는 전문 대학에서 상담하고 가르치는 데 많은 시간을 쓴다. 사랑과 헌신 속에서, 부드러운 자비와 사랑에 넘치는 헤아림으로 이 심판 아들들은 자신을 공간 세계에 수여한다. 그러나 행성에게 베푸는 이러한 봉사는 미가엘이 필사자로 자신을 수여한 것보다 어떤 면에서도 못하지 않다. 너희의 창조 아들이 인간의 체험을 겪는 마지막 모험 지역으로서, 두드러지게 불운을 겪은 세계를 고른 것은 참말이다. 그러나 어떤 행성도 조건이 너무나 나빠서, 영적 회복을 이루기 위하여 창조 아들의 수여가 필요한 적은 결코 없다. 수여 집단에 속한 어느 아들도 똑같이 충분했을 터이니, 한 지역 우주의 세계에서 심판 아들이 무슨 일을 해도, 그들은 파라다이스 형인 창조 아들과 똑같이, 신답게 효과적이고 온통 지혜롭기 때문이다.
20:5.7 (228.4) 수여 목적으로 육신화하는 기간에, 재난의 가능성은 언제나 이 파라다이스 아들들을 따라다니지만, 심판 아들이나 창조 아들이 자신 수여 임무를 그르치거나 이행하지 못했다는 기록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이 둘의 기원이 절대 완전에 너무 가까워서 실패할 수 없다. 그들은 정말로 위험을 무릅쓰고, 정말로 피와 살을 가진 필사 인간처럼 되고, 그렇게 함으로 독특한 인간 체험을 얻기는 하지만, 내가 관찰한 범위 안에서 보건대, 그들은 반드시 성공한다. 결코 수여 임무의 목적을 이루는 데 실패하지 않는다. 네바돈 전역에서, 그들이 자신을 수여하고 행성에서 봉사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는 너희 지역 우주의 역사에서 가장 고귀하고 황홀한 장(章)이다.
20:6.1 (228.5) 파라다이스 아들이 수여 아들로서, 필사자로 육신화(肉身化)하기 위하여 준비되고 그 수여 행성에서 잉태되는 그 방법은 우주의 신비이다. 그리고 이 아들별 기법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탐지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분명히 실패하도록 정해져 있다. 나사렛 예수의 필사 생애에 관한 숭고한 지식을 너희의 혼 속에 새길지어다. 그러나 네바돈 미가엘의 이 신비로운 육신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쓸데없이 짐작하느라고 헛된 생각을 하지 말라. 그러한 성취가 신의 성품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확신함으로 우리 모두가 기뻐하고, 그러한 현상을 일으키려고 신의 슬기가 무슨 기술을 이용했는가 쓸데없이 추측하는 데 시간을 조금도 헛되이 쓰지 말라.
20:6.2 (229.1) 예수가 유란시아에서 했던 것 같이, 필사자로 자신을 수여하는 임무에서 파라다이스 아들은 반드시 여자에게서 태어나고, 그 영역에서 사내아이로서 자란다. 최고의 봉사를 베푸는 이 아들들은 모두, 인간이 하는 것과 똑같이, 유년기부터 소년기를 거쳐서 어른이 된다. 모든 점에서, 그들이 태어난 종족의 필사자처럼 된다. 그들이 봉사하는 영역의 자녀들과 같이, 그들은 아버지께 간청을 드린다. 물질적 관점에서 보면, 사람이자 신인 이 아들은, 꼭 한 가지만 제쳐놓고, 보통의 일생을 산다: 머무르는 세계에서 그들은 자식을 낳지 않는다. 이것은 모든 계급의 파라다이스 수여 아들에게 지워진 보편적 제한이다.
20:6.3 (229.2) 예수가 목수(木手)의 아들로서 너희 세계에서 일했던 것 같이, 다른 파라다이스 아들들도 여러 가지 직책을 가지고 자신을 수여하는 행성에서 수고한다. 어느 파라다이스 아들이 시간 세계의 어느 진화 행성에서 수여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가져보지 않은 직업을 너희는 도저히 생각해낼 수 없다.
20:6.4 (229.3) 한 수여 아들이 인간의 생애를 사는 체험을 통달하고, 그가 깃드는 조절자와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을 때, 그렇게 하고 나서, 그는 육체를 입은 형제들의 지성에 빛을 던져 주고 그 혼에 영감을 주도록 고안된 부분, 행성 임무의 바로 그 부분을 시작한다. 선생으로서, 이 아들들은 그들이 머무르는 세계에서 필사 민족들의 영적 깨우침에 온전히 전념한다.
20:6.5 (229.4) 미가엘과 아보날이 필사자로 자신을 수여하는 생애는 대부분의 면에서 비교할 만하지만, 다 똑같지는 않다. 너희의 창조 아들이 유란시아에서 육체를 입고 있을 때 한 것 같이 심판 아들은 “아들을 본 자는 누구나 그 아버지를 보았도다”하고 결코 선포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여된 아보날은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을 보았다”하고 선포한다. 심판 아들은 우주의 아버지의 직계 후손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에 복종해서 육신화하지도 않으며, 그들은 언제나 파라다이스의 영원한 아들의 뜻에 복종해서, 파라다이스 아들로서 자신을 수여한다.
20:6.6 (229.5) 자신을 수여하는 창조 아들이나 심판 아들이 죽음의 문에 들어설 때, 그들은 셋째 날에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1천9백년 전에 너희 세계에 머무른 창조 아들이 겪은 비극의 최후를 그들이 반드시 만날 것이라는 생각을 품어서는 안된다. 나사렛 예수가 특별하고 두드러지게 잔인한 체험을 겪음으로 유란시아는 “십자가의 세계”로 지역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한 분에게 그처럼 사람 아닌 대접을 할 필요는 없다. 대다수의 행성은 이러한 아들을 더 인정 있게 받아들였고, 그가 비명(非命)에 죽지 않고서 필사 생애를 마치고, 한 시대를 종결하고, 잠자는 생존자들을 판결하고, 새로운 섭리 시대를 개시하도록 허락하였다. 수여 아들은 죽음을 거쳐야 하고, 그 영역의 필사자의 실제 체험을 전부 겪어야 한다. 그러나 신의 계획은 이러한 죽음이 비명이거나 특별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20:6.7 (229.6) 수여 아들은 비명에 죽지 않으면 자진하여 자기 생애를 그만두고 죽음의 관문을 거친다. 이것은 “엄격한 응보”의 요구나 “신의 진노”를 충족하려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자신 수여하는 일을 마치려고, 필사자로 존재하는 행성에서 인간이 사는 것처럼, 한 인간의 생애를 이루는 모든 면에서, 육신화하는 생애와 개인적 체험의 “잔을 마시기 위해서”이다. 수여는 행성과 우주의 필요 조건이고, 육체의 죽음은 수여 임무에 필요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20:6.8 (230.1) 필사자로 육신화하는 일이 끝날 때, 봉사하던 아보날은 파라다이스로 나아가서 우주의 아버지의 영접을 받으며, 배치된 지역 우주로 돌아가서 그 창조 아들의 승인을 받는다. 그리고 나서 수여 아보날과 창조 아들은 그들의 합동 진리의 영을, 그 수여 세계에 사는 필사 민족들의 마음 속에서 일하라고 보낸다. 한 지역 우주에서 군주 시대 이전에, 이것은 두 아들의 합동 영(靈)이며, 창조 영이 이를 효력이 있게 만든다. 이것은 미가엘이 일곱째 수여를 마치고 난 뒤에 그 지역 우주 시대의 특징을 나타내는 진리의 영과 얼마큼 다르다.
20:6.9 (230.2) 창조 아들의 마지막 수여가 끝나고 나서, 이전에 그 지역 우주의 모든 아보날 수여 세계에 보낸 진리의 영은 성질이 달라지며, 엄밀하게 말하면 군주 미가엘의 영이 된다. 이 현상은 미가엘이 필사자로 자신을 수여한 행성에서 봉사하도록 진리의 영이 해방되는 것과 동시에 일어난다. 그 뒤에, 심판 아들이 찾아오는 명예를 받는 각 세계는, 그 심판 아들과 관련하여 칠중의 창조 아들로부터 똑같은 위로 영을 받을 터이고, 지역 우주의 군주가 수여 아들로서 몸소 육신화했다면 그 세계는 같은 위로자를 받았을 것이다.
20:7.1 (230.3)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상당히 사사롭게 대하고 상당히 영적인 이 파라다이스 아들을 낳는다. 그들은 하보나에서 데이날 계급으로 알려져 있다. 오르본톤에서 그들은 삼위일체 교육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며, 혈통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구원자별에서 그들은 때때로 파라다이스의 영적 아들이라고 부른다.
20:7.2 (230.4) 교육 아들의 수는 항상 늘어나고 있다. 최근의 우주 통계 방송은 중앙 우주와 초우주에서 활동하는 이 삼위일체 아들의 수가 210억이 조금 넘는다고 했다. 이것은 파라다이스 예비군을 제외한 것이며, 이 예비군은 존재하는 모든 삼위일체 교육 아들의 3분의 1을 넘는다.
20:7.3 (230.5) 데이날 아들 계급은 지역 우주나 초우주 행정의 유기적 일부가 아니다. 그 구성원은 창조자도 구출자도 아니요, 재판관도 통치자도 아니다. 그들은 우주 행정에 그다지 관심이 없고, 오히려 도덕적 깨우침과 영적 성장에 관심을 가진다. 그들은 보편적 교육자이며, 모든 영역에서 영적 깨우침을 주고 도덕적으로 인도하는 데 헌신한다. 그들의 직책은 무한한 영의 성격자들의 직책과 밀접하게 서로 연관이 있고, 인간 존재들이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것과 가까운 관련을 가진다.
20:7.4 (230.6) 이 삼위일체 아들은 파라다이스 신 세 분의 통합된 성품을 취하지만, 하보나에서는 우주의 아버지의 성질을 더욱 비치는 듯하다. 초우주에서 그들은 영원한 아들의 성질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며, 한편 지역 우주에서는 무한한 영의 특성을 드러내는 듯하다. 온 우주에서 그들은 봉사의 화신(化身)이요 지혜로운 판단이다.
20:7.5 (230.7) 파라다이스 형인 미가엘과 아보날과 달리, 삼위일체 교육 아들은 중앙 우주에서 아무 예비 교육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초우주 본부에 직접 파송되며, 거기서부터 어떤 지역 우주에서 봉사하라고 임명된다. 이 진화 영역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그들은 한 창조 아들 및 관련된 심판 아들들의 통합된 영적 영향을 이용하는데, 이는 데이날이 자신 안에 저절로 영적 인력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20:8.1 (231.1) 파라다이스의 영적 아들은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독특한 존재이며, 2중 기원을 가진 우주의 운영과 완전히 연결된, 유일한 삼위일체 생물이다. 그들은 필사 인간과 낮은 계급의 영적 존재를 교육하는 직분에 사랑으로 헌신한다. 지역 체계에서, 그리고 경험과 업적에 따라서 수고를 시작하며, 별자리 근무를 거쳐 지역 우주의 가장 높은 일에 이르기까지, 안쪽으로 올라간다. 인가를 받고 나서, 그들이 봉사하는 지역 우주를 대표하는 영적 대사(大使)가 될 수도 있다.
20:8.2 (231.2) 나는 네바돈에 있는 교육 아들의 정확한 수를 모른다. 그들은 수천명 있다. 여러 멜기세덱 학교에서 부서장의 다수는 이 계급에 속하며, 한편 정규적으로 구성된 구원자별 대학의 통합 직원은 이 아들들을 포함하여 10만명이 넘는다. 큰 무리가 다양한 상물질 훈련 세계에 주둔하지만, 필사 인간의 영적ㆍ지적 진보에만 온통 전념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지역 우주의 천사 존재와 기타 원주민을 가르치는 데 똑같이 관심을 가진다. 그들의 조수 가운데 다수는 인간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존재들의 등급에서 선택된다.
20:8.3 (231.3) 교육 아들은, 전초(前哨) 기지의 파수 임무를 비롯하여 별을 연구하는 자의 임무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험을 관리하고, 모든 하위 단계의 우주 봉사에서 자격과 면허를 주는 모든 시험을 치르고 운영하는 직원을 구성한다. 그들은 행성 과목들로부터 구원자별에 자리잡은 높은 지혜 학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친 훈련 과정을 운영한다. 지혜와 진리 속에 이 모험을 마치는 하늘 가는 필사자나 포부가 큰 케루빔 모두에게, 노력하고 과정을 마친 공로를 인정해 준다.
20:8.4 (231.4) 온 우주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나, 늘 충성스럽고 보편적으로 유능한 이 삼위일체 교육 아들들에게 신세를 진다. 그들은 모든 영 성격자를 가르치는 높은 선생이요, 아니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을 가르치는 노련하고 참된 선생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육 아들의 임무와 활동에 관한 끝없는 세부를 나는 너희에게 도저히 가르칠 수 없다. 너희의 지능이 더 진급하고, 너희 행성의 영적 고립이 끝난 뒤에, 데이날 아들들이 얼마나 광대한 분야에서 활동하는가 유란시아에서 더 잘 이해할 것이다.
20:9.1 (231.5) 한 진화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진행이 영적 시대를 개시할 때가 무르익었음을 가리킬 때, 삼위일체 교육 아들들은 언제나 이 봉사를 베풀려고 자원한다. 너희는 이 아들 계급에 관하여 익숙하지 않은데, 이는 유란시아가 한 번도 영적 시대, 우주의 계몽을 받는 1천년을 거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 구체에서 체류할 것을 예상하여 계획을 세울 목적으로 교육 아들들은 지금도 너희 세계를 찾아본다. 그들은 유란시아의 거주민이 짐승 같은 생활의 쇠고랑과 유물론의 사슬을 비교적 벗어난 뒤에 유란시아에 나타날 것이다.
20:9.2 (231.6) 삼위일체 교육 아들은 행성 시대의 종결(終決)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들은 죽은 자를 심판하지도 산 자를 옮기지도 않지만, 각 행성 임무에 이 직책을 수행하는 심판 아들이 그들을 따라온다. 교육 아들은 영적 시대를 개시하는 데, 진화 행성에서 영적 실체를 깨닫는 시대가 밝아오는 데, 전적으로 관심이 있다. 그들은 물질적 지식 및 현세의 지혜에 해당하는 것을 영적 면에서 현실로 만든다.
20:9.3 (232.1) 교육 아들은 행성의 시간으로 보통 1천년 동안 방문하는 행성에서 머무른다. 교육 아들 한 분이 행성의 천년 통치를 주관하며, 그는 같은 계급의 동료 70명의 도움을 받는다. 데이날은 필사 존재의 눈에 보일 수 있도록 육신화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물질화하지 않는다. 따라서 방문하는 세계와 연락하는 것은 찬란한 저녁별들의 활동을 통해서 유지되며, 이들은 삼위일체 교육 아들과 관계하는, 지역 우주 성격자이다.
20:9.4 (232.2) 데이날은 사람이 사는 한 세계에 여러 번 돌아와도 좋다. 그들의 마지막 임무가 끝난 뒤에 그 행성은 빛과 생명의 구체 지위로 인도되며, 이것이 현재 우주 시대에, 필사자가 사는 모든 세계의 진화적 목표이다. 필사 최후 군단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구체들과 상관이 많고, 그들이 행성에서 하는 활동은 교육 아들의 활동과 관련된다. 정말로, 데이날 아들 계급 전체가 시공의 진화 우주에서 모든 단계의 최후자 활동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20:9.5 (232.3) 삼위일체 교육 아들들은 진화로 승천하는 초기 단계를 통해서 필사자를 진보시키는 체제와 아주 완벽하게 일체가 된 듯하다. 그래서 미래 우주들의 아직 밝혀지지 않은 과정에 그들이 최후자와 아마도 어떤 관계를 가질 듯한가 우리는 가끔 추측하게 된다. 초우주 행정가들의 일부는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성격자이고, 일부는 삼위일체가 품은, 하늘 가는 진화 인간임을 우리는 눈여겨본다. 지금 교육 아들과 최후자들은 시간적으로 관계된 체험을 얻고 있으며, 이것은 어떤 밝혀지지 않은 앞날의 운명에서 생기는 밀접한 관계를 위하여 그들을 준비시키는 예비 훈련일 수 있다고 우리는 굳게 믿는다. 여러 초우주가 빛과 생명 속에 마침내 안정되고 나서, 그렇게 철저히 진화 세계의 문제에 익숙하게 되었고, 그렇게 오랫동안 진화 필사자의 생애와 관계해 오던 이 파라다이스 교육 아들들은 아마도 이동하여 파라다이스 최후 군단과 영원한 관계를 가질 것이라고 유버르사에 있는 우리는 믿는다.
20:10.1 (232.4) 하나님의 파라다이스 아들은 누구나 그 기원과 성품이 신성하다. 각 세계를 위하여 파라다이스 아들 각자가 하는 일은, 봉사하는 그 아들이 마치 처음이자 하나 뿐인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한다.
20:10.2 (232.5) 파라다이스 아들들은 시공의 영토에 대하여 세 분 신의 활동하는 성품의 신다운 표현이다. 창조 아들, 심판 아들, 교육 아들은 사람의 자손과 하늘 가는 잠재성을 가진 모든 다른 우주 인간에게 영원한 신들이 주는 선물이다. 이 하나님의 아들들은 시간 세계의 인간으로 하여금, 높은 영적 목표, 곧 영원에, 이르도록 돕는 일에 그칠 줄 모르고 헌신하는 신성한 봉사자이다.
20:10.3 (232.6) 창조 아들의 경우에, 우주의 아버지의 사랑이 영원한 아들의 자비와 섞이며, 그것은 미가엘의 창조적 힘, 사랑의 봉사, 사람을 이해하는 통치권으로 지역 우주에게 드러난다. 심판 아들의 경우에, 영원한 아들의 자비가 무한한 영의 봉사와 뭉쳐서, 재판ㆍ봉사ㆍ수여를 담당하는 이 아보날의 생애에서, 진화하는 지역에 계시된다. 삼위일체 교육 아들의 경우에는, 파라다이스 신 세 분의 사랑ㆍ자비ㆍ봉사가 가장 높은 시공 가치 수준에서 조정되며, 여러 우주에게 살아 있는 진리, 신의 선함, 참된 영적 아름다움으로서 제시된다.
20:10.4 (233.1) 지역 우주에서 이 여러 아들 계급은 공간의 인간에게 파라다이스 신들의 계시를 수행하려고 함께 일한다. 한 지역 우주의 아버지로서, 창조 아들은 우주의 아버지의 무한한 특징을 묘사한다. 자비로운 수여 아들로서, 아보날은 무한한 동정심을 가진 영원한 아들의 비할 데 없는 성품을 드러낸다. 하늘 가는 인격자를 가르치는 참 교육자로서, 삼위일체 데이날 아들은 무한한 영의 선생 성격을 드러낸다. 신답게 완전히 협동하는 가운데, 미가엘ㆍ아보날ㆍ데이날은 시공 우주에서, 그리고 시공 우주에 대하여, 최상위 하나님의 성격과 통치권을 현실로 만들고 계시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영구한 파라다이스 섬으로부터 미지의 깊은 공간으로 첫째 근원 중심이 언제나 끝없이 신성을 넓히는 것을 이 하나님의 파라다이스 아들들이 따를 때, 삼자일체 활동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그들은 신 성격자들의 선두(先頭)에서 늘 활동한다.
21:0.1 (234.1) 창조 아들은 시공에서 지역 우주의 창조자요 통치자이다. 지역 우주를 창조하는 이 통치자는 이중 기원을 가졌고,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의 특성을 몸에 담고 있다. 그러나 창조 아들들은 각자 서로 다르고, 각자 성격 뿐 아니라 성품이 독특하다. 각자가 기원이 있는 완전한 신의 이상(理想)이 “하나만 얻은 아들”이다.
21:0.2 (234.2) 이 높은 아들이 한 지역 우주를 조직하고, 진화시키고, 완성하는 방대한 작업은 언제나 우주의 아버지의 승인을 계속 얻는다. 창조 아들과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관계는 감동적이고 최상급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신 어버이가 신다운 자식을 깊이 사랑하는 것은, 필사 부모가 자녀들을 사랑하는, 아름답고 거의 신다운 그 사랑의 근원이 된다.
21:0.3 (234.3) 이 1차 파라다이스 아들들은 미가엘로서 성격화된다. 파라다이스로부터 자신의 우주를 지으려고 떠나갈 때, 그들은 창조자 미가엘로서 알려진다. 최상의 권한을 얻어 안정되었을 때, 그들을 주 미가엘이라 부른다. 때때로 우리는 너희 네바돈 우주의 군주를 그리스도 미가엘이라 언급한다. 언제나, 언제까지나, 그들은 “미가엘의 서열”을 좇아서 군림하며, 미가엘은 그들의 계급과 성품을 지닌 첫째 아들의 명칭이다.
21:0.4 (234.4) 최초의 미가엘, 곧 처음 낳은 미가엘은 결코 하나의 물질 존재로서 육신화를 경험한 적이 없다. 그러나 중앙 창조의 바깥 구체들로부터 가장 안쪽 회로까지 진행하면서, 하보나의 일곱 회로에서 영적 생물이 올라가는 체험을 일곱 번 거쳤다. 미가엘 서열은 한쪽 끝에서부터 다른 끝까지 대우주를 알고 있다. 시공의 어느 아이가 겪은 기본 체험도 미가엘들이 몸소 참여해 보지 않은 것이 없다. 사실 그들은 신다운 성품 뿐 아니라 너희의 성품을 가진 자, 즉 가장 높은 자로부터 가장 낮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품을 취한 자이다.
21:0.5 (234.5) 최초의 미가엘은 1차 파라다이스 아들들이 만물의 중심에서 협의하려고 모일 때 주관하는 우두머리이다. 영원한 섬에서, 부모가 계신 가운데 모여서, 온 우주의 통일과 안정의 진보에 관하여 심의하는 창조 아들 15만 명의 특별 집회를 우주에 방송하는 것을 우리가 유버르사에서 기록한 지 오래지 않다. 이것은 군주 미가엘, 곧 일곱 번 수여한 아들들로 이루어진 선택된 집단이었다.
21:1.1 (234.6) 영원한 아들 안에 있는 절대적 영적 관념 작용이 무르익어서 우주의 아버지의 충만한 절대 성격 개념과 마주칠 때, 그러한 창조적 연합이 마침내 충분히 이루어졌을 때, 그렇게 절대로 동일한 영과 그렇게 무한히 하나된 성격 개념이 일어날 때, 그때, 바로 그때 거기서 어느 쪽 무한한 신의 성격이나 특권에 아무 손실이 없이, 새롭고 독창적인 한 창조 아들이 완전히 자란 존재로서 번쩍 나타난다. 이 창조 아들은 완전한 이상과 강력한 생각이 하나만 얻은 아들이며, 이러한 연합은 힘차고 완전한, 이 새 창조 성격자를 생산한다.
21:1.2 (235.1) 창조 아들은 각자 늘 존재하는, 온 우주 창조자들의 지성, 무한ㆍ영원하고 완전한 두 지성이 품은 독창적 개념을 완전히 연합하여 하나만 얻은 자식, 하나밖에 얻을 수 없는 자식이다. 결코 그와 같이 또 다른 아들이 생길 수 없으니, 이는 이 미가엘 아들을 생산하기 위하여 뭉쳐진 그 신성한 창조 잠재성에서 온 영원에 걸쳐서 언젠가 발견되고, 그렇게 표현되고, 그로부터 진화될 수 있는, 모든 신다운 실체의 총 가능성, 그 모든 모습의 총 국면을 모두, 각 창조 아들이 무조건 완벽하게, 최종으로 표현하고 몸으로 나타냈기 때문이다. 창조 아들은 각자 그의 신다운 기원을 구성하는, 뭉쳐진 절대적 신 개념의 절대적 표현이다.
21:1.3 (235.2) 이 창조 아들의 신다운 성품은, 파라다이스 부모의 속성으로부터 똑같이 얻는 것이 원칙이다. 모두가 우주의 아버지의 신성한 성품과 영원한 아들의 창조 특권을 넘치게 가져간다. 그러나 우주에서 미가엘의 활동이 실제로 진행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건대, 우리는 겉으로 나타나는 차이를 식별한다. 어떤 창조 아들은 아버지 하나님을 더 닮았고, 어떤 아들은 아들 하나님을 더 닮았다. 예를 들면, 네바돈 우주에서 행정의 경향은 그 창조자이자 다스리는 아들의 성품과 특징이, 어머니인 영원한 아들을 더 닮은 아들인 것을 가리킨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을 똑같이 닮아 보이는 파라다이스 미가엘들이 어떤 우주들을 주관한다는 것을 덧붙여야 한다. 이러한 관찰은 어떤 의미에서도 은근한 비판이 아니라, 다만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다.
21:1.4 (235.3) 나는 이미 존재하는 창조 아들의 정확한 수를 모르지만, 70만이 넘게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현재, 늘 하나된 이는 정확히 70만이 있고 그들은 더 창조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우리가 지켜보건대, 현재 우주 시대에 예정된 계획은, 늘 하나된 이 한 분이 각 지역 우주에, 삼위일체의 상담하는 대사(大使)로서 주둔하기로 예정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듯하다. 게다가, 우리는 항상 늘어나는 창조 아들의 수가 이미 늘 하나된 이의 고정된 수를 넘는다는 것을 눈여겨본다. 그러나 70만을 넘는 미가엘들의 운명에 관하여, 우리는 결코 통지 받은 적이 없다.
21:2.1 (235.4) 1차 서열의 파라다이스 아들은 각자 영토의 설계자요 창조자, 건설자이자 관리자이다. 이 영토는 시공의 지역 우주, 곧 진화하는 일곱 초우주의 기본 창조 단위이다. 창조 아들은 앞날에 우주 활동을 펼칠 공간의 위치를 고르는 것이 허락된다. 그러나 자기 우주의 물리적 조직을 미처 시작하기 전에, 그가 활동하려고 계획하는 초우주에 자리잡은 여러 우주에서 형들이 노력한 것을 연구하는 데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관찰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앞서, 미가엘 아들은 파라다이스를 관찰하고 하보나 훈련을 받는 체험, 길고도 독특한 체험을 이미 마쳤을 것이다.
21:2.2 (235.5) 한 창조 아들이 우주를 창조하고, 자신이 조직하는 지역 우주에서 우두머리가 되는―사실상의 하나님이 되는―모험을 시작하려고 파라다이스를 떠날 때, 그때, 그는 자신이 셋째 근원 중심과 밀접하게 연락하고, 여러 면에서 그에게 의존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한다. 만물의 중심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거하지만, 무한한 영은 각 창조 아들에게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조수로서 활동하도록 정해져 있다. 그래서 무한한 영의 창조하는 딸 하나가 각 창조 아들을 따라오며, 그는 신성한 봉사자, 새 지역 우주의 어머니 영이 되도록 운명이 정해진 존재이다.
21:2.3 (236.1) 이 기회에 미가엘 아들의 출발은, 파라다이스 근원 중심들이 선재(先在)하는 데 본래 따르는 어떤 제한, 그리고 어떤 다른 선행(先行)하는 권능과 계심에 복종한다는 조건으로, 미가엘의 창조자 특권을 이 근원 중심들로부터 언제까지나 해방시킨다. 지역 우주의 아버지로서 창조자의 특권은 다음의 제한 외에는 전능하다:
21:2.4 (236.2) 1. 에너지와 물질은 무한한 영의 지배를 받는다. 크던 작던, 사물의 어떤 새로운 형태가 창조되기 전에, 에너지와 물질의 어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기 전에, 창조 아들은 무한한 영의 찬성과 기초적 협조를 확보해야 한다.
21:2.5 (236.3) 2. 생물의 설계와 형태는 영원한 아들의 통제를 받는다. 한 창조 아들은 어떤 새 부류의 존재를 창조하고 어떤 새로운 생물의 고안에 착수하기 전에, 어머니인 최초의 영원한 아들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21:2.7 (236.5) 지성의 종류와 형태는 생물이 되기 전의 존재 요인에 따라서 결정된다. 이 요인들이 결합하여 한 생물을 (성격이든 아니든) 구성한 뒤에, 셋째 근원 중심이 지성을 부여하며, 그는 파라다이스에 있는 창조자들 수준 밑에 있는 모든 존재에게 베푸는 지성 봉사의 보편적 근원이다.
21:2.8 (236.6) 영의 고안 및 종류에 대한 통제는 고안과 종류가 표현되는 수준에 달려 있다. 결국, 영적 설계는 삼위일체의 통제를 받거나, 삼위일체 성격자들―아버지ㆍ아들ㆍ영―이 가진 삼위일체 이전의 영적 자질에 따라서 통제된다.
21:2.9 (236.7) 그러한 완전하고 신다운 아들이 그가 선택한 우주의 공간 위치를 차지했을 때, 우주가 물질로 나타나고 대체적 균형을 얻는 초기 문제들이 해결되었을 때, 그가 무한한 영의 보완하는 딸과 효과적이며 협동하는 안정된 연합을 이루었을 때―그때 이 우주 아들과 우주 영이 연결을 개시하며, 이것은 수없이 많은 무리의 지역 우주 아이들을 낳도록 고안되어 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파라다이스에 계신 무한한 영이 집중하는 창조 영은 성질이 달라지며, 한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의 성격 기품을 가지게 된다.
21:2.10 (236.8) 창조 아들은 누구나 파라다이스 부모와 신답게 비슷한데도, 아무도 다른 아들을 똑같이 닮지 않는다. 각자가 성격 뿐 아니라 성품도 독특하고 다양하며, 유일하고 고유하다. 그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생명 계획을 세운 설계자요 창조자이기 때문에, 바로 이 다양성(多樣性)이 영역 안에서 창조되거나 나중에 진화될지도 모르는 생명, 미가엘에게서 파생된 생명 존재의 모든 형태와 단계에서 그들의 영토가 또한 다채로울 것을 보장한다. 따라서 지역 우주에서 태어난 서열의 생물은 아주 다채롭다. 모든 면에서 동일한, 이중 기원을 가진 토착 존재가 두 우주를 관리하거나 거기에 사는 일은 없다. 어떤 초우주 안에서도, 그들의 타고난 속성의 절반은 아주 비슷한데, 이 속성이 한결같은 창조 영들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반은 다양화된 창조 아들들한테서 유래하니까 다르다. 그러나 그러한 다양성은 순전히 창조 영에게서 기원을 가진 생물이나, 중앙 우주나 초우주에서 태어나고 수입(輸入)된 존재들의 특징은 아니다.
21:2.11 (237.1) 미가엘 아들이 자기 우주에서 자리를 비울 때, 처음에 태어난 토착 존재, 곧 지역 우주의 우두머리 집행자, 밝은 아침별이 그 정부를 지휘한다. 그러한 때, 늘 하나된 이의 조언과 상담은 가치를 따질 수 없다. 이렇게 자리를 비웠을 때, 창조 아들은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그리고 필사 자녀들의 가슴 속에 그의 영적 계심의 전반적 통제를 관계된 어머니 영에게 맡길 수 있다. 그리고 한 지역 우주의 어머니 영은 언제나 그 본부에 남고, 그러한 진화 영토의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까지 보살피고 영적 봉사를 베푼다.
21:2.12 (237.2) 안정된 물질 우주의 순조로운 운영에는 창조 아들이 지역 우주에 친히 계실 필요가 없다. 그러한 아들들은 파라다이스로 여행해도 좋고, 그래도 여전히 그들의 우주는 공간을 통해서 빙그르르 돈다. 그들은 시간 세계의 아이로서 육신화하기 위하여 자기 동력선을 내려놓아도 좋다. 그래도 여전히 그들의 세계는 각자의 중심을 소용돌이치며 돈다. 어떤 물질 조직도 파라다이스의 절대 인력(引力)의 힘이나 또는 무제한 절대자의 공간 계심에 본래 있는, 우주의 전반적 통제력을 벗어나지 못한다.
21:3.1 (237.3)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찬성을 얻고, 관련된 초우주를 감독하는 으뜸 영의 확인을 받고서, 창조 아들은 한 우주의 범위를 받는다. 그러한 행위는 물리적 소유 권리, 곧 우주의 임차권(賃借權)이다. 그러나 스스로 제한한 이 초기의 통치 단계로부터 스스로 벌어들인 경험적 최상 통치권의 높이까지 미가엘 아들이 올라가는 것은, 우주를 창조하고 육신화로 자신을 수여하는 일로 몸소 겪는 체험의 결과로서 생긴다. 수여로 얻는 통치권을 성취하기까지, 그는 우주의 아버지의 대관(代官)으로서 다스린다.
21:3.2 (237.4) 창조 아들은 언제라도 친히 지은 창조에 대하여 완전한 통치권을 주장할 수 있지만, 슬기롭게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만일에 생물이 되어 자신을 수여하는 일을 마치기 전에 수고하여 벌지 않은 최상 통치권을 차지하면, 그의 지역 우주에 주둔하는 파라다이스 성격자들이 물러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시공의 창조 전체에서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21:3.3 (237.5) 창조자인 사실은 완전한 통치권을 뜻하지만, 미가엘들은 통치권을 체험으로 얻기를 선택하며, 이렇게 함으로 지역 우주 행정에 딸린 모든 파라다이스 성격자의 완전한 협조를 얻는다. 우리는 이렇게 하지 않은 미가엘을 하나도 모르지만, 그들은 모두 그렇게 할 수 있고, 참으로 자유 의지를 가진 아들이다.
21:3.4 (237.6) 한 지역 우주에서 창조 아들의 통치권은 여섯 단계, 아마도 일곱 단계의 체험적 표현을 거친다. 이 여러 단계는 다음 순서로 나타난다:
21:3.5 (237.7) 1. 초기의 대리(代理) 통치권―관계된 창조 영이 성격의 기품을 얻기 전에, 창조 아들이 혼자서 임시로 행사하는 권한.
21:3.6 (237.8) 2. 합동 대리 통치권―우주 어머니 영이 성격을 얻고 난 뒤에 그 파라다이스 쌍이 합동으로 통치하는 것.
21:3.7 (238.1) 3. 확대되는 대리 통치권―한 창조자가 일곱 번 생물이 되어 자신을 수여하는 기간에 행사하는 높아지는 권한.
21:3.8 (238.2) 4. 최상 통치권―일곱째 수여를 마치고 나서 얻는 안정된 권한. 네바돈에서 최상 통치권은 유란시아에서 미가엘의 수여가 끝난 때부터 시작된다. 이 단계는 너희 행성 시간으로 1천9백년이 조금 넘게 존재해 왔다.
21:3.9 (238.3) 5. 확대되는 최상 통치권―사람이 사는 대다수의 영토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됨으로 생겨나는 상급 관계. 이 단계는 너희 지역 우주가 아직 이르지 못한 앞날과 관련된다.
21:3.10 (238.4) 6. 삼위일체의 통치권―지역 우주 모두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뒤에 행사된다.
21:3.12 (238.6) 계획한 한 지역 우주를 초기에 대관(代官)으로서 통치하는 권한을 받아들일 때, 창조자 미가엘은 일곱 번 생물로 자신을 수여하는 일이 끝나고 초우주 통치자들의 인가를 받기 전에 최상 통치권을 쥐지 않겠다고 삼위일체에게 서약한다. 그러나 미가엘 아들이 수고해서 벌지 않은 그러한 통치권을 멋대로 주장하여 가질 수 없다면,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데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21:3.13 (238.7) 자신을 수여하기 이전 시대에도, 어느 구석에서도 아무 이견(異見)이 없으면, 창조 아들은 거의 최상으로 그의 영토를 다스리는 것이다. 통치권이 한 번도 도전받지 않는다면, 통치에 대한 제한은 도저히 겉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반란이 없을 때 한 우주에서 수여 이전에 창조 아들이 행사하는 통치권은, 반란이 있는 우주의 경우보다 조금도 크지 않다. 그러나 첫째 경우에는 통치권에 대한 제한이 명백하지 않은데, 둘째 경우에는 명백하다.
21:3.14 (238.8) 창조 아들의 권한이나 행정이 언제라도 도전받거나, 공격받거나, 위태롭게 되면, 그는 몸소 지은 우주를 지원하고 보호하고 지키고, 필요하다면 회복할 것을 영원히 서약한다. 오직 자신이 만든 생물이나 자신이 선택한 높은 존재들이 그러한 아들들을 성가시게 하거나 괴롭힐 수 있다. 짐작컨대, “더 높은 존재들,” 곧 한 지역 우주보다 높은 수준에 기원이 있는 존재들이 창조 아들을 성가시게 할 듯하지는 않고, 이것은 참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선택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 미덕은 성격자가 의지(意志)하여 얻는 것이며, 올바름은 자유 의지를 가진 생물에게 자동으로 생기지 않는다.
21:3.15 (238.9) 수여 생애를 마치기 전에, 창조 아들은 스스로 통치권에 어떤 제한을 부과하고서 다스린다. 그러나 자신 수여 봉사를 마치고 난 뒤에, 그는 여러 생물의 형태와 모습을 입고서 실제로 체험한 덕분으로 다스린다. 한 창조자가 자기가 지은 생물 사이에서 일곱 번 머무르고 나서, 그 수여 생애가 끝났을 때, 그때 우주 권한이 최상으로 안정된다. 그는 주 아들, 군주이자 최고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21:3.16 (238.10) 한 지역 우주를 다스리는 최상 통치권을 얻는 기법은 다음 일곱 가지 체험 단계를 포함한다:
21:3.17 (238.11) 1. 관계된 수준에서 생물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서, 육신화로 자신을 수여하는 방법으로 일곱 가지 생물 수준을 체험으로 거칠 것.
21:3.18 (238.12) 2. 파라다이스 신의 일곱 가지 의지(意志)가 일곱 으뜸 영으로 성격이 된 것 같이, 각 단계에 체험으로 헌신할 것.
21:3.19 (239.1) 3. 일곱 생물 수준에서 각 체험을 거치면서 동시에, 파라다이스 신의 뜻에 일곱 가지로 헌신하는 것 중에서 하나를 실행할 것.
21:3.20 (239.2) 4. 각 생물 수준에서, 생물의 생명이 어느 높이까지 이를 수 있는가 파라다이스 신과 모든 우주 지성 존재에게 체험으로 보여줄 것.
21:3.21 (239.3) 5. 각 생물 수준에서, 신의 일곱 가지 뜻의 한 단계를 그 수여 수준과 온 우주에게 체험으로 나타낼 것.
21:3.22 (239.4) 6. 일곱 번 생물로 사는 체험을, 신의 성품과 뜻을 계시하는 데 헌신하는 일곱 가지 체험과 조화시킬 것.
21:3.23 (239.5) 7. 최상 존재와 새롭고 더 높은 관계에 도달할 것. 이 창조자인 생물이 겪는 총 체험의 영향은 초우주에서 최상위 하나님의 현실성과 전능 최상위의 시공 통치권을 확대하며 파라다이스 미가엘이 지역 우주를 다스리는 최상 통치권을 사실로 만든다.
21:3.24 (239.6) 한 지역 우주에서 통치권 문제를 해결하면서, 창조 아들은 자신이 다스릴 체력이 있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파라다이스 신들의 성품을 드러내고 그들의 일곱 가지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가 제일 높은 것을 유한자가 이해하고 생물이 인식하는 것은, 한 창조 아들이 황송하게도 자기가 지은 생물의 모습을 입고 체험을 겪을 때 그 아들이 부딪치는 모험과 관련된다. 이 1차 파라다이스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하는 성품과 자비로운 권한을 참으로 계시하는 자이며, 바로 이 아버지는 아들과 영과 연합하여, 모든 우주 영역에 두루, 모든 권능ㆍ성격자ㆍ정부의 보편적 우두머리이다.
21:4.1 (239.7) 자신을 수여하는 창조 아들은 일곱 집단이 있는데, 그들은 자기 영역에 사는 생물에게 몇 번이나 자신을 수여했는가에 따라서 그렇게 분류된다. 그들의 범위는 초기의 체험으로부터, 그 뒤에 점진적으로 자신을 수여하는 다른 다섯 구체를 지나서, 일곱째이자 마지막 사건, 창조자이자 인간으로서 체험하는 사건에까지 이른다.
21:4.2 (239.8) 아보날 수여는 반드시 필사자 육체의 모습을 입는다. 그러나 창조 아들의 일곱 수여는 일곱 가지 생물 수준의 존재로 나타나는 것을 포함하며, 신의 뜻과 성품의 일곱 가지 주요한 표현을 계시하는 데 관한 것이다. 예외 없이, 창조 아들은 모두 자신이 창조한 우주에 대하여 안정된 최고 관할권을 떠맡기 전에, 그들이 창조한 아이들에게 자신을 일곱 번 주는 체험을 거친다.
21:4.3 (239.9) 이 일곱 번의 수여는 다른 구역과 우주에서 달라지지만, 반드시 필사자로 수여하는 모험을 포함한다. 마지막 수여가 있을 때 창조 아들은 사람이 사는 어떤 세계에서, 한 상급 필사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보통은 동물 기원을 가진 민족들의 신체적 지위를 향상하려고 이전에 수입(輸入)된 아담 혈통의 유전 흔적을 가장 많이 품는 민족 집단의 한 사람으로서 나타난다. 베들레헴의 아기에 대하여 너희가 기록을 가지고 있다시피, 수여 아들로서 일곱 생애에서 꼭 한번, 파라다이스 미가엘은 여자에게서 태어난다. 그는 오직 한번, 의지를 가진 진화 인간, 가장 낮은 계급의 한 사람으로서 살다가 죽는다.
21:4.4 (239.10) 각 수여가 끝난 뒤에, 창조 아들은 “아버지의 오른 편”으로 나아가서, 거기서 그 수여에 대하여 아버지의 인가를 얻고, 우주에서 봉사하는 다음 사건을 준비하기 위하여 지침을 받는다. 일곱째이자 마지막 수여가 있고 나서, 창조 아들은 우주의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우주에 대하여 최고의 권한과 관할권을 받는다.
21:4.5 (240.1) 너희의 행성에 지난번에 나타난 신다운 아들이, 여섯 단계의 수여 생애를 이전에 마친 파라다이스 창조 아들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유란시아에서 육신화한 일생에서 의식하는 힘을 버렸을 때, 그는 참으로 “다 이루었다”하고 말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말했다―글자 그대로 마쳤다. 유란시아에서 그의 죽음은 수여 생애를 끝냈고, 이것은 파라다이스 창조 아들의 신성한 서약을 지키는 마지막 걸음이었다. 이 체험을 얻었을 때, 그러한 아들들은 그 우주의 최상 군주가 된다. 그들은 이제 더 아버지의 대관(代官)이 아니라, 자신의 권한과 이름으로 “가장 높은 임금이요, 가장 높은 주”로서 다스린다. 일곱 차례 자신 수여를 마친 이 아들들은, 진술한 어떤 예외를 빼고, 그들이 사는 우주에서 아무 제한 없이 최상위이다. 그의 지역 우주에 관하여 말하자면, 승리를 거두고 보좌에 앉은 이 주 아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력”이 넘겨진 것이다.
21:4.6 (240.2) 창조 아들들은, 수여 생애를 마치고 난 뒤에, 따로 된 계급, 곧 칠중의 주 아들로 간주된다. 주 아들의 몸은 창조 아들과 동일하다. 그러나 아주 독특한 수여 체험을 겪었기 때문에, 보통은 다른 계급으로 여겨진다. 창조자가 황송하게도 자신 수여를 실행할 때, 진정하고 영구한 변화가 일어나도록 정해져 있다. 수여 아들은 아직도, 여전히 창조자인 것이 참말이지만, 한 인간의 체험을 그의 성품에 보탰고, 이것은 언제까지나 그를 창조 아들의 신성한 수준에서 제쳐놓고, 한 우주를 다스리고 그 안에 있는 세계들을 관리할 권한을 충분히 얻은, 주(主) 아들의 체험 수준으로 들어올린다. 그러한 존재들은 신성한 부모로부터 따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몸에 담고, 완전해진 인간의 체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품에 안고 있다. 바로 그 신들도 자기의 우주 영토를 마침내 완전히 다스리기에 체험적으로 자격 있고 유능하다고 생각되기 전에 대등한 체험을 겪어야 하는 마당에, 사람이 어째서 그의 비천한 기원과 부과된 진화 생애를 슬퍼해야 하는가!
21:5.1 (240.3) 주 미가엘의 권력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와 체험을 거친 관계에서 얻었기 때문에 제한이 없으며, 그러한 권한에 지배되는 바로 그러한 여러 생물로서 사는 실제 체험에서 얻었기 때문에 도전을 받지 않는다. 칠중의 창조 아들의 통치권은 최상급의 성질을 가졌으니, 그 이유는 그 통치권이:
21:5.2 (240.4) 1. 파라다이스 신의 일곱 가지 관점을 포함하고,
21:5.5 (240.7) 따라서 이 체험적 통치권은 궁극에 최상 존재에 이르는, 칠중 신의 신성을 다 포함한다. 칠중 아들의 개인 통치권은, 언젠가 완성될 최상 존재의 미래 통치권과 같으며, 후자와 마찬가지로, 관계된 시공 한계 안에서 표현될 수 있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힘과 권한, 가능한 최대의 내용을 포함한다.
21:5.6 (240.8) 지역 우주의 최상 통치권을 얻고 나서, 그 미가엘 아들에게서 현재 우주 시대에 전혀 새 종류의 생물 존재를 창조할 권력과 기회가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한 주 아들이 전혀 새로운 계급의 존재를 창시(創始)할 권력을 잃는 것은, 이미 자리잡고 전개되는 과정에 있는 생명을 다듬는 일을 조금도 막지 않는다. 우주를 진화시키는 이 방대한 계획은 간섭이나 단축 없이 진행된다. 한 주 아들이 최상 통치권을 얻는 것은, 이미 고안되고 창조된 것, 그리고 그렇게 고안되고 창조된 자들이 차후에 생산할 것을 기르고 관리하는 데 몸소 헌신할 책임이 있음을 가리킨다. 시간이 지나면, 다양한 존재들이 거의 끝없이 진화될지 모르지만, 그후부터 전혀 새로운 원본이나 형태의 지적 생물이 주 아들에 직접 기원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어느 지역 우주에서도 안정된 행정의 첫 걸음이요 시작이다.
21:5.7 (241.1) 일곱 번 자신을 수여한 아들이 자신의 우주에서 도전받지 않는 통치권 수준으로 올라가는 것은, 불확실하고 비교적 혼란했던 오랜 세월의 끝이 시작됨을 뜻한다. 이 사건이 있은 뒤에, 언젠가 영답게 변화될 수 없는 것은 궁극에 해체될 터이고, 언젠가 우주 실체와 조정될 수 없는 것은 궁극에 없어질 것이다. 그 영역에 의지를 가진 인간의 충성과 헌신을 얻으려는 노력으로 비축해둔, 끝없는 자비와 말할 수 없는 인내가 소모되고 나면, 응보와 공정(公正)이 지배할 것이다. 자비가 구제할 수 없는 것은 응보가 궁극에 말소(抹消)할 것이다.
21:5.8 (241.2) 주 미가엘들은, 군주 통치자로 일단 취임하고 나서, 자신의 지역 우주에서 최상위이다. 그들의 통치에 부과된 몇 가지 제약은 어떤 물력과 성격자들이 우주에 선재(先在)한 사실에 본래부터 생기는 것들이다. 이 외에, 이 주 아들의 권한, 책임, 행정 권력은 각자의 우주에서 최상위이다. 그들은 창조자요 하나님으로서, 거의 모든 일에 최상위이다. 한 주어진 우주의 작용에 관해서, 그들의 지혜는 아무도 꿰뚫어볼 수 없다.
21:5.9 (241.3) 한 지역 우주의 통치권이 안정되고 난 뒤에, 파라다이스 미가엘은 그의 영토에서 활동하는 다른 하나님의 아들들을 모두 완전히 장악하며, 그 영역의 필요에 대한 자신의 생각대로 자유롭게 다스려도 좋다. 주 아들은 사람이 사는 행성에서 영적 심판의 차례와 진화적 조정의 순서를 뜻대로 바꾸어도 좋다. 그리고 그러한 아들들은 행성의 특별한 필요에 관한 모든 문제에서, 특히 그들이 생물로 머물렀던 세계들에 관하여, 더군다나 최종으로 자신을 수여한 영역, 곧 필사 육체의 모습으로 육신화한 행성에 관하여, 자신이 고른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다.
21:5.10 (241.4) 주 아들들은 자신을 수여한 세계, 그들이 몸소 머무른 세계 뿐 아니라 심판 아들이 자신을 수여했던 모든 세계와도 완전히 교통이 있는 듯하다. 그들 자신의 영적 계심, 곧 진리의 영이 이러한 연락을 유지하는데, 그들은 이 영을 “모든 육체에 퍼부을” 수 있다. 이 주 아들들은 또한 만물의 중심에 계신 어머니, 영원한 아들과도 끊임없는 연결을 유지한다. 그들은 위로 우주의 아버지로부터, 시간의 영역에서 행성 생명의 비천한 민족들에 이르기까지, 동정하는 마음이 미친다.
21:6.1 (241.5) 지역 우주를 다스리는 칠중의 주 군주들의 성품이나 운명에 관하여 아무도 최종 권한을 가지고 주제넘게 논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는 모두 많이 추측해 본다. 각 파라다이스 미가엘이 그의 기원이 있는 이중 신 개념의 절대적 표현이라고 우리는 가르침을 받았고, 그렇게 믿는다. 따라서 그는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의 무한성의 여러 실제 단계를 몸으로 나타낸다. 미가엘들은 총 무한과 비교해서 부분적인 것이 틀림없지만, 그 기원에 관련된 그 부분의 무한과 아마도 절대 관계가 있다. 그러나 현재 우주 시대에 그들이 하는 일을 지켜보건대, 우리는 유한을 넘는 활동을 하나도 찾지 못한다. 유한을 넘는 어떤 예상된 능력도 독립되어 있고, 아직 드러나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21:6.2 (242.1) 생물로 자신을 수여하는 생애를 마치고 최상의 우주 통치권의 높이로 승진하는 것은 미가엘의 유한한 활동 능력이 완전히 해방되고, 그에 뒤따라 유한을 넘는 봉사 능력이 나타남을 뜻하는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맥락에서, 그러한 주 아들들은 그때 새로운 종류의 생물 존재를 생산하는 것이 금지된 것을 우리가 눈여겨보기 때문이며,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제한은 유한을 뛰어넘는 잠재성을 해방함으로 필요하게 된다.
21:6.3 (242.2)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 창조자 권능이 현재 우주 시대를 통하여 죽, 잠자코 있으리라는 것이 상당히 있음직하다. 그러나 아주 먼 앞날에 언젠가, 지금 바깥 공간에서 동원되는 여러 우주에서, 칠중의 주 아들과 일곱째 단계에 있는 창조 영의 결합은 초한(超限) 수준의 봉사에 이르고, 궁극의 우주 중요성을 가진 초월 수준에서, 새로운 사물ㆍ의미ㆍ가치의 출현이 뒤따를 수도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21:6.4 (242.3) 체험으로 봉사하는 덕택으로 최상위 신이 현실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창조 아들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들의 성품에 단단히 싸여 있는 파라다이스 신의 잠재성을 몸소 실현하는 일을 해내고 있다. 유란시아에 있을 때, 그리스도 미가엘은 한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영원 속에서, 최상의 신성(神性)으로부터 궁극의 초한을 거쳐서, 영원한 신의 최종까지 인도하는 길을 모든 우주 성격자를 위하여 언제나 불빛으로 비추면서, 미가엘들이 글자 그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도록 정해져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22:0.1 (243.1)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세 무리의 존재들이 있다. 내려오는 계급과 하늘 가는 아들 계급 외에도, 삼위일체를 체험한 하나님의 아들이라 알려진 셋째 무리가 있다. 삼자일체를 체험한 아들 계급은 그 여러 부류의 밝혀진 성격자와 밝혀지지 않은 성격자의 기원에 따라서, 세 가지 1차 부문으로 다시 분류된다. 이 1차 부문은 다음과 같다.
22:0.2 (243.2) 1. 신이 삼자일체화한 아들.
22:0.5 (243.5) 기원에 상관 없이, 삼자일체를 체험한 하나님의 아들은 모두, 기원의 일부로서, 또는 나중에 삼위일체의 품에 안기는 경험으로서, 삼자일체 경험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신이 삼자일체화한 아들은 이 이야기에서 밝혀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발표는 나머지 두 집단, 특히 삼위일체가 품었던, 하나님의 아들들을 묘사하는 데 국한될 것이다.
22:1.1 (243.6) 삼위일체가 품었던 아들들은 모두 처음에 2중 기원이나 단일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품에 안긴 뒤에, 그들은 언제까지나 삼위일체를 위한 봉사와 임무에 헌신한다. 밝혀진 대로, 그리고 초우주 근무를 위하여 조직된 바와 같이, 이 군단은 일곱 계급의 성격자를 포함한다:
22:1.4 (243.9) 3. 이름도 번호도 없는 자.
22:1.5 (243.10) 4. 삼위일체를 체험한 관리자.
22:1.9 (243.14) 이 일곱 무리의 성격자들은 기원ㆍ성품ㆍ기능에 따라서, 다시 3대 부문, 곧 삼위일체를 체험한 달성의 아들, 삼위일체를 체험한 선택의 아들, 삼위일체를 체험한 완전의 아들로 분류된다.
22:1.10 (244.1) 삼위일체를 체험한 달성의 아들―막강한 사자, 고등 권위자, 이름도 번호도 없는 자―는 모두 파라다이스와 최후 군단에 다다르고 조절자와 융합한, 올라가는 필사자이다. 그러나 그들은 최후자(最後者)가 아니다. 삼위일체의 품에 안기고 나서, 그들의 이름은 최후자의 출석 점호에서 빠진다. 이 계급의 새 아들들은 비교적 짧은 동안, 영원부터 늘 계신 이들의 지도 하에서 하보나 회로에 있는 여러 회로 본부 행성에서 특정한 훈련 과정을 거친다. 그 뒤에 일곱 초우주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근무에 배치된다.
22:1.11 (244.2) 삼위일체를 체험한 선택의 아들은 삼위일체를 체험한 관리자와 삼위일체를 체험한 대사(大使)를 포함한다. 그들은 하보나를 거치고 파라다이스에 다다른, 어떤 진화하는 세라핌과 변신한 중도인(中道人), 그리고 마찬가지로 가운데 빛과 생명의 섬으로 올라가고 영이나 아들과 융합한 필사자로부터 모집한다.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품에 안기고 나서, 그리고 하보나에서 짧은 훈련을 받은 뒤에, 삼위일체를 체험한 선택의 아들들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법정에 배치된다.
22:1.12 (244.3) 삼위일체를 체험한 완전의 아들. 천상의 보호자 및 그들과 동등한 높은 아들 조수들은 두 번 삼자일체 체험을 거친 성격자라는 독특한 무리를 이룬다. 그들은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인격자들, 또는 최후 군단에서 오랫동안 두각을 나타낸, 완전하게 된 승천 필사자들이 인간으로서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이다. 인간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이 아들들 가운데 더러는 일곱 으뜸 영의 최상 집행자 근무를 끝내고, 삼위일체 교육 아들 밑에서 근무한 뒤에,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로부터 다시 삼자일체 체험을 거치고 (품에 안기고), 다음에 천상의 보호자나 높은 아들 조수로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법정에 임명된다. 삼위일체를 체험한 완전의 아들들은 더 훈련을 거치지 않고 초우주 근무에 바로 배치된다.
22:1.13 (244.4)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우리 동료들―지혜 완성자, 신성한 조언자, 우주 검열자―의 수는 고정되었지만, 삼위일체가 품에 안은 아들들의 수는 항상 늘어난다. 삼위일체가 품었던, 모두 일곱 계급의 아들들은 일곱 초우주 정부 중 한 곳의 일원으로 임명되며, 각 초우주에서 봉사하는 수는 정확히 같은데, 이 가운데 하나도 결코 길을 잃은 적이 없다. 삼위일체가 품었던 존재들은 한 번도 길을 벗어난 적이 없으니, 잠시 넘어질지 모르지만, 하나도 초우주 정부를 모욕했다는 판결을 받은 적이 없다. 달성의 아들과 선택의 아들들은 오르본톤 근무에서 한 번도 넘어진 적이 없지만, 삼위일체를 체험한 완전의 아들들은 가끔 판단의 잘못을 저질렀고, 그렇게 해서 일시(一時) 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22:1.14 (244.5)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지휘 하에서, 일곱 계급 모두가 상당히 자치하는 무리로서 활동한다. 그들이 봉사하는 범위는 넓다. 삼위일체를 체험한 완전의 아들들은 배치받은 초우주를 떠나지 않지만, 삼자일체를 체험한 그들의 동료들은 대우주를 돌아다니며, 시공의 진화 세계들로부터 영원한 파라다이스 섬까지 여행한다. 그들은 어느 초우주에서 활동해도 좋지만, 언제나 처음에 지정받은 초우주 정부의 구성원으로서 활동한다.
22:1.15 (244.6) 삼위일체가 품었던 아들들은 영구히 일곱 초우주의 근무에 배치된 듯하다. 분명히 이 배치는 지금 우주 시대가 지속되는 동안이지만, 이것이 영원하리라는 말을 우리는 들은 적이 없다.
22:2.1 (245.1) 막강한 사자는 삼위일체를 체험한 아들들 가운데 하늘 가는 무리에 속한다. 그들은 반란의 시험을 거치거나, 다른 방법으로 똑같이 몸소 충성한 것이 입증된, 완전해진 필사자 등급이다. 모두가 우주에 충성하는 어떤 분명한 시험을 거쳤다. 그들이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길에 어느 때, 상급자의 불충(不忠)에 부닥치고도 굳게 버티고 충성했으며, 더러는 그렇게 부실한 지도자를 대신하여 적극적으로 충성스럽게 활동하였다.
22:2.2 (245.2) 이렇게 몸소 충실하고 헌신한 기록을 가지고, 하늘 가는 이 필사자들은 시간 순례자의 인파와 함께 하보나를 거쳐 가며, 파라다이스에 다다르고, 거기서 졸업하고, 최후 군단으로 소집된다. 그리고 나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신비스런 품 안에서 삼자일체 체험을 거치며, 그 뒤에 일곱 초우주 정부의 행정부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과 상관하도록 임명된다.
22:2.3 (245.3) 반란에 부닥쳐서 충성스럽게 활동하는, 반란의 체험을 겪은 승천 필사자는 누구나 궁극에 초우주에서 근무하는 막강한 사자가 되도록 정해져 있다. 그러한 잘못, 악, 또는 죄의 대소동을 효과 있게 막는 어떤 하늘 가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한 우주의 위기에 반란(反亂)을 막거나 상급 형태의 충성을 일으키려고 고안된 행동은 실제의 반란과 마주친 경우에 보인 충성보다 훨씬 더 값지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22:2.4 (245.4) 선임인 막강한 사자들은 초기에 파라다이스에 도착한 시공의 승천 필사자들 중에서 뽑혔는데, 다수가 그랜드판다 시절에 하보나를 거쳐 갔다. 그러나 후보자 군단이 각 초우주에서 온 대표들을 모두 포함하기까지, 막강한 사자들을 처음으로 삼위일체를 거치게 하는 일은 시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파라다이스에서 자격을 갖춘, 이 계급의 최근 집단은 네바돈 지역 우주에서 온 승천 순례자들을 포함했다.
22:2.5 (245.5) 막강한 사자는 각 초우주에 10만 명씩 배치하기 위해서, 70만 명의 학급 단위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품에 안긴다. 유버르사에는 거의 1조의 막강한 사자가 임관되어 있고, 각 초우주에서 근무하는 수는 모두 똑같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22:2.6 (245.6) 나는 막강한 사자이다. 유란시아인에게 재미있는 일인가 하지만, 나의 필사 체험의 동반자였던 동료도 이 큰 시험에 합격했다. 하보나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안으로 올라가는 길에 여러 번, 또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지만, 우리는 같은 70만의 무리 속에 품에 안겼고, 대관별을 거치면서 가깝고 사랑에 겨운 관계에서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우리는 임관되었고 오르본톤에서 유버르사에 함께 배치되었으며, 두 사자의 봉사를 요구하는 과제를 집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주 함께 파송된다.
22:2.7 (245.7) 막강한 사자는, 삼위일체의 품에 안긴 모든 아들과 공통으로, 초우주 활동의 어느 단계에나 배치된다. 초우주 거울 봉사를 통해서, 그들의 본부와 늘 연락을 유지한다. 막강한 사자는 한 초우주의 모든 구역에서 근무하며, 지역 우주에 대해, 아니 개별 세계들에 대해서도, 내가 이 경우에 하는 것처럼 자주 임무를 수행한다.
22:2.8 (245.8) 초우주 법정에서 개인과 행성들이 재판에 오를 때, 막강한 사자는 그 대변자로서 행동한다. 그들은 또한 대구역의 사무를 지도하는 일로 늘 완전한 이들을 보조한다. 한 무리로서, 그들의 주요한 책임은 초우주 관찰자가 되는 책임이다. 그들은 여러 본부 세계와 중요한 개별 행성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공식 관찰자로서 주둔한다. 그렇게 배치되었을 때, 또한 머무르는 구체들의 사무를 지도하는 당국에 고문으로서 봉사한다. 필사자가 진보하는 승천 계획의 모든 단계에서 사자들은 적극 참여한다. 그들은 필사 기원을 가진 동료들과 함께, 초우주 정부가 내려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계획의 상태 및 진보를 밀접하게, 개인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22:2.9 (246.1) 막강한 사자들은 자기의 승천 생애를 전부 완전히 의식하고 있다. 이것이 어째서 그들이 어느 공간 세계에나, 그리고 시간 세계의 어떤 인간에게도 봉사하는, 아주 유용하고 동정심 있는 봉사자요 이해심 있는 사자(使者)인가 하는 까닭이다. 육체를 벗어나자마자, 너희는 우리와 자유롭게, 이해하면서 교통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공간의 모든 진화 세계의 모든 민족, 다시 말해서, 생각 조절자가 깃들고 나중에 융합한 필사 민족들의 출신이기 때문이다.
22:3.1 (246.2) 고등 권위자는 삼위일체를 체험한 달성의 아들의 제2 집단이며 모두 필사자의 기원을 가지고 생각 조절자와 융합한 존재이다. 이들은 긴 승천 생애를 통해서 죽, 탁월한 행정 능력을 나타내고 특별한 집행의 재능을 보인, 완전하게 된 필사자이다. 그들은 공간 세계에서 살아남는 필사자들로부터 뽑아낸, 통치 능력의 노른자이다.
22:3.2 (246.3) 삼위일체가 연결할 때마다 고등 권위자 7만 명이 삼자일체 체험을 겪는다. 네바돈 지역 우주는 비교적 연륜이 짧은 창조이지만, 요즈음에 이 계급에서 삼자일체 체험을 겪은 학급 안에 대표들이 있다. 오르본톤에는 지금 이 노련한 행정관이 1백억 명이 넘게 임관되었다. 따로 된 서열의 모든 천상 존재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기네 본부를 유버르사에서 유지하며, 삼위일체가 품었던 다른 아들들처럼, 유버르사에서 그들의 예비군은 오르본톤에 있는 그들 계급의 중앙 지도(指導) 기관으로서 행동한다.
22:3.3 (246.4) 고등 권위자는 제한이 없는 행정관이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유능한 집행자,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집행자이다. 어떤 구체에서나, 사람이 사는 어떤 세계에서도, 일곱 초우주 가운데 어디서나, 어떤 단계의 활동에서도 봉사한다.
22:3.4 (246.5) 훌륭한 행정 지혜와 드문 집행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 명석한 존재들은 초우주 법정을 위해서 응보의 원인을 제시하는 일을 맡는다. 그들은 진화하는 우주에서 응보를 집행하고 부적응을 시정하는 일을 보살핀다. 그러니까 너희가 우주에서 진보하도록 예비된 세계와 구체들까지 올라가는 동안에, 언젠가 판단의 잘못으로 주의를 받는다면,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일은 도저히 있을 듯하지 않다. 이는 너희를 고소하는 자들이 너희가 이미 거쳤고, 또 거치고 있는 생애의 모든 단계를 몸소 잘 아는, 한때 하늘 가던 인간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2:4.1 (246.6) 이름도 번호도 없는 자는 삼위일체를 체험한 달성의 아들 중에서 셋째이자 마지막 무리이다. 그들은 시공 세계로부터 온 진화 민족들의 모든 아들딸의 기술을 뛰어넘어, 신을 예배하는 능력을 개발한, 하늘 가는 혼이다. 그들은 우주의 아버지의 영원한 목적에 대하여 영적 개념을 얻었고, 이것은 이름이나 번호가 있는 진화 인간이 이해하는 한계를 비교적 초월한다. 따라서 그들은 이름도 번호도 없는 자라 부른다. 더 엄밀하게 옮긴다면, 그들의 이름은 “이름과 번호 위에 있는 자”일 것이다.
22:4.2 (247.1) 이 계급의 아들은 7천 명씩 무리를 지어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품에 안긴다. 오르본톤에서 임명된 이 아들들의 수가 1억이 넘는다는 기록이 유버르사에 있다.
22:4.3 (247.2) 이름도 번호도 없는 자는 살아남는 민족들 가운데 우월한 영적 지성이기 때문에, 영적 견해가 바람직할 때, 또 판결되어야 할 문제들에 관계된 질문을 적절히 이해하는 데 승천 생애의 체험이 필수일 때, 그들은 특별히 재판석에 앉고 의견을 제시할 자격을 가졌다. 그들은 오르본톤에서 최고 배심원이다. 잘못 운영되는 배심원 제도는 어떤 세계에서 얼마큼 응보를 졸렬하게 흉내낸 것이지만, 유버르사와 그 연장된 법정에서, 우리는 가장 높은 부류의 진화된 영적 정신을 가진 자를 배심원이자 판사로 이용한다. 판결은 어떤 정부에서도 가장 높은 기능이며, 판결 내리는 일을 맡은 자는 가장 경험 있고 이해심 있는 개인, 가장 높고 고귀한 부류의 개인들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22:4.4 (247.3) 막강한 사자, 고등 권위자, 이름도 번호도 없는 자의 학급, 삼위일체를 체험할 학급 후보자들은 선천적으로 자동으로 선택된다. 파라다이스에서 선택하는 방법은 어떤 의미에서도 멋대로가 아니다. 몸소 겪는 체험과 영적 가치 기준이 삼위일체를 체험한 달성의 아들의 요원 선택을 좌우한다. 그러한 존재들은 권한이 같고 행정 지위가 한결같지만, 모두 개성과 다채로운 특징을 가졌으며, 표준화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모두, 승천하는 생애의 차이점에 따라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22:4.5 (247.4) 이 체험 자격에 보태서, 삼위일체를 체험한 달성의 아들들은 파라다이스 신들의 신성한 품 속에서 삼자일체를 겪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삼위일체의 고정된 아들과 같은 지위의 동료로서 활동한다. 이것은 삼위일체의 포옹이, 인간 존재의 이루어지지 않은 많은 잠재성을 미래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쏟아지게 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 우주 시대에 관계된 것에 한해서만 참말이다.
22:4.6 (247.5) 다 그렇지는 않지만, 이 집단의 아들들은 주로, 시공 필사자의 승천하는 생애에 봉사하는 데 관계된다. 한 필사 인간의 관점이 언제라도 의심을 받으면, 그 문제는 한 승천 위원회에 상고함으로 해결되는데, 이 위원회는 막강한 사자 1명, 고등 권위자 1명, 이름도 번호도 없는 자 1명으로 이루어진다.
22:4.7 (247.6) 이 소식을 읽는 바로 너희 필사자는 파라다이스로 올라가고, 삼위일체의 품에 다다르고, 먼 미래 시대에 일곱 초우주 가운데 한 곳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 근무에 소속되고, 지금 내가 유란시아에서 활동하는 것처럼, 진리의 계시를 확대하기 위해 언젠가 사람이 사는 어떤 진화 행성에 배치될지 모른다.
22:5.1 (247.7) 삼위일체를 체험한 관리자는 삼위일체를 체험한 선택의 아들이다. 너희 민족을 비롯하여 살아남을 가치를 가진 다른 필사자들은 하보나를 거쳐 가고, 파라다이스에 다다르고, 때로는 삼위일체의 고정된 아들들을 위해서 자신이 초우주에서 근무하도록 예정된 것을 발견한다. 그뿐 아니라, 너희의 충실한 천사 보호자, 그리고 똑같이 충실한 중도자 동료들도 또한 같이 삼위일체의 인정(認定)을 받고 훌륭한 성격 운명의 후보자가 될 수도 있다.
22:5.2 (248.1) 삼위일체를 체험한 관리자는 하보나를 거쳐서 파라다이스와 최후 군단에 이른, 하늘 가는 세라핌과 변신한 중도인(中道人)이다. 그 뒤에 그들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품에 안기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근무에 배치되었다.
22:5.3 (248.2) 하늘 가는 세라핌 중에서 삼위일체의 품에 안길 후보자는, 최후 군단에 다다르고 그 뒤에 삼자일체를 겪은 어떤 승천 필사자와 용감하게 협동했기 때문에, 이러한 인정을 받는다. 필사 생애에서 바로 나를 보호하던 세라핌은 함께 끝까지 견디었고, 나중에 삼자일체를 겪었으며, 지금은 삼위일체를 체험한 관리자로서 유버르사 정부에 소속되어 있다.
22:5.4 (248.3) 중도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다수가 변신하고 파라다이스에 이르고, 세라핌과 함께, 같은 이유로, 삼위일체의 품에 안기며, 초우주에서 관리자로 임명된다.
22:5.5 (248.4) 삼위일체를 체험한 관리자는 7만 명씩 집단으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품에 안기며, 각 무리에서 7분의 1은 한 초우주에 배치된다. 신임받는 이 높은 관리자가 1천만 명이 조금 넘게 오르본톤에서 지금 근무하고 있다. 그들은 유버르사에서, 그리고 대구역과 소구역의 본부 구체에서 일한다. 그들은 수고하면서, 몇십억에 이르는 2품 천사 및 기타 유능한 초우주 성격자 집단의 도움을 받는다.
22:5.6 (248.5) 삼위일체를 체험한 관리자는 그 생애를 관리자로서 시작하고, 초우주 정부의 사무에서 그렇게 계속한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초우주 정부의 관리이지만, 천상의 보호자처럼, 개인을 다루지 않는다. 삼위일체를 체험한 관리자는 집단의 사무를 처리하고 공동 사업을 돌본다. 그들은 기록ㆍ계획ㆍ기구(機構)를 관리하는 자이며, 사업, 성격자 집단, 승천 계획, 상물질 계획, 우주 예측, 그리고 수없이 많은 다른 사업의 수탁자(受託者)로서 행동한다.
22:6.1 (248.6) 삼위일체를 체험한 대사는 삼위일체를 체험한 선택의 아들에서 둘째 계급이며, 그 동료인 관리자와 마찬가지로, 두 종류의 하늘 가는 생물로부터 뽑는다. 하늘 가는 필사자가 모두 조절자, 곧 아버지와 융합하지는 않는다. 더러는 영과 융합하고, 더러는 아들과 융합한다. 이러한 영과 융합한 필사자와 아들과 융합한 필사자들 가운데 더러는 하보나에 이르고 파라다이스에 다다른다. 이 파라다이스 승천자들로부터, 삼위일체의 품에 안기려고 후보자들이 뽑히고, 때때로 그들은 7천명의 학급을 지어 삼위일체를 체험한다. 그리고 나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에게 삼위일체를 체험한 대사(大使)로서 초우주에서 임관된다. 거의 5억 명이 유버르사에 등록되어 있다.
22:6.2 (248.7) 삼위일체를 체험한 대사는 하보나 선생들의 조언을 받고 나서 삼위일체의 품에 안기기 위하여 선택된다. 그들은 각자 무리의 상급 지성을 대표하며, 따라서 영과 융합한 필사자의 기원이 있던 세계들의 이익을 이해하고 관리하는 일로 초우주 통치자들을 돕기에 가장 적합하다. 아들과 융합한 대사는 우리가 아들과 융합한 계급의 성격자에 관계된 문제를 처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22:6.3 (248.8) 삼위일체를 체험한 대사는 그들이 배치받은 초우주 안에 있는 어느 세계나 우주에도, 어떤 목적에도,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밀사(密使)가 된다. 그들은 소구역 본부에서 특별하고 중요한 봉사를 베풀며, 한 초우주의 수없는 잡다한 과제를 수행한다. 그들은 초우주 정부의 삼위일체를 체험한 아들의 긴급 군단, 곧 예비 군단이며, 따라서 광대한 범위의 임무에 소용된다. 그들은 초우주 사무 가운데 수천 가지 사업에 종사하는데, 유란시아에서 벌어지는 아무 일도 이 활동과 어떤 면에서도 비슷하지 않으니까, 인간의 머리가 알아듣도록 묘사하기가 불가능하다.
22:7.1 (249.1) 완전한 존재와 완전해진 영적 존재들이 겪는 최상의 창조 행위를 맛보는 체험―삼자일체(三者一體) 행위―를 나는 물질 지성에게 넉넉히 펼쳐 보여줄 수 없다. 삼자일체 기법은 대관별과 외톨이별의 비밀이고, 이 독특한 체험을 거친 자들 외에, 아무한테나 밝힐 수 없고 아무나 이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까 어떤 존재도 이 특별한 거래의 성질과 취지를 인간의 지성에게 성공적으로 묘사하기가 불가능하다.
22:7.2 (249.2) 신들은 별도로 하고, 오로지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인격자들, 그리고 각 최후자 군단의 어떤 단원들만 삼자일체 체험에 들어간다. 파라다이스처럼 완전한 특정 조건 밑에서, 이 훌륭한 존재들은 개념 및 신분의 독특한 체험을 시작해도 좋고, 그들은 새로운 존재(存在)를, 인간이 삼자일체화한 아들을 낳는 데 많이 성공한다.
22:7.3 (249.3) 그러한 삼자일체 모험에 들어가는 영화롭게 된 인간은 그런 체험에 꼭 한 번 참여해도 좋다. 한편 파라다이스 신들에게는 삼자일체화 사건을 줄곧 연출하는 데 아무 제한이 없다. 오직 한 가지 면에서 신은 제한이 있는데, 최초의 무한한 영이 오직 한 분, 곧 아버지와 아들의 통합된 의지의 무한한 집행자가 꼭 하나밖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22:7.4 (249.4) 어떤 수준의 파라다이스 문화와 영적 성장에 도달하고 조절자와 융합한, 하늘 가는 필사 최후자는, 한 인간 존재를 삼자일체화로 낳으려고 시도할 수 있는 자에 속한다. 필사 최후자의 중대가 파라다이스에 주둔할 때, 하보나 시간으로 1천 년마다 쉬는 시간이 주어진다. 그러한 최후자들은 책임에서 풀려난 이 시간을 일곱 가지 다른 방법으로 보내도 좋다. 이 가운데 하나는 어떤 동료 최후자, 또는 어떤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인격자와 결합하여, 인간의 삼자일체 체험을 시도하는 것이다.
22:7.5 (249.5) 총우주 건축가들 앞에 가서, 두 필사 최후자가 삼자일체 체험을 위하여 그들이 따로 동일한 개념을 골랐다는 것을 보여주면, 건축가들은 자기들의 판단 아래, 영화롭게 된 이 필사 승천자들에게 휴가를 주고, 이들을 파라다이스 시민의 삼자일체화 구역으로 한동안 이동하는 것을 허가하는 명령을 선포할 권한이 있다. 이렇게 배치된 휴식의 끝에, 그때까지 삼자일체화를 거치지 않은, 선택한 독창적 개념을 영적으로 변화시키고 이상화(理想化)하고 현실화하려는 천국 같은 노력을 그들이 따로따로, 그리고 공동으로 하기로 했다고 말씀드리면, 그때 으뜸 영 7번이 그러한 특별 사업을 허가하는 명령을 내린다.
22:7.6 (249.6) 때때로 이 모험에 믿을 수 없이 오랜 세월이 걸린다. 충실하고 결의가 굳은 이 예전의 필사자들이―그리고 때때로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인격자들이―마침내 목적을 이루고, 그들이 고른 보편적 진리 개념을 실제 존재로 생겨나게 하는 데 정말로 성공하기까지 한 시대가 지나가는 듯하다. 이 헌신적인 쌍들이 반드시 성공하지는 않는다. 여러 번 그들은 실패하고, 게다가 그들에게 아무런 잘못이 발견되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 그렇게 실패하는 삼자일체화 후보자들은, 최상의 노력을 기울이고도 최상의 실망을 견딘 존재로 부르는, 특별한 최후자 무리 속에 가입이 허락된다. 파라다이스 신들이 삼자일체화하려고 뭉치면, 반드시 성공한다. 그러나 한 쌍의 동질(同質) 인간의 경우, 같은 계급 존재의 두 구성원이 뭉치려고 시도한 경우에 반드시 성공하지는 않는다.
22:7.7 (250.1) 신들이 새롭고 고유한 한 존재를 삼자일체화로 낳을 때, 신성한 부모는 신 잠재성에 변화가 없다. 그러나 높아진 인간 존재들이 그러한 창조 사건을 연출할 때, 계약하고 참여하는 개인들 중에 하나가 독특한 인격 수정(修正)을 겪는다. 인간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의 두 조상(祖上)은 어떤 의미에서, 영적으로 하나와 같이 된다. 우리는 최상 존재가 대우주에서 성격이 충만하고 완전하게 명시될 때까지, 성격의 어떤 영적 단계에서 둘이 하나로 되는 이 상태가 아마 지속할 것이라 믿는다.
22:7.8 (250.2) 인간의 삼자일체 체험으로 새로운 아들이 나타남과 동시에, 두 조상의 이러한 기능의 영적 연합이 생긴다. 궁극의 기능 수준에서, 삼자일체를 겪는 두 부모는 하나가 된다. 우주의 창조된 존재들 가운데 아무도 이 놀라운 현상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으며, 이것은 신성에 가까운 체험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무한한 영을 영원하게 만들려고 뭉쳤을 때, 목적이 성취되고 나서 그들은 하나와 같이 되었고 그 뒤로 언제나 하나였다. 그리고 두 인간의 삼자일체화 연합이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이 이룬 완전한 신 연합의 서열, 무한한 규모의 서열을 좇지만, 인간의 삼자일체화가 일으키는 영향의 성질은 영원하지 않다. 체험적 신들의 현실화가 끝나고 나서, 그 영향이 그칠 것이다.
22:7.9 (250.3) 인간의 삼자일체 체험으로 생긴 아들의 이 부모는 그들의 우주 과제에서 하나처럼 되지만, 최후 군단과 총우주 건축가들의 구성 및 출석 점호에는 계속 두 인격자로 간주된다. 현재 우주 시대에, 삼자일체화로 연합한 부모들의 배치와 활동은 뗄 수 없다. 하나가 가면 다른 하나가 따르며, 하나가 하는 것을 다른 하나도 한다. 부모의 양자(兩者) 통일이 한 필사 (또는 기타) 최후자와 한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인격자를 포함할 때, 연합한 부모 존재는 파라다이스 시민이나, 하보나 주민이나, 최후자와 함께 활동하지 않는다. 그렇게 섞인 연합은 비슷한 존재들로 이루어진 한 특별 집단에서 사귄다. 그리고 섞였든 그렇지 않든, 모든 삼자일체화 연합에서 부모 존재들은 서로를 의식하고 서로와 교통할 수 있고, 그들은 어느 쪽도 이전에 이룰 수 없었던 직무를 해낼 수 있다.
22:7.10 (250.4) 일곱 으뜸 영은 최후자와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인격자가 삼자일체로 연합하는 것을 인가할 권한을 가졌고, 그러한 혼합된 연결은 반드시 성공한다. 인간의 삼자일체화로 생긴 훌륭한 아들들은 파라다이스의 영원한 인간이나 시공의 인간이 이해하기에 부적당한 개념을 대표한다. 그래서 그들은 총우주 건축가들의 피보호자가 된다. 겉보기에 미래 우주와 관계되고 따라서 초우주나 중앙 우주 행정부에 즉시 아무런 실용적 가치가 없는 개념과 이상과 체험을, 삼자일체화로 생긴 이 운명의 아들들이 몸에 담고 있다. 이 독특한 시간 세계의 아이들과 영원의 시민들이 낳은 자손은 모두 대관별에서 예비군에 남아 있으며, 그들은 그곳에 창조 아들 집단의 비밀 학부가 차지하는 구체(球體)의 특별 구역에서, 시간의 개념과 영원의 실체를 연구하는 데 몰두한다.
22:7.11 (251.1) 최상 존재는 세 단계의 신 실체가 통일된 것이다. 최상위 하나님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어떤 유한한 모습이 영적으로 통일된 것이요, 전능 최상위는 대우주 창조자들의 권능이 통일된 것, 최상 지성은 셋째 근원 중심과 그 동격자들이 개별로 최상 존재의 실체에 공헌한 것이다. 중앙 우주와 파라다이스의 훌륭한 인간은, 삼자일체화 모험을 겪으면서 최상위 신의 세 가지 모험에 참가하며, 이것은 인간의 삼자일체 체험으로 세 계급 아들들의 생산을 초래한다:
22:7.12 (251.2) 1. 승천자가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 창조하는 노력을 기울일 때 최후자들은 시공을 거쳐서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면서 체험으로 얻은, 전능 최상위의 어떤 개념 실체를 삼자일체화하려고 시도한다.
22:7.13 (251.3) 2.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주민. 파라다이스 시민과 하보나 주민의 창조적 노력은 궁극위와 영원자에 가까이 가는, 최상을 초월하는 배경에서 체험으로 얻은 모습, 최상 존재의 어떤 높은 영적 모습의 삼자일체화를 일으킨다.
22:7.14 (251.4) 3.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운명의 아들. 최후자 하나와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주민[1] [1662] 하나가 함께 새 인간을 삼자일체화로 낳을 때, 이 합동 노력은 최상 궁극 지성의 어떤 단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 결과로 생기는 아들, 인간의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은 창조를 초월한다. 그들은 달리 체험적으로 얻지 못했던 최상 궁극 신의 사실성을 대표한다. 따라서 이것은 자동으로 총우주 건축가들의 분야에 속하며, 그들은 현재 우주 시대의 창조 한계를 초월하는 것들을 관리한다. 삼자일체화로 생긴 운명의 아들들은 최상 궁극위의 아직 밝혀지지 않은 총우주 활동의 어떤 모습을 몸에 담고 있다. 이 시간과 영원의 합동 자손에 대하여 우리는 많이 모르지만, 밝히도록 허락받은 것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다.
22:8.1 (251.5) 이 이야기에서 고려되는, 인간이 삼자일체로 낳는 아들들 외에도, 수많은 밝혀지지 않은 계급의 존재, 인간이 삼자일체로 낳는 존재들이 있다―일곱 최후자 군단과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인격자들이 복수(複數)로 연결하여 낳은 다양한 후손이 있다. 이미 밝혀졌든 그렇지 않든, 인간이 삼자일체로 낳는 이 존재들은 모두 우주의 아버지한테서 인격을 부여받는다.
22:8.2 (251.6) 승천자가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거나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시민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새 아들들이 어리고 훈련되지 않았을 때, 그들은 보통 무한한 영의 일곱 파라다이스 구체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도록 파송되며, 거기서 일곱 최상 집행자의 보호 밑에서 수고한다. 그 뒤에 그들은 지역 우주에서 삼위일체 교육 아들들의 연장된 훈련을 받도록 입양될 수도 있다.
22:8.3 (251.7) 높고 영화롭게 된 인간에 기원을 가진 이 양자(養子)들은 교육 아들들의 도제(徒弟), 곧 학생 조수이며, 분류로 따지면, 그들은 흔히 일시 이 아들들과 함께 포함된다. 극기(克己)하는 가운데 그들이 택한 봉사 영역의 이익을 위하여, 그들은 많은 고귀한 과제를 실행해도 좋고 또 실행하기도 한다.
22:8.4 (251.8) 지역 우주에 있는 교육 아들들은, 인간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피보호자들을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품에 안기도록 지명할 수 있다. 이 포옹에서 삼위일체를 체험한 완전의 아들로 솟아나서, 그들은 일곱 초우주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을 위한 근무에 들어가며, 이것은 현재 알려진 바, 두 번 삼자일체 체험을 거친 이 독특한 존재 무리의 운명이다.
22:8.5 (252.1) 인간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들이 모두 삼위일체의 품에 안기지는 않는다. 다수가 파라다이스의 일곱 으뜸 영, 초우주의 거울 영, 지역 우주 어머니 영들의 동료와 대사(大使)가 된다. 더러는 영원한 섬에서 특별 임무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 더러는 아버지의 비밀 세계에서, 영의 여러 파라다이스 구체에서 특별 근무에 들어갈 수도 있다. 결국에는, 다수가 하보나의 내부 회로에서 삼자일체를 체험한 아들의 합동 군단으로 찾아간다.
22:8.6 (252.2) 삼위일체를 체험한 완전의 아들과 대관별에서 모이는 자들을 제외하고, 인간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모든 아들의 최상 운명은 삼자일체를 체험한 최후자 군단에 가입하는 것인 듯하며, 이것은 일곱 파라다이스 최후 군단 가운데 하나이다.
22:9.1 (252.3) 인간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들은 7천 명씩 학급을 지어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품에 안긴다. 완전해진 인간들의 자손과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인격자들의 자손,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이 자손들은 모두 똑같이 신들의 품에 안기지만, 그들의 예전의 강사(講師), 삼위일체 교육 아들들의 조언에 따라서 초우주에 배치된다. 근무 성적이 만족스러운 자는 높은 아들 조수로 임명되고, 성적이 덜 특출한 자는 천상의 보호자로 지정된다.
22:9.2 (252.4) 독특한 이 존재들은 삼위일체의 품에 안기고 나서, 초우주 정부에서 가치 있는 보조자가 된다. 이들은 승천 생애의 사무에 관해서 통달하게 되는데, 몸소 승천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공간 세계에서 삼위일체 교육 아들들과 함께 근무하는 결과로서 그렇게 된다.
22:9.3 (252.5) 오르본톤에는 거의 10억 명의 천상의 보호자가 임관되었다. 이들은 주로 대구역의 본부에서 늘 완전한 이들의 행정부에 배치되며, 아들과 융합한 승천 필사자 집단이 이들을 유능하게 보조한다.
22:9.4 (252.6) 천상의 보호자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법정의 관리이며, 법정의 사자로서, 또한 초우주 정부의 여러 재판소의 소환장과 판결문을 소지(所持)한 자로서 활동한다. 그들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체포 대리자이며, 유버르사로부터 나가서 초우주 판사들 앞에 출석이 요구되는 존재들을 데리고 돌아온다. 그들은 초우주에서 어떤 성격자라도 잡아 가두라는 명령을 집행한다. 그들은 또한 지역 우주에서, 영과 융합한 필사자들이, 어떤 이유에서든, 유버르사에 출석이 필요할 때 이들을 따라간다.
22:9.5 (252.7) 천상의 보호자 및 그 동료, 높은 아들 조수에게는 조절자가 한 번도 깃든 적이 없다. 그들은 영이나 아들과 융합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포옹은 삼위일체를 체험한 완전의 아들의 비융합 지위를 보상해 준다. 삼위일체의 포옹은, 품에 안긴 아들을 달리 변화시키지 않고서, 인간이 삼자일체로 낳은 아들 안에 오직 인격화된 그 개념에 대해서만 작용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은 그렇게 계획했을 경우에만 일어난다.
22:9.6 (252.8) 두 번 삼자일체 체험을 거친 아들들은 놀라운 존재이지만, 하늘 가는 동료들처럼, 다능하지도 믿을 만하지도 않다. 공간의 어두운 영토로부터 영광(榮光)이 있는 곳까지 실제로 올라감으로 이 무리에 속하는, 나머지 아들들이 얻은 엄청나고 몸소 겪은 깊은 체험이 그들에게 빠져 있다. 하늘 가는 생애를 가진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고, 힘이 자라는 데까지 그들의 부족한 점을 메워주려고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낮은 기원과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을 언제나 고마워하는 느낌이 들게 한다. 우주로 올라가면서 체험할 수 있는 실체들을 그들이 맛보지 못한 것을 그들이 자진해서 헤아리고 인정하는 것은 초월적으로 아름답고, 어떤 때는 아주 애처로워 감동이 된다.
22:9.7 (253.1) 삼위일체가 품은 다른 아들들과 대조해서, 삼위일체를 체험한 완전의 아들들은 제한되어 있는데, 그들의 체험 능력이 시공에서 억제되었기 때문이다. 최상 집행자 및 교육 아들들과 함께 오랜 훈련을 거치는데도, 그들은 체험이 모자란다. 그리고 이렇지 않다면, 넘치는 체험은 어느 미래 우주 시대에 체험을 얻도록 그들을 예비로 남아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모든 우주 존재에서, 실제로 몸소 체험을 맛보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정말로 하나도 없다. 그리고 인간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이 아들들은 어떤 앞날의 우주 시기에 체험적 활동을 위하여 예비로 남아 있다.
22:9.8 (253.2) 초우주의 높은 법정에서 일하는 이 위엄 있는 관리들이, 하다 못해 공간의 진화 세계에서 요즘에 다다른 자들도 부러워하며 호소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저택 세계에서 나는 이따금 보아 왔다. 그래서 체험이 없이 이러한 삼자일체화를 거친 자들이, 진정한 체험과 실제로 사는 걸음을 거쳐서 우주의 길을 올라가는 형제, 운이 나쁘다고 생각된 형제들을 정말로 부러워한다고 누구라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장애와 한계가 있는데도, 초우주 정부의 까다로운 행정 계획을 집행하는 일이 닥칠 때, 그들은 놀랍게도 유용하고, 늘 기쁘게 일하는 집단의 일꾼이다.
22:10.1 (253.3) 높은 아들 조수는 필사 최후 군단의 영화롭게 된 승천자, 그리고 영원한 동료인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인격자들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들 가운데 다시 삼자일체를 거친 우수한 집단이다. 그들은 초우주 근무에 배치되며,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정부에서 높은 아들들의 개인 조수로서 활동한다. 그들은 개인 비서라 부르는 것이 더욱 적절할지 모른다. 때때로 그들은 높은 아들들의 특별 위원회와 기타 집단 관계의 서기(書記)로서 활동한다. 그들은 지혜 완성자, 신성한 조언자, 우주 검열자, 막강한 사자, 고등 권위자, 이름도 번호도 없는 자들에게 봉사한다.
22:10.2 (253.4) 천상의 보호자를 논하면서 내가 두 번 삼자일체를 겪은 이 아들들의 한계와 장애에 눈길을 끄는 듯했다면, 온통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 이제 내가 그들의 한 가지 큰 장점, 거의 값을 따질 수 없이 그들을 우리에게 소중하게 만드는 속성을 지적해 보자. 그들이 한 가지 최상 개념이 성격화된 것이라는 사실에 바로 그들의 존재 이유가 있다. 그들은 어떤 신다운 개념, 어떤 우주의 이상을, 이전에 결코 생각해 보거나 표현하거나 삼자일체화 과정을 거친 적도 없기 때문에, 인격자로 몸에 담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 그들은 삼위일체의 품에 안겼고, 따라서 그들의 인격이 존재하는 개념과 이상에 관한 신성한 삼위일체의 바로 그 지혜를, 그들이 보여주고 실제로 몸에 담고 있다. 여러 우주에 대하여 그 특별한 개념이 드러날 수 있는 한, 이 인격자들은 어떤 인간이나 창조자의 지능이 아마 생각해 보거나, 표현하거나, 모범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몸에 담고 있다. 그들은 그 개념이 인격화된 것이다.
22:10.3 (253.5) 너희는 한 가지 최상의 우주 실체 개념이 집중된 그러한 살아 있는 존재가 초우주 행정을 맡은 자들에게 얼마나 말할 수 없이 쓸모 있을지 깨달을 수 없는가?
22:10.4 (254.1) 나는 오르본톤 남쪽에 있는 새 우주들의 집단에 관해서 세 가지 문제를 연구하는 데 배치된 위원회, 여섯명―높은 아들 한명씩―으로 이루어진 한 위원회를 주관하라는 지시를 받은 지 오래지 않다. 내가 높은 아들 조수들의 가치를 뼈저리게 깨닫게 된 것은 그러한 비서(秘書)들을 내 위원회에 임시 배치하도록 유버르사에 있는 그들 계급의 우두머리에게 요청했을 때였다. 우리의 생각 중에 첫째는 유버르사에 있는 한 높은 아들 조수가 대표하였고, 그는 당장 우리 무리에 부속되었다. 둘째 문제는 제3 초우주에 배치된 어느 높은 아들 조수 몸에 담겨 있었다. 필수 지식을 조정하고 분배하는 중앙의 우주 교환소를 통해서, 이 근원으로부터 우리는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지만, 최상으로 인간이 삼자일체화하고 마지막에 신이 삼자일체화한 그 개념이 되는 한 인격자가 실제로 앞에 있어 도움주는 것에 비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셋째 문제에 관해서는, 파라다이스의 기록이 그러한 개념을 결코 인간이 삼자일체화한 적이 없다는 것을 드러냈다.
22:10.5 (254.2) 높은 아들 조수들은 엄청난 개념과 굉장한 이상이 독특하고 고유하게 성격화된 것이다. 그것만으로 그들은 때때로 우리가 심의(審議)할 때 말할 수 없이 빛을 밝게 비춰줄 수 있다. 공간 우주에서 내가 바깥에서 어떤 장거리 임무를 띠고 활동할 때, 내가 착수하고 해결하라고 파송받은 바로 그 문제에 대하여 충만한 신다운 개념이 되는 높은 아들 조수를 내가 운 좋게 내 임무에 배치받았다면, 이것이 얼마나 큰 도움을 의미하는가 생각해 보아라. 나는 바로 이러한 체험을 여러 번 겪었다. 이 계획의 유일한 문제는, 어떤 초우주도 이러한 삼자일체화된 여러 개념의 완전한 한 벌을 갖추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겨우 이 존재들의 7분의 1을 가지며, 한 개념이 삼자일체화되었다는 기록이 있더라도, 우리가 이 존재들과 친히 교제를 누리는 것은 겨우 일곱 번에 한 번쯤이다.
22:10.6 (254.3) 우리는 유버르사에서 이 존재를 훨씬 많은 수로, 크게 유리하게 쓸 수 있다. 초우주 행정부에서 그들이 쓸모 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우리는 공간 순례자, 그리고 파라다이스 거주민에게도, 그들이 그러한 창조 모험을 실행하는 데 필수인 체험적 실체를 서로에게 기여한 뒤에 삼자일체 체험을 시도하라고 권한다.
22:10.7 (254.4) 우리는 지금 우리 초우주에 높은 아들 조수를 약 125만 명 가졌고, 유버르사에서 활동하는 것 같이, 그들은 대구역과 소구역에서도 근무한다. 우리가 먼 우주들까지 임무를 받고 떠날 때 그들은 가끔 우리를 따라온다. 높은 아들 조수는 어떤 아들이나 어떤 위원회에 영구히 배치되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유통되며, 바로 그들의 신분인 개념과 이상(理想)이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영원한 목적을 최선으로 진전시킬 수 있는 곳은 어디에나 봉사하며, 그들은 삼위일체의 아들이 되었다.
22:10.8 (254.5) 그들은 감동을 주도록 사랑이 넘치며, 더할 나위 없이 충성스럽고, 지극하게 총명하고―한 가지 개념에 관하여―최상으로 지혜롭고, 초월적으로 겸손하다. 자기들의 한 가지 생각이나 이상에 관하여 우주의 지식을 너희에게 나눠줄 수 있는 한편, 여러 다른 주제에 관하여, 하다 못해 하늘 가는 필사자한테서도 지식과 정보를 찾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대단히 애처롭다.
22:10.9 (254.6) 이것이 삼위일체를 체험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어떤 자들, 특히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신성한 품을 거치고, 그리고 나서 초우주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행정자에게 지혜롭고 이해심 있게 협조하려고 초우주 근무로 배치된 자들의 기원ㆍ성품ㆍ활동에 관한 이야기이며, 바로 앞의 하보나 목적지까지, 궁극에 파라다이스 목표를 향하여 가는, 시간 세계의 승천 필사자들이 안으로 향하여 걷는 발걸음을 돕기 위하여 그들은 지치지 않고 노력한다.
23:0.1 (256.1) 외톨 사자들은 합동 창조자의 개인적이고 보편적인 집단이다. 그들은 무한한 영의 고등 성격자 중에서 첫째이자 선임 계급이다. 그들은 홀로 사는 성격의 영들을 만들려는 목적으로, 혼자서 활동하는 무한한 영의 초기 창조 행위를 대표한다. 아버지도 아들도 이 굉장한 영적 변화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23:0.2 (256.2) 이 영(靈) 사자들은 단일 창조 사건에서 성격화되었고, 그들의 수는 고정되어 있다. 이 현재 임무에, 이 특별한 존재들 중에 하나가 나와 관계되어 있지만, 나는 온 우주에 그러한 성격자들이 얼마나 존재하는지 모른다. 나는 때때로 얼마나 많은 영 사자들이 우리 초우주의 관할 밑에서 당분간 활동하는 것으로 등록부에 기입되어 있는가 알 뿐이다. 나는 최근의 유버르사 보고서로부터, 오르본톤의 경계 안에, 그때 외톨 사자가 거의 7,690조(兆) 명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주목한다. 그리고 이 숫자는 그들의 총 숫자의 7분의 1보다 훨씬 적다고 나는 추측한다.
23:1.1 (256.3) 일곱 하보나 회로의 영을 창조하고 나서 바로 뒤에, 무한한 영은 광대한 외톨 사자 군단을 낳았다. 파라다이스와 하보나 회로들을 제쳐놓고, 우주 창조의 어느 부분도 외톨 사자보다 앞서 존재하는 것이 없으며, 그들은 거의 영원의 시절부터 대우주 전역에서 활동해 왔다. 외톨 사자는 시공의 광범위한 창조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고 그들과 개인적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무한한 영이 쓰는 신성한 기법에 필수이다.
23:1.2 (256.4) 이 사자들이 영원에 가까운 시절부터 존재하는데도, 그들은 모두 자아의 시초를 의식한다. 그들은 시간을 의식하며, 무한한 영이 창조한 중에서 그러한 시간 의식을 가진 처음 존재이다. 시간 속에서 성격화되고 공간 속에서 영화(靈化)된 생물, 무한한 영이 처음 낳은 생물이다.
23:1.3 (256.5) 홀로 사는 이 영들은 충분히 발육되고 완전하게 갖춰진 영 존재로서, 시간이 시작될 때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같고, 개인적 차이에 기초를 둔 아무런 등급이나 세분이 없다. 그들의 분류는 전적으로 그들이 때때로 배치되는 일의 종류에 근거를 둔다.
23:1.4 (256.6) 필사자는 공간 세계에서 거의 물질 존재로 시작해서, 큰 중심들을 향하여 안으로 올라간다. 홀로 사는 이 영들은 만물의 중심에서 출발하며, 멀리 떨어진 창조들까지, 아니 가장 바깥의 여러 지역 우주에 있는 개별 세계들, 그리고 그 너머까지도 가는 임무를 몹시 바란다.
23:1.5 (256.7) 외톨 사자라고 부르기는 해도, 그들은 외로운 영이 아니니, 참으로 혼자 일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창조에서 혼자 사는 생활을 즐길 수 있고, 또 즐기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렇지만 우주 지능을 가진, 그들이 사귈 수 있는 극소수 계급과 교제하기를 똑같이 좋아한다.
23:1.6 (257.1) 외톨 사자는 근무할 때 고립되지 않으며, 머무르는 지역의 모든 방송을 “듣는” 능력이 있어서, 그들은 모든 창조의 풍부한 지능과 항상 연결이 된다. 또한 자체 직속 군단의 구성원, 곧 같은 초우주에서 비슷한 종류의 일을 하는 존재들과 서로 통신할 수 있다. 그들 무리 가운데 다른 자들과 교통할 수 있지만, 일곱 으뜸 영 회의로부터 그렇게 하지 말라고 지시를 받았고, 그들은 충성스러운 집단이다. 그들은 거역하거나 근무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언제라도 외톨 사자가 우연히 악행을 저질렀다는 기록이 없다.
23:1.7 (257.2) 우주 동력 지휘자와 마찬가지로, 외톨 사자는 그 영역에서 두루, 시공의 법정에게 체포되거나 구금되지 않고 활동하는 극소수의 존재에 속한다. 일곱 으뜸 영을 제외하고, 아무도 그들을 출두하라고 소환할 수 없다. 하지만 총우주의 연대기를 통틀어서, 이 파라다이스 회의가 어느 외톨 사자의 사례(事例)를 판결하라고 요청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
23:1.8 (257.3) 혼자 배치되는 이 사자들은 셋째 근원 중심에서 유래하며, 믿을 수 있고, 자립적이고, 다능하며, 철저히 영답고, 널리 동정심을 가진 집단의 창조된 존재이다. 그들은 중앙의 파라다이스 섬에 거하는 무한한 영의 권한으로, 성격화된 그대로 지역 우주의 본부 구체에서 활동한다. 그들은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의 직접 영향 밑에서 지역 우주에서 활동할 때에도, 무한한 영으로부터 방사되는 직접 회로에서 영양을 항상 섭취한다.
23:1.9 (257.4) 이 외톨 사자들이 혼자 여행하고 일해야 하는 데는 기술적 이유가 있다. 짧은 기간 동안, 고정되어 있을 때, 그들은 한 무리를 이루어 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모여 있을 때, 파라다이스 회로의 영양(營養)과 지도(指導)로부터 완전히 차단된다. 그들은 전적으로 고립된다. 이동할 때나 공간 회로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활동할 때, 이 계급에서 둘 이상이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 둘 또는 모두가 더 높은 순환하는 물력과 연결된 상태에서 동댕이쳐진다. 실례가 되는 상징으로 너희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합선”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몸 속에 자동 경보, 경고 신호를 본래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들에게 다가오는 충돌을 어김없이 알려 주며, 적절하고 효과적인 작용을 방해하지 않도록 틀림없이 그들을 넉넉히 떼어놓는다. 그들은 또한 영감 받은 삼위일체 영과 신다운 생각 조절자가 가까이 있는 것을 탐지하고 가리키는 선천적이고 자동인 힘도 소유한다.
23:1.10 (257.5) 이 사자들은 개성을 키우거나 자식을 낳는 능력이 없지만, 우주에서 그들이 종사할 수 없는 일은 실질적으로 하나도 없고, 무슨 일에나 그들은 무엇인가 본질적이며 유익한 것을 기여할 수 있다. 특히, 우주 사무의 행정에 관여하는 자에게 크게 시간을 벌어 주며, 가장 높은 자로부터 가장 낮은 자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를 도와준다.
23:2.1 (257.6) 외톨 사자는 하늘 성격자들 가운데 어느 개인이나 집단에 영구하게 배치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배치에 따라서 근무하며, 그렇게 근무하는 동안에 그들이 부속된 집단의 영역을 지휘하는 자의 직접 감독 밑에서 일한다. 그들 사이에 어떠한 종류의 조직이나 정부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들은 외톨 사자이다.
23:2.2 (258.1) 무한한 영이 외톨 사자를 다음 일곱 분과의 근무에 배치한다:
23:2.3 (258.2) 1.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사자.
23:2.10 (258.9) 이 영 사자들은 한 종류의 근무에서 다른 종류로, 어떤 의미에서도 서로 교환 할 수 있다. 그러한 이동은 항상 일어난다. 따로 된 외톨 사자 계급이 하나도 없다. 그들은 영적으로 비슷하고, 어떤 의미에서도 같다. 대체로 그들을 숫자로 부르지만, 무한한 영은 그들의 개별 이름을 알고 있다. 나머지 우리에게 그들은 현재 임무를 가리키는 이름이나 숫자로 통한다.
23:2.11 (258.10) 1.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사자. 삼위일체에게 배치된 사자 집단이 하는 일에 관하여, 나는 많이 밝히는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신들이 의지하는 비밀 하인이며, 신들의 발표되지 않은 정책과 앞날의 운영에 관계되는 특별한 소식을 맡았을 때, 그들은 한 번도 비밀을 흘리거나, 그들 계급에 속하는 비밀을 털어놓은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이 완전함을 자랑하려는 것처럼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신들은 완전한 존재를 창조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함을 지적하려고 이 모두를 이야기한다.
23:2.12 (258.11) 유란시아에서 생긴 혼란과 소동은 파라다이스 통치자들이 사무를 다르게 처리할 관심이나 능력이 없다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창조자들은 유란시아를 진정한 천국으로 만들기에 넉넉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에덴은 필요의 모루와 고통의 망치 사이에서, 신들이 너희 세계에서 아주 확실히 단련해내는 강하고 고귀하고 노련한 인품을 개발하는 데 기여하지 않을 것이다. 완전한 중앙 우주의 여러 세계에서 만물이 말할 수 없이 완전하고 그들 최고의 목적에 무한히 적응된 것과 마찬가지로, 너희의 걱정과 슬픔, 너희의 시련과 실망은 너희의 구체에서 신의 계획의 일부이다.
23:2.13 (258.12) 2. 하보나 회로의 사자. 하늘 가는 생애를 통해서 너희는 어렴풋이, 그러나 갈수록 더 외톨 사자의 존재를 탐지할 수 있을 터이나, 하보나에 다다르기까지 너희는 그들을 틀림없이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얼굴을 맞대고 처음 보는 사자는 하보나 회로들에 있는 사자일 것이다.
23:2.14 (258.13) 외톨 사자는 하보나 세계들의 원주민과 특별한 관계를 누린다. 이 사자들은 서로 관련을 가질 때 그렇게 기능의 장애를 받지만, 하보나 원주민과 아주 가깝고 개인적 교통을 가질 수 있고 또 그렇게 한다. 그러나 신답게 완전한 이 존재들의 지성이 그러한 초월에 가까운 성격자의 영과 접촉하고 나서 얻는 최상의 흐뭇함을 인간의 머리에 전달하기가 아주 불가능하다.
23:2.15 (259.1) 3. 초우주의 사자.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 일곱 초우주의 운명을 주관하고 삼위일체의 기원을 가진 성격자들, 신성한 힘과 행정 지혜를 가진 이 삼원조(三員組)는 외톨 사자를 풍부하게 공급받고 있다. 오로지 이 계급의 사자들을 통해서, 한 초우주의 삼자일치 통치자들은 직접, 개인적으로 다른 초우주의 통치자들과 교통할 수 있다. 외톨 사자는―아마도 영감 받은 삼위일체 영은 별도로 하고―한 초우주 본부에서 직접 다른 초우주 본부로 보낼 수 있는, 유일하게 소용되는 종류의 지적 영이다. 모든 다른 성격자는 하보나와 으뜸 영들의 집행부 세계들을 거쳐서 그러한 여행을 해야 한다.
23:2.16 (259.2) 인력 사자나 거울 작용이나 방송을 이용해서 얻을 수 없는 어떤 종류의 정보가 있다.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이러한 일을 꼭 알고 싶을 때, 그들은 지식의 근원까지 한 외톨 사자를 보내야 한다. 지금 나와 같이 일하는 사자(使者)는 유란시아에서 생명이 생기기 훨씬 전에, 유버르사에서 중앙 우주로 가는 임무에 배치되었다―오르본톤의 출석 점호에서 거의 1백만 년 동안 자리를 비웠지만, 제 시간이 되자 바라던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23:2.17 (259.3) 초우주에서 외톨 사자의 근무에는 아무 제한이 없으며, 그들은 고등 재판소의 집행자로서, 또는 그 영역의 이익을 위해서 정보 수집자로서 활동할 수도 있다. 모든 초우주 가운데, 그들은 오르본톤 근무를 가장 기뻐하는데, 여기에 필요가 가장 크고, 영웅다운 노력을 할 기회가 크게 늘어나기 때문이다. 빈곤한 지역일수록 우리는 모두 더욱 충만히 활동하는 만족감을 즐긴다.
23:2.18 (259.4) 4. 지역 우주의 사자. 한 지역 우주에서 근무할 때, 외톨 사자의 활동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 군림하는 주 아들의 완전한 사법권 밑에 있어도, 그들은 그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의 동기와 의도를 충실하게 드러내는 자이다. 이것은 그들이 우주 본부로부터 바깥으로 직접 여행을 떠나든지, 아니면 별자리 아버지, 체계 군주, 또는 행성 영주들과 연락하여 임시로 활동하든지 상관 없이, 한 지역 우주에서 활동하는 모든 사자에게 참말이다. 한 창조 아들이 자기 우주를 통치하는 군주로 승격될 때, 그의 손에 모든 권력이 모아지기 전에, 이 지역 우주 사자들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일반 지휘를 받으면서 활동하며, 그들의 거주 대표인 늘 하나된 이에게 직접 책임을 진다.
23:2.19 (259.5) 5. 지시받지 않은 임무를 띠고 탐험하는 자. 외톨 사자 예비군이 넘치게 모집되었을 경우에, 일곱 최상 동력 지휘자 가운데 한 분으로부터 탐험할 자원자를 찾는 요청이 발표된다. 그리고 자원자가 모자랄 경우는 한 번도 없는데, 새로 형성되는 세계와 우주의 핵심을 찾아내는 짜릿함을 맛보기 위하여, 그들이 자유롭고 구속받지 않는 탐험자로서 파송되기를 기뻐하기 때문이다.
23:2.20 (259.6) 그들은 그 영역의 공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자들이 제공한 실마리를 조사하려고 떠나간다. 의심할 여지 없이, 파라다이스 신들은 공간에 발견되지 않은 에너지 체계들이 있음을 알지만, 결코 그러한 정보를 흘리지 않는다. 새로 조직되고 있는 에너지 중심들을 외톨 사자들이 탐험하고 지도(地圖)를 그리지 않는다면, 그러한 현상은 근처 영역의 정보부도 오랫동안 눈치채지 못한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나의 등급으로서, 외톨 사자는 인력(引力)에 대단히 민감하다. 따라서 그들은 아주 작고 어두운, 있음직한 행성들의 존재를 가끔 찾아낼 수 있고, 바로 이런 행성들이 생명 실험에 가장 적합하다.
23:2.21 (260.1) 지시받지 않은 임무를 띠고 탐험하는 이 사자들은 총우주를 순찰한다. 그들은 모든 바깥 공간에서 지도가 그려지지 않은 지역으로 탐험하는 원정(遠征)에 항상 나가 있다. 바깥 공간의 영역에서 생기는 움직임에 관하여 우리가 소유하는 정보의 상당히 많은 부분은 외톨 사자들이 탐험한 덕택으로 얻은 것인데, 그들이 흔히 하늘의 천문학자들과 함께 일하고 연구하기 때문이다.
23:2.22 (260.2) 6. 특무 대사 및 밀사. 같은 초우주 안에 자리잡은 지역 우주들은 그들 토착 계급의 아들로부터 뽑은 대사들을 교환하는 것이 관습이다. 그러나 지연을 막기 위해서, 외톨 사자들은 빈번하게 한 지역 우주에서 다른 지역 우주까지 대사로서 가 달라고 부탁을 받는다. 예를 들면, 사람이 사는 새 영역이 발견될 때, 그것이 공간에 너무 멀리 떨어져서, 세라핌에 둘러싸인 대사가 멀리 떨어진 이 우주에 도착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릴 수도 있다. 세라핌에 둘러싸인 존재는 너희 시간으로 1초에 899,174킬로미터의 속도를 도저히 넘을 수 없다. 잡아당기는 접선(接線)뿐 아니라 거대한 별, 역류(逆流), 우회로는 모두 이러한 속도를 늦출 테니까, 먼 여행에서는 평균 속도가 1초에 약 880,000킬로미터가 될 것이다.
23:2.23 (260.3) 원주민 대사가 아주 먼 지역 우주에 이르는 데 수백년이 걸리는 일이 생길 때, 한 외톨 사자가 거기에 즉시 가서, 잠정적 대사로 활동하라고 흔히 부탁을 받는다. 외톨 사자들은 재빨리 갈 수 있고, 인력 사자들처럼 시공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거의 그렇다. 그들은 또한 다른 경우에 특별한 임무를 띤 밀사로 쓰인다.
23:2.24 (260.4) 7. 진리 계시자. 외톨 사자들은 진리 계시 임무를 그들 계급에게 맡기는 가장 높은 책임으로 여긴다. 그들은 때때로, 초우주에서부터 공간의 개별 행성에 이르기까지, 이 자격으로 일한다. 그들은 세계와 체계들에 진리의 계시를 확대하기 위해 파송되는 위원회에 빈번히 부속된다.
23:3.1 (260.5) 외톨 사자는 방송 서비스나 거울 작용을 이용하는 것이 불편할 때, 중요하고 긴급한 소식을 빨리 전하는 데 어느 영역에서도 쓸모 있는, 가장 높은 종류의 완전한 기밀(機密) 성격자이다. 그들은 끝없이 다채로운 임무에 봉사하며, 특히 시간 요소가 들어갈 때, 그 영역의 영적 존재와 물질 존재들을 돕는다. 초우주 영토의 근무에 배치된 모든 계급 가운데, 그들은 시간과 공간을 거의 무시할 수 있는, 가장 높고 다능한 성격화된 존재이다.
23:3.2 (260.6) 우주에는 이동하는 목적으로 인력을 이용할 수 있는 영들의 공급이 넉넉하다. 그들은 어디에나 어느 때나 갈 수 있지만―순간자(瞬間者)이지만―성격자가 아니다. 인력 사자와 초월 기록자처럼, 인력을 통과하는 어떤 다른 자들은 성격 존재이지만, 그들은 초우주 및 지역 우주 행정가들에게 소용되지 않는다. 세계들은 천사와 사람, 그리고 기타 상당히 성격을 가진 존재들로 가득 차 있지만, 그들은 시간과 공간에 장애를 받는다. 세라핌에 싸이지 않은 대부분의 존재들의 속도 한계는 너희 시간으로 1초에 너희 세계의 299,780 킬로미터이다. 중도인(中道人)과 기타 어떤 자들은 2배 속도―1초에 599,561킬로미터―에 이를 수 있고, 자주 그 속도에 이르며, 한편 세라핌과 기타 존재들은 3배 속도, 1초에 약 899,341킬로미터 속도로 공간을 통과할 수 있다. 그러나 외톨 사자를 제외하고, 인력을 통과하는 자들의 순간적 속도와 비교적 느린 세라핌 속도 사이에 활동하는 이동 성격자나 사자(使者)인 성격자는 없다.
23:3.3 (261.1) 따라서 외톨 사자들은 대체로, 임무를 달성하는 데 성격자가 필수인 상황, 그리고 어떤 다른 형태로 즉시 준비된 개인 사자를 보내서 생길 시간의 손실을 피하는 것이 바람직한 경우에, 파송하고 봉사하기 위하여 쓰인다. 그들은 대우주의 통합된 우주 전류와 동시화(同時化)할 수 있는, 유일하게 분명히 성격화된 존재이다. 그들이 공간을 통과하는 속도는, 아주 다양한 간섭 영향에 따라 변하지만, 이 임무를 완수하는 여행에서 나의 동료 사자는 너희 시간으로 1초에 너희의 거리로 1,346,594,600,000 킬로미터의 속도로 나아갔다는 것을 기록이 보여준다.
23:3.4 (261.2) 어떻게 한 영이 참된 성격자이면서 동시에 그렇게 엄청난 속도로 공간을 통과할 수 있는가 물질 종류의 지성에게 나는 전혀 설명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외톨 사자들은 이렇게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유란시아로 실제로 오고 간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정말로 우주 행정 체제 전체가 개인적 요소를 대체로 잃어버릴 것이다.
23:3.5 (261.3) 멀리 떨어진 공간 지역, 곧 대우주의 설립된 회로 안에 포함되지 않은 지역 도처에서, 외톨 사자들은 비상 통신망으로서 활동할 수 있다. 이렇게 활동할 때, 유란시아 천문학자들이 별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는 식으로 한 사자가 약 1백 광년 떨어져 있는 동료 사자에게 소식을 전달하거나 충격 전파를 보낼 수 있다.
23:3.6 (261.4) 초우주 사무의 운영에서 우리와 협동하는 수많은 존재들 가운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고 시간 절약을 돕는 면에서, 아무도 이들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공간 우주에서 우리는 시간의 장애를 주의해야 한다. 따라서 외톨 사자들이 베푸는 큰 봉사는, 그들이 몸소 통신하는 특권의 수단으로 인하여 어느 정도 거리에 구애받지 않으며, 엄청난 이동 속도(速度)의 덕택으로 시간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23:3.7 (261.5) 외톨 사자가 어떻게 형태가 없으면서도 진정하고 분명한 성격을 소유할 수 있는가, 유란시아 필사자들에게 설명하기는 난처하다. 성격과 자연히 연결시킬 형태를 가지지 않았지만, 그들은 모든 상급 부류의 영 존재들이 알아볼 수 있는 영의 위풍을 가지고 있다. 외톨 사자는 완전히 발육된 성격자의 모든 특권과 함께, 형태가 없는 영의 장점(長點)을 거의 모두 소유한 듯이 보이는 유일한 등급의 존재이다. 그들은 참 성격자이며, 그래도 비성격 영이 분명히 표시되는 속성을 거의 모두 부여받았다.
23:3.8 (261.6) 일곱 초우주에서, 보통―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어떤 생물을 시간과 공간의 장애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무엇이나 그에 비례하여 성격 특권을 줄인다. 외톨 사자는 이 일반 법칙에 하나의 예외(例外)이다. 영적 표현, 신다운 수고, 개인적 봉사, 우주 통신에서 어떤 방법을 이용하든지, 온갖 한없는 방법을 이용할 때도, 그들의 활동에 거의 제한이 없다. 너희가 이러한 특별 존재들을 내 우주 행정 경험에 비추어볼 수 있다면, 그들의 다능한 협조가 없으면 초우주 사무의 조정이 얼마나 어려울까 이해할 것이다.
23:3.9 (262.1) 아무리 많이 우주가 커지더라도 상관 없이, 외톨 사자는 아마 더 창조되지 않을 것이다. 우주들이 자라면, 다른 부류의 영 봉사자, 그리고 군주 아들과 지역 우주 어머니 영들이 만드는 생물처럼, 이 새로운 여러 우주에서 기원을 가지는 존재들이 확장된 행정 사무를 점점 더 담당해야 한다.
23:4.1 (262.2) 외톨 사자는 모든 부류의 영 존재를 위하여, 성격자들을 조정하는 자인 듯하다. 그들의 봉사는 방대한 영적 세계들에 사는 모든 성격자를 비슷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그들은 모든 영 존재의 집단 신분 의식을 발달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한다. 어떤 부류의 영 존재도 특별한 외톨 사자 집단의 시중을 받으며, 외톨 사자는 그러한 존재들이, 아무리 서로 달라도, 모든 기타 부류와 계급을 이해하고 그들과 사귀는 능력을 갖도록 촉진한다.
23:4.2 (262.3) 외톨 사자는 온갖 형태와 계급의 유한한 성격자들을 조정하는 능력―아니 총우주 통제자들의 초한(超限) 체제와 연락을 취하기까지―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그래서 무한한 영이 이 사자들을 창조한 것은, 어떤 면에서 합동 행위자가 최상 궁극 지성을 수여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우리 중에 더러는 가정해 본다.
23:4.3 (262.4) 최후자와 파라다이스 시민이 협동하여 “시간과 영원”의 아이를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을 때―이것은 최상 궁극위의 밝혀지지 않은 지성 잠재성과 상관되는 거래이다―그러한 분류되지 않은 성격자가 대관별로 파송될 때, 한 외톨 사자가 (짐작컨대 그는 그러한 신의 지성의 수여에 영향을 받는 성격자이다) 인간이 삼자일체로 낳는 그런 아들에게 반드시 보호하는 동반자로 배치된다. 이 사자는 새 운명의 아들이 배치받은 세계로 그를 따라가며, 대관별을 결코 떠나지 않는다. 시간과 영원의 아이의 운명에 이렇게 소속되었을 때, 외톨 사자는 영원히 총우주 건축가들의 독점 관할 밑으로 옮겨진다. 그렇게 특별한 관계가 앞으로 어찌될지, 우리는 모른다. 오랜 세월 동안, 이러한 독특한 성격자의 쌍들이 대관별에 줄곧 모여 왔고, 한 쌍도 거기를 떠난 적이 없다.
23:4.4 (262.5) 외톨 사자의 수는 고정되었지만, 운명의 아들을 삼자일체로 낳는 것은 무제한의 기법인 듯하다. 삼자일체 체험으로 태어나는 운명(運命)의 아들 각자가 외톨 사자 하나를 배치받으니, 우리가 보기에 아주 먼 앞날 어느 시점에, 사자(使者)들의 공급이 바닥이 날 것이다. 누가 대우주에서 그들의 일을 대신 맡을 것인가? 영감 받은 삼위일체 영들 사이에서 새로 생길 사태가 그들의 봉사를 대신할 것인가? 어느 먼 후일에,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존재들이 대우주를 거의 관리하고, 한편 단일 기원이나 이중 기원을 가진 생물은 바깥 공간의 영역으로 전진할 것인가? 만약에 사자들이 예전의 근무로 돌아온다면, 이 운명의 아들들은 사자들을 따라올 것인가? 외톨 사자의 공급이 이 운명의 아들을 보호하는 동반자로서 소모되어 버릴 때, 최후자와 파라다이스와 하보나 주민 사이에 삼자일체화가 그칠 것인가? 우리의 유능한 외톨 사자들이 모두 대관별에 집중될 것인가? 이 특별한 영 성격자들이 아직 운명이 밝혀지지 않은, 삼자일체로 생긴 이 아들들과 영원히 결합될 것인가? 대관별에 모여드는 이 쌍들이, 막강한 신비의 존재, 총우주 건축가들의 독점 지휘 밑에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무슨 중요성을 부여해야 하는가? 이것들을 비롯하여 비슷한 질문을 바로 우리가 많이 내놓고, 또 수많은 다른 계급의 하늘 존재들에게 물어보지만, 그 답을 모른다.
23:4.5 (263.1) 우주 행정에서 많은 비슷한 사건과 함께, 이 거래는 틀림없이 대우주의 직원이, 아니 하보나와 파라다이스의 직원조차도, 분명하고 확실한 재편성을 겪고 있으며, 이것은 바깥 공간의 영역 전체에 걸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광대한 에너지의 진화와 함께 조정되고, 그와 상관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23:4.6 (263.2) 영원한 과거가 경험한 모든 것을 훨씬 뛰어넘을 그러한 우주 진화의 현상을 영원한 미래에 구경할 것이라 우리는 믿고 싶다. 그리고 너희도 마찬가지로 그래야 하다시피, 우리도 날카로운 흥미와 항상 더욱 큰 기대를 가지고 그러한 엄청난 모험을 기다린다.
24:0.1 (264.1) 유버르사에서 우리는 합동 창조자의 모든 성격자 및 존재를 3대 부문으로 나누는데, 곧 무한한 영의 고등 성격자, 공간의 사자 무리, 시간 세계에서 봉사하는 영들이다. 이들은 필사자로 진보하는 승천 계획을 따르는, 의지(意志)를 가진 인간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봉사하는 데 관여하는 영 존재이다.
24:0.2 (264.2) 이 여러 글에서 언급되는 무한한 영의 고등 성격자는 대우주 전역 어디에나 다음 일곱 부문에서 활동한다:
24:0.10 (264.10) 외톨 사자, 회로 감독자, 통계 지휘자, 개인 보조자의 특징은 엄청난 반인력 자질을 소유한 것이다. 외톨 사자들은 알려진 일반 본부가 없고, 온 우주를 돌아다닌다. 우주 회로 감독자와 통계 지휘자들은 초우주 서울에 본부를 둔다. 무한한 영의 개인 보조자들은 중앙에 있는 빛의 섬에 주둔한다. 부(副)검열자와 지정된 파수들은 각자, 지역 우주의 서울과 그들이 속한 체계의 서울에 주둔한다. 졸업생 안내자들은 하보나 우주에 거하고, 그 10억 세계 어디에나 활동한다. 이 고등 성격자의 대부분은 지역 우주에 주둔지가 있지만, 진화 영역의 행정부에 유기적으로 부속되지 않는다.
24:0.11 (264.11) 이 무리를 구성하는 일곱 등급 중에서, 오직 외톨 사자와 아마도 개인 보조자가 온 우주를 다닌다. 파라다이스에서 바깥으로, 다시 말해서, 하보나 회로를 거쳐서, 초우주 서울로, 거기서부터 바깥으로, 여러 구역, 그리고 지역 우주 및 그 하위 분과들을 지나서, 아니 사람 사는 세계에서도, 외톨 사자를 만나게 된다. 외톨 사자는 무한한 영의 고등 성격자에 속하지만, 그들의 기원과 성품과 봉사는 앞에 있는 글에서 이미 다루었다.
24:1.1 (265.1) 공간에 있는 광대한 동력의 흐름과 영(靈) 에너지 회로는 자동으로 작용하는 듯 보일지 모른다. 이것들이 아무런 방해 없이 작용하는 듯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이 모든 엄청난 에너지 체계는 통제되고, 총명하게 감독을 받고 있다. 우주 회로 감독자는 순전히 물리적 에너지, 곧 물질 에너지의 영역―우주 동력 지도자의 분야―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영적 에너지 회로에, 그리고 상당히 발달된 영적 존재들과 상물질이나 과도기 부류의 지적(知的) 생물을 유지하는 데 필수인, 수정(修正)된 회로에 관여한다. 감독자들은 신의 에너지 회로 및 초월 본질의 기원이 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그들은 시간 세계와 영원의 모든 상급 영 회로, 그리고 대우주 구성 분자들의 행정에 관계되는 모든 상대적 영 회로와 상관이 있다. 그들은 파라다이스 섬 바깥에 있는 모든 그러한 영 에너지 회로를 지도하고 조종한다.
24:1.2 (265.2) 우주 회로 감독자는 무한한 영이 혼자서 창조한 존재이며, 그들은 오로지 합동 행위자의 대리자로서 활동한다. 그들은 근무를 위하여 다음 네 계급으로 성격화된다:
24:1.7 (265.7) 하보나의 최상 감독자와 일곱 초우주의 부(副)감독자의 수는 한정되었고, 이 계급들은 더 창조되지 않는다. 최상 감독자의 수는 일곱이며, 일곱 하보나 회로의 안내 세계에서 주둔하고 있다. 일곱 초우주의 회로는 놀라운 집단, 일곱 부감독자의 책임 하에 있고, 그들은 무한한 영의 일곱 파라다이스 구체에, 곧 일곱 최상 집행자의 세계들에 본부를 둔다. 여기서 그들은 공간의 초우주 회로들을 감독하고 지휘한다.
24:1.8 (265.8) 영의 이 여러 파라다이스 구체에서, 회로 부감독자 7명과 제 1 계급의 최상 동력 중심들은 최상 집행자들의 지시 하에서 연락을 가지며, 이것은 일곱 초우주에 전해지는 회로, 파라다이스 이하의 모든 물질 및 영적 회로의 조정을 일으킨다.
24:1.9 (265.9) 각 초우주의 본부 세계에는 시공의 지역 우주들을 위하여 2차 감독자들이 주둔한다. 대구역과 소구역은 초우주 정부의 행정 분과이지만, 영 에너지를 감독하는 이 문제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나는 대우주에 2차 회로 감독자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르지만, 유버르사에 이 존재가 84,691명 있다. 2차 감독자들은 항상 창조되고, 때때로 그들은 70명씩 무리를 지어 최상 집행자들의 여러 세계에 나타난다. 우리 관할 구역 안에 새로이 진화되는 우주에 영 에너지 및 연락 동력을 가진 회로를 따로 설치하는 일을 주선하는 대로, 우리는 요청해서 그들을 확보한다.
24:1.10 (265.10) 3차 회로 감독자들은 지역 우주마다 그 본부 세계에서 활동한다. 2차 감독자들처럼 이 계급은 계속 창조되며, 7 백명 씩 집단으로 창조된다.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그들을 지역 우주에 배치한다.
24:1.11 (266.1) 회로 감독자들은 특정한 과제를 위하여 창조되고, 처음에 배치된 집단에서 영원히 근무한다. 교대로 근무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들이 처음에 배치받은 영역에서 발견되는 문제들에 관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연구한다. 예를 들면, 3차 회로 감독자 572,842번은 너희 지역 우주를 초기에 착상할 때부터 구원자별에서 활동해 왔으며, 네바돈 미가엘의 개인 참모진의 일원이다.
24:1.12 (266.2) 지역 우주나 또는 더 높은 우주에서 활동하든지 상관 없이, 회로 감독자들은 모든 영적 소식의 전달과 모든 성격자의 이동에 사용되는 적절한 회로에 관하여 모든 것을 지휘한다. 회로를 감독하는 과제에서 이 유능한 존재들은 온 우주에 있는 모든 대리자ㆍ물력ㆍ성격자를 이용한다. 그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회로를 담당하는 높은 영 성격자들”을 고용하며, 무한한 영의 성격자들로 이루어진 수많은 유능한 참모들의 도움을 받는다. 한 행성 영주가 우주의 아버지와 그의 대관(代官)인 아들에 맞서서 반란을 일으킬 경우에, 바로 그들이 그 진화 세계를 격리시키는 자이다. 그들은 상위의 영적 서열의 특정한 우주 회로로부터 어떤 세계라도 몰아낼 수 있지만, 동력 지도자들의 물질적 전류를 취소할 수는 없다.
24:1.13 (266.3) 우주 동력 지휘자가 물질 회로를 감독하는 것과 얼마큼 비슷하게 우주 회로 감독자는 영 회로를 감독한다. 두 계급은 서로 보완하며, 생물이 통제하고 조종할 수 있는 모든 영 회로와 모든 물질 회로를 함께 감시한다.
24:1.14 (266.4) 동력 지휘자들이 물리적 에너지와 관련된 지성 단계―기계적 지성―에 대하여 얼마큼 관할권을 가지는 것처럼, 회로 감독자들은 영과 관련된 지성 회로에 대하여 얼마큼 감시한다. 일반적으로, 각 계급의 기능은 다른 계급과 연락함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순수한 지성 회로들은 이 중에 어느 쪽의 감독도 받지 않는다. 이 두 계급은 동격도 아니다. 온갖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면서 우주 회로 감독자들은 일곱 최상 동력 지휘자와 그 부하들의 지배를 받는다.
24:1.15 (266.5) 회로(回路) 감독자들은 각자의 계급 안에서 전적으로 비슷하지만, 모두 독특한 개인이다. 참으로 성격을 가진 존재이지만, 모든 우주 존재 가운데 어떤 다른 부류의 생물에서도 볼 수 없는, 아버지가 부여하지 않은 부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24:1.16 (266.6) 파라다이스를 향하여 안으로 여행하면서 너희는 그들을 식별하고 알게 되겠지만, 그들과 아무런 개인적 관계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회로 감독자이며, 엄밀하고 유능하게 업무를 처리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감독하고 있는 회로에 관련되는 활동을 감시하는 성격자와 존재들만 상대한다.
24:2.1 (266.7) 우주 지능이 가진 우주 지성은 모든 생각하는 생물의 계심과 그 거처를 의식한다. 그렇기는 해도, 온 우주에 의지(意志)를 가진 모든 생물의 수를 계산하는 독자적인 방법이 작용한다.
24:2.2 (266.8) 통계 지휘자는 무한한 영의 존재, 창조가 완결되고 특별한 존재이며, 그들의 수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은 초우주의 거울 기법과 완전한 동시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고, 동시에 개인적으로 예민하고 지적 의지에 민감하다. 이 지휘자들은, 아직 충분히 이해되지 않은 기술로, 대우주의 어느 부분에서도 의지가 태어나는 것을 즉시 의식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언제나 중앙 창조와 일곱 초우주의 어느 부분에서도, 거기에 의지를 가진 모든 생물의 수ㆍ성품ㆍ거처를 우리에게 알려 줄 능력이 있다. 그러나 파라다이스에서는 활동하지 않는다. 거기에 있을 필요가 없다. 파라다이스에서 지식은 본래부터 있고, 신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24:2.3 (267.1) 통계 지휘자 일곱 명이 하보나 회로에서 활동하고, 각 하보나 회로의 안내 세계에 한 명이 주둔한다. 이 일곱 명, 그리고 파라다이스의 영 세계들에 있는 그 계급의 예비군을 제외하고, 통계 지휘자는 모두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관할 밑에서 활동한다.
24:2.4 (267.2) 통계 지휘자 하나가 각 초우주 본부를 주관하며, 그러한 우두머리 지휘자 밑에 지역 우주마다 그 서울에 하나씩, 수천 명이 있다. 하보나의 여러 안내 세계에 있는 자들과 일곱 초우주의 우두머리들을 제외하고 이 계급의 모든 성격자는 똑같다.
24:2.5 (267.3) 제7 초우주에는 통계 지휘자가 10만 명 있다. 이 수는 온통 지역 우주에 배치될 수 있는 자들로만 이루어지며, 이것은 모든 오르본톤 지휘자의 초우주 우두머리인 유사시아의 개인 참모진을 포함하지 않는다. 다른 초우주 우두머리들과 마찬가지로, 유사시아는 지적 의지를 등록하는 데 직접 조율되어 있지 않다. 그는 오로지 오르본톤의 우주들에 주둔하는 부하들에게만 소리를 맞추고 있다. 따라서 지역 우주들의 서울로 들어오는 그들의 보고서에 총계(總計)를 내는 훌륭한 성격자로서 행동한다.
24:2.6 (267.4) 때때로 유버르사의 공식 기록자들은 유사시아의 성격 안에, 그 성격에 기록된 것이 가리키는 대로, 초우주의 상태를 그들의 기록부에 남긴다. 그러한 통계 자료는 초우주에 토착이며, 이 보고서들은 하보나나 파라다이스에 전달되지 않는다.
24:2.7 (267.5) 통계 지휘자는 의지가 활동하는 사실을 적는 한도까지만, 인간에 대하여―의지를 가진 다른 생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관심을 가진다. 너희의 생애와 업적의 기록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어떤 의미에서도 기록하는 성격자는 아니다. 네바돈의 통계 지휘자, 오르본톤의 81,412번은 지금 구원자별에 주둔하며,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여기 유란시아에 네가 살아 있음을 의식하고 알고 있다. 그리고 네가 의지를 가진 인간으로서 활동을 멈추는 그 순간, 기록부에 너의 죽음을 확인해 준다.
24:2.8 (267.6) 통계 지휘자는 처음 의지 행위가 일어났을 때, 의지를 가진 한 새 인간의 존재를 등록한다. 그들은 마지막 의지 행위가 일어날 때, 한 의지 인간의 죽음을 표시한다. 어떤 고등 생물의 반응에서 관찰되는 부분적 의지의 출현은 통계 지휘자의 분야에 속하지 않는다. 그들은 진정한 의지를 가진 생물 외에 아무것도 세지 않으며, 의지 활동 외에 아무것에도 민감하지 않다. 정확히 어떻게 그들이 의지 활동을 기록하는지 우리는 모른다.
24:2.9 (267.7) 이 존재들은 언제나 통계 지휘자였고, 언제나 그러할 것이다. 그들은 어떤 다른 분야의 우주 노동에도 비교적 쓸모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에 잘못이 있을 수 없고, 그들은 결코 태만하지 않으며 거짓으로 기록하지도 않는다. 놀라운 힘과 믿을 수 없는 특권을 가졌는데도, 그들은 성격자이다. 알아볼 수 있는 영 위풍과 형태를 가졌다.
24:3.1 (268.1) 개인 보조자들이 언제 어떻게 창조되었는가에 대해서 믿을 만한 지식은 우리에게 없다. 그들의 수가 아주 많은 것이 틀림없지만, 유버르사에 그 기록이 없다. 그들이 하는 일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 바탕을 두고 신중히 추측함으로 그들의 수가 몇조에 이른다고 나는 감히 어림한다. 무한한 영은 수에 제한 없이 개인 보조자를 창조할 것이라 우리는 의견을 모은다.
24:3.2 (268.2) 무한한 영의 개인 보조자는 순전히 신의 셋째 분이 파라다이스에 계심을 돕기 위하여 존재한다. 무한한 영에 직접 소속되고 파라다이스에 자리를 잡았지만, 그들은 창조의 가장 먼 곳까지 이리저리 번쩍 다닌다. 합동 행위자의 회로가 뻗는 곳은 어디나, 무한한 영의 명령을 집행할 목적으로 이 개인 보조자들이 나타날지 모른다. 그들은 외톨 사자와 아주 비슷하게 공간을 통과하지만, 그 사자들과 같은 의미에서 성격자는 아니다.
24:3.3 (268.3) 개인 보조자는 모두 똑같고 동일하며, 개성의 차이를 나타내지 않는다. 합동 행위자는 그들을 참 성격자처럼 보지만, 남들은 그들을 참 성격자로 보기가 어렵다. 그들은 다른 영 존재들에게 영 계심을 표시하지 않는다. 파라다이스에 기원을 가진 존재들은 언제나 이 보조자가 가까이 있음을 의식하지만, 우리는 한 성격자가 자리에 있음을 알아보지 못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러한 풍채의 부재는 그들을 신의 셋째 분에게 더욱 쓸모 있게 만든다.
24:3.4 (268.4) 무한한 영 안에서 기원이 있는 모든 밝혀지지 않은 계급의 영 존재 가운데, 개인 보조자는 너희가 파라다이스까지 안으로 올라가면서 만나지 않을 거의 유일한 자일 것이다.
24:4.1 (268.5) 일곱 최상 집행자는 무한한 영의 일곱 파라다이스 구체에서, 일곱 초우주의 행정을 담당하는 초월 관리 위원회로서, 집단으로 활동한다. 부(副)검열자는 시공의 지역 우주들에 대하여 최상 집행자들의 권한을 개인적으로 구현한 자이다. 지역 우주 사무를 지켜보는 이 높은 관찰자는, 무한한 영과 파라다이스의 일곱 으뜸 영이 합동으로 낳은 자손이다. 영원에 가까운 시절에, 70만 명이 성격화되었고, 그들의 예비군은 파라다이스에 거한다.
24:4.2 (268.6) 부검열자는 일곱 최상 집행자의 직접 감독 하에 일하고, 이들은 시공의 지역 우주에 대해서 그들의 강력한 개인적 대표자이다. 검열자 하나가 각 지역 우주의 본부 구체에 주둔하며, 거기에 거주하는 늘 하나된 이의 가까운 동료이다.
24:4.3 (268.7) 부검열자는 오직 부하들, 곧 사람 사는 세계의 지역 체계 서울에 주둔하는 지정된 파수들로부터 보고서와 추천을 받으며, 한편 그들은 오직 직속 상관, 곧 관계된 초우주의 최상 집행자에게 보고한다.
24:5.1 (268.8) 지정된 파수는 일곱 최상 집행자를 위하여 조정하는 성격자요 연락하는 대표이다. 파라다이스에서 무한한 영이 그들을 성격화하였고, 그들이 배치받은 특수한 목적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그들의 수는 고정되었고, 꼭 70억 명이 존재한다.
24:5.2 (269.1) 한 부검열자가 한 지역 우주 전체에 대하여 일곱 최상 집행자를 대표하는 것과 비슷하게, 그 지역 우주에 있는 1만 체계 하나하나에 지정된 파수가 1명이 있으며, 그는 멀리서 모두 일곱 초우주 사무의 초월적 통제를 담당하는 최상 위원회의 직접 대표로서 행동한다. 오르본톤의 지역 체계 정부에서 근무하는 파수들은 제7 초우주의 조정자인 최상 집행자 7번의 직속 권한 하에서 행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행정 조직에서 한 지역 우주에 임명된 파수는 누구나 그 우주 본부에 주둔하는 부검열자에게 부속된다.
24:5.3 (269.2) 한 지역 우주 안에서 지정된 파수들은, 한 체계에서 다른 체계로 이동되며, 돌아가면서 근무한다. 그들은 보통 지역 우주 시간으로 1천년마다 갈린다. 한 체계의 서울에 주둔하는 가장 높은 지위의 성격자에 속하지만, 그들은 체계 사무에 관계된 심의에 결코 끼어들지 않는다. 지역 체계에서, 그들은 그 진화 세계의 출신인 24 행정자에게 직권상 의장(議長)으로서 근무하지만, 이밖에 하늘 가는 필사자는 그들과 아무런 접촉이 없다. 파수들은 그들이 배치받은 체계의 복지와 지위에 관한 모든 문제에 대하여, 그들 우주의 부검열자가 넉넉히 정보를 받도록 하는 데만 거의 온통 관심을 기울인다.
24:5.4 (269.3) 지정된 파수와 부검열자들은 초우주 본부를 통해서 최상 집행자들에게 보고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관계된 초우주의 최상 집행자에게만 책임을 진다. 그들의 활동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행정과 구별된다.
24:5.5 (269.4) 최상 집행자, 부검열자, 지정된 파수들은 전(全)천사 및 밝혀지지 않은 성격자 무리와 함께, 효율이 있고 직접적인 중앙 집권 체계이지만, 이것은 또한 사물과 존재로 이루어진 대우주 전체의 자문 및 행정 조정을 맡는 방대한 체계이다.
24:6.1 (269.5) 하나의 집단으로서 졸업생 안내자는, 기술 교육과 영적 훈련을 담당하는 높은 대학을 후원하고 운영한다. 그런 훈련은 필사자가 오랜 세월동안 찾던 목표, 곧 하나님을 만나고, 휴식을 취하고, 그리고 나서 완벽히 봉사하는 영원을 달성하는 데, 아주 꼭 필요하다. 상당히 개인적인 이 존재들은 그들이 하는 일의 성질과 목적으로부터 이름을 따온 것이다. 그들은 시간 세계의 초우주로부터 온 필사 졸업생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하보나 과정을 통해서, 안내하는 과업에 순전히 전념하며, 이 과정은 파라다이스와 최후 군단까지 들어가도록 하늘 가는 순례자를 준비시키는 데 소용된다.
24:6.2 (269.6) 내가 이 졸업생 안내자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 너희에게 일러주지 말라고 금지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지극히 영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다양한 활동에 관한 개념을 물질 지성에게 적당히 묘사할 수 있을까 절망이 된다. 저택 세계에서, 너희 시야(視野)가 넓어지고 물질로 비교하는 쇠사슬에서 너희가 풀려난 뒤에,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사람의 머리 속에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실체들, 아니 “그러한 영원한 진실을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실체들의 의미도 너희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의 시력과 영적 이해의 범위가 언제나 그렇게 제한되도록 정해지지는 않았다.
24:6.3 (270.1) 졸업생 안내자는 일곱 회로의 하보나 세계들을 통해서 시간의 순례자를 안내하는 데 종사한다. 네가 하보나 바깥 회로의 영접 세계에 도착하고 나서 너에게 인사하는 안내자는, 하늘의 여러 회로에서 너의 생애를 통하여 내내 너와 함께 남아 있을 것이다. 10억 세계에서 머무르는 동안 너는 수없이 많은 다른 성격자들과 사귈 터이지만, 너의 졸업생 안내자는 네가 하보나에서 진보하는 끝까지 너를 따라다니고, 네가 시간 세계의 마지막 잠에 빠지는 것을 구경할 것이다. 이것은 파라다이스 목표까지 영원으로 이동하는 잠이며, 잠에서 깨어났을 때, 파라다이스 동반자가 너에게 인사할 터이고, 그는 거기서 너를 반기고 네가 필사 최후 군단의 일원으로 가입될 때까지, 아마 너와 함께 남아 있도록 배치된다.
24:6.4 (270.2) 졸업생 안내자의 수는 인간의 머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그들은 계속해서 나타난다. 그들의 기원은 얼마큼 신비이다. 그들은 영원부터 존재해 오지는 않았고, 필요한 대로 신비하게 나타난다. 온 세월에 걸쳐서 첫 필사 순례자가 중앙 우주의 바깥 지대에 이르렀던 아주 까마득한 그날까지, 중앙 우주의 모든 영역에서 졸업생 안내자에 관한 기록이 없다. 바깥 회로의 안내 세계에 첫 순례자가 다다른 순간, 친절하게 인사하는 말보리안을 만났는데, 그는 첫째 졸업생 안내자이며, 지금은 그들 최고 회의의 우두머리이고, 그들의 광대한 교육 조직의 지도자이다.
24:6.5 (270.3) 하보나에 관한 파라다이스 기록부에는, “졸업생 안내자”라고 부르는 부분에, 이 첫 기록이 나타난다:
24:6.6 (270.4) “그리고 이 계급의 첫째인 말보리안은 하보나를 발견한 순례자를 맞이하고 가르쳤고, 초기의 체험을 겪는 바깥 회로에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한 회로 한 회로, 모든 성격자의 근원 운명이 계신 바로 그 앞에 서기까지 그를 안내했으며, 나중에 이 순례자는 파라다이스에 이르는 영원의 문턱을 건너갔다.”
24:6.7 (270.5) 그 아득한 시대에, 나는 유버르사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근무에 소속되어 있었고, 우리 초우주로부터 온 순례자들이 궁극에는 하보나에 다다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 모두가 기뻐했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공간의 진화 인간이 파라다이스에 도착할 것이라고 전에 가르침을 받았다. 첫 순례자가 실제로 도착했을 때, 만세(萬世)를 통해서 가장 큰 흥분이 하늘 궁정을 휩쓸었다.
24:6.8 (270.6) 하보나를 발견한 이 순례자의 이름은 그랜드판다이며, 그는 1번 초우주에 자리잡은, 1,131번 지역 우주, 62번 별자리, 84번 체계, 341번 행성의 출신이었다. 그가 도착한 것은 온 우주의 방송 서비스를 설치하는 신호가 되었다. 그때까지는 초우주와 지역 우주의 방송만 운영되고 있었지만, 그랜드판다가 하보나의 입구에 도착했다는 발표는 “영광의 공간 보고서”가 개시됨을 알렸는데, 그렇게 이름지은 것은 첫 우주 방송이 하늘 가는 존재의 목적지로 들어가려고 첫 진화 존재가 하보나에 이르렀음을 보고했기 때문이다.
24:6.9 (270.7) 졸업생 안내자는 결코 하보나 세계들을 떠나지 않으며, 시간과 공간을 졸업한 순례자에게 봉사하는 데 헌신한다. 네가 살아남고 승천하게 만들도록 고안된 계획, 확실하고 전부 완성된 계획을 네가 물리치지 않는다면, 너는 언젠가 이 고귀한 존재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만나 볼 것이다.
24:7.1 (270.8) 진화는 중앙 우주의 질서가 아니지만, 우리는 졸업생 안내자들이 다른 계급의 중앙 우주 생물, 곧 하보나 일꾼 중에서 완전하게 된 일원, 곧 경험을 쌓은 일원이라고 믿는다. 졸업생 안내자는 하늘 가는 인간에게 그러한 너그러운 동정심과 이해하는 능력을 보이기 때문에, 우주에 봉사하는 하보나 일꾼으로서 초우주 영역에서 실제로 봉사함으로 그들이 이러한 교양을 얻었다고 우리는 확신한다. 이 견해가 틀리다면, 선임 일꾼, 곧 경험을 쌓은 일꾼들이 계속 사라지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24:7.2 (271.1) 한 일꾼은 초우주 임무를 띠고 오랫동안 하보나에서 자리를 비우고, 그러한 임무에 여러 번 이전에 종사했으므로,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파라다이스 중심 광채와 “몸소 접촉하는” 특권이 주어지고, 빛나는 분들의 품에 안길 터이고, 그의 영 동료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사라지고, 결코 그의 부류에 속하는 자들 사이에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24:7.3 (271.2) 초우주 근무로부터 돌아와서, 하보나 일꾼은 수많은 신성한 포옹을 누리며, 그는 다만 승격된 일꾼으로 솟아날 수도 있다. 빛나는 품에 안기는 것은 반드시 그 일꾼이 졸업생 안내자로 변신함을 뜻하지 않지만, 신의 품에 안기는 자 중에서 거의 4분의 1은 결코 다시 그 영역의 근무로 돌아오지 않는다.
24:7.4 (271.3) 높은 기록부에 다음과 같이 연속되는 기록이 나타난다:
24:7.5 (271.4) “그리고 하보나의 일꾼 842,842,682,846,782번의 이름은 수드나이며, 초우주 근무로부터 옮겨 왔고, 파라다이스에서 영접받았으며, 아버지를 알았고, 신성한 품에 들어갔는데, 이제는 없다.”
24:7.6 (271.5) 그러한 기입이 기록부에 나타날 때, 그러한 일꾼의 생애는 막을 내린다. 그러나 꼭 세 순간 안에 (너희 시간으로 사흘이 조금 안 되는 시간에) 갓난 졸업생 안내자가 “저절로” 하보나 우주의 바깥 회로에서 나타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동 중에 있는 자들 때문에 생기는 사소한 차이를 살피면, 졸업생 안내자의 수는 사라진 일꾼의 수와 꼭 같다.
24:7.7 (271.6) 졸업생 안내자가 하보나 일꾼으로부터 진화된다고 상상하는 이유가 또 있는데, 그것은 이 안내자들, 그리고 관련된 일꾼들이 어김없이 그렇게 특별한 애착을 가지는 경향이다. 독립된 계급으로 생각되는 이 존재들이 서로 이해하고 동정하는 모양은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이 서로 위함을 구경하는 것은 기분을 좋게 하며 영감을 준다.
24:7.8 (271.7) 일곱 으뜸 영 및 관련된 일곱 최상 동력 지휘자는 각자 최상 존재가 아직 개인적으로 활용하지 않는 그의 지성 잠재성과 동력 잠재성을 몸소 저장한 장소이다. 그리고 이 파라다이스 동료들이 하보나 일꾼을 창조하려고 협동할 때, 후자는 선천적으로 최상위의 어떤 국면과 관계한다. 그래서 하보나 일꾼은 실제로, 시공 영토의 어떤 진화 잠재성이 완전한 중앙 우주에 비친 것이며, 이 모두가 한 일꾼이 변화와 재창조를 겪을 때 나타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최상위를 위해서 행동하는 무한한 영의 뜻에 반응하여 이 변화가 생긴다고 우리는 믿는다. 최상 존재가 졸업생 안내자를 창조하지는 않지만, 이 존재들을 만들어 내는 거래에 체험적 신이 어떤 방법으로 관여한다고 우리 모두가 추측한다.
24:7.9 (271.8) 하늘 가는 필사자가 지금 거쳐 가는 하보나는 여러 면에서 그랜드판다 시절 이전의 중앙 우주와 다르다. 하보나의 여러 회로에 필사 승천자들이 도달한 것은 중앙의 신성한 창조의 조직에서 대규모의 수정(修正)을 개시하였고, 의문의 여지 없이 이러한 수정은 일곱 초우주에서 체험하는 첫 아이가 도착한 데 반응하여 최상 존재가―진화 인간의 하나님이―개시하였다. 졸업생 안내자의 출현은, 3차 상천사들의 창조와 함께, 이러한 최상위 하나님의 행위를 가리킨다.
25:0.1 (273.1) 무한한 영의 집단에서 중간에 자리잡은 자는 공간의 사자(使者) 무리이다. 다능한 이 존재들은 고등 성격자와 봉사하는 영들 사이에 연결하는 고리로서 활동한다. 사자 무리는 다음 계급의 하늘 존재들을 포함한다:
25:0.9 (273.9) 열거한 일곱 무리 가운데 세 계급―일꾼, 화해자, 상물질 동반자―만 그렇게 창조되었고, 나머지 넷은 도달하는 수준의 천사 계급이다. 본래의 성품과 도달한 지위에 따라서, 사자 무리들은 온 우주에서 다양하게 수고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배치받은 영역을 다스리는 자들의 지휘 하에 있다.
25:1.1 (273.10) 일꾼이라고 이름지었지만, 중앙 우주의 이 “중도인”은 조금도 그 낱말이 가지는 비천한 뜻으로 일꾼이 아니다. 영적 세계에는 비천한 일 같은 것이 없으니, 모든 봉사가 거룩하고 자극을 주며, 높은 계급의 존재가 낮은 계급의 존재를 업신여기지도 않는다.
25:1.2 (273.11) 하보나 일꾼은 일곱 으뜸 영과 그 동료인 일곱 최상 동력 지휘자가 함께 창조한 작품이다. 이러한 창조적 협동은 진화 우주에서 목록이 긴 이중 계급을 번식하는 원본에 가장 가깝고, 이것은 창조 아들과 창조 영의 결합으로 생기는 밝은 아침별의 창조를 비롯하여 유란시아와 같은 세계에서 성교로 번식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25:1.3 (273.12) 일꾼의 수는 막대하며, 항상 더 창조된다. 으뜸 영과 최상 동력 지휘자들의 집회가 끝난 뒤에, 파라다이스의 먼 북쪽 구역에 그들의 합동 지역에서, 셋째 순간에 일꾼이 1천 명씩 무리를 이루어 나타난다. 네 명에 하나는 다른 자보다 더 물리적인 종류이다. 다시 말하면, 1천 명마다, 750명은 정확히 영 형태인 것이 분명하지만, 250명은 반(半)물리적 성질을 가진다. 이 넷째 생물은 얼마큼 물질 (하보나 의미에서 물질) 존재의 계급이며, 으뜸 영들보다 물리적인 동력 지휘자들을 더 닮는다.
25:1.4 (274.1) 유란시아에서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성격자의 관계에서 영적인 자는 물질인 자를 지배한다. 하보나 일꾼의 생산에는 영 지배의 법칙이 작용한다. 세 영적 존재에 반물리적 존재 하나씩, 고정된 비율로 생산된다.
25:1.5 (274.2) 새로 창조된 일꾼들은, 새로 나타나는 졸업생 안내자들과 함께 모두 훈련 과정을 겪으며, 일곱 하보나 회로의 각 곳에서 상급 안내자들이 줄곧 그 과정을 지도한다. 그리고 나서 일꾼들은 가장 적합한 활동에 배치되며, 그들이 두 가지 부류―영적 부류와 반물리적 부류―이니까, 이 다능한 존재들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에 별로 제한이 없다. 상급 집단, 곧 영적 집단은 선택하여 아버지ㆍ아들ㆍ영을 위한 봉사에, 그리고 일곱 으뜸 영의 근무에 배치된다. 때때로 그들은 일곱 초우주의 본부 세계를 돌고 있는 여러 연구 세계에서 근무하도록 큰 무리를 지어 파송된다. 이 세계들은 하보나 회로까지 진급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사람, 시간 세계에서 승천하는 사람들이 거치는 마지막 훈련과 영적 교양에 전념한다. 영 일꾼 및 더 물리적인 동료들은, 하보나에 이미 다다르고 파라다이스에 이르려고 애쓰는 다양한 계급의 하늘 가는 인간을 돕고 가르치는 일에 졸업생 안내자의 조수(助手)와 동료로서 임명된다.
25:1.6 (274.3) 하보나 일꾼과 졸업생 안내자는 자기 일에 초월하여 헌신하는 태도와 서로에게 감동적인 애정을 드러낸다. 이러한 사랑은 영적이지만, 오직 인간이 사랑하는 현상과 견주어야 너희는 이해할 수 있다. 일꾼을 안내자와 떼어놓는 데 신다운 연민이 있는데, 일꾼들이 중앙 우주의 한계 바깥에 임무를 띠고 파송될 때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그러나 그들은 슬퍼하지 않고 기쁘게 떠난다. 높은 임무로부터 오는 흐뭇한 기쁨은 영적 존재에게 앞서는 감정이다. 충실하게 실행한 신성한 의무를 의식하는 마당에 슬픔이 있을 수 없다. 사람의 하늘 가는 혼이 최상의 심판관 앞에 설 때, 영원한 중요성을 가진 판결은 물질적 성공이나 양적 성과에 좌우되지 않는다. 높은 법정을 통해서 메아리치는 판결문은 선포한다: “잘했도다, 착하고 충실한 일꾼아. 네가 몇 가지 필요한 일에 충실하였으니, 너는 우주 현실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될지니라.”
25:1.7 (274.4) 초우주에서 근무할 때 하보나 일꾼은, 일반 권리 및 특별한 영적 특권 면에서 그들이 가장 닮은 으뜸 영이 주관하는 영역에 반드시 배치된다. 그들은 오직 일곱 초우주의 서울을 둘러싸는 여러 교육 세계에서 근무하며, 최근의 유버르사 보고서는 거의 1조 380억 명의 일꾼이 490개 위성(衛星)에서 봉사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오르본톤 초우주의 초월 대학을 구성하는 이 교육 세계의 일과 관련하여, 그들은 끝없이 다양한 활동에 종사한다. 여기서 그들은 너희의 동반자이다. 너희를 연구하며 실제로, 너희가 궁극에 시간 세계의 우주를 졸업하여 영원의 궤도에 이르는 현실과 확신으로 너희에게 영감을 주려고 너희의 다음 생애로부터 내려온다. 이렇게 접촉하면서, 일꾼들은 시간 세계에서 승천하는 인간에게 시중드는 예비 체험을 얻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보나 회로에서 졸업생 안내자의 동료로서, 또는 자신이 졸업생 안내자로서―변신된 일꾼으로서―나중에 하는 일에 아주 유익하다.
25:2.1 (275.1) 창조된 하보나 일꾼 하나에 대하여, 각 초우주에 하나씩, 일곱 우주 화해자가 창조된다. 이 창조 행위는 파라다이스에서 일어나는 거래에 그림자처럼 반응하는 분명한 초우주 기법이 관계된다.
25:2.2 (275.2) 일곱 초우주의 본부 세계에는, 일곱 으뜸 영의 일곱 그림자가 활동한다. 이러한 거울 영의 성품을 물질 지성에게 그리려는 시도는 쉽지 않다. 그들은 참 성격자이다. 그래도 한 초우주 집단의 각 구성원은 일곱 으뜸 영 가운데 꼭 한 분을 완전히 비친다. 한 집단의 하보나 일꾼을 창조할 목적으로 으뜸 영들이 동력 지휘자들과 연합할 때마다, 각 초우주 집단에 있는 한 거울 영에게 동시 집중이 일어나며, 초우주의 본부 세계들에, 당장에 똑같은 수의 우주 화해자가 완전히 성장하여 나타난다. 일꾼들을 창조할 때 으뜸 영 7번이 주도한다면, 제7 등급의 거울 영들 외에 아무도 화해자를 잉태하지 않을 것이다. 오르본톤을 닮은 일꾼 1천 명의 창조와 동시에, 제7 등급 화해자 1천 명이 각 초우주 서울에 나타날 것이다. 으뜸 영들의 일곱 가지 성품을 비치는 이 사건들로부터, 각 초우주에서 봉사하는, 일곱 등급의 창조된 화해자들이 생긴다.
25:2.3 (275.3) 파라다이스 이전 지위를 가진 화해자들은 초우주들 사이에 서로 바꾸어서 봉사하지 않으며, 그들이 태어난 창조 구역에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창조된 각 계급의 7분의 1을 포함하는 어떤 초우주 군단도, 으뜸 영들 가운데 다른 분들을 제외하고 한 분의 영향 밑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낸다. 초우주 서울에서 일곱 분 모두가 비치지만, 오직 한 분이 각 초우주에서 지배한다.
25:2.4 (275.4) 일곱 초우주에는 각각 그 운명을 주관하는 으뜸 영 한 분이 실제로 스며든다. 이렇게 각 초우주는 감독하는 으뜸 영의 성품과 기질을 비치는 거대한 거울처럼 된다. 어머니인 창조 영들의 계심과 작용으로 말미암아, 부속된 각 지역 우주에서 이 모든 것이 더 계속된다. 그러한 환경이 진화적 성장에 아주 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초우주 이후 생애에서 화해자들은 집단으로 49가지의 체험적 관점 또는 식견을 드러내며, 이것은 하나하나 모나고―따라서 불완전하지만―모두가 서로 보완하고, 함께 최상위의 영역을 둘러싸는 경향이 있다.
25:2.5 (275.5) 각 초우주에서 우주 화해자들은 이상하게도 자신들이 날 때부터 네 명씩 집단으로 갈라지고, 그러한 관계에서 줄곧 봉사하는 것을 발견한다. 각 집단에서 셋은 영 성격자이고, 하나는, 넷째 일꾼처럼 반(半)물질 존재이다. 이 사원조(四員組)가 화해 위원회를 이루며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25:2.6 (275.6) 1. 판사인 중재자. 그 집단에서 재판장으로 행동하기에 가장 유능하고 자격 있는 자로서, 다른 삼자가 만장 일치로 지명한 자.
25:2.7 (275.7) 2. 영 변호사. 화해(和解) 위원회가 판결하라고 위탁받은 어떤 문제에도, 증거를 제시하고, 관련된 모든 성격자의 권리를 보호하라고 판사 중재자에게 지명받은 자.
25:2.8 (276.1) 3. 신성한 집행자. 본래의 성질로 말미암아, 그 영역의 물질 존재들과 연락하고 그 위원회의 결정을 집행할 자격을 갖춘 화해자. 신성한 집행자들은, 넷째 생물―준(準)물질 존재―이니까 필사 민족들의 단거리 시력(視力)에 거의 보일 듯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25:2.9 (276.2) 4. 기록자. 그 위원회의 나머지 회원은 자동으로 기록자, 법정의 서기(書記)가 된다. 그는 모든 기록이 초우주의 기록 보관소와 지역 우주의 기록을 위해 알맞게 준비된 것을 확인한다. 그 위원회가 한 진화 우주에서 근무하고 있으면, 집행자의 도움을 받아 제3 보고서가 그 체계 사법부의 물리적 기록을 위하여 준비된다.
25:2.10 (276.3) 심리(審理) 중에 한 위원회는 3자의 집단으로서 활동하는데, 이는 변호사가 재판 중에 분리되고, 청문회가 끝날 때에만 판결의 작성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위원회는 때때로 심판 삼원조라 부른다.
25:2.11 (276.4) 화해자들은 온 우주의 순조로운 운영을 유지하는 데 크게 소용된다. 3배 속도인 천사 속도로 공간을 통과하면서, 그들은 여러 세계의 이동 법정, 곧 사소한 어려움을 빨리 해결하는 데 전념하는 위원회로서 봉사한다. 발이 빠르고 탁월하게 공정한 이 위원회가 없다면, 여러 구체의 법정에는 그 영역의 하찮은 오해가 희망 없이 넘쳐흐르게 될 것이다.
25:2.12 (276.5) 이 심판 삼원조는 영원한 중요성을 가진 문제를 판결하지 않는다. 혼, 곧 시간 세계의 인간의 영원한 전망은 결코 그들의 행위로 위태롭게 되지 않는다. 화해자들은 시간 세계에서 인간의 현세 존재와 우주의 복지를 초월하는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한 위원회가 일단 한 문제의 재판권을 받아들였을 때, 그 판결은 최종이고 언제나 만장일치이며, 그 판사 중재자의 결정에 대하여 아무런 상고(上告)가 없다.
25:3.1 (276.6) 화해자들은 그들의 초우주 서울에 집단 본부를 유지하며, 거기에 그들의 1차 예비군이 주둔한다. 그들의 2차 예비군은 지역 우주의 서울에 주둔한다. 젊고 경험이 적은 위원들은 유란시아처럼 낮은 세계에서 근무를 시작하고, 숙달된 체험을 얻은 뒤에 더 큰 문제를 판결하는 일로 진급된다.
25:3.2 (276.7) 화해자 계급은 전적으로 의지할 만하고, 하나도 결코 타락한 적이 없다. 그들의 지혜와 판단이 절대로 잘못이 없지 않지만, 의문의 여지없이 그들은 믿을 만하고, 어김없이 충실하다. 그들은 한 초우주 본부에 기원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우주에서 봉사하는 수준을 거쳐 승진하면서, 궁국에 본부로 돌아간다.
25:3.3 (276.8) 1. 세계의 화해자. 개별 세계를 감독하는 성격자들이 기존 상황 밑에서 적절한 절차에 관하여 크게 당황하거나 실제로 벽에 부딪칠 때는 언제나, 그리고 그 문제가 지역에서 정식으로 구성된 법정 앞으로 가져갈 정도로 충분히 중요하지 않으면, 그때 다투는 편에서 하나씩, 두 성격자의 탄원을 받고 나서, 화해 위원회가 당장에 활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25:3.4 (277.1) 이러한 행정 및 사법 문제가 조사와 판결을 받으려고 화해자들의 손에 넘어갔을 때, 그들은 최고의 권한을 가진다. 그러나 증언을 모두 듣기 전에는 판결문을 작성하지 않으며, 그들은 근원을 막론하고, 어디서든지 증인을 부르는 이 권한에 절대로 제한이 없다. 그들의 판결은 상소(上訴)될 수 없지만, 그 위원회가 어떤 시점에 기록을 마치고, 그들의 의견에 결론을 내리며, 그 문제 전체를 그 지역의 더 높은 법정에 옮기도록 가끔 문제가 발전되기도 한다.
25:3.5 (277.2) 위원장의 판결은 행성의 기록부에 남으며, 필요하면 신성한 집행자가 그 판결을 집행한다. 그의 권력은 몹시 크고, 사람이 사는 한 세계에서 그의 활동 범위는 아주 넓다. 신성한 집행자는 마땅히 되어야 할 일에 유리한 것을 솜씨 있게 조종하는 자이다. 그들이 하는 일은 때때로 그 영역의 분명한 복지를 위하여 집행되며, 여러 시공 세계에서 그들의 행위는 때때로 설명하기 힘들다. 자연 법칙이나 그 영역의 정해진 관습에 어긋나지 않게 판결을 집행하지만, 그들은 흔히 체계 행정의 상급 법규에 따라서, 그들의 이상한 할 일을 수행하며 화해자들의 명령을 집행한다.
25:3.6 (277.3) 2. 체계 본부의 화해자. 진화 세계의 근무로부터 이 4자 위원회는 체계 본부의 임무로 진급된다. 여기서 그들은 할 일이 많고, 사람과 천사와 기타 영 존재들에게 이해심 있는 친구가 된다. 심판 삼원조는 개인의 차이보다, 집단의 주장, 그리고 다른 계급의 생물 사이에서 생겨나는 오해에 오히려 관심이 있다. 체계 본부에는 영적 존재와 물질 존재, 그리고 물질 아들처럼 통합된 존재들도 살고 있다.
25:3.7 (277.4) 창조자들이 선택하는 힘을 가진 진화하는 개인들을 만드는 순간, 바로 그때, 신답게 완전한 순조로운 작용으로부터 일이 빗나간다. 오해는 분명히 생기고, 이러한 정직한 관점의 차이에 대하여 공정(公正)한 조정이 마련되어야 한다. 전적으로 슬기롭고 전능한 창조자들은 하보나와 똑같이 완전하게 지역 우주들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한다. 중앙 우주에는 아무런 화해 위원회가 활동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창조자들은 온통 지혜로워 이렇게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들은 차이가 많고 어려움이 가득한 우주들을 만들어냈지만, 마찬가지로 이 모든 차이를 수습하고 혼란으로 보이는 이 모든 것을 조화시키는 장치와 수단을 마련했다.
25:3.8 (277.5) 3. 별자리 화해자. 화해자들은 체계의 근무로부터 한 별자리의 문제들을 재판하는 일로 진급되어, 1백 체계의 사람 사는 세상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문제들을 맡는다. 별자리 본부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그들의 관할에 속하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한 체계에서 다른 체계로 증거를 수집하고 예비 진술을 준비하느라고 그들은 바쁘게 지낸다. 그 주장이 정직하고, 그 문제가 진정한 의견 차이와 정직한 관점의 다양성에서 생겨나면, 아무리 소수의 사람들이 관계되었다 하더라도, 그 오해가 아무리 하찮게 보이더라도, 그 논쟁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판결을 내리도록 화해 위원회가 열릴 수 있다.
25:3.9 (277.6) 4. 지역 우주의 화해자. 한 우주에서 규모가 더 큰 이 일을 하면서, 위원들은 멜기세덱과 심판 아들들에게, 그리고 1백 별자리의 조정과 행정에 관여하는 별자리 통치자, 그리고 성격자 집단에게 크게 도움이 된다. 지역 우주의 본부 구체에 있는 다른 계급의 세라핌과 기타 거주민도 심판 삼원조에게 소용이 되고 그들의 결정에 도움이 된다.
25:3.10 (278.1) 한 체계나 별자리나 또는 지역 우주의 상세한 사무에서 생길 수도 있는 그러한 차이의 본질을 설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문제들이 생기지만, 이것은 진화 세계에서 사는 물질적 존재의 하찮은 시련과 산고(産苦)와 아주 다르다.
25:3.11 (278.2) 5. 초우주 소구역 담당 화해자. 지역 우주의 문제로부터, 위원들은 초우주 소구역에서 생기는 문제의 연구로 진급된다. 개별 행성으로부터 안으로 그들이 멀리 올라갈수록, 신성한 집행자의 물질적 의무는 적어진다. 차츰 그는 자비와 응보를 해석하는 자로서 새로운 기능을 맡으며, 동시에―준물질이니까―그 조사의 물질적 면에 대하여 그 위원회 전체가 동정적 손길을 유지하게 만든다.
25:3.12 (278.3) 6. 초우주 대구역 담당 화해자. 위원들이 하는 일의 특징은 그들이 진급함에 따라서 계속 바뀐다. 오해를 판단해야 할 경우가 자꾸 줄어들고, 설명하고 해석해야 될 신비한 현상들이 자꾸 늘어난다. 한 무대에서 다른 무대로, 그들은 견해 차이를 중재하는 자의 위치로부터 신비를 설명하는 자로 바뀐다―판사들이 해석하는 선생으로 바뀐다. 그들은 한때, 무지(無知) 때문에 어려움과 오해가 생기게 하는 자들을 중재하는 자였으나, 이제는 생각의 충돌과 의견의 싸움을 피할 만큼 충분히 영리하고 관대한 자들의 선생이 되고 있다. 한 생물이 높은 교육을 받을수록, 남의 지식ㆍ경험ㆍ의견을 더욱 존중한다.
25:3.13 (278.4) 7. 초우주 담당 화해자. 여기서 화해자들은 동격이 된다―서로 이해하고 완전히 활동하는, 4명의 중재자요 교육자가 된다. 신성한 집행자는 벌주는 권력을 벗어버리고, 영 삼원조의 실제 목소리가 된다. 이때가 되면 이 상담자인 선생들은 초우주 사무를 처리하면서 부딪치게 되는 대부분의 실제 문제와 어려움에 노련하게 통달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초우주의 본부 세계들을 둘러싼 여러 교육 구체에서 하늘 가는 순례자에게 놀라운 고문(顧問)이자 현명한 선생이 된다.
25:3.14 (278.5) 모든 화해자는 파라다이스로 진급할 때까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일반 감독 밑에서, 영상 보조자들의 직접 지도를 받으며 근무한다. 파라다이스에서 머무르는 동안, 그들은 자기들이 기원을 가진 초우주를 주관하는 으뜸 영에게 보고한다.
25:3.15 (278.6) 초우주 기록부는 그 관할권을 거쳐 간 화해자들을 열거하지 않으며, 그러한 위원회는 대우주에 널리 흩어져 있다. 유버르사 기록부의 최근 보고서는 오르본톤에서 활약하는 위원회의 수가 거의 18조―70조가 넘는 개인―이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그들은 오르본톤에서 창조된 화해자 무리의 아주 극히 작은 부분이다. 이 수는 아주 훨씬 더 크고, 졸업생 안내자로 변화한 것을 참작하면 하보나 일꾼의 총수와 맞먹는다.
25:3.16 (278.7) 초우주의 화해자 수가 늘어남에 따라서, 때때로 그들은 파라다이스에 있는 완전의 회의로 변신하며, 거기서부터 그들은 나중에 무한한 영이 온 우주를 위해서 진화시키는, 하나의 조정하는 집단으로서 솟아난다. 그들은 수와 효율성이 항상 늘어나는 놀라운 무리의 존재이다. 체험으로 승천하고 파라다이스에서 훈련을 받음으로, 그들은 최상 존재의 태어나는 실체를 독특하게 이해했으며, 특별한 임무를 띠고 온 우주를 돌아다닌다.
25:3.17 (279.1) 화해 위원회의 구성원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4명의 무리는 처음에 결합된 그대로, 언제까지나 함께 일한다. 영화롭게 된 근무를 할 때에도, 우주에서 쌓인 체험과 완전하게 된 체험적 지혜의 사원조로서 계속 활동한다. 시공에서 최고의 정의를 표현한 존재로서 그들은 영원히 연합되어 있다.
25:4.1 (279.2) 영 세계의 법을 이해하고 전문 지식을 가진 뛰어난 지성 존재들은 그렇게 창조되지 않았다. 무한한 영이 초기의 상천사(上天使)와 전천사(全天使)로부터, 행동이 아주 바른 1백만의 지성 존재를 이 광대하고 다능한 무리의 핵심으로서 선택한다. 그리고 아주 까마득한 그 시절부터, 완전한 법을 진화적 창조 계획에 응용하면서 얻은 실제 체험이 법률 고문이 되는 포부를 품은 모든 자에게 요구되었다.
25:4.2 (279.3) 법률 고문은 다음 성격자 계급의 계층에서 모집한다:
25:4.10 (279.11) 현재, 일시 소속된 모든 필사자와 중도자를 세지 않으면, 유버르사에 등록되고 오르본톤에서 활약하는 법률 고문의 수는 61조를 조금 넘는다.
25:4.11 (279.12) 법률 고문은 빈번하게 개인으로서 활동하지만, 근무를 위해서 조직되며, 7명으로 무리를 이루어, 배치된 구체에서 공동 본부를 유지한다. 각 무리에서 적어도 다섯은 영구(永久) 지위를 가져야 하고, 한편 둘은 임시 관계로 있을 수 있다. 하늘 가는 필사자와 하늘 가는 중도인은 파라다이스로 올라가기를 추구하면서 이 여러 자문 위원회에서 근무하지만, 그들은 법률 고문을 위한 정규 훈련 과정을 밟지 않고, 결코 그 계급의 영구 회원이 되지도 않는다.
25:4.12 (279.13) 고문들과 함께 일시 근무하는 필사자와 중도자(中道者)는 우주 법칙과 최상의 정의 개념에 관하여 그들이 가진 전문 지식 때문에, 그러한 일을 위해서 뽑힌다. 늘어난 지식과 향상된 기술을 항상 습득하면서, 너의 파라다이스 목표를 향하여 여행하는 동안에 네가 이미 쌓은 지혜와 경험을 남에게 나누어줄 기회가 너에게 계속 주어진다. 하보나까지 가는 동안 내내, 너는 생도인 선생 노릇을 해낸다. 이 광대한 체험 대학의 여러 승천 수준을 통해서, 바로 네 밑에 있는 자들에게 너의 전진하는 생애에서 새로 발견한 지식을 나누어 줌으로써, 너는 고학(苦學)하여 네 길을 갈 것이다. 우주의 체제에서, 네가 남에게 지식과 진리를 나누어줄 능력과 자진성을 보여주기까지, 바로 네가 이러한 지식과 진리를 가졌다고 간주되지 않는다.
25:4.13 (280.1) 긴 훈련과 실제 체험을 겪은 뒤에, 케루빔 지위보다 높은 어떤 봉사 영도, 법률 고문으로서 영구히 임명받는 것이 허락된다. 모든 후보자는 자원해서 이 계급의 근무에 들어가지만, 일단 그러한 책임을 맡고 나서, 그 책임을 벗어서는 안 된다. 오로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이 고문들을 다른 활동으로 옮길 수 있다.
25:4.14 (280.2) 지역 우주의 멜기세덱 학부에서 시작된 법률 고문의 훈련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법정까지 계속된다. 이 초우주 훈련으로부터, 그들은 하보나 회로의 여러 안내 세계에 자리잡은 “일곱 궤도 학교”로 나아간다. 그들은 안내 세계들로부터, “최상위의 법 윤리 및 기술 학부”에 입학하는데, 여기는 법률 고문을 완전하게 만드는 파라다이스 훈련 학교이다.
25:4.15 (280.3) 이 고문들은 법률 전문가보다 더한 존재이다. 그들은 응용 법칙, 곧 널리 펼쳐진 우주의 광대한 영토에 거주하는 모든 자의 생명과 운명에 적용되는 우주 법칙을 공부하는 학자요 선생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들은 시공의 살아 있는 법률 도서관이 되며, 영원(永遠)의 통치자들이 가장 수긍할 수 있는 과정의 형태 및 절차에 관하여 시간 세계의 성격자를 가르침으로 끝없는 어려움과 필요 없는 지연을 막는다. 그들은 공간의 노동자들이 파라다이스의 요구 조건에 조화되어 활동하게 만들 수 있도록 그들에게 조언을 줄 수 있다. 그들은 창조자들의 기법에 관하여 모든 생물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25:4.16 (280.4) 그러한 살아 있는 응용 율법 도서관은 창조될 수 없다. 그러한 존재는 실제 체험으로 진화되어야 한다. 무한한 신들은 실존적이며, 따라서 체험의 결핍이 보상된다. 미처 체험하기도 전에, 만사를 알고 있지만, 이 비체험 지식을 하위 생물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
25:4.17 (280.5) 법률 고문은 지연을 방지하고, 진보를 촉진하며, 성취에 관하여 조언하는 일에 전념한다. 사물을 처리하는 데는 언제나 한 가지 최선의 옳은 방법이 있다. 반드시 완전한 기법, 신다운 방법이 하나 있고, 이 고문들은 어떻게 더 좋은 이 길을 찾도록 우리 모두를 이끄는가 알고 있다.
25:4.18 (280.6) 뛰어나게 지혜롭고 실용적인 이 존재들은 반드시 우주 검열자의 근무 및 작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멜기세덱들에게 한 유능한 군단이 제공된다. 체계ㆍ별자리ㆍ우주ㆍ초우주 구역의 통치자들은 모두 영적 세계의 이러한 기술적 참고서, 곧 법적 참고서가 되는 지적 존재들을 터지게 공급받고 있다. 한 특별한 무리는 생명 운반자들에게 법률 상담자로서 행동하고, 확정된 계급의 생명 파종으로부터 얼마큼 이탈이 허용되는가에 관하여 이 아들들에게 조언하며, 그밖에 그들의 특권 및 활동 범위에 관하여 이 아들들을 가르친다. 그들은 모든 영 세계 거래의 적당한 용법과 기술에 관하여 모든 등급의 존재들에게 고문이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영역의 물질 생물을 직접 개인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25:4.19 (280.7) 법적 통례(通例)에 관해서 조언하는 외에, 법률 고문들은 ―육체적ㆍ지적ㆍ영적―생물 존재에 관한 모든 법칙을 유능하게 해석하는 데 똑같이 전념한다. 그들은 우주 화해자들에게 소용되고, 또한 법의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모든 다른 자, 다시 말해서, 확립된 육체적ㆍ지적ㆍ영적 계급의 요인을 가진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최상위 신이 어떻게 확실히 반응할 것인가 알고 싶어 하는 모든 다른 자에게 소용된다. 그들은 궁극위의 기법까지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25:4.20 (281.1) 법률 고문은 선택받고 시험을 거친 존재이다. 그들 가운데 하나도 이탈했다는 이야기를 나는 결코 들은 적이 없다. 그들이 아주 효과적으로 해석하고 우렁차게 해설하는 신의 법칙을 그들이 언제라도 무시했다고 판결 받은 기록이 유버르사에는 없다. 그들의 근무 분야에 아무런 제한이 알려지지 않았고, 그들의 진보에 대해서도 아무 제한이 부과되지 않았다. 그들은 파라다이스 입구에 이를 때까지도 고문으로서 활동하며, 율법과 체험이 가득한 우주 전체가 그들 앞에 열려 있다.
25:5.1 (281.2) 하보나에 있는 3차 상천사들 가운데, 어떤 선임 우두머리 기록자들은 기록 관리자, 곧 빛의 섬의 공식 기록 보관소의 관리자로 뽑힌다. 이 기록 보관소는, 지식 관리자들의 머리 속 등록부에 적힌 살아 있는 기록과 대조가 되며, 후자는 가끔 “파라다이스의 살아 있는 도서관”이라 부른다.
25:5.2 (281.3) 사람이 사는 행성에서 기록하는 천사들은 모든 개인 기록의 근원이다. 여러 우주에 두루, 다른 기록자들은 공식 기록과 산 기록, 이 둘에 관하여 활동한다. 유란시아에서부터 파라다이스까지, 이 두 가지 기록과 마주친다. 지역 우주에는 문서로 된 기록이 더 많고, 산 기록은 적다. 파라다이스에는 산 기록이 많고, 공식(公式) 기록이 적다. 유버르사에서는 두 가지를 똑같이 사용할 수 있다.
25:5.3 (281.4) 조직되어 있고 사람이 사는 우주에서 생기는 중요한 일은 무엇이나 기록된다. 지역적 중요성을 넘지 않는 사건들은 지역 기록에만 남지만, 더 널리 중요성이 있는 것은 그에 따라서 처리된다. 네바돈의 행성ㆍ체계ㆍ별자리에서부터, 지역 우주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모두 구원자별에 공시(公示)된다. 그러한 지역 우주 서울로부터 그 사건들은 구역 및 초우주 정부의 사무에 관계되는 상위의 기록으로 올라간다. 파라다이스도 또한 적절한 초우주 요약과 하보나 자료를 가지고 있다. 온 우주에 관한 역사적이고 누적된 이 이야기는 이러한 높은 3차 상천사들이 관리하고 있다.
25:5.4 (281.5) 이 존재들 가운데 더러는 하늘 기록자들의 활동을 지도하는 기록장으로서 일하도록 초우주에 파송되어 왔는데, 아직 하나도 그들 계급의 영구 점호에서 다른 곳으로 전근되지 않았다.
25:6.1 (281.6) 이들은 모든 기록을 이중으로 만드는 기록자이며, 원본인 영(靈) 기록과 ―사본(寫本)이라 불러도 좋은―반(半)물질 기록을 만든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동시에 영적 에너지와 물질 에너지를 모두 다룰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늘 기록자는 그렇게 창조되지 않았다. 그들은 지역 우주에서 온 하늘 가는 세라핌이다. 일곱 초우주 본부에서 기록장들의 회의가 그들을 접수하고 분류하며, 그들의 일하는 분야로 배치한다. 거기에는 또한 하늘 기록자들을 훈련하는 학교들이 자리잡고 있다. 지혜 완성자와 신성한 조언자들이 유버르사의 학교를 운영한다.
25:6.2 (281.7) 우주의 근무에서 승진함에 따라서 기록자들은 이중 기록 체계를 계속하고, 물질 계급에서부터 높은 빛나는 영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등급의 존재들에게 언제나 기록을 소용되게 한다. 네가 이 물질 세계로부터 올라감에 따라서 과도기 체험을 겪으면서, 너는 언제나 너의 지위 구체의 역사와 전통에 관한 기록을 참조할 수 있고, 달리 그에 통달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25:6.3 (282.1) 기록자들은 시험을 거치고 단련된 군단이다. 하늘 기록자가 이탈했다는 말을 나는 결코 들은 적이 없고, 그들의 기록에서 날조가 발견된 적도 없다. 그들은 이중 검사를 받고, 그들의 기록은 유버르사에서 온 그들의 높은 동료와 막강한 사자들에게 정밀 검사를 받는데, 후자는 원본 영 기록의 준(準)물리적 사본이 정확한가 확인한다.
25:6.4 (282.2) 오르본톤의 여러 우주의 하위 기록 구체에 주둔하는, 승진하는 기록자의 수는 몇조에 이르지만, 유버르사에서 도달한 지위를 가진 자의 수는 8백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 이 선임 기록자, 곧 졸업한 기록자들은 초우주 관리자이고, 후원받은 시공의 기록을 발송하는 자이다. 그들의 영구 본부는 유버르사에 있는 기록 지역을 둘러싸는 둥그런 거처에 있다. 그들은 결코 이 기록의 관리를 남에게 맡기지 않는다. 개인으로서 자리를 비울지 모르지만, 결코 큰 무리가 자리를 비우지는 않는다.
25:6.5 (282.3) 기록 관리자가 된 상천사와 같이, 하늘 기록자 군단은 영구 배치를 받는다. 세라핌과 상천사(上天使)가 일단 이 근무에 소집되면, 완전히 성격화된 최상위 하나님의 새롭고 수정된 행정부의 시절이 오기까지, 각자 하늘 기록자와 기록 관리자로 남는다.
25:6.6 (282.4)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오신 아주 아득한 시절 이후로 오르본톤 전체에서 우주 중요성을 가진 모든 것의 기록을 유버르사에서 이 선임 하늘 기록자들이 보여줄 수 있다. 한편 영원한 섬에는 무한한 영이 성격화된 시절 이후에 파라다이스의 거래를 입증하는, 그 영역의 기록 보관소를 기록 관리자들이 지킨다.
25:7.1 (282.5)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이 낳은 이 아이들은 하늘 가는 상물질 생애를 사는 어떤 자에게도 친구요 동료이다. 그들은 승천자가 인간으로서 진보하는 진짜 과제에 불가결하지 않으며, 흔히 파라다이스 여행에 필사 동료를 따라가는 보호 천사들이 하는 일을 어떤 의미에서도 대신하지 않는다. 상물질 동반자는 다만, 오랫동안 안으로 향한 승천을 막 시작하는 자를 영접하는 품위 있는 주인이다. 그들은 또한 솜씨 있는 오락 후원자요, 이 일을 하는 데 그들은 회상 지도자들의 유능한 도움을 받는다.
25:7.2 (282.6) 너희는 네바돈의 여러 상물질 훈련 세계에서 수행할 중대하고 점점 더 어려운 과제를 받겠지만, 너희에게 언제나 정기적으로 휴식을 취하고 돌이켜보는 시간이 마련될 것이다. 파라다이스까지 여행하는 동안 내내, 언제나 쉬고 영적으로 노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빛과 생명의 생애에는 언제나 신을 예배하고 새로운 것을 성취하는 시간이 있다.
25:7.3 (282.7) 이 상물질 동반자는 너무 친절한 동료이기 때문에, 너희가 상물질 체험의 마지막 단계를 마침내 떠날 때, 초우주에서 영의 모험을 시작하려고 준비할 때, 이 붙임성 있는 생물이 너희를 따라올 수 없는 것을 참으로 섭섭히 여길 터이지만, 그들은 순전히 지역 우주에서 근무한다. 승천 생애의 단계마다, 모든 접촉 성격자는 친절하고 붙임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파라다이스 동반자를 만날 때까지, 너희는 그렇게 우정과 동반에 헌신하는 다른 집단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25:7.4 (283.1) 상물질 동반자가 하는 일은 너희 지역 우주의 사무를 다루는 이야기에서 더욱 자세히 묘사된다.
25:8.1 (283.2) 파라다이스 동반자는 복합 집단, 곧 세라핌, 2품 천사, 상천사, 전천사(全天使)의 계층에서 뽑아서 모집한 집단이다. 터무니없이 긴 시간이라고 너희가 생각할 만큼 오랫동안 봉사하지만, 그들은 영구한 지위가 없다. 이 직책이 끝나고 나서, 그들은 보통 (항상 그렇지는 않다), 파라다이스 근무에 소집되었을 때 수행했던 임무로 되돌아간다.
25:8.2 (283.3) 지역 우주의 어머니 영과 초우주의 거울 영들, 그리고 파라다이스의 위엄자가 천사 무리의 구성원들을 이 근무에 지명한다. 이들은 중앙의 섬으로 소집되고, 일곱 으뜸 영 가운데 한 분이 이들을 파라다이스 동반자로 임명한다. 파라다이스에서 얻는 영구 지위를 별도로 하고, 파라다이스에서 동반자가 되는 이 일시 근무는 봉사하는 영들에게 수여되는 가장 높은 명예이다.
25:8.3 (283.4) 이 선택된 천사들은 동반하는 봉사에 헌신하고, 파라다이스에 어쩌다 혼자 있을지 모르는 모든 등급의 존재들에게, 주로 하늘 가는 필사자이지만, 또한 가운데 섬에서 혼자 지내는 모든 다른 자에게, 동료로서 배치된다. 파라다이스 동반자는 사귀는 자를 위해서 특별히 이루어야 할 일이 하나도 없고, 다만 동반자일 따름이다. 너희가 파라다이스에서 머무르는 동안, 너희 필사자가 만나는 거의 모든 다른 존재는―너희 동료 순례자를 제외하고―무언가 분명히, 너희와 함께 또는 너희를 위해 할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친구들은 오로지 너희와 같이 있고, 인격자의 동료로서 너희와 사귀라고 배치된다. 그들은 흔히 자기 직책에서 품위 있고 명석한 파라다이스 시민의 도움을 받는다.
25:8.4 (283.5) 필사자는 아주 사회적 민족의 출신이다. 창조자들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음”을 잘 알며, 따라서 파라다이스에서도 동무에 대한 배려가 되어 있다.
25:8.5 (283.6) 네가 하늘 가는 필사자로서, 너의 지상 생애의 동반자나 또는 가까운 동료와 함께 파라다이스에 다다르거나, 너의 운명 수호 천사가 너와 함께 어쩌다가 도착하게 되든지 또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면, 너에게 아무런 영구 동반자가 배치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혼자 도착하면, 시간 세계에서 마지막 잠에 들었다가 빛의 섬에서 깨어날 때, 한 동반자가 분명히 너를 반길 것이다. 하늘 가는 관계에 있는 누군가가 너를 따라오는 사실이 알려진다고 하더라도, 임시 동반자들이 영원의 기슭으로 너를 환영하고, 너와 네 동료들을 영접하기 위하여 예비된 장소에 너를 바래다 주라고 지정될 것이다. 네가 영원한 파라다이스 기슭에서, 영원으로 부활함을 체험할 때 너는 따뜻하게 환영받을 것을 굳게 믿어도 좋다.
25:8.6 (283.7) 영접하는 동반자들은 하보나의 마지막 회로에서 승천자가 체류하는 마지막 시절에 배치된다. 그들은 필사의 기원을 비롯하여, 공간의 세계들과 여러 하보나 궤도를 거치는 파란 많은 승천 기록을 주의 깊게 조사한다. 시간 세계의 필사자에게 인사할 때, 그들은 도착하는 이 순례자의 생애에 관하여 이미 통달해 있으며, 그들이 동정심 있고 흥미를 자아내는 동반자인 것이 즉시 판명된다.
25:8.7 (283.8) 파라다이스에서 네가 최후자가 되기 전의 체류 기간에, 어떠한 이유이든, 승천 생애에서 너의 동료였던 자로부터 잠깐이라도 떨어지면―그가 필사자이든 천사이든―파라다이스 동반자 하나가 즉시 상담하고 동무해 주려고 배치될 것이다. 파라다이스에서 혼자 거하는 승천 필사자에게 일단 배치되고 나서, 이 성격자가 그의 승천 동료와 다시 합치든지, 아니면 최후 군단에 정식으로 소집될 때까지, 그 동반자는 함께 남아 있다.
25:8.8 (284.1) 승천자는 그의 초우주 부류와 다른 성품을 가진 동반자의 책임 하에 결코 맡겨지지 않는다. 이것을 제외하고, 기다리는 순서대로 파라다이스 동반자가 배치된다. 유란시아 필사자 하나가 오늘 파라다이스에 다다른다면, 오르본톤에서 기원을 가졌거나 아니면 제7 으뜸 영의 성품을 가진, 첫 번째로 기다리는 동반자가 그에게 배치될 것이다. 따라서 전천사는 일곱 초우주에서 오는 승천 인간과 함께 봉사하지 않는다.
25:8.9 (284.2) 파라다이스 동반자는 기타 여러 가지 봉사를 수행한다. 하늘 가는 한 필사자가 중앙 우주에 혼자 다다르고, 하보나를 거치는 동안 신을 만나는 모험의 어떤 국면에 실패한다면, 그를 적당한 시기에 시간 세계의 우주들로 돌려보내며, 이내 파라다이스 동반자 예비군에게 요청이 나간다. 실패한 순례자가 파라다이스로 승천을 다시 시작하려고 중앙 우주로 돌아올 때까지, 이 계급 가운데 하나가 그를 따르고, 그와 함께 있고, 그를 위로하고 기운을 북돋아주고, 그와 남아 있으라고 배치된다.
25:8.10 (284.3) 하늘 가는 한 세라핌, 곧 필사 생애에서 수호(守護) 천사와 동무하여 하보나를 거쳐가는 동안에 하늘 가는 한 순례자가 신 모험에서 실패하면, 그 천사는 그 필사 동료를 동반하고 싶어한다. 이 천사들은 언제나 자원하며, 오랫동안 동료였던 필사자를 동반해서 시공 근무로 돌아가도록 허락된다.
25:8.11 (284.4) 그러나 가깝게 사귀던 두 필사 승천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하나가 하나님에 도달하고 다른 하나가 일시 실패하면, 성공한 자는 실망한 성격자와 함께 진화 우주로 항상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이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 대신에, 파라다이스 동반자 예비군에게 요청이 나가며, 자원자들 가운데 하나가 실망한 순례자를 따라가도록 뽑힌다. 그러면 자원하는 파라다이스 시민 하나가 성공한 필사자와 사귀게 되며, 성공한 자는 실패한 동료가 하보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가운데 섬에서 머문다. 그동안에 그는 특정한 파라다이스 학교에서 가르치고, 진화로 승천하는 모험 이야기를 발표한다.
26:0.1 (285.1) 상천사(上天使)는 파라다이스와 중앙 우주에서 봉사하는 영이다. 그들은 무한한 영의 가장 낮은 자손 집단―천사 무리―가운데서 가장 높은 계급이다. 너희는 파라다이스 섬으로부터 시공 세계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봉사하는 영들과 마주치게 된다. 조직되고 사람이 사는 우주의 어떤 중요한 부분에도, 그들이 봉사하지 않는 곳이 없다.
26:1.1 (285.2) 천사는 모든 공간에서, 진화하며 하늘 가는, 의지를 가진 인간에게 봉사하는 영 동료이다. 그들은 또한 여러 구체에서 상급 집단의 신다운 성격자들의 동지(同志)요 일하는 동료이다. 어떤 계급의 천사도 별개의 성격자이며, 상당히 개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모두 회상 지도자가 베푸는 봉사를 이해하는 큰 능력이 있다. 공간의 사자 무리들과 함께, 봉사하는 영들은 휴식 시간과 변화가 있는 시간을 즐긴다. 그들은 매우 사교적 성품을 소유하며, 인간을 훨씬 뛰어넘는 교제 능력을 가졌다.
26:1.2 (285.3) 대우주의 봉사하는 영들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26:1.10 (285.11) 천사 계급의 개별 구성원은, 우주에서 개인적 지위가 전적으로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 어떤 계급의 천사들은 한 계절 동안 파라다이스 동반자가 되고, 더러는 하늘 기록자가 되며, 더러는 법률 고문의 계층으로 올라간다. 어떤 케루빔은 세라핌의 지위와 운명을 바랄 수도 있고, 한편 진화 세라핌은 하늘 가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적 수준에 이를 수 있다.
26:1.11 (285.12) 일곱 계급의 봉사하는 영들은, 드러난 바와 같이, 하늘 가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그들의 기능에 따라서 발표를 위하여 분류된다:
26:1.12 (285.13) 1. 중앙 우주의 봉사 영. 세 계급의 상천사가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체계에서 봉사한다. 무한한 영이 1차 상천사, 곧 파라다이스 상천사들을 창조한다. 하보나에서 근무하는 2차와 3차 계급은 각자 으뜸 영 및 회로 영들의 자손이다.
26:1.13 (286.1) 2. 초우주의 봉사 영―2품 천사, 3품 천사, 전천사. 2품 천사, 곧 거울 영들의 자손은 여러 가지로 일곱 초우주에서 근무한다. 3품 천사는 무한한 영에서 기원을 가지며, 궁극에 창조 아들과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 사이에 연락하는 봉사에 전념한다. 전천사는 무한한 영과 일곱 최상 집행자의 협동으로 창조되며, 그들은 순전히 후자의 일꾼이다. 이 세 계급에 대한 논의는 이 시리즈에서 뒤잇는 이야기의 주제가 된다.
26:1.14 (286.2) 3. 지역 우주의 봉사 영은 세라핌 및 그 조수 케루빔을 포함한다. 필사 승천자는 우주 어머니 영의 이 자손과 처음 접촉을 가진다.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태어난 중도인(中道人)은, 흔히 봉사하는 영들과 함께 기능적으로 분류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정말로 천사 계급은 아니다. 세라핌과 케루빔에 관한 설명과 함께, 그들의 이야기는 너희 지역 우주의 사무를 다루는 글에서 발표된다.
26:1.15 (286.3) 모든 계급의 천사 무리는 여러 가지 우주 봉사에 헌신하고,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상급의 하늘 존재들에게 봉사한다. 그러나 시간 세계의 자녀들을 위하여 점진적으로 완전하게 되는 승천 계획을 추진하는 데 다수로 고용되는 자는 상천사와 2품 천사와 세라핌이다. 중앙 우주, 초우주, 지역 우주에서 활동하면서, 영원한 아들을 통해서 우주의 아버지에 도달하기를 구하는 모든 사람을 돕고 안내하기 위하여, 그들은 무한한 영이 마련한, 단절되지 않은 영 봉사자의 계통을 형성한다.
26:1.16 (286.4) 상천사는 활동하면서 오직 한 단계에 관하여, 우주의 아버지의 단계에서, “영의 극성(極性)”에 제한을 받는다. 아버지의 독점 회로를 직접 이용할 때를 제외하고, 그들은 혼자서 일할 수 있다. 아버지가 직접 베푸는 봉사로 동력을 받고 있을 때, 상천사는 활동할 수 있도록 자진해서 쌍으로 손잡아야 한다. 2품 천사도 마찬가지로 제한되어 있고, 게다가 영원한 아들의 회로와 동시화하기 위해서 쌍으로 일해야 한다. 세라핌은 구별되고 지역화한 성격자로서 혼자서 활동할 수 있지만, 연락하는 쌍으로서 양극화되었을 때에만 회로에 연결할 수 있다. 그러한 영 존재들이 쌍으로 연합되어 있을 때, 하나를 다른 하나의 보완자라고 한다. 보완 관계는 잠깐일지 모르고, 반드시 영구한 성질을 가지지는 않는다.
26:1.17 (286.5) 이 눈부신 빛의 생물들은 우주의 주요 회로의 영적 에너지를 흡수함으로 직접 기운을 얻는다. 유란시아 필사자는 식물(植物) 형태를 통하여 빛 에너지를 얻어야 하지만, 천사 무리들은 회로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너희가 모르는 음식을 섭취하느니라.” 또한 놀라운 삼위일체 교육 아들들의 순회하는 가르침을 섭취한다. 그들은 생명 에너지를 소화하는 기술과 아주 비슷하게, 지식을 받아들이고 지혜를 섭취한다.
26:2.1 (286.6) 상천사는 파라다이스와 중앙 우주에서 머무르는 모든 종류의 존재들을 보살피는 숙련된 봉사자이다. 이 높은 천사들은 크게 1차ㆍ2차ㆍ3차, 이 3대 계급으로 창조된다.
26:2.2 (287.1) 1차 상천사는 순전히 합동 행위자의 자손이다. 그들은 어떤 집단의 파라다이스 시민과 항상 커지는 승천 순례자 군단 사이에, 봉사를 대체로 같게 나누어 베푼다. 이 영원한 섬의 천사들은 두 집단의 파라다이스 거주민이 받는 기본 훈련을 촉진하는 데 상당히 효력이 있다. 두 가지 독특한 계급의 우주 인간이―하나는 의지를 가진, 가장 높은 부류의 신답고 완전한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온 우주에서 가장 낮은 부류의 인간, 의지(意志)를 가진, 완전하게 진화된 인간인데―서로 이해하는 데 유익한 많은 것을 이 천사들이 이바지한다.
26:2.3 (287.2) 1차 상천사가 하는 일은 아주 독특하고 달라서, 뒤잇는 이야기에서 따로 다루겠다.
26:2.4 (287.3) 2차 상천사는 하보나의 일곱 회로에서 승천하는 존재들의 사무를 지도한다. 그들은 중앙 우주의 여러 세계 회로에서 오랫동안 머무르는 수많은 계급의 파라다이스 시민에게 교육 훈련을 베푸는 데 똑같이 관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수고하는 이 단계에 대하여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
26:2.5 (287.4) 이 높은 천사들은 일곱 종류가 있는데, 각 종류는 일곱 으뜸 영 가운데 한 분에 기원이 있으며, 따라서 그 성품을 닮는다. 집단으로, 일곱 으뜸 영은 많은 다른 무리의 독특한 존재와 개체를 창조한다. 그리고 각 계급의 개별 구성원의 성품은 비교적 한결같다. 그러나 바로 이 일곱 으뜸 영이 개별로 창조할 때, 거기서 생기는 계급들의 성품은 언제나 일곱 가지이다. 각 으뜸 영의 아이들은 그 창조자의 성품을 취하며, 따라서 서로 다르다. 2차 상천사의 기원이 그러하며, 모두 일곱 종류의 창조된 천사들이 그들 계급 전체에게 열린 모든 활동 경로에서, 주로 신성한 중앙 우주의 일곱 회로에서 활동한다.
26:2.6 (287.5) 하보나의 일곱 행성 회로는 각각 일곱 회로 영 중에 한 분의 직접 감독을 받고, 그들 자체가 일곱 으뜸 영이 집합으로―따라서 한결같은―창조한 존재이다. 셋째 근원 중심의 성품을 가지지만, 보조하는 이 일곱 하보나 영은 최초의 원본 우주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들은 최초의 (영원한) 창조가 있은 뒤에, 그러나 그랜드판다 시절보다 오래 전에 활동하고 있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은 최상 존재의 태동하는 목적에 대한 으뜸 영들의 창조적 반응으로서 나타났고, 대우주가 조직되고 나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무한한 영과 그의 모든 창조 동료는 보편적 조정자로서, 체험적 신들 속에서, 그리고 진화하는 여러 우주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에 대하여 적절한 창조적 반응 능력을 풍부하게 타고난 듯하다.
26:2.7 (287.6) 3차 상천사는 이 일곱 회로 영에서 기원을 가진다. 그들은 각자, 다른 하보나 궤도에서, 중앙 우주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충분한 수의 높은 3차 계급 상천사 봉사자들을 창조할 힘을 무한한 영에게서 받는다. 시간의 순례자들이 하보나에 다다르기 전에 회로 영들은 이 천사 봉사자를 비교적 적게 생산했지만, 일곱 으뜸 영은 그랜드판다가 착륙하기까지, 2차 상천사의 창조도 미처 시작하지 않았다. 따라서, 두 계급 가운데 연장자로서, 3차 상천사가 먼저 고려될 것이다.
26:3.1 (288.1) 일곱 으뜸 영의 이 일꾼들은 하보나의 여러 회로의 전문가인 천사이며, 그들의 봉사는 하늘 가는 시간 순례자와 내려오는 영원의 순례자들에게 연장된다. 완전한 중앙 우주의 10억 연구 세계에서, 모든 계급의 상천사 동료들은 충분히 너희 눈에 보일 것이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너희는 모두 거기서 서로 접촉하고 공감하는 존재, 친교하고 이해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너희는 또한 내려오는 순례자들을 충분히 알아보고 이들과 아름다운 교제를 가질 것이다. 그들은 안에서 바깥으로 이 회로들을 거쳐 가는 파라다이스 시민이며, 첫째 회로의 안내 세계를 통해서 하보나에 들어가고 바깥으로 일곱째까지 진행한다.
26:3.2 (288.2) 일곱 초우주에서 온 승천 순례자들은, 일곱째 회로의 안내 세계를 거쳐서 안으로 진행하면서, 반대 방향으로 하보나를 거쳐 간다.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한 회로에서 다른 회로로, 하늘 가는 인간의 진보에 아무런 시간 제한이 없다. 이것은 여러 상물질 세계에 거주하는 데 멋대로 고정된 시간이 할당되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나 적당히 발육된 개인들은 하나나 또는 그 이상의 지역 우주 훈련 세계에 머무르는 것이 면제될 수도 있지만, 어떤 순례자도 점차 영적으로 변화되는 일곱 하보나 회로를 하나라도 피해 가서는 안 된다.
26:3.3 (288.3) 시간의 순례자에게 봉사하는 데 주로 배치된 3차 상천사 군단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26:3.4 (288.4) 1. 조화 감독자. 완전한 하보나에서도, 다음 단계의 파라다이스 성취를 위하여 시간의 순례자를 준비시키는 모든 작업에서 체계를 유지하고 조화(調和)를 보장하기 위하여 일종의 조정하는 영향력이 필요한 것이 명백하다. 그런 것―만사가 부드럽고 신속하게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 조화 감독자들의 진짜 임무이다. 첫째 회로에서 기원을 가졌으니까 그들은 하보나에 두루 근무하며, 그들이 회로에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잘못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들이 다른 계급―아니 여러 수준―의 성격자를 포함하는 다채로운 활동을 조정하는 큰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필요할 때 언제 어디서나 이 상천사가 도움을 줄 수 있게 만든다. 그들은 시간의 순례자와 영원의 순례자들이 서로 이해하는 데 엄청나게 이바지한다.
26:3.5 (288.5) 2. 우두머리 기록자. 이 천사들은 둘째 회로에서 창조되지만, 중앙 우주 어디에서나 일한다. 그들은 세 벌로 기록하며, 하보나에 있는 실제 서류철을 위해서, 그들 계급의 영적 서류철을 위해서, 그리고 파라다이스의 공식 기록부를 위해서 기록한다. 게다가, 그들은 참된 지식의 중요성을 가진 거래들을 파라다이스의 살아 있는 도서관, 곧 1차 계급 상천사인 지식 관리자들에게 자동으로 전달한다.
26:3.6 (288.6) 3. 방송자. 셋째 회로 영의 아이들은 하보나에서 두루 활동한다. 하지만 그들의 공식 주둔지는 가장 바깥 회로의 70번 행성에 있다. 이 전문 기술자들은 중앙 창조에서 방송을 수신(受信)하고 송신하는 자이고, 파라다이스에 있는 모든 신 현상에 관한 공간 보고서의 지도자이다. 그들은 공간의 모든 기본 회로를 운영할 수 있다.
26:3.7 (288.7) 4. 사자들은 4번 회로에서 기원을 가진다. 그들은 몸소 전달하기를 요구하는 모든 소식을 지참하는 자로서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체계를 돌아다닌다. 그들은 동료에게, 하늘 성격자, 파라다이스 순례자에게, 또 시간 세계의 하늘 가는 사람에게도 봉사한다.
26:3.8 (289.1) 5. 정보 조정자. 이 3차 상천사들은 다섯째 회로 영의 아이들이며, 하늘 가는 순례자와 내려오는 순례자 사이의 친교 관계를 언제나 지혜롭게 동정심을 가지고 추진한다. 그들은 하보나의 모든 거주자에게, 특히 승천자에게, 온 우주의 일거리에 관하여 동향을 알려줌으로 봉사한다. 방송자와 반영자들과 몸소 접촉하는 덕택으로, 하보나의 이 “살아 있는 신문들”은 중앙 우주의 광범위한 뉴스 회로에서 전달되는 모든 정보를 순간에 통달한다. 그들은 하보나 도표(圖表) 방법으로 정보를 확보하는데,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너희의 가장 빠른 전신(電信) 기술로 기록하기에 1천 년이 걸릴 만큼 많은 정보를 유란시아 시간으로 한 시간 안에 자동으로 소화할 수 있게 만든다.
26:3.9 (289.2) 6. 수송 성격자. 이 존재들은 6번 회로에 기원이 있고, 가장 바깥 회로의 40번 행성에서 보통 활동한다. 그들은 바로, 신에 도달하는 모험에 일시 실패하는 실망한 후보자들을 데려가는 자이다. 하보나 근무에서 오고가야 하는 모든 자와 공간 여행자가 아닌 자들에게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26:3.10 (289.3) 7. 예비군. 하늘 가는 존재, 파라다이스 순례자, 하보나에 머무르는 다른 계급의 존재들과 함께 하는 일의 변동은 일곱째 궤도의 안내 세계에서 상천사 예비군의 유지를 필요하게 만들며, 상천사들은 여기에서 기원을 가진다. 그들은 특별한 설계 없이 창조되고, 3차 계급의 상천사 동료들이 하는, 힘이 덜 드는 단계의 어떤 임무에도 봉사를 담당할 능력이 있다.
26:4.1 (289.4) 2차 상천사는 중앙 우주의 일곱 행성 회로에 봉사하는 자이다. 일부는 시간의 순례자에게 봉사하는 데 전념하고, 그 전체 계급의 반은 영원에서 온 파라다이스의 순례자의 훈련에 배치된다. 이 파라다이스 시민들은 또한 여러 하보나 궤도를 거쳐서 순례하면서, 필사 최후 군단으로부터 자원한 자들의 시중을 받는데, 이것은 처음 최후자 무리가 완성된 이후로 있어 온 제도이다.
26:4.2 (289.5) 하늘 가는 순례자들의 봉사에 정기적으로 배치받는 데 따라서, 2차 상천사들은 다음 일곱 집단에서 일한다:
26:4.10 (289.13) 이 여러 작업 집단은 각자 모두 일곱 부류의 창조된 천사들을 포함한다. 공간의 순례자는 언제나, 그가 태어난 초우주를 주관하는 으뜸 영에 기원을 가지는 2차 상천사의 개인 지도를 받는다. 너희 유란시아 필사자들이 하보나에 이를 때 분명히―바로 너희의 진화된 성품처럼―오르본톤의 으뜸 영으로부터 유래한 성품을 가진 상천사들이 너희를 안내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개인 교사들이 너희의 초우주 으뜸 영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파라다이스의 완전함을 이루려고 너희가 온갖 노력을 기울일 때, 특별히 너희를 이해하고, 위로하고, 도울 자격을 갖추고 있다.
26:4.11 (290.1) 일곱 초우주의 본부에서 활동하는, 1차 계급의 2품 천사인 수송 성격자들이 하보나의 검은 인력체들을 지나서, 바깥의 행성 회로까지 시간의 순례자를 수송한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파라다이스로 올라 가도록 인가받은, 행성과 지역 우주에서 근무하는 대다수의 세라핌은, 필사 동료가 하보나까지 장거리 비행을 떠나기 전에 그들과 작별할 것이다. 하늘 일에 배치를 받기 위해서, 당장에 그들은 오랜 집중 훈련을 시작하고 세라핌으로서 완전한 존재와 최상의 근무에 이르기를 기대한다. 그들은 시간의 순례자와 다시 만나기를 희망하면서 훈련을 시작하며, 우주의 아버지에 이르고 최후 군단의 밝혀지지 않은 근무에 배치받은 그러한 필사자의 길을 언제까지나 따를 자 가운데 그들이 끼어들기를 바란다.
26:4.12 (290.2) 순례자들은 오직 한 가지 완전한 자질, 완전한 목적을 부여받고 하보나의 영접 행성, 일곱째 회로의 안내 세계에 착륙한다. 우주의 아버지는 선포하였다: “내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이것은 공간 세계의 유한한 자녀들에게 놀라운 초청이자 명령을 방송한 것이다. 위대한 첫째 근원 중심의 그 엄청난 명령을 달성하고 실현하도록 돕는 하늘 존재들의 협조하는 노력으로, 그 명령의 선포는 온 우주를 술렁거리게 만들었다.
26:4.13 (290.3) 사람을 살아남게 하는 우주 계획을 돕는 모든 조수 무리의 봉사를 통해서, 또 그러한 봉사로 너희가 마침내 하보나의 영접 세계에 투입될 때, 너희는 오직 한 종류의 완전함―완전한 목적―을 가지고 도착한다. 너희의 목적은 이미 철저하게 증명되었고, 너희의 믿음은 시험을 거쳤다. 너희는 절대 실망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 알려진다. 우주의 아버지를 알아보는 데 실패하는 것조차, 하보나의 완전한 구체들에 도달하기 위하여 모두가 겪어야 하는 체험을 거친, 승천 필사자의 신앙을 흔들거나 믿음을 심각하게 방해할 수 없다. 하보나에 이를 때가 되어 너의 성실성은 숭고하게 되었다. 완전한 목적(目的)과 신다운 소망을 가진 것은, 굳건한 믿음과 함께, 안정된 영원의 처소에 네가 들어가는 것을 보장해 놓았다. 시간 세계의 불확실한 처지로부터 너는 완전히 벗어났고, 이미 끝난 일이다. 이제 너는 하보나의 문제와 파라다이스의 엄청난 일에 부닥쳐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너는 공간의 여러 세계 학교에서 체험하는 시대에, 그렇게 오랫동안 훈련을 받았다.
26:4.14 (290.4) 믿음은 하늘 가는 순례자에게 완전한 목적을 얻게 해주었고, 이것은 영원의 입구까지 시간 세계의 아이들을 들여보낸다. 순례자를 돕는 자들은, 성격을 파라다이스처럼 완전하게 만드는 데 아주 필수인 완전한 이해력과 터득하는 기법을 개발하는 일을 이제 시작해야 한다.
26:4.15 (290.5) 이해하는 능력은 필사자가 파라다이스로 가는 여권이다. 기꺼이 믿으려는 태도는 하보나에 이르는 열쇠이다. 아들 신분을 받아들이는 것, 깃드는 조절자와 협동하는 것은 진화로 살아남으려고 치르는 대가이다.
26:5.1 (291.1) 2차 상천사의 일곱 무리 가운데 처음으로 마주치게 될 집단은 순례자 조수이다. 그들은 많이 여행한 공간 승천자들을 중앙 우주의 안정된 세계들과 정착한 체제로 환영하는 존재, 재빨리 이해하고 널리 공감하는 존재이다. 동시에 이 높은 봉사자들은 파라다이스의 영원 순례자를 위해서 할 일을 시작한다. 이들 가운데 처음 순례자는, 바깥 회로의 안내 세계에 그랜드판다가 착륙한 것과 동시에, 하보나 내부 회로의 안내 세계에 도착했다. 아득히 먼 그 시절에, 파라다이스에서 온 순례자와 시간의 순례자들은 4번 회로의 영접 세계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26:5.2 (291.2) 일곱째 궤도의 여러 하보나 세계에서 활동하는 이 순례자 조수(助手)들은 3대 부문에서 하늘 가는 필사자를 위하여 일을 수행하는데, 첫째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를 최상으로 이해하는 것, 둘째는 아버지와 아들의 협동 관계를 영적으로 이해하는 것, 셋째는 무한한 영을 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 여러 교육 단계는 각각 일곱 지부로, 각 지부는 열두 소분과로, 각 소분과는 70개 부속 집단으로 나누어진다. 이 70개의 부속 교육 집단은 각각 1천 등급으로 제시된다. 더 자세한 가르침은 나중의 여러 궤도에서 마련되지만, 순례자 조수들이 파라다이스의 모든 필요 사항의 윤곽을 가르친다.
26:5.3 (291.3) 그러면 이것이 믿음의 시험을 거치고 많이 여행한 공간 순례자가 직면하는 주요 과정, 기본 과정이다. 그러나 하보나에 이르기 훨씬 전에, 시간 세계의 이 승천하는 자녀들은 알 수 없는 미래를 마음껏 즐기고, 실망을 견디고 잘 자라며, 실패할 듯 보이는 것에 열을 올리고, 어려운 가운데서 활력을 얻고, 엄청난 것에 부닥치고서 굽히지 않는 용기를 보이며, 설명할 수 없는 도전을 받을 때 꺾이지 않는 믿음을 실천하기를 배워 왔다. 그 뒤에 오랫동안, “하나님과 연결하면 아무것도―절대로 아무것도―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이 순례자들의 투쟁 구호가 되었다.
26:5.4 (291.4) 하보나의 각 궤도에는 시간의 순례자에 대하여 분명한 요구 사항이 있다. 어떤 순례자도 특별한 종류의 하늘 가는 인간을 돕기에 천성으로 적응된 상천사의 보호 밑에 계속 있지만, 통달해야 되는 과정은 중앙 우주에 도착하는 모든 승천자에게 상당히 한결 같다. 이 성취 과정은 양적ㆍ질적ㆍ체험적인 것이다―지적ㆍ영적이자 최상의 과정이다.
26:5.5 (291.5) 하보나 궤도에서 시간은 거의 중요성이 없다. 제한된 방법으로, 시간은 승진 가능성에 계산되지만, 성취가 마지막이자 최상의 시험이다. 네가 안쪽으로 다음 궤도로 갈 능력이 있다고 너의 상천사 동료가 판단을 내리는 바로 그 순간, 너는 일곱째 회로 영의 열두 조수 앞에 출두하게 된다. 여기서 네가 기원을 가진 초우주, 그리고 네가 태어난 체계가 지정한, 그 궤도의 시험에 네가 합격(合格)하는 것이 요구될 것이다. 이 궤도에서 신성의 도달은 안내 세계에서 일어나며, 그것은 하늘 가는 순례자의 초우주 으뜸 영을 영적으로 인식하고 깨닫는 것이다.
26:5.6 (291.6) 하보나의 바깥 궤도의 일이 끝나고 제시된 과정을 통달했을 때, 순례자 조수들은 피보호자를 다음 궤도의 안내 세계로 데리고 가서, 최상위 안내자들의 보호 밑에 맡긴다. 순례자 조수들은 그 전학을 유쾌하고 유익하게 만드는 데 거들려고 언제나 한 철 동안 머무른다.
26:6.1 (292.1) 공간의 승천자들은 일곱째 궤도에서 여섯째 궤도로 옮겨질 때, “영적 졸업생”이라 부르고, 최상위 안내자들의 직접 감독 하에 맡겨진다. 이 안내자들은―무한한 영의 고등 성격자에 속하는―졸업생 안내자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후자는 그 동료 일꾼들과 함께, 하보나의 모든 회로에서, 올라가는 순례자와 내려오는 순례자들 모두에게 봉사한다. 최상위 안내자들은 오직 중앙 우주의 여섯째 궤도에서만 활동한다.
26:6.2 (292.2) 이 궤도에서 승천자는 최상의 신(神)을 새로이 깨닫는다. 진화하는 우주에서 지낸 긴 생애를 통해서, 시간의 순례자는 시공 창조들이 전능하게 전반적으로 통제되는 현실을 점점 더 의식해 왔다. 여기, 이 하보나 회로에서 그들은 시공을 통일하는 중앙 우주 근원―최상위 하나님의 영적 실체―와 마주치는 일이 가까워진다.
26:6.3 (292.3) 나는 이 궤도에서 벌어지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얼마큼 주저한다. 승천자들은 최상위의 성격화된 계심을 전혀 식별하지 못한다. 어떤 면에서, 제7 으뜸 영과 가지는 새로운 관계가 이러한 최상 존재의 접근 불가능성을 보완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기법을 깨달을 수 없어도 상관 없이, 하늘 가는 각 인간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성장, 새로이 통합된 의식, 목적의 새로운 영적 변화, 신에 대한 새 민감성을 체험하는 듯하다. 이것들은 최상 존재의 밝혀지지 않은 활동을 가정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다. 이 신비스러운 작용을 관찰해 온 우리에게는 최상위 하나님이 체험하는 자녀에게 애정을 가지고 바로 그 체험 능력의 한계까지 지적 이해, 영적 통찰력, 인격의 범위를 향상시키는 것처럼 보이며, 이것은 영원하고 실존적인 파라다이스 신들에 도달하기 위해서, 최상 삼위일체의 신성 수준을 파고들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일 때 그들에게 아주 필요하다.
26:6.4 (292.4) 자기 생도가 진급할 만큼 성숙하다고 판단할 때, 최상위 안내자는 생도(生徒)를 70자 위원회에 데리고 오는데, 이 위원회는 6번 회로의 안내 세계에서 검사자로서 수고하는 혼합 집단이다. 최상 존재와 최상 삼위일체를 충분히 이해한다고 이 위원회에서 합격을 받은 뒤에, 순례자는 다섯째 회로로 이동하는 인가를 받는다.
26:7.1 (292.5) 삼위일체 안내자는, 시공 세계에서 온 전진하는 순례자들에게 하보나 훈련을 시키는 봉사자, 다섯째 궤도에서 지칠 줄 모르고 일하는 봉사자이다. 여기서 영적 졸업생은 “신(神) 모험 후보자”로 부른다. 이는 이 궤도에서 삼위일체 안내자들의 지도 하에서, 무한한 영의 성격을 인식하려는 시도에 대비하여, 순례자들이 신성한 삼위일체에 관하여 상급의 가르침을 받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늘 가는 순례자들은 더욱 부담되고 훨씬 더 벅찬 영적(靈的) 노력의 성질을 비로소 깨달으면서, 진정한 연구와 참된 정신적 노력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발견한다. 이 회로의 여러 세계에서 그들이 성취하라고 세운 높은 목표의 요구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 이러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26:7.2 (292.6) 삼위일체 안내자들은 대단히 충실하고 유능하다. 각 순례자는 이 계급에 속하는 한 2차 상천사의 집중된 주목(注目)을 받으며, 온전한 사랑을 누린다. 앞으로 다가오는, 신을 발견하는 모험의 성질과 기법에 관하여 하늘 가는 자들을 가르치는 데 종사하는 이 안내자와 기타 영적 존재 무리의 도움과 조력이 없다면, 시간의 순례자는 결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중에서 처음에 접근이 가능한 성격자도 찾지 못할 것이다.
26:7.3 (293.1) 이 회로에서 훈련 과정을 마친 뒤에, 삼위일체 안내자들은 생도들을 그곳의 안내 세계로 데리고 가서, 신 모험을 하려는 후보자들을 검사하고 인가하는 자로서 활동하는 여러 3자 위원회 중 하나 앞에 그들을 내놓는다. 이러한 위원회는 최후자 1명, 1차 상천사 계급에서 행동 지도자 1명, 공간의 외톨 사자나 파라다이스의 삼위일체를 체험한 아들 1명으로 구성된다.
26:7.4 (293.2) 하늘 가는 혼이 실제로 파라다이스를 향해 떠날 때, 오직 이동 삼원조, 곧 궤도의 상천사 동료, 졸업생 안내자, 그리고 후자에게 늘 붙어 있는 동료 일꾼만 그를 따른다. 하보나의 궤도에서 파라다이스까지 가는 소풍은 시험 여행이다. 승천자는 아직 파라다이스 지위를 가지지 않았다. 우주의 아버지께 도달하고 하보나의 여러 회로에서 마지막 허가를 받고 난 뒤에, 시간 세계의 마지막 휴식을 거치기까지, 그들은 파라다이스에서 거주 지위를 얻지 못한다. 거룩한 휴식이 있은 뒤에, “신성(神性)의 본질”과 “최상의 영”을 취하고, 그래서 영원의 수준에서, 삼위일체가 계신 앞에서, 정말로 비로소 활동하기까지 이를 얻지 못한다.
26:7.5 (293.3) 승천자를 동반하는 이동 삼원조는 그가 삼위일체의 영적 빛의 지리적 계심을 찾아낼 수 있게 만들라고 요구되지 않는다. 차라리, 충분히 성격을 인식할 정도로 순례자가 무한한 영을 인식하고 알아보며 이해하는 어려운 과제에, 그에게 모든 가능한 도움을 주는 것이 요구된다. 파라다이스에서 승천 순례자는 누구나 삼위일체의 지리적 계심, 곧 위치에 계심을 알아볼 수 있고, 대다수는 신들, 특히 셋째 분의 지적(知的) 실체와 접촉할 수 있지만, 모두가 아버지와 아들의 영적 계심의 실체를 인식하거나, 일부라도 이해할 수 있지는 않다. 우주의 아버지를 최소로 영적으로 이해하는 것조차 더욱 어렵다.
26:7.6 (293.4) 무한한 영의 추구에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는 드물다. 피교육자가 이 단계의 신 모험에 성공했을 때, 삼위일체 안내자들은 하보나의 넷째 궤도에 있는 아들 탐지자들의 사명에 그들을 이동시키려고 준비한다.
26:8.1 (293.5) 넷째 하보나 회로는 가끔 “아들들의 회로”라고 부른다. 영원한 아들을 이해하는 접촉을 가지려고, 하늘 가는 순례자들은 이 회로의 세계로부터 파라다이스로 간다. 한편 내려오는 순례자들은 이 회로의 여러 세계에서 시공의 창조 아들들의 성품과 임무를 새로이 이해하게 된다. 이 회로에는 파라다이스 미가엘 예비군이, 하늘 가는 순례자와 내려오는 순례자, 양자에게 서로 봉사하는 특별 서비스 학교를 운영하는 일곱 세계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미가엘 아들의 여러 세계에서, 시간의 순례자와 영원의 순례자가 처음으로 진정하게 서로에 대하여 이해하게 된다. 여러 면에서, 이 회로에서 겪는 체험은 하보나 체류 전체에서 가장 흥미를 자아낸다.
26:8.2 (294.1) 아들 탐지자는 넷째 회로에서 승천하는 필사자에게 시중드는 상천사이다. 영원한 아들과 삼위일체의 관계를 깨닫도록 후보자를 준비시키는 일반 작업 외에도, 이 아들 탐지자는 피교육자가 세 가지 일에 온전히 성공하도록 충분히 가르쳐야 하는데, 첫째는 적절히 아들을 영적으로 인식하는 것이요, 둘째는 아들의 성격을 만족스럽게 인식하는 것, 셋째는 무한한 영의 성격과 아들을 적절히 구분하는 것이다.
26:8.3 (294.2) 무한한 영에 도달한 뒤에, 아무 시험도 더 시행되지 않는다. 안쪽 여러 궤도에서 있던 시험은, 순례 후보자가 신들의 가림 속에 안겨 있을 때의 성적이다. 진급은 순전히 그 개인의 영적 성향에 따라서 결정되며, 신들 외에 아무도 주제넘게 이를 소유했는가 판결하지 않는다. 실패할 경우에 아무런 이유도 대지 않고, 후보자 자신이나 그들의 개인 교사와 안내자도 결코 꾸지람을 받거나 비판을 받지 않는다. 파라다이스에서 실망(失望)은 결코 실패로 여기지 않는다. 뒤로 미루는 것을 한 번도 굴욕으로 여기지 않고, 시간 세계에서 명백한 실패를 결코 영원 속에서 심각한 지연과 혼동하지 않는다.
26:8.4 (294.3) 신에 도달하는 모험에서, 실패로 보이는 것으로 인한 지연(遲延)을 많은 순례자가 겪지는 않는다. 거의 모두가 무한한 영에 도달한다. 하지만 제1 초우주에서 온 순례자가 가끔 처음 시도에 성공하지 못한다. 영에 도달한 순례자들은 아들을 발견하지 못하는 일이 드물다. 첫 모험에서 실패하는 자 가운데 거의 모두가 제3 및 제5 초우주에서 온다. 영과 아들을 모두 발견한 뒤에, 아버지에게 이르는 처음 모험에서 실패하는 자의 대다수가 제6 초우주에서 온다. 하지만 제2와 제3 초우주에서 온 소수도 마찬가지로 성공하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이 이 명백한 실패에 좋고도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가리키는 듯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지연이다.
26:8.5 (294.4) 신에 도달하는 모험에 실패한 후보자들은 배치장, 곧 1차 상천사 무리의 관할에 맡겨지며, 적어도 1천 년 동안, 공간 영역의 과업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결코 자기가 태어난 초우주로 돌아가지 않으며, 두 번째 신 모험을 준비하는 재훈련을 받기에 가장 형편이 좋은 초월 우주로 간다. 이 근무를 마치고 나서, 자신의 제안에 따라서 그들은 하보나의 바깥 궤도로 돌아오며, 생애가 중단되었던 궤도로 즉시 호송되고, 당장에 신에 도달하는 모험을 하려고 다시 준비를 시작한다. 2차 상천사는 피교육자를 2차 시도에서 성공적으로 안내하는 일을 결코 그르치지 않는다. 바로 이 상천사 봉사자와 기타 안내자들도 이 둘째 모험을 하는 동안에 이 후보자를 반드시 따라다닌다.
26:9.1 (294.5) 순례하는 사람이 하보나의 셋째 궤도에 이를 때, 그는 아버지 안내자들의 보호 밑으로 들어오는데, 이들은 상천사 봉사자 중에서 나이가 더 지긋하고, 상당히 노련하고, 대단히 경험이 많다. 이 회로의 여러 세계에서, 아버지 안내자들은 지혜 학교와 기술 학부들을 유지하며, 거기에는 중앙 우주에서 거하는 모든 존재가 선생으로서 근무한다. 영원에 도달하는 이 초월 모험에서, 시간 세계의 인간에게 소용될 만한 것은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26:9.2 (294.6) 거쳐야 될 회로들이 남아 있는데도, 우주의 아버지께 도달하는 것은 영원에 이르는 여권이다. 따라서 세월의 마지막 모험이 바야흐로 시작되고, 공간에서 온 또 하나의 인간이 영원의 입구를 통해서 파라다이스에 들어오기를 추구한다고 이동 삼원조가 발표할 때는 3번 궤도의 안내 세계에서 중대한 때이다.
26:9.3 (295.1) 세월의 시험은 거의 끝났고, 영원을 향한 달리기는 거의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불확실한 시절은 끝나고 있고, 의심의 유혹은 사라지고 있으며, 완전하라는 명령은 지켜 왔다. 지적 존재의 맨 밑바닥에서부터, 시간 세계의 인간이자 물질 인격자가 공간의 진화 구체들로 올라갔다. 이것은 승천 계획이 가능함을 증명하며, 또한 우주의 아버지가 여러 세계에 있는 비천한 인간에게 주신 명령의 정의(正義)와 올바름을 언제까지나 보여준다: “내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26:9.4 (295.2) 한 걸음 한 걸음, 한 생명 한 생명, 한 세계 한 세계, 하늘 가는 생애를 통달하였고, 신에 이르는 목표를 이루었다. 살아남는 일은 완전히 마무리되고, 완전은 최상의 신성 속에 넘친다. 영원이 세월을 삼켜 버린다. 우주의 아버지와 경건하게 하나가 되고 조화를 이룬 가운데, 공간은 사라져 버린다. 하보나의 방송은 영광스러운 공간 보고서를 번개처럼 보내며, 이것은 진실로, 진화적 승천을 통해서 동물의 성질과 물질 기원을 가진 양심적 인간들이 실제로, 영원히, 하나님의 완전해진 아들이 되었다는 좋은 소식이다.
26:10.1 (295.3) 둘째 궤도에 있는 상담 및 고문 상천사들은, 시간 세계의 자녀들에게 영원의 생애에 관하여 가르치는 교육자이다. 파라다이스에 도달하면 새롭고 더욱 높은 수준의 책임이 따르며, 둘째 궤도에서 머무르는 것은 이 헌신적 상천사의 유익한 상담을 받을 기회를 충분히 준다.
26:10.2 (295.4) 신에 도달하려는 첫 시도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자는, 초우주 근무로 돌아가기 전에, 실패한 궤도에서 바로 둘째 궤도로 올라간다. 따라서 상담자와 고문들은 또한 이 실망한 순례자에게 상담자와 위로자로서 수고한다. 그들은 가장 큰 실망에 막 부닥쳤고, 이 실망은 사다리를 타듯, 혼돈에서 영광으로 올라갔던, 수많은 그러한 체험과―크기만 제외하고―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들은 체험의 잔을 찌꺼기까지 마셨다. 시간 세계에서 온 일시적 실망을 겪는 아이들에게 사랑으로 봉사하는 가장 높은 부류의 봉사자로서, 그들이 초우주 근무로 일시 돌아가는 것을 나는 보아 왔다.
26:10.3 (295.5) 2번 궤도에서 오래 머무른 뒤에, 실망한 피교육자들은 이 궤도의 안내 세계에서 완전 회의의 검사를 받고, 하보나 시험에 합격한 것으로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이것이, 비영적 지위에 관한 한, 그들에게 실제로 신에 이르는 모험에 성공한 것과 똑같은 지위를 시간 세계의 우주에서 부여한다. 그러한 후보자들의 영은 전적으로 용납할 만했다. 그들의 실패는 접근 기법의 어떤 국면이나, 그들의 체험적 배경의 어느 부분에 선천적이었기 때문이다.
26:10.4 (295.6) 그리고 나서 회로의 상담자들이 그들을 파라다이스에 있는 배치장들 앞으로 인도하며, 그들은 공간 세계에서 시간 근무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들은 기쁨과 반가움으로 지난 시절과 시대의 과제로 돌아간다. 다른 어느 날 그들이 가장 실망했던 회로(回路)로 돌아와서, 그들은 신에 이르는 모험을 새롭게 시도할 것이다.
26:10.5 (296.1) 둘째 회로에서 성공한 순례자에게는 진화의 불확실한 자극이 이미 끝났지만, 영원한 임무로 떠나는 모험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이 회로에서 머무르는 것이 온통 쾌적하고 상당히 유익하기는 하지만, 이전의 여러 궤도에 있었던, 기대에 부푼 정열이 얼마큼 모자란다. 그런 때,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의 세계들로 돌아가서 다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정말로 바라면서, 즐겁지만 서운하여 기나 긴 투쟁을 뒤돌아보는 순례자가 많다. 이것은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너희 필사자가 젊은 날과 초기 시절의 고생(苦生)을 가끔 뒤돌아보면서, 너희의 일생을 다시 한 번 살 수 있을까 참으로 바라는 것과 같다.
26:10.6 (296.2) 그러나 가장 안쪽 회로를 통과하는 일은 바로 눈앞에 놓여 있고, 그 뒤에 곧 마지막으로 이동하는 잠이 끝나고 영원한 생애의 새로운 모험이 시작될 것이다. 둘째 궤도에서 상담자와 고문들은 이 마지막 큰 휴식을 위해서 피교육자의 준비를 시작하며, 이것은 하늘 가는 생애의 시대적 단계 사이에 언제나 끼어 있는 불가피한 잠이다.
26:10.7 (296.3) 우주의 아버지에 도달한 승천 순례자들이 둘째 궤도의 체험을 마칠 때, 늘 따라다니는 졸업생 안내자가 그들을 마지막 궤도에 입장시키는 명령을 내린다. 이 안내자는 내부 회로까지 피교육자를 몸소 안내하며, 거기서 휴식 보완자의 보호에 맡긴다. 이 휴식 보완자는 여러 하보나 세계 회로에서 시간의 순례자에게 봉사하는 데 배치된 마지막 2차 상천사 계급이다.
26:11.1 (296.4) 마지막 회로에서 하늘 가는 자가 보내는 시간의 상당 부분은 다가오는 문제, 파라다이스 거주 문제를 계속 연구하는 데 들어간다. 광대하고 다채로운 무리의 존재들은, 그 대다수가 밝혀지지 않는데, 이 안쪽 고리에 있는 여러 하보나 세계에서 영구하게 거주하는 자와 일시 거주하는 자들이다. 이 다양한 부류의 혼합은 휴식을 보완하는 상천사들에게 풍부한 상황을 환경으로 마련해 준다. 하늘 가는 순례자의 교육을 촉진시키려고, 특히 파라다이스에서 곧 마주치게 될 많은 무리의 존재에게 적응하는 문제에 관하여, 그들은 그 환경을 효과 있게 사용한다.
26:11.2 (296.5) 이 안쪽 회로에서 사는 자 가운데 인간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들이 있다. 1차 및 2차 상천사는 이 아들들의 합동 군단의 일반 보호자이며, 이 군단은 필사 최후자들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자손, 그리고 파라다이스 시민들의 비슷한 후손을 포함한다. 이 아들들 중에서 더러는 삼위일체의 품에 안기고 초우주 정부에 임명되며, 더러는 다양하게 배치되지만, 대다수는 안쪽 하보나 회로의 완전한 여러 세계에서 함께 합동 군단에 집결된다. 여기서, 상천사의 감독 밑에, 특별하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높은 파라다이스 시민의 군단이, 어떤 미래의 일을 위하여 그들을 준비시킨다. 이 파라다이스 시민들은 그랜드판다 시절 이전에, 영원부터 늘 계신 이들의 첫 집행 조수였다. 이 독특한 두 집단, 삼자일체 체험으로 생긴 존재들이 먼 앞날에 함께 일하리라고 추측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파라다이스에 있는 삼위일체를 체험한 최후자 군단의 예비군이 그들의 공통 운명이라는 것이 그 중에 가장 작은 이유는 아니다.
26:11.3 (296.6) 이 가장 안쪽 회로에서, 올라가는 순례자와 내려오는 순례자들이 다 서로 사귀고, 또한 인간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들하고도 사귄다. 그들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이 아들들은 서로 교제(交際)함으로 큰 소득을 얻고, 필사 최후자들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들, 파라다이스 시민들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들이 서로 친교하는 것을 촉진하고 보장하는 것이 상천사의 특별 임무이다. 휴식을 보완하는 상천사들은 훈련보다 그들이 다양한 집단과 이해하는 관계를 갖도록 조장하는 데 더 관심을 가진다.
26:11.4 (297.1) 필사자는 “너희의 파라다이스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는 파라다이스 명령을 받았다. 삼자일체 체험으로 태어난 이 합동 군단의 아들들에게, 감독하는 상천사는 그치지 않고 선포한다: “파라다이스 창조 아들들이 너희의 하늘 가는 형제들을 알고 사랑하는 것 같이, 저희를 이해하라.”
26:11.5 (297.2) 필사 인간은 하나님을 발견해야 한다. 창조 아들은 사람―의지(意志)를 가진 가장 낮은 인간―을 찾아내기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의심할 여지 없이, 창조 아들과 그의 필사 자녀들은 어떤 앞날에 미지의 우주 봉사를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 양자가 체험적 우주의 영역 전체를 거쳐 가며, 그들의 영원한 임무를 위하여 그렇게 교육과 훈련을 받는다. 우주에 두루, 사람다운 것과 신다운 것의 독특한 이 배합, 곧 인간과 창조자의 혼합이 일어나고 있다. 생각 없는 사람들은, 특별히 약한 자에 대해서, 또 곤궁한 자를 위하여, 신의 자비와 친절이 전시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닮았음을 가리킨다고 말해 왔다. 이것은 얼마나 큰 잘못인가! 오히려, 인간이 자비와 인내심을 그렇게 보이는 것은, 필사 인간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이 깃들며, 결국 신이 인간을 자극한다는 증거로 여겨야 한다.
26:11.6 (297.3) 첫째 궤도에서 체류가 거의 끝날 때, 하늘 가는 순례자는 처음으로 1차 계급 상천사인 휴식 선동자를 만난다. 그들은 영원의 문턱에 서 있는 자에게 인사하고, 마지막으로 부활하는 이동 잠을 위한 준비를 마치려고 오는 파라다이스 천사이다. 네가 안쪽 궤도를 거치고 세월의 마지막 잠에 들어가서 영원의 부활을 체험하기까지, 너는 참으로 파라다이스의 아이가 아니다. 완전하게 된 순례자는 이 휴식을 시작하고 하보나의 첫째 궤도에서 잠에 들어가지만, 파라다이스 기슭에서 깨어난다. 영원한 섬으로 올라가는 모든 사람 가운데, 이렇게 도착하는 자만 영원의 아이이다. 다른 자들은 방문객으로서, 거주 지위가 없는 손님으로 간다.
26:11.7 (297.4) 이제, 하보나 생애의 절정에서, 안쪽 회로의 안내 세계에서 너희 필사자가 잠에 들어가면서, 너희의 기원 세계에서 필사자가 눈을 감고 자연스러운 죽음의 잠에 빠졌을 때 했던 것처럼, 또 하보나로 가는 여행을 위해서 준비하는 오랜 이동의 꿈결에 들어갈 때 했던 것처럼, 혼자 휴식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제, 도달하여 휴식을 위해 준비할 때, 첫째 궤도에서 오랫동안 같이 있던 너의 동료가 네 옆으로 온다. 그는 너의 이동이 완결되었고, 네가 오직 완전의 마지막 손질을 기다린다는 하보나의 서약으로서, 너와 하나가 되어 휴식에 들어가려고 준비하는 훌륭한 휴식 보완자이다.
26:11.8 (297.5) 정말로 너의 첫 이동은 죽음이었고, 둘째는 이상적인 잠이었으며, 이제 셋째 변화는 참된 휴식, 오랜 만에 누리는 휴양이다.
27:0.1 (298.1) 1차 상천사는 영원한 파라다이스 섬에서 신들을 섬기는 하늘 일꾼이다. 그들이 한 번이라도 빛과 올바름의 길에서 벗어났다는 소문이 들린 적이 없다. 그 점호는 완전하며, 영원으로부터 이 훌륭한 무리 가운데 하나도 타락한 적이 없다. 이 높은 상천사는 완전한 존재요, 최고로 완전하지만, 그들은 초한하지 않고 절대 존재도 아니다. 그 본질이 완전하니까, 무한한 영의 이 아이들은 서로 바꾸어서, 그리고 다양한 임무의 모든 단계에서, 뜻대로 일한다. 중앙 우주에서 1천 년마다 모이는 여러 집회와 집단 재회에 참여하지만, 그들은 파라다이스 바깥에서 널리 활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신들의 특별 사자로서 여행하며, 큰 무리가 법률 고문으로 승진된다.
27:0.2 (298.2) 1차 상천사들은 반란 때문에 고립된 세계에서 봉사하는 천사 무리들을 지휘하는 책임을 맡기도 한다. 한 파라다이스 아들이 그러한 세계에 수여되고, 그 임무를 완수하고, 우주의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영접받고, 이 고립된 세계에 인가받은 구원자로 돌아올 때, 1차 상천사(上天使) 하나가 새로 회복된 이 구체에서 근무하는 봉사 영들의 지휘를 맡으라고 반드시 배치장들의 지명을 받는다. 이 특별 근무에 종사하는 상천사는 정기적으로 갈린다. 유란시아에서 현재 “세라핌 우두머리”는 그리스도 미가엘이 수여된 시절 뒤로, 이 계급에서 두 번째로 근무하는 자이다.
27:0.3 (298.3) 영원으로부터 1차 상천사는 빛의 섬에서 봉사해 왔고, 공간 세계들까지 지도자의 임무를 띠고 떠나갔다. 그러나 시간 세계에서 온 하보나 순례자들이 파라다이스에 도착한 뒤에, 그들은 오직 현재 분류된 대로 활동해 왔다. 이 높은 천사들은 주로 지금 다음 일곱 가지 봉사 계급에서 수고한다:
27:0.11 (298.11) 하늘 가는 순례자가 실제로 파라다이스 거주 자격을 얻기까지, 순례자는 이 상천사의 직접 영향 밑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위에 천사들을 지명한 순서와 반대로 순례자들은 이 천사들의 지휘 하에서 훈련 경험을 쌓는다. 다시 말해서, 너는 휴식 선동자의 보호 밑에 파라다이스 생애를 시작하고, 중간에 끼어 있는 여러 계급과 연속된 계절을 보낸 뒤에, 예배 인도자와 함께 훈련 기간을 마친다. 그리고 나서 너는 최후자의 끝없는 생애를 시작할 준비가 된다.
27:1.1 (299.1) 휴식 선동자는 파라다이스의 검열자이며, 가운데 섬으로부터 하보나의 안쪽 회로에 가서, 거기서 그들의 동료, 곧 2차 계급 상천사인 휴식 보완자와 협력한다. 파라다이스를 즐기는 데 한 가지 필수인 것은 휴식, 신성한 휴식이다. 이 휴식 선동자는 시간의 순례자가 영원으로 입문하도록 준비시키는 최종 교육자이다. 선동자들은 중앙 우주에서 마지막 도달 궤도에서 일을 시작하고, 순례자가 마지막 이동의 잠에서 깨어날 때 그 일을 계속하며, 이 잠은 공간 세계에서 온 한 인간을 졸업시켜서 영원의 나라로 보낸다.
27:1.2 (299.2) 휴식은 일곱 가지 성질이 있다. 낮은 생명 계급에는 잠자는 휴식과 놀이의 휴식이 있고, 더 높은 존재에게는 발견이 있고, 가장 높은 부류인 영 성격자에게는 예배가 있다. 또한 에너지를 흡수하는 정상 휴식이 있으니, 곧 존재들을 물리적 에너지나 영적 에너지로 다시 충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동하는 잠이 있으니, 곧 천사에 둘러싸일 때, 한 구체에서 다른 구체로 통과할 때 겪는 무의식(無意識)의 잠이다. 이 모든 것과 전혀 다른 것은 변형하는 깊은 잠이니, 곧 한 존재 단계로부터 다른 단계로, 한 생명에서 다른 생명으로, 한 존재 상태로부터 다른 존재 상태로 이동하는 휴식이다. 이러한 잠은 어느 한 지위의 여러 단계를 거치는 진화와 반대로, 실제 우주 지위로부터 이동할 때 언제나 따르는 잠이다.
27:1.3 (299.3) 그러나 마지막으로 변신하는 잠은, 승천 생애에서 연달아 지위의 달성을 표시했던, 이전의 이동하는 잠보다 더 큰 무엇이다. 이렇게 함으로 시공에서 온 인간은 시간과 공간이 없는 파라다이스 거처에서 거주 자격을 얻으려고, 일시적이고 공간적인 것의 맨 안쪽 한계를 건너간다. 필사 인간이 죽음에서 살아남을 때 세라핌 및 관련된 존재들이 필수였던 것과 똑같이, 휴식 선동자와 보완자는 이 초월적 변신에 필수이다.
27:1.4 (299.4) 너는 마지막 하보나 회로에서 휴식에 들어가고, 파라다이스에서 영원히 부활한다. 거기서 영적으로 다시 인격화하면서, 너는 이내 휴식 선동자를 알아볼 터인데, 그는 하보나의 맨 안쪽 회로에서 마지막 잠에 빠지게 한 바로 그 1차 상천사로서, 너를 영원한 기슭으로 반가이 맞는다. 그리고 네 신분의 보관을 우주의 아버지의 손에 맡기려고 다시 한 번 준비하면서, 마지막으로 크게 마음껏 믿어 본 것을 너는 기억할 것이다.
27:1.5 (299.5) 세월의 마지막 휴식은 이미 가졌고, 마지막 이동의 잠도 맛보았다. 이제 너는 영생에 이르러 영원한 거처의 기슭에서 깨어난다. “더 이상 잠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의 계심과 그의 아들은 너희 앞에 있고, 너희는 영원히 그의 일꾼이로다. 너희는 그의 얼굴을 보았으니, 그의 이름은 너희의 영이로다. 거기에는 밤이 없을지며, 저희는 햇빛이 필요 없나니, 위대한 근원 중심이 저희에게 빛을 주심이라. 저희는 영원토록 살고 또 살리라. 하나님은 저희 눈에서 눈물을 다 닦아 주시리라. 더 이상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음도 없으며, 아픔도 더 없을지니, 예전의 것들이 지나가 버렸음이라.”
27:2.1 (300.1) 이들은 모두 세 계급의 이 천사들―1차ㆍ2차ㆍ3차 상천사―의 조직을 주관하기 위하여, 우두머리 상천사, 곧 “최초의 원본 천사”가 때때로 지명하는 무리이다. 그들 공동의 우두머리, 곧 이 모든 영 성격자를 늘 주관하는 파라다이스의 처음 천사의 기능을 제외하고, 하나의 집단으로서 상천사들은 온전히 자치하며 자체가 통제한다.
27:2.2 (300.2) 파라다이스의 영화롭게 된 필사 거주자들이 최후 군단에 입단이 허가되기 전에, 배치 천사들은 그들과 많이 상관을 가진다. 연구와 교육은 파라다이스에 도착한 자의 유일한 직업이 아니다. 파라다이스에서 최후자가 되기 전에 교육받는 체험에서 봉사도 또한 필수 부분이다. 그리고 하늘 가는 필사자들은 한가한 시간이 있을 때, 상천사 배치장의 예비군과 사귀는 성향을 나타내는 것을 나는 보아 왔다.
27:2.3 (300.3) 너희 필사 승천자들이 파라다이스에 이를 때, 너희의 사회 관계에는, 신분이 높은 신다운 존재들의 무리, 그리고 영화롭게 된 낯익은 동료 필사자 무리와 접촉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이 포함된다. 너희는 3천이 넘는 다른 계급의 파라다이스 시민, 여러 집단의 초월자, 수많은 다른 종류의 영구 및 일시 파라다이스 거주자와 또한 사귀어야 하는데, 후자는 유란시아에서 아직 밝혀진 적이 없다. 파라다이스의 이러한 막강한 지능들과 지속된 접촉을 가진 뒤에, 천사 부류의 지성과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편안하다. 그들은 시간 세계의 필사자에게, 그렇게 오랫동안 접촉하고 유쾌하게 사귀어 왔던 세라핌들을 생각나게 한다.
27:3.1 (300.4) 생명의 눈금에서 너희가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우주 윤리를 더욱 눈여겨보아야 한다. 윤리(倫理) 의식은 단지 한 개인이, 어떤 다른 개인, 모든 다른 개인의 존재에 본래부터 있는 권리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 윤리는 개인 및 집단 관계에 대한, 필사자 아니 상물질 개념조차 훨씬 뛰어넘는다.
27:3.2 (300.5) 시간의 순례자는 파라다이스의 영광의 높이까지 오랫동안 올라가면서 마땅히 윤리를 가르침 받고 적절히 배워 왔다. 공간의 출생 세계로부터 안으로 올라가는 생애가 펼쳐짐에 따라서, 승천자는 항상 넓어지는 우주 동료 모임에 여러 집단을 계속 더했다. 새로 만난 동료 무리마다, 인식하고 좇아야 할 또 하나의 윤리 수준에 부딪쳤고, 이것은 하늘 가는 필사자가 파라다이스에 이를 때가 되어, 윤리적 해석에 관하여 정말로 유익하고 친절하게 조언해 줄 누군가가 필요할 때까지 계속된다. 그들에게 윤리를 가르칠 필요는 없지만, 아주 많은 새로운 것을 접촉하는 특별한 과제에 부닥치는 대로, 그렇게 땀흘리며 배운 것을 그들에게 적절히 해석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27:3.3 (300.6) 거주 지위를 얻는 때로부터 필사 최후자 군단에 정식으로 입단하기까지 이어지는 파란 많은 기간에, 윤리 해석자들은 파라다이스에 도착하는 자가 수많은 무리의 위엄 있는 존재들에게 적응하도록 보조하는 데 그들에게 귀중한 도움이 된다. 하늘 가는 순례자는 수많은 부류의 많은 파라다이스 시민을 하보나의 일곱 회로에서 이미 만난 적이 있다. 영화롭게 된 필사자는 또한 하보나 안쪽 회로의 합동 군단에 소속된, 인간이 삼자일체로 낳은 아들들과 친밀한 접촉을 즐겼고, 여기서 이 존재들은 그들의 교육의 상당 부분을 받고 있다. 그리고 다른 회로에서, 하늘 가는 순례자는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체계에 속하는,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거주자를 만났고, 그들은 거기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앞날의 임무에 대비하여 집단 훈련을 추구하고 있다.
27:3.4 (301.1) 이 하늘의 사귐은 모두, 항상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하늘 가는 필사자로서, 너희는 잇따라 만나는 이 우주 동반자들, 그리고 그렇게 수많은 계급의 동료, 갈수록 더욱 신다운 동료들로부터 이익을 얻을 뿐 아니라, 너희도 이 친교하는 존재들 각자에게 바로 너의 인격과 체험에서 무엇인가 준다. 이것은 시공의 진화 세계에서 온 하늘 가는 한 필사자와 사귀었기 때문에 그들 모두를 다르고 더 좋게 만든다.
27:4.1 (301.2) 파라다이스 관계의 윤리는 의미 없는 형식이 아니요, 부자연한 계급 제도를 강요하는 것도 아니지만, 차라리 본래부터 있는 예절이다. 이 윤리에 대하여 이미 넉넉히 가르침을 받았으니, 하늘 가는 필사자는 상천사인 행동 지도자의 조언을 받는 것이 유익하다. 이 지도자들은 파라다이스 사회의 새 회원들에게, 중앙의 빛과 생명의 섬에서 머무르는 높은 존재들의 관습, 완전히 행동하는 관습을 가르친다.
27:4.2 (301.3) 조화(調和)는 중앙 우주의 기본음이며, 탐지할 수 있는 질서가 파라다이스를 지배한다. 적절한 행위는, 지식의 길로, 그리고 철학을 통해서, 자연히 우러나오는 예배의 영적 경지까지 진보하는 데 필수이다. 신에게 가까이 가는 데는 신다운 기법이 있고, 이 기법을 터득하는 것은 순례자가 파라다이스에 도착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기법의 정신은 여러 하보나 궤도에서 전해 받았지만, 오로지 시간의 순례자가 실제로 빛의 섬에 이른 뒤에야 그들의 훈련에 마지막 손질을 더할 수 있다.
27:4.3 (301.4) 파라다이스의 모든 행동은 전적으로 저절로 일어나고, 어떤 의미에서도 자연스럽고 자유롭다. 그러나 여전히, 영원한 섬에는 일을 처리하는 적절하고 완전한 길이 있으며, 행동 지도자들은 언제나 “문 안에 들어 선 낯선 자” 옆에서 가르치고 발걸음을 안내함으로 그들이 완전히 마음 편안하게 해주고, 동시에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피한 그 혼란과 불안을 순례자가 피하게 해준다. 오로지 이러한 주선으로 끝없는 혼란을 피할 수 있고, 혼란은 결코 파라다이스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27:4.4 (301.5) 이 행동 지도자들은 정말로 영화롭게 된 선생이자 안내자로서 봉사한다. 그들은 주로, 거의 끝없이 이어지는 새로운 상황과 낯선 관습에 관하여 새로 온 필사 거주자를 가르치는 데 관여한다. 그 여행을 위하여 온갖 준비를 오랫동안 갖추고 거기까지 긴 여행이었는데도, 파라다이스는 마침내 거주 지위를 얻는 자에게 여전히 말할 수 없이 이상하고 뜻밖에도 새롭다.
27:5.1 (301.6) 상천사인 지식 관리자는 파라다이스에서 거주하는 자는 누구나 알고 읽는 고급의 “살아있는 편지”이다. 그들은 진리의 신성한 기록이요, 참 지식을 담은 살아 있는 책이다. 너희는 “생명의 책”에 담긴 기록에 관하여 들은 적이 있다. 지식 보관자는 꼭 그러한 살아 있는 책이요, 신다운 생명과 최고의 보장이 담긴 서판, 영원한 서판에 새긴 완전한 기록이다. 실제로 그들은 살아 있는, 자동 도서관이다. 우주의 여러 가지 사실은 이 1차 상천사에게 선천적인 것이요, 실제로 이 천사들 안에 기록되어 있다. 이 영원의 진리와 시간 세계의 정보를 담은 완전하고 충만한 저장소, 이들의 머리 속에 비진실(非眞實)이 투입되는 것은 또한 본래부터 불가능하다.
27:5.2 (302.1) 이 관리자들은 영원한 섬의 거주민을 위하여 비공식 교육 과정을 운영하지만, 그들의 주요 기능은 참조와 확인이다. 파라다이스 체류자는 누구나, 알고 싶은 특별한 사실이나 진실이 담긴 살아 있는 창고를 뜻대로 자기 옆에 두어도 좋다. 섬의 맨 북단에는 살아 있는 지식 발견자들이 예비되어 있고, 그들은 구하는 정보를 가진 무리의 지도자를 지명할 것이다. 네가 알고 싶어 하는 바로 그것인 명석한 존재가 당장에 나타날 것이다. 너는 몰두하고 있는 페이지로부터 이제 더 깨우침을 추구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너는 살아 있는 정보와 얼굴을 맞대고 벗한다. 따라서 너는 지식의 최종 관리자인 살아 있는 존재들로부터 최고의 지식을 얻는다.
27:5.3 (302.2) 네가 정확히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 되는 바로 그 상천사를 찾아낼 때, 너는 모든 우주의 알려진 사실을 다 발견할 것이다. 이는 지역 우주 및 초우주의 세라핌 및 2품 천사로부터 하보나에 있는 3차 상천사인 우두머리 기록자에 이르기까지, 이 지식 관리자들은 기록 천사들의 광대한 연락망에서 마지막이요 살아 있는 요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살아 있는 지식의 축적은 파라다이스의 공식 기록과 다르며, 이것은 우주 역사의 누적된 요약(要約)이다.
27:5.4 (302.3) 진리의 지혜는 중앙 우주의 신에 기원을 가지지만, 지식, 곧 경험적 지식은 대체로 시간과 공간의 영토에서 시작된다―따라서 하늘 기록자들이 후원하는, 기록 세라핌과 상천사로 구성된 광대한 초우주 조직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27:5.5 (302.4) 우주의 지식을 선천적으로 소유하는 이 1차 상천사들은 또한 그 지식을 정리하고 분류하는 것도 책임을 진다. 자신들을 온 우주의 살아 있는 참고 도서관으로 만들면서 그들은 지식을 일곱 가지 큰 체제로 분류했고, 각 체제에는 약 1백만 소부문이 있다. 파라다이스 거주민이 광대하게 저장된 이 지식을 쉽게 참조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지식 관리자들의 자원하는 지혜로운 노력 때문이다. 이 관리자들은 또한 중앙 우주에서 높은 선생이며, 어느 하보나 회로의 어떤 존재에게도 그들의 살아 있는 보물을 아낌없이 나누어준다. 그들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법정에서 널리, 그러나 간접으로 이용된다. 그러나 중앙 우주와 초우주에서 이용할 수 있는 이 살아 있는 도서관을 지역 우주는 이용할 수 없다. 오로지 간접으로, 그리고 거울 작용을 통해서 파라다이스 지식의 혜택을 지역 우주에서 확보한다.
27:6.1 (302.5) 예배로 얻는 최고의 만족 다음에는 철학의 유쾌함이 있다. 네가 너무나 높이 올라가거나 승진해서,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철학의 이용을 요구하는 신비가 천 가지가 남지 않은 적은 결코 없다.
27:6.2 (302.6) 파라다이스의 철학 대가(大家)들은 우주의 문제를 풀려고 애쓰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원주민과 하늘 가는 거주민의 생각을 인도하기를 기뻐한다. 철학 대가인 이 상천사들은 “하늘의 현자”요, 미지를 통달하려는 노력으로, 진실한 지식과 경험의 사실을 이용하는 지혜로운 존재이다. 그들이 있으면, 지식은 진리에 이르고 체험은 지혜의 높이로 올라간다. 공간에서 온 하늘 가는 인격자들은 파라다이스에서 존재의 절정을 체험한다. 지식이 있고 진실을 알고 있으니, 그들은 철학적으로 생각해도―진리를 생각해도―좋다. 궁극위의 개념을 깨달으려고 애쓰고, 아니 절대자들의 기법을 파악하려고 애써도 좋다.
27:6.3 (303.1) 광대한 파라다이스 영토의 남단(南端)에서, 철학 대가들은 지혜의 70 가지 기능 분과에서 공들인 과목을 가르친다. 여기서 그들은 무한자의 계획과 목적에 대하여 토론하며, 그들의 지혜를 이용하는 모든 존재의 체험을 조정하고 그 지식을 통합하려고 애쓴다. 그들은 다양한 우주 문제에 관하여 상당히 전문화된 태도를 개발해 왔지만, 그들의 마지막 결론은 언제나 한결같이 일치한다.
27:6.4 (303.2) 이 파라다이스 철학자들은 모든 가능한 교육 방법으로 가르치며, 이것은 하보나의 상급 도표(圖表) 기법과 어떤 파라다이스 정보 통신 방법을 포함한다. 지식을 배포하고 생각을 전달하는 이 모든 상급 기법은, 최고로 발달된 인간 지성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파라다이스에서 1시간 교육받는 것은 유란시아에서 1만 년 동안 낱말을 기억하는 방법과 맞먹을 것이다. 너희는 이러한 통신 기법을 이해할 수 없다. 단지 필사자의 체험에서 아무것도 이 기법과 견줄 수 없고, 이에 비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27:6.5 (303.3) 철학 대가들은 공간 세계에서 올라온 존재들에게 온 우주에 대한 그들의 해석을 전하는 데 최고의 기쁨을 느낀다. 철학의 결론은 결코, 아는 사실과 체험하는 진리처럼 고정될 수 없다. 그래도 풀리지 않은 영원의 문제와 절대자들의 행위에 대하여 이 1차 상천사들의 강연을 듣고 나서, 통달하지 못한 이 문제들에 관하여 너희는 확실하고 오래 가는 만족감을 느낄 것이다.
27:6.6 (303.4) 파라다이스의 이 지적(知的) 연구는 방송되지 않는다. 완전한 철학은 몸소 자리에 있는 자에게만 소용된다. 회전하는 우주들은 오로지 이 체험을 겪은 자, 그리고 나중에 이 지혜를 바깥으로 공간 우주로 가지고 간 자로부터만 이 가르침을 배운다.
27:7.1 (303.5) 신을 예배하는 것은 모든 창조된 지적 존재의 가장 높은 특권이요 첫째 의무이다. 예배는 창조자들이 인간과 밀접하고 개인적 관계를 가진다는 진실과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행위, 의식하는 즐거운 행위이다. 예배의 질은 인간이 이해하는 깊이에 따라서 결정된다. 신들의 무한한 특성을 더욱 알게 됨에 따라서, 창조된 존재들이 아는 바, 궁극에 최고의 체험적 기쁨과 가장 아름다운 쾌락을 얻는 영화로움에 이를 때까지, 예배 행위는 갈수록 더 모든 것을 포함하게 된다.
27:7.2 (303.6) 파라다이스 섬에 어떤 예배하는 장소들이 있지만, 오히려 그 섬은 신성한 예배를 드리는 하나의 광대한 성전에 가깝다. 예배는 더없이 행복한 기슭까지 올라가는 모든 자의 첫째 가는 지배적 정열이다―하나님이 계신 앞에 이르려고 하나님을 충분히 배운 존재에게서 저절로 끓어오르는 감정이다. 한 궤도 한 궤도, 하보나를 통해서 안으로 여행하는 중에, 파라다이스에서 그 표현을 지휘하고 달리 통제하는 것이 필요하게 될 때까지, 예배는 자라는 정열이다.
27:7.3 (304.1) 정기적으로, 저절로, 집단으로, 그리고 달리 특별히 터져 나오는 찬양, 파라다이스에서 즐기는 최고의 찬미와 영적 찬양은 1차 상천사 특별 군단의 지휘 밑에서 일어난다. 이 예배 지휘자들의 지도 밑에서, 그러한 경의(敬意)는 인간으로서 최고의 기쁨을 얻는 목적을 이루고, 숭고한 자아 표현과 개인적 즐거움의 완전한 극치에 이른다. 1차 상천사는 누구나 몹시 예배 지휘자가 되고 싶어한다. 배치장들이 정기적으로 이 집회를 해산하지 않으면, 하늘 가는 존재는 누구나, 언제까지나 예배하는 자세로 즐겁게 남아 있고 싶어할 것이다. 하늘 가는 어떤 존재도 완전히 흐뭇하게 예배에 빠지기까지, 결코 영원히 봉사하는 근무에 들어가는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
27:7.4 (304.2) 하늘 가는 인간에게 어떻게 예배하는가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자아를 표현하는 이 만족감을 얻게 하고, 동시에 파라다이스 체제의 기본 활동을 눈여겨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예배 지휘자의 과제이다. 예배(禮拜) 기법의 개선이 없이, 파라다이스에 도착하는 보통 필사자가 지적 이해와 높아지는 감사한 느낌을 충분히 만족스럽게 표현하는 데 몇백년이 걸릴 것이다. 예배 지휘자는 새롭고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표현 수법을 열어 주고, 그래서 공간의 자궁에서 태어나고 세월의 산통을 겪은 이 놀라운 자녀들은 훨씬 짧은 시간 안에 완전히 예배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게 된다.
27:7.5 (304.3) 자아를 표현하고 고마움을 전하는 능력을 강화하고 높여 주는 예술, 우주 전체의 모든 존재의 온갖 예술은, 파라다이스 신들을 예배하는 데 그들의 능력이 닿는 데까지 고용된다. 예배는 파라다이스에 존재하면서 누리는 최고의 기쁨이다. 예배는 사람을 새롭게 하는 파라다이스 오락이다. 오락이 땅에서 지친 너희 정신에 미치는 것과 같은 영향을 파라다이스에서 예배가 너희의 완전한 혼에 미친다. 파라다이스의 예배 형식을 필사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여기 아래, 유란시아에서도 그 정신을 너희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으니, 신들의 영이 지금도 너희 안에 깃들고, 너희 위에 떠돌며, 너희를 북돋아서 참된 예배로 이끈다.
27:7.6 (304.4) 파라다이스에는 예배하는 시간과 장소가 정해져 있지만, 이것은 체험으로 영원의 섬까지 올라간 명석한 존재들이 느끼는, 지능이 성장하고 더욱 신을 인식한다는 감정, 항상 더욱 넘쳐 흐르는 영적 감정을 감당하기에 적당하지 않다. 그랜드판다 시절 이후로, 파라다이스에서 상천사들은 결코 예배 정신을 충분히 감당할 시설을 제공할 수 없었다. 예배를 위한 준비로 측정하는 바와 같이, 언제나 경건함이 넘쳐흐른다. 그리고 이것은 본래부터 완전한 성격자들이, 낮은 시공 세계의 칠흑같은 영적 어두움으로부터 천천히 피땀 흘려, 위로, 파라다이스의 영광으로 올라온 존재들이 보이는 영적 감정, 그 엄청난 반응을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 세계에서 온 그러한 천사와 필사자들이 파라다이스 권력자들 앞에 이를 때, 오랜 세월 동안 쌓였던 감정이 터져 나오며, 이것은 파라다이스의 천사들을 놀라게 하고, 파라다이스 신들을 신성하게 만족시키는, 최고로 기쁜 광경이다.
27:7.7 (304.5) 때때로 파라다이스 전체가 경건한 영적 표현의 물결, 휩쓰는 물결 속에 삼켜진다. 가끔 예배 지휘자들은 신의 거처에서 세 번 빛의 변동이 일어날 때까지 그러한 현상을 통제할 수 없는데, 이것은 신들의 신성한 마음이 파라다이스 거주자, 곧 영화로운 완전한 시민과 시간 세계에서 올라오는 인간이 드리는 진실한 예배로, 넉넉히 완벽하게 채워졌음을 뜻한다. 얼마나 놀라운 극치의 기법인가! 인간 아이의 총명한 사랑이 창조한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완전히 채워주다니, 신들의 영원한 계획과 목적이 얼마나 좋은 열매를 맺는가!
27:7.8 (305.1) 넘치는 예배로부터 최고의 만족을 얻은 뒤에, 너희는 최후 군단에 들어갈 자격을 가진다. 하늘 가는 생애는 거의 끝났고, 일곱째 축제가 경축을 위하여 준비된다. 첫째 축제는 살아남으려는 목적이 확인되었을 때, 필사자가 생각 조절자와 찬성한 것을 기념한다. 둘째는 상물질 생명으로 깨어나는 것이요, 셋째는 생각 조절자와 융합한 것이었다. 넷째는 하보나에서 눈을 뜬 것이요, 다섯째는 우주의 아버지를 찾아낸 것을 축하했으며, 여섯째 축제는 세월 속에 마지막 이동하는 잠으로부터 파라다이스에서 깨어나는 계제였다. 일곱째 축제는 필사자가 최후자 군단에 들어가는 것과 아울러, 영원한 근무가 시작됨을 표시한다. 최후자가 일곱째 단계의 영적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아마도 영원의 첫째 축제의 축하를 신호할 것이다.
27:7.9 (305.2) 이렇게 파라다이스 상천사, 모든 봉사 영 가운데 가장 높은 계급에 관한 이야기가 끝난다. 이 봉사하는 영들은 하나의 우주 등급으로서, 너희가 영원한 삼위일체 선서를 마치고 필사 최후 군단에 소집되면서, 예배 지휘자들이 너희에게 마지막으로 작별을 알릴 때까지, 너희의 기원이 있는 세계에서부터 늘 너희를 따라다닌다.
27:7.10 (305.3)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게 끝없이 봉사하는 일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한다. 이제 최후자는 궁극위 하나님을 만나는 목표에 직면한다.
28:0.1 (306.1) 상천사가 중앙 우주의 천사 집단이요, 세라핌이 지역 우주의 천사 집단인 것처럼, 2품 천사는 초우주에서 봉사하는 영이다. 그러나 신성의 정도와 최고의 잠재성으로 보면, 이 거울 영의 아이들은 세라핌보다 상천사와 훨씬 더 비슷하다. 그들은 초우주에서 혼자 일하지 않으며, 그들의 밝혀지지 않은 동료들이 후원하는 일거리들은 허다하고 흥미를 자아낸다.
28:0.2 (306.2) 이 이야기에서 발표된 바와 같이, 초우주에서 봉사하는 영들은 다음 세 계급을 포함한다:
28:0.6 (306.6) 마지막 두 계급은 필사자가 진보하는 승천 계획과 직접 관련되지 않으니까, 2품 천사에 관하여 자세히 고려하기 전에, 먼저 그들에 대하여 간단히 이야기하기로 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3품 천사나 전(全)천사는 모두 초우주 영토 안에서 근무하지만, 그들은 초우주 출신의 봉사 영은 아니다.
28:1.1 (306.7) 이 높은 천사들은 초우주 본부의 기록에 올라 있고 지역 창조에서 근무하는데도, 엄밀하게 말하면, 지역 창조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이 초우주 서울의 거주민이다. 3품 천사는 무한한 영의 자식이며, 1천 명씩 무리를 지어 파라다이스에서 성격화된다. 신다운 독창성이 있고 지극하게 다능한 이 하늘 존재는 무한한 영이 하나님의 창조 아들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28:1.2 (306.8) 한 미가엘 아들이 부모의 파라다이스 체제에서 떨어져 나와 공간에서 우주 모험을 떠날 준비가 될 때, 무한한 영은 이 동반(同伴)하는 영, 1천 명의 무리를 낳는다. 그리고 위엄 있는 이 3품 천사들은 이 창조 아들이 우주를 짓는 모험을 시작할 때 그를 따라간다.
28:1.3 (306.9) 우주를 짓는 초기를 통하여 내내, 이 3품 천사 1천 명은 창조 아들의 유일한 개인 참모진이다. 우주를 조립하고 달리 천문학적으로 조종하는 이 풍운의 시대에, 그들은 아들의 조수로서 막대한 체험을 얻는다. 그들은 밝은 아침별, 곧 그 지역 우주에서 첫 아들이 성격화되는 날까지 창조 아들의 옆에서 일한다. 그리고 나서 3품 천사들의 공식 사임서가 제출되고 받아들여진다. 본토 천사 생명의 처음 계급들이 나타나면, 그들은 그 지역 우주의 현역 근무에서 물러나며, 이전에 부속되었던 창조 아들, 그리고 관련된 초우주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 사이에 연락하는 봉사자가 된다.
28:2.1 (307.1) 일곱 최상 집행자와 결합하여 무한한 영이 전(全)천사를 창조한다. 그들은 바로 이 최상 집행자들에게 전속된 일꾼이요 사자이다. 전천사는 대우주에 배치되고, 오르본톤에서 그들의 군단은 유버르사의 북쪽 부분에 본부를 두며, 거기서 그들은 특별한 우대 거류민으로서 거주한다. 그들은 유버르사에 등록되지 않고, 우리 행정부에 딸리지도 않는다. 그들은 필사자를 진보시키는 승천 계획에 직접 관여하지도 않는다.
28:2.2 (307.2) 전천사는 일곱 최상 집행자의 관점을 가지고 행정을 조정할 목적으로, 초우주를 감독하는 일에 온전히 몰두한다. 유버르사에 있는 우리의 전천사 거류민은 오로지 오르본톤의 최상 집행자로부터 지시를 받고 그에게 보고하는데, 그는 파라다이스 위성들의 바깥 고리에서 합동 행정 구체 7번에 자리잡고 있다.
28:3.1 (307.3) 각 초우주 본부에 배치된 일곱 거울 영이 2품 천사 무리를 생산한다. 일곱 명씩 집단을 이루어 이 천사들을 창조하는 것과 관련하여, 분명히 파라다이스에 반응하는 기법이 있다. 일곱 중에서 언제나 1차 2품 천사가 1명, 2차가 3명, 3차가 3명이 있으며, 그들은 반드시 꼭 이 비율로 성격화한다. 그러한 2품 천사 7명이 창조되었을 때, 1차 2품 천사 한 명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근무에 부속된다. 2차 천사 3명은 초우주 정부에서 파라다이스 기원을 가진 세 집단의 행정자, 곧 신성한 조언자, 지혜 완성자, 우주 검열자들과 관련된다. 3차 천사 3명은 초우주 통치자들에 속한, 삼위일체를 체험한 승천 동료, 곧 막강한 사자, 고등 권위자, 이름도 번호도 없는 자들에게 부속된다.
28:3.2 (307.4) 초우주의 이 2품 천사는 거울 영의 자손이며, 따라서 반영은 그들의 성품에 선천적이다. 그들의 거울 기능은 셋째 근원 중심과 파라다이스 창조 아들들에 기원이 있는 어떤 생물의 어떤 단계에도 민감하다. 그러나 그들은 첫째 근원 중심에 유일하게 기원이 있는 존재와 개체를, 성격이든 아니든, 직접 비치지 않는다. 우리는 무한한 영의 우주 정보 회로가 사실이라는 증거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아무 다른 증거가 없다 하더라도, 2품 천사의 비치는 행위는 합동 행위자의 무한한 지성이 보편적으로 계신다는 현실을 보여주기에 아주 충분할 것이다.
28:4.1 (307.5)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에게 배치되는 1차 2품 천사는 이 삼자일체 통치자들을 섬기는 근무에서 살아 있는 거울이다. 말하자면, 살아 있는 거울에 의존할 수 있기 때문에, 1천 광년 또는 10만 광년이나 멀리 떨어진 다른 존재의 어떤 반응을 거울 안에서 들여다 보고, 거울을 가지고 들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모두를 순간에, 틀림없이 한다는 것이 한 초우주 체제에서 무엇을 뜻하는가 생각해 보아라. 우주의 운영에 기록은 필수이고, 방송은 쓸모 있으며, 외톨 사자 및 다른 사자들이 하는 일은 아주 도움이 된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세계와 파라다이스 사이―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중간에 있는 그들의 위치로부터,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은 한 순간에 양쪽을 보고, 양쪽을 듣고, 양쪽을 알 수 있다.
28:4.2 (308.1) 이 능력―말하자면 만물을 보고 듣는 능력―은 초우주에서 오로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그리고 그들 각자의 본부(本部) 세계에서만 완전히 실현할 수 있다. 거기서도 한계에 부딪친다. 유버르사에서 그러한 통신은 오르본톤의 세계와 지역 우주에만 국한된다. 초우주들 사이에는 작용하지 않아도, 바로 이 비치는 기법은 각 초우주로 하여금 중앙 우주, 그리고 파라다이스와 밀접한 접촉을 유지하게 한다. 일곱 초우주 정부는, 하나하나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 위의 권한을 완전히 반영하고, 아래의 필요에 완전히 정통할 뿐 아니라, 온전히 동정심을 가진다.
28:4.3 (308.2) 1차 2품 천사는 본래부터 가진 성품에 따라서 일곱 종류의 봉사를 하고 싶어 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 계급에서 첫째 계열이 영의 생각을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에게 풀이하는 선천적 자질을 받은 것은 적절하다:
28:4.4 (308.3) 1. 합동 행위자의 목소리. 각 초우주마다, 첫째 1차 2품 천사, 그리고 그 계급에서 나중에 창조된 일곱째 2품 천사마다 무한한 영의 생각을 이해하고, 이를 초우주 정부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과 그 동료들에게 해석해주는 높은 수준의 적응 능력을 나타낸다. 이것은 초우주 본부에서 큰 가치가 있는데, 이는 신성한 봉사자를 가진 지역 우주와 달리, 초우주 정부의 자리에 무한한 영을 특별히 성격화한 자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서울 구체에게 이 2품 천사의 목소리는 셋째 근원 중심의 개인적 대표인 것이나 거의 마찬가지다. 일곱 거울 영이 거기에 있는 것은 참말이지만, 2품 천사 무리의 이 어머니들은 일곱 으뜸 영을 비치는 것보다 합동 행위자를 덜 참되게 자동으로 비친다.
28:4.5 (308.4) 2. 일곱 으뜸 영의 목소리. 둘째 1차 2품 천사, 그리고 그 뒤에 창조된 일곱째마다 일곱 으뜸 영의 집합 성품과 반응을 묘사하는 성향를 나타낸다. 초우주 서울에서, 배치된 일곱 거울 영 가운데 어느 하나가 각 으뜸 영을 이미 대표하지만, 그러한 대표는 개별적이고 집단을 대표하지 않는다. 집단으로, 그들은 오직 거울 작용을 이용하여 자리에 있다. 따라서 으뜸 영들은 상당히 개인적인 이 천사들의 봉사를 환영하며, 이 1차 2품 천사들의 둘째 계열은 아주 유능하여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 앞에서 으뜸 영들을 대표한다.
28:4.6 (308.5) 3. 창조 아들의 목소리. 무한한 영은 미가엘 계급의 파라다이스 아들들을 창조하거나 훈련시키는 데 무슨 상관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셋째 1차 2품 천사와 그 뒤에 연속으로 일곱째마다 이 창조 아들의 생각을 비치는 놀라운 재능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고려하는 어떤 문제에 관하여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네바돈 미가엘의 태도를 알고 싶으면―정말로 알고 싶으면―그들은 공간의 줄을 이용하여 그를 부르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다만 네바돈 목소리의 우두머리를 부르기만 하면 된다. 그는 요청을 받고 나서 등록되어 있는 미가엘 2품 천사를 내세우며, 바로 그때 거기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은 네바돈 주 아들의 목소리를 인식할 것이다.
28:4.7 (309.1) 다른 아들 계급은 아무도 이렇게 “거울처럼 비칠” 수 없고, 어떤 다른 계급의 천사도 이렇게 활동할 수 없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우리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며, 바로 창조 아들들도 이를 완전히 이해하는지 나는 아주 의심이 든다. 그러나 우리는 거울 기능이 작용함을 확실히 알고, 또한 그 기능이 수긍할 만하게 틀림없이 작용함을 알고 있는데, 유버르사 역사 전체를 통해서 2품 천사의 목소리들이 한 번도 잘못 발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28:4.8 (309.2) 여기서 너희는 신이 시간 세계의 공간을 둘러싸고 공간에서 시간을 통달하는 방법에 대하여 무언가 비로소 구경하고 있다. 너희는 공간의 어려운 장애물을 통달하는 과제에서 시간 세계의 자녀를 도우려고 잠시동안 갈라지는, 영원 주기의 기법을 처음으로 한 번 보고 있다. 그리고 이 현상은 거울 영의 확립된 우주 기법과 별도이다.
28:4.9 (309.3) 위로 으뜸 영들과 아래로 창조 아들들이 몸소 계시는 혜택을 받지 못하는 듯하지만,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은 그들의 지휘 하에, 완전히 거울처럼 비치고 궁극적으로 정밀한 우주 작용에 조율된 살아 있는 존재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그러한 작용으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은 몸소 출석하지 못하는 고귀한 모든 존재의 비치는 계심을 누릴 수 있다. 이러한 수단과 너희에게 알려지지 않은 다른 수단으로, 또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초우주 본부에 잠재적으로 계신다.
28:4.10 (309.4)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은 위로 영이 번쩍 보낸 목소리와 아래로 미가엘이 번쩍 보낸 목소리를 등식으로 처리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짐작한다. 따라서, 그들은 지역 우주의 행정 사무에 관하여 아버지의 뜻을 계산할 때 틀림없이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신들 가운데 두 분의 뜻을 알면서 다른 한 분의 뜻을 추측하려면, 옛적부터 늘 계신 이 세 분이 함께 행동해야 한다. 두 분만 가지고는 대답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이유 때문에, 다른 이유가 없다고 하더라도, 한 분이나 두 분도 아니고, 언제나 옛적부터 늘 계신 이 세 분이 초우주를 주관한다.
28:4.11 (309.5) 4. 천사 무리의 목소리. 넷째 1차 2품 천사, 그리고 연속하여 일곱째마다, 위로 상천사를 비롯하여 아래로 세라핌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급의 천사의 감정에 특별히 민감한 것이 판명된다. 그래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어떤 회의에서도, 지휘하거나 감독하는 어떤 천사의 태도라도 즉시 고려할 준비가 되어 있다. 너희 세계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유란시아의 세라핌 우두머리는 거울 작용으로 전송(傳送)되는 현상, 유버르사로부터 어떤 목적에 이용되는 현상을 의식하게 된다. 그러나 외톨 사자가 미리 경고하지 않으면, 그 우두머리는 무슨 정보가 추구되는가, 정보가 어떻게 확보되는가 도무지 모른다. 이 시간 세계에서 봉사하는 영들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과 그 동료들의 눈길과 상담을 요하는 끝없이 쌓인 문제에 관하여, 항상 이 종류의 무의식 증언, 따라서 확실히 편견 없는 증언을 제공한다.
28:4.12 (309.6) 5. 방송 수신자. 오직 이 1차 2품 천사들만 수신(受信)하는 특급 방송 통신문이 있다. 그들은 유버르사의 정규 방송자가 아니지만,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비치는 화면(畵面)과 기존 우주 통신 회로에서 들어오는 어떤 실제 통신문을 동시화할 목적으로, 그들은 거울처럼 비치는 목소리를 가진 천사들과 연결해서 일한다. 방송 수신자는 연속하여 다섯째로 태어나는 자, 곧 다섯째 1차 2품 천사와 그 뒤에 일곱째마다 창조되는 자이다.
28:4.13 (310.1) 6. 수송 성격자. 이들은 시간의 순례자를 초우주 본부 세계에서 하보나의 바깥 궤도로 나르는 2품 천사이다. 그들은 초우주의 수송 군단이며, 안으로 파라다이스까지, 바깥으로 그들 각자 구역의 세계들에 이르기까지 활동한다. 이 군단은 여섯째 1차 2품 천사와 그 뒤에 창조된 모든 일곱째 2품 천사로 구성된다.
28:4.14 (310.2) 7. 예비군. 아주 큰 무리의 2품 천사, 1차에서 일곱째마다 태어나는 자는 그 영역에서 분류되지 않은 임무와 긴급 배치를 위해서 예비로 남아 있다. 고도로 전문화되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다양한 동료의 어떤 자격으로도 썩 잘 활동할 수 있지만, 긴급시에만 그러한 특화된 일에 착수한다. 그들의 보통 과제는, 특별 임무를 받은 천사의 범위에 소속되지 않는, 한 초우주의 일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28:5.1 (310.3) 2차 계급의 2품 천사들은 1차 계급의 동료보다 조금도 반영력이 못하지 않다. 1차ㆍ2차ㆍ3차로 분류되는 것은 2품 천사의 경우에, 지위나 기능의 차이를 가리키지 않고, 다만 절차의 순서를 나타낸다. 그들이 활동할 때 세 집단은 모두 동일한 품질을 드러낸다.
28:5.2 (310.4) 일곱 종류의 반영하는 2차 2품 천사들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동료, 즉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동급의 동료들의 근무에 다음과 같이 배치된다:
28:5.3 (310.5) 지혜 완성자들에게―지혜의 목소리, 철학의 혼, 혼의 연합.
28:5.6 (310.8) 1차 서열과 마찬가지로, 이 무리는 연속체로 창조된다. 다시 말해서, 처음 낳은 자는 지혜의 목소리이고, 그 뒤 일곱째마다 비슷했으며, 이런 식으로 다른 여섯 형태로 이 거울 천사들이 생겼다.
28:5.7 (310.9) 1. 지혜의 목소리. 이 2품 천사 가운데 더러는 파라다이스의 살아 있는 도서관, 곧 1차 상천사에 속하는 지식 보관자들과 영구하게 연결되어 있다. 전문화된 거울 서비스에서 지혜의 목소리는 온 우주에서 조정된 지혜가 집중되고 모인 것이며, 이것은 시대에 맞고 생생하고 충만하고 철저히 믿을 만하다. 초우주의 주회로에서 순환되는 거의 무한한 양의 정보에 대하여, 이 훌륭한 존재들은 아주 잘 반영하고 선택하고 민감하며, 그래서 지혜의 알맹이를 분리하여 받을 수 있고, 정신 작용의 이러한 보석들을 상관, 지혜 완성자들에게 어김없이 전달한다. 그들이 그렇게 활동함으로, 지혜 완성자들은 이 지혜를 실제로 최초에 표현한 것을 들을 뿐 아니라, 또한 입으로 표현한 바로 그 존재들을, 그 기원이 높건 낮건, 거울 작용으로 볼 수 있다.
28:5.8 (310.10)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물을지어다”하고 기록되었다. 유버르사에는 초우주 정부의 복잡한 사무에서, 까다로운 상황에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는 것이 필요하게 될 때, 완전하고 실용적인 지혜가 나타나야 할 때, 그때 지혜 완성자들은 지혜의 목소리 한 중대를 호출한다. 그들 계급의 완벽한 기술로, 머리 속에 들은 유통되는 온 우주의 지혜를 받는, 살아 있는 이 수신자들을 지혜 완성자들이 조율하고 방향을 지시하기 때문에, 즉시 이 2품 천사들의 목소리에서, 위에 있는 우주로부터 신다운 지혜의 물줄기와 아래에서 여러 우주의 고등 지성들로부터 실용적 지혜의 홍수가 쏟아진다.
28:5.9 (311.1) 지혜의 이 두 가지 견지를 조화시키는 데 혼동이 생기면, 신성한 조언자들에게 이내 상소가 올라가고, 그들은 어떻게 절차를 적절히 통합하는가 즉시 판결한다. 반란이 퍼지는 영역으로부터 들어오는 어떤 것의 신빙성에 대하여 어떤 의문이 생기면, 검열자들에게 상소가 올라가고, 그들은 자체의 영 분별자들과 함께 “도대체 어떤 모양의 영”이 그 조언자를 움직였는가 이내 판정을 내릴 수 있다. 이렇게 오랜 세월에 걸친 지혜와 순간의 지능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인자하게 보는 앞에 열려진 책처럼, 그들과 언제나 함께 있다.
28:5.10 (311.2) 너희는 초우주 정부의 운영을 책임지는 자들에게 이 모두가 무엇을 뜻하는지 겨우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거래의 거창하고 포괄적인 성질은 유한 개념 안에 담을 수 없다. 내가 여러 번 한 것과 같이 너희가 유버르사에서 지혜의 전당(殿堂)의 특별 접대실에 서서, 이 모든 것이 실제로 작용하는 것을 볼 때, 너희는 우주의 행성간 통신이 지극히 복잡하고 확실히 작용하는 것을 찬미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렇게 훌륭한 기법으로 계획하고 집행하는 신들의 신다운 지혜와 선함에 대하여 경의(敬意)를 표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내가 묘사한 그대로, 실제로 일어난다.
28:5.11 (311.3) 2. 철학의 혼. 이 놀라운 선생들도 지혜 완성자들에게 소속되어 있다. 다르게 지향되어 있지 않으면, 그들은 파라다이스에 있는 철학 대가들과 동시화하는 초점을 맞춘 채로 있다. 말하자면, 거대한 살아 있는 거울 앞으로 걸어가서, 너의 유한하고 물질인 자신의 모습을 보는 대신에, 신의 지혜와 파라다이스의 철학이 비친 것을 파악하는 것을 상상해 보아라. 그리고 이 완전한 철학을 “육신화”하여, 낮은 세계에서 비천한 민족들이 그 철학을 실용적으로 적용하고 동화(同化)하도록 그 철학의 농도를 묽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 살아 있는 이 거울들은 얼굴을 아래로 돌려서, 또 다른 세계나 우주의 표준과 필요를 비치기만 하면 된다.
28:5.12 (311.4) 바로 이 방법으로 지혜 완성자들은 고려하는 민족과 세계들의 진짜 필요와 실제 상태에 대한 결정 및 추천을 적응하며, 언제나 그들은 신성한 조언자와 우주 검열자들과 발을 맞추어서 행동한다. 그러나 이런 거래가 얼마나 숭고하게 충만한가는 나의 이해 능력도 초과한다.
28:5.13 (311.5) 3. 혼의 연합. 윤리 관계의 이상(理想) 및 상태를 비추는 이 반영자(反映者)를 더하면, 지혜 완성자에게 부속된 삼자일체 참모진이 완성된다. 우주에서 체험하고 적응하는 지극한 지혜의 이용을 요구하는 모든 문제 가운데, 아무것도 지적 존재들의 관계와 연합에서 생겨나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다. 상업과 무역, 우정과 결혼과 같은 인간적 교제에서나 또는 천사 무리의 연락에서, 화해자들의 눈을 끌기에 너무 하찮은 일이지만, 만약 커지고 계속하도록 버려둔다면 우주의 순조로운 작용을 망칠 정도로 충분히 염증을 일으키고 평화를 깨뜨리는 작은 마찰, 사소한 오해가 계속 일어난다. 그러므로 지혜 완성자들은 한 초우주 전체를 위해서, 그들 계급이 얻은 지혜로운 체험을 “화해의 기름”으로 소용되게 만든다. 이 모든 작업에서, 비치는 동료인 혼의 연합들이 이 초우주의 현자들을 유능하게 지지한다. 혼의 연합은 우주 상태에 관한 시사(時事) 정보를 제공하며, 동시에 이러한 곤란한 문제에 최선으로 적응하는 파라다이스의 이상을 보여준다. 다른 곳에서 특정하게 지향되어 있지 않을 때, 이 2품 천사들은 파라다이스에 있는 윤리 해석자들과 거울 작용으로 연결된 채로 남아 있다.
28:5.14 (312.1) 오르본톤 전체의 협동 작업을 육성하고 촉진하는 천사들이 있다. 너의 필사 생애 기간에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협동 작업이다. 완전한 구체들은 다른 존재들과 함께 일하는 이 예술을 터득한 자들로 채워져 있다. 우주에서 홀로 있는 일꾼이 할 임무는 거의 없다. 너희가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일시 너희 동료와 사귐이 없을 때, 너희는 더욱 외로워진다.
28:5.15 (312.2) 4. 조언의 핵심. 이는 신성한 조언자들의 감독 하에 임명된, 이 반영 천재의 첫째 무리이다. 이 부류의 2품 천사는 공간의 사실을 알고 있으며, 세월의 회로에서 그런 자료를 선택한다. 특별히, 그들은 정보 조정 상천사들을 거울처럼 비치지만, 그들은 또한 신분이 높든 낮든, 모든 존재의 조언을 선택해서 비친다. 신성한 조언자들이 중요한 조언이나 결정을 요청받으면, 그들은 즉시 조언의 핵심 한 집단을 징발하며, 당장에 한 판결이 내려지는데, 이것은 그 초우주 전체에서 가장 유능한 지성들의 조정된 지혜와 조언을 실제로 종합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모두 하보나, 아니 파라다이스에 계신 높은 지성들의 조언에 비추어서 검열받고 고쳐진 것이다.
28:5.16 (312.3) 5. 생존의 기쁨. 천성으로 이 존재들은, 위로 상천사인 조화 감독자들에게, 아래로는 어떤 세라핌들에게, 거울 작용에 조율되어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이 무리의 구성원이 정말로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가 설명하기 힘들다. 그들의 주요 활동은, 다양한 계급의 천사 무리와 그보다 낮은, 의지를 가진 인간 사이에서 기뻐하는 반응을 촉진하도록 지향된다. 신성한 조언자들이 그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조언자들은 특정한 기쁨을 찾느라고 그들을 사용하는 일이 드물다. 그보다 일반적 방법으로, 회상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그들은 기쁨 교환소로서 활동하며, 유머 감각을 개선하고 사람과 천사 사이에서 초월 유머를 개발하도록 애쓰는 한편, 그 영역에서 즐거움에 대한 반응을 높이려고 애쓴다. 모든 바깥 영향과 상관 없이, 그들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사는 데 선천적 기쁨이 있음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그들은 옳지만, 원시인의 머리 속에서 이 진리를 깨우치게 만드는 데 큰 어려움에 부딪친다. 상급 영 성격자와 천사들은 이러한 교육 노력에 훨씬 빨리 반응한다.
28:5.17 (312.4) 6. 봉사의 만족. 이 천사들은 파라다이스에 있는 행동 지도자들의 태도를 상당히 반영한다. 생존의 기쁨이 하는 것과 비슷하게 활동하면서, 그들은 봉사의 가치를 높이고 그로부터 생기는 만족을 키우려고 애쓴다. 그들은 사심 없는 봉사, 곧 진리의 나라를 널리 펼치는 봉사에 본래 있는, 앞으로 받을 보상을 조명하려고 많이 일해 왔다.
28:5.18 (312.5) 이 계급은 신성한 조언자들에게 소속되며, 이 조언자들은 영적 봉사로부터 얻을 이익을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비치려고 그들을 이용한다. 그리고 평범한 자에게 영감을 주고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가장 나은 자의 성과를 이용함으로 이 2품 천사들은 초우주에서 헌신적 봉사의 질을 높이는 데 엄청나게 이바지한다. 어느 세계에도 다른 세계들이, 특히 가장 잘하는 세계가 무슨 일을 하는가 정보를 퍼뜨림으로, 우호적 경쟁 정신이 효과 있게 이용된다. 상쾌하고 건전한 경쟁은 천사 무리 사이에서도 권장된다.
28:5.19 (313.1) 7. 영 분별자. 둘째 하보나 궤도의 조언자 및 고문과 이 거울 천사들 사이에는 특별한 연락이 있다. 그들은 우주 검열자에게 부속되는 유일한 2품 천사이지만, 아마도 모든 동료 가운데 가장 독특하게 특화된 자이다. 정보의 근원이나 경로에 상관 없이, 손에 쥔 증거가 아무리 극미해도, 그들의 반영 검사를 거치면, 이 분별자들은 즉시 참 동기, 실제 목적, 그 기원의 진정한 본질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나는 이 천사들의 훌륭한 활동에 감탄하며, 그들은 어떤 당사자가 초점에 노출되더라도, 그의 실제 도덕적, 영적 됨됨이를 아주 어김없이 비친다.
28:5.20 (313.2) 이 거울 천사들이 이렇게 직관으로, 본래부터, 틀림없이 활동한다는 생각을 인간의 머리에 전하려는 노력으로, 내가 이런 표현을 써도 좋다면, 타고난 이 “영적 통찰력” 덕분에, 영 분별자들은 이러한 복잡한 봉사를 해낸다. 우주 검열자들이 이 발표를 볼 때, 그들은 거기에 비친 개인의 벌거벗은 혼과 얼굴을 마주한다. 그리고 초상이 바로 이렇게 확실하고 완전한 것은 어째서 검열자들이 올바른 재판관으로서 언제나 아주 공정하게 활동할 수 있는가 얼마큼 설명한다. 분별자는 유버르사를 떠나서 행하는 어떤 임무에도 반드시 검열자를 따라가며, 유버르사 본부에서 그런 것 같이, 그들은 여러 우주에서 똑같이 효과적이다.
28:5.21 (313.3) 영 세계의 이 모든 거래가 실재한다는 것, 우주 영토의 확정된 관례에 따라서, 그리고 변경할 수 없는 법과 조화를 이루면서, 이 거래들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는 너희에게 보장한다. 새로이 창조된 어떤 계급의 존재도 생명의 입김을 받는 즉시, 한 순간에 위로 비쳐진다. 인간의 성품과 잠재성의 생생한 그림이 초우주 본부로 번쩍 전해진다. 그래서, 분별자의 수단을 통해서, 검열자는 정확하게 “어떤 모양의 영”이 공간 세계에 태어났는가 충분히 의식하게 된다.
28:5.22 (313.4) 필사 인간에게 그렇다. 너희 세계에서 성령이 “만물을 살피기” 때문에, 구원자별의 어머니 영은 너를 넉넉히 알고 있다. 너에 관한 영의 지식에 대하여 분별하는 2품 천사들이 영과 함께 비칠 때는 언제나, 너에 대하여 신성한 영이 아는 것은 무엇이든지 즉시 소용된다. 그러나 아버지 분신의 지식과 계획은 비칠 수 없다는 것을 언급해야 한다. 분별자는 조절자가 계심을 비칠 수 있고, 또 비친다. (그리고 검열자들은 조절자가 신성하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그들은 신비의 훈계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내용을 풀이할 수 없다.
28:6.1 (313.5) 이 천사들은 동료들과 같은 방식으로, 일련으로, 그리고 반영하는 일곱 종류로 창조되지만, 이 부류는 초우주 행정자들의 분리된 근무에 개인적으로 배치되지 않는다. 3차 2품 천사들은 모두 집단으로 삼위일체를 체험한 달성의 아들들에게 배치되며, 이 올라가는 아들들은 이 천사들을 서로 교환하여 쓸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막강한 사자는 3차 부류 중에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고, 또 이용하며, 동격자인 고등 권위자와 이름도 번호도 없는 자도 그렇게 한다. 이 일곱 종류의 3차 2품 천사는 다음과 같다:
28:6.2 (314.1) 1. 기원의 중요성. 한 초우주 정부에 속하는, 삼위일체를 체험한 올라가는 아들들에게는 어떤 개인이나 민족이나 세계에서 기원을 가짐으로 생기는 모든 논점을 다루는 책임이 지워진다. 그리고 기원의 중요성은 그 영역에 살아 있는 인간을 우주에서 진보시키려는 우리의 모든 계획에서 가장 중대한 문제이다. 윤리의 모든 관계와 그 적용은 근본적 기원의 사실에서 생겨난다. 기원은 신들과 상관되는 반응에 기초가 된다. 언제나 합동 행위자는 “사람을, 사람이 어떤 모양으로 태어났는가를 눈여겨본다.”
28:6.3 (314.2) 내려오는 상급 존재의 경우에, 기원은 다만 확인되어야 할 사실이다. 그러나 낮은 계급의 천사를 포함하여, 하늘 가는 존재의 경우에 그 기원의 성질과 주위 상황은 우주 사무에서 거의 어디에나 똑같이 중대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뚜렷하지는 않다―따라서 중앙 우주에서나 한 초우주의 전체 영역에 두루, 어떤 존재의 시작에 관하여 무엇이 요구되든지 순간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일련의 반영하는 2품 천사를 마음대로 이용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
28:6.4 (314.3) 기원의 중요성은 일곱 초우주에 사는 광대한 무리의 존재―사람, 천사 및 다른 자―가 즉시 참조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족보(族譜)이다. 각 초우주의 어느 세계에서 어느 개인의 조상 요소와 현재의 실제 지위에 관하여도 그들은 언제나 충분하고 믿을 만한 최신 평가를 상관에게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소지한 사실에 관하여, 언제나 분(分)마다 그들의 계산이 새롭게 되어 있다.
28:6.5 (314.4) 2. 자비의 기억. 기원의 중요성이 묘사한 것이 노출하다시피, 그 영역의 상태에 올바른 응보를 조절하는 임무를 띤 자비의 기억은 무한한 영의 도구들이 부드럽게 보살핌으로 개인과 종족에게 얼마나 자비를 베풀었는가 보이는 기록, 충분하고 충만하고 살아 있는 실제 기록이다. 자비의 기억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정해 놓은, 구제하려고 준비한 자산, 그리고 자비를 받는 자녀의 도덕적 빚―그들의 영적 부채(負債)―를 드러낸다. 아버지가 미리 정한 자비를 드러낼 때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나 살아남는 것을 보장하기에 필요한 용서의 한도를 정해 준다. 그리고 나서, 기원의 중요성이 조사한 결과에 따라서, 합리적인 인간 각자가 살아남도록 자비의 한도가 정해지며, 이것은 물쓰듯 헤픈 한도, 신성한 시민권을 정말로 바라는 자는 누구나 살아남는 것을 보장하기에 충분한 자비의 한도이다.
28:6.6 (314.5) 자비의 기억은 살아 있는 시산표(試算表), 그 영역의 초자연 세력 은행에 있는 네 계좌(計座)의 현재 계산서이다. 이것은 각 개인이 끝없이 살 권리가 판결에 오를 때, 유버르사 법정의 증언에 기록되는, 베풀어진 자비를 적은 살아 있는 기록부이다. 그때에 “보좌가 세워지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앉으시도다. 유버르사 방송이 저희 앞에서 시작되고 공표되도다. 수천 명이 저희에게 시중들며, 수억 명이 저희 앞에 서니라. 재판이 준비되고, 책들이 열려지니라.” 그렇게 중대한 계제에 펼쳐지는 책들은 살아 있는 기록부, 초우주의 3차 2품 천사이다. 필요하다면, 자비의 기억들의 증언을 확인하기 위하여, 공식 기록은 철이 되어 있다.
28:6.7 (314.6) 하나님의 아들들이 정해 놓은 구제 한도까지 셋째 근원 중심의 참을성 있는 성격자들이 사랑으로 베푸는 봉사로 충분하고 충실하게 용서했다는 것을 자비의 기억이 보여야 한다. 그러나 자비가 소모되었을 때, 자비의 “기억”이 자비가 소모되었음을 증언할 때, 그때 응보가 지배하고 공정이 선포된다. 자비를 비웃는 자에게 자비를 떠밀어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비는 시간 세계의 끈질긴 반역자들의 발길에 짓밟혀야 되는 선물이 아니다. 그런데도, 자비를 이렇게 값지고 귀중하게 베풀지만, 너의 목적이 성실하고 마음이 정직하면, 너 개인이 쓸 수 있는 용서의 한도는 언제나 예비된 용서를 이용할 수 있는 너의 능력보다 훨씬 크다.
28:6.8 (315.1) 베푼 자비의 반영자는 3차 동료들과 함께, 수많은 초우주 봉사에 종사하며, 이것은 하늘 가는 인간의 교육을 포함한다. 많은 다른 것 가운데, 기원의 중요성은 이 승천자들에게 어떻게 영 윤리를 적용하는가 가르치며, 그러한 훈련이 있은 다음에 자비의 기억은 어떻게 참으로 자비롭게 되는가 가르친다. 자비를 베푸는 영적 기법이 너희의 개념을 뛰어넘지만, 자비가 성장하는 품질이라는 것을 너희는 이제라도 이해해야 한다. 처음에는 정당하고, 다음에 공평하고, 다음에 참으며, 다음에 친절한 데서 개인적으로 만족하는 큰 보상이 있음을 너희가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 기초 위에, 너희가 선택하고 마음 속에 열심이 있으면, 너희는 그 다음 걸음을 밟고 정말로 자비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너희는 자비 그 자체를 따로 나타낼 수 없다. 이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자비가 있을 수 없다. 후원이나 생색(生色)이나 혹은 자선이―아니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있을지 모르지만, 자비는 아니다. 집단을 이해하고, 서로 고맙게 여기고, 형제 같은 친교, 영적 교통, 신다운 조화가 있고 나서, 이것들에 부속되어, 앞에 적은 것들의 아름다운 절정으로서, 참된 자비가 생긴다.
28:6.9 (315.2) 3. 시간의 중요성. 시간은 의지를 가진 모든 인간에게 주는 하나의 보편적 재산이다. 모든 지적 존재에게 맡겨 놓은 “한 달란트”이다.[1] [1663] 너희는 모두 너희가 살아남는 것을 보장해 놓을 시간이 있다. 오로지 업신여겨 시간이 파묻혀 있을 때, 너희 혼이 꼭 살아남게 만들도록 시간을 이용하지 못할 때, 시간이 치명적으로 낭비된다.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치명적 벌을 내리지 않으며, 다만 시간 순례자의 하늘 가는 여행을 늦출 뿐이다. 일단 살아남으면, 모든 다른 손해를 회복(回復)할 수 있다.
28:6.10 (315.3) 책임을 배당할 경우에, 시간의 중요성의 조언은 가치를 따질 수 없다. 하보나와 파라다이스의 이쪽에서는 시간이 만사에 사활(死活)을 가리는 요소이다.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 앞에서 마지막 판결이 있을 때, 시간은 증거의 요소이다. 시간의 중요성은 언제나 모든 피고가 결정을 내리고 선택을 하기에 넉넉한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보이는 증언을 해야 한다.
28:6.11 (315.4) 이 시간 평가자들은 또한 예언의 비밀이다. 그들은 어떤 사업이라도 이를 마치는 데 필요할 시간 요소를 보여주며, 다른 살아 있는 계급인 생계기(生計器)나 생시계와 똑같이 그들을 지표(指標)로서 믿을 수 있다. 신들은 미리 보며, 따라서 미리 안다. 그러나 시간 우주의 승천 당국은 앞날의 사건을 예측할 수 있으려면 시간의 중요성들과 의논해야 한다.
28:6.12 (315.5) 너희는 저택 세계에서 이 존재들과 처음으로 마주칠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너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의 유익한 이용, 적극적 이용인 노동과 소극적 사용인 휴식에 관해서 너희를 가르칠 것이다. 이 두 가지 시간 이용은 중요하다.
28:6.13 (315.6) 4. 책임의 존엄. 맡긴 책임은 의지를 가진 인간의 중대한 시험이다. 신뢰도는 자아의 통달, 곧 인품의 참된 측정이다. 이 2품 천사들은 초우주 체제에서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한다. 그들은 의지를 가진 모든 인간에게 맡긴 책임이 의무이고 신성하고 존엄하다는 감각을 보여준다. 동시에 이들은 통치하는 당국에게, 신용하거나 책임을 맡길 어떤 후보자라도 그의 정확한 신뢰도를 어김없이 비쳐 준다.
28:6.14 (316.1) 유란시아에서, 너희는 사람의 됨됨이를 판독하고 특정한 능력을 어림하려고 괴상한 시도를 하지만, 유버르사에서 우리는 실제로 이 일을 완전히 처리한다. 이 2품 천사들은 틀림없이 인품을 평가하는 저울, 살아 있는 저울에 신뢰도를 잰다. 그들이 너를 보고 나서, 네가 책임을 이행하고 맡긴 일을 집행하고 임무를 달성하는 능력의 한계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만 쳐다보면 된다. 너의 재산, 신뢰도는 너의 부채, 곧 네가 불이행하거나 배반하는 가능성과 나란히, 뚜렷하게 진술된다.
28:6.15 (316.2) 이 늘어난 책임을 즐겁게 맡도록 너의 인품이 충분히 성장하자마자, 늘어난 책임을 맡도록 너를 진급시키는 것이 네 상관들의 계획이다. 그러나 개인에게 지나친 짐을 지우는 것은 오직 재난을 부르고 실망을 보장할 뿐이다. 사람이나 천사에게 때 이르게 책임을 지우는 잘못은 시공에서 개인의 책임을 질 능력을 틀림없이 재는 자들의 봉사를 이용하여 피할 수 있다. 이 2품 천사들은 늘 고등 권위자들을 따라다니며, 후보자가 이 2품 천사의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없다”하고 선포되기까지, 이 집행자들은 결코 임무를 나눠주지 않는다.
28:6.16 (316.3) 5. 봉사의 고결. 책임을 맡길 만하다는 것이 발견되면 봉사할 특권이 즉시 따른다. 너 자신의 신뢰도의 부족, 곧 네가 책임의 존엄성을 이해하는 능력의 부족 외에, 아무것도 네가 더 크게 봉사할 기회를 얻는 것을 가로막을 수 없다.
28:6.17 (316.4) 봉사는―노예 상태가 아니라, 의도하여 행하는 봉사는―가장 높은 만족감을 낳고 가장 신다운 위엄을 표현한다. 봉사―계속된 봉사, 늘어난 봉사, 어려운 봉사, 모험하는 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답고 완전한 봉사―는 시간 세상에서 목표이고 공간 세계에서 목적지이다. 그러나 시간 세계의 노는 주기(週期)는 언제나 진보하는 봉사 주기와 번갈아 일어날 것이다. 시간 세계에서 봉사한 뒤에, 영원 속에서 초월적 봉사가 따른다. 영원히 봉사하는 동안에 너희는 시간 세계에서 놀던 것을 회상하리니, 그처럼 시간 세계에서 노는 동안에, 너희는 영원 속에 할 일을 상상해야 한다.
28:6.18 (316.5) 우주의 경제는 투입과 생산에 기초를 둔다. 영원한 생애를 통하여 내내, 너희는 결코 할 일 없어 지루하거나 인격이 활기를 잃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자생하는 운동으로 진보가 가능하게 되고, 향상은 신다운 활동 능력으로부터 생겨나며, 성취는 상상하는 모험의 소산(所産)이다. 그러나 이 성취 능력에는 윤리를 지키는 책임이 선천적으로 따르며, 이것은 세계와 우주가 수많은 다른 종류의 존재들로 채워져 있음을 깨닫는 데 필요하다. 바로 너를 포함하여 이 모든 웅장한 창조는, 꼭 너만 위하여 창조되지 않았다. 이 우주는 자기 중심의 우주가 아니다. 신들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도다”하고 선포했고, 너희의 주 아들은 “너희 가운데 가장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모두를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했다.
28:6.19 (316.6) 어떤 봉사의 진정한 성질도, 사람이 하든 천사가 하든, 봉사의 지표인 이 2품 천사, 봉사의 고결의 얼굴에 충분히 드러난다. 참된 동기와 감추어진 동기의 완전한 분석이 뚜렷이 나타난다. 이 천사들은 정말로 우주에서 머리 속을 읽는 자요, 심중(心中)을 탐색하는 자요, 혼을 드러내는 자이다. 필사자는 자기 생각을 감추려고 말을 이용할지 모르지만, 이 높은 2품 천사들은 인간의 마음과 천사의 머리 속에 깊은 동기를 발가벗긴다.
28:6.20 (317.1) 6과 7. 위대함의 비결과 선한 혼. 하늘 가는 순례자가 시간의 중요성을 깨우치고 나서, 책임의 존엄성을 깨닫고 봉사의 고결함을 깨닫도록 길이 예비된다. 이것들은 위대함의 도덕적 요소이기는 하지만, 또한 위대하게 되는 비결도 있다. 위대함을 재는 영적 시험이 적용될 때, 도덕 요소는 무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땅에 있는 자기 동료, 특히 가난과 어려움에 빠진 귀중한 존재들의 복지를 위하여 사욕 없이 수고하는 데서 나타나는 비이기적 기품, 이것이 행성에서 위대함을 재는 참다운 척도이다. 유란시아와 같은 세계에서 사람이 위대한 표시는 자제를 보이는 것이다. 위대한 사람은 “한 도시를 정복”하거나, “한 나라를 뒤집어엎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혀를 복종시키는 자”이다.
28:6.21 (317.2) 위대함은 신성(神性)과 비슷한 말이다. 하나님은 최고로 위대하고 선하다. 위대함과 선함은 다만 떼어놓을 수 없다. 이 둘은 언제까지나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된다. 위대함의 비결과 선한 혼이 서로 비쳐 의존하는 것이 이 진리를 글자 그대로, 놀랍게 보여주는데, 이는 어느 쪽도 다른 쪽 없이 활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성의 다른 품질을 비치면서 초우주의 2품 천사는 혼자 활동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지만, 위대함과 선함을 비치는 두 측정치는 분리할 수 없는 듯하다. 따라서, 어떤 우주의 어느 세계에서도, 위대함과 선함을 비치는 이 천사들은 함께 일하며, 언제나 그들이 집중하는 모든 존재에 대하여 2중이자 서로 의존하는 보고서를 보여준다. 얼마나 선한가 내용을 모르고서 사람의 위대함을 어림할 수 없고, 한편 본래부터 가진 신다운 위대함을 드러내지 않고 선한 정도를 묘사할 수 없다.
28:6.22 (317.3) 위대함을 측정하는 것은 구체마다 다르다. 위대한 것은 하나님다운 것이다. 위대함의 질이 전적으로 선한 내용으로 결정되니까, 너의 현재 인간 지위에서도, 네가 은총을 통해서 선하게 될 수 있다면, 너는 그렇게 함으로 위대해지고 있다. 네가 신이 선하다는 개념을 굳세게 바라볼수록, 끈질기게 추구할수록, 너는 더욱 확실히 위대해지고, 진정한 살아남는 인품이 참으로 위대해질 것이다.
28:7.1 (317.4) 2품 천사들은 초우주 서울에 기원이 있고, 거기에 본부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연락하는 동료들과 함께, 2품 천사들은 파라다이스의 기슭으로부터 공간의 진화 세계들까지 돌아다닌다. 그들은 초우주 정부에서 심의하는 집회의 구성원에게 귀중한 조수로서 수고하며, 유버르사의 우대받는 거류민에게, 곧 별 학자, 1천 년마다 다니는 여행자, 천상의 관측자, 그리고 하보나까지 수송되기를 기다리는 하늘 가는 존재들을 포함하여 다른 무리에게 큰 도움이 된다.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은 유버르사를 둘러싸는 490 연구 세계에 거주하는 승천 인간을 돕도록, 어떤 1차 2품 천사들을 배치하기를 기뻐하며, 또한 여기서 2차와 3차 계급의 다수가 선생으로서 봉사한다. 이 유버르사 위성들은 시간 우주에서 최종 학교이며, 하보나의 일곱 회로의 대학을 위하여 예비 과정을 제공한다.
28:7.2 (317.5) 세 계급의 2품 천사 가운데, 3차 집단은 승천 당국에 부속되어 있고, 시간 세계에서 하늘 가는 인간에게 아주 널리 봉사한다. 너희가 오르본톤의 기다리는 세계들에 다다를 때까지 너희는 그들의 봉사를 자유롭게 이용하지 않을 터이지만, 유란시아를 떠난 뒤에 곧, 너희는 이따금 그들을 만날 것이다. 너희가 유버르사의 여러 학교 세계에서 머무르는 동안 그들과 충분히 얼굴을 익히게 될 때, 너희는 그들의 동반을 즐길 것이다.
28:7.3 (318.1) 이 3차 2품 천사는 시간을 절약하고 공간을 단축하는 자요, 오류를 탐지하는 자, 충실한 선생, 영구한 파수―신의 보장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표시―이니, 크게 당황하고 영적으로 불안한 순간에 초조한 순례자의 발걸음을 안내하기 위해서, 그들은 세월의 십자로(十字路)에 자비롭게 배치되었다. 완전의 입구에 다다르기 훨씬 전에, 너희는 신성한 도구에 비로소 다가가고 신의 기법을 접촉하게 될 것이다. 처음 저택 세계에 다다를 때부터, 너희가 파라다이스로 이동하는 것을 준비하려고 하보나의 잠 속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점점 더 너희는 이 놀라운 존재들의 긴급한 도움을 이용할 것이다. 그들은 완전의 입구까지 가는 긴 여행 중에 너희 앞에 간 순례자, 안전하고 믿을 만한 순례자들의 확고한 지식과 확실한 지혜를 아주 넉넉히, 아낌없이 반영한다.
28:7.4 (318.2) 우리에게는 유란시아에서 이 거울 계급 천사들을 쓰는 완전한 특권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들은 배치된 성격자들을 따라서, 너희 세계에 자주 오는 방문객이지만, 여기서 그들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다. 이 구체는 아직도 일부 영적으로 격리되어 있고, 그들의 서비스에 필수인 어떤 회로들이 현재 여기에 없다. 관계된 거울 회로들로 너희 세계가 다시 한 번 회복될 때, 행성간 및 우주간 통신 작업의 상당 부분이 크게 간소화되고 신속하게 될 것이다. 유란시아에서는 하늘 일꾼들이 많은 어려움에 부딪치는데, 이는 비치는 동료들이 이러한 기능의 축소를 겪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간의 살아 있는 거울이며, 시간 세계에서 계심을 투영하는 이 놀라운 존재의 많은 서비스를 우리가 지역에서 빼앗겼는데도, 우리는 손에 닿는 연장을 가지고 우리의 사무를 즐겁게 계속 수행한다.
29:0.1 (319.1) 행성간 및 우주간 사무를 규제하는 데 관련된 모든 우주 성격자 가운데, 동력 지휘자와 그 동료들을 유란시아에서 사람들이 가장 적게 이해하였다. 너희 민족들이 천사 및 비슷한 하늘 존재 계급이 있다는 것을 안 지 오래 되지만, 물리적 영토의 통제자와 규제자에 관한 정보는 거의 전해지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총우주의 물력을 통제하고 에너지를 규제하는 데 상관이 있는 다음 세 집단의 살아 있는 존재들 가운데, 마지막 계급만 완전히 밝히도록 허락을 받았다:
29:0.5 (319.5) 여러 집단의 우주 동력 지휘자, 중심, 통제자의 개성을 묘사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지만, 나는 그들이 활동하는 분야에 관하여 무언가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은 대우주 전역에서 에너지의 지능적 규제와 상관되는, 독특한 무리의 살아 있는 존재이다. 최상 지휘자들까지 합쳐서, 그들은 다음 대분과를 포함한다:
29:0.10 (319.10) 최상 동력 지휘자 및 중심들은 영원에 가까운 시절부터 존재해 왔고, 우리가 아는 한, 이 여러 계급의 존재들은 더 창조되지 않았다. 일곱 으뜸 영이 일곱 최상 지휘자를 성격화하였고, 그리고 나서 그 지휘자들은 자기의 부모와 공동으로 1백억이 넘는 동료들을 생산하는 데 수고했다. 동력 지휘자의 시절 이전에 중앙 우주 바깥에 있는 공간의 에너지 회로는 파라다이스의 물력 조직책들의 지능적 감독을 받고 있었다.
29:0.11 (319.11) 물질 인간에 관한 지식이 있으니까, 너희는 적어도 영적 존재들에 관하여 반대되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필사자의 머리로 동력 지휘자를 상상하기는 아주 어렵다. 상급 수준의 존재로 올라가는 진보 계획에서, 너희는 최상 지휘자나 동력 중심들과 아무런 직접 관계가 없다. 어떤 드문 경우에, 너희는 물리 통제자와 거래가 있을 터이지만, 저택 세계에 도착하고 나서 너희는 상물질 동력 감독들과 함께 자유롭게 일할 것이다. 이 상물질 동력 감독은 순전히 지역 우주의 상물질 체제에서 활동하니까, 지역 우주를 다루는 부분에서 그들의 활동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된다.
29:1.1 (320.1) 일곱 최상 동력 지휘자는 대우주의 물리적 에너지를 규제하는 자이다. 일곱 으뜸 영이 그들을 창조한 것은 참 영 조상으로부터 반(半)물질 자손이 파생된 것을 처음 기록한 경우이다. 일곱 으뜸 영이 개인적으로 창조할 때, 그들은 천사 계급에서 상당히 영적 성격자를 생산한다. 그들이 집단으로 창조할 때, 그들은 때때로 높은 부류의 이 반물질 존재를 생산한다. 그러나 이 준(準)물리적 존재조차 유란시아 필사자의 단거리 시력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29:1.2 (320.2) 최상 동력 지휘자의 수는 일곱이며, 그들의 모습과 기능은 동일하다. 각자 직접 관련된 으뜸 영에게, 완전히 기능적으로 복종하며, 이 으뜸 영을 제외하고, 아무도 하나와 다른 하나를 구별할 수 없다. 으뜸 영은 각자 그들의 집합 자손 가운데 하나와 이렇게 영원히 뭉쳐 있다. 같은 지휘자는 언제나 같은 영과 관련되어 있고, 그들이 일하는 협동 관계는 물리적 에너지와 영 에너지, 반물리적 존재와 영 성격자 사이에 독특한 관계가 생기게 한다.
29:1.3 (320.3) 일곱 최상 동력 지휘자는 가장자리 파라다이스에 주둔하며, 거기서 천천히 도는 그들의 계심은 으뜸 영들의 물력 초점(焦點)의 본부가 어디에 있는가를 가리킨다. 이 동력 지휘자들은 각 초우주의 동력 에너지를 혼자서 규제하지만, 중앙 우주의 행정부에서는 집단으로 활동한다. 그들은 파라다이스에서 활동하지만, 자신들을 대우주의 모든 분과에서 효과적인 동력 중심으로 유지한다.
29:1.4 (320.4) 이 강력한 존재들은 광대한 무리의 동력 중심, 그리고 이 중심들을 통해서, 일곱 초우주 전체에 흩어져 있는, 물리 통제자들의 물리적 조상이다. 물리적으로 통제하는 그러한 하급 유기체들은 기본적으로 한결같고, 각 초우주 군단의 다른 빛깔 외에 동일하다. 초우주 근무를 바꾸는 경우에, 그들은 다만 빛깔을 바꾸려고 파라다이스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물리적 창조의 행정은 근본적으로 한결같다.
29:2.1 (320.5) 일곱 최상 동력 지휘자는 개인으로서 자식을 낳을 수 없지만, 집단으로 일곱 으뜸 영과 결합하여, 그들은 자신과 비슷한 다른 존재들을 낳을 수 있고―창조할 수 있고, 또 낳는다. 대우주의 최상 동력 중심의 기원이 그러하며, 그들은 다음 일곱 집단에서 활동한다:
29:2.9 (321.1) 이 동력 중심들은 최상 동력 지휘자와 함께, 높은 의지의 자유를 가진 활동적 존재이다. 그들은 모두 셋째 근원의 성격을 부여받았고, 의문의 여지 없이 높은 등급의 의지할 능력이 있음을 드러낸다. 우주 동력 체계를 지휘하는 이 중심들은 지극한 지능 자질을 소유한다. 그들은 대우주 동력 체계를 다루는 지적 존재이며, 물리 통제사와 상물질 동력 감독들의 널리 미치는 활동의 망, 그 모든 광대한 망을 지성으로 통제하는 신비스러운 기법이다.
29:2.10 (321.2) 1. 최상 감독 중심. 최상 동력 지휘자와 동급인 이 일곱 동료는 대우주의 주요 에너지 회로를 규제한다. 각 감독 중심은 일곱 최상 집행자의 특별 세계 중 하나에 본부를 두며, 그들은 이 일반 우주 사무를 조정하는 이 존재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일한다.
29:2.11 (321.3) 최상 동력 지휘자와 최상 감독 중심들은 “인력 에너지” 수준 이하의 모든 우주 현상에 관하여, 개인으로서, 그리고 합동하여 활동한다. 연결하여 활동할 때 이 존재 14명과 우주 동력의 관계는 일곱 최상 집행자와 일반 우주 사무의 관계, 그리고 일곱 으뜸 영과 시공 우주의 지성의 관계와 같다.
29:2.12 (321.4) 2. 하보나 중심. 시공의 우주들이 창조되기 전에는 동력 중심이 하보나에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주 아득한 이 시절 이후로, 1백만 중심이 중앙 창조에서 죽 활동해 왔고, 각 중심은 1천 하보나 세계를 감독한다. 여기 신성한 우주에는 에너지 통제가 완전하며, 이 조건은 다른 데서 존재하지 않는다. 에너지를 완전히 규제하는 것은 모든 동력 중심과 공간에 있는 물리 통제자가 궁극에 바라는 목표이다.
29:2.13 (321.5) 3. 초우주 중심. 일곱 초우주의 각 서울 구체에서 거대한 지역을 차지하는 것은 제3 계급의 1천 동력 중심이다. 10개의 분리된 집단의 1차 에너지의 세 가지 전류가 각각 이 동력 중심들로 들어온다. 불완전하게 통제되지만, 특화되고 잘 지휘된 일곱 동력 회로가, 연합하여 행동하는 그들의 자리로부터 떠나간다. 이것은 우주 동력을 전자(電子)로 조직한 것이다.
29:2.14 (321.6) 모든 에너지는 파라다이스 주기에 따라서 순환되지만, 우주 동력 지휘자들은 아래 파라다이스의 물력 에너지가 중앙 우주와 초우주의 공간 기능 속에서 수정된 것을 발견하는 대로 이 에너지를 지휘하며, 유익하고 건설적으로 적용하는 경로로 바꾸고 지휘한다. 하보나 에너지와 초우주 에너지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초우주의 동력 충전량은 3단계의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고, 이것은 각각 10개 분리 집단으로 이루어진다. 이 세 가지 에너지 전하(電荷)는 대우주의 공간에 두루 퍼지며, 그것은 일곱 초우주 각자를 통째로 삼키고 적시는 에너지, 광대한 움직이는 에너지의 대양과 같다.
29:2.15 (321.7) 우주 동력의 전자 조직은 일곱 단계에서 작용하며, 지역 인력, 곧 직진(直進) 인력에 대하여 다른 반응을 나타낸다. 이 일곱 회로는 초우주 동력 중심들로부터 나가서, 각 초우주에 스며든다. 시공의 그러한 특화된 회로들은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개시되고 관리되는, 분명하고 지역화된 에너지 움직임이며, 이것은 대서양 한 가운데에 국한된 현상으로서 걸프 해류(海流)가 작용하는 것과 비슷하다.
29:2.16 (321.8) 4. 지역 우주 중심. 각 지역 우주 본부에는 제4 계급 동력 중심이 1백명 주둔한다. 그들은 초우주 본부로부터 방사되어 나오는 일곱 동력 회로를 격하시키고 달리 수정하려고 활동하며, 이렇게 이 회로를 별자리와 체계 서비스에 적용할 수 있게 만든다. 공간에서 지역의 천문학적 이변은 이 동력 중심들에게 일시적 관심거리이다. 그들은 효율적 에너지를 하위 별자리와 체계들로 질서 있게 보내는 일에 종사한다. 그들은 후일에 우주를 형성하고 에너지를 동원하는 시절에, 창조 아들들에게 크게 도움이 된다. 이 중심들은 사람이 사는 중요한 거점 사이에 행성간의 통신에 유용한 집중된 에너지 통로를 마련해줄 수 있다. 그러한 에너지 통로나 선은 가끔 또한 에너지 길이라고도 부르고, 한 동력 중심으로부터 다른 동력 중심까지, 또는 한 물리 통제자로부터 다른 감독에게 전하는 직통 에너지 회로이다. 이 회로는 개별화된 동력의 흐름이며, 분화(分化)되지 않은 에너지의 자유로운 공간 운동과 대조가 된다.
29:2.17 (322.1) 5. 별자리 중심. 살아 있는 이 동력 중심 10명이 각 별자리에 주둔하며, 1백 종속 지역 체계에 에너지를 던지는 자로서 활동한다. 통신과 수송을 위하여, 그리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떤 형태의 물리적 에너지에 의존하는 살아 있는 생물에게 에너지를 주입하려고, 이 존재들로부터 동력선(動力線)이 떠나간다. 그러나 동력 중심이나 하위 물리 통제자도 기능적 조직인 생명에는 달리 관여하지 않는다.
29:2.18 (322.2) 6. 체계 중심. 최상 동력 중심 1명이 영구하게 각 지역 체계에 배치된다. 이 체계 중심은 동력 회로를 사람이 사는 시공 세계들로 보낸다. 그들은 하위 물리 통제자들의 활동을 조정하고, 그밖에 지역 체계에서 동력의 바람직한 분배를 보장하기 위하여 활동한다. 행성간 회로의 중계는 어떤 물질 에너지를 완벽하게 조정하고 물리적 동력을 효과적으로 규제하는 데 달려 있다.
29:2.19 (322.3) 7. 분류되지 않은 중심. 이들은 특별한 지역 상황에서 활동하지만, 사람 사는 행성에서 활동하지 않는 중심이다. 개별 세계는 물리 통제사들의 책임 하에 있고, 그들 체계의 동력 중심이 보낸, 연결된 동력선을 받는다. 아주 특별한 에너지 관계를 가진 구체들만, 우주의 균형 바퀴로서, 또는 에너지 규제자로서 활동하는 제7 계급의 동력 중심을 가진다. 각 활동 단계마다, 이 동력 중심들은 상급의 통제 단위에서 활동하는 자들과 완전히 대등하지만, 1백만 천체 중에 하나도 그러한 살아 있는 동력 조직을 거느리지 않는다.
29:3.1 (322.4) 여러 초우주에 두루 흩어져 있는 최상 동력 중심과 그 동료 및 부하들의 수는 1백억이 넘는다. 그들은 모두 파라다이스에 있는 선조, 일곱 최상 동력 지휘자와 완전히 동시화되고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대우주의 동력 통제는 일곱 최상 동력 지휘자를 창조한 일곱 으뜸 영의 보호와 지도에 맡겨진다.
29:3.2 (322.5) 최상 동력 지휘자와 그 동료ㆍ조수ㆍ부하들은 모두 언제까지나, 온 공간의 모든 법정의 체포나 간섭에서 면제된다. 그들은 또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초우주 정부, 또는 창조 아들의 지역 우주 행정부의 행정 지시에도 예속되지 않는다.
29:3.3 (323.1) 무한한 영의 자식들이 이 동력 중심과 지휘자들을 생기게 한다. 비록 우주를 물질로 조직하는 후기에 창조 아들들과 제휴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행정부에 관련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력 중심들은 어떤 면에서 최상 존재의 전반적 우주 통제와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
29:3.4 (323.2) 동력 중심과 물리 통제자들은 아무 훈련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완전하게 창조되었고, 선천적으로 완전히 활동한다. 그들은 결코 한 기능에서 다른 기능으로 이동하지 않고, 언제나 처음에 배치된 그대로 근무한다. 그들의 계층에 아무런 진화가 없고, 이것은 두 계급의 일곱 분과 모두에게 참말이다.
29:3.5 (323.3) 기억을 돌이켜보도록 올라오던 과거가 없으니까, 동력 중심과 물리 통제자는 결코 놀지 않는다. 그들의 모든 활동은 철저히 사무적이다. 언제나 근무하고 있으며, 우주의 계획에는 물리적 에너지 선이 중단되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준비가 없다. 1초의 몇 분의 1이라도 이 존재들은 시공 에너지 회로(回路)의 감독을 그만둘 수 없다.
29:3.6 (323.4) 동력 지휘자, 동력 중심, 동력 통제자는 동력, 곧 물질 에너지나 반(半)물리적 에너지를 제외하고, 온 창조에서 어떤 것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들은 동력을 창출하지 않지만, 동력을 수정하고, 주무르고, 방향을 정해 준다. 물리적 인력의 당기는 힘에 저항하는 것 외에, 그들은 인력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인력에 대하여 그들은 저항하는 관계 밖에 없다.
29:3.7 (323.5) 다양한 분리된 에너지 집합체의 살아 있는 작용과 연결하여, 동력 중심들은 물질 체제의 광범위한 장치와 조정을 이용한다. 개별 동력 중심은 각자 기능적으로 통제하는, 정확히 1백만 단위로 이루어져 있고, 사람의 육체 안에 있는 중요한 여러 기관(器官)처럼, 에너지를 수정하는 이 단위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동력을 규제하는 이 “중요한 기관들”은 움직일 수 있고, 연합 가능성은 참으로 다채롭다.
29:3.8 (323.6) 나는 도무지 살아 있는 이 존재들이 우주 에너지의 주요 회로들을 어떤 방법으로 작동하고 규제하는가 설명할 수 없다. 거대하고 거의 완전히 효과적인 이 동력 중심들이 얼마나 크고 무슨 활동을 하는가 더 가르치려 하면, 오직 너희를 더욱 헛갈리고 놀라게 할 것이다. 그들은 살아 있고 “성격”을 가졌지만, 너희는 이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29:3.9 (323.7) 하보나 바깥에서 최상 동력 중심들은 특별히 지어진 (건축된) 구체나 달리 알맞게 구성된 천체에서만 활동한다. 건축된 세계들은, 공간 에너지가 이 구체들 위에 넘쳐흐르는 동안, 살아 있는 동력 중심들이 방향을 지휘하고 에너지를 수정하고 집중하는, 선택하는 스위치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어져 있다. 그들은 진화하는 보통 태양이나 행성에서 그렇게 활동할 수 없다. 어떤 무리들은 또한 이 특별한 본부 세계들의 난방과 기타 물질적 필요에 관여한다. 유란시아 지식의 범위를 넘지만, 이 계급의 살아 있는 동력 성격자들은 열을 내지 않고 빛나는 빛의 분산에 크게 관여한다는 것을 내가 말해도 좋다. 그들은 이 현상을 일으키지 않지만, 열이 없는 빛의 분산과 방향을 지휘하는 데 관여한다.
29:3.10 (323.8) 동력 중심과 그 하위 통제자들은 조직된 공간의 모든 물리적 에너지를 움직이는 데 배치된다. 그들은 3가지 기본 기류(氣流)를 가지고 일하는데, 이것은 각자 10가지 에너지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물질이 조직된 공간의 에너지 전하이고, 조직된 공간은 그들의 영토이다. 우주 동력 지휘자들은 일곱 초우주의 현재 경계 바깥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엄청난 물력 행위와 아무 상관이 없다.
29:3.11 (324.1) 동력 중심과 통제자들은, 각 기본 우주 기류에 포함된 10가지 형태의 에너지 중에서 오로지 일곱 가지만 완전히 통제한다. 그들이 일부 또는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형태는 무제한 절대자가 지배하는 에너지 명시의 분야, 예측할 수 없는 분야임이 틀림없다. 만약 그들이 이 절대자의 원초 물력에 영향을 미친다면, 우리는 그러한 활동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물리 통제자들이 때때로 우주 절대자의 어떤 충동에 자동으로 반응한다는 견해를 정당화할 미약한 증거가 얼마큼 있다.
29:3.12 (324.2) 살아 있는 이 동력 장치들은 무제한 절대자가 총우주의 에너지를 통제하는 데 의식하여 관계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동력 지휘 계획, 거의 완전한 계획 전체가 어떤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이 초월 인력의 존재에 복종한다고 우리는 추측한다. 어떤 지역 에너지 상황에도, 중심과 통제자들은 거의 최고 권한을 행사하지만, 그들은 무제한 절대자의 초월 에너지의 존재와 헤아릴 수 없는 그의 행위를 언제나 의식하고 있다.
29:4.1 (324.3) 이 존재들은 최상 동력 중심들의 부하(部下), 기동성 있는 부하이다. 물리 통제자들은 놀라운 종류의 자동 운행을 시작할 수 있는 그러한 성질, 개체를 변형하는 능력을 부여받았고, 그들은 외톨 사자의 비행에 접근하는 속도로 지역의 공간을 통과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다른 공간 통과자처럼, 그들은 물질 구체를 떠날 때, 인력의 작용과 관성(慣性)의 저항을 극복하는 데, 동료들과 어떤 다른 종류 존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29:4.2 (324.4) 물리 통제사는 대우주 전역에 걸쳐 근무한다. 일곱 최상 동력 지휘자가 파라다이스로부터 초우주의 본부들에 이르기까지 멀리, 그들을 직접 다스린다. 여기서부터 균형 회의, 곧 물리 부조직책들의 직원으로부터 일곱 으뜸 영이 파송하는 높은 동력 위원들이, 주감독들을 지휘하고 분배한다. 이 높은 위원들에게는 주(主)생계기의 기록과 등록된 자료를 해석할 권한이 주어지며, 후자는 한 초우주 전체의 동력의 압력과 에너지 전하를 가리키는 살아 있는 도구이다.
29:4.3 (324.5) 파라다이스 신들의 계심은 대우주를 에워싸고 영원의 궤도를 둘러싸지만, 일곱 으뜸 영 가운데 어느 한 분의 영향도 단일 초우주에 국한된다. 각 초우주 사이에는 분명히 에너지가 분리되고 동력 회로가 격리된다. 따라서 개별화된 통제 방법이 지배해야 하고, 또 지배한다.
29:4.4 (324.6) 물리 통제사는 최상 동력 중심들의 직계 자손이며, 그들의 무리는 다음을 포함한다:
29:4.12 (325.5) 이 계급들은 모두, 개별적으로 선택하는 힘을 소유한다는 의미에서는 성격자가 아니다. 특히, 마지막 넷은 그들의 상관의 충동에 대한 반응, 그리고 기존 에너지 조건에 대한 반응이 온통 자동이며 기계적인 듯하다. 그러나 비록 그러한 반응이 온통 기계적인듯 하지만, 기계적이 아니다. 자동(自動) 기계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은 모두 다른 지능 작용을 드러낸다.
29:4.13 (325.6) 성격은 반드시 지성과 공존하는 물건이 아니다. 수많은 하등 동물, 그리고 어떤 이러한 하위 물리 통제자의 경우와 같이 모든 선택의 힘이 빼앗긴 때에도 지성은 생각할 수 있다. 물리적 동력을 더 자동으로 규제하는 자 중에 상당수는 어떤 의미에서도 성격자가 아니다. 그들은 의지와 혼자서 결정하는 능력을 부여받지 않았고, 그들이 배치받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기계적으로 완전한 설계에 전적으로 복종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두 상당히 총명한 존재이다.
29:4.14 (325.7) 물리 통제자는 유란시아에서 발견되지 않은 기본 에너지를 조절하는 데 주로 종사한다. 알려지지 않은 이 에너지는 행성간 수송 체계와 어떤 통신 기법에 아주 필수이다. 소리에 해당하는 것을 전달하거나 시력을 연장하려는 목적으로 우리가 에너지 선을 설치할 때, 살아 있는 물리 통제자와 그 동료들이 발견되지 않은 이 형태의 에너지를 이용한다. 또한 가끔 중도인(中道人)이 일상적인 일을 하느라고 바로 이 에너지를 사용한다.
29:4.15 (325.8) 1. 동력 부지휘자. 영역에서 항상 바뀌는 에너지 상태의 필요, 늘 변하는 필요에 따라서, 놀랍게 유능한 이 존재들에게 모든 계급의 물리 통제사를 배치하고 파송하는 일이 맡겨진다. 광대한 물리 통제자 예비군이 소구역 본부 세계에서 유지되며, 이 집중된 거점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동력 부지휘자들이 그들을 우주ㆍ별자리ㆍ체계의 본부로, 그리고 개별 행성으로 파송한다. 이렇게 배치되었을 때, 물리 통제자는 화해 위원회의 신성한 집행자가 내리는 명령에 잠정적으로 지배되지만, 그밖에 오직 그들의 부지휘자와 최상 동력 중심에게만 순종해야 한다.
29:4.16 (325.9) 동력 부지휘자 3백만 명이 오르본톤의 각 소구역에 배치되어 있고, 초우주에서 놀랍게 다능한 이 존재들을 배당받은 수는 총 30억이다. 그들 자체의 예비군이 바로 이 여러 소구역 세계에서 유지되고, 거기서 그들은 또한 총명하게 에너지를 통제하고 변화시키는 기법의 과학을 연구하는 모든 자에게, 강사로서 봉사한다.
29:4.17 (325.10) 이 지휘자들은 소구역에서 집행 근무를 하고 공간 영역에서 검사 근무를 하는 데 같은 기간을 번갈아 보낸다. 적어도 한 대리 검사자가 언제나 각 지역 체계에 있고, 그 서울 구체에서 본부를 둔다. 그들은 광대한 살아 있는 에너지의 총 집합체를 동시에 조화된 가운데 유지한다.
29:4.18 (325.11) 2. 기계적 통제자. 이들은 동력 지휘자에게 뛰어나게 다능하고 기동성 있는 조수이다. 몇조(兆)의 감독자가 너희 소구역 엔사에 임관되었다. 이 존재들을 기계적 통제자라 부르는 것은 그들이 완전히 상관의 지배를 받고, 동력 부지휘자의 뜻에 아주 온전히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 자신은 아주 총명하며, 할 일이 기계적이고 사무적이긴 하지만, 그들은 솜씨 있게 수행한다.
29:4.19 (326.1) 사람이 사는 세계에 배치된 모든 물리 통제사 가운데, 기계적 통제자는 월등하게 가장 강력하다. 모든 다른 존재를 능가하는 팔팔한 반인력(反引力) 자질을 소유하기 때문에, 각 감독이 인력에 저항하는 힘은 오직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는 거대한 구체들이 필적한다. 이 감독자 10명이 지금 유란시아에 주둔하고 있으며, 그들의 가장 중요한 행성 활동 중에 하나는 천사 수송기의 출발을 돕는 것이다. 그렇게 활동하면서, 에너지 전송자 1천 명이 한 중대(中隊)를 이루어 천사의 출발을 위한 시초(始初) 운동력을 마련하는 동안, 기계적 통제자 10명 모두가 일치하여 행동한다.
29:4.20 (326.2) 기계적 통제자는 에너지 흐름의 방향을 정해 주고 특화된 전류나 회로로 그 에너지의 집중을 수월하게 만드는 일에 유능하다. 이 강력한 존재들은 물리적 에너지를 분리하고 방향을 정해 주고 강화하는 데, 그리고 행성간 회로의 압력을 평준화하는 데 크게 상관이 있다. 그들은 초우주의 동력 전하를 구성하는, 공간에 있는 30가지 물리적 에너지 가운데 21가지를 다루는 일에 숙달되어 있다. 또한 물리적 에너지의 좀더 미묘한 9가지 형태 가운데 6가지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데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이 감독들을 서로에 대해서, 그리고 어떤 동력 중심들에 대하여 적당한 기술적 관계에 배치함으로, 동력 부지휘자들은 동력을 조정하고 에너지를 통제하는 데, 믿을 수 없이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게 된다.
29:4.21 (326.3) 물리 통제사는 흔히 수백, 수천, 아니 수백만까지도 대열을 이루어 활동하고, 그들의 위치와 대형(隊形)을 변화시킴으로 개별 자격 뿐 아니라, 집합 자격으로도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다. 필요가 변함에 따라서, 그들은 에너지의 분량과 운동을 증폭하고 가속하거나, 에너지의 흐름을 억류하고 응축하고 지연시킬 수 있다. 이른바 촉매가 화학 반응을 증대하는 것과 얼마큼 비슷하게, 그들은 에너지와 동력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타고난 능력에 따라서, 최상 동력 중심들과 협동하여 활동한다.
29:4.22 (326.4) 3. 에너지 변압자. 한 초우주에 있는 이 존재들의 수는 믿을 수 없이 많다. 사타니아에만 거의 1백만 명 있고, 보통 할당수는 사람이 사는 각 세계에 1백 명이다.
29:4.23 (326.5) 일곱 최상 동력 지휘자와 일곱 중앙 감독자가 합동으로 에너지 변압자를 창조한다. 그들은 성격이 더 뚜렷한 계급의 물리 통제자 축에 속하고, 동력 부지휘자가 사람 사는 세계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 변압자들이 지휘권을 가진다. 그들은 행성에서 출발하는 모든 천사(天使) 수송기를 검사하는 자이다. 모든 등급의 하늘 생명은, 오직 성격이 뚜렷한 계급의 부지휘자 및 에너지 변압자들과 연락함으로 성격이 덜한 계급의 물리 통제자들을 이용할 수 있다.
29:4.24 (326.6) 이 변압자들은 강력하고 유능한 살아 있는 스위치이며, 특정한 동력의 성향이나 방향을 따르기 위하여, 또는 그에 저항하여 처신할 수 있다. 그들은 또한 거대한 행성이나 별 이웃들 사이를 지나가는 강력한 에너지 흐름으로부터 행성을 격리하는 노력에 숙달되어 있다. 에너지를 변화시키는 그들의 속성은 보편적 에너지 평형이나 동력의 균형을 유지하는 중요한 과제에서 그들을 가장 쓸모 있게 만든다. 그들은 한때 에너지를 소비하거나 저장하는 듯하고, 다른 때에는 에너지를 발산하거나 해방시키는 듯하다. 변압자는 각자의 영역에서 산 에너지와 죽은 에너지를 “저장하는 건전지” 잠재성을 늘이거나 줄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오로지 물리적 에너지와 반물질 에너지만 다룬다. 그들은 생명의 영토에서 직접 활동하지 않고, 살아 있는 존재들의 형태를 바꾸지도 않는다.
29:4.25 (327.1) 어떤 면에서, 에너지 변압자들은 모든 살아 있는 반(半)물질 생물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고 신비스럽다. 이들은 어떤 미지의 방법으로 물리적으로 전문화되었고, 그들의 연락 관계를 다르게 함으로, 그들의 연합된 존재를 통과하는 에너지에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물리적 영역의 상태는 그들의 숙련된 조종으로 변화를 겪는 듯하다. 그들은 공간 에너지의 물리적 형태를 바꿀 수 있고, 또 바꾼다. 동료 감독자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은 초우주 동력 전하를 가진 30가지 물리적 에너지 가운데 27가지의 형태와 잠재성을 실제로 바꿀 수 있다. 그들이 이러한 에너지 가운데 세 가지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은 그들이 무제한 절대자의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29:4.26 (327.2) 나머지 4 집단의 물리 통제사는 어떤 용납할 만한 정의로도 도저히 성격자라고 할 수 없다. 발송자ㆍ연합자ㆍ분리자ㆍ생계기의 반응은 온통 자동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지능이 있다. 우리가 그들과 의사를 소통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놀라운 존재들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크게 제한되어 있다. 그들은 그 영역의 언어를 이해하는 듯하지만, 그들은 우리와 교통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리가 전하는 말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듯하지만, 도무지 반응할 능력이 없다.
29:4.27 (327.3) 4. 에너지 발송자. 이 존재들은,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지만, 주로 행성 안의 자격으로 활동한다. 그들은 개별 세계에서 나타나다시피, 놀라운 에너지 파송자이다.
29:4.28 (327.4) 에너지를 새로운 회로로 빼돌려야 할 때, 발송자들은 바라는 에너지 경로에 한 줄로 자신들을 배치하며, 에너지를 잡아당기는 그들의 독특한 속성의 덕택으로, 바라는 방향으로 늘어난 에너지 흐름을 실제로 유인할 수 있다. 어떤 금속 회로가 어떤 형태의 전기 에너지 흐름의 방향을 정하는 것과 똑같이 그들은 실제로 이렇게 한다. 그리고 그들은 30가지 가운데 반이 넘는 물리적 에너지 형태에 대하여 살아 있는 초전도체이다.
29:4.29 (327.5) 발송자들은 솜씨있는 연결을 형성하며, 이러한 연락은 한 행성에서 다른 행성으로, 개별 행성의 한 정거장에서 다른 정거장으로 이동하는 특화된 에너지의 약화되는 흐름을 회복하는 데 효과적이다. 그들은 너무 약해서 어느 다른 부류의 산 존재도 식별할 수 없는 전류를 탐지할 수 있고, 이 에너지를 확대해서 거기에 담긴 통신문을 완전히 알아볼 수 있게 만든다. 그들의 서비스는 방송 수신자에게 가치를 따질 수 없이 귀중하다.
29:4.30 (327.6) 에너지 발송자는 통신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지각(知覺)을 이용할 수 있다. 그들은 먼 거리에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멀리 있는 광경도 “볼 수 있게” 만든다. 그들은 지역 체계와 개별 행성에서 비상 통신선을 마련해 준다. 정상으로 설립된 회로 바깥 지역에서 통신하려는 목적으로 거의 모든 생물이 이 서비스를 사용해야 한다.
29:4.31 (327.7) 이 존재들은, 에너지 변압자와 함께, 희박해진 공기를 가진 세계에서 필사자의 존재를 유지하는 데 불가결하고, 비호흡 행성에서는 생명의 기법에 필수인 부분이다.
29:4.32 (328.1) 5. 1차 연합자. 흥미 있고 귀중한 이 존재는 숙달된 에너지 보존자요 관리자이다. 식물이 태양 빛을 저장하는 것과 얼마큼 비슷하게, 살아 있는 이 유기체는 양극으로 명시되는 기간에 에너지를 저장한다. 그들은 거대한 규모로 일하고, 공간의 에너지를 유란시아에서 알려지지 않은 물리적 상태로 바꾼다. 또한 물질 존재의 원시 단위를 얼마큼 생산하는 점까지, 이 변형을 진행할 수 있다. 이 존재들은 오로지 자리에 있음으로 행위한다. 이 행위로 조금도 지치거나 소모되지 않으며, 살아 있는 촉매처럼 행동한다.
29:4.33 (328.2) 음극 명시가 있는 시기에, 그들은 이 축적된 에너지를 방출하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에너지와 물질에 관한 너희의 지식이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 그들이 일하는 기술을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들은 언제나 우주 법칙에 순응해서 일하며, 같은 알파벳 글자가 방대하게 다른 이야기를 엮도록 만들려고 너희가 조절할 수 있는 활자를 조종하는 것과 비슷하게, 그들은 원자ㆍ전자ㆍ극자(極子)를 다루고 주무른다.
29:4.34 (328.3) 연합자는 형성되는 물질 구체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생명 집단이며, 그들은 너희가 살아 있는 존재가 전혀 있을 수 없다고 여길 그러한 물리적 온도(溫度)에서 활동할 수 있다. 그들은 다만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계급의 생명을 대표한다. 그들과 공동으로 일하는 분리자와 함께, 그들은 모든 지적 생물 가운데 가장 노예 같다.
29:4.35 (328.4) 6. 2차 분리자. 1차 연합자와 비교해서, 엄청난 반인력 자질을 부여받은 이 존재는 거꾸로 일하는 자이다. 지역 세계나 지역 체계에서 특별하거나 수정된 형태의 물리적 에너지가 소모될 위험은 결코 없으며, 살아 있는 이 조직들은 한없는 에너지 공급을 생성하는 독특한 힘을 부여받았다. 그들은 유란시아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형태의 에너지를 그보다도 적게 인식된 형태의 물질로부터 생성시키는 데 주로 관여한다. 그들은 참으로 공간의 연금술사이며 시간 세계에서 이적(異蹟)을 행하는 자이다. 그러나 어떤 이적을 행해도 그들은 결코 우주 최상위의 명령을 어기지 않는다.
29:4.36 (328.5) 7. 생계기. 이 존재들은 1차와 2차 물력 조직자, 그리고 동력 지휘자, 모두 세 계급의 에너지 통제자들이 합동으로 창조한 존재이다. 생계기(生計器)는 모든 물리 통제사 가운데 가장 수가 많다. 사타니아에서 활동하는 수만 해도 너희의 숫자 개념을 초과한다. 그들은 사람이 사는 모든 세계에 주둔하며, 언제나 상급의 물리 통제자에게 소속된다. 그들은 중앙 우주, 초우주, 바깥 공간에서 서로 바꿔서 활동할 수 있다.
29:4.37 (328.6) 생계기는 기본 우주 물력의 각 형태에 하나씩, 30 분과로 창조되며, 순전히 살아 있고 자동적인 계심ㆍ압력ㆍ속도를 재는 계기로서만 활동한다. 이 살아 있는 기압계는 오직 모든 형태의 물력 에너지의 상태를 자동으로 어김없이 등록하는 데만 아랑곳한다. 그들과 물리적 우주의 관계는, 광대한 거울 작용과 지능적 우주의 관계와 같다. 질적ㆍ양적 에너지 존재를 기록하고 그 위에 시간도 기록하는 생계기를 생시계라 부른다.
29:4.38 (328.7) 생계기가 총명한 존재인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 기계라고 밖에 그들을 분류할 수 없다. 살아 있는 이 기계 장치를 너희가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거의 지능적인 듯한 정밀성과 정확성을 가지고 작용하는, 너희 자신이 만든 기계 장치와 그들을 비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존재들을 너희가 상상하고자 하면, 훨씬 더 미세하게 정확하고, 아니 극도의 정밀성을 가지고 엄청난 계산을 요하는 더 복잡한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장치, 지능이 있고 살아 있는 기계 장치(존재)를 우리가 대우주에서 실제로 가졌다는 것을 인식할 때까지, 상상력을 동원해 보아라.
29:5.1 (329.1) 물력 조직자는 파라다이스에 거주하지만, 그들은 총우주 전체에 걸쳐서, 특히, 물질이 조직되지 않은 공간 영토에서 활동한다. 이 특별한 존재들은 창조자도 아니요 지음받은 자도 아니며, 그들은 서비스의 2대 분과를 이룬다:
29:5.4 (329.4) 원시 물력을 조종하는 이 두 막강한 계급은 순전히 총우주 건축가들의 감독 하에서 일하며, 현재 그들은 대우주의 경계 안에서 널리 일하지 않는다.
29:5.5 (329.5) 1차 물력 조직책은 무제한 절대자의 시원적 물력, 곧 기초적 공간의 물력을 조종한다. 그들은 성운(星雲)을 창시하는 자이다. 공간에서 에너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는 살아 있는 선동자요, 이 거대한 현상을 초기에 조직하고 방향을 정해 주는 자이다. 이 물력 조직자들은 시원적 물력을 (파라다이스의 직접 인력에 민감하지 않은 미숙성 에너지를) 1차 에너지, 곧 유력 에너지로 변질시키는데, 유력 에너지는 무제한 절대자 혼자서 붙들고 있던 손아귀로부터 파라다이스 섬의 인력이 붙들도록 변질되는 에너지이다. 그리고 나서 물력 부조직자가 이들을 이어받으며, 부조직자는 1차 단계에서 2차, 곧 인력 에너지 단계를 거쳐서 에너지를 변질시키는 과정을 계속한다.
29:5.6 (329.6) 한 창조 아들이 도착하는 것은 한 지역 우주를 창조하는 계획이 완성되었음을 알리며, 완성되고 나서 물력 부조직자들은 천문 관할권을 가진 초우주에서 활동하는 동력 지휘자들의 명령에 복종한다. 그러나 그러한 계획이 없는 경우에, 물력 부조직자들은, 지금도 그들이 바깥 공간에서 활동하다시피, 무기한으로 줄곧 이 물질 창조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29:5.7 (329.7) 물력 조직책은 오르본톤의 다능한 동력 중심과 물리 통제자도 견딜 수 없을 그러한 물리적 조건 밑에서, 온도를 견디며 활동한다. 바깥 공간의 이러한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는 존재, 밝혀진 유일한 다른 존재는 외톨 사자와 영감 받은 삼위일체 영이다.
29:5.8 (329.8) [유버르사에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권한으로 활동하는 한 우주 검열자가 후원하였다.]
30:0.1 (330.1) 파라다이스와 대우주에서 지금 활동하는 성격자 및 성격이 아닌 개체들은 거의 한없는 수의 살아 있는 존재들을 구성한다. 수없는 종속 부류와 변종은 말할 것도 없고, 주요 계급과 종류의 수조차 인간이 상상하기에 어지러울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존재의 두 가지 기본 분류에 관하여 무언가―제시된 파라다이스 분류와 유버르사 성격자 등록부의 요약을―발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0:0.1 (330.1) 파라다이스와 대우주에서 지금 활동하는 성격자 및 성격이 아닌 개체들은 거의 한없는 수의 살아 있는 존재들을 구성한다. 수없는 종속 부류와 변종은 말할 것도 없고, 주요 계급과 종류의 수조차 인간이 상상하기에 어지러울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존재의 두 가지 기본 분류에 관하여 무언가―제시된 파라다이스 분류와 유버르사 성격자 등록부의 요약을―발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0:0.2 (330.2) 포괄적이고 전적으로 일관성 있는 대우주 성격자 분류는 가능하지 않은데, 이는 총 집단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집단의 체계적인 분류에 필요한 계시(啓示), 길어지는 계시를 다루기 위해서 수많은 추가 논문이 요구될 것이다. 그렇게 개념을 확장하는 것은 도저히 바람직하지 않을 터이니, 이것은 일부 드러난 이 개념들이 주는 자극, 창조적으로 추측하는 자극을 다음 천 년 동안, 생각하는 필사자로부터 빼앗을 터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지나친 계시를 받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상상력을 억누르기 때문이다.
30:1.1 (330.3) 파라다이스에서, 살아 있는 존재는 파라다이스 신들과 본래부터 가진 관계 및 얻은 관계에 따라서 분류된다. 중앙 우주와 초우주의 대집회 기간에 출석한 자들은 흔히 기원에 따라서, 삼자의 기원을 가지거나 삼위일체에 도달한 자, 이중 기원을 가진 자, 그리고 단일 기원을 가진 자로 분류된다.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파라다이스의 분류를 필사자의 머리가 알아듣도록 해석하기는 힘들지만, 우리는 다음을 발표하도록 허가를 받았다:
30:1.2 (330.4) I. 삼위에 기원을 가진 존재. 파라다이스 신 세 분 모두가 신으로서 또는 삼위일체로서 창조한 존재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삼위일체를 체험한 군단. 후자의 명칭은 밝혀진 집단 및 밝혀지지 않은 집단을 포함하여, 삼자일체를 체험한 모든 집단의 존재들을 언급한다.
30:1.7 (330.9) 나. 삼위일체의 고정된 아들.
30:1.8 (330.10) 1. 삼위일체를 체험한 최상위의 신비.
30:1.9 (330.11) 2. 영원부터 늘 계신 이.
30:1.10 (330.12) 3. 옛적부터 늘 계신 이.
30:1.18 (331.7) 다.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존재 및 삼자일체 체험으로 생긴 존재.
30:1.19 (331.8) 1. 삼위일체 교육 아들.
30:1.20 (331.9) 2. 영감 받은 삼위일체 영.
30:1.23 (331.12) 5. 밝혀지지 않은 삼위일체 기원의 존재.
30:1.24 (331.13) 6. 밝혀지지 않은 신이 삼자일체화한 존재.
30:1.25 (331.14) 7. 삼위일체를 체험한 달성의 아들.
30:1.26 (331.15) 8. 삼위일체를 체험한 선택의 아들.
30:1.29 (331.18) II. 이중 기원 존재. 파라다이스 신들 가운데 어느 두 분에 기원을 가진 존재나, 그밖에 파라다이스 신들의 직접 자손 또는 간접 자손인 어느 두 존재가 창조한 존재들.
30:1.50 (331.39) 1. 조절자가 융합한 필사자.
30:1.51 (331.40) 2. 아들이 융합한 필사자.
30:1.55 (332.1) III. 단일 기원 존재. 파라다이스 신들 가운데 어느 한 분에게서 기원을 가진 자나, 그렇지 않으면 파라다이스 신들의 직접 또는 간접 자손인 어느 한 존재가 창조한 자들.
30:1.58 (332.4) 2. 하보나의 일곱 회로 영.
30:1.59 (332.5) 3. 하보나 회로의 12 보조자.
30:1.70 (332.16) 다. 무한한 영의 가족.
30:1.72 (332.18) 2. 우주 회로 감독자.
30:1.74 (332.20) 4. 무한한 영의 개인 보조자.
30:1.86 (332.32) 16. 케루빔과 사노빔.
30:1.87 (332.33) 17. 밝혀지지 않은 영 기원의 존재.
30:1.88 (332.34) 18. 일곱 최상 동력 지휘자.
30:1.92 (332.38) IV. 궁극에 이른 초월 존재.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될 때까지 여러 시공 우주에는 보통 그 기원이 밝혀지지 않는 광대한 무리의 초월 존재가 파라다이스에 발견될 것이다. 이 초월자들은 창조자도 지음받은 자도 아니니, 그들은 신성ㆍ궁극ㆍ영원의 성질을 가진 궁극에 이른 아이들이다. 이 “궁극에 이르는 자들”은 유한하지도 무한하지도 않다―초한이다. 초한(超限)은 무한도 절대성도 아니다.
30:1.93 (333.1) 창조되지 않은 이 비창조자들은 늘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게 충성하며 궁극위에게 복종한다. 성격 활동의 네 가지 궁극 수준에서 존재하고, 일곱 초한 수준에서 활동하며, 초한 수준은 12 대분과로, 대분과는 1천 주요 작업 집단으로 이루어지고, 여기에는 각자 일곱 등급이 있다. 궁극에 이른 이 존재들은 다음 계급을 포함한다:
30:1.99 (333.7) 하나님은 하나의 초월 성격으로서 궁극에 이르며, 하나님은 하나의 성격자로서 창조한다. 하나님은 하나의 선(先)인격으로서 조각이 된다. 그리고 자신의 그러한 조절자 조각은, 아버지인 하나님의 부모 행위로 인하여 그런 필사 인간에게 수여된 인격의 자유 의지 선택에 따라서, 물질 필사자의 지성 위에 영이 될 혼을 자라게 한다.
30:1.100 (333.8) V. 신의 분신이 된 개체.[1] [1664] 이 계급의 살아 있는 존재 형태는 우주의 아버지 안에서 기원을 가지며, 생각 조절자가 그 전형(典型)을 잘 나타낸다. 그러나 이 개체는 결코 첫째 근원 중심의 선(先)인격 실체의 유일한 분신은 아니다. 조절자가 아닌 다른 조각들이 하는 활동은 다양하고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조절자나 그러한 다른 조각과 융합하는 것은 그 인간을 아버지가 융합한 존재로 만든다.
30:1.101 (333.9) 셋째 근원 중심의 선(先)지성 영의[2] [1665] 분신은, 도저히 아버지의 분신과 견줄 수 없지만, 여기에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개체는 조절자와 아주 크게 다르다. 그들은 그런 자격으로 영별에서 거주하지도 않고, 그런 자격으로 지성 인력 회로를 거치지도 않으며, 육체를 입은 일생 동안에 필사 인간 속에 깃들지도 않는다. 그들은 조절자와 같은 의미에서 선(先)인격이 아니지만, 선지성 영의 그러한 분신은 살아남는 어떤 필사자에게 수여되며, 그와 융합하는 것은 조절자가 융합하는 필사자와 반대로 영 융합 필사자로 만든다.
30:1.102 (333.10) 창조 아들의 개별화된 영은 더욱 설명하기 힘들며, 이 영과 뭉치는 것은 그 인간을 아들 융합 필사자로 만든다. 그리고 신의 다른 분신들이 더 있다.
30:1.103 (333.11) VI. 초월 성격 존재. 온 우주에는 신다운 기원을 가지고 다채롭게 봉사하는 광대한 무리의 존재, 성격이 아닌 존재들이 있다. 이 존재들 중에 더러는 아들의 파라다이스 세계들에서 거주하며, 더러는 영원한 아들의 초월 성격 대표들처럼, 다른 데서도 마주치게 된다. 그들은 대체로 이 이야기에서 언급되지 않으며, 인격을 가진 인간에게 그들을 설명하려고 시도해보았자 아주 무익할 것이다.
30:1.104 (333.12) VII. 분류되지 않고 밝혀지지 않은 서열. 현재 우주 시대 동안에는, 성격이거나 아니거나, 모든 존재를 현재 우주 시대에 관계된 분류 안에 넣기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그러한 분류가 다 밝혀지지도 않았다. 따라서 수많은 계급이 이 목록에서 빠졌다. 다음을 생각해 보아라:
30:1.106 (333.14) 궁극위의 제한된 대관.
30:1.107 (334.1) 최상위의 무제한 감독자.
30:1.108 (334.2)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밝혀지지 않은 창조 대리자.
30:1.112 (334.6) 이들 가운데 아무도 여기에 밝혀진 파라다이스 분류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외에, 이 계급들이 함께 열거된 것에 아무런 특별 의미를 붙일 필요가 없다.
30:1.113 (334.7) 영들이 있다. 영 개체, 영 계심, 성격이 있는 영, 선(先)인격의 영, 초월 성격의 영, 영 존재, 영 성격자들이 있다―그러나 필사자의 언어도 필사자의 지능도 적당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순수 지성”에서 생겨난 성격자는 없다고 말해도 좋다. 하나님은 영이요, 하나님이 부여하지 않는 한, 어떤 개체도 성격을 가질 수 없다. 영적 에너지나 물리적 에너지와 결합되지 않은 어떤 지성 개체도 성격자가 아니다. 그러나 생각 능력을 가진 영 성격자들이 있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영을 가진, 생각하는 성격자들이 있다. 위엄자와 그 동료들은 지성이 지배하는 존재의 상당히 좋은 예이지만, 너희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 종류의 성격자에는 더 좋은 예들이 있다. 너희에게 알려지지도 않은, 한 전체 계급의 그러한 지성 성격자들도 있지만, 그들은 반드시 영과 결합되어 있다. 밝혀지지 않은 어떤 다른 생물은 지능 성격자와 물리적 에너지 성격자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른다. 이 종류의 존재는 영 인력에 반응하지 않지만, 그런데도 참된 성격자이다―아버지의 회로 안에 있다.
30:1.114 (334.8) 이 논문집은 시간 세계에 벌떼처럼 모이는 우주들과 영원한 중앙 우주에서 살고 예배하고 봉사하는, 살아 있는 생물, 창조자, 궁극에 이르는 자, 그리고 그 외에 달리 존재하는 것들에 관하여 낱낱히 이야기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그렇게 할 수 없다. 너희 필사자는 인격자이며, 따라서 인격화된 존재를 우리가 묘사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초한화(超限化)된 존재를 언제라도 너희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30:2.1 (334.9) 신성한 집단의 살아 있는 존재들은 일곱 대분과로 유버르사에 등록되어 있다:
30:2.4 (334.12) 3. 삼위일체에 기원을 가진 존재.
30:2.9 (334.17) 의지를 가진 이 집단의 생물은 수많은 등급과 작은 하위 분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이 대우주 성격자 분류를 발표하는 것은 이 여러 이야기에서 밝혀진 계급의 지적 존재들을 설명하는 데 주로 관여된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파라다이스까지 점진적으로 올라가는 길에, 시간 세계 필사자의 승천 체험 속에서 마주치게 될 것이다. 다음 목록은 필사자의 승천 계획과 동떨어져서 자기 일을 수행하는 광대한 계급의 우주 존재들에 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30:2.17 (335.8) 3. 일곱 무리의 거울 영.
30:2.22 (335.13) III. 삼위일체 기원의 존재.
30:2.23 (335.14) 1. 삼위일체를 체험한 최상위의 신비.
30:2.24 (335.15) 2. 영원부터 늘 계신 이.
30:2.25 (335.16) 3. 옛적부터 늘 계신 이.
30:2.27 (335.18) 5. 요즘부터 늘 계신 이.
30:2.30 (335.21) 8. 삼위일체 교육 아들.
30:2.39 (335.30) 1. 창조 아들―미가엘.
30:2.40 (335.31) 2. 심판 아들―아보날.
30:2.47 (335.38) 1. 아버지가 융합한 필사자.
30:2.48 (335.39) 2. 아들이 융합한 필사자.
30:2.49 (335.40) 3. 영이 융합한 필사자.
30:2.54 (336.1) 다. 삼위일체를 체험한 아들.
30:2.57 (336.4) 3. 이름도 번호도 없는 자.
30:2.58 (336.5) 4. 삼위일체를 체험한 관리자.
30:2.59 (336.6) 5. 삼위일체를 체험한 대사.
30:2.62 (336.9) 8. 승천자가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
30:2.65 (336.12) V. 무한한 영의 성격자.
30:2.66 (336.13) 가. 무한한 영의 고등 성격자.
30:2.68 (336.15) 2. 우주 회로 감독자.
30:2.74 (336.21) 나. 공간의 사자 무리.
30:2.90 (336.37) VI. 우주 동력 지휘자.
30:2.91 (336.38) 가. 일곱 최상 동력 지휘자.
30:2.108 (337.9) 라. 상물질 동력 감독.
30:2.116 (337.17) VII. 영구 시민 군단.
30:2.118 (337.19) 2. 체계의 아담 아들.
30:2.119 (337.20) 3. 별자리의 일생자.
30:2.120 (337.21) 4. 지역 우주의 수사시아.
30:2.121 (337.22) 5. 지역 우주의 영 융합 필사자.
30:2.122 (337.23) 6. 초우주의 아반돈터.
30:2.123 (337.24) 7. 초우주의 아들 융합 필사자.
30:2.125 (337.26) 9. 영의 파라다이스 구체의 원주민.
30:2.126 (337.27) 10. 아버지의 파라다이스 구체의 원주민.
30:2.129 (337.30) 이것이 유버르사 본부 세계의 기록에 있는 여러 우주의 성격자들의 기초적 분류이다.
30:2.130 (337.31) 복합 성격자 무리. 유버르사에는 이 외에 수많은 무리의 지능 존재들이 있다는 기록이 있고, 그들도 대우주의 조직과 행정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한 계급 가운데 다음 세 가지 복합 성격자 무리가 있다:
30:2.131 (337.32) 가. 파라다이스 최후 군단.
30:2.132 (337.33) 1. 필사 최후자 군단.
30:2.133 (337.34) 2. 파라다이스 최후자 군단.
30:2.134 (337.35) 3. 삼위일체를 체험한 최후자 군단.
30:2.135 (337.36) 4. 삼위일체를 체험한 합동 최후자 군단.
30:2.136 (337.37) 5. 하보나 최후자 군단.
30:2.139 (337.40) 필사 최후 군단은 이 시리즈의 다음이자 마지막 논문에서 다룬다.
30:2.148 (338.9) 지역 우주와 초우주의 모든 본부 세계에는, 지역 우주 통치자인 창조 아들을 위하여 특정한 임무에 종사하는 이 존재들을 위하여 준비가 되어 있다. 유버르사에서 우리는 이 우주 보조자들을 환영하지만, 그들에 대해서 아무 관할권이 없다. 그러한 특사(特使)들은 창조 아들의 권한 밑에서 자기 일을 처리하고 관찰 업무를 수행한다. 그들의 활동은 너희 지역 우주 이야기에서 더 자세히 기술된다.
30:2.149 (338.10) 다. 일곱 가지 우대 거류민.
30:2.157 (338.18) 이 일곱 집단의 존재들은 지역 체계에서부터 초우주의 서울까지, 특히 후자에서, 모든 본부 세계에서 이렇게 조직되고 통치되는 것이 발견될 것이다. 일곱 초우주의 서울은 거의 모든 등급 및 계급의 지적 존재들이 모이는 장소이다. 수많은 무리의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주민을 빼고, 여기서 모든 존재 단계에 있는, 의지를 가진 인간을 관찰하고 연구할 수 있다.
30:3.1 (338.19) 우대받는 일곱 가지 거류민은 그들의 임무를 추진하고 특별 과제를 수행하면서, 길거나 짧게, 여러 건축 구체에서 머무른다. 그들의 작업은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 있다:
30:3.2 (338.20) 1. 별 학자는 하늘의 천문학자이며 유버르사와 같은 구체에서 일하기를 택한다. 이는 그렇게 특별히 지은 세계들이 그들의 관찰과 계산에 특별히 유리하기 때문이다. 유버르사는 이 거류민의 작업에 유리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이것은 그 중심 위치 뿐 아니라, 에너지 기류를 교란할 거대한 활발한 태양이나 죽은 태양이 가까이 없기 때문이다. 이 학자들은 초우주 업무와 어떤 면에서도 유기(有機)적 연락이 없으며, 그들은 다만 손님이다.
30:3.3 (338.21) 유버르사의 천문학(天文學) 거류민은 근처의 많은 영역으로부터, 중앙 우주로부터, 아니 놀라시아덱으로부터 오는 개인들도 포함한다. 어느 우주의 어느 체계, 어느 세계의 어떤 존재도 별 학자가 되어도 좋으며, 어떤 하늘 천문학자 집단에 가입을 바랄 수 있다. 유일한 필요 조건은, 생애를 계속하고, 공간 세계에 관한 충분한 지식, 특히 그들의 진화 및 통제하는 물리적 법칙에 관하여 넉넉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별 학자들은 이 집단에서 영원히 일하도록 요구되지 않지만, 이 무리에 가입한 자는 아무도, 유버르사 시간으로 1천 년 안에 물러나서는 안 된다.
30:3.4 (339.1) 유버르사의 별 관측 거류민의 수는 지금 1백만을 넘는다. 더러가 비교적 오랫동안 남아 있지만, 이 천문학자들은 오고간다. 그들은 수많은 기계 도구와 물리적 장치의 도움을 받아서 작업을 수행한다. 또한 외톨 사자와 기타 영 탐구자들에게서 큰 도움을 받는다. 이 하늘 천문학자들은 별을 연구하고 공간을 조사하는 일을 하느라고 거울 성격자 뿐 아니라, 살아 있는 에너지 변압자와 발송자들을 항상 이용한다. 그들은 온갖 형태와 단계의 공간 물질과 에너지 명시(明示)를 연구하며, 별의 현상만큼 물력의 작용에도 똑같이 관심을 가진다. 모든 우주에서 아무것도 그들이 정밀하게 조사하지 않는 것이 없다.
30:3.5 (339.2) 비슷한 천문학 거류민이 지역 우주 및 그 행정의 하위 분과의 건축된 서울 뿐 아니라 초우주의 구역 본부 세계에서도 발견될 것이다. 파라다이스를 제외하고, 지식은 선천적으로 있지 않다. 물리적 우주에 관하여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대체로 관찰과 연구에 의존한다.
30:3.6 (339.3) 2. 하늘 예술가는 일곱 초우주에서 두루 일한다. 하늘 가는 필사자는 지역 우주의 상물질 생애 동안에 이 무리들과 처음으로 접촉을 가지며, 이와 관련하여 이 예술가들에 관하여 더욱 많이 논할 것이다.
30:3.7 (339.4) 3. 회상 지도자는 휴식과 유머―지난날의 기억으로 돌아가기―를 권장하는 자이다. 그들은 필사자를 진보시키는 승천 계획의 실제 운영에, 특히 상물질 과도기 및 영 체험을 겪는 초기 단계에, 크게 소용된다. 그들의 이야기는 지역 우주에서 필사자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에 속한다.
30:3.8 (339.5) 4. 연장 학교 강사. 하늘 가는 생애에서 다음 단계의 높은 거주 세계는 언제나 바로 밑의 세계에서 강력한 교육자 군단을 유지하는데, 이것은 그 구체의 진보하는 거주자를 위한 일종의 준비 학교이다. 이것은 시간의 순례자를 진급시키는 승천 계획의 한 단계이다. 이 여러 학교와 그 교육 및 시험 방법은 유란시아에서 너희들이 실행하려고 애쓰는 어떤 것과도 전혀 다르다.
30:3.9 (339.6) 필사자를 진보시키는 승천 계획 전체의 특징은 새로운 진리와 체험을 얻자마자 다른 존재들에게 나눠주는 실습이다. 진보의 눈금에서 바로 너희 뒤에 있는 생도들에게 선생으로 봉사함으로, 파라다이스에 이르는 오랜 학교 생활을 너희는 일하면서 마칠 것이다.
30:3.10 (339.7) 5. 다양한 예비군. 우리의 직접 감독을 받지 않는 광대한 존재들의 예비군은 유버르사에서 예비 거류민으로서 동원된다. 유버르사에는 이 거류민의 70 기본 분과가 있고, 이 특별한 성격자들과 한 계절을 보내라고 자유 교육이 허락된다. 비슷한 일반 예비군이 구원자별과 기타 우주 서울에서 유지된다. 그들은 각자의 집단 지도자들의 청구를 받고 나서 현역 근무에 파송된다.
30:3.11 (339.8) 6. 학생 방문자. 온 우주로부터 항상 들어오는 하늘 방문객이 여러 본부 세계를 통해서 쏟아진다. 개인으로서, 그리고 등급으로서, 이 다양한 종류의 존재들은 관찰자, 교환 생도, 학생 조수로서 우리에게 모여든다. 유버르사에는 현재, 이 우대 거류지에 10억 명이 넘는 성격자가 있다. 이 방문객들 중에서 더러는 하루를 머무를 수도 있고, 더러는 1년 동안 남을 수도 있으며, 모든 것이 그들이 맡은 임무의 성질에 달려 있다. 이 식민지는 창조 성격자와 상물질 필사자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등급의 우주 존재를 포함한다.
30:3.12 (340.1) 상물질 필사자는 오로지 그들이 태어난 지역 우주의 경계 안에서만 학생 방문자가 된다. 영의 지위를 얻은 뒤에야 그들은 초우주 자격으로 방문해도 좋다. 우리를 방문하는 거류민의 꼭 절반은 “도중에 들리는 자”인데, 그들은 다른 데로 가는 길에 오르본톤의 서울을 찾아보려고 머무른다. 이 성격자들은 우주 임무를 집행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여가―책임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주 사이에 여행하고 구경하는 특권은 모든 하늘 가는 존재의 생애의 일부이다. 여행하고 새로운 민족과 세계들을 구경하려는 인간의 소망은 지역 우주, 초우주, 중앙 우주를 통해서 파라다이스까지 파란 많고 오랫동안 올라가는 길에 충분히 채워질 것이다.
30:3.13 (340.2) 7. 하늘 가는 순례자. 하늘 가는 순례자는 파라다이스를 향하여 진보하는 것과 관련하여 다채로운 근무에 배치되니까, 여러 본부 구체에 있는 우대 거류민으로서 거주지가 정해진다. 여기저기 한 초우주에 두루 활동하면서, 그러한 집단은 대체로 자치(自治)한다. 그런 집단은 늘 변동하는 거류민이고, 모든 계급의 진화하는 필사자 및 하늘 가는 동료를 포함한다.
30:4.1 (340.3) 진보하여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도록 인가를 받을 때, 시공에서 살아남은 필사자를 하늘 가는 순례자라고 부르는데, 이 진화 인간은 이 여러 이야기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니까, 여기서 우리는 하늘 가는 우주 생애에서 다음 일곱 단계의 대략을 제시하고 싶다:
30:4.9 (340.11) 다음 이야기는 조절자가 깃드는 필사자의 우주 생애를 제시한다. 아들 및 영이 융합한 필사자는 이 생애의 여러 부분을 같이 하지만, 우리는 조절자가 융합한 필사자에 관련되는 이 이야기를 전개하기로 작정했으니, 이는 유란시아의 온 인류가 그러한 운명을 기대해도 좋기 때문이다.
30:4.10 (340.12) 1. 행성의 필사자. 필사자는 동물 기원을 가졌고 모두 하늘 가는 잠재성이 있는 진화 존재이다. 기원ㆍ성품ㆍ운명으로 볼 때, 이 다채로운 집단과 부류의 인간들은 유란시아의 민족들과 전적으로 다르지는 않다. 각 세계의 인종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보살핌을 똑같이 받고, 시간 세계에서 봉사하는 영들의 계심을 누린다. 자연사 뒤에, 모든 종류의 승천자는 여러 저택 세계에서 하나의 상물질 가족으로서 사귄다.
30:4.11 (341.1) 2. 잠자는 생존자. 개인 운명 수호자가 관리하는, 살아남는 지위를 가진 필사자는 누구나 자연사의 문을 거치고, 셋째 기간에 저택 세계에서 인격화한다. 인가 받았지만 어떤 이유이든, 개인 보호자를 가질 자격을 갖추는 수준의 지적 숙련과 영적 자질에 도달할 수 없었던 자는 이렇게 즉시, 바로 저택 세계까지 갈 수 없다. 그러한 살아남는 혼들은 신기원(新紀元), 새로운 섭리 시대의 심판이 있는 날까지, 그 시대의 점호를 부르고 그 영역을 판결할 하나님의 아들이 오기까지, 무의식의 잠 속에서 쉬어야 한다. 이것이 온 네바돈에 두루, 일반적 관례이다. 그리스도 미가엘이 땅에서 일을 마치고 하늘에 올라갔을 때, 그에 관하여 이렇게 언급되었다, “그는 큰 무리의 포로들을 거느렸더라.” 이 포로들은 아담의 시절부터 유란시아에서 주가 부활할 때까지 잠자던 생존자였다.
30:4.12 (341.2) 시간의 흐름은 잠자는 필사자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데, 그들이 얼마나 쉬는가 도무지 의식하지 못하고 잊고 있기 때문이다. 한 시대의 끝에 인격이 다시 조립되고 나서, 5천 년 동안 잠자던 자는 닷새 동안 휴식하던 자와 조금도 다르게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이 시간 지연 외에, 이 생존자들은 길던 짧던, 죽음의 잠을 피하는 자와 동일하게, 승천 체제를 거친다.
30:4.13 (341.3) 지역 우주 사무에서 집단 상물질 활동을 위하여 세계 순례자들의 이 섭리 시대 학급이 이용된다. 그렇게 굉장한 무리를 동원하는 데는 큰 이점(利點)이 있다. 오랫동안 효과적 서비스를 하도록 그들을 이렇게 함께 둔다.
30:4.14 (341.4) 3. 저택 세계 학생. 저택 세계에서 다시 깨어나는, 살아남는 필사자는 모두 이 학급에 속한다.
30:4.15 (341.5) 필사자의 살로 된 육체는 잠자는 생존자를 다시 조립한 몸의 일부가 되지 않는다. 육체는 티끌로 돌아가 버렸다. 책임 맡은 세라핌은, 불멸의 혼을 위하여, 돌아온 조절자가 깃들기 위하여, 새 생명이 타고 다닐 것으로서, 새 몸, 상물질 형태를 지원한다. 조절자는 잠자는 생존자 지성의 영적 성적표를 간직한다. 배치된 세라핌은 살아남는 신분―불사의 혼―을 그것이 진화한 데까지 간직하는 자이다. 조절자와 세라핌, 이 둘이 그들에게 맡긴 인격을 뭉칠 때, 그 새 사람은 옛 인격이 부활한 것이다, 즉 그 혼의 진화하는 상물질 신분이 살아남은 것이다. 혼과 조절자의 이러한 재결합은 부활이라, 인격 요소의 재조립이라 부르는 것이 꼭 알맞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살아남는 인격이 다시 출현하는 것을 전부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설명할 수 없는 거래가 사실인 것을 아마 너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터이지만, 필사자를 살아남게 하는 계획을 물리치지 않는다면, 너는 언젠가 이것이 진실임을 체험으로 알게 될 것이다.
30:4.16 (341.6) 점진적 훈련을 거치는 일곱 세계에 필사자를 처음에 억류하는 계획은 오르본톤에서 거의 보편적이다. 사람이 사는 약 1천 행성으로 구성된 각 지역 체계에 일곱 저택 세계가 있으며, 보통은 체계 서울의 위성이거나 부속 위성이다. 이 위성들은 대다수의 하늘 가는 필사자를 영접하는 세계이다.
30:4.17 (341.7) 필사자가 거주하는 모든 훈련 세계를 때때로 우주의 “저택”이라고 부르며, “내 아버지 집에는 많은 저택이 있도다”하고 말씀했을 때 예수는 바로 그러한 구체들을 언급하였다. 여기서부터 줄곧, 저택 세계와 같은 일정한 집단의 구체들 안에서, 승천자들은 따로따로 한 구체에서 다른 구체로, 생명의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진보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한 단계의 우주 연구로부터 다른 단계로, 학급을 지어 진보한다.
30:4.18 (342.1) 4. 상물질 진보자. 저택 세계들로부터 계속하여 위로 체계, 별자리, 지역 우주의 구체들을 거쳐서, 필사자는 상물질 진보자로 분류된다. 그들은 필사자로 승천하는 과도기 구체들을 거치고 있다. 낮은 상물질 세계에서 높은 세계로 하늘 가는 필사자가 진보함에 따라서, 그들은 자기 선생들과 관련하여, 더 진보한 상급 형제들과 더불어, 수없이 많은 임무에 봉사한다.
30:4.19 (342.2) 상물질로 진보하는 것은 지능과 영과 인격 형태의 계속된 진급에 관계된다. 살아남은 자는 아직도 세 가지 성질을 가진 존재이다. 상물질 체험 전체를 통해서 그들은 지역 우주의 피보호자이다. 영 생애가 시작할 때까지, 초우주 체제는 작용하지 않는다.
30:4.20 (342.3) 초우주 소구역의 영접 세계들을 향하여 지역 우주 본부를 떠나기 바로 전에, 필사자는 진정한 영(靈) 신분을 얻는다. 마지막 상물질 단계로부터 첫째 영 지위, 곧 가장 낮은 영 지위까지 지나는 것은 하찮은 변화일 뿐이다. 지성ㆍ인격ㆍ인품은 그러한 진급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오로지 모습이 수정(修正)을 거칠 뿐이다. 그러나 영 모습은 상물질 몸과 마찬가지로 실체이며, 똑같이 분별이 가능하다.
30:4.21 (342.4) 자기가 태어난 지역 우주로부터 초우주 영접 세계를 향하여 떠나기 전에, 시간 세계의 필사자는 창조 아들과 지역 우주 어머니 영으로부터 영이 되었다는 확인을 받는 자가 된다. 이 시점부터 줄곧, 하늘 가는 필사자의 지위는 언제까지나 안정된다. 초우주의 피보호자는 결코 타락한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하늘 가는 세라핌도 지역 우주를 떠날 때, 천사 지위에서 또한 진급된다.
30:4.22 (342.5) 5. 초우주의 피보호자. 초우주의 여러 훈련 세계에 다다르는 승천자는 누구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피보호자가 된다. 그들은 지역 우주의 상물질 생활을 거쳤고, 이제는 인가받은 영이다. 어린 영으로서 그들은 훈련과 교양을 거치는 초우주 체계의 상승을 시작하고, 이것은 그들의 소구역 영접 구체로부터, 10개 대구역의 연구 세계들을 통해서, 그리고 계속하여 초우주 본부의 상급 문화 구체들까지 연장된다.
30:4.23 (342.6) 영으로 진보하는 소구역ㆍ대구역ㆍ초우주의 본부 세계에서 체류한 것에 따라서, 세 계급의 학생 영이 존재한다. 상물질 승천자가 지역 우주의 여러 세계에서 공부하고 일한 것처럼, 영 승천자는 체험적 지혜의 샘물에서 마신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을 연습하면서, 새 세계들을 계속하여 통달한다. 그러나 초우주 생애에서 하나의 영 존재로서 학교에 가는 것은 사람의 물질적 머리가 일찍이 꿈꾸어본 어떤 것과도 아주 다르다.
30:4.24 (342.7) 하보나를 향해서 초우주를 떠나기 전에, 이 하늘 가는 영들은, 지역 우주의 감독 밑에서 상물질 체험을 거치는 동안에 받은 것과 똑같이 철저하게, 초우주 경영 과정을 밟는다. 영 필사자가 하보나에 이르기 전에, 유일한 직업은 아니지만 그들의 주요한 연구(硏究)는 지역 우주 및 초우주 행정을 통달하는 것이다. 이 모든 체험을 겪는 까닭은 지금 완전히 뚜렷하지 않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최후 군단의 구성원으로서 가능한 미래 운명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훈련은 현명하고 필요하다.
30:4.25 (342.8) 초우주 체제는 하늘 가는 필사자에게 모두 똑같지는 않다. 그들은 똑같은 일반 교육을 받지만, 특별한 집단 및 학급은 특별 교육 과정을 통해서 진행되고, 특정한 훈련 과정을 거친다.
30:4.26 (343.1) 6. 하보나 순례자. 충만하지는 않더라도 영의 발육이 끝나면, 살아남는 필사자는 진화하는 영들의 안식처인 하보나까지 오랜 비행(飛行)을 위하여 준비한다. 땅에서 너는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었고, 지역 우주를 통해서 너는 상물질 존재였으며, 초우주를 통해서 너는 자라는 영이었다. 하보나의 영접 세계에 네가 도착하면서 너의 영적 교육은 정말로, 진지하게 시작되며, 궁극에 너의 모습은 파라다이스에서 하나의 완전해진 영일 것이다.
30:4.27 (343.2) 초우주 본부로부터 하보나의 영접 구체들까지 가는 여행은 반드시 혼자 한다. 이제부터 아무런 학급이나 집단 교육이 실시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시공의 여러 진화 세계에서 기술 훈련과 행정 훈련을 마쳤다. 이제는 너의 개인적 교육, 너의 개별 영적 훈련이 시작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 하보나에 두루, 가르침은 개인적으로 행해지고 그 성질이 세 가지이니, 지적ㆍ영적ㆍ체험적 성질을 가진다.
30:4.28 (343.3) 너의 하보나 생애에서 처음 행위는 수송하는 너의 2품 천사를 알아보고, 길고도 안전한 여행을 한 것에 대하여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너는 초기 하보나 활동을 후원해 줄 존재들에게 소개된다. 다음에 네가 도착한 것을 등록하고 너희 지역 우주의 창조 아들에게 너를 파송한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찬미하는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며, 그는 지역 우주에서 너의 아들 생애를 가능하게 한 아버지이다. 이것이 하보나 도착 절차를 마친다. 그리고 나서 마음대로 구경하라고 긴 여가가 너에게 허락되는데, 이것은 오랜 승천 체험에서 너의 친구와 동무와 동료들을 찾아볼 기회를 준다. 네가 유버르사를 떠난 뒤로, 동료 순례자 중에서 누가 하보나를 향해 떠났는가 확인하기 위하여, 너는 또한 방송을 참조할 수도 있다.
30:4.29 (343.4) 하보나의 영접 세계에 네가 도착했다는 사실은 마땅히 너희 지역 우주 본부에 전달되고, 너의 보호 천사에게, 그 세라핌이 어쩌다가 어디에 있든지 상관 없이, 친히 전해질 것이다.
30:4.30 (343.5) 하늘 가는 필사자는 공간의 여러 진화 세계의 사무에 대하여 철저히 훈련을 받아 왔다. 이제 그들은 창조된 완전한 구체들과 길고도 유익한 접촉을 시작한다. 독특하고 특별한 이 총 체험이 어떤 앞날의 일을 위하여 얼마나 놀라운 준비를 마련해 주는가! 그러나 나는 하보나에 관해서 너희에게 일러줄 수 없다. 그 영광을 음미하거나 그 웅장함을 이해하려면, 이 세계들을 보아야 한다.
30:4.31 (343.6) 7. 파라다이스에 도착한 자. 거주 지위를 가지고 파라다이스에 도착하고 나서, 너는 신성(神性)과 초한성에 관하여 진보하는 과정을 시작한다. 파라다이스에서 네가 사는 것은 네가 하나님을 발견했고 네가 필사 최후 군단에 소집되리라는 것을 뜻한다. 대우주의 모든 생물 가운데서, 오직 아버지가 융합한 자만 필사 최후 군단에 소집된다. 오로지 그러한 개인이라야 최후자의 선서를 행한다. 파라다이스의 완전성을 가지거나 거기에 다다른 다른 존재들은 일시 이 최후 군단에 소속될지 모르지만, 그들은 시공 세계에서 진화하고 완전하게 된 노병(老兵)들의 임무, 이렇게 누적되는 무리의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임무에 영원히 배치되지 않는다.
30:4.32 (343.7) 파라다이스에 도착한 자에게 자유 기간이 주어지고, 그 뒤에 그들은 일곱 집단의 1차 상천사들과 사귀기 시작한다. 예배 지도자들과 과정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파라다이스 졸업생이라 부른다. 그리고 나서 최후자로서, 그들은 관찰하고 협동하는 봉사에, 광대한 창조의 끝까지 배치된다. 필사 최후자 군단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세계에서 여러 자격으로 근무하지만, 아직까지 그들을 위해서 특별하거나 정해진 일자리가 없는 듯하다.
30:4.33 (344.1) 필사 최후 군단을 위하여 아무런 앞날의 운명이나 밝혀지지 않은 운명이 없다면, 하늘 가는 이 존재들의 현재 배치는 아주 알맞고 영화로울 것이다. 그들의 현재 운명은 진화로 승천하는 우주 계획을 통째로 정당화한다. 그러나 바깥 공간의 구체들이 진화하는 미래 시대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인간이 살아남고 필사자가 승천하는 신의 계획을 집행하는 신들의 지혜와 자애로움을 더욱 설명하고, 더욱 충만하고 신성하게 비출 것이다.
30:4.34 (344.2) 너희에게 밝혀진 것, 바로 너희 세계에 관한 가르침과 관련하여 너희가 얻을까 싶은 것과 아울러, 이 이야기는 하늘 가는 필사자 생애의 대강을 제시한다. 그 이야기는 다른 초우주에서 상당히 차이가 있지만, 네바돈 지역 우주에서, 그리고 대우주의 일곱째 부분, 곧 오르본톤 초우주에서 운영되는 바와 같이, 이 발표는 필사자를 진급시키는 보통 계획을 한 번 훑어본 것이다.
31:0.1 (345.1) 필사 최후자 군단은 조절자가 융합한, 시간 세계에서 하늘 가는 필사자의 현재 알려진 운명이다. 그러나 다른 무리들도 이 군단에 배치되어 있다. 1차 최후자 군단은 다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31:0.8 (345.8) 영화롭게 된 이 여섯 집단의 존재들이 영원한 운명을 가진 이 독특한 단체를 구성한다. 우리는 그들이 앞날에 무슨 일을 하는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필사 최후 군단이 파라다이스에서 동원되고 있고, 그들이 공간의 여러 우주에 두루 봉사하며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세계들을 관리하는 한편, 그들의 미래 운명은 바깥 공간에서 이제 조직되고 있는 우주들인 것이 틀림없다. 적어도 유버르사에서는 이렇게 추측한다.
31:0.9 (345.9) 이 집단은 공간 세계들의 운영 관계에 따라서, 그리고 길고도 파란 많은 하늘 가는 생애를 통하여 죽 얻은, 친교하는 체험과 걸음을 맞추어서 조직되어 있다. 이 집단에 가입한 하늘 가는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접대되지만, 이 높아진 평등은 어떤 면에서도 개성을 없애거나 인격 신분을 파괴하지 않는다. 우리는 최후자와 교통할 때, 그가 승천하는 필사자, 하보나 원주민, 입양된 세라핌, 중도인(中道人), 또는 물질 아들인가 즉시 분별할 수 있다.
31:0.10 (345.10) 현재 우주 시대에 최후자는 시간 세계의 우주에서 근무하려고 돌아간다. 그들은 잇따라서 다른 초우주에서 수고하도록 배치되고, 모든 다른 여섯 초우주에서 근무를 마칠 때까지, 결코 그들이 태어난 초우주에 배치되지 않는다. 이처럼 그들은 최상 존재의 일곱 가지 개념을 얻을지 모른다.
31:0.11 (345.11) 일개 중대(中隊) 이상의 필사 최후자들이 항상 유란시아에서 근무하고 있다. 우주 근무에서 그들이 배치되지 않은 분야는 없다. 그들은 보편적으로, 배치된 임무와 자유 근무를 번갈아서, 같은 기간 동안 활동한다.
31:0.12 (345.12) 이 특별한 무리의 미래 조직의 성질에 대하여 우리는 전혀 아는 것이 없지만, 최후자는 지금 전적으로 자치하는 단체이다. 그들은 자체의 영구, 정기(定期) 및 배치 지도자와 지휘자를 뽑는다. 그들의 정책에 영향을 미칠 아무런 외부 압력을 주입할 수 없고, 그들은 오로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게 충성을 서약할 뿐이다.
31:0.13 (346.1) 최후자는 파라다이스에, 초우주에, 지역 우주에, 그리고 모든 분과(分課) 서울에 자체의 본부를 둔다. 그들은 진화된 창조에서 독립된 계급이다. 우리는 그들을 직접 관리하거나 통제하지 않는다. 그래도 절대로 충성하며 우리의 모든 계획에 언제나 협조한다. 정말로 그들은 시공에서 누적되는, 시험을 견디고 참된 혼―우주에서 진화적 소금―이며, 언제까지나 그들은 악에 물들 수 없고, 죄지을 위험이 없다.
31:1.1 (346.2) 중앙 우주의 순례자 훈련 학교에서 선생으로 수고하는 많은 하보나 원주민은 하늘 가는 필사자들에게 크게 애착을 가지게 되며, 필사 최후자 군단의 미래 과업과 운명에 관하여 더욱 흥미를 가진다. 파라다이스에는 그 군단의 행정 본부에, 그랜드판다의 부관이 주관하는 하보나 자원자의 등록부가 유지된다. 오늘날, 이 대기자 목록에 수백만의 하보나 원주민이 있음을 너는 발견할 것이다. 직접, 신이 창조한 이 완전한 존재들은 필사 최후 군단에게 크게 도움되며, 의심할 여지 없이, 아주 먼 앞날에 더욱 쓸모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완전하고 신처럼 충만하게 태어난 자의 관점을 제공한다. 따라서 최후자들은 체험적 존재의 두 가지 단계―완전한 단계와 완전하게 된 단계―를 포함한다.
31:1.2 (346.3) 하보나 원주민은 우주의 아버지 영 분신의 수여를 받아들이는 능력을 갖출 진화 존재와 연락하여, 어떤 체험적 성장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필사 최후자 군단은 오로지 첫째 근원 중심의 영과 융합한 그러한 존재나, 또는 인력 사자처럼, 날 때부터 아버지 하나님의 이 영을 구현하는 자를 영구 단원으로서 가지고 있다.
31:1.3 (346.4) 중앙 우주의 거주민은 1천 명―1개 최후자 중대―에 하나의 비율로 그 군단에 가입된다. 이 군단은 1천 명의 중대(中隊) 단위로, 임시 근무를 위하여 조직되고, 이 중대에는 하보나 원주민 1명, 인력 사자 1명, 그리고 하늘 가는 인간이 997명이 있다. 이렇게 최후자들은 중대 단위로 동원되지만, 최후자 선서는 개별적으로 실시된다. 이것은 광범위하게 미치는 함축성과 영원한 중요성을 가진 선서이다. 하보나 원주민은 똑같은 선서를 하고, 언제까지나 그 군단에 부속된다.
31:1.4 (346.5) 하보나 신입생은 자기가 배치된 중대를 따라다닌다. 그 무리가 어디로 가든지 따라간다. 그리고 최후자들이 새로 하는 일에 대하여 그들이 얼마나 열심인가 너희는 구경해야 한다. 최후 군단에 도달하는 가능성은 하보나에서 감격스러운 뛰어난 기쁨 중에 하나이며, 최후자가 되는 가능성은 이 완전한 종족들이 겪는 최고의 모험 중에 하나이다.
31:1.5 (346.6) 대관별에 있는 삼위일체를 체험한 합동 최후자 군단, 그리고 파라다이스에 있는 초월 최후자 군단은 하보나 원주민을 또한 같은 비율로 받아들인다. 하보나 시민은 하보나 최후자 군단에 가입하는 가능성과 함께, 이 세 가지 운명을 그들의 하늘 생애에 최상의 목표로 여긴다.
31:2.1 (346.7) 인력 사자가 활동하고 있는 곳은 언제 어디서나, 최후자들이 지휘한다. 인력 사자들은 모두 그랜드판다의 독점 관할 밑에 있고, 그들은 오로지 1차 최후 군단에만 배치된다. 지금도 그들은 최후자들에게 소중하며, 영원한 미래에 전적으로 쓸모 있을 것이다. 어떤 다른 무리의 지적 생물도,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그러한 인격화된 사자 군단을 소유하지 못한다. 다른 최후자 군단에 부속된, 비슷한 부류의 기록하는 사자들은 인격화되지 않았고, 그들은 초한화(超限化)되었다.
31:2.2 (347.1) 인력 사자는 신별의 출신이다. 그들은 수정되고 인격화된 조절자이지만, 우리 유버르사 집단에서 아무도 이들 중에 한 사자의 본질을 설명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상당히 인격적인 존재, 신답고 총명하고 감동적으로 이해심 있는 존재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시간을 쓰지 않고 공간을 통과하는 기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어떤 에너지와 회로도, 아니 인력까지도 이용하는 능력이 있는 듯하다. 필사 군단의 최후자들은 시간과 공간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의 무한한 영 인격자들과 관계를 가지고 있고, 그들을 자기네 지휘 밑에 두었다. 우리는 인력 사자를 감히 인격자라 부르지만, 실제로 그들은 초월 영 존재요, 제한 없고 속박받지 않는 인격자이다. 그들은 외톨 사자와 비교해서, 전혀 다른 계급의 인격자이다.
31:2.3 (347.2) 인력 사자(使者)는 수에 제한 없이 최후자 중대에 소속되어도 좋으나, 겨우 한 사자, 그 동료들의 우두머리만, 필사 최후 군단에 소집된다. 그러나 이 우두머리는 자기에게 동료 사자 999명으로 이루어진 영구 직원을 배치해 두었고, 필요한 경우에 수에 제한 없이, 그 계급의 예비군에게 조수들을 청구해도 좋다.
31:2.4 (347.3) 인력 사자와 영화롭게 된 필사 최후자는 서로, 감동적이며 깊은 사랑에 이르는데, 그들이 서로 같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하나는 우주의 아버지의 분신이 직접 인격화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바로 이 우주의 아버지의 분신, 곧 영인 생각 조절자와 융합한 인격, 살아남는 불멸의 혼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성격이다.
31:3.1 (347.4) 조절자가 융합한, 올라 가는 필사자는 1차 최후 군단의 대부분을 이룬다. 입양된 세라핌 및 영화롭게 된 세라핌과 함께, 그들은 보통 각 최후자 중대에서 990명이다. 필사자가 천사보다 훨씬 많지만, 어느 한 무리에서도 필사자와 천사의 비율은 다르다. 하보나 원주민, 영화롭게 된 물질 아들, 영화롭게 된 중도인, 인력 사자, 그리고 알려지지 않고 빠진 대원들은 그 무리의 1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1천 최후자로 이루어진 각 중대는 필사자도 아니고 천사도 아닌 성격자를 위하여 꼭 10자리가 있다.
31:3.2 (347.5) 유버르사에서 우리는 시간 세계에서 하늘 가는 필사자의 “최후 운명”이 무엇인지 모른다. 현재 그들은 파라다이스에서 거주하고, 빛과 생명의 군단에서 일시 근무하지만, 그렇게 엄청난 하늘 가는 훈련 과정과 그렇게 긴 우주 단련을 받는 것은 더욱 큰 책임을 맡는 시험을 위하여, 그리고 더욱 고귀한 책임을 지는 근무에 그들이 자격을 갖추도록 고안되었음이 틀림없다.
31:3.3 (347.6) 이 올라가는 필사자들이 파라다이스에 도달하고, 최후 군단에 소집되고, 큰 무리를 이루어 지역 우주의 운영에 참여하고 초우주 사무의 행정에 도움을 주도록 다시 파송되었는데도―아니 이 명백한 운명을 만나도―그들이 오로지 제6 단계 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중요한 사실이 남아 있다. 의심할 여지 없이, 필사 최후 군단의 생애에 한 걸음이 더 남아 있다. 우리는 그 걸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모르지만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인식해 왔고, 여기서 이 사실에 주의를 불러일으킨다:
31:3.4 (348.1) 1. 필사자는 소구역에서 머무르는 동안 제1 계급의 영이라는 것, 대구역으로 이동할 때 제2 계급으로, 그들이 초우주의 중앙 훈련 세계들로 나아갈 때 제3 계급으로 진급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록으로부터 알고 있다. 하보나의 여섯째 궤도에 이른 뒤에, 필사자는 넷째 영, 곧 졸업한 영이 되고, 우주의 아버지를 발견할 때 제5 계급의 영이 된다. 그 뒤에 필사 최후 군단의 영원한 사명으로 언제까지나 그들을 소집하는 선서를 하고 나서, 그들은 제6 단계의 영 존재에 도달한다.
31:3.5 (348.2) 영의 분류나 명칭은 우주 근무의 한 영역으로부터 다른 영역으로든지, 아니면 한 우주에서 다른 우주까지 실제로 진급함으로 결정되어 왔다는 것을 우리는 관찰한다. 우리가 추측컨대, 필사 최후 군단을 제7 영으로 분류하는 것은, 지금까지 기록되지 않았고 밝혀지지 않은 구체들에서 근무하는 영원한 배치로 진급하는 것과 동시에 일어나고, 그들이 최상위 하나님에 도달하는 것과 동시에 생길 것이다. 그러나 이 대담한 추측을 제외하고,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우리는 너희보다 조금도 더 아는 것이 없다. 필사자의 생애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현재 파라다이스 운명을 넘지 못한다.
31:3.6 (348.3) 2. 필사 최후자는 “너희는 완전하라”는 오랜 세월의 명령에 충분히 순응해 왔다. 그들은 필사자가 도달하는 우주의 길을 올라갔고, 하나님을 발견했으며, 최후 군단에 정식으로 가입되었다. 그러한 존재는 영이 진보하는 현재의 한계에 이르렀지만, 궁극의 영 지위의 끝까지 도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이 완전하게 되는 현재의 한계를 성취했지만, 인간이 봉사하는 최후에 이르지는 않았다. 그들은 신을 충만히 예배함을 체험했지만, 최종으로 체험적 신에 도달하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다.
31:3.7 (348.4) 3. 파라다이스 최후 군단의 영화롭게 된 필사자는, 지적 존재로서 가능한 가장 충만하게 사는 사실과 철학의 모든 단계에 관하여, 체험적 지식을 소유한 하늘 가는 존재이며, 한편 가장 낮은 물질 세계로부터 파라다이스의 영적 높이까지 올라가는 이 시대에, 살아남는 이 사람들은 시공의 모든 보편적 우주를 공평하고 효과 있게, 자비롭고 참을성 있게 관리하는 모든 신성한 원칙, 어떤 세부에 대해서도 능력이 닿는 데까지 훈련을 받아 왔다.
31:3.8 (348.5) 우리가 판단하기에, 인간은 우리와 같은 의견을 가질 자격이 있고, 너희는 파라다이스 최후 군단의 궁극 운명의 신비에 관하여 우리와 함께 추측할 자유가 있다. 완전해진 진화 인간의 현재 배치가 우주를 이해하고 초우주 관리를 공부하는, 대학원 과정의 성질을 띤다는 것이 우리에게 분명하다. “어째서 신들이 살아남는 필사자에게 그렇게 철저히 우주 관리 기법을 훈련시키는 데 그토록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하고 우리 모두가 묻는다.
31:4.1 (348.6) 필사자의 충실한 수호 천사 가운데 다수는 자기가 보호하던 인간과 함께 하늘 가는 생애를 거치는 것이 허락되며, 이 수호 천사의 다수는, 그 주체가 아버지와 융합한 뒤에, 영원한 최후자 선서(宣誓)를 하는 데 합세하여, 필사 동료의 운명을 영원히 받아들인다. 필사 존재의 하늘 가는 체험을 거치는 천사는 인간 성품의 운명을 함께 할 수도 있고, 이 최후 군단에 똑같이, 영원히 소집될 수도 있다. 큰 무리의 입양된 세라핌과 영화롭게 된 세라핌은 필사자가 아닌, 다양한 최후자 군단에 부속된다.
31:5.1 (349.1) 시공의 우주에서, 행성에 배치받는 것이 오래 지연될 때, 지역 체계의 아담 시민들이 영구 시민의 지위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탄원을 시작해도 좋다는 규정이 있다. 만일 허락을 받으면, 그들은 지역 우주 서울에서 하늘 가는 순례자들과 합세하며, 그때부터 계속하여 파라다이스로, 그리고 최후 군단까지 진행한다.
31:5.2 (349.2) 진보된 진화 세계가 빛과 생명의 시대 후기에 다다르면, 물질 아들들, 곧 행성 아담과 이브는 인간이 되기를 택하고, 조절자를 받고, 필사 최후자 군단으로 이끄는, 우주를 올라가는 진화 과정을 시작해도 좋다. 이 물질 아들 가운데 더러는 유란시아에서 아담이 한 것처럼, 생물학상의 가속자(加速者)로서 임무에 얼마큼 실패하거나, 엄밀하게 보아서 임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그 영역 민족들의 자연 과정을 밟고, 조절자를 받고, 죽음을 거치고, 어쩔 수 없이 승천 체제를 통해서 믿음으로 진보해야 하며, 나중에 파라다이스와 최후 군단에 이른다.
31:5.3 (349.3) 많은 최후자 중대에서 이 물질 아들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존재는 그러한 집단이 높게 봉사할 전망을 밝게 만든다. 에덴의 쌍이 같은 무리에 부속되면, 그들은 보통 공동으로, 한 인격자로서 활동하는 것이 허락된다. 그러한 하늘 가는 쌍들은 하늘 가는 필사자보다, 삼자일체 모험에 훨씬 더 성공하기 쉽다.
31:6.1 (349.4) 여러 행성에는 중도인(中道人)이 큰 무리로 생산되지만, 그들이 태어난 세계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고 난 뒤에, 거기에 남아 있는 일이 드물다. 그때, 아니면 조금 뒤에 그들은 영구 시민의 지위에서 풀려나며, 시공의 필사자들과 일행이 되어 파라다이스로 승천을 시작하고, 상물질 세계, 초우주, 하보나를 통과한다.
31:6.2 (349.5) 여러 우주에서 온 중도인은 기원과 성품이 크게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파라다이스의 어느 최후 군단으로 가도록 예정되어 있다. 2차 중도자는 모두 궁극에 조절자와 융합하며, 필사 군단으로 소집된다. 많은 최후자 중대는 그 집단 안에 이 영화롭게 된 존재 중에 하나를 가지고 있다.
31:7.1 (349.6) 현재 시점에서 모든 최후자 중대는 선서 지위를 가진 999명의 성격자, 곧 영구 회원이 있다. 빈 자리는 어느 단일 임무에 배치되는, 부속된 빛의 전도사들의 우두머리가 차지한다. 그러나 이 존재들은 그 군단의 임시 회원일 뿐이다.
31:7.2 (349.7) 어느 최후자 군단의 근무에 배치된 어떤 하늘 성격자도 빛의 전도사(傳道師)라고 부른다. 이 존재들은 최후자 선서를 하지 않으며, 군단 조직에 예속되기는 하지만, 영구하게 소속되지 않는다. 이 집단은 외톨 사자, 상천사, 2품 천사, 파라다이스 시민, 또는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그들의 자손을―임시 최후자 과제를 집행하는 데 필요한 어떤 존재라도―포함해도 좋다. 이 군단이 이 존재들을 영원한 임무에 소속하게 할지 우리는 모른다. 임시 소속이 끝나면, 이 빛의 전도사는 이전의 지위를 다시 시작한다.
31:7.3 (350.1) 현재 필사 최후 군단이 구성된 바와 같이, 꼭 여섯 등급의 영구 단원이 있다. 짐작하다시피, 최후자들은 미래 동료의 신분에 관해서 많은 추측에 빠지지만, 그들 가운데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다.
31:7.4 (350.2) 유버르사에서 우리는 제7 집단 최후자의 신분에 관하여 흔히 짐작해 본다. 파라다이스와 대관별과 하보나 내부 회로에서, 삼자일체 체험으로 태어난 수많은 집단의 어떤 축적되는 군단이 맡을 가능한 임무를 포함해서, 우리는 많은 생각에 귀를 기울인다. 지금 형성되고 있는 여러 우주에서 근무하도록 그들이 예정되는 경우에, 최후 군단이 우주를 관리하는 과제에서 일할 많은 조수를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도록 허락될지 모른다는 추측까지도 있었다.
31:7.5 (350.3) 우리 가운데 하나는, 이 군단에서 빈 자리는 그들이 미래에 근무할 새 우주에서 기원을 가지는 어떤 종류의 존재가 채우리라는 의견을 가진다. 다른 자는 이 자리가, 아직 창조되거나, 궁극에 이르거나, 삼자일체 체험으로 태어나지 않은 어떤 부류의 파라다이스 성격자가 채울 것이라 믿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알기도 전에, 최후자들이 영적 달성의 제7 단계로 들어가는 것을 기다릴 가능성이 가장 많다.
31:8.1 (350.4) 하나의 최후자로서, 완전해진 필사자가 파라다이스에서 겪는 체험의 일부는, 파라다이스에 1천 집단이 넘는 초월적 초시민, 곧 초한(超限) 속성을 가지고 궁극에 이른 존재의 성품과 활동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기울이는 데 있다. 이 초월 성격자들과 관계를 가지면서, 하늘 가는 최후자는 수많은 계급의 초월 봉사자의 유익한 안내로 큰 도움을 받는데, 이들은 진화된 최후자를 새로운 파라다이스 형제에게 소개하는 일에 배치된다. 초월자 계급 전체가 파라다이스의 서부에, 그들이 독점으로 차지하는 광대한 지역에서 산다.
31:8.2 (350.5) 초월자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인간이 이해하는 한계 뿐 아니라, 파라다이스 성격자들에 관한 이 발표를 통제하는 명령 조항에도 제한을 받는다. 이 존재들은 필사자가 하보나로 올라가는 데 조금도 관련되어 있지 않다. 광대한 집단의 파라다이스 초월자는 하보나나 일곱 초우주의 사무와 아무 상관이 없고, 총우주 사무의 초월 행정부에만 관여할 뿐이다.
31:8.3 (350.6) 너는 지음받은 사람이니까, 한 창조자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창조자도 지음받은 자도 아닌, 엄청나고 다양화된 집합의 총명한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너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 초월자들은 아무 존재도 창조하지 않고, 그들은 결코 지음받은 적도 없다. 그들의 기원에 관해서 말하면, 새 용어―멋대로 지은 의미 없는 명칭―의 사용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초월자가 다만 궁극에 이른다고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한다. 신 절대자가 그들의 기원에 아마 아랑곳했을지 모르며, 그들의 운명에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독특한 존재들은 지금 신 절대자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들은 궁극위 하나님의 지배 하에 있고, 그들이 현재 파라다이스에 머무르는 것은 모든 면에서 삼위일체의 감독과 지도를 받는다.
31:8.4 (351.1) 파라다이스에 도달하는 모든 필사자가, 파라다이스 시민과 사귀는 것처럼 초월자와 자주 사귀지만, 사람이 초월자와 처음으로 가지는 중요한 접촉은 어느 중대한 경우에 생기는데, 그때 초월자의 우두머리, 곧 주관하는 총우주 건축가의 우두머리가 영원한 삼위일체 선서를 하게 하는 동안에, 필사 승천자는 새로운 최후자 무리의 일원으로서, 최후자를 접대하는 동그라미 안에 선다.
31:9.1 (351.2) 총우주 건축가들은 파라다이스 초월자들을 다스리는 집단이다. 이 통치 군단은 28,011명의 성격자로 구성되고, 위대한 지능, 훌륭한 영, 천상의 초한자를 포함한다. 이 막대한 집단을 주관하는 관리, 곧 선임 으뜸 건축가는 신 수준 이하의 모든 파라다이스 지능 존재를 조정하는 우두머리이다.
31:9.2 (351.3) 이 이야기를 인가하는 지침에서 열여섯째 금지 항목은 이렇게 말한다. “현명하다고 판단되면, 총우주 건축가들과 그 동료들이 존재하는 것을 밝혀도 좋으나, 그들의 기원ㆍ성품ㆍ운명을 완전히 밝혀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으뜸 건축가들은 초한자의 일곱 수준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너희에게 알려도 좋다. 이 일곱 무리는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31:9.3 (351.4) 1. 파라다이스 수준. 오직 선임 건축가, 곧 처음으로 궁극에 이른 건축가만 초한자의 이 최고 수준에서 활동한다. 이 궁극의 성격자는―창조자도 아니요 지음받은 자도 아닌데―영원이 시작될 때 궁극에 이르렀고, 지금은 파라다이스 및 그와 관계된 활동이 있는 21 세계의 섬세한 조정자로서 활동한다.
31:9.4 (351.5) 2. 하보나 수준. 건축가의 두 번째 궁극화는 으뜸 계획자이자 초한 행정자 세 분을 생산했는데, 그들은 언제나 중앙 우주의 완전한 10억 구체를 조정하는 데 전념해 왔다. 파라다이스의 전통은, 이 세 건축가가, 이전에 궁극에 이른 선임 건축가의 조언을 받아서, 하보나를 계획하는 데 이바지했다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모른다.
31:9.5 (351.6) 3. 초우주 수준. 제3 초한 수준은 일곱 초우주의 일곱 으뜸 건축가를 포함하며, 그들은 지금 하나의 무리로서, 파라다이스에 계신 일곱 으뜸 영과 더불어, 그리고 무한한 영의 일곱 특별 세계에 있는 일곱 최상 집행자와 함께, 대체로 똑같이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대우주의 초월 조정자이다.
31:9.6 (351.7) 4. 1차 공간 수준. 이 집단은 70명의 건축가를 포함하며, 현재 일곱 초우주의 경계선 바깥에서 동원되고 있는, 바깥 공간의 첫 우주를 위하여 궁극의 계획에 그들이 아랑곳한다고 우리는 짐작한다.
31:9.7 (351.8) 5. 2차 공간 수준. 제5 집단의 이 건축가는 490명이며, 우리는 다시 그들이 바깥 공간의 둘째 우주에 관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추측한다. 이미 우리의 물리학자들이 거기에 분명한 에너지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탐지했다.
31:9.8 (352.1) 6. 3차 공간 수준. 이 제6 집단의 으뜸 건축가의 수는 3,430명에 달하며,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들이 바깥 공간의 셋째 우주를 건설하는 거대한 계획에 몰두할지 모른다고 짐작한다.
31:9.9 (352.2) 7. 4차 공간 수준. 마지막이자 가장 큰 이 군단은 24,010명의 으뜸 건축가로 구성되어 있고, 우리가 이전에 추측한 것이 타당하다면, 이 군단은 바깥 공간에서 항상 커지는, 넷째이자 마지막 우주들과 관련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31:9.10 (352.3) 이 일곱 집단의 으뜸 건축가는 모두 28,011명의 우주 계획자에 이른다. 파라다이스에는 아득히 영원한 과거에, 28,012번째 으뜸 건축가를 궁극에 이르게 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 존재는 초한화에 실패했고, 우주 절대자에게 성격이 몰수되는 일을 체험했다는 파라다이스의 전통이 있다. 으뜸 건축가들의 올라 가는 계열이 28,011번째 으뜸 건축가에서 초한의 한계에 도달하고, 28,012번째의 시도는 절대자가 계시는 수학 수준과 마주쳤을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해서, 28,012번째 궁극에 이르는 수준에서, 초한성의 질은 우주자(宇宙者)의 수준과 동등하게 되고, 절대자의 가치에 이른 것이다.[1] [1666]
31:9.11 (352.4) 기능적 조직으로 보면, 감독하는 세 분의 하보나 건축가는 혼자인 파라다이스 건축가에게 동료인 조수로서 행동한다. 초우주의 일곱 건축가는 하보나의 세 감독자와 동격자로서 행동한다. 바깥에 있는 1차 공간 수준에서 우주 계획자 70명은 현재, 일곱 초우주의 일곱 건축가에게 동료인 조수로서 봉사하고 있다.
31:9.12 (352.5) 총우주 건축가들은 광대한 두 계급의 물력 조직자, 곧 1차로 궁극에 이른 자와 2차 초월자를 포함하여, 수많은 무리의 조수와 돕는 자를 뜻대로 쓸 수 있다. 이 물력 조직책을 대우주에 관계된 동력 지휘자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31:9.13 (352.6) 최후자 및 파라다이스 시민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자손들처럼, 시간과 영원의 아이들이 뭉쳐서 생산되는 모든 존재는 으뜸 건축가들의 피보호자가 된다. 그러나 현재 조직된 여러 우주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밝혀진 모든 다른 생물이나 개체 중에서, 오로지 외톨 사자와 영감 받은 삼위일체 영들이 초월자 및 총우주 건축가들과 어떤 유기적 관계라도 유지한다.
31:9.14 (352.7) 으뜸 건축가들은 지역 우주를 조직하는 창조 아들을 그 공간 위치에 배정하는 것을 기술적으로 인가한다. 으뜸 건축가와 파라다이스 창조 아들들 사이에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이 관계가 밝혀지지는 않지만, 제1 체험적 삼자일체의 관계에서 으뜸 건축가와 대우주의 최상 창조자들의 관계에 대하여 너희는 가르침을 받았다. 이 두 집단은 진화하고 체험하는 최상 존재와 더불어, 초월 가치와 총우주 의미를 가진 궁극 삼자일체를 구성한다.
31:10.1 (352.8) 선임 으뜸 건축가는 일곱 최후 군단을 감독하는데, 그들은 다음과 같다:
31:10.3 (352.10) 2. 파라다이스 최후자 군단.
31:10.4 (352.11) 3. 삼위일체를 체험한 최후자 군단.
31:10.5 (353.1) 4. 삼위일체를 체험한 합동 최후자 군단.
31:10.9 (353.5) 이 여러 운명 군단에는 각기 주재하는 우두머리가 있고, 이 일곱 군단은 파라다이스에서 운명의 최고 회의를 구성한다. 현재 우주 시대에는, 그랜드판다가 궁극의 운명을 가진 아이들을 우주에 배치하는 이 최고 단체의 우두머리이다.
31:10.10 (353.6) 이 일곱 최후자 군단이 함께 모이는 것은 잠재성ㆍ성격자ㆍ지성ㆍ영ㆍ초한자, 그리고 사실로 체험하는 자들이 실체로 동원됨을 의미하며, 이것은 최상 존재의 미래 총우주 활동조차도 아마 뛰어넘을 것이다. 이 일곱 최후자 군단은 아마도 궁극 삼자일체가 현재 활동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궁극 삼자일체는 바깥 공간의 우주들에서 생기는 상상할 수 없는 발전에 대비하여 유한자와 초한자의 세력을 소집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영원에 가까운 시절에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당시에 있었던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인격자들을 동원했고, 계획하던 시공의 일곱 초우주 행정자와 통치자로서 그들을 임명했으며, 그 이후로 이와 같이 성격자를 동원한 적은 없었다. 일곱 최후자 군단은, 미래 영원의 활동이 있을 바깥의 여러 우주에서, 발육이 덜 된 잠재자들의 미래 필요성에 대하여, 대우주에서 신이 반응하는 것이다.
31:10.11 (353.7) 우리는 사람 사는 세계들로 이루어진, 미래에 더 큰 바깥 우주들, 새로운 계급의 지극하고 독특한 존재들이 사는 새 구체들, 궁극성이 숭고한 한 물질 우주를 감히 예측한다. 이 광대한 창조에는 오직 한 가지 중요한 세부가 모자란다―하늘로 올라 가는 존재가 우주 생활에서 겪는 실제의 유한한 체험이 빠져 있다. 그러한 우주는 엄청난 체험적 장애, 바로 전능 최상위의 진화에 참여하지 못한다. 이 바깥 우주들은 모두 최상 존재의 비할 데 없는 봉사와 하늘 같은 전반적 통제를 누릴 터이지만, 그가 활발하게 계신 바로 그 사실은 최상 신의 현실화에 그들이 참여하는 것을 막는다.
31:10.12 (353.8) 최상위 하나님의 통치권이 불완전하게 현실화되기 때문에, 현재 우주 시대에는 대우주의 진화 인격자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그의 진화하는 독특한 체험을 함께 가진다. 우리는 그 안에서 진화하며, 그는 우리 안에서 진화한다. 미래 영원에 언젠가, 최상 신의 진화는 우주의 역사에서 끝난 사실이 되고, 이 놀라운 체험에 참여할 기회는 우주의 행동하는 무대에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31:10.13 (353.9) 그러나 우리 가운데 우주의 청춘 시절에 이 독특한 체험을 얻은 자들은, 모든 미래 영원에 걸쳐서 그 체험을 소중히 간직할 것이다. 그리고 최상 존재의 시공 진화에 참여하지 않은 체험적 결함을 보충하려는 노력으로, 비슷하게 모집하는 다른 여섯 군단과 손을 잡고 이 바깥 우주들을 관리하는 것이 최후 군단, 승천하며 완전해진 필사자들이 점점 더 누적되는 이 예비군의 임무일지 모른다고 우리 중에 다수가 추측한다.
31:10.14 (353.10) 이 결함은 어떤 수준의 우주 존재에서도 피할 수 없다. 현재 우주 시대에, 높은 수준의 영적 존재를 가진 우리는 지금, 진화하는 우주를 관리하고 하늘 가는 필사자들을 보살피려고 내려오며, 이처럼 더 높은 영적 체험의 현실을 겪지 못한 그들의 부족함을 보상해 주려고 애쓰고 있다.
31:10.15 (354.1) 이 바깥 우주들에 관한 총우주 건축가들의 계획에 대하여 우리는 정말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지만, 그런데도 다음 세 가지에 대하여 우리는 확실하다:
31:10.16 (354.2) 1. 바깥 공간의 영토에서 차츰 조직되는 광대하고 새로운 체계의 우주들이 실제로 있다. 사람이 살고 조직된 우주들의 현재 테두리 바깥에 아주 멀리, 새 계급의 물리적 창조, 벌 떼 같이 수많은 우주로 이루어진 엄청나고 거대한 동그라미들이 너희의 망원경을 통해서 실제로 보인다. 현재, 이 바깥 창조들은 완전히 물리적이고 이 우주들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것이 명백하며, 생물이 관리하지 않는 듯하다.
31:10.17 (354.3) 2. 오랜 세월에 걸쳐 다른 여섯 최후자 군단과 관련하여, 완전해지고 하늘 가는 시공 존재들을 파라다이스에서 동원하는 일이, 설명도 없이 온통 신비스럽게 계속된다.
31:10.18 (354.4) 3. 이러한 거래들과 동시에, 최상위 신은 초월 우주들의 전능한 통치자로서 힘을 기르고 있다.
31:10.19 (354.5) 생물ㆍ우주ㆍ신을 포함하는 이 세 가지 발전을 보건대, 새롭고 밝혀지지 않은 어떤 일이 총우주에서 터지려 한다고 기대한다고 우리가 비난을 받을 수 있는가?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규모로, 오랜 세월에 걸쳐 물리적 우주들이 동원되고 조직되며, 최상 존재의 성격이 태동하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시간 세계의 필사자를 신처럼 완전하게 들어올리는 이 엄청난 계획, 그리고 차후에 파라다이스에서 최후 군단―우주의 신비 속에 가려진 이름이자 운명―에 필사자가 동원되는 것과 관련짓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집합하고 있는 최후 군단이 바깥 공간의 여러 우주의 어떤 미래 근무에 예정되어 있다고 온 유버르사에서 점점 더 믿고 있다. 우리는 이 바깥 우주에서 적어도 7만개의 물질 집합체가 밀집하는 것을 이미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들은 각기 현재 어느 초우주보다도 더 크다.
31:10.20 (354.6) 진화하는 필사자는 공간의 여러 행성에서 태어나고 상물질 세계를 통과하며, 영의 우주들까지 올라가고 하보나 구체들을 거치며, 하나님을 발견하고 파라다이스에 이르며, 1차 최후 군단에 소집되고, 거기서 다음에 우주에서 봉사하는 배치를 기다린다. 집합되고 있는 다른 여섯 최후 군단이 있지만, 첫 필사 승천자 그랜드판다가 파라다이스에서 모든 계급의 최후자의 우두머리로서 주재한다. 그리고 이 숭고한 광경을 보면서, 우리는 다 외친다 “동물의 기원을 가진 세월의 자손, 공간의 물질 아들들에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운명인가!”
31:10.21 (354.7) [유버르사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로부터 이렇게 활동하라고 인가받은 한 신성한 조언자와 어느 이름도 번호도 없는 자가 함께 후원하였다.]
31:10.22 (354.8) 신의 성품, 파라다이스의 실체, 중앙 우주 및 초우주의 조직과 작용, 대우주의 성격자들, 진화하는 필사자의 고귀한 운명을 묘사하는 이 31편의 논문을 한 높은 위원회가 후원하고 작성하여 영어로 적었다. 이 위원회는 유버르사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내린 명령에 따라서 활동하는 오르본톤 행정가 24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명령은 네바돈의 놀라시아덱 별자리, 사타니아 체계의 606번 행성 유란시아에서 서기 1934년에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구원자 별의 가브리엘에서 권한을 받아 활동하는 네바돈 지역 우주 성격자 군단의 후원을 받았다
32:0.1 (357.1) 한 지역 우주는 파라다이스의 미가엘 서열인 한 창조 아들의 작품이다. 이것은 1백 별자리로 구성되어 있고, 각 별자리는 사람이 사는 세계들로 구성된 1백 체계를 포함한다. 각 체계는 궁극에 사람 사는 구체를 대략 1천 개 포함할 것이다.
32:0.2 (357.2) 시공에 있는 이 우주들은 모두 진화한다. 파라다이스 미가엘들의 창조 계획은, 그러한 지역 우주를 구성하는 다채로운 체제의 구체들에서, 다양한 생물의 육체적ㆍ지적ㆍ영적 성품과 능력이 차츰차츰 진화하고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길을 따라서, 늘 진행된다.
32:0.3 (357.3) 유란시아는 한 지역 우주에 속하며, 그 군주는 네바돈의 하나님이자 사람, 곧 나사렛 예수요, 구원자별의 미가엘이다. 이 지역 우주에 대한 미가엘의 계획은 전부, 그가 공간에서 최고의 모험을 일찍이 시작하기 전에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로부터 완전히 인가를 받았다.
32:0.4 (357.4) 하나님의 아들들은 창조자로서 자신이 활동할 영역을 선택해도 좋지만, 최초에 총우주의 파라다이스 건축가들이 이 물질 창조들을 예상하고 계획하였다.
32:1.1 (357.5) 우주가 생기기 이전 단계에, 공간 물력과 원초적 에너지를 조종하는 것은 파라다이스의 물력 조직책들이 할 일이다. 그러나 초우주 영토에서, 태어나는 에너지가 지역 인력, 곧 직진(直進) 인력에 민감하게 될 때, 그들은 관계된 초우주의 동력 지휘자들이 일하도록 물러난다.
32:1.2 (357.6) 이 동력 지휘자들은 지역 우주 창조의 물질 이전이자 물력 이후 단계에서 혼자 활동한다. 태어나는 우주를 위하여 물질적 기초―실질의 태양과 물질로 이루어진 구체들―을 마련할 만큼 충분히 공간 에너지를 동력 지휘자들이 동원할 때까지, 창조 아들은 우주의 조직을 개시할 기회가 전혀 없다.
32:1.3 (357.7) 지역 우주들은 물리적 규모가 크게 다르며, 때때로 눈에 보이는 물질 내용에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모두가 대체로 같은 에너지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한 지역 우주의 동력 전기량과 잠재 물질의 재산은 창조 아들의 활동, 그리고 그의 창조 동료가 본래부터 소유한, 물리적으로 통제하는 재산 뿐 아니라, 동력 지휘자와 그 전임자들이 조종한 데 따라서 결정된다.
32:1.4 (358.1) 한 지역 우주의 에너지 전기량은 그 초우주의 물력 재산의 약 10만분의 1이다. 너희 지역 우주 네바돈의 경우는 물질화된 질량이 약간 적다. 물리적으로 말하면, 네바돈은 오르본톤의 어느 지역 창조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에너지 및 물질로 된 물리적 재산을 모두 소유한다. 네바돈 우주가 발전해서 확장하는 데 지워진 유일한 물리적 한계는, 함께 우주 작용을 맡은 관련된 동력과 성격자들의 인력 통제에 붙잡혀 있는 공간 에너지의 전기량에 있다.
32:1.5 (358.2) 에너지인 물질이 질량으로 물질화하는 어떤 단계에 도달할 때, 파라다이스 창조 아들이 그 장면에 나타나며, 무한한 영의 창조 딸이 그를 동반한다. 창조 아들이 도착함과 동시에, 건축 구체를 짓는 작업이 시작되며, 이것은 계획된 지역 우주의 본부 세계가 될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러한 지역 창조는 진화하며, 태양들이 안정되고, 행성들이 형성되어 궤도에 던져지며, 한편 별자리 본부와 체계의 서울로 쓰일 건축 세계들을 짓는 공사가 계속된다.
32:2.1 (358.3) 지역 우주를 조직할 때 셋째 근원 중심에 기원을 가진 동력 지휘자 및 다른 존재들이 창조 아들보다 앞서 간다. 이렇게 미리 조직된 공간의 에너지로부터, 너희의 창조 아들 미가엘은 네바돈 우주의 사람 사는 영역을 확정하였고, 그 뒤로 언제나 이를 관리하는 데 온 정성을 기울여 왔다. 선재(先在)하는 에너지로부터 이 신다운 아들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이 생기게 하며, 살아 있는 생물을 기획하고, 무한한 영의 지역 우주 계심의[1] [1667] 협조를 얻어 다양한 영 성격자 일행을 창조한다.
32:2.2 (358.4) 우주를 조직하는 물리적 예비 작업에서, 창조 아들을 훨씬 앞섰던 이 동력 지휘자와 에너지 통제자들은 나중에 이 우주 아들과 함께 훌륭하게 연락을 가지고 봉사하며, 그들이 최초에 조직하고 회로를 놓은 그 에너지를, 줄곧 관련하여 통제하는 상태로 언제까지나 남아 있다. 구원자별에는 이 지역 우주를 최초로 형성하는 데 너희의 창조 아들과 협동한 바로 이 동력 중심 1백 명이 지금 활동한다.
32:2.3 (358.5) 네바돈에서 처음으로 완성된 물리적 창조 행위는 본부 세계, 곧 구원자별의 건축 구체와 그 위성(衛星)들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동력 중심과 물리 통제자들이 처음 이동한 때부터, 활기 있는 참모진이 구원자별의 완성된 구체들에 도착할 때까지, 현재 너희 행성의 시간으로 10억 년이 조금 넘게 걸렸다. 구원자별이 지어진 직후에, 계획했던 별자리들의 1백 본부 세계, 그리고 행성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계획했던 지역 체계들의 1만 본부 구체 및 그 건축된 위성들을 창조하는 일이 뒤따랐다. 그러한 건축된 세계들은 물리적 성격자와 영적 성격자들, 그리고 그 사이에 개재하는 상물질 단계, 곧 과도기 단계의 존재들을 수용(收容)할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다.
32:2.4 (359.1) 네바돈의 본부, 구원자별은 지역 우주의 에너지 질량의 정확한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너희의 지역 우주는, 그 물리적 중심에 하나의 큰 체계가 있지만, 단일 천문 체계는 아니다.
32:2.5 (359.2) 구원자별은 네바돈의 미가엘이 몸소 계시는 본부이지만, 그를 거기서 언제나 찾지는 못할 것이다. 너희 지역 우주의 순조로운 운영은 그 서울 구체에 창조 아들이 고정되어 계심을 이제 더 요구하지 않지만, 물리적으로 조직하는 초기 시절에는 이와 달랐다. 서로의 물질 인력으로 말미암아, 여러 회로(回路)와 체계들이 서로 균형을 이루게 하는 충분한 에너지가 물질화됨으로 그 영역에 인력(引力)의 안정을 얻었을 때까지, 창조 아들은 그의 본부 세계를 떠날 수 없다.
32:2.6 (359.3) 즉시, 한 우주의 물리적 계획이 완성되고, 창조 영과 연합하여 창조 아들이 생명 창조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나서 무한한 영의 이 대표는 뚜렷한 창조 성격자로서 그의 우주 활동을 시작한다. 이 첫 창조 활동이 모습을 갖추고 집행될 때, 밝은 아침별이 솟아나오는데, 그는 신의 신분과 이상(理想)으로 이루어진, 이 초기의 창조 개념이 성격화된 것이다. 이분이 그 우주의 최고 집행자, 창조 아들의 개인적 동료이며, 신(神)의 속성이 두드러지게 제한되어 있지만, 그 성품의 모든 면이 아들과 같다.
32:2.7 (359.4) 창조 아들의 오른팔인 조수이자 최고 집행자가 마련되었으니까, 광대하고 놀라운 행렬의 다양한 생물을 생산하는 일이 따른다. 지역 우주의 아들딸이 나타나고, 그 뒤에 곧 그러한 창조를 다스리는 정부가 마련되며, 이것은 그 우주의 최고 회의로부터 별자리 아버지와 지역 체계의 군주들까지 연장된다―지역 체계는 나중에 의지를 가진 인간, 다양한 필사 민족들이 사는 집이 되도록 고안된 세계들의 집합이다. 그리고 이 세계들을 각각 한 행성 영주가 주관한다.
32:2.8 (359.5) 다음에, 그러한 우주가 아주 완전히 조직되고 아주 충만하게 직원이 배치되고 나서, 창조 아들은 신다운 모습대로 필사 인간을 창조하라는 아버지의 제안을 비로소 실행한다.
32:2.9 (359.6) 행성의 거처들을 조직하는 것은 네바돈에서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데, 이는 이 우주가 정말로 오르본톤의 별과 행성이 있는 영역에서 연륜이 짧은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등록부에는 네바돈에 사람 사는 행성이 3,840,101개 있었고, 너희 세계가 속한 지역 체계 사타니아는 다른 체계들의 상당히 좋은 전형(典刑)이다.
32:2.10 (359.7) 사타니아는 균일한 물리적 체계, 곧 단일 천문(天文) 단위나 조직은 아니다. 거기에 사람 사는 619 세계는 5백이 넘는 다른 물리 체계들에 자리를 잡고 있다. 오직 다섯 체계만 사람 사는 세계가 둘이 넘게 있으며, 이 중에 겨우 하나만 사람 사는 세계를 넷이나 가지고 있고, 한편 46 체계는 사람 사는 세계가 둘이 있다.
32:2.11 (359.8) 사타니아 체계의 사람 사는 세계들은 유버르사로부터, 그리고 일곱째 초우주의 물리적 중심, 곧 천문학적 중심으로 작용하는 큰 태양 집단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사타니아의 본부 예루셈으로부터, 은하수의 밀집된 지름 안에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오르본톤 초우주의 물리적 중심까지 20만 광년(光年)이 넘는다. 사타니아는 지역 우주의 변두리에 있으며, 네바돈은 지금 오르본톤의 가장자리를 향해서 썩 바깥에 나가 있다. 가장 바깥 체계의 사람 사는 세계들로부터 초우주의 중심까지는 25만 광년이 조금 안 되는 거리이다.
32:2.12 (360.1) 네바돈 우주는 지금 오르본톤 초우주 순회로의 남동쪽으로 멀리서 돌고 있다. 가장 가까운 이웃 우주들은 아발론ㆍ헨셀론ㆍ산셀론ㆍ포르탈론ㆍ울버링ㆍ파노빙, 그리고 알보링이다.
32:2.13 (360.2) 그러나 한 지역 우주의 진화는 긴 이야기이다. 초우주를 다루는 논문들이 이 주제를 소개하며, 지역 창조들을 다루는 이 부분의 논문들이 이 글을 뒤잇고, 그 다음에 나오는 논문들은 유란시아의 역사와 운명에 관하여 언급하며 이야기를 마친다. 그러나 너희의 창조 아들이 바로 너희의 진화 세계에서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한때 사람의 일생을 산 그대로, 오로지 그의 일생과 가르침에 관한 이야기를 정독함으로 너희는 그러한 지역 우주의 필사자들이 어떤 운명을 가졌는가 적절히 이해할 수 있다.
32:3.1 (360.3) 완전하게 안정된 유일한 창조는 하보나 중앙 우주이다. 이것은 우주의 아버지의 생각과 영원한 아들의 말씀으로 직접 지어졌다. 하보나는 실존적이고 완전하고 충만한 우주이며, 영원한 신들의 집, 만물의 중심을 둘러싼다. 일곱 초우주에 있는 창조들은 유한하고 진화하며, 변함없이 진보한다.
32:3.2 (360.4) 시공의 물리적 체계들은 모두 진화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 이 체계들은 그 초우주의 안정된 회로에 던져질 때까지, 물리적으로도 안정되어 있지 않다. 한 지역 창조가 확장하고 성장하는 물리적 가능성이 다 소모되기까지, 그리고 그 안에 사람이 사는 모든 세계의 영적 지위가 영원히 정착되고 안정되기까지, 그 지역 창조는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지 않는다.
32:3.3 (360.5) 중앙 우주를 제외하고, 완전은 차츰 달성하는 것이다. 중앙 창조에서 우리는 완전의 원본이 있지만, 모든 다른 영역은 그 특정한 세계나 우주들이 전진하도록 확정된 방법에 따라서 완전을 달성해야 한다. 창조 아들들이 각자의 지역 우주를 조직하고 진화시키며, 훈련시키고 안정시키는 계획은 거의 무한하게 다양한 특징을 나타낸다.
32:3.4 (360.6) 아버지가 신으로서 계신 것을 제외하면, 어떤 지역 우주이든지 어떤 면에서 중앙 창조, 곧 원본이 되는 창조의 행정 조직을 모방한 것이다. 우주의 아버지는 거주 우주에 몸소 계시지만, 시공 세계의 필사자의 혼과 글자 그대로 함께 사는 것처럼 아버지가 중앙 우주에 기원이 있는 존재들의 지성에 깃들지는 않는다. 광범위한 창조의 영적 일을 조절하고 정리하는 데 전적으로 지혜로운 보상이 있는 듯하다. 중앙 우주에서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친히 계시지만, 그 완전한 창조에서 사는 아이들의 지성 속에 계시지는 않는다. 공간의 여러 우주에서 아버지는 몸소 계시지 않으며 그의 군주 아들이 그를 대표한다. 한편 아버지는 필사 자녀들의 지성 속에 가까이 계시며, 의지를 가진 이 사람들의 지성 속에 사는 신비의 훈계자의 선(先)인격 계심이 그를 영적으로 대표한다.
32:3.5 (360.7) 한 지역 우주 본부에는 우주의 아버지가 친히 계시지 않지만, 완전히 독립된 권한과 행정적 자치를 대표하는, 창조자와 창조하는 성격자들이 모두 산다. 우주의 아버지를 제외하고, 중앙 우주에서 존재하는 거의 모든 등급의 총명한 존재들 중에서, 모두에 관하여 무언가, 그리고 누구인가 지역 우주에서 발견될 것이다. 우주의 아버지는 한 지역 우주에 친히 계시지 않지만, 그 창조 아들이 아버지를 친히 대표하며, 그는 언젠가 하나님의 대관(代官)으로서, 나중에는 자신의 권한으로 통치하는 최고의 군주가 된다.
32:3.6 (361.1) 우리가 생명의 눈금에서 밑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믿음의 눈으로 찾아내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하위의 생물은 언제나―그리고 때때로 상급 성격자들조차―창조 아들 안에 계신 우주의 아버지를 상상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그들이 영적으로 승진할 그때, 그들이 완전히 성장하여 하나님을 몸소 볼 수 있게 될 때까지, 그들은 진보에 지치고 영적 의심을 품고 혼란에 빠지며, 그래서 그들이 살던 시대와 우주에서, 진보하는 영적 목표에서 벗어난다. 이런 식으로 창조 아들을 바라볼 때, 그들은 아버지를 보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아버지에게 도달하는 오랜 투쟁을 통해서 내내, 본래의 조건들이 그러한 달성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 시기에, 사람에게 가장 안전한 보호 조치는 아버지가 그의 아들 안에 계신다는 진실과 사실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이다. 글자 그대로, 또 상징으로, 영적으로, 또 성격으로, 아버지와 아들들은 하나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창조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32:3.7 (361.2) 한 특정한 우주의 성격자들은, 처음에 오로지 신과 그들이 얼마나 가까운 관계에 있는가에 따라서, 안정되고 믿을 만하다. 생물의 기원이 최초의 신성한 근원들로부터 충분히 떨어져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나 또는 무한한 영에 속하는 봉사하는 생물을 상대하는가 상관 없이, 부조화와 혼란, 그리고 어떤 때는 반란―죄―의 가능성이 늘어난다.
32:3.8 (361.3) 신에 기원을 가진 완전한 존재들을 제외하고, 초우주에서 의지(意志)가 있는 모든 생물은 진화된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비천한 지위에서 시작하여, 늘 위로, 실제는 안으로 올라간다. 상당히 영적인 성격자들조차, 한 생명에서 다음 생명으로, 한 구체에서 다른 구체로 점진적으로 이동함으로, 생명의 눈금을 줄곧 올라간다. 신비의 훈계자를 영접하는 자들의 경우에, 그들이 영적으로 올라가고 우주에서 도달하는 가능한 높이에 정말로 아무 한계가 없다.
32:3.9 (361.4) 시간 세계에서 태어난 사람이 완전함에 마침내 도달했을 때, 그러한 완전은 전적으로 벌어들인 것이며 인격자의 진정한 소유물이다. 은혜의 요소가 아낌없이 섞여지지만, 그런데도 인간이 달성한 것은 개인이 노력하고 실제로 살아서 얻은 결과이며, 존재하는 환경에 인격이 반응한 것이다.
32:3.10 (361.5) 동물로서 진화한 기원을 가졌다는 사실은 우주의 견지에서 어떤 인격자에게도 낙인을 찍지 않으니, 이는 그것이 두 가지 기본형의 생물, 유한하고 지적인, 의지(意志)를 가진 생물 중에 하나를 창조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완전과 영원의 절정에 도달했을 때,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즐겁게 생명의 사다리를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간 자들에게 더욱 큰 명예가 주어지며, 영광의 높이까지 이를 때, 그들은 밑바닥에서부터 꼭대기까지 생명의 모든 단계에 관하여 실제 지식을 몸에 지닌 체험을 몸소 겪었을 것이다.
32:3.11 (361.6) 이 모두가 창조자들의 지혜를 보여준다. 우주의 아버지는 모든 필사자를 완전한 존재로 만드는 것, 그의 신성한 말씀으로 완전을 나눠주는 것이 마찬가지로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면, 오랫동안 차츰차츰 안으로 올라가는 것과 관련된 모험과 훈련을 겪는 놀라운 체험을 그들로부터 빼앗을 터인데, 이것은 아주 운이 좋아서 생명 존재의 맨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자들만 얻을 수 있는 체험이다.
32:3.12 (362.1) 하보나를 돌고 있는 여러 우주에는, 생명의 진화 단계를 올라가는 자를 가르치는, 원본이 되는 선생 안내자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겨우 충분한 수의 완전한 인간만 마련된다. 진화 부류 인격자의 체험적 성품은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인간의 늘 완전한 성품에 자연스러운 우주 보완자이다. 실제로, 완전한 인간과 완전해진 인간은 모두, 유한한 총체에서 볼 때 미완성이다.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체계에 있는 실존적으로 완전한 인간, 그리고 진화하는 우주로부터 올라가고 체험으로 완전하게 된 최후자의 보완하는 관계에서, 두 부류는 본래부터 있는 한계로부터 해방되며, 따라서 그들은 인간 지위의 궁극, 숭고한 절정에 이르려고 함께 시도해도 좋다.
32:3.13 (362.2) 인간의 이러한 거래는 칠중 신 안에서 행동과 반응이 우주에 미치는 영향이며, 칠중 신 안에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영원한 신성은, 동력으로 현실화되는 최상 존재의 신 안에서, 그로 인하여, 그리고 그를 통해서, 시공 우주의 최상 창조자들의 진화하는 신성과 합쳐진다.
32:3.14 (362.3) 신답게 완전한 인간과 진화로 완전해진 인간은 같은 정도로 신(神)의 잠재성을 가졌지만, 그 종류가 다르다. 최고의 봉사에 도달하기 위해서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의존해야 된다. 진화하는 여러 초우주는 하늘 가는 시민을 위해서 최종 훈련을 마련하는 것을 완전한 하보나에 의존하지만, 마찬가지로 완전한 중앙 우주는 내려가는 그 주민의 완전한 성장을 마련하기 위하여, 완전해지고 있는 초우주들이 존재하는 것이 필요하다.
32:3.15 (362.4) 유한한 실체의 두 가지 1차 명시, 곧 타고난 완전과 진화된 완전은, 인격자이든 우주이든, 동격이며 의존하고 통합된다. 기능ㆍ봉사ㆍ운명을 완성하기 위해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필요로 한다.
32:4.1 (362.5) 우주의 아버지가 자신과 그의 권능을 아주 많이 다른 자들에게 이양했다고 해서, 아버지가 신 조합에서 말이 없거나 가만히 있는 구성원이라는 생각을 가지지 말라. 성격 분야와 조절자 수여를 제외하면, 아버지가 그의 영원한 목적을 수행하는 과제에서 신 동위자들과 그의 아들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창조된 지적 존재에게 그렇게 많이 행하도록 허락하니까, 아버지는 파라다이스 신들 가운데, 겉보기에 가장 적게 활동한다. 오직 아버지가 그의 동료나 하위 동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결코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아버지는 창조하는 세 분 중에서 말없는 구성원이다.
32:4.2 (362.6) 하나님은 모든 지적 생물이 활동하고 체험할 필요를 충분히 이해한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도, 한 우주의 운명에, 또는 생물 중에 가장 비천한 자들의 복지에 관련된다 하더라도, 그 자신과 어떤 특정한 우주 상황이나 창조적 사건 사이에 본래부터 개재하는, 수많은 화려한 집단의 생물 및 창조 성격자들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은 활동하지 않고 물러난다. 그러나 물러나고, 무한한 조정을 이렇게 보여주는데도, 하나님 편에서는 이러한 예비된 대리자 및 성격자들의 수단으로, 그들을 통해서, 이 여러 사건에 실제로, 글자 그대로 친히 참여한다. 아버지는 모든 광범위한 창조의 복지를 위하여 이 모든 경로 안에서, 그리고 이를 통해서, 일하신다.
32:4.3 (363.1) 한 지역 우주의 정책ㆍ운영ㆍ행정에 관해서 말하면, 우주의 아버지는 그의 창조 아들의 몸 안에서 행동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상호 관계에서, 셋째 근원 중심에 기원이 있는 성격자들의 집단 관계에서, 또는 인간과 같이 어느 다른 생물 사이의 관계에서―그러한 관계에 대해서―우주의 아버지는 결코 개입하지 않는다. 창조 아들의 법칙, 그리고 별자리 아버지, 체계 군주, 행성 영주들의 통치―그 우주를 위하여 예정된 정책과 절차―는 언제나 우선한다. 아무런 권한도 분산되지 않고, 신의 권능과 목적이 엇갈리는 일은 결코 없다. 신들은 완전히, 영원하게 의견이 일치한다.
32:4.4 (363.2) 창조 아들은 윤리적 관계, 곧 어느 분과의 생물과 어느 다른 등급의 생물의 관계, 또는 어느 특정한 집단 안에서 둘 이상의 개인들의 관계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에서, 최상으로 다스린다. 그러나 그러한 계획은 우주의 아버지가 모든 창조 전역에 두루 어느 개별 생물에게도, 그 개인의 현재 지위나 앞날의 전망에 대하여, 그리고 아버지의 영원한 계획과 무한한 목적에 관련하여, 자신의 방법으로 간섭하면 안 되고, 신의 지성이 기뻐하는 어떤 일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32:4.5 (363.3) 의지를 가진 필사 인간의 경우에, 아버지는 깃드는 조절자 안에 실제로 계시며, 이것은 그의 선인격 영의 분신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또한 의지가 있는 그러한 필사 인간의 인격 근원이다.
32:4.6 (363.4) 우주의 아버지가 수여한 이 생각 조절자들은 비교적 고립되어 있다. 그들은 인간의 지성 속에 깃들지만, 한 지역 창조의 윤리적 사무와 눈에 뜨일 만한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들은 천사의 봉사나, 체계, 별자리, 또는 지역 우주의 행정, 아니 창조 아들의 통치와도 직접 조정되지 않는데, 창조 아들의 뜻은 그의 우주에서 최고의 법이다.
32:4.7 (363.5) 깃드는 조절자는 거의 무한한 창조에 있는 인간과 연락하는 방식, 독립되어 있지만 통일된 하나님의 한 방식이다. 따라서 필사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그의 계심을 명백히 나타내며,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또 다른 방법으로도 자신을 보여주려 하시겠지만, 이보다 더한 계시는 신답게 가능하지 않다.
32:4.8 (363.6) 우리는 아들들이 자기가 관할하는 우주에 대하여 깊고도 완벽한 지식을 가지는 작용을 보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온 우주의 세부를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충분히 친히 통달하는가 십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우주의 아버지가 그의 거대한 창조에 있는 존재들에 관하여 정보를 받고, 또 그들에게 그의 계심을 드러낼 수 있는 길을 우리는 인식할 수 있다. 인격 회로를 통해서, 아버지는 모든 창조ㆍ우주ㆍ체계에 있는 모든 존재의 온갖 생각과 행동을 인식한다―친히 알고 계신다.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과 교통하는 이 기법을 우리가 충분히 파악할 수 없어도, “주가 그의 자녀들을 아신다”는 확신과 “우리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그가 눈여겨보신다”는 우리 각자의 확신 속에서, 우리는 강해질 수 있다.
32:4.9 (363.7) 우주의 아버지는 너희의 우주에, 너희 마음 속에 계신다. 영적으로 말하면, 중앙 거처의 일곱 으뜸 영 중의 하나를 통하여 계시며, 구체적으로, 필사 지성의 깊은 데서 살고 일하고 기다리는 신다운 조절자를 통하여 계신다.
32:4.10 (363.8) 하나님은 자기 중심인 성격자가 아니며, 아버지는 그의 우주에게, 그리고 지은 인간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분배한다. 그는 신들 속 뿐 아니라, 그의 아들들 속에서 살고 행동하며, 아들들이 신답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들이 하라고 맡긴다. 우주의 아버지는 다른 존재가 행할 수 있는 어떤 기능이라도 참으로 자신에게서 벗어 버렸다. 이것은 한 지역 우주 본부에서 하나님 대신에 다스리는 창조 아들의 경우와 똑같이, 필사 인간에게도 참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주의 아버지의 이상과 무한한 사랑이 해결되어 나가는 것을 바라본다.
32:4.11 (364.1) 이렇게 자신을 보편적으로 수여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아버지의 신다운 성품이 얼마나 크고 너그러운가 풍부한 증거를 발견한다.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에게 주지 않고 자신의 무엇이라도 남겨 놓았다면, 그 나머지 중에서, 그는 아낌없이 관대하게 그 영역의 필사자들에게 생각 조절자를 수여하고 있으며,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받을 필사 후보자에게 아주 참을성 있게 깃든다.
32:4.12 (364.2) 우주의 아버지는, 말하자면, 모든 창조가 성격 재산과 영적 달성의 잠재성이 풍부하도록 자신을 쏟아부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을 우리에게 주었고, 사랑하는 것들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힘과 영광만 자신을 위해 남겨 놓고, 그 사랑 때문에 모든 다른 것을 이렇게 벗어 버렸다.
32:5.1 (364.3) 공간을 통해서 가는 우주들의 행진에 크고 영화로운 목적이 있다. 너희 필사자의 모든 투쟁은 헛수고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엄청난 계획, 거대한 사업의 일부이며, 그 사업이 방대하기 때문에 어느 한 시점이나 어느 일생 동안에 이를 많이 보기가 불가능하다. 우리 모두가 신들이 감독하고 해결해 나가는 영원한 사업의 일부이다. 경이롭고 보편적인 장치 전체가, 위대한 첫째 근원 중심의 무한한 생각과 영원한 목적의 리듬이 담긴 음악에 맞추어, 공간을 통해서 당당하게 계속 움직인다.
32:5.2 (364.4) 영원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드높은 영적 이상이다. 세월 속의 사건들과 물질 존재에서 생기는 투쟁은 단지 일시적 발판이며, 이것은 건너 편까지, 영적 실체와 하늘 생활이 있는 약속의 땅까지 다리를 놓는다. 물론, 너희 필사자들은 영원한 목적을 가진 개념을 파악하기 힘들다. 너희는 영원이라는 생각, 결코 시작이 없고 끝이 없는 어떤 것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익숙한 모든 것에는 종말이 있다.
32:5.3 (364.5) 한 개인의 일생, 한 영역의 지속 기간, 또는 어떠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의 연대기에 대하여 말하면, 우리는 분리된 시간의 길이를 다루는 듯 보일 것이다. 모든 것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어 보인다. 일련의 그러한 체험이나 생애나 세월이나 시대는, 연속하여 배열되었을 때 한 직선 도로가 되며, 이것은 영원(永遠)의 무한한 표면에 순간적으로 번쩍 가로지르는, 시간 세계의 고립된 사건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장면 뒤에서 볼 때, 더 포괄적 관점에서 보고 더 완전히 이해하면, 그러한 설명은 부적당하고, 앞뒤가 맞지 않고, 도무지 적합하지 않아서, 시간 세계에 일어나는 거래들을 적절히 설명하고 이 거래들과 밑바닥에 있는 목적 및 영원의 기본 반응을 달리 서로 관련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32:5.4 (364.6) 필사자의 머리가 알아듣도록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영원을 하나의 주기(週期)로 생각하고 영원한 목적을 하나의 끝없는 동그라미로서, 어떤 면에서 일시적이며 물질적인, 시간의 주기들과 동시화된 영원의 주기로서 상상하는 것이 내게는 더욱 적절해 보인다. 영원의 주기와 연결되고 또한 그 일부를 형성하는 시간 구역들에 대하여 말하면, 한 때 시간적 존재들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일시적 시대들은 태어나고, 살다가 없어지는 것을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인간은 조절자와 융합하는 영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죽는다. 죽음으로 인한 변질은 그들이 시간의 속박과 물질 창조의 사슬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한 절차이며, 이렇게 함으로 진보하는 영원의 행렬과 영적으로 발걸음을 맞출 수 있게 된다. 시간 세계에서 시험삼아 사는 생애와 물질적 존재로부터 살아남은 뒤에, 영원한 시대의 동그라미 주위에 있는 공간 세계들과 함께 언제까지나 빙 돌면서, 영원과 접촉하면서, 아니 영원의 일부로서, 네가 계속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32:5.5 (365.1) 시간의 구역들은 일시적 형태를 입고서 인격자가 번쩍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들은 한 철 동안 나타났다가, 다음에 인간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영원한 동그라미 주위를 끝없이 회전하는 높은 인생에서 새로운 배우이자 계속하는 요소로서, 다시 나타날 뿐이다. 우주의 아버지의 중앙 거처 둘레에 광대하고 길쭉하게 된 동그라미 위에서 제한된 우주가 움직인다고 믿는 우리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영원을 직선 도로라고 생각할 수 없다.
32:5.6 (365.2) 솔직히 말해서, 영원은 시간 세계의 유한한 지성이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다. 너희는 단지 영원을 파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을 따름이다. 나는 영원을 완전히 눈으로 보지 못하며, 내가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나의 개념을 인간의 머리가 알아듣도록 전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우리의 관점을 얼마큼 묘사하기 위해서, 영원한 사물에 관하여 우리가 이해하는 것을 얼마큼 너희에게 일러 주려고 나는 최선을 다했다. 무한한 성질과 영원한 중요성을 가진 이러한 가치 수준에 대하여 너희 생각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나는 너희를 도우려고 애쓰고 있다.
32:5.7 (365.3) 하나님의 지성 속에는 그의 광대한 영토 전체에 있는 모든 생물을 포함하는 한 계획이 있으니, 이 계획은 한없는 기회를 주고, 제한 없이 진보하며, 끝없는 사는 하나의 영원한 목적이다. 그리고 노력하기만 하면, 그러한 비할 데 없는 생애에서 얻는 무한한 보물은 너희의 것이다!
32:5.8 (365.4) 영원의 목표가 앞에 있다! 신(神)에 도달하는 모험이 너희 앞에 놓여 있다! 완전을 향한 달리기가 진행되고 있다! 원하는 자는 누구나 참가해도 좋다. 달리는 길에 걸음마다 깃드는 조절자가 인도하는 데, 모든 육체에게 아주 아낌없이 퍼붓는 영, 우주 아들의 그 선한 영이 안내하는 데 의존하면서, 어떤 인간이 믿음과 신뢰로 달리는 수고를 하더라도 확실한 승리로 보답을 받을 것이다.
32:5.9 (365.5) [네바돈 최고 회의에 임시 부속되어 있고, 구원자별의 가브리엘로부터 이 임무에 배치받은 어느 막강한 사자가 발표하였다.]
33:0.1 (366.1) 우주의 아버지는 그의 광대한 창조를 다스리는 것이 아주 확실하지만, 한 지역 우주의 행정에서 아버지는 창조 아들의 몸을 통해서 활동한다. 아버지는 한 지역 우주의 행정 사무에는 다른 방법으로 친히 활동하지 않는다. 이러한 일은 창조 아들에게, 그리고 지역 우주의 어머니 영과 그들의 다채로운 자식들에게 맡겨진다. 이 아들이 지역 우주의 계획, 정책, 행정 법령을 수립하고 집행하며, 그는 영 동료와 함께, 집행 권력을 가브리엘에게, 그리고 사법 권한을 별자리 아버지, 체계 군주, 행성 영주들에게 이양한다.
33:1.1 (366.2) 우리의 창조 아들은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에게 동시에 기원이 있는 무한한 신분 개념, 611,121번째 독창적 개념이 성격화된 것이다. 네바돈의 미가엘은 신성과 무한의 개념, 이 611,121번째 우주 개념을 성격화하는 “하나만 얻은 아들”이다. 그의 본부는 구원자별에 세 겹의 빛나는 저택에 있다. 이 거처가 이렇게 배치된 것은 미가엘이 영ㆍ상물질ㆍ물질, 이 세 단계의 지적 생물 존재로 사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유란시아에서 일곱째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을 수여한 데 관련된 이름 때문에, 그를 때때로 그리스도 미가엘이라고 부른다.
33:1.2 (366.3) 우리의 창조 아들은 영원한 아들이 아니며, 후자는 파라다이스에서 우주의 아버지와 무한한 영과 함께 실존적 동료이다. 네바돈의 미가엘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구성원이 아니다. 그런데도 만약에 영원한 아들 자신이 실제로 구원자별에 계시고 네바돈에서 활동한다면 그가 드러냈을 모든 신다운 속성과 권능을 우리 주 아들은 그의 영역 안에서 소유한다. 미가엘은 추가된 권능과 권한도 소유하며, 이는 그가 영원한 아들을 몸으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 이 지역 우주에 대해서, 거기에서 우주의 아버지 성격의 계심을 충분히 대표하고 실제로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ㆍ아들의 조합까지도 대표한다. 이 여러 관계는 진화하는 우주를 직접 관리하고 미숙한 생물 존재들과 개인적 접촉을 가질 능력이 있는 모든 신다운 존재 가운데, 창조 아들을 가장 강력하고, 다능하고, 영향력이 있는 자가 되게 한다.
33:1.3 (366.4) 우리의 창조 아들은 파라다이스의 영원한 아들이 구원자별에 몸소 계시다면 그가 행사할 것과 똑같이, 지역 우주의 본부에서, 영적으로 당기는 힘, 곧 영 인력(引力), 그리고 그보다 더한 것을 미친다. 이 우주 아들은 또한 네바돈 우주에 대하여 우주의 아버지가 성격화된 것이다. 창조 아들들은 파라다이스의 아버지ㆍ아들의 영적 세력을 위하여 성격의 중심이 된다. 창조 아들들은 칠중 신의 막강한 시공 속성을 최종으로 동력을 가진 성격으로 집중한 것이다.
33:1.4 (367.1) 창조 아들은 우주의 아버지의 대관(代官)으로 성격화된 것이며, 우주의 아버지는 영원한 아들과 동격의 신(神)이요, 무한한 영의 창조 동료이다. 우리의 우주와 그 안에 사람 사는 모든 세계에 대하여, 모든 실질적 의도와 목적에서 볼 때, 군주 아들은 하나님이다. 그는 진화하는 필사자가 식별하여 이해할 수 있는, 파라다이스 신들의 모든 것을 성격화한다. 이 아들과 그 영 동료는 너희의 부모인 창조자이다. 너희에게, 창조 아들 미가엘은 최상의 인격자이며, 너희에게 영원한 아들은 최상을 초월하는―무한한―신 성격자이다.
33:1.5 (367.2) 창조 아들의 몸에, 우리는 통치자인 신성한 부모가 있다. 그는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 두 분이 구원자별에 계시고 네바돈 우주 사무의 관리를 담당할 경우와 똑같이, 강력하고 유능하며 인자하다.
33:2.1 (367.3) 창조 아들들을 관찰하면 더러는 아버지를 더 닮고 더러는 아들을 더 닮았으며, 한편 더러는 무한한 부모의 혼합인 것을 드러낸다. 우리의 창조 아들은 영원한 아들을 더 닮은 특징과 속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33:2.2 (367.4) 미가엘은 이 지역 우주를 조직할 것을 선택했고, 거기서 지금 최상으로 군림한다. 그의 개인 권력은 파라다이스에 집중되는 선재(先在)하는 인력 회로에 제한을 받고, 또한 인격 소멸에 관하여 모든 최종 집행 판결을 담당하는 초우주 정부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 편에서 유보한 것에 제한을 받는다. 성격은 아버지가 홀로 수여한 것이지만, 영원한 아들의 승인을 받고서 창조 아들들은 새로운 생물의 설계를 개시하며, 영 동료들의 실질적 협조를 얻고서 에너지와 물질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도 좋다.
33:2.3 (367.5) 미가엘은 네바돈 지역에 대하여, 거기에서, 파라다이스의 아버지와 아들의 결합이 성격이 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미가엘이 유란시아에서 마지막 자신 수여를 마치고 돌아와서, 지역 우주에서 무한한 영을 대표하는 어머니 창조 영이 그에게 복종했을 때, 주 아들은 이로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력”에 대하여 관할권을 얻었다.
33:2.4 (367.6) 신성한 봉사자가 지역 우주의 창조 아들에게 이처럼 복종하는 것은 이 주 아들을 아버지ㆍ아들ㆍ영의 신성, 유한하게 명시할 수 있는 신성(神性)을 저장하는 몸으로 만든다. 한편 미가엘이 지음받은 생물로서 자신을 수여하는 체험은 그들에게 최상 존재의 체험적 신성을 묘사하는 자격을 부여한다. 각 우주에서 어느 다른 존재도, 현재의 유한 체험 가능성을 이처럼 몸소 소모하지 않았고, 지역 우주에서 어느 다른 존재도 홀로 통치하는 그러한 자격을 소유하지 않는다.
33:2.5 (367.7) 미가엘의 본부는 네바돈의 서울인 구원자별에 공식 위치가 있지만, 그는 별자리와 체계 본부, 그리고 개별 행성까지 방문하는 데 시간을 상당히 소모한다. 정기적으로, 그는 파라다이스로, 그리고 가끔 유버르사까지 여행하며, 거기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과 의논한다. 그가 구원자별을 떠나 있을 때, 그의 자리를 가브리엘이 대신하며, 그때 가브리엘은 네바돈 우주의 대리(代理) 통치자로서 활동한다.
33:3.1 (368.1) 시공의 모든 우주에 널리 퍼지면서 무한한 영은 창조 아들과 협동하여 창조하는 기법으로 온전한 성격 품질을 얻는, 하나의 특화된 초점으로서 각 지역 우주 본부에서부터 활동한다. 한 지역 우주에 관하여 말하면, 한 창조 아들의 행정 권한은 제일 높다. 신성한 봉사자로서 무한한 영은 전적으로 협조하지만, 완전히 동격이다.
33:3.2 (368.2) 구원자별에 계신 우주 어머니 영은 네바돈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미가엘의 동료요, 최상 영의 여섯째 집단 출신이며, 그 계급에서 611,121번째이다. 그 영은 미가엘이 파라다이스 책임에서 해방되는 기회에 그를 동반하기를 자원했고, 그 뒤로 미가엘과 함께 그의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리면서 활동해 왔다.
33:3.3 (368.3) 주 창조 아들은 자기 우주를 친히 다스리는 군주이지만, 우주 영은 아들과 함께 그 관리의 모든 세부를 공동으로 지도한다. 영은 언제나 아들을 군주인 통치자로서 인정하는 한편, 아들은 그 영역의 모든 사무에서 영에게 동등한 위치와 대등한 권한을 부여한다. 전적으로 현명하고 언제나 충실한 우주 영과 그의 다양한 모든 수행원, 천사 성격자들은 언제나, 언제라도, 창조 아들이 사랑으로 하는 일, 그리고 생명을 수여하는 모든 일에 그를 완전히 지지하고 유능하게 보조한다. 그러한 신성한 봉사자는 실제로 영과 영 성격자들의 어머니요, 창조 아들에게 늘 옆에 있는 전적으로 현명한 조언자이며, 파라다이스의 무한한 영을 충실하고 진실하게 나타낸다.
33:3.4 (368.4) 아들은 그의 지역 우주에서 아버지로서 활동한다. 영은 필사 인간이 이해하는 어머니 노릇을 하며, 언제나 아들을 보조하고 그 우주의 행정에 영구하게 필수이다. 반란(反亂)에 부닥칠 때, 오로지 아들 및 그와 관련된 아들들이 구원자로서 활동할 수 있다. 영은 결코 반란에 대항하여 싸우거나 권한을 지키는 일을 할 수 없으나, 악에 물들거나 죄에 지배된 세계에서 정부를 안정시키고 권한을 유지하려고 아들이 노력할 때, 그가 아마도 체험할 필요가 있는 모든 일에 영은 언제나 아들을 지지한다. 오직 아들이 그들이 함께 창조한 작품을 구제할 수 있다. 그러나 신성한 봉사자와 그의 광대한 집단의 영 조수들이 끊임없이 협동하지 않고는 어떤 아들도 최후의 성공을 바랄 수 없다. 이 조수들은 하나님의 딸이며, 그들은 필사 인간의 복지와 신성한 부모의 영광을 위해서, 아주 충실하고 용감하게 투쟁한다.
33:3.5 (368.5) 창조 아들의 일곱번째이자 마지막에 인간으로서 수여하는 일이 끝난 뒤에, 신성한 봉사자가 이따금 고립되는 불안은 종결되며, 아들의 우주 조력자는 안전한 가운데 지배하면서 영원히 안정된다. 창조 아들이 주 아들의 보좌에 오를 때, 집합한 무리들 앞에서, 우주 영이 처음으로 성실과 복종을 서약하고 아들에게 종속됨을 대중 앞에서 널리 승인하는데, 이때는 축제 중의 축제이다. 이 사건은 네바돈에서 유란시아 수여를 마친 뒤에 미가엘이 구원자별로 돌아올 때 일어났다. 이 중대한 경사 이전에, 우주 영은 결코 우주 아들에게 종속된다고 인정하지 않았고, 그 영이 권력과 권한을 자진해서 이처럼 포기하기까지, 아들에 대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권력이 그의 손에 맡겨졌도다”하고 진실로 선언할 수 없었다.
33:3.6 (369.1) 어머니 창조 영이 이렇게 복종 서약을 마친 뒤에, 네바돈의 미가엘은 그가 영 동반자에게 영원히 의존함을 고귀하게 인정하였고, 그의 우주 영토에서 영을 공동 통치자로 세우고, 아들에게 서약한 것과 같이 모든 생물이 영에게 충성을 서약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최종의 “동등 선언”이 나가고 공포되었다. 그가 이 지역 우주의 군주이기는 했어도, 아들은 영의 모든 성격 자질과 신다운 속성이 그와 동등하다는 사실을 여러 세계에 발표했다. 이것은 공간 세계에서 사는 비천한 인간에게도 가족을 조직하고 다스리는 데 초월적 모범이 된다. 이것이 실제로 진실로, 가족, 그리고 자원하여 결혼하는 인간 제도의 높은 이상이다.
33:3.7 (369.2) 아들과 영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키는 것과 비슷하게 이제 우주를 주관하며, 그들의 아들딸 집단에게 봉사한다. 우주 영을 창조 아들의 창조 동반자라고 부르고, 그 영역의 생물을 그 아들딸로 여기는 것이 아주 부당하지는 않다―이들은 크고도 영화로운 가족이지만, 말할 수 없이 많은 책임과 끝없는 보살핌이 있는 가족이다.
33:3.8 (369.3) 아들은 특정한 우주 아이들을 창조하는 일을 개시하고, 한편 영은 수많은 계급의 영 성격자들의 출산을 홀로 책임지며, 이들은 바로 이 어머니 영의 지도와 안내를 받고서 봉사하고 수고한다. 다른 부류의 우주 성격자들을 창조할 경우에 아들과 영이 함께 활동하며, 어떤 창조 행위에서도 하나가 다른 하나의 조언과 승인 없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33:4.1 (369.4) 밝은 아침별은 창조 아들, 그리고 무한한 영의 지역 우주 표현이 잉태한, 첫 신분 개념이자 성격의 이상이다. 지역 우주의 초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서, 창조 관계로 결속한 가운데 창조 아들과 어머니 영이 결합하기 전에, 다능한 아들딸로 이루어진 가족을 비로소 만들기 이전 시절로 돌아가서, 신다운 이 두 성격자의 이러한 자유로운 초기 결합의 결과는 아들과 영의 가장 높은 영 성격자, 곧 밝은 아침별이 창조되는 것이다.
33:4.2 (369.5) 각 지역 우주에 지혜롭고 위엄 있는 그런 존재는 오직 하나만 생겨난다.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은 신성이 그들과 동등한 아들들을 한없이 창조할 수 있고, 또 실제로 창조한다. 그러나 그러한 아들은 무한한 영의 딸과 결합하여, 각 우주에서 밝은 아침별을 오직 하나만 창조할 수 있는데, 밝은 아침별은 그들과 같으며 그들의 창조 특권을 제외하고, 그들의 통합된 성품을 자유롭게 가진다. 구원자별의 가브리엘의 성품은 우주의 아들과 같이 신답지만, 신의 속성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
33:4.3 (369.6) 새 우주의 부모가 낳은 이 맏아들은 독특한 성격자요, 부모의 어느 쪽에서도 눈에 띄게 보이지 않는 놀라운 많은 특성을 소유하며, 전례 없이 다능하고 상상할 수 없이 명석한 존재이다. 이 하늘 성격자는 영의 창조적 상상력과 아울러 아들의 신다운 뜻을 포함한다. 밝은 아침별의 생각과 행위는 늘 창조 아들과 창조 영 두 분을 충분히 대표할 것이다. 그러한 존재는 또한 영적인 천사 무리와 물질적이고 의지를 가진 진화 인간, 이 둘을 널리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접촉할 능력이 있다.
33:4.4 (370.1) 밝은 아침별은 창조자가 아니지만 놀라운 행정가요, 창조 아들을 친히 대표하는 행정가이다. 창조하고 생명을 분배하는 일을 제외하고, 아들과 영은 가브리엘이 자리에 있지 않으면 중요한 우주 절차에 관하여 결코 의논하지 않는다.
33:4.5 (370.2) 구원자별의 가브리엘은 네바돈 우주의 최고 집행자이며, 그 행정에 관련된 모든 집행적 항소를 중재하는 자이다. 이 우주 집행자는 그의 할 일에 적합하게 충분한 자질을 받고 창조되었지만, 우리 지역 창조가 성장하고 진화하는 것과 함께 경험을 쌓아 왔다.
33:4.6 (370.3) 가브리엘은 지역 우주에서 비개인적 사무에 관하여 초우주 명령을 집행하는 우두머리 관리이다.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평결한, 집단 판결 및 섭리 시대 부활에 관한 대부분의 일을 집행하는 것도 또한 가브리엘과 그의 직원에게 이양된다. 따라서 가브리엘은 초우주 통치자와 지역 우주 통치자들 모두에게 최고 집행자이다. 그는 자기의 지휘 하에 유능한 행정 조수 군단을 두고 있는데, 그들은 특별히 할 일을 위하여 창조되었고, 이들은 진화하는 필사자에게 밝혀지지 않는다. 이 조수들 외에도, 가브리엘은 네바돈에서 활동하는 어느 계급의 천상 존재들도 모두 고용할 수 있고, 그는 또한 “하늘 군대,” 곧 하늘 무리의 총사령관이기도 하다.
33:4.7 (370.4) 가브리엘과 그의 참모진은 교육자가 아니다. 그들은 행정관이다. 미가엘이 생물이 되어 자신을 수여하기 위하여 육신화되었을 때를 제외하고, 그들은 결코 정상(正常) 직무를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한 수여가 있는 동안에, 가브리엘은 육신화된 아들의 뜻을 언제나 살피며, 늘 하나된 이와 협력하여, 후기의 여러 수여에서 우주 사무를 실제로 지휘하는 자가 되었다. 미가엘이 필사자로 자신을 수여한 뒤로 가브리엘은 유란시아의 역사와 발전에 밀접히 관련되어 왔다.
33:4.8 (370.5) 여러 수여 세계에서, 그리고 일반 부활 점호와 특별 부활 점호가 있을 때 가브리엘을 만나는 것을 제외하고, 지역 우주의 행정 사무에 소집될 때까지, 필사자는 지역 우주를 통해서 올라가는 동안 가브리엘과 마주치는 일이 드물 것이다. 너희는 행정관으로서 어느 계급이나 등급에 속하든지, 가브리엘의 지휘를 받을 것이다.
33:5.1 (370.6) 삼위일체에 기원이 있는 성격자들의 행정은 초우주 정부에서 끝난다. 지역 우주의 특징은 2중의 감독을 받는 것이며, 이것이 어머니와 아버지 개념의 시초이다. 지역 우주의 아버지는 창조 아들이며, 우주의 어머니는 신성한 봉사자, 곧 지역 우주의 창조 영이다. 그러나 각 지역 우주는 중앙 우주와 파라다이스에서 온 어떤 성격자들이 계시는 축복을 받는다. 네바돈에서 이 파라다이스 집단의 우두머리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대사(大使)―구원자별의 이마누엘―인데, 그는 네바돈 지역 우주에 배치된 늘 하나된 이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높은 삼위일체 아들은 또한 창조 아들의 법정에 대하여 우주의 아버지를 몸소 대표하는 자이다. 따라서 이름이 이마누엘이다.[1] [1668]
33:5.2 (370.7) 구원자별의 이마누엘, 곧 최상 삼위일체 성격자의 제6 계급에서 611,121번은 숭고하게 위엄을 갖추고, 모든 살아 있는 생물의 예배와 찬미를 물리칠 정도로, 더할 나위 없이 겸손을 갖춘 존재이다. 네바돈 전체에서 그는 동생 미가엘에게 종속됨을 결코 인정하지 않은 유일한 성격자라는 특징을 지닌다. 그는 군주 아들에게 조언자로서 활동하지만, 오직 요청받을 경우에 조언을 준다. 창조 아들이 자리를 비울 때 그는 어떤 높은 회의를 주관해도 좋지만, 그 외에 요청받지 않고서 우주의 집행 사무에 참여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33:5.3 (371.1) 네바돈에 주둔하는 이 파라다이스 대사는 지역 우주 정부의 사법권에 지배되지 않는다. 별자리 본부에서 근무하는, 연락하는 그의 형제, 늘 충실한 이들을 감독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진화하는 지역 우주의 집행 사무에서 그는 권위 있는 사법권을 행사하지도 않는다.
33:5.4 (371.2) 늘 하나된 이와 마찬가지로, 늘 충실한 이들은 요청을 받지 않고서 별자리 통치자들에게 충고하거나 도움을 제의하지 않는다. 별자리에 파송되는 이 파라다이스 대사들은 여러 지역 우주에서 자문(諮問) 역할을 하는 삼위일체의 고정된 아들들의 마지막 몸소 계심이다. 별자리들은 지역 체계보다 초우주 행정에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지역 우주에서 태어난 성격자들이 독점하여 지역 체계들을 관리한다.
33:6.1 (371.3) 가브리엘은 네바돈의 최고 집행자요 실제 행정가이다. 미가엘이 구원자별에서 자리를 비우는 것은 우주 사무의 질서 있는 운영에 조금도 차질을 가져오지 않는다. 최근에 파라다이스에서 있었던 오르본톤 주 아들들의 재회 임무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가엘이 자리를 비운 동안 가브리엘은 우주의 대리 통치자이다. 그런 때 가브리엘은 언제나 모든 주요한 문제에 관해서, 구원자별의 이마누엘에게 상담을 구한다.
33:6.2 (371.4) 아버지 멜기세덱은 가브리엘의 제1 조수이다. 밝은 아침별이 구원자별에서 자리를 비울 때, 이 최초의 멜기세덱 아들이 그의 책임을 대신 담당한다.
33:6.3 (371.5) 우주의 다양한 하위 행정부는 그에 배당된 특별한 책임 분야가 있다. 일반적으로, 한 체계의 정부(政府)는 그에 속한 행성들의 복지를 돌보며, 살아 있는 존재들의 신체적 상태, 생물학적 문제에 관하여 각별히 관심을 가진다. 그 다음, 별자리의 통치자들은 다른 행성 및 체계들의 사회 및 정부를 지배하는 조건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인다. 별자리 행정권은 주로 통일과 안정에 대하여 행사된다. 그보다 위에서, 우주 통치자들은 그 영역의 영적 지위에 더 몰두한다.
33:6.4 (371.6) 대사는 사법(司法) 명령에 따라서 임명되며, 그들은 지역 우주를 다른 우주에 대표한다. 영사(領事)는 별자리를 서로 대표하고, 또 우주 본부에 대표한다. 그들은 입법 명령으로 임명되고, 한 지역 우주의 경계 안에서만 활동한다. 관찰자는 한 체계 군주의 집행 명령에 따라서 그 체계를 다른 체계에게 대표하기 위하여, 별자리 서울에서 임명되며, 그들도 역시 지역 우주의 경계 안에서만 활동한다.
33:6.5 (371.7) 방송은 구원자별로부터 동시에 별자리 본부, 체계 본부, 개별 행성으로 보낸다. 모든 고등 계급의 하늘 존재들은 우주에 두루 흩어져 있는 동료들과 통신하기 위하여 이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우주 방송은 사람이 사는 모든 세계에 그들의 영적 지위와 상관 없이 미친다. 행성의 상호 교신은 영적 검역 밑에 있는 세계에게만 금지된다.
33:6.6 (372.1) 별자리 아버지들의 우두머리가 별자리의 방송을 정기적으로 별자리 본부로부터 내보낸다.
33:6.7 (372.2) 구원자별에서 특별 집단의 존재들이 연대(年代)를 계산하고 산출하고 수정한다. 네바돈의 표준일은 유란시아 시간으로 18일 6 시간 2.5분이다. 네바돈의 1년은 유버르사 회로와 관련하여, 우주가 회전하는 시간의 일부로 이루어져 있고, 1백 표준 우주일, 곧 유란시아 시간으로 약 5년과 같다.
33:6.8 (372.3) 네바돈 시간은 구원자별에서 방송되며, 이 지역 우주에서 모든 별자리 및 체계를 위한 표준이다. 각 별자리는 네바돈 시간에 맞추어서 그 사무를 운영하지만, 개별 행성과 마찬가지로, 체계는 자체의 연대를 유지한다.
33:6.9 (372.4) 예루셈에서 계산되다시피, 사타니아에서 하루는 유란시아 시간으로 사흘보다 약간 (1 시간 4분 15초가) 적다. 이러한 시간은 구원자별 시간, 곧 우주 시간, 그리고 사타니아 시간, 곧 체계 시간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표준 시간은 우주 시간이다.
33:7.1 (372.5) 주 아들인 미가엘은 오직 창조ㆍ유지(維持)ㆍ봉사, 이 세 가지에 지극히 관심이 있다. 그는 우주의 사법적 사무에 친히 참여하지 않는다. 창조자는 그들이 지은 생물을 결코 재판하지 않는다. 재판은 고급 훈련을 받고 실제로 생물의 체험을 겪은 자들이 독점하는 기능이다.
33:7.2 (372.6) 네바돈의 사법 기구(機構) 전체가 가브리엘의 감독 밑에 있다. 구원자별에 있는 고등 법원들은 일반적 우주 중요성을 가진 문제와 체계의 법정으로부터 올라오는 상소(上訴) 사례에 몰두한다. 이 우주 법정에는 70 지부가 있으며, 지부들은 일곱 분과로 나누어져 활동하고, 각 분과는 10구역으로 되어 있다. 모든 판결 문제에서 2중 판사제가 주관하며, 이것은 완전한 경력을 가진 판관 하나와 승천 경험이 있는 판사 하나로 구성된다.
33:7.3 (372.7) 사법권에 관하여 말하자면, 지역 우주 법정은 다음 문제에 제한을 받는다:
33:7.4 (372.8) 1. 지역 우주의 행정은 창조ㆍ진화ㆍ유지ㆍ봉사에 관심을 가진다. 따라서, 영생과 죽음의 문제에 관계되는 사례(事例)를 판결하는 권한은 우주 법정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유란시아에서 생기는 것과 같은 자연사(自然死)와 아무 관련이 없지만, 계속 존재할 권리, 곧 영생할 권리에 관한 문제가 재판에 오르면, 이를 오르본톤 법정으로 넘겨야 한다. 개인에게 불리하게 결정되면, 모든 소멸 선고는 초우주 정부 통치자들의 명령을 받고 나서, 그 대리 기관을 통해서, 집행된다.
33:7.5 (372.9) 2. 지역 우주에서 낳은 어떤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그들의 지위와 권한을 위태롭게 만드는 불이행이나 배신은 결코 아들의 법정에서 판결되지 않는다. 그러한 오해는 즉시 초우주 법정으로 회부된다.
33:7.6 (372.10) 3. 영적으로 고립되고 나서, 한 지역 우주의 어느 구성 부분을―한 지역 체계처럼―지역 창조에서 완전한 영적 지위를 가진 모임에 다시 가입시키는 문제는 초우주의 고등 집회에서 동의를 받아야 한다.
33:7.7 (373.1) 모든 다른 문제에서, 구원자별의 법정은 최종이요 최고 권한을 갖는다. 그들의 결정에 아무런 상고(上告)가 없고 그 선고를 회피할 수 없다.
33:7.8 (373.2) 유란시아에서 인간의 논쟁이 가끔 아무리 부당하게 판결되는 듯 보여도, 우주에서는 응보와 신성한 공평이 지배한다. 너희는 잘 정돈된 우주에서 살고 있으며, 머지 않아 너희가 정당하게, 아니 자비롭게 대우받을 것도 너희는 믿어도 좋다.
33:8.1 (373.3) 네바돈의 본부, 구원자별에는 참된 입법 기관이 없다. 지역 우주 본부 세계들은 대체로 판결에 관심을 가진다. 지역 우주의 입법 회의는 1백 별자리의 본부들에 자리잡고 있다. 체계는 주로 지역 세계들의 집행 및 행정 사무에 관심을 가진다. 체계 군주와 그 동료들은 별자리 통치자의 입법 명령을 집행하며, 우주의 고등 법정의 사법 명령을 처리한다.
33:8.2 (373.4) 우주 본부에는 참된 입법 활동이 없지만, 구원자별에는 다양한 자문 및 연구 집회가 활동하며, 이것들은 그 규모와 목적에 따라서, 다르게 구성되고 운영된다. 더러는 영구적이고, 더러는 그 목적을 달성하고 나서 해체된다.
33:8.3 (373.5) 지역 우주의 최고 회의는 각 체계에서 온 회원 3명, 그리고 각 별자리에서 온 대표 7명으로 구성된다. 고립된 체계들은 이 집회에 대표를 보내지 않지만, 이 모든 심의에 참석하고 이를 연구하는 관찰자를 보내는 것이 허락된다.
33:8.4 (373.6) 최고 제재(制裁) 1백 회의도 구원자별에 위치가 있다. 이 회의의 의장들은 가브리엘의 직속으로 활동하는 내각을 구성한다.
33:8.5 (373.7) 우주의 고등 자문 회의가 조사한 결과는 모두 구원자별의 사법 기구나 별자리의 입법 집회로 넘겨진다. 이 고등 회의는 그들의 추천 사항을 집행할 권한이나 권력이 없다. 그들의 조언이 우주의 기본 법칙에 기초를 둔 것이라면, 네바돈 법정이 집행하는 판결을 내린다. 그러나 그들의 추천 사항이 지역 조건이나 긴급 조건에 상관되면, 심의해서 법을 제정하기 위하여 별자리의 입법 회의로, 그리고 나서 집행하기 위하여 체계 당국까지 내려보내야 한다. 실제로, 이 고등 회의는 우주의 초월 법률 부서이지만, 그들은 법을 제정하는 권한이 없이, 집행하는 권력이 없이, 활동한다.
33:8.6 (373.8) “법정”과 “집회”라는 용어로 우리가 우주 행정을 언급하지만, 이러한 영적 거래들은 같은 이름을 지닌 활동, 유란시아의 더 원시적ㆍ물질적 활동과 대단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4:0.1 (374.1)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이 한 창조 아들을 성격화할 때, 공간의 영역까지 이 창조 아들을 따라가서, 거기서 새로 계획한 우주를 처음에는 물리적 조직에, 그리고 나중에는 생물을 창조하고 그들에게 봉사하는 데, 그의 동반자가 되라고 무한한 영은 자신의 새로운 독특한 대표를 개별화한다.
34:0.2 (374.2) 창조 영은 물리적 실체와 영적 실체, 모두에 반응하며, 창조 아들도 그렇다. 따라서 시공의 지역 우주 행정에서 그들은 동격이고 동료이다.
34:0.3 (374.3) 이 딸 영들은 무한한 영의 본질로부터 생겨났으나, 물리적으로 창조하고 영적으로 봉사하는 일을 동시에 할 수 없다. 우주 아들은 물리적 창조의 원본(原本)을 마련해 주고, 한편 우주 영은 물리적 실체의 물질화를 시작한다. 아들은 동력 설계 면에서 활동하지만, 영은 이렇게 창조된 에너지를 물리적 실질로 변형시킨다. 무한한 영의 이러한 초기의 우주 계심을 하나의 성격자로서 묘사하기가 얼마큼 힘들지만, 그런데도 창조 아들에게, 영 동료는 개성이 있으며, 언제나 뚜렷이 다른 개체로서 활동해 왔다.
34:1.1 (374.4) 초우주 동력 중심들이 별과 행성 집단의 물리적 조직과 에너지 회로의 설치를 마친 뒤에, 무한한 영이 지역 우주에서 창조력을 집중함으로, 그리고 그 지휘 하에 활동하는 무한한 영의 대리자들이 이 예비 창조 작업을 마치고 나서, 다음에 새로 조직된 우주에서 생명을 계획할 것이라는 미가엘 아들의 선포가 나간다. 이 의도(意圖)의 선포가 파라다이스에서 인식되고 나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승인 반응이 일어나며, 뒤이어서 신들의 영적 광채가 이 새 세상이 조직되고 있는 초우주의 으뜸 영으로부터 사라진다. 그동안에 다른 으뜸 영들은 파라다이스 신들이 계신 이 중앙 거처에 가까이 다가간다. 그 뒤에 신의 포옹을 받은 으뜸 영이 그의 동료들이 식별하도록 솟아나올 때, “1차 분출”이라고 알려진 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은 엄청난 영적 섬광(閃光)이며, 관계된 초우주의 본부만큼 멀리서도 명백히 알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이 삼위일체의 명시가 일어남과 동시에, 관계된 지역 우주에 거하는 무한한 영의 창조적 영 계심 및 동력의 성질에 두드러진 변화가 일어난다. 이 파라다이스 현상에 응답하여, 창조 아들이 계신 바로 앞에서, 무한한 영의 새로운 성격 대표가 즉시 성격화된다. 이 분이 신성한 봉사자이다. 창조 아들의 조수, 개별화된 창조 영은 그의 개인적 창조 동료, 지역 우주의 어머니 영이 된 것이다.
34:1.2 (375.1) 이렇게 합동 창조자가 분리한 새 성격으로부터, 또 그를 통하여, 영 동력의 확립된 흐름과 예정된 회로, 그리고 그 지역 우주의 모든 세계 및 존재를 침투하도록 예정된 영적 영향력이 나아간다. 실제로, 이 새로운 성격의 계심은 단지, 아들이 물리적 우주를 조직하는 이 초기 작업을 할 때 개성이 덜하고 이전에 존재했던 그의 동료가 모습이 바뀐 것일 뿐이다.
34:1.3 (375.2) 이것이 몇 마디로 엄청난 드라마를 이야기한 것이지만, 이 외에 이 중대한 거래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이 거래는 순간에 일어났고, 자세히 훑어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 그 기법과 과정의 비밀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가슴 속에 거한다. 오로지 한 가지에 관해서 우리는 확실하다. 순전히 물리적으로 창조하거나 조직하는 기간에, 지역 우주에서 영의 계심은 파라다이스의 무한한 영의 영과 완전히 구별되지 않았다. 반면에, 신들의 비밀스런 포옹으로부터 감독하는 으뜸 영이 다시 나타난 뒤에, 그리고 영적 에너지 섬광이 번쩍한 뒤에, 무한한 영의 지역 우주 자태는 무한한 영과 변화되는 연결을 유지하던, 그 으뜸 영 몸을 닮은 모습으로 갑자기, 완전히 바뀐다. 이처럼 지역 우주의 어머니 영은 천문 관할권을 가진 초우주의 으뜸 영 성질에 물든, 그러한 성질의 성격을 얻는다.
34:1.4 (375.3) 무한한 영이 이렇게 성격화한 계심, 곧 지역 우주의 어머니 창조 영은 사타니아에서 신성한 봉사자로 알려져 있다. 모든 실제 의도와 영적 목표로 볼 때, 신의 이러한 자태는 신다운 개체요, 영 성격이다. 창조 아들은 그를 그렇게 인식하고 간주한다. 우리 지역 우주에서 바로 셋째 근원 중심이 이렇게 지역화하고 성격화함을 통해서 영이 차후에 창조 아들에게 아주 완전히 복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 아들에 관하여 참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력이 그에게 맡겨졌도다.”
34:2.1 (375.4) 생명을 창조하는 시절에 두드러진 성격의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신성한 봉사자는 그 이후로 하나의 성격자로서 활동하며, 지역 세계의 광범위한 사무를 계획하고 관리하는 데 창조 아들과 대단히 개인적 방법으로 협동한다. 미가엘이 최종으로 자신을 수여하기 이전 시대에는, 무한한 영의 이 대표조차 많은 우주 종류의 존재들에게 도무지 성격이 아닌 듯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창조 아들이 주 아들의 군주 권한으로 승진한 뒤에, 어머니 창조 영은 성격의 질이 아주 확대되며, 그래서 모든 접촉하는 개인에게 개인적으로 인식된다.
34:2.2 (375.5) 창조 아들과 아주 일찍부터 관계를 가질 때부터, 우주 영은 완전한 반인력 자질을 포함하여, 무한한 영의 물리적 통제 속성을 모두 소유한다. 성격의 지위를 얻고 나서, 무한한 영이 친히 계실 경우와 같이 우주 영은 지역 우주에서 지성 인력에 대하여 충분하고 완전한 통제력을 행사한다.
34:2.3 (375.6) 각 지역 우주에서 신성한 봉사자는 파라다이스의 일곱 으뜸 영 가운데 한 분의 몸에 담긴 무한한 영의 성품과 본래의 특징에 따라서 활동한다. 모든 우주 영의 특징은 기본적으로 균일하지만, 또한 기능의 다양성이 있으며, 이것은 일곱 으뜸 영 중의 한 분을 통하여 그들이 기원을 가진 데 따라서 정해진다. 이 기원의 차이는, 다른 초우주에서 지역 우주 어머니 영들이 활동할 때 어째서 기법이 다양한가 설명한다. 그러나 이 영들의 모든 필수 영적 속성은 초우주의 차이에 상관 없이, 동일하고 똑같이 영적이며, 온전히 신답다.
34:2.4 (376.1) 창조 영은 여러 세계의 생물을 생산하는 데 창조 아들과 공동 책임이 있으며, 이 세계들을 지원하고 보존하려는 온갖 노력을 기울이면서 결코 아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는다. 창조 영의 작용을 통해서, 생명은 보살핌을 받고 유지된다. “주가 주의 영을 보내시니, 저희가 창조되나이다. 주는 땅의 표면을 새롭게 하나이다.”
34:2.5 (376.2) 어머니 창조 영은 지적 생물이 사는 우주를 창조할 때, 먼저 완전한 우주 분야에서 활동하고, 아들과 협력하여 밝은 아침별을 생산한다. 그 뒤에, 멜기세덱을 비롯하여 그 영역의 필사자와 실제로 접촉하는 물질 아들에 이르기까지 아들들이 밑으로 내려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의 자손은 행성에서 창조된 존재들 계급에 더욱 접근한다. 필사 인간이 후일에 진화할 경우에 생명 운반 아들들은 육체를 마련해 주며, 이것은 그 영역에서 기존의 조직된 물질로부터 조립된다. 한편 우주 영은 “생명의 호흡”을 기여한다.
34:2.6 (376.3) 대우주의 제7 구역은 여러 면에서 발전이 느릴지 모르지만, 우리 문제를 연구하는 생각 깊은 학자들은 다가오는 시대에 특별히 균형이 잘 잡힌 창조로 진화되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오르본톤이 이렇게 높은 균형미를 갖추리라 예측하는데, 이는 이 초우주를 주관하는 영이 하늘에서 으뜸 영들의 우두머리이며, 모두 세 분의 영원한 신의 특성과 특징이 균형되어 통합되고 완전히 조정된 모습을 구현하는 영 지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구역들에 비해서 느리고 뒤져 있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 없이, 앞날의 영원한 시대에 언젠가, 초월적 발전과 전례 없는 성취가 우리를 기다린다.
34:3.1 (376.4) 영원한 아들도 무한한 영도 시간이나 공간에 제한되거나 제약을 받지 않지만, 그들의 후손은 대부분 제약을 받는다.
34:3.2 (376.5) 무한한 영은 모든 공간에 스며들고 영원의 궤도에 깃든다. 여전히, 시간 세계의 아이들과 친히 접촉하면서, 무한한 영의 성격자들은 공간을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흔히 시간 요소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성에게 베푸는 많은 봉사는 공간을 무시하지만 다양한 수준의 우주 실체를 조정하는 데 시간의 지연(遲延)을 겪는다. 외톨 사자는,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여행하는 데 시간이 실제로 걸린다는 것을 제쳐놓고, 공간으로부터 거의 독립되어 있다. 그리고 너희에게 알려지지 않은 비슷한 존재들이 있다.
34:3.3 (376.6) 성격 특권 면에서 볼 때 창조 영은 온전히, 전적으로 공간으로부터 독립되지만, 시간으로부터 독립되지는 않는다. 별자리 본부나 체계 본부에는 그러한 우주 영의 특화된 몸소 계심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지역 우주에 두루, 똑같이 분산되어 존재하며, 따라서, 한 세계에, 어느 다른 세계와 똑같이, 글자 그대로 친히 계신다.
34:3.4 (376.7) 오직 시간 요소에 관해서, 우주에서 베푸는 창조 영의 봉사는 늘 제한을 받는다. 창조 아들은 그의 우주 전역에서 한 순간에 행동하지만, 창조 영은 의식해서 일부러 우주 아들의 개인적 특권을 이용할 때를 제외하고, 지성의 봉사를 베풀면서 시간을 고려해야 한다. 신비로운 우주 거울 작용과 협동할 때 뿐 아니라, 순수 영으로 활동하는 경우에, 창조 영은 시간과 상관 없이 행동한다.
34:3.5 (377.1) 영원한 아들의 영 인력 회로는 시간과 공간에 의존하지 않고 작용하지만, 창조 아들의 모든 활동은 공간의 제한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여러 진화 세계에서 생기는 거래를 제외한다면, 이 미가엘 아들들은 비교적 시간과 상관 없이 활동할 수 있는 듯하다. 창조 아들은 시간에 장애를 받지 않지만, 공간에 제약을 받는다. 즉 그는 동시에, 두 곳에 몸소 계실 수 없다. 네바돈의 미가엘은 자신의 우주 안에서 시간을 쓰지 않고 행동하며, 초우주에서는 거울 작용을 이용하여 실질적으로 그렇게 한다. 그는 영원한 아들과 직접, 시간을 쓰지 않고 교통한다.
34:3.6 (377.2) 신성한 봉사자는 창조 아들에게 이해심 있는 조력자이며, 공간에 대하여 본래부터 가진 아들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상할 수 있게 만든다. 이는 이 두 분이 행정적 일체가 되어 활동할 때, 지역 창조의 경계 안에서 그들이 시간과 공간에 실질적으로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지역 우주 전역에서 실질적으로 관찰된 바와 같이, 창조 아들과 창조 영은 보통, 시간과 공간에 상관 없이 활동한다. 이는 하나가 다른 하나의 시공(時空) 해방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34:3.7 (377.3) 오직 절대 존재들만 절대적 의미에서 시공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 이하의 성격자들의 대다수는 시간과 공간, 모두에 지배된다.
34:3.8 (377.4) 한 창조 영이 “공간을 의식하게” 될 때, 그는 한정된 “공간 영토”를 자기 땅으로 인정하려고 준비하며, 이것은 그 영이 제약을 받는 모든 다른 공간과 반대로, 그가 공간적으로 자유로운 영역이다. 한 존재는 오로지 자신이 의식하는 영역 안에서만 선택하고 행동할 자유가 있다.
34:4.1 (377.5) 네바돈 지역 우주에는 다음 세 가지 다른 영의 회로가 있다:
34:4.2 (377.6) 1. 창조 아들이 수여하는 영, 곧 위로자, 진리의 영.
34:4.3 (377.7) 2. 신성한 봉사자의 영 회로, 곧 성령.
34:4.4 (377.8) 3. 지능에 봉사하는 회로. 얼마큼 통일된 활동이지만, 일곱 보조 지성 영의 다채로운 작용을 포함한다.
34:4.5 (377.9) 창조 아들들은 지역 우주에 계시는 영을 부여받았는데, 이것은 여러 면에서 파라다이스의 일곱 으뜸 영이 가진 것과 비슷하다. 이것은 수여 아들이 한 구체의 영적 소유권을 받은 뒤에, 그러한 세계에 퍼붓는 진리의 영이다. 이 수여된 위로자는 모든 진리 추구자가 아들을 향하도록 늘 끌어당기는 영적 힘이며, 그는 그 지역 우주에서 진리를 성격화한 것이다. 이 영은 창조 아들이 본래부터 가진 재산이며, 대우주의 주회로(主回路)들이 파라다이스 신들의 성격 계심으로부터 파생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신다운 성품에서 솟아난다.
34:4.6 (377.10) 창조 아들은 오고가도 좋다. 그의 몸소 계심은 지역 우주에, 또는 다른 데 있어도 좋다. 그래도 진리의 영은 방해받지 않고 활동하는데, 이는 창조 아들 성격으로부터 파생되지만 이 신다운 계심은 기능적으로 신성한 봉사자의 몸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34:4.7 (378.1) 그러나 우주 어머니 영은 지역 우주의 본부 세계를 결코 떠나지 않는다. 창조 아들의 영은 아들이 몸소 어디에 있든지 상관 없이 활동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지만, 창조 영의 개인적 영은 그렇지 않다. 신성한 봉사자의 성령은 그 몸소 계심이 구원자별로부터 이동한다면 활동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의 영적 계심은 그 우주 본부 세계에 고정되어 있는 듯하며, 바로 이 사실이 창조 아들의 영으로 하여금 아들이 어디 있든 상관 없이 활동하게 만든다. 우주 어머니 영은 자신의 성격 영향, 곧 성령 뿐 아니라, 진리의 영의 우주 초점과 중심으로서 행동한다.
34:4.8 (378.2) 아버지인 창조 아들과 어머니인 창조 영, 이 두 분은 지역 우주 아이들의 지성 자질에 다양하게 이바지한다. 그러나 창조 영은 자기가 성격 특권을 받기까지 지성을 수여하지 않는다.
34:4.9 (378.3) 한 지역 우주에서 진화를 초월하는 성격자 서열은 초우주의 지성 원본에서 생긴 지역 우주 종류를 부여받는다. 진화하는 생명 중에서 인간 및 인간 이하 계급은 지성에 봉사하는 보조 영 종류를 부여받는다.
34:4.10 (378.4) 일곱 보조 지성 영은 한 지역 우주에서 신성한 봉사자가 창조한 것이다. 이 지성 영들은 특징이 비슷하지만 능력이 다양하며, 모두가 우주 영의 성질을 비슷하게 가진다. 하지만 그들은 도저히 어머니 창조자와 따로 된 성격자로서 간주되지 않는다. 일곱 보조자에게 다음 이름이 주어진다. 지혜의 영, 예배의 영, 상담의 영, 지식의 영, 용기의 영, 이해의 영, 그리고―빨리 깨치는―직관의 영이다.
34:4.11 (378.5) 이들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요, “보좌 앞에서 타는 등불과 같으며,” 선지자가 이것을 환상에서 나타난 상징에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 일곱 보조 지성 영 둘레에 있는 24 파수의 자리는 못보았다. 이 기록은 두 가지 발표를 혼동했음을 가리키는데, 하나는 우주 본부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체계 서울에 관한 것이다. 24 장로의 자리는 예루셈에 있고, 여기는 사람이 사는 너희 지역 체계의 본부이다.
34:4.12 (378.6) 그러나 “번개와 천둥과 목소리가”―지역 체계로 보내는 우주 방송이―“보좌로부터 나갔도다”하는 요한의 기록은 구원자별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지역 우주에서 방향을 통제하는 생물을 환상으로 보았는데, 그들은 본부 세계의 살아 있는 나침반이다. 구원자별의 통제하는 생물 네 명이 네바돈에서 이 방향 통제를 유지하는데, 그들은 우주 전류에 대하여 활동하며, 처음에 활동하는 지성 영, 곧 직관 보조자, “빨리 이해하는” 영의 유능한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네 생물의 묘사는―짐승이라고 부른 것은―딱하게도 흠이 있었다. 그들은 비할 바 없이 아름답고 절묘한 모습을 가졌다.
34:4.13 (378.7) 나침반의 네 점은 보편적이며 네바돈 생명에 본래부터 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이러한 지향하는 전류에 민감하고 반응하는 신체 단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생물의 창조는 우주를 통해서 개별 행성에까지 복사되고, 그 세계들의 자력(磁力)과 함께, 동물의 유기체에 있는 다수의 극소형 물체를 활성화시키기 때문에, 이 방향 세포들은 언제나 남북을 가리킨다. 이처럼 방향 감각은 언제나 우주의 살아 있는 존재들 안에 고정되어 있다. 인간이 의식하여 가진 재산으로서, 이 감각이 온통 부족하지는 않다. 이 물체는 이 이야기를 할 무렵에 처음으로 유란시아에서 관찰되었다.
34:5.1 (379.1) 신성한 봉사자는 생명을 고안하고 새 계급의 존재들을 창조하는 과제에서, 일곱째 수여가 있을 때까지 창조 아들과 협동하며, 나중에 그가 우주의 완전한 군주로 승급한 뒤에, 세계에 봉사하고 행성을 진보시키는 계속된 사업에서 아들과 함께, 그리고 아들이 수여한 영과 함께, 줄곧 일한다.
34:5.2 (379.2)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영은 진화로 진보시키는 과제를 시작하는데, 이것은 그 영역에 생명이 없는 물질을 가지고 시작하여, 처음에 식물 생명, 다음에 동물 유기체, 그리고 나서 인간 존재의 처음 계급을 부여한다. 초기의 원시 단계로부터 의지를 가진 인간이 나타날 때까지, 뒤이어 분배하는 것은 각기 행성 생명의 진화 잠재성을 더욱 펼치는 데 이바지한다. 이러한 영의 수고는 대체로 일곱 보조자, 곧 약속된 영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들은 진화하는 행성에서 통일하고 조정하는 영 지성이며, 늘 연합하여 인간 종족들을 상급의 생각과 영적 이상으로 인도한다.
34:5.3 (379.3) 진화하는 인간의 지성, 순전히 동물적 지성이 예배 보조자와 지혜 보조자를 받는 능력을 개발할 때, 필사 인간은 영이 지성과 관련하여 베푸는 봉사를 처음 맛본다. 여섯째와 일곱째 보조자가 이렇게 봉사하는 것은 지성이 영적 봉사를 받을 문턱을 넘어서 진화되었음을 가리킨다. 예배 기능과 지혜 기능이 있는 그런 지성은 즉시 신성한 봉사자의 영적 회로에 포함된다.
34:5.4 (379.4) 이처럼 지성(知性)이 성령의 보살핌을 받을 때, 지성은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않고서) 우주의 아버지의 영적 계심을―생각 조절자를―선택할 능력을 가진다. 행성에서 모든 필사자에게 봉사를 베풀기 위하여 수여 아들이 진리의 영을 해방시킬 때까지, 정상의 머리를 가진 모든 사람이 생각 조절자를 받아들이도록 자동으로 준비되지는 않는다. 진리의 영은 신성한 봉사자의 영 계심과 하나가 되어 일한다. 이렇게 2중으로 연락된 영은 여러 세계 위에 떠돌면서, 진리를 가르치고 사람의 지성을 영적으로 깨우치며, 하늘 가는 민족들의 인간 혼을 북돋아주고, 진화 행성에서 사는 민족들을 언제나 신성한 운명으로, 파라다이스 목표를 향하여 이끌려고 애쓴다.
34:5.5 (379.5) 진리의 영이 모든 육체에 퍼부어지지만, 수여 아들의 임무의 총합과 내용을 구성하는 것을 사람이 몸소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서, 이 아들 영의 기능과 권능이 거의 전적으로 제한을 받는다. 성령은 인간의 태도와 얼마큼 독립되며, 사람의 의지ㆍ결정ㆍ협동에 따라서 어느 정도 조절된다. 그렇기는 해도 성령의 보살핌은 신의 인도하심에 더 충만히 복종하는 필사자의 정신 생활을 거룩하게 만들고 영적으로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갈수록 더 효과 있게 된다.
34:5.6 (379.6) 개인으로서 너희는 아버지인 창조 아들의 영이나 어머니인 창조 영의 분리된 부분이나 개체를 몸소 소유하지 않는다. 이 봉사는 신비의 훈계자가 하는 것처럼, 개인 지성의 생각하는 중심과 접촉하거나 거기에 깃들지 않는다. 생각 조절자는 우주의 아버지의 선(先)인격 실체가 분명하게 개체화된 것이며, 그 지성의 바로 한 부분으로서 실제로 필사 지성에 깃든다. 그들은 창조 아들과 창조 영의 통합된 영들과 늘 완전히 조화를 이루어 일한다.
34:5.7 (380.1) 무한한 영의 우주 딸이 성령으로서 계시고, 영원한 아들의 우주 아들이 진리의 영으로서 계시며,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조절자 영이 진화하는 필사자 안에, 또는 함께, 계신 것은 영적 자질과 봉사가 균형된 것을 의미하며, 그러한 필사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믿음과 사실을 의식하여 깨닫도록 자격을 준다.
34:6.1 (380.2) 사람이 사는 행성에서 진화가 진전되고 그 거주민이 더욱 영적으로 변화됨에 따라서, 그러한 성숙한 인격자들은 추가된 영적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필사자의 지성 통제와 영적 깨우침이 진보함에 따라서, 이러한 여러 가지 영적 봉사는 기능이 갈수록 더 조정되고, 갈수록 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전반적 봉사와 섞이게 된다.
34:6.2 (380.3) 신성(神性)은 여러 가지로 명시될 수도 있지만, 인간의 체험에서 신은 단 하나요, 반드시 하나이다. 인간이 체험하는 영적 봉사도 여럿이 아니다. 여러 곳에서 기원이 있는 것과 상관 없이, 모든 영이 미치는 영향은 하나로 작용한다. 정말로 이러한 영향은 하나이며, 대우주의 인간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에게, 칠중 신이 베푸는 영의 봉사이다. 사람들이 이러한 영의 통일된 봉사를 이해하고 받아들임에 따라서, 이 봉사는 그들의 체험 속에서 최상위 하나님이 베푸는 봉사가 된다.
34:6.3 (380.4) 신의 영은 영원한 영광의 높이에서 일련의 긴 단계들을 거쳐서, 있는 그대로 너희가 있는 곳에서 너희를 만나려고 내려오며, 다음에 믿음의 도움으로, 필사 기원을 가진 혼을 사랑으로 품에 안고, 그 겸손한 발걸음을 분명히, 확실히 거슬러 올라가는 일을 시작한다. 자비와 봉사를 베푸는 임무를 띠고 최초에 출발한 바로 그 지극히 복스러운 높은 곳으로 진화하는 혼이 안전히 오를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34:6.4 (380.5) 영적 세력들은 어김없이 자신이 처음에 있던 수준을 추구하고 거기에 다다른다. 영원자로부터 떠났으니까, 그들은 확실히 거기로 돌아가며, 깃드는 조절자의 인도함과 가르침을 지지한 시공의 모든 자녀, 참으로 “영에게서 태어난” 자, 믿음이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데리고 온다.
34:6.5 (380.6) 신의 영은 사람의 자녀에게 계속 베푸는 보살핌과 격려의 근원이다. 너희의 힘과 성취는 “그가 자비를 베푸는 대로, 영이 새롭게 함을 통해서” 얻는다. 영적 생명은, 물리적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소모된다. 영적 노력은 상대적으로 영적 피곤을 낳는다. 하늘 가는 체험 전체는 영적인 것일 뿐 아니라 현실이다. 그러므로 “활기를 주는 것은 영이라,” “영이 생명을 주느니라”하고 진실로 기록되었다.
34:6.6 (380.7) 가장 높은 종교적 교리라도, 거기에 담긴 죽은 이론(理論)은 사람의 됨됨이를 변화시키거나 필사자의 행동을 통제하는 힘이 없다. 오늘날의 세상이 필요한 것은 너희의 옛 선생이 선언한 진리이다: “말씀만이 아니라 또한 권능과 성령 안에서.” 신성한 영이 진리의 형태에 입김을 불어넣고, 올바른 방식에 생기를 불어넣지 않으면, 그렇게 할 때까지, 이론적 진리의 씨앗은 죽었고, 가장 높은 도덕적 개념도 효력이 없다.
34:6.7 (381.1) 하나님이 안에 계심을 받아들이고 이를 인식한 자는 영에게서 태어났다.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니라.” 이 영을 너희에게 퍼붓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신성한 영이 인간 체험의 모든 단계를 지배하고 고삐를 쥐어야 한다.
34:6.8 (381.2) 필사자의 불만으로 생기는 강렬한 갈증, 그리고 영적으로 변화되지 않은 인간 정신의 말할 수 없는 갈급함을 방지하는 것은, 신다운 영의 계심, 생명의 물이다. 영의 자극을 받은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나니, 이 영적 물이 저희 안에서, 영원한 생명 속에 솟아나서 만족시키는 샘물이 될 것임이라.” 생활의 기쁨과 땅에서 존재하는 만족감에 관하여 말하면, 그렇게 신이 뿌린 물을 머금은 혼은 물질 환경에 거의 의존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적 빛을 받고 새롭게 되며, 도덕적으로 강화되고 자질을 받는다.
34:6.9 (381.3) 모든 필사자에는 2중의 성질이 있으니, 이는 물려받은 동물 성향과 영이 부여한 높은 욕구이다. 유란시아에서 네가 덧없는 인생을 살면서, 갈라지고 상반되는 이 두 가지 욕구는 충분히 화해되는 일이 드물며, 이것들은 도저히 조화되고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너의 일생을 통해서, 통합된 영은 육체를 점점 더 영의 인도하심에 복종시키도록 너를 도우려고 늘 보살핀다. 너는 물질 생애를 끝까지 살아야 하고, 네가 몸, 그리고 몸에 필요한 것을 벗어날 수 없지만, 그런데도 목표와 이상(理想)으로 보아서 동물적 성질을 영의 지휘 밑에 복종시키는 능력이 더욱 너에게 주어진다. 진실로 네 안에는 영적 세력들이 공모(共謀)하고 신성한 권력자들이 동맹하며, 그들의 순전한 목적은 물질의 사슬과 유한의 장애로부터 너를 마침내 구원하는 것이다.
34:6.10 (381.4) 이 모든 보살핌의 목적은 “그의 영을 통하여 속 사람이 권능으로 강화되기 위한 것”이다. 이 모두는 다만 완전한 믿음과 봉사를 마침내 달성하는 데 이르는 예비 단계일 뿐이며, 그 체험 속에서 너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가득 채워지리니,”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은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인 까닭이라.”
34:6.11 (381.5) 영은 결코 사람을 조종하지 않고, 단지 인도할 뿐이다. 네가 기꺼이 배우려 하는 사람이고, 네가 영 수준에 도달하고 신의 높이에 이르기 바라고, 진심으로 네가 영원한 목표에 도달하기 바라면, 신의 영은 부드럽게 사랑으로, 아들이 되고 영적으로 나아가는 길을 따라서 너를 이끌 것이다. 네가 딛는 걸음마다 기꺼이 내딛는 걸음, 총명하고 즐겁게 협동하는 걸음이어야 한다. 영의 지배는 결코 강요하는 빛이 없고, 강제로 타협하지 않는다.
34:6.12 (381.6) 그리고 영이 안내하는 그러한 생활을 자유롭게 영리하게 받아들일 때, 인간의 머리 속에 신과 접촉한다는 분명한 의식, 그리고 영과 교통한다는 확신이 차츰 생긴다. 머지않아 “네가 하나님의 아이라는 것을 너의 영과 (조절자와) 함께 영이 증언한다.” 이미 바로 너의 생각 조절자가 너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하여 일러주기 때문에, 너의 영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너의 영과 함께” 증언한다고 기록은 간증한다.
34:6.13 (381.7) 영이 인생을 지배하는 것을 의식한 뒤에, 영이 이끄는 그러한 필사자의 생활 반응에 당장 영의 특징이 갈수록 더 나타나는 일이 뒤따른다. “이는 영의 열매가 사랑ㆍ기쁨ㆍ평화요, 오랜 인내와 부드러움ㆍ선ㆍ믿음ㆍ온유ㆍ절제인 까닭이라.” 영이 인도하고 신의 빛을 받는 그러한 필사자는, 아직도 비천한 고생 길을 걷고, 땅에서 배치받은 임무를 인간적으로 충실히 수행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 다른 세계에 아득히 먼 기슭에서 반짝이는, 영생의 빛을 이미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영감과 위로를 주는 그 진리의 실체를 이미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공정ㆍ평화ㆍ기쁨을 얻는 것이라.” 어떤 시련이 있어도, 어떤 어려움에 부닥쳐도, 영에게서 태어난 혼은 어떤 두려움도 초월하는 그 희망으로 영양을 공급받으니,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신다운 영의 계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널리 뿌려지기 때문이다.
34:7.1 (382.1) 육체는 동물 기원을 가진 민족들로부터 파생된 타고난 성품이며, 저절로 신성한 영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 하나님의 물질 아들의 체질을 더하여 필사자의 체질이 강화되었을 때, 아담의 수여로 유란시아 민족들이 어느 정도 나아졌다시피, 영이 인품 속에 맺는 열매, 아름다운 수확을 거두기 위해서, 진리의 영이 깃드는 조절자와 협동하도록 길이 더 낫게 준비된다. 너희가 이 영을 물리치지 않으면, 임무를 완수하는 데 영원이 요구될지 몰라도 “그가 모든 진리로 너를 인도하리라.”
34:7.2 (382.2) 영적 진보가 있는 정상 세계에서 진화하는 필사자는 영과 육체 사이에 심각한 갈등을 겪지 않는데, 이러한 갈등이 오늘날의 유란시아 민족들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나 가장 이상적 행성에서도, 순전한 동물 수준의 존재로부터, 더욱 지적 의미와 상급의 영적 가치에 이르기까지 연속되는 수준을 거쳐서 올라가기 위해서, 아담 이전의 사람은 적극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34:7.3 (382.3) 정상 세계의 필사자는 육체의 성품과 영적 성품 사이에 끊임없는 투쟁을 겪지 않는다. 그들은 동물 존재의 수준에서 영답게 사는 상급 수준까지 올라가는 필요성에 부닥친다. 그러나 물질 성품과 영적 성품이 갈라지는 이 영역에서 유란시아 필사자가 겪는 맹렬한 갈등과 비교했을 때, 이들의 승천은 오히려 교육 훈련을 받는 것에 가깝다.
34:7.4 (382.4) 유란시아 민족들은 점진적으로 행성에서 영적으로 도달하는 이 과제에서 두 가지 도움이 결핍되어 그 결과를 감수하고 있다. 칼리가스티아 동란은 세계적 혼란을 일으켰고, 질서가 잘 잡힌 사회는 도덕적 도움을 주었을 터인데, 그러한 도움을 그 뒤의 모든 세대로부터 빼앗았다. 그러나 더욱 큰 재난은 아담의 실패였으니, 이는 영적 포부와 보조를 맞추어 받았을 뻔했던 우수한 종류의 체질을 그 민족들로부터 빼앗았기 때문이다.
34:7.5 (382.5) 유란시아 필사자들이 영과 육체 사이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두드러진 갈등을 겪게 된 것은 에덴의 수여로 인하여 그들의 먼 조상이 충분히 아담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의 계획대로 되었더라면, 유란시아의 필사 민족들이 자연히 영에 더 민감한 체질을 가졌어야 한다.
34:7.6 (382.6) 인간의 성품과 인간의 환경에 이 두 가지 재난이 있었는데도, 영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한다면, 오늘날의 필사자는 육체와 영 사이에 이 명백한 싸움을 더 적게 겪을 것이다. 거기서 하나님의 믿음의 아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봉사, 사람을 깨우치고 자유롭게 만드는 봉사를 베풀면서, 육체의 노예가 되는 속박에서 비교적 벗어나게 된다. 예수는 인류에게 사람이 사는 새 길을 보여주었으니, 이 길을 감으로 인간은 칼리가스티아 반란의 끔찍한 결과를 대체로 피하고, 아담의 실패로 인한 결핍을 아주 효과 있게 메울 수도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생의 정신은 동물처럼 사는 법칙, 그리고 죄와 악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였느니라.” “이것이 육체, 아니 너의 믿음조차도 극복하는 승리이라.”
34:7.7 (383.1) 하나님을 알고 영에게서 태어난 남녀는 가장 정상인 세계, 곧 죄에 물든 적도 없고 반란에 영향을 받은 적도 없는 행성의 거주자보다, 더 이상 자신의 필사 성품과 갈등을 겪지 않는다. 믿음의 아들은 자제하지 않거나 부자연스러운 육체적 욕구 때문에 생기는 갈등보다 훨씬 위의 지적 수준에서 일하고 영적 수준에서 산다. 동물 존재의 정상 욕구, 육체의 성질을 가진 자연스러운 식욕과 충동은, 무지하거나, 잘못 가르침을 받거나, 딱하게도 지나치게 양심적인 사람의 지성에서 그럴 경우를 제외하고, 가장 높은 영적 도달과도 대립되지 않는다.
34:7.8 (383.2) 너희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떠났고, 과제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니까, 인간의 잊어버리는 위험과 필사자의 한결같지 않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실패할까 하는 의심이나 복잡한 혼란에 빠져 괴로워하지 말라. 머뭇거리며 너의 상태나 지위가 어떻게 되었는가 의문을 갖지 말라. 이는 어두운 때마다, 전진하는 투쟁에서 만나는 길목마다, 진리의 영이 언제나 “이것이 길이라”하고 일러줄 것이기 때문이다.
35:0.1 (384.1) 앞에 소개한 하나님의 아들들은 파라다이스에 기원이 있었다. 그들은 우주 영토를 다스리는 신성한 통치자들의 자식이다. 1차 파라다이스 아들 계급, 곧 창조 아들 중에서 네바돈에는 오직 한 분, 미가엘이 계시며, 그는 지역 우주의 아버지요 군주이다. 2차 파라다이스 아들 계급인 아보날, 곧 심판 아들 중에서, 네바돈은 할당받은 수대로―1,062명을―가지고 있다. 이 “작은 그리스도들”은 창조자인 주 아들이 유란시아에서 그랬던 것과 똑같이, 행성에 자신을 수여할 때 효과적이며 전능하다. 3차 계급은 삼위일체 기원을 가졌으니까 지역 우주에서 등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1만 5천에서 2만 명의 삼위일체 교육 아들이 네바돈에 있다고 추정하며, 이것은 기록에 있는, 인간이 삼자일체화한 조수 9,642명을 제외한 것이다. 이러한 파라다이스 데이날은 심판관도 행정관도 아니다. 그들은 초월 선생이다.
35:0.2 (384.2) 이제 고찰하려고 하는 부류의 아들들은 지역 우주에 기원이 있다. 그들은 파라다이스 창조 아들의 자손이며, 보완하는 어머니 우주 영과 다양하게 연합하여 태어난다. 다음 계급의 지역 우주 아들 신분이 이 이야기에서 언급된다.
35:0.7 (384.7) 삼자일치된 파라다이스 신은 미가엘ㆍ아보날ㆍ데이날, 이 세 계급의 아들들을 창조하기 위하여 활동한다. 지역 우주에서 두 신, 아들과 영이 또한 멜기세덱ㆍ보론다덱ㆍ라노난덱, 이 세 계급의 높은 아들들을 창조하기 위하여 활동한다. 이 세 가지 표현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다능한 계급, 생명 운반자를 생산하느라고 그 다음 수준의 칠중 신과 합동하여 일한다. 이 존재들은 내려가는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분류되지만, 그들은 독특하고 독창적인 형태의 우주 생명이다. 그들에 대한 고려는 다음 논문 전체를 차지한다.
35:1.1 (384.8) 한 주어진 우주의 신성한 목적과 창조 계획에 따라서, 밝은 아침별 및 기타 행정 성격자들과 같이 개인적으로 돕는 존재들을 만든 뒤에, 창조 아들, 그리고 창조 영, 곧 무한한 영의 지역 우주 딸 사이에, 새로운 형태의 창조 연합이 일어난다. 이 창조적 협동에서 생겨나는 성격자 자손이 최초의 멜기세덱―아버지 멜기세덱―이며, 그는 나중에 창조 아들 및 창조 영과 합작하여, 그 이름을 가진 집단 전체를 생산해 내는 독특한 존재이다.
35:1.2 (385.1) 네바돈 우주에서 아버지 멜기세덱은 밝은 아침별의 제1 동료 집행자로서 행동한다. 가브리엘은 우주 정책에, 멜기세덱은 실용적 과정에 더 몰두한다. 가브리엘은 정식으로 구성된 네바돈 법정과 회의를, 멜기세덱은 특별하고 드문 비상시 위원회와 자문하는 단체들을 주관한다. 가브리엘과 아버지 멜기세덱은 결코 동시에 구원자별을 떠나 있지 않는다. 이는 가브리엘이 자리를 비울 때, 아버지 멜기세덱이 네바돈의 최고 집행자로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35:1.3 (385.2) 창조 아들과 창조 영은 아버지 멜기세덱과 연락하여, 우리 우주의 멜기세덱들을 모두 표준 시간으로 1천 년 안에 창조하였다. 자신들 가운데 하나가 동등한 창조자 노릇을 한 아들 계급이니까, 멜기세덱의 구성은 얼마큼 자기 기원을 가졌고, 따라서 하늘 부류의 자치(自治) 정부를 실현하는 후보자가 된다. 그들은 표준 시간으로 임기가 7년이 되게, 그들 자체의 행정 우두머리를 정기적으로 선출하고, 그 외에는 자치하는 계급으로서 활동한다. 하지만 최초의 멜기세덱은 본래부터 가진 공동 부모의 특권을 행사한다. 이따금 이 아버지 멜기세덱은 자기 계급의 특정한 개인들을 중간 한계자 세계들에[1] [1669] 대하여 특별한 생명 운반자로서 활동하도록 임명하는데, 이 세계들은 유란시아에서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부류의 생명이 거하는 행성이다.
35:1.4 (385.3) 초우주의 법정 앞에 미결인 문제에서 증인으로 부름받을 때, 그리고 그들이 가끔 대사(大使)가 되다시피, 같은 초우주 안에서 한 우주를 다른 우주에 대표하는 특별 대사로 임명받을 때를 제외하고, 멜기세덱들은 지역 우주 바깥에서 널리 활동하지 않는다. 각 우주에서 최초의 멜기세덱, 곧 처음 태어난 멜기세덱은 이웃 우주들로, 또는 그의 계급의 관심거리와 의무에 상관되는 임무를 띠고 파라다이스로 언제나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다.
35:2.1 (385.4) 멜기세덱은 하등 생물의 생명에 충분히 가까이 접근하여, 필사자를 향상시키는 사명에 직접 활동하고, 육신화할 필요 없이 진화 종족들을 보살필 수 있는, 첫째 계급의 신의 아들이다. 이 아들들은 자연히, 위대한 내려가는 성격자들의 중간 지점에 있으며, 기원으로 따지면 가장 높은 신, 그리고 의지를 부여받은 가장 낮은 인간 생명 사이에 거의 중간점에 있다. 따라서 그들은 신다운 상급 수준의 살아 있는 존재, 그리고 진화 세계의 하급 생명, 아니 물질 형태의 생명 사이에, 자연스러운 중재자가 된다. 세라핌 계급, 곧 천사들은 멜기세덱과 함께 일하기를 즐거워한다. 사실은, 어떤 형태의 지적 생명도, 이 아들들이 이해심 있는 친구요, 공감하는 선생, 지혜로운 조언자임을 발견한다.
35:2.2 (385.5) 멜기세덱은 자치하는 계급이다. 이 독특한 계급에서 우리는 지역 우주 존재들 편에서 자결(自決)하려는 최초의 시도를 보며, 가장 높은 부류의 참된 자치 정부를 관찰한다. 이 아들들은 그들의 집단 행정과 고향 행성의 행정을 위하여, 그리고 관계된 여섯 구체와 그 종속 세계들의 행정을 위하여, 자체의 기구(機構)를 조직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특권을 결코 남용한 적이 없다는 것을 기록해야 한다. 오르본톤 초우주 전역에서 한 번도 이 멜기세덱 아들들은 책임을 저버린 적이 없다. 그들은 자치를 꿈꾸는, 우주의 모든 집단의 희망이며, 모든 네바돈 구체에게 자치 정부의 모범이자 선생이다. 모든 계급의 지적 존재들은, 위로 상관으로부터 아래로 부하들에 이르기까지, 멜기세덱의 정부를 진심으로 찬양한다.
35:2.3 (386.1) 멜기세덱 아들 계급은 한 큰 집안에서 맏아들의 위치를 차지하고 그 책임을 맡는다. 그들이 하는 일의 대부분은 규칙적이고 얼마큼 일상적이지만, 그 상당 부분은 자원하는 것이고 전적으로 스스로 짊어진 것이다. 이따금 구원자별에서 열리는 대다수의 특별 회의는 멜기세덱들의 제안을 받고 나서 소집된다. 자신들이 주도권을 쥐고 이 아들들은 그들이 태어난 우주를 순찰한다. 그들은 우주 정보에 전념하는 독립된 조직을 유지하며, 그 영역의 일상 행정에 관여하는 정상 부서를 통해서 우주 본부로 올라오는 모든 정보와 따로, 창조 아들에게 정기적으로 보고를 드린다. 그들은 천성(天性)으로 편견 없는 관찰자이며, 모든 등급의 지적 존재들의 완전한 신임을 받고 있다.
35:2.4 (386.2) 멜기세덱들은 영역에서 기동성 있고 자문 역할을 가진 재심 법정으로서 활동한다. 이 우주 아들들은 작은 집단을 이루어 여러 세계로 가서, 자문 위원회로서 봉사하고 증언을 청취하며, 제안을 받아들이고, 조언자로서 행동하며, 이렇게 진화하는 영토의 사무에서 이따금 일어나는 큰 문제를 해소하고 심각한 의견 차이를 좁히려고 돕는다.
35:2.5 (386.3) 한 우주에서 맏아들인 이들은 밝은 아침별의 우두머리 조수로서 창조 아들의 명령을 수행한다. 한 멜기세덱이 가브리엘의 이름으로 먼 세계에 갈 때, 그 특별 임무의 목적을 위하여, 파송한 자의 이름으로 대리자로서 임명될 수 있으며, 그 경우에 밝은 아침별의 전권(全權)을 가지고 배치된 행성에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특히, 더 높은 아들이 그 영역에 사는 생물의 모습을 입고 나타나지 않은 구체에서 참말이다.
35:2.6 (386.4) 창조 아들이 한 진화 세계에서 자신을 수여하는 생애에 들어갈 때, 그는 혼자 간다. 그러나 그의 파라다이스 형제들 중에 하나, 아보날 아들이 자신 수여에 들어갈 때, 그에게 지원해 주는 12 멜기세덱이 따르며, 그들은 수여 임무가 성공하도록 아주 유능하게 이바지한다. 그들은 또한 사람이 사는 세계에 심판관 임무로 가는 파라다이스 아보날을 지원하며, 이런 임무에서 아보날 아들이 명백히 눈에 보인다면, 멜기세덱들도 그처럼 필사자의 눈에 보인다.
35:2.7 (386.5) 행성에 영적으로 필요하면서 그들이 봉사하지 않는 단계는 하나도 없다. 그들은 창조 아들과 파라다이스 아버지에게 최종으로 완전한 인가를 받기까지, 진보된 생활을 하는 모든 세계를 아주 흔히 설득하는 선생이다.
35:2.8 (386.6) 멜기세덱의 지혜는 거의 완전하지만, 절대로 판단의 오류가 없지는 않다. 행성 임무에서 동떨어지고 홀로 있을 때, 그들은 가끔 사소한 문제에서 실수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어떤 일을 하려고 했고, 나중에 상관들의 인가를 받지 못한 적이 있다. 그러한 판단의 잘못은 일시 한 멜기세덱의 자격을 정지시킨다. 이 자격 정지는 그가 구원자별로 가서, 창조 아들이 방청하는 가운데, 그의 동료들과 대립하게 만드는 불화(不和) 요소를 그에게서 사실상 지워 버리는 지시를 받을 때까지이며, 그리고 나서 징계하는 휴식이 있은 다음에, 뒤이어 사흘째에 근무로 복직된다. 그러나 멜기세덱의 활동 중에 이렇게 사소한 잘못된 적응은 네바돈에서 일어난 적이 드물다.
35:2.9 (387.1) 이 아들들은 수가 늘어나는 계급이 아니며, 그들의 수는 각 지역 우주마다 다르지만, 고정되었다. 네바돈에서 그들의 본부 행성에 있는 기록에 따르면 멜기세덱의 수는 1천만이 넘는다.
35:3.1 (387.2) 멜기세덱들은 우주 본부 구원자별 근처에 자신들의 세계를 차지한다. 멜기세덱이라 부르는 이 구체는 70 주요 구체로 이루어진 구원자별 회로의 시범 세계이며, 이 구체들은 각각 특화된 활동에 전념하는 여섯 종속 구체에 둘러싸여 있다. 이 경이로운 구체―70 주요 구체와 420 종속 구체―들은 흔히 멜기세덱 대학이라고 언급한다. 온 네바돈의 별자리에서 오는 승천 필사자는 구원자별에서 거주 자격을 얻는 과정에 모두 490 세계에서 훈련을 거친다. 그러나 승천자들의 교육은 구원자별 집단의 건축 구체들에서 일어나는 다채로운 활동 중에서 겨우 한 국면일 뿐이다.
35:3.2 (387.3) 구원자별 회로에 있는 490 구체는 10 집단으로 나누어지며, 각 집단은 일곱 주요 구체와 42 종속 구체를 포함한다. 이 여러 집단은 각자가 우주 생명의 주요 계급 중에서 하나의 일반 감독을 받고 있다. 돌고 있는 행성 행렬의 시범 세계와 그 다음 여섯 주요 구체를 포함하는 제1 집단은, 멜기세덱의 감독을 받는다. 이 멜기세덱 세계들은 다음과 같다.
35:3.3 (387.4) 1. 시범 세계―멜기세덱 아들들의 고향 세계.
35:3.4 (387.5) 2. 육체 생명의 여러 학교와 살아 있는 에너지 실험실이 있는 세계.
35:3.6 (387.7) 4. 초기 영 생명의 구체.
35:3.7 (387.8) 5. 중간 영 생명의 세계.
35:3.10 (387.11) 이러한 각 멜기세덱 구체에 속하는 여섯 종속 세계는 관계된 주요 구체의 일에 관한 활동에 전념한다.
35:3.11 (387.12) 시범 세계, 곧 멜기세덱 구체는 시공 세계에서 온 승천 필사자들을 교육하고 영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종사하는 모든 존재를 위한 일반 회합 장소이다. 승천자에게는 아마도 이 세계가 온 네바돈에서 가장 흥미 있는 곳이다. 자기 별자리의 훈련을 마치는 진화하는 필사자는 누구나 멜기세덱 구체에 내리도록 예정되어 있고, 거기서 구원자별 교육 체계에서 훈련 및 영 진보를 담당하는 체제에 가입된다. 파라다이스 목적지에 도착한 뒤에도, 너희는 이 독특한 세계에서 사는 첫날에 너희가 어떻게 반응했는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35:3.12 (387.13) 하늘 가는 필사자들은 전문화된 교육을 맡는, 회전하는 여섯 행성에서 훈련을 추구하면서, 멜기세덱 세계에서 거처를 잡는다. 70 문화 세계, 곧 구원자별 회로의 주요 구체들에서 그들이 체류하는 기간 전체를 통해서, 바로 이 방법을 준수한다.
35:3.13 (387.14) 멜기세덱 구체의 여섯 종속 세계에 거주하는 수많은 존재의 시간을 많은 다채로운 활동이 차지한다. 그러나 하늘 가는 필사자가 관계되다시피, 이 위성들은 다음의 특별한 연구 단계에 전념한다.
35:3.14 (388.1) 1. 1번 구체는 하늘 가는 필사자가 초기에 행성에서 보낸 일생을 복습하는 데 전념한다. 필사자로 태어난 일정한 세계에서 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학급에서 이 일이 진행된다. 유란시아에서 온 사람들은 그러한 체험의 복습을 함께 추구한다.
35:3.15 (388.2) 2. 2번 구체의 특별한 작업은 지역 체계 본부의 제1 위성을 도는 저택 세계들에서 겪은 체험을 비슷하게 복습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35:3.16 (388.3) 3. 이 구체에서 하는 복습은 지역 체계의 서울에 머무른 것에 관계되며, 체계 본부 집단의 나머지 건축 세계들에서 있던 활동을 포함한다.
35:3.17 (388.4) 4. 제4 구체는 별자리의 70 종속 세계 및 관계된 구체들에서 가졌던 체험을 복습하는 데 몰두한다.
35:3.18 (388.5) 5. 제5 구체에는 별자리 본부 세계에서 승천자가 머무른 것에 대하여 복습이 진행된다.
35:3.19 (388.6) 6. 6번 구체에서 보내는 시간은 이 다섯 시대를 서로 연관지으려는 시도에 쓰이며, 이처럼 우주 훈련을 담당하는 멜기세덱 기초 학교에 들어가는 준비로서, 체험의 조정을 마친다.
35:3.20 (388.7) 우주 행정과 영적 지혜를 가르치는 학교들은 멜기세덱 고향 세계에 위치가 있고, 거기에는 또한 에너지ㆍ물질ㆍ조직ㆍ통신ㆍ기록ㆍ윤리, 그리고 비교 생물 존재와 같은 단일 분야의 연구에 전념하는 학교들도 발견될 것이다.
35:3.21 (388.8) 멜기세덱 영적 자질 학부에서는, 모든 계급의 하나님의 아들이―파라다이스 계급조차―멜기세덱 및 천사 선생들과 협동하여 운명의 전도사로 떠나가는 무리들을 훈련시키며, 이들은 우주의 먼 세계들에게도 영적 자유와 신의 아들 자격을 선포한다. 멜기세덱 대학의 이 특별 학부는 고급 대학 기관이며, 다른 영역에서 오는 학생 방문자들은 받지 않는다.
35:3.22 (388.9) 멜기세덱들이 우주 행정의 가장 높은 훈련 과정을 그들의 고향 세계에서 가르친다. 최초의 아버지 멜기세덱이 고등 윤리 학부를 주관한다. 여러 우주가 이 학교에 교환 학생을 보낸다. 영적 성취와 높은 윤리의 개발에 관해서 말하면, 젊은 네바돈 우주는 여러 우주의 등급에서 지위가 낮지만, 그런데도 우리의 행정 문제들이 그 우주 전체를 근처에 다른 우주들을 위한 광대한 진료소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멜기세덱 학부들은 다른 영역에서 온 학생 방문자 및 관찰자들로 붐빈다. 굉장한 집단의 지역 등록자 외에도, 멜기세덱 학교에 다니는 외래(外來) 학생이 언제나 10만 명이 넘게 있는데, 이는 네바돈에 있는 멜기세덱 계급은 스플랜돈 전체를 통해서 이름을 날리기 때문이다.
35:4.1 (388.10) 멜기세덱 활동에서 상당히 전문화된 지부(支部)는 하늘 가는 필사자의 진보하는 상물질 생애를 감독하는 것과 상관이 있다. 참을성 있고 현명한, 봉사하는 천사들이 이 훈련의 상당 부분을 운영하며, 그들은 우주적 달성이 비교적 높은 수준에 있는 필사자들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이 교육 작업 전체는 삼위일체 교육 아들과 제휴하는 멜기세덱들의 일반 감독을 받고 있다.
35:4.2 (389.1) 멜기세덱 계급은 주로 지역 우주의 광대한 교육 체계와 체험으로 훈련하는 체제에 전념하는 한편, 그들은 또한 독특한 임무와 특별한 상황에도 활동한다. 종국에 사람이 사는 세계를 약 1천만 개 포함하는 진화 우주에는 평범하지 않은 일이 많이 일어나게 마련이며, 그러한 긴급시에 멜기세덱들이 행동한다. 너희의 별자리 본부 에덴시아에서 그들은 비상시 아들로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어떤―물리적ㆍ지적, 혹은 영적―비상(非常) 사태에도, 어느 행성이나 체계나 별자리나 또는 우주에서, 언제라도 일할 준비가 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나 특별한 도움이 필요할 경우에, 거기서 너희는 멜기세덱 아들을 하나나 여럿을 발견할 것이다.
35:4.3 (389.2) 창조 아들의 계획의 어떤 특수한 모습이 위협받을 때, 당장에 멜기세덱 하나가 도움을 주려고 갈 것이다. 그러나 사타니아에서 일어난 것과 같이 죄가 가득한 반란을 직면하여 그들이 활동하라고 호출받는 일은 흔치 않다.
35:4.4 (389.3) 멜기세덱은 의지(意志)를 가진 생물이 사는 모든 세계에서, 어떤 성질의 비상 사태가 일어나도 제일 먼저 행동하는 자이다. 그들은 어떤 때 방자한 행성에서 임시 관리자로서 활동하며, 실패하는 행성 정부의 관리자로서 근무한다. 행성에 위기가 있을 때 이 멜기세덱 아들들은 많은 독특한 자격으로 봉사한다. 그러한 아들은 쉽게 자신을 필사 존재의 눈에 보이게 할 수 있고, 어떤 때는 이 계급 중의 하나가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육신화하기도 하였다. 일곱 번이나 네바돈에서 한 멜기세덱은 진화하는 세계에서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봉사했고, 수많은 경우에 이 아들들은 다른 계급의 우주 생물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지역 우주에서 모든 계급의 지적 존재에게, 그리고 어떤 세계에나, 어떤 체계의 세계에도 정말로 다능하고 자원해서 일하는 비상시 봉사자이다.
35:4.5 (389.4) 아브라함 시절에 유란시아에서 살았던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으로 그 지역에서 알려졌는데, 이는 살렘이라 부르는 곳에 거주하는 진리 추구자들의 작은 부락을 그가 주관했기 때문이다. 그는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자원해서 육신화했고, 행성의 멜기세덱 관리자들의 승인을 받고서 그렇게 했다. 그들은 영적으로 갈수록 더 어두워 가던 그 기간에, 생명의 빛이 꺼질까 두려워했다. 그는 당대(當代)의 진리를 보전하고, 그 진리를 안전하게 아브라함과 그 동료들에게 전해 주었다.
35:5.1 (389.5) 개인 보조자들과 첫째 집단의 다능한 멜기세덱들을 창조한 뒤에, 창조 아들과 지역 우주 창조 영은 위대하고 다양한 둘째 계급의 우주 아들, 곧 보론다덱을 계획하고 생산하였다. 그들은 별자리 아버지로서 더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계급의 한 아들이 어느 지역 우주에도 각 별자리 정부의 꼭대기에서 한결같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35:5.2 (389.6) 보론다덱의 수는 각 지역 우주마다 다르며, 네바돈에는 꼭 1백만이 기록된 수이다. 이 아들들은, 그들과 동격자인 멜기세덱처럼, 번식하는 능력이 없다. 그들이 수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도 알려지지 않았다.
35:5.3 (389.7) 여러 면에서 이 아들들은 자치하는 단체이다. 그들은 멜기세덱과 비슷하게, 개인으로서, 집단으로서, 아니 전체로서도 대체로 스스로 결정한다. 그러나 보론다덱은 그렇게 광범위한 활동을 통해서 제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눈부시게 다능한 면에서 멜기세덱 형제를 따라가지 못하지만, 통치자로서, 멀리 내다보는 행정가로서, 훨씬 더 믿을 만하고 유능하다. 그들은 행정 면에서, 부하인 라노난덱 체계 군주들에 필적하지 못한다. 그러나 안정된 목적을 가지고 신다운 판단을 내리는 면에서 그들은 모든 계급의 우주 아들을 뛰어넘는다.
35:5.4 (390.1) 이 계급의 아들이 내리는 결정과 판결은 언제나 신다운 아들의 정신을 따르고 창조 아들의 정책과 조화되지만, 그들은 잘못으로 인하여 창조 아들에게 소환을 받은 적이 있으며, 기술적 세부에서 그들의 결정은 가끔 지역 우주의 고등 법정에 상고(上告)되어 번복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아들들은 실수하는 일이 드물고, 결코 반란에 참가한 적이 없다. 네바돈의 역사를 통틀어서 결코 어떤 보론다덱 아들도 우주 정부를 모욕한 죄가 발견된 적이 없다.
35:5.5 (390.2) 지역 우주에서 보론다덱들의 봉사는 광대하고 다양하다. 그들은 다른 우주에 보내는 대사(大使)로서, 그리고 그들이 태어난 우주 안에서 별자리를 대표하는 영사(領事)로서 봉사한다. 모든 계급의 지역 우주 아들 가운데 그들은 아주 흔히 중대한 우주 상황에서 행사하도록 통치하는 전권을 위임받는 자이다.
35:5.6 (390.3) 영적 어두움에 빠져 분리된 세계, 곧 반란과 직무 불이행을 통해서 행성의 고립을 겪은 구체에는 보통, 정상 지위를 되찾을 때까지 관찰자인 한 보론다덱이 거기에 있다. 어떤 비상시에 이 관찰하는 최고자는 그 행성에 배치된 어떤 하늘 존재에게도 임의로 절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보론다덱들이 그러한 행성의 섭정인 최고자로서 그런 권한을 때때로 행사했다는 것이 구원자별의 기록에 있다. 이것은 또한 반란의 손길이 닿지 않은, 사람 사는 세계에서도 참말이었다.
35:5.7 (390.4) 때때로 12명이나 그 이상의 보론다덱 아들로 이루어진 한 집단이, 한 행성이나 체계의 지위에 관련되는 특별한 사례에 관하여, 재심(再審)과 상고를 맡는 고등 법정으로서 전원이 출석한 가운데 재판한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일은 별자리 정부에 토착인 입법 활동과 대체로 관계된다. 이 모든 봉사의 결과로서, 보론다덱 아들들은 지역 우주의 역사가가 되었다. 그들은 사람이 사는 세계들의 모든 정치적 투쟁과 사회적 봉기에 관하여 개인적으로 정통하다.
35:6.1 (390.5) 적어도 보론다덱 세 명이 한 지역 우주에서 1백 별자리의 각 곳을 통치하는 자리에 배치된다. 창조 아들이 이 아들들을 선택하며, 1만 년―10,000 표준년, 유란시아 시간으로 약 50,000년―동안 별자리의 최고자로서 근무하라고 가브리엘이 그들을 임명한다. 군림하는 최고자, 곧 별자리 아버지는 두 명의 동료, 선임자 하나와 후임자 하나를 거느리고 있다. 행정부가 바뀔 때마다, 선임 동료는 정부의 우두머리가 되고, 후임 동료는 선임자의 임무를 맡으며, 한편 구원자별의 여러 세계에 거주하는, 아직 배치받지 않은 보론다덱들이 후임 동료의 책임을 맡도록 선택될 후보자로서 그들 중에 하나를 지명한다. 이렇게 통치하는 최고자는 각자 현재 정책에 따라서, 별자리 본부에서 3만 년, 유란시아 시간으로 약 150,000년 동안 근무한다.
35:6.2 (390.6) 별자리 정부를 실제로 주관하는 우두머리인, 별자리 아버지 1백 명은 창조 아들의 최고 자문 내각(內閣)을 구성한다. 이 회의는 우주 본부에서 빈번히 심의에 들어가며, 그 심의의 규모와 범위에 제한이 없지만, 주로 별자리의 복지에, 그리고 지역 우주 전체의 행정을 통일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
35:6.3 (391.1) 한 별자리 아버지가 빈번히 하다시피, 우주 본부에 임무를 띠고 참석할 때, 선임 동료가 별자리 사무의 임시 지도자가 된다. 선임 동료의 정상 기능은 영적 일을 감독하는 것이며, 한편 후임 동료는 몸소 별자리의 물리적 복지에 몰두한다. 그러나 모두 세 최고자가 그 집행의 모든 세부에 관하여 찬성하지 않으면 별자리에서 아무런 중요한 정책도 결코 집행되지 않는다.
35:6.4 (391.2) 영 정보와 통신 경로의 작용 전체는 별자리의 최고자들의 재량에 달려 있다. 그들은 구원자별에 있는 상관들, 그리고 지역 체계의 군주인 직속 부하들과 완벽한 연락을 가진다. 그들은 별자리의 상태에 관하여 심의하려고 이 체계 군주들과 빈번히 회의를 연다.
35:6.5 (391.3) 최고자들은 조언자 무리에 둘러싸이는데, 이 무리는 별자리 본부에 있는 여러 집단의 존재에 따라서, 또한 지역의 요구가 변하는 대로, 때때로 그 수와 직원이 달라진다. 긴장이 쌓일 때에는 행정 일을 돕기 위하여, 최고자들이 보론다덱 계급의 아들들을 추가로 요구하며, 또 조속히 받는다. 현재 보론다덱 아들 12명이 바로 너희의 별자리 놀라시아덱을 관리한다.
35:7.1 (391.4) 구원자별을 둘러싸는 70 주요 구체의 회로에서 제2 집단의 일곱 세계는 보론다덱 행성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구체들은 각자 그 주위를 회전하는 여섯 위성과 함께, 보론다덱 활동의 한 특별한 국면에 전념한다. 이 49 세계에서, 하늘 가는 필사자들은 우주의 입법에 관하여 그들 최고의 교육을 확보한다.
35:7.2 (391.5) 별자리의 본부 세계들에서 활동하는 입법 집회를 하늘 가는 필사자들은 관찰해 왔다. 그러나 여기 이 여러 보론다덱 세계에서, 선임 보론다덱들의 보호 밑에 그들은 지역 우주에서 실제의 일반 입법 행위에 참여한다. 그러한 입법 행위는 1백 별자리에서 자치하는 입법 집회의 다양한 선포를 조정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여러 보론다덱 학교에서 받아야 하는 교육을 유버르사에서도 능가하지 못한다. 이 훈련은 점진적으로 행해지며, 여섯 위성에서 보충하는 일을 포함하여 첫째 구체로부터 시작해서, 나머지 여섯 주요 구체, 그리고 그와 관계된 위성 집단에까지 미친다.
35:7.3 (391.6) 하늘 가는 순례자는 연구와 실용적 일을 맡는 이 여러 세계에서 수많은 새로운 활동에 입문할 것이다. 우리는 새롭고 꿈도 꾸지 못한 이 여러 사업을 밝히는 시도는 금지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을 필사 존재의 물질적인 머리가 알아듣게 묘사할 수 있을까 절망이 된다. 우리는 이 천상의 활동이 무엇을 뜻하는가 전할 낱말이 없고, 하늘 가는 필사자가 이 49 세계에서 탐구하는 동안, 그들의 이러한 새 직종을 실례(實例)로 들 수 있는, 비슷한 인간 일거리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승천 체제의 일부가 아닌, 많은 다른 활동이 구원자별 회로에 있는 이 보론다덱 세계들에 집중된다.
35:8.1 (392.1) 보론다덱을 창조하고 난 뒤에, 창조 아들과 우주 어머니 영은 셋째 계급의 아들, 곧 라노난덱을 출산하려는 목적으로 뭉친다. 체계 행정과 연결된 다채로운 과제에 몰두하지만, 그들은 체계 군주, 곧 지역 체계의 통치자, 그리고 사람이 사는 세계의 행정 우두머리인 행성 영주로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35:8.2 (392.2) 후기에 창조된 아들이며―신성 수준으로 따지면―낮은 계급이기 때문에, 이 존재들은 후일에 근무하는 것에 대비해서, 여러 멜기세덱 세계에서 어떤 훈련 과정을 거치는 것이 요구되었다. 그들은 멜기세덱 대학의 처음 학생이며, 능력ㆍ성격ㆍ업적에 따라서, 멜기세덱 선생과 검사자들이 이들을 분류하고 인가한다.
35:8.3 (392.3) 네바돈 우주가 존재하기 시작할 때, 라노난덱은 정확히 1천 2백만 명 있었다. 그들이 멜기세덱 구체를 거쳤을 때, 그들은 최종 시험에서 다음 세 등급으로 분류되었다.
35:8.4 (392.4) 1. 1차 라노난덱. 가장 높은 계급에는 709,841명이 있었다. 그들은 체계 군주, 별자리의 최고 회의에 조수로서, 그리고 지역 우주의 상급 행정 작업에 조언자로서 지명된 아들이다.
35:8.5 (392.5) 2. 2차 라노난덱. 멜기세덱 구체에서 졸업한 이 계급에는 10,234,601명이 있었다. 그들은 행성 영주로서, 그리고 그 계급의 예비군에 배치된다.
35:8.6 (392.6) 3. 3차 라노난덱. 이 집단은 1,055,558명을 포함했다. 이 아들들은 하위의 조수ㆍ사자(使者)ㆍ관리자ㆍ위원ㆍ관찰자로서 활동하며, 체계와 그 구성 세계들의 잡다한 임무를 수행한다.
35:8.7 (392.7) 이 아들들은 진화하는 존재의 경우처럼,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진급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멜기세덱의 훈련을 받을 때, 일단 검사되고 분류되고 나서, 그들은 배치된 등급에서 줄곧 근무한다. 이 아들들은 번식하지도 않으며, 지역 우주에서 그들의 수는 정해져 있다.
35:8.8 (392.8) 반올림한 수로, 라노난덱 계급의 아들들은 구원자별에서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35:8.9 (392.9) 우주 조정자와 별자리 상담자 . . . . . . . . . 100,000
35:8.10 (392.10) 체계 군주와 조수 . . . . . . . . . . . . . . . . . . 600,000
35:8.11 (392.11) 행성 영주와 예비군 . . . . . . . . . . . . . . 10,000,000
35:8.12 (392.12) 사자 군단 . . . . . . . . . . . . . . . . . . . . . . . 400,000
35:8.13 (392.13) 관리자와 기록자 . . . . . . . . . . . . . . . . . . 100,000
35:8.14 (392.14) 예비 군단 . . . . . . . . . . . . . . . . . . . . . . . 800,000
35:8.15 (392.15) 라노난덱이 멜기세덱과 보론다덱보다 약간 낮은 계급의 아들 신분이니까, 그들은 우주의 하층 단위에서 더욱 크게 쓸모가 있는데, 이는 그들이 하등 생물, 지적 민족들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잘못에 빠질 위험, 우주 정부가 용납할 기법에서 이탈하는 위험이 더 크다. 그러나 이 라노난덱, 특히 1차 계급은 모든 지역 우주 행정가 중에서 가장 능력이 있고 다재(多才)하다. 집행 능력으로 보면 오로지 가브리엘과 그의 밝혀지지 않은 동료들만 그들을 능가한다.
35:9.1 (393.1) 라노난덱은 행성을 지속하여 통치하는 자이며, 번갈아서 근무하는 체계 군주이다. 그러한 아들 하나가 사람이 사는 세계들로 이루어진 너희 체계의 서울, 예루셈에서 지금 다스린다.
35:9.2 (393.2) 체계 군주는 사람이 사는 세계들의 각 체계 본부에서 두세 명의 위원회를 이루어 통치한다. 별자리 아버지는 1만 년마다 이 라노난덱들 중에서 하나를 우두머리로 지명한다. 어떤 때는 삼원조의 우두머리가 갈리지 않으며, 이 문제는 전적으로 별자리 통치자들의 재량에 맡겨진다. 체계 정부는 어떤 종류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으면 직원을 갑자기 바꾸지 않는다.
35:9.3 (393.3) 체계 군주나 조수들이 해임될 때, 그들의 자리는 별자리 본부에 자리잡은 최고 회의가 그 계급의 예비군에서 뽑은 자들로 채우는데, 이 집단은 지적된 평균보다 에덴시아에서 더 크다.
35:9.4 (393.4) 라노난덱의 최고 회의는 여러 별자리 본부에 주둔한다. 별자리 아버지의 선임 동료 최고자가 그러한 단체를 주관하며, 한편 후임 동료는 2차 계급의 예비군을 감독한다.
35:9.5 (393.5) 체계 군주는 그 이름에 어긋나지 않는다. 사람이 사는 세계들의 지역 사무에서 거의 독립되어 있다. 그들은 거의 아버지답게 행성 영주, 물질 아들, 봉사하는 영들을 지도한다. 군주의 개인적 지배력은 거의 완벽하다. 이 통치자들은 중앙 우주로부터 온 삼위일체 관찰자들의 감독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지역 우주의 집행 부서이며, 입법 명령을 집행하는 관리자로서, 그리고 사법(司法) 판결을 적용하는 집행자로서, 미가엘 아들의 뜻에 대항하는 개인적 불충이 아주 쉽게, 재빨리 깊이 숨어서 자기 주장을 추구할 수 있는, 모든 우주 행정부에서 유일한 곳이다.
35:9.6 (393.6) 7백 명이 넘는 라노난덱 계급의 아들들이 우주 정부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그렇게 함으로 몇 체계와 수많은 행성을 발칵 뒤집어 놓았으니까, 우리 지역 우주는 불행했다. 이 실패한 총 숫자에서 겨우 셋이 체계 군주였으며, 이 아들들의 거의 전부는 2차와 3차 계급, 곧 행성 영주와 3차 라노난덱에 속했다.
35:9.7 (393.7) 이 아들들의 큰 무리가 성실한 길에서 벗어난 것은 창조 권한에 어떤 흠이 있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들은 신답게 완전히 만들어질 수도 있었으나, 그들이 시공 세계에서 사는 진화 인간을 더욱 잘 이해하고, 그들에게 가까이 갈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졌다.
35:9.8 (393.8) 오르본톤에 있는 모든 지역 우주 가운데 헨셀론을 빼고, 우리 우주가 이 계급의 아들을 가장 많이 잃어버렸다. 우리 라노난덱 계급의 아들들이, 그처럼 선택하고 계획하는 상당한 개인적 자유를 지니고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네바돈에서 그렇게 많은 행정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유버르사의 여론이다. 나는 비판할 생각으로 이런 소견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 우주의 창조자는 이렇게 할 충분한 권한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자유로이 선택하는 그런 아들들이 우주의 초기 시대에 지나친 문제를 일으키는 반면에, 만사가 충분히 추려지고 마침내 안정될 때, 철저하게 시험받은 이 아들들 편에서, 더 높이 충성하고 더욱 충만히 의도하여 봉사함으로 생기는 이익이, 초기의 혼란과 시련을 보상하고도 남으리라는 것이 우리의 높은 통치자들의 주장이다.
35:9.9 (394.1) 한 체계 본부에서 반란(反亂)이 생길 경우에, 새 군주가 보통 비교적 짧은 시일 안에 임명되지만, 개별 행성에서는 그렇지 않다. 행성은 물질 창조의 구성 단위이며, 모든 그러한 문제의 최종 판결에서, 생물의 자유 의지는 한 요인이 된다. 뒤를 잇는 행성 영주가 고립된 세계, 권한을 가진 영주가 그릇된 길로 빠졌을지도 모르는 세계에 임명된다. 그러나 멜기세덱 및 기타 봉사하는 성격자들이 채택한 치료 조치로 반역의 결과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제거할 때까지, 그들은 그러한 세계의 현역 통치 자격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행성 영주의 반란은 한 순간에 그 행성을 고립시킨다. 그 지역의 영적 회로는 즉시 단절된다. 오로지 수여 아들이 영적으로 고립된 그런 세계에서 행성간 통신선을 다시 설치할 수 있다.
35:9.10 (394.2) 방자하고 지혜롭지 못한 이 아들들을 구제하는 계획이 있는데, 다수가 이 자비로운 조치를 이용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한 직책에서 결코 다시 활동해서는 안 된다. 명예가 회복된 뒤에 그들은 관리직과 물리적 행정 분과로 배치된다.
35:10.1 (394.3) 70 행성으로 이루어진 구원자별 회로에서 제3 집단의 일곱 세계는 각기 관련된 42 위성과 함께, 라노난덱 행정 구체 집단을 구성한다. 이 영역에서 전에 체계 군주로서 경험이 있는 라노난덱들은 하늘 가는 순례자와 천사 무리에게 행정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직무를 수행한다. 진화하는 필사자들은 체계 서울에서 체계 행정관들이 일하는 것을 지켜보지만, 여기서 그들은 1만 지역 체계의 행정 선포를 실제로 조정하는 데 참여한다.
35:10.2 (394.4) 지역 우주의 이 행정 학교들은, 체계 군주로서, 그리고 별자리의 조언자로서 오랜 경험을 가진 라노난덱 아들 집단이 감독한다. 오직 엔사의 행정 학교들이 이 집행 학부들을 능가한다.
35:10.3 (394.5) 하늘 가는 필사자를 위한 훈련 구체로 쓰이면서, 라노난덱 세계들은 우주에서 정상이며 일상적인 행정 운영과 상관되는 광범위한 사업의 중심이다. 파라다이스까지 가는 동안 내내, 하늘 가는 순례자는 응용 지식―그들이 가르침받고 있는 것을 정말로 행하는 실제 훈련―을 가르치는 여러 실용 학교에서 연구에 힘을 쏟는다. 멜기세덱들이 후원하는 우주의 교육 체계는 실용적이고 진취적이며, 의미 있고 체험적이다. 물질적ㆍ지적ㆍ상물질ㆍ영적인 것들에 관한 훈련을 포함한다.
35:10.4 (394.6) 이 라노난덱 행정 구체들과 연관하여, 그 계급에서 구제받은 아들들의 대부분이 행성 사무 관리자와 지도자로서 근무한다. 그리고 직무에 실패한 이 행성 영주들, 그리고 반란에 가담했다가 제공된 명예 회복을 받아들일 것을 선택한 그 동료들은 이 일상적 자격으로, 적어도 네바돈 우주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될 때까지, 줄곧 근무할 것이다.
35:10.5 (395.1) 그러나 오래 된 체계의 라노난덱 아들 중에서 다수는 봉사와 행정, 영적 성취 면에서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개인의 자유라는 오류, 그리고 자치한다는 허구를 통해서 그들이 잘못에 빠지는 성향이 있기는 해도, 그들은 고귀하고 충실하고 충성스러운 집단이다.
36:0.1 (396.1) 생명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생명은 (밝혀지지 않은) 존재 설계사들이 작성한 계획에 따라서 지으며, 직접 수입(輸入)하여, 또는 지역 우주의 생명 운반자들이 활동한 결과로서, 사람이 사는 행성들에 나타난다. 이 생명 운반자들은 우주 아들 집단 가운데 가장 흥미 있고 다능한 신다운 자에 속한다. 그들에게 생물의 생명을 고안하고 생명을 행성인 구체들에 나르는 책임이 맡겨진다. 그러한 새 세계에 이 생명을 심은 뒤에, 그들은 생명이 발달하는 것을 돌보기 위하여 오랫동안 거기에 남아 있다.
36:1.1 (396.2) 신다운 아들 가족에 속하지만, 생명 운반자는 특별하고 뚜렷이 다른 종류의 우주 아들이며, 한 초우주의 통치자들은 지역 우주에서 유일하게 이 집단의 지적 생명의 창조에만 참여한다. 생명 운반자는 창조 아들, 우주 어머니 영, 그리고 관계된 초우주의 운명을 주관하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 세 분 중에서 지명받은 하나, 이렇게 선재(先在)하는 세 성격자의 자식이다. 오직 이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지적 생명의 소멸을 선포할 수 있으며, 이들이 생명 운반자의 창조에 참여한다. 진화하는 세계에서 물리적 생명을 정착시키는 책임은 생명 운반자들에게 맡겨진다.
36:1.2 (396.3) 네바돈 우주에서 1억 명의 생명 운반자가 창조되었다는 기록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이 유능한 군단은 참으로 자치하는 집단은 아니다. 그들은 생명을 결정하는 삼원조의 지시를 받는다. 이 삼원조는 가브리엘, 아버지 멜기세덱, 그리고 네바돈에서 최초이자 처음에 태어난 생명 운반자 남비아이다. 그러나 분과 행정의 모든 단계에서 그들은 자치한다.
36:1.3 (396.4) 생명 운반자는 3대 분과로 등급이 정해진다. 제1 분과는 선임 생명 운반자이고, 제2 분과는 조수, 제3 분과는 관리자이다. 1차 분과는 생명이 표현되는 여러 형태에서 12 집단의 전문가들로 다시 나누어진다. 멜기세덱들이 이 3 분과로 분리하는 일을 했고, 그들은 생명 운반자의 본부 구체에서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시험을 시행한다. 그 뒤로 죽, 멜기세덱은 생명 운반자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었으며, 그들이 새로운 행성에 생명을 정착시키려고 떠날 때 언제나 따라간다.
36:1.4 (396.5) 진화하는 행성이 마침내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될 때, 생명 운반자들은 그 세계 및 거기 있는 영화롭게 된 존재들의 계속된 행정과 발전을 돕기 위하여 고문 자격을 가진 고등 심의 기관으로서 조직된다. 진화하는 우주에서 후기의 안정된 시대에, 이 생명 운반자들에게 많은 새 임무가 맡겨진다.
36:2.1 (397.1) 멜기세덱들은 구원자별 회로에서 제4 집단의 일곱 주요 구체의 일반적 감독을 담당한다. 이 생명 운반자 세계들은 다음과 같이 지정된다.
36:2.6 (397.6) 5. 지성과 연합된 생명의 구체.
36:2.9 (397.9) 이 주요 구체들은 각자 여섯 위성에 둘러싸여 있고, 우주에서 생명 운반자의 모든 활동의 특별 단계가 거기에 집중된다.
36:2.10 (397.10) 제1 세계는 본부 세계이며, 이 세계는 그 여섯 종속 위성과 함께, 지역 우주 생명, 모든 알려진 명시 단계의 생명을 연구하는 데 전념한다. 여기에 생명 계획 학부가 자리잡고 있고, 유버르사와 하보나에서, 아니 파라다이스에서 온 선생과 조언자들까지 거기서 활동한다. 그리고 나는 보조 지성 영들의 일곱 중앙 거처가 이 생명 운반자 세계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밝히라고 허락을 받았다.
36:2.11 (397.11) 10이라는 수는―십진법―물리적 우주에 본래부터 있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생명의 분야는 3ㆍ7ㆍ12, 또는 이 기본 수의 배수(倍數)나 조합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세 파라다이스 근원 중심의 질서를 좇아서, 세 가지 1차이며 본질적으로 다른 생명 계획이 있고, 네바돈 우주에는 이 3대 기본 생명 형태가 세 가지 다른 종류의 행성들에 분리되어 있다. 최초에, 전해 줄 수 있는 생명에 관하여 열두 가지 다른 신다운 개념이 있었다. 이 12라는 수는, 그 분수(分數) 및 배수와 함께, 모두 일곱 초우주에 있는 기본 생명의 원본에 두루 나타난다. 또한 일곱 가지로 설계된 종류의 생명 계획, 즉 살아 있는 물질의 번식을 형성하는 근본적 배치가 있다. 오르본톤 생명 원본은 열두 가지 유전 운반자로서 배치되어 있다. 의지를 가진 다른 계급의 생물은 12ㆍ24ㆍ48ㆍ96ㆍ192ㆍ384ㆍ768개로 배치되어 있다. 유란시아에는 인간의 번식하는 성(性)세포 안에 48개의 원본 통제 단위―특성을 결정하는 인자(因子)―가 있다.
36:2.12 (397.12) 제2 세계는 생명을 설계하는 구체이다. 여기서 생명 조직의 모든 새로운 형태가 작성된다. 창조 아들이 최초 생명의 초안을 마련해주지만, 이 초안의 실제 운영은 생명 운반자와 그 동료들에게 맡겨진다. 새 세계를 위하여 일반 생명 계획을 세우고 나서, 계획은 본부 구체로 전달되며, 거기서 상담하는 멜기세덱 집단과 합작하여, 선임 생명 운반자들의 최고 회의에서 샅샅이 검토된다. 계획이 이전에 승인받은 공식을 벗어나면, 그 계획은 창조 아들에게 회부되어 승인을 받아야 한다. 멜기세덱의 우두머리는 가끔 이러한 심의에서 창조 아들을 대표한다.
36:2.13 (397.13) 따라서, 행성의 생명은 어떤 면에서 비슷한 반면에, 각 진화 세계에서 여러 면에서 다르다. 단일 집단의 세계들 중에 균일한 생명 계열에서도, 생명은 어느 두 행성에서도 반드시 똑같다고 할 수 없다. 언제나 행성 종류가 있는데, 생명 운반자들이 그들에게 보관하라고 맡긴 생명 공식(公式)을 개량하려고 항상 노력을 쏟기 때문이다.
36:2.14 (398.1) 생명을 겉으로 명시하는 부모 원본과 수많은 기본적 기능의 변종을 구성하는 기초 공식, 곧 우주의 화학 공식은 1백만이 넘는다. 생명을 계획하는 구체의 1번 위성은 생명 운반자들을 돕는 기술자로서 근무하는 우주 물리학자와 전기 화학자들이 일하는 분야이며, 그들은 생명을 전하는 물질적 몸, 이른바 생식질(生殖質)을 만드는 데 고용되는 기본 에너지 단위를 포착하고, 조직하고, 조종하는 일에 종사한다.
36:2.15 (398.2) 행성의 생명 계획 실험실은 이 2번 세계의 둘째 위성에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실험실에서 생명 운반자들과 그 모든 동료는 네바돈의 십일 행성에 심으려고 고안한 생명을 수정하고 아마도 개량하려는 노력으로, 멜기세덱들과 함께 일한다. 열 행성마다 한 행성에서, 다른 (비실험) 세계들보다 표준 생명을 설계하는 데 더 큰 변화가 허락된다.
36:2.16 (398.3) 제3 세계는 생명의 보존에 몰두한다. 여기서 생명 운반자 군단의 조수와 관리자들이, 생명을 보호하고 보존하는 다양한 방식을 연구하고 개발한다. 모든 새 세계의 생명 계획은 언제나 생명 보존 위원회가 일찍 정착하도록 마련해 주는데, 이 위원회는 기초 생명 원본을 솜씨 있게 조종하는 관리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유란시아에는 생명 물질의 구조를 만드는 기초 원본, 곧 부모 원본마다 둘씩, 그러한 관리 위원이 24명 있었다. 너희 행성과 같은 행성들에서 가장 높은 형태의 생명은 24 원본 단위를 소유하는, 생명을 운반하는 다발로 재생산된다. (그리고 지적 생명이 육체의 생명으로부터, 그리고 그 기초 위에 자라니까, 정신 조직의 24 가지 기본 계급이 생기게 된다.)
36:2.17 (398.4) 제4 구체와 그 종속 위성들은 일반적으로 생물 생명의 진화를 연구하는 데, 그리고 특히 어느 한 생명 수준의 진화적 선행(先行) 조건에, 전념한다. 한 진화 세계에서 최초의 생명 세포질은 모든 미래의 발전하는 변종을 위해, 그리고 차후에 일어날 진화적 변화와 수정을 위하여 충분한 잠재성을 포함해야 한다. 생명을 변형시키는 그러한 원대한 사업 계획의 준비는, 쓸모 없이 보이는 동물 및 식물 생명 형태가 많이 나타나는 것을 필요하게 만들지 모른다. 예상되었든 그렇지 않았든, 행성의 진화에서 생기는 그런 부산물은 활동 무대에 오로지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그러나 이 긴 과정 전체에서, 그를 통해서, 행성의 생명 초안과 종자(種子) 계획을 최초로 세운 자들의 현명하고도 총명한 여러 고안이 연결된다. 하등 형태의 생명을 정복하려는 고등 인간이 위로 올라가는 긴 투쟁에서 이따금, 겉보기에 큰 부조화가 지배할지 모르지만, 그런데도, 생물학상의 진화에서 생기는 다양한 부산물은 모두, 상급의 총명한 생명 형태가 마침내, 완전히 활동하는 데 꼭 필요하며, 이따금 많은 하등 생명의 종류는 의지를 가진 진화 인간의 평화와 위안에 아주 해롭다.
36:2.18 (398.5) 제5 세계는 지성과 관련된 생명에 온통 관심을 둔다. 그 위성들은 각각, 생물의 생활과 서로 관련된, 단일 단계의 생물 지성을 연구하는 데 전념한다. 사람이 이해하는 것과 같은 지성은, 가르칠 수 없는 수준, 곧 기계 수준의 지성(知性) 위에, 무한한 영이 중개함으로 일곱 보조 지성 영을 부여한 것이다. 생명의 원본들은 이 보조자들에 대하여, 그리고 시공 우주에 두루 작용하는 다른 영 봉사에 다양하게 반응한다. 물질 인간이 영에 대하여 반응하는 능력은 전적으로 관계된 지성 자질에 달려 있고, 이것은 다시 바로 이 필사 인간이 어떤 방향으로 생물학적으로 진화하는가 그 과정을 정해 왔다.
36:2.19 (399.1) 제6 세계는 지성과 영이 살아 있는 형태 및 유기체들과 관계되는 그러한 지성 및 영의 상관 관계에 전념한다. 이 세계와 그 여섯 종속 위성은 여러 생물 조정 학교를 포함하며, 여기서 중앙 우주와 초우주에서 온 선생들이 시공에서 생물이 달성하는 가장 높은 수준을 제시하는 과제에 네바돈 강사(講師)들과 협동한다.
36:2.20 (399.2) 생명 운반자의 제7 구체는 최상 존재의 현실화가 확대되는 우주 철학과 관계되다시피, 진화하는 인간 생명의 밝혀지지 않은 분야에 전념한다.
36:3.1 (399.3) 생명은 우주에서 저절로 나타나지 않는다. 생명 운반자들이 불모의 행성에서 생명을 비롯해야 한다. 그들은 공간의 진화 세계에서 출현하는 생명의 운반자요, 파종자요, 보호자이다. 유란시아에서 알려진 모든 계급과 형태의 생명은 이 아들들과 함께 일어난다. 하지만 모든 형태의 행성 생명이 유란시아에 존재하지는 않는다.
36:3.2 (399.4) 새로운 세계에 생명을 심으라고 위임받은 생명 운반자 군단은 보통 선임 운반자 1백 명, 조수 1백 명, 관리자 1천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명 운반자들은 가끔 새로운 세계까지 실제 생명 원형질을 나르지만, 반드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생명을 정착시키는 새 모험을 위하여, 이전에 승인된 공식(公式)에 따라서, 그들은 배치받은 행성에 도착하고 난 뒤에 때때로 생명 원본들을 조직한다. 유란시아에서 행성 생명의 기원이 그러했다.
36:3.3 (399.5) 인가받은 공식에 따라서, 물리적 원본들이 마련되고 나서, 생명 운반자들은 이 생명 없는 물질을 자극하며, 그들의 몸을 통해서 생명에 필요한 영의 불꽃을 뿌려 준다. 그러면 당장에 활기 없는 원본들이 살아 있는 물질이 된다.
36:3.4 (399.6) 생명을 주는 불꽃―생명의 신비―는 생명 운반자들이 수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수여된다. 그들은 정말로 그러한 행위를 감독하며, 생명 원형질 그 자체를 빚어내지만, 살아 있는 원형질의 필수 요인을 공급하는 이는 우주 어머니 영이다. 무한한 영의 창조 딸로부터, 몸에 생기를 불어넣고 지성을 예시(豫示)하는 에너지 불꽃이 온다.
36:3.5 (399.7) 생명을 수여할 때 생명 운반자들은, 새 계급의 생명을 기획하는 구체에서도, 그들 개인의 성품을 전혀 전달하지 않는다. 그런 때에 그들은 다만 생명의 불꽃을 시작하고 전달하며, 예정된 계획 및 원본의 물리ㆍ화학ㆍ전기적 명세에 따라서, 필요한 물질의 회전을 시작한다. 생명 운반자들은 살아 있는 촉매 같은 존재이며, 이들이 아니면 생기가 없는 물질 계급 존재의 요소들을 휘젓고, 조직하고, 활기를 준다.
36:3.6 (400.1) 한 행성의 생명 운반자 집단에게 새 세계에서 생명을 정착시키는 데 일정한 기간, 그 행성 시간으로 약 50만 년이 주어진다. 행성 생명이 어떤 상태까지 발전하면 이 기간이 끝났음을 가리키는데, 이때 그들은 생명을 심는 노력을 그만두고, 그 뒤에 그 행성의 생명에 어떤 새로운 것이나 보완하는 것도 더해서는 안 된다.
36:3.7 (400.2) 생명이 정착하는 것과 도덕적 지위를 가진 인간이 출현하는 사이에 끼는 시대에 생명 운반자들은 생활 환경을 조종하고 그 밖에도 생물학적 진화 과정의 방향을 유리하게 지향하는 것이 허락된다. 그리고 그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이렇게 한다.
36:3.8 (400.3) 새로운 세계에서 활동하는 생명 운반자들이 의지(意志), 곧 도덕적 결정을 내리고 영적으로 선택하는 힘을 가진 존재를 생산하는 데 일단 성공하고 나서, 그때 거기서, 그들의 할 일은 종료된다―할 일이 끝난 것이다. 그들은 진화 생명을 이제 더 조종해서는 안 된다. 이 시점부터 죽, 살아 있는 존재들의 진화는 행성 생명의 공식 및 원본에, 이미 심고 안정된, 선천적 성질 및 경향이 부여된 데 따라서 진행되어야 한다. 생명 운반자들은 의지를 실험하거나 간섭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으며, 그들은 도덕적 인간을 지배하거나 그들에게 멋대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36:3.9 (400.4) 행성 영주가 도착하고 나서, 그들은 떠나려고 준비한다. 하지만 선임 운반자 2명과 관리자 12명은 임시 포기를 서약함으로, 생명 원형질을 계속 개발하고 보존하는 문제에 조언자로서 그 행성에 무기한으로 남기를 자원해도 좋다. 그러한 두 아들과 그 동료 12명이 지금 유란시아에서 근무하고 있다.
36:4.1 (400.5) 네바돈 전체를 통해서 사람이 사는 세계들의 지역 체계는 어디에나, 멜기세덱이 생명 운반자로서 활동해 온 구체가 하나 있다. 이 거처들은 체계의 중간 한계자 세계로 알려져 있으며, 각 세계에는 물질적으로 수정된 멜기세덱 아들이 물질 아들 계급 중에서 뽑힌 한 딸과 짝을 지었다. 그러한 중간 한계자 세계의 어머니 이브는 관할하는 체계 본부로부터 파송되며, 체계 군주가 자기 구체의 물질 딸들에게 보낸 요청에 응답하는 수많은 자원자들 중에서, 지정된 멜기세덱 생명 운반자가 그런 어머니 이브를 선택한다.
36:4.2 (400.6) 멜기세덱 생명 운반자와 물질 딸의 후손은 중간 한계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고매한 생물 종족의 멜기세덱 아버지는 그가 독특한 생명 노릇을 한 그 행성을 결국 떠나며, 이 특별 계급 우주 존재들의 어머니 이브도 행성에서 낳은 자손의 제7 세대가 나타나면 떠난다. 그리고 나서 그러한 세계의 지휘는 이브의 큰아들에게 돌아간다.
36:4.3 (400.7) 중간 한계 생물은 표준년으로 1천 살이 될 때까지 그들의 웅장한 세계에서 번식하는 존재로 살고 활동하며, 1천 살이 되고 나서, 그들은 천사 수송으로 옮겨진다. 그 뒤에 중간 한계자는 자식 낳지 않는 존재인데, 천사에게 둘러싸이는 준비로 그들이 거치는 비물질화 기법이 번식 특권을 영원히 빼앗기 때문이다.
36:4.4 (400.8) 이 존재들의 현재 지위는 도저히 필사나 불멸(不滅)이라고 여기기 어렵고, 그들을 인간이나 신으로 분명히 분류할 수도 없다. 이 생물에게는 조절자가 깃들지 않으며, 따라서 불멸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들이 반드시 죽는 듯하지도 않다. 아무 중간 한계자도 죽음을 겪은 적이 없다. 네바돈에서 태어난 모든 중간 한계자가 오늘날도 살아 있고, 그들이 태어난 세계나, 중간에 개재하는 어떤 구체에서나, 아니면 구원자별의 최후자 집단 세계의 중간 한계자 구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36:4.5 (401.1) 구원자별의 최후자 세계. 멜기세덱 생명 운반자 및 그와 관계된 어머니 이브들은 체계의 중간 한계자 구체로부터 구원자별 회로의 최후자 세계들로 가며, 거기서 그들의 자손이 또한 집결하기로 정해져 있다.
36:4.6 (401.2) 이러한 맥락에서, 구원자별 회로에서 제5 집단의 일곱 주요 세계는 네바돈의 최후자 세계라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멜기세덱 생명 운반자와 물질 딸들의 자손은 최후자의 일곱째 세계, 곧 구원자별의 중간 한계자 구체에 주소를 가진다.
36:4.7 (401.3) 최후자의 일곱 주요 세계의 위성들은, 네바돈에서 임무를 수행할지도 모르는, 초우주 및 중앙 우주 성격자들이 만나는 장소이다. 하늘 가는 필사자는 멜기세덱 대학을 구성하는 490 세계 중에서 어떤 문화 세계나 훈련 구체에도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반면에, 그들이 들어가도록 허락받지 않은 어떤 특별 학교와 수많은 금지된 지대가 있다. 이런 제한은 특히, 최후자의 관할 밑에 있는 49 구체에서 참말이다.
36:4.8 (401.4) 중간 한계 생물의 목적은 현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주 진화에서 이 성격자들이 어떤 미래 사태를 위한 준비로 제7 최후자 세계에서 집합하는 듯 보일 것이다. 중간 한계자 종족에 관하여 우리가 질문하면 언제나 최후자들에게 넘겨지는데, 그들은 언제나 피보호자의 운명에 관하여 입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중간 한계자들의 미래를 우리가 확실히 모르는 것과 상관 없이, 오르본톤의 지역 우주마다 신비스런 이 존재들의 누적되는 군단을 두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멜기세덱 생명 운반자들은 언젠가 궁극위 하나님이 그들의 중간 한계 자식들에게 초월적이고 영원한 초한(超限) 영을 부여할 것이라고 믿는다.
36:5.1 (401.5) 원시 세계에서 일곱 보조 지성 영의 계심은 유기체의 진화 과정을 조절한다. 이것이 왜 진화가 목적이 있고 우연히 생기지 않는가 설명한다. 이 보조자들은,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의 작용을 통해서, 하등 계급의 지적 생명에게 연장되는 무한한 영이 지성에 봉사하는 기능을 대표한다. 이 보조자들은 우주 어머니 영의 자식이요, 그 영역의 물질 지성에게 그가 몸소 베푸는 봉사이다. 그러한 지성이 나타나는 곳은 언제, 어디서나 이 영들이 여러 가지로 활동하고 있다.
36:5.2 (401.6) 일곱 보조 지성 영을 다음 명칭에 해당하는 이름으로 부른다: 직관ㆍ이해ㆍ용기ㆍ지식ㆍ상담ㆍ예배ㆍ지혜. 이 지성 영들은 다른 충동으로서 그들의 영향을 사람이 사는 모든 세계에 보내며, 어느 정도 동료 영들이 수용되고 활동할 기회를 찾는 것과 따로, 각자가 표현의 수용 능력을 추구한다.
36:5.3 (401.7) 생명 운반자의 본부 세계에서 보조 영들의 중앙 거처는, 어떤 세계에, 지능 지위를 가진 어떤 일정한 산 유기체 안에서도, 그 보조자들의 지성이 활동하는 범위와 질을, 감독하는 생명 운반자들에게 표시해 준다. 이러한 생명 및 지성의 배치는 처음 다섯 보조자의 살아 있는 지성이 작용함을 가리키는 완전한 지표(指標)이다. 그러나 제6 및 제7 보조 영―예배와 지혜―에 관해서 말하면, 이 중앙 거점은 다만 질적 작용만 기록한다. 예배 보조자와 지혜 보조자의 양적(量的) 활동은 구원자별에서 신성한 봉사자가 계신 바로 그 앞에 기록되며, 우주 어머니 영이 몸소 겪는 체험이 된다.
36:5.4 (402.1) 일곱 보조 지성 영은 새 행성까지 언제나 생명 운반자들을 따라가지만, 그들을 개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오히려 회로(回路)에 더 가깝다. 일곱 우주 보조자의 영들은 신성한 봉사자의 우주 계심과 동떨어진 성격자로서 활동하지 않는다. 사실, 그들은 신성한 봉사자의 한 의식 수준이며, 언제나 그들을 창조한 어머니의 행동과 계심에 지배된다.
36:5.5 (402.2) 우리는 이 일곱 보조 지성 영을 적절히 부를 낱말이 없어 지장을 받고 있다. 그들은 하위 수준의 체험적 지성에게 봉사하는 자이며, 진화로 달성하는 순서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묘사해도 좋다.
36:5.6 (402.3) 1. 직관(直觀)의 영―지성을 가진 모든 생물의 재빨리 파악하는 성질, 원시적ㆍ물리적ㆍ선천적인 반사(反射) 본능, 그리고 방향을 알고 기타 자아를 보존하는 자질. 이것은 하등 동물의 생명에서 아주 널리 활동하는 유일한 보조자이며, 가르칠 수 없는 기계적 지성 수준과 광범위하게 기능적으로 접촉하는 유일한 보조자이다.
36:5.7 (402.4) 2. 이해의 영―조정하려는 충동, 저절로 그리고 겉보기에 자동으로 관념을 연결하는 것. 이것은 얻은 지식을 조정하는 재능이요, 빨리 추리하고, 재빨리 판단하고, 즉시 결정을 내리는 현상이다.
36:5.8 (402.5) 3. 용기의 영―충실의 자질―은 인격 존재에서 인품을 얻는 기초요, 도덕적 체력과 영적 용기의 지적 뿌리가 된다. 사실을 보고 깨우치고, 진리에 영감을 받을 때, 이것은 총명하게, 양심적으로, 스스로 방향을 찾는 경로를 거쳐서 진화로 승천하려는 욕구의 비결이 된다.
36:5.9 (402.6) 4. 지식의 영―모험하고 발견하려는 호기심의 근원, 곧 과학적 정신. 용기와 상담의 영들의 안내자이며 충실한 동료이다. 용기의 자질을 유익하고 진취적인 성장의 길로 지도하는 욕구.
36:5.10 (402.7) 5. 상담의 영―사회적 욕구, 종(種)의 협동하는 자질, 의지(意志)를 가진 인간이 동포와 어울리는 능력, 하등 생물 사이에서 사교(社交)하는 본능의 기원.
36:5.11 (402.8) 6. 예배의 영―종교적 충동, 지능을 가진 인간을 두 가지 기본 등급의 필사 존재로 분리하는, 동물과 구별하는 이 첫째 욕구. 예배의 영은 관련된 동물을 지성 자질이 있어도 혼이 없는 인간과 영원히 구별한다. 신을 예배하는 것은 영적으로 올라가는 후보자의 자격이 있음을 상징한다.
36:5.12 (402.9) 7. 지혜의 영―모든 도덕적 인간이 질서 있게, 점진적으로 진화하여 올라가는 타고난 경향. 이것은 보조자들 중에서 가장 높고, 모든 다른 보조자의 일을 조정하고 표현하는 영이다. 이 영은 존재의 올라가는 눈금에서 실용적이고 효과적인 순서를 시작하고 유지하는 욕구, 지능을 가진 인간의 바로 그 선천적 욕구의 비밀이다. 살아 있는 것들의 이 재능은, 그들의 설명할 수 없는 살아남는 능력, 그리고 살아남아서, 관계된 유기체의 지성 속에서 모든 다른 여섯 지성 봉사자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얻기 위하여, 그들의 모든 과거의 체험과 현재의 기회를 조정하는 능력을 설명한다. 지혜는 지적 성취의 절정(絶頂)이다. 지혜는 순전히 정신적ㆍ도덕적 존재가 달성할 목표이다.
36:5.13 (403.1) 보조 지성 영들은 체험으로 성장하지만, 결코 성격을 가지게 되지 않는다. 그들의 기능은 진화하며, 동물 계급에 있는 처음 다섯 기능은, 모두 일곱이 인간의 지능으로서 활동하는 데 어느 정도까지 필수이다. 동물과 이 관계를 가지는 것은 보조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지성으로서 실질적으로 더 효과 있게 만든다. 따라서 어느 정도까지, 동물은 사람의 신체의 진화 뿐 아니라, 지적 진화에 필수이다.
36:5.14 (403.2) 동력 중심 및 물리 통제자들이 우주에 생명이 없는 물력을 보살피다시피,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의 이 지성 보조자들은 지적(知的) 지위를 가진 인간 생명을 보살핀다. 지성 보조자들은 사람이 사는 세계의 지성 회로에서 귀중한 봉사를 수행하며, 물리 통제사와 공동으로 유능하게 일한다. 이 물리 통제사는 또한 보조자 이전의 지성 수준, 가르칠 수 없는 지성, 곧 기계적 지성 수준에서 통제자와 지휘자로서 일한다.
36:5.15 (403.3) 체험을 통해서 배우는 능력이 나타나기 전에, 살아 있는 지성은 물리 통제사들이 봉사하는 분야이다. 인간의 지성은, 신성을 인식하고 신을 예배하는 능력을 얻기 전에 보조 영들의 독점 영토이다. 사람의 지능이 영적 반응을 나타내면, 그러한 창조된 지성들은 당장에 초월 지성을 가지며, 한 순간에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의 영적 회로 안으로 들어온다.
36:5.16 (403.4) 신성한 봉사자는 사람이 사는 세계의 성령이며, 보조 지성 영들은 그의 몸소 계시는 영의 다양하고 상당히 영적인 기능과 어떤 면에서도 직접 관련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진화하는 사람 안에서 바로 이 영이 출현하는 것보다 기능적으로 선행(先行)하며 그 출현을 위하여 준비한다. 보조자들은 우주 어머니 영으로 하여금 한 지역 우주의 살아 있는 물질 생물과 다양한 접촉을 가지게 하며, 그들을 통제하게 한다. 그러나 선(先)인격 수준에서 활동할 때, 그들은 최상 존재 안에서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36:5.17 (403.5) 비영적 지성은 영 에너지의 명시이든지 아니면 물리적 에너지의 현상이다. 인간의 지성은, 인격을 가진 지성조차도, 영과 일체가 된 것을 제외하고, 전혀 살아남는 품질이 없다. 지성은 신이 수여한 것이지만, 영 통찰력이 없이 활동할 때, 신을 예배하고 살아남기를 갈망하는 능력이 결여될 때, 지성은 불멸(不滅)하지 않는다.
36:6.1 (403.6) 생명은 기계론과 활력론(活力論)을[1] [1670] 따른다―물리적ㆍ영적이다. 유란시아의 물리학자ㆍ화학자들은 원형질 형태의 식물과 동물 생명을 이해하는 데 늘 진보하겠지만, 결코 살아 있는 유기체를 만들어낼 수 없다. 생명은 모든 에너지 명시와 다른 어떤 것이다. 육체를 가진 생물의 물질적 생명조차도 물질에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36:6.2 (403.7) 물질인 사물은 독립된 존재를 누릴지 모르지만, 생명은 오로지 생명으로부터 솟아나온다. 지성은 오로지 선재(先在)하는 지성으로부터 파생될 수 있다. 영은 오로지 영 조상에서 기원이 생긴다. 생물은 생명의 형태를 생산할지 모르지만, 오로지 창조하는 성격자나 창조적 물력이, 활성을 주는 살아 있는 불꽃을 공급할 수 있다.
36:6.3 (404.1) 생명 운반자들은 살아 있는 존재의 물질적 형태, 곧 물리적 모습을 조직할 수 있지만, 영은 생명의 첫 불꽃을 마련해주고 지성의 자질을 부여한다. 생명 운반자들이 구원자별의 여러 세계에서 조립하는, 실험 생명의 살아 있는 형태조차 번식하는 능력이 반드시 결핍되어 있다. 생명의 공식과 생체의 원본이 바르게 조립되고 적당히 조직될 때, 한 생명 운반자의 계심은 생명을 시작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러한 살아 있는 모든 유기체는 두 가지 필수 속성이 빠져 있다―지성의 재산과 생식 능력이다. 동물의 지성과 인간의 지성은 일곱 보조 지성 영을 통해서 활동하는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이 내리는 선물이다. 한편 생물의 번식 능력은 생명 운반자들이 개시한, 시조(始祖) 생명 원형질에 우주 영이 특유하게 친히 나누어준 것이다.
36:6.4 (404.2) 생명 운반자들이 생명의 원본을 설계했을 때, 에너지 체계를 조립한 뒤에, 추가 현상이 하나 일어나야 한다. “생명의 입김”을 생명이 없는 이 형태에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생명의 형태를 만들 수 있지만, 생명력의 불꽃을 정말로 기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다. 그리고 이렇게 나누어준 생명을 다 써버렸을 때, 남아 있는 물질 몸은 다시 죽은 덩어리가 된다. 수여된 생명을 써버렸을 때, 몸은 물질 우주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 몸은 그러한 에너지 물질의 눈에 보이는 연합에 생명 운반자들이 건네준 그 생명 재산이 일시 타고 다닐 것으로서 쓰이도록 생명 운반자들이 물질 우주로부터 빌려 온 것이다.
36:6.5 (404.3) 생명 운반자가 식물과 동물에게 준 생명은 그 식물이나 동물이 죽고 나서 생명 운반자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한 살아 있는 물건을 떠나는 생명은 신분(身分)도 성격도 없다. 그런 생명은 죽은 뒤에 개별적으로 남지 않는다. 물질의 몸 속에서 존재하고 머무르는 동안에, 생명은 변화를 겪었다. 생명은 에너지의 진화를 거쳤으며, 지역 우주에서 오직 우주 물력의 일부로서 살아남고, 개체의 생명으로서 살아남지 않는다. 필사 인간이 살아남는 것은 필사 지성 안에 있는 불멸(不滅)의 혼이 진화하는가에 온전히 달려 있다.
36:6.6 (404.4) 우리는 생명을 “에너지”라, “물력”이라 언급하지만, 생명은 정말로 어느 쪽도 아니다. 물력과 에너지는 다르게 인력에 반응하지만, 생명은 그렇지 않다. 형태도 또한 인력에 민감하지 않으며, 형태는 인력에 민감한 모든 부채(負債)를 이미 치른 에너지를 배열한 것이다. 생명은 그 자체로서 어떤 형태로 배열되거나, 아니면 분리된 에너지―물질, 정신, 또는 영적―체계에 활기를 불어 넣는 것이다.
36:6.7 (404.5) 여러 진화하는 행성에는 생명을 공들여 다듬는 것과 연결된 무엇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온전히 명백하지는 않다. 생명 운반자들의 전기 화학 공식을 따르는 물리적 조직을 우리는 완전히 이해한다. 그러나 생명을 활성화하는 불꽃의 성질과 근원을 우리가 전부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이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해서, 영의 길로 흘러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으뜸 영들이, 모든 창조에게 쏟아지는 생명의 강이 흐르는 일곱 길이라는 것은 가능성이 있고도 남는다. 그러나 감독하는 으뜸 영이 새로운 행성에서 생명을 수여하는 초기 사건에 어떤 방법으로 참여하는가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도 새 세계에서 생명을 비롯하는 이 일에 어떤 역할을 한다고 확신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슨 성질이 있는가 전혀 모른다. 우주 어머니 영이 생명이 없는 원본에 실제로 활기를 불어넣고 그러한 활성화된 원형질에 유기체의 번식 특권을 나누어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세 가지가 이따금 시공의 최상 창조자로 일컫는 칠중 하나님의 수준이라는 것을 우리는 관찰한다. 그러나 그밖에 우리는 유란시아 필사자보다 더 아는 것이 없다―다만 생각은 아버지 안에, 표현은 아들 안에, 생명의 실현은 영 안에 본래부터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36:6.8 (405.1) [감독하는 계시 군단의 멜기세덱 우두머리의 요청을 받고서, 관찰자로서 이 자격으로 활동하며 유란시아에 주둔하는 한 보론다덱 아들이 적었다.]
37:0.1 (406.1) 네바돈에서 모든 성격자의 꼭대기에는 창조자인 주 아들, 곧 지역 우주의 아버지이자 군주, 미가엘이 있다. 그와 신성(神性)이 동등하고 보완하는 창조 속성을 가진 분은 지역 우주 어머니 영, 곧 구원자별의 신성한 봉사자이다. 이 창조자들은 아주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네바돈의 모든 토착 생물의 아버지인 아들이며 어머니인 영이다.
37:0.2 (406.2) 앞에 있는 논문들은 창조된 계급의 아들들을 다루었다. 뒤잇는 이야기는 봉사하는 영과 하늘 가는 계급의 아들들을 묘사할 것이다. 이 논문은 주로 그 사이에 있는 집단, 우주 보조자들에 관한 것이지만 네바돈에 주둔하는 특정한 고급 영과 지역 우주에서 영구 시민권을 가진 어떤 계급도 간단히 고려할 것이다.
37:1.1 (406.3) 이 분류에 대체로 한데 모은 독특한 계급 중에서 다수는 밝혀지지 않지만, 이 논문에서 발표된 바와 같이, 우주 보조자는 다음 일곱 계급을 포함한다.
37:1.9 (406.11) 우주 보조자의 첫째 계급인 밝은 아침별은 각 지역 우주에 꼭 하나 있고, 그는 한 지역 우주에서 토착인 모든 생물 가운데 처음 태어난 자이다. 우리 우주의 밝은 아침별은 구원자별의 가브리엘로 알려져 있다. 그는 온 네바돈에서 최고 집행자이며, 군주 아들을 몸소 대표하는 자로서, 그리고 그의 창조 배우자의 대변자로서 활동한다.
37:1.10 (406.12) 네바돈의 초기 시절에 가브리엘은 미가엘과 창조 영과 더불어 아주 외롭게 일했다. 우주가 성장하고 행정 문제가 늘어나면서, 밝혀지지 않은 조수들로 구성된 개인 참모진이 그에게 제공되었고, 결국 이 집단은 네바돈의 저녁별 군단이 창조됨으로 확대되었다.
37:2.1 (407.1) 멜기세덱들이 이 찬란한 생물을 계획하였고, 그리고 나서 창조 아들과 창조 영이 이들을 낳았다. 그들은 여러 자격으로 일하지만, 주로 지역 우주의 최고 집행자 가브리엘의 연락 장교로서 일한다. 이 존재들이 한 명이나 그 이상 네바돈의 모든 별자리 및 체계의 서울에서, 그의 대표로서 활동한다.
37:2.2 (407.2) 네바돈의 최고 집행자로서, 가브리엘은 구원자별에서 열리는 대부분의 비밀 회의에서 직권상 의장이나 관찰자이며, 이 회의는 흔히 1천개나 동시에 열린다. 찬란한 저녁별은 이 경우에 가브리엘을 대표하는데, 그가 동시에 두 군데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이 초월 천사들이 이 한계를 보충한다. 그들은 삼위일체 교육 아들 군단을 위하여 비슷한 일을 수행한다.
37:2.3 (407.3) 친히 행정 임무에 전념하지만, 가브리엘은 찬란한 저녁별들을 통해서 모든 다른 단계의 우주 생명 및 사무와 접촉을 유지한다. 그가 행성으로 여행할 때 그들은 언제나 그를 동반하며, 빈번히 그의 개인 대표로서 개별 행성에 특별 임무를 띠고 간다. 그러한 임무에 그들은 가끔 “주의 천사”로서 알려져 왔다. 그들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법정과 집회 앞에 밝은 아침별을 대표하려고 유버르사로 빈번히 가지만, 오르본톤의 경계를 넘어서 여행하는 일은 드물다.
37:2.4 (407.4) 찬란한 저녁별은 독특한 2중 계급이며, 그런 직위로 창조된 자를 더러 포함하고, 나머지는 도달해서 봉사하는 계급이다. 네바돈의 이 초월 천사 군단은 이제 13,641명에 이른다. 창조된 직위를 가진 자가 4,832명 있고, 한편 8,809 명은 높이 봉사하는 이 목표에 도달한, 올라온 영이다. 이 올라온 저녁별의 다수는 우주 생애를 세라핌으로서 시작했고, 나머지는 밝혀지지 않은 수준의 생물 생명으로부터 올라갔다. 하나의 달성 목표로서, 한 우주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지 않는 한, 이 높은 군단은 올라가는 후보자들에게 결코 문이 닫혀 있지 않다.
37:2.5 (407.5) 두 종류의 찬란한 저녁별은 상물질 성격자 및 어떤 종류의 초인간 물질 존재들에게 쉽사리 눈에 뜨인다. 흥미 있고 다능한 이 계급 중에서 창조된 존재들은, 그들 개인의 계심과 상관 없이 겉으로 나타나는 영력을 소유한다.
37:2.6 (407.6) 이 초월 천사들의 우두머리는 가발리아인데, 그는 네바돈에서 이 계급 중에 처음으로 태어났다. 그리스도 미가엘이 유란시아에서 승리한 수여로부터 돌아온 뒤에, 가발리아는 하늘 가는 필사자에게 봉사하는 데 배치되었다. 유란시아 시간으로 최근의 1천 9백 년 동안 그의 동료 갈란시아가 예루셈에서 본부를 유지했는데, 거기서 그는 자기 시간의 약 절반을 보낸다. 갈란시아는 이 높은 지위를 처음으로 얻은, 올라가는 초월 천사이다.
37:2.7 (407.7) 버릇대로 여러 임무에 쌍으로 결합되는 것 외에, 찬란한 저녁별의 분류나 중대(中隊) 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필사자의 승천 생애에 관련된 임무에 광범위하게 배치되지 않지만, 그렇게 임명될 때, 결코 혼자 활동하지 않는다. 언제나 쌍을 이루어서 일한다―하나는 창조된 존재이며, 다른 하나는 올라간 저녁별이다.
37:2.8 (407.8) 저녁별의 높은 의무 중의 하나는,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자신을 수여할 때 가브리엘이 그를 동반한 것 같이, 아보날 수여 아들들이 행성에 임무를 띠고 갈 때 그들을 동반하는 것이다. 시중하는 두 초월 천사는 그러한 임무를 받는 높은 성격자이며, 천사장들과 이 사업에 배치된 모든 다른 자의 공동 사령관으로서 근무한다. 중요한 시기와 시대에 아보날 수여 아들에게, “당신의 형의 일을 돌보소서”하고 말하는 것은, 이 초월 천사인 선임 사령관이다.
37:2.9 (408.1) 비슷한 이 초월 천사 쌍들이, 사람 사는 한 세계에서 수여 이후 시대를 안정시키거나 영적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위해서 활동하는 삼위일체 교육 아들들의 행성 군단에 배치된다. 그러한 임무에 저녁별은 그 땅의 필사자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교육 아들 군단의 연락관으로서 근무한다.
37:2.10 (408.2) 저녁별의 세계. 구원자별의 제6 집단의 일곱 세계와 그에 속한 42 종속 위성은 찬란한 저녁별의 행정에 배치된다. 이 초월 천사들 중에서 창조된 계급은 일곱 주요 세계를 주관하며, 한편 올라온 저녁별들은 종속 위성들을 관리한다.
37:2.11 (408.3) 처음 세 세계의 위성들은 지역 우주의 영 성격자들에게 헌신하는 교육 아들과 저녁별들의 여러 학교에 전념한다. 다음 세 집단은 하늘 가는 필사자의 훈련에 몰두하는 비슷한 합동 학교들이 차지한다. 일곱째 세계의 위성들은 교육 아들, 저녁별, 최후자들의 삼자일치 심의를 위해서 남겨 둔다. 최근에 이 초월 천사들은 최후 군단의 지역 우주 작업과 밀접하게 일체가 되어 일해 왔고, 그들은 오랫동안 교육 아들들과 관계를 가져 왔다. 최후자 작업 집단에 부속된 저녁별과 인력 사자들 사이에는 엄청난 힘과 중요성을 가진 연락이 존재한다. 일곱째 주요 세계 자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문제들을 위하여 쓰지 않고 그냥 두었는데, 이 문제들은 최상위 하나님 성격의 초우주 명시(明示)가 완벽하게 출현한 결과로서, 교육 아들, 최후자, 저녁별들 사이에 생길 미래 관계와 상관된다.
37:3.1 (408.4) 천사장은 창조 아들과 우주 어머니 영의 자식이다. 그들은 한 지역 우주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높은 영 존재 중에서 가장 높은 종류이며, 최근에 등록할 당시에 거의 80만 명이 네바돈에 있었다.
37:3.2 (408.5) 천사장들은 보통, 가브리엘의 관할 밑에 있지 않은, 몇 안 되는 지역 우주 성격자 집단 중에 하나이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도 우주의 일상 행정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사람을 살아남게 하는 작업, 그리고 시공 필사자의 하늘 가는 생애를 촉진하는 데 헌신한다. 보통 때 밝은 아침별의 지휘 하에 있지 않아도, 천사장들은 가끔 그의 권한으로 활동한다. 너희 세계에서 생명을 이식(移植)하는 이야기에 묘사된 어떤 조치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그들은 또한 저녁별과 같은 다른 우주 보조자들과 함께 일한다.
37:3.3 (408.6) 네바돈의 천사장 군단을 이 계급에서 처음 태어난 자가 지휘하며, 최근에는 천사장의 분과 본부가 유란시아에서 유지되어 왔다. 네바돈 바깥에서 온 학생 방문자들의 눈길을 곧 끄는 것은 이 보기 드문 사실 때문이다. 그들이 우주 안의 거래들을 일찍 관찰한 것 중에서, 찬란한 저녁별들의 많은 승천 활동을 지역 체계 사타니아의 서울에서 지휘한다는 것을 이 방문객들은 발견한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서, 그들은 작고도 겉보기에 중요치 않은 유란시아라고 부르는, 사람 사는 세계에서 어떤 천사장 활동이 지휘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나서 유란시아에서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했다는 것이 드러나고, 즉시 그들은 너희에게, 그리고 너희의 비천한 구체에 관하여, 흥미를 돋우게 된다.
37:3.4 (409.1) 비천하고 혼란에 빠진 너희의 행성이, 파라다이스 승천 계획과 관련된 어떤 천사장 활동을 지역 우주가 관리하고 지휘하는 분과 본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가 너희는 깨닫는가?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한 세계에 다른 승천 활동이 미래에 집중된다는 것을 예시하며, “나는 다시 오리라”하고 주가 친히 하신 약속에 엄청나고 엄숙한 의미를 부여한다.
37:3.5 (409.2) 대체로, 천사장은 아보날 아들 계급의 근무와 봉사에 배치되지만, 이것은 봉사하는 여러 영이 행하는 모든 단계의 작업에 천사장이 광범위한 예비 훈련을 거치기 전에는 안 된다. 사람이 사는 세계로 가는 파라다이스 수여 아들에게는 누구나 1백 명의 군단이 따라가며, 그들은 그러한 수여가 끝날 때까지 그에게 임시로 배치된다. 심판 아들이 그 행성의 임시 통치자가 된다면, 이 천사장들은 그 구체에서 모든 하늘 생명을 지휘하는 우두머리로서 행동할 것이다.
37:3.6 (409.3) 어떤 행성 임무에서도, 사법 행위, 심판관 임무, 혹은 수여 육신화를 포함하는가와 상관 없이, 두 명의 선임 천사장이 파라다이스 아보날의 개인 조수로서 언제나 배치된다. 이 파라다이스 아들이 한 영역의 심판을 마치고, 죽은 자가 등록하도록 부름받을 때 (이른바 부활), 잠자는 성격자의 수호 천사들이 “천사장의 목소리”에 응답한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수행하는 천사장이 한 섭리 시대를 마치는 점호를 공포한다. 그가 부활의 천사장이며, 때때로 “미가엘의 천사장”이라 언급된다.
37:3.7 (409.4) 천사장 세계. 구원자별을 둘러싸는 제7 집단의 세계들은, 관계된 그 위성들과 함께 천사장들에게 배정된다. 1번 구체와 그 여섯 종속 위성은 모두 인격자 기록을 보관하는 자들이 차지한다. 이 엄청난 기록자 군단은, 필사자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주 생애를 거쳐서, 각 개인이 초우주 체제를 향하여 구원자별을 떠나든지 아니면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명령에 따라서 “기록된 존재로부터 지워질” 때까지, 그러한 시간 세계에서 온 필사자의 기록을 정리하느라고 분주하다.
37:3.8 (409.5) 바로 이 여러 세계에서, 필사자가 죽고 다시 인격화하는 그 시각, 곧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사이에 낀 기간에, 인격자의 기록과 신분 보증서들이 분류되고, 철이 되고, 보관된다.
37:4.1 (409.6) 최고 조수는 지역 우주 바깥에서 기원을 가진, 자원하는 존재들의 집단이며, 그들은 여러 지역 우주에 대하여 중앙 우주와 초우주를 대표하는 자로서, 또는 지역 우주 관찰자로서 임시 배치된다. 그들의 수는 항상 변하지만, 언제나 몇 백만이나 된다.
37:4.2 (409.7) 따라서 지혜 완성자, 신성한 조언자, 우주 검열자, 영감 받은 삼위일체 영, 삼위일체를 체험한 아들, 외톨 사자, 상천사, 2품 천사, 3품 천사들, 그리고 기타 인자한 봉사자들과 같이, 파라다이스 기원을 가진 존재들의 봉사와 도움을 받아 때때로 우리는 이득을 본다. 네바돈 전체를 오르본톤의 개념과 파라다이스의 이상과 더욱 조화시키려는 노력으로, 그들은 우리 본토 성격자들을 도우려고 우리와 함께 머무른다.
37:4.3 (410.1) 이 존재들 가운데 누구라도 네바돈에서 자원해서 근무하고 있을지 모르며,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의 관할권 바깥에 있다. 그러나 배치받아 활동할 때, 초우주와 중앙 우주에서 온 그러한 성격자들은 그들이 머무르는 지역 우주의 규제로부터 전적으로 면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더 높은 우주의 대표로서 계속 활동하고, 우리 영역에서 그들의 임무를 구성하는 지시에 따라서 일한다. 그들의 일반 본부의 위치는 구원자별에서 늘 하나된 이의 구역에 있고, 그들은 이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대사의 전반적 감독을 받으면서 네바돈에서 활동한다. 소속되지 않은 집단에서 근무할 때, 높은 영역에서 온 이 성격자들은 보통 자치하지만, 요청을 받고서 근무할 때, 그들은 흔히, 배치되어 활동하는 영역의 감독하는 지휘자들의 전적인 관할 밑으로 자진해서 들어온다.
37:4.4 (410.2) 최고 조수들은 지역 우주에서, 그리고 별자리 자격을 가지고 근무하지만, 체계나 행성의 정부에 직접 소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지역 우주에 어디서나 활동해도 좋으며 네바돈 활동의 어느 단계에도―행정ㆍ집행ㆍ교육 및 기타 분야에―배치되어도 좋다.
37:4.5 (410.3) 이 군단의 대부분은 네바돈의 파라다이스 성격자―늘 하나된 이, 창조 아들, 늘 충실한 이, 심판 아들, 삼위일체 교육 아들―들을 돕는 일에 모집된다. 이따금 한 지역 창조의 사무를 처리하면서, 그 지역 우주에서 거의 대부분의 토착 성격자들이 모르게 어떤 세부를 임시로 알리지 않는 것이 현명하게 된다. 어떤 진척된 계획과 까다로운 판결도 또한, 더 성숙하고 멀리 내다보는 최고 조수 집단이 더욱 잘 파악하고 자세히 이해한다. 그러한 상황 및 기타 여러 상황에 그들은 우주 통치자와 행정자들에게 상당히 쓸모가 있다.
37:5.1 (410.4) 고등 위원은 영이 융합한 필사자이다. 그들은 조절자와 융합되지 않는다. 너희는 조절자와 융합할 필사 후보자가 우주에서 올라 가는 생애에 관하여 잘 알고 있다. 이 융합은 그리스도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한 이후로, 유란시아 필사자는 누구나 기대하는 높은 운명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희 세계와 같은 세계에서, 수여 이전 시대에 모든 필사자의 유일한 운명은 아니다. 생각 조절자가 거주민에게 결코 영구히 깃들지 않는, 다른 종류의 세계가 있다. 그러한 필사자는 파라다이스에서 수여한 신비의 훈계자와 결코 영구히 결합되어 붙지 않는다. 그런데도 조절자는 일시 그들에게 깃들고, 육체를 입은 생명이 지속되는 동안에, 안내자와 원본으로서 봉사한다. 일시(一時) 이렇게 머무르는 동안, 그들이 융합하기를 희망하는 존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불멸하는 혼의 진화를 촉진한다. 그러나 필사자의 달리기가 끝났을 때, 그들은 일시 관계했던 인간을 영원히 떠난다.
37:5.2 (410.5) 이 계급에서 살아남는 혼은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의 개별화된 영 분신과 영원히 융합함으로 불멸을 얻는다. 적어도 네바돈에서, 그들은 다수인 집단은 아니다. 영이 융합한 필사자들이 구원자별까지 너희와 함께 파라다이스 길로 올라가는 동안, 너희는 여러 저택 세계에서 그들을 만나고 사귈 터인데, 그들은 구원자별에서 멈춘다. 그들 중에 더러는 나중에 더 높은 우주 수준까지 올라갈지 모르지만, 대다수는 언제까지나 지역 우주 근무에 남아 있을 것이다. 하나의 등급으로서, 그들은 파라다이스에 이르도록 예정되지 않았다.
37:5.3 (411.1) 조절자와 융합하지 않았으니까 결코 최후자가 되지 않지만, 그들은 궁극에 지역 우주의 완전 군단에 등록된다. 그들은 “너희는 완전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정신적으로 복종했다.
37:5.4 (411.2) 네바돈 완전 군단에 이른 뒤에, 영과 융합한 승천자들은 우주 보조자로서 임무를 받아들여도 좋은데, 이것은 그들에게 열려 있는, 계속해서 체험으로 성장하는 길 중의 하나이다. 이처럼, 그들은 물질 세계에서 진화하는 인간의 관점을 지역 우주의 하늘 당국에 풀이해 주는, 높은 직책을 가진 여러 위원회의 후보자가 된다.
37:5.5 (411.3) 고등 위원은 민족 위원으로서, 행성에서 그들의 근무를 시작한다. 이 자격으로 그들은 여러 인간 종족의 관점을 풀이하고 그들의 필요를 보여준다. 이 위원들은 그들이 대변하는 필사 민족의 복지에 최고로 헌신하며, 다른 민족들과 가지는 모든 관계에서 언제나 그들이 자비, 정의, 공정한 대우를 받게 하려고 애쓴다. 민족 위원들은 끝없이 연속되는 행성 위기에 활동하며, 투쟁하는 필사자 집단 전체의 의사를 분명히 표현하는 자로서 봉사한다.
37:5.6 (411.4) 사람이 사는 여러 세계에서 문제 해결에 오랜 경험을 쌓은 뒤에, 이 민족 위원들은 더 높은 기능 수준으로 진급되며, 결국에는 지역 우주의 고등 위원 지위를 거기서 얻는다. 최근의 등록부는 네바돈에 15억이 약간 넘는 이 고등 위원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그들은 최후자가 아니지만, 오랜 경험을 쌓은 올라가는 존재이며, 그들이 출생한 지역에서 크게 쓸모가 있다.
37:5.7 (411.5) 모든 재판하는 법정에서, 가장 낮은 데서부터 가장 높은 데까지, 변함없이 우리는 이 위원들을 발견한다. 그들이 재판 절차에 참여하기 때문이 아니라, 법정에서 친구로서 행동하며, 판결에 관련된 자들의 선행 조건, 환경, 선천적 성품에 관하여 주관하는 심판관들에게 조언한다.
37:5.8 (411.6) 고등 위원은 공간의 다양한 사자 무리에게, 그리고 시간 세계에서 봉사하는 영들에게 늘 소속된다. 여러 우주 집회의 순서에서 그들과 마주치게 되며, 필사자의 형편에 밝은 바로 이 위원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들의 공간 세계에 대한 임무에 부속된다.
37:5.9 (411.7) 공평과 응보의 정신이, 고려되고 있는 정책이나 절차가 시간 세계에서 진화하는 민족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때는 언제나, 이 위원들은 그들의 추천을 제시하려고 가까이 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말할 수 없는 자를 대변(代辯)하기 위하여 언제나 자리에 있다.
37:5.10 (411.8) 영이 융합한 필사자의 세계. 구원자별 회로에서 제8 집단의 일곱 주요 세계와 종속 위성들은 영이 융합한 네바돈 필사자들이 독점으로 소유한다. 영이 융합한 거주민에게 초대받은 손님으로서 유쾌하고 유익한, 많은 체류를 즐기는 것을 제외하고, 조절자가 융합한 하늘 가는 필사자는 이 세계들에 관여하지 않는다.
37:5.11 (411.9) 유버르사와 파라다이스에 이르는 소수를 제외하고, 이 세계들은 영이 융합한 생존자의 영구 거주지이다. 필사자가 올라가는 데 그렇게 일부러 한계를 지우는 것은 영구한 진화 인구(人口)의 유지를 보장함으로 지역 우주의 이익에 반응하며, 그들의 늘어나는 체험은 지역 우주 행정의 미래 안정과 다변화를 계속 향상시킬 것이다. 이 존재들은 파라다이스에 이르지 못할지 모르지만, 네바돈 문제들을 통달하는 일에 체험적 지혜를 얻으며, 이것은 잠깐 있다가 가는 승천자들이 성취한 어떤 것도 철저히 초과한다. 인간다운 것과 신다운 것의 독특한 조합으로서 살아남는 이 혼들은 계속 있으며, 널리 갈라진 이 두 수준의 관점을 더욱 통합하고, 항상 더 지혜롭게 그러한 2중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
37:6.1 (412.1) 삼위일체 교육 아들들과 멜기세덱 교육 군단이 합동으로 네바돈의 교육 체계를 관리하지만, 이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고안된 작업의 상당한 분량은 천상의 감독자들이 수행한다. 이 존재들은 하나의 모집된 군단이며, 하늘 가는 필사자를 교육하고 훈련하는 계획과 연결된 온갖 종류의 개인을 포함한다. 네바돈에는 그들의 수가 3백만이 넘는데, 그들은 모두 영역 전체에 교육하는 조언자로서 근무하도록 경험으로 자격을 갖춘 자원자이다. 멜기세덱의 구원자별 세계들에 있는 그들의 본부로부터, 하늘 가는 인간에게 지성을 훈련시키고 영적 교육을 실시하도록 설계된 네바돈 학교의 기술을 검사하는 자로서, 이 감독자들은 지역 우주를 돌아다닌다.
37:6.2 (412.2) 이 지성 훈련과 영 교육은 인간이 기원을 가진 세계로부터, 체계의 저택 세계, 그리고 예루셈과 연결된 다른 진보 구체들을 거쳐서, 에덴시아에 부속된 사교하는 70개 영역에서, 그리고 구원자별을 둘러싸는 490 구체에서 수행된다. 우주 본부 자체에는 수많은 멜기세덱 학교, 우주 아들들의 학부, 천사 대학, 그리고 교육 아들 및 늘 하나된 이의 학교들이 있다. 승진하는 근무와 개선된 활동을 위하여 우주의 다양한 성격자들이 자격을 갖추게 만들려고, 모든 가능한 준비가 마련된다. 우주 전체가 하나의 광대한 학교이다.
37:6.3 (412.3) 다수의 상급 학교에서 사용되는 방법은 진리를 가르치는 예술에 대한 인간의 개념을 능가하지만, 교육 체계 전체의 기조(基調)는 바로, 깨우친 체험으로 인품을 얻는 것이다. 선생들은 깨우침을 마련해 주며, 우주의 정거장과 승천자의 지위는 체험을 얻을 기회를 허락하고, 이 둘을 지혜롭게 이용하는 것은 튼튼한 인품을 기르게 한다.
37:6.4 (412.4) 근본적으로, 네바돈 교육 체계는 한 과제에 네가 배치되는 것을 준비하며, 다음에 그 과제를 최선으로 수행하는 이상(理想)과 신다운 방법에 관하여 교육받을 기회를 너에게 준다. 너는 수행할 분명한 과제를 받고, 동시에 너의 임무를 수행하는 최선의 방법을 가르칠 자격이 있는 선생들이 너에게 마련된다. 신의 교육 계획은 작업과 교육의 밀접한 관계를 마련해준다. 우리가 하라고 너에게 명하는 일을 어떻게 최선으로 수행하는가 우리는 너에게 가르친다.
37:6.5 (412.5) 이 모든 훈련과 체험을 거치는 목적은, 네가 초우주의 더 높고 더 영적인 훈련 구체들에 입학하도록 너를 준비시키는 것이다. 한 일정한 영역에서 진보는 개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이동하는 것은 보통, 학급 단위로 행해진다.
37:6.6 (412.6) 영원한 진보는 오로지 영적 발전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지식을 얻는 것도 우주 교육의 일부분이다. 지성의 체험은 영적 시야가 확대되는 것과 똑같이 넓어진다. 지성과 영에게, 훈련과 승진을 위하여 비슷한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지성과 영이 이 모든 훌륭한 훈련을 받는 가운데, 너는 필사 육체의 장애로부터 언제까지나 자유롭다. 너는 상반되는 너의 영적 성품과 물질 성품의 대립된 주장을 이제 더 늘 심판하지 않는다. 물질적인 것을 향하는 원시적 동물 성향을 빼앗긴 지 오랜 후에, 너는 마침내 영화롭게 된 지성의 통일된 욕구를 누릴 자격이 갖추어진다.
37:6.7 (413.1) 네바돈 우주를 떠나기 전에, 대부분의 유란시아 필사자는 네바돈의 천상의 감독자 군단의 단원으로서, 길거나 짧게 근무할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37:7.1 (413.2) 저택 세계 선생은 모집되고 영화롭게 된 케루빔이다. 네바돈에 있는 대부분의 다른 강사들처럼, 멜기세덱이 그들을 임명한다. 그들은 상물질 생명의 대부분의 교육 사업에서 활동하며, 그들의 수는 필사 지성이 이해하는 한계를 아주 뛰어넘는다.
37:7.2 (413.3) 케루빔과 사노빔이 도달하는 수준으로서 다음 논문에서 저택 세계 선생을 더 자세히 다루겠고, 한편 상물질 생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선생으로서 그들에 대하여 그 명칭을 가진 논문에서 더 널리 논의할 것이다.
37:8.1 (413.4) 동력 중심과 물리적 감독 외에도, 무한한 영의 집단에서 높은 기원을 가진 어떤 영 존재들은 지역 우주에 영구히 배치된다. 무한한 영 집단에서 높은 영 계급 가운데 다음 존재들이 그렇게 배치된다.
37:8.2 (413.5) 외톨 사자는 지역 우주 행정에 기능적으로 배치되었을 때, 우리가 시간과 공간의 장애를 극복하려고 애쓸 때, 우리에게 귀중한 봉사를 베푼다. 그들이 이렇게 배치되지 않았을 때, 지역 우주에서 우리는 그들에 대하여 절대로 아무 권한이 없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이 독특한 존재들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가 받은 명령을 집행하는 데 언제나 우리를 기쁘게 도우려 한다.
37:8.3 (413.6) 안도본시아는 우리 지역 우주에 머무르는 3차 우주 회로 감독자의 이름이다. 그는 오로지 영 및 상물질 회로에만 아랑곳하며, 동력 지휘자의 관할 밑에 있는 회로에 관심이 없다. 루시퍼 반란으로 시련을 받던 시절에, 칼리가스티아의 행성 배반이 일어났을 때, 바로 그가 유란시아를 고립시켰다. 유란시아 필사자들에게 안부를 전하면서, 그는 감독하는 우주 회로로 언젠가 너희가 회복될 것을 기대하며 기쁨을 표시한다.
37:8.4 (413.7) 네바돈의 통계 지휘자 살사시아는 구원자별의 가브리엘 구역 안에 본부를 유지한다. 그는 의지(意志)의 출생과 사망을 자동으로 의식하며, 지역 우주에서 활동하는, 의지를 가진 생물의 정확한 수를 지금 기록한다. 그는 천사장의 여러 기록 세계에서 거주하는, 성격자를 기록하는 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일한다.
37:8.5 (413.8) 한 부검열자가 구원자별에 거주한다. 그는 오르본톤의 최고 집행자의 개인적 대표이다. 지역 체계에 있는 그의 동료, 지정된 파수들도 또한 오르본톤의 최고 집행자의 대표이다.
37:8.6 (414.1) 우주 화해자들은 시공 우주에서 여행하는 법정이며, 진화 세계로부터 지역 우주의 모든 구역을 통해서, 그리고 거기를 지나서 활동한다. 이 심판들은 유버르사에 등록되어 있는데, 네바돈에서 활동하는 정확한 수는 기록에 없지만, 나는 우리 지역 우주 안에 화해 위원회가 약 1억이 있다고 추정한다.
37:8.7 (414.2) 법률 고문은 그 영역의 법적 지성이며, 그 중에서 우리는 네바돈에 할당받은 수, 약 5억 명을 가지고 있다. 이 존재들은 모든 공간에 있는, 살아 있고 순환하는 체험적 법률 도서관이다.
37:8.8 (414.3) 하늘 기록자는 올라가는 세라핌인데 우리는 네바돈에 75명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선임 기록자, 곧 감독하는 기록자이다. 이 계급 중에서 훈련을 받는, 진보하는 학생들은 거의 40억 명에 달한다.
37:8.9 (414.4) 7백억 명의 상물질 동반자가 네바돈에서 베푸는 봉사는 시간의 순례자들이 거치는 과도기 행성들을 다루는 이야기에서 설명한다.
37:8.10 (414.5) 각 우주는 그 자체에서 태어난 천사 군단을 거느리고 있다. 그런데도 지역 창조 바깥에서 기원을 가진 고등(高等) 영들의 도움이 매우 유익할 경우가 있다. 상천사들은 어떤 드물고도 독특한 수고를 해낸다. 유란시아 세라핌의 현재 우두머리는 파라다이스에서 온 1차 상천사이다. 초우주 직원이 활동하고 있는 곳은 어디서나, 반영하는 2품 천사와 마주치게 되며, 아주 많은 3품 천사들이 최고 조수로서 임시 근무에 종사한다.
37:9.1 (414.6) 초우주 및 중앙 우주와 마찬가지로, 지역 우주는 영구 시민 계급이 있다. 그들은 창조된 다음 종류를 포함한다.
37:9.6 (414.11) 지역 창조에서 태어난 이 원주민은 영이 융합한 승천자, 그리고 (다르게 분류되는) 영 일꾼들과 함께, 비교적 영구한 시민 계급을 구성한다. 이 계급의 존재들은 대체로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는다. 그들은 모두 체험하는 생물이지만, 늘어나는 체험은 그들의 기원이 있는 수준에서, 지역 우주에 계속 소용된다. 이것은 아담의 아들 및 중도인(中道人)들에게 전적으로 참말은 아니지만, 이 여러 계급에 비교적 진실이다.
37:9.7 (414.12) 수사시아. 이 놀라운 존재들은 이 지역 우주 본부, 구원자별에서 영구 시민으로 거주하고 활동한다. 그들은 창조 아들과 창조 영의 빛나는 자손이며 지역 우주의 올라 가는 시민, 곧 네바돈 완전 군단의 영 융합 필사자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37:9.8 (414.13) 일생자. 건축 구체인 1백 별자리 본부의 집단은 각각 일생자(一生者)로 알려진, 거주하는 등급의 존재들이 계속 베푸는 봉사를 누린다. 창조 아들과 창조 영이 낳은 이 아이들은 별자리 본부 세계의 영구한 인구이다. 그들은 체계 본부에 기거하는 물질 아들들의 반(半)물질 지위, 그리고 더 뚜렷하게 영적 수준에 있는 영 융합 필사자 및 구원자별의 수사시아 사이에, 대략 중간 생명 수준의 비생식(非生殖) 존재이다. 그러나 일생자는 상물질 존재는 아니다. 하보나 원주민이 중앙 우주를 거쳐 가는 영 순례자들에게 이바지하는 것을, 그들은 하늘 가는 필사자들이 별자리 구체들을 거쳐 가는 동안에 이들에게 해준다.
37:9.9 (415.1) 하나님의 물질 아들. 창조 아들과 우주 어머니 영, 곧 무한한 영의 우주 대표 사이의 창조적 연결이 그 주기(週期)를 마치고 나서, 통합된 성품을 가진 자손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때, 그때 창조 아들은 그의 마지막 존재 개념을 두 가지 형태로 성격화하며, 이처럼 마침내 자신이 최초에 2중 기원을 가졌음을 확인한다. 자신 안에서 스스로, 그는 물질 계급의 우주 아들 신분을 가진, 아름답고 훌륭한 아들과 딸들을 창조한다. 이것이 네바돈의 각 지역 체계에서 최초의 아담과 이브의 기원이다. 그들은 번식하는 계급의 아들이며, 남자와 여자로서 창조된다. 그들의 자손은 체계 서울에서 비교적 영구한 시민으로서 활동한다. 그러나 더러는 행성 아담으로 임명된다.
37:9.10 (415.2) 행성 임무를 띠고서 물질 아들과 딸은 그 세계의 아담 민족을 창시하기 위하여 임명되며, 이 민족은 결국 그 구체의 필사 거주자와 혼합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행성 아담은 내려오기도 하고 올라가기도 하는 아들이지만, 우리는 보통 그들을 올라가는 자로 분류한다.
37:9.11 (415.3) 중도인(中道人). 사람이 사는 대부분의 세계에서 초기 시절에, 초인간이지만 육체화된 어떤 존재들이 배치된다. 그러나 보통 그들은 행성 아담들이 도착한 뒤에 물러난다. 진화 종족들을 개량하려는 그러한 존재들의 행적과 물질 아들들의 노력은, 흔히 수가 제한되고 분류하기 힘든 생물의 출현을 초래한다. 이 독특한 존재들은 흔히, 물질 아들과 진화하는 인간의 중간에 있다. 그래서 그들의 명칭이 중도인이다. 비교적 의미로 이 중도자들은 진화 세계의 영구 시민이다. 행성 영주가 도착하는 초기 시대부터 그 행성이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는 그 아득한 시절까지, 그들은 그 구체에 줄곧 남아 있는 유일한 집단의 지적 존재이다. 유란시아에서 중도 봉사자들은 정말로, 행성의 실제 관리자이다. 실제로 말하자면, 그들은 유란시아 시민이다. 필사자는 한 진화 세계에서 육체가 있는 물질적 거주자이지만, 너희는 모두 너무나 잠시 산다. 너희는 태어난 행성에서 아주 짧게 머무른다. 너희는 태어나서, 살다가 죽고, 진화로 진보하는 다른 세계들로 옮긴다. 하늘의 봉사자로서 행성에서 근무하는 초인간 존재들도 일시 배치를 받으며, 그들 중 거의 아무도 일정한 구체에 오래 소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중도인은 늘 변하는 천상의 봉사와 늘 바뀌는 필사 거주자들이 있는 가운데 연속된 행성 행정을 마련해 준다. 결코 그치지 않는 이 변화와 변동을 통하여 내내, 중도인은 그 행성에 남아서, 끊임없이 할 일을 수행한다.
37:9.12 (415.4) 마찬가지 방법으로, 지역 우주 및 초우주 행정 조직의 모든 분과는 얼마큼 영구한 인구, 곧 시민 지위를 가진 거주자들을 가지고 있다. 유란시아가 중도자를 가진 것 같이 너희 체계의 서울 예루셈은 물질 아들과 딸이 있다. 너희의 별자리 본부 에덴시아는 일생자가 있으며, 한편 구원자별의 시민은 두 가지인데, 창조된 수사시아와 진화된 영 융합 필사자를 가지고 있다. 초우주의 소구역 및 대구역의 여러 행정 세계에는 영구(永久) 시민이 없다. 그러나 유버르사 본부 구체들은 아반돈터로 알려진 한 놀라운 존재 무리의 보살핌을 줄곧 받는데, 그들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밝혀지지 않은 대리자와 오르본톤 서울에 거주하는 일곱 거울 영이 창조한 것이다. 유버르사에서 거주하는 이 시민들은 현재 유버르사에 있는, 아들 융합 필사자 군단의 직접 감독을 받으면서 그들 세계의 일상 사무를 관리한다. 하보나도 거기에서 태어난 존재들이 있으며, 중앙에 빛과 생명의 섬은 여러 집단의 파라다이스 시민의 고향이다.
37:10.1 (416.1) 차후의 여러 논문에서 고려될 천사 및 필사 계급 외에, 네바돈 우주처럼 거대한 우주를 유지하고 완성시키는 데 관여하는 수많은 존재가 더 있으며, 네바돈은 지금도 사람 사는 세계들이 3백만이 넘게 있고, 1천만 세계가 될 전망이다. 다양한 네바돈 종류의 생명은 너무 수가 많아서 이 논문에서 목록을 작성할 수 없다. 그렇지만 지역 우주의 647,591개 건축 구체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하는 두 가지 특별한 계급이 있는데, 이들은 언급해도 좋다.
37:10.2 (416.2) 영 일꾼은 밝은 아침별과 아버지 멜기세덱의 영 자손이다. 그들은 성격 말소에서 면제되지만 진화하거나 하늘 가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진화로 올라가는 체제와도 기능적으로 관계가 없다. 그들은 지역 우주의 영 조수이며, 네바돈의 일상적 영 과제를 집행한다.
37:10.3 (416.3) 씨앗 일꾼. 지역 우주의 건축된 본부 세계들은 실재하는 세계이다―물리적 창조이다. 이 세계들의 물리적 관리와 연결된 일이 많이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씨앗 일꾼이라고 부르는 집단, 육체적 생물 집단의 도움을 받는다. 그들은 예루셈으로부터 구원자별에 이르기까지, 이 여러 본부 세계의 물질 단계의 보존과 문화에 전념한다. 씨앗 일꾼은 영도 성격자도 아니며, 그들은 동물 계급의 존재이지만, 너희가 그들을 볼 수 있다면, 그들이 완전한 동물로 보인다고 동의할 것이다.
37:10.4 (416.4) 여러 우대 거류지는 구원자별과 기타 장소에 거주한다. 별자리에서 하늘 예술가들이 베푸는 봉사로부터 우리는 특별히 혜택을 받으며, 회상 지도자들의 활동으로부터 이득을 얻는데, 그들은 주로 지역 체계 서울에서 활동한다.
37:10.5 (416.5) 영화롭게 된 중도인을 포함하여, 하늘 가는 필사자 집단이 언제나 우주 봉사에 부속되어 있다. 이 승천자들은, 구원자별에 도착한 이후로, 우주 사무를 운영하는 데 거의 끝없이 다양한 종류의 활동에서 이용된다. 각 달성 수준으로부터 승진하는 이 필사자들은 뒤와 밑으로 손을 뻗어서, 그들을 따라 위로 올라오는 동료들에게 도우려는 손길을 내민다. 구원자별에서 임시 머무르는 그러한 필사자들은 요청을 받고 나서, 거의 모든 군단의 하늘 성격자들에게 조수ㆍ학생, 관찰자ㆍ선생으로서 배치된다.
37:10.6 (416.6) 지역 우주의 행정에 관여하는 다른 부류의 지적 생명이 더 있지만, 이 이야기의 계획은 이 계급들의 생명에 대하여 더 밝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살아남아 존재하는 일이 실재하고 웅대한 것에 대하여 필사자의 머리가 파악할 만큼 이 우주의 생명과 행정은 여기에 충분히 묘사되었다. 너희의 승진하는 생애에서 연장된 체험은 흥미 있고 매력 있는 이 존재들을 점점 더 드러낼 것이다. 이 이야기는, 엄청난 훈련 학교로서 이 여러 세계를 관리하는, 공간의 여러 우주로 모여드는 다양한 성격자들의 성질과 하는 일에 관하여 간략한 줄거리밖에 될 수 없다. 이 여러 학교에서 시간의 순례자들이, 그들의 기원이 있는 우주의 경계로부터 초우주의 더 높은 교육 체제로, 거기서부터 계속하여 하보나의 영 훈련 세계로, 궁극에 파라다이스까지, 그리고 최후자의 높은 운명으로 그들이 사랑을 받으면서 파송될 때까지, 한 생명에서 다른 생명으로,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진급한다. 이 높은 운명은 시공의 여러 우주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임무로 영원히 배치받는 것이다.
38:0.1 (418.1) 무한한 영의 성격자들은 세 가지 구별되는 계급이 있다. “그가 하늘에 올라가셨고, 하나님 바른 편에 계시며, 천사와 권위자와 능력자들이 그에게 굴복하더라”하고 성급한 사도가 예수에 관하여 기록했을 때 그는 이를 이해했다. 천사는 시간 세계에서 봉사를 베푸는 영이며, 권위자는 공간의 사자(使者)요, 능력자는 무한한 영의 고등 성격자이다.
38:0.2 (418.2) 중앙 우주에 있는 상천사와 초우주에 있는 2품 천사들 같이, 세라핌은 관련된 케루빔 및 사노빔과 더불어, 지역 우주의 천사 군단을 구성한다.
38:0.3 (418.3) 세라핌은 모두 상당히 한결같게 설계된다. 한 우주와 다른 우주 사이에, 일곱 초우주 전체를 통해서, 세라핌은 최소한의 변화를 보인다. 모든 영 종류의 성격 존재들 중에서 세라핌은 가장 표준에 가깝다. 그들의 다양한 계급은 지역 창조에서 숙련된 평범한 봉사자 군단을 구성한다.
38:1.1 (418.4) 우주 어머니 영이 세라핌을 창조하며, 네바돈의 초기 시절에 “원본 천사”와 어떤 모형 천사들이 창조된 뒤에, 그들은 단위를 이루어―일시에 41,472명씩―계획된다. 창조 아들, 그리고 무한한 영의 지역 우주 대표가 큰 무리의 아들 및 기타 우주 성격자들을 생산하기 위하여 함께 일한다. 이 연합된 노력이 끝난 뒤에, 아들은 물질 아들, 곧 남녀로 된 첫 생물을 창조하는 데 종사하고, 한편 우주 어머니 영은 동시에 영을 낳기 위하여 처음으로 혼자 노력을 시작한다. 이렇게 한 지역 우주의 천사 무리의 창조가 시작된다.
38:1.2 (418.5) 이 천사 계급들은 의지를 가진 필사 인간의 진화를 계획할 때 설계된다. 후에 주 아들과 동급자가 아니라, 초기에 창조 아들에게 창조하는 조수로서, 우주 어머니 영이 비교적 성격을 얻을 때부터, 세라핌의 창조가 시작된다. 이 사건 이전에, 네바돈에서 근무하던 세라핌은 이웃 우주에서 임시로 빌려왔다.
38:1.3 (418.6) 세라핌은 아직도 정기적으로 생산된다. 네바돈 우주는 아직도 형성되는 과정에 있다. 우주 어머니 영은 성장하고 완전해지고 있는 우주에서 결코 창조 활동을 그치지 않는다.
38:2.1 (419.1) 천사는 물질 몸이 없지만, 분명하고 구별된 존재이며, 영 성품과 기원을 가지고 있다. 필사자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들은 변압자나 해석자의 도움이 없이, 육체를 입은 그대로 너희를 파악한다. 그들은 필사 생명의 형태를 지적으로 이해하며, 사람의 육욕 아닌 감동과 감정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들은 너희의 음악, 예술, 참 유머의 노력을 이해하고 크게 즐긴다. 그들은 너희의 도덕적 투쟁과 영적 어려움을 충분히 의식한다. 그들은 인간을 사랑하며, 너희가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면 오직 좋은 결과만 생길 수 있다.
38:2.2 (419.2) 세라핌은 대단히 애정이 깊고 동정심 있는 존재이지만, 성(性) 감정이 있는 생물이 아니다. 너희는 저택 세계에서 그들과 아주 비슷한 존재가 될 터이니, 거기서 너희는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으며, 하늘의 천사와 같으리라.” 이는 “저택 세계들에 이를 자격이 있다고 간주될 자는 누구나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기” 때문이며, “저희가 이제 더 죽지도 아니하니, 저희가 천사와 같음이라.” 그런데도 남녀로 된 생물과 상대할 경우에,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직접 내려온 쪽의 존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한편 영의 아이들을 하나님의 딸이라 언급하는 것이 우리의 관습이다. 따라서, 남녀 구별이 있는 행성에서 천사들은 보통 여성 대명사로 언급된다.
38:2.3 (419.3) 세라핌은 영과 물질, 두 수준에서 활동하도록 창조된다. 그들의 직책에 열려 있지 않은 상물질이나 영 활동 단계는 거의 없다. 천사의 성격 지위는 인간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반면에, 세라핌의 어떤 기능적 성과는 인간을 훨씬 초월한다. 그들은 인간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을 많이 소유한다. 예를 들면, “너희의 머리털도 모두 계산되었다”고 너희는 들었는데, 머리털이 참말로 계산되었지만, 세라핌은 머리털 수를 세고, 순간마다 그 수를 바로 잡느라고 시간을 쓰지 않는다. 천사들은 그러한 것을 아는 능력, 본래부터 자동 (다시 말해서, 너희가 파악하는 한 자동) 능력을 가지고 있다. 너희는 참으로 세라핌을 수학(數學) 천재라 보고 싶을 것이다. 따라서, 필사자에게 엄청난 과제인 수많은 임무를 세라핌은 아주 거뜬히 수행한다.
38:2.4 (419.4) 천사의 영적 지위는 너희보다 우수하지만, 천사는 너희를 재판하거나 고발하는 자가 아니다. 너희의 잘못이 무엇이든, “천사들은 능력과 힘이 더 크지만, 너희를 전혀 고소하지 않느니라.” 천사들은 인류를 재판하지 않으며, 개별 필사자도 동료 인간을 미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38:2.5 (419.5) 너희가 천사를 사랑하는 것은 좋아도 숭배해서는 안 되며, 천사는 예배를 받을 대상이 아니다. 너희의 예언자가 “천사의 발 앞에 예배하려고 무릎을 꿇었을 때” 위대한 세라핌 로얄라시아는 말했다. “너는 그러지 않도록 명심하여라. 나는 너와 네 민족과 함께 동료 일꾼이니, 너희 모두가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명령을 받았느니라.”
38:2.6 (419.6) 세라핌의 성품과 성격 자질은 생물 존재의 눈금에서 필사 민족보다 아주 조금 앞섰다. 정말로, 너희가 육체에서 벗어날 때, 너희는 그들과 상당히 비슷하게 된다. 여러 저택 세계에서, 너희는 세라핌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고, 여러 별자리 구체에서 그들을 기뻐하겠고, 반면에 구원자별에서 그들은 너희와 함께 쉬고 예배하는 장소를 같이 사용할 것이다. 상물질 승천 전체를 통해서, 그리고 나중에 영으로 승천하는 동안, 세라핌과 너희의 친교는 이상적이고 너희의 교제는 훌륭할 것이다.
38:3.1 (420.1) 지역 우주의 영토에서 두루 활동하는 수많은 계급의 영 존재들이 필사자에게 밝혀지지 않는데, 그들이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진화 계획과 어떤 방법으로도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 “천사”라는 말은, 필사자를 살아남게 만드는 계획을 운영하는 데 대체로 관여하는, 우주 어머니 영의 천사 자손 및 관계된 자손을 지칭하는 데 일부러 국한된다. 지역 우주에는 다른 여섯 계급의 관계된 존재, 곧 밝혀지지 않은 천사들이 봉사하는데, 그들은 어떤 특정한 방법으로도 진화하는 필사자의 파라다이스 승천과 관련된 우주 활동에 연결되지 않는다. 이 여섯 집단의 천사 동료들은 결코 세라핌이라 부르지 않고, 그들은 봉사하는 영으로 언급되지도 않는다. 이 성격자들은 네바돈의 행정 및 기타 사무에 온통 전념하며, 이 업무는 영적으로 상승하고 완전에 도달하는, 사람의 진보하는 생애와 도무지 관련되지 않는다.
38:4.1 (420.2) 구원자별 회로에서 제9 집단의 일곱 주요 구체는 세라핌의 세계이다. 이 세계들은 각각 여섯 종속 위성을 가졌고, 거기에는 특별 학교들이 모든 단계의 천사 훈련에 전념한다. 세라핌은 이 구원자별 구체 집단을 구성하는 49 세계를 모두 드나들 수 있는 한편, 일곱 구체로 이루어진 첫째 집단만 독차지한다. 나머지 여섯 집단은 유란시아에 밝혀지지 않는 여섯 계급의 천사 동료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한 각 집단은 여섯 주요 세계 중 하나에 본부를 유지하며, 그에 속한 여섯 종속 위성에서 특화된 활동을 수행한다. 각 천사 계급은 다양한 이 일곱 집단의 모든 세계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
38:4.2 (420.3) 이 본부 세계들은 네바돈의 장려한 영역에 속한다. 천사들의 사유지는 아름답고도 광대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세라핌은 각자 진짜 집이 있으며, “집”은 두 세라핌의 주거를 말하는데, 그들은 쌍을 이루어 산다.
38:4.3 (420.4) 물질 아들과 필사 민족들처럼 남자와 여자는 아니라도, 세라핌은 음성(陰性)과 양성(陽性)이다. 대다수의 임무에서 과제를 성취하는 데 두 천사가 요구된다. 회로에 연결되어 있지 않을 때, 그들은 혼자서 일할 수 있다. 움직이지 않을 때, 그들은 존재의 보완자가 필요하지도 않다. 보통 그들은 자기 최초의 보완자를 간직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러한 결합은 1차적으로 기능에 따라서 필요하게 된다. 그들의 특징은 성욕 감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사사롭고 참으로 애정이 깊다.
38:4.4 (420.5) 지정된 집 외에도, 세라핌은 소대(小隊)ㆍ중대(中隊)ㆍ대대(大隊)ㆍ단위의 본부가 있다. 그들은 1천 년마다 재회를 위하여 모이며, 그들이 창조된 시간에 맞추어 모두 출석한다. 한 세라핌이 임무에서 자리 비우는 것을 금하는 책임을 졌으면, 보완자가 출석을 교대하며, 다른 생일을 가진 한 세라핌이 그 보완자를 해방한다. 각 천사의 짝은 이렇게 해서 적어도 두 번에 한 번, 재회에 출석한다.
38:5.1 (420.6) 세라핌은 구원자별 및 관련된 여러 세계 학교에서, 임명받지 않은 관찰자로서 처음 1천 년을 보낸다. 둘째 1천 년은 구원자별 회로의 천사 세계들에서 보낸다. 그들의 중앙 훈련 학교를 지금 네바돈의 첫 세라핌 10만 명이 주관하며, 그 꼭대기에는 이 지역 우주 최초의 천사, 곧 처음 낳은 천사가 있다. 네바돈 세라핌 가운데 처음 창조된 집단은 아발론에서 온 세라핌 군단, 1천 명으로부터 훈련을 받았다. 그 뒤에 우리 천사들은 자기 선배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멜기세덱들도 모든 지역 우주 천사―세라핌ㆍ케루빔ㆍ사노빔―의 교육과 훈련에 큰 역할을 한다.
38:5.2 (421.1) 구원자별의 여러 천사 세계에서 이 훈련 기간이 끝날 때, 세라핌은 전통적 집단과 천사 조직의 단위로 동원되며, 별자리들 중 어느 하나에 배치된다. 그들은 아직 봉사하는 영으로 임관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천사 훈련에서 임관 이전(以前) 단계에 한창 들어가 있다.
38:5.3 (421.2) 세라핌은 진화 세계들 중에 가장 낮은 곳에서 관찰자로 근무하면서, 봉사하는 영으로서 시작한다. 이 체험 뒤에, 상급 과정을 시작하고, 더 분명하게 어떤 특별한 지역 체계 근무를 준비하기 위해서, 그들은 배치된 별자리 본부의 관련된 세계들로 돌아간다. 이 일반 교육을 받은 뒤에, 그들은 지역 체계들 중에 어느 한 곳에서 근무하도록 진급된다. 어느 네바돈 체계의 서울과 연관된 여러 건축 세계에서, 우리 세라핌은 훈련을 마치고, 시간 세계에서 봉사하는 영으로서 임관된다.
38:5.4 (421.3) 세라핌이 일단 임관(任官)되고 나서, 그들은 네바돈 전체, 아니 오르본톤까지도 임무를 띠고 돌아다녀도 좋다. 우주에서 그들이 하는 일에 경계가 없고 제한이 없다. 그들은 여러 세계에 있는 물질 생물과 밀접히 관련이 있고, 하등 계급의 영적 성격자들에게 늘 봉사하며, 영 세계의 이 존재들과 물질 영역의 필사자들 사이에서 연락을 취한다.
38:6.1 (421.4) 천사 본부에서 둘째 천 년 동안 머무른 뒤에, 세라핌은 열둘로 (12 쌍, 24 세라핌으로) 이루어진 소대로, 우두머리 밑에 조직된다. 그러한 12 소대(小隊)가 한 중대(中隊)를 (세라핌 144쌍, 288명을) 구성하며, 한 지도자가 이를 지휘한다. 한 대대장 밑에 12 중대가 한 대대를 (세라핌 1728 쌍, 곧 3,456명을) 이루며, 한 지휘자 밑에 12 대대(大隊)가 한 천사 단위를 (20,736 쌍, 곧 41,472명을) 이룬다. 한편 한 감독자의 명령을 받는 12 단위가 한 군단을 이루며, 이 수는 248,832 쌍, 곧 497,664명이다. 예수가 “나는 지금도 내 아버지께 요청할 수 있으니, 그는 당장에 12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게 주시리라”하고 말했을 때,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날 밤에 그런 집단의 천사들을 언급하였다.
38:6.2 (421.5) 12 군단의 천사들은 한 무리를 이루고, 이것은 2,985,984쌍, 곧 5,971,968명인데, 그러한 12 무리는 (35,831,808 쌍, 곧 71,663,616명) 세라핌의 가장 큰 작업 조직, 곧 천사군이다. 천사장, 또는 그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 어떤 다른 성격자가 한 천사 무리를 지휘하며, 한편 찬란한 저녁별이나 가브리엘의 다른 직속 부관이 천사군들을 지휘한다. 그리고 가브리엘은 “하늘 군대의 최고 사령관,” 곧 “만군의 주 하나님,” 네바돈 군주의 최고 집행자이다.
38:6.3 (421.6) 구원자별에서 성격화된 무한한 영의[1] [1671] 직접 감독 밑에서 근무하지만, 세라핌과 모든 다른 지역 우주 계급은,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자신을 수여한 뒤로, 주 아들 통치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유란시아에서 미가엘이 육체에서 태어났을 때도, “모든 천사가 그를 경배할지어다”하고 선포하는 초우주 방송이 온 네바돈으로 나갔다. 모든 계급의 천사들이 그의 통치권 하에 있으며, 그들은 “그의 막강한 천사”라고 일컬어 온, 바로 그 집단의 일부이다.
38:7.1 (422.1) 모든 필수 자질 면에서, 케루빔과 사노빔은 세라핌과 비슷하다. 그들은 같은 기원을 가지고 있지만 반드시 같은 운명을 가지지는 않는다. 경이롭게 총명하고 놀랍게 유능하며, 감동을 주도록 애정이 깊고 거의 인간답다. 그들은 천사 중에 가장 낮은 계급이며, 따라서 여러 진화 세계에서 진취적 부류의 인간과 더욱 가깝다.
38:7.2 (422.2) 케루빔과 사노빔은 선천적으로 관련되어 있고, 기능 면에서 하나가 되어 있다. 하나는 양성 에너지요, 다른 하나는 음성 에너지 성격자이다. 바른편 지향자, 곧 양성 전하(電荷)를 가진 천사는 케루빔이다―선임 성격자, 곧 통제 성격자이다. 왼편 지향자, 곧 음성 전하를 가진 천사는 사노빔이다―존재의 보완자이다. 각 종류의 천사는 혼자 하는 활동이 아주 제한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들은 보통 쌍을 이루어 근무한다. 그들의 지휘하는 천사들로부터 독립되어 근무할 때, 그들은 어느 때보다 더욱 서로의 접촉에 의존하며, 언제나 함께 활동한다.
38:7.3 (422.3) 케루빔과 사노빔은 봉사하는 세라핌에게 충실하고 유능한 보조자이며, 모두 일곱 계급의 세라핌에게 이 부하 조수들이 배당된다. 케루빔과 사노빔은 이 자격으로 오랜 세월 동안 근무하지만, 지역 우주의 경계를 벗어나는 임무에는 세라핌을 따라가지 않는다.
38:7.4 (422.4) 케루빔과 사노빔은 체계의 개별 세계에서 일상적인 영 노동자이다. 개인적이 아닌 임무와 비상시에 그들은 세라핌 쌍을 대신하여 일해도 좋지만, 그들은 결코 잠시라도, 인간에게 시중드는 천사로서 활동하지 않는다. 이것은 세라핌이 독점하는 특권이다.
38:7.5 (422.5) 한 행성에 배치되었을 때, 케루빔은 지역 훈련 과정에 들어가며, 이것은 행성의 관습과 언어를 공부하는 것을 포함한다. 시간 세계에서 봉사하는 영들은 모두 두 가지 말을 쓰는데, 그들의 기원이 있는 지역 우주의 언어(言語)와 그들의 기원이 있었던 초우주의 언어를 사용한다. 영역의 여러 학교에서 공부함으로 그들은 다른 언어를 더 터득한다. 세라핌과 모든 다른 계급의 영 존재들처럼, 케루빔과 사노빔은 계속하여 자신을 개선하는 노력에 힘쓴다. 동력을 통제하고 에너지 지향을 담당하는 그러한 하위 존재들만 진보할 능력이 없다. 실제의 성격 의지나 잠재적 성격 의지(意志)를 가진 모든 생물은 새로운 달성을 추구한다.
38:7.6 (422.6) 케루빔과 사노빔은 천성으로 상물질 수준의 존재에 아주 가깝고, 그들은 물리적, 상물질, 영적 영토의 경계 지역에서 생기는 작업에 가장 유능한 것이 입증된다. 이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의 아이들은, 하보나 일꾼 및 화해 위원회들과 비슷하게, “넷째 생물”이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넷째 케루빔과 넷째 사노빔은 모두, 준(準)물질이며, 아주 분명히 상물질 수준의 존재를 닮는다.
38:7.7 (422.7) 이 넷째 천사 생물은 그들의 우주 및 행성 활동 중에 실질성이 높은 단계에서 세라핌에게 큰 도움이 된다. 그러한 상물질 케루빔은 또한 여러 상물질 훈련 세계에서, 경계선에 있는 필수 과제를 많이 수행하며, 큰 무리를 지어, 상물질 동반자 근무에 배치된다. 중도인(中道人)과 진화 행성의 관계는 대체로 그들과 상물질 구체의 관계와 같다.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이 상물질 케루빔은 빈번히 중도인과 연락하여 일한다. 케루빔과 중도인은 뚜렷하게 다른 계급의 존재이며, 그들은 다른 기원을 가졌어도, 성품과 활동이 크게 비슷함을 드러낸다.
38:8.1 (423.1) 지위의 향상으로 이끄는 길, 승진하는 근무로 이끄는 수많은 길이 케루빔과 사노빔에게 열려 있으며, 이것은 신성한 봉사자의 품에 안김으로 더욱 확대될 수도 있다. 승진 잠재성으로 보면 3대 등급의 케루빔과 사노빔이 존재한다.
38:8.2 (423.2) 1. 승천 후보자. 이 존재들은 천성(天性)으로 세라핌 지위를 얻을 후보자이다. 이 계급의 케루빔과 사노빔은 명석하지만, 본래부터 가진 자질은 세라핌과 대등하지는 않다. 그러나 열심과 체험으로, 그들은 완전한 세라핌 지위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38:8.3 (423.3) 2. 중간 단계 케루빔. 모든 케루빔과 사노빔은 승천 가능성이 같지 않으며, 그들은 천사로 창조될 때 본래부터 제한된 존재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케루빔과 사노빔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재능 있는 개인들은 제한된 세라핌 근무에 도달할 수도 있다.
38:8.4 (423.4) 3. 상물질 케루빔. 천사 계급에서 이 “넷째 생물”은 언제나 그들의 준(準)물질 특징을 간직한다. 중간 단계에 있는 그 형제들의 대다수와 함께, 최상 존재가 완전히 사실화할 때까지, 그들은 케루빔과 사노빔으로서 계속할 것이다.
38:8.5 (423.5) 둘째와 셋째 집단은 성장 가능성이 얼마큼 제한되어 있지만, 승천 후보자들은 보편적인 세라핌 봉사의 높이까지 도달할 수도 있다. 이 케루빔 중에서 경험이 많은 다수는 운명 수호 세라핌에게 소속되며, 따라서 그들의 세라핌 선배가 두고 떠날 때, 저택 세계 선생의 지위로 승진하는 직통선에 놓인다. 운명 수호자는 필사 피보호자가 상물질 생명에 도달할 때, 케루빔과 사노빔을 조수로 거느리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종류의 진화 세라핌이 천사별과 파라다이스로 가는 입장 허가가 내릴 때, 네바돈 경계를 빠져 나갈 때, 그들은 예전의 부하들을 두고 가야 한다. 그러한 버림받은 케루빔과 사노빔은 보통 우주 어머니 영의 품에 안기며, 이렇게 도달한 세라핌 지위는 저택 세계 선생의 것에 상당하는 수준에 이른다.
38:8.6 (423.6) 저택 세계 선생으로서, 한 번 품에 안긴 케루빔과 사노빔이 여러 상물질 구체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가장 높은 곳까지 오래 근무했을 때, 그리고 구원자별에 있는 그들의 집단이 정원(定員) 초과일 때, 밝은 아침별은 시간 세계의 인간을 돌보는 이 충실한 일꾼들을 그의 앞으로 출두하라고 호출한다. 성격을 변화시키는 선서가 시행되며, 그리고 나서 7천 명씩 집단을 이루어, 이 상급의 선임 케루빔과 사노빔은 우주 어머니 영의 품에 다시 안긴다. 이 둘째 포옹으로부터 그들은 완전히 발육된 세라핌으로 나타난다. 그때부터, 세라핌의 충만하고 완전한 생애가, 그 모든 파라다이스 가능성과 더불어, 그렇게 다시 태어난 케루빔과 사노빔에게 열린다. 그러한 천사들은 어떤 필사 존재에게 운명 수호자로 배치되어도 좋다. 그리고 그 필사 피보호자가 살아남으면, 그들은 천사별, 그리고 천사가 달성하는 일곱 영역까지, 아니 파라다이스와 최후 군단까지 승진할 자격을 갖추게 된다.
38:9.1 (424.1) 중도인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그들은 하늘 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분류되는 것이 적절하다. 그들은 사실로 영구 시민 계급과 함께 분류되며, 한편 기능적으로 시간 세계에서 봉사하는 영들과 함께 계산되는데, 이것은 공간의 개별 세계에서 그들이 천사 무리와 함께 친밀하고 능률적인 관계를 가지고 필사 인간에게 봉사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38:9.2 (424.2) 이 독특한 생물은 사람이 사는 대다수의 세계에 출현하며, 유란시아와 같은 십일 행성, 곧 생명을 실험하는 행성에서 반드시 발견된다. 중도자는 두 종류―1차와 2차―가 있고, 그들은 다음 기법에 따라서 나타난다.
38:9.3 (424.3) 1. 1차 중도자, 둘 중에서 영적 집단은 얼마큼 표준화된 계급의 존재이며, 그들은 한결같이 행성 영주의 참모, 수정된 하늘 가는 필사 참모들로부터 생겨난다. 1차 중도인의 수는 반드시 5만 명이며, 그들의 보살핌을 누리는 어떤 행성도 더 큰 집단을 소유하지 않는다.
38:9.4 (424.4) 2. 2차 중도자는 이 생물 중에서 물질적인 편에 속하는 집단이며, 그 수는 다른 세계에서 크게 다르다. 하지만 평균은 약 5만 명이다. 그들은 행성의 생물학적 개량자, 곧 아담과 이브, 또는 그들의 직계 후손으로부터 다양하게 유래한다. 공간의 진화 세계에서 이 2차 중도인을 생산하는 데는 적어도 24 가지나 다양한 기법이 관련되어 있다. 유란시아에서 이 집단이 기원을 가진 형식은 보기 드물고 특별하다.
38:9.5 (424.5) 이 중에 어느 집단도 진화에서 우연히 생긴 것은 아니다. 두 집단은 우주 건축가들이 미리 예정한 계획에 필수 특징이며, 진화하는 세계에서 적절한 시점에 그들은 감독하는 생명 운반자들의 최초의 설계와 발전 계획에 따라서 출현한다.
38:9.6 (424.6) 1차 중도자는 천사의 기법으로 지적ㆍ영적으로 에너지를 공급받으며, 그들의 지적 지위는 한결같다. 일곱 보조 지성 영은 그들과 전혀 접촉하지 않는다. 오로지 여섯째와 일곱째, 즉 예배의 영과 지혜의 영이, 2차 집단에게 봉사를 베풀 수 있다.
38:9.7 (424.7) 2차 중도자는 아담의 기법으로 물리적 에너지를 받으며, 천사의 기법으로 영적 회로가 연결되고, 과도기의 상물질 종류의 지성을 지적으로 부여받는다. 그들은 네 가지 물리적 부류, 일곱 영적 계급, 그리고 마지막 두 보조 영 및 상물질 지성의 합동 봉사에 대하여 지적으로 반응하는 12 수준으로 분류된다. 이 다양성은 그들의 다른 활동과 행성 임무를 결정한다.
38:9.8 (424.8) 1차 중도자는 사람보다 천사를 더 닮았고, 2차 계급은 훨씬 더 인간과 비슷하다. 각자가 다른 종류에게 그들의 다채로운 행성 임무를 집행하는 데 귀중한 도움을 준다. 1차 봉사자는 상물질 에너지 및 영 에너지 통제자와 지성 회로자 모두와 협동하여 연락할 수 있다. 2차 집단은 오로지 물리 통제자 및 물질 회로 조종자와 기초적 연결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각 계급의 중도자가 다른 자와 완전히 동시화되어 접촉할 수 있으니까, 각 집단은 이렇게 함으로 물질 세계의 총 물리적 동력으로부터 우주 에너지의 과도기 단계를 거쳐서, 하늘 영역의 상급 영 실체의 물력에 이르기까지, 에너지 범위 전체를 실용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38:9.9 (425.1) 물질 세계와 영적 세계 사이의 간격에 필사 인간, 2차 중도자, 1차 중도자, 상물질 케루빔, 중간 단계 케루빔, 세라핌이 완전히 다리를 놓는다. 한 개별 필사자가 몸소 겪는 체험에서 이 다양한 수준은, 의심할 여지 없이, 신다운 생각 조절자의 관측되지 않는 신비스러운 작용으로 말미암아, 얼마큼 통일되고 개인적으로 의미 있게 된다.
38:9.10 (425.2) 정상 세계에서, 행성 영주를 위한 정보 군단으로서, 그리고 하늘의 접대자로서 1차 중도자는 봉사를 유지한다. 한편 2차 봉사자는 진화하는 행성 문명의 운동을 촉진하는 아담 체제와 계속하여 협동한다. 유란시아에서 일어난 것처럼, 행성 영주의 배반과 물질 아들의 실패가 있을 경우에 중도인은 체계 군주의 피보호자가 되며, 행성의 임시 관리자의 지휘와 안내를 받으며 근무한다. 그러나 유란시아의 연합 중도 봉사자들이 하는 것처럼, 사타니아에서 오직 다른 세 세계에서, 이 존재들은 연합된 지도자 밑에서 한 집단으로서 활동한다.
38:9.11 (425.3) 1차 및 2차 중도자가 행성에서 하는 일은 한 우주의 수많은 개별 세계에서 다르고 다채롭지만, 정상의 보통 행성에서, 그들의 활동은 유란시아처럼 고립된 구체에서 그들의 시간을 차지하는 의무와 대단히 다르다.
38:9.12 (425.4) 1차 중도자들은 행성의 역사가이며, 행성 영주가 도착한 시절부터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는 시대까지, 체계의 본부 세계들에서 행성을 전시하기 위하여 행성 역사의 연극을 출연하고 그 묘사를 설계한다.
38:9.13 (425.5) 중도자는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오랫동안 남아 있지만, 맡긴 책임에 충실하면, 아주 확실하게, 창조 아들의 통치를 유지하는 데 오랜 세월에 걸쳐 봉사한 것 때문에 궁극에 인정 받을 것이다. 그들의 시공 세계에서 물질 필사자에게 참을성 있게 봉사를 베푼 것 때문에 그들은 마땅히 보상을 받을 것이다. 조만간에, 인가받은 모든 중도인은 하늘 가는 하나님의 아들 등급으로 소집될 것이다. 행성에서 오래 머무르는 동안 그들이 아주 조심스럽게 지키고 아주 유능하게 보살핀 필사자, 동물 기원을 가진 바로 그 필사자, 땅에서 형제인 자들과 일행을 이루어,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긴 모험에 마땅히 가입될 것이다.
38:9.14 (425.6) [네바돈 천사 군대 우두머리의 요청을 받고서 활동하는 한 멜기세덱이 발표하였다.]
39:0.1 (426.1) 우리가 인식하는 한, 지역 우주에서 성격화된 무한한 영은 한결같이 완전한 세라핌을 생산하려고 의도하지만, 어떤 미지의 이유로, 이 천사 자손은 대단히 다채롭다. 이 다양성은 진화하는 체험적 신이 알지 못하게 개입함으로 생기는 결과일 수도 있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세라핌들이 교육 시험과 훈련 과정을 받고 나서, 그들은 어김없이, 뚜렷이 다음 일곱 집단으로 분류된다.
39:0.9 (426.9) 어느 한 세라핌이 어느 다른 집단의 한 천사보다 열등하다고 말하는 것은 도저히 참말일 수 없다. 그런데도 어떤 천사도 최초에 선천적으로 분류된 집단에서 처음에 봉사하도록 제한된다. 이 글을 준비하는 과제에서 나의 천사 동료 마노시아는 최상 세라핌이며, 한때는 오직 최상 세라핌으로서 활동했다. 열심히 일하고 헌신하여 봉사함으로, 그는 하나하나 모두 일곱 가지 천사 봉사를 성취했으며, 세라핌에게 개방된 거의 모든 활동 분야에서 일해 왔고, 지금은 유란시아에서 세라핌의 부(副)우두머리로 임명받았다.
39:0.10 (426.10) 상급 수준에서 봉사하라고 창조된 능력은, 비교적 낮은 봉사 수준에서 활동할 능력이 있음을 반드시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간은 가끔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사람은 무력(無力)한 아기로서 일생을 시작한다. 따라서 필사자가 무엇을 성취하더라도 모든 체험적 선행 조건을 용납해야 한다. 세라핌은 그러한 어른이 되기 전의 시기―소년기―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체험하는 생물이며, 체험으로, 추가 교육을 통해서, 하나나 그 이상의 천사 봉사에서 기능적 기술을 체험으로 얻어, 신이 준 그들의 선천적 능력을 키울 수 있다.
39:0.11 (426.11) 임관된 뒤에, 세라핌은 그들 본래 집단의 예비군에 배치된다. 행성 및 행정 지위에 있는 자는 흔히 최초에 분류된 대로 오랜 세월 근무하지만, 선천적 기능 수준이 높을수록 이 천사 봉사자들은 더 끈질기게 하급 수준의 우주 봉사에 배치받기를 추구한다. 특히, 그들은 행성 조수 예비군에 배치되고 싶어 하며, 성공하면, 어떤 진화 세계에서 행성 영주의 본부에 부속된 하늘 학교에 등록한다. 여기서 그들은 인류 민족들의 언어, 역사, 지역 습관에 관하여 연구를 시작한다. 세라핌은 인간과 비슷하게 지식을 얻고 체험을 겪어야 한다. 그들의 어떤 성격 특성은 너희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들은 모두 밑바닥에서, 가능한 가장 낮은 수준의 봉사에서 시작하기를 몹시 바란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가능한 가장 높은 수준의 체험적 운명을 성취하기를 희망한다.
39:1.1 (427.1) 이 세라핌은 지역 우주 천사에서 밝혀진 일곱 계급 중에 가장 높다. 그들은 일곱 집단으로 활동하며, 각각 완결 천사 군단에 속한 천사 봉사자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39:1.2 (427.2) 1. 아들 및 영의 봉사자. 최상 세라핌의 첫째 집단은 지역 우주에서 거주하며 활동하는, 높은 아들과 영에서 기원을 가진 존재들을 위한 근무에 배치된다. 이 집단의 천사 봉사자는 또한 우주 아들과 우주 영을 위하여 수고하며, 창조 아들과 창조 영의 연합된 의지를 시행하는 우주 최고 집행자, 곧 밝은 아침별의 정보 군단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39:1.3 (427.3) 높은 아들과 영들에게 배치되었기 때문에, 이 세라핌들은 자연히 파라다이스 아보날을 위한 광범위한 근무에 관련되는데, 아보날은 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의 신다운 자손이다. 파라다이스 아보날의 모든 심판관 임무와 수여 임무에, 높고 노련한 이 계급의 세라핌들이 따라가며, 그들은 그런 때에 행성의 한 섭리 시대를 마치고 새 섭리 시대의 개시와 연결된 특별한 사무를 조직하고 관리하는 데 전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섭리 시대의 변경에 따를 수 있는 판결 작업에 관여하지는 않는다.
39:1.4 (427.4) 수여 수행원. 창조 아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지만, 파라다이스 아보날이 수여 임무로 갈 때 반드시 144명의 수여 수행원 무리가 따라간다. 이 천사 144명은 각자 수여 임무에 관계될 수도 있는 모든 다른 아들 및 영 봉사자의 우두머리이다. 행성에 수여되는 육신화된 하나님의 아들의 지휘 하에, 여러 천사 군단이 아마 있을지 모르지만, 수여 수행원 144명이 이 모든 세라핌을 조직하고 지휘할 것이다. 높은 천사, 곧 상천사와 2품 천사들도, 또한 수행하는 무리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그들의 임무가 세라핌의 임무와 다르더라도, 수여 수행원들이 이 모든 활동을 조정할 것이다.
39:1.5 (427.5) 이 수여 수행원은 완결 세라핌이다. 그들은 모두 천사별의 영역들을 전부 거쳤고, 완결 천사 군단에 도달했다. 시간 세계 자녀들의 진보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수여되는 데 관련된 어려움을 극복하고 비상 사태를 해결하려고, 그들은 특별히 더 훈련을 받았다. 그러한 세라핌은 모두 파라다이스와 둘째 근원 중심, 곧 영원한 아들의 품에 도달한 적이 있다.
39:1.6 (427.6) 세라핌은 육신화된 아들의 임무에 배치되는 것과 그 영역의 필사자에게 운명 수호자로 부속되기를 똑같이 간절히 바란다. 후자는 파라다이스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천사의 여권이며, 한편 수여 수행원은 파라다이스에 도달한 완결 세라핌으로서 지역 우주에서 가장 높은 봉사를 성취한 것이다.
39:1.7 (428.1) 2. 법정 고문. 화해자들로부터 그 영역의 가장 높은 법정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든 등급의 재판에 부속된, 고문이자 조수인 천사이다. 그러한 법정의 목적은 징벌하는 언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한 의견 차이를 판정하고, 하늘 가는 필사자의 영원한 생존을 선포하는 것이다. 여기에 법정 고문의 임무가 있으니, 즉 필사 인간에 대한 모든 고발이 정당하게 진술되고 자비롭게 판결되는가 확인하는 것이다. 이 일을 하면서 그들은 고등 위원, 곧 지역 우주에서 봉사하는, 영과 융합한 승천 필사자들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39:1.8 (428.2) 법정의 고문 천사는 필사자의 변호사로서 광범위하게 근무한다. 그 땅의 비천한 인간에게 어떤 불공평한 처분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응보는 신다운 완전을 향하여 올라가는 길에 어떤 실패가 있어도 그 판결을 요구하는 한편, 자비는 어떤 그러한 잘못된 걸음이라도 인간의 성품과 신의 목적에 따라서 공정하게 판결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천사들은 신의 응보에 원래 있는 자비 요소―개인의 동기 및 종족의 성향에 관한 기초적 사실을 아는 데 근거를 둔 공정의 요소―를 주장하는 자요 그 모범이다.
39:1.9 (428.3) 이 계급의 천사는 행성 영주의 회의로부터 지역 우주의 가장 높은 법정에 이르기까지 봉사하며, 한편 완결 천사 군단에 있는 그들의 동료들은 오르본톤의 더 높은 영역에서, 아니 유버르사에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법정에서도 활동한다.
39:1.10 (428.4) 3. 우주 진로 지도자. 광대한 오르본톤 초우주에서 하늘 가는 인간이 그들 앞에 펼쳐지는 영적 모험에 발을 내딛기 직전에, 구원자별에서, 자기의 기원이 있는 우주에서, 마지막으로 멈추는 그들에게 이 교육자들은 참 친구이며, 과정 졸업 이후에 상담자이다. 그러한 때에 많은 승천자가, 인간의 향수(鄕愁) 감정과 비교해야 겨우 필사자가 이해할 수 있는 그러한 느낌을 가진다. 뒤에는 성취한 영역, 곧 오랜 서비스와 상물질 달성으로 친숙해진 땅이 있고, 앞에는 더 크고 더 넓은 우주의 신비, 도전하는 신비가 놓여 있다.
39:1.11 (428.5) 달성한 수준에서부터 우주에서 봉사하는, 아직 미치지 못한 수준까지, 하늘 가는 순례자가 쉽게 통과하도록 만드는 것이 우주 진로 지도자의 과제이다. 지역 우주에서 상물질로 올라가는 끝과 절정이 아니라, 오히려 파라다이스에 계신 우주의 아버지께로, 영적으로 올라가는 긴 사다리의 맨 밑바닥에, 제1 단계 영 존재가 서 있다. 이것을 깨달음에 본래 있는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면서 끊임없이 적응하도록 지도자들은 이 순례자들을 돕는다.
39:1.12 (428.6) 천사별의 많은 졸업생은 이 세라핌들과 관련된 완결 천사 군단의 단원이며, 다음 우주 시대의 관계를 위하여 네바돈의 인간들을 준비시키는 데 관여하는 어떤 구원자별 학교에서 다방면의 교육에 종사한다.
39:1.13 (428.7) 4. 교육 상담자. 이 천사들은 지역 우주의 영적 교육 집단에게 귀중한 조수이다. 교육 상담자는 멜기세덱 및 삼위일체 교육 아들들로부터 승천 생애 단계에서 바로 뒤에 있는 동료들에게 조수로서 배치된 상물질 필사자에 이르기까지, 온갖 계급의 선생들에게 비서(秘書)가 된다. 예루셈을 둘러싸는 일곱 저택 세계 중 어느 한 곳에서, 너희는 이 준(準)교사 세라핌을 처음 구경할 것이다.
39:1.14 (428.8) 이 세라핌들은 지역 우주의 수많은 교육 및 훈련 기관에서 분과 우두머리들의 동료가 되고, 그들은 큰 무리를 지어 지역 체계의 일곱 훈련 세계 및 별자리의 70 교육 구체의 직원에 부속된다. 이러한 시중은 밑으로 개별 세계에까지 연장된다. 참되고 성스럽게 헌신하는 시간 세계의 교육자들조차 도움을 받고, 가끔 상담자인 이 최상 세라핌들의 보살핌을 받는다.
39:1.15 (429.1) 네 번째로 창조 아들이 생물로 자신을 수여한 것은 네바돈의 최상 세라핌으로서, 교육 상담자의 모습을 입은 것이었다.
39:1.16 (429.2) 5. 배치 지도자. 생물이 거주하는 진화 구체와 건축 구체들에서 근무하는 천사들이 때때로, 최상 세라핌 144명의 집단을 선출한다. 이것은 어느 구체에서도 가장 높은 천사 회의이며, 천사 근무 및 배치를 맡는 자치 단계를 조정한다. 이 천사들은 근무, 또는 예배하라고 부르는 초청에 관계되는 모든 천사 집회를 주관한다.
39:1.17 (429.3) 6. 기록자. 이들은 최상 세라핌을 위한 공식 기록자이다. 이 높은 천사들의 다수는 재능을 완전히 갖춘 채로 태어났다. 더러는 낮거나 책임이 가벼운 계급에 소속되었을 때 부지런히 공부에 전념하고, 비슷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함으로 신임받고 책임 있는 자리에 합당하게 자격을 갖추었다.
39:1.18 (429.4) 7. 무소속 봉사자. 아무 데도 소속되지 않은 다수의 최상 계급 세라핌은 건축된 구체와 사람 사는 행성에서 자치하는 봉사자이다. 그러한 봉사자들은 최상 세라핌의 봉사에 대한 다양한 요구를 자원해서 충족하며, 이처럼 이 계급의 일반 예비군을 구성한다.
39:2.1 (429.5) 우수 세라핌은 어떤 의미에서도 다른 계급의 천사보다 질적으로 우수하기 때문이 아니라, 한 지역 우주의 고급 활동을 책임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받는다. 이 천사 군단의 처음 두 집단에는 허다한 자가 도달한 세라핌이며, 온갖 단계의 훈련에 봉사했고 그들의 초기 활동이 있던 여러 구체에서 그들 종류의 지도자로서 영화로운 임무를 받고 돌아온 천사이다. 네바돈은 젊은 우주이니까, 이 계급에 속한 천사가 많이 없다.
39:2.2 (429.6) 우수 세라핌은 다음 일곱 집단에서 활동한다.
39:2.3 (429.7) 1. 정보 군단. 이 세라핌들은 밝은 아침별 가브리엘의 개인 참모진에 속한다. 그들은 네바돈 회의에서 가브리엘을 안내하는 데 필요한 그 영역의 정보를 수집하면서 지역 우주를 돌아다닌다. 그들은 막강한 무리의 정보 군단이며, 가브리엘이 주 아들의 대관으로서 그 군단을 주관한다. 이 세라핌들은 체계나 별자리와 직접 관련되지 않으며, 그들의 정보는 연속되고 독립된 직접 회로에서, 구원자별로 바로 흘러 들어간다.
39:2.4 (429.8) 여러 지역 우주의 정보 군단은 서로 교신할 수 있고, 또 교신하기도 하지만, 다만 주어진 초우주 안에서만 그렇게 한다. 여러 초우주 정부의 사업과 거래를 효과 있게 분리하는 에너지의 구분이 있다. 한 초우주는 보통 경우에 파라다이스 교환소의 물자와 시설을 통해야 다른 초우주와 교통할 수 있다.
39:2.5 (430.1) 2. 자비의 목소리. 자비는 천사의 직분과 천사가 베푸는 봉사의 요지이다. 따라서, 특별 방법으로 자비를 표현하는 천사 군단이 있어야 마땅하다. 이 세라핌들은 지역 우주에서 참된 자비를 베푸는 자이다. 그들은 사람과 천사의 고급 충동과 좀더 거룩한 감정을 촉구하는, 영감을 받은 지도자이다. 이 여러 군단의 지도자들은 또한 현재 반드시, 필사자의 운명을 수호하는 일을 마친, 완결 세라핌이다. 다시 말해서, 각 천사 쌍은 동물 기원을 가진, 적어도 한 사람을 육체로 사는 일생 동안 안내하고, 그 뒤에 천사별의 영역을 거치고, 완결 천사 군단에 소집되었다.
39:2.6 (430.2) 3. 영 조정자. 셋째 집단의 우수 세라핌은 구원자별에 근거를 두지만, 지역 우주에서 그들이 유익하게 쓰일 수 있는 데는 어디서나 활동한다. 그들의 과제의 본질은 영적인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지성이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반면에, 구원자별에서 승천 체류자가 지역 우주에서 마지막으로―가장 높은 상물질 수준에서 새로 태어난 영 존재의 지위로―이동하는 것을 준비시키는 과제가 이 천사들에게 맡겨졌다고 설명하면, 너희는 그들이 필사자에게 무슨 봉사를 베푸는가 아마 얼마큼 깨달을 것이다. 살아남는 인간이 상물질 지성의 잠재성에 적응하고, 그 잠재성을 효과 있게 쓰도록 지성 계획자들이 여러 저택 세계에서 돕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라핌들은 구원자별에서 상물질 졸업생에게 영이 새로 얻은 지성 능력에 관하여 가르친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여러 방법으로 하늘 가는 필사자를 위하여 수고한다.
39:2.7 (430.3) 4. 조교. 조교(助敎)들은 동포 세라핌, 곧 교육 상담자의 조수이자 동료이다. 그들은 또한 지역 우주의 광범위한 교육 사업, 특히 지역 체계의 여러 저택 세계에서 적용되는 일곱 가지 훈련 계획과 개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계급의 세라핌 중에서 한 놀라운 집단이 유란시아에서 진리와 공정을 부르짖는 운동을 지원하고 촉진하는 목적으로 활동한다.
39:2.8 (430.4) 5. 수송자. 모든 집단의 봉사하는 영들은 그들의 수송단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스스로 한 구체에서 다른 구체로 여행할 수 없는 성격자들을 수송하는 직무에 헌신하는 천사 계급이다. 다섯째 집단의 우수 세라핌은 구원자별에 본부를 두며, 지역 우주 본부에서 오가는 공간 통과자로서 근무한다. 우수 세라핌의 다른 종속 부서들과 마찬가지로, 더러는 그렇게 창조되고, 한편 더러는 낮거나 자질이 적은 집단으로부터 올라왔다.
39:2.9 (430.5) 세라핌의 “에너지 한계”는 지역 우주를 위해서, 아니 초우주의 필요에도 전적으로 충분하지만, 그들은 결코 유버르사로부터 하보나까지 가는 것과 같이 그런 긴 여행에 따르는 에너지 요구를 결코 견딜 수 없다. 그렇게 피곤한 여행은 수송 자질을 가진 1차 2품 천사의 특별한 동력을 요구한다. 수송자들은 이동 중에 비행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취하며, 그 여행 끝에 개인의 동력을 회복한다.
39:2.10 (430.6) 구원자별에서도 하늘 가는 필사자는 몸소 이동하는 형태를 소유하지 않는다. 하보나의 안쪽 궤도에서 마지막으로 잠자는 휴식에 들어가고 파라다이스에서 영원히 깨어나기 전까지, 승천자는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승진할 때 천사의 수송에 의존해야 한다. 그 뒤에 한 우주에서 다른 우주로 교통하는 데 너희는 천사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39:2.11 (430.7) 세라핌에 둘러싸이는 과정은, 이동하는 잠에 자동으로 시간 요소가 있다는 것을 제쳐놓고, 죽음이나 잠자는 체험과 다르지 않다. 천사 안에서 쉬는 동안, 너는 일부러 무의식이 된다. 그러나 생각 조절자는 전적으로, 충분히 의식이 있으며, 사실은 창조적이고 변화시키는 작업을 네가 반대하거나 저항하거나 달리 방해할 수 없기 때문에, 특별히 효율이 있다.
39:2.12 (431.1) 세라핌에 둘러싸였을 때, 너는 지정된 시간 동안 잠에 들어가며, 지정된 순간에 깨어날 것이다. 이동하는 잠에 빠져 있을 때, 여행의 길이는 의미가 없다. 너는 시간이 지나는 것을 직접 의식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네가 한 도시에서 수송 차량 안에서 잠들고, 밤새 평화로운 잠에 빠져 쉬고 난 뒤에 다른 먼 대도시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다. 너는 잠든 동안에 여행한 것이다. 너는 휴식하는―잠자는―동안, 세라핌에 둘러싸여 공간을 통해서 비행한다. 조절자와 수송하는 천사가 연락함으로 이동 중의 수면을 유도한다.
39:2.13 (431.2) 천사들은 너희가 지금 가진 것과 같이 불에 타는 몸을―살과 피를―나를 수 없지만, 가장 낮은 상물질 형태로부터 더 높은 영 형태까지, 모든 다른 것을 수송할 수 있다. 그들은 자연사의 경우에 활동하지 않는다. 네가 땅에서 생애를 마칠 때, 너의 몸은 이 행성에 남는다. 너의 생각 조절자는 아버지 품으로 나아가며, 이 천사들은 신분을 확인하는 저택 세계에서 차후에 너의 인격을 다시 조립하는 데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 거기서 너의 새 몸은 상물질 형태이며, 세라핌 속에 들어갈 수 있는 형태이다. 너는 무덤에서 “필사 육체를 심고,” 저택 세계에서 “상물질 형태를 거둔다.”
39:2.14 (431.3) 6. 기록자. 이 성격자들은 구원자별 및 거기와 관계된 세계들의 기록을 접수하고, 철하고, 다시 운반하는 일에 특히 관여한다. 그들은 또한 거주하는 초우주 성격자 및 고등 성격자 집단을 위한 특별 기록자로서, 구원자별 법정의 서기로서, 그리고 그 통치자들의 비서(秘書)로서 근무한다.
39:2.15 (431.4) 방송자―수신자와 송신자―는 기록 천사 중에서 특화된 종속 부서이며, 기록을 배달하고 중요한 정보를 배포하는 데 관여한다. 그들의 일은 높은 등급에 속하고, 아주 여러 겹으로 회로가 연결되어서 144,000개의 통신문이 동시에 같은 에너지 선을 거쳐 갈 수 있다. 그들은 상천사 우두머리 기록자들의 상급 표의(表意) 기법을 편집하고, 이 공통된 표현으로 3차 상천사인 정보 조정자와 완결 천사 군단에 속하는 영화로운 정보 조정자들, 이 양자와 서로 접촉을 유지한다.
39:2.16 (431.5) 우수 계급의 기록 천사는 자체 계급의 정보 군단 및 모든 종속 기록자와 밀접한 연락을 가지며, 한편 방송은 그들로 하여금 초우주의 고등 기록자 뿐 아니라, 이 경로를 통해서 하보나의 기록자, 그리고 파라다이스에 있는 지식 관리자들과 늘 통신을 유지하게 만든다. 우수 계급 기록자들의 다수는 지역 우주의 낮은 구역에서 비슷한 임무로부터 승진한 세라핌이다.
39:2.17 (431.6) 7. 예비군. 온갖 종류의 우수 세라핌으로 이루어진 큰 예비군이 구원자별에서 유지되는데, 배치 지도자들로부터 요청받는 대로, 또는 우주 행정가들의 요청을 받고 나서, 네바돈의 가장 먼 세계들까지 파송되도록 즉시 소용된다. 우수 세라핌의 예비군은 또한 찬란한 저녁별들의 우두머리의 요청을 받고 나서 사자(使者)의 도움을 제공하는데, 이 우두머리에게는 모든 개인 통신을 관리하고 배달하는 책임이 맡겨진다. 한 지역 우주에는 서로 통신하는 적절한 수단이 충분히 마련되지만, 개인적 사자의 파송을 요구하는 나머지 통신문이 언제나 있다.
39:2.18 (432.1) 지역 우주 전체를 위한 기본 예비군은 구원자별의 여러 천사 세계에서 유지된다. 이 군단은 온갖 종류의 천사 집단을 모두 포함한다.
39:3.1 (432.2) 이 다능한 계급의 지역 우주 천사들은 별자리의 전속 근무에 배치된다. 이 유능한 봉사자들은 별자리 서울에 본부를 만들지만, 그들이 배치된 영역의 권익을 위해서 네바돈 전역에서 활동한다.
39:3.2 (432.3) 1. 감독하는 조수. 감독 세라핌의 첫 계급은 별자리 아버지들의 집단 작업에 배치되며, 최고자들에게 언제나 유능한 조수이다. 이 세라핌들은 1차적으로 한 별자리 전체의 통일과 안정에 관여한다.
39:3.3 (432.4) 2. 법률 예측자. 응보의 지적 기초는 법이며, 한 지역 우주에서 법은 별자리의 입법 집회에서 생겨난다. 이 심의 단체들은 네바돈의 기본법을 법전(法典)으로 만들고 공식으로 선포한다. 이러한 법령은 성격을 가진 생물의 도덕적 자유 의지를 침해하지 않는 고정된 정책에 어긋나지 않게, 한 별자리 전체에서 가능한 최대한으로 조정을 허락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어떤 제안된 법의 제정이 어떻게 자유 의지를 가진 생물의 생활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예측을 별자리의 입법가들 앞에 제출하는 것이 둘째 계급의 감독 세라핌의 의무이다. 지역 체계와 사람 사는 세계에서 오랜 체험을 가진 덕택으로, 그들은 이런 수고를 해내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이 세라핌들은 어느 한 집단을 위하여 아무런 특별 혜택을 추구하지 않지만, 자신을 위해서 말하려고 자리에 있을 수 없는 자를 대변하려고 하늘 입법자들 앞에 출두한다. 필사 인간조차도 우주 법칙의 진화에 이바지할 수도 있는데, 이는 바로 이 세라핌들이, 반드시 사람의 일시적이고 의식하는 욕망이 아니라, 속 사람, 곧 공간 세계의 물질 필사자가 진화시키는 상물질 혼이 참으로 몹시 바라는 것을 충실하고 충분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39:3.4 (432.5) 3. 사회 조성자. 개별 행성으로부터 위로 상물질 훈련 세계들을 통해서, 이 세라핌들은 모든 진지한 사회 접촉을 향상시키고, 우주에 있는 인간의 사회적 진화를 촉진하기 위하여 수고한다. 그들은 지적 존재들의 관계에서 모든 인위적 요소를 없애려고 애쓰고, 한편 참된 자아 이해와 진정한 상호 이해의 바탕 위에, 의지를 가진 인간의 상호 관계를 수월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39:3.5 (432.6) 사회 조성자(造成者)들은 자기 분야와 권력 안에서 적절한 개인들을 한데 모으려고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그래서 그들이 땅에서 유능하고 어울리는 작업 집단을 구성하도록 만든다. 어떤 때는 그런 집단이 여러 저택 세계에서 결실이 많은 근무를 계속하도록 자신들이 다시 관계됨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 세라핌들이 반드시 목적을 이루지는 않는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거나 어떤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가장 이상적인 집단을 이룰 자들을 그들이 반드시 한데 모을 수 있지는 않다. 이러한 조건 밑에서 그들은 소용되는 최선의 물질을 이용해야 한다.
39:3.6 (432.7) 이 천사들은 저택 세계 및 더 높은 상물질 세계에서 그들의 직책을 계속한다. 그들은 상물질 세계에서 생기는 진보와 상관 있고, 세 사람 이상에 관계되는 어떤 사업에도 관심을 가진다. 두 존재는 짝짓거나, 보완하거나, 협동하는 데 근거를 두고 활동하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세 사람 이상이 봉사하려고 한데 모일 때, 그들은 하나의 사회 문제를 구성하며, 따라서 사회 조성자들의 관할로 넘어간다. 이 유능한 세라핌들은 에덴시아에서 70 분과로 조직되며, 이 여러 분과는 본부 구체를 도는 세계, 상물질로서 진보하는 70 세계에서 봉사를 베푼다.
39:3.7 (433.1) 4. 윤리 감각 향상자. 사람이 인간 관계의 도덕성을 더욱 이해하도록 육성하고 촉진하는 것이 이 세라핌들의 임무이다. 이는 그러한 것이, 인간이나 초인간의 사회 및 정부가 계속하여 의도한 대로 성장하게 하는 씨앗이요 그 비결이기 때문이다. 윤리를 더욱 이해시키는 이 세라핌들은, 행성 통치자에게 자원하는 상담자로서, 그리고 체계의 훈련 세계에서 교환 선생으로서, 그들이 소용될까 싶은 곳은 어디서나 활동한다. 그러나 너희가 에덴시아에 있는 여러 형제 정신 학교에 이르기까지, 너희는 그들의 완전한 지휘를 받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 학교에서 그들은 바로 그 친교의 진리를 너희가 이해하도록 일깨울 것이다. 에덴시아의 여러 사회 실험실, 곧 놀라시아덱 서울의 70 위성에서 일생자(一生者)들과 함께 실제로 사는 체험을 겪음으로, 그때에도 너희는 아주 열심히 친교의 진리를 탐구할 것이다.
39:3.8 (433.2) 5. 수송자. 다섯째 집단의 감독 세라핌은 성격자를 수송하는 자로서 활동하며, 별자리 본부에서 오가는 존재들을 실어 나른다. 그러한 수송 세라핌은, 한 구체에서 다른 구체로 가는 비행 중에, 그들의 속도, 방향, 천문학적 위치를 완전히 의식하고 있다. 그들은 생명이 없는 탄환처럼 공간을 통과하지 않는다. 충돌할 위험이 조금도 없이 공간을 비행하는 중에 서로 가까이서 추월할 수도 있다. 그들은 진행 속도를 변화시키고, 비행 방향을 충분히 바꿀 수 있으며, 우주 정보 회로의 어느 공간 교차로에서도 상관들이 지시한다면, 목적지를 바꿀 수도 있다.
39:3.9 (433.3) 이 이동 성격자들은 아주 잘 조직되어 있으므로 보편적으로 분배된 세 에너지 선을 동시에 모두 이용할 수 있는데, 각 선은 분명히 1초에 299,780킬로미터의 공간 속도를 가지고 있다. 오랫동안 여행할 때 너희 시간으로 1초에 893,162킬로미터에서부터 거의 899,599킬로미터 사이까지 변하는 어떤 평균 속도를 얻을 때까지, 이 수송자들은 이처럼 동력 속도 위에 에너지 속도(速度)를 겹쳐 놓을 수 있다. 속도는 근처에 있는 물질의 질량과 거리, 그리고 근처에 있는 우주 동력의 기본 회로의 강도 및 방향에 영향을 받는다. 공간을 통과하고, 또한 적절히 준비된 다른 존재들을 수송할 수 있는 존재, 세라핌과 비슷한 수많은 종류의 존재들이 있다.
39:3.10 (433.4) 6. 기록자. 여섯째 계급의 감독 세라핌은 별자리 사무의 특별 기록자로서 행동한다. 하나의 크고 유능한 집단이 에덴시아에서 활동하는데, 여기는 너희 체계와 행성이 속하는 놀라시아덱 별자리의 본부이다.
39:3.11 (433.5) 7. 예비군. 감독 세라핌의 일반 예비군이 별자리의 본부에서 유지된다. 그러한 예비군의 천사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놀지 않는다. 다수가 별자리 통치자들에게 소식 전하는 보조자로서 근무하며, 더러는 배치되지 않은 보론다덱의 구원자별 예비군에 소속된다. 더러는 보론다덱 관찰자, 그리고 가끔 유란시아의 최고자 대리처럼, 특별 임무를 받은 보론다덱 아들들에게 부속될 수도 있다.
39:4.1 (434.1) 넷째 계급의 세라핌은 지역 체계의 행정 의무에 배치된다. 그들은 체계 서울에서 태어나지만, 큰 무리를 이루어 저택 구체와 상물질 구체에, 그리고 사람 사는 세계에 주둔한다. 넷째 계급의 세라핌은 천성으로 비상한 행정 능력을 부여받는다. 창조 아들의 우주 정부에서 하위 부서 지도자들에게 유능한 조수이며, 지역 체계 및 이를 구성하는 세계들의 사무에 주로 전념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근무를 위하여 조직된다.
39:4.2 (434.2) 1. 행정 조수. 이 유능한 세라핌들은 체계 군주, 곧 1차 라노난덱 아들에게 직속된 조수(助手)이다. 그들은 체계 본부의 집행 작업의 까다로운 세부를 집행하는 데 귀중한 도움을 주는 일꾼이다. 또한 체계 통치자의 개인 대리자로서 근무하고, 큰 무리를 이루어 여러 과도기 세계와 사람 사는 행성으로 오가며, 체계의 복지를 위하여, 그에 속한 사람 사는 세계들의 물리적 이익과 생물학적 이익을 위하여 많은 임무를 집행한다.
39:4.3 (434.3) 바로 이 행정 천사들은 또한 세계 통치자, 곧 행성 영주의 정부에 부속된다. 일정한 우주에서 대다수의 행성들은 2차 라노난덱 아들의 관할 밑에 있으나, 유란시아와 같이 어떤 세계에서는 신의 계획이 유산(流産)되었다. 행성 영주가 배반할 경우에, 이 세라핌들은 멜기세덱 관리자와 그 행성 권한을 계승하는 자들에게 소속된다. 현재 유란시아의 임시 통치자는 이 다능한 계급의 세라핌 1천 명으로 구성된 군단의 지원을 받는다.
39:4.4 (434.4) 2. 응보 안내자. 이들은 사람과 천사의 영원한 복지에 관하여, 그러한 문제들이 한 체계나 행성의 법정에서 재판에 오를 때, 증거의 요약을 제시하는 천사이다. 필사자의 생존에 관계되는 모든 예비 청문회를 위하여 진술서를 작성하고, 이 진술서는 그러한 사례의 기록과 함께, 나중에 지역 우주와 초우주의 고등 법정으로 넘겨진다. 이 세라핌들은 사람이 살아남는 것이 의심되는 모든 사례의 변론을 준비하며, 그들은 우주의 응보를 맡은 행정관들이 작성한 기소(起訴)의 모든 항목, 모든 특성을 낱낱이 모두 완전히 이해한다.
39:4.5 (434.5) 응보를 막거나 지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어김없는 응보가 아주 자비롭게 배분됨을 보장하는 것이 이 천사들의 임무이다. 이 세라핌들은 흔히 여러 지역 세계에서 활동하며, 화해 위원회―사소한 오해를 다루는 법정―의 심판 삼원조 앞에 보통 출두한다. 한때 낮은 지역에서 응보 안내자로 근무한 자의 다수는, 높은 구체에서, 그리고 구원자별에서 자비의 목소리로서 나중에 등장한다.
39:4.6 (434.6) 사타니아에서 루시퍼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응보 안내자는 거의 분실되지 않았으나 다른 행정 세라핌, 그리고 더 낮은 계급의 천사 봉사자의 4분의 1이 넘게, 고삐 없는 개인의 자유라는 궤변에 잘못 이끌려 가서 착각에 빠졌다.
39:4.7 (434.7) 3. 우주 시민권 해석자. 하늘 가는 필사자들이 저택 세계의 훈련, 곧 우주 생애에서 처음 받는 학생 견습을 마쳤을 때, 그들은 상대적 성숙이 주는 일시적 만족―체계 서울의 시민권―을 누리도록 허락된다. 각 승천 목표는 사실로 성취한 것이지만, 더 큰 의미에서 그러한 목표는 다만 오랜 세월동안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길에 이정표일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공이 아무리 상대적이라도 상관 없이, 진화하는 어떤 사람에게도 목표를 달성하는 만족, 일시라도 완전한 만족을 맛보는 것을 막지 않는다. 때때로 파라다이스로 향하여 올라가면서 잠시 멈추는 시간, 잠시 숨 돌릴 겨를이 있고, 그동안에 우주 지평선은 가만히 있고, 사람의 지위는 그대로 있고 인격자는 목적을 이룬 단맛을 즐긴다.
39:4.8 (435.1) 필사 승천자의 생애에서 그러한 첫 기간은 한 지역 체계의 서울에서 생긴다. 이 멈추는 기간에, 너는 예루셈의 한 시민으로서―유란시아와 일곱 저택 세계를 포함하는―여덟 가지 전생(前生)의 체험을 겪는 동안에 네가 얻은 것을 인간 생활에서 표현하려고 애쓸 것이다.
39:4.9 (435.2) 우주 시민권을 해석하는 천사들은 체계 서울의 새 시민을 안내하고, 우주 정부의 책임을 빨리 이해시킨다. 이 세라핌들은 또한 체계의 행정에서 물질 아들들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고, 한편 그들은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물질적 필사자에게 우주 시민의 책임과 도덕성을 보여준다.
39:4.10 (435.3) 4. 도덕 촉진자. 너는 여러 저택 세계에서, 관련된 모든 자의 이익을 위하여 자치(自治)하는 것을 비로소 배운다. 너의 머리는 협동을 배우고, 다른 더 지혜로운 존재들과 어떻게 계획하는가 배운다. 체계 본부에서, 선생 천사들은 우주 도덕성을―자유와 충성의 상호 관계를―네가 이해하도록 더욱 일깨운다.
39:4.11 (435.4) 무엇이 충성인가? 충성은 우주의 형제 정신을 영리하게 인식함으로 생기는 열매이다. 사람은 아주 많이 받고서 남에게 전혀 주지 않을 수가 없다. 인격의 눈금에서 올라감에 따라서, 처음에 너는 충성하기를 배우고, 다음에 사랑하기를 배우며, 다음에 자식의 도리를 배우며, 다음에 너는 자유롭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네가 최후자가 되기까지, 완전한 충성에 이르기까지, 너는 최종의 자유를 스스로 실현할 수 없다.
39:4.12 (435.5) 이 세라핌들은 참을성이 열매 맺는다는 것을 가르친다. 침체는 확실히 죽음으로 이끌지만, 지나치게 빠른 성장은 똑같이 자살이라는 것, 물 한 방울이 높은 수준에서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며, 줄곧 흘러가서, 연달아 조금씩 떨어져 늘 밑으로 내려가는 것처럼―마찬가지로 천천히, 그러한 똑같은 점진적 단계를 거쳐서―상물질 세계와 영 세계에서, 진보는 늘 위를 향한다.
39:4.13 (435.6) 사람이 사는 여러 세계에게, 도덕 촉진자들은 필사자의 인생을 여러 고리가 연결된 사슬로서 묘사한다. 필사자가 어린 시절을 보내는 이 구체 유란시아에서 네가 잠시 머무르는 것은 겨우 한 고리요, 여러 우주를 거쳐 가고 영원한 시대를 통해서 뻗어나가는 긴 사슬의 맨 처음 고리이다. 이 처음 생명에서 네가 배우는 것은 그리 대단치 않다. 중요한 것은 이 생명을 사는 체험이다. 이 세계에서 하는 일조차 중대하기는 하지만, 네가 이 일을 어떤 방법으로 하는가, 이보다 거의 더 중요하지 않다. 바르게 사는 데는 아무런 물질적 보상이 따르지 않지만, 깊은 흐뭇함―성취하는 의식―이 있으며, 이것은 생각할 수 있는 어떤 물질적 보상도 초월한다.
39:4.14 (435.7) 하늘 나라의 열쇠는 성실(誠實)하게, 더욱 성실하게, 또 더욱 성실하게 사는 것이다. 누구나 이 열쇠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결심하고, 더욱 결심하고, 또 더욱 결심하여 이 열쇠를 사용한다―영적 지위가 올라간다. 가장 도덕적인 선택은 가능한 가장 높은 가치를 고르는 것이요, 언제나―어느 구체에서나, 모든 구체에서―하나님의 뜻 실행하기를 택하는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선택하면, 비록 예루셈에서 가장 비천한 시민이라도, 아니 유란시아에서 지위가 가장 낮은 필사자라도, 그는 위대하다.
39:4.15 (436.1) 5. 수송자. 이들은 지역 체계에서 활동하는 수송 세라핌이다. 너희의 체계 사타니아에서, 그들은 예루셈에서 오가는 승객들을 나르며, 그 외에 행성간 수송자로서 근무한다. 사타니아의 수송 세라핌이 어떤 학생 방문자나, 영이나 준영(準靈) 성질을 가진 어떤 다른 여행자를 유란시아 해안에 투입하지 않고서 하루가 지나는 경우는 드물다. 바로 이 공간 통과자들은 언젠가 체계 본부 집단의 여러 세계로 너희를 싣고 오고갈 터이고, 너희가 예루셈의 과제를 마치고 나서, 너희를 앞으로, 에덴시아로 나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기원이 있는 세계로 너희를 뒤로 나르지 않을 것이다. 필사자는 그가 일시 존재하는 섭리 시대에는 결코 태어난 행성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만일 이후의 섭리 시대에 돌아간다면, 그는 우주 본부 집단의 한 수송 세라핌의 호송을 받을 것이다.
39:4.16 (436.2) 6. 기록자. 이 세라핌들은 지역 체계의 3중 기록을 보관하는 자이다. 한 체계 서울에서 기록부 전당(殿堂)은 독특한 구조이다. 3분의 1은 물질이며, 빛나는 금속과 수정(水晶)으로 건축되었다. 3분의 1은 상물질이며, 영적 에너지와 물질 에너지를 연결해서 제조되었지만, 필사자 시력의 한계를 벗어나며, 3분의 1은 영적이다. 이 계급의 기록자는 이 3중 기록 체계를 주관하고 유지한다. 하늘 가는 필사자는 처음에 물질 기록 보관소를 참조하며, 물질 아들과 높은 과도기 존재는 상물질 회관에 있는 기록 보관소를 참조하고, 한편 그 영역의 세라핌과 높은 영 성격자들은 영 구역의 기록을 훑어본다.
39:4.17 (436.3) 7. 예비군. 예루셈에서 이 예비군 부대(部隊)의 행정 세라핌은, 영 동반자로서, 체계의 여러 세계로부터 새로 도착한 승천 필사자―여러 저택 세계에서 인가받은 졸업생―들과 사귀느라고, 기다리는 시간의 상당 부분을 보낸다. 예루셈에서 너희가 머무르는 동안 얻는 한 가지 즐거움은 여행을 많이 하고 체험을 많이 겪은 세라핌, 기다리는 예비군에 속한 이 세라핌들과 쉬는 기간에 이야기하고 사귀는 것이다.
39:4.18 (436.4) 하늘 가는 필사자가 체계 서울을 아주 소중히 여기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친근한 관계이다. 예루셈에서 너희는 물질 아들과 천사와 하늘 가는 순례자들이 처음으로 서로 섞이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온전한 영적 존재, 반(半)영적 존재, 그리고 물질 존재로부터 막 솟아나는 개인들이 여기서 사귄다. 필사자의 형태는 거기서 아주 수정되고, 빛에 대한 인간의 반응 범위가 아주 확대되어서, 모두가 서로를 인식하고 공감하면서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
39:5.1 (436.5) 이 세라핌들은 체계 서울에서 본부를 유지한다. 거주하는 아담 시민과 밀접히 관련되지만, 주로 행성 아담, 곧 진화 세계에서 물질 민족들의 생물학적 개량자, 신체 개량자에게 봉사하는 데 배치된다. 천사의 봉사하는 작업은 그 작업이 사람이 사는 세계들에 가까워짐에 따라서, 영원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시도를 위하여 준비하는, 시간 세계의 남녀가 부딪치는 실제 문제에 가까워짐에 따라서, 더욱 흥미롭게 된다.
39:5.2 (437.1) 유란시아에서 행성 조수의 대다수는 아담의 체제가 붕괴하고 나서 제거되었고, 너희 세계의 천사 감독은 대체로 행정자, 과도기 봉사자, 운명 수호자들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너희의 실패한 물질 아들들을 보조하던 이 천사들은 다음 집단에서 유란시아에서 아직도 근무한다.
39:5.3 (437.2) 1. 동산의 목소리. 행성에서 인간의 진화 과정이 가장 높은 생물학적 수준에 도달했을 때, 물질 아들딸, 곧 아담과 이브가, 그들의 우수한 생명 원형질을 실제로 기여함으로 종족들의 계속된 진화를 강화하려고 반드시 나타난다. 그러한 아담과 이브의 행성 본부는 보통 에덴 동산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개인 세라핌은 흔히 “동산의 목소리”로 알려져 있다. 이 세라핌들은 진화 종족들의 육체와 지능을 향상시키려고 벌이는 모든 사업에서 행성 아담에게 귀중하게 쓰인다. 유란시아에서 아담이 실패한 뒤에, 이 세라핌들 가운데 더러는 행성에 남아서, 아담의 권한을 이어받은 후계자들에게 배치되었다.
39:5.4 (437.3) 2. 형제 정신의 영. 아담과 이브가 한 진화하는 행성에 도착할 때, 그 다양한 종족들 사이에 종족의 조화와 사회적 협동을 성취하는 과제는 상당한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이다. 피부 빛이 다르고 성품이 다른 이 종족들은 인간이 형제가 되는 계획을 달갑게 여기는 일이 드물다. 이 원시인들은 성숙한 인간 체험을 겪는 결과로서, 그리고 천사인 형제 정신의 영들의 충실한 봉사를 통해서, 서로 평화 관계를 가질 지혜를 겨우 깨닫게 된다. 이 세라핌들이 일하지 않으면, 진화 세계의 종족들을 조화시키고 향상시키려는 물질 아들들의 노력은 크게 지연될 것이다. 너희의 아담이 유란시아를 발전시키는 최초의 계획을 고수했더라면, 이때쯤 되어서 이 형제 정신의 영들이 인류에게 믿을 수 없는 변화를 일으켰을 것이다. 아담의 실패에 비추어 볼 때, 이 천사 계급들이 유란시아에서 지금 너희가 가진 형제 정신만큼이라도 육성하고 실현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정말로 놀랍다.
39:5.5 (437.4) 3. 평화의 혼. 진화하는 사람들이 전진하려고 싸웠던 초기의 몇천 년은 많은 투쟁으로 얼룩져 있다. 평화는 물질 영역에서 자연스런 상태가 아니다. 세계들은 평화의 혼 천사들이 베푸는 봉사를 통해서 “땅에는 평화요, 사람들 사이에 선의”를 처음으로 실현한다. 이 천사들이 유란시아에서 초기에 수고할 때 대체로 방해를 받았지만, 아담 시절에 평화의 혼의 우두머리 베보나는 유란시아에 남았고, 지금 거주하는 총독의 참모진에 소속되어 있다. 미가엘이 태어났을 때, 바로 이 베보나가 천사 무리의 지도자로서 여러 세계에 이렇게 알렸다, “하보나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는 사람들 사이에 평화와 선의라.”
39:5.6 (437.5) 행성의 진화가 더 진보된 시대에 이 세라핌들은 필사자가 살아남는 것에 관한 철학으로서, 속죄(贖罪)[1] [1672] 개념을 신의 목소리에 조율하는 개념으로 갈아치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
39:5.7 (437.6) 4. 신뢰의 영. 의심은 원시인 본래의 반응이다. 초기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투쟁은 자연히 신뢰감을 길러주지 않는다. 신뢰는 아담 체제의 이 행성 세라핌들이 봉사를 베풀어 인간이 새로 얻은 것이다. 진화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남을 신뢰하는 생각을 주입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신들은 사람을 아주 믿는다. 우주의 아버지는 자유로이 자신을―조절자를―사람과 교제하라고 기꺼이 맡긴다.
39:5.8 (438.1) 이 세라핌 집단 전체는 아담의 실수가 있은 뒤에 새 체제로 이전되었고, 그 뒤로 늘 유란시아에서 줄곧 수고해 왔다. 그들은 전적으로 실패하지는 않았는데, 그들의 이상, 곧 신용과 신뢰를 상당히 구현하는 문명이 지금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39:5.9 (438.2) 행성이 더 진보한 시대에 이 세라핌들은 불확실성이 연속된 만족을 얻는 비결이라는 진리를 사람이 더욱 깨닫게 만든다. 모르는 것이 성공에 필수일 때, 이들은 사람이 미래를 아는 것이 엄청난 실수라는 것을 필사 철학자들이 깨닫도록 도와준다. 그들은 불안의 달콤함, 그리고 막연한 미지의 앞날이 가진 꿈같은 이야기와 매력을 맛보려는 사람의 입맛을 당기게 한다.
39:5.10 (438.3) 5. 수송자. 행성의 수송자들은 개별 세계에서 근무한다. 이 행성에 데려온, 천사에 둘러싸인 존재들의 대다수는 이동 중에 있으며, 그들은 다만 가는 길에 멈출 뿐이다. 그들은 자기의 특별한 수송 천사의 보호를 받고 있지만, 그러한 세라핌의 큰 무리가 유란시아에 주둔한다. 그들은 유란시아로부터 예루셈까지 갈 경우처럼, 지역 행성에서 활약하는 수송 성격자이다.
39:5.11 (438.4) 천사에 관한 너희의 전통적 관념은 다음과 같이 생겨났다. 육체가 죽기 바로 직전의 순간에, 인간의 머리 속에서 돌이켜보는 현상이 가끔 일어나는데, 이 흐려지는 의식은 시중드는 천사 형태와 같은 무엇을 눈에 선하게 보는 듯하며, 이것은 즉시 그 사람의 머리가 지녔던 습관적 천사 개념으로 바뀐다.
39:5.12 (438.5) 천사가 날개를 가졌다는 그릇된 생각은 전적으로, 공중을 날아다니기 위해서 날개가 있어야 한다는 옛 관념 때문은 아니다. 인간은 수송 서비스를 위해서 준비되는 세라핌을 가끔 지켜보는 것이 허락되었고, 이 체험에 대한 전통이 유란시아에서 천사 개념을 대체로 고정시켰다. 행성 사이에 이동하는 한 승객을 받으려고 준비되는 수송 세라핌을 지켜볼 때, 천사의 머리로부터 발까지 뻗는 두 벌의 날개와 같은 것이 보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이 날개는 에너지 절연체이다―마찰을 막는 방패이다.
39:5.13 (438.6) 하늘 존재들이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하려고 세라핌에 둘러싸여야 할 때, 그들은 그 구체의 본부로 인도되고, 정식으로 등록한 뒤에, 이동하는 잠으로 유도된다. 그동안에 수송 세라핌은 그 행성의 우주 에너지 극(極) 바로 위 수평 위치로 움직인다. 에너지 방패들이 활짝 열린 동안, 주관하는 보조 천사들이 잠자는 인격자를 수송 천사 바로 위에, 교묘하게 투입한다. 그리고 나서 위쪽 쌍과 아래쪽 쌍의 방패가 모두 조심스럽게 닫히고 조정된다.
39:5.14 (438.7) 그리고 이제, 변압자와 송신자들의 영향 밑에서, 세라핌이 우주 회로의 에너지 흐름 속으로 휙 들어가려고 준비되는 동안, 이상한 변형이 시작된다. 겉보기에 그 세라핌의 양쪽 끝이 뾰족하게 되며, 호박색을 띤 기묘한 빛 속에 아주 가려져서, 금방 천사에 둘러싸인 인격자를 구별하기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이 떠날 준비가 되었을 때, 수송 부장이 생명이 실린 차량(車輛)을 적절히 검사하고, 천사가 적절히 회로에 연결되었는가 되지 않았는가 확인하려고 일상적 검사를 행한다. 그리고 나서, 여행자가 적절히 세라핌 속에 들어 있다, 에너지가 조정되었다, 그 천사가 절연되었다, 출발 신호를 위해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고 선언한다. 다음에 기계적 통제자 둘이서 자기 자리를 잡는다. 이때쯤 되어서, 수송 세라핌은 거의 투명하고 진동하는 어뢰(魚雷) 모양으로 반짝이는 빛의 윤곽이 되어버린다. 이제 그 영역의 수송기 파송자는 살아 있는 에너지 송신자의 보조 중대(中隊)들을 호출하는데, 그들은 보통 1천 명이다. 수송기의 목적지를 발표하면서, 그는 손을 뻗어서 천사 차량의 가까운 점에 손을 댄다. 천사 차량은 번개 같은 속도로 앞으로 튀어나가며, 그 행성의 대기권이 연장되는 데까지 하늘의 빛 줄기를 남긴다. 10분도 채 안 되어, 그 놀라운 광경은 세라핌의 강화된 시야로부터도 사라져 버릴 것이다.
39:5.15 (439.1) 행성의 공간 보고서는 지정된 영적 본부의 자오선(子午線)에서 정오에 수신되며, 한편 수송자들은 바로 이 자리에서 자정(子正)에 파송된다. 이때가 출발을 위해서 가장 유리한 시간이며, 달리 명시되지 않을 때 그때가 표준이 되는 시각이다.
39:5.16 (439.2) 6. 기록자. 행성이 체계의 일부로서 작용하고, 행성이 우주 정부에 관계되고, 또 그에 관여하다시피, 이들은 행성의 주요 사무의 관리자이다. 그들은 행성 사무를 기록하는 일에 활동하지만, 개인의 생명이나 존재 문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39:5.17 (439.3) 7. 예비군. 행성 세라핌의 사타니아 예비군은, 물질 아들 예비군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예루셈에서 유지된다. 이 풍부한 예비군은 이 천사 계급의 온갖 단계의 다양한 활동을 충만히 마련해 준다. 이 천사들은 또한 지역 체계의 개인적 소식을 지참하는 자이다. 그들은 체계 본부에 주소를 둔 다른 자들은 물론이고, 이동 중에 있는 필사자, 천사, 물질 아들들에게 봉사한다. 현재 유란시아는 사타니아와 놀라시아덱의 영적 회로 바깥에 있지만, 그 외에 너희는 행성간 사무와 긴밀한 접촉을 가지고 있다. 이는 예루셈에서 온 이 사자들이, 체계의 모든 다른 구체에 가는 것 같이, 빈번히 이 세계로 오기 때문이다.
39:6.1 (439.4) 그 이름이 넌지시 가리키다시피, 과도기에 봉사하는 세라핌은 사람이 물질 지위에서 영적 지위로 넘어가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나 봉사한다. 이 천사들은 사람이 사는 세계로부터 체계의 서울까지 봉사하지만, 사타니아에 있는 천사들은 현재 일곱 저택 세계에서 살아남는 필사자들을 교육하는 데 최대의 힘을 쏟는다. 이 봉사는 다음 일곱 계급의 배치에 따라서 다양해진다.
39:6.9 (439.12) 여러 저택 세계와 상물질 생활을 다루는 이야기와 관련하여, 너희는 과도기의 승천자를 보살피는 이 봉사하는 천사들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39:7.1 (440.1) 네바돈에서 오래 된 나라에서, 그리고 진보된 행성에서 봉사하는 것을 제쳐놓고, 이 천사들은 광범위하게 봉사하지 않는다. 그들의 큰 무리가 구원자별에서 가까운 여러 천사 세계에서 예비군에 남아 있으며, 거기서 네바돈에서 빛과 생명의 시대가 언젠가 밝아오는 데 관련된 일에 종사한다. 이 세라핌들은 승천하는 필사자의 생애와 연결되어 활동하지만, 수정된 승천 계급 중에서 누군가를 잃은 필사자들에게 거의 순전히 봉사한다.
39:7.2 (440.2) 이 천사들이 지금 유란시아나 유란시아인과 직접 상관되지 않으니까, 그들의 황홀한 활동에 관하여 설명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판단된다.
39:8.1 (440.3) 세라핌들은 지역 우주에 기원이 있으며, 더러는 그들이 출생한 바로 이 영역에서 봉사하는 운명에 도달한다. 선임 천사장들의 도움과 조언을 받고서 어떤 세라핌은 찬란한 저녁별이 되어 높은 임무로 승급될 수도 있고, 한편 더러는 저녁별과 동격인 밝혀지지 않은 지위와 봉사에 도달하기도 한다. 지역 우주 운명을 가진 또 다른 모험을 시도해도 좋지만, 천사별은 언제나 모든 천사의 영원한 목표로 남는다. 천사별은 천사에게 파라다이스와 신에 도달하는 문턱이며, 시간 세계의 봉사로부터 영원 속에 고귀한 근무에 이르는 사이의 과도기 구체이다.
39:8.2 (440.4) 세라핌은 수십―수백―가지 방법으로 파라다이스에 도착해도 좋지만, 이 이야기에서 상술(詳述)한 바와 같이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39:8.3 (440.5) 1. 개인 자격으로, 하늘 예술가나, 법률 고문이나 또는 하늘 기록자로서 특화된 근무에서 완전하게 됨으로, 파라다이스의 천사 거처에 입국 허가를 받는 것. 파라다이스 동반자가 되고, 이렇게 만물의 중심에 이르고 나서, 아마도 천사 계급 및 다른 자들에게 영원한 봉사자와 고문이 되는 것.
39:8.4 (440.6) 2. 천사별로 호출받는 것. 어떤 조건 하에서, 세라핌은 하늘로부터 오라고 명령을 받는다. 다른 상황에, 천사들은 때때로 사람보다 파라다이스에 이르는 데 시간이 훨씬 덜 걸린다. 그러나 어떤 천사 한 쌍이라도, 아무리 적성이 있어도, 그들은 천사별이나 다른 데로 출발을 개시할 수 없다. 성공한 운명 수호자들 외에 아무도, 진화로 승천하는 점진적 행로를 거쳐서 파라다이스로 나아가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모든 다른 천사는 그들에게 하늘로 출두하라고 명하는 호출장을 가지고 오는 3차 상천사인 파라다이스 사자가 도착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39:8.5 (440.7) 3. 진화하는 필사자의 기법을 이용하여 파라다이스에 도달하는 것. 시간 세계의 일생에서 세라핌의 최상의 선택은 수호 천사의 자리이며, 그렇게 그들이 최종의 생애에 도달하고, 천사로 근무하는 영원한 구체로 배치될 자격을 갖추게 된다. 시간 세계의 아이를 그렇게 몸소 안내하는 자를 운명 수호자라고 부르며, 그것은 신성한 운명을 따르는 길에서 필사 인간을 지키고, 그렇게 함으로 자신의 높은 운명을 그들이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9:8.6 (440.8) 운명 수호자는 이 근무를 위해서 자격을 갖춘 모든 계급의 세라핌들 가운데, 경험이 많은 천사 성격자의 계층에서 뽑는다. 조절자와 융합할 운명을 가진 어떤 살아남는 사람에게도 임시 수호자가 배치되며, 이 동료들은 필사 생존자가 필요한 지적ㆍ영적 성장을 마칠 때 영구하게 소속될 수도 있다. 하늘 가는 필사자는 저택 세계들을 떠나기 전에 모두 영구한 동료 천사를 가진다. 이 집단의 봉사하는 영들은 유란시아 이야기와 관련해서 논의된다.
39:8.7 (441.1) “너희보다 조금 높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천사들은 인간 수준의 기원으로부터 하나님이 계신 곳에 도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도저히 맨 밑바닥에서, 필사자가 존재하는 그 영적 저지(低地)에서 시작할 수 없지만, 그들은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자에게 내려가서, 한 걸음 한 걸음, 한 세계 한 세계, 하보나의 입구까지 그러한 사람을 안내해도 좋다. 하늘 가는 필사자가 하보나 회로를 시작하려고 유버르사를 떠날 때, 육체를 입은 생명 이후에 부속되었던 이 수호자들은 순례하는 동료에게 일시 작별을 알린다. 그동안에 그들은 천사별로 여행하는데, 여기는 대우주에서 천사의 목적지이다. 여기서 이 수호자들은 천사 빛의 일곱 궤도를 시도하고, 의심할 여지 없이 달성한다.
39:8.8 (441.2) 물질적 생명 동안에 운명 수호자로 배치된 세라핌 중에, 모두는 아니지만, 다수가 하보나 궤도들을 통해서 자기 필사 동료를 동반하고, 어떤 다른 세라핌들은 필사자의 승천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중앙 우주의 회로들을 통과한다. 그러나 하늘 가는 길과 상관 없이, 진화 세라핌은 모두 천사별을 거치고, 대다수는 여러 하보나 회로 대신에 이 체험을 거친다.
39:8.9 (441.3) 천사별은 천사에게 운명의 구체이며, 그들이 이 세계에 도달하는 것은 필사 순례자가 승천자별에서 겪는 체험과 아주 다르다. 천사들은 천사별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영원한 미래에 관하여 절대로 확신하지 못한다. 천사별에 도달한 어떤 천사도 잘못에 빠졌다고 보고된 적이 없다. 죄는 결코 완결 세라핌의 마음 속에서 반응을 얻지 못할 것이다.
39:8.10 (441.4) 천사별 졸업자는 여러 가지로 배치된다. 하보나 궤도의 체험을 겪은 운명 수호자들은 보통 필사 최후자 군단에 들어간다. 다른 수호자들은 하보나 분리 시험에 합격했으니까, 흔히 파라다이스에서 필사 동료와 합세한다. 더러는 필사 최후자의 영구한 동료가 되며, 한편 더러는 필자자가 아닌 다양한 최후자 군단에 들어가고, 다수는 완결 천사 군단으로 소집된다.
39:9.1 (441.5) 영들의 아버지가 계신 곳에 도달하고, 완성된 천사 근무에 들어간 뒤에, 천사들은 때때로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세계에서 봉사하는 데 배치된다. 그들은 여러 우주에서 삼자일체화로 태어난 높은 존재들에게, 그리고 파라다이스와 하보나에서 일하는 고귀한 봉사에, 소속된다. 이 지역 우주 세라핌들은, 이전에 그들을 중앙 우주와 초우주에서 봉사하는 영과 구별했던, 신 가능성의 차이를 경험으로 보상하였다. 완결 천사 군단의 천사들은 초우주의 2품 천사들의 동료로서, 그리고 높은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계급의 상천사의 조수로서 근무한다. 그러한 천사에게는 시간 세계의 생애가 끝났다. 그때부터, 영원히 그들은 하나님의 일꾼이요, 신다운 성격자들과 사귀는 자이며, 파라다이스 최후자와 대등한 자이다.
39:9.2 (441.6) 큰 무리의 완결 세라핌은 그들이 출생한 우주로 돌아가고, 거기서 체험으로 완전한 봉사를 베풀어, 신다운 자질로 행하는 봉사를 보완한다. 비교해서 말하면, 네바돈은 젊은 우주 축에 속한다. 따라서 더 오래 된 영역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네바돈에는 돌아온 이 천사별 졸업생이 많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 지역 우주는 완결 세라핌의 공급을 적절히 받고 있는데, 진화하는 영역이 빛과 생명의 지위에 가까워짐에 따라서 그들이 더욱 봉사할 필요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완결 세라핌들은 지금 최상 계급의 세라핌들과 함께 더욱 널리 근무하지만, 더러는 다른 각 천사 계급과 함께 근무한다. 너희 세계조차도 완결 천사 군단에서 전문화된 12 집단의 광범위한 봉사를 누린다. 행성을 감독하는 이 노련한 세라핌들은 새로 임명받은 각 행성 영주를 사람이 사는 세계까지 동반한다.
39:9.3 (442.1) 봉사하는 많은 황홀한 길이 완결 세라핌에게 열려 있다. 그러나 파라다이스로 가기 이전 시절에 운명 수호자로 배치받기를 모두 열망한 것과 똑같이, 그들은 파라다이스 이후 체험에서 육신화된 파라다이스 아들의 수여 수행원으로서 근무하기를 가장 바란다. 진화 세계의 필사 인간이 신과 영원에 도달하는 파라다이스 목표를 향하여 길고도 흥미 있는 나그네 길을 떠나는 우주 계획에, 그들은 여전히 최고로 헌신한다. 하나님을 발견하고 신다운 완전함에 이르는 필사자의 모험 전체를 통해서, 완결 천사인 이 영 봉사자들은, 시간 세계에서 봉사하는 충실한 영들과 함께, 언제나, 언제까지나 너희의 참다운 친구요 지칠 줄 모르는 조수이다.
39:9.4 (442.2) [네바돈 천사 무리 우두머리의 요청을 받고서 행동하는 한 멜기세덱이 발표하였다.]
40:0.1 (443.1) 많은 주요 집단의 우주 존재들의 경우처럼, 일곱 가지 일반 등급의 하늘 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밝혀졌다:
40:0.2 (443.2) 1. 아버지가 융합한 필사자.
40:0.3 (443.3) 2. 아들이 융합한 필사자.
40:0.9 (443.9) 진화 세계에서 비천한 동물의 기원을 가진 필사자로부터 우주의 아버지의 인격화된 조절자에 이르기까지, 이 여러 존재에 관한 이야기는 파라다이스 신들의 광범위한 창조에서 세세토록, 온 우주를 통해서, 아낌없이 신의 사랑을 수여하고 인자하게 지체를 낮춘 영광스러운 내력의 이야기이다.
40:0.10 (443.10) 이러한 발표는 신들의 묘사로 시작했고, 불사(不死)의 가능성을 부여받은 가장 낮은 계급의 생명에 미칠 때까지, 이야기는 한 집단 한 집단, 우주의 살아 있는 존재의 단계를 내려왔다. 이제 나는―한때 공간의 어느 진화 세계에서 기원을 가진 필사자였는데―하늘 가는 아들 계급에 관하여, 더 자세히 말하면 시공의 필사 인간에 관하여, 신들의 영원한 목적에 관련된 이야기를 더 자세히 설명하고 계속하려고 구원자별로부터 파송되었다.
40:0.11 (443.11) 이 이야기의 반이 넘는 부분이 3대 기본 계급의 하늘 가는 필사자들을 논하는 데 쓰일 것이므로, 필사자가 아닌 승천 계급의 아들 신분이 ―세라핌ㆍ아담ㆍ중도자ㆍ조절자가―먼저 고려될 것이다.
40:1.1 (443.12) 동물 기원을 가진 필사 인간은 아들 신분의 특권을 받은 유일한 존재가 아니다. 천사 무리도 또한 파라다이스에 이르는, 하늘이 준 기회를 함께 가진다. 하늘 가는 시간 세계 필사자와 함께 체험하고 봉사함으로, 수호 세라핌도 또한 하늘 가는 아들 지위를 얻는다. 그러한 천사들은 천사별을 통해서 파라다이스에 이르고, 다수는 필사 최후 군단에 소집되기도 한다.
40:1.2 (443.13) 하나님의 최후자 아들이 되어 하늘처럼 높이 올라가는 것은 천사로서 훌륭한 성취이며, 영원한 아들의 계획과 깃드는 조절자의 상존하는 도움을 통해서 너희가 영원히 살아남는 것을 훨씬 능가하는 업적이다. 하지만 수호 세라핌, 그리고 이따금 다른 자들이 실제로 그러한 승천을 달성한다.
40:2.1 (444.1) 하나님의 물질 아들은 멜기세덱과 그 동료들과 함께 지역 우주에서 창조되었고, 그들은 모두 내려가는 아들로 분류된다. 정말로, 행성 아담―진화 세계의 물질 아들과 딸―은 내려오는 아들이며, 그들의 기원이 있는 구체, 지역 체계의 서울에서, 사람이 사는 세계로 내려온다.
40:2.2 (444.2) 그러한 아담과 이브는 생물학적 개량자로서 공동으로 행성 임무에 온전히 성공할 때, 그들 세계의 거주자들과 같은 운명을 가진다. 그러한 세계가 상급 단계에서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될 때, 이 충실한 물질 아들과 딸은 행성의 모든 행정 임무로부터 물러나는 것이 허락되고, 내려가는 모험으로부터 이처럼 해방된 뒤에 지역 우주 기록부에서, 완전하게 된 물질 아들로서 자신을 등록하는 것이 허락된다. 마찬가지로, 행성의 과제가 오래 지연될 때, 고정된―지역 체계의 시민―지위를 가진 물질 아들은 그들의 지위 구체에서 하던 활동으로부터 물러나고, 완전하게 된 물질 아들로서 비슷하게 등록한다. 이러한 절차를 밟은 뒤에, 그러한 해방된 아담과 이브는 하늘 가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고, 그 당시의 지위와 영적으로 도달한 바로 그 시점에서 출발함으로, 즉시 하보나와 파라다이스로 가는 긴 여행을 시작해도 좋다. 그리고 그들은 필사자 및 하늘 가는 다른 아들들과 일행을 이루어 이 나그네 길을 떠나며, 하나님을 발견하고, 파라다이스 신들에게 영원히 봉사하면서 필사 최후 군단을 성취할 때까지 계속한다.
40:3.1 (444.3) 내려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행성에 자신을 수여함으로 즉시 생기는 이익을 빼앗기고,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것이 오랫동안 미루어져도, 그런데도 진화하는 행성이 빛과 생명의 중간 시대에 도달한 뒤에 (만약 그 전이 아니라면), 두 집단의 중도인이 행성 임무에서 풀려난다. 어떤 때는 인간 사촌들과 더불어, 빛의 성전이 내려오고 행성 영주가 행성 군주의 직위로 승진하는 날, 그들의 대다수가 변신한다. 행성 근무에서 해방되고 나서, 두 계급은 지역 우주에서 하늘 가는 하나님의 아들로 등록되고, 물질 세계의 필사 종족들이 진보하도록 예정된 바로 그 길을 밟고서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긴 여행을 즉시 시작한다. 1차 집단은 다양한 최후자 군단으로 가도록 예정되지만, 2차 중도자, 곧 아담의 중도자들은 모두 필사 최후 군단에 등록하도록 길이 정해진다.
40:4.1 (444.4) 시간 세계의 필사자가 우주의 아버지가 주시는 영 선물과 행성에서 관계를 가지고서 혼이 영원히 살아남지 못할 때, 그러한 실패는 결코 어떤 면에서도 조절자 편에서 의무나 직분이나 봉사나 헌신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 아니다. 필사자가 죽을 때, 그러한 버림받은 훈계자는 신별로 돌아가고, 살아남지 못한 자의 판결이 있고 나서, 나중에 시공(時空) 세계에 다시 배치될지 모른다. 이 종류의 근무를 되풀이한 뒤에, 아니면 육신화한 수여 아들에게 깃드는 조절자로 활동하는 것처럼 어떤 특별한 체험을 겪은 뒤에, 어떤 때는 우주의 아버지가 이 유능한 조절자를 인격으로 만든다.
40:4.2 (445.1) 인격이 된 조절자는 독특하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등급의 존재이다. 최초에는 실존적 선(先)인격 지위를 가졌고, 물질 세계의 비천한 필사자의 생활과 생애에 참여하여 체험을 얻었다. 그리고 노련한 이 생각 조절자에게 수여된 인격은 우주의 아버지가 창조한 인간에게 체험적 인격을 수여하는, 계속하여 몸소 베푸는 봉사에 기원이 있고 그 근원이 있다. 그런 까닭에, 인격화된 이 조절자들은 하늘 가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그러한 아들 계급 중에서 가장 높은 계급으로 분류된다.
40:5.1 (445.2) 필사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존재들의 사슬에서 마지막 고리이다. 신다운 면이 자꾸 적어지고 더욱 인간답게 되는 일련의 성격화를 통해서 바로 너희와 아주 비슷한 존재, 너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날 때까지, 최초의 영원한 아들의 개인적 손길이 내려간다. 그때 너희의 믿음이 움켜쥘 수도 있는 위대한 진리―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너희가 영적으로 의식하게 된다!
40:5.2 (445.3) 마찬가지로, 최초의 무한한 영은 일련의 서열, 신다운 면이 더욱 적어지고 더욱 인간다워지는 긴 서열로 그 영역의 투쟁하는 생물에게 차츰차츰 가까이 다가가며, 표현의 한계인 천사에 미치는데―너희는 그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창조되었다―그들은 필사자가 시간 생애에서 일생토록 여행하는 동안 너희를 몸소 보호하고 안내한다.
40:5.3 (445.4) 아버지 하나님은 온 우주에 두루, 거의 한없는 수의 하늘 가는 인간과 그러한 거의 개인적인 접촉을 가지려고 이처럼 자신이 내려오지 않으며, 그리할 수도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비천한 인간과 친히 접촉하는 길을 잃지 않는다. 너는 신성한 계심이 없이 지내지 않는다. 아버지 하나님이 직접 성격을 나타냄으로 너와 함께 있을 수 없지만, 깃드는 생각 조절자, 신성한 훈계자의 신분으로 네 안에 있고 그는 너에게 속한다. 이처럼 성격 면에서, 그리고 영적으로 너로부터 가장 멀리 계신 아버지는 필사 아들딸의 바로 그 혼과 마음 속에서 교통하는 영적 접촉을 가지면서, 성격 회로에서 너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간다.
40:5.4 (445.5) 영과 일체가 되는 것은 인격이 살아남는 비결이며, 영적 승천의 운명을 결정한다. 육체를 입은 인생 동안에, 생각 조절자가 사람과 동일시되는 영, 융합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영이니까, 시공의 필사자는 그들이 이 신의 선물, 깃드는 신비의 훈계자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에 따라서 1차적으로 분류된다. 이 분류는 다음과 같다.
40:5.5 (445.6) 1. 조절자가 일시, 곧 경험으로, 머무르는 필사자.
40:5.8 (445.9) 제1 계열―조절자가 일시, 곧 경험으로 머무르는 필사자. 어떤 진화하는 행성에도 잠시만, 그리고 제2 계열에 속하는 자들을 제외하고, 사람이 사는 모든 세계의 초기 단계에 이 계열의 명칭이 사용된다.
40:5.9 (445.10) 제1 계열의 필사자는 인류가 진화하는 초기 시대에 여러 공간 세계에 거주하며 가장 원시 종류의 인간 지성을 포함한다. 아담 이전의 유란시아와 같이 많은 세계에서, 더 진보된 상급 부류 원시인의 큰 무리가 살아남는 능력을 얻지만 조절자와 융합하지 못한다. 오랜 세월 동안, 상급의 영적 의지를 가지는 수준으로 사람이 올라가기 전에, 육체를 입은 짧은 인생 동안에 조절자는 이 투쟁하는 인간의 지성을 차지한다. 의지(意志)를 가진 그런 인간에 조절자가 깃드는 순간, 집단을 수호하는 천사들이 비로소 활동한다. 이 제1 계열의 필사자는 개인 수호자가 없지만, 집단 관리자를 가지고 있다.
40:5.10 (446.1) 경험으로 오는 조절자는 한 원시인의 육체적 생애 동안 내내 함께 남아 있다. 조절자는 원시인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지만, 그러한 필사자와 영원히 연합할 수 없다. 조절자의 이 일시적 직분은 두 가지를 성취한다. 첫째로, 그들은 진화된 지능의 성질과 작용을 이해하는 귀중한 실제 체험을 얻으며, 다른 세계에서 더 발달된 존재들과 차후에 생길 접촉과 관련하여 이 체험은 대단히 소중할 것이다. 둘째로, 조절자의 일시 체류는 가능한 후일의 영 융합을 위하여, 필사 피보호자를 준비시키는 방향으로 크게 이바지한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이 부류의 모든 사람은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의 영적 포옹을 통해서 영생을 얻고, 이처럼 지역 우주 체제에서 올라가는 필사자가 된다. 아담 이전에 유란시아로부터 온 많은 사람이 이렇게 사타니아 저택 세계들까지 진행하였다.
40:5.11 (446.2) 오랜 세월에 걸친 진화적 고난과 시련을 통하여, 상급 수준의 영적 지성으로 필사 인간이 올라가도록 예정하신 신들은, 올라가는 각 단계마다 인간의 지위와 필요를 눈여겨본다. 진화하는 종족들의 초기 시절에 투쟁하는 이 필사자들이 최종 심판을 받을 때, 언제나 그들은 신답게 공평하고 정당하고, 완벽하게 자비롭기도 하다.
40:5.12 (446.3) 제2 계열―조절자와 융합하지 않는 종류의 필사자. 이들은 깃드는 조절자와 영원한 연합을 이룰 수 없는, 특별한 종류의 인간이다. 한 골, 두 골, 세 골을 가진 종족들로 종류를 분류하는 것은 조절자 융합의 요인이 아니다. 모든 그러한 필사자는 비슷하지만, 조절자와 융합하지 않는 이 부류는 전적으로 다르고 두드러지게 수정된 계급이며 의지(意志)를 가진 인간이다. 비호흡자 중에서 다수가 이 계열에 속하고, 대체로 조절자와 융합하지 않는 수많은 다른 집단이 있다.
40:5.13 (446.4) 제1 계열과 마찬가지로, 이 집단의 구성원은 각자 육체를 입은 일생 동안에 꼭 한 조절자의 보살핌을 받는다. 현세에 사는 동안 이 조절자들은 그들이 일시 깃드는 대상을 위하여, 필사자가 융합 가능성이 있는 다른 세계에서 하는 것과 똑같이 모든 것을 행한다. 이 제2 계열의 필사자에게 흔히 처녀 조절자가 깃들지만, 상급 인간은 흔히 솜씨 있고 경험 있는 훈계자와 연결된다.
40:5.14 (446.5) 동물 기원을 가진 인간을 향상시키는 승천 계획에서, 유란시아 부류의 필사자에게 베푸는 것과 똑같이 이 존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헌신적 봉사를 누린다. 융합 가능성이 있는 세계의 경우처럼, 비융합 행성에서도 천사와 조절자가 똑같이 충분히 협동한다. 운명 수호자들은 유란시아에서와 똑같이 그러한 구체에서 봉사하고, 필사자가 살아남을 때 비슷하게 활동하며, 그때 살아남는 혼은 영과 융합된다.
40:5.15 (446.6) 여러 저택 세계에서 이 수정(修正)된 필사 부류들과 마주칠 때, 너희는 그들과 교통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같은 체계의 말을 하지만 수정된 기술을 사용한다. 이 존재들은 영과 인격의 모습이 너희 계급의 인간 생명과 동일하며, 어떤 신체적 모습이, 그리고 생각 조절자와 융합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다르다.
40:5.16 (447.1) 나는 어째서 이 부류의 인간이 우주의 아버지의 조절자와 결코 융합할 수 없는가 말할 수 없다. 특별한 행성 환경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생명 운반자들이 의지(意志)를 가진 총명한 인간을 만드는 우주 계획에 그러한 극단적 수정을 가할 필요에 부딪쳤기 때문에, 조절자와 영구한 연합을 이루는 것이 본래부터 불가능하게 된다고 우리 중에 더러가 믿고 싶어한다. 우리는 흔히 물어 왔다. 이것이 승천 계획의 의도한 부분인가 그렇지 않은 부분인가? 그러나 우리는 답을 찾지 못했다.
40:5.17 (447.2) 제3 계열―조절자와 융합할 잠재성을 가진 필사자. 아버지가 융합한 필사자는 모두 유란시아 종족들과 똑같이, 동물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조절자와 융합하는 잠재성을 가진 한 골, 두 골, 세 골 부류의 필사자를 포함한다. 유란시아인은 중간 종류, 곧 두 골 종류에 속하며, 여러 면에서 인간적으로 한 골 집단보다 우수하지만, 세 골 계급과 비교해서 분명히 제한되어 있다. 이 세 부류의 육체적 두뇌의 자질은 조절자의 수여나 천사의 봉사, 또는 어느 다른 단계의 영적 봉사에 요인은 아니다. 세 가지 두뇌 종류 사이에 지적ㆍ영적 차이는 다른 면에서 지성 자질과 영적 가능성이 아주 비슷한 개인들의 특징을 나타내며, 이 차이는 현세의 생활에서 가장 크고, 저택 세계들을 하나하나 거침에 따라서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체계 본부에서부터 계속하여, 이 세 종류의 진보는 같고, 그들이 궁극에 마주치는 파라다이스 운명은 동일하다.
40:5.18 (447.3) 번호 없는 계열. 이 이야기는 여러 진화 세계에서 생기는 황홀한 차이점을 도저히 다 담을 수 없다. 너희는 10 세계마다 하나는 십일(十一) 행성, 곧 실험 행성인 것을 알지만, 진화 구체들의 행렬을 잠시 그치게 하는 기타 변수를 도무지 모른다. 같은 집단의 행성들의 경우처럼, 밝혀진 계급의 살아 있는 인간 사이에서도 차이가 너무 많아서 이야기할 수 없지만, 이 발표는 승천 생애와 관계되는 기본적 차이점을 규명한다. 그리고 시공의 필사자에 관한 어떤 고찰에도 승천 생애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40:5.19 (447.4) 필사자가 살아남을 확률에 관하여 말하자면, 영원히 분명히 해둘지어다. 깃드는 조절자와 협동할 자진성을 보이고, 하나님을 찾아내고 신다운 완전에 이르려는 소망을 드러낸다면, 이 소망이 비록 “세상으로 오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을 원시적으로 깨닫는, 희미하게 깜빡이는 첫 불빛이라도, 필사 존재의 어떤 가능한 단계에 있는 어떤 사람이든지, 모두 살아남을 것이다.
40:6.1 (447.5) 필사 민족들은 총명하고 성격을 가진 창작품 중에서 가장 낮은 계급을 대표하는 처지이다. 너희 필사자는 신성하게 소중하며, 너희 모두가 영화로운 체험을 얻는 확실한 운명을 받아들여도 좋다. 그러나 너희는 아직 천성으로 신다운 계급이 아니며, 온전히 필사자이다. 융합이 일어나는 순간에, 너희는 하늘 가는 아들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나 시공 필사자의 지위는, 살아남는 필사자의 혼이 어떤 부류의 영원하고 불멸인 영과 최종으로 융합하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믿음의 아들 지위이다.
40:6.2 (448.1) 유란시아 인간과 같은 비천하고 물질적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가장 높은 이의 믿음의 자녀라는 것은 엄숙하고 숭고한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다니 아버지가 어떤 모양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는가 볼지어다.” “그를 받아들인 많은 사람에게, 그는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식하는 힘을 주셨도다.” “너희가 무엇이 될 것인가 아직 드러나지 않지만,” 이제도 “너희는 하나님의 믿음의 아들이라.” “너희가 다시 두려워할, 노예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들의 영을 받았고, 그리함으로 너희가 ‘우리 아버지’라 외침이라.” 영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옛 선지자가 말했다. “저희에게도 나의 집에서 아들보다 더 좋은 자리와 이름을 주리니, 나는 저희에게 영구한 이름을 줄 것이요, 그 이름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너희는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영을 너희 가슴 속에 보내셨도다.”
40:6.3 (448.2) 필사자가 거하는 모든 진화 세계는 하나님의 이 믿음의 아들, 인자와 자비의 아들, 곧 신의 가족에 속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필사 존재들을 품고 있다. 유란시아 필사자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길 자격이 있으니,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40:6.4 (448.3) 1. 너희는 영적으로 약속된 아들, 믿음의 아들이다. 너희는 아들의 지위를 받아들였다. 너희의 아들 신분이 현실임을 너희가 믿으며, 따라서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영원히 현실이 된다.
40:6.5 (448.4) 2. 하나님의 한 창조 아들이 너희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사실 그는 너희의 형이다. 정신적으로 너희가 그리스도, 승리한 미가엘과 참으로 관련된 형제가 되면, 정신적으로 너희는 또한 너희가 공통으로 가진 그 아버지―만민의 우주의 아버지―의 아들임이 틀림없다.
40:6.6 (448.5) 3. 아들의 영이 너희에게 퍼부어졌고, 아낌없이, 그리고 확실히 모든 유란시아 민족에게 수여되었으니까, 너희는 아들이다. 이 영은 언제나 너희를 그 근원인 신다운 아들에게로, 그 신다운 아들의 근원인 파라다이스 아버지께로 끌어당긴다.
40:6.7 (448.6) 4. 우주의 아버지는 신의 자유 의지로, 너희에게 인간의 성격을 주셨다. 너희는 자유 의지로 행동하는, 신이 준 자발성을 어느 만큼 부여받았고, 하나님은 아들이 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자발성을 나눠주신다.
40:6.8 (448.7) 5. 너희 안에 우주의 아버지의 한 분신(分身)이 존재하고, 따라서 너희는 모든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한 아버지와 직접 관계가 있다.
40:7.1 (448.8) 조절자를 보내는 것, 조절자가 사람 안에 깃드는 것은 정말로, 아버지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신비 중의 하나이다. 우주의 아버지의 신다운 성품을 가진 이 분신은 인간의 불멸 잠재성을 지닌다. 조절자는 불멸하는 영이며, 조절자와 뭉치는 것은 융합된 필사자의 혼에 영생을 부여한다.
40:7.2 (448.9) 바로 너희의 민족에서 살아남는 필사자는 이 집단의 하늘 가는 하나님의 아들에 속한다. 너희는 지금 행성에 있는 아들이요, 생명 운반자들이 뿌린 씨로부터 유래하고 아담 생명을 주입(注入)하여 수정된 진화 인간이요, 아직까지 도저히 하늘 가는 아들은 아니다. 그러나 너희는 정말로 (영광과 신성을 달성하는 가장 높은 데까지) 올라가는 잠재성을 지닌 아들이요, 믿음으로, 깃드는 조절자의 활동, 너희를 영적으로 변화시키는 활동에 자유 의지로 협동함으로, 이 하늘 가는 아들의 영적 지위를 얻을 수 있다. 너와 네 조절자가 마침내, 영원히 융합했을 때, 너희 둘이 하나가 되었을 때, 그리스도 미가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이 하나인 것 같이, 그때 너희는 사실로 하늘 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다.
40:7.3 (449.1) 보호 관찰 하에 있는 진화 행성에서, 사람에게 깃들어 수고하는 조절자 생애의 세부는 내 임무에 속하지 않는다. 이 위대한 진리의 자세한 설명은 너희 일생 전체를 포함한다. 조절자가 융합한 필사자에 관하여 충분히 진술하기 위하여 나는 어떤 조절자 활동을 언급한다. 육체로 존재하는 초기부터, 네바돈과 오르본톤에서 승천하는 생애 전체를 통하여, 그리고 계속해서 하보나를 거쳐서 바로 파라다이스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이 깃드는 분신은 너희 계급의 존재와 함께 있다. 그 뒤로, 영원한 모험을 하면서 바로 이 조절자는 너와 하나이며, 그는 너에게 속한다.
40:7.4 (449.2) 이들은 우주의 아버지로부터 “내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는 명령을 받은 필사자이다. 아버지는 자신을 너에게 수여했고, 자신의 영을 네 안에 두셨다. 따라서 그는 네가 궁극에 완전하기를 요구한다. 시간 세계의 필사자의 구체로부터 영원한 신의 영역까지 인간이 올라가는 이야기는, 내 임무에 포함되지 않는, 흥미를 자아내는 발표가 되지만, 이 숭고한 모험은 필사 인간에게 최고의 연구 대상이어야 한다.
40:7.5 (449.3) 우주의 아버지의 분신과 융합하는 것은 궁극에 파라다이스에 도달함을 신이 인가하는 것에 해당한다. 조절자가 융합한 그런 필사자는 모두 하보나 회로들을 거치고 파라다이스에 계신 하나님을 찾아내는 유일한 등급의 인간이다. 조절자가 융합한 필사자에게는 우주에서 봉사하는 생애가 활짝 펼쳐져 있다. 얼마나 존귀한 운명과 영화로운 달성이 너희 하나하나를 기다리는가! 너희를 위하여 무슨 일이 행해졌는지 충분히 이해하는가? 너희―아니 비천한 생명의 길에서, 이른바 너희의 “눈물의 장막”을 통해서, 터벅터벅 걷는 너희도―앞에 펼쳐진 영원한 성취의 절정이 장려함을 이해하는가?
40:8.1 (449.4) 살아남는 거의 모든 필사자가 어느 저택 세계에서, 아니면 상급 상물질 구체에 도착한 직후에, 자기의 조절자와 융합한다. 한편 융합이 늦어지는 어떤 사례들이 있는데, 더러는 우주 본부의 최종 교육 세계들에 이를 때까지, 살아남는다는 이 최종 확신을 체험하지 못한다. 그리고 결코 끝 없는 생명을 얻을 이 필사 후보자 중에서 몇은 자기의 충실한 조절자와 신분을 융합하는 데 철저히 실패한다.
40:8.2 (449.5) 그러한 필사자는 살아남을 자격이 있다고 판결 당국의 판정을 받았고, 조절자조차도 신별로부터 돌아옴으로 저택 세계들까지 올라가는 데 찬성했다. 그러한 존재들은 체계와 별자리를 통해서, 그리고 구원자별 회로의 교육 세계들을 통해서 올라갔다. 그들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나 융합할 기회가 있었으나 여전히 자기 조절자와 하나가 될 수 없었다.
40:8.3 (449.6) 동시화의 어떤 어려움이 아버지의 융합을 억제하는 것이 분명해질 때, 창조 아들의 생존 심판자들이 소집된다. 그리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한 개인 대표가 인가한 이 문의(問議) 법정이, 하늘 가는 필사자가 융합을 달성하지 못할 아무 원인도 찾을 수 없다고 최종으로 결정을 내릴 때, 그들은 지역 우주 기록부에 그렇게 증명하고, 이 결과를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에게 마땅히 통보한다. 그리고 나서 깃드는 조절자는 인격화된 훈계자들의 확인을 받으려고 당장에 신별로 돌아간다. 이렇게 작별하고 나서 그 상물질 필사자는 즉시 창조 아들 영의 개별화된 선물과 융합된다.
40:8.4 (450.1) 네바돈의 여러 상물질 구체를 영 융합 필사자와 함께 쓰는 것과 비슷하게, 아들이 융합한 인간은 아득히 먼 파라다이스 섬을 향하여 안으로 여행하는, 조절자가 융합한 형제들과 오르본톤의 봉사를 함께 한다. 그들은 참으로 너희의 형제이니, 초우주의 훈련 세계들을 통과하는 동안 너희는 그들과 사귀기를 크게 기뻐할 것이다.
40:8.5 (450.2) 아들이 융합한 필사자는 수가 많은 집단이 아니며, 오르본톤 초우주에서 그들의 수는 1백만이 채 되지 않는다. 파라다이스에서 거주하는 운명을 제외하면, 그들은 조절자가 융합한 동료들과 모든 면에서 대등한 자이다. 그들은 파라다이스까지 초우주 임무를 띠고 빈번히 여행하지만, 거기서 영구히 거주하는 일이 드물고, 하나의 등급으로서 그들이 태어난 초우주에 국한되어 있다.
40:9.1 (450.3) 하늘 가는 영 융합 필사자는 셋째 근원 성격자가 아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성격 회로에 포함되지만, 셋째 근원 중심의 선(先)지성 영이 개체화한 것과 융합하였다. 그러한 영 융합은 자연 수명을 누리는 기간에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여러 저택 세계에서 상물질 존재를 입고 필사자가 깨어날 때에만 일어난다. 융합하는 체험은 중복되지 않으며, 의지를 가진 인간은 영과 융합하든지, 아들과 융합하든지, 아니면 아버지와 융합한다. 조절자, 곧 아버지와 융합하는 자는 결코 영이나 아들과 융합하지 않는다.
40:9.2 (450.4) 이 부류의 필사 인간이 조절자와 융합할 후보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육체를 입은 일생 동안에 조절자가 그들에게 깃드는 것을 막지 않는다. 물질적 일생 동안에 그러한 존재의 지성 속에서 조절자가 일하기는 하지만, 결코 생도의 혼과 영구하게 하나가 되지 않는다. 조절자와 융합하는 후보자 안에서 하는 것과 똑같이, 이렇게 일시 체류하는 동안 조절자는 필사 성품을 가진, 바로 그 영의 짝―혼―을 효과적으로 강화한다. 필사자가 죽는 그 시간까지 조절자가 하는 일은 전적으로 너희 민족들 안에서 하는 활동과 비슷하지만, 필사자가 분해되고 나서, 조절자는 영과 융합하는 이 후보자를 영원히 떠나며, 모든 신다운 훈계자의 본부, 신별로 직접 나아가서, 거기서 그들 계급의 새로운 배치를 기다린다.
40:9.3 (450.5) 그러한 잠자는 생존자가 저택 세계에서 다시 인격화될 때, 떠나버린 조절자의 자리를 신성한 봉사자 영의 한 개체가 차지하는데, 그는 관계된 지역 우주에서 무한한 영의 대표이다. 이 영이 주입되는 것은 살아남는 이 사람을 영과 융합한 필사자로 만든다. 그러한 존재들은 모든 면에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너희와 대등한 자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너희와 동시대 사람이고, 너희 계급의 융합 후보자, 그리고 아들이 융합할 자들과 더불어, 저택 및 상물질 구체들을 함께 사용한다.
40:9.4 (450.6) 그러나 영이 융합한 필사자는 하늘 가는 형제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기원이 있는 물질 세계에서 필사자가 가진 인간 체험의 기억은 육체로 죽은 뒤에 살아남는데, 이는 깃드는 조절자가 인생에서 영적 의미를 가진 사건들의 영사본(寫本), 곧 성적표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이 융합하는 필사자의 경우에는, 그렇게 인간의 기억이 지속할 수 있는 작용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조절자의 기억 성적표는 완전하고 손대지 않은 채로 있지만, 이 재산은 떠나 버린 조절자의 체험적 소유물이고, 그들이 예전에 깃든 사람의 손에 닿지 않는다. 따라서 이 사람은 네바돈 상물질 구체의 부활 회관에서, 마치 새로 지음받은 존재, 예전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인 것처럼 깨어난다.
40:9.5 (451.1) 지역 우주의 그러한 자녀들은, 관계된 세라핌과 케루빔으로부터 이야기를 다시 듣고서, 그리고 기록하는 천사들이 철해 놓은 필사 생애의 기록을 훑어보고서, 예전의 인간이 기억하는 체험의 상당 부분을 다시 소유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이는 물질적인 필사 생명에서 체험적 기원을 가진 살아남는 혼이 필사자의 사건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반면에, 과거의 체험에서 기억하지 못하는 이 사건들에 대하여 체험적 인식 반응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40:9.6 (451.2) 영이 융합하는 필사자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사건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을 때, 그러한 생존자의 혼 (신분) 안에 즉시 체험적 인식 반응이 있고, 그것은 한 순간에 이야기 들은 사건에 실체의 감정적 빛깔과 사실의 지적 품질을 부여한다. 이 두 가지 반응은 필사자의 체험에서 기억하지 못하는 면을 다시 구성하고 인식하고 확인하는 것이 된다.
40:9.7 (451.3) 조절자와 융합하는 후보자의 경우에도, 영적 가치를 가진, 인간의 체험만, 살아남는 사람과 돌아오는 조절자가 공동으로 가진 재산이며, 따라서 필사자가 살아남은 뒤에 이를 즉시 기억한다. 영적 의미가 없는 사건들에 관해서 말하자면, 조절자가 융합한 이 사람들도 살아남는 혼 안에서 인식 반응의 속성에 의존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사건도 한 사람에게 영적 의미가 있지만 남에게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같은 행성에서 온 집단, 동시대에 승천하는 한 집단의 사람들이 조절자가 기억한 사건들의 저장을 한데 모으고, 이처럼 그들이 공통으로 어떤 체험을 가졌어도, 그들 중에 누구의 생애에서 영적 가치를 가졌던 어떤 체험이라도, 복구하는 것이 가능하다.
40:9.8 (451.4) 우리는 기억을 복구하는 그러한 기법을 상당히 잘 이해하지만, 인격을 어떤 기법으로 인식하는가 파악하지 못한다. 한 번 관계를 가졌던 인격자들은 기억(記憶) 작용과 아주 상관 없이, 서로 반응한다. 하지만 그렇게 충분히 인식하면서 서로 인격이 반응하게 만드는 데는 기억 자체, 그리고 기억을 복구하는 기법이 필요하다.
40:9.9 (451.5) 영이 융합한 생존자도 또한, 그가 살던 행성의 섭리 시대 뒤에, 그가 태어난 세계를 다시 찾아봄으로, 육체를 입고 살던 인생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영이 융합한 그러한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지역 우주의 근무에 국한되기 때문에, 그들의 인간 생애를 조사하는 이 기회를 누리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그들은 파라다이스 최후 군단에서 너희가 가진 높고도 고귀한 운명을 함께 하지 못한다. 오로지 조절자가 융합한 필사자나 기타 특별히 포옹을 받은 승천 존재들이 신에게 도달하는 영원한 모험을 기다리는 자들의 계층에 소집된다. 영이 융합한 필사자는 지역 우주의 영구 시민이다. 그들은 파라다이스 운명을 마음에 품을지 모르지만, 그런 운명을 확신할 수 없다. 네바돈에서 그들의 우주 고향은 구원자별을 회전하는 여덟째 집단의 세계들이고, 여기가 유란시아에서 행성의 전통이 상상해 왔던 것과 상당히 비슷한 성질과 위치를 가진, 운명이요 하늘이다.
40:10.1 (452.1) 영이 융합한 필사자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한 지역 우주에 국한된다. 아들이 융합한 생존자는 초우주에 제한된다. 조절자가 융합한 필사자는 온 우주를 침투하도록 운명이 예정되어 있다. 필사자와 융합하는 영은 반드시 기원이 있던 수준으로 올라간다. 그러한 영 개체는 어김없이 최초의 근원이 있는 구체로 돌아간다.
40:10.2 (452.2) 영이 융합한 필사자는 지역 우주 출신이다. 그들은 보통 태어난 영역의 경계를 지나서, 그들에게 스며드는 영이 미치는 공간 테두리를 지나서 올라가지 않는다. 아들이 융합한 승천자도 마찬가지로 영을 부여받은 근원까지 올라가며, 창조 아들의 진리의 영이 관계된 신성한 봉사자에 집중하는 것과 비슷하게, 그의 “융합하는 영”은 더 높은 우주의 거울 영들 안에서 효력이 생긴다. 지역 우주 수준과 칠중 신의 초우주 수준, 이 둘 사이에 그러한 영 관계는 설명하기 어려워도 헤아리기 힘들지 않으며, 거울 영들의 아이―창조 아들의 2품 천사 목소리―안에서 어김없이 드러난다.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오는 생각 조절자는 필사 아들이 영원한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설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40:10.3 (452.3) 한 필사 존재가 그에게 깃드는 생각 조절자와 영원히 융합하지 않거나 융합할 수 없도록 만드는 변수, 결합 기법에 있는 신비한 변수는 승천 계획에 하나의 흠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아들 융합과 영 융합은, 겉보기에 파라다이스에 도달하는 계획의 어떤 세부에서, 설명할 수 없는 실패에 대한 보상과 비슷하다. 그러나 모든 그러한 결론은 잘못되었다. 이 모든 사건은 최상 우주 통치자들이 세운 법칙에 복종해서 펼쳐진다고 우리는 가르침을 받았다.
40:10.4 (452.4) 우리는 이 문제를 분석해 보았고, 창조 아들과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법정이 더 높은 영역으로 이동하는 자들의 봉사에 온통 의존할 터이니까, 모든 필사자를 궁극의 파라다이스 운명으로 넘기는 것은, 여러 시공 우주에 대하여 불공평할 것이라는 의심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렀다. 지역 우주 정부와 초우주 정부에는 각각 영구한 집단의 올라 가는 시민들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 이 행정부의 활동은 영구한 지위를 가진, 어떤 집단의 영화롭게 된 필사자, 아반돈터와 수사시아와 같은 진화 보완자들의 노력으로 강화되어야 하는 것은 마땅하고도 남는다. 현재의 승천 계획은 시공의 행정부에게 바로 그러한 올라 가는 인간 집단을 효과적으로 마련해 준다는 것이 이제 아주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는 여러 번 궁금히 여겨 왔다. 이 모든 것이, 창조 아들과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에게 영구한 상승 인구를 마련해 주도록 고안된 계획, 총우주 건축가들의 전적으로 지혜로운 계획에서 의도한 일부인가? 다가올 우주 시기에 이 영역의 사무를 추진하도록 갈수록 더 유능하게 될, 진화된 시민 계급을 마련해 주는가?
40:10.5 (452.5) 사람의 운명이 이처럼 다르다는 것은 절대로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반드시 크거나 작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운명이 다름을 증명한다. 조절자와 융합하는 승천자는 정말로, 장대하고 영화로운 생애, 최후자로서 사는 생애가 영원한 미래에 앞에 펼쳐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올라가는 형제들보다 그들이 우대받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필사자를 살아남게 하는 신의 계획의 선택적 운영에 아무런 편애가 없고 아무것도 멋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40:10.6 (453.1) 조절자와 융합한 최후자는 분명히 전체에서 가장 널리 봉사하는 기회를 누린다. 그 반면에, 이 목표의 달성은 어떤 한 지역 우주나 초우주에서, 초기의 채 안정되지 않은 시대로부터 상대적으로 완전해진 후일의 안정된 시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친 투쟁에 참여할 기회로부터 그들을 자동으로 차단한다. 최후자는 대우주의 일곱 구역 전체에서 일시 근무하는 놀랍고 광범위한 체험을 얻지만, 보통 어느 한 우주에 관해서 자세한 지식을 얻지 못하며, 자세한 지식은 지금도 네바돈 완결 군단에서 영이 융합한 고참들의 특징을 나타낸다. 사람이 사는 1천만 세계에서 행성의 시대가 하나하나 펼쳐질 때, 이 개인들은 여러 시대에 올라가는 행렬을 구경할 기회를 누린다. 그러한 지역 우주 시민에게 충실하게 봉사함으로, 때가 되어 집중된 체험으로 생기는 바로 그 높은 품질의 지혜―권위 있는 지혜―가 무르익을 때까지 체험이 쌓이고 쌓이며, 이것은 그 자체로서 어느 지역 우주를 안정시키는 데도 중대한 요인이다.
40:10.7 (453.2) 영이 융합한 자의 경우와 같이, 유버르사에서 거주 지위를 얻은 아들 융합 필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존재들 중에서 더러는 오르본톤의 가장 이른 시기의 출신이다. 그들은 통찰력을 길러주는 지혜를 가진 무리, 서서히 누적되는 무리를 대표하고, 그런 지혜는 일곱째 초우주의 복지와 궁극의 안정에 기여하며, 이런 봉사는 항상 늘어난다.
40:10.8 (453.3) 이 고정 계급, 곧 지역 우주 및 초우주 시민이 무슨 궁극의 운명을 가졌는지 우리는 모른다. 파라다이스 최후자들이 제1 바깥 공간 수준의 여러 행성 체계에서 확장되는 신의 경계를 개척하고 있을 때, 진화로 승천하는 투쟁에 들어간 아들 및 영이 융합한 형제들은 완전하게 된 초우주들의 체험적 균형을 유지하는 데 쓸 만하게 이바지할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 그들은 또 한편 지금은 지도(地圖)에도 없고 사람이 살지도 않는 바깥 공간의 은하들로부터 그 아득한 앞날에 영을 추구하는 광대한 격류가 되어, 오르본톤과 그 자매 창조들로부터 쏟아질지 모르는, 파라다이스로 들어오는 순례자의 흐름을 환영할 준비를 갖춘다.
40:10.9 (453.4) 영이 융합한 자의 대다수는 지역 우주 시민으로서 영구하게 봉사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베푸는 우주 봉사의 어떤 단계가 초우주에서 그들이 몸소 자리에 있기를 요구할 때, 그들을 더 높은 우주로 올라가게 만드는 그러한 존재의 변화가 이 시민들에게 일어날 것이다. 영이 융합한 그러한 필사자를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법정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은 천상의 보호자가 도착하고 나서, 그들은 그렇게 올라가고,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은 초우주의 피보호자가 되고, 다시 파라다이스와 하보나 근무를 위해 호출되는 극소수를 제외하고, 천상의 보호자들의 조수로서 영구하게 봉사한다.
40:10.10 (453.5) 영이 융합한 형제들처럼 어떤 수정하는 변화를 겪지 않으면, 아들과 융합한 자는 하보나를 거치거나 파라다이스에 이르지 않는다. 좋은 충분한 까닭이 있어서, 그러한 변화가 아들이 융합한 어떤 생존자들에게 일어났고, 너희는 때때로 중앙 우주의 일곱 회로에서 이 존재들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특정한 수의 아들 및 영이 융합한 필사자들이 실제로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며, 아버지가 융합한 필사자를 기다리는 것과 여러 면에서 같은 목표를 달성한다.
40:10.11 (453.6) 아버지가 융합한 필사자는 잠재 최후자이다. 그들의 목적지는 우주의 아버지이고, 그들이 아버지께 도달하지만, 현 우주 시대의 시야 안에서, 최후자는 그런 상태로, 운명을 달성한 자는 아니다. 그들은 미완성 인간으로서―제6 단계의 영으로서―남아 있고, 따라서 빛과 생명 이전의 지위를 가진 진화 영토에서 활동하지 않는다.
40:10.12 (454.1) 필사 최후자가 삼위일체의 품에 안길 때―막강한 사자처럼 삼위일체를 겪은 아들이 될 때―적어도 지금 우주 시대 동안에 그 최후자는 운명을 달성했다. 막강한 사자와 그 동료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제7 단계 영이 아니지만, 다른 것들에 추가하여 삼위일체의 품에 안기는 것은, 최후자가 언젠가 제7 단계 영으로서 성취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부여한다. 영이 융합하거나 아들이 융합한 필사자가 삼자일체 체험을 맛본 뒤에, 그들은 조절자가 융합한 승천자들과 함께 파라다이스 체험을 거치며, 그러면 초우주 행정에 관한 모든 문제에서 이들과 동일하다. 이 삼위일체를 체험한 선택의 아들이나 달성의 아들은 적어도 지금은 완성된 인간이며, 이와 대조해서 최후자는 현재 완성되지 않은 인간이다.
40:10.13 (454.2) 따라서, 결국에는, 승천 아들 계급들의 운명을 대조하면서, “더 크다” 또는 “더 작다”는 말을 쓰기가 도저히 적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아들마다 공통으로 아버지가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지음받은 아들들을 마찬가지로 사랑한다. 하늘 가는 운명에 도달할지 모르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다시피, 그는 하늘 가는 운명을 차별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의 아들 하나하나를 사랑하며, 그 사랑은 진실하고, 거룩하고, 신답고, 한없고, 영원하고, 독특함에 모자람이 없다―이것은 이 아들에게, 그리고 저 아들에게, 개별적으로, 몸소, 유일하게 쏟아붓는 사랑이다. 그러한 사랑은 모든 다른 사실을 전적으로 무색하게 만든다. 아들 신분은 인간이 창조자와 가지는 최상의 관계이다.
40:10.14 (454.3) 필사자로서, 너희는 신의 아들로 구성된 가족 안에서 너희의 위치를 이제 깨달을 수 있고, 필사자를 살아남게 하는 파라다이스 계획 속에서, 그 계획으로, 아주 아낌없이 마련된 이점을 이용할 의무를 비로소 느낄 수 있다. 이 계획은 한 수여 아들이 일생에 겪은 체험으로 말미암아 아주 향상되고 조명되어 왔다. 신의 완전함에 이르는 파라다이스 목표를 너희가 궁극에 달성하는 것을 보장하려고 모든 시설과 모든 권력이 마련되었다.
41:0.1 (455.1) 각 지역 창조를 모든 다른 우주 가운데서 돋보이게 하는 현상, 특징을 나타내는 공간 현상은 창조 영의 계심이다. 네바돈 전체가 구원자별의 신성한 봉사자의 공간 계심으로 분명히 가득 차 있고, 그러한 계심은 우리 지역 우주의 바깥 테두리에서 마찬가지로 분명히 그친다. 우리 지역 우주의 어머니 영이 채우는 그것이 바로 네바돈이다. 그의 공간 계심을 지나서 뻗는 것은 네바돈 바깥이고, 이것은 오르본톤 초우주에서 네바돈 바깥의 공간 지역, 곧 다른 지역 우주들이다.
41:0.2 (455.2) 대우주의 행정 조직은 중앙 우주, 초우주, 지역 우주 정부가 뚜렷이 구분되었음을 드러내며, 이러한 구분은 천문학적으로, 하보나와 일곱 초우주를 공간에서 분리한 것과 일치하지만, 그렇게 명확한 물리적 분계선이 지역 창조들을 갈라놓지는 않는다. 오르본톤의 대구역ㆍ소구역들조차 (우리에게) 분명히 구별이 가능하지만, 지역 우주의 물리적 경계선을 확인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이것은 이러한 지역 창조들이, 한 초우주의 총 에너지 전하(電荷)의 분할을 지배하는 어떤 창조 원칙에 따라서 행정적으로 조직되어 있고, 한편 그 물리적 구성 분자, 곧 공간의 구체들―태양ㆍ흑도(黑島)ㆍ행성들 따위―는 1차적으로 성운(星雲)에 기원을 가지고, 이 구체들이 총우주 건축가들의 어떤 창조하기 이전 (초월) 계획에 따라서, 천문학적으로 출현하기 때문이다.
41:0.3 (455.3) 네바돈이 안드로노버와 기타 성운들의 별 및 행성 자식들로부터 물리적으로 조립된 것과 같이, 하나나 그 이상―아니 많은―그러한 성운이 단일 지역 우주 영토 안에 포함될 수도 있다. 네바돈의 구체들은 다채로운 성운 조상에서 생겼지만, 모두가 공간 운동의 어떤 최소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공간 운동은 우리의 현재 공간 물체들의 집합을 만들려고 동력 지휘자들이 총명한 노력을 기울여 조정되었고, 이 물체들은 초우주의 여러 궤도에서 하나의 인접한 단위로서 함께 여행한다.
41:0.4 (455.4) 네바돈의 지역 별구름의 구성이 이러하니, 네바돈은 우리 지역 창조가 속하는, 오르본톤의 한 소구역에서, 점점 더 안정된 궤도에서 궁수(弓手) 자리 중심을 오늘도 돈다.
41:1.1 (455.5) 나선형 및 다른 성운들은[1] [1673] 공간에 있는 구체들의 모체인 바퀴이며, 파라다이스 물력 조직자들이 이를 시작한다. 그리고 인력(引力)에 반응하여 성운이 진화되고 나서, 동력 중심 및 물리 통제자들이 그들의 초우주 활동을 대체하며, 그리고 나서 물리 통제자들이 뒤이어 생기는 별 및 행성 자식 세대의 물리적 진화를 지도하는 총 책임을 맡는다. 네바돈의 전신(前身)인 우주를 이렇게 물리적으로 감독하는 것은, 우리의 창조 아들이 도착하고 나서, 즉시 그의 우주 조직 계획과 조정되었다. 하나님의 이 파라다이스 아들의 영토 안에서, 최상 동력 중심과 물리 통제사들이 나중에 나타나는 상물질 동력 감독 및 다른 자들과 함께 통신선, 에너지 회로, 동력선으로 이루어진 그 광대한 복합체를 생산하려고 일했으며, 이것은 네바돈의 다양한 천체들을 하나의 통합된 행정 단위로 단단히 묶어 놓는다.
41:1.2 (456.1) 제4 계급의 최상 동력 중심 1백명이 영구하게 우리 지역 우주에 배치되어 있다. 이 존재들은 유버르사의 제3 계급 중심들로부터 들어오는 동력선을 받으며, 전압을 내리고 수정한 회로들을 우리 별자리와 체계들의 동력 중심에 전해 준다. 이 동력 중심들은 연합하여, 통제하고 평준화시키는 살아 있는 체계를 만들려고 활동하며, 이것은 이들이 없으면 오르내리고 변할 수 있는 에너지의 균형과 분배를 유지하도록 작용한다. 그러나 동력 중심들은, 태양의 흑점, 그리고 체계의 전류 교란과 같은, 일시적ㆍ지역적 에너지 격변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빛과 전기는 공간의 기본 에너지가 아니다. 이것들은 2차적이고 종속되는 명시이다.
41:1.3 (456.2) 1백 지역 우주 중심이 구원자별에 주둔하며, 거기서 그 구체의 정확한 에너지 중심에서 활동한다. 구원자별ㆍ에덴시아ㆍ예루셈과 같이 건축된 구체들은 공간의 태양들로부터 그들을 아주 독립시키는 방법으로 빛을 받고, 열을 얻고,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동력 중심과 물리 통제자들이 이 구체들을 지었고―주문을 받아 만들었고―에너지 분배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고안되었다. 에너지를 통제하는 그러한 초점에 활동의 기초를 두고서, 동력 중심들은 살아 있는 계심으로 공간의 물리적 에너지를 지향하고 연결한다. 이 에너지 회로들은 모든 물리적 물질 현상과 상물질 및 영적 현상에 기본이다.
41:1.4 (456.3) 제5 계급의 최상 동력 중심 10명이 네바돈의 각1차 종속 분과에, 1백 별자리에, 배치되어 있다. 너희의 별자리 놀라시아덱에서, 그들은 본부 구체에 주둔하지 않지만, 별자리의 물리적 핵심을 구성하는 거대한 별 체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에덴시아에는 관계된 기계적 통제자 10명과 생계기(生計器) 10명이 있고, 이들은 부근의 동력 중심들과 완전하게, 항상 연락을 가진다.
41:1.5 (456.4) 제6 계급의 최상 동력 중심 한 명이 각 지역 체계의 정확한 인력 초점에 주둔한다. 사타니아 체계에서는, 배치된 동력 중심이 그 체계의 천문 중심에 자리잡은, 공간의 흑도(黑島)를 차지한다. 이 흑도들의 다수는 어떤 공간 에너지를 동원하고 지향해 주는 광대한 발전기이다. 사타니아 동력 중심은 이 자연 상황을 효과 있게 이용하며, 그의 살아 있는 덩어리는 더 높은 중심들의 연락원으로 작용하고, 더 물질화된 동력의 흐름을 공간의 진화하는 여러 행성에, 물리 통제사에게 보낸다.
41:2.1 (456.5) 물리 통제사(統制師)는 대우주 전역에서 동력 중심들과 함께 일하지만, 사타니아와 같은 한 지역 체계에서 그들의 기능은 더 이해하기 쉽다. 사타니아는 놀라시아덱 별자리의 행정 조직을 구성하는 1백 지역 체계 가운데 하나이며, 바로 이웃에 산드마시아ㆍ아순시아ㆍ포로지아ㆍ소르토리아ㆍ란툴리아ㆍ글란토니아 체계들이 있다. 놀라시아덱의 체계들은 여러 면에서 다르지만, 사타니아와 아주 비슷하게 모두가 진화를 거치고 진취적이다.
41:2.2 (457.1) 사타니아 자체는 7천이 넘는 천문 집단, 곧 물리적 체계로서 구성되어 있고, 이 가운데 거의 아무것도 너희 태양계의 기원과 비슷한 기원을 가지지 않았다. 사타니아의 천문학적 중심은 공간의 거대한 흑도인데, 이것은 그에 속한 구체들과 더불어, 체계 정부의 본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41:2.3 (457.2) 배치된 동력 중심들의 계심을 제외하면, 사타니아의 총 물리적 에너지 체계의 감독은 예루셈에 집중된다. 이 본부 구체에 주둔하는 물리 통제사는 체계의 동력 중심과 조정해서 일하고, 예루셈에 본부를 둔 동력 검열자들의 연락 우두머리로서 봉사하며, 지역 체계에 두루 활동한다.
41:2.4 (457.3) 에너지 회로를 연결하고 경로를 만드는 것은, 사타니아에 두루 흩어진, 살아 있고 총명한 에너지 조종자 50만 명의 감독을 받는다. 그러한 물리 통제자들의 행위를 통해서, 감독하는 동력 중심들은 상당히 가열된 공에서, 그리고 에너지 전하를 띤 검은 구체들에서 나오는 방사물을 포함해서, 대다수의 기본 에너지를 완벽하고 완전하게 다스린다.
41:2.5 (457.4) 생명은 우주의 에너지를 동원하고 변화시키는 선천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너희는 빛의 물질 에너지를 식물 세계의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식물 생명의 작용을 잘 알고 있다. 이 식물 에너지가 어떤 방법으로 동물 활동의 현상으로 바뀔 수 있는가 너희는 또한 무언가 알고 있다. 그러나 동력 지도자와 물리 통제자들의 기법에 관하여 너희는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들은 공간의 다양한 에너지를 동원하고, 변화시키고, 지향하고, 집중하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41:2.6 (457.5) 에너지 영역을 다루는 이 존재들은 살아 있는 생물의 구성 요소인 에너지에, 아니 생리 화학의 분야에도, 직접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은 때때로 생명의 물리적 예비 조건, 기본적 물질 유기체의 살아 있는 에너지를 위하여 물리적 몸으로 쓰일 수 있는 에너지 체계를 잘 다듬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보조 지성 영들이 물질 지성 영이 생기기 이전 활동에 관여하는 것처럼, 어떤 면에서 물리 통제자들은 물질 에너지의 생명 이전의 모습에 관련된다.
41:2.7 (457.6) 동력을 통제하고 에너지를 지휘하는 이 총명한 생물은 각 행성의 물리적 구성과 건축에 따라서, 그 구체에서 그들의 기법을 조절해야 한다. 그들 각자의 물리학자 참모진 및 기타 기술 고문들이 상당히 가열된 태양과 기타 종류의 지나치게 충전된 별들의 지역 영향에 관하여 계산하고 추론한 것을 그들은 어김없이 이용한다. 공간에 있는 거대하고 춥고 어두운 거성들, 그리고 떼지어 모이는 별 먼지 구름까지도 계산에 넣어야 한다. 이 물질적인 것들은 모두 에너지를 조종하는 실용적 문제와 관련된다.
41:2.8 (457.7) 사람이 사는 진화 세계들의 동력 에너지를 감독하는 것은 물리 통제사의 책임이지만, 이 존재들은 유란시아에서 생기는 모든 에너지의 비행(非行)에 책임이 없다. 그러한 소란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고, 그 중에 더러는 물리적 관리자들의 분야와 손아귀를 벗어난다. 유란시아는 엄청난 여러 에너지 선에 놓여 있고, 거대한 질량을 가진 회로에서 하나의 작은 행성이다. 지역 통제자들은 때때로 이 에너지 선들을 평준화하려는 노력으로, 그들 계급 중에 엄청난 수를 고용한다. 그들은 사타니아의 물리적 회로에 관해서 썩 잘하는 편이지만, 강력한 놀라시아덱 전류를 차단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41:3.1 (458.1) 사타니아에는 빛과 에너지를 내뿜는 빛나는 태양이[2] [1674] 2천 개가 넘고, 너희의 태양은 보통 크기의 타오르는 구체이다. 너희 태양에 가장 가까운 30개 태양 중에서, 오직 셋만 더 밝다. 우주 동력 지휘자들은 개체의 별과 그들 각자 체계 사이에 작용하는 특화된 에너지 흐름을 개시한다. 이 태양 화로(火爐)들은 공간의 검은 거성들과 함께, 여러 물질 우주의 에너지 회로를 효과적으로 집중하고 지향하기 위한 중간역으로서 동력 중심과 물리 통제자에게 쓰인다.
41:3.2 (458.2) 네바돈의 태양들은 다른 우주의 별들과 다르지 않다. 모든 태양ㆍ흑도(黑島)ㆍ행성ㆍ위성, 아니 운석들조차 그 물질의 구성은 상당히 동일하다. 이 태양들은 평균 지름이 약 160만 킬로미터이고, 너희 태양 구체의 지름은 약간 작다. 우주에서 가장 큰 별, 별 구름 안타레스는 너희 태양 지름의 450배가 되고, 그 부피는 태양의 6천만 배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태양들을 모두 담을 만큼 풍부한 공간이 있다. 오렌지 12개가 유란시아 내부 전역에서 돌고 있고 그 행성이 텅 빈 공이라면, 이 태양들은 그 오렌지들의 행동 반경과 똑같은 상대적 행동 반경(半徑)을 가지고 있다.
41:3.3 (458.3) 너무 큰 태양이 성운의 모체 바퀴로부터 던져질 때, 그런 태양은 즉시 부서지거나 2중성(二重星)을 형성한다. 모든 태양은 최초에 참으로 가스이다. 하지만 태양들은 나중에 일시 반(半)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도 있다. 너희의 태양은 초월 가스 압력을 가진 이 준(準)액체 상태에 이르렀을 때, 적도(赤道)에서 갈라질 만큼 크지 않았으며, 이렇게 갈라져 한 종류의 2중성이 형성된다.
41:3.4 (458.4) 너희 태양의 10분의 1 크기보다 작을 때, 이 불타는 구체들은 급격히 줄어들고, 응축하고, 식는다. 태양 크기의 30 배―차라리 실제 물질 총 내용의 30배―가 넘을 때, 태양들은 쉽게 두 개의 따로 된 물체로 갈라지고, 새로운 체계들의 중심이 되든지, 아니면 서로의 인력 손아귀에 남아서, 2중성의 한 형태로서, 공통된 중심의 둘레를 돈다.
41:3.5 (458.5) 오르본톤에서 주요한 우주 분출(噴出) 가운데 가장 최근의 것은 보기 드문 2중성의 폭발이었는데, 이 빛은 유란시아에 서기 1572년에 도착했다. 이 대화재는 너무나 강렬해서 밝은 대낮에도 그 폭발이 뚜렷이 눈에 보였다.
41:3.6 (458.6) 별들이 다 고체는 아니지만, 오래 된 많은 별이 고체이다. 불그스름하고 희미하게 깜박이는 어떤 별들은 그 거대한 덩어리의 중심에서, 그러한 별의 1 입방 센티미터가 만약 유란시아에 있다면 무게가 165킬로그람이 될 것이라고 표현할 밀도에 도달했다. 그 거대한 압력은, 열의 손실과 회전하는 에너지로 인하여, 이제 전자(電子)가 응축되는 상태에 바짝 가까워질 때까지 기본 물질 단위의 궤도들이 점점 가까워지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냉각하고 수축하는 이 과정은 극자가 응축되는, 제한하는 임계(臨界) 폭발점까지 계속될 수 있다.
41:3.7 (459.1) 대부분의 거대한 태양은 비교적 젊다. 대부분의 왜소한 별은 나이가 들었지만 다 그렇지는 않다. 충돌하는 왜성(矮星)들은 아주 젊을 수도 있고, 젊게 빛나는 초기의 붉은 단계를 결코 거치지 않고, 강렬한 흰 빛을 내면서 이글거릴 수도 있다. 아주 젊은 태양과 아주 늙은 태양도, 보통 불그스름한 색을 띠고 빛난다. 노란 빛깔은 온건한 청년기나 노년기가 가까왔음을 가리키지만, 찬란한 흰 빛은 튼튼하고 오래 버티는 성년기 생애를 의미한다.
41:3.8 (459.2) 청년기에 있는 모든 태양이 고동치는 단계를 거치지는 않으며, 적어도 눈에 보이게 고동치지 않는 반면에, 바깥으로 공간을 내다볼 때, 크게 부풀어 오르는 호흡이 한 주기를 마치는 데 2일에서 7일이 걸리는 이러한 젊은 별을 너희가 많이 관찰할지 모른다. 너희의 태양은 젊은 시절에 강력히 팽창함으로 생긴 후유증을, 줄어들기는 하지만, 아직도 지닌다. 그러나 그 기간은 한때 사흘 반만에 고동치던 것이 오늘날 11년 반이 걸리는 태양 흑점의 주기로 길어졌다.
41:3.9 (459.3) 변광성에는 수많은 기원이 있다. 어떤 2중성에서는 두 물체가 자기들의 궤도를 돌 때, 거리가 급히 변함으로 생기는 간만(干滿)의 차이가 또한 정기적으로 빛의 변동을 일으킨다. 이 인력의 변동은 정기적으로, 재발하는 불꽃을 일으킨다. 이것은 마치 표면에서 에너지 물질이 달라붙는 작용으로 인한 운석(隕石)의 생포가 비교적 갑작스런 섬광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데, 이 섬광은 그 태양의 정상의 밝기로 급속히 줄어든다. 때때로 태양은 인력의 저항이 약화된 선에서 한 줄기의 운석들을 생포하며, 충돌이 가끔 별에서 불꽃이 타오르게 하지만, 그러한 현상의 대다수는 전적으로 내부의 변동에 기인한다.
41:3.10 (459.4) 한 집단의 변광성에서 빛의 변동 기간은 그 밝기에 직접 달려 있고, 이 사실을 알면 천문학자는 멀리 있는 성단(星團)을 더욱 탐구하기 위해서 그러한 태양을 우주 등대(燈臺)로, 정확히 측정하는 위치로서,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이 방법으로 1백만 광년이 넘기까지 별 사이의 거리를 아주 정밀하게 재는 것이 가능하다. 공간을 측정하는 더 좋은 방법과 개량된 망원경 기술은 언젠가 오르본톤 초우주의 10개 대부문을 더 자세히 드러낼 것이다. 너희는 적어도 이 거창한 구역들 가운데 여덟이 거대하고 상당히 대칭된 성단임을 인식할 것이다.
41:4.1 (459.5) 너희 태양의 질량은 너희 물리학자들이 측정한 값보다 조금 크며, 그들은 그 질량이 약 2 × 1027 톤이라고[3] [1675] 계산하였다. 너희의 태양은 지금 밀도가 가장 높은 별과 가장 낮은 별 사이의 약 중간점에 존재하고, 물의 1.5배 되는 밀도를 가졌다. 그러나 너희 태양은 액체도 고체도 아니며―기체이다―어떻게 가스 물질이 이 밀도(密度), 아니 훨씬 더 높은 밀도에도 이를 수 있는가 설명하기 어려운데도, 이것은 참말이다.
41:4.2 (459.6) 기체와 액체와 고체 상태는 원자(原子)와 분자(分子) 관계의 문제이지만 밀도는 공간과 물질의 관계이다. 밀도는 공간에 있는 물질의 양에 정비례하여 높아지며, 물질 안에 있는 공간의 양이 늘어날수록 낮아진다. 이 공간은 물질의 중앙 핵심과 이 중심을 빙빙 도는 입자(粒子)들 사이의 공간, 그리고 그러한 물질 입자들 안에 있는 공간을 말한다.
41:4.3 (459.7) 식어 가는 별들은 물리적으로 기체이며, 동시에 밀도가 굉장히 높을 수 있다. 너희는 태양 초월 가스에 관하여 익숙하지 않지만, 이를 비롯하여 다른 드문 형태의 물질은 어떻게 고체가 아닌 태양들조차 쇠와 같은―대체로 유란시아와 같은―밀도에 이를 수 있는가, 그래도 몹시 가열된 가스 상태에 있고 계속 태양으로 활동하는가 설명한다. 밀도가 높은 이 초월 가스 안의 원자들은 예외로 작으며, 거의 전자를 품지 않는다. 그러한 태양들은 또한 자유로운 극자(極子) 에너지의 저장을 대체로 써버렸다.
41:4.4 (460.1) 너희 근처에 어느 태양은 너희 태양과 대체로 같은 질량을 가지고 일생을 시작했는데, 지금 거의 유란시아 크기로 줄어들었고, 너희 태양의 4만배만큼 밀도가 높다. 이 뜨거운 가스이자 찬 고체의 무게는 1 평방 센티미터에 약 155킬로그람이다. 아직도 이 태양은 희미한 불그스름한 광채로 빛나는데, 이것은 죽어 가는 빛의 군주가 발산하는 쇠약한 미광(微光)이다.
41:4.5 (460.2) 그러나 대부분의 태양은 그렇게 조밀하지 않다. 더 가까이 있는 너희 이웃 중 하나는, 해면에서 너희 대기(大氣)의 밀도와 똑같은 밀도를 가졌다. 만일 너희가 이 태양의 내부에 있다면, 너희는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기온이 허락한다면, 밤 하늘에 반짝이는 대다수의 태양을 꿰뚫고 지나가면서 땅에서 너희의 거실의 공기(空氣)에서 파악하는 것보다 물질을 더 많이 볼 수 없다.
41:4.6 (460.3) 무거운 벨룬시아 태양은 오르본톤에서 가장 큰 태양 중의 하나인데, 겨우 유란시아 대기의 1천분의 1의 밀도를 가지고 있다. 조직이 너희의 대기와 비슷하고 초고열 상태에 있지 않다면, 그 별이 너무 진공(眞空)에 가까워서 인간이 그 속이나 그 위에 있다면 급속히 질식할 것이다.
41:4.7 (460.4) 오르본톤에서 또 하나의 거성은 표면 온도가 3천도가 약간 안 된다. 그 지름은 4.8억 킬로미터가 넘는다―너희의 태양과 현재 지구의 궤도를 담을 만큼 충분한 자리가 있다. 그래도 너희 태양의 4천만배가 넘는 이 엄청난 크기에 비해서, 질량은 겨우 약 30배가 더 크다. 이 거대한 태양들은 한 별에서 다른 별에 거의 미칠 정도로 테두리가 뻗는다.
41:5.1 (460.5) 공간의 태양들이 그다지 조밀하지 않다는 것은 도망하는 빛 에너지가 꾸준히 흘러나가는 것으로 증명된다. 밀도가 너무 높으면 빛 에너지의 압력이 폭발하는 점에 이를 때까지, 불투명으로 인하여, 빛이 보존될 것이다. 한 태양 안에는, 멀리 있는 행성들에게 에너지를 공급하고 빛과 열을 주기 위해서 수백만 킬로미터의 공간을 꿰뚫고 갈 에너지 흐름을 쏘아내게 할 만큼, 엄청난 빛이나 가스 압력이 있다. 원자 분열의 결과로 누적되는 에너지의 끓어오르는 내부 압력이 바깥으로 엄청나게 폭발해서 인력을 이길 때까지, 유란시아의 밀도를 가진 표면의 4.6미터는 모든 X선과 빛 에너지가 태양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것이다.
41:5.2 (460.6) 고온에서 불투명한 보존하는 벽에 갇혀 있을 때, 추진력을 가진 가스가 있을 경우에 빛은 상당히 폭발성이 있다. 빛은 실재한다. 너희 세계에서 에너지와 동력을 평가하는 대로 1킬로그람에 220만 달라이면, 태양 빛은 비싸지 않을 것이다.
41:5.3 (460.7) 너희 태양의 내부는 광대한 X선 발생기이다. 태양들은 이 강력한 방사물의 끊임없는 폭격으로 인하여 내부에서 유지된다.
41:5.4 (460.8) 보통 태양의 핵심에서 태양 표면까지, X선에 자극받은 한 전자(電子)가 길을 애써 찾아가는 데는 50만 년이 넘어 걸린다. 태양 표면에서 전자는 그 우주 모험을 떠나고, 혹시 사람이 사는 행성을 따듯하게 만들거나, 운석에게 붙잡히거나, 한 원자의 출생에 참여하거나, 공간에서 높은 전하를 가진 흑도에 흡수되거나, 아니면 우주에 비행하는 길을 발견하며, 이것은 기원이 있던 태양과 비슷한 어느 태양의 표면에 최종으로 투신함으로 끝난다.
41:5.5 (461.1) 한 태양의 내부 X선은 상당히 가열된 흥분한 전자들을 충분한 에너지로 충전시키고, 공간을 통해서 바깥으로, 중간에 개재하는 물질의 여러 가지 억제하는 영향력을 지나치고, 다양한 인력이 당기는데도, 외딴 체계들의 먼 구체들까지 보낸다. 한 태양의 인력 손아귀를 빠져 나가는 데 필요한 큰 속도 에너지는 그 태양 빛이 상당한 물질 덩어리와 마주칠 때까지 속도를 줄이지 않고서 줄곧 여행할 것을 보장하기에 충분하며, 그런 덩어리에 부딪치고 나서 태양 빛은 다른 에너지를 해방시키면서 급히 열로 변화된다.
41:5.6 (461.2) 빛으로든 다른 형태로든, 공간을 통해 비행할 때 에너지는 똑바로 앞으로 움직인다. 물질 존재의 실제 입자들은 연속 사격처럼 공간을 질러간다. 우월한 물력이 작용할 때를 제외하고, 물질 덩어리에 본래 있는 직진(直進) 인력의 당김, 그리고 파라다이스 섬의 둥그런 인력의 존재에 늘 복종하는 것을 제외하고, 이 입자들은 곧고 단절되지 않은 선이나 행렬을 지어 진행한다.
41:5.7 (461.3) 태양 에너지는 파도처럼 추진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공존(共存)하는 다양한 영향의 작용 때문이다. 일정한 형태의 조직된 에너지는, 파도를 이루지 않고 직선으로 진행한다. 2차 또는 3차 형태의 물력 에너지가 있으면 관찰되는 흐름이 파도 형태로 달리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눈을 뜰 수 없이 세찬 폭풍우 속에서, 강풍이 동반되었을 때, 때때로 물이 쏟아부은 듯 떨어지거나 혹은 파도를 이루어 쏟아지는 듯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빗방울은 단절되지 않게 줄서서 직선으로 내려오고 있지만, 바람의 작용은 억수비로, 빗방울이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듯 보이게 만든다.
41:5.8 (461.4) 너희 지역 우주의 공간 구역에 존재하는 어떤 2차 에너지와 기타 발견되지 않은 에너지의 작용은 태양 빛의 방사(放射)를 분명한 길이와 무게를 가진 극미한 분량으로 자를 뿐 아니라, 어떤 파도같은 현상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실제로 고려하면,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난다. 네바돈 공간 지역에서 작용하는 여러 가지 공간 물력과 태양 에너지의 상호 작용 및 상호 관계에 대하여 너희가 더 뚜렷한 개념을 얻을 때까지, 너희는 도저히 빛의 행동을 더 이해하기를 바랄 수 없다. 현재 너희가 겪는 혼란은 또한 이 문제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데 기인하며, 이것은 이 문제가 총우주의 성격 통제와 비성격 통제―합동 행위자와 무제한 절대자의 계심ㆍ행위ㆍ조정―의 서로 연결된 활동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41:6.1 (461.5) 분광(分光) 현상을 풀이할 때, 공간이 비어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공간을 질러가면서 모든 조직된 공간에서 순환하는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와 물질로 인하여 빛이 때때로 약간 수정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너희 태양의 분광에서 보이는 미지의 물질을 가리키는 어떤 선들은, 부서진 형태로 공간 전역에서 떠도는, 잘 알려진 원소들이 수정(修正)되기 때문이며, 이 원소들은 태양의 원소(元素) 전쟁에서 맹렬한 충돌로 희생되는 원자(原子)이다. 공간은 이 떠도는 부랑자, 특히 나트리움과 칼시움으로 가득 차 있다.
41:6.2 (461.6) 칼시움은 사실, 오르본톤 전역에 두루, 공간을 물질로 침투하는 주요한 원소이다. 우리 초우주 전체가 미세하게 빻아진 돌가루로 뿌려져 있다. 돌은 글자 그대로, 공간의 행성과 구체들을 짓는 기본 건축 재료이다. 우주 구름, 곧 공간의 큰 덮개는 대부분 수정된 칼시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돌 원자는 가장 널리 퍼져 있고 영속하는 원소들 중의 하나이다. 돌 원자는 태양의 이온화―원소 쪼개기―를 견딜 뿐 아니라, 파괴적인 X선에 얻어맞고 높은 태양 온도로 인하여 부서진 뒤에도, 결합된 신분을 버틴다. 칼시움은 더 흔한 형태의 어떤 물질도 능가하는 개성과 수명을 가지고 있다.
41:6.3 (462.1) 너희 물리학자들이 추측한 바와 같이, 불구(不具)가 된 이 태양 칼시움 찌꺼기는 글자 그대로 광선을 타고서 미치는 거리가 달라지며, 따라서 공간에 두루, 칼시움의 광범위한 분산을 엄청나게 수월하게 만든다. 어떤 수정을 거치면, 나트리움 원자도 빛과 에너지로 이동하는 능력이 있다. 칼시움의 재주는 더군다나 두드러진데, 이 원소의 질량은 나트리움의 거의 2배이기 때문이다. 칼시움이 지역 공간에 퍼지는 것은, 수정된 형태로서, 글자 그대로, 바깥으로 나가는 광선을 올라타고 태양의 광구(光球)로부터 달아난다는 사실 때문이다. 태양의 모든 원소 가운데, 칼시움은―회전하는 전자 20개를 포함하다시피―비교적 부피가 큰데도, 태양의 내부에서 공간 영역으로 달아나는 데 가장 많이 성공한다. 이것이 어째서 태양에 1만 킬로미터나 두텁게 칼시움 층, 가스 상태의 돌 껍질이 있는가 설명한다. 더 가벼운 원소가 19개, 그리고 더 무거운 수많은 원소가 그 밑에 있는 것이 사실인데도 그렇다.
41:6.4 (462.2) 칼시움은 태양 온도에서 활발하고 다능한 원소이다. 돌 원자는 바깥의 두 전자 회로에, 민첩하고 느슨히 붙어 있는 전자가 2개 있고, 이 회로들은 아주 가까이 함께 있다. 원자가 투쟁하는 초기부터, 돌 원자는 바깥의 전자를 잃어버린다. 이렇게 되고 나서, 19번째 전자 궤도와 20번째 궤도에, 19번째 전자를 이리 던졌다가 저리 던지는 솜씨 있는 연기(演技)에 들어간다. 1초에 25,000번이 넘게, 그 자체의 궤도와 사라진 그 동반자의 궤도에 이 19번째 전자를 이리저리 던짐으로, 불구가 된 돌 원자는 어느 정도 인력을 물리치고, 이렇게 해방과 모험을 향하여, 솟아오르는 빛과 에너지의 흐름, 태양 빛을 올라타는 데 성공할 수 있다. 이 칼시움 원자는 1초마다 약 25,000번 태양 빛을 붙잡았다 놓았다 하면서, 번갈아서 덜컥덜컥 앞으로 추진함으로 바깥을 향하여 움직인다. 이것이 어째서 돌이 공간의 여러 세계에서 주요한 구성 분자인가 하는 이유이다. 칼시움은 태양 감옥을 탈출하는 데 가장 솜씨 있는 원소이다.
41:6.5 (462.3) 이 곡예사 같은 칼시움 전자의 민첩성은, 고온 X선의 태양 물력으로 인하여 더 높은 궤도의 동그라미에 던져졌을 때, 그 전자는 그 궤도에서 1초의 약 1백만분의 1 동안만 머무른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원자핵의 전기(電氣) 및 인력의 힘이 전자를 그 옛 궤도로 도로 끌어내리기 전에, 그 전자는 원자 중심의 회전을 1백만 번이나 마칠 수 있다.
41:6.6 (462.4) 너희의 태양은 굉장한 양의 칼시움을 떨쳐 버렸는데, 태양계의 형성과 관련하여 경련하면서 분출하는 시기에 엄청난 양을 잃어버렸다. 태양 칼시움의 상당 부분은 지금 태양의 바깥 껍질에 있다.
41:6.7 (462.5) 분광을 분석하는 것은 오로지 태양 껍질이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보여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면, 태양의 분광은 철선(鐵線)을 여러 개 드러내지만, 쇠는 태양의 주요 원소가 아니다. 이 현상은 거의 전적으로 태양 표면의 현재 온도 때문인데, 이것은 6,000도보다 약간 낮고, 이 온도는 철이 분광에 등록되는 데 대단히 유리하다.
41:7.1 (463.1) 너희의 태양은 물론이고, 많은 태양의 내부 온도는 보통 추측하는 것보다 훨씬 높다. 한 태양의 내부에는 온전한 원자가 실제로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원자들은 모두, 그러한 고온에서 생겨나는 강렬한 X선의 폭격 때문에 다소 깨진다. 한 태양의 바깥 층에 무슨 물질 원소들이 나타나는가 상관 없이, 내부에 있는 원소들은 파괴하는 X선의 분열 행위로 인하여 대단히 비슷하게 만들어진다. X선은 원자의 존재를 평준화시키는 좋은 도구이다.
41:7.2 (463.2) 너희 태양 표면의 온도는 거의 6,000도이지만, 태양의 온도는 그 내부를 파고드는 데 따라서, 중심 지역에서 믿을 수 없는 고온, 약 35,000,000도에 이르기까지 급속히 높아진다. (이 온도는 모두 너희의 화씨 온도를 말한다.)
41:7.3 (463.3) 이 모든 현상은 엄청난 에너지가 소비됨을 가리키며, 태양 에너지의 근원은 중요한 순서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41:7.4 (463.4) 1. 원자의 소멸, 그리고 궁극에 전자(電子)의 소멸.
41:7.5 (463.5) 2. 이렇게 해방된 방사성 에너지 집단을 포함한, 원소들의 변질.
41:7.6 (463.6) 3. 어떤 우주 공간 에너지를 축적한 것과 발송받은 것.
41:7.7 (463.7) 4. 불타는 태양 속으로, 끊임없이 뛰어드는 공간 물질과 운석.
41:7.8 (463.8) 5. 태양의 수축. 태양의 냉각과 그에 따르는 수축은, 공간 물질이 공급하는 것보다 때때로 더 큰 에너지와 열을 생산한다.
41:7.9 (463.9) 6. 고온에서 인력의 작용은 순환된 어떤 힘을 방사성 에너지로 바꾼다.
41:7.10 (463.10) 7. 태양 바깥에서 기원을 가진 다른 에너지와 함께, 태양을 떠난 뒤에 다시 태양으로 이끌리는 회수된 빛과 기타 물질.
41:7.11 (463.11) 뜨거운 (때로는 온도가 수백만도가 되는) 가스로 이루어진 규제하는 덮개가 존재하는데, 이것은 태양을 둘러싸고, 열 손실을 안정시키도록 작용하며 그밖에 열이 분산되는 위험한 변동을 방지한다. 한 태양의 활발한 생애 동안에, 외부 온도가 점차 떨어지는 것에 아주 상관 없이, 35,000,000도에 이르는 내부 온도는 대체로 같은 수준에 머무른다.
41:7.12 (463.12) 너희는 35,000,000도의 열을, 어떤 인력의 압력과 연관하여, 전자가 끓는 점이라고 상상해도 좋다. 그러한 압력 밑에서, 그리고 그러한 온도에서, 모든 원자는 비하(卑下)되며, 전자 및 기타 조상인 구성 분자로 부서진다. 전자와 기타 극자의 결합들도 부서질 수 있다. 그러나 태양은 극자를 비하시킬 수 없다.
41:7.13 (463.13) 이러한 태양 온도는 극자(極子)와 전자들을 엄청나게 가속하도록, 적어도 이 조건 밑에서 극자와 같은 것들이 존재를 계속할 정도로 작용한다. 너희가 보통 물 한 방울이 1조(兆)의 10억배나 넘는 원자를 포함한다는 것을 멈추어 생각할 때, 극자와 전자 활동을 가속하는 방향으로 고온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깨달을 것이다. 이것은 1백 마력(馬力)을 2년 동안 줄곧 쓴 것보다 더 큰 에너지이다. 현재 태양계의 태양에서 매초 발산되는 총 열량은 꼭 1초 안에, 유란시아의 모든 대양에 있는 물을 다 끓이기에 충분하다.
41:7.14 (464.1) 우주 에너지의 주류가 흐르는 직통 경로에서 활동하는 태양만 언제까지나 계속 빛날 수 있다. 그러한 태양 화로들은 무기한으로 타오르며, 공간 물력, 그리고 순환하는 비슷한 에너지를 흡수함으로, 물질의 손실을 메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요 재충전 경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별들은 에너지 소모를 겪도록―차츰 식어가고 궁극에는 타 버리도록―운명이 정해져 있다.
41:7.15 (464.2) 죽었거나 죽어 가는 그런 태양들은 충돌의 영향으로 청춘을 회복하든지, 아니면 공간에서 빛나지 않는 어떤 에너지 섬으로 인하여, 또는 근처의 더 작은 태양이나 체계들을 인력으로 탈취하여 다시 충전될 수 있다. 죽은 태양의 대다수는 이 방법이나 다른 진화 기법으로 다시 활기를 찾게 될 것이다. 이렇게 궁극에 다시 충전되지 않은 것들은, 인력으로 인한 응축이 극자가 에너지 압력으로 응축되는 임계 수준에 도달할 때, 물질이 폭발함으로 붕괴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사라지는 태양들은 이처럼 아주 드문 형태의 에너지가 되고, 더 유리하게 자리잡은 다른 태양에게 활력을 불어넣기에 놀랍게도 적절하다.
41:8.1 (464.3) 공간 에너지의 경로에서 회로가 이어진 태양의 경우에, 여러 가지 복잡한 연쇄 핵반응으로 말미암아 태양 에너지가 방출된다. 이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은 수소-탄소-헬리움 반응이다. 이러한 변형 과정에서 탄소는 에너지 촉매로서 작용하는데, 이는 수소를 헬리움으로 전환시키는 이 과정이 탄소를 실제로 도무지 변화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고온 조건 밑에서, 수소는 탄소의 핵들을 관통한다. 탄소가 그러한 양성자(陽性子)를 4개보다 더 가지고 있을 수 없으니까, 이 포화 상태에 이를 때, 새 양성자들이 도착하는 것과 똑같이 빠르게 양성자들을 내보낸다. 이 반응에서 들어가는 수소 입자들은 하나의 헬리움 원자가 되어 나온다.
41:8.2 (464.4) 수소(水素) 내용의 감소는 태양의 밝기를 높인다. 타 버릴 운명을 가진 태양의 경우에, 수소가 소모되는 시점에 밝기가 절정에 이른다. 이 점이 지난 뒤에, 그에 따라 인력으로 인한 수축 과정으로 밝기가 유지된다. 궁극에 그러한 별은 이른바 백왜성(白矮星), 상당히 응축된 구체가 될 것이다.
41:8.3 (464.5) 큰 태양―작은 둥그런 성운―에서, 수소가 소모되고 인력으로 인한 수축이 따를 때, 그러한 천체가 충분히 불투명하지 않아서 바깥의 가스 지역을 지탱할 내부 압력을 유지하지 못하면, 갑작스러운 붕괴가 일어난다. 인력과 전기(電氣)의 변화는, 전기 잠재성이 없는, 광대한 양의 작은 입자들을 낳는다. 그러한 입자들은 쉽게 태양의 내부로부터 도망치고, 이처럼 며칠 사이에 거대한 태양의 붕괴를 일으킨다. 약 50년 전에 안드로메다 성운에서[4] [1676] 거대한 신성(新星)의 붕괴를 일으킨 것은 바로 이 “도망하는 입자들”이 그렇게 이주한 것이었다. 이 광대한 별 덩어리는 유란시아 시간으로 40분 안에 붕괴했다.
41:8.4 (464.6) 일반적으로, 광대하게 물질이 분출된 것은 식어 가는 남은 태양 근처에, 방대한 성운 가스의 구름으로서 계속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이, 게 성운과 같은 여러 종류의 불규칙한 성운의 기원을 설명하는데, 게 성운은 그 기원이 약 9백년 전에 있었고, 아직도 어미 구체가 이 불규칙한 성운 덩어리의 중심 가까이 혼자 있는 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41:9.1 (465.1) 비교적 큰 태양들은, 빛이 강력한 X선의 도움을 얻어야 겨우 도망칠 만큼 자체의 전자들에 대하여 상당한 인력 통제를 유지한다. 이 원조하는 X선은 모든 공간을 꿰뚫고, 에너지의 기본적 극자 결합을 유지하는 데 관여한다. 태양이 그 최대 온도―35,000,000도가 넘는 온도―에 이른 뒤에, 태양의 초기 시절에 일어나는 큰 에너지 손실은 빛의 도망보다 극자의 유출에 기인한다. 이 극자 에너지는 공간으로 달아나서, 태양의 청춘기 동안 하나의 진정한 에너지 폭발로서, 전자로 결합되고 에너지의 물질화 모험을 시작한다.
41:9.2 (465.2) 원자와 전자는 인력에 지배를 받는다. 극자(極子)는 지역 인력, 즉 물질의 당기는 상호 작용에 지배되지 않는다. 그러나 극자는 절대 인력, 곧 파라다이스 인력에, 온 우주의 보편적이고 영원한 동그라미 성향과 회전에, 충분히 복종한다. 극자 에너지는 가까이 혹은 멀리 있는 물질 덩어리의 직진 인력, 곧 직접 인력의 당기는 힘에 복종하지 않지만, 방대한 창조의 큰 타원형 회로를 늘 충실히 지키며 돈다.
41:9.3 (465.3) 너희 태양의 중심은 해마다 거의 1천억 톤의 실제 물질을 방출한다. 한편 거대한 태양들은 성장하는 초기에, 즉 처음 몇십억 년 동안 막대한 양의 물질을 잃어버린다. 한 태양의 생명은 최고의 내부 온도에 이른 뒤에 안정되며, 원자 이하의 에너지가 비로소 방출된다. 그리고 바로 이 임계점에서, 비교적 큰 태양은 경련으로 고동치기 시작한다.
41:9.4 (465.4) 태양의 안정성은 온통 인력(引力)과 열의 싸움의 균형에―엄청난 압력과 상상하지 못할 온도가 균형을 이루는 데―의존한다. 태양 내부 가스의 탄력성은 위에 놓인 다양한 물질 층을 지탱하며, 인력과 열이 균형을 이룰 때, 바깥 층 물질의 무게는 밑에 있는 내부 가스의 온도 압력과 정확히 같다. 다수의 비교적 젊은 별의 경우에, 인력으로 인한 계속된 응축은 내부 온도를 늘 높게 만든다. 내부의 열이 올라감에 따라서, 내부의 초월 가스의 X선 압력이 아주 커져서, 원심(遠心) 운동과 연관하여, 태양은 비로소 그 바깥 층을 공간으로 던지기 시작하고, 이처럼 인력과 열의 불균형을 시정한다.
41:9.5 (465.5) 바로 너희의 태양은 확장하고 축소하는 그 주기 사이에 비교적 균형을 이룬 지 오래 되었다. 이러한 소동은 비교적 다수의 젊은 별에서 거대한 박동을 일으킨다. 너희의 태양은 지금 그 60억 년대를 지나고 있다. 현재 시점에서, 태양은 최대로 경제적인 기간을 통하여 활동하고 있다. 현재의 효율로 태양은 250억 년이 넘게 빛날 것이다. 어느 정도 효과적인 쇠퇴 기간을 겪을 터이고, 이것은 아마도 청춘과 안정되어 활동하는 기간을 통합한 것만큼 길 것이다.
41:10.1 (465.6) 어떤 변광성은, 최대의 박동 상태에 있거나 그에 가까울 때, 종속 체계들을 낳는 과정에 있고, 이들 가운데 다수는 결국 바로 너희의 태양 및 그를 회전하는 행성들과 상당히 비슷하게 될 것이다. 너희의 태양은 육중한 앙고나 체계가 가까이 접근했을 때, 마침 그러한 강력한 박동 상태에 있었고, 태양의 바깥 표면은 진정한 물질의 흐름을―이어지는 폭포수 같이―내뿜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이 병렬 상태에 있을 때까지, 이것은 항상 더욱 맹렬하게 지속되었고, 이때 태양의 응축이 한계에 이르러 광대한 물질의 절정, 곧 태양계의 조상을 토해냈다. 비슷한 상황에서, 끌어당기는 물체가 아주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때때로 온전한 여러 행성을, 아니 한 태양의 4분의 1이나 3분의 1을 끌어내기도 한다. 이러한 대분출은 어떤 특이한 세계, 구름에 쌓인 종류의 세계, 목성과 토성과 상당히 비슷한 구체들을 형성한다.
41:10.2 (466.1) 하지만 대다수의 태양계는 너희의 것과 도무지 다른 기원을 가졌고, 인력의 조수(潮水) 방법으로 생산되는 것들의 경우에도 이것이 참말이다. 그러나 무슨 방법으로 세계가 지어졌는가에 상관 없이, 인력은 언제나 태양계 부류의 창조, 다시 말해서 행성, 위성, 종속 위성, 운석들과 더불어, 중심에 있는 태양이나 또는 흑도(黑島)를 생산한다.
41:10.3 (466.2) 개별 세계의 물리적 모습은 대체로 기원의 형식, 천문학적 상황, 물리적 환경에 따라서 결정된다. 나이ㆍ크기ㆍ회전율, 그리고 공간을 통과하는 속도도 또한 결정 요인이다. 가스가 응축하고 고체가 달라붙어 생긴 세계들은 산이 있고, 초기 생애 동안에, 너무 작지 않을 때, 물과 공기를 가지는 특징이 있다. 녹아서 갈라진 세계와 충돌로 생긴 세계들은 때때로 광범위한 산맥이 없다.
41:10.4 (466.3) 이 모든 새 세계의 초창기에 지진이 빈번히 일어나고, 모두가 큰 물리적 소란을 겪는 특징을 가진다. 특히 가스가 응축되어 생긴 구체에서 이것이 참말이며, 이들은 어떤 개별 태양이 초기에 응축하고 수축하는 결과로 남은 거대한 성운 고리에서 태어나는 세계이다. 유란시아처럼 2중 기원을 가진 행성들은 그보다 덜 격심하고 덜 시끄러운 청년기 생애를 거친다. 그렇기는 해도, 너희 세계는 초기 단계에 화산ㆍ지진ㆍ홍수, 그리고 굉장한 폭풍의 특징을 가진, 강력한 대격변을 체험했다.
41:10.5 (466.4) 유란시아는 사타니아의 교외에 비교적 고립되어 있고, 너희의 태양계는 하나의 예외를 빼고, 예루셈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한편 사타니아 자체는 놀라시아덱의 가장 바깥 체계 옆에 있고, 이 별자리는 지금 네바돈의 바깥 테두리를 질러가고 있다. 미가엘의 수여가 너희 행성을 명예롭고 크게 우주의 관심을 끄는 지위로 올리기까지, 너희는 참으로 모든 창조 가운데 가장 하찮은 축에 끼어 있었다. 때때로 마지막이 첫째이고, 한편 참으로 제일 작은 자가 제일 크게 된다.
42:0.1 (467.1) 에너지가 모든 존재의 기본이라는 의미에서, 우주의 바탕은 물질이며, 우주의 아버지는 순전한 에너지를 통제한다. 물력, 곧 에너지는 우주 절대자의 존재와 계심을 보여주고 입증하는 영구한 기념비로 서 있는 유일한 것이다. 파라다이스 삼위로부터 진행하는 광대한 에너지 흐름은 결코 그친 적이 없고, 결코 실패한 적이 없다. 우주를 무한히 떠받치는 일이 결코 중단된 적이 없다.
42:0.2 (467.2) 우주 에너지는 언제나 우주의 아버지 자신의 뜻과 전적으로 지혜로운 명령에 따라서 조종된다. 아버지와 나란히 영원한 아들이 행동하고 결정하는 데 따라서, 또한 아들과 아버지의 통일된 목적을 합동 행위자가 집행하는 데 따라서, 이렇게 동력의 명시와 순환하는 에너지를 친히 통제하는 것이 수정된다. 이 신성한 존재들은 친히, 그리고 개체로서 행동한다. 그들은 또한 거의 한없는 수의 하급자들의 몸과 권능 속에서 활동하며, 이들 각자는 온 우주에서 영원하고 신성한 목적을 다양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신의 힘을 이렇게 기능적으로 또 임시로 수정하거나 변화시키는 것은, 만물의 중심에 거하는, 성격을 가진 하나님이 궁극에 모든 물력과 에너지를 통제한다는 말의 진실성을 조금도 떨어뜨리지 않는다.
42:1.1 (467.3) 우주의 바탕은 물질이지만, 생명의 본질은 영이다. 영들의 아버지는 또한 우주들의 조상이다. 최초의 아들의 영원한 아버지는 또한 최초의 원본, 파라다이스 섬의 영원한 근원이다.
42:1.2 (467.4) 물질―에너지―가 똑같은 우주 실체의 다양한 명시에 불과하니까, 물질은 하나의 우주 현상으로서 우주의 아버지 안에 본래부터 생긴다. “그분 안에 만물이 존재하도다.” 물질은 선천적 에너지를 나타내고, 독립된 힘을 전시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물리 현상에 관여하는 에너지에 연결된 인력선은 파라다이스로부터 유래하며 파라다이스에 의존한다. 극자는 측정할 수 있는 처음 형태의 에너지이며, 극자의 핵심에 파라다이스가 있다.
42:1.3 (467.5) 물질 안에, 그리고 우주 공간에, 유란시아에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형태의 에너지가 선천적으로 있다. 이것을 마침내 발견할 때, 물리학자들은 그들이 물질의 신비(神秘)를, 적어도 거의 풀었다고 느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창조자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을 것이다. 그래서 신의 기법을 한 단계 더 통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파라다이스의 우주 기법과 우주의 아버지의 자극하는 목적과 따로, 물질이 존재하거나 자연 법칙이 작용하는 것을 입증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42:1.4 (468.1) 더욱 큰 진보와 계속된 발견이 있고 나서, 유란시아가 현재의 지식과 비교하여 측량할 수 없이 진보한 뒤에, 물질의 물리적 명시를 수정할 정도까지 물질의 전기(電氣) 단위의 에너지 회전을 통제하는 힘을 너희가 장악할 터이지만―모든 그러한 가능한 진보가 있은 뒤에도―영원히, 과학자는 한 물질 원자를 창조하거나, 에너지가 번쩍 생기게 하거나, 아니면 언제라도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물질에 더할 힘이 없을 것이다.
42:1.5 (468.2) 에너지 창조와 생명의 수여는 우주의 아버지와 그 동료 창조 성격자들의 특권이다. 에너지와 생명의 강은 신들로부터 잇따라 쏟아져 나오는 것이요, 모든 공간으로 진행하는 파라다이스 물력의 흐름, 보편적이고 통일된 흐름이다. 이 신의 에너지는 모든 창조에 스며든다. 물력 조직자는 궁극에 에너지가 되는 공간 물력의 변화를 개시하고 그러한 수정을 시작한다. 동력 지휘자는 에너지를 물질로 변질시키고, 이처럼 물질 세계들이 태어난다. 생명 운반자는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과정, 곧 물질 생명을 죽은 물질 안에서 개시한다. 상물질 동력 감독은 물질 세계와 영적 세계 사이의 과도기 영역에 두루, 마찬가지로 활동한다. 상급 영인 창조자들은 신의 에너지 모습을 입고서 비슷한 과정을 개시하며, 상급 영 형태의 지적 생명이 뒤이어 생긴다.
42:1.6 (468.3) 에너지는 파라다이스로부터 진행하며, 신의 질서를 따라서 만들어진다. 에너지―순수한 에너지―는 신의 조직의 성질을 띤다. 세 신이 온 우주의 본부에서 활동하는 것 같이, 에너지는 하나 속에 포함된 세 신의 모습을 본따서 만들어진다. 모든 물력은 파라다이스 안에서 순회되며, 파라다이스 삼위로부터 나와서 거기로 돌아가고, 물력은 본질적으로 원인 없는 원인―우주의 아버지―의 표현이다. 그리고 아버지 없이, 존재하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42:1.7 (468.4) 스스로 존재하는 신으로부터 유래한 물력 그 자체는 늘 존재한다. 물력 및 에너지는 썩을 수 없고 파괴될 수 없다. 무한자의 이러한 명시는 한없는 변질, 끝없는 변형, 모습의 영원한 변화를 겪을지 모르지만, 어떤 의미나 정도에서도, 조금이라도 상상할 수 있는 범위까지, 이 명시는 사라질 수 없고 결코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에너지가 무한자로부터 솟아나와도 무한히 명시되지는 않으며, 현재 파악된 총우주에는 바깥 한계가 있다.
42:1.8 (468.5) 에너지는 영원하지만 무한하지 않다. 에너지는 모든 것을 둘러싸는 무한자의 손아귀 힘에 언제나 반응한다. 영원토록 물력과 에너지는 계속한다. 파라다이스로부터 나갔으니까, 예정된 회로를 마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린다 하더라도, 물력과 에너지는 거기로 돌아가야 한다. 파라다이스 신에 기원을 가진 것은 오로지 파라다이스로 돌아가거나 신의 운명을 가질 수 있다.
42:1.9 (468.6) 이 모든 것이, 온 우주가 둥그렇고, 얼마큼 제한되었지만 질서 있고 광대하다는 우리의 믿음을 확증한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느 시점에 에너지가 고갈되는 증거가 머지않아 나타날 것이다. 모든 법칙ㆍ조직ㆍ행정, 그리고 우주 탐험자들의 증언이―이 모든 것이 무한한 하나님이 존재하지만 아직까지 하나의 유한한 우주가 있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끝없이 존재하고 거의 한계가 없는, 하나의 동그라미 모양이지만, 그런데도 무한한 것이 아니라, 유한한 우주이다.
42:2.1 (469.1) 다양한 수준의 물력과 에너지―물리적ㆍ정신적ㆍ영적 에너지―를 가리키고 묘사하기에 알맞는 낱말을 영어에서 찾기가 정말로 어렵다. 이 이야기는 너희가 널리 사용하는 물력ㆍ에너지ㆍ동력의 정의(定義)를 도무지 따를 수 없다. 언어가 너무 부족해서 우리는 이러한 용어들을 여러 가지 뜻으로 써야 한다. 이 논문에서, 예를 들면, 에너지란 낱말은 모든 단계와 형태의 현상적 움직임ㆍ행동ㆍ잠재성을 나타내는 데 쓰이며, 한편 물력은 인력이 생기기 전의 에너지 단계, 동력은 인력이 생긴 뒤의 에너지 단계에 적용된다.
42:2.2 (469.2) 그러나 다음과 같이 우주 물력, 태동 에너지, 우주 동력―물리적 에너지―로 분류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라는 제안으로 나는 개념의 혼란을 줄이려고 노력하겠다.
42:2.3 (469.3) 1. 공간 잠재력. 이것은 무제한 절대자의 도전받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 계심이다. 이 개념을 연장하는 것은 무제한 절대자의 기능적 총체에 원래 있는, 우주 물력과 공간 잠재성을 뜻하고, 한편 이 개념이 내포하는 것은 총 우주 실체―우주들―을 의미하며, 이 총체는 영원의 방법으로 결코 시작과 끝이 없고, 결코 움직이지 않고 변함이 없는 파라다이스 섬으로부터 방출되었다.
42:2.4 (469.4) 파라다이스 아래쪽에 토착인 현상은 아마도 절대 물력이 존재하고 활동하는 세 지대(地帶)를 포함한다. 즉 무제한 절대자의 지레 받침 지대, 파라다이스 섬 자체가 있는 지대, 그리고 어떤 확인되지 않은, 평준화하고 보충하는 작용이나 기능을 가진 중간 지대이다. 이 세 동심원 지대는 우주 실체의 파라다이스 주기(週期)를 일으키는 중심체이다.
42:2.5 (469.5) 공간 잠재력은 하나의 선(先)실체이다.[1] [1677] 이것은 무제한 절대자의 영토이고, 1차 물력 조직책들의 계심이 이를 겉보기에 수정할 수 있는 듯한데도, 우주의 아버지의 친히 움켜쥐는 손에만 민감하다.
42:2.6 (469.6) 유버르사에서는 공간 잠재력을 절대력이라 언급한다.
42:2.7 (469.7) 2. 원초 물력. 이것은 공간 잠재력에서 처음 생기는 기본적 변화를 나타내며, 무제한 절대자가 아래 파라다이스에서 하는 활동의 하나일지 모른다. 아래 파라다이스로부터 나가는 공간이 있는 자리는 들어오는 공간과 어떤 면에서 다르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어떤 가능한 관계와 상관 없이, 널리 인식된 바 공간 잠재력을 원초 물력으로 변질시키는 것은, 살아 있는 파라다이스 물력 조직자들의 긴장과 계심이 1차적으로 차별하는 작용이다.
42:2.8 (469.8) 궁극에 이른 1차 물력 조직책들의 공간 계심이 제공하는 저항에 반응하여, 수동적 잠재 물력은 활발한 원초 물력이 된다. 물력은 이제 무제한 절대자의 독점 영토에서 여러 가지로 반응하는 영역으로 솟아나온다―이것은 행위의 하나님이 개시한 어떤 1차 운동에 대하여, 또한 그리고 나서 우주 절대자로부터 방출되는 어떤 보상 운동에 대하여 생기는 반응이다. 원초 물력은 절대성에 비례하여 초월 원인에 반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42:2.9 (469.9) 원초 물력을 때로는 순수 에너지라고 언급하며, 유버르사에서 우리는 이를 분리력이라 말한다.
42:2.10 (470.1) 3. 태동 에너지. 1차 물력 조직자들의 수동적 계심은 공간의 잠재력을 원초 물력으로 바꾸기에 충분하다. 그러한 활성화된 공간 분야 위에, 바로 이 물력 조직자들이 처음으로 적극적 활동을 시작한다. 원초 물력은 우주 동력으로 나타나기 전에, 에너지가 명시되는 영역에서 두 가지 뚜렷한 변질 단계를 거치도록 정해져 있다. 이 두 수준의 태동하는 에너지는 다음과 같다.
42:2.11 (470.2) 가. 유력 에너지. 이것은 강력하고 방향이 있고 대량으로 움직이며, 힘차게 긴장을 받고 힘 있게 반응하는 에너지이다―1차 물력 조직자들의 활동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거대한 에너지 체계들이다. 이 1차 에너지, 곧 유력(有力) 에너지는 처음에 파라다이스 인력의 당김에 분명히 민감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은 아마 파라다이스 아래쪽으로부터 작용하는, 절대 영향력의 집합에 대하여 총 질량의 반응, 곧 공간에서 방향 있는 반응을 낳는다. 파라다이스의 둥그런 절대 인력의 장악에 에너지가 처음으로 반응하는 수준까지 솟아나올 때, 1차 물력 조직자들은 2차 동료들이 활동하도록 길을 양보한다.
42:2.12 (470.3) 나. 인력 에너지. 이제 나타나는, 인력에 반응하는 에너지는 우주 동력이 될 가능성을 지니며, 모든 우주 물질의 활발한 조상이 된다. 이 2차 에너지, 곧 인력 에너지는 2차 초월 물력 조직책들이 일으킨 압력의 존재와 긴장의 경향으로부터 생기는 에너지를 다듬은 산물이다. 이 물력 조종자들의 작업에 반응하여, 공간 에너지는 유력(有力) 단계로부터 인력 단계까지 급속히 지나가고, 이처럼 파라다이스 (절대) 인력의 둥그런 붙잡는 힘에 직접 민감하게 되며, 한편 에너지와 물질의 전자(電子) 단계와 전자 이후 단계에서, 곧 출현하는 물질 덩어리에 본래 있는 직진 인력의 당김에 대하여 어떤 잠재 민감성을 드러낸다. 인력 반응이 나타난 뒤에, 우주 동력 지휘자들이 그 활동 분야에 배치될 수 있다면, 2차 물력 조직책들은 공간의 에너지 회오리바람으로부터 물러나도 좋다.
42:2.13 (470.4) 초기 단계에 물력 진화의 정확한 원인에 관하여 우리는 아주 확실하지 않지만, 태동 에너지가 나타나는 두 수준에서 우리는 궁극위의 지적 활동이 있음을 인식한다. 유력 에너지와 인력 에너지를 한데 합쳐서 유버르사에서는 궁극력이라 말한다.
42:2.14 (470.5) 4. 우주 동력. 공간에 있던 물력은 공간 에너지로, 그리고 나서 인력(引力)이 통제하는 에너지로 바뀌었다. 이렇게 물리적 에너지는 무르익어서, 동력의 경로로 지향되고, 우주 창조자들의 다채로운 목적에 쓰일 수 있게 되었다. 대우주―조직되어 있고 사람이 사는 여러 창조―에서 물리적 에너지의 다능한 지휘자ㆍ중심ㆍ통제자들이 이 작업을 수행한다. 이 우주 동력 지휘자들은 일곱 초우주의 현재 에너지 체계를 구성하는 30 단계의 에너지 중에서 21 단계를 얼마큼 능숙하게 통제하는 책임을 진다. 이 동력ㆍ에너지ㆍ물질의 분야는 최상위의 전반적 시공 통제 밑에서 활동하는 칠중자의 지적 활동이 있는 영역이다.
42:2.15 (470.6) 유버르사에서 우리는 우주 동력의 분야를 우주력이라[2] [1678] 언급한다.
42:2.16 (470.7) 5. 하보나 에너지. 변질하는 공간 물력을 따라서, 한 수준 한 수준, 시공의 여러 우주의 에너지 및 동력이 작용하는 수준까지, 이 이야기의 개념은 파라다이스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파라다이스 쪽으로 계속 가면, 다음에는 중앙 우주의 특징을 나타내는, 선재(先在)하는 에너지 단계와 마주친다. 여기서 진화의 주기는 그 자체를 향하여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에너지 및 동력은 이제 물력을 향하여 비로소 휙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공간 잠재력과 원초 물력의 성질과 대단히 다른 성질을 가진 물력이다. 하보나 에너지 체계는 두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이다. 이것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를 위하여 활동하는, 합동 행위자의 실존적 에너지 영토이다.
42:2.17 (471.1) 유버르사에서 이 하보나 에너지는 삼력(三力)으로 알려져 있다.
42:2.18 (471.2) 6. 초월 에너지. 이 에너지 체계는 파라다이스의 위쪽에서, 거기서부터, 그리고 오직 초한(超限) 민족들과 연결하여 작용한다. 유버르사에서 이것은 초력(超力)이라고 부른다.
42:2.19 (471.3) 7. 일력. 에너지는 파라다이스 에너지일 때 신성(神性)에 가깝다. 일력(一力)은 파라다이스의 살아 있는 비영적 에너지―영원 세계에서 최초의 아들의 살아 있는 영 에너지에 해당하는 물건―이라, 따라서 우주의 아버지의 비영적 체계라고 우리는 믿고 싶다.
42:2.20 (471.4) 우리는 파라다이스 영의 본질과 파라다이스 일력을 구별할 수 없고, 이 두 가지는 겉보기에 비슷하다. 이들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영적 명시와 비영적 표현이 겨우 이름으로만 구별할 수 있는 그러한 실체에 대하여 너희에게 도저히 많이 일러줄 수 없다.
42:2.21 (471.5) 유한한 인간이 칠중 신과 생각 조절자의 봉사를 통해서 우주의 아버지를 예배하는 체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이하의 어떤 성격자도, 아니 동력 지휘자도 위대한 첫째 근원 중심의 에너지가 무한함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의심한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공간 물력의 모습이 변화하는 기법에 관하여 동력 지휘자들이 정통하다면, 그들은 나머지 우리에게 그 비밀을 공개하지 않는다. 내 소견에는, 그들은 물력 조직자의 기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42:2.22 (471.6) 바로 이 동력 지휘자는 에너지 촉매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자신의 계심으로 말미암아, 단위 형태를 이루어 에너지가 갈라지거나, 조직하거나, 집합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은, 이 동력 존재들 앞에서, 에너지가 그렇게 활동하게 만드는 무엇이 본래부터 에너지 속에 틀림없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바돈의 멜기세덱들은 우주 물력이 우주 동력으로 변질하는 현상을 일곱 가지 “신성의 무한”의 하나로 부른 지 오래다. 지역 우주에서 올라가는 동안, 너희는 이 점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42:2.23 (471.7) 우주 물력의 기원ㆍ성질ㆍ변질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데도, 파라다이스 인력의 행위에 대하여 우주 물력이 직접 어김없이 반응하던 시절―대체로 초우주 동력 지휘자들이 활동을 시작하던 때―부터 우리는 태동 에너지 행위의 모든 단계에 관하여 익히 알고 있다.
42:3.1 (471.8) 중앙 우주의 경우를 제외하고, 온 우주에 있는 물질은 동일하다. 물질의 물리적 성질은, 유란시아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어떤 물력의 존재 뿐 아니라, 그 구성 분자의 회전율, 회전하는 구성 단위의 수와 크기, 그것들과 핵심까지의 거리, 또는 물질이 얼마나 공간 내용을 가졌는가에 달려 있다.
42:3.2 (471.9) 다양한 태양, 행성, 공간 물체에는 물질의 열 가지 대구분이 있다:
42:3.3 (472.1) 1. 극자 물질―물질 존재의 근본이 되는 물리적 단위, 전자를 구성하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 입자.
42:3.4 (472.2) 2. 전자 이하 물질―태양의 초월 가스가 폭발하고 밀어내는 단계.
42:3.5 (472.3) 3. 전자 물질―물질이 분화되는 전기 단계―전자(電子)ㆍ양성자(陽性子), 그리고 전자 집단의 다양한 구성에 들어가는 여러 가지 다른 단위.
42:3.6 (472.4) 4. 원자 이하 물질―뜨거운 태양의 내부에서 널리 존재하는 물질.
42:3.7 (472.5) 5. 부서진 원자―식어 가는 태양에서, 그리고 공간 전역에서 발견된다.
42:3.8 (472.6) 6. 이온화된 물질―전기ㆍ열, 또는 X선 활동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용매 때문에 자체의 바깥 전자들을 벗어 버린 (화학적으로 활성적인) 개별 원자.
42:3.9 (472.7) 7. 원자 물질―원소 조직의 화학 단계, 분자(分子)나 또는 눈에 보이는 물질의 구성 단위.
42:3.10 (472.8) 8. 분자 단계의 물질―보통 조건 밑에서, 비교적 안정된 물질화 상태에서 유란시아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물질.
42:3.11 (472.9) 9. 방사성 물질―적당한 열과 인력의 압력이 감소된 조건 밑에서, 무거운 원소들이 분열하는 경향과 활동.
42:3.12 (472.10) 10. 붕괴한 물질―식거나 죽은 태양의 내부에서 발견되는 비교적 고정된 물질. 이 형태의 물질은 정말로 가만히 있지 않는다. 아직도 극자, 아니 전자 활동조차 얼마큼 있지만, 이 단위들은 아주 가까운 거리 안에 있고, 그 회전율은 크게 줄어들었다.
42:3.13 (472.11) 앞서 말한 물질의 분류는 창조된 존재들의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라 그 조직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에너지가 태동하기 이전 단계나, 또는 파라다이스에서, 그리고 중앙 우주에서 생기는 영원한 물질화를 고려하지도 않는다.
42:4.1 (472.12) 빛ㆍ열ㆍ전기ㆍ자력(磁力), 화학 작용, 에너지, 물질은―그 기원ㆍ본질ㆍ운명이― 유란시아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다른 물질적 실체들과 함께, 하나이며 동일하다.
42:4.2 (472.13) 물리적 에너지가 겪을 수 있는 거의 끝없는 변화를 우리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물리적 에너지는 한 우주에서 빛으로, 다른 우주에서는 열을 수반하는 빛으로, 또 다른 우주에서는 유란시아에서 알려지지 않은 형태의 에너지로 나타난다. 백만 년이 무수히 지난 뒤, 그 에너지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솟아오르는 어떤 형태의 전기 에너지로서, 또는 자력으로서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 또 그 뒤에 다음 우주에서, 일련의 모습의 변화를 겪는 어떤 형태의 변하는 물질로 다시 나타났다가, 그 영역에서 어떤 큰 격변 속에, 겉보기에 물리적으로 사라지는 듯이 보일지 모른다. 그리고 나서, 셀 수 없이 긴 세월, 수없이 많은 우주를 통해서 거의 끝없이 방랑한 뒤에, 바로 이 에너지가 다시 솟아나서 여러 번 그 형태와 잠재성을 바꿀지 모른다. 따라서 이러한 변형은 이어지는 세월을 통해서 수없는 영역에 두루 계속된다. 그래서 세월의 변천을 겪으면서, 늘 영원의 궤도에 어김없이 맞추어 돌면서, 물질은 계속 휙 지나간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오랫동안 저지된다 하더라도, 물질은 그 근원에 늘 민감하며, 물질을 내보낸 무한한 성격자가 예비한 길에서 늘 진행한다.
42:4.3 (473.1) 동력 중심과 그 동료들은 극자를 전자의 회로와 회전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많이 관여한다. 이 독특한 존재들은 물질화된 에너지의 기본 단위인 극자를 솜씨 있게 주물러서 동력을 통제하고 늘어나게 한다. 그들은 에너지가 이 원시 상태에서 순환하는 동안, 에너지의 주인이다. 에너지가 전기(電氣) 수준, 이른바 전자 단계까지 변화한 뒤에도, 물리 통제자들과 연결하여, 그들은 에너지를 실지로 통제하고 지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 범위는 전자로 조직된 에너지가 원자 체계의 소용돌이 속으로 던져질 때 엄청나게 축소된다. 그렇게 물질화가 되고 나면 이 에너지는 직진 인력이 당기는 완벽한 손아귀에 굴러 떨어진다.
42:4.4 (473.2) 동력 중심과 물리 통제자들의 동력 선과 에너지 경로에서, 인력은 적극적으로 작용하지만, 이 존재들은 인력에 대하여 오로지 소극적 관계―반인력(反引力) 자질을 행사하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42:4.5 (473.3) 모든 공간을 통해서, 추위와 기타 영향은 극자를 조직하여 전자로 만드는 일을 한다. 열은 전자 활동이 얼마나 있는가 측량하고, 한편 추위는 다만 열이 전혀 없는―상대적으로 에너지가 쉬고 있는―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태동 에너지나 조직된 물질이 있어 인력에 반응하지도 않는, 공간의 우주 물력 전하(電荷) 상태이다.
42:4.6 (473.4) 인력이 존재하고 작용하기 때문에 이론적 절대 0도의 출현이 방지되는데, 이는 별 사이의 공간이 절대 0도의 기온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직되어 있는 모든 공간 전역에 걸쳐서, 조직되고 있는 전자 에너지 뿐 아니라, 인력에 반응하는 에너지 흐름, 동력 회로, 극자 활동이 있다. 실용적으로 말하면, 공간은 비어 있지 않다. 유란시아의 대기조차도, 약 5천 킬로미터 거리까지 갈수록 더욱 엷어지고, 거기서 대기는 비로소 우주의 이 구역에서 평균 공간 물질로 희미하게 된다. 네바돈에서 알려진 바 가장 빈 공간에 가까운 곳은 1 입방 인치에[3] [1679] 약 100개의 극자를 산출할 것이다―이것은 하나의 전자와 대등하다. 그렇게 물질이 희박한 것은 실지로 빈 공간으로 간주된다.
42:4.7 (473.5) 에너지와 물질이 진화하는 영역에서, 온도―더위와 추위―는 오직 인력 다음으로 지배한다. 극자들은 극단의 온도에 겸손히 복종한다. 낮은 온도는 어떤 형태의 전자의 구성과 원자의 조립을 유리하게 만들며, 한편 높은 온도는 온갖 종류의 원자 분해와 물질의 붕괴를 용이하게 만든다.
42:4.8 (473.6) 태양의 어떤 내부 상태에서 열과 압력을 받을 때, 가장 원시적 물질 결합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부서질 수 있다. 이처럼 열은 대체로 인력의 안정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알려진 어떤 태양열이나 압력도 극자를 유력(有力) 에너지로 바꿀 수 없다.
42:4.9 (473.7) 타오르는 태양은 물질을 여러 형태의 에너지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어두운 세계들과 모든 바깥 공간은, 이 에너지를 영역의 물질로 전환시키는 점까지 전자와 극자의 활동을 느리게 만들 수 있다. 비슷한 성질을 가진 어떤 전자 결합, 그리고 핵 물질의 많은 기본 결합은 열린 공간에서 극도로 낮은 온도에서 형성되고, 나중에 물질화하는 에너지를 가진 더 큰 성장물과 결합해서 덩어리가 커진다.
42:4.10 (473.8) 우리는 결코 그치지 않는, 이 에너지와 물질의 변화에 두루, 인력 압력의 영향 뿐 아니라, 어떤 온도ㆍ속도ㆍ회전의 조건 하에서 극자 에너지의 반인력(反引力) 행위를 고려해야 한다. 온도, 에너지의 흐름, 거리, 그리고 살아 있는 물력 조직자 및 동력 지도자들의 계심도 또한 에너지와 물질이 변형하는 모든 현상에 영향을 미친다.
42:4.11 (474.1) 물질에 있는 질량의 증가는 에너지의 증가를 빛 속도의 제곱으로 나눈 것과 같다. 동태적 의미에서, 정지 상태에 있는 물질이 성취할 수 있는 작업은 파라다이스로부터 그 부분들을 함께 가져오는 데 쓰인 에너지에서, 이동 중에 극복한 물력의 저항, 그리고 물질의 부분들이 서로 행사하는 당기는 힘을 뺀 것이다.
42:4.12 (474.2) 납의 두 가지 원자 무게가 전자(電子) 이전 형태의 물질이 존재함을 가리킨다. 최초에 형성된 납은, 라디움 방사 방법으로 유라니움을 분열시킴으로 생산된 것보다 조금 더 무겁다. 이 원자 무게의 차이는 원자의 분열에서 생기는 실제 에너지 손실을 대표한다.
42:4.13 (474.3) 유란시아 과학자들이 콴툼이라고 부른 정확한 양으로만 에너지가 흡수되거나 방출될 수 있다는 사실이 물질의 상대적 총체성을 보장한다. 물질 영역에서 이 현명한 조치는 우주들을 계속하는 사업으로서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42:4.14 (474.4) 전자나 다른 것의 위치가 바뀔 때 흡수되거나 방출되는 에너지 양은 언제나 1 “콴툼”이거나 그 몇 배이다. 그러나 그러한 에너지 단위의 진동이나 파도 같은 행동은 관계된 물질 구조의 규격에 따라서 전적으로 결정된다. 그러한 파도 같은 에너지 물결은 그렇게 행동하는 극자ㆍ전자ㆍ원자 또는 다른 단위들의 지름의 860배가 된다. 콴툼 행위의 파동 역학(力學)을 관찰하는 데 따르는 끝없는 혼란은 에너지의 파장이 중복되는 데 기인한다. 파장 봉우리 두 개가 합쳐서 두 배로 높은 하나의 절정을 만들 수 있고, 반면에 한 봉우리와 한 골짜기는 합쳐서, 서로 상쇄할 수 있다.
42:5.1 (474.5) 오르본톤 초우주에는 100 옥타브의 파동 에너지가 있다. 에너지가 나타나는 이 100 집단 가운데, 64 집단은 유란시아에서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알려져 있다. 태양 빛은 초우주의 눈금에서 4 옥타브를 구성하고, 가시(可視) 광선은 단일 옥타브를 포함하며, 이 시리즈에서 46번이다. 자외선 집단이 다음에 오고, 그 위로 10 옥타브는 X선이고, 라디움의 감마선이 뒤따른다. 태양의 가시 광선 위에 32 옥타브는 바깥 공간의 에너지 선이며, 이것들은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관계된 미세한 물질 입자들과 아주 빈번히 섞인다. 눈에 보이는 태양 빛 밑으로 다음에 적외선이 나타나고, 30 옥타브 밑에는 라디오 송신 집단이 있다.
42:5.2 (474.6) 물결 같은 에너지 명시는―20 세기 유란시아 과학의 깨우친 관점에서 볼 때―다음 10 집단으로 분류할 수 있다.
42:5.3 (474.7) 1. 극자 이하 선―극자들이 분명한 형태를 가지기 시작할 때, 경계지에서 생기는 극자들의 회전. 이것은 물결 같은 현상이 탐지되고 측정될 수 있는, 태동 에너지의 첫 단계이다.
42:5.4 (474.8) 2. 극자선. 미세한 극자 구체 속으로 에너지가 집합하는 것은 공간 내용에서 식별하고 측정할 수 있는 진동을 일으킨다. 물리학자들이 극자를 발견하기 오래 전에,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은 유란시아에 소나기처럼 이 선들이 쏟아지는 현상을 탐지할 것이다. 짧고 강력한 이 선들은, 전자로 물질을 조직하는 점까지 극자가 늦추어지는 극자의 초기 활동을 대표한다. 극자들이 뭉쳐서 전자가 됨에 따라서, 그에 따라 에너지의 저축과 함께 응축이 일어난다.
42:5.5 (475.1) 3. 짧은 우주선. 이것은 모든 순전한 전자 진동 가운데 가장 짧은 것들이고, 이 형태의 물질의 원자 이전 단계를 대표한다. 이 선들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극도로 높거나 낮은 온도가 필요하다. 이 우주선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원자의 출생을 따르며, 다른 하나는 원자의 분열을 가리킨다. 이것들은 초우주의 가장 밀집한 평면, 곧 은하수로부터 아주 대량으로 방사되고, 그 평면은 또한 바깥 우주들의 밀도가 가장 높은 평면이다.
42:5.6 (475.2) 4. 전자 단계. 이 단계의 에너지는 일곱 초우주에서 모든 물질화의 기초이다. 전자들이 높은 에너지 수준에서 궤도를 회전하다가 낮은 수준으로 건너갈 때, 콴툼이 언제나 방출된다. 전자들의 궤도 변경은 아주 분명하고 한결같은, 측정할 수 있는 빛 에너지 입자(粒子)를 배출하거나 흡수한다. 한편 개별 전자는 충돌이 있을 때 언제나 빛 에너지 입자를 내놓는다. 물결 같은 에너지 명시도, 전자 단계에서 양성(陽性) 물체와 기타 구성원의 행동에 뒤따라 일어난다.
42:5.7 (475.3) 5. 감마선―자연스러운 원자 물질이 분열됨을 가리키는 방사물. 이 형태의 전자 활동에서 가장 좋은 예는 라디움 붕괴와 관련된 현상이다.
42:5.8 (475.4) 6. X선 집단. 전자가 감속되는 다음 단계는, 인위적으로 발생한 X선과 함께, 여러 형태의 태양 X선을 산출한다. 전하(電荷)는 전자장(電子場)을 만들고, 운동은 전류를 일으키며, 전류는 자장(磁場)을 일으킨다. 하나의 전자가 갑자기 멈출 때, 그에 따라 생기는 전자기(電磁氣)의 동요는 X선을 생산한다. X선은 바로 그 소동이다. 태양의 X선은 인체의 내부를 탐구하기 위하여 기계로 발생시킨 것보다 조금 길다는 점 외에, 두 가지가 동일하다.
42:5.9 (475.5) 7. 자외선, 곧 태양의 화학선과 여러 가지 기계적 산물.
42:5.10 (475.6) 8. 흰 빛―태양의 가시(可視) 광선 전체.
42:5.13 (475.9) 이 10 단계의 모든 파도 같은 에너지 활동 중에서, 사람의 눈은 꼭 한 옥타브, 곧 보통 태양 광선의 빛 전체에만 반응한다.
42:5.14 (475.10) 이른바 에테르라 하는 것은 단지 공간에서 생기는 한 집단의 물력과 에너지 활동을 가리키는 집합적 이름이다. 극자, 전자, 기타 에너지 집합체들은 한결같은 물질 입자이며, 공간을 통하여 이동하면서 참으로 직선으로 진행한다. 빛, 그리고 식별이 가능한 모든 다른 형태의 에너지 명시는 분명한 에너지 입자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것은 인력과 기타 중간에 개재하는 물력에 수정되는 것을 제외하면, 똑바로 진행한다. 어떤 관찰 조건 밑에서, 이러한 에너지 입자 행렬이 파장 현상으로 보이는 것은 모든 공간에 있는 차별되지 않은 물력의 담요, 곧 가상적 에테르의 저항, 그리고 관계된 물질 집합의 인력(引力) 사이의 긴장 때문이다. 물질 입자 사이의 공간은, 에너지 빛줄기의 시초 속도와 함께, 여러 형태 에너지 물질의 물결치는 모습을 만든다.
42:5.15 (476.1) 마치 배가 물을 지나가는 것이 폭과 간격이 다른 물결을 일으키는 것처럼, 공간 내용을 흥분시키는 것은 급속히 움직이는 물질 입자들이 통과하는 데 대하여 물결 같은 반응을 낳는다.
42:5.16 (476.2) 원초 물력의 행위는 여러 면에서 너희가 가정(假定)한 에테르와 비슷한 현상을 일으킨다. 공간은 비어 있지 않으며, 모든 공간에 있는 구체들은 소용돌이치고, 펼쳐진 공간 에너지의 광대한 대양 속으로 뛰어든다. 한 원자의 공간 내용도 비어 있지 않다. 그런데도 아무런 에테르가 없고, 바로 이 가상한 에테르의 부재는 바로 사람이 사는 행성들이 태양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피하게 하고, 회전하는 전자가 핵 안으로 굴러 떨어지는 데 저항하게 만든다.
42:6.1 (476.3) 우주 물력이 공간에서 가진 전하(電荷)는 동질이고 차별화되지 않은 반면에, 생성된 에너지를 물질로 조립하는 것은 분명한 규격과 특정한 무게를―정밀한 인력 반응을―가진 자연수의[4] [1680] 질량 속으로 에너지가 집중되는 일이 뒤따른다.
42:6.2 (476.4) 지역 인력, 곧 직진 인력은 물질의 원자 조직이 나타남과 함께, 십분 작용한다. X선과 기타 비슷한 에너지로 인하여 활성화되었을 때, 원자 이전의 물질은 조금 인력에 반응한다. 그러나 자유롭고 매이지 않은, 전하 없는 전자 에너지 입자나 연합되지 않은 극자들에게는, 아무런 측량할 만한 직진 인력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다.
42:6.3 (476.5) 극자들은 오직 둥그런 파라다이스 인력의 힘에 반응하면서, 서로 끄는 힘으로 작용한다. 직진 인력에 반응하지 않으면서 극자들은 이처럼 보편적으로 공간에서 떠돌이 상태에 있다. 극자들은 얼마큼 반인력 행위가 생기는 점까지 회전 속도를 가속할 수 있다. 그러나 극자들은 물력 조직자나 동력 지휘자들의 도움이 없이, 개체가 사라지는 임계(臨界) 속도에 도달하여 유력(有力) 에너지 단계로 되돌아갈 수 없다. 사실로, 극자들은 식어서 죽어 가는 태양의 최종 분열에 참여할 때만, 물리적 존재 상태를 벗어난다.
42:6.4 (476.6) 아직 유란시아에서 알려지지 않은 극자는 전자로 조직되는 데 선행 조건인 회전 에너지에 도달하기 전에, 여러 단계의 물리적 활동을 통하여 늦춰진다. 극자에게는 우주 물력에 대한 공통된 저항, 반인력 잠재성을 가진 개체의 회전, 그리고 전자 안에서 서로 연합된 100개 극자의 위치, 이 세 종류의 운동이 있다.
42:6.5 (476.7) 전자의 구조 속에 서로 끄는 힘은 100개의 극자를 함께 묶어 둔다. 그리고 전형적 전자 안에는 결코 극자가 100개보다 많거나 적지 않다. 극자를 하나 이상 잃어버리는 것은 전형이 되는 전자의 신분을 파괴하고, 이렇게 10 가지 수정된 전자 형태 중의 하나를 낳는다.
42:6.6 (476.8) 전자 안에서, 극자들은 궤도를 그리거나 회로에서 빙빙 돌지 않지만, 그 축 회전 속도에 따라서 극자들은 퍼지거나 모이고, 이처럼 전자 규격의 차이를 결정한다. 바로 이 극자의 축(軸) 회전 속도는 또한 몇 종류의 전자 단위의 음성(陰性)이나 양성(陽性) 반응을 결정한다. 전자 물질의 분리와 분류는 전부, 에너지 물질의 음성 및 양성 물체를 전기적으로 차별하는 것과 함께, 구성 분자인 극자가 서로 결합하는 이러한 다양한 작용으로부터 생긴다.
42:6.7 (477.1) 각 원자는 지름이 0.25 나노미터를[5] [1681] 조금 넘고 한편 전자는 가장 작은 원자인 수소(水素)의 1/2000보다 조금 더 무겁다. 양성인 양성자(陽性子)는 원자핵의 특징이며, 음성인 전자보다 더 크지 않은데, 거의 2천 배나 더 무겁다.
42:6.8 (477.2) 한 전자(電子)의 덩어리가 2.8그람이 될 때까지 물질 덩어리가 커지고 그 크기가 비례해서 확대된다면, 그러한 전자의 부피는 지구의 부피만큼 크게 될 것이다. 양성자는―전자의 1800배만큼 무거운데―그 부피가 핀의 머리 크기만큼 커진다면, 비교해서, 핀의 머리는 태양 둘레에 지구 궤도의 지름과 같은 크기에 도달할 것이다.
42:7.1 (477.3) 모든 물질의 형태는 태양계의 체제를 좇는다. 에너지를 가진 모든 미세한 우주의 중심에는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비교적 고정된, 물질 존재의 핵심 부분이 있다. 이 중심 단위는 세 가지로 명시되는 가능성을 부여받는다. 에너지 단위들이 이 에너지 중심 둘레에, 끝없이 풍부하게, 그러나 변동하는 회로에서 빙빙 돌며, 이 단위들은 바로 너희의 태양계와 같은 어떤 별 집단의 태양을 회전하는 행성들과 가까스로 비교할 만하다.
42:7.2 (477.4) 태양계의 공간에서 행성들이 태양 둘레를 돌 때 가진 공간과 대체로 비슷한 상대적 공간을 가지고, 원자 안에서 전자들이 중앙의 양성자 둘레를 돈다. 실제 크기와 비교해서, 지구보다 안쪽에 있는 수성(水星)과 너희 태양 사이에 있는 것과 똑같은 상대적 거리가 원자핵과 안쪽 전자 회로 사이에 있다.
42:7.3 (477.5) 전자를 구성하는 극자들의 속도는 말할 것도 없고, 전자의 축 회전, 그리고 전자가 원자핵 둘레의 궤도를 도는 속도는 모두 사람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라디움의 양성(陽性) 입자들은 1초에 1만 6천 킬로미터의 속도로 공간으로 날아가 버리며, 반면에 음성 입자들은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에 이른다.
42:7.4 (477.6) 지역 우주는 십진법의 구조로 되어 있다. 2중인 우주에는 우주 에너지가 꼭 100 가지로 식별할 수 있도록 원자 물질화가 생기는데, 이것이 네바돈에서 최대한으로 가능한 물질 조직이다. 이 100 가지 형태의 물질은 정규 계열로 이루어져 있고, 거기에는 하나에서 100개의 전자가 중앙에 비교적 조밀한 핵을 돈다. 물질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 다양한 에너지의 질서 있고 믿을 만한 연합이다.
42:7.5 (477.7) 식별할 수 있는 100 가지 원소가 모든 세계의 표면에서 보이지는 않을 터이나, 이 원소들은 어딘가 있거나, 있어 왔거나, 아니면 생성되는 과정에 있다. 한 행성의 기원을 둘러싸는 조건과 후일의 진화는 100개 원자 형태 중에서 몇이나 관찰될 수 있는가 결정한다. 무거운 원자들은 많은 세계의 표면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유란시아에서도 알려진 무거운 원소들은, 라디움 행동이 보여주다시피, 산산조각이 나는 경향을 드러낸다.
42:7.6 (477.8) 원자의 안정성은 중심체에 전기 활동이 없는 중성자(中性子)의 수에 달려 있다. 화학 작용은 자유롭게 도는 전자들의 활동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42:7.7 (478.1) 오르본톤에서는 한 원자 체계 안에서 궤도를 도는 전자를 100개가 넘게 자연히 집결하는 것이 가능한 적이 없었다. 인위적으로 101개를 궤도의 장(場)에 들여보냈을 때, 그 결과로 전자들과 기타 해방된 에너지가 사납게 분산되는 것과 함께, 언제나 중앙의 양성자(陽性子)가 거의 한 순간에 분열되었다.
42:7.8 (478.2) 원자들은 궤도를 회전하는 전자를 하나에서 100개까지 포함할 수 있는 한편, 덩치 큰 원자들의 바깥 전자 10개만, 정확하고 분명한 궤도에서 손상되지 않고서 조밀하게 회전하면서, 뚜렷하고 분리된 물체로서 중앙의 핵 둘레를 돈다. 중심에서 가장 가까운 전자 30개는 따로 조직된 물체로서 관찰하거나 탐지하기 어렵다. 전자를 몇 개 품고 있는가에 상관 없이, 전자 행위를 전자와 핵의 거리와 관련짓는 바로 이 상대적 비율이 모든 원자에서 지배한다. 핵이 가까이 있을수록, 전자의 개성이 적어진다. 한 전자의 파도같은 에너지의 범위는 너무 넓어서 작은 원자 궤도 전체를 차지할 수도 있다. 특히 원자핵에서 가장 가까운 전자들에게 이것이 참말이다.
42:7.9 (478.3) 가장 안쪽 궤도에 있는 30개의 전자는 개성이 있지만, 그 에너지 체계들은 서로 섞이는 경향이 있고, 한 전자로부터 다른 전자로, 거의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뻗는다. 그 다음 30개의 전자는 제2 집단, 곧 에너지 지대(地帶)를 이루며, 개성을 더 가지고 있고, 자체에 속하는 에너지 체계를 더 철저하게 통제하는 물질 덩어리이다. 그 다음 30개의 전자, 곧 제3 에너지 지대는 더욱더 개별화되었고, 더 뚜렷하고 분명한 궤도에서 돈다. 마지막 10개의 전자는 가장 무거운 10개 원소에만 있는데, 독립된 위풍이 있고, 따라서 어머니 핵의 손아귀로부터 얼마큼 자유롭게 도망칠 수 있다. 온도와 압력이 조금만 변해도 넷째이자 가장 바깥에 있는 이 전자 집단의 구성원은, 유라니움과 그 친척 원소들의 자발적 붕괴에서 드러나다시피, 중앙 핵의 손아귀로부터 달아날 것이다.
42:7.10 (478.4) 궤도를 도는 전자를 하나에서 27개까지 포함하는 처음 27개의 원자는, 나머지보다 더 이해하기 쉽다. 28개가 넘으면, 우리는 점점 더 무제한 절대자의 가정된 계심으로부터 생기는 예측 불가능성과 마주치게 된다. 그러나 이 전자의 예측 불가능성에서 더러는 극자의 다른 축 회전 속도, 그리고 설명하지 못하는, 극자들의 “떼짓는” 경향 때문이다. 다른 영향―물리적, 전기ㆍ자력(磁力)ㆍ인력의 영향―은 또한 전자 행동의 변화를 낳도록 작용한다. 따라서 사람과 원자는 예측을 불허하는 성질이 비슷하다. 통계학자들은 많은 원자나 사람을 다스리는 법칙을 외칠지 모르지만, 하나의 개별 원자나 사람의 경우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42:8.1 (478.5) 인력은 조그마한 원자 에너지 체계를 함께 붙들어 놓는 데 관련된 몇 가지 요인 중에 하나이며, 한편 이 기본 물리적 단위들 안에, 그리고 그 사이에 또한 강력한 알려지지 않은 에너지가 있다. 이 에너지는 원자의 기본 구성과 궁극의 행동의 비밀이요, 유란시아에서 아직도 발견해야 할 물력이다. 이 보편적 영향은 이 조그마한 에너지 조직 안에 포함된 모든 공간에 스며든다.
42:8.2 (478.6) 한 원자 안에서 전자 사이의 공간은 비어 있지 않다. 한 원자에 두루, 이 전자 사이의 공간은 전자 속도 및 극자의 회전과 완전히 동시화된, 파도 같은 명시로 인하여 활성화된다. 이 물력은 너희가 깨달은 법칙, 양성과 음성이 끌어당기는 법칙에 전적으로 지배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 행동은 때때로 예측할 수 없다. 이름을 모르는 이 영향은 무제한 절대자의 공간 물력에 대한 반응으로 보인다.
42:8.3 (479.1) 원자핵 안에서 전하를 가진 양성자(陽性子)와 전하가 없는 중성자(中性子)는 중간자의 교환 작용으로 인하여 함께 붙들려 있는데, 이 중간자는 전자의 180배나 무거운 물질 입자이다. 이런 주선이 없었다면, 양성자가 지니는 전하는 원자핵을 붕괴할 것이다.
42:8.4 (479.2) 원자들이 구성된 바와 같이, 전기도 인력의 힘도 핵을 붙잡아 놓을 수 없다. 핵의 온전함은 중간자의 서로 밀착하는 기능으로 유지되는데, 이것은 우세한 물력과 질량의 힘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서 양성자와 중성자들이 항상 자리를 바꾸게 만드는 기능으로 말미암아, 전하를 가진 입자와 전하를 가지지 않은 입자들을 함께 붙잡아 놓을 수 있다. 중간자는 핵 입자의 전하가 양성자와 중성자 사이에 끊임없이 이리저리 던져지게 만든다. 1초의 극소(極小) 부분의 시점에서, 한 주어진 핵 입자는 전하를 띤 양성자이고, 다음에는 전하가 없는 중성자가 된다. 그리고 에너지 상태가 이렇게 번갈아 바뀌는 것이 너무 믿을 수 없이 빨라서, 전하는 하나의 분열시키는 영향력으로서 작용할 기회를 모두 빼앗긴다. 그래서 중간자는 원자의 핵 안정에 크게 이바지하는, 하나의 “에너지 보유자”인 입자로서 활동한다.
42:8.5 (479.3) 중간자(中間子)의 존재와 기능은 원자의 또 다른 수수께끼를 설명한다. 원자들이 방사성을 띠고 활동할 때, 원자들은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에너지를 발산한다. 이 과잉 방사는 중간자인 “에너지 보유자”가 부서져서 생기고, 이로서 중간자는 단순히 전자가 된다. 중간자가 부서질 때 또한 전하가 없는 어떤 작은 입자들의 방출이 따른다.
42:8.6 (479.4) 중간자는 원자핵의 어떤 응집 성질을 설명하지만, 중간자는 양성자끼리 밀착하는 것이나, 중성자끼리 붙어 있는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원자의 밀착하는 총체성의 힘, 역설적(逆說的)이고 강한 힘은 유란시아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형태의 에너지이다.
42:8.7 (479.5) 이 중간자는 너희 행성에 끊임없이 충돌하는 우주선 안에서 풍부하게 발견된다.
42:9.1 (479.6) 종교만 홀로 독단이 아니며, 자연 과학도[6] [1682] 똑같이 독단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다. 어느 유명한 종교 선생이 사람의 머리에 구멍이 일곱이기 때문에, 7이라는 수가 자연에는 근본이라고 판단하였는데, 그가 화학에 대하여 더 알았다면, 그는 물리 세계의 참 현상에 근거를 두고 그러한 믿음을 주장했을지 모른다. 에너지의 십진법 구성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데도, 시공의 모든 물리적 우주에 선(先)물질의 일곱 가지 전자 조직의 현실을 늘 생각나게 해 주는 것이 있다.
42:9.2 (479.7) 7이라는 수는 중앙 우주에게, 그리고 특징을 본래부터 전달하는 영적 체계에 기본적이다. 그러나 10이라는 수, 십진법은 에너지, 물질, 물질 창조에 선천적이다. 그런데도 원자 세계는 어떤 주기적 특징을 나타내며, 이 특징은 일곱씩 무리를 지어 다시 일어난다―이것은 바로 이 물질 세계가 지닌, 그 아득한 영적 기원을 가리키는 출생 표시이다.
42:9.3 (480.1) 창조적 구조에서 보이는 이 일곱 가지 지속성은, 기본 원소들이 원자 무게의 순서대로 배열되었을 때, 분리된 일곱 주기로[7] [1683] 비슷한 물리ㆍ화학적 성질이 다시 일어나는 것으로서 화학 분야에서 나타난다. 유란시아의 화학 요소들이 이렇게 한 줄로 섰을 때, 어느 일정한 품질이나 성질은 일곱 째마다 집단으로 다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일곱째마다 생기는 주기적 변화는 화학표 전체를 통해서, 줄어드는 경향을 가지고 변화되면서 다시 나타나며, 초기에, 곧 가벼운 축에 속하는 원자 집합에서 가장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어느 한 원소에서 시작하여 어떤 한 성질을 주목한 뒤에, 그러한 성질은 연속으로 여섯 원소까지 변할 것이다. 그러나 여덟째에 이르러서, 그 성질은 다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서, 화학적으로 활성적인 여덟째 원소는 첫째를 닮고, 아홉째는 둘째를 닮고, 이렇게 이어진다. 물리 세계의 그러한 사실은 조상인 에너지의 일곱 가지 구조를 뚜렷이 가리키며, 시공 창조의 일곱 가지 다양성이 근본 현실임을 가리킨다. 사람은 또한 자연 분광에는 일곱 가지 빛깔이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42:9.4 (480.2) 그러나 자연 과학의 가정(假定)이 모두 옳지는 않다. 예를 들면, 가상(假想)된 에테르는 사람이 모르면서 우주 현상을 조화시키려는 영리한 시도를 나타낸다. 우주에 관한 철학은 이른바 과학에서 말하는 관찰에 근거를 둘 수 없다. 만일 애벌레가 나비로 발달하는 그 변모를 볼 수 없다면, 과학자는 그러한 가능성을 부인하고 싶어 할 것이다.
42:9.5 (480.3) 생물학적 탄력성과 연결되어, 자연이 물리적으로 안정된 것은 오로지 세상을 지은 으뜸 건축가들의 거의 무한한 지혜 때문이다. 초월 지혜보다 못한 어떤 것도 결코 동시에 그처럼 안정되고 그처럼 효과적 신축성을 가진 물질 단위들을 설계할 수 없다.
42:10.1 (480.4) 절대적 파라다이스 일력(一力)으로부터 절대적 공간 잠재력에 이르기까지 상대적 우주 실체의 끝없는 범위는 첫째 근원 중심의 비영적 실체의 관계에서 어떤 진화가 생기는 것을 암시한다―이 실체들은 공간 잠재력에 감추어져 있고, 일력에서 드러나며, 사이에 개재하는 여러 우주 수준에서 임시로 노출된다. 우주들의 아버지 안에서 연결되는 에너지의 이 영원한 주기는 절대적이다. 절대적이니까, 사실이나 가치 면에서 팽창할 수 없다. 그런데도 최초의 아버지는 지금도―언제나 그랬던 것처럼―시공 의미, 그리고 시공을 초월한 의미을 가진, 늘 확장하는 무대를 스스로 실현하고 계시니, 이것은 변하는 관계의 무대이며, 그 무대에서 살아 있고 성격을 가진 지성의 체험적 노력을 통해서, 에너지 및 물질은 살아 있는 신다운 영의 전반적 통제에 점진적으로 지배된다.
42:10.2 (480.5) 우주의 비영적 에너지는 여러 수준에서 살아 있는 체계, 창조자가 아닌 지성들 속에서 다시 관련되며, 이들 가운데 더러는 다음과 같이 묘사할 수 있다:
42:10.3 (480.6) 1. 보조 영 이전의 지성. 이 수준의 지성은 체험하지 않으며,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물리 통제사들의 보살핌을 받는다. 이것은 기계적 지성이며, 가장 원시 형태의 물질 생명이 가진, 가르칠 수 없는 지능이다. 그러나 가르칠 수 없는 지성은 원시의 행성 생명 외에도 많은 수준에서 작용한다.
42:10.4 (481.1) 2. 보조 영 지성. 이것은 가르칠 수 있는 (기계가 아닌) 수준의 물질 지성 속에서 일곱 보조 지성 영을 통해서 작용하는,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이 베푸는 봉사이다. 이 수준에서 물질 지성은, 처음 다섯 보조자 안에서 인간 이하의 (동물) 지능으로서, 일곱 보조자 안에서 사람의 (도덕적) 지능으로서, 마지막 두 보조자 안에서 초인간 (중도자) 지능으로서, 체험을 겪고 있다.
42:10.5 (481.2) 3. 진화하는 상물질 지성―올라 가는 지역 우주 생애에서 진화하는 인격자의 확대되는 의식(意識). 이것은 창조 아들과 관련하여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이 수여한 것이다. 이 지성 수준은 상물질 종류의 생명을 담은 몸이 조직되어 있음을 뜻하며, 그 몸은 지역 우주의 상물질 동력 감독들이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을 통합한 것이다. 상물질 지성은 570 수준의 상물질 생명에 대하여 다르게 작용하고, 더 높은 달성 수준에서는 우주 지성과 관계하는 능력이 커짐을 드러낸다. 이것은 필사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이지만, 또한 우주 아들과 우주 영은 지역 창조에서 상물질이 아닌 아이들에게 상물질 아닌 서열의 지성을 수여한다.
42:10.6 (481.3) 우주 지성. 이것은 일곱 가지로 다양화된, 시공의 지성이며, 이 중에서 한 단계를 일곱 으뜸 영 각자가 일곱 초우주 중 한 곳에 베푼다. 우주 지성은 모든 유한한 지성 수준을 포함하고, 체험으로 최상 지성의 진화하는 신(神) 수준, 그리고 초월적으로 절대 지성―합동 행위자의 직통 회로―의 실존 수준과 조정한다.
42:10.7 (481.4) 지성은 파라다이스에서 절대 지성이요, 하보나에서 초한(超限) 지성이며, 오르본톤에서 유한 지성이다. 지성은 언제나 달라진 여러 에너지 체계에 생생한 봉사가 베풀어지고 작용함을 뜻하며, 이것은 어떤 수준이나 종류의 지성의 경우도 참말이다. 그러나 우주 지성을 넘어서, 지성이 비영적 에너지와 무슨 관계를 가지는가 상상하기가 더욱 어렵게 된다. 하보나 지성은 절대 이하이지만 진화를 초월하는 지성이다. 실존적이고 체험적 지성이니까, 너희에게 밝혀진 어느 다른 개념보다도 초한 지성에 더 가깝다. 파라다이스 지성은 인간이 이해하는 한계를 뛰어넘으며, 실존적이고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는 지성이다. 그런데도 이 온갖 수준의 지성은 합동 행위자가 우주에 계심으로―파라다이스에 계신, 지성의 하나님이 지성으로 장악하는 힘으로―인하여 무력하게 된다.
42:11.1 (481.5) 지성을 평가하고 인식할 때, 우주는 기계도 요술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주는 지성이 창조한 것이요, 법칙의 기계적 작용이다. 그러나 실지로 적용할 때 자연 법칙은 물리적인 것과 영적인 것, 이 두 가지 영역으로 보이는 것 안에서 작용하며, 실제로 이 둘은 하나이다. 첫째 근원 중심은 모든 물질화된 것의 1차 원인이요, 동시에 모든 영의 처음이자 마지막 아버지이다. 파라다이스 아버지는 하보나 바깥의 우주에서는 오로지 순수 에너지와 순수 영으로서―생각 조절자 및 기타 비슷한 분신으로서―몸소 나타난다.
42:11.2 (481.6) 기계적 작용은 창조 전체를 절대로 지배하지는 않는다. 온 우주를 전적으로 지성이 계획하고, 지성이 만들고, 지성이 관리한다. 그러나 온 우주에서 신이 만든 기계적 작용이 온통 너무 완전해서, 사람의 유한한 지성이 쓰는 과학적 방법은 무한한 지성이 지배하는 것을 낌새조차 눈치챌 수 없다. 우주를 창조하고 통제하고 유지(維持)하는 이 지성은 물질 지성도 아니요, 생물의 지성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지성은 신의 실체인 창조자 수준에서, 그리고 거기서부터 활동하는 영 지성이다.
42:11.3 (482.1) 우주의 기계적 작용에 있는 지성을 알아보고 발견하는 능력은 그러한 관찰하는 과제에 종사하여 조사(調査)하는 사람의 능력ㆍ규모ㆍ자격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시공의 에너지로부터 빚어진 시공의 지성들은 시간과 공간의 작용에 지배된다.
42:11.4 (482.2) 운동과 우주의 인력은 온 우주에서 생기는 비성격 시공 작용의 두 얼굴이다. 영ㆍ지성ㆍ물질이 인력에 반응하는 수준은 아주 시간과 상관이 없지만, 오직 참 영 수준의 실체만 공간에 의존하지 않는다 (비공간적이다). 우주의 상급 지성 수준―영 지성 수준―도 비공간적일지 모르지만, 사람의 지성과 같은 물질 수준의 지성은 우주 인력의 상호 작용에 민감하고, 오직 이 반응을 영 신분이 될수록 비례해서 잃어버린다. 영 실체의 수준은 그 영 알맹이로 인식되고, 시공에서 영적 성향은 직진 인력 반응에 반비례되는 것으로 측정된다.
42:11.5 (482.3) 직진 인력에 대한 반응은 비영(非靈) 에너지의 양을 재는 척도이다. 모든 물질은―조립된 에너지는―운동과 지성이 물질에 작용할 때를 제외하고, 이 인력에 지배된다. 마치 원자 안의 응집하는 물력이 소우주(小宇宙)의 단거리 물력인 것과 얼마큼 비슷하게, 직진 인력은 큰 우주의 단거리 응집 물력이다. 이른바 물질 속에 담긴, 물질화된 물리적 에너지는, 직진 인력 반응에 영향을 주지 않고서 공간을 통과할 수 없다. 그러한 인력에 대한 반응은 질량에 비례하여 커지지만, 중간에 개재하는 공간이 이를 너무 수정하므로 그 최종 결과는, 거리의 제곱의 역수(逆數)로 표현한 것을 대충 어림한 값에 지나지 않는다. 공간은 궁극에 직진 인력을 이겨내는데, 이는 그 안에 수많은 초물질 물력의 반인력 영향이 있기 때문이고, 이것은 인력의 행위와 그에 대한 모든 반응을 중화하도록 작용한다.
42:11.6 (482.4) 극도로 복잡하고 상당히 자동으로 보이는 우주의 기계적 작용은, 그 작용 자체의 성질과 능력을 이해하는 우주 수준보다 아주 밑에 있는 어떤 지적 존재도 깨닫지 못하도록, 독창적이거나 창조적인 깃드는 지성의 계심을 반드시 감추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하등 생물에게는 우주에서 높은 기계적 작용이 생각 없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결론에 유일하게 가능한 예외는 놀라운 현상, 스스로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우주에 있는 지성 작용임을 의미할 것이다―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체험하는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이다.
42:11.7 (482.5) 지성이 우주를 조정하니까, 경직된 기계적 작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의 자체 유지와 관련된, 점진적 진화 현상은 보편적이다. 자발성이 무한할 때, 우주의 진화 능력은 소모될 수 없다. 오로지 목적이 있는 지배하는 지성이, 조화된 통일을 향하여 진보를 이룩할 수 있고, 이것은 늘 더욱 복잡해지는 관계 위에 점점 더 체험으로 통합한 것을 첨가한 것이다.
42:11.8 (482.6) 어느 우주 현상에 관계하는 우주 지성이 높을수록, 하등 지성은 이를 발견하기가 더욱 어렵다. 우주의 기계적 작용을 만들어 낸 지성은 창조적 영 지성(아니 무한자의 생각)이니까, 모든 지성 중에도 가장 낮은 인간 지성은 물론, 낮은 수준의 우주 지성에게 한 번도 들키거나 식별될 수 없다. 진화하는 동물 지성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혼자서 저절로, 선천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42:12.1 (483.1) 기계적 작용이 진화하는 것은 창조적 지성이 숨어 있고 지배함을 의미하고 또한 가리킨다. 필사자의 지능이 자동 기계들을 상상하고 설계하고 창조하는 능력은, 행성에서 지배적 영향인 지성, 우수하고 창조적이고 의도하는 성질의 지성을 사람이 가졌음을 보여준다. 지성은 언제나 다음을 향해서 손을 뻗는다:
42:12.2 (483.2) 1. 물질적 기계 작용의 창조.
42:12.3 (483.3) 2. 감추어진 신비의 발견.
42:12.4 (483.4) 3. 멀리 있는 상황의 탐구.
42:12.5 (483.5) 4. 정신(精神) 체계들의 고안.
42:12.6 (483.6) 5. 지혜 목표에 도달하는 것.
42:12.9 (483.9) 지성은 언제나 창조성이 있다. 한 개별 동물, 필사자, 상물질자, 영 승천자, 또는 최후를 달성한 자는 언제나 그 살아 있는 생물 신분에 알맞고 쓸모 있는 몸을 만들 능력이 있다. 그러나 한 성격자가 있는 현상이나 한 신분의 원본은, 그것만으로 물리적, 지적 또는 영적 에너지의 표현이 아니다. 성격 형태는 살아 있는 존재가 갖춘 형태의 모습이다. 그 형태는 에너지가 배열되었음을 의미하고, 이것에 생명과 운동을 더한 것이 생물 존재의 기계적 작용이다.
42:12.10 (483.10) 영 존재들조차 형태가 있고, 이 영 형태(원본)는 실재한다. 가장 높은 부류의 영 성격자조차 형태를―유란시아 필사자의 몸과 어떤 의미에서도 비슷한 성격 위풍을―가지고 있다. 일곱 초우주에서 마주치는 거의 모든 존재가 형태를 소유한다. 그러나 이 일반 법칙에 몇 가지 예외가 있다. 생각 조절자는 그 필사 동료의 살아남는 혼과 융합할 때까지 형태가 없는 듯하다. 외톨 사자, 영감 받은 삼위일체 영, 무한한 영의 개인 보조자, 인력 사자, 초월 기록자, 그리고 어떤 다른 자들도, 알아볼 수 있는 형태가 없다. 그러나 이들은 예외인 소수(小數)의 전형이다. 대다수는 진정한 성격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형태는 개성의 특징이 있고, 알아볼 수 있고, 개인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42:12.11 (483.11) 우주 지성과 연결되어 보조하는 지성 영들의 봉사는 진화 인간을 위하여 적당한 육체적 거처를 만들어낸다. 마찬가지로 상물질 지성은 모든 필사 생존자를 위하여 상물질 형태를 개별화한다. 필사자의 몸이 모든 사람에게 개인적이고 특징을 나타내는 것 같이, 상물질 형태도 상당히 개별적이며 자체를 다스리는 창조적 지성의 특징을 알맞게 나타낸다. 어떤 두 사람의 몸이 다른 것처럼 어떤 두 상물질 형태도 같지 않다. 상물질 동력 감독들은 동질의 상물질계 물질을 후원하고, 시중드는 세라핌들은 이를 마련해 주고, 이것을 가지고 상물질 생명은 비로소 일할 수 있다. 상물질 생명 뒤에, 영 형태가 꼭 마찬가지로 다채롭고, 성격이 있고, 그들 각자의 영 지성에 깃드는 자의 특징을 나타낸다는 것을 너희는 발견할 것이다.
42:12.12 (483.12) 물질 세계에서 너희는 몸이 영(靈)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영이 육체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물질인 눈은 참으로 영에게서 태어난 혼이 내다 보는 창문이다. 영은 설계자요, 지성은 짓는 자요, 육체는 물질로 된 건물이다.
42:12.13 (484.1) 물리적 에너지, 영적 에너지, 지성 에너지는, 그 자체로 그 순전한 상태에서, 현상이 생기는 우주에 실재하는 물건으로서 충분히 서로 작용하지 않는다. 이 세 가지 에너지는 파라다이스에서 나란히 있고, 하보나에서 조정되며, 한편 활동이 유한한 우주 수준에서 물질ㆍ지성ㆍ영이 지배하는 온갖 영역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틀림없다. 시공의 비인격 상황에서는 물리적 에너지가 우세해 보인다. 그러나 또한 영 지성 활동이 신의 목적과 최상의 행동에 가까이 갈수록, 영 단계가 더욱 지배하게 되고, 궁극 수준에서 영 지성의 지배는 거의 완벽할 수도 있다. 절대 수준에서는 영이 확실히 지배한다. 거기서부터 계속, 시간과 공간의 영역을 통해서 바깥으로, 신다운 영 실체가 계신 곳에는 어디나, 진짜 영 지성이 작용할 때는 언제나, 반드시 그 영 실체의 물질 사본 (寫本), 곧 물리적 사본이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다.
42:12.14 (484.2) 영은 창조하는 실체요, 그 물리적 사본은 영 실체가 시공에 반영된 것이요, 곧 영 지성의 창조 행위에 대한 물리적 반응이다.
42:12.15 (484.3) 지성은 보편적으로 물질을 지배하고, 다음에 마찬가지로 지성은 영의 궁극적 전반 통제에 민감하다. 그리고 필사 인간의 경우에, 오직 영의 지휘를 자유롭게 따르는 그러한 지성이 최상위ㆍ궁극위ㆍ절대자, 즉 무한자의 영원한 영 세계에 불멸(不滅)의 아이로서, 필사자의 시공 존재를 거치고 살아남기를 바랄 수 있다.
43:0.1 (485.1) 유란시아는 네바돈의 놀라시아덱에서, 사타니아의 606번으로 보통 언급되며, 이것은 사타니아 지역 체계에서 606번째로 사람이 사는 세계임을 뜻한다. 이 체계는 네바돈 지역 우주의 1백 별자리 중 하나인 놀라시아덱 별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별자리가 한 지역 우주의 1차 구분이니까, 그 통치자들은 사람이 사는 지역 체계의 세계들을 구원자별에 있는 지역 우주의 중앙 행정부, 그리고 거울 작용으로, 유버르사에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초우주 행정부와 연결한다.
43:0.2 (485.2) 너희 별자리의 정부는 771개의 건축된 구체 집단 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중에서 가장 중앙에 있고 큰 것은 에덴시아인데, 여기는 별자리 아버지, 놀라시아덱 최고자들의 행정부가 있는 자리이다. 에덴시아 자체는 대략 너희 세계의 1백배만큼 크다. 에덴시아를 둘러싸는 70 주요 구체는 유란시아의 약 10배 크기이고, 한편 이러한 각 세계를 도는 10 위성은 대략 유란시아 만한 크기이다. 이 771개의 건축된 구체는 다른 별자리의 건축 구체들과 크기가 아주 견줄 만하다.
43:0.3 (485.3) 에덴시아의 시간 계산과 거리 측정은 구원자별의 것과 같고, 우주 서울에 있는 구체들과 마찬가지로, 별자리 본부 세계들은 온갖 계급의 하늘 지성 존재를 충분히 공급받고 있다. 대체로, 이 성격자들은 지역 우주 행정부와 관련하여 서술된 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43:0.4 (485.4) 지역 우주 천사 중에서 셋째 계급인 감독 세라핌은 별자리 근무에 배치된다. 그들은 자기네 본부를 서울 구체에서 만들고, 둘러싼 여러 상물질 훈련 세계에 널리 봉사한다. 놀라시아덱에서 7백개의 작은 위성들과 함께, 70 주요 구체에는 일생자(一生者), 곧 별자리의 영구 시민이 산다. 여러 집단의 토착 생명이 이 모든 건축 세계를 충분히 관리하며, 그들 가운데 과반수가 밝혀지지 않지만, 유능한 영 일꾼과 아름다운 씨앗 일꾼을 포함한다. 상물질 훈련 체제에서 중간 지점이니까, 너희가 헤아릴까 하지만 별자리의 상물질 생명은 전형적이고 이상적이다.
43:1.1 (485.5) 에덴시아는 황홀한 산지(山地)가, 상물질 생명으로 장식되고 영적 영광으로 펼쳐지고 자연 물질로 된 넓은 고지(高地)가 풍부하지만, 유란시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험한 산맥은 없다. 수만의 빛나는 호수와 수천의 서로 이어진 냇물이 있지만, 큰 대양이나 급히 흐르는 강이 하나도 없다. 산지에만 지표에서 흐르는 이 냇물이 없다.
43:1.2 (486.1) 에덴시아 및 비슷한 여러 건축 세계에 있는 물은 진화 행성들의 물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한 구체들의 물 체계는 지표의 물과 지하수이고, 습기는 항상 돌고 있다. 이 여러 수로(水路)를 거쳐서 에덴시아를 한바퀴 돌 수 있다. 하지만 주요한 수송 경로는 항공 경로이다. 영 존재들은 자연히 구체의 표면 위에서 여행하며, 한편 상물질 및 물질 존재들은 대기를 지나가기 위하여 물질 수단과 반(半)물질 수단을 이용한다.
43:1.3 (486.2) 에덴시아 및 관련된 세계들은 참 공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러한 건축된 세계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흔한 세 가스의 혼합물이며, 유란시아 대기의 두 원소에, 상물질 생물이 숨쉬도록 적당한 상물질 가스를 더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공기가 물질이자 상물질이지만, 아무런 폭풍이나 폭풍우가 없다. 여름이나 겨울도 없다. 공기의 변동과 계절의 변화가 없는 것은 특별히 만들어진 이 여러 세계에서 야외 전체를 치장할 수 있게 만든다.
43:1.4 (486.3) 에덴시아의 산지들은 웅장한 자연의 모습을 가졌고, 산지의 사방에 널려 있는 끝없이 풍부한 생명이 그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다. 좀 동떨어진 몇 개의 구조를 제외하고, 이 여러 산지에는 생물의 손으로 지은 작품이 하나도 없다. 물질 장식과 상물질 장식은 거주 지역에만 국한되어 있다. 작은 고지들은 특별한 거처가 있는 자리이고, 생물학적 예술과 상물질 예술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43:1.5 (486.4) 일곱째 산지 지역의 꼭대기에 자리잡은 것은 에덴시아의 부활실이고, 이 안에서 수정된 2차 승천 계급의 하늘 가는 필사자들이 깨어난다. 인간을 다시 조립하는 이 방들은 멜기세덱의 감독을 받는다. 에덴시아의 첫째 영접 구체도 (구원자별 가까이 있는 멜기세덱 행성처럼) 특별 부활실들이 있고, 거기서 수정된 승천 계급의 필사자들이 다시 조립된다.
43:1.6 (486.5) 멜기세덱들은 또한 에덴시아에서 두 특별 학부를 유지한다. 하나는 비상 학교이고, 사타니아의 반란에서 생기는 문제들의 연구에 전념한다. 다른 하나는 수여 학교이며, 미가엘의 최종 수여가 놀라시아덱에 속한 한 세계에서 일어났다는 사실로부터 생기는 새로운 문제들의 통달에 전념한다. 이 수여 학부는 거의 4만 년 전, 유란시아가 미가엘이 자신을 최종으로 수여하는 세계로 선택되었다고 미가엘이 발표한 직후에 세워졌다.
43:1.7 (486.6) 에덴시아의 영접 지역인 유리 바다는 행정부 중심 가까이에 있고, 본부 원형 극장에 둘러싸여 있다. 별자리 사무를 맡은 70 부서를 위하여, 통치하는 중심들이 이 지역을 둘러싼다. 에덴시아의 반은 70개의 삼각형 구역으로 나눠지고, 그 테두리는 각자 구역의 본부 건물에서 만난다. 이 구체의 나머지는 하나의 광대한 자연 공원, 하나님의 동산이다.
43:1.8 (486.7) 네가 정기적으로 에덴시아를 방문하는 동안에, 그 행성 전체가 네가 훑어보도록 개방되어 있지만, 너는 시간의 대부분을 그 행정 삼각형에서 보낼 터이고, 그 삼각형의 번호는 네가 현재 거주하는 세계의 번호와 맞는다. 너는 관찰자로서 언제나 입법 집회에서 환영받을 것이다.
43:1.9 (486.8) 에덴시아에서 거주하는 하늘 가는 필사자에게 배치된 상물질 지역은, 35번째 삼각형의 중간 지대에 놓여 있고, 이것은 36번째 삼각형에 자리잡은 최후자 본부에 인접한다. 일생자의 일반 본부는, 상물질 시민이 거주하도록 지정된 구역과 바로 닿는 34번째 삼각형의 중앙 지역에서 거창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 배열로부터, 적어도 70개 대부문의 하늘 생명을 받기 위하여 시설이 마련되어 있고, 이 70개 삼각 지역은 각각 상물질 훈련을 담당하는 70개 주요 구체 가운데 어느 하나와 서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3:1.10 (487.1) 에덴시아의 유리 바다는 둘레가 약 160킬로미터, 깊이가 약 48킬로미터 되는 하나의 거대한 둥그런 수정(水晶)이다. 이 웅장한 수정은 구체의 바깥 지점으로부터 도착하는 모든 수송 세라핌과 기타 존재들을 받아들이는 들판으로서 쓰인다. 그러한 유리 바다는 수송 세라핌의 착륙을 대단히 용이하게 만든다.
43:1.11 (487.2) 이 서열의 수정 들판은 거의 모든 건축 세계에서 발견되고, 장식 가치를 빼놓고도 많은 목적에 쓰이는데, 모인 집단들에게 초우주의 반영을 묘사하는 데, 그리고 공간의 전류를 고치고, 들어오는 다른 물리적 에너지 흐름을 적응시키기 위하여 에너지를 변화시키는 기술에 한 요소로 쓰인다.
43:2.1 (487.3) 별자리는 한 지역 우주의 자치 단위이고, 각 별자리는 그 자체의 입법 행위에 따라서 관리된다. 네바돈 법정이 우주 사무를 판결할 때, 모든 내부의 문제는 관계된 별자리에서 통용되는 법대로 판결된다. 지역 체계의 행정가들이, 별자리에서 통과한 입법 조치와 함께, 구원자별의 이 사법 선포를 집행한다.
43:2.2 (487.4) 따라서 별자리는 입법 단위, 법을 세우는 단위로서 활동하고, 한편 지역 체계는 집행부, 집행하는 단위의 구실을 한다. 구원자별 정부는 사법을 담당하고 조정하는 최고의 권한이다.
43:2.3 (487.5) 최고의 사법(司法) 활동은 한 지역 우주의 중앙 행정에 맡겨지는데, 각 별자리 본부에는, 종속되지만 주요한 두 재판소, 멜기세덱 회의와 최고자의 법정이 있다.
43:2.4 (487.6) 모든 사법 문제는 멜기세덱 회의에서 먼저 검토된다. 이 계급에서, 진화하는 행성과 체계의 본부 세계들에서 어떤 필수 경험을 겪은, 12명이 증거를 검토하고 탄원을 소화하고, 잠정적 판결을 작성하는 권한을 받으며, 이 판결은 최고자, 곧 통치하는 별자리 아버지의 법정에 전달된다. 이 후자 법정의 필사자 부서는 일곱 판사로 이루어져 있고, 그들은 모두 하늘 가는 필사자이다. 우주에서 너희가 높이 올라갈수록, 너희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에게 너희가 판결을 받으리라는 것이 더욱 확실하다.
43:2.5 (487.7) 별자리의 입법 기관은 세 집단으로 나누어진다. 한 별자리의 입법 순서는 승천자로 구성된 하원(下院)에서 시작되는데, 한 최후자가 이것을 주관하며, 대표하는 필사자 1천 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체계는 이 심의 집회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회원 10명을 지명한다. 에덴시아에서 이 단체는 현재 시점에서 완전히 자리를 채우지 않았다.
43:2.6 (487.8) 중원(中院)의 입법자는 천사 무리와 그 동료들, 곧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의 다른 자손들로 구성된다. 이 집단은 1백명이며, 그러한 존재들이 별자리 안에서 활동하는 동안, 그들의 여러 가지 활동을 주관하는 감독 성격자들이 그들을 지명한다.
43:2.7 (488.1) 별자리 입법자 중에서 자문(諮問) 단체, 가장 높은 단체는 상원(上院)으로 ―신다운 아들들의 의회로―구성된다. 최고 아버지들이 이 집단을 선택하며, 그 수는 10명이다. 오로지 특별한 체험을 가진 아들들만 이 상원에서 일해도 좋다. 상원은 사실을 확인하고 시간을 절약하는 집단이고, 입법 집회의 두 하위 부서에게 효과적으로 쓰인다.
43:2.8 (488.2) 입법자들의 통합 회의는 별자리 심의 집회의 분리된 이 각 지부로부터 3명씩 뽑은 회원들로 이루어지며, 통치하는 후임 최고자가 이를 주관한다. 이 집단은 모든 법령의 최종 형태를 재가(裁可)하고 방송자들의 선포를 허가한다. 이 최고 위원회의 승인은 통과한 법을 그 영역의 법이 되게 하며, 그들의 행위는 최종이다. 에덴시아에서 선포된 법은 온 놀라시아덱의 기본법을 이룬다.
43:3.1 (488.3) 별자리의 통치자들은 지역 우주 아들 중에서 보론다덱 계급이다. 우주에서 현역 근무로 별자리의 통치자나 다른 자리에 임명될 때, 이 아들들은 최고자로 알려지는데, 이는 그들이 지역 우주에서 모든 계급의 하나님의 아들 가운데, 가장 멀리 앞을 내다보고 총명하게 충성심을 보일 뿐 아니라 가장 높은 행정 지혜를 몸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개인적 성실성과 집단의 충성심은 한 번도 의심받은 적이 없고, 보론다덱 아들이 불평을 품는 일은 네바돈에서 결코 일어난 적이 없다.
43:3.2 (488.4) 가브리엘이 적어도 보론다덱 아들 세 명을 네바돈의 각 별자리에 최고자로서 임명한다. 이 삼원조에서 주관하는 자는 별자리 아버지로, 그리고 두 동료는 선임 최고자와 후임 최고자로 알려져 있다. 별자리 아버지는 1만 표준년 (유란시아 시간으로 약 50,000년) 동안 군림하고, 그 전에 똑같은 시일 동안에 후임 동료로서, 그리고 선임 동료로서 근무했다.
43:3.3 (488.5) 시편(詩篇)의 저자는 별자리 아버지 세 분이 에덴시아를 다스리는 것을 알았고, 따라서 그들의 거처를 여럿으로 언급하였다: “한 강이 있으니, 그 강물은 하나님의 도시, 곧 최고자들의 거처들 중에서 가장 거룩한 자리를 기쁘게 하리라.”
43:3.4 (488.6) 오랜 세월에 걸쳐 유란시아에는 여러 우주 통치자에 관하여 큰 혼동이 있었다. 후일에 숱한 선생들이 흐릿하고 분명치 않은 부족 신들을 아버지 최고자와 혼동하였다. 그 뒤에도, 히브리인은 이 모든 하늘 통치자를 하나의 복합된 신으로 합쳐 버렸다. 어느 선생은 최고자들이 최상 통치자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는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최고자의 비밀한 곳에서 거하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에서 살리로다.” 유란시아의 기록에는 때때로 “최고자”라는 용어가 누구를 언급하는지 똑똑히 알기가 아주 어렵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 문제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최고자는 사람의 나라에서 다스리며, 뜻하는 대로 그 나라를 누구에게든지 주시니라.”
43:3.5 (488.7) 별자리 아버지들은 사람 사는 행성의 개인들에게 몰두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별자리의 입법부 및 법을 제정하는 활동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고, 사람 사는 세계들의 모든 필사 종족 및 민족 집단이 이 활동에 크게 관심을 가진다.
43:3.6 (489.1) 별자리 체제는 너희와 지역 우주 행정부 사이에 있지만, 개인으로서 평상시에, 너희는 별자리 정부에 거의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의 큰 관심은 보통, 지역 체계인 사타니아에 쏟아질 것이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유란시아가 별자리 통치자들과 밀접히 관련된 것은 루시퍼 반란으로 생긴 어떤 체계 및 행성의 조건 때문이다.
43:3.7 (489.2) 에덴시아 최고자들은 루시퍼 탈퇴가 있던 시절에 모반한 세계들로부터 행성 권한의 어떤 단계를 빼앗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이 권력을 행사해 왔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은 제멋대로인 이 세계들의 통제권을 맡는 것을 인가한 지 오래다. 의심할 여지 없이, 루시퍼가 사는 한, 그들은 이 떠맡은 사법권을 계속 행사할 것이다. 이 권한의 상당 부분은 충실한 체계에서 보통, 체계 군주에게 맡겨진다.
43:3.8 (489.3) 그러나 또 한 가지 면에서, 유란시아는 최고자들과 각별히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창조 아들인 미가엘이 최종 수여 임무로 왔을 때, 루시퍼의 후계자가 지역 체계에서 전권이 없었기 때문에, 놀라시아덱의 최고자들이 미가엘 수여에 관계된 모든 유란시아 사무를 직접 감독하였다.
43:4.1 (489.4) 가장 거룩한 집회의 산은 늘 충실한 이의 거처인데, 그는 에덴시아에서 활동하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대표이다.
43:4.2 (489.5) 이 늘 충실한 이는 파라다이스의 삼위일체 아들이며, 본부 세계가 창조된 뒤로, 임마누엘의 개인 대표로서 에덴시아에 내내 계셨다. 언제라도 늘 충실한 이는 별자리 아버지들의 바른 편에서 그들에게 조언하려고 서 있지만, 요청받지 않고는 결코 조언을 제공하지 않는다. 높은 파라다이스 아들들은 지역 우주의 임시 통치자들의 탄원을 받을 경우를 제쳐놓고, 그러한 영토의 사무 운영에 결코 끼어들지 않는다. 그러나 늘 하나된 이와 창조 아들의 관계는 모두, 늘 충실한 이와 별자리의 최고자들의 관계와 같다.
43:4.3 (489.6) 에덴시아의 늘 충실한 이의 거처는 우주 바깥의 통신 및 정보를 맡는 파라다이스 체계의 별자리 중심이다. 이 삼위일체 아들들은, 그들의 하보나 및 파라다이스 성격자들로 이루어진 참모진과 함께, 감독하는 늘 하나된 이와 연락해서, 모든 우주 전역에 걸쳐, 아니 하보나와 파라다이스와도, 그들의 계급과 직접, 항상 교통하고 있다.
43:4.4 (489.7) 가장 거룩한 산은 지극히 아름답고 설비가 놀랍게 갖추어져 있지만, 최고자들의 중앙 거처, 그리고 보론다덱 아들들의 거주 단위를 이루는 둘러싸는 70채의 구조물과 비교해 볼 때, 그 파라다이스 아들의 실제 거처는 수수하다. 이 시설은 순전히 주택이며, 별자리 사무를 처리하는 넓은 행정 본부 건물과 전혀 따로 되어 있다.
43:4.5 (489.8) 에덴시아에 있는 늘 충실한 이의 거처는 이 최고자들 주택의 북부에 자리잡고 있고, “파라다이스 집회의 산”으로 알려져 있다. 거룩하게 구별된 이 산지에서 하늘 가는 필사자들은 정기적으로 모여서, 완전한 10억의 하보나 세계들을 통해서, 그리고 계속하여, 말할 수 없이 즐거운 파라다이스까지 가는 여행, 진보하는 필사자의 길고도 흥미를 자아내는 여행에 관하여 이 파라다이스 아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 바로 집회의 산에서 열리는 이 특별 모임에서, 상물질 필사자는 중앙 우주에서 기원을 가지는 다양한 집단의 성격자들에 관하여 더 자세히 알게 된다.
43:4.6 (490.1) 한때 사타니아의 군주였던, 반역한 루시퍼는 확대된 관할권을 요구하는 주장을 발표할 때, 지역 우주의 정부 계획에서 상관 계급의 아들들을 모두 갈아치우려고 애썼다. “나는 내 보좌를 하나님의 아들들보다 위로 높이리라. 나는 북쪽에 있는 집회의 산에 앉으리라. 나는 최고자와 같이 되리라”하고 말하며 그는 가슴 속에서 뜻을 품었다.
43:4.7 (490.2) 체계 군주 1백명은 정기적으로, 별자리의 복지에 관하여 심의하는 에덴시아 비밀 회의에 온다. 사타니아 반란이 있은 뒤에, 예루셈의 대반역자들은 그들이 이전 경우에 했던 것과 똑같이 이 에덴시아 회의에 올라오곤 했다. 유란시아에서 미가엘의 수여가 있고 나서 그가 나중에 네바돈 전역에서 무제한 통치권을 쥐기까지, 이 방자한 태도를 막을 길이 도무지 없었다. 그날 이후로, 죄를 선동한 이 자들이 충성스러운 체계 군주들의 에덴시아 회의에 앉는 것이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43:4.8 (490.3) 옛 시절의 선생들이 이런 일을 알았다는 것은 이 기록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들이 최고자들 앞에 문안하러 왔고, 사탄도 와서 그들 가운데서 문안하였다.” 어떤 맥락으로 이 글이 어쩌다가 나타났는가에 상관 없이, 이것은 사실을 진술한 것이다.
43:4.9 (490.4) 그리스도가 승리한 뒤로, 온 놀라시아덱에서 죄와 반역자들을 깨끗이 없애고 있다. 미가엘이 육신을 입고 죽기 얼마 전에, 몰락한 루시퍼의 조수 사탄은 그러한 에덴시아 비밀 회의에 참석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대반역자들을 적대하는 감정이 굳어져 동정(同情)의 문이 거의 보편적으로 닫혀지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래서 사타니아에 있던 적들은 설 땅을 찾을 수 없었다. 악을 받아드릴 열린 문이 존재하지 않을 때, 죄를 품어 볼 기회가 전혀 없다. 온 에덴시아의 마음 문이 사탄을 대적하여 닫혔을 때, 그는 모인 체계 군주들에게 만장 일치로 거절당했고, 바로 이때 사람의 아들은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43:4.10 (490.5) 루시퍼 반란이 있은 뒤에, 늘 충실한 이의 거처 가까운 곳에 새 구조물이 마련되었다. 이 임시 건축물은 연락 최고자의 본부이며, 그는 죄와 반란에 대한 늘 계급의 정책과 태도에 관련된 모든 문제에서 별자리 정부에게 고문으로서, 파라다이스 아들과 긴밀한 접촉을 가지고 활동한다.
43:5.1 (490.6) 에덴시아에서 최고자들의 교체는 루시퍼 반란이 있을 당시에 중지되었다. 우리는 지금 당시에 근무하고 있었던 바로 그 통치자들을 가지고 있다. 루시퍼와 그 동료들이 마지막으로 처분되기까지, 이 통치자들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으리라 우리는 추측한다.
43:5.2 (490.7) 그러나 별자리의 현재 정부는 보론다덱 계급의 아들 12명을 포함하도록 확대되었다. 이 12명은 다음과 같다.
43:5.3 (490.8) 1. 별자리 아버지. 현재 놀라시아덱의 통치하는 최고자는 네바돈의 보론다덱 계열에서 617,318번이다. 그는 에덴시아 책임을 맡기 전에, 우리 지역 우주 전역에 많은 별자리에서 근무했다.
43:5.6 (491.2) 4. 고문 최고자, 곧 미가엘이 주 아들의 지위를 얻은 뒤에 미가엘의 개인 대표.
43:5.7 (491.3) 5. 집행 최고자, 루시퍼 반란 이후로 내내 에덴시아에 머물러 있는, 가브리엘의 개인 대표.
43:5.8 (491.4) 6. 행성 관찰자의 우두머리인 최고자, 사타니아의 고립된 세계들에 머물러 있는 보론다덱 관찰자들의 지도자.
43:5.9 (491.5) 7. 심판 최고자, 별자리 안에서 반란 때문에 생긴 모든 문제를 조절하는 의무를 맡은 보론다덱 아들.
43:5.10 (491.6) 8. 비상 행정 최고자, 반란으로 고립된 사타니아 세계들에 놀라시아덱 입법 기관의 긴급 법령을 적응하는 과제를 맡은 보론다덱 아들.
43:5.11 (491.7) 9. 중재 최고자, 유란시아에서 특별 수여 조정을 별자리의 일상 행정과 조화하는 데 배치된 보론다덱 아들. 유란시아에서 어떤 천사장 활동이 있는 것과 수많은 다른 불규칙한 봉사는, 예루셈에서 찬란한 저녁별의 특별 활동과 아울러, 이 아들의 활동을 필요하게 만든다.
43:5.12 (491.8) 10. 판사 및 변호 최고자, 사타니아 반란에 따른 혼란으로부터 생긴 놀라시아덱의 특별한 문제를 조정하는 데 전념하는 긴급 법정의 우두머리.
43:5.13 (491.9) 11. 연락 최고자, 에덴시아 통치자들에게 소속되었지만, 반란과 생물의 불충에 관한 문제를 다루면서 추구할 최선의 과정에 관하여, 늘 충실한 이에게 특별 조언자로서 임명되었다.
43:5.14 (491.10) 12. 지도 최고자, 곧 에덴시아의 긴급 회의 회장. 사타니아 동란 때문에 놀라시아덱에 배치된 모든 성격자는 긴급 회의를 구성하며, 그들을 주관하는 지휘관은 특별한 체험을 가진 보론다덱 아들이다.
43:5.15 (491.11) 이것은 또한 수많은 보론다덱, 네바돈의 여러 별자리에서 온 사절, 그리고 또한 에덴시아에 거주하는 다른 자들을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다.
43:5.16 (491.12) 루시퍼 반란이 있은 뒤로 계속, 에덴시아 아버지들은 유란시아, 그리고 사타니아에 있는 다른 고립된 세계들을 특별히 보살폈다. 오래 전에 선지자는 열강들의 국사(國事)에서 별자리 아버지들의 통제하는 손길이 있음을 깨달았다. “최고자가 열강에게 저희의 유산을 나누어주고 아담의 아들들을 갈라 놓았을 때, 그는 민족의 경계들을 정하였더라.”
43:5.17 (491.13) 격리되거나 고립된 세계는 모두, 관찰자로서 행동하는 보론다덱 아들을 하나 가지고 있다. 국가들의 사무에 간섭하라고 별자리 아버지의 명령을 받을 때를 제외하고 그는 행성의 행정에 참여하지 않는다. 사실은, “사람의 나라에서 다스리는” 분은 이 관찰하는 최고자이다. 유란시아는 놀라시아덱의 고립된 세계들 중의 하나이며, 칼리가스티아의 배반 이후로 죽, 한 보론다덱 관찰자가 이 행성에 주둔해 왔다.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유란시아에서 반(半)물질 형태를 입고 봉사했을 때, “그리고 살렘의 왕 멜기세덱은 최고자의 제사장이었더라” 하고 기록된 바와 같이, 그는 당시에 근무하던 관찰 최고자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그리고 최고자는 복이 있으니, 그는 너의 적들을 네 손에 인도하였도다” 하고 말했을 때, 멜기세덱은 이 관찰 최고자와 그의 관계를 아브라함에게 드러냈다.
43:6.1 (492.1) 체계의 서울은 물질과 광물로 지어 각별히 아름답게 꾸며져 있고, 한편 우주 본부는 영적 영광을 더 반영한다. 그러나 별자리의 서울은 상물질 활동과 살아 있는 치장(治裝)의 극치이다. 별자리의 본부 세계에는 살아 있는 장식이 더 널리 이용되고, 이 세계들을 “하나님의 동산”이라 부르게 만드는 것은 무성한 생명―식물을 이용한 예술성―때문이다.
43:6.2 (492.2) 에덴시아의 약 절반은 최고자들의 아름다운 여러 동산에 배당되어 있고, 이 동산들은 지역 우주에서 가장 황홀한 상물질 작품 축에 속한다. 이것이 어째서 놀라시아덱의 사람 사는 세계에서 뛰어나게 아름다운 곳을 흔히 “에덴의 동산”이라 부르는가 설명한다.
43:6.3 (492.3) 이 웅대한 동산에서 가운데 자리잡은 것은 최고자들이 예배하는 성당(聖堂)이다. 시편의 저자는 이러한 것들에 관하여 무언가 알았음이 틀림없는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누가 최고자들의 언덕에 올라가리요? 누가 이 거룩한 장소에 서리요? 그는 깨끗한 손과 맑은 마음을 가졌고, 그의 혼을 허영으로 높이지 않았으며, 거짓 맹세를 하지도 않았더라.” 이 성당에서 최고자들은 10일마다 다가오는 휴일에 최상위 하나님을 예배하는 명상에 잠겨 온 에덴시아를 이끈다.
43:6.4 (492.4) 건축 세계들은 물질 계급에서 10가지 생명 형태를 누린다. 유란시아에는 식물과 동물 생명이 있지만, 에덴시아와 같은 세계에는 10 부문의 물질 계급의 생명이 있다. 너희가 이 10 부문의 에덴시아 생명을 본다면, 너희는 재빨리 처음 셋을 식물, 마지막 셋을 동물로 분류하겠지만, 그 사이에 있는 풍성하고 황홀한 생명 형태를 가진 4 집단의 성질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43:6.5 (492.5) 뚜렷이 동물인 생명조차 진화 세계의 동물과 아주 다르다. 너무 달라서, 이 말 없는 생물의 독특한 특징과 사랑스러운 성품을 필사자가 알아듣도록 묘사하기가 아주 불가능하다. 너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수천 가지의 살아 있는 생물이 있다. 동물 세계 전체가 진화하는 행성에 있는 괴상한 동물 종자(種子)들과 도무지 다른 계급이다. 그러나 이 모든 동물 생명은 아주 총명하고, 절묘하게 쓰임새가 있으며, 다양한 종자들은 모두 놀랍게도 온순하고, 그 친근함은 감동을 준다. 그러한 건축 세계들에는 육식하는 생물이 하나도 없다. 에덴시아 전체에서 살아 있는 존재를 무서워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도 없다.
43:6.6 (492.6) 식물 생명도 유란시아의 것과 아주 다르고, 물질 종류와 상물질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물질적 성장은 그 특징인 녹색 빛을 가지지만, 상물질에서 식물 생명에 해당하는 것은 보라빛이나 연자주 빛으로 다양한 색조를 띠고 반사한다. 그러한 상물질 식물은 순전히 에너지가 성장한 것이요 먹었을 때 아무런 찌꺼기가 없다.
43:6.7 (492.7) 상물질 종류는 말할 것도 없고, 10 부문의 물리적 생명이 부여되어 있으니까, 이 건축 세계들은 경치, 그리고 물질 및 상물질 구조를 생물로 미화(美化)하는 엄청난 가능성을 마련해준다. 하늘 예술가들은 식물로 장식하고 생물로 꾸미는 이 광범위한 일을 하면서 토착인 씨앗 일꾼들을 지도한다. 너희의 예술가들은 자기의 개념을 묘사하기 위하여 생기 없는 페인트와 살아 있지 않은 대리석에 의존해야 하지만, 하늘 예술가와 일생자들은 생각을 나타내고 이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살아 있는 물질을 쓰는 일이 더 흔하다.
43:6.8 (493.1) 너희가 유란시아의 꽃과 떨기나무와 나무를 좋아한다면, 에덴시아의 하늘 같은 동산에서 아름다운 식물과 화려한 꽃을 너희의 눈이 마음껏 즐길 것이다. 그러나 하늘 세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적당한 개념을 필사자의 머리에 전달하고 싶어도 도저히 입으로 표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참으로 필사자가 승천하는 모험을 겪는 이 여러 세계에서 너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그러한 영광을 사람의 눈은 본 적이 없다.
43:7.1 (493.2) 일생자는 에덴시아 및 그에 관계된 세계들, 곧 그들의 감독 밑에 있는 별자리 본부를 둘러싸는 770 세계 전체에서 영구한 시민이다. 창조 아들과 창조 영의 이 자손은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존재하는 수준에서 계획되지만, 그들은 상물질 생물이 아니다. 에덴시아의 70 주요 구체의 각 곳에 있는 원주민은 눈에 보이는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다. 1번 세계로부터 연속해서 70번 세계까지 지나는 동안에, 한 에덴시아 구체에서 다른 구체로 거주를 바꿀 때마다, 일생자(一生者)의 올라가는 눈금에 맞도록 상물질 필사자는 자신의 상물질 형태를 조율한다.
43:7.2 (493.3) 영적 면에서 일생자들은 비슷하다. 필사자처럼, 그들의 지능은 다르다. 그들의 형태는 상물질 상태의 존재를 많이 닮았고, 다양한 70 계급의 성격으로 활동하도록 창조되었다. 이 각 계급의 일생자의 지적 활동은, 10 가지 주요 변종을 드러내고, 이 다른 지적 부류들은 각각, 에덴시아의 각 주요 세계를 도는 10개 위성 중 어느 하나에서, 점진적 직업 사회화, 곧 실용적 사교를 가르치는 특별 훈련 및 문화 학교들을 주관한다.
43:7.3 (493.4) 이 700개의 소(小)세계는 지역 우주 전체의 작용에서 실무 교육을 담당하는 전문 구체이며, 모든 등급의 지능 존재들에게 개방된다. 특별한 기술과 전문 지식을 가르치는 이 훈련 학교들은 순전히 하늘 가는 필사자를 위해서만 운영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물질 학생들이 이 훈련 과정을 다니는 모든 존재 가운데 명백히 가장 큰 무리를 이룬다. 사회 문화를 맡는 70개 주요 세계 중 어느 하나에서 너희가 영접받을 때, 너희는 둘러싸는 10개 행성의 각 곳에 즉시 입국 허가를 받는다.
43:7.4 (493.5) 여러 우대(優待) 거류지에서, 하늘 가는 상물질 필사자는 회상 지도자들 사이에서 주류를 이루지만, 일생자는 네바돈 하늘 예술가 단체와 관계된 가장 큰 집단이다. 오르본톤 전체에서, 유버르사의 아반돈터를 제외하고, 하보나 바깥에 있는 어느 존재도 예술적 솜씨, 사회 적응 능력, 영리한 조정 면에서 일생자를 따라가지 못한다.
43:7.5 (493.6) 이 별자리 시민들은 실제로 예술가 단체의 단원은 아니지만, 그들은 자유롭게 모든 집단과 함께 일하고, 별자리 세계들을 과도기 문화의 멋진 예술적 가능성을 실현하는 주요한 구체로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한다. 그들은 별자리 본부 세계들의 경계를 지나서 활동하지 않는다.
43:8.1 (493.7) 에덴시아와 그 둘레에 있는 구체들의 물리적 재산은 거의 완전하다. 이것은 구원자별 구체들의 영적 웅장함과 도저히 비할 수 없지만, 예루셈 훈련 세계들의 영화로움을 훨씬 뛰어넘는다. 이 에덴시아 구체들은 모두 보편적인 공간 전류로 직접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별자리 중심들이 이 구체들의 엄청난 물질 및 상물질 동력 체계를 솜씨 있게 감독하고 분배하며, 이 중심들은 유능한 집단의 물력 통제사와 상물질 동력 감독들의 도움을 받는다.
43:8.2 (494.1) 필사자가 올라가면서 에덴시아에서 지내는 시대와 연결된, 과도기 상물질 문화를 가르치는 70 훈련 세계에서 보내는 시간은, 최후자 지위까지 이르는 승천 필사자 생애에서 가장 안정된 기간이다. 이때는 정말로 상물질 생활의 전형이다. 한 주요 문화 세계에서 다른 주요 문화 세계로 지나갈 때마다 너희는 다시 조율되지만, 같은 상물질 몸을 지니며, 인격이 의식을 잃는 기간은 조금도 없다.
43:8.3 (494.2) 에덴시아 및 그와 관련된 여러 구체에서 머무르면서 너는 주로 집단 윤리, 곧 다양한 우주 및 초우주 계급의 지적 성격자들과 즐겁고 유익한 상호 관계를 가지는 비결을 통달하는 데 몰두한다.
43:8.4 (494.3) 여러 저택 세계에서 너는 진화하는 필사 인격을 통일하는 일을 마쳤다. 체계 서울에서 너는 예루셈 시민권을 얻었고, 집단 활동의 훈련 및 조정된 사업에 자아를 기꺼이 복종시켰다. 그러나 이제 별자리의 훈련 세계에서 너의 진화하는 상물질 인격은 참된 교제를 성취해야 한다. 이 하늘의 교양을 터득하는 것은 다음을 배우는 데 있다:
43:8.5 (494.4) 1. 다양한 상물질 동료 10명과 행복하게 살고 효과 있게 일할 것, 한편 그러한 10개 집단은 1백명의 중대 단위로 결합되어 있고, 다음에 1천 명의 군단으로 연합된다.
43:8.6 (494.5) 2. 일생자(一生者) 10명과 기쁘게 살고 진심으로 협조할 것. 그들은 상물질 존재들과 지능이 비슷하지만, 기타 모든 면에서 아주 다르다. 그리고 나서 너는 이 집단이 다른 10 가족과 조정하는 동안, 이 10명의 집단과 함께 활동해야 한다. 이 가족들은 다시 1천 일생자의 집단으로 연합된다.
43:8.7 (494.6) 3. 상물질 동료와 이 일생자인 주인들 모두에게 동시에 적응할 것. 얼마큼 비슷하지 않은 집단의 총명한 생물과 밀접한 작업 관계를 가지면서 바로 네 계급의 존재들과 자진해서 효과적인 협동 능력을 얻을 것.
43:8.8 (494.7) 4. 바로 너와 비슷한 존재 및 비슷하지 않은 존재들과 이렇게 사회적으로 활동하면서, 두 집단의 동료들과 지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그들에게 직업적으로 적응할 것.
43:8.9 (494.8) 5. 지적 수준과 직업 수준에서 인격이 만족스러운 교제를 가지면서, 비슷한 존재 및 약간 다른 존재들과 함께, 늘 짜증을 줄이고 늘 분개심을 가라앉히고 밀접하게 접촉하며 사는 능력을 더욱 완전히 갖출 것. 회상 지도자들은 그들의 집단 놀이 활동을 통해서 이 후자를 달성하는 데 많이 이바지한다.
43:8.10 (494.9) 6. 이 여러 가지 교제 방법을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생애에서 생기는 점진적 조정을 촉진하는 데 모두 적응할 것. 겉보기에 하찮은 이 여러 시공 활동 안에 감추어진 영원한 목표와 의미를 깨닫는 능력을 높임으로, 우주 통찰력을 키울 것.
43:8.11 (494.10) 7. 그리고 나서, 이 모든 여러 가지 교제 과정을 최대로 높일 것, 그리고 집단의 영적 교제 및 상물질 조정을 통하여, 온갖 단계의 개인적 자질의 향상에 관계되는 영적 통찰력을 동시에 높일 것. 지적ㆍ사회적ㆍ영적 면에서, 도덕적인 두 인간은 협동하는 방법으로 그들이 우주에서 개인적으로 성취하는 가능성을 겨우 2배로 늘이지 않는다. 달성하고 성취하는 가능성을 거의 4배에 가깝게 만든다.
43:8.12 (495.1) 우리는 에덴시아 교제가, 상물질 필사자가 지능이 다른 10명으로 구성된 일생자 집단과 사귀고, 동시에 상물질 동료 10명과 비슷하게 사귀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처음 일곱 주요 세계에서는 오직 하늘 가는 필사자 1명이 일생자 10명과 함께 산다. 둘째 집단의 주요 세계에서는 필사자 2명이 10명으로 된 각 토착 집단과 함께 살고, 이렇게 계속해서, 마지막 집단의 주요 구체에서는, 상물질 존재 10명이 일생자 10명과 함께 산다. 일생자들과 어떻게 더 낫게 사귀는가를 배움에 따라서, 너희는 진보하는 상물질 동료와 가지는 관계에서 그러한 개선된 윤리를 연습할 것이다.
43:8.13 (495.2) 하늘 가는 필사자로서, 너희는 에덴시아의 이 여러 진보 세계에서 머무르는 것을 즐길 것이다. 그러나 체계 서울에서 너희가 처음으로 우주 사무와 가진 접촉, 또는 우주 서울의 여러 최종 세계에서 이 실체들과 작별하면서 가진 접촉의 특징이었던 개인적 만족감, 그 짜릿한 느낌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43:9.1 (495.3) 70번 세계에서 졸업한 뒤에, 하늘 가는 필사자는 에덴시아에서 거주를 정한다. 승천자들은 이제, 처음으로, “파라다이스의 집회”에 참석하고, 늘 충실한 이가 승천자의 광범위한 생애를 묘사하는 이야기를 듣는데, 늘 충실한 이는 그들이 만난 가운데 최상 삼위일체에 기원을 가진 첫 성격자이다.
43:9.2 (495.4) 별자리의 여러 훈련 세계에서 이렇게 머무른 것은 모두, 에덴시아 시민권을 드디어 얻게 하였고, 이때는 상물질 진보자에게 참되고 하늘 같은 행복을 누리는 기간이다. 체계의 여러 세계에서 머물렀던 기간을 통하여 내내, 너는 동물에 가까운 처지에서 상물질 인간으로 진화하고 있었고, 영보다 물질에 더 가까운 편이었다. 구원자별의 여러 구체에서, 너는 상물질 존재로부터 하나의 참된 영의 지위로 진화할 것이다. 물질보다 영에 더 가깝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에덴시아에서, 승천자들은 그들의 옛 지위와 미래 지위 사이의 중간점, 진화하는 동물로부터 하늘 가는 영이 되는 통로에서 중간에 있다. 에덴시아와 그에 속한 여러 세계에서 머물렀던 동안 내내, 너희는 “천사들과 같으니,” 늘 진보하고 있지만, 그동안 죽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상물질 지위를 유지한다.
43:9.3 (495.5) 하늘 가는 필사자가 별자리에서 이렇게 머무를 때는 상물질로 진보하는 생애 전체에서 가장 변화가 없고 안정된 시대이다. 이 체험은 승천자가 영이 되기 전에 거치는, 남과 교제하는 훈련이다. 이것은 하보나에서 최후자가 되기 전에 거치는 영적 체험, 그리고 파라다이스에서 겪는 초한(超限) 이전의 훈련과 비슷하다.
43:9.4 (495.6) 에덴시아에서 하늘 가는 필사자는 진보하는 70 일생자 세계에서 받은 과제들에 주로 몰두한다. 그들은 또한 에덴시아 자체에서 다양한 자격으로, 주로 집단ㆍ종족ㆍ국가ㆍ행성의 복지에 관계된 별자리 계획과 연결되어 근무한다. 최고자들은 사람 사는 세계에서 개인의 승진을 촉진하는 데 별로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은 개인의 가슴 속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나라에서 다스린다.
43:9.5 (495.7) 너희가 구원자별 생애를 향하여 에덴시아를 떠날 준비가 된 그날에, 너희는 멈춰서 파라다이스의 이쪽에서 너희가 훈련받던 모든 시대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유쾌했던 한 시대를 되돌아볼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안을 향하여 올라가고, 신성한 의미와 영적 가치를 더욱 크게 이해하는 확대된 능력을 얻음에 따라서, 그 모든 영광이 늘어난다.
44:0.1 (497.1) 분과 본부 세계와 우주 본부 세계에서 우대(優待)받는 거류지 중에 하늘 예술가라 부르는 독특한 계급의 혼합된 성격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존재들은 상물질 영역과 하등 영(靈) 영역에 있는 대예술가요 장인(匠人)이다. 그들은 상물질 치장과 영적 미화에 종사하는 영과 준영(準靈)이다. 그러한 장인들은 대우주에 두루―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모든 구체 뿐 아니라, 초우주, 지역 우주, 별자리, 체계의 본부 세계에도―분포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주요한 활동 영역은 별자리에, 그리고 특별히 각 본부 구체를 둘러싸는 770 세계에 있다.
44:0.2 (497.2) 물질적 지성은 그들이 하는 일을 거의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상물질 세계와 영 세계들이 높은 예술과 하늘 문화가 없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4:0.3 (497.3) 하늘 예술가들은 예술가로 창조되지 않았고, 그들은 중앙 우주에서 태어난 어떤 선생 성격자, 그리고 하늘 가는 필사자 및 기타 수많은 하늘 집단으로부터 뽑은 자원한 제자들로 이루어진 단체, 선택되고 모집된 존재들의 단체이다. 이 예술가들로 구성된 최초의 교육 집단을 무한한 영이 일곱 으뜸 영과 합동으로 수고하여 언젠가 배치하였고, 이것은 각 분과에 1천 명씩, 일곱 예술가 분과에 7천 명의 하보나 강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한 핵심을 가지고 시작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서, 영 사무와 상물질 사무에 솜씨 있는 일꾼들의 단체, 이 눈부신 단체가 발전되었다.
44:0.4 (497.4) 어떤 상물질 성격자나 영 개체도, 다시 말해서, 날때부터 신의 아들인 등급 밑에 있는 어떤 존재도, 하늘 예술가 단체에 가입할 자격이 있다. 진화하는 여러 구체에서 하나님의 올라가는 아들들은, 상물질 세계에 도착한 뒤에 예술가 단체에 가입 신청을 해도 좋으며, 충분히 재능이 있으면, 길거나 짧은 동안 그러한 생애를 택해도 좋다. 그러나 1천 년, 초우주 시간으로 1천 년보다 짧게, 하늘 예술가들 사이에 가입할 수는 없다.
44:0.5 (497.5) 하늘 예술가는 모두 초우주 본부에 등록되어 있지만, 지역 우주 서울에서 상물질 감독자의 지휘를 받는다. 그들은 각 지역 우주의 본부 세계에서 활동하는 상물질 감독자의 중앙 군단으로부터 다음 일곱 가지 주요 활동 부문에서 임명받는다:
44:0.13 (498.4) 이 일곱 무리의 최초의 선생들은 모두 하보나의 완전한 세계들로부터 왔으며, 하보나는 모든 단계와 형태의 영적 예술을 위한 여러 원본 및 원본 연구를 포함한다. 이 하보나 예술을 공간 세계로 옮기려는 시도는 거창한 과제이지만, 하늘 예술가들은 대대로, 기술과 집행 면에서 개선되어 왔다. 하늘 가는 생애의 모든 다른 단계와 같이, 어떤 직종에서도 가장 앞선 자는 우수한 지식과 기술을 그만큼 혜택을 받지 못한 동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항상 요구된다.
44:0.14 (498.5) 너희는 처음으로 여러 저택 세계에서, 옮겨 심은 이 하보나 예술을 비로소 한 번 보게 될 것이다. 너희가 구원자별에 있는 영의 방에 서서, 영 영역에서 일하는 하늘 예술가들의 작품, 영감을 주는 여러 걸작품을 바라볼 때까지, 그 예술의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높아지고 나아질 것이다.
44:0.15 (498.6) 상물질 세계와 영 세계의 이런 활동은 다 실재한다. 영 존재에게는 영 세계가 현실이다. 우리에게는 물질 세계가 더 비현실이다. 상급 형태의 영들은 보통의 물질을 자유롭게 통과한다. 높은 영들은, 어떤 기본 에너지를 제외하고, 어떤 물질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물질 존재에게는 영 세계가 다소 비현실이다. 영 존재에게 물질 세계는 거의 전적으로 비현실이며, 단지 영 실체 알맹이의 그림자일 뿐이다.
44:0.16 (498.7) 나는 이 이야기가 번역되고 기록되고 있는 건물을 순전한 영 시력(視力)으로 파악할 수 없다. 어쩌다가 내 옆에 서 있는, 유버르사에서 온 한 신성한 조언자는 순전히 물질인 이 작품을 더군다나 적게 파악한다. 우리에게 시중드는 에너지 변압자들 중에 하나가 우리의 머리에 제시하는 영적 부본(副本)을 보고서, 우리는 이 물질 구조들이 너희 눈에 어떻게 보이는가 분별한다. 물질로 만든 이 건물은, 영 존재인 나에게, 꼭 현실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물론, 그 건물은 물질 필사자에게 대단히 현실이고 대단히 쓸모가 있다.
44:0.17 (498.8) 영 세계와 물질 세계, 양쪽에 있는 생물의 실체를 헤아려 볼 수 있는, 어떤 부류의 존재들이 있다. 이 등급에 속하는 자들은 하보나 일꾼의 이른바 넷째 생물, 그리고 화해자 중에서 넷째 생물이다. 육체를 입은 생명에서 벗어난 뒤에 하늘 가는 필사자처럼, 시공의 천사들은 영 존재와 물질 존재를 모두 헤아려 보는 능력을 받았다. 상급 영 수준에 도달한 뒤에, 승천자는 물질ㆍ상물질ㆍ영 실체를 인식할 수 있다.
44:0.18 (498.9) 유버르사에서 온 한 막강한 사자도 여기 내 곁에 있는데, 그는 조절자와 융합하였고 한때 필사자였던 승천 존재요, 그는 너희 모습 그대로 너희를 파악하며, 동시에 그는 외톨 사자, 상천사, 그리고 기타 하늘 존재들이 자리에 있는 것을 눈으로 본다. 긴 승천 기간에, 너희는 이전 존재로 있는 너희의 동료들을 알아보는 힘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생명의 눈금에서 안으로 올라감에 따라서, 너희는 예전에 너희의 하급 체험 수준에 있는 동료 존재들을 식별하고 그들과 사귀는 능력을 지닐 것이다. 이전 상태에 있는 너희의 친구와 동료들을 식별하는 능력을 조금도 빼앗지 않고서, 새로운 이동이나 부활은 각각 또 다른 집단의 영 존재들을 보도록 너희 시력의 한계를 넓힐 것이다.
44:0.19 (498.10) 이 모든 것이, 깃드는 생각 조절자가 행동함으로, 하늘 가는 필사자의 체험 속에서 가능하게 된다. 너희 생애에 겪은 체험 전체의 사본(寫本)을 그들이 간직함으로, 너희가 한때 가졌던 어떤 참된 속성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너희에게 보장된다. 이 조절자들은, 너희의 일부로서, 실제는 너희로서, 너희와 함께 체험을 거친다.
44:0.20 (499.1) 그러나 하늘 예술가들이 하는 일의 성질을 물질적 지성에게 전할 수 없어 나는 거의 단념한다. 필사의 지성에게 이러한 상물질 기록과 영에 가까운 현상의 현실을 펼쳐 보이려는 노력으로, 나는 항상 생각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언어를 왜곡할 필요성에 부닥친다. 너희의 이해하는 지능은 파악할 힘이 없고 너희의 언어는 이러한 반영 활동의 중요성과 가치와 관계를 전하는 데 부적당하다. 그러한 과제에 내가 크게 성공하는 것이 도무지 불가능한 것을 십분 이해하면서, 이 실체들에 관하여 인간의 머리에 깨우침을 주려고 이 노력을 계속한다.
44:0.21 (499.2) 나는 필사자의 물질적 행동과 하늘 예술가의 다채로운 활동의 유사점을 서투르게 대강 그리는 시도밖에 더 할 수 없다. 유란시아 종족들의 예술 및 기타 문화의 업적이 더 진보되었다면, 물질적 사물로부터 상물질 사물까지 인간의 생각을 연장시키려는 노력에서 그만큼 더 멀리 나갈 수 있다. 상물질 세계와 영 세계에서 이러한 일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 외에 내가 더 이루고 싶은 것이 거의 없다.
44:1.1 (499.3) 필사자의 듣는 범위가 제한되어 너희는 상물질계의 멜로디를 도저히 깨달을 수 없다. 파악할 수 없는 범위의 상물질 화음(和音)과 영 화음은 말할 것도 없고, 물질의 범위에서 인간의 청각으로 인식되지 않는 아름다운 소리도 있다. 영 멜로디는 물질적 음파(音波)는 아니지만, 하늘 성격자들의 영이 수신(受信)하는 영의 박동이다. 구체들의 멜로디와 관련하여, 웅대한 연주 뿐 아니라 광대한 범위와 혼을 표현하는 방법이 있으며, 인간은 이것들을 전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하늘 회로의 영 에너지 위에 영역의 멜로디가 굴러 들어오는 동안, 숭고한 희열에 빠진 수백만의 존재를 나는 보았다. 이 경이로운 멜로디는 한 우주의 가장 먼 구석까지 방송될 수 있다.
44:1.2 (499.4) 하늘 음악가들은 다음 영 물력을 조종하여 하늘 화음을 만드는 데 몰두한다:
44:1.3 (499.5) 1. 영적 소리―영 흐름의 중지(中止).
44:1.4 (499.6) 2. 영적 빛―상물질과 영적 영역에서 빛을 통제하고 집중하는 것.
44:1.5 (499.7) 3. 에너지 충돌―상물질 및 영 에너지를 솜씨 있게 다루어 생기는 멜로디.
44:1.6 (499.8) 4. 빛깔 교향곡―상물질계 빛깔의 멜로디. 이것은 하늘 음악가들의 가장 높은 성취에 속한다.
44:1.7 (499.9) 5. 연합된 영들의 화음―다른 계급의 상물질 존재와 영 존재들의 바로 그 배열과 결합은 웅장한 멜로디를 만들어낸다.
44:1.8 (499.10) 6. 생각의 멜로디―영적 생각을 품는 것은 하보나의 멜로디로 터져나올 만큼 아주 완전하게 될 수 있다.
44:1.9 (499.11) 7. 우주의 음악―적절히 조율함으로, 다른 구체들의 멜로디를 우주 방송 회로에서 청취할 수 있다.
44:1.10 (500.1) 10만 가지가 넘는 다른 모양의 소리ㆍ색ㆍ에너지를 조종하는 방법이 있으며, 이런 기법은 사람이 악기(樂器)를 이용하는 것과 비슷하다. 너희의 춤 앙상블은 의심할 여지 없이, 존재를 배치하고 성격자를 배열하는 하늘의 조화에 다가가려는 시도, 물질적 인간의 서투르고 괴상한 시도를 나타낸다. 다른 다섯 형태의 상물질 멜로디는 물질적 육체의 감각 작용이 인식하지 못한다.
44:1.11 (500.2) 화음, 일곱 수준에서 멜로디를 결합하는 음악은, 영이 교통하는 하나의 보편적 규칙이다. 유란시아 필사자가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음악은 체계 서울인 예루셈의 학교에서 최고의 표현에 다다르며, 거기서 준(準)물질 존재들은 소리의 화음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는다. 필사자는 다른 형태의 상물질 멜로디와 하늘 화음에 반응하지 않는다.
44:1.12 (500.3) 유란시아에서는 음악을 육체로, 그리고 영적으로 감상한다. 너희 인간 음악가들은, 너희 초기 선조들의 원시적인 단조로운 수준으로부터 더 높은 수준의 소리를 이해하기까지 음악 취미를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유란시아 필사자의 대다수는 물질적 근육으로 대체로 음악에 반응하며, 지성과 영으로 반응하는 일이 너무나 적다. 그러나 3만 5천 년이 넘도록 음악 감상은 꾸준히 개선되어 왔다.
44:1.13 (500.4) 선율이 아름다운 당김음은 원시인의 단조로운 음악으로부터 후세 음악가들의 화음, 표현이 풍부한 화음과 의미 있는 멜로디에 이르는 과도기를 대표한다. 이 초기 종류의 리듬은 화음을 감상하는 상급의 지성 능력을 쓰지 않으면서 음악을 좋아하는 감각 반응을 자극하며, 따라서 미숙하거나 영적으로 게으른 개인들이 더 매력을 느낀다.
44:1.14 (500.5) 유란시아에서 최선의 음악은 너희 음악가의 하늘 동료들이 듣는 화려한 선율이 휙 지나가는 메아리이며, 그들은 화성학의 음악 멜로디로서 상물질 물력의 이 화음 조각들만 남겨 놓았을 뿐이다. 영과 상물질의 음악은 뜸하지 않게 모두 일곱 형태의 표현과 재생을 이용하며, 따라서 상급 구체들의 이러한 멜로디를 음악의 단순한 음표로서 적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의 지성은 엄청나게 장애를 겪는다. 그러한 노력은 큰 오케스트라의 선율(旋律)을 겨우 한 악기로 재생하려고 애쓰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44:1.15 (500.6) 유란시아에서 너희는 아름다운 멜로디를 얼마큼 모았지만, 사타니아에 있는 많은 이웃 행성에 가까이 갈 정도로 음악에 앞서지는 않았다. 아담과 이브가 살아남기만 했더라면, 너희는 정말로 음악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성품을 많이 차지했던 화음 재질은, 비음악 경향의 핏줄로 인하여 너무나 묽어졌고, 그래서 1천 필사자의 생애에서 겨우 한 번 화음의 배열을 크게 이해한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지니, 언젠가 유란시아에서 참 음악가가 나타날 수도 있고, 그러면 민족들이 전부 그의 멜로디의 화려한 선율에 넋이 빠질 것이다. 그러한 인간 하나는 한 나라 전체, 아니 문명화된 세계 전체의 진로도 영원히 바꿀 수 있다. “멜로디는 온 세상을 바꿀 힘을 가졌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언제까지나, 음악은 사람과 천사와 영들의 보편적 언어로 남을 것이다. 화음은 하보나의 말이다.
44:2.1 (500.7) 필사 인간은 하늘 재생자의 기능에 대해서 빈약하고 왜곡된 것보다 더 좋은 개념을 도저히 바랄 수 없지만, 너희의 물질적 언어의 괴상하고 제한된 상징을 통해서, 나는 재생자의 기능을 보여주려고 애써야 한다. 영과 상물질 세계는 최상의 가치를 가진 수많은 사물이 있는데, 이것들은 재생할 가치가 있지만 유란시아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요, 도저히 “사람의 머리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범위의 활동에 속하는 체험이요, 육체를 입은 생명 뒤에 살아남는 자를 위해서 하나님이 대기시키는 실체이다.
44:2.2 (501.1) 하늘 재생자에는 일곱 무리가 있는데, 다음 분류에 따라서 그들이 하는 일을 설명해 보겠다:
44:2.3 (501.2) 1. 가수(歌手)―지난날의 특정한 화음을 되풀이하고 오늘의 멜로디를 풀이하는 화음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상물질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44:2.4 (501.3) 2. 빛깔 일꾼―너희가 스케치하는 사람 또는 화가(畵家)라고 부를까 싶은, 빛과 그림자를 다루는 예술가. 앞날의 상물질계 즐거움을 위하여, 지나가는 장면과 일시적 사건들을 보존하는 예술가.
44:2.5 (501.4) 3. 빛으로 그림을 만드는 자―참된 준(準)영적 현상의 보존품을 만드는 자. 영화는 이것의 아주 서투른 예이다.
44:2.6 (501.5) 4. 역사물 연출가―우주 기록과 역사에서 중대한 사건을 연극으로 재현하는 자.
44:2.7 (501.6) 5. 예언 예술가―역사의 의미를 미래에 예측하는 자.
44:2.8 (501.7) 6. 일생 이야기꾼―생활 체험의 의미와 중요성을 지속시키는 자. 오늘의 개인적 체험을 미래에 달성하는 가치로 예측하는 것.
44:2.9 (501.8) 7. 행정 연극자―통치하는 철학과 행정 기법의 중요성을 그리는 자, 통치권을 표현하는 하늘 극작가.
44:2.10 (501.9) 하늘 재생자들은 아주 흔히, 효과적으로, 기억의 재현을 어떤 형태의 정신 휴식 및 인격자의 기분 전환과 통합하느라고 회상 지도자들과 함께 일한다. 상물질계 집회와 영 집회 앞에서 이 재생자들은 때때로 그러한 모임의 목적을 대표하는, 엄청나게 극적인 광경에 협조한다. 최근에 나는 1백만 명이 넘는 배우들이 연속된 1천 장면을 출연한 그러한 엄청난 발표를 구경하였다.
44:2.11 (501.10) 총명한 상급 선생과 과도기 봉사자들은, 그들의 상물질 교육 활동에서 자유롭고 효과있게, 이 여러 무리의 재생자들을 이용한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일시적 예를 보여주는 데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 중에 허다한 분량은 영구한 성질을 가졌고, 모든 미래 시대에 전하는 유물로서 언제까지나 남을 것이다. 이 예술가들은 너무 다능해서, 떼를 지어 활동할 때, 한 시대를 재연(再演)할 수 있고, 봉사하는 천사들과 손잡고 시간 세계의 필사 예언자들에게 영 세계의 영원한 가치를 실제로 묘사할 수 있다.
44:3.1 (501.11) “하나님이 건축하고 만드신” 도시들이 있다. 우리는 영적으로 건축에 해당하는 것, 너희 필사자에게 낯익은 모든 것, 그리고 말할 수 없이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집이 있고, 영적 위로와 상물질 필수품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즐길 수 있는 온갖 물질적 만족 대신에, 우리의 존재를 부유하게 하고 그 범위를 확대하는 데 쓰이는 수천 가지 영적 실체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신성한 건축자들은 다음의 일곱 집단에서 활동한다:
44:3.2 (502.1) 1. 집 설계사와 건축자―개인 및 작업 집단에 배정된 거처들을 짓고 개축하는 자. 이 상물질 주거와 영 주거는 실재한다. 이 집들은 너희의 단거리 시력에 보이지 않겠지만, 우리에게는 아주 현실적이고 아름답다. 어느 정도까지, 모든 영 존재는 그들의 상물질 또는 영 거처를 계획하고 만드는 어떤 세부를 건축자들과 교환해도 좋다. 이 집들은 거기에 거주할 상물질 생물이나 영 생물의 필요에 따라서 맞춰지고 꾸며진다. 이 모든 건축물에서 개인적 표현을 하기에 풍부한 변화와 넉넉한 기회가 있다.
44:3.3 (502.2) 2. 직업 창조자―영 및 상물질 영역의 정규 일꾼과 일상적 일꾼들의 주거를 설계하고 조립하는 데 활동하는 자. 이 건축자들은 유란시아의 작업장 및 기타 산업 공장을 짓는 자들과 견줄 수 있다. 여러 과도기 세계에는 서로 봉사하고 특화된 노동으로 분업하는, 필요한 경제가 있다. 우리 모두가 온갖 일을 하지는 않는다. 상물질 존재와 진화하는 영들 사이에는 기능이 다양하고, 이 직업 창조자들은 개선된 작업장을 지을 뿐 아니라, 노동자의 직업 향상에도 이바지한다.
44:3.4 (502.3) 3. 오락용 건설자―쉬는 철에는 거대한 건축물이 이용되는데, 이 휴식을 필사자는 오락이라,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놀이라고 부를 것이다. 회상 지도자들을 위하여 적당한 무대 시설이 제공되는데, 그들은 상물질 세계의 익살꾼이다. 그 과도기 구체들에는 하늘로 가지만 최근에 진화 행성으로부터 옮겨진 존재들의 훈련이 행해진다. 상급 영들조차 영적으로 다시 충전(充電)하는 기간에 어떤 형태로 지난날을 돌이켜보는 유머에 빠진다.
44:3.5 (502.4) 4. 성전 건축자―영을 위한 성전과 상물질로 된 성전을 짓는 노련한 건축자. 필사자가 올라가면서 보는 여러 세계에는 모두 예배하는 성전이 있고, 이러한 건물은 상물질 영역과 영 구체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다.
44:3.6 (502.5) 5. 교육용 건설자―상물질계의 훈련 및 상급의 영적 배움의 본부를 짓는 자. 언제나 더 많은 지식을 얻고, 보편적 문화 지식 뿐 아니라 한 개인의 현재와 미래에 할 일에 관하여 추가 정보를 얻도록 길이 열려 있으며, 이러한 정보는 하늘 가는 필사자를 상물질 세계와 영 세계에서 더욱 총명하고 유능한 시민으로 만들도록 고안되어 있다.
44:3.7 (502.6) 6. 상물질계 계획자―모든 영역에 있는 온갖 성격자가 어느 한 구체에서, 어느 때라도 그 상태로, 그들이 동등하게 교제하도록 건축하는 자. 이 계획자들은 진보하는 상물질 생활의 조정을 강화하기 위하여, 상물질 동력 감독들과 공동으로 일한다.
44:3.8 (502.7) 7. 공공 건물 건설자―예배 장소가 아닌 지정된 집회 장소를 계획하고 건축하는 예술가. 공공(公共) 집회가 있는 장소들은 크고 웅장하다.
44:3.9 (502.8) 이러한 구조물이나 그 치장도 물질적 필사자의 감각에는 꼭 현실이 아닐 터이지만, 이런 건물은 우리에게 아주 현실이다. 너희가 육체를 입고 거기에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너희는 이 여러 성전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초물질 건물은 다 실제로 거기에 있으며, 우리는 뚜렷하게 알아보고, 마찬가지로 충분히 즐긴다.
44:4.1 (503.1) 이 예술가들은 영역의 우수한 생각을 보존하고 복사하는 데 헌신하며, 그들은 일곱 집단에서 활동한다:
44:4.2 (503.2) 1. 생각 보존자. 이들은 영역의 상급 생각을 보존하는 데 헌신하는 예술가이다. 상물질 세계에서 그들은 참으로 정신 작용의 보석(寶石)같은 생각을 값지게 여긴다. 유란시아로 처음 오기 전에, 나는 이 행성의 어떤 위대한 인물들의 생각 작용이 기록된 것을 보고 그 방송을 들었다. 생각 기록자들은 유버르사 언어로 그러한 고귀한 관념을 간직한다.
44:4.3 (503.3) 각 초우주는 자체의 언어, 거기 있는 성격자들이 쓰는 언어가 있으며, 그 여러 구역에 두루 통용된다. 우리 초우주에서 이 언어는 유버르사어로 알려져 있다. 각 지역 우주도 그 자체의 언어가 있다. 네바돈의 고등 계급들은 모두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하며, 네바돈 언어와 유버르사어를 쓴다. 다른 지역 우주에서 온 두 개인이 만날 때, 그들은 유버르사어로 교통한다. 그러나 그 중에 하나가 다른 초우주에서 왔으면, 그들은 통역자에 의존해야 한다. 중앙 우주에는 언어가 거의 필요 없으며, 서로 완전하고 거의 완벽하게 이해한다. 거기에는 오로지 신들만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파라다이스에서 누구를 어쩌다가 만나면, 1천 년 동안 필사자의 언어로 의사를 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서로 이해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우리는 가르침을 받았다. 구원자별에서도 “손바닥 보듯” 우리는 훤히 알고 있다.[1] [1684]
44:4.4 (503.4) 생각을 상물질 구체와 영 구체들의 언어로 옮기는 능력은 필사자가 상상할 수 없다. 우리가 생각을 영구한 기록으로 적는 비율을 전문 기록자들이 아주 가속할 수 있기 때문에, 50만 단어, 곧 생각 부호가 넘는 양에 해당하는 것이 유란시아 시간으로 1분에 기록될 수 있다. 이 우주 언어는 진화하는 세계들의 말보다 훨씬 더 충만하다. 유버르사의 개념 부호는 10억이 넘는 글자를 포함한다. 하지만 기본 알파벳은 겨우 70개 부호를 포함한다. 네바돈의 언어는 그다지 정교하지 않으며, 기본 부호, 곧 알파벳의 글자 수는 48이다.
44:4.5 (503.5) 2. 개념 기록자. 이 둘째 무리의 기록자들은 개념의 그림, 곧 관념 형태를 보존하는 데 관여한다. 이것은 물질 영역에서 알려지지 않은, 영구한 기록 형태이며, 보통 기록된 언어를 1백년 동안 정독하여 너희가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지식을 이 방법으로, 너희 시간으로 1시간 안에 얻을 수 있다.
44:4.6 (503.6) 3. 표의 문자 기록자. 우리는 너희의 글말과 입말, 이 두 가지에 해당하는 것이 있지만, 생각을 보존할 때 우리는 보통, 개념을 그림으로 만들기와 표의(表意) 기술을 이용한다. 표의 문자를 보존하는 자는 개념 기록자의 작업을 1천배나 향상할 수 있다.
44:4.7 (503.7) 4. 웅변 추진자. 이 집단의 기록자들은 웅변으로 재생하기 위하여 생각을 보존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그러나 네바돈 언어로 반시간의 연설로, 한 유란시아 필사자의 일생의 주제를 다룰 수 있다. 잠시 멈춰서, 너희의 어지럽고 뒤죽박죽인 꿈 속에서 사는 기술을―어떻게 이러한 밤의 환상 속에서 몇년 동안의 체험을 몇초 동안에 거칠 수 있는가―생각해 보아야 이런 기록을 이해할 수 있다.
44:4.8 (503.8) 영 세계의 웅변은, 서툴고 말을 더듬는 유란시아의 웅변만 들어 온 너희를 기다리는 보기 드문 대접의 하나이다. 구원자별과 에덴시아의 웅변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듣기 좋은 화음과 좋은 소리의 표현이 있다. 이 중요한 개념들은 영광스러운 왕관에 박힌 아름다운 보석과 같다. 그러나 나는 차마 못하겠다! 다른 세계에 있는 이 실체들이 얼마나 넓고 깊은가 인간의 머리에 전할 수 없다!
44:4.9 (504.1) 5. 방송 지도자. 파라다이스, 초우주, 지역 우주의 방송은 이 생각 보존자 집단의 일반 감독을 받는다. 그들은 방송 물질을 조정할 뿐 아니라 검열하고 편집하는 자로서 일하며, 파라다이스의 모든 방송을 초우주에 맞게 적응하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방송을 지역 우주의 개별 언어로 적응하고 번역한다.
44:4.10 (504.2) 지역 우주의 방송도 또한 체계 및 개별 행성들이 수신하도록 수정되어야 한다. 이 우주 보고서의 전송(傳送)은 면밀한 감독을 받으며, 주어진 회로 안에 있는 모든 세계에서 모든 보고서의 적절한 수신을 보장하려고 언제나 거꾸로 기록이 된다. 이 방송 지도자들은 온갖 목적의 정보 통신을 위하여 공간의 전류를 이용하는 데 기술적으로 숙련되어 있다.
44:4.11 (504.3) 6. 리듬 기록자. 유란시아인은 의심할 바 없이, 이 예술가들을 시인(詩人)이라 부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너희의 시 작품과 아주 다르며, 이를 거의 무한히 초월한다. 리듬은 상물질 존재와 영 존재들에게 피곤을 덜어주며, 그래서 리듬 형태로 수많은 기능을 수행함으로 즐거움을 높일 뿐 아니라 효율성을 높이려고 흔히 노력을 기울인다. 나는 에덴시아 집회의 시(詩) 방송을 얼마큼 너희가 듣고서, 별자리 천재들이 만든 색깔과 음조의 그윽함을 즐길 특권을 너희가 가질까 희망할 뿐인데, 그들은 이 아름다운 형태로 자아를 표현하고 사회를 조화시키는 대가이다.
44:4.12 (504.4) 7. 상물질계 기록자. 여러 집합의 상물질 사무와 영 기록을 총합한 그림을 보존하는 일에 배치된, 중요한 이 생각 기록자 집단의 역할을 물질 지성에게 어찌 묘사할지 몰라서 나는 안타깝다. 어설프게 설명하자면, 그들은 과도기 세계들의 사진사 집단이다. 그들은 앞날을 위하여 이 진보하는 시대의 중대한 장면과 관계를 저장하며, 상물질 기록실의 보관소에 간직한다.
44:5.1 (504.5) 흥미 있고 효과적인 이 예술가들은 모든 종류의 물리적ㆍ정신적ㆍ영적 에너지에 관심을 가진다:
44:5.2 (504.6) 1. 물리적 에너지 조종자. 물리적 에너지 조종자는 동력 지휘자와 함께 오랫동안 근무하며, 많은 단계의 물리적 에너지를 주무르고 통제하는 데 전문가이다. 그들은 초우주의 3가지 기본 전류와 30가지 종속 에너지를 분리하는 데 정통하다. 이 존재들은 과도기 세계의 상물질 동력 감독들에게 측량할 수 없이 귀중한 도움을 준다. 그들은 파라다이스의 우주 계획을 꾸준히 연구한다.
44:5.3 (504.7) 2. 지성 에너지 조종자. 이들은 상물질 종류와 기타 종류의 지성 존재들 사이에 서로 통신하는 일에 전문가이다. 필사자들 사이에서 이 형태의 교통은 유란시아에서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하늘 가는 상물질 존재들의 상호 교통 능력을 권장하는 전문가이며, 그들이 하는 일은 물질 지성에게 묘사하는 나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지적 연락을 가지는 수많은 독특한 모험을 포함한다. 이 예술가들은 무한한 영의 지성 회로를 연구하는 명석한 학생이다.
44:5.4 (505.1) 3. 영적 에너지 조종자. 영적 에너지를 조종하는 자들은 흥미를 자아내는 집단이다. 영적 에너지는, 물리적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확정된 법칙에 따라서 작용한다. 다시 말해서, 영적 물력은, 이를 연구했을 때 믿을 만한 추론을 낳고, 물리적 에너지처럼 정밀하게 다룰 수 있다. 물질 영역에서 지배하는 것처럼, 영 세계에 똑같이 확실하고 믿을 만한 법칙이 있다. 여러 우주에 두루, 상물질 계급과 기타 계급의 하늘 존재들에게 적용되는 법칙, 영 에너지를 다스리는, 영원한 아들의 근본 법칙을 연구하는 이 학자들은 지난 몇백만 년 동안에 영 에너지를 흡수하는 많은 개량된 기법을 이용해 왔다.
44:5.5 (505.2) 4. 복합 조종자. 이들은 잘 훈련받은 모험심 있는 존재들의 무리이며 물리적ㆍ정신적ㆍ영적 에너지로서, 여러 우주에 두루 나타나는 최초의 3단계의 신성한 에너지를 기능적으로 결합하는 데 헌신한다. 이들은 실제로, 최상위 하나님이 우주에 계심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날카로운 성격자이니, 이 신 성격 안에서 모든 대우주 신(神)이 체험으로 통일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까지, 이 예술가들은 최근에 얼마큼 성공을 거두었다.
44:5.6 (505.3) 5. 수송 고문. 수송 세라핌들에게 기술 고문인 이 무리는 경로를 산출하는 과제에서 별 학자들과 공동으로 일하는 데, 그리고 그밖에 공간 세계에서 수송 담당 우두머리들을 돕는 데 대단히 숙달되어 있다. 그들은 구체들의 교통을 감독하는 자이며, 사람이 사는 어느 세계에나 있다. 유란시아는 70명으로 이루어진 수송 고문단의 보살핌을 받는다.
44:5.7 (505.4) 6. 통신 전문가. 유란시아는 마찬가지로 행성간 통신과 우주간 통신을 맡는 기술자 12명의 보살핌을 받는다. 오랜 경험을 가진 이 존재들은 그 영역의 통신에 적용되는 송신 및 간섭 법칙에 관한 지식을 훤히 알고 있다. 이 집단은 인력 사자와 외톨 사자의 것을 제외한 온갖 형태의 공간 소식에 관여한다. 유란시아에서 그들이 하는 일의 상당 부분은 천사장 회로에서 실행해야 한다.
44:5.8 (505.5) 7. 휴식 선생. 신성한 휴식은 영적 에너지를 흡수하는 기술과 관련된다. 상물질 에너지와 영 에너지는 물리적 에너지처럼 확실히 다시 채워야 하지만, 똑같은 이유로 그렇지는 않다. 할 수 없이, 너희를 깨우쳐 주려는 시도로 나는 서툰 예를 써야 한다. 그런데도, 영 세계 출신인 우리는 정기적으로 우리의 정상 활동을 멈추고 적당한 약속 장소로 가야 하며, 거기서 우리는 신성한 휴식에 들어가서 이처럼 우리의 소모되는 에너지를 회복한다.
44:5.9 (505.6) 너희가 상물질 존재가 되고 영 사무의 기법을 비로소 체험하고 나서 저택 세계에 이르렀을 때, 너희는 이 문제에서 첫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하보나에서 가장 안쪽 궤도에 대하여 알며, 공간 순례자가 이전의 여러 궤도를 거치고 난 뒤에, 그들이 길고도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파라다이스 휴식에 들어가도록 안내받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시간 세계의 생애로부터 영원의 봉사까지 이동하는 데 기술적 요구 조건일 뿐 아니라 또한 필수품이며, 하늘 가는 체험의 마지막 걸음에 따르는 에너지 소모를 다시 채우기 위해서, 그리고 다음 단계의 끝없는 생애를 위하여, 여분의 영적 힘을 저장하는 데 필요한 한 가지 형태의 휴식이다.
44:5.10 (506.1) 이 에너지 조종자들은 또한 목록을 작성하기에 너무 많은 몇백 가지 다른 방법으로 활동하는데, 예를 들면, 가장 효율적 에너지 흡수 방식에 관하여, 그리고 적극적 케루빔과 소극적 사노빔 사이에 분산되는 물력의 가장 유리한 균형을 잡는 것에 대하여, 세라핌ㆍ케루빔ㆍ사노빔과 상담한다. 다른 여러 방법으로, 이 전문가들은 신성한 휴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상물질 생물과 영 생물에게 도움을 주며, 이 휴식은 공간의 기본 에너지를 효과 있게 이용하는 데 아주 필요하다.
44:6.1 (506.2) 이 독특한 예술가들의 아름다운 작업을 어떻게 그리는지 그 방법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 편에서 영(靈)으로 치장하는 일을 설명하려고 아무리 시도해도 물질 지성에게는, 너희의 지성 및 물질 세계에서 이런 일을 하려는 노력, 딱하지만 가치 있는 바로 너희의 노력을 생각나게 할 뿐이다.
44:6.2 (506.3) 1천이 넘는 하위 부문의 활동을 포함하지만, 이 집단은 다음 일곱 주요 항목 아래에 분류된다:
44:6.3 (506.4) 1. 색 기술자. 이들은 영을 반영하는 1만 가지 빛깔로, 조화된 아름다움을 전하는 그들의 아름다운 말씀을 울려 퍼지게 하는 자이다. 빛깔을 인식하는 것 외에 인간의 체험에서 이 활동과 비교될까 싶은 것이 하나도 없다.
44:6.4 (506.5) 2. 소리 설계자. 너희가 소리라 부를 것을 설계하는 자가 다양한 신분과 상물질계 이해를 나타내는 영의 파장을 묘사한다. 이 충동은 정말로, 하늘 무리들의 꾸밈없고 영화로운 영과 혼을 훌륭하게 반영하는 것이다.
44:6.5 (506.6) 3. 감정 설계자. 느낌을 높이고 보존하는 이 설계자는 시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의 연구와 교화를 위하여, 상물질 진보자와 승진하는 영들의 영감과 미화를 위하여, 상물질 정서(情緖)와 신성한 감정을 보존하는 자이다.
44:6.6 (506.7) 4. 향기 예술가. 더할 나위 없는 영 활동을, 육체로 화학적 냄새를 맡는 것과 이렇게 비교하자니 정말로 유감이다. 그러나 유란시아 필사자는 이 봉사를 어떤 다른 이름으로 도저히 인식할 수 없다. 이 예술가들은 승진하는 빛의 자녀들의 교화와 기쁨을 위하여 다채로운 교향곡을 짓는다. 너희는 땅에서 이 부류의 영적 웅장함을 멀리서라도 견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44:6.7 (506.8) 5. 풍채 치장자. 이 예술가들은 자기를 치장하는 예술이나 생물을 미화시키는 기술에 몰두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다양한 존재들의 복합 앙상블에서 다른 상물질 계급과 영 계급에게 배정된 위치의 가치를 통하여 관계의 중요성을 연극으로 만들어, 개별 상물질 생물과 영 생물한테서 광대하고 즐거운 반응을 일으키는 데 전념한다. 너희가 살아 있는 선율ㆍ향기ㆍ광경을 정돈하는 것처럼, 이 예술가들은 초물질 존재들을 정돈하며, 그리고 나서 그들을 섞어서 영광스러운 축가로 만든다.
44:6.8 (506.9) 6. 취향 고안자. 이 예술가들에 대하여 어떻게 너희에게 일러줄 수 있을까! 그들이 상물질 취향을 개선하는 자이며, 또한 생성되는 영 감각을 날카롭게 함으로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능력을 높이려고 애쓴다고 암시할까 한다.
44:6.9 (507.1) 7. 상물질계 통합자. 이들은 숙련된 공예가이며, 남들이 모두 각자 공헌한 뒤에 상물질 앙상블에 절정에 이르는 끝손질을 하며, 이처럼 신성하게 아름다운 것을 보는 자에게 격려가 되도록 묘사하는 일, 영 존재와 상물질 동료들에게 오래가는 영감이 되는 일을 해낸다. 그러나 상물질 세계와 영 세계의 예술적 영광과 미학적 아름다움을 너희가 미처 이해할 수 있기 전에, 너희는 동물의 몸을 벗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44:7.1 (507.2) 혹시 너희가 그렇게 추측할지 모르지만, 이 예술가들은 음악이나 그림이나, 그와 비슷한 어떤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 세계에 존재하지만 필사자가 인식하지 못하는, 특화된 물력과 에너지를 주무르고 조직하는 데 전념한다. 내가 조금이라도 비교가 가능한 근거를 가졌다면, 영이 성취하는 이 독특한 분야의 묘사를 시도하고 싶지만, 나는 단념한다―이 분야의 하늘 예술을 필사 지성에게 전할 희망이 전혀 없다. 그런데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여전히 암시할까 한다:
44:7.2 (507.3) 아름다움ㆍ리듬ㆍ조화는 지적으로 관련되어 있고 정신적으로 비슷하다. 진리ㆍ사실ㆍ관계는 지적으로 분리할 수 없고, 이것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선ㆍ올바름ㆍ응보는 철학적으로 서로 관련되어 있고, 생생한 진리와 신성한 아름다움과 정신적으로 함께 묶여 있다.
44:7.3 (507.4) 참된 철학에 대한 우주 개념이나, 하늘 예술의 묘사나, 또는 신성한 아름다움을 인간이 깨닫는 것을 묘사하려는 필사자의 시도는, 그러한 생물이 진보하려는 시도가 통일되지 않는다면, 결코 참으로 마음에 흐뭇할 수 없다. 진화하는 사람 안에서 이러한 신다운 욕구의 표현은 지적으로 참되고, 아름다운 느낌이요, 정신적으로 선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참된 현실인 것, 아름다운 의미가 있는 것, 그리고 선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 예술가나 과학자나 철학자의 인생 체험에서 통일되지 않으면, 표현하는 참된 혼이 빠진 것이다.
44:7.4 (507.5) 이러한 신다운 품질은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절대로 통일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나 천사는 누구나, 결코 그침 없이 하나님답게 되는 기법으로―진화적 체험에서 영원한 진리, 보편적 아름다움, 신다운 선을 체험으로 섞어서―통일된 자아를 실현하는 항상 전진하는 수준에서, 한없이 자아를 표현하는 가능성을 가진다.
44:8.1 (507.6) 하늘 예술가들은 유란시아와 같은 물질적 행성에서 몸소 일하지 않지만, 때때로 체계의 본부로부터, 필사 민족들 가운데 선천적 재능이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려고 온다. 이처럼 배치되었을 때, 이 예술가들은 행성의 진보 천사들의 감독 하에서 일시 일한다. 선천적 자질을 소유하고, 또한 특별한 이전의 체험을 가진 조절자를 소유하는 필사 예술가들을 도우려고 애쓰면서, 천사 무리들은 이 예술가들과 협동한다.
44:8.2 (507.7) 인간의 특별한 능력은 세 가지 가능한 근원이 있다: 밑바닥에는, 타고난, 즉 선천적 적성(適性)이 반드시 존재한다. 특별한 능력은 결코 신들이 멋대로 주는 선물이 아니다. 뛰어난 재능에는 모두 반드시 조상의 기초가 있다. 이 자연 능력에 보태서, 또는 차라리 이를 보조하여, 생각 조절자의 이끄심이 제공될 수도 있다. 그러한 개인 안에 깃드는 조절자는 다른 세계에서, 다른 필사 인간 안에서, 그러한 직업을 따라서 실제로 진정한 체험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지성과 안에 깃드는 조절자가 다 특별히 솜씨 있을 경우에, 이 재능을 조화시키는 자로서 행동하려고, 그리고 늘 완전해지는 이상을 추구하며, 그 영역의 교화를 위하여 그들의 묘사를 향상하려고 애쓰도록 이 필사자들을 돕고 영감을 주기 위해서, 영 예술가들이 파견될 수도 있다.
44:8.3 (508.1) 영 예술가의 등급에는 카스트가 없다. 너의 기원이 아무리 낮더라도, 네가 표현하는 능력과 재능이 있으면, 상물질 체험과 영적 달성의 눈금에서 위로 올라감에 따라서, 너는 적절히 인정받고 마땅히 평가를 받을 것이다. 상물질 생애가 완전히 갚아 주고 전적으로 지워 버리지 못할 만큼, 인간이 유전(遺傳)으로 장애를 받거나 필사자의 환경이 결핍될 수는 없다. 예술적 성취, 그리고 표현이 풍부한 자아 실현으로 얻는 그러한 만족은 모두, 점진적으로 진급하면서 바로 네가 몸소 노력을 기울임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침내, 진화적으로 평범한 자의 포부가 이루어질지 모른다. 신들은 시간 세계의 자녀들에게 임의로 재능과 능력을 주지 않지만, 그들의 모든 고상한 소망을 만족시키고, 훌륭한 자아 표현을 하고 싶은, 인간의 모든 갈망을 채우도록 마련해 준다.
44:8.4 (508.2)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기억해야 한다: 육체를 입은 필사자를 애타게 만드는, 뛰어나고 싶은 많은 욕구는, 상물질 생애와 영 생애를 사는 동안 바로 이 필사자에게 계속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하늘 가는 상물질자는 예전에 가졌던 순전히 이기적 소망과 자기 중심의 포부를 사회와 함께 하기를 배운다. 그런데도 땅에서 너희가 아주 열심히 하고 싶어 했지만 주위 환경이 끈질기게 너희에게 허락하지 않은 그러한 것을, 상물질 생애에서 참된 상지혜(上知慧)의 통찰력을 얻은 뒤에, 만약에 너희가 아직도 바란다면, 오래 간직했던 소망을 충분히 채울 모든 기회가 너희에게 아주 확실히 허락될 것이다.
44:8.5 (508.3) 하늘 가는 필사자는 영의 생애를 개시하려고 지역 우주를 떠나기 전에, 그들의 필사 수준이나 상물질 수준으로 존재했을 때의 특징을 나타냈던 모든 지적ㆍ예술적ㆍ사회적 소망이나 참된 포부에 관하여 만족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자아를 표현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만족을 평등하게 성취한 것이지, 동일한 체험적 지위에 이르는 것도 아니요, 솜씨ㆍ기술ㆍ표현으로 보아 개성의 특징을 완전히 말소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너희가 하보나 생애의 마지막 궤도를 마칠 때까지, 개인의 체험적 달성에서 생기는 새로운 영적 차이는 이렇게 평준화되고 같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파라다이스 거주자들은 개인적 체험의 초한(超限) 차이에 적응할 필요성과 마주치게 되며, 그 차이는 오로지 사람의 궁극 지위―필사 최후자가 제7 단계의 영이 되는 운명―을 집단으로 달성해야만 평준화될 수 있다.
44:8.6 (508.4) 이것이 하늘 예술가들, 파라다이스 창조자들의 신성한 아름다움을 예술적으로 묘사함으로 건축 구체들을 영화롭게 만들기 위하여, 대단히 수고하는 아름다운 일꾼들의 우주 단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45:0.1 (509.1) 사타니아의 행정부 중심은 57개의 건축된 구체들의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예루셈 자체와 7개의 주요 위성과 49개의 종속 위성이다. 체계 서울 예루셈은 유란시아 크기의 거의 1백배가 된다. 하지만 그 인력은 조금 작다. 예루셈의 주요 위성들은 일곱 과도기 세계이며, 이것들은 각자 유란시아의 약 10배만큼 크다. 한편 이 과도기 구체들에 속하는 일곱 종속 위성은 거의 유란시아 크기 만하다.
45:0.2 (509.2) 일곱 저택 세계는 1번 과도기 세계의 일곱 종속 위성이다.
45:0.3 (509.3) 57개의 건축된 세계로 이루어진 이 체계 전부가 특별히 지은 이 구체들을 물리적으로 조직하고 배열하는 확정된 기법에 따라서, 사타니아 동력 중심과 물리 통제사들이 조정함으로 따로 조명을 받고, 따듯하게 되고, 물과 에너지의 공급을 받는다. 이 구체(球體)들은 또한 물리적 보살핌을 받으며, 그밖에 토착 씨앗 일꾼이 이 구체들을 유지한다.
45:1.1 (509.4) 예루셈 둘레를 도는 일곱 주요 세계는 일반적으로 과도기 문화 구체로 알려져 있다. 그 통치자들은 때때로 예루셈의 최고 집행 회의에서 임명된다. 이 구체들은 다음과 같이 번호와 이름이 주어진다:
45:1.2 (509.5) 1번. 최후자 세계. 여기는 지역 체계의 최후자 군단 본부이며, 필사자를 승천시키는 계획에 아주 완전히 전념하는 접대 세계, 곧 일곱 저택 세계에 둘러싸여 있다. 일곱 저택 세계의 어느 곳에 거주하는 자도 최후자 세계에 접근할 수 있다. 이 순례 여행에서 수송 세라핌은 하늘 가는 인격자들을 오가며 나르며, 이 여행은 과도기 필사자가 궁극의 운명에 관한 믿음을 키우도록 설계되어 있다. 최후자 및 그들의 구조물은 보통, 상물질 시력에 잡힐 수 없지만, 이따금, 에너지 변압자와 상물질 동력 감독들이 순간적으로 너희로 하여금 이 높은 영 인격자들을 얼핏 보게 만들 때, 너희는 흥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들은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일을 실제로 마쳤고, 너희가 엄청난 사업을 마쳐도 좋고 또 마칠 수 있다는 것을 보장하는 서약으로서, 너희가 이 긴 여행을 시작하는 바로 그 세계들로 돌아왔다. 저택 세계의 체류자는 누구나 최후자를 눈으로 보여주는 이 집회에 참석하려고, 적어도 1년에 한 번 최후자 구체로 간다.
45:1.3 (510.1) 2번. 상물질 세계. 이 행성은 상물질 생명을 감독하는 자들의 본부이고, 일곱 구체에 둘러싸여 있는데, 거기에는 상물질 우두머리들이 동료와 조수들, 곧 상물질 존재와 하늘 가는 필사자들을 다 훈련시킨다.
45:1.4 (510.2) 일곱 저택 세계를 지나가면서, 너희는 또한 상물질 접촉이 늘어나는 이 문화 구체와 사교(社交) 구체들을 통해서 진보할 것이다. 첫째 저택 세계에서 둘째까지 진급할 때, 너희는 과도기 본부 2번, 상물질 세계까지 방문 허가 자격을 얻을 것이며, 나머지도 이런 식으로 얻는다. 이 여섯 문화 구체 중에 어느 한 곳에 있더라도, 너희는 초청을 받고 나서, 관련된 집단 활동이 있는 둘러싼 일곱 세계 중 어디에도 방문자와 관찰자가 되어도 좋다.
45:1.5 (510.3) 3번. 천사 세계. 여기는 체계의 활동에 종사하는 모든 천사 무리의 본부이며, 천사의 훈련과 교육을 맡은 일곱 세계에 둘러싸여 있다. 이 세계들은 천사가 사교하는 구체이다.
45:1.6 (510.4) 4번. 초월 천사 세계. 이 구체는 사타니아에서 찬란한 저녁별들의 집이며, 동등한 존재 및 거의 동등한 존재들이 모이는 집합소이다. 이 세계의 일곱 위성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이 하늘 존재들의 일곱 주요 집단에게 배정되어 있다.
45:1.7 (510.5) 5번. 아들의 세계. 이 행성은 인간이 삼자일체화로 낳은 아들들을 포함하여, 모든 계급의 신다운 아들들의 본부이다. 둘러싸는 일곱 세계는 신성하게 관계된 이 아들들의 어떤 개별 집단에 전념한다.
45:1.8 (510.6) 6번. 영의 세계. 이 구체는 무한한 영의 높은 성격자들이 체계에서 회합하는 장소로서 쓰인다. 둘러싼 일곱 위성은 이 다채로운 계급의 개별 집단에 배당되어 있다. 그러나 과도기 세계 6번에는 영의 대표가 없고, 그러한 계심이 체계의 서울에서 관찰되지도 않을 것이다. 구원자별의 신성한 봉사자는 네바돈 어디에나 있다.
45:1.9 (510.7) 7번. 아버지의 세계. 여기는 체계에서 고요한 구체이다. 어떤 집단의 존재도 거기에 거주하지 않는다. 큰 빛의 성전이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지만, 그 안에 아무 존재도 있는 것이 식별되지 않는다. 어느 체계의 세계에서 온 어떤 존재도 다 예배자로서 환영받는다.
45:1.10 (510.8) 아버지의 세계를 둘러싸는 일곱 위성은 다른 체계에서 여러 가지로 이용된다. 사타니아에서, 이 위성들은 지금 루시퍼 반란에서 감금된 무리들을 위해서 구금하는 구체로서 쓰인다. 별자리의 서울 에덴시아는 이와 비슷한 감옥 세계가 하나도 없다. 사타니아 반란에서 반란군에 가담한 소수의 세라핌과 케루빔은 예루셈의 이 격리된 세계들에 갇힌 지 오래다.
45:1.11 (510.9) 일곱째 저택 세계에 머무르는 자로서, 너는 일곱째 과도기 세계, 곧 우주의 아버지의 구체에 접근할 수 있고, 또한 이 행성을 둘러싸는 사타니아 감옥 세계들을 방문하는 것이 허락된다. 여기에는 루시퍼를 비롯하여, 미가엘에 맞서서 루시퍼를 따랐던 성격자들의 대다수가 이제 갇혀 있다. 이 딱한 광경을 이 최근 시대에 관찰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그 우주의 아버지, 미가엘이 내민 구원을 거절한 루시퍼를 비롯하여 그의 타락한 동료들의 죄를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재판할 때까지, 네바돈 전체에게 계속하여 엄중한 경고가 될 것이다.
45:2.1 (511.1) 사람 사는 세계들로 구성된 한 지역 체계의 최고 집행자는 체계 군주, 1차 라노난덱 아들이다. 우리 지역 우주에서 이 군주들에게 큰 집행 책임이, 특별한 개인적 특권이 맡겨진다. 오르본톤에서도, 체계 군주들이 체계 사무를 지도하는 데 그렇게 특별히 큰 개인적 재량권의 행사를 허락하도록 모든 우주가 조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네바돈 역사를 통틀어서 구속받지 않은 이 집행자들은 오직 세 번 불충을 드러냈다. 사타니아 체계에서 생긴 루시퍼 반란은 그 중에서 마지막이자 가장 널리 퍼진 반란이었다.
45:2.2 (511.2) 사타니아에서 이 비참한 동란이 있은 뒤에도, 체계를 다스리는 기법에 절대로 아무런 수정이 없었다. 지금 별자리 아버지들의 감독 밑에 있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루시퍼의 후임자 라나포지에게 아직 완전히 회복해주지 않은 어떤 문제들을 제쳐놓고, 지금의 체계 군주는 자격 없는 전임자에게 맡겨졌던 모든 권력을 소유하고 모든 권한을 행사한다.
45:2.3 (511.3) 사타니아의 현재 우두머리는 너그럽고 명석한 통치자이며, 그는 반란의 시험을 거친 군주이다. 체계의 조군주(助君主)로서 근무할 때, 라나포지는 네바돈 우주에서 더 일찍 있었던 동란 중에 미가엘에게 충성했다. 막강하고 명석한 이 사타니아 군주는 단련과 시험을 받은 행정가이다. 네바돈에서 두 번째 체계 반란이 일어난 계제에 체계 군주가 잘못하여 어둠에 빠졌을 때, 잘못을 저지르는 우두머리의 제1 조수였던 라나포지는 정권을 장악하고 본부 세계들이나 그 불행한 체계의 사람 사는 여러 세계에서 성격자들이 비교적 적게 분실되도록 체계의 사무를 처리하였다. 라나포지는 미가엘에게 봉사하면서, 그리고 더 높은 권한으로 선임 계급이었던 형제가 책임을 이행하지 않던 바로 그 마당에, 네바돈 전체에서 유일하게 이렇게 충실히 활동한 1차 라노난덱 아들이라는 명예를 지닌다. 예전의 어리석은 행위로 인한 모든 결과를 극복하고 반란의 결과가 사타니아로부터 제거될 때까지, 라나포지는 아마 예루셈으로부터 자리를 옮기지 않을 것이다.
45:2.4 (511.4) 사타니아의 고립된 세계들의 사무가 모두 그의 관할 밑에 돌아오지 않았지만, 라나포지는 그 세계들의 복지에 대하여 큰 관심을 보이고 유란시아를 빈번히 방문한다. 다른 정상 체계와 같이, 그 군주는 세계 통치자, 곧 행성 영주들, 그리고 고립된 세계에 주둔하는 총독들로 구성된 체계 회의를 주관한다. 때때로 체계의 본부에서―“하나님의 아들들이 함께 모일 때”―이 행성 회의가 열린다.
45:2.5 (511.5) 예루셈에서 일주에 한번, 곧 10일마다, 군주는 본부 세계에 거주하는 다양한 계급 성격자들의 어느 한 집단과 회의를 연다. 이런 회의는 예루셈에서 즐겁게 격식 차리지 않는 시간이며,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행사이다. 예루셈에는 모든 다채로운 계급의 존재들 사이에, 그리고 각 무리와 체계 군주 사이에 지극한 친교가 있다.
45:2.6 (511.6) 이 독특한 집회는 유리 바다에서 일어나며, 이것은 체계 서울의 큰 집합소이다. 이 집회는 순전히 사회적이고 영적인 행사이며, 행성 행정이나, 아니 승천 계획에 관계된 아무것도 결코 거론되지 않는다. 하늘 가는 필사자들은 다만 즐기려고, 그리고 동료 예루셈 사람들을 만나려고 이 시간에 모인다. 주일마다 가지는 이 휴양 시간에 군주에게 접대받지 않는 무리들은 그들 자체의 본부에서 모인다.
45:3.1 (512.1) 한 지역 체계의 최고 집행자, 체계 군주는 반드시 라노난덱 아들 두세 명의 지원을 받으며, 그들은 제1ㆍ제2 조수로서 활동한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일곱 라노난덱의 참모진이 사타니아 체계를 관리한다.
45:3.2 (512.2) 1. 체계 군주―라나포지는 1차 계급의 2,709번이며, 배신자 루시퍼를 뒤이었다.
45:3.3 (512.3) 2. 제1 조군주―만수로시아는 3차 라노난덱의 17,841번이다. 라나포지와 함께 사타니아에 파견되었다.
45:3.4 (512.4) 3. 제2 조군주―사딥은 3차 계급의 271,402번이다. 사딥도 라나포지와 함께 사타니아로 왔다.
45:3.5 (512.5) 4. 체계 관리자―홀단트는 3차 집단의 19번이며, 필사 존재 계급 위에 있는 모든 감금된 영의 관리자요 통제자이다. 홀단트도 마찬가지로 라나포지와 함께 사타니아로 왔다.
45:3.6 (512.6) 5. 체계 기록자―빌튼은 사타니아에서 라노난덱 임무에 비서이며, 3차 계급의 374번이다. 빌튼은 최초의 라나포지 집단의 일원이었다.
45:3.7 (512.7) 6. 수여 지도자―포탄트는 2차 라노난덱 예비군에서 319,847번이며,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자신을 수여한 뒤로 예루셈에 옮겨 놓은 모든 우주 활동의 임시 지도자이다. 포탄트는 유란시아 시간으로 1천 9백년 동안 라나포지의 참모진에 소속되어 있었다.
45:3.8 (512.8) 7. 높은 상담자―하나바드는 1차 라노난덱 아들들 중에서 67번이며, 높은 우주 상담자 및 조정자 집단의 구성원이다. 그는 사타니아 집행 회의에서 임시 의장으로서 활동한다. 하나바드는 루시퍼 반란 이후로 이 계급에서 열두 번째로 이렇게 근무하는 자이다.
45:3.9 (512.9) 이 행정부 집단의 일곱 라노난덱은 루시퍼 반란의 비상 사태로 필요하게 된, 확대된 긴급 행정이다. 예루셈에는 오로지 소법정들만 있는데, 이는 체계가 행정 단위요, 재판 단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노난덱 행정부는 예루셈 행정 회의의 지원을 받으며, 이것은 사타니아에서 최고 자문 단체이다. 이 회의는 12 회원으로 구성된다:
45:3.10 (512.10) 1. 하나바드, 라노난덱 의장.
45:3.11 (512.11) 2. 라나포지, 체계 군주.
45:3.12 (512.12) 3. 만수로시아, 제1 조군주.
45:3.13 (512.13) 4. 사타니아 멜기세덱의 우두머리.
45:3.14 (512.14) 5. 사타니아 생명 운반자의 임시 지도자.
45:3.15 (512.15) 6. 사타니아 최후자의 우두머리.
45:3.16 (512.16) 7. 사타니아의 처음 아담, 물질 아들들의 감독하는 우두머리.
45:3.17 (512.17) 8. 사타니아의 천사 무리의 지도자.
45:3.18 (512.18) 9. 사타니아의 물리 통제자의 우두머리.
45:3.19 (512.19) 10. 체계의 상물질 동력 감독의 지도자.
45:3.22 (513.3) 이 회의는 우주 본부에 있는 최고 회의에서 지역 체계를 대표하는 회원 3명을 정기적으로 뽑지만, 이러한 대표는 반란으로 중지되었다. 사타니아는 지금 지역 우주 본부에 한 관찰자가 있지만, 미가엘 수여가 있은 뒤로, 이 체계는 에덴시아 입법 회의에 보낼 회원 10명을 다시 선출하기 시작했다.
45:4.1 (513.4) 예루셈에서 천사들이 거주하는 일곱 동그라미의 중심에는 유란시아 자문 회의, 24 상담자의 본부가 자리잡고 있다. 계시자 요한은 그들을 24 장로라고 불렀는데, “그리고 보좌의 둘레에 24 자리가 있고, 내가 보니 그 자리에 24 장로가 흰 옷을 걸치고 앉았더라.” 이 집단의 중심에 있는 보좌는 주관하는 천사장의 재판석, 곧 온 사타니아를 위하여 자비와 응보로 부활 점호를 부르는 보좌이다. 이 재판석은 언제나 예루셈에 있어 왔지만, 그 둘레의 24 자리는 놓여진 지 1천 9백년이 넘지 않으며, 그리스도 미가엘이 네바돈의 완전 통치권으로 올라간 뒤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이 24 상담자는 예루셈에서 그의 개인적 대표자이고, 그들은 사타니아의 출석 점호에 관한 모든 문제에서, 그리고 그 체계의 고립된 여러 세계에서 필사자 승천 계획의 많은 다른 단계에서, 주 아들을 대표할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가브리엘의 특별 요청과 미가엘의 특별 명령을 집행하기 위하여 임명된 대리자이다.
45:4.2 (513.5) 이 24 상담자는 유란시아의 여덟 종족으로부터 모집되었고, 이 중에 최종 집단은 미가엘이 부활 출석을 부를 때, 1천 9백년 전에 모집되었다. 이 유란시아 자문 회의는 다음 회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45:4.3 (513.6) 1. 오나가, 행성 영주 이전 시대의 뛰어난 지도자이며, “숨쉬게 하는 이”를 예배하도록 동료들을 지도하였다.
45:4.4 (513.7) 2. 만산트, 유란시아에서 행성 영주 이후 시대의 대선생, 그는 “큰 빛”을 숭상하도록 동료들을 지도하였다.
45:4.5 (513.8) 3. 오나모나론톤, 아득한 시절에 홍인의 지도자요, 이 민족을 다신(多神) 숭배로부터 “큰 영”의 숭배로 이끈 자이다.
45:4.6 (513.9) 4. 올란도프, 청인의 임금이며, “최상 우두머리”의 신성을 인식하도록 이끈 그들의 지도자였다.
45:4.7 (513.10) 5. 포슌타, 멸종된 주황 민족의 제사장이며, “위대한 선생”을 예배하도록 이끈 이 민족의 지도자였다.
45:4.8 (513.11) 6. 싱랑톤, 황인 중에서 처음으로, 여럿 대신에 “한 진리”를 예배하도록 자기의 민족을 가르치고 이끈 자. 몇천년 전에 황인은 한 분의 하나님을 알았다.
45:4.9 (513.12) 7. 판탓, 녹색인을 어두움에서 구원한 자이며, “생명의 유일 근원”을 예배하도록 그들을 이끈 지도자였다.
45:4.10 (513.13) 8. 오르보논, 남색(藍色) 민족의 계몽자이며, 한때 “신 중의 신”을 예배하도록 이끈 지도자였다.
45:4.11 (514.1) 9. 아담, 신용을 잃었지만 명예를 회복한, 유란시아의 행성 아버지이며,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밀려난 아들, 하나님의 물질 아들이었다. 그러나 살아남았고, 나중에 미가엘의 선포로 이 지위까지 승급되었다.
45:4.12 (514.2) 10. 이브, 유란시아에서 보라 민족의 어머니이며, 자기의 배우자와 함께 실패한 것에 대하여 벌을 받았고, 또한 그와 함께 명예를 다시 찾았으며, 이 무리의 필사 생존자들과 더불어 근무하도록 배치되었다.
45:4.13 (514.3) 11. 에녹, 육체를 입고서 필사 생명을 사는 동안에 생각 조절자와 처음으로 융합한 유란시아 필사자.
45:4.14 (514.4) 12. 모세, 사라져 버린 보라 민족의 잔재를 해방한 자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이름 아래 우주의 아버지의 예배를 부활시키려고 선동한 자.
45:4.15 (514.5) 13. 엘리야, 물질 아들 이후 시대에 눈부신 영적 업적을 이룩한, 옮겨진 혼.
45:4.16 (514.6) 14. 마키벤타 멜기세덱, 이 계급에서 유란시아 민족들에게 자신을 수여한 유일한 아들. 아직도 멜기세덱으로 여겨지지만, 그는 “언제까지나 최고자들의 봉사자”가 되었고, 필사 승천자로서 봉사하는 직책을 영원히 맡았으며, 아브라함 시절에 살렘에서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유란시아에 머물렀다. 이 멜기세덱은 나중에 예루셈에 본부를 두고 미가엘을 위하여 활동하는 권한을 가진,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 대관(代官)으로 선포되었다. 이 미가엘은 실제로, 인간의 모습을 입고서 마지막 자기 수여를 체험한 그 세계의 행성 영주이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잇따라 주둔하는 총독, 곧 24 상담자의 회원들이 아직도 유란시아를 감독한다.
45:4.17 (514.7) 15. 세례자 요한, 유란시아에서 미가엘 사명의 선구자, 그리고 육체를 입었을 때 사람의 아들의 먼 사촌이었다.
45:4.18 (514.8) 16. 1-2-3 첫째, 칼리가스티아 배반이 있던 당시에 가브리엘을 위한 근무에서 충성했던 중도인(中道人)들의 지도자. 미가엘이 무제한 군주 자리로 올라간 뒤에, 미가엘이 그를 곧 이 자리로 진급시켰다.
45:4.19 (514.9) 선택받은 이 성격자들은 가브리엘의 요청을 받고서, 얼마 동안 승천 체제로부터 면제되며, 이 자격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이 근무할까 우리는 도무지 모른다.
45:4.20 (514.10) 17ㆍ18ㆍ19ㆍ20번 자리는 영구 회원으로 채우지 않는다. 영구 회원 16명이 만장 일치로 찬성함으로 이 자리들을 임시로 채우며, 유란시아에서 현재 수여 아들 이후 시대로부터 하늘 가는 필사자에게 나중에 배정하도록 자리를 비워 둔다.
45:4.21 (514.11) 21ㆍ22ㆍ23ㆍ24번 자리도, 의심할 여지 없이, 지금 시대를 뒤잇는, 다른 후세의 큰 선생들을 위하여 자리를 남겨 놓으며, 마찬가지로 임시로 채운다. 신다운 아들들이 뜻밖에 방문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와 상관 없이, 심판 아들 시대, 교육 아들 시대, 빛과 생명의 시대를 유란시아에서 기대해야 한다.
45:5.1 (514.12) 여러 계급의 신다운 아들, 높은 영, 초월 천사, 천사, 중도인을 포함하여, 하늘 생명의 큰 분과들은 예루셈에 그들의 본부와 막대한 보호 지역을 가지고 있다. 이 놀라운 구역의 중앙에 있는 거처는 물질 아들들의 주요 성전이다.
45:5.2 (515.1) 아담들의 영토는 예루셈에서 새로이 도착한 자들 모두에게 흥미를 끄는 초점이다. 이것은 1천 중심으로 이루어진 엄청난 지역이다. 하지만 물질 아들과 딸들의 가족은 각자, 그 구성원이 공간의 진화 세계에서 근무하려고 떠날 때까지, 또는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생애를 시작할 때까지, 바로 그 가족의 사유지에서 산다.
45:5.3 (515.2) 이러한 물질 아들은 진화하는 우주의 여러 훈련 구체에서 발견되는 바, 남녀로 번식하는 가장 높은 부류의 존재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물질로 되어 있다. 행성 아담 및 이브들조차 사람 사는 세계의 필사 민족들의 눈에 뚜렷이 보인다. 이 물질 아들들은 위로 신 및 완전함으로부터, 밑으로 인류와 물질 존재까지 연결되는 성격자들의 계통에서 마지막이자 육체인 고리이다. 이 아들들은 사람이 사는 여러 세계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행성 영주와 그 영역의 물질 인간 사이에 서로 접촉할 수 있는 중개자를 마련해 준다.
45:5.4 (515.3) 구원자별에서 천년만의 등록이 최근에 있었을 때, 네바돈에는 시민 자격을 가진, 물질 아들과 딸 161,432,840명이 여러 지역 체계 서울에 있다고 기록되었다. 물질 아들의 수는 다른 체계마다 다르며, 그들의 수는 자연히 번식함으로 항상 늘어난다. 자식 낳는 일을 할 때, 그들은 접촉하는 인격자들의 개인적 소망을 전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또한 상급 통치 단체와 자문 회의의 지도를 받는다.
45:5.5 (515.4) 이 물질 아들과 딸들은 예루셈 및 관계된 여러 세계에서 영구 주민이다. 그들은 예루셈에서 광대한 사유지를 차지하고, 서울 구체의 지역 관리에 아낌없이 참여하며, 중도자와 승천자들의 도움을 받아, 실질적으로 모든 일상(日常) 사무를 처리한다.
45:5.6 (515.5) 자식을 낳는 이 아들들은 멜기세덱의 방법을 좇아서, 예루셈에서 자치(自治)하는 이상을 가지고 실험하는 것이 허락되며, 이들은 아주 높은 부류의 사회를 만들고 있다. 상급의 아들들은 그 영역의 거부권 기능을 유보하고 있지만, 거의 모든 점에서 예루셈의 아담 족속은 보통 선거권과 대의 정치로 자치한다. 그들은 언젠가 거의 완전히 자치할 허가를 받고 싶어한다.
45:5.7 (515.6) 물질 아들들이 베푸는 봉사의 특징은 대체로 그들의 나이에 따라 결정된다. 그들은 구원자별의 멜기세덱 대학에 입학할 자격이 없지만―이것은 물질적이고 보통은 어떤 행성에만 국한되어 있다―그런데도 나이 어린 세대의 물질 아들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멜기세덱들은 각 체계의 본부에서 우수한 선생들로 이루어진 교수진을 유지한다. 이 어린 물질 아들과 딸들의 성장을 위하여 마련된 교육 및 영적 훈련 체계는 규모ㆍ기술ㆍ실용 면에서 완전의 절정이다.
45:6.1 (515.7) 물질 아들과 딸들은 그 자손과 더불어, 하늘 가는 모든 필사자의 호기심을 반드시 일으키고 눈을 끄는, 매력 있는 광경을 연출한다. 그들은 남녀 구별이 있는 바로 너희의 물질 종족들과 아주 비슷해서 너희는, 생각에 잠기게 하고 또한 친하게 접촉하는 시간을 차지하는 많은 공통된 관심거리를 발견한다.
45:6.2 (515.8) 필사 생존자들은 체계의 서울에서, 이 우수한 반(半)육체적이고 남녀 구분이 있는 인간의 생활 습관과 행동을 지켜보고 연구하면서 여가의 상당한 부분을 보낸다. 이는 이 예루셈 시민들이 본부 세계에서 시민 자격을 얻을 때부터 에덴시아를 향해 떠날 때까지, 그들이 살아남은 필사자에게 직접 후원자이자 상담자이기 때문이다.
45:6.3 (516.1) 일곱 저택 세계에서 하늘 가는 필사자는 기원이 있던 세계에서 어떤 체험의 결핍을 겪었더라도, 그것이 유산(遺産)이든 환경이든, 또는 육체를 입은 생애가 불운하게 때 이르게 끝났기 때문이든 상관 없이, 이를 메울 풍부한 기회가 주어진다. 필사자의 성생활과 그에 따르는 조정을 제외하고,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참말이다. 수많은 필사자가 그들이 태어난 구체에서 상당히 평범한 성관계에서 생기는 훈련으로부터 특별히 덕을 보지 못하고서 저택 세계에 다다른다. 저택 세계의 체험은 대단히 개인적인 이 결핍을 메울 기회를 거의 마련해 줄 수 없다. 육체적 의미에서 성경험은 이 승천자들에게 지난 일이다. 그러나 물질 아들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개별적으로, 그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성경험이 모자라는 필사자는 결핍된 사회적ㆍ지적ㆍ정신적ㆍ감정적 국면을 메울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환경이나 그릇된 판단으로 인하여 진화 세계에서 유익한 성관계의 혜택을 빼앗긴 모든 그러한 인간에게, 체계 서울에서 영구히 거주하는 훌륭한 아담의 성생물과 밀접하고 사랑스러운 관계를 가지면서, 필수인 이 필사자 체험을 얻을 기회가 여기 체계 서울에서 충분히 주어진다.
45:6.4 (516.2) 세계에서 진화하는 한 아이에게 부모가 되는 관계를 얻는 숭고한 체험이나 그와 비슷하고 대등한 어떤 다른 체험이 없이, 살아남는 어떤 필사자나 중도자나 세라핌도 파라다이스로 올라가고, 아버지께 도달하고, 최후 군단으로 소집될 수 없다. 아이와 부모의 관계는 우주의 아버지와 그의 우주 아이들에 관한 핵심 개념에 근본이다. 따라서, 그러한 체험은 어떤 승천자의 체험적 훈련에도 빠뜨릴 수 없게 된다.
45:6.5 (516.3) 하늘 가는 중도인(中道人)과 진화하는 세라핌은 체계 본부의 물질 아들딸과 관계를 가지면서 이 부모 체험을 거쳐야 한다. 이처럼 자식을 낳지 않은 그러한 승천자는 예루셈의 아담과 이브들이 그 후손을 기르고 훈련시키는 것을 도와줌으로 부모의 체험을 얻는다.
45:6.6 (516.4) 진화 세계에서 부모 경험을 겪지 못하고 살아남은 필사자는 누구나 예루셈의 물질 아들들의 집에서 머무르는 동안, 이 훌륭한 아버지와 어머니들에게 부모의 동료로서, 이 필수 훈련을 받아야 한다. 예루셈의 첫째 과도기 문화 세계의 체계 육아원에서 그러한 필사자가 부족한 점을 메울 수 있는 경우를 제쳐놓고, 이것은 참말이다.
45:6.7 (516.5) 최후자 세계에 있는 어떤 상물질 성격자들이 사타니아의 이 시험 육아원을 유지하며, 그 행성의 절반은 아이를 기르는 이 작업에 전념한다. 개인으로서 영적 지위를 얻기 전에 진화 세계에서 죽은 자손들과 같이, 살아남는 필사자의 어떤 자녀들이 여기서 접수되고 다시 조립된다. 친부모 가운데 하나가 승천하는 것은, 그 영역의 그러한 필사 아이가 체계의 최후자 행성에서 다시 인격화되고, 거기서 나중에 자유 의지로 선택함으로, 그가 필사자로 승천하는 부모의 길을 따르는가 따르지 않는가 보여주도록 허락받는 것을 보장한다. 남녀 구별이 없는 것을 제외하고, 여기서 아이들은 출생한 세계에서 가졌던 모습과 마찬가지로 보인다.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생활 체험을 겪은 뒤에, 필사자 종류와 같이 자식 낳는 일은 전혀 없다.
45:6.8 (517.1) 최후자 세계의 시험 육아원에 하나나 그 이상의 아이를 가지고 있고 필수인 부모 체험이 부족한 저택 세계 학생들은, 여러 저택 세계에서 하늘 가는 임무로부터 최후자 세계로 임시 이동하도록 멜기세덱의 허가를 신청해도 좋다. 거기서 그들에게 자신의 아이들과 다른 아이들에게 준(準)부모 자격으로 활동할 기회가 주어진다. 부모로서 수고하는 이 근무는, 물질 아들과 딸들의 여러 가족에서 그러한 승천자가 겪어야 하는 훈련의 절반을 마친 것으로 예루셈에서 나중에 인정을 받는다.
45:6.9 (517.2) 시험 육아원 자체는 1천 쌍의 물질 아들과 딸의 감독을 받는데, 이들은 자기 계급의 예루셈 거류지로부터 온 자원자이다. 대체로 대등한 수의 부모로 자원하는 중간 한계자 집단이 그들을 직접 도와주며, 이 부모들은 사타니아의 중간 한계자 세계로부터, 구원자별의 최후자 구체들 사이에 있는 그들의 여러 특별 보호 세계에서 지내는, 밝혀지지 않은 운명으로 가는 도중에, 이 봉사를 베풀려고 여기서 멈춘다.
45:7.1 (517.3) 멜기세덱들은 그 큰 선생 집단―얼마큼 영답게 변화된, 의지를 가진 인간 및 다른 존재들―의 지도자이며, 이 선생들은 예루셈 및 그와 관련된 여러 세계에서, 그러나 특히 일곱 저택 세계에서, 매우 합당하게 활동한다. 이 세계들은 사람을 붙들어 두는 행성이며, 거기서 육체를 입은 생애에 깃드는 조절자와 융합하지 못한 필사자들이, 더 도움을 받으려고, 그리고 영적 달성을 위한 수고, 죽음으로 때 이르게 중단되었던 바로 그 수고를 계속하는 연장된 기회를 가지려고, 일시적 모습을 입고 회복된다. 또는 유전적 장애나 불리한 환경이나 주위 환경이 우연히 겹치는 따위의 어떤 다른 이유로 이 혼의 달성을 마치지 않으면, 그 이유와 상관 없이, 목적에 충실하고 영적 자격이 있는 자는 누구나, 자신으로서, 계속하는 여러 행성에 자신이 온 것을 깨달을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영원한 생애의 기본을 통달하는 것, 육체를 입은 일생에 얻을 수 없었거나 얻지 못한 특성을 터득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45:7.2 (517.4) 찬란한 저녁별(그리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그 동격자들)은, 멜기세덱들이 후원하는 사업을 포함하여, 우주의 여러 교육 사업에서, 빈번히 선생으로서 근무한다. 가르치는 삼위일체 아들들도 또한 함께 일하며, 진보 훈련을 받는 이 여러 학교에서 파라다이스의 완전한 솜씨를 나누어준다. 그러나 이 모든 활동은 하늘 가는 필사자의 승진에만 순전히 전념하지는 않는다. 다수는 네바돈의 본토 영 성격자를 진보시키는 훈련에 똑같이 몰두한다.
45:7.3 (517.5) 멜기세덱 아들들은 예루셈에서 30개가 넘는 다른 교육 중심을 지도한다. 이 여러 훈련 학교는 자기 평가 학부(學部)로부터 시작해서 예루셈 시민 학교들에서 끝난다. 거기서 물질 아들과 딸들은 멜기세덱 및 다른 자들과 합세하여, 살아남은 필사자들이 대의 정치의 높은 책임을 맡도록 자격을 갖추게 하려고 최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 우주 전체가, 대표하는 계획에 근거하여 조직되고 관리된다. 대의 정치는 완전하지 않은 존재들 사이에서 자치(自治)하는 신성한 이상이다.
45:7.4 (517.6) 우주 시간으로 1백년마다 각 체계는 별자리의 입법 회의에서 심의할 대표 10명을 뽑는다. 그들은 1천명으로 이루어진 예루셈 회의에서 선출되는데, 이것은 이양(移讓)되거나 지정된 모든 그러한 문제에서 체계 집단을 대표하는 임무가 주어진, 선출되는 단체이다. 대표나 다른 위임자는 모두 1천명의 유권자로 이루어진 회의에서 선출되며, 이 1천 유권자 집단을 구성하는 모든 자와 마찬가지로, 멜기세덱 행정 학부, 최고 학교의 졸업생이어야 한다. 이 학교는 멜기세덱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최근에는 최후자들의 도움을 받는다.
45:7.5 (518.1) 예루셈에는 선출되는 단체들이 많이 있고, 이따금 세 계급의 시민―물질 아들딸, 세라핌과 (중도인을 포함하여) 그 동료, 그리고 하늘 가는 필사자들―이 이 여러 단체에게 권한을 주려고 투표한다. 대표하는 영예를 얻는 지명을 받기 위해서, 후보자는 멜기세덱의 여러 행정 학교에서 필수인 인정을 받았어야 한다.
45:7.6 (518.2) 예루셈에는 세 무리의 시민 사이에 보통 선거권이 있지만, 인정받고 공식으로 기록된 상지혜(上知慧)―상물질계의 슬기―를 몸소 소유하는 데 따라서, 다르게 표를 던진다. 어떤 한 성격자가 예루셈 선거에서 던지는 투표의 가치는 1부터 1천까지 이른다. 예루셈 시민들은 이처럼 상지혜를 얻은 것에 따라서 분류된다.
45:7.7 (518.3) 때때로 예루셈 시민들은 검사하는 멜기세덱들 앞에 나타나며, 검사자들은 그들이 상물질 지혜를 얻은 것을 증명해 준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검사하는 찬란한 저녁별 집단이나 그들이 지명한 자들 앞에 가며, 이들은 영 통찰력을 얻은 정도를 확인한다. 다음에 그들은 24 상담자 및 그 동료들 앞에 나타나는데, 이들은 시민들이 체험으로 남과 사귄 상태를 평가한다. 이 세 가지 요소는 다음에 대의 정치 담당의 시민권 등록자들에게 넘겨지며, 그들은 상지혜 상태를 재빨리 계산하고 그에 따라서 투표 자격을 배정한다.
45:7.8 (518.4) 멜기세덱들의 감독 하에서, 하늘 가는 필사자, 특히 새 상물질 수준에서 인격을 통일하는 데 더딘 자는 물질 아들들에게 맡겨지며, 그러한 부족을 시정하도록 고안된 집중 훈련을 받는다. 이 물질 아들들이 상지혜를 터득한 인격을 달성했음을 증명할 때까지, 하늘 가는 필사자는 아무도 더 광범위하고 다채로운 생애, 별자리에서 사교하는 생애를 향해 가려고 체계 본부를 떠나지 못한다. 이 상지혜 인격은 체험적 관계를 가지면서 싹트는 상물질 생애와 완성된 필사 존재를 통합하는 개성이며, 이 두 가지는 생각 조절자의 전반적 영적 통제로 말미암아 알맞게 섞여진다.
46:0.1 (519.1) 사타니아의 본부 예루셈은 한 지역 체계의 평범한 서울이며, 루시퍼 반란, 그리고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자신을 수여함으로 생긴 수많은 불규칙한 점을 별도로 하고, 예루셈은 비슷한 구체들의 전형(典刑)이다. 너희의 지역 체계는 어떤 험난한 체험을 거쳤지만, 현재 아주 효율적으로 관리되고 있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불화의 결과는, 느리지만 확실히 뿌리가 뽑히고 있다. 질서와 선의가 회복되고 있으며, 예루셈의 조건은 갈수록 너희의 전통에 나오는 하늘 상태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체계 본부가 참으로 20세기에 대다수의 경건한 신자들이 마음 속에 그려왔던 하늘이기 때문이다.
46:1.1 (519.2) 예루셈은 1천 위도(緯度) 구역과 1만 경도(經度) 지대로 나누어져 있다. 이 구체에는 주요 서울이 일곱, 소행정 중심이 70개 있다. 7개의 구역 서울은 다채로운 활동에 관계하며, 체계 군주는 1년에 적어도 한 번 각 서울에 계신다.
46:1.2 (519.3) 예루셈의 표준 마일은 유란시아에서 약 11.2 킬로미터와 대등하다. 표준 무게, “그라단트”는 성숙한 극자(極子)로부터 십진법을 통해서 쌓아올렸고, 너희의 무게로 거의 정확하게 300그람을 대표한다. 사타니아의 하루는 유란시아 시간으로 3일에서 1시간, 4분 15초가 모자라며, 이것은 예루셈이 자체의 축을 한 번 회전하는 시간이다. 체계의 1년은 예루셈의 1백 일이다. 으뜸 생시계(生時計)들이 체계의 시간을 방송한다.
46:1.3 (519.4) 예루셈의 에너지는 훌륭하게 통제되며, 여러 지대(地帶)의 경로를 따라 구체의 둘레를 순환한다. 이 경로는 우주의 에너지 전하로부터 직접 공급받고 물리 통제사들이 솜씨 있게 그 경로를 관리한다. 이 에너지가 물리적으로 전도(傳導)되는 경로를 통과하는 데 대한 자연 저항은 예루셈의 한결같은 기온을 만드는데 필요한 열을 낸다. 빛이 한창 밝을 때 기온은 화씨로 약 70도에 유지되고, 한편 빛이 물러나는 기간에는 기온이 50도 조금 밑으로 떨어진다.
46:1.4 (519.5) 예루셈의 조명 방법은 너희가 그다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무런 낮과 밤이 없고, 더운 계절과 추운 계절이 없다. 동력 변압자들은 10만 중심을 유지하며, 거기서부터 묽게 된 에너지가 행성의 대기(大氣)를 통해서 위로 발사되고, 그 구체에서 전기를 띤 공기 천장에 이를 때까지 어떤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나서 아침 10시에 태양이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을 때, 유란시아 태양 빛의 강도쯤 되는 부드럽고 체질하는 고른 빛으로서, 이 에너지는 거꾸로, 밑으로 반사된다.
46:1.5 (520.1) 그러한 조명 조건 하에서, 광선은 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듯하지 않다. 이 광선은 그저 하늘로부터 새어나오며, 공간의 모든 방향으로부터 똑같이 방사되어 나온다. 이 빛이 열을 아주 적게 담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 그 빛은 자연의 태양 빛과 아주 비슷하다. 따라서 너희는 그러한 본부 세계들이 우주에서 빛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예루셈은 유란시아에 아주 가까이 있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46:1.6 (520.2) 예루셈의 상부 이온 층으로부터 거꾸로 땅에 이 빛 에너지를 반사하는 가스는 유란시아의 상부 공기 지대에 있는 가스와 아주 비슷하며, 후자는 너희의 이른바 북극광의 오로라 현상과 관계된다. 하지만 오로라는 다른 원인으로 생긴다. 유란시아에서 지표의 방송(放送) 파장이 도망가지 못하게 막는 것은 바로 이 가스 방패이며, 이것은 파장이 직접 바깥으로 비행하면서 이 가스 지대를 때릴 때, 그 파장을 땅으로 반사한다. 이 방법으로 방송이 너희 세계를 둘러싼 공기를 통하여 여행하는 동안, 방송은 지표 가까이 붙잡혀 있다.
46:1.7 (520.3) 그 구체의 이러한 조명은 예루셈 하루의 4분의 3동안 한결같이 유지되고, 그리고 나서 빛이 최소로 비칠 때, 맑은 밤에 너희의 보름달 빛 정도가 될 때까지, 차츰 빛이 약해진다. 이 때는 온 예루셈에서 고요한 시간이다. 휴식하고 회복하는 이 기간에 오로지 방송 수신소들만 작용한다.
46:1.8 (520.4) 예루셈은 가까이 있는 몇 개의 별로부터 희미한 빛―일종의 밝은 별빛―을 받지만, 이에 의존하지 않는다. 예루셈과 같은 세계들은 별의 동요로 생기는 변화에 지배되지 않으며, 그런 세계는 식어가거나 죽어 가는 별의 문제에 부닥치지도 않는다.
46:1.9 (520.5) 일곱 과도기 연구 세계 및 그에 속한 49개 위성은 예루셈의 기법으로 따듯하게 유지되고, 빛을 받고, 에너지와 물을 공급받는다.
46:2.1 (520.6) 예루셈에서 너희는 유란시아와 진화된 다른 세계에서 보는 험난한 산맥이 없어 서운할 터인데, 지진도 없고 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미려한 산지와 기타 지형과 풍경의 독특한 변화를 즐길 것이다. 예루셈의 거대한 지역이 “자연 상태”로 보존되어 있으며, 그러한 구역의 웅장함은 인간의 상상력을 훨씬 뛰어 넘는다.
46:2.2 (520.7) 작은 호수가 몇천개 있지만 거세게 흐르는 강이나 광활한 대양이 하나도 없다. 어느 건축 세계에도 비가 전혀 내리지 않고, 폭풍이나 눈보라도 없지만, 빛이 약해짐으로 기온이 가장 낮아질 때 습기가 응축되어 이슬 맺히는 일이 날마다 일어난다. (세 가스 세계에서 이슬점은 유란시아와 같은 두 가스 행성보다 높다.) 물리적인 식물 생명, 그리고 살아 있는 것들이 있는 상물질 세계는 다 물기가 필요하지만, 물기는 대체로 그 구체 전체에, 아니 산지의 맨 꼭대기까지도 뻗는 지하 순환 체계를 거쳐 공급된다. 이 물 체계는 전적으로 지표 밑에 있지는 않은데, 예루셈의 반짝이는 호수들을 서로 연결하는 많은 운하가 있기 때문이다.
46:2.3 (520.8) 예루셈의 대기(大氣)는 세 가스의 혼합물이다. 이 공기는 유란시아의 대기와 아주 비슷하지만, 거기에 상물질 서열의 생명이 숨쉬는 데 적응된 가스가 보태진다. 이 셋째 가스는 물질 계급의 동물이나 식물이 호흡하는 공기로서 조금도 부적당하지 않다.
46:2.4 (521.1) 수송 체계는 에너지 운동의 순환하는 흐름과 연합되어 있고, 이 주요 에너지 기류는 16킬로미터 간격으로 놓여 있다. 물리적 장치를 조정함으로, 그 행성의 물질 존재들은 1시간에 320킬로미터에서 800킬로미터까지 변하는 속도로 나아갈 수 있다. 수송하는 새들은 1시간에 약 160킬로미터 속도로 날아다닌다. 물질 아들의 비행 장치는 1시간에 약 800킬로미터로 여행한다. 물질 존재와 초기의 상물질 존재는 이 기계적 수송 수단을 이용해야 하지만, 영 성격자는 우수한 물력과 에너지의 영 근원과 연결하여 진행한다.
46:2.5 (521.2) 예루셈 및 그와 관련된 세계들은 네바돈의 건축 구체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10개 표준 분과의 육체적 생명을 부여받고 있다. 예루셈에는 아무런 유기체의 진화가 없으니까 대립하는 생명 형태가 하나도 없고, 살기 위한 투쟁이 전혀 없으며, 적자 생존이 전혀 없다. 오히려 중앙의 신성한 우주에 있는 영원한 세계들의 아름다움ㆍ조화ㆍ완전을 예시하는 창조적 적응이 있다. 이처럼 전부 완전히 창조된 가운데, 하늘 예술가와 그 동료들이 예술적으로 대조해 보여주는 물리적 생명과 상물질 생명이 아주 놀랍게 혼합되어 있다.
46:2.6 (521.3) 예루셈은 정말로 천국의 영광과 웅장함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설명하려 애쓰더라도, 너희는 결코 이 영화로운 건축 세계들에 관하여 적당한 관념을 얻기를 바랄 수 없다. 너희 세계에 있는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고, 게다가 예루셈에 있는 사물은 유란시아의 것들을 아주 초월하기 때문에, 비교가 괴상할 지경이다. 너희가 실제로 예루셈에 다다를 때까지, 너희는 여러 하늘 세계에 관하여 참된 개념과 비슷한 어떤 것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체계 서울에서 다가오는 너희의 체험을 우주ㆍ초우주ㆍ하보나의 더욱 먼 훈련 구체들에 너희가 언젠가 도착하는 것과 견주어 볼 때, 이것은 그리 먼 앞날이 아니다.
46:2.7 (521.4) 예루셈의 공업 지역, 곧 실험 지역은 광대한 영토이며, 연기 나는 굴뚝이 하나도 없으니까, 유란시아 사람들은 도저히 알아보지 못할 영토이다. 그런데도 이 특별 세계들과 관련된 복잡한 물질 경제가 있고, 가장 경험 있는 너희의 화학자와 발명가들을 놀라게 하고, 아니 경외하도록 만들 만큼, 기계 기술과 물리적 성취가 완전하다. 파라다이스로 가는 여행에서 잠시 멈추어 이 첫째 구금 세계가 영적이기보다 훨씬 더 물질적인 것을 생각해 보아라. 예루셈과 그에 속하는 여러 과도기 세계에서 너희가 머무르는 동안 내내, 승진하는 영 존재로서 사는 너희의 후기 생명보다, 너희는 물질적인 것으로 이루어진 지상(地上) 생명과 훨씬 더 가깝다.
46:2.8 (521.5) 천사산은 예루셈에서 가장 높은 고지인데 높이가 거의 4,600미터가 되며, 모든 수송 세라핌이 출발하는 곳이다. 행성의 인력(引力)을 피하고 공기의 저항을 이기는 시발 에너지를 마련하려고 수많은 기계적 개발품이 사용된다. 빛이 있는 동안 죽, 그리고 이따금 빛이 후퇴하는 기간까지 늦도록, 유란시아 시간으로 3초마다 천사 수송기가 떠난다. 수송자들은 유란시아 시간으로 1초에 약 25 표준 마일의[1] [1685] 속도로 뜨며, 그들이 예루셈으로부터 22,400킬로미터가 넘게 멀리 떨어질 때까지 표준 속도에 도달하지 않는다.
46:2.9 (521.6) 수송기들은 수정(水晶) 들판, 이른바 유리 바다에 착륙한다. 이 지역 둘레에는 천사 수송으로 공간을 통과하는 여러 계급의 존재들을 받는 접대소들이 있다. 학생 방문자들을 받는, 극지의 수정으로 된 접대역 가까이에서 너희는 진주 관측소에 올라가서, 본부 행성 전체의 엄청난 지도, 돋을새김으로 만든 지도를 보아도 좋다.
46:3.1 (522.1) 초우주 방송과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방송은 구원자별과 연결하여 극지의 수정, 유리 바다를 이용하는 기법으로 예루셈에서 수신된다. 이 네바돈 바깥의 통신을 수신하는 시설 외에도, 세 가지 다른 집단의 수신소(受信所)가 있다. 따로 있지만 세 동그라미 집단의 수신소들은 여러 지역 세계에서, 별자리 본부에서, 그리고 지역 우주의 서울에서 오는 방송을 수신하도록 조절된다. 이 모든 방송은 중앙에 방송하는 원형 극장에 와 있는 모든 종류의 존재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자동으로 전시된다. 예루셈에서 하늘 가는 필사자가 몰두하는 모든 것 가운데, 끝없이 흐르는 우주 공간 보고서를 듣는 것보다 더 마음을 빼앗고 열중하게 하는 것은 없다.
46:3.2 (522.2) 이 예루셈 방송을 받는 수신소는 한 거대한 원형 극장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것은 유란시아에서 대체로 알려지지 않은 반짝이는 물질로 지어졌고, 수많은 영 존재들을 받아들이는 외에도, 50억이 넘는 존재―물질 존재와 상물질 존재―를 앉힐 수 있다. 방송국에서 우주의 복지와 상태에 관하여 소식을 들으면서 여가를 거기서 보내는 것은 온 예루셈이 가장 좋아하는 오락이다. 이것은 빛이 물러나는 기간에 줄어들지 않는 유일한 행성 활동이다.
46:3.3 (522.3) 방송을 수신하는 이 원형 극장에서 구원자별의 소식은 계속 흘러 들어온다. 근처에는, 최고자인 별자리 아버지들이 에덴시아에서 하시는 말씀이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수신된다. 정기적으로 유버르사의 보통 방송과 특별 방송은 구원자별을 통해서 중계되며, 파라다이스의 통신문이 수신될 때 주민 전체가 유리 바다 둘레에 모이는데, 유버르사 친구들이 파라다이스의 방송 기술에 반영 현상을 더하기 때문에, 귀에 들리는 것이 모두 눈에 보이게 된다. 이 방법으로 살아남은 필사자들이 영원한 모험을 하면서 안으로 여행하는 동안에, 높아지는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계속해서 미리 맛볼 기회가 주어진다.
46:3.4 (522.4) 예루셈의 송신소(送信所)는 그 구체의 반대 극에 자리잡고 있다. 개별 세계에 보내는 방송은 모두, 이따금 천사장의 회로 위로 목적지까지 직접 가는 미가엘의 통신문을 제외하고, 체계 서울에서 중계된다.
46:4.1 (522.5) 예루셈의 상당 부분은 거주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고, 한편 체계 서울의 다른 부분들은 사람이 사는 619개 구체, 56개의 과도기 문화 세계, 그리고 체계 서울 자체의 사무 감독에 관계된 필요한 행정 활동에 배치된다. 예루셈과 네바돈에서 이 배치는 다음과 같이 설계되어 있다:
46:4.2 (522.6) 1. 동그라미―비원주민이 거주하는 지역.
46:4.3 (522.7) 2. 정사각형―체계의 집행 및 행정부 지역.
46:4.6 (522.10) 체계의 활동을 동그라미ㆍ정사각형ㆍ직사각형ㆍ삼각형으로 이렇게 배치하는 것은 네바돈의 모든 체계 서울에서 공통된다. 다른 우주에서는 전혀 다른 배치가 유행할 수도 있다. 이것은 창조 아들들의 다양한 계획에 따라서 결정된다.
46:4.7 (523.1) 이 거주 지역과 행정 지역에 관한 우리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물질 아들들, 곧 예루셈의 영구 시민의 광활하고 아름다운 소유지를 전혀 계산에 넣지 않았고, 다른 수많은 매력있는 계급의 영 생물과 영에 가까운 생물도 언급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예루셈은 체계 활동을 위하여 고안된 영(靈) 일꾼들의 유능한 봉사를 누린다. 이 존재들은 초물질 거주자와 방문객들을 돕기 위하여 영적 봉사에 전념한다. 그들은 놀라운 무리, 총명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의 무리이고, 모든 상물질 창조를 유지하고 치장하기 위하여 수고하는 상급 상물질 생물 및 상물질 조수들에게 과도기에 돕는 자이다. 그들은 중도인(中道人)이 유란시아에서 하는 역할을 예루셈에서 하며, 돕는 중도자들은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서 활동한다.
46:4.8 (523.2) 체계의 서울은 물질ㆍ상물질ㆍ영, 모두 세 단계의 우주 존재를 거의 완전히 전시하는 유일한 세계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네가 물질이나 상물질, 또는 영 성격자인가와 상관 없이, 너는 예루셈에서 편안한 느낌을 가질 터이고, 또한 중도인과 물질 아들과 같은 통합된 존재들도 그렇게 느낀다.
46:4.9 (523.3) 예루셈은 물질 형태와 상물질 형태, 이 두 가지의 큰 건물들이 있고, 한편 순전한 영적 지대의 치장은 조금도 아름다움이나 충만함이 못하지 않다. 예루셈의 경이로운 물질 장비에 해당하는 상물질 물건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더 나아가서 이 본부 세계의 영적 시설이 더할 나위 없이 웅장하고 지극히 완전한 것을 내가 묘사할 수만 있다면! 완전한 아름다움과 충만한 설비에 관하여 상상력이 아주 풍부해도 너희의 개념은 이 웅장함에 도저히 가까이 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예루셈은 하늘 같이 완전한 파라다이스의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에서 겨우 첫 걸음일 뿐이다.
46:5.1 (523.4) 주요 집단의 우주 생명에게 배치된 거주 지역들을 예루셈 동그라미라고 부른다. 이 이야기에서 언급되는 동그라미 집단들은 다음과 같다:
46:5.2 (523.5) 1. 하나님의 아들의 동그라미.
46:5.3 (523.6) 2. 천사 및 상급 영들의 동그라미.
46:5.4 (523.7) 3. 삼위일체의 교육 아들들에게 배치되지 않은, 인간이 삼자일체가 되어 낳은 아들들을 포함하여, 우주 조수들이 사는 동그라미.
46:5.5 (523.8) 4. 물리 통제사들이 사는 동그라미.
46:5.6 (523.9) 5. 중도인을 포함하여, 배치된 하늘 가는 필사자들이 사는 동그라미.
46:5.9 (523.12) 이 여러 거주 집단은 각자 연달아 높아지는 일곱 동심원(同心圓)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들은 모두 같은 방식에 따라서, 그러나 다른 크기로 건축되었고, 다른 물질로 모양을 지었다. 이것들은 모두 멀리 미치는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고, 일곱 동심원 집단마다 이를 완전히 둘러싸는 넓은 산책로를 이루도록 서 있다.
46:5.10 (524.1) 1. 하나님의 아들의 동그라미.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신들이 교제하는 행성, 곧 과도기 문화 세계 중에 하나를 소유하지만, 또한 예루셈에서 이 너른 영토를 차지한다. 하늘 가는 필사자는 그들의 과도기 문화 세계에서 모든 계급의 신다운 아들과 자유로이 섞인다. 거기서 너희는 이 아들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사랑하겠지만, 그들의 사회 생활은 대체로 이 특별 세계와 그 위성들에 국한된다. 그러나 예루셈의 여러 동그라미에서 이 집단의 아들들이 일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상물질 시력의 범위가 굉장하니까, 너희는 아들들의 산책로에서 이리저리 걸어다니고, 그들의 수많은 계급의 흥미 있는 활동을 바라볼 수 있다.
46:5.11 (524.2) 아들들의 이 일곱 동그라미는 동심(同心) 형태이며, 연달아 높아져서, 바깥쪽의 큰 동그라미는 각각 안쪽의 작은 동그라미들을 내려다보며, 각 동그라미는 대중이 산책로로 쓰는 담에 둘러싸여 있다. 이러한 벽은 어렴풋이 빛나는 수정(水晶) 보석으로 지어졌고, 각자의 거주하는 동그라미를 모두 내려다보도록 높게 되어 있다. 이러한 각 벽에 뚫려 있는 많은 문은―5만에서 15만이 되는데―꼭 하나의 진주색 수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46:5.12 (524.3) 아들들의 영토에서 첫째 동그라미는 심판 아들과 그들 개인의 참모진이 차지한다. 이 사법(司法) 담당 아들들이 자신을 수여하고 판결하는 봉사 계획과 그에 직결된 활동이 모두 여기에 집중된다. 또한 바로 이 중심을 통해서 체계의 아보날들은 우주와 접촉을 유지한다.
46:5.13 (524.4) 둘째 동그라미는 삼위일체의 교육 아들들이 차지한다. 이 신성한 영토에서 데이날과 그 동료들은 새로 도착한 1차 서열의 교육 아들들의 훈련을 실시한다. 이 모든 과제에 그들은 찬란한 저녁별의 어떤 동격자 사단(師團)의 유능한 지원을 받는다. 인간이 삼자일체로 낳은 아들들은 데이날 동그라미의 한 구역을 차지한다. 삼위일체의 교육 아들들은 한 지역 체계에서 우주의 아버지의 개인 대표에 아주 가깝다. 그들은 적어도 삼위일체에 기원이 있는 존재이다. 이 둘째 동그라미는 예루셈의 모든 부류에게 특별히 관심을 끄는 지역이다.
46:5.14 (524.5) 셋째 동그라미는 멜기세덱이 차지하는 지역이다. 여기에 체계의 우두머리들이 살고, 이 다능한 아들들의 거의 끝없는 활동을 감독한다. 처음 저택 세계로부터 계속해서, 하늘 가는 필사자의 예루셈 생애 전체를 통하여 멜기세덱들은 양아버지요 늘 계시는 조언자이다. 물질 아들과 딸들이 항상 하는 활동을 제쳐놓고, 멜기세덱이 예루셈에서 지배적 영향이라 말하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46:5.15 (524.6) 넷째 동그라미는 보론다덱, 그리고 달리 집이 마련되지 않은 모든 다른 계급의 방문자 및 관찰자인 아들들의 집이다. 최고자인 별자리 아버지들은 지역 체계에 검열 방문으로 올 때, 이 동그라미에서 거처를 정한다. 체계에서 근무할 때, 지혜 완성자, 신성한 조언자, 우주 검열자들은 모두 이 동그라미에서 거주한다.
46:5.16 (524.7) 다섯째 동그라미는 라노난덱, 곧 체계 군주 및 행성 영주인 아들 계급의 거처이다. 이 영토에서 집에 있을 때, 이 세 무리는 하나같이 섞인다. 체계의 예비군은 이 동그라미에서 유지되고, 한편 체계 군주는 행정 산에서 통치 건물 집단의 중심에 자리잡은 한 성전을 가지고 있다.
46:5.17 (524.8) 여섯째 동그라미는 체계의 생명 운반자들이 머무르는 장소이다. 모든 계급의 이 아들들이 여기에 집합하며, 여기서부터 세계로 임무를 받고서 떠나간다.
46:5.18 (524.9) 일곱째 동그라미는 하늘 가는 아들, 곧 천사 동료와 더불어 체계 본부에서 일시 활동할까 싶은, 배치된 필사자들이 모이는 장소이다. 예루셈 시민 지위 위이면서 최후자 지위 밑에 있는, 왕년(往年)의 필사자는 모두 이 동그라미에 본부를 가진 무리에 속한다고 간주된다.
46:5.19 (525.1) 아들들을 위하여 예비한 이 둥그런 거주지는 거대한 지역을 차지하며, 1천 9백년 전까지, 그 중심에 커다란 트인 공간이 있었다. 지금은 미가엘 기념관이 이 가운데 지역을 차지하는데, 이것은 약 5백년 전에 완성되었다. 495년 전에, 이 성전이 봉헌되었을 때, 미가엘이 친히 자리에 계셨고, 온 예루셈은 주아들이 유란시아, 곧 사타니아에서 가장 작은 행성에 자신을 수여했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미가엘 기념관은 이제, 미가엘의 수여로 생겨난, 수정된 체계 관리에 포함된 모든 활동의 중심이며, 이것은 요즘에 옮긴 구원자별 활동의 대부분을 포함한다. 그 기념관의 직원은 1백만이 넘는 성격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46:5.20 (525.2) 2. 천사의 동그라미. 아들들의 거주 지역처럼, 이 천사의 동그라미들은 연달아 높아지는 일곱 동심원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것들은 각자 안의 지역을 내려다본다.
46:5.21 (525.3) 천사의 첫째 동그라미는 본부 세계들에 주둔할지 모르는, 무한한 영의 고등 성격자―외톨 사자와 그 동료―들이 차지한다. 사자 무리, 법률 고문, 동반자, 검열자, 기록자들이 때때로 예루셈에서 어쩌다 활동할지 모르는데, 둘째 동그라미는 이들이 차지한다. 고등 계급 및 집단의 봉사하는 영들이 셋째 동그라미를 차지한다.
46:5.22 (525.4) 넷째 동그라미는 행정 세라핌이 차지하며, 사타니아와 같은 지역 체계에서 수고하는 세라핌들은 “수없이 많은 천사의 무리”이다. 다섯째 동그라미는 행성의 세라핌이 차지하고, 한편 여섯째는 과도기 봉사자의 집이다. 일곱째 동그라미는 어떤 밝혀지지 않은 계급의 세라핌이 머무르는 구체이다. 이 모든 집단의 천사 기록자들은 동료들과 함께 머무르지 않고, 예루셈 기록 전당(殿堂)에 주거가 있다. 모든 기록은 3중 보관실에 3중으로 보존된다. 체계 본부에서, 기록은 반드시 물질ㆍ상물질ㆍ영, 이 세 가지 형태로 보존된다.
46:5.23 (525.5) 이 일곱 동그라미는 예루셈의 둥그런 전시에 둘러싸여 있고, 그 둘레는 56,000킬로미터이다. 이것은 사타니아의 사람 사는 세계들의 진보 상태를 발표하는 데 전용으로 쓰이며, 개별 행성의 최신 조건을 참으로 나타낼 수 있도록 항상 수정된다. 초기의 방문 중에 너희에게 연장된 여가가 허락될 때, 천사의 동그라미들을 내려다보는 이 광대한 산책로가 너희 눈을 끄는 첫 예루셈 광경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46:5.24 (525.6) 예루셈의 토착민이 이 여러 전시(展示)를 담당하지만, 그들은 에덴시아로 가는 길에 예루셈에서 머무르는 승천자, 사타니아의 여러 세계에서 온 승천자들의 도움을 받는다. 행성의 조건과 세계의 진보를 묘사하는 것은 여러 방법으로 이루어지며, 더러는 너희에게 알려져 있지만, 대체로 유란시아에서 알려지지 않은 기술이다. 이 전시는 이 방대한 벽의 바깥 가장자리를 차지한다. 산책로의 나머지는 거의 전체가 열려 있고, 상당히, 웅장하게 꾸며져 있다.
46:5.25 (525.7) 3. 우주 조수의 동그라미. 이 동그라미들은 거대한 중앙 공간에 자리잡은 저녁별들의 본부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갈란시아의 체계 본부가 있는데, 갈란시아는 이 강력한 초월 천사 집단의 부단장이며, 모든 올라온 저녁별 중에서 처음으로 임명받은 자이다. 이 본부는 최근에 건축된 것들에 속하지만, 예루셈의 모든 행정 구역에서 가장 장엄한 것 중의 하나이다. 이 중심은 지름이 80킬로미터이다. 갈란시아 본부는 한 기둥으로 된, 부어서 만든 수정(水晶)이며, 통째로 투명하다. 상물질 존재와 물질 존재들은 물질이며 상물질인 이 수정들을 다 높이 평가한다. 창조된 저녁별들은 예루셈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며, 그러한 성격 바깥의 속성을 소유한다. 그들의 활동 중에 아주 많은 부분이 구원자별로부터 여기로 옮겨진 뒤로, 온 세계가 영적 면에서 향기롭게 되었다.
46:5.26 (526.1) 4. 물리 통제사의 동그라미. 다채로운 계급의 물리 통제사들은 광대한 동력의 전당(殿堂) 둘레에 동심원으로 배치되어 있고, 그 전당 안에서 상물질 동력 감독들의 우두머리와 관련하여, 체계의 동력 우두머리가 주관한다. 이 동력의 전당은 예루셈에서 하늘 가는 필사자와 중도인에게 금지된 두 구역 중의 하나이다. 다른 구역은 물질 아들의 지역에 있는 비물질화 구역, 일련의 실험실이며, 여기서 수송 세라핌들이 물질 존재를 상물질 계급의 존재와 아주 비슷한 상태로 변화시킨다.
46:5.27 (526.2) 5. 하늘 가는 필사자의 동그라미. 하늘 가는 필사자의 여러 동그라미에서 중앙 지역은, 체계에서 사람 사는 세계들을 대표하는 619채의 행성 기념관 집단이 차지하고 있는데, 이 구조물은 정기적으로 큰 변화를 겪는다. 때때로, 자기네 행성 기념관들을 특정하게 개조하거나 추가하는 것에 찬성하는 것은 각 세계로부터 온 필사자의 특권이다. 유란시아 구조물 안에 지금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 전당 619채의 중심을 에덴시아와 그에 딸린 많은 승천 문화 세계의 기본 모형이 차지한다. 이 모형은 지름이 64킬로미터이고, 에덴시아 체계를 실제 크기로 재생한 것이며, 모든 세부가 원본 그대로이다.
46:5.28 (526.3) 승천자들은 예루셈에서 즐겁게 수고하며, 다른 무리들의 기술을 지켜보는 것을 기뻐한다. 이 여러 동그라미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이 온 예루셈이 전부 관찰하도록 열려 있다.
46:5.29 (526.4) 그러한 세계의 활동은 일ㆍ진보ㆍ놀이, 이 세 가지 다른 종류가 있다. 다시 말하면, 이 활동은 봉사ㆍ연구ㆍ휴식이다. 복합된 활동은 사회적 교제, 집단 흥행, 신성한 예배로 구성된다. 다양한 무리의 성격자들, 자신의 동료와 아주 다른 계급들과 섞이는 데 큰 교육적 가치가 있다.
46:5.30 (526.5) 6. 우대 거류지의 동그라미. 거대한 세 구조물이 우대 거류지의 일곱 동그라미를 장식하는데, 예루셈의 광대한 천문 관측소, 사타니아의 거대한 예술 화랑, 그리고 회상 지도자들의 거창한 집회실, 곧 휴식과 오락에만 몰두하는 상물질 활동이 있는 극장이다.
46:5.31 (526.6) 하늘 예술가들은 씨앗 일꾼들을 지휘하고, 모든 공공 집회 장소에 널려 있는 창조적 장식과 기념관 집단을 마련해 준다. 이 예술가들의 작업장은 이 놀라운 세계에서 비할 데 없는 모든 구조물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것들에 속한다. 다른 여러 우대 거류지는 넓고 아름다운 본부를 유지한다. 이 건물들 중의 다수는 온전히 수정(水晶) 보석들로 지어져 있다. 건축 세계는 모두 수정, 그리고 이른바 귀금속으로 널려 있다.
46:5.32 (527.1) 7. 최후자의 동그라미들은 중심에 독특한 구조물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 빈 성전은 네바돈에 두루 어느 체계 본부 세계에나 발견된다. 예루셈에 있는 이 건축물은 미가엘의 휘장(徽章)으로 봉인되어 있고, 그 휘장에는 이 글이 적혀 있다. “제7 단계의 영에게―영원한 배치에―봉헌되지 않았음.” 가브리엘은 이 신비의 성전에 봉인을 찍었는데, 밝은 아침별이 붙여 놓은 군주의 봉인을 미가엘 외에 아무도 깨뜨릴 수 없고, 또 깨뜨리면 안 된다. 너희가 그 신비를 꿰뚫어보지는 못할지 모르지만, 언젠가 너희는 이 고요한 성전을 들여다볼 것이다.
46:5.33 (527.2) 예루셈의 기타 동그라미: 이 주택 동그라미들 외에도, 예루셈에는 수많은 다른 지정된 거처가 있다.
46:6.1 (527.3) 체계의 집행 및 행정을 담당하는 부문들은 1천 개의 엄청난 분과(分課) 정사각형 안에 자리잡고 있다. 각 관리 단위는 1백 하위 분과로 나누어지고, 이것은 각각 10개의 하위 집단으로 되어 있다. 이 1천 정사각형은 10개의 대부문으로 집단을 이루며, 따라서 다음 10 관리 분과를 이룬다:
46:6.2 (527.4) 1. 물리적 유지와 물질적 개선, 곧 물리적 동력 및 에너지의 분야.
46:6.3 (527.5) 2. 중재, 윤리와 행정 판결.
46:6.4 (527.6) 3. 행성 및 지역의 사무.
46:6.5 (527.7) 4. 별자리 및 우주의 사무.
46:6.6 (527.8) 5. 교육과 멜기세덱의 기타 활동.
46:6.7 (527.9) 6. 행성과 체계의 물리적 진보, 사타니아 활동 중에 과학 분야.
46:6.9 (527.11) 8. 순수한 영(靈) 활동과 윤리.
46:6.12 (527.14) 이 구조들은 투명하다. 따라서 학생 방문자들조차 모든 체계 활동을 구경할 수 있다.
46:7.1 (527.15) 예루셈의 1천 직사각형은 본부 행성의 하등 토착 생명이 차지하며, 그 중심에 씨앗 일꾼들의 광대한 둥그런 본부가 자리잡고 있다.
46:7.2 (527.16) 예루셈에서 너희는 경이로운 씨앗 일꾼의[2] [1686] 농업 성과에 놀랄 것이다. 거기서 토지는 대체로 미학 및 치장의 효과를 위하여 경작된다. 씨앗 일꾼들은 본부 세계의 조경(造景) 기술자이며, 예루셈의 빈 공간을 처리하는 독창성과 예술성이 있다. 그들은 땅을 가는 데 동물과 수많은 기계적 장치를 모두 이용한다. 그들 영역의 동력 장치를 이용하고, 하등 동물 창조인 형제, 그들보다 못한 수많은 계급의 형제들을 이용하는 데 머리를 잘 쓰며, 많은 하등 동물이 이 여러 특별 세계에서 그들에게 마련된다. 이 계급의 동물 생명은 지금 대체로, 진화 구체에서 온 하늘 가는 중도인(中道人)들의 지도를 받는다.
46:7.3 (528.1) 씨앗 일꾼에게는 조절자가 깃들지 않는다. 그들은 살아남는 혼을 소유하지 않지만 장수(長壽)를 누리고, 어떤 때는 4만에서 5만 표준년까지 산다. 그들의 수는 엄청나고, 그들은 물질적 봉사가 필요한 모든 계급의 우주 성격자들에게 물리적 봉사를 베푼다.
46:7.4 (528.2) 씨앗 일꾼은 살아남는 혼을 소유하지도 진화하지도 않으며, 비록 성격도 없지만, 그런데도 다시 육신화를 체험할 수 있는 개성을 진화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이 독특한 생물의 육체가 닳아 버리고 나이 들어서 나빠지면, 그 창조자들은 생명 운반자들과 공동으로 일하여, 늙은 씨앗 일꾼들이 다시 거주할 수 있는 새로운 몸을 조립한다.
46:7.5 (528.3) 씨앗 일꾼은 네바돈 우주 전체에서, 이 종류나 어떤 다른 종류의 재육신화를 겪는 유일한 생물이다. 그들은 처음 다섯 보조 지성 영에게만 반응하며, 예배 영과 지혜 영에 민감하지 않다. 그러나 다섯 보조 지성은 총체성, 곧 여섯째 실체 수준과 대등하게 되며, 체험적 신분으로서 지속하는 것은 바로 이 요소이다.
46:7.6 (528.4) 이 쓸모 있고 특별한 생물을 설명하는 데 도무지 비교할 대상이 없다. 이들과 견줄 만한 동물이 진화 세계에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화하는 존재가 아니고, 생명 운반자들이 그들의 현재 모양과 지위로 계획하였다. 그들은 암수로 나누어지며, 늘어나는 인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필요한 대로 번식한다.
46:7.7 (528.5) 그들이 충실한 말과 다정한 개를 통합한 특성을 소유하며, 가장 높은 종류의 침판지보다 높은 지능을 나타낸다고 말하면, 나는 아마도 유란시아 지성인에게 이 아름답고 쓸모 있는 생물의 성품에 대하여 무언가 최선으로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유란시아의 육체적 기준으로 판단하건대, 그들은 아주 아름답다. 그들은 이 건축 세계들에 있는 물질 및 준(準)물질 체류자의 눈길을 끄는 것을 아주 고맙게 여긴다. 그들의 시력은 그들에게―물질 존재 외에도―상물질 존재, 하등 천사 계급, 중도인, 그리고 하등 계급의 영 성격자들 가운데 더러를 알아볼 수 있게 한다. 그들은 무한자를 예배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영원자의 의미도 깨닫지 못하지만, 그들의 주인에 대한 애정을 통하여, 그들의 영역에서 외관상으로 영적 예배에 참여한다.
46:7.8 (528.6) 미래 우주 시대에, 이 충실한 씨앗 일꾼들이 동물 수준의 존재를 벗어나서, 차츰 지적으로 성장하는 가치 있는 진화 운명을, 아니 영적 업적까지도 이룰 것이라 믿는 자들도 있다.
46:8.1 (528.7) 순전히 지역적이고 일상적인 예루셈 사무는 1백 삼각형으로부터 지시를 받는다. 이 단위들은 예루셈의 지역 행정을 포함하는 10채의 놀라운 건물 둘레에 뭉쳐 있다. 그 삼각형들은 체계 본부의 역사를 묘사한 파노라마에 둘러싸여 있다. 현재 이 동그라미 형태로 엮어진 이야기는 22.4킬로미터가 넘게 지워져 있다. 이 구역은 사타니아가 별자리 가족으로 다시 들어오면 회복될 것이다. 이 사건을 위하여 미가엘의 선포에 따라서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졌지만,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법정은 아직 루시퍼 반란 사건의 판결을 끝내지 않았다. 사타니아가 반란 주모자, 곧 빛으로부터 어두움으로 굴러 떨어진, 높이 지음받은 존재들을 거느리고 있는 한, 사타니아는 놀라시아덱의 완전한 친교 관계로 돌아오지 못할지 모른다.
46:8.2 (529.1) 사타니아가 별자리의 울타리로 돌아올 수 있을 때, 그때 그 고립된 세계들을 사람 사는 세계들의 체계 집단으로 다시 받아들이는 것이 고려될 터이고, 그 뒤에 그 나라들은 영적 교통이 있는 영역으로 회복된다. 그러나 유란시아가 체계 회로에 회복된다 하더라도, 너희 체계 전부가 모든 다른 체계로부터 부분적으로 격리하는 놀라시아덱 검역 밑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너희는 여전히 당황할 것이다.
46:8.3 (529.2) 그러나 오래지 않아, 루시퍼와 그 일당의 재판은 사타니아 체계를 놀라시아덱 별자리로 회복할 터이고, 그 뒤에 유란시아와 고립된 다른 구체들은 사타니아 회로에 회복될 것이다. 그러한 세계들은 행성 사이에 서로 통신하고 체계 사이에 교통하는 특권을 다시 누릴 것이다.
46:8.4 (529.3) 모반자들과 반란의 끝이 다가올 것이다. 최상 통치자들은 자비롭고 참을성이 있지만, 계획해서 품어온 악을 다스리는 법은 보편적으로 어김없이 집행된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영원한 소멸이다.
47:0.1 (530.1) 유란시아에 있을 때, 창조 아들은 “아버지의 우주에 있는 많은 저택”에 관하여 말씀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예루셈을 도는 56 세계가 모두 하늘 가는 필사자의 과도기 문화에 집중한다. 그러나 1번 세계의 일곱 위성은 엄밀하게 말하면, 저택 세계로 알려져 있다.
47:0.2 (530.2) 1번 과도기 세계 자체는 아주 승천 활동에만 집중하며, 사타니아에 배치된 최후자 군단의 본부이다. 이 세계는 지금 10만 개가 넘는 최후자 중대(中隊)들을 위하여 본부로서 쓰이며, 각 중대에는 영화롭게 된 존재가 1천 명 있다.
47:0.3 (530.3) 한 체계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될 때, 그리고 저택 세계들이 하나하나 필사자의 훈련소로 사용하는 것이 중지됨에 따라서, 늘어나는 이 최후자 인구가 저택 세계들을 점령하는데, 그 인구는 더 오래 되고 더 높이 완성된 체계에서 늘어나고 있다.
47:0.4 (530.4) 일곱 저택 세계는 상물질 감독자와 멜기세덱들이 책임을 지고 있다. 각 세계에는 예루셈 통치자들에게 직접 보고하는 임시 총독이 있다. 유버르사 화해자들은 각 저택 세계에 본부를 유지하며, 한편 법률 고문의 지역 회합 장소가 인접해 있다. 회상(回想) 지도자와 하늘 예술가는 이 중에 어느 세계에나 집단 본부를 유지한다. 영 일꾼은 2번 저택 세계로부터, 그 이후에 죽 활동하며, 한편 다른 과도기 문화 행성 및 본부 세계와 공통으로, 일곱 세계에 표준 창조인 씨앗 일꾼이 풍부하게 마련된다.
47:1.1 (530.5) 1번 과도기 세계에는 오로지 최후자, 그리고 어떤 무리의 구제된 아이들과 그 보호자들이 거주하지만, 모든 등급의 영 존재, 과도기 필사자, 학생 방문자를 접대할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씨앗 일꾼은 이 세계들에 어디서나 활동하며, 그들이 알아볼 수 있는 모든 존재에게 싹싹한 주인 노릇을 한다. 그들은 최후자에 대하여 어렴풋한 느낌을 가지고 있지만, 최후자를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들은 너희의 현재 육체 상태에서 너희가 천사를 여기는 것과 비슷하게 최후자를 여긴다.
47:1.2 (530.6) 최후자의 세계는 비록 지극히 물리적으로 아름답고 뛰어나게 상물질로 치장된 구체이지만, 활동의 중심에 자리잡은 큰 영(靈) 거처, 곧 최후자의 성전은, 도움받지 않은 물질 눈이나 초기 상물질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에너지 변압자는 이 실체들 가운데 많은 것을 하늘 가는 필사자의 눈에 보이게 해줄 수 있고, 이 문화 구체에서 저택 세계 학생들의 학급 집회가 있을 경우처럼, 때때로 그렇게 활동한다.
47:1.3 (531.1) 저택 세계 체험을 통하여 줄곧, 너희는 파라다이스에 다다른 형제, 영화롭게 된 너희 형제들이 옆에 있다는 것을 어떤 면에서 영적으로 의식하지만, 때때로 본부 거처에서 활동하는 그들을 실제로 파악하는 것은 아주 유쾌하다. 너희가 참된 영 시력을 얻을 때까지 너희는 저절로 최후자를 눈으로 볼 수 없다.
47:1.4 (531.2) 첫째 저택 세계에서, 살아남은 자는 누구나 태어난 행성으로부터 부모 위원회의 요구 조건에 합격해야 한다. 현재 유란시아 위원회는 최근에 도착한, 12쌍의 부모로 이루어져 있고, 그들은 필사자로서 청춘기까지 셋 이상의 아이들을 기르는 체험을 겪은 적이 있다. 이 위원회 근무는 돌아가면서 하는데, 일반적으로 오직 10년 동안이다. 부모 노릇하는 체험에 관하여, 이 위원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자는 누구나, 예루셈에 있는 물질 아들들의 집에서, 또는 최후자 세계에 있는 시험 육아원에서 어느 정도 근무함으로 자격을 더 갖추어야 한다.
47:1.5 (531.3) 그러나 부모 체험과 상관 없이, 시험 육아원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가진 저택 세계의 부모들은 그러한 아이들의 교육과 훈련에 관하여 그 아이들의 상물질 관리자와 함께 일할 온갖 기회가 주어진다. 이 부모들은 1년에 4번까지 거기를 방문하는 여행이 허락된다. 저택 세계의 부모가 최후자 세계로 정기적으로 순례하는 기회에, 그들의 물질 자손을 껴안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하늘 가는 생애 전체에서 가장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장면 중에 하나이다. 한쪽 또는 양쪽 부모가 아이보다 먼저 저택 세계를 떠날 수도 있지만, 얼마 동안 그들은 흔히 같은 시대에 있다.
47:1.6 (531.4) 하늘 가는 필사자는 아무도, 물질 세계에서나, 아니면 나중에 최후자 세계나 예루셈에서, 아이―자신의 아이나 다른 아이―들을 기르는 체험을 피할 수 없다. 어머니와 똑같이 확실하게, 아버지도 이 필수 체험을 거쳐야 한다. 아이의 교양은 대체로 어머니가 할 일이라는 것은, 유란시아에서 현대 민족들이 가진 유감스럽고 잘못된 개념이다. 아이들은 어머니만큼 아버지가 필요하며, 어머니만큼 아버지는 이 부모 체험이 필요하다.
47:2.1 (531.5) 사타니아에 있는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는 학교들은 최후자 세계, 곧 예루셈 과도기 문화 구체들 중에 첫째 구체에 자리잡고 있다. 어린아이를 받는 이 학교들은, 우주 기록부에서 개인 지위를 얻기 전에 공간의 진화 세계에서 죽은 자를 포함하여, 시간 세계에서 온 아이들을 기르고 훈련하는 데 전념하는 사업이다. 그러한 아이의 부모 중 한쪽이나 양쪽이 살아남은 경우에, 운명 수호자는 자기와 관련된 케루빔을 그 아이의 잠재 신분 관리자로 임명하며, 그 케루빔에게 자라지 않은 이 혼을 상물질 세계의 시험 육아원에 있는 저택 세계 선생들의 손에 인도하는 책임을 맡긴다.
47:2.2 (531.6) 저택 세계 선생으로서, 멜기세덱들의 감독 하에, 최후자의 관찰 대상인 피보호자들을 훈련시키려고 그러한 광범위한 교육 시설을 유지하는 자는 바로 이 버림받은 케루빔이다. 최후자의 보호를 받는 자, 하늘 가는 필사자의 이 어린아이들은 자식 낳는 가능성을 제외하고, 반드시 죽을 때와 똑같은 육체 상태 그대로 인격의 모습을 입는다. 이렇게 눈뜨는 것은 첫째 저택 세계에 부모가 도착하는 바로 그 시각에 일어난다. 그리고 나서, 이 아이들은, 그들의 상태 그대로, 때아니게 죽음이 그들의 생애를 끝낸 세계에서 그들이 선택했을 뻔한 그 하늘의 길을 택할 모든 기회가 주어진다.
47:2.3 (532.1) 육아원 세계에서, 보호 받고 있는 아이들은 그들이 조절자를 가졌는가 가지지 않았는가에 따라서 분류되는데, 이는 조절자가 시간 세계와 똑같이, 이 물질 아이들에게 깃들려고 오기 때문이다. 조절자를 받을 나이가 되지 않은 아이들은 다섯 명씩 가족을 이루어서 보살핌을 받고, 이들은 1살 이하부터 대략 5살, 곧 조절자가 도착하는 나이까지이다.
47:2.4 (532.2) 진화하는 세계에서, 생각 조절자를 가졌지만 죽기 전에 파라다이스 생애에 관하여 결심하지 않은 아이들도 모두, 그 체계의 최후자 세계에서 다시 인격화된다. 조절자 없이 도착했지만, 도덕적 선택을 내려야 하는 나이에 이른 뒤에 신비의 훈계자를 나중에 받을 어린이들과 같이, 거기서 그들은 마찬가지로 물질 아들과 그 동료들의 가족 안에서 자란다.
47:2.5 (532.3) 최후자 세계에서, 조절자가 깃드는 아이와 젊은이들은 또한 다섯 명으로 된 가족 안에서 양육되며, 그들은 6살에서 14살에 이른다. 대략 이 가족들은 나이가 6ㆍ8ㆍ10ㆍ12ㆍ14인 아이들로 구성된다. 16살이 된 뒤에 언제라도, 마지막 결심이 서면, 그들은 첫째 저택 세계로 옮겨지고,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길을 떠난다. 더러는 이 나이가 되기 전에 결정을 내리고 계속하여 승천하는 구체들로 가지만, 유란시아 기준으로 계산해서, 16살 이하의 아이들은 여러 저택 세계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47:2.6 (532.4) 진화하는 행성에서 필사자를 영적으로 보살피는 것처럼, 수호 세라핌들은 최후자 세계의 시험 육아원에서 이 젊은이들을 따라다니며, 한편 충실한 씨앗 일꾼들은 그들의 육체적 필요를 보살핀다. 이렇게 이 아이들은, 마지막 결정을 내릴 때까지 과도기 세계에서 자란다.
47:2.7 (532.5) 물질 생명이 그 과정을 마쳤을 때, 하늘 가는 생애에 대하여 아무런 결심이 서지 않았거나, 또는 시간 세계에서 온 이 아이들이 하보나 모험이 싫다고 분명히 결정을 내리면, 죽음은 자동으로 그들의 시험 생애를 끝낸다. 그러한 경우에 아무런 판결이 없다. 그렇게 두 번째 죽을 때는 아무런 부활이 없다. 그들은 다만, 마치 없었던 것처럼 된다.
47:2.8 (532.6) 그러나 완전하게 되는 파라다이스로 가는 길을 선택하면, 그들은 이내 첫째 저택 세계로 옮길 준비가 되며, 거기서 그들의 다수는 하보나로 올라가는 부모와 합치는 것과 시간을 맞추어 도착한다. 하보나를 거치고 신들에게 도달한 뒤에, 필사자의 기원을 가지고 이렇게 구제받은 혼들은 파라다이스의 영구한 승천 시민 계급을 구성한다. 필사자로 태어난 세계에서 값지고 필수인 진화 체험을 빼앗긴 이 아이들은 최후 군단에 소집되지 않는다.
47:3.1 (532.7) 여러 저택 세계에서 부활한 필사 생존자들은, 죽음이 덮쳤을 때 그들이 떠난 바로 그 자리에서, 생애를 다시 시작한다. 네가 유란시아로부터 제1 저택 세계로 갈 때, 너는 상당한 변화를 눈치챌 것이다. 그러나 네가 좀더 정상이고 진취적인 시간 세계의 출신이라면, 네가 다른 몸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차이점을 거의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살과 피로 이루어진 천막은 태어난 세계에 두고 온 것이다.
47:3.2 (532.8) 제1 저택 세계에서 모든 활동의 가장 중심 지역은 부활실, 곧 인격을 조립하는 거창한 성전이다. 이 거대한 구조는 운명 수호 천사, 생각 조절자, 그리고 부활을 담당하는 천사장들의 중앙 회합소로 이루어져 있다. 생명 운반자들도 또한 죽은 자가 부활할 때 이 하늘 존재들과 함께 활동한다.
47:3.3 (533.1) 필사자 지성의 성적표, 그리고 물질 수준에서 영 수준으로 바뀐, 사람의 활발한 기억 형태는 떨어져 있는 생각 조절자의 사유물이다. 영이 되어 버린 이 지성 요소 와 기억, 그리고 사람의 인격은 언제까지나 그러한 조절자의 일부이다. 사람의 지성이 담긴 기반과 신분의 수동적 잠재성은 운명 수호 천사가 보관하도록 맡겨진 상물질 혼 안에 들어 있다. 세라핌에게 맡겨진 상물질 혼과 조절자에게 맡겨진 영 지성을 다시 뭉치는 것은 사람의 인격을 다시 조립하며 이것이 잠자는 생존자의 부활이다.
47:3.4 (533.2) 필사자에 기원을 가진 일시적 인격이 이처럼 결코 다시 조립되지 않는다면, 살아남지 못하는 필사 인간의 영 요소들은 한 때 깃들던 조절자의 개별적 체험 재산의 구성 부분으로서 언제까지나 계속할 것이다.
47:3.5 (533.3) 새 생명의 성전으로부터, 방사(放射)되는 일곱 날개, 곧 필사 종족들의 부활실들이 뻗어 나간다. 이 구조물은 각각 시간 세계의 일곱 종족 중 한 민족의 집합이 차지한다. 둥근 학급 집회실에서 끝나는 이 일곱 날개 안에는 각각 인격 부활실이 10만채 있으며, 이 방들은 1백만이나 되는 사람들을 위해서 잠에서 깨어나는 방으로 쓰인다. 이 방들은 아담 이후의 정상 세계에서 온, 혼합 종족들의 인격을 조립하는 방에 둘러싸여 있다. 특별 부활이나 섭리 시대의 부활과 연관되어, 개별 시간 세계에서 쓰일 수 있는 기법과 상관 없이, 완벽한 실제 인격을 정말로 의식하도록 다시 조립하는 것은 1번 저택 나라의 여러 부활실에서 일어난다. 영원을 통해서 내내, 이 부활의 아침을 네가 처음으로 구경하는 인상, 깊이 기억에 남는 인상을 너는 회상할 것이다.
47:3.6 (533.4) 부활실에서 너는 멜기세덱 구역으로 나아가며, 거기서 영구한 거처가 너에게 배정된다. 그리고 나서 너는 10일 동안 개인적으로 자유를 얻는다. 너의 새 집 바로 근처를 마음대로 탐구하고, 너는 바로 앞에 놓인 순서에 익숙해진다. 너는 기록부를 들여다보고 이 세계들에 먼저 왔을까 싶은, 네가 사랑하던 자들과 세상의 다른 친구들을 찾아보려는 소망을 만족시킬 시간도 있다. 10일 동안의 여가 끝에, 너는 파라다이스 여행에서 둘째 걸음을 시작하는데, 이는 저택 세계들이 단지 구금하는 행성일 뿐 아니라, 실제로 훈련하는 구체이기 때문이다.
47:3.7 (533.5) 1번 저택 세계에서 (또는 상급 지위의 경우에는 다른 데서) 너는 죽음으로 중단된 바로 그 수준에서, 너의 지적 훈련과 영의 발전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행성에서 죽거나 옮겨지던 때와 저택 세계에서 부활하는 때 사이에, 필사 인간은 살아남는 사실의 체험을 제쳐놓으면, 절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 세계에서 너는, 여기 밑에서 네가 떠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한다.
47:3.8 (533.6) 저택 세계 1번에서 겪는 체험의 거의 전부가 결핍된 봉사에 관계된다. 구류 구체들 중에 이 첫째 구체에 도착하는 생존자들이, 사람의 인품에서 아주 많고 아주 다양한 결점과 필사 존재의 부족한 점을 제시하기 때문에, 그 영역의 주요 활동은 시공의 물질적 진화 세계에서 육체를 입은 생명이 받은 이 잡다한 유산(遺産)을 바로잡고 치유하는 데 몰두한다.
47:3.9 (534.1) 저택 세계 1번에서 머무르는 것은 정상의 진화 세계에서 적어도 아담 이후 섭리 시대의 지위까지, 살아남은 필사자들을 개발시키도록 고안되어 있다. 영적으로, 물론, 저택 세계 학생들은 그러한 단순한 인간적 발전 상태보다 훨씬 앞서 있다.
47:3.10 (534.2) 네가 저택 세계 1번에 억류되지 않아야 한다면, 10일이 끝날 때 너는 변신하는 잠에 들어가서 2번 세계로 나아갈 터이고, 그 뒤에 10일마다, 네가 배치된 세계에 다다를 때까지 너는 이처럼 진급할 것이다.
47:3.11 (534.3) 제1 저택 세계의 행정에서 일곱 주요 동그라미의 중심은 상물질 동반자들의 성전이 차지하며, 이들은 하늘 가는 필사자에게 배치된 개인 안내자이다. 이 동반자들은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의 자손이며, 사타니아의 여러 상물질 세계에는 이들이 몇백만 명 있다. 집단 동반자로서 배치된 자들을 제쳐놓고, 너는 통역자와 번역자, 건물 관리자, 소풍 감독자들과 함께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이 동반자들은 모두 상물질 몸 안에서, 네 인격의 지성 및 영 요소를 개발하는 일과 상관이 있는 자들에게 아주 협조적이다.
47:3.12 (534.4) 너희가 제1 저택 세계에서 시작할 때, 하늘 가는 필사자 1천 명으로 이루어진 각 중대(中隊)에 상물질 동반자 한 명이 배치된다. 그러나 너희가 일곱 저택 구체를 통해서 진보함에 따라서, 너희는 더 많은 동반자와 마주칠 것이다. 아름답고 다능한 이 존재들은 사귈 만한 동료요 매력 있는 안내자이다. 여러 위성 세계를 포함하여, 어느 과도기 문화 구체에도, 그들은 개인이나 선택된 무리들을 자유롭게 동반한다. 그들은 하늘 가는 모든 필사자의 소풍 안내자요 여가 동안에 동료이다. 예루셈을 정기적으로 방문할 때 그들은 흔히 생존자 무리를 따라가며, 너희가 어느 날 거기 있더라도, 체계 서울의 등록 구역으로 가서, 모두 일곱 저택 세계에서 온 하늘 가는 필사자들을 만날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의 거처와 체계 본부 사이에 그들이 마음대로 오고가기 때문이다.
47:4.1 (534.5) 이 구체에서 너희는 저택 나라 생활에 더욱 충만히 들어간다. 상물질 생명의 집단들이 비로소 형태를 갖춘다. 작업 집단과 사회 조직들이 비로소 활동하며, 공동체들은 공식 규모를 갖추고, 진보하는 필사자들은 새 사회 체제와 정부 시설을 개시한다.
47:4.2 (534.6) 영이 융합한 생존자는, 조절자가 융합한 승천 필사자와 함께, 저택 세계들을 차지한다. 다양한 계급의 하늘 생명이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친절하고 사교적이다. 어느 세계에 올라가도 너희는 사람의 참지 못하는 성향, 그리고 분별없는 카스트 제도의 차별과 비할 만한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47:4.3 (534.7) 네가 저택 세계들을 하나하나 올라감에 따라서, 이 세계들은 승진하는 생존자의 상물질 활동으로 더욱 붐비게 된다. 네가 앞으로 가는 동안, 너는 여러 저택 세계에서 예루셈의 모습이 더 나타남을 인식할 것이다. 유리 바다는 제2 저택 나라에서 그 모습을 나타낸다.
47:4.4 (534.8) 한 저택 세계에서 다음 세계로 올라갈 때마다, 새로이 개발되고 알맞게 조정된 상물질 몸을 얻는다. 너는 천사 수송자와 함께 잠에 들어가며, 새롭지만 발육되지 않은 몸으로 부활실에서 깨어난다. 이것은 저택 세계들 사이에 이렇게 이동 중에 잠을 자는 동안 생각 조절자가 너를 떠나지 않는 것을 제쳐놓으면, 네가 처음으로 저택 세계 1번에 도착했던 때와 비슷하다. 일단 네가 진화 세계로부터 첫째 저택 세계까지 통과하고 난 뒤에, 너의 인격은 손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47:4.5 (535.1) 네가 상물질 생명에서 올라가는 동안 네 조절자의 기억은 완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순전히 동물적이고 온통 물질적이었던 정신 관계는 육체적 두뇌와 함께 자연히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너의 정신 생활에서 보람 있고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것은 모조리 조절자가 그 부본(副本)을 작성하고, 하늘 가는 생애를 통해서 끝까지 개인 기억의 일부로서 보존된다. 한 저택 세계로부터 다른 세계로, 그리고 우주의 한 구역에서 다른 구역으로―아니 파라다이스까지도―네가 나아가는 동안에, 너는 보람 있는 너의 체험을 모두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47:4.6 (535.2) 너희는 상물질 몸을 가졌지만, 이 일곱 세계 모두를 통해서, 너희는 계속해서 먹고 마시고 쉰다. 너희는 상물질 체제의 먹을 것을 먹는데, 이것은 물질 세계에서 알려지지 않은 살아 있는 에너지 분야이다. 먹을 것과 물은 다 상물질 몸 안에서 완전히 이용되며, 남는 찌꺼기가 하나도 없다. 멈춰서 생각해 보아라: 저택 나라 1번은 대단히 물질적 구체이며, 상물질 체제의 아주 초기를 제시한다. 너는 아직도 인간에 가깝고, 필사 인생의 제한된 관점에서 그다지 멀리 있지 않지만, 각 세계는 분명한 진보가 있었음을 드러낸다. 한 구체에서 다른 구체로, 너는 차츰 물질 성향이 줄어들고, 더 총명하고 조금 더 영답게 변한다. 영적 전진은 진보하는 이 일곱 세계 중에서 마지막 세 세계에서 가장 크다.
47:4.7 (535.3) 생물학상의 결점은 제1 저택 세계에서 대체로 메워진다. 거기서 성생활, 가족 관계, 그리고 부모의 활동에 관계되어 행성 체험에서 있었던 결점은 고쳐지든지, 아니면 예루셈에 있는 물질 아들 가족들 사이에서 앞날에 시정(是正)하도록 계획된다.
47:4.8 (535.4) 저택 세계 2번은 특히, 모든 국면의 지적 갈등을 제거하고 온갖 종류의 정신의 불화를 고친다. 제1 저택 세계에서 시작된, 상물질계 상지혜의 의미를 통달하려는 노력은 여기서 더욱 진지하게 이어진다. 저택 나라 2번에서 생기는 발전은 이상적인 진화 세계에서 심판 아들 이후 문화의 지적 상태와 비교된다.
47:5.1 (535.5) 셋째 저택 나라는 저택 세계 선생들의 본부이다. 이 선생들은 일곱 저택 구체 어디서나 활동하지만, 그들은 3번 세계의 학교 영역의 중심에서 집단 본부를 유지한다. 저택 세계와 상급 상물질 세계에는 이 강사(講師)들이 수백만 명 있다. 상급이며 영화롭게 된 이 케루빔들은 저택 세계로부터 지역 우주의 상승 훈련을 맡는 마지막 구체까지 내내, 상물질 선생으로서 일한다. 작별 시간이 가까워 올 때, 너의 기원이 있던 우주에게 네가 작별 인사를 할 때―적어도 몇 시대 동안―초우주 소구역의 여러 접대 세계로 이동하려고 네가 천사에게 둘러싸일 때, 그들은 마지막으로 깊은 애정으로 이별을 고하는 자들 사이에 있을 것이다.
47:5.2 (535.6) 제1 저택 세계에서 머무를 때, 너는 첫째 과도기 세계, 곧 최후자 본부, 그리고 발육되지 않은 진화하는 자녀들을 양육하는, 체계의 시험 육아원을 찾아볼 허가를 받는다. 네가 2번 저택 나라에 다다를 때, 너는 과도기 세계 2번을 정기적으로 찾아볼 허가를 받으며, 거기에는 온 사타니아를 위하여 상물질 감독자 본부, 그리고 여러 상물질 계급을 위한 훈련 학교들이 자리잡고 있다. 네가 저택 세계 3번에 다다를 때, 너에게 즉시 셋째 과도기 구체를 방문할 허가가 내리는데, 여기는 천사 계급의 본부요, 그들의 다양한 체계 훈련 학교들의 근거지이다. 이 세계에서 예루셈을 찾아보는 것은 갈수록 더 유익하며, 하늘 가는 필사자에게 늘 흥미를 돋구어 준다.
47:5.3 (536.1) 셋째 저택 나라는 필사자로 태어난 세계에서 육체로부터 해방되기 전에, 이 여러 문화 사회에 해당하는 것을 마치지 못한 모든 사람을 위해서 개인적ㆍ사회적으로 큰 성취가 있는 세계이다. 이 구체에서 더욱 긍정적 교육 작업이 시작된다. 처음 두 저택 세계의 훈련은, 육체를 입은 인생에 있던 체험을 보충하는 것과 상관되니까, 대부분 결핍의―부정적―성질이 있다. 이 셋째 저택 세계에서 생존자들은 정말로 그들의 진보하는 상물질 교양을 시작한다. 이 훈련의 주요 목적은 상물질의 상지혜와 필사자의 논리의 상관 관계에 대한 이해, 곧 상물질의 상지혜와 인간 철학을 더욱 잘 조정하는 데 있다. 살아남는 필사자는 이제 참된 형이상학을 들여다보는 실용적 통찰력을 얻는다. 이것은 우주의 의미와 여러 우주 상호 관계를 지적으로 이해하는 데 참된 첫걸음이다. 제3 저택 세계의 문화는 사람이 사는 정상 행성에서 수여 아들 이후 시대의 성질을 띤다.
47:6.1 (536.2) 네가 제4 저택 세계에 다다를 때, 너는 상물질 생애에 한창 들어가 있다. 너는 초기의 물질 존재로부터 한참 진보하였다. 이제 너에게 과도기 4번 세계를 찾아볼 허가가 주어지며, 거기서 찬란한 저녁별을 포함한 초월 천사들의 본부와 여러 훈련 학교에 관하여 익숙하게 된다. 제4 과도기 세계에 있는 이 초월 천사들이 잘 주선한 덕택으로 상물질 방문자는 예루셈에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동안, 다양한 계급의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아주 가까이 갈 수 있게 되며, 이것은 승진하는 필사자가 본부 세계를 이렇게 거듭 방문함에 따라서, 체계 서울의 새 구역들이 그들에게 차츰 개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승천자들의 성장하는 지성 속에 새로운 위엄이 점진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47:6.2 (536.3) 네 번째 저택 나라에서 개별 승천자는 상물질 생활의 집단 작업과 학급 활동에서 더욱 알맞게 자기 자리를 찾는다. 승천자는 여기서 방송과 기타 단계의 지역 우주 문화와 진보를 더욱 이해하게 된다.
47:6.3 (536.4) 바로 4번 세계에서 훈련을 받는 기간에, 하늘 가는 필사자는 상물질 인간의 참된 사회 생활의 요구와 기쁨을 정말로 처음으로 접촉하게 된다. 진화하는 사람들이, 개인의 영달이나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승리에 바탕을 두지 않은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정말로 새로운 체험이다. 새 사회 질서가 도입되고 있고, 이것은 서로 존중함으로 공감하는 마음, 서로 봉사하는 사심(私心) 없는 사랑, 그리고 최고의 공동 운명을―경건하고 신다운 완전함으로 파라다이스에 이르는 목표를― 실현하려는 동기, 사람을 지배하는 동기에 근거를 두었다. 하늘 가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구하며, 하나님을 찾아내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47:6.4 (536.5) 이 제4 저택 세계의 지적ㆍ사회적 문화는 정상으로 진화하는 행성에서 교육 아들 이후 시대의 정신 및 사회 생활과 비교할 만하다. 영적 지위는 필사자의 그러한 섭리 시대보다 훨씬 앞서 있다.
47:7.1 (537.1) 제5 저택 세계까지 수송되는 것은 상물질 진보자의 생애에서 엄청난 전진의 걸음이다. 이 세계에서 겪는 체험은 참으로 예루셈의 생활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여기서 충성스러운 진화 세계의 높은 운명을 네가 비로소 깨닫는데, 이는 그런 세계들이 보통 자연스런 행성의 발전 기간에 이 단계까지 진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저택 세계의 문화는 일반적으로, 정상으로 진화로 진보하는 행성에서 빛과 생명 시대의 초기 문화에 해당한다. 그리고 너는 이로부터, 이 여러 상급 진화 세계에서 때때로 거주하는, 상당히 교양 있고 진취적인 부류의 존재들이 어째서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저택 구체, 아니 모든 저택 구체를, 거치지 않고 면제되도록 주선되는가 이해할 수 있다.
47:7.2 (537.2) 제4 저택 세계를 떠나기 전에 지역 우주 언어를 통달했으니까, 너는 거주 자격을 가지고 예루셈에 도착하기 전에 유버르사의 말을 완전히 익히는 데 이제 더 시간을 바치며, 두 언어를 네가 유창하게 쓰는 것이 목표이다. 체계 본부에서부터 하보나까지, 하늘 가는 필사자는 모두 두 나라 말을 한다. 그리고 나서 오직 초우주 낱말 수를 늘이는 것이 필요하며, 파라다이스에 거주하기 위해서 그 위에 더 낱말 수를 더하는 것이 필요하다.
47:7.3 (537.3) 5번 저택 나라에 도착하고 나서, 순례자는 해당하는 번호의 과도기 세계, 곧 아들들의 본부를 찾아보도록 허락이 내린다. 여기서 하늘 가는 필사자는 여러 집단의 신다운 아들들과 개인적으로 친숙하게 된다. 이 훌륭한 존재들에 관하여 죽 소문을 들어 왔고, 이미 예루셈에서 그들을 만났지만, 이제 그들을 정말로 알게 된다.
47:7.4 (537.4) 다섯째 저택 나라에서 너는 비로소 별자리의 연구 세계들에 관하여 배운다. 나중에 별자리에 머무르는 것을 위하여 너를 비로소 준비시키는 처음 강사(講師)들을 여기서 만난다. 이런 준비가 6번과 7번 세계에서 더 계속되며, 한편 예루셈에 있는 하늘 가는 필사자의 구역에서 마무리하는 손질이 더해진다.
47:7.5 (537.5) 5번 저택 나라에서 우주 의식(意識)이 정말로 태어난다. 너는 우주에 머리를 쓰게 된다. 이 때는 정말로 시야가 커지는 때이다. 어떤 엄청나고 웅장한 운명, 어떤 천상의 신성한 운명이 파라다이스까지 가는 점진적 승천을 마치는 자들을 모두 기다린다는 생각이, 하늘 가는 필사자의 확대되는 지성 속에 비로소 떠오르고 있으며, 승천은 아주 힘들게, 그러나 몹시 기쁘고 상서롭게 시작되었다. 대략 이 지점에서, 하늘 가는 보통 필사자는 하보나에 올라가는 것에 대하여 비로소 진정한 체험적 열심을 보인다. 공부는 자원해서 하며, 사심 없는 봉사는 자연히 하게 되고, 예배는 저절로 일어난다. 진정한 상물질 인품이 싹트고 있으며, 진정한 상물질 인간이 진화하고 있다.
47:8.1 (537.6) 이 구체에서 머무르는 자는 6번 과도기 세계를 찾아보는 것이 허락되며, 거기서 그들은 초우주의 높은 영들에 관하여 더 배운다. 하지만 이 하늘 존재들의 다수를 눈으로 볼 수 없다. 여기서 그들은 또한 장래의 영 생애에서 첫 수업을 받는데, 이것은 지역 우주의 상물질 훈련을 졸업하고 나서 즉시 뒤따른다.
47:8.2 (537.7) 체계의 조군주(助君主)는 이 세계를 자주 방문하며 여기서 우주 행정 기법의 첫 교육이 시작된다. 이제 한 우주 전체의 사무를 포함하는 첫 수업을 준다.
47:8.3 (538.1) 이 때는 하늘 가는 필사자에게 빛나는 시대이며, 보통은 인간의 지성과 신다운 조절자의 완전한 융합을 구경하게 된다. 가능성으로 볼 때 이 융합은 이전에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제5 저택 세계, 아니 제6 세계에서 머무를 때까지도, 실제로 작용하는 일체가 되지 않는 일이 흔하다.
47:8.4 (538.2) 부활한 생존자를 감독하는 초월 천사,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재판에 가는 자를 위하여 기록 담당 천사장, 이 둘을 천사가 호출하는 것이 진화하는 불멸의 혼이 영원하고 신다운 조절자와 일체가 된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나서 그러한 생존자의 상물질 동료들 앞에서, 이 확인하는 사자들이 말한다: “이 사람은 내가 아주 기뻐하는 사랑하는 아들이라.” 간단한 이 의식(儀式)은 하늘 가는 필사자가 파라다이스에서 봉사하는 영원한 생애로 들어가는 것을 표시한다.
47:8.5 (538.3) 조절자와 융합된 것이 확인되고 나서 즉시, 새로운 그 상물질 존재는 동료들에게 처음으로 새 이름으로 소개되며, 모든 일상적 활동으로부터 40일 동안 영적 은거를 허락받는다. 그동안에 자신과 교통하며, 하보나까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길 중에 어느 하나를 고르고, 파라다이스에 도달하는 상이한 기법 중에 선택하려는 것이다.
47:8.6 (538.4) 그러나 아직도 이 눈부신 존재들은 얼마큼 물질이며, 참 영(靈)이 되기에 멀었다. 그들은 차라리 초월 필사자와 같고, 영적으로 말하면 아직도 천사보다 조금 못하다. 그러나 참으로 놀라운 인간이 되어 가고 있다.
47:8.7 (538.5) 6번 세계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저택 세계 학생들은, 빛과 생명의 초기 단계를 지나서 정상으로 진보한 진화 세계의 특징을 나타내는 지위, 그 높은 발전에 견줄 만한 지위에 이른다. 이 저택 나라에서 사회의 조직은 높은 체제이다. 이 세계들을 하나하나 올라감에 따라서, 필사 성품의 그림자는 자꾸 줄어든다. 행성에서 동물의 기원을 가졌던 험한 자국을 벗어버리고 떠나면서, 너는 갈수록 더 사랑스럽게 되어 간다. “큰 시련을 거치고 올라가는 것”은 영화롭게 된 필사자를 아주 상냥하고 이해심 있고, 아주 동정심 있고 너그럽게 만드는 데 소용된다.
47:9.1 (538.6) 이 구체에서 겪는 체험은 죽음 직후의 생애에서 최고의 업적이다. 여기서 네가 머무르는 동안 너는 여러 선생의 가르침을 받을 터이고, 그들은 모두 예루셈에 거주하도록 너를 준비시키는 일에 협조할 것이다. 고립되고 뒤처진 세계에서 온 필사자와, 더 앞선 깨우친 구체에서 온 생존자 사이에 어떤 식별할 만한 차이점이 있어도 제7 저택 세계에서 거의 지워진다. 여기서 불행한 유전(遺傳), 건전하지 않은 환경, 행성의 비영적 경향과 같은 모든 찌꺼기가 너에게서 깨끗이 씻겨 내린다. 마지막으로 남은 “짐승의 표시”가 여기서 뿌리 뽑힌다.
47:9.2 (538.7) 7번 저택 나라에서 머무르는 동안, 과도기 세계 7번, 곧 우주의 아버지의 세계를 방문하는 허가가 내린다. 여기서 너는 보이지 않는 우주의 아버지께 드리는 새롭고 더 영적인 예배를 시작하며, 이것은 너의 긴 승천 생애를 통하여 내내, 네가 점점 더 추구할 버릇이다. 이 과도기 문화 세계에서 너는 아버지의 성전을 발견하지만, 아버지를 만나 뵙지 못한다.
47:9.3 (538.8) 이제 예루셈으로 가는 졸업 학급이 형성된다. 개인으로서 너희는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갔지만, 이제 너희는 무리를 이루어 예루셈을 향하여 떠나려고 준비한다. 하지만 어떤 범위 안에서, 승천자는 땅에서나 저택 나라에서 그의 작업 집단에서 뒤떨어진 일원이 그를 따라잡게 만들려는 목적으로, 제7 저택 세계에서 머물러도 좋다.
47:9.4 (539.1) 제7 저택 나라의 직원들은 너희가 거주 자격을 가지고 예루셈을 향하여 떠나는 것을 구경하려고 유리 바다에서 모인다. 수백 또는 수천 번, 너희는 예루셈을 방문했을지 모르지만, 언제나 손님으로서 그랬다. 하늘 가는 필사자로서 저택 나라 생애 전체에 영원히 작별을 알리는 동료들의 한 무리와 일행을 이루어, 너희가 체계 서울을 향하여 나아간 적은 결코 전에 없었다. 너희는 예루셈의 시민으로서 본부 세계의 접대하는 들에서 곧 환영받을 것이다.
47:9.5 (539.2) 비물질화를 겪는 일곱 세계를 거쳐서 진보하는 것을 너희는 크게 즐길 것이다. 이 세계들은 정말로 필사를 벗어나게 하는 구체이다. 제1 저택 세계에서 너희는 대체로 인간이었고, 그저 물질 몸이 빠진 필사 존재, 곧 상물질 형태―살과 피로 이루어진 필사의 거처가 아니라, 상물질 세계의 물질 몸―속에 들어 있는 인간 지성일 뿐이었다. 조절자와 융합할 때, 너희는 정말로 필사 상태에서 불멸의 상태로 지나가며, 너희가 예루셈 생애를 마쳤을 때가 되어서, 너희는 완전히 자란 상물질 사람이 될 것이다.
47:10.1 (539.3) 저택 세계 졸업생들의 새 학급을 영접하는 것은 온 예루셈에게, 환영하는 위원회로서 집합하라는 신호이다. 씨앗 일꾼들조차 진화의 기원을 가지고 승리한 이 승천자들의 도착을 즐거워하는데, 이들은 행성에서 달리기를 하였고, 저택 세계의 진보를 마쳤다. 오직 물리 통제자와 상물질 동력 감독들만 이 즐거운 경사에 나타나지 않는다.
47:10.2 (539.4) 계시자 요한은 일곱째 저택 세계로부터 예루셈의 영광인 첫째 하늘까지, 승진하는 필사자의 학급이 도착하는 환상을 보았다. 그는 기록하였다: “그리고 내가 보니, 마치 불과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몸 안에 처음부터 있던 짐승, 저택 세계들을 통해서 남아 있었던 형상, 그리고 마침내 최종의 표시와 자국을 이겨 낸 자들이, 유리 바다에 서서, 하나님의 하프를 지녔은즉, 필사자의 두려움과 죽음에서 구원받은 노래를 부르더라.” (완전하게 된 우주 통신이 이 모든 세계에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하프”를 가지고 다니면, 그러한 통신을 너희가 어디서나 수신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은 우주 통신을 수신하기에는 미숙한 상물질 감각 작용을 직접 조정할 수 없는 것을 보상하는 상물질 장치이다.)
47:10.3 (539.5) 바울도 또한 예루셈에서 완전하게 되는 필사자들의 승천 시민 집단을 보았는데, 그가 이렇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시온 산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시로,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집단의 천사들에게, 미가엘의 대집회에까지, 그리고 완전해지고 있는 의인의 영들에게 왔도다.”
47:10.4 (539.6) 필사자가 체계 본부에서 거주 자격을 얻은 뒤에, 글자 그대로의 부활은 이제 더 겪지 않을 것이다. 저택 세계의 생애를 떠날 때 너에게 내린 상물질 형태는 지역 우주 체험이 끝날 때까지 네가 견딜 그러한 것이다. 때때로 몸을 수정하는 일이 생길 터이나, 높아지는 교양과 영 훈련을 받는 초우주의 여러 세계까지 이동하는 데 대비해서, 제1 단계의 영으로 네가 솟아날 때, 작별할 때까지 너는 바로 이 형태를 지닐 것이다.
47:10.5 (540.1) 저택 나라의 생애 전부를 거치는 이 필사자들은 일곱 번이나 조정하는 잠을 자고 부활하여 깨어나는 과정을 겪는다. 그러나 마지막 부활실, 마지막으로 잠을 깨는 방을 제7 저택 세계에 두고 떠났다. 형태의 변화는 이제 더 의식을 잃게 하거나, 개인의 연속되는 기억을 중단시킬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47:10.6 (540.2) 진화 세계에서 시작되고 육체 속에 임시로 거하던―신비의 훈계자가 깃들고 진리의 영이 투입된―필사자의 인격은, 그러한 예루셈 시민에게 에덴시아로 입국 허가가 내리고, 네바돈의 상물질 집단의 참된 단원이라고―조절자와 결합한 불멸의 생존자요,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자, 상물질 지위를 가진 인격자, 최고자들의 참된 자식이라고―선포되는 날까지, 충분히 움직이고 실현되고 통일되지 않는다.
47:10.7 (540.3) 필사자의 죽음은 육체를 입은 물질적 인생을 벗어나는 기법이며, 시정하는 훈련과 교양 교육을 받는 일곱 세계를 거쳐서 진보하며 사는 저택 나라 체험은 살아남는 필사자가 상물질 생애의 첫걸음을 내딛게 한다. 이것은 진화하는 물질 존재, 그리고 영원의 입구에 이르도록 예정된, 시간 세계 승천자의 더 높은 영적 성취, 이 둘 사이에 끼어 있는 과도기 인생이다.
48:0.1 (541.1) 신들은 거친 동물 성품을 가진 인간을 어떤 신비스러운 창조적 요술 행위로 완전해진 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적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창조자들이 완전한 존재를 생산하기를 바랄 때, 그들은 직접 최초의 창조로 그렇게 생산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동물 기원을 가진 물질적 인간을 한 걸음에 완전한 존재로 개조하는 일에 손대지 않는다.
48:0.2 (541.2) 지역 우주 생애에서 여러 단계에 연장되는 상물질 생명은 물질 필사자가 영 세계의 문턱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한 접근 방법이다. 죽음이, 물질 몸의 자연스런 분해가, 무슨 요술을 지녔기에, 그렇게 간단한 걸음이, 한 순간에 필사의 물질 지성을 완전해진 불사의 영으로 변화시킬 것인가? 그러한 믿음은 다만 무지한 미신이요, 듣기 좋은 꾸민 이야기일 뿐이다.
48:0.3 (541.3) 필사 상태와 살아남는 인간이 나중에 얻는 영 지위 사이에는 언제나 이 상물질의 과도기가 끼어 있다. 우주에서 진보하는 이 중간 상태는 여러 지역 창조에서 두드러지게 다르지만, 그 의도와 목적에서 볼 때 이 창조들은 다 아주 비슷하다. 네바돈에 있는 저택 세계와 상급 상물질 세계들의 시설은 오르본톤의 이쪽 부분에서 상물질 과도기 체제에 상당히 전형(典型)이다.
48:1.1 (541.4) 상물질 영역은 인간이 존재하는 물질 수준과 영적 수준 사이를 연결하는 지역 우주 구체들이다. 이 상물질 생명은 행성 영주의 초기 시절부터 유란시아에서 알려졌다. 때때로 이 과도기 상태에 대하여 필사자들은 가르침을 받아 왔고, 그 개념은 일그러진 모습으로 오늘날의 여러 종교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다.
48:1.2 (541.5) 상물질 구체들은 지역 우주의 진보하는 여러 세계를 거쳐서 필사자가 올라가는 과도기 단계이다. 오로지 지역 체계의 최후자 구체를 둘러싸는 일곱 세계만 저택 세계라 부른다. 그러나 별자리 및 우주 본부를 둘러싸는 상급 구체들과 함께, 체계의 과도기 거처에 있는 56 세계를 모두 상물질(上物質) 세계라고 부른다. 이 창조들은 지역 우주의 본부 구체들의 물리적 아름다움과 상물질의 웅장함을 함께 가진다.
48:1.3 (541.6) 이 세계들은 모두 건축된 구체이며, 진화된 행성에 있는 원소들의 꼭 2배를 가지고 있다. 주문에 따라 지은 그러한 세계들은, 1백개의 물질 원소가 있으니까 중금속과 수정(水晶)이 풍부할 뿐 아니라, 상물질계 물질이라 부르는, 꼭 1백 가지 형태의 독특한 에너지 조직을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다. 물리 통제사와 상물질 동력 감독들은 물체의 기본 단위들의 회전을 수정하고, 동시에 이 에너지 결합을 바꾸어서 이 새로운 본질을 창조할 수 있다.
48:1.4 (542.1) 지역 체계에서 초기의 상물질 생명은 너희의 현재 물질 세계의 것과 아주 비슷하며, 별자리의 여러 연구 세계에서 그 생명은 물질의 성향이 줄고 더 참된 상물질이 된다. 그리고 구원자별의 구체들까지 나아감에 따라서, 너희는 갈수록 더 영적 수준에 이른다.
48:1.5 (542.2) 상물질 동력 감독은 물질 에너지와 영적 에너지를 통합시킬 수 있고, 이렇게 함으로 통제하는 영을 겹쳐 놓도록 허락하는, 한 상물질 형태의 물질화를 일으킨다. 네가 네바돈의 상물질 인생을 거칠 때, 참을성 있고 솜씨 있는 바로 이 상물질 동력 감독들은 연달아서 너에게 상물질 몸을 570개나 마련해 줄 터인데, 이것은 각각 네가 진보하는 변화의 한 단계이다. 물질 세계를 떠날 때부터, 네가 구원자별에서 제1 단계 영으로 구성될 때까지, 너는 올라가는 상물질 변화를 따로 꼭 570번 거칠 것이다. 이 가운데서 8번은 체계에서, 71번은 별자리에서, 그리고 491번은 구원자별의 여러 구체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일어난다.
48:1.6 (542.3) 필사 육체를 가졌던 시절에는 신다운 영이, 거의 따로 떨어진 개체로서 네 안에 깃든다―실제로 이것은 우주의 아버지가 주신 영이 사람에게 쳐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상물질 인생에서, 영은 네 인격의 진짜 부분이 될 터이고, 네가 진보하는 변화를 570번 연달아 거치는 동안, 너는 인간 생명의 물질 상태로부터 영적 상태로 올라간다.
48:1.7 (542.4) 바울은 상물질 세계들이 존재하고 상물질이 실재하는 것을 알았는데, 그가 이렇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저희는 더 좋고 더 오래 견디는 물질을 가지고 있도다.” 그리고 “하나님이 짓고 만드신 기초 위에 세운 도시”의 경우처럼, 이 상물질은 실재하며 실질이다. 이 놀라운 구체들은 각각 “더 좋은 나라, 다시 말해서 하늘의 나라이라.”
48:2.1 (542.5) 이 독특한 존재들은 영적 에너지, 그리고 물리적 에너지나 준물질 에너지의 기초적 조합을 대표하는 활동을 감독하는 데 순전히 관여한다. 그들은 상물질 진보에 봉사하는 데 전적으로 헌신한다. 과도기 체험을 겪는 동안에 필사자를 많이 보살피기 때문이 아니라, 진보하는 상물질 인간을 위하여 과도기 환경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러 과도기 세계에서 상물질 단계를 지원하고 에너지를 공급하는 상물질 동력의 경로(經路)이다.
48:2.2 (542.6) 상물질 동력 감독은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의 자손이다. 여러 지역 창조에서 성질이 조금 다르지만, 그들의 설계는 상당히 표준화되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특정한 기능을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들의 책임을 시작하는 데 아무런 훈련이 필요하지 않다.
48:2.3 (542.7) 상물질 동력 감독을 처음 창조하는 것은, 한 지역 우주에서 처음 저택 세계들 중에서 어느 하나의 기슭에 살아남은 첫 필사자가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일어난다. 그들은 1천명의 집단을 이루어 창조되며,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48:2.11 (543.5) 동력 감독들은 언제나 그들이 태어난 우주에서 근무한다. 우주 아들과 우주 영이 합동으로 하는 영 활동만이 그들을 지시하지만, 그밖에 그들은 온전히 자치하는 집단이다. 그들은 지역 체계의 각 첫째 저택에 본부를 두며, 거기서 물리 통제자 및 세라핌들과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일하지만, 에너지를 명시하고 영을 적용하는 경우에 그들 자체의 세계에서 활동한다.
48:2.12 (543.6) 그들은 또한 여러 진화 세계에서 일시 배치받는 봉사자로서, 가끔 초물질 현상과 관련되어 일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 사는 행성에서 근무하는 일은 드물다. 그들은 초우주의 고등 훈련 세계에서 일하지도 않으며, 주로 한 지역 우주에서 상물질 진보를 담당하는 과도기 체제에 전념한다.
48:2.13 (543.7) 1. 회로 규제자. 이들은 물리적 에너지와 영적 에너지를 조정하는 독특한 존재이며, 상물질 구체의 분리된 경로로 에너지가 흘러가는 것을 규제한다. 이 회로들은 순전히 행성에 속하며, 단일 세계에 국한된다. 상물질 회로는 과도기 세계에 있는 물리적ㆍ영적 회로와 다르고, 이를 보충하며, 사타니아 체계와 같은 체계의 경우에도 그 저택 세계들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데 이 규제자가 몇백만명이 요구된다.
48:2.14 (543.8) 회로 규제자는 물질 에너지 안에서 어떤 변화를 시작하고, 그 에너지가 동료들의 통제와 규제에 복종하게 만든다. 이 존재들은 회로를 규제할 뿐 아니라 상물질 동력을 가진 발전기 노릇을 한다. 발전기가 대기(大氣)로부터 전기를 발생하게 하는 듯이 보이는 것과 비슷하게, 살아 있는 이 상물질 발전기는 어디에나 있는 우주 에너지를 물질로 변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며, 상물질 감독은 그 물질을 하늘 가는 필사자의 몸과 생명 활동 속으로 엮어 넣는다.
48:2.15 (543.9) 2. 체계 조정자. 각 상물질 세계가 따로 된 서열의 상물질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니까, 인간은 이 구체들을 눈에 선하게 그리기가 극도로 힘들다. 그러나 연속되는 각 과도기 구체에서, 필사자는 식물(植物) 생명, 그리고 상물질 존재에 관계되는 모든 다른 것이, 하늘 가는 생존자가 영적으로 변화되는 정도가 높아지는 데 맞추어 점진적으로 수정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각 세계의 에너지 체계가 이처럼 개별화되어 있으니까, 이 조정자들은 어느 특정 집단의 관련된 구체들을 위한 기초적 단위 속으로, 그러한 다른 여러 동력 체계를 조화시키고 섞으려고 활동한다.
48:2.16 (543.10) 하늘 가는 필사자는 한 상물질 세계에서 다른 상물질 세계로 올라감에 따라서, 물리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으로 차츰차츰 진보한다. 따라서 올라가는 등급의 여러 상물질 구체와 올라가는 등급의 상물질 형태를 마련해 줄 필요성이 생긴다.
48:2.17 (543.11) 저택 세계 승천자가 한 구체에서 다른 구체로 지나갈 때, 수송 세라핌들이 그들을 상급 세계에 있는 체계 조정자의 수령자에게 인도한다. 독특한 이 여러 전당에, 지구에서 기원을 가진 필사자를 영접하는 초기 세계의 부활실 비슷한 과도기 방들이, 방사하는 70개 날개의 중심에 있는데, 여기서 체계 조정자들이 인간의 형태에서 필요한 변화를 솜씨 있게 일으킨다. 이 초기 상물질 형태의 변화를 마치기까지 표준 시간으로 약 7일이 걸린다.
48:2.18 (544.1) 3. 행성 관리자. 여러 저택 구체로부터 우주 본부까지―상물질 사무에 관해서 말하면―수호자 70명이 각 상물질 세계를 관리하고 있다. 그들은 최고의 상물질계 권한을 가진 지역 행성 회의를 구성한다. 이 회의는 그 구체들에 착륙하는, 하늘 가는 모든 사람에게 상물질 형태를 지을 물질을 허가해 주고, 한 승천자가 다음 구체로 진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변화, 인간의 형태에 그러한 변화를 허가해 준다. 저택 세계들을 거치고 난 뒤에, 너희는 의식(意識)을 잃을 필요 없이, 상물질 생명의 한 단계로부터 다른 단계로 옮겨갈 것이다. 오로지 초기의 변형을 겪을 때, 그리고 한 우주에서 다른 우주로, 그리고 하보나에서 파라다이스로 나중에 이동할 때 무의식이 따른다.
48:2.19 (544.2) 4. 통합 통제자. 상당히 기계적인 이 존재들 중에 하나가 언제나 한 상물질 세계의 각 행정 단위 중심에 주둔한다. 통합 통제자는 물리적 에너지, 영 에너지, 상물질 에너지에 민감하고, 이것들과 함께 작용한다. 언제나 이 존재와 함께, 체계 조정자 2명, 회로 규제자 4명, 행성 관리자 1명, 연락 안정자 1명, 그리고 부기록원이나 선택 분류자 1명이 관계되어 있다.
48:2.20 (544.3) 5. 연락 안정자. 이들은 그 영역의 물리적ㆍ영적 물력과 관련된 상물질 에너지를 규제하는 자이다. 이들은 상물질 에너지를 상물질계 물질로 바꾸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상물질로 존재하는 조직 전체가 안정자들에게 의존한다. 그들은 물질화가 일어날 수 있는 점까지 에너지 회전을 늦춘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들의 직책을 내가 비교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용어가 내게 없다. 이것은 인간의 상상력을 아주 초월한다.
48:2.21 (544.4) 6. 선택 분류자. 너는 상물질 세계의 한 등급이나 단계로부터 그 다음으로 진보하는 동안 다시 조율되거나 높게 맞추어져야 하며, 네가 상물질 생명과 점진적으로 동시화를 유지하도록 만드는 것이 선택 분류자의 과제이다.
48:2.22 (544.5) 기본적 상물질 형태의 생명과 물질은 첫째 저택 세계로부터 마지막 우주 과도기 구체에 이르기까지 동일하지만, 기능적 진보는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으로 차츰차츰 연장된다. 기본적으로 한결같지만 이렇게 연속하여 진보하고 영으로 변하는 창조에 대하여, 이렇게 선택하여 다시 조율함으로 너의 적응이 이루어진다. 너희가 똑같은 상물질 형태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도, 인격의 작용에서 그러한 조절은 새로이 창조되는 것과 같다.
48:2.23 (544.6) 너는 되풀이해서 이 검사자들의 시험을 받아도 좋다. 네가 적당한 영적 성과를 기록하자마자, 그들은 기쁘게 너를 상급 지위로 인가해 줄 것이다. 이 점진적 변화는 상물질 환경에 대하여, 먹을 것의 필요와 수많은 다른 개인 관습에 따라 생기는 조정과 같이, 달라진 반응을 일으킨다.
48:2.24 (544.7) 선택 분류자들은 또한 연구, 교육, 기타 사업의 목적을 위하여 상물질 성격자들을 분류하는 데 크게 쓸모가 있다. 그들은 누가 임시 관계에서 최선으로 활동할 것인가 자연스럽게 가리킨다.
48:2.25 (544.8) 7. 부기록원. 상물질 세계는 자체의 기록원들이 있는데, 이들은 상물질 세계에 토착인 기록과 기타 자료를 감독하고 관리하는 과제에, 영 기록원들과 제휴하여 일한다. 상물질 기록은 모든 계급의 성격자에게 소용이 된다.
48:2.26 (545.1) 과도기의 상물질 영역은 모두, 물질 존재와 영 존재에게 똑같이 이용될 수 있다. 상물질 진보자로서 너희는 물질 세계 및 물질 성격자들과 완전히 접촉을 유지할 터이고, 한편 너희는 갈수록 더 영 존재들을 알아보고 그들과 사귈 것이다. 상물질 체제를 떠날 때가 되면, 너희는 외톨 사자와 같은 몇몇 상급 종류를 제외하고, 모든 계급의 영들을 보았을 것이다.
48:3.1 (545.2) 여러 저택 세계와 상물질 세계에 있는 이 무리들은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의 자손이다. 대대로 그들은 10만명씩 무리를 지어 창조되며, 네바돈에는 현재 이 독특한 존재가 7백억명이 넘는다.
48:3.2 (545.3) 상물질 동반자는 근무하기 위하여 구원자별 가까이 있는 한 특별 행성에서 멜기세덱들에게 훈련을 받는다. 그들은 중앙의 멜기세덱 학교들을 거치지 않는다. 그들의 근무는 체계의 가장 낮은 저택 세계들로부터 구원자별의 가장 높은 연구 구체들까지 미치지만,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그들과 마주치는 일이 드물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일반 감독 하에서, 그리고 멜기세덱들의 직접 지도를 받으면서 수고한다.
48:3.3 (545.4) 상물질 동반자는 한 지역 우주에서 1만 본부를―지역 체계의 제1 저택 세계 각 곳에―둔다. 그들은 거의 온전히 자치(自治)하는 계급이며, 대체로 총명하고 충성스런 무리의 존재이다. 그러나 이따금, 어떤 불행한 하늘 소동과 관련되어, 그들은 잘못에 빠졌다고 알려져 있다. 이 쓸모 있는 생물을 몇천명이나 사타니아에서 루시퍼 반란 시절에 잃어버렸다. 너희의 지역 체계는 지금 이 존재들의 할당수를 충분히 채웠으며, 루시퍼 반란으로 생긴 손실이 겨우 요즈음에 메워졌다.
48:3.4 (545.5) 상물질 동반자는 두 가지 뚜렷한 부류가 있다. 한 종류는 공격적이고, 다른 하나는 수줍음을 타지만, 그밖에 그들은 지위가 동등하다. 남녀 구별이 있는 생물이 아니지만, 서로에게 감동스럽게 아름다운 애정을 나타낸다. 그들은 물질적 (인간적) 의미에서 도저히 벗이 되지 않지만, 생물이 존재하는 순서에서 인류와 아주 가깝다. 여러 세계에 있는 중도인이 너희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다. 그 다음에 상물질 케루빔이고, 그 다음에 상물질 동반자이다.
48:3.5 (545.6) 이 동반자들은 감동스럽게 애정이 깊고, 지극히 사교적인 존재이다. 그들은 뚜렷한 성격을 소유하며, 너희가 저택 세계에서 그들을 만날 때, 그들을 한 등급으로서 인식하기를 배운 뒤에, 곧 그들의 개성(個性)을 깨달을 것이다. 필사자들은 다 서로 닮았다. 동시에 너희는 각자 뚜렷하고 알아볼 수 있는 인격을 가지고 있다.
48:3.6 (545.7) 한 지역 체계에서 이 상물질 동반자가 하는 활동에 관한 다음 분류로부터, 그들이 하는 일의 성질에 대하여 어떤 관념을 얻을 수 있다.
48:3.7 (545.8) 1. 순례자의 수호자는 상물질계 진보자와 관계할 때 특정한 의무에 배치되지 않는다. 이 동반자들은 상물질계 생애 전체에 대하여 책임을 지며, 따라서 모든 다른 상물질 및 과도기 봉사자의 일을 조정한다.
48:3.8 (546.1) 2. 순례자를 영접하는 자와 자유로운 친교자. 이들은 여러 저택 세계에서 새로 도착한 자들과 사교하는 동반자이다. 네가 시간 세계에서 처음으로 변신의 잠이 들었다가 첫째 저택 세계에서 깨어날 때, 육체가 죽었다가 네가 상물질 생명으로 부활(復活)할 때, 그들 가운데 하나가 너를 반기려고 분명히 가까이 있을 것이다. 깨어나면서 네가 이렇게 정식으로 환영받는 그때부터, 제1 단계 영이 되어 네가 지역 우주를 떠나는 그날까지, 이 상물질 동반자는 늘 너와 함께 있다.
48:3.9 (546.2) 동반자는 개인에게 영구히 배치되지 않는다. 어느 저택 세계나 상급 세계에 있는 하늘 가는 필사자는 연달아 생기는 각 기회에 다른 동반자를 가질 수도 있고, 또한 동반자 없이 오랫동안 지낼지 모른다. 모두가 필요에 달려 있고, 또한 소용되는 동반자의 공급에 달려 있을 것이다.
48:3.10 (546.3) 3. 천상의 방문자를 영접하는 자. 이 인자한 생물은, 어쩌다 여러 과도기 세계에서 머무르게 된, 초인간 집단의 학생 방문자 및 기타 천상 존재들을 환대하는 데 전념한다. 체험으로 도달한 어느 영역 안에서도, 너는 방문할 기회를 넉넉히 가질 것이다. 학생 방문자는 사람이 사는 모든 세계에, 아니 고립된 행성에도, 입국이 허락된다.
48:3.11 (546.4) 4. 조정자와 연락 지휘자. 이 동반자들은 상물질계 교류를 수월하게 만드는 데, 그리고 혼란을 방지하는 데 전념한다. 그들은 사회적 행위와 상물질 진보를 가르치는 자이며, 하늘 가는 필사자들 사이에서 학급과 기타 집단 활동을 후원한다. 그들은 너른 지역을 유지하며, 거기서 생도를 모으고, 그들의 순서를 꾸미려고 때때로 하늘 예술가와 회상 지도자들을 요청한다. 너희가 진보함에 따라서 너희는 이 동반자들과 밀접한 접촉을 가지게 될 터이고, 이 두 집단을 대단히 좋아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적극적인 부류나 수줍어하는 부류의 동반자와 사귈 것인가는 우연의 문제이다.
48:3.12 (546.5) 5. 통역자와 번역자. 초기의 저택 나라 생애에서, 너희는 통역자와 번역자의 도움을 자주 받을 것이다. 그들은 한 지역 우주의 모든 언어를 알고 모든 언어로 말하며, 그 영역의 언어학자이다.
48:3.13 (546.6) 너희는 자동으로 새 언어를 배우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가 여기 밑에서 하는 것과 비슷하게, 거기서 말을 배울 터이고, 이 명석한 존재들은 너희의 언어 선생이 될 것이다. 저택 세계에서 첫 공부는 사타니아의 말이고, 그 다음에는 네바돈 언어일 것이다. 너희가 이 새 언어들을 통달하는 동안, 상물질 동반자는 너희의 유능한 통역자요 참을성 있는 번역자가 될 것이다. 상물질 동반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통역 노릇을 하지 않고서 너희가 이 세계들 중 어디서도 방문자를 만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48:3.14 (546.7) 6. 소풍 및 회상 감독자. 이 동반자들은 본부 구체까지, 그리고 둘러싼 여러 과도기 문화 세계까지 긴 여행을 할 때, 너희를 따라갈 것이다. 그들은 체계의 여러 훈련 세계와 문화 세계 주위를 다니는 모든 그러한 개별 및 집단 여행을 계획하고 운영하고 감독한다.
48:3.15 (546.8) 7. 지역 및 건물 관리자. 너희가 저택 나라 생애에서 진급하는 동안 물질 구조와 상물질 구조조차 더욱 완벽하고 웅장해진다. 개인으로서, 그리고 집단으로서, 너희는 다른 저택 세계에서 너희가 머무를 본부로 배치된 거처에서, 어떤 변경을 하는 것이 허락된다. 이 여러 구체에서 많은 활동은 다양하게 지정된 동그라미ㆍ정사각형ㆍ삼각형으로 된, 울타리 친 노천 구역 안에서 일어난다. 대다수의 저택 세계 건물은 지붕이 없고, 웅장하게 지어지고 섬세하게 치장된, 울타리 친 구역이다. 건축 세계의 기후 및 다른 물리적 조건은 지붕이 전혀 필요 없게 만든다.
48:3.16 (547.1) 승천 생명의 과도기 단계를 관리하는 이들은 상물질 사무 관리에서 최고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이 일을 위하여 창조되었고, 최상 존재가 사실이 될 때까지, 언제나 상물질 동반자로서 남아 있을 터이고, 결코 다른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다.
48:3.17 (547.2) 체계와 우주들이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됨에 따라서, 차츰 저택 세계들은 상물질 훈련을 맡는 과도기 구체로서 활동하기를 그친다. 점점 더 최후자들은 그들의 새로운 훈련 체제를 시작하며, 이것은 우주 의식을 현재의 대우주 수준으로부터 미래의 바깥 우주 수준으로 옮기려고 고안된 듯하다. 상물질 동반자들은 갈수록 더 최후자들과 손잡고서, 그리고 유란시아에서 현재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48:3.18 (547.3) 너의 체재가 길든 짧든, 이 존재들 때문에 아마도 여러 저택 세계에서 네가 누리는 기쁨이 크리라 너는 예측할 수 있다. 너는 구원자별까지 내내, 그 존재들과 계속 사귈 것이다. 엄밀하게 보면, 그들은 너의 살아남는 체험의 어느 부분에도 필수인 존재는 아니다. 그들이 없어도 구원자별에 다다를 수 있지만, 너는 그들이 없으면 크게 서운해 할 것이다. 그들은 지역 우주에서 올라가는 생애에서 인격자가 누리는 사치품이다.
48:4.1 (547.4) 기쁨에 넘친 웃음, 그리고 빙그레 웃음에 상당하는 것은 음악처럼 보편적이다. 상물질로, 그리고 영적으로 웃음과 폭소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 하늘 가는 생활은 일과 놀이―임무로부터 풀려나는 것―사이에 대체로 같게 나누어진다.
48:4.2 (547.5) 하늘의 휴식과 초인간적 유머는 인간적 유사물과 아주 다르지만, 우리 모두가 실제로 이 두 가지의 어떤 형태에 빠진다. 이것들은 정말로 우리에게, 우리 상태에서, 유란시아에서 이상적 유머가 너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을 거의 모두 성취한다. 상물질 동반자들은 솜씨 있게 놀이를 후원하며, 회상 지도자들이 그들을 아주 유능하게 지원해 준다.
48:4.3 (547.6) 회상 지도자를 유란시아에서 상급 부류의 익살꾼과 견준다면, 너희는 아마도 그들이 하는 일을 최선으로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변화를 일으키고 긴장 푸는 일을 맡는 이 지도자, 상물질과 영의 영역의 높은 유머를 만드는 자의 기능에 대한 관념을 전하는, 지나치게 서툴고 얼마큼 유감스러운 방법일 것이다.
48:4.4 (547.7) 영적 유머를 논하면서, 먼저 영적 유머가 무엇이 아닌가 내 말을 들어 보아라. 영적 농담은 결코 약하고 잘못하는 자의 불운(不運)을 강조하는 빛을 띠지 않는다. 결코 신의 올바름과 영광을 모독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유머는 세 가지 일반 수준의 이해를 포함한다.
48:4.5 (547.8) 1. 회상하는 농담. 전투, 투쟁, 어떤 때는 두려움, 흔히 바보 같고 어린아이 같은 걱정 따위를 맛본 사람의 체험 속에 지난날의 사건을 기억하면서 우러나오는 놀리는 말. 우리에게, 이 단계의 유머는 기억 자료로 지난날을 이용하는 능력, 가슴 속 깊이 자리잡고 오래 거하는 능력으로부터 생겨나며, 그 자료로 오늘의 무거운 짐이 기쁜 맛이 돌게 만들고, 달리 그 짐을 가볍게 만든다.
48:4.6 (548.1) 2. 당대의 유머. 아주 흔히 우리에게 심각한 걱정거리가 되는 많은 것이 어리석고,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심각한 허다한 걱정거리가 하찮은 것을 깨닫는 즐거움. 우리가 앞날의 확실한 것에 치중하고 아주 쉽게 오늘의 불안을 가벼이 여길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단계의 유머를 가장 고맙게 여긴다.
48:4.7 (548.2) 3. 예언의 기쁨. 필사자가 이 단계의 유머를 상상하기는 아마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필사자 뿐 아니라 영과 상물질 인간을 위해서도―우리는 “모든 것이 함께 선을 이룬다”는 확신으로부터 특이한 흐뭇함을 얻는다. 하늘 유머의 이 모습은 우리의 상관들이 사랑으로 극진히 보살피며, 최상 지휘자들이 신답게 안정되었음을 우리가 믿는 데서 우러나온다.
48:4.8 (548.3) 그러나 영역의 회상 지도자들은 여러 계급의 지적 존재들의 높은 유머를 그리는 데만 순전히 관여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또한 기분 전환, 영적 오락, 상물질 여흥을 지도하는 데 몰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늘 예술가들이 그들에게 한껏 협조한다.
48:4.9 (548.4) 회상 지도자들 자체는 창조된 무리가 아니다. 그들은 하보나 원주민으로부터, 밑으로 공간의 사자 무리와 시간 세계에서 봉사하는 영들, 그리고 진화 세계에서 온 상물질 진보자에 이르는 존재들을 포함하여, 모집한 군단이다. 모두가 자원자이고, 생각을 변화시키고 정신의 휴식을 주려고 자기 동료들을 돕는 일에 헌신한다. 그러한 태도가 써버린 에너지를 회복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48:4.10 (548.5) 달성하는 노력으로 어느 정도 지쳤을 때, 새로운 에너지의 충전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동안, 지난 시절과 시대에 행한 것을 되새겨 보는 데 유쾌한 즐거움이 있다. 종족이나 계급의 초기 체험을 돌이켜보면 마음이 평안해진다. 이것이 바로 어째서 이 예술가들을 회상 지도자로 부르는가 하는 이유이다―그들은 예전의 발달 상태나 설익은 존재였을 때의 지위로 기억을 돌이키는 일에 도움을 준다.
48:4.11 (548.6) 어떤 존재도 이 종류의 회상을 즐기는데, 그 예외는 본래부터 창조자이고, 따라서 자동으로 스스로 원기를 찾는 이들, 그리고 상당히 특화된 어떤 부류의 생물, 곧 동력 중심과 물리 통제자와 같은 자인데, 이들의 모든 반응은 언제나, 영원히 철저히 사무적이다. 기능적 의무로 긴장했다가 이처럼 정기적으로 해방되는 것은 온 우주에 두루, 모든 세계에서 생활의 정상 부분이지만, 파라다이스 섬에서는 그렇지 않다. 중앙 거처에서 태어난 존재들은 지칠 능력이 없고, 따라서 에너지를 다시 공급받지 않는다. 파라다이스에서 영원히 완전한 그런 존재들의 경우에는, 그렇게 진화적 체험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있을 수 없다.
48:4.12 (548.7) 우리 중에서 대부분은 낮은 존재 단계를 통해서, 또는 우리 계급의 진보하는 여러 수준을 통해서 올라왔는데, 우리가 겪은 초기 체험의 어떤 사건들을 돌이켜보는 것은 기분이 상쾌하며, 어느 정도 즐겁다. 자신의 계급에게 오래 된 것, 그리고 머리가 소유한 기억에 남은 것을 숙고하면 마음이 평안하다. 앞날은 투쟁과 진급을 의미하며, 일과 노력과 성취를 예시(豫示)한다. 그러나 지난날은 이미 통달하고 이룩한 것들의 맛이 난다. 지난날을 숙고하는 것은 휴식과 아주 속 편한 복습을 허락하므로 영적 웃음, 그리고 흥겨움에 가까운 상물질 지성 상태를 자극한다.
48:4.13 (548.8) 필사자의 유머조차, 자기가 현재 도달한 상태보다 조금만 밑에 있는 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을 그리거나, 또는 자기보다 높다고 생각되던 자들이, 밑에 있다고 생각되는 자들이 흔히 겪는 체험으로 고생하는 것을 묘사할 때, 아주 건전하다. 유란시아 출신인 너희는 천하고도 불친절한 많은 것을 너희의 유머라고 혼동하도록 버려두었다. 그러나 비교적 날카로운 유머 감각을 가졌으니 너희는 대체로 칭찬받을 만하다. 너희 종족들 중에서 더러는 풍부한 유머 기질을 가졌고, 그 때문에 땅에서 살면서 크게 도움을 받는다. 너희의 아담 유산으로부터, 유머의 측면에서 너희는 많이, 음악이나 예술에서 얻은 것보다 훨씬 많이, 받은 듯하다.
48:4.14 (549.1) 노는 시간에, 거주자들이 하급 단계에서 존재하던 기억을 유쾌하게 되살릴 때, 온 사타니아가 유란시아에서 온 회상 지도자 집단의 즐거운 유머를 듣고 감화를 받는다. 가장 어려운 임무를 행할 때에도, 언제나 우리는 하늘 유머 감각을 지니고 있다. 자기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지나치게 자라도록 두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 그러나 우리 각자 계급의 심각한 임무로부터 쉴 때를 제외하고, 너희가 “신나게 논다”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멋대로 유머에 빠지지 않는다.
48:4.15 (549.2) 우리가 자신의 중요성을 과장하려는 유혹을 받을 때, 멈춰서 우리의 창조주들이 무한히 위대하고 웅대한 것을 숙고해 본다면, 우리 스스로를 찬미하는 것은 터무니 없이 어리석은 일이 되고, 아니 사람을 웃기는 일에 가깝다. 유머의 한 가지 구실은 우리 모두로 하여금 자신을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기도록 도와준다. 유머는 신이 내린 자아 찬미 해독제이다.
48:4.16 (549.3) 한숨 돌리고 유머로 기분을 전환할 필요는 하늘 가는 존재 계급에서 가장 큰데, 이들은 위로 올라가는 싸움에서 지속된 긴장으로 압박을 받는다. 생명의 두 극단은 익살로 기분을 바꿀 필요가 거의 없다. 원시인은 유머를 소화할 능력이 없고, 파라다이스에서 완전한 존재들은 유머가 필요 없다. 하보나의 무리들은 자연히, 최상으로 행복한 성격 존재들의 집단, 기쁘고 유쾌한 집단이다. 파라다이스에는 예배의 질이 높아서 회상하는 활동의 필요가 없어진다. 그러나 완전해지는 파라다이스 목표보다 한참 밑에서 생애를 시작하는 자들 사이에서, 회상 지도자들의 봉사가 큰 역할을 한다.
48:4.17 (549.4) 필사 종족이 높으면 높을수록, 긴장이 더 커지고, 유머의 필요 뿐 아니라 유머를 즐기는 능력도 더 커진다. 영 세계에서는 그 반대가 사실이다.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우리는 회상하는 체험으로 기분 전환할 필요가 적어진다. 그러나 파라다이스에서부터 천사 무리에 이르기까지 영 생명의 눈금을 내려가면서, 폭소의 사명과 여흥의 봉사가 더욱 필요하게 된다. 옛날에 체험한 지적 상태로 정기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필요한 자는 상급 부류의 인종, 상물질 인간, 천사, 물질 아들, 그리고 모든 비슷한 부류의 성격자이다.
48:4.18 (549.5) 유머는 발육의 진전과 고귀한 업적을 이루려는 강렬한 투쟁과 관련하여, 지속해서 심각하게 자신을 숙고하는 단조로움 때문에 지나친 압력이 쌓이는 것을 막는 자동 안전 밸브로서 작용해야 한다. 유머는 또한, 사실 또는 진리, 엄격하고 움직이지 않는 사실, 그리고 신축성 있고 늘 생생한 진리, 이 둘의 예기치 못한 영향이 주는 충격을 줄이도록 작용한다. 필사 인격자는, 다음에 무엇에 부닥칠지 결코 확실하지 않으니까, 유머를 통해서 그 상황을, 그 성질이 사실이든 진실이든, 재빨리 알아차린다―요점을 보고 통찰력을 얻는다.
48:4.19 (549.6) 유란시아의 유머는 지나치게 서툴고 예술성이 매우 떨어지지만, 하나의 건강 보험으로서, 감정의 압박을 해소하는 약으로서 값진 목적에 쓰이며, 이와 같이 해로운 신경 과민과 지나치게 심각한 자아의 명상을 막는다. 유머와 놀이―휴식―은 결코 진취적 노력에서 생기는 반응이 아니요, 반드시 뒤를 보는 것, 지난날을 회상함으로 생기는 반응이다. 유란시아에서도, 지금 너희 상태 그대로, 너희가 더 새롭고 더 높은 지적 노력을 잠시 그만두고, 너희 조상들이 하던 좀더 단순한 일로 돌아갈 수 있을 때, 너희는 언제나 활력을 되찾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48:4.20 (550.1) 유란시아 사람들의 놀이 생활의 원칙은 철학적으로 건전하며, 너희의 하늘 가는 인생을 통해서, 하보나 회로들을 거쳐서, 파라다이스의 영원한 기슭까지 줄곧 적용된다. 하늘 가는 존재로서, 너희는 예전에 하등 존재였을 때의 개인적 기억을 모두 간직하며, 그러한 지난날 신분의 기억이 없이, 필사자의 웃음이든 상물질계 폭소이든, 오늘의 유머가 있을 근거가 전혀 없을 것이다. 오늘의 기분 전환과 오락의 기초를 마련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지난날의 체험을 회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의 긴 상물질 생애와, 다음에 갈수록 영적인 생애를 통해서 내내, 지상(地上)의 유머에 해당하는 하늘 유머를 너희가 즐길 것이다. 하늘 가는 필사 인격의 영원한 부분이 되는, 하나님의 바로 그 부분(조절자)은 시공에서 하늘 가는 인간의 기쁜 표현, 아니 영적 폭소에도, 신의 소리를 더한다.
48:5.1 (550.2) 저택 세계 선생들은, 버림받았지만 영화롭게 된 케루빔과 사노빔의 군단이다. 시간의 순례자가 공간의 시험 세계로부터, 저택 세계, 그리고 상물질 훈련을 받는 관계된 세계들로 올라갈 때, 그에게는 개인 세라핌이나 집단 세라핌, 곧 운명 수호자가 따라붙는다. 필사자가 사는 세계에서 케루빔과 사노빔은 세라핌을 유능하게 도와준다. 그러나 그의 필사 피보호자가 육체의 사슬을 벗어나고, 하늘 가는 생애를 시작할 때, 물질 이후 생명, 곧 상물질 생명이 시작될 때, 시중들던 세라핌은 예전의 부관(副官), 케루빔과 사노빔이, 이제 더 필요 없다.
48:5.2 (550.3) 봉사하는 세라핌이 남겨놓은 이 조수(助手)들은 흔히 우주 본부에 소집되는데, 거기서 우주 어머니 영의 친밀한 품에 안기며, 그리고 나서 저택 세계 선생으로서, 체계의 훈련 구체들로 떠나간다. 이 선생들은 흔히 물질 세계들을 방문하며, 가장 낮은 저택 세계에서 시작하여, 우주 본부와 연결된 가장 높은 교육 구체들에 이르기까지 죽 활동한다. 자신이 제안하는 대로 그들은 봉사하는 세라핌과 관련하여 일하는 그들의 예전 작업으로 돌아가도 좋다.
48:5.3 (550.4) 사타니아에는 이 선생들이 몇 십억 명 있고, 그들의 수는 항상 늘어나는데, 이는 대다수의 경우에, 한 세라핌이 조절자와 융합한 필사자와 함께 안으로 진행할 때 케루빔과 사노빔이 한명씩 뒤에 남기 때문이다.
48:5.4 (550.5) 다른 대부분의 강사(講師)들과 마찬가지로, 멜기세덱들이 저택 세계 선생들을 임명한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상물질 동반자들의 감독을 받지만, 개인으로서 또 선생으로서, 그들이 강사로서 활동하고 있는 학교나 구체의 임시 우두머리의 감독을 받는다.
48:5.5 (550.6) 이 상급 케루빔은 보통, 세라핌에게 딸려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쌍을 이루어 일한다. 그들은 선천적으로 상물질 부류의 존재와 아주 가깝고, 하늘 가는 필사자에게 본래부터 이해심 있는 선생이며, 저택 세계와 상물질 교육 체제의 프로그람을 아주 유능하게 운영한다.
48:5.6 (551.1) 여러 상물질 생명 학교에서 이 선생들은 개인ㆍ집단ㆍ학급 및 대규모 교육에 종사한다. 저택 세계에서 그러한 학교들은, 각기 1백 부서로 이루어진 세 가지 일반 집단으로 조직되어 있는데, 생각 학교, 느낌 학교, 행동 학교이다. 너희가 별자리에 다다를 때, 윤리 학교, 행정 학교, 사회 적응 학교가 첨가된다. 우주의 여러 본부 세계에서 너희는 철학 학교, 신성(神性) 학교, 순수 영성(靈性) 학교에 들어갈 것이다.
48:5.7 (551.2) 땅에서 배울 수도 있었으나 배우지 못한 것을, 너희는 충실하고 참을성 있는 이 선생들의 감독 하에서 얻어야 한다. 파라다이스까지 가는 데 아무런 왕도(王道)나 지름길이나 쉬운 길이 없다. 가는 길의 개인적 차이와 상관 없이, 너희는 한 구체의 교훈을 다른 구체로 가기 전에 통달한다. 출생한 세계를 너희가 한번 떠난 뒤에, 적어도 이것이 참말이다.
48:5.8 (551.3) 상물질 생애의 한 가지 목적은 미루는 버릇, 얼버무리기, 불성실, 문제 회피, 불공평, 안일(安逸)의 추구와 같이, 남아 있는 짐승의 흔적을 살아남은 필사자로부터 영구히 뿌리 뽑는 것이다. 저택 나라 생활은 일찍부터, 어린 상물질 생도에게, 뒤로 미루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육체를 입은 인생 뒤에, 시간은 상황을 회피하거나 달갑지 않은 의무를 벗어나는 기술로서 소용되지 않는다.
48:5.9 (551.4) 저택 세계 선생들은 대기하는 구체 중 가장 낮은 곳에서 근무를 시작하고, 체계와 별자리의 교육 구체들을 거쳐서, 구원자별의 훈련 세계들까지, 경험을 얻으면서 진급한다. 그들은 우주 어머니 영의 품에 안기기 전이나 후에, 아무런 특별 훈련을 받지 않는다. 저택 세계에 머무르는 생도(生徒)들의 고향 세계에서 세라핌의 동료로서 수고하는 동안, 그들은 이미 할 일을 위하여 훈련을 받았다. 사람 사는 세계에서 이 진급하는 필사자들과 함께, 실제 체험을 겪었다. 그들은 실용적이고 동정심 있는 선생이요, 현명하고 이해심 있는 강사요, 유능하고 효과적인 안내자이다. 승천 계획에 관하여 전부 익숙하고, 진보하는 생애의 초기 단계에 철저히 경험을 가졌다.
48:5.10 (551.5) 이 선생들 가운데 오래 된 자들의 다수, 곧 구원자별 회로의 여러 세계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자들은 우주 어머니 영의 품에 다시 안기며, 이 둘째 포옹으로부터 이 케루빔과 사노빔은 세라핌 지위를 가지고 솟아난다.
48:6.1 (551.6) 모든 계급의 천사들은, 행성 조수로부터 최상 세라핌에 이르기까지 여러 상물질 세계에서 봉사하는데, 과도기 봉사자는 더 집중되어 이 활동에 배치된다. 이 천사들은 제6 계급의 봉사하는 천사이다. 그들의 봉사는, 육체를 입은 현세의 생명으로부터, 계속하여 물질인 필사 인간이 일곱 저택 세계에서 초기 단계의 상물질 존재로 이동하는 것을 수월하게 만드는 데 전념한다.
48:6.2 (551.7) 혼이 잉태될 때, 도덕적 지위를 가진 인간의 지성 안에 영(靈) 조절자가 깃드는 바로 그때, 사람 사는 세계에서 하늘 가는 필사자의 상물질 인생이 정말로 개시된다는 것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 그 순간부터 죽, 사람의 혼은 필사자를 초월하는 활동 능력, 아니 더 높은 수준의 지역 우주 상물질 구체들에서 인식하는 잠재 능력을 가진다.
48:6.3 (552.1) 그러나 여러 저택 세계에 이르기까지, 과도기 세라핌이 베푸는 봉사를 너희는 깨닫지 못할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생도인 필사자의 승진을 위하여 지치지 않고 일하며, 다음 일곱 부문의 근무로 배치된다:
48:6.4 (552.2) 1. 전도 천사. 저택 세계에서 의식을 찾는 순간, 너희는 체계의 기록부에서 진화하는 영으로 분류된다. 너희가 실제로 아직 영이 아닌 것이 참말이지만, 이제 더 필사 존재나 물질 존재가 아니다. 너희는 영이 되기 전의 생애를 개시했고, 정식으로 상물질 생활에 들어가는 허락을 받았다.
48:6.5 (552.3) 여러 저택 세계에서 전도(傳道) 천사들은 에덴시아ㆍ구원자별ㆍ유버르사ㆍ하보나에 이르는, 선택해도 좋은 여러 길 중에서 네가 지혜롭게 고르도록 도와줄 것이다. 똑같이 추천할 만한 길이 여럿이 있다면, 이런 길이 너희 앞에 제시될 터이고, 너에게 가장 매력 있는 길을 네가 선택하도록 허락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 세라핌들은 하늘 가는 각 사람에게 가장 유리할 과정을 예루셈의 24 상담자에게 추천한다.
48:6.6 (552.4) 네 앞날의 과정에 관하여 너에게 무제한의 선택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네 앞날의 영적 성취에 가장 알맞다고 과도기 봉사자와 그 상관들이 지혜롭게 결정을 내리는 한계 안에서 너는 선택해도 좋다. 네가 선택해도 좋은 과정이 너에게 해독이 되거나 네 동료들을 다치지 않는 한, 너의 자유 의지 선택을 존중하는 원칙에 바탕을 두고 영 세계가 다스려진다.
48:6.7 (552.5) 이 전도 천사들은 사람이 영원히 진보한다는 복음, 승리하여 완전에 이른다는 것을 선포하는 데 헌신한다. 여러 저택 세계에서 그들은 선이 보존되고 지배한다는 위대한 법칙을 선포한다: 어떤 선한 행위도 결코 전적으로 헛일이 되지 않는다. 선은 오랫동안 방해 받을지 모르지만, 결코 전적으로 무효가 되지 않으며, 그 동기의 신성한 정도에 비례해서 영원히 효력이 있다.
48:6.8 (552.6) 그들은 유란시아에서도 “회개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전도를 고수하라, “모든 두려움을 쫓아내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라고, 진리와 올바름을 가르치는 인간 선생들에게 조언한다. 그렇기는 해도 이 진리는 너희 세계에서 선포된 적이 있다:
48:6.9 (552.7) 신들이 나를 보살피시니, 내가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으리로다.
48:6.10 (552.8) 저희가 나란히 나를 아름다운 길과 영화롭게 신선한 영생으로 나를 인도하시도다.
48:6.11 (552.9) 이 신의 계심 앞에서 나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아니하리라.
48:6.12 (552.10) 내가 비록 불안의 골짜기로 내려가거나 의심스런 세계들까지 올라갈지라도,
48:6.13 (552.11) 외롭게, 또는 내 종류의 친구들과 함께 움직일지라도,
48:6.14 (552.12) 빛의 합창 속에서 승리하거나, 구체들의 외로운 데서 비틀거릴지라도,
48:6.15 (552.13) 주의 선한 영이 나를 보살필지며, 주의 영화로운 천사가 나를 위로하리라.
48:6.16 (552.14) 비록 깊은 어두움과 바로 죽음까지 내려갈지라도,
48:6.17 (552.15) 나는 주를 의심하거나 두려워 아니하리니,
48:6.20 (553.1) 이것은 목동에게 밤에 속삭여진 이야기이다. 그는 이것을 한 마디 한 마디 마음에 새길 수 없었지만, 오늘날 기록된 것과 비슷하게, 그의 기억을 최대한 살려서 표현하였다.
48:6.21 (553.2) 이 세라핌들은 또한 개별 승천자 뿐 아니라 체계 전체가 완전을 성취하라는 복음을 전하는 자이다. 지금도 젊은 사타니아 체계에서 그들의 가르침과 계획은, 저택 세계들이 하늘 구체에 이르는 디딤돌로서 필사 승천자에게 더 이상 쓰이지 않을 그 미래 시대를 위한 준비를 포함한다.
48:6.22 (553.3) 2. 종족 해석자. 모든 민족의 필사 존재들은 같지 않다. 한 주어진 세계에서 여러 민족의 물리적ㆍ정신적ㆍ영적 성품과 경향을 통해서 연결되는, 행성 원본이 있다는 것은 참말이다. 그러나 또한 다른 종족 부류들이 있으며, 아주 뚜렷한 사회적 성향이, 다른 이 기본 종류의 인간 자손의 특징을 나타낸다. 시간 세계에서 종족을 해석하는 천사들은, 종족들의 여러 가지 관점을 조화시키려는 종족 위원들의 노력을 촉진한다. 그들은 여러 저택 세계에서 계속 활동하며, 거기에는 바로 이 차이가 어느 정도 지속된다. 유란시아와 같이 혼란에 빠진 행성에서는 이 명석한 존재들이 활동할 좋은 기회가 거의 없었지만, 그들은 노련한 사회학자요, 첫째 하늘의 지혜로운 인종 고문(顧問)이다.
48:6.23 (553.4) 너희는 “하늘”과 “가장 높은 하늘”에 관한 말씀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너희 선지자들의 대부분이 상상했던 하늘은 지역 체계의 첫째 저택 세계였다. 한 사도가 “셋째 하늘까지 잡혀 올라갔다”고 말했을 때, 잠자는 동안에 그의 조절자가 자리를 떠서, 이 특별한 상태에서 일곱 저택 세계 중에서 셋째까지 상상한 체험을 그는 언급하였다. 너희의 현자들 가운데 더러는 더 큰 하늘, “가장 높은 하늘”의 환상을 보았는데, 그 중에 일곱 저택 세계의 체험은 단지 첫째였다. 둘째는 예루셈이고, 셋째는 에덴시아와 그 위성들이요, 넷째는 구원자별과 둘러싸는 교육 구체들이며, 다섯째는 유버르사요, 여섯째는 하보나이며, 일곱째는 파라다이스이다.
48:6.24 (553.5) 3. 정신 계획자. 이 세라핌들은 상물질 존재들을 효과적으로 분류하고 저택 세계에서 그들의 합동 작업을 조직하는 데 헌신한다. 그들은 첫째 하늘의 심리학자이다. 이 특별한 분과에서 봉사하는 천사의 대다수는 예전에 시간 세계의 자녀들에게 수호 천사로서 일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피보호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저택 세계에서 인격화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영이 융합하는 기법으로 살아남았다.
48:6.25 (553.6) 여러 저택 세계를 통해서 이동하는 조절자 혼들의 성품ㆍ체험ㆍ지위를 연구하고, 배치와 진급을 위하여 그들의 분류를 수월하게 하는 것이 정신 계획자가 할 일이다. 그러나 이 정신 계획자들은 계교를 꾸미거나, 조종하거나, 달리 저택 세계 학생들의 무지나 다른 한계를 이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온통 공평하고 뛰어나게 공정하다. 그들은 너의 새로 태어난 상물질 의지(意志)를 존중한다. 너희를 독립되고 의지를 가진 존재로 여기며, 너희가 빨리 발전하고 전진하라 북돋아주려고 애쓴다. 여기서 너는 참다운 친구와 이해심 있는 조언자들을 만나며, 그들은 네가 “남들이 너를 보는 것과 같이 너 자신을 보도록,” 그리고 “천사들이 너를 아는 것과 같이 너 자신을 알도록” 너를 정말로 도울 수 있는 천사이다.
48:6.26 (553.7) 유란시아에서도, 이 세라핌들은 영구한 진리를 가르친다: 바로 너의 정신이 너를 잘 보살피지 못하면 너는 이를 나사렛 예수의 정신과 바꿀 수 있으며, 그는 언제나 너에게 잘 봉사한다.
48:6.27 (554.1) 4. 상물질 상담자. 이 봉사자들은 인간의 기원이 있는 세계에서 살아남은 필사자를 가르치고 지도하고 상담하도록 배치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을 받으며, 이 필사자들은 체계 본부의 여러 상급 학교까지 이동하는 혼이다. 그들은 다양한 생명 수준에서 체험적 통일성을 보는 통찰력을 얻으려 하는 자, 곧 의미 있는 것을 통합하고 가치 기준을 통일하는 자를 가르치는 선생이다. 이것은 필사자의 인생에서 철학의 기능이요, 상물질 구체에서 상지혜의 기능이다.
48:6.28 (554.2) 상지혜는 우수한 철학보다 더 높은 것이며, 철학이 한 눈으로 보는 것이라면, 상지혜는 두 눈으로 보는 것과 같다. 상지혜는 의미와 가치 기준에 대하여 두 눈의 효과를 가진다. 물질인 사람은, 말하자면, 우주를 오직 한 눈으로―평평하게―본다. 저택 세계 학생들은 육체적 생명의 지각(知覺) 위에 상물질 생명의 지각을 겹쳐 놓음으로, 우주의 원근―깊이―를 얻는다. 대체로 상담하는 천사의 지칠 줄 모르는 봉사를 통해서, 그들은 이 물질 및 상물질 관점을 정확히 초점 맞추어 볼 수 있게 되며, 이 천사들은 아주 참을성 있게 저택 세계 학생과 상물질 진보자들을 가르친다. 최상 계급 세라핌으로서 가르치는 상담자들 중에서 다수는 시간 세계 필사자의 새로 해방된 혼의 조언자로서 생애를 시작했다.
48:6.29 (554.3) 5. 기술자. 이들은 새로운 승천자가 여러 상물질 구체의 새롭고 비교적 낯선 환경에 적응하도록 돕는 세라핌이다. 여러 과도기 세계의 생명에는 물리적 수준과 상물질 수준의 에너지와 물질,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영적 실체들과, 정말로 접촉하는 일이 생긴다. 승천자는 모든 새로운 상물질(上物質) 수준에 적응해야 하며, 이 모든 일에 그들은 천사 기술자들의 도움을 크게 받는다. 이 세라핌은 상물질 동력 감독과 물리 통제사들 사이에 연락원으로서 행동하며, 여러 과도기 구체에서 이용되는 에너지의 성질에 관하여 하늘 가는 순례자들의 강사로서 널리 활동한다. 그들은 긴급시에 공간 통과자로서 근무하며, 수많은 다른 정상 임무와 특별 임무를 수행한다.
48:6.30 (554.4) 6. 기록자인 선생. 이 세라핌은 영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의 경계 지역에 있는 거래, 사람과 천사들의 관계, 그리고 하급 우주 영역의 상물질 거래를 기록한다. 그들은 또한 사실을 기록하는 기술, 능률이 있고 효과적인 기술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봉사한다. 관계된 자료를 영리하게 수집하고 조정하는 데는 예술이 있다. 이 예술은 하늘 예술가들과 함께 일하면서 높아지며, 하늘 가는 필사자도 이처럼 기록 세라핌과 연결된다.
48:6.31 (554.5) 모든 천사 계급의 기록자는 상물질 진보자를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데 얼마큼 시간을 바친다. 시간 세계의 사실을 맡은 이 관리 천사들은 모든 사실 추구자에게 이상적인 강사이다. 예루셈을 떠나기 전에, 너희는 사타니아의 역사와 그에 속한, 사람이 사는 619 세계에 관하여 아주 익숙하게 될 터이고, 기록 천사들이 이 이야기의 상당한 부분을 전해 준다.
48:6.32 (554.6) 이 천사들은 모두, 가장 낮은 관리자로부터 시간 세계의 사실과 영원의 진리를 다루는 가장 높은 관리자까지 연장되는 기록자들의 계통에 속한다. 언젠가 그들은 사실 뿐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라고, 너희의 생각 뿐 아니라 혼을 키우라고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다. 지금도 너희는 마른 모래알 같은 지식을 추구할 뿐 아니라 너희 마음 속 동산에 물 주기를 배워야 한다. 교훈을 배운 뒤에 겉 모습은 가치가 없다. 어떤 병아리도 껍질 없이 생길 수 없지만, 병아리가 깨어난 뒤에는 어떤 껍질도 아무 가치가 없다. 그러나 때때로 잘못이 너무 커서 계시를 내려 이를 바로잡는 것은 체험으로 그 잘못을 타도하는 데 필수인 진리, 천천히 솟아나는 진리에게 치명상을 입힐 것이다. 아이들이 이상을 가질 때, 그 이상을 몰아내지 말고, 자라도록 버려 두어라. 너희가 어른 같이 생각하기를 배우는 동안, 또한 아이 같이 기도하는 것을 배우고 있어야 한다.
48:6.33 (555.1) 법이란 것은 바로 생명이며, 생명이 어떻게 행해야 하는 규칙이 아니다. 생명은 법이요, 악은 생명에 관한 행동 법칙의 위반이 아니라, 법을 어기는 것이다. 거짓은 이야기하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를 왜곡하는 것으로서 미리 계획한 무엇이다. 오래 된 사실로부터 새로운 그림을 창조하는 것, 자손의 생애에서 부모의 일생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것이 진리의 예술적 승리이다. 거짓된 목적으로 미리 계획해서, 머리카락 하나를 고치는 그림자, 원칙인 것을 조금이라도 비틀거나 왜곡하는 것―이것이 거짓이다. 그러나 주물로 사실이 된 진리, 화석(化石)처럼 굳어진 진리, 이른바 불변하는 진리의 쇠고랑은 냉철한 사실의 답답한 동그라미 안에 사람을 눈먼 채로 붙잡아 둔다. 사람은 사실에 관하여 정확한 전문 지식을 가지고, 언제까지나 진리를 잘못 알 수 있다.
48:6.34 (555.2) 7. 봉사 예비군. 모든 계급의 과도기 세라핌으로 이루어진 큰 군단이 제1 저택 세계에서 유지된다. 운명 수호자 다음에, 이 과도기 봉사자들은 모든 계급의 세라핌 중에서 인간에게 가장 가까우며, 너희는 여가 시간을 많이 그들과 함께 보낼 것이다. 천사들은 봉사하기를 기뻐하며, 배치받지 않았을 때, 자원자로서 흔히 수고한다. 천사 예비군의 자원 봉사자들과 개인적 친분을 통해서 많은 승천 필사자의 혼이 봉사하려는 의지로, 처음으로 신성한 불이 붙었다.
48:6.35 (555.3) 너희는 곤궁에 처해서도 안정과 확신을 얻으며, 충실하고 진지하고 게다가 즐거운 마음을 가지며, 투덜거리지 않고 도전을 받아들이며, 두려움 없이 어려움과 불안에 직면하는 것을 그들로부터 배울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실패한다면, 너는 굽히지 않고 다시 시도하려고 일어나겠는가? 성공한다면, 물질적 타성의 사슬을 깨뜨리기 위하여, 영으로 존재하는 자유를 얻기 위하여 오래 투쟁하는 동안 온갖 노력을 통해서, 너는 차분한 자세―안정되고 영답게 변화된 자세―를 유지하겠는가?
48:6.36 (555.4) 필사자와 마찬가지로, 이 천사들도 많은 실망을 낳았고, 때때로 너를 가장 서운하게 만드는 실망이 너의 가장 큰 복이 되었음을 지적할 것이다. 때때로 하나의 씨앗을 심는 것이, 다시 태어나서 새 생명과 새 기회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 전에, 씨앗의 죽음, 네가 제일 좋아하는 희망이 죽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 천사들로부터, 너는 먼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몸소 계획하는 일을 줄이고, 다음에 의무를 충실히 행했을 때 너의 운명을 받아들임으로, 슬픔과 실망으로 고통을 적게 받기를 배울 것이다.
48:6.37 (555.5) 너 자신을 너무 중대하게 생각하면 너는 네 짐을 불리고 성공의 가능성을 줄인다는 것을 배울 것이다. 아무것도 너의 지위 구체―이 세계나 다음 세계―에서 할 일보다 우선하지 않는다. 다음의 더 높은 구체를 위한 준비 작업이 대단히 중요하지만, 아무것도 네가 실제로 사는 세계에서 할 일만큼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비록 할 일이 중요하기는 해도, 자아는 그렇지 않다. 네가 중요하다는 느낌이 들 때, 너는 자아의 위엄이 소모되는 데 에너지를 잃어버려서, 일할 에너지가 거의 남지 않는다.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덜된 인간을 진이 빠지게 만든다. 닳아 버리는 것은 자아 요소이지, 성취하는 노력이 아니다. 자신을 중요시하지 않게 되면, 너는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다. 자신을 빼놓으면, 너는 몇 가지 일을 하나 하는 것처럼 쉽게 할 수 있다. 변화는 휴식을 주며, 단조로움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피곤하게 만든다. 날마다 비슷하다―올바르게 살든지, 아니면 다른 선택, 죽음에 이른다.
48:7.1 (556.1) 하급 단계에서 상물질계의 상지혜는 인간 철학의 높은 수준과 바로 맞닿는다. 제1 저택 세계에서는 진보가 더딘 학생들을 평행 기법으로 가르치는 것이 관례이다. 다시 말하면, 한 쪽에 상지혜 의미가 있는 비교적 간단한 개념이 제시되고, 맞은 편에 필사자의 철학에서 비슷한 말씀이 인용된다.
48:7.2 (556.2) 사타니아의 첫째 저택 세계에서 임무를 수행하면서, 나는 얼마 전에 이 교육 방법을 지켜볼 기회를 가졌다. 그 수업의 상지혜 내용을 내가 제시해서는 안되지만, 나는 인간 철학의 28개 조항을 기록하는 허락을 받았는데, 상지혜의 중요성과 의미를 깨우치려고 초기에 노력할 때 저택 세계에서 새로 머무르는 이 사람들을 도우려고 고안된 설명 자료로서, 이 상물질계 교육자가 이를 이용하고 있었다. 인간 철학의 이 실례(實例)는 다음과 같다.
48:7.3 (556.3) 1. 전문화된 기술을 보여주는 것은 영적 능력이 있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영리한 것은 참된 인품을 대신하지 않는다.
48:7.4 (556.4) 2. 자기가 정말로 가진 믿음에 부끄럽지 않게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까닭 없는 두려움은 진화하는 필사자의 혼이 당하는 큰 지적 속임수이다.
48:7.5 (556.5) 3. 타고난 능력은 뛰어넘을 수 없다. 한 되는 결코 한 말을 담지 못한다. 물질을 기억하는 틀 속에 영 개념을 기계적으로 강제로 넣을 수 없다.
48:7.6 (556.6) 4. 천성과 신의 은총이 함께 개인에게 빌려주려고 지정한 신용 한도 근처까지 감히 빌리고자 하는 필사자는 거의 없다.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참으로 부유하지만 이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48:7.7 (556.7) 5. 어려움은 평범한 자에게 도전하고 무서워하는 자를 좌절시킬 수도 있지만, 최고자들의 참된 자녀를 자극할 뿐이다.
48:7.8 (556.8) 6. 악용하지 않고서 특권을 즐기며, 방종하지 않고서 자유를 누리며, 권력을 소유하면서 자기 확대에 쓰기를 완강히 거절하는 것―이것이 높은 문명의 표시이다.
48:7.9 (556.9) 7. 맹목이며 예기치 않은 사고는 우주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하늘 존재들은, 자신이 본 진리의 빛을 좇아 행동하려고 하지 않는 낮은 존재를 돕지도 않는다.
48:7.10 (556.10) 8. 수고한다고 반드시 즐거움을 얻지는 않지만 영리하게 수고하지 않고는 행복이 없다.
48:7.11 (556.11) 9. 행동은 힘을 낳고, 절제는 궁극에 매력으로 변한다.
48:7.12 (556.12) 10. 올바름은 진리의 화음을 울리며, 그 멜로디는 우주에 두루, 아니 무한자가 알아보기까지 울려 퍼진다.
48:7.13 (556.13) 11. 약한 자는 쉽게 결심하지만, 강한 자는 행동한다. 인생은 단지 하루의 일이다―그 일을 잘 하여라. 행동은 우리가 하고, 결과는 하나님이 정한다.
48:7.14 (556.14) 12. 우주에서 가장 큰 고통은 결코 고통을 맛보지 못하는 것이다. 필사자는 오로지 시련을 겪음으로 지혜를 얻는다.
48:7.15 (556.15) 13. 빛나고 기쁨에 넘치는 산 꼭대기가 아니라, 체험의 밑바닥에서 외롭게 떨어져 있는 곳에서 별들이 제일 잘 보인다.
48:7.16 (556.16) 14. 진리를 향한 너희 동료들의 입맛을 돋구어라. 부탁받을 때에만 충고하라.
48:7.17 (557.1) 15. 허식(虛飾)은 무지한 자가 지혜롭게 보이려 하는 어리석은 노력이요, 곤궁한 사람이 부유한 듯 보이려고 애쓰는 것이다.
48:7.18 (557.2) 16. 영적 진리는 네가 손으로 만지듯 체험할 때까지 깨달을 수 없고, 곤경에 빠지지 않고는 많은 진리를 정말로 느끼지 못한다.
48:7.19 (557.3) 17. 포부는 완전히 사회와 함께 가질 때까지는 위험하다. 어떤 미덕이라도 네가 그에 어울리게 행동할 때까지, 너는 그 미덕을 얻지 못한 것이다.
48:7.20 (557.4) 18. 성급한 마음은 영에게 독이며, 분노는 벌집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다.
48:7.21 (557.5) 19. 걱정은 버려야 한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실망은 결코 닥쳐오지 않는 실망이다.
48:7.22 (557.6) 20. 오로지 시인(詩人)이 평범한 산문 같은 일상 생활에서 시(詩)를 발견한다.
48:7.23 (557.7) 21. 어떤 예술이든지 예술의 높은 임무는 그 환상을 이용하여 더 높은 우주 실체를 예시하는 것, 세월의 느낌을 영원의 생각으로 구체화하는 것이다.
48:7.24 (557.8) 22. 행위가 아니라 성취하려고 애쓰는 목표에 따라, 진화하는 혼은 신답게 된다.
48:7.25 (557.9) 23. 사람의 죽음은 지적 재산이나 영적 소유물을 늘이지 않았지만, 체험하는 지위에 살아남은 의식(意識)을 더했다.
48:7.26 (557.10) 24. 영원한 운명은 하루하루 살면서 이룬 업적에 따라서 한 순간 한 순간 결정된다. 오늘의 행위는 내일의 운명을 정한다.
48:7.27 (557.11) 25. 위대함은 힘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힘을 지혜롭고 신답게 쓰는 데 있다.
48:7.28 (557.12) 26. 지식은 나누어 주어야 가질 수 있으며, 지혜는 지식을 보호하고 사랑은 지식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48:7.29 (557.13) 27. 진보는 개성의 발전을 요구한다. 평범한 사람은 표준이 된 것을 영속시키려고 한다.
48:7.30 (557.14) 28. 어떤 명제(命題)라도 진리를 적게 담을수록 이를 입증하는 말이 길어진다.
48:7.31 (557.15) 첫째 저택 세계의 초심자의 일이 이러하며, 한편 그 뒤의 여러 세계에서 상급 생도들은 더 높은 수준의 우주 통찰력과 상물질계의 상지혜를 통달하고 있다.
48:8.1 (557.16) 여러 저택 세계를 졸업할 때부터 초우주 생애에서 영 지위를 얻을 때까지, 하늘 가는 필사자는 상물질 진보자라 부른다. 이 놀라운 경계지(境界地)의 생활을 너희가 거치는 것은 잊을 수 없는 체험, 매력 있는 기억이 될 것이다. 그것은 영 생명에 이르고 궁극에 인간의 완전을 달성하는 진화의 입구이며, 이렇게 함으로 승천자는 세월의 목표―파라다이스에 계신 하나님을 찾아내는 목표―를 달성한다.
48:8.2 (557.17) 필사자를 진보시키는 이 모든 상물질 계획과 차후의 영 계획, 하늘 가는 사람들을 위한 이 정교한 우주 훈련 학교에 분명하고 신성한 목적이 있다. 시간 세계의 인간에게 대우주의 운영과 행정의 세부를 통달할 점진적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 창조자들의 설계이며, 살아남는 필사자가 차츰차츰 올라가게 함으로, 올라 가는 걸음마다 실제로 참여함으로, 이 긴 훈련 과정이 최선으로 진행된다.
48:8.3 (558.1) 필사자를 살아남게 하는 계획에는 실용적이고 쓸모 있는 목표가 있다. 겨우 너희가 살아남아 그저 끝없는 복과 영원한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 이 모든 신성한 수고와 힘드는 훈련을 받는 것이 아니다. 현재 우주 시대의 지평선을 지나서, 초월적 봉사 목표가 감추어져 있다. 신들이 겨우 하나의 길고도 영원한, 즐거운 소풍으로 너희를 데려가려고 계획했다면, 분명히 그들은 우주 전체를 하나의 방대하고 복잡한 실용적 훈련 학교로 대체로 바꾸어 놓고, 하늘 세계의 상당 부분을 선생 및 교육자로서 징발하며, 다음에 이 거대한 우주 학교의 체험 훈련을 통해서 너희를 하나하나 안내하느라고 기나긴 세월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필사자 진보 계획을 촉진하는 것은 현재 조직된 우주의 주요 사업의 하나인 듯하다. 수많은 계급의 창조된 지성들의 대다수는 점진적으로 사람을 완성시키는 이 계획의 어떤 국면을 진행하는 데, 직접 또는 간접으로 종사하고 있다.
48:8.4 (558.2) 필사 인간으로 시작하여 신의 품에 안기기까지, 살아 있는 존재의 올라가는 단계를 거치면서, 현재 우주 시대의 한계 안에서, 완전하게 된 인간 존재가 거치는 모든 가능한 국면과 단계의 바로 그 인생을 너희가 실제로 산다. 필사 인간으로 시작하여 파라다이스의 최후자에 이르기까지, 지금 가능한 것을 다 포함한다―살아 있는 여러 계급에서 총명하고 완전하게 된 유한한 인간 존재가 당장 성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하늘 가는 훈련의 일부로서, 동물로부터 천사까지, 천사로부터 영에 이르기까지, 영으로부터 하나님 앞에 이르기까지, 필사 최후자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진보하는 한 단계로서 어떤 세상에서 살아 왔다. 파라다이스 최후자의 미래 운명(運命)이 지금 생성되고 있는 여러 새 우주에서 일하는 것이라면, 그런 최후자의 일생과 도무지 다른 일생을 사는 존재, 그러한 창조된 계급의 체험적 존재는 이 새로운 미래 창조에 전혀 없으리라는 것이 확실하다.
49:0.1 (559.1) 필사자가 사는 세계는 모두 진화에 기원이 있고 진화의 성질을 가졌다. 이 구체들은 시공의 필사 종족들이 번식하는 땅이요 진화의 요람이다. 하늘 가는 생명의 각 단위는 바로 앞 단계의 존재를 위한 진정한 훈련 학교이며, 이것은 사람이 진보해서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어느 단계에도 참말이다. 이것이 진화하는 행성에서 초기의 필사 체험의 경우에 똑같이 참말이요, 멜기세덱들의 최종 우주 본부 학교의 경우도 그러하며, 이 학교는 초우주 체제로 옮기고 제1 단계의 영 존재에 도달하기 바로 전까지 하늘 가는 필사자가 다니지 못하는 학교이다.
49:0.2 (559.2) 사람 사는 세계들은 다 기본적으로, 하늘의 행정을 위하여 지역 체계 단위로 분류되며, 이 지역 체계는 각각 약 1천 진화 세계를 넘지 않게 제한되어 있다. 이 제한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선포에 따른 것이며, 이것은 생존 지위를 가진 필사자가 살고 있는, 실제로 진화된 행성들과 관련된다. 마침내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세계나, 사람이 생기기 이전 단계로 생명이 발달한 행성도 이 집단에 계산되지 않는다.
49:0.3 (559.3) 사타니아 자체는 미완성 체계이며, 사람 사는 행성을 오직 619개 포함한다. 그런 행성들은 사람 사는 세계로, 의지(意志)를 가진 사람이 사는 세계로 등록된 데 따라서, 일련 번호가 매겨진다. 이처럼 유란시아는 사타니아의 606번이라는 번호를 받았는데, 이는 이 지역 체계에서 오랜 진화 생명의 과정이 마침내 인간의 출현을 가져온 606번째 세계라는 뜻이다. 아직 사람이 살지 않지만 생명을 부여할 단계에 가까워지는 행성이 36개 있고, 몇몇은 이제 생명 운반자들을 위하여 준비되고 있다. 다음 수백만 년 안에 생명을 심기 위하여 준비가 되도록 진화하고 있는 구체가 거의 2백개 있다.
49:0.4 (559.4) 모든 행성이 필사 생명을 품기에 적합하지는 않다. 자체의 축(軸) 회전율이 높은 작은 행성은 생명의 서식처로 전혀 부적당하다. 사타니아의 몇 물리 체계에서 중앙의 태양[1] [1687] 주위를 돌고 있는 행성들은 생명이 서식하기에 너무 크며, 그 큰 질량이 압도적 인력(引力)의 원인이다. 이 거대한 구체들 가운데 다수는 위성이 있고, 때때로 여섯 이상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달은 흔히 유란시아의 크기에 아주 가까워서, 사람이 살기에 거의 이상적이다.
49:0.5 (559.5) 사타니아에서 사람이 사는 가장 오래 된 세계, 1번 세계는 아노바이며, 이것은 거대한 어두운 행성 주위를 도는 44개 위성 중에 하나이지만, 이웃에 있는 세 태양의 다른 빛에 노출되어 있다. 아노바는 진보하는 문화의 상급 단계에 있다.
49:1.1 (559.6) 시공의 우주들은 차츰차츰 발달하며, 생명의 진보는―땅에 있거나 하늘에 있거나―멋대로 일어나지 않고 마술도 아니다. 우주의 진화는 반드시 이해할 (예측할) 수 있지는 않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우연히 생기지 않는다.
49:1.2 (560.1) 물질 생명의 생물학적 단위는 원형질 세포이며, 이것은 화학 에너지, 전기 에너지, 그리고 기타 기본 에너지가 공동체로 결합된 것이다. 화학 공식은 체계마다 다르고, 살아 있는 세포의 번식 방법은 각 지역 우주에서 조금씩 다르지만, 생명 운반자들은 언제나 물질 생명의 원초적 반응을 개시하는 살아 있는 촉매이다. 그들은 살아 있는 물질의 에너지 회로를 휘젓는 자이다.
49:1.3 (560.2) 한 지역 체계에 있는 세계들은 모두 틀림없는 물리적 유사성을 드러낸다. 그렇기는 해도 각 행성에는 자체 생명의 등급이 있고, 어느 두 세계도 그 식물 및 동물 재산이 똑같지 않다. 체계 생명의 종류에서 행성들 사이에 이 차이는 생명 운반자들이 내린 결정으로부터 생긴다. 그러나 이 존재들은 변덕스럽거나 쉽게 번복하지 않는다. 우주들은 법과 질서에 따라서 운영된다. 네바돈의 법칙은 구원자별의 신성한 명령이며, 사타니아에서 진화하는 계급의 생명은 네바돈의 진화 원본들과 조화된다.
49:1.4 (560.3) 진화는 인간의 발전을 지배하지만, 그 과정 자체는 다른 세계들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생명은 때때로 한 중심에서 개시되며, 때때로 유란시아처럼 세 곳에서 개시된다. 대기(大氣)가 있는 세계에서 생명은 보통 바다에서 기원이 생기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많은 것이 행성의 물리적 상태에 달려 있다. 생명 운반자는 생명을 개시하려고 활동하면서 큰 재량권을 가진다.
49:1.5 (560.4) 행성에서 생명이 발달할 때 식물(植物) 형태가 반드시 동물에 앞서며, 동물 형태가 분화되기 전에 아주 충분히 발달한다. 모든 동물 종류는 선행(先行)하는 식물계 생물의 기본 형태로부터 발달하며 따로 조립되지 않는다.
49:1.6 (560.5) 생명의 진화에서 초기 단계는 오늘날 너희의 관점과 전적으로 조화되지는 않는다. 필사 인간은 진화로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한 정밀한 체계, 한 우주 법칙이 있고, 이것은 공간의 여러 구체에서 행성의 생명 계획이 펼쳐지는 것을 결정한다. 시간과 한 종자의 대량 생산은 지배하는 영향력이 아니다. 쥐는 코끼리보다 훨씬 빨리 번식하지만, 코끼리는 쥐보다 더 빨리 진화한다.
49:1.7 (560.6) 행성의 진화 과정은 질서가 있고 통제된다. 하등 생명의 집합으로부터 상급 유기체가 발달하는 일은 어쩌다 일어나지 않는다. 선택된 종자(種子)가 지니는 생명 세포질의 어떤 유리한 계열이 파괴되어 때때로 진화의 걸음이 일시 늦어진다. 인간의 유전(遺傳)에서 하나의 우수한 혈통을 잃어서 생긴 손해를 회복하는 데는 장구한 세월이 걸린다. 살아 있는 원형질에서 선택된 이 우수한 혈통들은, 일단 나타나면 조심스럽게, 영리하게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이 사는 대부분의 세계는 유란시아보다 이 우수한 생명 잠재성을 훨씬 더 높이 평가한다.
49:2.1 (560.7) 각 체계에는 식물 및 동물 생명의 표준이 되는 기초적 원본이 있다. 그러나 생명 운반자들은 흔히 공간의 수많은 세계를 지배하는 다양한 물리적 조건에 맞도록 이 기본 형태를 수정할 필요에 직면한다. 그들은 일반화된 체계 종류의 필사 인간을 육성하지만, 일곱 가지 뚜렷한 물리적 종류가 있고, 또한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 현저한 분화 중에 작은 변종들이 수천 가지가 있다:
49:2.9 (561.8) 사타니아 체계는 이 종류들과 수많은 중간 집단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떤 것은 아주 부족하게 대표된다.
49:2.10 (561.9) 1. 대기 종류. 필사자가 사는 세계들의 물리적 차이점은 주로 대기의 성질에 따라 결정된다. 행성에서 생명의 분화에 이바지하는 다른 영향은 비교적 사소하다.
49:2.11 (561.10) 현재 유란시아 대기의 상태는 숨쉬는 종류의 사람을 지탱하는 데 거의 이상적이지만, 인간 종류는 짙은 대기를 가진 행성과 옅은 대기를 가진 행성에서 살 수 있도록 조정될 수 있다. 그러한 수정은 또한 동물 생명에 연장되며, 동물 생명은 사람이 사는 다른 구체들에서 크게 다르다. 대기보다 옅은 공기와 대기보다 짙은 공기를 가진 세계에서는 동물 계급이 크게 수정된다.
49:2.12 (561.11) 사타니아에 있는 대기 종류들 가운데, 약 2.5퍼센트는 저(低)호흡자이고, 약 5퍼센트는 고(高)호흡자이며, 중간 호흡자는 91퍼센트가 넘는데, 이들 모두가 사타니아 세계들에서 98.5퍼센트를 차지한다.
49:2.13 (561.12) 유란시아 종족들과 같은 존재는 중간 호흡자로 분류되며, 너희는 보통 등급, 곧 대표적 호흡 등급의 필사 존재이다. 지적(知的) 인간이 너희의 가까운 이웃, 금성의 대기와 비슷한 대기를 가진 행성에 존재한다면, 그들은 고호흡 집단에 속할 것이다. 한편 너희의 바깥 이웃, 화성의 대기처럼 엷은 대기를 가진 행성에 사는 자들은 저 호흡자로 지칭될 것이다.
49:2.14 (561.13) 너희의 달처럼, 공기가 없는 행성에 필사자가 산다면, 그들은 따로 된 계급, 비(非)호흡자에 속할 것이다. 이 종류는 행성의 환경에 대하여 근본적이거나 극단적인 조정을 대표하며, 따로 고려된다. 비호흡자는 사타니아 세계들 중에 나머지 1.5퍼센트를 차지한다.
49:2.15 (561.14) 2. 원소 종류. 이 분화(分化)는 필사자와 물ㆍ공기ㆍ육지의 관계와 상관이 있고, 이러한 서식처에 관계된 대로 지적 생명에는 네 가지 뚜렷이 다른 종(種)이 있다. 유란시아 종족들은 육지 계열이다.
49:2.16 (561.15) 너희가 어떤 세계들의 초기 시대를 지배하는 환경을 상상하기는 아주 불가능하다. 이러한 특별 조건 때문에, 진화하는 동물 생명이, 쾌적한 육지 및 대기(大氣) 환경을 아주 일찍 마련한 행성보다, 더 오랫동안 그 해양의 번식하는 서식처에 남아 있는 것이 필요하다. 반대로, 어떤 고호흡자(高呼吸者) 세계에서, 행성이 너무 크지 않을 때, 대기에서 쉽게 다닐 수 있는 필사자 종류를 마련하는 것이 때로는 편리하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이 사람들은 때때로 물 집단과 땅 집단 사이에 끼며, 그들은 반드시 어느 정도 땅에서 살고, 결국에는 육지 거주자로 진화한다. 그러나 어떤 세계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육지 종류의 존재가 된 뒤에도 그들은 계속해서 날아다닌다.
49:2.17 (562.1) 인간의 원시 민족의 초기 문명이 형성되는 것을 지켜보기는 놀랍고 흥미 있다. 그들은 한 경우에는 공중에서, 또 나무 꼭대기에서, 그리고 다른 경우에는 아늑한 열대 분지(盆地)의 얕은 물가에 싸여, 그리고 그러한 특별한 구체의 시초 종족들이 사는 이 해양 동산의 바닥ㆍ옆ㆍ물가에서 형성된다. 유란시아에서도 초기에 나무에서 살던 조상들이 했던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원시인이 대체로 나무 꼭대기에서 삶으로, 자신을 보존하고 원시 문명을 진보하게 하였다. 유란시아에서 너희는 아직도 공중을 나르는, 한 무리의 왜소한 포유 동물(박쥐 가족)이 있으며, 해양에서 서식하는, 너희의 물개와 고래도 또한 포유 동물목(目)에 속한다.
49:2.18 (562.2) 사타니아에는 요소 종류들 가운데, 7퍼센트는 물이고, 10퍼센트는 공기이며, 70퍼센트는 땅이요, 13퍼센트는 땅과 공기의 통합 종류이다. 그러나 초기에 지적 생물을 이렇게 수정한 것은 인간 물고기도 아니요, 인간 새도 아니다. 그들은 인간 종류 및 인간이 되기 전 종류이며, 초월 물고기도 아니요 영화롭게 된 새도 아니지만, 뚜렷하게 필사자이다.
49:2.19 (562.3) 3. 인력 종류. 창조적 설계를 수정함으로, 지적 존재들은 유란시아보다 작은 구체와 큰 구체에서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도록 지어질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상적 크기와 밀도(密度)를 가지지 않은 행성들의 인력(引力)에 어느 정도 조절된다.
49:2.20 (562.4) 다양한 행성 종류의 필사자는 키가 서로 다르며, 네바돈에서 평균은 213센티미터보다 조금 작다. 큰 세계들 중에서 어떤 곳에서는 키가 겨우 약 76센티미터 되는 존재들이 살고 있다. 필사자의 키는 여기서 시작해서, 보통 크기의 행성에서 평균키를 지나서, 사람이 사는 작은 구체에서 약 3미터에 이른다. 사타니아에는 키가 120센티미터보다 작은 민족이 오직 하나 있다. 사람이 사는 사타니아 세계들의 20퍼센트에는 크고 작은 행성들을 차지하는, 수정된 인력 종류의 필사자가 살고 있다.
49:2.21 (562.5) 4. 기온 종류. 유란시아 종족들이 사는 범위보다 훨씬 높은 기온(氣溫)을 견딜 수 있는 인간과 훨씬 낮은 온도를 견딜 수 있는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 가능하다. 열을 규제하는 작용과 관련하여 분류된 바와 같이, 다섯 가지 뚜렷이 다른 계급의 존재들이 있다. 이 눈금에서 유란시아 종족들은 3번이다. 사타니아 세계들 중에 30퍼센트는 수정된 기온 종류의 민족들이 차지한다. 중간 기온 집단에서 활동하는 유란시아인과 비교하여, 12퍼센트는 더 높은 온도 범위에 속하며, 18퍼센트는 더 낮은 범위에 속한다.
49:2.22 (562.6) 5. 전기 종류. 여러 세계에서 전기, 자력(磁力) 및 전자(電子)의 행동은 크게 다르다. 필사 생명에는 여러 구체의 차별되는 에너지를 견디도록 다르게 만든, 10가지 설계가 있다. 이 10가지 종류는 또한 보통 태양 빛의 화학선에 조금 다른 방법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물리적 차이는 어떤 면에서도 지적 생명이나 영적 생명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49:2.23 (562.7) 필사 생명의 전기적 분류 가운데, 거의 23퍼센트가 4번 등급, 곧 유란시아 종류의 존재에 속한다. 이 종류들은 다음과 같이 분포되어 있다: 1번, 1퍼센트. 2번, 2퍼센트. 3번, 5퍼센트. 4번, 23퍼센트. 5번, 27퍼센트. 6번, 24퍼센트. 7번, 8퍼센트. 8번, 5퍼센트. 9번, 3퍼센트. 10번, 2퍼센트이다―정수(整數) 퍼센트로 따져서 그렇다.
49:2.24 (563.1) 6. 에너지 공급 종류. 모든 세계가 에너지를 흡수하는 방법이 비슷하지는 않다. 사람이 사는 세계들이 모두, 유란시아에 있는 것처럼 가스를 숨쉬어 교환하는 데 적당한, 방대한 양의 대기(大氣)를 가지지는 않았다. 많은 행성의 초기 및 후기 단계에서, 너희 현재 등급의 사람들은 존재할 수 없다. 한 행성의 호흡 요소들이 아주 높거나 아주 낮아도, 지적 생명에 필요한 모든 다른 조건이 알맞을 때, 생명 운반자들은 흔히 그러한 세상에서 수정된 형태의 필사 존재를 정착시키며, 이들은 빛 에너지로, 그리고 물리 통제사들의 동력을 몸소 변화시키는 수단으로 직접, 생명 과정의 교환을 행하는 능력이 있는 존재이다.
49:2.25 (563.2) 동물 및 필사자의 영양에는 여섯 가지 다른 종류가 있다. 저호흡자는 제1 종류의 영양을 이용하며, 해양 거주자는 제2 종류, 중간 호흡자는 유란시아의 경우와 같이 제3 종류를 이용한다. 고호흡자는 제4 종류의 에너지 흡수를 이용하며, 한편 비호흡자는 제5 체계의 영양과 에너지를 이용한다. 에너지를 공급하는 제6 기법은 중도인(中道人)에 국한된다.
49:2.26 (563.3) 7. 이름 없는 종류. 행성 생명에 추가로 수많은 물리적 변종이 있으나, 이 차이는 모두 완전히, 해부학상으로 수정(修正)하거나 생리학상으로 구분하거나 전기ㆍ화학적으로 조정하는 문제이다. 그러한 구별은 지적 생명이나 영적 생명과 상관되지 않는다.
49:3.1 (563.4) 사람이 사는 대다수의 행성들은 숨쉬는 종류의 지적 존재로 차 있다. 그러나 공기가 거의 또는 전혀 없는 세계에서 살 수 있는 서열의 필사자도 또한 있다. 오르본톤에서 사람 사는 세계들 가운데 이 종류는 7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다. 네바돈에서 이 비율은 3퍼센트 미만이다. 온 사타니아에서 그러한 세계가 꼭 아홉 군데 있다.
49:3.2 (563.5) 사타니아에는 비호흡 종류의 사람 사는 세계들이 극히 적은데, 이는 놀라시아덱에서 최근에 조직된 이 구역은 아직도 운석 같은 우주 물체가 많기 때문이다. 마찰로 보호하는 공기가 없는 세계는 끊임없이 이 방랑자들의 폭격을 받는다. 운석의 떼로 이루어진 혜성들도 더러 있지만, 일반적으로 혜성들은 좀더 작은 파열된 물체이다.
49:3.3 (563.6) 날마다 수백만의 운석이 유란시아의 대기로 들어오며, 1초에 거의 320킬로미터의 속도로 온다. 비호흡 세계에서 선진 민족들은, 운석을 태우거나 피하도록 작용하는 전기 장치를 시설하여 운석의 피해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느라고 많이 수고해야 한다. 그들은 이 보호 지대(地帶)를 지나서 모험할 때 큰 위험에 부딪친다. 이 세계들은 또한 유란시아에서 알려지지 않은 성질을 가진 끔찍한 전기(電氣) 폭풍에 피해를 입는다. 엄청나게 에너지가 변동하는 그러한 기간에, 거주자들은 보호하고 절연하는 특별 구조물 안에서 피난해야 한다.
49:3.4 (563.7) 비호흡자의 세상에서 생명은 유란시아의 생명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비호흡자는 유란시아의 종족들처럼 먹을 것을 먹거나 물을 마시지 않는다. 이 특화된 민족들의 신경 체계의 반응, 열을 규제하는 작용, 신진 대사는 유란시아 필사자의 그런 기능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번식하는 것을 제쳐놓고, 거의 모든 생활 행위가 다르며, 출산하는 방법조차도 얼마큼 다르다.
49:3.5 (564.1) 비호흡 세계에서 동물 종자들은 대기가 있는 행성에서 발견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비호흡 생명의 계획은 대기를 가진 세계에서 사는 방법과 차이가 있다. 살아남은 뒤에도, 거기 있는 민족들은 다르며, 그들은 영 융합의 후보자이다. 그런데도 이 존재들은 생명을 즐기며, 대기가 있는 세상에서 사는 필사자가 겪는 것과 똑같이, 비교되는 시련과 즐거움을 가지고 그 영역의 활동을 수행한다. 지성과 인품 면에서, 비호흡자는 다른 필사자 종류들과 다르지 않다.
49:3.6 (564.2) 너희는 이 부류의 필사자가 행성에서 하는 행위에 관하여 관심이 있고도 남으리니, 그러한 종족의 존재들이 유란시아와 아주 가까이 있는 한 구체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49:4.1 (564.3) 다른 여러 세계에 있는 필사자들 사이에, 아니 같은 지적ㆍ육체적 부류에 속하는 자들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의지의 존엄을 가진 필사자는 모두 직립(直立) 동물, 두 발을 가진 동물이다.
49:4.2 (564.4) 여섯 가지 기본 진화 종족, 곧 세 가지 1차 종족―홍인ㆍ황인ㆍ청인―이 있고 세 가지 2차 종족―주황인ㆍ녹색인ㆍ남색인―이 있다. 사람이 사는 세계들의 대부분은 이 종족들을 다 가지고 있지만, 세 골 행성 중에서 다수는 세 가지 1차 종류만 가지고 있다. 어떤 지역 체계도 또한 이 세 종족만 가지고 있다.
49:4.3 (564.5) 인간이 특별히 부여받은 육체적 감각은 보통 열두 가지이다. 그러나 세 골을 가진 필사자의 특별 감각은 한 골과 두 골 종류보다 조금 더 연장된다. 그들은 유란시아 종족들보다 훨씬 더 많이 보고 들을 수 있다.
49:4.4 (564.6) 어린것들은 보통 하나씩 태어나며, 여럿을 출산하는 것은 예외이다. 가족 생활은 모든 부류의 행성에서 상당히 한결같다. 모든 선진(先進) 세계에서 남녀 평등이 지배한다. 남자와 여자의 지성 자질과 영적 지위는 동등하다. 한 쪽이 다른 쪽을 학대하려고 하는 한, 우리는 행성이 야만 상태에서 벗어났다고 여기지 않는다. 사람이 겪는 체험의 이 특성은 물질 아들과 딸이 도착한 뒤에 반드시 크게 개선된다.
49:4.5 (564.7) 계절과 기온의 변화는 태양의 빛을 받고 태양으로 가열되는 모든 행성에서 일어난다. 농업은 대기를 가진 어느 세계에나 보편적이며, 땅을 가는 것은 모든 그러한 행성의 진보하는 민족들에게 공통되는 한 가지 직종이다.
49:4.6 (564.8) 사람들은 모두 초기 시절에, 유란시아에서 너희가 겪는 것 같이 미세한 적들과 똑같은 일반적 투쟁을 겪지만, 그 투쟁이 아마도 그렇게 광범위하지 않다. 생명의 길이는 원시 세계에서 25년으로부터, 더 진보되고 오래 된 구체에서는 거의 5백년에 이르기까지, 행성들마다 다르다.
49:4.7 (564.9) 인간 존재들은 모두 부족끼리, 종족끼리 떼지어 산다. 집단이 이렇게 분리되는 것은 그 기원과 구성이 선천적이다. 그러한 경향은 오직 문명이 발달함으로, 그리고 차츰 영적 변화를 겪음으로 고쳐질 수 있다. 사람이 사는 세계들의 사회ㆍ경제ㆍ정부의 문제는 행성의 나이, 그리고 신다운 아들들이 연달아 체류한 것에 행성이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가에 따라서 다르다.
49:4.8 (564.10) 지성은 무한한 영이 수여한 것이며, 다양한 환경에서 아주 같게 작용한다. 필사자의 지성은, 지역 체계에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육체적 성품의 특징을 나타내는 어떤 구조 및 화학적 차이와 상관 없이, 비슷하다. 개인의 차이나 행성의 물리적 차이와 상관 없이, 이 모든 다채로운 계급의 필사자들의 정신 생활은 아주 비슷하며, 죽음 직후에 그들의 생애는 대단히 비슷하다.
49:4.9 (565.1) 그러나 불사의 영이 없이 필사자의 지성은 살아남을 수 없다. 사람의 지성은 죽는다. 오로지 수여된 영이 불멸한다. 살아남는 것은 조절자의 봉사를 받고 영답게 변하는 데―불사의 혼이 태어나고 진화하는 데―달려 있다. 적어도 물질적 지성에 영적 변화를 일으키는 조절자의 임무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지 않았어야 한다.
49:5.1 (565.2) 행성의 여러 필사자 계열을 적절히 묘사하기는 얼마큼 어려울 터인데, 너희가 그 계열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고, 또한 아주 많은 변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관점에서 필사 인간을 연구할 수 있고, 그 중에 다음 방법이 있다:
49:5.2 (565.3) 1. 행성 환경에 대한 적응.
49:5.9 (565.10) 일곱 초우주에서 사람 사는 구체들은, 진화하는 인간 생명의 이 일곱 가지 일반화된 등급 중에서 어떤 하나 이상의 항목에 동시에 분류되는 필사자들로 차 있다. 그러나 이 일반적 분류조차, 중간 한계자와 같은 존재나 어떤 다른 형태의 지적 생명에 대하여 아무런 배려가 없다. 이 이야기에서 발표된 바와 같이, 사람이 사는 세계들은 진화하는 필사 인간으로 채워져 있지만, 다른 형태의 생명도 있다.
49:5.10 (565.11) 1. 행성 환경에 대한 적응. 행성의 환경에 인간의 생명이 적응하는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이 사는 세계에는 세 가지 일반 집단이 있는데, 보통으로 적응하는 집단, 극단적 적응 집단, 그리고 실험하는 집단이다.
49:5.11 (565.12) 행성의 조건에 대한 정상적 적응은 앞서 고려된 바, 일반 물리적 원본을 따른다. 비호흡자의 세계들은 근본적 적응, 곧 극단적 적응의 전형(典刑)이지만, 다른 부류도 또한 이 무리에 포함된다. 실험 세계들은 전형인 생물 형태에 보통 이상적으로 적응되어 있고, 이 십일(十一) 행성에서 생명 운반자들은 표준 생명의 설계에서 유익한 변종을 생산하려고 시도한다. 너희 세계는 실험 행성이니까, 사타니아에 있는 자매 구체들과 두드러지게 다르다. 다른 데서 발견되지 않는, 많은 생명 형태가 유란시아에서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많은 보통 종자가 너희 행성에 없다.
49:5.12 (565.13) 네바돈 우주에서는, 모든 생명 수정 세계가 연속물로서 함께 이어져 있고, 지정된 행정가들이 주목하는 특별 분야의 우주 사무이다. 그리고 이 모든 실험 세계는 정기적으로 우주 지도자 군단의 검열을 받는데, 그 군단의 우두머리는 사타니아에서 타바만시아로 알려진 고참 최후자이다.
49:5.13 (566.1) 2. 두뇌 종류 계열. 필사자들에게 육체적으로 한 가지 한결같은 성질은 두뇌와 신경 체계이다. 그런데도 두뇌의 작용에 세 가지 기본 조직이 있는데, 한 골, 두 골, 세 골 종류이다. 유란시아인은 두 골 종류의 조직이며, 한 골을 가진 필사자보다 얼마큼 더 상상력과 모험심이 있고 철학적이지만, 세 골 서열보다 영적 성향, 윤리, 경건함이 조금 떨어진다. 이 두뇌의 차이는 인간 이전의 동물 존재들에서도 특징을 나타낸다.
49:5.14 (566.2) 유란시아인이 가진 두뇌 피질의 두 반구(半球) 종류로부터 유추함으로 너희는 한 골 종류에 대하여 무언가 파악할 수 있다. 세 골 서열이 가진 셋째 골은 너희의 작은 골, 곧 기초 형태의 골이 진화된 것이라 상상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것은 주로 신체 활동을 통제하는 기능을 가지는 점까지 발전되며, 상위의 두 골이 더 높은 일에 종사하도록 해방하는데, 하나는 지적 활동이요, 다른 하나는 생각 조절자에 대응하는 영적 활동을 위한 것이다.
49:5.15 (566.3) 한 골 종족들이 땅에서 이루는 업적은 두 골 서열과 견주어 조금 제한되어 있다. 한편 세 골 집단이 사는 오래 된 행성들은 유란시아인을 놀라게 할 문명을 전시하며, 비교하면 너희의 문명을 얼마큼 부끄럽게 할 것이다. 기계의 발전과 물질 문명에서, 아니 지적 진보를 보면, 두 골 필사자의 세계는 세 골 구체들에 필적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의 상급 통제와 지적ㆍ영적 교류의 발달을 보면, 너희는 약간 열등하다.
49:5.16 (566.4) 어느 세계, 또는 집단 세계들의 지적 진보나 영적 달성에 관한 그러한 비교 추정치는 모두, 공정하기 위해서 행성의 시대를 고려해야 한다. 허다한 것이 시대, 생물학적 개량자의 도움, 그리고 다양한 계급의 신다운 아들들이 차후에 맡는 임무에 달려 있다.
49:5.17 (566.5) 세 골 민족은 한 골이나 두 골 서열보다 조금 높이 행성에서 진화할 능력이 있지만, 모두 같은 종류의 생명 세포질을 가졌고, 유란시아에서 인간이 하는 것과 근사하게, 대단히 비슷한 방법으로 행성 활동을 해 나간다. 이 세 종류의 필사자들은 지역 체계의 여러 세계에 두루 흩어져 있다. 대다수의 경우에 행성의 조건은 다른 세계에서 이 다양한 계급의 필사자들을 계획하는 생명 운반자들의 결정과 거의 상관이 없었다. 그렇게 계획하고 집행하는 것은 생명 운반자들의 특권이다.
49:5.18 (566.6) 하늘 가는 생애에서 이 세 계급은 평등한 지위에 있다. 각자가 똑같이 지적으로 발달하는 단계를 거쳐야 하며, 각자가 똑같은 영적 진보 시험을 통달해야 한다. 별자리가 체계 행정과 이 다른 세계들을 전반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한결같이 차별이 없고, 행성 영주의 체제조차도 동일하다.
49:5.19 (566.7) 3. 영적 감수성 시리즈. 영의 사무와 접촉하는 것과 관련하여 세 가지 집단의 정신 고안이 있다. 이 분류는 한 골, 두 골, 세 골 서열의 필사자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1차적으로 선(腺) 화학, 더 자세히 말하면 하수체(下垂體)에 견줄 수 있는 어떤 선들의 조직을 언급한다. 어떤 세계의 민족들은 한 선(腺)을 가지고 있고, 다른 데서는 유란시아인처럼 둘이 있으며, 한편 또 다른 구체에는 민족들이 독특한 이 하수체를 셋이나 가지고 있다. 타고난 상상력과 영적 감수성은 차이 나는 이 화학적 자질에 분명히 영향을 받는다.
49:5.20 (566.8) 영적 감수성 종류 가운데, 65퍼센트는 유란시아 종족들처럼 둘째 집단이다. 12퍼센트는 첫째 종류이고 자연히 민감성이 덜하며, 한편 23퍼센트는 땅에서 사는 동안 더 영적 성향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구별은 자연사 뒤에 남지 않는다. 이러한 종족들의 차이는 모두 육체를 입은 생명에만 관련된다.
49:5.21 (567.1) 4. 행성의 필사자 시대. 이러한 분류는 땅에서 사람의 지위, 그리고 하늘의 봉사를 받아들이는 데 영향을 주는 현세의 섭리 시대가 연속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49:5.22 (567.2) 생명 운반자들이 행성에서 생명을 창시하며, 필사 인간이 진화를 거쳐 출현하고 얼마큼 지날 때까지 그 발전을 감시한다. 행성을 떠나기 전에, 생명 운반자들은 정식으로 행성 영주를 그 영역의 통치자로 임명한다. 이 통치자와 함께, 할당받은 수대로 하위 보조자와 봉사하는 조수(助手)들이 도착하며, 산 자와 죽은 자의 첫 판결이 그 통치자의 도착과 동시에 일어난다.
49:5.23 (567.3) 인간 집단들이 출현하고 나서, 이 행성 영주가 인간의 문명을 개시하고, 인간 사회의 초점을 한 곳에 모으려고 도착한다. 혼란에 빠진 너희 세계는 행성 영주가 군림하는 초기 시절이 어떠한가 전혀 판단할 기준이 못되는데, 왜냐하면 그 기간이 유란시아에서 그러한 행정이 시작될 무렵에, 너희의 행성 영주 칼리가스티아가 체계 군주 루시퍼와 함께 모반의 운명을 같이 하였기 때문이다. 너희의 행성은 그 이후로, 폭풍과 같은 과정을 좇아 왔다.
49:5.24 (567.4) 정상으로 진화하는 세계에서, 행성 영주가 통치하는 동안에 종족의 진보는 자연스런 생물학적 절정에 이르며, 그 뒤에 곧 체계 군주가 물질 아들과 딸을 그 행성에 파송한다. 이 수입(輸入)된 존재들은 생물학적 개량자로서 수고하며, 유란시아에서 그들이 실패한 것은 너희 행성의 역사를 더욱 까다롭게 만들었다.
49:5.25 (567.5) 인류의 지능 및 윤리의 진보가 진화적 발전의 한계에 이르렀을 때, 파라다이스의 아보날 아들이 심판 임무를 띠고 도착한다. 나중에, 그러한 세계의 영적 지위가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한계에 가까워질 때, 파라다이스 수여 아들이 그 행성을 방문한다. 수여 아들의 주요 임무는 행성의 지위를 확립하고, 행성에서 활동하도록 진리의 영을 해방하고, 이처럼 생각 조절자들이 보편적으로 오게 하는 것이다.
49:5.26 (567.6) 여기서 다시 유란시아는 빗나간다: 너희 세계에는 결코 심판관 임무가 없었고, 너희가 받은 수여 아들도 아보날 계급이 아니었다. 너희 행성은 군주 아들, 곧 네바돈 미가엘이 필사자로서 살았던 고향 행성이 되는 대단한 영예를 누렸다.
49:5.27 (567.7) 연달아 신다운 아들 계급이 모두 봉사한 결과로서, 사람 사는 세계들과 거기서 전진하는 민족들은 행성 진화의 정점에 비로소 다가간다. 그러한 세계에는 이제 최고의 임무, 곧 삼위일체의 교육 아들들이 강림할 때가 무르익었다. 이 가르치는 아들들의 시대는 마지막 행성 시대―진화의 유토피아―곧 빛과 생명의 시대에 이르는 길목이다.
49:5.28 (567.8) 뒤잇는 한 논문에서 인간의 이러한 분류를 특별히 주목할 것이다.
49:5.29 (567.9) 5. 생물의 연속된 유사성. 행성들은 체계ㆍ별자리와 같은 식으로 수직(垂直)으로만 조직된 것이 아니라, 우주 행정은 또한 부류, 계열, 기타 관계에 따라서 수평으로 분류할 수 있게 만든다. 우주의 이러한 측면 행정은 더욱 특히, 다른 구체들에서 따로 촉진되어 온, 비슷한 성질을 가진 활동의 조정과 관련된다. 관계된 이러한 등급의 우주 인간은, 오랜 체험을 얻은 최후자들이 주관하는 어떤 복합 집단의 높은 성격자들의 정기적 검열을 받는다.
49:5.30 (568.1) 이러한 비슷한 요소는 모든 수준에서 명백히 나타나는데, 이는 연속물의 유사성이 필사 인간 뿐 아니라 비인간 성격자 사이에서도―아니 인간과 초인간 계급 사이에서도―존재하기 때문이다. 지적 존재들은 각기 일곱 주요 부문으로 구성된, 12 대집단 안에서 수직으로 관계되어 있다. 독특하게 관련된 이 생물 집단을 조정하는 것은 아마도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최상 존재의 어떤 기법에 따라서 이루어진다.
49:5.31 (568.2) 6. 조절자 융합 계열. 융합하기 이전의 체험을 겪는 동안에 모든 필사자의 영적 분류나 배치는 전적으로, 인격 지위와 깃드는 신비의 훈계자의 관계에 따라서 결정된다. 네바돈에서 사람 사는 세계들의 거의 90퍼센트는 조절자와 융합하는 필사자가 차지하고 있고, 이와 대조해서 이웃에 있는 한 우주에는 반이 겨우 넘는 세계들이 조절자가 깃드는 영원한 융합 후보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49:5.32 (568.3) 7. 땅을 벗어나는 기법. 근본적으로 오직 한 방법으로, 사람 사는 행성에서 개별 인생이 시작될 수 있는데, 바로 인간이 자식을 낳고 자연스런 출생을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땅에서 그의 지위를 벗어나서, 안으로 움직이는 파라다이스 승천자의 흐름과 접촉하는, 수많은 기법이 있다.
49:6.1 (568.4) 다른 물리적 부류와 행성 계열의 필사자는 모두 똑같이, 생각 조절자와 수호 천사, 그리고 다양한 계급의 사자, 무한한 영의 사자 집단의 보살핌을 누린다. 모두가 똑같이 자연사로 해방되어 육체의 사슬을 벗어나며, 모두가 똑같이 그 때부터 영적으로 진화하고 생각이 진보하는 여러 상물질 세계로 간다.
49:6.2 (568.5) 행성 당국이나 체계 통치자들의 제안을 받고 나서, 때때로 잠자는 생존자의 특별 부활이 실시된다. 그러한 부활은 적어도 행성 시간으로 1천 년마다 일어나며, 그때 모두는 아니지만, “티끌 속에서 잠자는 많은 사람이 깨어난다.” 이 특별 부활은 필사자를 승천시키는 지역 우주 계획에서, 특정한 근무를 위하여 특별한 승천자 집단을 동원하는 기회이다. 이 특별 부활에는 실용적 이유가 있고, 감상적 관계가 연결되어 있다.
49:6.3 (568.6) 사람이 사는 한 세계의 초기 시대 전체를 통해서, 특별 부활과 천년(千年) 부활이 있을 때 많은 사람이 여러 저택 세계로 호출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생존자는, 행성에서 근무하는 한 신다운 아들의 강림과 관련하여 새로운 섭리 시대가 개시될 때 다시 인격화된다.
49:6.4 (568.7) 1. 섭리 시대에 또는 집단 서열로 살아남는 필사자. 사람 사는 세계에 첫 조절자가 도착하는 것과 함께 수호 세라핌들도 또한 나타나며, 그들은 땅을 벗어나는 데 필수이다. 잠자는 생존자의 생명이 소멸된 기간 전체를 통해서, 새롭게 진화한 불멸의 혼의 영적 가치와 영원한 실체를, 개인이나 집단의 수호 세라핌이 신성한 재산으로서 맡아둔다.
49:6.5 (568.8) 잠자는 생존자들에게 배치된 집단 수호자들은 판결하는 아들이 세상에 오실 때 반드시 함께 활동한다. “그는 천사들을 보내고, 저희는 사방에서 그가 선택한 자를 불러모으리라.” 잠자는 생존자를 다시 인격화하는 데 배치된 각 세라핌과 함께, 돌아온 조절자가 활동하며, 그는 육체를 입은 시절에 그 사람 안에서 살았던 바로 그 불멸의 아버지 분신이며, 따라서 신분이 회복되고 인격이 부활된다. 자기의 피보호자가 잠자는 동안에, 기다리던 이 조절자들은 신별에서 일하며, 그들은 이 막간에 또 다른 필사자의 지성에 결코 깃들지 않는다.
49:6.6 (569.1) 필사자가 존재하는 더 오래 된 세계들은, 상물질 인생을 거의 면제 받은 인간, 한층 높이 발달하고 지극히 영적인 부류의 인간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 반면에, 동물 기원을 가진 민족들의 초기의 특징은 원시 필사자가 너무 미숙하여 조절자와 융합이 불가능한 것이다. 셋째 근원 중심이 가진 불멸하는 영의 개별화된 부분과 함께, 수호 세라핌들은 이러한 필사자를 다시 깨우는 일을 해낸다.
49:6.7 (569.2) 이와 같이 한 행성 시대에 잠자는 생존자는 섭리 시대의 출석 점호가 있을 때 다시 인격화된다. 그러나 한 영역의 구제할 수 없는 인격자에 관하여 말하자면, 어떤 불멸의 영도 집단 운명 수호자들과 함께 활동하려고 자리에 있지 않으며, 이것이 인간 존재의 중지(中止)이다. 너희의 기록 가운데 더러는 이 사건이 사람이 죽는 행성에서 벌어지는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이 모든 사건은 여러 저택 세계에서 일어난다.
49:6.8 (569.3) 2. 개별로 승천하는 서열의 필사자. 인간의 개별 진보는 일곱 가지 우주 수준을 연속으로 달성하고 통과(통달)하는 것에 따라 측정된다. 필사자가 진보하는 이 여러 수준은 관계된 지적ㆍ사회적ㆍ영적 가치와 우주 통찰력 가치의 수준이다. 7급 수준에서 출발하여, 필사자들은 1급 수준에 도달하려고 애쓰며, 3급 수준에 도달한 자는 모두, 개인 운명 수호자를 즉시 배치받는다. 이 필사자들은 섭리 시대나 기타 판결과 상관 없이, 상물질 생명에서 다시 인격화될 수 있다.
49:6.9 (569.4) 한 진화 세계의 초기 시대 전체를 통해서, 거의 아무 필사자도 사흘째 되는 날에 심판을 받으러 가지 않는다. 그러나 시대가 경과함에 따라서, 점점 더 개인 운명 수호자가 전진하는 사람들에게 배치되며, 따라서 자연사(自然死) 뒤 사흘째 되는 날에 제1 저택 세계에서 다시 인격화되는 이 진화 인간의 수가 늘어난다. 그러한 경우에, 조절자가 돌아오는 것은 인간의 혼이 깨어났음을 알리며, 진화 세계에서 한 섭리 시대의 끝에 대규모 점호를 부를 때와 똑같이, 이것이 글자 그대로, 죽은 자의 재인격화이다.
49:6.10 (569.5) 세 집단의 개별 승천자들이 있다: 진보가 덜 된 자는 처음 세계, 곧 제1 저택 세계에 발을 내딛는다. 더 진보된 무리는 이전에 행성에서 진보한 것에 따라서, 중간의 저택 세계들 중 어디에서 상물질 생애를 시작할지 모른다. 이 서열 중에서 가장 진보한 자는 일곱째 저택 세계에서 상물질 체험을 정말로 시작한다.
49:6.11 (569.6) 3. 시험 중인 서열 및 부모에 의존하는 서열의 승천 필사자. 우주의 견지에서 볼 때, 조절자의 도착은 신분을 구성하며, 그가 깃든 존재는 누구나 응보의 점호 명부에 올라 있다. 그러나 진화 세계에서 현세의 생활은 불안하며, 다수가 파라다이스 생애를 택하기 전에, 젊을 때 죽는다. 조절자가 깃든 그러한 아이와 젊은이들은 부모 중에서 가장 진보된 영적 지위를 가진 쪽의 뒤를 따르며, 이처럼 특별 부활이 있을 때, 또는 정기적 천년 출석 점호와 섭리 시대의 출석 점호가 있을 때, 사흘째 되는 날, 체계의 최후자 세계로(시험 육아원으로) 간다.
49:6.12 (570.1) 너무 어린 나이에 죽어서 생각 조절자를 받지 못한 아이들은, 부모의 어느 한 쪽이 저택 세계에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지역 체계의 최후자 세계에서 다시 인격화된다. 어린아이는 필사자로 태어날 때 육체적 개체를 얻지만, 살아남는 문제에서 조절자가 없는 아이들은 모두, 아직도 부모에게 딸린 것으로 간주된다.
49:6.13 (570.2) 때가 되면 생각 조절자들은 이 어린아이들에게 깃들려고 오며, 한편 시험 중인 서열과 부모에 의존하는 서열, 살아남는 이 두 집단에게 베푸는 천사의 봉사는 일반적으로, 더 진보한 아버지나 어머니의 것과 비슷하든지, 아니면 하나만 살아남을 경우에 그쪽의 것과 대등하다. 자기 부모의 지위에 상관 없이, 3급 수준에 이르는 자에게는 개인 수호자가 허락된다.
49:6.14 (570.3) 비슷한 시험 육아원들이 별자리와 우주 본부의 최후자 구체들에서, 수정된 1차와 2차 계급 승천자의 아이들, 조절자 없는 아이들을 위해서 유지된다.
49:6.15 (570.4) 4. 수정된 2차 서열의 승천하는 필사자. 이들은 중급의 진화 세계에서 진보하는 인간이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자연사에서 면제되지 않지만, 일곱 저택 세계를 통과하는 것이 면제된다.
49:6.16 (570.5) 완전성이 떨어지는 집단은 지역 체계 본부에서 다시 깨어나며, 저택 세계들만 그냥 지나친다. 중간 집단은 별자리의 훈련 세계들로 가며, 그들은 지역 체계의 상물질 체제 전체를 그냥 지나친다. 영적으로 투쟁하는 여러 행성 시대에서 더 오래 지나면, 많은 생존자가 별자리 본부에서 깨어나며, 거기서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길을 떠난다.
49:6.17 (570.6) 그러나 이 여러 집단 중에서 누구나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그들이 놓친 세계들에 선생으로서 뒤로 여행해야 하며, 그들이 학생으로서 그냥 지나쳐 버린 나라에서 선생으로서 많은 체험을 얻는다. 그들은 모두 나중에, 필사자가 진보하는 예정된 길을 거쳐 파라다이스로 나아간다.
49:6.18 (570.7) 5. 수정된 1차 서열의 승천하는 필사자. 이 사람들은 조절자가 융합한 종류의 진화 인생에 속하지만, 그들은 아주 흔히 진화하는 세계에서 인간이 발전하는 마지막 단계를 대표한다. 영화롭게 된 이 존재들은 죽음의 입구를 거치는 것이 면제되며, 그들은 아들이 잡아채도록 몸을 맡긴다. 그들은 살아 있는 자 가운데서 옮겨지고, 즉시 지역 우주 본부에서 군주 아들이 계신 앞에 나타난다.
49:6.19 (570.8) 이들은 필사 인생 동안에 자기 조절자와 융합하는 필사자이며, 조절자가 융합한 그런 인격자는 상물질계 형태를 입기 전에 자유롭게 공간을 통과한다. 이 융합한 혼들은 직접 조절자가 이동함으로 상급 상물질 구체의 부활실로 가며, 거기서 진화 세계로부터 도착하는 모든 다른 필사자와 같이, 자기의 처음 상물질 의상(衣裳)을 받는다.
49:6.20 (570.9) 이 수정된 1차 서열 필사자의 승천은, 조절자가 융합하는 세계들의 가장 낮은 단계로부터 가장 높은 단계까지, 어느 행성 계열의 개인에게도 적용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 구체들 중에서 오래 된 곳에서, 그들이 수많은 신다운 아들들의 체재로부터 이득을 얻은 뒤에, 흔히 이런 승천이 작용한다.
49:6.21 (570.10) 행성에서 빛과 생명의 시대가 정착되면, 많은 사람이 수정된 1차 서열의 이동을 이용하여 우주의 상물질 세계들로 간다. 상급 단계의 안정된 존재를 따라 더 나아가서, 한 영역을 떠나는 필사자의 대다수가 이 등급에 포함될 때, 그 행성은 이 계열에 속한다고 간주된다. 빛과 생명 속에 오랫동안 안정된 이러한 구체들에서, 자연사는 갈수록 드물게 된다.
50:0.1 (572.1) 라노난덱 아들 계급에 속하지만 근무가 아주 전문화되어서, 행성 영주들은 보통 다른 집단으로 간주된다. 2차 라노난덱으로서 멜기세덱의 인가를 받은 뒤에, 이 지역 우주 아들들은 별자리 본부에서 그들 계급의 예비군에 배치된다. 여기서부터 이들은 체계 군주에게 다양한 임무로 배치되며, 결국 행성 영주로 임명되고 사람이 사는 진화 세계를 다스리기 위하여 파송된다.
50:0.2 (572.2) 한 주어진 행성에 통치자를 배치하는 문제에서, 체계 군주의 행동을 요하는 신호는, 생명 운반자들이 생명을 정착시키고 총명한 진화 존재를 발달시킨 이 행성에서 활동할 우두머리 행정가를 파송해 달라고 그들로부터 요청을 받는 것이다. 진화된 필사 인간이 거하는 모든 행성은 이 계급의 아들인 행성 통치자를 배당받는다.
50:1.1 (572.3) 행성 영주와 그의 조수인 형제들은 (육신화를 제쳐놓고) 파라다이스의 영원한 아들이 시공의 비천한 인간에게 제시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성격화된 접근법이다. 창조 아들이 그의 영을 통해서 그 영역의 인간과 접촉하는 것이 참말이지만, 행성 영주는 파라다이스로부터 사람의 자손에게 연장되는, 성격을 가진 아들 계급 중에 마지막이다. 무한한 영은 운명 수호자와 기타 천사 존재들의 몸을 입고서 아주 가까이 온다. 우주의 아버지는 신비의 훈계자의 선(先)인격 계심으로 사람 안에 사신다. 그러나 행성 영주는 영원한 아들과 그의 아들들이 너희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마지막 노력을 나타낸다. 새로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행성 영주는 완벽한 신성을 가진 유일한 대표이며, 창조 아들(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의 자식)과 신성한 봉사자(지역 우주에서 무한한 영의 딸)로부터 태어나온다.
50:1.2 (572.4) 새로 사람이 사는 세계의 영주(領主)는 한 충성스러운 집단의 돕는 일꾼과 조수, 그리고 큰 무리의 봉사하는 영들에 둘러싸인다. 그러나 그러한 새 세계를 지도하는 집단은, 행성의 문제와 어려움에 선천적 동정심을 가지고 그에 공감하기 위해서 낮은 계급의 체계 행정가이어야 한다. 진화 세계에게 이해심 있는 통치자를 마련해 주려는 이 모든 노력에는, 인간과 가까이 있는 이 성격자들이 바로 그들의 생각을 최상 통치자들의 뜻보다 더 높임으로, 잘못에 빠질 수 있다는 부담이 늘어난다.
50:1.3 (572.5) 개별 행성에서 신(神)의 대표로서 아주 외롭게 있으니까 이 아들들은 심하게 시험받으며, 네바돈은 몇 번에 걸쳐 반란이 터지는 불운을 겪었다. 체계 군주와 행성 영주들을 창조할 때,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로부터 갈수록 더 멀어지는 개념을 성격자로 만드는 일이 일어난다. 한 개인이 자신의 중요성에 관한 비례 감각을 잃을 위험이 늘어나고, 수많은 계급의 신다운 존재들의 가치 기준과 관계, 그리고 단계적으로 얻는 그들의 권한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 아버지가 지역 우주에 친히 계시지 않는 것은 또한 이 아들들 모두에게 어떤 믿음과 충성심에 대한 시험이 된다.
50:1.4 (573.1) 그러나 이 세계 영주들이 사람 사는 구체를 조직하고 관리하는 임무를 그르치는 일은 흔치 않다. 그들이 성공하는 것은 나중에, 세계의 원시인에게 더 높은 형태의 인간 생명을 접목시키려고 오는 물질 아들의 임무를 크게 수월하게 만든다. 그들의 통치는 또한 하나님의 파라다이스 아들들을 위하여 그 행성을 예비하는 데 많이 기여하며, 이 아들들은 나중에 여러 세상을 심판하고, 연속되는 섭리 시대를 개시하려고 온다.
50:2.1 (573.2) 행성 영주들은 모두 가브리엘의 우주 행정부 관할 밑에 있고, 가브리엘은 미가엘의 최고 집행자이다. 한편 직속 권한으로 볼 때, 영주들은 체계 군주의 집행 명령에 지배된다.
50:2.2 (573.3) 행성 영주는 어느 때라도 예전에 자신의 교육자이자 후원자였던 멜기세덱들의 상담을 구해도 좋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도움을 청하는 것이 임의로 요구되지는 않으며, 그러한 도움을 자진해서 요청하지 않으면, 멜기세덱들은 행성의 행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이 세계 통치자들은 또한 24 장로의 조언을 이용해도 좋은데, 이들은 체계의 수여 세계들로부터 모집된다. 사타니아에는 현재 이 상담자들이 모두 유란시아 토착민이다. 별자리 본부에는 비슷한 70자 회의가 있고, 이들은 또한 그 영역의 진화 존재들로부터 선택된다.
50:2.3 (573.4) 진화하는 여러 행성에서 초기의 불안한 기간에는 대체로 독재 정치로 다스린다. 행성 영주는 전문화된 집단의 조수들을 행성의 조수 군단 가운데서 조직한다. 그들은 보통 12자 최고 회의로 자신을 둘러싸지만, 이것은 다른 세계에서 다르게 선택되고 다양하게 구성된다. 한 행성 영주는 또한 자기 집단의 아들 중에서 셋째 계급을 하나 이상, 그리고 때때로 어떤 세계에서는, 자신 계급인 2차 라노난덱 동료 중에서 하나를 조수로서 가져도 좋다.
50:2.4 (573.5) 한 세계 통치자의 참모진 전체는 무한한 영의 성격자, 어떤 부류의 상급 진화 존재, 그리고 다른 세계들로부터 온 승천 필사자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참모진은 평균 약 1천 명에 이르며, 그 행성이 진보함에 따라서, 이 조수들의 무리는 10만까지 또는 그보다 더 늘어나도 좋다. 조수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는 언제라도, 행성 영주는 그 형제, 체계 군주에게 요청하기만 하면 되고, 그 탄원은 당장에 허가를 받는다.
50:2.5 (573.6) 행성들의 성질ㆍ조직ㆍ행정은 크게 다르지만, 모두가 사법(司法)을 담당하는 법정을 마련한다. 지역 우주의 사법 체계는 행성 영주의 법정에서 시작되는데, 그의 개인 참모진에서 한 참모가 이를 주관한다. 그러한 법정의 선포는 상당히 아버지답고 자유 재량의 태도를 반영한다. 행성 거주자의 통제를 넘는 모든 문제는 고등 법정에 올리는 상소(上訴)에 지배된다. 그러나 영주의 세계 영토의 사무는 대체로 그의 개인적 재량에 따라서 조정된다.
50:2.6 (574.1) 떠돌아다니는 여러 화해자 위원회가 행성의 법정에 봉사하고 이를 보조하며, 영 통제자와 물리 통제자들은 이 화해자들의 조사 결과에 지배된다. 그러나 아무런 임의적 집행도 별자리 아버지의 찬성이 없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데, 이는 “최고자들이 사람의 나라에서 다스리기” 때문이다.
50:2.7 (574.2) 행성에 배치받은 통제자와 변압자들도 또한 천사와 기타 계급의 하늘 존재들과 함께, 이 후자인 성격자들을 필사 인간의 눈에 보이게 만드는 일에 함께 일할 수 있다. 특별한 경우에, 돕는 천사, 그리고 멜기세덱들조차, 진화 세계의 거주자에게 자신을 눈에 보이게 만들 수 있고, 또 그렇게 한다. 행성 영주 참모진의 일부로서 하늘 가는 필사자들을 체계 서울에서 데려오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영역의 거주자들과 의사 소통을 수월하게 하려는 것이다.
50:3.1 (574.3) 역사가 짧은 세계로 갈 때, 행성 영주는 보통 지역 체계 본부로부터 한 집단의 자원하는 승천 존재들을 데리고 간다. 이 승천자들은 초기에 종족을 개량하는 작업에 조언자와 조수로서 영주를 따라간다. 이 집단의 물질 조수들은 영주와 그 세계 종족들을 연결하는 고리가 된다. 유란시아 영주, 칼리가스티아는 그러한 조수 1백 명으로 이루어진 한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50:3.2 (574.4) 그러한 자원하는 조수들은 체계 서울의 시민이며, 그들 중에 아무도 그들에게 깃드는 조절자와 융합하지 않았다. 그러한 자원 봉사자의 조절자의 지위는 이 상물질 진보자가 예전의 물질 상태로 임시 돌아가는 동안에, 체계 본부에서 거주하는 지위를 가진 것으로 남아 있다.
50:3.3 (574.5) 형체를 짓는 건축가, 곧 생명 운반자들은 그러한 자원자들에게 새 육체를 마련해 주며, 행성에서 머무르는 동안 그들은 이 육체를 차지한다. 이 인격자 형태는 그 영역의 보통 질병에서 면제되지만, 초기의 상물질 몸처럼, 기계적 성질을 가진 어떤 사고(事故)가 일어날 수 있다.
50:3.4 (574.6) 영주의 유형(有形) 참모진은, 두 번째 아들이 그 구체에 도착할 때, 다음 판결과 연관되어 보통 그 행성으로부터 옮겨진다. 떠나기 전에 그들은 여러 가지 임무를 그들이 함께 낳은 자손, 그리고 어떤 우수한 자원 토착민에게 맡기는 것이 관습이다. 영주(領主)의 이 조수들이 토착 종족들의 우수한 집단과 짝짓도록 허락된 세계에서, 그러한 자손이 보통 그들의 뒤를 잇는다.
50:3.5 (574.7) 행성 영주의 이 조수들은 그 세계의 종족들과 짝짓는 일이 드물지만, 반드시 자기들끼리 짝을 짓는다. 이 결합으로부터 두 등급의 존재가 생겨난다: 1차 부류의 중도인(中道人)과 어떤 높은 부류의 물질 존재들인데, 후자는 아담과 이브가 도착할 때 그들의 부모가 그 행성에서 옮겨진 뒤에, 영주의 참모진에 딸린 채로 남는다. 이 아이들은 어떤 비상시를 제외하고, 필사 종족들과 짝짓지 않으며, 그때에도 오직 행성 영주의 지시에 따라서 그렇게 한다. 그런 경우에, 그들의 자녀들―유형 참모진의 손자들―의 지위는 그들의 시대와 세대의 우수한 민족의 출신과 같다. 행성 영주의 이 준(準)물질 조수들의 자손에게 모두 조절자가 깃든다.
50:3.6 (575.1) 영주의 섭리 시대 끝에, 이 “복귀한 참모진”이 파라다이스 생애를 다시 시작하기 위하여 체계 본부로 돌아갈 때가 오면, 이 승천자들은 물질 육체를 돌려줄 목적으로 생명 운반자들에게 출두한다. 그들은 변신하는 잠에 들어가서, 그들의 필사의 옷을 벗고 상물질 형태를 입은 채로 깨어나며, 체계 서울로 돌아가는 천사의 수송을 위하여 준비된다. 거기에는 떨어져 있던 조절자들이 그들을 기다린다. 그들은 자기의 예루셈 동기생들보다 온전히 한 섭리 시대가 뒤떨어지지만, 그들은 독특하고 보기 드문 체험을 얻었고, 이것은 하늘 가는 필사자의 생애에 진귀한 장(章)이 된다.
50:4.1 (575.2) 영주의 유형(有形) 참모진은 사람을 훈련하고 교양을 가르치는 여러 행성 학교를 일찍부터 조직하며, 거기서 진화 종족들의 정예가 교육받고, 그리고 나서 그들의 민족에게 더 좋은 이 길을 가르치려고 파송된다. 영주의 이 학교들은 물질로 지어진 행성 본부에 자리잡는다.
50:4.2 (575.3) 유형 참모진은 이 본부 도시의 설립과 연결된 물리적 작업의 상당 부분을 수행한다. 행성 영주의 초기 시절에 그러한 여러 본부 도시, 곧 촌락들은 유란시아 필사자가 상상할까 싶은 것과 아주 다르다. 후세와 견주어 보면 이 촌락들은 간단하며, 광물로 치장되고 비교적 진보된 물질 구조의 특징을 가졌다. 이 모든 것이 동산 본부 주위에 집중하는 아담의 체제와 대조되며, 이 본부로부터, 그들이 종족들을 위하여 할 일은 우주 아들들의 제2 섭리 시대 동안에 수행된다.
50:4.3 (575.4) 너희 세계에서 본부 촌락에는 모든 인간 거주지에 풍부한 땅이 마련된다. 멀리 떨어진 부족들은 사냥과 먹을거리 찾아다니는 일을 계속했지만, 영주 학교의 학생과 선생은 모두 농사 짓는 사람이요 원예가였다. 시간은 다음 직종 사이에 대체로 똑같이 나누어진다:
50:4.4 (575.5) 1. 육체 노동. 집을 짓고 꾸미는 것과 관련하여, 땅을 경작하는 것.
50:4.5 (575.6) 2. 사회 활동. 놀이의 연출과 문화적 사회의 모임.
50:4.6 (575.7) 3. 교육적 적용. 가족 집단을 가르치는 것과 관련된, 개인의 교육. 이것은 전문화된 학급 훈련으로 보충된다.
50:4.7 (575.8) 4. 직업 훈련. 결혼 및 가정(家庭) 관리 학교, 예술 및 공예 훈련 학교, 선생들에게―세속(世俗), 문화 및 종교적―훈련을 주는 학급.
50:4.8 (575.9) 5. 영적 교양. 선생들의 형제 정신, 어린아이 및 청년 집단의 계몽, 그리고 양자ㆍ양녀로 받아들인 토착민 아이들을 그 민족에게 보내는 선교사로서 훈련하는 것.
50:4.9 (575.10) 행성 영주는 필사 존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참모진의 준물질 존재들의 진술을 믿는 것은 믿음의 시험이다. 그러나 이 교양과 훈련을 맡는 학교들은 각 행성의 필요에 잘 적응되어 있다. 이 다채로운 배움의 기관에 들어가려는 노력으로, 사람의 종족들 사이에서 격심하고 칭찬할 만한 경쟁이 곧 일어난다.
50:4.10 (575.11) 그러한 교양과 성취가 있는 세계 중심으로부터 모든 민족에게 정신을 높여 주고 교화시키는 영향이 차츰 퍼지며, 이것은 느리고 확실하게 진화 종족들을 변화시킨다. 그동안에 둘러싼 민족들 중에서 영주의 여러 학교에서 양자ㆍ양녀가 되고 훈련을 거치고, 교육받고 영적으로 감화받은 아이들은 그들이 태어난 집단으로 돌아가며, 힘이 자라는 데까지, 거기서 새로운 힘찬 배움과 문화의 중심을 건설하고, 영주 학교의 계획에 따라서 운영해 나간다.
50:4.11 (576.1) 유란시아에서 행성의 진보와 문화의 발전을 위한 이 계획은 잘 진척되었고, 아주 흡족하게 진행되었는데, 그때 칼리가스티아가 루시퍼 반란에 가담하여 그 사업 전체가 오히려 갑작스럽고 가장 치욕스러운 종말에 이르렀다.
50:4.12 (576.2) 내 계급의 아들 중에 하나인 칼리가스티아의 냉담한 배반을 내가 전해 들은 것은 이 반란에서 가장 깊은 충격을 주는 사건 중에 하나였다. 그는 숙고한 가운데, 미리 사악한 생각을 품고, 당시에 운영되던 모든 유란시아 행성 학교에서 마련한 교육을 체계적으로 왜곡하고 거기에 독(毒)을 섞었다. 이 학교들은 빠르게, 철저히 패망했다.
50:4.13 (576.3) 영주의 육체화된 참모진과 관련된 승천자 자손 가운데 다수는 계속 충성하였고, 칼리가스티아의 계열에서 탈주했다. 이 충성파는 유란시아의 멜기세덱 관리자들의 격려를 받았고, 후일에 그들의 자손은 행성에서 진리와 정의의 개념을 지지하기 위하여 많이 수고하였다. 이 충성스러운 전도사들이 한 일은 유란시아에서 영적 진리가 완전히 말소되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용감한 사람들과 그 자손들은 아버지의 통치에 대한 지식이 얼마큼 살아남도록 지켰고, 세상 민족들을 위하여 다양한 계급의 신다운 아들들이 행성에서 연속하여 다스린다는 섭리 시대 개념을 보존하였다.
50:5.1 (576.4) 사람이 사는 세계를 다스리는 충성스러운 영주는 최초에 배치된 행성에 영구히 소속된다. 파라다이스 아들들과 그들의 섭리 시대는 오고갈지 모르지만, 성공적인 행성 영주는 그 영역의 통치자로서 계속한다. 그가 하는 일은 더 높은 아들들의 임무와 아주 독립되어 있으며, 행성 문명의 발전을 촉진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50:5.2 (576.5) 문명의 진보는 어느 두 행성에서도 좀처럼 같지 않다. 필사자의 진화가 전개되는 그 세부는 수많은 상이한 세계에서 아주 다르다. 물리적ㆍ지적ㆍ사회적 노선을 따라서 행성의 발전이 이렇게 많이 다양화되는데도, 진화하는 구체들은 모두 아주 분명한 어떤 방향으로 진보한다.
50:5.3 (576.6) 행성 영주의 인자한 통치는 물질 아들로 인하여 확대되고,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정기적 임무가 이따금 끼어든다. 그러한 영주의 통치 밑에서, 시공의 보통 세계에 있는 필사 민족들은 연달아 다음 일곱 가지 발전 시대를 거칠 것이다:
50:5.4 (576.7) 1. 영양 시대. 인간이 되기 이전의 생물, 그리고 여명기의 원시 종족들은 주로 먹을거리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 이 진화 존재들은 깨어 있는 시간을 먹이를 찾거나, 공격하거나 방어하는 싸움에 보낸다. 먹이를 찾는 것은 뒤따르는 문명의 이러한 초기 조상의 머리 속에서 가장 우선한다.
50:5.5 (576.8) 2. 안전 시대. 원시의 사냥꾼이 먹을거리를 찾는 일로부터 얼마큼의 시간이라도 절약할 수 있게 되자마자, 그는 이 여가를 자신의 안전을 높이는 데 쓴다. 전쟁하는 기술에 점점 더 많이 주의를 기울인다. 집이 강화되며, 공통으로 가진 두려움 때문에, 그리고 외인(外人) 집단에 대한 증오심을 불어넣음으로 씨족들이 단결된다. 먹을거리가 해결된 뒤에 사람은 반드시 자아 보존을 추구한다.
50:5.6 (577.1) 3. 물질적 편안의 시대. 먹을거리 문제가 얼마큼 해결되고 어느 정도 안전이 확보되고 난 뒤에, 추가로 얻는 여가는 개인의 편안을 늘이기 위해서 이용된다. 사치가 인간의 활동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려고 필요와 싸움을 벌인다. 그러한 시대는 폭정ㆍ불관용ㆍ포식(飽食)ㆍ만취의 특징을 가지는 경우가 너무 빈번하다. 종족들의 연약한 구성원이 난폭하고 잔학한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쾌락을 추구하는 이 약골들은 진보하는 문명의 더 많은 구성원, 튼튼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구성원에게 차츰차츰 정복된다.
50:5.7 (577.2) 4. 지식과 지혜의 추구. 먹을거리ㆍ안전ㆍ쾌락ㆍ여가는 문화가 발전하고 지식이 보급될 기초를 마련해 준다. 지식을 얻으려는 노력은 지혜를 낳고, 한 문화가 경험을 얻음으로 어떻게 이익을 얻고 개선하는가 배웠을 때, 문명이 정말로 다가온 것이다. 먹을거리, 안전, 물질적 편안이 아직도 사회를 지배하지만, 앞을 내다보는 많은 사람이 지식을 갈급히 찾고 지혜를 목마르게 찾는다. 아이들에게 누구나 실습으로 배우는 기회가 주어지며, 교육이 이 시대의 표어이다.
50:5.8 (577.3) 5. 철학과 형제 정신의 시대. 생각하기를 배우고 경험으로 이익을 얻기 시작할 때, 필사자는 냉정하게 된다―마음 속에서 이치를 따지고, 사물을 차별하는 판단을 내리기 시작한다. 이 시대의 사회는 윤리를 찾게 되고, 그러한 시대의 필사자는 참으로 도덕적 존재가 된다. 그러한 진보하는 세계에서 지혜로운 도덕적 존재는 인간의 형제 정신이 자리잡게 만들 능력이 있다. 윤리와 도덕이 있는 존재는 황금률에 따라서 어떻게 사는가 배울 수 있다.
50:5.9 (577.4) 6. 영적 분투의 시대. 진화하는 필사자가 육체적ㆍ지적ㆍ사회적 발전 단계를 거쳤을 때, 머지 않아 영적 만족감과 우주의 이해를 추구하도록 그들을 재촉하는 개인적 통찰력의 수준에 다다른다. 종교는 공포와 미신(迷信)의 감정 분야로부터 우주의 지혜와 개인의 영적 체험을 얻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는 일을 마친다. 교육은 목적의 달성을 얻으려 애쓰고, 문화는 우주의 관계와 참된 가치 기준을 파악한다. 그러한 진화하는 필사자는 진정하게 교양이 있고, 참되게 교육 받고, 지극하게 하나님을 알고 있다.
50:5.10 (577.5) 7. 빛과 생명의 시대. 이때는 육체의 안전, 지적 확장, 사회적 문화, 영적 성취의 시대들이 연속되어 번창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런 업적은 우주와 조화되고 사심(私心) 없는 봉사로 이제 섞이고, 관련되고, 조정된다. 유한한 자연과 천부의 물질 한계 안에서, 숭고하고 안정된 이 시공 세계에서 연달아 사는 세대, 진보하는 세대들이 진화로 성취하는 가능성에 아무런 한계가 부과되지 않았다.
50:5.11 (577.6) 세계 역사에서 연이은 여러 섭리 시대와 행성이 진보하는 진취적 시대를 통해서 자기의 구체에서 수고한 뒤에, 빛과 생명의 시대가 개시되고 나서, 행성 영주는 행성 군주의 자리로 승진된다.
50:6.1 (578.1) 유란시아의 고립된 상태는 사타니아에 있는 너희 이웃의 생활 및 환경의 많은 세부를 발표하려는 시도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우리의 이 발표 사항은 행성이 격리되고 체계가 고립된 것에 제한을 받는다. 유란시아의 필사자들을 깨우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면서 우리는 이러한 금지 조치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허락받은 범위 안에서 너희는 보통 진화 세계의 진보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고, 너희는 그러한 세계의 경력을 현재 유란시아의 상태와 비교할 수 있다.
50:6.2 (578.2) 유란시아에서 문명의 발전은 영적 고립의 불운을 겪은 다른 세계들의 발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우주의 충성스러운 세계들과 비교했을 때, 너희의 행성은 모든 국면의 지적 진보와 영적 성취 면에서 가장 뒤죽박죽이 되고 몹시 뒤떨어진 듯하다.
50:6.3 (578.3) 너희 행성이 불운을 겪었기 때문에, 유란시아인은 정상 세계의 문화에 관하여 이해하는 데 많은 지장을 겪었다. 그러나 너희는 진화 세계들이, 아니 가장 이상적인 세계조차, 인생이 꽃으로 뒤덮인 평안한 잠자리와 같은 구체라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필사 민족들의 초기 생활에는 언제나 투쟁이 따른다. 노력과 결심은 살아남는 가치를 얻는 데 필수 부분이다.
50:6.4 (578.4) 문화는 지성이 우수할 것을 전제(前提)로 한다. 문화는 생각을 높이지 않으면 향상될 수 없다. 우수한 지능은 고상한 문화를 추구하며 그러한 목표를 이루는 어떤 방법을 찾을 것이다. 열등한 머리는 가장 높은 문화를 당장에 누리도록 눈앞에 내밀었을 때에도 코웃음칠 것이다. 또한 많은 것이 신다운 아들들의 연속되는 사명에 달려 있고 그들 각자의 섭리 시대가 얼마나 깨우침을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다.
50:6.5 (578.5) 너희는 루시퍼 반란의 결과로서 20만 년 동안이나 사타니아의 모든 세계가 놀라시아덱의 영적 금지령 밑에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죄와 단절에 따른 장애를 회복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너희 세계는 반역한 행성 영주와 책임을 이행하지 못한 물질 아들, 이 두 가지 비극의 결과로서, 불규칙하고 얼룩진 길을 아직도 계속 추구한다. 유란시아에서 그리스도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한 것조차, 세상의 초기 행정에서 심각한 이러한 잘못으로 현세에 일어난 결과를 즉시 취소하지 못했다.
50:7.1 (578.6) 얼핏 생각하면, 행성 영주와 물질 아들딸과 같은 초인간 성격자들의 유익한 계심과 영향을 빼앗겼다는 뜻으로, 유란시아 및 관련된 고립된 세계들은 가장 운이 나쁜 듯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구체들의 고립은 그 민족들에게 독특한 기회, 믿음을 실천하고, 우주가 믿음직한 것에 대하여 눈으로 보거나 어떤 다른 물질적 이유에 의존하지 않고서, 특별한 품질의 신뢰를 개발하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궁극에는, 반란의 결과로서 격리된 세계에서 태어난 필사 인간이 지극히 운이 좋다는 것이 입증될 수도 있다. 우리는 우주 사업에 배치되는 수많은 특별 임무가 그러한 승천자들에게 아주 일찍 맡겨진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런 사업의 성취에는 의심하지 않는 믿음과 숭고한 확신이 필수이다.
50:7.2 (579.1) 이러한 고립된 세계에서 온 승천자들은 예루셈에서 자기들끼리 한 거주 구역을 차지하며 불굴자(不屈者)로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고, 고립되었을 때 견디며, 홀로 있을 때조차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을 이기는, 진화된 의지(意志)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뜻한다. 불굴자라는 이 기능적 분류는 지역 우주에서 승천하고 초우주를 통과하는 동안 내내 지속된다. 이것은 하보나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사라지지만, 파라다이스에 이르고 나서 대번에 다시 나타나며, 필사 최후 군단에서 분명히 지속한다. 타바만시아는 최후자 지위를 가진 불굴자이며, 그는 시공 우주에서 처음 일어난 반란에 관련된, 어느 격리된 구체에서 살아남았다.
50:7.3 (579.2) 파라다이스 생애를 통해서 내내, 원인에 대한 결과로서 보상은 노력을 따라다닌다. 그러한 보상은 개인을 평범과 구별하며, 다른 인간 체험을 마련해주고, 최후자들의 집합체에서 신축성 있는 궁극의 행동에 기여한다.
51:0.1 (580.1) 행성 영주의 섭리 시대 동안에, 원시인은 자연스러운 진화적 발전의 한계에 이르며, 이 생물학적 달성은 체계 군주에게 그러한 세계에 둘째 계급의 아들, 곧 생물학적 개량자들을 파송해 달라는 신호이다. 이 아들들은, 둘이 있기 때문에―물질 아들과 딸―보통은 한 행성에서 아담과 이브로서 알려진다. 사타니아 최초의 물질 아들은 아담이며, 체계의 여러 세계에 생물학적 개량자로서 가는 자는 언제나, 그들의 독특한 계급에서 처음이며 기원인 이 아들의 이름을 가지고 간다.
51:0.2 (580.2) 이 아들들은 창조 아들이 사람 사는 세계에 주는 물질적 선물이다. 행성 영주와 함께, 그들은 그러한 구체의 진화 과정 전체를 통해서 배치된 행성에 남아 있다. 행성 영주가 있는 세계에서 그러한 모험은 크게 위험하지 않다. 그러나 배신(背信)이 있던 행성, 곧 영적 통치자가 없고, 행성간 통신을 빼앗긴 영역에서, 그러한 사명은 심각한 위험을 안고 있다.
51:0.3 (580.3) 사타니아의 모든 세계, 그리고 다른 체계들에서 이 아들들이 하는 일에 관하여 모든 것을 너희가 알기를 바랄 수 없지만, 다른 여러 논문이 그 흥미 있는 쌍, 아담과 이브의 생애와 체험을 더 자세히 묘사한다. 그들은 예루셈의 생물학적 개량자 집단으로부터 유란시아 종족들을 향상시키려고 왔다. 너희 토착 민족들을 개량하려는 이상적 계획이 유산(流産)되었지만, 그래도 아담의 사명은 헛되지 않았다. 유란시아는 아담과 이브를 선사받아서 헤아릴 수 없이 이익을 보았고, 그들의 동료 사이에서, 그리고 하늘의 회의에서는 그들이 한 일이 전부 헛일이라 여기지 않는다.
51:1.1 (580.4) 물질, 곧 남녀인 아들과 딸들은 창조 아들의 자손이다. 우주 어머니 영은 이 존재들의 생산에 참여하지 않으며, 이들은 진화 세계에서 육체의 개량자로서 활동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51:1.2 (580.5) 물질 아들 계급은 지역 우주 전역에 한결같지 않다. 창조 아들은 각 지역 체계에서 이 존재들을 한 쌍만 생산하는데, 이 최초의 쌍들은 성품이 다채롭고 그들 각자 체계의 생명 형태에 조율되어 있다. 이것은 필요한 준비인데, 그렇지 않으면 아담의 번식하는 잠재력이, 어느 특별한 체계의 세계들에서, 진화하는 필사 존재의 잠재력과 함께 작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란시아에 온 아담과 이브는 물질 아들들 중에서 최초의 사타니아 쌍으로부터 내려온 후손이다.
51:1.3 (580.6) 물질 아들들은 2.4미터에서부터 3미터에 이르기까지 키가 다르고, 그들의 몸은 보라빛을 띤 찬란한 색으로 빛난다. 물질인 피가 그들의 물질 몸을 통해서 돌지만, 그들은 또한 신성한 에너지로 넘치게 충전되어 있고, 하늘의 빛으로 젖어 있다. 이 물질 아들(아담)과 물질 딸(이브)은 서로 대등하며, 오직 생식(生殖)하는 성품, 그리고 어떤 화학 자질이 다르다. 그들은 대등하지만, 남자와 여자로 구별되고―따라서 서로 보완하며―거의 모든 임무에 쌍으로 일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51:1.4 (581.1) 물질 아들들은 두 가지로 영양을 공급받는다. 정말로 그들의 성품과 구조가 2중이며, 그 영역의 육체적 존재들이 하는 것과 비슷하게 물질이 된 에너지를 취한다. 한편 그들의 불멸하는 존재는 어떤 지속시키는 우주 에너지를, 바로 자동으로 흡수함으로 충분히 유지된다. 배치받은 어떤 임무에 실패하거나, 또는 의식해서 고의로 반항하면, 이 계급의 아들들은 고립되며 빛과 생명의 우주 근원과 연락이 끊어진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실지로 물질 존재가 되며, 배치받은 세계에서 물질 생활의 과정을 따르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고, 어쩔 수 없이 우주 심판관들의 판결을 기대하게 된다. 물질적 죽음은 궁극에 불행하고 지혜롭지 못한 그런 물질 아들이나 딸의 행성 생애를 마치게 할 것이다.
51:1.5 (581.2) 최초에, 곧 직접, 창조된 아담과 이브는 모든 다른 계급의 지역 우주 아들처럼, 선천적 자질로 인하여 불멸한다. 그러나 불멸 잠재성의 감소가 그들의 아들딸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 최초의 쌍은 그들이 낳은 아들과 딸에게 무조건 불사(不死)하는 성질을 전해줄 수 없다. 그들의 후손은 계속 살기 위해서, 영의 지성 인력 회로와 끊임없이 지적으로 동시성(同時性)을 유지하는 데 의존한다. 사타니아 체계가 비롯된 뒤로, 행성 아담 13명이 반란과 불이행의 와중에, 그리고 681,204명이 하위의 책임을 맡은 자리에서 자격을 잃었다. 이 탈퇴의 대부분은 루시퍼 반란 시절에 일어났다.
51:1.6 (581.3) 체계의 서울에서 영구 시민으로 사는 동안, 아니 진화하는 행성에 내려가는 임무를 띠고 활동할 때에도, 물질 아들은 생각 조절자를 소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 근무를 통하여 조절자의 깃드심과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생애를 체험하는 능력을 얻는다. 독특하고 놀랍게 쓸모 있는 이 존재들은 영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이다. 그들은 체계 본부(本部)에 몰려 있고, 거기서 그 영역의 물질 시민으로서 자식을 낳고 살아가며, 거기서부터 진화 세계로 파송된다.
51:1.7 (581.4) 행성에서 근무하는 다른 창조된 아들들과 달리, 물질 계급의 아들은 날때부터 유란시아의 거주자와 같은 물질적 인간의 눈에 보인다. 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눈으로 보고,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그들은 시간 세계의 인간과 실제로 섞일 수 있고, 아니 그들과 함께 자식을 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생물학상으로 개량하는 이 역할은 보통, 행성 아담들의 후손에게 돌아간다.
51:1.8 (581.5) 예루셈에서는 아담과 이브의 충성스러운 자녀는 누구나 불멸한다. 그러나 물질 아들과 딸이 진화하는 행성에 도착한 뒤에, 그들의 자손은 이처럼 자연사로부터 면제되지 않는다. 이 아들들이 진화 세계에 생식(生殖) 활동을 위하여 다시 물질화될 때, 생명을 전달하는 작용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생명 운반자들은 행성 임무로 가는 행성 아담과 이브에게서 죽지 않는 아들딸을 낳는 힘을 일부러 빼앗는다. 그들이 실패하지 않으면, 행성에서 근무하는 동안 아담과 이브는 무기한으로 살 수 있지만, 어떤 한계 안에서 그 아이들은 이어지는 각 세대마다 수명이 줄어드는 것을 체험한다.
51:2.1 (582.1) 사람이 사는 또 하나의 세계가 물리적 진화의 정점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받고 나서, 체계 군주는 체계 서울에서 물질 아들딸 단체를 소집한다. 그러한 진화 세계의 필요성을 논의한 뒤에, 자원하는 무리 중에서 두 명이―선임 물질 아들 집단 가운데 한 아담과 한 이브가―그 모험을 시작하도록 선택되며, 관련된 근무를 하던 그들의 집으로부터 새 기회와 새 위험이 기다리는 새 영역으로 가려고 천사 속에 둘러싸이고 수송되는 준비로 깊은 잠에 들어간다.
51:2.2 (582.2) 아담과 이브는 준물질 인간이며, 그대로 세라핌이 수송할 수 없다. 그들이 배치받은 세계로 수송되기 위하여 천사 속에 둘러싸일 수 있기 전에, 그들은 체계 서울에서 비물질화를 겪어야 한다. 수송 천사들은 물질 아들 속에서, 그리고 기타 준물질 존재 속에서 그러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고, 이것은 그들이 천사 속에 둘러싸이고 따라서 한 세계나 체계에서 다른 데로 공간을 통해서 수송될 수 있게 만든다. 표준 시간으로 약 사흘이 이 수송 준비에 소모된다. 천사가 수송하는 여행 끝에, 도착하고 나서, 그러한 비물질화된 인간을 정상 존재로 회복하는 데는 생명 운반자의 협조가 필요하다.
51:2.3 (582.3) 아담들을 예루셈에서 진화 세계까지 이동하기 위하여 준비시키는 이 비물질화 기술이 있지만, 그러한 세계로부터 그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데는 대등한 방법이 없다. 행성 전체를 비워야 할 경우는 예외이고, 이 경우에 구원할 수 있는 인구 전체를 위하여 비물질화 기법의 비상(非常) 설치가 일어난다. 어떤 물리적 대이변이 한 진화하는 민족이 거하는 행성을 망하게 한다면, 멜기세덱과 생명 운반자들은 모든 생존자를 위하여 비물질화 기법을 설치하며, 천사의 수송으로 이 존재들은 그들이 계속 존재하도록 준비된 새 세계로 옮겨질 것이다. 인류의 진화는, 우주의 한 세계에서 일단 시작되면, 그 행성이 물리적으로 살아남는 것과 아주 별도로 진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진화 시대에는 행성 아담이나 이브가 달리 그들이 선택한 세계를 떠나도록 예정되어 있지 않다.
51:2.4 (582.4) 목적지인 행성에 도착하고 나서, 물질 아들과 딸은 생명 운반자들의 지시 하에 다시 물질화된다. 이 과정 전체는 유란시아 시간으로 10일에서 28일이 걸린다. 천사 속에 잠든 사이의 무의식은 다시 조립하는 이 기간 전체에 죽 계속된다. 육체적 유기체의 재조립이 끝날 때, 모든 의도와 목적으로 보아서, 그들이 예루셈에서 비물질화 과정을 따르기 전에 그들의 상태 그대로, 이 물질 아들과 딸은 새 집 안에, 새 세상에서 서게 된다.
51:3.1 (582.5)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물질 아들과 딸은 동산 집들을 짓고, 곧 자신들이 낳은 아이들의 도움을 받는다. 보통은 행성 영주가 동산의 위치를 선택하였고, 그의 유형(有形) 참모진은 상급 부류의 토착 민족들 중에서 많은 사람의 도움을 얻어서, 기초적 준비 작업을 많이 행한다.
51:3.2 (583.1) 이 에덴 동산은 별자리 서울, 에덴시아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리고 최고 아버지들의 본부 세계에 있는 식물의 화려함을 모방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짓는다. 그러한 동산 집들은 보통, 한적한 구역에, 열대에 가까운 지대에 자리잡는다. 그 집들은 보통 세계에서 놀라운 창작품이다. 너희는 아름다운 이 여러 문화 중심에 대하여, 유란시아에서 그러한 사업이 도중에 중지된 것에 대하여 단편적 설명을 듣고서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다.
51:3.3 (583.2) 행성 아담과 이브는 잠재성으로 볼 때, 필사 종족들에게 육체적 은혜를 온전히 선물한 것이다. 그러한 수입(輸入)된 쌍의 주요한 사업은 번식하고 시간 세계의 자녀들을 개량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산의 민족과 세상의 민족은 즉시 서로 교배하지 않는다. 여러 세대 동안 아담과 이브는 자기 계급에서 강한 민족을 세우기까지, 진화하는 필사자들과 생물학적으로 격리된 채로 남아 있다. 이것이 사람 사는 세계에서 보라 민족의 기원이다.
51:3.4 (583.3) 행성 영주와 그 참모진이 종족 개량 계획을 준비하고, 아담과 이브가 이를 집행한다. 바로 여기서, 너희의 물질 아들과 그 동반자는 유란시아에 도착했을 때 크게 불리한 처지에 놓였다. 칼리가스티아는 아담의 임무에 교묘하고 효과 있게 저항했다. 반역하는 행성 영주가 자리에 있음으로 본래부터 생기는, 행성의 위험에 관하여 유란시아의 멜기세덱 관리자들이 아담과 이브 두 사람에게 마땅히 경고했는데도, 이 반란 주모자는 교활한 계략으로 에덴의 쌍을 이겼고, 그들을 함정에 빠뜨려, 너희 세계에서 눈에 보이는 통치자로서 그들이 책임진 약속을 어기게 만들었다. 이 배신한 행성 영주는 너희의 아담과 이브의 신용을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지만 루시퍼 반란에 말려들게 하려는 노력은 실패했다.
51:3.5 (583.4) 제5 계급의 천사, 곧 행성의 조수들은 아담의 임무에 소속되며, 행성 아담들이 세계 모험을 떠날 때 그들을 반드시 따라간다. 최초에 배치되는 군단은 보통 약 10만 명이다. 유란시아의 아담과 이브의 작업이 때 이르게 개시되었을 때, 그들이 예정된 계획에서 벗어났을 때, 꾸짖어 마땅한 행위에 대하여 그들을 훈계한 자는 동산의 목소리 중의 한 천사였다. 이 사건에 관한 너희의 이야기는 어떤 방식으로 너희 행성의 전통이 초자연적 일을 무엇이나 주 하나님께 돌리려는 경향이 있는가 잘 설명해준다. 이런 이유로, 유란시아인은 우주의 아버지의 성품에 관하여 흔히 갈피를 잡지 못했는데, 그의 동료와 하위 존재들의 언행이 모두 일반적으로 그가 한 것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아담과 이브의 경우에 그 동산의 천사는 바로, 당시에 근무 중이던 행성 조수들의 우두머리였다. 이 세라핌 솔로니아는 신의 계획이 유산되었음을 선언하고, 멜기세덱 관리자들이 유란시아로 돌아올 것을 요청했다.
51:3.6 (583.5) 2차 중도인은 아담의 임무에서 생겨난다. 행성 영주의 유형(有形) 참모진의 경우처럼, 물질 아들과 딸의 후손은 그들의 육체적 자손과 2차 계급의 중도인, 이 두 계급으로 이루어진다. 물질이지만 보통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 행성 봉사자들은 문명의 진보에, 아니 사회 발전과 영적 진보를 뒤엎으려고 애쓸지도 모르는, 순종하지 않는 소수(小數)를 굴복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한다.
51:3.7 (583.6) 2차 중도자들은 1차 계급과 혼동하면 안 되는데, 후자는 행성 영주가 도착하던 시절 가까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란시아에서 초기에 있었던 이 중도인들의 대다수는 칼리가스티아와 함께 반란에 가담했고, 오순절 뒤로 구금되었다. 행성 행정부에 계속 충성하지 않은 아담 집단의 다수도 마찬가지로 갇혀 있다.
51:3.8 (584.1) 오순절 날에, 충성스러운 1차 중도자와 2차 중도자들은 자원하는 연방을 결성했고, 그 뒤로 죽, 세상사에서 한 단위로서 활동해 왔다. 그들은 두 집단에서 번갈아서 선택된, 충성스러운 중도자의 지휘 하에서 봉사한다.
51:3.9 (584.2) 너희 세계는 4 계급의 아들들의 방문을 받았는데, 곧 행성 영주 칼리가스티아, 하나님의 물질 아들인 아담과 이브, 아브라함의 시절에 “살렘의 현자”였던 마키벤타 멜기세덱, 그리고 파라다이스의 수여 아들로서 왔던 그리스도 미가엘이다. 네바돈 우주의 최고 통치자 미가엘이 너희 세계에서 충성스럽고 유능한 행성 영주와 헌신적이고 성공한 물질 아들의 환영을 받았더라면, 얼마나 더욱 효과 있고 아름다웠을까! 그들 모두가 수여 아들의 일생의 과업과 사명의 질을 향상하려고 무척 많이 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세계가 유란시아처럼 그렇게 불행하지는 않았고, 행성 아담의 임무도 언제나 그토록 어렵거나 그렇게 위험하지도 않았다. 성공할 때 그들은 위대한 민족의 발전에 이바지하며, 행성 사무에서 눈에 보이는 우두머리로서, 그러한 세상이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시대로 한창 들어갈 때까지도 계속한다.
51:4.1 (584.3) 사람이 사는 세계의 초기 시대에 지배하는 민족은 홍인(紅人)이며, 그는 보통 먼저 인간 수준의 발전을 이룩한다. 홍인이 행성에서 선임 종족이지만, 뒤잇는 유색(有色) 민족들은 필사자가 등장하는 시대에 아주 일찍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51:4.2 (584.4) 초기의 종족들은 후기의 종족들보다 얼마큼 우수하다. 홍인은 남인종(藍人種)―흑인―보다 훨씬 위에 있다. 생명 운반자들은 살아 있는 에너지를 충분히 처음 인종, 홍인종에게 나누어 주며, 다른 필사자 집단이 연달아 진화로 나타나는 것은 최초의 자질을 희생하고 얻는 변화이다. 필사자의 키조차 홍인으로부터 남인종으로 내려가면서 작아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유란시아에는 기대하지 않았던 거인증의 경향이 녹색인과 주황 종족 사이에서 나타났다.
51:4.3 (584.5) 여섯 진화 민족이 모두 있는 세계에서, 우수한 민족들은 첫째ㆍ셋째ㆍ다섯째이다―홍인종ㆍ황인종ㆍ청인종이다. 진화 민족들은 지적 성장과 영적 발전의 능력이 이처럼 번갈아 생기며, 둘째ㆍ넷째ㆍ여섯째는 얼마큼 자질을 적게 부여받는다. 이 2차 종족들은 어떤 세계에 없는 민족이며, 많은 다른 세계에서 멸종한 민족이다. 너희의 우수한 청인(靑人)이, 혼혈이 된 “백인종” 안에 지속하는 것을 제외하고, 너희가 대체로 우수한 청인을 잃어버린 것은 유란시아에서 불운이다. 너희의 주황 및 녹색 혈통을 잃어버린 것은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51:4.4 (584.6) 여섯―또는 세―유색 인종의 진화는, 홍인의 최초의 자질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필사자의 부류에서 무척 바람직한 변화를 마련해주며, 그렇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다채로운 인간의 가능성을 표현하게 한다. 이러한 여러 수정(修正)은 수입된 아담 민족, 곧 보라 민족이 나중에 이를 개량한다면, 전체로서 인류의 진보에 유익하다. 여느 때 쓰는 이 혼혈 계획은 유란시아에서 널리 시행되지 않았고, 종족의 진화 계획을 집행하는 데 이렇게 실패한 것은, 너희 세계에서 이 초기 민족들의 잔재를 관찰한다고 해도 사람이 사는 보통 세계에서 이 민족들의 지위가 어떠한가 너희가 도저히 많이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51:4.5 (585.1) 종족이 발전하는 초기 시절에는 홍인ㆍ황인ㆍ청인이 서로 교배(交配)하는 경향이 조금 있고, 이와 비슷하게 주황인ㆍ녹색인ㆍ남색 종족들이 서로 섞이는 경향이 있다.
51:4.6 (585.2) 뒤떨어진 인간들은 보통, 더 진취성이 있는 민족들에게 노동자로서 고용된다. 이것이 초기 시대에 여러 행성에서 노예 제도의 기원을 설명한다. 주황인은 보통 홍인에게 정복되고, 하인의 지위로 전락한다―때로는 전멸된다. 황인과 홍인은 친교하는 일이 흔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황인종은 보통 녹색인을 노예로 만들고, 청인은 남색인을 굴복시킨다. 이 원시인 종족들은 뒤떨어진 동료들을 강제 노동에 이용하는 것을 유란시아인이 말이나 가축을 사고 파는 것보다 더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51:4.7 (585.3) 대부분의 정상 세계에서는 강제된 노예 상태가 행성 영주의 섭리 시대까지 살아남지 못한다. 하지만 정신 장애자와 사회에서 비행(非行)을 저지른 자들은 흔히 아직도 강제 노동을 하도록 강요된다. 그러나 모든 정상 구체에서 이 종류의 원시 노예 제도는 수입된 보라 민족, 곧 아담 민족이 도착한 뒤에 곧 폐지된다.
51:4.8 (585.4) 이 여섯 진화 민족은 아담 개량자들의 자손과 융합함으로 섞이고 향상될 운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민족들이 섞여지기 전에, 열등하고 부적당한 자는 대체로 제거된다. 행성 영주와 물질 아들은 다른 적절한 행성 당국과 함께, 번식하는 혈통의 적성(適性)에 대하여 판결을 내린다. 유란시아에서 그러한 극단적 계획을 집행하기가 어려운 것은 너희 세계 민족들 중에서 개인이 생물학상으로 건전한가 그렇지 않은가 판결할 유능한 재판관들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장애가 있어도, 아주 두드러지게 부적당하고, 결함이 있고, 퇴화되고 반(反)사회적인 혈통의 생물학적 자격을 박탈하는 데 너희가 찬성할 수 있어야 하는 듯이 보인다.
51:5.1 (585.5) 행성 아담과 이브가 사람이 사는 세계에 도착할 때, 그들은 기존 종족의 지적 존재들을 어떻게 개량하는 것이 최선인가 상관들로부터 충분히 교육을 받았다. 그 절차의 계획은 한결같지 않다. 많은 것이 봉사하는 그 쌍의 판단에 맡겨지며, 특히 유란시아와 같이 어지럽고 반란이 있던 세계에서, 실수는 뜸하지 않게 일어난다.
51:5.2 (585.6) 보라 민족들은 보통, 자체 집단이 1백만 명을 넘을 때까지 그 행성의 토착민과 혼합을 시작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동안에 행성 영주의 참모진은 신들의 아이들이, 말하자면, 사람의 민족들과 하나가 되려고 내려왔다고 선포한다. 우수한 종족 혈통에 속하여 자격을 갖춘 자들은 에덴 동산으로 나아가도 좋다, 그리고 거기서 새 혼합 등급의 인류에게 진화적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아담의 아들딸의 선택을 받는다고 선포될 그날을 사람들은 열심히 고대(苦待)한다.
51:5.3 (585.7) 정상 세계에서 행성 아담과 이브는 진화 민족들과 결코 교배하지 않는다. 이 생물학적 개선 작업은 아담의 후손이 할 일이다. 그러나 이 아담 족속은 민족들 사이로 나가지 않는다. 아담의 후손과 자원해서 짝짓기 위하여 우수한 남녀를 에덴 동산으로 영주의 참모진이 데리고 온다. 그리고 대부분의 세계에서, 동산의 아들딸과 짝지을 후보자로 뽑히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여긴다.
51:5.4 (586.1) 처음으로 종족의 전쟁과 기타 부족들의 투쟁이 줄어들고, 한편 세계 민족들은 동산으로부터 인정받고 거기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려고 더욱 애쓴다. 정상의 행성에서 이 경쟁하는 싸움이 어떻게 모든 활동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는가 너희는 겨우 아주 미약한 관념을 가질 수 있다. 종족을 개량하는 이 계획 전체가 유란시아에서 일찍부터 망쳐졌다.
51:5.5 (586.2) 보라 민족은 일부 일처(一夫一妻)를 지키는 민족이며, 아담의 아들딸과 연합하는 진화하는 남자와 여자는 누구나 다른 짝을 얻지 않고, 단일 배우자를 유지하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칠 것을 서약한다. 이 각각의 결합에서 생긴 아이들은 행성 영주의 학교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으며, 그리고 나서 진화적 부모인 민족에게로 떠나가서, 거기서 선택된 집단의 우수한 필사자들 중에서 결혼하는 것이 허락된다.
51:5.6 (586.3) 이 물질 아들들의 혈통이 세계의 진화 민족들에게 더해질 때, 진화로 진보하는 더 중대한 새 시대가 시작된다. 수입된 능력, 그리고 진화를 초월하는 특성이 번식 방법으로 이렇게 퍼부어지고 나서, 문명과 종족 발전에서 일련의 급속한 진전이 따른다. 이전에 1백만 년 동안의 투쟁보다 10만 년 안에 더 큰 진보가 이루어진다. 너희 세계에서, 예정된 계획들이 유산(流産)되었어도, 아담의 생명 세포질을 너희 민족들에게 준 뒤로, 큰 진보가 이루어졌다.
51:5.7 (586.4) 그러나 행성의 에덴 동산에서 순수 핏줄을 가진 아이들이 여러 진화 민족의 우수한 구성원들에게 자신을 수여할 수 있고, 이렇게 함으로 인류의 생물학적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지만, 유란시아 필사자들 중에서 높은 혈통이 그보다 낮은 민족과 짝짓는 것은 이롭다고 입증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지혜롭지 않은 과정은 너희 세계에서 모든 문명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아담의 기법으로 종족의 조화를 얻는 데 실패했으니까, 너희는 다른 방법, 대체로 적응하고 통제하는 인간적 방법으로, 이제 너희 행성에서 종족 개량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51:6.1 (586.5) 사람이 사는 대부분의 세계에서 에덴 동산은 훌륭한 문화의 중심으로서 남아 있고, 오랜 세월에 걸쳐 행성 운영 및 관습의 사회적 규범으로서 계속 작용한다. 보라 민족들이 비교적 격리된 초기에도, 그들의 학교는 세계 종족들로부터 적절한 후보자를 받으며, 한편 동산의 산업 발전은 새로이 무역의 길을 연다. 따라서 아담과 이브와 그 후손들은 그들의 세계에서 진화 민족의 갑작스러운 문화적 팽창과 급속한 발전에 이바지한다. 그리고 이 관계는 모두 진화 민족과 아담의 아들들이 섞임으로 확대되고 안정되며, 생물학적 지위를 즉시 개선하고, 지적 잠재성을 자극하고, 영적 감수성을 높인다.
51:6.2 (586.6) 정상 세계에서 보라 민족의 동산 본부는 세계 문화의 제2 중심이 되며, 행성 영주의 본부 도시와 합동으로, 문명이 발전하는 속도를 정한다. 몇 세기 동안 행성 영주의 도시 본부에 있는 학교와 아담과 이브의 동산 학교들은 현대식이다. 그 학교들은 보통, 서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어울려서 협조하는 가운데 함께 일한다.
51:6.3 (587.1) 레반트 지방 어디에 문명의 세계적 중심, 37,000년 동안이나 그치지 않고 활동해 온, 행성의 위대한 문화 대학이 있었다면, 그것이 너희 세계에서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생각해 보아라. 또 다시, 500,000년 동안 쌓인 힘, 통합된 진화적 영향을 미칠 그런 전통을 가진 본부, 하늘의 봉사를 베푸는 또 하나의 더 오래 된 본부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면, 그러한 고대(古代) 중심이라도 그 도덕적 권한이 얼마나 강화되었을 것인가 멈추어 생각해 보아라. 궁극에 에덴의 이상을 온 세계에 퍼뜨리는 것은 바로 관습이다.
51:6.4 (587.2) 행성 영주의 학교들은 철학ㆍ종교ㆍ도덕, 그리고 상급의 지적ㆍ예술적 성취에 주로 관심을 가진다. 아담과 이브의 동산 학교들은 보통, 실용 예술, 기초적 지성 훈련, 사회적 문화, 경제 발전, 무역 관계, 물리적 효율성, 국가 정치에 전념한다. 궁국에 이 세계 중심들이 혼합되지만, 이러한 실제 제휴 관계는 때때로 첫 심판 아들이 올 때까지 일어나지 않는다.
51:6.5 (587.3) 행성 아담과 이브가 계속하여 존재하는 것은 보라 민족의 순수 혈통의 핵심과 더불어, 에덴의 문화가 안정된 성장을 누리게 하며, 그 덕택으로 그들의 계심은 전통의 강제력으로 한 세계의 문명에 작용하게 된다. 이 불멸의 물질 아들과 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고리, 필수인 마지막 고리와 마주치며, 이것은 영원한 창조자와 시간 세계의 가장 낮은 유한 인격자들 사이, 거의 무한한 간격에, 다리를 놓는다. 여기에 육체가 있고 물질적이며, 아니 유란시아 필사자처럼 남녀가 구별된 생물, 기원이 높은 존재가 있으니, 그는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행성 영주를 보고 이해할 수 있으며, 그 땅의 필사 인간에게 그의 뜻을 통역해 줄 수 있는 자이니, 물질 아들과 딸이 모든 하등 계급의 영 존재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행성 영주와 참모진 전부, 사람 눈에 보이는 자와 보이지 않는 자를 본다.
51:6.6 (587.4) 여러 세기가 지나가면, 그들의 후손과 사람의 종족들이 혼합하여, 바로 이 물질 아들과 딸은 인류의 공통된 조상으로서, 이제는 섞여진 진화 민족 후손들의 공통된 부모로서 받아들여지게 된다. 사람이 사는 세계로부터 출발한 필사자는 일곱명의 아버지를 인식하는 체험을 가지도록 예정되어 있다:
51:6.7 (587.5) 1. 생물학상의 아버지―육체의 아버지.
51:6.8 (587.6) 2. 그 영역의 아버지―행성 아담.
51:6.9 (587.7) 3. 구체들의 아버지―체계 군주.
51:6.10 (587.8) 4. 최고 아버지―별자리 아버지.
51:6.11 (587.9) 5. 우주 아버지―창조 아들이며 지역에서 창조된 세계들의 최고 통치자.
51:6.12 (587.10) 6. 초우주 아버지―초우주를 다스리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
51:6.13 (587.11) 7. 영 아버지, 곧 하보나 아버지―우주의 아버지, 그는 파라다이스에서 거하며, 온 우주에 사는 비천한 인간의 지성 속에서 살고 일하라고 그의 영을 수여한다.
51:7.1 (587.12) 때때로 파라다이스의 아보날 아들들이 사법(司法) 행위 때문에 사람이 사는 세계들로 오지만, 심판관 임무로 도착하는 첫 아보날은 시공의 진화 세계에서 제4 섭리 시대를 연다. 이 심판 아들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어떤 행성에서 그는 한 시대 동안 남아 있고, 따라서 그 행성은 행성 영주, 물질 아들, 심판 아들, 이 세 아들의 합동 통치 하에 번영하며, 뒤의 두 존재는 그 영역의 모든 거주자의 눈에 보인다.
51:7.2 (588.1) 정상으로 진화하는 세계에서 첫 심판 아들이 임무를 마치기 전에, 행성 영주와 물질 아들의 교육 및 행정 작업은 통합되어 버렸다. 한 행성의 2중 감독이 이렇게 융합되는 것은 새롭고 효과적인 체제의 세계 행정을 초래한다. 심판 아들이 은퇴하고 나서, 행성 아담은 그 구체의 외향적 지도를 맡는다. 물질 아들과 딸은 그 세계에 빛과 생명 시대가 정착될 때까지, 이처럼 행성의 행정가로서 함께 행동한다. 그리고 나서 행성 영주는 행성 군주의 자리로 승급된다. 이렇게 상급으로 진화된 시대에 아담과 이브는 영화롭게 된, 그 영역의 공동 수상(首相)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된다.
51:7.3 (588.2) 진화 세계의 통합된 새 서울이 잘 안정되고, 유능한 하위 행정관들이 적절히 훈련받을 수 있게 되자마자, 하위의 여러 서울이 먼 땅 덩어리에, 그리고 다른 민족들 사이에 세워진다. 또 다른 섭리 시대의 아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러한 하위 중심이 50에서 1 백 개나 조직되어 있을 것이다.
51:7.4 (588.3) 행성 영주와 그 참모진은 아직도 영적ㆍ철학적 활동 분야를 육성한다. 아담과 이브는 그 영역의 물리ㆍ과학ㆍ경제 상태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두 집단이 예술, 사회 관계, 지적 업적을 증진시키는 데 에너지를 똑같이 바친다.
51:7.5 (588.4) 세상사의 제5 섭리 시대가 열릴 때가 되면, 행성의 활동이 훌륭하게 관리된다. 잘 관리된 그런 구체에서 필사자의 존재는 정말로 자극을 주며 유익하다. 그리고 유란시아인이 그러한 행성의 생활을 지켜볼 수만 있다면, 그들의 세계가 악을 용납하고 반란에 가담하여 얼마나 귀중한 것을 잃어버렸는가, 대번에 이해할 것이다.
52:0.1 (589.1) 한 진화 행성에서 생명이 비롯할 때부터 빛과 생명의 시대에 그 생명이 마침내 번창할 때까지, 세상의 행동 무대에 적어도 인간 생명의 일곱 시대가 등장한다. 연속되는 이 여러 시대는 신의 아들들이 행성에서 행하는 사명에 따라서 결정되며, 사람이 사는 보통 세계에서 이 시대들은 다음 순서로 나타난다:
52:0.2 (589.2) 1. 행성 영주 이전의 인간.
52:0.3 (589.3) 2. 행성 영주 이후의 인간.
52:0.5 (589.5) 4. 심판 아들 이후의 인간.
52:0.6 (589.6) 5. 수여 아들 이후의 인간.
52:0.9 (589.9) 공간의 세계들은 물리적으로 생명이 살기에 적당하게 되자마자 생명 운반자들의 등록부에 기록되며, 시간이 되면 이 아들들은 생명을 개시할 목적으로 그러한 행성에 파송된다. 생명이 개시될 때부터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그 기간 전체는 인간 이전 시대로 부르며, 이 이야기에서 고려되는, 필사자의 연속된 여러 시대보다 앞선다.
52:1.1 (589.10) 사람이 동물 수준에서 솟아오르는 시절부터―창조자를 숭배하기로 결심할 수 있을 때부터―행성 영주가 도착할 때까지, 의지(意志)를 가진 필사 인간을 원시인이라 부른다. 원시인에는 여섯 가지 기본 종류, 곧 종족이 있고, 이 초기 민족들은, 홍인으로부터 시작하여, 분광(分光)의 여러 색 순서대로 연달아 나타난다. 초기에 이러한 생명의 진화에 걸리는 시간은 다른 세계에서 많이 다르며, 유란시아 시간으로 15만 년에서부터 1백만 년이 넘기도 한다.
52:1.2 (589.11) 진화하는 유색(有色) 종족―홍인ㆍ주황인ㆍ황인ㆍ녹색인ㆍ청인ㆍ남색인―은 원시인이 간단한 언어를 개발하고 창조적 상상력을 쓰기 시작할 무렵이 되어 비로소 나타난다. 이때가 되면 사람은 똑바로 서는 데 상당히 익숙해 있다.
52:1.3 (589.12) 원시인은 힘센 사냥꾼이요 사나운 투사이다. 이 시대의 법은 적자(適者)의 육체적 생존이며, 이 시절의 정부는 전적으로 부족에 국한된다. 많은 세계에서 초기에 종족 투쟁이 있는 기간에, 어떤 진화 민족들은 유란시아에서 일어난 바와 같이 멸종되었다. 살아남는 자들은 보통, 나중에 수입된 보라 민족, 곧 아담 민족들과 후일에 섞인다.
52:1.4 (589.13) 이후의 문명에 비추어 볼 때, 이 원시인 시대는 길고 어둡고, 피로 얼룩진 장(章)이다. 밀림 속의 윤리와 원시 숲속의 도덕은 계시된 종교와 상급 영적 발전이 있는 후기 섭리 시대의 기준과 걸음이 맞지 않는다. 정상이고 실험하지 않는 여러 세계에서 이 시대는 유란시아에서 이 시대의 특징을 나타냈던, 길게 이어지고 특별히 무자비했던 투쟁과 거리가 멀었다. 너희가 첫째 세상의 체험에서 솟아났을 때, 진화 세계에서 어째서 이러한 길고 쓰라린 투쟁이 일어나는가 너희는 비로소 이해하게 될 것이다. 파라다이스로 가는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너희는 이상하게 보이는 이러한 행실의 지혜를 점점 더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등장하는 초기 시대에 온갖 역경이 있다 하더라도, 원시인의 업적은 시공의 진화 세계의 연대기(年代記)에서 하나의 훌륭한 장, 아니 영웅다운 장이다.
52:1.5 (590.1) 초기의 진화 인간은 흥미 있는 생물이 아니다. 대체로 이 원시 필사자는 동굴이나 절벽에서 거주하는 자이다. 그들은 또한 큰 나무에 투박한 오두막을 짓는다. 그들이 높은 수준의 지능을 얻기 전에, 행성에는 가끔 더 큰 종류의 동물이 들끓는다. 그러나 이 시대에 일찍부터 사람들은 불을 지피고 간직하기를 배우며, 발명하는 상상력이 커지고 연장이 개량됨에 따라서, 진화하는 사람은 크고 다루기 힘든 여러 동물을 이내 정복한다. 초기 민족들은 또한 큰 비행하는 동물을 널리 이용한다. 이 거대한 새들은 800킬로미터가 넘는 무착륙 비행에, 보통 크기의 사람을 하나나 둘 실을 수 있다. 어떤 행성에서 이 새들은 높은 수준의 지능을 소유하고, 흔히 그 영역의 언어 중에 많은 낱말을 지껄일 수 있기 때문에, 크게 소용된다. 이 새들은 아주 총명하고, 대단히 유순하며, 믿을 수 없을 만큼 애정이 깊다. 그러한 타는 새들은 유란시아에서 멸종된 지 오래지만, 너희의 초기 조상들은 이 새들의 봉사를 즐겼다.
52:1.6 (590.2) 사람이 윤리적 판단, 도덕적 의지(意志)를 얻는 것은 보통, 초기의 언어가 나타남과 동시에 일어난다. 인간의 수준에 이르고 나서, 필사자의 의지가 이렇게 나타난 뒤에, 이 존재들은 신다운 조절자의 일시적 깃드심을 받아들이게 된다. 죽고 나서 많은 사람이 생존자로서 마땅히 선택되고, 차후에 부활하고 영과 융합하기 위하여 천사장들의 인가를 받는다. 천사장들은 반드시 행성 영주를 따라가며, 그 영역의 섭리 시대의 판결은 영주의 도착과 동시에 일어난다.
52:1.7 (590.3) 생각 조절자가 깃드는 필사자는 모두 예배자가 될 잠재성이 있으며, “참 빛을 받았고,” 신(神)과 서로 접촉하기를 추구할 능력을 소유한다. 그런데도 원시인의 초기 종교, 곧 생물학적 종교는 대체로, 무지한 경외감과 부족의 미신과 아울러, 동물의 두려움이 지속된 것이다. 유란시아 민족들에게 미신이 남아 있는 것은 너희의 진화적 발전을 전혀 보완하지 않으며, 물질적 진보의 다른 측면에서 너희가 이룬 훌륭한 업적과 양립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초기에 있던 이 두려움의 종교는 이 원시인의 불 같은 성질을 억제하는 데 무척 가치 있게 쓰인다. 두려움의 종교는 문명의 선구자이며, 나중에 그 토양 위에 행성 영주 및 그의 봉사자들이 계시 종교의 씨앗을 심는다.
52:1.8 (590.4) 사람이 똑바로 선 자세를 얻은 때로부터 10만 년 안에, 의지(意志)가 작용한다는 생명 운반자들의 보고를 받고 나서, 비록 비교적 극소수의 사람들이 이렇게 발달했다 하더라도, 보통은 행성 영주가 체계 군주의 파송을 받고서, 도착한다. 원시 필사자들은 보통, 행성 영주와 눈에 보이는 참모진을 환영한다. 사실, 이 필사자들은 흔히 경외감과 존경심으로, 제지하지 않으면 거의 경배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52:2.1 (591.1) 행성 영주가 도착하는 것과 함께 새 섭리 시대가 시작된다. 정부가 땅에서 출현하고, 진보된 부족 시대가 다가온다. 이 체제 하에 몇천 년 동안, 큰 사회적 진전이 이루어진다. 정상의 조건 밑에서, 필사자는 이 시대에 높은 상태의 문명에 도달한다. 그들은 유란시아 종족들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미개 상태에서 허덕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세계의 생활이 반란으로 인하여 너무 변화되어서, 정상 행성에서 그러한 체제가 어떠한가 너희는 거의 또는 전혀 알 수 없다.
52:2.2 (591.2) 이 섭리 시대의 평균 길이는 약 50만 년이고, 더러는 더 길고 더러는 이보다 짧기도 하다. 이 시대에 행성은 체계의 회로에서 안정되며, 천사 및 다른 하늘 조수들이, 정원을 배당받은 수만큼 그 행정에 배치된다. 오는 생각 조절자들의 수가 점점 더 늘어나며, 수호 천사들은 필사자를 감독하는 그들의 체제를 확대한다.
52:2.3 (591.3) 원시 세계에 행성 영주가 도착할 때, 두려움과 무지로 가득한 진화 종교가 지배한다. 영주와 그의 참모진은 상급 진리와 우주의 조직을 처음으로 계시한다. 계시된 종교를 가르치는 이 초기의 발표는 아주 간단하고 보통, 지역 체계의 사무에 관계된다. 행성 영주가 도착하기 전에, 종교는 온전히 진화하는 과정이다. 그 뒤에 종교는 진화로 성장할 뿐 아니라, 차츰차츰 계시로 인하여 진보한다. 각 섭리 시대에, 필사자의 각 시대에, 영적 진리와 종교적 윤리가 확대되어 발표된다. 한 세계의 거주자들이 종교적 가르침을 받는 능력의 진화가 대체로 그들의 영적 진보의 속도와 종교적 계시의 한계를 결정한다.
52:2.4 (591.4) 이 섭리 시대에 영적 새벽이 밝아오는 것이 보이며, 다른 민족 및 그에 속한 여러 부족들이 전문화된 체계의 종교 및 철학 사상(思想)을 개발하는 경향이 있다. 이 모든 민족 종교를 통해서 두 가지 경향이 한결같이 보이는데, 즉 원시인이 초기에 가지는 두려움과 후일에 행성 영주의 계시이다. 어떤 면에서 유란시아인은 행성의 진화에서 이 단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너희가 이 연구를 추구함에 따라서, 진화로 진보하고 발달하는 보통 과정에서 너희의 세계가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더욱 똑똑히 헤아려 볼 것이다.
52:2.5 (591.5) 그러나 행성 영주는 “평화의 왕”이 아니다. 종족 투쟁 및 부족 전쟁이 이 섭리 시대까지 이어지지만, 그 빈도와 정도가 줄어든다. 이때는 종족이 분산되는 중대한 시대이며, 마침내 격심한 민족주의 시기가 된다. 피부색이 부족 및 민족 분류의 기초가 되며, 다른 민족들은 흔히 다른 언어를 개발한다. 팽창하는 각 필사자 집단은 고립을 찾는 경향이 있다. 많은 언어가 존재하는 것이 이러한 분리를 촉진한다. 몇 민족이 통일되기 전에, 그들의 무자비한 전쟁은 때때로 민족 전체의 멸종을 가져온다. 특히 주황인과 녹색인이 그러한 절멸을 겪는다.
52:2.6 (591.6) 보통 세계에서, 영주 통치의 후기 부분에, 국가 생활이 비로소 부족 조직을 갈아치우거나, 아니면 오히려 기존 부족 집단 위에 겹쳐지게 된다. 그러나 영주 시대의 큰 사회적 업적은 가족 생활의 출현이다. 지금까지, 인간 관계는 주로 부족의 문제였다. 이제 가정이 비로소 모습을 갖춘다.
52:2.7 (591.7) 이때는 남녀 평등이 실현되는 섭리 시대이다. 어떤 행성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통치할 수도 있고, 다른 데서는 반대 현상이 지배한다. 이 시대에 정상 세계에서는 완전한 남녀 평등이 자리잡으며, 이것은 가정 생활의 이상을 더욱 실현하는 예비 단계이다. 이때가 가정의 황금 시대의 시작이다. 부족 통치의 관념은 차츰, 국가 생활과 가정 생활, 이 두 가지 개념에 자리를 양보한다.
52:2.8 (592.1) 이 시대에 농업이 출현한다. 가족 관념의 성장은 방랑하며 정착하지 않는 사냥꾼의 생활과 양립할 수 없다. 정착하여 사는 관습과 토지의 경작이 차츰 자리잡는다. 동물 길들이기와 가정(家庭) 기술이 발걸음을 맞추어 발달한다. 생물학적 진화의 정점에 도달하고 나서, 높은 수준의 문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기계적 수준의 발전이 거의 없으며, 발명이 뒤잇는 시대의 특징을 나타낸다.
52:2.9 (592.2) 이 시대가 끝나기 전에, 민족들은 정화(淨化)되고 신체가 완전해지고 지적 힘이 있는 높은 상태로 올라간다. 정상 세계의 초기 발전은 상급 종류 필사자의 증가와 하급 종류들의 비례적 감소를 촉진하는 계획으로 말미암아 크게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너희의 초기 민족들이 이런 부류를 이처럼 구별하지 못한 것은 오늘날 유란시아 민족들 사이에서 결함이 있고 퇴화된 사람이 아주 많이 존재하는 것을 설명한다.
52:2.10 (592.3) 영주(領主) 시대에 큰 업적 가운데 하나는 정신적 결함이 있는 자와 사회적으로 부적당한 개인들의 번식을 이렇게 제한한 것이다. 두 번째 아들, 곧 아담들이 도착하는 시절보다 오래 전에, 대부분의 세계는 종족을 정화(淨化)하는 과제를 심각하게 처리하며, 이것은 유란시아 민족들이 아직까지 심각하게 손대지 않은 일이다.
52:2.11 (592.4) 이 종족 개량의 문제는, 인간의 진화에서 이렇게 일찍 그 일에 착수했을 때, 그렇게 광범위한 사업은 아니다. 종족이 살아남으려고 부족 투쟁과 험한 경쟁이 있던 이전의 시대는 비정상이고 결함 있는 혈통의 대부분을 뿌리 뽑아버렸다. 원시적이고 투쟁하는 부족 사회의 조직에서, 천치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별로 없다. 진화하는 인간 종족 가운데서 희망 없이 결함 있는 혈통을 육성하고 보호하고 영속시키는 것은, 얼마큼 완전해진 너희 문명의 그릇된 감상(感傷)이다.
52:2.12 (592.5) 퇴화된 인간, 비정상이고 열등하고 구제할 수 없는 필사자에게 쓸데없는 동정을 베푸는 것은 부드러움도 이타주의도 아니다. 가장 정상인 진화 세계에서도, 진화하는 인류 중에 사회적으로 부적당한 자와 정신적으로 퇴화된 혈통을 영속시키지 않고도, 이타적 감정과 필사자에게 사심 없이 봉사하는 모든 고귀한 특성을 충분히 표현하기 위하여, 개인들 사이에, 그리고 수많은 사회 집단 사이에, 충분한 차이가 존재한다. 자신의 도덕적 유산(遺産)을 돌이킬 수 없이 잃어버리고 자신의 영적 상속권을 영원히 버리지 않은, 불행하고 빈궁한 개인들을 위하여, 관용을 베풀고 이타주의를 실천할 기회가 풍부히 있다.
52:3.1 (592.6) 진화하는 생명의 최초의 추진력이 그 생물학적 과정을 다 마쳤을 때, 동물이 발달하는 정점에 사람이 이르렀을 때, 제2 계급의 아들이 도착하며, 은총과 봉사를 베푸는 제2 섭리 시대가 시작된다. 이것이 모든 진화 세계에서 참말이다. 가능한 가장 높은 수준의 진화 생명에 도달하고, 원시인이 생물학의 눈금에서 가능한 한도까지 높이 올라갔을 때, 체계 군주의 파송을 받고서, 물질 아들과 딸이 반드시 그 행성에 나타난다.
52:3.2 (593.1) 생각 조절자가 아담 이후의 사람들에게 더욱 수여되며, 나중에 조절자와 융합하는 능력을 얻는 이 필사자의 수가 항상 늘어난다. 내려오는 아들로서 활동하는 동안 아담들은 조절자를 소유하지 않지만, 행성에서 그들의 자손―직계와 혼혈―은 때가 오면, 신비의 훈계자를 받을 합당한 후보자가 된다. 아담 이후 시대가 끝날 때가 되면, 그 행성은 배당받은 수대로 하늘 봉사자를 소유하며, 오로지 융합하는 조절자만 아직 보편적으로 수여되지 않는다.
52:3.3 (593.2) 진화 인간을 사냥꾼ㆍ목자(牧者) 단계의 문명에서 농부ㆍ원예가 단계로 완전히 넘어가도록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담 체제의 첫째가는 목적이며, 이 단계는 문명에 부수되는 도시 및 산업의 출현으로 나중에 보충된다. 생물학적 개량자가 활동하는 이 섭리 시대 1만 년은 놀라운 변화를 이룩하기에 충분하다. 행성 영주와 물질 아들들의 공동 지혜로 그런 행정을 2만 5천 년 거치면 보통, 심판 아들의 강림을 위하여 그 구체가 충분히 발달한다.
52:3.4 (593.3) 이 시대에는 보통, 건전하지 않은 자를 제거하는 일을 끝마치고 종족 혈통이 더욱 정화(淨化)되는 것을 구경한다. 정상 세계에는 결함이 있는, 짐승 같은 경향이 그 영역의 번식하는 혈통으로부터 거의 제거된다.
52:3.5 (593.4) 아담의 후손은 진화 민족들의 열등한 혈통과 결코 혼합하지 않는다. 행성 아담이나 이브가 몸소, 진화 민족들과 짝짓는 것도 신의 계획이 아니다. 이 종족 개량 계획은 그들의 후손이 할 일이다. 그러나 종족 혼합의 임무가 개시되기 전에, 물질 아들과 딸의 자손은 몇 세대 동안 동원된다.
52:3.6 (593.5) 아담의 생명 원형질을 필사 민족들에게 선물하는 것은 지적 능력을 즉시 향상시키고 영적 진보를 가속하는 결과를 낳는다. 보통은 신체적 개선도 얼마큼 따른다. 보통 세계에서 아담 이후의 섭리 시대는 위대한 발명, 에너지 통제, 기계의 발전이 있는 시대이다. 이때는 여러 형태의 제조업과 자연력의 통제가 나타나는 시대이다. 이때는 행성을 탐험하고 마침내 정복하는 황금 시대이다. 한 세계의 물질적 진보의 상당 부분은, 자연 과학의 발전이 개시되는 이 시기, 유란시아가 지금 겪고 있는 바로 그러한 시대에 일어난다. 너희 세계는 보통 행성의 계획보다, 온전히 한 섭리 시대가 넘게 뒤떨어져 있다.
52:3.7 (593.6) 정상(正常) 행성에서 아담의 섭리 시대가 끝날 때가 되면, 민족들이 실질적으로 혼합되고, 그래서 “하나님이 한 핏줄로부터 모든 나라를 만드셨고,” 그의 아들이 “모든 종족을 한 색으로 만드셨도다”하고 참으로 선포할 수 있다. 그러한 혼합 민족의 피부색은 보라 빛을 띤 얼마큼 올리브 빛깔, 곧 그 구체에서 종족의 “흰빛”[1] [1688]이 된다.
52:3.8 (593.7) 원시인은 대체로 고기를 먹는다. 물질 아들과 딸들은 고기를 먹지 않지만, 그들의 자손은 보통, 몇 세대 안에 잡식(雜食)하는 수준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그들의 자손의 집단 전체가 때때로 비육식자로 남는다. 아담 이후 민족들의 이러한 2중 기원은 어떻게 그러한 섞인 인간 혈통이, 채식과 육식을 하는 두 동물 집단에 속하는 해부학적 흔적을 나타내는가 설명한다.
52:3.9 (593.8) 종족이 혼합되는 1만 년 동안에 그 결과로 생기는 혈통들은 다른 정도로 해부학상의 혼합을 나타낸다. 어떤 혈통은 육식하지 않는 조상의 표시를 더 지니고, 더러는 육식하는 진화적 선조의 두드러진 특성과 신체의 특징을 더 지닌다. 이 세계 민족들의 대다수는 곧 잡식을 하게 되고, 동물계 및 식물계로부터 광범위한 식품을 먹고 산다.
52:3.10 (594.1) 아담 이후의 시대는 국제화되는 섭리 시대이다. 종족을 혼합시키는 과업이 거의 끝나면서 민족주의는 기울며, 인간의 형제 정신이 정말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대의 정치가 군주 형태나 가장이 다스리는 형태의 통치를 비로소 대체한다. 교육 체제는 세계화되고, 차츰 종족들의 언어는 보라 민족의 언어에 길을 양보한다. 민족들이 상당히 잘 섞이기까지, 그들이 공통된 언어를 쓸 때까지, 보편적 평화와 협동이 이루어지는 일이 드물다.
52:3.11 (594.2) 아담 이후 시대가 막을 내리는 몇 세기 동안에, 예술ㆍ음악ㆍ문학에 대하여 새로운 관심이 개발되며, 이러한 세계적 각성은 심판 아들이 나타날 신호가 된다. 이 시대에 최고의 발전은 지적 현실, 곧 참된 철학에 보편적 관심이 생기는 것이다. 종교는 민족주의 성향이 줄고, 갈수록 더 행성의 일거리가 된다. 진리의 새로운 계시가 이 시절의 특징이며, 별자리의 최고자들은 비로소 인간사에서 다스린다. 진리는 별자리의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계시된다.
52:3.12 (594.3) 큰 윤리적 진전이 이 시대의 특징을 나타낸다. 인간이 형제가 되는 것이 그 사회의 목표이다. 세계적 평화는―종족의 전쟁과 국가의 반목(反目)이 그치는 것은―제3 서열의 아들, 곧 심판 아들의 강림을 위하여 행성에서 때가 무르익었음을 나타내는 지표(指標)이다.
52:4.1 (594.4) 정상이며 충성하는 행성에서, 이 시대는 혼합되고 생물학상으로 건전한 필사 민족들과 함께 시작된다. 종족 문제, 곧 인종(人種) 문제가 하나도 없다. 글자 그대로, 모든 나라와 민족이 한 핏줄이다. 사람의 형제 정신이 한창 퍼지고, 나라들이 땅에서 평화롭고 평온한 가운데 살기를 배운다. 그러한 세계는 위대한 지적 발전의 절정을 눈앞에 두고 있다.
52:4.2 (594.5) 진화 세계가 이처럼 심판관 시대를 위하여 무르익을 때, 높은 아보날 아들 계급 중에 하나가 심판 임무를 띠고 나타난다. 행성 영주와 물질 아들들은 지역 우주에서 기원을 가지며, 심판 아들은 파라다이스로부터 온다.
52:4.3 (594.6) 필사자의 구체로 사법(司法) 행위를 하려고, 오직 섭리 시대 재판자로서 올 때, 파라다이스 아보날은 결코 육신을 입지 않는다. 그러나 심판 임무를 띠고 올 때, 적어도 처음 방문할 때 그들은 반드시 육신을 입는다. 하지만 그들은 출생을 겪지 않으며, 그 영역에서 죽음을 거치지도 않는다. 어떤 행성에서 통치자로서 남아 있는 경우에, 그들은 여러 세대 동안 살지도 모른다. 임무가 끝날 때, 그들은 행성에서 생명을 포기하고 예전 상태, 신다운 아들 신분으로 돌아간다.
52:4.4 (594.7) 새로운 각 섭리 시대는 계시된 종교의 시야를 연장하며, 심판 아들은 지역 우주와 그 모든 종속 지부의 사무를 보여주려고 진리의 계시를 확대한다.
52:4.5 (594.8) 심판 아들의 처음 방문이 있은 뒤에, 민족들은 곧 경제적 해방을 달성한다. 한 사람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 소요되는 나날의 일은 너희 시간으로 두 시간 반이 될 것이다. 윤리가 있고 총명한 그러한 필사자들을 해방하는 것은 틀림없이 안전하다. 그러한 순화(純化)된 민족들은 자신을 개선하고 행성을 진보시키는 데 어떻게 여가를 이용하는가 잘 안다. 적성이 떨어지고 부족한 자질을 타고난 사람들 사이에 번식을 제한함으로 이 시대는 종족의 혈통이 더욱 정화되는 것을 보게 된다.
52:4.6 (595.1) 민족들의 정치적 통치와 사회의 관리는 계속 개선되며, 이 시대의 끝이 되기까지 자치가 상당히 정착되어 있다. 우리가 자치 정부라 하는 것은, 가장 높은 종류의 대의 정치를 언급한다. 그러한 세계들은 오직 사회와 정치의 책임을 맡기에 가장 적당한 지도자와 통치자들을 진급시키고 그들에게 명예를 돌린다.
52:4.7 (595.2) 이 시대에 대다수의 세상 사람들에게 조절자가 깃든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신다운 훈계자는 반드시 보편적으로 수여되지 않는다. 융합 운명을 가진 조절자가 아직도 행성의 모든 필사자에게 수여되지 않는다. 여전히 의지를 가진 인간이 신비의 훈계자를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
52:4.8 (595.3) 이 섭리 시대가 끝나는 시기에, 사회는 비교적 단순해진 형태의 생활로 비로소 돌아간다. 복잡한 성질을 가진 진보하는 문명이 그 과정을 마치고, 사람들은 더 자연스럽고 능률 있게 살기를 배운다. 그리고 이 경향은 뒤잇는 각 시대에 늘어난다. 이때는 예술과 음악과 상급의 배움이 번창하는 시대이다. 자연 과학의 발전은 이미 그 정점에 이르렀다. 이 시대가 막을 내리면, 이상적 세계에서 큰 종교적 각성이 충만해지는 것, 영적 깨우침이 세계에 널리 퍼지는 것을 구경한다. 그리고 민족들의 영적 성품이 이렇게 널리 자극받는 것은 수여 아들이 도착하고 필사자의 제5 시대가 개시된다는 신호이다.
52:4.9 (595.4) 많은 세계에서, 한 번의 심판 임무로 그 행성이 수여 아들을 위하여 미처 준비되지 않는 일이 생긴다. 그 경우에 둘째, 아니 일련의 심판 아들들이 올 터이고, 행성이 수여 아들을 받도록 준비될 때까지, 각자가 한 섭리 시대로부터 다음 섭리 시대로 그 민족들을 승진시킬 것이다. 둘째 임무와 그 이후의 임무에서 심판 아들들은 육신화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심판 아들이 나타나든지 상관 없이―그리고 그들은 또한 수여 아들 뒤에 그런 자격으로 올 수도 있다―각 심판 아들의 강림은 한 섭리 시대가 끝나고 다른 섭리 시대가 시작됨을 표시한다.
52:4.10 (595.5) 심판 아들들의 이 여러 섭리 시대는 유란시아 시간으로 2만 5천 년에서 5만 년까지, 얼마든지 시간을 차지한다. 때때로 그러한 시기는 훨씬 짧거나, 드문 경우에 더 길기도 하다. 그러나 세월이 충분히 지나면, 바로 이 심판 아들들 가운데 하나가 파라다이스 수여 아들로서 태어날 것이다.
52:5.1 (595.6) 사람 사는 세계에서 지성과 영의 발전이 어떤 기준에 이르렀을 때, 파라다이스 수여 아들 한 분이 반드시 도착한다. 정상 세계에서, 민족들이 지적 발전과 윤리적 달성의 가장 높은 수준에 올라갈 때까지, 그는 육신을 입고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유란시아에서, 수여 아들이, 아니 너희의 창조 아들이, 아담의 섭리 시대 끝에 나타났다. 하지만 이것은 공간 세계에서 사건들이 일어나는 보통 순서가 아니다.
52:5.2 (595.7) 세상이 영적 변화를 위하여 충분히 준비되었을 때, 수여 아들이 도착한다. 이 아들들은 반드시 심판관 계급, 곧 아보날 계급에 속하는데, 예외는 네바돈의 미가엘이 너희 필사 민족들에게 자신을 수여하려고 유란시아에 나타났을 때와 같이, 각 지역 우주에서 한 번, 창조 아들이 어느 진화 세계에서 그의 마지막 자기 수여를 준비할 때이다. 거의 1천만 세계 중에서 오직 한 세계가 그러한 선물을 받을 수 있다. 모든 다른 세계는 아보날 계급의 파라다이스 아들이 수여됨으로 영적 진보가 일어난다.
52:5.3 (596.1) 수여 아들은 높은 교육 문화를 가진 세계에 도착하며, 상급의 가르침을 소화하고 수여 임무를 고맙게 여기도록 영적 훈련을 받고 준비된 민족을 만난다. 이 시대의 특징은 도덕적 문화와 영적 진리를 세계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이 섭리 시대에 사람의 정열은 우주의 실체를 꿰뚫고 영적 실체와 교통하는 것이다. 진리의 계시는 연장되어 초우주를 포함한다. 전혀 새로운 교육 및 정부 체계가 성장하여 지난 시대의 서투른 체제를 갈아치운다. 인생의 즐거움은 새로운 빛깔을 띠고, 생명의 반응은 하늘 같이 높은 음조와 음질로 높아진다.
52:5.4 (596.2) 수여 아들은 한 세계의 필사 민족들의 영적 향상을 위하여 살다가 죽는다. 그는 “새 생명의 길”을 자리잡게 한다. 그의 일생은 파라다이스의 진리가 필사의 몸을 입고 육신화된 것이요, 바로 그 진리를―진리의 영 까지도―알고서 사람은 자유롭게 될 것이다.
52:5.5 (596.3) 유란시아에서 이 “새 생명의 길”이 안정되는 것은 진리의 문제일 뿐 아니라 사실의 문제였다. 루시퍼 반란이 있을 때 유란시아가 고립된 것은, 필사자가 죽고 나서 저택 세계들의 기슭으로 바로 통과할 수 있는 그 절차를 중지하게 했다. 그리스도 미가엘이 유란시아에서 계시던 시절 이전에는, 섭리 시대의 부활이나 또는 1천 년마다 특별 부활이 있을 때까지, 모든 혼이 계속 잠을 잤다. 특별 부활의 기회가 올 때까지 모세조차도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타락한 행성 영주 칼리가스티아는 그러한 구원에 항의하였다. 그러나 오순절 뒤로 죽, 유란시아 필사자들은 다시 상물질 구체들로 직접 나아가도 좋다.
52:5.6 (596.4) 육신화된 생명을 버린 뒤 사흘째에 수여 아들이 부활하고 나서, 그는 우주의 아버지의 바른 편으로 올라가고, 수여 임무가 승인되었다는 확언을 받고, 지역 우주 본부에 계신 창조 아들에게로 돌아간다. 그리고 나서 수여된 아보날과 창조자 미가엘은 그들의 합동 영, 곧 진리의 영을 그 수여 세계로 보낸다. 이때는 “승리한 아들 영이 모든 육체에게 쏟아지는” 기회이다. 우주 어머니 영도 또한 이렇게 진리의 영을 수여하는 데 참가하며, 이와 동시에 생각 조절자를 수여하는 칙령이 떨어진다. 그 뒤에 그 세계에서 멀쩡한 정신과 의지를 가진 모든 인간은, 도덕적 책임을 지고 영적 결정을 내릴 나이에 이르자마자, 조절자를 받을 것이다.
52:5.7 (596.5) 그러한 수여된 아보날이 수여 임무를 마친 뒤에 한 세계로 돌아온다면, 육신화하지 않지만 “천사의 무리와 함께 영광에 싸여” 올 것이다.
52:5.8 (596.6) 수여 아들 이후의 시대는 1만 년에서 10만 년까지 연장될 수 있다. 이 여러 섭리 시대 중 어느 시대에도 임의로 얼마큼의 시간이 배정되지 않는다. 이때는 크게 윤리적ㆍ영적 진보가 있는 시절이다. 이 시기의 영적 영향 밑에서, 사람의 인품은 엄청난 변화를 거치며, 진기한 발전을 겪는다. 황금률을 실제로 쓰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인품을 고상하게 하고 교양을 높이는 섭리 시대와 함께, 수여 아들들이 오기 전의 예비 훈련을 받은 그러한 필사자 세계에서는 예수의 가르침을 정말로 적용할 수 있다.
52:5.9 (596.7) 이 시기에 질병과 범죄의 문제는 거의 해결된다. 선택해서 번식함으로 퇴화는 이미 대체로 근절되었다. 아담 혈통의 높은 저항 성질을 통해서, 그리고 지난 시대에 자연 과학의 발견을 영리하게 세계에 널리 적용함으로, 질병은 실지로 정복되었다. 이 시기에, 평균 생명의 길이는 유란시아 시간으로 3백 년에 해당하는 것보다 훨씬 길어진다.
52:5.10 (597.1) 이 시기 전체를 통해서 정부의 감독이 차츰 줄어든다. 참된 자치가 비로소 작용하고, 제한하는 법규의 필요가 자꾸 줄어든다. 국가의 저항을 담당하는 군사(軍事) 지부들이 사라져 버린다. 나라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시대가 정말로 다가오고 있다. 많은 국가가 있고, 국가는 대체로 땅의 분포에 따라서 결정되지만, 오로지 한 민족, 한 언어, 한 종교가 있다. 필사자의 사무는 완전히 이상향(理想鄕) 같지 않더라도, 거의 그렇다. 이때는 참으로 위대하고 영화로운 시대이다!
52:6.1 (597.2) 너희가 수여받은 아들은 평화의 왕이다. 그는 “땅에는 평화, 사람들 사이에는 선의가 있을지어다”하는 소식을 가지고 도착한다. 정상 세계에서 이때는 세계 평화가 오는 섭리 시대이다. 열강은 이제 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의 수여 아들, 그리스도 미가엘의 강림에는 그러한 유익한 영향이 따르지 않았다. 유란시아는 정상 순서대로 나아가고 있지 않다. 너희 세계는 행성의 행렬과 발걸음이 맞지 않는다. 너희의 주는, 땅에 계실 때, 그의 강림이 보통의 평화적 통치를 유란시아에 가져오지 않으리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했다. 그는 “전쟁과 전쟁의 소문”이 있으리라,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리라, 그들에게 분명히 일러주었다. 또 다른 때에 “내가 땅에 평화를 가져오리라 생각지 말라”하고 말했다.
52:6.2 (597.3) 정상의 진화 세계에서도 인간의 세계적 형제 정신을 실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유란시아처럼 뒤범벅이 되고 질서가 없는 행성에서 그러한 성취는 훨씬 더 시간이 걸리고, 훨씬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도움이 없이 사회의 진화는 영적으로 고립된 구체에서 도저히 그렇게 행복한 결과를 이룰 수 없다. 종교적 계시는 유란시아에서 형제 정신의 실현에 필수이다. 예수가 영적 형제 정신을 즉시 이룩하는 길을 보여주었지만, 너희 세계에서 사회적 형제 정신의 실현은 다음과 같이 개인의 변화와 행성의 적응을 마치는 데 크게 달려 있다:
52:6.3 (597.4) 1. 사회적 친교. 여행ㆍ상업, 그리고 경쟁하는 놀이를 통하여, 국가 및 종족 사이의 사회적 접촉과 친교 관계가 증가하는 것. 공통 언어가 발전하고 다국어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종족과 국가가 학생ㆍ선생ㆍ산업가, 종교 철학가를 서로 교환하는 것.
52:6.4 (597.5) 2. 지적 상호 교류. 거주민이 너무 원시적이어서 염치없는 이기심(利己心)이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는 세계에는 형제 정신이 불가능하다. 국가와 종족의 문헌이 교류되어야 한다. 각 종족은 모든 종족의 사고(思考)에 익숙해져야 한다. 각 민족은 모든 민족이 어떻게 느끼는가 알아야 한다. 무지는 의심을 낳고, 의심은 동정심과 사랑, 이 본질적 태도와 양립하지 않는다.
52:6.5 (597.6) 3. 윤리적 각성. 오로지 윤리 의식이, 인간의 불관용이 부도덕하며 형제를 죽이는 싸움이 죄 많음을 폭로할 수 있다. 오로지 도덕 의식이 국가의 시기심과 종족의 질투와 같은 잘못을 규탄할 수 있다. 오로지 도덕적 존재들이 황금률을 실천하는 데 필수인 바로 그 영적 통찰력을 늘 추구할 것이다.
52:6.6 (598.1) 4. 정치적 지혜. 감정 면에서 성숙한 것은 자제(自制)에 필수이다. 오로지 감정 면에 성숙해야 전쟁으로 야만스런 판결을 받지 않고, 문명화된 판결을 내리는 국제적 방법으로 대신할 것을 보장한다. 지혜로운 정치가들이 자신의 국가나 종족 집단의 이익을 키우려 애쓰는 동안에도, 그들은 언젠가 인류의 복지를 위하여 일할 것이다. 이기적인 정치적 지혜는 궁극에 자살(自殺)이 된다―행성에서 집단의 생존을 보장하는 그 모든 지속하는 성질을 파괴한다.
52:6.7 (598.2) 5. 영적 통찰력. 사람이 형제라는 정신은 결국,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깨닫는 데 달려 있다. 유란시아에서 사람의 형제 정신을 실현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오늘날 인류의 영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사회가 진화하는 자연스런 경향을 가속하는 유일한 방법은 위에서 영적 압력을 적용하고, 이처럼 누구나 모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혼의 능력을 향상하면서, 도덕적 통찰력을 키우는 방법이다. 서로 이해하고 형제답게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문명화시키는 초월 처방이요, 인간의 형제 정신을 세계적으로 실현하는 데 힘찬 요소가 된다.
52:6.8 (598.3) 뒤떨어지고 뒤죽박죽이 된 너희 세계로부터 수여 아들 이후 시대에 있는 어느 정상 행성으로 지금 너희를 데려갈 수 있다면, 너희는 전통에 나오는 천국으로 옮겨 갔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이 거주하는 필사자 구체의 정상적 진화 작용을 너희가 지켜보고 있다고 도저히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계들은 그들 영역의 영적 회로 속에 있으며, 그들은 모두 지역 우주 방송의 혜택과 초우주의 거울 봉사를 누린다.
52:7.1 (598.4) 보통의 진화 세계에 도착할 다음 계급의 아들은 삼위일체의 교육 아들, 곧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신다운 아들이다. 너희의 예수가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다시 우리는 유란시아가 그 자매 구체들과 발걸음이 맞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약속을 분명히 지키겠지만, 그의 두 번째 강림이 유란시아에서 심판 아들이나 교육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보다 앞설지, 아니면 뒤설지 아무도 모른다.
52:7.2 (598.5) 교육 아들들은 영적 변화를 겪는 세계에 무리를 지어 온다. 행성의 한 교육 아들은 1차 아들 70명, 2차 아들 12명, 그리고 최상 계급의 데이날 가운데 가장 높고 가장 노련한 3명의 도움과 지원을 받는다. 이 단체는 세상에서 한 동안, 진화 시대로부터 빛과 생명의 시기로 이동하기에 넉넉할 만큼 오랫동안―행성 시간으로 적어도 1천 년 동안, 흔히 그보다 상당히 길게―남아 있을 것이다. 이 사명은 사람 사는 세계에 봉사한 모든 신다운 성격자가 이전에 기울인 노력에 삼위일체가 기여하는 것이다.
52:7.3 (598.6) 진리의 계시는 이제 중앙 우주까지, 그리고 파라다이스까지 연장된다. 민족들은 영적 성향이 상당히 높아지고 있다. 위대한 민족이 진화했고 대단한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행성의 교육ㆍ경제ㆍ행정 체제는 철저한 변화를 겪고 있다. 새로운 가치 기준과 관계가 확립되고 있다. 하늘나라가 땅에서 나타나고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세계에서 널리 퍼지고 있다.
52:7.4 (598.7) 이때는 많은 필사자가 살아 있는 자 가운데에서 옮겨지는 섭리 시대이다. 삼위일체의 교육 아들들의 시기가 진행됨에 따라서, 시간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영적 충성이 갈수록 더 일반화된다. 육체를 입은 일생 동안에 조절자가 점점 더 그 피보호자와 융합함에 따라서, 자연사는 줄어든다. 그 행성은 결국, 필사자가 승천하는, 수정된 1차 계급의 행성으로 분류된다.
52:7.5 (599.1) 이 시대에 생활은 유쾌하고 유익하다. 오랜 진화적 투쟁에서 퇴화된 것과 반사회적 최종 산물은 거의 뿌리가 뽑혔다. 수명은 유란시아 시간으로 5백 년에 접근하며, 종족의 증가하는 번식률은 영리하게 통제된다. 전혀 새로운 체제의 사회가 다가온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아직도 큰 차이가 있지만, 사회의 상태는 사회적 형제 정신과 영적 평등의 이상(理想)에 더욱 가깝게 다가간다. 대의 정치는 사라지고 있고, 세상은 개인의 자제에 지배를 받으며 지나간다. 정부의 활동은 주로 사회를 관리하고 경제적으로 조정하는 집단 과제에 집중된다. 황금 시대가 급히 다가오고 있다. 행성에서 길고도 맹렬한 진화적 투쟁이 현세에 이룰 목표가 시야에 들어온다. 오래도록 기다리던 보상이 곧 실현될 것이요, 신들의 지혜가 바야흐로 명백히 드러나려고 한다.
52:7.6 (599.2) 이 시대에 한 세계의 물리적 관리에 한 가지 요건이 있는데, 개별 어른은 누구나 하루에 약 한 시간 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란시아의 한 시간에 해당하는 양이다. 그 행성은 우주 사무와 긴밀한 접촉을 가지며,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너희가 지금 최신판 일간 신문에 날카로운 흥미를 보이는 것과 똑같이 흥미를 가지고 최신 방송을 자세히 살핀다. 이 민족들은 너희 세상에서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관심거리에 빠진다.
52:7.7 (599.3) 최상 존재에게 바치는 행성의 참된 충성심이 갈수록 더 자란다. 대대로 이어서 종족의 더 많은 부분이, 정의를 실행하고 자비를 실천하는 자들과 발걸음을 맞춘다. 느려도 확실하게, 그 세계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즐겁게 봉사하는 것에 설득된다. 물리적 어려움과 물질 문제는 대체로 해결되었고, 그 행성이 상급의 생활과 좀더 안정된 존재를 누릴 때가 되었다.
52:7.8 (599.4) 교육 아들들은 그들의 섭리 시대 전체를 통하여, 때때로 이 평화로운 세계로 계속 온다. 그 행성과 관련된 진화 계획의 순조로운 진행을 지켜볼 때까지, 그들은 행성을 떠나지 않는다. 교육 아들들이 연속된 임무를 받을 때, 재판을 담당하는 한 심판 아들이 보통 그들을 따라가며, 한편 그들이 떠날 때 또 하나의 그러한 아들이 활동한다. 그리고 대대로, 시공의 필사자 체제가 지속되는 동안 내내, 이 사법 행위가 계속된다.
52:7.9 (599.5) 삼위일체의 교육 아들들의 되풀이되는 사명은 각각 그러한 하늘 같은 세계를, 지혜롭고 영적이고 우주를 비추는 수준, 늘 올라가는 수준으로 연달아 향상시킨다. 그러나 그러한 구체의 고상한 원주민은 아직도 유한한 필사자이다. 아무것도 완전치 않다. 그렇기는 해도 불완전한 세계의 운영에, 그리고 거기 있는 인간 거주자의 생활 속에, 완전에 가까운 기질이 진화하고 있다.
52:7.10 (599.6) 삼위일체의 교육 아들은 같은 세계로 여러 번 돌아올지 모른다. 그러나 머지 않아 그들의 한 임무가 끝나는 것과 관련하여, 행성 영주가 행성 군주의 자리로 승진되고, 그러한 세상이 빛과 생명의 시대로 들어가는 것을 선포하려고 체계 군주가 나타난다.
52:7.11 (599.7) “왕자를 위하여 꾸민 공주처럼 준비된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하고 요한이 기록한 것은, 교육 아들들의 마지막 임무의 종료에 관한 것이었다. (적어도 그것이 정상 세계에서 연대 순서일 것이다.)
52:7.12 (600.1) 옛 예언자가 환상 속에서 본 것은 회복된 바로 그 지구, 진보된 행성 단계이니, 그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주가 말씀하시되, ‘내가 만들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남아 있을 것이요, 이와 같이 너희와 너희의 자녀가 살아남을 것임이라. 새 달부터 다음 달까지, 한 안식일부터 다음 안식일까지, 모든 육체가 내 앞에 경배하러 나오는 일이 이루어질지니라.’”
52:7.13 (600.2) 그러한 시대의 필사자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되었다, “선택된 세대, 임금 같은 성직자, 거룩한 나라, 고귀한 민족이라. 너희를 어두움으로부터 이 놀라운 빛으로 부른 주께 찬양을 드릴지어다.”
52:7.14 (600.3) 한 개별 행성의 특별한 자연 역사가 어떻든 상관 없이, 한 영역이 온전히 충성했든지, 악으로 물들거나 죄로 저주를 받았든지 차이가 없이―그 선행(先行) 조건이 어떻든 상관 없이―머지 않아 하나님의 은총과 천사의 보살핌이 삼위일체의 교육 아들들이 오는 시절을 안내할 것이다. 그들의 최종 임무가 있은 뒤에, 그들이 떠나는 것은 이 훌륭한, 빛과 생명의 시대를 개시할 것이다.
52:7.15 (600.4) 사타니아의 모든 세계가 이렇게 기록한 자와 같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도 주의 약속에 따라서, 우리는 올바름이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찾노라. 그러므로 그러한 것들을 너희가 찾음을 보는즉, 주가 너를 평화 속에서, 티와 흠이 없음을 발견하도록, 사랑하는 이들이여, 부지런하여라.”
52:7.16 (600.5) 교육 아들들의 처음 통치, 아니면 나중에 어느 통치의 끝에, 이 군단이 떠나는 것은 빛과 생명의 시대가 밝아옴을―시간 세계로부터 영원의 현관으로 넘어가는 문턱을―인도한다. 행성에서 이 빛과 생명의 시대의 실현은 유란시아 필사자들이 가장 바라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들은 하늘이, 살아남는 필사자가 즉시 마주치는 운명이요 마지막에 거하는 장소라고 묘사하는 종교적 관념에 포함된 것보다, 미래 생활에 대하여 더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개념을 품고 있었다.
53:0.1 (601.1) 루시퍼는 네바돈에서 빛나는 1차 라노난덱 아들이었다. 여러 체계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고 그의 집단에서 높은 상담자였으며, 지혜와 명철과 유능함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루시퍼는 그의 계급에서 37번이었고, 멜기세덱들이 그를 임명했을 때, 그는 70만 명이 넘는 그의 부류 가운데 가장 유능하고 빛나는 1백 성격자 중의 하나로서 지명되었다. 시작은 그렇게 훌륭했는데, 악하고 잘못하여 죄를 품었고, 이제는 네바돈에서 자아의 충동에 굴복하고―우주에 충성하기를 거부하고 형제의 의무를 무시하며, 우주의 관계를 못 보고―거짓된 개인 자유라는 궤변에 항복한 세 체계 군주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
53:0.2 (601.2) 네바돈 우주, 그리스도 미가엘의 영토에는 사람이 사는 세계들로 이루어진 1만 체계가 있다. 라노난덱 아들들의 역사를 통틀어서, 이 수천 체계에 두루, 그리고 우주 본부에서 그들이 한 모든 일 중에, 오로지 3명의 체계 군주만 일찍이 창조 아들의 정부를 모욕한 적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53:1.1 (601.3) 루시퍼는 하늘 가는 존재가 아니었다. 지역 우주에서 창조된 아들이었고, 그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되었다, “네가 지음받은 날부터 불의(不義)가 네 안에서 발견될 때까지, 모든 면에서 너는 완전하였도다.” 여러 번 그는 에덴시아의 최고자들과 의논하였다. 루시퍼는 “하나님의 거룩한 산 위에서,” 곧 예루셈의 행정 산에서 군림하였는데, 이는 그가 사람이 사는 607 세계로 이루어진, 한 큰 체계의 최고 집행관이었기 때문이다.
53:1.2 (601.4) 루시퍼는 하나의 훌륭한 존재, 눈부신 성격자였다. 그는 우주의 직계 명령 계통에서 별자리의 최고 아버지들 다음에 있었다. 루시퍼가 죄를 지었는데도, 하위의 지성 존재들은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자신을 수여하기 이전에, 그에게 불경스럽거나 경멸하는 태도를 보이려 하지 않았다. 모세가 부활할 당시에, 미가엘의 천사장조차, 루시퍼에 “맞서서 고발하는 판단을 제시하지 않았고, 다만 ‘재판관이 당신을 꾸짖으시기를’ 하고 말하였더라.” 그러한 문제에서, 판결은 초우주 통치자인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에 속한다.
53:1.3 (601.5) 루시퍼는 이제 몰락하였고 사타니아 군주에서 해임되었다. 자아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하늘 세계의 고귀한 성격자들에게도 대단히 큰 재난을 일으킨다. “너의 아름다움 때문에 너의 마음이 높아졌도다. 머리가 좋아서 너의 지혜를 썩게 만들었도다”하고 루시퍼에 관하여 언급되었다. 너희의 옛 선지자는 그의 딱한 처지를 보았는데, 이렇게 말했다, “아, 아침의 아들 루시퍼여, 너는 어찌하여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세계들을 감히 혼란에 빠뜨리려 했던 네가 어찌하여 버림받았는가!”
53:1.4 (602.1) 유란시아에는 루시퍼에 관하여 거의 아무것도 전해진 바가 없는데, 이는 루시퍼가 너희 행성에서 그의 운동을 지지하라고 제1 부관, 사탄을 배치한 사실 때문이다. 사탄은 같은 1차 라노난덱 집단의 일원이었으나, 결코 체계 군주로 활동한 적이 없었고, 루시퍼 반역에 십분 참여했다. “악마”는 바로 칼리가스티아, 곧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에서 해임되었고, 2차 라노난덱 계급의 아들이다. 미가엘이 육신을 입고 유란시아에 있었을 때, 루시퍼와 사탄과 칼리가스티아는 미가엘의 수여 임무를 유산(流産)시키려고 함께 단합하였다. 그러나 크게 실패했다.
53:1.5 (602.2) 아바돈은 칼리가스티아 참모진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주인을 따라서 반란에 가담했고, 그 이후로 유란시아 반역자들의 최고 집행관으로서 행동하였다. 비엘세붑은 모반한 칼리가스티아의 세력과 함께 연합한, 불충한 중도인(中道人)들의 두목이었다.
53:1.6 (602.3) 용(龍)은 결국 이 모든 악한 성격자를 상징하는 표현이 되었다. 미가엘이 승리하고 나서, “가브리엘이 구원자별에서 내려와서, 그 용(반역한 두목들 모두)을 한 시대 동안 묶어 두었더라.” 예루셈의 반역한 천사들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되었다: “그리고 자기의 처음 지위를 지키지 못하고 자신의 거주지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에 재판이 있기까지, 그가 어두움의 사슬에 단단히 채워두었더라.”
53:2.1 (602.4) 루시퍼와 제1 조수 사탄은 예루셈에서 50만 년이 넘도록 군림했는데, 그때 우주의 아버지와 당시에 그의 대관(代官)이었던 아들, 미가엘에게 저항하려고 비로소 마음을 먹었다.
53:2.2 (602.5) 사타니아 체계에는 반란을 권하거나 유리하게 만든 아무런 특이하거나 특별한 조건이 없었다. 그 생각은 루시퍼의 머리 속에서 기원이 있고 형성되었다고, 어디에 주둔했든지 상관 없이, 그가 그러한 반란을 선동할 수 있었다고 우리는 믿는다. 루시퍼는 처음에 그의 계획을 사탄에게 알렸지만, 유능하고 명석한 동료의 정신을 흐리게 만드는 데 몇 달이 걸렸다. 그러나 일단 반란의 이론(理論)에 넘어가자, 그는 “자아 주장과 해방”을 대담하게 열심히 부르짖는 자가 되었다.
53:2.3 (602.6) 아무도 결코 루시퍼에게 반란을 제안한 적이 없다. 미가엘의 뜻, 그리고 미가엘이 대표하는, 우주의 아버지의 계획에 대항하여 자기 주장을 펼 생각은, 바로 그의 머리 속에서 싹이 텄다. 그는 창조 아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졌고, 언제나 친절하였다. 마음이 높아지기 전에 어느 때도 루시퍼는 우주 행정에 대하여 드러내놓고 불만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가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도, 표준 시간으로 1백 년이 넘도록, 구원자별의 늘 하나된 이는 루시퍼의 머리 속에 만사가 평안하지는 않다고 유버르사에 반영하고 있었다. 이 정보는 또한 창조 아들과 놀라시아덱의 별자리 아버지들에게 전달되었다.
53:2.4 (602.7) 이 기간을 통해서 내내, 루시퍼는 우주의 행정 계획 전부에 대하여 갈수록 더 비판하게 되었으나, 언제나 최상 통치자들에게 마음을 다하여 충성한다고 공언하였다. 루시퍼 자유 선언을 공개 선포하기 바로 며칠 전, 가브리엘이 예루셈을 방문하는 기회에 그는 처음으로 대담하게 불충한 마음을 분명히 표시하였다. 가브리엘은 확실히 반란이 곧 일어날 것이라고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공개 반란이 일어날 경우에 무슨 조치를 취할 것인가 별자리 아버지들과 의논하려고 바로 에덴시아로 갔다.
53:2.5 (603.1) 정확히 무슨 원인이나 원인들이 마침내 루시퍼 반란을 터뜨리게 했는가 꼬집어 내기는 아주 어렵다. 우리는 오로지 한 가지에 관해서만 확실한데, 바로 이것이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었든지, 그 시초는 루시퍼의 머리 속에서 싹이 텄다는 것이다. 자기를 속이는 점까지 스스로 키워 온, 자만심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한동안 루시퍼는, 그가 반란을 숙고하는 것은 그 우주는 아니라도, 실제로 그 체계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정말로 자신을 설득하였다. 꿈에서 깨어날 지경까지 그의 계획이 발전했을 때가 되자, 의심할 여지 없이 그는 너무 멀리 나아갔고, 그래서 불화를 일으킨 최초의 자만심을 버릴 수 없었다. 이 체험을 겪으면서 어느 시점에, 그는 불성실하게 되었고, 악은 발전하여 일부러 계획하여 저지른 죄가 되었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이 명석한 집행관이 차후에 취한 행동이 증명한다. 그에게 오랫동안 뉘우칠 기회가 주어졌으나, 그의 부하들 가운데 어떤 자들만 자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에덴시아의 늘 충실한 이는 별자리 아버지들의 요청을 받고 나서, 이 극악한 반역자들을 구원하려는 미가엘의 계획을 친히 제시하였다. 그러나 언제나 창조 아들의 자비는 거절당했고, 갈수록 더 경멸과 멸시를 받으며 거절당했다.
53:3.1 (603.2) 루시퍼와 사탄의 마음 속에서 문제의 처음 기원이 무엇이었든지 상관 없이, 마지막 봉기는 루시퍼 자유 선언으로서 모습을 갖추었다. 반역자들의 주장은 다음 세 항목으로 진술되었다.
53:3.2 (603.3) 1. 우주의 아버지의 실체. 루시퍼는 우주의 아버지는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다, 물리적 인력과 공간 에너지는 우주에 본래부터 있다, 아버지는 파라다이스 아들들이 지어낸 신화(神話)요, 이것이 그들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계속하여 우주를 통치할 수 있게 만든다고 비난했다. 그는 성격이 우주의 아버지의 선물인 것을 부인했다. 그는 최후자들조차 결코 파라다이스에서 식별할 수 있는 아버지의 실제 성격에 대하여 아주 뚜렷한 개념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창조에게 사기(詐欺)를 치려고 최후자들이 파라다이스 아들들과 결탁하고 있다고 암시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아버지 존경심을 무지(無知)한 짓이라고 이용하였다. 그 고발은 모두를 휩쓸었고, 끔찍하고, 신성 모독이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최후자들을 겨냥한 이 은근한 공격은 당시에 예루셈에 있던 하늘 가는 시민들이 반역자의 온갖 제안에 대항해서, 굳건히 서고 흔들리지 않도록 영향을 주었다.
53:3.3 (603.4) 2. 창조 아들―미가엘―의 우주 정부. 루시퍼는 지역 체계들이 자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창조 아들 미가엘이 가상하는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이름으로 네바돈의 통치권을 취하고, 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에게 충성함을 인정하라고 모든 성격자에게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항의했다. 아버지를 숭배하는 계획 전부가 파라다이스 아들들을 강화하는 영리한 책략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미가엘이 그의 창조자인 아버지인 것을 기꺼이 인정하지만 그를 신으로, 정당한 통치자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53:3.4 (603.5) 그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외부 권력가”―들이 지역 체계와 지역 우주의 사무에 간섭하는 권리를 가장 신랄하게 공격했다. 이 통치자들이 독재자요 강탈자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사람과 천사들이 다만 스스로를 주장하고 대담하게 자기 권리를 주장할 용기만 있다면, 완벽한 지방 자치의 운영에 간섭하려고 이 통치자들 중에 누구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믿으라고 추종자들에게 타일렀다.
53:3.5 (603.6) 그는 토착 존재들이 단지 독립을 주장하기만 하면,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사형(死刑) 집행자들이 지역 체계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금할 수 있다고 주장을 폈다. 불멸은 체계의 성격자들에게 본래부터 있다, 부활은 자연스럽고 자동으로 일어난다,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사형 집행자들이 멋대로 부당한 행위를 하지 않으면, 모든 존재가 영원히 살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53:3.6 (604.1) 3. 하늘 가는 필사자를 훈련하는 보편적 계획에 대한 공격. 루시퍼는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우주 행정 원칙을 하늘 가는 필사자에게 아주 철저히 훈련시키는 계획에 소모된다고 주장했고, 그런 원칙은 윤리가 없고 건전하지 않다고 확언하였다. 그는 어떤 미지의 운명을 위하여 공간의 필사자를 준비시키는, 장구한 세월이 걸리는 프로그람에 항의했고, 예루셈에 있는 최후자 군단의 존재는, 이 필사자들이 순전한 허구인 어떤 운명을 위하여 준비하려고 오랜 세월을 보냈음을 증명한다고 지적했다. 최후자가 태어난 구체와 비슷한 비천한 구체로 돌아가는 것보다 전혀 더 영화롭지 않은 운명을 만났다고 그는 비웃으면서 지적했다. 최후자들이 지나친 훈련과 오래 끄는 훈련으로 타락되었다, 하늘 가는 필사자가 신화(神話)같은 영원한 운명을 가졌다는 허구(虛構)에 온 세상을 노예로 만드는 계획에 지금 협조하고 있으니까, 최후자는 실제로 동료 필사자의 배신자라고 비쳤다. 승천자는 개인이 자결(自決)하는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나님의 파라다이스 아들들이 후원하고 무한한 영이 지지하는, 필사자 승천 계획 전체에 도전하고 이를 규탄하였다.
53:3.7 (604.2) 그러한 자유 선언과 함께, 루시퍼는 그를 어두움과 죽음으로 이끄는 대향연의 막을 올렸다.
53:4.1 (604.3) 루시퍼 선언문은 유리 바다에서, 매년 열리는 사타니아 집회가 있을 때, 모여든 예루셈의 무리가 참석한 가운데, 유란시아 시간으로 약 20만 년 전, 그 해의 마지막 날에 발표되었다. 예배는 우주의―물리적ㆍ지적ㆍ영적―세력에게 드릴 수 있다, 그러나 충성 서약은 오직, 실제로 현재 통치자 루시퍼, 곧 “사람과 천사들의 친구”요, “자유의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만 인정할 수 있다고 사탄은 선포했다.
53:4.2 (604.4) 자아 주장이 루시퍼 반란의 투쟁 구호(口號)였다. 그의 주요한 쟁점 중에 하나는, 자치(自治)가 멜기세덱과 기타 집단에게 좋고 올바른 것이라면, 모든 지적 계급에게 마찬가지로 좋다는 것이었다. 그는 “지성은 평등”하고 “지적 존재는 형제”라고, 대담하고 끈질기게 주장했다. 모든 정부가 지역 행성들, 그리고 행성들의 자원 연방에 국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다른 감독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행성 영주들에게 그들이 최고 집행관으로서 세계를 다스릴 것이라 약속했다. 그는 입법 활동이 별자리 본부에 있고 사법(司法) 사무의 운영이 우주 서울에 있는 것을 비난했다. 이 모든 정부 기능은 체계 서울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는 자신의 입법 집회를 수립하는 데 착수하고 사탄의 관할 하에 자신의 법정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배반하는 세계의 영주들에게 똑같이 하라고 지시하였다.
53:4.3 (604.5) 루시퍼 행정의 내각 전체가 무더기로 넘어갔고, “해방된 세계와 체계들”의 새 우두머리의 행정부 관리로서, 공식 선서를 거쳐서, 임명되었다.
53:4.4 (605.1) 네바돈에 반란이 이전에 두 번 있었지만, 그 반란들은 먼 별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반란들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지성 존재들의 대다수가 그 지도자를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루시퍼는 주장하였다. “과반수가 지배한다,” “지성은 틀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우주 통치자들이 그에게 자유를 허락하는 것은 그의 많은 사악한 주장을 입증하는 듯하였다. 그는 상관들 모두에게 반항했다. 그래도 상관들은 그가 하는 일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런 방해 없이, 유혹하는 그의 계획을 집행하도록 그에게 자유가 주어졌다.
53:4.5 (605.2) 자비롭게 처벌이 지연되는 것이 모두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정부가 반란을 중지할 능력이 없다는 증거라고 루시퍼는 지적했다. 그는 미가엘, 이마누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에게 드러내놓고 반항하고 거만하게 대들었으며, 그리고 나서 아무 조치가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주와 초우주 정부들이 무력하다는 분명한 증거라고 지적하곤 하였다.
53:4.6 (605.3) 가브리엘은 이 모든 불충한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친히 자리에 있었고, 다만 때가 되면 그가 미가엘을 대변하고 모든 존재가 자유롭게 방해받지 않고 선택하도록 두리라고, “아버지를 대신하는 아들들의 정부는 오로지, 자원해서 바치며 마음에서 우러나고 궤변에 끄떡하지 않는 그런 충성과 헌신을 바란다고” 발표했다.
53:4.7 (605.4) 탈퇴할 권리에 이의(異議)를 제기하거나 모반 선전에 찬물을 끼얹으려고 가브리엘이 어떤 노력을 쏟기도 전에, 루시퍼는 그의 반역 정부를 세우고 철저히 조직하는 것이 충분히 허락되었다. 그러나 별자리 아버지들은 즉시 이 불충한 성격자들의 활동을 사타니아 체계에 국한시켰다. 그런데도 이 지연된 기간은 온 사타니아의 충성하는 존재들에게 큰 시련과 시험의 시간이었다. 몇년 동안 만사가 엉망진창이었고, 여러 저택 세계에 큰 혼란이 있었다.
53:5.1 (605.5) 사타니아의 반란이 터지자, 미가엘은 그의 파라다이스 형 이마누엘과 의논했다. 이 중대한 회의가 있고 나서, 미가엘은 과거에 비슷한 여러 동란이 일어났을 때 그의 처리 방법의 특징이었던 것과 같은 정책, 곧 불간섭의 태도를 취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53:5.2 (605.6) 이 반란이 있을 때, 그리고 그보다 먼저 두 차례 반란이 일어났던 시절에, 네바돈 우주에는 개인적인 절대 통치 권한이 없었다. 미가엘은 신의 권한으로, 우주의 아버지의 대관(代官)으로서 다스렸지만, 아직까지 자기 개인의 권한으로 다스리지 않았다. 그는 수여 생애를 마치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까지 “하늘과 땅의 모든 권력”이 그에게 맡겨지지 않았다.
53:5.3 (605.7) 반란이 터진 당시부터 네바돈의 군주 통치자로서 보좌에 앉는 날까지, 미가엘은 루시퍼의 반란 세력에 결코 간섭하지 않았다. 유란시아 시간으로 거의 20만 년 동안 그들은 방자하게 굴도록 허락되었다. 그리스도 미가엘은 이제 그러한 불충이 일어나는 것을 신속히, 아니 즉결로, 처리할 충분한 권력과 권한을 가졌다. 그러나 그러한 동란이 또 한번 일어난다 하더라도, 이 군주 권한을 가졌다고 해서 그가 달리 행동할 것인가 우리는 의심을 가진다.
53:5.4 (605.8) 미가엘이 루시퍼 반란의 실제 투쟁에 관계하지 않고 초연히 남아 있기로 했기 때문에, 가브리엘은 에덴시아에서 그의 개인 참모진을 소집하고, 최고자들과 의논하고 나서 사타니아의 충성한 무리들의 지휘를 맡기로 작정하였다. 미가엘은 구원자별에 남았고, 한편 가브리엘은 예루셈으로 진행하여 아버지에게 바쳐진 구체에서 자리를 잡았다―바로 그 아버지의 성격에 대하여 루시퍼와 사탄은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모여든 충성스러운 성격자들 무리 앞에서, 그는 미가엘의 깃발을 펼쳐 보였는데, 이것은 모든 창조의 삼위일체 정부의 물질적 상징, 곧 흰 바탕에 푸른 하늘 빛의 세 동심원(同心圓)이었다.
53:5.5 (606.1) 루시퍼의 상징은 흰 깃발이었고, 하나의 붉은 동그라미가 있고 그 가운데 하나의 검은 색으로 채워진 동그라미가 보였다.
53:5.6 (606.2) “하늘에 전쟁이 있었더라. 미가엘의 사령관과 그의 천사들이 용(곧 루시퍼, 사탄, 배반한 영주들)에 대항하여 싸웠더라. 용과 반역하는 그의 천사들이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더라.” 이 “하늘의 전쟁”은 유란시아에서 그러한 투쟁을 상상하는 것처럼, 물리적 전쟁이 아니었다. 투쟁의 초기에 루시퍼는 행성의 원형(圓形) 극장에서 줄곧 열변을 토했다. 가브리엘은 바로 가까이 자리잡은 그의 본부로부터 반역자의 궤변을 끊임없이 폭로하였다. 자기가 어떻게 처신할까 의문을 가졌던, 그 구체에 있던 여러 성격자는 마지막 결심에 이를 때까지, 이 두 토론회 사이에 오락가락하였다.
53:5.7 (606.3) 그러나 하늘에서 벌어진 이 전쟁은 아주 끔찍하고 현실이었다. 미숙한 세계에서 물리적 전쟁의 특징을 나타내는 잔인한 행위를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 투쟁은 훨씬 더 치명적이었다. 물질적 전투에서는 물질 생명이 위험에 빠지지만, 하늘의 전쟁은 영원한 생명을 놓고 벌어졌다.
53:6.1 (606.4) 항쟁이 일어난 때부터 새 체계 통치자와 그의 참모진이 도착할 때까지 수많은 성격자가 고귀하고 영감을 주는 행위, 헌신적이고 충실한 행위를 많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모든 대담한 헌신적 공훈 가운데 가장 마음을 떨리게 하는 것은, 사타니아 본부 세라핌의 부지휘관, 마노시아의 용감한 행위였다.
53:6.2 (606.5) 예루셈에서 반란이 터졌을 때, 천사 무리의 우두머리는 루시퍼 운동에 가담하였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것은 어째서 그렇게 많은 수의 제4 계급, 곧 체계의 행정 세라핌들이 잘못된 길에 빠졌는가 설명한다. 그 천사 지도자는 루시퍼의 명석한 성격에 영적으로 눈이 멀어 버렸다. 그의 매력 있는 몸가짐은 낮은 계급의 하늘 존재들을 매혹시켰다. 그들은 다만 그렇게 눈부신 성격자가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53:6.3 (606.6) 루시퍼 반란의 발단과 관련된 경험을 묘사하면서, 마노시아가 이렇게 말한 지 얼마 안 된다. “그러나 나의 가장 유쾌한 순간은 루시퍼 반란과 결부된, 가슴 떨리는 모험이었다. 그때 둘째 천사 사령관으로서, 나는 미가엘을 모욕하는 계획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막강한 반역자들은 그들이 준비한 연락 세력의 수단을 이용하여 나를 패망시키려고 애썼다. 예루셈에 엄청난 대격변이 있었지만, 충실한 세라핌은 한 명도 다치지 않았다.
53:6.4 (606.7) “내 직속 상관이 이탈하고 나서, 그 체계에서 혼란에 빠진 천사 사무의 이름 뿐인 지도자로서, 예루셈의 천사 무리를 지휘하는 일이 내게 떨어졌다. 나는 실질적으로 멜기세덱들의 지지를 받았고, 대다수의 물질 아들들의 막강한 지원을 받았으며, 내 계급의 엄청난 집단이 나를 버렸지만, 예루셈에서 하늘 가는 필사자들이 나를 크게 지지하였다.
53:6.5 (606.8) “루시퍼의 탈퇴로 인하여 별자리 회로에서 자동으로 쫓겨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정보 군단의 충성에 의존했고, 그들은 원조 요청을 이웃의 란툴리아 체계로부터 에덴시아로 전달하였다. 질서 있는 나라, 충성하는 지능, 진리의 영은 반란, 자기 주장, 그리고 이른바 개인의 자유를 선천적으로 이긴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했다. 루시퍼를 뒤이을, 자격 있는 새 체계 군주가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뒤에, 나는 유란시아의 멜기세덱 관리자 집단에 배치되었고, 모반한 칼리가스티아의 세계에서 나는 충성하는 천사 계급의 관할권을 맡았다. 칼리가스티아는 루시퍼가 발표한 악명 높은 자유 선언에서 제안된 바와 같이, 그의 구체가 ‘해방된 세계와 자유롭게 된 성격자들’의 체계, 새로이 계획한 체계에 속한다고 선포했으며, 이것은 루시퍼가 ‘잘못 통치되고 잘못 관리된 사타니아 세계들에 있는 존재, 자유를 사랑하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앞을 내다보는 지적 존재들’을 부르려고 발표한 선언이었다.”
53:6.6 (607.1) 이 천사는 유란시아에서 아직도 근무하며, 세라핌의 부지휘관으로서 활동한다.
53:7.1 (607.2) 루시퍼 반란은 체계에 널리 퍼졌다. 탈퇴하는 행성 영주 37명이 그들의 세계 행정부를 대체로 대반역자의 편으로 전향했다. 오직 파놉시아에서 행성 영주가 자기 주민들을 함께 데리고 가는 데 실패했다. 이 세계에서, 멜기세덱들의 지휘 하에, 사람들은 미가엘을 지지하려고 집결했다. 사람이 사는 그 영역의 한 젊은 여인 엘라노라는 그 인류의 지도권을 쥐었고, 전쟁에 짓밟힌 그 세계에서 단 한 사람도 루시퍼의 깃발 밑에 지원하지 않았다. 그 뒤로 죽, 충성스러운 이 파놉시아 사람들은 일곱째 예루셈 과도기 세계에서, 아버지의 구체 및 그 둘레의 일곱 구류 세계에서 관리자와 건축자로서 근무해 왔다. 파놉시아 사람들은 이 세계들의 실제 관리자로서 행동할 뿐 아니라, 또한 앞날에 어떤 미지의 사용을 위하여 이 구체들을 꾸미려고 미가엘이 친히 내린 명령을 집행한다. 그들은 에덴시아로 가는 길에 머무르면서, 이 일을 수행한다.
53:7.2 (607.3) 이 기간을 통해서 내내, 칼리가스티아는 유란시아에서 루시퍼 운동을 지지하였다. 멜기세덱들은 배반한 행성 영주를 능숙하게 반대했으나, 고삐 없는 자유를 부르짖는 궤변과 자아 주장의 망상은 역사가 짧고 개발되지 않은 세계의 원시 민족들을 속일 기회를 얼마든지 가졌다.
53:7.3 (607.4) 모든 탈퇴 선전은 개인적 노력으로 수행되어야 했는데, 이는 방송 서비스와 모든 다른 행성간 통신 방법이 체계 회로 감독자들의 행위로 인하여 중지되었기 때문이다. 반란이 실제로 터지고 나서, 사타니아 체계 전체가 별자리 회로와 우주 회로, 양쪽에서 고립되었다. 천사 대리자와 외톨 사자들이 이 시기에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통신문을 급송하였다. 타락한 세계로 가는 회로들도 또한 끊어졌고, 그래서 루시퍼는 그의 사악한 계획을 추진하려고 이 방법을 이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회로들은 대반역자가 사타니아의 경계 안에 사는 한,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53:7.4 (607.5) 이것은 라노난덱 반란이었다. 지역 우주 아들 중에서 더 높은 계급은 루시퍼의 탈퇴에 참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역한 여러 행성에 주둔했던 생명 운반자 몇명은 불충한 영주(領主)들의 반란에 얼마큼 영향을 받았다. 삼위일체를 체험한 아들들은 하나도 미혹되지 않았다. 멜기세덱, 천사장, 찬란한 저녁별들은 모두 미가엘에게 충성했고, 가브리엘과 함께,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통치를 위하여 용감하게 싸웠다.
53:7.5 (608.1) 파라다이스 기원을 가진 존재들은 아무도 불충에 말려들지 않았다. 그들은 외톨 사자들과 함께 영의 세계에서 본부를 차렸고, 에덴시아의 늘 충실한 이의 지휘 하에 남아 있었다. 화해자들 가운데 아무도 배반하지 않았고, 하늘 기록자들 가운데서 단 한 명도 잘못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상물질 동반자와 저택 세계 선생들 중에서 큰 희생이 있었다.
53:7.6 (608.2) 최상 계급의 세라핌 가운데 한 천사도 분실되지 않았지만, 다음 계급, 곧 우수 계급의 상당한 무리가 속임에 빠지고 덫에 걸려들었다. 마찬가지로, 셋째 계급, 곧 감독 계급 천사들 가운데 몇몇이 그릇 인도되었다. 그러나 넷째 집단, 곧 행정 천사, 체계 서울의 임무에 보통 배치되는 세라핌 중에서 끔찍한 분열이 있었다. 마노시아는 그들 가운데 거의 3분의 2를 살렸지만, 3분의 1이 조금 넘는 수가 반란 당파가 되어 두목을 따라갔다. 행정 천사들에 부속되었던, 모든 예루셈 케루빔의 3분의 1은 불충한 세라핌들과 함께 분실되었다.
53:7.7 (608.3) 행성의 천사 조수들 가운데, 물질 아들들에게 배치된 조수들 중에서 약 3분의 1이 속았고, 거의 10퍼센트의 과도기 봉사자들이 덫에 걸려들었다. 요한은 큰 붉은 용에 관해서 기록할 때 상징으로 이것을 보았는데,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의 꼬리는 하늘의 별들 가운데 3분의 1을 당겨서, 저희를 어둠 속에 던졌더라.”
53:7.8 (608.4) 가장 큰 손실은 천사 계층에서 일어났지만, 하등 계급의 지적 존재의 대부분이 불충에 말려들었다. 사타니아에서 분실된 물질 아들 681,217명 가운데, 95퍼센트는 루시퍼 반란의 희생자였다. 행성 영주들이 루시퍼 운동에 가담한 그러한 개별 행성에서 큰 무리의 중도인이 분실되었다.
53:7.9 (608.5) 여러 면에서 이 반란은 네바돈에서 있었던 모든 그러한 사건 중에서 가장 널리 퍼지고 비참하였다. 이 반동에는 다른 두 사건보다 더 많은 성격자가 말려들었다. 루시퍼와 사탄의 밀사들이 최후자의 문화 행성에 어린아이들을 훈련시키는 학교들도 남기지 않고, 오히려 여러 진화 세계에서 구제되어 자비 속에서 자라는 이 지성들을 부패시키려고 추구한 것은 그들에게 영구한 불명예이다.
53:7.10 (608.6) 하늘 가는 필사자들은 취약했지만, 하급 영들보다 반란의 궤변을 더 잘 견디었다. 여러 하급 저택 세계에서 많은 사람, 곧 자기 조절자와 마침내 융합을 이루지 못한 자들이 굴복했지만, 예루셈에서 거주하는, 사타니아의 승천 시민 가운데 단 한 명도 루시퍼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승천 계획의 지혜로움을 나타내는 영광으로 기록된다.
53:7.11 (608.7) 시간마다, 날마다, 온 네바돈의 방송국들은 초조한 구경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등급의 하늘 지성 존재들로 혼잡하였다. 이들은 사타니아 반란을 담은 회보를 열심히 정독했고, 여러 보고서가 하늘 가는 필사자들의 대쪽같은 충성심을 잇달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기뻐했다. 이들은 멜기세덱의 지휘 하에, 탈퇴와 죄의 깃발 주위로 아주 재빨리 모여든, 미묘하고 악한 모든 세력이 함께 오랫동안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이를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53:7.12 (608.8) “하늘에서 전쟁”이 시작될 때부터 루시퍼의 후계자가 임명될 때까지, 체계 시간으로 2년이 넘게 걸렸다. 그러나 드디어 새 군주가 왔고, 유리 바다에 그의 참모진과 함께 도착했다. 나는 가브리엘이 에덴시아에서 동원한 예비군 사이에 있었는데, 라나포지가 놀라시아덱의 별자리 아버지에게 전한 첫 소식을 잘 기억한다.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예루셈 시민은 단 한 사람도 분실되지 않았다. 하늘 가는 모든 필사자가 불 같은 시련을 견디었고, 중대한 시험을 겪고 성공하여, 온통 승리를 거두고서 솟아났다.” 그리고 계속하여 구원자별ㆍ유버르사ㆍ파라다이스에, 승천함으로 필사자가 살아남는 체험은 반란을 방지하는 가장 큰 보장이요, 죄를 막는 가장 확실한 보호 조치라는, 확신을 주는 이 소식이 전해졌다. 이 고귀한 예루셈 집단의 충성스러운 필사자는 꼭 187,432,811명이었다.
53:7.13 (609.1) 라나포지가 도착하고 나서 대반역자들은 자리에서 쫓겨나고 모든 통치 권한을 빼앗겼다. 하지만 그들은 예루셈, 여러 상물질 구체에서, 아니 사람 사는 개별 세계에도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들은 사람과 천사들의 머리를 혼란시키고 그릇 인도하려고 속이고 유혹하는 노력을 계속했다. 그러나 예루셈의 행정 산에서 그들이 하던 일에 관해서 말하면, “저희의 자리는 이제 더 보이지 않았더라.”
53:7.14 (609.2) 루시퍼는 사타니아에서 모든 행정 권한을 빼앗겼지만, 당시에 이 사악한 반역자를 구금하거나 없애버릴 수 있는 아무런 지역 우주 권력이나 법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 미가엘은 군주 통치자가 아니었다.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은 별자리 아버지들이 체계 정부를 몰수하는 것을 지지했지만, 루시퍼와 사탄, 그리고 그 동료들의 현재 지위와 앞날의 처분에 관하여, 아직도 미결인 많은 상소(上訴)에 대하여 어떤 차후의 판결도 내린 적이 없다.
53:7.15 (609.3) 이처럼 이 대반역자들은 체계 전체를 돌아다니는 것이 허락되었고, 그들은 불만과 자기 주장을 외치는 신조(信條)를 더욱 퍼뜨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유란시아 시간으로 거의 20만 년 동안에 그들은 또 다른 세계를 속일 수 없었다. 37 세계가 타락한 뒤로, 사타니아의 어느 세계도, 아니 그 반란의 날 이후로 사람이 살게 된, 연륜이 짧은 세계들조차, 분실되지 않았다.
53:8.1 (609.4) 유란시아에서 미가엘의 수여 임무가 끝날 때까지 루시퍼와 사탄은 사타니아 체계를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사람의 아들을 합동으로 공격했을 때, 그들은 너희 세계에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다.
53:8.2 (609.5) 이전에 행성 영주들, “하나님의 아들들”이 정기적으로 모였을 때, “사탄도 왔으며,” 그는 몰락한 행성 영주들의 고립된 세계를 모두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가엘의 마지막 자신 수여 이후로, 예루셈에서 그러한 자유가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미가엘이 수여하는 육체를 입고 있을 때 그들이 그를 불충하게 만들려고 애쓴 뒤에, 루시퍼와 사탄를 동정하는 마음은 모두 사타니아 전역에서, 다시 말해서, 죄로 고립된 세계들은 제외하고, 사라져 버렸다.
53:8.3 (609.6) 배반한 행성 영주들이 다스리던 행성들을 제쳐놓고, 미가엘의 수여는 온 사타니아에서 루시퍼 반란을 종결시켰다. 이것이 예수가 육체를 입고 죽기 바로 전에, “그리고 하늘로부터 벼락처럼 사탄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고 어느 날 제자들에게 외쳤을 때, 그가 몸소 겪은 체험의 의미였다. 그때 사탄은 중대한 마지막 투쟁을 벌이려고, 루시퍼와 함께 유란시아로 왔다.
53:8.4 (609.7) 사람의 아들은 성공할 자신이 있었고, 너희 세계에서 그가 승리를 거두는 것이 사타니아 뿐 아니라 죄가 들어간 다른 두 체계에서도, 오랜 세월에 걸쳐 그의 적이었던 자들의 지위를 영원히 해결할 것을 알았다. 루시퍼의 여러 제안에 응답하여, 너희의 주가 차분하게 신다운 확신을 가지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하고 대답했을 때, 필사자는 살아남게 되었고 천사에게는 안전이 생겼다. 이것이, 원칙으로, 루시퍼 반란의 참된 종말이었다. 반역자들을 소멸할 것을 간청하는 가브리엘의 상소에 대하여 유버르사 법정이 집행 결정을 아직 내리지 않은 것은 참말이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 없이, 세월이 충분히 지나면 그러한 선포가 다가올 터이니, 이 소송의 청문회에서 첫 걸음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53:8.5 (610.1) 칼리가스티아는 사람의 아들이 죽을 무렵까지 그에게서 법적으로 유란시아의 영주로 인정을 받았다. 예수는 말했다: “이제는 이 세계의 심판이라. 이제 이 세상의 영주는 버림받을지니라.” 그리고 나서 일생의 일이 종말에 더욱 가까워졌을 때 그는 선언했다, “이 세상의 영주는 재판을 받느니라.” 그리고 폐위되고 체면이 떨어진 바로 이 영주를 한때 “유란시아의 신”이라고 불렀다.
53:8.6 (610.2) 유란시아를 떠나기 전에 미가엘이 마지막으로 취한 행동은 칼리가스티아와 달리가스티아에게 자비를 내미는 것이었으나, 그들은 그의 친절한 제안을 걷어찼다. 너희의 배반한 행성 영주 칼리가스티아는 아직도 유란시아에서 극악한 계교를 실행할 자유가 있지만, 절대로 사람들의 머리 속에 들어갈 힘이 없고, 사람들이 그의 사악한 강림으로 정말로 저주받고 싶어 하지 않으면, 그들을 유혹하거나 부패시키려고 그들의 혼에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다.
53:8.7 (610.3) 미가엘이 수여되기 전에 이 어둠의 통치자들은 유란시아에서 그들의 권한을 유지하려고 애썼고, 하위의 작은 하늘 성격자들에게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러나 오순절 날 이후로, 이 배신한 칼리가스티아, 그리고 똑같이 멸시할 동료 달리가스티아는 파라다이스의 생각 조절자들과 보호하는 진리의 영, 곧 모든 육체에게 퍼부어진 미가엘 영의 신성한 위엄 앞에 비굴하다.
53:8.8 (610.4) 그렇기는 해도, 어떤 타락한 영도 하나님의 자녀의 지성을 침범하거나 그 혼을 괴롭히는 힘이 결코 없었다. 사탄이나 칼리가스티아도 결코 하나님의 믿음의 아들들을 다치거나 접근할 수 없었다. 믿음은 죄와 불법에 맞서는 효과 있는 갑옷이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는 스스로를 보호하며, 사악한 자가 그를 건드리지 않도다”하는 것이 참말이다.
53:8.9 (610.5) 대체로, 약하고 방탕한 필사자가 악마와 귀신의 영향 밑에 있다고 생각될 때, 그들은 다만 자신의 타고난 저속한 경향에 지배되고, 자신의 자연스런 성향에 이끌려 가는 것이다. 악마는 그의 잘못이 아닌데도 악을 저질렀다고 무척 크게 공로를 인정받는다. 칼리가스티아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뒤에, 비교적 무능한 채로 있었다.
53:9.1 (610.6) 루시퍼 반란 시절에 일찍부터, 미가엘은 모든 반역자에게 구원을 내밀었다. 진지하게 뉘우침을 증명하고자 하는 모든 자에게, 자기가 완전한 우주 통치권을 얻고 나서, 이들을 용서하고 어떤 형태의 우주 근무로 복직시킬 것을 제안했다. 주모자들 가운데 아무도 이 자비로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물질 아들과 딸 수백명을 포함하여, 수천의 천사와 낮은 계급의 하늘 존재들은 파놉시아 사람들이 선포한 자비를 받아들였고, 1천 9백 년 전에, 예수가 부활했을 때 명예 회복이 허락되었다. 이 존재들은 그 뒤로 예루셈의 아버지 세계로 옮겨졌으며, 절차상으로, 가브리엘 대 루시퍼의 문제에 대하여 유버르사 법정이 판결을 내릴 때까지, 그들은 거기에 구금되어야 한다. 그러나 소멸 판결이 내려질 때, 뉘우치고 구원받은 이 성격자들이 소멸의 선포에서 면제될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보호 관찰 중에 있는 이 혼들은 지금 아버지의 세계를 돌보는 일을 하느라고 파놉시아 사람들과 함께 수고한다.
53:9.2 (611.1) 미가엘이 자신 수여를 마치고 마침내, 확실히 네바돈의 무제한 통치자로 취임하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려고 애쓰던 시절 이후로, 그 대사기꾼은 유란시아에 결코 발을 들인 적이 없다. 미가엘이 네바돈 우주의 안정된 우두머리가 되고 나서, 루시퍼는 유버르사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대리자들에게 구금되었고, 그 뒤로 죽 예루셈에, 아버지의 과도기 구체 집단의 1번 위성에 죄수로 있었다. 여기서 다른 세계 및 체계의 통치자들은 불충한 사타니아 군주의 종말을 바라본다. 바울은 미가엘의 수여가 있은 뒤에 이 반역 지도자들의 상태에 관하여 알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칼리가스티아의 두목들을 “하늘의 거처에 있는 악한 영의 무리”라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53:9.3 (611.2) 네바돈의 최상 군주권을 맡고 나서, 미가엘은 가브리엘 대 루시퍼 소송에서 초우주 법정이 판결을 내릴 때까지, 루시퍼 반란에 관여한 모든 성격자를 구류할 권한을 받으려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에게 탄원했는데, 이 소송은 너희가 시간을 계산하는 대로, 거의 20만 년 전에 유버르사 최고 법정의 기록부에 등록되었다. 체계 서울 집단에 관하여,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은 한 가지만 빼고 미가엘의 탄원을 허락했다: 즉 그러한 여러 배신(背信) 세계에서 또 다른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들일 때까지, 아니면 유버르사의 법정이 가브리엘 대 루시퍼 소송의 판결을 시작하는 그러한 때까지, 사탄은 몰락한 세계의 배신한 영주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도록 허락되었다.
53:9.4 (611.3) 너희가 거주 자격을 가진 아들이 하나도―행성 영주도 물질 아들도―없기 때문에, 사탄은 유란시아에 올 수 있었다. 마키벤타 멜기세덱은 그 뒤로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 대관(代官)이라고 선포되었고, 가브리엘 대 루시퍼 소송이 시작된 것은 모든 고립된 세계에서 임시 행성 체제가 개시된다는 신호였다. 이 계시를 발표하기 직전까지, 사탄이 정기적으로 칼리가스티아와 다른 몰락한 영주들을 찾아보았다는 것은 참말이며, 이때 대반역자들의 소멸을 요구하는 가브리엘의 탄원에 대하여 첫 청문회가 있었다. 사탄은 지금 예루셈의 감옥 세계에서 무조건 구류되어 있다.
53:9.5 (611.4) 미가엘의 마지막 수여가 있은 뒤로, 온 사타니아에서 아무도 구류된 반역자들을 보살피려고 감옥 세계들로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 존재도 더 사기꾼의 운동에 설득되지 않았다. 1천 9백 년 동안 그 상태는 바뀌지 않았다.
53:9.6 (611.5)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대반역자들을 마침내 처분할 때까지, 우리는 사타니아의 현재 규제 조치가 없어질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루시퍼가 살아 있는 한, 체계의 회로들은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에, 그는 전혀 활동이 없다.
53:9.7 (611.6) 반란은 예루셈에서 그쳤다. 타락한 여러 세계에서, 반란은 신성한 아들들이 도착하자마자 그친다. 우리는 자비를 언제라도 받아들일 반역자는 누구나 이미 받아들였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 배반자들에게서 성격 존재를 빼앗을 방송이 번쩍 오기를 기다린다. 우리는 이 구류된 반역자들을 소멸시킬 사형 집행 방송이 유버르사의 판결을 발표할 것을 기대한다. 그때 너희는 그들이 있던 자리를 찾겠지만, 그들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세계에서 너를 아는 자들이 너를 보고 놀라리라. 너는 두려운 존재였으나 결코 더 있지 아니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자격 없는 배반자는 누구나 “마치 저희가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되느니라.” 모두가 유버르사의 선포를 기다린다.
53:9.8 (611.7)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사타니아에서 영적으로 어두웠던 일곱 감옥 세계는 온 네바돈에 엄숙한 경고가 되었고, 위대한 진리를 웅변으로, 효과 있게 이렇게 선포했다. “죄 지은 자의 길은 고달프도다,” “어떤 죄 안에도 그 자체를 파괴하는 씨앗이 감추어져 있도다,” “죄의 값은 죽음이라.”
54:0.1 (613.1) 진화하는 인간은 악ㆍ잘못ㆍ죄ㆍ불의(不義)의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것을 발견한다. 완전과 불완전을 대조하는 것은 악의 가능성을 낳는다, 상반되는 진리와 거짓은 혼동하는 잘못을 낳는다, 신이 자유 의지 선택을 부여하는 것은 궁극에 죄의 영역과 올바름의 영역이 갈라지게 만든다, 신을 끈질기게 찾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며, 이와 반대로 신을 줄곧 거부하는 것은 불의의 영토로 이끈다는 것을 사람은 더디게 깨닫는다.
54:0.2 (613.2) 신들은 악을 창조하지 않고, 죄와 반란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다른 수준의 완전의 의미와 가치 기준이 있는 우주에서, 악의 가능성은 시간과 함께 존재한다. 불완전한 존재들이 선악을 택하는 능력을 부여받은 영역에는 어디서나 죄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진리와 비진리, 사실과 거짓이 부딪치며 존재하는 것이 바로 잘못이 일어날 가능성을 만든다. 깊이 생각하여 악을 선택하는 것은 죄요, 진리를 일부러 물리치는 것은 잘못이며, 죄와 잘못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것은 불의이다.
54:1.1 (613.3) 루시퍼 반란으로부터 생겨난 모든 난처한 문제 가운데 아무것도, 진화하는 미숙한 필사자가 참된 자유와 거짓된 자유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54:1.2 (613.4) 참된 자유는 오랜 세월에 걸쳐 추구한 것이요, 진화로 진보하는 것에 따르는 보상이다. 거짓된 자유는 시간 세계에서 생기는 잘못과 공간에 있는 악이 사람을 미묘하게 속이는 것이다. 오래 가는 자유는 응보―곧 지능ㆍ성숙ㆍ친교ㆍ공평―의 현실에 달려 있다.
54:1.3 (613.5) 동기가 영리하지 않고 무조건이고 통제되지 않았을 때, 자유는 우주에서 존재하는 것을 스스로 파괴하는 방법이다. 참된 자유는 점진적으로 현실과 관련되고, 사회의 평등, 우주의 공평, 우주 친교, 신성한 의무를 늘 살핀다.
54:1.4 (613.6) 자유가 물질적 정의, 지적 공평, 사회적 자제, 도덕적 의무, 영적 가치 기준과 멀어지면 자살이 된다. 자유는 우주의 현실과 동떨어져서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성격자의 현실성은 그와 신(神)의 관계에 비례한다.
54:1.5 (613.7) 억제하지 않은 자아의 의지, 그리고 규제되지 않는 자아의 표현은 염치없는 이기심, 불경스러움의 극치이다. 관련되고 항상 커지는 자아(自我)의 극복이 없이, 자유는 자기 본위인 필사자의 상상에서 생긴 산물이다. 자아가 자극하는 자유는 개념의 망상이요, 잔인한 속임수이다. 자유의 옷자락 속에 감추어진 방종에는 비참한 속박이 따른다.
54:1.6 (614.1) 참된 자유는 진정한 자존심의 벗이며, 거짓된 자유에는 자찬(自讚)이 따라다닌다. 참된 자유는 자제에서 생기는 열매요, 거짓된 자유는 주제넘은 자기 주장이다. 자제는 이타적 봉사로 이끌지만, 자아의 찬미는 동료 존재들에 대하여 부당한 권력을 얻으려고 올바른 달성을 기꺼이 희생하는, 그러한 잘못된 개인의 사리를 채우기 위하여 남을 착취하는 경향이 있다.
54:1.7 (614.2) 지혜조차도 오직 그 규모가 우주를 포함하고 영적 자극을 받았을 때, 신답고 안전하다.
54:1.8 (614.3) 지적 존재가 다른 존재들이 가진 자연스런 자유를 빼앗을 목적으로 다른 자에게 권력을 행사하고 싶도록 만드는 종류의 자기 속임보다 더 큰 잘못은 없다. 인간에게 공평하라는 황금률은 모든 그러한 사기(詐欺)ㆍ불공평ㆍ이기심ㆍ불의에 맞서 외친다. 오직 참되고 진정한 자유가 사랑의 통치와 자비를 베푸는 봉사와 양립할 수 있다.
54:1.9 (614.4) 우주의 최상 통치자들이 이러한 의지의 특권과 성격의 잠재성을 자비롭게 존중하여 뒤로 물러서는데, 자유 의지를 가진 생물이, 어찌 개인의 자유라는 이름을 빌려 감히 동료들의 권리를 침해하는가! 누구라도 자기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개인적 자유를 주장하면서, 창조자들이 수여하고, 충실한 모든 동료, 하위 존재, 백성이 마땅히 존중하는, 그 존재 특권을 어떤 다른 존재에게서 빼앗을 권리는 없다.
54:1.10 (614.5) 진화하는 인간은, 죄 많고 불의한 세계에서, 또는 진화하는 원시 구체의 초기 시절에 물질적 자유를 얻기 위하여 독재자와 억압자와 싸워야 할지 모르지만, 상물질 세계나 영(靈)의 구체에서는 그렇지 않다. 전쟁은 초기의 진화하는 인간이 물려받은 유산이지만, 전진하는 보통 문명을 가진 세계에서, 종족의 오해를 조정하는 방법으로서, 물리적 전투는 평판이 나빠진 지 오래다.
54:2.1 (614.6) 아들과 함께, 영 안에서, 하나님은 영원한 하보나를 설계했고, 그 뒤로 늘 창조에 나란히 참여하는―함께 하는―영원한 형태가 생겼다. 이 함께 하는 형태는, 영원히 완전한 중앙 우주를 시간 세계에서 복사하는 시도를 시작하려고 공간 세계로 나가는 하나님의 아들딸 모두를 위한, 주요 설계이다.
54:2.2 (614.7) 어떤 진화 우주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포부를 가진 인간은 누구나, 체험적 완전을 달성하는 이 멋진 모험에서 시공에 있는 창조자들과 협동하는 자가 되는 운명을 가졌다. 이것이 참말이 아니라면, 아버지는 도저히 그러한 인간에게 창조적 자유 의지를 주지 않았을 터이고, 그가 그들 안에 깃들고, 자신의 영의 수단으로 그들과 실제로 협동 관계에 들어가지도 않을 것이다.
54:2.3 (614.8) 루시퍼의 어리석음은, 할 수 없는 일을 하려는 것, 체험하는 우주에서 옆길로 시간을 단축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루시퍼의 범죄는 사타니아의 모든 성격자가 가진 창조권을 박탈하려고 애쓴 것이다. 개별적으로 또 집단으로 빛과 생명의 지위에 이르려고, 긴 진화적 투쟁에 인간이 몸소 참여하는―자유 의지로 참여하는―것을 허락 없이 단축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너희 체계의 이 옛 군주는, 성격을 가진 모든 생물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데서 드러난 목적, 하나님의 뜻의 영원한 목적을 정면으로 거역하여 자신의 뜻대로 현세의 목표를 정했다. 루시퍼 반란은 이처럼 사타니아 체계에서 승천자와 봉사자의 자유 의지 선택을 가능한 최대한으로 침해하려고 위협하였다―이것은 완전하게 된 사타니아 체계로서 언젠가 존재할 기념비, 천천히 지어지는 체험적 지혜의 기념비에, 이러한 모든 존재로부터 무언가 개인적이고 독특한 것을 기여하는 가슴 떨리는 체험을 영원히 빼앗는 위협이다. 이와 같이 맑은 이치에 비추어볼 때, 루시퍼 선언문은 자유의 옷을 입어 가장(假裝)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훔치려고, 그리고 온 네바돈 역사에서 꼭 두 번만 접근한 규모로, 그렇게 하려는 엄청난 위협으로서 두드러진다.
54:2.4 (615.1)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사람과 천사에게 준 것을 루시퍼는 도로 빼앗으려 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운명, 그리고 사람 사는 세계들로 이루어진 이 지역 체계의 운명을 창조하는 데 참여하는, 신이 준 특권이다.
54:2.5 (615.2) 우주 전체에서 아무도 어느 다른 존재로부터 참된 자유, 사랑하고 사랑 받을 권리, 하나님을 예배하고 동료들에게 봉사하는 특권을 빼앗을 정당한 자유가 없다.
54:3.1 (615.3) 여러 진화 세계에서, 도덕적 의지를 가진 인간은 온통 지혜로운 창조자들이 어째서 죄와 악을 허락하는가, 이런 생각 없는 질문에 반드시 시달린다. 그들은 생물이 참으로 자유롭게 되려면 이 두 가지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진화하는 인간이나 아름다운 천사의 자유 의지는 단지 철학 개념, 상징적 이상(理想)이 아니다. 사람이 선이나 악을 택하는 능력은 하나의 우주 현실이다. 자신을 위하여 선택하는 이 자유는 최상 통치자들이 부여한 것이다. 어느 존재나 집단의 존재들이라도 넓은 우주에서 단 하나의 성격자에게서 신이 준 이 자유를 빼앗는 것을 그들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잘못 이름지은 개인의 자유를 누리는, 그러한 잘못 인도되고 무지한 존재들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54:3.2 (615.4) 의식하여, 마음을 다하여, 이렇게 악(죄)의 편을 드는 것은 비존재(소멸)와 맞먹지만, 그렇게 몸소 죄의 편을 드는 때와 벌이 집행되는―그렇게 일부러 악을 품어 생기는 자동 결과―사이에는 얼마큼 시간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러한 개인의 우주 지위에 관하여, 모든 관계된 우주 성격자가 온통 만족스럽게 여기며, 아주 공평하고 정당해서, 죄지은 자 자신이 승인할 그런 판결을 내리기에 충분히 긴 기간이다.
54:3.3 (615.5) 그러나 진리와 선(善)의 현실에 대항하는 이 우주 반역자가 그 판결을 승인하려 하지 않으면, 그 죄 지은 자가 선고(宣告)가 정당함을 마음 속에서 알아도 그렇게 고백하지 않으면, 그 선고의 집행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재량에 따라서 늦춰져야 한다.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은 행악자 및 모든 관계된 지지자와 가능한 동정자한테서 모든 도덕적 가치와 영적 실체가 없어질 때까지, 어떤 존재라도 소멸하기를 거절한다.
54:4.1 (615.6) 놀라시아덱 별자리에서 얼마큼 설명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문제는, 무슨 이유로 체포되고 구금되고 판결되기 전까지 무척 오랫동안 불화(不和)를 일으키도록 루시퍼와 사탄과 타락한 영주들을 버려두는가에 관한 것이다.
54:4.2 (616.1) 아이들을 낳고 기른 부모들은 어째서 창조자이자 아버지인 미가엘이 자신의 아들들을 정죄하고 죽이는 데 시간을 끌 수 있는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방탕한 아들에 관한 예수의 이야기는 인자한 어느 아버지가 잘못하는 아이의 뉘우침을 어떻게 오랫동안 기다릴 수 있는가 잘 보여준다.
54:4.3 (616.2) 악행하는 생물이 실제로 그릇된 일을 선택할 수 있다―죄를 저지른다―는 바로 그 사실은 자유 의지가 사실임을 입증하며, 자비를 연장하는 것이 뉘우침과 회복으로 유도할까 싶으면, 응보를 집행하는 데 아무리 길게 지연되더라도 이를 충분히 정당화한다.
54:4.4 (616.3) 루시퍼는 그가 추구했던 자유의 대부분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다른 것들은 미래에 받게 되어 있었다. 참지 못하고, 자기가 지금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고, 온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다른 존재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할 의무를 다 무시하면서 이를 소유하려는 욕구에 굴복함으로써, 이 모든 귀중한 재산이 사라져 버렸다. 윤리적 의무는 선천적인 것이요, 신성하고, 보편적이다.
54:4.5 (616.4) 우리가 알건대, 최상 통치자들이 루시퍼 반란의 주모자들을 즉시 소멸하거나 구금하지 않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가 모르지만 다른, 아마도 더 좋은 이유들이 있다. 응보의 집행이 이렇게 지연된 것, 자비의 모습은 네바돈의 미가엘이 친히 베푼 것이다. 이 창조자인 아버지가 잘못하는 아들들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초우주 최고의 응보가 작용했을 것이다. 루시퍼 반란과 같은 그런 사건이 미가엘이 유란시아에서 육신화된 동안에 네바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런 악을 선동한 자들은 한 순간에, 아예 소멸되었을지도 모른다.
54:4.6 (616.5) 신의 자비로 제어되지 않았을 때, 최고의 응보는 한 순간에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시공의 자녀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데는 언제나 이 시간 지연, 곧 씨 뿌릴 때와 거두는 사이에, 이 유익한 틈을 마련해 준다. 좋은 씨를 뿌리면, 이 기간은 인품을 시험하고 튼튼하게 만들어 준다. 나쁜 씨를 뿌리면, 이 자비로운 지연은 뉘우치고 바로잡을 시간을 마련해 준다. 행악자를 판결하고 집행하는 데서 생기는 시간 지연(遲延)은 일곱 초우주의 자비로운 봉사에 본래부터 있다. 응보를 자비로 제어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 그러한 사랑의 하나님이 여러 우주를 지배하고 자비롭게 모든 생물의 운명과 심판을 통제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54:4.7 (616.6) 자비로운 시간 지연은 창조자들의 자유 의지 명령에 따른 것이다. 죄 많은 반역자들을 다룰 때 이 인내하는 기법으로부터 우주에서 선(善)을 얻게 되어 있다. 골똘히 생각하여 악한 일을 하는 자에게는 악으로부터 선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참말이지만, 하나님을 알고, 그의 뜻을 실행하기 좋아하고, 그의 영원한 계획과 신성한 목적에 따라서 파라다이스를 향하여 올라가는 모든 존재에게는 (가능한 악과 드러난 악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이 합쳐서 선을 이룬다는 것이 똑같이 참말이다.
54:4.8 (616.7) 그러나 이 자비로운 지연은 끝없이 이어지지 않는다. (유란시아에서 시간을 따지는 대로) 루시퍼 반란을 판결하는 데 시간이 오래 지연되었어도, 이 계시가 진행되는 동안에, 미결인 가브리엘 대 루시퍼 소송의 첫 청문회가 유버르사에서 열렸고, 그 뒤에 얼마 안 있어, 그때부터 사탄을 루시퍼와 함께 감옥 세계에 가두어 두라고 지시하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명령이 내렸다. 이것은 사타니아의 타락한 세계들 가운데 어디도 사탄이 더 이상 방문할 수 없게 만든다. 자비가 지배하는 우주에서 응보는 느릴지 모르지만 확실히 따른다.
54:5.1 (617.1) 루시퍼와 그 일당이 어째서 더 일찍 구금되거나 재판을 받지 않았는가에 관하여 내가 아는 여러 이유 가운데, 나는 다음을 열거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54:5.2 (617.2) 1. 자비는 모든 범죄자에게 자기의 악한 생각과 죄가 되는 행위에 관하여 신중하고 온전히 태도를 정할 충분한 시간을 주기를 요구한다.
54:5.3 (617.3) 2. 최고의 응보는 아버지의 사랑에 지배된다. 따라서 응보는 자비가 구할 수 있는 것을 결코 죽이지 않는다. 구원을 받아들일 시간이 모든 행악자에게 허락된다.
54:5.4 (617.4) 3. 다정한 아버지는 누구든지 결코 자기 집안에서 잘못하는 사람에게 성급히 벌을 내리지 않는다. 인내(忍耐)는 시간과 따로 작용할 수 없다.
54:5.5 (617.5) 4. 죄를 저지르는 것은 반드시 한 가족에게 해롭지만, 지혜와 사랑은 올바른 아이들에게 다정한 아버지가 허락한 시간 동안에 잘못하는 형제를 참으라고 훈계하고, 그동안에 죄지은 자는 제 길의 잘못을 깨닫고 구원을 받아들일지 모른다.
54:5.6 (617.6) 5. 루시퍼에 대하여 미가엘이 무슨 태도를 가졌든 상관 없이, 그가 루시퍼의 아버지인 창조자인데도, 배신한 체계 군주에게 즉결 사법권을 행사하는 것은 창조 아들의 권한에 들어 있지 않다. 이는 당시에 그가 자신 수여 생애를 마치고 그렇게 함으로 네바돈의 무제한 군주권을 얻지 않았기 때문이다.
54:5.7 (617.7) 6.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은 즉시 이 반역자들을 소멸시킬 수 있었지만, 그들이 충분한 청문회가 없이 행악자를 집행하는 일은 드물다. 이 경우에 그들은 미가엘의 결정을 뒤엎기를 거부했다.
54:5.8 (617.8) 7. 반역자들과 상관하지 말고 반란이 저절로 소멸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밟도록 버려두라고 이마누엘이 미가엘에게 조언했음이 확실하다. 늘 하나된 이의 슬기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통일된 슬기가 시간적으로 반영된 것이다.
54:5.9 (617.9) 8. 에덴시아에 계신 늘 충실한 이는 별자리 아버지들에게, 놀라시아덱의 현재 및 미래의 모든 시민―모든 필사자, 상물질 또는 영 생물―의 마음 속에서 이 행악자들에 대한 동정심이 모두 더 빨리 뿌리 뽑히도록, 끝까지 반역자들이 멋대로 하도록 버려두라고 조언하였다.
54:5.10 (617.10) 9. 예루셈에서 오르본톤 최상 집행자의 개인 대표자는, 루시퍼 자유 선언에 관계된 여러 문제에서, 모든 살아 있는 생물이 신중한 결정을 내리도록 넉넉한 기회를 주라고 가브리엘에게 조언했다. 반란의 논점이 제기되었으니까, 모든 놀라시아덱 생물에게 그런 충분하고 자유로운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마음이 반쯤 내키거나 의심에 빠진 모든 그러한 가능한 생물에 대하여, 별자리 전체에 자체의 보호 조치로서 파라다이스 검역이 연장될 것이라고, 가브리엘의 파라다이스 비상 조언자가 설명했다. 놀라시아덱의 생물에게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문을 계속 열어놓기 위하여, 반란이 충분히 발전하도록 준비하고, 어떤 면에서도 그와 관련된 모든 존재의 편에서 태도를 완전히 결정하도록 보장하는 것이 필요했다.
54:5.11 (617.11) 10. 구원자별의 신성한 봉사자는 그의 세 번째 단독 선언으로서, 반역자들과 반란의 가증한 모습을 반쯤 치료하거나, 소심하게 억압하거나, 아니면 감추려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지시하는 명령을 내렸다. 천사 무리는 죄와 악의 전염병을 완전히 최종으로 치료하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서, 완전히 노출시키고 죄를 표현할 무제한의 기회를 주도록 일하라고 지시를 받았다.
54:5.12 (618.1) 11. 막강한 사자는 비슷한 상황에서 몸소 체험을 겪은 영화롭게 된 필사자인데, 이들로 이루어진 예전의 필사자들의 긴급 회의가, 그 동료들과 함께 예루셈에서 조직되었다. 그들은 임의로 하거나 약식(略式)의 억압 방법을 시도한다면, 적어도 3배나 되는 존재들이 그릇된 길에 빠질 것이라고 가브리엘에게 조언했다. 결말을 보는 데 1백만 년이 걸린다 하더라도, 반란이 충분하고 자연스런 과정을 밟도록 버려 두라고 가브리엘에게 조언한 것에 유버르사 상담자 집단 전체가 찬성하였다.
54:5.13 (618.2) 12. 시간적 우주에서도, 시간은 상대적이다. 보통 수명(壽命)을 가진 한 유란시아 필사자가 세계적 수라장을 일으키는 죄를 저지른다면, 그리고 죄를 저지르고 나서 이삼일 안에 체포되고, 재판받고, 집행되었다면, 그것이 너희에게 오랜 세월로 보이겠는가? 그래도 그것이, 지금 시작된 루시퍼의 재판이 유란시아 시간으로 10만 년 동안에 끝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루시퍼의 수명과 더욱 가까운 비교가 될 것이다. 소송이 유버르사에서 미결 상태로 있는데 유버르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루시퍼의 범죄는 저지른 지 2초 반 안에 재판에 올랐다고 하는 것이 비교적 시간의 경과를 가리킬 수 있다. 파라다이스 관점에서 보면, 그 재판은 그 범죄 행위와 동시에 일어난다.
54:5.14 (618.3) 임의로 루시퍼 반란을 멈추게 하지 않은 데에는, 너희가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똑같은 수의 이유가 있지만, 나는 입을 열도록 허락을 받지 않았다. 악이 그 자체가 도덕적으로 파산하고 영적으로 소멸하는 과정을 끝까지 밟도록 버려두는 48 가지 이유를 우리가 유버르사에서 가르친다고 너희에게 알려도 좋다. 그 위에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똑같이 많이 있다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54:6.1 (618.4) 루시퍼 반란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진화하는 필사자가 무슨 어려움에 부닥치든지, 반역자들을 다루는 방법은 신의 사랑을 입증한다는 것이 돌이켜보는 모든 사람에게 뚜렷해야 한다. 반역자들에게 사랑으로 베푸는 자비는, 많은 죄 없는 존재를 시련과 고난에 말려들게 한 듯하다. 그러나 혼란에 빠진 이 모든 성격자는 전적으로 지혜로운 재판관들이, 그들의 운명을 올바르게 판결할 뿐 아니라 자비롭게 판결할 것을 단단히 믿어도 좋다.
54:6.2 (618.5) 지적 존재들과 함께 무슨 일을 하더라도, 창조 아들과 파라다이스 아버지는 사랑에 지배된다. 신(神)이 인류와 어떤 관계를 가지더라도, 아버지인 하나님이 모든 다른 단계의 신의 명시(明示)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반역자들과 반란―죄와 죄 지은 자들―에 대하여 우주 통치자들이 취하는 태도의 여러 단계를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 파라다이스 창조 아들들은 모두 자비로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을 또한 상기해야 한다.
54:6.3 (618.6) 한 대가족에서 다정한 아버지가 아이들 중에서, 몹쓸 악행을 저지른 아이에게 자비를 보이기로 한다면, 행동거지가 나쁜 이 아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품행이 바른 다른 자녀들 모두에게 일시 어려움을 줄 것은 당연하다. 그러한 결과는 피할 수 없다. 인자한 아버지가 있고 가족 집단의 한 사람이 되는 현실 상황과 그러한 위험은 분리할 수 없다. 한 가족 안에서 각자가 모든 다른 사람의 올바른 행위로부터 이득을 본다. 마찬가지로 각 사람은 모든 다른 사람의 비행(非行)이 직접 일으키는, 시간적 결과로부터 고통을 받는다. 가족ㆍ집단ㆍ나라ㆍ민족ㆍ세계ㆍ체계ㆍ별자리ㆍ우주들은 개성을 가진 연합의 관계이다. 따라서 크던 작던, 그러한 어떤 집단이라도, 그 구성원은 누구나 관계된 집단의 모든 다른 구성원의 선행(善行)으로부터 이득을 보고 악행에서 생기는 결과로 고생한다.
54:6.4 (619.1) 그러나 한 가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너희 가족의 어떤 구성원, 어떤 동료 시민, 또는 동료 필사자의 죄, 아니 그 체계나 다른 데서 있었던 반란의 악한 결과로 너희가 고통을 겪게 되었다면―너희 동료나 친구나 또는 상관들의 악행 때문에 너희가 무엇을 견디어야 하는가 상관 없이―그러한 시련은 일시적 고통이라는 영원한 확신을 가지고 안심해도 좋다. 집단 속에서 비행이 형제에게 미치는 이러한 결과 중에 아무것도, 결코 너희의 영원한 전망을 위태롭게 하거나, 또는 조금이라도, 파라다이스로 올라가고 하나님에게 도달하는 너희의 신성한 권리를 빼앗을 수 없다.
54:6.5 (619.2) 그리고 모반의 죄를 변함없이 뒤따르는, 이 시련과 지연과 실망에는 보상이 있다. 루시퍼 반란에서 가치 있고 열거할 수 있는 많은 영향 가운데, 나는 오직 필사 승천자들, 곧 예루셈 시민의 생애가 향상된 것에 주의를 불러일으키고 싶다. 그들은 죄의 궤변을 견딤으로, 앞날에 막강한 사자들, 곧 내 계급의 동료가 되는 줄에 섰다. 그 악한 사건의 시험을 견딘 존재는 누구나, 그렇게 함으로 즉시 그의 행정 지위를 향상하고 그의 영적 가치를 높였다.
54:6.6 (619.3) 처음에 루시퍼 동란은 체계와 우주에 대하여 수그러들 줄 모르는 재난처럼 보였다. 차츰 이익이 생기기 시작했다. 체계 시간으로 2만 5천 년 (유란시아 시간으로 2만 년)이 지나자, 멜기세덱들은 루시퍼의 어리석음으로부터 생긴 선은 저질러진 악과 맞먹게 되었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악의 총합은 거의 정지된 상태였고, 오로지 어떤 고립된 세계들에서 계속 늘어났으며, 한편 유익한 영향은 줄곧 불어나고, 우주와 초우주를 통해서, 아니 하보나까지 바깥으로 연장되었다. 멜기세덱들은 이제 사타니아 반란으로부터 생긴 선은 모든 악의 총합보다 1천 배가 넘는다고 가르친다.
54:6.7 (619.4) 그러나 악행으로부터 거둔 특별하고 유익한 수확은 오로지, 에덴시아에 있는 별자리 아버지들로부터 파라다이스에 계신 우주의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루시퍼 위에 계신 모든 분의 지혜롭고, 신답고, 자비로운 태도 때문에 거둘 수 있었다. 시간의 경과는 루시퍼의 어리석은 짓으로부터 그 결과로 생길 선을 향상시켰다. 벌 받아야 할 악이 비교적 짧은 시일 안에 충분히 개발되었으니까, 온통 지혜롭고 멀리 내다보는 우주 통치자들이 갈수록 더 유익한 수확을 거둘 시간을 확실히 연장시킬 것이 명백하다. 사타니아 반역자들의 체포와 재판을 늦춘 많은 이유가 추가되는 것과 상관 없이, 이 한 가지 소득만 해도 어째서 이 죄지은 자들이 더 일찍 구금(拘禁)되지 않고, 어째서 그들이 재판받고 소멸되지 않았는가 설명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54:6.8 (619.5) 근시안(近視眼)이고 시간에 매여 있는 필사자의 지성은 우주 사무를 담당하는, 멀리 내다보는 온통 지혜로운 행정가들이 시간을 지체한다고 성급히 비판해서는 안 된다.
54:6.9 (620.1) 이 문제들에 관하여 인간이 한 가지 잘못 생각하는 것은, 진화하는 행성에서 진화하는 모든 필사자가 그들의 세계가 죄로 저주받지 않았다면, 파라다이스 생애에 들어가기를 선택할 것이라는 관념에 있다. 살아남기를 거부하는 능력은 루시퍼 반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필사 인간은 파라다이스 생애에 관하여, 언제나 자유 의지로 선택하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54:6.10 (620.2) 너희는 살아남는 체험을 겪으며 올라감에 따라서, 너희의 우주 개념을 넓히고, 의미와 가치를 보는 시야를 넓힐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어째서 루시퍼와 사탄 같은 존재들이 반란을 계속하도록 버려두는가 더 잘 이해될 것이다. 너희는 또한 일시적으로 제한된 악으로부터, 어떻게 (즉시 생기지는 않더라도) 궁극의 선을 얻을 수 있는가 더 잘 이해될 것이다. 너희는 파라다이스에 이른 뒤에, 상천사 철학자들이 우주를 조정하는 이 심오한 문제들을 토론하고 설명하는 것을 들을 때, 정말로 깨우침과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너희가 머리 속에 충분히 만족할 것인지 나는 의심이 든다. 적어도, 내가 이처럼 우주 철학의 절정에 다다른 때에도, 나는 만족해 하지 않았다. 초우주에서 내가 행정 임무에 배치되기까지, 나는 이 까다로운 일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는데, 나는 거기서 실제 체험을 겪음으로, 우주의 평등과 영적 철학에서 그러한 다방면의 문제들을 이해하기에 적절한 개념적 능력을 얻었다. 너희가 파라다이스를 향하여 올라감에 따라서, 오직 체험 능력이 늘어난 뒤에, 그리고 향상된 영적 통찰력을 얻은 뒤에야 우주 행정에서 문제가 되는 여러 가지 모습을 겨우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너희는 더욱 배울 것이다. 우주 지혜는 우주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필수이다.
54:6.11 (620.3) [한 막강한 사자가 발표하였다. 그는 시간 세계의 여러 우주에서 생긴 첫 체계 반란에서 체험을 거쳐 살아남았고, 지금 오르본톤 초우주 정부에 속해 있으며, 구원자별의 가브리엘의 요청을 받고서 이 문제에서 활동하였다.]
55:0.1 (621.1) 시공의 한 세계에서, 빛과 생명의 시대는 진화로 마지막에 달성하는 시대이다. 원시인이 살던 초기 시절부터, 사람이 사는 그러한 세계는 연속되는 여러 행성 시대―행성 영주 이전(以前) 시대와 이후 시대, 아담 이후 시대, 심판 아들 이후 시대, 수여 아들 이후 시대―를 거쳐 왔다. 그리고 나서 그러한 세계는 절정에 이르는 진화적 달성, 곧 안정된 빛과 생명의 지위를 위하여 준비된다. 이것은 삼위일체의 교육 아들들이 신성한 진리와 우주 지혜를 항상 더욱 계시하는 것과 더불어, 연달아 행성 임무를 이행함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면서, 마지막 행성 시대를 안정시킬 때 교육 아들들은 반드시 찬란한 저녁별들의 도움을 받고, 때때로 멜기세덱들의 도움을 받는다.
55:0.2 (621.2) 교육 아들들의 최종 행성 임무가 끝날 때,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그들이 개시한 이 빛과 생명의 시대는 무기한으로 계속된다. 안정된 지위에서 각 진보 단계는, 심판 아들들의 사법 행위에 따라서 일련의 섭리 시대로 분리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그러한 사법 행위는 순전히 절차상의 문제이며, 행성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과정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55:0.3 (621.3) 오직 초우주의 주요 회로에서 존재하는 행성들에게 계속된 생존이 보장되지만, 우리가 아는 한,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이 세계들은 모든 미래의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내내, 계속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55:0.4 (621.4) 진화 세계에서 빛과 생명의 시대가 펼쳐지는 데는 일곱 단계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영이 융합한 필사자의 세계는 조절자가 융합한 계열의 세계와 동일한 노선을 따라서 진화한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빛과 생명의 이 일곱 단계는 다음과 같다:
55:0.5 (621.5) 1. 제1 단계, 행성 단계.
55:0.6 (621.6) 2. 제2 단계, 체계 단계.
55:0.7 (621.7) 3. 제3 단계, 별자리 단계.
55:0.8 (621.8) 4. 제4 단계, 우주 단계.
55:0.9 (621.9) 5. 제5 단계, 소구역 단계.
55:0.12 (621.12) 전진하여 발전하는 이 여러 단계는 우주 조직에 관계되는 바 이 이야기의 끝에 묘사된다. 그러나 어떤 단계에 있는 행성의 가치 기준도, 다른 세계들의 발전이나 행성을 초월하는 우주 행정 수준과 아주 상관 없이, 어떤 세계에서나 달성될 수 있다.
55:1.1 (622.1) 사람이 사는 한 세계의 서울에 상물질 성전이 있는 것은 그러한 구체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시대에 들어갔다는 증명서이다. 교육 아들들의 최종 사명이 끝날 때, 한 세계를 떠나기 전에, 그들은 진화로 달성하는 이 마지막 시기를 개시한다. 그들은 “거룩한 성전이 땅에 내려오는” 그날에 행사를 주관한다. 그 행성의 파라다이스 수여 아들이 몸소 참석하여 빛과 생명의 시대가 밝아오는 것을 알리는 이 사건을 반드시 기념하며, 그는 이 큰 날을 구경하기 위하여 온다.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이 성전에서, 거기서 이 파라다이스 수여 아들은 오래 있던 행성 영주가 새 행성 군주임을 선포하고, 그러한 충실한 라노난덱 아들에게 행성의 사무를 처리하는 새 권력과 늘어난 권한을 부여한다. 체계 군주도 참석하고 이 선포를 확인하려고 말씀한다.
55:1.2 (622.2) 상물질 성전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가장 가운데 있는 것은 파라다이스 수여 아들의 성역(聖域)이다. 오른편에는 전직 행성 영주, 곧 현재 행성 군주의 자리가 있다. 그리고 성전에 있을 때, 이 라노난덱 아들은 그 영역에서 비교적 영적인 개인들의 눈에 보인다. 왼편에는 그 행성에 소속된 최후자들의 임시 우두머리의 자리가 있다.
55:1.3 (622.3) 행성의 성전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1] [1689] 언급된 적이 있었지만, 실제로 아무런 실질적 물질이 체계 본부로부터 수송되지 않는다. 각 성전의 건축을 체계의 서울에서 축소판으로 만들어 보고, 나중에 상물질 동력 감독들이 이 인가된 계획을 그 행성으로 가져 온다. 여기서 그들은 물리 통제사들과 제휴하여, 명세(明細)에 따라서 상물질 성전의 건축을 진행한다.
55:1.4 (622.4) 보통의 상물질 성전은 약 30만 명의 관객을 앉힌다. 이 건축물은 예배나 경기를 위하여, 또는 방송을 수신하기 위하여 쓰이지 않는다. 이것은 행성의 특별한 예식을 거행하는 데 쓰인다. 예를 들면, 체계 군주나 최고자들과 가지는 통신, 영 존재들이 몸소 계심을 드러내도록 고안된, 특별히 눈에 보이게 하는 예식, 그리고 고요히 우주를 명상하는 데 쓰인다. 여러 우주 철학 학교는 여기서 졸업식 연습을 거행하며, 여기서 또한 그 영역의 필사자들이 사회에 크게 봉사한 업적, 그리고 다른 뛰어나는 성취 때문에 행성의 인정을 받는다.
55:1.5 (622.5) 그러한 상물질 성전은 또한 살아 있는 필사자를 상물질 존재로 옮기는 것을 구경하는 집회 장소로서 쓰인다. 이것은 변신(變身)의 성전이 상물질계의 물질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 성전이 신다운 조절자와 마지막 융합을 체험하는 그러한 필사자의 육체를 아주 깨끗이 없애는 불, 다 태우는 불의 타오르는 영광에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큰 세계에서 이 작별의 불꽃은 거의 연속되며, 변신하는 수가 늘어남에 따라서, 상물질 생명의 여러 종속 성당(聖堂)이 그 행성의 다른 지역에 마련된다. 아주 먼 북쪽의 어느 세계에 내가 머무른 지 오래지 않은데, 거기에는 상물질 성당 25채가 운영되고 있었다.
55:1.6 (622.6) 안정되기 이전의 세계, 상물질 성전이 없는 행성에는 이 융합의 섬광이 행성의 대기(大氣)에서 여러 번 일어나며, 대기에서 중도인과 물리 통제자들이 변신 후보자의 물질 몸을 들어올린다.
55:2.1 (623.1) 자연사, 육체의 죽음은 필사자에게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상급의 진화 존재들, 곧 마지막인 빛과 생명 시대에 들어간 세계에서 시민들의 대다수는 죽지 않는다. 그들은 육체를 입은 생명에서 바로 상물질 존재로 변화된다.
55:2.2 (623.2) 물질 생명에서 상물질 상태로 변화하는 이 체험―불멸의 혼이 그 깃드는 조절자와 융합하는 것―은 그 행성의 진화적 진보에 비례하여 빈도가 늘어난다. 처음에는 각 시대에 겨우 몇 명만 변신하는 영적 수준에 이른다. 그러나 연속되는 교육 아들들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진보하는 이 필사자의 길어지는 수명이 끝나기 전에, 조절자 융합이 갈수록 더 일어난다. 교육 아들들이 최종 임무로 오는 시절이 되면, 이 훌륭한 필사자의 약 4분의 1이 자연사에서 제외된다.
55:2.3 (623.3) 빛과 생명의 시대로 더 깊숙이 들어가서, 중도인(中道人)이나 그 동료들은 있음직한, 혼과 조절자의 연합이 다가오는 상태를 느끼고, 이를 운명 수호자들에게 알린다. 이들은 다시 이 문제를 이 필사자가 활동하고 있는 관할 지역의 최후자 무리에게 통보한다. 그리고 나서 그러한 필사자가 모든 행성 임무에서 물러나고, 기원이 있는 세계에 작별을 알리고, 행성 군주의 내부 성전으로 나아가며, 거기서 진화하는 물질 영토로부터 영(靈) 이전에 진보하는 상물질 수준까지 상물질계 이동을, 변신의 섬광을, 기다리라고 행성 군주의 호출장이 떨어진다.
55:2.4 (623.4) 그러한 융합 후보자의 가족, 친구들, 그리고 일하는 집단이 상물질 성전에서 모였을 때, 그들은 융합 후보자들이 쉬고 있는 중앙 무대 주위에 흩어져 있고, 그동안에 모여든 친구들과 자유로이 이야기를 나눈다. “생명의 섬광”이 번쩍이는 순간에 나타나는 에너지의 작용으로부터 물질 필사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이에 낀 하늘 성격자들의 동그라미가 그어지는데, 이 섬광은 승천 후보자를 물질 육체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 자연사(自然死)가 육체를 벗어나는 자에게 미치는 것과 똑같은 영향을 그러한 진화 필사자에게 미친다.
55:2.5 (623.5) 많은 융합 후보자가 동시에 너른 성전에 모여도 좋다. 이처럼 사랑하던 자들이 영적 불꽃 속에 올라가는 것을 구경하려고 필사자들이 모일 때,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경사인가, 필사자들이 죽은 자를 지상의 원소(元素)의 품에 맡겨야 했던 지난 시대와 얼마나 대조가 되는가! 인간의 진화에서 초기의 특징을 나타내는 장면,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는 여러 장면은, 타오르는 장려함과 올라가는 영광의 불, 영적 불로 인하여 그들의 물질적 관계를 벗어날 때, 하나님을 아는 이 필사자들이 사랑하던 자들에게 임시 작별을 알릴 때, 이제 극치에 이른 기쁨과 가장 숭고한 열심으로 바뀐다.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세계에서, “장례식”은 최고의 기쁨, 깊은 만족감, 말할 수 없는 희망이 생기는 행사이다.
55:2.6 (623.6) 진보하는 이 필사자의 혼은 갈수록 더 믿음과 희망과 확신으로 채워진다. 변신의 성당 둘레에 모여든 자에게 스며드는 정신은, 자기 집단에서 한 사람을 위하여 졸업식 연습에 모여들거나, 또는 그들 중 한 사람에게 어떤 큰 명예를 수여하는 것을 구경하려고 모일까 싶은, 즐거운 친구와 친척들의 정신과 비슷해진다. 아직 많이 진보하지 못한 필사자들이 바로 이렇게 거의 명랑하고 쾌활한 태도로 자연사를 보는 것을 배울 수만 있다면, 확실히 유익할 것이다.
55:2.7 (624.1) 융합하는 섬광이 있고 나서, 지켜보는 필사자들은 변신한 동료의 그림자도 볼 수 없다. 그러한 변신한 혼은 조절자가 이동함으로 적절한 상물질 훈련 세계의 부활실로 바로 나아간다. 살아 있는 인간을 상물질 세계로 옮기는 데 관련된 이 거래는 그러한 세계가 처음으로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날에 거기에 배치된 한 천사장의 감독을 받는다.
55:2.8 (624.2) 한 세계가 빛과 생명의 제4 단계에 이를 때가 되면, 과반수의 필사자가 살아 있는 자 가운데서 변신을 거쳐 그 행성을 떠난다. 그러한 죽음의 감소는 내내 계속되지만, 내가 알기에, 생명 속에 안정된 지 오래 되었어도, 육체의 사슬을 벗어나는 기법으로서 자연사(自然死)를 전혀 거치지 않는, 사람 사는 세계를 가진 체계는 하나도 없다. 행성의 진화가 그러한 높은 상태로 균일하게 도달하기까지, 지역 우주의 상물질 훈련 세계들은 진화하는 상물질 진보자를 위하여 교육 및 문화 구체로서 줄곧 사용되어야 한다. 죽음의 제거는 이론적으로 가능하지만, 내가 지켜본 바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안정된 행성 생명의 제7 단계를 뒤잇는 시대에, 까마득히 먼 날에 그러한 상태에 도달할지 모른다.
55:2.9 (624.3) 안정된 구체가 한창인 시대에 변신을 겪은 혼은 저택 세계들을 거치지 않는다. 그들은 학생으로서, 체계나 별자리의 여러 상물질 세계에서 머무르지도 않는다. 그들은 상물질 생명의 어떤 초기 단계도 거치지 않는다. 그들은 물질 존재로부터 준영(準靈) 지위까지 상물질의 과도기를 아주 거의 피하는, 승천 필사자일 뿐이다. 하늘 가는 생애에서 아들이 움켜잡은 그러한 필사자의 초기 체험은 우주 본부의 여러 진보 세계에서 근무하는 것이다. 이 구원자별의 여러 연구 세계로부터, 그들은 그냥 지나친 바로 그 세계들까지 선생으로서 돌아가며, 나중에는 필사자로 승천하는 확정된 경로를 거쳐서 안쪽으로 파라다이스까지 간다.
55:2.10 (624.4) 너희가 상급의 발전 단계에 있는 한 행성을 방문할 수만 있다면, 저택 세계와 상급의 상물질 세계에서 하늘 가는 필사자들을 차별하여 받도록 마련한 이유를 너희는 재빨리 파악할 것이다. 그렇게 높이 진화된 구체로부터 와서 그냥 지나치는 존재들은, 유란시아처럼 무질서하고 뒤떨어진 세계로부터 도착하는 보통 필사자보다 훨씬 앞서, 파라다이스 상승을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된 것을 너희는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55:2.11 (624.5) 행성에서 어떤 수준을 달성하고서 인간이 상물질 세계들까지 올라가든지 상관 없이, 일곱 저택 구체는 그들이 출생한 행성이 상급 지위였기 때문에 거치지 못했던 모든 것을, 선생인 학생으로서, 체험으로 얻을 넉넉한 기회를 그들에게 준다.
55:2.12 (624.6) 우주는 어떤 승천자도 하늘 가는 체험에 꼭 필요한 것을 하나도 빼앗기지 않을 것을 보장하려고 고안된 이 평준화 기법을 어김없이 적용한다.
55:3.1 (624.7) 이 빛과 생명의 시대에, 행성 군주의 아버지다운 통치 밑에서 세계는 갈수록 더 번영한다. 이때가 되면 한 언어, 한 종교, 그리고 정상 구체에서는 한 종족의 운동력에 힘입어, 세계가 진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완전하지 않다. 이러한 세계는 아직도 잘 갖추어진 병원, 곧 병자를 돌보기 위한 집들이 있다. 사고(事故)로 생긴 부상을 돌보는 문제, 그리고 나이가 들어 생기는 병약함, 노인이 허약해짐에 따르는 불가피한 질병 문제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병을 전부 극복하지는 않았고, 지상의 동물도 완전히 정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행성 영주 이전 시대에, 원시인이 살던 초기 시절과 비교해서 그러한 세계는 파라다이스와 같다. 너희는 본능적으로 그러한 나라를―이 발전 단계에 있는 한 행성에 너희가 갑자기 수송될 수 있다면―지상 천국이라고 표현하고 싶을 것이다.
55:3.2 (625.1) 물질적 사무를 처리하는 인간 정부는 비교적 진보하고 완전하게 되는 이 시대를 통하여 내내, 계속 활동한다. 내가 최근에 방문한 세계, 빛과 생명의 첫 단계에 있는 한 세계에서는 공공(公共) 활동을 십일조(十一租) 방법으로 조달한다. 모든 어른 노동자는―사지가 멀쩡한 시민은 누구나 어떤 과제에서 일했는데―공공 재정에 그의 소득이나 증가분의 10퍼센트를 지불했고, 이것은 다음과 같이 쓰였다.
55:3.3 (625.2) 1. 3퍼센트는 진리―과학ㆍ교육ㆍ철학―을 증진하는 데 쓰였다.
55:3.4 (625.3) 2. 3퍼센트는 아름다움에―놀이, 사회적 여가, 예술에―사용되었다.
55:3.5 (625.4) 3. 3퍼센트는 선에―사회 봉사, 이타주의, 종교에―쓰였다.
55:3.6 (625.5) 4. 1퍼센트는 사고ㆍ병ㆍ노령, 또는 예방할 수 없는 재난 때문에 노동할 수 없는 위험에 대비하는 보험 비축금에 할당되었다.
55:3.7 (625.6) 이 행성의 자연 자원은 사회의 소유물, 공동체의 재산으로서 관리되었다.
55:3.8 (625.7) 이 세계에서 한 시민에게 수여되는 가장 높은 명예는 “최고의 봉사” 계급이었는데, 이것은 일찍이 상물질 성전에서 수여하는 유일한 등급의 공로(功勞) 인정이다. 이러한 공로 인정은 초물질적 발견의 어떤 국면에서, 또는 행성에서 사회에 봉사하는 데, 오랫동안 두각을 나타낸 자에게 수여된다.
55:3.9 (625.8) 대다수의 사회 및 행정 직책을 남녀가 함께 차지했다. 대부분의 교육도 합동으로 행해졌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법(司法)의 직무는 비슷한 연합된 쌍들이 수행하였다.
55:3.10 (625.9) 이러한 훌륭한 세계에서 임신 기간은 크게 연장되지 않는다. 한 집안의 아이들 사이에 터울이 너무 긴 것은 최선이 아니다. 나이가 비슷할 때, 아이들은 서로 훈련시키는 데 훨씬 더 이바지할 수 있다. 이런 세계에서 아이들은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 통달하는 다양한 성취의 상급 분야와 부서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경쟁 체계로 인하여 훌륭하게 훈련을 받는다. 결코 두려워 말지니, 그렇게 영화롭게 된 구체들도 실재하는 악과 잠재 악을 풍부하게 제시하며, 이것은 진리와 잘못, 선과 악, 죄와 정의 사이의 선택을 자극한다.
55:3.11 (625.10) 그런데도 그러한 상급의 진화 행성에서 필사 존재에 따르는 어떤 불가피한 벌이 있다. 안정된 세계가 빛과 생명의 제3 단계를 지나서 진보할 때, 승천자는 누구나 소구역에 도달하기 전에, 초기 단계의 진화를 거치고 있는 행성에서 일종의 일시적 임무를 받도록 예정되어 있다.
55:3.12 (626.1) 연속되는 이 여러 시대는 각각 행성이 달성하는 모든 단계에서 진보하는 업적을 가리킨다. 빛의 초기 시대에 진리의 계시는 온 우주의 작용을 포함하기까지 확대되었고, 한편 제2 시대에 신에 관한 연구는 칠중 신의 첫째 수준, 곧 창조 아들들의 성품ㆍ임무ㆍ봉사ㆍ관계ㆍ기원ㆍ운명의 개념, 변화가 가득한 개념을 통달하려는 시도이다.
55:3.13 (626.2) 유란시아 크기의 행성은, 상당히 잘 안정되었을 때, 약 1백개의 하위 행정 중심을 가질 것이다. 다음 집단에서 자격을 갖춘 행정가들 가운데 하나가 이 하위 중심들을 주관할 것이다:
55:3.14 (626.3) 1. 통치하는 아담과 이브에게 조수로서 행동하라고, 체계 본부로부터 데리고 온, 젊은 물질 아들과 딸.
55:3.15 (626.4) 2. 행성 영주의 준필사 참모진이 낳은 자손. 이들은 이 책임과 기타 비슷한 책임을 위하여 어떤 세계에서 출산된다.
55:3.16 (626.5) 3. 행성에서 아담과 이브의 직계 자손.
55:3.17 (626.6) 4. 물질화되고 인간화된 중도인(中道人).
55:3.18 (626.7) 5. 조절자와 융합하는 지위를 가진 필사자인데, 자신이 간청을 드리고 나서, 우주의 수령인 인격화된 조절자의 명령에 따라서, 그 행성에서 어떤 중요한 행정직에서 계속할 수 있도록, 일시 변신을 면제받았다.
55:3.19 (626.8) 6. 행성의 여러 행정 학교에서 특별히 훈련받은 필사자. 그들은 상물질 성전에서 최고의 서비스에 임하라는 명령도 또한 받았다.
55:3.20 (626.9) 7. 적절히 자격을 갖춘 시민 3명으로 이루어진 어떤 선출된 위원회. 때때로 행성 영주의 지시에 따라서, 특별한 그 행성 구역에서 필요한 어떤 분명한 과제를 성취하는 특별한 능력에 따라서, 시민이 가끔 그들을 뽑는다.
55:3.21 (626.10) 행성의 높은 운명, 빛과 생명의 운명을 성취하는 과제에서 유란시아가 부닥치는 큰 장애물은 질병ㆍ퇴화ㆍ전쟁, 다색 인종, 잡다한 언어, 이러한 문제 속에 포함되어 있다.
55:3.22 (626.11) 어떤 진화 세계도 그 세계가 한 언어, 하나의 종교, 하나의 철학을 달성하기까지 빛 속에 안정되는 첫째 단계를 넘어서 진보하기를 바랄 수 없다. 한 민족이 되는 것은 그러한 성취를 크게 수월하게 만들지만, 유란시아에 많은 민족이 있다고 해서 더 높은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 미리 배제되지는 않는다.
55:4.1 (626.12) 안정되어 존재하는 연속된 단계에서, 사람이 사는 세계들은 자원하는 최후 군단의 현명하고 자상한 관리 하에 놀랍게 진보하는데, 이들은 파라다이스에 도달한 승천자이고, 육체를 입고 사는 형제들을 보살피려고 돌아왔다. 이 최후자들은 삼위일체의 교육 아들들에게 활발하게 협조하지만, 상물질 성전이 땅에 나타날 때까지 세상사에 정말로 비로소 참여하지 않는다.
55:4.2 (626.13) 최후 군단의 행성 봉사가 정식으로 개시되고 나서, 대다수의 하늘 무리가 물러난다. 그러나 운명 수호 천사들은 빛 속에서 진보하는 필사자에게 계속하여 몸소 봉사를 베푼다. 빛 속에 안정된 시대를 통하여 내내, 정말로 그렇게 오는 천사들의 수가 자꾸 늘어나는데, 이는 행성에서 누리는 수명 동안에, 갈수록 더 큰 무리의 인간이 같은 수준, 필사자의 3급 우주 수준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55:4.3 (627.1) 이것은 다만 연속되는 행정적 조정에서 첫 단계일 뿐이다. 사람 사는 세계가 첫째 단계에서 일곱째까지 안정된 존재를 거치는 동안, 갈수록 더 눈부신 성취가 있는, 연속되는 시대가 펼쳐지면서 그런 조정이 뒤따른다.
55:4.4 (627.2) 1. 빛과 생명의 제1 단계. 세 통치자가 안정된 초기 단계에 있는 한 세계를 관리한다:
55:4.5 (627.3) 가. 행성 군주는 상담하는 한 삼위일체의 교육 아들의 직접 조언을 받도록 되어 있고, 그는 그 행성에서 활동하는 그런 아들들의 최종 집단의 우두머리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55:4.6 (627.4) 나. 행성 최후자 군단의 우두머리.
55:4.7 (627.5) 다. 아담과 이브. 이들은 영주나 군주, 그리고 최후자의 우두머리로 이루어진 2중 지도 체제를 통합하는 자로서, 함께 활동한다.
55:4.8 (627.6) 고귀하고 해방된 중도인(中道人)들이 수호 천사와 최후자들을 위하여 통역자로서 활동한다. 삼위일체의 교육 아들들이 최종 임무에서 행하는 마지막 조치 가운데 하나는 그 영역의 중도자들을 해방하고 행성에서 상급 지위로 진급(또는 회복)시키고, 그들을 안정된 구체의 새 행정부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배치하는 것이다. 초기 아담 체제에 속한 이 사촌, 그때까지 눈에 보이지 않던 사촌들을 필사자들이 식별하도록 만드는 그러한 변화가 인간 시력 범위에서 이미 이루어졌다. 이것은 물리 통제사들의 행성 기능이 확대된 것과 관련하여, 자연 과학의 최종 발견으로 가능하게 된다.
55:4.9 (627.7) 체계 군주는 안정된 제1 단계 이후에, 생명 운반자와 물리 통제자들의 도움을 받고서 중도인을 상물질계에서 인간화하도록 어느 때라도 해방시킬 권한이 있는데, 그들은 생각 조절자를 받은 뒤에,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길을 떠난다.
55:4.10 (627.8) 제 3 단계에서, 그리고 그후에, 최후자들을 위하여 주로 접촉 성격자로서 중도자들이 더러 아직 활동하고 있지만, 빛과 생명의 각 단계에 들어섬에 따라서, 새 계급의 연락 봉사자들이 중도자를 대부분 갈아치운다. 중도자 가운데 극소수가 빛의 넷째 단계를 지난 뒤에 남아 있다. 제7 단계에는 어떤 우주 생물을 대신해서 봉사하려고 파라다이스로부터 첫 초한(超限) 봉사자들이 오는 것을 구경할 것이다.
55:4.11 (627.9) 2. 빛과 생명의 제2 단계. 한 생명 운반자가 도착하는 것이 세계에서 이 시기인 것을 신호하며, 그는 필사 민족을 정화(淨化)하고 안정시키려는 연장된 노력에 관하여 행성 통치자들에게 자원하는 조언자가 된다. 이처럼 생명 운반자들은―물리ㆍ사회ㆍ경제 면에서―인류의 연장된 진화에 적극 참여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의 감독은 지적ㆍ철학적ㆍ우주적ㆍ영적 성품의 잠재성이 열등한, 뒤처지고 지속하는 잔재를 철저히 없앰으로써 필사자의 혈통을 더욱 정화하는 일에 미친다.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생명을 고안하고 심는 자들은 물질 아들과 딸들에게 조언할 자격이 충분하며, 모든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 진화 민족을 없애는, 완전하고 도전받지 않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55:4.12 (627.10) 제2 단계로부터 계속하여 안정된 한 행성의 경력을 통하여 내내, 교육 아들들은 최후자들에게 조언자로서 봉사한다. 그러한 임무 중에, 그들은 배치받기 때문이 아니라, 자원자로서 근무한다. 체계 군주의 동의를 받고서, 행성 아담과 이브에게 조언자로서 있어도 좋은 경우를 제외하고, 그들은 순전히 최후자 군단과 함께 근무한다.
55:4.13 (628.1) 3. 빛과 생명의 제3 단계. 이 시기에 사람 사는 세계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을 새로이 인식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칠중 신의 제2 단계이며, 이 초우주 통치자들의 대표들은 행성의 행정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간다.
55:4.14 (628.2) 안정된 존재가 연속되는 각 시대에 최후자의 활동 능력은 늘 확대된다. 최후자와 저녁별(초월 천사)과 삼위일체의 교육 아들들 사이에 가까운 기초적 연락이 존재한다.
55:4.15 (628.3) 이 시대나 다음 시대에, 봉사하는 영 사원조(四圓組)의 도움을 받는 한 교육 아들이, 선출되는 필사 최고 집행관에게 딸리게 되며, 그는 이제 세상사의 합동 행정관으로서, 행성 영주와 연결된다. 이 필사 최고 집행관은 행성 시간으로 25년 동안 근무하며, 이 새로운 사태는 뒤따르는 시대에 오랜 세월 동안 배치되었던 세계에서 행성 아담과 이브의 해방을 수월하게 만든다.
55:4.16 (628.4) 봉사하는 영 사원조는 그 구체의 천사 우두머리, 초우주의 상담하는 2품 천사, 번역 담당 천사장, 그리고 체계 본부에 주둔하는 지정된 파수의 개인 대표로서 활동하는 전천사(全天使)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고문들은 요청을 받지 않으면, 결코 조언을 제공하지 않는다.
55:4.17 (628.5) 4. 빛과 생명의 제4 단계. 세계에서 삼위일체의 교육 아들들이 새로운 역할을 가지고 나타난다. 자기 계급과 아주 오래 관련을 가졌던, 인간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은 이제 행성 군주와 그 동료들에게 자원하는 상담자와 조언자로서 세계로 온다. 그러한 쌍―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주민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 그리고 승천자가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들은 행성의 통치자들에게 상당히 쓸모 있는, 차이 나는 우주 관점과 다채로운 개인적 체험을 대표한다.
55:4.18 (628.6) 이 시대 이후에 어느 때라도, 행성 아담과 이브는 파라다이스로 상승을 시작하기 위하여 군주가 된 창조 아들에게 행성 임무에서 해방해 달라고 간청할 수 있다. 아니면 그들은 그 행성에서, 새로 출현하는 계급의 더욱 영적인 사회의 지도자로서 그 행성에 남아 있을 수 있다. 이 사회는 찬란한 저녁별들이 묘사한 최후자의 철학적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상급 필사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찬란한 저녁별들은 초우주의 본부로부터 온 2품 천사들과 쌍을 이루어 공동으로 일하려고 이제 이러한 세계에 배치된다.
55:4.19 (628.7) 최후자는 사회의 새로운 초물질 활동―사회ㆍ문화ㆍ철학ㆍ우주ㆍ영적 활동―을 개시하는 데 주로 종사한다.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한, 그들은 진화로 안정된 제7 시기로 깊숙이 들어갈 때까지 이 봉사를 계속할 것이고, 그때 아마도 그들은 바깥 공간에서 봉사하려고 나갈지 모른다. 그리고 나서 파라다이스에서 온 초한(超限) 존재들이 그들의 자리를 차지할지 모른다고 우리는 추측한다.
55:4.20 (628.8) 5. 빛과 생명의 제5 단계. 안정된 존재에서 이 단계의 재조정은 거의 전적으로 물리적 분야에 관한 것이며, 물리 통제사들의 주요한 관심거리이다.
55:4.21 (628.9) 6. 빛과 생명의 제6 단계는 그 영역에서 지성 회로의 새 기능이 발전되는 것을 구경한다. 우주의 지혜는 지성이 우주에게 베푸는 봉사의 일부인 듯하다.
55:4.22 (628.10) 7. 빛과 생명의 제7 단계. 제7 시기에 일찍,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보낸, 한 자원 조언자가 행성 군주에게 조언하는 삼위일체 교육자와 합세한다. 나중에 그들은 초우주의 최상 집행자로부터 오는 셋째 상담자를 맞이하여 확대될 것이다.
55:4.23 (629.1) 이 시기 이전이나 이 시기에, 아담과 이브는 반드시 행성 임무에서 해방된다. 최후자 군단에 물질 아들이 하나 있으면, 그는 필사 최고 집행자와 연결될지도 모르고, 때때로 한 멜기세덱이 이 자격으로 활동하겠다고 자원한다. 중도자 한 명이 최후자들 사이에 있으면, 행성에 남아 있는 그 계급에 속한 모두가 즉시 해방된다.
55:4.24 (629.2) 오랜 세월에 걸친 임무에서 해방되고 나서, 행성 아담과 이브는 다음과 같은 생애를 골라도 좋다:
55:4.25 (629.3) 1. 그들은 행성에서 해방을 얻을 수 있고, 우주 본부로부터 즉시 파라다이스 생애를 시작하고, 상물질 체험이 끝날 때 생각 조절자를 받는다.
55:4.26 (629.4) 2. 아주 흔히, 행성 아담과 이브는 빛 속에 안정된 세계에서 아직 근무하는 동안 조절자를 받을 것이다. 이것은 행성 근무를 한 시절 동안 자원한, 수입(輸入)된 순수 혈통의 아이들 가운데 더러가 조절자를 받는 것과 동시에 일어난다. 그 뒤에 그들은 모두 우주 본부로 가서, 거기서 파라다이스 생애를 시작해도 좋다.
55:4.27 (629.5) 3. 행성 아담과 이브는―체계 본부로부터 온 물질 아들과 딸들이 하는 것처럼― 잠시 머무르는 동안 조절자를 받으려고, 중간 한계자 세계로 직접 가기를 선택해도 좋다.
55:4.28 (629.6) 4. 그들은 체계 본부로 돌아가서, 거기서 한동안 최고 법정에서 자리를 차지하려고 결정해도 좋다. 이 근무가 끝난 뒤에 조절자를 받고 파라다이스 상승을 시작할 것이다.
55:4.29 (629.7) 5. 행정 직무를 그만두고 그들이 태어난 세계에 가서 한 철 동안 선생으로서 근무하기를 선택해도 좋으며, 그들이 우주 본부로 이동할 때 그들에게 조절자가 깃들게 된다.
55:4.30 (629.8) 이 시기를 통하여 내내, 수입된 보조하는 물질 아들과 딸들은 진보하는 사회 및 경제 체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적어도 그들이 인간화하고, 조절자를 받고, 파라다이스를 향하여 길을 떠날 때까지, 그들은 불멸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55:4.31 (629.9) 진화 세계에서 한 존재는 생각 조절자를 받기 위해서 인간화해야 한다. 세라핌을 제외하고, 필사 최후자 군단의 승천하는 회원에게 모두 조절자가 깃들고 융합했으며, 세라핌이 이 군단에 소집될 때 아버지가 또 다른 영으로 세라핌에게 깃든다.
55:5.1 (629.10) 유란시아처럼 죄에 휩쓸리고 악에 지배되고 자아를 추구하는 고립된 세계에서 필사 인간은, 죄 없는 구체에서 이 상급 진화 시기의 특징을 나타내는 물리적 완전, 지적 달성, 영적 발전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55:5.2 (629.11)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세계의 상급 단계는 진화를 따른 물질적 발전의 정점을 대표한다. 문화가 있는 이 세계에서, 초기의 원시 시대의 게으름과 마찰은 사라졌다. 빈곤과 사회의 불평등은 거의 사라져 버렸고 퇴화는 없어졌으며, 직무 태만을 보는 일은 드물다. 정신 이상(異常)은 거의 존재하지 않고, 정신 박약은 드문 일이다.
55:5.3 (629.12) 이 세계들의 경제ㆍ사회ㆍ행정적 지위는 높고 완전하게 된 등급이다. 과학ㆍ예술ㆍ산업이 번성하고, 사회는 높은 물질적ㆍ지적ㆍ문화적 업적을 이루어 순조롭게 움직이는 장치이다. 산업은 대체로 그러한 훌륭한 문명의 상급 목표에 쓰이는 방향으로 바뀐다. 그러한 세계의 경제 생활은 윤리가 있게 되었다.
55:5.4 (630.1) 전쟁은 역사적 관심거리가 되어 버렸고, 이제 더 군대나 경찰이 없다. 정부는 차츰차츰 사라지고 있다. 자제(自制)는 인간이 제정한 법령을 천천히 쓸모 없게 만들고 있다. 문명이 중간 정도로 발전되어 있을 때, 국가 정부와 법적 규제는 시민이 도덕적이고 영적일수록 줄어든다.
55:5.5 (630.2) 학교들은 널리 개선되고, 머리 훈련과 혼의 성장에 전념한다. 여러 예술 중심은 아름답고 음악 단체들은 훌륭하다. 예배에 쓰이는 여러 성전은 관련된 철학 및 체험적 종교 학교들과 함께, 아름답고 웅장한 작품이다. 예배하는 집회가 열리는 야외 무대는 그 단순한 예술적 치장이 똑같이 숭고하다.
55:5.6 (630.3) 경쟁하는 놀이ㆍ유머, 그리고 다른 단계의 개인 및 집단의 성취를 위한 시설은 충분하고 적당하다. 높은 문화를 가진 그러한 세계에서 경쟁 활동의 특별한 모습은 과학과 우주론 철학에서 뛰어나려고 개인 및 집단이 기울이는 노력과 관계된다. 문학과 웅변이 번창하고, 말은 생각을 표현할 뿐 아니라 개념을 상징하도록 무척 좋아진다. 생활은 상쾌하게도 단순하다. 마침내 사람은 고도의 기계적 발전과 감격할 만한 지적 달성을 조정하였고, 아름다운 영적 성취는 이 두 가지를 뛰어넘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기쁘고도 흐뭇한 체험이다.
55:6.1 (630.4) 세계들이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지위에서 전진함에 따라서, 사회는 점점 더 평화롭게 된다. 개인은 여전히 자립하고 자기 가족에 헌신하는데도, 이타심과 형제다움이 늘어났다.
55:6.2 (630.5) 유란시아에서, 너희의 상태 그대로, 완전하게 된 이 세계들에서 사는 깨우친 민족들의 앞선 상태와 진보된 성질을 너희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 이 민족들은 진화 민족의 절정이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들은 아직도 필사이며, 계속 숨쉬고, 먹고, 자고, 마신다. 이 위대한 진화는 하늘은 아니지만, 파라다이스로 오르는 길에 볼 신성한 세계들을 훌륭하게 예시한다.
55:6.3 (630.6) 정상 세계에서 필사 민족의 생물학적 건강은 아담 이후 시기에, 높은 수준에 이른 지 오래 되었다. 이제, 안정된 여러 시대 전체를 통해서, 한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사람의 육체적 진화는 계속된다. 시력(視力)과 청력이 모두 연장된다. 이때가 되어서 인구는 증가하지 않는다. 번식은 행성의 요구 조건과 타고난 유전 자질에 따라서 규제를 받는다: 이 시대에 있는 한 행성의 필사자들은 5에서 10 집단으로 나누어지며, 하급 집단은 상급 집단이 낳는 수의 겨우 반만큼 아이를 낳도록 허락된다. 빛과 생명의 시대를 통하여 내내, 그러한 훌륭한 종족의 계속된 개선은 대체로, 양질의 사회적ㆍ철학적ㆍ우주적ㆍ영적 성품을 나타내는 그러한 종족 혈통을 선택해서 번식시키는 문제이다.
55:6.4 (630.7) 이전의 진화 시대와 마찬가지로 조절자가 계속 오며,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이 필사자들은 갈수록 더 깃드는 아버지 분신(分身)과 교통할 수 있다. 초기에 영(靈) 이전의 발전 단계에는 보조 지성 영들이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 안정된 생명의 연속된 여러 시기를 거침에 따라서, 성령 그리고 천사들이 베푸는 봉사는 더욱 효과 있게 된다. 빛과 생명의 제4 단계에서, 상급 필사자는 초우주를 관할하는 으뜸 영의 영 계심과 의식하면서 접촉을 상당히 가지는 듯하다. 한편 그러한 세계의 철학은 최상위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를 이해하려는 시도에 집중된다. 이 상급 지위를 가진 행성에서, 인간 거주자 중에서 반이 넘게, 살아 있는 자 가운데에서 상물질 상태로 변신하는 것을 체험한다. 그렇다 해도 “낡은 것들이 지나가고 있으니, 보라, 만물이 새롭게 되고 있도다.”
55:6.5 (631.1) 우리는 빛과 생명 시대에 제5 시기의 끝이 되면 신체의 진화가 완전히 성숙했으리라 상상한다. 진화하는 인간 지성과 관련된 영적 발전의 상한(上限)은 상물질 가치 기준과 우주 의미를 깨닫는 수준, 조절자와 융합하는 수준으로 결정되는 것을 우리는 관찰한다. 그러나 지혜에 관하여 말하면, 정말로 모르지만, 지적 진화와 지혜가 도달하는 수준에 결코 한계가 있을 수 없다고 우리는 추측한다. 제7 단계의 세계에서, 지혜는 물질의 가능성을 소모하고 상지혜 통찰력에 이를 수 있으며, 궁극에는 초한의 위대함도 맛볼 수도 있다.
55:6.6 (631.2) 높이 진화되고 오래 된 이 제7 단계의 세계에서, 우리는 인간이 변신하기 전에 지역 우주 언어를 충분히 배우는 것을 관찰한다. 아반돈터가 나이 든 필사자들에게 초우주의 말을 가르치고 있는, 아주 오래 된 몇몇 행성을 나는 찾아본 적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에서, 초한 성격자들이 상물질 성전에서 최후자들의 풍채를 드러내는 기법을 본 적이 있다.
55:6.7 (631.3) 이것이 진화 세계에서 필사자가 분투하여 얻으려는 훌륭한 목표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인간이 상물질 생애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 모두가 일어난다. 사람 사는 세계에서 물질적 필사자는 이 모든 찬란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으며, 그런 달성은 파라다이스로 올라가고 신성에 도달하는, 끝없고 이해할 수 없는 그 생애에 바로 첫 단계이다.
55:6.8 (631.4) 그러나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제7 시기에 오랫동안 존재한 세계들로부터 어떤 종류의 진화하는 필사자가 지금 출현하는가 너희가 과연 상상할 수 있을까? 자기의 하늘 가는 생애를 시작하려고, 지역 우주의 상물질 세계들로 계속 가는 것은 이와 같은 존재들이다.
55:6.9 (631.5) 어수선한 유란시아의 필사자가 빛과 생명 속에 오랫동안 안정된, 이 상급 세계 중 하나를 구경할 수만 있다면, 결코 다시 진화적 창조 계획이 얼마나 지혜로운가 의문을 더 가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영원히 진보하는 미래가 없더라도 여전히, 완전에 도달한 그러한 안정된 세계에서 필사 민족들이 훌륭하게 진화로 달성한 것은 시공의 여러 세계에서 사람을 창조한 것을 정당화하고 남을 것이다.
55:6.10 (631.6) 우리는 가끔 숙고해 본다: 대우주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다고 하면, 하늘 가는 사랑스러운 필사자들은 여전히 최후 군단으로 가도록 운명이 정해질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모른다.
55:7.1 (631.7) 이 시기는 새 행성 본부에서 상물질 성전이 출현하는 때부터, 체계 전체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될 때까지 연장된다. 삼위일체의 교육 아들들이 그들의 연속된 세계 임무가 끝날 때 이 시대를 개시하며, 그때 그 구체의 파라다이스 수여 아들의 명령으로, 그리고 그가 몸소 계심으로, 행성 영주는 행성 군주의 지위로 승급된다. 이와 동시에, 최후자는 행성 사무에 활발하게 참여하기 시작한다.
55:7.2 (632.1) 바깥으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보면,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그러한 세상의 실제 통치자나 지도자는 물질 아들과 딸, 곧 행성의 아담과 이브이다. 최후자는 사람 눈에 보이지 않으며, 상물질 성전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 영주나 군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행성 체제의 실제 우두머리, 글자 그대로의 우두머리는 물질 아들과 딸이다. 우주 영역에 두루, 왕과 여왕 관념에 위신을 준 것은 사람들이 이 조치를 알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상적 상황에서 왕과 여왕은 대성공이다. 그런 경우에 한 세계는 그러한 높은 성격자들에게, 더 높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통치자들을 대표하여 행동하라고 명할 수 있다.
55:7.3 (632.2) 너희 세계가 그러한 시대에 도달했을 때, 의심할 여지 없이, 지금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 대관, 마키벤타 멜기세덱은 행성 군주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놀라시아덱 최고자들의 피보호자로서 에덴시아에 지금 붙잡혀 있는 유란시아 아담과 이브의 한 아들과 딸이 그를 동반하리라고 예루셈에서 오랫동안 추측해 왔다. 아담의 이 아이들은 멜기세덱 군주와 손잡고 그렇게 유란시아에서 근무할지 모르는데, 이는 에덴시아로 이동할 준비를 위하여 유란시아에서 물질 몸을 버렸을 때, 거의 37,000년 전에, 그들이 번식 능력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55:7.4 (632.3) 이 안정된 시대는 그 체계에서 사람 사는 세계들이 모두 안정된 시대에 이를 때까지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그리고 나서, 가장 연륜이 짧은 세계가―빛과 생명을 마지막으로 이룩하는 세계가―체계 시간으로 1천 년 동안 그러한 안정을 겪었을 때, 그 체계 전체가 안정된 상태로 들어가며, 개별 세상은 빛과 생명 시대의 체계 시기로 진입하게 된다.
55:8.1 (632.4) 한 체계 전부가 생명 속에 안정될 때, 새로운 체제의 정부가 개시된다. 행성 군주들은 체계 회의의 구성원이 되며, 이 새 행정부는 최고의 권한을 가졌지만, 별자리 아버지들의 거부권에 지배된다. 사람 사는 세계들로 이루어진 그러한 체계는 실질적으로 자치한다. 체계의 입법 집회가 본부 세계에서 구성되며, 각 행성은 거기에 10명의 대표를 보낸다. 재판소가 이제 체계의 여러 서울에 설립되고, 오로지 상소(上訴)만 우주 본부에 넘겨진다.
55:8.2 (632.5) 체계가 안정되면서, 지정된 파수, 곧 초우주 최상 집행자의 대표는 체계의 최고 법정에게 자원하는 조언자가 되고, 새 입법 집회를 실제로 주관하는 관리가 된다.
55:8.3 (632.6) 한 체계 전부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뒤에, 체계 군주들은 이제 더 바뀌지 않는다. 그러한 군주는 그 체계의 우두머리로서 영구히 남는다. 조군주(助君主)들은 이전 시대에서 하던 것처럼 계속해서 바뀐다.
55:8.4 (632.7) 이 안정된 시기에, 처음으로 중간 한계자가 입법 집회에 상담자로서, 그리고 재판하는 법정에 조언자로서 행동하려고, 그들이 머무르는 우주의 본부 세계들로부터 온다. 이 중간 한계자들은 또한 최후자들과 함께 합동으로 후원하는 교육 사업에, 최상의 가치를 가진 새로운 상지혜 의미를 불어넣도록, 어떤 노력을 계속한다. 물질 아들들이 필사 민족들을 위하여 생물학적으로 행한 일을 이제 중간 한계 생물이 늘 진보하는, 철학과 영적으로 변화된 생각의 분야에서, 단결하고 영화롭게 된 이 인간들을 위하여 행한다.
55:8.5 (633.1)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교육 아들들은 최후자와 함께 일하는 자원자가 된다. 그리고 바로 이 교육 아들들은 또한, 한 체계 전체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뒤에, 그 구체들이 다른 영접 세계로 더 이상 이용되지 않을 때, 여러 저택 세계까지 최후자들을 동반한다. 그 별자리 전체가 이처럼 진화했을 때가 되면 적어도 이것이 참말이다. 그러나 네바돈에는 그만큼 멀리 진보한 집단이 없다.
55:8.6 (633.2) 우리는 그렇게 다시 봉헌된 저택 세계들을 감독할 최후자들이 어떤 성질의 일을 하는가 밝히도록 허락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우주에 두루, 이 여러 이야기에서 묘사되지 않은, 여러 부류의 지적 생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너희는 들었다.
55:8.7 (633.3) 이제, 체계들이 그 구성 세계들이 진보하는 덕분으로 하나하나 빛 속에서 안정됨에 따라서, 한 주어진 별자리에서 마지막 체계가 안정될 때가 온다. 최고자들이 사람 사는 세계들로 이루어진, 안정된 1백 체계, 새로 완전하게 된 집단의 무제한 통치자라 선포하려고, 우주 행정자들―주 아들, 늘 하나된 이, 밝은 아침별―이 별자리의 서울에 도착한다.
55:9.1 (633.4) 안정된 체계들로 이루어진 한 별자리 전체가 통일되면 집행 권한을 새로이 분배하고 추가로 우주 행정을 조정하는 일이 뒤따른다. 이 시기는 사람 사는 모든 세계에서 상급의 달성을 구경하지만, 그 특징은 체계의 감독 및 지역 우주 정부와 가지는 관계를 뚜렷이 조정함과 아울러, 특별히 별자리 본부에서 재조정이 생기는 것이다. 이 시대에 별자리 및 우주의 많은 활동은 체계의 서울로 옮겨지며, 초우주 대표자들은 행성, 체계 및 우주 통치자들과 새롭고 더욱 밀접한 관계에 들어간다. 이 새로운 관계와 동시에, 어떤 초우주 행정가들은 별자리의 서울에서, 최고 아버지들에게 자원하는 봉사자로서 자리를 잡는다.
55:9.2 (633.5) 한 별자리가 이처럼 빛 속에 안정될 때, 입법 기능이 정지되며, 최고자들이 주관하는 체계 군주들의 하원(下院)이 대신 활동한다. 이제, 처음으로, 그러한 행정 집단이 하보나 및 파라다이스 관계에 대한 문제에서, 초우주 정부를 직접 상대한다. 이밖에 별자리와 지역 우주의 관계는 전과 같다. 생명이 안정된 한 단계로부터 다른 단계로, 일생자들은 별자리의 여러 상물질 세계에게 계속 봉사를 베푼다.
55:9.3 (633.6)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서, 별자리 아버지들은 예전에 우주 본부에 집중되었던, 자세한 행정이나 감독하는 기능을 더욱 떠맡는다. 안정기의 제6 단계에 이를 때까지, 이 통일된 별자리들은 거의 완벽한 자치 상태에 이르렀을 것이다. 안정기의 제7 단계에 들어가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 통치자들이 자기 이름 최고자가 가리키는 참된 품위까지 높아지는 것을 구경할 것이다. 모든 의도와 목적으로 볼 때, 별자리들은 그때 초우주 통치자들과 직접 상대하며, 한편 지역 우주 정부는 대우주에 대하여 새 의무를 지는 책임을 확보하려고 확대될 것이다.
55:10.1 (634.1) 한 우주는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될 때, 설립된 초우주 회로 속으로 곧 들어가며,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은 무제한 권한을 가진 최고 회의가 확립되는 것을 선포한다. 이 새로운 통치 기구는 늘 충실한 이 1백명으로 이루어져 있고, 늘 하나된 이가 이를 주관한다. 이 최고 회의의 첫 행위는 주 창조 아들의 계속된 군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55:10.2 (634.2) 가브리엘과 아버지 멜기세덱이 관계된 한, 우주 행정은 별로 바뀌지 않는다. 무제한 권한을 가진 이 회의는 빛과 생명의 상급 지위에서 생기는 새로운 문제와 조건에 주로 관여한다.
55:10.3 (634.3) 부검열자는 이제 지역 우주의 안정 군단을 구성하려고 지정된 파수를 모두 동원하며, 아버지 멜기세덱에게 자기와 함께 그 감독을 맡기를 요청한다. 그리고 이제, 처음으로, 영감 받은 삼위일체 영들의 군단이 늘 하나된 이의 근무에 배치된다.
55:10.4 (634.4) 한 지역 우주 전체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는 것은 행정 계획 전체에서, 사람 사는 개별 세계로부터 우주 본부에 이르기까지, 깊은 재조정을 개시한다. 새로운 관계가 아래로 별자리와 체계들까지 연장된다. 지역 우주의 어머니 영은 초우주의 으뜸 영과 새로운 연락 관계를 체험하며, 주 아들이 본부 세계에서 자리를 비울 때, 그런 동안에 효력을 가지도록 가브리엘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과 직접 연락을 개시한다.
55:10.5 (634.5) 이 시대와 뒤잇는 시대에, 심판 아들들은 섭리 시대의 재판자로서 줄곧 활동하며, 한편 이 파라다이스 아보날 아들 1백 명은 우주 서울에서 밝은 아침별의 새 최고 회의를 구성한다. 나중에, 체계 군주들이 요청을 받고서, 이 심판 아들 중에 하나가, 제7 단계의 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각 지역 체계의 본부 세계에서 주둔하는 최상 조언자가 될 것이다.
55:10.6 (634.6) 이 시기에 삼위일체의 교육 아들들은 행성 군주에게 자원 조언자일 뿐 아니라, 3명씩 무리를 지어 별자리 아버지들에게 비슷하게 봉사한다. 마침내 이 아들들은 지역 우주에서 그들의 자리를 찾는데, 왜냐하면 이때 그들이 지역 부서의 관할로부터 옮겨지고 무제한 권한을 가진 최고 회의(會議)에 근무하도록 배치되기 때문이다.
55:10.7 (634.7) 최후자 군단은 이제, 처음으로, 파라다이스 바깥의 권한, 곧 최고 회의의 관할권을 인정한다. 이제까지 최후자들은 파라다이스 이쪽에서 행하는 어떤 감독도 인정하지 않았다.
55:10.8 (634.8) 그러한 안정된 우주의 창조 아들은 파라다이스 및 관계된 세계에서, 그리고 수많은 최후자 집단과 상담하는 데 시간을 많이 보내는데, 최후자들은 지역 창조 전역에서 근무한다. 이 방법으로 인간 미가엘은 영화롭게 된 필사 최후자들과 더욱 충만한 친교 관계를 발견할 것이다.
55:10.9 (634.9) 지금 예비로 집결하는 과정에 있는 바깥 우주들과 관련하여, 이 창조 아들들이 무슨 역할을 할 것인가에 관한 추측은 완전히 무익하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때때로 그러한 가상(假想)에 빠진다. 이 제4 발전 단계에 이르고 나서, 창조 아들은 행정 면에서 자유롭게 된다. 신성한 봉사자는 그의 봉사를 초우주의 으뜸 영 및 무한한 영의 봉사와 점진적으로 섞는다. 창조 아들, 창조 영, 저녁별, 교육 아들들, 그리고 항상 늘어나는 최후자 군단 사이에 새롭고 탁월한 관계가 생성되는 듯하다.
55:10.10 (635.1) 미가엘이 네바돈을 언제라도 떠난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가브리엘은 최고 행정관이 되고, 아버지 멜기세덱은 그의 동료가 될 것이다. 동시에, 물질 아들, 일생자(一生者), 중간 한계자, 수사시아, 영 융합 필사자와 같은, 온갖 계급의 영구 시민에게 새로운 지위가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진화가 계속되는 한, 세라핌과 천사장들은 우주 행정에서 필요할 것이다.
55:10.11 (635.2) 그러나 우리의 추측은 두 가지 면에 만족스럽다. 창조 아들들이 바깥 우주들로 가도록 정해져 있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신성한 봉사자들이 따라갈 것이다. 우리는 멜기세덱들이 기원이 있는 우주에 남을 것이라고 똑같이 확신한다. 우리는 지역 우주 정부와 행정에서 멜기세덱들이 언제나 늘어나는 책임을 가진 역할을 하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본다.
55:11.1 (635.3) 초우주의 소구역 및 대구역은 빛과 생명 속에 안정시키는 계획에 직접 계산되지 않는다. 그렇게 진화로 진보하는 것은 1차적으로, 한 단위로서 지역 우주에 관계되며, 오로지 한 지역 우주의 구성 분자들의 관심거리이다. 한 초우주는 그에 속하는 모든 구성 분자인 지역 우주들이 그처럼 완전하게 될 때,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다. 그러나 일곱 초우주 가운데 하나도 이 근처에 미치는 수준의 진보도 이룩하지 못했다.
55:11.2 (635.4) 소구역 시대. 관찰로 꿰뚫어 볼 수 있는 한, 제5 단계, 곧 소구역 단계의 안정은 순전히 물리적 상태에, 그리고 초우주의 확정된 회로에서, 관계된 1백 지역 우주가 나란히 안정되는 것과 상관있다. 동력 중심과 그 동료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물질 창조를 이렇게 다시 정렬하는 데 관여하지 않는 듯하다.
55:11.3 (635.5) 대구역 시대. 제6 단계, 곧 대구역의 안정에 관해서, 우리는 오로지 짐작만 할 뿐인데, 우리 가운데 아무도 그러한 사건을 구경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마도 그러한 상급 지위를 가진 사람 사는 세계들과 그 우주 집합에 따를 행정 및 기타 재조정에 관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가정해 볼 수 있다.
55:11.4 (635.6) 소구역 지위는 나란히 물리적 균형을 얻는 것과 상관이 있으니까, 대구역의 통일은 어떤 새로운 지적 수준의 달성, 그리고 아마도 우주 지혜를 최상으로 실현함으로 어떤 높은 목표를 성취하는 것과 관계될 것이라 우리는 추측한다.
55:11.5 (635.7) 이제까지 진화적 진보로 이룩하지 못한 수준을 실현하는 데 어떤 재조정이 혹시 따를 것인가에 관하여 결론을 내리는 방법은 개별 세계에서, 또 더 오래 되고 상당히 발전된 이 구체들에서 사는 개별 필사자의 체험에서, 그러한 업적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살펴보는 것이다.
55:11.6 (635.8) 한 우주나 초우주의 행정 작용과 통치 기술은, 사람이 사는 한 개별 행성, 또는 그러한 구체에 있는 어떤 개별 필사자의 진화적 발전이나 영적 진보를 어떤 방법으로도 제한하거나 늦출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자.
55:11.7 (635.9) 더 오래 된 어떤 우주에는, 빛과 생명의 제5 및 제6 단계에 있는―아니 제7 시기에 깊숙이 들어간―안정된 세계들이 있지만, 그 지역 체계들이 아직 빛 속에 안정되지 않았음을 우리는 발견한다. 연륜이 짧은 행성들은 그 체계의 통일을 늦출지 모르지만, 이것은 더 오래 된 상급 세계의 진보에 조금이라도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환경의 한계도, 고립된 세계라도, 개별 필사자의 개인적 달성을 막을 수 없다. 나사렛 예수는, 사람들 사이에 한 사람으로서, 유란시아에서 1천9백여년 전에, 빛과 생명의 지위를 개인적으로 성취했다.
55:11.8 (636.1) 일곱 초우주가 안정되는 사건을 우리가 안전하게 가정할 수 없더라도, 오랫동안 안정된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지켜봄으로, 한 초우주 전체가 빛 속에 안정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관하여 상당히 믿을 만한 결론에 이른다.
55:12.1 (636.2) 한 초우주가 빛 속에 안정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분명하게 예측할 수 없는데, 이는 그러한 사건이 결코 사실이 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 번도 반박을 받은 적이 없는 멜기세덱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우리는 사람 사는 세계로부터 초우주 본부에 이르기까지 시공 창조의 모든 단위의 조직 및 행정 전체에, 대규모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추론한다.
55:12.2 (636.3) 달리 어디엔가 소속되지 않은, 사람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들의 큰 무리가 안정된 초우주의 본부 및 분과 서울에서 집결되리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하보나와 파라다이스로 가는 길에 바깥 공간에서 온 자들이 언젠가 도착할 것을 예측해서 그런가 싶지만, 우리는 정말 모른다.
55:12.3 (636.4) 한 초우주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다면, 그럴 때, 지금은 고문 자격인 최상위의 무제한 감독자들이 초우주의 본부 세계에서 높은 행정부가 되리라고 우리는 믿는다. 이들은 안정된 초우주에서 당장에 활동하게 될 초한(超限) 행정자들과 바로 접촉할 수 있는 성격자이다. 이 무제한 감독자들은 비록 오랫동안 조언자와 상담자로서, 상급의 진화된 창조 단위에서 활동해 왔지만, 그들은 최상 존재가 군주 권한을 가질 때까지 행정 책임을 맡지 않는다.
55:12.4 (636.5) 이 시기에 더 널리 활동하는 최상위의 무제한 감독자들은 유한하거나, 초한하거나, 궁극이거나, 무한하지 않다. 그들은 최상이며, 오로지 최상위 하나님을 대표한다. 그들은 시공 세계의 최상이 성격화된 것이며, 따라서 하보나에서는 활동하지 않는다. 오로지 최상의 통일자로서 활동한다. 그들은 아마도 우주의 반영 기법에도 관계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확실치 않다.
55:12.5 (636.6) 우리 가운데 아무도, 대우주가 (하보나에 의존하는 일곱 초우주가) 전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에 대하여 만족한 개념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사건은 중앙 창조가 나타난 뒤로, 영원의 연대기(年代記)에서 가장 심오한 사건일 것이다. 최상 존재 스스로가 그의 영 몸을 가리는 하보나의 신비로부터 솟아나고, 시간과 공간에서 완전하게 된 창조들을 다스리는 전능한 체험적 군주로서, 일곱째 초우주의 본부에 거하게 되리라는 견해를 가진 자들이 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는 모른다.
56:0.1 (637.1) 하나님은 하나됨이요, 신은 보편적으로 조정되어 있다. 온 우주는 하나의 광대한 통합된 장치이며, 하나의 무한한 지성이 이를 절대로 통제한다. 우주 창조의 물리적ㆍ지적ㆍ영적 영토는 신성하게 관련되어 있다. 완전한 자와 불완전한 자는 참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유한한 진화 인간은 “내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는 우주의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해서, 파라다이스까지 올라가도 좋다.
56:0.1 (637.1) 하나님은 하나됨이요, 신은 보편적으로 조정되어 있다. 온 우주는 하나의 광대한 통합된 장치이며, 하나의 무한한 지성이 이를 절대로 통제한다. 우주 창조의 물리적ㆍ지적ㆍ영적 영토는 신성하게 관련되어 있다. 완전한 자와 불완전한 자는 참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유한한 진화 인간은 “내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는 우주의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해서, 파라다이스까지 올라가도 좋다.
56:0.2 (637.2) 총우주 건축가들의 계획과 행정에서 창조의 다양한 수준은 모두 통일된다. 시공 필사자의 제한된 생각에는, 겉보기에 부조화를 나타내고 효과 있게 조정되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많은 문제와 상황을 우주가 제시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서 더 넓은 지대의 우주 현상을 살펴볼 수 있고 창조적 다양성 밑에 깔려 있는 기초적 통일성을 탐지하고, 다수의 이러한 모든 활동을 지배하는, 신의 통일성을 발견하는 이 기술에 경험이 많은 자는, 보편적 창조 에너지의 명시, 이 모든 다채로운 명시에서, 신성하고 유일한 목적을 더 잘 파악한다.
56:1.1 (637.3) 물리적 창조, 곧 물질 창조는 무한하지 않지만 완전히 조정된다. 물력ㆍ에너지ㆍ동력이 있지만, 이 모두가 같은 기원을 가졌다. 일곱 초우주는 겉보기에 2중이며, 중앙 우주는 3중이지만, 파라다이스는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파라다이스는 모든―과거ㆍ현재ㆍ미래―물질 우주의 실제 근원이다. 그러나 우주가 이렇게 유래한 것은 영원에 생긴 사건이며, 어느 시간에도―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도―공간이나 물질 우주가 중앙의 빛의 섬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우주의 근원으로서, 파라다이스는 공간보다 이전에, 시간 이전에 작용한다. 따라서 거기서 나온 파생물은 무제한 절대자를 통해서 솟아나지 않는다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버림받은 듯하다. 이 무제한 절대자는 공간에서 이 파생물이 있는 궁극의 저장소요, 세월 속에서 그 파생물을 드러내고 규제하는 자이다.
56:1.2 (637.4) 무제한 절대자는 물리적 우주를 떠받들고, 신 절대자는 모든 물질적 실체의 절묘한 전반적 통제를 유도한다. 우주 절대자가 이 두 절대자를 기능적으로 통일한다. 어떤―물질, 상물질, 초한 또는 영―성격자도 모든 진정한 물질적 실체가 아래 파라다이스에 집중하는 인력(引力)에 대하여 어떤 인력 반응을 보이는가 살펴봄으로, 물질 우주에서 응집하는 이 상호 관계를 최선으로 이해한다.
56:1.3 (638.1) 인력의 통일은 보편적이며 변하지 않는다. 순수 에너지의 반응은 마찬가지로 보편적이고 불가피하다. 순수 에너지(원시 물력)와 순수 영은 인력보다 온전히 먼저 작용한다. 절대자들 안에서 본래부터 생기는 이 원시(原始) 물력을 우주의 아버지가 친히 통제한다. 따라서 모든 인력은 순수 에너지와 순수 영인 파라다이스 아버지가 몸소 계신 앞에, 그의 초물질 거처에 집중된다.
56:1.4 (638.2) 순수 에너지는, 상대적이고 기능적인 모든 비영(非靈) 실체의 조상(祖上)이며, 한편 순수 영은 모든 기본 에너지 체계를 신이 지휘하는 통제력의 잠재성이다. 공간에 두루 나타나고 시간의 움직임에서 관찰되는 무척 다양한 이 두 가지 실체는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몸에 집중된다. 하나님은 하나이니까, 그분 안에서 이 실체들은 하나이다―통일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성격은 절대로 통일되어 있다.
56:1.5 (638.3) 아버지 하나님의 무한한 성품에는 물리적 실체와 영적 실체와 같은, 두 가지 실체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무한한 수준으로부터,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성격 가치의 무한 수준과 절대 실체를 피하여 옆을 보는 순간, 우리는 이 두 가지 실체가 존재함을 지켜보며, 그 실체들이 그의 몸소 계심에 충분히 민감한 것을 깨닫는다. 아버지 안에 만물이 존재한다.
56:1.6 (638.4) 너희가 파라다이스 아버지가 무한한 성격이라는 무조건의 개념을 벗어나는 순간, 지성이, 최초의 단일성(單一性) 창조자인 성격자, 곧 첫째 근원 중심―스스로 계신 이―의 이러한 두 가지 우주 명시가 항상 널리 확산되는 것을 통일하는 불가피한 기법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56:2.1 (638.5) 생각인 아버지는 말씀인 아들 속에서 영의 표현을 실현하며, 방대한 여러 물질 우주에서 파라다이스를 통하여 실체의 확장을 달성한다. 영원한 아들의 영적 표현은 무한한 영의 기능으로 인하여, 창조의 여러 물질 수준과 서로 관련된다. 무한한 영이 베푸는, 영에 민감한 지성이 수고함으로, 그의 지성의 물리적이고 지도하는 행위 속에서, 신의 영적 실체와 신의 물질적 영향이 서로 연결된다.
56:2.2 (638.6) 지성은 무한한 영의 기능적 재산이며, 따라서 잠재성이 무한하고 보편적으로 수여된다. 우주의 아버지가 가진 원초의 생각은 두 가지 표현으로 영원하게 되는데, 하나는 파라다이스 섬이요, 또 그와 대등한 신, 곧 영답고 영원한 아들이다. 그러한 두 가지 영원한 실체는 지성의 하나님, 곧 무한한 영의 존재를 불가피하게 만든다. 지성은 영적 실체와 물질적 실체 사이에 필수 통신 경로이다. 물질적인 진화 인간은 오로지 지성의 보살핌으로 인하여, 깃드는 영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다.
56:2.3 (638.7) 시공 우주에서는 무한하고 보편적인 이 지성이 우주 지성으로서 베풀어진다. 이 지성은 보조 영들이 베푸는 원시적 봉사로부터 한 우주의 최고 집행자의 웅대한 지성에 이르기까지 연장되지만, 이 우주 지성조차 일곱 으뜸 영의 감독 하에서 알맞게 통일된다. 이 으뜸 영들은 다시 시공의 최상 지성과 조정되며, 무한한 영의 지성, 만물을 감싸는 지성과 완전히 서로 연결된다.
56:3.1 (639.1) 무한한 영이 파라다이스에 몸소 계신 곳에 보편적 지성 인력이 집중되는 것 같이, 보편적 영 인력은 파라다이스에 영원한 아들이 몸소 계신 곳에 집중된다. 우주의 아버지는 하나이지만, 시공에 대해서 그는 순수 에너지와 순수 영, 이 두 가지 현상으로서 드러난다.
56:3.2 (639.2) 파라다이스의 영 실체들은 마찬가지로 하나이지만, 시공의 모든 상황 및 관계에서 이 단일 영은 영원한 아들의 영 성격자 및 방사물, 그리고 무한한 영 및 관계된 창조들에 있는 영 성격자들과 영향, 이 두 가지 현상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아직 셋째가―순수 영 분신―곧 선(先)인격인 생각 조절자와 기타 영 개체가 있다.
56:3.3 (639.3) 우주 활동의 어떤 수준에서 너희가 영적 현상과 마주치거나, 또는 영 존재들과 접촉하거나 상관 없이, 영 아들과 무한한 지성 영이 베푸는 봉사로 말미암아, 이런 것들이 모두 영인 하나님으로부터 파생된다는 것을 너희가 알지도 모른다. 이 광범위한 영은 지역 우주 본부에서 지시하는 대로, 진화하는 시간 세계에서 생기는 현상으로서 작용한다. 이 창조 아들의 서울로부터, 보조 지성 영들이 베푸는 봉사와 함께, 성령과 진리의 영이 진화하는 하급 수준의 물질 지성에게 온다.
56:3.4 (639.4) 최상 존재와 관련하여, 절대 지성에게 복종하는 우주 지성으로서, 지성은 으뜸 영의 수준에서 더 통일되어 있지만, 진화 세계에게 베푸는 영의 봉사는 지역 우주 본부에서 거주하는 성격자들 안에서, 그리고 주관하는 신성한 봉사자의 몸 속에서, 더 직접 통일되어 있다. 신성한 봉사자들은 다시 영원한 아들의 파라다이스 인력 회로와 거의 완전히 상관되며, 거기서 시공에서 나타나는 영의 명시가 최종으로 통일된다.
56:3.5 (639.5) 자의식하는 지성이,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어느 한 분의 자질, 삼위일체 이전의 영 자질의 분신과 융합함으로, 사람은 완전해진 인간 존재에 도달할 수 있고, 이를 지원하고, 영원하게 만들 수 있다. 필사자의 지성은 영원한 아들의 아들, 그리고 무한한 영의 딸이 창조한 것이며, 아버지로부터 온 생각 조절자와 융합되었을 때, 진화 영역의 세 가지 영 자질을 취한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영 표현이, 우주의 스스로 계신 이가, 일찍이 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의 우주의 아버지가 되기 전에 자신 안에서 영원 속에 통일된 것 같이, 이러한 표현도 최후자 안에서 완전히 통일된다.
56:3.6 (639.6) 영은 언제나, 궁극에 세 가지로 표현되어야 하고, 마침내 실현되었을 때 삼위일체가 이를 통일해야 한다. 영은 한 근원으로부터 세 가지 표현을 통해서 생긴다. 신과 하나된 가운데 영은 최종으로 충만히 실현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하며, 하나님을 발견하면서―신과 하나된 상태로―영원 속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우주적 생각을 영원한 말씀으로 무한히 표현하는, 그 우주 지성이 봉사하는 수단으로, 영은 이 신의 통일성을 체험한다.
56:4.1 (639.7) 우주의 아버지는 신답게 통일된 성격이다. 따라서 생각 조절자의 되돌아오는 힘으로 파라다이스로 옮겨지는, 하늘 가는 자녀들은 모두, 하보나에 이르기 전에 마찬가지로 충분히 통일된 인격이 될 터이고, 조절자는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하여 물질인 필사자에게 깃들려고 파라다이스를 떠났다.
56:4.2 (640.1) 성격은 본래부터, 그를 구성하는 모든 실체를 통일하려고 손을 뻗는다. 첫째 근원 중심, 우주의 아버지의 무한한 성격은 구성 요소인 일곱 무한 절대자를 모두 통일한다. 필사 인간의 성격은, 우주의 아버지가 독점으로 직접 수여한 것이니까, 필사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통일하는 잠재성을 마찬가지로 소유한다. 모든 인간 성격의 그러한 통일하는 창조성은 그 성격의 높고 순전한 근원을 가리키는 출생 표시이며, 성격 회로를 통해서 바로 이 근원과 단절되지 않고서 접촉하는 것을 더욱 증거한다. 이 성격 회로의 방법으로 사람의 인격은 파라다이스에 계신, 모든 성격의 아버지와 직접, 오래 가는 접촉을 유지한다.
56:4.3 (640.2) 칠중자의 영토로부터 최상위와 궁극위를 거쳐서 절대자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명시되는데도, 지적 존재의 모든 수준에, 그리고 완전한 우주, 완전해진 우주, 완전해지고 있는 우주의 온 영역에 있는 모든 성격자가 관계되는 한, 파라다이스에, 아버지 하나님의 몸에 집중되는 성격 회로는, 신 성격의 이 모든 다양한 표현을 완벽하게, 완전히 통일한다.
56:4.4 (640.3) 하나님은 여러 우주에 대하여, 여러 우주 안에서, 우리가 묘사한 모든 것이지만, 그런데도 너희에게, 또 하나님을 아는 모든 다른 인간에게, 그는 하나요, 너희의 아버지요, 그들의 아버지이다. 성격자에게 하나님은 여럿일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 각자에게 아버지이며, 어떤 아이라도 아버지를 하나 이상 가지는 것은 글자 그대로 불가능하다.
56:4.5 (640.4) 철학적으로, 우주적으로 볼 때, 명시되는 다른 수준 및 위치와 관련하여, 너희는 여러 신들이 활동하는 것을 상상해도 좋고, 또 어쩔 수 없이 상상해야 하며, 여러 가지 삼자일체의 존재를 가정해야 한다. 그러나 총우주 전역에 걸쳐서, 신을 예배하는 모든 성격자가 몸소 접촉하는 예배 체험 속에서, 하나님은 하나이다. 통일되고 성격을 가진 그 신이 우리의 파라다이스 부모요, 아버지 하나님이요, 사람 사는 세계의 필사 인간으로부터 가운데 빛의 섬에 계신 영원한 아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격을 수여하고 보존하는 분이요 아버지이다.
56:5.1 (640.5) 파라다이스 신이 하나인 성질, 불가분성은 실존적이고 절대적이다. 신은 세 분―우주의 아버지, 영원한 아들, 무한한 영―으로 영원히 성격화되지만,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안에서 세 분은 실제로 하나의 신이며, 갈라져 있지 않고 불가분하다.
56:5.2 (640.6) 최초의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수준의 실존적 실체로부터, 절대 이하의 두 수준이 분화되었는데, 그 뒤에 아버지ㆍ아들ㆍ영은 성격을 가진 수많은 동료와 하위 존재들을 창조하는 일에 들어갔다. 이러한 맥락에서, 초월적 궁극 수준에서 초한적 신의 통일을 고려하려고 애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로 성격화된 신의 통일 기능의 어떤 모습을 보는 것이 가능하며, 다양한 창조 구역들에 대하여, 그리고 다른 계급의 지적 존재들에 대하여, 그러한 성격화된 모습에 신(神)이 기능적으로 분명히 나타난다.
56:5.3 (640.7) 여러 초우주에서 신이 현재 하는 활동은 최상 창조자들―지역 우주 창조 아들과 영들, 초우주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 파라다이스의 일곱 으뜸 영―의 작용에서 활발하게 나타난다. 이 존재들은 칠중 신의 처음 세 수준을 구성하며, 이것은 안으로 우주의 아버지께로 이끌며, 이 칠중 신의 영토 전체가 진화하는 최상 존재 안에서 체험적 신의 첫째 수준에서 조정되고 있다.
56:5.4 (641.1) 파라다이스에서, 그리고 중앙 우주에서, 신의 통일성은 존재하는 사실이다. 시공의 진화하는 여러 우주 전역에 걸쳐서, 신의 통일성은 하나의 성취할 목표이다.
56:6.1 (641.2)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안에서 갈라지지 않은 신으로서, 영원한 신 세 분이 활동할 때, 그들은 완전히 통일된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연합하여, 또는 따로따로 창조할 때, 그들의 파라다이스 자손은 그 특징인 신의 통일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시공 영토를 다스리는 최상 창조자이자 통치자들이 명백히 드러내는 이 신성한 목적은 궁극에 체험적으로 최상인, 군주의 통일하는 동력 잠재성이 된다. 그 잠재성은 실체의 긴장을 일으키며, 이것은 우주의 비성격 에너지가 통일된 가운데, 오로지 체험적 신의 체험하는 성격 실체들과 적절히 통일함으로 해결될 수 있다.
56:6.2 (641.3) 최상 존재의 성격 실체들은 파라다이스 신들로부터 솟아나오며, 하보나의 바깥 회로의 시범 세계에서, 대우주의 창조자인 신들로부터 올라오는 전능 최상위의 동력 특권과 함께 통일된다. 하나의 성격자로서 최상위 하나님은 일곱 초우주가 창조되기 전에 하보나에서 존재했으나 오직 영적 수준에서 활동했다. 진화하는 여러 우주에서 다양한 신의 통합으로 인하여, 전능자가 최상의 동력을 진화하는 것은 궁극에 새로운 동력을 가진 신의 계심이 되었고, 이것은 최상 지성의 수단으로 하보나에 계신 최상위의 영적 몸과 조정되었다. 동시에 이 최상 지성은 무한한 영의 무한한 지성에 거하는 잠재성을, 최상 존재의 활발한 기능적 지성으로 변화시켰다.
56:6.3 (641.4) 일곱 초우주의 여러 진화 세계에서 물질 위주로 생각하는 인간은 오직 최상 존재가 이렇게 동력을 가진 성격자로 통합되면서 진화하는 그러한 신의 통일성을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존재 수준에서도, 하나님은 그러한 수준에서 사는 존재들의 개념 능력을 뛰어넘을 수 없다. 진리를 인식하고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선을 존중함으로, 필사 인간은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길러야 하며, 그리고 나서 높아지는 신 수준을 거쳐서, 최상위를 이해하기까지 진보해야 한다. 신이 이처럼 동력이 통일된 것으로 파악되었으니까, 그리고 나서 신은 사람이 이해하고 도달하도록 영적으로 성격화될 수 있다.
56:6.4 (641.5) 하늘 가는 필사자는 초우주의 서울에서 전능자의 힘을 이해하고, 하보나의 여러 바깥 회로에서 최상위의 성격을 이해하지만, 파라다이스 신들을 발견하도록 예정된 것처럼 실제로 최상 존재를 찾아내지 못한다. 제6 단계 영인 최후자들조차 최상 존재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들이 제7 단계 영의 지위를 얻을 때까지, 그리고 미래의 바깥 우주들이 작용하고 최상위가 실제로 활동하게 될 때까지, 찾아낼 것 같지도 않다.
56:6.5 (641.6) 그러나 우주의 아버지가 칠중 신의 제7 수준인 것을 하늘 가는 자가 발견할 때, 그들은 우주의 생물과 가지는 모든 신 수준의 성격 관계에서 첫째 분의 성격에 다다른 것이다.
56:7.1 (642.1) 시공의 우주에서 진화가 꾸준히 진보하는 데에는 신이 모든 지적 인간에게 주는 계시, 항상 확대되는 계시가 뒤따른다. 한 세계나 체계, 별자리나 우주, 초우주 또는 대우주에서, 진화로 진보하여 높이 도달하는 것은 이 진보적인 여러 창조 단위에 대하여, 그리고 이에 대응하여 거기서 신의 활동이 확대됨을 알린다. 신성의 실현이 그렇게 지역에서 향상될 때마다 뒤이어, 창조의 모든 다른 구역에 대하여 신의 명시의 영향, 윤곽이 분명한 어떤 영향이 확대된다. 파라다이스로부터 바깥으로 뻗으면서, 진화로 실현하고 도달한 새로운 영토는 각기, 체험하는 신이 온 우주에게 주는 새롭고 확대된 계시가 된다.
56:7.2 (642.2) 한 지역 우주의 구성 분자들이 점진적으로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됨에 따라서, 칠중 신은 갈수록 더 명백하게 나타난다. 한 행성에서 시공의 진화는, 지배하는 칠중 신의 첫째 표현―창조 아들과 창조 영의 결합―과 함께 시작된다. 한 체계가 빛 속에 안정되고 나서, 이러한 아들과 영의 연락은 충만히 작용하며, 한 별자리 전체가 이처럼 안정될 때, 칠중 신의 제2 단계가 그러한 영역에서 두루, 더 활발하게 된다. 한 지역 우주에서 행정부의 진화가 완결되면 초우주의 으뜸 영들이 새로이, 직접 더 보살피는 일이 뒤따른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칠중 신의 늘 확대되는 계시와 실현이 또한 시작되며, 이것은 여섯째 하보나 회로의 세계들을 통과하는 동안 승천자가 최상 존재를 이해하는 높이까지 이른다.
56:7.3 (642.3) 우주의 아버지, 영원한 아들, 무한한 영은 실존적 신이 지적 생물에게 명시되는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모든 창조에 있는, 지성 생물 및 영 생물과 개인적 관계에서 비슷하게 확대되지 않는다.
56:7.4 (642.4) 이 신들을 개인적 존재로서 체험으로 몸소 인식하고 그들과 접촉하기 위하여, 하늘 가는 필사자가 충분히 영적으로 변화되고 적절히 교육받기 훨씬 전에, 이 필사자들은 연속되는 신 수준의 비영적(非靈的) 계심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56:7.5 (642.5) 창조된 한 구역 안에서 새로운 진화적 달성이 있을 때마다, 신성(神性)의 명시가 공간을 새로이 침입할 때마다, 뒤이어 당시에 존재하고 예전에 조직된 모든 창조 단위 안에서 신의 기능적 계시가 동시에 확장된다. 우주와 그 구성 단위들의 행정 작업이 이렇게 새로이 침입하는 것은, 여기에 윤곽을 제시한 기법 그대로 집행되는 것처럼 반드시 보이지 않을지 모른다. 이는 행정을 통제하는 차후의 연속되는 새 시대를 위하여 길을 예비하려고 전위(前衛) 행정자 집단을 보내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궁극위 하나님조차 한 지역 우주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후기 단계에, 그가 초월적으로 우주를 전반적으로 통제한다는 것을 미리 예시한다.
56:7.6 (642.6) 여러 시공 창조의 진화적 지위가 점진적으로 안정됨에 따라서, 최상위 하나님의 새롭고 더 충만한 활동이 관찰되는 것이 하나의 사실이며, 이에 상응하여 동시에 칠중 신의 처음 세 가지 명시가 철수(撤收)된다. 대우주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면,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최상위 하나님이 이 여러 시공 창조를 직접 통제하는 일을 맡는다면, 칠중 신이 창조 아들 및 창조 딸로 명시되어 과연 미래에 무슨 역할을 할 것인가? 시공의 여러 우주를 조직하고 개척한 이분들은 바깥 우주에서 비슷한 활동을 하도록 해방될 것인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이것을 비롯하여 관계된 문제들에 대하여 우리는 많이 추측해 본다.
56:7.7 (643.1) 체험하는 신의 개척지가 무제한 절대자의 영토로 뻗어나감에 따라서, 우리는 이 미래 창조들의 초기의 진화 시대에 칠중 신이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상상해본다.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과 초우주 으뜸 영들의 미래 지위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하여 우리 모두가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최상 존재가 일곱 초우주에서 한 것처럼 거기서 활동할 것인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창조 아들인 미가엘들이 이 여러 바깥 우주에서 활동하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우리 모두가 추측한다. 더러는 미래 시대에, 연결된 창조 아들과 신성한 봉사자들이 더 가까운 형태로 연합된 것을 구경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창조자 연합이 종국에 궁극의 성질을 가진, 부(副)창조자 신분의 어떤 새로운 표현이 된다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밝혀지지 않은 앞날의 이 여러 가능성에 관하여 우리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
56:7.8 (643.2) 그러나 여러 시공 우주에서 칠중 신이 우주의 아버지께 도달하는 점진적 접근법을 마련해 준다는 것, 이 진화적 접근법이 최상위 하나님 안에서 체험으로 통일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한 계획이 바깥 우주에서도 지배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또 한편, 이 바깥 우주들에 언젠가 살 새 계급의 존재들은 궁극의 수준에서, 초한 기법으로 신에게 접근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요컨대, 바깥 공간에서 앞날에 생길 여러 우주에서 신에게 접근하는 어떤 기법이 작용하게 될 것인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56:7.9 (643.3) 그렇기는 해도 우리는 완전하게 된 초우주들은, 어떤 방법으로, 이 바깥 세상에서 살지도 모르는 존재들이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생애의 일부가 되리라고 판단한다. 그 미래 시대에, 일곱 으뜸 영의 협력이 있든 없든, 최상위 하나님이 관리하는 일곱 초우주를 거쳐서, 하보나에 다가가는 바깥 우주 출신들을 우리가 구경할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
56:8.1 (643.4) 최상 존재는 필사 인간의 체험에서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그는 시공의 신(神), 칠중 신을 하나로 만드는 분이다. 둘째로, 그는 유한한 인간이 실제로 이해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신이다. 셋째로, 그는 초한(超限) 지성, 영원한 영, 그리고 파라다이스 성격자와 교제하는 초월적 체험을 필사 인간이 얻는 유일한 접근 방법이다.
56:8.2 (643.5) 하늘 가는 최후자는 지역 우주에서 태어나서, 초우주에서 양육되고, 중앙 우주에서 훈련받았으니까, 최상위 안에서 통일되는 칠중 신의 시공 신성을 이해하는 충분한 잠재성을 그들의 개인적 체험 속에서 가진다. 최후자는 그들이 태어난 곳이 아닌 여러 초우주에서 연달아 근무하며, 이렇게 하여 가능한 인간 체험의 일곱 가지 다양성을 충분히 몸에 익힐 때까지, 체험에 체험을 자꾸 쌓는다. 깃드는 조절자의 봉사를 통해서, 최후자는 우주의 아버지를 찾아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바로 이 체험 기법으로 그러한 최후자는 최상 존재를 정말로 알게 되며, 그들은 바깥 공간에서 앞날의 여러 우주에서 최상위 신에게 봉사하는 데, 그리고 여러 우주에 그를 계시하는 일에 예정되어 있다.
56:8.3 (644.1) 기억할지니, 아버지 하나님과 파라다이스 아들들이 우리에게 행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다시, 정신적으로, 솟아나는 최상 존재를 위하여, 또 그분 안에서 할 기회를 가진다. 우주에서 사랑하고 기뻐하고 봉사하는 체험을 서로 겪는다. 아버지 하나님은 그의 아들들에게 주는 모든 것을 그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다음 차례에 그들이 이 모든 것을 동료에게, 그리고 진화하는 최상 존재에게 주는 것이 필요하다 (또는 주어도 좋다).
56:8.4 (644.2) 모든 창조 현상은 선행하는, 창조자와 영의 활동을 반영한다. “아들은 아버지가 행하시는 것을 본 것만 행한다”하고 예수는 말씀했고, 이것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시간이 되면 너희 필사자들은 동료에게 최상위의 계시를 시작해도 좋고, 너희가 파라다이스를 향하여 올라가는 동안, 너희는 점점 더 이 계시를 확대해도 좋다. 영원 속에서, 제7 단계의 최후자로서, 너희는 최상―아니 궁극―수준에서 이 진화하는 인간의 하나님을 더욱 계시하는 것이 허락될지 모른다.
56:9.1 (644.3) 무제한 절대자와 신 절대자는 우주 절대자 안에서 하나가 된다. 절대자들은 궁극위 안에서 조정되고 최상위 안에서 제한되며, 칠중 신 안에서 시공에서 수정된다. 무한 이하 수준에는 세 절대자가 있지만, 무한 수준에서 그들은 하나인 듯이 보인다. 파라다이스에서는 신이 세 분으로 성격화되지만, 삼위일체 안에서 그들은 하나이다.
56:9.2 (644.4) 총우주에 관한 주요한 철학 명제(命題)는 이것이다: 절대자(무한 속에서 하나인 세 절대자)는 삼위일체보다 앞서 존재했는가? 그리고 그 절대자는 삼위일체의 조상인가? 아니면 삼위일체가 절대자에 선행(先行)하는가?
56:9.3 (644.5) 무제한 절대자는 삼위일체와 독립된 하나의 물력의 계심인가? 신 절대자의 계심은 삼위일체가 제한 없이 활동함을 뜻하는가? 우주 절대자는 삼자일체, 아니 가장 높은 삼자일체의 마지막 활동인가?
56:9.4 (644.6) 처음 생각에는, 절대자가 만물―아니 삼위일체―의 조상이라는 개념은 일관성을 충족시키고 철학적으로 통일되는 일시적 만족감을 주는 듯하지만, 그러한 어떤 결론도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영원하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무효(無效)가 된다. 우리는 우주의 아버지와 그의 삼위일체 동료들의 성품과 존재는 영원하다고 가르침을 받았고,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그렇다면, 일관성 있는 철학적 결론이 오직 하나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 온 우주의 지성 존재들이 보기에, 절대자는 모든 기본적 1차 상황, 우주 안 및 우주 바깥의 공간 상황에 대하여 (가장 높은) 삼자일체가 비성격 방법으로 나란히 반응하는 것이다. 사람이 몸소 이해하고 깨닫는 모든 실질적 목적으로 볼 때, 대우주에서 모든 지적 성격 존재에게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최종으로, 영원히, 최상으로, 궁극에 언제까지나 절대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56:9.5 (644.7) 인간의 지성으로 이 문제를 보다시피, 지성은 우주의 스스로 계신 이가 삼위일체와 절대자, 이 둘의 원초적 원인이요 무제한의 근원이라는 최종의 가설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절대자가 성격을 가졌다는 개념을 몹시 살펴보고 싶을 때, 우리는 파라다이스 아버지 개념과 이상(理想)으로 도로 돌아오게 된다. 우리가 다른 면에서 비성격인 이 절대자를 이해하는 것을 수월하게 하거나 그를 더 크게 의식(意識)하기를 바랄 때, 우리는 우주의 아버지가 절대 성격을 가진 실존적 아버지이며, 영원한 아들은 체험적 의미에서 절대자가 성격화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절대 성격자라는 사실로 도로 돌아온다. 다음에 우리는 더 나아가서, 체험적 삼자일체들이 결국, 체험으로 신 절대자의 성격화를 초래한다고 상상하며, 한편 우주 절대자는 최상ㆍ궁극ㆍ무한성을 가진, 통일되고 조정된 신 관계―가장 높은 삼자일체―의 비성격 활동이 명백히 나타나는 그러한 우주 및 우주 바깥의 현상을 빚어낸다고 생각한다.
56:9.6 (645.1) 유한 수준에서 무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어떤 수준에서도 우주의 아버지는 식별될 수 있으며, 파라다이스로부터 여러 진화 세계에서 그가 지은 생물은 다양하게 그를 파악했지만, 오직 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이 아버지를 하나의 무한으로서 이해한다.
56:9.7 (645.2) 영적 성격은 오직 파라다이스에서만 절대적이고, 절대자의 개념은 오직 무한 수준에서 제한이 없다. 신의 계심은 오로지 파라다이스에서만 절대적이고,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그의 힘이 무제한 절대자의 공간 잠재력 속에 체험적으로 무한하게 될 때까지, 반드시 부분적ㆍ상대적이고 진보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한편 하나님의 성격이 나타나는 것은 신 절대자의 명백한 계심에서 체험적으로 무한하게 되며, 또 무한의 이 두 잠재성은 우주 절대자 안에서 실체가 통일된다.
56:9.8 (645.3) 그러나 무한 이하의 수준을 넘으면, 세 절대자는 하나이며, 그런 수준을 넘어서, 어떤 다른 계급의 존재가 언제라도 무한 의식(意識)을 자각하든지 상관 없이, 신은 무한을 깨닫는다.
56:9.9 (645.4) 비록 무한한 영원―영원한 무한―에 본래 있는 체험적 잠재성을 자각하는 체험을 겪는 데 또 한 번 영원의 세월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영원에서 실존적 지위는 무한을 실존적으로 자의식(自意識)함을 의미한다.
56:9.10 (645.5)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은 온 우주 전역에서, 모든 지적 생물과 영 존재에게, 신과 실체의 모든 명시(明示)의 성격 근원이다. 성격자로서, 지금이나 영원한 미래에 이어지는 우주 체험에서, 너희가 칠중 신에게 도달하거나, 최상위 하나님을 이해하거나, 궁극위 하나님을 찾아내거나, 또는 절대자 하나님 개념을 파악하려고 애쓰거나 상관 없이, 너희가 영원히 만족하기까지, 각 모험이 완성될 때 너희가 새 체험 수준에서 영원한 하나님―모든 우주 성격자의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다시 찾아냈다는 것을 너희가 발견할 것이다.
56:9.11 (645.6) 우주의 아버지는 우주가 통일된 것을 설명하며, 이는 우주의 통일이 절대 가치와 의미(意味)―무제한의 실체―가 궁극 이후까지 통일된 가운데, 최상으로, 아니 궁극에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56:9.12 (645.7) 물력 조직책들은 공간으로 나가서, 우주의 아버지가 행사하는 파라다이스 힘에, 인력에 민감하게 만들려고 공간의 에너지를 동원한다. 그 뒤에 창조 아들들이 오며, 그들은 인력(引力)에 민감한 이 물력을 사람이 사는 우주로 조직하고, 그 안에서 지적 인간을 진화시킨다. 이들은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영을 받아들이고, 어떤 가능한 신(神)의 특성으로 보든지, 아버지와 같이 되려고 나중에 아버지께로 올라간다.
56:9.13 (645.8) 파라다이스의 창조적 물력이 공간을 통해서 끊임없이 확장하여 진행하는 것은 우주의 아버지의 인력 손아귀에 있는 영토가 늘 뻗어나가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지적(知的) 생물이 언제나 그치지 않고 늘어날 것이라 예시한다. 이들은 이처럼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해도 좋고, 파라다이스에 이르고 하나님을 찾으려 해도 좋다.
56:9.14 (646.1) 온 우주는 전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하나님의 권능과 성격은 하나이다. 모든 수준의 에너지와 모든 단계의 성격이 조정된다. 철학적으로, 체험적으로, 개념 면에서, 실제로, 모든 사물과 존재는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요, 모든 것 안에 계시며, 어떤 사물이나 존재도 하나님 없이 존재하지 못한다.
56:10.1 (646.2) 생명과 빛 속에 안정된 세계들이 초기 단계로부터 제7 시기까지 진보함에 따라서, 창조 아들을 찬미함을 비롯하여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예배하기까지, 그 세계들은 칠중 신의 실체가 실현되는 것을 연달아 파악한다. 그러한 세계 역사에서, 이어지는 제7 단계를 통하여 내내, 항상 진보하는 필사자는 최상위 하나님을 아는 가운데서 자라며, 한편 그들은 궁극위 하나님의 보호하는 봉사가 현실임을 어렴풋이 알아본다.
56:10.2 (646.3) 이 영화로운 시대를 통하여 내내, 항상 전진하는 필사자의 주요한 관심거리는 이해할 수 있는 신의 요소를―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더욱 낫게 이해하고 더 많이 깨닫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적ㆍ물질적ㆍ영적으로 하나님을 식별하려고 사람이 노력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필사자가 이 목표를 추구할 때, 철학ㆍ우주론ㆍ신성의 경험적 연구에 자신이 갈수록 더 몰두함을 발견한다.
56:10.3 (646.4) 너희는 철학을 얼마큼 파악하며, 신을 예배하고 사회에 봉사하고 개인의 영적 체험을 겪으면서 신성(神性)을 이해한다. 하지만 너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우주를 보는 눈―을 아주 흔히 사람의 서툰 예술적 노력을 공부하는 데 국한시킨다. 아름다움, 곧 예술은 대체로 대조 되는 물건들을 하나로 만드는 문제이다. 다양성은 아름다움의 개념에 필수이다. 최상의 아름다움, 유한한 예술의 절정은 창조자와 인간, 엄청나게 떨어져 있는 두 우주 극단(極端)을 통일하는 드라마이다. 하나님을 찾아내는 사람, 그리고 사람을 찾아내는 하나님―창조자가 완전한 것 같이 완전하게 되는 인간―바로 이것이 최상으로 아름다운 것을 훌륭하게 성취하는 것이요, 우주 예술의 정점에 이르는 것이다.
56:10.4 (646.5) 따라서 유물론(唯物論), 다시 말해서 무신론은 못난 것의 극대화요, 유한 속에서 아름다운 것의 정반대가 극치에 이른 것이다. 가장 높은 아름다움은 이전에 있던 조화된 실체로부터 태어난 여러 변화가 통일되어 전체가 펼쳐지는 광경이다.
56:10.5 (646.6) 우주론 수준의 생각에 도달하는 것은 다음을 포함한다:
56:10.6 (646.7) 1. 호기심. 조화를 갈망하고 아름다움을 목마르게 찾는 것. 새로운 수준의 조화되는 우주 관계를 발견하려고 끈질기게 애쓰는 것.
56:10.7 (646.8) 2. 미학의 이해.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모든 수준의 실체에서 온갖 창조적 표현의 예술적 솜씨를 이해하는 식견이 항상 높아지는 것.
56:10.8 (646.9) 3. 윤리 민감성. 진리를 깨달음으로 아름다움을 음미하는 것은, 신과 만물의 관계에서 신이 선함을 인식하는 데 영향을 주는 것들이 영원히 건전함을 감지하게 만든다. 따라서 우주론조차 신다운 실체의 가치를 추구하도록―하나님을 의식하도록―인도한다.
56:10.9 (646.10)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세계들은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 이해하는 데 아주 충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이러한 품질의 가치 기준이 시공 영역에 신이 주는 계시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진리의 중요성은 필사 인간의 지적ㆍ영적 성품 모두에 호소하는 힘을 가진다. 우주의 아름다움은 우주의 창조에서 조화되는 관계와 리듬을 포함한다. 이것은 아주 뚜렷이 지적 호소력이며, 물질 우주를 통일되게, 동시에 발맞추어 이해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신의 선함은 사람의 유한한 지능에 무한한 가치를 계시하는 것이며, 계시는 유한한 지능이 파악하고 인간이 이해하는 영적 수준의 바로 그 문턱까지 높아질 것이다.
56:10.10 (647.1) 진리는 과학과 철학의 기본이며, 종교의 지적 기초를 제시한다. 아름다움은 미술ㆍ음악, 그리고 인간의 모든 체험에서 중요한 리듬을 뒷받침한다. 선은 윤리ㆍ도덕ㆍ종교의 감각을―완전을 체험하려는 욕구를―포함한다.
56:10.11 (647.2)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사실은 최상 지성이 지배함을 가리킨다. 이와 똑같이 확실하게,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것은 이를 이해하는 인간의 지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아름다움은 현상으로 나타나는 실체의 광범위하고 다양한 표현들이 조화되어 시공에서 통합된 것을 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며, 그런 표현은 모두 선재(先在)하는 영원한 일체로부터 가지쳐 나온 것이다.
56:10.12 (647.3) 선은 다양한 수준에서 신다운 완전의 상대적 가치를 정신이 인식하는 것이다. 선을 인식하는 것은 도덕적 지위를 가진 지성, 곧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이 있는 개인적 지성을 가졌음을 뜻한다. 그러나 선(善)을 소유하는 것, 곧 위대함은 신성(神性)에 정말로 도달한 정도를 재는 척도이다.
56:10.13 (647.4) 참된 관계를 인식하는 것은 진실과 잘못을 구별할 수 있는 머리가 있음을 암시한다. 유란시아의 인간 지성에게 투입되는, 수여된 진리의 영은 틀림없이 진리에 ―하나님을 향하여 영원히 상승하면서 조정되는 관계, 모든 사물과 존재의 살아 있는 영적 관계에―민감하다.
56:10.14 (647.5) 어떤 전자(電子)나 생각이나 영이 일으키는 어떤 충동도 우주 전체에서 하나의 활동 단위이다. 오로지 죄가 정신적ㆍ영적 수준에서 항거하는, 고립되고 악한 인력이다. 우주는 하나의 전체이며, 어떤 사물이나 존재도 고립해서 존재하거나 살지 않는다. 자아의 실현은 반(反)사회적일 때 악할 가능성이 있다. “어떤 사람도 혼자서 살지 못한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참이다. 우주와 교제하는 것은 가장 높은 형태의 인격 통일이다. 예수는 말했다, “너희 가운데 가장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는 자가 되라.”
56:10.15 (647.6)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조차도―지성ㆍ물질ㆍ영으로 이루어진 우주를 사람이 총명하게 접근하는 것도―신다운 최고의 이상을 가진, 하나의 통일된 개념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필사 인격자가 인간의 체험을 물질ㆍ지성ㆍ영과 통일하는 것 같이, 마찬가지로 이 신다운 최고의 이상은 최상위 안에서 동력으로 통일되며, 그리고 나서 아버지다운 사랑을 가진 하나님으로서 성격화된다.
56:10.16 (647.7) 어떤 주어진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꿰뚫어보는 모든 통찰력은, 모든 부분이 그 전체와 무슨 관계를 가졌는가 파악하기를 요구한다. 우주에서 이것은 지음받은 부분과 창조적 전체의 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신은 보편적이고 영원히 달성할 초월적 목표, 아니 무한한 목표이다.
56:10.17 (647.8) 우주의 아름다움은 물질 창조에서 파라다이스 섬이 비쳐진 모습을 인식하는 것이다. 한편 영원한 진리는 파라다이스 아들들이 베푸는 특별한 봉사이며, 그들은 필사 민족에게 자신을 수여할 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진리의 영을 퍼붓기도 한다. 신의 선함은 무한한 영이 거느리는 다채로운 성격자들이 사랑으로 베푸는 봉사에서 더욱 충만히 전시된다. 그러나 사랑은 이 세 성질을 총합한 것이요, 하나님이 영 아버지임을 사람이 파악하는 것이다.
56:10.18 (648.1) 물리적 물질은 절대 신들이 가진 파라다이스 에너지와 광채가 시공 우주에 던지는 그림자이다. 진리의 의미는 신의 영원한 말씀이 필사자의 지능에 미치는 영향이다―최상의 개념들을 시공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신성의 선한 가치는 진화하는 구체에 사는 시공의 유한한 사람에게, 우주자ㆍ영원자ㆍ무한자,[1] [1690] 이 영 성격자들이 베푸는 자비로운 봉사이다.
56:10.19 (648.2) 신의 의미 있는 이러한 실체 가치는 아버지와 인격을 가진 각 사람의 관계에서 신의 사랑으로서 섞인다. 이 가치는 신의 자비로서 아들과 그의 아들들 안에서 조정된다. 그들은 영과 그의 영 자손들을 통해서 신성한 봉사로서, 곧 시간 세계의 자녀들에게 사랑으로 베푸는 자비의 표현으로서, 그들의 성질을 명백히 드러낸다. 이 세 가지 신의 성질은 주로 동력과 성격이 통합된 최상 존재로서 나타난다. 칠중 신이 이러한 성질을, 승천하는 일곱 수준에서 신성한 의미와 가치 기준의 일곱 가지 다른 연합에서 다양하게 보여준다.
56:10.20 (648.3) 유한한 사람에게,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은 신의 실체를 충분히 계시한 것이다. 이처럼 신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필사자의 생활 속에서 영적으로 표현됨에 따라서 지적 평안, 사회의 진보, 도덕적 만족, 영적 기쁨, 우주를 보는 지혜, 이와 같은 신의 열매가 맺어진다. 빛과 생명의 제7 단계에 있는 세계에서 상급 필사자는 사랑이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것임을 배웠다―그들은 하나님이 사랑임을 알고 있다.
56:10.21 (648.4) 사랑은 남에게 좋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욕구이다.
56:10.22 (648.5) [네바돈 계시 군단의 요청을 받고서, 유란시아 행성 영주의 대관인 어떤 멜기세덱과 협동하여, 유란시아를 방문하는 어느 막강한 사자가 발표하였다.]
56:10.23 (648.6) 우주의 통일성에 관한 이 논문은, 만투시아 멜기세덱의 지휘 하에 활동하는, 12 네바돈 성격자로 구성된 한 위원회의 집단 후원을 받고서, 여러 저자가 발표한 시리즈 가운데 25번째로 발표한 글이다. 우리는 유란시아 시간으로 1934년에, 상관들이 허가한 방법에 따라서 이 여러 이야기를 쓰고 영어로 기록하였다.
구원자 별의 가브리엘의 권한으로 활동하는 지역 우주 성격자 군단이 이 논문집을 후원하였다
57:0.1 (651.1) 유란시아의 내력과 초기 역사에 관하여, 유란시아에 관한 기록을 얻으려고 예루셈의 기록 보관소로부터 발췌한 것을 발표하면서, 우리는 현대의 관습에 따라서―1년이 365 1/4 일이고 윤년이 있는 오늘날의 달력으로―시간을 계산하라고 지시를 받았다. 대체로, 정확한 연대를 밝히려고 전혀 애쓰지 않겠지만 그러한 연대는 기록에 남아 있다. 이 역사적 사실을 발표하는 더 좋은 방법으로서, 우리는 가장 가까운 자연수를 쓰겠다.
57:0.2 (651.2) 백만 년이나 2백만 년 전에 생긴 사건을 언급할 때, 우리는 서력 기원으로 20세기 초기의 몇 십년대로부터 그 연대만큼 거꾸로, 그러한 사건의 연대를 표시하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아득히 먼 이 사건들이, 우수리 없이, 수천 년, 수백만 년, 수십억 년의 기간에 일어난 것으로서 묘사하겠다.
57:1.1 (651.3) 유란시아는 너희의 태양에서 기원이 있었고, 그 태양은 안드로노버 성운의 잡다한 자손 가운데 하나인데, 이 성운은 한때 네바돈 지역 우주의 물리적 동력과 물질 덩어리의 한 구성 분자로서 조직되었다. 이 큰 성운 자체는 아주 오래 전에, 오르본톤 초우주에서, 공간의 우주 물력 전하(電荷)에서 비롯하였다.
57:1.2 (651.4)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 당시에, 파라다이스의 1차 물력 조직책들은, 나중에 안드로노버 성운으로서 조직된 공간 에너지를 오랫동안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57:1.3 (651.5) 987,000,000,000년 전에 오르본톤 시리즈의 물력 부조직자와 당시에 대행 검열자 811,307번은 유버르사로부터 바깥으로 여행하면서, 그때 오르본톤 동쪽 부분의 어떤 구역에서, 공간의 조건이 물질화 현상을 개시하는 데 유리하다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에게 보고하였다.
57:1.4 (651.6) 900,000,000,000년 전에 유버르사의 기록 보관소는 유버르사 균형 회의가 초우주 정부에게 허가증을 발행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증거하는데, 이것은 811,307번 검열자가 앞서 지정한 지역으로 물력 조직자 하나와 참모진을 파송할 것을 인가하였다. 오르본톤 당국은 이 잠재 우주를 최초로 발견한 자가 새 물질 창조를 시작하라고 요청하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명령을 집행하라고 위임하였다.
57:1.5 (652.1) 이 허가증이 기록된 것은 그 물력 조직자와 참모진이 유버르사로부터 그 동쪽 공간 구역으로 먼 길을 이미 떠났음을 뜻하고, 거기서 나중에 그들은 오래 걸린 활동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이 활동은 오르본톤에서 한 새로운 물리적 창조가 출현함으로 종결될 것이었다.
57:1.6 (652.2) 875,000,000,000년 전에 굉장한 안드로노버 성운, 876,926 번이 정식으로 개시되었다. 오로지 물력 조직자와 연락 참모진의 계심이 이 에너지 소용돌이를 비롯하는 데 필요했는데, 그것은 결국 거대한 이 공간 회오리바람으로 성장했다. 그러한 성운 회전이 시작된 뒤에, 살아 있는 물력 조직자들은 다만 회전하는 원반의 평면에 대하여 직각으로 물러난다. 그 이후로, 에너지 본래의 성질은 그러한 새 물리적 체계가 점진적으로 질서 있게 진화할 것을 보장한다.
57:1.7 (652.3) 이 무렵에 이야기는 초우주 성격자들의 활동으로 옮겨진다. 실제로 그 이야기는 이 시점에서―오르본톤 초우주의 동력 지도자와 물리 통제자들이 행동하도록 공간 에너지 조건을 준비해 놓고서, 파라다이스 물력 조직자들이 철수하려고 준비하는 바로 이 무렵에―적절히 시작된다.
57:2.1 (652.4) 진화하는 물질 창조는 모두 둥그런 가스 성운(星雲)으로부터 태어나며, 그러한 1기의 성운은 모두 가스로 존재하는 초기 시절에 내내, 둥그렇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성운은 보통 나선형이 된다. 별을 형성하는 활동이 과정을 마치고 나서, 성운은 흔히 별의 집합으로서 또는 거대한 별이 되어 끝나고, 이 별들은 여러 면에서 너희의 왜소한 태양계와 비슷하게, 수가 일정하지 않은 행성과 위성, 그리고 작은 물질 집단에 둘러싸인다.
57:2.2 (652.5) 800,000,000,000년 전에, 안드로노버 창조는 오르본톤의 웅장한 1기 성운[1] [1691] 중에 하나로서 모양을 잘 갖추었다. 근처의 여러 우주에서 천문학자들이 이 공간 현상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눈길을 끌 만한 것을 거의 구경하지 못했다. 인접한 여러 창조에서 얻은 인력 추정치는 안드로노버 지역에서 공간에 물질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가리켰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57:2.3 (652.6) 700,000,000,000년 전에, 안드로노버 체계는 거대한 규모를 이루고 있었고, 아주 급히 진화하는 이 새 물질 체계의 동력 중심들을 지원하고 그들에게 협조를 제공하려고, 둘러싼 아홉 물질 창조에 추가로 물리 통제자들이 파견되었다. 이 아득히 먼 시절에, 차후의 창조들에게 물려준 물질은 모두 이 거대한 공간 바퀴의 테두리 안에 붙잡혀 있었다. 이 바퀴는 늘 계속하여 소용돌이쳤고, 그 최대 지름에 이른 뒤에, 계속해서 응축하고 줄어드는 동안에 점점 더 빠르게 소용돌이쳤다.
57:2.4 (652.7) 600,000,000,000년 전에, 안드로노버의 에너지를 동원하는 기간이 절정에 이르렀고, 그 성운은 그 최대 질량에 다다랐다. 이때 그것은 납작해진 긴 구체(球體)와 얼마큼 비슷한 모양을 한, 거대한 둥그런 가스 구름이었다. 이때는 상이한 질량이 형성되고 회전 속도가 달라지는 초기였다. 인력과 기타 영향력이 바야흐로 공간의 가스를 조직된 물질로 바꾸는 일을 시작하려고 했다.
57:3.1 (653.1) 그 엄청난 성운은 이제 비로소 차츰 나선형의 모습을 갖추었고, 먼 우주에 있는 천문학자들도 눈으로 뚜렷이 보게 되었다. 이것이 대부분의 성운들의 자연스런 역사이다. 별을 내던지고 우주를 짓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우주에서 이 2기의 성운은 보통 나선형 현상으로서 관찰된다.
57:3.2 (653.2) 그 아득히 먼 시대에 근처의 천문학자들은, 안드로노버 성운이 이렇게 변형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20세기 천문학자들이 망원경을 우주를 향해 돌리고 인접한 바깥 공간에서 지금 시대의 나선형 성운을 관찰할 때 보는 것과 똑같은 것을 보았다.
57:3.3 (653.3) 질량의 극대화에 이를 무렵이 되자, 가스인 알맹이의 인력 통제가 약화되기 시작했고 가스가 탈출하는 단계가 뒤따랐는데, 가스는 두 개의 거대하고 뚜렷한 팔로서 흘러 나왔고, 이 두 팔은 서로 모체의 반대 편에서 기원을 가졌다. 이 엄청난 중앙 핵심의 빠른 회전은 튀어나오는 이 두 가스 흐름에게 곧 나선형의 모습을 주었다. 튀어나온 이 팔 부분들이 식고 나중에 응축되자, 결국 팔의 매듭지어진 모습을 낳았다. 더 밀집된 이 부분들은 성운의 가스 구름 한가운데서 공간을 통하여 소용돌이치는 광대한 체계와 하위 체계들의 물리적 물질이었고, 모체인 바퀴의 인력 손아귀 안에 단단히 붙잡혀 있었다.
57:3.4 (653.4) 그러나 그 성운은 수축하기 시작했고, 회전율의 증가는 인력의 통제를 더욱 약화시켰다. 오래지 않아서 바깥의 가스 지역은 성운 핵심의 직접 끌어안는 힘으로부터 실제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불규칙한 윤곽을 가진 순회로를 타고 공간으로 나갔다가 핵심 지역으로 돌아와서 그 순회로를 마쳤다. 그러나 이것은 성운의 진보에서 일시적 단계일 뿐이었다. 회전율이 늘 빨라지는 것은 곧 거대한 별들을 공간으로 독립된 회로 위에, 내던질 것이었다.
57:3.5 (653.5) 그리고 이것이 아득히 오랜 세월 전에 안드로노버에서 일어났다. 그 에너지 바퀴는 최대로 커질 때까지 자꾸 자랐고, 그리고 나서 수축이 시작되었을 때, 더욱 빨리 빙빙 돌았으며, 결국에는 결정적 원심(遠心)단계에 도달하고 큰 붕괴가 시작되었다.
57:3.6 (653.6) 500,000,000,000년 전에 안드로노버의 첫 별이 태어났다. 타오르는 이 줄기는 모체의 인력 손아귀로부터 갈라져 나왔고, 공간을 가르고서 창조된 우주에서 하나의 독립된 모험에 들어갔다. 그 궤도는 그 별이 도망가는 경로에 따라서 정해졌다. 그러한 젊은 별은 재빨리 구체가 되고, 공간의 별로서 길고도 파란 많은 생애를 시작한다. 말기에 이른 성운의 핵심을 제쳐놓고, 대다수의 오르본톤 별은 비슷한 출생을 겪었다. 이 도망하는 별들은 다채로운 기간을 거쳐서 진화하고 나중에 우주에 소용된다.
57:3.7 (653.7) 400,000,000,000년 전에 안드로노버 성운이 물질을 다시 잡아들이는 기간이 시작되었다. 근처의 작은 별들 중에 다수는 모체의 핵심이 차츰 커지고 계속 응축되는 결과로서 다시 붙잡혔다. 오래지 않아, 성운이 응축되는 말기 국면이 시작되었는데, 이 기간은 에너지와 물질로 이루어진 엄청난 이 공간 집합체들이 마지막으로 분리되기 전에 반드시 앞서는 기간이다.
57:3.8 (654.1) 이 시기 뒤에 1백만 년이 채 되지 않아서, 네바돈 미가엘, 곧 파라다이스 창조 아들이 붕괴하는 이 성운을 우주를 짓는 모험 장소로 선택하였다. 거의 당장에 구원자별의 건축 세계들과 1백 별자리 본부 집단의 행성들이 시작되었다. 특별히 지어진 이 집단의 세계들을 완성하는 데는 거의 1백만 년이 걸렸다. 지역 체계 본부인 행성들은 그때부터 약 50억 년 전까지 이어지는 기간에 걸쳐 건축되었다.
57:3.9 (654.2) 300,000,000,000년 전에 안드로노버의 별 회로들은 자리를 잘 잡았고, 그 성운 체계는 일시나마 비교적 물리적으로 안정된 기간을 거치고 있었다. 이 무렵에 미가엘의 참모진이 구원자별에 도착했고, 오르본톤의 유버르사 정부는 네바돈 지역 우주를 물리적으로 인정하였다.
57:3.10 (654.3) 200,000,000,000년 전에 안드로노버의 중앙 집합체에서 거대한 열이 발생되는 것과 함께, 수축과 응축이 진행되는 것이 보였다. 중앙의 별 모체인 바퀴 가까이 있는 지역에서도 비교적 틈이 나타났다. 바깥 지역은 더 안정되고 더 잘 조직되었고, 새로 태어난 별들의 둘레를 도는 어떤 행성들은 충분히 식어서 생명을 옮겨 심기에 적당하였다. 네바돈에서 가장 오래 된, 사람 사는 행성들은 이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57:3.11 (654.4) 이제 완성된 네바돈의 우주 작용이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며, 미가엘의 창조는 사람이 살고, 진보하는 필사자가 승천하는 우주로서 유버르사에 등록되었다.
57:3.12 (654.5) 100,000,000,000년 전에 성운에서 팽팽하게 응축하는 힘의 정점이 도달되었고, 열의 팽창력이 극대화되는 점에 이르렀다. 인력과 열이 다투는 이 임계(臨界) 단계는 때때로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지만, 인력(引力)과 벌이는 싸움에서 머지 않아 열이 이기고, 별이 분산되는 볼 만한 시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 성운의 2기 생애가 끝난 것을 표시한다.
57:4.1 (654.6) 1기 단계의 성운은 둥그렇고, 제2 단계는 나선형이며, 제3 단계는 별이 처음으로 분산되는 시기이다. 한편 제4기는 별이 분산되는 둘째이자 마지막 주기를 포함하고, 모체의 핵심은 공 모양의 성단(星團)으로서, 아니면 말기 태양계의 중심으로 활동하는 혼자 있는 별로서 끝난다.
57:4.2 (654.7) 75,000,000,000년 전에 이 성운은 그 별 가족 단계의 절정에 이르렀다. 이때는 별을 잃어버리는 첫째 기간의 정점이었다. 이 별들의 대다수는 그 뒤에 광범위한 체계의 행성ㆍ위성ㆍ흑도(黑島)ㆍ혜성ㆍ운석, 그리고 우주의 먼지 구름을 확보하였다.
57:4.3 (654.8) 50,000,000,000년 전에 별이 분산되는 이 첫 시기가 끝났다. 그 성운은 그 존재의 제3기를 급히 마치고 있었고, 이 기간에 그 성운은 876,926개 별 체계에 기원을 주었다.
57:4.4 (654.9) 25,000,000,000년 전에는 성운 생명의 제3기가 끝나는 것을 구경했고, 이 부모 성운으로부터 파생되어, 널리 펼쳐진 별 체계들이 조직되고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수축하고 열의 발산이 늘어나는 과정은 성운 찌꺼기의 중심 덩어리에서 계속되었다.
57:4.5 (655.1) 10,000,000,000년 전에 안드로노버의 제4기가 시작되었다. 핵심 덩어리가 최대 기온에 도달하였고, 응축의 임계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최초의 모체인 핵심은 그 자체 내부의 열이 응축되는 긴장, 그리고 둘러싼 해방된 별 체계 집단의 늘어나는 인력 조수(潮水)의 당기는 힘, 이 둘의 통합된 압력을 받아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성운이 별을 생산하는 둘째 주기를 개시할 핵심의 분출이 다가왔다. 성운 존재의 제 4기가 바야흐로 시작되려 했다.
57:4.6 (655.2) 8,000,000,000년 전에 끔찍한 마지막 분출이 시작되었다. 그러한 우주 격변이 있을 때는 오직 바깥에 있는 체계들만 안전하다. 그리고 이것이 성운의 종말의 시작이었다. 마지막으로 별을 토해내는 것은 거의 20억 년에 걸쳐 이어졌다.
57:4.7 (655.3) 7,000,000,000년 전에는 안드로노버의 마지막 분열의 절정을 구경하게 되었다. 이때는 말기의 큰 별들이 태어나고 지역에 국한된 물리적 소란이 절정에 이른 기간이었다.
57:4.8 (655.4) 6,000,000,000년 전에는 마지막 분열이 끝나고 너희 태양이 출산되는 것을 표시하였고, 너희 태양은 안드로노버의 둘째 별 가족에서 끝에서부터 56번째였다. 성운 핵심의 이 마지막 분출은 136,702개의 별을 낳았고, 그 대부분은 혼자 있는 공이었다. 안드로노버 성운에서 기원을 가진 별 및 별 체계의 총수는 1,013,628개였다. 태양계를 가진 별의 수는 1,013,572개였다.
57:4.9 (655.5) 그리고 위대한 안드로노버 성운은 이제 더 없지만, 공간의 이 모체 구름 속에서 비롯한, 많은 별과 그 행성 집단 안에서 계속 산다. 이 웅장한 성운의 마지막 핵심의 잔재는 아직도 불그스레한 빛을 띠고 타며, 165 세계로 이루어진 나머지 행성 가족에게 계속하여 수그러진 빛과 열을 준다. 이 세계들은 막강한 두 세대의 빛의 군주들을 낳은, 이 존경할 모체를 지금 돌고 있다.
57:5.1 (655.6) 5,000,000,000년 전에 너희의 태양은 비교적 고립된 타오르는 공이었고, 근처에 돌고 있는 공간 물질의 대부분을 자체에게로 모았는데, 이 물질은 그 자체의 출생을 따른 최근의 격변에서 생긴 찌꺼기였다.
57:5.2 (655.7) 오늘날, 너희의 태양은 비교적 안정을 이룩했지만, 11년 반이 되는 흑점의 주기는 태양이 청춘기에 변광성이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너희 태양의 초기 시절에, 계속된 수축과 그에 따른 점진적 온도의 증가는 표면에서 엄청난 경련을 일으켰다. 이 거대한 융기는 밝기가 변하는 주기를 마치는 데 3일 반이 걸렸다. 이 변하는 상태, 정기적으로 뛰는 이 맥박은, 너희 태양으로 하여금 곧 마주치게 된 어떤 외부 영향력에 무척 민감하게 만들었다.
57:5.3 (655.8) 이처럼 지역 공간의 무대가 몬마시아의 독특한 기원을 위하여 준비되었는데, 이것이 너희 태양의 행성 집단의 이름이고, 그 태양계에 너희 세계가 속한다. 1퍼센트가 채 안 되는 오르본톤의 행성 체계들이 이와 비슷한 기원을 가졌다.
57:5.4 (655.9) 4,500,000,000년 전에 막대한 앙고나 체계가 혼자 있는 이 태양 근처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 큰 체계의 중심은 공간의 어두운 거성(巨星)이었는데, 단단하고 상당히 충전되어 있었고, 엄청나게 당기는 인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57:5.5 (656.1) 태양이 맥박치는 동안, 최대로 확장된 순간에 앙고나가 태양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자, 가스 물질의 흐름이 공간으로, 태양의 거대한 혀로서 분출되어 나왔다. 타오르는 이 가스 혀들은 처음에 변함없이 태양 속으로 도로 떨어졌다. 그러나 앙고나가 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 거대한 방문객의 당기는 인력(引力)이 너무 커져서 이러한 가스 혀들은 어떤 점에서 부서지곤 했는데, 그 뿌리는 태양 속으로 도로 떨어졌고, 한편 바깥 부분들은 떨어져 나가서 독립된 물질 덩어리, 곧 태양 운석들을 형성하곤 했다. 이것들은 즉시 자체의 타원형 궤도에서 태양의 둘레를 돌기 시작했다.
57:5.6 (656.2) 앙고나 체계가 더 가까이 다가가자, 태양의 분출물이 점점 더 커졌다. 갈수록 더 많은 물질이 태양으로부터 당겨져서, 둘레의 공간에서 회전하는 독립된 물체들이 되었다. 앙고나가 태양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이 상황은 약 50만 년 동안 발전되었고, 그렇게 되자 태양은 자체에서 정기적인 내부 경련 중 하나와 연관하여 부분적 분열을 겪었다. 정반대 쪽에서 동시에, 막대한 분량의 물질이 토해졌다. 앙고나 편에서 보아서, 양쪽 끝이 뾰족하고 가운데는 두드러지게 불룩한, 태양 가스의 거대한 기둥이 빠져 나왔고, 이것은 태양의 직접 인력 통제를 벗어나 영구히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57:5.7 (656.3) 태양에서 이렇게 떨어져 나온, 태양 가스의 이 큰 기둥은 나중에 태양계의 12 행성으로 진화했다. 이 거대한 태양계 조상의 분출에 조수(潮水)처럼 동조해서, 태양의 맞은 편으로부터 반응하여 가스가 분출된 것은 그 뒤에 태양계의 운석과 공간의 먼지로 응축되었다. 하지만 이 물질의 많은 부분, 상당히 많은 부분은 나중에, 앙고나 체계가 먼 공간으로 물러감에 따라서, 태양 인력에 다시 붙잡혔다.
57:5.8 (656.4) 태양계 행성들의 조상 물질, 그리고 소행성과 운석이 되어 태양을 지금 돌고 있는 거대한 부피의 물질을 뽑아내는 데 성공하기는 했어도, 앙고나는 이 태양 물질 가운데 어느 것도 자체를 위하여 확보하지 못했다. 방문하던 그 체계는 태양 물질의 어느 것도 실제로 훔쳐갈 만큼 아주 가까이 오지 않았지만, 오늘날의 태양계를 구성하는 물질 모두를 사이에 있는 공간으로 잡아당길 만큼 충분히 가깝게, 휙 다가왔다.
57:5.9 (656.5) 앙고나가 태양에서 떼어내기에 성공한 부분, 인력으로 부푼 거대한 부분의 덜 무겁고 가늘어지는 끝에서 식어서 응축하는 핵심들로부터, 내부의 다섯 행성과 외부의 다섯 행성이 곧 소규모로 형성되었고, 한편 토성과 목성은 더 육중하고 불룩한 중앙 부분으로부터 형성되었다. 목성과 토성의 강력하게 당기는 인력은 앙고나로부터 훔친 물질의 대부분을 일찍부터 잡아들였고, 이것은 앙고나에 속한 어떤 위성들의 역행(逆行)하는 움직임이 증거하는 바와 같다.
57:5.10 (656.6) 목성과 토성은 지나치게 가열된 태양 가스의 거대한 기둥의 바로 그 중심으로부터 유래되었으니까, 상당히 뜨겁게 가열된 태양 물질을 너무 많이 포함하여 밝은 빛으로 빛났고 막대한 열량을 방출했다. 따로 된 공간 물체로서 형성된 뒤에, 잠시 동안 이것들은 실제로 2차 태양이었다. 태양계 행성들 가운데 가장 큰 이 두 행성은 오늘날까지 대체로 가스로 남았고, 아직도 완전히 응축되거나 고체가 되는 점에 이르기까지 식지도 않았다.
57:5.11 (656.7) 다른 10 행성에서 응축되는 가스의 핵심은 곧 고체가 되는 단계에 이르렀고, 그래서 근처의 공간에서 돌고 있는 운석 물질의 늘어나는 분량을 자체 쪽으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태양계의 세계들은 이처럼 두 가지 기원을 가졌다: 가스로 응축된 핵심이 나중에 엄청난 양의 운석을 잡아들임으로 커진 것이다. 정말로 그 핵심들은 아직도 계속하여 운석을 잡아들이지만, 그 숫자는 크게 줄어들었다.
57:5.12 (657.1) 그 행성들은 모체인 태양의 적도(赤道) 평면에서 태양의 둘레를 돌지 않는데, 그 행성들이 태양의 회전으로 던져졌더라면 그렇게 할 것이다. 그것들은 오히려 앙고나 별의 분출이 있던 평면에서 여행하며, 이것은 태양 적도의 평면에 대하여 상당한 각을 이루고 존재하였다.
57:5.13 (657.2) 앙고나는 태양의 물질을 조금도 생포할 수 없었지만, 너희의 태양은 모습이 바뀌는 자체의 행성 가족에게, 그 방문하는 체계를 돌던 공간 물질을 얼마큼 보태 주었다. 앙고나의 강렬한 인력의 장(場) 때문에, 그에 종속하는 행성 가족은 그 검은 거성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진 궤도를 돌고 있었다. 태양계의 조상 물질이 분출된 뒤에 얼마 안 되어, 그리고 앙고나가 아직 태양 근처에 있는 동안, 앙고나 체계의 주요 행성들 가운데 셋이 육중한 태양계의 조상에게 너무 가까이 휙 던져졌기 때문에, 태양계의 당기는 인력은 태양의 인력 때문에 늘어나고 충분히 커져서, 앙고나 인력의 힘을 이기고 그 하늘 방랑자의 이 세 종속체를 영구히 떼어냈다.
57:5.14 (657.3) 태양으로부터 생겨난 태양계 물질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궤도를 도는 성질을 처음에 부여받았고, 이 세 개의 외래 공간 물체의 침입이 아니었다면, 태양계 물질은 모두 아직도 같은 방향의 궤도 운동을 유지할 것이다. 실제로 일어난 바와 같이, 세 앙고나 종속체의 충격은 태어나는 태양계 안으로 새로운 외래 방향의 물력을 투입했고, 그 결과로 역행 운동이 나타났다. 어느 천문 체계에서도 역행(逆行) 운동은 언제나 사고로 생기며, 반드시 외래 공간 물체가 부딪치는 충격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그러한 충돌이 반드시 역행 운동을 낳지 않을지 모르지만, 다양한 기원을 가진 덩어리들을 포함하는 체계 외에는, 결코 아무런 역행이 일어나지 않는다.
57:6.1 (657.4) 태양계가 태어난 뒤에, 태양의 분출이 줄어드는 기간이 따랐다. 다시 50만 년 동안, 태양은 차츰차츰 갈수록 줄어드는 양의 물질을 둘레의 공간으로 계속 퍼부었다. 그러나 궤도가 불규칙했던 이 초기 시절에, 둘러싼 물체들이 태양에 아주 가까이 다가왔을 때, 모체인 태양은 이 운석 물질의 큰 부분을 다시 잡아들일 수 있었다.
57:6.2 (657.5) 태양에 아주 가까운 행성들은 조수같은[2] [1692] 마찰로 먼저 회전이 느려지게 된 행성들이다. 그러한 인력의 영향은 또한 행성 궤도를 안정시키는 데 이바지하고, 행성이 자체의 축을 도는 속도에 대하여 브레이크 노릇을 하면서 행성이 늘 더 천천히 돌게 만든다. 이것은 자전(自轉)이 멈출 때, 행성의 한 반구(半球)가 언제나 태양이나 더 큰 물체를 향하게 만들 때까지 계속된다. 이것은 수성(水星)과 달이 보여주는 바와 같으며, 달은 유란시아를 향하여 언제나 같은 얼굴을 보인다.
57:6.3 (657.6) 달과 지구의 조수 같은 마찰이 균등하게 될 때, 지구는 언제나 달을 향하여 같은 반구(半球)를 돌릴 터이고, 하루와 한 달이 비슷할 것이다―그 길이가 약 47일이다. 그러한 궤도의 안정을 얻었을 때, 조수 같은 마찰은 거꾸로 작용하고, 이제 더 지구로부터 달을 멀리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차츰 그 위성을 행성의 방향으로 끌어당길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달이 지구에서 약 17,600킬로미터 안으로 접근하는 아득히 먼 그 앞날에, 지구의 인력 작용은 달을 분열시키겠고, 이 조수 같은 인력으로 인한 폭발은 달을 조그만 입자로 산산조각낼 것이다. 이 입자들은 그 세계 둘레에 토성의 고리를 닮은 물질의 고리로서 집합할 수도 있고, 아니면 운석(隕石)이 되어 지구로 차츰 이끌릴 수도 있다.
57:6.4 (658.1) 공간 물체들의 크기와 밀도가 비슷할 때,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밀도가 비슷한 두 공간 물체의 크기가 비교적 같지 않고, 작은 것이 큰 것에 차츰 다가가면, 작은 물체의 궤도의 반지름이 큰 물체의 반지름의 2.5배보다 작게 될 때, 작은 물체의 분열이 일어날 것이다. 공간에 있는 거성들 사이에서 충돌은 참으로 보기 드물지만, 이 인력의 조수 같은 작용으로 인한 작은 물체의 분열은 아주 흔하다.
57:6.5 (658.2) 유성(流星)이 떼지어 생기는 것은, 유성들이 더 큰 물질 덩어리의 조각이기 때문이며, 이것들은 근처에 있는 더 큰 공간 물체들이 행사하는 인력의 조수 같은 작용으로 분열된 것이다. 토성의 고리들은 분열된 어느 위성의 조각들이다. 목성의 달 가운데 하나는 지금 조수 같은 작용으로 분열되는 임계 지대에 아슬아슬하게 가까이 가고 있고, 몇백만 년 안에 그 행성에게 잡히든지, 아니면 인력의 조수 작용으로 인하여 분열을 겪을 것이다. 태양계의 다섯째 행성은 무척 오래 전에, 불규칙한 궤도를 돌았고, 정기적으로 목성에 점점 더 가까이 접근했으며, 마지막에 인력의 조수 작용으로 분열되는 임계 지대에 들어가서, 급히 조각이 나고 오늘날 소행성의 집합이 되었다.
57:6.6 (658.3) 4,000,000,000년 전에는 목성과 토성의 체계들이 조직되는 것을 구경하였고, 이것은 수십억 년 동안 계속 커진 자체의 달들을 제외하고, 오늘날 관찰되는 바와 무척 비슷했다. 사실, 태양계의 행성과 위성들은 모두, 계속해서 운석을 잡아들이는 결과로서, 아직도 자라고 있다.
57:6.7 (658.4) 3,500,000,000년 전에 다른 10 행성의 응축하는 핵심들이 잘 형성되었고, 대다수의 달의 핵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작은 위성들 가운데 더러는 나중에 뭉쳐서 오늘날의 더 큰 달들을 이루었다. 이 시대를 행성이 조립되는 시대로 여겨도 좋다.
57:6.8 (658.5) 3,000,000,000년 전에 태양계는 오늘날과 아주 비슷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 구성원들은, 공간의 운석들이 엄청난 비율로 행성과 그 위성들에 줄곧 쏟아짐에 따라서, 계속해서 덩치가 커졌다.
57:6.9 (658.6) 이 무렵에 너희의 태양계는 네바돈의 물리 등록부에 기록되었고, 몬마시아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57:6.10 (658.7) 2,500,000,000년 전에 행성들은 덩치가 엄청나게 커졌다. 유란시아는 오늘날 크기의 약 10분의 1로 잘 발육된 구체였고, 아직도 운석을 첨가함으로 빨리 자라고 있었다.
57:6.11 (658.8) 이 엄청난 활동은 모두 유란시아 서열의 진화 세계를 만드는 데 정상 부분이며, 시간 세계에서 생명의 모험을 위한 준비로서, 그러한 공간 세계들이 물리적 진화를 시작하기 위한 무대를 세우는 데 천문학적 준비 과정이다.
57:7.1 (658.9) 이 초기 시절 동안 내내, 태양계의 공간 지역에는 파괴적이고 응축된 작은 물체들의 떼가 들끓고 있었고, 물질을 태워 보호하는 공기가 없는 가운데 그러한 우주 물체들은 유란시아의 표면에 바로 부딪쳤다. 이 끊임없는 충격은 행성의 지표를 얼마큼 뜨거운 채로 두었고, 이것은 그 구체가 자람에 따라서 인력 작용이 늘어남과 함께, 철과 같이 무거운 원소들이 차츰 행성의 중심을 향하여 점점 더 가라앉게 한 영향력이 비로소 작용하게 만들었다.
57:7.2 (659.1) 2,000,000,000년 전에 지구는 분명히 달을 능가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이 행성은 그 위성보다 컸지만, 이 무렵까지 크기에 별 차이가 없었는데, 이때 엄청난 공간 물체들이 지구에게 붙잡혔다. 당시에 유란시아는 현재 크기의 약 5분의 1이었으며, 원시적 대기를 붙들어 둘 만큼 충분히 크게 되었고, 이 대기(大氣)는 가열된 내부와 식어 가는 껍질 사이에서, 안에 있는 원소들이 투쟁하는 결과로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57:7.3 (659.2) 분명한 화산(火山) 활동은 이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운석들이 공간으로부터 가져온 원소, 방사성이 있거나 무거운 원소들이 더욱 깊고 깊이 파묻혀서 지구의 내부 온도는 계속 높아졌다. 방사성을 가진 이 원소들을 연구하면 유란시아의 표면이 10억 년이 더 되었다는 것을 드러낼 것이다. 라디움 시계는 행성의 나이를 과학적으로 추정하는 데 가장 믿을 만한 시계이다. 그러나 모든 그러한 추정치는 너무 짧은데, 이는 너희의 정밀 검사에 소용되는 방사성 물질은 모두 지구 표면에서 추출된 것이고, 따라서 유란시아가 이 원소들을 비교적 최근에 얻었음을 나타낸다.
57:7.4 (659.3) 1,500,000,000년 전에 지구는 현재 크기의 2/3가 되었고, 한편 달은 그 현재 질량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구가 달보다 빠른 속도로 커진 것은 지구로 하여금 그 위성이 최초에 가지고 있던 얼마 안 되는 대기를 천천히, 비로소 강탈하게 만들었다.
57:7.5 (659.4) 화산의 활동은 이제 절정에 이르렀다. 지구 전체가 타오르는 진정한 지옥이었고, 그 표면은 무거운 금속들이 중심을 향하여 가라앉기 전에, 초기에 녹아 있던 상태를 닮았다. 이때가 화산 시대이다. 그런데도 비교적 가벼운 화강암으로 주로 이루어진 껍질이 차츰 형성되고 있다. 언젠가 생명을 지원할 수 있는 행성을 위하여 무대가 준비되고 있다.
57:7.6 (659.5) 행성에 원시 대기(大氣)가 천천히 생성되고 있으며, 이제는 얼마큼의 수증기, 1산화 탄소, 2산화 탄소, 염화 수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유리(遊離)된[3] [1693] 질소나 산소는 거의 또는 전혀 없다. 화산 시대에 세계의 대기는 이상한 광경을 보여준다. 앞에 열거한 가스 외에도, 대기는 많은 종류의 화산 가스로 무겁게 채워져 있고, 공기의 띠가 성숙함에 따라서, 행성 표면에 항상 팽개쳐지는 무거운 운석 소나기의 타 버린 산물로 채워진다. 그렇게 운석이 타는 것은 대기의 산소를 거의 소모해 버리는데, 운석의 폭격 비율은 아직도 엄청나다.
57:7.7 (659.6) 이내, 대기는 더욱 안정되고 충분히 식어서, 행성의 뜨겁고 거친 표면에서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수천 년 동안 유란시아는 하나의 광대하고 이어진 수증기의 담요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이 시대에 해는 지구의 표면에 결코 빛난 적이 없었다.
57:7.8 (659.7) 대기에 있는 탄소의 상당 부분은 추출되어 행성의 지표 층에 풍부한 여러 가지 금속의 탄산염을 형성하였다. 나중에 훨씬 많은 양의 이 탄소 가스를 초기의 무성한 식물 생명이 소비하였다.
57:7.9 (660.1) 후기에도, 계속되는 용암의 흐름과 쏟아지는 운석들은 공기에 있는 산소를 거의 완전히 소모해 버렸다. 곧 나타나는 원시 대양(大洋)의 초기 침전물조차 아무런 색깔 있는 돌이나 이판암(泥板岩)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대양이 나타난 뒤에 오랫동안, 대기에는 유리된 산소가 거의 없었다. 해초 및 다른 형태의 식물 생명이 나중에 산소를 발생시킬 때까지, 산소는 상당한 양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57:7.10 (660.2) 화산 시대에 행성에 있던 원시적 대기는, 운석 떼들의 부딪치는 충격을 거의 막아 주지 않는다. 수백만의 운석들이 그러한 공기의 띠를 꿰뚫고, 고체로서 행성의 껍질에 부딪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후기 시대에 산소로 강화되는 대기의 방패, 항상 강해지는 마찰력의 방패를 견딜 만큼 큰 것으로 판명되는 운석들의 수가 차츰 줄어들었다.
57:8.1 (660.3) 1,000,000,000년 전이 유란시아 역사가 실제로 시작한 날짜이다. 그 행성은 대체로 오늘날의 크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에 그 행성은 네바돈의 물리 등록부에 기록되었고, 유란시아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57:8.2 (660.4) 끊임없이 수증기가 응결됨과 함께, 공기는 지구의 껍질이 식는 것을 수월하게 만들었다. 화산의 활동은 내부 열의 압력과 껍질의 수축을 일찍부터 균형시켰고, 화산의 수가 급히 줄어들자, 그리고 껍질이 식고 조정되는 이 시기가 진전되자, 지진이 나타났다.
57:8.3 (660.5) 유란시아의 참 지질학적 역사는 첫 대양이 형성되도록 지구의 껍질이 넉넉히 식는 것과 함께 시작된다. 지구의 식어 가는 껍질에서 물과 수증기의 응결은, 일단 시작되자, 거의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의 끝이 되자 대양은 온 세계에 퍼졌고, 평균 1.6킬로미터가 넘는 깊이로 행성 전체를 덮었다. 조수(潮水)는 지금 관찰되는 것과 비슷하게 그때 작용하고 있었지만, 이 원시의 대양은 짜지 않았다. 그 물은 세상을 덮은, 실질적으로 민물이었다. 그 당시에 염소의 대부분은 여러 가지 금속과 결합되었지만, 수소(水素)와 합쳐서 이 물을 약한 산성으로 만들기에 넉넉히 염소가 있었다.
57:8.4 (660.6) 이 아득히 먼 시대가 열릴 때 유란시아는 물에 잠긴 행성이라고 상상해야 한다. 나중에, 더 깊고, 따라서 밀도가 더 높은 용암의 흐름이 현재 태평양의 밑바닥에서 나왔고, 물로 덮인 표면의 이 부분은 상당히 눌리게 되었다. 차츰차츰 두꺼워지는 땅 껍질의 균형을 보상하여 조정하려고 처음 대륙의 땅 덩어리가 세계의 대양에서 솟아나왔다.
57:8.5 (660.7) 950,000,000년 전에 유란시아는 하나의 큰 대륙과 하나의 큰 물 덩어리, 태평양이 있는 그림을 제시한다. 화산들은 아직 널리 퍼져 있고 지진(地震)은 잦고도 심하다. 운석들은 계속해서 지구를 폭격하지만, 그 빈도와 크기가 줄어들고 있다. 대기는 맑아지고 있지만, 2산화 탄소의 양은 계속 많다. 지구의 껍질은 차츰 안정되고 있다.
57:8.6 (660.8) 이 무렵에 유란시아는 행성 행정을 위하여 사타니아 체계에 배치되었고, 놀라시아덱의 생명 기록부에 기입되었다. 그리고 나서 작고 하찮은 그 구체의 행정적 승인이 시작되었다. 그 구체는 미가엘이 나중에 필사자로서 자신을 수여하는 엄청난 사업에 착수할 행성이 되도록 운명이 정해졌고, 거기서 미가엘은 나중에 유란시아로 하여금 그후에 “십자가의 세계”로 지역에서 알려지게 만든 여러 체험에 참여할 것이다.
57:8.7 (661.1) 900,000,000년 전에는 예루셈에서 사타니아의 첫 정찰단이 유란시아에 도착하는 것이 보였는데, 그들은 그 행성을 검사하고, 생명 실험 장소가 되도록 적응되어 있는가 보고하라고 파송되었다. 이 위원회는 24명으로 구성되었고, 생명 운반자, 라노난덱 아들, 멜기세덱, 세라핌, 그리고 초기 시절에 행성의 조직 및 행정과 상관이 있는 다른 계급의 하늘 생명들을 포함했다.
57:8.8 (661.2) 행성에 관하여 힘들여 조사를 마친 뒤에, 이 위원회는 예루셈으로 돌아가서 체계 군주에게 유리하다고 보고했고, 유란시아를 생명 실험 등록부에 기입할 것을 추천했다. 그에 따라 너희 세계는 예루셈에서 십일(十一) 행성으로 등록되었고, 생명 운반자들은 그들이 나중에 생명을 옮기고 심으라는 명령을 가지고 도착할 때, 그들에게 기계ㆍ화학ㆍ전기(電氣) 방법으로 동원하는 새로운 원본을 개시할 허가가 내릴 것이라고 통지를 받았다.
57:8.9 (661.3) 마땅한 절차를 거쳐, 예루셈에서 12명으로 이루어진 혼합 위원회가 행성 점령 준비를 마쳤고 이것은 에덴시아에 있는, 70명으로 이루어진 행성 위원회의 인가를 받았다. 생명 운반자들에게 자문하는 상담자들이 제안한 이 계획은 마침내 구원자별에서 승인을 받았다. 그 뒤에 곧, 네바돈 방송에는 유란시아가 생명 운반자들이 60번째로 사타니아의 실험을 행할 무대가 될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고, 이것은 네바돈 생명 원본들 중에서 사타니아 종류를 확대하고 개량하도록 고안되었다.
57:8.10 (661.4) 온 네바돈에 보낸 우주 방송에서 유란시아가 처음으로 인정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유란시아에게 완전한 우주 지위가 주어졌다. 그 뒤에 곧, 초우주의 소구역 및 대구역 본부 행성들의 기록부에 유란시아가 등록되었다. 이 시대가 끝나기 전에, 유란시아는 유버르사의 행성 생명 기록부에 기입되었다.
57:8.11 (661.5) 이 시대 전체가 잦고도 격심한 폭풍우의 특징을 가졌다. 지구의 초기 껍질은 계속해서 변하는 상태에 있었다. 지표의 냉각이 굉장한 용암의 흐름과 번갈아 일어났다. 세상의 표면 어디서도 이 최초의 행성 껍질을 조금도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모두 깊은 근원에서 분출하는 용암과 너무 자주 섞이고, 초기의 세계적 대양에서 생긴 후일의 침전물과 섞여 왔다.
57:8.12 (661.6) 세상의 표면 어디서도, 카나다 동북부에 헛슨 만 둘레보다, 고대의 대양이 있기 전에 생긴 이 바위들의 변화된 잔재가 더 많이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널리 퍼진 이 화강암 고지(高地)는 대양이 생기기 이전 시대에 속하는 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 돌 지층은 가열되고, 구부러지고, 비틀리고, 구겨졌고, 거듭하여 이 지층은 일그러뜨리는 이 변형 체험을 거쳤다.
57:8.13 (661.7) 대양 시대 동안 내내, 층을 이룬 엄청난 지층, 화석이 없는 돌 지층이 이 고대의 대양 밑바닥에 가라앉았다. (석회암은 화학적 침전의 결과로 형성될 수 있다. 오래 된 석회암이 모두 해양 생명의 침전으로 생기지는 않았다.) 이 고대의 바위 구조에서 아무 데도 생명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우연히, 물 시대의 나중 침전물이 생명이 생기기 이전의 지층, 더 오래 된 이 지층들과 섞이지 않는 한, 이 바위들은 아무런 화석을 포함하지 않는다.
57:8.14 (662.1) 지구의 초기 껍질은 상당히 불안정했지만, 산들은 아직 형성되는 과정에 있지 않았다. 행성은 형성되는 동안에 인력의 압력을 받아 수축되었다. 산은 수축되는 구체의 식는 껍질이 무너져서 생기는 결과가 아니라, 비와 인력과 침식(浸蝕) 활동의 결과로서 나중에 나타난다.
57:8.15 (662.2) 이 시대에 대륙의 땅 덩어리는 지구 표면의 거의 10퍼센트를 덮을 때까지 늘어났다. 대륙의 땅 덩어리가 물 위에 썩 솟아나올 때까지, 심한 지진은 시작되지 않았다. 한번 시작되자, 지진은 오랜 세월 동안 그 빈도와 가혹한 정도가 늘어났다. 수백만 년 동안 지진이 줄어들었지만, 유란시아에는 아직도 날마다 평균 열 다섯 번 일어난다.
57:8.16 (662.3) 850,000,000년 전에 지구의 껍질이 안정되는 진정한 첫 시기가 시작되었다. 무거운 금속들의 대부분은 구체의 중심을 향하여 가라앉았고, 식어 가는 껍질은 앞선 시대에 한 것처럼 그렇게 대규모로 무너지기를 그쳤다. 돌출한 땅과 그보다 무거운 대양의 바닥 사이에 균형이 더 잘 이루어졌다. 지표 밑에 있는 용암의 흐름은 거의 세계적으로 퍼졌고, 이것은 냉각과 수축과 지표의 이동 때문에 생긴 변동을 보상하고 안정시켰다.
57:8.17 (662.4) 화산 분출과 지진의 빈도와 심한 정도는 계속 줄어들었다. 대기는 화산 가스와 수증기를 깨끗이 치우고 있었지만, 2산화 탄소의 비율은 아직도 높았다.
57:8.18 (662.5) 공중에서, 땅에서, 전기(電氣)의 교란도 또한 줄어들고 있었다. 용암의 흐름은 껍질을 다채롭게 만들고 어떤 공간 에너지로부터 행성을 더 잘 절연시키는 원소들의 혼합물을 땅 표면으로 가지고 왔다. 이 모든 것은 자력(磁力)을 띤 두 극의 작용에서 나타나다시피, 땅 에너지의 통제를 용이하게 하고 그 흐름을 규제하는 데 많이 기여했다.
57:8.19 (662.6) 800,000,000년 전에는 처음으로 큰 땅덩이의 시기, 곧 대륙이 더욱 솟아나는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 보였다.
57:8.20 (662.7) 지구의 수권(水圈)이 처음에는 세계에 퍼진 대양으로, 나중에는 태평양으로 응축한 뒤로, 태평양의 물 덩어리는 그때 지구 표면의 10분의 9를 덮었다고 상상해야 한다. 바다로 떨어지는 운석들은 대양의 밑바닥에 쌓였는데, 일반적으로 말해서 운석들은 무거운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땅에 떨어지는 운석들은 대체로 산화(酸化)되고, 나중에 침식으로 닳아 버렸고, 대양의 분지(盆地)로 씻겨 내려갔다. 이처럼 대양의 밑바닥은 갈수록 더 무거워졌고, 이 위에 어떤 장소에서는 16킬로미터나 깊게 물 덩어리의 무게가 더해졌다.
57:8.21 (662.8) 태평양이 밑으로 더욱 가라앉는 것은 대륙의 땅 덩어리를 위로 밀도록 더욱 작용했다. 지금 오스트랄리아, 남북 아메리카, 남극 대륙이라고 부르는 덩어리들과 더불어, 유럽과 아프리카는 태평양의 깊은 데서부터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한편 태평양의 바닥은 이를 보상하여 가라앉는 조정을 더 계속하였다. 이 기간의 끝이 되자 지구 껍질에서 거의 3분의 1이 땅으로 이루어졌고, 모두가 하나의 대륙 덩어리였다.
57:8.22 (662.9) 이렇게 땅이 더욱 높아지면서, 행성에서 처음으로 기후 차이가 생겨났다. 땅의 융기, 우주 구름, 대양의 영향은 기후 변동의 주요한 요인이다. 아시아의 땅 덩어리의 기본 골격은 땅이 최대로 솟아났을 때 거의 14.4킬로미터 높이에 이르렀다. 높이 올라간 이 지역 위에 떠 있는 공기 속에 수분이 많았더라면, 거대한 얼음 담요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빙하기는 사실보다 훨씬 앞서 다가 왔을 것이다. 몇억 년이 지나서야, 그렇게 많은 땅이 다시 물 위에 나타났다.
57:8.23 (663.1) 750,000,000년 전에, 대륙의 땅 덩어리가, 크게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처음으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나중에 대양의 물이 들어오게 했고, 그린랜드를 포함해서, 남북 아메리카의 두 대륙이 서쪽으로 떠내려가는 길을 마련하였다. 동서 방향의 긴 분열은 아프리카를 유럽으로부터 떼어 냈고, 오스트랄리아, 태평양 군도, 남극 대륙을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잘라냈다.
57:8.24 (663.2) 700,000,000년 전에 유란시아는 생명을 지원하기에 적당한 조건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대륙의 떠돌이는 계속되었고, 점점 더 대양은 긴 손가락 같은 바다로서 땅을 쳐들어갔으며, 이 바다는 해양 생명의 서식지가 되기에 아주 적당한, 얕은 바다와 아늑한 만(灣)들을 마련해 주었다.
57:8.25 (663.3) 650,000,000년 전에는 땅덩어리가 더욱 분리되었고, 그 결과로서 대륙의 내해(內海)가 더욱 연장되었다. 이런 바다는 유란시아 생명에 필수였던 짠맛 정도에 빨리 이르고 있었다.
57:8.26 (663.4) 세월이 세월을 잇고, 시대가 지나고 또 지남에 따라서, 잘 보존되어 쌓이고 쌓인 돌 페이지에서 나중에 발견된 바와 같이, 유란시아의 생명 기록부를 적은 것은 바로 이 여러 바다와 뒤이어 생긴 바다였다. 옛 시절에 이 내륙의 바다들은 참으로 진화의 요람이었다.
57:8.27 (663.5) [한 생명 운반자가 발표했다. 그는 최초의 유란시아 군단의 단원이었고 이제는 거주하는 관찰자이다.]
58:0.1 (664.1) 온 사타니아에 유란시아와 비슷한 세계, 생명을 수정(修正)하는 행성이 꼭 61개 있다. 사람이 사는 세계들의 대다수는 확정된 기법에 따라서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한 구체에서 생명 운반자들은 생명을 심는 그들의 계획에 거의 재량이 없다. 그러나 약 열 세계 가운데 하나는 십일 행성으로 지정되고, 생명 운반자들의 특별 등록부에 배정된다. 그러한 행성에서 우리는 표준 우주 종류의 살아 있는 존재들을 수정하거나 어쩌면 개량하려는 노력으로, 어떤 생명 실험에 착수할 허락을 받는다.
58:1.1 (664.2) 600,000,000년 전에 예루셈으로부터 파송된 생명 운반자 위원회가 유란시아에 도착했고, 사타니아 체계의 606번 세계에서 생명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로, 물리적 조건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사타니아에서 네바돈 생명 원본들을 시작하는 606번째 경험이 되며, 지역 우주의 기본적 표준 생명을 설계하면서 우리가 고치고 수정할 60번째 기회가 될 것이었다.
58:1.2 (664.3) 생명 운반자들은 한 구체의 조건이 진화의 주기를 시작할 때가 무르익기 전에 생명을 개시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우리는 그 행성의 물리적 진보가 지원하고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빨리 생명을 개발할 수도 없다.
58:1.3 (664.4) 사타니아 생명 운반자들은 소금 형태의 생명을 계획했다. 따라서 대양의 바다가 충분히 짜게 되기까지 생명을 심는 방향으로 아무런 걸음을 내디딜 수 없었다. 유란시아 부류의 원형질은 오직 적당한 소금물 속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조상이 되는 모든 생명―식물과 동물―은 소금물로 된 서식지에서 진화하였다. 더욱 높게 조직된 육지 동물조차, 필수인 바로 이 소금 용액이 그 몸을 통해서 피의 흐름 속에 돌지 않으면 계속해서 살 수 없고, 이 피의 흐름은 이 “짠 바다” 속에 있는 조그만 살아 있는 세포를 모두 아낌없이 씻어 내리고, 글자 그대로 잠기게 한다.
58:1.4 (664.5) 너희의 원시 조상들은 짠맛이 나는 대양(大洋)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오늘날, 바로 이 대양과 같은 짠 용액이 너희 몸 속에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개별 세포를 화학 용액으로 적신다. 이 용액의 모든 요소는 행성에서 활동하기로 된 살아 있는 처음 세포들의 첫 원형질 반응을 자극한 소금물과 견줄 만하다.
58:1.5 (664.6) 그러나 이 시대의 막이 오르자 유란시아는 모든 면에서 초기 형태의 해양 생명을 지원하기에 유리한 상태를 향하여 진화하고 있다. 전개되는 물리적 환경―땅과 공간의 환경―에 최선으로 적응될 것이라고 우리가 결정한 생명 형태들을 자리잡게 하려는 나중의 여러 시도를 위하여, 느리지만 확실하게, 땅에서, 또 인접한 공간 지역에서 물리적 발전이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58:1.6 (665.1) 후일에 사타니아의 생명 운반자 위원회가 예루셈으로 돌아왔는데, 그들은 대륙의 땅 덩어리가 더 부서지기까지 기다리기를 선호하였고, 이것은 실제로 생명을 심기 시작하기 전에, 더욱 많은 내륙의 바다와 아늑한 만을 마련해 줄 것이었다.
58:1.7 (665.2) 생명이 해양에서 기원을 가지는 행성에서는 수많은 내륙의 바다가, 얕은 바다와 아늑한 만의 널리 뻗은 해안선이, 생명을 심는 데 이상적 조건을 마련해 준다. 그리고 지구에서 바로 그러한 바다가 빨리 분포되고 있었다. 고대에 있던 이 내륙의 바다는 150미터에서 180미터보다 더 깊은 일이 드물었고, 태양 빛은 180미터보다 더 깊이 대양의 물을 침투할 수 있다.
58:1.8 (665.3) 후기 시대의 따듯하고 온화한 풍토에서, 바로 그러한 바닷가에서, 원시의 식물 생명은 땅으로 올라가는 길을 찾았다. 거기서 공기 속에 밀도가 높은 탄소는 새로운 육지 종류의 생명에게 빠르고 무성하게 자랄 기회를 주었다. 이 대기가 그때 식물의 성장에 이상적이었으나 포함한 2산화 탄소의 비율이 아주 높아서, 사람은커녕, 아무 동물도 지구의 표면에서 살 수 없었다.
58:2.1 (665.4) 행성의 대기(大氣)는 태양의 총 빛 방출량의 약 20억분의 1을 걸러서 받는다. 북 아메리카에 떨어지는 빛의 값을 시간당 1킬로와트에 2센트의 비율로 치른다면, 1년에 빛의 요금은 약 800,000조(兆) 달라가 될 것이다. 시카고의 햇빛 요금은 하루에 1억 달라가 훨씬 넘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태양으로부터 다른 형태의 에너지를 받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빛은 너희 대기에 태양이 미치는 유일한 공헌이 아니다. 인간의 시력이 인식하는 범위 위와 아래로 미치는 파장을[1] [1694] 포함해서, 광대한 태양 에너지가 유란시아에 퍼부어진다.
58:2.2 (665.5) 지구의 대기는 극자외선[2] [1695] 파장 끝에 태양이 방사하는 많은 것을 거의 통과시키지 않는다. 이 짧은 파장의 대부분은 지표 위에서 약 16킬로미터 수준 전역에 걸쳐서 존재하는 한 오존층에 흡수되며, 이 층은 공간을 향하여 다시 16킬로미터까지 뻗는다. 이 지역에 스며드는 오존은, 지구 표면의 조건에서 0.25센티미터 두께의 층을 이룰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비교적 작고 겉보기에 하찮은 양의 오존은 햇빛에 있는 위험하고 파괴적인 이 자외선의 지나친 방사로부터 유란시아 거주자들을 보호한다. 그러나 이 오존층이 조금만 더 두텁다면, 너희는 상당히 중요하고 건강에 좋은 자외선을 빼앗길 것이다. 이 자외선은 지금 지구 표면에 미치며, 가장 필수인 너희의 비타민 중 하나의 조상이 된다.
58:2.3 (665.6) 상상력이 모자라는 너희 필사 기계론자 중에 더러는 아직도 물질 창조와 인간의 진화를 우연(偶然)이라 보기를 고집한다. 유란시아 중도자들은 물리학과 화학에서 5만 가지가 넘는 사실을 수집했는데, 이것들이 우연의 법칙과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며, 물질 창조에 총명한 목적이 있음을 틀림없이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이 모든 것은 물리학과 화학 분야 바깥에, 그들이 조사한 10만 가지가 넘는 결과의 목록을 전혀 계산에 넣지 않았고, 중도자들은 이것들이 물질 우주를 계획하고 창조하고 유지하는 지성이 있음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58:2.4 (666.1) 너희의 태양은 죽음을 초래하는 빛을 진정한 홍수처럼 퍼부으며, 유란시아에서 너희의 쾌적한 삶은, 40가지가 넘는 작용, 겉보기에 어쩌다가 일어나는 보호 작용의 “우연한” 영향 때문인데, 이것들은 이 독특한 오존층의 작용과 비슷하다.
58:2.5 (666.2) 밤에 대기가 “덮어주는” 효과가 아니라면, 방사로 말미암아 열을 너무 빨리 잃어 버려서, 인조(人造) 시설을 쓰지 않고서는 생명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58:2.6 (666.3) 지구의 대기에서 아래쪽 8킬로미터부터 9.6킬로미터는 대류권(對流圈)이다. 여기는 바람과 공기의 흐름이 있는 지역이며, 이것은 날씨 현상을 일으킨다. 이 지역 위는 내부 이온 층이고, 그 위는 성층권이다. 지구의 표면으로부터 올라가면서, 9.6킬로미터나 14.4킬로미터까지 기온이 꾸준히 떨어지고, 그 높이에서 약 화씨 영하 70도를 기록한다. 화씨로 영하 65도에서 70도에 이르는 이 기온의 범위는 64킬로미터 더 올라가면서 바뀌지 않는다. 기온이 불변하는 이 영역이 성층권이다. 72킬로미터나 80킬로미터의 높이에서, 기온은 비로소 오른다. 오로라가 전시되는 수준에서, 기온이 화씨 1200도에 이를 때까지, 이 기온의 상승이 계속되고, 산소를 이온화하는 것은 이 극심한 열이다. 그러나 그러한 희박하게 된 공기에서 온도는 지구 표면에서 계산하는 열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다. 너희의 모든 대기의 절반은 처음 4.8킬로미터에서 발견될 것을 기억하여라. 가장 높은 오로라 빛줄기가 지구의 대기의 높이를 가리킨다―약 640킬로미터이다.
58:2.7 (666.4) 오로라 현상은 태양의 흑점과 직접 관련된다. 이 태양의 회오리바람은 마치 땅에서 열대 지방의 폭풍우처럼, 태양의 적도(赤道) 위와 아래에서 반대 방향으로 소용돌이친다. 그러한 대기의 교란은 적도 위나 아래서 생길 때, 반대 방향으로 소용돌이친다.
58:2.8 (666.5) 태양의 흑점이 빛의 주파수를 바꾸는 힘은 이 태양 폭풍의 중심들이 엄청난 자석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한 자장(磁場)은 흑점의 분화구로부터 바깥으로 공간을 통해서, 전하를 띤 입자들을 지구의 바깥 대기까지 던질 수 있고, 거기서 이온화하는 입자들의 영향력은 그러한 무척 볼 만한 오로라를 보여준다. 따라서 태양의 흑점이 아주 한창일 때―또는 바로 뒤에―너희는 가장 큰 오로라 현상을 보는데, 그때 흑점들이 적도에 자리잡는 경향이 더 있다.
58:2.9 (666.6) 나침반의 바늘조차 이 태양의 영향에 민감한데, 해가 뜨는 동안에 바늘이 조금 동쪽으로, 해가 저물 무렵이 가까워짐에 따라서 조금 서쪽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날마다 일어나지만, 태양 흑점의 주기가 절정에 있는 동안, 이 나침반의 변동은 2배나 크다. 낮에 생기는 이러한 나침반의 떠돌이는 대기의 상부(上部)에서 생기는 이온화의 증가에 반응하는 것이며, 이온화는 햇빛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58:2.10 (666.7) 성층권 위에서 두 가지 다른 수준에서, 전기를 띤 전도(傳導) 지역이[3] [1696] 존재하는 것은 너희의 장파 및 단파 방송이 장거리에 송신되는 것을 설명한다. 때때로 너희의 방송은, 이 바깥 이온 층의 영역에서 이따금 몰아치는 무서운 폭풍에 방해를 받는다.
58:3.1 (666.8) 우주가 물질화하는 초기 시절에 공간 지역에는 광대한 수소(水素) 구름이 흩어져 있는데, 이것은 바로 그러한 천문학상의 먼지 덩어리가 먼 공간에 두루, 많은 지역의 특징을 지금 나타내는 것과 같다. 타오르는 별들이 방사 에너지로 분쇄하고 분산시키는 조직된 물질의 상당 부분은, 일찍 나타나는 구름, 공간의 이 수소 구름 속에서 처음에 만들어졌다. 어떤 특별한 조건 밑에서 큰 수소 덩어리의 핵 속에서도 원자의 붕괴가 또한 일어난다. 원자를 만들고 원자를 분해하는 이 모든 현상에는, 상당히 가열된 성운의 경우처럼, 방사 에너지를 가진 짧은 우주선이 밀물처럼 쏟아지는 일이 뒤따른다. 이 다양한 방사물에는 유란시아에서 알려지지 않은 형태의 공간 에너지가 뒤따른다.
58:3.2 (667.1) 우주 공간에 있는 짧은 빛의 에너지 전하는 조직된 공간 영토에서 존재하는 모든 다른 형태의 방사 에너지보다 4백배가 더 크다. 짧은 우주선(宇宙線)의 출력은, 타오르는 성운이나 팽팽한 전기장(電氣場), 바깥 공간이나 광대한 수소 먼지 구름에서 오든지 상관 없이, 온도ㆍ인력ㆍ전압의 갑작스러운 긴장의 변동에 따라서 질적ㆍ양적으로 수정된다.
58:3.3 (667.2) 우주선의 근원에서 일어나는 이 사태는 많은 우주 사건과 회전하는 물질의 궤도에 따라 결정되며, 이 궤도는 수정된 동그라미에서부터 극도의 타원형에 이르기까지 변한다. 전자(電子)의 자전(自轉)이 때때로 같은 물리적 지대에서도 더 커다란 물질의 움직임과 반대 방향이기 때문에, 물리적 조건은 또한 크게 바뀔 수도 있다.
58:3.4 (667.3) 광대한 수소 구름은 우주의 진정한 화학 실험실이며, 모든 단계의 진화하는 에너지와 변형하는 물질을 품고 있다. 아주 빈번히 겹치고, 따라서 널리 섞이는, 큰 2중성의 가장자리 가스에서 큰 에너지 활동이 또한 일어난다. 그러나 엄청나고 광범위한 이 공간 에너지 활동 중에 아무것도 조직된 생명의 현상―살아 있는 물건과 존재의 생식질(生殖質)―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공간의 이 에너지 조건은 생명을 정착시키는 데 필수인 환경과 관련되지만, 그 조건은 방사 에너지를 가진, 파장이 더 긴 빛 중에 더러가 그런 것처럼, 생식질의 유전 인자(因子)들을 나중에 수정하는 데 효력이 없다. 생명 운반자들이 심은 생명은 우주 에너지를 가진 짧은 우주선이 이렇게 놀랍게 범람하는 데 대하여 충분히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
58:3.5 (667.4) 생명 운반자들이 유란시아에서 생명을 정착시키는 일을 실제로 시작할 수 있기 전에, 이 기본 우주 조건이 모두 유리한 상태로 발전되어야 했다.
58:4.1 (667.5) 우리를 생명 운반자라 부른다고 해서 너희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행성에 생명을 나를 수 있고, 나르기도 하지만, 유란시아에 아무 생명도 가져오지 않았다. 유란시아의 생명은 독특하며, 행성에 기원이 있었다. 이 구체는 생명을 수정하는 세계이며, 여기서 나타나는 모든 생명은 바로 여기서, 행성에서 우리가 빚어냈다. 그리고 유란시아에 있는 것과 똑같은 생명 존재는 온 사타니아에, 아니 온 네바돈의 어느 다른 세계에도 없다.
58:4.2 (667.6) 550,000,000년 전에 생명 운반자 군단은 유란시아로 돌아왔다. 영적 권능과 초물리 세력들과 협동하여, 우리는 이 세계 최초의 생명 형태들을 준비하고 창시했으며, 그것들을 이 영역의 쾌적한 바다에 심었다. 행성 영주 칼리가스티아의 시절까지 (행성 바깥의 성격자들을 제외하고) 모든 식물 생명은 우리가 최초에, 동시에 심은 동일한 세 개의 해양 생명에서 기원을 가졌다. 이 세 개의 생명 이식(移植)에는 다음과 같은 명칭이 붙었다: 중앙 이식, 곧 유라시아 및 아프리카 이식, 동부 이식, 곧 오스트랄리아 이식, 그리고 서부 이식이며, 서부는 그린랜드와 두 아메리카를 포함한다.
58:4.3 (668.1) 500,000,000년 전에, 원시적 해양 식물 생명이 유란시아에서 자리를 잘 잡았다. 그린랜드와 북극의 땅 덩어리는, 남북 아메리카와 함께, 오랫동안 느리게 서향으로 떠내려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프리카는 조금 남쪽으로 움직였고, 동서 방향의 골짜기, 곧 지중해 분지를 그 자체와 모체 사이에 만들었다. 남극, 오스트랄리아, 그리고 태평양 섬들이 가리키는 땅은 남쪽과 동쪽에서 갈라졌고, 그날 이후로 멀리 떠내려갔다.
58:4.4 (668.2) 부서지는 대륙 땅 덩어리의 동서로 갈라진 틈에, 가운데 바다의 보호된 열대의 만(灣)에, 우리는 원시 형태의 해양 생명을 전에 심었다. 우리가 해양 생명을 셋이나 심은 목적은, 땅이 나중에 분리됨에 따라서 큰 땅 덩어리가 각자 이 생명을 물이 따듯한 바다 속으로 꼭 가져가도록 보장하려는 것이었다. 육지 생명이 나타나는 후일의 시대에 큰 대양의 물이, 떠내려가는 이 대륙 땅 덩어리를 떼어놓을 것이라 우리는 내다보았다.
58:5.1 (668.3) 대륙 땅 덩어리의 떠돌이는 계속되었다. 지구의 핵심은 강철처럼 조밀하고 단단해졌고, 1 입방 센티미터에 거의 1,500톤의 압력 밑에 깔려 있었다. 엄청난 인력의 누르는 힘 때문에, 깊은 내부는 아주 뜨거웠고 아직도 그렇다. 중심에서 온도가 태양 표면 온도보다 약간 높을 때까지, 표면에서 밑으로 가면서 온도가 올라간다.
58:5.2 (668.4) 지구 덩어리의 겉에서 1600킬로미터는 주로 다른 종류의 바위로 구성되어 있다. 그 밑에는 더 조밀하고 무거운 금속 원소들이 있다. 초기에 대기(大氣)가 있기 이전 시대를 통하여 내내, 세상은 녹아 있고 상당히 가열된 상태에서 아주 거의 액체 였기 때문에, 무거운 금속들은 안으로 깊숙히 가라앉았다. 오늘날 표면 가까이서 발견되는 것들은 고대 화산들의 분비물, 나중에 널리 퍼진 용암의 흐름, 그리고 그보다 최근에 운석으로 투입된 것을 대표한다.
58:5.3 (668.5) 바깥 껍질의 두께는 약 64킬로미터였다. 이 바깥 껍질을 두께가 다른 녹은 현무암의 바다가 받쳐 주고, 껍질은 바로 그 위에 놓여 있었다. 이것은 높은 압력 밑에 깔린 유동적인 녹은 용암층이었지만, 변하는 행성의 압력을 평준화하려고 늘 이리저리 흐르는 성질을 가졌고, 그렇게 함으로 지구의 껍질을 안정시키는 경향이 있다.
58:5.4 (668.6) 굳어지지 않고 방석 같은 이 녹은 현무암의 바다 위에서 대륙들이 오늘날도 계속 떠다닌다. 이렇게 보호하는 조건이 아니라면, 더욱 심한 지진이, 글자 그대로 세계를 흔들어 조각으로 만들 것이다. 지진은 딱딱한 바깥 껍질이 미끄러지고 이동함으로 생기며, 화산이 지진을 일으키지 않는다.
58:5.5 (668.7) 지구 껍질의 용암층은 식었을 때 화강암을 형성한다. 유란시아의 평균 밀도는 물보다 5배 반이 조금 넘는다. 화강암의 밀도는 물의 밀도의 3배보다 작다. 지구의 핵심은 물의 12배나 밀도가 높다.
58:5.6 (668.8) 바다의 밑바닥은 땅 덩어리보다 더 조밀하고, 이것이 대륙을 물 위에 뜨게 만든다. 바다 밑바닥은 해수면 위로 튀어나올 때, 대체로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것이 발견될 것이다. 현무암은 땅 덩어리를 이루는 화강암보다 상당히 더 무거운 용암의 형태이다. 또 한편, 대륙이 대양의 바닥보다 가볍지 않다면, 인력이 대양의 가장자리를 땅 위로 잡아당길 터이지만, 그러한 현상을 관찰할 수 없다.
58:5.7 (668.9) 대양의 무게는 또한 바다 밑바닥에서 압력이 증가하는 한 요인이다. 아래에 있지만 비교적 더 무거운 대양의 지층들은 그 위에 있는 물의 무게와 함께, 높이 있지만 훨씬 가벼운 대륙들의 무게에 가깝다. 그러나 모든 대륙은 대양 속으로 기어가는 성질이 있다. 대양의 바닥 수준에서 대륙의 압력은 1평방 센티미터에 약 1,400킬로그람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대양의 밑바닥에서 4600미터 높이에 서 있는 대륙 덩어리의 압력일 것이다. 대양 바닥에 있는 물의 압력은 1평방 센티미터에 겨우 350킬로그람이다. 차이 나는 이 압력은 대륙들로 하여금 대양의 바닥을 향하여 미끄러져 내리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58:5.8 (669.1) 생명이 생기기 이전 시대에 대양의 밑바닥이 눌린 것은, 혼자 있던 대륙 땅 덩어리를 아주 높이 들어올려서, 측면의 압력이 동쪽ㆍ서쪽ㆍ남쪽 가장자리로 하여금 아래로, 밑에 깔려 있는 반 끈적끈적한 용암 지층 위로, 둘러싼 태평양 바다로 미끄러져 내리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이 대륙의 압력을 아주 충분히 보상했기 때문에, 고대의 이 아시아 대륙의 동쪽 해안은 크게 갈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로 죽 그 동쪽 해안선은 인접한 대양 깊은 곳의 절벽 위에서 둥둥 떠 있어 왔고, 물 속 무덤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려고 위협한다.
58:6.1 (669.2) 450,000,000년 전에, 식물 생명으로부터 동물 생명으로 변이(變移)가 일어났다. 이 변천은 분리되는 여러 대륙의 널리 뻗은 해안선에서, 아늑한 열대의 만과 개펄의 얕은 물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 발전은 모두 최초의 생명 원본들에 본래부터 있었고, 차츰차츰 일어났다. 초기의 원시 식물 형태의 생명, 그리고 후기의 잘 규명된 동물 유기체(有機體) 사이에 많은 과도기 단계가 있었다. 오늘날도 과도기의 끈적끈적한 곰팡이들이 버티고 있는데, 이것들은 좀처럼 식물이나 동물로 분류할 수 없다.
58:6.2 (669.3) 식물 생명이 동물 생명으로 진화되는 것을 추적할 수 있고, 점진적으로 가장 간단한 것으로부터 가장 복잡하고 발달된 유기체로 이끄는 단계적 시리즈의 식물과 동물을 발견할 수 있지만, 동물계의 큰 부문 사이에서나, 인간이 생기기 이전의 가장 높은 동물 종류와 인류의 시초 인간 사이에서도, 그런 연결하는 고리를 너희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른바 이 “빠진 고리”는 언제까지나 빠진 채로 있을 터이니, 그것들이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는 뻔한 이유 때문이다.
58:6.3 (669.4) 한 시대에서 다음 시대까지, 근본적으로 새로운 종(種)의 동물 생명이 나타난다. 종들은 작은 변화가 차츰차츰 쌓인 결과로서 진화하지 않는다. 완전히 발육된, 새로운 서열의 생명으로서 나타나며, 갑자기 나타난다.
58:6.4 (669.5) 새로운 종과 다양화된 서열의 살아 있는 유기체들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온전히 생물학적이며, 엄밀하게 말하면 자연스럽다. 아무런 초자연 현상이 이 유전의 변화에 관련되지 않았다.
58:6.5 (669.6) 대양에서 물의 짠맛이 알맞을 때 동물 생명이 진화했고, 소금물이 해양 생명의 동물 몸을 통해서 돌게 만드는 것은 비교적 간단했다. 그러나 대양이 수축하고 소금의 비율이 크게 높아졌을 때, 바로 이 여러 동물은 체액에서 소금기를 줄이는 능력을 진화했으며, 이것은 민물에서 살기를 배운 유기체들이 소금을 보존하는 기발한 기법으로, 체액 속에서 소금을 적당한 정도로 유지하는 능력을 얻은 것과 같다.
58:6.6 (669.7) 바위 속에 박혀 있는 해양 생명의 화석(化石)을 연구하는 것은 이 원시 유기체들이 초기에 조정하는 싸움을 겪었음을 드러낸다. 식물과 동물은 이 조정하는 실험을 결코 그치지 않는다. 환경은 늘 변하고 있고, 살아 있는 유기체들은 결코 그치지 않는 변화에 적응하려고 언제나 애쓰고 있다.
58:6.7 (670.1) 모든 새 서열의 생명이 가진 생리적 장비와 해부학적 구조는 자연 법칙의 작용에 반응해서 생긴다. 그러나 그 뒤에 지성 재산은 타고난 두뇌 능력에 따라서 보조 지성 영들이 수여한 것이다. 지성은 물리적 진화는 아니지만, 순전히 물리적ㆍ진화적 발전이 허락하는 두뇌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58:6.8 (670.2) 이득과 손실이 거의 끝없이 되풀이 되는 주기(週期), 조정하고 다시 조정하는 주기를 거쳐서, 살아 있는 모든 유기체는 시대를 거듭하여, 앞뒤로 오락가락한다. 우주와 화합을 이루는 자는 지속하고, 이 목표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존재를 그친다.
58:7.1 (670.3) 생명이 시작되는 시대, 곧 원생대(原生代)에, 세상의 바깥 껍질을 구성한 광대한 집단의 바위 체계는 이제 지구 표면에서 여러 곳에 나타나지 않는다. 후일에 쌓인 모든 누적물 밑에서 그런 집단이 솟아날 때, 오로지 식물과 초기의 원시 동물 생명의 화석 유물만 발견될 것이다. 물로 퇴적된 오래 된 바위들 가운데 더러는 후일의 지층과 한데 섞여 있고, 초기 형태의 어떤 식물 생명의 화석 유물을 때때로 산출한다. 한편 가장 위층에서는 더 원시 형태의 초기 해양 동물 유기체가 얼마큼 때때로 발견될 수 있다. 여러 곳에서, 동물과 식물을 포함하여, 초기의 해양 생명 화석을 품은, 층화된 가장 오래 된 이 바위 층은, 차별화되지 않은 더 오래 된 돌 바로 위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
58:7.2 (670.4) 이 시대의 화석은 조류(藻類), 산호 같은 식물, 원시의 원충류(原蟲類), 해면 같은 과도기 유기체를 산출한다. 그러나 초기의 바위 층에서 그러한 화석이 없는 것은 그 화석이 투입되었을 때 생물이 다른 곳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반드시 증명하지는 않는다. 이 초기 시절을 통해서 생명은 드문드문 있었고, 느리게나마 땅 껍질에서 길을 개척했다.
58:7.3 (670.5) 이 옛 시대의 바위는 지금 지구의 표면이나 표면 아주 가까이, 현재 땅 면적의 약 8분의 1 위에 널려 있다. 이 과도기의 돌, 곧 가장 오래 된 층화된 바위 층의 평균 두께는 약 2.4킬로미터가 된다. 어떤 지점에서 이 고대의 바위 체계는 두께가 6.4킬로미터 되지만, 이 시대에 속한 것으로 사람들이 주장하는 층의 다수는 그보다 후기에 속한다.
58:7.4 (670.6) 북 아메리카에서, 화석을 품은 이 고대의 원시 돌 층은 카나다의 동부ㆍ중부ㆍ북부 지역에 걸쳐, 표면에 나타난다. 펜실바니아와 고대의 아디론닥 산맥으로부터 서쪽으로 미시간ㆍ위스칸신ㆍ미네소타를 거쳐서 연장되는, 이 바위의 드문드문한 동서 산마루가 또한 있다. 다른 산마루는 뉴펀드랜드서부터 알라바마까지, 그리고 알라스카에서부터 멕시코까지 이어진다.
58:7.5 (670.7) 이 시대의 바위는 온 세계에 여기저기 노출되어 있지만, 수피리어 호수 근처와 콜로라도 강의 그랜드 캐년에 있는 것보다 더 풀이하기 쉬운 것은 없다. 거기에는 화석을 품은 이 원시 바위가 여러 겹으로 존재하며, 그 아득한 시절에 격변과 표면의 변동이 있었음을 증거한다.
58:7.6 (670.8) 이 돌 층은, 지구의 껍질에서 화석을 품은 가장 오래 된 지층인데, 지진으로 인한 융기와 초기 화산의 결과로 구겨지고, 접히고, 괴상하게 비틀어졌다. 이 시대 용암의 흐름은 많은 철ㆍ구리ㆍ납을 행성의 표면 가까이로 올려 왔다.
58:7.7 (670.9) 지구에는 그러한 활동을 위스칸신의 세인트 크루아 계곡보다 더 그림처럼 보여주는 데가 거의 없다. 이 지역에는 땅에 있는 용암의 흐름이 연달아 물 속에 잠겨서 그 결과로 바위가 퇴적되는 현상이 127번이나 연속으로 일어났다. 위쪽의 바위 퇴적과 간헐적인 용암 흐름 가운데 많은 것은 오늘날 없다. 이 체계의 밑바닥은 땅 속에 깊이 묻혀 있지만, 그런데도 지난 시대의 이 층화된 기록 가운데 약 65에서 70군데가 눈에 보이게 지금 드러나 있다.
58:7.8 (671.1) 상당한 땅이 거의 해수면 가까이에 있던 이 초기 시절에, 여러 번 연달아 땅이 물 속에 가라앉고 솟아났다. 지구의 껍질은 비교적 안정된 후기에 막 들어가고 있었다. 더 일찍 있었던 대륙의 떠돌이로부터 생긴 파동, 곧 상승과 하강은 큰 땅 덩어리들이 빈번히 정기적으로 가라앉게 만들었다.
58:7.9 (671.2) 원시 해양 생물이 살던 이 시대에, 대륙 해안의 광범위한 면적은, 몇 미터에서 800미터까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오래 된 사암(砂岩)과 역암(礫岩)이 이 고대의 해안에서 침전되어 쌓인 것을 대표한다. 이 초기의 층화에 속하는 퇴적암은 생명이 시작되기 훨씬 앞서, 전세계에 퍼진 대양이 초기에 나타나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지층 바로 위에 놓여 있다.
58:7.10 (671.3) 이 과도기 암석 퇴적물의 상부 지층 가운데 더러는 소량의 이판암(泥板岩)이나 검은 빛을 띤 점판암(粘板岩)을 포함하는데, 이것은 유기(有機) 탄소가 존재했음을 가리키며, 뒤따르는 석탄기, 곧 석탄 시대에 지구를 뒤덮은 식물 생명 형태의 조상이 존재했음을 입증한다. 이 암석 지층에 있는 구리의 상당 부분은 물에서 퇴적한 결과로 생긴다. 더러는 더 오래 된 암석 틈에서 발견되며, 고대에 어떤 보호받은 해안선에서 느릿한 늪의 물이 농축된 것이다. 북 아메리카와 유럽의 철 광산은 퇴적물과 분출물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것들의 일부는 더 오래 된 층화되지 않은 암석, 그리고 일부는 생명이 형성되던 과도기에 속하는, 나중에 층화된 암석에 놓여 있다.
58:7.11 (671.4) 이 시기에는 세계의 바다 전역에 걸쳐서 생명이 퍼지는 것이 눈에 뜨이고, 해양 생명은 유란시아에서 자리를 잘 잡게 되었다. 얕고 널리 퍼진 내륙 바다의 밑바닥은 식물이 풍부하고 무성하게 성장하여 차츰 덮이고 있고, 한편 해안가의 바다는 간단한 형태의 동물 생명으로 들끓고 있다.
58:7.12 (671.5) 이 이야기는 모두, 세계가 기록한 광대한 “바위 책”의 화석 페이지 안에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다. 이 생물지리학 기록의 거대한 페이지는 너희가 풀이하는 기술만 얻는다면, 어김없이 진상을 일러준다. 이 고대의 바다 지층 가운데 많은 것은 지금 땅 위에 높이 들려 있고, 오랜 세월에 걸친 그 퇴적물은 그 초기 시절에 있었던 생명의 투쟁을 일러준다. 너희의 시인(詩人)이 말한 바와 같이, 이것이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우리가 밟는 티끌은 한때 살아 있었도다.”
59:0.1 (672.1) 우리는 유란시아의 역사가 약 10억 년 전에 시작하고 다음 5대 시기를 거쳐서 전개된다고 본다:
59:0.2 (672.2) 1. 생명 이전 시기는 행성이 현재 크기에 이른 무렵으로부터 생명이 자리를 잡은 때까지, 처음 4억 5천만 년에 걸친 기간이다. 너희의 학자들은 이 기간을 시생대(始生代)로 불러 왔다.
59:0.3 (672.3) 2. 생명이 싹트는 시기는 그 다음 1억 5천만 년 동안 펼쳐진다. 이 시기는 앞에 생명 이전 시대, 곧 대변동 시대와 그 뒤에 상당히 더 발달된 해양 생명 시대 사이에 끼어 있다. 이 시기는 너희 학자들에게 원생대(原生代)로 알려져 있다.
59:0.4 (672.4) 3. 해양 생명 시기는 그 다음 2억 5천만 년을 채우며, 너희에게 고생대(古生代)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59:0.5 (672.5) 4. 시초 육지 생명 시기는 그 다음 1억 년 동안 이어지며, 중생대(中生代)로 알려져 있다.
59:0.6 (672.6) 5. 포유 동물 시기는 마지막 5천만 년을 차지한다. 이 최근의 시기는 신생대(新生代)로 알려져 있다.
59:0.7 (672.7) 이처럼 해양 생명 시기는 너희 행성의 역사에서 약 4분의 1을 차지한다. 이 시기는 긴 여섯 기간으로 세분될 수 있는데, 각 기간은 지질학 분야와 생물학 영역에서 잘 규명된 어떤 발전의 특징이 있다.
59:0.8 (672.8) 이 시기가 시작될 때, 바다의 밑바닥, 널리 퍼진 대륙붕, 그리고 해안 가까이 있는 수많은 얕은 분지는 무성한 식물로 덮여 있다. 좀더 간단한 원시 형태의 동물 생명은 이미 선행(先行)하는 식물 유기체로부터 발전되었고, 초기의 동물 유기체는 많은 내륙의 바다가 원시 해양 생명으로 바글거릴 때까지, 여러 땅 덩어리의 광범위한 해안선을 따라서 차츰 진행하였다. 이 초기의 유기체 중에 극소수가 껍질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것이 화석으로서 보존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뒤잇는 시대에 아주 조직적으로 적힌 생명 기록을 보존하는, 그 위대한 “돌 책”의 처음 장들을 위하여 무대가 준비되어 있다.
59:0.9 (672.9) 북 아메리카 대륙에는 전체 해양 생명 시기의 화석이 박힌 퇴적물이 놀랍게도 풍부하다. 가장 처음에 생긴 오래 된 지층은 널리 퍼진 침식 퇴적물 때문에, 선행하는 시기의 후반 지층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이 퇴적물은 행성이 발전한 이 두 단계를 뚜렷하게 분리한다.
59:1.1 (673.1) 지구의 표면에서 비교적 고요하던 이 시기가 개시될 때가 되자, 생명은 여러 내륙 바다와 대양의 해안선에 국한되어 있고, 아직 아무 형태의 육지 유기체가 진화하지 않았다. 원시의 해양 동물은 자리를 잘 잡았고, 다음의 진화적 발전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다. 아메바는 이 초기 단계에 있는 동물 생명의 생존자의 전형(典刑)이며, 그에 앞선 과도기 끝 무렵에 나타났다.
59:1.2 (673.2) 400,000,000년 전에, 식물과 동물을 포함하여 해양 생명은 온 세계에 상당히 잘 흩어져 있다. 세계의 기후는 조금 따듯해지고 더 온화해진다. 여러 대륙, 특히 남북 아메리카의 해안가는 널리 물에 잠긴다. 새로운 대양들이 출현하고, 더 오래 된 수역(水域)은 크게 확대된다.
59:1.3 (673.3) 식물은 이제 처음으로 땅 위로 기어 올라오고, 곧 바다가 아닌 서식지에 적응하는 데 상당히 진보한다.
59:1.4 (673.4) 갑자기 단계적 조상이 없이, 첫 다세포 동물이 나타난다. 삼엽충이 진화했고, 오랜 세월 동안 삼엽충(三葉蟲)이 바다를 지배한다. 해양 생명의 견지에서 볼 때, 이때는 삼엽충 시대이다.
59:1.5 (673.5) 이 시간 구역의 후기 부분에 북 아메리카와 유럽의 상당 부분은 바다로부터 솟아났다. 지구의 껍질은 일시 안정되었고, 산맥, 아니 차라리 육지의 고지(高地)들은 대서양과 태평양 해안을 따라서, 서인도 섬들에 걸쳐, 그리고 유럽 남부에서, 올라섰다. 카리비안 지역 전부가 상당히 높아졌다.
59:1.6 (673.6) 390,000,000년 전에 대륙은 아직도 높이 솟아 있었다. 아메리카의 동부 및 서부와 서 유럽의 여러 부분에서 이 시절에 놓인 돌 지층을 찾을 수 있고, 이것은 삼엽충 화석을 지니는 가장 오래 된 바위이다. 땅 덩어리 속으로 삐죽 찌르는, 손가락 같이 긴 만(灣)이 많이 있었고 거기에는 화석을 품은 이 바위들이 저장되었다.
59:1.7 (673.7) 몇백만 년 안에 태평양은 두 아메리카 대륙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땅이 가라앉는 것은 주로 땅 껍질의 조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옆으로 땅이 퍼지는 것, 곧 대륙이 기어가는 것도 또한 요인이었다.
59:1.8 (673.8) 380,000,000년 전에 아시아는 가라앉고 있었고, 모든 다른 대륙은 잠시 동안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가 진행되자, 새로 나타나는 대서양이 모든 인접한 해안선을 광범위하게 잠식하였다. 대서양 북부, 곧 북극해는 당시에 남쪽 걸프 바다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 남쪽 바다가 아팔라치아 골에 들어갔을 때, 그 물결은 동쪽에서 알프스만큼 높은 산맥에 부딪쳐 부서졌다. 그러나 대체로 대륙들은 흥미 없는 낮은 땅이었고, 도무지 경치는 아름답지 않았다.
59:1.9 (673.9) 이 시대의 침전물은 네 가지 종류이다:
59:1.10 (673.10) 1. 역암(礫岩)―해안선 가까이에 퇴적된 물질.
59:1.11 (673.11) 2. 사암(砂岩)―얕은 물이지만, 물결이 개흙이 가라앉는 것을 막기에 넉넉했던 물에서 쌓인 퇴적물.
59:1.12 (673.12) 3. 이판암(泥板岩)[1] [1697]―더 깊고 조용한 물에서 쌓인 침전물.
59:1.14 (673.14) 이 시대의 삼엽충 화석들은 잘 주목된 어떤 변화와 더불어, 어떤 기본적 통일성이 있음을 제시한다. 최초의 세 생명을 심은 것으로부터 발전한 초기의 동물은 특색이 있었다. 서반구에서 나타나는 초기의 동물은 유라시아 집단의 동물, 그리고 오스트랄아시아나 오스트랄리아 및 남극 종류의 동물과 조금 달랐다.
59:1.15 (674.1) 370,000,000년 전에, 남북 아메리카가 크게, 거의 전부 물에 잠기는 일이 생겼고, 뒤이어 아프리카와 오스트랄리아가 가라앉았다. 겨우 북 아메리카의 어떤 부분이 이 케임브리아기(紀)의 얕은 바다 위에 남아 있었다. 5백만 년이 지난 뒤에, 바다는 올라오는 육지 앞에서 물러가고 있었다. 땅이 꺼지고 땅이 올라가는 이 모든 현상은 극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몇백만 년에 걸쳐 느리게 일어났다.
59:1.16 (674.2) 이 시기에 삼엽충 화석을 품은 지층은, 중앙 아시아를 제쳐놓고, 모든 대륙 전역에 걸쳐서 여기저기 표면에 솟아나온다. 여러 지역에서 이 바위들은 수평으로 있지만, 산맥에서는 압력을 받고 접힘으로 기울어지고 뒤틀린다. 그러한 압력은 여러 곳에서 이 퇴적물의 원래 특징을 바꾸어 놓았다. 사암은 차돌이 되고 이판암은 점판암으로 바뀌었고, 한편 석회석은 대리석으로 변화되었다.
59:1.17 (674.3) 360,000,000년 전에 육지는 아직도 솟아오르고 있었다. 남북 아메리카는 쑥 올라와 있었다. 서 유럽과 영국 제도(諸島)는, 깊이 물에 잠긴 웨일즈의 여러 부분을 제외하고, 떠오르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아무런 큰 빙상(氷床)이 없었다. 유럽ㆍ아프리카ㆍ중국ㆍ오스트랄리아에서 이 지층과 연관하여 나타났다고 생각되는 빙하 퇴적물은 고립된 산 빙하 때문이거나, 또는 나중에 생긴 빙하 부스러기가 옮겨졌기 때문이다. 세계의 기후는 대양성이었고, 대륙성이 아니었다. 남쪽의 바다는 지금보다 그때 더 따듯했고, 그 바다는 북 아메리카를 지나 북쪽으로, 극지방까지 뻗었다. 걸프 해류는 북 아메리카의 중앙 부분을 지나갔고, 동쪽으로 구부러져서 그린랜드의 해안을 적시고 따듯하게 했으며, 지금은 얼음으로 덮인 그 대륙을 진정한 열대의 파라다이스로 만들었다.
59:1.18 (674.4) 해양 생명은 온 세계에 상당히 비슷했고 해초, 단세포 유기체, 단순한 해면, 삼엽충, 그리고 다른 갑각류(甲殼類) 동물―새우ㆍ게ㆍ가재―로 이루어져 있었다. 3천 가지 종류의 완족(腕足) 동물이 이 시기의 끝에 나타났고, 그 가운데 겨우 2백 가지가 살아남았다. 이 여러 동물은 실질적으로 변하지 않은 채로 오늘날까지 내려온 초기 생명의 종류를 대표한다.
59:1.19 (674.5) 그러나 삼엽충이 지배적인 생물이었다. 삼엽충은 유성(有性) 생물이었고 여러 형태로 존재했다. 헤엄을 잘 치지 못했기 때문에 삼엽충은 느릿하게 물에서 떠다니거나 바다 밑바닥에서 기어다녔고, 나중에 나타나는 적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 자체를 보호하려고 몸을 감았다. 이것들은 길이가 5센티미터에서부터 30센티미터까지 자랐고, 네 가지 뚜렷한 집단으로 발전했는데, 육식ㆍ채식ㆍ잡식 종류와 “개흙을 먹는 종류”였다. 후자의 무리가 대체로 무기(無機) 물질을 먹고 사는 능력은―이것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다세포 생물이었는데―이 종류가 어째서 크게 증가하고 오랫동안 살아남았는가 설명해 준다.
59:1.20 (674.6) 이것이 세계 역사에서 5천만 년에 걸친 긴 기간 끝에서 본, 유란시아의 생물지질학적 그림이었고, 이 기간을 너희 지질학자는 캠브리아기(紀)라고 지칭한다.
59:2.1 (674.7) 이 시대의 특징을 나타내는 현상, 정기적으로 땅이 솟아오르고 가라앉는 현상은 모두 차츰차츰 생겼고 놀라운 광경이 아니었으며, 거의 또는 도무지 화산 활동이 뒤따르지 않았다. 이렇게 연달아 땅이 솟아오르고 꺼지는 동안 내내, 아시아 대륙의 모체는 다른 땅 덩어리들과 같은 역사를 충분히 함께 가지지 않았다. 이 대륙은 많은 범람을 겪었고, 특히 초기 역사에서, 처음에는 한쪽에서 나중에는 다른 쪽에서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 대륙은 다른 여러 대륙에서 발견될 수 있는, 한결같은 바위 퇴적물을 내놓지 않는다. 최근 시대에 아시아는 모든 땅 덩어리 가운데 가장 안정되어 있었다.
59:2.2 (675.1) 350,000,000년 전에는 중앙 아시아를 제쳐놓고, 모든 대륙에서 큰 홍수 시기가 시작되었다. 땅 덩어리들은 거듭해서 물로 덮였다. 오직 해안의 고지들만 얕고도 널리 퍼진, 동요하는 내륙의 바다 위에 남아 있었다. 3대 범람이 이 시기의 특징을 나타냈지만, 이 시기가 끝나기 전에, 대륙들은 다시 올라섰고, 땅이 물 위에 솟아오른 면적의 총합은 지금 존재하는 것보다 15퍼센트가 컸다. 카리비안 지역은 어지간히 높아졌다. 이 시기는 유럽에서 잘 표시되지 않는데, 이는 땅의 변동이 적고, 한편 화산의 활동이 더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59:2.3 (675.2) 340,000,000년 전에, 아시아와 오스트랄리아를 제외하고, 광범위한 땅의 침몰이 또 한 번 일어났다. 세계의 여러 대양의 물은 대체로 서로 섞였다. 이때는 대단한 석회암 시대였고, 이 시대에 생긴 돌의 상당한 양은 석회를 분비하는 조류(藻類)가 만들어 낸 것이다.
59:2.4 (675.3) 몇백만 년 뒤에 아메리카의 두 대륙과 유럽의 큰 부분은 물에서 비로소 솟아났다. 서반구에서는 태평양의 한 가닥만 멕시코와 현재의 록키 산맥 지역 위에 남아 있었지만, 이 시기의 끝이 가까워오자 대서양과 태평양의 해안은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
59:2.5 (675.4) 330,000,000년 전은 전세계에 걸쳐서 비교적 고요한 시간 구역이 시작됨을 표시하며, 많은 땅이 다시 물 위에 있었다. 적막한 땅이 이렇게 지배한 데 유일한 예외는 켄터키 동부에서 북 아메리카의 큰 화산 분출이었고, 이것은 세계가 일찍이 본 가장 큰 단일 화산 활동 중에 하나였다. 이 화산재는 4.6미터에서 6미터의 깊이로 1280 평방 킬로미터를 덮었다.
59:2.6 (675.5) 320,000,000년 전에 이 시기에서 세 번째로 큰 홍수가 터졌다. 이 범람으로 생긴 바다는 이전의 대홍수에 잠겼던 땅을 모두 덮었고, 한편 두 아메리카와 유럽 전역에 걸쳐서 여러 방향으로 더 멀리 뻗었다. 북 아메리카의 동부와 서 유럽은 3000미터에서 4600미터까지 물 밑으로 잠겼다.
59:2.7 (675.6) 310,000,000년 전에 세계의 땅 덩어리들은, 북 아메리카의 남부를 빼고, 다시 쑥 올라와 있었다. 멕시코가 솟아나서 이렇게 걸프 해를 만들었으며, 이것은 그 뒤로 신분을 유지했다.
59:2.8 (675.7) 이 시기의 생명은 줄곧 진화한다. 세상은 다시 한 번 조용하고 비교적 평화롭다. 기후는 따듯하고 온화한 채로 있고, 육지의 식물이 바닷가로부터 더욱 멀리 옮겨 간다. 생명 원본들이 잘 발달되어 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식물 화석은 거의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59:2.9 (675.8) 이때는 개별 동물 유기체가 진화한 대단한 시대였다. 하지만 식물로부터 동물로 옮겨가는 것과 같은 많은 기본적 변화는 그보다 앞서 일어났다. 척추가 없는 수준의 모든 생명 부류가 이 시대에 놓인 바위의 화석에서 대표되는 점까지, 해양 동물계가 발전되었다. 그러나 이 동물은 모두 해양 유기체였다. 바닷가를 따라서 땅속에 파고든 몇 종류의 벌레들을 제외하고, 아무 육지 동물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육지 식물도 아직 대륙을 뒤덮지 않았다. 대기에 아직도 2산화 탄소가 너무 많이 있어서 공기로 숨쉬는 것이 살게 할 수 없었다. 좀더 원시적인 어떤 것들을 제외하고, 1차적으로 모든 동물은 존재하기 위해서 직접 또는 간접으로 식물 생명에 의존한다.
59:2.10 (676.1) 삼엽충은 아직도 많이 눈에 띄었다. 이 작은 동물은 수만 가지의 모양으로 존재했고, 현대 갑각류 동물의 선구자이다. 삼엽충 가운데 더러는 25에서 4천 개의 아주 작은 눈이 있었고, 더러는 퇴화된 눈이 있었다. 이 시기가 막을 내리자, 삼엽충은 몇 가지 다른 형태의 무척추 생명과 함께 바다를 정복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 기간이 시작될 때 싹 멸망했다.
59:2.11 (676.2) 석회를 분비하는 조류(藻類)가 널리 퍼졌다. 산호의 초기 조상들이 수천 종이나 존재했다. 바다 벌레가 풍부했고, 많은 종류의 해파리가 있었는데 그 뒤로 멸종해 버렸다. 산호와 후기 종류의 해면이 진화했다. 두족류(頭足類)가 잘 발달되었고, 현대의 진주색 앵무조개, 문어ㆍ오징어ㆍ꼴뚜기로서 살아남았다.
59:2.12 (676.3) 많은 종류의 조가비 동물이 있었지만, 이것들의 껍질은 후일의 경우처럼 그때 방어 목적에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복족류(腹足類)가 고대의 바닷물에 있었고 그들은 껍질이 하나인 두드럭고둥ㆍ경단고둥ㆍ달팽이를 포함했다. 쌍각(雙殼) 복족류는 당시에 존재했던 것과 비슷하게, 그 사이에 낀 수백만 년을 통해서 내려왔고, 홍합ㆍ조개ㆍ굴ㆍ가리비를 포함한다. 밸브 껍질을 가진 유기체들도 또한 진화했고, 이 완족류(腕足類)는 오늘날 존재하는 것과 비슷하게 그 고대의 바다에서 살았다. 이것들은 돌쩌귀가 달린 종류, 톱니 있는 종류, 그리고 다른 종류의 보호하는 밸브 설비까지 가졌다.
59:2.13 (676.4) 이렇게 해양 생명에서 둘째로 큰 기간에 관한 진화 이야기가 끝나며, 이것은 너희의 지질학자들에게 오르도비스기(紀)로 알려져 있다.
59:3.1 (676.5) 300,000,000년 전에 땅이 가라앉는 또 다른 큰 시기가 시작되었다. 고대 실루리아기 바다의 남쪽과 북쪽을 향한 침식은 유럽과 북 아메리카의 대부분을 삼키려고 준비하였다. 육지는 바다 위로 그다지 높이 솟아 있지 않아서, 해안선 둘레에 침전물이 많이 생기지 않았다. 바다는 석회 껍질을 가진 생명으로 바글거렸고, 이 조개 껍질이 바다 밑바닥으로 떨어져서 아주 두터운 석회석 층을 차츰 쌓았다. 이것이 처음으로 광범위한 석회석 침전이며, 실질적으로 유럽과 북 아메리카 전체를 덮지만, 오직 몇 군데에서만 땅거죽에 나타난다. 이 고대 바위 층의 두께는 평균 약 300미터가 된다. 그러나 이 침전물의 다수는 그 뒤에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솟아오르고 단층이 생김으로 크게 모습이 일그러졌고, 많은 것이 차돌ㆍ이판암ㆍ대리석으로 변했다.
59:3.2 (676.6) 유럽 남부와 메인 주 동부의 큰 화산들에 있는 것, 그리고 퀘벡의 용암 흐름을 제쳐놓고, 아무런 화성암이나 용암이 이 시기의 바위 층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화산 활동은 대체로 지났다. 이 시기는 물에 침전이 생기는 전성기였고, 거의 또는 아무런 산(山)이 형성되지 않았다.
59:3.3 (676.7) 290,000,000년 전에 바다는 대체로 대륙들로부터 물러났고, 둘러싸는 대양들의 밑바닥은 가라앉고 있었다. 땅 덩어리들은 다시 물에 잠기기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모든 대륙에서 초기의 산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이 땅 껍질의 융기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아시아의 히말라야, 그리고 큰 칼레도니아 산맥이었는데, 이것은 아일랜드에서부터 스콧트랜드를 거쳐서 스핏츠버겐까지 뻗는다.
59:3.4 (677.1) 이 시대의 매장물에는 가스ㆍ기름ㆍ아연ㆍ납이 많이 발견되며, 가스와 기름은 앞서 육지가 가라앉을 때 밑으로 내려간 굉장한 집합의 식물 및 동물 물질로부터 비롯된다. 한편 매장된 광물은 느린 수역(水域)의 침전물을 대표한다. 다수의 바위 소금 매장물이 이 시기에 속한다.
59:3.5 (677.2) 삼엽충이 급속히 줄어들고 무대의 중심은 더 큰 연체 동물, 곧 두족류(頭足類)가 차지했다. 이 동물은 길이가 4.6미터, 지름이 30센티미터가 되게 자랐고, 바다의 주인이 되었다. 이 종(種)의 동물은 갑자기 나타나서 바다 생명을 지배했다.
59:3.6 (677.3) 이 시대의 큰 화산 활동은 유럽 구역에서 있었다. 지중해 골 둘레에, 그리고 특히 영국 제도 근처에서 이제 생긴 것과 같이 그렇게 맹렬하고 널리 퍼진 화산의 분출은 수백만 년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날 영국 제도 지역 위로 퍼진 용암의 흐름은 두께가 7600미터나 되게 용암과 바위가 번갈아 있는 층으로 나타난다. 얕은 바다 밑바닥 위에 퍼진, 이따금씩 생기는 용암 흐름이 이 바위들을 만들었고, 이처럼 바위 매장물과 섞였다. 이 모든 것이 나중에 바다 위로 높이 솟아올랐다. 맹렬한 지진이 북 유럽에서, 특히 스콧트랜드에서 일어났다.
59:3.7 (677.4) 해양성 기후는 온화하고 변치 않은 채로 있었고, 따듯한 바다가 극지의 해안을 적셨다. 완족 동물과 기타 해양 생명의 화석이 바로 북극까지, 이 퇴적물에서 발견될 수 있다. 복족류ㆍ완족류ㆍ해면, 그리고 산호초를 만드는 산호가 줄곧 늘어났다.
59:3.8 (677.5) 이 시기의 끝에는 실루리아기의 바다가 두 번째로 전진하는 것을 구경하며, 남쪽과 북쪽 대양의 바다가 또 한 번 서로 섞인다. 두족류가 해양 생명을 지배하고, 한편 관련된 생명 형태가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분화된다.
59:3.9 (677.6) 280,000,000년 전에 여러 대륙이 실루리아기의 둘째 범람으로부터 대체로 솟아나왔다. 이렇게 가라앉은 바위 퇴적물은 북 아메리카에서 나이아가라 석회석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 바위 층 위로 나이아가라 폭포가 지금 흐르기 때문이다. 이 바위 층은 동쪽 산맥으로부터 미시시피 강 유역까지 뻗지만, 남쪽을 빼고, 서쪽으로 멀리 미치지 않는다. 몇 층이 카나다에, 남 아메리카의 일부, 오스트랄리아, 그리고 유럽의 대부분에 연장되지만, 이 나이아가라 계열의 평균 두께는 약 200미터가 된다. 나이아가라 퇴적물 바로 위에서 역암, 이판암, 바위 소금의 집합체가 여러 지역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 이것은 2차 침전이 누적된 것이다. 이 소금은 큰 개펄에 정착되었고, 이 개펄은 번갈아서 바다에 열렸다가 나중에 단절되었기 때문에, 용액 속에 있는 다른 물질과 함께 소금이 퇴적되면서 증발이 일어났다. 어떤 지역에서는 이 바위 소금 바닥의 두께가 21미터나 된다.
59:3.10 (677.7) 기후는 고르고 따듯하며, 해양의 화석들은 극지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시기가 끝날 때가 되어서, 바다는 아주 광범위하게 짜서 거의 아무 생명도 살아남지 못한다.
59:3.11 (677.8) 실루리아기의 마지막 침수가 끝날 무렵에, 갯나리 석회석의 퇴적물에서 증명되다시피, 극피(棘皮) 동물―바다나리―가 크게 늘어났다. 삼엽충은 거의 사라져 버렸고 연체(軟體) 동물이 바다에서 군주 노릇을 계속하며, 산호초 형성이 크게 늘어난다. 이 시기에, 조건이 유리한 위치에 원시의 물전갈이 처음으로 진화한다. 그 뒤에 얼마 있다가, 갑자기 참 전갈―실제로 공기를 숨쉬는 것―들이 나타난다.
59:3.12 (678.1) 이러한 발전이 2천5백만 년에 걸쳐서, 제3 해양 생명기를 끝마쳤고, 이것은 너희 학자들에게 실루리아기로 알려져 있다.
59:4.1 (678.2) 땅과 물이 오랜 세월에 걸쳐 투쟁하면서, 오랫동안 바다가 비교적 승리했지만, 육지가 승리하는 시절이 바로 눈앞에 다가온다. 대륙의 떠돌이는 그다지 멀리 진행하지 않았지만, 때때로, 세계에서 거의 모든 땅이 가느다란 지협과 좁은 육지 다리로 연결된다.
59:4.2 (678.3) 실루리아기의 마지막 범람이 끝나고 땅이 솟아오르자, 세계의 발전과 생명의 진화에서 한 중요한 시기가 막을 내린다. 지구에서 새로운 시대가 밝아온다. 옛 시절의 벌거벗고 보잘것없는 풍경이 화려한 푸른 옷을 걸치고, 처음으로 웅대한 숲들이 곧 나타날 것이다.
59:4.3 (678.4) 이 시대의 해양 생명은 초기의 종(種) 분리 때문에 아주 다양했지만, 나중에는 이 모든 다른 종류가 자유롭게 서로 섞이고 관계를 가졌다. 완족 동물은 일찍 절정에 이르렀고, 절지(節肢) 동물이 그들을 이어받았으며, 따개비들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사건은 물고기과(科)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이때는 물고기 시대가 되었고, 세계 역사에서 이 시대의 특징은 척추 동물 종류이다.
59:4.4 (678.5) 270,000,000년 전에 대륙들은 모두 물 위에 나와 있었다. 수백만 년 동안 그렇게 많은 땅이 한 번에 물 위에 있은 적이 없었다. 이때는 전세계 역사에서 땅이 가장 많이 솟아난 시기의 하나였다.
59:4.5 (678.6) 5백만 년 뒤에, 남북 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 북 아시아, 오스트랄리아의 육지 지역이 잠시 범람했고, 북 아메리카에서 땅은 언젠가 거의 완전히 물에 잠겼으며, 그 결과로 생긴 석회석 지층은 두께가 150미터에서 1500미터에 이른다. 이 데본기에 속하는 여러 바다는 처음에는 한 방향으로, 나중에는 다른 방향으로 뻗어서, 북 아메리카의 엄청난 극지에 내륙의 바다가 칼리포니아 북부를 통해서 태평양으로 출구를 찾았다.
59:4.6 (678.7) 260,000,000년 전에, 육지가 가라앉는 이 시기의 끝 무렵에, 태평양ㆍ대서양ㆍ 북극해ㆍ걸프해와[2] [1698] 동시에 연결된 바다가 북 아메리카를 일부 덮었다. 데본기의 첫째 홍수의 후기 단계 퇴적물은 두께가 평균 약 300미터에 이른다. 이 시절의 특징을 나타내는 산호초는 내륙의 바다가 맑고 얕았음을 가리킨다. 그러한 산호 퇴적물은 켄터키 주의 루이빌 근처, 오하이오 강둑에 노출되어 있고, 두께가 약 30미터 되며 2백이 넘는 변종을 포함한다. 이 산호 형성은 카나다와 북 유럽을 통해서 북극 지역까지 뻗는다.
59:4.7 (678.8) 이 침수에 뒤이어, 많은 해안선이 상당히 높아져서, 이전의 퇴적물은 개흙이나 이판암으로 뒤덮였다. 또한 붉은 사암 층도 있고, 이것은 데본기 침전물의 한 특징을 나타내는데, 이 붉은 층은 지구의 표면에서 상당 부분에 연장되고, 남북 아메리카, 유럽ㆍ러시아ㆍ중국ㆍ아프리카ㆍ오스트랄리아에서 발견된다. 그러한 붉은 퇴적물은 건조하거나 반 건조한 조건을 암시하지만, 이 시기의 기후는 아직도 온화하고 평온하였다.
59:4.8 (679.1) 이 시기를 통하여, 신시나티 섬 남동쪽에 있는 땅은 물 위에 쑥 올라와 있었다. 그러나 서 유럽의 아주 많은 부분은, 영국 제도를 포함해서, 물에 잠겼다. 웨일즈와 독일, 그리고 유럽의 다른 여러 곳에서, 데본기의 바위는 두께가 6000미터가 된다.
59:4.9 (679.2) 250,000,000년 전에는 물고기과가 나타나는 것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이 척추 동물은 인간이 나타나기 이전의 모든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의 하나이다.
59:4.10 (679.3) 절지(節肢) 동물, 곧 갑각류는 첫 척추 동물의 조상이었다. 물고기과의 선조들은 수정된 두 가지 절지 동물의 조상이었는데, 하나는 머리와 꼬리를 연결하는 기다란 몸을 가졌고, 한편 다른 하나는 등뼈가 없고 턱이 없는 예비 물고기였다. 그러나 이 예비 종류들은, 동물 세계에서 첫 척추 동물인 물고기가 북쪽에서 갑자기 나타났을 때, 급히 멸망했다.
59:4.11 (679.4) 가장 큰 참 물고기의 다수는 이 시대에 속하며, 이를 가진 어떤 종류들은 길이가 7.6미터에서 9.1미터가 되었다. 오늘날의 상어는 이 고대 물고기의 잔재이다. 폐어(肺魚)와 갑옷 물고기는 그들의 진화의 정점에 이르렀고, 이 시기가 끝나기 전에 물고기는 민물과 짠물, 양쪽에 적응하였다.
59:4.12 (679.5) 물고기 이 및 뼈가 묻힌 진정한 뼈의 지층은 이 기간의 끝 무렵에 쌓인 퇴적물에서 발견될 수 있고, 풍부한 화석 지층은 칼리포니아 해안을 따라 놓여 있는데, 이는 태평양의 많은 아늑한 만이 그 지역의 땅까지 뻗었기 때문이다.
59:4.13 (679.6) 땅에는 새 서열의 육지 식물이 급속히 들끓었다. 물가 근처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거의 아무 식물도 땅에서 자라지 않았다. 이제 갑자기, 다산하는 고사리과가 나타났고, 세계의 모든 구석에서 급히 솟아오르는 땅 표면에 빨리 퍼졌다. 두께가 60센티미터, 키가 12미터 되는 나무 종류들이 곧 발달했고, 나중에 잎이 진화했지만, 이 초기 종류들은 겨우 기초적인 잎만 있었다. 작은 식물이 많이 있었지만 그 화석들은 발견되지 않는데, 이는 대개 그들이 더 일찍 나타난 박테리아에게 멸망되었기 때문이다.
59:4.14 (679.7) 땅이 올라오자, 북 아메리카는 그린랜드까지 뻗는 육지 다리로 유럽과 연결되었다. 오늘날 그린랜드는 그 얼음 외투 밑에 이 초기 육지 식물의 잔재를 가지고 있다.
59:4.15 (679.8) 240,000,000년 전에 유럽과 남북 아메리카의 여러 부분의 땅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 침몰은 마지막이자 가장 적게 퍼진 데본기 홍수가 나타났음을 표시한다. 북극의 바다는 다시 남쪽으로 북 아메리카의 상당한 부분으로 움직였고, 대서양은 유럽과 서 아시아의 큰 부분에 넘쳤으며, 한편 남태평양은 인도의 대부분을 덮었다. 이 범람은 천천히 나타났고, 똑같이 느리게 물러갔다. 헛슨 강 서쪽 둑을 따라 있는 캣스킬 산맥은 북 아메리카 표면에서 발견되는 바, 이 시기에 가장 큰 지질학 기념비의 하나이다.
59:4.16 (679.9) 230,000,000년 전에 바다는 계속 물러가고 있었다. 북 아메리카의 상당 부분이 물 위에 나와 있었고, 큰 화산 활동이 세인트 로렌스 지역에서 생겼다. 몬트리올에 있는 로얄 산은 이 화산들 중 하나의 좁은 부분이 침식된 것이다. 이 시기 전체의 퇴적물은 북 아메리카의 아팔라치아 산맥에서 잘 드러나며, 거기에는 서스크하나 강이 이 잇따른 지층을 노출하는 골짜기를 팠고, 그 두께는 4000미터가 넘었다.
59:4.17 (680.1) 대륙들의 융기가 진행되었고, 대기는 산소로 강화되고 있었다. 땅은 키가 30미터 되는 광대한 고사리 숲, 그리고 그 시절의 특이한 나무들, 곧 고요한 숲으로 덮였다. 아무 소리도, 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는데, 그런 나무들은 잎이 없었기 때문이다.
59:4.18 (680.2) 이렇게 해양 생명의 진화에서 가장 긴 시기의 하나, 물고기 시대가 저물었다. 세계 역사에서 이 기간은 거의 5천만 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때는 너희 학자들에게 데본기로 알려지게 되었다.
59:5.1 (680.3) 앞선 기간에 물고기의 출현은 해양 생명의 진화에서 정점을 가리킨다. 이 시점부터 죽, 육지 생명의 진화가 더욱 중요하게 된다. 첫 육지 동물의 출현을 위하여 거의 이상적으로 무대가 준비되고서 이 시기가 시작된다.
59:5.2 (680.4) 220,000,000년 전에 대륙의 많은 지역은, 북 아메리카의 대부분을 포함해서, 물 위에 나와 있었다. 땅은 화려한 식물로 덮였고, 이때는 정말로 고사리 시대였다. 2산화 탄소가 아직도 대기에 있었지만, 정도가 줄어들었다.
59:5.3 (680.5) 그 뒤에 얼마 안 되어, 북 아메리카의 중앙 부분이 범람했고, 두 개의 큰 내륙의 바다를 만들었다. 대서양과 태평양 해안의 고지들은 현재의 해안선을 바로 넘어서 있었다. 이 두 바다는 당장에 합쳐졌고, 다른 생명 형태를 서로 섞었으며, 이 해양 동물상(動物相)의 연합은 급속히 세계적으로 해양 생명이 감소하는 시기가 시작되고 차후의 육지 생명 기간이 시작되는 것을 표시했다.
59:5.4 (680.6) 210,000,000년 전에 물이 따듯한 북극의 바다가 북 아메리카와 유럽의 대부분을 덮었다. 남극의 바다는 남 아메리카와 오스트랄리아를 범람했고, 한편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어지간히 높아졌다.
59:5.5 (680.7) 바다가 가장 높아졌을 때, 새로운 진화적 발전이 갑자기 일어났다. 돌연히 첫 육지 동물이 나타났다. 땅 위나 물에서 살 수 있는 이 동물의 수많은 종자가 있었다. 공기로 숨쉬는 이 양서(兩棲) 동물은 절지 동물로부터 발전되었고, 이것들이 헤엄치는 데 쓰이는 부레는 허파로 진화했다.
59:5.6 (680.8) 바다의 짠물로부터 육지 달팽이, 전갈ㆍ개구리가 기어 나왔다. 오늘날 개구리는 아직도 물 속에서 알을 낳고, 그 새끼는 처음에 작은 물고기, 곧 올챙이로서 존재한다. 이 기간은 당연히 개구리 시대라 할 수 있다.
59:5.7 (680.9) 그 뒤에 곧, 곤충이 처음으로 나타났고, 거미ㆍ전갈ㆍ바퀴벌레ㆍ귀뚜라미ㆍ메뚜기와 함께, 세계의 여러 대륙을 곧 뒤덮었다. 잠자리는 가로가 76센티미터에 이르렀다. 바퀴벌레가 1천 종이 개발되었고, 어떤 것은 길이가 10센티미터까지 자랐다.
59:5.8 (680.10) 두 집단의 극피(棘皮) 동물이 특별히 잘 발달되었고, 이것들은 실제로 이 시대를 안내하는 화석이다. 조개를 먹고 사는 큰 상어들이 또한 상당히 진화했고, 5백만 년이 넘도록 대양을 지배했다. 기후는 여전히 따듯하고 온화했으며, 해양 생명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민물고기가 발달하고 있었고, 삼엽충은 멸종에 다가가고 있었다. 산호는 드물었고, 갯나리가 상당량의 석회석을 만들고 있었다. 세련된 건축용 석회석의 층은 이 시기에 쌓였다.
59:5.9 (681.1) 많은 내륙 바다의 물은 석회와 기타 광물을 많이 품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해양 종자의 진보와 발달을 크게 방해했다. 돌이 널리 퇴적되는 결과로서, 결국 바다가 맑아졌는데, 이러한 돌은 어떤 곳에서 아연과 납을 포함한다.
59:5.10 (681.2) 이 초기 석탄 시대의 퇴적물은 두께가 150미터에서 600미터가 되었고, 사암ㆍ이판암ㆍ석회석으로 이루어졌다. 가장 오래 된 지층은, 많은 자갈과 분지의 침전물과 함께, 육지 및 해양 동물과 식물의 화석을 산출한다. 더 오래 된 이 지층에는 쓸 수 있는 석탄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유럽 전역에 걸쳐서 이 퇴적물은 북 아메리카에서 쌓인 것과 무척 비슷하다.
59:5.11 (681.3) 이 시기의 끝 무렵에, 북 아메리카의 땅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잠시 중지되었고, 바다가 돌아와서 이전 바닥의 반 가량을 덮었다. 이 범람은 짧았고, 땅의 대부분은 곧, 물 위로 쑥 솟아올랐다. 남 아메리카는 아프리카를 경유해서 유럽과 아직도 연결되었다.
59:5.12 (681.4) 이 시기는 보주ㆍ슈바르츠발트[3] [1699]ㆍ유랄 산맥이 시작되는 것을 보았다. 오래 된 다른 산맥들의 그루터기가 영국과 유럽 전역에서 발견될 것이다.
59:5.13 (681.5) 200,000,000년 전에 석탄기(石炭紀)에서 정말로 활발한 단계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보다 앞서 2천만 년 동안, 더 이른 석탄 퇴적물이 쌓이고 있었지만, 이제 더 널리 석탄을 형성하는 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실제로 석탄이 쌓이는 시기의 길이는 2천5백만 년이 조금 넘었다.
59:5.14 (681.6) 해양 바닥의 활동으로 생기는 해면의 움직임 때문에 육지는 정기적으로 올라가고 내려가고 있었다. 이 껍질의 불안정―땅이 가라앉고 솟아오르는 것―은 해안 늪지대에 있는 무성한 식물과 관련하여, 광범위한 석탄 퇴적물의 생산에 기여했고, 이 때문에 이 시기는 석탄기로 알려지게 되었다. 기후는 전 세계에 걸쳐 아직도 온화했다.
59:5.15 (681.7) 석탄층은 이판암ㆍ바위ㆍ역암과 번갈아 있다. 미국의 중부와 동부에 있는 이 석탄층은 두께가 12미터에서 15미터까지 달라진다. 그러나 이 퇴적물의 다수는 나중에 땅이 높아질 때 씻겨 내려갔다. 북 아메리카와 유럽의 어떤 부분에서, 석탄을 품은 지층은 두께가 5,400미터 된다.
59:5.16 (681.8) 현재 석탄층 밑에 있는 점토(粘土)에서 나무가 자란 것과 같이, 나무 뿌리의 존재는 석탄이 지금 발견되는 바로 그곳에서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석탄은 아득히 먼 이 시대의 수렁에서, 또 늪 해안에서 자라던 무성한 식물이 물 속에 보존되고, 압력으로 수정된 잔재이다. 석탄층은 흔히 가스와 기름, 두 가지를 품는다. 토탄(土炭) 지층은 옛날의 식물 성장의 잔재이며, 적당한 압력과 열을 받으면 일종의 석탄으로 바뀌곤 한다. 무연탄은 다른 석탄보다 압력과 열을 더 받았다.
59:5.17 (681.9) 북 아메리카의 여러 지층 속에 있는 석탄층은 땅이 몇 번이나 내려가고 올라갔는가를 가리키며, 그 수는 일리노이 주에서 10번, 펜실바니아 주에서 20번, 알라바마 주에서 35번, 카나다에서 75번에 이르기까지 다르다. 민물과 바닷물 화석이 석탄층에서 발견된다.
59:5.18 (682.1) 이 시기를 통하여 내내, 남북 아메리카의 산맥들은 활동이 많았고, 안데스와 록키 산맥 남부의 선조(先祖)가 올라갔다. 대서양과 태평양의 큰 높은 해안 지역이 가라앉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아주 침식되고 물에 잠겨서 두 대양의 해안선은 대체로 현재 위치로 물러났다. 이 범람기의 퇴적물은 두께가 평균 약 300미터가 된다.
59:5.19 (682.2) 190,000,000년 전에는 북 아메리카의 석탄기 바다가 오늘날의 록키 산맥 지역에서 서쪽으로 뻗는 것이 보였고, 이것에는 칼리포니아 북부를 통해서 태평양에 이르는 수로(水路)가 있었다. 해안선이 갈팡질팡 움직이던 이 시기에 해안의 땅이 솟아오르고 내려감에 따라서, 두 아메리카와 유럽 전역에 걸쳐서, 석탄이 한 층 한 층, 계속해서 쌓였다.
59:5.20 (682.3) 180,000,000년 전에 석탄기의 막이 내렸고, 이 기간에 석탄은 세계 전역에서―유럽ㆍ인도ㆍ중국, 북 아프리카, 두 아메리카에서―형성되었다. 석탄 형성 시기가 막을 내릴 때, 미시시피 강 유역 동쪽의 북 아메리카는 솟아올랐고, 이 구역의 대부분은 그 뒤로 죽, 바다 위에 남아 있었다. 육지가 솟아오르던 이 시기는 아팔라치아 지역에서, 또 서부에서, 북 아메리카의 현대 산맥들이 시작되는 것을 표시한다. 알라스카와 칼리포니아에서,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의 산맥을 형성하는 지역에서, 화산들이 활발하였다. 동부 아메리카와 서 유럽은 그린랜드 대륙을 거쳐 연결되었다.
59:5.21 (682.4) 육지가 솟아난 것은 전기(前期)의 해양성 기후를 비로소 수정하고, 그 대신에 덜 따듯하고 더 변동하는 대륙성 기후가 시작되도록 변화시켰다.
59:5.22 (682.5) 이 시절의 식물은 포자(胞子)를 품고 있었고, 바람은 이 씨들을 멀리, 또 널리 퍼뜨릴 수 있었다. 석탄기 나무들의 줄기는 보통 그 지름이 2.1미터요, 키가 흔히 37.5미터가 되었다. 현대의 고사리는 참으로 이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다.
59:5.23 (682.6) 일반적으로, 이때는 민물 유기체가 성장하는 시기였고, 이전의 해양 생명에 거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기간의 중요한 특징은 개구리와 그 사촌들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석탄 시대의 생명의 특징은 고사리와 개구리였다.
59:6.1 (682.7) 이 기간은 해양 생명에서 중추가 되는 진화적 발전이 끝나고, 나중에 육지 동물 시대로 이끄는 과도기가 시작됨을 표시한다.
59:6.2 (682.8) 이 시대는 생명이 크게 곤궁하게 된 시대였다. 수천의 해양 종자가 멸망했고, 땅에서 생명은 아직도 거의 자리잡지 못했다. 이때는 생물학상의 시련이 있던 시절, 땅의 거죽으로부터, 그리고 대양의 깊은 곳으로부터, 생명이 거의 사라졌던 시대였다. 긴 해양 생명 시대가 끝날 무렵에, 지구에는 10만이 넘는 생물의 종이 있었다. 이 과도기가 끝날 때는 5백 종이 채 안 되게 살아남았다.
59:6.3 (682.9) 이 새로운 시기의 특이한 점은 지구의 껍질이 식거나 화산 활동이 오래 부재한 것보다, 일상적이고 전에 있던 영향력이―바다가 제한되고 엄청난 땅 덩어리들이 더욱 솟아난 것이―특별히 합쳐진 때문이었다. 이전 시절의 따듯한 해양성 기후는 사라지고 있었고, 더 사나운 대륙성 종류의 날씨가 급히 발달하고 있었다.
59:6.4 (683.1) 170,000,000년 전에 진화에 큰 변화와 조정이 지구 표면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해양의 바닥이 가라앉음에 따라서, 전 세계에서 땅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고립된 산마루들이 나타났다. 북 아메리카의 동부는 바다 위에 높이 솟아 있었고, 서부는 천천히 솟아오르고 있었다. 대륙들은 크고 작은 소금 호수와 수많은 내륙의 바다로 덮여 있었고, 좁은 해협이 이런 바다를 대양과 연결하였다. 이 과도기의 지층은 두께가 300미터에서 2,100미터에 이른다.
59:6.5 (683.2) 지구의 껍질은 육지가 솟아오르던 이 기간에 널리 주름이 졌다. 아주 오랫동안 남 아메리카를 아프리카와 연결하고 북 아메리카를 유럽과 연결했던 대륙들을 포함해서, 어떤 육지 다리들이 사라진 것을 제외하고, 이때는 대륙이 솟아나던 시기였다.
59:6.6 (683.3) 차츰차츰 내륙의 호수와 바다는 전 세계에서 말라 버리고 있었다. 고립된 산 빙하와 지역 빙하가 특히 남반구에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여러 지역에서 이 지역 얼음이 형성되어 생긴 빙하의 퇴적물은, 위쪽의 후기 석탄 퇴적물 중 더러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새로운 두 기후 요인―빙하 작용과 건조성―이 나타났다. 지구에서 다수의 높은 지역이 건조한 불모의 땅이 되었다.
59:6.7 (683.4) 기후가 변화하는 이 시기를 통하여, 큰 변동이 또한 육지 식물에서도 일어났다. 씨앗 식물이 처음으로 나타났고, 이 식물은 나중에 늘어난 육지 동물 생명에게 더 좋은 식량을 공급해 주었다. 곤충은 철저한 변화를 겪었다. 겨울과 가뭄 동안에 활동이 중지되어 생기는 요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휴식 단계가 진화했다.
59:6.8 (683.5) 육지 동물 가운데 개구리가 앞선 시대에 정점(頂點)에 다다랐고, 빨리 쇠퇴하였다. 그러나 개구리가 살아남은 것은 아득하고 극도로 힘든 이 시절에, 마르고 있던 웅덩이와 연못에서도 오래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무는 이 개구리 시대에, 아프리카에서, 개구리가 파충류로 넘어가는 진화의 첫 걸음이 일어났다. 땅 덩어리들이 아직도 연결되었으니까, 이 파충류 이전 생물, 일종의 공기 호흡 동물이 온 세계에 퍼졌다. 이때가 되자, 대기가 아주 바뀌어서 동물의 호흡을 지원할 만큼 놀랍게 도움이 되었다. 이 파충류 이전의 개구리가 도착한 뒤에 곧, 북 아메리카는 유럽, 아시아, 남 아메리카로부터 일시 고립되고 단절되었다.
59:6.9 (683.6) 대양의 바닷물이 차츰차츰 식는 것은 대양 생명의 파괴에 크게 기여했다. 그 시대의 해양 동물은 유리한 세 은신처에 임시 피난했는데, 이는 현재 멕시코 걸프 지역, 인도의 간지스 만, 지중해 분지(盆地)의 시실리 만이었다. 그리고 이 세 지역으로부터, 곤경에서 태어난 새 해양 종자들이 떠나가 나중에 바다를 다시 채웠다.
59:6.10 (683.7) 160,000,000년 전에 땅은 육지 동물의 생명을 부양하는 데 적응된 식물로 대체로 덮였고, 대기는 동물이 호흡하는 데 이상적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해양 생명이 줄어드는 기간과 생물학적으로 어려운 시련기가 끝났고, 이 시련기는 살아남을 가치를 가진 것들을 제외하고, 온갖 형태의 생명을 없애버렸다. 따라서 남은 것들은 뒤따르는 행성 진화 시대에서 더 급속히 발달하고 상당히 분화된 생명의 조상으로서 활동할 자격이 있었다.
59:6.11 (684.1) 이 생물학적 시련기의 끝은, 너희 학자들에게 페름기로 알려져 있고, 또한 오랜 고생대(古生代)의 끝을 표시하는데, 고생대는 행성 역사의 4분의 1, 곧 2억5천만 년을 차지한다.
59:6.12 (684.2) 유란시아에서 생명의 보육원, 광대한 대양의 보육원은 그 목적에 소용이 되었다. 고등 육지 동물을 지탱하기 위하여 대기(大氣)가 산소를 충분히 품기 전에, 땅이 생명을 지원하기에 적당하지 않았던 오랜 시대 동안, 바다는 이 세상의 초기 생명을 기르고 양육했다. 뭍에서 제2 단계의 진화가 비로소 펼쳐지자, 이제 바다의 생물학적 중요성은 점진적으로 줄어든다.
59:6.13 (684.3) [네바돈의 한 생명 운반자가 발표했다. 그는 유란시아에 배치된 최초 군단의 일원이다.]
60:0.1 (685.1) 해양 생명만이 살던 시대는 끝났다. 육지가 높아지고, 껍질이 식고 대양이 식는 것, 바다가 제한되고 그에 따라 깊어진 것은 북쪽 위도에서 땅이 크게 늘어난 것과 아울러, 적도(赤道) 지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모든 지역에서 세계의 기후를 변화시키도록 모두 함께 크게 작용하였다.
60:0.2 (685.2) 앞선 시기의 말기는 참으로 개구리 시대였지만, 육지 척추 동물의 이 조상은 이제 더 지배하지 않았고, 상당히 줄어든 무리로서 살아남았다. 극소수의 종류가 이전의 생물학적 수난기의 엄격한 시련을 이겨냈다. 포자(胞子)를 지닌 식물조차도 거의 멸종해 버렸다.
60:1.1 (685.3) 이 시기에 침식으로 생긴 침전물은 대부분 역암ㆍ이판암ㆍ사암이었다. 아메리카와 유럽의 이 침전물에 두루 있는 석고와 붉은 지층은 이 대륙들의 기후가 건조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건조한 지역들은 둘러싼 산지에서 맹렬하고 정기적으로 쏟아지는 소나기에 크게 침식되었다.
60:1.2 (685.4) 이 지층에서 화석은 거의 발견되지 않을 터이나, 사암에서 육지 파충류의 수많은 발자국이 관찰될 수도 있다. 여러 지역에서 이 시기의 붉은 사암 퇴적물 300미터는 아무런 화석을 품지 않는다. 육지 동물의 생명은 겨우 아프리카의 어떤 부분에서만 계속되었다.
60:1.3 (685.5) 이 퇴적물은 두께가 900미터에서부터 3000미터까지 되며, 태평양 해안에서는 5,400미터까지 된다. 나중에 용암이 이 많은 지층 사이에 투입되었다. 헛슨 강의 팔리세이드는 이 트라이아스기 지층 사이에 현무암 용암이 돌출하여 형성되었다. 화산의 활동은 세계의 다른 부분에 널리 퍼져 있었다.
60:1.4 (685.6) 유럽, 특히 독일과 러시아에서 이 시기의 퇴적물이 발견될 수 있다. 잉글랜드에 있는 신적색(新赤色) 사암은 이 시기에 속한다. 바다가 침입한 결과로서 남쪽 알프스에서 석회석이 쌓였고, 그 지역에서 특이한 백운암(白雲岩) 석회석 벽ㆍ봉우리ㆍ기둥이 된 것을 이제 볼 수 있다. 이 지층은 아프리카와 오스트랄리아 전역에 걸쳐 발견될 것이다. 카라라 대리석은 그러한 변조된 석회석으로부터 생긴다. 이 시기에 속하는 것은 전혀 남 아메리카의 남부 지역에서 발견되지 않을 터인데, 이는 대륙의 그 부분이 물 밑에 남아 있었고, 따라서 그 이전과 이후에 계속하여 오직 물에 있던 퇴적물, 곧 해양 퇴적물을 내놓기 때문이다.
60:1.5 (686.1) 150,000,000년 전에 세계 역사에서 초기 육지 생명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생명은 잘 견디지 못했지만, 해양 생명 시기의 벅차고 냉혹한 말기보다 더 잘 견디었다.
60:1.6 (686.2) 이 시대가 시작되자, 북 아메리카의 동부와 중부, 남 아메리카의 북쪽 절반, 유럽의 대부분, 그리고 아시아 전체가 물 위로 썩 나와 있었다. 북 아메리카는 처음으로 지리적으로 고립되었지만 오랫동안 그렇지는 않았는데, 이는 베링 해협의 육지 다리가 곧 다시 솟아나서 그 대륙을 아시아와 연결했기 때문이다.
60:1.7 (686.3) 북 아메리카에서 큰 골짜기들이 생겼고, 이것들은 대서양과 태평양 해안과 평행하였다. 동부 코넥티컷트의 큰 단층이 나타났고, 한쪽은 결국 3.2킬로미터 가라앉았다. 이 북 아메리카 골짜기의 다수는, 산 지역의 민물이나 짠물 호수의 많은 분지처럼, 침식으로 생긴 침전물로 나중에 채워졌다. 채워진 이 꺼진 땅 부분은 나중에 지하에서 일어난 용암의 흐름으로 인하여 크게 높아졌다. 여러 지역의 석화림(石化林)은 이 시기에 속한다.
60:1.8 (686.4) 태평양 해안은 대륙이 침수된 동안에 보통 물 위에 있었는데, 칼리포니아 남부와 지금의 태평양에서 그때 존재했던 큰 섬 하나를 제외하고, 내려갔다. 고대의 이 칼리포니아 바다에는 해양 생명이 풍부했고, 동쪽으로 뻗어서 중서부 지역의 오래 된 바다 분지와 연결하였다.
60:1.9 (686.5) 140,000,000년 전에, 갑자기, 앞선 시기에 아프리카에서 개발된 두 파충류 이전 조상이 준 암시만 받고서, 파충류가 완전히 발육된 형태로 나타났다. 이것들은 빨리 발달했고 금방, 악어, 비늘 있는 파충류, 그리고 결국에는 바다뱀과 나르는 파충류를 생산하였다. 이것들의 과도기 조상은 급속히 사라졌다.
60:1.10 (686.6) 빨리 진화하는 파충류 공룡은 곧 이 시대의 군주가 되었다. 공룡은 알을 낳았고, 작은 두뇌로 모든 동물과 구별되었는데, 나중에는 40톤이나 되는 몸을 가누는 데 0.5킬로그람이 채 되지 않는 두뇌를 가졌다. 그러나 초기의 파충류는 더 작았고, 육식을 하며 뒷다리로 캉가루처럼 걸었다. 그들은 속이 빈, 새 종류의 뼈를 가졌고, 나중에는 뒷발에 세 발가락만 발달시켰는데, 그들의 많은 화석 발자국은 큰 새들의 발자국으로 잘못 인식되었다. 나중에는 채식하는 공룡이 진화했다. 그들은 모두 네 발로 걸었고, 이 무리의 한 가지는 보호하는 갑옷을 개발했다.
60:1.11 (686.7) 몇백만 년 뒤에 첫 포유동물이 나타났다. 이것들은 태반(胎盤)이 없었고 재빨리 실패작인 것이 판명되었다. 아무것도 살아남지 않았다. 이것은 포유동물 종류를 개량하려고 실험한 노력이었지만, 유란시아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60:1.12 (686.8) 이 시기의 해양 생명은 변변치 않았어도, 바다가 새로이 침입함과 더불어 급속히 개선되었고, 이 침입은 다시 얕은 물에서 광범위한 해안선을 만들었다. 유럽과 아시아 둘레에 얕은 물이 더 많이 있었으니까, 가장 풍부한 화석 지층은 이 대륙들 근처에서 발견될 것이다. 오늘날 너희가 이 시대의 생명을 연구하고 싶다면, 인도와 남태평양 분지의 섬들 뿐 아니라 히말라야ㆍ시베리아ㆍ지중해 지역을 조사해 보아라. 해양 생명에서 뛰어난 한 특성은 아름다운 암모나이트 무리가 존재한 것이었고, 이들의 화석 자취는 전세계에서 발견된다.
60:1.13 (686.9) 130,000,000년 전에 바다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시베리아와 북 아메리카는 베링 해협의 육지 다리로 연결되었다. 풍부하고 독특한 해양 생명이 칼리포니아의 태평양 해안에서 나타났고, 거기서 1천 종이 넘는 암모나이트가 상급의 두족류 부류로부터 발전되었다. 이 시기에 생명의 변화는 과도적이고 차츰 일어났는데도, 참으로 혁신적이었다.
60:1.14 (687.1) 이 기간은 2천5백만 년이 넘도록 연장되며, 트라이아스기로 알려져 있다.
60:2.1 (687.2) 120,000,000년 전에 파충류 시대의 새 국면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큰 사건은 공룡이 진화하고 쇠망한 것이었다. 육지 동물의 생명은 크기 면에서 최대로 발달하였고, 이 시대의 끝이 되자, 지구의 표면에서 거의 멸망해 버렸다. 공룡은 길이가 60센티미터 채 안 되는 종으로부터, 거대하고 육식하지 않고 길이가 22.5미터 되는 공룡에 이르기까지 온갖 크기로 진화했는데, 그 뒤로 살아 있는 어떤 생물도 덩치 면에서 결코 이와 어깨를 견주지 못했다.
60:2.2 (687.3) 공룡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북 아메리카 서부에서 비롯하였다. 이 괴물 파충류는 록키 산맥 지역에 두루, 북 아메리카의 대서양 해안 전부를 따라서, 서 유럽, 남 아프리카, 그리고 인도에 파묻혀 있지만, 오스트랄리아에는 없다.
60:2.3 (687.4) 이 큼직한 생물은 자꾸 커짐에 따라서, 더욱 활동이 줄어들고 약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룡은 그렇게 엄청난 양의 먹이가 필요했고, 땅이 이들로 들끓었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굶어 죽고 멸종되었다―그 상황을 이겨낼 지능이 모자랐다.
60:2.4 (687.5) 오랫동안 높아졌던 북 아메리카 동부의 대부분은, 이때가 되자 평평해지고 대서양으로 씻겨 내려갔으며, 그래서 해안은 지금보다 몇백 킬로미터나 더 멀리 뻗었다. 대륙의 서부는 아직 높이 올라와 있었지만, 이 지역조차 나중에 북쪽 바다와 태평양의 침입을 받았고, 태평양은 동쪽으로 다코타의 블랙 힐스 지역까지 뻗었다.
60:2.5 (687.6) 콜로라도ㆍ몬타나ㆍ와이오밍의 이른바 모리슨 지층에서 나온 풍부한 민물 화석이 보여주다시피, 이때는 민물 시대였고 그 특징은 많은 내륙 호수이다. 이 통합된 짠물 및 민물 퇴적물의 두께는 600미터에서 1500미터까지 달라진다. 그러나 이 지층에는 석회석이 거의 없다.
60:2.6 (687.7) 북 아메리카로 아주 밑으로 뻗은, 바로 이 극지의 바다는 마찬가지로 곧 출현하는 안데스 산맥을 제외하고 남 아메리카 전체를 덮었다. 중국과 러시아의 대부분은 물에 잠겼지만, 물의 침입은 유럽에서 가장 컸다. 독일 남부에서 아름다운 석판 인쇄에 쓰이는 돌이 이 침수 기간에 쌓였는데, 이것은 옛 곤충들의 아주 섬세한 날개와 같은 화석이 바로 어제 있었던 것처럼 보존되어 있는 지층이다.
60:2.7 (687.8) 이 시대의 식물상(植物相)은 앞선 시기의 것과 무척 비슷했다. 고사리가 지속했고, 침엽수와 소나무가 갈수록 더 오늘날의 종류처럼 되었다. 석탄이 더러 지중해 북쪽 해안을 따라서 아직도 형성되고 있었다.
60:2.8 (687.9) 바다가 돌아와서 기후가 좋아졌다. 산호는 유럽의 바다에 퍼졌고, 기후가 아직도 온화하고 한결같았음을 증명하지만, 산호는 천천히 식는 극지방의 바다에 결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시절의 해양 생명은, 특히 유럽의 바다에서, 크게 개선되고 발전했다. 산호와 갯나리가 지금까지보다 큰 무리로 잠시 나타났다. 그러나 암모나이트가 대양에서 무척추 생명을 지배했고 그 평균 크기는 7.5센티미터에서 10센티미터에 이르렀다. 하지만 한 종은 지름이 2.4미터나 되었다. 해면(海綿)이 어디에나 있었고, 오징어와 굴이 계속해서 진화했다.
60:2.9 (688.1) 110,000,000년 전에 가능한 해양 생물들이 계속하여 전개되고 있었다. 성게가 이 시기에 뛰어난 돌연 변이의 하나였다. 게ㆍ바다가재, 그리고 현대 종류의 갑각류가 성숙했다. 뚜렷한 변화가 물고기과에서 일어났고, 철갑상어 종류가 먼저 나타났다. 그러나 육지 파충류로부터 내려온 사나운 바다뱀이 아직도 온 바다에 들끓었고, 바다뱀은 물고기과 전체를 멸망시키려고 위협했다.
60:2.10 (688.2) 이때는 계속하여 뚜렷이, 공룡의 시대였다. 공룡이 땅에 너무나 들끓어서, 두 종이 이전에 바다가 침식하는 시기에 먹이를 얻으려고 물에 뛰어들었다. 이 바다뱀은 진화에서 뒷걸음을 대표한다. 새로운 몇 종이 진보하고 있지만, 어떤 혈통은 고정된 상태로 남아 있고, 더러는 뒤로 이끌리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 바로 이것이 이 두 종류의 파충류가 땅을 버렸을 때 일어났다.
60:2.11 (688.3) 바다뱀은 시간이 지나자 크게 자라서 대단히 느려졌고, 결국에는 멸망했는데, 이는 바다뱀이 큰 두뇌가 없어서 엄청난 몸을 보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어룡(魚龍)은 때때로 길이가 15미터 되게 자랐고, 대다수는 길이가 10.5미터 넘은 것이 사실인데도, 바다뱀의 두뇌는 무게가 56그람도 채 되지 않았다. 해양 악어도 육지 종류의 파충류로부터 복귀한 것이지만, 바다뱀과 달리, 이 동물은 알을 낳으려고 언제나 땅으로 돌아왔다.
60:2.12 (688.4) 자체를 보존하려는 쓸데없는 노력으로 두 종의 공룡이 물로 옮겨간 뒤에 곧, 땅에서 사는 생활의 극심한 경쟁 때문에, 다른 두 종류가 공중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나르는 이 익룡(翼龍)은 후일에 진짜 새의 조상이 아니었다. 이것들은 뼈 속이 빈 뛰는 공룡으로부터 진화했고, 그 날개는 펼치면 6미터에서 7.5미터가 되는, 박쥐 같은 형태였다. 날아다니는 이 고대(古代)의 파충류는 길이가 3미터 되도록 자랐고, 현대의 뱀의 것과 무척 비슷하게, 분리할 수 있는 턱을 가졌다. 한동안 이 날아다니는 파충류는 성공인 듯했지만, 공중을 날아다니는 자로서 생존하게 만드는 경로를 따라서 진화하지 못했다. 이것들은 살아남지 않은 새 조상의 혈통을 대표한다.
60:2.13 (688.5) 바다거북은 이 시기에 늘어났고, 북 아메리카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들의 조상은 북쪽의 육지 다리를 거쳐서 아시아로부터 넘어왔다.
60:2.14 (688.6) 1억 년 전에 파충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공룡은, 엄청난 덩치에 비하여 거의 머리가 없는 동물이었고, 그러한 엄청난 몸에 영양을 공급하기에 충분히 먹이를 마련할 지능이 모자랐다. 그래서 느린 이 육지 파충류의 멸망하는 수가 항상 늘어났다. 그때부터 진화는 덩치의 크기가 아니라 두뇌의 성장을 따를 것이고, 두뇌의 발달은 동물의 진화와 행성의 진보에서 뒤따르는 시대의 특징을 나타낼 것이다.
60:2.15 (688.7) 파충류의 절정과 쇠망의 시작을 포함하는 이 시기는 거의 2천5백만 년 동안 계속되었고, 주라기라고 알려져 있다.
60:3.1 (688.8) 대단한 백악기(白堊期)는 분필을 만드는, 다산하는 유공충(有孔蟲)이 바다를 휩쓴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이 시기는 유란시아에서 오랜 파충류 지배의 종말을 가져왔고, 육지에서 꽃피는 식물과 새 종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이때는 또한 대륙들의 서향 및 남향 떠돌이가 그치는 시절이고, 뒤따라서 엄청난 껍질의 일그러짐과 동시에 널리 용암(鎔岩)의 흐름과 큰 화산 활동이 생긴다.
60:3.2 (689.1) 앞선 지질학 시기가 막을 내릴 때가 가까워지자, 대륙의 상당 부분은 물 위에 나와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 산 봉우리가 없었다. 그러나 대륙의 떠돌이가 계속되자, 대륙은 태평양 깊은 바닥에서 처음으로 큰 장애에 부딪쳤다. 이 지질 세력의 싸움은 알라스카로부터 밑으로 멕시코를 거쳐 케이프 혼까지 뻗는 광대한 남북 방향의 산맥 전부를 형성하도록 충격을 주었다.
60:3.3 (689.2) 이처럼 이 기간은 지질학 역사에서 현대 산의 형성 단계가 된다. 이 시절 이전에는 산 봉우리가 거의 없었고, 다만 폭이 아주 넓고 높아진 땅의 등성이만 있었다. 이제 태평양 해안의 범위가 높아지기 시작했지만, 현재 해안선에서 1,120킬로미터 서쪽에 있었다. 시에라 산맥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고, 금(金)을 지니는 그 석영 지층은 이 시기에 있던 용암 흐름의 산물이다. 북 아메리카의 동부에서 대서양의 압력은 또한 땅이 솟아오르도록 작용하고 있었다.
60:3.4 (689.3) 100,000,000년 전에 북 아메리카 대륙, 그리고 유럽의 일부는 물 위에 쑥 나와 있었다. 두 아메리카 대륙의 찌그러짐이 계속되었고, 남 아메리카의 안데스의 모습을 바꾸고, 북 아메리카의 서부 평야를 차츰 높였다. 멕시코의 대부분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고, 남대서양은 남 아메리카의 동부 해안을 침식하여, 결국은 현재의 해안선에 이르렀다. 대서양과 인도양은 그때, 오늘날의 상태와 대체로 같았다.
60:3.5 (689.4) 95,000,000년 전에 아메리카와 유럽의 땅 덩어리는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 남쪽 바다가 북 아메리카의 침략을 개시하였고, 차츰 북쪽으로 뻗어서 북극해와 연결하였는데, 이것은 두 번째로 큰 대륙의 침수이다. 이 바다가 마침내 물러갔을 때, 그 대륙을 지금 있는 근처에 두었다. 이 큰 침수가 시작되기 전에, 동부의 아팔라치아 고지는 바닷물 수준까지 거의 완전히 약화되었다. 지금 토기(土器)를 만드는 데 쓰이는 순수한 점토로 이루어진, 색깔이 있는 여러 지층은 이 시대에 대서양 해안 지역에 쌓였고, 그 평균 두께는 약 600미터였다.
60:3.6 (689.5) 큰 화산 활동이 알프스의 남쪽에서, 또 현재 칼리포니아의 해안 범위에 있는 산맥의 줄을 따라서 일어났다. 수백만 년 동안에 가장 크게, 멕시코에서 땅껍질이 찌그러졌다. 큰 변화가 또한 유럽ㆍ러시아ㆍ일본, 그리고 남 아메리카 남부에서도 일어났다. 기후는 점점 더 다양하게 되었다.
60:3.7 (689.6) 90,000,000년 전에 속씨 식물이 이 초기의 백악기 바다로부터 솟아났고, 곧 대륙을 덮었다. 이 육지 식물은 무화과나무ㆍ목련ㆍ툴립나무와 함께, 갑자기 나타났다. 이 시기 뒤에 곧, 무화과나무ㆍ빵나무ㆍ야자나무가 유럽에, 그리고 북 아메리카의 서부 평원에 퍼졌다. 아무런 새 육지 동물이 나타나지 않았다.
60:3.8 (689.7) 85,000,000년 전에 베링 해협이 막혔고, 북쪽 바다의 식는 물을 막아버렸다. 그때까지는 대서양 및 걸프해의 해양 생명과 태평양의 해양 생명은, 두 수역의 온도 차이 때문에 크게 달랐다. 이제 이 수역들은 균일하게 되었다.
60:3.9 (689.8) 분필과 녹색 모래 이회토(泥灰土)가 이 시기에 이름을 주었다. 이 시절의 침전물은 얼룩덜룩했고, 분필ㆍ이판암ㆍ사암, 그리고 열등한 석탄, 곧 갈탄과 함께 소량의 석회석으로 구성되었으며, 여러 지역에서 침전물은 기름을 포함했다. 이 지층의 두께는 어떤 지역에서 60미터에서, 북 아메리카 서부와 수많은 유럽 지방에서 3,000미터에 이른다. 록키 산맥의 동부 경계지를 따라서 이 침전물은 기울어진 산기슭의 언덕 지대에서 관찰할 수 있다.
60:3.10 (690.1) 전세계에서 이 지층에는 분필이 스며들어 있고, 구멍이 많은 반(半)바위로 된 이 지층은 뒤집힌 노출 부분에서 물을 받고, 현재 지구의 건조한 많은 지역에 물을 공급하도록, 밑으로 전한다.
60:3.11 (690.2) 80,000,000년 전에 지구의 껍질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대륙 떠돌이의 서향 진행이 멈추고 있었고, 뒤쪽 대륙 덩어리의 느릿하게 움직이는 엄청난 에너지가 남북 아메리카의 태평양 해안선을 찌부러뜨렸고, 이에 반응하여 아시아의 태평양 해안선을 따라서 깊이 변화를 일으켰다. 이 태평양 둘레에서 일어난 땅의 융기는 궁극에 오늘날의 산맥들을 이루었고, 길이가 40,000킬로미터가 넘었다. 그 출산에 따른 융기는 유란시아에서 생명이 나타난 뒤에, 가장 크게 땅거죽이 일그러진 것이었다. 용암의 흐름은 지상과 지하에서, 광범위하고 널리 퍼졌다.
60:3.12 (690.3) 75,000,000년 전은 대륙의 떠돌이가 끝난 것을 표시한다. 알라스카에서부터 케이프 혼까지, 태평양 해안의 긴 산맥이 완성되었지만, 아직까지 봉우리가 거의 없었다.
60:3.13 (690.4) 대륙의 떠돌이가 멈춰서 생긴 뒤쪽 밀기는 북 아메리카의 서부 평원을 계속해서 높였고, 한편 동부에서 대서양 해안 지역에서 약화된 아팔라치아 산맥은 거의, 또는 도무지 기울어지지 않고, 수직(垂直)으로 튀어나왔다.
60:3.14 (690.5) 70,000,000년 전에 록키 산맥 지역이 최대로 솟아오른 것과 연결하여, 땅껍질이 찌그러졌다. 큰 바위 조각이 브리티시 콜럼비아에서, 표면에서 24킬로미터나 위로 밀렸다.[1] [1700] 여기서 캠브리아기의 바위들이 백악기 지층 위에 비스듬하게 밀려나왔다. 록키 산맥의 동쪽 비탈에서, 카나다 경계 가까이, 또 한 번 볼 만하게 위로 밀림이 있었다. 여기서 당시에는 최근이었던 백악기 퇴적물 위로 밀려난, 생명이 생기기 이전의 돌 지층을 발견할 수 있다.
60:3.15 (690.6) 이때는 전세계에서 화산 활동이 있던 시대였고, 이것은 작고 고립된 수많은 원뿔 모양의 화산이 생겨나게 만들었다. 바다 밑의 화산들이 물 속에 가라앉은 히말라야 지역에서 터졌다. 아시아의 나머지 지역의 상당 부분도, 시베리아를 포함하여, 아직도 물 밑에 있었다.
60:3.16 (690.7) 65,000,000년 전에 사상 최대의 용암 흐름 중의 하나가 일어났다. 이때와 전기(前期)의 용암 흐름이 퇴적된 지층은 두 아메리카 전역에서, 아프리카 남부와 북부, 오스트랄리아, 그리고 유럽의 여러 부분에서 발견될 것이다.
60:3.17 (690.8) 육지 동물은 거의 바뀌지 않았지만, 특히 북 아메리카에서, 대륙이 크게 솟아올라왔기 때문에 빨리 번식했다. 북 아메리카는 이 시절에 육지 동물이 진화하는 큰 벌판이었고, 유럽의 대부분은 물 밑에 있었다.
60:3.18 (690.9) 기후는 아직도 따듯하고 한결같았다. 극지방은, 북 아메리카의 중부와 남부에서 현재 기후와 아주 비슷한 날씨를 누렸다.
60:3.19 (690.10) 식물 생명에서 큰 진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육지 식물 가운데 속씨 식물이 휩쓸었고, 너도밤나무ㆍ자작나무ㆍ오크나무ㆍ밤나무ㆍ시카모어ㆍ단풍나무, 그리고 현대의 야자수를 포함하여 오늘날의 많은 나무가 처음으로 나타났다. 과실ㆍ풀ㆍ곡식이 풍부했고, 씨를 맺는 이러한 풀 및 나무와 식물 세계의 관계는 사람의 조상과 동물 세계의 관계와 같다―이들은 진화의 중요성으로 보면 바로 사람의 출현 다음으로 중요하다. 갑자기, 이전에 단계적 변화가 없이, 꽃피는 식물의 큰 과(科)가 돌연 변이로 생겼다. 이 새로운 식물상은 곧 전 세계에 퍼졌다.
60:3.20 (691.1) 60,000,000년 전에, 육지 파충류가 비록 쇠퇴하고 있었지만, 공룡은 땅의 군주로서 줄곧 군림했고, 좀더 민첩하고 활발한 부류, 작고 뛰는 캉가루 종류의 육식하는 공룡이 이제 선두를 빼앗았다. 그러나 언젠가 그 전에, 새로운 부류의 채식하는 공룡들이 나타난 적이 있고, 이것들이 급속히 증가한 것은 풀과의 육지 식물이 나타난 데 기인한다. 풀을 먹는 이 새 공룡들 중에 하나는 진짜 네발 동물이었고, 두 뿔과 망토 같은 어깨 테두리가 있었다. 지름이 6미터 되는 육지 종류의 거북이가 나타났고, 또한 현대의 악어와 현대 부류의 참 뱀이 나타났다. 큰 변화가 또한 물고기와 기타 형태의 해양 생명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60:3.21 (691.2) 앞선 시대에 물가를 걷고 헤엄치는 선조류(先鳥類)는 공중에서 성공하지 못했고, 나르는 공룡도 마찬가지였다. 이것들은 짧게 산 종이요, 금방 멸종되었다. 이것들도 공룡의 운명, 멸망을 겪었는데, 몸 크기에 비해서 너무나 뇌의 내용이 적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와 전기에 포유동물을 생산하려는 시도가 유산된 것과 마찬가지로, 공중을 나를 수 있는 동물을 생산하려는 둘째 시도가 실패했다.
60:3.22 (691.3) 55,000,000년 전에 진화의 행진은 진짜 새의 시조(始祖)가 갑자기 나타남으로 두드러졌는데, 비둘기 같은 이 작은 생물은 모든 새 종류 생명의 조상이었다. 이것은 땅에서 나타난 셋째 종류의 나르는 생물이었고, 파충류 집단으로부터 직접 솟아났으며, 당대의 나르는 공룡이나, 이를 가진 초기 종류의 육지 새로부터 솟아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때는 파충류가 쇠퇴하는 시대 뿐 아니라, 새의 시대로 알려지게 되었다.
60:4.1 (691.4) 대단한 백악기가 막을 내리고 있었고, 그 종말은 바다의 대륙 대침공이 끝난 것을 표시한다. 특히 이것이 북 아메리카에 관해서 참말인데, 거기에는 꼭 24번 큰 범람이 있었다. 나중에 사소한 침수(沈水)가 있었지만, 이 중에 아무것도 이 시대와 이전 시대의 광범위하고 길었던 바다의 침략과 비교할 수 없다. 땅과 바다가 번갈아 지배하던 이 시기는 1백만 년의 주기로 일어났다. 대양의 바닥과 대륙 수준이 이렇게 오르내림과 관련하여, 오랜 세월에 걸친 리듬이 있었다. 바로 이 리듬 있는 껍질의 운동은 이때부터 줄곧, 지구의 역사 전체를 통해서 죽, 그러나 빈도와 범위가 줄어들면서 계속될 것이다.
60:4.2 (691.5) 이 시기에는 또한 대륙의 떠돌이가 끝나고, 유란시아에서 현대의 산들이 형성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대륙 덩어리들의 압력, 그리고 오랜 세월에 걸친 떠돌이의 저지된 운동량은 산을 만드는 유일한 영향력이 아니다. 산맥의 위치를 결정하는 데 주요한 근본적 요인은 기존하는 낮은 땅, 곧 골짜기이며, 이것은 땅의 침식으로 생긴 비교적 가벼운 퇴적물과 이전 시대의 해양 표류물로 채워지게 되었다. 가벼운 이 땅 지역은 두께가 때때로 4,500미터에서 6,000미터가 되었다. 따라서 껍질이 어떤 이유로든 압력을 받을 때, 이 가벼운 지역들은 먼저 구겨지고, 접히고, 위로 올라가서, 지구의 껍질에서나 혹은 껍질 밑에서 작용하는, 싸우고 반대하는 세력 및 압력을 보상하는 조정을 허락한다. 때때로 이렇게 땅의 밀어 올리기는 접힘이 없이 생긴다. 그러나 록키 산맥이 올라간 것과 연관해서, 지하에서, 또 지표에서, 여러 지층의 엄청난 위로밀림과 더불어, 접힘과 기울어짐이 크게 일어났다.
60:4.3 (692.1)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산들은 오래 된 동서 체계의 산들 사이에, 아시아와 그린랜드와 북 유럽에 있다. 중년의 산들은 태평양 둘레의 집단에, 그리고 유럽의 둘째 동서 체계에 있으며, 후자는 거의 같은 때에 생겼다. 이 거대한 솟아오름은 길이가 거의 16,000킬로미터가 되고, 유럽으로부터 서인도 제도의 고지로 뻗는다. 가장 젊은 산들은 록키 산맥 체계에 있고, 거기서 오랜 세월 동안, 땅의 융기가 일어났지만 다만 바다가 연달아 덮었다. 하지만 고지들 가운데 더러는 섬으로 남았다. 중년의 산들이 형성되고 나서, 진정한 산 고지가 높아졌고, 이것은 나중에 자연 요인의 통합된 예술로 말미암아, 오늘날의 록키 산맥으로 조각되었다.
60:4.4 (692.2) 현재 북 아메리카의 록키 산맥 지역은 최초의 땅이 높아진 것이 아니다. 그 고지는 침식으로 인하여 평평하게 된 지 오래 되었고, 그리고 나서 다시 높아졌다. 현재 산맥의 앞줄이 다시 높아진 최초의 산맥의 흔적이 남은 것이다. 파이크스 봉우리와 롱스 봉우리가 이 산 활동의 뛰어난 예이며, 산(山) 생명에서 두 세대, 또는 더 지나서 연장된다. 이 두 봉우리는 앞서 몇 차례 범람이 있던 동안에, 물 위에서 머리를 들고 있었다.
60:4.5 (692.3) 지리학 뿐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이때는 땅에서, 또 물 밑에서 파란 많고 활동이 많았던 시대였다. 성게가 늘어났고, 한편 산호와 갯나리가 줄어들었다. 이전 시대에 압도적 영향을 미쳤던 암모나이트도 또한 빨리 쇠퇴하였다. 땅에서 고사리 숲은, 대체로 소나무, 그리고 거대한 삼나무를[2] [1701] 포함하여, 다른 현대의 나무로 바뀌었다. 이 기간의 끝이 되기까지, 태반(胎盤)을 가진 포유동물이 아직 진화하지 않았지만, 후세에 미래 포유동물 종류의 초기 조상이 등장하는 것을 위하여 생물학적 무대가 충분히 마련되었다.
60:4.6 (692.4) 육지 생명이 초기에 나타나는 때로부터 인종, 그리고 그와 나란한 가지들의 직계 조상이 나타난 최근 시대까지, 세상의 진화에서 긴 시대가 이렇게 막을 내린다. 이 백악기는 5천만 년을 차지하고, 육지 생명 가운데 포유동물 이전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데, 이것은 1억 년의 기간에 걸치며, 중생대 (中生代)로 알려져 있다.
60:4.7 (692.5) [사타니아에 배치되었고, 지금 유란시아에서 활동하는 한 네바돈 생명 운반자가 발표했다].
61:0.1 (693.1) 포유동물 시대는 태반이 있는 포유동물이 기원을 가진 시절부터 빙하 시대의 끝까지 이어지며, 5천만 년보다 조금 적게 차지한다.
61:0.2 (693.2) 이 신생대(新生代)에 세상의 경치는 매력 있는 모습을―경사가 완만한 언덕, 넓은 골짜기, 폭 넓은 강, 큰 숲을―나타냈다. 이 시간 구역 중에 두 번이나 파나마 지협이 올라가고 내려갔다. 세 번이나 베링 해협의 육지 다리도 그렇게 했다. 동물의 종류는 많고도 다채로웠다. 나무는 새들로 바글거렸고, 진화하는 동물 종자들이 주도권을 얻으려고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는데도, 온 세상이 동물의 천국이었다.
61:0.3 (693.3) 5천만 년에 걸치는 이 시대의 다섯 기(紀)에 쌓인 퇴적물은 연속된 포유동물 왕조의 화석 기록을 지니고 있으며, 바로 인간이 실제로 나타나는 시대까지 직접 이끈다.
61:1.1 (693.4) 50,000,000년 전에 세계의 땅 지역은 아주 대체로 물 위에 있거나, 겨우 조금만 물 밑에 잠겼다. 이 시기의 지층과 퇴적물은 육지와 해양의 것이었으나, 주로 육지 퇴적물이었다. 상당히 오랫동안 육지가 차츰차츰 올라섰지만, 동시에 더 낮은 수준으로, 바다를 향해서 씻겨 내려갔다.
61:1.2 (693.5) 이 시기에 일찍, 북 아메리카에서 태반(胎盤)을 가진 종류의 포유동물이 갑자기 나타났고, 이것들은 이때까지 가장 중요한 진화적 발전이었다. 이전에 태반이 없는 포유동물목(目)이 존재했지만, 이 새 종류는 기존의 파충류 조상으로부터 직접, 갑자기 튀어나왔는데, 이것들의 후손은 공룡이 쇠망하던 시절을 거쳐서 계속 버티었다. 태반을 가진 포유동물의 아버지는 작고, 상당히 활발하고, 육식을 하며, 껑충 뛰는 종류의 공룡이었다.
61:1.3 (693.6) 이 원시 포유동물 종류에서 포유동물의 기본적 본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포유동물은 다음 면에서, 모든 다른 형태의 동물 생명보다 엄청나게 살아남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포유동물은:
61:1.4 (693.7) 1. 비교적 성숙하고 잘 발육된 자식을 낳을 수 있다.
61:1.5 (693.8) 2. 애정을 가지고 새끼에게 양분을 먹이고 새끼를 양육하고 보호할 수 있다.
61:1.6 (693.9) 3. 자기를 존속시키는 일에 우수한 두뇌력을 쓸 수 있다.
61:1.9 (694.1) 45,000,000년 전에, 해안선이 아주 일반적으로 침몰하는 것과 관련하여, 대륙의 골격이 높아졌다. 포유동물 생명이 급속히 진화하고 있었다. 작은 파충류인, 알 낳는 종류의 포유동물이 번성했고, 후일의 캉가루 선조가 오스트랄리아를 누볐다. 얼마 안 되어, 작은 말, 발 빠른 코뿔소, 코가 긴 타피르, 원시 돼지, 다람쥐, 리머[1] [1702], 오파섬, 그리고 원숭이 같은 몇 부족의 동물이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작고 원시적이었고, 산 지역의 숲 사이에서 살기에 가장 적합했다. 타조 같은 큰 육지 새가 3미터의 키로 발달했고, 가로 23센티미터 세로 33센티미터 크기의 알을 낳았다. 이것들은 후일에 거대한 타는 새의 선조였는데, 이 새는 상당히 머리가 영리했고 한때 인간을 공중에서 날랐다.
61:1.10 (694.2) 초기 신생대의 포유동물은 땅에서, 물 밑에서, 공중에서, 그리고 나무 꼭대기에서 살았다. 그들은 한 쌍에서 열한 쌍에 이르는 유방 선(腺)을 가졌고, 모두가 상당히 많은 털로 덮였다. 후일에 나타나는 목(目)들과 공통으로, 그들은 두 벌의 연속된 이를 개발했고, 몸 덩치에 비해서 큰 두뇌를 소유했다. 그러나 이들 전체에서 현대 형태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61:1.11 (694.3) 40,000,000년 전에 북반구의 땅 지역이 비로소 높아졌고, 이에 새롭고 광범위한 땅 퇴적물, 그리고 용암의 흐름, 뒤틀림, 호수의 형성, 침식을 포함하여, 다른 종류의 땅의 활동이 뒤따랐다.
61:1.12 (694.4) 이 시기의 후반에 유럽의 대부분이 물에 잠겼다. 땅이 약간 올라가고 나서, 그 대륙은 호수와 만으로 덮였다. 북극해는, 유랄의 함몰을 통해서, 남쪽으로 달려 지중해와 연결되었는데, 당시에 지중해는 북쪽으로 확장했고, 고지에 알프스ㆍ카르파티아ㆍ아페닌ㆍ피레네 산들은 바다의 섬으로 물 위에 나와 있었다. 파나마 지협은 올라섰고, 대서양과 태평양은 갈라졌다. 북 아메리카는 베링 해협의 육지 다리로 아시아와 연결되고, 그린랜드와 아이스랜드를 경유해서 유럽과 연결되었다. 북쪽 위도에서 지구의 땅 순회로를 오직 유랄 해협이 절단했고, 이것은 북극의 바다와 확대된 지중해를 연결하였다.
61:1.13 (694.5) 상당한 유공충(有孔蟲) 석회석이 유럽의 바다에 퇴적되었다. 오늘날 바로 이 돌은 알프스에서 3,000미터, 히말라야에서 4,800미터, 티벳에서는 6,000미터의 높이로 솟아올랐다. 이 시기의 백악 퇴적물은 아프리카와 오스트랄리아의 바닷가를 따라서, 남 아메리카의 서해안에서, 그리고 서인도 제도 근처에서 발견된다.
61:1.14 (694.6) 이른바 이 시신세(始新世) 기간을 통해서 내내, 포유동물 및 기타 관계된 형태의 생명은 거의 또는 아무런 방해 없이 계속하였다. 북 아메리카는 그때 오스트랄리아를 빼고, 모든 대륙과 땅으로 연결되었고, 세상은 차츰차츰 여러 종류의 원시 포유동물 집단으로 북적거렸다.
61:2.1 (694.7) 이 기간의 특징은 태반(胎盤)을 가진 포유동물이 더욱, 급속히 진화한 것이며, 이들은 이 시절에 발전하던 포유동물 생명 중에 더욱 진보한 형태였다.
61:2.2 (694.8) 초기의 태반 포유동물은 육식하는 선조로부터 솟아나왔지만, 아주 곧 채식하는 가지들이 발달하였고, 오래지 않아서 잡식하는 여러 포유동물과(科)도 또한 솟아나왔다. 속씨 식물도 급속히 늘어나는 포유동물의 주요한 먹이였고, 오늘날의 식물과 나무의 대다수를 포함하여 현대의 육지 식물상(植物相)은, 이전 시기에 나타났다.
61:2.3 (695.1) 35,000,000년 전은 태반을 가진 포유동물이 세상을 정복하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표시한다. 남쪽의 육지 다리는 널리 퍼졌고, 그때 엄청나게 컸던 남극 대륙을 남 아메리카, 남 아프리카, 오스트랄리아와 다시 연결하였다. 높은 위도에서 땅이 집결하고 있는데도, 열대 바다가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에, 세계의 기후는 비교적 온화한 채로 남았고, 땅도 충분히 높아지지 않아서 빙하를 만들 수 없었다. 광범위한 용암의 흐름이 그린랜드와 아이스랜드에서 일어났고, 어떤 석탄은 이 지층 사이에 퇴적되고 있었다.
61:2.4 (695.2) 뚜렷한 변화가 행성의 동물상(動物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바다 생명은 크게 수정을 겪고 있었으며, 해양 생물에서 오늘날 목(目)들의 대부분이 존재했고, 유공충은 계속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곤충 생명은 이전 시대의 것과 무척 비슷했다. 콜로라도의 플로리산트 화석 지층은 까마득한 이 시절의 후기에 속한다. 살아 있는 곤충과의 대부분은 이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당시에 존재했던 다수는 지금 멸종되었다. 하지만 이것들의 화석이 남아 있다.
61:2.5 (695.3) 뭍에서 이때는 두드러지게 포유동물이 혁신하고 팽창하던 시대였다. 더 일찍 있었고 더 원시적인 포유동물 가운데, 1백이 넘는 종이 이 시기가 끝나기 전에 절멸했다. 덩치가 크고 두뇌가 작은 포유동물조차 곧 멸망했다. 두뇌와 민첩성은 동물이 살아남는 법의 진보에서 갑옷과 덩치를 대체하였다. 그리고 공룡과가 쇠망하면서, 포유동물이 천천히 지구를 정복했고, 나머지 파충류 조상을 빠르고 완벽하게 파괴하였다.
61:2.6 (695.4) 공룡이 사라짐과 함께, 다른 큰 변화가 도마뱀과의 여러 분과에서 일어났다. 초기 파충류과에서 살아남은 가지는 바다거북ㆍ뱀ㆍ악어였고, 이들과 더불어 존경받을 개구리였는데, 개구리는 사람의 시초 조상을 대표하는, 남아 있는 유일한 집단이다.
61:2.7 (695.5) 여러 무리의 포유동물은 지금은 멸종한 독특한 동물에서 기원을 가졌다. 육식하는 이 생물은 고양이와 물개를 교배한 잡종 비슷한 것이었는데, 땅에서나 물에서 살 수 있었고, 상당히 머리가 좋고 대단히 활발했다. 유럽에서는 개과의 조상이 진화했고, 곧 많은 종류의 작은 개들을 낳았다. 같은 무렵에 비버ㆍ다람쥐ㆍ땅다람쥐ㆍ생쥐ㆍ토끼를 포함하여, 갉아먹는 설치류(齧齒類)가 나타나서 즉시 주목할 만한 형태의 생명이 되었으며, 그 뒤로 이 과에서 거의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시기의 후기 퇴적물은, 조상 형태로 있는 개ㆍ고양이ㆍ너구리ㆍ족제비의 화석 잔재를 포함한다.
61:2.8 (695.6) 30,000,000년 전에 현대 종류의 포유동물이 비로소 나타났다. 이전에는 포유동물이 산에서 사는 종류였기 때문에, 산에서 대체로 지내는 편이었다. 발톱을 가진 육식하는 것들과 구별하여, 갑자기 평원(平原) 종류, 곧 발굽이 있는 종류, 풀을 뜯는 종들의 진화가 시작되었다. 이 풀 뜯는 동물은 다섯 발가락과 이를 44개 가진, 분화되지 않은 조상으로부터 솟아나왔는데, 이것은 그 시대가 끝나기 전에 멸망했다. 이 기간을 통해서 내내, 발가락의 진화는 세 발가락 단계를 지나서 진보하지 않았다.
61:2.9 (695.7) 말은 진화의 뛰어난 본보기이며, 이 시절에 북 아메리카와 유럽, 양쪽에서 살았다. 하지만 말의 발전은 후일의 빙하(氷河) 시대까지 충분히 끝나지 않았다. 코뿔소과는 이 시기의 끝에 나타났지만, 나중에 최대의 확장기를 거쳤다. 돼지 같은 한 작은 생물도 개발되었고, 이것은 여러 종의 돼지와 멧돼지와 하마(河馬)의 조상이 되었다. 낙타와 라마는 북 아메리카에서 이 시기의 중간쯤에 비롯하였고, 서부 평원에 들끓었다. 나중에 라마는 남 아메리카로, 낙타는 유럽으로 옮겨 갔으며, 곧 두 가지가 북 아메리카에서 멸종되었다. 하지만 몇 마리 낙타가 빙하 시대까지 살아남았다.
61:2.10 (696.1) 이 무렵에 주목할 일이 북 아메리카 서부에서 생겼다. 고대 리머의 초기 조상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 과(科)는 참 리머로 여길 수 없지만, 그들의 등장은 참 리머가 나중에 솟아나온 혈통이 확립되었음을 표시한다.
61:2.11 (696.2) 바다를 향해 갔던 이전 시대의 육지 뱀들처럼, 이제 태반(胎盤) 포유동물의 한 부족 전체가 땅을 버리고, 대양에서 살림터를 잡았다. 이것들은 그 뒤로 늘 바다에 남았고, 현대의 고래ㆍ돌고래ㆍ쥐돌고래ㆍ물개ㆍ바다사자를 낳았다.
61:2.12 (696.3) 행성에서 새 종류 생명은 줄곧 발달했지만, 중요한 진화적 변화는 거의 없었다. 갈매기ㆍ왜가리ㆍ플라밍고ㆍ대머리수리ㆍ매ㆍ독수리ㆍ부엉이ㆍ메추라기ㆍ타조를 포함하여, 현대에 있는 새들의 대다수가 존재했다.
61:2.13 (696.4) 1천만 년을 차지하는 이 점신세(漸新世)의 끝이 되기까지, 해양 생명 및 육지 동물과 함께, 식물 생명은 아주 크게 진화했고, 오늘날과 비슷하게 땅 위에 있었다. 상당한 분화가 나중에 나타났지만, 살아 있는 것들의 대부분의 조상 형태는 그때 살아 있었다.
61:3.1 (696.5) 땅이 높아지고 바다가 분리된 것은 천천히 세계의 날씨를 바꾸고 있었고 차츰 날씨를 서늘하게 했지만, 기후는 아직도 온화했다. 세쿼이아와 목련은 그린랜드에서 자랐지만, 아열대 식물이 남쪽으로 비로소 이주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끝이 되기까지, 따듯한 기후에서 사는 이 식물과 나무는 대체로 북쪽 위도에서 사라졌고, 그들의 자리는 추위에 더 잘 견디는 식물과 낙엽수가 차지했다.
61:3.2 (696.6) 풀의 종류가 크게 늘어났고, 많은 포유동물 종자의 이는 차츰 오늘날의 풀 뜯는 종류와 같은 모양으로 개조되었다.
61:3.3 (696.7) 25,000,000년 전에 땅이 높아지던 긴 시대에 뒤이어, 육지가 조금 물에 잠겼다. 록키 산맥 지역은 높이 솟은 채로 있어서, 침식된 물질의 퇴적은 동쪽으로 낮은 땅 전역에 걸쳐서 계속되었다. 시에라 산맥은 상당히 다시 솟았고, 사실은 그 뒤로 늘 솟아오르고 있었다. 칼리포니아 지역에서 6.4킬로미터에 이르는 큰 수직(垂直) 단층은 이 시절부터 유래한다.
61:3.4 (696.8) 20,000,000년 전에는 정말로 포유동물의 황금 시대였다. 베링 해협의 육지 다리가 올라왔고, 엄니가 네 개 있는 마스토돈, 다리 짧은 코뿔소, 그리고 고양이과의 여러 변종을 포함하여, 많은 집단의 동물이 아시아에서 북 아메리카로 이주했다.
61:3.5 (696.9) 첫 사슴이 나타났고, 북 아메리카는 즉시 반추(反芻) 동물이―사슴ㆍ소ㆍ낙타ㆍ들소, 그리고 몇 종자의 코뿔소가―들끓었지만, 키가 1.8미터 넘는 큰 돼지는 멸종했다.
61:3.6 (697.1) 이 시기와 후기의 거대한 코끼리는 덩치가 클 뿐 아니라 큰 두뇌를 소유했는데, 오스트랄리아를 빼고 곧 전세계에 넘쳤다. 계속 살아 갈 수 있게 만들 만큼 충분히 큰 두뇌를 가진 거대한 동물이 한 번 세계를 정복했다. 이 시대에 상당히 지능적인 생명과 대항하여, 코끼리만큼 큰 어떤 동물이라도 크고 우수한 질의 두뇌를 소유하지 않았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지능과 적응 면에서, 오직 말이 코끼리에 접근했고, 바로 사람만이 코끼리를 능가했다. 그렇기는 해도, 이 시기가 시작할 때 생존하던 50종의 코끼리 가운데, 겨우 두 가지가 살아남았다.
61:3.7 (697.2) 15,000,000년 전에 유라시아의 산 지역들이 높아지고 있었고, 이 지역에 두루 얼마큼의 화산 활동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서반구 용암의 흐름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 불안한 조건이 온 세계를 지배했다.
61:3.8 (697.3) 지브랄타 해협이 닫혔고, 스페인은 오래 된 육지 다리로 아프리카와 연결되었다. 그러나 지중해는 프랑스를 지나서 뻗은 좁은 수로(水路)를 통해서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갔고, 산봉우리와 고지들은 이 고대의 바다 위에서 섬처럼 보였다. 나중에, 이 유럽의 바다는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뒤에, 지중해는 인도양과 연결되었고, 한편 이 시기 끝에 수에즈 지역이 높아져서 지중해는 한동안 내륙의 짠 바다가 되었다.
61:3.9 (697.4) 아이스랜드 육지 다리가 물 밑에 잠겼고, 북극의 바다가 대서양의 바다와 서로 섞였다. 북 아메리카의 대서양 해안은 급히 식었지만, 태평양 해안은 지금보다 더 따듯한 채로 남았다. 대양의 큰 해류가 작용하고 있었고, 오늘날과 비슷하게 기후에 영향을 주었다.
61:3.10 (697.5) 포유동물 생명은 줄곧 진화했다. 엄청난 말 떼가 북 아메리카의 서부 평원에서 낙타들과 합세하였다. 이때는 코끼리만 아니라 참으로 말의 시대였다. 말의 머리는 동물의 품질 면에서 코끼리의 머리에 버금가지만, 한 가지 점에서, 놀랐을 때 도망치는 뿌리 깊은 성향을 결코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은 결정적으로 열등하다. 말은 코끼리처럼 감정을 통제하는 힘이 모자라고, 한편 코끼리는 덩치가 크고 민첩성이 모자라서 몹시 장애를 겪는다. 이 기간에 얼마큼 코끼리와 같고 말과 비슷한 동물이 진화했지만, 급속히 늘어나는 고양이과가 이를 즉시 멸종시켰다.
61:3.11 (697.6) 유란시아가 이른바 “말이 없는 시대”로 들어가고 있으니까, 너희는 이 동물이 너희 조상에게 얼마나 중요했는가 멈추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은 말을 처음에 먹을 것으로, 다음에는 여행에, 나중에는 농업과 전쟁에 썼다. 말은 오랫동안 인류에게 봉사하고, 인간의 문명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61:3.12 (697.7) 이 시기에 생물학상의 발전은 나중에 사람이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무대를 준비하는 방향으로 크게 기여했다. 중앙 아시아에서 진정한 부류의 원시 원숭이와 고릴라가 진화했고, 이것들은 지금은 멸절해 버린 공통된 조상을 가졌다. 그러나 이 종들 가운데 어느 것도, 나중에 인류의 조상이 되도록 예정된 생물의 혈통과 관련되지 않는다.
61:3.13 (697.8) 몇몇 집단이, 특히 늑대와 여우가, 개과를 대표했다. 고양이족을 표범, 그리고 칼이를 가진 큰 호랑이가 대표했고, 후자는 북 아메리카에서 처음으로 진화했다. 현대의 고양이과와 개과는 온 세상에서 수가 늘어났다. 족제비ㆍ담비ㆍ수달ㆍ너구리가 번성했고, 북쪽 위도 전역에 걸쳐서 발달했다.
61:3.14 (698.1) 새가 계속 진화했다. 하지만 뚜렷한 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파충류도 현대의 부류와―뱀ㆍ악어ㆍ바다거북과―비슷했다.
61:3.15 (698.2) 이렇게 세계 역사에서 대단히 사건이 많고 흥미 있던 시기가 막을 내렸다. 이 코끼리와 말의 시대는 중신세(中新世)라고 알려져 있다.
61:4.1 (698.3) 이때는 북 아메리카ㆍ유럽ㆍ아시아에서 빙하기 이전에 육지가 높아지던 시기이다. 땅의 지형은 크게 바뀌었다. 산맥이 태어나고, 강이 진로를 바꾸며, 고립된 화산들이 온 세계에서 터졌다.
61:4.2 (698.4) 10,000,000년 전에 대륙들의 낮은 곳에서 광범위하게 지역적으로 땅 침전물이 쌓이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침전물의 대부분은 나중에 옮겨졌다. 이 시절에 유럽의 상당 부분은 잉글랜드ㆍ벨지움ㆍ프랑스의 여러 부분을 포함하여, 아직도 물 밑에 있었고, 지중해는 북 아프리카의 상당 부분을 덮었다. 북 아메리카에서 광범위한 퇴적물이 산밑에서, 호수에서, 큰 분지에서 만들어졌다. 이 퇴적물은 평균 약 60미터이고, 다소 색깔이 있고, 화석이 드물다. 북 아메리카 서부에 두 개의 큰 민물 호수가 존재했다. 시에라는 높아지고 있었고, 샤스타ㆍ후드ㆍ레이니어는 산으로서 생애를 시작했다. 그러나 후일에 빙하기까지, 북 아메리카는 대서양의 침몰 부분을 향하여 비로소 기어가지 않았다.
61:4.3 (698.5) 잠시 동안 세상의 모든 육지는 오스트랄리아를 제외하고 다시 연결되었고, 마지막으로 동물의 세계적 대이동이 일어났다. 북 아메리카는 남 아메리카와 아시아와 다 연결되었고, 동물 생명이 자유롭게 교환되었다. 아시아의 나무늘보ㆍ아마딜로ㆍ영양(羚羊)ㆍ곰이 북 아메리카로 들어갔고, 한편 북 아메리카의 낙타는 중국으로 갔다. 코뿔소가 오스트랄리아와 남 아메리카를 제외하고, 온 세계로 이주했으나, 이 시기 끝이 되자 서반구에서 멸종되었다.
61:4.4 (698.6) 대체로, 전기(前期)의 생명은 줄곧 진화하고 퍼졌다. 고양이과가 동물 생명을 지배했고, 해양 생명은 거의 정지했다. 다수의 말이 아직 세 발가락을 가졌지만, 현대 종류가 도착하고 있었다. 라마, 그리고 기린 같은 낙타가 풀 뜯는 평원에서 말과 섞였다. 기린이 아프리카에서 나타났고, 그때 지금처럼 긴 목을 가졌다. 남 아메리카에서 나무늘보ㆍ아마딜로ㆍ개미핥기, 그리고 남 아메리카 종류의 원시 원숭이가 진화했다. 대륙들이 마침내 고립되기 전에, 그 덩치 큰 동물 마스토돈은 오스트랄리아를 제외하고, 어디에나 이주해 갔다.
61:4.5 (698.7) 5,000,000년 전에 말은 지금 상태로 진화했고, 북 아메리카로부터 전세계로 이주했다. 그러나 말은 홍인(紅人)이 도착하기 오래 전에, 기원이 있던 대륙에서 멸종되었다.
61:4.6 (698.8) 기후는 차츰 추워지고, 육지 식물은 천천히 남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북쪽 지협 위로 동물의 이주를 막은 것은, 처음에는 북쪽에서 심해지는 추위였다. 그 뒤에 이 북 아메리카 육지 다리가 가라앉았다. 그 뒤에 곧 아프리카와 남 아메리카 사이의 육지 연결은 마침내 물에 잠겼고, 서반구는 오늘날의 상태와 비슷하게 고립되었다. 이 시절 이후로, 다른 종류의 생명이 동반구와 서반구에서 발달하기 시작했다.
61:4.7 (699.1) 이처럼 거의 1천만 년 동안 계속된 시기가 막을 내리고, 사람의 조상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는 보통 선신세(鮮新世)라고 부르는 시절이다.
61:5.1 (699.2) 전기의 끝이 되자, 북 아메리카의 동북부와 북 유럽의 땅은 광범위한 규모로 상당히 높아졌고, 북 아메리카에서는 광대한 지역이 9,000미터까지, 그리고 더 높아지고 있었다. 이전에는 이 북쪽 지역에 온화한 기후가 지배했고, 북극의 바다는 모두 증발하도록 열려 있었으며, 빙하기가 거의 끝날 때까지 이 바다는 줄곧 얼음이 없었다.
61:5.2 (699.3) 이렇게 육지가 올라오는 것과 동시에 대양의 해류가 바뀌었고, 계절풍이 방향을 바꾸었다. 이 조건은 결국, 북쪽의 고지(高地)에 무겁게 젖어 있는 대기의 움직임으로부터 거의 항상 비가 쏟아지게 만들었다. 높아지고, 따라서 서늘한 이 지역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깊이가 6,000미터에 이를 때까지 눈이 계속 내렸다. 눈이 가장 깊이 쌓인 지역은, 고도(高度)와 함께, 나중에 압력으로 인한 빙하 흐름의 중심점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 지나친 강설이 이 북쪽 고지를 이처럼 굉장한 눈 외투로 계속 덮는 한, 빙하 시대가 이어졌다. 이 눈은 곧, 단단하지만 기어가는 얼음으로 형태를 바꾸었다.
61:5.3 (699.4) 이 시기의 큰 빙상은 모두 높아진 고지에 자리잡고 있었고, 오늘날 그 빙상들이 발견되는 산지에 있지 않았다. 빙하 얼음의 반은 북 아메리카에 있었고, 4분의 1은 유라시아에, 4분의 1은 다른 곳, 주로 남극에 있었다. 아프리카는 얼음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오스트랄리아는 남극의 얼음 담요로 거의 덮여 있었다.
61:5.4 (699.5) 이 세상의 북쪽 지역은 여섯 번이나 따로, 뚜렷한 얼음의 침공을 받았다. 하지만 각 개별 빙상의 활동과 관련하여 전진과 후퇴가 수십 번 있었다. 북 아메리카에서 얼음은 두 중심에서, 나중에는 세 중심에서 모였다. 그린랜드가 덮였고, 아이스랜드는 얼음의 흐름 밑에 완전히 묻혔다. 유럽에서 얼음은 다른 때에,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빼고, 영국 제도를 덮었고, 프랑스까지 서 유럽으로 퍼졌다.
61:5.5 (699.6) 2,000,000년 전에 북 아메리카의 첫 빙하가 남쪽으로 전진을 시작했다. 빙하기가 이제 시작되고 있었고, 이 빙하는 북쪽의 압력 중심들로부터 전진하고 다시 거기로 후퇴하는 데, 거의 1백만 년을 써버렸다. 중앙의 빙상(氷床)은 남쪽으로 칸사스까지 뻗었는데, 동쪽과 서쪽의 얼음 중심들은 그때 그다지 널리 퍼져 있지 않았다.
61:5.6 (699.7) 1,500,000년 전에 첫 대빙하가 북쪽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동안에 굉장한 양의 눈이 그린랜드와 북 아메리카 동북부에 내리고 있었고, 머지 않아 이 동부의 얼음 덩어리는 남쪽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얼음의 둘째 침공이었다.
61:5.7 (699.8) 처음에 있은 이 두 얼음 침공은 유라시아에서 널리 퍼지지 않았다. 이 빙하기의 시초에, 북 아메리카는 마스토돈, 털 있는 맘모스, 말ㆍ낙타ㆍ사슴ㆍ사향소ㆍ들소ㆍ나무늘보, 큰 비버, 칼이를 가진 호랑이, 코끼리만큼 큰 나무늘보, 그리고 많은 집단의 개 및 고양이과로 들끓었다. 그러나 이 시절 이후로, 빙하기의 심해지는 추위로 그들의 수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빙하기의 끝 무렵에, 이 동물 종자의 대부분은 북 아메리카에서 절멸되었다.
61:5.8 (700.1) 얼음으로부터 떨어진 곳에서, 세계의 뭍과 물에서 사는 생명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얼음의 침공 사이사이에, 기후는 대체로 현재만큼 온화했고, 아마 조금 더 따듯했다. 빙하는 퍼져서 엄청난 지역을 덮기는 하지만, 결국 지역 현상이다. 빙하의 비활동기, 그리고 엄청난 빙산들이 메인주 해안에서 대서양으로 미끄러져 가고 퓨지트 사운드를 통과하여 태평양으로 미끄러져 내리고 노르웨이의 피오르드 밑으로 북해로 천둥치며 내려간 시절 사이에, 해안선 지역의 기후는 크게 바뀌었다.
61:6.1 (700.2) 이 빙하기에 있었던 큰 사건은 원시인의 진화였다. 인도에서 조금 서쪽으로, 지금은 물 밑에 있는 땅에서, 오래 된 북 아메리카 리머 종류의 아시아 이민 자손 사이에서, 원시 포유동물이 갑자기 나타났다. 이 조그만 동물은 대체로 뒷다리로 걸었고, 몸 크기에 비해서, 또 다른 동물의 두뇌와 비교해서, 큰 두뇌를 소유했다. 이 목(目) 생명의 70대에서 새로운 상급 집단의 동물이 갑자기 분화했다. 이 새로운 중간 포유동물이―크기와 키가 선조의 거의 두 배가 되고, 비례해서 커진 두뇌력을 가졌다―겨우 자리를 잘 잡았는데, 그때 세 번째로 결정적 돌연 변이, 곧 영장목(靈長目)이 갑자기 나타났다. (바로 이때, 중간 포유동물의 혈통 안에서 퇴보하는 진화가 원숭이의 조상을 낳았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가지는 점진적으로 진화하여 앞으로 나아갔고, 한편 원숭이 부족은 정지 상태에 남아 있거나, 아니면 실제로 후퇴하였다.)
61:6.2 (700.3) 1,000,000년 전에 유란시아는 사람 사는 세계로서 등록되었다. 진보하는 영장목의 혈통 안에서 돌연 변이가 갑자기 두 명의 원시 인간, 인류의 실제 조상을 생산하였다.
61:6.3 (700.4) 이 사건은 빙하의 세 번째 전진이 시작될 무렵에 일어났다. 그래서 자극과 활력을 주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너희의 옛 조상이 태어나고 번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유란시아 원주민의 유일한 생존자, 에스키모인은 지금도 혹독한 북방 기후에서 살기를 선호한다.
61:6.4 (700.5) 인간은 빙하기의 끝이 가까울 때까지, 서반구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빙하기 사이에 그들은 서쪽으로 지중해 둘레를 지나갔고, 곧 유럽 대륙을 누볐다. 서 유럽의 동굴에서, 인간의 뼈가 열대와 북극 동물의 잔해와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빙하가 전진하고 후퇴하는 후기 시대를 통해서 죽, 이 지역에서 사람이 살았음을 증언한다.
61:7.1 (700.6) 빙하기 동안 내내 다른 활동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얼음의 활동은 북쪽 위도에서 모든 다른 현상을 무색하게 만든다. 땅의 어느 다른 활동도 그러한 특징을 가진 증거를 지형에 남기지 않는다. 특이한 표석(漂石)[2] [1703], 그리고 땅의 구멍, 호수, 옮겨진 돌, 돌가루와 같은 지표의 분열 현상은 자연에서 어떤 다른 현상과 관련 없이 발견될 것이다. 얼음은 또한 완만한 돌출부, 곧 빙퇴구(氷堆丘)로 알려진 지표의 진동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그리고 빙하가 진행함에 따라서, 빙하는 강을 옮기고 지구의 얼굴 전체를 바꾸어 놓는다. 오로지 빙하가 내막을 알리는 표류물을―지상ㆍ측면ㆍ말단 빙퇴석을―남겨 놓는다. 이러한 표류물, 특히 지상에 있는 빙퇴석(氷堆石)은, 북 아메리카에서 동쪽의 해안 북부에서부터 서쪽으로 연장되며, 유럽과 시베리아에서 발견된다.
61:7.2 (701.1) 750,000년 전에, 북 아메리카의 중앙 및 동부 빙원(氷原)이 합쳐진 넷째 빙상이 남쪽으로 한창 진행 중에 있었는데, 절정에 달했을 때 일리노이주 남부에 이르렀고, 미시시피 강을 80킬로미터 서쪽으로 옮겨놓았으며, 동쪽에서 오하이오 강과 펜실바니아주 중부만큼 남쪽으로 뻗었다.
61:7.3 (701.2) 아시아에서 시베리아 빙상(氷床)은 가장 남쪽으로 쳐들어갔고, 한편 유럽에서 진행하는 얼음은 알프스 산의 장벽에 바로 못 미처 멈추었다.
61:7.4 (701.3) 500,000년 전에, 얼음이 다섯 번째로 전진하던 동안에, 새로운 사태가 인간의 진화 과정을 가속했다. 갑자기, 한 세대에, 여섯 유색 민족이 원주민 인간 혈통으로부터 돌연 변이로 생겼다. 이때는 2중으로 중요한 날짜이니, 그때가 또한 행성 영주가 도착한 것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61:7.5 (701.4) 진행하는 다섯째 빙하는 북 아메리카에서 모두 세 얼음 중심의 합동 침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쪽 돌출부는 세인트 로렌스 계곡 밑에 짧게만 뻗었고, 서쪽의 빙상은 남향으로 거의 진출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심의 돌출부는 남쪽에 이르러 아이오와주의 대부분을 덮었다. 유럽에서 이 얼음 침공은 전기의 것만큼 널리 퍼지지 않았다.
61:7.6 (701.5) 250,000년 전에, 여섯째이자 마지막 빙하 활동이 시작되었다. 북부 고지가 조금 가라앉기 시작한 사실이 있었는데도, 이때는 북부 빙원에서 가장 크게 눈이 쌓인 기간이었다.
61:7.7 (701.6) 이 침공에서 세 개의 큰 빙상은 하나의 광대한 얼음 덩어리로 뭉쳤고, 서부의 산들은 모두 이 빙하 활동에 참여했다. 이것은 북 아메리카에서 모든 얼음 침공 가운데 가장 컸다. 얼음은 그 압력 중심들로부터 2,400킬로미터가 넘게 남쪽으로 움직였고, 북 아메리카는 가장 낮은 기온을 체험하였다.
61:7.8 (701.7) 200,000년 전에, 마지막 빙하가 진행하는 동안에, 유란시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진행과 많이 상관되는 사건―루시퍼 반란―이 일어났다.
61:7.9 (701.8) 150,000년 전에 여섯째이자 마지막 빙하의 남쪽 연장 부분이 가장 멀리 미쳤고, 서부의 빙상은 막 카나다 경계를 넘었다. 중부는 칸사스ㆍ미조리ㆍ일리노이로 내려왔고, 동쪽 빙상은 남쪽으로 진행하고, 펜실바니아와 오하이오의 절반을 넘게 덮었다.
61:7.10 (701.9) 이것은 많은 곶, 곧 얼음 돌출부를 내보낸 빙하인데, 이 돌출부는 오늘날의 크고 작은 호수를 만들었다. 이 빙하가 물러갈 때, 북 아메리카의 그레이트 레이크스 체계가 만들어졌다. 유란시아의 지질학자들은 이 사태의 여러 단계를 아주 정확히 추론했는데, 다른 시점에서 이 물 덩어리가 처음에는 미시시피 유역으로 흘러 들어가고, 다음에 동쪽으로 헛슨 유역으로 갔으며, 마지막에는 북쪽 길을 경유하여 세인트 로렌스로 흘러갔다고 옳게 추측했다. 연결된 그레이트 레이크스 체계가 현재의 나이아가라 길로 물을 비우기 시작한 지는 3만 7천 년이 되었다.
61:7.11 (702.1) 100,000년 전에, 마지막 빙하가 물러나는 동안에, 광대한 극지의 빙상들이 비로소 형성되었고, 누적된 얼음의 중심이 상당히 북쪽으로 옮겨갔다. 미래에 육지가 올라오거나 대양의 해류가 수정되는 것과 상관 없이, 북극 지역이 계속 얼음으로 덮여 있는 한, 또 하나의 빙하기는 도저히 생길 수 없다.
61:7.12 (702.2) 이 마지막 빙하는 10만 년 동안 진행하고 있었고, 북쪽으로 후퇴를 마치는 데는 비슷한 길이의 시간이 필요했다. 온대 지방은 5만 년이 조금 넘게 얼음에서 해방된 채로 있었다.
61:7.13 (702.3) 가혹한 빙하기는 많은 종자를 없애버렸고, 수많은 다른 종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여러 종이 이리저리 옮겨다님으로 뼈저리게 시련을 받았는데, 이러한 이동은 나아가고 물러나는 얼음 때문에 필요하게 되었다. 땅에서 빙하를 왔다갔다 따라다닌 동물은 곰ㆍ들소ㆍ순록ㆍ사향소ㆍ맘모스ㆍ마스토돈이었다.
61:7.14 (702.4) 맘모스는 탁 트인 초원을 찾았지만, 마스토돈은 숲 지역의 아늑한 가장자리를 더 좋아했다. 늦은 시절까지 맘모스는 멕시코에서부터 카나다까지 흩어졌고, 시베리아 종류는 털로 덮이게 되었다. 백인이 나중에 들소를 죽여버린 것처럼, 마스토돈은 홍인에게 멸망될 때까지 북 아메리카에서 버티었다.
61:7.15 (702.5) 북 아메리카에서, 마지막 빙하 활동이 있던 동안에 말ㆍ타피르ㆍ라마, 그리고 칼이를 가진 호랑이가 멸종되었다. 그들 대신에 나무늘보ㆍ아마딜로ㆍ카피바라가 남 아메리카로부터 올라왔다.
61:7.16 (702.6) 전진하는 얼음 앞에 강제된 생명의 이동은 식물과 동물의 특별한 혼합을 일으켰으며, 마지막 얼음 침공이 물러나자, 북극의 식물과 동물의 많은 종자가 어떤 산봉우리들에 높이 버려졌고, 거기로 그들은 빙하로 인하여 멸망되는 것을 피하려고 여행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옮겨진 이 식물과 동물을 유럽의 알프스 산의 높은 데서, 그리고 북 아메리카의 아팔라치아 산맥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61:7.17 (702.7) 빙하 시대는 마지막으로 종결된 지질학 기간, 이른바 홍적세(洪績世)이고, 길이는 2백만 년이 넘었다.
61:7.18 (702.8) 35,000년 전은 행성의 극지를 제쳐놓고, 큰 빙하 시대의 종말을 표시한다. 이 시점은 또한 물질 아들딸의 도착과, 아담 섭리 시대의 시작에 가까우므로 중요하며, 이것은 대체로 충적세(沖積世), 곧 빙하 이후 시기가 시작되는 것에 해당한다.
61:7.19 (702.9) 포유동물 생명이 대두된 때부터 얼음이 물러갈 때까지, 그리고 유사(有史) 시대까지 계속 이어지는 이 이야기는, 거의 5천만 년에 걸친다. 이때는 마지막―현재―지질학 기간이고, 너희의 학자들에게는 신생대(新生代) 또는 근세 시대라고 알려져 있다.
62:0.1 (703.1) 약 1백만 년 전에, 태반이 있는 포유동물, 리머 종류의 초기 혈통으로부터, 세 번 연달아 갑자기 돌연 변이가 생김으로 인류의 직계 조상이 나타났다. 이 초기 리머의 지배적 요소는, 서부 집단, 곧 후기 아메리카 집단의 진화하는 생명 원형질로부터 유래하였다. 그러나 인간 조상의 직계 혈통을 세우기 전에, 이 혈통은 아프리카에서 진화한, 중부에서 심은 생명의 기여로 강화되었다. 동부 생명 집단은 인간종을 실제로 낳는 데 거의 또는 아무것도 이바지하지 않았다.
62:1.1 (703.2) 인간종의 족보에 관계되는 초기의 리머는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북부에서 당시에 살던, 이전에 존재하던 긴팔원숭이와 원숭이[1] [1704] 부족들과 직접 관련이 없었고, 이들의 자손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이것들은 현대 종류 리머의 자손도 아니었으나, 양자(兩者)에 공통되지만, 멸종한 지 오래 된 조상으로부터 솟아났다.
62:1.2 (703.3) 이 초기의 리머는 서반구에서 진화했으나, 인류의 직계 포유동물 조상이 자리잡은 것은 남서 아시아에서, 중앙 생명 이식이 있었던 최초의 지역이지만 동부 지역의 경계에서 일어났다. 몇백만 년 전에 북 아메리카 종류의 리머는 베링 육지 다리 위로 서쪽으로 이주했고, 아시아 해안을 따라서 천천히 남서쪽으로 진행했다. 이주하는 이 부족들은 당시에 확대된 지중해, 그리고 인도 반도(半島)의 높아지는 산 지역 사이에 놓인, 기후 좋은 지역에 마침내 이르렀다. 인도 서쪽에 있는 이 땅에서 그들은 다른 유리한 혈통들과 합쳤고, 이렇게 인류의 족보를 세웠다.
62:1.3 (703.4) 시간이 흐르자, 산 지역의 남서쪽에서 인도의 바닷가는 차츰차츰 물에 잠겼고, 이 지역의 생명을 완전히 고립시켰다. 북쪽을 제외하고, 이 메소포타미아 반도, 곧 페르시아 반도에 이르거나 거기서부터 도망할 접근 경로가 하나도 없었고, 그 길은 빙하의 남향 침공으로 인하여 거듭해서 두절되었다. 당시에 거의 천국 같은 이 지역에서, 이 리머 종류 포유동물의 우수한 후손으로부터, 위대한 두 집단이 솟아났는데, 현대의 원숭이족과 오늘날의 인간종이다.
62:2.1 (703.5) 1백만 년보다 조금 더 전에, 메소포타미아의 시조 포유동물[2] [1705], 곧 북 아메리카 리머 종류로서 태반이 있는 포유동물의 직계 후손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들은 활동적인 작은 생물이었고, 키가 거의 90센티미터였다. 버릇으로 뒷다리로 서서 걷지는 않았지만, 쉽게 똑바로 설 수 있었다. 이것들은 털이 많고, 재빠르고, 원숭이 같은 짓으로 종알거렸지만, 원숭이족과 달리, 고기를 먹었다. 상당히 쓸모 있는 움켜쥐는 엄지발가락 뿐 아니라, 다른 손가락과 마주 볼 수 있는 원시 엄지손가락을 가졌다. 이 시점 이후로, 인간 이전의 종들은 마주 볼 수 있는 엄지손가락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고, 한편 엄지발가락의 움켜쥐는 힘을 차츰 잃어버렸다. 후일의 원숭이족들은 움켜쥐는 엄지발가락을 간직했지만, 결코 인간 종류의 엄지를 개발하지 못했다.
62:2.2 (704.1) 이 시조 포유동물은 서너 살이 되었을 때 완전히 자랐고, 가능한 수명이 평균 약 20년이었다. 일반적으로, 자손들은 하나씩 생겼지만 쌍둥이가 때때로 있었다.
62:2.3 (704.2) 이 새 종의 구성원은 그때까지 땅에서 존재했던 어떤 동물 중에서도, 몸 크기에 비해 가장 큰 두뇌를 가졌다. 그들은 나중에 원시인의 특징을 나타냈던 많은 감정을 느끼고 수많은 본능을 공통으로 가졌으며, 호기심이 많았고 어떤 시도라도 성공했을 때 아주 우쭐해하였다. 배고픔과 성욕이 잘 발달되었고, 서투른 형태로 구애하고 짝을 선택하는 일에, 분명히 성(性)의 상대를 선택함을 드러냈다. 자기들의 친족을 방어하느라고 사납게 싸우곤 했고, 가족 관계가 아주 부드러웠으며, 자기를 낮추는 감각을 소유했는데, 이것은 부끄러움과 뉘우침에 가까웠다. 그들은 대단히 사랑이 깊었고, 짝에게 충성하는 것은 감동적이었지만, 환경이 그들을 떼어놓았을 때, 새 짝을 고르곤 했다.
62:2.4 (704.3) 키가 작았고, 자기들의 숲 거주지에 있는 위험을 깨닫는 날카로운 머리를 가졌기 때문에 특별한 두려움을 개발하여 그들이 현명한 예방 조치를 취하도록 이끌었으며, 이것은 생존에 아주 엄청나게 이바지하였다. 예를 들면, 그들은 높은 나무 꼭대기에 어설픈 오두막을 지었는데, 이것은 땅에서 살면서 생기는 많은 위험을 제거했다. 인류의 두려워하는 성향의 시작은 더 자세히 말하면 이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62:2.5 (704.4) 이 시조 포유동물은 이전에 나타냈던 것보다, 부족 정신이 더 발달되었다. 정말로 상당히 사교적이었지만, 그런데도 일상 생활에서 보통 일을 하다가 어떤 방법으로든 방해를 받았을 때 대단히 싸우기 좋아했고, 분노를 충분히 건드렸을 때 불같은 성미를 나타냈다. 그러나 호전적 성질은 좋은 목적에 쓰였다. 우수한 집단은 열등한 이웃과 서슴지 않고 전쟁하였고, 이처럼 선택적 생존으로 그 종은 점진적으로 개량되었다. 그들은 곧 이 지역의 작은 생물의 생활을 지배했고, 더 오래 되고 육식하지 않는, 원숭이 같은 부족들은 극소수가 살아남았다.
62:2.6 (704.5) 적극성이 있는 이 작은 동물은 메소포타미아 반도에서 1천 년이 넘도록 번식하고 퍼졌고, 신체의 종류와 일반 지능이 항상 개량되었다. 이 새로운 부족이 가장 높은 종류의 리머 조상에서 기원을 가진 뒤, 꼭 70대가 되자, 그 다음의 획기적 발전이 일어났다―유란시아에서 인간의 진화에서 다음으로 극히 중대한 걸음이 되는 조상이 갑자기 분화되어 생긴 것이다.
62:3.1 (704.6) 시조 포유동물의 생애에서 일찍, 이 우수한 한 쌍의 재빠른 생물이 살던 나무꼭대기 집에서 쌍둥이, 수놈 하나와 암놈 하나가 태어났다. 조상과 비교해서, 이들은 정말로 잘생긴 작은 생물이었다. 몸에 거의 털이 없었어도 따듯하고 온화한 기후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것은 아무런 신체의 장애가 아니었다.
62:3.2 (705.1) 이 아이들은 키가 120센티미터 조금 넘게 자랐다. 모든 면에서 부모보다 덩치가 컸고, 다리가 더 길고 팔이 더 짧았다. 거의 완전히 마주 볼 수 있는 엄지손가락을 가졌고, 이것은 거의 오늘날 인간의 엄지손가락만큼, 다양한 일에 잘 적응되었다. 그들은 똑바로 서서 걸었고, 후일의 인종만큼, 걷기에 거의 잘 적응된 발을 가졌다.
62:3.3 (705.2) 그들의 두뇌는 인간보다 열등하고 작았지만, 조상보다 대단히 우수하고, 조상과 비교해서 훨씬 컸다. 그 쌍둥이는 일찍부터 우수한 지능을 나타냈으며, 시조 포유동물의 종족 전체에서 곧 우두머리로서 인정받았고, 원시 형태의 사회 조직과 투박하지만 경제적 노동 분업을 정말로 시작했다. 이 오누이는 짝을 지었고, 곧 자신과 상당히 비슷한 아이들 21명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가졌다. 이들은 모두 키가 120센티미터 넘고, 모든 면에서 조상의 종보다 뛰어났다. 이 새 집단은 중간 포유동물의 핵심을 이루었다.
62:3.4 (705.3) 새롭고 우수한 이 집단의 수가 크게 늘어났을 때, 전쟁, 무자비한 전쟁이 터졌다. 그 끔찍한 싸움이 끝났을 때, 시조 포유동물 가운데 전에 있었던 조상 종은 하나도 살아남지 않았다. 그 종에서 수가 적지만 더 강력하고 머리 좋은 가지가 조상을 희생하고 살아남았다.
62:3.5 (705.4) 이제 거의 1만 5천 년 (6백 세대) 동안, 이 생물은 세상의 이 부분에서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지난 시대의 크고 사나운 동물이 모두 멸망했다. 이 지역에 토착인 큰 짐승들은 육식을 하지 않았고, 고양이과에서 큰 종자, 사자와 호랑이는 지구의 표면에서 특별히 보호받은 이 구석을 아직 침범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중간 포유동물은 용감해졌고, 세상에서 그들이 있던 구석을 전부 정복했다.
62:3.6 (705.5) 조상 종자(種子)와 비교해서, 중간 포유동물은 모든 면에서 더 나았다. 잠재 수명도 더 길었고, 약 25년이었다. 기초적 인간 특성 가운데 몇 가지가 이 새 종에서 나타났다. 조상이 전시한 타고난 성향 외에도, 이 중간 포유동물은 어떤 불쾌한 상황에서 메스꺼움을 보이는 능력이 있었다. 더 나아가서 분명한 저축 본능을 소유했다. 나중에 쓰려고 먹이를 감추곤 했고, 방어하고 공격하는 탄약으로서 적당한, 매끄럽고 동그란 자갈, 그리고 어떤 종류의 둥근 돌을 모으는 데 마음이 쏙 빠졌다.
62:3.7 (705.6) 이 중간 포유동물은, 나무 꼭대기 집과 터널이 여러 개 있는 지하 피난처를 지으면서 벌인 경쟁에서 보인 바와 같이, 분명한 집 짓는 성향을 처음으로 나타낸 동물이다. 나무로 된 피난처와 지하 피난처에서, 안전을 마련한 첫 포유동물 종자였다. 거주하는 장소로서 나무를 대체로 포기했고, 낮에는 땅에서 살고 밤에는 나무 꼭대기에서 잤다.
62:3.8 (705.7)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자연스러운 수의 증가는 결국 심각한 먹이 경쟁과 성(性)의 경쟁을 낳았고, 이 모든 것이 서로 죽이는 일련의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것은 그 종 전체를 거의 없애버렸다. 이 싸움은 1백명도 채 안 되는 한 집단이 살아남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평화가 다시 한 번 찾아왔고, 혼자 살아남은 이 부족은 나무 꼭대기 침실을 새로 짓고, 다시 한 번 정상이고 얼마큼 평화스러운 삶을 시작하였다.
62:3.9 (705.8) 얼마나 아슬아슬한 차이로 인간 이전의 조상이 때때로 멸종할 뻔했는가 너희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다. 어떤 기회에, 온 인류의 조상(祖上) 개구리가 5센티미터만 적게 팔짝 뛰었더라면, 진화 과정 전부가 뚜렷하게 바뀌었을 것이다. 시조 포유동물 종의 직계에 리머 같은 어머니는 새로운 상급 포유동물목(目)의 아버지를 낳기 전에, 겨우 털끝 만한 차이로 적어도 다섯 번이나 죽음을 모면했다. 그러나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아슬아슬했던 탈출은, 영장목 쌍둥이를 밴 어머니가 잠자고 있던 나무를 벼락이 때린 때였다. 중간 포유동물인 이 부모는 심하게 충격을 받고 크게 그슬렸다. 일곱 아이 가운데 셋은 하늘에서 떨어진 이 번개에 맞아 죽었다. 진화하는 이 동물은 미신에 사로잡힌 듯하였다. 나무꼭대기 집을 벼락 맞은 이 쌍은 정말로 중간 포유동물 종에서 진취적인 무리의 지도자였다. 그들의 본보기를 따라서, 머리가 더 깨인 가족들을 포함하여, 그 부족의 과반수가 이 장소로부터 약 3.2킬로미터 옮겨 가서, 나무꼭대기에 새 거처와 새 지상 피난처를―갑작스런 위험이 있을 때 임시 은둔할 장소를―짓기 시작했다.
62:3.10 (706.1) 집이 완성된 뒤에 얼마 안 있어, 수많은 투쟁을 겪은 노병인 이 쌍은 자랑스럽게도 쌍둥이의 부모가 되었다. 이 쌍둥이는 그때까지 세상에 일찍이 태어난 가운데 가장 흥미 있고 중요한 동물이었으니, 인간 이전의 진화에서 다음으로 중대한 걸음, 영장목(靈長目)에서 새로운 종의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62:3.11 (706.2) 이 영장목 쌍둥이가 태어난 것과 같은 때에, 또 한 쌍이―중간 포유동물 부족 가운데서 특히 우둔한 수놈과 암놈, 머리와 육체 면에서 열등한 쌍이―또한 쌍둥이를 낳았다. 이 쌍둥이는 수놈 하나와 암놈 하나였는데, 무엇을 정복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이것들은 오로지 먹이를 얻는 데 관심이 있었고, 고기를 먹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짐승을 잡는 데 전혀 흥미가 없었다. 이 우둔한 쌍둥이는 오늘날 원숭이족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그들의 후손은 기후가 온화하고 열대 과일이 풍부한, 좀더 따듯한 남쪽 지역을 찾았고, 긴팔원숭이와 원숭이의 시초 종류와 교배하고, 그 결과로 크게 저하된 가지들을 제쳐놓고, 거기서 그 시절과 상당히 비슷하게 살아왔다.
62:3.12 (706.3) 그래서 사람과 원숭이는 중간 포유동물로부터 솟아났으니까 관련이 있음을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그 족(族)에서 두 쌍의 쌍둥이가 같은 시대에 출생하고 나중에는 갈라졌다. 열등한 쌍은 현대 종류의 원숭이ㆍ비비ㆍ침판지ㆍ고릴라를 낳도록 정해졌고, 우수한 쌍은 바로 사람으로 진화한 상승 혈통을 계속하도록 운명이 정해졌다.
62:3.13 (706.4) 현대 인간과 원숭이는 같은 족과 종으로부터 솟아나기는 했어도, 같은 부모로부터 솟아나지는 않았다. 사람의 조상은 이 중간 포유동물 부족에서 선택된 잔재의 우수한 핏줄로부터 내려왔고, 한편 현대의 원숭이는 (어떤 선재하던 종류의 리머ㆍ긴팔원숭이ㆍ원숭이, 그리고 기타 원숭이 같은 동물을 제외하고) 이 중간 포유동물 집단에서 가장 열등한 쌍의 후손이다. 이 쌍은 그들 족속의 맹렬한 마지막 전투 중에, 먹이를 저장하는 지하 피난처에서 2주가 넘도록 숨었다가, 적대 행위가 완전히 끝난 뒤에 나타나서, 겨우 살아남았다.
62:4.1 (706.5) 우수한 쌍둥이, 수놈 하나와 암놈 하나가, 중간 포유동물 부족 가운데 두 마리의 지도자에게 태어났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이 동물 새끼들은 특별한 목(目)이었다. 그들은 부모보다도 몸에 털이 더욱 적었고, 아주 어릴 때 몸을 곧게 세우고 걷기를 고집했다. 그들의 조상은 언제나 뒷다리로 걷기를 배웠지만, 이 영장목(靈長目) 쌍둥이는 처음부터 똑바로 섰다. 그들은 키가 150센티미터 넘게 자랐고, 머리는 그 부족에서 남들과 비해서 더 크게 자랐다. 일찍부터 몸짓과 소리로 서로 교통하기를 배웠지만, 이 새로운 표현을 결코 그 종족에게 이해시킬 수 없었다.
62:4.2 (707.1) 약 14살이 되었을 때, 그들은 그 부족으로부터 도망쳤고, 가족을 일으키고 영장목의 새 종자를 세우기 위해서 서쪽으로 갔다. 이 새로운 생물을 영장목이라 일컫는 것이 아주 적절한데,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인간 가족의 직계이자 직접, 동물 조상이었기 때문이다.
62:4.3 (707.2) 이처럼 영장목은 메소포타미아 반도의 서해안에서 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 반도는 그때 남쪽 바다 속으로 쑥 튀어나왔다. 한편 지능이 덜하고 가까이 관련된 부족들은 반도의 정점 둘레에, 그리고 동쪽 해안선 위쪽에서 살았다.
62:4.4 (707.3) 영장목은 중간 포유동물인 전임자보다, 사람에 더 가깝고 동물과 거리가 더 멀었다. 이 새 종의 골격 비율은 원시 인류의 것과 대단히 비슷했다. 인간 종류의 손과 발이 충분히 발육되었으며, 이 생물은 걸을 수 있었고, 후일에 그들의 어느 인간 후손만큼이나 잘 뛸 수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나무에서 살기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예전의 조상들처럼, 겁이 많았기 때문에 밤에 안전 조치로서 계속해서 나무 꼭대기에 의존했다. 손을 더욱 사용한 것은 타고난 두뇌력을 개발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지만, 그들은 정말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머리를 아직 소유하지 않았다.
62:4.5 (707.4) 그 영장목의 감정적 성품은 비록 그 선조와 거의 다르지 않았어도, 그들의 모든 성향은 인간의 경향을 더 나타냈다. 정말로 그들은 빛나는 우수한 동물이었고, 약 10살에 성숙기에 이르고 약 40년의 자연 수명을 가졌다. 즉, 자연사했다면 그만큼 오래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옛 시절에는 자연사한 동물이 거의 없었는데, 생존 투쟁이 아주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62:4.6 (707.5) 이제, 시조 포유동물이 생긴 때부터 약 2만 1천 년에 걸쳐, 거의 9백 세대의 발전이 있은 뒤에, 영장목은 갑자기 놀라운 두 생물, 처음으로 참 인간들을 출산했다.
62:4.7 (707.6) 이와 같이 북 아메리카 리머 종류로부터 솟아나온 시조 포유동물이 중간 포유동물을 낳았고, 이 중간 포유동물은 다음에 우수한 영장목을 낳았으며, 이들은 원시 인류의 직계 선조가 되었다. 영장목 부족들은 인간의 진화에서 마지막으로 중대한 고리였으나, 5천 년도 채 되지 않아 이 특별한 부족들 가운데 한 마리도 살아남지 않았다.
62:5.1 (707.7) 서기 1934년부터 처음 두 인간이 출생하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꼭 993,419년이다.
62:5.2 (707.8) 놀랄 만한 이 두 생물은 참 인간이었다. 그들의 많은 조상처럼 완전한 인간 엄지손가락을 소유했고, 한편 오늘날의 인류처럼, 똑같이 완전한 발을 가졌다. 그들은 걷고 달리는 자요, 기어오르는 자가 아니었다. 엄지발가락의 움켜쥐는 기능이 없었다, 완전히 없었다. 위험 때문에 그들이 나무 꼭대기로 몰렸을 때, 그들은 마치 오늘날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기어올랐다. 곰처럼 나무의 몸통을 기어올라가곤 했고, 침판지나 고릴라처럼 나무가지를 잡고 몸을 휙 위로 던져, 올라가지 않았다.
62:5.3 (708.1) 이 처음 인간들(과 그 후손)은 12살에 완전히 성숙했고, 약 75년의 잠재 수명을 가졌다.
62:5.4 (708.2) 많은 새로운 감정이 이 인간 쌍둥이에게 일찍부터 나타났다. 그들은 물건과 기타 존재에 대하여 감탄하는 것을 체험했고, 상당한 허영심을 보였다. 그러나 감정의 발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진보는 새로운 집단의 느낌, 정말로 인간다운 느낌, 곧 경외ㆍ존경심ㆍ겸손, 그리고 원시 형태의 고마움조차도 포함하여, 예배하는 감정 집단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었다. 자연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연결되어, 두려움이 바야흐로 원시 종교를 낳으려 한다.
62:5.5 (708.3) 이 원시 인간 속에 그러한 인간다운 느낌이 나타났을 뿐 아니라, 상당히 진화된 훨씬 많은 감정이 또한 기초 형태로 있었다. 그들은 동정심ㆍ부끄러움ㆍ뉘우침을 미약하게 의식했고 사랑ㆍ미움ㆍ복수를 날카롭게 의식했으며, 또한 뚜렷한 질투하는 느낌에 쉽게 빠졌다.
62:5.6 (708.4) 이 처음 두 인간―쌍둥이―는 영장목 부모에게 커다란 시련이었다. 너무나 호기심이 많고 모험을 좋아해서, 그들은 여덟 살이 되기 전에 수많은 경우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실제로 일어난 바와 같이, 12 살이 되기까지, 그들은 숱하게 상처를 입었다.
62:5.7 (708.5) 아주 일찍부터 그들은 말로 뜻을 소통하기를 배웠다. 10살이 되자 그들은 개량된 신호와 거의 50 가지 관념을 가리키는 언어를 고안해냈고, 조상들의 투박한 의사(意思) 소통 기술을 크게 개선하고 확대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애써도, 그들은 부모에게 새로운 신호와 상징 가운데 겨우 몇 개만 가르칠 수 있었다.
62:5.8 (708.6) 약 9살이 되었을 때, 그들은 어느 화창한 날에, 강가를 따라 훌쩍 떠나서 중대한 회의를 가졌다. 유란시아에 주둔했던 하늘 지성 존재는 누구나, 바로 나도 포함해서, 이 대낮의 밀회에서 생긴 거래를 지켜보는 자로서, 거기에 있었다. 이 중요한 날에 그들은 서로 함께, 서로를 위하여 살자는 데 의견을 모았고, 이것은 그러한 일련의 합의에서 처음이었다. 이 합의는 마침내 그들이 열등한 동료 동물로부터 달아나서 북쪽으로 떠나자는 결정으로 이끌었고, 그들은 이처럼 인류의 기초를 세우게 되리라는 것을 조금도 깨닫지 못했다.
62:5.9 (708.7) 우리 모두가 작은 이 두 야만인이 계획하고 있는 것에 크게 관심을 가졌어도, 우리는 그들의 지성 작용을 통제할 힘이 없었다. 우리는 멋대로 그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허락할 수 있는 행성 활동의 한계 안에서, 우리 생명 운반자들은 모두, 동료들과 함께, 그 인간 쌍둥이를 북쪽으로, 털이 많고 얼마큼 나무에서 사는 그들의 족속으로부터 멀리 이끌려고 일을 꾸몄다. 그래서, 총명하게 선택하는 자신들의 논리에 따라서, 그 쌍둥이는 이주했고 우리의 감독 때문에 그들은 북쪽으로 한적한 곳으로 옮겨갔다. 거기서 그들은 영장목 부족의 열등한 친척들과 섞임으로 생물학상의 퇴화 가능성을 피했다.
62:5.10 (708.8) 고향 숲을 떠나기 얼마 전에, 긴팔원숭이의 공격이 있었을 때 그들은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는 그들만큼 지능이 없었지만, 자손에 대해서 높은 정도의 값진 포유동물의 애정을 가졌고, 어머니는 그 놀라운 쌍을 구하려는 노력으로 목숨을 두려움 없이 버렸다. 어머니의 희생도 헛되지 않았으니, 아버지가 지원군과 함께 도착해서 침략자들이 패주할 때까지 적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62:5.11 (709.1) 인류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서 이 젊은 쌍이 동료들을 버리고 난 직후에, 영장목인 그들의 아버지는 슬픔에 잠겼다―비통에 잠겼다. 다른 아이들이 먹을 것을 가져왔을 때도, 그는 먹기를 마다하였다. 눈부신 자손이 사라졌으니, 평범한 친구들 사이에서 삶은 살아볼 가치가 없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숲 속으로 헤매다녔고, 적대하는 긴팔원숭이들의 공격을 받고 맞아 죽었다.
62:6.1 (709.2) 행성의 바다에 우리가 생명의 원형질을 처음 심은 그날부터, 우리 생명 운반자들은 조심스럽게 기다리면서 오래 지키는 기간을 거쳤고, 처음으로 정말로 총명하고 의지를 가진 존재들이 나타난 것은 자연히 우리에게 큰 기쁨과 최고의 만족감을 안겨 주었다.
62:6.2 (709.3) 이 행성에 우리가 도착할 때 유란시아에 배치된 일곱 보조 지성 영의 작용을 지켜봄으로 우리는 그 쌍둥이의 정신적 발달을 구경하고 있었다. 행성 생명의 오랜 진화적 발전을 통해서 내내, 지칠 줄 모르는 이 지성 봉사자들은 그들이 점진적으로 우수한 동물의 연달아 커지는 두뇌력과 접촉하는 능력이 늘어나는 것을 항상 기록하였다.
62:6.3 (709.4) 원초적 동물 생명의 본능적 조건 반사 행위에서, 처음에는 오직 직관의 영이 활동할 수 있었다. 더 높은 종류가 분화함과 아울러, 이해의 영은 그러한 생물에게 여러 개념을 저절로 관련시키는 재주를 부여할 수 있었다. 나중에 우리는 용기의 영이 작용함을 지켜보았다. 진화하는 동물은 서툰 형태의 보호하는 자의식을 정말로 개발하였다. 포유동물 집단이 나타난 뒤에, 우리는 지식의 영이 더욱 큰 정도로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상급 포유동물의 진화는 상담의 영의 활동을 가져왔고, 그에 따라서 떼 짓는 본능이 성장하고 원시적 사회 발전이 시작되었다.
62:6.4 (709.5) 시조 포유동물, 중간 포유동물, 영장목을 통해서 계속, 처음 다섯 보조자의 봉사가 늘어나는 것을 우리는 점점 더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둘, 가장 높은 지성 봉사자들은 결코 유란시아 종류의 진화 지성 안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62:6.5 (709.6) 어느 날―그 쌍둥이가 10살쯤 되었을 때―예배의 영이 쌍둥이 중에서 여자의 지성, 그리고 조금 뒤에 남자의 지성과 처음 접촉했을 때 우리에게 쏟아진 기쁨을 상상해 보아라. 인간의 지성에 아주 가까운 무엇이 절정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그리고 약 1년 뒤에, 깊이 생각하고 고의(故意)로 결정을 내린 결과로, 그들이 집을 떠나서 북쪽으로 길을 가자고 드디어 결심했을 때, 그때 지혜의 영이 유란시아에서, 그리고 이제 인정받은 이 두 인간의 머리 속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62:6.6 (709.7) 일곱 보조 지성 영이 즉시, 새로운 체제로, 동원되었다. 우리는 기대에 부풀어 활기에 넘쳤고, 오랫동안 기다리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유란시아에서 의지(意志)를 가진 인간을 진화시키려고 오랜 세월에 걸쳐 기울인 노력이 열매 맺는 문턱에 우리가 왔음을 알았다.
62:7.1 (709.8) 우리는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 쌍둥이가 도망친 다음 날 한낮에, 유란시아의 행성 수신 초점에서 우주 회로 신호를 처음으로 시험하는 섬광이 번쩍 있었다. 물론 우리는 모두, 큰 사건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고 달아올랐다. 그러나 이 세계가 생명을 실험하는 장소였으니까, 행성에 있는 지적 생명을 인정받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정말로 어떻게 평가받을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애태우지 않았다. 그 쌍둥이가 달아난 뒤 사흘 째, 생명 운반자 집단이 떠나기 전에, 첫 행성 회로의 설립을 맡은 네바돈 천사장이 도착했다.
62:7.2 (710.1) 이날은 유란시아에서 중대한 날이었는데, 그날 우리의 작은 집단이 행성의 우주 통신극 둘레에 모여서, 행성에서 새로 세워진 지성 회로를 타고 구원자별로부터 온 첫 소식을 받았다. 그리고 천사장 군단의 우두머리가 받아쓰게 한 이 첫 소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62:7.3 (710.2) “유란시아에 있는 생명 운반자들에게―안부를 전한다! 유란시아에 의지(意志)의 위엄을 가진 지성이 존재한다는 신호를 네바돈 본부에 등록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우리는 구원자별ㆍ에덴시아ㆍ예루셈에서 크게 기뻐한다는 확신을 보낸다. 쌍둥이가 북쪽으로 달아나고, 자손을 열등한 조상과 떼어놓으려고, 의도하여 내린 결정을 주목하였다. 이것은 유란시아에서 머리―인간 종류의 머리―가 내린 첫 결정이며, 이를 인정하는 이 첫 소식이 전달되는 통신 회로를 자동으로 설립한다.”
62:7.4 (710.3) 이 새 회로를 타고 다음에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의 인사가 들어왔는데, 이것은 우리가 정착시킨 생명 형태에 우리가 간섭하는 것을 금하는 지시, 거주하는 생명 운반자들에게 주는 지시를 포함했다. 우리는 인간이 진보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행성의 진화 계획이 자연스럽게 풀려나가는 데 생명 운반자들이 언제라도 멋대로 기계적으로 간섭한다고 추측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우리는 특별한 방법으로 환경을 조종하고 생명 원형질을 보호하는 것이 허락되었는데, 특별하지만 온통 자연스러운 바로 이 감독이 중단되어야 했다.
62:7.5 (710.4) 최고자들이 말씀을 마치자마자, 당시에 사타니아 체계의 군주였던 루시퍼의 아름다운 말씀이 행성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 생명 운반자들은 그들의 우두머리의 환영하는 말씀을 들었고, 그로부터 예루셈으로 돌아가라는 허락을 받았다. 루시퍼로부터 전해 온 이 말씀은 유란시아에서 생명 운반자들이 한 일의 공식 승인을 포함했고, 사타니아 체계에서 확립된 대로 네바돈의 생명 원본들을 개선하려고 우리가 기울인 어떤 노력에 대해서도, 앞날에 아무런 비판을 받지 않도록 우리를 면제하였다.
62:7.6 (710.5) 구원자별과 에덴시아와 예루셈으로부터 전해 온 이 여러 말씀은 오랜 세월에 걸쳐 생명 운반자들이 행성을 감독하는 일이 끝났음을 정식으로 표시했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근무해 왔고, 오로지 일곱 보조 지성 영과 물리 통제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제, 의지(意志), 곧 예배하고 하늘 가기를 택할 수 있는 힘이 행성의 진화된 인간 속에서 나타났으니까, 우리는 할 일이 끝났음을 깨달았고 우리 집단은 길을 떠나려고 준비했다. 유란시아가 생명을 수정하는 세계이니까, 조수 12명과 함께 선임 생명 운반자 2명을 남겨놓는 것이 허락되었는데, 나는 이 집단의 일원으로 선택되었고, 그 뒤로 늘 유란시아에서 살아왔다.
62:7.7 (710.6) (서기 1934년부터) 꼭 993,408년 전에, 유란시아는 네바돈 우주에서 인간이 사는 행성으로서 공식으로 인정되었다. 생물학상의 진화는 다시 한 번, 의지의 위엄을 가진 인간 수준에 도달했다. 사타니아의 606번 행성에 사람이 도착한 것이다.
63:0.1 (711.1) 처음 두 인간이―쌍둥이가―11 살이었을 때, 실제 인간의 둘째 세대, 곧 처음으로 얻은 자식의 부모가 되기 전에, 유란시아는 사람이 사는 세계로서 등록되었다. 구원자별에서 전해 온 천사장의 말씀은 공식으로 행성을 인정하는 이 기회에, 다음 말씀으로 끝을 맺었다:
63:0.2 (711.2) “사람의 지성이 사타니아 606번에서 나타났는데, 새 민족의 이 부모를 안돈과 폰타라 부르겠다.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 우주의 아버지가 내리는 영 선물이 빨리 몸소 깃들도록 모든 천사장이 기도한다.”
63:0.3 (711.3) 안돈은 네바돈에서 주는 이름이요, “완전해지고 싶은 인간의 갈망을 나타내는, 아버지 같은 첫 사람”을 의미한다. 폰타는 “완전해지고 싶은 인간의 갈망을 나타내는, 아들 같은 첫 사람”을 의미한다. 안돈과 폰타는 자기 생각 조절자와 융합할 때 이름을 받기까지, 결코 이 두 이름을 알지 못했다. 유란시아에서 필사자로서 체류하는 동안 내내, 그들은 서로 손타안과 손타엔으로 불렀고, 손타안은 “어머니에게 사랑받음,” 손타엔은 “아버지에게 사랑받음”을 뜻한다. 자신들에게 이런 이름을 주었고, 그 뜻은 그들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함을 가리켰다.
63:1.1 (711.4) 여러 점에서, 안돈과 폰타는 지구의 표면에서 언젠가 살았던 인간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쌍이었다. 이 놀라운 쌍은 온 인류의 실제 부모였고, 많은 직계 후손보다 모든 면에서 우수했으며, 그들의 모든 조상, 가까운 조상 및 먼 조상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63:1.2 (711.5) 이 첫 인간 쌍의 부모는, 그들 부족의 평균과 거의 다른 듯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총명한 구성원 편에 속했고, 그 집단은 싸울 때 돌을 던지고 곤봉 쓰는 것을 처음으로 배운 집단이었다. 그들은 또한 날카로운 바늘 모양의 돌ㆍ부싯돌ㆍ뼈를 사용했다.
63:1.3 (711.6) 아직도 부모와 함께 사는 동안, 안돈은 곤봉 끝에 날카로운 부싯돌 조각을 묶었고, 이 목적으로 동물의 힘줄을 썼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그와 똑같이 모험을 좋아하고 호기심 많은 누이의 목숨을 구하는 데, 그는 적어도 열두 번이나 그러한 무기를 잘 써먹었으며, 그 누이는 어떤 탐험 여행에도 어김없이 그를 따라다녔다.
63:1.4 (711.7) 허다한 후일의 후손이 부끄럽게도, 뒤떨어진 원숭이족 사촌들과 짝지었다. 안돈과 폰타가 영장목 부족들로부터 달아나려고 한 결정은, 이들의 특징을 나타낸 저질의 지성보다 훨씬 높은 품질의 지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이 단순한 동물보다 더한 무엇이라는 어렴풋한 느낌은 인격을 소유했기 때문이었고, 깃드는 생각 조절자의 계심이 그런 느낌을 키웠다.
63:2.1 (712.1) 북쪽으로 달아나기로 결심한 뒤에, 안돈과 폰타는 한동안 두려움, 특히 아버지와 그 직계 가족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까 하는 두려움에 빠졌다. 그들은 적대하는 친척들의 공격을 받는 것을 상상했고, 그래서 벌써부터 시샘하는 부족원들의 손에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을 깨달았다. 어린이로서, 그 쌍둥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서로 붙어 다니면서 보냈고, 이 때문에 영장목 부족의 동물 사촌들 사이에서 결코 지나치게 평판이 좋은 적이 없었다. 동떨어진 아주 우수한 나무 집을 지은 것도 부족에서 그들의 위치를 개선하지 않았다.
63:2.2 (712.2) 나무 꼭대기 사이에 지은 이 새 집에서, 어느 날 밤, 사나운 폭풍에 잠이 깬 뒤에, 무서워서 다정한 포옹 속에 서로를 부둥켜안으면서, 그들은 부족의 거처와 나무 꼭대기의 집을 떠나려고 마침내, 완전히 마음을 먹었다.
63:2.3 (712.3) 그들은 북쪽으로 반나절 여행하는 거리에 어설픈 나무 꼭대기 은신처를 이미 마련해 놓았다. 이것은 고향 숲을 떠난 첫날에 그들이 지낼 비밀스럽고 안전한 은신처였다. 그 쌍둥이는 밤에 땅에서 있는 것을 죽는 듯이 싫어하는 영장목의 두려움을 가졌는데도, 밤이 오기 조금 전에 북쪽으로 여행 길을 떠나갔다. 이런 밤 여행을 시도하는 것은 보름달이 있더라도 비상한 용기가 필요했지만, 부족원과 친척들이 그들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그들을 추적할 가능성이 덜하다고 똑바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자정이 지난 지 얼마 안 되어, 그들은 앞서 준비해 놓은 회합 장소에 안전히 다다랐다.
63:2.4 (712.4) 북쪽으로 가는 여행 길에 노출된 부싯돌 매장물을 발견했고, 여러 용도에 알맞게 생긴 많은 돌을 발견하고, 앞날을 위하여 물자를 모았다. 이 부싯돌을 어떤 목적에 더 알맞게 쪼개려고 노력하면서, 안돈은 불이 튀는 부싯돌의 성질을 발견했고, 불을 지피려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기후가 아직도 쾌적했고, 불이 거의 필요 없었기 때문에, 그때 이 생각은 머리 속에 깊이 박히지 않았다.
63:2.5 (712.5) 그러나 하늘에서 가을 해는 낮아지고 있었고, 그들이 북쪽으로 여행함에 따라서, 밤은 더욱 서늘해졌다. 이미 그들은 몸을 따듯하게 하려고 동물의 가죽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집을 떠난 지 한 달이 되기 전에, 안돈은 그가 부싯돌로 불을 지필 수 있다 생각한다고 짝에게 뜻을 알렸다. 불을 지피는 데 부싯돌의 불꽃을 쓰려고 두 달 동안 애썼지만, 실패하기만 했다. 날마다 이 쌍은 부싯돌을 쳐서 나무에 불을 붙이려고 애쓰곤 했다. 마침내, 어느 날 저녁, 해가 질 무렵에 그 기술의 신비가 풀렸는데, 그때 폰타에게 근처의 나무에 기어 올라가서 버려진 한 새 둥지를 확보할 생각이 떠올랐다. 그 둥지는 말라서, 상당히 불붙기 쉬웠고, 따라서 불꽃이 떨어지는 순간, 당장 타올라서 큰 불덩이가 되었다. 성공한 데 너무나 놀라고 당황해서, 그들은 불을 거의 잃을 뻔했지만, 적당한 땔감을 더해서 불을 살렸고, 다음에 온 인류의 부모가 땔나무를 얻으려고 처음으로 탐색을 나섰다.
63:2.6 (712.6) 이것은 짧지만 파란 많은 그들의 생애에서 가장 기쁜 순간 중에 하나였다. 밤새 그들은 불이 타는 것을 구경하며 앉아 있었고, 기후에 대항하고, 따라서 그들의 발견이 남쪽 땅에서 사는 동물 친척들로부터 언제까지나 독립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사흘 동안 쉬고 불을 즐기고 난 뒤에, 다시 길을 떠났다.
63:2.7 (712.7) 안돈의 영장목 조상들은 번개로 붙은 불에 가끔 땔감을 더한 적이 있지만, 결코 이전에는 땅의 생물이 뜻대로 불을 지피는 방법을 소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 쌍둥이는 마른 이끼와 기타 물질이 새 둥지만큼 불이 잘 붙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63:3.1 (713.1) 쌍둥이가 집을 떠난 밤부터 첫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거의 2년이 되었다. 그들은 아이를 손탓이라고 불렀고, 손탓은 유란시아에서 출생할 때 보호하는 덮개에 싸인 첫 사람이었다. 인류가 시작되었고, 이 새로운 진화와 함께, 더욱 약해진 아기들을 적절히 돌보는 본능이 나타났으며, 이런 아기들은 순전히 동물인 종류와 대조해서 지적 서열의 지성이 점진적으로 발달하는 특징을 나타낸다.
63:3.2 (713.2) 안돈과 폰타는 아이들을 모두 19명 가졌고, 손자 손녀를 거의 50명, 증손을 6명 볼 때까지 살았다. 그 가족은 인접한 네 개의 바위 피난처, 곧 반 동굴에서 거주했는데, 그 중에 셋은 복도로 서로 연결되었고, 안돈의 아이들이 고안한 부싯돌 연장으로 부드러운 석회석에서 이 복도를 파냈다.
63:3.3 (713.3) 이 초기 안돈 사람들은 대단히 뚜렷한 씨족 정신을 드러냈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사냥했고, 결코 집터로부터 그다지 멀리 떠나지 않았다. 자기들이 고립되고 독특한 집단의 살아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떨어져 있기를 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듯했다. 이렇게 밀접한 인척 관계를 느끼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보조 영들이 지성에게 베푸는 봉사가 향상되었기 때문이었다.
63:3.4 (713.4) 안돈과 폰타는 씨족의 양육과 향상을 위하여 끊임없이 수고했다. 그들은 42살까지 살았고, 그 나이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툭 튀어나온 바위가 떨어져서 죽음을 당했다. 아이들 중에 다섯 명과 손자ㆍ손녀 11명이 함께 죽었고, 거의 스무 명의 후손이 심한 부상을 입었다.
63:3.5 (713.5) 부모가 죽고 나서, 발을 몹시 다쳤는데도, 손탓은 즉시 그 씨족의 지도권을 쥐었고, 그의 아내, 곧 맨 위 누이가 그를 유능하게 보조했다. 그들의 처음 과제는 죽은 부모ㆍ형제ㆍ자매ㆍ아이들을 효과적으로 무덤에 넣도록 돌을 굴려 올리는 것이었다. 이 매장하는 행위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죽은 뒤에 살아남는 것에 대한 그들의 관념은 아주 어렴풋하고 분명치 않았고, 대체로 그들의 환상적이고 다채로운 꿈 속의 생활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63:3.6 (713.6) 이 안돈과 폰타의 가족은 20 세대에 이르기까지 같이 지냈는데, 그때 식량 경쟁과 사회적 마찰이 합쳐서 비로소 가족이 흩어지게 되었다.
63:4.1 (713.7) 원시인―안돈 족속―은 까만 눈과 거무스레한 살갗, 누런 빛과 붉은 빛의 잡종과 같은 것이었다. 멜라닌은 모든 인간의 살갗에서 발견되는, 색을 입히는 물질이다. 그것은 최초의 안돈 살갗에 있는 물감이다. 일반적 겉모습과 피부 색깔로 보면 이 초기의 안돈 족속은 살아 있는 어느 다른 인간 종류보다, 오늘날의 에스키모를 더 비슷하게 닮았다. 그들은 추위를 막으려고 동물의 가죽을 처음으로 쓴 사람이었고, 오늘날의 인간보다 몸에 털이 거의 더 많지 않았다.
63:4.2 (713.8) 이 초기 인간의 동물 조상이 누렸던 부족 생활은 수많은 시초의 사회 모임에 전조(前兆)가 되었고, 이 존재들의 발달하는 감정과 늘어난 두뇌력과 함께, 즉시 사회 조직이 발달하고 씨족 노동의 새로운 분업이 생겼다. 그들은 몹시 흉내를 잘 냈지만, 놀이 본능은 조금만 발달되었고, 유머 감각이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원시인은 때때로 빙그레 웃었지만, 결코 마음껏 너털 웃음을 웃지는 않았다. 유머는 후일에 아담 종족이 물려준 유산(遺産)이었다. 이 초기 인간은 나중에 진화하는 많은 필사자처럼, 그렇게 아픔을 예민하게 느끼지 않았고 불쾌한 상황에 그다지 민감하지도 않았다. 출산은 폰타와 그 직계 후손에게 아프거나 괴로운 시련이 아니었다.
63:4.3 (714.1) 그들은 놀라운 부족이었다. 남자들은 제 짝과 자식들의 안전을 위하여 영웅처럼 싸우곤 했고, 여자들은 아이들에게 사랑으로 헌신했다. 그러나 그들의 애족심은 온전히 직계 씨족에게만 국한되었다. 그들은 가족에게 대단히 충성했고, 제 아이들을 방어하는 데 죽음도 서슴지 않았지만, 손자ㆍ손녀를 위하여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려 애쓰는 개념을 깨우칠 수 없었다. 종교의 탄생에 필수인 모든 감정이 이미 이 유란시아 원주민에게 있었는데도, 이타주의는 인간의 가슴 속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63:4.4 (714.2) 이 초기의 인간은 동무들에 대하여 감동적 애정, 그리고 서툴기는 하지만 진짜 우정 관념을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 열등한 부족들과 항상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전투 중에서, 이 원시인들 중에 하나가 부상한 동료 투사를 보호하고 구하려 애쓰면서 한 손으로 용감히 싸우는 것은 후일에 흔히 보는 광경이었다. 후일에 진화가 발전되면서 대단히 고귀하고 상당히 인간다운 많은 특성이 이 원시 민족들에게 전조(前兆)로 나타난 것은 감동이 된다.
63:4.5 (714.3) 최초의 안돈 씨족은 27대까지 끊어지지 않고 지도자의 핏줄을 유지했고, 그때 손탓의 직계 후손 가운데서 아무런 남자 자손이 나타나지 않자, 그 씨족에서 통치권을 지망하는 두 경쟁자가 주도권을 쥐려고 싸움에 들어갔다.
63:4.6 (714.4) 안돈 씨족들이 널리 퍼지기 전에, 일찍부터 서로 뜻을 교통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잘 발달된 언어가 진화했다. 이 언어는 줄곧 성장했으며, 활발하고 가만히 있지 못하고 호기심 많은 이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발명하고 환경에 적응했기 때문에, 거의 날마다 낱말이 더해졌다. 이 언어는 나중에 유색 인종들이 나타나기까지, 유란시아의 말, 초기 인간 가족의 언어가 되었다.
63:4.7 (714.5) 시간이 흐르자, 안돈 씨족들의 수가 늘어났고, 가족들의 접촉이 많아지면서 마찰과 오해를 낳았다. 이 민족들은 오로지 두 가지만 머리 속에 생각하고 있었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하여 사냥하는 것, 그리고 이웃 부족들의 손에서 실제로 어떤 불공평한 대우나 모욕을 받든지, 또는 받았다고 생각하여 복수하려고 싸우는 것이었다.
63:4.8 (714.6) 가족 싸움이 늘어났고, 부족 전쟁이 터졌으며, 유능하고 진보된 집단의 가장 좋은 성분 중에서 심각한 손실이 있었다. 이 손실 가운데 더러는 돌이킬 수 없었고, 능력과 지능을 가진 가장 귀중한 핏줄이 더러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이 초기 민족과 그 원시 문명은 씨족들이 벌인 이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하여 멸종의 위협을 받았다.
63:4.9 (714.7) 그러한 원시인을 오랫동안 평화롭게 살도록 유도하기는 불가능하다. 사람은 싸우는 동물의 자손이며, 가까이 붙어 있을 때 교양 없는 사람들은 서로를 짜증나게 하고 성나게 한다. 생명 운반자들은 진화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이 성향을 알며, 따라서 발전하는 인간들을 궁극에 적어도 뚜렷이 다르고 따로 된 세 민족, 그리고 더 흔하게 여섯 민족으로 분리하도록 주선한다.
63:5.1 (715.1) 초기의 안돈 종족들은 아시아로 아주 깊숙이 파고들지 않았고, 처음에는 아프리카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 시절에 지리(地理)는 그들에게 북쪽으로 가라고 가리켰고, 느리게 진행하는 셋째 빙하의 얼음에 방해를 받을 때까지, 이 사람들은 북쪽으로 멀리 멀리 떠나갔다.
63:5.2 (715.2) 이 광범위한 빙상이 프랑스와 영국 제도에 이르기 전에, 안돈과 폰타의 후손은 유럽으로 서쪽으로 밀고 나갔고, 그때 따듯했던 북해의 바다까지 이르는 큰 강들을 따라서, 따로 떨어진 촌락을 세운 것이 1천 개가 넘는다.
63:5.3 (715.3) 이 안돈 부족들은 프랑스에서 일찍부터 강가에서 정착한 사람들이었고, 솜 강을 따라서 수만 년 동안 살았다. 솜 강은 빙하에 영향을 받지 않은 강이었고, 그 시절에 오늘날과 비슷하게 바다로 흘러 들어갔다. 이것이 어째서 안돈 후손의 자취가 그렇게 많이 이 강 유역의 진로를 따라서 발견되는가 설명한다.
63:5.4 (715.4) 이 유란시아 토착민은 나무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비상시에 아직도 나무 꼭대기로 올라갔다. 강가를 따라서, 위에서 튀어나온 절벽의 보호 밑에, 그리고 접근하는 길이 잘 내려다보이고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는 산허리의 석굴 속에서 정규적으로 살았다. 그들은 이렇게 연기로 지나치게 불편을 겪지 않고서, 지핀 불로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정말로 동굴에서 사는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후일에 빙상이 나중에 남쪽으로 더 내려와서 그들의 후손을 동굴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숲 가장자리 가까이서, 그리고 냇물 가에서 야영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63:5.5 (715.5) 일부 보호된 거처를 감추는 데 그들은 아주 일찍부터 놀랍게 영리해졌고, 돌로 된 침실, 지붕이 둥근 돌 오두막을 만드는 데 큰 솜씨를 보였으며, 밤에는 그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러한 오두막의 입구는 앞에 돌을 굴려서 막았고, 이것은 이 목적을 위해서 지붕의 돌들이 마지막에 제자리에 놓여지기 전에 안에 들여 놓은 큰 돌이었다.
63:5.6 (715.6) 안돈 족속은 두려움이 없고 솜씨 있는 사냥꾼이었으며, 야생의 딸기와 어떤 나무 열매들을 제외하면 순전히 고기를 먹고 살았다. 안돈이 돌도끼를 발명한 것처럼, 그의 후손도 던지는 막대기와 작살을 일찍 발견하고 효과 있게 사용했다. 마침내 연장을 만드는 머리가 도구를 쓰는 손과 함께 활동하고 있었고, 이 시초 인간들은 부싯돌 연장을 다듬는 데 상당히 솜씨가 있게 되었다. 오늘날의 인간이 금ㆍ백금ㆍ다이아몬드를 찾아서 땅 끝까지 여행하는 것과 비슷하게, 그들은 부싯돌을 찾아서 멀리, 또 널리 여행했다.
63:5.7 (715.7) 여러 가지 다른 면에서 이 안돈 부족은 퇴보하는 후손들이 50만 년 동안 도달하지 못한 정도의 지능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 후손들은 여러 번, 불을 피우는 여러 가지 방법을 되풀이해서 다시 발견했다.
63:6.1 (715.8) 안돈 족속이 더욱 흩어짐에 따라서, 그 씨족들의 문화적ㆍ영적 상태는 오나가의 시절까지 거의 1만 년 동안 퇴보했다. 오나가는 이 부족들의 지도권을 쥐고 그들 사이에 평화를 가져왔고, 처음으로 모두가 “사람과 동물에게 숨을 주시는 분”을 예배하도록 이끌었다.
63:6.2 (716.1) 안돈의 철학은 매우 뒤범벅이 되어 있었고, 어쩌다가 불을 발견하여 크게 편안해졌기 때문에 불 숭배자가 될 뻔한 것을 겨우 모면했다. 그러나 논리는 자신이 발견한 불로부터 더 우수하고 더 경외감을 자아내는, 열과 빛의 근원인 태양으로 그를 인도하였다. 하지만 태양이 너무 멀리 있어서 그는 태양 숭배자가 되지는 않았다.
63:6.3 (716.2) 안돈 족속은 자연―천둥ㆍ번개ㆍ비ㆍ눈ㆍ우박ㆍ얼음―을 두려워하기를 일찍 배웠다. 그러나 이 초기 시절에 배고픔은 늘 되풀이되는 욕구였고, 그들이 대체로 동물을 먹고 살았으니까, 궁극에 일종의 동물 숭배를 발전시켰다. 안돈에게, 먹이가 되는 큰 동물은 창조의 힘과 오래 가는 권력의 상징이었다. 때때로 이 큰 여러 동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지정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특이한 동물이 한창 있을 때, 동굴 벽에 그 동물의 서투른 윤곽이 그려지곤 했고, 나중에는 예술이 계속 진보함에 따라서, 그러한 동물 신(神)이 여러 가지 장신구에 새겨졌다.
63:6.4 (716.3) 아주 일찍부터 안돈 종족은 부족이 숭배하는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을 삼가는 버릇을 길렀다. 젊은이들의 머리에 인상을 주기에 더 알맞게, 당장 그들은 경외하는 예식을 진화시켰는데, 이것은 이 존경받는 한 동물의 몸 근처에서 진행되었다. 더 나중에 그 후손이 이 원시적 연출을 더 공들인 희생 예식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것이 예배의 일부로서 희생물 바치기의 기원이다. 모세가 이 관념을 히브리인의 의식(儀式)에서 더 다듬었고, 이론으로는 이를 사도 바울이 “피를 흘림”으로 죄를 대속하는 교리로서 보존했다.
63:6.5 (716.4) 이 원시 인간의 생활에서 먹을 것이 온통 중요한 일이었다는 것은, 그들의 큰 선생 오나가가 이 단순한 사람들에게 가르친 기도에서 나타난다. 이 기도는 다음과 같다:
63:6.6 (716.5) “아, 생명의 숨이여, 오늘날 우리에게 나날의 양식을 주시고, 얼음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며, 숲에 있는 우리의 적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시고, 자비롭게 큰 저승으로 우리를 받으소서.”
63:6.7 (716.6) 오나가는 현재 카스피 바다 지역, 고대 지중해의 북쪽 바닷가에, 오반이라 부르는 촌락에서 본부를 유지했는데, 이곳은 메소포타미아 남쪽 땅으로부터 북쪽으로 이끄는 여행 길이 서쪽으로 도는 곳에, 머무르는 장소였다. 오반으로부터 그는 하나의 신의 교리와 그가 큰 저승이라 부른, 다음 세상의 개념을 전파하려고 먼 촌락들까지 선생들을 보냈다. 이 오나가의 밀사(密使)들은 세상에서 첫 선교사였다. 그들은 또한 처음으로 고기를 익히고, 먹을 것을 요리하는 데 불을 처음으로 정규적으로 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작대기 끝에, 또한 뜨거운 돌 위에 고기를 익혔고, 나중에는 큰 덩어리를 불 속에서 구웠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은 거의 전적으로 날 고기 먹는 버릇으로 돌아갔다.
63:6.8 (716.7) 오나가는 (서기 1934년부터) 983,323년 전에 태어났으며, 그는 69살이 되기까지 살았다. 행성 영주 이전 시절에 살던 이 큰 지성인이자 영적 지도자가 이룩한 업적의 기록은 이 원시 민족들을 참된 사회로 조직한, 가슴 떨리는 이야기이다. 그는 효율적 부족 정부를 세웠고, 그와 같은 것은 수천 년 동안 뒤잇는 세대들이 이룩하지 못했다. 두 번 다시, 행성 영주가 도착할 때까지, 그토록 높은 영적 문명은 땅에 없었다. 이 소박한 사람들은 원시적이기는 해도 진정한 종교를 가졌다. 그러나 질이 나빠지는 그들의 후손이 나중에 그 종교를 잃어버렸다.
63:6.9 (717.1) 안돈과 폰타는 여러 후손처럼 생각 조절자를 받았지만, 오나가의 시절이 되어서야 조절자와 수호 세라핌이 큰 떼를 지어 유란시아로 왔다. 이때는 정말로, 원시인의 황금기였다.
63:7.1 (717.2) 인류의 빛나는 창시자 안돈과 폰타는 행성 영주가 도착하고 나서 유란시아의 판결이 있을 때 인정을 받았으며, 시간이 되자 예루셈에서 시민 자격을 가지고, 저택 세계의 체제에서 솟아났다. 그들은 결코 유란시아로 돌아가도록 허락받은 적이 없어도, 그들이 세운 민족의 역사를 알고 있다. 그들은 칼리가스티아의 배반을 슬퍼했고, 아담의 실패 때문에 슬퍼했지만, 미가엘이 마지막으로 자신을 수여할 무대로 그들의 세계를 선택하였다는 발표를 듣고서 넘치게 기뻐했다.
63:7.2 (717.3) 예루셈에서 안돈과 폰타는 자신의 생각 조절자와 융합했고, 또한 손탓도 포함하여, 아이들 몇 명도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직계 후손에서도 대다수가 겨우 영 융합을 이룩하였다.
63:7.3 (717.4) 안돈과 폰타가 예루셈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 뒤에, 그들은 첫째 저택 세계로 돌아가서, 유란시아로부터 하늘의 구체들까지 가는 시간 순례자들을 환영하는 상물질계 성격자들과 함께 수고하도록 체계 군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이 근무에 무기한으로 배치되었다. 그들은 이 계시와 관련하여, 유란시아에 인사말을 보내려고 애썼지만, 현명하게도 이 요청은 거절되었다.
63:7.4 (717.5) 그리고 이것이 유란시아의 역사 전체에서 가장 영웅답고 황홀한 장(章), 온 인류의 독특한 부모가 진화하고, 사는 투쟁을 겪고, 죽고, 영원히 살아남은 것에 관한 이야기를 엮은 것이다.
64:0.1 (718.1) 이 글은 거의 1백만 년 전에 안돈과 폰타의 시절부터, 행성 영주의 시절을 거쳐 빙하 시대의 끝까지 살았던, 유란시아의 진화 종족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64:0.2 (718.2) 인류는 생긴 지 거의 1백만 년이 되었고, 그 이야기의 처음 절반은 대체로 유란시아에서 행성 영주 이전 시절에 해당한다. 인류 역사의 후반은 행성 영주가 도착하고 여섯 유색 인종이 나타날 때에 시작되며, 대체로 보통 구석기 시대로 여기는 기간에 해당한다.
64:1.1 (718.3) 원시인이 땅에서 진화하여 나타난 것은 1백만 년이 조금 못 되었고, 원시인은 활발한 체험을 겪었다. 원시인은 본능적으로 열등한 원숭이족과 섞이는 위험을 피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해수면에서 9,000미터 높이에 있는 건조한 티벳의 고지 때문에 원시인은 동쪽으로 이주할 수 없었다. 커진 지중해 때문에 남쪽이나 서쪽으로도 갈 수 없었는데, 지중해는 그때 동쪽으로 인도양까지 뻗었다. 그리고 북쪽으로 가면서 그는 전진하는 얼음에 부딪쳤다. 그러나 계속 이주하는 길이 얼음에 막혀 있을 때에도, 비록 흩어지는 부족들이 갈수록 적대하게 되었어도, 좀더 영리한 집단들은, 지능이 열등하고 나무에서 사는, 털 많은 사촌들 사이에서 살려고 남쪽으로 갈 생각을 결코 품지 않았다.
64:1.2 (718.4) 사람이 가장 일찍 품는 종교적 감정 가운데 많은 것이 이 지리적 상황에―오른쪽에 산, 왼쪽에는 바다, 앞에는 얼음에―갇힌 환경에서 그가 무력하다는 느낌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진취적인 이 안돈 족속은 남쪽에 나무에서 사는 열등한 친척들에게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64:1.3 (718.5) 이 안돈 족속은 인간이 아닌 친척들의 버릇과 달리, 숲을 피했다. 숲에서 사람은 언제나 저하되었고, 인간의 진화는 반드시 오직 탁 트인 높은 위도 지방에서 앞으로 나아갔다. 훤히 트인 땅에서 부딪치는 추위와 배고픔은 행동과 발명과 주변머리를 자극한다. 이 안돈 부족이 이 혹독한 북쪽 기후에서 어려움과 결핍을 견디면서 현재 인류의 개척자를 기르고 있는 동안, 뒤떨어진 사촌들은 그들이 일찍이 공통으로 기원을 가졌던 땅, 남쪽 열대의 숲에서 사치스럽게 살고 있었다.
64:1.4 (718.6) 이 사건들은 제3 빙하 시대에, 지리학자의 계산에 따르면, 첫째 빙하기에 일어났다. 처음 두 빙하는 북 유럽에서 널리 퍼지지 않았다.
64:1.5 (718.7) 빙하 시대의 대부분에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육지로 연결되었고, 한편 나중에 아프리카는 시실리 육지 다리로 유럽과 붙었다. 안돈 족속이 이주하던 때에, 서쪽에 잉글랜드로부터 유럽과 아시아를 거쳐, 동쪽에 자바까지 이어진 육로가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랄리아는 다시 고립되었고, 이것은 그 자체의 특이한 동물상의 발전을 더 강화했다.
64:1.6 (719.1) 950,000년 전에, 안돈과 폰타의 후손은 동쪽으로, 그리고 서쪽으로 멀리 옮겨 갔다. 서쪽으로, 그들은 유럽을 지나서 프랑스와 잉글랜드까지 갔다. 후일에 동쪽으로 자바까지 멀리 파고들었고, 거기서 그들의 뼈가―소위 자바인이―아주 최근에 발견되었으며, 그리고 나서 타스마니아까지 줄곧 여행했다.
64:1.7 (719.2) 서쪽으로 가는 집단은 동쪽으로 가는 집단보다, 같은 조상에서 비롯한 뒤떨어진 혈통에 적게 오염되었다. 동쪽 집단은 더딘 동물 사촌들과 아주 자유롭게 섞였다. 진취성이 없는 이 사람들은 남쪽으로 흘러갔고, 당장에 열등한 부족들과 짝지었다. 나중에, 그들의 잡종 후손의 커지는 무리가 북쪽으로 돌아와서, 급히 확장하는 안돈 종족과 짝지었고, 그러한 유감스러운 연합은 우수한 핏줄을 어김없이 저하시켰다. 숨을 주시는 이의 숭배를 유지하는 원시 촌락들이 자꾸 줄어들었다. 일찍 있었던 이 초기 문명은 절멸의 위협을 받았다.
64:1.8 (719.3) 유란시아에서는 늘 이와 같았다. 우수한 자가 열등한 자와 자유롭게 번식하도록 버려두는 어리석음 때문에, 큰 장래를 가진 문명이 잇달아 퇴화했고 마침내 소멸되었다.
64:2.1 (719.4) 900,000년 전에 안돈과 폰타의 예술과 오나가의 문화는 지구의 표면에서 사라지고 있었고, 문화ㆍ종교, 그리고 부싯돌 이용조차도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갔다.
64:2.2 (719.5) 이때는 큰 무리의 열등한 잡종 집단이 프랑스 남부로부터 잉글랜드로 도착하던 시절이었다. 이 부족들은 원숭이 같은 숲의 생물과 아주 널리 섞여서, 거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무 종교도 없었지만, 서툴게나마 부싯돌을 쓸 줄 알았고, 불을 지피기에 충분한 지능을 소유했다.
64:2.3 (719.6) 유럽에서 그들 뒤에 얼마큼 우수하고 자식을 많이 낳는 민족이 따라왔는데, 이들의 후손은 북쪽에 얼음으로부터 남쪽에서 알프스와 지중해까지 대륙 전체에 곧 퍼졌다. 이 부족들이 이른바 하이델버그 인종이다.
64:2.4 (719.7) 문화가 퇴폐하던 이 오랜 기간에, 잉글랜드의 폭스홀 종족, 그리고 인도의 북서쪽에 있던 바도난 부족들은, 안돈의 전통을 더러, 그리고 오나가 문화의 어떤 잔재를 계속해서 간직했다.
64:2.5 (719.8) 폭스홀 종족은 가장 서쪽에 있었고, 안돈 문화의 많은 것을 간직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또한 부싯돌 이용하는 지식을 보존했고, 이것을 후손, 곧 에스키모의 옛 조상에게 전해 주었다.
64:2.6 (719.9) 폭스홀 종족의 유물이 잉글랜드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았어도, 이 안돈 족속은 정말로 그 지역에서 처음으로 산 사람들이었다. 당시에 육지 다리는 아직도 프랑스를 잉글랜드와 연결했고, 안돈 후손이 살던 초기 촌락의 대부분이 그 옛날의 강과 바닷가를 따라서 자리잡았기 때문에, 이 촌락들은 이제 영국 해협과 북해의 바다 밑에 있다. 그러나 서넛은 아직도 잉글랜드 해안에 물 위에 나와 있다.
64:2.7 (720.1) 폭스홀 종족 가운데 좀더 머리가 있고 영적인 자들의 다수는 그들의 종족 우수성을 유지하고 원시 종교 관습을 지속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후일의 혈통과 나중에 섞임에 따라서, 후일에 얼음이 찾아온 뒤에 잉글랜드로부터 서쪽으로 계속 여행했고, 오늘날의 에스키모로서 살아남았다.
64:3.1 (720.2) 서쪽에 있는 폭스홀 종족 외에도, 분투하는 또 다른 문화 중심이 동쪽에 버티고 있었다. 이 집단은 안돈의 고손(高孫), 바도난의 부족 사이에, 인도의 북서 고지의 언덕 지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인간을 희생물로 한 번도 바치지 않은, 안돈의 유일한 후손이었다.
64:3.2 (720.3) 이 고지의 바도난 사람들은 널리 펼쳐진 고원을 차지했는데, 이 고원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시내들이 가로지르고 사냥감이 풍부했다. 티벳에 있는 그들의 어떤 사촌들처럼, 그들은 투박한 돌 오두막, 언덕가의 석굴, 그리고 반(半) 지하 통로에서 살았다.
64:3.3 (720.4) 북쪽의 부족들은 갈수록 더 얼음을 무서워하게 되었고, 그들이 기원이 있던 고향 가까이 살던 사람들은 물을 지나치게 무서워하게 되었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 반도가 차츰차츰 대양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았고, 그 반도가 몇 번이나 솟아났는데도, 바다의 위험과 이따금 바다에 잠기는 두려움에 관하여 이 원시 종족의 전통이 생겨났다. 이 두려움은, 강물이 넘치는 체험을 겪은 것과 함께, 어째서 그들이 살기에 안전한 장소인 고지(高地)를 찾았는가 설명한다.
64:3.4 (720.5) 바도난 종족의 동쪽에, 인도 북부의 시왈릭 산에서, 땅에서 어느 다른 부류보다, 사람과 여러 가지 인간 이전 집단 사이의 과도기 종류에 더 가까운 화석(化石)을 발견할 수 있다.
64:3.5 (720.6) 850,000년 전에 우수한 바도난 부족들은 열등하고 짐승 같은 이웃들을 몰살하는 전쟁을 시작했다. 1천 년 안에, 이 지역에 있던 어중간한 짐승 집단의 대부분이 죽음을 당하거나 남쪽 숲으로 밀려갔다. 열등한 자를 근절시키는 이 투쟁은 그 시대에 산에서 살던 부족들 가운데서 조금 개선을 가져왔다. 이 개량된 바도난 혈통의 혼합 후손들이, 겉보기에는 새로운 민족―네안데르탈 종족―으로서 활동 무대에 등장했다.
64:4.1 (720.7) 네안데르탈인은 뛰어난 용사였고, 널리 여행했다. 그들은 인도 북서쪽에 있는 고지의 중심들로부터 차츰차츰 서쪽으로 프랑스까지, 동쪽으로 중국까지, 또 밑으로 북 아프리카까지도 퍼졌다. 그들은 진화하는 유색 인종들이 이주할 때까지, 거의 50만 년 동안 세계를 지배했다.
64:4.2 (720.8) 800,000년 전에는 사냥감이 풍부했다. 코끼리와 하마 뿐 아니라, 여러 종의 사슴이 유럽을 돌아다녔다. 가축은 풍부했고, 말과 이리가 어디에나 있었다. 네안데르탈인은 뛰어난 사냥꾼이었고, 프랑스에 있는 부족들은 가장 성공한 사냥꾼에게 제일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주는 풍습을 처음으로 채택했다.
64:4.3 (721.1) 사슴은 이 네안데르탈 종족에게 상당히 쓸모가 있었고, 먹을거리와 옷으로서, 또 연장을 만드는 데 쓰였는데, 그들이 뿔과 뼈를 여러 용도에 썼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의 문화가 없었지만, 거의 안돈 시절의 수준에 이를 때까지 부싯돌 작업을 크게 개량했다. 나무 손잡이에 붙인 큰 부싯돌이 다시 쓰이게 되었고, 도끼와 곡괭이로 사용되었다.
64:4.4 (721.2) 750,000년 전에 넷째 빙상이 남쪽으로 한참 진행하였다. 개량된 도구로 네안데르탈인은 북쪽의 강을 덮는 얼음에 구멍을 뚫고, 이 공기 구멍으로 올라온 물고기를 창으로 찌를 수 있었다. 언제나 이 부족들은 다가오는 얼음 앞에서 물러났는데, 이때 얼음은 가장 널리 유럽을 침공했다.
64:4.5 (721.3) 이 시절에 시베리아 빙하는 가장 남쪽으로 행진하고 있었고, 원시 인간으로 하여금, 기원이 있던 땅을 향하여 도로, 남쪽으로 움직이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인간종은 아주 분화되어서, 진보하지 않는 원숭이 친척들과 더 섞일 위험이 크게 줄어들었다.
64:4.6 (721.4) 700,000년 전에 넷째 빙하, 유럽에서 가장 큰 빙하가 물러가고 있었다. 사람과 동물은 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기후는 서늘하고 축축했고, 원시인은 다시 유럽과 서 아시아에서 번성했다. 차츰차츰 숲은 아주 최근에 빙하에 덮였던 땅 위로 북쪽으로 퍼졌다.
64:4.7 (721.5) 포유동물 생명은 큰 빙하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 포유동물은 얼음과 알프스 사이에 놓인 좁은 지대에서 버티었고, 빙하가 물러나자, 다시 온 유럽에 재빨리 퍼졌다. 아프리카로부터, 시실리 육지 다리 위로, 곧은 엄니를 가진 코끼리, 코가 넓은 코뿔소, 하이에나, 아프리카 사자가 도착했고, 이 새로운 여러 동물은 칼이를 가진 호랑이와 하마를 거의 멸종시켰다.
64:4.8 (721.6) 650,000년 전에는 따듯한 기후가 계속되는 것이 보였다. 간빙기(間氷期)의 중간이 되자, 날씨가 무척 따듯해져서 알프스는 얼음과 눈을 거의 벗어 버렸다.
64:4.9 (721.7) 600,000년 전에 얼음은 그때 가장 북쪽의 후퇴점에 이르렀고, 몇천 년 동안 쉬고 난 뒤에, 다시 남쪽으로 다섯 번째 나들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5만 년 동안 기후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유럽의 사람과 동물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전기에 있던 약한 건조성이 줄어들었고, 알프스의 빙하는 강 유역까지 멀리 내려왔다.
64:4.10 (721.8) 550,000년 전에 진행하던 빙하는 다시 사람과 동물을 남쪽으로 밀었다. 그러나 이때 사람은 넓은 지대에서 넉넉히 여지가 있었는데, 이 지대는 북동쪽으로 아시아로 뻗고, 빙상과 당시에 지중해의 크게 확대된 흑해(黑海) 연장 부분 사이에 놓여 있었다.
64:4.11 (721.9) 넷째와 다섯째 빙하가 있던 시절에 네안데르탈 종족의 투박한 문화가 더욱 퍼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진보가 거의 없어서, 참으로 유란시아에서 새롭고 수정된 종류의 지적 생명을 만들려는 시도가 마치 실패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거의 25만 년 동안 이 원시 민족들은 떠돌아다니고, 사냥하고, 싸우며, 잠시 동안 어떤 방향으로 나아졌지만, 대체로, 그들의 우수한 안돈 조상과 비교해서 꾸준히 퇴보하고 있었다.
64:4.12 (721.10) 영적으로 어두웠던 이 시대에, 미신을 믿는 인류의 문화는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갔다. 네안데르탈인은 부끄러운 미신을 넘어서, 정말로 아무 종교가 없었다. 그들은 구름, 특히 엷거나 짙은 안개를 죽는 듯이 무서워했다. 자연력을 두려워하는 원시 종교가 차츰 개발되었고, 한편 풍부한 사냥감과 아울러, 연장의 발전이 이 사람들로 하여금 먹을거리에 대해 걱정을 덜하고 살 수 있게 만들자, 동물 숭배는 줄어들었다. 사냥감 쫓기를 여자로 보상하는 것은 사냥 솜씨를 크게 개선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새로운, 두려움의 종교는 자연력 뒤에 보이지 않는 세력을 달래려는 노력으로 이끌었고, 나중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자연력을 달래려고 인간을 바치기에 이르렀다. 유란시아에서 뒤처진 인종들은 사람을 잡아 바치는 이 끔찍한 풍습을 바로 20세기까지 지속시켰다.
64:4.13 (722.1) 이 초기 네안데르탈인은 도저히 태양 숭배자라고 부를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어둠을 무서워하며 살았고, 밤이 오는 것을 죽는 듯 두려워했다. 달이 조금 비치기만 하면, 그럭저럭 지냈다. 그러나 달이 어두울 때 그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달이 다시 비치도록 유인(誘引)하려는 노력으로 그들 가운데 표본이 되는 가장 나은 남자와 여자를 잡아 바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태양이 정기적으로 돌아올 것을 일찍이 배웠지만, 달은 오로지 그들이 동료인 부족 사람을 잡아 바쳤기 때문에 돌아오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 종족이 진보함에 따라서, 희생의 대상과 목적이 점진적으로 바뀌었지만, 종교 예식의 일부로서, 인간을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64:5.1 (722.2) 500,000년 전에, 인도의 북서 고지에서 살던 바도난 부족들은 또 다른 큰 종족 싸움에 말려들었다. 1백년이 넘도록 이 무자비한 전쟁이 격렬하게 계속되었고, 그 오랜 싸움이 끝났을 때, 겨우 약 1백 가구가 남았다. 그러나 이 생존자들은 당시에 살아 있던, 안돈과 폰타의 모든 후손 가운데 가장 영리하고 바람직한 자들이었다.
64:5.2 (722.3) 이제, 이 고지의 바도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롭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에 사람이 거하는 고지 지역의 동북부에서 살고 있던 한 남자와 여자가 갑자기 특별히 영리한 집단의 아이들을 낳기 시작했다. 이것이 산긱 가족이었고, 유란시아의 여섯 유색 인종 모두를 낳은 조상이었다.
64:5.3 (722.4) 이 산긱 아이들은 19명이었는데, 동료들보다 머리가 더 좋았을 뿐 아니라, 살갗이 태양 빛에 노출되고 나서 여러 색깔로 바뀌는 독특한 성향을 나타냈다. 이 아이들 19명 가운데, 다섯은 붉고, 둘은 오렌지 색이고, 넷은 누렇고, 둘은 풀빛이고, 넷은 푸르고, 둘은 남빛이었다. 이러한 색은 아이들이 나이가 들자 더욱 뚜렷해졌고, 이 젊은이들이 나중에 동료 부족 사람들과 짝지었을 때, 그 자손은 모두 산긱 부모의 피부색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64:5.4 (722.5) 이 무렵에 행성 영주가 도착한 것을 지적한 뒤에, 나는 이제 연대순의 이야기를 중지하고, 그동안에 우리는 유란시아의 여섯 산긱 인종을 따로 고려한다.
64:6.1 (722.6) 보통의 진화하는 행성에서는, 진화하는 여섯 유색 인종이 하나씩 나타난다. 홍인(紅人)이 먼저 진화하고, 뒤잇는 유색 인종들이 나타나기 전에,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을 돌아다닌다. 유란시아에서 모두 여섯 인종이 동시대에, 그것도 한 가족 안에서 태어난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64:6.2 (723.1) 유란시아에서 이전에 안돈 사람들이 나타난 것도 사타니아에서 새로운 일이었다. 지역 체계의 어느 다른 세계에서도, 의지를 가진 그런 사람 종족이 진화하는 유색 인종보다 먼저 진화하지 않았다.
64:6.3 (723.2) 1. 홍인. 이 민족은 인류에서 놀라운 종이요, 여러 면에서 안돈과 폰타보다 우수했다. 그들은 가장 총명한 집단이었고, 산긱 아이들 중에서 처음으로 부족의 문명과 정부를 개발하였다. 그들은 언제나 일부 일처(一夫一妻) 주의를 지켰다. 그들의 혼합된 후손들도 한 사람을 여럿과 짝짓는 일이 드물었다.
64:6.4 (723.3) 후일에 그들은 아시아에서 황인 형제들과 심각하고도 오래 끈 분쟁이 있었다. 그들은 일찍부터 활과 화살의 발명으로 도움을 받았지만, 불행하게도 자기들끼리 싸우는 조상의 성향을 많이 물려받았고, 이것이 그들을 너무 약화시켜서 황인 부족들은 아시아 대륙에서 그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64:6.5 (723.4) 약 8만 5천 년 전에, 홍인종의 비교적 순수한 나머지가 떼를 지어 북 아메리카로 건너갔는데, 그 뒤에 얼마 안 되어 베링 지협이 가라앉았고, 이렇게 그들을 고립시켰다. 아무 홍인도 아시아로 돌아온 적이 없다. 그러나 시베리아, 중국, 중앙 아시아, 인도, 유럽의 전역에 걸쳐서 그들은 다른 유색 인종들과 섞인 혈통을 많이 뒤에 남겼다.
64:6.6 (723.5) 아메리카로 건너갔을 때, 홍인은 초기에 기원을 가진 많은 가르침과 전통을 가지고 갔다. 홍인의 직계 조상은 행성 영주의 세계 본부가 후일에 벌인 활동과 전에 접촉이 있었다. 그러나 두 아메리카에 이르고 난 뒤 짧은 시일 안에, 홍인들은 이 가르침을 잃어버리기 시작했고, 지적ㆍ영적 문화가 크게 쇠퇴하였다. 오래지 않아, 이 사람들이 다시 자기들끼리 아주 맹렬히 싸움에 빠져서, 이 부족 전쟁은 비교적 순수한 홍인의 이 잔재가 급속히 멸망하게 만들 것처럼 보였다.
64:6.7 (723.6) 이렇게 크게 퇴보했기 때문에 홍인은 망한 듯했는데, 약 6만 5천 년 전에, 오나모나론톤이 지도자요 영적 구원자로서 나타났다. 그는 아메리카 홍인들 사이에서 일시적 평화를 가져왔고, “큰 영”의 숭배를 부활시켰다. 오나모나론톤은 96살까지 살았고, 칼리포니아의 큰 세쿼이아 나무들 사이에서 본부를 유지했다. 후일에 그의 자손의 다수가 블랙 푸트 인디안 사이에서 현대까지 내려왔다.
64:6.8 (723.7) 시간이 지나자, 오나모나론톤의 가르침은 어렴풋한 전통이 되어 버렸다. 서로 죽이는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고, 이 위대한 선생이 있던 시절 이후로, 결코 또 다른 지도자가 그들 사이에 보편적 평화를 가져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총명한 축에 속하는 혈통이 이 부족 싸움에서 자꾸 이슬처럼 사라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능하고 총명한 이 홍인들이 북 아메리카 대륙에서 위대한 문명을 세웠을 것이다.
64:6.9 (723.8) 중국에서 아메리카로 건너간 뒤에, 북부의 홍인은 백인에게 나중에 발견될 때까지, 다시는 결코 다른 세계 영향과 (에스키모를 빼고) 접촉을 가지지 않았다. 홍인이 후일에 아담 혈통과 섞여서 개량될 기회를 거의 완전히 놓쳐 버린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실제로 일어난 바와 같이, 홍인은 백인(白人)을 다스릴 수 없었고 기꺼이 백인을 섬기려 하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두 종족이 섞이지 않으면, 둘 가운데 하나가 망한다.
64:6.10 (723.9) 2. 주황인. 이 종족의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이나 세우려는 충동, 또 모든 것을 세우려는 특이한 충동이었고, 단지 어느 부족이 가장 큰 무더기를 만들 수 있는가 보려고 광대한 돌무더기를 쌓기까지 했다. 비록 진취적 민족은 아니었어도, 그들은 영주의 여러 학교로부터 큰 이익을 얻었고, 교육을 받으려고 대표들을 거기로 보냈다.
64:6.11 (724.1) 주황 민족은 지중해가 서쪽으로 물러감에 따라서, 처음으로 아프리카를 향해서 남쪽으로 해안선을 따라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아프리카에서 유리한 발판을 확보하지 못했고, 나중에 도착하는 녹색 종족에게 멸종이 되었다.
64:6.12 (724.2) 끝이 오기 전에, 이 민족은 많은 문화적, 영적 바탕을 잃었다. 그러나 이 불행한 민족의 뛰어난 지도자 포슌타가 현명하게 지휘한 결과로서 높은 생활이 크게 부흥되었으며, 그는 약 30만 년 전에 그들의 본부가 아마겟돈에 있었을 때, 그들을 보살폈다.
64:6.13 (724.3) 주황인과 녹색인 사이에 마지막 큰 싸움이 에집트의 나일 강 하류 유역 지방에서 일어났다. 오래 끈 이 전쟁은 거의 1백년 동안 수행되었고, 싸움이 끝났을 때 주황 민족의 극소수가 살아남았다. 이 사람들의 산산이 흩어진 잔재는 녹색인에게, 그리고 나중에 도착하는 남색인에게 흡수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종족으로서 주황인은 10만 년쯤 전에, 존재를 그쳤다.
64:6.14 (724.4) 3. 황인. 원시의 황인 부족들은 처음으로 사냥을 그만두고, 안정된 공동체를 세우고, 농업에 바탕을 둔 가정 생활을 개발했다. 지능 면에서 그들은 얼마큼 홍인보다 못했지만, 사회적으로, 집단으로, 종족의 문명을 육성하는 문제에서 모든 산긱 종족보다 우수한 것을 입증했다. 형제 정신을 개발했기 때문에, 여러 부족이 비교적 평화로운 가운데 함께 살기를 배웠고, 아시아로 차츰 확장함에 따라서, 그들 앞에 있는 홍인종을 몰아낼 수 있었다.
64:6.15 (724.5) 그들은 세상의 영적 본부의 영향이 미치는 곳으로부터 멀리 떠나갔고, 칼리가스티아 배반이 있고 나서 큰 어두움 속으로 떠내려갔다. 그러나 이 민족 사이에서 한 번 밝은 시대가 있었는데, 약 10만 년 전에 싱랑톤이 이 부족들의 지도권을 맡고서 “하나의 진리”를 숭배할 것을 선포하였다.
64:6.16 (724.6) 황인종이 비교적 큰 무리로 살아남은 것은 그들이 부족 사이에 평화를 지켰기 때문이다. 싱랑톤의 시절부터 현대 중국의 시기까지, 황인종은 유란시아의 민족들 중에서 평화로운 축에 속했다. 이 종족은 나중에 들여온 아담 혈통의 유산, 적지만 강력한 유산을 받았다.
64:6.17 (724.7) 4. 녹색인. 녹인종(綠人種)은 원시인 가운데 능력이 뒤떨어지는 집단 중에 하나였고, 그들은 다른 방향으로 널리 이주함으로 크게 약화되었다. 흩어지기 전에, 이 부족들은 약 35만 년 전에, 판탓의 지도 밑에서 크게 문화의 부흥을 겪었다.
64:6.18 (724.8) 녹인종은 크게 세 가지로 갈라졌다. 북쪽 부족은 황인종과 청인종에게 정복되고 노예가 되고 흡수되었다. 동쪽 집단은 그 시절의 인도 민족과 혼합되었고, 그 잔재가 아직도 그들 사이에 남아 있다. 남쪽의 민족은 아프리카로 들어갔고, 거기서 그들은 거의 똑같이 열등한 주황 사촌들을 멸망시켰다.
64:6.19 (724.9) 여러 면에서 이 두 집단은 이 싸움에서 비슷하게 겨루었는데, 이는 각자가 거인 계급의 혈통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들의 많은 지도자가 키가 240에서 270센티미터나 되었다. 이 녹색인의 거인 혈통은 이 남쪽 나라, 곧 에집트 국가에 대체로 국한되었다.
64:6.20 (725.1) 승리한 녹색인의 나머지는 나중에 남인종(藍人種)에게 흡수되었고, 이 남색인은 종족이 분산된 최초의 산긱 중심에서 마지막으로 발전하고 이주한 유색 민족이었다.
64:6.21 (725.2) 5. 청인. 청인은 위대한 민족이었다. 그들은 일찍이 창을 발명했고, 나중에 현대 문명에 쓰이는 많은 기술의 초보를 알아냈다. 청인은 황인이 가진 혼 및 감정과 함께, 홍인의 두뇌력을 소유했다. 아담의 후손은 후일에 지속한 어떤 유색 인종보다 이들을 더 좋아했다.
64:6.22 (725.3) 초기의 청인(靑人)은 칼리가스티아 영주의 참모진에 속한 선생들의 설복에 반응했고, 배반한 그 지도자들이 나중에 왜곡한 가르침 때문에, 큰 혼란에 빠졌다. 다른 원시 종족들처럼 그들은 칼리가스티아 배반으로 빚어진 소동으로부터 결코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성질을 결코 완전히 극복하지도 못했다.
64:6.23 (725.4) 칼리가스티아가 몰락한 뒤 약 5백년이 되어, 원시 종류의―그래도 참되고 유익한―배움과 종교의 부흥이 널리 일어났다. 올란도프가 청인종 사이에서 큰 선생이 되었고, 많은 부족을 “최고 우두머리”라는 이름 아래 참 하나님의 숭배로 돌아가도록 이끌었다. 후일에 이 종족이 아담 혈통과 혼합함으로 아주 크게 개선되는 시절까지, 이것은 청인이 이룩한 가장 큰 진보였다.
64:6.24 (725.5) 유럽의 구석기 시대에 관한 연구와 탐구는 대체로 이 고대의 청인의 연장ㆍ뼈ㆍ공예품을 발굴하는 것과 상관된다. 이른바 유란시아의 백인종은 이 청인의 후손이며, 처음에 황인과 홍인이 조금 섞여 수정되고, 나중에 보라종의 큰 부분을 동화함으로 크게 개선되었다.
64:6.25 (725.6) 6. 남인종. 홍인이 모든 산긱 종족 가운데 가장 진보한 것처럼, 흑인은 진취성이 가장 떨어졌다. 그들은 고지의 고향으로부터 마지막으로 이주하였다. 아프리카로 여행해서 그 대륙을 점령했고, 대대로 노예로서 강제로 옮겨졌을 때를 제외하고, 그 뒤로 늘 거기에 남아 있었다.
64:6.26 (725.7) 아프리카에서 고립되어서, 남색인 종족들은 홍인과 마찬가지로, 아담 혈통의 주입으로 얻었을 종족 향상을 거의 또는 전혀 얻지 못했다. 그들은 오르보논의 시절에 크게 영적 각성을 체험했고, 그때까지 아프리카에서 홀로 남인종은 거의 진보하지 않았다. 오르보논이 부르짖은 “신 중의 신”을 나중에 거의 완전히 잊어버렸지만, 알지 못하는 이를 숭배하는 소망을 전적으로 잃지는 않았다. 적어도 몇천 년 전까지 그들은 일종의 숭배를 유지했다.
64:6.27 (725.8) 뒤처져 있지만 이 남색인 종족들은 하늘의 권력 앞에서 어느 다른 지상 종족과 똑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
64:6.28 (725.9) 이 시대는 여러 종족 사이에서 격심한 투쟁이 있던 시대였으나, 행성 영주의 본부 가까이에서 좀더 깨우치고 최근에 가르침을 받은 여러 집단은 비교적 화평한 가운데 함께 살았다. 하지만 루시퍼 반란이 터짐으로 이 체제가 심각하게 혼란을 겪을 때까지, 세계 종족들은 아무런 큰 문화적 업적을 이룩하지 않았다.
64:6.29 (726.1) 이 다른 민족들은 모두, 때때로 문화적ㆍ영적 부흥을 체험하였다. 만산트는 행성 영주 이후 시대에 큰 선생이었다. 그러나 한 종족 전체에게 두드러지게 영향을 주고 영감을 불러일으킨 뛰어난 지도자와 선생들만 여기에 언급된다. 시간이 지나자, 다른 지역에서 작은 선생들이 많이 나타났다. 특히 칼리가스티아 반란이 터지고 나서 아담이 도착하기까지 길고도 어두운 시대에, 그들은 합쳐서, 문화 있는 문명이 완전히 붕괴하는 것을 방지했던 유익한 총합 영향력에 크게 이바지했다.
64:6.30 (726.2) 공간 세계에서 셋 또는 여섯 유색 인종을 진화시키는 계획에는 좋고도 충분한 이유가 많이 있다. 비록 유란시아 필사자가 이 모든 이유를 넉넉히 헤아릴 처지에 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다음을 지적하고 싶다:
64:6.31 (726.3) 1. 다양성은 자연 도태(淘汰)가 널리 작용하기 위하여, 우수한 혈통이 구별되어 살아남는 기회를 마련하는 데 필수이다.
64:6.32 (726.4) 2. 다른 민족들이 우수한 유전 인자(因子)를 보유할 때, 이 다양한 민족들을 서로 교배함으로 더 힘세고 나은 민족을 얻게 된다. 우수한 아담 혈통과 철저하게 섞임으로 하나의 합동 민족을 나중에 효과적으로 개량할 수 있었다면, 유란시아 종족들은 그렇게 일찍 섞임으로 이득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한 실험을 현재의 종족 조건 밑에서 유란시아에서 실행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파괴적일 것이다.
64:6.33 (726.5) 3. 종족을 다양화함으로 건전하게 경쟁을 자극한다.
64:6.34 (726.6) 4. 종족 지위의 차이, 그리고 각 종족 안에서 생기는 집단 지위의 차이는 인간의 관용과 이타주의가 발달하는 데 필수이다.
64:6.35 (726.7) 5. 진화 세계의 민족들이 비교적 높은 수준까지 영적으로 발전할 때까지, 인종의 동질성은 바람직하지 않다.
64:7.1 (726.8) 산긱 가족의 유색 후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그들이 인접한 영토로 확장할 기회를 찾는 동안, 다섯째 빙하, 지질학 계산으로는 셋째 빙하가, 유럽과 아시아 위로 남쪽을 향하여 한창 떠내려 가고 있었다. 이 초기의 유색 인종들은 그들이 태어난 빙하 시대의 혹독함과 곤경으로 특별히 단련을 받았다. 이 빙하는 아시아에서 아주 널리 퍼져서, 몇천 년 동안 동 아시아로 이주하는 길이 막혀 버렸다. 그리고 아라비아가 높아진 결과로서 지중해가 나중에 물러날 때까지, 그들이 아프리카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64:7.2 (726.9) 이처럼 거의 10만 년 동안 이 산긱 민족들은 산기슭 언덕 근처에 퍼졌고, 다른 민족들 사이에 특이하지만 자연스러운 싫은 감정이 일찍 나타났는데도, 얼마큼 서로 섞였다.
64:7.3 (726.10) 행성 영주 시절과 아담 시절 사이에, 인도는 지구의 표면에서 일찍이 발견된 바 가장 국제적 인구의 고향이 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혼합은 녹색인ㆍ주황인ㆍ남색인 종족을 아주 많이 품게 되었다. 이 2차 산긱 민족들은 남쪽 땅에서, 살기가 더 쉽고 편안함을 발견했고,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나중에 아프리카로 옮겨 갔다. 1차 산긱 민족들, 곧 우수한 민족들은 열대 지방을 피했다. 홍인은 북동쪽으로 아시아로 갔고, 황인이 그 뒤를 바짝 따라갔으며, 한편 청인은 북서쪽으로 유럽으로 이주했다.
64:7.4 (727.1) 홍인은 후퇴하는 얼음의 발꿈치를 좇아서, 일찍 북동쪽으로 옮겨 가기 시작했고, 인도의 고지 둘레를 지나면서, 아시아의 동북부를 모두 차지했다. 그들 뒤에 황인 부족들이 바짝 따라갔고, 이들은 나중에 홍인을 아시아로부터 북 아메리카로 몰아냈다.
64:7.5 (727.2) 비교적 순수한 핏줄의 홍인종 잔재가 아시아를 버렸을 때 11 부족이 있었는데, 그들은 7천명이 조금 넘는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이었다. 이 부족들에게 혼합된 조상을 가진, 작은 세 집단이 따라왔는데, 이 중에 제일 큰 것은 주황인과 청인 종족의 조합이었다. 이 세 집단은 결코 홍인과 완전히 친하지 않았고, 남쪽으로 멕시코와 중앙 아메리카로 일찍 떠나갔으며, 거기서 그들은 나중에 황인과 홍인의 작은 혼합 집단과 합쳐졌다. 이 민족들은 모두 서로 결혼했고, 융합된 새 민족을 세웠으며, 이 민족은 순수한 핏줄의 홍인보다 싸움을 훨씬 덜 좋아했다. 5천 년 안에 이 융합된 민족은 세 집단으로 나뉘었고, 멕시코, 중앙 아메리카, 남 아메리카에서 각자 문명을 세웠다. 남 아메리카의 가지는 아담의 피를 약간 받기는 했다.
64:7.6 (727.3) 어느 정도까지, 초기의 홍인과 황인은 아시아에서 섞였고, 이 연합으로 생긴 자손은 동쪽으로, 그리고 남쪽 바닷가를 따라서 떠나갔는데, 결국에는, 빠르게 늘어나는 황인종에게 반도와 근처 바다의 섬들로 밀려났다. 그들은 오늘날의 갈색인이다.
64:7.7 (727.4) 황인종은 계속해서 동 아시아의 중부 지역을 차지했다. 모두 여섯 유색 인종 가운데 그들은 가장 큰 무리로 살아남았다. 황인들이 이따금 종족 전쟁에 말려들기는 했지만 홍인ㆍ녹색인ㆍ주황인이 벌인 것처럼, 그렇게 끊임없이 무자비하게 멸종하는 전쟁을 수행하지 않았다. 이 세 종족은 그들의 적인 다른 종족들에게 마침내 거의 전멸되기 전에, 실질적으로 자체를 파괴했다.
64:7.8 (727.5) 다섯째 빙하가 유럽에서 남쪽으로 그리 멀리 뻗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산긱 민족들이 북서쪽으로 이주하는 길이 어느 정도 열렸다. 얼음이 물러가자 몇몇 다른 작은 종족 집단과 함께, 청인(靑人)은 안돈 부족들이 갔던 옛 길을 따라서 서쪽으로 옮겨 갔다. 그들은 연달아 파도를 이루어 유럽에 쳐들어갔고, 그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64:7.9 (727.6) 유럽에서 그들은 초기에 공통으로 조상인 안돈의 네안데르탈 후손과 마주쳤다. 예전에 있던 이 유럽의 네안데르탈인은 빙하로 말미암아 남쪽과 동쪽으로 밀려갔고, 이처럼 산긱 부족들의 침공하는 사촌들을 속히 만나고 그들을 흡수할 위치에 있었다.
64:7.10 (727.7) 일반적으로, 그리고 첫째로, 산긱 부족들은 초기에 평야에 살던 안돈 족속의 퇴보된 후손보다 더 영리했고, 대부분의 면에서 훨씬 우수했다. 이 산긱 부족들이 네안데르탈 종족과 섞인 것은 더 오래 된 종족을 즉시 개선되게 만들었다. 이 산긱 피의 주입, 특히 청인의 피는 네안데르탈 종족을 두드러지게 개선하였고, 이것은 동쪽으로부터 유럽을 휩쓴, 갈수록 더 영리한 부족들이 잇달아 파도처럼 밀려온 데서 나타났다.
64:7.11 (727.8) 뒤따르는 간빙기(間氷期)에, 이 새 네안데르탈 종족은 잉글랜드로부터 인도까지 뻗었다. 고대의 페르시아 반도에 있던 청인의 나머지는 나중에 어떤 다른 사람들, 주로 황인과 섞였고, 그 결과로 생긴 혼합 종족을 나중에 아담의 보라 종족이 얼마큼 개량하였으며, 이들은 현대의 아랍 사람, 거무스레한 살빛의 유목 부족으로서 지속해 왔다.
64:7.12 (728.1) 현대 민족들의 산긱 조상을 확인하려고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나중에 아담의 피가 섞임으로, 종족의 혈통이 후일에 개량되었다는 것을 계산에 넣어야 한다.
64:7.13 (728.2) 우수한 종족들은 북쪽 기후, 곧 온대 기후를 찾았으며, 한편 주황ㆍ녹색ㆍ남색 종족들은 새로 높아진 육지 다리 위로, 연달아 아프리카로 몰려갔고, 그 다리는 서쪽으로 물러가는 지중해를 인도양으로부터 떼어냈다.
64:7.14 (728.3) 종족 기원의 중심으로부터 마지막으로 이주한 산긱 종족은 남색인(藍色人)이었다. 녹색인이 에집트에서 주황인을 죽이고, 그렇게 하면서 자체를 크게 약화시키고 있을 무렵에, 해안을 따라서 팔레스타인을 통해서 남쪽으로 흑인의 큰 집단 이동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신체가 튼튼한 이 남색인 종족들이 에집트에 넘쳤을 때, 그들은 순전히 인구의 위력으로 녹색인의 뿌리를 뽑아버렸다. 이 남인종은 주황인의 잔재와 녹색인 혈통의 상당수를 흡수했고, 어떤 남색인 부족들은 이 종족 혼합으로 말미암아 상당히 개선되었다.
64:7.15 (728.4) 그래서 처음에는 주황인이, 다음에 녹색인, 그 뒤에 남색인(흑인)이, 더 후에는 남색인, 청인, 그리고 수정된 녹색인의 잡종 민족이 에집트를 정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담이 도착하기 오래 전에, 유럽의 청인과 아라비아의 혼합 종족은 남인종을 에집트로부터, 아프리카 대륙에서 멀리 남쪽으로 몰아냈다.
64:7.16 (728.5) 산긱 민족의 이동이 막을 내리자, 녹색인과 주황인 종족은 사라져 버렸고, 홍인은 북 아메리카, 황인은 동 아시아, 청인은 유럽을 지키고 있으며, 남인종은 아프리카로 이끌려 갔다. 인도는 혼합된 2차 산긱 종족들을 품고 있으며, 홍인과 황인이 혼합된 갈색인은 아시아 해안에서 떨어진 섬들을 지키고 있다. 오히려 우수한 잠재성을 가진 혼합 민족이 남 아메리카의 고지를 차지하고 있다. 더 순수한 안돈 족속은 유럽의 가장 북쪽 지역에서, 그리고 아이스랜드와 그린랜드와 북 아메리카의 동북부에서 산다.
64:7.17 (728.6) 빙하(氷河)가 가장 멀리 진행한 기간에, 안돈 부족들의 맨 서쪽 가지는 바다로 거의 밀려가게 되었다. 그들은 오늘날의 잉글란드 섬 남쪽의 좁고 길쭉한 땅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여섯째이자 마지막 빙하가 마침내 나타났을 때 그들을 바다로 뛰어들도록 몬 것은 되풀이된 이 빙하의 진행에 관한 전통이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바다로 모험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배를 만들고, 그들이 바라건대 무서운 얼음 침공이 없을까 싶은 새 땅을 찾아 나섰다. 그들 가운데 더러는 아이스랜드에, 더러는 그린랜드에 도착했지만, 대다수는 망망한 바다에서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서 죽었다.
64:7.18 (728.7) 8만 년 조금 더 전에, 홍인이 북 아메리카의 북서쪽으로 들어간 뒤에 얼마 안 되어, 북극의 바다가 얼어붙고 그린랜드에서 지역 빙원(氷原)이 진행한 것은, 유란시아 토착민의 이 에스키모 후손을 더 좋은 땅, 새 집을 찾도록 몰아냈다. 그리고 그들은 그때 그린랜드를 북 아메리카의 동북부의 땅 덩어리로부터 떼어 낸 좁은 해협을 안전히 건너서 성공했다. 그들은 홍인이 알라스카에 도착한 뒤 약 2천 1백년쯤 되어 그 대륙에 이르렀다. 그 뒤에 청인의 혼합된 혈통 가운데 더러가 서쪽으로 여행했고, 후일의 에스키모들과 섞였으며, 이 연합은 에스키모 부족들에게 조금 유익했다.
64:7.19 (728.8) 약 5천 년 전에 헛슨 만의 남동쪽 해안가에서, 인디안 부족과 외로운 에스키모 무리가 어쩌다가 만나는 일이 생겼다. 이 두 부족은 서로 의사를 전하기가 어려움을 발견했지만, 금방 그들은 서로 결혼했고, 그 결과로 이 에스키모들은 결국 더 수가 많은 홍인에게 흡수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약 1천 년 전에 백인이 처음으로 대서양 해안에 어쩌다가 상륙할 때까지, 북 아메리카 홍인이 어느 다른 인간 혈통과 가진 유일한 접촉이다.
64:7.20 (729.1) 이 초기 시절의 투쟁은 용기와 용맹, 아니 영웅심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너희의 초기 조상이 가졌던 견실하고 튼튼한 특성 가운데 많은 것이 후일 종족들한테서 사라진 것을 우리는 모두 섭섭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진보하는 문명이 제공하는 많은 세련된 것의 가치를 이해하지만, 너희의 옛 조상들이 보인 훌륭한 내구력과 뛰어난 헌신이 없어 서운히 여기며, 이것은 때때로 위대하고 숭고한 정신에 가까웠다.
65:0.1 (730.1) 기초적인 진화하는 물질 생명―지성 이전의 생명―은 물리 통제사들이 형성한 것이요, 인가받은 생명 운반자들의 활발한 봉사와 관련하여, 일곱 으뜸 영이 생명을 나누어 주는 봉사이다. 이 세 가지 창조성이 나란히 활동하는 결과로서 유기체의 물리적 지성 능력이 개발되며, 이것은 바깥 환경의 자극에 대하여, 나중에는 내부의 자극, 곧 유기체 지성 자체에서 비롯하는 영향력에 대하여, 지적으로 반응하는 물질적 작용이다.
65:0.2 (730.2) 그러면 생명의 생산과 진화에는 세 가지 뚜렷하게 다른 수준이 있다:
65:0.3 (730.3) 1. 물리적 에너지 분야―지성 능력의 생산.
65:0.4 (730.4) 2. 보조 영들이 베푸는 지성 봉사―이것은 영 능력에 영향을 미친다.
65:0.5 (730.5) 3. 필사 지성에게 영을 부여하는 것―이것은 궁극에 생각 조절자의 수여를 초래한다.
65:0.6 (730.6) 기계적이고 가르칠 수 없는 수준에서, 환경에 대한 유기체의 반응은 물리 통제자의 분야에 속한다. 보조 지성 영들은 적응하는 지성, 곧 기계적이 아니고 가르칠 수 있는 종류의 지성―체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유기체의 반응 작용―을 활성화하고 규제한다. 영 보조자들이 이렇게 지성 잠재력을 조종하는 것 같이, 생명 운반자들은 인간의 의지가―하나님을 아는 능력과 그를 예배하려는 힘이―나타나기 바로 전까지, 상당한 재량권을 가지고 진화 과정에서 환경의 측면을 통제한다.
65:0.7 (730.7) 생명 운반자, 물리 통제자, 영 보조자의 통합된 활동이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유기체의 진화 과정을 조절한다. 이것이 어째서 진화가―유란시아나 다른 곳에서―반드시 의도하여 생긴 것이고 결코 우연이 아닌가 하는 이유이다.
65:1.1 (730.8) 생명 운반자들은 성격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잠재력을 부여받았고, 오직 극소수 계급의 생물이 이 힘을 소유한다. 이 지역 우주 아들은 세 가지 다른 존재 단계에서 활동하는 능력이 있다. 그들은 보통 중간 단계의 아들로서 임무를 수행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기원을 가진 상태이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 단계에서는 도저히 생명 운반자가 물리적 에너지와 물질 입자를 살아서 존재하는 단위로 찍어 내는 자로서, 전기ㆍ화학 분야에서 활동할 수 없다.
65:1.2 (730.9) 생명 운반자들은 다음 세 수준에서 활동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한다:
65:1.3 (730.10) 1. 물리적인 전기ㆍ화학 수준.
65:1.6 (731.1) 생명 운반자들이 생명을 심는 데 착수하려고 준비할 때, 그러한 사업을 위한 장소를 고르고 난 뒤에, 그들은 생명 운반자의 변형을 담당하는 천사장 위원회를 소집한다. 이 집단은 물리 통제자와 그 동료들을 포함하여, 10 계급의 다양한 성격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천사장의 우두머리가 이 집단을 주관하며, 그는 이 자격으로 가브리엘의 명령에 따라서, 그리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허락을 받아서 행동한다. 이 존재들이 알맞게 회로가 연결되었을 때, 그들은 생명 운반자들 안에서 그들로 하여금 물리적인 전기ㆍ화학 수준에서 즉시 활동할 수 있게 만드는 그러한 수정을 가한다.
65:1.7 (731.2) 생명 원본들이 작성되고 물질 조직이 알맞게 완성된 뒤에, 생명을 퍼뜨리는 데 관계된 초물질 세력이 당장에 활발하게 되고, 생명이 존재한다. 이렇게 되고 나서, 생명 운반자들은 당장에 그들의 정상적 중간 단계의 성격 존재로 돌아가며, 비록 새로운 형태의 살아 있는 물질을 유기체로 만드는―창조―하는 능력을 다 잃어 버려도, 그 상태에서 그들은 살아 있는 단위들을 조종하고, 진화하는 유기체를 움직일 수 있다.
65:1.8 (731.3) 유기체의 진화가 어떤 과정을 다 밟고 나서, 인간 종류의 자유 의지가 가장 높은 진화 유기체에서 나타난 뒤에, 생명 운반자들은 그 행성을 떠나든지, 아니면 포기 서약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유기체의 진화 과정에 더 영향을 주려는 어떤 시도도 삼가겠다고 서약해야 한다. 새로이 진화된, 의지를 가진 사람을 돌보는 책임이 맡겨질 자들에게 앞날에 조언자로서 그 행성에서 남아 있고 싶어 하는 생명 운반자들이 자청해서 그런 맹세를 했을 때, 12명으로 구성된 한 위원회가 소집되는데, 체계 군주의 권한을 받아서, 그리고 가브리엘의 허락을 얻어 행동하는, 저녁별들의 우두머리가 이 위원회를 주관한다. 당장에 이 생명 운반자들은 셋째 단계의 성격 존재―준영 수준의 존재―로 변화된다. 나는 유란시아에서 이 셋째 단계의 존재에서, 안돈과 폰타의 시절 이후로 늘 활동해 왔다.
65:1.9 (731.4) 우주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될 수 있을 때, 온전히 영이 되는 가능한 제4 단계의 존재가 되기를 우리는 기대한다. 그러나 바람직한 이 상급 지위를 우리가 무슨 기법으로 이룰 수 있는지 우리에게 결코 밝혀진 적이 없다.
65:2.1 (731.5) 해초에서 비롯하여 지상 세계의 주인이 되기까지 사람이 올라간 이야기는 정말로 생물학상의 투쟁을 겪고 지성이 살아남은 모험담이다. 사람의 시원(始原) 조상들은 글자 그대로, 고대(古代) 내륙 바다의 광대한 해안선에서, 완만하고 물이 따듯한 만(灣)과 개펄에 있던 것, 대양 바닥에서 나온 끈적이요 흘러나온 물질이었다. 바로 그런 바다에서 생명 운반자들은 세 가지 독립된 생명을 유란시아에 심었다.
65:2.2 (731.6) 동물 비슷한 어중간한 유기체들을 낳은 그 획기적 변화에 참여한 초기 종류의 해양 식물 가운데 극소수의 종(種)이 오늘날 존재한다. 해면(海綿)은 이 초기의 중간 종류 중에 하나가 살아남은 것이며, 이 유기체를 통해서 식물에서 동물로 점진적 이동이 일어났다. 이 초기의 과도기 형태들은, 현대의 해면과 동일하지 않지만, 무척 그와 비슷했다. 그들은 참으로 이도 저도 아닌―식물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유기체였지만, 궁극에 진정한 동물 형태의 생명이 발전하게 만들었다.
65:2.3 (732.1) 박테리아는 대단히 원시적 성질을 가진 간단한 식물 유기체이며, 생명이 초기에 시작될 때부터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의 기생(寄生)하는 행동은 어느 정도 퇴화를 나타내기까지 한다. 많은 곰팡이도 또한 진화에서 퇴화 작용을 대표하며, 잎파랑이 만드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다소 기생하게 된 식물이다. 병을 일으키는 대다수의 박테리아와 보조하는 바이러스 생체는 정말로 이 집단의 변질된 기생 곰팡이에 속한다. 중간에 끼어 있는 시대에 광대한 식물 생명 분야의 모든 것은 박테리아와 함께, 같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왔다.
65:2.4 (732.2) 상급의 원생(原生) 동물 종류의 생명이 곧 나타났고, 갑자기 나타났다. 이 아득한 시절부터, 아메바는 전형적 단일 세포인 동물 유기체인데 이제까지 거의 달라지지 않고 내려왔다. 아메바는 그것이 생명의 진화에서 마지막이자 가장 큰 성취였을 때 한 것과 비슷하게 오늘날도 장난을 친다. 이 미세한 생물 및 그 원생 동물 사촌들과 동물 세계의 관계는, 박테리아와 식물계(植物界)의 관계와 같다. 이것들은 생명의 분화에서 초기에 진화하는 첫 걸음을 대표하였고, 또 후일에 발전하는 데 실패했다.
65:2.5 (732.3) 오래지 않아서 초기의 단일 세포 동물 종류는 볼복스 계획에서 처음으로, 즉시 히드라와 해파리의 선을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 자기들끼리 결합했다. 그 다음에 불가사리ㆍ바다나리, 바다 성게, 해삼ㆍ지네ㆍ곤충ㆍ거미ㆍ갑각류, 그리고 가까이 관계된 집단인 지렁이와 거머리가 진화했고, 연체 동물―굴ㆍ문어ㆍ달팽이―가 곧 뒤따랐다. 수백 종이 사이에 끼어 나타났다가 멸망했는데, 오직 길고 긴 투쟁에서 살아남은 것만 여기에 언급한다. 진보하지 않는 그런 종자들은, 나중에 나타나는 물고기과와 함께, 오늘날 정태적 부류의 초기 하등 동물을 대표하며 이것들은 생명 나무에서 진보하지 못한 가지이다.
65:2.6 (732.4) 이처럼 등뼈가 있는 첫 동물, 곧 물고기의 등장을 위해서 무대가 준비되었다. 이 물고기과로부터 두 가지 독특한 수정이 솟아나왔는데, 개구리와 도롱뇽이다. 그리고 바로 개구리가 동물 생명에서 일련의 진보하는 분화를 비롯하였고, 마침내 바로 사람에 이르렀다.
65:2.7 (732.5) 개구리는 인류의 살아남은 조상들 가운데 가장 일찍 있던 것 중에 하나이지만, 이것도 진보하지 못했고 그 아득한 시절과 무척 비슷하게 오늘날도 지속한다. 개구리는 지구의 표면에서 지금 살고 있는, 초기의 원시 종족들의 유일한 조상 종(種)이다. 인류는 개구리와 에스키모인 사이에 살아남은 조상이 하나도 없다.
65:2.8 (732.6) 개구리는 파충류를 낳았고, 파충류는 거의 절멸한 위대한 동물 과(科)였지만, 절멸하기 전에, 새과(科) 전부, 그리고 포유동물에서 수많은 목(目)을 낳았다.
65:2.9 (732.7) 인간이 생기기 이전의 모든 진화에서 가장 큰 한 번의 비약은 파충류가 새가 되었을 때 일어났다. 오늘날의 새 종류―독수리ㆍ오리ㆍ비둘기ㆍ타조―는 모두 아주 오래 전에 거대한 파충류로부터 내려왔다.
65:2.10 (732.8) 개구리과에서 내려온 파충류 세계를 오늘날 네 가지 살아남은 문(門)이 대표하는데, 진보하지 않는 두 문, 곧 뱀과 도마뱀, 그리고 이들과 더불어 그 사촌, 악어와 바다거북이 있다. 어느 정도 진보하는 한 문, 곧 새과가 있고, 넷째는 포유동물의 조상이고 인간종의 직접 가계이다. 그러나 비록 떠난 지 오래 되지만, 지나가는 파충류의 큰 덩치는 코끼리와 마스토돈에서 메아리쳤고, 한편 그들의 특이한 형태는 뛰는 캉가루에서 지속되었다.
65:2.11 (733.1) 오직 14 문(門)이 유란시아에서 출현했으며, 물고기가 맨 마지막이었다. 새와 포유동물 뒤에는 더 이상 새로운 강(綱)이 발달되지 않았다.
65:2.12 (733.2) 육식하는 버릇을 가졌지만 비교적 큰 두뇌를 가진, 민첩하고 작은 파충류 공룡으로부터 태반을 가진 포유동물이 갑자기 솟아나왔다. 이 포유동물은 빨리 발전했고, 여러 면에서, 현대의 보통 변종들을 낳았을 뿐 아니라, 고래와 물개 같은 해양 종류로, 그리고 박쥐과(科) 같이 공중을 나르는 것으로도 진화하였다.
65:2.13 (733.3) 이처럼 사람은 고대에 동서(東西)로 뻗은 아늑한 바다에서 서부에 심은 생명으로부터 주로 파생된, 고등 포유동물로부터 진화했다. 동부 및 중앙 집단의 살아 있는 유기체들은 인간 이전 수준의 동물 존재에 도달하는 방향으로 유리하게 일찍 진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생명을 배치한 동쪽 초점은, 가장 높은 종류의 생식질을 거듭해서 돌이킬 수 없이 잃어버려서, 인간의 잠재성을 회복할 능력을 언제까지나 빼앗겼기 때문에, 그것은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인간 이전의 지적 상태에 이르는 데 실패했다.
65:2.14 (733.4) 이 동부 집단에서 지성이 발달할 능력의 질이 다른 두 집단보다 아주 분명히 열등했기 때문에, 생명 운반자들은 상관들의 찬성을 얻어서, 진화 생명에서 열등한 이 인간 이전 혈통을 더욱 제한하도록 환경을 조종하였다. 겉으로 드러난 모든 모습으로 볼 때, 이 열등한 집단의 생물이 제거된 것은 우연이었지만, 실제로 그것은 전적으로 의도한 것이다.
65:2.15 (733.5) 지능의 진화가 펼쳐지면서 나중에, 인간종의 리머 조상은 다른 지역보다 북 아메리카에서 훨씬 앞서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생명을 심은 서부의 무대로부터 베링 육지 다리를 건너, 해안을 따라서 남서 아시아로 옮겨 가도록 인도되었고, 거기서 그들은 줄곧 진화하고, 중앙 생명 집단의 어떤 혈통이 더해짐으로 이익을 보았다. 이처럼 사람은 어떤 서부 및 중앙 생명 혈통으로부터, 그러나 중앙에서 근동에 이르는 지역에서 진화했다.
65:2.16 (733.6) 이 방법으로 유란시아에 심은 생명은 빙하 시대까지 진화했고, 그때 바로 사람 이 처음으로 나타나서 행성에서 파란 많은 생애를 시작했다. 빙하 시대에 원시인이 땅에 이처럼 나타난 것은 단지 우연이 아니라, 계획하여 생긴 일이다. 빙하 시대의 혹독함과 가혹한 날씨는 엄청난 생존 자질을 가진 튼튼한 종류의 인간의 생산을 촉진하려는 목적에 맞게 모든 면에서 조정되었다.
65:3.1 (733.7) 초기에 진화로 진보하면서 있었던 사건, 이상하고 겉보기에 괴이한 많은 사건을 오늘날의 인간 지성에게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살아 있는 것들의 이상한 진화로 보이는 이 모든 것에 두루, 어떤 목적을 가진 계획이 작용하고 있지만, 생명 형태들이 일단 활동한 뒤에 우리는 그 발달에 멋대로 간섭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65:3.2 (733.8) 생명 운반자들은 모든 가능한 자연 자원을 사용하고, 생명 실험에서 발전하는 진도를 높일 어떤 우연한 환경이라도 이용해도 좋다. 그러나 우리는 식물이나 동물의 진화에 기계적으로 간섭하거나, 또는 그 운영과 과정을 멋대로 주무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65:3.3 (733.9) 유란시아 필사자들이 원시의 개구리를 발전시키는 방법으로 진화했고, 꼭 개구리 한 마리에 잠재한 이 상승하는 혈통이 어떤 기회에 멸종을 겨우 피했다는 이야기를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이 길목에서 사고가 한 번 났다고 해서 인류의 진화가 끝나 버렸을 것이라 추측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1천개 이상의 다른 혈통, 멀리 떨어진 곳에 돌연 변이하는 생명 혈통을 지켜보고 기르고 있었는데, 이것들을 여러 가지 다른 형태의 인간 이전 수준으로 발달하도록 인도할 수 있었다. 특별한 이 조상 개구리는 우리가 세 번째로 고른 것이며, 그에 앞서 두 생명 혈통은 그들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우리가 온갖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죽어버렸다.
65:3.4 (734.1) 자식을 낳기 전에 안돈과 폰타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비록 인간의 진화를 늦추겠지만, 진화를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안돈과 폰타가 나타난 다음에, 동물 생명에서 돌연 변이하는 인간 잠재성이 소모되기 전에, 일종의 인간 부류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유리한 혈통이 7천 개 이상 진화하였다. 팽창하는 인간종의 다른 가지들이 이 상급 혈통의 다수를 나중에 동화하였다.
65:3.5 (734.2) 물질 아들과 딸, 곧 생물학적 개량자들이 한 행성에 도착하기 오래 전에, 진화하는 동물 종자의 인간 잠재성이 소모되었다. 동물 생명의 이 생물학상의 지위는 셋째 단계의 보조 영을 동원하는 현상으로 인하여 생명 운반자들에게 드러나며, 이 현상은 모든 동물 생명이 인간 이전 개체들의 변이 잠재성을 낳을 능력이 소모되는 것과 동시에, 자동으로 일어난다.
65:3.6 (734.3) 유란시아에서 인류는 자체의 인간 혈통을 가지고 필사자의 발전 문제를 풀어야 한다―앞날의 세월을 통틀어, 인간 이전의 근원으로부터 아무 종족도 더 진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 필사 종족들에게 아직도 있는 진화 잠재성을 총명하게 육성함으로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인간의 발전을 성취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인간의 의지가 나타나기 전에 생명의 혈통을 기르고 보존하는 방향으로 우리 생명 운반자들이 하던 일을, 그러한 사건이 있은 뒤에, 우리가 진화에 적극 참여하다가 물러난 뒤에, 사람은 스스로 해야 한다. 대체로 사람의 진화 운명은 자신의 손 안에 있고, 과학적 지능은 머지 않아 통제되지 않은 자연 도태와 우연한 생존이 마구잡이로 작용하는 것을 대신해야 한다.
65:3.7 (734.4) 진화를 보살피는 일을 논의하면서, 장기적으로 앞을 내다보면, 너희가 언젠가 생명 운반자 군단에 부속될 때, 너희는 생명을 관리하고 이식하는 계획과 기법에 관하여 제안하고 어떤 가능한 개선을 이룩할 기회가 풍부하고도 넉넉히 있으리라 지적해도 괜찮을 것이다. 참아라! 너희가 좋은 생각이 있으면, 너희 지성이 우주 영토의 어느 부분을 위해서 더 좋은 관리 방법을 풍부히 가지고 있다면, 다가올 시대에 그러한 생각을 너희 친구와 동료 행정가들에게 발표할 기회를 너희는 분명히 가질 것이다.
65:4.1 (734.5) 유란시아가 생명을 실험하는 세계로서 우리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라. 이 행성에서 우리는 네바돈 생명 설계에 사타니아식 적응을 수정(修正)하고, 가능하면 개선하려고 60번째 시도했으며, 우리가 표준 생명 형태에서 수많은 유익한 수정을 가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자세히 말하자면, 유란시아에서 우리는 미래 전체를 통해서, 온 네바돈에 쓸모가 있을 특성, 28가지 이상으로 생명을 수정하는 특성을 고안하고 만족스럽게 시범을 보였다.
65:4.2 (735.1) 해 보지 않고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시도한다는 의미에서, 어떤 세계에서도 생명을 정착시키는 것은 결코 실험이 아니다. 생명을 진화시키는 것은 늘 진보하고 차이가 생기고 변하는 기법이지만, 결코 어쩌다가 일어나거나 방치되지 않으며, 우연이라는 의미에서 통째로 실험적인 것도 아니다.
65:4.3 (735.2) 인간 생활의 여러 모습은 필사자가 존재하는 현상이 머리를 써서 계획되었다는 것, 유기체의 진화는 단순히 우주에서 우연(偶然)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풍부한 증거를 마련해 준다. 살아 있는 세포가 다칠 때, 그 세포는 이웃의 정상 세포를 자극하고 활성화하는 힘을 가진 어떤 화학 물질을 손질하는 능력을 소유한다. 그래서 정상 세포들은 상처난 곳에서 고치는 과정을 수월하게 하는 어떤 물질을 즉시 분비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정상이고 다치지 않은 이 세포들은 번식을 시작한다―이 세포들은 사고(事故)로 파괴되었을지 모르는 어떤 동료 세포라도 갈아치울 새 세포를 만드는 일을 실제로 시작한다.
65:4.4 (735.3) 상처를 낫게 하고 세포를 재생하는 데 관련된 이 화학 작용과 반응은 가능한 화학 반응 및 생물학적 영향에서 10만 가지가 넘는 단계와 특성을 포함하는 한 공식을 생명 운반자들이 선택했음을 가리킨다. 유란시아의 생명 실험에 맞는 이 공식을 마침내 결정하기 전에, 생명 운반자들은 실험실에서 50만 번이 넘게 특정한 실험을 진행하였다.
65:4.5 (735.4) 이 치유하는 화학 약품을 더 많이 알게 될 때, 유란시아 과학자들은 상처의 치유에 더 효율성이 늘고, 간접으로 어떤 심각한 병들을 어떻게 통제하는가 더욱 알게 될 것이다.
65:4.6 (735.5) 생명이 유란시아에서 자리를 잡은 이후로, 생명 운반자들은, 이 기법이 고통을 더 줄이고 관계된 정상 세포의 번식 능력을 더 잘 통제한다는 의미로 이 치유 기술을 개량해 왔고, 이 기술은 또 다른 사타니아 세계에 소개되었다.
65:4.7 (735.6) 유란시아의 생명 실험에는 많은 독특한 모습이 있었지만, 두 가지 뛰어난 사건은 여섯 유색 인종이 미처 진화하기 전에 안돈 종이 등장한 것, 그리고 나중에 단일 가족에서 산긱 돌연 변이가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유란시아는 사타니아에서 처음으로, 같은 인간 가족으로부터 여섯 유색 인종이 솟아나온 세계이다. 그들은 보통, 인간 이전의 동물 혈통 안에서 독립된 돌연 변이로부터 얻어진 다양화된 혈통으로 생기며, 보통 한 번에 하나씩, 그리고 홍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여러 빛깔을 거쳐 남색인에 이르기까지, 연달아서 오랜 기간에 걸쳐서 나타난다.
65:4.8 (735.7) 또 다른 특출한 과정의 변화는 행성 영주가 늦게 도착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영주(領主)는 의지가 발생할 무렵에 한 행성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러한 계획을 따랐더라면, 칼리가스티아는 여섯 산긱 종족이 출현하는 것과 동시에 거의 50만 년 뒤에 나타나지 않고, 안돈과 폰타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유란시아에 왔을지 모른다.
65:4.9 (735.8) 사람이 사는 보통 세계에서는, 안돈과 폰타가 나타날 때나 그 뒤에 언젠가, 생명 운반자들의 요청을 받고 나서 한 행성 영주가 허락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란시아는 생명을 수정하는 세계로 지정되었으니까, 사전(事前) 합의에 따라서, 나중에 행성 영주가 도착할 때까지, 멜기세덱 관찰자 12명이 생명 운반자들에게 조언자로서, 그리고 행성의 감독자로서 파송되었다. 생각 조절자들이 안돈과 폰타의 필사 지성에 깃들 수 있게 만든 어떤 결정을 안돈과 폰타가 내렸을 때, 이 멜기세덱들이 왔다.
65:4.10 (736.1) 유란시아에서 생명 운반자들이 사타니아의 생명 형태를 개량하려고 기울인 노력은 겉보기에 쓸모 없는 형태의 과도기 생명을 많이 생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이미 생긴 이익은 표준 생명의 설계를 유란시아에서 수정(修正)한 것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하다.
65:4.11 (736.2) 유란시아의 진화하는 생명 속에 의지(意志)가 일찍 나타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도였고, 우리는 성공했다. 보통은 유색 인종들이 오랫동안 존재하기까지 의지는 태어나지 않으며, 우수한 종류의 홍인 사이에서 먼저 나타난다. 너희의 세계는 사타니아에서 인간 종류의 의지가 유색 종족이 생기기 전에 나타난 유일한 행성이다.
65:4.12 (736.3) 그러나 마침내 인류의 포유동물 조상을 낳은 유전 인자들의 조합과 결합을 마련하려는 노력으로, 우리는 다르고 비교적 쓸모가 없는 수백, 수천 가지 유전 인자(因子)의 조합과 결합을 버려둘 필요성에 부닥쳤다. 우리의 노력에서 생긴 부산물, 겉보기에 이상한 이 부산물 가운데 많은 것을 너희가 행성의 과거를 파헤치면서 뚫어지게 볼 것이 분명한데, 이들 가운데 더러는 제한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얼마나 수수께끼 같은지 나는 잘 이해할 수 있다.
65:5.1 (736.4) 유란시아에서 지적 생명을 수정하려는 우리의 특별한 노력이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비극적 타락, 곧 칼리가스티아 배반과 아담의 실패로 인하여 무척 장애를 받았다는 것이 생명 운반자들에게 유감(有感)의 근원이었다.
65:5.2 (736.5) 그러나 이 생물학적 모험 전체를 통해서 내내, 우리가 가장 크게 실망한 것은 어떤 원시적 식물 생명이 아주 널리, 기대했던 것보다 크게, 잎파랑이 이전 수준의 기생(寄生) 박테리아로 돌아감으로 생겨났다. 식물 생명의 진화에서 이 결말은 고등 포유동물에서, 특히 좀더 취약한 인간종에서 많은 비참한 질병을 일으켰다. 이 곤란한 상황에 우리가 부닥쳤을 때, 우리는 이와 관계된 어려움을 얼마큼 가볍게 여겼는데, 아담 생명질을 나중에 섞는 것이 그 결과로 생기는 혼합된 종족의 저항 력을 아주 강화해서 그 종족이 식물 종류의 유기체가 일으키는 모든 병에 실질적으로 면역이 되게 만들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은 아담이 실패한 불운 때문에, 실망하도록 운명이 정해졌다.
65:5.3 (736.6) 유란시아라고 부르는 이 작은 세상을 포함해서, 온 우주는 다만 우리의 승인을 얻거나 그저 우리의 편리에 맞게 관리되는 것이 아니요, 우리의 변덕을 만족시키고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은 더군다나 아니다. 우주의 관리를 책임지는 지혜롭고 전능한 존재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지혜로운 통치, 권력자의 군림, 진보하는 행진에 진심으로 협조하는 것이 생명 운반자들에게 어울리고 필사 지성인들에게 마땅하다.
65:5.4 (736.7) 유란시아에 미가엘이 수여된 바와 같이, 물론 시련에 어떤 보상이 따른다. 그러나 모든 그러한 고려 사항과 상관 없이, 나중에 온 이 행성의 하늘 감독자들은 인류가 마침내 진화적 승리를 거두고, 우리의 원래 계획과 생명 형태들이 정당함을 궁극에 입증할 것이라 완전히 확신함을 표현한다.
65:6.1 (737.1) 움직이는 물체의 정밀한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하게 결정하기는 불가능하다. 하나를 재려는 어떠한 시도도 불가피하게 다른 하나에 변화를 낳는다. 원형질의 화학적 분석을 시도할 때, 필사 인간은 똑같은 종류의 역설(逆說)에 부닥친다. 화학자는 죽은 원형질의 화학 작용을 밝힐 수 있지만, 살아 있는 원형질의 물리적 조직이나 동태적 성과를 헤아릴 수 없다. 과학자는 늘 생명의 신비에 점점 더 가까이 갈 터이지만, 결코 그 신비를 찾아낼 수 없다. 원형질을 분석하기 위해서 그것을 죽여야 한다는 것밖에 다른 이유가 없다. 죽은 원형질은 살아 있는 원형질과 무게가 같지만, 똑같지 않다.
65:6.2 (737.2) 살아 있는 물건과 존재에는 처음에 부여된 적응 자질이 있다. 모든 살아 있는 식물이나 동물 세포에, 모든 살아 있는 유기체에는―물질이든 영적이든―환경에 대하여 조정하고, 유기체가 적응하고, 확대된 생명을 실현하고 싶은 욕구, 늘 더욱 완전해지고 싶은 끝없는 욕구가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이렇게 그침 없이 노력하는 것은, 그들 안에 완전을 향한 타고난 투쟁심이 존재함을 입증한다.
65:6.3 (737.3) 식물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걸음은 잎파랑이를 만드는 능력이 발달한 것이었고, 둘째로 큰 진보는 홀씨가 복잡한 씨앗으로 넘어가는 진화였다. 홀씨는 생식하는 인자로서 아주 효과적이지만, 홀씨에는 씨앗에 원래 있는, 변하고 쉽게 적응하는 가능성이 모자란다.
65:6.4 (737.4) 고등 종류 동물의 진화에서 가장 쓸모 있고 복잡한 사건 중에 하나는, 순환하는 혈구 안에서 철이 산소를 나르고 2산화탄소를 제거하는 매체로서 2중 역할을 하는 능력을 개발한 것이다. 이 적혈구의 행동은 어떻게 진화하는 유기체들이 다르거나 바뀌는 환경에 그들의 기능을 적응할 수 있는가 보여준다. 사람을 포함해서, 고등 동물은 적혈구(赤血球) 안에 있는 철의 행위로 세포 조직에 산소를 공급하는데, 이 적혈구는 살아 있는 세포에 산소를 날라 주고, 똑같이 효과 있게 2산화 탄소를 제거한다. 그러나 다른 금속들도 똑같은 목적에 쓰이도록 만들 수 있다. 오징어는 이 기능에 구리를 쓰고, 멍게는 바나디움을 이용한다.
65:6.5 (737.5) 유란시아의 고등 포유동물에서 치아의 진화가 그러한 생물학상의 조정이 계속된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사람의 먼 조상의 경우 이는 서른 여섯에 이르렀고, 그 다음에 시조 인간과 그의 가까운 친척들에서는 서른 둘 방향으로 적응하는 재조정을 시작했다. 이제 인류는 스물 여덟을 향하여 천천히 끌려가고 있다. 진화 과정은 이 행성에서 아직도 활발하게, 적응하면서 진행되고 있다.
65:6.6 (737.6) 그러나 살아 있는 유기체가 겉보기에 신비롭게 조정하는 것은 순전히 화학적이고, 온전히 물리적이다. 어느 한 순간에도, 어떤 인간의 피 흐름 속에도, 12 가지 내분비선의 호르몬 생산물 사이에 15,000,000 가지가 넘는 화학 반응이 일어날 가능성이 존재한다.
65:6.7 (737.7) 하등 형태의 식물 생명은 물리ㆍ화학ㆍ전기적 환경에 전적으로 민감하다. 그러나 생명의 등급이 높아짐에 따라서, 일곱 보조 영이 지성에게 베푸는 봉사가 하나씩 작용하게 되고, 지성은 갈수록 더 순응하고 창조성이 늘어나며, 조정하고 지배한다. 동물이 공기ㆍ물ㆍ땅에 적응하는 능력은 초자연적 자질이 아니라, 초물리적 조정이다.
65:6.8 (738.1) 물리학과 화학만으로는 어떻게 한 인간이 초기 바다에 있는 시원의 원형질로부터 진화했는가 설명할 수 없다. 배우는 능력, 기억, 그리고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반응은 지성이 부여한 것이다. 물리학의 법칙은 훈련에 민감하지 않으며, 이 법칙들은 변할 수 없고, 변하지 않는다. 화학 반응은 교육으로 고쳐지지 않으며, 불변하고 믿을 만하다. 무제한 절대자의 계심을 제쳐놓고, 전기 및 화학 반응은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지성은 체험으로부터 이익을 얻고, 되풀이되는 자극에 대하여 반응하는 행동의 버릇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65:6.9 (738.2) 지성이 생기기 이전의 유기체는 환경의 자극에 반응하지만, 지성의 봉사에 반응하는 유기체는 환경 자체를 조절하고 조종할 수 있다.
65:6.10 (738.3) 한 인격자의 발달하는 지성이 어떤 타고난 영적 감수(感受) 능력을 소유하고, 따라서 영적으로 진보하고 달성하는 가능성을 가지는 것과 똑같이, 물리적 두뇌는 관련된 신경 체계와 함께, 지성이 베푸는 봉사에 반응하는 타고난 능력을 소유한다. 지적ㆍ사회적ㆍ도덕적ㆍ영적 진화는 일곱 보조 영과 초물리적 동료들이 지성에게 베푸는 봉사에 의존한다.
65:7.1 (738.4) 일곱 보조 지성 영은 한 지역 우주에서 하등의 지적 존재들에게 다능한 지성 봉사자이다. 이 계급의 지성은 지역 우주 본부로부터, 또는 그와 연결된 어떤 세계로부터 보살핌을 받지만, 체계의 서울에서 하등 지성의 기능에 영향을 미치도록 지도한다.
65:7.2 (738.5) 진화 세계에서는 많은 것, 허다한 것이 이 일곱 보조자가 하는 일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 보조자들은 지성에게 봉사하는 자요, 신체의 진화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이것은 생명 운반자의 분야이다. 그런데도 이 영 자질이, 생명 운반자들의 전개되는 본래 체제의 예정된 자연 과정과 완벽하게 통합된 것은 필사자가 어째서 지성 현상에서 자연의 손길, 그리고 자연스런 과정이 해결되어 나가는 것밖에 아무것도 헤아릴 수 없는가 설명한다. 하지만 물질에 붙어 있는 지성의 자연스러운 반응과 연결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할 때, 너희는 때때로 얼마큼 어리둥절하게 된다. 유란시아가 최초의 계획을 더 따르는 방향으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성의 현상에서 눈길 끄는 것이 더욱 적게 보일 것이다.
65:7.3 (738.6) 일곱 보조 영은 개체라기보다 회로와 같으며, 이 영들은 보통 세계에서 지역 우주 전역에 걸치는 다른 보조 작용과 함께 회로가 연결된다. 그러나 생명을 실험하는 행성에서 그들은 비교적 고립되어 있다. 그리고 유란시아에서, 여러 생명 형태의 독특한 성질 때문에, 하등 보조자들은 더 표준화된 종류의 생명을 부여한 경우보다 진화 유기체들과 접촉하는 데 훨씬 더 어려움을 겪었다.
65:7.4 (738.7) 게다가, 보통의 진화 세계에서 일곱 보조 영은 유란시아보다 동물이 발전하는 여러 승진 단계와 동시화가 더 잘된다. 꼭 하나의 예외가 있지만, 보조자들은 네바돈 우주 전역에 걸쳐서 온갖 활동을 하면서 겪은 중에 유란시아 유기체들의 진화하는 지성과 접촉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 세계에는 많은 형태의 어중간한 현상―기계적이고 가르칠 수 없는 종류, 그리고 기계적이 아니고 가르칠 수 있는 종류의 유기체 반응의 혼란스러운 조합―이 발달되었다.
65:7.5 (739.1) 일곱 지성 영은 환경에 대하여 유기체의 반응이 순전히 기계적인 서열과 접촉을 가지지 않는다. 살아 있는 유기체가 보이는 그러한 지성 이전(以前)의 반응은 순전히 동력 중심, 물리 통제자, 그리고 그 동료들의 에너지 분야에 관계된다.
65:7.6 (739.2) 체험으로부터 배우는 잠재 능력을 얻는 것은 보조 영들의 활동이 시작됨을 표시하며, 그들은 원시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가장 낮은 지성으로부터 인간의 진화 눈금에서 가장 높은 종류에 이르기까지 활동한다. 보조 영들은 달리 얼마큼 신비스러운 행위, 그리고 충분히 파악되지 않았지만, 물질 환경에 대한 지성의 빠른 반응의 근원이고 형태이다. 충실하고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이 영향력은 동물 지성이 인간 수준의 영 감수성을 얻을 때까지, 오랫동안 예비 봉사를 해내야 한다.
65:7.7 (739.3) 보조자들은 여섯째 단계, 곧 예배의 영 수준까지, 체험하는 지성이 진화하는 동안 독점하여 활동한다. 이 수준에서 불가피하게 봉사의 중복이 일어난다―이것은 상급 수준의 발전이 나중에 이루어질 것을 기대해서, 상위에 있는 자가 하위에 있는 자와 조정하려고 손을 뻗는 현상이다. 그 위에 추가되어 일곱째이자 마지막 보조자인 지혜 영의 행동에 영의 봉사가 뒤따른다. 영 세계가 베푸는 봉사 전역에 걸쳐서 개인은 영이 협동하는 갑작스러운 과도기를 결코 체험하지 않으며, 반드시 이 여러 변화는 차츰차츰 생기고 서로 보완한다.
65:7.8 (739.4) 환경의 자극에 대하여 물리적 (전기ㆍ화학적), 정신적으로 반응하는 분야들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하며, 다음에 이 분야들은 모두 영적 활동과 동떨어진 현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물리적ㆍ정신적ㆍ영적 인력이 작용하는 분야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도, 우주 실체의 뚜렷이 다른 영역들이다.
65:8.1 (739.5) 시간과 공간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으며,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어떤 공간 조건에서는 시간의 지연을 피할 수 없다.
65:8.2 (739.6) 진화로 생명을 발달시키는 변화를 일으키는 데 어째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는가 아리송하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한 행성의 물리적 변형이 허락하는 것보다 조금도 더 빨리 생명 과정을 펼치도록 시간을 맞출 수 없다. 우리는 한 행성의 자연스러운 물리적 발전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지질의 진화에 절대로 아무 힘을 쓸 수 없다. 물리적 조건이 허락한다면, 우리는 1백만 년보다 훨씬 시간을 적게 쓰고, 생명이 진화를 완성하도록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파라다이스의 최상 통치자들의 관할 밑에 있고, 시간은 파라다이스에 존재하지 않는다.
65:8.3 (739.7) 개인이 시간을 재는 척도는 일생(一生)의 길이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은 시간에 제약을 받고, 따라서 진화가 시간을 오래 끄는 과정이라고 여긴다. 수명(壽命)이 잠시 존재하도록 제한을 받지 않는 우리에게는, 진화가 그렇게 오래 끄는 일거리처럼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파라다이스에서, 무한의 지성 속에, 그리고 영원의 행위 안에 이것들은 모두 현재이다.
65:8.4 (739.8) 지성의 진화가 물리적 조건이 느리게 발달하는 데 달려 있고 그 때문에 늦어지는 것 같이, 마찬가지로 영적 진보는 정신력의 확장에 달려 있고, 어김없이 지능의 발달이 지연됨으로 늦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 진화가 교육이나 문화나 지혜에 달려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혼은 정신 문화와 상관 없이 진화할지 모르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정신 능력과 소망―살아남겠다는 선택과 늘 더욱 나아지려는 결심―이 없는 가운데서 진화하지 않는다. 살아남는 것은 지식과 지혜의 소유에 달려 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진보는 아주 확실히 그렇다.
65:8.5 (740.1) 우주의 진화 실험실에서 지성은 언제나 물질을 지배하며, 영은 늘 지성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다양한 재산이 동시화하고 조정하는 데 실패하면 시간의 지연을 일으킬지 모른다. 그러나 개인이 하나님을 정말로 알고, 찾고, 그처럼 되기를 바란다면, 시간의 장애와 상관없이 살아남는 것이 보장된다. 물리적 지위가 지성을 불리하게 만들고, 비뚤어진 정신이 영적 달성을 늦출지 모르지만, 이 장애물 가운데 아무것도 혼을 다하여 의지(意志)가 선택한 것을 짓밟을 수 없다.
65:8.6 (740.2) 물리적 조건이 무르익었을 때, 갑자기 정신의 진화가 일어날지 모른다. 지성의 지위가 순조로울 때 갑자기 영적 변화가 생길지 모른다. 영적 가치가 마땅한 인정을 받을 때, 그때 우주의 중요성을 식별할 수 있게 되고, 점점 더 그 인격자는 시간의 장애에서 해방되고, 공간 세계의 제한으로부터 벗어난다.
66:0.1 (741.1) 보통 세계에서 한 라노난덱 아들이 오는 것은 의지(意志)가, 영원히 살아남는 길을 택하는 능력이, 원시인의 지성 안에서 개발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유란시아에서 행성 영주는 인간의 의지가 나타난 뒤에 거의 50만 년이 되어서 도착했다.
66:0.2 (741.2) 약 50만 년 전에, 여섯 유색 인종, 곧 산긱 인종들이 나타남과 동시에, 행성 영주 칼리가스티아는 유란시아에 도착했다. 영주가 도착했을 때 땅에는 거의 5억의 원시 인간이 있었고, 그들은 유럽ㆍ아시아ㆍ아프리카에 잘 흩어져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에 세운 영주의 본부는 세계 인구의 중심 부근에 있었다.
66:1.1 (741.3) 칼리가스티아는 라노난덱 아들이었고, 2차 계급에서 9,344번이었다. 그는 대체로 지역 우주 사무의 행정에, 그리고 후일에는 특히 사타니아 지역 체계의 관리에 경험을 쌓았다.
66:1.2 (741.4) 사타니아에서 루시퍼가 군림하기 전에, 칼리가스티아는 예루셈에서 생명 운반자 에게 자문하는 자들의 회의에 부속되었다. 루시퍼는 칼리가스티아를 자신의 개인 참모진에서 한 지위로 진급시켰고, 그는 연달아 다섯 번이나 명예롭고 책임이 중한 임무를 쓸 만하게 마쳤다.
66:1.3 (741.5) 칼리가스티아는 아주 일찍부터 행성 영주로 임명받으려고 애썼지만, 그의 요청이 별자리 회의에서 인가를 받으러 올라왔을 때, 거듭하여 별자리 아버지들의 찬성을 얻지 못했다. 칼리가스티아는 십일(十一) 세계, 다시 말해서 생명을 수정하는 세계에 행성 통치자로서 파송되는 것을 특별히 바란 듯하다. 마침내 유란시아로 배치받을 때까지, 그의 탄원은 여러 번 인가를 받지 못했다.
66:1.4 (741.6) 칼리가스티아는 예루셈으로부터 세상의 통치를 책임지는 자리로 떠나갔는데, 이때 그는 어떤 사소한 문제에서 기존 질서와 의견을 달리하는 경향과 더불어 그의 특징을 나타내는 어떤 초조감이 있었는데도, 그가 태어나고 머무른 우주의 복지에 충성하고 헌신한 기록, 부러움을 살 만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66:1.5 (741.7) 명석한 칼리가스티아가 체계의 서울을 떠났을 때 나는 예루셈에 있었다. 어느 행성의 영주(領主)도, 50만 년 전, 그 중대한 날에 칼리가스티아보다 더 풍부한 예비 체험이나 더 좋은 전망을 가지고 세상을 통치하는 생애를 시작하지 않았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내가 그 사건의 이야기를 지역 우주에 방송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한 순간이라도 이 고귀한 라노난덱이 행성을 관리하는 신성한 책임을 그렇게 곧 저버리고, 드높은 우주 아들 계급의 좋은 이름을 그토록 끔찍하게 더럽힐 것이라는 생각이 털끝만큼도 들지 않았다. 나는 유란시아가 그렇게 경험이 있고, 찬란하고 독창적인 지능 존재를 세상사를 주관하는 자리에 모실 것이므로, 유란시아가 온 사타니아에서 가장 운이 좋은 대여섯 행성에 속한다고 정말로 여겼다. 칼리가스티아가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반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 나는 파악하지 못했고, 그때 나는 성격 자만심이 얼마나 미묘한가 그다지 이해하지 못했다.
66:2.1 (742.1)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는 그의 임무를 수행하려고 혼자 파송되지 않았고, 보통 보내는 보조자와 행정 조수의 일행이 그를 뒤따랐다.
66:2.2 (742.2) 이 집단의 우두머리에는 달리가스티아, 곧 행성 영주의 부관인 조수가 있었다. 달리가스티아도 2차 라노난덱 아들이었고, 그 계급에서 319,407번이었다. 그가 칼리가스티아의 동료로서 배치 받을 때, 그의 계급은 조수였다.
66:2.3 (742.3) 행성 참모진은 큰 무리의 협조하는 천사와 한 집단의 다른 하늘 존재들을 포함했으며, 이들은 인류의 이익을 증진하고 복지를 추진하기 위하여 배치되었다. 그러나 너희의 관점에서 볼 때, 전체에서 가장 흥미 있는 집단은 영주 참모진의 유형(有形) 참모들이었다―그들을 때때로 칼리가스티아 1백인이라고 불렀다.
66:2.4 (742.4) 영주 참모진의 구성원, 다시 물질화된 이 100명은 유란시아 모험을 시작하기 위하여 785,000명이 넘는 자원자, 하늘 가는 예루셈 시민들로부터 칼리가스티아가 뽑았다. 선택된 100명은 각자 다른 행성에서 왔고, 아무도 유란시아 출신이 아니었다.
66:2.5 (742.5) 이 예루셈 자원자들은 체계 서울로부터 천사의 수송으로 유란시아로 바로 인도되었는데, 도착하고 나서 그들에게 특별히 행성에서 근무하는 2중 성질의 사람 모습, 즉 피와 살로 되어 있지만, 또한 체계의 생명 회로에 맞춰져 있는 실질 몸이 마련될 수 있을 때까지, 천사 몸에 실린 채로 있었다.
66:2.6 (742.6) 이 예루셈 시민 100명이 도착하기 얼마 전에, 유란시아에 거주하며 감독하는 생명 운반자 2명은, 그들의 계획을 미리 완벽하게 세웠으므로, 안돈과 폰타의 혈통에서 선택한 생존자 100명의 생명질을 영주 참모진의 유형 참모들을 위하여 계획될 물질 몸으로 옮겨 심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예루셈과 에덴시아에 탄원하였다. 이 요청은 예루셈에서 허락을 받고 에덴시아에서 인가를 받았다.
66:2.7 (742.7) 따라서, 생명 운반자들은 안돈과 폰타 후손 가운데 남자 50명과 여자 50명을 선택하였고, 이들은 그 독특한 민족에서 가장 좋은 살아남은 혈통을 대표한다. 하나나 둘을 제외하고, 종족 발전에 이바지한 이 안돈 사람들은 서로 낯선 사람이었다. 그들은 영주의 행성 본부 문턱에서, 생각 조절자들의 지시와 천사의 안내를 조정함으로, 널리 떨어져 있는 장소로부터 모집되었다. 여기서 인간 주체 100명은 아발론으로부터 온, 상당히 솜씨 있는 자원 위원회의 손에 맡겨졌고, 그들은 이 안돈 후손의 생명질의 일부 물질을 뽑는 것을 지도하였다. 살아 있는 이 물질은 그때 예루셈에서 온, 영주 참모진의 구성원 100명이 쓰도록 지어진 물질 몸 속으로 옮겨졌다. 그동안에, 체계 서울에 새로 도착한 시민들은 천사의 수송기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66:2.8 (742.8) 칼리가스티아 1백인을 위하여 특별한 몸을 글자 그대로 창조한 것과 함께, 이 작업은 수많은 전설을 낳았는데, 이 중에 많은 것은 나중에 아담과 이브가 행성에 취임한 것과 관련된 후일의 전통과 뒤범벅이 되었다.
66:2.9 (743.1) 예루셈 자원자 100명을 실은 수송 천사들이 도착한 때부터 그 땅에서 3중의 존재인 그들이 의식을 찾기까지, 다시 인격화하는 작업 전체는 꼭 열흘이 걸렸다.
66:3.1 (743.2) 행성 영주의 본부는 그 시절에 페르시아 만(灣) 지역, 나중에 메소포타미아에 해당하는 구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66:3.2 (743.3) 그 시절에 메소포타미아에서 기후와 풍경은, 그 뒤에 때때로 지배했던 조건과 무척 다르게, 모든 면에서 영주 참모진과 그 조수들이 벌인 사업에 유리했다. 원시적인 유란시아인의 문화와 문명이 어떤 초기 수준까지 발전하도록 유도하려고 설계된 자연 환경의 일부로서, 그렇게 유리한 기후를 가지는 것이 필요했다. 그 시절에 하나의 큰 과제는, 사람을 사냥꾼으로부터 목자(牧者)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목자가 나중에 평화를 사랑하고 집에서 사는 농부로 진화할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66:3.3 (743.4) 유란시아에서 행성 영주의 본부는 젊고 개발되는 구체에서 그러한 주둔지의 전형(典刑)이었다. 영주가 있는 촌락의 핵심은 매우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도시였고, 높이가 12미터 되는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세계 문화의 중심은 달리가스티아에게 명예를 돌리는 뜻으로 달라마시아라고 이름을 지었다.
66:3.4 (743.5) 그 도시는 10 구역으로 배열되어 있고, 유형 참모진의 10개 회의의 본부 저택들이 이 구역들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도시의 한가운데에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모시는 성전이 있었다. 영주와 그 동료들의 행정 본부는 바로 성전 둘레에, 한데 모인 열두 방에 배치되었다.
66:3.5 (743.6) 달라마시아의 건물은 모두 단층이었고, 예외는 2층인 회의 본부, 그리고 가운데, 만인의 아버지를 모시는 성전이었는데, 이것은 작아도 3층이었다.
66:3.6 (743.7) 그 도시는 건축 자재 면에서 그 초기 시절의 최고 기술―벽돌―의 표본이었다. 돌이나 나무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둘러싼 민족들 사이에서 집 건물과 마을 건축은 달라마시아의 본보기로 말미암아 크게 나아졌다.
66:3.7 (743.8) 영주의 본부 가까이, 온갖 종족과 계층의 인간들이 거주했다. 근처에 있는 이 부족들로부터 여러 영주 학교의 첫 학생들이 모집되었다. 초기에 이 달라마시아의 학교들은 투박하기는 했어도, 그 원시 시대의 남녀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마련해 주었다.
66:3.8 (743.9) 영주의 유형 참모진은 둘러싼 부족들 가운데서 우수한 사람들을 주위에 계속 끌어 모았고, 이 학생들을 훈련하고 그들에게 영감을 부어준 다음에, 각자 민족의 선생과 지도자로서 돌려보냈다.
66:4.1 (743.10) 영주 참모진의 도착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 소식이 널리 퍼지는 데 거의 1천 년이 걸렸지만, 메소포타미아 본부 가까이 있던 부족들은 유란시아에서 새로 거주하는 1백인의 가르침과 행동에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후일에 너희의 많은 신화(神話)는 이 영주 참모진의 구성원들이 유란시아에서 초인간으로 다시 인격화된, 이 초기 시절에 관한 왜곡된 전설로부터 생겨났다.
66:4.2 (744.1) 행성 바깥에서 온 그런 선생들이 좋은 영향을 미치는 데 심각한 장애물은 사람들이 그들을 신으로 여기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칼리가스티아 1백인―남자 50명과 여자 50명―이 지구에 나타난 기법을 제쳐놓고, 초자연 방법을 쓰거나 초인간적 조종에 의존하지 않았다.
66:4.3 (744.2) 그러나 유형(有形) 참모들은 여전히 초인간이었다. 그들은 유란시아에서 특별한 3중 존재로서 사명을 시작했다:
66:4.4 (744.3) 1. 그들은 형체를 가졌고 비교적 인간이었는데, 인류 중에 한 종족의 실제 생명질, 곧 유란시아의 안돈의 생명질을 몸에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66:4.5 (744.4) 영주 참모진의 1백 명은 이전에 그들의 필사 신분에 따라서, 남녀 별로 수가 똑같이 나누어졌다. 이 집단에서 각 사람은 함께 부모가 되어 어떤 새로운 서열의 육체적 존재를 낳을 능력이 있었지만, 오직 어떤 조건 하에서 부모가 되는 길을 택하라고 조심스러운 지시를 받았다. 행성 영주의 유형 참모진은 특별한 행성 근무로부터 은퇴하기 얼마 전에 후계자들을 낳는 것이 관습이었다. 보통 이것은 행성 아담과 이브가 도착할 때나, 그 뒤에 얼마 안 되는 때이다.
66:4.6 (744.5) 따라서 이 특별 존재들은 그들이 남녀의 결합으로 어떤 종류의 물질 인간이 태어날지, 거의 또는 전혀 몰랐다. 그들은 결코 몰랐다. 그들이 세상의 일을 집행하면서 그런 걸음을 밟을 때가 오기 전에, 그 체제 전부가 반란으로 뒤집혔고, 나중에 부모 노릇을 한 사람들은 그 체계의 생명 기류(氣流)로부터 격리되었다.
66:4.7 (744.6) 칼리가스티아 참모진의 물질화된 이 구성원들은 안돈 종족의 피부색과 언어를 따랐다. 그들은 다음의 차이점을 제외하고, 그 영역의 필사자처럼 먹을 것을 먹었다: 다시 빚어진 이 집단의 육체는 고기가 없는 음식물로 충분히 만족되었다. 이것은 과일과 견과가 풍부한 따듯한 지역에 그들의 살곳을 결정한 고려 사항 가운데 하나였다. 고기 없는 음식물로 살아가는 풍습은 칼리가스티아 1백인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왜냐하면 이 풍습이 가까이, 그리고 멀리 퍼져서, 둘러싼 많은 부족, 한 때 순전히 고기를 먹던 진화 종족으로부터 내려 온 집단의 먹는 버릇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66:4.8 (744.7) 2. 1백인은 물질 존재였으나 초인간 존재였고, 높고 특별한 서열의 독특한 남자와 여자로서 유란시아에서 다시 빚어졌다.
66:4.9 (744.8) 예루셈에서 임시 시민 자격을 누렸지만, 이 집단은 아직까지 미처 생각 조절자와 융합되지 않았다. 그들이 자원하고 나서, 내려가는 아들 계급과 연결되어 행성에서 근무하도록 인가를 받았을 때, 그들의 조절자가 분리되었다. 그러나 이 예루셈 사람들은 초인간 존재였다―승천하면서 자라는 혼을 지녔다. 육체를 입고서 필사자로 사는 동안, 혼은 싹의 상태에 있다. 혼은 태어나서 (부활하여) 상물질 생명이 되고, 연속되는 상물질 세계들을 거쳐서 성장을 겪는다. 칼리가스티아 1백인의 혼은, 일곱 저택 세계에서 진보하는 체험을 거치면서 예루셈의 시민 자격을 얻기까지, 이렇게 성장하였다.
66:4.10 (744.9) 받은 지시에 순응하여 참모진은 성교(性交)로 번식을 시작하지 않았지만, 자기들의 몸 구조를 공들여 연구했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단계의 지적(지성) 결합과 상물질 (혼) 결합을 세밀하게 탐구했다. 달라마시아에서 머무른 지 33년째 해에, 담이 완성되기 오래 전에, 단 집단의 2번과 7번이, 그들이 (남녀의 구별이 없고 물질이 아니라고 생각된) 상물질 자아를 연결하는 데 따르는 현상을 어쩌다가 발견했다. 이 모험의 결과는 첫 1차 중도인(中道人)인 것이 드러났다. 이 새로운 존재는 행성의 참모진과 그 하늘 동료들의 눈에 완전히 보이지만, 여러 인간 부족의 남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행성 영주의 허가를 받아서 유형 참모진 전체가 비슷한 존재들을 낳는 일에 착수했고, 개척자인 단 쌍의 지침을 따라서 모두가 성공했다. 이처럼 영주의 참모진은 결국 50,000명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1차 중도자 집단을 낳았다.
66:4.11 (745.1) 이 중간 종류의 인간은 세계 본부의 일을 수행하는 데 크게 쓸모가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달라마시아에 머물렀던 원시인들은 보이지 않는 이 준영(準靈)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고, 이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 진화하는 필사자들에게 영 세계의 전부였다.
66:4.12 (745.2) 3. 칼리가스티아 1백인은 개인적으로 불멸한다, 죽지 않는다. 체계의 생명 기류에 있는 해독하는 보충물이 그들의 물질 형태를 통하여 돌았다. 그들이 반란을 통해서 생명의 기류와 접촉을 잃지 않았다면, 나중에 하나님의 아들이 도착할 때까지, 아니면 하보나와 파라다이스까지 중단된 여행을 다시 시작하도록 언젠가 나중에 풀려날 때까지, 줄곧 기한 없이 살았을 것이다.
66:4.13 (745.3) 사타니아 생명 기류에 있는 해독하는 보충물은 생명나무의 과실로부터 얻었는데, 이것은 칼리가스티아가 도착했을 때 놀라시아덱의 최고자들이 유란시아에 보낸, 에덴시아의 떨기나무였다. 달라마시아 시절에 이 나무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성전, 가운데 뜰에서 자랐고, 바로 이 생명나무의 열매가 영주 참모진의 물질적 존재가 그 나무에 접근할 수 있는 한, 무기한으로 줄곧 살게 만들었고, 이들은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할 존재였다.
66:4.14 (745.4) 진화 종족에게는 아무 가치가 없지만, 이 초월 영양은 칼리가스티아 1백인에게, 그리고 그들과 관련되었던 수정된 안돈 사람 1백 명에게, 계속된 생명을 주기에 아주 충분했다.
66:4.15 (745.5) 이와 관계되어, 안돈 사람 1백 명이 그들의 인간 생식질을 영주 참모진의 구성원에게 기여했을 때, 생명 운반자들은 이들의 필사 몸 안에 체계 회로의 보충물을 넣었다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그들은 이처럼 세세로 이어, 신체가 죽지 않고 참모진과 같은 때에 줄곧 살 수 있게 만들어졌다.
66:4.16 (745.6) 결국 안돈 사람 1백 명은 상관의 새로운 몸에 그들이 기여한 것을 알게 되었고, 바로 안돈 부족의 이 자손 1백 명은 영주의 유형 참모진의 개인 수행원으로서 본부에 남아 있었다.
66:5.1 (745.7) 1백인은 각각 10명으로 이루어진 10개 자치 회의에서 근무하도록 조직되었다. 이 열 회의 가운데 둘 이상이 합동 회의에서 만날 때, 달리가스티아가 그러한 연결 집회를 주관하였다. 이 10개 집단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66:5.2 (745.8) 1. 식품과 물질 복지 회의. 앙이 이 집단을 주관하였다. 이 유능한 집단은 먹을 것, 물ㆍ옷, 그리고 인류의 물질적 진보를 보살폈다. 그들은 우물 파기, 샘물 통제, 관개를 가르쳤다. 높은 산지로부터 온 사람과 북쪽에서 온 사람들에게 옷으로 쓰기 위하여 가죽을 처리하는 개량된 방법을 가르쳤고, 예술과 과학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천 짜기를 소개하였다.
66:5.3 (746.1) 먹을 것을 저장하는 방법에 큰 진전이 있었다. 먹을 것은 익히고, 말리고, 그을림으로 보존되었고, 이처럼 먹을 것은 최초의 재산이 되었다. 사람은 굶어죽을 위험에 대비하라고 가르침을 받았고, 굶주림은 주기적으로 세계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66:5.4 (746.2) 2. 동물을 길들이고 이용하는 위원회. 이 회의는 짐을 싣고 사람을 나르는 일에 인간을 돕고, 먹을 것을 제공하고, 나중에는 땅을 가는 데 쓸모 있을 가장 적합한 동물을 고르고 사육하는 과제에 전념했다. 본이 이 유능한 집단을 지도했다.
66:5.5 (746.3) 오늘날까지 길들인 동물로서 계속해 온 어떤 것들과 함께, 지금은 멸종되었지만, 몇 가지 종류의 유익한 동물을 길들였다. 사람은 오랫동안 개와 함께 살았고, 청인은 코끼리를 길들이는 데 이미 성공했다. 소도 조심스러운 사육 방법에 따라서, 가치 있는 식품의 근원이 되도록 무척 개량되었다. 버터와 치즈가 사람의 식단에서 보통 물건이 되었다. 사람들은 짐을 나르는 데 소를 사용하는 것을 가르침 받았지만, 말은 후일까지 길들이지 못했다. 이 집단의 참모들은 끌어당기는 일을 쉽게 하려고, 처음으로 바퀴 쓰는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66:5.6 (746.4) 이 시절에 소식을 전하는 비둘기가 처음으로 쓰였고, 긴 여행을 떠날 때 소식을 보내거나 도움을 청하려는 목적으로 사람들이 이 비둘기를 가지고 다녔다. 본 집단은 큰 판도르를 타는 새로 길들이는 데 성공했지만, 이 새들은 3만 년도 더 전에 멸종되었다.
66:5.7 (746.5) 3. 육식 동물의 정복에 관한 조언자. 원시인이 어떤 동물을 길들이려고 애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적대하는 동물 세계의 나머지 동물에게 먹히지 않도록 어떻게 자신을 보호하는가 배워야 한다. 단이 이 집단을 지휘하였다.
66:5.8 (746.6) 고대 도시에서 담을 쌓는 목적은 적대하는 사람들의 기습을 막을 뿐 아니라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담이 없이, 숲에서 사는 사람들은 나무 위 집, 돌 움막, 그리고 밤에 불을 유지하는 데 의존하였다. 따라서 이 선생들이 인간의 거처를 개량하는 법을 생도들에게 가르치는 데 많은 시간을 바치는 것이 아주 당연했다. 개량된 기술을 이용하고, 덫을 써서 동물을 정복하는 일이 크게 진보되었다.
66:5.9 (746.7) 4. 지식 전파 및 보존 담당 교직원. 이 집단은 그 초기 시절에 순전히 교육하는 노력을 조직하고 지도했다. 팟이 이를 주관하였다. 팟의 교육 방법은 고용을 감독하는 것이었고, 이에 개량된 노동 방법의 교육이 뒤따랐다. 팟은 첫 알파벳을 만들고 기록하는 체계를 소개하였다. 이 알파벳은 25 글자로 되어 있었다. 글쓰는 재료로 이 초기의 민족들은 나무 껍질, 진흙 서판, 석판, 두드린 가죽으로 만든 일종의 가죽 종이, 벌집으로 만든 어설픈 형태의 종이 같은 물질을 이용했다. 칼리가스티아의 모반이 있은 뒤에 곧 파괴된 달라마시아 도서관은 2백만이 넘는 따로 된 기록으로 이루어졌고 이것은 “팟의 집”이라고 알려졌다.
66:5.10 (746.8) 청인(靑人)은 알파벳 쓰기를 몹시 좋아했고, 그러한 길을 따라서 가장 크게 진보했다. 홍인은 그림 글자를 더 좋아했으며, 한편 황인종은 오늘날 사용하는 것과 비슷하게, 낱말과 관념을 대표하는 기호(記號)를 쓰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나중에 알파벳과 훨씬 많은 것이 반란을 뒤이은 혼란기에 세상에서 사라졌다. 칼리가스티아의 배반은 한 보편적 언어를 가질 희망이, 적어도 말할 수 없이 긴 세월 동안,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였다.
66:5.11 (747.1) 5. 산업 및 무역 위원회. 이 회의는 부족 안에서 산업을 촉진하는 데, 그리고 여러 평화로운 집단 사이에 무역을 증진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 지도자는 놋이었다. 이 집단은 온갖 형태의 원시 제조업을 권장했다. 원시인의 상상력을 끌기 위하여 많은 새로운 상품을 마련함으로 생활 수준의 향상에 직접 이바지했다. 과학 및 예술 회의가 생산한 개량된 소금의 무역을 크게 늘였다.
66:5.12 (747.2) 달라마시아의 여러 학교에서 교육받은 이 깨우친 집단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상업 신용이 실행되었다. 그들은 중앙의 신용(信用) 교환소로부터 돈표를 확보했고, 사람들이 이것을 물물 교환하는 실제 상품을 대신하여 받았다. 세계는 이 장사 방법을 몇십만 년 동안 개선하지 못했다.
66:5.13 (747.3) 6. 계시 종교 대학. 이 단체는 활동하는 데 느렸다. 유란시아 문명은 글자 그대로 모루와 망치 사이와 같이 필요와 두려움 사이에서 단련되었다. 그러나 이 집단은 행성 이탈의 격변이 있고 나서 후일에 혼란이 생겨 그들의 수고가 중단되기 전에, 생물을 두려워(귀신을 숭배)하는 대신에 창조자를 경외하도록 만들려는 시도는 상당히 진보했다. 이 회의의 우두머리는 합이었다.
66:5.14 (747.4) 영주의 참모진 가운데 아무도 진화를 까다롭게 만들 계시를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진화의 힘을 최대로 소모했을 때에야 그들은 계시를 발표했다. 그러나 합은 일종의 종교 예식을 확립하려는 도시 거주자들의 소망에 굴복하기는 했다. 그의 집단은 달라마시아 사람들에게 일곱 가지 예배하는 찬송을 마련해 주었고, 또한 그들에게 날마다 찬양하는 구절을 주었으며, 궁극에는 “아버지의 기도”를 그들에게 가르쳤는데 다음과 같다:
66:5.15 (747.5) “만물의 아버지여, 주의 아들에게 우리가 영광을 돌리오니, 은혜로 우리를 내려다보소서. 아버지 외에, 무서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소서. 우리의 신다운 선생들이 우리를 기뻐하게 만드시고, 언제까지나 우리 입술에 진리를 담아 주소서. 폭력과 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며, 장로들을 공경하고 이웃에 속하는 것을 존중하는 마음을 주소서. 이 계절에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할 푸른 풀밭과 새끼 많이 낳는 양 떼를 주소서. 약속하신 개량자가 하루빨리 오기를 기도하오며, 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 같이, 우리도 아버지의 뜻을 이 세상에서 실행하고자 하나이다.”
66:5.16 (747.6) 영주의 참모진은 종족을 개량하는 자연스런 수단과 평범한 방법을 쓰도록 제한을 받았어도, 생물학적으로 높이 발전하고 나서, 그 뒤에 진화로 성장하는 목표로서 새 종족, 아담의 선물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였다.
66:5.17 (747.7) 7. 건강과 생명의 수호자. 이 회의는 보건을 소개하고 원시적 위생을 증진하는 데 관심을 가졌고, 룻이 이를 지휘하였다.
66:5.18 (747.8) 그 회원들은 후일에 혼란한 와중에 잊혀지고 20세기까지 결코 다시 발견되지 않은 많은 것을 가르쳤다. 인류에게 익히고, 끓이고, 굽는 것이 질병을 피하는 수단이며, 또한 그렇게 익혀 먹는 것이 유아(幼兒)의 사망률을 크게 줄이고, 일찍 젖떼기를 쉽게 만든다는 것도 가르쳤다.
66:5.19 (747.9) 룻의 건강 수호자들이 초기에 가르친 많은 것이, 비록 상당히 왜곡되고 크게 바뀌었지만, 땅의 부족들 사이에 모세의 시절까지 지속하였다.
66:5.20 (748.1) 이 무지한 종족들 사이에서 위생을 증진하는 길에 큰 장애물은 많은 병의 진정한 원인이 너무 작아서 맨 눈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있었고, 또한 그들 모두가 불을 미신처럼 존중했기 때문이다. 쓰레기를 태우라고 그들을 설득하는 데 수천 년이 걸렸다. 그동안에 그들은 썩는 쓰레기를 파묻도록 재촉받았다. 이 시대에 위생에서 큰 발전은 건강을 주고 병을 없애는 햇빛의 성질에 관한 지식을 전파함으로부터 생겼다.
66:5.21 (748.2) 영주가 도착하기 전에, 목욕은 순전히 종교 예식이었다. 원시인들에게 건강 관습으로서 몸을 씻으라고 설득하기는 정말로 힘들었다. 한 주에 한 번 정오 예배에, 만인의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일과 관련하여 실행해야 할 정화(淨化) 예식의 일부로서, 룻은 마침내 종교 선생들이 물로 몸 씻기를 포함하도록 유도하였다.
66:5.22 (748.3) 이 건강 수호자들은 또한 개인적 우정의 약속으로서 침을 교환하거나 피를 마시는 것 대신에 악수를 소개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지도하는 상관들의 가르침을 강제한 압박 밑에서 풀려났을 때, 이 원시 민족들은 건강을 해치고 병을 퍼뜨리는 관습, 무지하고 미신을 믿는 옛 관습으로 서슴지 않고 되돌아갔다.
66:5.23 (748.4) 8. 행성의 예술 및 과학 회의. 이 무리는 초기 인간의 산업 기술을 개량하고, 아름다움에 대한 사람의 개념을 높이는 데 많이 이바지했다. 그들의 지도자는 멕이었다.
66:5.24 (748.5) 세상에 두루, 예술과 과학은 밑바닥에 있었지만, 달라마시아 사람들은 물리학과 화학의 기본을 배웠다. 도기(陶器)가 진보되고, 치장하는 예술이 모두 개량되었고,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보라 종족이 도착할 때까지, 음악은 그다지 진보하지 않았다.
66:5.25 (748.6) 선생들이 거듭하여 재촉했는데도, 이 원시인들은 증기력(蒸氣力) 실험에 찬성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갇혀 있는 수증기의 폭발하는 힘을 크게 두려워하는 것을 결코 이겨낼 수 없었다. 그러나 금속과 불을 가지고 작업하도록 마침내 설득되었다. 하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금속 조각은 초기의 인간에게 무서운 물건이었다.
66:5.26 (748.7) 멕은 안돈 족속의 문화를 진보시키고, 청인의 예술을 개선하느라고 큰 일을 하였다. 청인과 안돈 혈통의 혼합은 예술적으로 재주 있는 종류를 낳았고, 그들 가운데 여럿이 조각(彫刻)의 대가가 되었다. 그들은 돌이나 대리석을 가지고 일하지 않았지만, 구워서 단단해진 그들의 진흙 작품은 달라마시아의 동산을 장식했다.
66:5.27 (748.8) 가내(家內) 예술에서 큰 진보가 있었는데, 그 대부분은 길고도 어두운 반란 시대에 사라졌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결코 다시 발견되지 않았다.
66:5.28 (748.9) 9. 진보된 부족 관계의 관리자. 이 집단은 인간의 사회를 국가 수준으로 올리는 일을 맡은 집단이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툿이었다.
66:5.29 (748.10) 이 지도자들은 부족들 사이에 결혼하게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들은 심의를 거듭하고 서로 알게 될 충분한 기회가 있은 뒤에 구애(求愛)하고 결혼하는 것을 권장했다. 순전히 군사적인 전쟁 춤은 다듬어졌고, 귀중한 사회적 목표에 쓰이도록 만들어졌다. 여러 가지 경쟁하는 놀이가 소개되었지만, 이 옛 사람들은 심각한 민족이었고, 이 초기 부족들에게는 유머가 거의 없었다. 이 여러 관습 가운데 거의 아무것도 나중에 행성이 반란으로 붕괴된 뒤에 살아남지 않았다.
66:5.30 (749.1) 툿과 그 동료들은 평화로운 성질의 집단 관계를 육성하고, 전쟁을 규제하고 인간답게 하도록 만들며, 부족들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고, 부족 정부를 개량하려고 수고했다. 달라마시아 근방에서 상급 문화가 발달하였고, 이 개량된 사회 관계는 더 멀리 있는 부족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데 무척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남 아프리카, 케이프 타운의 20세기 사회가 북쪽에 있는 왜소한 부시맨의 투박한 문화와 전혀 다른 것과 같이, 영주의 본부에서 유행되는 문명의 형태는 다른 데서 진화하는 미개 사회와 아주 달랐다.
66:5.31 (749.2) 10. 부족 조정 및 종족 협동의 최고 법정. 반이 이 최고 회의를 지도하였는데, 이것은 인간사를 감독하는 책임을 맡은 모든 다른 아홉 특별 위원회의 상소(上訴)를 처리하는 법정이었다. 이것은 널리 활동하는 회의였고, 특별히 다른 집단에게 지정되지 않은 문제, 지상의 관심거리인 모든 문제를 맡았다. 이 선택된 집단은 유란시아 최고 법정의 기능을 맡도록 인가받기 전에, 미리 에덴시아의 별자리 아버지의 승인을 받았다.
66:6.1 (749.3) 세계 문화의 발달 정도는 그 토착 존재들의 사회적 유산(遺産)으로 측정되고, 문화의 확장 속도는 그 거주자들이 새롭고 진보된 관념을 이해하는 능력에 따라서 온전히 결정된다.
66:6.2 (749.4) 전통을 노예처럼 따르는 것은 감상적(感傷的)으로 지난날을 오늘과 연결함으로 안정과 협동을 낳지만, 마찬가지로 창의성을 죽이고 인격자의 창조 능력을 해방시키지 않는다. 칼리가스티아 1백인이 도착해서 그 시절의 사회 집단 안에서 개인의 창의성을 부르짖는 새 복음을 비로소 선포했을 때, 온 세계는 전통에 묶인 관습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그러나 이 유익한 통치는 오래지 않아 중단되어서, 종족들은 결코 관습에 예속된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난 적이 없으며, 풍습이 아직도 유란시아를 지나치게 지배한다.
66:6.3 (749.5) 칼리가스티아 1백인―사타니아 저택 세계의 졸업생들―은 예루셈의 예술과 문화를 잘 알았지만, 그러한 지식은 원시 인간이 가득한 미개 행성에서 거의 쓸모가 없었다. 이 현명한 존재들은 그 시절에 원시 민족들을 갑자기 변화시키거나 대규모로 향상시키는 일에 착수하는 것이 좋지 않음을 알았다. 인종이 느리게 진화하는 것을 잘 알았고, 땅에서 사람의 생활 형식을 고치려는 어떤 근본적 시도도 지혜롭게 삼갔다.
66:6.4 (749.6) 10개 행성 위원회는 각자 그들에게 맡겨진 관심거리를 향상시키려고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시작했다. 그들의 계획은 둘러싼 부족들 가운데 최고의 지성인들을 끌어들이고 훈련시킨 뒤에, 사회를 향상시키는 밀사로서 이들을 그 민족에게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66:6.5 (749.7) 한 민족이 특별히 요청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결코 그 민족에게 담당 밀사가 파송되지 않았다. 특정한 부족이나 종족의 향상과 진보를 위하여 수고한 자들은 반드시 그 부족이나 종족의 토착민이었다. 1백인은 우수한 종족의 버릇이나 도덕 관습조차 다른 부족에게 부과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들은 각 종족이 오래 지켜 온 관습을 향상하고 진보시키려고 언제나 참을성 있게 일했다. 유란시아의 단순한 사람들은 그들의 사회 관습을 달라마시아로 가져왔지만, 새롭고 더 좋은 관행과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문화와 접촉함으로, 그리고 우수한 지성인들과 관계를 가짐으로 그 관습을 향상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과정은 더디기는 했어도 아주 효과가 있었다.
66:6.6 (750.1) 달라마시아 선생들은 의식하여, 생물학적 진화로 생기는 순전한 자연 선택에 사회적 선택을 더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인간 사회를 어지럽히지 않았지만, 그 사회의 자연스러운 정상적 진화를 뚜렷이 가속하였다. 그들의 동기는 진화로 진보하는 것이요, 계시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었다. 인류는 가지고 있는 보잘것없는 종교와 도덕을 얻는 데 오랜 세월을 보냈다. 깨우친 우수한 존재들이 너무 가르치고 지나치게 계몽함으로 뒤떨어진 종족들을 향상시키는 일에 손댈 때, 반드시 그런 혼란과 절망이 생기는데, 이 초인간들은 그렇게 해서 인류로부터 이 보잘것없는 진보를 강탈하는 것이 좋지 않음을 잘 알았다.
66:6.7 (750.2) 아프리카의 심장부에서는 자식들이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계속 부모의 통제와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기독교 선교사들이 거기에 가서, 이 아이들이 21살이 된 뒤에, 전혀 부모의 제한에 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침으로 이 풍습을 한 세대 안에 갈아치우려고 애쓸 때, 다만 혼란과 모든 권한의 붕괴를 가져올 뿐이다.
66:7.1 (750.3) 영주의 본부는 지극히 아름다웠고, 비록 그 시절의 원시인에게 두려운 마음이 들도록 설계되었지만, 아주 검소했다. 축산업의 소개를 통해서 궁극에 농업의 발전을 북돋는 것이 이 수입된 선생들의 동기였으니까, 건물은 특별히 크지 않았다. 도시의 담 안에서 땅에 지은 시설은 약 2만의 인구를 부양하기 위하여 풀밭과 밭을 마련하기에 충분했다.
66:7.2 (750.4) 중앙에 예배를 위한 성전과 감독하는 초인간 집단의 10개 위원회의 저택 내부는 정말로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었다. 거주에 쓰이는 건물이 깔끔하고 깨끗함의 본보기였어도, 후일의 발전과 견주어서 모든 것이 무척 간단하고 아주 원시적이었다. 자연히 유란시아에 속하지 않은 어떤 방법도 이 문화 본부에서 이용되지 않았다.
66:7.3 (750.5) 영주의 유형 참모진은 간단하고 모범 되는 거처들을 주관했고, 그 거처들을 세계의 사회 중심과 교육 본부에서 머무르는, 학생으로 온 관찰자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좋은 인상을 주도록 고안된 집으로 유지하였다.
66:7.4 (750.6) 가족 생활의 분명한 질서, 그리고 비교적 안정된 위치에 있는 한 주거에서 한 가족이 함께 사는 것은 이 달라마시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며, 주로 1백인과 그 생도들의 본보기와 가르침 때문이었다. 달라마시아의 초인간 남녀들이 인류가 손자ㆍ손녀를 사랑하고 그 후손을 위하여 계획하도록 이끌기까지, 가정은 하나의 사회 단위로서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야만인은 자식을 사랑하지만, 문화인은 손자ㆍ손녀도 사랑한다.
66:7.5 (750.7) 영주의 참모진은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함께 살았다. 그들 자신이 낳은 아이가 없었던 것이 참말이지만, 달라마시아의 50 모범 가정은 안돈과 산긱 종족의 우수한 가족들로부터 모은 어린아이를 5백 명이 안 되게 데리고 있은 적이 없다. 이 아이들의 다수는 고아였다. 그들은 이 초월 부모의 단련과 훈련을 받았고, 그리고 나서 영주의 여러 학교에서 3년을 보낸 뒤에 (13살에서 15살까지 다녔다) 그들은 결혼할 자격이 있었고, 각 종족에서 필요한 부족들에게 영주의 밀사로서 임명받을 준비가 되었다.
66:7.6 (751.1) 팟은 산업 학교로서 시행한 달라마시아의 교육 계획을 후원했는데, 여기서 생도들은 실습으로 배우고, 실습을 통하여 날마다 유익한 과제를 수행함으로 힘들여 진출하였다. 이 교육 계획은 인품의 발달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무시하지 않았지만, 손으로 하는 훈련을 첫째로 쳤다. 교육은 개인에게, 또 집단으로 했다. 남자와 여자들이, 그리고 남녀가 같이 행동함으로 생도들을 가르쳤다. 이 집단 교육의 절반은 남녀 따로 행했고, 나머지 반은 남녀 공학이었다. 학생들은 개인으로서 손재주를 배웠고, 집단이나 학급을 이루어 사귀었다. 그들은 자기 또래의 사람들과 집단 작업을 하는 것 뿐 아니라, 더 나이 어린 집단, 더 나이 많은 집단, 그리고 어른들과 사귀도록 훈련을 받았다. 또한 가족 집단, 놀이하는 소집단, 학급과 같은 결합에도 익숙해졌다.
66:7.7 (751.2) 각자의 종족과 일하려고 메소포타미아에서 훈련받은 후일의 학생들 사이에는 홍인과 청인의 대표들과 함께, 서 인도의 산지(山地)로부터 온 안돈 사람들이 있었다. 더 나중에는 소수의 황인종도 받아들였다.
66:7.8 (751.3) 합은 원시 종족들에게 도덕률을 제시했다. 이 법전은 “아버지의 길”로 알려졌고, 다음 일곱 계명으로 구성되었다:
66:7.9 (751.4) 1. 만민의 아버지 외에 어떤 신(神)도 두려워하거나 섬기지 말라.
66:7.10 (751.5) 2. 세상의 통치자인 아버지의 아들을 거역하지 말고, 그의 초인간 동료들에게도 불경함을 보이지 말라.
66:7.11 (751.6) 3. 사람의 재판관 앞에 부름받았을 때 거짓말하지 말라.
66:7.12 (751.7) 4. 남자나 여자나 어린아이를 죽이지 말라.
66:7.13 (751.8) 5. 이웃의 물건이나 가축을 훔치지 말라.
66:7.16 (751.11) 이것이 거의 30만 년 동안 달라마시아의 법이었다. 그리고 이 법이 새겨진 많은 돌이 지금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의 해안에서 뚝 떨어져 바다 밑에 놓여 있다. 각 요일에 이 계명들 가운데 하나를 명심하고, 이것을 인사에, 그리고 식사 때 감사를 드리려고 쓰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66:7.17 (751.12) 이 시절의 시간 측정은 음력의 달이었고, 이 기간은 28일로 계산되었다. 낮과 밤을 빼고, 이것이 초기 민족들에게 알려진 유일한 시간 계산이었다. 7일로 된 한 주를 달라마시아 선생들이 소개하였고, 이것은 7이 28의 4분의 1이라는 사실에서 생겨났다. 초우주에서 7이라는 수의 중요성은 의심할 여지 없이, 영적 암시를 보통의 시간 계산에 집어넣을 기회를 그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한 주 기간의 자연스런 기원은 하나도 없다.
66:7.18 (751.13) 그 도시 주위에 160킬로미터 반지름 안에 있는 시골은 잘 정착되었다. 도시 바로 둘레에서, 영주 학교의 졸업생 수백 명이 동물 사육에 종사했고, 그렇지 않으면 그 참모진과 수많은 인간 조수(助手)로부터 받은 지침을 수행했다. 몇몇은 농사와 원예에 종사하였다.
66:7.19 (751.14)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 것에 대한 벌로서, 인류가 농사 짓는 신세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얼굴에서 땀을 흘리며 너희는 들의 열매를 먹을지니라” 하는 것은 배반한 칼리가스티아의 지휘 밑에서 어리석은 짓, 루시퍼 반란에 사람이 가담했다는 이유로 벌을 내리는 선고가 아니었다. 땅을 경작하는 것은 진화 세계에서 진보하는 문명을 세우는 데 본래부터 있다. 행성 영주와 그 참모진이 유란시아에 도착한 때와 칼리가스티아가 모반자 루시퍼와 운명을 같이 하기로 작정했던 그 비극의 시절 사이에 개재하는 30만 년 동안 내내, 이 명령은 그들의 모든 가르침의 핵심이었다. 흙을 가지고 일하는 것은 저주(詛呪)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모든 활동 가운데 가장 사람다운 것을 누리도록 그렇게 허락받은 모든 사람에게 주는 가장 고귀한 축복이다.
66:7.20 (752.1) 반란이 터졌을 때, 달라마시아에 거주하던 인구는 거의 6천 명이었다. 이 수는 정규 학생들을 포함하지만, 늘 1천 명이 넘는 방문자와 관찰자를 넣지 않는다. 그 아득히 먼 시절에 얼마나 놀라운 진보가 이루어졌는가 너희는 거의 또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 시절에 인간이 얻은 거의 모든 놀라운 소득은 사람을 속이고 선동하는 칼리가스티아의 재난에 뒤따라 생긴 끔찍한 혼란과 비참한 영적 암흑으로 인하여 깨끗이 지워졌다.
66:8.1 (752.2) 칼리가스티아의 오랜 생애를 돌이켜보건대, 우리는 그의 행동에서 눈길을 끌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뚜렷한 모습을 발견한다. 그는 극도로 개인주의자였다. 거의 모든 항의 집단을 편드는 경향이 있었고, 은근한 비평을 가볍게 표현하는 자를 보통 동정하였다. 권한에 지배받을 때 불안해하고, 어떤 형태의 감독이라도 얼마큼 분개하는 이 경향이 일찍부터 나타난 것을 우리는 탐지한다. 선임자의 조언을 조금 분하게 여기고, 상관의 권한 밑에서 얼마큼 불안해했지만, 그런데도 시험이 다가왔을 때는 언제나 우주 통치자들에게 충성하고, 별자리 아버지들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가 부끄럽게도 유란시아를 저버릴 그때까지, 아무런 진짜 잘못이 결코 그에게서 발견되지 않았다.
66:8.2 (752.3) 루시퍼와 칼리가스티아는 모두, 그들의 비판하는 경향, 또 자만심이 미묘하게 발전하고 이와 관계되어 자신을 중요시하는 느낌이 지나친 것에 관하여, 참을성 있는 가르침과 사랑의 경고를 받아 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도와주려는 이 모든 시도가 근거 없는 비판으로, 개인의 자유를 부당하게 간섭하는 것이라고 오해되어 왔다. 칼리가스티아와 루시퍼는 친절한 조언자들이 몹시 비난받을 수 있는 동기로 움직인다고 판단했고, 그런 비난할 만한 동기가 자신의 뒤틀린 생각과 그릇 인도된 계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차츰 자라는 자신의 이기심으로 사심(私心)없는 조언자들을 판단하였다.
66:8.3 (752.4) 칼리가스티아 영주가 도착한 때로부터, 행성의 문명은 거의 30만 년 동안 어지간히 정상 방법으로 진보하였다. 생명을 수정하는 구체이고, 따라서 불규칙하게 일어나는 수많은 것과 진화에서 변동하는 특별한 사건들에 지배되는 것을 제쳐놓고, 루시퍼 반란, 그리고 동시에 일어난 칼리가스티아 배반이 있던 시절까지, 유란시아는 그 행성 경력을 볼 때 아주 흡족하게 진보하였다. 그 뒤의 모든 역사는, 나중에 아담과 이브가 그들의 행성 사명을 마치는 데 실패한 것 뿐 아니라, 이 크나큰 실수로 말미암아 분명히 바뀌었다.
66:8.4 (752.5) 유란시아의 영주는 루시퍼 반란이 있을 당시에 어두운 길에 빠졌고, 따라서 행성에서 오래 가는 혼란을 일으켰다. 별자리 통치자 및 다른 우주 권력자들이 같이 행동함으로, 그는 나중에 군주 권한을 빼앗겼다. 그는 아담이 행성에서 머무르던 때까지, 고립된 유란시아의 불가피한 흥망을 함께 나누었고, 새로운 보라 민족―아담과 이브의 후손―의 생명력을 주입함으로 필사 종족들을 개량하려는 계획이 유산(流産)되도록 만드는 데 무엇인가 기여하였다.
66:8.5 (753.1) 타락한 영주가 인간사를 어지럽힐 힘은 아브라함 시절에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필사자로 육신화함으로 엄청나게 단축되었고, 나중에 미가엘이 육신을 입고 살던 시절에, 이 배반한 영주는 마침내 유란시아에서 모든 권한을 빼앗겼다.
66:8.6 (753.2) 유란시아에서 악마가 몸으로 와 있다는 교리는, 비록 배신하고 불의한 칼리가스티아가 행성에 있었다는 데 얼마큼 근거가 있지만, 그런데도 그러한 “악마”가 정상 인간의 정신이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그 정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가르침은 통째로 허위이다.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수여되기 전에도, 칼리가스티아나 달리가스티아도 결코 필사자를 억압하거나 인간의 의지를 거슬러서 무엇인가 하도록 어떤 정상 인간에게도 강요할 수 없었다. 사람의 자유 의지는 도덕적인 일을 최종으로 좌우한다. 깃드는 생각 조절자조차 사람 자신의 의지가 택하는 것에 반대하여, 한 가지 생각이나 한 가지 행위를 사람에게 강제하려고 하지 않는다.
66:8.7 (753.3) 이제 그 영역의 이 모반자는, 옛 부하들을 해칠 권력을 다 빼앗기고서, 유버르사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루시퍼 반란에 참가한 모든 자에게 최종 판결을 내리기를 기다린다.
67:0.1 (754.1) 과거의 어떤 중대한 시대에 관한 지식, 특히 행성에 반란이 일어난 것과 그 결과에 관한 지식이 없이는 유란시아에서 인간의 존재와 연결된 문제들을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 비록 이 동란은 유기체 진화의 걸음을 심각하게 방해하지 않았어도, 사회의 진보와 영적 발전의 과정을 두드러지게 수정하였다. 행성의 초물리적 역사 전체가 파괴적인 이 재난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
67:1.1 (754.2) 루시퍼의 조수, 사탄이 한 번 정기 검열로 방문했을 때, 30만 년 동안 칼리가스티아는 유란시아를 책임지고 있었다. 사탄이 행성에 도착했을 때, 그의 모습은 사악한 위풍을 그린 너희의 풍자 만화들을 조금도 닮지 않았다. 그는 대단히 눈부신 라노난덱 아들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놀라지 말지니, 바로 사탄은 눈부신 빛의 생물이라.”
67:1.2 (754.3) 이 검열을 받는 중에 사탄은 루시퍼가 그때 제안한 “자유 선언서”를 칼리가스티아에게 알려 주었다. 지금 우리가 알다시피, 영주는 반란이 선포되고 나서 행성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찬성하였다. 지역 우주에 충성하는 성격자들은, 맡긴 책임을 이렇게 미리 계획하여 배반한 것 때문에 칼리가스티아 영주를 특별히 멸시한다. 창조 아들은 이러한 경멸을 이 말씀으로 표현했다: “너는 너의 지도자 루시퍼와 같으니, 그는 죄가 가득하여 불의(不義)를 지속하였느니라. 진리 가운데 거하지 않았은즉, 그는 자신을 높이기 시작할 때부터 왜곡하는 자였더라.”
67:1.3 (754.4) 한 지역 우주의 어떤 행정 사무에서도, 새로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진화하는 필사자의 복지와 안내를 책임지는 행성 영주에게 맡긴 것보다 더 신성하게 생각되는 높은 직무는 없다. 그리고 온갖 형태의 악한 것 중에서 아무것도, 맡긴 책임을 저버리고 자기가 신임하는 친구들에게 불충하는 것보다 성격의 지위를 더 파괴하지 않는다. 깊이 숙고하여 이 죄를 저지르면서, 성격이 아주 완전히 비뚤어졌기 때문에, 칼리가스티아의 머리는 그 이후로 결코 다시 균형을 완전히 찾을 수 없었다.
67:1.4 (754.5) 죄를 보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다. 그러나 우주 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죄는 알면서 우주의 현실에 저항하는 성격자의 태도이다. 잘못은 현실을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것이라 여길 수도 있다. 악한 것은 우주의 현실을 부분적으로 이루거나 그 현실에 그릇되게 적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죄는 신의 실체에 일부러 저항하는 것―멀쩡한 정신으로 영적 진보를 반대하는 것―이요, 한편 불의는 인식된 현실에 대하여 드러내놓고 끈질기게 항거하는 것이요, 우주에서 미친 짓에 가까이 가도록 성격이 붕괴되는 정도를 의미한다.
67:1.5 (755.1) 잘못은 지능이 날카롭지 못함을 가리키며, 악(惡)은 지혜가 모자람, 죄는 지나친 영적 빈곤을 가리킨다. 하지만 불의(不義)는 성격자의 통제력이 사라진 것을 가리킨다.
67:1.6 (755.2) 그리고 죄를 아주 여러 번 선택하고 아주 빈번히 되풀이할 때, 죄는 버릇이 될 수 있다. 습관으로 죄를 저지르는 자는 쉽게 불의하게 되고, 우주와 거기 있는 모든 신다운 실체에 대항하여 마음을 다하여 모반하는 자가 될 수 있다. 온갖 형태의 죄가 용서 받을 수 있지만, 불의에 굳어진 자가 언제라도 그릇된 행동 때문에 진지하게 슬픔을 맛보거나 죄의 용서를 받아들일까 우리는 의심이 든다.
67:2.1 (755.3) 사탄의 검열이 있은 뒤에 조금 있다가, 그리고 행성 행정부가 유란시아에서 바야흐로 대단한 성과를 얻으려 하기 직전에, 칼리가스티아는 동료 달리가스티아와 오랫동안 연장된 회담을 가졌고, 그 뒤에 달리가스티아는 유란시아의 10개 위원회의 특별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집회는 칼리가스티아 영주가 자신이 유란시아의 절대 군주라 선포하려고 한다는 발표로 시작되었고, 행성 정부가 다시 조직되고 행정 권한을 가진 직책들이 나중에 다시 분배될 때까지, 모든 행정 집단이 모든 기능과 권력을 수탁자인 달리가스티아의 손으로 넘겨줌으로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67:2.2 (755.4) 이 놀라운 요구가 발표된 뒤에, 최고 조정 회의의 의장, 반의 대가다운 호소가 뒤따랐다. 탁월한 행정관이자 유능한 이 법학자는 칼리가스티아가 제안한 과정이 행성의 반란에 가까이 가는 행위라고 낙인을 찍고, 사타니아의 체계 군주 루시퍼에게 상소(上訴)가 올라갈 수 있을 때까지, 회의에 참석한 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참여를 삼가라고 호소했는데, 그는 참모진 전부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따라서, 상소가 예루셈으로 올라갔는데, 당장에 칼리가스티아가 유란시아에서 최고 군주라고 지명하며 그의 지침에 절대로, 도전하지 않고 충성할 것을 지시하는 명령이 돌아왔다. 이 놀라운 소식에 답하여, 기품 있는 반은 일곱 시간에 걸쳐 기억에 남을 연설을 했으며, 이 연설에서 달리가스티아ㆍ칼리가스티아ㆍ루시퍼가 네바돈 우주의 통치권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정식으로 고발하였다. 그리고 그는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에게 지지와 확인을 받으려고 호소했다.
67:2.3 (755.5) 그동안에 체계의 회로들이 단절되었고, 유란시아는 고립되어 버렸다. 행성에 있는 하늘 생명의 무리는 모두 갑자기 아무 경고 없이 고립되고, 어떤 외부의 상담과 조언도 받지 못하게 완전히 단절된 것을 발견했다.
67:2.4 (755.6) 달리가스티아는 칼리가스티아가 “유란시아의 하나님이요 만민 위에 최고”라고 선포했다. 그들 앞에 이렇게 선포되자, 논쟁의 선이 뚜렷하게 그어졌다. 각 집단은 자기네끼리 물러나서 심의를 시작했고, 이 논쟁은 결국 행성에 있던 모든 초인간 성격자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었다.
67:2.5 (755.7) 세라핌과 케루빔과 기타 하늘 존재들이 이 모진 싸움에, 길고도 죄 많은 이 투쟁의 결정에, 말려들었다. 유란시아가 고립될 때 유란시아에 어쩌다가 있었던 많은 초인간 무리가 여기에 묶여 있었고, 세라핌과 그 동료들처럼, 죄와 올바름 사이에―루시퍼의 길과 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뜻 사이에―선택하도록 강요되었다.
67:2.6 (756.1) 7년이 넘도록 이 싸움이 이어졌다. 관련된 모든 성격자가 마지막 결정을 내릴 때까지, 에덴시아 당국은 간섭하거나 끼어들려 하지 않았고, 끼어들지도 않았다. 그때가 되기까지, 반과 충성스러운 동료들은 그들이 정당함을 확인받거나, 오래 끌었던 걱정과 견딜 수 없는 불안에서 풀려나지도 못했다.
67:3.1 (756.2) 사타니아의 서울, 예루셈에서 반란이 터진 것을 멜기세덱 회의가 방송했다. 비상시 멜기세덱들이 즉시 예루셈에 파송되었고, 가브리엘은 권한을 도전받은 창조 아들의 대표로서 행동하겠다고 자원하였다. 사타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난 사실이 방송되는 것과 함께, 그 체계는 자매 체계들로부터 고립되고 격리되었다. “하늘에서,” 사타니아의 본부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그 전쟁은 지역 체계의 어느 행성에나 퍼졌다.
67:3.2 (756.3) 유란시아에서 1백인의 유형(有形) 참모진 가운데 40명이 (반을 넣어서) 반란에 가담하기를 거절했다. 참모진의 많은 인간 조수(수정된 사람 및 다른 사람들)도 또한 미가엘과 그의 우주 정부를 용감하고 고귀하게 방어한 자였다. 세라핌과 케루빔 사이에서 성격자들이 끔찍하게 분실되었다. 행성에 배치된 행정 및 과도기 세라핌 가운데 거의 절반이 루시퍼의 운동을 지지하여, 그들의 지도자 및 달리가스티아와 합세하였다. 1차 중도인(中道人) 중에서 40,119명이 칼리가스티아와 손을 잡았으나 이 존재들 가운데 나머지는 맡긴 책임에 충실한 채로 남아 있었다.
67:3.3 (756.4) 배반한 영주는 불충한 중도인과 기타 무리의 반란 성격자들을 집결시키고 그들이 그의 명령을 집행하도록 조직했고, 한편 반은 충성하는 중도자와 기타 충실한 무리를 모으고 행성 참모진과 버려진 다른 하늘 성격자들을 구하기 위하여 큰 전투를 시작했다.
67:3.4 (756.5) 이 투쟁이 있던 시기에 충성파는 달라마시아 동쪽에 몇 킬로미터 떨어져, 담이 없고 보호가 잘 되지 않은 촌락에 거주했다. 그러나 깨어 있고 항상 지키는 충성하는 중도인들이 그들의 주거를 낮에도 밤에도 경계했고, 그들은 귀중한 생명나무를 가지고 있었다.
67:3.5 (756.6) 반란이 터지자, 충성하는 케루빔과 세라핌들은 충실한 중도자 3명의 도움을 받아서 생명나무의 관리를 맡았고, 오직 참모진에서 충성파 40명, 그리고 그들과 관계된 수정된 필사자들이 이 에너지 식물의 열매와 잎을 먹도록 허락했다. 참모진의 동료인 이 수정된 안돈 족속은 56명이 있었고, 불충한 참모진에서 안돈 수행원 16명은 주인을 따라서 반란에 가담하기를 거절했다.
67:3.6 (756.7) 칼리가스티아 반란이 터졌던 중대한 7년에 걸쳐서 내내, 반은 사람ㆍ중도자ㆍ천사로 이루어진 그의 충성스러운 군대를 보살피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했다. 흔들림 없이 우주 정부에 그렇게 충성하는 태도를 반이 유지하게 한 그 영적 통찰력과 정신의 확고함은 맑은 생각, 지혜로운 생각, 논리적 판단, 진지한 동기, 사심 없는 목적, 지적 충성, 체험의 기억, 단련받은 인품에서, 그리고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의심하지 않고 헌신한 데서 생긴 산물이었다.
67:3.7 (756.8) 기다리는 이 7년은 마음을 살피고 혼을 단련하는 시간이었다. 한 우주의 사무에서 그러한 위기는 영적 선택의 한 요인으로서 지성이 얼마나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는가 보여준다. 교육ㆍ훈련ㆍ체험은 진화하는 모든 도덕적 인간이 내리는, 생사를 좌우하는 대부분의 결정에서 요인이 된다. 그러나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의 뜻과 길에 충성으로 헌신하는 놀라운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완전히 헌신한 인간 의지에게 능력을 주도록, 깃드는 영이, 결정하는 인격의 힘과 바로 접촉하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반의 수정된 인간 동료, 아마돈의 체험에서 일어났다.
67:3.8 (757.1) 아마돈은 루시퍼 반란에서 뛰어난 인간 영웅이다. 안돈과 폰타의 이 남자 후손은 영주의 참모진에게 생명질(生命質)을 기여한 1백인 중에 하나였고, 그 사건 이후로 늘, 반에게 동료이자 인간 조수로서 부속되었다. 길고도 벅찬 투쟁을 통해서 내내, 아마돈은 두령의 편에 섰다. 7년에 걸친 투쟁 전체를 통해서, 아마돈과 충성스러운 동료들이 머리가 좋은 칼리가스티아의 온갖 속이는 가르침에 불굴의 정신으로 저항하는 동안에, 진화 종족의 출신인 이 사람이 달리가스티아의 궤변에 끄떡도 하지 않고 버틴 것은 감격스러운 광경이었다.
67:3.9 (757.2) 최대의 지능, 그리고 우주 사무에서 광대한 체험을 가진 칼리가스티아는 잘못된 길에 빠졌다―죄를 품었다. 최소의 지능을 가지고 우주 체험이 전혀 없는 아마돈은 우주에 봉사하는 일에 굳게 견디고, 동료에게 굳게 충성하였다. 반은 지적 결의와 영적 통찰력을 멋지고 효과 있게 조합한 가운데 지성과 영을 이용했고, 이렇게 함으로 인격의 실현을 체험하는 수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등급에 도달했다. 지성과 영이 완전히 하나가 되면, 초인간적 가치가 있는 것을, 아니 상물질 실체까지도, 창조하는 가능성이 된다.
67:3.10 (757.3) 이 비극의 시절에 술렁이던 사건들을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다. 그러나 드디어 마지막 성격자가 최종 결정을 내렸고, 그때, 그러나 그제서야, 에덴시아의 최고자 한 분이 유란시아에서 권한을 몰수하려고 긴급 멜기세덱들과 함께 도착했다. 칼리가스티아가 군림했던 전체 모습을 적은 기록은 예루셈에서 지워졌고, 행성을 복원시키는, 시험 시대가 막을 열었다.
67:4.1 (757.4) 마지막 출석을 불렀을 때, 영주 참모진의 유형 참모들은 다음과 같이 줄을 선 것이 발견되었다. 반과 그의 조정 법정 전부가 충성한 채로 남아 있었다. 앙과 식량 회의에서 세 참모는 살아남았다. 동물 사육 위원회는 다 반란에 휩쓸렸고, 마찬가지로 동물 정복 고문들도 다 그렇게 되었다. 팟과 교육 직원에서 다섯 참모가 구제되었다. 놋과 산업 및 무역 위원회는 모두 칼리가스티아와 합세하였다. 합과 계시 종교 대학 전부가 반과 그의 고귀한 집단과 함께 충성한 채로 남았다. 룻과 건강 위원회 전부가 분실되었다. 예술 및 과학 회의는 전부 충성한 채로 남았지만, 툿과 부족 정부 위원회는 모두 분실되었다. 이처럼 1백인 가운데 40명은 구제되었고 나중에 예루셈으로 옮겨갔으며, 거기서 파라다이스로 가는 여행을 다시 시작했다.
67:4.2 (757.5) 행성 참모진에서 반란에 동조한 60명은 놋을 지도자로 뽑았다. 그들은 모반하는 영주를 위해서 마음을 다하여 일했지만, 체계의 생명 회로가 주는 영양을 빼앗긴 것을 곧 발견했다. 그들은 필사 존재의 지위로 강등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정말로 초인간이었지만, 동시에 물질이고 필사자였다. 그들의 수를 늘이려는 노력으로, 달리가스티아는 최초의 60명과 수정된 안돈 동료 44명이 머지 않아 죽음으로 사라질 운명을 가진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즉시 성교로 자식을 낳으라고 명령했다. 달라마시아가 멸망한 뒤에, 불충한 참모들은 북쪽과 동쪽으로 옮겨갔다. 그들의 후손은 놋 족속으로, 그들이 거하던 곳은 “놋의 땅”으로 오랫동안 알려졌다.
67:4.3 (758.1) 반란으로 인하여 버림받고 지상의 아들딸과 곧 짝지은 이 비범한 초인간 남녀들의 존재는 신들이 필사자들과 짝지으려고 내려왔다는, 전설로 내려온 이야기를 쉽게 낳았다. 이처럼 신화(神話)의 성질을 가졌지만, 반란 이후 시절의 사실에 근거를 둔 수많은 전설이 생겨났다. 이것은 조상이 놋 족속 및 그 후손들과 이렇게 접촉한 다양한 민족의 민속 이야기와 전통에서 자리를 차지했다.
67:4.4 (758.2) 영적 영양을 빼앗긴, 모반한 참모들은 결국 자연사로 죽었다. 나중에 인류의 우상 숭배의 상당한 부분은 칼리가스티아 시절에 상당히 존경받았던 이 존재들의 기억을 지속하려는 소망에서 생겨났다.
67:4.5 (758.3) 참모진 1백명이 유란시아에 왔을 때, 그들은 임시로 생각 조절자로부터 분리되었다. 멜기세덱 관리자들이 도착하고 나서 즉시, 충성한 인격자들은 (반을 빼고) 예루셈으로 돌아갔고, 그들을 기다리던 조절자와 다시 뭉쳤다. 우리는 반역한 참모 60명의 운명을 모른다. 관계된 조절자들은 아직도 예루셈에서 기다린다. 루시퍼 반란 전부가 마침내 판결되고 모든 참가자의 운명이 선포될 때까지, 의심할 여지 없이, 문제는 지금 상태대로 남을 것이다.
67:4.6 (758.4) 천사와 중도자와 같은 존재들은 칼리가스티아와 달리가스티아처럼 찬란하고 신임받는 통치자가 길을 잃는 것―배반의 죄를 저지르는 것―을 상상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죄에 빠진 자들은―일부러 또는 미리 계획하여 반란에 들어가지는 않았는데―신임했던 지도자들에게 속은 자기 상관들에게 잘못 끌려갔다. 마찬가지로 원시적으로 생각하는 진화된 필사자의 지지를 얻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67:4.7 (758.5) 예루셈과 잘못에 빠진 여러 행성에서 루시퍼 반란의 희생자가 된 모든 인간 및 초인간 존재의 대다수는 진심으로 어리석은 짓을 뉘우친 지 오래다. 그리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사타니아 반란 사무의 판결을 아주 최근에 시작했는데, 그들이 마침내 판결을 마칠 때, 진지하게 뉘우친 모든 그러한 존재가 어떤 방법으로 회복되고, 우주의 어떤 단계에 봉사하도록 회복될 것이라고 우리는 참으로 믿는다.
67:5.1 (758.6) 반란의 선동이 있은 뒤에, 달라마시아와 그 근처에서 거의 50년 동안 큰 혼란이 휩쓸었다. 빈틈없이, 철저하게 온 세계를 다시 조직하는 일이 시도되었다: 문화를 증진하고 종족을 개량하는 정책으로서, 혁명이 진화를 대체하였다. 달라마시아와 그 근처에 있던 우수하고 어느 정도 훈련받은 체류자들 사이에 문화적 지위의 갑작스런 진보가 나타났지만, 바깥에 있는 민족들에게 이 새로운 급진적 방법을 시도했을 때, 말할 수 없는 혼란과 민족의 수라장이 당장에 일어난 결과였다. 그 시절에 절반 진화된 원시인은 자유를 재빨리 방종(放縱)으로 풀이하였다.
67:5.2 (758.7) 반란이 있고 나서 바로 뒤에, 선동했던 참모진 전부가 반 야만인의 떼에 대항하여 그 도시를 열심히 방어하는 데 말려들었고, 이 반 야만인들은 때 이르게 그들에게 가르쳐 준 자유주의의 결과로 그 담을 포위했다. 그 아름다운 본부가 남쪽의 물결 밑에 가라앉기 몇년 전에, 그릇 인도되고 잘못된 가르침을 받은, 달라마시아 후배지(後背地)의 부족들이 반 야만스런 공격으로 그 찬란한 도시를 이미 휩쓸었고, 탈퇴한 참모진과 그 동료들을 북쪽으로 몰아냈다.
67:5.3 (759.1) 개인과 집단에게 자유를 주자는 생각을 따라서 인간 사회를 즉시 다시 건설하려는 칼리가스티아의 계획은 재빠른 실패, 대체로 완벽한 실패인 것이 입증되었다. 사회는 급히 그 옛날의 생물학적 수준으로 가라앉았고, 혼란에 빠진 세계를 이 동란이 전보다 더 나쁘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으니까, 발전하려는 투쟁은 칼리가스티아 체제가 시작될 때 있던 자리보다 그다지 앞서지 않은 데서 모두 다시 시작되었다.
67:5.4 (759.2) 반란이 있은 지 162년이 지나서 해일(海溢)이 달라마시아를 휩쓸었고, 행성의 본부는 바닷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 찬란한 시대에 있었던 귀한 문화의 거의 모든 자취가 지워질 때까지, 이 땅은 다시 솟아나지 않았다.
67:5.5 (759.3) 세계의 처음 서울이 물에 잠겼을 때, 그 도시에는 유란시아에서 가장 낮은 부류의 산긱 종족들만 살고 있었고, 이 배반자들은 아버지의 성전을 빛과 불의 거짓 신, 녹에게 바친 사당(祠堂)으로 이미 바꾸어 버렸다.
67:6.1 (759.4) 반을 따르는 자들은 인도 서부의 고지로 일찍 물러났고, 거기서 혼란에 빠진 낮은 땅 민족들의 공격을 면했다. 그 은둔처로부터, 초기 바도난 선조가 산긱 부족들이 태어난 시절 바로 전에 인류의 복지를 위하여 모두 영문 모르고서 한때 일했던 것 같이, 그들은 세계를 복원할 계획을 세웠다.
67:6.2 (759.5) 멜기세덱 관리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반은 인간사의 행정을 각자 4명으로 된 10개 위원회의 손에 맡겼고, 이 집단은 영주의 체제와 똑같았다. 거주하는 선임 생명 운반자들은 이 40인의 회의를 임시 지도하는 일을 맡았고, 이것은 기다리던 7년 동안 내내 활동했다. 충성한 참모 39명이 예루셈으로 돌아갔을 때, 아마돈 족속의 비슷한 집단이 이 책임을 맡았다.
67:6.3 (759.6) 이 아마돈 족속은 아마돈이 속했던 충성한 안돈 사람 144명의 집단에서 비롯하였고, 이들은 그의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집단은 남자 39명과 여자 105명으로 구성되었다. 이 가운데 56명은 불사(不死)의 지위를 가졌는데, 모두가 (아마돈을 제외하고) 참모진의 충성한 사람들과 함께 옮겨졌다. 이 귀중한 무리에서 나머지는 반과 아마돈의 지휘 하에 필사 시대가 끝날 때까지 땅에서 계속 있었다. 그들은 번식하고, 반란 이후 시기에 길고도 어두운 세월을 통해서, 세상을 위하여 지도력을 계속 마련해 준 생물학적 효소였다.
67:6.4 (759.7) 반은 아담의 시절까지 유란시아에 남아 있었고, 행성에서 활동하는 모든 초인간 성격자에게 이름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반과 아마돈은 15만 년이 넘도록, 멜기세덱들이 베푸는 특화된 생명 봉사와 함께, 생명나무의 기법으로 목숨을 유지하였다.
67:6.5 (759.8) 선임 별자리 통치자, 곧 놀라시아덱의 최고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확인을 받고서, 행성 관리자였던 12명의 멜기세덱의 회의가 유란시아의 사무를 오랫동안 관리했다. 한 자문 회의가 멜기세덱 관리자들과 관련되어 있었고 이렇게 구성되었다: 타락한 영주의 충성스러운 조수 중에서 1명, 거주하는 생명 운반자 2명, 견습 훈련을 받는, 삼위일체를 체험한 아들 1명, 자원하는 교육 아들 1명, 아발론의 찬란한 저녁별 1명 (정기적으로), 세라핌의 우두머리와 케루빔의 우두머리, 두 이웃 행성으로부터 온 고문들, 하위 천사 생명의 총독, 중도인의 사령관 반. 이렇게 유란시아는 아담이 도착할 때까지 통치되고 관리되었다. 용감하고 충성스러운 반이, 유란시아의 사무를 그렇게 오랫동안 관리한 행성 관리자 자문 회의에서 한 자리에 배치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67:6.6 (760.1) 유란시아의 멜기세덱 관리자 12명은 영웅다운 일을 해냈다. 그들은 문명의 잔재를 보존했으며, 반은 그들의 행성 정책을 충실하게 집행했다. 반란이 있은 뒤 1천 년 안에, 그는 세계에서 널리 흩어진, 350개가 넘는 상급 집단을 가지고 있었다. 이 문명의 전진 기지(基地)들은, 산긱 종족, 특히 청인과 놋 족속과 조금 섞인, 충성스러운 안돈 사람들로 대체로 구성되었다.
67:6.7 (760.2) 반란으로 끔찍한 좌절이 있었는데도, 땅에는 생물학상으로 장래가 보이는 좋은 핏줄이 많이 있었다. 멜기세덱 관리자들의 감독 하에, 반과 아마돈은 계속하여 인류의 자연스러운 진화를 돌보았고, 궁극에 유란시아로 물질 아들과 딸의 파견을 정당화한 수준에 이를 때까지, 사람의 신체적 진화를 진척시켰다.
67:6.8 (760.3) 반과 아마돈은 아담과 이브가 도착하고 나서 얼마 안 되기까지 땅에 남아 있었다. 그 뒤에 몇년이 지나서 그들은 예루셈으로 옮겨졌고, 거기서 반은 그를 기다리던 조절자와 다시 합쳤다. 파라다이스의 완전함, 그리고 모이고 있는 필사 최후 군단의 밝혀지지 않은 운명에 이르는 멀고 먼 길에서, 앞으로 가라는 명령을 기다리면서 반은 지금 유란시아의 이익을 위하여 수고한다.
67:6.9 (760.4) 루시퍼가 유란시아에서 칼리가스티아를 지지한 뒤에, 반이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에게 상소했을 때, 별자리 아버지들은 반이 주장하는 모든 쟁점에서 즉시 그를 지지하는 결정을 보냈다는 것을 기록해야 한다. 이 판결은 그에게 미치지 못했는데, 그 판결이 이동 중에 있을 때 행성의 통신 회로가 두절되었기 때문이다. 겨우 최근에야 이 실제 판결이 중계하는 에너지 송신자의 수중에 던져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고, 거기서 그것은 유란시아가 고립된 이후로 죽, 버려진 채로 있었다. 유란시아 중도자들이 조사한 결과로 이것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이 판결의 발표는 유란시아가 별자리 회로에 회복되기까지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행성간 통신에서 생긴 이 명백한 사고(事故)는 에너지 송신자들이 정보를 받고 보낼 수 있지만, 통신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길 수 있었다.
67:6.10 (760.5) 사타니아의 법적 기록에서 반의 절차상 지위는 에덴시아 아버지들의 이 판결이 예루셈에서 기록될 때까지, 실제로, 최종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67:7.1 (760.6) 생물이 빛을 일부러, 끈질기게 물리치는 것이 성격에게 주는 (구심적) 결과는 불가피하고 개인적이며, 오로지 신과 성격을 가진 그 생물에게만 관심거리이다. 그러나 불의(不義)의 수확, 혼을 죽이는 수확은 의지를 가진 그 불의한 생물이 마음 속에서 거두는 것이다.
67:7.2 (761.1) 그러나 죄가 외부에 미치는 영향은 그렇지 않다: 마음 속에 품은 죄의 비성격 (원심적) 결과는 불가피하고 집단에게 생기며, 영향을 미치는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는 생물 모두의 관심거리이다.
67:7.3 (761.2) 행성의 행정이 붕괴된 뒤에 5만 년쯤 되어서, 지구의 사무는 너무나 분열되고 지연되어서 35만 년 이전에 칼리가스티아가 도착했을 때 존재했던, 일반적 진화 상태보다 거의 나아지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진보가 있었지만, 다른 방향에서 근거를 많이 잃었다.
67:7.4 (761.3) 죄의 효과는 결코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주의 행정 구역들은 유기적이며, 모두가 한 성격자의 곤경을 어느 정도까지 함께 짊어져야 한다. 죄가 현실에 대한 그 성격자의 태도이니까, 우주 가치의 어떤 관련된 수준에서도 본래부터 가진 그 부정적 수확을 드러내도록 정해져 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 악행, 또는 죄 많은 계획이 낳는 총 결과는 오직 실제로 행하는 수준에서 체험하는 것이다. 우주 법칙을 어기는 것은 머리를 심각하게 쓰거나 영적 체험을 해치지 않고도, 물리적 영역에서 치명적일 수도 있다. 죄가 존재 전체의 태도일 때, 머리가 선택하고 혼이 의도하는 것을 죄가 대표할 때에야 죄는 성격자의 생존에 치명적 결과를 가득히 가져온다.
67:7.5 (761.4) 악과 죄는 그 결과를 물질 및 사회의 영역에서 쏟아부으며, 때때로 우주 실체의 어떤 수준에서 영적 진보를 늦출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존재가 지은 죄도 결코 남의 성격이 살아남는, 신이 준 권한이 실현되는 것을 막지 않는다. 영원히 살아남는 것은 오직 머리가 내리는 결정과 개인 자신의 혼이 내리는 선택으로 위태롭게 될 수 있다.
67:7.6 (761.5) 유란시아에서 죄는 생물학상의 진화를 늦추도록 기여한 것이 거의 없지만, 아담의 유산으로부터 생기는 총 이익을 필사 종족들로부터 빼앗도록 작용했다. 죄는 지적 발전, 도덕적 성장, 사회의 진보, 대규모의 영적 달성을 엄청나게 늦춘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을 알고 그의 신성한 뜻을 진심으로 행하기를 바라든지, 죄는 그의 가장 높은 영적 달성을 막지 못한다.
67:7.7 (761.6) 칼리가스티아는 모반을 일으켰고 아담과 이브는 실패했지만, 유란시아에서 그 뒤에 태어난 어떤 필사자도 이러한 실수 때문에 개인의 영적 체험으로 고통을 받지는 않았다. 칼리가스티아의 반란이 있은 뒤에 유란시아에서 태어난 모든 필사자가 어떤 방법으로, 시간으로 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혼들의 미래 복지는 결코 조금이라도 영원 속에 위태롭게 되지 않았다. 어느 누구나 남의 죄 때문에 영적으로 굶어 죽게 되지 않는다. 죄의 영향은 행정ㆍ지능ㆍ사회 분야에서 널리 미치는데도, 죄가 낳는 도덕적 죄책감이나 그 영적 결과는 온통 개인에게 일어난다.
67:7.8 (761.7) 어째서 그러한 대재난이 일어나도록 버려두는가 우리는 그 지혜를 헤아릴 수 없으나, 지역 소동이 우주에 널리 반영되는 바와 같이, 그 소동이 유익하게 해결되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헤아릴 수 있다.
67:8.1 (761.8) 사타니아의 여러 세계에서 많은 용감한 사람이 루시퍼 반란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구원자별의 기록은 범람하는 선동의 물결을 아마돈이 영화롭게도 거절하고, 흔들림 없이 반에게 헌신했으므로, 아마돈을 체계 전체에서 뛰어난 인물로 묘사한다―보이지 않는 아버지와 미가엘 아들의 통치권에 그들은 함께 흔들리지 않고 충성하였다.
67:8.2 (762.1) 이 중대한 보고서들이 작성될 때 나는 에덴시아에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구원자별의 방송을 샅샅이 읽으면서 맛보았던 흥분을 아직도 의식하고 있다. 안돈 종족에서 실험 중인 최초의 혈통으로부터 솟아나온, 옛날의 이 준(準)야만인이 보인 믿을 수 없이 확고한 태도, 초월적 헌신, 아름다운 충성심을 그 방송이 하루하루 알려 주었다.
67:8.3 (762.2) 에덴시아로부터 구원자별을 거쳐, 유버르사에도, 긴 7년 동안 사타니아 반란에 관해서 하위의 모든 하늘 생명이 던진 첫 질문은 항상, 언제나 이와 같았다: “유란시아의 아마돈이 무엇을 가졌기에, 아직도 끄떡하지 않고 버티는가?”
67:8.4 (762.3) 루시퍼 반란이 지역 체계와 그에 딸린 여러 타락한 세계에 지장을 주었고, 이 아들과 그릇 인도된 동료들의 손실이 놀라시아덱 별자리의 진보를 일시 방해했다면, 자연이 낳은 이 한 아들과 전우(戰友) 143명 집단의 굳센 행위,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를 광범위하게 발표한 효과를 저울로 재어 보아라. 아마돈의 불충한 상관들의 그렇게 엄청난 반대 압력에 부딪쳐서, 그들은 더 높은 우주 관리 및 행정 개념을 지지하여 꿋꿋하게 버티었다. 너희는 안심할지니, 이것은 네바돈 우주와 오르본톤 초우주에서, 루시퍼 반란의 모든 해악과 슬픔의 총합이 결코 능가할 수 없이 이미 좋은 일을 했다.
67:8.5 (762.4) 그리고 이 모두가, 파라다이스에서 필사 최후 군단을 동원하고, 승천하면서 진보하는 필사자―흔들리지 않는 아마돈과 같은 바로 그러한 필사자―를 대체로 구성하는 보통 진흙에서 이 광대한 집단의 하인, 신비스러운 앞날의 하인들을 모집하려는 아버지의 우주 계획이 슬기로움을 아름답게 감동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비춰 준다.
68:0.1 (763.1) 이 글은 동물 존재보다 거의 낫지 않은 지위로부터, 중간의 여러 시대를 거쳐, 어설프기는 하지만 진정한 문명이 인류의 고등 민족들 사이에서 진화한 후기 시절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거친, 길고 긴 전진하는 투쟁에 관한 이야기의 시작이다.
68:0.2 (763.2) 문명은 종족이 획득하는 것이요, 생물학적으로 타고나지 않는다. 따라서 아이들을 모두 문화가 있는 환경에서 길러야 하며, 한편 이어지는 각 젊은 세대는 그 교육을 새로 받아야 한다. 문명의 우수한―과학ㆍ철학ㆍ종교적―품질은 한 세대가 다른 세대에게 직접 물려주어 전달되지 않는다. 이 문화적 성취는 오로지 사회적 유산(遺産)을 현명하게 보호함으로 보존된다.
68:0.3 (763.3) 달라마시아 선생들이 협동 체제의 사회적 진화를 개시하였고, 30만 년 동안 인류는 집단으로 활동하는 관념 속에서 양육되었다. 청인은 누구보다도 많이, 홍인은 어느 정도, 흑인은 가장 적게, 이 초기의 사회 교육으로 인하여 이익을 보았다. 근래에는 황인종과 백인종이 유란시아에서 가장 진보된 사회 발전을 보였다.
68:1.1 (763.4) 가까이 모였을 때 사람은 흔히 서로 좋아하기를 배우지만, 원시인은 형제답게 느끼는 정신, 그리고 동료들과 사회적 접촉을 가지려는 욕구가 자연스럽게 넘쳐흐르지 않았다. 오히려 이 초기 종족들은 슬픈 체험을 겪음으로 “뭉치는 가운데 힘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유란시아에서 사람의 형제 정신을 즉시 실현하는 데 지금 방해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자연스러운, 형제로서 매력이 부족한 것이다.
68:1.2 (763.5) 유대 관계는 일찍부터, 살아남기 위해 치르는 값이 되었다. 혼자 있는 사람은, 그가 어떤 공격을 받더라도 분명히 복수해 줄 어떤 집단에 그가 속하는 것을 증명하는 부족 표시를 지니지 않으면, 무력했다. 카인의 시절에도 집단 관계를 가리키는 어떤 표시가 없이 혼자서 바깥에 돌아다니는 것은 목숨에 위태로웠다. 문명은 사람이 비명(非命)에 죽지 않게 하는 보험이 되었고, 한편 사회의 수많은 법적 요구에 순응함으로 그 보험료를 지불하였다.
68:1.3 (763.6) 원시 사회는 이처럼 필요를 서로 교환하고, 교제함으로 더욱 안전하게 사는 데 기초를 두었다. 이렇게 고립을 두려워한 결과로서, 또 마지못해 협동하는 수단으로, 인간 사회는 오랜 세월의 주기를 거쳐 진화해 왔다.
68:1.4 (763.7) 원시 인간은 일찍부터 집단이 그 개별 단위의 단순 합계보다 훨씬 크고 강력하다는 것을 배웠다. 사람 1백 명이 뭉쳐서 한 뜻으로 일하면 큰 돌을 움직일 수 있다. 잘 훈련된 평화 수호자 스무 명은 성난 폭도를 제지할 수 있다. 그래서 단지 많은 사람과 관련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리하게 협동하는 자들을 조직한 결과로서 사회가 태어났다. 그러나 협동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특성이 아니다. 처음에는 두려움을 통해서, 그리고 나서 나중에는 시간 세계의 어려움에 대처하는 데, 그리고 영원한 위험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비하여 지키는 데, 협동이 가장 유익하기 때문에 사람은 협동하기를 배운다.
68:1.5 (764.1) 이처럼 자체를 일찍부터 원시(原始) 사회로 조직한 민족들은 자기 동료들에 대한 방어 뿐 아니라, 자연을 공격하는 데 더 성공하게 되었다. 그들이 살아남을 확률이 더 컸다. 따라서 방해 요인이 많았는데도, 문명은 유란시아에서 꾸준히 진보했다. 사람이 많은 실수를 저질렀어도 지금까지 인간의 문명이 정지되거나 파괴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사람과 관계를 가짐으로 살아남는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68:1.6 (764.2) 오스트랄리아 원주민과 아프리카의 부시맨 및 피그미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그러한 원시 사회 조건이 오늘날 남아 있다는 사실이 현대의 문화 사회가 오히려 최근의 현상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 뒤떨어진 민족들 사이에서, 얼마큼 초기의 집단 적개심, 개인적 의심과 비슷한 것, 그리고 모든 원시 종족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상당히 반사회적인 다른 특성이 관찰될 것이다. 고대에 사교성이 없던 종족들의 이 불쌍한 잔재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개인주의 경향이 사회적 진보에서 더 효력 있고 강력한 조직 및 결합과 경쟁해서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말해 주는 증언이다. 60이나 80킬로미터마다 다른 방언을 쓰는 종족, 뒤떨어지고 의심이 많은 이 반사회적 종족들은, 행성 영주의 유형(有形) 참모진의 가르침, 그리고 아울러 아담 집단의 종족 개량자들이 후일에 기울인 노력이 없었다면, 너희가 지금 어떤 세계에서 살고 있을 것인가 보여준다.
68:1.7 (764.3)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현대의 표현은 무지한 망상이요, 한때 허구였던 “황금 시대”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황금 시대의 전설에 관한 유일한 근거는 달라마시아와 에덴의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개량된 사회들은 유토피아 같은 꿈의 실현과 거리가 멀었다.
68:2.1 (764.4) 문명화된 사회는 혼자 살기 싫은 것을 극복하려고 사람이 초기에 노력한 결과이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 사랑함을 반드시 뜻하지는 않으며, 어떤 원시 집단들의 시끄러운 현상태가 초기의 부족들이 무엇을 겪어 왔는가 잘 설명해 준다. 그러나 비록 한 문명의 개인들이 서로 부딪치고, 서로 싸운다고 해도, 그리고 문명 자체가 애쓰고 투쟁하는 모순 덩어리처럼 보인다고 해도, 문명은 지겹게 단조로운 정체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열심히 애쓴다는 것을 입증한다.
68:2.2 (764.5) 지능의 수준은 문화가 진보하는 속도에 상당히 기여하지만, 사회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생활 형태에서 위험 요인을 줄이도록 설계되어 있고, 생활 속에서 고통을 줄이고 쾌락 요소를 늘이는 데 성공한 만큼, 빨리 사회가 진보해 왔다. 이처럼 사회 단체 전체가 운명의 목표를 향하여―멸종하든 살아남든―그 목표가 자아 유지인가 자아 욕구의 충족인가에 따라서, 천천히 나아간다. 자아 유지는 사회를 일으키며, 한편 지나친 자아 욕구의 충족은 문명을 파괴한다.
68:2.3 (764.6) 사회는 자아의 영속(永續), 자아 유지, 자아 욕구의 충족에[1] [1706] 관심을 가지지만, 인간의 자아 실현은 많은 문화 집단이 즉시 이룰 목표가 될 가치가 있다.
68:2.4 (765.1) 자연인(自然人)에 있는 군집 본능은 유란시아에서 지금 존재하는 것과 같은 사회 조직이 발전한 것을 설명하기에 도저히 충분하지 않다. 이 타고난 군생(群生) 성향은 인간 사회의 밑바닥에 깔려 있지만, 사람의 사교 성향의 상당 부분은 얻은 것이다. 인간들이 초기에 교제하도록 이바지한 두 가지 큰 영향은 배고픔과 성욕(性慾)이었다. 사람은 이 두 본능을 동물 세계와 함께 가진다. 인간들을 한데로 몰고 붙들어 둔 다른 두 가지 감정은 허영과 두려움, 특히 귀신을 두려워한 것이었다.
68:2.5 (765.2) 역사(歷史)는 사람이 오랜 세월에 걸쳐, 먹을 것을 얻으려고 투쟁한 기록일 뿐이다. 원시인은 배고플 때에야 겨우 생각했다. 식량을 저장하는 것은 원시인에게 첫 극기(克己), 자아의 단련이었다. 사회가 성장하자, 배고픔은 상호 교제의 유일한 동기가 되지 못했다. 수많은 다른 종류의 욕구, 여러 가지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은 모두 인류가 더욱 가까이 교제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는 인간의 필요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지나치게 성장하여 꼭대기가 무겁다. 20세기의 서양 문명은 사치의 엄청난 부담과 인간의 욕구 및 열망이 터무니없이 증가함으로, 지쳐서 끙끙거린다. 현대 사회는 널리 서로 관계되고 상당히 복잡하게 서로 의존하는, 가장 위험한 한 단계의 긴장을 견디고 있다.
68:2.6 (765.3) 배고픔, 허영, 그리고 귀신 공포증은 계속하여 사회에 압력을 주었지만, 성욕의 만족은 일시적이고 돌발하는 것이었다. 성욕만으로 원시인 남녀가 가정을 유지하는 무거운 짐을 지도록 강요되지는 않았다. 초기의 가정은, 자주 만족시키지 않을 때 남자가 느끼는 성욕의 불만, 그리고 여자의 헌신하는 모성애에 기초를 두었으며, 여자는 얼마큼 이 모성애를 모든 고등 동물의 암컷과 함께 가진다. 무력한 아기의 존재는 남자와 여자의 활동이 초기에 구별되게 하였다. 여자는 안정된 거주를 유지해야 했고, 거기서 여자는 땅을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아주 이른 시절부터, 여자가 있는 곳을 언제나 집으로 여겼다.
68:2.7 (765.4) 곧 사라지는 성욕의 열정 때문이 아니라 먹을 것이 필요한 결과로서, 이처럼 여자는 일찍부터 발달하는 사회 계획에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여자는 자아의 유지에 꼭 필요한 협동자였다. 여자는 먹을 것을 마련하는 사람이요, 짐 싣는 동물이요, 사납게 분개하지 않고 큰 혹사(酷使)를 견디곤 하는 동반자였고, 이 모든 바람직한 특성 위에, 여자는 성욕을 만족시키는 수단, 항상 옆에 있는 수단이었다.
68:2.8 (765.5) 문명 속에서 지속하는 가치를 가진 거의 모든 것이 가족에서 뿌리를 가진다. 가족은 처음으로 성공한 평화 집단이었고, 남자와 여자는 그들의 대립 관계를 어떻게 조절하는가 배우면서, 동시에 아이들에게 평화의 추구를 가르쳤다.
68:2.9 (765.6) 진화에서 결혼의 역할은 단지 개인 행복의 실현이 아니라, 종족을 살아남게 하는 보험이었다. 자아의 유지와 자아의 영속은 가정의 진짜 목표였다. 자아의 욕구 충족은 어쩌다 일어나며, 성적 결합을 보장하는 미끼인 것을 제외하고, 꼭 필요하지는 않다. 자연은 살아남기를 요구하지만, 문명의 예술은 결혼의 기쁨과 가정 생활의 만족감을 계속 늘인다.
68:2.10 (765.7) 허영이 확대되어 자만ㆍ포부ㆍ명예까지 포함한다면, 어떻게 이러한 성향이 인간 관계의 형성에 이바지하는가 뿐 아니라 또한 이것들이 어떻게 사람을 단결하게 만드는가 우리가 헤아릴 수 있다. 이는 앞에 나서서 뽐내 보일 청중이 없이는 그러한 여러 감정이 쓸데없기 때문이다. 허영은 사람들이 내보이고 자신이 만족할 사회적 무대를 필요로 하는 다른 감정 및 충동과 머지 않아 결합되었다. 이 집단의 감정들은 모든 예술ㆍ의식(儀式), 그리고 온갖 형태의 운동 경기 및 경쟁을 시작하게 하였다.
68:2.11 (766.1) 허영심은 사회의 탄생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이 계시가 있을 때, 허영심 많은 세대의 빗나간 노력은 상당히 특화된 문명의 복잡해진 구조 전체를 늪에 처박고 가라앉히려고 위협한다. 쾌락을 얻으려는 욕구는 배고픔을 채우려는 욕구를 대신한 지 오래다. 먹고 살기 위한 정당한 사회적 목표는 저열하고 위협하는 형태의 자아 욕구의 충족으로 재빨리 변하고 있다. 먹고 살기 위한 활동은 사회를 건설하지만, 자제하지 않은 자아 욕구의 충족은 어김없이 문명을 파괴한다.
68:3.1 (766.2) 원시적 욕구는 최초의 사회를 낳았지만, 귀신을 무서워하는 것은 그 사회를 단결시키고 사회의 존재에 인간 이상의 모습을 나누어 주었다. 보통의 두려움은 생리적으로 생긴다: 신체가 고통받는 두려움, 배고픔을 견디는 것, 또는 땅에서 생기는 어떤 재난이 그렇다. 그러나 귀신 공포증은 새롭고 고상한 종류의 무서움이다.
68:3.2 (766.3) 인간 사회의 진화에서 가장 큰 단일 요인은 아마도 귀신 꿈이었다. 대부분의 꿈이 원시인의 머리를 크게 어지럽게 했지만, 귀신 꿈은 실제로 초기의 인간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들었고, 미신을 믿는 이 꿈꾸는 사람들을 영(靈) 세계의 어렴풋하고 보이지 않는, 상상(想像)하는 위험에 대비하여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기꺼이 진지하게 결합한 가운데 서로 부둥켜안도록 만들었다. 귀신 꿈은 동물과 인간 종류의 지성 사이에서 가장 일찍 나타나는 한 가지 차이점이었다. 동물은 죽은 뒤에 살아남는 것을 그려볼 수 없다.
68:3.3 (766.4) 이 귀신 요인을 제외하고, 모든 사회는 근본적 필요와 생물학적 기본 욕구에 기초를 두었다. 그러나 귀신 공포증은 문명에 새로운 요인을 도입하였고, 이 무서움은 뻗어서 개인의 기본적 필요를 멀리 벗어나고, 집단을 유지하는 싸움조차도 훨씬 뛰어넘었다. 죽은 사람의 떠나간 영을 무서워하는 것은 새롭고 놀라운 형태의 두려움을 드러냈고, 소름끼치게 하는 이 강력한 공포는 초기 시대의 허술한 사회 질서를 채찍질하여, 고대에 철저하게 훈련되고 잘 통제된 원시 집단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의미 없는 이 미신 가운데 더러는 아직까지도 내려오며, 현실이 아니고 초자연적인 것을 미신으로 두려워함을 통해서, “지혜의 시작이 되는, 주를 두려워함”을 나중에 발견하도록 사람의 지성을 준비시켰다. 진화로 생긴 근거 없는 두려움은 계시로 영감을 받은, 신을 경외하는 느낌으로 바뀌도록 고안되어 있다. 귀신을 두려워하는 초기의 제사는 강력한 사회적 유대가 되었고, 그 아득한 시절 이후로 늘, 인류는 대체로 영적 성향을 얻으려고 애써 왔다.
68:3.4 (766.5) 배고픔과 사랑은 사람을 한데로 몰았으며, 허영심과 귀신 공포증은 사람을 단결시켰다. 그러나 평화를 조장하는 계시의 영향 없이, 이러한 감정만으로 인간의 상호 관계에서 의심하고 짜증내는 긴장을 견딜 수 없다. 초인간 근원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사회의 긴장은 어떤 한계에 이르고 나서 폭발하며, 사회를 동원하는 바로 이 영향―배고픔ㆍ사랑ㆍ허영ㆍ두려움―은 인류를 전쟁과 살육으로 돌입하도록 협력한다.
68:3.5 (766.6) 인류의 평화 성향은 자연스러운 자질이 아니다. 그것은 계시된 종교의 가르침으로부터, 진보하는 종족들의 쌓인 체험으로부터, 그러나 특히 평화의 왕,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비롯된다.
68:4.1 (767.1) 현대의 모든 사회 제도는 너희의 야만인 조상이 가졌던 원시 관습의 진화로부터 생겨난다. 오늘날의 관습은 지난날의 관습이 고쳐지고 확대된 것이다. 버릇과 개인의 관계는, 관습과 집단의 관계와 같다. 집단의 관습은 민속(民俗)이나 부족의 전통―군중의 관습―으로 발전한다. 오늘날 인간 사회의 모든 사회 제도가 이 초기의 시작에 그 초라한 기원을 가진다.
68:4.2 (767.2) 도덕 관습은 집단의 생활을 대중이 존재하는 조건에 적응하려는 노력에서 생겨났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도덕 관습은 사람의 처음 사회 제도였다. 그리고 이 부족의 반응은 모두, 고통과 치욕을 피하고, 동시에 쾌락과 권력을 누리려고 애쓰는 노력으로부터 생겼다. 민속의 기원은, 언어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의식하지 않고 의도하지 않은 것이며, 따라서 언제나 신비 속에 가려져 있다.
68:4.3 (767.3) 귀신 공포증은 원시인으로 하여금 초자연적인 것을 상상하도록 몰았고, 따라서 윤리와 종교가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미칠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다음에 윤리와 종교는 대대로 사회의 도덕관과 관습을 다치지 않고 보존하였다. 도덕 관습을 일찍 확립하고 구체화한 한 가지는,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을 살다가 죽었든 그 방법에 몹시 마음을 쓰며, 그래서 그들이 육체를 입고 있을 때 존중했던 생활 규칙을 감히 가볍게 멸시하는 살아 있는 필사자에게 끔찍한 벌을 퍼부으리라는 믿음이었다. 이 모두가 오늘날 황인종의 조상 존중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나중에 개발되는 원시 종교는 도덕 관습을 안정시키면서 귀신 공포증을 크게 강화했지만, 진보하는 문명은 갈수록 더 인류를 두려움의 사슬과 미신에 노예가 된 상태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68:4.4 (767.4) 달라마시아 선생들의 가르침, 사람을 해방하고 자유롭게 만드는 가르침을 받기 전에, 관습이 된 의식(儀式)은 옛날 사람을 무력한 희생자로 붙들어 두었다. 원시의 야만인은 끊임없는 예식에 둘러싸였다. 아침에 깨어날 때부터 밤에 동굴에서 잠에 곯아떨어질 때까지 그가 행한 것은 무엇이나 꼭 어떻게―그 부족의 풍습에 따라서―해야 되었다. 야만인은 풍습이라는 학정에 노예가 되었고, 그의 생활은 자유롭거나, 즉흥이거나, 독창성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더 높은 정신적 존재나, 도덕적 존재나, 사회적 존재를 향하여 아무런 자연스런 진보가 없었다.
68:4.5 (767.5) 초기의 인간은 관습에 꽉 붙들려 있었다. 야만인은 관습에 진정한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사고 방식과 개량된 생활 방법을 감히 시작한 부류로부터 변화가 때때로 일어났다. 그런데도 원시인의 타성(惰性)은 너무 빨리 진보하는 문명에 잘못 적응하는 파멸의 길로 너무 갑자기 굴러떨어지는 것을 막는 생물학적 안전 장치이다.
68:4.6 (767.6) 그러나 이러한 관습은 순전한 악은 아니며, 관습의 진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급진적 혁명으로 관습을 대규모로 수정하는 일에 손대는 것은 문명의 지속에 거의 치명적이다. 관습은 문명을 붙들어 놓은, 연속시키는 끈이었다. 인간의 역사가 지나간 길은 버린 관습과 시대에 뒤진 사회 관습의 찌꺼기로 널려 있다. 그러나 더 낫고 더 적당한 관습을 채택한 것을 제외하고, 자체의 도덕관을 버린 문명은 하나도 지탱하지 못했다.
68:4.7 (767.7) 한 사회가 살아남는 것은 주로 그 도덕관의 점진적 발달에 달려 있다. 관습의 진화 과정은 실험해 보고 싶은 욕망에서 생겨난다. 새로운 생각이 제시된다―경쟁이 따른다. 진보하는 문명은 진취적인 생각을 품에 안고 오래 견딘다. 시간과 환경은 마침내 살아남는 데 더 적당한 집단을 고른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사회의 구성에서 생긴 변화를 따로 고립시켜 보았을 때, 각 변화가 더 나아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니, 정말로 아니다! 왜냐하면, 유란시아 문명이 전진하는 긴 투쟁에 아주 여러 번 후퇴가 있었기 때문이다.
68:5.1 (768.1) 토지는 사회의 무대요, 사람들은 배우이다. 사람은 토지의 상황에 순응하도록 그의 연기를 늘 조절해야 한다. 도덕 관습의 진화는 언제나 인구 밀도에 달려 있다. 이것은 헤아리기 힘들어도 참말이다. 사람의 토지 이용 기술, 곧 유지하는 기술에 생활 수준을 더한 것은 민속(民俗)의 총합, 곧 도덕 관습이다. 그리고 생활의 요구에 대하여 사람이 적응한 것의 총합이 사람의 문화적 문명이다.
68:5.2 (768.2) 가장 일찍 있었던 인간의 문화는 동반구의 강들을 따라서 생겨났고, 거기서 전진하는 문명의 행진에 네 가지 큰 단계가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68:5.3 (768.3) 1. 수집 단계. 먹어야 되는 것, 배고픔은 산업 조직의 첫 형태, 원시적으로 먹이 수집하는 줄을 서게 하였다. 먹을 것을 집으면서 땅을 지나가는 그러한 굶주린 사람들이 행진하는 줄은 때때로 16킬로미터나 되곤 했다. 이것은 원시 유목민 단계의 문화였고, 지금 아프리카의 부시맨이 이 생활 형태를 따른다.
68:5.4 (768.4) 2. 사냥 단계. 무기(武器)인 연장의 발명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냥꾼이 되고, 따라서 먹을 것을 얻으려고 노예처럼 일하는 생활로부터 상당한 자유를 얻게 만들었다. 중대한 전투에서 주먹을 심하게 다친, 생각 깊은 어느 안돈 사람이 팔 대신에 기다란 막대기를, 그리고 주먹 대신에, 힘줄로 끝에 단단한 부싯돌 조각을 묶어서 쓰는 관념을 다시 찾아냈다. 많은 부족이 이런 종류의 생각을 따로 해냈고, 이 여러 형태의 망치는 인간의 문명에서 크게 전진하는 한 걸음이었다. 오늘날 오스트랄리아의 어떤 원주민은 이 단계를 지나서 거의 진보하지 않았다.
68:5.5 (768.5) 청인은 솜씨 있는 사냥꾼이요 덫꾼이 되었다. 그들은 강에 울타리를 쳐서 물고기를 대량으로 잡았고, 나머지를 겨울에 쓰려고 말렸다. 여러 형태의 교묘한 올가미와 덫이 사냥감을 잡는 데 이용되었지만, 이보다 원시적 종족들은 큰 동물을 사냥하지 않았다.
68:5.6 (768.6) 3. 목축 단계. 이 단계의 문명은 동물을 길들임으로 가능해졌다. 아랍인과 아프리카 원주민은 최근에 목축하는 민족에 속한다.
68:5.7 (768.7) 목축 생활은 식량에 노예가 된 상태로부터 더욱 부담을 덜어 주었다. 사람은 그의 자본에서 생기는 이자(利子), 곧 가축 떼의 증가분으로 사는 것을 배웠고, 이것은 문화와 진보를 위하여 더 여가를 마련해 주었다.
68:5.8 (768.8) 목축 이전의 사회는 남녀가 협동하는 사회였지만, 동물 사육이 파급된 것은 여자를 사회에서 노예가 되는 처지로 떨어뜨렸다. 그 전에는 동물의 고기를 확보하는 것이 남자의 의무였고, 먹을 채소를 마련하는 것이 여자의 일이었다. 따라서, 남자가 생활의 목축 시대에 들어갔을 때, 여자의 위엄은 크게 떨어졌다. 여자는 여전히 생활에 필수인 채소를 생산하느라고 수고해야 되었고, 한편 남자는 풍부한 동물의 고기를 마련하기 위하여 고작 동물의 떼가 있는 곳으로 가기만 하면 되었다. 이처럼 남자는 비교적 여자로부터 독립되었다. 목축 시대를 통하여 내내, 여자의 지위는 꾸준히 떨어졌다. 이 시대의 끝이 되어서 여자는 인간인 동물보다 거의 낫게 되지 않았으며, 동물의 떼가 노동하고 새끼를 낳도록 기대한 것처럼, 일하고 인간의 자식을 낳는 신세로 떨어졌다. 목축 시대의 남자는 가축을 지극히 사랑했다. 남자가 제 아내를 더 깊이 사랑할 수 없었으니, 더군다나 딱한 일이었다.
68:5.9 (769.1) 4. 농업 단계. 이 시대는 식물(植物)을 길들임으로 시작되었고, 이것은 가장 높은 종류의 물질 문명을 대표한다. 칼리가스티아와 아담 모두가 원예와 농업을 가르치려고 애썼다. 아담과 이브는 목동이 아니라 채소를 가꾸는 사람이었고, 채소 재배는 당시에 상급 문화였다. 식물의 재배는 인류의 모든 종족에게 사람을 고상하게 만드는 영향을 미친다.
68:5.10 (769.2) 농업은 세계의 인구 밀도를 4배가 넘게 늘였다. 농업은 이전의 문화 단계의 목축하는 직업과 겸할 수도 있었다. 세 단계가[2] [1707] 겹칠 때, 남자는 사냥하고 여자는 땅을 경작한다.
68:5.11 (769.3) 목자와 토지를 경작하는 자 사이에는 언제나 마찰이 있어 왔다. 사냥꾼과 목자는 투사요, 싸움을 좋아하였다. 농사꾼은 평화를 더 사랑하는 종류였다. 동물과 관련을 가지는 것은 싸움과 무력(武力)을 암시하며, 식물과 관계를 가지는 것은 참을성과 평온과 평화를 주입시킨다. 농업과 산업은 평화로운 활동이다. 그러나 세상의 사회 활동으로서 이 두 가지의 약점은, 흥분과 모험이 모자라는 것이다.
68:5.12 (769.4) 인간 사회는 사냥 단계로부터 목축 단계를 거쳐서, 땅에서 농사 짓는 단계로 진화했다. 그리고 이 진보하는 문명의 각 단계에 방랑 생활이 차츰 줄어들었다. 남자는 갈수록 더 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68:5.13 (769.5) 그리고 이제 산업은 농업을 보충하고 그 결과로 더욱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시민 계급에는 비농업 집단이 늘어났다. 그러나 가장 높은 사회 발전조차 늘 건전한 농업의 기초 위에 서야 한다는 것을 그 지도자들이 깨닫지 못한다면, 산업 시대는 살아남기를 바랄 수 없다.
68:6.1 (769.6) 사람은 흙에서 생긴 생물이며, 자연의 산물이다. 사람이 아무리 진지하게 땅을 벗어나려 해도, 끝까지 두고 보면 분명히 실패한다. “너희는 티끌이요, 티끌로 돌아갈지니라”하는 것은 모든 인류에게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사람의 근본적 싸움은 땅을 위한 싸움이었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것이다. 원시 인간의 처음 사회 관계는 이 토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었다. 인구 밀도는 모든 사회 문명의 기초가 된다.
68:6.2 (769.7) 사람의 지능은 예술과 과학의 수단으로 땅의 소산을 늘였다. 동시에 자손의 자연 증가가 얼마큼 통제되었고, 따라서 문화가 있는 문명을 세우기 위하여 생계와 여가가 마련되었다.
68:6.3 (769.8) 인간 사회는, 인구가 토지 기술에 따라서 정비례로, 그리고 주어진 생활 수준에 반비례하여 변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법칙에 지배된다. 이 초기 시대 전체를 통해서, 사람과 토지에 관계된 공급과 수요의 법칙이 지금보다 더, 인구와 토지의 추정치를 결정했다. 토지가―점령되지 않은 지역이―풍부한 시절에는 사람의 필요가 컸고, 따라서 사람 목숨의 값이 상당히 높아졌다. 따라서 생명의 손실은 더욱 끔찍한 것이었다. 토지가 귀하고, 이에 관계되어 인구가 과잉인 기간에는, 사람의 목숨이 비교적 값싸졌고, 그래서 전쟁ㆍ기근ㆍ유행병에 관심을 덜 쏟았다.
68:6.4 (770.1) 토지의 소산이 줄어들거나 인구가 늘어날 때 불가피한 투쟁이 다시 시작되었고, 인간의 성품에서 가장 나쁜 특성이 표면으로 나타났다. 토지 소산의 증가, 기계 기술의 개선, 인구의 감소는 모두 인간 성품에서 좋은 면이 발달하도록 촉진하는 경향이 있다.
68:6.5 (770.2) 개척지의 사회는 인간성의 서투른 면이 나타나게 만든다. 영적 문화와 함께, 예술과 참된 과학적 진보는,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심이 인구 밀도가[3] [1708] 조금 적은, 농업과 산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지원을 받을 때, 그런 도심에서 최선으로 이루어졌다. 도시는 반드시 그 거주자들의 권력을, 좋은 곳에 쓰든 나쁜 곳에 쓰든, 몇 배로 늘인다.
68:6.6 (770.3) 가족의 크기는 언제나 생활 수준에 영향을 받아 왔다.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안정된 상태나 차츰 사멸하는 점까지 가족이 작아진다.
68:6.7 (770.4) 오랜 세월을 통해서 생활 수준은, 단순한 양이 아니라, 살아남는 인구의 질을 결정했다. 지역 계급의 생활 수준은 새로운 사회 계층, 새로운 도덕 관습을 낳았다. 생활 수준이 너무 복잡하거나 지나치게 사치스럽게 될 때, 그것은 급속히 자살이 된다. 카스트는 조밀한 인구가 심하게 경쟁하는 높은 사회적 압력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직접 결과이다.
68:6.8 (770.5) 초기의 종족들은 흔히, 인구를 제한하도록 고안된 관습에 의존하였다. 모든 원시 부족은 기형(奇形) 아이와 병약한 아이를 죽였다. 아내를 사들이는 시절 이전에 여자 아기들은 빈번히 죽음을 당했다. 때때로 아이들은 출산할 때 목 졸려 죽음을 당했지만, 가장 잘 쓰이는 방법은 내버리는 것이었다. 쌍둥이의 아버지는 보통 하나를 죽여야 한다고 우겼는데, 이는 여러 아기를 낳는 것은 요술이나 부정(不貞) 때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체로, 동성(同性)의 쌍둥이는 살려 두었다. 쌍둥이에 대한 이 금기는 한때 거의 보편적이었지만, 결코 안돈 족속의 풍습의 일부가 되지 않았다. 안돈 종족은 쌍둥이를 언제나 행운의 전조로 여겼다.
68:6.9 (770.6) 많은 종족이 유산(流産)하는 기술을 배웠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출산이 금기로 확정된 뒤에, 이 관습은 아주 흔하게 되었다. 미혼녀가 제 자식을 죽이는 것은 오랫동안 관습이었지만, 좀더 개화된 집단들 사이에서 이 사생아(私生兒)는 소녀의 어머니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많은 원시 씨족은 유산과 유아를 죽이는 관습 때문에 거의 절멸되었다. 그러나 도덕 관습의 명령과 상관 없이, 일단 젖을 빨린 뒤에는 죽음을 당하는 아이들이 극히 드물었다―모성애가 너무 강하다.
68:6.10 (770.7) 20세기에도, 인구를 통제하는 이 원시 방법의 찌꺼기가 남아 있다. 오스트랄리아에는 한 부족이 있는데, 거기에는 어머니가 아이를 두셋보다 더 기르는 것을 거부한다. 한 식인종 부족이 다섯 번째 태어난 아이마다 먹어치운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마다가스카에서 어떤 부족들은 아직도 어떤 운 나쁜 날에 태어난 아이들을 다 죽이며, 이것은 모든 아기의 약 25퍼센트의 죽음을 초래한다.
68:6.11 (770.8) 세계의 관점에서 볼 때, 과잉 인구는 지난날에 결코 심각한 문제가 된 적이 없다. 그러나 전쟁이 줄어들고 과학이 점점 더 인간의 병을 통제하면, 가까운 앞날에 과잉 인구는 심각한 문제가 될지 모른다. 그러한 때에 세계 지도층의 지혜를 크게 시험하는 일이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유란시아 통치자들이, 비범한 자들의 극단과 엄청나게 증가하는 보통 이하의 집단 대신에, 보통 사람, 곧 안정된 인간의 증가를 촉진할 통찰력과 용기를 가질 것인가? 보통 인간이 양육되어야 한다. 보통 사람은 문명의 등뼈요, 종족에서 돌연 변이 천재들이 나오는 근원이다. 보통 이하의 사람은 사회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하등 수준의 산업 관리, 곧 동물 수준보다 높은 지능을 요구하지만, 상급 부류의 인류를 위하여 분명히 진정한 종과 속박이 되는 그러한 낮은 등급의 노동에 필요한 것보다 더 생산되어서는 안 된다.
69:0.1 (772.1) 감정 면에서, 사람이 유머ㆍ예술ㆍ종교를 이해하는 능력은 그의 동물 조상을 뛰어넘는다. 사회적으로, 사람은 연장을 만들고 의사(意思)를 교환하고 제도를 만드는 자이므로 그의 우수성을 드러낸다.
69:0.2 (772.2) 인간이 오랫동안 사회 집단을 유지할 때, 그러한 집합은 궁극에 제도화되는 어떤 활동 경향을 반드시 낳는다. 인간의 제도의 대부분은 노동을 절약하고, 동시에 집단 안전의 향상에 무언가 이바지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69:0.3 (772.3) 문명화된 사람은 그가 확립한 제도의 특성, 제도가 안정되고 지속하는 것에 대해서 큰 자부심을 가진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제도는 다만, 금기(禁忌)가 보존하고 종교가 위엄을 부여함으로 축적된 지난날의 도덕 관습에 불과하다. 그러한 유산은 전통이 되고, 전통은 궁극에 관습으로 모습을 바꾼다.
69:1.1 (772.4) 제도의 지나친 발전은, 인격이 빛을 잃고 창의성이 줄어들기 때문에, 어김없이 개인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그런데도, 인간의 제도는 모두 어떤 사회적 필요, 지난날이나 오늘의 필요를 보살핀다. 사람은 진보하는 문명이 만든 이 작품에 자신이 지배되도록 버려두기보다 그 제도를 통제해야 한다.
69:1.2 (772.5) 인간의 제도는 세 가지 일반 등급이 있다:
69:1.3 (772.6) 1. 자아 유지 제도. 이러한 제도는 굶주림과 이에 관계된 자아 보존의 본능에서 생겨나는 관습을 포함한다. 이런 제도는 산업과 재산, 이익을 위한 전쟁, 그리고 사회의 모든 통제 작용을 포함한다. 조만간에 두려움의 본능은 금기, 관습, 종교적 제재의 수단을 써서, 생존을 위한 이런 제도의 확립을 촉진한다. 그러나 두려움과 무지와 미신은 모든 인간 제도가 초기에 기원을 가지고 후일에 발전하는 데서, 뛰어난 역할을 해냈다.
69:1.4 (772.7) 2. 자아 영속 제도. 이러한 제도는 성욕, 모성 본능, 그리고 종족들의 부드러운 상급 감정에서 생겨나는, 사회가 세운 질서이다. 이것은 가정과 학교, 가족 생활, 교육ㆍ윤리ㆍ종교를 보호하는 사회 조치를 포함한다. 이런 제도는 결혼 관습, 방어를 위한 전쟁, 가정 만들기를 포함한다.
69:1.5 (772.8) 3. 자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제도. 이것은 허영심의 성향과 자부심의 감정으로부터 생겨나는 관습이다. 이것은 옷을 입고 몸을 치장하는 풍습, 사회의 관행, 영광을 위한 전쟁ㆍ춤ㆍ흥행ㆍ놀이, 그리고 관능을 만족시키는 다른 단계를 포함한다. 그러나 문명은 자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뚜렷한 제도를 결코 진화시킨 적이 없다.
69:1.6 (773.1) 이 세 집단의 사회 관습은 밀접하게 서로 관계되고, 미세하게 서로 의존한다. 유란시아에서 이 여러 제도는 단일 사회 기구로서 활동하는 복잡한 조직이 된다.
69:2.1 (773.2) 원시 산업은 끔찍한 기근을 막는 보험으로서 천천히 생겨났다. 옛날에 살던 사람은 풍부한 수확이 있는 동안에 빈곤한 시절에 대비하여 먹을 것을 저축한 몇몇 동물로부터 교훈을 받기 시작했다.
69:2.2 (773.3) 초기의 검소와 원시 산업이 시작되기 전에, 보통 부족의 운명은 궁핍과 진짜 고통이 가득한 운명이었다. 원시 인간은 먹을 것을 얻으려고 동물 세계 전체와 경쟁해야 했다. 경쟁의 당기는 힘은 늘 사람을 짐승의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가난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가혹한 상태였다. 재산은 저절로 생기는 선물이 아니요, 노동과 지식과 조직으로부터 생긴다.
69:2.3 (773.4) 원시인은 교제(交際)의 이점을 더디게 깨닫지 않았다. 교제는 사람을 조직하도록 이끌었고, 조직의 처음 결과는 노동의 분업이었으며, 그 결과로 시간과 물자가 즉시 절약되었다. 이 노동의 전문화는 압력에 적응함으로―저항이 약한 길을 추구함으로―생겨났다. 원시의 야만인은 결코 어떤 진짜 일도 즐겁게 하지 않았고 기꺼이 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순응한 것은 어쩔 수 없이 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69:2.4 (773.5) 원시인은 고된 일을 싫어했고, 심각한 위험에 부딪치지 않으면 서두르려 하지 않았다. 노동에서 시간 요소, 주어진 과제를 특정한 시간 안에 해치우는 생각은 전적으로 현대에 생긴 개념이다. 옛날 사람들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한 맹렬한 싸움과 늘 높아지는 생활 수준의 2중 요구가 원시 인간, 자연히 활동하지 않는 종족을 근면의 길로 몰았다.
69:2.5 (773.6) 노동, 일부러 기울이는 노력은 사람을 짐승과 구별하며, 짐승의 노력은 대체로 본능적이다. 노동의 필요성은 사람에게 최고의 축복이다. 영주의 참모진은 다 일했고, 유란시아에서 육체 노동을 고상하게 만들려고 많이 공헌했다. 아담은 동산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은 일했다―그는 만물을 창조하는 이, 지원하는 이였다. 히브리인은 근면을 최고로 친 처음 부족이었다. 그들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라”하고 처음으로 선포한 민족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종교는 초기의 이상(理想), 게으름으로 되돌아갔다. 주피터는 술 잔치하는 이였고, 부다는 명상에 잠겨 여가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69:2.6 (773.7) 산긱 부족들은 열대에서 떨어져 살 때, 상당히 부지런했다. 그러나 게으른, 마술 추종자와 일하기를 외치는 사도(使徒)―선견을 이용한 자―들 사이에는 길고 긴 싸움이 있었다.
69:2.7 (773.8) 인간은 불과 물과 먹을 것을 보존하는 데 처음으로 선견을 이용했다. 그러나 원시인은 날 때부터 노름꾼이었다. 원시인은 언제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언가 얻기를 바랐으며, 이 옛 시절에 너무나 자주, 참는 관습으로부터 얻은 성공을 마력의 탓으로 돌렸다. 요술은 선견ㆍ절제ㆍ산업에게 느리게 길을 비켰다.
69:3.1 (773.9) 원시 사회에서 노동의 분업은 자연스런 상황에 따라서, 다음에는 사회적 상황에 따라 결정되었다. 초기에 노동이 전문화되는 체제는 다음과 같았다:
69:3.2 (774.1) 1. 남녀 구별에 따른 전문화. 선택하여 아이가 있게 되면서 여자의 일이 생겨났다. 여자는 자연히 남자보다 아기들을 더 사랑했다. 이처럼 여자는 일상적인 일꾼이 되었고, 한편 남자는 사냥꾼과 투사가 되어서, 집중하여 일하고 쉬는 기간이 있었다.
69:3.3 (774.2) 오랜 세월에 걸쳐 내내, 금기(禁忌)는 여자를 자기 밭에 꼭 붙잡아 두도록 작용했다. 남자는 아주 이기적으로 더 편한 일을 골랐고, 일상적인 고된 일을 여자에게 맡겼다. 남자는 언제나 여자의 일 하기를 부끄러워했지만, 여자는 남자의 일을 하는 것을 결코 거리끼는 적이 없었다. 그러나 기록하기 이상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집을 짓고 장만하는 데 언제나 같이 일했다.
69:3.4 (774.3) 2. 나이와 질병에 따라서 생기는 수정. 이 차이는 다음의 노동 분업을 결정했다. 늙은 남자와 병든 자는 일찍이 연장과 무기(武器)를 만드는 데 종사했다. 그들은 나중에 관개 시설을 만드는 데 배치되었다.
69:3.5 (774.4) 3. 종교에 기초를 둔 분화. 주술사(呪術師)는 처음으로 육체 노동에서 면제된 인간이었다. 그들은 전문 직종의 개척자였다. 대장장이는 마술을 쓰는 주술사와 경쟁한 작은 집단이었다. 금속을 가지고 일하는 그들의 솜씨는 사람들이 그들을 무서워하게 만들었다. “흰 대장장이”와 “검은 대장장이”는[1] [1709] 백마술과 흑마술을 믿는 초기의 신앙을 낳았다. 이 신앙은 나중에, 착한 귀신과 악한 귀신, 곧 착한 영과 악한 영을 믿는 미신과 결부되었다.
69:3.6 (774.5) 대장장이는 특권을 누린 첫 비종교 집단이었다. 그들은 전쟁 동안에 중립자로 간주되었고, 이렇게 남는 여가는 하나의 계급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원시 사회의 정치가가 되게 만들었다. 이 특권을 지나치게 악용함으로 대장장이들은 널리 미움을 받게 되었고, 주술사는 기회를 놓칠세라 경쟁자를 미워하도록 부추겼다. 과학과 종교 사이에 있은 이 첫 싸움에서 종교(미신)가 이겼다. 마을에서 쫓겨난 뒤에, 대장장이들은 촌락의 변두리에 첫 여인숙, 곧 대중을 위한 하숙집을 만들었다.
69:3.7 (774.6) 4. 주인과 종. 노동의 다음 분화는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관계에서 생겨났는데, 이것은 인간의 노예 제도가 시작된 것을 의미했다.
69:3.8 (774.7) 5. 다양한 신체 및 정신 자질에 기초를 둔 분화. 사람의 타고난 차이가 노동의 계속된 분업을 유리하게 만들었다. 모든 인간은 똑같이 태어나지 않는다.
69:3.9 (774.8) 산업에서 초기의 전문가는 부싯돌 벗기는 자와 석공이었고, 그 다음에는 대장장이가 뒤따랐다. 그 뒤에 집단의 전문화가 생겼다. 온 가족과 씨족이 어떤 종류의 노동에 종사했다. 부족의 주술사를 제쳐놓고, 가장 일찍 있었던 사제 계급 중에 하나는 칼 만드는 전문가들의 집단을 미신으로 높이 섬겼기 때문에 생겨났다.
69:3.10 (774.9) 산업에서 처음 집단 전문가는 돌소금 수출상과 도공(陶工)이었다. 여자는 평범한 오지그릇을 만들었고 남자는 화려한 것을 만들었다. 어떤 부족 사이에서는 여자가 바느질하고 천을 짰고, 다른 부족에서는 남자가 그 일을 했다.
69:3.11 (774.10) 초기의 상인은 여자였는데, 여자는 첩자로 고용되었고 상업을 부업(副業)으로 했다. 이내 무역이 확대되고, 여자는 중개인―중매인―으로 행동했다. 그리고 나서 상인 계급이 나타났고, 그들이 봉사한 대가로 수수료, 곧 이익을 받았다. 집단의 물물 교환이 성장한 것은 상업으로 발전했고, 상품 교환에 뒤이어서 기술 노동자의 교환이 생겼다.
69:4.1 (775.1) 여자를 사로잡아서 치르는 결혼 다음에 계약 결혼이 따랐던 것처럼, 침공으로 생긴 약탈 뒤에는 물물 교역이 뒤따랐다. 그러나 말없이 물물 교환을 하는 초기의 관습과 후일에 현대의 교환 방법으로 무역하는 사이에 해적(海賊) 행위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69:4.2 (775.2) 무장(武裝)한 무역상들이 처음 물물 교환을 했으며, 그들은 중간 지점에 물건을 놓아 두곤 했다. 여자들이 처음으로 시장을 열었고, 여자는 아주 일찍부터 있었던 상인(商人)이었는데, 이는 그들이 짐꾼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무사(武士)였다. 아주 일찍부터 무역 계산대가 발달되었고, 이것은 상인들이 무기로 서로 손이 미치지 못하도록 충분히 넓은 벽이었다.
69:4.3 (775.3) 말없이 물물 교환을 위해서 맡긴 물품을 지키려고 주물이 사용되었다. 그러한 시장은 도둑맞을 염려가 없었다. 물물 교환을 하거나 사지 않으면 아무것도 옮겨지지 않곤 했다. 주물이 지키고 있으면 상품은 언제나 안전했다. 초기의 상인은 자신의 부족 안에서 면밀하게 정직했지만, 먼 데서 온 낯선 사람을 속이는 것은 괜찮게 여겼다. 초기의 히브리인조차 이방인과 거래하는 데 다른 윤리 규정을 인정했다.
69:4.4 (775.4) 사람들이 무장하지 않고 신성한 시장에서 만나기 전에, 오랜 세월 동안 말없는 물물 교환이 계속되었다. 바로 이런 장터는 첫 성소(聖所)의 자리가 되었고, 어떤 나라에서는 나중에 “피난의 도시”로 알려졌다. 어떤 피난자가 시장에 다다라도 그는 안전했고, 공격받을 염려가 없었다.
69:4.5 (775.5) 처음의 저울추는 밀알과 기타 곡식의 낟알이었다. 교환의 처음 매체는 물고기나 염소였다. 나중에 송아지가 물물 교환의 단위가 되었다.
69:4.6 (775.6) 현대의 글자는 초기의 상업 기록에서 생겨났다. 사람의 처음 문서는 장사를 선전하는 기록, 소금 광고였다. 초기에 있던 많은 전쟁은 부싯돌ㆍ소금ㆍ금속과 같은 천연 매장물 때문에 일어났다. 맨 처음 맺은 공식(公式) 부족 조약은 소금 매장물을 부족들 사이에 같이 쓰는 것과 관계되었다. 이런 조약 장소는 친절하고 평화롭게 생각을 교환하고 여러 부족이 서로 섞이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69:4.7 (775.7) 글쓰기는 “소식 막대기,” 매듭진 끈, 그림으로 기록하기, 상형 문자, 조가비 띠의 단계를 거쳐서 초기의 상징 알파벳까지 발전했다. 소식(消息) 보내기는 원시적인 연기(煙氣) 신호로부터, 달리는 사람, 동물 타는 사람, 철로, 비행기까지, 그리고 전보ㆍ전화, 무선 통신에 이르기까지 진화했다.
69:4.8 (775.8) 고대의 상인이 새로운 생각과 개량된 방법을 사람 사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옮겼다. 모험과 연결하여, 상업은 탐험과 발견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 모두가 수송을 낳았다. 상업은 문화의 교류를 조장함으로 사람을 문명화시키는 좋은 도구였다.
69:5.1 (775.9) 자본은 오늘을 포기하고 앞날을 위하여 노동을 이용하는 것이다. 저축은 유지하고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보험이다. 먹을 것의 저장은 자제(自制)를 개발시켰고, 자본과 노동의 첫 문제를 만들어냈다. 먹을 것을 가진 사람은, 강도로부터 이를 보호할 수만 있다면, 먹을 것이 없는 사람보다 뚜렷한 장점을 가졌다.
69:5.2 (775.10) 초기의 은행가는 부족에서 용감한 사람이었다. 그는 집단의 귀중품을 맡아서 가지고 있었고, 한편 공격을 받았을 경우에 씨족 전부가 그의 오두막을 방어하곤 했다. 이처럼 개인의 자본과 집단 재산의 축적은 이내 군대 조직으로 이끌었다. 처음에 그러한 예방책은 바깥의 침공자들로부터 재산을 방어하려고 고안되었지만, 나중에는 이웃 부족의 재산과 재물을 침략하기 시작함으로 군대 조직을 연습시키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69:5.3 (776.1) 자본의 축적으로 이끈 기본 욕구는 다음과 같다:
69:5.4 (776.2) 1. 배고픔―선견과 연결된다. 먹을 것을 저축하고 보존하는 것은 앞날의 필요를 위해서 준비하는 충분한 선견이 있는 사람들에게 권력과 위안을 뜻했다. 식량의 저장은 기근과 재난에 대비하여 적절한 보험이었다. 그리고 원시의 도덕 관습 전체가 정말로, 사람이 오늘보다 내일을 중요시하는 것을 도우려고 고안되어 있다.
69:5.5 (776.3) 2. 가족 사랑―가족이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려는 소망. 자본은 앞날의 필요를 보장하기 위하여 오늘의 욕구가 강요하는데도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다. 이 앞날의 필요의 얼마큼은 사람의 자손과 상관이 있을지 모른다.
69:5.6 (776.4) 3. 허영심―사람이 재산 축적한 것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 여벌의 옷은 탁월을 나타내는 첫 표시의 하나였다. 수집하는 허영은 일찍부터 사람의 자존심을 끌었다.
69:5.7 (776.5) 4. 지위―돈으로 사회 및 정치적 위신을 사려는 열심. 상업화된 귀족들이 일찍부터 생겨났고, 귀족 계급에 끼는 것은 왕족에게 무슨 특별한 봉사를 해주는 데 달려 있기도 하고, 또는 솔직하게 돈을 낸 댓가로 허락되기도 했다.
69:5.8 (776.6) 5. 권력―주인이 되려는 갈망.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수단으로서 귀중품의 임대가 행해졌는데, 1년에 100퍼센트가 옛 시절에 이자율이었다. 대금업자는 항상 빚진 자들의 떼를 만들어 자신이 왕이 되었다. 종들은 아주 초기 형태의 축적한 재산이었고, 옛날에는 빚 때문에 생긴 종살이는 죽은 뒤에 몸을 통제하기까지 연장되었다.
69:5.9 (776.7) 6. 죽은 자의 귀신을 두려워하는 것―보호를 받으려고 사제에게 내는 요금. 다음 생명을 거쳐서 그들이 나아가는 것을 쉽게 만들기 위하여 재산을 쓰는 목적으로, 사람들은 일찍부터 사제들에게 죽음을 위한 선물을 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제들은 아주 부자가 되었고, 고대에 으뜸가는 자본가였다.
69:5.10 (776.8) 7. 성욕―아내를 하나 또는 여럿 가지려는 욕구. 남자가 처음으로 한 장사의 형태는 여자 교환이었고, 이것은 말을 파는 것보다 훨씬 앞섰다. 그러나 성(性) 노예의 매매는 결코 사회를 진보시키지 않았다. 그러한 장사는 민족의 치욕이었고, 지금도 그러한데, 이는 한꺼번에 그 장사가 가족 생활의 발전을 방해하고, 우수한 민족들의 생물학적 건강을 해쳤기 때문이다.
69:5.11 (776.9) 8. 수많은 형태의 자아 욕구의 충족. 부(富)가 권력을 주니까 더러는 부를 추구했고, 더러는 재산이 편안한 생활을 뜻하기 때문에 재산을 위하여 수고했다. 초기의 사람은 (그리고 후일의 어떤 사람들도) 재산을 사치품에 헤프게 쓰는 경향이 있었다. 취하게 하는 물품과 마약은 원시 종족들의 흥미를 끌었다.
69:5.12 (776.10)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서 사람들은 저축하는 새로운 동기를 얻었다. 최초의 배고픔 위에, 새로운 욕구가 빨리 불어났다. 빈곤을 아주 싫어해서, 죽었을 때 부자들만 천국으로 바로 간다고 생각되었다. 재산을 아주 소중히 여겨서, 허세부리는 잔치는 사람의 이름에서 불명예를 지워버리곤 했다.
69:5.13 (777.1) 재산의 축적은 일찍부터 사회적으로 탁월함을 가리키는 상징이 되었다. 어떤 부족에서는, 개인들이 어떤 휴일에 태우거나 동료 부족 사람들에게 거저 나누어 줌으로 감명을 주려고 몇 년 동안 재산을 쌓곤 했다. 이것은 그들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현대의 민족들도 아낌없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누어 주면서 흥청거리며, 한편 부자들은 큰 박애 및 교육 기관에 기부한다. 사람의 방법은 다르지만, 그 성향은 아주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69:5.14 (777.2) 그러나 옛날의 많은 부자가 그의 재물을 탐내는 자에게 피살되는 두려움 때문에 많은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는 것을 기록해야 공평하다. 부유한 사람들은 재산을 경시하는 것을 보이려고, 보통 노예 몇십 명을 잡아 바쳤다.
69:5.15 (777.3) 자본은 사람을 해방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자본은 사회 및 산업 조직을 크게 복잡하게 만들었다. 부당한 자본가들이 자본을 악용하는 것은 자본이 현대 산업 사회의 기초라는 사실을 없애지 않는다. 자본과 발명을 통해서 지금 세대는 땅에서 이전에 있던 어떤 세대보다도 더 높은 정도의 자유를 누린다. 이것을 생각 없고 이기적인 관리자들이 자본을 많이 악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실로서 기록한다.
69:6.1 (777.4) 원시 사회는 네―산업ㆍ규제ㆍ종교ㆍ군사―분과와 함께 불ㆍ동물ㆍ노예ㆍ재산을 도구로 씀으로 생겨났다.
69:6.2 (777.5) 불을 피우는 것은, 한 걸음에, 언제까지나 사람과 동물을 구별했다. 불은 인간의 기본 발명, 곧 발견이다. 모든 동물이 불을 무서워했기 때문에, 불은 사람으로 하여금 땅에서 머무를 수 있게 하였다. 불은 저녁때 사회적 교제를 북돋았다. 불은 추위와 들짐승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했을 뿐 아니라, 귀신에 대하여 방어 조치로도 쓰였다. 처음에는 열을 얻기보다 빛을 밝히려고 불이 쓰였다. 뒤떨어진 많은 부족은 불빛이 밤새도록 있지 않으면 잠을 자려 하지 않았다.
69:6.3 (777.6) 불은 사람을 교화시키는 좋은 수단이었고, 불을 잃지 않고 타고 있는 목탄을 이웃에게 줌으로, 사람에게 손해 보지 않고 남에게 이익이 되는 수단을 주었다. 어머니나 맏딸이 집안의 불을 돌보았고, 불은 사람의 첫 선생이었으며, 경계하는 태도와 신뢰가 요구되었다. 초기의 가정은 건물이 아니었지만, 가족은 불, 가족의 화로 둘레에 모였다. 아들이 새 집을 차렸을 때, 가족의 화로로부터 횃불을 가지고 갔다.
69:6.4 (777.7) 불을 발견한 안돈은 불을 예배 대상으로 다루기를 피했지만, 그 후손의 다수는 불꽃을 하나의 주물이나 영으로 여겼다. 쓰레기를 태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불이 주는 위생적 이익을 얻지 못했다. 원시인은 불을 무서워했고, 언제나 불을 기분 좋게 간직하려고 했으며, 따라서 향을 뿌렸다. 어떠한 상황에도 옛날 사람들은 결코 불 속에 침을 뱉거나, 또는 어떤 사람과 타고 있는 불 사이에 지나가려 하지 않았다. 초기의 인류는 불을 지필 때 쓰는 황철광과 부싯돌조차도 성스럽게 여겼다.
69:6.5 (777.8) 불을 끄는 것은 죄였다. 오두막에 불이 붙으면, 타도록 내버려 두었다. 성전과 성당에 있는 불은 신성했고, 해마다 또는 어떤 재난이 있은 뒤에 새 불을 지피는 관습을 제외하고, 결코 불이 꺼지도록 버려두지 않았다. 여자들이 집의 불을 관리했기 때문에, 여자들은 사제로 뽑혔다.
69:6.6 (778.1) 불이 어떻게 신들로부터 내려왔는가에 관한 초기의 신화는 번개로 불이 붙는 것을 지켜본 데서 생겼다. 초자연의 기원이 있다는 이 생각은 곧장 배화(拜火)로 이끌었고, 불의 숭배는 “불을 지나가는” 관습으로 발전되었으며, 이는 모세의 시절까지 계속된 풍습이었다. 죽은 뒤에 불을 지나간다는 관념이 아직도 남아 있다. 불의 신화는 초기 시절에 좋은 단결 수단이었고, 파시 교도의 상징에 아직도 남아 있다.
69:6.7 (778.2) 불은 먹을 것을 익혀 먹게 만들었고, “날로 먹는 사람”은 비웃는 표현이 되었다. 익히는 것은 음식을 소화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줄였고, 그래서 초기의 인간에게 사회적 문화를 가질 힘을 얼마큼 남겨 주었다. 한편 동물의 사육은 식량의 확보에 필요한 노력을 줄임으로 사회 활동을 할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69:6.8 (778.3) 불은 금속 세공(細工)의 길을 열었고, 나중에 증기 동력의 발견과 오늘날 전기의 사용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69:7.1 (778.4) 우선 첫째로, 동물 세계 전체가 사람의 적이었다. 인간은 자신을 짐승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배워야 했다. 처음에 사람은 동물을 먹어치웠지만, 나중에는 길들이고 사람을 위해서 일하도록 만드는 것을 배웠다.
69:7.2 (778.5) 동물 길들이기는 어쩌다가 일어났다. 아메리카 인디안이 들소를 사냥하는 것과 비슷하게, 야만인은 동물의 떼를 사냥하곤 했다. 야만인은 동물의 떼를 둘러싸서 동물을 통제할 수 있었고, 이처럼 식량에 필요한 대로 동물을 죽일 수 있었다. 나중에는 우리가 건축되었고, 동물의 떼 전체를 사로잡곤 했다.
69:7.3 (778.6) 어떤 동물은 길들이기 쉬웠지만, 많은 동물은 코끼리처럼 사로잡혀 있을 때 새끼를 낳으려 하지 않았다. 후일에 어떤 동물 종자는 사람의 존재에 복종하려 하고 사로잡혀 있어도 새끼를 낳는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처럼 동물 길들이기는 좋은 종자를 골라서 사육함으로 진전되었고, 이것은 달라마시아 시절 이후로 크게 진보한 기술이었다.
69:7.4 (778.7) 개는 처음으로 길들인 동물이었고, 개를 길들이는 어려운 체험은 어떤 개가 하루 종일 한 사냥꾼 주위를 따라다닌 뒤에 실제로 사냥꾼과 함께 집으로 갔을 때 시작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개는 식용으로, 사냥과 수송에, 그리고 동반하는 동물로 쓰였다. 처음에 개는 이리처럼 울부짖기만 했으나, 나중에 짖기를 배웠다. 개의 날카로운 후각은 개가 영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을 낳았고, 따라서 개를 주물로 모시는 종파가 생겼다. 망보는 개를 고용한 것은 처음으로 씨족 전체가 밤에 잘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눈에 보이는 적 뿐 아니라 유령으로부터 집을 보호하려고 지키는 개를 이용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개가 짖을 때는 사람이나 짐승이 다가온 것이지만, 개가 길게 울부짖을 때는 유령들이 가까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개가 밤에 울부짖는 것은 죽음을 상징한다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믿는다.
69:7.5 (778.8) 사냥꾼이었을 때 남자는 여자에게 꽤 친절했다. 그러나 동물을 길들인 뒤에, 칼리가스티아가 일으킨 혼란과 더불어, 많은 부족이 자기네 여자들을 부끄럽게 다루었다. 너무나 남자는 동물을 다루듯이 여자를 대했다. 남자가 여자를 무자비하게 대한 것은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장(章)의 하나이다.
69:8.1 (778.9) 원시인은 서슴지 않고 동료들을 종으로 만들었다. 여자는 첫 종, 가족의 종이었다. 목축하는 사람은 여자를 열등한 성(性) 상대인 종으로 만들었다. 이 종류의 성 노예는 남자가 여자에게 의존하는 성향이 줄어들자, 바로 그 결과로 생겨났다.
69:8.2 (779.1) 바로 얼마 전까지도 정복자의 종교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전쟁 포로들이 노예 처지로 떨어졌다. 그보다 더 전에 포로는 잡아먹히든지, 고문을 받아 죽든지, 서로 싸우게 되든지, 영들에게 희생되든지, 아니면 노예가 되었다. 노예 제도는 학살이나 잡아먹기보다 대단히 진보한 것이다.
69:8.3 (779.2) 노예로 만드는 것은 전쟁 포로를 자비롭게 취급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전진한 것이었다. 아이 성(城)을 취한 복병은[2] [1710]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을 전멸시키고, 정복자의 허영을 채우려고 임금만 살려놓았는데, 이것은 문명화되었다고 생각되는 민족들도 실행했던 미개한 학살을 충실히 보여준다. 바샨의 임금 옥을 침공한 것은 똑같이 모질고 같은 결과를 낳았다.[3] [1711] 히브리인은 적을 “남김없이 죽였고,” 그 재산을 모두 전리품으로 가졌다. 그들은 공물을 바치는 모든 도시가, 위반하면 “모든 남자의 죽음”을 각오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부족의 자부심을 덜 가진, 당대의 많은 부족은 우수한 포로를 부족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관습을 시작한 지 오래 된다.
69:8.4 (779.3) 아메리카의 홍인처럼, 사냥꾼은 노예를 만들지 않았다. 포로를 동료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죽였다. 목축하는 민족들 사이에는 노예 제도가 유행하지 않았는데, 이는 노동자가 거의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목자들은 남자 포로를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만 노예로 취했다. 모세의 법에는 이 여자 포로를 아내로 만드는 것에 관하여 특정한 지시가 들어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들을 돌려보낼 수 있었지만, 히브리인은 그러한 퇴짜맞은 배우자를 노예로 파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이것은 적어도 문명에서 하나의 진보였다. 히브리인의 사회 기준은 어설프기는 했지만, 둘러싼 부족들보다 훨씬 위에 있었다.
69:8.5 (779.4) 목자는 첫 자본가였는데, 가축 떼가 자본이었고, 그들은 그 이자―자연 증가분―으로 먹고 살았다. 그리고 이 재산을 노예나 여자들이 관리하라고 맡기기 싫어했다. 그러나 나중에 남자 죄수들을 받았고, 죄수들에게 땅을 갈도록 강요했다. 이것이 농노(農奴)―땅에 딸린 사람―의 첫 기원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땅을 경작하는 것을 쉽게 배웠고, 따라서 좋은 노예 종족이 되었다.
69:8.6 (779.5) 노예 제도는 연속되는 인간 문명에서 빠뜨릴 수 없는 고리였다. 노예 제도라는 다리 위로 사회는 혼란과 게으름으로부터 질서와 문명화된 활동이 있는 곳까지 건너갔다. 노예 제도는 뒤떨어지고 게으른 민족들이 일하도록 강요하고, 따라서 그들보다 우수한 자의 사회적 진보를 위하여 부와 여가를 마련해 주었다.
69:8.7 (779.6) 노예 제도는 사람으로 하여금 원시 사회를 규제하는 작용을 발명하도록 강요했으며, 그것은 정부의 시작을 낳았다. 노예 제도는 강력한 규제를 요구했고, 봉건 영주들이 노예를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세(中世)의 유럽에서 거의 사라졌다. 고대의 뒤떨어진 부족들은, 오늘날의 오스트랄리아 원주민과 마찬가지로, 결코 노예를 가지지 않았다.
69:8.8 (779.7) 노예 제도가 사람을 억압한 것은 참말이지만, 억압이라는 학교에서 사람은 부지런함을 배웠다. 노예들은 상급 사회가 생기는 것을 마지못해 도와주었고, 궁극에는 그 사회의 축복을 함께 가졌다. 노예 제도는 문화와 사회적 성취가 있는 조직을 창조하지만, 모르는 사이에 곧, 파괴적인 모든 사회악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며, 안에서 사회를 공격한다.
69:8.9 (779.8) 현대의 기계 발명은 노예를 쓸모 없이 만들었다. 노예 제도는 일부다처와 마찬가지로 수지가 맞지 않아 사라진다. 그러나 큰 무리의 노예를 갑자기 해방하는 것은 재난임이 반드시 입증되었다. 이들이 단계적으로 해방될 때 문제가 덜 따랐다.
69:8.10 (780.1) 오늘날, 사람은 사회의 노예가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 포부 때문에 빚의 노예로 전락한다. 강제하는 노예 제도가 사라지고 새롭고 개량된 형태로 수정된 산업 노예 상태가 대두되었다.
69:8.11 (780.2) 사회의 이상은 모든 사람이 자유를 가지는 것이지만, 게으름은 결코 묵인되어서는 안 된다. 튼튼한 육체를 가진 사람은 모두 적어도 자기가 먹고 살 만큼의 일을 하도록 강요되어야 한다.
69:8.12 (780.3) 현대의 사회는 거꾸로 간다. 노예 제도는 거의 사라졌고, 길들인 동물도 사라져 간다. 문명은 동력을 얻으려고 불에―무기체의 세계에―다시 손을 뻗고 있다. 사람은 불, 동물, 노예 제도를 거쳐서 야만 상태에서부터 올라왔다. 오늘날 사람은 뒤로 손을 뻗어서, 자연의 원소 창고로부터 부와 동력의 새로운 비밀과 근원을 쥐어짜려고 애쓴다.
69:9.1 (780.4) 원시 사회는 거의 공동체였지만, 원시인은 현대 공산주의 신조(信條)를 지키지는 않았다. 이 초기의 공산주의는 단순한 이론이나 사회적 신조가 아니라, 간단하고 실용적인 자동 조정이었다. 공산주의는 빈궁과 빈곤을 막았고, 이 고대의 부족들은 구걸과 매춘을 거의 알지 못했다.
69:9.2 (780.5) 원시 공산주의는 특히 사람을 똑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않았고, 평범을 찬양하지도 않았지만, 비활동과 게으름을 높이 쳐주었다. 그리고 근면을 짓누르고 포부를 죽였다. 공산주의는 원시 사회의 성장에 필수인 임시 발판이었지만, 네 가지 강한 인간의 성향을 거스르기 때문에, 더 높은 사회 체제로 진화하도록 길을 비켰다:
69:9.3 (780.6) 1. 가족. 사람은 재산을 쌓기만 바라지 않는다. 사람은 자본이 되는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한다. 그러나 초기의 공산 사회에서, 사람의 자본은 이내 소비되든지, 아니면 죽을 때 집단에 분배되었다. 재산 상속이 없었다―상속세가 100퍼센트였다. 나중에 자본을 축적하고 재산을 물려주는 관습은 사회의 뚜렷한 진보였다. 그리고 나중에 자본을 잘못 사용함으로 지나친 남용이 따랐는데도, 이것은 참말이다.
69:9.4 (780.7) 2. 종교적 경향. 원시인은 또한 다음 세상에서 생명을 시작하는 토대로서 재산을 저축하고 싶어했다. 이 동기는 어째서 사람의 개인 소유물을 함께 파묻는 관습이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는가 설명한다. 옛날 사람들은 오로지 부자만 즉시 어떤 쾌락과 위엄을 가지고 죽음에서 살아난다고 믿었다. 계시된 종교를 가르치는 선생, 특히 기독교 선생들은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와 같은 조건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처음으로 선포했다.
69:9.5 (780.8) 3. 자유와 여가를 가지고 싶은 소망. 사회가 진화하는 초기 시절에 개인의 소득을 집단에서 나누는 것은 실질적으로 일종의 노예 제도였다. 일하는 자는 게으른 자에게 노예가 되었다. 이것이 공산주의의 자살적 약점이다. 선견이 없는 자는 검소한 자에게 붙어사는 것이 버릇이었다. 현대에도 생각 없는 자는 나라가 (세금을 내는 검소한 자들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데 의존한다. 자본이 없는 자는 아직도 자본이 있는 자가 먹여 주기를 바란다.
69:9.6 (780.9) 4. 안전과 권력의 욕구. 진취적이며 성공하는 개인들의 속이는 버릇 때문에 공산주의는 마침내 무너졌는데, 그들은 자기 부족에서 꼼짝하지 않고 게으름 부리는 자에게 종이 되는 것을 피하려는 노력으로, 다채로운 핑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처음에 모든 저축은 비밀이었다. 원시의 불안감은 눈에 보이게 자본 축적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후일에도 지나치게 재산을 많이 쌓는 것은 아주 위험했다. 임금은 부자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어떤 죄목을 분명히 만들어 내곤 하였으며, 한 부자가 죽었을 때, 그 가족이 공공의 복지나 임금에게 큰 돈, 곧 상속세를 낼 때까지 장례식을 치르지 못하게 막았다.
69:9.7 (781.1) 초기에 여자는 공동체의 재산이었고, 어머니가 가족을 지배했다. 초기의 족장들은 모든 땅을 소유했고, 모든 여자를 소유한 사람이었다. 결혼은 족장의 찬성이 필요했다. 공산주의가 지나가자, 여자들은 개인별로 소유되었고, 아버지는 차츰 가정의 통제권을 쥐었다. 이처럼 가정이 비롯되었고, 지배했던 일부다처 관습은 차츰 일부일처(一夫一妻)로 바뀌었다 (일부다처제는 결혼에서 여자 노예의 요소가 남은 것이다. 일부일처제는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기르고, 공동의 문화를 가지고, 자아를 개선하는 아름다운 기업에서 생기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관계, 노예가 없는, 비할 데 없이 이상적인 관계이다.)
69:9.8 (781.2) 처음에는 연장과 무기(武器)를 포함해서, 모든 재산이 부족의 공동 재산이었다. 처음에는 몸소 만진 모든 물건이 사유 재산이었다. 낯선 사람이 한 컵으로 마시면, 그때부터 그 컵은 그의 것이었다. 다음에 피가 흘린 곳은 어디나, 다친 그 개인이나 집단의 재산이 되었다.
69:9.9 (781.3) 사유 재산은 그 소유자의 인격의 일부가 담겨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이처럼 처음부터 존중받았다. 재산에 대하여 사람이 정직한 것은 이 종류의 미신에 안전히 기초를 두었다. 아무런 경찰이 개인의 소유물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집단 안에서는 아무런 도둑질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른 부족의 물건을 취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재산 관계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고, 일찍부터 개인의 소유물을 불에 태우고 죽은 자와 함께 파묻었으며, 나중에는 남아 있는 가족이나 부족이 이를 물려받았다.
69:9.10 (781.4) 치장하는 종류의 개인 소유물은 부적을 달고 다니는 데서 생겨났다. 허영에 더하여 귀신을 무서워하는 것은 원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부적을 벗게 만들려는 온갖 시도를 물리치도록 만들었고, 그러한 재산은 필수품보다 더 귀중하게 평가되었다.
69:9.11 (781.5) 잠자는 자리는 아주 일찍부터 사람의 한 재산이었다. 나중에 부족의 추장이 집터를 배정하였고, 추장은 집단을 위해서 모든 부동산을 관리했다. 이내, 불 피는 자리는 소유권을 부여하였고, 그 뒤에 우물은 인접한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었다.
69:9.12 (781.6) 물웅덩이와 우물은 첫 사유 재산에 속했다. 주물 관습 전부가 물웅덩이ㆍ우물ㆍ나무ㆍ농작물ㆍ꿀을 지키는 데 이용되었다. 주물에 대한 믿음을 잃고 나서, 법이 개인 소유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진화되었다. 그러나 사냥 법, 곧 사냥하는 권리는 토지법을 훨씬 앞섰다. 아메리카의 홍인은 결코 개인의 토지 소유권을 이해하지 못했다. 홍인은 백인의 관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69:9.13 (781.7) 사유 재산은 일찍부터 가족의 문장(紋章)으로 표시되었는데, 이것이 가족 문장의 초기 기원이다. 부동산은 또한 영들의 감시를 받게 할 수 있었다. 사제들은 한 조각의 땅을 “거룩히 바치고,” 그러면 그 땅은 그 위에 세운 요술 금기(禁忌)의 보호를 받곤 했다. 금기의 소유자는 “사제의 증서”를 가졌다고 했다. 히브리인은 이 가족 땅의 경계 표지를 크게 존중했다. “이웃의 경계 표지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표시하는 돌덩이는 사제의 머리 글자를 가졌다. 머리 글자로 표시했을 때는 나무조차도 사유 재산이 되었다.
69:9.14 (782.1) 옛날에는 농작물만 사유(私有)가 되었으나, 연속해서 거두는 농작물은 소유권을 부여했다. 이처럼 농업은 개인 토지 소유권의 유래가 되었다. 개인들은 처음에 종신 소유권을 받았다. 죽을 때 땅은 부족에게 되돌아갔다. 부족이 개인에게 수여한 최초의 토지 소유권은 무덤―가족을 묻는 땅―이었다. 후일에 땅은 울타리를 친 자에게 속했다. 그러나 도시는 언제나 어떤 땅을 공유 목초지로서, 그리고 포위되었을 때 쓰려고 남겨 놓았다. 이런 “공유지”는 초기 형태의 집단 소유권이 남은 것이다.
69:9.15 (782.2) 결국에는 나라가 재산권을 개인에게 나누어 주었고, 세금을 부과할 권리를 유보하였다. 이 소유권을 확보해 놓고서, 지주들은 임대료를 걷을 수 있었고, 토지는 소득의 한 근원―자본―이 되었다. 마침내 땅은 정말로 매매(賣買)ㆍ이전(移轉)ㆍ저당, 권리 상실과 함께, 남에게 양도할 수 있었다.
69:9.16 (782.3) 사유 재산권은 자유를 늘이고 안정성을 높였다. 그러나 개인의 토지 소유권은 공동체의 통제와 지도가 실패했을 경우에만 사회의 인가를 받았고, 곧 노예ㆍ농노, 그리고 땅을 가지지 못한 계급이 뒤이어 따랐다. 그러나 개량된 기계는 차츰 사람을 종이 하는 고된 일로부터 해방시키고 있다.
69:9.17 (782.4) 재산권은 절대적이 아니고, 순전히 사회적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정부ㆍ법ㆍ질서, 그리고 현대 민족들이 즐기는 시민의 권리, 사회적 자유, 관습ㆍ평화ㆍ행복은 개인의 재산 소유권을 둘러싸고 성장했다.
69:9.18 (782.5) 현재의 사회 질서가 반드시 옳지는 않다―신성하거나 거룩하지는 않다―그러나 인류는 개정하는 일을 천천히 하는 것이 좋겠다.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너희 조상이 알고 있는 어떤 제도보다도 엄청나게 더 좋다. 너희가 사회 질서를 바꿀 때는 반드시 더 낫게 바꾸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조들이 버린 형식을 가지고 실험할 생각을 가지지 말라. 뒤로 가지 말고, 앞으로 나가라! 진화가 앞으로 나가게 하여라! 뒷걸음을 하지 말지어다.
70:0.1 (783.1) 생계를 잇는 문제를 일부 풀자마자, 사람은 인간의 접촉을 규제하는 일에 부닥쳤다. 산업의 발달은 법과 질서와 사회적 조정을 요구했다. 사유 재산은 정부를 필요하게 만들었다.
70:0.2 (783.2) 진화 세계에서 적개심은 자연히 생기고, 오로지 사회를 규제하는 어떤 종류의 체계가 평화를 보장한다. 사회적 규제는 사회의 조직과 뗄 수 없고, 관계는 어떤 통제하는 권한이 있음을 의미한다. 정부는 부족ㆍ씨족ㆍ가족ㆍ개인의 대립 관계가 조정되기를 강요한다.
70:0.3 (783.3) 정부는 의식하지 않고 발달한 것이요, 시행 착오로 진화한다. 정부는 살아남을 가치가 있고, 따라서 정부는 전통이 된다. 무정부는 비참을 더하고, 따라서, 정부, 곧 상대적 법과 질서는 천천히 태어났거나 태어나고 있다. 살기 위하여 투쟁해야 한다는 요구는 문명에 이르기까지 진보하는 길을 따라서 글자 그대로 인류를 몰았다.
70:1.1 (783.4) 전쟁은 진화하는 사람의 자연스런 상태요 물려받은 것이다. 평화는 문명이 진보한 정도를 재는, 사회의 척도이다. 진보하는 민족들이 어느 정도 교제하기 전에, 사람은 극도로 개인주의이고, 지나치게 의심이 많고, 믿을 수 없이 다투기를 좋아했다. 폭력은 자연의 법칙이요, 적의(敵意)는 자연인의 자동 반응이며, 한편 전쟁은 다만 바로 이 활동을 집단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명의 구조가 사회의 진보에 따르는 혼란에 시달릴 때는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인간의 상호 관계에서 생기는 염증을 폭력으로 해결하는 이 옛 방법으로, 즉시 파괴 성향으로 되돌아간다.
70:1.2 (783.5) 전쟁은 오해와 염증에 대하여 동물처럼 반응하는 것이다. 모든 그러한 문제와 어려움의 문명화된 해결에 평화가 뒤따른다. 나중에 질이 나빠진 아담 족속과 놋 족속과 함께, 산긱 민족들은 모두 싸움을 좋아했다. 안돈 족속은 일찍부터 황금률을 배웠으며, 오늘날도 그 에스키모 후손은 대체로 그 법을 따라 산다. 관습은 그들 사이에 확고하며, 그들에게는 사나운 대립 관계가 없는 편이다.
70:1.3 (783.6) 안돈은 자식들에게, 각자가 나무를 저주하면서 막대기로 나무를 때림으로 말다툼 해결하는 것을 가르쳤다. 막대기를 먼저 부러뜨린 자가 이긴 사람이었다. 후일의 안돈 족속은 대중의 구경거리를 열어서 싸움을 해결하곤 했는데, 거기서 싸우는 자들이 서로 놀리고 비웃었고, 한편 청중은 박수로 이긴 자를 결정했다.
70:1.4 (783.7) 그러나 사회가 실제로 평화스런 기간을 체험하고 전쟁 비슷한 연습을 인가할 만큼 충분히 진화하기까지, 전쟁과 같은 현상이 전혀 있을 수 없다. 전쟁한다는 바로 그 개념은 어느 정도의 조직이 있음을 의미한다.
70:1.5 (784.1) 사회 집단들이 생겨나자, 개인의 짜증은 집단의 감정 속에 파묻혀 사라지기 시작했고, 이것은 부족 안에서 평온을 증진했지만, 부족들 사이의 평화를 희생하였다. 이처럼 먼저 내부 집단, 곧 부족이 평화를 누렸고, 그들은 언제나 바깥 집단, 다른 부족 사람들을 싫어했다. 일찍부터 사람은 타지방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70:1.6 (784.2) 그러나 이것도 처음에는 효과가 없었다. 오해를 해소하려고 애썼을 때, 초기의 족장들은 적어도 1년에 한 번, 부족의 돌싸움을 허가하는 것이 필요함을 흔히 발견했다. 그 씨족은 두 무리로 갈라져 하루 종일 싸움에 빠지곤 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저 재미로 하는 외에 아무런 다른 이유가 없었고, 그들은 정말로 싸움을 즐겼다.
70:1.7 (784.3) 전쟁이 지속하는 것은 사람이 동물로부터 진화한 인간이기 때문이며, 동물은 다 싸움을 좋아한다. 초기에 전쟁의 원인은 다음과 같았다:
70:1.8 (784.4) 1. 배고픔은 식량을 얻기 위한 침공으로 이끌었다. 땅이 부족한 것은 언제나 전쟁을 불러 왔고, 이러한 투쟁에서 초기의 평화로운 부족들은 실질적으로 멸종했다.
70:1.9 (784.5) 2. 여자의 부족(不足)―집안 일꾼이 모자라는 것을 해소하려는 시도. 여자를 훔치는 것은 반드시 전쟁을 일으켰다.
70:1.10 (784.6) 3. 허영심―부족의 용맹을 나타내려는 욕심. 우수한 집단은 그들의 생활 방식을 열등한 민족에게 강제하기 위하여 싸우려 한다.
70:1.11 (784.7) 4. 노예―노동 계급이 될 새 일꾼을 모집할 필요.
70:1.12 (784.8) 5. 복수는 이웃 부족이 동료 부족 사람의 죽음을 초래했다고 믿었을 때, 전쟁의 동기가 되었다. 애도(哀悼)는 머리 하나를 집으로 가져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복수(復讐)하는 전쟁은 근대에 바로 이르기까지 좋은 평가를 받았다.
70:1.13 (784.9) 6. 오락―이 초기 시절에 젊은 남자들은 전쟁을 오락으로 보았다. 전쟁을 위하여 좋은 충분한 핑계가 생기지 않으면, 평화가 답답할 때, 가까이 있는 부족들은, 노는 날로, 거짓 싸움을 즐기기 위해서, 약탈에 참가하려고 반(半) 우호적 전쟁에 나가는 습관이 있었다.
70:1.14 (784.10) 7. 종교―종파로 전향하는 자들을 얻으려는 욕심. 원시 종교들은 모두 전쟁을 인가했다. 겨우 요즈음에 와서야 종교는 전쟁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초기의 사제들은, 유감스럽게도 보통, 군사력과 손을 잡았다. 오랜 세월 동안에 큰 평화 운동 중의 하나는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려는 시도였다.
70:1.15 (784.11) 이 옛 부족들은 언제나 그들의 신들의 명령을 받고서, 추장(酋長)이나 주술사의 요청을 받고서, 전쟁을 일으켰다. 히브리인은 그러한 “전투의 하나님”을 믿었고, 그들이 미디안 족속을 침공한 이야기는 옛날에 부족 전쟁에서 일어난 잔학 행위의 전형적 이야기이다. 모든 남자를 도살하고 나중에는 모든 남자 아이와 처녀가 아닌 모든 여자를 죽인 이 침공은 20만 년 전에 한 부족 추장의 관습에 경의를 표했을 것이다. 이 모두가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1] [1712] 행해졌다.
70:1.16 (784.12) 이것은 사회의 진화―종족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이야기, 사람이 땅에서 자신의 운명을 해결해 나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한 잔학 행위는, 사람이 그 책임을 신들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신이 부추긴 것이 아니다.
70:1.17 (784.13) 군사적(軍事的) 자비는 인류를 더디게 찾아왔다. 한 여자 데보라가 히브리인을 통치했을 때에도, 바로 이 대규모의 잔학 행위가 계속되었다. 그 여자의 장군이 이방인에게 승리했을 때 “모든 무리가 칼날에 이슬이 되게” 만들었고, “하나도 남지 않았다.”
70:1.18 (785.1) 아주 일찍부터 민족의 역사에서, 독이 있는 무기(武器)가 쓰였다. 온갖 종류의 몸 부분 자르기가 실행되었다. 사울은 자기 딸 미갈을 위해서 내야 할 지참금으로, 다윗에게 필리스티아인 1백 명의 포피(包皮)를 서슴지 않고 요구했다.
70:1.19 (785.2) 초기의 전쟁에는 부족 전체가 싸웠으나, 후일에는 서로 다른 부족에 속한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이 있을 때, 두 부족이 싸우는 대신에, 그 두 사람만 결투에 들어갔다. 다윗과 골리앗의 경우에서 보다시피, 두 군대가 각 편에서 뽑은 대표 사이의 싸움 결과에 모두를 거는 것이 또한 관습이 되었다.
70:1.20 (785.3) 전쟁이 처음으로 개선된 것은 포로를 잡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여자는 전투 행위에서 제외되었고, 그리고 나서 뒤이어 비전투원을 인정하게 되었다. 전투가 더욱 복잡하게 되는 것과 발을 맞추어 군대 계급과 상비군이 곧 개발되었다. 그러한 용사들은 여자와 교제하는 것이 일찍부터 금지되었고, 여자들은 오래 전에 싸움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여자들은 언제나 군인들을 먹이고 돌보았으며, 그들이 싸우도록 계속 격려했다.
70:1.21 (785.4) 전쟁을 선언하는 관습은 큰 진보이다. 싸우겠다는 의사(意思)를 그렇게 선언하는 것은 공정 감각이 도래했음을 가리키며, 뒤이어 “문명화된” 전쟁 규칙이 차츰 발전되었다. 아주 일찍부터 종교적인 장소 가까이에서, 나중에는 어떤 거룩한 날에 싸우지 않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다음에는 피난처의 권리를 공인하는 일이 따랐으며, 정치적 망명자는 보호를 받았다.
70:1.22 (785.5) 이렇게 전쟁은 원시적인 사람 사냥으로 시작하여 후일에 “문명화된” 국가들의 얼마큼 질서 있는 체계로 차츰 발전했다. 그러나 사회의 우호적 태도는 적대하는 태도를 천천히 바꿀 뿐이다.
70:2.1 (785.6) 지나간 시대에 격심한 전쟁은, 1만 년 동안에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을 그러한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고 새로운 생각을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들곤 하였다. 전쟁으로 생기는 이러한 어떤 이득을 얻으려고 끔찍한 대가를 치르는 것은 사회가 일시 야만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문명화된 논리는 물러나야 했다. 전쟁은 효력이 센 약이요, 아주 비싸고 몹시 위험하다. 어떤 사회적 질병을 가끔 고치지만, 전쟁은 때때로 환자를 죽이고 사회를 파괴한다.
70:2.2 (785.7) 상존하는 국가 방어의 필요성은 사회에서 새롭고 진보된 많은 조정을 일으킨다. 오늘날의 사회는 허다한 유익한 기술 혁신의 이익을 누리는데, 이것들은 처음에 전적으로 군사(軍事) 목적이었고, 춤은 전쟁의 덕으로 비롯되었으며, 춤은 초기 형태의 군사 훈련의 하나였다.
70:2.3 (785.8) 전쟁은 지난날의 문명에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전쟁이:
70:2.4 (785.9) 1. 훈련, 곧 강제된 협동을 부과했다.
70:2.5 (785.10) 2. 사람들이 인내와 용기를 소중히 여기게 만들었다.
70:2.6 (785.11) 3. 민족주의를 육성하고 자리잡게 만들었다.
70:2.9 (785.14) 전쟁은 어떤 진화적 가치와 사람을 선택하는 가치가 있지만, 노예 제도와 마찬가지로, 문명이 천천히 진보함에 따라서 언젠가 전쟁을 버려야 한다. 옛날의 전쟁은 여행과 문화의 교류를 촉진했는데, 이런 목표는 현대의 수송과 통신 방법으로 지금 더 쉽게 달성된다. 옛날의 전쟁은 국가를 강화했지만, 현대의 전투는 문명 세계의 문화를 뒤집어엎는다. 고대의 전쟁은 열등한 종족의 학살을 초래했다. 현대 전투의 최종 결과는 가장 훌륭한 인간 혈통을 골라서 파괴하는 것이다. 초기의 전쟁은 조직과 효율성을 촉진했지만, 이것은 이제 현대 산업의 목표가 되었다. 지난 시대에 전쟁은 문명을 앞으로 나가게 한 사회적 효소(酵素)였다. 지금은 포부와 발명이 이 결과를 더 낫게 달성한다. 고대의 전쟁은 전투하는 하나님 개념을 지지했지만, 현대인은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말을 들었다. 지난날에는 전쟁이 많은 가치 있는 목적에 소용이 되었고, 문명을 세우는 데 필수 발판이었지만, 전쟁은 급속히 문화에 손해가 되고 있다―전쟁을 불러일으키는 데 따르는 끔찍한 손해에 비례해서 어떤 면으로도 사회에 이익을 배당할 수 없다.
70:2.10 (786.1) 한때 의사들은 방혈(防血)이 여러 가지 병을 치료한다고 믿었지만, 의사들은 그 뒤로 이러한 질병의 대부분에 더 좋은 처방을 발견했다. 그래서 전쟁이 낳는 국제적 유혈(流血)은 분명히, 국가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더 좋은 방법을 발견하도록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70:2.11 (786.2) 유란시아의 나라들은 민족적 군사주의와 산업주의 사이에 벌어지는 거대한 싸움에 이미 들어갔고, 여러 면에서 이 투쟁은 목자인 사냥꾼과 농부 사이에 오랜 세월에 걸쳤던 투쟁과 비슷하다. 그러나 산업주의가 군사주의를 이기려면, 산업주의를 따르는 위험을 피해야 한다. 유란시아에서 싹트는 산업의 위험은 다음과 같다:
70:2.12 (786.3) 1. 물질주의, 곧 영적으로 눈이 먼 상태로 강하게 흘러가는 경향.
70:2.13 (786.4) 2. 부와 권력의 숭배, 가치의 왜곡.
70:2.14 (786.5) 3. 사치의 악덕, 문화적 미숙.
70:2.15 (786.6) 4. 게으름, 봉사에 무감각한 것, 이 두 가지 위험이 커진다.
70:2.16 (786.7) 5. 바람직하지 않게 종족이 연약해지는 것, 생물학상의 악화.
70:2.17 (786.8) 6. 표준화된 산업에 노예가 되는 위협, 인격이 성장하지 않는 것. 노동은 사람을 고상하게 만들지만, 고역은 감각을 마비시킨다.
70:2.18 (786.9) 군사주의는 독재이며 잔인하다―야만스럽다. 정복자들 사이에서 사회 조직을 촉진하지만, 정복당한 자를 무너뜨린다. 산업주의가 더 문명화된 것이며, 창의성을 촉진하고 개성을 북돋아주도록, 산업주의를 실천해야 한다. 사회는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창의성을 길러주어야 한다.
70:2.19 (786.10) 전쟁을 영화롭게 기리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오히려 문명의 진보를 계속하기 위해서 전쟁의 대용품이 무엇을 마련해야 주어야 하는가 더 똑똑히 볼 수 있도록 전쟁이 사회에 무슨 이익을 가져왔는가 헤아려 보아라. 그러한 적당한 대용품을 마련하지 않으면, 전쟁이 오랫동안 계속될 것을 너희는 확신해도 좋다.
70:2.20 (786.11) 평화가 사람의 물질적 복지에 최선이라는 것을 속속들이 거듭하여 사람이 확신하기까지, 그리고 인류의 자아 보존 반응에 속하는, 늘 쌓이는 감정과 에너지를 방출하도록 예정된 집단 욕구를 이따금 해소하는 타고난 성향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사회가 평화적 대용품을 지혜롭게 마련할 때까지, 사람은 결코 평화를 정상 생활의 형태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70:2.21 (786.12) 그러나 지나는 길에 덧붙인다면, 전쟁을 체험의 학교로 존중해야 하며, 이 학교는 거만한 개인주의자로 이루어진 민족을 상당히 집중된 권한―최고 집행자―에 복종하도록 강요했다. 옛날 방식의 전쟁은 선천적으로 위대한 사람을 지도자로 뽑았지만, 현대의 전쟁은 이제 더 이렇게 하지 않는다. 지도자를 찾으려면, 사회는 이제 평화를 정복하는 일, 곧 산업ㆍ과학, 그리고 사회적 성취에 눈을 돌려야 한다.
70:3.1 (787.1) 가장 원시적 사회에서는 집단이 전부이다. 아이들조차 집단의 공동 재산이다. 진화하는 가족은 아이를 기르는 일에 집단을 대체하였고, 한편 생겨나는 씨족과 부족들은 사회 단위로서 가족을 대신했다.
70:3.2 (787.2) 성욕과 모성애는 가족을 일으킨다. 그러나 가족을 초월하는 집단들이 비로소 형성되기까지 진짜 정부는 나타나지 않는다. 집단이 가족을 갖기 이전 시절에, 비공식으로 뽑은 개인들이 지도자가 되었다. 아프리카의 부시맨은 결코 이 원시 단계를 넘어서 진보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무리 안에 우두머리가 없다.
70:3.3 (787.3) 가족들은 씨족, 곧 친척 집합의 혈연으로 뭉치게 되었다. 씨족들은 나중에 부족, 곧 영토를 가진 공동체로 진화하였다. 전쟁과 외부의 압력은 인척 관계를 가진 씨족들에게 부족을 조직하도록 강요했지만, 어느 정도 내부의 평화로 이 초기의 원시 집단들을 결속한 것은 상업과 무역이었다.
70:3.4 (787.4) 환상적 평화를 계획하는, 감상에 젖은 어떤 궤변보다, 국제 무역(貿易) 조직이 유란시아의 평화를 훨씬 더 증진할 것이다. 언어의 발달이, 그리고 개량된 수송 뿐 아니라 통신 방법이, 무역 관계를 수월하게 만들었다.
70:3.5 (787.5) 공통된 언어의 부재(不在)는 언제나 평화 집단의 성장을 막았지만, 돈은 현대 무역에서 보편적 언어가 되어버렸다. 대체로, 산업 시장이 현대 사회를 결속한다. 이익의 동기는 봉사하려는 욕구로 커졌을 때, 사람을 문명화시키는 강력한 도구이다.
70:3.6 (787.6) 초기 시대에 각 부족은 바깥으로 나가면서 두려움과 의심이 증가하는 그러한 여러 동심원(同心圓)에 둘러싸여 있었다. 따라서, 한때는 낯선 사람을 모두 죽이는 것, 나중에는 그들을 종으로 만드는 것이 관습이었다. 옛날의 친교 관념은 씨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했으며, 씨족의 회원 자격은 죽은 뒤에도 계속된다고 생각되었다―이것은 가장 초기의 영생 개념의 하나이다.
70:3.7 (787.7) 부족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의식(儀式)은 서로의 피를 마시는 것이었다. 어떤 집단에서는 피를 마시는 대신에 침을 교환하였고, 이것이 사교에서 입맞추는 관습의 옛 기원이다. 그리고 관계를 맺는 모든 의식은, 결혼이든 입족 예식이든, 언제나 잔치를 벌임으로 끝났다.
70:3.8 (787.8) 후일에는 붉은 포도주로 묽게 만든 피가 쓰였고, 결국에는 오직 포도주를 입족 의식을 봉인하려고 마셨는데, 이 의식은 포도주 잔을 스침으로 표시했고, 마실 것을 삼키고서 끝났다. 히브리인은 이 입족 의식을 고쳐서 실행하였다. 그들의 아랍 조상은 서약을 이용했는데, 서약은 후보자의 손이 부족 원주민의 생식기에 놓인 동안 실시되었다. 히브리인은 받아들인 외국인을 친절하게, 형제처럼 다루었다. “너희와 함께 거하는 외국인은 너희 사이에 태어난 자와 같게 될지니, 너희는 그를 네 몸처럼 사랑할지니라.”
70:3.9 (787.9) “손님 자격의 친교”는 임시 친교 관계였다. 방문하는 손님이 떠날 때, 접시를 반쪽으로 깨뜨리고 한 조각을 떠나는 친구에게 주었고, 그것은 나중에 방문하려고 도착할지 모르는 제삼자를 위하여 적당한 소개장으로 쓰이곤 하였다. 손님들은 자기의 여행과 모험에 관하여 이야기함으로 방문에 대하여 보답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옛날의 이야기꾼들은 아주 인기가 좋아서, 결국 관습은 사냥하거나 수확하는 철 동안에 이야기꾼의 활동을 금지하였다.
70:3.10 (788.1) 첫 평화 조약은 “피의 유대”였다. 싸우는 두 부족을 대표하는 평화 대사(大使)들이 만나서, 경의를 표하고, 다음에 나아가서 살갗에서 피가 날 때까지 찌르곤 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서로의 피를 빨아먹고 평화를 선언하곤 했다.
70:3.11 (788.2) 가장 일찍 있었던 평화 사절단은 옛날 적들의 성욕(性慾)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 가장 예쁜 자기네 처녀들을 데려오는 남자들의 대표단이었는데, 성욕이 전쟁 요구를 물리치는 데 이용된 것이다. 그렇게 명예를 받은 부족은 자체가 바치는 처녀들을 데리고, 답례 방문을 하곤 했다. 그리고 나서 평화가 정착된 것이다. 그리고 추장들의 가족 사이에서 서로 결혼하는 것이 인가되었다.
70:4.1 (788.3) 첫 평화 집단은 가족이었고, 다음에는 씨족ㆍ부족, 나중에는 민족이었으며, 민족은 결국 영토를 가진 현대 국가가 되었다. 유란시아의 나라들이 아직도 전쟁 준비에 막대한 돈을 쓰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도, 오늘날의 평화 집단들이 혈연을 넘어서 국가들을 포함한 지 오래 되었다는 사실은 아주 격려가 된다.
70:4.2 (788.4) 씨족은 부족 안에서 혈연을 가진 집단이며, 그들의 존재는 다음과 같은 어떤 공통된 이익에 빚을 지고 있다:
70:4.3 (788.5) 1. 공통된 조상까지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70:4.4 (788.6) 2. 공통된 종교 토템에 충성한다.
70:4.5 (788.7) 3. 같은 지방 사투리를 말한다.
70:4.6 (788.8) 4. 공통된 거처를 함께 쓴다.
70:4.9 (788.11) 씨족의 수령들은 반드시 부족 추장에게 종속되었고, 초기의 부족 정부는 씨족들의 허술한 연합이었다. 오스트랄리아 원주민은 결코 부족 형태의 정부를 개발하지 못했다.
70:4.10 (788.12) 씨족의 평화시 추장은 보통 모계(母系)를 통해서 다스렸다. 부족의 전시(戰時) 추장은 부계를 확립했다. 부족 추장 및 초기 임금의 법정은 씨족의 수령들로 구성되었고, 그들을 임금 앞으로 1년에 몇 번씩 초대하는 것이 풍습이었다. 이것은 임금으로 하여금 그들을 지켜보고 그들의 협조를 더 단단히 확보하게 만들었다. 씨족들은 지역의 자치 정부에서 값진 목적에 쓰였지만, 크고 강한 국가의 성장을 아주 더디게 만들었다.
70:5.1 (788.13) 인간의 모든 제도는 시작이 있었고, 결혼ㆍ산업ㆍ종교와 꼭 마찬가지로, 국가의 정부는 점진적 진화의 산물이다. 초기의 씨족과 원시 부족들로부터, 연속되는 체제의 인간 정부가 차츰 개발되었고, 20세기에 둘째 3분의 1의 특징을 나타내는 그러한 형태의 사회 및 시민 규제에 바로 이르기까지, 이러한 정부는 생겼다가 없어졌다.
70:5.2 (788.14) 가족 단위가 차츰 나타나자, 씨족 조직에서, 같은 피를 가진 가족들의 집합에서, 정부의 기초가 세워졌다. 진짜 정부 단체의 처음은 장로 회의였다. 이런 규제하는 집단은 어떤 유능한 방법으로 탁월함을 보인 노인들로 구성되었다. 야만인도 지혜와 경험을 존중하였고, 장로들이 지배하는 오랜 세월이 뒤따랐다. 나이 든 소수가 이렇게 독재하는 통치는 차츰 족장의 관념으로 발전했다.
70:5.3 (789.1) 초기의 장로 회의에는 모든 정부 기능, 곧 행정ㆍ입법ㆍ사법 기능의 잠재성이 존재했다. 당대의 관습을 풀이했을 때, 그 회의는 법정이었다. 새로운 양식의 사회 관습을 세울 때는 입법 기관이었고, 그러한 선포와 법령이 집행되는 한도까지, 그것은 행정부였다. 그 회의의 의장은 나중에 부족 우두머리의 선구자 중에 하나였다.
70:5.4 (789.2) 어떤 부족에는 여자 회의가 있었고, 때때로 많은 부족이 여자 통치자를 가졌다. 홍인의 어떤 부족들은 “7인 회의”의 만장일치 통치를 따르는 면에서 오나모나론톤의 가르침을 보존했다.
70:5.5 (789.3) 다투는 사회가 평화나 전쟁을 경영할 수 없다는 것을 인류가 깨닫기는 어려웠다. 원시의 “교섭”은 유익한 일이 드물었다. 여러 씨족의 수령들이 명령하는 군대는 한 사람이 지휘하는 강한 군대에 맞서서 승산이 없다는 것을 종족은 일찍부터 배웠다. 전쟁은 반드시 임금을 만들었다.
70:5.6 (789.4) 처음에 전쟁 추장은 군사 근무에만 뽑혔고, 평화시에는 그 권한의 얼마를 포기하곤 했는데, 이때 추장의 임무는 사회적 성질을 더 띠었다. 그러나 차츰차츰 그들은 평화 기간을 잠식하기 시작했고, 한 전쟁에서 다음 전쟁이 있기까지 내내, 계속하여 다스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흔히 한 전쟁이 끝나고 다음 전쟁이 생기는 데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도록 처리하였다. 이 초기의 전쟁 군주들은 평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70:5.7 (789.5) 후일에 어떤 추장들은 군대 근무가 아닌 일 때문에 선출되었고, 특별한 체격이나 뛰어난 개인 능력 때문에 뽑히었다. 홍인은 흔히 두 벌의 추장―총재, 곧 평화시 추장, 그리고 상속되는 전쟁 추장―이 있었다. 평화시의 통치자는 또한 판관이요 선생이었다.
70:5.8 (789.6) 주술사가 어떤 초기의 공동체를 다스렸고, 그들은 흔히 추장으로서 행동했다. 한 사람이 사제, 의원, 최고 집행자로서 행동하곤 했다. 아주 흔히 초기의 왕의 문장(紋章)은 최초에 사제의 옷의 표시나 상징이었다.
70:5.9 (789.7) 이런 단계를 걸쳐서 정부의 행정부가 차츰 생기게 되었다. 씨족 및 부족 회의는 자문하는 기능을 가지고, 또 나중에 나타나는 입법부와 사법부의 선구자로서, 계속하였다. 아프리카에는 오늘날 이 모든 형태의 원시 정부가 여러 부족 사이에서 실제로 존재한다.
70:6.1 (789.8) 완전한 집행 권한을 가진 추장이 나타난 뒤에야 효과적인 국가 통치가 다가왔다. 한 인물에게 관념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권한을 줌으로써 효과적 정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사람은 발견했다.
70:6.2 (789.9) 통치권은 가족의 권한이나 재산 관념으로부터 생겨났다. 족장인 소왕(小王)이 정말로 임금이 되었을 때, 그를 때때로 “민족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나중에, 임금은 영웅으로부터 솟아나왔다고 생각되었다. 세월이 더 지나서, 왕이 신성한 기원을 가졌다는 믿음 때문에, 통치권이 상속되었다.
70:6.3 (789.10) 세습(世襲)하는 왕권은 이전에 임금이 죽고 후계자가 선출되는 사이에, 대혼란을 일으켰던 무정부 상태를 피했다. 가족은 생물학상의 우두머리가 있고, 씨족은 자연히 선택된 지도자가 있었다. 부족과 나중에 생긴 국가는 자연스런 지도자가 없었다. 이것은 추장이나 왕의 자리를 물려주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였다. 왕의 가족과 귀족 제도의 관념은 또한 씨족이 “이름 소유권”을 가지는 관습에 기초를 두었다.
70:6.4 (790.1) 왕의 계승은 결국 초자연의 일로 간주되었고, 왕족의 피는 칼리가스티아 영주의 육체화된 참모진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처럼 왕은 주물 인격자가 되었고 사람들은 터무니없이 왕을 무서워하게 되었으며, 특별한 형태의 대화를 궁정에서 쓰도록 채택하였다. 요즈음까지도 왕의 손길은 병을 고친다고 생각되었고, 어떤 유란시아 민족들은 아직도 그들의 통치자가 신에게서 기원을 가졌다고 여긴다.
70:6.5 (790.2) 초기의 주물 임금은 흔히 은둔 속에 두었다. 그는 너무나 신성해서 잔칫날과 휴일을 빼고는 사람들이 볼 수 없다고 여겼다. 보통 한 대표가 그를 흉내내도록 선택되었고, 이것이 수상(首相)의 기원이다. 첫 내각의 관리는 식량 관리자였고, 다른 사람들이 곧 뒤를 이었다. 통치자들은 이내 상업과 종교를 책임지는 대표들을 지명했다. 내각의 발전은 집행 권한을 개인적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직접 내디딘 걸음이었다. 초기 임금의 이러한 조수들은 인정받는 귀족이 되었고, 여자들이 전보다 더 존경받게 되자, 왕의 아내는 차츰 왕비의 위엄으로 올라갔다.
70:6.6 (790.3) 양심 없는 통치자들은 독을 발견함으로 큰 권력을 쥐었다. 일찍부터 궁중의 요술은 악마처럼 잔학했다. 임금의 적들은 금방 죽었다. 그러나 아주 잔학한 폭군도 얼마큼 제한을 받았다. 그는 늘 암살당하는 두려움 때문에 적어도 자제하였다. 주술사ㆍ마술사ㆍ사제는 언제나 임금에게 강력한 저지 세력이었다. 나중에는, 지주(地主), 곧 귀족들이 제어하는 영향력을 미쳤다. 그리고 때때로 씨족과 부족들이 그저 들고일어나서, 전제 군주와 폭군을 뒤집어엎었다. 폐위된 통치자는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흔히 자살하는 선택권이 주어졌는데, 이것은 어떤 환경에서 자살하는, 고대 사회의 유행을 낳았다.
70:7.1 (790.4) 혈연 관계는 처음 사회 집단들을 결정했고, 인간 관계는 친척인 씨족을 확대했다. 서로 결혼하는 것은 집단을 확대하는 다음 걸음이었고, 그에 따라 생긴 복잡한 부족은 처음으로 참된 정치 단체였다. 사회의 발전에서 다음의 진보는 종교적 종파와 정치 클럽의 진화였다. 이것들은 처음에 비밀 사회로서 나타났고, 최초에는 온전히 종교적이었는데, 나중에는 행동을 규제하였다. 처음에 이러한 비밀 사회는 남자들의 클럽이었고, 나중에 여자들의 클럽이 나타났다. 이내 클럽은 두 등급, 사회ㆍ정치적 등급과 종교적이고 신비스런 등급으로 나누어졌다.
70:7.2 (790.5) 이 사회들이 비밀을 지키는 데는 많은 까닭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70:7.3 (790.6) 1. 어떤 금기를 위반하는 것 때문에 통치자의 비위를 건드리는 두려움.
70:7.4 (790.7) 2. 소수의 종교 의식(儀式)을 거행하기 위해서.
70:7.7 (790.10) 이 사회들이 지키는 바로 그 비밀은 모든 회원에게, 나머지 부족 사람에 대해서 신비의 힘을 주었다. 비밀은 또한 허영심에도 호소한다. 가입한 자들은 당대에 사회에서 귀족이었다. 남자 아이는 전에 여자들과 함께 채소를 거두었는데, 입회식이 있은 뒤에는 어른들과 함께 사냥했다. 사춘기 시험에 미끄러져, 남자들의 거처 바깥에서 강제로 여자와 아이들과 함께 남아 있는 것, 여자처럼 여겨지는 것은 최고의 치욕이요, 부족에서 불명예였다. 게다가, 가입하지 않은 자들은 결혼이 허락되지 않았다.
70:7.8 (791.1) 원시 인간은 아주 일찍부터 사춘기 청년들에게 성욕의 자제를 가르쳤다. 사춘기부터 결혼하기까지 소년들을 부모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관습이 되었고, 소년의 교육과 훈련은 남자들의 비밀 사회에 맡겼다. 이러한 클럽의 주요 활동 가운데 하나는 사춘기의 청년들을 통제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사생아가 생기는 것을 막았다.
70:7.9 (791.2) 이 남자의 클럽이 다른 부족에서 온 여자를 사용하는 데 돈을 치렀을 때, 상업화된 매춘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집단들은 놀랍게도 성의 문란에 빠지지 않았다.
70:7.10 (791.3) 사춘기에 입문하는 의식(儀式)은 보통 5년의 기간에 연장되었다. 많이 고행과 아픈 절단이 이 의식에 들어갔다. 할례가 이런 비밀 사회 중 하나에 입회 의식으로서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사춘기 입문의 일부로서 부족의 표시를 몸에 새겼다. 문신(文身)은 그러한 부족원의 표징으로서 시작되었다. 그러한 고문은, 상당한 고난과 함께, 이 젊은이들을 강하게 단련시켰고, 생명의 현실과 그에 따른 불가피한 시련으로 그들에게 감명을 주도록 고안되었다. 나중에 나타나는 운동 시합과 육체적 경기가 이 목적을 더 잘 수행한다.
70:7.11 (791.4) 그러나 비밀 사회들은 사춘기의 도덕성을 개량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사춘기 예식의 주요한 목적의 한 가지는 소년에게 다른 남자의 아내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70:7.12 (791.5) 험한 단련과 훈련을 이렇게 몇 년 동안 거친 다음, 결혼하기 바로 전에, 이 젊은 남자들은 보통, 여가와 자유를 가지도록 잠시 동안 풀려났고, 그 뒤에 돌아와서 결혼하고 부족의 금기에 일생 동안 복종하였다. 그리고 이 고대의 관습은 “젊어서 난봉을 피우는” 어리석은 관념으로서 현대까지 계속되었다.
70:7.13 (791.6) 후일에 많은 부족이 여자들의 비밀 클럽을 만드는 것을 인가했는데, 그 목적은 사춘기의 소녀들을 아내와 어머니가 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입회한 다음에 소녀는 결혼할 자격이 있었고 “신부 보이기”에 나가는 것이 허락되었는데, 이것은 그 시절에 사회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는 모임이었다. 결혼하지 않을 것을 서약한 여자들의 계급은 일찍부터 생겼다.
70:7.14 (791.7) 결혼하지 않은 남자의 집단과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은 여자의 집단이 따로 조직되었을 때, 당장에 비밀 아닌 클럽들이 등장했다. 이 사회들은 정말로 처음 학교였다. 남자의 클럽과 여자의 클럽은 서로를 괴롭히는 경향에 흔히 빠졌지만, 어떤 진보된 부족들은 달라마시아 선생들과 접촉을 가진 뒤에, 남녀 공학(共學)을 실험했고, 남녀 모두를 위하여 기숙사가 있는 학교를 가지고 있었다.
70:7.15 (791.8) 비밀 사회들은 주로 그 입회식의 신비스런 특징으로 말미암아, 사회 계층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 사회의 회원들은 애도하는 의식―조상 숭배―에서 호기심 있는 자를 놀라게 해서 쫓아내려고 처음으로 가면을 썼다. 나중에 이 의식은 가짜 강령회(降靈會)로 발전되었고, 거기서 귀신이 나타났다고 소문이 났다. “새로이 탄생”한 고대의 사회들은 신호를 썼고, 특별한 비밀 은어(隱語)를 이용했다. 또한 어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맹세했다. 그들은 밤의 경찰로서 행동했고, 그밖에도 넓은 범위의 사회 활동 분야에서 일했다.
70:7.16 (792.1) 모든 비밀 결사는 선서를 부과하고 신뢰를 강요했으며, 비밀을 지키라고 가르쳤다. 이런 명령은 폭도에게 두려움을 주고 폭도를 통제했다. 그들은 또한 경계를 맡는 사회 단체로서 행동했으며, 따라서 사형(私刑) 법을 실천했다. 이들은 부족들이 전쟁할 때 첫 간첩이었고, 평화 시절에는 첫 비밀 경찰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양심 없는 왕이 바늘방석에 앉게 만들었다. 그들을 상쇄하기 위해서, 왕들은 자체의 비밀 경찰을 길렀다.
70:7.17 (792.2) 이러한 사회 단체는 처음으로 정당을 낳았다. 처음 정당 정치는 “강한 자” 대 “약한 자”였다. 옛날에는 내란이 있은 다음에야 행정부가 갈렸는데, 이것은 약한 자가 강해졌다는 것을 풍부히 증명한다.
70:7.18 (792.3) 이 클럽들은 빌려준 돈을 걷기 위하여 상인에게 고용되었고, 세금을 걷기 위해서 통치자에게 고용되었다. 세금 걷는 것은 오랜 투쟁이었는데, 가장 이른 형태 중의 하나는 십일조, 곧 사냥이나 전리품의 10분의 1이었다. 세금은 최초에 왕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부과되었지만, 성전 예배를 지원하는 헌금으로 변장했을 때 세금 걷기가 더 쉽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70:7.19 (792.4) 이윽고 이 비밀 결사(結社)들은 첫 자선 조직으로 성장했고, 나중에는 초기의 종교 단체―교회의 선구자―로 진화했다. 마침내 이 사회들 중에 더러는 부족간의 사회, 곧 첫 국제 단체가 되었다.
70:8.1 (792.5) 인간의 정신ㆍ육체의 불평등은 사회 계급이 나타날 것을 보장한다. 사회 계층이 없는 유일한 세계는 가장 원시적 세계와 가장 진보된 세계이다. 새로 시작되는 문명은 아직 사회적 수준의 차별을 시작하지 않았고, 한편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세계는 이러한 인류의 구분을 대체로 지워버렸으며, 이러한 구분은 중간에 있는 모든 진화 단계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70:8.2 (792.6) 사회가 야만 상태에서 미개(未開) 상태로 솟아오름에 따라서, 그 인간 구성원은 다음의 일반적 이유 때문에, 여러 등급으로 분류되는 경향이 있다:
70:8.3 (792.7) 1. 자연스런 이유―접촉, 친척 관계, 결혼. 처음 사회적 구별은 남녀ㆍ나이ㆍ혈연―추장과 무슨 인척 관계인가―에 기초를 두었다.
70:8.4 (792.8) 2. 개인적 이유―능력과 끈기와 기술, 그리고 불굴의 정신을 인정하는 것. 언어의 능숙, 지식, 일반적 지능의 인정이 곧 뒤따랐다.
70:8.5 (792.9) 3. 우연―전쟁과 이민은 인간 집단을 분리하였다. 계급의 진화는 정복에, 승자와 피정복자의 관계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고, 한편 노예 제도는 자유로운 자와 매인 자로, 처음으로 일반적 사회의 구분(區分)을 가져왔다.
70:8.6 (792.10) 4. 경제적 이유―빈부(貧富). 재산, 그리고 노예의 소유는 한 사회 계급의 유전적 기초가 되었다.
70:8.7 (792.11) 5. 지리적 이유―도시나 시골의 촌락이 생기자 그에 따라서 계급이 생겨났다. 도시와 시골은 각자가 목자나 농부, 그리고 상인이나 산업가로 전문화되는 데 기여했으며, 그들의 관점과 반응은 달랐다.
70:8.8 (792.12) 6. 사회적 이유―다른 여러 집단의 사회적 가치를 대중이 추정하는 데 따라서 계급이 차츰 형성되었다. 가장 일찍부터 생긴 이 종류의 구분에는 사제와 선생, 통치자와 무사(武士), 자본가와 상인, 보통 노동자와 노예가 있었다. 노예는 결코 자본가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임금 받는 자는 때때로 자본가의 서열에 낄 수 있었다.
70:8.9 (793.1) 7. 직업적 이유―직종이 늘어나자, 그들은 계급과 조합을 세우는 경향이 있었다. 노동자는 세 집단으로 나뉘었는데, 곧 주술사를 포함한 전문가 계급, 다음에 기술 노동자, 미숙련 노동자가 뒤따랐다.
70:8.10 (793.2) 8. 종교적 이유―초기의 종파 클럽은 씨족과 부족 안에서 자체의 계급을 만들었고, 사제들의 경건함과 신비스러움은 그들이 따로 된 사회 집단으로 오랫동안 지속하게 만들었다.
70:8.11 (793.3) 9. 종족의 이유―일정한 국가나 영토 단위 안에 둘 이상의 종족이 존재하는 것은 보통 피부색에 따른 카스트를 만들어낸다. 인도 최초의 카스트 제도는, 초기 에집트의 카스트와 마찬가지로, 피부색에 기초를 두었다.
70:8.12 (793.4) 10. 나이―청춘기와 성년기. 부족 사이에서 소년은 아버지가 사는 한, 아버지의 보호 밑에 남아 있었고, 한편 소녀는 결혼할 때까지 어머니의 보살핌에 맡겨졌다.
70:8.13 (793.5) 융통성 있고 변하는 사회 계급은 진화하는 문명에 필수이지만, 계급이 카스트가 될 때, 사회 수준이 굳어질 때, 사회의 안정은 개인의 창의성을 줄임으로 향상된다. 사회적 카스트는 산업에서 한 사람의 자리를 찾는 문제를 풀지만, 또한 개인의 발전을 뚜렷이 단축시키고 사회의 협동을 실질적으로 방해한다.
70:8.14 (793.6) 사회에서 여러 계급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으니까, 진보하는 문명에서 다음과 같은 생물학적ㆍ지적ㆍ영적 자원의 영리한 조종을 통해서, 계급은 사람이 진화로 말소할 때까지 존속할 것이다:
70:8.15 (793.7) 1. 종족 혈통의 생물학적 혁신―열등한 인간 혈통을 골라서 없앤다. 이것은 필사자의 많은 불평등을 없애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70:8.18 (793.10)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미래에 아득하게 천년이 허다하게 지나야 그 참된 열매를 얻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의 진보를 가속(加速)하는 이러한 요인을 총명하게, 현명하게, 참을성 있게 조종함으로, 많은 사회적 개선이 즉시 생길 것이다. 종교는 혼란으로부터 문명을 들어올리는 강력한 지렛대이지만, 건전한 정상 유전(遺傳)에 단단히 기초를 둔, 건전한 정상 지성의 지레 받침이 없이 힘을 쓸 수 없다.
70:9.1 (793.11) 자연은 사람에게 아무 권리를 주지 않는다. 단지 목숨과 그 목숨을 이을 세상을 준다. 자연은 살 권리조차 주지 않는다. 무장하지 않은 사람이 배고픈 호랑이를 원시림에서 만났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가 생각하면 이를 짐작할 것이다. 사회가 사람에게 주는 첫째 선물은 안전이다.
70:9.2 (793.12) 차츰차츰 사회는 권리를 주장했고, 오늘날 이 권리는 다음과 같다:
70:9.4 (793.14) 2. 군사적 방어―준비를 통해 얻는 안전.
70:9.5 (793.15) 3. 내부 평화의 보존―개인에 대한 폭력과 사회의 무질서를 방지하는 것.
70:9.6 (794.1) 4. 성의 통제―결혼, 가족 제도.
70:9.8 (794.3) 6. 개인 및 집단 경쟁의 육성.
70:9.9 (794.4) 7. 젊은이를 교육하고 훈련하는 준비.
70:9.10 (794.5) 8. 무역과 상업의 촉진―산업의 발전.
70:9.11 (794.6) 9. 노동 조건과 보상의 개선.
70:9.12 (794.7) 10. 영적 동기를 얻어 이 모든 다른 사회 활동을 고상하게 만들려는 목적으로 종교 관습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
70:9.13 (794.8) 권리가 기원을 알 수 없이 오래 되었을 때, 이를 흔히 자연권이라 부른다. 그러나 인간의 권리는 정말로 자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며, 전부 사회적이다. 이 권리는 상대적이고 늘 변하고 있으며, 경기 규칙에 불과하다―늘 바뀌는 인간의 경쟁 현상을 다스리는, 인정된 여러 관계를 조정한 것이다.
70:9.14 (794.9) 어느 시대에 권리로 여길 수 있는 것은 다른 시대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수의 장애자와 퇴화된 자가 살아남은 것은 그들이 그렇게 20세기 문명을 거추장스럽게 할 어떤 자연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당대의 사회, 곧 도덕 관습이 그렇게 선포하기 때문이다.
70:9.15 (794.10) 인간의 권리 중에 거의 아무것도 유럽의 중세에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때는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속했고, 권리는 국가나 교회가 허락한 특권이나 은혜였다. 이 잘못에 대한 저항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믿음으로 인도했기 때문에, 똑같이 잘못되었다.
70:9.16 (794.11) 약하고 열등한 자는 언제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였다. 그들은 국가가 강하고 우수한 자에게 그들의 요구를 채워주고 그밖에 결점을 회복하도록 강요해야 한다고 언제나 주장했는데, 이런 결점은 아주 빈번히 바로 그들의 무관심과 게으름에서 자연히 생긴 결과이다.
70:9.17 (794.12) 그러나 이 평등의 이상(理想)은 문명의 소산이다. 자연 속에 평등은 발견되지 않는다. 문화 자체도 문화를 받아들일 사람의 바로 그 능력이 다른 것은 사람이 평등하지 않게 타고난 것을 확실히 보여준다. 자연스러운 평등이라 생각되는 것을 갑자기 비진화 방법으로 실현하는 것은 문명화된 사람을 원시 시대의 투박한 관습으로 재빨리 되돌려 보낼 것이다. 사회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권리를 제공할 수 없지만, 각자의 다른 권리를 공정하고 공평하게 관리할 것을 약속할 수 있다. 자연인에게 자아 유지를 추구하고, 자아 존속에 참여하고, 한편 동시에 어느 정도 자아 욕구의 충족을 즐기는 공평하고 평화로운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사회의 일이요 임무이며, 자아에 관한 이 세 가지는 모두, 인간의 행복의 총합이다.
70:10.1 (794.13) 자연이 응보를 베푼다는 것은 사람이 만든 이론이며, 현실이 아니다. 자연 속에서, 응보는 순전히 이론이요, 전부 허구(虛構)이다. 자연은 오직 한 가지 응보를 마련해 준다―결과는 불가피하게 원인을 좇는다.
70:10.2 (794.14) 사람이 파악하는 응보는 사람이 자기의 권리를 찾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점진적 진화의 문제였다. 응보 개념은 영이 부여한 지성을 구성할지 모르지만, 응보 개념은 완전히 발육되어 공간 세계로 솟아나지 않는다.
70:10.3 (794.15) 원시인은 모든 현상이 한 인격자가 저지른 것이라 생각했다. 누가 죽었을 경우에, 야만인은 무엇이 그를 죽였는가가 아니라, 누가 죽였는가 물었다. 따라서 사고로 사람을 죽인 것은 인정되지 않았고, 죄를 벌할 때 범죄자의 동기는 통째로 무시되었다. 판결은 입은 손해에 따라서 정해졌다.
70:10.4 (795.1) 가장 초기의 원시 사회에서 여론은 직접 작용했고, 법을 담당하는 관리가 필요 없었다. 원시인의 인생에는 사생활이 없었다. 이웃이 한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졌다. 따라서 이웃이 사사로운 일을 엿보는 권리가 생긴다. 집단 전체가 각 개인의 행동에 관심을 가지고, 어느 정도 통제해야 한다는 이론에 근거를 두고 사회가 규제되었다.
70:10.5 (795.2) 사람들은 귀신이 주술사와 사제들을 통해서 응보를 베푼다고 아주 일찍부터 믿었다. 이것이 이 계급을 최초로 범죄를 탐지하고 율법을 시행하는 자로 만들었다. 범죄를 찾아내려고 그들이 초기에 쓴 방법은 독물ㆍ불ㆍ고통으로 시련을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야만스런 시련은 서투른 중재 기술에 불과했다. 이런 시련이 논쟁을 반드시 공정하게 해결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독물을 주었을 때, 피고가 게워 버리면 무죄였다.
70:10.6 (795.3) 구약은 이 혹독한 시련 중에 하나, 결혼 생활의 죄에 대한 시험을 기록한다. 한 남자가 그의 아내가 정절을 지키지 않았다고 의심하면, 아내를 사제에게 데리고 가서 그가 의심하는 바를 이야기했고, 그 뒤에 사제는 거룩한 물과 성전 마루에서 쓸어모은 것으로 이루어진 혼합물을 준비하곤 했다. 위협하는 저주를 포함하여 마땅한 의식을 치른 뒤에, 고발당한 아내는 그 더러운 약을 마시라고 강요받았다. 아내에게 죄가 있으면, “저주를 일으키는 그 물이 그 여자에게 들어가서 쓰게 될 것이며, 그 여자의 배가 붓고 허벅지는 썩을지라. 그리고 민족 사이에서 저주를 받으리라.” 어쩌다가 어떤 여자가 이 더러운 물 한 모금을 쭉 들이키고 몸이 아픈 징후를 보이지 않으면, 그 여자는 시샘하는 남편이 고소한 죄목에서 풀려났다.
70:10.7 (795.4) 진화하는 거의 모든 부족이 범죄를 찾아내는 이 포학한 방법을 언젠가 실행한 적이 있다. 결투는 혹독한 시련으로 죄를 정하는 재판이 현대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70:10.8 (795.5) 3천 년 전에 히브리인과 기타 반문명화된 부족들이, 응보를 시행하는 그런 원시 방법을 쓴 것에 놀라서는 안 된다. 그러나 생각 있는 사람들이, 성스러운 기록을 수집한 페이지 안에 그러한 미개 상태의 유물을 남겨두려 했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의심되는 결혼의 부정(不貞)을 찾아내고 판결하는 일에 관하여, 어떤 신성한 존재도 그렇게 부당한 지침을 필사 인간에게 결코 준 적이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70:10.9 (795.6) 사회는 일찍부터 눈에는 눈, 목숨에는 목숨으로, 복수하여 갚는 태도를 채택하였다. 진화하는 부족들은 모두 피를 갚는 이 권리를 인정했다. 복수(復讐)는 원시 생활의 목표가 되었지만, 종교는 그 뒤로 이 초기의 부족 풍습을 크게 고쳤다. 계시된 종교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언제나 선포했다, “‘복수는 나의 일이라’ 주가 말씀하시니라.” 초기 시절에 복수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불문율의 핑계로 행해지는 오늘날의 살인과 아주 다르지 않았다.
70:10.10 (795.7) 자살은 흔한 형태의 복수였다. 사람이 살아서 복수할 수 없다면, 그는 귀신으로서 돌아와서 적에게 노여움을 퍼부을 수 있다는 믿음을 품고 죽었다. 이 믿음이 아주 널리 퍼졌으니까, 적의 문간에서 자살한다는 위협은 보통 적을 항복시키는 데 넉넉했다. 원시인은 생명을 그다지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찮은 일에 자살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달라마시아 사람들의 가르침은 이 관습을 크게 줄였으며, 최근에는 여가ㆍ편안ㆍ종교ㆍ철학이 합쳐서 인생을 더 즐겁고 바람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단식 투쟁은 이 옛 시절의 복수 방법의 현대판이다.
70:10.11 (796.1) 가장 초기 형태의 진보된 부족 율법 중의 하나는 피의 복수를 하나의 부족 일로 떠맡는 것과 상관이 있었다. 그러나 설명하기 야릇하지만, 그때에도 남자는 값을 충분히 치르고 아내를 샀다면, 벌을 받지 않고 아내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에스키모는 범죄에 대한 벌을, 살인의 경우에도, 피해자의 가족이 선포하고 시행하라고 맡긴다.
70:10.12 (796.2) 또 한 가지 진보는 금기(禁忌) 위반에 대하여 벌금을 물게 하는 것, 벌칙 조항이었다. 이 벌금은 처음으로 공공 수익이었다. “피의 값”을 치르는 관습은 또한 피로 갚는 복수의 대안(代案)으로서 유행하였다. 그러한 손해는 보통 여자나 가축으로 물었다. 실제로 벌금, 돈으로 보상하는 것이 범죄에 대한 벌로서 인정을 받기까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형벌 관념이 본질적으로 보상이었으니까, 사람의 목숨을 포함하여 모든 것에, 결국 값이 매겨지게 되었고, 그 값을 손해로서 치를 수 있었다. 히브리인은 피 값 치르는 관습을 처음으로 폐지하였다. 모세는 그들이 “사람 죽인 죄를 지은 살인자의 목숨 대신에 아무 배상을 받지 말라, 그를 반드시 죽여야 할지니라”하고 가르쳤다.
70:10.13 (796.3) 이처럼 처음에는 가족이, 다음에는 씨족이, 나중에는 그 부족이 응보를 시행하였다. 참된 응보의 관리는 원수 갚는 일을 개인과 친척 집단으로부터 빼앗아서, 사회 집단, 곧 국가의 손에 넘겨주는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70:10.14 (796.4) 산 채로 태워 죽이는 벌은 한때 보통 관습이었다. 하무라비와 모세를 포함해서, 고대의 많은 통치자가 이 관습을 인정하였고, 모세는 많은 범죄, 특히 심각한 성적(性的) 성질을 가진 범죄는 화형에 처함으로 벌을 주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만일 “제사장”이나 다른 유지의 “딸”이 공공 창녀가 되면, “그 여자를 불에 태워 죽이는” 것이 히브리인의 관습이었다.
70:10.15 (796.5) 반역―자기 부족의 동료를 “팔아 넘기거나” 배반하는 것―은 처음으로 죽을 죄였다. 가축을 훔치는 것은 보편적으로 즉시 죽는 벌을 받았고, 최근에도 말을 훔치는 것은 비슷하게 벌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벌의 무거움은 벌의 확실성과 신속성만큼 가치 있는 범죄 억제책이 아니라는 것이 발견되었다.
70:10.16 (796.6) 사회가 범죄를 벌하지 못할 때, 집단의 분개심은 보통 사적(私的) 제재로 죽이는 수단으로서 나타난다. 피신처의 조항은 갑작스런 이런 집단의 분노를 피하는 수단이었다. 사적 제재로 죽이기와 결투(決鬪)는 개인이 사사롭게 시정(是正)하는 일을 국가에게 넘겨주기 싫어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70:11.1 (796.7) 새벽에 언제 밤에서 낮으로 이어지는가를 정확히 가리키는 것만큼, 도덕 관습과 법을 뚜렷이 구분하기가 힘들다. 도덕 관습은 형성 과정에 있는 법 및 경찰의 규제이다. 오랫동안 확립되었을 때, 규명되지 않은 도덕 관습은 엄밀한 법, 분명한 규칙, 잘 규명된 사회 관습으로 구체화되는 경향이 있다.
70:11.2 (796.8) 법은 반드시 처음에 부정적이고 무엇을 하지 말라 한다. 진보하는 문명에서는 법이 더욱 적극성을 띠고 무엇을 지시한다. 초기의 사회는 부정적(否定的)으로 작용했으며, 모든 다른 사람에게 “너희는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림으로 개인에게 살 권리를 주었다. 개인에게 주는 모든 권한이나 자유는 모든 다른 사람의 자유를 단축시키며, 금기, 곧 원시의 율법이 이 일을 해냈다. 금기라는 관념 전체가 본래부터 부정적인데, 이는 원시 사회가 완전히 무엇을 막으려고 조직되었고, 초기에 응보의 시행은 금기를 집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초에 이 법들은, 후일의 히브리인이 보여주었다시피, 오직 동료 부족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히브리인은 이방인을 다루는 경우에 다른 윤리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70:11.3 (797.1) 증언을 더 진실하게 만들려는 노력으로, 맹세는 달라마시아 시절에 생겨났다. 그러한 맹세는 자신에게 저주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아무도 자기가 태어난 집단에 불리하게 증언하려 하지 않았다.
70:11.4 (797.2) 범죄는 부족의 도덕 관습을 공격하는 것이었고, 죄는 귀신이 인가한 금기를 어기는 것이었다. 범죄와 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오랫동안 혼란이 있었다.
70:11.5 (797.3) 사람은 이기심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금기를 만들었고, 사회는 이를 전통적 관습으로 인가하였으며, 한편 종교는 관습을 성스럽게 도덕법으로 만들었다. 이처럼 세 가지 모두가 인간의 생활을 더 안전하고 신성하게 만드는 데 협력하였다. 권리가 종교의 인가를 받지 않았더라면, 초기 시절에 사회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모두, 신들이 선조에게 그들의 오래 된 법, 금기를 주었다고 주장했다.
70:11.6 (797.4) 율법은 오래 된 인간 체험, 구체화되고 공인된 여론이 법전으로 기록된 것이다. 도덕 관습은 축적된 체험이었고, 이것을 토대로 나중에 유력한 지식인들이 성문화된 법을 작성했다. 고대의 재판관은 아무 법이 없었다. 판결을 내릴 때, 그는 다만 “이것이 관습이다”하고 말했다.
70:11.7 (797.5) 법정 판결에서 선례를 언급하는 것은 재판관이 성문화(成文化)된 법을 변하는 사회 조건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나타낸다. 이것은 전통이 연속된다는 감명을 주면서, 변하는 사회 조건에 대하여 점진적으로 적응하는 길을 마련해 준다.
70:11.8 (797.6) 재산에 관한 투쟁은 여러 방법으로 처리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70:11.9 (797.7) 1. 싸움에 걸린 재산을 없애버린다.
70:11.10 (797.8) 2. 무력으로―논쟁하는 자들은 싸움으로 해결했다.
70:11.13 (797.11) 초기의 법정은 주먹 싸움으로 판결했다. 판사는 단지 심판이나 중재인이었다. 그들은 인가된 규칙에 따라서 싸움이 진행되도록 처리했다. 법정에서 격투에 들어갈 때, 각 편은 다른 편에게 진 뒤에 그 비용과 벌금을 물려고 재판관에게 보증금을 냈다. “힘이 아직도 옳았다.” 후일에는, 말싸움이 주먹 싸움을 대신하였다.
70:11.14 (797.12) 원시적 응보 관념 전체가 공정을 찾기보다 논쟁을 해결하고, 이처럼 공중의 무질서와 개인의 폭력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원시인은 지금 불공평하다고 여길 것을 그다지 분개하지 않았다. 권력을 가진 자는 권력을 이기적으로 쓸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도 어떤 문명의 지위는 그 법정이 얼마나 철저하고 공평한가, 그 판사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재판하는가에 따라서 아주 정확하게 결정되는가 한다.
70:12.1 (797.13) 정부의 진화에서 큰 싸움은 권력의 집중과 관계되었다. 잘 조정된 행정부ㆍ입법부ㆍ사법부 사이에 권력의 적당한 균형이 유지되었을 때, 대의 정치 종류의 국가 정부가 사람 사는 세계에서 진화 민족들을 최선으로 규제한다는 것을 우주 행정가들은 경험으로 배웠다.
70:12.2 (798.1) 원시의 권한은 힘, 육체의 힘에 바탕을 두었지만, 이상적 정부는 대의 정치 체계이며, 거기서 능력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 그러나 미개한 시절에는 온통 전쟁이 너무 많아서 대의 정치가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없었다. 권한의 분리와 지휘의 통일 사이에 있었던 오랜 투쟁에서, 독재자가 이겼다. 원시 장로 회의가 초기에 가졌던 분산된 권력은 차츰, 절대 군주의 몸에 집중되었다. 진짜 임금들이 나타난 뒤에, 장로의 집단은 준입법 및 사법(司法)에 관하여 자문하는 단체로서 지속되었다. 후일에 동등한 지위를 가진 입법 기관이 나타났고, 결국에는 판결하는 최고 법정이 입법 기관과 따로 확립되었다.
70:12.3 (798.2) 임금은 도덕 관습, 곧 최초의 법 또는 불문율의 집행자였다. 나중에 임금은 제정된 법령, 곧 구체화된 여론을 집행했다. 인민 집회가 여론의 표현으로서, 늦게 등장했어도 사회의 큰 진보를 표시하였다.
70:12.4 (798.3) 초기의 임금은 도덕 관습―전통이나 여론―에 크게 제한을 받았다. 최근에 어떤 유란시아 국가들은 이 도덕 관습을 통치를 위한 근거 자료로 성문화하였다.
70:12.5 (798.4) 유란시아 필사자들은 자유를 가질 자격이 있고, 정부 체계를 만들어야 하며, 헌법, 또는 국가 권한과 행정 절차에 관한 기타 헌장을 채택해야 한다. 이렇게 하고 나서, 가장 유능하고 자격 있는 동료를 최고 집행자로 뽑아야 한다. 입법부에 있는 대표들을 위해서, 그러한 신성한 책임을 완수하도록, 지능과 도덕 면에서 자격 있는 자들만 뽑아야 한다. 고등 법정과 최고 법정의 판사 경우에, 오로지 타고난 능력을 부여받고 충만한 체험으로 지혜롭게 된 자들만 선출해야 한다.
70:12.6 (798.5) 사람들이 자유를 유지하고 싶으면, 자유 헌장을 고른 뒤에, 다음 사항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헌장을 지혜롭고 총명하고 두려움 없이 해석해야 한다:
70:12.7 (798.6) 1. 행정부나 입법부가 부당하게 권력을 강탈하는 것.
70:12.8 (798.7) 2. 무지하고 미신을 믿는 선동자들의 술수.
70:12.9 (798.8) 3. 과학적 진보의 지연.
70:12.10 (798.9) 4. 평범이 지배하는 막다른 골목.
70:12.11 (798.10) 5. 사악한 소수의 지배.
70:12.12 (798.11) 6. 야심 있고 머리 좋은, 독재를 꿈꾸는 자의 통제.
70:12.13 (798.12) 7. 공포가 일으키는 비참한 혼란.
70:12.14 (798.13) 8. 양심 없는 자들이 착취하는 것.
70:12.15 (798.14) 9. 국가가 세금으로 시민을 노예로 만드는 것.
70:12.16 (798.15) 10. 사회 및 경제적 공평을 이루지 못하는 것.
70:12.19 (798.18) 이것들이 진화하는 세계에서 대의 정치라는 엔진을 다스리는 장치로서 작용하는 법정, 헌법에 따른 법정의 목적이요 목표이다.
70:12.20 (799.1) 유란시아에서 정부를 완전하게 만들려는 인류의 투쟁은, 행정의 경로를 완전하게 만들고, 그 경로를 늘 변하는 시대의 요구에 적응하며, 정부 안에서 권력을 더 균형 되게 분산시키고, 다음에 참으로 지혜로운 행정 지도자들을 뽑는 것과 상관이 있다. 신성하고 이상적 형태의 정부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계시될 수 없고, 시공 우주에서 두루, 각 행성의 남녀가 천천히 힘들여 발견해야 한다.
71:0.1 (800.1) 국가는 문명에서 하나의 유익한 진화이며, 국가는 사회가 전쟁의 황폐와 고통으로부터 얻은 순이익을 대표한다. 국정(國政)의 기술조차 단지 싸우는 부족과 나라들 사이에 무력의 경쟁을 조절하는 기술이 축적된 것이다.
71:0.2 (800.2) 현대의 국가는 집단의 권력을 얻으려는 오랜 투쟁에서 살아남은 제도이다. 우수한 권력이 결국 이겼고, 그것은 시민이 국가를 위하여 죽고 사는 절대적 의무를 가졌다는 도덕적 신화와 함께, 사실로 있는 산물―국가―를 낳았다. 그러나 국가는 신에게서 기원을 가지지 않았다. 국가는 의도하여 총명한 인간 행위로 생겨나지도 않았다. 국가는 순전히 진화된 제도이며, 전적으로 저절로 생겼다.
71:1.1 (800.3) 국가는 영토가 있고 사회를 규제하는 조직이며, 가장 강력하고 효과 있고 오래 가는 국가는 단일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국민은 공통된 언어와 도덕 관습과 제도를 가지고 있다.
71:1.2 (800.4) 초기의 국가들은 작았고, 모두 정복으로 생긴 결과였다. 이 국가들은 자원하는 결합으로 생겨나지 않았다. 정복하는 유목민들이 많은 국가를 세웠고, 이들은 평화로운 목자나 정착한 농부들 위에 와락 덮쳐서 그들을 무찌르고 노예로 만들곤 했다. 정복의 결과로 생긴 그러한 국가들은, 강제로 여러 층으로 이루어졌다. 계급이 불가피했고, 계급 투쟁은 늘 진 자를 도태시켰다.
71:1.3 (800.5) 아메리카 홍인의 북쪽 부족들은 진정한 국가 상태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 그들은 느슨한 부족 연맹, 아주 원시적 국가 형태를 지나서 발전하지 못했다. 그들의 가장 가까운 접근은 이로쿼이 연방이었으나, 이 여섯 민족의 집단은 결코 제대로 국가로서 활동한 적이 없고, 현대의 국가 생활에 다음과 같은 어떤 필수인 것들이 빠졌기 때문에 살아남지 못했다:
71:1.4 (800.6) 1. 사유 재산의 획득과 상속.
71:1.7 (800.9) 4. 실용적 가족 조직. 이 홍인들은 모계 가족과 조카 상속을 고수하였다.
71:1.9 (800.11) 6. 강력한 행정 우두머리.
71:1.12 (800.14) 홍인들은 너무 민주적이었다. 그들은 좋은 정부를 가졌지만 그 정부는 실패하였다. 그들이 때 이르게, 더 진보된 백인의 문명에 부닥치지 않았더라면, 결국 국가를 진화시켰을 것이다. 백인은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정부 방법을 따르고 있었다.
71:1.13 (801.1) 성공적인 로마 국가는 다음에 기초를 두었다:
71:1.15 (801.3) 2. 농업, 그리고 동물 길들이기.
71:1.18 (801.6) 5. 노예 제도―시민의 여러 계급.
71:1.22 (801.10) 로마 문명에서 가장 큰 약점이자 그 제국이 궁극에 멸망하게 된 한 가지 요인은, 21살에 남자아이를 해방하고 무조건 여자아이를 풀어놓은 조치, 자유롭고 진취적이라고 생각된 조치였는데, 여자아이는 자신이 고르는 남자와 결혼하거나, 집을 나가서 나라에서 부도덕하게 될 자유가 있었다. 사회에 끼친 해악은 이 개혁 자체만 아니라, 오히려 그 조치를 갑자기 널리 채택한 그 방법에 있었다. 로마의 멸망은 한 국가가 너무 빨리 확장하고, 이와 관련하여 내부에서 타락했을 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를 가리킨다.
71:1.23 (801.11) 초기의 국가는 영토의 결속을 위하여 혈통의 유대가 줄어들어 가능하게 되었고, 그러한 부족 연맹은 정복으로 보통 견고하게 되었다. 모든 하찮은 투쟁과 집단의 차이를 초월하는 통치권이 참 국가의 특징이지만, 아직도 많은 계급과 카스트가 옛 시절의 씨족과 부족들의 잔재로서 후일의 국가 조직에 남아 있다. 나중에 나타난, 영토를 가진 큰 국가들은, 같은 핏줄을 가진 그보다 작은 이 씨족 집단들과 오랫동안 쓰라린 투쟁을 겪었고, 부족 정부는 가족과 국가 권한 사이에 가치 있는 과도기인 것이 판명되었다. 후일에 많은 씨족이 무역과 기타 산업 조합으로부터 생겨났다.
71:1.24 (801.12) 국가의 통합에 실패하는 것은 유럽에서 중세의 봉건주의처럼, 통치 방법이 국가 이전의 조건으로 후퇴하게 만든다. 이 어두운 시대에, 영토를 가진 국가들은 멸망했고, 작은 성(城) 집단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생겼으며, 씨족과 부족 단계의 발전이 다시 나타났다. 비슷한 준국가들이 지금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존재하지만, 이들 모두가 진화에서 후퇴는 아니다. 다수가 미래 국가의 초기 핵심이다.
71:2.1 (801.13) 민주주의는 이상이지만, 문명의 소산이요 진화의 소산이 아니다! 천천히 가라! 살펴서 선택하여라!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민주주의의 위험 때문이다:
71:2.3 (801.15) 2. 저질이고 무지한 통치자를 선택하는 것.
71:2.4 (801.16) 3. 사회의 진화에서 기본적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
71:2.7 (802.1) 여론(輿論), 일반적 의견은 언제나 사회가 처지게 만들었다. 그렇기는 해도, 여론은 값지니, 여론이 사회의 진화를 더디게 하지만, 문명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여론을 교육하는 것은 문명을 가속하는 유일하게 안전하고 참된 방법이다. 무력은 잠시 편리할 뿐이고, 총알이 투표에게 길을 양보함에 따라서 문화의 성장은 갈수록 더 빨라질 것이다. 여론, 도덕 관습은 사회의 진화와 국가의 발전에 기본적ㆍ근본적 에너지이지만, 국가에 가치가 있으려면 여론의 표현은 폭력을 쓰지 않아야 한다.
71:2.8 (802.2) 사회의 진보를 재는 척도는, 폭력을 쓰지 않는 표현을 통해서, 여론이 개인의 행동과 국가의 규제를 통제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서 결정된다. 여론이 개인 선거권의 힘을 갖추었을 때 정말로 문명화된 정부가 다가온 것이다. 보통 선거가 사물을 반드시 바르게 결정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나쁜 일조차도 올바르게 처리하는 방법을 대표한다. 진화는 단숨에 최상급의 완전을 낳지 않지만, 오히려 비교가 되고 진보하는 실용적 조정을 낳는다.
71:2.9 (802.3) 실용적이고 효과 있는 형태의 대의 정치가 진화하는 데 열 걸음 또는 단계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71:2.10 (802.4) 1. 사람의 자유. 노예 제도, 농노(農奴), 그리고 온갖 형태의 인간의 구속은 사라져야 한다.
71:2.11 (802.5) 2. 지성의 자유. 자유로운 민족이 교육―영리하게 생각하고 지혜롭게 계획하도록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자유는 보통, 유익하기보다 해롭다.
71:2.12 (802.6) 3. 법대로 다스리는 것. 오로지 인간 통치자의 의지와 변덕을, 인가된 기본법에 따라서 세워진 법령으로 갈아치울 때 사람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71:2.13 (802.7) 4. 언론의 자유. 대의(代議) 정치는 인간의 열망과 의견을 나타내기 위하여 온갖 형태의 표현의 자유가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71:2.14 (802.8) 5. 재산의 안전. 어떤 형태로 개인의 재산을 사용할 권한을 마련해 주지 못하면, 어떤 정부도 오래 견딜 수 없다. 사람은 그의 개인 재산을 쓰고, 통제하고, 주고, 팔고, 빌려 주고, 물려줄 권리를 가지고 싶어한다.
71:2.15 (802.9) 6. 탄원할 권리. 대의 정치는 시민들이 말할 권리가 있다고 가정한다. 탄원하는 특권은 자유로운 시민권에 본래부터 있다.
71:2.16 (802.10) 7. 통치하는 권리.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으로 넉넉지 않다. 탄원하는 권한은 정부를 실제로 관리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71:2.17 (802.11) 8. 보통 선거권. 대의 정치는 총명하고 유능한 보통 선거권자를 전제 조건으로 한다. 그러한 정부의 성격은 정부를 구성하는 자의 됨됨이와 인품에 따라서 늘 결정될 것이다.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투표권은 남녀에게 보편적으로 남아 있지만, 효과 있게 고쳐지고, 다시 분류되고, 달리 구별될 것이다.
71:2.18 (802.12) 9. 공복(公僕)의 통제. 시민이 공무원과 공복을 안내하고 통제하는 지혜로운 기법을 소유하고 쓰지 않으면, 어떤 국가 정부도 쓸모 있고 효과적일 수 없다.
71:2.19 (802.13) 10. 총명하고 훈련받은 대표. 민주주의가 살아남는 것은 대의 정치의 성공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것은 기술 훈련을 받고, 지적으로 유능하고, 사회에 충성하며, 도덕적으로 건전한 사람들만 공직에 선출하는 관습에 조건을 받는다. 오로지 그런 준비가 있어야 국민의 정부, 국민이 다스리는 정부, 국민을 위한 정부가 보존될 수 있다.
71:3.1 (803.1) 한 정부의 정치 또는 행정의 형태는, 시민의 진보에 기본적인 것―자유ㆍ안전ㆍ교육 및 사회적 조정―을 마련해 준다면, 거의 중요성이 없다. 어떤 국가인가가 아니라, 국가가 무엇을 하는가가 사회의 진화 과정을 좌우한다. 국민이 뽑은 지도자들이 예가 되다시피, 결국은 어떤 국가도 국민의 도덕적 가치 기준을 뛰어넘을 수 없다. 무지와 이기심은 가장 높은 종류의 정부라도 꼭 무너지게 만들 것이다.
71:3.2 (803.2) 매우 유감으로 생각되어야 하지만, 민족의 자기 중심주의는 사회가 살아남는 데 필수였다. 선택된 백성이라는 신조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부족의 결속과 국가 건설에 으뜸가는 요소였다. 그러나 온갖 종류의 불관용(不寬容)을 없앨 때까지, 어떤 나라도 이상적 활동 수준에 이를 수 없다. 그리고 과학ㆍ상업ㆍ놀이ㆍ종교를 조정하는 것이 불관용을 물리치는 데 최선이다.
71:3.3 (803.3) 이상적인 국가는 강력하고 조화되어 움직이는 세 가지 추진력의 자극을 받고서 활동한다:
71:3.4 (803.4) 1. 사람이 형제임을 깨닫고 사랑으로 충실하는 것.
71:3.7 (803.7) 이상적 국가의 법은 가지 수가 많지 않으며, 그 법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기 시대를 지나서, 자제가 향상되는 결과로서 개인의 자유가 분명히 진보하는 시대로 넘어갔다. 높은 수준에 있는 국가는 국민에게 일하지 않을 수 없게 할 뿐 아니라, 기계 시대로 진보하여 고된 일로부터 해방되어 얻는 늘어난 여가를 유익하고 고상하게 이용하도록 유도한다. 여가는 물건을 소비할 뿐 아니라 생산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71:3.8 (803.8) 어떤 사회도, 게으름을 허용하거나 빈곤을 묵인할 때 그다지 많이 진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함이 있고 퇴화된 핏줄을 아낌없이 지원하고, 아무 제한 없이 번식하도록 허락하면, 결코 빈곤과 의존성을 없앨 수 없다.
71:3.9 (803.9) 도덕적인 사회는 그 국민의 자존심을 보존하고 모든 정상적인 개인에게 자아를 실현하는 적당한 기회를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러한 사회적 성취 계획은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진 사회를 낳을 것이다. 최소한으로 규제하는 정부의 감독으로 사회의 진화가 촉진되어야 한다. 가장 적게 다스리고, 가장 많이 조정하는 국가가 제일 좋다.
71:3.10 (803.10) 이상적 국가는 진화로, 시민 의식, 곧 사회에 봉사하는 의무와 특권의 인식이, 천천히 성장함으로 성취되어야 한다. 처음에는, 이권(利權) 운동자들의 행정 목표를 좇아서, 사람들이 정부의 짐을 하나의 임무로서 맡지만, 나중에는 사람들이 그러한 직책을 하나의 특권으로서, 가장 큰 명예로서 추구한다. 어떤 수준에 있더라도, 문명의 지위는 국가의 책임을 자청해서 받아들이는 국민의 됨됨이가 충실하게 보여준다.
71:3.11 (803.11) 국민의 모든 다른 형태의 경제 및 상업 단체와 마찬가지로, 참된 연방에서는 전문가가 도시와 지방을 다스리는 사무를 운영하고 관리한다.
71:3.12 (803.12) 진보된 국가에서, 정치적 봉사는 국민의 가장 높은 헌신으로 평가된다. 가장 지혜롭고 고귀한 시민의 가장 큰 포부는 시민의 인정을 얻고, 정부가 맡기는 어떤 자리에 선출되거나 임명되는 것이다. 그러한 정부는 봉사를 인정하는 가장 높은 명예를 공무원이나 사회에 봉사하는 자에게 수여한다. 다음에 명예는 차례대로 철학자ㆍ교육자ㆍ과학자ㆍ산업가ㆍ군인에게 수여된다. 부모는 아들딸의 탁월성에 따라 마땅히 상을 받으며, 순전히 종교적인 지도자는 영적 국가의 대사(大使)이니까, 진짜 보상을 다른 세계에서 받는다.
71:4.1 (804.1) 경제와 사회와 정부는 남아 있으려면 진화해야 한다. 진화하는 세계에서 정적(靜的) 조건은 무엇이 썩고 있음을 가리키며, 오직 진화의 흐름과 함께 앞으로 움직이는 제도만 지속한다.
71:4.2 (804.2) 확대되는 문명의 진취적 계획은 다음을 포함한다:
71:4.10 (804.10) 8. 불운한 자를 보살피기.
71:4.12 (804.12) 10. 과학과 예술의 증진.
71:4.15 (804.15) 문명의 예술에서 생기는 이러한 진보는 필사자의 노력에서 가장 높은, 인간답고 신다운 목표의 실현으로―사람의 형제 정신을 사회에서 성취하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개인적 지위에 이르도록―바로 이끌며, 이것은 모든 사람의 소망,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최상의 소망에서 드러난다.
71:4.16 (804.16) 진정한 형제 정신의 출현은, 모든 사람이 서로 기쁘게 짐을 지는 그러한 사회 질서가 도착했음을 가리킨다. 그들은 실제로 황금률을 실천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러한 이상적 사회는,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 추구하는 봉사에 헌신함으로 주로 자극받는 자를 약한 자나 악한 자가 부당하고 사악하게 이용하려고 잠복해서 기다릴 때는 실현될 수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오직 한 길이 실용적이다: “황금률을 지키는 사람”은 그들의 평화로운 성질을 이용하거나 진보하는 문명의 파괴를 추구할지도 모르는 뒤떨어진 동료에 대항해서 적절한 방어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이상에 따라서 진취적 사회를 세워도 좋다.
71:4.17 (804.17) 각 세대에 이상주의자가 그보다 낮은 서열의 인간에게 멸종되도록 버려두면, 이상주의는 진화하는 행성에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 이상주의의 가장 큰 시험이 있다: 이기적 소득을 얻거나 나라를 크게 만들려는 목적으로 다른 민족을 공격하는 작전에 이 군사력을 쓰려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하나의 진보한 사회가, 전쟁을 좋아하는 이웃들의 온갖 공격을 받아도 그 사회를 안전하게 지킬 그러한 군사적 준비를 유지할 수 있는가? 국가가 살아남으려면 전쟁 준비가 필요하며, 오직 종교적 이상(理想)이 방어 준비를 공격에 악용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오로지 사랑, 형제 정신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누르는 것을 막을 수 있다.
71:5.1 (805.1) 경쟁은 사회의 진보에 필수이지만, 규제를 받지 않은 경쟁은 폭력을 낳는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경쟁은 산업 자체가 살아남을 것인가를 선언할 뿐 아니라, 산업에서 사람의 자리를 결정하므로 경쟁은 천천히 전쟁을 대신하고 있다. (살인과 전쟁은 도덕 관습 앞에서 지위가 다르며, 살인은 사회의 초기 시절 이후로 금지되었고, 한편 아직 인류 전체가 전쟁을 금지한 적은 없다.)
71:5.2 (805.2) 이상적 국가는 개인의 경쟁에서 폭력을 제외하고 개인적 주도권의 불공평을 막기에 겨우 충분할 만큼 사회적 행위의 규제를 떠맡는다. 여기에 국가의 큰 문제가 있다: 어떻게 산업에서 평화와 평온을 보장하고, 국가의 권력을 지원하기 위하여 세금을 내고, 동시에 세금이 산업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막으면서, 국가가 기생충이나 폭군이 되지 않게 보장할 수 있는가?
71:5.3 (805.3) 어느 세상에서도 그 초기 시대를 통하여 내내, 경쟁은 진보하는 문명에 꼭 필요하다. 사람의 진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협동은 갈수록 더 효과 있게 된다. 상급 문명에서는 협동이 경쟁보다 더 능률이 있다. 원시인은 경쟁에 자극을 받았다. 초기 진화의 특징은 생물학상의 적자(適者)가 살아남는 것이지만, 영리한 협동, 서로 이해하는 친교, 영적 형제 정신이 후일의 문명을 더 낫게 촉진한다.
71:5.4 (805.4) 산업의 경쟁은 지나친 낭비이며 상당히 비효율적인 것이 참말이지만, 이 낭비적 경제 운동을 없애려는 어떤 노력도, 그러한 조절이 개인의 기본 자유 중에 어느 것을 아주 손톱만큼이라도 취소할 때, 묵인해서는 안 된다.
71:6.1 (805.5) 이익을 얻으려는 동기가 봉사하려는 동기로 인하여 확대될 수 없다면,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오늘날의 경제는 운명이 정해졌다. 생각이 좁은 자기 이익에 기초를 둔 무자비한 경쟁은 궁극에, 그 경쟁이 유지하려 하는 것마저도 파괴한다. 순전히 사리(私利)를 추구하는 이익 동기는 기독교의 이상과 양립할 수 없다―예수의 가르침과 더군다나 어긋난다.
71:6.2 (805.6) 경제학에서 이익을 얻으려는 동기와 봉사하려는 동기의 관계는 종교에서 두려움과 사랑의 관계와 같다. 그러나 이익의 동기를 갑자기 파괴하거나 없애서는 안 된다. 이익 동기는 그런 동기가 없으면 나태한 사람을 부지런히 일하게 만든다. 그러나 사회의 에너지를 일으키는 이 자극제의 목적이 언제까지나 이기적일 필요는 없다.
71:6.3 (805.7) 경제 활동에서 이익의 동기는 높은 체제의 사회에 전적으로 천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익 동기는 문명의 초기 단계 전체에 걸쳐서 필수인 요소이다. 사람들이 경제적 노력과 사회 봉사를 위하여, 여러 가지 우수한 종류의 비이익 동기―최상의 지혜, 흥미 있는 형제 정신, 탁월한 영적 달성을 얻으려는 초월적 욕구―를 단단히 잡을 때까지, 이익을 얻으려는 동기를 사람들한테서 빼앗아서는 안 된다.
71:7.1 (806.1) 지속하는 국가는 문화에 기초를 두고, 이상에 지배되며, 봉사로 인하여 자극을 받는다. 교육의 목적은 기술을 획득하고, 지혜를 추구하며, 자아를 실현하고, 영적 가치 기준에 도달하는 것이어야 한다.
71:7.2 (806.2) 이상적 국가에서는 교육이 일생을 통해서 내내 계속되며, 때로는 철학이 그 국민의 주요한 추구 대상이 된다. 그런 나라의 국민은 인간 관계의 중요성, 실체의 의미, 가치 기준의 고귀함, 생활의 목표, 영화로운 우주 운명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높이는 것으로서 지혜를 추구한다.
71:7.3 (806.3) 유란시아인은 새롭고 더 높은, 문화 있는 사회를 이루는 꿈을 가져야 한다. 교육은 순전히 이익 때문에 움직이는 경제 체계가 사라짐과 함께, 새로운 가치 수준으로 뛰어오를 것이다. 교육은 너무나 오랫동안 지역과 군대에 치중하였고, 자아를 찬미하고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교육은 궁극에 세계적ㆍ이상적이어야 하고, 자아를 실현하고 우주를 깨달아야 한다.
71:7.4 (806.4) 교육은 성직자의 통제를 받다가, 요즈음에 법률가와 사업가들이 통제하는 일로 넘어가 버렸다. 궁극에는 철학자와 과학자에게 교육을 맡겨야 한다. 철학, 곧 지혜의 탐구가 주요한 교육 목표가 될 수 있도록, 선생들은 자유로운 존재, 진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71:7.5 (806.5) 교육은 실천하는 사업이다. 교육은 일생을 통해서 내내 계속되어야 하며, 그래서 인류는 다음과 같이 높아지는 수준의 필사자의 지혜를 차츰차츰 체험해야 한다:
71:7.7 (806.7) 2. 체험의 의미를 깨달음.
71:7.10 (806.10) 5. 목표를 자극하는 것―도덕.
71:7.13 (806.13) 그리고 나서, 이러한 성취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필사자로서 궁극에 지성이 도달하는 수준, 하나님을 의식하는 수준까지 올라갈 것이다.
71:8.1 (806.14) 어떤 인간 정부에서도 유일하게 성스러운 모습은 국가를 행정ㆍ입법ㆍ사법 활동의 세 분과로 나눈 것이다. 우주는 기능과 권한을 그렇게 분리하는 계획에 따라서 관리된다. 효과적 사회 규제나 국민의 정부에 관한 이 신성한 개념을 제쳐놓고, 시민이 더욱 자제하고 더욱 사회에 봉사하는 목표를 향하여 늘 진보하고 있다면, 한 민족이 어떤 형태의 국가를 선택하는가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 민족의 날카로운 지능, 경제적 지혜, 사회적 지략, 도덕적 체력은 모두 국가에 충실하게 반영된다.
71:8.2 (806.15) 국가의 진화에는 다음과 같이 한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진보가 필요하다:
71:8.3 (806.16) 1. 행정부ㆍ입법부ㆍ사법부, 세 부분으로 정부를 창조하는 것.
71:8.4 (806.17) 2. 사회ㆍ정치ㆍ종교 활동의 자유.
71:8.5 (807.1) 3. 온갖 형태의 노예 제도와 인간적 속박의 폐지.
71:8.6 (807.2) 4. 국민이 세금 부과에 고삐를 쥐는 능력.
71:8.7 (807.3) 5. 보편적 교육의 확립―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진 교육.
71:8.8 (807.4) 6. 지역 정부와 국가 정부 사이의 적당한 조정.
71:8.9 (807.5) 7. 과학의 육성과 질병의 정복.
71:8.10 (807.6) 8. 남녀 평등을 마땅히 인정하며, 산업과 정부에서 여자들이 특화된 봉사를 하는 것과 아울러, 가정ㆍ학교ㆍ교회에서 남녀가 조화되어 활동하는 것.
71:8.11 (807.7) 9. 기계의 발명과 후일의 기계 시대를 정복함으로 사람이 고된 일에 예속되지 않게 만드는 것.
71:8.12 (807.8) 10. 방언의 정복―보편적 언어의 승리.
71:8.13 (807.9) 11. 전쟁의 종결―여러 국가의 대륙 법정이 국가와 종족의 의견 차이를 국제적으로 판결하는 것. 대륙 법정에서 정기적으로 은퇴하는 우두머리들로부터 자동으로 선택된, 행성의 최고 재판소가 이 법정을 주관한다. 대륙 법정은 권한을 가지며, 세계 법정은 자문한다―도덕에 관여한다.
71:8.14 (807.10) 12. 지혜의 추구가 세계에 널리 유행하는 것―철학이 높아지는 것. 세계 종교의 진화, 이것은 행성이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는 초기 국면에 들어감을 예시한다.
71:8.15 (807.11) 이것들이 진보하는 정부의 필요 조건이요, 이상적 국가의 표시이다. 유란시아는 이 높은 이상을 이룩하기에 아득히 멀었지만, 문명화된 민족들은 첫 걸음을 내디디었다―인류는 더 높이 진화하는 운명을 향하여 행진하고 있다.
72:0.1 (808.1) 라나포지의 허가를 받고, 에덴시아 최고자들의 승인을 받아서, 사타니아 체계에 속하고 그리 멀지 않은 어느 행성에서 사는 인류, 가장 진보된 인류의 사회, 도덕 및 정치 생활에 관하여 나는 얼마큼 이야기할 허가를 받았다.
72:0.2 (808.2) 루시퍼 반란에 참여했기 때문에 고립된 사타니아의 모든 세계 중에서, 이 행성은 유란시아와 매우 비슷한 역사를 거쳤다. 두 구체의 비슷한 점은 의심할 여지 없이, 어째서 이 특별 발표가 인가되었는가 설명한다. 왜냐하면 체계 통치자들이 한 행성에서, 다른 행성의 일을 이야기하는 데 찬성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72:0.3 (808.3) 유란시아처럼 이 행성은, 루시퍼 반란과 관련하여, 그 행성 영주가 불충함으로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 심판 아들이 그 필사 민족들에게 한 번도 수여된 적이 없기 때문에, 아담이 유란시아에 온 뒤에 곧, 그 행성은 한 물질 아들을 받았고, 이 아들도 직무를 이행하지 못하여 그 구체가 고립되게 만들었다.
72:1.1 (808.4) 행성에 이 모든 장애가 있었는데도, 아주 우수한 문명이 대체로 오스트랄리아 크기의 고립된 대륙에서 발전되고 있다. 이 나라의 인구는 약 1억4천만이다. 거기에 사는 민족은 혼합된 종족이고, 주로 청인과 황인이며, 유란시아의 이른바 백인종보다 조금 더 보라의 비율이 높다. 이 다른 종족들은 아직 서로 충분히 섞이지 않았지만, 아주 흡족하게 사귀고 친교한다. 이 대륙에서 평균 수명은 이제 90년이며, 그 행성에서 사는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15퍼센트가 길다.
72:1.2 (808.5) 이 나라의 산업 기구는 그 대륙의 독특한 지형(地形)으로부터 생기는 어떤 큰 이점을 누린다. 1년에 8개월 동안 비가 많이 내리는 높은 산들은 그 나라의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이 자연스러운 배치는 수력(水力)의 이용을 유리하게 만들고, 그 대륙의 건조한 서쪽 4분의 1에 물 대는 것을 크게 수월하게 만든다.
72:1.3 (808.6) 이 사람들은 자급 자족한다. 다시 말해서 둘러싼 나라들로부터 아무것도 수입하지 않고서 언제까지나 살 수 있다. 지하 자원은 충분하며, 과학 기술로 그들은 생활 필수품의 부족을 어떻게 메우는가 배웠다. 국내 상업은 활발하지만, 자기보다 덜 진보된 이웃들이 두루 적개심을 가졌기 때문에 거의 외국과 무역을 하지 않는다.
72:1.4 (808.7) 이 대륙 국가는, 대체로 그 행성의 진화 추세를 따랐다. 부족 단계로부터 강력한 통치자와 왕들이 등장하기까지 발전하는 데 몇천 년이 걸렸다. 여러 다른 체제의 정부가 절대 권한을 가진 군주들을 이어받았다―유산된 공화국과 공동체 국가, 그리고 독재자들이 끝없이 많이 오고갔다. 이 성장은 약 5백 년 전까지 계속되었는데, 그때 정치적으로 시끄러운 기간에, 그 나라의 강력한 세 권력자인 집정관들 가운데 하나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다른 통치자들 중에 하나, 곧 나머지 둘 가운데 더 낮은 자도 권력의 자리를 비운다는 조건으로 그가 양위할 것을 자청했다. 이처럼 그 대륙의 통치권이 한 통치자의 손에 쥐어졌다. 그 통합된 국가는 1백 년이 넘도록 강력한 군주 정치 밑에서 진보했고, 그동안에 훌륭한 자유 헌장이 진화하였다.
72:1.5 (809.1) 그 뒤에 군주제로부터 대의정치 형태로 넘어 가는 것은 차츰 일어났고, 임금은 겨우 사회적이나 감상적인, 이름 뿐인 우두머리로 남았으며, 남자 후손의 씨가 말랐을 때 마침내 사라져 버렸다. 현재 있는 공화국은 꼭 2백 년 동안 존재해 왔는데, 그동안에 다음에 이야기하려는 정치 기법을 향하여 줄곧 진보가 있었다. 그리고 산업과 정치 분야에서 최근의 발전이 지난 10년 동안에 일어났다.
72:2.1 (809.2) 이 대륙 국가는 이제 대의(代議) 제도의 정부가 있고, 나라의 서울은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중앙 정부는 비교적 자유로운 1백 주(州)로 된 강력한 연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여러 주는 주지사와 입법가를 뽑고 임기는 10년이며, 아무도 재선될 자격이 없다. 주의 판사들은 주지사로부터 종신으로 임명받고 입법부의 확인을 받으며, 이 입법부는 시민 10만 명에 한 명씩 뽑은 대표들로 구성된다.
72:2.2 (809.3) 도시의 크기에 따라 도시 정부에는 다섯 가지 다른 종류가 있지만, 어느 도시도 1백만이 넘게 거주자를 가지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전체로 보아서, 이 도시를 다스리는 계획은 아주 간단하고, 직접이고 경제적이다. 가장 높은 부류의 시민들이 도시 행정의 몇 가지 공직을 치열하게 추구한다.
72:2.3 (809.4) 연방 정부는 동등한 세 분과, 곧 행정부ㆍ입법부ㆍ사법부를 포함한다. 연방의 최고 집행자는 지역의 보통 선거로 6년마다 뽑는다. 적어도 주 입법가 75명이 탄원하고 그 주의 주지사(州知事)들이 찬성할 경우를 제외하고, 그는 다시 뽑힐 자격이 없으며, 그것도 오직 한 임기 뿐이다. 그는 살아 있는 모든 전직(前職) 최고 집행자로 이루어진 초월 내각의 자문을 받는다.
72:2.5 (809.6) 1. 상원은 산업ㆍ전문직ㆍ농업, 그리고 기타 집단의 노동자들이 선출하며, 경제 활동에 따라서 투표한다.
72:2.6 (809.7) 2. 하원은 산업이나 전문직에 들어가지 않는 사회ㆍ정치ㆍ철학 집단을 포함하는 어떤 사회 조직들이 뽑는다. 정상 지위를 가진 모든 시민은 두 계급의 대표들을 선출하는 데 참여하지만, 그 선거가 상원 또는 하원에 관계되는가에 따라서, 그들은 다르게 분류된다.
72:2.7 (809.8) 3. 제삼원―연로 정치가들―은 국민에게 오래 봉사한 고참들을 포함하며, 최고 집행자와 (연방 밑의) 지역 집행자들, 최고 재판소의 우두머리, 그리고 입법을 맡는 다른 상하원의 한쪽을 주관하는 관리들이 지명하는, 많은 탁월한 사람을 포함한다. 이 집단은 많아야 1백 명으로 제한되어 있고, 그 회원들은 연로 정치가들 자체에서 대다수의 결정에 따라서 뽑힌다. 회원 자격은 종신(終身)이며, 빈 자리가 생길 때, 지명받은 자들의 명단에서 가장 많은 투표를 받는 사람이 이렇게 공식으로 선출된다. 이 단체의 범위는 순전히 자문이지만, 여론을 힘차게 규제하며, 정부의 온갖 지부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72:2.8 (810.1) 연방의 행정 작업의 상당 부분을 (연방 밑에 있는) 10개 지역 당국이 수행하며, 이것은 각기 10개 주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역 부서들은 온전히 집행 및 관리를 맡으며, 입법이나 사법 기능이 없다. 10명의 지역 집행자는 연방의 최고 집행자가 친히 임명한 자이며, 그 임기는 그의 임기와 같다―6년이다. 연방 최고 재판소는 이 지역 행정자 10명의 임명을 승인하며, 이들은 다시 임명되지 않지만, 은퇴하는 집행자는 자동으로 그 후계자의 동료이자 조언자가 된다. 그밖에 이 지역 우두머리들은 행정 관리들로 이루어진 자기의 내각을 고른다.
72:2.9 (810.2) 이 나라는 두 가지 주요 법정 체계―법 재판소와 사회 경제 재판소―의 판결을 받는다. 법 재판소는 다음 세 수준에서 활동한다:
72:2.10 (810.3) 1. 소(小)재판소는 시와 지역을 관할하며, 소재판소의 결정은 높은 주(州) 재판소에 상소될 수 있다.
72:2.11 (810.4) 2. 주 최고 재판소의 결정은 연방 정부, 또는 시민의 권한이나 자유의 위협에 관련되는 모든 문제에서 최종이다. 지역 집행자는 어느 사례(事例)도 대번에 연방 최고 재판소의 법관들에게 가져갈 권한을 받는다.
72:2.12 (810.5) 3. 연방 최고 재판소―국가의 주장, 그리고 주 재판소로부터 올라오는 상소 사례를 판결하기 위한 고등 재판소. 이 최고 법정은 40세가 넘고 75세 미만의 남자 12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들은 어느 주 재판소에서 2년 이상 봉사하고, 초월 내각과 입법 집회의 제삼원에서 대다수의 승인을 받아, 최고 집행자로부터 이 높은 자리에 임명되었다. 이 최고 사법 기관은 적어도 3분의 2 투표로 결정을 내린다.
72:2.13 (810.6) 사회 경제 재판소는 다음 세 부문에서 활동한다:
72:2.14 (810.7) 1. 부모 재판소, 가정과 사회 체계의 입법 및 행정 부서와 관련되어 있다.
72:2.15 (810.8) 2. 교육 재판소―주 및 지역 학교 체계들과 연결되고, 교육 행정 기능을 가진 행정부 및 입법부와 관련된 사법 기관.
72:2.16 (810.9) 3. 산업 재판소―모든 경제적 오해를 매듭짓는 전권(全權)이 맡겨진 사법 재판소.
72:2.17 (810.10) 연방의 최고 법정은 국가 정부의 셋째 입법부, 곧 연로 정치가 회의에서 4분의 3의 투표를 받을 경우를 제외하고, 사회 경제적 사례에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그밖에 부모ㆍ교육ㆍ산업을 담당하는 고등 법정들의 결정은 모두 최종이다.
72:3.1 (811.1) 이 대륙에서 같은 지붕 밑에서 두 가족이 사는 것은 법에 어긋난다. 집단 거주가 불법이 되었으니까, 아파트 종류의 건물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자들은 아직도 클럽ㆍ호텔, 그리고 기타 집단 거처에서 산다. 허용되는 가장 작은 집터는 4645 평방 미터의 땅을 마련해야 한다. 집의 목적으로 쓰이는 모든 토지와 기타 재산은, 최소 집터 할당의 10배까지 세금(稅金)이 면제된다.
72:3.2 (811.2) 이 사람들의 가정 생활은 지난 1세기 동안 크게 개선되었다. 부모,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아동의 교양을 가르치는 부모 학교에 참석하는 것이 의무이다. 작은 시골 촌락에서 사는 농부들조차 이 일을 통신으로 마쳐야 하며, 열흘에―2주마다―한 번씩, 말로 하는 강의를 들으려고 근처의 중심으로 간다. 1주에 5일로 된 달력을 쓰기 때문이다.
72:3.3 (811.3) 각 가족에 있는 아이들의 평균 수는 다섯이며, 그들은 부모의 완전한 통제를 받든지, 아니면 부모 중 하나나 둘이 다 죽었을 때, 부모 법정이 지명한 보호자들의 완전한 통제를 받는다. 어떤 가족도 완전한 고아(孤兒)의 보호권을 받는 것을 큰 영예로 여기며, 고아는 최선의 부모 자격을 나타내는 자들의 가정에 맡겨진다.
72:3.4 (811.4) 이 사람들은 가정을 그들 문명의 기본 제도로 여긴다. 한 아이의 교육과 인격 훈련의 가장 값진 부분은 부모로부터, 그리고 집에서 얻기를 기대하며, 아버지는 아이의 교육에 거의 어머니만큼 주의를 기울인다.
72:3.5 (811.5) 모든 성교육은 집에서 부모나 법적 보호자들이 베푼다. 도덕 교육은 학교의 작업장에서 노는 시간에 선생들이 제공하지만, 종교 훈련은 그렇지 않다. 종교 훈련은 부모가 독점하는 특권이라고 생각되며, 종교를 가정 생활의 필수 부분으로 여긴다. 순전히 종교적 가르침은 오직 철학의 전당(殿堂)에서만 대중에게 베풀어지고, 유란시아의 교회와 같이 순전한 종교 조직은 이 민족 사이에서 발달하지 않았다. 그들의 철학을 따르면, 종교는 하나님을 알고 동료에게 봉사함을 통해서 동료 사랑을 드러내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행성에 있는 다른 나라들의 종교 상태의 전형(典刑)은 아니다. 종교가 이 사람들 사이에서 전적으로 가족의 문제이기 때문에, 순전히 종교적 집회에 바쳐진 공공 장소가 하나도 없다. 유란시아인들이 버릇으로 말하다시피, 정치적으로 교회와 국가는 온전히 분리되었지만, 종교와 철학은 이상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
72:3.6 (811.6) 20년 전까지, 영적 교육자들은 (유란시아의 목사들과 견줄 만하다) 아이들이 부모한테서 알맞게 교육 받았는가 확인하기 위해서 아이들을 정기적으로 검사하려고 각 가정을 찾아보며, 그들은 정부의 감독을 받고 있었다. 지금 이 영적 조언자와 검사자들은 새로 세운 영적 진보 재단의 지휘 밑에 있고, 이것은 자진해서 내는 기부금의 지원을 받는다. 아마도 이 제도는 파라다이스 심판 아들이 도착할 때까지 더 진화하지 않을지 모른다.
72:3.7 (811.7) 아이들은 15살까지 법적으로 부모 밑에 남아 있으며, 그때 시민의 책임을 받도록 처음 입회식이 거행된다. 그 뒤에, 5년마다 연달아 다섯 기간에, 그러한 또래의 집단을 위하여 비슷한 공식 행사가 거행되는데, 거기서 부모에 대한 그들의 의무가 줄어들며, 한편 국가에 대한 새로운 시민의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맡는다. 투표권은 20살에 주며, 부모의 승낙 없이 결혼할 권리는 25살까지 주지 않고, 아이들은 30살이 되면 집을 떠나야 한다.
72:3.8 (812.1) 결혼과 이혼 법률은 나라에 두루 한결같다. 20살―시민 선거권을 가질 나이―가 되기 전에 결혼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의사(意思)를 통지하고 나서 1년 뒤에, 그리고 신부와 신랑이 결혼 생활의 책임에 관하여 부모 학교에서 마땅히 교육받은 것을 보이는 증명서를 제출한 뒤에야 겨우 결혼할 허가가 내린다.
72:3.9 (812.2) 이혼 규칙은 얼마큼 느슨하지만, 부모 법정에서 발행하는 별거의 선포는 이혼 신청을 기록한 지 1년이 지날 때까지 받지 못한다. 그리고 이 행성에서 1년은 유란시아에서보다 훨씬 길다. 그들이 쉬운 이혼법을 가졌는데도, 현재 이혼율은 유란시아에서 문명화된 민족들의 이혼율의 10분의 1 밖에 안 된다.
72:4.1 (812.3) 이 나라의 교육 제도는 5살부터 18살까지 다니는, 대학 밑의 학교에서 의무이며 남녀 공학이다. 이 학교들은 유란시아의 학교들과 엄청나게 다르다. 교실이 하나도 없고, 한 때에 오직 한 가지 공부만 추구하는데, 처음 3년 뒤에는 모든 생도가 조교(助敎)가 되고, 그들 밑에 있는 자들을 가르친다. 책은 오로지, 학교의 작업장에서, 그리고 학교 농장에서 생기는 문제들을 푸는 데 도움이 될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서만 쓰인다. 대륙에서 쓰이는 많은 가구(家具)와 기계 장치는―이때가 큰 발명과 기계화의 시대이니까―이 작업장에서 생산된다. 각 작업장 옆에는 기초 도서관이 있고, 거기서 학생들은 필요한 참고 서적을 뒤질 수도 있다. 농업과 원예도 또한 각 지역 학교에 인접한 큰 농장에서, 교육 기간 전체를 통해서 내내 가르친다.
72:4.2 (812.4) 저능한 아이들은 오직 농업과 축산 분야에서 훈련을 받고, 특별히 관리하는 식민지에 일생 동안 맡겨진다. 거기서 이들은 부모가 되지 못하도록 성별로 분리되며, 부모 노릇은 정상 이하의 모든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이 제한된 조치는 75년 동안 운영되었다. 여기에 맡기는 선포는 부모 법정에서 내려온다.
72:4.3 (812.5) 모두가 한 해에 한 달 동안 휴가를 가진다. 대학 밑의 학교들은 열 달로 된 1년에 아홉 달 동안 운영되며, 휴가는 부모와 함께, 또는 친구들과 여행하면서 보낸다. 이 여행은 성인 교육 프로그람의 일부이고, 일생에 걸쳐서 이어진다. 그러한 비용에 쓸 자금은 노령 보험에서 쓰이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축적된다.
72:4.4 (812.6) 학교 시간의 4분의 1은 놀이―경쟁하는 운동―에 바치고, 이 경쟁에서 생도들은 지역 시합부터, 주(州)와 지방의 시합을 거쳐서, 솜씨와 씩씩함을 겨루는 전국 시합까지 올라간다. 마찬가지로, 과학과 철학의 경쟁 뿐 아니라 웅변과 음악의 경쟁은, 낮은 사회 부문에서 전국의 영예를 얻는 경쟁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의 관심을 차지한다.
72:4.5 (812.7) 학교의 정부는 서로 관련된 세 지부(支部)를 가진 국가 정부의 복사판이며, 교직원은 셋째 부서, 곧 자문하는 입법 부서로서 활동한다. 이 대륙에서 교육의 주요한 목적은 모든 생도를 자립하는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다.
72:4.6 (813.1) 18살에 대학 밑의 학교 체제에서 졸업하는 아이들은 모두 솜씨 있는 기능공이다. 다음에 책을 연구하고 특별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성인 학교나 대학에서 시작된다. 머리 좋은 학생이 계획보다 앞서 제 일을 마치면, 그에게 시간과 수단으로 상을 주며, 그것으로 그는 자신이 고안한 어떤 조그만 사업을 추진해도 좋다. 교육 체계 전체가 개인을 알맞게 훈련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72:5.1 (813.2) 이 민족 사이에서 산업의 상황은 그들의 이상과 거리가 멀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아직도 문제를 안고 있지만, 양자가 성실하게 협동하는 계획에 적응이 되고 있다. 이 독특한 대륙에서 노동자는 갈수록 모든 산업 분야의 기업에서 주주(株主)가 되고 있다. 모든 영리한 노동자가 천천히 작은 자본가가 되고 있다.
72:5.2 (813.3) 사회의 대립은 줄어들고 있고, 선의(善意)가 빨리 퍼지고 있다. 노예 제도가 폐지된 이후로 (1백 년이 넘는다) 아무런 심각한 경제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것은 1년에 2퍼센트씩 해방시킴으로 이러한 조정이 차츰차츰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정신ㆍ 도덕ㆍ 신체의 시험을 만족스럽게 거친 노예들은 시민권을 받았고, 이 우수한 노예들의 다수는 전쟁에서 잡힌 포로이든지, 아니면 그런 포로의 아들딸이었다. 그들은 50년쯤 전에 마지막 열등한 노예들을 출국시켰고, 퇴화되고 나쁜 계급의 인구를 줄이는 과제에 최근에 착수하고 있다.
72:5.3 (813.4) 이 사람들은 산업에서 생기는 오해를 조절하고 경제적 남용을 시정하는 새로운 기술을 요즈음에 개발했는데, 이것은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예전의 방법보다 뚜렷하게 개선되었다. 개인이나 산업의 의견 차이를 조정하는 데 쓰이는 과정으로 폭력은 금지되었다. 임금(賃金)과 이익과 기타 경제 문제는 엄격하게 규제되지 않지만,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산업 법규에 통제를 받으며, 한편 산업 재판소가 산업에서 생겨나는 모든 논쟁에 판결을 내린다.
72:5.4 (813.5) 산업 재판소들은 겨우 30년이 되었지만, 대단히 만족스럽게 활동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생긴 발전은, 이제부터 산업 재판소들이 다음 세 부문에 속하는 법적 보상을 인정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72:5.5 (813.6) 1. 투자된 자본에 대한 법정(法定) 이자율.
72:5.8 (813.9) 이 조건들은 계약에 따라서 먼저 만족되어야 하든지, 아니면 소득이 줄어들 경우에 그들은 일시적 감소를 비례해서 분담해야 한다. 이 고정된 비용을 초과하는 모든 이익은 그 다음부터 배당금으로 간주되고, 자본ㆍ기술ㆍ노동, 이 세 부문 모두에게 비례해서 분배되어야 한다.
72:5.9 (813.10) 10년마다 지역 집행자는 소득을 얻는 1일 법정 노동 시간을 조정하고 선포한다. 산업은 이제 5일로 된 1주에 근거를 두고 운영하며, 나흘 일하고 하루를 논다. 이 사람들은 일하는 날에 6시간 일하며, 학생들처럼, 열 달로 된 1년에 아홉 달 일한다. 휴가를 여행에 보통 쓰며, 새로운 수송 방법이 아주 최근에 개발되었기 때문에, 나라 전체가 여행에 흠뻑 빠져 있다. 기후는 1년에 약 8개월 동안 여행을 허락하며, 그들은 기회를 최대한으로 이용한다.
72:5.10 (813.11) 2백 년 전에는 이익 동기가 산업을 온통 지배했지만, 오늘날 다른 더 높은 추진력이 이익 동기를 급속히 대체하고 있다. 이 대륙에서 경쟁은 심하지만, 상당한 부분이 산업으로부터 운동, 기술, 과학적 성취, 지적 달성으로 옮겨졌다. 경쟁은 사회에 봉사하고 정부에 충성하는 데서 가장 활발하다. 이 사람들 사이에서 공직에 봉사하는 것은 급속히 주요한 포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그의 기계 작업장 사무실에서 하루에 여섯 시간 일하고, 다음에 정치 학교의 지역 지부로 서둘러 가서, 거기서 공직(公職)을 얻을 자격을 갖추려고 애쓴다.
72:5.11 (814.1) 노동은 이 대륙에서 더 명예로운 직업이 되고 있으며, 18살이 넘고 몸이 정상인 모든 국민은 집과 농장에서, 어떤 인정받는 산업에서, 일시 일자리 잃은 자를 흡수하는 공공 사업에서, 또는 광산에서 강제 노동자 단체에서 일한다.
72:5.12 (814.2) 이 사람들은 또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혐오감―게으름과 벌어들이지 않은 재산에 대한 혐오감―을 비로소 기르고 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그들은 기계를 정복하고 있다. 그들도 한때는 정치적 자유를 위하여, 나중에는 경제적 자유를 위하여 투쟁했다. 이제 그들은 이 두 가지를 즐기는 단계에 들어가고 있고, 한편 그 위에 열심히 번 여가를 비로소 고맙게 여기고 있으며, 이 여가는 더욱 자아를 실현하는 데 바칠 수 있다.
72:6.1 (814.3) 이 나라는 자존심을 상하는 종류의 자선을, 노년기의 안전을 품위 있게 보장하는 정부 보험으로 바꿔치우려고, 굳은 결의로 노력하고 있다. 이 나라는 아이들을 모두 교육시키고 모든 사람에게 직업을 마련해 준다. 따라서 허약하고 나이 든 사람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런 보험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72:6.2 (814.4) 이 민족 사이에서 모든 사람은, 주(州)의 노동 위원장으로부터 70세까지 남아서 일하도록 자격을 부여하는 허가를 받지 않는 한, 65세에 소득을 얻는 직업으로부터 은퇴해야 한다. 이 나이 제한은 공무원이나 철학자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신체적으로 일할 수 없게 된 자나 영구하게 불구(不具)가 된 사람은, 지역 정부의 연금 위원장이 확인한 법정의 명령에 따라서, 나이에 상관 없이 은퇴자 명단에 올라갈 수 있다.
72:6.3 (814.5) 노년기 연금을 위한 기금은 네 가지 근원으로부터 생긴다:
72:6.4 (814.6) 1. 한 달에 하루의 소득은 연방 정부가 이 목적으로 강제로 떼어 가며, 이 나라에서는 모두가 일한다.
72:6.5 (814.7) 2. 유산(遺産)―부유한 많은 시민이 이 목적으로 기금을 남긴다.
72:6.6 (814.8) 3. 주(州)의 광산에서 강제 노동으로부터 얻은 소득. 징집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지원하고 은퇴 분담금을 떼어놓은 뒤에, 그들의 노동으로부터 생기는 잉여 이익은 모두 이 연금(年金) 기금에 넘겨진다.
72:6.7 (814.9) 4. 지하 자원에서 생기는 소득. 대륙에서 모든 천연 재산은 사회가 위탁한 재산으로서 연방 정부가 가지고 있고, 그로부터 생긴 소득은 질병의 예방, 천재 교육, 그리고 정치 학교에서 특별히 장래가 보이는 개인들의 비용과 같은 사회적 목적을 위하여 이용된다. 지하 자원으로부터 생기는 소득의 반은 노년 연금 기금으로 들어간다.
72:6.8 (814.10) 주 및 지역의 보험 통계 재단이 여러 가지 보호하는 보험을 공급하지만, 노년 연금은 10개 지역 분과를 통해서 연방 정부가 홀로 관리한다.
72:6.9 (814.11) 이러한 정부 기금은 오랫동안 정직하게 관리되어 왔다. 반역과 살인 다음에, 재판소에서 내리는 가장 무거운 벌은 대중의 신임을 저버리는 데 내려진다. 사회 및 정치적 불충은 이제 모든 범죄 중에서 가장 흉악한 것으로 여긴다.
72:7.1 (815.1) 연방 정부는 노년 연금의 관리, 그리고 천재와 독창성을 육성하는 데만 간섭한다. 주 정부는 조금 더 개별 시민에 관심을 가지며, 한편 지역 정부는 훨씬 더 간섭하거나 사회주의적이다. 도시는 (또는 도시의 어떤 하위 부서들은) 건강, 위생, 건물 규제, 미화(美化), 물 공급, 그리고 조명ㆍ난방ㆍ오락ㆍ음악ㆍ통신과 같은 문제에 관여한다.
72:7.2 (815.2) 어떤 산업에서도 먼저 건강에 주의를 기울인다. 어떤 단계의 육체적 복지는 산업과 공동체의 특권으로 간주되지만, 개인과 가족의 건강 문제는 개인의 관심거리일 뿐이다. 의술에서는, 순전히 개인적인 모든 다른 문제의 경우처럼, 간섭을 삼가는 것이 더욱 정부의 계획이 되는 경향이 있다.
72:7.3 (815.3) 도시는 전혀 세금을 부과하는 권한이 없고, 빚을 질 수도 없다. 도시는 주 재무부로부터 머리 수에 따라 수당을 받고, 그러한 수입(收入)을 그들의 사회주의적 기업에서 생긴 소득으로, 그리고 여러 상업 활동에 면허를 줌으로 보충해야 한다.
72:7.4 (815.4) 급히 이동하는 시설은 도시 테두리의 확장을 대단히 실용성 있게 만들며, 이것은 도시의 통제를 받는다. 도시의 소방(消防) 부서는 화재 방지 및 보험 재단들의 지원을 받고, 도시나 시골에 있는 모든 건물은 불연성(不燃性)이다―75년이 넘도록 이렇게 되었다.
72:7.5 (815.5) 시에서 임명하는 치안 담당 관리는 하나도 없다. 주 정부가 경찰력을 관리한다. 이 부서는 25세부터 50세 사이에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거의 전부 충원된다. 대부분의 주(州)는 아주 높은 독신 세금을 부과하고, 이것은 주 경찰에 가입하는 모든 남자에게 지급된다. 보통 주에서 경찰력은 이제 50년 전 경찰력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72:7.6 (815.6) 경제 및 기타 조건이 대륙의 다른 여러 구역에 따라 크게 다르니까, 비교적 자유롭고 주권을 가진 1백 주의 세금 계획은 거의 또는 전혀 한결같지 않다. 주마다 10개의 기본 헌법 조항이 있고, 이것들은 연방 최고 재판소의 찬성이 없이 고칠 수 없다. 그리고 이 조항들 중의 하나는 어느 한 해에 어떤 재산이라도 그 가치에 대해서 1퍼센트가 넘는 세금을 부과하지 못하게 하고, 집터는 도시이든 시골이든, 여기서 면제된다.
72:7.7 (815.7) 연방 정부는 빚을 질 수 없으며, 전쟁 목적을 제외하고, 어떤 주라도 돈을 빌릴 수 있기 전에, 4분의 3의 주민 투표가 요구된다. 연방 정부가 빚을 질 수 없으니까,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 국가 방어 회의는 여러 주에게 사람과 물자 뿐 아니라 돈도 내라고, 필요한 대로 부과할 권한이 있다. 그러나 어떤 부채도 25년이 넘게 계속될 수 없다.
72:7.8 (815.8) 연방 정부를 지원하는 소득은 다음의 다섯 근원으로부터 생긴다:
72:7.9 (815.9) 1. 수입세. 모든 수입품은 이 대륙에서 생활 수준을 보호하려고 고안된 관세를 물어야 하는데, 생활 수준은 그 행성에서 다른 어느 나라보다 훨씬 높다. 산업 국회의 양원(兩院)이 경제 사무를 맡는 최고 집행자의 추천을 비준한 뒤에, 최고 산업 재판소가 이 관세들을 정하는데, 최고 집행자는 이 두 입법 기관이 합동으로 임명한 사람이다. 노동자가 산업을 담당하는 상원을 선출하고, 자본가가 하원을 선출한다.
72:7.10 (816.1) 2. 특허권 사용료. 연방 정부는 10개 지역 실험실에서 발명과 새로운 창작품을 권장하며, 온갖 종류의 천재―예술가ㆍ작가ㆍ과학자―들을 원조하고, 그들의 특허를 보호한다. 그 대신에 정부는 기계, 책, 예술 작품, 식물 또는 동물에 관계되든지 상관 없이, 모든 그러한 발명과 창작품으로부터 생긴 이익의 절반을 가진다.
72:7.11 (816.2) 3. 상속세. 연방 정부는 재산의 크기와 기타 조건에 따라서, 1퍼센트에서 50퍼센트까지 누진되는 상속세를 부과한다.
72:7.12 (816.3) 4. 군사 장비. 육군 및 해군 장비를 상업 및 오락 용도로 빌려 줌으로 상당한 금액을 번다.
72:7.13 (816.4) 5. 자연 자원. 자연 자원으로부터 생기는 소득은, 연방의 주 헌장에 지정된 특별한 목적으로 전부 요구되지 않을 때, 나머지는 국가의 금고로 넘겨진다.
72:7.14 (816.5) 국가 방어 회의가 평가한 전쟁 기금을 제외하고, 연방 정부의 예산은 입법을 담당하는 상원에서 시작되고, 하원의 동의를 얻고, 최고 집행자의 승인을 받고, 마지막에 1백 명으로 이루어진 연방 예산 위원회가 이를 유효하게 만든다. 이 위원회의 회원들은 주지사의 지명을 받고, 24년 동안 근무하도록 주 의회가 선출하며, 4분의 1을 6년마다 선출한다. 6년마다 이 기관은, 4분의 3 투표로 그 중에서 한 사람을 우두머리로 선택하고, 이렇게 그는 연방 재무부의 지도자이자 통제자가 된다.
72:8.1 (816.6) 5살부터 18살까지 이어지는 기본 의무 교육 프로그람에 보태서, 특별 학교들이 다음과 같이 유지된다:
72:8.2 (816.7) 1. 정치 학교. 이 학교들은 국가ㆍ지역ㆍ주(州), 이 세 등급으로 되어 있다. 국가의 공직은 4 부문으로 분류된다. 공직의 첫째 부문은 주로 국가 행정에 관계되는데, 이 집단의 관리들은 모두, 지역의 정치 학교와 국가 정치(政治) 학교를 졸업한 자라야 된다. 개인들은 10개의 정치 학교 중 어디든 졸업하고 나서, 둘째 부문에서, 정치적 직책이나, 선거를 통한 직책이나 임명된 직책을 받아들여도 좋다. 그들이 맡는 임무는 지역 행정과 주 정부에 있는 직책에 관계된다. 제3 부문은 주 정부의 직책이며, 그러한 관리들은 오직 주의 정치 학위를 소지하는 것이 요구된다. 넷째이자 마지막 부문의 관리들은 정치 학위를 소지하는 것이 요구되지 않고, 그러한 직책은 모두 지명된다. 이런 직책은 작은 조수 자리, 비서직, 기술 직책이며, 정부의 행정 자격에서 활동하는 학식 있는 여러 직종이 그 일을 수행한다.
72:8.3 (816.8) 소재판소와 주 재판소의 판사들은 주(州)의 정치 학교에서 받은 학위를 지니고 있다. 사회ㆍ교육ㆍ산업의 문제를 다루는 사법 재판소의 판사들은 지역 학교의 학위를 소지한다. 연방 최고 재판소의 판사들은 이 모든 정치 학교로부터 받은 학위를 가져야 한다.
72:8.4 (817.1) 2. 철학 학교. 이 학교들은 철학의 전당(殿堂)과 연결되어 있고, 공공 기능으로서 얼마큼 종교와 관련된다.
72:8.5 (817.2) 3. 과학 기관. 이 기술 학교들은 교육 체계보다 오히려 산업과 조정되며, 15 부문 밑에서 관리된다.
72:8.6 (817.3) 4. 전문직 훈련 학교. 이 특별 기관들은 12 가지의 다양한 학문 직종을 위하여 기술 훈련을 마련해 준다.
72:8.7 (817.4) 5. 육군 학교와 해군 학교. 국가 본부 가까이, 그리고 해안에 있는 25개의 군사 중심에는, 18세부터 30세까지 자원하는 시민의 군사 훈련에 전념하는 기관들이 유지된다. 25세가 되기 전에 이 학교들에 입학하려면 부모의 승인이 요구된다.
72:9.1 (817.5) 모든 공직 후보자는 주ㆍ지역, 또는 연방의 정치 학교 졸업생들에게 제한되어 있어도, 이 나라의 진취적 지도자들은 보통 투표 계획에서 심각한 약점을 발견했으며, 약 50년 전에 수정된 투표 계획을 위한 헌법 조치를 마련했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72:9.2 (817.6) 1. 20세 이상의 모든 남자와 여자는 한 표를 가진다. 이 나이가 되고 나서, 모든 시민은 두 투표 집단에서 회원 자격을 받아들여야 한다. 경제 활동―산업ㆍ전문직ㆍ농업 또는 무역 활동―에 따라서, 그들은 첫째 집단에 참가하게 된다. 정치ㆍ철학ㆍ사회적 경향에 따라서 둘째 집단에 들어가게 된다. 이처럼 모든 노동자는 선거권을 가진 어떤 경제 집단에 속하며, 이 조합들은 비경제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로 권력이 분산된 국가 정부와 아주 비슷하게 통제된다. 이 집단에 등록한 것은 12년 동안 바꿀 수 없다.
72:9.3 (817.7) 2. 주지사 혹은 지역 집행자의 지명을 받고 나서, 지역 최고 회의의 명령에 따라서, 사회에 크게 봉사했거나 또는 정부에 근무하면서 비상한 지혜를 보인 개인들은 5년 이상의 기간마다 그들에게 수여된 추가 투표권을 받아도 좋으며, 그 초월 투표권은 9을 넘지 못한다. 어느 복수 투표권을 가진 자도 그 최대 투표는 10이다. 과학자ㆍ발명가ㆍ선생ㆍ철학자, 영적 지도자는 또한 늘어난 정치 권력을 받음으로 이렇게 인정받고 영예를 얻는다. 특별 학부가 학위를 주는 것과 아주 비슷하게, 주와 지역의 최고 회의가 이 높아진 시민 특권을 수여하는데, 수령자는 다른 학위와 함께, 몸소 이룩한 업적의 목록에 시민의 인정을 받는 그러한 상징을 보태는 것에 긍지를 느낀다.
72:9.4 (817.8) 3. 광산에서 강제 노동을 하라고 판결을 받은 모든 사람, 그리고 세금으로 지원을 받는 모든 정부 공무원은 그러한 근무 기간에, 투표권을 잃는다. 이것은 65세에 연금을 받고 은퇴하는 나이 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72:9.5 (817.9) 4. 5년마다 낸 연평균 세금을 반영하는 투표권에는 다섯 등급이 있다. 세금을 많이 낸 자는 5표까지 추가 투표권이 허락된다. 이 투표권의 수여는 모든 다른 인정과 상관 없지만, 어떤 경우에도 누구든지 10표가 넘게 던질 수 없다.
72:9.6 (818.1) 5. 이 선거권 계획이 채택되었을 때, 경제 체계, 곧 기능적 체계를 지지하고 지역 투표 방법을 포기하였다. 모든 시민은 이제 거처에 상관 없이, 산업ㆍ사회, 또는 전문직 집단의 회원으로서 투표한다. 그래서 유권자는 정부의 신뢰와 책임을 맡는 자리에 가장 자격 있는 회원들만 뽑는, 단결되고 뭉쳐진 총명한 집단으로 구성된다. 이 기능 투표권, 곧 집단 투표권 계획에 한 가지 예외가 있다: 6년마다 연방의 최고 집행자는 전국 투표로 선출되며, 어느 시민도 한 표밖에 던지지 못한다.
72:9.7 (818.2) 최고 집행자의 선거를 제외하고, 이처럼 투표권은 시민의 경제적ㆍ직업적ㆍ지적ㆍ사회적 분류에 따라서 행사된다. 이상적인 국가는 유기체이며, 자유롭고 지적인 모든 시민 집단은 그보다 큰 유기체인 정부 안에서 하나의 중대하고 작용하는 기관(器官)을 대표한다.
72:9.8 (818.3) 정치 학교들은 결함이 있거나, 게으르거나, 무관심하거나, 범죄성이 있는 어떤 개인한테서도 투표권을 빼앗을 의도를 가지고, 법적 절차를 주 재판소에서 시작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이 사람들은 한 나라의 50퍼센트가 열등하거나 결함이 있으면서 투표권을 가질 때, 그런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헤아린다. 그들은 평범이 지배하면 어떤 나라도 멸망한다는 것을 믿는다. 투표는 의무이며, 투표를 하지 않는 자에게 무거운 벌금이 부과된다.
72:10.1 (818.4) 이 종족이 범죄, 광기(狂氣), 퇴화를 다루는 방법은 어떤 면에서 유쾌하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다른 면에서는 대부분의 유란시아인에게 충격임이 드러날 것이다. 범죄자와 결함 있는 자를 보통 성별에 따라서, 다른 농업 식민지에 보내며, 그들은 자급하고도 남는다. 그보다 더 심각한 습관성 범죄자와 치료할 수 없이 미친 자는 죽이는 가스 방에서 죽도록 재판소에서 선고를 받는다. 살인은 별도로 하고, 정부의 신임을 저버리는 것을 포함해서, 수많은 범죄가 또한 사형(死刑)을 받으며, 판결의 시행은 분명하고 빠르다.
72:10.2 (818.5) 이 사람들은 법의 부정적 시대로부터 긍정적 시대로 지나가고 있다. 요즈음에 그들은 살인과 큰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구류 식민지에서 종신으로 근무하도록 선고하여 범죄 방지를 시도할 정도까지 이르렀다. 그러한 죄수들은 나중에 더 정상으로 되었다는 것을 보이면, 가석방(假釋放)되거나 사면을 받을 수도 있다. 이 대륙에서 살인율은 다른 나라들의 비율의 겨우 1퍼센트이다.
72:10.3 (818.6) 죄수와 결함 있는 자들의 번식을 막으려는 노력이 1백 년도 더 전에 시작되었고, 이미 흡족한 결과를 낳았다. 미친 사람을 위하여 아무런 감옥이나 병원이 없다. 한 가지 이유는, 이 집단이 유란시아에서 발견되는 것의 겨우 10퍼센트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72:11.1 (818.7) 국가 방어 회의의 총재는 연방 군사 학교의 졸업생들을 능력과 경험에 따라서, 일곱 계급으로, “문명의 수호자”로 임명할 수 있다. 이 회의는 25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높은 부모 재판소, 교육 재판소, 산업 재판소가 그들을 지명하고, 연방 최고 법정이 이를 확인해 주며, 이 회의에서 조정된 군사(軍事) 참모진의 우두머리가 직권상 의장을 맡는다. 그러한 회원들은 70세가 되기까지 근무한다.
72:11.2 (819.1) 그러한 임명받은 장교들이 추구하는 과정은 4년 걸리고, 변함없이 어떤 상업이나 전문직의 통달과 관계된다. 관계된 이 산업ㆍ과학, 또는 전문직의 교육을 받지 않고는 군사 훈련을 결코 주지 않는다. 군사 훈련이 끝났을 때, 개인은 4년 과정 동안에, 마찬가지로 과정이 4년 걸리는 어느 특별 학교에서 나누어 주는 교육의 절반을 받은 것이다. 이 방법으로 기술 또는 전문직 훈련의 처음 절반을 확보하는 동안에, 다수의 남자들에게 자신을 부양할 기회를 마련해 줌으로, 직업 군인 계급의 창설을 피한다.
72:11.3 (819.2) 평화 시절에 군대 복무는 순전히 자원이며, 어느 지부에서 근무하더라도 복무는 4년 동안이다. 그동안에 모든 남자는 군사 전술을 통달하는 것 외에 어느 특별한 직종의 연구를 추구한다. 음악 훈련을 받는 것은 중앙 군사 학교에서, 그리고 그 대륙의 변두리 근처에 흩어져 있는 25개 훈련소에서, 주요한 즐거움 중에 하나이다. 산업이 한산한 기간에 수천 명의 실업자가 육지와 바다와 공중에서 대륙의 군사 방어를 강화하는 데 자동으로 이용된다.
72:11.4 (819.3) 둘러싼 적대 민족들의 침공에 대한 방어로서 이 사람들이 강력한 전쟁 시설을 유지하지만, 1백 년이 넘도록 그들이 이 군사 자원을 공격하는 전쟁에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의 명예로 기록해도 좋다. 전쟁 능력을 공격에 이용하려는 유혹에 무릎 꿇지 않고서, 문명을 힘차게 지킬 수 있는 점까지 그들은 문명화되었다. 통일된 대륙 국가가 세워진 이후로 아무 내란이 없었지만, 이 사람들은 지난 2세기 동안 아홉 번이나 맹렬히 방어 전쟁을 수행하도록 요구되었으며, 그 가운데 셋은 강력한 세계 열강의 연방에 대항한 것이었다. 비록 이 나라가 적대하는 이웃들의 공격에 대해서 적절한 방어를 유지하지만, 그 나라는 정치가ㆍ과학자ㆍ철학자를 훈련하는 데 훨씬 더 많이 주의를 기울인다.
72:11.5 (819.4) 세계와 평화를 누리고 있을 때, 이동할 수 있는 모든 방어 장치는 아주 충분히 무역ㆍ상업ㆍ오락에 고용된다. 전쟁이 선포될 때는 나라 전체가 동원된다. 전쟁 기간을 통해서 내내, 모든 산업에서 군대 임금이 지불되며, 모든 군사 분과의 우두머리들은 최고 집행자의 내각에서 회원이 된다.
72:12.1 (819.5) 이 독특한 민족의 사회와 정부가 여러 면에서 유란시아의 국가들보다 우수하지만, 다른 여러 대륙에 있는 정부들은 (이 행성에 열 하나가 있는데) 유란시아의 진보된 나라들보다 뚜렷이 열등하다.
72:12.2 (819.6) 이제 바로 이 우수한 정부는 열등한 민족들과 대사(大使) 관계를 세우려고 계획하고 있으며, 둘러싼 이 나라들에 선교사를 보내자고 주장하는 큰 종교 지도자가 처음으로 나타났다. 우수한 문화와 종교를 다른 민족에게 강요하려고 노력했을 때, 허다한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을 그들이 바야흐로 저지르려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진보된 문화를 가진 이 대륙 국가가 그저 나가서 이웃 민족들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그들을 교육시킨 다음에, 뒤처진 형제들에게 문화의 밀사(密使)로 돌려보내기만 한다면, 이 세계에서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말할 것도 없이, 심판 아들이 진보된 이 나라에 곧 온다면, 큰 일이 이 세계에 빨리 일어날 수 있다.
72:12.3 (820.1) 유란시아에서 문명을 향상하고 정부의 진화를 보강하려는 뜻으로 특별 허가를 받고서, 이 이웃 행성의 일을 이야기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유란시아인의 관심을 끌고 흥미를 자아내게 할 훨씬 더 많은 것을 늘어놓을 수 있지만 이 발표는 우리가 허락받은 명령의 범위까지 다룬다.
72:12.4 (820.2) 그러나 유란시아인은 사타니아 체계에서 그 자매 구체가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심판관 임무나 수여 임무의 혜택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살펴야 한다. 유란시아의 여러 민족은, 이 대륙 국가를 그 행성의 다른 나라들과 구별하는 것 같은 그런 문화적 차이 때문에 서로 분리되지도 않았다.
72:12.5 (820.3) 진리의 영이 부어진 것은 주를 수여받은 세계에서 인류를 위하여 큰 업적을 이룩할 영적 기초를 마련해 준다. 따라서 유란시아는 법률, 기계 장치, 상징ㆍ관습ㆍ언어와 아울러, 행성의 정부를 더 빨리 실현하도록 준비가 훨씬 더 잘 되어 있다―이 모두가 법 아래에서 세계에 두루 평화를 이룩하는 데 아주 힘차게 이바지할 수 있고, 영적 노력을 기울이는 진짜 시대가 언젠가 밝아오도록 이끌 수 있다. 그러한 시대는 빛과 생명의 시대, 행성에서 유토피아 시대로 이끄는 문턱이다.
73:0.1 (821.1) 칼리가스티아가 패망하고 그에 따라 사회가 혼란해져서 생긴 문화적 퇴폐와 영적 빈곤은 유란시아 민족들의 육체적 상태, 곧 생물학적 상태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칼리가스티아와 달리가스티아의 불만에 뒤따라 그렇게 빨리 생긴 문화 및 도덕의 후퇴와 아주 상관 없이, 유기적 진화는 빠른 걸음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행성의 역사에서 거의 4만 년 전에, 순전히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유란시아 민족들의 발전이 절정에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을 근무하던 생명 운반자들이 주목한 때가 왔다. 멜기세덱 행성 관리자들은 이 의견에 찬성하면서,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에게 생명 운반자들과 함께 탄원을 드리자고 쉽게 찬성했고, 이 탄원은 생물학적 개량자, 곧 물질 아들과 딸의 파송을 허가할 목적으로 유란시아 검열을 요청하였다.
73:0.2 (821.2) 이 요청은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에게 올린 것이었고, 이는 칼리가스티아가 몰락하고 예루셈에서 권력이 일시 자리를 비운 뒤로 늘, 그들이 유란시아의 많은 사무에 대하여 직접 관할권을 전에 행사했기 때문이다.
73:0.3 (821.3) 십일(十一) 세계, 곧 실험 세계 시리즈를 감독하는 군주 타바만시아가 행성을 검열하려고 왔고, 종족의 진전을 살핀 뒤에, 그는 유란시아에 물질 아들들을 보내 줄 것을 정식으로 추천했다. 이 검열이 있은 지 1백 년이 채 안 되어, 아담과 이브, 곧 지역 체계의 물질 아들과 딸이 도착했고, 반란으로 뒤에 처지고 영적으로 고립시키는 금지령의 지배 하에 있는 한 행성에서, 혼란에 빠진 일의 실마리를 풀려고 애쓰는 어려운 과제를 시작했다.
73:1.1 (821.4) 정상(正常) 행성에서 물질 아들이 도착하는 것은 보통, 발명과 물질적 진보와 지적 깨우침이 있는 중대한 시대가 다가옴을 알릴 것이다. 대부분의 세계에서 아담 이후 시대는 대단한 과학 시대이지만, 유란시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육체적으로 건강한 종족들이 행성에 살았지만, 부족들은 야만스럽고 도덕적으로 침체된 늪에서 시들고 있었다.
73:1.2 (821.5) 반란이 있은 뒤 1만 년이 되자, 영주의 행정부가 쌓아 놓은 공적이 실질적으로 다 지워져 버렸다. 세상의 종족들은 잘못 인도받은 이 아들이 오지 않은 경우보다 형편이 조금도 낫지 않았다. 겨우 놋 족속과 아마돈 족속 사이에서, 달라마시아의 전통과 행성 영주의 문화가 지속되었다.
73:1.3 (821.6) 놋 족속은 영주의 참모진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분자들의 후손인데, 그 이름은 그들의 처음 지도자 놋에서 유래하며, 그는 한때 달라마시아의 산업 및 무역 위원회의 의장이었다. 아마돈 족속은 반과 아마돈과 함께 충성하기로 작정한 안돈 족속의 후손이었다. “아마돈 족속”은 종족을 가리키는 용어라기보다 문화 종교적 명칭이다. 종족 면에서 볼 때, 아마돈 족속은 본질적으로 안돈 족속이었다. “놋 족속”은 문화와 종족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놋 족속 자체가 유란시아의 여덟째 종족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73:1.4 (822.1) 놋 족속과 아마돈 족속 사이에는 전통적 적대 관계가 존재했다. 이 싸움은 이 두 집단의 자손이 어떤 공동 사업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항상 표면에 나타났다. 나중에도 에덴 동산의 사무에서, 그들이 평화롭게 함께 일하기는 대단히 힘들었다.
73:1.5 (822.2) 달라마시아가 멸망한 뒤에 얼마 안 되어, 놋의 추종자들은 세 주요 집단으로 갈라졌다. 중앙 집단은 페르시아 만 상류 가까이에 그들 최초의 집, 바로 근처에 남아 있었다. 동쪽 집단은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바로 동쪽에 엘람의 고지(高地) 지역으로 옮겨 갔다. 서쪽 집단은 지중해에 시리아의 동북 바닷가에서, 그리고 인접한 영토에서 자리를 잡았다.
73:1.6 (822.3) 이 놋 족속은 산긱 종족들과 자유롭게 짝을 짓고 유능한 후손을 남겼다. 그리고 모반한 달라마시아 사람들 후손 중에 더러는 나중에 메소포타미아 북쪽의 땅에서 반과 그의 충성스러운 추종자들과 합쳤다. 여기서, 반 호수와 카스피 바다 남쪽 지역 근처에서, 놋 족속은 아마돈 족속과 섞이고 사귀었으며, 그들은 “옛날의 강한 사람들” 축에 끼었다.
73:1.7 (822.4) 아담과 이브가 도착하기 전에 이 무리―놋 족속과 아마돈 족속―들은 땅에서 가장 진보하고 문화가 발달한 민족이었다.
73:2.1 (822.5) 타바만시아의 검열이 있기 전에 거의 1백 년 동안, 반과 그 동료들은, 고지에 있던 본부, 세계의 윤리ㆍ문화의 본부로부터, 약속된 하나님의 아들, 곧 종족 개량자,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 반역한 칼리가스티아의 뒤를 이을 자격 있는 후계자가 오리라 외치고 있었다. 그 시절에 세계 거주자의 대다수는 그러한 예언에 거의 또는 아무런 흥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반과 아마돈과 가까이 접촉을 가졌던 사람들은 그러한 가르침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약속된 아들을 실제로 영접하려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73:2.2 (822.6) 반은 가장 가까운 동료들에게 예루셈에 있는 물질 아들들의 이야기, 일찍이 유란시아에 오기 전에 그 아들들에 관하여 알고 있던 것을 일러주었다. 수수하지만 매력 있는 동산의 집에서 이 아담 아들들이 늘 살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았고, 아담과 이브가 도착하기 83년 전에, 그들이 오리라 선포하고 그들을 영접하기 위하여 동산 집을 준비하는 일에 헌신할 것을 제안했다.
73:2.3 (822.7) 그들의 고지 본부로부터, 또 멀리 흩어져 있는 61개 촌락으로부터, 반과 아마돈은 기꺼이 일하고 싶은 열심 있는 노동자 무리를 3천 명이 넘게 모집했고, 이들은 엄숙한 집회에서, 약속된―적어도 기대하던―아들을 위하여 준비하는 이 사명에 헌신하였다.
73:2.4 (822.8) 반은 자원자들을 1백 중대(中隊)로 나누었고, 각 중대에는 중대장 하나, 그리고 자신의 개인 참모진에서 연락 장교로 일했던 부관을 한 명 두고, 아마돈을 자신의 부관으로 두었다. 이 위원회들은 모두 진지하게 준비 작업을 시작했고, 동산을 마련하는 장소 위원회는 이상적인 자리를 찾아서 힘차게 떠나갔다.
73:2.5 (822.9) 칼리가스티아와 달리가스티아는 나쁜 일을 하는 힘을 많이 빼앗겼어도, 동산을 준비하는 일을 좌절시키고 방해하려고, 할 수 있는 대로 무엇이든지 했다. 그러나 그들의 악한 음모는 그 사업을 진척시키려고 지칠 줄 모르고 노동한, 거의 1만 명의 충성스러운 중도인(中道人)이 성실하게 활동함으로 대체로 상쇄되었다.
73:3.1 (823.1) 장소 위원회는 거의 3년 동안 자리를 비웠다. 이 위원회는 가능한 세 장소에 관하여 적당하다고 보고했다. 첫째는 페르시아 만(灣)에 있는 섬이었고, 둘째는 나중에 둘째 동산으로서 차지했던, 강가의 자리였고, 셋째는, 지중해의 동쪽 해안으로부터 서쪽으로 튀어나온 길고도 좁은 반도(半島)였다―거의 섬이었다.
73:3.2 (823.2) 그 위원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셋째 장소를 선호했다. 이 자리가 선택되었고, 이 지중해의 반도로, 생명나무를 포함하여 세계의 문화 본부를 옮기는 데 2년이 걸렸다. 반과 그 일행이 도착했을 때, 반도에서 거주하던 자들 중에서 한 집단만 빼고 모두가 싸우지 않고 자리를 비웠다.
73:3.3 (823.3) 이 지중해의 반도는 상쾌한 기후를 가졌고 기온이 따듯했다. 이 안정된 날씨는 둘러싼 여러 산 때문에, 그리고 이 지역이 내륙의 바다에서 실질적으로 섬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둘러싼 고지(高地)에서 비가 풍부하게 쏟아졌지만, 에덴 자체에는 비가 내리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밤마다 인공으로 관개하는 광범위한 수로(水路)의 망으로부터 “안개가 올라와서” 동산의 식물을 적셔 주었다.
73:3.4 (823.4) 이 땅 덩어리의 해안선은 상당히 높이 올라와 있었고, 본토와 연결하는 목은 가장 좁은 곳의 폭이 겨우 43킬로미터였다. 동산에 물을 대는 큰 강은 반도의 고지로부터 내려와서, 본토에 이르는 반도의 목을 거쳐서 동쪽으로, 그리고 거기서부터 메소포타미아의 낮은 땅을 거쳐서 그 너머에 바다로 흘러갔다. 그 강은 에덴 반도의 바닷가의 산에서 기원을 가진 네 개의 지류(支流)로부터 물을 받았는데, 이것들이 “에덴에서 나간” 강의 “네 수원(水源)”이며, 이것은 나중에 둘째 동산을 둘러싸는 강들의 지류와 혼동되었다.
73:3.5 (823.5) 동산을 둘러싸는 여러 산에는 귀중한 돌과 금속이 많았다. 하지만 이것들은 별로 주목을 받지 않았다. 지배적인 생각은 원예를 높이고 농업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73:3.6 (823.6) 동산으로 선택된 장소는 아마도 온 세상에서 그 종류로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였고, 기후는 당시에 이상적이었다. 다른 어디에도 그렇게 식물(植物)로 천국을 표현한 곳이 되도록 아주 완전히 적합한 장소가 없었다. 이 장소에서 유란시아 문명의 노른자가 모이고 있었다. 바깥에, 건너편에, 세상은 어두움과 무지와 야만 속에 놓여 있었다. 에덴은 유란시아에서 하나의 밝은 장소였고, 자연히 사랑받는 꿈 같은 곳이었으며, 곧 아름답고 완전해진 경치의 영화로움을 표현하는 시(詩)같은 곳이 되었다.
73:4.1 (823.7) 생물학적 개량자인 물질 아들들이 한 진화 세계에서 머무르기 시작할 때, 그들의 거처를 흔히 에덴 동산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별자리의 서울 에덴시아의 특징, 꽃이 아름답게 피고 식물이 화려한 특징을 가지기 때문이다. 반은 이 관습을 잘 알았고, 따라서 반도(半島) 전체를 동산에 넘겨주도록 주선했다. 인접한 본토를 위하여 목장과 동물 사육이 계획되었다. 동물 생명 가운데 새와 다채로운 길들인 종자들만 공원에서 보였다. 반의 지시는 에덴이 동산, 오로지 동산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구역 안에서는 결코 아무 동물도 죽이지 않았다. 건축하는 여러 해 동안 내내, 동산의 일꾼들이 먹는 고기는 다, 본토에서 지키고 유지하는 동물의 떼로부터 가져왔다.
73:4.2 (824.1) 첫 과제는 반도의 목 부분에, 가로질러서 벽돌 담을 세우는 일이었다. 이것이 일단 끝나자, 경치를 아름답게 만들고 집을 짓는 진짜 일을 방해받지 않고 진행할 수 있었다.
73:4.3 (824.2) 동물이 있는 동산은 큰 담 바로 바깥에, 그보다 작은 담을 쌓아서 만들었다. 그 사이의 공간은 온갖 종류의 들짐승이 차지했고,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 추가된 방어로 쓰였다. 이 동물원은 12 대부문으로 조직되었고, 담으로 둘러싸인 길은 이 여러 집단 사이로부터 동산의 12 대문(大門), 강, 그리고 중앙 지역을 차지하는, 강에 인접한 목초지로 인도했다.
73:4.4 (824.3) 동산을 준비하는 일에 오직 자원하는 노동자만 사용되었다. 임금(賃金)을 받는 노동자는 하나도 결코 쓰이지 않았다. 그들은 동산을 가꾸고, 자신을 부양하기 위하여 동물의 떼를 돌보았다. 가까이 있는 신자(信者)들로부터 식량의 기부도 받았다. 이 어수선한 시절에, 세상의 혼란 상태에 따르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는데도, 이 큰 사업은 마치기까지 계속되었다.
73:4.5 (824.4) 그러나 기대하던 아들과 딸이 얼마나 빨리 올지 모르고, 그들의 도착이 늦어질 경우에 젊은 세대도 또한 그 사업을 계속하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반이 넌지시 비쳤을 때, 이것은 큰 실망의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반의 편에서 믿음이 모자람을 인정하는 듯했으며, 어지간히 문제를 일으키고 많은 탈주자가 생기게 만들었다. 그러나 반은 준비하는 계획을 수행하였고, 그동안에 탈주자들의 자리를 더 젊은 자원자로 채웠다.
73:5.1 (824.5) 에덴 반도 한가운데, 돌로 만든 우주의 아버지의 아름다운 성전, 동산의 성소(聖所)가 있었다. 북쪽에는 행정 본부가 세워졌고, 남쪽에는 일꾼과 그 가족들을 위하여 집들이 건축되었다. 서쪽에는 제안된 대로 기대하는 아들의 교육 체계의 학교들을 위하여 땅이 할당되었고, 한편 “에덴의 동쪽”에는 약속된 아들과 그 직계 후손을 위하여 예정된 거처가 세워졌다. 에덴을 건축하는 계획은 인간 1백만 명을 위하여 집과 넓은 땅을 마련해 놓았다.
73:5.2 (824.6) 아담이 도착했을 때, 동산이 겨우 4분의 1이 끝났어도, 거기에는 몇천 킬로미터나 되는 관개하는 도랑과 19,000킬로미터가 넘는 포장된 보도(步道)와 도로가 있었다. 여러 구역에 5천동(棟)이 조금 넘는 벽돌 건물이 있었고, 나무와 식물은 거의 셀 수 없이 많았다. 공원(公園)에 있는 어느 주택 집단이라도 집의 수는 기껏해야 일곱이었다. 그리고 동산의 구조물은 수수했어도, 무척 예술적이었다. 도로와 작은 길은 잘 지어졌고, 주위 풍경은 아름답게 꾸며졌다.
73:5.3 (824.7) 동산의 위생 시설은 그때까지 유란시아에서 시도한 어떤 것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에덴의 마실 물은 정결함을 보존하려고 고안된 위생 규칙을 엄격하게 지킴으로 건강에 좋게 유지되었다. 이 옛 시절에 많은 문제가 이 규칙을 소홀히 하여 생겨났지만, 반은 동산의 수원(水源)에 아무것도 떨어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함을 동료들에게 차츰차츰 강조하였다.
73:5.4 (825.1) 하수도를 처리하는 체계가 나중에 세워지기 전에 에덴 사람들은 모든 쓰레기나 썩는 물질을 꼼꼼히 파묻는 관습을 지켰다. 아마돈의 검열자들은 날마다 질병의 있음직한 원인을 찾느라고 순찰했다. 유란시아인은 후일에 19세기와 20세기까지, 다시는 인간의 병을 방지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지 못했다. 아담의 체제가 무너지기 전에, 땅에 파묻은 벽돌 파이프로 하수(下水) 처리 체계가 건설되었고, 이것은 담 밑으로 이어져서, 동산의 바깥 담, 곧 작은 담을 거의 1.6킬로미터 지나서, 에덴의 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73:5.5 (825.2) 아담이 도착할 때가 되기까지, 세상에서 그 구역에 있는 식물의 대부분은 에덴에서 자라고 있었다. 많은 과실ㆍ곡식ㆍ견과가 이미 크게 개량되었다. 현대의 뭇 채소와 곡식이 여기서 처음 재배되었지만, 몇십 종류의 먹는 식물(植物)이 나중에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73:5.6 (825.3) 동산의 약 5퍼센트는 고도의 인조(人造) 재배 기술로 경작하였고, 15퍼센트는 일부 경작되었으며, 나머지는 아담이 도착할 때까지 얼마큼 자연 상태로 놓아두었는데, 그의 생각에 따라서 공원을 완성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73:5.7 (825.4) 그래서 에덴 동산은 약속된 아담과 그 배우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그리고 이 동산은 완전하게 관리되고 정상으로 통제받는 가운데 한 세계에 큰 영예가 되었을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의 일반 계획을 아주 기뻐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의 거처를 꾸미는 일에 많이 손을 보았다.
73:5.8 (825.5) 아담이 도착했을 때 치장 작업은 도저히 끝났다고 할 수 없어도, 그 곳은 이미 아름답게 식물로 장식되어 보석과 같았다. 아담이 에덴에서 머무르던 옛 시절에 동산 전체가 새로운 모습을 입었고, 새 규모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갖추었다. 이 시절 이전이나 이후에 결코 유란시아는 그렇게 원예와 농업을 아름답고 충만하게 펼쳐 보인 적이 없었다.
73:6.1 (825.6) 동산의 성전 가운데에 반은 오랫동안 지켜 오던 생명나무를 심었고, 그 이파리는 “민족들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 과일은 반이 그렇게 오랫동안 땅에서 버티게 해주었다. 일단 유란시아에서 물질 형태를 입고 나타난 뒤에, 아담과 이브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 에덴시아의 선물에 의존할 것을 반은 잘 알았다.
73:6.2 (825.7) 체계 서울에 있는 물질 아들들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생명나무가 필요하지 않다. 오직 행성에서 다시 인격화되었을 때, 그들은 육체가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첨가물에 의존한다.
73:6.3 (825.8)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비유적 표현, 잡다한 인간의 체험을 가리키는 상징적 이름일지 모르지만, “생명나무”는 신화(神話)가 아니었다. 생명나무는 실재하였고, 오랫동안 유란시아에 있었다.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이 칼리가스티아를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로, 또 예루셈 시민 1백 명을 그의 행정 참모진으로 임명하는 것을 인가했을 때, 멜기세덱들 편에 에덴시아의 한 떨기나무를 행성으로 보냈고, 이 식물은 유란시아에서 자라서 생명나무가 되었다. 이 형태의 지능 없는 생명은 별자리 본부 구체의 토산물이며, 하보나 구체들 뿐 아니라 지역 우주와 초우주의 본부 세계에서 또한 발견되지만, 체계의 서울에는 없다.
73:6.4 (826.1) 이 초월 식물은 동물 존재에서 나이를 먹게 하는 요소를 해독(害毒)하는 어떤 공간 에너지를 저장했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비화학 방법으로 에너지를 저장하는 전지(電池)와 같았고, 먹었을 때 우주에서 생명을 늘이는 힘을 신비하게 방출하였다. 이 형태의 자양분은 유란시아에 있는 보통의 진화 존재에게 온전히 쓸모 없었지만, 특별히 칼리가스티아 참모진의 물질화된 구성원 1백 명, 그리고 영주 참모진에게 생명질을 기여한 수정된 안돈 족속 1백 명에게 쓸모가 있었다. 이 안돈 족속도 그 대가로 그 생명 보충물을 소유하게 되었고, 이것은 달리 죽어야 할 존재를 무기한으로 더 살게 하기 위하여 생명나무의 과일을 이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73:6.5 (826.2) 영주가 다스리던 시절에 그 나무는 아버지의 성전에, 가운데 있는 둥그런 뜰에서, 땅에서 솟아나 자라고 있었다. 반란이 터지고 나서, 반과 그 동료들은 임시 캠프에서 그 나무를 가운데 핵심으로부터 다시 길렀다. 이 에덴시아 떨기나무를 나중에 그들의 고지 피난처로 가져갔고, 거기서 그 나무는 반과 아마돈에게 15만 년이 넘도록 쓰였다.
73:6.6 (826.3) 반과 그 동료들은 아담과 이브를 위해서 동산을 준비했을 때 에덴시아의 나무를 에덴 동산으로 옮겨 심었으며, 거기서 다시 한 번 그 나무는 아버지를 예배하는 또 다른 성전의 가운데에, 둥그런 뜰에서 자랐다.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이중 형태의 육체 생명을 유지하려고 그 열매를 정기적으로 먹었다.
73:6.7 (826.4) 물질 아들의 계획이 빗나갔을 때, 아담과 그의 가족은 그 나무의 핵심을 동산에서 가지고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놋 족속이 에덴을 쳐들어갔을 때, “그들이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신들과 같이” 되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주 놀랍게도 그들은 아무도 그 나무를 지키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몇년 동안 그 과일을 아낌없이 먹었지만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그들이 모두 그 땅의 물질 필사자였기 때문이다. 그 나무 열매의 보충물 노릇을 하는 성분이 그들에게 모자랐다. 그들은 생명나무로부터 혜택을 얻을 수 없어서 성이 났고, 그들의 한 내란과 연관되어, 성전과 나무는 모두 불에 타버렸다. 동산이 나중에 물에 잠길 때까지 오로지 돌담만 남아 있었다. 이것이 두 번째로 파괴된, 아버지의 성전이었다.
73:6.8 (826.5) 이제 유란시아에서 모든 육체는 살다가 죽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아담과 이브, 그 자녀와 손자들은 동료들과 함께, 시간이 지나자 모두 죽었다. 따라서 그들은 지역 우주의 승천 계획에 지배를 받았고, 그 계획에는 육체가 죽고 나서 저택 세계의 부활이 뒤따른다.
73:7.1 (826.6) 아담이 첫째 동산을 비우고 난 뒤에, 다양하게 놋 족속, 큣 족속, 순트 족속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나중에 동산은 아담 족속과 협조하는 것을 반대한 북쪽 놋 족속의 거처가 되었다. 아담이 동산을 떠난 뒤에, 그 반도(半島)에는 거의 4천 년 동안 이 낮은 등급의 놋 족속이 들끓었다. 이때 둘러싼 화산들의 맹렬한 활동과 시실리를 아프리카로 잇는 육지 다리가 가라앉는 것과 관련하여, 지중해의 동쪽 바닥이 무너졌고, 에덴 반도 전체를 바다 밑으로 끌고 갔다. 이 광범위한 침몰과 동시에 동부 지중해의 해안선이 크게 높아졌다. 이것이 유란시아가 일찍이 품에 간직했던 가장 아름다운, 자연의 창작품의 마지막이었다. 이 침몰은 갑작스럽지 않았고, 반도 전체가 완전히 가라앉기까지 몇백 년이 걸렸다.
73:7.2 (827.1) 우리는 동산이 이렇게 사라진 것을 어떤 면에서도 신성한 계획이 유산(流産)된 결과라거나 아담과 이브가 실수한 결과라고 여길 수 없다. 우리는 에덴이 가라앉은 것을 자연 현상이 아닌 어떤 다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세계 민족들을 회복하는 일에 착수하기 위하여 보라 인종의 비축 인구가 축적되었을 바로 그 무렵에 맞추어서, 에덴이 가라앉는 일이 생긴 듯이 보인다.
73:7.3 (827.2) 멜기세덱들은 아담에게, 그 자신의 가족이 50만이 될 때까지, 종족을 개량하고 혼합하는 순서를 개시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동산이 결코 아담 족속의 영구한 집이 되라고 의도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온 세상에 새 생명의 밀사(密使)가 되도록 정해져 있었다. 땅에서 곤궁한 종족들에게 사심 없이 수여되기 위해서 동원될 예정이었다.
73:7.4 (827.3) 멜기세덱들이 아담에게 준 지침은, 그의 직계 아들딸을 책임질 종족 본부, 대륙 본부, 분과 본부들을 세워야 하며, 한편 그와 이브는 생물학적 개량, 지적 진보, 도덕의 회복, 이러한 세계적 직책을 맡는 고문이자 조정자로서, 세상의 이 다양한 수도(首都)들 사이에서 시간을 나누어 써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74:0.1 (828.1) 아담과 이브는 서기 1934년부터 따져서 37,848년 전에 유란시아에 도착했다. 그들은 봄이 무르익어 동산에 꽃이 한창 피었을 때 도착했다. 정오에 발표도 없이, 두 천사 수송기가 유란시아로 생물학적 개량자들을 나르는 일을 맡은 예루셈 직원들을 동반하고, 우주의 아버지 성전 근처에서, 회전하는 행성의 표면에 천천히 내렸다. 아담과 이브의 몸을 다시 물질로 만드는 모든 작업은 새로 지은 이 성소의 구역 안에서 이루어졌다. 도착한 때부터, 그 세계의 새 통치자로서 등장하기 위해서 두 가지 인간 형태로 그들이 다시 지어지기까지 열흘이 지났다. 그들은 동시에 의식을 다시 찾았다. 물질 아들과 딸은 반드시 함께 봉사한다. 항상 어디서나 결코 떨어지지 않는 것이 그들이 베푸는 봉사의 본질이다. 그들은 쌍을 이루어 일하라고 고안되어 있고, 홀로 활동하는 일은 드물다.
74:1.1 (828.2) 행성 유란시아에 온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에서 선임 물질 아들 집단의 단원이었고, 함께 14,311번이었다. 그들은 셋째 육체 시리즈에 속했고, 키는 240센티미터가 조금 넘었다.
74:1.2 (828.3) 유란시아로 오려고 뽑혔을 때, 아담은 배우자와 함께 실험하고 시험하는, 예루셈의 물리 실험실에 고용되어 있었다. 1만 5천 년이 넘도록 그들은 살아 있는 형태의 수정(修正)에 적용되는 실험 에너지 부문에서 지도자였다. 이보다 훨씬 전에 그들은 예루셈에서 새로 도착한 자들을 위한 여러 시민 학교에서 선생이었다. 그들이 유란시아에서 나중에 한 행위의 이야기와 관련하여,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74:1.3 (828.4) 유란시아에서 아담으로서 모험하는 사명에 자원자를 모집한다는 선포가 발표되었을 때, 선임 집단의 물질 아들과 딸 전부가 자원하였다. 멜기세덱 검사자들은, 라나포지와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의 승인을 얻어, 나중에 유란시아의 생물학적 개량자로서 활동하게 된 아담과 이브를 마침내 선택했다.
74:1.4 (828.5) 아담과 이브는 루시퍼 반란이 있을 때 미가엘에게 끝까지 충성했다. 그런데도 그 쌍은 체계 군주와 그의 내각(內閣) 앞에서 검사와 지시를 받기 위하여 호출되었다. 유란시아에서 있었던 일의 자세한 내용을 담은 충분한 발표를 들었고, 그들은 싸움으로 분열된 그런 세계에서 다스리는 책임을 받아들이면서 어떤 계획을 추구할 것인가 샅샅이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은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에게, 그리고 구원자별의 미가엘에게 충성한다는 합동 서약을 마쳤다. 그리고 유란시아의 멜기세덱 관리자 집단이 그들이 배치받은 세계의 통치를 포기하는 것이 좋다고 여길 때까지, 자신들이 그 통치 단체의 지배 하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라고 그들은 마땅히 충고를 받았다.
74:1.5 (829.1) 이 예루셈 쌍은 사타니아의 서울과 다른 곳에 자손 1백 명―아들 50명과 딸 50명―을 남겨 두었는데, 이 아이들은 전진의 함정을 피한 훌륭한 사람들이었고, 부모가 유란시아를 향하여 떠날 때, 우주의 책임을 맡은 충성스러운 관리자로서 모두 임명되었다. 수여를 받아들이는 마지막 예식과 관련된 작별 실습이 있고 나서 그들 모두가 물질 아들들의 아름다운 성전에 참석하였다. 이 아이들은 그들 계급의 비물질화 본부까지 부모를 따라갔고, 부모가 천사의 수송을 위한 준비에 앞서 성격이 의식을 잃고서 잠들었을 때,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작별을 알리고 성공을 빈 자였다. 아이들은 부모가, 사타니아 체계의 606번 행성에서, 눈에 보이는 우두머리, 실제로는 유일한 통치자 쌍이 곧 되리라는 것을 기뻐하면서, 가족이 회합한 가운데 얼마큼 함께 시간을 보냈다.
74:1.6 (829.2) 이렇게 아담과 이브는 시민들이 환호하고 성공을 비는 가운데, 예루셈을 떠났다. 그들은 유란시아에서 부닥칠 모든 임무와 위험에 관하여, 적절히 준비를 갖추고 충분히 가르침을 받고서, 새로운 직책이 기다리는 곳으로 떠나갔다.
74:2.1 (829.3)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에서 잠에 빠졌다. 유란시아에서 그들을 환영하느라고 모인 막대한 군중이 모여 있는 앞에서 아버지의 성전에서 깨어났을 때, 그들은 익히 소문을 들어 왔던 두 존재, 반과 그의 충성스러운 동료 아마돈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칼리가스티아가 이탈할 당시에 있었던 이 두 영웅이, 새 동산 집에서 그들을 처음으로 반갑게 맞이한 자였다.
74:2.2 (829.4) 에덴의 말은 아마돈이 사용했던, 안돈 족속의 방언(方言)이었다. 반과 아마돈은 24 글자로 된 새 알파벳을 만들어서 이 언어를 두드러지게 개량했고, 그들은 에덴의 문화가 세상에 두루 퍼짐에 따라서 그 말이 유란시아의 언어가 되는 것을 보기를 바랐다. 아담과 이브가 예루셈을 떠나기 전에 이 인간의 방언을 충분히 통달했기 때문에, 이 안돈의 아들은 세상을 다스리는 높은 통치자가 그에게 자기 방언으로 말을 거는 것을 들었다.
74:2.3 (829.5) “새들을 놓아 주어라. 약속된 아들이 오셨다는 말씀을 새들이 전하게 할지어다”하고 외치면서, 멀리서 가까이서 모여든, 소식 나르는 비둘기의 회합 장소까지 주자(走者)들이 황급히 달려갔을 때, 그날 온 에덴이 크게 흥분하고 즐거워하였다. 신자들의 수백 촌락이 충실하게, 해마다, 바로 그런 경사를 위하여 집에서 기른 이 비둘기들을 계속 공급하였다.
74:2.4 (829.6) 아담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바깥에 퍼지자, 근처에 있는 부족 사람 수천 명이 반과 아마돈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한편 여러 달 동안 순례자들이 아담과 이브를 환영하고, 보이지 않는 아버지께 경배를 드리려고 에덴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74:2.5 (829.7) 깨어난 뒤에 곧, 아담과 이브는 성전 북쪽의 큰 언덕에서 열린 정식 환영회까지 호위를 받았다. 자연히 생긴 이 언덕은 세상의 새 통치자들이 취임하는 것을 위하여 미리 확장되고 준비되었다. 여기서 정오에 유란시아 접대 위원회는 사타니아 체계의 이 아들과 딸을 환영했다. 아마돈은 이 위원회의 의장(議長)이었고, 그 위원회는 여섯 산긱 종족으로부터 각자 대표 한 사람씩, 중도자의 임시 우두머리, 충성스러운 딸이자 놋 족속의 대변인 아난, 동산의 설계자이자 건축자의 아들이며 돌아가신 아버지의 계획의 집행자였던 노아, 그리고 거주하는 두 생명 운반자를 넣어서 12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었다.
74:2.6 (830.1) 다음 행위는 유란시아 관리자 회의(會議)의 우두머리인 선임 멜기세덱이 행성 관리 책임을 아담과 이브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물질 아들과 딸은 놀라시아덱의 최고자들에게, 그리고 네바돈의 미가엘에게 충성을 서약했고, 반은 그들이 유란시아의 통치자라고 선포했다. 이렇게 함으로 반은 멜기세덱 관리자들의 행위의 덕분으로 15만 년이 넘도록 지녔던 직함에 따른 권한을 포기하였다.
74:2.7 (830.2) 아담과 이브는 이 기회에, 정식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자리에 취임하는 이때, 임금다운 예복을 걸쳤다. 달라마시아의 예술이 모두 세상에서 사라지지는 않았다. 직물 짜기는 에덴 시절에 아직도 유행하고 있었다.
74:2.8 (830.3) 그리고 나서 천사장들의 선포가 들렸고, 가브리엘의 방송하는 목소리가 사타니아의 606번 행성에서, 유란시아의 둘째 심판 점호, 그리고 은혜와 자비를 베푸는 제2 섭리 시대에, 잠자고 있던 생존자들이 부활(復活)될 것을 선포하였다. 영주의 섭리 시대는 지나갔고, 아담 시대, 곧 행성의 제3 시대가 소박하지만 위엄 있는 광경 속에 열린다. 그리고 그 행성에서 권한을 가졌던 전임자의 협조가 부족해서 세계적 혼란이 있었는데도, 유란시아의 새 통치자들은 유리하게 보이는 조건 하에서 통치를 시작한다.
74:3.1 (830.4) 이제, 정식으로 취임하고 난 뒤에,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행성이 고립된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귀에 익었던 방송은 조용했고, 행성 바깥과 통신하는 회로가 전혀 없었다. 예루셈에 있던 동료들은 자리가 안정된 행성 영주와 경험 있는 참모진, 그러한 세계에서 초기에 체험을 겪는 동안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고 그들과 협동할 유능한 참모진이 있는, 순조롭게 운영되는 세계들로 가버렸다. 그러나 유란시아에는 반란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행성 영주는 상당히 활발했고, 악한 일을 저지를 힘의 대부분을 빼앗겼지만 아직도 아담과 이브의 과제를 어렵게, 그리고 어느 정도 위험스럽게 만들 수 있었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꿈에서 깨어난 예루셈의 아들과 딸은 그날 밤 보름달이 비치는 아래서 동산을 통해서 거닐면서 다음 날의 계획을 이야기하였다.
74:3.2 (830.5) 고립된 유란시아에서, 칼리가스티아의 배반이 있었던, 혼란에 빠진 행성에서 아담과 이브의 첫날이 이렇게 끝났다. 그들은 땅에서 지내는 첫날 밤에, 밤이 깊기까지 걷고 이야기했다―그리고 너무나 쓸쓸했다.
74:3.3 (830.6) 땅에서 아담이 지낸 둘째 날은 행성 관리자들과 자문 위원회와 함께 회의를 가지면서 보냈다. 여러 멜기세덱과 그 동료들로부터, 아담과 이브는 칼리가스티아 반란의 세부, 그리고 그 동란이 세상의 진보에 미친 결과에 대하여 더 이야기를 들었다. 대체로 가슴 아프게 하는 이야기, 세상사를 잘못 처리한 것에 관한 이러한 긴 이야기였다. 그들은 사회의 진화 과정을 가속하려던 칼리가스티아의 계획이 완전히 물거품이 된 것에 관하여, 있는 사실을 모두 들었다. 또한 신의 진보 계획과 따로 행성의 진보를 이룩하려고 애쓰는 것이 어리석음을 충분히 깨닫게 되었다. 슬프지만 정신을 일깨워 주는 날―유란시아에서 둘째 날―이 이렇게 저물었다.
74:3.4 (831.1) 셋째 날은 동산의 검열에 쓰였다. 사람을 태우는 큰 새―판도르―를 타고 아담과 이브는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 장소 위에서, 공중에서 나르는 동안에, 동산의 광대한 지대를 내려다보았다. 에덴의 아름다움과 위엄을 가진 이 동산을 만들려고 수고한 모든 사람에게 명예를 돌리기 위하여 풍성한 잔치를 치르면서, 이 검열하는 날이 끝났다. 또 다시, 셋째 날 밤이 늦도록, 그 아들과 배우자는 동산에서 거닐고 그들이 닥친 문제가 얼마나 방대한가 이야기했다.
74:3.5 (831.2) 넷째 날에 아담과 이브는 동산 집회에서 연설했다. 취임식을 거행한 산으로부터, 사람들에게 세계를 회복하려는 그들의 계획에 관하여 말했고, 죄와 반란의 결과로서 유란시아가 굴러 떨어진 낮은 수준으로부터 그 사회 문화를 구제하려고 추구할 여러 방법의 윤곽을 설명했다. 이날은 대단한 날이었고, 세상사를 운영할 새 행정부에서 책임을 맡으려고 뽑힌 남녀의 회의를 위한 잔치로 끝을 맺었다. 주목하라! 남자 뿐 아니라 여자들도 이 무리 속에 있었고, 달라마시아 시절 이후로 땅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브가, 한 여자가, 남자와 함께 세상사의 명예와 책임을 나누는 것을 바라보다니, 놀라운 개혁이었다. 이렇게 땅에서 넷째 날이 끝났다.
74:3.6 (831.3) 다섯째 날은 임시 정부의 조직에 쓰였고, 이것은 멜기세덱 관리자들이 유란시아를 떠날 때까지 앞으로 활동할 행정부였다.
74:3.7 (831.4) 여섯째 날은 수많은 종류의 사람과 동물을 검열하는 데 쓰였다. 에덴에서 동쪽으로 담을 따라서, 아담과 이브는 하루 종일 호송을 받으면서 행성의 동물 생명을 보았고, 그러한 여러 종류의 생물이 거하는 세계의 혼란 속에서 질서를 찾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더 많이 이해하였다.
74:3.8 (831.5) 보여준 수천 가지 동물의 성질과 활동을 얼마나 자세히 아담이 이해하는가 지켜본 것은 이 여행에서 그를 따라간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 한 동물을 한 번 보는 순간, 그는 동물의 성품과 행동을 지적하곤 했다. 아담은 한 번 보고, 모든 물질 생물의 기원과 성품과 활동을 묘사하는 이름을 줄 수 있었다. 이 검열 여행에서 그를 안내한 사람들은 세상의 새 통치자가, 온 사타니아에서 가장 노련한 해부학자 중의 하나인 것을 몰랐다. 이브는 똑같이 능숙했다. 아담은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너무 작은, 살아 있는 것들의 집단을 설명함으로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
74:3.9 (831.6) 땅에서 머무른 여섯째 날이 저물었을 때, 아담과 이브는 “에덴의 동쪽”에, 그들의 새 집에서 처음으로 쉬었다. 유란시아 모험을 하는 동안 처음 엿새는 아주 바빴고, 그들은 아주 기쁜 마음으로, 모든 활동을 그만두고 하루 종일 쉴 것을 기대하였다.
74:3.10 (831.7) 그러나 상황은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아담이 유란시아의 동물 생명을 아주 총명하게, 아주 샅샅이 논했던, 막 지나버린 그날의 체험은, 능숙한 취임 연설과 매력 있는 몸가짐과 더불어, 동산 거주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 지능을 너무 압도했기 때문에, 그들은 새로 도착한 예루셈의 아들과 딸을 통치자로 진심으로 받아들이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대다수는 엎드려 그들을 신으로서 예배할 준비가 거의 되어 있었다.
74:4.1 (832.1) 그날 밤, 여섯째 날 밤에, 아담과 이브가 잠자는 동안, 에덴의 중앙 구역, 아버지의 성전 근처에서 야릇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거기서 부드러운 달빛 아래, 열심 있고 흥분한 남자와 여자 몇백 명이 자기네 지도자들의 탄원, 정열에 넘치는 탄원을 몇 시간 동안 들었다. 그들은 좋은 뜻을 가졌지만, 새 통치자들이 어째서 단순히 친근한 민주적 방법을 쓰는가 단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날이 밝기 훨씬 전에, 세상사를 새로 맡는 임시 행정자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아담과 그의 짝은 전적으로 너무나 겸손하며 티를 내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神)이 육체의 모습을 입고 내려왔고, 아담과 이브는 실제로 신이거나, 아니면 경건한 숭배를 받아 마땅한 상태에 아주 가깝다고 결정했다.
74:4.2 (832.2) 아담과 이브가 땅에서 보낸 처음 엿새 동안의 놀라운 사건들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에도, 준비되지 않은 머리에 아주 너무나 벅찼다. 그들의 머리는 빙글빙글 돌았다. 사람마다 존경심으로 숭배하는 태도로 절하고 겸손하게 복종하여 엎드릴 수 있도록, 그 고귀한 쌍을 정오에 아버지의 성전으로 모셔오자는 제안에 그들은 함께 휩쓸렸다. 그리고 동산 거주자들은 이 모든 일에 정말로 진지했다.
74:4.3 (832.3) 반은 항의했다. 아마돈은 밤 동안 아담과 이브와 함께, 뒤에 남은 명예 보초의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자리에 없었다. 그러나 반의 항의는 일축되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너무 겸손하고 너무 티를 내지 않는다고, 그리고 바로 그는 신에게서 멀지 않은데,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땅에서 그리 오래 살았는가, 그리고 아담이 오는 것과 같은 큰 사건을 그가 어떻게 일으켰는가? 하는 말을 들었다. 흥분한 에덴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서, 찬미하려고 산까지 메고 올라가려 했을 때, 반은 무리를 헤쳐 나가서, 중도자(中道者)들과 통신할 수 있으므로 중도자의 우두머리를 황급히 아담에게 보냈다.
74:4.4 (832.4) 좋은 뜻을 가졌지만 잘못 인도된 이 필사자들의 제안이 있었다고, 소스라치게 놀라운 소식을 아담과 이브가 들은 것은 땅에서 일곱째 날의 새벽이 가까운 때였다. 그리고 나서, 사람 태우는 새들이 재빨리 그들을 성전으로 데려오려고 날아가는 동안에도, 중도자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아담과 이브를 아버지의 성전으로 수송했다. 이 일곱째 날 아침 일찍부터, 그리고 바로 얼마 전에 그들을 영접하던 산에서, 아담은 신의 아들 계급에 관하여 설명하는 뜻으로 장황하게 이야기하고, 오로지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지명하는 자들만 숭배를 받아도 좋다고 이 땅의 사람들에게 뚜렷이 일러주었다. 아담은 그가 어떤 명예도, 그리고 어떤 존경도 받겠지만, 결코 숭배는 안 된다! 하고 알기 쉽게 설명했다.
74:4.5 (832.5) 그날은 중요한 날이었고, 한낮이 되기 바로 전, 세계 통치자들의 취임을 예루셈이 인정한다는 소식을 가져온 천사 사자(使者)가 도착했을 무렵, 아담과 이브는 군중을 떠나면서, 아버지의 성전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는 이제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계심의 물질적 상징이 있는 곳까지 가서, 우리 모두를 만들고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그분에게 경배하여 절하라. 그리고 이 행동으로 너희가 결코 다시 하나님 외에 아무도 경배할 유혹을 받지 않겠다고 성실하게 약속하라.” 그들은 다 아담이 지시하는 대로 했다. 사람들이 성전 근처에서 엎드려 있는 동안 물질 아들과 딸은 외로이 고개를 숙이고 산에서 서 있었다.
74:4.6 (832.6) 이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전통의 기원이었다. 언제나 에덴에서는 이 일곱째 날을 성전에서 한낮의 집회에 바쳤다. 오랫동안 이날을 자기 교양을 쌓는 데 바치는 것이 관습이었다. 오전은 육체의 개선에, 한낮은 영적 예배에, 오후는 지성의 교양에 바쳤고, 한편 저녁은 함께 모여서 기뻐하는 데 쓰였다. 이것은 한 번도 에덴에서 법이 되지 않았지만, 아담의 행정부가 땅에서 지배하는 한, 관습이었다.
74:5.1 (833.1) 멜기세덱 관리자들은 아담이 온 뒤에 거의 7년 동안 계속하여 근무하였으나, 그들이 세상 일의 행정을 아담에게 넘기고 예루셈으로 돌아갈 때가 마침내 다가왔다.
74:5.2 (833.2) 관리자들과 작별하는 데 하루 종일이 걸렸고, 저녁 때 멜기세덱들은 각자 아담과 이브에게 작별하면서 조언을 주고 성공을 빌었다. 아담은 여러 번 조언자들에게 땅에서 그와 함께 남아 있으라고 부탁했지만, 언제나 이 간청은 거절되었다. 물질 아들들이 세상사의 운영을 완전히 책임져야 할 때가 왔다. 그래서 사타니아의 천사 수송기들은 예루셈을 향하여 14 존재를 싣고 자정(子正)에 행성을 떠났고, 반과 아마돈의 이동은 멜기세덱 12명의 출발과 동시에 일어났다.
74:5.3 (833.3) 한동안 유란시아에서 모든 일이 순조로웠고, 아담이 궁극에 에덴의 문명을 차츰차츰 확장시키는 일을 촉진하려고 어떤 계획을 세울 수 있을 듯하였다. 그는 멜기세덱들의 조언을 따르려고, 바깥 세계와 무역 관계를 개발할 생각으로 공업 기술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에덴이 붕괴되었을 때, 1백개가 넘는 원시 제조 공장이 가동하고 있었고, 가까이 있는 부족들과 널리 무역 관계가 수립되었다.
74:5.4 (833.4) 오랜 세월 동안 아담과 이브는 진화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특화된 기여를 준비하려고 세상을 개선하는 기법을 전에 교육받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야만인ㆍ미개인, 그리고 반(半)문명화된 인간이 사는 세계에서, 법과 질서를 세우는 일과 같이 코앞에 닥친 문제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동산에 모여든, 지구(地球) 인구의 노른자를 제쳐놓고, 아담의 문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조금이라도 되어 있는 집단이 여기저기 겨우 몇이 있었다.
74:5.5 (833.5) 아담은 세계 정부를 세우려고 영웅답게 굳게 결심하여 노력을 기울였지만, 가는 곳마다 끈질긴 저항에 부딪쳤다. 아담은 이미 에덴에 두루, 집단 통제 체계를 작동시켰고, 이 여러 중대(中隊)를 모두 에덴 연맹으로 연합시켰다. 그러나 아담이 동산 바깥으로 나가서 이 개념을 바깥의 부족들에게 적용하려고 애썼을 때, 문제, 심각한 문제가 뒤따랐다. 아담의 동료들이 동산 바깥에서 일하기 시작한 순간, 칼리가스티아와 달리가스티아의 저항, 잘 계획된 저항에 직접 부딪쳤다. 몰락한 영주는 세계 통치자의 자리에서 쫓겨났지만, 행성에서 제거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땅에 있었고, 인간 사회를 회복하려는 아담의 모든 계획에 적어도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었다. 아담은 칼리가스티아에게 적대하여 그 종족들에게 경고하려고 애썼지만, 그의 대적(大敵)이 필사자의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일은 아주 어렵게 되었다.
74:5.6 (833.6) 에덴 사람들 사이에서도 전혀 제한 없는 개인의 자유를 부르짖는 칼리가스티아의 가르침에 빠진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아담에게 끝없이 문제를 일으켰다. 그들은 질서 있게 진보하고 착실한 발전을 위하여 최선으로 짜놓은 계획을 언제나 뒤집어엎었다. 마침내 아담은 이들과 즉시 교제하려는 계획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반이 조직하던 방법으로 되돌아갔으며, 에덴 사람들을 1백인씩 중대로 나누고 각 중대에는 중대장, 그리고 10명의 집단을 책임지는 부관들을 두었다.
74:5.7 (834.1) 아담과 이브는 군주 정치 대신에 대의(代議) 정치를 실시하려고 왔지만, 온 지구의 표면에서 자격 있는 정부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얼마 동안 아담은 대의 정치를 수립하려는 온갖 수고를 포기했고, 에덴의 체제가 무너지기 전에 그는 바깥에서 무역 및 사회 중심을 거의 1백 개 세우는 데 성공했으며, 거기에는 강력한 개인이 아담의 이름으로 다스렸다. 이전에 반과 아마돈이 이 중심들의 대부분을 조직한 적이 있었다.
74:5.8 (834.2) 한 부족이 다른 부족에게 대사를 보내는 것은 아담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정부의 진화에서 크게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이었다.
74:6.1 (834.3) 아담 가족의 집터는 12.8 평방 킬로미터가 조금 넘었다. 이 집터 바로 둘레에서, 30만 명이 넘는 순수 핏줄의 자손을 돌보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계획된 건물 가운데 오직 첫째 단위가 언젠가 완성되었을 뿐이다. 이 초기의 시설이 넘치도록 아담의 가족이 늘어나기 전에, 에덴 계획 전부가 물거품이 되었고 그들은 동산을 비웠다.
74:6.2 (834.4) 아담손은 유란시아에서 보라 인종의 맏아들이며, 그 누이와 이브손, 곧 아담과 이브가 낳은 둘째 아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멜기세덱들이 떠나기 전에, 이브는 다섯 아이―세 아들과 두 딸―의 어머니였다. 그 다음에 둘은 쌍둥이였다. 그들은 임무 불이행이 있기 전에, 아이 63명, 곧 딸 32명과 아들 31명을 낳았다. 아담과 이브가 동산을 떠났을 때, 그들의 가족은 4대로 이루어졌고, 순수 핏줄 후손은 1647명이 되었다. 그들이 동산을 떠난 뒤에, 땅에서 필사자의 핏줄과 공동으로 부모가 되어 낳은 자손 2명을 제쳐놓고, 아이들을 42명이나 거느렸다. 그리고 이것은 아담이 놋 족속과 진화 민족들에게 부모가 된 경우를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74:6.3 (834.5) 아담의 아이들은, 한 살이 되자 어머니의 젖을 뗄 때 동물의 젖을 먹지 않았다. 이브는 많은 종류의 견과의 즙과 많은 과일의 주스를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이러한 먹을 것의 화학 작용과 에너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가 생겨날 때까지 이브는 아이들에게 영양이 되도록 이것들을 알맞게 섞어 주었다.
74:6.4 (834.6) 에덴에서 아담의 구역 바로 바깥에는 불로 익혀 먹기가 널리 이용되었지만, 아담의 집에서는 익혀 먹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먹을 것―과일ㆍ견과ㆍ곡식―이 익었을 때 먹기에 적당한 것을 알았다. 그들은 하루에 한 번, 정오 뒤에 곧, 먹었다. 아담과 이브는 또한 생명나무의 혜택과 연결하여, 우주 방사물로부터 직접 “빛과 에너지”를 빨아들였다.
74:6.5 (834.7) 아담과 이브의 몸은 어렴풋한 빛을 발산했지만, 그들은 동료들의 관습을 좇아서 반드시 옷을 입었다. 낮에는 거의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어도, 저녁때는 두르는 밤옷을 걸쳤다. 경건하고 거룩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머리를 둘러싸는 전통적 후광(後光)의 기원은 아담과 이브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의 몸에서 방사되는 빛은 대체로 옷에 가려졌으니까, 머리에서 방출되는 빛만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담손의 후손은 특별히 영적으로 앞섰다고 생각된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개념을 언제나 이렇게 묘사했다.
74:6.6 (834.8) 아담과 이브는 약 8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에서 서로, 그리고 친자식들과 통신할 수 있었다. 이 생각 교환은 그들의 골 구조에 가까이 자리잡은 섬세한 가스 방을 이용함으로 이루어졌다. 이 작용으로 그들은 생각의 진동을 보내고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힘은 악의 불협화음과 교란에 생각이 굴복할 때, 순간적으로 정지되었다.
74:6.7 (835.1) 아담의 아이들은 16살이 될 때까지 학교를 다녔고, 나이든 아이들이 더 어린 아이들을 가르쳤다. 어린아이들은 30분마다, 큰 아이들은 시간마다 활동을 바꾸었다. 아담과 이브의 이 아이들이 노는 것, 순전히 재미있어서 즐겁고 신나는 활동에 빠져 있음을 지켜보는 것은, 유란시아에서 분명히 새로운 광경이었다. 오늘날 종족들의 놀이와 유머는 대체로 아담의 핏줄로부터 유래한다. 아담 족속은 모두 날카로운 유머 감각이 있었을 뿐 아니라 음악을 잘 이해했다.
74:6.8 (835.2) 약혼하는 평균 나이는 18살이었고, 그때 이 젊은이들은 결혼의 책임을 지는 준비로, 2년의 교육 과정에 들어갔다. 스무 살에 결혼할 자격이 있었고, 결혼한 뒤에 일생의 일을 시작하거나, 이를 위하여 특별한 준비에 들어갔다.
74:6.9 (835.3) 후일에 어떤 여러 나라에서, 신들로부터 내려왔다고 생각되는 왕족들의 형제와 자매가 결혼하는 관습은 아담 후손의 전통까지―그들이 서로 짝지을 수밖에 없으니까―거슬러 올라간다. 동산에서 첫째와 둘째 세대의 결혼 예식은 반드시 아담과 이브가 거행하였다.
74:7.1 (835.4) 아담의 아이들은 서쪽 학교에 4년 동안 다니는 것 외에 “에덴의 동쪽”에서 살고 일했다. 16살이 될 때까지, 예루셈 학교의 방법을 좇아서, 지적 훈련을 받았다. 16살부터 20살까지, 그들은 동산의 다른 끝에서 여러 유란시아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았고, 거기서 또한 낮은 학급에서 선생으로 봉사하였다.
74:7.2 (835.5) 동산의 서쪽 학교 체계의 목적은 온통 교제였다. 오전의 휴식 시간은 실용적 원예와 농업에, 오후 시간은 경쟁하는 놀이에 쓰였다. 저녁은 사회적으로 교제를 가지고 개인의 친교를 개발하는 데 이용되었다. 종교 및 성(性) 교육은 가정의 분야, 부모의 임무로 여겼다.
74:7.3 (835.6) 이 여러 학교에서 가르침은 다음에 관한 교육을 포함하였다:
74:7.5 (835.8) 2. 황금률, 사회 교제의 기준.
74:7.6 (835.9) 3. 개인의 권리와 집단의 권리의 관계,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의무.
74:7.7 (835.10) 4. 여러 지구 종족의 역사와 문화.
74:7.8 (835.11) 5. 세계 무역을 진보시키고 개선하는 방법.
74:7.11 (835.14) 학교는, 사실은 동산의 활동이, 모두 방문객에게 언제나 열려 있었다. 무기를 지니지 않은 관찰자는 잠시 방문할 경우에, 에덴에 자유로이 입장이 허락되었다. 한 유란시아인이 동산에서 머무르려면 “입양되어야” 했다. 그는 아담 수여의 계획과 목적에 관하여 교육을 받고, 이 사명을 지키겠다는 뜻을 알리고, 다음에 아담의 사회적 통치와 우주의 아버지의 영적 통치권에 충성함을 선언했다.
74:7.12 (836.1) 동산의 법은 예전의 달라마시아 율법에 기초를 두었고, 일곱 항목 아래에 선포되었다:
74:7.13 (836.2) 1. 건강 및 위생 법칙.
74:7.15 (836.4) 3. 무역과 상업의 법규.
74:7.16 (836.5) 4. 공정한 놀이 및 경쟁 법칙.
74:7.20 (836.9) 에덴의 도덕 법규는 달라마시아의 일곱 계명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아담 족속은 이 계명들을 지키는 여러 가지 추가된 이유를 가르쳤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는 금령(禁令)에 관하여, 생각 조절자가 깃드는 것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 추가 이유로 제시되었다. 그들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누구나 자기의 피를 흘려야 할지니, 하나님이 그의 모습대로 사람을 만드셨음이라”하고 가르쳤다.
74:7.21 (836.10) 에덴에서 대중(大衆) 예배 시간은 한낮이었고, 해질녘은 가족 예배 시간이었다. 아담은 판에 박힌 기도를 막으려고 최선을 다했고, 효과적 기도는 완전히 개인적이어야 한다, “혼이 바라는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에덴 사람들은 달라마시아 시절부터 내려온 그 기도와 형태를 계속해서 썼다. 아담은 또한 종교 의식에서 피 흘리는 희생물 대신에 땅의 열매를 바치는 것으로 바꾸려고 애썼지만, 동산이 무너지기 전에는 거의 진전이 없었다.
74:7.22 (836.11) 아담은 종족들에게 남녀 평등을 가르치려고 애썼다. 이브가 남편 옆에서 일하는 방식은 동산에 있는 모든 거주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여자는 새 존재를 만들기 위하여 연합하는 생명 요소를 남자와 똑같이 이바지한다고 아담은 분명히 가르쳤다. 그때까지 인류는 모든 출산이 “아버지의 허리”에서 거한다고 가정했다. 어머니를 기껏해야, 미처 태어나지 않은 것을 먹이고 갓난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시설로 바라보았다.
74:7.23 (836.12) 아담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쳤지만, 그것은 비교해 보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땅에 있는 종족들 가운데 영리한 편에 속하는 사람들은 보라 인종의 우수한 아이들과 서로 결혼할 허락을 받을 때를 열심히 기대했다. 종족을 개량하는 이 훌륭한 계획이 이루어졌더라면, 유란시아가 얼마나 다른 세계가 되었을 것인가! 실제 일어난 그대로도, 진화 민족들이 어쩌다가 확보한 이 소량의 수입(輸入)된 종족의 피로부터 엄청난 이득이 생겼다.
74:7.24 (836.13) 이처럼 아담은 그가 머무른 세계의 복지와 향상을 위해서 일했다. 그러나 이 섞인 잡종 민족들을 더 나은 길로 이끄는 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74:8.1 (836.14) 유란시아를 엿새 동안에 창조했다는 이야기는 아담과 이브가 동산을 처음 훑어보는 데 꼭 엿새를 보냈다는 전통에 근거를 두었다. 이 상황은 달라마시아 사람들이 최초에 소개한 한 주(週)의 기간을 거의 신성한 것으로 인가했다. 아담이 동산을 검사하고, 예비적 조직 계획을 짜면서 6일을 보낸 것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지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예배하려고 일곱째 날을 고른 것은, 여기에 함께 이야기한 사실에 전적으로 우연히 생겼다.
74:8.2 (837.1) 세상을 엿새 안에 만들었다는 전설은, 사실 3만 년도 더 지나서, 나중에 생각한 것이다. 그 이야기의 한 특성, 곧 해와 달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해와 달을 오랫동안 가렸던, 미세한 먼지로 이루어진 짙은 우주 구름으로부터 세상이 한때 갑자기 나타났다는 전통에 기원을 가졌을지 모른다.
74:8.3 (837.2) 아담의 갈비로부터 이브를 빚어 낸 이야기는 아담이 도착한 것과 45만 년도 더 전에 행성 영주의 유형 참모진이 온 것과 관련하여, 살아 있는 물질을 서로 교환한 데 관련된 수술, 천상의 수술이 혼동되어 압축된 것이다.
74:8.4 (837.3) 세상 민족들의 대다수는 아담과 이브가 유란시아에 도착하고 나서 그들을 위하여 지어진 육체 형태를 입었다는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 진흙으로 사람이 빚어졌다는 믿음은 동반구에서 거의 보편적이었다. 이 전통은 필립핀 섬들로부터 세계를 돌아서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많은 집단이, 점진적으로 창조―진화―되었다는 초기의 관념 대신에, 어떤 특별 창조 방법으로 사람이 진흙에 기원을 가졌다는 이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74:8.5 (837.4) 달라마시아와 에덴의 영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인류는 인간종의 점진적 향상을 믿는 경향이 있었다. 진화의 사실은 현대에 발견된 것이 아니다. 옛 사람들은 인간이 진보하는, 느린 진화적 특징을 이해하였다. 옛날의 그리스인은 메소포타미아에 가까이 있었는데도, 이 생각을 뚜렷이 가졌다. 땅에 있는 다양한 종족들의 진화 개념은 딱할 정도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런데도 많은 원시 부족은 그들이 여러 가지 동물의 후손이라고 믿고 가르쳤다. 원시 민족들은 자기네 조상이라고 생각되는 동물을 “토템”으로 고르는 관습을 가졌다. 어떤 북 아메리카 인디안 부족들은 그들이 비버와 이리로부터 생겨났다고 믿었다. 어떤 아프리카 부족들은 하이에나로부터, 한 말레이 부족은 리머로부터, 한 뉴 기니아 집단은 앵무새로부터 그들이 내려왔다고 가르친다.
74:8.6 (837.5) 아담 족속 문명의 잔재와 바로 접촉을 가졌기 때문에, 바빌로니아인은 사람이 창조된 이야기를 불리고 꾸몄다. 그들은 사람이 신들로부터 바로 내려왔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그 민족이 귀족의 기원을 가졌다는 생각을 고수했고, 이것은 진흙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교리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74:8.7 (837.6) 천지 창조에 관한 구약(舊約)의 설명은 모세의 시절이 훨씬 지난 뒤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세는 히브리인에게 그렇게 왜곡된 이야기를 가르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창조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에 이르기까지 간단하고 요약된 이야기를 제시하였고, 이렇게 함으로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라 부른 창조자, 곧 우주의 아버지를 경배하라는 그의 말이 더욱 호소력이 있기를 바랐다.
74:8.8 (837.7) 초기의 가르침에서 아주 지혜롭게도, 모세는 아담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려고 애쓰지 않았고, 모세가 히브리인의 최고의 선생이었으니까, 아담의 이야기는 천지 창조의 이야기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초기의 전통이 아담 이전의 문명을 인정했다는 것은, 아담 시절 이전의 인간사(人間事)에 관한 어떤 언질도 없애려고 의도했던 후일의 편집자들이 소홀히 하여, 카인이 “놋의 땅”으로 옮겨 가고, 거기서 아내를 얻었다는 언급, 내막을 드러내는 언급을 없애지 못한 사실에 뚜렷이 나타난다.
74:8.9 (838.1)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뒤에 오랫동안, 히브리인은 널리 사용한 글자가 없었다. 그들은 이웃에 있는 필리스티아인으로부터 알파벳 쓰기를 배웠는데, 이 사람들은 더 높은 크레테 문명으로부터 정치적으로 피신하여 온 자들이었다. 히브리인은 기원전 약 900년까지 거의 글을 쓰지 않았고, 그렇게 늦은 때까지 아무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몇 가지 다른 천지 창조 이야기가 유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에서 포로 생활을 한 뒤에 그들은 수정된 메소포타미아 판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더 기울었다.
74:8.10 (838.2) 유대인의 전통은 모세에 관하여 분명히 고정되었고, 그가 아브라함의 핏줄을 추적하여 아담까지 미치려고 애썼기 때문에, 유대인은 아담이 온 인류의 처음이라고 가정했다. 야웨는 창조자였고, 아담이 처음 사람이라 생각되었으니까 야웨는 아담을 만들기 바로 전에 세상을 만들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나서 아담이 엿새를 보냈다는 전통이 그 이야기에 섞여 들어갔고, 그 결과로서 모세가 땅에서 머무른 지 거의 1천 년이 지난 뒤에, 엿새 안에 천지를 창조했다는 전통이 기록되었으며, 나중에는 모세가 그 글을 썼다고 명예를 돌렸다.
74:8.11 (838.3) 유대인 사제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사물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의 기록을 이미 마쳤다. 곧 그들은 이 이야기가 최근에 발견된, 모세가 적은 천지 창조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기원전 500년 무렵에, 당대의 히브리인은 이 글을 신이 준 계시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후일의 민족들이 신화 같은 이야기를 보는 것과 상당히 비슷하게 이 글을 여겼다.
74:8.12 (838.4) 모세의 가르침이라고 소문난 이 가짜 서적은 프톨레미, 곧 그리스 사람인 에집트 왕의 눈에 뜨였고,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그의 새 도서관을 위하여 이것을 70인 학자의 위원회에게 그리스어로 옮기게 하였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나중에 히브리교와 기독교의 “성서”에서 후기 수집의 일부가 된 글 사이에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이 신학 체계들과 동일시됨으로, 그러한 개념들은 오랫동안 많은 서양 민족의 철학에 깊이 영향을 미쳤다.
74:8.13 (838.5) 기독교의 선생들은 명령으로 인류를 창조했다는 관념을 영속하게 하였고, 이 모두가 한때 유토피아 같이 복된 황금 시대가 있었다는 가설, 그리고 사람 또는 초인간이 타락했다는 이론을 직접 형성하도록 만들었으며, 이것은 어째서 사회가 유토피아 아닌 상태에 있는가 설명했다. 인생, 그리고 우주에서 사람의 처지를 이렇게 내다보는 것은 기껏해야 실망을 주는 것이니, 왜냐하면 그것이 한때 어떤 행성 행정자들의 잘못 때문에 이를 꾸짖으려고 인류에게 노여움을 퍼부은 신, 복수심에 불타는 신을 암시할 뿐 아니라, 사람이 진보하지 않고 오히려 후퇴한다는 믿는 생각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이다.
74:8.14 (838.6) “황금 시대”는 신화(神話)이지만 에덴은 사실이었고, 동산의 문명은 실제로 멸망하였다. 아담과 이브는 동산에서 117년 동안 버티었고, 그때 이브의 성급함과 아담의 그릇된 판단을 통해서, 이들은 예정된 길을 주제넘게 벗어났으며, 급속히 자신들에게 재난을 부르고, 망할 정도까지 온 유란시아의 발전하는 걸음을 늦추었다.
75:0.1 (839.1) 유란시아에서 1백 년이 넘도록 수고한 뒤에, 아담은 동산 바깥에서 거의 아무런 진전을 볼 수 없었다. 바깥 세상은 그다지 나아지는 듯 보이지 않았다. 종족 개량의 실현은 아득히 먼 일로 보였고, 상황은 아주 절망적이어서, 구제하기 위해서 최초의 계획에 들어 있지 않은 무엇이 요구되는 듯하였다. 적어도 이런 생각이 아담의 머리에 이따금 떠올랐고, 그는 여러 번 이브에게 그렇게 표현했다. 아담과 그의 짝은 충성스러웠지만, 그들은 같은 부류와 떨어져 있었고, 그들 세계가 닥친 불쌍한 곤경은 견디기 힘들었다.
75:1.1 (839.2) 실험 중이고 반란으로 마비되고, 고립된 유란시아에서 아담의 임무는 벅찬 사업이었다. 물질 아들과 딸은 행성에서 받은 과제가 어렵고 까다로움을 일찍부터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다방면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제를 용감하게 시작했다. 그러나 인간의 핏줄 사이에서 결함 있는 자와 퇴화된 자를 없애는 온통 중요한 일에 착수했을 때, 그들은 아주 낙심했다. 그들은 궁지에서 빠져 나갈 길을 전혀 찾을 수 없었고, 예루셈이나 에덴시아에 있는 상관들과 의논할 수 없었다. 여기서 그들은 떨어져서, 날마다 어떤 새롭고 까다롭게 얽힌 문제, 풀 수 없는 듯한 어떤 문제에 부닥쳤다.
75:1.2 (839.3) 정상 조건에서 행성 아담과 이브가 처음으로 할 일은 종족들을 조정하고 혼합시키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란시아에서 그런 사업은 대체로 희망이 없는 듯했는데, 그 종족들은 생물학상으로 건강해도, 더디고 결함 있는 핏줄을 제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75:1.3 (839.4) 아담과 이브는 그들이 사람의 형제 정신을 선포하기에 전혀 준비되지 않은 구체(球體)로 온 것을 발견했으며, 이것은 비참한 영적 어둠 속에서 더듬으면서, 혼란에 빠져 있고, 앞서 있던 행정부의 사명이 유산됨으로 더군다나 나쁘게 진창에 빠진 세계였다. 생각과 도덕은 낮은 수준에 있었고, 종교적 통일을 이룩하는 일을 시작하는 대신에, 그들은 거주자들을 가장 간단한 형태의 종교적 믿음으로 전향시키는 일을 다 다시 시작해야 했다. 채용할 준비가 된 한 언어를 찾는 대신에, 수백 가지 지방 사투리를 쓰는 세계적 혼란에 부닥쳤다. 행성에서 봉사하는 어떤 아담도 이보다 더 힘든 세상에 발을 디딘 적이 없었다. 장애물은 넘을 수 없고 여러 문제는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듯이 보였다.
75:1.4 (839.5) 그들은 고립되어 있었고, 그들을 짓누르는 엄청난 외로운 느낌은 더군다나 멜기세덱 관리자들이 일찍 떠났기 때문에 더해졌다. 겨우 간접으로, 천사 계급들의 수단을 이용하여, 그들은 행성 바깥에 있는 어떤 존재하고도 통신할 수 있었다. 천천히 그들의 용기는 줄어들고 투지는 떨어졌으며, 때때로 그들의 믿음은 흔들리다시피 하였다.
75:1.5 (840.1) 그리고 이것이 부닥친 과제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을 때, 이 고귀한 두 사람이 소스라치게 놀란 참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모두 행성에서 받은 과제의 수행과 관련된 사업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75:1.6 (840.2) 아마 네바돈의 어떤 물질 아들도 유란시아의 불쌍한 처지에서 아담과 이브가 부딪친 것처럼, 그렇게 어렵고 겉보기에 희망 없는 과제에 부딪친 적이 없다. 그러나 더 멀리 내다보고 참을성이 있었더라면 언젠가 성공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더군다나 이브는, 아주 너무 참을성이 없었다. 그들은 길고 길게 견디는 시험에 차분히 착수하려 하지 않았다. 당장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싶었고, 또 보았지만, 그렇게 얻은 결과는 자신들과 그 세상에 아주 비참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75:2.1 (840.3) 칼리가스티아는 동산에 자주 찾아왔고 아담과 이브와 여러 번 회담을 가졌지만 타협과 지름길 모험이 담긴 어떤 제안에도 그들은 끄떡하지 않았다. 넌지시 비추는 모든 그러한 제안에 효과적 면역을 일으키도록, 반란의 결과가 그들 앞에 넉넉히 있었다. 아담의 어린 자식들조차 달리가스티아의 서곡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물론, 칼리가스티아나 그 동료도, 아담의 아이들에게 나쁜 일을 하라고 설득하기는커녕, 어떤 사람에게도 자신의 뜻을 거슬러 영향을 미칠 힘이 없었다.
75:2.2 (840.4) 칼리가스티아는 아직도 직함으로는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 잘못 인도되었지만, 그래도 지역 우주의 높은 아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유란시아에서 그리스도 미가엘이 왔을 때에야 마침내 자리에서 쫓겨났다.
75:2.3 (840.5) 그러나 그 몰락한 영주는 끈질겼고 각오가 굳었다. 그는 얼마 안 있어 아담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노력을 그만두었고, 이브에게 교활하게 옆 공격을 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 악한 자는 성공할 유일한 가망은 놋 족속 집단 가운데 상위 계층에 속하는 적당한 사람들을 교묘히 이용하는 데 있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이 놋 족속은 한때 그의 유형(有形) 참모진 동료들의 후손이었다. 그리고 보라 인종의 어머니를 옭아매기 위해서 적절하게 계획이 세워졌다.
75:2.4 (840.6) 이브에게는 아담의 계획에 대항하여 싸우거나 그들의 행성 임무를 위태롭게 할 어떤 일이라도 저지를 의도가 전혀 없었다. 멀리 내다보면서 먼 장래 효과를 위하여 계획하기보다 당장의 결과를 보는 여자의 경향을 알기 때문에, 멜기세덱들은 떠나기 전에, 행성에서 고립된 지위에 따르는 특이한 위험에 관하여 이브에게 각별히 타일렀고, 이브에게 결코 제 짝의 옆을 벗어나지 말라고, 다시 말해서 그들의 공동 사업을 촉진하기 위하여 아무런 개인적이거나 비밀스런 방법도 시도하지 말라고 특별히 경고하였다. 이브는 1백 년이 넘도록 이 지침을 아주 면밀하게 지켜나갔고, 세라파타시아라는 이름의 어떤 놋 족속의 지도자와 즐기고 있는 방문, 갈수록 더 사사롭고 비밀스러운 방문에 어떤 위험이 따르리라는 것이 이브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건 전체가 아주 차츰차츰, 자연스럽게 발전되어서, 이브는 눈치채지 못하고 걸려들었다.
75:2.5 (840.7) 동산 거주자들은 에덴의 초기 시절부터 놋 족속과 접촉이 있었다. 그들은 칼리가스티아 참모진에서 직무를 게을리 하는 참모들의 혼합된 후손으로부터 많은 귀중한 도움과 협조를 받았고, 이들을 통해서 에덴의 체제는 이제 완벽한 붕괴와 마지막 멸망을 만나게 되었다.
75:3.1 (841.1) 아버지가 죽고 나서 세라파타시아가 놋 부족들의 서부 연맹, 곧 시리아 연맹을 지휘하는 자리에 올랐을 때, 아담은 땅에서 처음 1백 년을 막 마쳤다. 세라파타시아는 살갗이 갈색인 남자였고, 한때 달라마시아의 건강 위원회의 우두머리가, 그 아득히 먼 옛 시절에 청인종의 으뜸가는 지적 여자들 중에서 하나와 짝지어 낳은 명석한 후손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이 혈통은 권한을 쥐었고, 서부 놋 부족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미쳤다.
75:3.2 (841.2) 세라파타시아는 동산에 몇 번 찾아왔고, 아담의 운동이 올바른 것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시리아의 놋 족속의 지휘를 맡은 뒤에 곧, 그는 동산에 있는 아담과 이브의 작업과 제휴 관계를 수립하려는 뜻을 발표했다. 그의 민족에서 대다수는 이 계획에 그와 함께 하였고, 아담은 모든 이웃 부족 가운데 가장 힘있고 영리한 자들이 세계 개선 계획을 지원하도록 거의 통째로 설득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그것은 분명히 격려가 되었다. 이 큰 사건 바로 뒤에, 세라파타시아와 그의 새 참모진은 아담과 이브의 집에서 환대를 받았다.
75:3.3 (841.3) 세라파타시아는 아담의 모든 부관 가운데 가장 유능하고 능률 있는 한 사람이 되었다. 어떤 활동에도 그는 온통 정직하고 속속들이 성실했다. 나중에도, 그가 교활한 칼리가스티아에게 상황의 도구로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했다.
75:3.4 (841.4) 대번에 세라파타시아는 에덴의 부족 관계 위원회의 부의장이 되었고, 먼 부족들이 동산의 운동을 지지하도록 설득하는 작업을 더욱 힘차게 실행하기 위하여 많은 계획이 세워졌다.
75:3.5 (841.5) 세라파타시아는 아담과 이브―특히 이브―와 여러 번 회의를 가졌고, 그들의 방법을 개선하기 위하여 여러 계획을 의논했다. 어느 날, 이브와 이야기하는 동안, 보라 인종의 큰 집단이 모집되기를 기다리면서, 기다리는 궁핍한 부족들을 즉시 개선하려고 그동안에 무엇인가 할 수 있다면, 아주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세라파타시아에게 퍼뜩 떠올랐다. 놋 족속이, 가장 진취적이고 협조하는 종족으로서, 일부 기원을 보라 핏줄에 가진 한 지도자가 그들에게 태어나게 할 수 있다면, 이 민족들을 동산에 더 가깝게 묶어 두는 강력한 끈이 될 것이라고 세라파타시아는 주장했다. 그리고 멀쩡한 정신에, 정직하게, 이 모든 것이 세계의 복지를 위한 것이라 생각되었는데, 이는 동산에서 자라고 교육받을 이 아이는 그의 아버지 민족에게 영원히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75:3.6 (841.6) 세라파타시아가 어떤 제안을 했어도 그가 아주 정직하고 전적으로 성실했다는 것을 다시 강조해야 한다. 칼리가스티아와 달리가스티아의 손에 자기가 놀아나고 있다고 그는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혼란에 빠진 유란시아 민족들을 세계적으로 개량하는 일을 시도하기 전에, 보라 인종의 예비군을 견실하게 확보하는 계획에 세라파타시아는 온통 충성했다. 그러나 이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몇백 년이 걸릴 터이고, 그는 참을성이 없었다. 금방 나타나는 어떤 결과―자신의 일생에서 무언가―를 보고 싶었다. 세상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 것이 거의 없는 것에 아담이 때때로 낙심한다고 그는 이브에게 분명히 말했다.
75:3.7 (841.7) 5년이 넘도록 이 계획은 남몰래 완성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이브가 카노와 비밀 회담을 가지기로 찬성하는 데까지 나아갔는데, 카노는 근처에 우호적인 놋 족속의 거류민 가운데 가장 똑똑한 지적 존재요 활동적인 지도자였다. 카노는 아담 체제에 무척 공감하였다. 사실, 그는 동산과 우호 관계를 가지는 데 찬성한 이웃 놋 족속의 성실한 영적 지도자였다.
75:3.8 (842.1) 아담의 집으로부터 멀지 않은 데서, 가을 저녁 땅거미가 질 때, 운명의 만남이 일어났다. 이브는 잘생기고 열심 있는 카노를 전에 만난 적이 없었다―그리고 그는 영주 참모진에 속하는 먼 선조 가운데서, 우수한 체격과 뛰어난 지능이 살아남은 훌륭한 표본이었다. 카노도 또한 세라파타시아의 계획이 옳다는 것을 철저히 믿었다. (동산 바깥에서는 한 사람이 여럿과 짝짓는 것은 보통 관습이었다.)
75:3.9 (842.2) 칭찬과 열심에, 또 대단한 개인적 설득에 영향을 받아서, 이브는 그때 거기서 많이 이야기해 왔던 사업을 시작하기로, 더 크고 더 널리 미치는 신의 계획에, 세상을 구원하는 자기의 작은 계획을 보태기로 찬성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이브는 운명의 걸음을 내디디었다. 엎지른 물이었다.
75:4.1 (842.3) 행성에 있던 하늘 생명은 술렁거렸다. 아담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브에게 동산에, 그의 옆으로 오라고 청했다. 두 방향에서 동시에 일함으로 세상의 개선을 가속하는, 오랫동안 품어 왔던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전부, 아담은 이제 처음으로 들었다: 세라파타시아의 사업을 집행하는 것과 동시에 신의 계획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75:4.2 (842.4) 달빛 비치는 동산에서 물질 아들과 딸이 이렇게 교통하는 동안, “동산의 목소리”는 불복종한 것 때문에 그들을 꾸짖었다. 그 목소리는, 그들이 동산의 약속을 어겼다, 멜기세덱들의 지시(指示)에 복종하지 않았다, 우주 통치자에게 책임을 다하겠다는 서약을 지키지 못했다고, 에덴의 쌍에게 이른 바로 내 자신의 발표에 지나지 않았다.
75:4.3 (842.5) 이브는 선과 악의 실행에 참여하기로 찬성한 것이다. 선(善)은 신의 계획을 수행하는 것이요, 죄는 신의 뜻을 일부러 어기는 것이다. 악은 계획을 그릇되게 적용하고 기법을 잘못 적응하는 것이며, 이것은 우주의 부조화와 행성의 혼란을 일으킨다.
75:4.4 (842.6)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을 때마다, 동산의 쌍은 선과 악을 섞는 칼리가스티아의 제안에 넘어가지 말라고, 관리하는 천사장에게 경고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훈계를 받았다: “선과 악을 섞는 날에, 너희는 그 땅의 필사자와 같이 될지니라. 너희는 반드시 죽으리라.”
75:4.5 (842.7) 이브는 비밀로 만났던 운명의 계제에, 자주 되풀이되던 이 경고에 대하여 전에 카노에게 일러 주었지만, 카노는 그러한 훈계의 중요성이나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좋은 동기와 참된 의도를 가진 남녀는 아무런 악을 행할 수 없다, 이브는 분명히 죽지 않고, 오히려 그들 후손의 몸에서 새롭게 살 것이요, 그 후손은 자라서 세상에 복을 주고 세상을 안정시킬 것이라고 이브를 안심시켰다.
75:4.6 (842.8) 신의 계획을 수정하는 이 계획이 비록 아주 진지하게, 오직 세상의 복지에 관하여 가장 높은 동기만 가지고 잉태되고 집행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악이었다. 이는 그것이 올바른 목적을 이룩하는 그릇된 길을 대표하기 때문이요, 바른 길, 신의 계획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75:4.7 (843.1) 카노가 매력 있음을 이브가 발견한 것은 참말이었고, 이브는 “인간사(人間事)에 관하여 새롭고 확대된 지식을 얻고, 인간 성품을 빨리 이해하는 것이 아담 성품을 이해하는 데 보충이 된다”는 구실로 유혹자가 약속했다는 것을 모두 깨달았다.
75:4.8 (843.2) 그날 밤 동산에서, 그 슬픈 상황에서 내 의무가 된 바와 같이, 나는 보라 인종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어머니 이브가 책임을 이행하지 못하게 만든 이야기의 자초지종을 충분히 들었고, 그 당면한 상황에 관하여 두 사람에게 조언하고 의논했다. 그들은 이 충고 가운데 더러는 따르고, 더러는 버렸다. 이 회담은 너희의 기록에 “주 하나님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를 부르고 ‘너희가 어디 있느냐’”하고 묻는 것으로 나타난다. 보기 드물고 특별한 일을 모두, 자연스럽든 영적이든, 직접 신들이 친히 간섭한 탓으로 돌리는 것이 후세대의 관습이었다.
75:5.1 (843.3) 이브가 꿈에서 깨어난 것은 보기에 참으로 애처로웠다. 아담은 그 곤경 전체를 헤아렸고, 마음이 찢어지고 풀이 꺾이기는 했어도, 일을 그르친 짝에게 오직 불쌍한 느낌과 동정심을 보였다.
75:5.2 (843.4) 실패를 깨닫고 절망에 빠져, 이브가 잘못을 저지른 다음 날 아담은 라오타를 찾았는데, 그 여자는 동산의 서부(西部) 학교들의 우두머리이자 명석한, 놋 족속의 여자였다. 생각 끝에 그는 이브처럼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라. 아담은 속지 않았다.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이브와 운명을 함께 하기로 작정하였다. 인간을 초월하는 애정으로 그는 제 짝을 사랑했고, 유란시아에서 이브가 없이 혼자 지키는 가능성을 생각하니 이를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75:5.3 (843.5) 이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들었을 때,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동산 거주자들은 다룰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이웃에 있는 놋 족속의 촌락에 전쟁을 선포했다. 에덴의 문 바깥을 지나서, 준비되지 않은 이 사람들에게 덮쳤고, 이들을 모조리 죽였다―남자나 여자나 어린아이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카노, 아직 태어나지 않은 카인의 아버지도 이슬로 사라졌다.
75:5.4 (843.6)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깨닫고 나서, 세라파타시아는 어쩔 줄 몰라했고, 두려움과 뉘우침으로 제 정신이 아니었다. 다음 날 그는 큰 강에 빠져 죽었다.
75:5.5 (843.7) 아담의 아이들은 아버지가 외롭게 헤매는 30일 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는 어머니를 위로하려고 애썼다. 그때가 끝나자 판단이 제대로 섰고, 아담은 집으로 돌아와서 그들이 앞날에 어찌 행동할 것인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75:5.6 (843.8) 그릇 인도받은 부모가 저지른 어리석은 짓의 결과를 죄 없는 아이들이 흔히 함께 받는다. 아담과 이브의 바르고 고귀한 아들과 딸들은 아주 갑자기, 아주 무자비하게 밀어닥친 믿을 수 없는 비극의 슬픔, 말할 수 없는 슬픔에 파묻혔다. 50년이 지나도, 자식 중에서 나이든 자녀들은 그 비참한 시절의 애처로움과 슬픔, 특히 아담이 집을 비운 그 30일 간의 공포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동안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어머니는 아담이 어디 있는지, 어떤 운명에 빠졌는지 까맣게 몰랐다.
75:5.7 (843.9) 바로 이 30일 동안은 이브에게 슬프고 괴로운 몇 년처럼 길었다. 이 고귀한 사람은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영적으로 슬펐던 기간, 속 썩던 그 기간의 결과로부터 결코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그들이 나중에 겪은 결핍과 물질적 어려움의 어떤 모습도, 이브의 기억에는 외롭고 견딜 수 없이 불안했던 그 무서운 여러 날, 두려운 여러 밤과 도저히 견줄 수 없었다. 이브는 세라파타시아의 성급한 행동에 관하여 소식을 들었고, 제 짝이 슬픔에 못 이겨 목숨을 끊었는지, 혹은 자기의 잘못을 꾸짖느라고 세상에서 제거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아담이 돌아왔을 때, 이브는 기쁨과 고마움을 느겼고, 고되게 봉사하면서 길고도 어려운 일생을 함께 사는 동안 그 만족감은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75:5.8 (844.1)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이브가 실수한 뒤에 70일이 되기까지 아담은 그들이 어떤 성질의 반칙을 저질렀는가 확신이 없었는데, 그때 멜기세덱 관리자들이 유란시아로 돌아와서 세상일의 관할권을 맡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들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았다.
75:5.9 (844.2) 그러나 아직도 문제가 더 터지려 하고 있었다. 에덴 가까이 있는 놋 족속 촌락이 절멸되었다는 소식은 북쪽에 있는 세라파타시아의 고향 부족들에게 전해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고, 대번에 큰 무리가 동산으로 행진해 오려고 집결하고 있었다. 이렇게 아담 족속과 놋 족속 사이에 길고도 쓰라린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아담과 그 추종자들이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있는 둘째 동산으로 옮겨 간 뒤에도 이 적대 행위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와 그 여자 사이에, 그의 씨와 그 여자의 씨 사이에” 맹렬하고 오래 이어지는 불화가 있었다.
75:6.1 (844.3) 놋 족속이 행진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담은 멜기세덱들의 상담을 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조언하려 하지 않았고, 최선이라 생각되는 대로 일을 처리하라고 이르기만 하고, 그가 어떤 길을 택하든지, 가능한 한 친절히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멜기세덱들은 아담과 이브가 스스로 세우는 계획에 간섭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75:6.2 (844.4) 아담은 그와 이브가 실패한 것을 알았다. 멜기세덱 관리자들이 그 자리에 온 것이 그렇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그들의 개인 지위나 앞날의 운명이 어찌될 것인가 그는 아직 아무것도 몰랐다. 자기들의 지도자를 따르겠다고 약속한 충성스러운 추종자 1천2백여 명과 그는 밤새 의논하였고, 다음 날 정오에 이 순례자들은 새 집을 찾아서 에덴을 떠나갔다. 아담은 전쟁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고, 따라서 놋 족속에게 저항하지 않고 첫째 동산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75:6.3 (844.5) 에덴의 카라반은 동산을 떠난 지 사흘째에, 예루셈으로부터 온 천사 수송기들이 도착하여 정지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담과 이브는 아이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통고를 받았다. 수송기들이 기다리는 동안, 선택의 나이(스무 살)에 이른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유란시아에 남아 있거나 놀라시아덱 최고자들의 피보호자가 되는 선택이 주어졌다. 3분의 2가 에덴시아로 가기로 했다. 약 3분의 1은 부모와 함께 남아 있기로 했다. 선택의 나이가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은 모두 에덴시아로 데려갔다. 이 물질 아들과 딸, 그리고 아이들이 슬프게 이별하는 것을 보고서 아무도 위반자의 길이 고달프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담과 이브의 이 자손들은 이제 에덴시아에 있다. 그들에게 어떤 처분이 내릴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
75:6.4 (844.6) 슬프고 슬픈 카라반은 계속 여행하려고 준비하였다. 이보다 무엇이 더 비극일 수 있었을까! 그렇게 높은 희망에 부풀어 한 세상으로 와서, 그렇게 축복 속에 영접 받고, 그리고 나서 에덴을 부끄러움 속에 떠나가고, 새로 살 곳을 미처 찾기도 전에 아이들을 4분의 3도 더 잃어버리다니!
75:7.1 (845.1) 에덴의 카라반이 멈춘 동안에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위반 행위의 성질에 대하여 통지받고 그들의 운명이 어찌될 것인가 조언을 받았다. 가브리엘이 판결을 선포하려고 나타났다. 이렇게 판결을 받았다: 유란시아 행성에 있는 아담과 이브는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으로 판결을 내린다. 사람 사는 이 세상의 통치자로서 그들은 수탁자의 서약을 어겼다.
75:7.2 (845.2) 죄책감 때문에 풀이 죽기는 했어도, 아담과 이브는 구원자별에 있는 재판관들이 “우주 정부를 모욕했다는” 어떤 고발에 대해서도 그들이 면죄되었다는 선고를 듣고 크게 기뻐했다. 그들이 모반한 죄가 있다는 주장은 없었다.
75:7.3 (845.3) 에덴의 부부는 자신들이 그 땅에서 필사자의 지위로 떨어졌고, 미래에 세상 종족들의 앞날을 기대하면서, 이제부터 유란시아의 남자와 여자로서 행동해야 한다고 통지를 받았다.
75:7.4 (845.4) 아담과 이브가 예루셈을 떠나기 오래 전에, 그들의 선생들은 신의 계획을 크게 벗어나는 일이 있을 경우에 생기는 결과를 설명해 주었다. 필사자 육체의 지위로 떨어지는 것이 확실한 결과요 분명한 벌이며, 행성에서 그들이 이루어야 할 임무를 집행하지 못할 때 그런 벌이 어김없이 따른다는 것을 그들이 유란시아에 도착하기 전에도 그후에도 나는 친히 거듭 경고했다. 그러나 물질 계급 아들의 불사(不死) 지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담과 이브가 임무를 이루지 못하는 데 어떤 결과가 따르는가 똑똑히 이해하는 데 필수이다.
75:7.5 (845.5) 1.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에 있는 동료들처럼, 영의 지성 인력 회로와 지적 관계를 가짐으로 불사의 지위를 유지했다. 정신이 분리됨으로 이 중대한 자양분이 끊어질 때, 그때 사람이 어떤 영적 수준에 있는가에 상관 없이, 불사의 지위는 없어진다. 육체의 분해를 뒤따르는 필사자의 지위가 아담과 이브가 책임을 지적으로 이행하지 못함으로 생기는 불가피한 결과였다.
75:7.6 (845.6) 2. 유란시아의 물질 아들과 딸은 또한 이 세상의 필사 육체의 모습으로 인격화되었으니까, 두 가지 순환 체계를 유지하는 데 더욱 의존했는데, 하나는 신체의 성질로부터 생기고, 하나는 생명나무의 열매에 저장된 초월 에너지로부터 생긴다. 관리하는 천사장은 언제나 아담과 이브에게, 맡긴 임무의 불이행(不履行)은 지위의 강등을 낳고, 실패한 뒤에 이 에너지 근원에 접근하는 것이 거절된다고 훈계했다.
75:7.7 (845.7) 칼리가스티아는 아담과 이브를 덫에 옭아넣는 데 성공했지만, 이들을 우주 정부에 맞서 드러내놓고 반항하도록 이끌려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이 한 일은 정말로 나빴지만, 그들은 결코 진리를 멸시한 죄가 없고, 우주의 아버지와 그 창조 아들의 올바른 통치에 맞서 알면서 반란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75:8.1 (845.8) 아담과 이브는 높은 물질 아들의 지위로부터 낮은 필사 인간의 지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타락이 아니었다. 아담의 실패로 즉시 결과가 나타났는데도 인류는 개량되어 왔다. 보라 민족을 유란시아 종족들에게 주는 신의 계획이 유산(流産)되기는 했어도, 필사 종족들은 아담과 그 후손이 유란시아 종족들에게 얼마큼 기여한 것으로부터 엄청나게 이득을 얻었다.
75:8.2 (846.1) “사람의 타락”은 전혀 없었다. 인류의 역사는 점진적 진화의 역사였고, 아담의 수여는 이전에 그들의 생물학적 조건과 비교해서 세계 민족들을 크게 개량하였다. 유란시아의 우수한 혈통은 이제 안돈ㆍ산긱ㆍ놋ㆍ아담, 따로 된 이 네 가지 근원으로부터 얻은 유전 요소를 포함한다.
75:8.3 (846.2) 아담이 인류에게 내린 저주의 원인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아담이 신의 계획을 수행하는 데 실패했고, 신과 한 약속을 어겼고, 그와 배우자의 생물 지위가 아주 확실히 낮아졌지만, 이 모든 일이 일어났어도, 인류에 끼친 그들의 공헌은 유란시아에서 문명을 진보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75:8.4 (846.3) 너희 세계에서 아담의 사명의 결과를 평가하면서, 공정을 기하자면 행성의 조건을 인지할 것이 요구된다. 아담은 아름다운 짝과 함께 예루셈으로부터 어둡고 혼란에 빠진 이 행성으로 옮겨졌을 때, 거의 희망 없는 과제에 부닥쳤다. 그러나 여러 멜기세덱과 그 동료들의 조언에 인도를 받았더라면, 그리고 더 참을성이 있었다면, 결국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브는 개인의 해방과 행성에서 행동의 자유를 부르짖는 선전, 모르는 사이에 파고드는 선전에 귀를 기울였다. 자기에게 맡겨진 이 생명으로 하여금 생명 운반자들이 최초에 설계했던, 당시의 혼합된 계급, 한때 행성 영주의 참모진에 딸렸던 자식 낳는 존재의 생명질과 예전에 합쳐진 적이 있었던 혼합된 계급의 생명과 때 이르게 섞이게 만들었으므로, 이브는 물질 아들 계급의 생명질을 가지고 실험하도록 유도되었다.
75:8.5 (846.4) 파라다이스로 너희가 올라가는 길에 내내, 완전한 길, 완전에 이르는 길, 영원히 완전하게 되는 길에서, 지름길이나 개인의 발명이나, 아니면 개선하는 다른 조치로, 확정된 신의 계획을 돌아가려고 참을성 없이 애써도 너희는 결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75:8.6 (846.5) 통틀어서, 온 네바돈의 어느 행성에서도 더 가슴 아팠던 지혜의 부족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잘못된 걸음이 진화하는 우주의 사무에서 일어나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거대한 창조의 일부이며, 만사가 완전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우리의 우주는 완전하게 창조되지 않았다. 완전은 우리의 영원한 목표요, 기원이 아니다.
75:8.7 (846.6) 이것이 기계론적 우주라면, 첫째 근원 중심이 오직 하나의 물력이고 또한 성격자도 아니고, 모든 창조가 엄격한 법칙에 지배되는 물질, 에너지 활동이 변치 않는 특징을 가진 물리적 물질의 광대한 집합이라면, 그때 우주 상태가 불완전한데도 완전이 지배할지 모른다. 아무 의견 차이가 없고 아무 마찰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 완전과 불완전이 생기는 진화 우주에서, 의견 차이와 오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기뻐한다. 이로서 우주에서 성격자가 있다는 사실과 그들의 행동이 증명되는 까닭이다. 우리의 창조가 성격자의 지배를 받는 하나의 존재라면, 너희는 성격이 살아나고, 진급하고, 성취하는 것이 가능함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격이 성장하고 체험하고 모험하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우주가 겨우 기계적이거나 또는 수동적으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 성격이 있고 진취성이 있으니까, 얼마나 영화로운 우주인가!
76:0.1 (847.1) 아담이 대항하지 않고 놋 족속에게 첫째 동산을 넘겨주고 떠나기로 했을 때, 그와 추종자들은 서쪽으로 갈 수 없었는데, 에덴 사람들이 그런 바다 모험에 적당한 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북쪽으로 갈 수 없었다. 북쪽의 놋 족속이 이미 에덴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그들은 남쪽으로 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 지역의 산에는 적대하는 부족들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열려 있는 유일한 길은 동쪽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당시에 쾌적했던 지역을 향하여 동쪽으로 여행했다. 뒤에 남았던 많은 사람이 나중에 동쪽으로 여행하여, 유역에 있는 아담 족속의 새 집에서 그들과 합쳤다.
76:0.2 (847.2) 카인과 산사는 모두 아담의 카라반이 메소포타미아의 두 강 사이의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에 태어났다. 산사의 어머니 라오타는 딸이 태어날 때 죽었다. 이브는 많이 고생했지만 우수한 체력 때문에 살아남았다. 이브는 라오타의 아이 산사를 품에 안았고, 산사를 카인과 함께 길렀다. 산사는 자라서 큰 능력을 가진 여자가 되었다. 산사는 사르간의 아내가 되었는데, 사르간은 북쪽 청인 종족의 우두머리였고, 그 시절에 청인의 진보에 기여하였다.
76:1.1 (847.3) 아담의 카라반이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기까지 거의 1년이 꼬박 걸렸다. 그 강이 홍수로 넘쳐 있음을 발견하고, 둘째 동산이 되도록 정해진, 강들 사이의 땅으로 건너가기 전에, 그들은 거의 6주 동안 개울 서쪽의 평야에서 야영(野營)한 채로 남아 있었다.
76:1.2 (847.4) 에덴 동산의 임금이자 높은 사제가 행진해 오고 있다는 말이 둘째 동산 땅의 거주자들의 귀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서둘러 동쪽 산지로 달아났다. 아담은 도착했을 때 그가 바라던 영토가 다 비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여기 이 새 자리에서 아담과 그를 돕는 자들이 새 집을 짓고, 문화와 종교의 새 중심을 세우는 작업에 착수했다.
76:1.3 (847.5) 이 장소는 아담이 알기로, 반과 아마돈이 제안한 동산을 지으려고 가능한 자리를 선택하라고 임명받은 위원회가 택한 최초의 세 장소 중의 하나였다. 두 강 자체가 그 시절에 좋은 천연 방어물이었고, 둘째 동산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져서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이 가까워지기 때문에, 남쪽에, 강들 사이의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서, 90킬로미터나 뻗는 방어벽을 세울 수 있었다.
76:1.4 (847.6) 새 에덴에서 자리를 잡은 뒤에, 투박한 생활 방법을 채택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온통 참말인 듯했다. 자연은 다시 한 번 멋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이제 아담 족속은 불친절한 자연과 필사 존재의 여러 모순과 마주친 가운데, 준비되지 않은 흙으로부터 생계를 잇고 생활의 현실을 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첫째 동산이 그들을 위하여 어느 정도 준비된 것을 발견했지만, 둘째 동산은 바로 자신들의 손이 일함으로 “얼굴에 땀을 흘려” 창조되어야 했다.
76:2.1 (848.1) 카인이 태어난 뒤 2년이 채 안 되어 아벨이 태어났는데, 그는 둘째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 사이에 태어난 첫 아이였다. 자라서 12살이 되었을 때 아벨은 목동이 되기를 택하고 카인은 농업에 종사하기를 선택했다.
76:2.2 (848.2) 자, 그 시절에는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을 사제에게 바치는 것이 관습이었다. 목자는 양 떼를 가져오고, 농부는 들의 열매를 가져오곤 했다. 이 풍습에 따라서, 카인과 아벨은 마찬가지로 사제들에게 때마다 예물을 드렸다. 두 소년은 여러 번 자기의 직업이 비교해서 더 좋다고 다투었고, 아벨은 그가 동물 희생을 바치는 것이 우대받는다고 재빨리 지적하였다. 카인은 첫째 에덴의 전통, 즉 들의 열매가 예전에 우대된 것을 들어 항의했지만 헛일이었다. 아벨은 이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좌절에 빠진 형을 조롱하였다.
76:2.3 (848.3) 첫째 에덴 시절에 아담은 동물 잡아바치기를 그만두게 하려고 정말로 애썼고, 그래서 카인은 그의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는 선례가 있었다. 그러나 둘째 에덴의 종교 생활을 조직하기는 힘들었다. 아담은 건축ㆍ방어ㆍ농업의 일과 관련된 수많은 미세한 일을 책임지고 있었다. 영적으로 많이 풀이 죽었기 때문에, 그는 예배와 교육의 조직을 첫째 동산에서 그런 자격으로 일했던, 놋의 피를 받은 사람들에게 맡겼다. 아주 짧은 사이에도, 예식을 거행하는 놋 족속 사제들은 아담 이전 시절의 기준과 규칙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76:2.4 (848.4) 두 소년은 결코 잘 어울린 적이 없었고, 이 희생물 바치는 문제는 그들 사이에 미움이 커지도록 더욱 부채질하였다. 아벨은 그가 아담과 이브 두 사람의 아들인 것을 알았고, 카인에게 아담이 그의 아버지가 아닌 것을 어김없이 강조하였다. 아버지가, 청인과 홍인과 섞이고 또 토종 안돈 핏줄과 나중에 섞인 놋 족속 출신이었으니까, 카인은 순수한 보라종이 아니었다. 이 모두가, 카인의 타고난 호전적 유산과 함께, 그로 하여금 동생을 더욱 미워하는 마음을 품게 만들었다.
76:2.5 (848.5) 그들 사이에 긴장이 마침내 해결되었을 때 그 소년들은 각각 열 여덟과 스물이었는데, 어느 날 아벨의 빈정거리는 말이 싸우기 좋아하는 형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게 만들었고, 그래서 카인은 진노하여 달려들어 그를 죽였다.
76:2.6 (848.6) 아벨의 행동을 지켜보면 인품 발달의 요인으로서, 환경과 교육이 얼마큼 가치있는가 확증한다. 아벨은 이상적 유전(遺傳)을 물려받았고, 유전은 모든 인품의 바닥에 놓여 있다. 그러나 열등한 환경의 영향은 이 훌륭한 유산을 거의 상쇄해 버렸다. 아벨은, 특히 어린 시절에 불리한 주위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스물다섯이나 서른까지 살았더라면, 그는 도무지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훌륭한 유전이 그때 저절로 나타났을 것이다. 저질의 유전에서 생긴 인격의 장애를 정말로 극복하는 데는 좋은 환경이 크게 기여할 수 없지만, 나쁜 환경은, 적어도 인생에서 어린 시절에, 뛰어난 유전을 아주 실질적으로 망쳐 놓을 수 있다. 좋은 사회 환경과 적당한 교육은 좋은 유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데 필수인 토양이요 상황이다.
76:2.7 (849.1) 아벨의 죽음은 개들이 주인 없는 양 떼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부모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카인은 아담과 이브에게 그들의 어리석은 짓을 생각나게 하는 섬뜩한 사람이 빨리 되고 있었고, 그들은 동산을 떠나려는 그의 결심을 북돋아 주었다.
76:2.8 (849.2)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카인이 책임의 불이행을 상징했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카인의 생활은 반드시 행복하지는 않았다. 동료들이 그에게 불친절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리에 있는 것을 동료들이 의식하지 못하면서 분개하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아무런 부족 표시를 지니지 않았으니까, 그를 어쩌다 만나는 첫 이웃 부족 사람들의 손에 죽게 될 것을 카인은 알았다. 두려움과 얼마큼의 후회 때문에 그는 뉘우치게 되었다. 카인에게 한 번도 조절자가 깃든 적이 없었고, 그는 언제나 가족의 징계에 반대하고 아버지의 종교를 멸시해 왔다. 그러나 이제 그는 어머니 이브에게 가서 영적 도움과 안내를 부탁했고, 신의 도움을 정직하게 구했을 때, 한 조절자가 그에게 깃들었다. 그리고 이 조절자가 안에 깃들고 바깥을 내다보면서, 카인에게 뚜렷하게 우수한 장점을 주었고, 이것이 그로 하여금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는 아담 부족 사람으로 취급하게 만들었다.
76:2.9 (849.3) 그래서 카인은 놋의 땅을 향하여, 둘째 동산의 동쪽으로 떠났다. 그는 아버지 민족의 한 집단에서 큰 지도자가 되었고, 어느 정도 세라파타시아의 예언을 이루었는데, 왜냐하면 그가 일생에 걸쳐서 놋 족속의 이 지파와 아담 족속 사이에 평화를 촉진했기 때문이다. 카인은 먼 사촌 레모나와 결혼했고, 첫 아들 에녹은 엘람의 놋 족속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리고 몇백 년 동안, 엘람 족속과 아담 족속은 줄곧 평화를 지켰다.
76:3.1 (849.4) 둘째 동산에서 세월이 지나자 실패의 결과는 더욱 분명해졌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시아로 추방된 아이들 뿐 아니라, 아름답고 고요한 옛 집을 대단히 그리워했다. 이 훌륭한 쌍이 그 땅에서 보통 육체의 지위로 떨어진 것을 지켜보는 것은, 참으로 애처로웠다. 그러나 그들은 품위와 용기로 낮아진 지위를 견디었다.
76:3.2 (849.5) 아담은 지혜롭게도 아이들과 그 동료들에게 국가 행정, 교육 방법, 종교적 헌신을 훈련시키느라고 시간의 대부분을 썼다. 이런 선견이 없었다면, 그가 죽고 나서 큰 혼란이 생겼을 것이다. 실제로 일어난 바와 같이, 아담의 죽음은 그의 민족의 일을 운영하는 데 아무런 차이를 가져오지 않았다. 아담과 이브가 죽기 훨씬 전에, 자식과 추종자들이 에덴에서 영화로웠던 시절을 차츰 잊기를 배웠다는 것을 그들은 깨달았다. 그 추종자의 대다수가 에덴의 장려함을 잊어버린 것은 다행이었다. 불행한 환경에 대하여 그들이 지나친 불만을 품는 일은 그다지 있을 듯하지 않았다.
76:3.3 (849.6) 아담 족속의 국가 통치자는 유전적으로 첫째 동산의 아들들로부터 나왔다. 아담의 첫 아들 아담손(아담 벤 아담)은 둘째 에덴의 북쪽에서 보라 인종의 2차 중심을 세웠다. 아담의 둘째 아들 이브손은 솜씨 있는 지도자요 행정가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브손은 아담만큼 오래 살지 못했고, 그의 큰아들 잔삿은 아담 부족들의 우두머리로서 아담의 후계자가 되었다.
76:3.4 (849.7) 종교 지도자, 곧 사제들은 셋으로부터 생겼고, 그는 둘째 동산에서 태어나고 살아 있는 아담과 이브의 아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는 아담이 유란시아에 도착한 지 129년이 지난 뒤에 태어났다. 셋은 아버지 민족의 영적 지위를 개선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고, 둘째 동산에서 새 사제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의 아들 에노스는 새로운 체제로 드리는 예배의 기초를 놓았고, 손자 케난은 주위의 가까운 부족과 먼 부족들에게 대외 선교 봉사를 시작했다.
76:3.5 (850.1) 셋의 사제직은 세 가지 일을 하는 사업이었고, 종교와 건강과 교육을 포함했다. 이 서열의 사제들은 종교 의식을 거행하고, 의사(醫師)와 위생 검사자로서 일하며, 동산의 여러 학교에서 선생으로 행동하도록 훈련을 받았다.
76:3.6 (850.2) 아담의 카라반은 첫째 동산에서 몇백 가지의 식물과 곡식의 씨앗ㆍ구근(球根)을 강들 사이의 땅으로 가져갔다. 그들은 또한 수두룩한 양 떼와 온갖 종류의 길들인 동물을 얼마큼 데리고 갔다. 이 때문에, 그들은 둘러싼 부족들보다 큰 장점을 소유했다. 그들은 처음 동산에서 가졌던 옛 문화의 이득을 많이 누렸다.
76:3.7 (850.3) 첫째 동산을 떠날 때까지 아담과 그의 가족은 언제나 과일ㆍ곡식ㆍ견과를 먹고 살았다. 메소포타미아로 가는 길에 처음으로 약초와 채소를 먹었다. 고기를 먹는 것은 일찍부터 둘째 동산에 소개되었으나, 아담과 이브는 정규 식사(食事)의 일부로서 결코 고기를 먹지 않았다. 아담손이나 이브손이나, 또는 첫째 동산에서 태어난 첫째 세대의 다른 아이들도, 육식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다.
76:3.8 (850.4) 아담 족속의 문화적 업적과 지적 발달은 둘러싼 민족들을 크게 능가했다. 그들은 세 번째 알파벳을 만들었고, 그밖에도 현대의 예술ㆍ과학ㆍ문학의 선조인 많은 것의 기초를 놓았다. 여기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땅에서 그들은 글쓰기, 금속 가공, 도자기 만들기, 천 짜기 기술을 유지했고, 사람들은 그들이 만든 종류의 건축을 수천 년 동안 능가하지 못했다.
76:3.9 (850.5) 보라 종족들의 가정 생활은 그들이 살던 시대에 이상적이었다. 아이들은 농업, 장인(匠人)의 기술, 동물 기르기의 훈련 과정을 받거나, 아니면 사제ㆍ의사ㆍ선생이 되는 셋 사람의 세 가지 의무를 수행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76:3.10 (850.6) 그리고 셋 사람의 사제직을 생각할 때, 높은 생각을 가지고, 건강과 종교를 가르쳤던 고귀한 선생, 이 참 교육자들을 후일의 부족과 둘러싼 나라들에 있던 천하고 상업적인 사제직과 혼동하지 말지어다. 신과 우주에 관한 그들의 종교 개념은 진보되었고, 얼마큼 정확하며, 그들의 건강 규칙은 당대에 뛰어났고, 그 뒤로 사람들이 그들의 교육 방법을 결코 능가한 적이 없다.
76:4.1 (850.7) 아담과 이브는 사람 가운데 보라 인종, 유란시아에서 아홉 번째로 나타난 인종의 시조였다. 아담과 그의 자손은 푸른 눈을 가졌고, 보라 민족은 흰 살결과 밝은―노란 색, 붉은 색, 갈색―머리털의 특징을 가졌다.
76:4.2 (850.8) 이브는 아이를 낳을 때 산통을 겪지 않았다. 초기의 진화 종족들도 그렇지 않았다. 오로지 진화한 사람이 놋 족속, 그리고 나중에 아담 족속과 결합해서 생긴 혼합된 종족들이 심한 출산의 아픔을 겪었다.
76:4.3 (851.1)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에 있는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영양으로 에너지를 받았고, 음식과 빛을 먹고 살면서, 유란시아에서 밝혀지지 않은, 물질을 초월하는 어떤 에너지로 보충되었다. 유란시아에서 낳은 그들의 자손은 에너지를 흡수하고 빛을 순환시키는 부모의 자질을 물려받지 않았다. 그들은 한 가지 순환을 가지고 있었고, 피로 영양을 받는 인간 종류의 순환이었다. 오래 살기는 했어도 그들은 반드시 죽도록 고안되었다. 하지만 수명은 뒤잇는 각 세대마다 인간의 평균을 향하여 줄어들었다.
76:4.4 (851.2) 아담과 이브와 첫 세대의 아이들은 동물의 고기를 먹을 것으로 쓰지 않았다. 온통 “나무의 열매”만 먹고 살았다. 첫 세대 뒤에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유제품을 먹기 시작했지만,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이 고기 없는 식사를 계속 따랐다. 그들과 나중에 연합한 남쪽 부족들의 다수도 또한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이 채식하는 부족들의 대부분은 동쪽으로 옮겨 갔고, 이제는 인도 민족들 안에서 섞인 채로 살아남았다.
76:4.5 (851.3) 아담과 이브의 육체적ㆍ영적 시력(視力)은 모두 오늘날의 민족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들의 특별한 감각은 훨씬 더 날카로웠으며, 그들은 중도자와 천사 무리, 멜기세덱, 그리고 몰락한 영주 칼리가스티아를 볼 수 있었고, 영주는 그의 고귀한 후계자와 의논하러 몇 차례 왔다. 그들은 실패가 있은 뒤에 1백 년이 넘도록 이 하늘 존재들을 보는 능력을 지녔다. 아이들의 경우에 이 특별한 감각은 그다지 날카롭지 않았고, 뒤잇는 각 세대마다 줄어드는 경향이 있었다.
76:4.6 (851.4) 아담의 아이들에게는 대체로 조절자가 깃들었는데, 이는 그들 모두가 의심할 여지 없이, 살아남을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우수한 자손은 진화된 아이들처럼 두려움에 지배되지 않았다. 유란시아의 현대 민족들은 두려움이 아주 많은데, 종족의 신체를 개량하려는 계획을 일찍부터 그르쳐서, 너희 조상이 아담의 생명질을 아주 적게 받았기 때문이다.
76:4.7 (851.5) 물질 아들과 그 자손의 몸 세포는 행성에서 태어난 진화 존재보다 훨씬 더 질병에 저항력이 있다. 토착 종족들의 몸 세포는 이 땅에서 질병을 일으키는, 미세하고 극미한 살아 있는 유기체와 비슷하다. 이 사실은 어째서 유란시아 민족들이 그렇게 많은 신체의 질병을 물리치려고 과학적 노력을 기울여 그토록 많이 수고해야 하는가 설명한다. 너희 종족들이 아담의 생명을 더 지녔더라면, 너희는 훨씬 더 질병에 저항력이 있을 것이다.
76:4.8 (851.6) 유프라테스 강가의 둘째 동산에서 자리를 잡은 뒤, 아담은 그가 죽은 뒤에 세상을 이롭게 하려고, 그의 생명질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남기기를 택했다. 따라서, 이브는 12명으로 구성된 종족 개량 위원회의 우두머리에 임명되었고, 아담이 죽기 전 이 위원회는 유란시아에서 가장 높은 종류의 여자 1682명을 골랐으며, 이 여자들은 아담의 생명질로 아이를 배었다. 그들이 낳은 아이들은 112명을 제외하고, 모두 어른이 되기까지 자랐고, 그래서 이 방법으로 세계는 우수한 남자와 여자 1570명을 보탬으로 이득을 보았다. 이 어머니 후보자들은 둘러싼 모든 부족으로부터 선택되었고, 땅에 있는 대부분의 종족들을 대표했다. 대다수는 놋 족속의 가장 높은 핏줄로부터 선택되었고, 그들은 막강한 안드 종족의 옛 시조였다. 이 아이들은 각자 어머니의 부족 환경에서 태어나고 거기서 자랐다.
76:5.1 (851.7) 둘째 에덴을 세운 뒤에 오래지 않아서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뉘우침이 받아들일 만하고, 비록 그들이 그 세계의 필사자의 운명을 겪도록 정해지기는 했어도, 분명히 유란시아의 잠자는 생존자 계열에 들어갈 자격을 얻을 것이라고 공식 통지를 받았다. 멜기세덱들이 매우 감동스럽게 선포한 복음, 그들이 부활하고 회복될 것이라는 이 복음을 그들은 완전히 믿었다. 그들이 저지른 죄는 판단을 잘못한 때문이었고, 의식하면서 일부러 반항하여 저지른 죄는 아니었다.
76:5.2 (852.1)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 시민으로서 생각 조절자를 가지지 않았고, 유란시아에서 첫째 동산에서 활동했을 때 조절자가 그들에게 깃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필사자의 지위로 떨어진 뒤에 얼마 있다가, 그들은 안에 새로운 계심을 의식하게 되었고, 진지하게 뉘우침과 더불어, 인간의 지위가 조절자로 하여금 그들 안에 깃들 수 있게 만든 것을 깨달았다. 조절자가 안에 깃드심을 이렇게 안 것은 그들의 남은 생애를 통하여 내내, 아담과 이브의 마음을 크게 기쁘게 하였다. 사타니아의 물질 아들로서 실패한 것을 알았지만, 그들은 또한 우주에서 하늘 가는 아들로서, 파라다이스로 가는 생애가 아직도 그들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76:5.3 (852.2) 아담은 그가 행성에 도착함과 동시에 섭리 시대의 부활이 일어난 것을 알았고, 아마도 다음 서열의 아들이 오는 것과 관련하여 그와 아내가 다시 인격화되리라 믿었다. 그는 이 우주의 군주 미가엘이 오래지 않아 유란시아에 나타날 것을 몰랐다. 그는 다음에 도착할 아들은 아보날 계급에 속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담과 이브가 미가엘로부터 받은 말씀, 유일한 개인적인 말씀을 곰곰이 생각한 것은 무언가 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늘 위안이 되었다. 우정과 위로를 나타내는 다른 말씀 가운데, 전해온 이 소식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너희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형편을 고려했고, 내 아버지의 뜻에 늘 충성하려는, 너희 마음 속의 소망을 기억하였노라. 내가 유란시아로 올 때, 그 전에 내 영역에서 하위의 아들들이 너희를 부르지 않는다면, 너희는 필사의 잠의 품에서 깨어나도록 부름을 받으리라.”
76:5.4 (852.3) 그리고 이것은 아담과 이브에게 큰 신비였다. 그들은 이 말씀에서 아마도 그들이 특별히 부활한다는 약속 비슷한 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러한 가능성은 그들의 마음을 크게 기쁘게 했지만,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몸소 나타나시는 것과 관련된 부활이 있을 때까지 그들이 쉴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무슨 뜻인가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래서 에덴의 부부는 하나님의 아들 한 분이 언젠가 오시리라 언제나 선포했고, 그들이 실수하고 슬픔을 겪은 세계가 아마도, 이 우주 통치자가 파라다이스의 수여 아들로서 활동하려고 선택하는 영역이 될지 모른다는 믿음, 적어도 몹시 바라는 희망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알려 주었다. 이 소식은 너무 좋아서 참말이 아닌 듯 보였어도, 아담은 전쟁으로 상처받은 유란시아가 결국, 사타니아 체계에서 가장 운이 좋은 세계, 온 네바돈이 부러워하는 행성인 것이 입증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품어 보았다.
76:5.5 (852.4) 아담은 530 년 동안 살았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라고 할까 싶은 것으로 죽었다. 육체 작용이 단지 낡아 버렸던 것이다. 붕괴하는 과정이 고치는 과정을 차츰차츰 따라잡았고, 피할 수 없는 끝이 다가왔다. 이브는 심장이 약해져서 19년이나 앞서 죽었다. 그들은 모두 신성하게 예배하는 성전 가운데에 묻혔고, 이 성전은 그 거류지의 담이 완성된 뒤에 얼마 안 되어, 그들의 계획에 따라서 전에 지었다. 그리고 이것이 예배하는 장소의 마루 밑에, 이름나고 경건한 남녀를 묻는 관습의 기원이었다.
76:5.6 (852.5) 유란시아의 초물질 정부는 멜기세덱들의 지휘 하에 계속되었으나, 진화하는 종족들과 직접 육체로 접촉하는 일은 두절되었다. 행성 영주의 유형(有形) 참모진이 도착했던 그 아득히 먼 시절부터, 반과 아마돈의 시절을 거쳐서 아담과 이브가 도착할 때까지, 육체를 가진 우주 정부 대표들은 행성에서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담의 실패와 함께, 45만 년이 넘는 기간에 걸치는 이 체제는 끝이 났다. 영적 분야에서, 돕는 천사들은 생각 조절자들과 함께 줄곧 투쟁하였고, 그들 모두가 개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영웅처럼 일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시절에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도착할 때까지, 멀리 미치는 세계 복지를 위하여 아무런 포괄적 계획이 땅에 있는 필사자들에게 선포되지 않았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력과 참을성과 권한을 가지고, 불행한 유란시아를 개선하고 영적으로 회복하는 일을 진전시키기 위하여 기초를 쌓았다.
76:5.7 (853.1) 그러나 불운만이 유란시아의 운명은 아니었다. 이 행성은 또한 네바돈 지역 우주에서 가장 운이 좋았다. 조상의 잘못과 초기의 세계 통치자들의 실수가 행성을 그렇게 희망 없는 혼란된 상태로 곤두박질하게 만들고, 죄와 악으로 인하여 더욱 진창이 되었다면, 유란시아인은 바로 이 어두운 배경이 네바돈 미가엘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하는 성격을 드러낼 무대로서 이 세계를 고른 것을 모두 이득으로 계산해야 한다. 유란시아가 그 얽히고 설킨 사무를 바로잡는 데 창조 아들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유란시아에서 죄와 악은 창조 아들에게,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비할 데 없는 사랑과 자비와 참을성을 드러낼, 더군다나 뚜렷한 배경을 마련해 주었다.
76:6.1 (853.2) 아담과 이브는 그들이 언젠가,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서 저택 세계들에서 인생을 다시 시작하리라고 멜기세덱들이 약속한 것을 굳게 믿고서 죽음의 휴식으로 들어갔으며, 저택 세계 모두가 유란시아에서 보라 인종의 물질적 육체를 입고 사명을 시작하기 전 시절에 그들에게 아주 익숙한 세상이었다.
76:6.2 (853.3) 그들은 그 영역의 필사자의 망각, 의식 없는 잠에 빠져 오랫동안 쉬지 않았다. 아담이 죽은 뒤에 셋째 날, 경건한 장례식을 치르고 둘째 날에, 에덴시아의 임시 최고자의 지지를 받고, 구원자별에 계시고 미가엘을 대행하는 늘 하나된 이의 승인을 받은 라나포지의 명령을 가브리엘이 받았는데, 이것은 유란시아에서 아담의 실패가 있었을 때 탁월한 생존자들의 특별 점호를 지시했다. 그리고 유란시아 시리즈에서 제 26번 특별 부활을 지시하는 이 명령에 따라서, 아담과 이브는 첫째 동산의 체험에서 동료였던 1316명과 함께, 사타니아 저택 세계의 부활실에서 다시 인격을 얻고 다시 조립되었다. 충성한 많은 다른 사람은 아담이 도착할 때 이미 옮겨져 있었고, 뒤이어 잠자는 생존자와 자격을 갖춘 살아 있는 승천자들의 섭리 시대 판결이 내렸다.
76:6.3 (853.4)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에서 시민권을 얻을 때까지, 진보해서 올라가는 세계들을 빨리 거쳤고, 기원이 있던 행성에서 다시 한 번, 그러나 이때는 다른 계급의 우주 성격자의 일원으로서 거주자가 되었다. 그들은 영구(永久) 시민―하나님의 아들―로서 예루셈을 떠났는데, 하늘 가는 시민―사람의 아들―로서 돌아왔다. 그들은 체계의 서울에서 유란시아 근무에 즉시 부속되었고, 나중에 현재 유란시아의 자문ㆍ통제 기관을 구성하는 24 상담자 가운데 회원 자격을 받았다.
76:6.4 (854.1) 이렇게 유란시아의 행성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끝난다. 이것은 시련ㆍ비극ㆍ승리의 이야기, 좋은 의도를 가졌어도 속임에 넘어간 물질 아들과 딸에게, 적어도 개인적으로 승리한 이야기이며, 의심할 여지 없이, 마지막에 그들의 세계, 그리고 반란으로 뒤집히고 악에 시달렸던 그 거주자들에게는 궁극에 승리한 이야기이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보건대, 아담과 이브는 급속히 움직이는 문명에 힘차게 이바지했고, 인류의 생물학적 진보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들은 땅에서 큰 문화를 남겼지만, 아담의 유전(遺傳)이 일찍부터 묽어지고 궁극에 가라앉게 된 마당에, 그러한 진보된 문명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문명을 만드는 것은 민족이요, 문명이 민족을 만들지 않는다.
77:0.1 (855.1) 네바돈에서 사람 사는 세계들의 대부분은 하나 이상 되는 집단의 독특한 존재들을 품고 있는데, 그들은 그 영역의 필사자와 천사 계급 사이의 가운데쯤에 생명이 활동하는 수준에서 존재한다. 그래서 그들을 중도인(中道人)이라 부른다. 시간 시계에서 어쩌다가 생긴 듯하지만, 그들은 아주 널리 퍼져 있고 돕는 자로서 아주 소중하며, 그래서 우리는 모두, 행성의 통합된 봉사에서 그들을 하나의 필수 계급으로 받아들인 지 오래다.
77:0.2 (855.2) 유란시아에는 뚜렷이 다른 두 계급의 중도자들이 활동한다. 1차 군단, 곧 선임 군단은 달라마시아 시절에 생겼고, 2차 군단, 곧 젊은 집단의 기원은 아담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77:1.1 (855.3) 1차 중도자들은 유란시아에서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이 독특하게 서로 연결된 데서 기원을 가진다. 우리는 다른 세계와 다른 체계에서 비슷한 생물이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다른 기법으로 생겨났다.
77:1.2 (855.4) 진화하는 행성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연달아 수여되는 것은 그 땅의 영적 질서 에서 두드러진 변화를 일으키고, 때때로 한 행성에서 영적 대리자와 물질 대리자들이 서로 관계하는 작용을 아주 고쳐서,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는 것이 좋다. 영주 칼리가스티아 참모진의 유형(有形) 참모 1백 명의 지위는 바로 그러한 독특한 상호 관계를 보여준다. 그들은 예루셈에서 하늘 가는 상물질 시민으로서, 자식 낳는 특권이 없는 초물질 인간이었다. 유란시아에서, 행성에서 내려가서 봉사하는 자로서, (나중에 그들 가운데 더러가 그렇게 한 바와 같이) 그들은 물질 자손을 낳을 수 있고 남녀가 다른 물질 인간이었다. 어떻게 이 1백 명이 초물질 수준에서 부모 노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지만,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유형 참모진의 남자와 여자가 초물질로 (성교 아닌 방법으로) 연결한 것은 처음으로 1차 중도자 자식이 나타나게 만들었다.
77:1.3 (855.5) 필사자와 천사(天使), 이 두 수준 중간에 있는 이 계급의 생물은, 영주 본부의 사무를 수행하는 데 크게 쓸모가 있으리라는 것이 즉시 발견되었고, 따라서 유형 참모진에서 각 쌍은 비슷한 존재를 생산하라고 허락을 받았다. 이 노력은 첫째 집단에서 중도인 50명을 낳았다.
77:1.4 (855.6) 이 독특한 집단의 일을 1년 동안 지켜본 뒤에, 행성 영주는 제한 없이 중도자의 생산을 허가했다. 이 계획은 자식 낳는 힘이 계속되는 한 수행되었고, 따라서 최초 집단, 50,000명이 생겨났다.
77:1.5 (856.1) 각 중도자를 낳는 사이에 반년의 기간이 끼었고, 그러한 존재 1천 명이 각 쌍에게 태어나자, 결코 더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1천 번째 자식이 나타난 뒤에 어째서 이 힘이 소모되었는지 전혀 설명할 수 없다. 아무리 더 실험해도 실패밖에 아무 결과가 없었다.
77:1.6 (856.2) 이 생물은 영주의 행정에서 정보(情報) 군단을 구성했다. 그들은 두루 돌아다녔고, 세계의 종족들을 연구하고 지켜보고, 행성 본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인간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영주와 그 참모진의 작업에 다른 소중한 봉사를 베풀었다.
77:1.7 (856.3) 이 체제는 행성에서 반란이 있던 비극의 시절까지 이어졌는데, 이 반란은 1차 중도자 가운데 5분의 4를 조금 넘게 덫에 걸리게 만들었다. 충성한 무리는 멜기세덱 관리자들을 위한 봉사에 들어갔고, 아담의 시절까지, 이름뿐의 지도자인 반의 밑에서 활동했다.
77:2.1 (856.4) 이것이 유란시아 중도인의 기원ㆍ성품ㆍ활동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두 계급―1차와 2차―사이의 친척 관계는, 행성에서 반란이 있던 시절부터 아담의 시절까지, 영주 칼리가스티아의 유형 참모진의 모반 참모들로부터 내려온 혈통을 따르기 위해서, 이 시점에서 1차 중도자 이야기를 중단하는 것을 필요하게 만든다. 둘째 동산의 초기 시절에, 2차 계급 중도인(中道人) 조상의 절반을 제공한 것은 바로 이 유전의 혈통이었다.
77:2.2 (856.5) 영주의 참모진에서 육체를 가진 참모들은 그들의 특별 계급이 안돈 부족의 선택된 핏줄의 품질과 합쳐진, 통합 품질을 몸에 담은 자손을 낳는 계획에 참여할 목적으로, 남자와 여자로 구성되었다. 이 모두가 나중에 아담이 나타날 것을 예상한 것이다. 생명 운반자들은 영주 참모진의 합동 자손과 아담과 이브의 1대 자손의 연합을 포함하는, 새 종류의 필사자를 전에 계획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새 계급의 행성 인간을 예상하여 계획을 세웠고, 이 사람들이 인간 사회에서 선생이자 통치자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한 존재들은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다스리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이 거의 완전히 유산되었으니까, 유란시아가 이처럼 인자한 지도력과 비할 데 없는 문화를 가진, 얼마나 훌륭한 귀족을 빼앗겼는지 우리는 결코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유형 참모진이 나중에 자식을 낳았을 때, 그것은 반란이 있은 뒤, 그들이 체계의 생명 흐름과 연락을 빼앗긴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77:2.3 (856.6) 반란 이후 시대에 유란시아에는 특별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 위대한 문명이―달라마시아의 문화가―붕괴하고 있었다. “그 시절에 네비림(놋 족속)이 땅에 있었고, 이 신들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가서 저희에게 아이들을 낳아 주었으니, 이 아이들은 ‘옛날의 용사’요 ‘이름난 사람’이었더라.” 그 참모진과 그 초기 후손은 도저히 “신들의 아들들”이라 할 수 없어도, 그 아득한 시절에 진화하는 필사자들은 이들을 그렇게 여겼다. 전통에 따르면 이들의 키조차 과장되었다. 그러면 이것이 땅에 내려와서, 거기서 사람의 딸들과 함께 고대(古代) 영웅의 민족을 낳은 신들에 대한, 거의 보편적인 민속(民俗) 이야기의 기원이다. 그리고 이 모든 전설은 둘째 동산에서 나중에 나타나는 아담 족속의 종족 혼합과 더욱 혼동하게 되었다.
77:2.4 (857.1) 영주 참모진의 유형(有形) 참모 1백 명이 안돈의 인간 혈통의 생식질(生殖質)을 지녔으니까, 그들이 성교로 번식에 들어가면, 그 후손은 다른 안돈 족속 부모의 자손을 아주 닮을 것이라고 자연히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그 참모진에서 모반자 60명, 곧 놋을 따르던 자들이 실제로 성교로 번식에 들어갔을 때, 생겨난 아이들은 거의 모든 면에서 안돈 족속과 산긱 민족들보다 훨씬 우수한 것이 판명되었다. 예기하지 않았던 이 탁월성은 육체와 지능의 품질 뿐 아니라, 영적 능력에서도 특징이 나타났다.
77:2.5 (857.2) 놋 족속의 첫 세대에서 나타나는 이 돌연 변이의 특성은 안돈 족속 생식질의 유전 인자(因子)의 배치와 화학적 구성 요소에서 일어난 어떤 변화로부터 생겨났다. 참모들의 몸 안에 있는, 생명을 유지하는 사타니아 체계의 강력한 회로가 이런 변화를 일으켰다. 이 생명 회로는 특화된 유란시아 형의 염색체로 하여금 네바돈에서 예정한 생명 표현 중에 사타니아 특화의 표준화된 형태와 비슷하게 다시 조직하도록 만들었다. 체계의 생명 흐름의 작용으로 생식질을 변화시키는 이 방법은 유란시아 과학자들이, X선을 이용하여, 식물과 동물의 생식질을 수정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77:2.6 (857.3) 이렇게 놋 민족들은 안돈 족속 기여자의 몸에서 유형 참모들의 몸으로 아발론 외과 의사들이 옮긴 생명질에서 일어난 변화, 어떤 특이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변화로부터 생겨났다.
77:2.7 (857.4) 생식질을 기여한 안돈 족속 1백인은 그 대신 생명나무를 보완하는 유기체를 소유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타니아 생명의 흐름이 마찬가지로 그들의 몸에 투입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참모진을 따라서 반란에 참여한 수정된 안돈 족속 44명도 자기들끼리 짝짓고, 놋 민족의 상급 혈통에 크게 이바지했다.
77:2.8 (857.5) 안돈 족속의 수정된 생식질을 지닌 104명을 포함하는 이 두 집단은 놋 족속의 조상을 이루며, 그들은 유란시아에 나타난 여덟째 종족이었다. 유란시아에서 인간 생명의 이 새로운 모습은, 이것이 예기하지 않았던 발전의 하나라는 것을 제쳐놓고, 생명 수정 세계로서 이 행성을 이용하는 최초의 계획이 작용하는 또 다른 국면을 나타낸다.
77:2.9 (857.6) 순수 핏줄의 놋 족속은 훌륭한 종족이었으나, 차츰 땅의 진화 민족들과 함께 섞였고, 얼마 안 되어 크게 질이 저하되었다. 반란이 있은 지 1만 년이 되자, 그들의 평균 수명은 진화 종족들보다 거의 길지 않은 점까지 쇠퇴하였다.
77:2.10 (857.7) 놋 족속의 후기 수메르 후손이 만든 진흙 서판 기록을 고고학자들이 파낼 때, 수메르 왕들의 목록이 몇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기록들이 거슬러 올라갈수록, 개별 임금의 통치는 25년이나 30년에서부터 150년 이상으로 길어진다. 이 옛 왕들의 통치가 이렇게 길어지는 것은 옛날 놋 족속 통치자들 가운데 더러는 (영주 참모진의 직계 후손) 후일에 계승한 자들보다 더 오래 살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또한 왕조를 달라마시아까지 거슬러 올라가 연장하려고 애쓴 것을 가리킨다.
77:2.11 (857.8) 그렇게 오래 산 개인들의 기록은 또한 시간을 재는 단위로서 달과 해를 혼동했기 때문이다. 성서에 아브라함의 족보에서, 그리고 중국인의 옛 기록에서도 이것을 관찰할 수 있다. 28일로 된 한 달, 곧 한 기간을 나중에 소개된, 350일이 넘는 해와 혼동한 것이 사람이 그토록 오래 살았다는 전통에 책임이 있다. 9백 “해”가 넘도록 산 사람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 기간은 70년이 채 못되고, 그러한 생애는, 나중에 “고희(古稀)”라고 부르게 되었다시피, 오랜 세월 동안 대단히 나이 많은 것으로 여겼다.
77:2.12 (858.1) 한 달을 28일로 시간을 계산하는 것은 아담의 시절 이후로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나 에집트인이 약 7천 년 전에, 달력의 개혁에 착수했을 때, 그들은 아주 정밀하게 일을 했고, 365일로 된 1년을 소개했다.
77:3.1 (858.2) 달라마시아가 물 밑에 가라앉은 뒤에, 놋 족속은 북쪽과 동쪽으로 옮겨 갔고, 대번에 새 도시 딜문을 그들의 민족과 문화의 본부로 세웠다. 놋이 죽은 뒤에 약 5만 년이 되어, 영주 참모진의 후손이 새 도시 딜문을 바로 둘러싸는 땅에서 생계를 잇기에 너무 많아졌을 때, 그리고 그들이 뻗어나가서 경계에 인접하는 안돈 및 산긱 부족들과 서로 결혼한 뒤에, 그들 종족의 단결을 유지하려고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그 지도자들의 머리에 떠올랐다. 따라서 부족들의 회의가 열렸고, 많이 의논을 거친 뒤에, 놋의 후손 바블롯의 계획이 승인되었다.
77:3.2 (858.3) 바블롯은 그때 그들이 차지한 영토의 중심에 위세가 당당해 보이는 종족 찬양의 전당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이 전당(殿堂)에는 세계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그런 종류의 탑을 세울 것이었다. 그 탑은 한때 그들이 위대했던 것을 기리는 대단한 기념비가 될 것이었다. 이 기념비를 딜문에 세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더러는 그들의 첫째 서울 달라마시아가 바다에 가라앉았다는 전통을 기억하면서, 그렇게 큰 건물은 바다의 위험으로부터 충분히 떨어진 곳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77:3.3 (858.4) 바블롯은 새 건축물이 앞날에 놋 족속의 문화와 문명(文明)의 중심에서 노른자가 되도록 계획했다. 그의 조언(助言)이 마침내 지배했고, 그의 계획에 따라서 공사가 시작되었다. 새 도시는 탑을 설계하고 건축한 자의 이름을 따서 바블롯이라고 이름지을 것이었다. 이 위치는 나중에 바블로드로, 그리고 결국 바벨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77:3.4 (858.5) 그러나 놋 족속은 이 사업의 계획과 목적에 관하여 아직도 얼마큼 감정이 갈라져 있었다. 지도자들도 건축 계획이나, 건물이 완성된 뒤에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관하여, 전부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았다. 4년 반 동안 일한 뒤에, 그 탑을 세우는 목적과 동기에 관하여 큰 논쟁이 벌어졌다. 그 싸움이 아주 극심해서, 모든 작업이 중지되었다. 먹을 것을 나르는 자들이 분쟁의 소식을 퍼뜨렸고, 부족들의 큰 무리가 건축터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탑을 세우는 목적에 관하여, 세 가지 다른 관점이 제안되었다.
77:3.5 (858.6) 1. 가장 큰 무리는 거의 절반이었는데, 그들은 놋 족속의 역사와 종족 우월성을 기리는 기념비인 탑을 짓는 것을 보고 싶어했다. 그들은 그 탑이 모든 미래 세대의 칭찬을 얻을 만큼 크고 위세 있는 구조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77:3.6 (858.7) 2. 다음으로 가장 큰 당파는 딜문의 문화를 기념하도록 고안된 탑을 바랐다. 그들은 바블롯이 큰 상업ㆍ예술ㆍ제조업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77:3.7 (859.1) 3. 가장 적은 소수파는 탑을 세우는 것은 칼리가스티아 반란에 참여한 그들 선조의 어리석은 짓을 속죄하는 기회를 마련한다고 주장했다. 그 탑을 만민의 아버지를 예배하는 데 바쳐야 한다, 새 도시를 짓는 목적 전부가 달라마시아를 대신하는 것―둘러싼 미개인들을 위하여 문화와 종교의 중심으로서 활동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77:3.8 (859.2) 종교적 집단의 의견은 재빨리 부결되었다. 대다수는 그들의 조상이 반란을 저지른 죄가 있다는 가르침을 부인했고, 그러한 종교적 낙인을 분개하였다. 그 논쟁의 세 관점 중에 하나를 처리하고, 다른 둘을 토론으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싸움에 빠졌다. 종교파, 곧 비전투자들은 남쪽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달아났고, 한편 동료들은 거의 말살될 때까지 싸웠다.
77:3.9 (859.3) 약 1만 2천 년 전에 바벨의 탑을 세우려는 두 번째 시도가 있었다. 안드 족속의 혼합 종족들(놋 족속과 아담 족속)은 처음 구조의 폐허 위에 새 전당을 세우는 일에 착수했으나, 그 사업을 위하여 충분한 지원이 없었다. 그 사업은 허세부리는 자체의 무게 때문에 무너졌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바벨의 땅으로 알려졌다.
77:4.1 (859.4) 바벨 탑 때문에 서로 죽이는 싸움이 즉시 가져온 결과는 놋 족속의 분산이었다. 이 내란은 피가 순수한 놋 족속의 수를 크게 줄였고, 여러 면에서 그들이 아담이 오기 전에 큰 문명을 세우지 못한 데 책임이 있었다. 이때부터 계속하여, 놋 족속의 문화는 아담의 피가 주입(注入)되어 개량될 때까지, 12만 년이 넘도록 쇠퇴했다. 그러나 아담의 시절에도 놋 족속은 여전히 유능한 민족이었다. 그들의 혼합된 후예 중에 많은 사람이 동산 건축자 속에 끼었고, 반의 무리에서 지휘관 몇 명은 놋 족속이었다. 아담의 참모진에서 일하던 가장 유능한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이 종족에 속했다.
77:4.2 (859.5) 놋 족속의 4대 중심 가운데 셋은 바블롯 투쟁이 있고 나서 즉시 세워졌다:
77:4.3 (859.6) 1. 서부, 곧 시리아의 놋 족속. 민족주의나 종족의 기념을 부르짖는 자들의 나머지는 북쪽으로 여행했고, 안돈 족속과 뭉쳐서 메소포타미아 북서쪽에, 후일에 놋 족속의 중심을 세웠다. 이것은 흩어지는 놋 족속 중에서 가장 큰 무리였고, 나중에 나타나는 아씨리아인의 혈통에 크게 기여하였다.
77:4.4 (859.7) 2. 동부, 곧 엘람의 놋 족속. 문화와 상업을 주장하던 자들은 큰 떼를 지어 동쪽에 엘람으로 옮겨 갔고, 거기서 혼합된 산긱 부족들과 뭉쳤다. 3만에서 4만 년 전에 엘람 족속은 대체로 그 성품이 산긱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둘러싼 미개인들보다 우수한 문명을 줄곧 유지했다.
77:4.5 (859.8) 둘째 동산이 세워진 뒤에, 근처에 있는 이 놋 족속의 촌락을 “놋의 땅”이라고 언급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리고 이 놋 집단과 아담 족속 사이에 오랫동안 비교적 평화로웠던 기간에 그 두 종족이 크게 섞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아들들(아담 족속)이 사람의 딸들(놋 족속)과 서로 짝짓는 것이 점점 더 풍습이 되었기 때문이다.
77:4.6 (860.1) 3. 중부, 곧 수메르 이전의 놋 족속.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입구에 있던 작은 집단은 종족 통일성을 더 많이 유지했다. 그들은 몇천 년 동안 버티었고, 궁극에는 아담 족속과 섞여서 유사(有史) 시대에 수메르 민족을 세웠던 놋 족속의 조상을 이루었다.
77:4.7 (860.2) 이 모두가 어떻게 수메르인이 아주 갑자기, 신비하게, 메소포타미아에서 활동 무대에 나타났는가 설명한다. 학자들은 결코 이 부족들을 추적해서 수메르인의 시초까지 거슬러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 수메르인은 달라마시아가 바다에 가라앉은 뒤에, 20만 년 전에 기원을 가졌다. 세상의 다른 곳에서 기원을 가진 흔적이 없이, 이 고대의 부족들은 성전(聖殿)과 금속 가공, 농업ㆍ동물ㆍ도기(陶器), 천 짜기, 상법ㆍ민법전, 그리고 종교 예식과 오래 된 글 체계를 포함하여, 완전히 성장한 우수한 문화를 가지고 문명의 지평선에 갑자기 나타난다. 유사(有史) 시대의 초기에 그들은 달라마시아의 알파벳을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고, 딜문에서 기원을 가진 특이한 글쓰기 체계를 채택하였다. 수메르어는 세상에서 거의 사라졌어도, 셈어가 아니었다. 그 말은 이른바 아리아인의 언어들과 공통되는 것이 많았다.
77:4.8 (860.3) 수메르인이 남긴 정교한 여러 기록은, 옛날의 딜문 도시 가까이에, 페르시아 만에 자리잡은 한 놀라운 촌락의 위치를 묘사한다. 에집트인은 고대에 영화로웠던 이 도시를 딜맛이라고 불렀고, 한편 나중에 아담화되어 버린 수메르인은 첫째와 둘째 놋 족속의 도시를 달라마시아와 혼동하였으며, 셋을 모두 딜문이라 불렀다. 고고학자들은 이미 고대 수메르인의 이 진흙 서판들을 발견했는데, 이 서판들은 “문명화되고 문화 생활의 본보기를 가지고 신들이 인류에게 처음에 복을 내렸던,” 땅에 있는 이 천국을 언급하였다. 사람과 하나님의 천국, 딜문을 기술하는 이 서판들은 여러 박물관의 먼지 낀 선반에서 이제 말없이 쉬고 있다.
77:4.9 (860.4) 수메르인은 첫째와 둘째 에덴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담 족속과 널리 서로 결혼했는데도, 북쪽에 있는 동산 거주자들을 줄곧 외래 민족으로 여겼다. 더 오래 된 놋 족속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수메르인의 마음은, 딜문 시의 웅장함과 천국의 전통을 우대하여, 후일의 이 영광스러운 추억을 무시하도록 이끌었다.
77:4.10 (860.5) 4. 북부 놋 족속과 아마돈 족속―반 족속. 이 집단은 바블롯의 전투보다 이전에 생겼다. 가장 북쪽에 있는 이 놋 족속은 놋과 그 후계자들의 지휘를 버리고, 반과 아마돈의 지휘를 따른 자들의 후손이다.
77:4.11 (860.6) 초기에 반의 동료들 가운데 더러는 아직도 그의 이름을 지닌 호수의 물가 근처에 나중에 정착했고, 이 장소 근방에서 그들의 전통이 생겨났다. 아라랏 산이 그들의 신성한 산이 되었고, 시나이 산이 히브리인에게 가졌던 것과 대체로 같은 중요성을 후일의 반 족속에게 가졌다. 1만 년 전에 아씨리아인의 반 족속 조상은, 일곱 계명으로 된 도덕률을 아라랏 산에서 신들이 반에게 주었다고 가르쳤다. 반과 그의 동료 아마돈이 산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행성으로부터 산 채로 들려 올라갔다고 그들은 굳게 믿었다.
77:4.12 (860.7) 아라랏 산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있는 신성한 산이었고, 이 옛 시절에 관한 너희 전통의 상당한 부분이 바빌로니아인의 홍수 이야기와 연결되어 얻어졌으니까, 아라랏 산과 그 지역이 노아와 널리 홍수가 있었다는 후일의 유대인 이야기에 섞여 들어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77:4.13 (860.8) 기원전 약 35,000년에 아담손은 그의 문명 중심을 세우려고 가장 동쪽에 있는 옛 반 족속의 촌락들 가운데 하나를 방문했다.
77:5.1 (861.1) 2차 중도자의 족보에 관하여 놋 족속 내력(來歷)의 윤곽을 그렸으니까, 이 이야기는 이제 그들의 족보에서 절반인 아담 족속을 고려해야 한다. 2차 중도자들은 또한 유란시아의 보라 인종의 맏아들, 아담손의 손자이기 때문이다.
77:5.2 (861.2) 아담손은 아담과 이브의 아이들 가운데,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땅에 남아 있기로 결정한 무리 속에 있었다. 자, 아담의 이 맏아들은 반과 아마돈으로부터 북쪽의 고지(高地)에 있는 그들의 집 이야기를 가끔 들었고, 둘째 동산이 세워진 뒤에 얼마 있다가 그가 어려서 꿈에 그리던 이 땅을 찾아서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77:5.3 (861.3) 이때 아담손은 120살이었고, 첫째 동산에서 태어난 순수 핏줄의 아이 32명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부모와 함께 남아서 둘째 동산을 발전시키는 데 부모를 돕고 싶어했지만, 그의 짝과 아이들을 잃어버려서 마음이 크게 어수선했는데, 이들은 최고자들의 피보호자가 되기로 한 아담의 다른 아이들과 함께, 모두 에덴시아로 가기로 했다.
77:5.4 (861.4) 아담손은 부모를 유란시아에 버리고 가지 않으려 했고, 어려움이나 위험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둘째 동산에서 가진 교제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초기에 방어하고 건축하는 활동을 추진하려고 많이 일했지만, 기회가 닿는 대로 일찍 북쪽으로 떠나려고 작정하였다. 비록 그의 출발은 온통 즐거웠지만, 아담과 이브는 큰아들을 잃고, 그가 결코 돌아오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를 낯설고 적대하는 세계로 보내는 것을 많이 슬퍼했다.
77:5.5 (861.5) 27명의 일행이 아담손을 따라서, 그가 어려서 꿈에 그리던 이 사람들을 찾아갔다. 3년이 조금 넘자 아담손의 일행은 실제로 그들의 모험의 대상이었던 그 목표를 찾아냈고, 이 사람들 가운데서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스무 살 난 여인을 발견했는데, 그 여자는 영주 참모진의 순수 핏줄을 가진 후예의 마지막이라고 주장했다. 이 여자 라타는 자기의 조상은 모두 영주의 몰락한 참모진 가운데 두 사람의 후손이라고 말했다. 그 여자는 그 종족에서 마지막 사람이었고, 살아 있는 형제나 자매가 아무도 없었다. 그 여자는 짝짓지 않기로 거의 작정했고, 자식이 없이 죽으리라 거의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라타는 당당한 아담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라타가 에덴의 이야기, 반과 아마돈의 예언이 어떻게 정말로 이루어졌는가 들었을 때, 그리고 동산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라타는 오직 한 가지 생각에―아담의 아들인 이 상속자와 결혼하려는 생각에―휩싸였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재빨리 아담손에게도 생겼다. 석 달이 조금 지나서 그들은 결혼했다.
77:5.6 (861.6) 아담손과 라타는 아이가 67명인 가족을 거느렸다. 그들은 위대한 혈통을 가진 세계 지도자들을 낳았지만, 그보다 무엇인가 더 하였다. 이 두 존재가 정말로 초인간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네 번째마다 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독특한 계급이었다. 그 넷째 아이는 흔히 눈에 보이지 않았다. 세계 역사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라타는 크게 걱정되었다―미신을 믿기까지 했다―그러나 아담손은 1차 중도자의 존재를 잘 알았고, 무언가 비슷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상하게 행동하는 아이가 두 번째로 생겼을 때, 하나가 남자이고 하나가 여자였으니까, 그는 이들을 짝지어 주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것이 2차 계급 중도자의 기원이다. 1백 년 안에, 이 현상이 그치기 전에, 거의 2천 명이 태어났다.
77:5.7 (862.1) 아담손은 396살까지 살았다. 여러 번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아보려고 돌아왔다. 7년마다 그와 라타는 남쪽으로 둘째 동산으로 여행했고, 그동안에 중도자들은 그의 민족의 복지에 관하여 그에게 정보를 알려 주었다. 아담손의 일생 동안에 그들은 진리와 올바름을 찾는 새롭고 독립된 세계 중심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봉사했다.
77:5.8 (862.2) 아담손과 라타는 이렇게 이 놀라운 조수(助手) 군단을 지휘하였고, 그들은 상급의 진리를 퍼뜨리는 데, 또 높은 영적ㆍ지적ㆍ육체적 생활 기준을 퍼뜨리는 데, 오랜 생애에 걸쳐서 그들과 함께 수고했다. 그리고 세상을 개선하려고 이렇게 노력한 결과는 후일의 후퇴로 인하여 결코 완전히 빛을 잃지는 않았다.
77:5.9 (862.3) 아담손 족속은 아담손과 라타의 시절부터 거의 7천 년 동안, 높은 문화를 유지했다. 나중에 그들은 이웃의 놋 족속과 안돈 족속과 섞이게 되었고, 또한 “고대의 힘센 사람들” 사이에 끼었다. 그리고 그 시대에 있었던 진보의 얼마큼은 지속하여 후일에 유럽 문명으로 꽃핀 문화적 가능성의 잠재 부분이 되었다.
77:5.10 (862.4) 이 문명의 중심은 코펫 닥 가까이, 카스피 바다의 남단(南端)의 동쪽 지역에 자리잡았다. 투르키스탄의 구릉 지대에서 조금 올라가서, 한때 보라 인종의 아담손 족속의 본부였던 것의 자취가 있다. 코펫 산맥의 낮은 구릉 지대에 놓인, 좁고 비옥한 옛 지대에 자리잡은 이 고지의 터에서, 여러 기간에 연달아 네 가지 다채로운 문화가 일어났는데, 각기 다른 네 집단의 아담손 후예가 이것들을 육성하였다. 그들 가운데 둘째 집단이 서쪽을 향하여 그리스와 지중해의 섬들로 옮겨갔다. 아담손의 후예의 나머지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오는 마지막 안드 인파의 섞인 핏줄과 함께, 북쪽과 서쪽으로 이주해서 유럽으로 들어갔고, 그들도 또한 인도를 침입한 안드ㆍ아리아 족속 사이에 끼었다.
77:6.1 (862.5) 1차 중도자들은 거의 초인간 기원을 가졌으나, 2차 서열은 순수한 아담 족속의 핏줄이, 선임 집단의 부모인 공통된 조상의 후손,[1] [1713] 인간화 된 후손과 뭉쳐서 생긴 자손이다.
77:6.2 (862.6) 아담손의 아이들 가운데 2차 중도자의 특이한 조상이 꼭 16명 있었다. 독특한 이 아이들은 남녀별로 똑같이 나누어졌고, 각 쌍은 성의 결합과 비성(非性) 결합을 이용하는 통합 방법으로 70일마다 2차 중도자 하나를 낳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땅에서 그 전에 결코 가능하지 않았고, 그 뒤에 그런 일이 생긴 적도 없다.
77:6.3 (862.7) 이 아이들 열 여섯 명은 (그들의 특이한 점을 제외하면) 그 땅의 필사자로서 살다가 죽었으나, 전기로 에너지를 받는 그들의 자손은 줄곧 살아 있으며, 필사 육체의 한계에 지배되지 않는다.
77:6.4 (862.8) 여덟 쌍은 각자 궁극에 중도자 248명을 낳았고, 이렇게 최초의 2차 군단―1984명―이 생겨났다. 2차 중도자에는 여덟 가지 하위 집단이 있다. 이들은 A-B-C 첫째ㆍ둘째ㆍ셋째, 이런 식으로 부른다. 그리고 나서 D-E-F 첫째ㆍ둘째,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77:6.5 (862.9) 아담의 실패가 있은 뒤에 1차 중도자들은 멜기세덱 관리자들에게 봉사하는 일로 되돌아갔고, 한편 2차 집단은 아담손 중심에, 그가 죽을 때까지 부속되었다. 이 2차 중도자 가운데 33명, 즉 아담손이 죽었을 때 그들 조직에서 우두머리였던 자들은 그 계급 전부를 멜기세덱들에게 봉사하는 일로 휩쓸고 가서, 1차 군단과 연결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것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동료들을 버리고 행성 관리자들에게 봉사하는 일로 단체로 넘어갔다.
77:6.6 (863.1) 아담손이 죽은 뒤에, 나머지 2차 중도자들은 유란시아에서 이상하고 조직되지 않은 채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영향력이 되었다. 그때부터 마키벤타 멜기세덱의 시절까지, 그들은 불규칙하고 조직되지 않은 존재를 이끌어 왔다. 그들은 어느 정도 이 멜기세덱의 통제를 받았지만, 그리스도 미가엘의 시절까지 여전히 못된 일을 많이 저질렀다. 미가엘이 땅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그들은 모두 앞날의 운명에 관하여 마지막 결정을 내렸고, 충성스러운 대다수는 그때 1차 중도자들의 지휘를 받으려고 지원하였다.
77:7.1 (863.2) 1차 중도자들의 대다수는 루시퍼 반란이 터졌을 때, 죄에 빠졌다. 행성 반란의 참상이 계산되었을 때, 다른 손실 가운데도, 최초의 50,000명 가운데 40,119명이 칼리가스티아 탈퇴에 참가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77:7.2 (863.3) 최초에 2차 중도자의 수는 1984명이었는데, 이 가운데에서 873명은 미가엘의 통치와 제휴하지 못했고, 오순절 날에 유란시아가 행성 심판을 받는 것과 관련하여, 정식으로 구금되었다. 아무도 이 타락한 자들의 앞날을 내다볼 수 없다.
77:7.3 (863.4) 두 집단의 반역한 중도자들은 체계 반란 사건의 마지막 판결을 기다리면서, 이제 보호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의 행성 섭리 시대가 개시되기 전에, 땅에서 이상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
77:7.4 (863.5) 이 불충한 중도자들은 어떤 상황에 필사자의 눈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고, 비엘세붑의 동료들에게 이것이 특히 참말이었는데, 비엘세붑은 배신한 2차 중도자들의 두목이었다. 그러나 이 독특한 생물은 그리스도가 죽고 부활할 때까지 땅에 또한 있던, 어떤 반역한 케루빔 및 세라핌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옛날 저자들 가운데 더러는 이 반역한 중도인을 악령과 악마로 불렀고, 배반한 세라핌을 악한 천사로 불렀다.
77:7.5 (863.6) 파라다이스 수여 아들이 일생을 산 뒤에, 어느 세계에서나 악한 영들은 어떤 필사자의 지성도 지배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있던 시절 이전에―생각 조절자들이 보편적으로 오고 주의 영이 모든 육체에게 퍼부어지기 전에―이 반역 중도자들은 실제로 어떤 열등한 필사자의 지성에 영향을 미치고 얼마큼 그들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었다. 조절자가 초인간 지성 존재들과 연락하는 동안에, 인격으로부터 사실상 떨어져 있을 때 충실한 중도인이 유란시아 운명 예비군의 인간 지성과 접촉하는 유능한 보호자로서 일할 때 작용하는 방법과 아주 비슷하게, 이것이 이루어졌다.
77:7.6 (863.7) “그리고 저희가 그에게 온갖 종류의 아픈 군중을 데리고 왔더니, 저희는 귀신 들린 자와 미친 자들이었더라”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단지 비유적 표현은 아니다. 예수는 미친 것과 악령에 들린 것의 차이를 알고 헤아렸다. 하지만 그 시대와 세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머리 속에, 이 두 상태는 크게 혼동되었다.
77:7.7 (863.8) 오순절 이전에도, 어떤 모반한 영도 정상 인간의 지성을 지배할 수 없었고, 그날 이후로 열등한 필사자의 허약한 지성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도무지 없다. 진리의 영이 도착한 뒤로, 귀신을 쫓아냈다고 생각한 것은 귀신 들린다는 관념을 히스테리ㆍ광기(狂氣), 정신 박약과 혼동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미가엘의 수여가 유란시아에 있는 모든 인간의 지성이 귀신에 들릴 가능성으로부터 영원히 해방했다고 해서, 그런 일이 옛 시대에 일어나지 않았다고 상상하지 말지어다.
77:7.8 (864.1) 반역한 중도자 무리 전체가 현재 에덴시아 최고자들의 명에 따라서 죄수로 붙들려 있다. 그들은 이제 더 짓궂은 심술로 이 세상을 누비고 다니지 않는다. 생각 조절자의 계심과 상관 없이, 진리의 영을 모든 육체에 퍼붓는 것은 어떤 종류나 모습의 불충한 영들이 가장 박약한 인간 지성조차도 다시 한 번 침입하는 것을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오순절 이후로 귀신 들리는 것과 같은 일은 결코 다시 일어날 수 없다.
77:8.1 (864.2) 최근에 이 세상의 판결이 있을 당시에, 잠자고 있던, 시간 세계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미가엘이 옮겼을 때, 중도인들이 뒤에 남게 되었다. 행성의 영적 일과 준(準) 영적 일을 돕기 위하여 남은 것이다. 그들은 이제 두 계급을 포함해서, 10,992명에 이르는 단일 군단으로서 활동한다. 현재 각 서열의 선임 회원이 번갈아서 유란시아 연합 중도자들을 다스린다. 오순절 뒤에 조금 있다가 한 집단으로 통합된 뒤로, 이 체제가 생겼다.
77:8.2 (864.3) 더 나이 든 서열, 곧 1차 서열은, 대체로 숫자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1-2-3 첫째, 4-5-6 첫째, 이런 따위의 이름을 흔히 받는다. 유란시아에서 아담의 중도자들은, 1차 중도자의 숫자 명칭과 구별하려고, 알파벳 순서로 부른다.
77:8.3 (864.4) 두 계급은 영양과 에너지 흡수에 관해서 비물질 존재이지만, 그들은 인간의 특성을 많이 가지며, 너희의 예배 뿐 아니라 유머도 즐기고 알아들을 수 있다. 필사자에게 딸려 있을 때, 그들은 인간의 일하고 쉬고 노는 정신에 젖는다. 그러나 중도자들은 잠자지 않으며, 자식을 낳는 능력도 없다. 어떤 의미에서 2차 집단은 남자답고 여자다운 모습에 따라서 구별되며, 흔히 “그” 또는 “그 여자”로 언급된다. 그들은 흔히 그런 쌍을 이루어 일한다.
77:8.4 (864.5) 중도자는 사람이 아니고 천사도 아니지만, 2차 중도자의 성품은 천사보다 사람에 가깝다. 그들은 어떻게 보면 너희 종족의 출신이며, 따라서 인간 존재와 접촉할 때, 대단히 이해심이 많고 동정심이 있다. 그들은 인류의 여러 종족을 위해서, 또 이들과 함께 하는 일에 세라핌에게 소중하며, 두 계급은 필사자에게 개인 수호자로 일하는 세라핌에게 필수이다.
77:8.5 (864.6) 유란시아 연합 중도자들은 타고난 자질과 얻은 기술에 따라서, 행성의 세라핌들과 함께 봉사하도록 다음 집단으로 조직된다:
77:8.6 (864.7) 1. 중도 사자. 이 무리는 이름을 가진다. 그들은 작은 무리이며, 빠르고 믿을 수 있게 개인적 의사를 전하는 봉사에서 진화 세계에서 크게 도움이 된다.
77:8.7 (864.8) 2. 행성 파수꾼. 중도자는 공간 세계의 수호자요 파수꾼이다. 그들은 그 영역의 초자연 존재들에게 중요한, 수많은 현상과 종류의 통신 모두를 위하여 중요한 관찰자의 임무를 수행한다. 그들은 행성의 보이지 않는 영적 영역을 순찰한다.
77:8.8 (865.1) 3. 접촉 성격자. 이 통신문을 전달하는 데 쓰인 주체의 경우처럼, 물질 세계의 필사 존재들과 접촉하는 데, 중도인이 반드시 쓰인다. 그들은 영 수준과 물질 수준을 그렇게 연결할 때 필수 요소이다.
77:8.9 (865.2) 4. 진보 조수. 이들은 중도인 가운데 영적으로 더 높은 자이며, 그들은 행성에서 특별 집단을 이루어 활동하는 여러 계급의 세라핌에게 조수로서 분배된다.
77:8.10 (865.3) 중도자들은 위로 세라핌, 아래로 인간 사촌과 접촉하는 능력이 크게 다르다. 예를 들면, 1차 중도자들은 물질 대리자와 바로 접촉하기가 지극히 힘들다. 그들은 천사 종류의 존재에 훨씬 더 가깝고, 따라서 행성에서 주둔하는 영적 세력과 함께 일하고, 그에 봉사하는 데 보통 배치된다. 그들은 하늘에서 온 방문자와 학생 체류자들을 동반하고 안내하는 자로서 행동하며, 한편 2차 생물은 그 영역의 물질 존재들에게 봉사를 베푸는 데 거의 순전히 부속된다.
77:8.11 (865.4) 충성하는 2차 중도자 1111명은 땅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 1차 동료들과 견주어서, 그들은 확실히 물질적이다. 필사자의 시야(視野) 바로 바깥에서 존재하며, 사람들이 “물질적 사물”이라 부르는 것과 마음대로 육체적 접촉을 하기에 충분한 범위 안에서 조절할 수 있다. 이 독특한 자들은 그 영역의 짐승도 제외하지 않고 시공(時空)의 사물에 대하여 어떤 분명한 능력을 지닌다.
77:8.12 (865.5) 천사들의 탓으로 돌리는, 글자 그대로 일어난 많은 현상은 2차 중도인이 해낸 것이다. 예수의 복음을 가르치던 초대의 선생들을 그 시절의 무지한 종교 지도자들이 감옥에 던졌을 때, 실제로 “주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그들을 데리고 나왔더라.” 그러나 헤롯의 명령에 따라 야고보가 죽은 뒤, 베드로가 구출된 경우에, 천사의 탓으로 돌린 일을 행한 것은 2차 중도자였다.
77:8.13 (865.6) 오늘날 그들의 주요한 일은, 행성의 운명 예비군을 구성하는 남녀에게, 인식되지 않는 채 몸소 연락하는 동료로서 하는 일이다. 행성의 하늘 감독자들로 하여금 여러 탄원의 시작을 마침내 유도하도록, 유란시아에서 성격자들 및 상황의 조정을 일으킨 것은 이 2차 집단이 한 일이었고, 1차 군단의 어떤 자들이 이를 훌륭하게 지원하였다. 이러한 탄원은 일련의 계시를 가능하게 만든 명령을 내리게 했으며, 이 발표는 그 계시의 일부이다. 그러나 중도자들은 “강신술”(降神術)이라는 일반 명칭 아래에서 행해지는 더러운 연기(演技)와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현재 유란시아에 있는 중도자들은, 모두 명예로운 신분을 가졌고, 이른바 “영매(靈媒) 능력”이라는 현상과 관련이 없다. 그들은 때때로 필요한 물리적 활동을 하거나 물질 세계와 달리 접촉하는 것을 인간의 감각이 깨닫는 것처럼 인간이 구경하는 것을 보통 허락하지 않는다.
77:9.1 (865.7) 필사 인간과 같은 진화된 승천자와 천사 무리와 대조해서, 중도자는 여러 우주에 두루, 여러 서열의 세계에서 발견되는 첫째 집단의 영구 거주자로 간주해도 좋다.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면서 여러 군데서 그러한 영구(永久) 시민들과 마주치게 된다.
77:9.2 (866.1) 행성에서 봉사하라고 배치된 여러 계급의 하늘 존재들과 달리, 중도자들은 사람이 거하는 세계에서 산다. 세라핌은 오고가지만, 중도인은 남아 있고, 앞으로도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 행성에 토박이이기 때문에, 그들은 봉사자요, 천사 무리의 변하는 행정을 조화시키고 연결시키는, 하나의 계속하는 체제를 마련해 준다.
77:9.3 (866.2) 유란시아의 실제 시민으로서, 중도자들은 친척으로서 이 구체의 운명에 관심을 가진다. 자기들이 태어난 행성의 진보를 위하여 끊임없이 일하는, 굳게 결의한 단체이다. 그들 계급의 표어가 그 각오를 암시해 준다: “연합 중도자들은 착수한 것을 반드시 이룬다.”
77:9.4 (866.3) 에너지 회로를 통과하는 능력은 어떤 중도자도 행성을 떠날 수 있게 하지만, 우주 당국이 언젠가 해방할 때까지 그들은 행성을 떠나지 않기로 개인별로 서약했다. 중도자들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는 시대까지, 한 행성에서 닻을 내린다. 1-2-3 첫째를 제외하고, 충실한 중도인은 아무도 유란시아를 떠난 적이 없다.
77:9.5 (866.4) 1차 계급에서 가장 위인 1-2-3 첫째는, 오순절 뒤에 곧, 행성에서 직접 근무하는 것으로부터 풀려났다. 이 고귀한 중도자는 행성에서 반란이 있던 비극의 시절에, 반과 아마돈과 더불어 굳건히 지켰고, 겁 없는 지도력은 그의 서열에서 희생자를 줄이는 데 힘이 되었다. 그는 현재 예루셈에서 24 상담자의 일원으로 근무하며, 오순절 이후로 한 번, 유란시아의 총독으로서 이미 활동한 적이 있다.
77:9.6 (866.5) 중도자는 행성에 묶여 있지만, 필사자가 멀리서 온 여행자와 이야기하고 행성의 먼 지방에 관하여 배우는 것과 비슷하게, 중도자는 우주의 먼 장소에 관하여 배우려고 하늘 여행자들과 대화를 가진다. 이래서 그들은 이 체계와 우주, 아니 오르본톤과 그 자매 창조들에 관해서도 정통하게 되며, 이렇게 그들은 인간이 존재하는 상급 수준에서 시민권을 얻으려고 준비한다.
77:9.7 (866.6) 중도자는 완전히 발육된 채로―미숙한 상태로부터 성장하거나 발전하는 기간을 거치지 않고서―생겨나지만, 지혜와 체험 면에서 결코 성장(成長)을 그치지 않는다. 필사자처럼 그들은 진화하는 생물이요, 진정하게 진화로 성취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유란시아 중도자 군단에는 위대한 지성과 막강한 인물이 많이 있다.
77:9.8 (866.7) 더 넓은 각도에서 보면, 유란시아의 문명은 유란시아의 필사자와 유란시아의 중도자들이 공동으로 지은 작품이다. 그리고 두 문화 수준 사이에 현재 차이가 있어도 이것은 참말이며, 이 차이는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는 시대가 오기까지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77:9.9 (866.8) 중도자의 문화는 죽지 않는 행성 시민 계급의 산물이니까, 인간의 문명을 성가시게 하는 현세의 변천에 비교적 면역이 되어 있다. 사람의 세대는 잊어버린다. 중도자 군단은 기억하며, 그 기억은 사람이 사는 너희 세계의 전통을 간직하는 보물 창고이다. 이렇게 한 행성의 문화는 늘 그 행성에서 남아 있고,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를 유란시아의 중도자들이 육체를 입은 사촌(四寸)들에게 전한 것과 같이, 적당한 상황에서 지난 날의 사건들을 그렇게 소중히 간직한 기억을 사람이 이용할 수 있게 된다.
77:9.10 (867.1) 중도자는 아담과 이브가 죽고 나서 유란시아의 물질적 사무와 영적 사무 사이에 생긴 틈을 보상해 주는 솜씨 있는 봉사자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너희의 형이요, 유란시아에서 안정된 빛과 생명의 지위를 얻으려는 오랜 투쟁에서 전우이다. 연합 중도자들은 반란의 시험을 거친 군단이며, 이 세상이 오랜 세월 동안 바라던 목표에 다다를 때까지, 사실로 평화가 땅에서 다스리고 진실로 사람들의 가슴 속에 선의가 생길 아득히 먼 그날까지, 행성의 진화에서 그들의 역할을 충실히 해낼 것이다.
77:9.11 (867.2) 이 중도자들이 행하는 귀중한 일 때문에, 그들이 영역의 영적 체제에 참으로 긴요한 부분이라고 우리는 결론을 내렸다. 반란이 행성 사무에 상처를 내지 않은 곳에서 그들은 세라핌에게 더욱 큰 도움이 된다.
77:9.12 (867.3) 높은 영, 천사 무리, 중도(中道) 친구들의 조직 전부가, 진화하는 필사자가 점진적으로 올라가고 완전을 이룩하는 파라다이스 계획을 촉진하는 데 열심히 헌신하고 있다. 이것은 필사자와 중도자를 위하여 똑같이, 우주에서 하늘 같은 사업이다―하나님을 사람에게 모셔 오고, 그리고 나서 숭고한 종류의 협동으로, 사람을 하나님께,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영원히 봉사하고 신성한 성취가 있는 길로 데리고 가는 계획, 살아남게 하는 숭고한 계획이다.
78:0.1 (868.1) 둘째 동산은 거의 3만 년 동안 문명의 요람이었다. 아담 종족들은 여기 메소포타미아에서 버티고 그 자손을 땅 끝까지 보냈고, 후일에는 놋 부족과 산긱 부족과 섞이자 안드 족속으로 알려졌다. 이 지역으로부터, 유사(有史) 시대의 행적을 시작하고 유란시아에서 문화의 진보를 아주 엄청나게 가속한 남녀들이 떠나갔다.
78:0.2 (868.2) 이 논문은 행성에서 보라 인종의 역사를 묘사하며, 이 역사는 아담의 실패가 있은 뒤에 곧, 기원전 약 35,000년에 시작하며, 기원전 약 15,000년에 안드 민족들을 형성하려고 놋 부족과 산긱 부족과 혼합하던 시기를 거쳐서, 기원전 약 2000년에 메소포타미아의 고향으로부터 마지막으로 사라질 때까지 이어진다.
78:1.1 (868.3) 아담이 도착했을 때 종족들의 지성과 도덕은 낮은 수준에 있었어도, 신체의 진화는 칼리가스티아의 반란으로 생긴 긴급 사태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은 채로 진행되었다. 아담이 여러 종족의 생물학적 지위에 기여한 것은 그 사업이 일부 실패했는데도, 유란시아의 사람들을 엄청나게 개량하였다.
78:1.2 (868.4) 아담과 이브는 또한 인류의 사회ㆍ도덕ㆍ지능의 진보에 귀중한 많은 것을 기여하였다. 그들의 자손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문명은 엄청나게 가속되었다. 그러나 3만 5천 년 전에, 일반 세상은 문화가 거의 없었다. 문명의 어떤 중심이 여기저기 존재했지만, 유란시아의 대부분은 야만 속에서 시들었다. 종족과 문화의 분산은 다음과 같았다:
78:1.3 (868.5) 1. 보라 인종―아담 족속과 아담손 족속. 아담 족속 문화의 주요한 중심은 둘째 동산에 있었고, 여기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삼각 지역에 놓여 있었다. 이곳은 정말로 서양과 인도 문명의 요람이었다. 보라 인종의 2차 중심, 곧 북쪽 중심은 아담손 족속의 본부였고, 이것은 코펫 산맥 가까이 카스피 바다의 남쪽 해안의 동쪽에 놓여 있었다. 이 두 중심으로부터 둘러싼 땅으로 문화와 생명질이 떠나갔고, 이것은 즉시 모든 종족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다.
78:1.4 (868.6) 2. 수메르 이전 족속과 기타 놋 족속. 메소포타미아에는 또한 강들의 입구 가까이에, 달라마시아 시절의 고대 문화의 잔재가 있었다. 수천 년이 지나면서, 이 무리는 북쪽에 있는 아담 족속과 속속들이 섞였지만, 그들의 놋 족속 전통을 결코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다. 레반트에서 정착했던 다른 여러 놋 족속의 집단은 대체로 나중에 커지는 보라 인종에게 흡수되었다.
78:1.5 (869.1) 3. 안돈 족속은 아담손 본부의 북쪽과 동쪽에 상당히 대표적인 촌락을 대여섯 유지했다. 그들도 또한 투르키스탄에 두루 흩어졌고, 한편 그들의 고립된 집단들이 유라시아에 두루, 특히 산악 지역에 지속하였다. 이 원주민들은 아이스랜드와 그린랜드와 함께, 유라시아 대륙의 북쪽 땅을 아직도 지키고 있었지만, 유럽의 평야에서 청인에게, 그리고 더 멀리 아시아의 강 유역에서 확장하는 황인종에게 쫓겨난 지 오래 되었다.
78:1.6 (869.2) 4. 홍인(紅人)은 두 아메리카를 차지했고, 아담이 도착하기 5만 년쯤 전에 아시아에서 밀려났다.
78:1.7 (869.3) 5. 황인종. 중국 종족들은 동부 아시아를 단단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의 가장 진보된 촌락들은 현대 중국의 북서쪽에, 티벳과 닿는 지역에서 자리를 잡았다.
78:1.8 (869.4) 6. 청인종(靑人種). 청인은 유럽 전역에 걸쳐 흩어졌으나, 그들 문화의 상급 중심들은 지중해 분지에, 당시에 기름졌던 유역에, 그리고 북서 유럽에 자리잡았다. 네안데르탈인을 흡수한 것은 청인의 문화를 크게 더디게 만들었지만, 그밖에 청인은 유라시아의 모든 진화 민족 가운데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모험심이 있고 탐험을 좋아했다.
78:1.9 (869.5) 7. 드라비다 이전의 인도. 인도에 있는 종족들―땅에 있는 모든 종족을 포함하지만, 특히 녹인종, 주황 인종, 흑인종―의 복잡한 혼합은 바깥에 놓인 지역들보다 조금 높은 문화를 유지했다.
78:1.10 (869.6) 8. 사하라 문명. 남인종(藍人種)의 우수한 요소는, 지금 큰 사하라 사막인 지역에서 가장 진보된 촌락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 남색 집단, 곧 흑인 집단은 가라앉은 주황 인종과 녹인종의 널리 퍼진 혈통을 지녔다.
78:1.11 (869.7) 9. 지중해 분지. 인도 바깥에서 가장 많이 섞인 종족은 지금 지중해 분지인 곳을 차지했다. 여기서 북쪽에서 온 청인과 남쪽에서 온 사하라 주민이 동쪽에서 온 놋 족속과 아담 족속을 만나고, 함께 섞였다.
78:1.12 (869.8) 이것이 보라 인종이 크게 비로소 팽창하기 전, 약 2만 5천 년 전에, 세상의 그림이었다. 미래 문명의 희망은 메소포타미아의 강들 사이의 둘째 동산에 달려 있었다. 여기 남서 아시아에, 큰 문명의 잠재성, 곧 달라마시아 시절과 에덴의 시대로부터 건져낸 개념ㆍ이상을 세계에 퍼뜨릴 가능성이 존재하였다.
78:1.13 (869.9) 아담과 이브는, 제한되기는 했어도 유력한 후손을 남겼고, 유란시아에 있던 하늘의 관찰자들은 잘못하는 물질 아들과 딸의 이 후손들이 어떻게 처신하려는가 알아보려고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78:2.1 (869.10) 몇천 년 동안 아담의 아들들은 메소포타미아의 강을 따라서 수고하였고, 남쪽에서 관개하고 치수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북쪽에서 방어를 완벽하게 만들며, 첫 에덴에서 영화로웠던 전통을 간직하려고 애썼다.
78:2.2 (869.11) 둘째 동산의 지도층에서 나타난 영웅심은 유란시아의 역사에서 놀랍고 영감을 주는 서사시(敍事詩)의 하나이다. 이 빛나는 사람들은 아담 사명의 목적을 결코 완전히 잊지 않았고, 따라서 둘러싼 열등한 부족들의 영향을 용감하게 물리쳤으며, 한편 땅에 있는 종족들에게 밀사로서 꾸준히 연속하여 빼어난 아들딸을 기쁘게 내보냈다. 때때로 이 팽창은 고향의 문화를 소모했지만, 언제나 이 우수한 민족들은 자체를 회복하였다.
78:2.3 (870.1) 아담 족속의 문명과 사회, 그리고 문화적 지위는 유란시아의 진화된 종족들의 일반 수준보다 훨씬 위에 있었다. 오로지 반과 아마돈, 그리고 아담손 족속의 오래 된 촌락들 사이에서 어떤 면에서도 비할 만한 문명이 있었다. 그러나 둘째 에덴의 문명은 인위적 구조물이었고―진화되지 않았다―따라서 자연스러운 진화 수준에 이르기까지 악화되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
78:2.4 (870.2) 아담은 위대한 지적ㆍ영적 문화를 뒤에 남겼으나 그 문화는 기계적 장치 면에서 는 진보되지 않았는데, 이는 모든 문명이 발명의 결과를 보장하기 위하여 쓸 수 있는 자연 자원, 타고난 재능, 충분한 여가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보라 인종의 문명은 아담의 존재와 첫째 에덴의 전통에 달려 있었다. 아담이 죽은 뒤에, 그리고 수천 년이 지나가며 이 전통이 흐릿해짐에 따라서, 아담 족속의 문화 수준은 둘러싼 민족들의 상태, 그리고 보라 인종의 자연스럽게 진화하는 문화적 능력과 서로 균형되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저하되었다.
78:2.5 (870.3) 그러나 아담 족속은 기원전 19,000년에 450만에 이르는 참 민족이었고, 이미 둘러싼 민족들에게 그들의 자손 몇백만 명을 퍼부었다.
78:3.1 (870.4) 보라 인종은 수천 년 동안 에덴의 평화로운 전통을 간직했으며, 이것이 그들이 영토를 정복하는 데 오래 지체한 것을 설명한다. 인구가 늘어나 압박을 받을 때, 영토를 더 확보하려고 전쟁을 일으키는 대신에, 그들은 잉여 거주자들을 다른 종족들에게 선생으로 보냈다. 예전에 있었던 이 이민(移民)의 문화적 효과는 오래 가지 않았지만, 아담 족속의 선생ㆍ무역가ㆍ탐험가들을 흡수한 것은 둘러싼 민족들에게 생물학적으로 생기를 불어넣었다.
78:3.2 (870.5) 아담 족속 가운데 더러는 일찍부터 서쪽으로 나일 강 유역까지 여행했다. 더러는 동쪽으로 아시아로 파고들어 갔으나, 이들은 소수파였다. 후일에 있었던 대규모의 움직임은 널리 북쪽으로, 그리고 거기서부터 서쪽으로 향했다. 주로 그것은 차츰차츰, 그러나 끊임없이 북쪽을 향한 진격이었고, 반이 넘는 무리가 북쪽으로, 다음에는 서쪽으로 카스피 바다를 돌아서 유럽으로 들어갔다.
78:3.3 (870.6) 약 2만 5천 년 전에 아담 족속의 좀더 순수한 요소의 다수는 북쪽 길을 한창 가고 있었다. 북쪽으로 침투함에 따라서 그들은 아담의 모습이 더욱 줄어들었고, 이것은 투르키스탄을 차지했을 때가 되어, 다른 민족들, 특히 놋 족속과 속속들이 뒤섞이기까지 계속되었다. 순수 핏줄을 가진 보라 인종은 거의 아무도 유럽이나 아시아로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
78:3.4 (870.7) 기원전 약 30,000년부터 10,000년까지, 신기원(新紀元)을 이루는 종족 혼합이 서남 아시아 전역에 걸쳐서 일어나고 있었다. 투르키스탄의 고지에서 거주하던 자들은 씩씩하고 활력 있는 민족이었다. 인도의 북서쪽에는 반 시절의 문화가 많이 지속하였다. 이 여러 촌락에서 더 북쪽으로 옛 안돈 족속의 노른자가 보존되어 있었다. 그리고 문화와 특성을 가진 이 우수한 두 종족은 북쪽으로 움직이는 아담 족속에게 흡수되었다. 이 혼합은 많은 새 개념을 채택하도록 이끌었고, 문명의 진보를 수월하게 하고, 예술ㆍ과학, 그리고 사회적 문화의 모든 국면을 크게 앞서게 하였다.
78:3.5 (871.1) 기원전 약 15,000년에, 아담 족속의 초기 이동이 끝나면서 세상에서 어느 다른 데보다, 아니 메소포타미아보다도, 유럽과 중앙 아시아에는 아담의 후손들이 더 많이 있었다. 그들은 유럽의 청인종을 대체로 침투하였다. 놋 족속, 안돈 족속 그리고 홍인 및 황인 산긱 종족과 섞인 아담 족속의 큰 저장이 지금 러시아와 투르키스탄이라고 부르는 땅의 남쪽 지대를 두루 차지했다. 유럽의 남부와 지중해의 가장자리는 아담의 핏줄이 한 줌 섞인, 안돈 및 산긱 종족들―주황인ㆍ녹색인ㆍ남색인―이 차지하였다. 소 아시아와 중부 및 동부 유럽의 땅은 대체로 안돈 족속의 부족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78:3.6 (871.2) 섞인 유색 인종은 이 무렵에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온 사람들로 인하여 크게 보강되었고, 에집트에서 세력을 지키며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사라지는 문화를 이어받으려고 준비했다. 흑인 종족들은 아프리카에서 더 남쪽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홍인종처럼 거의 고립되었다.
78:3.7 (871.3) 사하라 문명은 가뭄에 시달리고 지중해 분지의 문명은 홍수에 시달렸다. 아직까지도 청인종은 진보된 문화를 개발하지 못했다. 안돈 족속은 아직도 북극과 중앙 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녹인종과 주황 인종은 그런 신분으로서 멸종되었다. 남인종(藍人種)은 아프리카에서 남쪽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느리기는 하지만 오래 끌면서 종족의 질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78:3.8 (871.4) 인도의 민족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문명을 가지고 침체되어 있었다. 황인은 중앙 아시아에서 자기가 차지한 것을 통합하고 있었다. 갈색인은 근처 태평양의 여러 섬에서 아직 문명을 시작하지 않았다.
78:3.9 (871.5) 이러한 종족의 분산은, 광범위한 기후의 변화와 관련하여, 안드 시대의 유란시아 문명을 개시하려고 세계의 무대를 준비하였다. 이 초기의 이동은 기원전 25,000년에서 15,000년까지, 1만 년의 기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후일의 이동, 곧 안드 족속의 이동은 기원전 15,000년부터 6000년까지 계속되었다.
78:3.10 (871.6) 아담 족속의 이 초기 인파가 유라시아를 지나가는 데 세월이 너무 오래 걸려서 그들의 문화는 대체로 이동하면서 사라졌다. 오로지 후일의 안드 족속이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아무리 먼 거리에서도 에덴의 문화를 간직할 만큼 충분히 빨리 움직였다.
78:4.1 (871.7) 안드 종족은 순수한 핏줄의 보라 인종과 놋 족속 및 여러 진화 민족을 1차적으로 섞은 것이다. 무릇 안드 족속은 현대 민족들보다 아담의 피를 훨씬 높은 비율로 가졌다고 생각해야 한다. 주로, 안드 족속이라는 용어는 종족의 유산이 8분의 1에서 6분의 1까지 보라인 종족들을 부르는 데 쓰인다. 현대의 유란시아인은, 북쪽의 백인조차 이 비율보다 훨씬 적게 아담의 피를 지닌다.
78:4.2 (871.8) 가장 초기의 안드 민족들은 2만 5천 년도 더 전에 메소포타미아에 인접한 지역에서 기원을 가졌고, 아담 족속과 놋 족속의 혼합으로 이루어졌다. 둘째 동산은 줄어드는 보라 피의 동심원(同心圓)에 둘러싸였고, 안드 종족이 태어난 것은 종족이 섞이는 이 도가니의 가장자리에서였다. 나중에, 이동하는 아담 족속과 놋 족속이 당시에 기름진 투르키스탄 지역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곧 우수한 거주자들과 섞였고, 이렇게 생긴 종족의 혼합은 안드 종류를 북쪽으로 뻗게 하였다.
78:4.3 (872.1) 안드 족속은 순수 핏줄의 보라 인종이 살던 시절 이후로 유란시아에서 나타난 바 가장 좋고 다능한 인간 핏줄이었다. 그들은 아담 종족과 놋 종족의 살아남은 잔재 중에 가장 높은 종류의 대부분, 나중에는 황인ㆍ청인ㆍ녹인 가운데서 가장 좋은 핏줄을 얼마큼 포함했다.
78:4.4 (872.2) 이 옛 안드 족속은 아리아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리아인 이전 종족이었다. 백인이 아니었고, 백인 이전의 종족이었다. 그들은 서양 민족도 동양 민족도 아니었다. 그러나 여러 나라 말을 하는, 이른바 백인종의 혼혈에게 코카서스 인종이라 부르는 일반화된 동질성을 주는 것은 안드 족속의 유산이다.
78:4.5 (872.3) 보라 인종의 좀더 순수한 핏줄은 평화를 추구하는 아담의 전통을 간직하였고, 이것이 어째서 초기에 있었던 민족 이동이 평화롭게 이주하는 성질을 더 띠었는가 설명한다. 그러나 놋 족속의 핏줄은 이때가 되어 호전적 민족이었는데, 아담 족속이 이들과 뭉쳐짐에 따라서, 그 안드 후손은, 그 시절과 시대에 유란시아에서 산 중에서 가장 솜씨 있고 현명한 군국주의자였다. 그때부터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움직임은 갈수록 더 군사적 특징을 띠었고, 실제로 정복자와 더 비슷해졌다.
78:4.6 (872.4) 이 안드 족속은 모험을 좋아했고 돌아다니는 성향을 가졌다. 산긱이나 안돈 족속의 피를 더하면 그들을 안정되게 만들었다. 그렇다 해도 후일에 그 자손들은 지구를 배로 한 바퀴 돌아서 멀리 있는 마지막 대륙을 발견할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았다.
78:5.1 (872.5) 2만 년 동안 둘째 동산의 문화는 지속되었으나 기원전 약 15,000년까지 꾸준한 쇠퇴를 겪었고, 이때 셋 사람의 사제직이 부활되고 아모삿이 지도자가 된 것은 밝은 시대를 열었다. 나중에 유라시아로 퍼진 문명의 거대한 물결은, 아담 족속이 둘러싼 혼합된 놋 족속과 널리 연합하여 안드 족속을 형성한 결과로서 생긴, 동산의 큰 부흥에 뒤이어 즉시 퍼졌다.
78:5.2 (872.6) 이 안드 족속은 유라시아와 북 아프리카 전역에 걸쳐서 새로이 진격을 개시하였다.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신장(新疆)을 통해서 안드 족속의 문화가 지배했고, 유럽을 향한, 사람들의 꾸준한 이주는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새로 온 사람들 때문에 계속 상쇄되었다. 그러나 아담의 혼합된 후예의 마지막 이동이 시작될 무렵까지, 안드 족속을 메소포타미아 본토의 종족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저히 정확하다 할 수 없다. 이때가 되자 둘째 동산에 있는 종족들조차 너무 섞여서 그들은 이제 더 아담 족속이라 여길 수 없었다.
78:5.3 (872.7) 투르키스탄의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새 사람들, 특히 나중의 안드 기병들로 말미암아 항상 부활되고 새로워졌다. 이른바 아리아인의 조상 언어는 투르키스탄의 고지에서 형성되는 과정에 있었다. 그것은 그 지역의 안돈 족속 방언이 아담손 족속과 후기 안드 족속의 언어와 섞인 것이었다. 많은 현대 언어가 유럽과 인도,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평야의 위쪽 지대를 정복한 이 중앙 아시아 부족들의 이 초기 언어로부터 생겨났다. 이 고대 언어는 아리아인이라 부르는 그 모든 유사성을 서양의 여러 언어에게 주었다.
78:5.4 (872.8) 기원전 12,000년이 되자, 세상에서 안드 족속 핏줄의 4분의 3은 북부와 동부 유럽에 거주하였고,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나중에 마지막 탈출이 일어났을 때, 이 마지막 이민 인파의 65퍼센트는 유럽으로 들어갔다.
78:5.5 (873.1) 안드 족속은 유럽 뿐 아니라, 중국의 북부와 인도까지 이주했고, 한편 많은 무리가 선교사ㆍ선생ㆍ상인으로서 땅 끝까지 파고들었다. 그들은 사하라의 산긱 종족들의 북쪽 집단에게 상당히 기여하였다. 그러나 오직 몇몇 선생과 상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나일 강 상류보다 더 남쪽으로 파고들었다. 나중에, 혼합된 안드 족속과 에집트인이 적도(赤道) 훨씬 밑으로 아프리카의 동부와 서부 해안 밑으로 따라갔지만, 마다가스카르에 이르지는 않았다.
78:5.6 (873.2) 이 안드 족속은 인도에서 이른바 드라비다인, 후일에는 정복하는 아리아인이었다. 그리고 중앙 아시아에서 그들의 존재는 투란 족속의 조상을 크게 개선하였다. 이 종족에서 많은 사람이 신장과 티벳을 경유해서 중국으로 여행했고, 후일의 중국인 핏줄에 바람직한 품질을 보탰다. 때때로 작은 무리들이 일본ㆍ타이완, 동인도 제도, 중국 남부로 들어갔다. 하지만 거의 아무도 해안선의 길로 중국 남부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78:5.7 (873.3) 이 종족 132명은 일본에서 작은 배로 떼를 지어 출발하여, 결국에는 남 아메리카에 다다랐고, 안데스의 토착민과 서로 결혼함으로 후일에 잉카를 통치한 자들의 조상을 세웠다. 그들은 쉬운 단계를 거쳐 태평양을 건넜고, 가는 길에 발견한 많은 섬에서 머물렀다. 폴리네시아 집단의 섬들은 지금보다 더 많고 더 컸는데, 이 안드 종족의 뱃사람들은 그들을 따라간 얼마큼의 사람들과 함께, 이동하는 중에 토착 집단들을 생물학적으로 변화시켰다. 안드 족속이 침투한 결과로서 지금은 물 밑에 가라앉은 이 여러 지방에서, 번성하는 문명의 중심이 많이 생겨났다. 이스터 섬은 오랫동안 이 사라진 집단 중 하나의 종교 및 행정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오래 전에 태평양을 항해한 안드 족속 가운데 132명을 빼고, 아무도 결코 두 아메리카 본토에 이르지 못했다.
78:5.8 (873.4) 안드 족속의 이주와 정복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분산될 때까지, 기원전 8000년에서 6000년까지 이어졌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쏟아져 나옴에 따라서 그들은 고향의 생물학적 저장을 계속 소모했고, 한편 둘러싼 민족들을 두드러지게 강화하였다. 지나간 모든 나라에 그들은 유머ㆍ예술ㆍ모험ㆍ음악ㆍ제조업을 기여했다. 그들은 동물을 길들이는 기술이 있었고 농업에 전문가였다. 얼마 동안, 적어도 그들의 존재는 보통, 더 오래 된 종족들의 종교 관념과 도덕 풍습을 개량하였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의 문화는 조용히 유럽ㆍ인도ㆍ중국, 그리고 북 아프리카와 태평양 군도(群島)에 퍼졌다.
78:6.1 (873.5) 안드 족속이 기원전 8000년에서 6000년 사이에 마지막으로 세 차례 파도를 이루어 메소포타미아에서 쏟아져 나왔다. 세 차례에 걸쳐 이 문화의 큰 물결은, 동쪽에서 산지(山地) 부족들의 압력이 있었고 서쪽에서 평야 사람들이 성가시게 굴었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에서 할 수 없이 쫓겨났다. 유프라테스 강 유역, 그리고 인접한 영토의 거주자들은 마지막에 탈출할 때 여러 방향으로 갈라졌다:
78:6.2 (873.6) 65퍼센트는 카스피 바다의 길로 유럽으로 들어가서 새로 등장하는 백인―청인과 옛 안드 족속의 혼합 민족―을 정복하고 그들과 섞였다.
78:6.3 (873.7) 큰 무리의 셋 사제들을 포함하여, 10퍼센트는 동쪽으로, 엘람의 고지를 거쳐서 이란의 고원과 투르키스탄으로 옮겨 갔다. 그들의 후손 가운데 다수는 나중에, 북쪽 지역에서 온 아리아인 형제들과 함께 인도로 몰려갔다.
78:6.4 (874.1)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10퍼센트는 북향 길을 가다가 동쪽으로 돌아서 신장에 들어갔고, 거기서 그들은 안드 족 황인 거주자들과 함께 섞였다. 이 종족 연합에서 나온 유능한 자손의 대다수는 황인종의 북쪽 가지를 즉시 개선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78:6.5 (874.2) 달아나는 이 안드 족속의 10퍼센트는 아라비아를 가로질러 가서, 에집트로 들어갔다.
78:6.6 (874.3) 열등한 이웃 부족 사람들과 서로 결혼하지 않고 자신들을 지키며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입구 근처, 물가 지역에서 아주 우수한 문화를 가졌던 안드 족속의 5퍼센트는 집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이 집단은 많은 우수한 놋 족속과 아담 족속의 핏줄이 살아남은 것이다.
78:6.7 (874.4) 안드 족속은 기원전 6000년이 되어 이 지역을 거의 완전히 비웠다. 하지만 둘러싼 산긱 종족들과 소 아시아의 안돈 족속과 널리 섞인 안드 족의 후손은, 거기서 훨씬 후일에 북쪽과 동쪽을 침공한 자들에 대항하여 싸웠다.
78:6.8 (874.5) 둘째 동산의 문화 시대는 둘러싼 열등한 종족들이 더욱 침투함으로 막을 내렸다. 문명은 서쪽으로 나일 강과 지중해의 섬들로 옮겨 갔고, 메소포타미아에서 그 원천이 저하된 뒤에 오랫동안 거기서 계속하여 번성하고 진보하였다. 그리고 제지받지 않고 열등한 민족들이 이렇게 들어온 것은, 북쪽 미개인들이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나중에 정복하도록 길을 닦았으며, 그들은 남아 있는 유능한 혈통을 몰아냈다. 후일에도 문화를 가진 그 잔재는 무지하고 거친 이 침공자들의 존재를 여전히 분개했다.
78:7.1 (874.6)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철에 강이 둑을 넘쳐흐르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이 홍수는 그들의 생활에 해마다 터지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북쪽에서 점진적인 지질학적 변화의 결과로서 새로운 위험이 메소포타미아 유역을 위협했다.
78:7.2 (874.7) 처음 에덴이 물 속에 가라앉은 뒤에 몇천 년 동안, 지중해의 동부 해안가 근처의 산과 메소포타미아의 북서쪽과 북동쪽의 산들은 계속해서 높아졌다. 고지가 이렇게 높아지는 것은 기원전 약 5000년에 크게 가속되었고, 이것은 북쪽 산맥에 강설량이 크게 늘어남과 함께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두루, 봄이 되면 전례 없이 큰 홍수를 일으켰다. 봄에 생기는 이 홍수는 더욱 악화되어서, 결국 강 지역에 거주하던 자들은 동쪽의 고지로 밀려났다. 거의 1천 년 동안 수십 도시가 널리 퍼진 이러한 홍수 때문에 실질적으로 버림받았다.
78:7.3 (874.8) 거의 5천 년 뒤에, 바빌로니아에서 포로로 살던 히브리인 사제들이 유대 민족의 유래를 아담까지 거슬러 추적하려고 애썼을 때, 그 이야기를 연결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 중 한 사람에게, 그런 수고를 집어치우고, 노아 홍수 시절에 온 세상이 사악한 가운데 물에 빠지게 만들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추적하여 이처럼 노아의 살아남은 세 아들 중 하나에게까지 바로 거슬러 올라가기에 훨씬 좋은 처지에 있으려는 생각이었다.
78:7.4 (875.1) 물이 지구의 표면 전체를 덮은 때에 관한 전통은 널리 퍼져 있다. 많은 종족이 지난 시대 어느 때인가 세계적 홍수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성경에 있는 노아ㆍ방주ㆍ홍수에 관한 이야기는 바빌로니아에서 포로로 살던 동안에 히브리인 사제들이 발명한 것이다. 유란시아에 생명이 정착한 뒤로 보편적 홍수는 한 번도 있은 적이 없다. 지구의 표면이 완전히 물로 덮인 때는 땅이 나타나기 전, 시생대(始生代) 동안이었다.
78:7.5 (875.2) 그러나 노아는 정말로 살아 있었다. 그는 에렉 가까이 강가의 촌락 아람에서 포도주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는 해마다 강물이 올라오는 날짜를 적은 기록을 만들었다. 그는 강 유역을 오르내리면서, 모든 집을 나무로, 배 모양으로 지으라, 홍수 철이 다가올 때 밤마다 가족의 동물을 갑판에 올려놓으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많은 비웃음을 샀다. 그는 해마다 이웃에 있는 강가의 여러 촌락으로 가서, 며칠 있으면 홍수가 오리라 경고하곤 했다. 마침내, 드물게 몹시 쏟아진 비로 해마다 있는 홍수가 몹시 커져서, 갑자기 솟아오른 물이 마을 전체를 싹 쓸어버렸다. 오직 노아와 그의 직계 가족이 집으로 쓰는 배에서 구제되었다.
78:7.6 (875.3) 이 여러 홍수는 안드 족속 문명의 붕괴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홍수 기간이 끝나자, 둘째 동산은 사라져 버렸다. 오직 남쪽에, 그리고 수메르인 사이에서, 옛 영광의 어떤 자국이라도 남아 있다.
78:7.7 (875.4) 가장 오래 된 문명의 하나인 이것의 잔재는 메소포타미아의 이 지역에서, 그리고 북동쪽과 북서쪽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러나 더 오래 된 달라마시아 시절의 흔적은 페르시아 만의 바다 밑에 존재하고, 첫 에덴은 지중해의 동쪽 끝, 물 밑에 잠겨 있다.
78:8.1 (875.5) 안드 족속의 마지막 분산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생물학적 중추를 부수었을 때, 이 우수한 종족의 작은 소수(小數) 집단이 두 강 입구 가까이 있던 그들의 고향에 남아 있었다. 이들은 수메르인이었고, 기원전 6000년이 되자 그들의 줄기는 대체로 안드 족속이 되었다. 하지만 그 문화의 성격은 놋 족속에 더 가까웠으며, 그들은 달라마시아의 옛 전통에 집착하였다. 그런데도 해안 지역의 이 수메르인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마지막 안드 족속이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종족들은, 이 시대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두개골 종류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이미 이 늦은 시점에 속속들이 섞여 있었다.
78:8.2 (875.6) 수사가 아주 크게 번성한 것은 이 홍수가 있던 시절이었다. 처음에 낮은 곳에 세운 도시는 물에 잠겼고, 그래서 둘째 마을, 곧 더 높이 있던 마을은 그 시절의 특이한 공예품 본부로서 낮은 곳에 있던 도시를 이어받았다. 이 홍수가 나중에 줄어들자, 우르는 도기 산업의 중심이 되었다. 약 7천 년 전에 우르는 페르시아 만에 있었고, 그 뒤로 강의 퇴적물은 땅을 현재의 한계까지 쌓아 올렸다. 이 촌락들은 치수(治水) 작업이 개선되고 강들의 입구가 넓어졌기 때문에, 홍수로부터 피해를 적게 보았다.
78:8.3 (875.7)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유역에서 곡식을 심던 평화로운 사람들은 투르키스탄과 이란 고원에 있던 미개인의 침공에 시달린 지 오래 되었다. 그러나 고지의 목초지에서 가뭄이 늘어났기 때문에, 이제 공동으로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침공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침공은 더군다나 심각했는데, 둘러싼 이 목자와 사냥꾼들이 대량의 길들인 말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말의 소유는 남쪽에 있는 부유한 이웃에 비하여 그들을 군사적으로 엄청나게 유리하게 만들었다. 짧은 기간에 그들은 온 메소포타미아를 휩쓸고, 마지막 문화의 물결을 밀어냈으며 이것은 유럽, 서 아시아, 북 아프리카 모두에 퍼졌다.
78:8.4 (876.1) 이 메소포타미아 정복자들은 그들의 계층 안에, 아담 핏줄의 얼마큼을 포함하여, 투르키스탄의 혼합된 북부 종족들의 우수한 안드 혈통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덜 진보되었지만 더 활력 있는, 북에서 온 이 부족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잔재를 재빨리, 기꺼이 동화(同化)했고, 당장에 역사(歷史) 연대기의 처음에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그 혼합된 민족으로 발달하였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사라지는 문명의 많은 단계를 재빨리 되살렸고, 강 유역에 살던 부족들의 예술, 그리고 수메르인의 문화에서 많은 것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셋째 바벨 탑까지 세우려고 애썼고, 나중에 그 용어를 그들 국가의 이름으로 채택하였다.
78:8.5 (876.2) 동북부로부터 온 이 미개한 기병들이 유프라테스 강 유역 전체에 들끓었을 때, 그들은 페르시아 만에서 강 입구 근처에 거주하던 안드 족속의 잔재를 정복하지 않았다. 이 수메르인은 우수한 지능, 더 나은 무기, 그리고 그들이 지은 광범위한 군사적 운하(運河) 체계 때문에 자신들을 방어할 수 있었다. 이 운하는 물웅덩이를 서로 연결하는 관개 계획에 덧붙인 것이었다. 그들은 동일한 집단 종교를 가졌기 때문에 뭉친 민족이었다. 북서쪽에 있는 이웃들이 고립된 도시 국가로 갈라진 지 오랜 뒤에도, 이렇게 그들은 종족과 국가의 통일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도시 집단 가운데 어느 것도 뭉친 수메르인을 정복할 수 없었다.
78:8.6 (876.3) 그리고 북쪽에서 온 침략자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이 수메르인이 유능한 선생이요 행정자인 것을 신임하고 그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배웠다. 북쪽에, 그리고 서쪽에 에집트로부터 동쪽에는 인도까지, 모든 민족이 그들을 예술과 산업의 선생으로, 상업의 지도자로서, 나라의 행정자로서 크게 존경하고 찾았다.
78:8.7 (876.4) 초기의 수메르 연방이 깨어진 뒤에, 셋 족속 사제들의 변절한 후손이 후일의 도시 국가들을 다스렸다. 이 사제들이 이웃 도시들을 정복했을 때에야 그들은 자신을 왕이라고 불렀다. 다른 신(神)을 경계하는 마음 때문에, 후일에 도시 임금들은 사르곤 시절 이전에 강력한 연방을 세우지 못했다. 각 도시는 그 도시의 신이 모든 다른 신보다 우수하다고 믿었고, 따라서 그들은 공통된 지도자에게 복종하려 하지 않았다.
78:8.8 (876.5) 도시의 사제들이 미약하게 통치하던 이 긴 기간을 키시의 사제 사르곤이 끝을 맺었는데, 그는 자기가 임금이라고 선포하고 메소포타미아 전체와 인접한 땅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대에는 이것이, 사제가 다스리고 사제에 억눌려 있고 각 도시가 자체의 도시 신과 자체의 예식 관습을 가진, 그런 도시 국가들의 종말을 가져왔다.
78:8.9 (876.6) 이 키시 연방이 깨어진 뒤에, 이 강 유역의 도시들 사이에 우위를 얻으려고 오랫동안 끊임없이 전쟁하던 기간이 따랐다. 그리고 통치권은 수메르ㆍ아카드ㆍ키시ㆍ에렉ㆍ우르ㆍ수사 사이에 다양하게 바뀌었다.
78:8.10 (876.7) 기원전 2500년 무렵에 수메르인은 북쪽에 있는 수 족속과 구 족속의 손에 크게 패배를 겪었다. 홍수로 생긴 언덕 위에 세운, 수메르의 서울 라가시가 함락되었다. 에렉은 아카드가 무너진 뒤에, 30년 동안 버티었다. 하무라비의 통치가 확립될 때가 되자 수메르인은 북쪽의 셈 족속의 계층에 흡수되었고, 메소포타미아의 안드 족속은 역사의 페이지에서 사라졌다.
78:8.11 (877.1) 기원전 2500년에서 2000년까지,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유목민이 날뛰었다. 네르 족속은 안돈 족속과 안드 족속이 혼합되어 생긴 부족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낳은 후손 가운데 카스피 집단이 마지막으로 분출한 것이다. 미개인들은 메소포타미아를 멸망시키지 못했고, 나중에 기후의 변화가 이를 이룩하였다.
78:8.12 (877.2) 이것이 아담의 시절 뒤에 보라 인종, 그리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있던 그들의 고향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들의 고대 문명은, 우수한 민족들이 바깥으로 이주하고 열등한 이웃들이 이민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마침내 멸망했다. 그러나 미개한 기병들이 그 유역을 정복하기 오래 전에, 동산 문화의 상당 부분이 아시아ㆍ아프리카ㆍ유럽으로 퍼졌고, 거기서 유란시아의 20세기 문명을 일으킨 효소를 생산하였다.
79:0.1 (878.1) 아시아가 인류의 고향이다. 이 대륙의 남쪽 반도에서 안돈과 폰타가 태어났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의 고지에서 그들의 후손 바도난은 원시 문화 중심의 기초를 세웠고, 이것은 50만 년이 넘도록 이어 왔다. 여기서 인류의 이 동부 초점에서 산긱 민족들은 안돈의 혈통으로부터 분화(分化)되었고, 아시아는 그들의 처음 집이요, 첫 사냥터, 첫 전쟁터였다. 남서 아시아는 달라마시아 사람, 놋 족속, 아담 족속, 안드 족속의 이어지는 문명을 보았고, 이 지역으로부터 현대 문명의 잠재성이 세계로 퍼졌다.
79:1.1 (878.2) 2만 5천 년이 넘도록, 거의 기원전 2000년까지 계속해서, 유라시아의 심장부는 주로 안드 족속이었으나 그 성분이 줄어들었다. 투르키스탄의 낮은 땅에서 안드 족속은 서쪽으로 내륙 호수들을 돌아서 유럽으로 들어갔고, 한편 이 지역의 고지로부터 동쪽으로 침투했다. 동부 투르키스탄 (신장), 그리고 그보다 덜한 정도로 티벳은 고대의 출입구였고, 거기를 통해서 이 메소포타미아 민족들은 산을 거쳐서 황인의 북쪽 땅으로 갔다. 안드 족속의 인도 침투는 투르키스탄의 고지로부터 펀잡으로, 그리고 이란의 풀 뜯는 땅으로부터 발루키스탄을 거쳐서 진행되었다. 이 초기의 민족 이동은 어떤 의미에서도 정복(征服)이 아니었다. 이것은 오히려 안드 부족들이 인도의 서부와 중국으로 계속하여 흘러 들어간 것이다.
79:1.2 (878.3) 거의 1만 5천 년 동안, 혼합된 안드 족속의 문화 중심들은 신장에서 타림 강의 분지에, 남쪽으로는 티벳의 고지 지역에서 지속되었고, 여기서 안드 족속과 안돈 족속이 널리 섞였다. 타림 강 유역은 가장 동쪽에 있는 참 안드 문화의 전진 기지(基地)였다. 여기서 그들은 촌락들을 지었고, 동쪽으로 진취적인 중국인, 북쪽으로 안돈 족속과 무역 관계를 시작하였다. 그 시절에 타림 지역은 기름진 땅이었고, 비가 많이 왔다. 고비의 동쪽에는 탁 트인 초원이 있었고, 거기서 동물을 기르던 자들은 차츰 농업으로 전향하였다. 이 문명은 비를 실은 바람이 남동쪽으로 바뀌었을 때 무너졌으나, 그 전성기에 이 문명은 바로 메소포타미아와 힘을 겨루었다.
79:1.3 (878.4) 기원전 8000년이 되어, 중앙 아시아의 고지 지역에서 건조함이 천천히 심해진 것은 안드 족속을 강의 저지대와 바닷가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심해지는 가뭄은 그들을 나일 강, 유프라테스 강, 인더스 강, 황하 유역으로 몰았을 뿐 아니라, 안드 문명에서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다. 새 계급의 사람들, 곧 상인이 큰 무리를 지어 비로소 나타났다.
79:1.4 (879.1) 기후 조건이 이동하는 안드 족속에게 사냥을 쓸모없게 만들었을 때, 그들은 목자가 됨으로 더 오래 된 민족들의 진화 과정을 밟지 않았다. 상업과 도시 생활이 나타났다. 에집트로부터 메소포타미아와 투르키스탄을 거쳐서 중국과 인도의 강들까지, 상당히 문명화된 부족들이 제조업과 무역에 전념하는 여러 도시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아도니아는 중앙 아시아에서 상업(商業)의 대도시가 되었고, 그 위치는 오늘날 아슈카바드 시 가까이 있었다. 돌ㆍ금속ㆍ나무ㆍ도기를 다루는 상업이 땅과 바다에서 빨리 발달되었다.
79:1.5 (879.2) 그러나 항상 심해지는 가뭄이 차츰 카스피 바다의 남쪽과 동쪽 땅으로부터 안드 족속의 대탈출을 가져왔다. 민족 이동의 물결이 북쪽이 아니라 남쪽을 향하여 길을 바꾸기 시작했고, 말을 탄 바빌로니아인은 메소포타미아로 밀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79:1.6 (879.3) 더 나아가서 중앙 아시아에서 심해지는 건조성은 인구를 줄이고 이 사람들의 호전성을 약화시키도록 작용하였다. 북쪽에서 강우량이 줄어들어 유목하는 안돈 족속이 할 수 없이 남쪽으로 내려갔을 때, 투르키스탄에서 엄청난 안드 족속의 탈출이 있었다. 이것은 이른바 아리아인이 레반트와 인도로 들어가는 마지막 이동이다. 이렇게 아담의 혼합된 후손들의 오랜 분산이 절정에 이르렀고, 이 동안에 모든 아시아 민족, 그리고 태평양의 섬 민족들의 대부분이, 이 우수한 종족들로 인하여 어느 정도 개량되었다.
79:1.7 (879.4) 이렇게 동반구에 흩어졌으나, 안드 족속은 메소포타미아와 투르키스탄에 있는 고향을 잃어버렸는데, 안돈 족속의 광범위한 이 남방 이동이 중앙 아시아에서 거의 사라지는 점까지 안드 족속의 수를 줄어들게 했기 때문이다.
79:1.8 (879.5) 그러나 그리스도 이후 20세기에도, 투란과 티벳 종족들 사이에, 이 지역에서 이따금 발견되는 금발 종류가 증언하는 바와 같이, 안드 족속 혈통의 흔적이 있다. 옛날 중국의 연대기(年代記)는 양자강에 있는 평화로운 촌락들 북쪽으로, 붉은 머리털의 유목민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며, 거기서 오래 전에 타림 분지에서 금발의 안드 족속 종류와 갈색 머리의 몽고인 부류가 있었다는 것을 충실히 기록하는 그림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79:1.9 (879.6) 중앙 아시아의 안드 족속의 잠자던 군사적 재능이 마지막으로 크게 나타난 것은 서기 1200년이었는데, 이때 징기스칸 밑에서 몽고인이 아시아 대륙의 반 이상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옛날의 안드 족속처럼, 이 용사들은 “하늘에 계신 유일한 하나님”이 존재함을 선포하였다. 그들의 제국이 일찍 무너진 것은 서양과 동양의 문화적 교류를 오랫동안 늦추었고, 아시아에서 유일신 개념이 성장하는 것을 크게 방해했다.
79:2.1 (879.7) 인도는 유란시아 민족들이 모두 섞인 유일한 지역이며, 안드 족속의 침공이 마지막 혈통을 더했다. 인도 북서쪽에 있는 고지에서 산긱 종족들이 태어났고, 예외 없이 각 종족의 사람들이 옛 시절에 인도 아대륙(亞大陸)에 파고들었으며, 유란시아에서 일찍이 존재한 가장 이질적 종족 혼합을 뒤에 남겼다. 고대의 인도는 이동하는 종족들을 붙잡아 두는 분지로 작용했다. 그 반도의 기초는 옛날에 지금보다 좁았고, 간지스 강과 인더스 강 삼각지의 상당한 부분은 최근 5만 년 동안 생긴 결과이다.
79:2.2 (879.8) 인도에서 가장 일찍부터 있었던 종족 혼합은 이동하는 홍인과 황인이 원주민 안돈 족속과 섞인 것이다. 이 집단은 큰 무리의 주황 민족 뿐 아니라, 동부에 절멸한 녹색 민족의 대부분을 흡수하여 나중에 약화되었고, 제한된 양으로 청인과 혼합하여 얼마큼 개량되었지만, 큰 집단의 남인종을 동화함으로 극도로 손해를 보았다. 그러나 이른바 인도 원주민은 도저히 이 옛 민족을 대표한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은 오히려 가장 열등한 남쪽과 동쪽의 변두리 세력이고, 이것은 초기의 안드 족속이나 나중에 나타나는 아리아인 사촌들에게 결코 완전히 흡수되지 않았다.
79:2.3 (880.1) 기원전 20,000년이 되기까지, 인도 서부의 인구는 이미 아담 족속의 피 흔적이 있었고, 유란시아 역사에서 결코 어느 한 민족이 그렇게 많은 종족을 통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2차 산긱 혈통들이 지배한 것은 불행한 일이었고, 옛날에 있었던 이 종족의 도가니에 청인과 홍인이 대체로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재난이었다. 1차 산긱 혈통이 더 많았더라면, 더욱 위대하게 되었을까 싶은 문명의 향상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일이 전개된 바와 같이, 홍인은 두 아메리카에서 자신을 죽이고 있고, 청인은 유럽에서 즐겁게 장난치고 있었으며, 아담의 초기 후손은 (나중의 후손 대부분도) 인도나 아프리카나 다른 곳에서, 검은 빛을 띤 민족들과 섞일 욕구를 거의 보이지 않았다.
79:2.4 (880.2) 기원전 15,000년 무렵에, 투르키스탄과 이란 전역에서 인구의 압력이 팽창한 것은 인도를 향하여 정말로 광범위한 안드 민족의 이동을 일으켰다. 1천 5백 년이 넘도록 이 우수한 민족들은 발루키스탄의 고지를 통하여 쏟아져 들어와서 인더스와 간지스 강 유역에 퍼졌으며, 천천히 남쪽으로 데칸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북서쪽에서 온 이 안드 족속의 압력은 남쪽과 동쪽에 있는 열등한 사람들의 다수를 버마와 중국 남부로 몰았지만, 침공자들이 종족으로서 사라지는 것을 막을 만큼 충분하지는 않았다.
79:2.5 (880.3) 인도가 유라시아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한 것은 대체로 지형(地形)의 문제였다. 북쪽으로부터 받는 인구의 압력은 대다수의 사람들을 남쪽으로, 데칸의 줄어드는 영토로 밀어냈을 뿐이고, 데칸은 어디나 바다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주해 갈 인접한 땅이 있었더라면, 그 열등한 사람들은 사방으로 밀려났을 터이고, 우수한 혈통은 더 높은 문명을 이룩했을 것이다.
79:2.6 (880.4) 실제로 일어난 바와 같이, 초기 정복자인 이 안드 족속은 서로 결혼하는 것에 관하여 엄격한 제한을 둠으로 그들의 신분을 보존하고 종족을 삼키는 인파를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애썼다. 그런데도 안드 족속은 기원전 10,000년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 민족의 대중 전체가 이들을 흡수함으로 두드러지게 개량되었다.
79:2.7 (880.5) 종족의 혼합은 문화의 융통성을 촉진하고 진보하는 문명에 도움이 되므로 언제나 유익하다. 그러나 종족 혈통에서 열등한 요소가 주류를 이룬다면, 그러한 성취는 잠시일 뿐이다. 여러 나라 말을 쓰는 문화는 우수한 혈통이 열등한 혈통과 충분한 간격을 두고 자체를 번식할 때에야 보존될 수 있다. 우수한 자의 번식이 줄어들면서 열등한 자가 제한 없이 번식하는 것은, 어김없이 문화적 문명의 자살이 된다.
79:2.8 (880.6) 안드 정복자들이 실제보다 세 배가 되었거나, 아니면 주황ㆍ녹색ㆍ남색의 혼합 거주자들 중에서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3분의 1을 몰아내거나 없앴더라면, 인도는 세계에서 주요한 문화적 문명 중심의 하나가 되었을 터이고, 의심할 여지 없이, 투르키스탄으로, 그리고 거기에서 북쪽으로 유럽으로 흘러 들어간, 메소포타미아인의 후기 인파를 더 유인했을 것이다.
79:3.1 (881.1) 인도를 정복한 안드 족속과 토종 핏줄의 혼합은 결국 드라비다인이라 부른 그 혼합된 민족을 낳았다. 초기에 있었고 좀더 순수했던 드라비다인은 문화적으로 성취할 큰 능력을 소유했는데, 이 능력은 그들의 안드 족 유산(遺産)이 점진적으로 묽어짐에 따라서 줄곧 약화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거의 1만 2천 년 전에 인도의 싹트는 문명을 망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적은 양의 아담의 피를 주입한 것조차 사회의 발전을 두드러지게 가속하였다. 이 복합 혈통은 대번에 그때 땅에서 가장 다능한 문명을 낳았다.
79:3.2 (881.2) 인도를 정복한 뒤에 얼마 안 되어, 드라비다 안드 족속은 메소포타미아와 종족 및 문화의 접촉을 잃어버렸지만, 나중에 뱃길과 카라반 길이 열리자 이 연락이 다시 회복되었다. 지난 1만 년 안에 어느 때도 인도가 서쪽으로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동쪽으로 중국과 완전히 접촉을 잃은 적이 없다. 하지만 산의 장벽은 서쪽의 교류를 크게 유리하게 만들었다.
79:3.3 (881.3) 인도 종족들의 우수한 문화와 종교적 경향은 드라비다인이 지배하던 옛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며, 일부는 일찍이 있었던 안드 족속의 침공과 나중에 아리아인의 침공을 통하여 셋 사람 사제들이 아주 많이 인도로 들어갔다는 사실 때문이다. 인도의 종교 역사를 통하여 이어지는 일신교의 실마리는 이처럼 둘째 동산에서 아담 족속의 가르침으로부터 뻗어나온다.
79:3.4 (881.4) 기원전 16,000년부터 일찍 셋 사람 사제 1백 명의 일행이 인도로 들어가서, 다국어를 쓰는 그 민족의 서쪽 절반에서 종교적 정복을 거의 이루었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는 오래 가지 않았다. 5천 년 안에 그들이 지녔던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교리는 불의 신(神)의 삼자일체 상징으로 변질되었다.
79:3.5 (881.5) 그러나 안드 족속의 이동이 끝나기까지 7천 년이 넘도록 인도 거주자의 종교 상태는 세계 전체보다 훨씬 높았다. 이 시절에 인도는 세계에서 선두를 이끄는 문화ㆍ종교ㆍ철학ㆍ상업을 가진 문명을 낳을 가망이 있었다. 그리고 안드 족속이 남쪽 사람들 밑에 완전히 파묻혀 사라지지 않았더라면, 이 운명이 아마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79:3.6 (881.6) 드라비다인 문화의 중심은 강 유역에서, 주로 인더스 강과 간지스 강에서, 그리고 동 갓츠를 통해서 바다로 흐르는 큰 세 강을 따라서, 데칸에서 자리를 잡았다. 서 갓츠의 바닷가를 따라서 있던 촌락들의 탁월성은 바다로 수메르와 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79:3.7 (881.7) 드라비다인은 가장 일찍 도시를 세우고, 육지와 바다로 널리 수출입 사업에 종사한 민족들에 속한다. 기원전 7000년이 되어 낙타의 일행들이 먼 메소포타미아까지 정기적으로 여행하고 있었다. 드라비다인의 해상 운송은 아라비아 해를 가로질러 페르시아 만에 있는 수메르인의 여러 도시까지 해안을 따라 밀고 들어갔으며, 벵골 만의 바다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동인도 제도(諸島)까지 멀리 갔다. 글쓰는 기술과 함께, 알파벳이 이 뱃사람과 상인들을 통해서 수메르에서 수입되었다.
79:3.8 (881.8) 이 상업 관계는 국제적 문화를 더욱 다양화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도시 생활의 많은 세련된 물건이, 그리고 사치품도, 일찍부터 나타나게 만들었다. 나중에 나타나는 아리아인이 인도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드라비다인의 얼굴에서 산긱 종족들 안에 파묻힌 사촌(四寸)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들은 상당히 진보된 문명을 발견하였다. 생물학적 한계가 있었어도 드라비다인은 우수한 문명을 세웠다. 그것은 온 인도 전역에 걸쳐서 흩어졌고, 데칸에서 현대까지 살아남았다.
79:4.1 (882.1) 안드 족속의 두 번째 인도 침투는 그리스도 이전 제3 천년의 중간에, 거의 5백 년 동안에 벌어진 아리아인의 침공이었다. 이 민족 이동은 안드 족속이 투르키스탄의 고향에서 마지막으로 탈출한 것을 가리킨다.
79:4.2 (882.2) 초기 아리아인의 중심들은 인도의 북쪽 절반에, 특히 북서쪽에 흩어져 있었다. 이 침공자들은 그 나라의 정복을 결코 끝내지 않았고, 나중에 이것을 소홀히 여겨서 파멸을 만났는데, 이는 그들의 적은 수가 남쪽에 있는 드라비다인에게 흡수되도록 취약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며, 이 드라비다인은 나중에 히말라야 지방을 제외하고 반도(半島) 전체에 들끓었다.
79:4.3 (882.3) 아리아인은 북쪽 지방을 제외하고, 인도에서 종족 면에서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데칸에서 그들의 영향은 종족보다 문화ㆍ종교에 끼친 것이었다. 인도 북부에서 이른바 아리아인 피가 더 많이 지속한 것은 이 지역에 그들이 큰 무리로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나중에 정복자ㆍ상인ㆍ선교사들로 인하여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 이전 바로 1세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아리아인의 피가 펀잡으로 줄곧 스며들었고, 마지막 유입(流入)은 헬라 민족의 전투를 뒤따랐다.
79:4.4 (882.4) 간지스 강 평야에서 아리아인과 드라비다인은 결국에 섞여서 높은 문화를 일으켰고, 이 중심은 북동쪽으로부터, 중국이 기여(寄與)한 것으로 인하여 나중에 강화되었다.
79:4.5 (882.5) 인도에는, 얼마큼 민주적인 아리아인 체계로부터 전제(專制) 형태와 군주 형태의 정부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사회 조직이 때때로 번성하였다. 그러나 사회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모습은 큰 사회 카스트가 지속된 것이었는데, 종족의 신분을 지속하려는 노력으로 아리아인이 이를 시작하였다. 정교한 이 카스트 제도는 오늘날까지 지속되어 왔다.
79:4.6 (882.6) 4대 카스트 가운데서 첫째를 빼고 모두가, 정복자인 아리아인이 열등한 백성과 피가 섞이는 것을 막으려는 헛된 노력에서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상급의 카스트, 곧 선생인 사제들은, 셋 족속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리스도 뒤 20세기의 브라만들은 둘째 동산의 사제들로부터 직계로 내려온 문화적 후손이다. 하지만 그 가르침은 화려한 그 선조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다.
79:4.7 (882.7) 아리아인이 인도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둘째 동산의 종교에서 남아 있던 전통에 간직된 그들의 신 개념을 가져왔다. 그러나 아리아인이 민족으로서 없어진 뒤에, 브라만 사제들은 데칸의 열등한 종교들과 갑자기 접촉하여 생긴 이교도의 여세를 결코 막아낼 수 없었다. 이처럼 인구의 대다수가 열등한 종교들의 미신,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미신의 속박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래서 인도는 옛 시절에 전조가 보였던 높은 문명을 일으키지 못했다.
79:4.8 (882.8) 그리스도 이전 6세기에 일어난 영적 각성은 인도에서 버티지 못했고, 마호메트 교도의 침공이 있기 전에 망했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일에 온 인도를 이끌려고 언젠가 더 위대한 고타마가 나타날지 모른다. 그리고 나서 사람을 마비시키는 영향, 진보하지 않는 영적 시력(視力)의 영향 밑에서 아주 오랫동안 혼미 상태에 빠졌던, 다능한 민족의 문화적 잠재성이 열매 맺는 것을 세상이 지켜볼 것이다.
79:4.9 (883.1) 문화는 생물학적 기초 위에 세워지지만, 카스트만 가지고 아리아인의 문화를 지킬 수 없었다. 이는 종교, 참 종교가, 인간의 형제 정신에 기초를 둔 우수한 문명을 세우도록 사람을 재촉하는 더 높은 에너지의 필수 근원이기 때문이다.
79:5.1 (883.2) 인도에 관한 이야기는 안드 족속이 더 오래 된 진화 민족들을 정복하고 궁극에 그 속에 파묻힌 것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동 아시아의 이야기는 1차 산긱, 특히 홍인과 황인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더 온당하다. 이 두 민족은, 유럽에서 청인들을 아주 크게 뒤처지게 만든, 저하된 네안데르탈인의 피와 섞이는 것을 대체로 피했으며, 따라서 1차 산긱 부류의 우수한 잠재성을 간직하였다.
79:5.2 (883.3) 초기의 네안데르탈인은 유라시아 전역에 널리 흩어졌고, 동쪽 날개는 저하된 동물 핏줄로 더욱 오염되었다. 이 인간 이하 부류들은 제5 빙하기 때문에 남쪽으로 밀려났고, 이것은 동 아시아로 산긱의 민족 이동을 아주 오랫동안 막았던 바로 그 빙상(氷床)이었다. 홍인이 인도의 고지를 돌아서 북동쪽으로 움직였을 때, 홍인은 북동 아시아가 이 인간 이하의 부류가 없음을 발견했다. 홍인종의 부족 조직은 다른 어느 민족들보다 더 일찍 형성되었고, 그들은 산긱 종족들의 중앙 아시아 중심지로부터 처음으로 이주한 자이다. 열등한 네안데르탈인의 핏줄은 나중에 이동하는 황인 부족들에게 멸망되거나 본토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홍인은 황인 부족들이 도착하기 전에, 거의 10만 년 동안 동 아시아에서 세력을 떨쳤다.
79:5.3 (883.4) 30만 년도 더 전에 황인종의 주류가 남쪽에서 바닷가의 이주민으로서 중국으로 들어갔다. 천년이 지날 때마다 그들은 내륙으로 멀리 멀리 침투했으나, 그들은 비교적 최근까지, 이동하는 티벳 형제들과 접촉을 가지지 않았다.
79:5.4 (883.5) 증가하는 인구의 압력은 북쪽으로 움직이는 황인종으로 하여금 홍인의 사냥터 속으로 비로소 밀고 들어가게 만들었다. 종족 사이의 자연스런 적대 감정과 더불어 이 침략은 적대 행위가 증가되게 하였고, 이처럼 더 깊이 아시아의 기름진 땅을 얻으려는 중대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79:5.5 (883.6) 홍인종과 황인종 사이에 오랜 세월에 걸친 이 싸움은 유란시아 역사에서 하나의 서사시이다. 20만 년이 넘도록 우수한 이 두 민족은 끊임없이 지독한 싸움을 벌였다. 초기의 투쟁에서는 홍인들이 대체로 성공했고, 그들의 침공하는 패거리들은 황인의 여러 촌락에 대소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황인은 전투 기술을 배우는 똑똑한 생도였고, 친구들과 평화롭게 사는 두드러진 능력을 일찍부터 나타냈다. 중국인은 뭉친 가운데 힘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배운 사람이었다. 홍인 부족들은 서로 죽이는 싸움을 계속하였고, 무자비한 중국인의 공격하는 손에 대번에 거듭 패배를 겪기 시작했으며, 중국인은 용서 없이 북쪽으로 행진을 계속했다.
79:5.6 (883.7) 10만 년 전에, 크게 학살당한 홍인 부족들이 마지막 빙하기의 물러가는 얼음을 등지고 싸우고 있었는데, 베링 지협(地峽) 위로, 서반구로[1] [1714] 가는 육상 통로가 지나갈 수 있게 되었을 때, 이 부족들은 아시아 대륙의 불친절한 바닷가를 망설이지 않고 버렸다. 순수한 마지막 홍인들이 아시아를 떠난 지 8만 5천 년이 되지만, 오랜 세월에 걸친 그 싸움은 승리한 황인종에게 유전의 자국을 남겼다. 북쪽의 중국 종족들은, 시베리아에 사는 안돈 족속과 함께, 홍인의 핏줄을 많이 동화(同化)하였고, 그렇게 함으로 어지간히 이득을 보았다.
79:5.7 (884.1) 북 아메리카의 인디안은 아담과 이브의 안드 자손과도 결코 접촉을 가지지 않았고, 아담이 오기 5만여 년 전에, 그들의 아시아 고향을 빼앗겼다. 안드 족속이 이동하던 시절에 순수 홍인의 핏줄은 북 아메리카에서 유목하는 부족으로서 퍼지고 있었고, 이들은 소규모로 농사를 짓던 사냥꾼이었다. 이 종족 및 문화 집단들은, 두 아메리카에 도착할 때부터 기독교 시대의 첫째 천년 끝에 유럽의 백인 종족들에게 발견될 때까지, 나머지 세계와 거의 완전히 고립된 채로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는 에스키모인이, 북쪽의 홍인 부족들이 본 중에서 백인에 가장 가까웠다.
79:5.8 (884.2) 안드 족속의 영향을 제쳐놓고, 오직 홍인과 황인 종족이 높은 정도의 문명을 일찍이 이룩한 인간 혈통이었다. 가장 오래 된 아메리카 인디안의 문화는 칼리포니아에 있는 오나모나론톤 중심이었으나, 이것은 기원전 35,000년이 되어서 사라진 지 오래 되었다. 멕시코와 중앙 아메리카에서, 그리고 남 아메리카의 산지에서 나중에 더 오래 지속되는 문명은, 주로 홍인이지만 황인ㆍ주황인ㆍ청인이 상당히 섞인 종족이 세운 것이다.
79:5.9 (884.3) 안드 족속 혈통의 흔적이 페루에 다다르기는 했어도, 이 문명은 산긱의 진화적 산물이었다. 북 아메리카의 에스키모, 그리고 남 아메리카의 폴리네시아 안드 족속 몇을 빼고, 서반구의 민족들은 그리스도 이후 제1 천년 끝까지 나머지 세상과 아무 접촉이 없었다. 유란시아 종족들을 개량하려는 멜기세덱의 최초의 계획에는, 아담의 순수 핏줄 후손 1백만 명이 두 아메리카의 홍인을 개량하러 가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79:6.1 (884.4) 건너 북 아메리카로 홍인을 몰아낸 뒤에 얼마 있다가, 세력이 커지는 중국 민족은 동 아시아의 여러 강 유역에서 안돈 족속을 깨끗이 쓸어 버렸고, 북쪽에 시베리아로, 그리고 서쪽에 투르키스탄으로 그들을 몰아냈는데, 거기서 그들은 곧 안드 족속의 우수한 문화와 접촉하게 되었다.
79:6.2 (884.5) 버마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인도와 중국의 문화가 섞이고 혼합되어서 그 지역에서 연속되는 문명을 일으켰다. 사라진 녹색 인종이 세계에서 어느 다른 데보다 여기서 큰 비율로 지속하였다.
79:6.3 (884.6) 많은 다른 인종이 태평양의 섬들을 차지했다. 대체로, 남쪽에, 그리고 그때 더 널리 퍼져 있던 섬들은 녹인(綠人)과 남인(藍人)의 피를 많이 지닌 민족들이 차지하였다. 북쪽 섬들은 안돈 족속이, 나중에는 황인과 홍인의 혈통을 많이 품은 종족들이 차지했다. 일본 민족의 선조는 기원전 12,000년까지 본토에서 밀려나지 않았는데, 이때 그들은 남쪽으로 해안을 따라 북쪽의 중국 부족들에게 강력한 공격을 받고서 쫓겨났다. 그들의 마지막 탈출은 인구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신다운 인물로 여기게 된 어느 추장이 주도권을 쥐었기 때문이었다.
79:6.4 (885.1) 인도와 레반트의 민족들처럼, 승리한 황인 부족들은 물가를 따라서, 또 강의 상류에 최초의 중심지들을 세웠다. 해안에 있던 촌락들은 잦아지는 홍수(洪水)와 바뀌는 강 물줄기가 낮은 땅의 도시들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자, 후일에는 잘 견디지 못했다.
79:6.5 (885.2) 2만 년 전에 중국인의 선조는 원시 문화와 배움이 있는 강력한 중심을 열두 군데, 특히 황하와 양자강을 따라서 세웠다. 그리고 신장(新彊)과 티벳으로부터 우수한 혼합 민족들의 꾸준한 인파가 도착함으로, 이제 이 중심들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티벳으로부터 양자강 유역까지의 이민은 북쪽처럼 그다지 널리 퍼지지 않았고, 티벳의 중심들은 타림 분지만큼 진보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이동은 안드 족속의 피를 얼마큼 동쪽으로 강가의 촌락들로 날랐다.
79:6.6 (885.3) 고대 황인종의 우수성은 4대 요인 때문이다:
79:6.7 (885.4) 1. 유전 요인. 유럽에 있는 푸른 사촌들과 달리, 홍인종과 황인종 모두가 저하된 인간 핏줄과 섞이는 것을 대체로 피했다. 북쪽의 중국인은 소량의 우수한 홍인과 안돈 족속의 핏줄로 이미 강화되어 있었고, 안드 족속의 피가 상당히 흘러 들어옴으로 곧 이득을 보게 되어 있었다. 남쪽의 중국인은 이 점에서 그다지 운이 좋지 않았는데, 그들은 오랫동안 녹인종을 흡수함으로 고생하였고, 나중에 드라비다 안드 족속의 침공으로 말미암아 인도에서 밀려나오는 열등한 민족들의 떼가 침투해 들어와서 더욱 약해졌다. 오늘날 중국에는 북부 종족과 남부 종족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79:6.8 (885.5) 2. 사회적 요인. 황인종은 자기들끼리 평화를 지키는 것이 귀중함을 일찍이 배웠다. 내부의 평화 성향은 그들의 문명이 수백만 사이에 퍼지는 것을 보장하도록 인구의 증가에 크게 이바지했다. 기원전 25,000년부터 5000년까지, 유란시아에서 가장 큰 집단 문명은 중국의 중앙과 북부에 있었다. 황인은 종족의 단결을 처음으로―대규모의 문화ㆍ사회ㆍ정치 문명을 처음으로―이룩한 사람이었다.
79:6.9 (885.6) 기원전 15,000년에 중국인은 공격적인 군국주의자였다. 그들은 지난날을 지나치게 존중함으로 약화되지 않았고, 그 수가 1천2백만이 채 되지 않았으며, 하나의 공통 언어를 쓰는 밀집된 단체를 이루었다. 이 시대에 그들은 진짜 국가를 세웠고, 유사(有史) 시대의 정치적 연합보다 훨씬 더 뭉쳐지고 동질성이 있었다.
79:6.10 (885.7) 3. 영적 요인. 안드 족속이 이동하던 시대에 중국인은 땅에서 영적 민족에 속했다. 싱랑톤이 선포한 하나의 진리를 숭배하는 데 오랫동안 매달린 것은 대부분의 다른 민족들보다 그들이 앞서게 했다. 진취적이고 앞선 종교의 자극은 흔히 문화의 발전을 좌우하는 요인이다. 인도가 시드는 동안, 진리를 최고의 신으로서 모시는 종교의 자극, 활력을 주는 자극을 받으며 중국은 선두를 달렸다.
79:6.11 (885.8) 이렇게 진리를 숭상하는 정신은 자연의 법칙과 인류의 잠재성을 연구하고 두려움 없이 탐구하도록 자극하였다. 6천 년 전에도 중국인은 아직도 날카로운 연구자였고 진리를 적극적으로 탐구하였다.
79:6.12 (885.9) 4. 지리적 요인. 중국은 서쪽에 산, 동쪽에는 태평양의 보호를 받는다. 오로지 북쪽에 공격받을 길이 열려 있으며, 홍인의 시절부터 후일에 안드 족속의 후손이 오기까지, 어떤 공격하는 민족도 북쪽을 차지하지 않았다.
79:6.13 (886.1) 그리고 산의 장벽이 없고 나중에 영적 문화가 쇠퇴하지 않았더라면, 황인종은 의심할 여지 없이, 투르키스탄으로부터 안드 민족 이동의 더 큰 부분을 끌어들이고, 의문의 여지 없이 세계 문명을 재빨리 지배했을 것이다.
79:7.1 (886.2) 약 1만 5천 년 전에 안드 족속은 어지간히 큰 떼를 지어서, 디다오 (狄道)[2] [1715] 통로를 가로질러서, 간쑤(甘肅)의 중국 촌락들 사이에서, 황하 상류의 유역 위에 퍼지고 있었다. 당장에 그들은 동쪽으로 허난(河南)까지 침투했고, 거기에는 가장 진보한 촌락들이 자리를 잡았다. 서쪽으로부터 이렇게 침투한 것은 대체로 안돈 족속이 절반이고 안드 족속이 절반이었다.
79:7.2 (886.3) 황하를 따라서 생긴 문화의 북부 중심들은 언제나 양자강에 있는 남쪽 촌락들보다 더 진취성이 있었다. 적은 무리라도 이 우수한 필사자들이 도착한 뒤 몇천 년 안에, 황하를 따라 생긴 촌락들은 양자강에 있는 마을들보다 선두로 나섰고, 남쪽에 있는 형제보다 우위를 차지했으며, 이 자리는 그 뒤로 늘 유지되었다.
79:7.3 (886.4) 안드 족속이 그렇게 많았기 때문이 아니고, 그 문화가 그다지 우수했기 때문도 아니었으나, 그들과 섞인 것은 더 능력 있는 혈통을 낳았다. 북쪽의 중국인은 타고난 유능한 지성을 약간 자극하기에 겨우 넉넉할 만큼 안드 족속의 피를 받았지만, 이것은 북부 백인 종족들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들떠 있고 탐험하고 싶은 호기심으로 그들을 불태울 만큼 많지는 않았다. 이렇게 안드 족속의 유전을 적게나마 주입한 것은 산긱 부류의 타고난 침착성을 적게 방해하였다.
79:7.4 (886.5) 후일에 안드 족속의 인파는 메소포타미아의 어떤 진보된 문화를 함께 가져왔다. 서쪽으로부터 온 마지막 이민 물결의 경우에 이것이 특히 참말이었다. 그들은 북쪽 중국인의 경제 및 교육 관습을 크게 개량하였다. 황인종의 종교 문화에 그들이 미친 영향은 오래 가지 않았지만, 그들의 나중 후손들은 후일에 생긴 영적 각성에 많이 이바지했다. 그러나 에덴과 달라마시아의 아름다움에 관한 안드 족속의 전통은 중국인의 전통에 영향을 미쳤다. 옛날 중국의 전설은 “신들의 땅”이 서쪽에 있다고 본다.
79:7.5 (886.6) 중국 민족은, 투르키스탄에서 기후가 변하고 후일의 안드 족속 이민이 도착하고 나서 기원전 1만 년이 되기까지, 비로소 도시를 세우고 제조업에 종사하지 않았다. 이 새로운 피가 주입된 것은 황인의 문명에 크게 보태기보다, 우수한 중국인 혈통의 잠재 성향을 더욱, 그리고 빨리 개발하도록 자극하였다. 허난(河南)에서부터 산시(陝西)까지, 진보된 문명의 잠재성이 열매를 맺고 있었다. 금속 가공과 모든 제조 기술이 이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79:7.6 (886.7) 옛날에 중국과 메소포타미아의 어떤 시간 계산, 천문학, 정부의 행정 방법은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두 중심 사이에 상업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생겼다. 중국 상인들은 수메르인 시절에도, 투르키스탄을 거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육로로 여행하였다. 이 교환은 한편으로 치우치지도 않았다―유프라테스 강 유역은, 간지스 평야에 있던 민족들처럼, 이로 인하여 상당히 이득을 보았다. 그러나 기후의 변화와 그리스도 이전 제3 천년에 있었던 유목민의 침공은 중앙 아시아의 카라반 길을 거치는 무역의 양을 크게 줄였다.
79:8.1 (887.1) 홍인은 너무 많이 전투를 겪어서 고생했지만, 중국인 사이에서 국가의 발전은, 아시아를 철저히 정복했기 때문에 늦어졌다는 것이 아주 빗나간 말은 아니다. 그들은 민족을 단결하는 큰 잠재성을 가졌으나 그 잠재성을 알맞게 개발하지 못했는데, 항상 바깥에서 침공하는 위험이 주는, 계속 몰아붙이는 자극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79:8.2 (887.2) 동 아시아의 정복을 마치는 것과 함께 이 고대의 군사(軍事) 국가는 차츰차츰 허물어졌다―지난날의 전쟁을 잊어버렸다. 홍인종과 가졌던 서사시 같은 투쟁에서, 활 쏘는 민족들과 옛날에 싸웠다는 흐릿한 전통이 겨우 지속되었다. 중국인은 일찍부터 농사를 짓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고, 이것은 그들의 평화 성향에 더 이바지했다. 한편 농업에 필요한 인구 밀도보다 훨씬 적은 인구는 그 나라의 평화 성향에 더욱 기여했다.
79:8.3 (887.3) 지난날의 성취를 의식하는 태도 (오늘날 얼마큼 줄어들었다), 압도적으로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보수주의, 잘 발달된 가족 생활은 조상 숭배를 낳았고, 궁극에는 과거의 인물을 숭배하다시피 존경하는 관습을 초래하였다. 그리스ㆍ로마의 문명이 붕괴된 뒤에 5백여 년 동안, 유럽에서 백인 종족들 사이에 아주 비슷한 태도가 지배하였다.
79:8.4 (887.4) 싱랑톤이 가르쳤던 “하나의 진리”를 믿는 신앙과 숭배는 결코 완전히 죽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새로운 상급 진리의 추구는 이미 확립된 것을 존경하는 성향이 깊어짐으로 빛을 잃게 되었다. 황인종의 천재는 천천히 미지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알려진 것의 보존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빨리 진보하던 문명이었던 것이 정체(停滯)하게 된 이유이다.
79:8.5 (887.5) 기원전 4000년과 500년 사이에 황인종의 정치적 재통일이 이루어졌으나 양자강과 황하(黃河)에 있던 중심들의 문화적 연합은 이미 그 전에 성취되었다. 후일에 부족 집단의 이러한 정치적 재통일은 싸움 없이 되지 않았지만, 전쟁에 대한 사회의 여론은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조상 숭배, 늘어나는 지방 언어, 그리고 몇천 년 동안 군사 행동의 요청이 없어진 것은 이 민족을 극도로 평화롭게 만들었다.
79:8.6 (887.6) 진보된 국가를 일찍 개발하리라는 전망을 실현하지 못했는데도, 황인종은 문명의 기술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특히 농업과 원예 분야에서 점진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산시와 허난에서 농본주의자들이 부닥친 치수(治水) 문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집단의 협동을 요구했다. 그러한 관개 및 토양 보존의 문제는 적지 않게 서로 의존하는 성향이 발달하도록 이바지했고, 그 결과로 농업 집단들 사이에 평화가 촉진되었다.
79:8.7 (887.7) 학교가 세워짐과 더불어, 글쓰기의 발전이 곧 전례 없는 규모로 지식을 보급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그러나 뜻을 표시하는 글쓰기 체계의 거추장스러운 본질은 인쇄술이 일찍 나타났는데도, 지식 계급의 수에 한계를 지워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회를 표준화하고 종교ㆍ철학적으로 독단화되는 과정이 빨리 진행되었다. 조상을 숭배하는 종교의 발전은 자연 숭배를 포함하는 미신의 범람으로 더욱 복잡하게 되었으나, 진정한 하나님 개념의 남은 흔적이 제국의 상제(上帝) 숭배에 간직된 채로 남아 있다.
79:8.8 (888.1) 조상 숭배의 큰 단점은 뒤를 돌아보는 철학을 조장하는 것이다. 지난날로부터 지혜를 거두는 것이 아무리 현명하더라도, 지난날을 진리의 유일한 근원으로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진리는 상대적이고 팽창한다. 진리는 언제나 현재에서 살고, 각 세대의 사람들 안에서―아니 각 인생 속에서―새 표현을 이룩한다.
79:8.9 (888.2) 조상 존중에 있는 큰 장점은 그러한 태도가 가족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중국 문화가 놀랍게 안정되고 지속하는 것은 가족에게 최고의 지위를 줌으로 생기는 결과이니, 왜냐하면 문명은 가족의 효과적 작용에 직접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가족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 아니 어떤 다른 민족도 거의 접근하지 못하는 그런 종교적 중요성까지 얻었다.
79:8.10 (888.3) 짙어져 가는 조상 숭배 교파가 강요하는 효도(孝道)와 가족에 대한 충성은 우수한 가족 관계와 오래 가는 가족 집단이 세워지는 것을 보장했고, 이것은 모두 문명을 보존하는 데 다음 요소를 수월하게 만들었다:
79:8.11 (888.4) 1. 재산과 부(富)의 보존.
79:8.12 (888.5) 2. 한 세대를 넘어서 지식을 한데 모은다.
79:8.15 (888.8) 안드 족속이 오면서 시작된 중국 문명의 형성기는, 그리스도 전 6세기에 크게 윤리적ㆍ도덕적ㆍ반(半)종교적 각성이 있기까지 계속된다. 중국인의 전통은 지난날의 발전에 관한 흐릿한 기록을 간직한다. 즉 모계 가족에서 부계(父系) 가족으로 옮겨 간 것, 농업의 확립, 건축의 발전, 산업의 시작―이 모든 것을 연달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어떤 다른 비슷한 설명보다도 훨씬 더 정확하게, 한 우수한 민족이 미개한 수준에서 훌륭히 올라간 그림을 제시한다. 이 시기에 그들은 원시 농경 사회로부터 도시ㆍ제조업, 금속 가공과 상업 교류, 정부ㆍ글쓰기ㆍ수학ㆍ예술ㆍ과학ㆍ인쇄술을 포함하는 더 높은 사회 조직으로 성장했다.
79:8.16 (888.9) 그래서 황인종의 고대 문명은 여러 세기를 통해서 지속해 왔다. 중국 문화에서 처음으로 중요한 진보가 있은 지 거의 4만 년이 된다. 비록 후퇴가 여러 번 있었으나, 한(漢)의 아들들의 문명은 20세기 시대에 바로 이르기까지, 계속 진보하는 단절되지 않은 그림을 어느 것보다 가장 가깝게 제시한다. 백인 종족의 기계 및 종교의 발전은 높은 수준이었으나, 그들은 결코 가족에 대한 충성심, 집단 윤리, 또는 개인의 도덕성 면에서 중국인을 뛰어넘은 적이 없다.
79:8.17 (888.10) 이 옛 문화는 인간의 행복에 많이 기여했다. 수백만의 인간이 살다가 죽었고, 그 문화의 업적으로 복을 받았다. 몇 세기 동안 이 위대한 문명은 지난날의 월계관에 기대고 있었지만, 지금도 필사 존재의 초월 목표를 새로이 그려 보려고, 끝없는 진보를 위하여 쉴새없는 투쟁을 또 한 번 시작하려고 다시 깨어나고 있다.
80:0.1 (889.1) 유럽의 청인은 큰 문화적 문명을 스스로 이룩하지 않았어도, 아담화된 그 핏줄이 나중에 안드 침공자들과 섞였을 때, 보라 민족과 그 안드 후계자의 시절 이후로 일찍이 유란시아에서 나타난 진취적 문명을 이룩한 가장 강력한 혈통 하나를 낳은 생물학적 기초를 제공했다.
80:0.2 (889.2) 현대의 백인 종족들은 아담 혈통의 남은 핏줄을 포함하는데, 이 아담 혈통은 산긱 종족, 얼마큼 홍인과 황인이지만 특히 청인과 섞이게 되었다. 모든 백인 민족에는 최초의 안돈 족속의 줄기가 상당한 비율로 있고, 초기 놋 족속의 혈통은 더욱 많이 있다.
80:1.1 (889.3) 마지막 안드 족속이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밀려나기 전에, 그들의 많은 형제는 모험가ㆍ선생ㆍ상인ㆍ군인으로서 유럽으로 들어갔다. 보라 인종이 있던 옛 시절에 지중해의 계곡은 지브랄타 지협(地峽)과 시실리 육지 다리로 보호되었다. 사람이 아주 일찍부터 가졌던 해상 무역의 얼마큼은 이 내륙 호수들에서 자리를 잡았고, 거기서 북쪽에서 온 청인과 남쪽에서 온 사하라인이 동쪽에서 온 놋 족속과 아담 족속을 만났다.
80:1.2 (889.4) 지중해의 동쪽 계곡에서 놋 족속은 그들의 가장 광범위한 문화 중의 하나를 세웠고, 이 중심들로부터 얼마큼 남쪽 유럽으로, 그러나 특히 아프리카 북부로 파고들었다. 얼굴이 넓적한 놋 및 안돈 종류의 시리아인은, 천천히 솟아오르는 나일 강 삼각지에 있는 그들의 촌락들과 관련하여, 아주 일찍부터 도기와 농업을 들여왔다. 그들은 또한 양ㆍ염소ㆍ가축, 그리고 다른 길들인 동물을 수입했고, 크게 개량된 금속 가공 방법을 가져왔으며, 시리아는 당시에 그 산업의 중심이었다.
80:1.3 (889.5) 3만 년이 넘도록 에집트는 꾸준히 흘러 들어오는 메소포타미아인을 받았고, 그들은 자신의 예술과 문화를 가져와서 나일 강 유역의 문화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큰 떼의 사하라 민족들이 진입한 것은 나일 강가를 따라 있던 초기의 문명을 크게 퇴화시켰고, 그래서 에집트는 1만 5천여 년 전에 가장 낮은 문화 수준에 도달했다.
80:1.4 (889.6) 그러나 그 이전에는 아담 족속의 서향 이동을 막을 것이 거의 없었다. 사하라는 탁 트인 풀 뜯는 땅이었고, 거기에 목자와 농사꾼이 퍼져 있었다. 이 사하라인은 한 번도 제조업에 종사하지 않았고, 도시를 세우지도 않았다. 그들은 남색-흑인 집단이었고, 멸종된 녹색 및 주황 인종의 핏줄을 널리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땅이 솟아오르고 물을 실은 이동하는 바람이, 번영하고 평화로운 이 문명의 잔재를 흩어 버리기 전에, 그들은 아주 적은 양의 보라 유전을 받았다.
80:1.5 (890.1) 아담의 피는 대부분의 인종들에게 나누어졌으나, 더러는 다른 인종보다 더 확보하였다. 인도의 혼합 종족과 검은 빛을 띤 아프리카 민족들은 아담 족속의 마음을 끌지 못했다. 홍인이 두 아메리카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더라면 아담 족속은 홍인과 자유롭게 섞였을 것이다. 그들은 황인에게 친절한 마음이 있었지만, 황인도 마찬가지로 멀리 떨어진 아시아에 있어서 접촉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모험이나 이타주의에 마음이 움직였을 때나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밀려났을 때,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유럽의 청인 종족들과 연합하기를 택했다.
80:1.6 (890.2) 청인은 그때 유럽을 휩쓸었고, 그 전에 이동하던 아담 족속이 싫어하는 종교적 관습이 없었으며, 보라 인종과 청인종 사이에 성적 매력이 크게 작용했다. 청인 가운데 빼어난 자는 아담 족속과 짝짓도록 허락받는 것을 높은 명예로 여겼다. 청인은 누구나 아주 솜씨 있고 예술적이 되어서 어느 아담 족속 여자의 사랑을 얻으려는 꿈을 품었으며, 아담 족속의 눈길을 받는 것은 우수한 청인 여자의 가장 높은 꿈이었다.
80:1.7 (890.3) 이동하는 이 에덴의 아들들은 천천히 청인종의 높은 부류와 연합했고 그들의 문화 풍습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한편 네안데르탈 종족의 남아 있는 혈통을 무자비하게 없애버렸다. 종족을 혼합하는 이 기법은, 열등한 핏줄의 제거와 함께, 힘차고 진취적이고 우수한 청인 집단을 열둘 이상 낳았는데, 이들 가운데 하나를 너희는 크로마뇽인이라 불러 왔다.
80:1.8 (890.4) 이것과 기타 이유로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초기 물결은 거의 순전히 유럽으로 갔으며, 좀더 유리한 이동 경로였다는 것은 이 중에 가장 작은 이유는 아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현대 유럽 문명의 전제 조건을 결정하였다.
80:2.1 (890.5) 보라 인종이 유럽으로 초기에 팽창한 것은 오히려 갑작스러운 어떤 기후와 지질의 변화로 단축되었다. 북쪽의 빙원들이 물러가자, 서쪽으로부터 물을 실은 바람이 북쪽으로 옮겨졌고, 사하라의 확 트인 큰 목초 지역을 차츰차츰 불모의 사막으로 만들었다. 이 가뭄은 큰 사하라 고원에서 살던 거주자들을 흩어 버렸는데, 그들은 키가 작고 갈색 머리와 까만 눈을 가졌으나 얼굴이 길었다.
80:2.2 (890.6) 더 순수한 남색 요소들은 남쪽으로 중앙 아프리카의 숲으로 옮겨 갔고, 그 뒤로 늘 거기에 남아 있었다. 좀더 혼합된 무리들은 세 방향으로 퍼졌다: 서쪽에 우수한 부족들은 스페인으로, 그리고 거기서부터 유럽의 인접한 부분으로 옮겨 갔고, 나중에 지중해에서 얼굴이 길고 갈색 머리털을 가진 민족의 핵심을 이루었다. 사하라 고원의 동쪽에 있던 진취성이 가장 적은 가지는 아라비아로, 그리고 거기서부터 메소포타미아 북부와 인도를 통해서 멀리 세일론까지 옮겨 갔다. 중앙 집단은 북쪽과 동쪽으로 나일 강 유역까지, 그리고 팔레스타인으로 옮겨 갔다.
80:2.3 (890.7) 데칸으로부터 이란ㆍ메소포타미아를 거쳐서, 지중해의 양쪽 바닷가를 따라서 흩어진 현대 민족들 사이에 어떤 정도의 인척 관계를 가리키는 것은 바로 이 2차 산긱 종속 계층이다.
80:2.4 (890.8) 아프리카에서 이런 기후의 변화가 있을 무렵에, 잉글랜드는 대륙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고, 덴마크는 바다에서 솟아올랐으며, 한편 지중해의 서쪽 분지를 보호하던 지브랄타 지협(地峽)은 지진의 결과로 무너졌고, 이 내륙의 호수를 대서양 수준까지 재빨리 올려 놓았다. 대번에 시실리 육지 다리가 물 속에 잠겼고, 한 바다 지중해를 만들고 이를 대서양과 이었다. 이 자연의 대이변은 인간 촌락 수십 개를 물에 잠기게 하였고, 온 세계 역사에서 홍수로 말미암아 최대로 생명의 손실을 일으켰다.
80:2.5 (891.1) 지중해 분지가 이렇게 물에 삼켜진 것은 아담 족속의 서향 이동을 즉시 줄였고, 한편 사하라인이 크게 유입된 것은, 아담 족속의 늘어나는 무리를 위하여 그들이 에덴의 북쪽과 동쪽으로 출구를 찾도록 이끌었다. 아담의 후손들이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북쪽으로 여행하자, 그들은 산의 장벽과 당시에 확대된 카스피 바다와 마주쳤다. 투르키스탄 전역에 흩어진 촌락 주위에서, 여러 세대 동안 아담 족속은 사냥하고 짐승을 기르고 땅을 갈았다. 천천히 이 훌륭한 민족은 영토를 유럽으로 뻗었다. 그러나 이제 아담 족속은 동쪽으로부터 유럽으로 들어가서 청인의 문화가 아시아보다 몇천 년 뒤떨어진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이 지역이 메소포타미아와 거의 전적으로 접촉이 없었기 때문이다.
80:3.1 (891.2) 청인(靑人) 문화의 옛 중심은 유럽의 모든 강을 따라서 자리를 잡았지만, 오직 솜 강이 빙하기 이전 시대에 따랐던 바로 그 경로에서 지금도 흐른다.
80:3.2 (891.3) 우리는 청인이 유럽 대륙에 스며들었다고 이야기하지만, 몇십의 종족 부류가 있었다. 3만 5천 년 전에도, 유럽의 청인종은 이미 홍인과 황인의 핏줄을 지닌 어지간히 섞인 민족이었고, 한편 대서양의 바닷가 땅에서, 또 오늘날의 러시아 지역에서, 상당한 양의 안돈 족속의 피를 흡수하고, 남쪽으로 사하라 종족들과 접촉이 있었다. 그러나 많은 종족 집단을 열거하려고 애쓰는 것은 무익할 것이다.
80:3.3 (891.4) 아담 이후 시절의 초기에 유럽의 문명은 청인(靑人)의 활력과 예술을 아담 족속의 창조적 상상력과 독특하게 섞은 것이었다. 청인은 크게 활력을 가진 민족이었으나, 아담 족속의 문화와 영적 지위를 크게 저하시켰다. 허다한 자가 처녀들을 속이고 유혹하는 경향 때문에, 아담 족속은 그들의 종교를 크로마뇽인에게 인식시키기가 아주 어려웠다. 몇만 년 동안 유럽에서 종교는, 인도와 에집트에서 발전한 것과 비교해서 낮은 수준에 있었다.
80:3.4 (891.5) 청인은 어떤 거래에서도 완전히 정직했고, 혼합된 아담 족속의 성적(性的) 타락이 도무지 없었다. 그들은 처녀기를 존중했고, 전쟁 때문에 남자가 부족하게 되었을 때에만 일부다처(一夫多妻)를 실행했다.
80:3.5 (891.6) 이 크로마뇽 민족은 용감하고 멀리 내다보는 종족이었다. 그들은 효과적인 아이 훈련 체계를 유지했다. 부모 양쪽이 이 수고에 참여했고, 나이 든 아이들의 도움이 충분히 이용되었다. 아이들은 각자 동굴 보존, 예술, 부싯돌 만들기를 조심스럽게 훈련을 받았다. 나이가 어릴 때 여자는 가정 기술과 소박한 농업을 훤히 통달했고, 한편 남자는 솜씨 있는 사냥꾼이요 용감한 무사(武士)였다.
80:3.6 (891.7) 청인은 사냥꾼이요, 어부요, 먹을 것을 모으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배 만들기에 숙달되었다. 돌도끼를 만들고, 나무를 자르고, 통나무 오두막을 세웠으며, 이것은 일부가 땅 밑에 있었고 가죽으로 그 지붕을 덮었다. 그리고 시베리아에는 아직도 비슷한 오막살이를 짓는 종족들이 있다. 남쪽의 크로마뇽인은 대체로 동굴과 석굴에서 살았다.
80:3.7 (892.1) 겨울이 모질게 추울 때, 동굴 입구에서 밤에 망보는 파수들이 얼어죽는 것은 드물지 않았다. 그들은 용기가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예술가였다. 아담 족속과 섞이는 것은 창조적 상상력을 갑자기 가속했다. 청인 예술의 절정은 약 1만 5천 년 전, 곧 살갗이 더 검은 민족들이 아프리카로부터 스페인을 통해서 북쪽으로 오던 시절 이전이었다.
80:3.8 (892.2) 약 1만 5천 년 전에 알프스의 숲은 널리 퍼지고 있었다. 세계의 즐거운 사냥터를 메마른 불모(不毛)의 사막으로 바꾼 바로 그 기후의 강요 때문에, 유럽의 사냥꾼들은 강 유역으로, 그리고 바닷가로 밀려나고 있었다. 비바람이 북쪽으로 이동함에 따라서, 유럽의 트인 큰 목초지들이 숲으로 덮이게 되었다. 크게, 비교적 갑작스럽게 이렇게 기후가 변화한 것은 유럽의 종족들을 광활한 평야의 사냥꾼으로부터 목자(牧者)로, 그리고 어느 정도는 어부와 땅을 경작하는 자로 바꾸도록 몰았다.
80:3.9 (892.3) 한편으로 문화의 발전을 낳았어도, 이 변화는 어떤 생물학상의 후퇴를 일으켰다. 이전의 사냥 시대에 우수한 부족들은 상급의 전쟁 포로들과 서로 결혼했고, 열등하다고 판단된 자를 어김없이 죽였다. 그러나 비로소 촌락을 세우고 농업과 상업에 종사함에 따라서, 그들은 평범한 많은 포로를 노예로 살려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 노예들의 후손이 나중에 크로마뇽 부류 전체를 아주 크게 저하시켰다. 이 문화의 후퇴는 동쪽으로부터 새로운 추진력을 받을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그때 메소포타미아인의 마지막 대규모 침공이 유럽을 휩쓸어 크로마뇽 부류를 재빨리 흡수하고, 백인의 문명을 시작하였다.
80:4.1 (892.4) 안드 족속이 유럽으로 꾸준한 흐름을 이루어 쏟아지는 동안, 일곱 번 큰 침공이 있었고, 마지막에 도착한 자들은 세 차례 큰 인파(人波)를 이루어 말을 타고 왔다. 더러는 에게 바다의 섬들을 거쳐서, 그리고 다뉴브 강 유역을 거슬러 유럽으로 들어갔으나, 그보다 일찍 있었던 더 순수한 핏줄의 대다수는 볼가 강과 돈 강의 목초지를 가로질러 북쪽 경로로 서북 유럽으로 이동했다.
80:4.2 (892.5) 셋째와 넷째 침공 사이에, 러시아의 여러 강과 발트 해를 거쳐서 시베리아로부터 온, 안돈 족속의 한 떼가 북쪽에서 유럽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북쪽의 안드 부족들에게 즉시 동화되었다.
80:4.3 (892.6) 그보다 일찍 있었던 더 순수한 보라 인종의 팽창은, 나중에 얼마큼 군사적이고 정복을 좋아하는 안드 족속 후손의 팽창보다 훨씬 더 평화적이었다. 아담 족속은 평화를 좋아하고, 놋 족속은 싸우기를 좋아했다. 이 두 핏줄의 연합은, 나중에 산긱 종족들과 섞여서, 유능하고 공격적인 안드 족속을 낳았고, 그들은 실제로 군사적 정복을 실행하였다.
80:4.4 (892.7) 그러나 말은 서양에서 안드 족속의 지배를 결정한 진화적 요인이었다. 말은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기동성의 이점을 흩어지는 안드 족속에게 주었고, 안드 기병(騎兵)의 마지막 집단으로 하여금 카스피 바다를 둘러서 재빨리 진행하여, 온 유럽을 휩쓸도록 만들었다. 그 전에 안드 족속의 인파는 모두 아주 느리게 움직여서,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멀리 떨어진 데는 어디서나, 붕괴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 후일의 인파는 너무 빨리 움직여서 그들은 단결된 무리로 유럽에 이르렀고, 어느 정도 더 높은 문화를 아직도 지니고 있었다.
80:4.5 (893.1) 힘차게 달리는 안드 기마병들이 그리스도 이전 제6 및 제7 천 년에 등장했을 때, 중국과 유프라테스 강 지역을 제외하고, 사람이 사는 세계 전체가 1만 년 동안에 이룩했던 문화의 진보는 아주 제한되었다. 이 기마병들이 청인 가운데 가장 나은 요소를 흡수하고 가장 못한 요소를 없애면서 러시아의 평원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움직임에 따라서, 이들은 섞여서 한 민족이 되었다. 이들은 이른바 노르딕 종족, 곧 스칸디나비아, 게르만, 앙글로 삭슨 민족들의 선조였다.
80:4.6 (893.2) 오래지 않아서 우수한 청인의 핏줄은 북 유럽 전역에 걸쳐서 안드 족속에게 완전히 흡수되었다. 오로지 라프랜드(그리고 어느 정도 브리타니)에서 더 오래 된 안돈 족속이 신분 비슷한 것이라도 보존하였다.
80:5.1 (893.3) 북 유럽의 부족들은 투르키스탄과 남부 러시아 지역을 통해서 메소포타미아로부터 꾸준히 흘러 들어오는 이민으로 계속 강화되고 개량되었고, 마지막 안드 기병의 군대가 유럽을 휩쓸었을 때, 세계의 모든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그 지역에서 안드 유전을 가진 사람들이 이미 더 많이 있었다.
80:5.2 (893.4) 3천 년 동안 북쪽 안드 족속의 군사 본부는 덴마크에 있었다. 이 중앙 거점으로부터 연달아 정복하는 군대가 떠나갔고, 이것은 지나가는 여러 세기가 메소포타미아 정복자들이 정복된 민족들과 마침내 혼합되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안드 성향이 자꾸 줄어들고, 갈수록 더 백인이 되어 버렸다.
80:5.3 (893.5) 청인은 북쪽에서 흡수되었고, 남쪽을 침투한 백인 기병 침공자들에게 마침내 굴복했지만, 진행하는 혼합된 백인종 부족들은 크로마뇽인의 완강하고 오래 끈 저항에 부딪쳤다. 그러나 우수한 지능과 항상 늘어나는 생물학적 저장은 그들로 하여금 더 오래 된 종족을 싹 쓸어버릴 수 있게 하였다.
80:5.4 (893.6) 백인과 청인 사이에 결정적인 싸움은 솜 강 유역에서 벌어졌다. 여기서, 청인종의 정예가 남쪽으로 움직이는 안드 족속과 통렬하게 싸웠고, 이 크로마뇽인은 백인 침공자의 우수한 군사 작전에 무릎을 꿇기 전에, 5백 년이 넘도록 그들의 영토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 솜 강 전투에서 북쪽 군대의 승리한 사령관 토르는 북쪽 백인 부족들의 영웅이 되었고, 나중에는 그들 가운데 더러가 그를 신으로서 존경했다.
80:5.5 (893.7) 가장 오래 버틴 청인의 본거지는 프랑스 남부에 있었으나, 마지막으로 큰 군사 저항 세력은 솜 강을 따라서 무너졌다. 후일의 정복은 강을 따라서 상업의 침투, 인구의 압력 때문에, 그리고 열등한 자들을 무자비하게 죽임과 아울러, 우수한 자들과 계속 서로 결혼함으로 진행되었다.
80:5.6 (893.8) 한 열등한 포로가 부적당하다고 안드 족 장로들의 부족 회의가 판결하고 나서, 그는 공들인 예식을 치르고 샤먼 사제들에게 넘겨졌고, 그들은 강으로 그를 데리고 가서 “즐거운 사냥터”로 입장하는―물 속에 처넣어 죽이는―예식을 치렀다. 이 방법으로 유럽의 백인(白人) 침공자들은 자체의 계급으로 빨리 흡수되지 않은, 마주친 모든 민족을 멸종시켰고 이렇게 청인은 끝장이 났다―빨리 끝났다.
80:5.7 (893.9) 크로마뇽 청인은 현대 유럽 종족들의 생물학적 기초를 이루었으나, 나중에 그들의 고토(故土)를 친 강건한 정복자들에게 흡수됨으로 겨우 살아남았다. 청인의 핏줄은 유럽의 백인 종족들에게 튼튼한 특성과 신체의 활력을 많이 기여했지만, 혼합된 유럽 종족의 유머와 상상력은 안드 족속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이 안드와 청인의 연합은 북쪽의 백인 종족들을 일으켰고, 즉시 안드 족속 문명의 쇠퇴, 일시적 성질의 둔화를 초래하였다. 결국, 이 북쪽 미개인의 잠재 우수성이 나타나서 오늘날의 유럽 문명이 되었다.
80:5.8 (894.1) 기원전 5000년이 되어서, 진화하는 백인 종족들은 독일 북부와 프랑스 북부, 그리고 영국 제도(諸島)를 포함하여, 북 유럽에 두루 세력을 떨쳤다. 청인과 둥근 얼굴을 한 안돈 족속이 한동안 중앙 유럽을 장악했다. 후자는 주로 다뉴브 강 유역에서 자리를 잡았고, 결코 안드 족속에게 완전히 밀려나지 않았다.
80:6.1 (894.2) 안드 족속의 마지막 이동이 있던 시절부터 문화는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쇠퇴하였고, 인접한 문명의 중심은 나일 강 유역으로 옮겨 갔다. 에집트는 땅에서 가장 앞선 집단의 본부로서, 메소포타미아를 이어받았다.
80:6.2 (894.3) 나일 강 유역은 메소포타미아 유역보다 조금 전에 홍수로 피해를 당하기 시작했으나, 운이 훨씬 좋았다. 이 초기의 좌절은 연속하여 안드 족속 이민이 흘러들어옴으로 보상되고도 남았으며, 그래서 비록 에집트의 문화가 정말로 유프라테스 강 지역에서 파생되었어도, 선두에 서는 듯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5000년에, 메소포타미아에서 홍수가 있던 기간에, 뚜렷이 다른 일곱 집단의 인간이 에집트에 있었다. 한 집단을 빼고, 그들 모두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왔다.
80:6.3 (894.4)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마지막 탈출이 있었을 때, 에집트는 가장 솜씨 있는 예술가와 장인(匠人)을 아주 많이 얻어서 운이 좋았다. 이 안드 장인들은 강가의 생활, 강의 범람, 관개, 건조기에 속속들이 익숙했기 때문에, 아주 편안하게 느꼈다. 그들은 나일 강 유역의 보호된 위치를 좋아했다.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서 지낼 때보다 거기서 적의 침입과 공격을 훨씬 덜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에집트인의 금속 가공 기술에 크게 이바지했다. 여기서 그들은 흑해 지역으로부터 오는 철광석 대신에 시나이 산으로부터 오는 것을 처리하였다.
80:6.4 (894.5) 에집트인은 아주 일찍부터 그들의 도시 신들을 정교한 국가 체계의 신들로 모았다. 그들은 광범위한 신학(神學)을 개발하고, 똑같이 광범위하지만 부담스러운 사제 제도를 가졌다. 몇몇 다른 지도자들이 셋 족속의 옛 종교적 가르침의 잔재를 부활시키려고 했으나 이 노력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안드 족속은 에집트에서 첫 돌 구조물을 지었다. 돌로 지은 피라미드 가운데서 처음이자 가장 아름다운 것을 임호텝이 세웠는데, 그는 수상(首相)으로 일하던 안드 족속으로 건축의 천재였다. 이전의 건물은 벽돌로 지어 왔는데, 많은 돌 구조물이 세계의 여러 구석에서 세워졌어도 이것은 에집트에서 처음이었다. 그러나 건축 기술은 이 위대한 건축가가 살던 시절부터 꾸준히 쇠퇴하였다.
80:6.5 (894.6) 이 찬란한 문화 시대는 나일 강가를 따라서 일어난 내란으로 말미암아 단축되었고, 그 나라는 메소포타미아가 그랬던 것처럼, 살기 어려운 아라비아로부터 온 열등한 부족들과 남쪽으로부터 온 흑인들로 곧 들끓었다. 그 결과로 5백 년이 넘도록 사회의 진보는 꾸준히 줄어들었다.
80:7.1 (895.1) 메소포타미아에서 문화가 쇠퇴하는 기간에, 얼마 동안 지중해 동부의 여러 섬에서 우수한 문명이 지속되었다.
80:7.2 (895.2) 기원전 12,000년 무렵에, 안드 족속의 한 명석한 부족이 크레테로 이주하였다. 이 섬은 그러한 우수한 무리가 아주 일찍 정착한 유일한 섬이었고, 거의 2천 년이 지나서 이 바다 사람들의 후손이 이웃의 섬들까지 퍼졌다. 이 집단은 북쪽 놋 족속의 반 계열과 서로 결혼했던, 얼굴이 좁고, 키가 작은 안드 족속이었다. 그들은 모두 키가 180센티미터가 되지 않았고, 몸이 더 크고 열등한 동료들에게 글자 그대로, 본토에서 밀려났다. 크레테로 간 이 이민들은 직물ㆍ금속ㆍ도기ㆍ배관(配管)에, 그리고 돌을 건축 재료로서 사용하는 데 상당히 솜씨가 있었다. 그들은 글쓰기에 착수했고, 목자와 농사꾼으로서 생계를 이었다.
80:7.3 (895.3) 크레테에 이들이 정착한 뒤 거의 2천 년이 되자, 아담손의 키 큰 후손들이 북쪽의 섬들을 건너서 그리스까지 갔고, 이들은 메소포타미아의 북쪽에, 고지에 있는 고향으로부터 거의 바로 내려왔다. 사토는 이 그리스인의 선조를 서쪽으로 인도했는데, 사토는 아담손과 라타의 직계 후손이었다.
80:7.4 (895.4) 그리스에서 마지막으로 정착한 집단은 아담손 족속의 둘째 문명의 끝을 이루는, 선택되고 우수한 민족의 375명으로 구성되었다. 아담손의 이 후일의 자손들은 태동하는 백인 종족들 중에서 당시에 가장 귀중한 핏줄을 지녔다. 그들은 높은 지적 계급의 출신이었고, 육체로 보건대, 첫 에덴의 시절 이후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80:7.5 (895.5) 얼마 안 되어 그리스와 에게 해 제도(諸島) 지역은 서양의 무역ㆍ예술ㆍ문화의 중심으로서,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아담손 선구자의 문화를 제외하고, 에집트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에게 세계의 실질적으로 모든 예술과 과학이 또한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유래되었다. 이 그리스 민족의 모든 예술과 천재가, 아담과 이브의 첫 아들 아담손과 특별한 둘째 아내 사이에 생긴 후손이 직접 받은 유산(遺産)이었는데, 이 여자는 칼리가스티아 영주의 순수한 놋 족속 참모진으로부터 끊어지지 않은 혈통을 따라서 내려온 딸이었다. 그리스인이 그들이 신과 초인간 존재들로부터 직접 내려왔다는 신화의 전통을 가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80:7.6 (895.6) 에게 해 지역은 뚜렷한 다섯 문화 단계를 거쳤고, 각자 이전보다 영적 수준이 낮았으며, 머지 않아, 그리스인의 후세들이 들여온 다뉴브 노예들의 자손, 급히 번식하는 평범한 자손들의 무게에 짓눌려, 마지막으로 화려한 예술의 시대가 사라졌다.
80:7.7 (895.7) 카인 후손의 어머니 숭배가 가장 크게 유행한 것은 크레테에서 이 시기였다. 이 종파는 “큰 어머니”를 숭배하면서 이브에게 영광을 돌렸다. 이브의 형상이 어디에나 있었다. 대중을 위한 수천의 성당이 크레테 섬과 소 아시아에 전역에 걸쳐 세워졌다. 이 어머니 숭배는 그리스도의 시절까지 지속되었고, 땅에서 예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에게 영광을 돌리고 예배한다는 구실로, 나중에 초대 기독교에 합병되었다.
80:7.8 (895.8) 기원전 6500년 무렵이 되기까지 안드 족속의 영적 유산은 크게 쇠퇴하였다. 아담의 후손들은 널리 퍼졌고, 더 오래 되고 수가 많은 인종들 속에서 실질적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러한 안드 문명의 퇴폐는 그들의 종교 기준이 사라짐과 더불어, 세상에서 영적으로 불쌍한 민족들을 한탄할 처지에 버려두었다.
80:7.9 (896.1) 기원전 5000년이 되어서, 아담의 후손들 가운데 가장 순수한 세 혈통은 수메르와 북 유럽과 그리스에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전체가, 아라비아로부터 스며들어온 섞이고 더 검은 종족들이 흘러들어옴으로 천천히 나빠지고 있었다. 이 열등한 민족들이 온 것은 안드 족속의 생물학적ㆍ문화적 잔재를 바깥으로 흩어지게 하는 데 더욱 기여하였다. 비옥한 초생달[1] [1716] 전역으로부터 모험을 더 좋아하는 민족들이 서쪽의 섬들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 이민들은 곡식과 채소를 가꾸었고, 길들인 동물을 데리고 왔다.
80:7.10 (896.2) 기원전 약 5000년에, 진취적 메소포타미아인의 막강한 무리가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나와서 사이프러스 섬에 정착하였다. 약 2천 년 뒤에, 북쪽에서 온 미개한 떼가 이 문명을 뿌리 뽑았다.
80:7.11 (896.3) 또 하나의 큰 식민지가 지중해에, 후일에 카르타고 자리 가까이에 정착했다. 그리고 북 아프리카로부터 큰 무리의 안드 족속이 스페인으로 들어가서, 나중에 에게 해 제도로부터 이탈리아로 더 전에 온 형제들과 스위스에서 섞였다.
80:7.12 (896.4) 에집트의 문화가 메소포타미아를 따라 쇠퇴했을 때, 많은 유능하고 앞선 가족들이 크레테로 달아났고, 이처럼 이미 앞선 이 문명을 크게 키웠다. 그리고 에집트에서 온 열등한 무리들이 도착하여 나중에 크레테의 문명을 위협했을 때, 문화가 더 발달된 가족들은 서쪽으로, 그리스로 옮겨 갔다.
80:7.13 (896.5) 그리스인은 위대한 선생이요 예술가일 뿐 아니라, 또한 세상에서 가장 큰 상인이요 식민지를 일으키는 자였다. 그들의 예술과 상업을 끝내 삼켜 버린 열등한 자들의 물결에 무릎을 꿇기 전에, 그들이 서쪽으로 문화의 전진(前進) 기지들을 대단히 많이 심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초기 그리스 문명에서 상당히 많은 진보가 후일에 남 유럽 종족들 안에서 지속되었고, 이 아담손 족속의 혼혈 후손 가운데 다수가 인접한 본토의 부족들에게 합병되었다.
80:8.1 (896.6)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안드 종족들은 북쪽으로 유럽까지 이주하여 청인과 뒤섞였고, 서쪽으로 지중해 지역으로 가서 사하라인과 남쪽 청인 혼혈의 잔재와 섞였다. 그리고 얼굴이 넓고 산에서 사는 생존자, 예전에 있었던 안돈 부족의 생존자들은 백인종의 이 두 가지를 널리 떼어놓았고, 지금도 그러하며, 이 안돈 부족들은 이 중앙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 왔다.
80:8.2 (896.7) 안돈의 이 후예는 유럽의 중앙 및 남동부에서 산 지역의 대부분을 통해서 흩어졌다. 그들은 소 아시아로부터 새로 온 사람들로 말미암아 흔히 강화되었고, 그들은 큰 세력으로 이 지역을 차지했다. 고대의 힛 사람은 안돈 족속의 핏줄로부터 직접 내려온다. 그들의 창백한 살갗과 넓은 얼굴은 그 종족의 전형(典型)이었다. 이 핏줄은 아브라함의 조상에 들어 있었고, 후일에 그의 유대인 후손의 특징인 얼굴 모습에 많이 기여했으며, 유대인 후손은 안드 족속으로부터 유래한 문화와 종교를 가졌어도, 아주 다른 언어를 썼다. 그들의 말은 뚜렷이 안돈 말이었다.
80:8.3 (897.1) 이탈리아, 스위스, 남부 유럽의 호수에서, 쌓인 더미나 통나무 기둥 위에 세운 집에서 거주했던 부족들은 아프리카인, 에게인, 그리고 특히 다뉴브인 이민들의 커지는 곁가지였다.
80:8.4 (897.2) 다뉴브인은 안돈 족속이었고, 발칸 반도를 거쳐서 유럽으로 들어갔던 농부와 목자였는데, 그들은 다뉴브 강 유역을 경유해서 북쪽으로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도기(陶器)를 만들고 땅을 일구었고, 유역에서 살기를 좋아했다. 다뉴브인의 가장 북쪽 촌락은 벨지움의 리에주에 있었다. 이 부족들은 그들 문화의 중심과 근원으로부터 떨어져 나감에 따라서, 빨리 저하되었다. 가장 좋은 도기는 그들보다 먼저 있던 촌락들의 작품이다.
80:8.5 (897.3) 크레테 섬에서 온 선교사들이 일한 결과로서, 다뉴브인은 어머니 숭배자가 되었다. 이 부족들은 나중에, 소 아시아의 바닷가로부터 배를 타고 온 안돈 뱃사람의 무리와 혼합했는데, 이들도 어머니 숭배자였다. 따라서 중앙 유럽의 상당 부분은, 얼굴이 넓적한 백인 종족의 이 혼합된 부류가 차지했으며, 그들은 어머니 숭배와 죽은 사람을 화장(火葬)하는 종교 의식을 실천했는데, 이는 어머니 종교 신봉자들이 죽은 사람을 돌 움막에서 태우는 것이 풍습이었기 때문이다.
80:9.1 (897.4) 안드 족속의 이동이 끝날 때 가까이 유럽에서 종족의 혼합은 다음과 같이 대체로 세 백인 종족으로 정리되었다:
80:9.2 (897.5) 1. 북방 백인 종족. 이른바 이 노르딕 종족은 주로 청인과 안드 족속의 혼합이었으나, 또한 어지간한 양의 안돈 족속, 그리고 그보다 적은 양의 홍인 및 황인 산긱의 피를 품었다. 따라서 북방의 백인 종족은 가장 바람직한 이 네 가지 인간 핏줄을 담았다. 그러나 가장 많은 유전은 청인으로부터 내려왔다. 초기의 전형적 노르딕인은 얼굴이 길고, 키가 크고, 금발이었다. 그러나 오래 전에 이 민족은 백인 종족의 모든 가지와 속속들이 섞였다.
80:9.3 (897.6) 침공하는 노르딕인이 마주친 유럽의 원시 문화는 청인과 섞인, 퇴화하는 다뉴브인의 문화였다. 오늘날 독일에서 두 종족 집단의 존재가 증언하다시피, 노르딕 덴마크인과 다뉴브 안돈 족속의 문화가 라인 강에서 만나서 섞였다.
80:9.4 (897.7) 노르딕인은 발트 해 바닷가로부터 온 호박(琥珀)의 무역을 계속했고, 브렌너 통로를 거쳐서 다뉴브 강 유역에 얼굴 넓적한 사람들을 상대로 큰 상업을 일으켰다. 다뉴브인과 이렇게 접촉이 늘어난 것은 이 북방 족속을 어머니 숭배로 이끌었고, 몇천 년 동안 죽은 사람을 화장하는 것이 스칸디나비아 전역에 걸쳐서 거의 보편적이었다. 이것이 먼저 있던 백인 종족들이 유럽 전역에 묻혀 있어도, 어째서 그들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가 설명한다―오직 돌과 진흙 항아리 속에 그들의 재만 남았다. 이 백인들은 또한 거처를 지었고, 결코 동굴에서 살지 않았다. 이것은 어째서 또 다시 백인의 옛 문화의 물증이 거의 없는가 설명한다. 하지만 그 전에 있었던 크로마뇽 종류는 동굴과 석굴에서 단단히 봉해진 곳에 잘 간직되어 있다. 말하자면, 북 유럽에서 어느 날 퇴보하는 다뉴브인과 청인의 원시 문화가 있고, 그 다음 날 갑자기 엄청나게 우수한 백인의 문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80:9.5 (897.8) 2. 중부 백인 종족. 이 무리는 청인과 황인과 안드 족속의 핏줄을 포함하기는 해도, 주로 안돈 족속이었다. 이 민족은 얼굴이 넓고, 거무스름하고, 짝달막했다. 이들은 노르딕인과 지중해 종족들 사이에 쐐기처럼 박혔으며, 그 넓은 거점은 아시아에 두고, 그 끝은 프랑스 동부를 파고들었다.
80:9.6 (898.1) 거의 2만 년 동안 안돈 족속은 안드 족속에게 중앙 아시아의 북쪽으로 멀리 멀리 밀려났다. 기원전 3000년이 되어서 심해지는 건조한 기후는 이 안돈 족속을 투르키스탄으로 다시 되돌려 보냈다. 안돈 족속의 이 남향 진출은 1천 년이 넘도록 이어졌고, 카스피 바다와 흑해(黑海) 둘레에서 갈라져서, 발칸과 우크라이나를 거쳐 유럽으로 파고들었다. 이 침공은 아담손 후손의 남은 집단을 포함했고, 침공기의 후반에는 셋 족속 사제들의 많은 후손 뿐 아니라 이란의 안드 족속을 상당수 데리고 갔다.
80:9.7 (898.2) 기원전 2500년이 되기까지, 안돈 족속의 서향 진출은 유럽에 다다랐다. 그리고 투르키스탄 산지(山地)의 미개인들이 온 메소포타미아, 소 아시아, 다뉴브 강 분지에 들끓은 것은 그때까지 모든 문화적 후퇴 가운데 가장 심각하고 오래 지속된 후퇴를 낳았다. 이 침공자들은 중부 유럽 종족들의 성격을 분명히 안돈처럼 만들었고, 이 종족들은 그 뒤로 계속 알프스 족의 특징을 지닌 채로 남았다.
80:9.8 (898.3) 3. 남방 백인 종족. 갈색 머리를 한 이 지중해 종족은 안드 족속과 청인의 혼합으로 이루어졌고, 북쪽보다 안돈 핏줄을 적게 가졌다. 이 무리는 또한 사하라인을 통해서, 상당한 양의 2차 산긱 피를 흡수했다. 후일에 백인종의 이 남방 지파에 지중해 동부로부터 강력한 안드 족속의 요소가 주입되었다.
80:9.9 (898.4) 그러나 지중해 바닷가의 땅에는, 기원전 2500년에 유목민의 대침공이 있던 시절까지 안드 족속이 스며들지 않았다. 유목민이 지중해 동부 지역을 침공했던 이 여러 세기 동안, 육지의 교통과 무역은 거의 중지되었다. 이렇게 육지 여행이 방해된 것은 해상 교통과 무역을 크게 확장시켰다. 지중해의 해상(海上) 무역은 약 4500년 전에 한창이었다. 이 해상 교류의 발달은 지중해 분지의 바닷가 지역 전체에 두루, 안드 족속 후손의 갑작스런 팽창을 가져왔다.
80:9.10 (898.5) 이 종족 혼합이 남방 유럽 종족, 전체에서 가장 많이 섞인 종족의 기초를 쌓았다. 이 시절 뒤로 이 종족은 특히 아라비아의 청인-황인-안드 민족들과 계속된 혼합을 더 겪었다. 이 지중해 종족은, 사실, 둘러싼 민족들과 아주 자유롭게 섞여서, 따로 된 부류로 거의 구별할 수 없다. 그러나 대체로 그 구성원은 키가 작고, 얼굴이 길고, 갈색 머리를 했다.
80:9.11 (898.6) 북쪽에서 안드 족속은 전쟁과 결혼을 통해서 청인을 말살했지만, 남쪽에서 청인의 큰 무리가 살아남았다. 바스크인과 베르베르인은 이 민족의 살아남은 두 가지를 대표하지만, 이 민족들조차 사하라인과 속속들이 섞였다.
80:9.12 (898.7) 이것이 기원전 약 3000년에 중앙 유럽에서 나타난 종족 혼합의 그림이었다. 아담이 사명을 부분적으로 이행하지 못했는데도, 상급 부류들은 섞였다.
80:9.13 (898.8) 이때는 신석기(新石器) 시대가 다가오는 청동기 시대와 겹치는 시절이었다.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어머니 숭배와 관련된 청동기 시대였다.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에서는 태양 숭배와 관련된 신석기 시대였다. 이때는 둥그렇고 지붕 없는 태양 신전을 짓던 때였다. 유럽의 백인 종족들은 정력이 있는 건축가였고, 후일에 그들의 자손이 스톤헨지에서 했던 것과 비슷하게, 태양에 대한 표시로서 큰 돌들을 세워놓기를 좋아했다. 태양 숭배가 유행한 것은 이때가 남부 유럽에서 대단한 농업 시대였음을 가리킨다.
80:9.14 (899.1) 비교적 최근에 이 태양 숭배 시대의 미신이 지금도 브리타니의 민속에서 남아있다. 1500년이 넘도록 기독교도가 되었어도 이 브리타니인은 악한 눈을 쫓아내기 위하여 신석기 시대의 부적을 아직도 지닌다. 그들은 아직도 번개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굴뚝에 천둥 돌을[2] [1717] 가지고 있다. 이 브리타니인은 스칸디나비아의 노르딕인과 섞인 적이 없다. 그들은 서 유럽에서 지중해 혈통과 섞인 최초의 안돈 거주자가 살아남은 것이다.
80:9.15 (899.2) 그러나 백인 민족들을 노르딕ㆍ알프스ㆍ지중해 종족으로 주제넘게 분류하는 것은 잘못이다. 종족이 너무 많이 혼합되어서 그렇게 분류할 수 없다. 한때는 백인종을 그러한 등급으로 분류하기에 어지간히 잘 규명된 구분이 있었지만, 그 뒤에 종족이 널리 서로 섞였으며, 얼마큼이라도 뚜렷하게 이 차이를 확인하는 것이 이제는 더 가능하지 않다. 오늘날 북 아메리카의 거주민과 마찬가지로 기원전 3000년에도, 고대의 사회 집단들은 한 민족이라 할 수 없었다.
80:9.16 (899.3) 이 유럽의 문화는 5천 년 동안 줄곧 성장하고 어느 정도 서로 섞였다. 그러나 언어의 장벽은 서양 국가들의 완전한 교류를 막았다. 지나간 세기에 이 문화는 북 아메리카의 세계적 인구 속에서 섞이기에 가장 좋은 기회를 누리고 있었다. 그 대륙의 앞날은, 유지되는 사회 문화의 수준 뿐 아니라, 그 현재 및 미래 인구로 들어가도록 허락되는 종족 요소들의 질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81:0.1 (900.1) 칼리가스티아와 아담의 임무에서 예상했던, 세상 개선 계획이 실패함으로 생긴 변동과 상관 없이, 인간의 진보와 종족의 발전을 재는 눈금으로 볼 때 인종의 기본 유기체의 진화는 종족들을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진화는 늦출 수 있어도 멈출 수 없다.
81:0.2 (900.2) 보라 인종의 영향은, 계획했던 것보다 수가 적기는 했어도 문명의 진보를 낳았고, 이 영향은 아담 시절 이후에, 인류가 거의 1백만 년 동안, 이전의 존재 전체를 통해서 진보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81:1.1 (900.3) 아담 시절 이후로 약 3만 5천 년 동안, 문명의 요람은 서남 아시아에 있었고, 나일 강 유역으로부터 동쪽으로, 조금 북쪽에 아라비아 북부를 가로지르고, 메소포타미아를 통해서 투르키스탄으로 계속 뻗었다. 그리고 기후는 그 시대에 문명을 세우는 데 결정적 요인이었다.
81:1.2 (900.4) 아담 족속의 초기 이동을 그치게 한 것은 북 아프리카와 서 아시아에 있었던 큰 기후 및 지질학적 변화였으며, 이것은 확대된 지중해로 그들을 유럽 방향에서 막고, 이민의 물결을 북쪽과 동쪽으로, 투르키스탄으로, 빼돌렸다. 육지가 올라오고 그에 따라 기후의 변화가 이렇게 그칠 때가 되어, 기원전 약 15,000년에, 동쪽에는 아시아에서 산맥으로, 서쪽에는 유럽에서 확대되는 숲으로 인하여 아직도 갇혀 있던 안드 족속의 문화적 효소와 생물학적 비축을 제외하고, 문명은 세계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이르기까지 정체되었다.
81:1.3 (900.5) 기후의 진화는 이제 모든 다른 노력이 이루지 못한 것을 성취하려 한다. 다시 말해서, 유라시아 사람으로 하여금 사냥을 버리고 더 진보된 동물 기르기와 농사 직종을 가지라고 강요한다. 진화는 느릴까 싶지만, 무섭게 효과가 있다.
81:1.4 (900.6) 초기의 농사꾼들이 노예들을 아주 널리 이용했기 때문에, 농부는 예전에 사냥꾼과 목자 모두에게 업신여김을 받았다. 오랜 세월 동안 땅을 경작하는 것은 천하게 생각되었다. 따라서 흙을 만지는 일은 저주라는 개념이 생겼는데, 오히려 흙으로 수고하는 것은 모든 축복 가운데 으뜸이다. 카인과 아벨의 시절에도 목축 생명을 바치는 것은 농산물을 드리는 것보다 더 높이 여겼다.
81:1.5 (900.7) 사람은 보통 사냥꾼으로부터, 목자의 시기를 거쳐서 바뀌어 농사꾼으로 진화했으며, 이것이 또한 안드 족속 사이에 참말이었지만, 그보다 더 흔하게, 기후의 필요에 따른 진화적 강요가 부족 전체를 사냥꾼으로부터 성공적 농부로 바로 넘어가도록 만들곤 했다. 그러나 사냥에서 농사로 바로 넘어가는 이 현상은, 보라 핏줄과 높은 정도로 종족이 혼합된 지역에서만 일어났다.
81:1.6 (901.1) 진화 민족들(특히 중국인)은, 어쩌다가 축축하게 된 씨나 죽은 자에게 먹을 것으로 무덤에 둔 씨가 싹트는 것을 지켜봄으로, 씨를 심고 농작물 재배하는 것을 일찍부터 배웠다. 그러나 서남 아시아에 두루, 기름진 강 바닥과 인접한 평야를 따라서, 안드 족속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개량된 농업 기술을 쓰고 있었고, 그 선조는 둘째 동산의 테두리 안에서 농업과 채소 가꾸기를 주요한 직업으로 삼았다.
81:1.7 (901.2) 몇천 년 동안 아담의 자손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위쪽 경계에 있는 고지 전역에 걸쳐서, 동산에서 개량한 밀과 보리를 심었다. 아담과 아담손의 자손들은 여기서 만나서 무역하고, 사회적으로 섞였다.
81:1.8 (901.3) 생활 조건이 이렇게 강제로 변화된 것은 그렇게 많은 비율의 인류로 하여금 식생활 관습에서 잡식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밀ㆍ쌀ㆍ채소로 된 식사(食事)와 가축의 고기를 섞어 먹는 것은 이 고대 민족들의 건강과 활력 면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큰 걸음을 표시하였다.
81:2.1 (901.4) 문화의 성장은 문명의 도구(道具)가 발전하는 데 달려 있다. 사람이 야만으로부터 올라가면서 이용한 도구는 그 도구가 더 높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인력을 해방하는 바로 그 한도까지 효과가 있었다.
81:2.2 (901.5) 사회적 면에서 문화가 싹트고 진보가 시작되는 현대의 장면에서 지금 사는 너희는, 사회와 문명에 관하여 생각할 여분의 겨를이 실제로 조금 있는데, 너희의 옛 선조들이 깊이 돌이켜보고 사회적인 생각을 하는 데 바칠 수 있는 여가가 거의 또는 도무지 없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81:2.3 (901.6) 인간의 문명에서 처음 4대 진보는 다음과 같았다:
81:2.8 (901.11) 불은 처음으로 큰 발견이었고 궁극에 과학 세계에 이르는 문을 열었지만, 이 점에서 원시인에게 거의 가치가 없었다. 원시인은 자연의 원인이 보통 현상을 설명한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81:2.9 (901.12) 어디에서 불이 왔는가 질문을 받았을 때, 안돈과 부싯돌의 단순한 이야기는, 어떤 프로메테우스라는 자가 어떻게 불을 하늘로부터 훔쳤는가 하는 전설로 곧 대체되었다. 옛날 사람들은 그들이 몸소 이해하는 범위 바깥의 모든 자연 현상에 대하여 초자연적 설명을 얻으려고 애썼다. 많은 현대인도 계속 이렇게 한다. 이른바 자연 현상을 비인격 현상으로 만드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참 원인을 찾는 솔직하고 정직하고 두려움 없는 연구가 현대 과학을 낳았다: 그런 연구가 점성학을 천문학으로, 연금술을 화학으로, 마술을 의술(醫術)로 바꾸었다.
81:2.10 (901.13) 기계가 생기기 전 시대에, 사람이 스스로 하지 않고 일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동물의 사용이었다. 동물을 길들인 것은 사람의 손에 살아 있는 연장을 쥐어 주었고, 동물을 영리하게 사용하는 것은 농업과 수송을 위하여 길을 준비했다. 이러한 동물이 없이, 사람은 원시 상태로부터 후일의 문명 수준으로 올라갈 수 없었다.
81:2.11 (902.1) 길들이기에 가장 적당한 동물의 대부분은 아시아에서, 특히 중앙 지역에서부터 서남 지역에 이르기까지 발견되었다. 이것이 어째서 세계의 다른 어느 부분보다 그 위치에서 문명이 더 빨리 진보했는가 하는 한 이유였다. 이 동물 중에 다수는 두 번이나 이전에 길들인 적이 있었고, 안드 족속 시대에 그 동물을 다시 한 번 길들였다. 그러나 개는 아주 오래 오래 전에, 청인이 받아들인 뒤로 늘 사냥꾼과 함께 남아 있었다.
81:2.12 (902.2) 투르키스탄의 안드 족속은 말을 널리 길들인 첫 민족이었고, 이것이 어째서 그들의 문화가 아주 오랫동안 지배했는가 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기원전 5000년이 되자, 메소포타미아ㆍ투르키스탄ㆍ중국의 농부들은 양ㆍ염소ㆍ소ㆍ낙타, 말ㆍ가금ㆍ코끼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황소ㆍ낙타ㆍ말ㆍ야크를 짐 싣는 짐승으로 이용했다. 바로 사람은 한때 짐을 부리는 짐승이었다. 청인종의 어느 통치자는 한때 그의 짐꾼 거류지에 10만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81:2.13 (902.3) 노예 제도와 토지를 사유(私有)하는 제도는 농업과 함께 왔다. 노예 제도는 주인의 생활 수준을 높여 주었고, 사회의 문화를 누릴 여가를 더 마련해 주었다.
81:2.14 (902.4) 야만인은 자연에 복종하는 노예이지만, 과학 문명은 천천히 인류에게 늘어나는 자유를 부여하고 있다. 동물ㆍ불ㆍ바람ㆍ물ㆍ전기, 그리고 발견되지 않은 다른 에너지 근원을 통해서, 사람은 쉴새없이 수고할 필요로부터 자신을 해방했고, 앞으로도 계속 해방할 것이다. 기계를 풍부하게 발명함으로 생기는 일시적 어려움과 상관 없이, 그러한 기계 발명으로부터 얻게 되는 궁극의 이득은 측량할 수 없다. 사람이 일을 처리하는 새롭고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하고, 계획하고, 상상할 여가를 가질 때까지, 문명은 세워지기는커녕, 결코 번영할 수 없다.
81:2.15 (902.5) 사람은 먼저 은신처를 단지 취하고, 바위 선반 밑에 살거나 동굴에 거주했다. 다음에 나무와 돌 같은 천연 재료를 가족 움막을 짓는 데 이용하였다. 마지막으로 집을 짓는 창조 단계에 들어갔고, 벽돌과 기타 건축 자재 만드는 것을 배웠다.
81:2.16 (902.6) 투르키스탄 고지의 민족들은 현대에 가까운 종족들 중에서 처음으로 나무로 집을 지었다. 이 집들은 아메리카에 개척하여 정주한 사람들이 초기에 지은 통나무 집과 아주 다르지 않았다. 평야에 두루, 인간의 거처는 벽돌로 지었으며, 나중에는 구운 벽돌을 썼다.
81:2.17 (902.7) 강가에 살던 이전의 종족들은 땅에, 동그라미 안에 높은 장대들을 세워서 움막을 지었다. 꼭대기들을 한데 모아서, 움막을 위한 뼈대를 만들었고, 이것을 가로지르는 갈대로 엮었으며, 작품 전체가 엎어진 큰 광주리 같았다. 그리고 나서 이 구조물에 진흙 칠을 할 수 있었고, 이것은 햇빛에 말린 다음, 아주 쓸모 있는 거처, 비바람에 견디는 거처가 되곤 했다.
81:2.18 (902.8) 이 초기의 움막으로부터, 나중에 온갖 종류의 광주리를 짜는 생각이 따로 생겨났다. 한 집단 사이에서, 도기(陶器)를 만드는 생각은 이 장대 틀을 젖은 진흙으로 바르는 효과를 지켜보는 데서 생겨났다. 구워서 도기를 단단하게 만드는 법은 진흙으로 바른 이 원시 움막 중 하나가 어쩌다가 타는 바람에 발견되었다. 옛 시절의 여러 기술은 초기 민족들의 일상 생활에 따르는 우연한 일에서 생기는 적이 많았다. 적어도 이것이, 아담이 올 때까지, 인류가 진화하는 발걸음에 관하여 거의 전적으로 참말이었다.
81:2.19 (903.1) 약 50만 년 전에 영주의 참모진이 도기를 처음으로 소개했지만, 진흙 그릇을 만드는 것은 15만 년이 넘도록 실지로 그쳤다. 오로지 그 만(灣)의[1] [1718] 바닷가에, 수메르 이전의 놋 족속이 계속해서 진흙 그릇을 만들었다. 도기를 만드는 기술은 아담의 시절에 부활되었다. 이 기술의 전파는 아프리카, 아라비아, 중앙 아시아의 사막 지역이 뻗는 것과 동시에 일어났고, 개량된 기술이 연달아 파도를 이루어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바깥으로 동반구에 퍼졌다.
81:2.20 (903.2) 이 안드 시대의 문명을 그들의 도기나 다른 예술의 단계로 반드시 추적할 수는 없다. 인간이 진화하는 순조로운 과정은 달라마시아와 에덴, 이 두 체제로 인하여 엄청나게 까다로워졌다. 후일의 화병과 도구가 더 순수한 안드 민족들이 예전에 만든 작품보다 못한 경우가 흔히 생긴다.
81:3.1 (903.3) 투르키스탄의 기름지고 훤히 트인 초원의 땅, 사냥하며 동물이 풀 뜯는 땅이 기후로 말라버린 것은 기원전 12,000년 무렵에 시작하여, 그 지역의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형태의 산업과 투박한 제조업에 의존하도록 강요하였다. 더러는 길들인 가축 떼를 기르는 일로 발길을 돌렸고, 더러는 농사꾼이 되거나 물에서 자라는 먹을거리를 모으는 사람이 되었지만, 안드 족속에서 상급 부류의 지적 존재들은 상업과 제조업을 선택했다. 전체 부족(部族)이 한 가지 산업의 개발에 몰두하는 것이 관습이 되기도 하였다. 나일 강 유역으로부터 힌두 쿠시까지, 그리고 간지스 강으로부터 황하에 이르기까지, 우수한 부족들의 주요한 사업은 땅을 경작하는 것이 되었고, 상업은 부업이 되었다.
81:3.2 (903.4) 무역, 그리고 원자재를 여러 가지 상품으로 만드는 제조업의 증가는 초기의 얼마큼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데 직접 도움이 되었고, 이 공동체들은 문화와 문명의 기술을 퍼뜨리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광범위한 세계 무역 시대가 오기 전에, 사회의 공동체는 부족 단위였다―확대된 가족 집단이었다. 무역(貿易)은 다른 종류의 인간들이 서로 친교하도록 이끌었고, 이처럼 문화의 더 빠른 교류에 이바지하였다.
81:3.3 (903.5) 약 1만 2천 년 전에, 독립된 도시의 시대가 밝아오고 있었다. 원시 무역과 제조업을 하는 이 도시들은 반드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지대에 둘러싸여 있었다. 생활 수준이 높아짐으로 산업이 촉진된 것이 참말이지만, 너희는 옛날의 도시 생활의 세련된 정도에 관하여 아무런 오해를 가져서는 안 된다. 초기의 종족들은 지나치게 깔끔하거나 깨끗하지 않았고, 보통의 원시 공동체는 단지 흙과 쓰레기가 쌓인 결과로서, 25년마다 30에서 60센티미터가 높아졌다. 이 오래 된 도시들 가운데 어떤 것은 굽지 않은 진흙 오두막이 오래 가지 않았기 때문에 둘레의 땅보다 아주 빨리 높아졌고, 옛날의 폐허 바로 위에 새 주거(住居)를 짓는 것이 풍습이었다.
81:3.4 (903.6) 금속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이 초기의 산업 및 상업 도시 시대의 특성이었다. 너희는 투르키스탄에서 기원전 9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청동기 문화를 이미 발견하였고, 안드 족속은 마찬가지로 철ㆍ금ㆍ구리를 가지고 일하는 것을 일찍부터 배웠다. 그러나 더 진보된 문명의 중심들로부터 떨어진 곳에서는 조건이 아주 달랐다.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와 같은 아무런 뚜렷한 시기가 없었다. 모두 세 시기가 한꺼번에 다른 지역에서 존재했다.
81:3.5 (904.1) 금은 사람이 처음으로 찾아다닌 금속이었다. 금은 작업하기 쉬웠고, 처음에는 장식품으로만 쓰였다. 구리가 다음에 이용되었으나, 주석(朱錫)과 섞어서 더 단단한 청동을 만들기까지 널리 쓰이지 않았다. 투르키스탄의 아담손 족속 가운데 한 사람이 구리와 주석을 섞어서 청동 만드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들의 고지에 구리 광산이 마침 주석 매장 옆에 있었다.
81:3.6 (904.2) 투박한 제조업과 초기 산업이 나타나자, 상업은 문화를 가진 문명의 보급에 재빨리 가장 유력한 영향이 되었다. 육지와 바다를 거쳐 무역의 길이 열린 것은 문명이 섞이게 할 뿐 아니라, 여행, 그리고 문화의 혼합을 크게 수월하게 만들었다. 기원전 5000년이 되자 문명화된 땅과 반문명화된 땅에 두루, 말이 일반적으로 쓰였다. 이 후일의 종족들은 길들인 말 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4륜차와 2륜 전차(戰車)를 가지고 있었다. 오랜 세월 전에 바퀴가 쓰였지만, 이제 그렇게 장비를 갖춘 차량이 상업과 전쟁, 두 군데서 보편적으로 이용되었다.
81:3.7 (904.3) 여행하는 무역상과 떠돌아다니는 탐험가는 모든 다른 영향력을 합친 것보다 유사(有史) 이후의 문명의 진보에 더 많이 기여했다. 군사적 정복ㆍ식민화, 그리고 후일의 종교들이 조장한 선교 사업도 또한 문화 보급에 요인이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무역 관계에 2차적이었고, 무역 관계는 산업에서 급속히 발전하는 기술과 과학으로 인하여 늘 가속되었다.
81:3.8 (904.4) 아담의 핏줄이 인간 종족에 주입된 것은 문명의 걸음을 빠르게 했을 뿐 아니라, 또한 모험과 탐험의 성향을 크게 자극했고, 그 결과로 안드 족속의 빨리 번식하는 혼혈 후손이 유라시아와 북 아프리카의 대부분을 이내 차지하였다.
81:4.1 (904.5) 밝아오는 유사 시대와 접촉이 생김에 따라서, 유라시아 전체, 북 아프리카, 태평양 군도(群島)에 인류의 복합 종족들이 퍼졌다. 오늘날 이 종족들은 유란시아의 다섯 가지 기본 인간 혈통이 섞이고 다시 섞인 결과로 생겨났다.
81:4.2 (904.6) 유란시아 종족들은 각자 어떤 구별되는 신체의 특징으로 확인되었다. 아담 족속과 놋 족속은 얼굴이 길었고, 안돈 족속은 얼굴이 넓었다. 산긱 종족들은 중간 얼굴이었고, 황인과 청인은 넓적 얼굴인 편이었다. 청인 종족들은, 안돈 족속의 핏줄과 섞였을 때, 뚜렷이 넓적 얼굴이 되었다. 2차 산긱들은 중간에서 긴 편의 얼굴이었다.
81:4.3 (904.7) 이 두개골 규격이 종족의 기원을 해독(解讀)하는 데 쓸모가 있어도, 통틀어서 뼈대가 훨씬 더 믿을 만하다. 유란시아 종족들의 초기 발전에는 최초에 다섯 가지 뚜렷이 다른 종류의 뼈 구조가 있었다:
81:4.4 (904.8) 1. 안돈 부류, 유란시아 토착민.
81:4.5 (904.9) 2. 1차 산긱, 홍인ㆍ황인ㆍ청인.
81:4.6 (904.10) 3. 2차 산긱, 주황인ㆍ녹색인ㆍ남색인.
81:4.9 (904.13) 이 5대 종족 집단이 널리 서로 섞임에 따라서, 계속된 혼합은 산긱 유전의 우성(優性) 때문에 안돈 부류를 가리는 경향이 있었다. 라프인과 에스키모인은 안돈 종족과 산긱 청인 종족이 혼합된 것이다. 그들의 뼈 구조는 토착 안돈 부류를 간직하는 것에 아주 가깝다. 그러나 아담 족속과 놋 족속은 다른 종족들과 아주 섞여서, 오직 일반화된 코카서스 계급으로만 탐지할 수 있다.
81:4.10 (905.1) 따라서, 대체로, 지난 2만 년 동안에 쌓인, 사람의 유물을 파헤침에 따라서, 다섯 가지 최초의 종류를 똑똑히 구분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한 뼈 구조의 연구는 인류가 이제 대략 세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드러낼 것이다:
81:4.11 (905.2) 1. 코카서스 인종―놋과 아담의 핏줄이 안드 족속과 혼합되었는데, 1차와 (얼마큼) 2차 산긱과 혼합됨으로, 그리고 안돈 족속과 상당히 교배함으로 더 수정되었다. 서양의 백인 종족들은, 얼마큼의 인도인 및 투란인 종족들과 함께, 이 집단에 속한다. 이 구분에서 통일되는 요소는 많든 적든 안드 족속의 유전이 있는 것이다.
81:4.12 (905.3) 2. 몽고 인종―1차 산긱 부류이며, 최초의 홍인과 황인과 청인 종족을 포함한다. 중국인과 아메리카 인디안이 이 무리에 속한다. 유럽에서 몽고 인종 부류는 2차 산긱과 안돈 족속과 혼합됨으로 수정되고, 안드 족속의 주입으로 더욱 수정되었다. 말레이와 기타 인도네시아 민족들이 이 분류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들은 높은 비율의 2차 산긱 피를 지니고 있다.
81:4.13 (905.4) 3. 흑색 인종―2차 산긱 종류는 최초에 주황ㆍ녹색ㆍ남색 종족들을 포함했다. 이것은 흑인이 가장 잘 설명하는 부류이며, 아프리카와 인도와 인도네시아 도처에, 2차 산긱 종족들이 있는 곳은 어디에나 발견될 것이다.
81:4.14 (905.5) 중국 북부에는 코카서스 종류와 몽고 종류가 얼마큼 섞였다. 레반트에서는 코카서스와 흑색 인종이 서로 섞였다. 인도에서는, 남 아메리카에서처럼, 모두 세 종류가 대표된다. 살아남은 세 부류의 골격 특징은 아직도 지속하며, 오늘날 인간 종족들의 후기 선조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
81:5.1 (905.6)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가 있는 문명은 반드시 상관되지는 않는다. 어느 시대라도 유기체의 진화는 문화가 퇴폐하는 한가운데서도 방해받지 않고 진행될 수 있다. 그러나 오랜 기간의 인간 역사를 조사했을 때, 결국은 진화와 문화가 원인과 결과로서 관계됨을 관찰할 것이다. 진화는 문화가 없이도 진행될지 모르지만, 문화가 있는 문명은 먼저 종족이 진보하는 적당한 배경이 없이 번영하지 않는다. 아담과 이브는 인간 사회가 진보하는 데 낯선 문명의 기술을 하나도 들여오지 않았으나, 아담의 피는 종족들의 타고난 능력을 확대했고, 경제가 발전하고 산업이 진보하는 그 걸음을 가속하였다. 아담을 수여한 것은 종족들의 두뇌력을 개선하였고, 이렇게 함으로 자연스러운 진화 과정을 크게 재촉하였다.
81:5.2 (905.7) 농사를 짓고, 동물을 길들이고, 건축을 개량함으로 인류는 살기 위한 끊임없는 최악의 투쟁을 차츰 피했고, 사는 과정을 무엇으로 즐겁게 만드는가 찾으려고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자꾸 높아지는, 물질적 편안의 수준에 도달하려는 수고의 시초였다. 제조업과 산업을 통해서, 사람은 필사 생활에서 쾌락의 성분을 차츰 키우고 있다.
81:5.3 (906.1) 그러나 문화적 사회는 날때부터 모든 사람이 공짜로 회원 자격을 가지고 온전히 평등한 물려받은 특권을 주는 클럽, 크고 자선하는 클럽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회는 높고 늘 진보하는, 지상의 일꾼들의 동업 조합이며, 세상을 후세에 자식과 손자들이 살고 진보할 수 있는 더 좋은 곳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귀족 일꾼만 그 계열로 받아들인다. 이 문명 조합은 비싼 가입비를 받아내고, 엄격하고 세찬 훈련을 부과하며, 찬성하지 않는 자와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누구나 무거운 벌을 내리고, 한편 공통된 위험과 종족의 위협에 대하여 더 안전해진 것을 제외하고, 개인의 방종이나 특권을 거의 주지 않는다.
81:5.4 (906.2) 사회적 관계는 생존을 보장하는 일종의 보험이며, 사람들은 이 보험이 이로움을 깨달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희생하고 개인의 자유를 단축하는 보험료를 기꺼이 내며, 사회는 이렇게 집단으로 더 보호받는 것에 대한 값으로 그 구성원으로부터 보험료를 받아낸다. 잘라 말하면, 오늘날 사회의 구조는 시행 착오로 생긴 보험 계획이며, 이것은 인류의 초기 체험의 특징을 나타내는, 끔찍하고 반사회적 조건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어느 정도 보장하고 보호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81:5.5 (906.3) 이처럼 사회는 제도를 통하여 시민의 자유, 자본과 발명을 통해서 경제적 자유, 문화를 통해서 사회적 해방, 경찰의 규제를 통해서 폭력을 당하지 않을 자유를 확보하기 위하여 서로 협동하는 계획이다.
81:5.6 (906.4) 힘이 정의(正義)를 낳지는 않으나, 힘은 뒤잇는 각 세대가 공통으로 인정하는 권리를 집행한다. 정부의 주요한 임무는 권리를 규명하고, 계급의 차이를 정당하고 공평하게 규제하며, 법의 통치 밑에서 기회의 평등을 실시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권리는 사회적 임무와 결합되어 있다. 집단의 특권은 보험 작용이며, 이것은 집단에게 봉사하는 힘겨운 보험료 전액을 낼 것을 어김없이 요구한다. 개인의 권리 뿐 아니라 집단의 권리는, 성(性) 버릇의 규제를 포함하여, 보호해야 한다.
81:5.7 (906.5) 집단의 규제에 지배를 받는 자유는 사회의 진화에서 정당한 목표이다. 제한 없는 자유는 불안정하고 경솔한 인간 지성들이 지어낸 헛되고 환상 같은 꿈이다.
81:6.1 (906.6) 생물학적 진화는 늘 앞으로 나아갔지만, 많은 문화적 진화는 유프라테스 강 유역으로부터 파도를 지어 나갔으며, 이러한 파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순수 혈통을 가진 아담 후손 전체가 아시아와 유럽의 문명을 강화하려고 마침내 떠나갈 때까지, 연달아 약화되었다. 종족들은 완전히 섞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문명은 상당한 정도까지 섞였다. 문화가 천천히 세계에 두루 퍼졌다. 그리고 이 문명은 유지되고 양육(養育)되어야 한다. 이는 오늘날 문화의 새 근원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고, 문명이 진화하는 느린 걸음에 활력을 주고 이를 자극할 안드 족속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81:6.2 (906.7) 지금 유란시아에서 진화하고 있는 문명은 다음 요인에서 생겨났고, 또 그 요인에 달려 있다:
81:6.3 (906.8) 1. 자연 상황. 물질 문명의 성질과 범위는 대체로 소용되는 자연 자원에 따라 결정된다. 기후ㆍ날씨, 그리고 수많은 물리적 조건은 문화의 진화를 결정하는 요인이다.
81:6.4 (907.1) 안드 족속의 시대가 열렸을 때, 온 세계에 광활하고 비옥하고 탁 트인 사냥 지역이 오직 두 군데 있었다. 하나는 북 아메리카에 있었고, 거기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퍼져 있었다. 다른 하나는 투르키스탄의 북쪽에 있었고, 그 일부는 안돈 황인이 차지했다. 서남 아시아에서 우수한 문화가 진화한 결정적 요인은 종족과 기후였다. 안드 족속은 위대한 민족이었으나, 그들 문명의 과정에 결정적 요인은 이란ㆍ투르키스탄ㆍ신장이 더욱 건조해진 것이었고, 이것이 자꾸 메말라 가는 그들의 땅에서 생계를 잇는 새롭고 진보된 방법을 발명하고 채택하도록 강요했다.
81:6.5 (907.2) 여러 대륙의 지형, 그리고 달리 땅이 배치된 상황은 평화나 전쟁을 결정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 유란시아 사람 중에 극소수가, 북 아메리카의 종족들이 누려 왔던 것 같이 계속하여 방해받지 않고 발전할 유리한 기회를 누렸다―그들은 넓은 대양(大洋) 때문에 실지로 사방에서 보호를 받았다.
81:6.6 (907.3) 2. 자본재. 문화는 결코 빈곤한 조건 밑에서 발달하지 않는다. 여가는 문명의 진보에 필수이다. 도덕적ㆍ영적 가치가 있는 개인의 인품은 물질적 부(富)가 없는 가운데 얻을 수 있지만, 문화를 가진 문명은 오로지, 포부와 더불어 여가를 허락하는 물질적 번영이 있는 조건에서만 생긴다.
81:6.7 (907.4) 원시 시대의 유란시아에서, 인생은 심각하고 진지한 일이었다. 그리고 인류가 건강에 좋은 열대 기후를 향하여 항상 떠다니는 성향이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투쟁과 그침 없는 수고를 피하려는 것이었다. 이 따듯한 거주 지대는 극심한 생존 투쟁을 벗어나 얼마큼 한숨 돌리게 했지만, 이렇게 편안을 추구한 종족과 부족들은 피땀 흘려 벌지 않은 여가를 문명의 진보를 위하여 이용하는 일이 드물었다. 머리를 써서 수고함으로 노력을 줄이고, 노동 일수(日數)를 줄임으로 땅으로부터 생계를 얻는 것을 배우고, 그처럼 잘 벌어들이고 유익한 여가를 누릴 수 있었던 종족들의 생각과 계획으로부터, 변함없이 사회의 진보가 생겼다.
81:6.8 (907.5) 3. 과학 지식. 문명의 물질적 면은 반드시 과학적 자료가 쌓이기를 기다려야 한다. 활과 화살을 발견하고 동력의 목적으로 동물을 이용한 뒤에, 사람이 바람과 물의 사용을 배우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으며, 증기(蒸氣)와 전기의 이용이 뒤따랐다. 직물 짜기와 도기, 동물 길들이기, 금속 가공 뒤에는, 글을 쓰고 인쇄하는 시대가 따랐다.
81:6.9 (907.6) 지식은 힘이다. 발명은 반드시 세계적 규모로 문화의 발전이 가속되는 것보다 앞서 간다. 과학과 발명은 무엇보다도 인쇄기로부터 이익을 보았고, 이 모든 문화 활동과 발명 활동의 상호 작용은 문화가 진보하는 속도를 엄청나게 빠르게 하였다.
81:6.10 (907.7) 과학은 사람에게 수학이라는 새 언어의 사용을 가르치며, 엄밀한 선을 따라서 사람의 생각을 훈련시킨다. 과학은 또한 오류를 없앰으로 철학을 안정시키며, 한편 미신을 없앰으로 종교를 깨끗하게 한다.
81:6.11 (907.8) 4. 인간 자원. 노동력은 문명을 퍼뜨리는 데 필수이다. 모든 다른 조건이 같다면, 수가 많은 민족은 수가 적은 종족을 지배할 것이다. 따라서 인구를 어느 선까지 늘이지 못하는 것은 국가의 운명이 완전히 실현되는 것을 막지만, 계속된 성장이 자살이 되는 그러한 인구 증가의 한계가 있다. 정상 인구 밀도의[2] [1719] 적정 수준을 넘어서 인구가 증가하는 것은 생활 수준의 하락을 초래하거나, 아니면 평화로운 침투나 군사적 정복, 곧 강제 점령으로 영토의 경계가 즉시 확장됨을 뜻한다.
81:6.12 (908.1) 너희는 때때로 전쟁의 참화에 충격을 받지만, 사회와 도덕이 발전하는 충분한 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하여 큰 무리의 필사자를 생산하는 것이 필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행성에서 그러한 번식과 더불어 곧 인구의 과잉이라는 심각한 문제가 일어난다. 사람이 사는 세계들의 대부분은 작다. 유란시아는 평균이며, 아마 크기가 좀 작다. 민족의 인구가 적정 수준에서 안정되는 것은 문화를 향상시키고 전쟁을 막는다. 그리고 성장을 그칠 때를 아는 나라는 현명한 나라이다.
81:6.13 (908.2) 그러나 지하 자원이 가장 풍부한 대륙과 가장 앞선 기계 장비가 있어도 그 민족의 지능이 쇠퇴한다면, 거의 진보하지 못할 것이다. 지식은 교육으로 얻을 수 있지만, 지혜는 참된 문화에 필수이며, 오로지 경험을 통해서, 날 때부터 총명한 남녀들이 지혜를 확보할 수 있다. 그러한 민족은 체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고, 참으로 지혜롭게 될 수도 있다.
81:6.14 (908.3) 5. 물질 자원의 효율성. 많은 것이 자연 자원, 과학 지식, 자본재, 인간의 잠재성을 이용하는 데 사람이 얼마큼 지혜를 보이는가에 달려 있다. 초기 문명에서 주요한 요인은 사회의 지혜로운 군주가 행사하는 세력이었다. 원시인은 같은 시대의 우수한 사람들이 글자 그대로 그에게 떠맡긴 문명을 가졌다. 잘 조직되고 우수한 소수(小數)가 대체로 이 세상을 다스려 왔다.
81:6.15 (908.4) 힘이 무엇을 정당화하지는 않지만, 힘은 무엇이 지금 존재하고 역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결정한다. 유란시아는 겨우 요즘에야 힘과 정의(正義)의 윤리를 기꺼이 논의하려는 점까지 사회가 도달했다.
81:6.16 (908.5) 6. 언어의 효율성. 문명의 보급은 언어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살아 있고 성장하는 언어는 문명화된 생각과 계획의 팽창을 보장한다. 초기 시절에 중요한 진보는 언어에서 이루어졌다. 오늘날, 발전하는 생각의 표현을 수월하게 만들기 위해서, 언어의 계속된 발전이 크게 필요하다.
81:6.17 (908.6) 언어는 집단의 교제로부터 진화했고, 각 지역 집단은 의사를 소통하는 자체의 체계를 개발하였다. 언어는 손짓ㆍ표징, 외치는 소리와 흉내내는 소리, 억양, 그리고 후일의 알파벳을 소리내는 데 붙는 악센트를 통해서 성장했다. 언어는 사람이 가진 가장 크고 가장 쓸모 있는, 생각에 쓰이는 연장이지만, 언어는 사회 집단들이 얼마큼 여가를 얻을 때까지 결코 번성하지 않았다. 말을 가지고 노는 성향은 새로운 낱말―속어―를 개발한다. 대다수가 그 속어를 채택하면, 관습은 그 속어가 언어가 되게 만든다. 한 가족 집단에서 사람들이 “아기 말투”에 빠지는 것은 지방 사투리의 기원을 설명한다.
81:6.18 (908.7) 언어가 다른 것은 평화를 연장시키는 데 항상 큰 장벽이었다. 지방 사투리를 정복하는 것은 한 민족 전체에, 한 대륙에서, 또는 전 세계에 한 문화를 보급하는 것보다 앞서야 한다. 보편적 언어는 평화를 촉진하고 문화를 보장하며 행복을 증진한다. 한 세상의 언어가 몇 개로 줄어들 때조차도, 주도하는 문화 민족들이 이 언어들을 통달하는 것은 세계의 평화(平和)와 번영을 이룩하는 데 막강한 영향을 미친다.
81:6.19 (908.8) 국제어의 개발을 향하여 유란시아에서 진보가 거의 없었어도, 국제 상업 교류의 확립은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리고 언어ㆍ무역ㆍ예술ㆍ과학, 경쟁 놀이, 또는 종교와 관련되는가에 상관 없이, 이 모든 국제 관계가 육성되어야 한다.
81:6.20 (909.1) 7. 기계 장치의 효율성. 문명의 진보는 연장, 기계 및 분배 경로의 발달과 소유와 직접 관계된다. 개량된 연장, 정교하고 효율 있는 기계들은 진보하는 문명의 무대에서 서로 다투는 집단들의 생존을 좌우한다.
81:6.21 (909.2) 초기 시절에 땅을 가는 데 적용된 유일한 에너지는 노동력이었다. 사람을 쓰지 않고 황소로 대신한 것은, 사람을 일자리에서 내쫓았기 때문에, 오래 걸린 싸움이었다. 나중에는 기계가 사람을 대체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발전은 모조리 사회의 진보에 직접 이바지했는데, 이는 그것이 더 가치 있는 과제를 성취하기 위하여 노동력을 해방하기 때문이다.
81:6.22 (909.3) 지혜롭게 사용하면, 과학은 사람을 사회적으로 해방하는 큰 수단이 될지 모른다. 노동을 절약하는 새 종류의 기계가 너무 빨리 발명되는 결과로서 큰 집단이 갑자기 일자리를 잃게 되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지적 수준이 너무 낮아서 그런 과도기 문제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는 지혜로운 방법과 건전할 기술을 발견할 수 없는 나라에게만, 기계 시대가 재난으로 판명될 수 있다.
81:6.23 (909.4) 8. 횃불 쥔 자들의 인품. 사회의 유산은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있었고 문화와 지식의 총합에 무엇이라도 이바지한 모든 사람의 어깨 위에 설 수 있게 만든다. 문화의 횃불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이 작업에서 가정은 늘 기초 제도가 될 것이다. 놀이와 사회 생활이 다음에 오며, 마지막이지만, 복잡하고 상당히 조직된 사회에서 똑같이 필수인 학교가 뒤따른다.
81:6.24 (909.5) 곤충은 일생을 위하여 완전히 교육받고 장비를 갖춘 채로 태어난다―정말로 아주 좁고 순전히 본능적 존재이다. 인간의 아기는 교육 없이 태어난다. 따라서 사람은 어린 세대를 교육하는 훈련에 고삐를 쥠으로, 문명이 진화하는 과정을 크게 수정할 힘을 소유한다.
81:6.25 (909.6) 문명의 증진과 문화의 전진에 이바지하는 20세기 최대의 영향력은, 세계 여행의 두드러진 증가와 통신 방법의 전례 없던 개선이다. 그러나 교육의 개선은 확대되는 사회 구조와 발걸음을 맞추지 못했다. 윤리에 대한 현대의 이해도 더 순전히 지적이고 과학적인 노선을 따른 성장에 맞추어 발전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현대 문명은 영적 발전과 가정 제도의 보호 면에서 걸음을 멈춘 상태에 있다.
81:6.26 (909.7) 9. 종족의 이상. 한 세대의 이상(理想)은 바로 뒤잇는 후세를 위하여 운명의 경로를 개척한다. 사회에서 횃불을 쥔 자들의 품질은 문명이 전진하는가 후퇴하는가를 좌우한다. 한 세대의 가정ㆍ교회ㆍ학교는 뒤잇는 세대의 인격의 경향을 미리 정해 준다. 한 종족이나 나라가 도덕적ㆍ영적으로 움직이는 힘은 그 문명에서 문화의 속도를 대체로 결정한다.
81:6.27 (909.8) 이상은 사회적 흐름의 근원을 높인다. 그리고 어떤 흐름도, 압력이나 방향을 통제하는 무슨 기술이 이용된다 하더라도, 그 근원보다 조금도 더 높이 올라가지 못할 것이다. 문화가 있는 문명의 가장 물질적 면을 추진하는 힘조차 사회의 성취 중에서 물질 성향이 가장 적은 곳에 거한다. 지능은 문명의 작용을 통제하고, 지혜는 이를 지휘할지 모르지만, 영적 이상을 찾는 것은 한 달성 수준에서 다음 수준까지 인간의 문화를 정말로 높이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이다.
81:6.28 (910.1) 처음에, 인생은 존재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인생은 이제 생활 수준을 높이기 위한 싸움이며, 다음에는 생각의 질을 높이는 싸움이 될 것이요, 이것은 앞으로 땅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목표이다.
81:6.29 (910.2) 10. 전문가의 조정. 초기에 노동의 분업으로, 나중에는 그에 따라 전문화한 결과로 문명은 엄청나게 진보되었다. 문명은 이제 전문가들을 효과 있게 조정하는 데 달려 있다. 사회가 확대됨에 따라서, 다양한 전문가들을 함께 모으는 어떤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
81:6.30 (910.3) 사회ㆍ예술ㆍ기술ㆍ산업의 전문가는 줄곧 늘어나고, 기술과 숙달 면에서 나아질 것이다. 이렇게 능력이 다양화되고 직업이 상이한 것은, 조정하고 협동하는 효과적 수단이 개발되지 않는다면, 궁극에 인간 사회를 약화시키고 무너지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창의성과 전문화 능력을 가진 지능은, 발명이 급속히 성장하고 문화 팽창의 걸음이 빨라짐으로 생기는 모든 문제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적당한 방법을 고안하는 데 전적으로 유능할 것이다.
81:6.31 (910.4) 11. 일자리를 찾는 방책. 사회의 발전에서 다음 시대는, 항상 늘어나고 확대되는 전문화에 대하여 더 낫게, 더 효과 있는 협동과 조정에서 나타날 것이다. 노동이 더욱 다양화됨에 따라서, 개인을 적당한 일자리로 지도하는 어떤 기술이 고안되어야 한다. 유란시아의 문명화된 민족들 사이에서, 기계는 실업(失業)을 낳는 유일한 원인이 아니다. 경제의 복잡성, 그리고 산업 및 직업의 전문화가 꾸준히 증가하는 것은 노동자에게 일자리 찾아주는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81:6.32 (910.5) 사람을 일하도록 훈련하는 것만으로 넉넉하지 않다. 복잡한 사회에서는 또한 일자리를 찾는 효과적 방법이 마련되어야 한다. 생계를 잇는 상당히 특수화된 기술을 시민에게 훈련시키기 전에, 전문화된 일에서 잠시 일자리를 잃었을 때 이용될 수 있는, 하나 이상의 보통 노동ㆍ상업, 또는 직종에서 훈련을 받아야 한다. 어떤 문명도 큰 실업자 계급을 오랫동안 지니고서 살아남을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최선의 시민조차 공공(公共) 금고로부터 지원을 받음으로 비뚤어지고 사기(士氣)를 잃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베푸는 자선조차, 팔다리가 멀쩡한 시민에게 오래 베풀었을 때 해독이 된다.
81:6.33 (910.6) 고도로 전문화된 그런 사회는 옛 민족들의 오래 된 공동체 및 봉건적 관습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많은 보통 서비스가 수긍할 만하게, 이롭게 사회화될 수 있는 것이 참말이지만, 총명하게 협동하는 어떤 기술로, 상당히 훈련받고 극도로 전문화된 인간들을 최선으로 관리할 수 있다. 현대화된 조정과 우호적 규제는, 더 낡은 원시 공산주의 방법이나 무력(武力)에 기초를 두고 독재로 규제하는 기구보다 더 오래 가는 협동을 낳을 것이다.
81:6.34 (910.7) 12. 기꺼이 협동하는 정신. 인간 사회의 진보에 하나의 큰 장애물은 크고 사회화된 인간 집단, 그리고 그보다 작고 반대 생각을 가진 단체, 즉 반사회적 생각을 가진 개별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인류의 반사회적 단체, 이 둘의 이익과 복지 사이에서 생기는 싸움이다.
81:6.35 (910.8) 교육 방법과 종교적 이상이, 높은 종류의 총명한 애국심과 국가에 대한 헌신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어떤 국가의 문명도 오래 가지 못한다. 이런 부류의 총명한 애국심과 문화적 단결이 없으면, 모든 국가가 지방적 질투와 지역의 자체 이권의 결과로서, 무너지는 경향이 있다.
81:6.36 (911.1) 세계적 문명을 유지하는 것은 평화와 친교 속에서 어떻게 함께 사는가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효과적 조정이 없이, 산업 문명은 지나친 전문화의 위험, 즉 단조로움과 편협, 그리고 불신과 질투를 기르는 성향으로 인하여 위태롭게 된다.
81:6.37 (911.2) 13. 효과적이고 지혜로운 지도층. 문명에는 많은 것, 허다한 것이, 열심히 효과 있게 짐을 끌어당기는 정신에 달려 있다. 큰 짐을 드는 데 열 사람은, 함께―모두가 같은 순간에―들지 않는다면, 한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다. 그러한 단체 작업―사회적 협동―은 지도층에 달려 있다. 지난날과 오늘날의 문화적 문명은, 시민이 지혜로운 진취적 지도자들과 영리하게 협동하는 데 기초를 두었다. 그리고 사람이 더 높은 수준으로 진화하기까지, 문명은 지혜롭고 활력 있는 지도층에 계속 의존할 것이다.
81:6.38 (911.3) 높은 문명은 물질적 부(富), 지적 위대함, 도덕적 가치, 사회적 재치, 우주 통찰력, 이러한 것들을 현명하게 상관시킴으로부터 태어난다.
81:6.39 (911.4) 14. 사회의 변화. 사회는 신이 준 제도가 아니다. 사회는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현상이다. 지도자들이 그 시대의 과학의 발전과 발걸음을 맞추는 데 필수인 사회 조직의 변화를 더디게 일으킬 때, 전진하는 문명은 반드시 늦어진다. 이 모든 것 때문에, 오래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물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며, 한 개념을 다만 진기하고 새롭다는 이유로 무조건 채택해서도 안 된다.
81:6.40 (911.5) 사람은 사회의 장치를 가지고 실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조절하는 이러한 모험은 반드시, 사회 진화의 역사를 충분히 통달한 자들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이 개혁자들은 고려하고 있는 사회 실험이나 경제 실험의 분야에서 실지로 체험을 가진 자들의 지혜를 반드시 참조해야 한다. 어떤 큰 사회의 변화나 경제의 변화도 갑자기 시도해서는 안 된다. 온갖 종류의 인간적 조정―물리적ㆍ사회적, 또는 경제적 조정―에는 시간이 필수이다. 오로지 도덕적ㆍ영적 조정이 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고, 이것들조차 그 물질적ㆍ사회적 반응이 충분히 작용하는 데 시간의 흐름이 필요하다. 문명이 한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넘어가는 중대한 시기에, 민족의 이상(理想)은 주요한 지지와 확신이 된다.
81:6.41 (911.6) 15. 과도기 붕괴의 예방. 사회는 오랜 세월에 걸쳐 시행 착오로 얻은 산물이다. 사회는 동물 수준에서 행성 지위를 가진 인간 수준까지 인류가 오랜 세월에 걸쳐 연속된 단계를 올라감으로 선택해서 조정하고, 거듭 조정하여 살아남은 것이다. 어떤 문명에서도―어느 한 순간에도―가장 큰 위험은 과거의 정착된 방법으로부터 새롭고 더 낫지만 실습해 보지 않은 미래의 과정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붕괴되는 위협이다.
81:6.42 (911.7) 지도층은 진보를 좌우한다. 지혜ㆍ통찰력ㆍ선견은 국가가 지속하는 데 필수이다. 유능한 지도층이 비로소 사라질 때까지 문명은 결코 정말로 위태롭지 않다. 그러한 지혜로운 지도자의 수는 결코 인구의 1퍼센트를 넘은 적이 없다.
81:6.43 (911.8) 문명은 진화의 사다리에서 이 가로대를 딛고, 급속히 팽창하는 20세기의 문화를 낳은 힘찬 영향력이 개시될 수 있는 자리에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오로지 이 필수인 것들에 집착함으로, 사람은 오늘날의 문명이 계속 발전하고 확실히 살아남도록 마련하면서, 그 문명을 유지하기를 바랄 수 있다.
81:6.44 (912.1) 이것이 아담 시절 이후로 문명을 세우려고 세상의 민족들이 겪은, 길고 긴 투쟁의 요점이다. 오늘날의 문화는 이 벅찬 진화에서 생긴 최종의 결과이다. 인쇄가 발견되기 전에는 진보가 비교적 느렸는데, 이는 한 세대가 앞 세대들의 업적으로부터 그렇게 빨리 이득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인간 사회는 문명이 투쟁해 온, 지금까지의 세월 동안에 축적된 여세(餘勢)의 힘으로, 앞으로 돌진하고 있다.
82:0.1 (913.1) 결혼―짝짓기―는 남녀의 구별에서 생겨난다. 결혼은 그러한 남녀 구별에 사람이 반응하는 조정이며, 한편 가족 생활은 그러한 진화하며 적응하는 모든 조정으로 생기는 결과이다. 결혼은 오래 버티고 있다. 결혼은 생물학적 진화에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지만, 모든 사회적 진화의 기초이며, 따라서 어떤 형태로 계속 존재할 것이 확실하다. 결혼은 인류에게 가정을 주었고, 가정은 길고도 힘드는 진화의 투쟁 전체에서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다.
82:0.2 (913.2) 종교 제도, 사회 제도, 교육 제도는 모두 문화가 있는 문명이 살아남는 데 필수이지만, 가족은 사람을 문명화시키는 으뜸 세력이다. 어린아이는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인생의 기본의 대부분을 배운다.
82:0.3 (913.3) 옛 시절의 인간들은 아주 부유한 사회 문명을 소유하지 않았지만, 가진 것을 충실하게 효과적으로 다음 세대에 넘겨주었다. 이 과거 문명의 대부분은, 가정이 효과 있게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최소한의 다른 제도적 영향과 더불어 계속 진화했다는 것을 너희는 깨달아야 한다. 오늘날 인간 종족들은 부유한 사회 및 문화적 유산을 소유하며, 이를 뒤잇는 세대들에게 지혜롭고 효과 있게 전해 주어야 한다. 하나의 교육 기관으로 가족은 유지되어야 한다.
82:1.1 (913.4) 남자와 여자 사이에 큰 성격 차이가 있는데도, 성욕은 종(種)의 번식을 위하여 남녀가 한데 모이는 것을 보장하기에 넉넉하다. 인간들이 나중에 사랑과 헌신, 결혼의 정절(貞節)이라 부르는 것을 많이 체험하기 오래 전에, 이 본능은 효과 있게 작용했다. 짝짓기는 타고난 성향이며, 결혼은 짝짓기가 사회에 미치는 진화적 영향이다.
82:1.2 (913.5) 성(性)에 대한 흥미와 욕구는 원시 종족들에게 지배하는 정열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성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번식하는 체험 전부가 상상으로 아름답게 치장되지 않았다. 높이 문명화된 민족들이 느끼는 정열, 온 몸을 감싸는 성의 정열은 주로 종족이 섞인 때문이며, 관련된 상상력과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놋 족속과 아담 족속이 진화적 성품을 자극하는 곳에서 특히 그렇다. 그러나 이 안드 족속의 유전을 진화 종족들이 아주 소량으로 흡수했기 때문에, 더 날카로운 성(性) 의식과 더 강한 짝짓는 욕구를 부여받음으로 이처럼 일깨워지고 자극받은, 동물적 정열에 충분한 자제력을 마련하지 못했다. 진화 종족 가운데, 홍인이 가장 높은 성 규율을 가지고 있었다.
82:1.3 (913.6) 결혼과 관계된 성의 규제는 다음을 가리킨다:
82:1.4 (913.7) 1. 문명이 비교적 진보한 것. 문명은 유익한 경로에서, 도덕 관습을 지키면서 성욕을 만족시킬 것을 갈수록 더 요구한다.
82:1.5 (914.1) 2. 어느 민족에나 들어 있는 안드 혈통의 분량. 성은 그러한 무리들 사이에서 육체 및 감정의 본질 중에서 가장 높고 낮은 것을 모두 표현하게 되었다.
82:1.6 (914.2) 산긱 종족들은 정상으로 동물적 정열이 있었지만, 이성(異性)의 아름다움이나 육체적 매력을 상상하거나 인식하는 성향을 거의 나타내지 않았다. 성적 매력이라 부르는 것은 오늘날의 원시 종족들에게도 거의 없다. 혼합되지 않은 이 종족들은 분명한 짝짓는 본능이 있지만, 사회의 통제가 필요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성적 매력을 충분히 느끼지 않는다.
82:1.7 (914.3) 짝짓는 본능은 사람을 지배하는, 인간의 육체적 추진력이다. 그것은 개인의 만족을 가장하여, 제 몸의 편안을 찾고 개인의 책임을 벗어나는 것보다 종족의 복지와 영속을 더 중요하게 여기도록, 이기적인 사람을 실질적으로 속이는 하나의 감정이다.
82:1.8 (914.4) 하나의 제도로서 결혼은, 예전에 시작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아를 존속시키려는 생물학적 성향이 사회에서 진화한 것을 묘사한다. 진화하는 인종이 영속하는 것은 종족의 이 짝짓는 충동이 존재함으로 확실하게 되며, 이 욕구는 쉽게 말해서 성적 매력이라고 부른다. 위대한 이 생물학적 욕구는 온갖 종류의 관련된 본능과 감정, 그리고―육체적ㆍ지적ㆍ도덕적ㆍ사회적―관습을 충동하는 축(軸)이 된다.
82:1.9 (914.5) 야만인에게는 먹을 것의 공급이 강제된 동기이지만, 문명이 풍부한 식량을 보장할 때, 성욕은 지배하는 충동이 되는 적이 빈번하며, 따라서 늘 사회의 규제가 필요하다. 동물의 경우에, 본능의 주기(週期)가 짝짓는 성향을 통제하지만, 사람은 대체로 자제(自制)하는 존재이니까, 성욕이 아주 주기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따라서 사회가 개인에게 자제를 부과하는 것이 필요하다.
82:1.10 (914.6) 고삐가 풀리고 지나치게 탐닉할 때, 인간의 어떤 감정이나 충동도, 이 강력한 성욕만큼 많은 해독과 슬픔을 낳을 수 없다. 이 충동을 사회의 규제에 영리하게 굴복시키는 것은 어느 문명이라도 그 현실성을 재는 최고의 시험이 된다. 자제, 거듭된 자제는, 진보하는 인류의 항상 늘어나는 요구이다. 비밀을 가지는 것, 불성실ㆍ위선(僞善)은 성 문제를 눈에 띄지 않게 할지 모르지만,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으며, 윤리를 향상시키지도 않는다.
82:2.1 (914.7) 결혼의 진화에 관한 이야기는 다만 사회와 종교와 국가의 제한이 주는 압력을 통해서 성을 통제하던 역사이다. 자연은 개인을 거의 인식하지 않는다. 자연은 이른바 도덕을 알아보지 못한다. 자연은 오로지, 순전히 종의 번식에만 아랑곳한다. 자연은 강제로 번식을 주장하지만, 그 결과로 생기는 문제를 사회가 해결하라고 무관심하게 버려두며, 이처럼 진화하는 인류에게, 늘 따라다니는 주요한 문제를 만들어 낸다. 이 사회적 갈등은 기본적 본능과 진화하는 윤리 사이에 끝없이 벌어지는 싸움에 있다.
82:2.2 (914.8) 옛날 종족들 사이에는 남녀의 관계에 대하여 거의 또는 아무 규제가 없었다. 이 자유로운 성관계 때문에 아무런 매춘이 없었다. 오늘날, 피그미와 기타 뒤처진 집단은 아무런 결혼 제도가 없다. 이 종족들을 연구하는 것은 원시 민족들이 따른, 단순한 짝짓기 관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옛 종족들을 모두, 그들 시대의 관습의 도덕 수준에 비추어서 연구하고 판단해야 한다.
82:2.3 (915.1) 그러나 자유로운 성관계는 지독한 야만 수준보다 결코 평판이 더 좋은 적이 없었다. 사회 집단들이 비로소 형성되는 순간, 결혼 법규와 결혼 제한이 발달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짝짓기는 거의 완전히 자유로운 성관계로부터 비교적 완전히 성을 제한하는 20세기 수준까지, 여러 번 과도기를 거쳐서 진보해 왔다.
82:2.4 (915.2) 부족이 발전하는 가장 옛 단계에서 도덕 관습과 제한하는 금기는 아주 투박했으나, 이것들이 남녀를 떼어놓기는 했다―이것은 평온ㆍ질서ㆍ근면을 조장했다―그리고 결혼과 가정의 오랜 진화가 시작되었다. 성별에 따른 복장ㆍ치장, 종교 관행에 대한 관습은 이 초기의 금기(禁忌)에 기원이 있었고, 이 금기는 성의 자유의 범위를 명확히 정하고, 따라서 결국 악덕ㆍ범죄ㆍ죄의 개념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중요한 축제 날, 특히 5월제에는 성(性)에 대한 어떤 제한도 중지하는 것이 오랫동안 풍습이었다.
82:2.5 (915.3) 여자는 언제나 남자보다 더 엄격한 금기에 지배되었다. 초기의 도덕 관습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결혼하지 않은 여자에게 같은 정도로 성의 자유를 주었지만, 아내가 남편에게 충실하는 것이 아내에게 반드시 요구되었다. 원시의 결혼은 남자에게 성의 자유를 크게 줄이지 않았지만, 아내에게 더 이상 성의 자유를 금했다. 결혼한 여자들은 반드시 머리 장식, 옷차림ㆍ베일ㆍ은둔ㆍ치장ㆍ반지와 같은 어떤 표시를 지녔고, 이것은 한 등급으로서 그들을 따로 구별했다.
82:3.1 (915.4) 결혼은 사람의 그칠 줄 모르는 번식―자기를 퍼뜨리는―욕구의 긴장, 늘 있는 생물학적 긴장에 사회적 유기체가 제도로 반응하는 것이다. 짝짓기는 보편적으로 자연스럽고, 사회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진화하는 동안, 그에 따라서 짝짓기 관습이 진화했으며, 이것이 결혼 제도의 시초이다. 사회의 진화가 도덕 관습이 생기는 단계까지 진보하는 곳은 어디에나, 결혼이 진화된 제도로서 발견될 것이다.
82:3.2 (915.5) 결혼에는 두 가지 뚜렷한 영역이 언제나 있었고, 언제나 있을 터인데, 도덕 관습, 곧 짝짓기의 바깥 면을 규제하는 법과, 그밖에 남자와 여자들의 비밀스럽고 개인적인 관계이다. 사회가 부과한 성 규제에 맞서 개인은 언제나 반항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이 성 문제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자아의 유지는 개인에게 일어나지만 집단이 이를 수행하며, 자아의 존속은 사회적이지만, 개인의 충동으로 확보된다.
82:3.3 (915.6) 모든 종족 사이에서 보다시피, 존중되었을 때 도덕 관습은 성욕을 제한하고 통제하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 결혼의 기준은 언제나 도덕 관습의 현재 힘, 그리고 국가 정부의 기능이 제대로 작용함을 가리키는 참다운 지표였다. 그러나 초기에 있던 성(性) 및 짝짓기에 관한 도덕 관습은 모순되고 투박한 규칙들의 집합이었다. 부모ㆍ아이들ㆍ친척ㆍ사회 모두가 결혼의 규제에 이익이 엇갈려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이 있었는데도, 결혼을 높이고 실천한 종족들은 자연히 더 높은 수준으로 진화했고, 큰 수가 살아남았다.
82:3.4 (915.7) 원시 시절에 결혼은 사회적 지위를 얻으려고 치르는 값이었다. 아내를 소유하는 것은 탁월의 표시였다. 야만인은 결혼하는 날을 책임을 맡고 성년기에 들어가는 표시로 바라보았다. 한 시대에는 결혼을 사회에 대한 의무로 여겼고, 다른 시대에는 종교적 의무로, 또 다른 시대에는 국가에게 시민을 마련해 주는 정치적 요건으로 생각되었다.
82:3.5 (916.1) 초기의 많은 부족은 훔치는 공적을 결혼 자격으로 요구했다. 후일의 민족들은 그렇게 침공하여 약탈하는 것을, 운동 경쟁과 겨루는 경기(競技)로 바꿔치웠다. 이 경기에서 이긴 자에게는 1등상―그 계절에 신부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주었다. 머리 사냥꾼들 사이에서, 젊은이는 적어도 머리 하나를 소유할 때까지 결혼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두개골은 때때로 살 수 있었다. 아내 사들이기가 줄어들자, 수수께끼 경쟁으로 아내를 얻게 되었고, 이것은 흑인의 여러 집단 사이에 아직도 남아 있는 풍습이다.
82:3.6 (916.2) 진보하는 문명과 함께, 어떤 부족들은 남자들이 겪는 어려운 결혼 시험을 여자들의 손에 넘겼다. 이처럼 여자들은 그들이 선택하는 남자를 유리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 결혼 시험은 사냥과 투쟁, 그리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 능력을 포함했다. 신랑이 적어도 1년 동안 신부의 가족에 들어가서, 거기서 살고 수고하며, 그가 얻으려고 하는 아내를 가질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오랫동안 요구되었다.
82:3.7 (916.3) 아내의 자격은 고된 일을 해내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아내는 농사 일의 어떤 부분을 주어진 시간 안에 해내는 것이 요구되었다. 결혼하기 전에 아이를 낳으면, 그 여자는 더군다나 값이 있었다. 이렇게 그 여자의 생산 능력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82:3.8 (916.4) 옛날의 종족들이 결혼하지 못한 것을 창피나 죄라고까지 여겼다는 사실은 아이 결혼의 유래를 설명한다. 사람은 결혼해야 하니까, 이를수록 더 좋은 것이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영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믿음이 또한 널리 퍼졌고, 이것이 태어날 때조차, 때때로 낳기 전에, 성별에 달려 있지만, 아이들을 결혼시키는 추가된 동기였다. 옛 사람들은 죽은 사람도 결혼해야 한다고 믿었다. 최초의 중매쟁이들은 죽은 사람들을 위한 결혼을 협상하려고 고용되었다. 이 중매자들이 죽은 아들과 다른 가족의 죽은 딸의 결혼을 성사시키도록 한 부모가 주선하곤 했다.
82:3.9 (916.5) 후일의 종족들 사이에서는 사춘기가 결혼하는 보통 나이였으나, 문명의 진보에 비례해서 결혼하는 나이가 늦어졌다. 사회의 진화에서 일찍부터 특이한 독신 계급의 남자와 여자들이 생겨났다. 정상의 성욕이 얼마큼 모자라는 개인들이 이 계급을 시작하고 유지했다.
82:3.10 (916.6) 많은 부족이 신부를 그 남편에게 주기로 된 날 바로 전에, 통치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신부와 성관계를 가지도록 허락했다. 이 사람들은 각자 소녀에게 선물을 주곤 했으며, 이것이 결혼 선물을 주는 관습의 기원이었다. 어떤 집단에서는 젊은 여자가 자기 지참금을 벌 것이라 기대하였고, 이것은 신부를 전시하는 방에서 신부가 성교 서비스에 대한 값으로 받은 선물로 이루어졌다.
82:3.11 (916.7) 어떤 부족들은 젊은 남자를 과부와 늙은 여자에게 결혼시켰고, 나중에 홀아비가 되었을 때, 젊은 여자와 결혼하도록 허락하곤 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표현한 대로, 그들의 생각에 두 젊은이가 짝짓도록 놓아 둘 경우처럼 양쪽 부모가 바보가 되지 않을 것을 보장하였다. 다른 부족들은 짝짓기를 비슷한 나이 또래에 제한했다. 어떤 나이 집단에 결혼을 제한한 것이 근친 상간(相姦) 개념을 처음으로 낳았다. (인도에서는 지금도 결혼하는 데 아무런 나이 제한이 없다.)
82:3.12 (916.8) 어떤 도덕 관습 밑에서는 과부를 크게 두려워했고, 과부는 남편의 무덤에서 죽음을 당하든지 자살하도록 허락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배우자와 함께 영의 나라로 간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죽은 것은 거의 변함없이, 살아 있는 과부의 탓으로 돌렸다. 어떤 부족들은 과부를 산 채로 태웠다. 한 과부가 계속해서 살면, 대체로 재혼을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그 여자의 인생은 계속 애도하고, 견딜 수 없게 사회의 제한을 받는 인생이었다.
82:3.13 (917.1) 옛 시절에는 지금 부도덕하다고 여기는 많은 관습을 장려하였다. 원시의 아내들은 남편이 다른 여자들과 정사(情事)를 벌이는 것을 크게 자랑으로 여기는 일이 뜸하지 않았다. 소녀에게 순결은 결혼에 큰 방해물이었다. 결혼하기 전에 아이를 낳는 것은, 아이 낳을 수 있는 동반자를 남자가 가진 것이 확실하니까, 아내로서 한 소녀의 바람직함을 크게 높여 주었다.
82:3.14 (917.2) 많은 원시 부족은 여자가 아이를 배기까지 연습 결혼을 인가했으며, 아이를 가졌을 때 정식으로 결혼식이 거행되곤 했다. 다른 집단에서는 첫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 아내가 아이를 못 낳으면, 그 부모가 여자를 돌려받아야 했고, 결혼은 취소되었다. 도덕 관습은 모든 부부가 아이 가질 것을 요구했다.
82:3.15 (917.3) 이 원시의 연습 결혼은 전혀 방종과 비슷한 데가 없었다. 이것은 다만 진지한 생산력의 시험이었다. 계약하는 사람들은 생식 능력이 입증되자마자 영구하게 결혼했다. 현대의 부부가, 머리의 뒷전에서 결혼 생활에 온전히 만족하지 않으면 편리하게 이혼할 생각으로 결혼할 때, 그들은 실제로 일종의 연습 결혼에 들어가는 것이며, 이것은 그들보다 덜 개화된 조상들이 정직하게 모험하는 위치보다 훨씬 아래에 있는 결혼이다.
82:4.1 (917.4) 결혼은 언제나 재산ㆍ종교와 가깝게 연결되어 왔다. 재산은 결혼을 안정시키는 것이요, 종교는 결혼에 도덕성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82:4.2 (917.5) 원시의 결혼은 투자요, 경제적 투기(投機)였다. 불장난하는 일이 아니라 사업하는 문제였다. 옛 사람들은 집단의 이익과 복지를 위하여 결혼했다. 따라서 집단, 곧 부모와 장로들이 그들의 결혼을 계획하고 주선했다. 그리고 재산 관습이 결혼 제도를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는 것은, 결혼이 많은 현대 민족보다, 초기의 부족들 사이에서 더 오래 갔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82:4.3 (917.6) 문명이 진전되고 사유 재산이 관습에서 더 인정을 받음에 따라서, 도둑질은 큰 범죄가 되었다. 간통은 일종의 도둑질, 남편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초기에 있었던 법규와 도덕 관습에서 간통은 특별히 언급되지 않았다. 여자는 아버지의 재산으로서 시작했고, 아버지는 그의 권리를 딸의 남편에게 넘겨주었다. 모든 합법적 성관계는 이 기존 재산권에서 생겨났다. 구약(舊約)은 여자를 일종의 재산으로 다룬다. 코란은 여자들이 열등하다고 가르친다. 남자는 아내를 친구나 손님에게 빌려줄 권리를 가졌고, 이 관습은 아직도 어떤 종족들 사이에서 유행한다.
82:4.4 (917.7) 현대에 성에 대한 경계심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화하는 도덕 관습의 산물이다. 원시의 남자는 아내를 잃을까 경계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제 재산을 지키고 있었다. 아내를 남편보다 더 엄격하게 성(性)을 책임지게 하는 이유는 결혼 생활에서 아내의 부정(不淨)이 자손과 상속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문명의 행진에서 아주 일찍부터 사생아는 평판이 나빴다. 처음에는 여자만 간통으로 벌을 받았다. 나중에 도덕 관습은 또한 여자의 상대도 책망할 것을 선포했으며, 오랜 세월 동안, 피해자인 남편이나 보호자인 아버지는 침해한 남자를 죽일 온전한 권리가 있었다. 현대의 민족들은 이 관습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불문율 밑에서 이른바 정절을 침해한 범죄를 인정한다.
82:4.5 (917.8) 순결의 금기가 재산 관습의 한 단계로서 기원을 가졌으니까, 이 금기는 처음에 결혼한 여자에게 적용되었어도 결혼하지 않은 소녀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후일에는 구혼자보다 아버지가 순결을 더 요구했다. 처녀는 아버지에게 장사의 재산이었다―처녀는 값이 더 비쌌다. 순결이 더 요구되자, 남편이 되려는 자를 위하여 순결한 신부를 적절히 기르는 서비스를 인정하는 뜻으로 아버지에게 신부의 값을 치르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일단 시작되자, 여자의 순결을 지키는 이 생각이 종족들에게 꽉 들어박혀서, 처녀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소녀들을 글자 그대로 장 속에 가두는 것, 실제로 몇 년 동안 잡아가두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그래서 그후의 기준과 처녀성 시험은 자동으로 전문 창녀 계급을 낳았다. 그들은 퇴짜맞은 신부, 처녀가 아닌 것이 신랑의 어머니한테 들킨 여자들이었다.
82:5.1 (918.1) 아주 일찍부터 야만인은 종족의 혼합이 자손의 질을 높인다는 것을 관찰했다. 부족 안에서 결혼하는 것이 반드시 나빴다는 것이 아니라, 바깥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반드시 비교해서 더 나았다. 따라서 도덕 관습은 가까운 친척 사이에 성관계를 제한하도록 정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족외 결혼이 진화적 변화와 개선을 위하여 선택하는 기회를 크게 늘인다는 것이 인식되었다. 족외 결혼으로 생긴 사람들은 더 능력이 있고 냉혹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능력이 더 컸다. 부족 안에서 결혼하는 자들은, 그들의 도덕 관습과 함께, 차츰 사라졌다. 이것은 모두 천천히 일어났고, 야만인은 의식해서 그런 문제를 따져보지 않았다. 그러나 후일의 진보하는 민족들은 따져보았고, 또한 부족 안의 결혼이 지나치면 때때로 일반적 결점이 생긴다는 것을 관찰했다.
82:5.2 (918.2) 좋은 핏줄을 가진 자들의 근친 교배가 때때로 강력한 부족을 세우지만, 유전적 결함이 있는 자들의 근친 교배로 나쁜 결과가 생기는 놀라운 경우는 사람의 머리에 더 강하게 인상을 주었고, 그 결과로서 진보하는 도덕 관습은 갈수록 더, 아예 가까운 친척 사이에 결혼을 막는 금기를 형성했다.
82:5.3 (918.3) 종교는 오랫동안 족외 결혼을 막는 효과적 장벽이었다. 많은 종교적 가르침은 신도가 아닌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여자는 보통 족내 결혼, 남자는 족외 결혼 풍습을 더 좋아했다. 재산은 언제나 결혼에 영향을 미쳤고, 때때로, 재산을 한 씨족 안에서 보존하려는 노력으로, 아버지의 부족 안에서 남편을 고르라고 여자에게 강요하는 관습이 생겼다. 이런 종류의 판결은 사촌(四寸)의 결혼을 크게 번성하도록 이끌었다. 또한 기술의 비밀을 보존하려는 노력으로 안에서 짝짓는 관습을 지켰다. 솜씨 있는 직공들은 가진 기술의 지식을 가족 안에서 지키려 하였다.
82:5.4 (918.4) 우수한 무리들은, 고립되었을 때 언제나 같은 혈족끼리 짝짓기로 되돌아갔다. 놋 족속은 15만 년이 넘도록 부족 안에서 결혼하는 큰 집단 중의 하나였다. 후일의 족내 결혼 관습은 보라 인종의 전통에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는데, 보라 인종의 경우 처음 짝짓기는 어쩔 수 없이 형제와 자매 사이였다. 형제와 자매의 결혼은 옛날 에집트ㆍ시리아ㆍ메소포타미아에, 그리고 안드 족속이 한때 차지했던 땅에 두루, 보통이었다. 에집트인은 왕족의 피를 깨끗하게 지키려는 노력으로 형제 자매끼리 결혼하는 관습을 오랫동안 지켰고, 이 관습은 페르시아에서 더 오래 지속되었다. 아브라함 시절 이전에 메소포타미아인 사이에서는, 사촌 결혼이 의무였다. 사촌은 사촌과 먼저 결혼할 권리가 있었다. 아브라함 자신은 배다른 누이와 결혼했지만, 그러한 연합은 후일에 유대인 관습에서 허락되지 않았다.
82:5.5 (919.1) 형제 자매 사이의 결혼을 처음으로 그만둔 것은 다처(多妻) 관습 하에서 생겼는데, 이는 누이인 아내가 다른 아내나 아내들을 도도하게 지배했기 때문이다. 어떤 부족의 관습은 죽은 형제의 과부에게 장가드는 것을 막았지만, 살아 있는 형제가 그의 죽은 형제를 위하여 자식을 낳아 줄 것을 요구했다. 어떤 정도라도 안에서 결혼하는 데 저항하는 생물학적 본능은 없다. 그러한 제한은 전적으로 금기의 문제이다.
82:5.6 (919.2) 남자가 두둔했기 때문에 족외 결혼이 마침내 지배했다. 바깥에서 아내를 얻는 것은 인척들로부터 더 큰 자유를 얻을 것을 보장했다. 친숙은 경멸을 낳는다. 그래서, 개인의 선택 요인이 짝짓기를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 부족 바깥에서 짝을 고르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82:5.7 (919.3) 많은 부족은 마침내 씨족 안의 결혼을 금했으며, 다른 부족들은 어떤 카스트와 짝짓는 것을 제한했다. 자기 토템의 여자와 결혼하지 못하게 하는 금기는 여자를 이웃의 부족으로부터 훔치는 관습을 촉진하였다. 나중에는, 친척 관계보다 오히려 영토에 거주하는 것에 따라서 결혼을 규제했다. 족내 결혼이 현대의 족외 결혼 관습으로 진화한 데는 여러 단계가 있었다. 금기가 서민에게 족내 결혼을 막는 것에 근거를 둔 뒤에도, 추장과 왕들은 왕족의 핏줄을 모으고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가까운 친척과 결혼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관습은 보통 군림하는 통치자에게 성 문제에서 어떤 자유를 허락했다.
82:5.8 (919.4) 후일의 안드 민족들의 존재는 산긱 종족들이 자신의 부족 바깥에서 짝지으려는 욕구가 증가한 것과 많이 상관이 있다. 그러나 이웃하는 집단들이 비교적 평화롭게 함께 사는 것을 배우기까지, 족외 결혼은 유행될 수 없었다.
82:5.9 (919.5) 족외 결혼 자체가 평화를 추진한다. 부족들 사이의 결혼은 적대 행위를 줄였다. 족외 결혼은 부족의 조정과 군사(軍事) 연합으로 이끌었다. 힘을 키워 주기 때문에 족외 결혼이 지배하게 되었고, 족외 결혼이 국가를 세웠다. 모험과 탐험은 짝짓는 범위를 연장하는 데 기여했고, 종족 문화의 교류를 크게 수월하게 만들었다.
82:5.10 (919.6) 종족의 결혼 관습에서 달리 설명할 수 없는 모순점은 대체로, 이 족외 결혼 관습과 그에 따른 아내 훔치기와 다른 부족으로부터 아내 사들이기 때문이며, 이 모두가 독립된 부족 관습의 혼합을 초래하였다. 족내 결혼을 막는 이 금기가 사회적이요 생물학적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 단계의 사돈 관계, 곧 아무런 핏줄 관계를 대표하지 않는 경우를 포함하여, 친척 사이의 결혼을 막는 금기에서 잘 나타난다.
82:6.1 (919.7) 오늘날 세상에 순수한 민족은 하나도 없다. 옛날에 진화된 최초의 유색 민족들 가운데 세상에서 오직 두 가지 대표 민족, 곧 황인과 흑인이 지속하고 있다. 이 두 종족조차 멸망한 유색 민족들과 많이 섞여 있다. 이른바 백인 종족이 주로 옛날의 청인으로부터 내려왔어도, 백인종은 두 아메리카에 있는 홍인처럼, 모든 다른 종족과 얼마큼 섞였다.
82:6.2 (919.8) 여섯 가지 유색 산긱 종족 가운데, 셋은 1차이고 셋이 2차였다. 비록 1차 종족―청인ㆍ홍인ㆍ황인―이 여러 면에서 세 2차 종족보다 우수했어도, 이 2차 종족은 많은 바람직한 특성이 있었고, 그들 가운데 상급 핏줄을 흡수했더라면 1차 민족들이 어지간히 향상되었으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82:6.3 (920.1) “반(半) 카스트,”[1] [1720] “잡종,” “튀기”에 대한 오늘날의 편견은, 현대의 종족 교배가 대체로, 관계된 종족들 안에 심하게 열등한 핏줄 사이에 있기 때문에 생긴다. 너희는 또한 같은 종족의 퇴화된 핏줄이 서로 결혼할 때 바람직하지 않은 자손을 얻는다.
82:6.4 (920.2) 오늘날의 유란시아 종족들이, 그들의 가장 낮은 층에 저하되고 반사회적이고 박약하고 버림받은 종자들의 저주로부터 풀려날 수 있다면, 얼마큼 종족을 혼합시키는 데 거의 반대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종족 혼합이 몇 종족에서 가장 높은 부류 사이에 일어날 수 있다면, 반대는 더군다나 적을 것이다.
82:6.5 (920.3) 우수한 이질 혈통의 교배는 새롭고 더 활력 있는 핏줄을 창조하는 비결이다. 이것은 식물ㆍ동물ㆍ인종의 경우에 참말이다. 혼혈은 활력을 증가시키고 생식 능력을 높인다. 여러 민족의 평균이나 우수한 층에서 종족의 혼합은, 북 아메리카의 미국의 현재 인구에서 보다시피, 창조 잠재성을 크게 증가시킨다. 그러한 짝짓기가 낮거나 열등한 계층 사이에서 일어날 때, 오늘날 인도 남부의 민족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창조성이 줄어든다.
82:6.6 (920.4) 종족의 혼합은 새 특징의 갑작스런 출현에 크게 기여하며, 그러한 혼혈이 우수한 핏줄의 연합이면, 이 새 특징은 또한 우수한 특성이 될 것이다.
82:6.7 (920.5) 오늘날의 종족들이 열등하고 퇴화된 핏줄로 인하여 지나치게 부담을 받는 한, 대규모의 종족 혼합은 아주 치명적일 터이나 그런 실험에 대한 대부분의 반대는 생물학적 고려보다 사회 및 문화적 편견에 근거를 둔다. 열등한 핏줄 사이에서도, 잡종은 흔히 그 조상들보다 낫다. 우성 인자의 기능 때문에, 혼혈은 종의 개선을 낳는다. 종족의 상호 혼합은 혼혈 속에서 바람직한 우성 인자가 더 많이 있을 가능성을 높인다.
82:6.8 (920.6) 몇천 년 동안에 일어났던 것보다, 지난 1백 년 동안에 유란시아에서 종족 혼혈이 더 많이 일어나고 있다. 인간의 혈통을 이종(異種) 교배하는 결과로서 생기는 심한 부조화의 위험은 크게 과장되었다. “혼혈아”의 주요한 문제는 사회적 편견 때문이다.
82:6.9 (920.7) 백인과 폴리네시아 종족을 섞는 핏트케언 실험은 그 백인과 폴리네시아 여자들이 꽤 좋은 종족 혈통이었기 때문에, 어지간히 성공했다. 가장 높은 부류의 백인ㆍ홍인ㆍ황인 종족 사이에 서로 교배하는 것은 새롭고 생물학적으로 효과 있는 많은 특징을 즉시 낳을 것이다. 이 세 민족은 1차 산긱 종족에 속한다. 백인과 흑인 종족 사이의 혼합은 당장의 결과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고, 그러한 흑백 혼혈의 자손은 사회 및 종족의 편견이 이를 못마땅하게 보이게 만들려고 애쓰는 것처럼 못마땅하지도 않다. 신체적으로, 그러한 흑백의 혼혈은, 어떤 다른 면에서 조금 못하기는 해도, 인류의 탁월한 표본이다.
82:6.10 (920.8) 1차 산긱 종족이 2차 산긱 종족과 혼합할 때, 전자가 희생되는 값으로 후자는 어지간히 개량된다. 작은 규모로―오랜 기간에 연장될 때―1차 종족이 2차 집단의 개량을 위해서 그렇게 희생으로 기여하는 데 심각한 반대가 거의 있을 수 없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2차 산긱들은 어떤 면에서 1차 종족들보다 우수했다.
82:6.11 (921.1) 결국, 인종의 진짜 위협은, 종족이 서로 교배하는 데 따르는 어떤 상상하는 위험보다, 오히려 문명화된 여러 종족 중에 열등하고 퇴화된 핏줄이 마구 번식하는 데서 발견될 것이다.
83:0.1 (922.1) 이 글은 결혼 제도가 옛날에 시작된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결혼은 집단의 절제 없는 난잡한 교배로부터, 여러 가지 변화와 적응을 거쳐서, 궁극에 부부의 짝짓기를 실현하게 한 결혼 기준이 나타나기까지 진보해 왔으며, 부부가 짝짓는 것은 가장 높은 사회 체제인 가정을 세우려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연합하는 것이다.
83:0.2 (922.2) 결혼은 여러 번 위험에 빠졌고, 결혼 관습은 지탱하기 위하여 재산과 종교에 몹시 의존해 왔다. 그러나 결혼과 그에 따라 생기는 가정을 언제까지나 보호하는 진짜 영향력은, 남자와 여자가, 가장 원시적 야만인이거나 또는 가장 교양 있는 필사자이거나, 분명히 혼자 살려고 하지 않는, 단순하고 타고난 생물학적 사실이다.
83:0.3 (922.3) 성욕 때문에,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을 동물보다 더 나은 무엇으로 만들도록 꼬임을 받았다. 자아를 돌보고 자아를 만족시키는 성관계에는 자아를 부인(否認)하는 어떤 결과가 뒤따르며, 이타적 임무와 종족을 이롭게 하는 수많은 가정 책임을 맡는 것을 보장한다. 여기서 성은 야만인을 문명인답게 만드는, 인정도 의심도 받지 않는 도구였으니, 왜냐하면 바로 이 성(性) 충동이 저절로, 어김없이 사람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만들고 궁극에는 남을 사랑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83:1.1 (922.4) 결혼은 남녀의 육체적 사실에서 생겨나는 많은 인간 관계를 규제하고 통제하기 위하여 고안된 사회 장치이다. 그러한 제도로서, 결혼은 두 방향에서 작용한다:
83:1.2 (922.5) 1. 개인의 성관계를 규제할 경우에.
83:1.3 (922.6) 2. 자손ㆍ상속ㆍ계승, 그리고 사회 질서를 규제할 때. 질서가 더 오래 된 최초의 기능이었다.
83:1.4 (922.7) 결혼으로부터 생겨나는 가족 자체가 재산 관습과 함께, 결혼 제도를 안정시키는 장치이다. 결혼을 안정시키는 다른 유력한 요소는 자부심ㆍ허영심ㆍ기사도ㆍ의무, 그리고 종교적 확신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결혼을 인정하거나 부인할 수 있어도, 결혼은 도저히 하늘에서 정한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의 가족은 뚜렷하게 인간의 제도요, 진화로 발전한 것이다. 결혼은 사회 제도이지, 교회의 한 분과가 아니다. 종교가 결혼에 힘차게 영향을 미쳐야 하는 것이 참말이지만, 종교만으로 결혼을 통제하고 규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83:1.5 (922.8) 원시의 결혼은 1차적으로 산업이었다. 현대에도 결혼은 흔히 사회나 사업의 일이다. 안드 핏줄의 혼합이 미치는 영향을 통해서, 그리고 진보하는 문명의 관습의 결과로서, 천천히 결혼은 서로 나누고 낭만이 있으며, 부모답고 시(詩) 같으며, 사랑이 넘치고 윤리가 있으며, 아니 이상주의가 되고 있다. 그러나 원시의 짝짓기에는 선택과 이른바 낭만적 사랑이 극히 적었다. 옛 시절에 남편과 아내는 별로 같이 있지 않았다. 자주 함께 먹지도 않았다. 그러나 옛 사람들 사이에서, 개인의 사랑은 성(性)의 매력과 강하게 연결되지 않았다. 그들은 대체로, 같이 살고 일하기 때문에, 서로를 좋아하게 되었다.
83:2.1 (923.1) 원시의 결혼은 반드시 소년과 소녀의 부모가 계획하였다. 이 관습과 자유롭게 선택하는 시절 사이의 과도기 단계는 결혼 중개인, 곧 전문 중매인이 차지했다. 이 중매인들은 처음에 이발사였고, 나중에는 사제였다. 최초에 결혼은 집단의 행사였고, 다음에는 가족의 문제였다. 요즘에야 결혼은 개인의 모험이 되었다.
83:2.2 (923.2) 매력이 아니라, 강제로 원시의 결혼을 처리하였다. 옛 시절에 여자는 성에 냉담하지 않았고, 도덕 관습이 주입되어 오직 성적 열등감을 가졌다. 침공이 무역을 앞선 것처럼, 사로잡아 결혼하는 것이 계약 결혼에 앞섰다. 어떤 여자들은 자기 부족의 늙은 남자들에게 정복되는 것을 피하려고, 사로잡힐 때 모른 체하곤 했다. 그들은 다른 부족에서 온 제 또래의 남자 손에 굴러 떨어지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이 거짓 도망은 강제로 생포하는 것과 나중에 매력으로 구혼하는 사이에 과도기 단계였다.
83:2.3 (923.3) 초기 형태의 결혼식은 탈출하는 흉내, 일종의 도망 연습이었고, 이것은 한때 흔했던 관습이었다. 나중에는 생포를 흉내내는 것이 정상 결혼식의 일부가 되었다. 현대의 소녀가 “사로잡히는 데” 저항하는 체하는 것, 결혼에 대하여 말하기 싫어하는 것은 다 옛 관습의 유물이다. 문턱을 넘어 신부(新婦)를 메고 가는 것은 몇 가지 고대의 관습, 다른 것 중에도 아내 훔치는 시절을 생각나게 한다.
83:2.4 (923.4) 여자에게는 결혼한 동안 자기 뜻대로 처신하는 완전한 자유가 오랫동안 주어지지 않았으나, 총명한 여자들은 언제나 머리를 영리하게 써서 이 제한을 피할 수 있었다. 남자가 보통 구혼을 주도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여자는 은밀하게 할 뿐 아니라, 때로는 공식으로 결혼을 개시하였다.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여자는 구혼과 결혼의 모든 단계에서 맡는 역할이 늘어났다.
83:2.5 (923.5) 결혼하기 전 구혼 기간에 사랑, 낭만, 개인 선택의 증가는 세계 종족들에게 안드 족속이 공헌한 것이다. 남녀 사이의 관계는 순조롭게 진화하고 있었다. 진보하는 많은 민족이 효용과 소유권에 근거를 둔 옛날의 동기 대신에 얼마큼 이상이 된 성적 매력의 개념을 차츰 받아들이고 있다. 일생의 짝을 고르는 데 성적 충동과 사랑의 느낌이 냉철한 계산을 비로소 대체하고 있다.
83:2.6 (923.6) 최초에 약혼은 결혼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옛 민족들 사이에서 약혼 기간에 성관계를 가지는 것은 관습이었다. 최근에는 종교가 약혼과 결혼 사이의 기간에 성관계를 막는 금기를 만들었다.
83:3.1 (923.7) 옛날 사람들은 사랑과 약속을 믿지 않았다. 오래 가는 연합은 어떤 확실한 보증, 곧 재산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아내 사는 값을, 이혼하거나 아내를 버릴 경우에 남편이 잃도록 정해진 벌금이나 보증금으로 여겼다. 신부(新婦) 사는 값을 일단 치르고 나서, 남편의 소인(燒印)을 그 여자에게 찍는 것을 많은 부족이 허락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아직도 아내를 사들인다. 사랑으로 얻은 아내, 곧 백인의 아내를 그들은 고양이에 비교하는데, 그 여자가 한 푼도 들지 않기 때문이다.
83:3.2 (924.1) 신부(新婦) 구경은 신부가 아내로서 더 높은 값을 받으리라는 생각으로 대중에게 전시하기 위하여 딸을 잘 입히고 치장하는 계제이다. 그러나 그들은 동물처럼 팔리지는 않았다―후일의 부족들 사이에서 그런 아내는 남에게 양도할 수 없었다. 아내를 사는 것이 반드시 냉혈한 돈 거래도 아니었다. 수고는 아내를 사는 데 현금과 같았다. 다른 면에서 바람직한 남편이 제 아내의 값을 치를 수 없으면, 여자의 아버지에게 양자(養子)가 될 수 있었고, 그리고 나서 결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난한 남자가 아내를 구하면서 욕심 많은 아버지가 달라는 값을 치를 수 없으면, 장로들이 흔히 그 아버지에게 바짝 압력을 넣곤 했는데, 이것은 그의 요구를 수정하게 만들곤 하였고, 그렇지 않으면 눈이 맞아 도망치는 일이 생길 수 있었다.
83:3.3 (924.2)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아버지들은 딸을 파는 것처럼 보이기가 싫었고, 그래서 신부 사는 값을 계속 받는 한편, 신부의 값과 대충 같은 값으로, 그 쌍에게 귀중한 선물을 주는 관습을 시작했다. 그리고 신부 값을 치르기가 나중에 중지되고 나서, 이 선물은 신부의 지참금이 되었다.
83:3.4 (924.3) 지참금의 관념은 신부가 독립한다는 인상을 전하려는 것, 아내가 노예이고 동반자가 재산이었던 시대가 지난 지 아주 오래되었음을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남자는 지참금을 완전히 돌려주지 않고서 지참금을 가져온 아내와 이혼할 수 없었다. 어떤 부족들 사이에서는 상호 보증금, 실제는 결혼 보증금이 신부와 신랑, 양쪽의 부모에게 맡겨졌는데, 이것은 한 쪽이 다른 쪽을 버렸을 경우에 몰수하기로 되었다. 아내 사들이기에서 지참금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아내를 샀다면, 아이들은 아버지에게 속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은 아내의 가족에 속했다.
83:4.1 (924.4) 결혼 예식은 결혼이 두 사람이 내린 결정이 열매를 맺은 것일 뿐 아니라, 최초에 공동체의 일이었다는 사실에서 생겼다. 짝짓기는 개인의 활동일 뿐 아니라 집단의 관심거리였다.
83:4.2 (924.5) 요술과 의식(儀式)과 예식이 옛날 사람들의 생활 전체를 둘러쌌고, 결혼은 예외가 아니었다.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결혼을 더 진지하게 여김에 따라서, 결혼 예식은 갈수록 더 허세 부리는 것이 되었다. 초기의 결혼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재산 권익에 한 요인이었고, 따라서 법적 예식이 필요했으며, 한편 나중에 생기는 아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가능한 널리 홍보(弘報)할 것을 요구했다. 원시인은 아무런 기록이 없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결혼 예식을 구경해야 했다.
83:4.3 (924.6) 처음에 결혼식은 약혼 수준에 더 가까웠고, 다만 같이 살 뜻을 대중에게 통지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결혼식은 정식으로 같이 먹는 것이었다. 어떤 부족들 사이에는 부모가 단지 딸을 남편에게 데리고 갔다. 다른 경우에는 유일한 의식(儀式)이 선물을 정식으로 교환하는 것이었고, 그 뒤에 신부의 아버지가 딸을 신랑에게 내어주곤 했다. 여러 레반트 종족 사이에서는 온갖 형식을 생략하는 것이 관습이었고, 결혼은 성관계로 끝을 맺었다. 홍인은 더 정교한 결혼 축하를 처음으로 개발하였다.
83:4.4 (924.7) 사람들은 아이 낳지 못하는 것을 크게 두려워했고, 불임을 영이 장난치는 탓으로 돌렸기 때문에, 다산(多産)을 보장하려는 노력은 또한 결혼을 어떤 요술이나 종교 의식과 관련시키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행복하고 아이를 많이 낳는 결혼을 보장하려는 이 노력으로 많은 부적이 이용되었다. 계약하는 당사자들의 출생 별을 확인하려고 점성가들의 자문도 받았다. 한때는 살림이 넉넉한 사람들 사이에서, 인간을 잡아 바치는 것이 모든 결혼에 정규 행사였다.
83:4.5 (925.1) 사람들은 행운의 날을 찾았고, 목요일을 가장 유리하게 여겼다. 보름달에 올린 결혼식은 특별히 행운이라고 생각되었다. 새로 결혼한 자에게 곡식을 던지는 것이 근동에서 여러 민족의 관습이었다. 이것은 아이가 많을 것을 보장한다고 생각된 요술 의식이었다. 어떤 동양 민족들은 이 목적에 쌀을 썼다.
83:4.6 (925.2) 불과 물은 귀신과 악령을 방지하는 가장 좋은 수단으로 언제나 생각되었다. 따라서 거룩한 물을 세례로 뿌리는 것 뿐 아니라, 제단에 불을 지피고 촛불 켜는 것이 결혼식에 흔히 보였다. 오랫동안 가짜 결혼일을 정하고, 그리고 나서 귀신과 영들을 길에서 쫓아내려고 갑자기 그 행사를 연기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83:4.7 (925.3) 새로 결혼한 사람들을 놀리고 신혼 여행을 하는 자들에게 못된 장난을 하는 것은 모두 아득히 먼 시절의 유물이며, 그때는 귀신의 질투를 일으키는 것을 피하려고 귀신의 눈에 불쌍하고 불안해 보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되었다. 신부가 베일을 쓰는 것은, 귀신이 그 여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또한 그렇지 않으면 시샘하고 부러워할 귀신이 그 여자의 아름다움을 못 보게 감추려고 신부를 가장(假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시절의 유물이다. 신부의 발은 예식이 있기 바로 전에, 결코 땅에 닿아서는 안 되었다. 20세기에도 기독교 관습으로, 차량이 내리는 데서부터 교회의 제단까지 카펫을 까는 것이 아직도 관습이다.
83:4.8 (925.4) 가장 오래 된 결혼식 형태의 하나는 그 결합이 자식 많을 것을 보장하려고 사제가 결혼 침대에 복을 주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어떤 공식 결혼 의식이 생기기 오래 전에 행해졌다. 결혼 관습의 진화에서 이 기간에는 결혼식 손님들이 밤에 침실을 통해서 줄지어 지나가는 것을 기대하였고, 이것은 이처럼 결혼이 성사되었음을 보았다는 법적 입증이었다.
83:4.9 (925.5) 결혼 이전에 온갖 시험이 있었는데도, 어떤 결혼이 나쁘게 된다는 운(運)의 요인은, 원시의 남자에게 결혼의 실패에 대하여 보험으로 보호를 추구하도록 이끌었고, 사제와 요술을 찾게 만들었다. 이 운동은 결국 현대의 교회 결혼식을 직접 낳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결혼은 대체로, 계약하는 부모들이―나중에는 그 부부가―내리는 결정이라고 인정되었으며, 한편 교회와 국가가 지난 5백 년 동안에 관할권을 맡았고, 지금은 감히 결혼을 선언한다.
83:5.1 (925.6) 결혼의 초기 역사에서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은 그 부족의 남자들에게 속했다. 나중에, 한 여자는 일시에 남편이 오직 하나 있었다. 일시에 한 남자와 사는 이 관습은 그 집단의 난교(亂交)로부터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여자에게는 오직 한 남자가 허락되었어도, 그 여자의 남편은 그러한 일시적 관계를 마음대로 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허술하게 규제된 이러한 관계는 무리를 지어 사는 것과 구별해서, 짝을 지어 사는 방향으로 가는 첫걸음이었다. 결혼이 발전하는 이 단계에서 아이들은 보통 어머니에게 속했다.
83:5.2 (925.7) 짝짓기의 진화에서 다음 걸음은 집단 결혼이었다. 결혼의 이 공동체 단계는 가족 생활의 전개에서 사이에 끼어야 했는데, 이는 부부의 결합을 영구하게 하기에는 아직도 결혼 관습이 충분히 튼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제와 자매들의 결혼이 이 집단에 속했다. 한 가족의 다섯 형제가 다른 가족의 다섯 자매와 결혼하곤 했다. 전 세계에서 더 허술한 형태의 공동체 결혼이 차츰 여러 종류의 집단 결혼으로 발전했다. 이 집단 결합은 대체로 토템 관습에 규제를 받았다. 가족 생활은 느리고 확실하게 발전했는데, 성 및 결혼의 규제가 아이들이 더 많이 살아남는 것을 보장함으로 바로 그 부족의 생존을 유리하게 했기 때문이다.
83:5.3 (926.1) 더 진보된 부족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복혼(複婚)―일부 다처(一夫多妻)와 일처 다부(一妻多夫)―의 관습 앞에서 집단 결혼은 차츰 자리를 양보하였다. 그러나 일처다부는 결코 널리 퍼지지 않았고, 여왕이나 부유한 여인들에게 보통 국한되었다. 더군다나 그것은 관례로, 여러 형제와 한 아내가 사는, 집안 일이었다. 카스트와 경제적 제한은 때때로 여러 남자가 오직 한 아내로 만족하는 것을 필요하게 만들었다. 그런 때에도, 여자는 오직 한 사람과 결혼하고, 나머지는 합동 자손의 “아저씨”로서 적당히 참아 주곤 했다.
83:5.4 (926.2) 한 남자가 “자기 형제의 씨를 기르는” 목적으로 죽은 형제의 과부와 사귀도록 요구하는 유대인의 관습은 고대 세계의 절반이 넘는 데서 있던 관습이었다. 이것은 결혼이 개인의 결합이기보다 가족의 일이었던 시절의 유물이었다.
83:5.5 (926.3) 일부다처 제도는 다른 시절에 네 종류의 아내를 인정했다:
83:5.6 (926.4) 1. 예식을 올린 아내, 곧 합법적 아내.
83:5.10 (926.8) 아내들이 모두 똑같은 지위를 가지고 아이들이 모두 평등한 그러한 참 복혼은 아주 드물었다. 보통은 복혼의 경우에도 우두머리 아내, 신분이 있는 동반자가 가정을 지배했다. 그 여자 혼자, 의식(儀式)으로서 결혼식을 올렸고, 신분이 있는 아내와 특별히 주선하지 않으면, 오직 사들이거나 지참금을 낸 그러한 배우자의 아이들만 상속을 받을 수 있었다.
83:5.11 (926.9) 신분이 있는 아내는 반드시 사랑하는 아내가 아니었다. 옛날에 신분을 가진 아내는 보통 그렇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내, 곧 애인은 종족들이 어지간히 진보할 때까지, 특히 진화하는 부족들이 놋 족속과 아담 족속과 섞이기까지, 등장하지 않았다.
83:5.12 (926.10) 금기의 아내―법적 지위를 가진 한 아내―는 첩을 두는 관습을 만들어 냈다. 이 관습 밑에서 한 남자는 오직 한 아내를 가져도 좋았지만, 그는 몇 명이라도 첩들과 성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첩 제도는 일부일처(一夫一妻)에 이르는 디딤돌이요, 버젓한 복혼으로부터 벗어나는 첫걸음이었다. 유대인ㆍ로마인ㆍ중국인의 첩은 아주 흔히 아내의 몸종이었다. 나중에는, 유대인 사이처럼, 남편에게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그 법적 아내를 어머니로 여기었다.
83:5.13 (926.11) 아이를 배거나 젖을 먹이는 아내와 성관계를 하지 말라는 오래 된 금기는 일부 다처제를 권장하는 경향이 컸다. 원시의 여자들은 고된 일과 더불어 자주 임신했기 때문에 아주 일찍 늙었다. (지나치게 짐을 진 그런 아내들은, 아이로 몸이 무겁지 않을 때, 그들을 달마다 한 주 동안 고립시켰다는 사실 덕분에 겨우 그럭저럭 버티었다.) 그러한 아내는 흔히 아이를 배는 데 지쳤고, 둘째이자 더 젊은 아내를, 아이 낳는 일과 집안 일을 도와줄 수 있는 아내를 얻으라고 남편에게 부탁하곤 했다. 따라서 새 아내를 더 나이 든 배우자가 보통 기쁘게 환호하였다. 성적 질투 수준에 있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83:5.14 (926.12) 아내들의 수는 남자가 오직 그들에게 살림을 차려줄 능력에 따라서 제한되었다. 부유하고 유능한 남자는 아이들을 많이 바랐고, 아기 사망률이 아주 높았기 때문에, 큰 가족을 이루는 데 한 떼의 아내들이 필요했다. 여럿인 이 아내들 중에서 다수는 단순한 노동자요 노예 아내였다.
83:5.15 (927.1) 인간의 관습은 진화하지만, 아주 느리다. 하렘의[1] [1721] 목적은 왕좌를 받들기 위해서 튼튼하고 수많은 혈족의 단체를 세우는 것이었다. 어떤 추장은 한때 그가 하렘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한 아내로 만족해야 한다고 확신을 가졌다. 그래서 그의 하렘을 대번에 해고했다. 불평을 품은 아내들은 친정 집으로 돌아갔는데, 감정을 상한 친척들이 성이 나서 추장에게 몰려왔고, 그때 그 자리에서 그를 없애버렸다.
83:6.1 (927.2) 일부일처제는 독점이다. 이것은 이 바람직한 상태에 도달하는 자에게 좋지만, 그렇게 운이 좋지 않은 자에게 생물학적 어려움을 주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개인에게 미치는 효과에 아주 상관 없이, 일부일처제는 확실히 아이들에게 가장 좋다.
83:6.2 (927.3) 가장 일찍 있었던 일부일처제는 어쩔 수 없는 상황, 곧 가난 때문이었다. 일부일처는 문화적ㆍ사회적인 것이요,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럽다, 다시 말해서 진화 인간에게 부자연스럽다. 일부일처는 더 순수한 놋 족속과 아담 족속에게 온통 자연스러웠고, 모든 진보된 종족에게 크게 문화적 가치가 있었다.
83:6.3 (927.4) 갈대아 부족들은 아내가 그 배우자에게 둘째 아내나 첩을 두지 않겠다고 결혼 전에 서약을 부과하는 권리를 인정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일부일처의 결혼을 찬성했다. 조상 숭배는, 결혼을 신성한 일로 보는 기독교의 잘못이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일부일처제를 촉진했다. 생활 수준의 향상조차도 한결같이 여러 아내를 가지는 것에 대항하여 작용했다.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오실 때가 되자, 문명화된 세계의 거의 전부가 이론적 일부일처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수동적 일부일처제는, 인류가 진짜 부부 결혼의 관습에 길들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83:6.4 (927.5) 이상적 부부(夫婦) 결혼은 결국 독점 성관계와 비슷한 것이며, 이 일부일처의 목표를 추구하면서, 그 요구 조건에 협조하고 그 조건을 준수하려고 최선을 다했을 때에도, 새롭고 개량된 이 사회 질서에서 자리를 찾지 못하는 그런 불행한 남녀의 부럽지 않은 형편을 사회가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회의 경쟁 무대에서 짝을 얻지 못하는 것은 뛰어넘을 수 없는 어려움이나 현재의 도덕 관습이 지워준 다방면의 제한 때문일 수도 있다. 참으로, 일부일처제는 그런 관계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상적이지만, 혼자 사는 차가움 속에서 외톨이로 남은 자에게 불가피하게 큰 어려움을 안겨 준다.
83:6.5 (927.6) 불행한 소수(小數)는 진화하는 문명의 발전하는 관습 밑에서 대다수가 진보할 수 있도록 언제나 고생해야 했다. 그러나 유리하게 된 대다수는 그들보다 운이 나쁜 동료를 친절하게, 배려하는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들은 전진하는 사회의 진화에서 가장 높은 관습의 인가를 받고서 모든 생물학적 욕구를 채워 주는 이상적 성(性) 대상자의 계열에서 회원 자격을 얻지 못한 값을 치러야 한다.
83:6.6 (927.7) 일부일처는 언제나 인간의 성생활의 진화에서 이상적 목표였고, 지금도 그렇고, 언제까지나 그러할 것이다. 이 참된 부부 결혼이라는 이상에는 극기가 따르며, 따라서 단지 계약 당사자의 한쪽이나 양쪽이 모든 인간 미덕의 절정, 곧 강한 자제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실패하는 일이 아주 흔하다.
83:6.7 (927.8) 순전히 생물학적 진화와 구별해서, 일부일처는 사회 문명의 진보를 재는 척도이다. 일부일처는 반드시 생물학적이거나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사회의 문명을 당장에 유지하고 계속 발전시키는 데 필수이다. 그것은 세련된 감정, 도덕적 인격의 향상, 영적 성장에 이바지하며, 이런 것은 복혼의 경우에 도무지 불가능하다. 남편의 사랑을 얻으려는 경쟁에 어쩔 수 없이 말려든 동안에, 여자는 결코 이상적인 어머니가 될 수 없다.
83:6.8 (928.1) 부부의 결혼은 밀접한 이해와 효과적 협동을 유리하게 만들고 조장하는데, 이것들은 부모의 행복, 아이의 복지, 사회의 효율성을 위해서 최선이다. 서투른 강요로 시작된 결혼은 자아의 교양, 자제, 자아 표현, 자아 존속을 낳는 훌륭한 제도로 차츰 진화하고 있다.
83:7.1 (928.2) 결혼 관습이 초기에 진화할 때 결혼은 마음대로 그만둘 수 있는 허술한 연합이었고, 아이들은 언제나 어머니를 따랐다.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 있는 끈은 본능적이고, 도덕 관습의 발전 단계와 상관 없이 작용했다.
83:7.2 (928.3) 원시 민족들 사이에서는 겨우 결혼의 약 절반이 만족스러운 것이 판명되었다. 이별의 가장 흔한 원인은 아이가 없는 것이었고, 이를 언제나 아내의 탓으로 돌렸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내는 영 세계에서 뱀이 된다고 믿었다. 더 원시적 관습 밑에서 남자 혼자의 선택으로 이혼(離婚)이 이루어졌고, 어떤 민족들 사이에서 이 기준은 20세기까지 지속해 왔다.
83:7.3 (928.4) 도덕 관습이 진화함에 따라서, 어떤 부족들은 두 가지 형태의 결혼을 개발했다. 보통의 결혼은 이혼을 허락했으며, 사제가 맺은 결혼은 이별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내 사들이기와 아내의 지참금의 시작은, 결혼의 실패에 따른 재산 벌칙을 들여옴으로써 이별을 줄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정말로, 이 고대의 재산 요인이 현대의 많은 결합을 안정시킨다.
83:7.4 (928.5) 공동체에서 신분, 그리고 재산 특권이 주는 사회적 압력은 언제나 결혼 금기와 관습의 유지에 효력이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결혼은 꾸준히 진보해 왔고 현대의 세상에서 진보된 기초 위에 서 있다. 개인의 선택―새로운 자유―를 무척 크게 생각하는 민족들 사이에서 널리 불만이 퍼짐으로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받는데도 그렇다. 진보된 종족들 사이에서 이러한 적응의 격변은 갑자기 사회의 진화가 가속되는 결과로서 나타나지만, 그보다 진보하지 못한 민족들 사이에서 결혼은 계속 번성하며, 더 오래 된 관습의 지도를 받으며 천천히 개량된다.
83:7.5 (928.6) 결혼에 이상적이지만 극도의 개인주의적 사랑의 동기가 더 낡고 오랫동안 확립된 재산 동기를 새로 갑자기 대체한 것은 불가피하게 결혼 제도를 일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람이 결혼하는 동기는 언제나 실제의 결혼 도덕을 훨씬 능가했으며, 19세기와 20세기에 결혼에 대한 서양의 이상은, 자기 중심이고 겨우 얼마큼 통제된, 종족들의 성(性) 충동을 갑자기 껑충 뛰어넘었다. 어느 사회에서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이 큰 무리로 존재하는 것은 도덕 관습이 일시 붕괴하거나 과도기에 있음을 가리킨다.
83:7.6 (928.7) 결혼의 진짜 시험은, 긴 세월을 통해서 내내, 계속된 친밀성이었고, 이것은 모든 가족 생활에서 불가피한 것이다. 온갖 허영에 탐닉하고 자존심을 충분히 만족시킬 것을 기대하도록 교육받고, 제멋대로 행하고 버릇 없는 두 젊은이는 도저히 결혼하고 가정(家庭)을 일으키는 일―자기를 감추고, 절충하고, 헌신하고, 아이들의 교양에 아낌없이 헌신하는 일생의 협동 관계―에 도저히 크게 성공하기를 바랄 수 없다.
83:7.7 (929.1) 현대의 서양 민족들 사이에서 늘어나는 이혼 경향은 구혼(求婚)에 들어가는 고도의 상상력과 환상적 낭만에 대체로 책임이 있으며, 이것은 모두 여자의 개인적 자유가 커지고 경제적 자유가 늘어남으로 더욱 까다롭게 된다. 쉬운 이혼은, 그것이 자제의 부족이나 정상으로 인격자의 조정이 실패한 결과일 때, 아주 최근에, 또 아주 많은 개인적 괴로움과 종족의 고통을 겪은 결과로서 사람이 벗어났던 그 투박한 사회 단계로 곧장 돌아가도록 이끌 뿐이다.
83:7.8 (929.2) 그러나 사회가 어린아이와 젊은이를 적절히 교육하지 못하고, 사회 질서가 적당한 결혼 전 훈련을 마련하지 못하는 한, 현명하지 못하고 미숙하고 어린 이상주의로 결혼에 진입하는 것을 결정해야 하는 한, 그동안만큼 이혼이 유행할 것이다. 사회 집단이 젊은이들에게 결혼 준비를 마련해 주지 못하는 한, 그 범위까지 이혼은 사회의 안전 밸브로서 작용해야 하며, 이것은 진화하는 도덕 관습이 급속히 성장하는 시대에, 더욱 나쁜 상황을 방지한다.
83:7.9 (929.3) 옛 사람들은 꼭 오늘날의 어떤 사람들만큼이나 결혼을 진지하게 여긴 듯하다. 현대에 성급하고 성공하지 못한 많은 결혼은, 젊은 남녀가 짝짓는 자격을 갖추게 하는 옛 관습보다 크게 개선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큰 모순은 사랑을 높이고 결혼을 이상으로 만들면서, 이 두 가지를 철저히 검사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83:8.1 (929.4) 궁극에 가정으로 이끄는 결혼은 정말로 사람의 가장 고귀한 제도이지만, 그 본질은 인간적이다. 결혼을 결코 성사(聖事)라고 부르지 말았어야 했다. 셋 족속 사제들은 결혼을 종교 의식(儀式)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에덴 뒤에 수천 년 동안, 짝짓기는 순전히 사회와 시민의 제도로서 계속되었다.
83:8.2 (929.5) 인간의 관계를 신의 관계와 비교하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다. 결혼과 가정 관계에서 남편과 아내의 연합은 진화 세계에서 필사자의 물질적 기능이다. 정말로 남편과 아내가 진보하려고 인간으로서 진지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로 많은 영적 진보가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 참말이지만, 이것은 결혼이 반드시 신성함을 뜻하지 않는다. 영적 진보는 인간의 노력을 다른 방향에 진지하게 적용하는 결과로서 생긴다.
83:8.3 (929.6) 결혼은 조절자와 사람의 관계나, 또는 그리스도 미가엘과 인간 형제 사이의 친교와도 참으로 견줄 수 없다. 어떤 면에서도 그러한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결합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다. 이러한 관계에 대한 인간의 잘못된 생각이 결혼의 지위에 대하여 그렇게 많은 혼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다.
83:8.4 (929.7) 결혼이 신의 행위로 인하여 맺어졌다고 어떤 집단의 필사자들이 상상한 것도 또한 유감스럽다. 그러한 믿음은, 계약한 당사자의 상황이나 소망과 상관 없이, 결혼 상태가 취소될 수 없다는 개념으로 바로 이끈다. 그러나 결혼이 취소되는 사실 자체가 바로, 신이 그러한 연합에 관련된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어떤 두 물건이나 사람을 함께 일단 합쳐 놓았으면, 신의 뜻이 그들이 분리되라고 선포할 때까지, 그들은 그렇게 합쳐진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제도인 결혼에 관해서 말하면, 성질과 기원이 순전히 인간적 결혼과 대조해서, 어느 결혼이 우주 감독자들의 승인을 받을 수 있는 연합인가 말하려고 누가 감히 판단을 내리겠는가?
83:8.5 (930.1) 그런데도, 높은 곳의 구체들에는 이상적 결혼이 있다. 각 지역 체계의 서울에는 하나님의 물질 아들과 딸들이, 결혼의 끈 속에서, 그리고 자식을 낳고 기르는 목적으로, 남녀가 연합하는, 최고에 이른 이상을 보여준다. 결국, 필사자의 이상적 결혼은 인간적으로 신성하다.
83:8.6 (930.2) 결혼은 언제나 현세의 이상적인 것에 대하여 사람이 가진 최고의 꿈이었고 아직도 그렇다. 비록 이 아름다운 꿈이 전부 이루어지는 일이 드물어도, 그 꿈은 영화로운 이상으로서 오래 가며,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더욱 노력하도록 진보하는 인류를 늘 유혹한다. 그러나 가족 생활에서 서로 관계를 가지는 가혹한 요구 속에 첨벙 뛰어들기 전에, 젊은 남녀는 결혼의 현실에 관하여 더러 배워야 마땅하다. 젊은 마음에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느 정도 결혼 전의 실망으로 누그러져야 한다.
83:8.7 (930.3) 그러나 젊은이가 결혼을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을 나무라서는 안 된다. 그러한 꿈은 가족 생활의 미래 목표를 눈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결혼, 그리고 그 뒤에 가족 생활의 실용적이고 평범한 요건을 깨닫는 데 사람을 무디게 만들지 않는 한, 자극을 주며 유익하다.
83:8.8 (930.4) 결혼의 이상은 요즈음에 크게 진보했다. 어떤 민족들 사이에서 여자는 자기 배우자와 실질적으로 동등한 권한을 누린다. 적어도 개념으로는, 가족은 자식을 기르는 조합, 그에 따라 성(性)의 정절이 뒤따르는 충성스러운 조합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 신판(新版) 결혼조차, 모든 면에서 인격과 개성에게 서로 독점권을 주기까지, 주제넘게 극단으로 치우칠 필요는 없다. 결혼은 단지 개인주의 이상이 아니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의 진화하는 사회적 협동 관계요, 당대의 도덕 관습 밑에서 존재하고 작용하며, 금기에 제약을 받고, 사회의 법과 규제에 따라서 집행된다.
83:8.9 (930.5) 여자의 자유가 갑자기 늘어나서 사회 조직에 너무 갑자기 밀어닥친 문제들 때문에 가정 제도가 지금 벅찬 시험을 겪고 있는데도, 20세기의 결혼은 지난 시대의 결혼과 견주어서 우뚝 서 있으며, 여자의 자유는 지난 세대의 도덕 관습이 느릿느릿 진화하는 가운데 여자에게 아주 오랫동안 주지 않았던 권리이다.
84:0.1 (931.1) 물질적 필요가 결혼의 기초를 세웠고, 성욕은 결혼을 아름답게 꾸몄으며, 종교는 결혼을 인가하고 찬양하였고, 국가는 결혼을 요구하고 규제하였다. 한편 후일에, 진화되는 사랑은 문명의 가장 유익하고 숭고한 제도인 가정를 낳고 창조하는 것으로서 결혼을 비로소 정당화하고 영화롭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가정을 세우는 것은 모든 교육하는 노력의 중심이요 본질이 되어야 한다.
84:0.2 (931.2) 짝짓기는 정도가 다른 자아의 만족과 결부되어, 순전히 자아를 존속시키는 행위이다. 결혼, 곧 가정을 세우는 것은 대체로 자아를 유지하는 문제이며, 사회가 진화함을 뜻한다. 사회 그 자체는 가족 단위가 집합됨으로 생긴 구조이다. 개인들은 행성의 요인으로서 아주 일시적이다―오로지 가족이 사회의 진화에서 계속하는 매체이다. 가족은 문화와 지식이 대량으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흐르는 경로이다.
84:0.3 (931.3) 기본적으로, 가정은 사회학적 제도이다. 결혼은 자아 유지에 협동하고 자아 영속에 협력함으로부터 생겨났으며, 자아 충족의 요소는 대체로 부수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가정은 인간의 존재에서 모두 세 가지 기본 활동을 포함하며, 한편 생명을 퍼뜨리는 것은 가정을 근본적 인간 제도로 만들고, 성(性)은 가정과 모든 다른 사회 활동을 분리한다.
84:1.1 (931.4) 결혼은 성관계에 기초를 두지 않았고, 성관계는 결혼에 따르는 것이었다. 결혼은 원시의 남자에게 필요하지 않았고, 그는 아내와 아이들과 가정을 책임지느라고 자신을 번거롭게 만들지 않고서 마음대로 성욕을 채웠다.
84:1.2 (931.5) 여자는 자식에게 육체와 감정으로 애착을 가졌기 때문에 남자와 협동하는 데 의존했고, 이것은 여자를 결혼의 보호하는 울타리 속으로 떠민다. 그러나 아무런 생물학적 직접 욕구가 남자를―결혼에 붙잡아 두기는커녕―결혼으로 이끌지 않았다. 남자로 하여금 결혼에 이끌리게 만든 것은 사랑이 아니라 배고픔이었고, 배가 고파서 처음에 야만스런 남자가 여자에게, 여자의 아이들과 나누어 쓰는 원시 오두막으로 이끌렸다.
84:1.3 (931.6) 결혼은 성관계에 따른 의무를 의식하여 깨달음으로 생기지도 않았다. 원시인은 성의 즐거움과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는 것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때는 처녀가 아이를 밸 수 있다는 것을 보편적으로 믿었다. 야만인은 일찍부터 아기들이 영(靈) 나라에서 만들어진다는 생각을 가졌다. 임신은 영, 곧 진화하는 귀신이 여자에게 들어간 결과라고 믿었다. 식품과 악한 눈도 또한 처녀나 결혼하지 않은 여자에게 임신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고, 한편 후일의 관념은 생명의 시작을 숨과 햇빛에 연결시켰다.
84:1.4 (932.1) 초기의 많은 민족은 귀신을 바다와 결부시켰다. 따라서 처녀들은 목욕하는 관습에 크게 제한을 받았다. 젊은 여자들은 성관계를 가지는 것보다 밀물이 있을 때 바다에서 몸 적시는 것을 훨씬 더 무서워했다. 기형(奇形)이거나 조산(早産)으로 생긴 아기들은 부주의한 목욕이나 악령의 행위를 통해서, 여자의 몸으로 들어간 동물의 새끼라고 여겼다. 물론 야만인은 그런 자식이 태어날 때 목 졸라 죽이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84:1.5 (932.2) 계몽의 첫 단계는 성관계가 임신하게 하는 귀신이 여자에게 들어가는 길을 연다는 관념과 함께 다가왔다. 그 뒤로 사람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식을 시작하는 살아 있는 유전 인자(因子)를 똑같이 기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20세기에도, 많은 부모가 아직도 인간 생명의 기원에 대하여 아이들을 얼마큼 무지한 가운데 두려고 애쓴다.
84:1.6 (932.3) 생식(生殖)의 기능에는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가 따른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어떤 단순한 종류의 가족이 보장되었다. 어머니 사랑은 본능이며, 결혼처럼 도덕 관습에서 생기지 않았다. 모든 포유 동물의 어머니 사랑은 지역 우주의 보조 지성 영들에게서 본래부터 받은 자질이며, 그 강도와 헌신은 반드시 그 종(種)의 무력한 유아기가 얼마나 긴가에 따라 정비례한다.
84:1.7 (932.4)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는 자연스럽고, 강하고, 본능이며, 따라서 원시 여인들로 하여금 많은 이상한 조건을 참고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견디도록 강제한 관계이다. 어쩔 수 없는 이 어머니 사랑은 남자와 벌이는 모든 싸움에서 언제나 여자를 아주 엄청나게 불리한 자리에 몰아넣은, 장애가 되는 감정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종(種)에서 모성 본능은 지배하지 않는다. 포부ㆍ이기심, 종교적 확신으로 꺾일 수도 있다.
84:1.8 (932.5)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는 결혼도 가정도 아니지만, 그 핵심으로부터 이 두 가지가 솟아나왔다. 이 일시적 협동 관계가 그 결과로 생긴 자손을 기를 만큼 오래 갔을 때 짝짓기의 진화에서 큰 발전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가정을 이루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84:1.9 (932.6) 이 초기 부부들의 적대 감정과 상관 없이, 그 결합이 허술했어도 살아남을 확률은 이 남녀의 협동 관계로 인하여 크게 개선되었다. 협동하는 남자와 여자는, 가족과 자손을 제쳐놓더라도, 두 남자나 두 여자보다 대부분의 경우에 엄청나게 우수하다. 남녀가 이렇게 짝짓는 것은 많은 사람을 살아남게 하였고, 인간 사회의 바로 그 시작이었다. 남녀가 따로 노동을 분화하는 것은 또한 편안에 도움이 되고 사람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었다.
84:2.1 (932.7) 여자가 정기적으로 피 흘리고 출산할 때 피를 더 잃는 것은 일찍부터 피가 아이를 창조한다는 (아니 혼이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는) 것을 암시했고, 인간 관계에서 혈연의 개념을 낳았다. 옛 시절에 모든 후손은 여자의 핏줄로 계산하였고, 이것이 상속에서 조금이라도 확실한, 유일한 부분이었다.
84:2.2 (932.8) 어머니와 아이의 혈연 관계, 본능적이고 생물학적 관계에서 생겨났으므로, 원시의 가족은 불가피하게 모계 가족이었다. 그리고 많은 부족이 이 배치를 오랫동안 지켰다. 모계 가족은 무리에서 집단으로 결혼하는 단계로부터, 일부다처와 일부일처의 부계 가족의 생활, 후일의 개선된 가정 생활로 넘어가는 유일하게 가능한 과도기였다. 모계 가족은 자연스럽고 생물학적이었다. 부계 가족은 사회ㆍ경제ㆍ정치적인 것이었다. 북 아메리카 홍인들 사이에서 모계 가족이 지속된 것은, 어째서 다른 면에서 진취적인 이로쿼이인이 결코 진짜 국가가 되지 못했는가 하는 주요한 이유 중에 하나이다.
84:2.3 (933.1) 모계 가족의 관습 밑에서 아내의 어머니는 집에서 거의 최고의 권한을 누렸다. 아내의 형제와 조카들조차 가족을 감독하는 데 남편보다 더 분주했다. 아버지의 이름은 흔히 제 자식들을 따라서 다시 지었다.
84:2.4 (933.2) 아주 초기의 종족들은 아버지에게 공을 거의 돌리지 않았고, 아이가 전적으로 어머니로부터 온다고 보았다. 그들은 접촉하는 결과로서, 아이들이 아버지를 닮는다고, 또는 어머니가 아이들이 아버지를 닮았으면 했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아이들이 “표시되었다”고 믿었다. 나중에는 모계 가족에서 부계(父系) 가족으로 넘어가는 때가 다가왔을 때, 아이를 낳은 공을 아버지가 온전히 가졌으며, 임신한 여자에 대한 많은 금기(禁忌)는 나중에 그 남편을 포함하도록 연장되었다. 아이를 기대하는 아버지는 해산할 때가 가까워오자 일을 그만두었고, 아이가 태어날 때 침대로 가서 아내와 함께 3일에서 8일까지 남아서 쉬었다. 아내는 그 다음 날 일어나서 고된 일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남편은 축하를 받으려고, 침대에 남아 있었다. 이것은 모두 아이에 대한 아버지의 권리를 확립하려고 고안된 옛 관습의 일부였다.
84:2.5 (933.3) 처음에는 남자가 아내의 종족에게로 가는 것이 관습이었으나, 후일에는 남자가 신부 값을 치르거나 이를 위해 일한 뒤에, 제 아내와 아이들을 자기 사람들에게로 데리고 갈 수 있었다. 모계 가족으로부터 부계 가족으로 넘어간 것은, 달리 의미가 없는데 어째서 어떤 종류의 사촌 결혼을 금지하고, 한편 똑같은 인척 관계에 있는 다른 것은 인정되었는가를 설명한다.
84:2.6 (933.4) 사냥꾼의 풍습이 지나가고, 남자가 짐승을 길러 주요한 식량 공급을 좌우하게 되었을 때, 모계 가족은 재빨리 끝에 이르렀다. 모계 가족은 다만 새로 생긴 부계 가족과 경쟁하는 데 성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어머니의 남자 친척들에게 투입된 권력은 남편이자 아버지에게 집중된 권력과 경쟁할 수 없었다. 여자는 아이를 배고, 계속된 권한과 늘어나는 집안의 권력을 행사하는 두 가지 과제에 힘이 부치었다. 새로 등장하는 아내 훔치기와 나중에 아내 사들이기는 모계 가족의 종말을 재촉하였다.
84:2.7 (933.5) 모계 가족으로부터 부계 가족으로 넘어가는 굉장한 변화는 인류가 일찍이 일으킨 가장 급진적이고, 완전히 거꾸로 돌아가는 조정 중에 하나였다. 이 변화로 말미암아 대번에 사회적 표현이 늘어나고 가족을 이루는 모험이 증가하였다.
84:3.1 (933.6) 모성 본능이 여자를 결혼으로 이끌었는지 모르지만, 여자를 결혼한 채로 남아 있도록 실질적으로 강제한 것은, 관습의 영향과 함께 남자의 우수한 힘이었다. 전원 생활은 새로운 체계의 관습, 부계 종류의 가족 생활을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었다. 짐승을 기르고 초기에 농사 짓는 관습 하에서, 가족 단결의 기초는 아버지의 권한, 도전받지 않고 멋대로 하는 권한이었다. 모든 사회는, 국가이든 가족이든, 족장 계급이 독재 권한을 갖는 단계를 거쳤다.
84:3.2 (934.1) 구약(舊約) 시대에 여성에게 인색하게 예의를 보인 것은 목자들의 도덕 관습을 참되게 반영한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하는 말이 증언하다시피, 히브리 족장들은 모두 목자였다.
84:3.3 (934.2) 그러나 지난 시대에 남자가 여자를 낮추어 보는 의견을 가진 것에 대하여 남자는 바로 그 여자보다 더 큰 잘못은 없다. 여자는 비상시에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시 시대에 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여자는 눈부신 영웅도 위기의 영웅도 아니었다. 생존 투쟁에서 아이를 밴 것은 뚜렷한 불구였고, 모성애는 부족을 방어할 때 여자에게 장애물이 되었다.
84:3.4 (934.3) 원시의 여자들은 또한 남자가 싸우기 좋아하고 사내다운 것을 찬미하고 갈채를 보냄으로 뜻하지 않게 남자에게 의존하는 성향을 길렀다. 무사(武士)를 이렇게 추켜세운 것은 남자의 자존심을 높였고, 한편 여자의 자존심을 그만큼 억누르고 여자로 하여금 더욱 의존하게 만들었다. 군복은 아직도 여성의 감정을 힘차게 뒤흔든다.
84:3.5 (934.4) 진보한 축에 속하는 민족들 사이에서, 여자는 남자처럼 크거나 힘세지 않다. 여자는 약자이니까, 따라서 더 요령 있는 사람이 되었다. 여자는 일찍부터 성적 매력을 파는 것을 배웠다. 여자는 남자보다 생각이 깊지는 않았지만, 더 민첩하고 보수적이었다. 남자는 전쟁터에서, 그리고 사냥할 때, 여자의 상관이었다. 그러나 집에서 여자는 가장 원시적인 남자들도 보통 술책으로 이겼다.
84:3.6 (934.5) 목자는 먹을거리를 자기의 짐승 떼에서 찾았지만, 이 전원 시대를 통하여 내내, 여자는 아직도 먹을 채소를 마련해야 했다. 원시의 남자는 흙을 피했다. 흙은 너무나 평화롭고 모험하는 재미가 너무 없었다. 또한 여자가 채소를 더 잘 가꿀 수 있다는 오래 된 미신이 있었는데, 여자가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뒤에 처진 많은 부족에서, 남자는 고기를, 여자는 채소를 요리하며, 오스트랄리아의 원시 부족들이 행진할 때 여자들은 결코 사냥거리를 잡지 않고, 한편 남자는 뿌리 하나 캐려고 몸을 굽히려 하지 않는다.
84:3.7 (934.6) 여자는 언제나 일해야 했다. 적어도 바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자는 진정한 생산자였다. 남자는 보통 그보다 더 쉬운 길을 택했고, 이 불평등은 인류의 역사 전체를 통하여 존재하였다. 여자는 언제나 짐꾼이었고, 가족 재산을 나르고 아이들을 돌보았으며, 이렇게 싸움이나 사냥을 하도록 남자를 자유롭게 버려두었다.
84:3.8 (934.7) 남자가 땅을 경작하는 데 찬성했을 때, 그때까지 여자의 일로 여겨 왔던 것을 하겠다고 찬성했을 때, 여자의 첫 해방이 왔다. 남자 포로가 이제 더 죽음을 당하지 않고 농사꾼 노예가 되었을 때가 크게 전진하는 발걸음이었다. 이것이 여자의 해방을 가져왔고, 그래서 여자는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훈련하는 데 시간을 더 바칠 수 있었다.
84:3.9 (934.8) 어린것들에게 우유를 마련한 것은 아기들이 더 일찍 젖을 떼게 만들었으며, 따라서 때때로 잠시 불임에서 해방된 어머니들이 아이를 더 낳도록 만들었다. 한편 송아지 젖과 염소 젖의 사용은 아기의 사망률을 크게 줄였다. 사회가 짐승을 기르던 단계 이전에는 어머니가 아기들이 네다섯 살이 될 때까지 젖을 먹이곤 하였다.
84:3.10 (934.9) 원시 전쟁의 감소는 남녀 구별에 근거를 둔 노동 분업 사이의 불균형을 크게 줄였다. 그러나 여자들은 아직도 진짜 일을 해야 되었고, 한편 남자들은 망보는 임무를 맡았다. 어떤 캠프나 마을도 낮이나 밤에 지키지 않은 채로 버려둘 수 없었지만, 이 과제조차 개를 길들여 가벼워졌다. 대체로 농업의 시작은 여자의 품위와 사회적 지위를 높였다. 적어도 이것은 바로 남자가 농부로 전향할 때까지 참말이었다. 그리고 남자가 땅을 가는 일에 손을 대자마자, 즉시 농사짓는 방법의 큰 개선이 뒤따랐고, 이것은 뒤잇는 세대들을 통해서 계속 연장되었다. 사냥과 전쟁이 있을 때 남자는 조직이 귀중함을 배웠고 이 기술을 산업에 들여왔으며, 나중에 여자가 하는 일의 많은 부분을 물려받았을 때 여자의 허술한 노동 방법을 크게 개량했다.
84:4.1 (935.1)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떤 시대에도 여자의 지위는, 하나의 사회 제도로서 결혼이 얼마나 진화하여 진보했는가를 재는 공평한 평가 기준이다. 한편 결혼 자체의 진보는 인간의 문명이 얼마나 진보했는가를 기록하는 상당히 정확한 척도이다.
84:4.2 (935.2) 여자의 지위는 언제나 사회의 역설(逆說)이었다. 여자는 언제나 남자를 민첩하게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여자는 언제나 남자의 더 강한 성욕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의 승진을 위하여 이용했다. 남자에게 비참한 노예로 붙들려 있을 때조차, 여자는 자기의 성적 매력을 교묘하게 팔아서, 흔히 남자를 지배하는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다.
84:4.3 (935.3) 옛날의 여자는 남자에게 친구나 연인, 애인이나 협동자가 아니라, 오히려 한 덩이의 재산, 하녀나 종이었고, 나중에는 경제적 협동자요, 노리개요, 아이 낳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적당하고 흐뭇한 성관계에는 반드시 여자가 선택하고 협동하는 요소가 들어갔고, 이것은 언제나 영리한 여자들에게, 여성으로서 그들의 사회 지위에 상관 없이,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지위에 상당히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들의 속박을 가볍게 하려는 노력으로, 여자들이 줄곧 기민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남자의 불신과 의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84:4.4 (935.4) 남녀는 서로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어 왔다. 남자는 여자를 이해하기 어려움을 발견했고, 의심하고 경멸하지 않더라도, 무지로 인한 불신과 두려운 환상이 야릇하게 섞인 눈으로 여자를 보았다. 부족과 종족의 많은 전통은 고난(苦難)을 이브나 판도라, 또는 어떤 다른 여성 대표의 탓으로 돌렸다. 이런 이야기들은 언제나 왜곡되어서 여자가 남자에게 악을 가져온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 모두가 한때 여자를 보편적으로 불신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독신 사제직을 지지하면서 늘어놓은 여러 이유 중에서 으뜸가는 것은 여자의 천함이었다. 마법사라고 생각된 대부분의 사람이 여자라는 사실은 여성의 오래 된 평판을 더 좋게 만들지 않았다.
84:4.5 (935.5) 남자는 오랫동안 여자가 특이하다, 아니 비정상이라고 여겼다. 남자는 여자가 혼이 없다고 믿기도 하였다. 따라서 여자들에게 이름을 주지 않았다. 옛날에는 여자와 처음 성관계 가지는 것을 크게 두려워했다. 따라서 사제가 처녀와 첫 성교를 가지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여자의 그림자조차 위험하다고 생각되었다.
84:4.6 (935.6) 임신은 한때 일반적으로 여자를 위험하고 더럽게 만드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여러 부족의 관습이, 아이가 태어난 뒤에 어머니가 긴 정화(淨化) 의식을 거쳐야 한다고 선포했다. 해산하는 자리에 남편이 참여한 집단을 제외하고, 사람들은 출산을 앞둔 어머니를 피하고 혼자 버려두었다. 옛날 사람들은 집안에서 아이를 낳게 하는 것조차 피했다. 마침내, 늙은 여자들이 진통 중에 어머니를 보살피는 것이 허락되었고, 이 관습이 산파라는 직업을 낳았다. 분만을 쉽게 하려는 노력으로, 출산 중에 몇십 가지 어리석은 것을 말하고 행하였다. 귀신의 방해를 막으려고 갓난아이에게 거룩한 물을 뿌리는 것이 관습이었다.
84:4.7 (935.7) 혼합되지 않은 부족들 사이에서 출산은 비교적 쉬웠고, 겨우 두세 시간 걸렸다. 혼합된 민족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쉬운 일이 드물다. 여자가 출산할 때 죽으면, 특히 쌍둥이를 낳을 때, 그 여자는 영과 간통한 죄가 있다고 믿었다. 나중에, 상급 부족들은 출산할 때 죽는 것을 하늘의 뜻으로 보았다. 그러한 어머니들은 고귀한 이유로 죽었다고 간주되었다.
84:4.8 (936.1) 여자의 옷과 몸을 드러내는 것에 관한, 이른바 여자의 정숙(貞淑)은 월경이 있을 때 눈에 뜨일까 하는 지독한 두려움에서 생겨났다. 그렇게 들키는 것은 중대한 죄였고, 금기를 어기는 것이었다. 옛날의 관습 밑에서, 사춘기로부터 출산기의 끝까지, 모든 여자는 한 달에 한 주를 꼭 채워, 완전히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었다. 여자가 만지거나 앉거나 베고 누울 만한 모든 것은 “더러워졌다.” 달마다 월경이 끝난 뒤에 악령을 몸에서 몰아내려는 노력으로 소녀를 무자비하게 때리는 것이 오랫동안 관습이었다. 그러나 한 여자가 출산기를 지났을 때, 그 여자는 보통 더 배려해 주는 대우를 받았고, 더 많은 권리와 특권을 받았다. 이 모든 것을 보건대, 여자들이 업신여김을 받은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리스인조차 월경하는 여자를 몸을 더럽히는 3대 원인의 하나로 보았고, 나머지 둘은 돼지고기와 마늘이었다.
84:4.9 (936.2) 아무리 어리석었어도 이 옛 개념들은 좋은 일을 했는데, 그런 개념들이 과로한 여자들에게, 적어도 젊었을 때, 반가운 휴식과 유익한 명상 시간을 가지도록 한 달에 한 주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은 나머지 시간에 남자 동료들을 다룰 지혜를 익힐 수 있었다. 여자를 이렇게 격리한 것은 또한 남자들을 지나친 성욕의 탐닉으로부터 보호했고, 이렇게 함으로 인구를 제한하고 자제를 향상하는 데 간접으로 이바지했다.
84:4.10 (936.3) 남자가 마음대로 제 아내를 죽일 권리를 빼앗겼을 때 큰 진보가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여자가 결혼 선물을 소유할 수 있을 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후일에는 여자가 재산을 소유하고 통제하고, 처분까지 하는 권리를 얻었다. 그러나 여자는 교회에서나 국가에서 공직(公職)을 가질 권리를 오랫동안 빼앗겼다. 여자는 그리스도 이후 20세기까지, 그리고 이 세기에, 언제나 얼마큼 재산으로 취급되었다. 여자는 남자의 지배 밑에서 은둔하던 상태로부터 세계적으로 자유를 널리 얻지 못했다. 진보된 민족들 사이에서도, 남자가 여자를 보호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남자가 우수함을 말없이 주장하는 것이었다.
84:4.11 (936.4) 그러나 원시의 여자들은 최근에 자유롭게 된 자매들이 곧잘 하듯이,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상당히 행복하고 만족하였다. 더 낫거나 다른 형태의 존재를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84:5.1 (936.5) 자아를 존속시키는 일에 여자는 남자와 동등하지만, 자아를 유지하는 협동 관계에서 여자는 뚜렷이 불리하게 수고한다. 강제된 이 모성(母性)의 장애는 오로지, 진보하는 문명의 깨우친 관습으로, 그리고 남자가 늘어나는 공평 감각을 얻음으로써 겨우 보상할 수 있다.
84:5.2 (936.6) 사회가 진화함에 따라서 성의 기준은 여자들 사이에서 더 높아졌는데, 이는 성 관습을 위반한 결과로부터 그들이 더 고통을 받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성 기준은 문명이 요구하는 그 순전한 공평 감각의 결과로서 겨우 뒤늦게 개선되고 있다. 자연은 도무지 공평을 모른다―여자 혼자서 분만의 아픔을 견디게 만든다.
84:5.3 (936.7) 현대의 남녀 평등 관념은 아름답고, 확장하는 문명에 어울리지만, 그 관념은 자연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힘이 정의일 때, 남자는 여자에게 거만하게 군다. 정의ㆍ평화ㆍ공평이 더 많이 지배할 때, 여자는 차츰차츰 노예 상태와 낮은 신분에서 솟아나온다. 여자의 사회적 지위는 대체로 어느 나라나 어느 시대에도, 군사주의의 정도에 반비례하여 변하였다.
84:5.4 (937.1) 그러나 남자는 여자의 권리를 의식하여, 또는 일부러 빼앗지는 않았고, 그리고 나서 차츰차츰, 투덜거리면서 그 권리를 여자에게 돌려주었다. 이 모두가 사회의 진화에서 의식하지 않고 계획하지 않은 사건이었다. 늘어난 권리를 즐길 때가 정말로 왔을 때, 여자는 권리를 가졌고, 남자의 의식하는 태도와 아주 상관 없이 모두 가졌다. 사회적 조정은 문명의 지속하는 진화의 일부이며, 이를 마련하려고 도덕 관습은 느리지만 확실히 변한다. 진보하는 도덕 관습은 천천히 갈수록 더 여자에게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여자에게 계속 모질었던 부족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84:5.5 (937.2) 아담 족속과 놋 족속은 여자를 더 많이 인정했으며, 이주하는 안드 족속에게 영향을 받은 무리들은 여자의 사회적 신분에 관하여 에덴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었다.
84:5.6 (937.3) 초기의 중국인과 그리스인은 둘러싼 대부분의 민족들보다 여자를 더 낫게 대우했다. 그러나 히브리인은 지나치게 여자를 불신했다. 서양에서 여자는 기독교에 달라붙게 된 바울의 교리 밑에서, 가파른 오르막길에 부딪쳤다. 그래도 기독교는 남자에게 더 엄격한 성의 책임을 지워줌으로 도덕 관습을 진보시켰다. 여자의 신분은 마호메트교에서 여자에게 따르는 특이한 지위의 하락으로 거의 희망이 없으며, 다른 몇 가지 동양 종교의 가르침 밑에서 여자는 더군다나 운이 나쁘다.
84:5.7 (937.4)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 여자를 정말로 해방했다. 집의 울타리로부터 여자를 대체로 자유롭게 풀어 놓은 것은 현대의 공장(工場)이었다. 새로운 유지 장치에서 남자의 신체적 능력은 이제 더 중대한 필수 요소가 되지 않았다. 과학은 남자의 힘이 여자의 힘보다 이제 더 아주 우수하지 않도록 생활 조건을 변화시켰다.
84:5.8 (937.5) 이러한 변화는 집안의 노예 신세로부터 여자를 해방하는 경향이 있었고, 여자의 지위를 크게 수정해서, 여자는 실질적으로 남자와 같이 개인의 자유와 성교의 결정권을 이제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한때 여자의 가치는 여자가 먹을 것을 생산하는 능력에 있었으나, 발명과 부(富)는 여자로 하여금 활동해야 할 새로운 세계―품위와 매력의 분야―를 창조할 수 있게 하였다. 이처럼 산업은 여자의 사회ㆍ경제적 해방을 위하여, 의식하지도 않고 뜻하지도 않은 싸움을 싸워서 이겼다. 또 다시 진화는 계시조차 이룩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는 데 성공했다.
84:5.9 (937.6) 사회에서 여자의 지위를 규제하는 불공평한 도덕 관습에서 벗어난 깨우친 민족들의 극단적 반응은 정말로 추와 같았다. 산업화된 민족들 사이에서 여자는 거의 모든 권한을 받았고, 군대 복무와 같은 많은 의무로부터 면제된다. 존재를 위한 싸움이 완화될 때마다 여자의 해방에 도움이 되었고, 일부일처제를 향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여자는 직접 이득을 보았다. 사회가 진취적으로 진화하면서 관습이 조정될 때마다, 약한 자는 언제나 훨씬 더 이득을 본다.
84:5.10 (937.7) 부부 결혼의 이상(理想)에 비추어 볼 때, 여자는 마침내 인정(認定)ㆍ위엄ㆍ독립ㆍ평등ㆍ교육을 얻어냈다. 그러나 여자가 새롭고 전례 없는 이 모든 성취를 누릴 자격이 있는지 입증될 것인가? 사회의 해방이 가져온 이 위대한 성취에 대하여 현대 여성은 게으름ㆍ무관심ㆍ불임ㆍ간통으로 반응할 것인가? 오늘날, 20세기에 여자는 오랫동안 세상에 존재하면서 중대한 시험을 거치고 있다!
84:5.11 (938.1) 종족 번식 면에서 여자는 남자와 동등한 짝이며, 따라서 종족의 진화가 전개되는 데 똑같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진화는 갈수록 더 여성의 권리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여자의 권리는 결코 남자의 권리가 아니다. 남자가 여자의 권리를 가지고 잘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여자도 남자의 권리를 가지고 번성할 수 없다.
84:5.12 (938.2) 남녀는 각자 자신의 뚜렷한 존재 분야가 있고, 그 분야 안에서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여자가 글자 그대로 남자의 권리를 모두 가지고 싶어한다면, 머지 않아, 동정심도 감정도 없는 경쟁이, 많은 여성이 지금 즐기고, 남자들로부터 아주 최근에 얻어낸, 그 기사도(騎士道) 정신과 특별한 배려를 분명히 없애버릴 것이다.
84:5.13 (938.3) 문명은 남녀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결코 없애버릴 수 없다. 대대로 도덕 관습은 변하지만, 본능은 결코 그렇지 않다. 타고난 모성애는 결코 해방된 여자로 하여금 산업에서 남자와 심각하게 경쟁하도록 버려두지 않는다. 언제까지나 남녀는 각자 자신의 분야 안에서 힘을 떨칠 터이니, 이것은 생물학적 분화와 정신적 차이에 따라서 결정되는 분야이다.
84:5.14 (938.4) 남녀는 각자 언제나 자신의 특별한 분야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그 분야들이 때때로 겹칠 것이다. 오직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는 같은 조건으로 경쟁한다.
84:6.1 (938.5) 번식의 욕구는 자아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어김없이 남자와 여자를 함께 모이게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들이 서로 협동하는 속에―가정을 세우는 일에―함께 남아 있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84:6.2 (938.6) 성공하는 인간 제도는 모두, 실질적으로 조화를 이룬 개인 이익의 대립을 용납하며, 가정을 만드는 것도 예외가 아니다. 결혼은 가정을 세우는 기초요, 상반되는 협동의 가장 높은 표현이며, 이것은 아주 흔히 천성과 사회의 접촉의 특징이 된다. 갈등은 피할 수 없다. 짝짓기는 선천적이며, 자연히 일어난다. 그러나 결혼은 생물학상의 일이 아니라, 사회적인 일이다. 정열(情熱)은 남자와 여자가 한데 모일 것을 보장하지만, 그보다 약한 부모 본능과 사회 관습이 그들을 함께 붙들어 놓는다.
84:6.3 (938.7) 남성과 여성은 실지로 보건대, 가깝고 밀접하게 결합된 속에서 사는, 같은 종자의 두 가지 다른 변종이다. 그들의 관점과 전체 인생의 반응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서로를 충분히 진정하게 이해할 능력이 도무지 없다. 남녀 사이에 완전한 이해는 도달할 수 없다.
84:6.4 (938.8) 여자는 남자보다 직감이 더 좋은 듯하지만, 여자는 또한 얼마큼 논리가 덜한 듯하다. 그러나 여자는 언제나 도덕의 기치를 쥔 사람이요, 인류의 영적 지도자였다. 요람을 흔드는 손은 아직도 운명과 사귄다.
84:6.5 (938.9) 남자와 여자 사이에 성품ㆍ반응ㆍ관점ㆍ생각의 차이는 걱정을 일으키기는커녕, 개별적으로, 또 집단으로, 인류에게 상당히 유익하다고 간주되어야 한다. 많은 계급의 우주 생물은 두 단계로 성격을 표현하도록 지어졌다. 사람, 물질 아들, 중간 한계자[1] [1722] 중에서, 이 차이는 암컷과 수컷으로 묘사된다. 세라핌, 케루빔, 상물질 동반자 사이에서는, 양성, 즉 적극적인 것, 그리고 음성, 즉 수줍은 것으로 언급되었다.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체계에서 어떤 삼자일체 결합처럼, 그러한 2중 관계는 융통성을 크게 높이고 선천적 한계를 이겨낸다.
84:6.6 (939.1) 남자와 여자는 필사 생애 뿐 아니라 상물질 생애와 영적 생애에 서로 필요하다. 여성과 남성 사이에 관점의 차이는 첫 생명을 지나서도, 그리고 지역 우주와 초우주를 올라가면서 내내 지속된다. 그리고 하보나에서도, 한때 남자와 여자였던 순례자들은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면서 여전히 서로를 도울 것이다. 최후자 군단에서도, 결코 인간이 남성과 여성이라고 부르는 인격의 성향을 지워 버릴 만큼 사람의 모습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인류의 이 두 가지 기본 변종은 줄곧 서로를 골똘히 생각에 빠지게 하고, 자극하고, 북돋아 주고 돕는다. 그들은 난처한 우주 문제들을 푸는 데, 그리고 다채로운 우주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언제나 서로 협동에 의존할 것이다.
84:6.7 (939.2) 남녀는 결코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기 바랄 수 없어도, 그들은 효과적으로 보완한다. 협동은 얼마큼 개인적으로 대립되지만, 사회를 유지하고 재생하는 능력이 있다. 결혼은 남녀의 차이를 완화하도록 고안된 제도이며, 한편 문명을 계속하게 하고 종족의 번식을 보장한다.
84:6.8 (939.3) 결혼은 인간의 모든 제도의 근원이니, 결혼이 가정을 일으키고 가정을 유지하는 길로 바로 이끌기 때문이며, 이것이 사회 구조의 기초이다. 가족은 자아 유지 작용과 중대하게 연결되어 있다. 가족은 문명의 도덕 관습 밑에서 종족이 영속할 유일한 희망이며, 동시에 상당히 만족스러운 어떤 형태의 자아 충족을 가장 효과적으로 마련해 준다. 가족은 사람이 이룬 가운데 가장 큰, 순전히 인간다운 성취이며, 남녀의 생물학적 관계의 진화를 남편과 아내의 사회적 관계와 실제로 통합한다.
84:7.1 (939.4) 남녀가 짝짓는 것은 본능이요, 아이들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따라서 가족은 자동으로 존재하게 된다. 종족이나 국가의 가족들이 어떠하면, 그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가족들이 좋으면, 사회도 마찬가지로 좋다. 유대 민족과 중국 민족의 문화가 크게 안정된 것은 그들의 가족 집단의 힘에 달려 있다.
84:7.2 (939.5) 아이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여자의 본능은, 결혼과 원시의 가족 생활을 조장하는 데 여자를 이해 관계가 있는 당사자로 만들도록 작용한다. 남자는 후일의 관습과 사회 풍습의 압력 때문에 가정을 이루도록 강제되었을 뿐이다. 남자는 결혼과 가정을 이루는 일에 더디게 흥미를 가졌는데, 이는 성행위가 남자에게 아무런 생물학적 결과를 지워주지 않기 때문이다.
84:7.3 (939.6) 성적 연합은 자연스럽지만, 결혼은 사회적인 것이며 반드시 도덕 관습에 규제를 받아 왔다. (종교ㆍ도덕ㆍ윤리적) 관습은 재산ㆍ자존심ㆍ기사도(騎士道)와 함께, 결혼 제도와 가족 제도를 안정시킨다. 관습이 이리저리 변할 때는 언제나, 가정 및 결혼 제도의 안정에 변동이 생긴다. 결혼은 이제 재산 단계를 벗어나서 개인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예전에는 여자가 남자의 소유물이었으니까 남자가 여자를 보호했고, 여자는 같은 이유로 남자에게 복종했다. 그 장점에 상관 없이, 이 체계는 안정을 가져왔다. 지금은 여자를 더 이상 재산으로 여기지 않으며, 결혼 및 가정 제도를 안정시키도록 고안된 새로운 도덕 관습이 솟아나고 있다:
84:7.4 (939.7) 1. 종교의 새 기능―부모의 체험이 필수라는 가르침, 우주의 시민을 낳는다는 관념, 자식을 낳는―아들들을 아버지께 드리는―특권을 더욱 이해하는 것.
84:7.5 (940.1) 2. 과학의 새 기능―출산은 남자의 통제 밑에서, 점점 더 자원하는 것이 된다. 옛 시절에는 아이를 바라는 욕망이 도무지 없는 가운데, 이해의 부족이 아이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장했다.
84:7.6 (940.2) 3. 쾌락 유혹의 새 기능―이것은 종족의 생존에 새로운 요인을 시작한다. 옛날 사람은 바라지 않는 아이들을 죽도록 버려두었다. 현대인은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는다.
84:7.7 (940.3) 4. 부모 본능의 향상. 각 세대는 이제, 부모 본능이 충분히 강하지 않아서 아이 낳는 것을 보장할 수 없는 사람들을 종족 번식의 흐름에서 없애버리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은 다음 세대에 부모가 될 사람들이다.
84:7.8 (940.4) 그러나 하나의 제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협동 관계로서, 가정은 더 자세히 말하면 달라마시아 시절, 약 5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안돈과 그 직계 후손의 일부일처 관습이 사라진 지 오래 되었다. 그러나 놋 족속과 나중에 아담 족속의 시절 이전에, 가족 생활은 그다지 자랑할 것이 없었다. 아담과 이브는 온 인류에게 오래 가는 영향을 미쳤다. 세계 역사에서 처음으로, 남자와 여자들이 동산에서 나란히 일하는 것이 보였다. 온 가족이 채소 가꾸는 사람이 되는 에덴의 이상은 유란시아에서 새로운 관념이었다.
84:7.9 (940.5) 초기의 가족은, 노예들과 함께, 관련된 일하는 집단을 포함하였고, 모두가 한 거처에서 살았다. 결혼과 가족 생활은 반드시 동일하지 않았지만, 필요 때문에 가깝게 관련되었다. 여자는 언제나 개별 가족을 바랐고, 결국 여자는 뜻대로 했다.
84:7.10 (940.6)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거의 보편적이며, 뚜렷이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 옛날 사람들은 아이의 복지를 위하여 언제나 어머니의 이익을 희생했다. 에스키모인 어머니는 아직까지도 목욕시키는 셈으로 제 아기를 핥아 준다. 그러나 원시의 어머니들은, 제 자식들이 아주 어릴 때만 젖을 먹이고 보살폈다. 그들은 동물처럼, 아이들이 자라자마자 내버렸다. 오래 가고 계속되는 인간 관계는 오직 생물학적 사랑에만 기초를 둔 적이 없다. 동물은 제 새끼를 사랑한다. 사람―문명화된 사람―은 손자ㆍ손녀를 사랑한다. 문명이 높을수록, 아이들이 승진하고 성공할 때 부모의 기쁨이 더욱 커진다. 이처럼 이름 자존심에 대하여 새롭고 더 높은 깨달음이 생기게 되었다.
84:7.11 (940.7) 옛 종족들 사이에서 대가족이 반드시 애정이 깊지는 않았다. 다음 이유 때문에 아이들이 많은 것이 바람직했다:
84:7.12 (940.8) 1. 아이들은 일꾼으로서 값이 있었다.
84:7.13 (940.9) 2. 아이들은 노령 보험이었다.
84:7.14 (940.10) 3. 딸을 팔 수 있었다.
84:7.15 (940.11) 4. 가족의 자부심은 이름 남길 것을 요구한다.
84:7.16 (940.12) 5. 아들들은 보호와 방어를 마련해 주었다.
84:7.19 (940.15) 조상 숭배자는 아들 못 가지는 것을 온 세월과 영원을 통해서 최악의 재난으로 여긴다. 그들은 죽은 뒤의 축제를 거행하고, 영 나라를 통하여 귀신이 나아가는 데 필요한 희생물을 바칠 아들들을 무엇보다도 더 바란다.
84:7.20 (941.1) 옛날의 야만인 사이에서, 자식에게 벌주는 것은 아주 일찍 시작되었다. 동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복종이 실패나 죽음까지도 뜻한다는 것을 아이는 일찍부터 깨달았다. 문명이 아이가 어리석은 행동의 자연스런 결과를 받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은 현대에 사람의 불복종에 아주 크게 기여한다.
84:7.21 (941.2) 에스키모인 아이들은 징계와 벌이 거의 없이 잘 자라는데, 이것은 그들이 나면서부터 온순한 작은 동물이기 때문이다. 홍인과 황인의 아이들은 거의 똑같이 다루기 쉽다. 그러나 안드 족속 유전을 가진 종족들 중에서는 아이들이 그다지 차분하지 않다. 상상력이 더 많고 모험을 더 좋아하는 이 어린이들은 훈련과 징계가 더 필요하다. 아이를 훈련하는 현대의 문제는 다음 이유로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
84:7.22 (941.3) 1. 상당한 정도로 종족이 혼합된 것.
84:7.23 (941.4) 2. 인위적이고 겉핥기인 교육.
84:7.24 (941.5) 3. 부모를 모방함으로 아이가 훈련을 얻을 수 없는 것―부모가 너무나 자주 가족의 그림에서 빠져 있다.
84:7.25 (941.6) 가족을 징계하는 옛 관념은 생물학적 관념이었고, 부모가 아이의 존재를 만든 사람이었다는 깨달음에서 생겨났다. 가족 생활에 관한 진보하는 이상은 아이를 세상으로 데려오는 것은 어떤 부모의 권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에서 최고의 책임이 따른다는 개념으로 이끌고 있다.
84:7.26 (941.7) 문명은 부모가 모든 의무를 맡고, 아이는 모든 권리를 가졌다고 간주한다. 아이가 부모를 존경하는 마음은, 자식을 낳는 것이 무슨 의무를 암시하는가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투쟁에서 이기도록 아이를 돕는 데서 인자하게 보여주는 보살핌ㆍ훈련ㆍ애정의 결과로서 자연히 생겨난다. 참된 부모는 계속하여 서비스와 봉사를 베푸는 데 몰두하며, 지혜로운 아이는 이를 깨닫고 고맙게 여기게 된다.
84:7.27 (941.8) 현재의 산업 및 도시 시대에, 결혼 제도는 새로운 경제 노선을 따라서 진화하고 있다. 가족 생활은 갈수록 더 비싸게 되었고, 한편 예전에 재산이었던 아이들은 경제적 부채가 되었다. 그러나 문명 자체의 안전은 아직도 한 세대가 다음 세대와 미래 세대의 복지에 기꺼이 투자하려는 짙어지는 성향에 달려 있다. 그리고 부모의 책임을 국가나 교회에 떠맡기려고 어떤 시도를 하더라도 문명의 복지와 진보에 자살(自殺) 행위임이 입증될 것이다.
84:7.28 (941.9) 아이들과 그 결과로 생기는 가족 생활과 더불어, 결혼은 인간의 성품에서 가장 높은 잠재성을 자극하며, 동시에 필사자의 인격에서 활기를 띤 이 특성을 표현하는 이상적 길을 마련해 준다. 가족은 인간종이 생물학적으로 존속하게 한다. 집은 자연스러운 사회 무대이며, 자라는 아이들은 거기서 핏줄로 이어진 형제 정신의 윤리를 깨달을 수 있다. 가족은 근본적 친교 단위이며, 그 안에서 부모와 아이들은 참을성ㆍ이타주의ㆍ너그러움ㆍ인내심의 교훈을 배우며, 이것들은 모든 사람 사이에서 형제 정신을 실현하는 데 아주 긴요하다.
84:7.29 (941.10) 문명화된 종족들이 더욱 널리 안드 족속의 가족 회의 관습으로 돌아간다면, 인간 사회는 크게 개선될 것이다. 안드 족속은 족장이나 독재 형태의 가족 정부를 유지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주 형제답고 친교 성향이 있고, 가족의 성질을 가진 모든 제안과 규칙을 자유로이 솔직하게 토론하였다. 그들은 가족을 다스리는 모든 일에 이상적으로 형제 정신이 있었다. 이상적 가족 안에서 효도와 부모 사랑은 모두 형제처럼 헌신함으로 커진다.
84:7.30 (942.1) 가족 생활은 참된 도덕의 선구자요, 의무에 충성하는 의식(意識)의 근거이다. 가족 생활에서 강제된 관계는 다채로운 다른 인물에 대하여 필요한 적응을 강제함으로 인격을 안정시키고 인격의 성장을 자극한다. 그러나 오히려, 참된 가족―좋은 가족―은 자식을 낳는 부모에게 창조자가 그의 자녀들에게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 드러내며, 한편 동시에 그러한 참된 부모는 우주의 모든 아이들의 부모, 파라다이스 부모의 사랑을 올라가면서 드러내는, 길게 연속되는 과정의 첫걸음을 제 자식들에게 보여준다.
84:8.1 (942.2) 가족 생활의 큰 위협은 자아 욕구의 충족, 즉 위험하게 높아지는 현대 쾌락광의 물결이다. 결혼으로 이끈 첫째 동기는 예전에 경제 요인이었고, 성적 매력은 2차적인 것이었다. 자아 유지에 기초를 둔 결혼은 자아의 존속으로 이끌었고, 그와 동시에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자아 욕구의 충족을 마련해 주었다. 결혼은 살기 위한 세 가지 큰 동기를 모두 포함하는, 인간 사회의 유일한 제도이다.
84:8.2 (942.3) 최초에 재산은 자아를 유지하는 기본 제도였고, 한편 결혼은 자아를 존속시키는 독특한 제도로서 작용했다. 배를 채우는 것과 놀이와 유머는, 이따금 얻는 성욕의 만족과 더불어 자아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이기는 했어도, 진화하는 도덕 관습이 자아 욕구를 충족시키는 어떤 뚜렷한 제도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 여전히 사실이다. 즐거움을 얻는 전문화된 기술을 이렇게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 제도는 이 쾌락 추구에 완전히 젖어 있다. 재산의 축적은 온갖 종류의 자아 욕구를 더욱 충족시키는 도구가 되고 있으며, 한편 결혼은 흔히 오직 쾌락의 수단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 지나친 탐닉, 널리 퍼진 이 쾌락광은, 일찍이 사회의 진화적 가족 생활 제도인 가정을 노리는 가장 큰 위협이다.
84:8.3 (942.4) 보라 인종은 새롭고 겨우 불완전하게 실현된 특징―유머 감각과 함께 놀이 본능―을 인류의 체험 속에 들여왔다. 이 본능은 어느 만큼 산긱과 안돈 족속 안에 있었지만, 아담의 핏줄은 이 원시 성향을 가능한 쾌락으로 높였고, 이것은 새롭고 영화롭게 된 형태로 자아의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다. 배고픔을 달래는 것을 제쳐놓고, 기본 형태의 자아 욕구의 충족은 성욕을 채우는 것이며, 이 형태의 육체적 쾌락은 산긱과 안드 족속을 혼합함으로 엄청나게 높아졌다.
84:8.4 (942.5) 안드 이후 종족들의 차분하지 못한 성질, 호기심ㆍ모험, 그리고 쾌락에 빠지는 특징이 합친 곳에 진짜 위험이 있다. 혼의 갈증은 육체의 쾌락으로 채울 수 없다. 가정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쾌락을 지혜롭지 못하게 찾는다고 늘어날 수 없다. 너희는 예술ㆍ색깔ㆍ소리ㆍ리듬ㆍ음악, 그리고 사람 치장의 자원을 다 써 버리더라도, 그렇게 함으로 너희는 혼을 높이거나 정신에 자양분 주기를 바랄 수 없다. 허영심과 유행은 가정을 만들고 아이를 훈련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없다. 자존심과 경쟁심은 뒤잇는 세대들의 살아남는 성질을 높이는 데 무력하다.
84:8.5 (942.6) 진보하는 하늘 존재들은 모두 휴식을 즐기고 회상(回想) 지도자들의 보살핌을 누린다. 건강에 좋은 기분 전환을 얻고 사람을 격려하는 놀이에 참여하는 모든 노력은 건전하다. 기분을 새롭게 하는 잠ㆍ휴식ㆍ오락, 그리고 단조로운 지루함을 막는 모든 유흥은 가치가 있다. 경쟁하는 시합, 이야기를 엮는 것, 맛있는 것을 맛보는 것조차 자아 욕구 충족의 형태로서 쓸모가 있을까 한다. (먹을 것을 맛내려고 너희가 소금을 쓸 때, 거의 1백만 년 동안 사람은 먹을 것을 재 속에 집어넣어야 소금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멈추어 생각해 보아라.)
84:8.6 (943.1) 사람은 즐길지어다. 인종은 수많은 방법으로 쾌락을 발견할지어다. 진화하는 인류는 온갖 종류의 정당한 자아 욕구의 충족, 오랫동안 위를 향한 생물학적 투쟁으로 얻는 열매를 탐구할지어다. 사람은 오늘날의 즐거움과 쾌락의 얼마큼은 수고하여 잘 벌었다. 그러나 너희는 운명의 목표를 잘 보아라! 쾌락이 자아 유지의 도구가 된 재산을 파괴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자살이다. 그리고 자아 욕구의 충족이 결혼의 파탄, 가정 생활의 퇴폐, 가정의 파괴를 가져온다면, 치명적인 값을 치른 것이다―가정은 사람이 진화로 얻은 최고의 성취이며, 문명이 살아남을 유일한 희망이다.
85:0.1 (944.1) 도덕적 관계를 제외하고 모든 영적 영향을 제쳐놓으면, 원시 종교는 생물학적 기원을 가졌고, 자연스럽게 진화로 발전한 것이다. 고등 동물은 무서움을 가졌지만 아무런 환상이 없고, 따라서 종교가 없다. 사람은 두려운 마음에, 환상의 수단으로 원시 종교를 만들어낸다.
85:0.2 (944.2) 인간종이 진화하면서 원시적 표현으로 숭배가 나타나는 것은 사람의 머리가 지금 인생과 다음 세상의 인생에 관하여 더 복잡한 개념을 형성할 수 있기 훨씬 전이며, 이것은 종교라고 부를 만하다. 초기의 종교는 완전히 지적 성질을 가졌고 관계되는 상황에 전적으로 달려 있었다. 예배의 대상은 무척 암시적이었다. 그 대상은 손 가까이 있거나, 생각이 단순한 원시 유란시아인의 보통 체험 속에서 크게 돋보이는 자연의 사물로 구성되었다.
85:0.3 (944.3) 일단 자연 숭배를 지나서 진화한 뒤에 종교는 영적 기원의 뿌리를 얻었지만, 그런데도 반드시 사회의 환경에 제약을 받았다. 자연 숭배가 개발됨에 따라서, 사람의 개념은 초인간 세계에서 분업(分業)을 상상했다. 호수ㆍ나무ㆍ폭포ㆍ비, 그리고 수백 가지 땅에 있는 다른 보통 현상을 대표하는 자연의 영들이 있었다.
85:0.4 (944.4) 필사 인간은 언제인가, 자신을 포함해서, 땅 표면에 있는 모든 것을 숭배했다. 사람은 또한 하늘에 있고 땅 밑에 있는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숭배하였다. 원시인은 온갖 권능의 표시를 두려워했다. 원시인은 이해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을 모두 숭배했다. 폭풍우ㆍ홍수ㆍ지진ㆍ산사태ㆍ화산ㆍ불ㆍ열ㆍ추위와 같은 막강한 자연력을 지켜보는 것은 사람의 확대되는 지성에 크게 감명을 주었다. 인생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일을 아직도 “하나님의 행위”요[1] [1723], “섭리의 신비한 처분”이라는 용어로 언급한다.
85:1.1 (944.5) 진화하는 사람이 숭배하게 된 첫 대상은 돌이었다. 오늘날 인도 남부의 카테리 종족은, 인도 북부의 수많은 부족들처럼 아직도 돌을 숭배한다. 야곱이 돌 위에서 잔 것은 돌을 공경했기 때문이며, 그 돌에 기름을 붓기까지 하였다. 라헬은 제 천막에 신성한 돌을 몇 개 숨겼다.
85:1.2 (944.6) 경작하는 들이나 목초지의 표면에서 돌이 아주 갑자기 나타나는 그 특징 때문에, 돌은 원시인에게 보통이 아니라는 깊은 인상을 주었다. 사람들은 침식 작용이나 흙이 뒤집힘으로 생기는 결과를 계산하지 못했다. 돌은 흔히 동물을 닮았기 때문에 또한 원시 민족들에게 크게 감명을 주었다. 문명화된 사람들은 산 속에 있는, 동물, 아니 사람의 얼굴을 아주 많이 닮은 수많은 돌의 형상에 눈을 빼앗긴다. 그러나 가장 깊은 영향을 준 것은 운석(雲石)이었고, 원시 인간은 이 운석들이 화려하게 타오르면서 대기를 뚫고 돌진하는 것을 보았다. 유성(流星)은 원시인에게 두려운 것으로 보였고, 그는 그러한 불타는 줄기가 영이 땅으로 향하여 가는 길을 표시한다고 쉽사리 믿었다. 특히 사람들이 나중에 그 운석들을 발견했을 때, 그러한 현상을 숭배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다른 돌을 더욱 크게 존경하게 만들었다. 벵갈에서는 많은 사람이 서기 1880년에 땅에 떨어진 운석을 숭배한다.
85:1.3 (945.1) 고대의 모든 씨족과 부족은 신성히 여기는 돌이 있었고, 대부분의 현대 민족은 어떤 종류의 돌―보석―을 얼마큼 숭상함을 나타낸다. 다섯 돌의 집단이 인도에서 존중되었다. 그리스에서 그것은 30개의 집합이었다. 홍인 사이에서 숭상받는 것은 보통, 돌의 동그라미였다. 로마인은 주피터를 부를 때 반드시 공중에 돌을 던졌다. 오늘날까지도 인도에서는 돌이 증인으로 쓰일 수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돌이 율법의 부적으로서 이용되었고, 그 위엄으로 위법자를 법정으로 마구 끌고갈 수 있었다. 그러나 단순한 필사자는 반드시 신과 엄숙한 의식(儀式)의 대상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러한 주물은 흔히 단지 정말로 숭배받는 대상의 상징일 뿐이다.
85:1.4 (945.2) 옛날 사람들은 돌에 있는 구멍을 특이하게 여겼다. 그러한 구멍 많은 바위는 병을 고치는 데 특별히 효력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돌을 달고 다니려고 귀에 구멍을 뚫은 것이 아니라 귀의 구멍을 열린 채로 두려고 돌을 집어넣었다. 현대에도 미신 믿는 사람들은 동전에 구멍을 뚫는다. 아프리카에서 원주민은 주물 돌을 놓고 법석을 떤다. 사실, 뒤떨어진 모든 부족과 민족들 사이에서 돌은 아직도 미신처럼 존경을 받는다. 돌 숭배는 지금도 전 세계에 퍼져 있다. 묘비는 떠나간 동료 존재의 귀신과 영을 믿는 신앙과 관련하여, 돌에 새겨진 형상과 우상의 살아남은 상징이다.
85:1.5 (945.3) 산 숭배가 돌 숭배를 따랐고, 처음에 사람이 모신 산들은 큰 암석층이었다. 신들이 산에서 산다고 믿는 것이 당장에 풍습이 되었고, 그래서 이 추가된 이유 때문에 높은 고지(高地)를 숭배하였다. 시간이 지나자, 어떤 산은 어떤 신과 연결되었고, 따라서 거룩하게 되었다. 무지하고 미신을 믿는 토착민은 동굴이 악령과 마귀가 있는 지하 세계로 이끈다고 믿었고, 이와 반대로 산들은 나중에 진화하는, 착한 영과 신의 개념과 동일시되었다.
85:2.1 (945.4) 사람은 처음에 식물을 두렵게 여겼고, 다음에는 거기서 나오는, 사람을 취하게 하는 술 때문에 식물(植物)을 숭배했다. 원시인은 술에 취하면 사람이 신답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한 체험에는 특별하고 신성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현대에도 알코올은 “주정(酒精)”이라[2] [1724] 알려져 있다.
85:2.2 (945.5) 시초의 인간은 두려움과 미신 같은 경외감을 가지고 싹트는 낟알을 바라보았다.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싹트는 낟알로부터 깊은 영적 교훈을 끌어내고 그 위에 종교적 관념의 기초를 둔 사람은 아니었다.
85:2.3 (945.6) 나무를 숭배하는 종파는 가장 오래 된 종교 집단에 속했다. 모든 옛 결혼식은 나무 밑에서 올렸고, 여자들은 아이를 바랐을 때 숲에서 튼튼한 참나무를 사랑하듯 껴안고 있는 것이 때때로 발견되곤 했다. 많은 식물과 나무가 정말로 약효가 있거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숭배를 받았다. 야만인은 모든 화학 작용이 초자연의 물력이 직접 활동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85:2.4 (945.7) 나무 귀신에 대한 관념은 다른 부족과 종족들 사이에서 크게 달랐다. 어떤 나무에는 친절한 영이 깃들었고, 다른 것들은 사람을 속이는 모진 귀신을 품었다. 핀란드인은 대부분의 나무에 친절한 영이 들어 있다고 믿었다. 스위스인은 오랫동안 나무를 불신했고, 나무가 교활한 귀신을 담고 있다고 믿었다. 인도와 러시아 동부의 거민들은 나무 귀신이 모질다고 생각했다. 파타고니아인은 옛날 셈 족속처럼, 아직도 나무를 숭배한다. 나무 숭배를 그만둔 지 오랜 뒤에도, 히브리인은 숲에서 사는 다양한 신을 계속 섬기었다. 중국을 제외하고, 한때 생명나무를 믿는 보편적 종파가 있었다.
85:2.5 (946.1) 점치는 나무 막대기로 지구의 표면 밑에 있는 물이나 귀금속을 탐지할 수 있다는 믿음은 옛날 나무 종파의 유물이다. 5월제 기둥, 크리스마스 나무, 그리고 나무를 톡톡 두드리는 미신 관습은 나무를 숭배하는 옛 풍습과 후일의 나무 종파들의 어떤 것을 지속한다.
85:2.6 (946.2) 가장 일찍 있었던 형태의 자연 숭배 가운데 다수는 나중에 진화하는 숭배 기술과 섞이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 깨어나는 인류의 종교적 성품이 영적 영향의 자극에 충분히 민감해지기 오래 전에, 보조 지성이 활성화시킨 가장 이른 종류의 숭배가 작용하고 있었다.
85:3.1 (946.3) 원시인은 고등 동물에 대하여 특이하고 친근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선조들은 동물과 함께 살아 왔고 그들과 교미까지 하였다. 아시아 남부에서는 사람의 혼이 동물 형태를 입고 땅으로 돌아온다고 일찍부터 믿었다. 이 관념은 동물을 숭배하는, 그보다 더 일찍 있던 관습의 잔재이다.
85:3.2 (946.4) 시초의 인간들은 동물의 힘과 교묘함 때문에 동물을 존경했다. 그들은 어떤 생물의 날카로운 후각과 멀리 보는 눈은 영이 안내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모든 동물이 어떤 민족에게, 어느 때인가 숭배를 받았다. 그러한 숭배 대상에는 반인반마(半人半馬) 또는 인어(人魚)와 같이, 반은 인간이고 반은 동물이라고 간주된 생물이 있었다.
85:3.3 (946.5) 히브리인은 히스기아 왕의 시절까지 뱀을 숭배했고, 힌두교인은 아직도 집 뱀과 친한 관계를 유지한다. 중국인의 용(龍) 숭배는 뱀교가 살아남은 것이다. 뱀의 지혜는 그리스 의술의 상징이었고, 현대 의사들이 아직도 상징으로 이용한다. 뱀을 홀리는 기술은 뱀 사랑 종파의 여자 샤먼 시절부터 내려왔는데, 이 샤먼들은 날마다 뱀에게 물린 결과로 면역이 되었으며, 사실은 진짜 뱀독에 중독이 되었고 이 독이 없이 지낼 수 없었다.
85:3.4 (946.6) 곤충과 기타 동물의 숭배는 후일에 황금률―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 바라는 대로 남(모든 형태의 생명)에게 해 주기―를 잘못 풀이함으로 조장되었다. 옛날 사람들은 한때 새들의 날개가 모든 바람을 일으킨다고 믿었고, 따라서 날개 달린 모든 생물을 무서워하고 숭배했다. 초기의 노르딕인은 해나 달의 일부를 먹어 버린 이리가 일식(日蝕)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힌두인은 말의 머리를 가진 비시누를 흔히 보여준다. 동물적 상징은 잊혀진 신이나 사라진 종파를 흔히 대표한다. 진화 종교에서 일찍부터 양은 희생 동물의 전형(典型)이 되었고, 비둘기는 평화와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85:3.5 (946.7) 종교에서는 상징이 최초에 숭배하던 관념을 갈아치우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그 상징은 좋거나 나쁠 수 있다. 그리고 상징은 우상을 직접 숭배하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되며, 우상 숭배에서는 물질 대상을 직접, 실제로 숭배한다.
85:4.1 (946.8) 인류는 땅ㆍ공기ㆍ물ㆍ불을 숭배해 왔다. 원시 종족들은 샘물을 모시고 강을 숭배했다. 지금도 몽골리아에는 영향력이 큰 강(江) 종파가 번성한다. 세례는 바빌론에서 종교 의식이 되었고, 그리스인은 해마다 목욕 의식을 거행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부글거리는 샘물, 용솟음치는 샘, 흐르는 강, 성난 격류에 영들이 거한다고 상상하기가 쉬웠다. 움직이는 물은 이 단순한 사람들에게 영이 살아 움직이는 것과 초자연의 힘을 믿도록 생생하게 감명을 주었다. 어떤 때는 어떤 강의 신을 성나게 할까 두려워, 물에 빠지는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 뻗기를 거절하곤 했다.
85:4.2 (947.1) 많은 사물과 수많은 사건이 다른 시대에 다른 민족들에게, 종교적 자극으로 작용하였다. 인도의 여러 산(山) 부족들은 아직도 무지개를 숭배한다.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무지개는 거대한 하늘 뱀이라고 생각되었다. 히브리인과 기독교인은 무지개를 “약속의 활”이라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세계의 한 구석에서 유익하다고 여기는 영향력을 다른 지역에서 불길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동풍은 남 아메리카에서 신인데, 그 바람이 비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동풍이 악마인데, 먼지를 불러오고 가뭄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옛 베두인 족속은 자연 영이 모래 회오리바람을 일으킨다고 믿었고, 모세의 시절에도 자연 영들을 믿는 관념이 충분히 강해서, 그것들이 히브리 신학에서 불ㆍ물ㆍ공기의 천사로 지속되는 것을 보장했다.
85:4.3 (947.2) 수많은 원시 부족과 초기의 많은 자연 종파가 구름ㆍ비ㆍ우박 모두를 무서워하고 숭배했다. 천둥과 번개가 따르는 폭풍은 원시인이 두려움에 질리게 만들었다. 그는 이 자연력의 교란에 너무 감명 받아서, 천둥을 성난 신의 목소리로 여겼다. 불의 숭배와 번개를 무서워하는 태도는 서로 연결되었고, 많은 초기 집단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85:4.4 (947.3) 두려움에 질린 원시 필사자의 머리 속에서 불은 마술과 섞였다. 마술을 신봉하는 자는 주문(呪文)을 실습할 때, 어쩌다 생긴 긍정적 결과를 눈에 선하게 기억하지만, 몇십 번의 부정적 결과, 철저한 실패를 태연하게 잊어버린다. 불의 숭배는 페르시아에서 절정에 이르렀고, 거기서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어떤 부족들은 불을 하나의 신 그 자체로 섬기었다. 다른 부족들은 불을 그들이 존경하는 신들의 영, 정화(淨化)하고 씻어 버리는 영의 타오르는 상징으로 모셨다. 베스타[3] [1725] 여신을 섬기는 처녀들은 신성한 불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고, 20세기에 많은 종교적 예배 의식의 일부로서 아직도 사람들은 촛불을 켠다.
85:5.1 (947.4) 바위ㆍ산ㆍ나무ㆍ동물의 숭배는 자연히 성장해서, 자연력을 두렵게 섬기는 단계를 거치고, 해ㆍ달ㆍ별을 신으로 만들기까지 발전했다. 인도와 기타 지역에는 별이, 육체를 입은 삶을 떠난 위대한 사람들의 영화롭게 된 혼이라 여겼다. 갈대아의 점성가들은 자신들이 하늘 아버지와 땅 어머니의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85:5.2 (947.5) 달 숭배는 태양 숭배를 앞섰다. 달의 숭상은 사냥하던 시대에 절정에 이르렀고, 한편 태양 숭배는 그 뒤의 농업 시대에 주요한 종교 예식이 되었다. 태양 숭배는 처음에 인도에서 널리 뿌리를 내렸고, 거기서 가장 오랫동안 견디었다. 페르시아에서 태양 숭배는 후일에 미트라 종파를 낳았다. 많은 민족 사이에서 태양은 임금의 선조라고 여겼다. 갈대아인은 “우주의 일곱 동그라미”의 중심에 태양을 놓았다. 후일의 문명은 한 주의 첫날을 그 이름으로 불러 태양에 영예를 돌렸다.
85:5.3 (947.6) 태양신은 처녀에게서 태어난 운명의 아들들의 신비한 아버지라고 생각되었고 이 아들들은 때때로 은혜를 받은 민족에게 구세주로서 수여된다고 생각되었다. 언제나 어떤 신성한 강에 누가 이 초자연적 아기들을 떠내려 보냈고, 그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구출되었으며, 그 뒤에 자라서 그 민족에게 기적의 인물과 구원자가 되곤 하였다.
85:6.1 (948.1) 땅의 표면에, 그리고 위로 하늘에 있는 모든 다른 것을 숭배했으니까, 사람은 자신을 찬미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생각이 단순한 야만인은 짐승ㆍ사람ㆍ신을 조금도 뚜렷이 구별하지 않는다.
85:6.2 (948.2) 시초의 인간은 모든 특별한 사람을 초인간으로 여겼고, 그러한 존재들을 아주 두려워해서, 경외하는 느낌으로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글자 그대로 그들을 숭배했다. 쌍둥이를 낳는 것조차도 아주 운이 좋든지, 아니면 아주 운이 나쁘다고 생각되었다. 미치광이, 간질병자, 정신 박약자는 흔히 머리가 정상인 동료들의 숭배를 받았고, 그들은 그러한 비정상 존재 속에 신이 계신다고 믿었다. 사제ㆍ임금ㆍ선지자가 숭배를 받았다. 사람들은 옛날의 거룩한 자들이 신들에게서 영감을 받는다고 우러러보았다.
85:6.3 (948.3) 부족의 추장들은 죽고 나서 신으로 대접받았다. 나중에는 탁월한 사람들이 죽고 나서 성인(聖人)이 되었다. 하늘의 도움 없이 일어나는 진화는 죽은 인간의 영, 영화롭게 되고 높아지고 진화한 영보다 더 높은 신을 만들어 낸 적이 없다. 진화의 초기에서 종교는 자체의 신들을 만들어낸다. 계시를 내리는 과정에서 신들은 종교를 형성한다. 진화 종교는 필사 인간의 형상과 모습을 따라서 그 신들을 만들어낸다. 계시 종교는 필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으로 진화시키고 변화시키려고 애쓴다.
85:6.4 (948.4) 귀신인 신들은 인간의 기원을 가졌다고 생각되었는데, 이들은 자연 신(神)과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연 숭배는 만신전―신들의 자리로 높여진 자연의 영들―을 진화시켰기 때문이다. 자연을 숭배하는 종파들은 나중에 등장하는 귀신 종교를 따라서 계속 발전하였고, 서로 영향을 주었다. 많은 종교 체계는 두 가지 신의 개념, 자연 신과 귀신 신을 포함하였다. 귀신 영웅이자 또한 번개의 주인인 토르가 보여주다시피, 어떤 신학에는 이 개념들이 뒤범벅이 되어 서로 얽혔다.
85:6.5 (948.5)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숭배하는 것은, 현세의 통치자들이 백성에게 그러한 숭배를 명령하고 그러한 요구를 정당화하면서, 그들이 신으로부터 내려왔다고 주장했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85:7.1 (948.6) 자연 숭배는 원시 남녀의 머리 속에서 자연히, 저절로 생긴 듯 보일지 모르며, 또 그렇게 생겨났다. 그러나 그동안 언제나 바로 이 원시인의 머리 속에서 여섯째 보조 영이 작용하고 있었고, 그 영은 인간 진화의 이 단계에서 지도하는 영향력으로서 이 민족들에게 이전에 수여되었다. 이 영은, 그 첫 표현이 아무리 원시적이라도, 인간종의 예배 욕구를 항상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동물을 무서워하는 것은 경배하는 표현을 자극했고, 그 초기의 관습이 자연의 대상물에 집중되었는데도, 예배의 영은 무엇인가 숭배하고 싶은 인간의 충동에 분명한 기원을 주었다.
85:7.2 (948.7) 생각이 아니라 느낌이, 모든 진화적 발전에 안내하고 고삐를 쥐는 영향이었다는 것을 너희는 기억해야 한다. 원시인의 머리에는 두려움, 회피, 영예 돌리기, 숭배 사이에 거의 차이가 없다.
85:7.3 (948.8) 예배의 욕구가 지혜―명상하고 체험을 생각하는 것―의 훈계와 지도를 받을 때, 그때 진정한 종교 현상으로 비로소 발전한다. 일곱째 보조 영, 곧 지혜의 영이 효과적으로 봉사할 때, 예배하면서 사람은 자연과 자연의 대상으로부터, 자연의 하나님에게, 자연스런 만물의 영원한 창조자에게 비로소 고개를 돌린다.
86:0.1 (950.1) 이전의 원시적 예배 욕구로부터 종교가 진화하는 것은 계시에 달려 있지 않다. 보편적 영이 수여한 여섯째와 일곱째 지성 영의 지휘하는 영향 하에 인간의 지성이 정상으로 작용하면, 그러한 발전을 보장하기에 전적으로 충분하다.
86:0.2 (950.2) 인간의 의식 속에서 자연이 인격화되고, 영이 되고, 결국 신(神)이 됨에 따라서, 사람이 최초에 자연력에 대하여 가졌던 두려움, 종교가 있기 전의 두려움은 차츰 종교성을 띠게 되었다. 그러므로 원시 종류의 종교는, 진화하는 동물 지성이 일단 초자연의 것에 관한 개념을 생각해 본 뒤에, 그런 지성의 심리적 타성이 낳는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결과였다.
86:1.1 (950.3) 신을 예배하는 자연스러운 욕구를 제쳐놓고, 초기의 진화 종교의 뿌리는 인간이 우연―이른바 운(運), 보통 일어나는 일―을 체험한 데 기원이 있다. 원시인은 먹을거리를 사냥하는 사람이었다. 사냥의 결과는 늘 변하는 것이 틀림없고, 이것은 행운과 불운이라고 사람이 해석하는 그런 체험을 낳는다. 불운은 험한 경지에서 아슬아슬하고 시달리는 삶을 항상 살던 남녀의 인생에서 큰 요인이었다.
86:1.2 (950.4) 야만인의 제한된 지적 시야(視野)는 우연에 너무 치중하였고, 그래서 운은 그의 인생에서 항상 있는 요인이 된다. 원시의 유란시아인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하여 싸웠다. 그들은 우연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위험한 인생을 살았다. 알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재난을 늘 두려워하는 것이 절망의 구름이 되어 이 야만인들 위에 떠 있었고, 이것은 실지로 모든 즐거움이 빛을 잃게 만들었다. 그들은 불운을 가져올 무슨 일을 저지르는가 늘 두려워하며 살았다. 미신을 믿는 야만인은 행운이 이어지는 것을 언제나 두려워했고, 그런 행운이 재난이 다가올 분명한 전조(前兆)라고 생각했다.
86:1.3 (950.5) 불운이 올까 이렇게 늘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을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사람이 떠돌아다니다가 행운을 만날지 모르는데―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데―어째서 열심히 일하고 불운을 거두어야 하는가―무언가 공들이고 아무것도 못 거두어야 하는가? 생각 없는 사람들은 행운을 잊어버린다―당연하다고 생각한다―그렇지만, 불운은 뼈저리게 기억한다.
86:1.4 (950.6) 초기의 인간은 불안 속에서, 우연―불운―을 항상 두려워하면서 살았다. 인생은 흥미 있는 우연(偶然)의 장난이었고, 존재하는 것은 노름이었다. 얼마큼 문명화된 사람들이 아직도 우연을 믿고, 남아 있는 노름 성향을 보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원시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언가 얻으려는 정열, 그리고 무언가 수고를 들이고 아무것도 못 얻는 두려움, 이 두 가지 큰 관심거리 사이에 갈팡질팡했다. 그리고 목숨을 거는 이 노름은 초기 야만인의 머리에 주요한 관심거리요 최고의 매력이었다.
86:1.5 (951.1) 후일에 양치는 사람들은 바로 이 우연과 운(運)의 관점을 가졌고, 그후에 농사꾼들은 수확이 사람이 거의 또는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많은 것에 직접 영향을 받는 것을 더욱 의식하였다. 농부는 더위와 추위 뿐 아니라, 가뭄ㆍ홍수ㆍ우박ㆍ폭풍우ㆍ해충, 식물의 병으로 자신이 손해보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모든 자연의 영향이 개인의 번영에 영향을 주었으므로 이를 행운이나 불운이라고 여겼다.
86:1.6 (951.2) 이 우연과 운의 개념은 모든 옛 민족의 철학에 진하게 스며들었다. 최근에도 솔로몬의 지혜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내가 돌아와서 보니, 빠른 자가 달리기에 이기지 않고, 힘센 자가 전쟁에 이기지도 않으며, 지혜로운 자가 빵을 얻지도 않고, 명철한 사람이 부(富)를 얻지도 않으며, 기술 있는 사람이 은혜를 받지도 않도다. 그러나 운명과 우연이 저희 모두에게 내리느니라. 이는 사람이 제 운명을 알지 못함이라. 물고기가 나쁜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덫에 걸리는 것 같이, 사람의 자식들도 나쁜 때가 갑자기 닥칠 때, 그때 덫에 걸리느니라.”
86:2.1 (951.3) 걱정은 야만인의 머리 속에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남자와 여자가 지나친 걱정에 빠질 때 다만 까마득히 먼 조상의 자연 상태로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걱정이 실제로 고통스러워질 때, 걱정은 활동을 억제하고, 어김없이 진화적 변화와 생물학적 적응을 시작한다. 고통과 괴로움은 점진적 진화에 필수이다.
86:2.2 (951.4) 살려는 투쟁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어떤 뒤떨어진 부족들은 아직도 새로 해가 뜰 때마다 울부짖고 슬퍼한다. 원시인은 끊임없이 물었다, “누가 나를 괴롭히는가?” 곤경에 빠지는 물질적 근원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영으로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신비스러운 것을 두려워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경외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함으로부터 종교가 태어났다. 이처럼 자연을 두려워하는 것은 처음에 우연 때문에, 그리고 나서 신비스러움 때문에, 살려는 투쟁에서 한 요인이 되었다.
86:2.3 (951.5) 원시인의 머리는 논리가 있었으나 영리하게 연결지을 관념이 거의 없었다. 야만인의 머리는 교육받지 않았고, 도무지 세련되지 않았다.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을 따르면, 야만인은 이것들이 원인과 결과라고 보았다. 문명화된 사람이 미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야만인의 경우에 그저 단순한 무지에 불과했다. 인류는 목적과 결과 사이에 반드시 어떤 관계가 있지는 않다는 것을 느리게 배웠다. 행위와 그 결과 사이에 존재에서 여러 가지 반응이 나타난다는 것을 인간들은 겨우 비로소 깨닫고 있다. 야만인은 만질 수 없고 추상적인 것을 모조리 의인화하려고 애쓰며, 따라서 자연과 우연은 귀신―영―으로, 나중에는 신으로, 인격화된다.
86:2.4 (951.6) 사람은 자연히 자기를 위해서 최선이라고 판단되는 것, 당장이거나 먼 앞날에 이익이 되는 것을 믿는 경향이 있다. 자기 이익은 대체로 논리를 흐리게 만든다. 야만인과 문명화된 사람들의 생각하는 머리의 차이는 성질보다 내용의 차이, 질보다 정도의 차이이다.
86:2.5 (951.7) 그러나 이해하기 힘든 것을 초자연적 원인의 탓으로 계속 돌리는 것은 온갖 형태의 지적으로 힘든 일을 피하는, 게으르고 편리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운(運)은 단지 인간이 존재하던 어느 시대에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을 포함하려고 만들어 낸 용어일 뿐이다. 운은 사람들이 꿰뚫어볼 수 없거나 그렇게 하기 싫은 현상을 가리킨다. 우연(偶然)은 사람이 너무 무지하거나 게을러서 원인을 밝히지 못하는 것을 알리는 낱말이다. 사람들은 호기심과 상상력이 결핍되었을 때, 종족들이 창의력과 모험이 모자랄 때에야 자연 현상을 우연이나 불운으로 여긴다. 생명 현상의 탐구는 머지 않아 우연ㆍ행운, 그리고 이른바 우연에 대한 사람의 관념을 깨뜨리며, 그 자리에, 분명한 원인이 모든 결과에 앞서는, 법칙과 질서가 있는 우주를 채워 넣는다. 이렇게 존재하면서 닥치는 두려움은 살아가는 기쁨으로 바뀐다.
86:2.6 (952.1) 야만인은 모든 자연이 살아 있다고, 자연 속에 무엇이 들어 있다고 보았다. 문명화된 사람은 가는 길에 걸리고 그에게 부딪치는 생명 없는 물건을 아직도 발로 걷어차고 저주한다. 원시인은 결코 어떤 것도 우연이라 여기지 않았다. 모든 것에는 반드시 의도(意圖)가 있었다. 원시인에게 운명의 분야, 운의 작용, 영 세계는 원시 사회와 마찬가지로, 그저 조직되지 않은 채로 아무렇게나 펼쳐 있었다. 행운은 영 세계가 변덕스럽게 기분대로 반응하는 것이라고 보았고, 나중에는 신들의 유머라고 보았다.
86:2.7 (952.2) 그러나 모든 종교가 물활론(物活論)으로부터 발전하지는 않았다. 초자연의 것들에 대한 다른 개념들은 물활론과 같은 시대에 있었고, 이 여러 관념도 또한 신의 숭배로 이끌었다. 자연주의는 종교가 아니다―종교의 산물이다.
86:3.1 (952.3) 죽음은 진화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충격이요, 가장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우연과 신비의 조합이었다. 생명의 신성함이 아니라 죽음의 충격이 두려움을 불러일으켰고, 이처럼 효과적으로 종교를 육성했다. 야만인 민족들 중에서 죽음은 보통 사고(事故) 때문에 생겼고, 그래서 사고로 생기지 않은 죽음은 갈수록 더 신비스러워졌다. 기대하는 자연 생명의 끝은 원시인의 의식 속에서 또렷하지 않았고, 죽음이 불가피한 것을 사람이 깨닫는 데 기나긴 세월이 걸렸다.
86:3.2 (952.4) 초기의 인간은 생명을 사실로 받아들였고, 한편 죽음을 어떤 종류의 방문으로 여겼다. 모든 종족은 죽지 않은 사람들에 관한 전설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죽음에 대한 초기 태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전통이다. 인간의 머리 속에는 흐릿하고 체계 없는 영 세계에 대하여 뿌연 개념이 이미 존재했는데, 거기서부터 인생에서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것이 왔고, 설명할 수 없는 여러 현상이 적힌 이 긴 목록에 죽음이 첨가되었다.
86:3.3 (952.5) 인간의 모든 병과 자연사는 처음에 영(靈)의 영향 때문이라고 믿었다. 오늘날에도 어떤 문명화된 종족들은 질병을 “적”이 일으킨 것이라고 보며, 종교 예식에 의존하여 이를 치유하려고 한다. 나중에 더 복잡한 신학 체계는 여전히 죽음을 영 세계의 행위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이 모든 것이 원죄(原罪)와 인간의 타락과 같은 교리를 낳았다.
86:3.4 (952.6) 질병과 죽음이 찾아온 앞에서 인간이 약한 것을 인식함과 더불어, 막강한 자연력 앞에 무력(無力)함을 깨달은 것은 야만인으로 하여금 초물질 세계로부터 도움을 찾도록 재촉했고, 그는 이 초물질 세계가 이 신비스러운 인생의 부침(浮沈)의 근원이라고 어렴풋이 상상했다.
86:4.1 (952.7) 필사 인격자의 초물질 단계 개념은 의식하지 않고서, 순전히 우연하게 일상 생활의 사건들과 귀신 꿈을 연결지어 생겨났다. 돌아가신 추장에 관하여 부족에서 몇 사람이 동시에 꿈을 꾸는 것은 그 늙은 추장이 정말로 어떤 형태로 돌아왔음을 확신하게 하는 증거인 것처럼 보였다. 땀투성이가 되어 벌벌 떨고 소리치면서, 그러한 꿈에서 깨어나던 야만인에게는 그것이 모두 아주 현실이었다.
86:4.2 (953.1) 미래에 존재한다는 관념이 꿈에 기원을 가진 것은, 눈에 보이는 사물을 써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을 언제나 상상하는 경향을 설명한다. 꿈ㆍ귀신, 앞날의 생명에 대한 이 새 개념은 즉시, 자아를 보존하는 생물학적 본능과 연결하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효과적으로 해독하기 시작했다.
86:4.3 (953.2) 초기의 인간은 또한, 숨에 대하여, 특히 추운 기후에서 많이 걱정했는데, 그런 곳에서 숨은 내쉬었을 때 구름처럼 보였다. 생명의 호흡은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별하는 유일한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숨이 몸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잠자는 동안 온갖 종류의 야릇한 일을 행하는 꿈은 인간의 주위에 비물질인 무엇이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인간의 혼에 대한 가장 원시적 개념, 즉 귀신은, 호흡과 꿈 개념의 체계로부터 생겨났다.
86:4.4 (953.3) 결국 야만인은 자신이 2중―몸과 호흡―이라고 생각했다. 숨에서 몸을 빼면 영, 곧 귀신이 되었다. 아주 분명히 인간에 기원을 가졌지만, 귀신이나 영은 초인간으로 간주되었다. 몸을 잃어버린 영이 존재한다는 이 관념은 드문 것, 특별한 것, 흔치 않은 것,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일어나는 것을 설명하는 듯하였다.
86:4.5 (953.4) 죽은 뒤에 살아남는다는 원시 신조는 반드시 불멸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스물을 넘어서 셀 수 없는 존재들은 도저히 무한과 영원을 상상할 수 없다. 그보다 그들은 거듭 육신화하는 것을 생각했다.
86:4.6 (953.5) 주황 민족은 특히 윤회와 환생(還生)의 신앙에 빠졌다. 이 환생 신앙은 자손이 선조들의 유전과 특성을 닮은 것을 지켜본 데서 생겼다. 조부모와 기타 선조들을 따라 아이들의 이름을 짓는 관습은 환생을 믿기 때문이었다. 후일의 어떤 종족들은 사람이 세 번에서 일곱 번까지 죽는다고 믿었다. (저택 세계들에 관한 아담의 가르침의 잔재인) 이 관념과 계시된 종교의 많은 다른 찌꺼기를 20세기 미개인들의 교리, 다른 면에서 불합리한 교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86:4.7 (953.6) 초기의 인간은 지옥이나 앞날의 벌에 대하여 아무 관념이 없었다. 야만인은 미래의 인생이, 온갖 악운을 빼고, 꼭 이 인생과 같다고 보았다. 나중에는, 좋은 귀신과 나쁜 귀신이, 따로따로의 운명―천국과 지옥―을 가졌다고 상상했다. 그러나 많은 원시 종족이 사람이 이 인생을 떠난 그대로 다음 인생에 들어간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늙고 초라하게 된다는 생각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늙은이들은 너무 허약해지기 전에 죽음을 당하는 것을 훨씬 더 좋아했다.
86:4.8 (953.7) 거의 모든 집단이 귀신이 된 혼의 운명에 관하여 다른 생각을 가졌다. 그리스인은 약한 사람이 약한 혼을 가졌음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러한 핏기 없는 혼들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장소로 하데스를 발명했다. 튼튼하지 못한 이 종자들은 또한 그림자가 짧다고 생각되었다. 초기의 안드 족속은 그들의 귀신이 선조의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중국인과 에집트인은 혼과 몸이 같이 남아 있다고 한때 믿었다. 에집트인 사이에서 이것은 조심스럽게 무덤을 건축하고 몸을 보존하는 노력으로 이끌었다. 현대의 민족들도 죽은 자의 부패를 멈추게 하려고 애쓴다. 히브리인은 개인의 유령(幽靈) 복사품이 저승으로 내려간다, 그것은 살아 있는 자의 땅으로 돌아올 수 없다고 상상했다. 그들은 혼의 발전에 관한 교리에서 이 중요한 걸음을 내디디었다.
86:5.1 (953.8) 사람의 비물질 부분을 귀신ㆍ영ㆍ그림자ㆍ유령ㆍ망령, 나중에는 혼, 이렇게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렀다. 혼은 초기 인간의 꿈 속 복사판이었으며, 만지는 데 반응하지 않는 것을 제쳐놓고, 필사자 자신과 모든 면에서 똑같았다. 꿈 속 복사판에 대한 관념은 사람 뿐 아니라,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모두가 혼을 가졌다는 개념으로 바로 이끌었다. 이 개념은 자연이 영을 가졌다는 관념을 오랫동안 지속하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에스키모인은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이 영을 가졌다고 아직도 생각한다.
86:5.2 (954.1) 몸이 없는 혼의 소리를 듣고 그 혼을 볼 수도 있지만, 만질 수는 없었다. 차츰 종족의 꿈 생활은 진화하는 이 영 세계의 활동을 발전시키고 확대해서, 죽음은 마침내 “귀신을 버리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동물이나 거의 다름없는 부족들을 제외하고, 모든 원시 부족은 어떤 혼 개념을 개발했다. 문명이 진보하자, 미신 같은 이 혼 개념은 깨어지고, 혼은 하나님을 아는 필사 지성과 그 안에 깃드는 신다운 영, 곧 생각 조절자가 합동으로 창조하는 것이라는 새 개념을 얻으려고 사람은 온전히 계시와 개인의 종교적 체험에 의존한다.
86:5.3 (954.2) 옛날의 필사자들은 깃드는 영(靈)과 진화 성질을 가진 혼(魂), 이 개념들을 보통 구별하지 못했다. 몸이 없는 혼이 날 때부터 몸에 붙어 있는가, 아니면 몸을 소유하는 외부의 힘인가 야만인은 무척 혼동하고 있었다. 혼란한 가운데 논리적 생각의 부재(不在)는 혼ㆍ귀신ㆍ영에 관하여 야만인의 관점이 어째서 터무니없이 모순되는가 설명한다.
86:5.4 (954.3) 향기가 꽃에서 나오는 것 같이 혼이 몸에서 나온다고 생각되었다. 옛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혼이 여러 방법으로 몸을 떠날 수 있다고 믿었다:
86:5.5 (954.4) 1. 흔하게 잠시 기절할 때.
86:5.6 (954.5) 2. 잠 속에서, 자연스럽게 꿈을 꾸면서.
86:5.9 (954.8) 야만인은 재채기를 혼이 몸에서 달아나려다가 그만둔 것으로 보았다. 깨어 있고 지키고 있으면, 몸은 혼이 도망하려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나중에는, 재채기 다음에, “하나님이 너에게 복을 줄지어다!”하는 것 같이, 언제나 종교적 표현이 따랐다.
86:5.10 (954.9) 진화의 초기부터 잠은 귀신 혼이 몸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여겼고, 잠자는 사람의 이름을 말하거나 외침으로 그 혼을 다시 불러들일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종류의 무의식 상태에 있을 때 혼은 더 멀리 있다고, 아마 영원히 도망치려 하는 것―죽음이 다가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꿈은 잠을 잘 때, 몸을 잠깐 떠나 있는 동안 혼이 겪는 체험이라고 여겼다. 야만인은 깨어서 겪는 체험의 어떤 부분과 마찬가지로, 꿈이 똑같이 현실이라고 믿는다. 옛 사람들은 혼이 몸으로 돌아갈 겨를을 가지도록 잠자는 사람을 차츰차츰 깨우는 관습을 지켰다.
86:5.11 (954.10) 오랜 세월을 통해서 계속, 사람들은 밤 동안에 나타나는 유령에 겁을 먹었고, 히브리인은 예외가 아니었다. 모세가 금지령을 내렸는데도,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이 꿈 속에서 그들에게 말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모세는 옳았다. 왜냐하면 평범한 꿈은 영 세계의 성격자들이 물질 존재와 교통하려 할 때 쓰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86:5.12 (954.11) 옛날 사람들은 혼이 동물이나 생명이 없는 물체에도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동물 신분을 가진 인간 늑대 관념을 낳았다. 사람이 낮에는 법을 지키는 시민이 될 수 있으나, 잠들었을 때 그의 혼은 밤 동안에 약탈 행위를 하느라 쏘다니려고 늑대나 어떤 다른 동물에 들어갈 수 있었다.
86:5.13 (955.1) 원시인은 혼이 숨과 결합되어 있고, 혼의 성질을 숨을 불어 나누어 주거나 옮겨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용감한 추장은 갓난아이에게 숨을 내뿜고, 이렇게 용기를 나누어 주곤 했다. 초기의 기독교인 사이에서 성령을 주는 예식에는 후보자에게 숨을 불어 주는 일이 뒤따랐다. 시편의 저자는 말했다: “주의 말씀으로 하늘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 있는 온 무리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숨을 불어 만들어졌도다.” 맏아들이 죽어 가는 아버지의 마지막 숨을 붙잡으려고 애쓰는 것이 오랫동안 풍습이었다.
86:5.14 (955.2) 나중에는 숨과 똑같이,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존중하게 되었다. 물 속에 비치는 자신의 그림자를 또한 때때로 자아의 복사판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보았고, 사람들은 미신의 두려움을 가지고 거울을 다루었다. 문명화된 많은 사람이 지금도 사람이 죽었을 경우에 거울을 벽으로 돌려놓는다. 어떤 뒤처진 부족들은 그림ㆍ도화(圖畵)ㆍ모형, 또는 형상을 만드는 것은 혼의 전부나 일부를 몸에서 빼낸다고 아직도 믿으며, 따라서 그러한 일이 금지된다.
86:5.15 (955.3) 혼은 일반적으로 숨과 동일한 것이라 생각되었지만, 또한 여러 민족은 혼의 위치를 머리ㆍ머리카락ㆍ심장ㆍ간ㆍ피ㆍ지방에 두었다. “아벨의 피가 땅에서 외친다”는 것은 한때 귀신이 피 속에 있다는 관념을 표현한다. 셈 족속은 혼이 몸의 지방(脂肪) 속에 거한다고 가르쳤으며, 동물의 지방을 먹는 것은 많은 사람 사이에서 금기였다. 머리 사냥은, 머리 가죽 벗기기와 마찬가지로, 적의 혼을 사로잡는 방법이었다. 최근에 눈은 혼이 내다보는 창문이라고 생각되었다.
86:5.16 (955.4) 혼이 서너 개 있다는 교리를 고수하는 자들은 혼을 하나 잃는 것은 불쾌, 둘은 병, 셋은 죽음을 뜻한다고 믿었다. 혼 하나는 숨 속에, 하나는 머리에, 하나는 머리카락에, 하나는 심장에 살았다. 아픈 사람들은 그들의 헤매는 혼을 다시 잡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탁 트인 곳에서 활보하라는 조언을 받았다. 가장 위대한 주술사는 병든 사람의 아픈 혼을 새것, “새로 난 것”으로 바꾼다고 생각되었다.
86:5.17 (955.5) 바도난의 후손들은 두 혼, 숨과 그림자의 관념을 개발했다. 초기의 놋 족속은 사람이 두 인격으로, 혼과 몸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인간의 존재를 설명하는 이 철학은 나중에 그리스인의 관점에서 반영되었다. 그리스인 자신은 세 혼을 믿었다. 식물 혼은 위장에, 동물 혼은 심장에, 지적인 혼은 머리 속에 거한다고 믿었다. 에스키모인은 사람이 세 부분, 몸ㆍ혼ㆍ이름을 가진다고 믿는다.
86:6.1 (955.6) 사람은 자연 환경을 물려받고, 사회 환경을 익히고, 귀신에 쌓인 환경을 상상했다. 국가는 사람이 자연 환경에 반응한 것, 가정은 사회 환경에 반응한 것, 교회는 사람이 귀신에 둘러싸여 있다는 망상에 반응한 것이다.
86:6.2 (955.7) 인류의 역사에서 아주 일찍부터, 귀신과 영이 있는 공상(空想) 세계가 현실이라는 것을 보편적으로 믿었고, 새롭게 상상한 이 영 세계는 원시 사회에서 권력이 되었다. 온 인류의 정신 및 도덕 생활은 인간의 생각과 행위에서 이 새 요소가 나타남으로 영구하게 달라졌다.
86:6.3 (955.8) 극심한 두려움 때문에 후일에 원시 민족들의 모든 미신과 종교는 이 망상과 무지(無知), 이 주요 전제(前提) 조건 속에 압축되었다. 이것이 계시를 받기 직전까지 사람의 유일한 종교였고, 오늘날 세계의 많은 종족이 겨우 이 투박한 진화 종교를 가지고 있다.
86:6.4 (955.9) 진화가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행운은 좋은 영, 불운은 나쁜 영과 연결되었다. 변하는 환경에 할 수 없이 적응하는 불편은 불운으로, 귀신들이 불만을 가진 것으로 여겼다. 원시인은 타고난 예배 욕구와 우연에 관한 잘못된 개념으로부터 천천히 종교를 진화시켰다. 문명화된 사람은 이 우연의 사태를 극복하려고 보험이라는 계획을 마련한다. 현대 과학은 가상하는 영과 변덕스러운 신들 대신에 보험 회계사에게 수학으로 계산하게 한다.
86:6.5 (956.1) 지나가는 각 세대는 선조들의 어리석은 미신에 빙그레 웃으며, 한편 깨우친 후손들이 더욱 빙그레 웃게 만들, 잘못된 생각 및 숭배를 계속 마음 속에 품는다.
86:6.6 (956.2) 그러나 마침내 원시인의 머리가 모든 타고난 생물학적 욕구를 초월하는 생각으로 차 있었다. 드디어 사람은 물질적 자극에 대한 반응보다 더 큰 어떤 것에 바탕을 둔 사는 기술을 발전시키려 하였다. 원시의 철학적 생활 방침의 시초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초자연적 생활 기준이 바야흐로 나타나려 했다. 왜냐하면 영 귀신이 성날 때 불운을 쏟아 붓고 기쁠 때 행운을 던진다면, 인간의 행동을 그에 따라서 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옳고 그른 것의 개념이 마침내 진화했고, 땅에서 어떤 계시가 있기 오래 전에, 이 모두가 일어났다.
86:6.7 (956.3) 이 개념이 고개를 들자, 늘 기분이 상한 영을 달래려는 길고도 쓸데없는 싸움, 진화 종교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신세, 그리고 무덤과 성전, 희생물과 사제(司祭)들에게 인간의 노력을 바치는, 오래 계속된 낭비가 시작되었다.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값을 치렀으나, 그 모든 비용을 치를 만했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사람은 비교적 옳고 그른 것을 자연스럽게 의식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윤리가 태어난 것이다!
86:7.1 (956.4) 야만인은 보험의 필요성을 느꼈고, 따라서 불운에 대비하여 마법의 보험 증서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두려워하고 미신을 믿고 공포에 떨고, 사제에게 선물을 바침으로 벅찬 값을 기꺼이 치렀다. 원시 종교는 단지 숲에서 사는 위험에 대하여 보험료를 내는 것이었다. 문명화된 사람은 산업에서 생기는 사고(事故)와 현대 생활 형태의 비상 사태에 대비하여 물질적 보험료를 낸다.
86:7.2 (956.5) 현대 사회는 사제와 종교의 영역으로부터 보험 장사를 빼앗고 있으며, 이것을 경제학 분야에 놓는다. 종교는 무덤을 지나서 생명을 보장하는 데 점점 더 관계하고 있다. 현대인, 적어도 생각하는 자는, 운을 통제하려고 이제 더 물 쓰듯 보험료를 내지 않는다. 불운에 대비하는 보험 계획으로서 종교가 예전에 작용한 것과 반대로, 종교는 더 높은 철학 수준으로 천천히 올라가고 있다.
86:7.3 (956.6) 그러나 이 옛 종교 관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숙명론에 젖고 희망 없이 비관에 빠지는 것을 막았다. 운명에 영향을 미치려고 적어도 무언가 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귀신을 두려워하는 종교는, 사람에게 귀신의 행동을 규제해야 한다는 것, 인간의 운명을 통제하는 초물질 세계가 있다는 것을 마음에 심어 주었다.
86:7.4 (956.7) 현대의 문명화된 종족들은 귀신 공포증이 행운과 흔한 생존의 불평등을 설명한다는 생각을 막 벗어나고 있다. 인류는 귀신과 영 때문에 불운이 생긴다고 설명하는 사슬에서 해방을 얻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생의 부침(浮沈)에 영적 원인이 있다는 그릇된 교리를 내버리고 있는 한편, 인간의 모든 불평등을 정치적 부적응, 사회의 불공평, 산업의 경쟁에 돌리라고 명령하는, 거의 똑같이 거짓된 가르침을 놀랍게도 기꺼이 받아들일 태도를 나타낸다. 그러나 새로운 입법, 자선 행위의 성장, 산업 재조직의 증가는, 그 자체가 아무리 좋아도, 출생한 사실과 생활에서 생기는 우연을 고쳐주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사실을 파악하고, 자연 법칙 안에서 지혜롭게 조종하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바라는 것을 얻고 바라지 않는 것을 피하게 만들 것이다. 과학적 행동으로 이끄는 과학 지식이 이른바 우연히 생기는 재난에 대하여 유일한 해독제이다.
86:7.5 (957.1) 산업과 전쟁, 노예 제도와 국가 정부는 자연 환경 안에서 사람이 사회적으로 진화하는 데 반응하여 생겨났다. 종교도 비슷하게 가상(假想)하는 귀신 세계, 망상하는 환경에 대하여 반응함으로 생겨났다. 종교는 자아를 유지하는 진화된 발전이었고, 최초에는 그릇된 개념이고 철저히 논리가 없었는데도, 효과가 있었다.
86:7.6 (957.2) 원시 종교는 헛된 두려움의 강력하고 거창한 힘을 이용해서, 초자연의 기원을 가진 진정한 영적 세력, 곧 생각 조절자의 수여를 위해서 인간 지성의 토양을 준비시킨다. 신다운 조절자는 그 뒤로 언제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태도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변화시키려고 수고해 왔다. 진화는 느린가 싶지만, 틀림없이 효과가 있다.
87:0.1 (958.1) 귀신 숭배는 불운의 위험을 상쇄하는 수단으로서 진화했으며, 그 원시적 종교 관행을 지키는 것은 불운을 걱정하고 죽은 자를 지나치게 두려워함으로 생긴 결과였다. 이 초기 종교 가운데 아무것도 신을 인식하거나 초인간을 존경하는 것과 그다지 상관이 없었다. 그러한 의식(儀式)은 대체로 소극적이었고, 귀신을 피하거나 내쫓거나 강제하려고 고안되었다. 귀신 숭배는 재난에 대한 보험보다 더한 것도 덜한 것도 아니었고, 더 높은 앞날의 이익을 위한 투자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87:0.2 (958.2) 사람은 귀신 숭배와 오랫동안 격심한 투쟁을 해왔다. 인간의 역사에서 아무것도, 귀신 및 영 공포증에 사람이 비참하게 노예가 된 이 그림보다 더 측은한 느낌을 일으키도록 예정되지 않았다. 바로 이 두려움이 태어나면서, 인류는 종교적으로 진화하는 오르막길에서 발을 내디디었다. 인간의 상상력은 자아(自我)의 바닷가를 떠나갔고, 참된 신, 진정한 하나님 개념에 이를 때까지 또 다시 정박할 곳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87:1.1 (958.3) 죽음이 육체로부터 또 하나의 귀신을 해방시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을 무서워했다. 옛날 사람들은 죽음을 방지하려고, 새 귀신과 다투어야 하는 곤경을 피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귀신이 죽음의 장면을 떠나서, 죽은 자의 땅으로 길을 떠나게 유인하려고 언제나 안달하였다. 죽을 때 귀신이 솟아나서 나중에 귀신의 고향으로 떠나기까지의 과도기라 생각된 동안에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귀신을 가장 무서워했고, 이 귀신의 고향은 거짓 하늘에 대한 흐릿한 원시 개념이었다.
87:1.2 (958.4) 귀신이 초자연 능력이 있다고 믿기는 했어도, 야만인은 귀신이 초자연 지능을 가졌다고는 도저히 생각하지 않았다. 귀신들의 눈을 가리고 속이려는 노력으로 많은 계교와 전술이 쓰였다. 문명화된 사람은 아직도 경건함을 겉으로 표시하면 어떻게든 전지(全知)한 신조차 속일 것이라는 희망에 기대를 많이 건다.
87:1.3 (958.5) 원시인은 질병을 두려워했는데, 병이 흔히 죽음의 전조(前兆)인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부족의 주술사가 앓는 사람을 고치지 못하면, 아픈 사람을 보통 가족 오두막에서 옮겼고, 더 작은 오두막으로 데려가거나, 아니면 노천에서 혼자 죽도록 버려두었다. 죽음이 일어난 집은 보통 부수어 버렸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집을 반드시 피했고, 이 두려움은 시초 인간으로 하여금 튼튼한 거처를 짓지 못하게 막았다. 두려움은 또한 영구한 촌락이나 도시의 건설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87:1.4 (958.6) 야만인들은 씨족의 한 사람이 죽었을 때 밤을 새우고 이야기했다. 시체 근처에서 잠이 들면 그들도 죽을까 두려워했다. 시체로부터 전염(傳染)되는 것은 죽은 자를 무서워하는 것이 옮음을 입증했고, 모든 민족이 죽은 자와 접촉이 있은 뒤에 개인을 깨끗하게 하려고 고안된 공들인 정화(淨化) 예식을 언젠가 이용하였다. 옛 사람들은 시체에게 빛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시체를 결코 어둠 속에 남아 있도록 버려두지 않았다. 20세기에 죽은 사람의 방에서 아직도 촛불을 켜며, 사람들은 아직도 죽은 자와 함께 깨어 있다. 이른바 문명화된 사람은 생활 철학에서 시체를 두려워하는 생각을 아직도 완전히 없앴다고 할 수 없다.
87:1.5 (959.1) 그러나 이 모든 두려움과 상관 없이, 사람들은 여전히 귀신을 속이려고 애썼다. 죽은 사람의 오두막이 파괴되지 않았으면, 결코 문이 아니라, 벽에 있는 구멍을 통해서 시체를 옮겼다. 귀신을 혼란에 빠지게 만들고, 귀신이 머무르는 것을 막고 돌아오지 못하게 보장하려고 이 절차를 밟았다. 조객(弔客)들은 또한 귀신이 따라오지 않도록 장례식으로부터 다른 길로 돌아갔다. 귀신이 무덤에서 되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장하려고, 뒷걸음질과 수십 가지 다른 전략이 쓰였다. 남녀는 귀신을 속이려고 흔히 옷을 바꾸어 입었다. 애도하는 복장은 살아남은 사람들을 변장시키려고, 후일에는 죽은 자에게 존경을 표시하고, 그래서 귀신을 달래려고 고안되었다.
87:2.1 (959.2) 종교에서 귀신을 달래는 소극적 계획은 영에게 강요하고 부탁하는 적극적 계획보다 오랫동안 앞섰다. 인간의 첫 숭배 행위는 방어(防禦) 현상이요 존경 현상이 아니었다. 현대인은 화재에 대비해서 보험 드는 것을 현명하게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야만인은 귀신이 불운을 일으키는 것에 대비하여 보험을 마련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보장을 얻으려는 노력이 귀신 숭배의 기술과 의식이었다.
87:2.2 (959.3) 한때 귀신의 큰 소망은 방해 없이 저승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빨리 “눕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귀신을 눕히는 의식을 치를 때, 살아 있는 자의 행위에서 무엇을 저지르거나 빠뜨리는 무슨 잘못도 귀신이 귀신 나라로 가는 것을 분명히 더디게 했다. 이것은 귀신을 불쾌하게 만든다고 믿었고, 성난 귀신은 재난과 불운과 불행의 근원이라 생각되었다.
87:2.3 (959.4) 장례식은 귀신의 혼이 미래의 집을 향하여 떠나도록 유인하려는 사람의 노력에서 생겨났고, 장례식의 설교는 최초에, 새 귀신이 어떻게 거기에 가는가 가르치려고 고안되었다. 귀신의 나그네 길을 위하여 먹을 것과 옷가지를 마련해 주는 것이 풍습이었고, 이 물건들을 무덤 안이나 가까이에 놓았다. 야만인은 “귀신을 눕히는” 데―귀신을 무덤 근처에서 쫓아내는 데―사흘에서 1년이 걸린다고 믿었다. 에스키모인은 혼이 몸과 함께 사흘 동안 머무른다고 아직도 믿는다.
87:2.4 (959.5) 사람이 죽은 뒤에는 귀신이 집으로 마음이 끌려 돌아오지 않도록 침묵을 지키거나 애도하였다. 자학(自虐)―상처내기―는 보통의 애도 형태였다. 머리가 깨인 많은 선생이 이것을 막으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다. 단식과 기타 형태의 극기(克己)는 귀신을 기쁘게 한다고, 저승을 향하여 실제로 떠나기 전, 근처에 숨어 있는 과도기에, 그 귀신은 산 사람의 고통을 기뻐한다고 생각되었다.
87:2.5 (959.6) 오랫동안 그리고 빈번히 애도하고 활동하지 않는 기간은 문명의 진보에 커다란 장애물의 하나였다. 해마다 몇 주, 아니 몇 달까지도 이렇게 비생산적이고 쓸데없는 애도에 낭비되었다. 직업으로 애도(哀悼)하는 자들이 장례식 때 고용되었다는 사실은 애도가 의식(儀式)이요, 슬픔의 증거가 아님을 가리킨다. 현대인은 존경해 마지않아서, 또는 사별한 것이 슬퍼서 죽은 자를 애도할지 모르지만, 옛날 사람들은 두려워서 그렇게 했다.
87:2.6 (959.7) 죽은 자의 이름은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그 이름은 흔히 언어에서 추방되었다. 이러한 이름은 금기(禁忌)가 되었고, 이 방법으로 언어는 항상 빈곤하게 되었다. 이것은 결국 “사람이 결코 언급하지 않는 이름이나 날”과 같은 상징 언어와 비유적 표현이 늘어나게 만들었다.
87:2.7 (960.1) 옛날 사람들은 몹시 귀신을 쫓아버리고 싶어서, 그들이 일생에서 바랐을까 싶은 것을 모조리 귀신에게 내밀었다. 귀신들은 아내와 하인들을 바랐다. 살림이 넉넉한 야만인은 죽을 때 적어도 노예 아내 하나가 산 채로 파묻히기를 기대하였다. 나중에는 과부가 남편의 무덤에서 목숨을 끊는 것이 풍습이 되었다. 아이가 죽었을 때, 어른 귀신이 따라가서 아이 귀신을 돌보도록, 어머니나 아주머니나 할머니가 흔히 목 졸려 죽음을 당했다. 이렇게 제 목숨을 버린 자들은 기꺼이 그렇게 했다. 정말로, 그들이 관습을 어기고 살았더라면, 귀신이 노여워한다는 두려움은 원시인이 누렸던 얼마 안 되는 그런 즐거움마저 인생에서 빼앗았을 것이다.
87:2.8 (960.2) 죽은 추장을 따라가라고 큰 떼의 종들을 보내는 것이 풍습이었다. 노예들은 그 주인이 죽었을 때, 귀신 나라에서 그를 섬기라고 죽음을 당했다. 보르네오인은 아직도 안내하는 동반자를 마련한다. 노예는 죽은 주인과 함께 귀신의 길을 떠나라고 창에 찔려 죽는다. 살인 당한 사람의 귀신은 자기를 죽인 자의 귀신을 노예로 가지기를 기뻐한다고 믿었다. 이 개념은 사람들이 머리 사냥을 하도록 유인했다.
87:2.9 (960.3) 귀신은 먹을 것의 냄새를 즐긴다고 생각되었다. 장례식 잔치에 먹을 것을 바치는 것은 한때 보편적이었다. 먹기 전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원시 방법은, 주문을 중얼거리면서 영들을 달래는 목적으로 불 속에 먹을 것을 조금 던지는 것이었다.
87:2.10 (960.4) 죽은 자는 살았을 때 가졌던 연장과 무기(武器)의 귀신을 쓴다고 생각되었다. 물건을 깨뜨리는 것은 “그것을 죽이는” 것이며, 따라서 귀신 나라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떠나가라고 그 귀신을 놓아 주었다. 재산도 태우거나 파묻어 희생하였다. 옛날 장례식의 낭비는 엄청났다. 후일의 종족들은 종이 모형을 만들어서, 이 죽음의 희생물을 바칠 때 진짜 물건과 사람 대신에 그림으로 바꿔치웠다. 친척 상속이 재산을 태우고 파묻는 것을 대체했을 때, 문명에 큰 진보가 있었다. 이로쿼이 인디안은 장례식의 낭비에 많은 개혁을 실행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재산 보존은 그들로 하여금 북부 홍인 가운데 가장 강력한 자가 되게 만들었다. 현대인은 귀신을 무서워한다고 생각되지 않지만, 풍습은 질기며, 땅에 있는 많은 재산이 아직도 장례 의식과 사망 예식에 소모된다.
87:3.1 (960.5) 깊어지는 귀신 숭배는 조상 숭배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조상 숭배가 보통 귀신, 그리고 상급 영, 곧 발달하는 신들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초기의 신들은 다만 세상을 떠나 영화롭게 된 인간이었다.
87:3.2 (960.6) 조상 숭배는 최초에 숭배라기보다 조상을 두려워하는 것이었으나, 그러한 관념은 귀신을 두려워하고 숭배하는 태도를 널리 퍼뜨리는 데 분명히 기여했다. 초기의 조상 및 귀신 숭배자들은 하품할 때 몸 속으로 나쁜 귀신이 들어가지 않을까 하여 하품하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87:3.3 (960.7) 양자(養子)를 얻는 관습은 혼이 평안하고 잘 가기 위해서 죽은 뒤에 누군가가 공물을 꼭 마련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야만인은 동료의 귀신들을 두려워하며 살았고, 죽은 뒤에 자기 귀신의 안전한 처신을 계획하는 데 남는 시간을 썼다.
87:3.4 (960.8) 대부분의 부족들은 적어도 1년에 한 번, 온갖 귀신의 잔치를 시작하였다. 로마인은 해마다 열두 번 귀신 잔치와 그에 따르는 예식이 있었다. 1년의 반은 이 옛 종파들과 연결된 어떤 종류의 예식에 바쳤다. 어느 로마 황제는 축제일을 1년에 135일로 줄임으로 이 풍습을 개혁하려고 애썼다.
87:3.5 (961.1) 귀신 숭배는 줄곧 진화하고 있다. 귀신들이 불완전한 단계에서 더 높은 단계의 존재로 지나간다고 상상되자, 그 숭배는 결국 영, 아니 신들까지도 예배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상급 영들에 관한 다양한 관념과 상관 없이, 모든 부족과 종족이 한때 귀신을 믿었다.
87:4.1 (961.2) 귀신 공포증은 모든 세계 종교의 근원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부족이 귀신들이 한 종류라는 옛 관념에 집착하였다. 그들은 귀신이 기뻐할 때 사람의 운이 좋고, 귀신이 성날 때는 운이 나쁘다고 가르쳤다.
87:4.2 (961.3) 귀신을 두려워하는 숭배가 확대됨에 따라서 상급 종류의 영, 어떤 개별 인간이라고 신분을 확인할 수 없는 영들에 대한 인식이 생겨났다. 이들은 귀신 나라의 영토를 지나서 더 높은 영의 영토로 나아간 영, 졸업하거나 영화롭게 된 영들이었다.
87:4.3 (961.4) 두 종류의 영 귀신이 있다는 개념은 세계 전역에 두루, 느리지만 확실하게 진보했다. 이 새로운 이영(二靈) 사상은 한 부족에서 다른 부족으로 퍼질 필요가 없었다. 세계 전역에 걸쳐서 따로 솟아났다. 확대되는 진화된 지성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 한 개념의 힘은 그 현실성이나 논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념의 뚜렷함과 개념을 널리 쉽게 간단히 적용하는 데 있다.
87:4.4 (961.5) 더 후에 사람의 상상력은 좋은 초자연의 매체와 나쁜 매체의 개념을 상상했다. 어떤 귀신은 결코 착한 영의 수준으로 진화하지 않았다. 귀신을 두려워하는 초기의 일영(一靈) 사상은 차츰 이영 사상으로 진화했고, 이것은 땅의 일을 눈에 보이지 않게 통제한다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마침내 행운과 불운에는 각자를 통제하는 자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두 종류 사이에서, 불운을 가져오는 집단은 더 활발하고 수가 많다고 믿었다.
87:4.5 (961.6) 좋은 영, 나쁜 영의 교리가 마침내 성숙했을 때, 그것은 모든 종교 관념 가운데 가장 널리 퍼지고 오래 지속하였다. 이 이원 사상은 큰 종교 철학의 진보를 의미했는데,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행운과 불운을 설명하게 하고, 한편 동시에 어느 정도 일관성 있게 행동하는 초인간 존재를 믿게 하기 때문이다. 영들은 좋든지 아니면 나쁘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을 수 있었다. 가장 원시적 종교의 일영 사상에 담긴 초기 귀신들이 완전히 변덕스럽다고 상상했던 것처럼, 이 영들도 그렇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사람은 일관성 있게 행동하는 초인간 세력을 마침내 상상할 수 있었고, 이것이 종교 진화의 역사 전체에서, 인간 철학의 성장에서, 가장 중대한 진리의 발견 중에 하나였다.
87:4.6 (961.7) 그러나 진화된 종교는 이영 사상의 개념을 얻으려고 끔찍한 값을 치렀다. 사람이 초기에 가진 철학은, 하나는 좋은 영이고 다른 하나는 나쁜 영, 오직 두 가지의 영을 가정함으로, 영의 불변성과 현세의 행운의 변화를 절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사람으로 하여금 우연의 변수를 변하지 않는 초인간 세력의 개념과 조화할 수 있게 만들었지만, 이 교리는 그 뒤로 계속, 종교가들이 우주의 통일성을 파악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진화 종교의 신들은 일반적으로 암흑 세력의 반대에 부딪쳤다.
87:4.7 (962.1) 이 모든 것에 나타나는 비극은, 이러한 생각들이 사람의 원시 지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 온 세계에 나쁘거나 화목하지 않은 영이 정말로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런 불행한 상황은 칼리가스티아 반란이 있을 때까지 생기지 않았고, 오순절까지만 지속되었다. 선과 악이 우주에서 대등하다는 개념은 20세기에도 인간의 철학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세계 종교의 대부분은 귀신 숭배가 고개를 들던 시절, 아득히 오랜 시절에 태어난 이 문화적 표시를 아직도 지닌다.
87:5.1 (962.2) 원시인은 영과 귀신이 거의 무제한의 권리를 가졌으나 아무런 의무가 없다고 보았다. 영들은 사람이 여러 가지 의무가 있어도 아무 권리가 없다고 여긴다고 생각되었다. 사람이 자기의 영적 임무를 항상 이행하지 못해서 영들이 사람을 업신여긴다고 믿었다. 인류는 귀신이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값으로 귀신 섬기는 세금을 계속 부과한다고 일반적으로 믿었고, 아주 작은 불운도 귀신이 활동한 탓으로 돌렸다. 초기의 인간들은 신들이 받을 어떤 명예를 그들이 간과하는가 아주 두려워해서, 알려진 모든 영에게 희생물을 바친 뒤에, 그저 철저히 안전하게 해두려고, “알지 못하는 신들”에게 다시 한 번 바쳤다.
87:5.2 (962.3) 이제 단순한 귀신 숭배에 더 진보되고 비교적 복잡한 영 및 귀신을 숭배하는 풍습이 뒤따랐으며, 이것은 사람의 원시적 상상(想像) 속에서 상급의 영들이 진화함에 따라서 그들을 섬기고 숭배하는 것이었다. 종교 예식은 영이 진화하고 진보하는 데 발걸음을 맞추어야 한다. 확대된 숭배는 초자연 존재들을 믿는 것과 관련하여 실행되는 자아 유지 기술, 곧 영 환경에 대한 자아의 조정이었을 뿐이다. 산업 조직과 군사 조직은 자연 및 사회 환경에 대한 조정이었다. 결혼이 남녀의 요구를 채우려고 생겨난 것처럼, 종교적 조직은 상급의 영 세력과 영적 존재들을 믿는 관념에 반응하여 진화했다. 종교는 사람이 우연의 신비에 관한 망상에 적응하는 것을 나타낸다. 영을 두려워하고 후일에 영을 숭배하는 것은 불행에 대비하는 보험으로서, 번영을 보장하는 방책으로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87:5.3 (962.4) 야만인은 좋은 영들이 자기 일을 하느라고 다니고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 거의 없다고 상상한다. 기분이 좋은 상태로 두어야 하는 것은 나쁜 귀신과 영들이었다. 따라서, 원시 민족들은 호의를 가진 영보다 악의(惡意) 있는 귀신들에게 더 주의를 기울였다.
87:5.4 (962.5) 인간의 번영은 특히 악한 영들이 질투하게 만든다고 생각되었고, 그들이 앙갚음하는 방법은 인간 대리자를 통해서, 그리고 악한 눈의 기술을 써서 보복하는 것이었다. 영을 피하는 것과 상관되는 단계의 숭배는, 악한 눈의 간계와 상당히 관계되었다. 악한 눈을 무서워하는 것은 거의 세계적으로 퍼졌다. 아름다운 여인들은 악한 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베일을 썼다. 나중에는 아름답게 여김받고 싶어 하는 뭇 여인이 이 관습을 따랐다. 나쁜 영을 이렇게 두려워한 것 때문에 어두워진 뒤에 아이들을 바깥에 내보내는 일이 드물었고, 옛날의 기도는 언제나 “악한 눈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는 부탁을 담았다.
87:5.5 (962.6) 코란은 한 장 전체를 악한 눈과 주문(呪文)에 배당하며, 유대인은 이를 믿었다. 남근(男根) 숭배 전부가 악한 눈에 대한 방어로서 생겨났다. 생식 기관은 악한 눈을 힘없게 만드는 유일한 주물로 생각되었다. 악한 눈은 태어나기 전에 부모가 아이들에게 감화를 주는 것, 곧 어머니의 영향에 관하여 첫 미신이 생기게 하였고, 이 유행은 한때 거의 보편적이었다.
87:5.6 (963.1) 질투는 인간의 뿌리 깊은 특성이다. 따라서 원시인은 질투를 초기 신들의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사람은 일단 귀신 속이기를 실행한 뒤에, 곧 영들을 속이기 시작했다. “영들이 우리의 아름다움과 번영을 시샘하면, 우리 스스로를 볼품 없이 만들고 우리의 성공을 하찮게 말하리라” 말했다. 그러니까, 초기의 겸손은 자아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시샘하는 영들을 따돌리고 속이려는 시도였다.
87:5.7 (963.2) 인간의 번영을 영들이 질투하게 되는 것을 방지하려고 채용한 방법은 운 좋거나 많이 사랑받는 어떤 물건이나 사람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다. 자신이나 가족에게 칭찬하는 말을 깎아내리는 관습은 이 방법으로 기원을 가졌고, 그것은 결국 문명화된 겸손ㆍ자제ㆍ예의로 진화했다. 같은 동기와 발걸음을 맞추어, 못나 보이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아름다움은 영들의 시샘을 일으켰고, 아름다움은 죄 많은 인간의 자존심을 표시하였다. 야만인은 못난 이름을 찾았다. 이 유행의 특성은 예술의 진보에 큰 장애가 되었고, 세계를 오랫동안 어둠침침하고 보기 싫게 만들었다.
87:5.8 (963.3) 영을 숭배하던 시절에, 목숨은 기껏해야 노름이요 영이 통제함으로 생기는 결과였다. 영들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이용될 때를 제쳐놓고, 사람의 앞날은 노력이나 부지런이나 재능의 결과가 아니었다. 영을 달래는 예식은 무거운 짐이었고, 인생을 지루하고 거의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대대로 숱한 민족이 이 초월 귀신의 교리를 개선하려고 애썼지만, 어떤 세대도 아직까지 감히 그것을 통째로 물리치려 하지 않았다.
87:5.9 (963.4) 영들의 의도와 뜻은 전조(前兆)ㆍ신탁ㆍ징조의 수단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 영의 말씀은 점치기ㆍ예언ㆍ마술ㆍ시련ㆍ점성술로 풀이하였다. 그 숭배 전체가 이 가장된 뇌물을 통해서 영들을 달래고, 만족시키고 매수(買收)하려고 고안된 계획이었다.
87:5.10 (963.5) 이처럼 새롭고 확대된 세계 철학이 성장하였고 이는 다음으로 이루어졌다:
87:5.11 (963.6) 1. 의무―영들을 기분 좋게, 적어도 중립 상태로 두기 위해서 해야 할 일.
87:5.12 (963.7) 2. 권리―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영들을 적극 설득하려고 고안된 바른 행위와 예식.
87:5.13 (963.8) 3. 진리―영들을 똑똑히 이해하는 것, 영들에 대한 태도, 따라서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
87:5.14 (963.9) 옛날 사람들이 앞날을 알려고 애쓴 것은 단지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불운을 피하고 싶어했다. 점치기는 단지 곤경을 피하려는 시도였다. 이 시절에 꿈은 앞을 예언한다고 생각되었고, 한편 보통 아닌 것은 모두 전조라고 생각되었다. 오늘날도 문명화된 민족들은 징조와 표시, 그리고 옛날의 깊어지는 귀신 숭배에서 기타 미신의 잔재를 믿는 괴로움에 시달렸다. 사람은 아주 느리고 고통스럽게 진화 생명의 눈금을 올라가는 데 사용한 이 방법들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버릴 것이다.
87:6.1 (963.10) 사람들이 귀신만 믿었을 때, 종교 의식은 더 개인적이고, 더 체계가 없었지만, 높은 영들을 인식한 것은 그들을 다루는 데 “높은 영적 방법”의 이용이 필요하게 만들었다. 영을 달래는 기법을 개선하고 다듬으려는 이 시도는 직접 영들에 대한 방어 조치를 고안하게 만들었다. 땅에서 사는 인생에서 작용하는, 통제할 수 없는 세력 앞에 정말로 사람은 무력하게 느꼈고, 그의 열등감은 어떤 보상하는 조정, 곧 사람 대 우주의 일방적인 싸움에서, 승산(勝算) 있게 만드는 어떤 기법을 찾으려고 애쓰게 만들었다.
87:6.2 (964.1) 숭배의 초기 시절에 귀신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려는 사람의 노력은 달래기, 곧 뇌물로 불행을 피하려는 시도에 국한되었다. 귀신 숭배의 진화가 나쁜 영 뿐 아니라 좋은 영이 있다는 개념에 이르기까지 진보함에 따라서, 이 예식들은 더 적극적 성질을 가진 시도로, 행운을 얻으려는 노력으로 바뀌었다. 사람의 종교는 이제 더 철저하게 소극적인 것이 아니었고, 사람은 행운을 얻으려는 노력을 그만두지도 않았다. 얼마 안 되어 사람은 영의 협동을 강제할 수 있는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종교가는 스스로 지어낸 영 환상의 끊임없는 요구 앞에 이제는 더, 방비 없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야만인은 영이 행위하도록 강제하고 영의 도움을 강요할 수 있는 무기(武器)를 비로소 발명한다.
87:6.3 (964.2) 사람의 첫 방어 노력은 귀신을 향한 것이었다.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살아 있는 자는 죽은 자에게 저항하는 방법을 비로소 고안하였다. 귀신을 놀라게 하고 쫓아 버리기 위하여 많은 기술이 개발되었고, 이 가운데 다음 것을 늘어놓아도 좋겠다:
87:6.4 (964.3) 1. 목을 자르고 몸을 무덤에 묶어 놓기.
87:6.5 (964.4) 2. 죽음이 있었던 집에 돌 던지기.
87:6.6 (964.5) 3. 시체를 거세하거나 시체의 다리를 분지르기.
87:6.7 (964.6) 4. 돌 밑에 묻기, 현대 묘비의 한 기원.
87:6.8 (964.7) 5. 화장(火葬), 귀신 문제를 막으려고 후일에 발명한 것.
87:6.11 (964.10) 귀신은 시끄러우면 들볶이고 놀란다고 생각되었다. 소리지르기, 종 소리, 북 소리는 산 사람들로부터 귀신을 쫓아냈다. 이러한 옛 방법은 죽은 자를 위하여 “밤샘”할 때 아직도 유행한다. 나쁜 냄새의 혼합물이 반갑지 않은 영들을 쫓아내려고 이용되었다. 영들이 자신을 보았을 때 허겁지겁 달아나라고 영들의 소름끼치는 형상이 세워졌다. 개는 귀신이 다가오는 것을 탐지할 수 있다, 개는 높은 소리로 짖어서 경고한다, 귀신이 가까이 있을 때 수탉이 울곤 한다고 믿었다. 풍향계로서 수탉을 쓰는 것은 이 미신이 지속된 것이다.
87:6.12 (964.11) 귀신을 막는 데는 물이 가장 좋은 방책이라고 생각되었다. 거룩한 물, 곧 사제들이 발 씻은 물은 모든 다른 형태보다 뛰어났다. 불과 물은 다 귀신들이 뚫고 지나갈 수 없는 장벽이라고 믿었다. 로마인은 시체 둘레에 물을 세 번 날랐고, 20세기에 몸에 신성한 물을 뿌리고 공동 묘지에서 손씻는 것은 아직도 유대인의 의식(儀式)이다. 세례는 후일에 물로 행하는 의식의 특성이었다. 원시의 목욕은 종교 예식이었다. 요즘에 와서야 목욕은 위생 관습이 되었다.
87:6.13 (964.12) 그러나 사람은 귀신을 강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종교 의식과 기타의 관습을 통해서, 사람은 곧 영의 행위를 강요하려고 애썼다. 귀신 쫓아내기는 한 영을 통제하거나 쫓아내려고 다른 영을 이용하는 것이며, 이 전술은 또한 귀신과 영들을 놀라게 하는 데 이용되었다. 좋은 세력과 나쁜 세력이 있다는 이영(二靈) 개념은 한 힘이 다른 힘과 싸우게 만들려고 애쓰는 충분한 기회를 사람에게 주었다. 왜냐하면 힘센 사람이 약한 사람을 해치울 수 있다면 힘센 영은 분명히 열등한 귀신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원시의 저주(詛呪)는 작은 영들을 겁주려고 고안된 강제하는 관습이었다. 나중에 이 풍습은 적들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87:6.14 (965.1) 더 오래 전에 있던 도덕 관습으로 돌아감으로 영과 반신반인(半神半人)들이 바람직하게 행동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고 사람들이 오랫동안 믿었다. 현대인은 똑같은 과정을 밟는 죄가 있다. 너희는 서로에게 보통 말, 날마다 쓰는 말로 이야기하지만, 기도할 때는 다른 세대의 더 오래 된 말씨, 이른바 엄숙한 말씨에 의존한다.
87:6.15 (965.2) 이 신조는 또한 성전 매춘과 같은, 성교의 성질을 가진 많은 종교 의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설명한다. 원시의 풍습으로 이렇게 돌아가는 것은 많은 재난을 막는 확실한 보호 조치라 생각되었다. 머리가 단순한 이 민족들의 경우에, 모든 그러한 연출에는 현대인이 난교(亂交)라고 부를 만한 점이 도무지 없었다.
87:6.16 (965.3) 다음에 의식(儀式)에서 서약하는 관습이 왔고, 곧 뒤이어 종교적 서약과 거룩한 맹세가 따랐다. 이 맹세의 대부분에 자학(自虐)과 자기 몸 잘라내기가 따랐고, 나중에는 단식(斷食)과 기도가 뒤따랐다. 금욕은 나중에 확실한 강제 조치라고 생각되었다. 이것은 성욕을 억제하는 문제에서 특히 참말이었다. 그래서 원시인은 그의 종교 관습에서 굳은 결심으로 내핍 생활을 일찍부터 개발하였고, 이것은 달가워하지 않는 영들로부터 모든 그러한 고통과 결핍에 대해서 좋게 반응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 의식으로서, 자학과 금욕이 효과가 있다는 믿음이었다.
87:6.17 (965.4) 현대인은 드러내놓고 영들을 강요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도 신과 협상하려는 성향을 나타낸다. 현대인은 아직도 맹세하고, 나무를 두드리고, 손가락을 포개고[1] [1726], 어떤 낡아빠진 구절을 외우며 침 뱉는다. 한때 그런 구절은 마력(魔力)이 있는 표현이었다.
87:7.1 (965.5) 종파와[2] [1727] 같은 사회 조직은 그것이 도덕적 감각과 종교적 충성을 보존하고 자극하는 상징을 마련하기 때문에 지속했다. 예배는 “오래 된 가족들”의 전통으로부터 생겨났고, 확립된 제도로서 지속되었다. 모든 가족은 어떤 종류의 예배를 지니고 있다.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이상은 어떤 지속되는 상징을 붙잡는다―살아남는 것을 보장하고 실현을 확대하는 어떤 문화적 명시 기법을 추구한다―그리고 예배는 감정을 조장하고 만족시킴으로 이 목적을 이룬다.
87:7.2 (965.6) 문명의 아침이 밝아올 때부터 사회의 문화나 종교적 진보에서 마음을 끄는 운동마다 의식(儀式), 상징적 예식을 개발하였다. 의식하지 않고 성장할수록 이 예식은 더 단단히 신봉자들을 붙잡았다. 예배는 정서를 보존하고 감동을 주었지만, 언제나 사회의 재편성과 영적 진보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87:7.3 (965.7) 예배하는 종파가 언제나 사회의 진화를 더디게 만들었는데도, 도덕 기준과 영적 이상을 가진 현대의 허다한 신봉자가 아무런 적절한 상징이―서로 밀어줄 아무런 종파가―소속해야 할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유감이다. 그러나 종교적 제사는 제조될 수 없으며 성장해야 한다. 어떤 두 집단의 예배도 권한으로 그 의식(儀式)을 멋대로 표준화하지 않는 한, 동일할 수 없다.
87:7.4 (965.8) 초기 기독교의 예배는 일찍이 상상하거나 고안한 어떤 의식 중에서도 가장 효과 있고, 마음을 끌고, 오래 가는 것이었으나, 그 가치의 많은 부분은 최초의 기본 신조들 가운데서 허다한 것이 없어짐으로 과학 시대에 파손되었다. 기독교의 예배는 많은 기초적 개념을 잃어버림으로 활력을 잃었다.
87:7.5 (965.9) 과거에는 예배가 탄력성 있고 그 상징이 확대될 수 있을 때 진리가 빨리 자라고 자유롭게 확대되었다. 풍부한 진리와 적응할 수 있는 예배는 사회의 빠른 진보를 유리하게 만들었다. 의미 없는 예배 의식은 철학을 대체하고 논리를 예속하게 만들려고 애쓸 때, 종교를 망친다. 진정한 예배는 성장한다.
87:7.6 (966.1) 단점과 장애물에 상관 없이, 진리가 새롭게 계시될 때마다 새 종파가 생겼고, 예수의 종교를 다시 진술하는 것조차도 새롭고 적당한 상징을 개발해야 한다. 현대인은 새롭고 커지는 개념ㆍ이상ㆍ충성을 나타내는 어떤 적당한 상징을 찾아야 한다. 이 향상된 상징은 종교적 생활, 영적 체험으로부터 생겨나야 한다. 상급 문명의 이 상급 상징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고, 사람이 형제라는 강력한 이상을 담고 있어야 한다.
87:7.7 (966.2) 오래 된 종파들은 너무 자기 중심이었다. 새 종파는 사랑을 쏟음으로 생긴 산물이어야 한다. 오래 된 종파와 마찬가지로, 새 종파는 정서(情緖)를 길러 주고, 감동을 주고 충성을 조장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일해야 한다. 새 종파는 영적 진보를 수월하게 하고 우주의 의미 있는 것들을 향상하며, 도덕적 가치를 키우고 사회 발전을 격려하며, 개인에게 높은 종류의 종교 생활을 자극해야 한다. 새 종파는 생활에서 현세적이며 영원한 목표―사회적이며 영적인―최고의 목표를 마련해야 한다.
87:7.8 (966.3) 어떤 종파도 가정의 생물학적ㆍ사회학적ㆍ종교적 의미에 기초를 두지 않으면, 오래 지속하고 사회 문명의 진보와 개인의 영적 달성에 이바지할 수 없다. 살아남는 종파는 변화가 그치지 않는 가운데서 영구한 것을 상징해야 한다. 그 종파는 항상 바뀌는 사회 변화의 흐름을 통일하는 것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그 종파는 참된 의미를 인식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높이며, 정말로 고귀한 좋은 가치 기준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87:7.9 (966.4) 그러나 새롭고 마음에 드는 상징을 발견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은 현대인이 하나의 집단으로서, 과학적 태도에 집착하고 미신을 피하고, 무지를 무척 싫어하며, 한편 개인으로서 그들 모두가 신비를 몹시 좋아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존경하기 때문이다. 어떤 종파도 어떤 멋진 신비를 담고, 성취할 수 없는 어떤 값진 것을 감추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더 나아가서, 새로운 상징은 그 집단에게 중요할 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의미가 있어야 한다. 어떤 쓸모 있는 상징이라도 그 형태는 개인 스스로 주도권을 가지고 수행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또한 동료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새 종파가 정지된 것이 아니고 힘차게 움직일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적으로 인류가 진보하는 데 무언가 값진 것을 정말로 이바지할지 모른다.
87:7.10 (966.5) 그러나 한 종파는―의식(儀式)이나 표어나 목표와 같은 상징이―너무 복잡하면 작용할 수 없다. 그리고 헌신, 충성스러운 반응을 요구해야 한다. 효과적인 모든 종교는 가치 있는 상징을 어김없이 개발한다. 그 신봉자들은 그러한 의식을, 사람을 가두고 보기 흉하게 만들고 숨막히게 하는, 판에 박힌 예식으로 구체화되는 것을 막는 것이 좋겠다. 그런 예식은 오로지 모든 사회의 진보, 도덕의 진보, 영적 진보에 장애가 되고, 진보를 더디게 만들 수 있다. 어떤 종파도 도덕적 성장을 지체하고 영적 진보를 촉진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종파의 예배는 뼈대요, 그 둘레에 몸소 영적 체험을 가지는 살아 있는 힘찬 몸이―참 종교가―자란다.
88:0.1 (967.1) 생명이 없는 사물이나 동물이나 사람 속으로 영이 들어간다는 개념은 매우 오래 되고 존중받을 믿음이며, 종교의 진화가 시작될 때부터 유행하였다. 신에 들린다는 이 교리는 틀림없는 주물 숭배이다. 야만인이 반드시 주물을 예배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 논리적으로, 그는 안에 들어 있는 영을 숭배하고 존경한다.
88:0.2 (967.2) 처음에, 사람들은 주물 속에 든 영은 죽은 사람의 귀신이라고 믿었고, 나중에는 더 높은 영들이 주물 안에 거한다고 상상했다. 그래서 주물 숭배는 결국, 귀신ㆍ혼ㆍ영을 비롯하여, 악마에 들리는 것에 관한 모든 원시 관념을 합병하였다.
88:1.1 (967.3) 원시인은 언제나 특별한 것은 무엇이나 주물(呪物)로 만들고 싶어했다. 따라서 많은 것이 우연히 기원을 가졌다. 사람이 아프다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가 낫는다. 많은 약(藥)의 명성, 병을 치료하는 우연한 방법에 바로 이런 일이 참말이다. 꿈과 연결된 물건은 주물로 바뀌기가 쉬웠다. 보통 산이 아니라 화산, 별이 아니라 살별이 주물이 되었다. 시초의 인간은 별똥과 운석이 특별한 찾아오는 영이 땅에 도착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88:1.2 (967.4) 처음 주물은 특이하게 표시된 조약돌이었고, 사람은 그 뒤로 늘 “신성한 돌”을 찾았다. 구슬 목거리는 한때 신성한 돌의 수집이요, 부적을 모은 것이었다. 많은 부족이 주물 돌을 가졌지만, 카바와[1] [1728]스쿤의 돌과[2] [1729] 달리,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불과 물도 또한 초기의 주물이었고, 거룩한 물을 믿는 믿음과 더불어, 불의 숭배는 아직도 남아 있다.
88:1.3 (967.5) 나무 주물은 후일에 개발되었다. 그러나 어떤 부족들 사이에서 자연 숭배가 지속한 것은 어떤 종류의 자연 영이 깃든 부적의 관념을 낳았다. 식물(植物)과 과일이 주물이 되었을 때, 이것들은 먹지 못하는 금기가 되었다. 사과는 이 분류에 처음으로 들어갔다. 레반트 민족들은 결코 사과를 먹지 않는다.
88:1.4 (967.6) 동물이 인간의 살을 먹으면, 그 동물은 주물이 되었다. 이 방법으로 개는 파시 교도의 신성한 동물이 되었다. 주물이 동물이고 귀신이 그 안에 영구히 거하면, 주물 사상은 환생(還生)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여러 방법으로 야만인은 동물을 부러워했다. 그들은 동물보다 우수하다고 느끼지 않았고, 가장 좋아하는 짐승을 따라서 흔히 이름을 지었다.
88:1.5 (967.7) 동물이 주물이 되었을 때 그 주물인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라는 금기가 뒤따랐다. 꼬리 없는 원숭이와 꼬리 있는 원숭이는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일찍부터 주물 동물이 되었다. 나중에는 또한 뱀ㆍ새ㆍ돼지를 비슷하게 여겼다. 한때는 송아지가 주물이었고 우유는 금기였으며, 한편 배설물을 높이 쳐주었다. 팔레스타인에서, 특히 페니키아인이 뱀을 숭배하였는데, 이들은 유대인과 함께 뱀을 악한 영의 대변자라고 생각했다. 많은 현대인도 파충류가 부적의 힘이 있다고 믿는다. 아라비아로부터 계속하여 인도를 통해서, 홍인의 모키 부족의 뱀춤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뱀을 숭배하였다.
88:1.6 (968.1) 한 주에 어떤 날은 주물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금요일을 운이 나쁜 날로 여겨 왔고, 13이라는 수는 나쁜 수였다. 운 좋은 숫자, 3과 7은 후일의 계시로부터 생겼다. 4는 원시인에게 운 좋은 숫자였고, 나침반의 4점을 일찍부터 깨달은 데서 생겨났다. 가축이나 다른 소유물을 세는 것은 운이 나쁘다고 생각되었다. 옛 사람들은 인구 조사, “사람들의 수를 세는 것”을 반드시 반대했다.
88:1.7 (968.2) 원시인은 성교를 부당한 주물로 만들지 않았다. 생식 기능에는 겨우 조금 눈을 돌렸을 뿐이다. 야만인은 자연스러운 생각을 가졌고, 음탕하거나 음란하지 않았다.
88:1.8 (968.3) 침은 효력 있는 주물이었다. 사람에게 침을 뱉어 악마를 쫓아낼 수 있었다. 장로나 상관이 사람에게 침 뱉는 것은 최고의 칭찬이었다. 인체의 여러 부분, 특히 머리카락과 손톱을 잠재 주물로 여겼다. 길게 자라는 추장의 손톱을 높이 쳐주었고, 손톱 깎은 것은 강력한 주물이었다. 두개골 주물을 믿는 관념은 후일에 머리 사냥을 많이 설명한다. 탯줄은 높이 쳐주는 주물이었다. 오늘날도 아프리카에서 그렇게 여긴다. 인류의 처음 장난감은 보존된 탯줄이었다. 흔히 하다시피, 탯줄은 진주와 함께 엮어서 사람의 첫 목거리가 되었다.
88:1.9 (968.4) 꼽추 아이와 절름발이 아이는 주물로 간주되었다. 미치광이는 달에 영향을 받는다고 믿었다. 원시인은 천재와 광기(狂氣)를 가릴 수 없었다. 천치를 때려죽이거나 주물 인물로 모셨다. 히스테리는 점점 더 마술에 대한 대중의 믿음을 확증하였다. 간질병자는 흔히 사제와 주술사였다. 술에 취하는 것은 신들린 형태로 여겼다. 야만인이 흥청거리고 마실 때, 그가 한 짓에 대한 책임을 거부할 목적으로 머리털에 나뭇잎을 달았다. 독과 술 취하게 하는 것은 주물이 되었고, 이것들은 귀신이 들렸다고 생각되었다.
88:1.10 (968.5) 많은 사람이 천재는 지혜로운 귀신이 들린 주술 인물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재주 있는 사람들은 사리를 채우려고, 곧 사기(詐欺)와 술수에 의존하는 것을 배웠다. 주물 인간은 사람보다 높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신답고, 아니 잘못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추장ㆍ임금ㆍ사제ㆍ선지자, 교회 지도자들은 결국, 큰 힘을 쓰고 한없는 권한을 행사한다.
88:2.1 (968.6) 귀신은 육체를 입고 살아 있을 때 자기에게 속했던 어떤 물건에 거하기를 좋아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했다. 이 관념은 현대의 많은 유품(遺品)의 효력을 설명한다. 옛날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의 지도자의 뼈를 숭앙하였고 아직도 많은 사람이 성자(聖者)와 영웅의 유골을 미신으로 두렵게 여긴다. 오늘날도 위인의 무덤에 사람들이 순례한다.
88:2.2 (968.7) 유품을 믿는 관념은 옛적 주물 숭배의 부산물이다. 현대 종교의 유품은 야만인의 주물을 합리화하고 이처럼 현대의 종교 체계에서 위엄 있고 존경받는 자리로 올려놓으려는 시도이다. 주물과 마술을 믿는 것은 이교도 같지만, 유품과 기적을 받아들이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된다.
88:2.3 (969.1) 화로―난로―는 얼마큼 주물, 하나의 신성한 장소가 되었다. 성소와 성전은 처음에 주물 장소였는데, 거기에 죽은 자들이 묻혔기 때문이다. 모세는 히브리인의 주물 오두막을 그때 존재하던 하나님의 율법 개념이었던 큰 주물을 모신 장소로 높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돌 제단을 믿는 특이한 가나안 신앙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나님의 집이 될지니라.” 그들이 모시는 하나님의 영이 그러한 돌 제단에 거한다고 그들은 참으로 믿었고, 돌 제단은 실제로 주물이었다.
88:2.4 (969.2) 뛰어난 죽은 사람의 모습과 기억을 보존하려고 최초의 형상들이 만들어졌는데, 이것들은 정말로 기념비였다. 우상은 주물 숭배를 다듬은 것이다. 원시인은 거룩하게 바치는 예식이 영으로 하여금 형상 안에 들어가게 만든다고 믿었다. 마찬가지로 어떤 물건은 축복받았을 때 부적(符籍)이 되었다.
88:2.5 (969.3) 옛 달라마시아 도덕 법규에 둘째 계명을 보태면서, 모세는 히브리인 사이에서 주물 숭배를 통제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주물로서 성스럽게 될까 싶은 형상을 한 가지도 만들지 말라고 면밀하게 그들에게 지시하였다. 그는 분명히 말했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거나 아래로 땅에 있거나, 또는 지상의 바다에 있는 어떤 것이라도 그 새긴 형상이나 모습을 만들지 말지니라.” 이 계명은 유대인 사이에서 예술을 늦추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주물 숭배를 줄였다. 그러나 모세는 아주 현명해서 갑자기 옛 주물을 갈아치우려고 하지 않았고, 따라서 전쟁 제단이자 종교적 성소, 즉 언약 상자 안에, 율법과 나란히 어떤 유품들을 두는 데 찬성하였다.
88:2.6 (969.4) 말씀, 더군다나 특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긴 말씀은, 결국 주물이 되었다. 이 방법으로 숱한 종교의 거룩한 책들이 주물 감옥이 되어서, 사람의 영적 상상력을 가두어 두었다. 주물에 대항하는 모세의 바로 그 노력이 최고의 주물이 되었다. 그의 계명은 후일에 예술을 바보짓으로 만들고, 아름다운 것을 즐기고 찬미하는 것을 더디게 만드는 데 쓰였다.
88:2.7 (969.5) 옛 시절에, 권한을 가진 주물 낱말은 두려움을 일으키는 교리였고, 이것은 사람을 종으로 만드는 모든 폭군 가운데 가장 끔직한 것이었다. 주물이 된 교리는 필사 인간으로 하여금 본성을 드러내고 편협ㆍ광신ㆍ미신ㆍ불관용, 그리고 가장 지독하고 미개한 잔인 행위로 이끈다. 지혜와 진리를 현대에 존중하는 것은, 주물을 만드는 성향으로부터 생각하고 이치를 따지는 더 높은 수준으로 최근에 피한 것일 뿐이다. 다양한 종교가들이 신성한 책으로 여기는, 축적된 여러 주물 기록에 관해서 말하면, 책 안에 있는 것이 진리일 뿐 아니라, 모든 진리가 그 책에 들어 있다고 사람들이 믿는다. 이 신성한 책들 중에서 하나가 어쩌다가 지구가 평평하다고 말하면, 오랜 세대가 지나는 동안, 다른 면에서는 멀쩡한 남녀들이 행성이 둥글다는 분명한 증거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88:2.8 (969.6) 눈이 어쩌다 한 구절에 떨어지도록 이 신성한 책 중에 하나를 열어 보는 관습을 따르는 것은 일생의 중대한 결정이나 사업을 좌우할지도 모르는데, 그 버릇은 터무니없는 주물 숭배에 지나지 않는다. “신성한 책”을 놓고 선서하거나, 최고로 존경하는 어떤 물건으로 맹세하는 것은 일종의 세련된 주물 숭배이다.
88:2.9 (969.7) 그러나 야만인 추장의 손톱 깎은 것을 주물로 두려워하는 것을 비롯하여 글자ㆍ율법ㆍ전설ㆍ우화ㆍ신화ㆍ시(詩)ㆍ연대기의 훌륭한 수집을 찬미하기까지 나아간 것은 정말로 진화적 진보를 나타내며, 결국 이것들은 적어도 “신성한 책”으로서 수집한 그 시절과 사건이 있기까지, 여러 세기 동안 체질하여 거른 도덕적 지혜를 반영한다.
88:2.10 (970.1) 주물이 되려면, 말씀은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되어야 했고, 신에게서 영감을 받아서 썼다고 생각되는 기록을 인용하는 것은 교회 권한을 확립하였으며, 한편 국가 형태의 진화는 국가 권한이 성숙하게 만들었다.
88:3.1 (970.2) 주물 숭배는 아주 일찍부터 신성한 돌을 섬기는 관념으로부터 우상 숭배, 식인 풍습, 자연 숭배를 거쳐서 토템 신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원시 종교를 침투한다.
88:3.2 (970.3) 토템 신앙은 사회 풍습과 종교 풍습을 종합한 것이다. 최초에는, 생물학적 기원이 있다고 생각되던 토템 동물을 존중하는 것은 식량의 공급을 보장한다고 생각되었다. 토템은 한꺼번에 그 집단과 그들의 신의 상징이었다. 그러한 신은 인격처럼 된 씨족이었다. 토템 신앙은 다른 면에서 개인적인 종교를 사회적 종교로 만들려는 시도의 한 단계였다. 토템은 결국 여러 현대 민족의 깃발, 곧 나라의 상징으로 진화하였다.
88:3.3 (970.4) 주물 자루, 주술사의 자루는 귀신이 들어박힌 여러 가지 소문난 물건을 담은 자루였고, 옛날의 주술사는 결코 자기 권능의 상징인 그 자루가 땅에 닿게 하지 않았다. 20세기에 문명화된 민족들도 마찬가지로, 국가 의식(意識)의 상징인 깃발이 결코 땅에 닿지 않도록 처리한다.
88:3.4 (970.5) 사제직과 임금 직책의 휘장(徽章)은 결국 주물로 간주되었고, 가장 높은 국가의 주물은 씨족으로부터 부족까지, 영주로부터 군주권까지, 토템으로부터 깃발까지, 여러 단계의 발전을 거쳤다. 주물이 된 임금은 “신이 준 권한”으로 다스렸고, 여러 가지 다른 형태의 정부가 생겼다. 사람들은 또한 민주주의를 주물로 만들었고, 이것은 집합하여 “여론”이라고 불렀을 때, 보통 사람의 생각을 높이고 찬양한다. 한 사람의 의견은 그 자체로 볼 때 그다지 값지게 여기지 않지만, 민주주의로서 여러 사람이 집단으로 활동할 때, 바로 이 평범한 판단은 응보를 중재하는 물건이요 올바름의 표준이라고 여긴다.
88:4.1 (970.6) 문명화된 사람은 과학을 통해서 실재하는 환경 문제를 공격한다. 야만인은 환상적인 귀신 환경에 실재하는 문제를 마술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마술은 영들이 있다고 추측된 환경을 조종하는 기술이었고, 그 환경의 작용은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끊임없이 설명했다. 마술은 주물을 사용하거나 다른 더 힘센 영들을 통해서, 자진해서 영의 협조를 얻고, 마음 내켜 하지 않는 영의 도움을 강요하는 기술이었다.
88:4.2 (970.7) 마술ㆍ마법ㆍ강신술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88:4.5 (970.10) 과학의 목적은 마술의 목적과 똑같다. 명상과 논리가 아니라, 오히려 오랜 체험을 통해서, 차츰차츰, 고통스럽게, 인류는 마술에서 과학으로 진보하고 있다. 사람은 차츰 진리 속으로 후퇴하고, 잘못하여 시작하고, 잘못하면서 진보하며, 마침내 진리의 문턱에 다다른다. 과학적 방법이 도착하고 나서야 사람은 앞을 향했다. 그러나 원시인은 실험하든지 아니면 멸망해야 했다.
88:4.6 (970.11) 초기에 미신에 매혹된 것은 나중에 과학적 호기심의 근원이 되었다. 이 원시적 미신 속에는 진취적인 힘찬 감정―두려움과 아울러 호기심―이 있었다. 옛날의 마술에는 진보하는 추진력이 있었다. 이러한 미신은 행성의 환경을 알고 통제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태어난 것을 가리켰다.
88:4.7 (971.1) 야만인이 자연사의 개념을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술은 야만인에게 그러한 위력을 가졌다. 후일에 원죄(原罪) 관념은, 자연사를 설명하기 때문에 종족에 대한 마술의 위력을 약화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한 사람의 자연사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죄 없는 열 사람이 죽음을 당하는 것이 한때는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것이 어째서 고대의 민족들이 빨리 불어나지 않았는가 하는 한 가지 이유이며, 이것은 아직도 어떤 아프리카 부족들에게 참말이다. 고발당한 개인은 보통, 아니 죽음에 부닥쳤을 때에도, 죄를 고백하였다.
88:4.8 (971.2) 마술은 야만인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는 치켜 깎은 머리털이나 손톱 깎은 것에 마법을 쓰면 적을 실제로 죽일 수 있다고 믿는다. 뱀에게 물려 죽는 것은 마법사가 마술을 쓴 탓으로 돌렸다. 마술을 퇴치하기가 어려운 것은 두려움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서 생긴다. 원시 민족들은 마술을 너무나 무서워해서 마술이 실제로 사람을 죽였고, 그러한 결과는 이 그릇된 관념을 입증하기에 충분했다. 실패할 경우에는 언제나 어떤 그럴듯한 설명이 있었다. 결함이 있는 마술은 더 큰 마술로 치유하였다.
88:5.1 (971.3) 몸과 연결된 어떤 것도 주물이 될 수 있으니까, 가장 옛적의 마술은 머리카락과 손톱ㆍ발톱과 상관이 있었다. 몸에서 잘라낸 것에 따른 비밀은 적이 몸에서 나온 무엇을 소유하고, 이를 해로운 마술에 쓸까 하는 두려움에서 생겨났다. 따라서 몸에서 나온 모든 배설물은 조심스럽게 파묻었다. 침이 해로운 마술에 쓰일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대중 앞에서 침뱉기를 삼갔다. 뱉은 침은 언제나 덮었다. 음식 찌꺼기, 옷가지ㆍ장식품조차 마술의 도구가 될 수 있었다. 야만인은 결코 제가 먹고 난 아무 찌꺼기도 식탁에 남겨 두지 않았다. 그러한 관습이 위생적 가치가 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적이 이를 마술 의식에 쓸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이 모두가 행해졌다.
88:5.2 (971.4) 사람의 살, 호랑이 발톱, 악어 이, 독 있는 식물의 씨앗, 뱀 독, 사람의 머리카락과 같이 크게 다양한 종류의 물건을 섞어서 마법의 부적을 만들었다. 죽은 사람의 뼈는 대단히 마력이 있었다. 발자국에서 생겨난 먼지조차도 마술에 쓰일 수 있었다. 옛날 사람들은 사랑의 부적을 크게 믿었다. 피와 기타 형태의 분비물이 사랑의 마술적 효과를 보장할 수 있었다.
88:5.3 (971.5) 형상(形象)이 마술에 효력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형상이 만들어졌고, 형상을 나쁘게 또는 잘 다룰 때, 똑같은 효과가 진짜 몸에 일어난다고 믿었다. 물건을 살 때, 미신 믿는 사람들은 파는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려고 단단한 나무 조각을 씹곤 했다.
88:5.4 (971.6) 까만 소의 우유는 상당히 마력이 있었고, 또한 까만 고양이도 그러했다. 지팡이나 막대기도, 북ㆍ종ㆍ매듭과 함께, 마력이 있었다. 모든 옛 물건은 마력이 있는 부적이었다. 새롭거나 더 높은 문명의 관습을 좋지 않게 보았는데, 그 관습이 나쁜 마술의 성질을 가졌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기록ㆍ인쇄물ㆍ그림을 오랫동안 그렇게 여겼다.
88:5.5 (971.7) 이름, 특히 신들의 이름은, 존경심을 가지고 다루어야 한다고 원시인은 믿었다. 이름을 하나의 개체로, 신체를 가진 인물과 다른 영향으로 여겼다. 이름은 혼과 그림자와 똑같이 존중되었다. 돈을 빌릴 때 이름을 전당 잡혔으며, 빌린 돈을 치르고 다시 찾기까지, 사람은 제 이름을 쓸 수 없었다. 오늘날 사람은 증서에 제 이름을 서명한다. 개인의 이름은 곧 마술에서 중요하게 되었다. 야만인은 이름을 두 개 가지고 있었다. 중요한 이름은 보통 경우에 쓰기에 너무 거룩하다고 여겼고, 따라서 둘째 이름, 곧 날마다 쓰는 이름―별명―이 생겼다. 야만인은 낯선 사람에게 그의 진짜 이름을 결코 알려 주지 않았다. 이상한 성질을 가진 어떤 체험을 겪어도 이름을 갈게 되었다. 어떤 때는 병을 고치거나 불운을 그치게 하려는 노력으로 이름을 갈았다. 야만인은 부족의 추장으로부터 이름을 사서, 새 이름을 가질 수 있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직함과 학위에 투자한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부시맨처럼, 가장 원시적 부족들 사이에서는 개인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88:6.1 (972.1) 요술 막대기를 사용하고, “주술” 의식을 통해서, 그리고 주문을 외움으로 마술을 썼으며, 마술을 쓰는 사람이 옷을 벗고 일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원시 마술사들 사이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많았다. 마술에서 “주술”은 치료가 아니라, 신비를 뜻한다. 야만인은 결코 자신을 치료하지 않았다. 마술 전문가의 조언을 받을 때를 빼고, 야만인은 결코 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20세기 부두교의 주술사는 옛날 마술사의 전형이다.
88:6.2 (972.2) 마술에는 대중 단계와 개인 단계가 있었다. 주술사ㆍ샤먼, 또는 사제가 행하는 것은 부족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여자 마술사ㆍ요술사ㆍ마법사는 사사로운 마술,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마술을 시행했고, 이것은 사람의 적들에게 불운을 가져오는 강제 방법으로서 쓰였다. 이영(二靈), 좋은 영과 나쁜 영의 개념은 백마술과 흑마술을 믿는 후일의 관념을 낳았다. 종교가 진화함에 따라서, 마술은 자신의 종파 바깥에서 영 활동에 쓰이는 용어였고, 마술은 또한 귀신을 믿는 더 오래 된 신앙에도 적용되었다.
88:6.3 (972.3) 낱말의 조합, 찬송가와 주문을 외우는 의식(儀式)은 어지간한 마술이었다. 초기에 쓰인 어떤 주문은 마침내 기도로 진화했다. 흉내내는 마술이 당장에 실행되었다. 연출로 기도를 나타냈고, 마술 춤은 극적인 기도(祈禱)에 지나지 않았다. 기도는 희생에 부수되는 것으로서, 차츰 마술을 대신하였다.
88:6.4 (972.4) 손짓은 언어보다 더 오래 되었으니까, 더 거룩하고 마력이 있었고, 흉내내기는 강한 마력이 있다고 믿었다. 홍인은 흔히 물소 춤을 연출했고, 그 춤에서 그들 가운데 하나가 물소 노릇을 연기하고, 잡혀서, 다가오는 사냥이 성공할 것을 보장하곤 했다. 5월제의 성(性) 잔치는 단지 흉내내는 마술이었고, 식물 세계의 성의 정열에 암시로 호소하는 것이었다. 인형(人形)은 처음에 아기 못 낳는 아내한테 마술 부적으로서 이용되었다.
88:6.5 (972.5) 마술은 진화하는 종교적 나무에서 나온 가지였고, 결국 과학 시대라는 열매를 맺었다. 점성술을 믿는 것은 천문학의 발전으로 이끌었다. 철학자의 돌을 믿는 신앙은 금속의 통달로 이끌었고, 마법의 수를 믿는 것은 수학의 기초를 쌓았다.
88:6.6 (972.6) 그러나 부적으로 아주 가득 찬 세계는 개인의 모든 포부와 창의력을 없애는 데 많이 기여했다. 더 노력하거나 부지런하여 얻은 열매는 마술로 간주되었다. 사람이 이웃보다 들에서 알곡을 더 거두면, 추장에게 마구 끌려가서 게으른 이웃의 들에서 이 여분의 곡식을 꼬여 갔다고 고발당할 수 있었다. 정말로, 미개한 시절에 아주 많이 아는 것은 위험했고, 언제나 흑(黑) 마술사로서 사형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88:6.7 (972.7) 차츰 과학이 생활에서 노름 요소를 제거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교육 방법이 실패한다면, 거의 즉시 원시의 마술을 믿는 신앙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러한 미신은 아직도 이른바 문명화된 많은 사람의 머리 속에 남아 있다. 주문에 홀린다, 별 자리가 나쁘다, 귀신 들린다, 영감(靈感), 귀신처럼 사라진다, 재주가 많다, 귀신에 홀린다, 천둥 맞는다, 깜짝 놀란다는 말처럼, 언어는 그 종족이 마술의 미신에 오랫동안 젖어 있었다는 것을 증언하는 화석(化石)을 많이 담고 있다. 지적인 사람들이 아직도 행운, 악한 눈, 점성술을 믿는다.
88:6.8 (973.1) 옛적의 마술은 현대 과학을 낳은 고치이며, 그 시대에 불가결했으나 이제 더 쓸모가 없다. 그래서 무지한 미신으로 가득 찬 공상은 과학의 개념이 태어날 수 있을 때까지, 사람들의 원시 지성을 흔들어 놓았다. 오늘날 유란시아는 이 지적 진화에서 황혼이 저무는 지대에 있다. 세계의 절반이 진리의 빛과 과학으로 발견한 사실을 열심히 움켜쥐고 있고, 한편 나머지 반은 옛적의 미신, 그러나 얄팍하게 가장된 마술의 팔에 안겨 시들고 있다.
89:0.1 (974.1) 원시인은 자신이 영들에게 빚을 졌다, 죄값을 물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야만인이 이를 보건대, 공평하게 하자면 영들은 훨씬 더 많은 불운을 그들에게 퍼부을 수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이 개념은 죄와 구원의 교리로 발전되었다. 혼은 자격을 빼앗기고―원죄(原罪)를 가지고―세상에 왔다고 간주되었다. 혼은 값을 물고 찾아야 했다. 속죄양이 마련되어야 했다. 머리 사냥꾼은 해골 숭배를 실천하고, 그 위에 자기 목숨의 대용품, 즉 희생자를 마련할 수 있었다.
89:0.2 (974.2) 야만인은 일찍부터 영들이 인간의 빈곤ㆍ고통ㆍ굴욕을 구경함으로 최고의 만족을 얻는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처음에 사람은 오직 저지른 죄에만 아랑곳했으나, 나중에는 빠뜨리는 죄를 걱정하게 되었다. 후일의 희생 제도 전부가 이 두 관념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이 새로운 의식은 영을 달래는 희생 예식을 지키는 것과 상관이 있었다. 원시인은 신들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무슨 특별한 일을 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오직 진보한 문명이 한결같이 차분하고 선의를 가진 하나님을 인정한다. 신을 달래는 것은 앞날의 축복을 얻으려는 투자라기보다 당장의 불운을 막는 보험이었다. 귀신을 피하고 쫓아내고 강제하고 달래는 의식(儀式)은 모두 서로 합병된다.
89:1.1 (974.3) 금기(禁忌)를 지키는 것은 사람이 불운을 피하려는 노력, 무엇인가를 피함으로 영 귀신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금기는 처음에 종교적인 것이 아니었으나 일찍부터 귀신이나 영의 인가를 받았고, 이렇게 강화되었을 때 금기는 법과 제도를 만들게 되었다. 금기는 예식 기준의 근원이요, 원시적 자제(自制)의 조상이었다. 금기는 가장 이른 형태의 사회 규제였고, 오랫동안 유일한 규제였다. 금기는 아직도 사회를 규제하는 구조의 기본 단위이다.
89:1.2 (974.4) 야만인의 머리 속에서 이 금지 사항이 강요하는 존경심은 금기를 집행한다고 생각된 자의 권능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똑같았다. 금기는 처음에 불운을 어쩌다 겪었기 때문에 생겨났다. 나중에는 추장(酋長)과 샤먼―영 귀신, 아니 신의 명령을 받는다고 생각되었던 주물 인간―이 금기를 제안했다. 영의 꾸짖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원시인의 머리 속에서 아주 대단했고, 그래서 금기를 어겼을 때 때때로 원시인은 놀라서 죽기도 하며, 이런 극적인 사건은 금기가 살아남은 자의 생각에 미치는 위력을 엄청나게 강화한다.
89:1.3 (974.5) 아주 일찍부터 있었던 금지 사항은 여자와 기타 재산에 손대지 말라는 제한이었다. 종교가 금기의 진화에서 비로소 더 큰 역할을 하게 되자, 금지된 물건을 더럽다, 나중에는 거룩하지 않다고 여겼다. 히브리인의 기록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가득히 언급하지만, 이 노선을 따른 그들의 관념은 많은 다른 민족의 관념보다 훨씬 덜 성가시고 범위가 좁았다.
89:1.4 (975.1) 히브리인의 열 가지 명령뿐 아니라 달라마시아와 에덴의 일곱 계명은 분명한 금기였고, 가장 오래 된 금지 조항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똑같이 부정 형태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법규는 앞서 있던 몇천 가지 금기를 대신했으므로, 참으로 사람을 해방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후일의 계명은 복종한 값으로 무엇인가 분명히 약속했다.
89:1.5 (975.2) 먹을 것에 대한 초기의 금기는 주물 숭배와 토템 신앙으로부터 생겨났다. 돼지는 페니키아인에게 신성하고 소는 힌두인에게 신성했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에집트인의 금기는 히브리와 이슬람 신앙에서 지속되었다. 먹을 것에 대한 금기의 한 변종은 임신한 여자가 어떤 식품을 너무 먹고 싶어해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식품을 닮는다는 믿음이었다. 그러한 고급 식품은 그 아이에게 금기가 되곤 했다.
89:1.6 (975.3) 먹는 방법은 곧 금기가 되었고, 그래서 고대와 현대의 식탁 예절이 생겨났다. 카스트 제도와 사회의 표준은 옛 금지 조항의 흔적을 가리키는 찌꺼기이다. 금기는 사회를 조직하는 데 어지간히 효과가 있었으나, 끔찍하게 부담이 되었다.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 체제는 쓸모 있는 건설적 규칙 뿐 아니라, 고리타분하고 낡고 쓸모 없는 금기도 보존하였다.
89:1.7 (975.4) 그러나 방대하고 잡다한 금기를 제외하고, 원시인을 비평할 처지에 있는 문명화된 사회는 하나도 없을 것이요, 원시 종교의 지지를 받지 않았더라면 금기는 결코 지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진화에서 많은 필수 요소는 무척 비싼 대가를 치렀고, 노력ㆍ희생ㆍ자제 면에서 큰 값을 요구했지만, 이 자제(自制)의 성취는 사람이 딛고 기어올라간 문명의 사다리의 참된 발판이었다.
89:2.1 (975.5) 우연을 두려워하고 불운을 무서워하는 것은 이러한 재난을 방지하는 보험이라 생각된 원시 종교를 발명하도록 글자 그대로 사람을 족쳤다. 종교는 마술과 귀신으로부터, 영(靈)과 주물을 거쳐서, 금기로 진화했다. 원시 부족마다 금지된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있었고, 이것은 실제로 사과였지만, 온갖 종류의 금기가 무겁게 달린 1천개나 되는 가지를 상징하였다. 그 금지된 나무는 반드시 “너희는 무엇을 하지 말라”하고 말했다.
89:2.2 (975.6) 야만인의 생각이 좋은 영과 나쁜 영을 상상하는 점까지 진화하는 동안에, 그리고 금기가 진화적 종교의 엄숙한 지지를 받았을 때, 새로운 죄 개념이 등장하기 위하여 무대가 모두 준비되었다. 계시된 종교가 미처 나타나기도 전에, 세상에서 죄의 개념은 보편적으로 확립되었다. 오로지 죄 개념으로 인하여, 원시인의 머리에 자연사는 이치가 있게 되었다. 죄는 금기를 어기는 것이요, 죽음은 죄에 대한 벌이었다.
89:2.3 (975.7) 죄는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의식(儀式)이었고, 생각이 아니라 행위였다. 이 죄 개념 전부가 딜문, 그리고 땅에 있던 작은 천국의 시절에 관한, 남아 있는 전통 때문에 육성되었다. 아담과 에덴 동산의 전통은 또한 종족들의 개벽 시절에 한때 “황금 시기”가 있었다는 꿈에 신빙성을 부여했다. 이 모두가 특별 창조가 있을 때 사람이 기원을 가졌고, 사람이 완전한 상태로 생애를 시작했으며, 금기를 어긴 것―죄―가 나중에 그를 불쌍한 곤경에 빠뜨렸다는 신앙에 후일에 표현된 생각을 입증했다.
89:2.4 (976.1) 금기를 버릇처럼 어기는 것은 악덕이 되었고, 원시 율법은 악덕을 범죄로 만들고, 종교는 악덕을 죄로 만들었다. 옛 부족들 사이에서 금기를 어기는 것은 범죄와 죄를 합친 것이 되었다. 공동체의 재난은 반드시 부족의 죄에 대한 벌이라고 간주되었다. 번영과 올바름이 붙어 다닌다고 믿은 자에게는, 악한 자가 번영하는 듯 보이는 것이 너무 걱정 되어서, 금기를 위반하는 자를 벌하려고 지옥을 발명하는 것이 필요했다. 앞날에 벌을 주는 이 장소의 수는 하나에서 다섯까지 달랐다.
89:2.5 (976.2) 죄의 고백과 용서의 관념은 원시 종교에서 일찍부터 나타났다. 사람들은 다음 주(週)에 저지르려고 하는 죄 때문에, 대중 회의에서 용서를 부탁하곤 했다. 고백은 다만 용서하는 의식이었고, 또한 더럽히는 것을 대중에게 통지하는 것이요, “더럽다 더러워!”하고 외치는 의식이었다. 그리고 나서 정화(淨化)하는 모든 의식 절차가 뒤따랐다. 고대의 모든 부족이 의미 없는 이 예식을 따랐다. 위생 관습인 듯한 옛 부족들의 많은 관습은 대체로 예식이었다.
89:3.1 (976.3) 극기가 이 종교의 진화에서 다음 단계로서 다가왔다. 금식은 보통 관습이었다. 곧 여러 가지 형태의 육체적 쾌락, 특히 성적(性的) 성질을 가진 쾌락을 그만두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굶는 의식은 여러 고대 종교에 뿌리 깊이 박혀 있고, 실질적으로 현대의 모든 신학 사상 체계에까지 전해져 내려왔다.
89:3.2 (976.4) 죽은 자와 함께 재산을 태우고 파묻는 낭비적 관습으로부터 야만인이 막 회복할 무렵이 되자, 바야흐로 종족들의 경제 구조가 비로소 모습을 갖추고 있을 때, 극기를 부르짖는 이 새 종교 교리가 나타났고, 수만 명의 진지한 혼이 가난을 친구로 삼기 시작했다. 재산은 영적 장애물로 간주되었다. 물질 소유가 영적으로 위험하다는 이 개념을 빌로와 바울의 시절에 사람들이 널리 품었고, 그 뒤로 늘 유럽의 철학에 두드러지게 영향을 주었다.
89:3.3 (976.5) 빈곤은 단지 육체를 죽이는 의식의 일부였고, 이것은 불행하게도 많은 종교, 특별히 기독교의 기록과 가르침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행은 억제하는, 흔히 어리석은 이 의식(儀式)이 부정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야만인에게 자제를 가르쳤고, 이는 사회의 진화에서 가치 있는 진보였다. 극기와 자제는 초기의 진화 종교로부터 생긴, 가장 큰 두 가지 사회적 이득이었다. 자제는 사람에게 새로운 생활 철학을 주었고, 이기적 만족이라는 분자(分子)를 늘이려고 늘 애쓰는 대신에, 개인적 요구인 분모(分母)를 낮춤으로 인생의 분수(分數)를 높이는 기술을 사람에게 가르쳤다.
89:3.4 (976.6) 스스로를 단련하는 이 옛 관념은 매질과 온갖 종류의 육체적 고문을 포함했다. 어머니 숭배교의 사제들은 육체적 고통의 미덕을 가르치는 데 특히 적극적이었고, 스스로 거세를 받음으로 본보기를 보였다. 히브리인, 힌두교 신자, 불교 신자는 이 고행(苦行)의 교리를 열심히 따른 자였다.
89:3.5 (976.7) 옛 시절을 통해서 내내, 사람들이 이 방법으로 신들이 적는 극기(克己) 장부에 공적을 더하려고 애썼다. 어떤 감정의 압박을 받고 있을 때 극기와 고행(苦行)을 하겠다고 서약하는 것이 한때는 풍습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이 서약은 신들과 계약하는 형태를 취했고,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고행하고 육체를 억제한 값으로 신들이 무언가 분명히 하기로 생각되었다는 면에서, 진화에서 참된 진보였다. 부정적 서약과 긍정적 서약이 있었다. 오늘날 인도의 어떤 무리들 사이에서, 이렇게 해롭고 극단적 성질을 가진 서약을 가장 잘 준수한다.
89:3.6 (977.1) 극기와 굴욕을 부르짖는 종파가 성의 만족에 눈을 돌린 것은 자연스러울 뿐이다. 전투에 들어가기 전에 군인들 사이에서, 성욕을 절제하는 종파가 의식으로서 생겨났다. 후일에 이것은 “성자(聖者)들”의 관습이 되었다. 이 종파는 결혼을 겨우 간통보다 덜한 악으로서 묵인했다. 세상의 많은 큰 종교가 이 고대의 숭배에 나쁘게 영향을 받았지만, 아무것도 기독교보다 더 두드러지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사도 바울은 이 숭배를 받드는 신자였고, 그의 개인적 관점은 그가 기독교 신학에 묶어놓은 가르침에 반영된다: “남자가 여자에게 손대지 않는 것이 좋으니라.” “모든 사람이 바로 나와 같기를 바라노라.” “그러므로 결혼하지 않은 자와 과부들에게 내가 이르노니, 나처럼 지내는 것이 저희에게 좋으니라.” 바울은 그러한 가르침이 예수의 복음의 일부가 아님을 잘 알았고, 이를 인정했다는 것은 그의 진술에서 나타난다, “계명이 아니라 허락으로서 내가 이것을 이르노라.” 그러나 이러한 열심 때문에 바울은 여자들을 경시하게 되었다. 이 모두가 딱한 것은, 그의 개인적 의견이 위대한 세계 종교의 가르침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천막을 만드는 그 선생의 조언에 글자 그대로 널리 순종한다면, 인류는 갑자기 영화롭지 못한 종말에 다다를 것이다. 더군다나 한 종교가 성욕을 절제하는 옛 종파와 관련된 것은 결혼과 가정, 곧 사회의 진정한 기초이자 인간을 진보시키는 기본 제도에 대항하는 싸움으로 직접 이끈다. 모든 그러한 신앙이 여러 민족의 숱한 종교에서 독신 사제 계급의 형성을 조장했다는 것에 놀래서는 안 된다.
89:3.7 (977.2) 언젠가 사람은 어떻게 방종하지 않고서 자유를, 포식하지 않고서 영양을, 방탕하지 않고 즐거움을 누리는가 배워야 한다. 극단적 극기(克己)보다, 자제가 행동을 규제하는 더 좋은 인간적 정책이다. 예수는 결코 추종자들에게 이런 부당한 관점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89:4.1 (977.3) 종교적 헌신의 일부로서, 희생은 다른 여러 가지 경건한 의식처럼, 간단한 한 가지 기원을 가지지 않았다. 권력 앞에 절하고, 신비가 있는 가운데 경건히 찬미하는 태도로 엎드러지는 경향의 전조(前兆)는 개가 주인 앞에서 아양부리는 데서 나타난다. 숭배하려는 충동으로부터 희생물 바치는 행동까지는 겨우 한 걸음일 뿐이다. 원시인은 그가 희생하는 값을 그가 받는 고통으로 쟀다. 희생물 바치는 관념이 처음 종교 의식에 달라붙었을 때, 아픔을 낳지 않는 헌물은 하나도 고려되지 않았다. 처음 희생물은 머리카락을 뽑고, 살을 베어내고, 절단하고, 이를 쳐서 뽑고, 손가락을 잘라 버리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 문명이 진보하자, 이 투박한 희생 개념들은 자기 절제, 금욕주의ㆍ금식ㆍ궁핍의 의식(儀式) 수준으로, 나중에는 슬픔과 고통, 정욕(情慾)의 억제를 통해서 성스럽게 바치는 기독교의 교리로 높이 올라갔다.
89:4.2 (977.4) 종교의 진화에서 일찍부터 두 가지 희생 개념이 존재했으며, 선물 바치는 관념은 추수를 감사하는 태도를 암시했고, 빚 갚는 희생은 죄값을 치른다는 관념을 포함하였다. 나중에는 대용품 개념이 발전하였다.
89:4.3 (977.5) 그후에, 사람은 그의 희생물이 무슨 성질을 가졌든지, 희생물은 신들에게 보내는 말씀을 지닌 사자로서 작용할 수도 있다고 상상했다. 희생물은 신의 콧구멍에 달콤한 향기와 같을 수도 있다. 이것은 희생 의식에서 향과 기타 미학적 특성을 낳았고, 그 의식은 희생물 바치는 잔치로 발전되었으며, 시간이 지나자 잔치는 갈수록 더 공들이고 화려하게 되었다.
89:4.4 (978.1) 종교가 진화함에 따라서, 화해하고 달래는 희생 의식은, 회피와 구슬리기와 귀신 쫓기와 같은 더 오래 된 방법을 대신하였다.
89:4.5 (978.2) 최초의 희생 관념은 조상의 영들이 공평한 세금을 부과한다는 관념이었다. 나중에야 속죄 관념이 개발되었다. 종족의 진화적 기원을 가진 개념을 사람이 벗어남에 따라서, 행성 영주 시절의 전통과 아담의 체재가 세월의 흐름을 통해 걸러짐에 따라서, 죄와 원죄의 개념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그래서 어쩌다가 저지른 개인의 죄에 대한 희생은 종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희생물을 바치는 교리로 진화하였다. 희생물을 바쳐 대신 갚는 것은, 알지 못하는 신의 분개심과 질투조차 포함하는 총괄 보험 조치였다.
89:4.6 (978.3) 쉽게 기분 상하는 허다한 영과 욕심 부리는 신들에 둘러싸여서, 원시인이 큰 무리의 빚쟁이 신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영적 빚을 갚는 데 일생 동안 모든 사제ㆍ의식ㆍ희생물이 필요했다. 원죄 교리, 곧 종족이 죄가 있다는 교리는, 사람마다 영 권력자들에게 무거운 빚을 지고서 인생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89:4.7 (978.4) 선물과 뇌물을 사람들에게 준다. 그러나 신들에게 주었을 때 선물과 뇌물은 헌신하든지 거룩하게 된다고 이야기했고, 또는 희생물이라 불렀다. 극기는 소극 형태로 신을 달래는 것이었고, 희생물 바치는 것은 적극 형태가 되었다. 신을 달래는 행위는 찬송하고 신을 영화롭게 하고, 아첨하고 신을 즐겁게 하는 것까지도 포함하였다. 옛날에 신을 달래던 종파의 이 적극적 풍습의 잔재가 현대의 신성한 예배 형태를 이룬다. 오늘날의 예배 형태는 다만 적극적으로 신을 달래는 기술, 희생물 바치는 이 옛 기술을 의식(儀式)으로 만든 것이다.
89:4.8 (978.5) 동물을 바치는 것은 현대 종족들에게 일찍이 의미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원시인에게 중요했다. 이러한 미개인은 동물을 실제 친척, 가까운 친척으로 여겼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은 제물을 바치는 데 약삭빨라졌고, 일하는 동물 바치기를 그쳤다. 처음에는 길들인 동물을 포함하여 어떤 물건을 드리더라도 가장 좋은 것을 바쳤다.
89:4.9 (978.6) 어떤 에집트 통치자가 다음을 바쳤다고 했을 때, 빈 말로 자랑한 것이 아니다: 노예 113,433명, 송아지 493,386마리, 배 88척, 금 우상 2756개, 꿀과 기름 331,702항아리, 포도주 228,380항아리, 거위 680,714마리, 빵 6,744,428덩어리, 동전 5,740,352자루. 이렇게 하려고 그는 땀흘리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무겁게 부과해야 했다.
89:4.10 (978.7) 신들이 희생물의 혼을 즐겼으니까 순전한 필요가 궁극에는 이 반야만인으로 하여금 바친 희생물의 물질 부분을 먹게 만들었다. 옛적에 신성한 식사, 현대의 통례에 따르면 성찬식이라는 구실로, 이 관습은 정당화되었다.
89:5.1 (978.8) 옛적에 사람을 잡아먹던 풍습에 대한 현대의 개념은 통째로 틀리다. 그것은 옛 사회의 도덕 관습의 일부였다. 현대 문명에는 식인(食人) 풍습이 전통으로 끔찍해도, 그것은 원시 사회에서 사회 및 종교 구조의 일부였다. 집단의 이익은 식인 풍습을 강요했다. 그것은 필요의 충동을 통해서 자랐고, 미신과 무지에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지속되었다. 사회ㆍ경제ㆍ종교ㆍ군사적 관습이었다.
89:5.2 (979.1) 원시 인간은 식인자였고, 사람의 고기를 즐겼다. 따라서 영과 그가 섬기는 원시적 신들에게 먹는 선물로서 사람의 고기를 바쳤다. 귀신 영이 단지 모습이 변화된 사람이었고, 먹을 것이 사람에게 가장 큰 필요였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먹을 것은 영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89:5.3 (979.2) 식인 풍습은 진화된 민족들 사이에서 한때 거의 보편적으로 퍼졌다. 산긱 족속은 모두 식인종이었으나, 최초에 안돈 족속은 그렇지 않았고, 놋 족속과 아담 족속도 그렇지 않았다. 진화 종족들과 크게 섞이기까지 안드 족속도 그렇지 않았다.
89:5.4 (979.3) 사람 고기에 맛을 들이면 그 입맛은 자란다. 굶주림이나 우정이나 복수나 종교 의식을 통해서 시작되고 나서, 사람의 살을 먹는 것은 버릇된 식인 풍습으로 계속된다. 사람을 먹는 일은 식량이 모자라서 생겼다. 하지만 이것이 근본적 이유였던 적은 드물다. 그러나 에스키모인과 초기의 안돈 족속은 기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 사람의 고기를 먹은 적이 드물다. 홍인은, 특히 중앙 아메리카에서, 식인종이었다. 한때는 원시의 어머니가 아이를 배느라고 잃어버린 기운을 되찾으려고 제 아이를 잡아먹는 것이 일반 풍습이었고, 퀸즈랜드에서 첫 아이는 아직도 이렇게 죽음을 당하고 잡아먹히는 일이 빈번하다. 근대에는 아프리카의 많은 부족이 하나의 전쟁 조치로서, 자기 이웃들을 무서워 떨게 만드는 일종의 끔찍한 짓으로서, 식인 풍습에 일부러 의존했다.
89:5.5 (979.4) 식인 풍습은 더러 한때 우수했던 핏줄이 퇴화함으로 생겼지만, 대체로 진화 종족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사람 잡아먹는 것은 사람들이 적에게 맹렬하고 모진 감정을 느꼈을 때 비롯되었다. 사람의 고기를 먹는 것은 엄숙한 복수(復讐) 예식의 일부가 되었다. 이 방법으로 적의 귀신이 없어지든지 또는 잡아먹는 사람의 귀신과 융합될 수 있다고 믿었다. 마법사들이 사람 고기를 먹음으로 권능을 얻는다는 관념이 한때 널리 퍼졌다.
89:5.6 (979.5) 사람을 잡아먹는 어떤 집단은 오직 자기네 부족 사람만 먹곤 했다. 일종의 거짓된 영적 근친 교배였는데, 이것은 부족의 단결을 강화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또한 적의 힘을 빼앗는다는 생각으로 앙갚음하려고 적들을 먹어치웠다. 친구나 동료 부족 사람의 몸을 먹는다면 그의 혼에게 명예를 돌리는 것이라 생각되었고, 한편 이처럼 적을 먹어치우는 것은 적에 대한 마땅한 징벌에 지나지 않았다. 야만인의 머리는 아예 일관성을 찾는 허세를 부리지 않았다.
89:5.7 (979.6) 어떤 부족들 사이에서 늙은 부모는 자기 자식들에게 먹히려고 애썼고, 다른 부족들 사이에서는 가까운 친척 잡아먹기를 삼가는 것이 풍습이었다. 그들의 몸은 팔거나 낯선 사람의 것과 바꾸었다. 도살하려고 살찌운 여자와 아이들을 파는 상당한 상업이 있었다. 병이나 전쟁이 인구를 통제하지 못할 때, 남는 사람은 예식도 차리지 않고 잡아먹혔다.
89:5.8 (979.7) 식인 풍습은 다음 영향 때문에 차츰 사라지고 있었다:
89:5.9 (979.8) 1. 때때로 식인 풍습이 공동체의 예식, 곧 동료 부족 사람에게 사형(死刑)의 벌을 내리기 위하여 집단으로 책임 맡는 것이 되었다. 피 흘린 죄는 모두가, 사회가 참여했을 때 범죄가 되지 않는다. 아시아에서 마지막 식인 풍습은 집행이 끝난 범죄자들을 이렇게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89:5.10 (979.9) 2. 식인 풍습은 아주 일찍부터 종교 의식이 되었지만, 귀신 공포증의 성장이 반드시 사람을 먹는 수준으로 내려가도록 작용하지는 않았다.
89:5.11 (979.10) 3. 결국 식인 풍습은 몸에서 겨우 어떤 부분이나 내장을 먹는 데까지 진보했고, 이것들은 혼을 담거나 영 부분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었다. 피를 마시는 것은 흔했고, 몸에서 “먹을 수 있는” 부분을 약과 함께 섞는 것이 관습이었다.
89:5.12 (980.1) 4. 남자에게 국한되었고, 여자는 사람 고기를 먹는 것이 금지되었다.
89:5.13 (980.2) 5. 다음에는 추장ㆍ사제ㆍ주술사에게 국한되었다.
89:5.14 (980.3) 6. 다음에 식인 풍습은 상급 부족 사이에서 금기가 되었다. 사람을 먹지 말라는 금기는 달라마시아에서 시작되었고, 천천히 세계에 퍼졌다. 한때 파묻은 시체를 파내서 먹는 것이 흔한 관습이었기 때문에, 놋 족속은 식인 풍습을 퇴치하는 수단으로서 화장(火葬)을 권장했다.
89:5.15 (980.4) 7.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식인 풍습에 마지막 종을 울렸다. 사람의 고기가 우수한 사람, 추장들의 먹을 것이 되었으니까, 그것은 결국 더욱 우수한 영들을 위하여 예비되었다. 그리고 가장 낮은 부족들을 제외하고, 이처럼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효과적으로 식인 풍습을 그치게 하였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가 충분히 자리잡았을 때, 사람 잡아먹는 것은 금기가 되었고, 인간의 살은 오직 신들의 먹을 거리였다. 사람은 겨우 예식에서 작은 부스러기, 성찬(聖餐)을 먹을 수 있었다.
89:5.16 (980.5) 마침내, 희생물 바치는 목적으로 동물 대용품이 널리 쓰이게 되었고, 더 뒤떨어진 부족들 사이에서도 개 잡아먹기는 사람 잡아먹기를 크게 줄였다. 개는 처음에 길들인 동물이었고, 그 자체로서, 그리고 먹을거리로서 높이 쳐주었다.
89:6.1 (980.6) 사람 제물은 식인 풍습을 고치는 처방일 뿐 아니라, 그 간접 결과였다. 영 세계까지 호송하는 영을 마련하는 것은 또한 사람 잡아먹기를 줄어들게 했는데, 죽여서 바친 이 희생물을 먹는 것은 풍습이 된 적이 없다. 어떤 형태로 어느 때인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관습에 전혀 빠지지 않은 민족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안돈 ㆍ놋ㆍ아담 족속은 식인 풍습에 가장 적게 물들었다.
89:6.2 (980.7)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거의 보편적이었다. 이 풍습은 중국인ㆍ힌두인ㆍ에집트인ㆍ히브리인ㆍ메소포타미아인ㆍ그리스인ㆍ로마인의 종교 관습에서 지속하였고, 많은 다른 민족, 뒤떨어진 아프리카 및 오스트랄리아 부족들 사이에서 요즘까지도 지속되었다. 후일에 아메리카 인디안은 식인(食人) 풍습에서 태어난 문명을 가졌고, 따라서 특히 중앙 및 남 아메리카에서 사람을 잡아 바치는 풍습에 흠뻑 젖어 있었다. 갈대아인은 보통 계제에 사람 바치기를 처음으로 버린 사람들에 속했고, 동물로 대신하였다. 약 2천 년 전에 일본에 마음씨 고운 어느 황제는 사람 잡아 바치는 것을 대신하려고 진흙 형상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 바치기가 북 유럽에서 사라진 것은 1천 년이 채 안 된다. 어떤 뒤떨어진 부족들 사이에서는 자원하는 자들이 사람 바치기를 아직도 행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종교적 자살이나 의식(儀式)으로 하는 자살이었다. 한때 어느 샤먼이 어떤 부족에서 크게 존경받는 한 노인을 바치라고 시켰다. 사람들이 반항했고, 복종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그 노인은 아들로 하여금 자신을 보내게 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정말로 이 관습을 믿었다.
89:6.3 (980.8) 예붓다와 그의 외딸에 관한, 히브리인의 이야기보다 더 비극이고 애처로운 체험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이것은 오래 되고 옛날부터 지켜 온 종교 관습과 진보하는 문명의 상반되는 요구 사이에 생긴, 가슴 아픈 싸움을 잘 나타낸다. 보통 관습이었다시피, 좋은 의도를 가진 이 사람은 어리석은 맹세를 하였고, 적들을 이기는 것에 대하여 어떤 값을 치르겠다고 찬성하면서 “전쟁의 신”과 협상했다. 이 값은 집으로 돌아올 때 그를 맞이하려고 집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자를 바치는 것이었다. 예붓다는 충실한 종들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그를 맞이하려고 가까이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알고 보니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 그를 집으로 맞아들이려고 나왔다. 그래서 그렇게 근래의 시절에도, 문명화되었다고 생각된 민족 사이에서, 두 달 동안 제 운명을 슬퍼한 뒤에 아버지가 이 아름다운 소녀를, 그 동포 부족 사람들의 찬성을 얻고서, 사람 제물로 실제로 바쳤다. 그리고 사람을 제물로 바치지 말라고 모세가 엄하게 명령한 마당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바보 같고 쓸데없는 맹세를 하는 데 빠지며, 옛날 사람들은 그러한 모든 서약을 무척 거룩하게 여겼다.
89:6.4 (981.1) 옛 시절에는 얼마큼 중요한 새 건물을 짓기 시작할 때, “기초에 넣는 제물”로서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풍습이었다. 이것은 그 구조물을 감시하고 보호하는 한 귀신 영을 마련해 주었다. 중국인이 쇳물을 부어 종을 만들려고 준비했을 때, 풍습은 종 소리를 좋게 만들려는 목적으로 적어도 소녀 하나를 바쳐야 한다고 명했다. 뽑힌 소녀는 산 채로 녹은 쇳물 속으로 던져졌다.
89:6.5 (981.2) 노예를 산 채로 넣고 중요한 담을 세우는 것은 많은 무리가 오랫동안 가졌던 관습이었다. 후일에 북 유럽 부족들은 새 건물의 담 속에 산 사람을 파묻는 이 관습 대신에,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를 담 속에 넣는 것으로 바꿔치웠다. 중국인은 담을 쌓는 동안에 죽은 일꾼들을 담 속에 묻었다.
89:6.6 (981.3) 팔레스타인의 어느 대단치 않은 임금은 예리고 담을 세우면서 “그의 맏아들 아비람을 잃고 그 기초를 세웠고, 막내아들 세굽을 잃고 그 대문들을 세웠다.”[1] [1730] 그런 근래의 시절에, 이 아버지는 그 도시의 대문의 기초 구멍에 두 아들을 산 채로 넣었을 뿐 아니라, 그의 행동은 또한 “주의 말씀을 따른” 것이라고 기록되었다. 모세는 기초에 이 제물 바치는 것을 금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가 죽고 나서 곧 이 풍습으로 돌아갔다. 장신구와 기념품을 새 건물의 초석 속에 집어넣는 20세기 예식은 원시의 기초 제물을 생각나게 한다.
89:6.7 (981.4) 첫 열매를 영들에게 바치는 것은 오랫동안 여러 민족의 관습이었다. 이제는 이를 지키는 것이 얼마큼 상징이지만, 모두가 사람을 잡아바치는 옛날 예식의 잔재이다. 첫 아이를 제물로 바친다는 생각은 옛 사람들, 특히 페니키아인 사이에서 널리 퍼졌고, 이들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버린 자들이었다. 제물을 바치면서 “목숨 대신에 목숨을”하고 말하곤 했다. 이제는 사람이 죽었을 때 너희가 “티끌에서 티끌로”하고 말한다.
89:6.8 (981.5) 아브라함이 마지못해 아들 이삭을 바치는 광경은, 문명화된 감수성에 충격이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 새롭거나 이상한 관념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큰 감정의 압박을 받을 때, 첫 아들을 바치는 것은 오랫동안 유행한 풍습이었다. 여러 민족이 이 이야기와 비슷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무슨 드물거나 특별한 일이 생겼을 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필요하다는, 세계에 널리 퍼진 깊은 관념이 한때 존재했기 때문이다.
89:7.1 (981.6) 모세는 사람을 대신하는 몸값을 개시함으로 사람 바치는 풍습을 끝내려고 애썼다. 그는 그 민족으로 하여금 그들의 성급하고 어리석은 맹세의 최악의 결과를 피할 수 있게 만든 체계적 계획을 세웠다. 확정된 요금에 따라서, 땅과 재산과 아이들을 구제할 수 있었고, 이 요금을 사제들에게 낼 수 있었다. 첫 아이를 잡아 바치기를 그만둔 무리들은, 이 끔찍한 행위를 계속한 뒤처진 이웃보다 큰 이점을 곧 가졌다. 그러한 뒤떨어진 많은 부족은 아들들을 이렇게 잃었기 때문에 크게 약화되었을 뿐 아니라, 지도층의 계승조차도 가끔 끊어졌다.
89:7.2 (982.1) 일시적인 아이 바치기의 부산물은 첫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집 문설주에 피를 문지르는 풍습이었다. 이것을 한 해의 신성한 축제의 하나와 연결하여 자주 행했고, 이 예식은 한때 멕시코에서 에집트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대부분에서 유행했다.
89:7.3 (982.2) 대부분의 집단이 의식으로 아이들을 잡아죽이기를 그만둔 뒤에도, 갓난아기를, 떨어진 광야나 강물에 작은 배 속에 홀로 두는 것이 풍습이었다. 사르곤ㆍ모세ㆍ싸이러스ㆍ로물루스의 경우와 같이, 아이가 살아남으면, 신들이 그를 살리려고 간섭했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나서 첫 아들을 신성하게 또는 희생물로서 드리는 관습, 즉 아이들이 자라도록 내버려 두고, 다음에 죽이는 것에 준하여 그들을 추방하는 관습이 따랐다. 이것이 식민지가 생긴 기원이었다. 로마인의 식민화 계획은 이 관습을 지켰다.
89:7.4 (982.3) 원시적 숭배와 관련되어, 성(性)의 문란으로 생긴 많은 특이한 관계는 사람을 바치는 것과 관련하여 기원이 생겼다. 옛날에는, 여자가 머리 사냥꾼을 만났을 때, 몸을 제공함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나중에는 신들에게 희생물로서 성스럽게 바친 소녀는 몸을 일생 동안 성전에서 신성한 성교 서비스에 바침으로 제 목숨 찾기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이 방법으로 그 여자는 몸 찾는 돈을 벌 수 있었다. 이렇게 몸값을 치르는 데 종사하는 여인과 성관계를 가지는 것은 사람을 무척 고상하게 만드는 일로 여겼다. 이 신성한 소녀들과 사귀는 것은 종교 예식이었고, 게다가 이 의식 전부가 평범한 성욕 만족을 얻기 위하여 그럴듯한 구실을 주었다. 이것은 소녀와 그 짝들이 스스로 기쁘게 실행한, 야릇한 종류의 자기 속임이었다. 문명이 진화로 진보할 때 도덕 관습은 언제나 뒤에서 끌려 가고, 이처럼 진화하는 종족들의 관습, 더 오래 되고 더 야만스러운 성 관습을 인가해 주었다.
89:7.5 (982.4) 성전의 매춘은 결국 남부 유럽과 아시아에 두루 퍼졌다. 성전의 창녀들이 번 돈은 모든 민족 사이에서 거룩하게―신들에게 드리는 고급 선물로―여겼다. 가장 높은 부류의 여인들이 성전의 매춘 시장에 들끓었고, 번 돈을 온갖 종류의 신성한 서비스와 공익 사업에 바쳤다. 상급 여인들의 상당수가 성전에서 임시로 몸 파는 서비스로 지참금을 모았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런 여자를 아내로 가지기를 더 좋아했다.
89:8.1 (982.5) 희생물로 죄값 치르기와 성전 매춘은 실제로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의 변종이었다. 다음에는 딸들을 거짓으로 바치는 일이 따랐다. 이 예식은 일생 동안 처녀성을 지키는 데 헌신하는 것과 더불어 방혈(防血)하는 것이었고, 이보다 오래 된 성전 매춘에 대한 도덕적 반작용이었다. 후일에는 처녀들이 신성한 성전 불을 지키는 봉사에 헌신하였다.
89:8.2 (982.6) 사람들은 결국 몸의 어떤 부분을 드리는 것이 사람을 완전히 제물로 바치는 더 오래 된 관습을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신체를 잘라내는 것도 또한 괜찮은 대용품이라고 생각되었다. 머리카락ㆍ손발톱ㆍ피, 그리고 손가락과 발가락조차 바쳤다. 후일에 거의 보편적이었던 옛 할례 의식은 부분을 희생하는 의식(儀式)의 산물이었다. 순전한 희생이었고, 거기에 위생을 지키려는 아무런 생각이 따라붙지 않았다. 남자들은 할례를 받았고, 여자들은 귀에 구멍을 뚫었다.
89:8.3 (983.1) 나중에는 손가락을 잘라내는 대신에 함께 묶는 것이 풍습이 되었다. 머리를 밀고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도 마찬가지로 종교적 헌신의 형태였다. 내시(內侍)를 만드는 것은 처음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생각을 고친 것이었다. 코와 입술 뚫기는 아직도 아프리카에서 실행되고 있고, 문신(文身)은 예전에, 상스럽게 몸에 상처를 입히는 풍습이 예술답게 진화한 것이다.
89:8.4 (983.2) 희생물 바치는 관습은, 진보하는 가르침의 결과로서, 결국 약속의 관념과 연결되었다. 마침내 신들이 사람과 진짜 협정을 맺는다고 생각되었고, 이것은 종교를 안정시키는 데 내디딘 큰 걸음이었다. 율법, 곧 계약이, 운ㆍ두려움ㆍ미신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89:8.5 (983.3) 사람은 그의 하나님 개념이 우주 통치자들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수준으로 나아갔을 때까지, 신과 계약하는 것을 결코 꿈에도 그릴 수 없었다. 사람이 초기에 가졌던 하나님 관념은 너무 인간을 닮아서, 자신이 비교적 믿을 만하고, 도덕과 윤리가 있게 될 때까지, 사람은 의지할 수 있는 신을 상상할 수 없었다.
89:8.6 (983.4) 그러나 신들과 계약을 맺는다는 생각이 마침내 도래하였다. 진화하는 인간은 결국 그의 신들과 주제넘게 협상할 정도의 도덕적 위엄을 얻었다. 그래서 희생물을 바치는 사업은 사람이 철학적으로 하나님과 협상하는 노름으로 차츰 발전했다. 이 모두가 불운에 대비해서 보험에 드는 새로운 조치, 아니 오히려 번영을 더 분명히 사들이는 향상된 기술이었다. 이 옛날의 제물이 신들에게 거저 드리는 선물, 고마움이나 추수 감사의 표시로 자진해서 드리는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품지 말라. 이런 제물은 참된 예배의 표현이 아니었다.
89:8.7 (983.5) 원시 형태의 기도는 영들과 협상하는 것, 신들과 따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탄원과 설득으로 무언가 더 형태가 있는 비싼 것을 대신하는 일종의 물물 교환이었다. 종족들의 발전하는 상업은 무역하는 정신을 불러일으켰고, 물물 교환하는 눈치를 개발하였다. 이제 이 특성은 사람이 신을 숭배하는 방법에도 비로소 나타났다. 어떤 사람이 남보다 장사를 더 잘하는 상인인 것처럼,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낫게 기도하는 자로 생각되었다. 올바른 사람의 기도는 높이 여김을 받았다. 올바른 사람은 영들에게 셈을 다 치른 자, 신들에게 모든 의식(儀式) 의무를 충분히 끝낸 사람이었다.
89:8.8 (983.6) 초기의 기도는 도저히 예배라 할 수 없었다. 기도는 건강ㆍ재산ㆍ목숨을 위하여 협상하는 탄원이었다. 여러 면에서, 기도는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별로 바뀌지 않았다. 기도를 아직도 책에서 읽어치우고, 형식으로 외우고, 바퀴에 붙이고 나무에 걸어 놓으려고 적으며, 거기서 지나가는 바람은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후― 하고 부는 수고를 덜어 줄 것이다.
89:9.1 (983.7)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는 유란시아 의식(儀式)이 진화하는 과정에 걸쳐서 내내, 사람을 잡아먹는, 피 흘리는 장사로부터 더 높고 상징적 수준으로 나아갔다. 희생물을 바치는 초기의 의식은 후일에 성찬 예식을 낳았다. 그후에는 사제가 혼자서 사람 희생물의 작은 조각이나 사람의 피 한 방울을 취하고, 그리고 나서 모두가 동물 대용품을 먹곤 했다. 몸값, 돈으로 되찾기, 계약과 같은 이 옛 관념은 후일에 성찬 예배로 진화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예식의 진화는 사람들과 교제하게 하는 막강한 영향을 미쳤다.
89:9.2 (984.1) 하나님의 어머니 숭배와 연결되어, 멕시코와 기타 장소에서, 케이크와 포도주를 드는 성찬이 더 오래 된, 사람을 바치는 관습에 있는 살과 피에 준하여 결국 이용되었다. 히브리인은 유월절 예식의 일부로서 이 의식을 오랫동안 지켰고, 이 예식으로부터 나중에 기독교식의 성찬식이 생겼다.
89:9.3 (984.2) 고대 사회의 형제 정신은 피를 마시는 의식에 기초를 두었다. 옛날 유대인의 친교는 희생물의 피를 흘리는 일이었다. 바울은 “영구한 약속의 피” 위에 새 기독교 종파를 세우기 시작했다. 바울이 피와 희생물에 관한 가르침으로 기독교를 쓸데없이 성가시게 만들기는 했어도, 인간이나 동물을 바쳐서 속죄하는 교리를 한 숨에 끝내버렸다. 그의 신학적 절충은, 계시조차도 진화의 점진적 통제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마지막이자 온통 충분한 사람 제물이 되었다. 신성한 재판관은 이제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만족한 것이다.
89:9.4 (984.3) 그래서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희생물 바치는 예식은 성찬 예식으로 진화했다. 따라서 현대 종교의 성찬은 사람을 잡아서 바치는 예식, 충격을 주는 옛날 예식과 그보다 이전에 있었던 사람 잡아먹는 의식, 이 두 가지를 정통으로 이어받은 예식이다. 많은 사람이 아직도 구원을 받으려고 피에 의존하지만, 적어도 그것은 비유요 상징이요 신비가 되었다.
89:10.1 (984.4) 옛날 사람은 희생물을 바침으로 겨우 하나님의 은혜를 의식하기에 이르렀다. 현대인은 구원받음을 스스로 의식하는 새로운 기법을 개발해야 한다. 죄의식은 필사자의 머리 속에 버티고 있지만, 거기에서 나온 구원의 생각 형태는 낡아빠지고 케케묵었다. 영적 필요라는 현실은 지속되지만, 지적 진보는 지성과 혼을 위하여 평안과 위로를 얻는 옛 방법을 없애버렸다.
89:10.2 (984.5) 죄는 의도하여 신에게 불충하는 것이라고 다시 정의를 내려야 한다. 불충에는 정도 차이가 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부분적 불충, 갈등으로 갈라진 충성, 무관심이라는 죽어가는 충성, 신이 없는 이상에 헌신하는 데서 나타나는 죽은 충성이 있다.
89:10.3 (984.6) 죄를 지었다는 감각이나 느낌은 도덕 관습을 어겼음을 의식하는 것이요, 그것이 반드시 죄는 아니다. 의식하면서 신에게 불충함이 없을 때 진짜 죄는 없다.
89:10.4 (984.7) 죄책감을 깨닫는 가능성은 인류에게 초월적 탁월성이 있다는 표시이다. 죄책감은 사람이 비열함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대하게 될 잠재성이 있고 언제나 올라가는 영광을 가진 생물로서 사람을 구별한다. 그러한 모자란다는 느낌은 시초의 자극이며, 이것은 믿음으로 필사자의 지성을 도덕적으로 고귀한 수준, 우주 통찰력과 영적 생활의 훌륭한 수준으로 변화시키는 그러한 믿음의 승리로, 빠르게 확실히 이끌어야 한다. 이처럼 인간의 존재에서 모든 의미 있는 것이 현세의 것으로부터 영원한 것으로 바뀌고, 모든 가치가 인간다운 것으로부터 신다운 것으로 높아진다.
89:10.5 (984.8) 죄의 고백은 불충을 씩씩하게 물리치는 것이지만, 그러한 불충이 시공에서 낳는 결과를 조금도 줄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백―죄의 성질을 진지하게 인정하는 것―은 종교적 성장과 영적 진보에 필수이다.
89:10.6 (985.1) 신이 죄를 용서하는 것은, 충성 관계의 단절이 의식하여 반항한 결과임을 한동안 인간이 의식한 뒤에, 충성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용서를 찾을 필요는 없으며, 오직 사람과 창조자 사이에 충성 관계가 다시 세워짐을 의식함으로 용서를 얻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충성하는 아들들은 모두 행복하고 봉사를 사랑하며,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길에서 늘 앞으로 나아간다.
90:0.1 (986.1) 종교적 관행의 진화는 구슬리기, 회피, 귀신 쫓아내기, 강요ㆍ화해ㆍ달래기로부터 제물 바치기, 죄지은 값 물어내기, 값을 치르고 되찾기에 이르기까지 진보하였다. 종교적 의식을 치르는 기술은 원시 종파의 형태로부터, 주물을 거쳐서 마술과 기적에 이르기까지 변화되었다. 물질을 초월하는 영역에 대한 사람의 개념이 갈수록 더 복잡해지는 데 반응하여 의식(儀式)이 더 복잡해지자, 불가피하게 주술사ㆍ샤먼ㆍ사제들이 의식을 지배하였다.
90:0.2 (986.2) 원시인의 진보하는 개념에서 결국, 영 세계는 보통 사람에게 반응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사람들 가운데 오직 예외인 자들만 신에게 말씀을 드릴 수 있었다. 영들은 오직 특별한 남자나 여자의 말만 듣곤 했다. 이처럼 종교는 차츰차츰 남의 손을 빌리게 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반드시 주술사나 샤먼이나[1] [1731] 사제가 신자와 숭배 받는 대상 사이에 끼어든다. 오늘날 유란시아 체계의 조직된 종교의 신앙은 이 수준에서 진화하는 발전을 거치고 있다.
90:0.3 (986.3) 진화 종교는 단순하고 온통 강력한 두려움에서 생겨나고, 이 두려움은 알지 못하는 것, 설명할 수 없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부딪쳤을 때 인간의 머리를 통해서 솟구친다. 궁극에 종교는 전능한 사랑을 매우 단순히 깨닫는 경지에 이르며, 인간의 혼이 우주의 아버지가 우주의 아들들을 한없이 사랑한다는 개념을 깨우칠 때, 이 사랑은 견딜 수 없이 그 혼을 휩쓴다. 그러나 종교적 진화의 시작과 절정 사이에는 샤먼이 판치는 긴 세월이 끼며, 이들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중개자ㆍ통역자ㆍ중재자로서 주제넘게 자리를 차지한다.
90:1.1 (986.4) 샤먼은 상급 주술사요, 예식을 맡는 주물 인간이요, 진화 종교의 모든 관습에서 초점이 되는 인물이었다. 많은 집단에서 샤먼은 전쟁 추장보다 높았는데, 이것은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을 알린다. 샤먼은 때때로 사제로서, 아니 사제인 임금으로서도 활동하였다. 후일의 어떤 부족들은 초기의 샤먼 주술사(점쟁이)와 나중에 나타나는 샤먼 사제를 모두 가졌다. 여러 경우에 샤먼의 직책은 상속되었다.
90:1.2 (986.5) 옛날에 이상한 것은 무엇이나 귀신에 들렸다고 보았기 때문에, 어떤 놀라운 기형(奇形), 정신이나 육체의 기형은, 주술사가 되는 자격이었다. 이들 가운데 많은 남자가 지랄병을 가졌고, 많은 여자가 히스테리가 있었다. 이 두 종류는 신과 악마에 들린 것 뿐 아니라, 옛적의 영감(靈感)의 상당 부분을 설명했다. 옛날부터 있던 사제들의 상당수가 나중에 망상증 환자라 부른 등급에 속했다.
90:1.3 (987.1) 사소한 문제에서 속임수를 썼을지 모르지만, 대다수의 샤먼은 그들이 신들렸다는 사실을 믿었다. 황홀한 상태나 몸이 굳어지는 발작에 스스로 빠질 수 있는 여자는 강력한 샤먼이 되었다. 나중에 그런 여자들은 선지자와 영 매체가 되었다. 그들의 몸이 굳어지는 황홀한 상태는, 주장에 따르면, 죽은 사람의 귀신과 교통하는 데 보통 관련되었다. 뭇 여자 샤먼이 또한 전문 춤꾼이었다.
90:1.4 (987.2) 그러나 모든 샤먼이 스스로에게 속지는 않았다. 많은 샤먼이 눈치 빠르고 유능한 사기꾼이었다. 그 직업이 발전함에 따라서, 풋내기는 주술사 자격을 얻기 위해서 시련과 극기로 10년의 세월을 견습생으로 일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샤먼들은 전문 형태의 복장을 개발했고 신비스러운 행위를 흉내냈다. 그들은 부족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신비스러운 느낌이 들게 하는 어떤 신체적 상태를 유도하려고 흔히 마약을 이용했다. 보통 사람들은 날랜 손재주의 묘기를 초자연의 것으로 여겼고, 약삭빠른 사제들은 복화술(複話術)을 처음으로 이용하였다. 여러 옛날 샤먼은 뜻하지 않게 최면술과 마주쳤고, 다른 사람들은 자기 배꼽을 오랫동안 뚫어져라 봄으로 자기 최면을 유도했다.
90:1.5 (987.3) 많은 사람이 이 술수와 속임수를 이용했지만, 하나의 등급으로서 그들의 명성은 결국 겉으로 나타난 업적에 달려 있었다. 샤먼이 시도한 일에 실패했을 때, 그럴듯한 변명을 늘어놓을 수 없으면, 강등(降等)되거나 죽음을 당했다. 이처럼 정직한 샤먼은 일찍 이슬로 사라졌고, 오직 눈치 빠른 배우들만 살아남았다.
90:1.6 (987.4) 늙은이와 힘센 사람들의 손에서 부족 사무의 독점 지휘를 빼앗아 눈치 빠른자, 영리한 자, 선견이 있는 자의 손에 던져 준 것은 주술 신앙이었다.
90:2.1 (987.5) 영을 불러내는 것은 아주 정밀하고 상당히 까다로운 절차였고, 옛날의 말로 행해지는 오늘날의 교회 의식과 견줄 만하다. 인류는 아주 일찍부터 초인간적 도움, 계시를 추구하였고, 사람들은 샤먼이 실제로 그러한 계시를 받는다고 믿었다. 샤먼들은 일할 때 암시의 큰 힘을 이용했어도, 거의 변함없이 그것은 소극적 암시였다. 겨우 최근에 와서야 적극적으로 암시 기술이 이용되었다. 샤먼 직업이 발전하는 초기에 그들은 비 부르기, 병 고치기, 범죄 찾아내기와 같은 직종으로 전문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병 고치는 것은 샤먼 주술사의 주요한 기능이 아니었다. 그보다 차라리 생활의 위험을 알고 통제하는 것이었다.
90:2.2 (987.6) 고대에 종교와 속세에서 쓰인 흑마술은 사제나 예언자나 샤먼이나 주술사들이 부릴 때 백마술이라고 불렀다. 흑마술을 실행하는 자를 마법사ㆍ마술사ㆍ요술사ㆍ마녀ㆍ마술쟁이ㆍ강신술사ㆍ요술쟁이ㆍ점쟁이로 불렀다. 시간이 지나자, 자연을 초월한다고 주장하는 그러한 접촉은 모두 요술이나 주술로 분류되었다.
90:2.3 (987.7) 마녀의 마법은 더 일찍 있던 비정상이고 인정받지 않은 영들이 부리는 마술을 포함했다. 샤먼의 주술은 보통의 영, 그리고 부족이 인정하는 신들이 행하는 기적과 관계되었다. 후일에 마녀는 악마와 연결되었고, 이처럼 종교적 불관용을 비교적 최근에 많이 드러내는 무대가 마련되었다. 마술은 많은 원시 부족에게 종교였다.
90:2.4 (987.8) 샤먼들은 우연이 영들의 뜻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크게 믿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자주 결정을 내렸다. 이 제비뽑는 성향이 현대에 남아 있는 것은 우연이 결정하는 많은 노름 뿐 아니라, 또한 잘 알려진 “술래로 따돌리기”하는[2] [1732] 운문(韻文)에서도 나타난다. 한때는 따돌림받은 술래는 죽어야 했다. 이제 그런 사람은 어떤 어린아이 놀이에서 술래이다. 원시인에게 심각한 일이었던 것이 현대에 어린아이의 오락으로 살아남았다.
90:2.5 (988.1) “뽕나무 꼭대기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 너는 분발할지라”하는 것처럼, 주술사는 징조와 전조를 크게 믿었다. 종족의 역사에서 아주 일찍부터 샤먼들은 별에 눈을 돌렸다. 원시의 점성술은 세계에 널리 퍼진 믿음이요 관습이었다. 꿈의 풀이도 널리 퍼졌다. 이 모든 것 후에, 죽은 자의 영과 교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변덕스러운 여자 샤먼이 뒤이어 나타났다.
90:2.6 (988.2) 고대에 기원이 있지만, 기우사(祈雨師)나 천기(天氣)를 움직이는 샤먼은 오랜 세월을 거쳐서 죽 버티어 왔다. 극심한 가뭄은 옛날 농사꾼에게 죽음을 뜻했다. 날씨를 통제하는 것이 고대의 많은 마술의 목적이었다. 문명화된 사람은 아직도 대화할 때 날씨를 보통 이야기거리로 삼는다. 옛날 사람들은 모두 샤먼이 비를 내리게 하는 힘이 있다고 믿었지만, 실패했을 때 왜 실패했는가 설명하는 그럴듯한 핑계를 내놓을 수 없으면, 그를 죽이는 것이 풍습이었다.
90:2.7 (988.3) 로마의 황제들은 거듭 점성가들을 추방했지만, 대중이 그들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변함없이 되돌아왔다. 그들을 쫓아낼 수 없었고, 그리스도 뒤 16세기에도 서양에서 교회와 국가의 지도자들은 점성술의 후원자였다. 총명하다고 생각되는 허다한 사람이, 행운의 별이나 불운의 별의 지배를 받으며 사람이 태어날 수 있다고, 천체들이 나란히 있는 것은 땅에서 여러 가지 모험의 결과를 좌우한다고 아직도 믿는다. 귓구멍 넓은 사람들이 아직도 점쟁이를 후원한다.
90:2.8 (988.4) 그리스인은 신탁(神託)의 조언이 효력이 있다고 믿었고, 중국인은 마귀로부터 보호를 받으려고 마술을 썼으며, 주술은 인도에서 번성했고 아직도 중앙 아시아에서 버젓이 지속한다. 주술은 세계의 많은 곳에서 두루, 겨우 요즈음에야 버린 관습이다.
90:2.9 (988.5) 때때로 참 선지자와 선생들이 일어나서 주술 신앙을 비판하고 폭로하였다. 사라지는 홍인조차도 지난 몇백 년 안에 그러한 선지자가 있었는데, 쇼니 족의 텐스콰타와는 태양의 일식(日蝕)이 1808년에 있을 것을 예언했고, 백인의 악덕을 비난하였다. 허다한 참된 선생이 오랫동안의 진화 역사를 통해서, 여러 부족과 종족 사이에서 나타났다. 어떤 시대의 샤먼이나 사제가 대중(大衆) 교육을 반대하고 과학의 진보를 망치려고 애쓰더라도 그들에게 도전하려고 참된 선생들이 늘 계속해서 나타날 것이다.
90:2.10 (988.6) 여러 면에서, 빗나간 방법으로, 옛 샤먼들은 하나님의 목소리요 섭리의 보관자로서 명성을 유지했다. 그들은 갓난아기에게 물을 뿌렸고, 그들에게 이름을 주었으며, 남자들에게 할례를 주었다. 모든 장례식을 주관했고, 죽은 자가 영 나라에 안전히 도착했다고 공식으로 선포했다.
90:2.11 (988.7) 샤먼 사제와 주술사들은, 겉으로 영들에게 바치는 제물인 여러 가지 요금을 축적함으로 흔히 아주 부유하게 되었다. 뜸하지 않게 샤먼은 실질적으로 부족 재산을 다 끌어 모으곤 했다. 부자가 죽고 나면, 그의 재산을 샤먼과 어떤 공익 사업이나 자선(慈善)에 똑같이 나누는 것이 풍습이었다. 이 관습은 아직도 티벳의 어떤 구석에서 행해지는데, 거기에는 남자 인구의 반이 이 등급의 비생산자에 속한다.
90:2.12 (989.1) 샤먼은 옷을 잘 차려 입었고, 아내를 보통 몇명 거느렸다. 그들은 최초의 귀족이었고, 부족의 모든 제한을 면제받았다. 그들은 아주 흔히 낮은 등급의 머리와 도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경쟁자를 마녀나 마술사라고 불러서 억눌렀고, 아주 흔히 영향력과 권력을 가진 자리에 올랐으며, 그래서 추장이나 임금을 지배할 수 있었다.
90:2.13 (989.2) 원시인은 샤먼을 필요악이라고 여겼다. 샤먼을 무서워했으나 사랑하지는 않았다. 옛날 사람은 지식을 존경했고, 지혜를 존중하고 그 값을 치렀다. 샤먼은 대체로 사기(詐欺)였지만, 주술을 존중하는 것은 종족의 진화에서 지혜에 웃돈을 지불했음을 잘 보여준다.
90:3.1 (989.3) 옛날 사람이 자신과 물질 환경이 직접, 귀신의 변덕과 영의 취미에 민감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의 종교가 물질적 일에만 순전히 관계되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현대인은 자기의 물질 문제를 직접 공격한다. 사물이 그의 머리를 총명하게 쓰는 데 반응하는 것을 깨닫는다. 마찬가지로 원시인은 물리적 영토에 있는 생명과 에너지를 수정하고, 아니 통제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우주에 대한 원시인의 이해가 제한된 것은 그로 하여금 귀신ㆍ영ㆍ신들이 몸소 직접, 생명과 물질을 낱낱이 통제하는 데 관여한다는 관념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이치에 맞게 원시인은 이 초인간 매개자들의 은혜와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90:3.2 (989.4) 이 관점에서 비추어 볼 때, 고대의 종파 예식에서 설명할 수 없고 비합리적인 많은 것이 이해된다. 종파의 예식은 원시인이 자기가 살고 있는 물질 세계를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원시인은 목숨을 연장하고 건강을 보장하려는 목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모든 병과 죽음 그 자체가 최초에는 영 현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샤먼이 주술사와 사제로서 활동하면서, 또한 의사(醫師)와 외과 의사로 수고해야 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90:3.3 (989.5) 원시인의 머리는 사실을 알지 못하여 장애를 받을지 모르지만, 그 모든 것에 논리가 있었다. 생각 깊은 사람들이 병과 죽음을 지켜볼 때, 그들은 이러한 고난의 원인을 규명하는 데 착수하고, 이해하는 데 따라서, 샤먼과 과학자는 고통에 관한 다음 여러 이론을 주창하였다:
90:3.4 (989.6) 1. 귀신―영의 직접 영향. 병과 죽음을 설명하는 데 가장 일찍 제기된 가설은 영들이 혼이 몸에서 나오도록 유혹함으로 병을 일으키며, 혼이 돌아가지 못하면 죽음이 따른다는 것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병을 일으키는 귀신이 악의로 하는 행위를 너무 무서워해서, 흔히 먹을 것이나 물도 주지 않고 아픈 사람을 버렸다. 그릇된 근거와 상관 없이, 이 관념은 병든 사람을 실질적으로 격리하고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았다.
90:3.5 (989.7) 2. 폭력―분명한 원인. 어떤 사고나 죽음의 원인은 확인하기 아주 쉬웠고, 그래서 이러한 원인은 귀신 행위의 종류로부터 일찍 제거되었다. 전쟁, 동물과 싸움하기, 그리고 기타 금방 확인할 수 있는 매체들에 따르는 사망과 상처는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병이 낫는 데 오래 걸리거나, 또는 “자연스러운” 원인으로 생겨도 상처가 곪는 것은 여전히 영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오랫동안 믿었다. 관찰할 수 있는 아무런 자연 요인을 발견할 수 없으면, 영 귀신들이 여전히 병과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90:3.6 (990.1) 오늘날 아프리카와 기타 지역에서, 횡사(橫死)가 아닌 죽음이 일어날 때마다 어떤 사람을 죽이는 원시 민족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주술사는 죄 있는 편을 지적한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다가 죽으면, 그 아이는 즉시 목 졸려 죽음을 당했다―한 목숨으로 다른 목숨을 갚는다.
90:3.7 (990.2) 3. 마술―적들의 영향. 많은 질병이 요술, 곧 악한 눈, 그리고 누구를 지적하는 마술 활의 작용으로 인하여 생긴다고 생각되었다. 한때는 누구에게 손가락질하는 것이 정말로 위험했다. 아직도 손가락질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된다. 분명치 않은 병과 죽음이 있을 경우에, 옛날 사람들은 정식으로 검시하고, 시체를 해부하고, 무엇을 발견하면 그것이 죽음의 원인이라고 결정을 내리곤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요술의 책임으로 돌리곤 했으며, 따라서 그에 책임 있는 마녀를 죽이는 것이 필요했다. 옛날 검시관의 검시는 마녀라고 생각된 자들의 목숨을 많이 건졌다.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 부족 사람은 스스로 마술을 쓴 결과로 죽을 수 있다고 믿었고, 이 경우에는 아무도 고발되지 않았다.
90:3.8 (990.3) 4. 죄―금기 위반에 대한 벌. 비교적 근래에 이르러, 질병은 개인이나 종족이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이라고 믿었다. 이 수준의 진화를 거치는 민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이론은, 사람이 금기를 어기지 않았으면 질병으로 고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질병과 고통을 “그들 안에 있는 전능자의 화살”로 여기는 것은 그러한 관념의 전형이다. 중국인과 메소포타미아인은 오랫동안 병이 나쁜 악마들이 행동한 결과라고 여겼다. 하지만 갈대아인은 또한 별이 고통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신이 성난 결과로 질병이 생긴다는 이 이론은, 문명화되었다고 소문난 여러 집단의 유란시아인 사이에서 아직도 유행한다.
90:3.9 (990.4) 5. 자연 원인. 인류는 에너지ㆍ물질ㆍ생명을 다루는 물리적 분야에서, 원인과 결과의 상호 관계인 물질적 비밀을 배우는 데 아주 더디었다. 고대 그리스인은 아담손의 가르침의 전통을 간직했기 때문에, 모든 병이 자연의 원인에서 생긴 결과인 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자였다. 과학 시대의 전개는 질병과 죽음에 대하여 사람이 오랜 세월에 걸쳐 가졌던 이론을 느리고 확실하게 무너뜨리고 있다. 열병은 초자연적 질환 종류로부터 처음으로 제거된 인간의 한 질병이었고, 점진적으로 과학 시대는 아주 오랫동안 인간의 지성을 가두어 두었던 그 무지의 사슬을 깨뜨렸다. 노령(老齡)과 전염을 이해하는 것은 귀신ㆍ영ㆍ신들이 인간의 비참한 일과 필사자의 고통을 몸소 일으킨다는, 사람의 두려움을 차츰 없애버리고 있다.
90:3.10 (990.5) 진화는 어김없이 그 목적을 이룬다. 진화는 미지의 것을 미신으로 두려워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무서워하는 마음을 사람에게 불어넣으며, 이것은 하나님 개념이 생기는 발판이다. 그리고 신에 대하여 진보된 이해가 생기고 나서, 바로 이 진화 기법은 나란히 일어나는 계시의 행위를 통해서, 어김없이 생각의 힘을 움직이게 만들며, 이것은 목적을 이루는 데 쓰인 발판을 용서 없이 없애버릴 것이다.
90:4.1 (990.6) 옛날 사람의 생활 전부가 질병의 예방이었다. 그들의 종교는 적지 않게 질병을 예방하는 기술이었다. 그리고 이론이 잘못된 것과 상관 없이, 그들은 그 이론을 실천하는 데 마음을 다하였다. 그들의 치료 방법을 한없이 신뢰하였고, 이것은 그 자체로서 강력한 치료법이었다.
90:4.2 (991.1) 이 옛날의 한 샤먼의 어리석은 보살핌을 받고서 낫는 데 필요한 믿음은 결국, 후일에 비과학적 병 치료에 참여하는 어떤 후계자의 손에서 치료받는 데 필요한 믿음과 실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90:4.3 (991.2) 더 원시적인 부족들은 아픈 사람을 크게 무서워했고, 아픈 사람을 오랜 세월 동안 주의해서 피하고, 부끄럽게도 소홀히 하였다. 샤먼 직책이 진화되어 질병을 고치겠다고 찬성하는 사제와 주술사가 생겼을 때, 인도주의가 크게 진보하였다. 다음에 씨족 전체가 병실로 몰려가서 병 귀신을 소리쳐 쫓아내며 샤먼을 돕는 것이 풍습이 되었다. 여자가 진찰하는 샤먼이 되는 일이 드물지 않았고, 한편 남자는 치료를 베풀곤 했다. 질병을 진찰하는 보통 방법은 한 동물의 창자를 검사하는 것이었다.
90:4.4 (991.3) 노래하고, 높은 소리를 지르고, 몸에 안수(按手)하고, 환자에게 입김을 불어서, 그리고 기타 여러 방법으로 병을 치료하였다. 후일에는 성전에서 잠자는 데 의존하는 것이 널리 퍼졌고, 자는 동안에 치료가 일어난다고 생각되었다. 주술사들은 성전에서 잠자는 것과 관련하여 결국 실제로 수술을 해 보았다. 처음에 한 수술 중에서 두통 귀신이 도망가게 하려고 머리뼈에 구멍 뚫는 수술이 있었다. 샤먼들은 골절과 삔 것을 치료하고 부스럼과 종기(腫氣) 째는 것을 배웠다. 여자 샤먼은 산파 노릇에 숙달하게 되었다.
90:4.5 (991.4) 몸에서 환부나 더러워진 곳에 무언가 요술인 것을 문지르고, 부적을 던지고, 나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 치료 방법이었다. 누구라도 버려진 부적을 집으면, 그는 즉시 그 병에 걸리거나 흠을 얻는다고 믿었다. 약초와 다른 진짜 약들이 소개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주문을 외우는 것과 관련하여 마사지, 곧 몸을 주물러서 영 쫓아내기가 개발되었고, 현대인이 바르는 약을 문질러 몸에 넣는 것처럼, 약을 문질러서 집어넣으려는 노력이 이에 앞섰다. 방혈과 더불어, 상처난 부분을 흡각(吸角)으로 피 뽑아내기, 그리고 빨아내기가 병을 일으키는 영을 제거하는 데 쓸모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90:4.6 (991.5) 물은 효험 있는 주물이었으니까, 여러 가지 병을 고치는 데 이용되었다. 병을 일으키는 영을 땀을 흘려서 없앨 수 있다고 오랫동안 믿어 왔다. 수증기 목욕을 높이 쳐주었고, 천연 온천은 곧 원시 요양지로서 번창하였다. 시초 인간은 열이 아픔을 덜어준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햇빛, 신선한 동물의 기관(器官), 뜨거운 진흙, 뜨거운 돌을 썼고, 이 방법들 가운데 많은 것이 아직도 이용된다. 영들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노력으로 리듬이 사용되었고, 톰톰 북이 널리 쓰였다.
90:4.7 (991.6)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 병은 영과 동물 사이에 꾸민 사악한 음모로 일어난다고 생각되었다. 동물이 일으키는 모든 질병에는 유익한 식물(植物) 치료법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낳았다. 홍인은 식물이 보편적 치료약이라는 이론에 특별히 집착했다. 그들은 식물의 뿌리를 뽑았을 때 남은 뿌리 구멍에 반드시 피 한 방울을 집어넣었다.
90:4.8 (991.7) 금식, 식사 조절, 반대 자극제들이 흔히 치료 조치로서 쓰였다. 인간의 분비물은 분명히 마력이 있었으니까, 높이 쳐주었다. 이처럼 피와 오줌은 아주 일찍부터 쓰인 약이었고, 뿌리와 여러 가지 소금으로 인하여 약의 종류가 확대되었다. 샤먼들은 냄새가 나쁘고 맛이 좋지 않은 약으로 질병 귀신을 몸에서 쫓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정결하게 하는 것은 아주 일찍부터 일상의 치료법이 되었고, 날 코코아와 키니네의 가치는 약학에서 가장 초기의 발견에 속한다.
90:4.9 (992.1) 그리스인은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참된 합리적 방법을 처음으로 발달시켰다. 그리스인과 에집트인은 다 유프라테스 강 유역으로부터 의학 지식을 받았다. 기름과 포도주는 상처를 낫게 하는 데 아주 일찍부터 쓰인 약이었다. 아주까리 기름과 아편을 수메르인이 이용하였다. 효과 있는 이 고대의 치료 비법의 다수는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때 그 효력을 잃었다. 사기와 미신 실습이 성공하는 데는 비밀이 반드시 필수였다. 오로지 사실과 진리가 완전히 깨닫게 하는 빛을 추구하며, 과학적 연구로 얻는 조명과 계몽을 달가워한다.
90:5.1 (992.2) 의식(儀式)의 요점은 그 연기를 완벽하게 하는 데 있다. 야만인 사이에서 의식은 아주 정밀하게 실행해야 한다. 의식을 올바르게 치렀을 때에야 그 예식이 영들에게 강요하는 힘을 소유한다. 의식에 흠이 있으면, 다만 신들을 성나게 하고 노엽게 만들 뿐이다. 따라서, 사람의 천천히 진화하는 머리가 의식 치르는 기술이 그 효력을 결정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빈틈없는 의식의 거행을 지휘하려고 머지않아 초기의 샤먼이 훈련받은 사제로 진화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래서 몇만 년 동안 끊임없는 의식은 사회를 거추장스럽게 만들고 문명을 성가시게 하였으며, 생활의 모든 행위, 종족의 모든 사업에 견딜 수 없는 짐이 되었다.
90:5.2 (992.3) 의식은 풍습을 거룩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의식은 사회 관습과 종교 관습의 보존에 이바지할 뿐 아니라, 신화(神話)를 만들어내고 지속시킨다. 또 한편, 의식 자체가 신화로부터 생겼다. 의식은 흔히 처음에 사회 예식이었고, 나중에 경제 예식이 되었고, 마침내 종교 예식의 거룩함과 위엄을 얻었다. 의식은 기도ㆍ춤ㆍ연극에서 보다시피, 개인이나 집단으로―또는 양쪽에서―실행할 수 있다.
90:5.3 (992.4) 아멘과 셀라와[3] [1733]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낱말은 의식의 일부가 된다. 욕하는 버릇, 신성 모독은 거룩한 이름을 예전에 의식에서 되풀이하던 것이 타락된 것이다. 거룩한 성소까지 순례하는 것은 아주 오래 된 의식이다. 의식은 다음에 정화하고 깨끗이 하고 성화(聖化)하는 공들인 예식으로 성장했다. 원시 부족에서 비밀 사회의 입회식은 실제로 투박한 종교 의식이었다. 옛날의 신비 종파들의 예배 기법은 단지 누적된 종교 의식을 한 번 길게 연출하는 것이었다. 의식은 마침내 현대 종류의 사회 예식과 종교적 예배, 곧 기도와 노래, 화답하여 글 읽기, 그리고 다른 개인 및 집단의 영적 헌신을 포함하는 예배로 진화하였다.
90:5.4 (992.5) 사제는 샤먼으로부터 신탁을 받는 사제, 점쟁이, 노래하는 자, 춤추는 자, 기우사(祈雨師), 종교 유품 보호자, 성전 관리자, 그리고 사건을 점치는 자를 거쳐서, 종교적 예배를 실제로 지휘하는 자의 신분에 이르기까지 진화했다. 결국 그 직책은 상속하게 되었고, 연속되는 사제 계급이 일어났다.
90:5.5 (992.6) 종교가 진화함에 따라서 사제들은 그들의 타고난 재주나 특별한 취향에 따라서 전문화하기 시작했다. 더러는 노래하는 자, 더러는 기도하는 자, 더러는 제사하는 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웅변하는 자―설교자―가 나타났다. 종교가 제도화되었을 때, 이 사제들은 “하늘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우겼다.
90:5.6 (992.7) 자신들의 경건함과 권한을 높이기 위해서 예배자를 신비에 젖게 하려고 옛날 말로 종교 의식을 거행함으로, 또 잡다한 마술의 속임수로, 사제들은 서민을 감동시키고 두려워하게 만들려고 언제나 애써 왔다. 이 모든 것에 있는 큰 위험은 의식이 종교의 대용품이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90:5.7 (993.1) 사제들은 과학의 발전을 더디게 만들고 영적 진보를 막으려고 많은 일을 했지만, 문명을 안정시키고, 어떤 종류의 문화를 높이는 데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사제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의식의 지휘자로 활동하기를 그만두었고, 신학으로―하나님을 정의(定義)하는 시도로―눈길을 돌렸다.
90:5.8 (993.2) 사제가 종족의 목에 매달린 맷돌처럼 무거웠음을 부인하지 않지만, 참된 종교 지도자는 더 높고 더 나은 실체에 도달하는 길을 가리키는 데 귀중하였다.
91:0.1 (994.1) 기도는 종교의 한 매체로서, 예전에 종교성이 없는 혼잣말과 대화하는 표현으로부터 진화했다. 원시인이 자의식을 얻게 되자, 남을 의식함으로부터 불가피하게 따르는 결과, 즉 사회에 반응하고 하나님을 깨닫는 두 가지 가능성이 생겼다.
91:0.2 (994.2) 아주 일찍부터 있던 기도(祈禱) 형태는 신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표현은, 너희가 어떤 중요한 사업을 시작할 때 친구에게 “내게 행운을 빌어주렴”하고 말하는 것과 비슷했다. 원시인은 마술에 종이 되었고, 행운과 불운이 인생의 모든 일에 끼어들었다. 행운을 비는 이 탄원은 처음에 혼잣말이었다―마술 부리는 자가 생각하는 것을 그저 소리내어 지껄이는 것과 같았다. 다음에 운을 믿는 이 사람들은 친구와 가족에게 밀어 달라 부탁하고, 이내 씨족이나 부족 전체를 포함하는 어떤 형태의 예식이 거행되곤 하였다.
91:0.3 (994.3) 귀신과 영의 개념이 진화했을 때, 이 간청은 인간을 초월하는 연설이 되었고, 신들을 의식하게 되자 그러한 표현은 진정한 기도의 수준에 이르렀다. 이것을 보여주는 예로서, 어떤 오스트랄리아 부족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원시 종교의 기도는 영과 초인간 성격자들에 대한 그들의 관념보다 일찍 생겼다.
91:0.4 (994.4) 종교적 각성이 있기 전에 초기의 민족들이 했던 것처럼, 인도의 토다 부족은 어느 특별한 이에게 향하지 않고 기도하는 이 관습을 지금 지킨다. 오직 토다인 사이에서, 이것은 그들의 퇴화하는 종교가 이 원시 수준으로 돌아가는 것을 나타낸다. 토다인의 우유 장수 사제들이 행하는 오늘날의 의식은 종교 예식이 아닌데, 이는 이 비개인적 기도가 어떤 사회적 가치나 도덕 가치나 영적 가치를 보존하거나 높이는 데 아무것도 이바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91:0.5 (994.5) 종교가 생기기 이전의 기도는 멜라네시아인의 마나[1] [1734] 관습, 아프리카 피그미족의 우다[2] [1735] 신앙, 북 아메리카 인디안의 마니토우[3] [1736] 미신의 일부였다. 아프리카의 바간다 부족은 겨우 요즈음에야 마나 수준의 기도를 벗어났다. 이 초기 진화의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지역 및 민족의―신들에게, 주물ㆍ부적ㆍ귀신ㆍ통치자에게, 그리고 보통 사람에게 기도를 올렸다.
91:1.1 (994.6) 초기에 진화된 종교의 기능은 천천히 모습을 갖추는 가치 기준, 필수인 사회적ㆍ도덕적ㆍ영적 가치 기준을 간직하고 확대하는 것이다. 종교의 이러한 임무를 인류가 아직 의식하면서 지켜보지 않았지만, 이것은 주로 기도의 기능으로 이루어진다. 기도하는 관습은 어떤 집단이든 상급의 가치를 이처럼 보존해 두려는 (현실화하려는) 노력,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노력을 대표한다. 그러나 기도가 보호되지 않는다면, 모든 거룩한 날이 재빨리 단지 노는 날의 처지로 되돌아갈 것이다.
91:1.2 (995.1) 종교와 그 매체는, 매체 중에 으뜸은 기도인데, 오직 일반적으로 사회에 인식된 가치 기준, 집단의 인정을 받는 가치 기준과 함께 연합되어 있다. 따라서, 원시인이 비열한 감정을 만족시키거나 염치없이 이기적 포부를 채우려고 애쓸 때, 그는 종교의 위안을 얻지 못하고 기도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 개인이 어떤 반사회적인 것이라도 성취하려고 한다면, 그는 비종교적 마술의 도움을 추구하고 마술사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기도의 도움을 빼앗긴다. 따라서 기도는 아주 일찍부터 사회의 진화, 도덕의 진보, 영적 달성을 힘차게 장려하는 수단이 되었다.
91:1.3 (995.2) 그러나 원시인의 머리는 논리도 일관성도 없었다. 초기의 인간은 물질적인 것이 기도의 분야가 아님을 깨닫지 못했다. 생각이 단순한 이 사람들은 먹을 것, 피난처ㆍ비ㆍ사냥감, 그리고 다른 물질 재화가 사회의 복지를 높인다고 판단했고, 따라서 이러한 물질의 축복을 얻으려고 빌기 시작했다. 이것은 기도를 곡해하는 것이었으나 사회적ㆍ윤리적 행동으로 이 물질적 목표를 이루려는 노력을 북돋아 주었다. 그러한 기도의 타락은 한 민족의 영적 가치를 낮추지만, 그런데도 그들의 경제ㆍ사회ㆍ윤리적 관습을 직접 향상하였다.
91:1.4 (995.3) 가장 원시 종류 지성의 경우에, 기도는 오직 혼잣말일 뿐이다. 기도는 일찍부터 대화가 되고, 급속히 집단 예배의 수준으로 확대된다. 기도하는 것은 원시 종교에서 마술 이전의 주문이,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도덕의 이상을 확대할 수 있는 유익한 권력자나 존재들의 실체를 인간의 머리가 깨닫는 수준까지 진화했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 세력들이 인간을 초월하며, 자의식하는 인간 및 동료 필사자의 자아와 다르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종교의 효력이 개인적이라는 것을 눈에 선하게 볼 때까지, 참된 기도는 나타나지 않는다.
91:1.5 (995.4) 기도는 물활론(物活論)과 거의 관련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싹트는 종교적 감정과 나란히 존재할 수도 있다. 여러 번, 종교와 물활론은 도무지 동떨어진 기원을 가졌다.
91:1.6 (995.5) 무서움이라는 원시적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에, 모든 기도가 죄를 지었다는 더러운 느낌, 실제 죄이든 상상하는 죄이든, 죄 지었다는 부당한 확신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참 위험이 있다. 그러나 현대에는 많은 사람이 기도에 충분히 시간을 써서, 그들이 보잘것없거나 죄가 많다고 이렇게 해롭게 곰곰이 생각하도록 이끌 것 같지는 않다. 기도를 잘못 이용하고 왜곡하는 데 따르는 위험은 무지ㆍ미신, 형식의 고정화, 활력의 상실에 있고, 유물론과 광신(狂信)에 있다.
91:2.1 (995.6) 처음의 기도는 단지 소망을 말로 표현한 것, 진지한 바람을 표현한 것이었다. 다음에 기도는 영의 협조를 얻는 기술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 기도는 모든 값진 가치 기준을 보존하는 면에서 종교를 돕는 상급 기능에 도달했다.
91:2.2 (995.7) 기도와 마술, 이 두 가지는 사람이 유란시아 환경에 맞게 반응하는 결과로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 일반화된 관계를 별도로 하고, 이 두 가지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기도는 언제나 비는 자아의 적극적 행위를 가리켰다. 기도는 언제나 정신적이고, 때때로 영적인 것이었다. 마술은 보통, 시행자, 마술 실습자의 자아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현실을 조종하려는 시도를 가리켰다. 기원을 따로 가졌는데도, 마술과 기도는 후일의 발전 단계에서 서로 관련되었다. 마술은 공식(公式)으로부터 의식(儀式)과 주문을 거쳐서, 참된 기도의 문턱에 이르기까지 목표를 높임으로 때때로 올라갔다. 기도는 때때로 너무 물질적이었고, 그래서 유란시아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기법, 가짜 마술의 기법으로 굴러 떨어졌다.
91:2.3 (996.1) 기도가 신들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이 깨달았을 때, 기도는 오히려 부탁, 간청이 되었다. 그러나 가장 참된 기도는 실제로, 사람과 창조주 사이에 교통하는 것이다.
91:2.4 (996.2) 어떤 종교에서도 희생물 바치는 관념이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자신의 거룩하게 된 뜻을 드리는 대신에, 사람들이 물질 재산 드리기를 추구하므로, 참된 기도의 더 높은 효력을 어김없이 떨어뜨린다.
91:2.5 (996.3) 종교가 성격을 가진 하나님을 벗어버릴 때, 그 기도는 신학과 철학 수준으로 옮겨진다. 한 종교에서 가장 높은 하나님 개념이, 범신적 이상주의에서 보는 것 같은 비성격 신 개념이 될 때, 어떤 형태의 신비스러운 교통의 근거를 마련해 주기는 해도, 참된 기도의 효능에 치명적인 것이 드러난다. 참 기도는 반드시 사람이, 성격을 가진 우수한 존재와 교통함을 나타낸다.
91:2.6 (996.4) 종족이 진화하는 초기에, 그리고 현대에도, 보통 필사자의 일상 체험에서 기도는 사람이 자신의 잠재 의식과 대화하는 현상과 아주 가깝다. 그러나 지적으로 기민하고 영적으로 진보하는 개인이 인간 지성의 상의식(上意識) 수준, 깃드는 생각 조절자의 영토와 얼마큼 접촉하는, 그러한 기도 분야가 또한 있다. 그 위에, 우주의 영적 세력이 받고 인식하는 데 관계되는 참된 기도의 분명한 영적 단계가 있으며, 이것은 모든 인간답고 지적인 관계와 전혀 다르다.
91:2.7 (996.5) 기도는 진화하는 인간 지성의 종교적 감각을 기르는 데 크게 이바지한다. 기도는 인격의 고립을 막도록 작용하는 힘찬 영향력이다.
91:2.8 (996.6) 기도는 종족의 진화에서 자연 종교와 관련된 하나의 기술을 대표하며, 이것은 또한 윤리적으로 뛰어난 더 높은 종교, 곧 계시 종교의 체험적 가치의 일부를 형성한다.
91:3.1 (996.7) 언어 쓰는 것을 처음 배울 때, 아이들은 그들에게 귀를 기울일 사람이 하나도 없어도, 생각을 말로 해보는, 말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창조적 상상력이 싹이 트자, 이들은 상상의 동무들과 이야기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이 방법으로 싹트는 자아가 가상(假想)하는 타아(他我)와 교통하기를 추구한다. 이 기법으로 그 아이는 일찍부터 혼잣말하는 것을 가짜 대화로 바꾸기를 배우고, 이 대화 속에서 이 타아는 말로 하는 그의 생각, 바람을 표현한 것에 대답한다. 어른의 생각에서 상당한 부분이 대화 형태로 머리 속에서 이루어진다.
91:3.2 (996.8) 초기에 원시 형태의 기도는 오늘날 토다 부족의 반(半) 마술적 암송, 특별히 어느 누구에게 드리는 것이 아닌 기도와 아주 비슷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법은 타아의 관념이 태어남으로, 대화 형태의 교통으로 진화하는 경향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타아 개념은 신다운 위엄을 가진 우수한 지위로 높아지고, 그러면 기도가 종교의 매체로서 등장한 것이다. 많은 단계를 거쳐서,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이 원시 형태의 기도는 총명하고 참으로 윤리 있는 기도의 수준에 이르기 전에, 진화하도록 정해져 있다.
91:3.3 (997.1) 연속되는 여러 세대의 기도하는 필사자들이 파악하다시피, 타아(他我)는 귀신ㆍ주물ㆍ영들을 거쳐서 다신교의 신들, 궁극에는 유일한 하나님 곧 기도하는 자아의 가장 높은 이상과 가장 고귀한 소망을 구현하는 신다운 존재에 이르기까지 진화한다. 이렇게, 기도하는 자의 가장 높은 가치와 이상을 보존하는 일에, 기도는 종교의 가장 유력한 매체로서 작용한다. 타아를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신답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개념이 나타나기까지, 기도는 언제나 사람을 사교적으로 만들고 교화하고 영답게 변화시키는 연습이다.
91:3.4 (997.2) 믿음으로 드리는 단순한 기도는 인간의 체험에서 힘찬 진화를 입증하고, 이렇게 함으로 원시 종교에서 가상(假想)의 상징인 타아와 함께 가졌던 옛날의 대화는 무한자의 영과 교통하는 수준, 그리고 모든 지적 창조의 영원한 하나님이자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실체를 진정하게 의식하는 수준까지 높아졌다.
91:3.5 (997.3) 기도하는 체험 속에서 초월 자아인 모든 것을 제쳐놓고, 윤리적인 기도는 더 나은 삶과 더 높은 달성을 위하여 사람의 자존심을 높이고 자아를 강화하는 훌륭한 방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물질적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필사자가 체험하는 하의식(下意識)의[4] [1737] 저수지를 보라, 영감과 안내를 받기 위해서는 물질인 자가 영적인 자, 신비의 훈계자와 닿는 상의식(上意識)의 경계를 보라, 기도는 도움을 얻기 위해서 인간의 자아로 하여금 이렇게 양쪽을 보도록 유도한다.
91:3.6 (997.4) 기도는 늘 두 가지 인간 체험, 영적 기술과 서로 관련된 심리적 과정이었고, 또 늘 그럴 것이다. 기도의 이 두 기능은 결코 완전히 떼어놓을 수 없다.
91:3.7 (997.5) 깨우침을 얻은 기도는 바깥에 계시고 성격을 가진 하나님 뿐 아니라, 또한 안에 계시고 비성격인 신, 깃드는 조절자를 헤아려 보아야 한다. 사람이 기도할 때 파라다이스에 계신 우주의 아버지 개념을 붙잡으려고 애쓰는 것은 무척 어울린다. 그러나 가장 실용적 목적을 위해서 가장 효과 있는 기법은, 원시의 지성이 늘 버릇처럼 한 것과 똑같이, 가까이 있는 타아의 개념으로 돌아가고, 다음에 이 타아의 관념이 단순한 허구(虛構)로부터 사실로 조절자의 계심 속에서 하나님이 필사 인간에 깃든다는 진리에 이르기까지 진화했음을 인식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사람은 자기 속에 깃들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 우주의 아버지의 바로 그 계심이자 알맹이인 타아, 실재하고 진정하고 신다운 타아와 함께, 말하자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다.
91:4.1 (997.6) 간청하는 사람이 제 동료들보다 이기적 이점을 찾을 때는 어떤 기도도 윤리적일 수 없다. 이기적이고 물질을 찾는 기도는 사심(私心)없는 신다운 사랑에 바탕을 둔, 윤리적 종교와 양립할 수 없다. 윤리에 어긋나는 모든 그러한 기도는 거짓 마술의 원시 수준으로 돌아가며, 진보하는 문명과 깨우친 종교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기적 기도는 자애로운 응보에 기초를 둔, 모든 윤리 정신을 짓밟는다.
91:4.2 (997.7) 기도는 결코 행동을 대신하는 정도가 되기까지 타락해서는 안 된다. 어떤 윤리적 기도도 행동을 자극하며, 자아를 초월하여 이상적 목표에 이르려는 진취적 노력으로 안내한다.
91:4.3 (998.1) 너희가 어떤 기도를 드리더라도 공정하여라. 하나님이 편애를 보이고, 다른 자녀들과 너희의 친구와 이웃, 아니 적보다도 더 너를 사랑하기를 기대하지 말라. 그러나 자연 종교, 즉 진화된 종교에서 드리는 기도는, 후일에 계시된 종교처럼 처음에는 윤리가 없다. 모든 기도는, 개별로 하든 공동으로 하든,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기도는 자아나 또는 남을 중심으로 드릴 수 있다. 기도가 비는 자를 위해서나 동료를 위해서 아무것도 구하지 않을 때, 혼(魂)의 그러한 태도는 참된 예배의 수준으로 향한다. 자기 본위의 기도는 고백과 부탁을 포함하고, 흔히 물질적 은혜를 부탁하는 것이다. 용서를 다루고 더욱 자제하기 위한 지혜를 찾을 때, 기도는 얼마큼 더 윤리가 있다.
91:4.4 (998.2) 이기심 없는 종류의 기도는 힘을 주고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만, 사람이 법과 질서가 있는 물리적 우주에서 산다는 것을 진보하는 과학의 발견이 보여줌에 따라서, 물질적 기도는 실망을 주고 사람이 환상에서 깨어나게 만들도록 정해져 있다. 한 개인이나 민족이 어린 시기에는 원시적ㆍ이기적ㆍ물질적 기도를 드리는 특징이 있다. 어느 정도까지 모든 그러한 부탁은, 그러한 기도에 대한 응답을 얻는 데 기여하는 노력과 수고로 어김없이 이끈다는 점에서 효력이 있다. 믿음으로 하는 진정한 기도는, 그러한 부탁이 영적 인정을 받을 가치가 없더라도, 생활 기법을 더 터득하는 데 반드시 이바지한다. 그러나 영적으로 앞선 사람은 원시적이거나 미숙한 생각을 하는 자가 그렇게 기도하는 것을 말리려고 애쓸 때 크게 조심해야 한다.
91:4.5 (998.3) 비록 기도가 하나님을 바꾸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도는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기대하며 기도하는 사람 속에서 크고 오래 가는 변화를 흔히 일으킨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기도는 진화하는 민족들의 남녀 안에서, 상당한 마음의 평안ㆍ명랑ㆍ차분함ㆍ용기, 자아의 통달과 공정한 정신의 근원이었다.
91:5.1 (998.4) 조상 숭배에서 기도는 조상의 이상을 추구하는 길로 이끈다. 그러나 신을 예배하는 한 모습으로서 기도는 모든 다른 그러한 관습을 뛰어넘는데, 이는 기도가 신의 이상을 추구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기도에서 타아의 개념이 지극히 높아지고 신답게 되면서, 사람의 이상도 따라서 단지 인간의 수준에서 하늘 같고 신다운 수준을 향하여 올라가며, 모든 그러한 기도의 결과는 인품을 높이고 인격을 깊이 통일하는 것이다.
91:5.2 (998.5) 그러나 기도는 반드시 개인 기도일 필요는 없다. 집단이나 집회에서 하는 기도는 그 영향이 상당히 사회에 퍼지므로 아주 효과가 있다. 한 무리가 도덕의 향상과 영적 진보를 위하여 공동체의 기도에 참여할 때, 그러한 예배는 그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에게 반응한다. 참여하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더 나아진다. 한 도시 전체나 한 나라 전부조차 그렇게 기도하는 예배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고백과 뉘우침과 기도는 개인과 도시, 나라와 온 민족을 힘찬 개혁의 노력과 과감한 성취를 향하여 용감하게 행동하도록 이끌어 왔다.
91:5.3 (998.6) 너희가 어떤 친구를 비난하는 버릇을 참으로 고치고 싶다면, 그러한 태도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일생에 날마다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버릇을 길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대체로 두 가지 조건에 의존한다:
91:5.4 (998.7) 1. 누구를 위해서 기도할 때 그 사람이 이를 알아야 한다.
91:5.5 (999.1) 2.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를 위하여 기도하든, 그 사람과 가까운 사회적 접촉을 가져야 한다.
91:5.6 (999.2) 기도하는 기법으로 조만간에 모든 종교는 제도화된다. 시간이 되면 기도는 수많은 2차적 매체와 결합되는데, 사제, 신성한 책, 예배 의식, 예식과 같이, 더러는 유익하고 더러는 확실히 해롭다.
91:5.7 (999.3) 그러나 영적 빛을 더 크게 받은 사람은, 자기의 허약한 영적 통찰력을 동원하기 위하여 상징을 몹시 바라는, 부족한 지능을 받은 자를 참고 너그럽게 보아야 한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업신여기는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상징이 없어도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는, 형태와 의식이 없이, 신을 숭배하고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 존중하기가 어려운 자에게 상징의 은혜로운 봉사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예배하는 가운데 대부분의 필사자는 그들이 예배하는 목표인 대상의 어떤 상징을 그려본다.
91:6.1 (999.4) 한 영역에서 개인적인 영적 세력 및 물질 감독자들의 뜻과 행위와 연결되지 않으면, 기도는 사람의 물리적 환경에 아무런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기도로 간청하는 범위에 아주 분명한 한계가 있지만, 그러한 한계는 기도하는 자의 믿음에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다.
91:6.2 (999.5) 기도는 진정한 병, 유기체의 병을 고치는 기술이 아니지만, 튼튼한 체력을 즐기는 데, 그리고 수많은 정신ㆍ감정ㆍ신경의 질병을 고치는 데 엄청나게 이바지해 왔다. 실제로 박테리아 때문에 생기는 병의 경우에도, 기도는 여러 번 다른 치료 과정의 효력에 크게 보탬이 되었다. 기도는 쉽게 성내고 투덜거리는 많은 병자를 인내(忍耐)의 표본으로 변화시키고, 그로 하여금 고통받는 모든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자가 되게 하였다.
91:6.3 (999.6) 기도의 효력에 관한 과학적 의심, 그리고 신다운 근원으로부터 도움과 안내를 받으려 하는 늘 있는 욕구, 이 두 가지를 절충하기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믿음으로 드리는 성실한 기도는 개인의 행복, 개인의 자제, 사회적 조화, 도덕적 진보, 영적 달성을 증진하는 데 막강한 힘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말라.
91:6.4 (999.7) 기도가 순전히 인간다운 관습, 사람의 타아와 가지는 대화이라도, 기도는 인간 지성의 무의식 영역에 쌓아 두고 보존된, 인간 성품에 비축된 힘을 실현하는 데 가장 효과 있게 접근하는 기법이다. 기도의 종교적 함축성과 영적 중요성은 별도로 하고, 기도는 건전한 심리학적 버릇이다. 충분히 곤경(困境)에 빠지면,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든 어떤 도움의 근원에게 기도를 드리고 싶어한다는 것이 인간의 체험에서 사실이다.
91:6.5 (999.8) 너의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탁할 정도로 너무 게으름을 피지 말지어다. 그러나 너 스스로가 각오를 가지고 닥친 문제에 용감하게 달려들면서, 너를 안내하고 버티게 할 지혜와 영적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서슴지 말고 부탁하여라.
91:6.6 (999.9) 기도는 종교적 문명의 진보와 보존에 필수 요소였고, 기도하는 자가 오로지 과학적 사실, 철학적 지혜, 지적 성실성, 영적 믿음에 비추어 기도한다면, 사회를 더욱 향상시키고 영답게 변화시키는 데 기도는 아직도 힘차게 공헌할 것이 있다. 예수가 제자들을 가르친 것 같이―정직하게, 사심 없이, 공평하게, 의심하지 말고―기도하라.
91:6.7 (1000.1) 그러나 기도하는 자가 몸소 영적 체험을 겪으면서 드리는 기도의 효력은, 어떤 면에서도 그러한 예배자의 지적 이해력, 철학적 총명, 사회적 수준, 문화적 지위, 또는 필사자의 기타 성취에 달려 있지 않다.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에 심리적ㆍ영적으로 부수되는 것들은 즉시, 개인에게 생기고 체험하는 것이다. 필사자가 무슨 다른 업적이 있던 상관 없이, 누구나 창조주와 교통할 수 있고, 사람이 창조자의 실체, 깃드는 생각 조절자와 접촉하는 바로 그 영역의 문턱에 아주 실질적으로 즉시 다가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은 하나도 없다.
91:7.1 (1000.2) 신비주의는 하나님이 앞에 계시다는 의식을 기르는 기법으로서 아주 칭찬할 만하지만, 그러한 풍습이 사회에서 고립되도록 이끌고 종교적 광신(狂信)에 이를 때 신비주의는 거의 비난을 받을 만하다. 지나치게 흥분한 신비주의자가 신이 주는 영감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전적으로 너무나 흔히 자신의 머리 속 깊은 데서 우러나온 것이다. 명상에 잠기면 필사자의 지성이 그 깃드는 조절자와 접촉하는 것이 흔히 유리하게 되지만, 동료 인간에게 베푸는 사심 없는 직책에서 마음을 다하여 사랑으로 봉사를 베푸는 것이 그 접촉을 수월하게 만드는 일이 더욱 흔하다.
91:7.2 (1000.3) 지난 시대에 나타났던 위대한 종교 스승과 선지자들은 극단적 신비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남녀였고, 동료 필사자에게 사심 없이 봉사함으로 하나님을 최선으로 섬겼다. 예수는 자주 사도들만 외딴 곳으로 데리고 가서 잠시 동안 명상과 기도에 잠기게 했지만, 대체로 사도들이 군중과 함께 봉사하는 접촉을 가지게 하였다. 사람의 혼은 영적 영양 뿐 아니라 영적 운동이 필요하다.
91:7.3 (1000.4) 종교적 환희는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생길 때는 괜찮아도, 그러한 체험은 깊은 영적 인품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감정의 영향으로 생긴 부산물일 때가 더 흔하다. 종교적인 사람은 눈에 선한 심리적 그림, 강렬하게 감동한 체험을 모조리 신의 계시나 영적 교통이라 여겨서는 안 된다. 진정한 영적 황홀경은 보통, 바깥으로 크게 차분하며, 거의 완전한 감정 통제와 연결된다. 그러나 예언을 받는 참된 환상은 심리학을 초월하는 그림이다. 그러한 방문은 거짓 환각이 아니요, 최면 같은 황홀경도 아니다.
91:7.4 (1000.5) 인간의 지성이 하의식(下意識)에서 떠오르는 것이나 상의식(上意識)의 자극에 민감할 때, 그 지성은 이른바 영감에 반응하여 행위할지 모른다. 둘 중에 어느 경우라도, 의식 알맹이가 그렇게 확대되는 것은 얼마큼 그 사람에게 낯선 것처럼 보인다. 자제하지 않고 신비주의에 빠지는 열심과 과격한 종교적 황홀경은 영감을 받았다는 증명서, 신이 준다고 생각되는 증명서는 아니다.
91:7.5 (1000.6) 신비주의ㆍ황홀경ㆍ영감과 같은 이 모든 이상한 종교적 체험이 진정한가를 재는 실용적 시험은 이 현상이 한 개인을 어떻게 만드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91:7.6 (1000.7) 1. 건강이 나아지고 몸이 더 건강하게 되는가.
91:7.7 (1000.8) 2. 개인의 정신 생활에서 더 효과 있게, 실용적으로 활동하게 하는가.
91:7.8 (1000.9) 3. 개인의 종교적 체험을 더욱 충만하고 즐겁게 사회와 연결짓는가.
91:7.9 (1000.10) 4. 틀에 박힌 필사 존재의 평범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나날의 생활을 더욱 낫게 영답게 변화시키는가.
91:7.10 (1001.1) 5.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 개인이 더욱 사랑하고 음미하게 하는가.
91:7.13 (1001.4) 그러나 기도는 특별한 이러한 종교적 체험과 아무런 진정한 관계가 없다. 기도가 지나치게 미학으로 흐를 때, 기도가 거의 순전히 천국의 신에 대한 아름답고 복된 명상으로 이루어질 때, 기도는 그 친교적 영향력을 많이 잃어버리고 기도하는 사람을 신비주의와 고립으로 향하게 한다. 지나친 비밀 기도와 연결된 어떤 위험이 있으며, 집단의 기도, 공동 예배가 그런 기도를 고치고 예방한다.
91:8.1 (1001.5) 기도에는 참으로 저절로 일어나는 모습이 있는데, 이는 원시인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뚜렷한 개념을 가지기 훨씬 전에, 자기가 비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시초의 인간은 두 가지 다른 상황에서 비는 버릇이 있었다: 끔찍한 곤경에 빠졌을 때, 도움을 얻으려고 손을 뻗는 충동을 느꼈고, 기쁨에 날뛸 때, 충동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데 빠졌다.
91:8.2 (1001.6) 기도는 마술이 진화된 것이 아니다. 이 둘은 따로 생겨났다. 마술은 신을 형편에 맞게 적응시키려는 시도였고, 기도는 인격자를 신의 뜻에 맞게 조정하려는 노력이다. 참된 기도는 도덕과 종교성이 있지만, 마술은 이 중에 어느 것도 없다.
91:8.3 (1001.7) 기도는 길들인 관습이 될 수도 있고, 많은 사람은 남이 기도하기 때문에 기도한다. 또 더러는 그들이 때맞추어 간청을 드리지 않으면 무슨 끔찍한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서 기도한다.
91:8.4 (1001.8) 어떤 사람에게 기도는 고마움을 차분하게 표현하는 것이요, 다른 사람에게는 찬미와 사회적 예배를 집단이 표현한 것이다. 어떤 때 기도는 다른 사람의 종교를 흉내낸 것이요, 한편 참되게 기도할 때 기도는 사람의 영적 성품이 어디에나 계시는 창조자의 영과 성실하게, 신뢰하면서 가지는 교통이다.
91:8.5 (1001.9) 기도는 하나님을 의식함을 저절로 입 밖에 내는 것일 수도 있고, 신학적 고백문을 뜻 없이 낭독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혼이 드리는 환희의 찬미이든지, 아니면 두려움에 질린 필사자가 종처럼 복종하는 것일 수 있다. 때때로 기도는 영적 목마름을 애처로이 표현한 것이고, 때때로 경건한 구절을 뻔뻔스럽게 외치는 것이다. 기도는 기쁨에 넘친 찬미이든지 또는 용서를 찾는 겸손한 간청일지 모른다.
91:8.6 (1001.10) 기도는 불가능한 것을 바라는 어린아이 같은 부탁이든지, 아니면 도덕적 성장과 영적 권능을 얻으려는 성숙한 탄원일 수도 있다. 간구는 날마다 먹는 빵을 얻기 위하거나, 하나님을 찾고 그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을 다하는 소망을 담을 수도 있다. 기도는 온통 이기적 요청일 수도 있고, 사심 없는 형제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참되고 훌륭한 손짓일 수도 있다.
91:8.7 (1001.11) 기도는 복수하려는 성난 외침일 수도 있고, 자기의 적을 위한 자비로운 중재일 수도 있다. 기도는 하나님의 생각을 바꾸려는 희망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사람의 자아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기법일 수도 있다. 기도는 엄격하다고 생각되는 재판관 앞에서 길 잃은 죄인이 움츠러들어 드리는 탄원이든지, 또는 살아 계신 자비로운 하늘 아버지의 해방된 아들이 기쁨에 넘쳐 표현하는 말일 수도 있다.
91:8.8 (1001.12) 현대인은 순전한 개인적 방법으로 하나님과 여러 가지를 의논한다는 생각에 어리둥절해한다. 많은 사람이 때마다 기도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들은 특별한 압력을 받아야―비상시에―겨우 기도한다. 사람은 하나님께 말씀드리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지만 오직 영적 어린이가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나서거나 그의 생각을 주제넘게 바꾸려 할 것이다.
91:8.9 (1002.1) 그러나 참된 기도는 실체에 이른다. 공기가 올라가고 있을 때에도, 어떤 새든지 날개를 펴지 않고는 날아오를 수 없다. 기도가 사람을 높여 주는 것은 기도가 우주의 올라가는 영적 기류(氣流)를 이용하여 진보하는 기법이기 때문이다.
91:8.10 (1002.2) 진정한 기도는 영적 성장에 보탬이 되고, 태도를 고치며, 신과 교통함으로부터 생기는 만족을 낳는다. 그 기도는 하나님 의식이 저절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91:8.11 (1002.3)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리를 더 계시해주고, 아름다움을 더 헤아리게 만들고, 확대된 선(善) 개념을 줌으로 사람의 기도에 응답한다. 기도는 주관적 손짓이지만, 인간 체험의 영적 수준에서 막강한 객관적 실체들과 접촉한다. 기도는 인간을 초월하는 가치를 얻으려고 인간이 뜻깊게 손을 뻗는 것이다. 기도는 가장 효력 있는 영적 성장 자극제이다.
91:8.12 (1002.4) 말은 기도와 상관이 없다. 말은 다만 영적 간청의 강물이 어쩌다 흘러가는 지적 경로일 뿐이다. 기도에 쓰이는 낱말의 가치는 사사롭게 드리는 예배에서 순전히 자신에게 암시하며, 집단 예배에서는 사회에게 암시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태도에 응답하고, 말에 응답하지 않는다.
91:8.13 (1002.5) 기도는 전투에서 달아나는 기법이 아니라, 오히려 전투 한가운데서 성장에 이르는 자극이다. 물건이 아니라 오직 가치있는 것을 위해서,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장을 위하여 기도할진저.
91:9.1 (1002.6) 너희가 효과 있는 기도를 드리고 싶다면, 널리 적용되는 간구의 법칙을 마음 속에 새겨야 한다:
91:9.2 (1002.7) 1. 너희는 우주 현실의 문제에 성실하고 씩씩하게 맞섬으로 힘있는 기도자로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너희는 우주의 끈기를 가져야 한다.
91:9.3 (1002.8) 2. 너희는 인간으로서 적응하는 인간적 능력을 정직하게 다 소모했어야 한다. 너희는 부지런했어야 한다.
91:9.4 (1002.9) 3. 너희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영적 성장의 품속에, 머리 속의 모든 소망과 혼의 모든 희망을 던져야 한다. 너희는 의미 있는 것들이 향상되고 가치 기준이 높아짐을 체험했어야 한다.
91:9.5 (1002.10) 4. 너희는 신의 뜻을 마음을 다하여 선택해야 한다. 너희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절대적 핵심을 없애야 한다.
91:9.6 (1002.11) 5.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고 행하기를 바랄 뿐 아니라, 너희는 아버지의 뜻을 실제로 행하는 데 조건 없이 거룩히 바치고 힘차게 헌신해 왔다.
91:9.7 (1002.12) 6. 너희의 기도는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신의 완전을 달성하는―길에 부딪치는 특정한 인간 문제를 푸는 신성한 지혜를 얻도록 순전히 지향될 것이다.
92:0.1 (1003.1) 유란시아에서 어떤 체계적 계시가 내리기 오래 전부터, 사람은 진화하는 체험의 일부로서 자연히 생긴 종교를 소유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기원을 가진 이 종교는 그 자체로서 사람이 가진, 동물을 초월하는 자질의 산물이었다. 진화 종교는 야만인ㆍ미개인ㆍ문명인 안에서 작용하고, 그에게 부딪치는 다음 영향력의 보살핌을 통해서, 수천 년에 걸쳐서 인류가 체험적 경력을 쌓는 동안 천천히 생겼다:
92:0.2 (1003.2) 1. 예배 보조자―동물 의식에서 실체를 파악하는, 동물 초월 잠재성이 나타나는 것. 이것을 신을 찾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라고 불러도 좋다.
92:0.3 (1003.3) 2. 지혜 보조자―상급의 표현 경로에서, 그리고 늘 확대되는 신의 실체 개념을 향하여, 경건한 지성 속에 찬미를 지도하는 성향이 나타나는 것.
92:0.4 (1003.4) 3. 성령(聖靈)―이것은 지성을 초월하는 초기의 선물이며, 모든 진정한 인격 안에 어김없이 나타난다. 예배를 갈망하고 지혜를 바라는 지성에게 베푸는 이 봉사는 신학 개념으로서, 또 실제로 사실로 인격이 체험하는 것으로서 인간이 살아남는다는 가설을 스스로 깨닫는 능력을 창조한다.
92:0.5 (1003.5) 이 세 가지 신성한 보살핌이 나란히 작용하는 것은 진화적 종교의 성장을 시작하고 추진하기에 아주 넉넉하다. 이 영향을 나중에 생각 조절자, 세라핌, 진리의 영이 확대하며, 이 모두가 종교의 발전 속도를 빠르게 한다. 이 매체들은 유란시아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왔고, 이 행성이 사람 사는 구체로 남아 있는 한, 여기서 계속할 것이다. 이 신성한 매체들의 많은 잠재성은 아직까지 표현될 기회를 가진 적이 없다. 필사자의 종교가 상물질 가치와 영적 진리의 숭고한 꼭대기를 향하여 한 수준 한 수준 올라감에 따라서, 많은 것이 다가오는 시대에 드러날 것이다.
92:1.1 (1003.6) 초기의 공포증과 귀신들로부터, 영들을 처음에 강제하고 다음에 구슬리려는 노력을 포함하여, 연속된 여러 발전 단계를 통해서 종교가 진화한 것을 추적해 보았다. 부족의 주물은 성장하여 토템과 부족 신이 되었고, 마술 주문은 현대의 기도가 되었다. 처음에 하나의 희생 행위였던 할례는 위생 절차가 되었다.
92:1.2 (1003.7) 종족들이 야만인이었던 초기 시절 전체에 걸쳐서, 종교는 자연 숭배로부터 귀신 숭배를 거쳐서 주물 숭배에 이르기까지 진보했다. 문명이 밝아옴과 함께 인류는 더 신비스러운 상징적 관념을 신봉했고, 한편 이제 성숙기에 가까워지면서 인류는 참 종교를 이해하기에, 아니 바로 진리의 계시가 시작되는 것을 위해서도 성숙해지고 있다.
92:1.3 (1004.1) 종교는 영적 관념과 환경에 대하여 지성이 생물학적으로 반응함으로 일어난다. 종교는 한 민족 안에서 좀처럼 멸망하거나 바뀌지 않는 것이다. 종교는 어느 시대에도 신비스러운 것에 대한 사회의 조정이다. 하나의 사회 제도로서, 종교는 의식ㆍ상징ㆍ제사ㆍ성서ㆍ제단ㆍ성소(聖所)ㆍ성전을 포함한다. 거룩한 물, 유품ㆍ주물ㆍ부적ㆍ예복ㆍ종(鐘)ㆍ북ㆍ사제직이 모든 종교에 공통으로 있다. 그리고 순전히 진화된 종교를 마술이나 요술로부터 온전히 분리하기는 불가능하다.
92:1.4 (1004.2) 신비와 권능이 언제나 종교적 느낌과 두려움을 자극해 왔고, 한편 감정은 이 둘의 발달을 강력하게 조절하는 요소로서 늘 작용해 왔다. 두려움은 언제나 기본되는 종교적 자극제였다. 두려움은 진화 종교에서 신들의 모습을 꾸미고, 원시 신자의 종교 의식(儀式)을 자극한다.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서, 두려움은 경외ㆍ찬미ㆍ존경ㆍ동정심으로 인하여 수정되고, 그리고 나서 가책과 뉘우침이 이를 더욱 조절한다.
92:1.5 (1004.3) 어느 아시아 민족은 “하나님은 크게 두려운 분이라”고 가르쳤다. 그것은 순전히 진화된 종교의 산물이다. 가장 높은 부류의 종교적 생활의 계시가 된 예수는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선언했다.
92:2.1 (1004.4) 종교는 모든 인간 제도 가운데 가장 경직되고 신축성이 없지만, 변하는 사회 뒤에 처져서 적응한다. 결국, 진화된 종교는 변하는 도덕 관습을 반영하며, 다시 이것은 계시된 종교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느리고 확실하게, 하지만 투덜거리면서, 종교(예배)는 지혜―체험적 논리가 안내하고 신의 계시가 비춰 주는 지식―의 발자국을 좇아서 따라간다.
92:2.2 (1004.5) 종교는 도덕 관습에 집착한다. 이미 있던 것은 오래 되었고, 신성하다고 생각된다. 다른 이유가 아니고 이 때문에, 돌로 만든 연장은 청동기 시대와 철기(鐵器) 시대까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 말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나에게 돌로 된 제단을 만들고자 하거든 너희는 깎은 돌로 세우지 말지니, 만드는 데 연장을 쓰면, 너희는 제단을 더럽혔느니라.” 오늘날도, 힌두인은 원시의 불 송곳을 써서 제단에 불을 지핀다. 진화된 종교의 과정에서, 새로운 것은 언제나 신성 모독으로 여겼다. 성찬(聖餐)은 새롭고 가공된 먹을 것이 아니라, 가장 원시적 식품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불로 구운 고기, 쓴 나물과 함께 이스트 넣지 않은 빵.” 온갖 종류의 사회 관행, 그리고 법 절차까지도 옛 모습에 집착한다.
92:2.3 (1004.6) 음탕하다고 여길 수 있는 많은 것이 다른 종교의 성서에 발표된 것을 보고 현대인이 놀랄 때, 지나가는 세대들이 그들의 선조가 거룩하고 신성하다고 여긴 것을 두려워 없애지 못했다는 것을 멈추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 세대가 음탕하다고 볼 수도 있는 많은 것을, 이전 세대들은 용납된 관습의 일부로, 아니 인정받은 종교 의식이라고까지 여겼다. 상당한 양의 종교적 논쟁은, 오래 되었지만 꾸짖어 마땅한 관습을 새로 제시된 논리와 절충하고, 오래 되고 묵은 풍습을 신조로 영속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면서 그럴듯한 이론을 찾으려는 끊임없는 시도 때문에 일어났다.
92:2.4 (1004.7) 그러나 종교의 성장을 너무 갑자기 가속하려고 애쓰는 것은 어리석을 따름이다. 한 종족이나 민족은 어떤 상급 종교로부터도, 적응하는 천재와 함께, 당대의 그 진화적 지위와 상당히 일치되고 양립할 수 있는 것을 동화할 수 있을 뿐이다. 사회ㆍ기후ㆍ정치ㆍ경제 조건은 모두, 종교적 진화 과정과 진보를 결정하는 데 온통 영향을 미친다. 사회의 도덕은 종교, 다시 말해서, 진화된 종교에 좌우되지 않는다. 오히려 종족의 도덕이 종교의 형태를 결정한다.
92:2.5 (1005.1) 사람의 종족들은 이상하고 새로운 종교를 그저 겉으로만 받아들인다. 새 종교를 그들의 도덕 관습과 옛날의 믿는 방식에 실제로 적응시킨다. 이것은 어떤 뉴질랜드 부족의 예가 잘 보여준다. 이 부족의 사제들은 이름만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뒤에, 가브리엘로부터 바로 계시를 받았다고 고백했는데, 그 계시의 취지는 바로 이 부족이 하나님이 택한 민족이 되었고, 그들이 절제 없는 성관계, 그리고 오래 되고 꾸짖어 마땅한 풍습, 그들의 수많은 다른 풍습에 마음대로 빠지는 것을 허락한다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새로 기독교인이 된 자들은 모두, 새롭고 덜 까다로운 이 기독교 해석으로 즉시 전향하였다.
92:2.6 (1005.2) 종교는 언젠가 온갖 종류의 반대되고 모순되는 행위를 인가한 적이 있고, 지금 부도덕하거나 죄라고 여기는 거의 모든 것을 한때는 인정했다. 체험으로 배우지 않고 논리의 도움을 받지 않은 양심은, 결코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안전하고 틀림없는 안내자가 된 적이 없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양심은 인간의 혼에게 말씀하는 신의 목소리가 아니다. 양심은 다만 존재의 어떤 현재 단계에서도 그 관습의 도덕적ㆍ윤리적 알맹이의 총합이다. 양심은 단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인간답게 생각한 이상적 반응을 나타낼 뿐이다.
92:3.1 (1005.3) 인간의 종교를 연구하는 것은 화석을 지닌, 지난 시대의 사회의 지층을 검사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습을 한 신들의 도덕 관습은 그러한 신들을 처음 생각한 사람들의 도덕률을 참되게 반영한다. 옛 종교와 신화(神話)는 사라진 지 오래된, 민족들의 신앙과 전통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 이 옛 의식 관습은 새로운 경제 관습과 사회의 진화와 나란히 지속하며, 물론 터무니없이 모순되어 보인다. 그 의식(儀式)의 남은 찌꺼기는 지난날의 민족 종교의 참 모습을 보여준다. 그 종파들은 진리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교리를 널리 펼치려고 형성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여라.
92:3.2 (1005.4) 종교는 언제나 대체로 관례ㆍ의식ㆍ관행ㆍ예식ㆍ독단의 문제였다. 종교는 끈질기게 해악을 끼치는 잘못, 즉 선택 받은 백성이라는 망상에 보통 물들어 있다. 주문 외우기, 영감, 계시, 신을 달래기, 뉘우침, 죄값 물어내기, 중재, 희생물 바치기, 기도, 죄 고백, 예배, 죽은 뒤에 부활, 성찬ㆍ의식ㆍ몸값ㆍ구원, 몸값 내고 되찾기, 계약ㆍ더러움ㆍ정화(淨化)ㆍ예언ㆍ원죄(原罪)와 같은 기본적 종교 관념―이 모두가 원시의 귀신 공포증이 있었던 옛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92:3.3 (1005.5) 원시 종교는 물질적 존재를 위한 싸움이 무덤을 넘어서 사는 것을 포함하려고 연장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신조를 유지하는 것은 자아 보존 투쟁이, 상상하는 귀신 및 영 세계의 영토까지 연장된 것이다. 그러나 진화된 종교를 비난할 유혹을 받을 때 조심하여라. 바로 진화된 종교는 일어난 사실임을 기억할지니,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어떤 개념의 힘은 그 개념이 확실하거나 진실한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얼마나 생생하게 인간에게 호소하는가에 있다.
92:3.4 (1006.1) 진화된 종교는 변화나 수정을 위하여 아무런 대책이 없다. 과학과 달리, 진화된 종교는 그 자체를 진취적으로 수정하는 방안을 마련하지 않는다. 진화된 종교는 그 추종자들이 그 종교가 “유일한 진리”라고 믿기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성자들이 전해 받은 신앙”은 이론적으로 최종이고 틀릴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진보가 그 단체 자체를 수정하거나 파괴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숭배 단체는 발전에 저항한다. 따라서 언제나 숭배 단체에게 수정을 강제해야 한다.
92:3.5 (1006.2) 오로지 두 가지 영향이 자연 종교의 교리를 수정(修正)하고 향상할 수 있는데, 하나는 느리게 진행하는 도덕 관습의 압력이요, 다른 하나는 신기원의 계시가 정기적으로 빛을 비추는 것이다. 그리고 진보가 느린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옛날에는 진취성이나 창의성이 있으면 요술사로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뜻했다. 숭배 단체는 몇 세대에 걸친 시대와 오랜 세월에 걸친 주기를 가지고 느리게 진보한다. 그러나 그 단체는 앞으로 나아간다. 귀신을 믿는 진화된 신앙은 계시된 종교의 철학을 받아들일 기초를 쌓았고, 이것은 궁극에 그 근원인 미신을 파괴할 것이다.
92:3.6 (1006.3) 종교는 여러 가지로 사회의 발전에 장애가 되었지만, 종교가 없이 지속되는 도덕이나 윤리, 가치 있는 문명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종교는 많은 비종교 문화의 어머니가 되었다: 조각은 우상 만들기에서, 건축은 성전 짓기에서, 시(詩)는 주문에서, 음악은 예배하는 노래에서, 연극은 영의 인도를 대신하는 연기에서, 춤은 철마다 예배하는 잔치에서 비롯하였다.
92:3.7 (1006.4) 그러나 종교가 문명의 발전과 보존에 필수였다는 사실에 주의를 불러일으키는 한편, 자연 종교는 달리 그 종교가 육성하고 유지한 바로 그 문명을 또한 절름발이로 만들고 방해하려고 많이 수고했다는 것을 적어야 한다. 종교는 산업 활동과 경제 발전을 방해했다. 노동을 헤프게 쓰고 자본을 낭비했다. 종교는 가족에게 반드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평화와 선의를 적절히 육성하지 않았다. 종교는 때때로 교육을 게을리 했고 과학의 성장을 더디게 만들었다. 죽음을 부유하게 꾸미기 위해서 삶을 지나치게 빈곤하게 만들었다. 진화된 종교, 인간의 종교는 정말로 이 모든 것, 그리고 더 많은 잘못ㆍ오류ㆍ실수를 저지른 죄가 있다. 그런데도 종교는 문화적 윤리, 문명화된 도덕, 사회의 단결을 유지했고, 계시된 종교가 후일에 많은 이러한 진화적 결점을 메우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92:3.8 (1006.5) 진화된 종교는 사람에게 가장 비용이 많이 든 제도였지만, 비할 수 없이 효과가 있었다. 인간의 종교는 오직 진화된 문명에 비추어서 정당화될 수 있다. 사람이 동물의 진화에서 올라간 결과가 아니라면, 그러한 종교 발전 과정을 정당화할 수 없을 것이다.
92:3.9 (1006.6) 종교는 자본의 축적을 용이하게 만들었고, 어떤 종류의 일을 육성했다. 사제들의 여가는 예술과 지식을 권장했고, 결국 그 종족은 초기에 윤리적 기법의 온갖 잘못의 결과로서 많은 것을 얻었다. 정직한 샤먼과 그렇지 않은 샤먼은 비용이 무척 비싸게 들었어도, 그들은 제 값을 충분히 했다. 지식 계급과 과학 그 자체는, 기생하는 사제 계급으로부터 솟아나왔다. 종교는 문명을 육성하고, 사회의 연속성을 마련해 주었고, 세세토록 도덕을 유지하는 경찰력이 되었다. 종교는 인간의 단련과 자제를 마련해 주었고, 이것은 지혜가 생길 수 있게 만들었다. 종교는 진화에서 효과 있는 채찍이며, 이 채찍은 게으르고 고통 받는 인류를 지능이 놀고 있는 자연 상태로부터 더 높은 이성과 지혜의 수준으로, 앞으로, 위로 가도록 사정 없이 몬다.
92:3.10 (1006.7) 그리고 동물로서 올라가서 얻은 이 신성한 유산, 진화된 종교를 계시된 종교로 계속 검열함으로, 그리고 진정한 과학의 불타는 용광로를 이용하여 늘 계속 다듬고 고귀하게 만들어야 한다.
92:4.1 (1007.1) 계시는 진화를 따르지만 언제나 진취적이다. 한 세계의 역사 시대를 통해서 종교의 계시는 늘 확대되고 있고 연달아 사람을 더욱 깨우치는 것이었다. 연속하여 진화하는 종교들을 분류하고 검열하는 것이 계시의 사명이다. 그러나 계시가 진화된 종교들을 높이고 개선하려면, 신의 그러한 방문은 그 가르침을 발표하는 시대의 생각 및 반응과 너무 멀리 동떨어지지 않은 가르침을 묘사해야 한다. 이처럼 계시는 언제나 진화와 연락을 유지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한다. 계시된 종교는 반드시 받아들이는 사람의 능력에 제한을 받는다.
92:4.2 (1007.2) 그러나 겉으로 나타나는 연락이나 유래와 상관 없이, 계시된 종교는 반드시, 최종 가치를 가진 어떤 신, 그리고 죽은 뒤에 인격 신분이 살아남는다는 어떤 개념을 믿는 신앙의 특징을 가진다.
92:4.3 (1007.3) 진화된 종교는 감상적이지만 논리가 없다. 그 종교는 가상하는 귀신 및 영 세계를 믿는 것에 대한 사람의 반응이다―미지의 것을 깨닫고 두려워함으로 자극 받는, 인간의 믿음이자 반사 작용이다. 실재하는 영적 세계가 계시 종교를 제시한다. 계시 종교는 우주의 신들을 믿고 기대려 하는 필사자의 갈망에 지능을 초월하는 우주가 반응하는 것이다. 진화된 종교는 인류가 멀리 빙 돌아서 진리를 찾으려고 더듬는 것을 그린다. 계시된 종교는 바로 그 진리이다.
92:4.4 (1007.4) 종교적 계시를 내린 여러 사건이 있었지만, 신기원(新紀元)의 중요성을 가진 것은 겨우 다섯이다. 이것들은 다음과 같다:
92:4.5 (1007.5) 1. 달라마시아의 가르침. 칼리가스티아 영주 참모진의 유형(有形) 참모 1백인이 참된 첫째 근원 중심 개념을 처음으로 유란시아에 선포하였다. 확대되는 이러한 신의 계시는 행성의 탈퇴와 교육 체제의 붕괴로 갑자기 끝날 때까지, 30만 년이 넘도록 이어졌다. 반이 한 일을 제쳐놓고, 달라마시아 계시의 영향은 온 세계에서 실질적으로 사라졌다. 아담이 도착할 때가 되자 놋 족속조차 이 진리를 잊어버렸다. 1백인의 가르침을 받은 모든 사람 가운데, 홍인이 그 가르침을 가장 오래 지녔다. 그러나 큰 영의 관념은 아메리카 인디안의 종교에서 겨우 흐릿한 개념이었고, 기독교와 접촉을 가졌을 때 그 개념이 크게 분명해지고 강화되었다.
92:4.6 (1007.6) 2. 에덴의 가르침. 아담과 이브는 진화 민족들에게 만물의 아버지 개념을 다시 묘사했다. 첫째 에덴의 붕괴는 아담의 계시가 미처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에 그 과정을 멈추게 했다. 그러나 중지된 아담의 가르침을 셋 족속 사제들이 계속하였고, 이 진리의 얼마큼은 세계에서 결코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다. 레반트의 종교적 진화의 경향 전체가 셋 족속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수정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2500년이 되자 인류는 에덴 시절에 후원받았던 계시를 대체로 잃어버렸다.
92:4.7 (1007.7) 3. 살렘의 멜기세덱. 네바돈의 이 비상시 아들은 유란시아에서 세 번째로 진리의 계시를 개시했다. 그의 가르침의 근본 교훈은 신뢰와 믿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전능한 은혜로움을 의지할 것을 가르쳤고, 믿음은 행위요, 행위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다고 선포했다. 그의 가르침은 다양한 진화된 종교의 관념 및 풍습과 차츰 서로 섞였고, 그리스도 이후 처음 천년이 시작될 때 유란시아에서 있었던 여러 신학 체계로 마침내 발전되었다.
92:4.8 (1008.1) 4.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미가엘은 하나님이 우주의 아버지라는 개념을 유란시아에 네 번째로 발표했고, 이 가르침은 그 뒤로 늘 널리 지속하였다. 그의 가르침의 본질은 사랑과 봉사였다. 즉 지음받은 아들이 아버지 하나님이 사랑으로 베푸는 봉사를 깨닫고, 또 그에 반응하여 자진하여 사랑으로 예배하는 것이요, 그러한 지음받은 아들들은 자유 의지로 형제들에게 봉사를 베풀고, 이러한 봉사로 마찬가지로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을 기쁘게 깨닫는다.
92:4.9 (1008.2) 5. 유란시아 논문집. 이 글은 이 논문집 가운데 하나인데, 이것은 유란시아의 필사자들에게 주는 최근의 진리 발표이다. 이 여러 논문은 모든 이전의 계시와 다르니, 이것은 한 우주 성격자의 작품이 아니라, 여러 존재의 종합된 발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의 아버지 앞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어떤 계시도 결코 완벽할 수 없다. 하늘이 베푸는 모든 다른 봉사는 기껏해야 부분적ㆍ일시적이며, 시공의 지역 조건에 실용적으로 적응되었다. 이처럼 인정하는 것은 모든 계시에서 즉시 생기는 효과와 권한을 아마도 깎아내릴지 모르지만, 유란시아의 필사 종족들에게 최근에 진리를 이처럼 내린 계시의 미래 영향과 권한을 약화시키는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그렇게 솔직히 말하는 것이 좋은 때가 유란시아에 왔다.
92:5.1 (1008.3) 진화된 종교에서, 신들은 사람과 비슷한 모습으로 존재한다고 생각되었다. 계시된 종교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아니 신의 유한한 모습을 따라서 빚어졌다고―가르침 받았다. 계시의 가르침과 진화의 산물이 혼합되어 합성된 신앙의 경우에 하나님 개념은 다음이 섞인 것이다:
92:5.2 (1008.4) 1. 여러 진화 종파의 선재하는 관념.
92:5.5 (1008.7) 대부분의 큰 종교 시기는 어떤 뛰어난 인물의 일생과 가르침으로 개시되었다. 지도층은 역사에서 대다수의 가치 있는 도덕 운동에 기원을 주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지도자의 가르침을 희생하면서 그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가 선포하는 진리를 놓치더라도 그 인물을 경외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유가 없지는 않다. 진화 인간의 가슴 속에는, 위로부터 또 저 세상으로부터 도움을 찾는 본능적 소망이 있다. 이 갈망은 행성 영주와 나중에 물질 아들들이 땅에 나타나기를 기대하도록 고안되었다. 유란시아에서 사람은 이 초인간 지도자와 통치자들을 빼앗겼고, 따라서 초자연 기원과 기적 같은 생애에 관계되는 전설로 인간 지도자들을 덮어 가림으로써 항상 이 손실을 메우려고 애쓴다.
92:5.6 (1008.8) 많은 민족이 그들의 지도자가 처녀로부터 태어났다고 상상했다. 이러한 지도자의 생애에는 기적의 사건들이 헤프게 널려 있고, 그가 돌아오기를 각자의 집단이 언제나 기대한다. 중앙 아시아에서 부족 사람들은 아직도 징기스칸이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티벳ㆍ중국ㆍ인도에서는 부처를 기다린다. 이슬람에서는 모하메드이고, 아메리카 인디안 사이에서는 헤수나닌 오나모나론톤이었다. 히브리인은 대체로 아담이 물질적 통치자로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바빌론의 신 마르둑은 아담의 전설이 지속된 것이고, 이 하나님의 아들 관념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였다. 아담이 땅에 나타난 뒤에, 이른바 하나님의 아들들은 세계의 여러 종족 사이에 공통된 것이었다.
92:5.7 (1009.1) 그러나 사람들이 이들을 미신으로 경외한 것과 상관 없이, 인류의 도덕ㆍ철학ㆍ종교의 진보를 위해서, 이 선생들은 받침점과 같은 현세의 인물이요, 그 위에 계시된 진리의 지렛대가 놓여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92:5.8 (1009.2) 오나가로부터 구루 나낙까지 1백만 년 동안 유란시아의 인간 역사에서 수백의 종교 지도자가 있었다. 이 기간에 종교적 진리와 영적 믿음의 물결이 여러 번 밀물과 썰물처럼 올라오고 내려갔으며, 지난날에 유란시아에서 있었던 각 종교의 부흥은 어떤 종교 지도자의 일생과 가르침과 동일시되었다. 근래의 선생들을 고려하면서 아담 뒤에 유란시아에서 7대 종교 시대로 이들을 묶는 것이 도움이 될까 한다:
92:5.9 (1009.3) 1. 셋 족속 시대. 아모삿의 지도 밑에서 다시 생긴 셋 족속 사제들은 아담 이후에 큰 선생들이 되었다. 그들은 안드 족속의 땅에서 두루 활동했고, 그들의 영향은 그리스인ㆍ수메르인ㆍ힌두인 사이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후자 사이에서 이 사제들은 힌두 신앙의 브라만으로서 오늘날까지 계속하였다. 셋 족속과 그 추종자들은 아담이 계시한 삼위일체 개념을 결코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다.
92:5.10 (1009.4) 2. 멜기세덱 선교사 시대. 유란시아 종교는 그리스도보다 거의 2천 년 전에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살렘에 살면서 가르쳤을 때, 그가 임명한 선생들의 노력으로 적지 않게 부활되었다. 이 선교사들은 믿음이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하여 지불하는 값이라고 선포했고, 그들의 가르침은 비록 금방 나타나는 종교를 낳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후일에 진리 선생들이 유란시아 종교들을 세우게 된 그 기초를 형성하였다.
92:5.11 (1009.5) 3. 멜기세덱 이후 시대. 아메니모피와 이크나톤 두 사람이 이 시기에 가르쳤지만, 멜기세덱 이후 시대에 뛰어난 종교적 천재는 레반트의 베두인 집단의 지도자이자 히브리 종교의 창립자―모세―였다. 모세는 일신교를 가르쳤다. 그는 말했다: “듣거라, 아 이스라엘아, 주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라.” “주, 그는 하나님이로다. 그 외에 아무도 없도다.” 모세는 그의 민족 사이에서 귀신 숭배의 찌꺼기를 뿌리 뽑으려고 끈질기게 추구하였고, 그 신봉자들에게 사형을 내리기까지 했다. 후계자들이 모세의 유일신 사상을 더럽혔지만, 나중에 그들은 그의 많은 가르침으로 돌아갔다. 모세의 위대함은 지혜와 총명에 있다. 다른 사람들은 더 위대한 하나님 개념을 가졌지만, 어느 누구도 큰 무리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진보된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는 데 그렇게 성공하지는 않았다.
92:5.12 (1009.6) 4. 기원전 6세기. 많은 사람이 이 세기에 진리를 선포하려고 일어났는데, 이때는 유란시아에서 일찍이 구경했던 바 종교적 각성이 있던 큰 세기 중에 하나였다. 이들 가운데 고타마ㆍ공자ㆍ노자ㆍ조로아스터, 그리고 자이나교 선생들을 기록해야 한다. 고타마의 가르침은 아시아에서 널리 퍼지게 되었고, 수백만이 그를 부처로 존경한다. 공자와 중국인의 도덕의 관계는 플라톤과 그리스 철학의 관계와 같았고, 이 두 가지 가르침에 대하여 종교적 반응이 있었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어느 쪽도 종교 스승은 아니었다. 공자가 인간성에서 본 것이나 플라톤이 이상주의에서 본 것보다, 노자는 도(道)에서 하나님을 더 보았다. 조로아스터는 유행하던 이영(二靈) 사상, 곧 좋은 영과 나쁜 영 개념에 많이 영향을 받았지만, 동시에 하나의 영원한 신 관념과 궁극에 빛이 어둠을 이긴다는 생각을 분명히 높였다.
92:5.13 (1010.1) 5. 서기 1세기. 종교 스승으로서, 나사렛의 예수는 세례자 요한이 세운 종파를 가지고 시작했으며, 금식과 형식을 피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나아갔다. 예수를 제외하고, 타르수스의 바울과 알렉산드리아의 빌로는 이 시대에 가장 위대한 선생이었다. 그들의 종교 개념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닌 그 종교의 진화에 지배적인 역할을 해 왔다.
92:5.14 (1010.2) 6. 서기 6세기. 모하메드는 그가 살던 시대의 많은 교리보다 뛰어난 종교를 창시했다. 그의 종교는 외국 종교의 사회적 요구에 대하여, 또 자기 민족의 종교 생활의 모순에 대한 항쟁이었다.
92:5.15 (1010.3) 7. 서기 15세기. 이 시기에는 두 가지 종교 운동을 보았는데, 하나는 서양에서 기독교의 통일이 무너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양에서 새 종교가 합성된 것이다. 유럽에서는 제도화된 기독교가 계속된 성장이 통일과 양립할 수 없게 만든 정도까지 경직되었다. 동양에서는 이슬람교ㆍ힌두교ㆍ불교의 통합된 가르침을 나낙과 추종자들이 시크교로 합성했는데, 이것은 아시아의 가장 진보된 종교 중에 하나였다.
92:5.16 (1010.4) 유란시아의 앞날은 의심할 것 없이, 종교적 진리―하나님이 아버지이고 모든 사람이 형제인 것―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등장하는 특징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지적 신학이 사타니아 체계에서 유란시아의 특징을 나타내는 바와 같이, 이 미래 선지자들의 뜨겁고 성실한 노력을 종교 사이의 장벽을 높이는 데 쏟기보다, 그런 여러 신학을 따르는 많은 추종자 사이에서, 영적으로 신을 예배하는 종교적 형제 정신을 기르는 방향으로 더욱 쏟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92:6.1 (1010.5) 20세기 유란시아의 종교들은 사람이 신을 숭배하려는 충동이 어떻게 사회에서 진화했는가에 관하여 재미있는 연구를 제공한다. 많은 종교가 귀신을 숭배하던 시절 이후로 거의 진보하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피그미인 가운데 더러는 영에 둘러싸인 환경을 조금 믿지만, 그들의 부류는 아무런 종교적 반응이 없다. 그들은 종교의 진화가 시작되었을 때 원시인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오늘날 그대로 있다. 원시 종교의 기본 신앙은 죽은 뒤에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성격을 가진 하나님을 예배하는 개념은 상급의 진화적 발전, 아니 계시의 첫째 단계까지 이르렀음을 가리킨다. 디야크인은 겨우 가장 원시적 종교 관습을 진화했을 뿐이다. 비교적 근래의 에스키모인과 아메리카 인디안은 무척 빈약한 하나님 개념을 가졌다. 그들은 귀신을 믿었고 죽은 뒤에 어떤 종류로 살아남는다는 분명치 않은 관념을 가졌다. 오늘날의 오스트랄리아 원주민은 귀신을 두려워하고, 어둠을 무서워하고, 투박한 조상 존중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줄루인은 귀신을 두려워하고 희생물 바치는 종교를 막 진화시키고 있다. 많은 아프리카 부족은, 기독교인과 모하메드 교인의 선교 사업을 통한 것을 제외하면, 종교의 진화에서 주물 단계를 넘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무리들은, 옛 트라키아인처럼, 일신교 관념을 오랫동안 지녀왔는데, 트라키아인도 불멸을 믿었다.
92:6.2 (1010.6) 유란시아에서 진화 종교와 계시 종교는, 이 여러 논문을 쓰던 시대에 세계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신학 체계로 섞이고 합병되는 동안에, 나란히 진보하고 있다. 이 여러 종교, 20세기에 유란시아의 종교들은 다음과 같이 열거해도 좋다:
92:6.14 (1011.12) 고대에 가장 진보된 종교는 유대교와 힌두교였고, 각기 동양과 서양에서 종교의 발전 과정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힌두인과 히브리인 모두가 자기네 종교가 영감과 계시를 받았다고 믿었고, 다른 것은 모두 한 참된 신앙이 퇴폐된 형태라고 믿었다.
92:6.15 (1011.13) 인도는 힌두ㆍ시크ㆍ모하메드ㆍ자이나 교인으로 갈라져 있고, 각기 하나님과 사람과 우주를 다르게 파악하는 대로 이들을 묘사했다. 중국은 도가(道家)와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고, 일본에서는 신도를 섬긴다.
92:6.16 (1011.14) 국제적이고 종족을 넘어선 큰 신앙은 히브리교ㆍ불교ㆍ기독교ㆍ이슬람교이다. 불교는 세일론과 버마에서부터 티벳과 중국을 거쳐서 일본까지 뻗는다. 오직 기독교가 이에 맞설 만큼, 여러 민족의 도덕 관습에 적응하는 능력을 보였다.
92:6.17 (1011.15) 히브리교는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넘어가는 철학적 과도기를 포함한다. 그것은 진화된 종교와 계시된 종교를 연결하는 진화의 고리이다. 히브리인은 초기에 그들의 진화된 신들로부터 곧장, 계시된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따라간 유일한 서양 민족이었다. 그러나 이 진리는 이사야의 시절까지 결코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사야는 우주의 창조자와 종족 신 관념이 뒤섞여 합쳐진 관념을 다시 한 번 가르쳤다: “아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는 하나님이요, 주 홀로 계시나이다. 주가 하늘과 땅을 만드셨나이다.” 한때 서양 문명이 살아남을 희망은 히브리인의 숭고한 선(善) 개념, 그리고 헬라인의[1] [1738] 진보된 아름다움의 개념에 있었다.
92:6.18 (1011.16)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일생과 가르침에 관한 종교이며, 이것은 유대교의 신학에 기초를 두었고, 조로아스터교의 어떤 가르침과 그리스 철학을 흡수함으로 더욱 수정되었는데, 주로 빌로ㆍ베드로ㆍ바울, 이 세 사람이 이를 형성했다. 바울의 시절 이후로 이 종교는 여러 단계의 진화를 거쳤고, 아주 속속들이 서양화되어서, 유럽 바깥에 여러 민족이 기독교를 낯선 하나님이 낯선 사람들에게 준 이상한 계시로 바라본 것은 아주 당연하다.
92:6.19 (1011.17) 이슬람은 북 아프리카, 레반트, 동남 아시아의 종교 문화를 연결한다. 후일의 기독교 가르침과 연결하여, 이슬람을 일신교로 만든 것은 유대인의 신학이었다. 모하메드의 추종자들은 높은 삼위일체 가르침을 믿기 어려워했다. 그들은 세 분의 신다운 성격자와 하나의 신의 교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갑자기 상급의 계시된 진리를 받아들이라고 진화된 지성들을 유도하기는 언제나 어렵다. 사람은 진화된 인간이며, 대체로 진화적 기법으로 종교를 얻어야 한다.
92:6.20 (1012.1) 조상 숭배는 한때 종교의 진화에서 결정적 진보였지만, 불교와 힌두교처럼 비교적 진보된 아주 많은 것 사이에, 이 원시 개념이 중국ㆍ일본ㆍ인도에서 지속하는 것은 놀랍고도 딱하다. 서양에서 조상 숭배는 민족의 신을 우러러보고 종족의 영웅을 존경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20세기에, 영웅을 모시는 이 민족주의 종교는 여러 가지 급진적ㆍ민족주의적 비종교주의에서 그 모습을 나타내며, 이것이 서양에서 많은 종족과 민족의 특징을 나타낸다. 바로 이 태도 중에 많은 것이 영어를 쓰는 민족들의 이름난 대학과 큰 산업 공동체에서 또한 발견된다. 이 개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종교는 다만 “풍족한 생활을 함께 추구하는 것”이라는 관념이다. “민족 종교”는 로마 초기의 황제 숭배로, 그리고 신도(神道)로―국가의 황제 가족 숭배로―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92:7.1 (1012.2) 종교는 결코 과학적 사실이 될 수 없다. 철학은 정말로 과학적 기초 위에 놓여있지만, 종교는 늘 진화된 것이거나 계시된 것이거나, 아니면 오늘날 세상에서 그런 것처럼, 이 두 가지의 가능한 조합으로 남을 것이다.
92:7.2 (1012.3) 새 종교는 발명될 수 없다. 새 종교는 진화되든지 아니면 갑자기 계시된다. 모든 새로운 진화 종교는 단지 오래 된 신앙의 진보하는 표현이요, 새롭게 적응하고 조정된 것일 따름이다. 오래 된 것은 존재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힌두교ㆍ불교ㆍ이슬람교, 그리고 당대의 다른 종파들이 자란 그 토양과 형태로부터 시크교가 싹트고 꽃핀 것처럼, 새로운 것과 합쳐진다. 원시 종교는 아주 민주적이었다. 야만인은 재빨리 빌리거나 빌려 주었다. 오로지 계시된 종교에서, 독재하고 너그럽지 않은 자기 본위의 신학이 나타났다.
92:7.3 (1012.4) 유란시아의 여러 종교는 사람을 하나님에게로 데려오고 사람에게 아버지를 깨닫게 하는 범위 안에서, 다 좋다. 어떤 집단의 신자라도, 그들의 교리가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한 태도는 믿음이 확실한 것이 아니라 신학이 오만(傲慢)하다는 것을 더 말해 준다. 모든 다른 신앙에 담긴 최선의 진리를 연구하고 소화함으로 이득을 얻을 수 없는 유란시아 종교는 하나도 없으니, 모두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들은 이웃의 남아 있는 미신과 낡아빠진 의식(儀式)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을 헐뜯기보다, 그들의 살아 있는 영적 믿음에서 가장 좋은 것을 빌리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92:7.4 (1012.5) 이 모든 종교는 사람이 똑같은 영적 인도에 대하여 다른 지적 반응을 보이는 결과로서 일어났다. 이 종교들은 결코 그 신조ㆍ교리ㆍ의식이 한결같이 되기를 바랄 수 없다―이것들은 지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종교들은 만물의 아버지를 참으로 경배하는 데서 통일을 얻을 수 있고, 언젠가 그렇게 하리니, 이것이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며, 영적으로 모든 사람은 동등하다는 것은 언제까지나 참말이다.
92:7.5 (1012.6) 원시 종교는 대체로 물질의 가치를 의식하는 것이었지만, 문명은 종교적 가치를 높이며, 이는 참 종교가 의미 있고 최고의 가치를 가진 봉사에 자아를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진화함에 따라서, 윤리는 도덕을 다루는 철학이 되고, 도덕성은 가장 높은 의미를 가진 것과 최상의 가치―신답고 영적인 이상―의 기준으로, 자아를 훈련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종교는 저절로 우러나오는 지극한 헌신, 사랑으로 충성하는 산 체험이 된다.
92:7.6 (1013.1) 다음이 종교의 품질을 가리킨다:
92:7.8 (1013.3) 2. 의미 있는 것들의 깊이―최고의 가치가 있는 이것들을 이상적으로 이해하는 데 개인이 민감해지는 것.
92:7.9 (1013.4) 3. 헌신의 깊이―이 신성한 가치 기준에 헌신하는 정도.
92:7.10 (1013.5) 4. 이상주의로 영적 생활을 하는 이 우주의 길에서 인격이 매이지 않고 진보하는 것, 곧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주에서 결코 그치지 않고 진보하는 시민임을 깨닫는 것.
92:7.11 (1013.6) 종교적 의미는 어린아이가 전능 개념을 부모로부터 하나님으로 옮길 때 자의식 속에서 진보한다. 그러한 아이의 종교적 체험은 전부, 대체로 두려움 아니면 사랑이 부모와 자식 관계를 지배했는가에 달려 있다. 노예들은 주인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개념으로 바꾸는 데 언제나 큰 어려움을 겪었다. 문명과 과학과 진보된 종교는 끔찍한 자연 현상에서 생겨난 두려움에서 인류를 벗어나게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더 높은 깨우침을 얻은 교육받은 사람은 신과 교통하는 데 중개인에게 온통 의존하려는 성향을 벗어나야 한다.
92:7.12 (1013.7) 인간답고 눈에 보이는 것을 숭배함으로부터 신답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숭배하도록 옮겨가는 과정에서, 우상 숭배로 머뭇거리는 이 중간 단계를 피할 수 없지만, 이 단계는 깃드는 신의 영이 돕는 봉사를 의식함으로 단축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은 그의 신 개념 뿐 아니라, 또한 그가 명예를 돌리기로 선택한 영웅들의 인품에도 깊이 영향을 받아 왔다. 신답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숭배하게 된 자들이 그 사람을―씩씩하고 용기가 넘치는 그 영웅―요셉의 아들 요수아를 놓치고 못보았다는 것은 무척 유감이다.
92:7.13 (1013.8) 현대인은 알맞게 종교를 스스로 의식하고 있지만, 사회의 변화가 가속되고 전례 없이 과학이 발전함으로 현대인의 예배 관습은 혼란에 빠지고 의심을 받고 있다. 생각하는 남녀는 종교를 다시 정의하기를 바라고, 이 요구는 종교가 자체를 다시 평가하기를 강요할 것이다.
92:7.14 (1013.9) 현대인은 2천 년 동안에 일어난 것보다 더 많이, 한 세대에 인간의 가치를 다시 조정하는 일에 부닥쳤다. 그리고 이 모두가 종교에 대한 사회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며, 이는 종교가 생각하는 기술일 뿐 아니라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92:7.15 (1013.10) 참된 종교는 늘, 동시에 모든 지속하는 문명의 영원한 기초이자 안내하는 별이 되어야 한다.
93:0.1 (1014.1) 멜기세덱은 비상시 아들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들이 한 지역 우주의 여러 세계에서 놀라운 범위의 활동에 종사하기 때문이다. 어떤 특별한 문제가 일어나거나 무엇인가 특별한 일을 시도해야 할 때, 아주 흔히 멜기세덱이 그 과제를 받아들인다. 멜기세덱 아들들이 비상시에, 그리고 우주의 널리 다양한 수준에서, 아니 성격을 나타내는 육체 수준에서도 활동하는 능력은 그들 계급에 특이하다. 오로지 생명 운반자가 이렇게 변형하는 범위의 성격 활동을 어느 정도라도 함께 한다.
93:0.2 (1014.2) 멜기세덱 계급의 우주 아들은 유란시아에서 대단히 활발했다. 12명의 한 집단이 생명 운반자들과 함께 봉사했다. 후일에 있었던 12명의 집단은 칼리가스티아 탈퇴가 있은 바로 뒤에 너희 세계의 관리자가[1] [1739] 되었고, 아담과 이브의 시절까지 줄곧 권한을 쥐었다. 이 열두 멜기세덱은 아담과 이브의 실수가 있고 나서 유란시아로 돌아왔고, 그 뒤로 나사렛 예수가 사람의 아들로서 직함으로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가 된 날까지, 행성 관리자로서 계속하였다.
93:1.1 (1014.3) 유란시아에서 아담의 임무가 실패하고 나서 뒤이은 수천 년 동안에, 계시된 진리는 소멸될 위협을 받았다. 비록 머리가 진보하기는 했어도, 인간 종족들은 천천히 영적으로 쇠퇴하고 있었다. 기원전 약 3000년에 하나님 개념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무척 흐릿하게 되었다.
93:1.2 (1014.4) 멜기세덱 관리자 12명은 미가엘이 앞으로 그들의 행성에 수여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일이 얼마나 빨리 일어날 것인지 몰랐다. 따라서 그들은 엄숙한 회의를 열었고, 유란시아에서 진리의 빛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슨 조치를 취해 달라고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에게 탄원했다. 이 간청은 “사타니아의 606번 세계에서 사무의 운영은 온전히 멜기세덱 관리자들의 권한에 속한다”는 지시와 함께 기각되었다. 그리고 나서 관리자들은 아버지 멜기세덱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수여 아들이 도착할 때까지” 그들 스스로 선택한 방식대로 계속하여 진리를 지켜야하고, 이 수여 아들은 “몰수되고 확실치 않은 상태로부터 행성의 여러 직함을 구할 것이라”는 말씀만 겨우 받았다.
93:1.3 (1014.5) 자신들의 수단을 이용하라고 아주 완전히 내던져진 결과로서, 행성 관리자 12명 중의 하나,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온 네바돈 역사에서 꼭 여섯 번만 행해진 일을 하겠다고 자원했다. 이것은 땅에서 그 영역에 임시 사는 사람으로 인격화하는 것, 세상에 봉사하는 비상시(非常時) 아들로서 자신을 수여하는 것이었다. 구원자별 당국이 이 모험을 허가했고, 마키벤타 멜기세덱의 실제 육신화는, 팔레스타인에서 앞으로 살렘 시가 되기로 예정된 곳 가까이에서 이루어졌다. 행성 관리자들은 생명 운반자와 어떤 물리 통제사들, 그리고 유란시아에서 거주하는 다른 하늘 성격자들의 협력을 얻어서, 이 멜기세덱 아들을 육신으로 만드는 사무 전체를 끝마쳤다.
93:2.1 (1015.1) 마키벤타가 유란시아의 인류에게 수여된 것은 예수가 태어나기 1973년 전이었다. 그가 온 것은 볼만한 구경거리는 아니었고, 그가 물질화되는 것은 인간의 눈이 구경하지 못했다. 그가 암돈의 텐트에 들어간 그 중대한 날에 필사 인간이 그를 처음으로 지켜보았고, 암돈은 수메르인 핏줄을 가진 갈대아인 목자였다. 그의 임무의 선포는 이 목자에게 간단히 이른 말씀에 나타나 있다, “나는 멜기세덱이요, 엘 엘리욘, 최고자, 오직 하나인 하나님의 사제이라.”
93:2.2 (1015.2) 그 목자가 놀랐다가 정신이 들었을 때, 이 낯선 사람에게 여러 가지를 캐물은 뒤에, 그는 멜기세덱에게 자기와 저녁을 같이 들자고 청했다. 이것이 마키벤타가 그의 오랜 우주 경력에서 물질 음식을 처음으로 먹은 것이고, 물질 영양은 물질 존재로서 94년의 일생을 통해서 그를 유지하게 되었다.
93:2.3 (1015.3) 그리고 그날 밤에, 그들이 별 빛 아래서 이야기하는 동안,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실체에 대한 진리를 드러내는 사명을 시작했다. 그때 팔을 휘두르면서 암돈을 향해서 말했다. “엘 엘리욘, 최고자는 하늘에 있는 별, 그리고 우리가 사는 바로 이 땅까지도 지으신 신성한 창조자요, 또한 하늘에서 가장 높은 하나님이라.”
93:2.4 (1015.4) 멜기세덱은 자기 둘레에, 나중에 살렘 공동체의 핵심을 이룬 한 무리의 생도와 제자와 신자들을 몇년 안에 모았다. 그는 곧 팔레스타인에서 두루, 엘 엘리욘 최고자의 사제, 살렘의 현자로서 이름이 알려졌다. 둘러싼 어떤 부족들 사이에서 그는 흔히 살렘의 족장, 곧 임금으로 언급되었다. 살렘은 멜기세덱이 사라진 뒤에 예부스 시가 되었고, 나중에 예루살렘이라고 부른 장소였다.
93:2.5 (1015.5) 개인적 모습을 보면 멜기세덱은 그 당시에, 혼합된 놋 민족과 수메르 민족을 닮았고, 키가 거의 180센티미터이고 위엄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갈대아어와 기타 여섯 가지 말을 했다. 가슴에 세 동심원의 상징을 지닌 것을 제외하고, 그는 가나안 사제들과 비슷하게 옷을 입었는데, 세 동심원은 사타니아에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상징이었다. 그가 봉사하는 과정에서 추종자들은 이 세 동심원의 표시를 너무나 거룩하게 여겼고, 그래서 그들은 결코 감히 그것을 쓰지 않았는데, 몇 세대가 지나면서 곧 잊혀졌다.
93:2.6 (1015.6) 마키벤타는 그 영역에 있는 사람들의 방식대로 살았어도, 결코 결혼하지 않았고, 땅에서 자손을 남길 수도 없었다. 그의 육체는, 남자의 몸을 닮기는 했지만, 어느 인종의 생명질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을 제외하고, 실제는 칼리가스티아 영주 참모진의 물질화된 참모 1백인이 사용한 몸, 특별히 지어진 종류의 몸이었다. 유란시아에는 생명나무도 없었다. 마키벤타가 땅에서 얼마큼 오랫동안 남아 있었더라면, 그의 신체 작용은 차츰 나빠졌을 것이다. 실제 일어난 바와 같이, 그는 물질 몸이 망가지기 시작하기 오래 전에, 94년에 걸친 자신 수여 임무를 끝마쳤다.
93:2.7 (1016.1) 육신화된 이 멜기세덱은 생각 조절자를 받았는데, 이 조절자는 시간 세계의 훈계자요 육체의 조언자로서 그의 초인간 성격에 깃들었고, 이렇게 유란시아 문제들과 육신화된 아들 안에 거하는 기법에 대하여, 체험과 실용적 첫걸음을 거쳤다. 이것은 이 아버지 영으로 하여금 나중에 하나님의 아들, 미가엘이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땅에 나타났을 때 그의 인간 지성 속에서 아주 용감하게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유란시아에서 두 지성 속에서 일찍이 활동한 유일한 생각 조절자이지만, 두 지성은 인간다울 뿐 아니라 신다웠다.
93:2.8 (1016.2)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 마키벤타는 행성 관리자 집단의 동료 11명과 완전히 연락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계급의 하늘 성격자들과 교통할 수 없었다. 멜기세덱 관리자들을 제쳐놓고, 그는 사람보다 초인간 지성 존재들과 더 접촉을 가지지 않았다.
93:3.1 (1016.3) 10년이 지나자, 멜기세덱은 살렘에서 여러 학교를 세웠고, 둘째 에덴에서 옛날 셋 족속 사제들이 개발한, 오래 된 체제를 모방하여 학교를 만들었다. 나중에 개종한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시작한 십일조 체제의 개념조차, 또한 옛날 셋 족속 풍습의 남은 전통으로부터 내려왔다.
93:3.2 (1016.4) 멜기세덱은 유일한 하나님, 우주의 신 개념을 가르쳤지만, 사람들이 이 가르침을 놀라시아덱의 별자리 아버지와 연결짓도록 버려두었고, 그는 이 아버지를 엘 엘리욘―최고자라고 불렀다. 멜기세덱은 루시퍼의 지위와 예루셈 사무의 상태에 관하여 거의 입을 다물었다. 체계 군주 라나포지는 미가엘의 수여가 끝날 때까지 유란시아와 거의 상관하지 않았다. 살렘의 학생들 대다수에게 에덴시아는 하늘이었고, 최고자는 하나님이었다.
93:3.3 (1016.5) 세 동심원의 상징은 멜기세덱이 자신 수여의 표시로 채택했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람ㆍ천사ㆍ하나님의 세 왕국을 대표한다고 풀이했다. 그들은 이 믿음을 계속 가지도록 허락되었다.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거의 아무도 이 세 동그라미가 신성하게 유지하고 지휘하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무한하고 영원하고 우주적인 성질을 상징한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했다. 아브라함조차 최고자 세 분이 하나로서 활동한다고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이 상징을 에덴시아의 최고자 세 분을 대표한다고 여겼다. 멜기세덱은 그의 표시가 상징하는 삼위일체 개념을 가르친 한도에서, 보통 이를 놀라시아덱 별자리의 보론다덱 통치자 세 분과 관련지었다.
93:3.4 (1016.6) 멜기세덱은 에덴시아 최고자―유란시아의 신―들이 다스린다는 사실을 넘어서, 하층 계급의 추종자들을 가르치려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 멜기세덱은 지역 우주의 운영과 조직을 포함하여 상급 진리를 가르쳤고, 한편 명석한 제자 켄 사람 노르단과 그 집단에 속한 열심 있는 학생들에게 그는 초우주에 대하여, 그리고 하보나도 포함하여, 진리를 가르쳤다.
93:3.5 (1016.7) 멜기세덱은 카트로의 가족과 함께 30년이 넘도록 같이 살았는데, 그 가족의 식구들은 이 상급 진리를 많이 알았고, 그들 가족 안에서 오랫동안, 아니 그들의 뛰어난 후손 모세의 시절까지도, 그 진리를 지속하였다. 모세는 어머니 편에서 다른 근원을 통해서 뿐 아니라, 이쪽, 그의 아버지 편에서도, 이처럼 멜기세덱 시절부터 물려받은 강력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93:3.6 (1016.8) 멜기세덱은 추종자들에게 그들이 받아들이고 소화할 만한 능력이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쳤다. 하늘과 땅에 대하여, 사람ㆍ하나님ㆍ천사에 관한 현대의 많은 종교 관념조차 이 멜기세덱의 가르침과 그다지 멀지 않다. 그러나 이 위대한 선생은 모든 것을 한 하나님, 우주의 신, 하늘에 계신 창조자, 신성한 아버지의 교리 밑에 종속시켰다. 사람이 찬미하라고 호소할 목적으로, 그리고 바로 이 우주의 아버지의 아들로서 미가엘이 나중에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길을 예비할 목적으로, 이 가르침이 강조되었다.
93:3.7 (1017.1) 멜기세덱은 어느 앞날에 또 다른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가 온 것처럼 육체를 입고 오지만 여자에게서 태어나리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이것이 어째서 후일에 수많은 선생이 예수가 “언제까지나 멜기세덱의 서열을 좇는” 사제, 곧 봉사자라고 주장한 까닭이다.
93:3.8 (1017.2) 따라서 멜기세덱은 유일한 하나님의 실제 파라다이스 아들의 수여를 위하여, 길을 예비하고 세계 추세의 일신교 단계를 준비하였다. 그는 이 하나님이 만물의 아버지라고 뚜렷하게 묘사하였고 이 아버지가, 개인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간단한 조건으로 사람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하나님이라고 아브라함에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땅에 나타났을 때, 미가엘은 파라다이스 아버지에 관하여 멜기세덱이 가르친 모든 것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93:4.1 (1017.3) 살렘의 예배 예식은 무척 간단했다. 멜기세덱 교회의 진흙 서판 명부에 서명하거나 표시한 사람은 누구나 다음 신조를 외우고 동의했다:
93:4.2 (1017.4) 1. 나는 엘 엘리욘, 최고자 하나님, 만물의 유일한 우주 아버지요 창조자를 믿는다.
93:4.3 (1017.5) 2. 희생물과 태운 제물이 아니라 나의 믿음을 보고 하나님이 은총을 내린다고 멜기세덱이 최고자와 한 언약을 나는 믿는다.
93:4.4 (1017.6) 3. 나는 멜기세덱의 일곱 계명에 복종하고, 최고자와 이렇게 약속했다는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이를 것을 약속한다.
93:4.5 (1017.7) 이것이 살렘 부락의 교리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렇게 짧고도 단순한 믿음의 선언조차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 너무 많고 앞선 것이었다. 그들은 다만 아무것도 바치지 않고―믿음으로―신의 은총을 얻는다는 개념을 깨달을 수 없었다. 그들은 사람이 신들에게 벌금을 물어야 할 신세를 타고났다는 믿음을 너무나 깊이 확신했다. 너무 오랫동안, 너무 열심히, 사제들에게 희생물을 바치고 선물을 주었기 때문에, 구원, 즉 신의 은총이 멜기세덱의 언약을 믿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거저 주는 선물이라는 좋은 소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건성으로 믿었고, 그것조차 “옳게 여김을” 받았다.
93:4.6 (1017.8) 멜기세덱이 선포한 칠계명은 옛날 달라마시아 최고 법의 순서를 따라서 모습을 갖추었고, 첫째와 둘째 에덴에서 가르친 칠계명과 무척 비슷했다. 살렘 종교의 이 명령은 다음과 같았다:
93:4.7 (1017.9) 1. 너희는 하늘과 땅을 지으신 최고 창조자 외에 어떤 신도 섬기지 말라.
93:4.8 (1017.10) 2. 믿음이 영원한 구원을 얻는 데 유일한 요구 조건임을 의심하지 말라.
93:4.9 (1017.11) 3. 거짓 증언하지 말라.
93:4.14 (1018.3) 어떤 희생물을 바치는 것도 그 부락 안에서 허락되지 않았지만, 멜기세덱은 오랫동안 지켜 온 관습을 갑자기 뿌리뽑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잘 알았고, 따라서 고기와 피를 바치는 예전의 제사가 아니라 빵과 포도주의 성찬으로 대신하라고 이 사람들에게 지혜롭게 제안하였다. “살렘의 왕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져왔더라” 하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조심스러운 개혁조차 아주 성공하지는 않았다. 여러 부족은 모두 살렘 교외에서 보조 중심들을 유지했고, 거기서 희생물과 태운 제물을 바쳤다. 케도라오머에게 승리한 뒤에, 아브라함도 이 미개한 풍습에 의존하였다. 그는 전통적 희생물을 바칠 때까지 다만 속이 아주 편치 않았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까지 포함하여, 추종자들의 종교 관습에서 희생물 바치는 이 성향을 결코 완전히 없애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93:4.15 (1018.4) 예수처럼, 멜기세덱은 엄격하게 그의 수여 임무를 마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도덕 관습을 개혁하고 세상의 관습을 바꾸려 애쓰지 않았고, 상급의 위생 관습이나 과학적 진리를 선포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두 가지 과제를 이루려고 왔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한 분 계시다는 진리를 땅에서 살려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우주의 아버지의 파라다이스 아들이 나중에 사람으로서 자신을 수여하는 것을 위하여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93:4.16 (1018.5) 멜기세덱은 살렘에서 94년 동안 계시된 기본적 진리를 가르쳤고, 이 기간에 아브라함은 세 번에 나누어 살렘 학교를 다녔다. 그는 마침내 살렘의 가르침으로 개종하였고, 멜기세덱의 가장 명석한 생도이자 주요한 지지자의 하나가 되었다.
93:5.1 (1018.6) “선택된 민족”이라 말하는 것은 잘못일까 하지만, 아브라함이 선택된 사람이라 언급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멜기세덱은 그때 유행하는 여러 신을 믿는 신앙과 구별하여, 하나님이 한 분 계시다는 진리를 살려두는 책임을 아브라함에게 맡겼다.
93:5.2 (1018.7) 마키벤타가 활동할 장소로서 팔레스타인을 선택한 것은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어떤 인간 가족과 접촉을 시작하려는 희망에 얼마큼 근거를 두었다. 멜기세덱이 육신화할 때, 아브라함의 가족처럼 살렘의 교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똑같이 잘 된 많은 가족이 땅에 있었다. 홍인과 황인, 그리고 서쪽과 북쪽으로 안드 족속 후손들 사이에, 똑같이 자질을 가진 가족들이 있었다. 그러나 또 한편, 이 장소들 중에 어디도 지중해의 동쪽 바닷가만큼, 땅에서 미가엘이 나중에 나타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에서 멜기세덱이 선교하고 나중에 히브리 민족 사이에서 미가엘이 나타난 것은 적지 않게, 지리(地理) 때문에, 팔레스타인이 세계에서 당시에 존재했던 무역ㆍ여행ㆍ문명과 관련하여 중앙에 자리잡았다는 사실로 결정되었다.
93:5.3 (1018.8) 한동안 멜기세덱 관리자들은 아브라함의 선조들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들은 어떤 세대에서 지능과 창의력이 있고 지혜롭고 성실한 특징을 가진 자손이 나올 것이라고 자신 있게 기대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테라의 아이들은 모든 면에서 이러한 기대를 채웠다. 테라의 이 다능한 아이들과 접촉하는 이 가능성이 바로 마키벤타가 에집트나 중국이나 인도나 또는 북쪽 부족들 사이가 아니라 살렘에 나타난 것과 상당히 상관이 있었다.
93:5.4 (1019.1) 테라와 그의 온 가족이 살렘 종교로 건성으로 개종하였고, 이 종교는 갈대아에서 전파되었다. 그들은 오비드의 설교를 통해서 멜기세덱의 소식을 들었는데, 오비드는 우르에서 살렘의 교리를 선포한 페니키아인 선생이었다. 그들은 곧장 살렘으로 가려고 우르를 떠났지만, 아브라함의 아우 나홀이 멜기세덱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태도가 미지근했고 그들에게 하란에서 머물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지 오래 지나서야 그들은 가져온 가족 신들을 기꺼이 모조리 깨뜨렸다. 그들은 살렘의 유일한 하나님을 믿고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신을 버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
93:5.5 (1019.2) 아브라함의 아버지 테라가 죽고 몇 주 지난 뒤에, 멜기세덱은 아브라함과 나홀 두 사람을 이렇게 초청하려고 제자들 가운데 하나, 힛 사람 야람을 보냈다. “살렘으로 오라, 너희가 여기서 우리가 영원한 창조자에 관한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들을지니, 너희 두 형제의 깨우친 자손으로 인하여 온 세계가 복을 받으리라.” 그런데 나홀은 멜기세덱 복음을 전부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는 뒤에 남아서 그의 이름을 지닌 강력한 도시 국가를 세웠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삼촌과 함께 살렘으로 가기로 작정하였다.
93:5.6 (1019.3) 살렘에 도착하고 나서 아브라함과 롯은 도시 가까이 있는 산지의 요새를 골랐고, 거기서 그들은 북쪽 침공자들의 잦은 기습에 대비하여 방어할 수 있었다. 이때에 힛 족속, 아씨리아인ㆍ필리스티아인과 기타 집단이 중부와 남부 팔레스타인의 부족들을 항상 침공했다. 산지에 있는 본거지로부터 아브라함과 롯은 살렘까지 자주 찾아갔다.
93:5.7 (1019.4) 살렘 가까이에서 자리잡은 지 오래지 않아 아브라함과 롯은, 그때 팔레스타인에서 가뭄이 있었기 때문에 식량 공급을 얻으려고 나일 강 유역까지 여행했다. 에집트에서 잠깐 머무르는 동안 아브라함은 에집트 왕좌에 있는 먼 친척을 발견했고, 그는 이 임금을 위하여 두 차례에 걸쳐, 사령관으로 일하여 군사적 토벌에 대단히 성공했다. 나일 강 지역에 머무르던 후반기에 그와 아내 사라는 궁중에서 살았고, 에집트를 떠날 때, 그의 군사 작전에서 얻은 전리품의 한 몫을 받았다.
93:5.8 (1019.5) 아브라함이 에집트 궁중의 명예를 떨쳐 버리고 마키벤타가 후원하는 더 영적인 일로 돌아가는 데는 큰 결심이 필요했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에집트에서도 존경을 받았고, 파라오 앞에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을 때, 파라오는 아브라함에게 돌아가서 살렘의 운동에 대해서 서약한 것을 실행하라고 힘차게 밀어주었다.
93:5.9 (1019.6) 아브라함은 임금의 포부를 가졌고, 에집트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그는 온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 민족을 살렘의 통치 하에 두자는 계획을 롯 앞에 펼쳐 놓았다. 롯은 장사에 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의견 차이가 생긴 뒤에, 그는 무역과 축산업에 종사하려고 소돔으로 갔다. 롯은 군인이나 양치기의 생활을 싫어했다.
93:5.10 (1019.7) 아브라함은 가족과 함께 살렘으로 돌아오고 나서, 그의 군사 계획을 다듬기 시작했다. 그는 살렘 지역에서 국가 통치자로서 곧 인정을 받았고, 근처의 일곱 부족을 그의 지휘 하에 연합했다. 정말로 멜기세덱은 가까스로 아브라함을 제어하였고, 아브라함은 나가서 칼로 이웃 부족들을 잡아들여서 그들에게 이처럼 살렘의 진리를 더 빨리 알리려는 열심에 불타 있었다.
93:5.11 (1019.8) 멜기세덱은 모든 둘러싼 부족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군사 우선주의자가 아니었고, 여러 군대가 이리저리 이동하는 동안에 어떤 군대로부터도 공격을 받은 적이 없었다. 나중에 실행된 바와 같이, 그는 아브라함이 살렘 방어 정책을 세우는 것을 전부 마음에 들어했지만, 야심에 불타는 생도의 정복 계획을 승인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관계가 우호적으로 단절되었고, 아브라함은 군사 본부를 세우려고 헤브론으로 갔다.
93:5.12 (1020.1) 아브라함이 훌륭한 멜기세덱과 가까운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그는 둘레에 있는 작은 나라의 임금들보다 큰 이점을 가졌다. 그들은 모두 멜기세덱을 존중했고, 지나치게 아브라함을 무서워했다. 아브라함은 이들이 이렇게 두려워함을 알았고, 이웃을 공격할 적당한 기회를 노릴 뿐이었다. 이 통치자들 중에 더러가 소돔에 살고 있는 조카 롯의 재산을 주제넘게 침공했을 때, 이런 핑계가 생겼다. 이 소식을 듣자, 아브라함은 연합한 일곱 부족의 선두에서, 적을 공격했다. 318명이 되는 자신의 경호단이, 이때 공격한 4000명이 넘는 군대를 지휘하였다.
93:5.13 (1020.2) 아브라함이 전쟁을 선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말리려고 떠났지만, 옛 생도가 전쟁에서 승리해서 돌아올 때에야 겨우 그를 따라잡았다. 아브라함은 살렘의 하나님이 그가 적들을 이기게 해주었다고 주장했고, 자기 전리품에서 10분의 1을 살렘의 금고에 내겠다고 고집하였다. 나머지 90퍼센트는 헤브론에 있는 그의 서울로 옮겼다.
93:5.14 (1020.3) 싯딤에서 이 전투가 있은 뒤에, 아브라함은 열한 부족으로 이루어진 둘째 연방의 지도자가 되었고,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뿐 아니라, 그 근처에 다른 부족들도 모두 똑같이 하도록 처리했다. 소돔의 왕과 가진 외교 거래는, 대체로 그를 두렵게 여기는 태도와 더불어, 소돔 임금과 다른 사람들이 헤브론의 군사 연방에 합세하게 만들었다. 팔레스타인에서 강력한 국가를 세우는 과제에 아브라함은 정말로 한창 진전을 보았다.
93:6.1 (1020.4) 아브라함은 온 가나안을 정복할 꿈을 꾸었다. 멜기세덱이 그 사업을 인가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의 결심을 겨우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사업을 시작하려고 거의 작정했을 때, 이 계획된 왕국의 통치자로서 그를 이어받을 아들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비로소 그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그는 멜기세덱과 또 한 번 회담을 주선했다. 이 회견의 과정에서 살렘의 사제,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아들은 아브라함에게 하늘나라의 영적 개념의 편을 들어, 물질적으로 정복하고 현세에 다스리는 그의 계획을 버리라고 설득했다.
93:6.2 (1020.5) 멜기세덱은 아모리 연방과 싸우는 것이 헛되다고 아브라함에게 설명했지만, 이 뒤떨어진 씨족들은 어리석은 풍습 때문에 확실히 자살하는 것이라, 그래서 몇 세대 안에 그들이 너무나 약해져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그동안에 크게 수가 늘어나고 그들을 쉽사리 정복할 것이라고 멜기세덱은 똑같이 분명하게 일러 주었다.
93:6.3 (1020.6) 그리고 멜기세덱은 살렘에서 아브라함과 공식 서약을 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하늘을 우러러보고, 할 수 있거든 별을 세어 보아라. 그렇게 네 씨가 많아질지니라.”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믿었고, “이것은 그의 의로움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나서 멜기세덱은 그의 자손이 에집트에서 머무른 뒤에 가나안을 미래에 차지한다는 이야기를 일러 주었다.
93:6.4 (1020.7) 멜기세덱이 아브라함과 맺은 이 약속은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하겠다고 찬성하는 협정, 신과 인간 사이의 위대한 유란시아 협정이다.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의 지시를 따르겠다고 찬성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구원은 오직 일함으로―희생물과 제물을 바쳐서―얻을 수 있다고 믿어 왔다. 이제 멜기세덱은 구원, 하나님의 은총을 믿음으로 얻으리라는 좋은 소식을 유란시아에 다시 가져왔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 복음은 너무 앞선 것이었다. 나중에 셈 부족 사람들은 더 예전의 희생물 바치기와 피를 흘려 죄값 물어내기로 돌아가는 것을 더 좋아했다.
93:6.5 (1021.1) 이 서약을 한 뒤에 오래지 않아서, 멜기세덱이 약속한 대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태어났다. 이삭이 출생한 뒤에, 아브라함은 멜기세덱과 한 약속에 대해서 대단히 엄숙한 태도를 가졌고, 이를 기록하려고 살렘으로 갔다. 대중 앞에서 공식으로 약속을 받아들이는 이 자리에서, 그는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갈았다.
93:6.6 (1021.2) 살렘 신자의 대부분은 할례를 행하였다. 하지만 멜기세덱은 결코 할례를 의무로 만든 적이 없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언제나 할례를 무척 반대해 왔기 때문에, 그는 이 계제에 살렘의 약속을 인정한다는 표시로, 이 의식(儀式)을 공식으로 받아들여 그 사건을 엄숙하게 만들기로 작정했다.
93:6.7 (1021.3) 멜기세덱의 원대한 계획을 지지하여 아브라함이 개인의 포부를 이렇게 정말로 대중 앞에서 포기한 뒤에, 세 하늘 존재가 마므레 평원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소돔과 고모라가 자연의 재해로 파괴된 것에 관하여 나중에 꾸민 이야기들과 결부되었는데도, 이것은 사실로 나타난 일이다. 그리고 그 시절에 일어난 사건들에 관한 이 전설은 아주 최근 시대에도 도덕과 윤리가 얼마나 뒤처졌는가를 가리킨다.
93:6.8 (1021.4) 엄숙한 언약을 마치고 나서,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화해는 완벽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살렘 거류지의 시민 및 군사의 지휘를 다시 맡았고, 이 거류지는 그 전성기에 멜기세덱 단체의 명부에, 정기적으로 십일조 내는 사람을 10만 명이 넘게 유지했다. 아브라함은 살렘 성전을 크게 개선하고 학교 전체를 위하여 새 텐트를 마련했다. 그는 십일조 체제를 늘렸을 뿐 아니라, 선교를 선전하는 분과의 운영 개선에 크게 이바지한 외에도, 학교 사업을 운영하는 많은 개량된 방법을 시작하였다. 그는 또한 가축의 개량과 살렘의 낙농 사업을 다시 조직하기 위해서 많이 일했다. 아브라함은 당대에 날카롭고 능률 있는 실업가요 부자였다. 그는 지나치게 경건하지 않았어도 속속들이 성실했고, 마키벤타 멜기세덱을 믿었다.
93:7.1 (1021.5) 멜기세덱은 몇 년 동안 학생들을 계속해서 가르치고 살렘 선교사들을 훈련시켰고, 이들은 둘러싼 모든 부족에, 특별히 에집트, 메소포타미아, 소 아시아에 침투했다. 몇십 년이 지나자, 이 선생들은 살렘으로부터 멀리 멀리 여행했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키벤타의 복음을 가지고 갔다.
93:7.2 (1021.6) 아담손의 후예는 반 호수의 물가 근처에서 무리를 지어 있었고, 이들은 살렘 종파의 힛 족속 선생들의 말을 기꺼이 들었다. 예전에 이 안드 족속의 중심으로부터 유럽과 아시아의 먼 지역까지 선생들이 파송되었다. 살렘 선교사들은 온 유럽, 아니 영국 제도에도 침투했다. 한 무리는 페로스 제도(諸島)를 거쳐서 아이스랜드의 안돈 족속에게로 갔고, 한편 또 한 무리는 중국을 통과하여 동쪽 섬들에 있는 일본인에게 이르렀다. 살렘과 메소포타미아와 반 호수로부터 동반구의 부족들을 깨우치려고 모험의 길을 떠난 남녀의 생애와 체험은 인류의 연대기에서 영웅적인 장(章)을 이룬다.
93:7.3 (1022.1) 그러나 과제가 너무나 크고 부족들이 너무 뒤처져 있어서, 그 결과는 흐릿하고 분명치 않았다. 한 세대가 지나가는 동안 살렘의 복음이 여기저기 투입되었지만, 팔레스타인을 제외하고, 유일한 하나님 개념은 한 부족이나 민족 전체의 계속된 충성심을 모을 수 없었다. 예수가 오기 오래 전에, 옛 살렘 선교사들의 가르침은 더 오래 된 보편적 미신과 신앙 속에 대체로 파묻혔다. 최초의 멜기세덱 복음은 큰 어머니, 태양, 그리고 기타 옛 종파를 믿는 신앙으로 거의 온통 흡수되었다.
93:7.4 (1022.2) 오늘날 인쇄술의 장점을 누리는 너희는 이 옛 시대에 진리를 지속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가, 한 세대가 지나가는 동안 새로운 교리를 놓치기가 얼마나 쉬웠는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언제나 새 교리가 예전의 종교적 가르침과 마술 풍습 덩어리 속으로 흡수되는 경향이 있었다. 새로운 계시는 언제나 더 오래 된 진화된 신앙에 오염된다.
93:8.1 (1022.3)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뒤에 얼마 안 있어, 마키벤타는 유란시아에서 비상 수여를 마치기로 작정했다. 멜기세덱이 육체를 입은 체재를 마치기로 결정한 것은 수많은 조건에 영향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주요한 것은 둘러싼 부족들이, 그리고 직계 동료들조차, 그를 하나의 반신(半神)으로 여기고 그를 초자연 존재로 바라보는 성향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었고, 그는 참으로 초자연 존재였다. 그러나 그들은 지나치게, 상당히 미신적 경외감으로 그를 우러러보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유 외에, 유일한 하나님의 진리가 추종자들의 머리 속에 굳게 자리잡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이 죽는 때보다 훨씬 전에 땅에서 활동하던 장면을 떠나기를 바랐다. 따라서 마키벤타는 어느 날 밤에 인간 동반자들에게 잘 자라 인사를 하고 나서, 살렘에서 그의 텐트로 물러갔다. 그들이 아침에 부르러 갔을 때, 그는 거기에 없었으니, 동료들이 그를 데리고 갔기 때문이다.
93:9.1 (1022.4) 멜기세덱이 그렇게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브라함에게 큰 시련이었다. 그가 온 것처럼 그는 언젠가 가야 한다고 추종자들에게 비록 충분히 경고했어도, 그들은 놀라운 지도자를 잃어버린 것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시절의 전통을 기초로 모세가 에집트에서 히브리 노예들을 이끌고 나왔지만, 살렘에 세운 큰 조직은 거의 사라졌다.
93:9.2 (1022.5) 멜기세덱이 사라진 것은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 큰 슬픔을 가져왔고, 그는 결코 이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물질적인 나라를 세우려는 포부를 버렸을 때 그는 헤브론을 포기했다. 그리고 이제, 영적인 나라를 세우는 일에 그의 동료가 사라지고 나서, 그는 살렘을 떠나서 게랄에, 그의 재산 근처에서 살려고 남쪽으로 갔다.
93:9.3 (1022.6) 멜기세덱이 사라진 직후에 아브라함은 무서워지고 겁이 났다. 게랄에 도착하자 그는 신분을 감추었고, 그래서 아비멜렉은 그의 아내를 데려갔다. (사라와 결혼하고 나서 얼마 있다가 아브라함은 어느 날 밤 그의 찬란한 아내를 가지기 위해서 그를 죽이려 하는 음모를 엿들었다. 이 외에는 용감하고 위험을 겁내지 않는 그 지도자에게 이 두려움은 공포가 되었다. 온 일생 동안 그는 누군가가 사라를 취하려고 몰래 그를 죽이려 할까 두려워했다. 그리고 이것이 어째서 세 번이나 따로, 이 용감한 남자가 정말 비겁함을 드러냈는가 하는 까닭이다.)
93:9.4 (1023.1) 그러나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의 후계자로서 자기 임무를 행하는 데 오랫동안 방해를 받지 않았다. 그는 곧 필리스티아인 사이에서, 그리고 아비멜렉의 민족에서 개종한 사람들을 얻고서 그들과 조약을 맺었고, 그 대신에 그들의 많은 미신, 특히 첫아들을 잡아 바치는 그들의 풍습에 물이 들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다시 팔레스타인에서 큰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모든 집단의 존경을 받았고 모든 왕이 그를 존중하였다. 그는 둘러싼 모든 부족 가운데서 영적 지도자였고, 그의 영향은 그가 죽은 뒤에 얼마 동안 계속되었다. 인생이 저물 때 그는 다시 한 번 헤브론으로 돌아갔는데, 여기는 초기에 그의 활동 무대요 멜기세덱과 연합하여 그가 일하던 장소였다. 아브라함의 마지막 일은 메소포타미아의 경계에, 아우 나홀의 도시로, 아들 이삭을 위한 아내로서 자기 민족에서 여자를 얻으려고, 충직한 하인들을 보내는 것이었다. 사촌과 결혼하는 것이 오랫동안 아브라함 민족의 풍습이었다. 그리고 사라진 살렘 학교에서 멜기세덱으로부터 배운 하나님을 믿고서 아브라함은 안심하고 죽었다.
93:9.5 (1023.2) 다음 세대가 멜기세덱의 이야기를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5백 년 안에 많은 사람이 그 이야기 전부를 신화로 여겼다. 이삭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썩 잘 보존했고, 살렘 거류지의 복음을 키웠지만, 야곱이 이 전통의 중요성을 파악하기는 더 힘들었다. 요셉은 멜기세덱을 굳게 믿었고, 대체로 이 때문에, 형제들이 그를 꿈꾸는 사람으로 여겼다. 에집트에서 요셉의 명예는 주로 증조부 아브라함의 기억 때문이었다. 요셉에게 에집트 군대의 지휘권이 제공되었지만, 멜기세덱의 전통과 아브라함과 이삭이 후일에 가르친 것을 아주 굳게 믿었기 때문에, 그는 문관 행정자로서 일하기를 택했고, 하늘나라를 진척시키기 위하여 이처럼 그가 더 일을 잘 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93:9.6 (1023.3) 멜기세덱의 가르침은 충분하고 충만했지만, 이 시절에 관한 기록은 후일의 히브리인 사제들에게 불가능하고 환상인 듯하였다. 하지만 적어도 바빌론에서 구약의 기록을 무더기로 편집할 때까지, 많은 사람이 이런 기록을 얼마큼 이해했다.
93:9.7 (1023.4)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대화라고 묘사하는 구약의 기록은 실제로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회담이었다. 후일의 서기관들은 멜기세덱이라는 낱말을 하나님과 비슷한말로 여겼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주의 천사”와 아주 여러 번 접촉했다는 기록은 그들이 멜기세덱과 수없이 만나서 이야기한 것을 언급한다.
93:9.8 (1023.5) 이삭ㆍ야곱ㆍ요셉에 대한 히브리인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보다 훨씬 더 믿을 만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도 사실과 다른 것을 많이 담고 있고,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였던 시절에 히브리 사제들이 이 기록들을 수집할 때, 의도하여 내용을 변경한 것도 있고, 뜻하지 않게 변경된 것도 있다. 케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가 아니었다. 하갈처럼 그 여자는 다만 첩이었다. 아브라함의 모든 재산은 본처 사라의 아들, 이삭에게로 갔다. 아브라함은 기록이 가리키는 것처럼 아주 늙지는 않았고, 아내는 훨씬 더 젊었다. 나중에 이삭이 기적 같이 출생했다고 주장하기 위하여 두 사람의 나이는 깊이 생각한 끝에 수정되었다.
93:9.9 (1023.6) 유대인의 민족 자부심은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였던 시절로 말미암아 엄청나게 오그라들었다. 민족의 열등감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들은 다른 극단, 국가와 민족의 자기 본위로 넘어갔고, 거기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모든 다른 종족 위에 자신들을 높일 생각으로 그들의 전통을 왜곡하고 곡해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브라함과 다른 민족 지도자들을, 바로 멜기세덱도 제외하지 않고 모든 다른 사람 위에 높이 올리려는 목적으로 그들의 모든 기록을 주의 깊게 편집했다. 따라서 히브리 서기관들은 발견할 수 있는 대로 이 중대한 시절의 기록을 모조리 없애버렸고, 싯딤 전투 이후에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이 만나는 이야기만 보존했는데, 그들은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큰 명예를 바치는 것을 반영한다고 판단하였다.
93:9.10 (1024.1) 그래서, 멜기세덱의 모습을 놓치면서, 그들은 약속된 수여 아들의 영적 사명에 관하여 이 비상시 아들이 가르친 것을 또한 놓쳤다. 이 사명의 성질을 아주 완전히, 완벽하게 놓쳤기 때문에 그들의 후손 중에 거의 아무도, 마키벤타가 예언한 대로 미가엘이 땅에서 육체를 입고 나타났을 때, 그를 알아보고 받아들일 수 없었고 기꺼이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93:9.11 (1024.2) 그러나 히브리서를 쓴 사람들 중에 하나는 멜기세덱의 사명을 알았는데, 이렇게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최고자의 사제, 이 멜기세덱은 또한 평화의 임금이었더라.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삶을 시작한 날도 끝날도 없으나 하나님의 아들처럼 만들어진 까닭에, 그는 사제로 계속하여 거하더라.” 이 저자는 나중에 나타나는 미가엘 수여의 종류로서 멜기세덱을 일컬었고, 예수가 “멜기세덱의 서열을 좇아서 언제까지나 봉사자”였다고 확인하였다. 이 비교는 무척 유감스럽기는 했지만, 그리스도가 세계에 자신을 수여할 때 근무하던 “열두 멜기세덱 관리자 서열에 따라서” 그리스도가 유란시아를 책임질 임시 권리를 받았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었다.
93:10.1 (1024.3) 마키벤타가 육신화한 여러 해 동안 유란시아의 멜기세덱 관리자들은 11명으로서 활동했다. 마키벤타는 비상시 아들로서 그의 임무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이 사실을 열한 동료에게 알렸고, 그들은 그가 육체를 벗어날 기술을 즉시 준비하고, 안전하게 최초의 멜기세덱 지위로 회복시켰다. 그리고 살렘으로부터 사라진 뒤 사흘째에, 그는 유란시아에 배치 받은 동료 11명 사이에 나타났고, 사타니아 606번에서 행성 관리자의 하나로서, 중단된 그의 생애를 다시 시작했다.
93:10.2 (1024.4) 마키벤타는 살과 피를 가진 인간으로서, 그가 시작한 것과 똑같이 갑자기 예식을 차리지 않고, 자신 수여를 마쳤다. 그의 출현이나 출발에 아무런 특별한 발표나 전시가 따르지 않았다. 그가 유란시아에 나타난 표시로 부활시 출석의 점검이나 행성 섭리 시대의 종결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임무는 비상시 수여였다. 그러나 아버지 멜기세덱이 그를 공식으로 책임에서 해방하고, 그의 비상시 수여가 네바돈의 최고 행정자, 곧 구원자별의 가브리엘로부터 승인을 받았다는 통지를 받기까지, 마키벤타는 인간의 육체를 입고서 그의 체재를 끝내지 않았다.
93:10.3 (1024.5) 마키벤타 멜기세덱은 그가 육체를 입고 있을 때 그의 가르침을 믿었던 사람들의 후손의 일에 계속하여 큰 흥미를 가졌다. 그러나 이삭을 통해서, 켄 족속과 서로 결혼해서 생겨난 아브라함의 후손은, 살렘의 가르침에 대해서 어떤 뚜렷한 개념이라도 오랫동안 계속 품고 있었던 유일한 핏줄이었다.
93:10.4 (1024.6) 바로 이 멜기세덱은 뒤이은 열아홉 세기를 통하여 내내, 많은 선지자ㆍ예언자와 함께 줄곧 일했고, 이처럼 미가엘이 땅에 나타날 때가 무르익기까지 살렘의 진리를 살려 두려고 애썼다.
93:10.5 (1025.1) 마키벤타는 미가엘이 유란시아에서 승리할 때까지 행성 관리자로서 줄곧 일했다. 그 뒤에 24 지도자의 하나로서 예루셈에서 유란시아 근무에 부속되었고, 겨우 최근에야 예루셈에서 창조 아들의 개인 대사 자리로 승진했으며, 유란시아의 영주 대리 직함을 지닌다. 유란시아가 사람 사는 행성으로 남아 있는 한, 마키벤타 멜기세덱은 아들 계급의 임무로 완전히 돌아가지 않고, 시간으로 따지자면, 언제까지나 그리스도 미가엘을 대표하는 행성의 봉사자로 남아 있으리라고 우리는 믿는다.
93:10.6 (1025.2) 마키벤타의 수여가 유란시아에서 비상시 수여였으니까, 그의 앞날이 무엇일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네바돈의 멜기세덱 집단은 그들 가운데 한 명을 영구하게 잃었을지 모른다. 최근의 판결이 에덴시아의 최고자들로부터 내려왔고 나중에 유버르사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확인을 받았는데, 이것은 수여된 이 멜기세덱이 타락한 행성 영주, 칼리가스티아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정해졌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이 점에서 우리의 추측이 옳다면, 이것이 매우 있음직하다: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유란시아에 몸소 다시 나타나서, 어떤 변경된 방법으로 폐위된 행성 영주의 직책을 다시 시작하든지, 아니면 지금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 직함을 실제로 지니는 그리스도 미가엘을 대표하는 행성 영주 대리로서 활동하려고 땅에 나타날지 모른다. 마키벤타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해서, 우리에게 도대체 뚜렷이 보이지 않지만, 그런데도 아주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은 앞에 말한 추측이 아마 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강하게 암시한다.
93:10.7 (1025.3) 유란시아에서 승리함으로 미가엘이 어떻게 칼리가스티아와 아담, 이 둘의 계승자가 되었는가, 그가 어떻게 행성에서 평화의 왕이 되고 둘째 아담이 되었는가 우리는 잘 안다. 이제 우리는 이 멜기세덱에게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 대리라는 직함이 수여되는 것을 본다. 그가 또한 유란시아의 물질 아들 대리가 될 것인가? 아니면 기대하지 않고 전례 없던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가, 곧 아담과 이브가 아니면 그들 후손 가운데 더러가 유란시아의 둘째 아담의 대리라는 직함을 가지고 미가엘의 대표로서 행성으로 언젠가 돌아올 것인가?
93:10.8 (1025.4) 심판 아들과 삼위일체의 교육 아들들이 앞날에 확실히 나타나리라는 것과 관련된 이 모든 추측은, 창조 아들이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분명한 약속과 관련하여, 유란시아를 앞날이 확실치 않은 행성으로 만들고, 온 네바돈 우주에서 가장 흥미 있고 관심을 끄는 구체 중의 하나로 만든다. 이것이 아주 있음직하다: 유란시아가 빛과 생명 시대에 다가가는 어떤 미래 시대에, 루시퍼 반란과 칼리가스티아 탈퇴 사건들이 마침내 판결된 뒤에, 심판 아들이나 아니 삼위일체의 교육 아들들 뿐 아니라, 마키벤타ㆍ아담ㆍ이브, 그리고 그리스도 미가엘이 동시에 유란시아에 오심을 우리가 구경할 수도 있다.
93:10.9 (1025.5) 유란시아 지도자, 곧 24 상담자로 이루어진 예루셈 집단에 마키벤타가 있다는 것은, 그가 진보하고 승천하는 우주 계획을 거쳐서, 파라다이스 최후 군단까지도, 유란시아 필사자들을 따라가도록 운명이 정해졌다는 믿음을 입증하는 충분한 증거라는 것이 오랫동안 우리 계급의 의견이었다. 유란시아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었을 때, 아담과 이브가 이처럼 파라다이스로 가는 모험에서 지구의 동료들을 따라가도록 운명이 정해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93:10.10 (1025.6) 1천 년 미만 전에, 옛날에 살렘의 현자였던 바로 이 마키벤타 멜기세덱은 1백 년이 되는 기간에 행성에 거주하는 총독으로 행동하면서, 유란시아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있었다. 그리고 행성의 사무를 지도하는 지금 체계가 계속된다면, 1천 년이 조금 지나서 같은 자격으로 돌아오도록 예정되었을 것이다.
93:10.11 (1026.1) 이것이 마키벤타 멜기세덱에 관한 이야기이니, 그는 일찍이 유란시아 역사에 관련을 가지게 된 가장 독특한 모든 등장 인물 중에 하나요, 너희의 불규칙하고 특이한 세계가 앞날에 겪는 체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운명이 정해졌을지도 모르는 성격자이다.
94:0.1 (1027.1) 살렘 종교의 초기 선생들은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의 가장 멀리 떨어진 부족들까지 침투했고, 사람이 우주의 하나님 한 분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신의 은총을 얻는 데 치르는 유일한 값이라는 마키벤타의 복음을 늘 전파하였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과 한 약속은 살렘과 다른 중심들로부터 떠나간 모든 초기 선전의 본보기였다. 동반구 전체에 멜기세덱의 가르침을 가지고 간 이 고귀한 남녀들보다 어떤 종교에도 더 열심이고 적극적인 선교사들이 결코 유란시아에 있은 적이 없다. 이 선교사들은 여러 민족과 종족으로부터 모집되었고, 그들은 대체로 개종한 원주민의 중개를 통해서 가르침을 퍼뜨렸다. 그들은 세계의 여러 구석에 훈련 중심을 세웠고, 거기서 원주민에게 살렘 종교를 가르치고, 다음에 이 생도들을 자신의 민족 가운데서 선생으로 활동하라고 임명했다.
94:1.1 (1027.2) 멜기세덱의 시절에, 인도는 국제적인 나라였고, 최근에 북쪽과 서쪽에서 침공하는 아리안과 안드 족속의 정치적ㆍ종교적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때 반도에서 오직 북쪽과 서쪽 부분에 아리아인이 널리 스며들었다. 베다 시대에 새로 온 이 이민들은 그들의 많은 부족 신을 가져왔다. 그들의 종교적 예배 형태는, 아직도 아버지가 사제로서 어머니는 여사제로서 활동하고, 가족의 화로(火爐)가 아직도 제단으로서 이용되었으므로, 이전에 있었던 선조, 안드 족속의 예식 풍습을 가까이 따랐다.
94:1.2 (1027.3) 베다 숭배는 그때 선생이자 사제인 브라만 카스트의 지휘 하에 성장하고 변형하는 과정을 밟고 있었고, 이 카스트는 확대되는 예배 의식에 차츰 고삐를 쥐고 있었다. 살렘 선교사들이 인도 북부에 침투했을 때, 옛 아리아인의 신 33명의 혼합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94:1.3 (1027.4) 이 아리아인의 다신교는 이전의 일신교의 퇴화를 가리키며, 이것은 그들이 부족 단위로 갈라지고 각 부족이 자체가 모시는 신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안드 족속이 있던 메소포타미아에서 최초의 일신교와 삼위일체 사상이 이렇게 퇴화한 것은 그리스도 이전 둘째 천년의 처음 몇 세기에 다시 합성하는 과정에 있었다. 여러 신이 하늘의 주 댜우스 피타[1] [1740], 변덕스러운 공기(空氣)의 주 인드라, 그리고 머리가 셋 달린 불의 신이요, 땅의 주이며 더 일찍 있던 삼위일체 개념의 남은 흔적을 상징하는 아그니, 이 삼자의 통일된 지도 하에서 만신전으로 조직되었다.
94:1.4 (1027.5) 분명한 최고신교의[2] [1741] 발전이 진화된 일신교를 위하여 길을 놓고 있었다. 가장 오래 된 신 아그니는 흔히 만신전 전체에서 아버지인 우두머리로서 높임을 받았다. 때때로 프라자파티라 부르고 때로는 브라마라고 이름지은, 아버지 신의 원리는 브라만 사제들이 나중에 살렘 선생들과 벌인 신학 투쟁에서 사라져 버렸다. 브라만은 베다의 만신전 전체를 활성화하는 에너지이자 신이 되는 원리라고 생각되었다.
94:1.5 (1028.1) 살렘 선교사들은 멜기세덱의 유일한 하나님, 하늘의 최고자를 전파했다. 이 묘사는 아버지 브라마가 모든 신의 근원이라는 새로 태어나는 개념과 전적으로 부조화되지는 않았지만, 살렘의 교리는 의식이 없었고, 따라서 브라만 사제의 교리ㆍ전통ㆍ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의식의 준수와 희생물 바치는 예식은 별도로 하고, 브라만 사제들은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다는 살렘의 가르침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94:1.6 (1028.2) 하나님을 의지할 것과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기를 부르짖는 멜기세덱 복음을 물리친 것은 인도(印度)에게 생사를 좌우하는 전환점을 표시했다. 살렘 선교사들은 베다의 모든 옛 신을 믿는 신앙을 버리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지도자, 곧 베다교의 사제들은 유일한 하나님과 하나의 단순한 신앙을 부르짖는 멜기세덱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94:1.7 (1028.3) 브라만들은 살렘 선생들에 대항하려는 노력으로 당대의 신성한 기록들을 추려 냈고, 이 모음은 나중에 편집되어 현대까지 릭 베다로서 내려왔는데, 이것은 가장 오래 된 신성한 책들 중에 하나이다. 브라만들이 자기네 예배 의식과 희생을 구체화하고 모양을 갖추고, 이것들을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 부과하려고 애씀에 따라서, 둘째ㆍ셋째ㆍ넷째 베다가 뒤따랐다. 가장 좋은 면을 보았을 때, 이 기록들은 개념의 아름다움과 진리를 헤아리는 면에서 비슷한 성질을 가진 어느 다른 수집에도 필적한다. 그러나 이 우수한 종교가 인도 남부에서 수천 가지 미신과 제사와 의식으로 오염되자, 그것은 필사 인간이 일찍이 개발한 신학 중에서 가장 얼룩덜룩한 체계로 점차 모습을 바꾸었다. 베다를 한번 검토하면 사람이 상상한 것 가운데 신에 관한 가장 높은 개념과 가장 비천한 개념을 얼마큼씩 드러낼 것이다.
94:2.1 (1028.4) 살렘 선교사들이 남쪽으로 드라비다의 데칸으로 파고 들어감에 따라서, 그들은 심해지는 카스트 제도에 부닥쳤는데, 이것은 높아지는 2차 산긱 민족들의 물결을 직면하여 종족 신분의 상실을 막으려는 아리아인의 계획이었다. 브라만 사제 카스트가 이 체계의 바로 그 본질이었기 때문에, 이 사회 질서는 살렘 선생들의 진전을 대단히 지연시켰다. 이 카스트 제도는 아리아 민족을 구하지 못했지만, 브라만을 영속시키는 데 성공했고, 그들은 다음에 인도에서 오늘날까지 종교의 주도권을 유지했다.
94:2.2 (1028.5) 이제, 더 높은 진리를 거부함으로 베다 신앙이 약화되자, 아리아인의 종파는 데칸으로부터 점점 더 침입을 당했다. 종족이 멸망하고 종교가 죽어가는 대세를 막으려는 절망스러운 노력으로, 브라만 카스트는 자신들을 모든 다른 것 위에 높이려고 애썼다. 그들은 신에게 희생물 바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대단히 효력이 있고, 그 효능이 온통 강력하다고 가르쳤다. 우주의 두 가지 기본 되는 신성한 원칙 중의 하나는 신 브라만이고, 다른 하나는 브라만 사제라고 선포했다. 다른 어떤 유란시아 민족들 사이에서도 사제들이 자기네 신들 위에 자기를 높이고, 신들이 받을 영예를 자신이 가로채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이 주제넘은 주장으로 너무 터무니 없이 극단적으로 우겼기 때문에, 둘러싼 덜 진보된 여러 문명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온 타락하는 종파들 앞에서, 그 아슬아슬한 체계가 통째로 무너졌다. 광대한 베다 사제직 자체가 버둥거렸고, 자신들의 이기적이고 지혜롭지 못한 주제넘은 짓이 온 인도에 가져온, 무기력과 비관주의의 검은 물결 밑으로 사라졌다.
94:2.3 (1029.1) 자아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잡초로서 연달아 육신화되는 끝없는 싸움에서, 자아가 비진화 방법으로 영속한다는 두려움을 확실히 낳았다. 태어나는 일신교가 될 뻔한 것에 부착될 수 있었던 모든 오염시키는 신앙 중에서, 아무것도 드라비다의 데칸에서 온 이 윤회(輪廻) 신앙―혼이 다시 육신화한다는 교리―보다 더 어리석어 보이는 것은 없었다. 진저리나고 단조롭게 거듭 윤회한다는 것을 믿는 이 관념은 오래 간직했던 희망, 일찍부터 베다 신앙의 일부로서, 죽고 나서 구원 받고 영적 승진을 발견하는 희망을 분투하는 필사자로부터 빼앗았다.
94:2.4 (1029.2) 철학적으로 사람을 쇠약하게 하는 이 가르침 뒤에, 브라만, 곧 온 창조의 대혼(大魂)과 절대로 연합하여 우주의 휴식과 평화 속에 잠김으로, 자아를 영원히 벗어난다는 교리가 발명되었다. 필사자의 욕망과 인간의 포부는 실질적으로 빼앗기고 거의 파괴되었다. 2천 년이 넘도록 인도의 상급 지성은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려고 애썼고, 그래서 영적 절망의 사슬 속에 많은 힌두 민족의 혼을 실질적으로 쇠고랑으로 채운 후일의 종파들과 가르침이 들어오도록 문이 활짝 열렸다. 모든 문명 가운데서, 베다의 아리아인은 살렘의 복음을 물리친 것 때문에 가장 끔찍한 값을 치렀다.
94:2.5 (1029.3) 카스트만 가지고 아리아인의 종교 문화 체계를 영속할 수 없었고, 데칸의 열등한 종교들이 북쪽에 침투하자, 절망과 낙심의 시대가 열렸다. 이 어두운 시절에 아무 생명도 죽이지 않는 종파가 일어났고, 그 뒤로 늘 지속하였다. 새로운 종파들 중에서 많은 것이 버젓이 무신론이었고, 얻을 수 있는 그런 구원은 오직 사람이 도움 받지 않고 노력하여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모든 불행한 철학의 많은 부분에 두루, 멜기세덱의 가르침, 아니 아담의 가르침의 잔재가 왜곡되어 남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94:2.6 (1029.4) 이때는 힌두 신앙의 후기 성서, 곧 브라마나와 우파니샤드가 수집된 시절이었다. 몸소 믿음으로 유일한 하나님을 체험한다는 개인적 종교의 가르침을 물리치고, 데칸에서 온, 비천하고 사람을 약화시키는 종파들과 교리의 물결에, 그리고 신을 인격화하는 생각과 환생(還生) 사상에 오염되었기 때문에 브라만 사제들은 이러한 오염시키는 관념에 대하여 맹렬한 반응을 체험했다. 참된 실체를 추구하고 찾아내려는 분명한 노력이 있었다. 브라만들은 인도인의 신 개념에서 사람 닮은 모습을 없애는 데 착수했지만,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개념에서 성격을 없애는 끔찍한 잘못에 빠졌으며, 파라다이스 아버지라는 드높은 영적 이상이 아니라, 만물을 둘러싸는 절대자라는 아득한 형이상학적 관념을 가지고 솟아났다.
94:2.7 (1029.5) 자체를 보존하려는 노력으로 브라만들은 멜기세덱의 유일한 하나님을 물리쳤고, 이제 그들은 브라만, 분명치 않고 미혹적인 철학적 자아, 비성격이고 무력한 그것을 가정(假定)하게 되었고, 이것은 그 불행한 날부터 20세기까지 인도의 영적 생활을 힘없고 기운 빠지게 만들었다.
94:2.8 (1029.6) 불교가 인도에서 일어난 것은 우파니샤드를 기록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1천 년 동안 성공했는데도, 불교는 후일의 힌두교와 경쟁할 수 없었다. 도덕 수준이 더 높았는데도, 초기에 불교의 하나님 묘사는 힌두교보다도 분명하지 않았고, 힌두교는 작은 신, 개인을 상대하는 신들을 마련해 주었다. 알라가 우주에서 최고의 하나님이라는 뚜렷한 개념을 가진, 호전적 이슬람교의 돌진 앞에서 불교는 인도 북부에서 마침내 굴복했다.
94:3.1 (1030.1) 브라만교의 최고 단계를 도저히 종교라 할 수 없지만, 그것은 참으로 철학과 형이상학 분야로 필사 지성이 도달한 가장 고귀한 노력의 하나였다. 최종의 실체를 찾아내려고 길을 떠났으니까, 종교의 기본적 두 가지 개념을 빼고, 인도의 지성은 멈추지 않고 신학의 거의 모든 단계에 관하여 숙고해 보았다. 이 두 개념은 온 우주의 생물을 지으신 우주의 아버지가 존재하는 것, 그리고 영원한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그들에게 완전하라고 명하신 그 아버지에게 도달하려고 애쓰는 동안에 바로 이 사람들이 우주에서 승천 체험을 겪는 사실이다.
94:3.2 (1030.2) 브라만의 개념을 보면 그 시절의 지성인은 만물에 침투하는 어떤 절대자 관념을 참으로 붙잡았는데, 이는 이 가정이 한꺼번에 창조 에너지이자 우주의 반응이라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브라만은 도무지 정의(定義)를 내릴 수 없는 것이라 생각되었고, 오직 모든 유한한 성질을 연달아 부정함으로 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히 이것은, 절대 존재, 아니 무한한 어떤 존재를 믿는 관념이었지만, 이 개념에는 대체로 성격 특성이 빠져 있고, 따라서 개별 신자가 이를 체험할 수 없었다.
94:3.3 (1030.3) 브라만 나라야나는 절대자, 무한한 스스로 있는 그것, 곧 잠재 우주의 원초적 창조 잠재력이요, 모든 영원을 통해서 정적(靜的)으로 존재하고 잠재하는 우주의 자아로 생각되었다. 당시의 철학자들이 신 개념에서 그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면, 브라만이 연합하고 창조하는 성질이 있고, 지음받고 진화하는 존재들이 가까이할 수 있는 하나의 성격자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면, 다음에 그러한 가르침은 유란시아에서 신에 관한 가장 진보된 초상화가 되었을 터인데, 이는 그 가르침이 총체적 신(神)의 활동에서 처음 다섯 수준을 포함하고, 아마도 나머지 둘을 상상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94:3.4 (1030.4) 어떤 단계에서 하나의 우주 대혼(大魂)이 모든 생물 존재를 합친 것의 총체라는 개념은 인도의 철학자들을 최상 존재의 진실에 무척 가까이 가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이러한 진실은 그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는데, 그들이 브라만 나라야나라는 이론적 일신교 목표에 이르는 데 타당하거나 합리적인 어떤 개인적 접근법도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94:3.5 (1030.5) 인과 관계의 연속을 말하는 카르마 원칙은, 다시, 최상위의 신 계심 안에 시공의 모든 행위의 영향이 통합된다는 진리와 아주 가까웠다. 그러나 이 가정은 결코 개별 신자가 개인적으로 나란히 신에 도달하는 길을 마련하지 않았고, 겨우 우주의 대혼이 모든 인격을 궁극에 삼킨다고만 하였다.
94:3.6 (1030.6) 브라만교의 철학은 또한 생각 조절자의 깃드심을 거의 깨달을 뻔했지만, 진리를 오해함으로 타락되기만 했다. 혼이 브라만의 깃드심이라는 가르침은, 이렇게 우주의 하나가 깃드는 것을 제쳐놓고, 따로 인간의 개성이 전혀 없다는 관념에 완전히 오염되지 않았더라면, 진보된 종교를 위하여 길을 닦았을 것이다.
94:3.7 (1030.7) 자아의 혼이 대혼과 합쳐진다는 교리에서, 인도의 신학자들은 인간다운 무엇, 새롭고 독특한 무엇, 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하나가 됨으로부터 태어나는 무엇이 살아남는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혼이 브라만으로 돌아간다는 가르침은 조절자가 우주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진리와 거의 같은 방향이다. 그러나 조절자와 달리, 또한 살아남는 무엇이 있으니, 이것은 필사 인격자의 상물질 사본(寫本)이다. 이 근본 개념이 브라만 철학에 치명적으로 빠져 있다.
94:3.8 (1031.1) 브라만 철학은 우주의 많은 사실에 접근했고, 수많은 우주 진리에 가까이 갔다. 그러나 절대ㆍ초월ㆍ유한 수준과 같이 몇 가지 수준의 실체를 구별하지 못하는 잘못을 너무 자주 저질렀다. 절대 수준에서 유한하고 환상인가 싶은 것이 유한 수준에서 절대로 실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철학은 또한 우주의 아버지의 기본 성격을 조금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진화 인간의 제한된 하나님 체험으로부터 영원한 아들이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한없이 체험하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어떤 수준에서도 우주의 아버지를 몸소 접촉하는 것이 가능하다.
94:4.1 (1031.2) 인도에서 몇 세기가 지나자, 민중은 멜기세덱 선교사들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수정되고 나중에 브라만 사제들이 구체화한, 베다의 옛 의식(儀式)으로 어느 정도 돌아갔다. 세계 종교 가운데 가장 오래 되고 가장 국제적인 이 종교는 불교ㆍ자이나교, 그리고 나중에 나타나는 모하메드교ㆍ기독교의 영향에 반응하여, 더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이 도착할 때가 되자 그 가르침은 “백인의 종교”가 될 정도로 이미 너무나 서양화되었고, 따라서 힌두의 지성인에게 이상하고 낯설었다.
94:4.2 (1031.3) 힌두 신학은 현재 네 가지 내려가는 수준의 신과 신성을 그린다:
94:4.3 (1031.4) 1. 브라만, 절대자, 무한한 하나, 스스로 존재하는 그것.
94:4.4 (1031.5) 2. 삼신일체(三神一體), 힌두교에서 제일 높은 삼자일체. 이 결합에서, 첫째 구성원 브라마는 브라만―무한―으로부터 스스로 창조되었다고 생각된다. 범신적인 무한한 하나와 가까운 신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브라마는 우주의 아버지 개념의 기초를 이룰 수도 있다. 브라마는 또한 운명과 동일시된다.
94:4.5 (1031.6) 둘째와 셋째 구성원, 시바와 비슈누 숭배는 그리스도 이후 첫째 천년 동안에 일어났다. 시바는 삶과 죽음의 주, 다산(多産)의 신이요, 파괴의 주였다. 비슈누는 정기적으로 사람 모습으로 육신화한다는 믿음 때문에 대단히 인기가 좋았다. 이 방법으로 비슈누는 인도인의 상상 속에서 실재하고 살아 있게 된다. 더러는 시바가, 더러는 비슈누가 만물 위에 최고라고 여겼다.
94:4.6 (1031.7) 3. 베다 및 베다 이후의 신들. 아그니ㆍ인드라ㆍ소마와 같이, 아리아인이 가졌던 고대의 여러 신은 삼신일체의 세 구성원에 2차적인 것으로서 지속하였다. 이에 더하여 수많은 신이 베다 시대 인도의 옛 시절 이후로 일어났고, 그들은 또한 힌두인의 만신전에 합병되었다.
94:4.7 (1031.8) 4. 반신(半神): 후일의 종파에서 믿는 초인간ㆍ준신(準神)ㆍ영웅, 악마ㆍ귀신ㆍ악령ㆍ요정(妖精)ㆍ괴물ㆍ도깨비ㆍ성자(聖者)들.
94:4.8 (1031.9) 힌두교는 오랫동안 인도 국민에게 활력을 주지 못했지만, 동시에 보통, 관대한 종교였다. 힌두교의 큰 장점은 그 종교가 유란시아에서 나타난 바 가장 잘 적응하고 형태가 없는 종교임이 입증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힌두교는 거의 한없이 바뀔 능력이 있고, 지적 브라만의 높은 반(半) 일신교 같은 추측으로부터 천하고 억압받는 계층의 무지한 신자들이 가진 터무니없는 주물 사상과 원시적 숭배 풍습에 이르기까지, 신축성 있게 조정할 정도로 특별히 범위가 넓다.
94:4.9 (1032.1) 힌두교가 살아남은 것은 본질적으로 그 종교가 인도에서 기본 사회 조직의 필수 부분이기 때문이다. 힌두교는 어지러워지거나 파괴될 수 있는 아무런 큰 성직자 계층이 없다. 힌두교는 사람들의 생활 형태에 함께 얽혀 있다. 힌두교가 변하는 조건에 대하여 적응하는 능력은 모든 다른 종파를 뛰어넘는다. 많은 다른 종교에 대하여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나타내며, 고타마 부다와 바로 그리스도조차도 비슈누가 육신화한 것이라 주장한다.
94:4.10 (1032.2) 오늘날 인도에서, 예수의 복음―하나님이 아버지이고 모든 사람이 아들이요, 따라서 형제인 것―을 묘사할 필요가 크며, 이 형제 정신은 사랑으로 베풀고 사회에 봉사할 때 개인적으로 이루어진다. 인도에는 철학의 틀이 존재하고, 신을 숭배하는 구조가 있다. 다만 필요한 것은 미가엘이 일생을 수여한 일을 백인의 종교로 만드는 성향이 있었던, 서양의 독단과 교리를 벗어 버린 복음, 사람의 아들이 준 최초의 복음에 나타난 힘찬 사랑의 불꽃, 활력을 주는 불꽃이다.
94:5.1 (1032.3) 최고자 하나님,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퍼뜨리면서 아시아를 통과하는 동안, 살렘 선교사들은 거쳐 간 여러 나라의 철학과 종교 사상을 많이 흡수했다. 그러나 멜기세덱과 그 후계자들이 임명한 선생들은 그들에게 맡긴 책임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유라시아 대륙의 모든 민족에게 파고들었고, 그들이 중국에 도착한 것은 그리스도 이전 둘째 천년의 중엽이었다. 수이푸(敘府)에서[3] [1742] 1백 년이 넘도록 살렘 사람들은 그들의 본부를 유지하면서 거기서 중국인 선생들을 훈련시켰고, 이들은 황인종의 영토 전역에 두루 가르쳤다.
94:5.2 (1032.4) 가장 원시 형태의 도교(道敎)가 중국에서 일어난 것은 이 가르침의 직접 결과였는데, 도교는 오늘날 그 이름을 지닌 것과 크게 다른 종교였다. 초기, 곧 시초의 도교는 다음 요소의 복합이었다:
94:5.3 (1032.5) 1. 싱랑톤의 남아 있는 가르침, 이것은 상제(上帝), 곧 하늘님의 개념으로 지속되었다. 싱랑톤이 살던 시절에 중국인은 거의 일신교를 믿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의 진리를 숭배하는 데 마음을 쏟았고, 이것은 나중에 하늘의 영, 곧 우주의 통치자로 알려졌다. 그리고 황인종은 결코 이 초기의 신 개념을 완전히 잃지 않았다. 하지만 뒤이은 여러 세기에 많은 하위 신과 영이 그들의 종교 속으로 모르는 사이에 기어 들어왔다.
94:5.4 (1032.6) 2. 사람의 믿음에 반응하여 인류에게 은혜를 내리려 하는 최고 창조자 신을 믿는 살렘 종교. 그러나 멜기세덱 선교사들이 황인종의 땅을 침투했을 때가 되자, 그들이 최초에 전한 말씀은 마키벤타 시절에 살렘의 간단한 교리와 상당히 달라졌다는 것이 또한 너무나 참말이다.
94:5.5 (1032.7) 3. 모든 악을 피하려는 욕구와 함께, 인도의 철학자들이 가진 브라만 절대자 개념. 베다 신앙을 가르치는 인도인 선생들은 동쪽으로 향한 살렘 종교의 전파에 아마도 가장 큰 외래 영향력을 미쳤고, 그들은 자기네 브라만―절대자―개념을 살렘 사람들의 구원 사상에 불어 넣었다.
94:5.6 (1033.1) 이 복합 신앙은 종교 철학 사상에서 밑받침하는 영향이 되어 황인과 갈색 종족들의 땅을 통해서 퍼졌다. 일본에서 이 원시 도교는 신도(神道)로 알려졌고, 팔레스타인의 살렘으로부터 아득히 먼 이 나라에서, 민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인류가 잊지 않게 하려고 땅에서 살았던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육신화한 것에 대하여 배웠다.
94:5.7 (1033.2) 중국에서 이 관념들은 모두 늘 성장하는 조상 숭배 종파와 후일에 뒤범벅이 되고 섞여 버렸다. 그러나 싱랑톤의 시절 이후로 중국인은 사제들에게 무력한 노예가 된 적이 없다. 황인종은 미개한 속박의 처지로부터 질서 있는 문명으로 처음 솟아나온 종족인데, 이는 그 종족이 비굴하게 신들을 두려워하던 처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고, 다른 종족들이 무서워한 것처럼 죽은 사람의 귀신을 무서워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사제들로부터 초기에 해방된 지경을 넘어서 진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중국은 거의 똑같이 비참한 잘못, 조상 숭배에 빠졌다.
94:5.8 (1033.3) 그러나 살렘 사람들의 수고는 헛되지 않았다. 6세기에 중국의 위대한 철학자들은 이들의 복음의 기초 위에 자기들의 가르침을 확립하였다. 노자와 공자의 시절에 도덕적 분위기와 영적 감정은 그 이전 시대에 살렘 선교사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자라났다.
94:6.1 (1033.4) 미가엘이 오시기 약 6백 년 전에, 육체를 떠난 지 오래 된 멜기세덱에게는 땅에서 그의 순수한 가르침이 더 오래 된 유란시아 신앙 속으로 널리 흡수됨으로 지나치게 위태로워지고 있는 듯하였다. 한동안 미가엘의 선구자였던 그의 사명이 실패할 위험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스도 이전 6세기에, 영적 대리자들의 특별한 조정을 통해서, 행성 감독자들조차도 이를 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유란시아에 다양한 종교적 진리가 아주 특별히 발표되었다. 몇몇 인간 선생들의 주선을 통해서, 살렘의 복음은 다시 진술되고 다시 활력을 찾았고, 그때 발표된 대로, 많은 것이 이 글을 쓸 때까지 지속하였다.
94:6.2 (1033.5) 영적 진보가 있었던 이 독특한 세기의 특징은 문명화된 세계 전역에 걸쳐서, 종교ㆍ도덕ㆍ철학 면에서 위대한 선생이 나타난 것이다. 중국에서 탁월한 두 선생은 노자(老子)와 공자(孔子)였다.
94:6.3 (1033.6) 도(道)가 모든 창조의 유일한 첫째 근원라고 선포했을 때 노자는 살렘 전통의 개념에 기초를 두었다. 노자는 큰 영적 선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의 영원한 운명은 도, 최상의 하나님, 우주의 임금과 영원히 하나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궁극의 원인을 가장 날카롭게 이해하였는데, 이는 “하나는 절대 도로부터 생겨나고, 하나로부터 우주의 이원(二元)이 나타나며, 그러한 이원에서 삼위가 솟아나오고, 삼위는 모든 실체의 최초의 근원이라”[4] [1743]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실체는 우주에 있는 잠재성과 실재물 사이에 늘 균형되어 있고, 신의 영이 이것들을 영원히 조화시킨다.”
94:6.4 (1033.7) 노자는 또한 악을 선으로 갚는 교리를 가장 일찍 발표한 사람 중에 하나였다: “선은 선을 낳지만, 참으로 선한 자에게는 악도 또한 선을 낳는다.”
94:6.5 (1033.8) 그는 사람은 창조자에게 돌아간다고 가르쳤고, 생명을 우주의 잠재성으로부터 인격이 태어나는 것으로 그렸으며, 한편 죽음은 사람의 이 인격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았다. 그가 가진 참된 믿음의 개념은 특별했고, 그도 또한 이것을 “어린아이의 태도”와 견주었다.
94:6.6 (1034.1)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뚜렷이 이해했으니,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절대 신은 애쓰지 않아도 늘 이긴다. 그는 인류에게 강요하지 않지만, 언제나 그들의 참된 소망에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은 영원히 참고, 그 뜻의 표현은 영원히 불가피하다.” 참 종교가에 대해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는 진리를 표현하면서 말했다. “착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진리를 쥐고 있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이 재산을 동료들에게 주려고 애쓰는데, 이는 그것이 진리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절대자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이익이 되고 결코 파괴하지 않는다. 참 신자의 목적은 언제나 행동하는 것이나 결코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94:6.7 (1034.2) 노자가 무저항을 가르치고, 행위와 강요를 구별한 것은 나중에 “아무것도 보거나 행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신앙으로 곡해되었다. 그러나 노자는 결코 그러한 잘못을 가르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무저항을 내세운 것은 중국 민족의 평화로운 성향이 더욱 발달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94:6.8 (1034.3) 그러나 20세기 유란시아에서 유행하는 도교는 그 옛 철학자의 드높은 감정 및 우주의 개념과 공통되는 것이 거의 없다. 그는 파악한 대로 진리를 가르쳤으니, 이것이다: 절대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세상을 다시 만들 그 신성한 에너지의 근원이요, 그 에너지로 사람은, 도(道), 곧 우주의 영원한 신이요 절대 창조자와 영적으로 하나되는 경지까지 올라간다.
94:6.9 (1034.4) 공부자(孔夫子)는 6세기에 중국에서 노자와 같은 시대에 살고 나이가 더 어린 사람이었다. 공자의 신조는 황인종의 오랜 역사에서 상급의 도덕적 전통에 기초를 두었고, 또한 살렘 선교사들의 남아 있는 전통에 얼마큼 영향을 받았다. 그의 주요한 업적은 옛 철학자들의 지혜로운 말씀을 모은 데 있다. 일생 동안 그는 사람들이 거절한 선생이었지만, 그의 글과 가르침은 그 뒤로, 중국과 일본에[5] [1744] 큰 영향을 미쳤다. 공자는 마술이 있던 자리에 도덕을 올려놓았으므로 샤먼들에게 본보기를 보였다. 그러나 그는 너무 손을 댔다. 그는 질서를 새로운 주물로 만들고 조상의 행위를 공경하도록 만들었으며, 이 글을 쓸 때 중국인은 아직도 조상의 행위를 받들어 모신다.
94:6.10 (1034.5) 유교가 설파하는 도덕은, 땅의 길은 하늘의 길이 일그러져 비친 그림자요, 이 세상 문명의 참된 모범은 하늘의 영원한 질서가 거울에 비친 것이라는 이론에 바탕을 둔다. 유교(儒敎)에서 잠재하는 하나님 개념은 천도(天道), 곧 우주의 원본을 강조한 것에 비하여 거의 완전히 경시되었다.
94:6.11 (1034.6) 동양에 있는 소수를 제외하고 모두가 노자의 가르침을 잃어버렸지만, 공자의 글은 그 뒤로 늘, 유란시아인의 거의 3분의 1의 문화에 도덕적 구조의 기초가 되었다. 이 공자의 교훈은 지난날의 최선을 지속하기는 해도, 그렇게 존중받은 업적을 낳은 중국인의 바로 그 탐구 정신에 얼마큼 해로웠다. 진시황 황실의 노력과 묵자(墨者)의 가르침이 이 교리의 영향에 맞서 싸웠으나 헛일이었다. 묵자는 윤리적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를 둔 형제 정신을 부르짖었다. 그는 새로운 진리를 찾는 옛 탐구 정신에 다시 불을 붙이려고 했지만, 그의 가르침은 공자의 제자들의 억센 반대에 부딪쳐 실패했다.
94:6.12 (1034.7) 중국에서 영적으로 어둡던 시대에, 다른 여러 영적 선생과 도덕 스승들처럼, 결국 추종자들이 공자와 노자 모두를 신격화하였고, 이 시대는 도교 신앙이 쇠퇴하고 왜곡되던 때와 인도로부터 불교 선교사들이 오던 사이에 끼었다. 영적으로 퇴폐한 이 여러 세기 동안, 황인종의 종교는 불쌍한 신학으로 퇴화했다. 그 속에는 악마ㆍ용ㆍ악귀가 들끓었고, 이것은 모두 깨우침을 받지 못한 필사 지성에게 두려움이 돌아오는 것을 가리킨다. 진보된 종교 때문에 한때 인간 사회의 선두에 있던 중국은, 다음에 하나님 의식을 개발하는 참된 길에서 잠시 진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뒤로 처졌다. 이 하나님 의식(意識)은 개별 필사자의 경우 뿐 아니라, 시공의 진화 행성에서 문화와 사회의 진보의 특징을 나타내는, 복잡하고 복합된 문명이 참으로 진보하는 데 필수이다.
94:7.1 (1035.1) 중국에서 노자와 공자와 같은 시대에, 진리를 가르친 또 하나의 위대한 선생이 인도에서 나타났다. 고타마 싯달타는 인도 북부 지방 네팔에서 그리스도 이전 6세기에 태어났다. 그의 추종자들은 나중에 그가 환상처럼 부유한 통치자의 아들인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진실로, 그는 남쪽 히말라야의 작은 외딴 산 계곡에서 주위가 묵인하여 다스린, 어느 조그만 족장의 옥좌를 분명히 이어받을 후계자였다.
94:7.2 (1035.2) 고타마는 요가를 쓸데없이 6년 동안 연습한 뒤에, 불교의 철학으로 발전된 어떤 이론을 만들어냈다. 싯달타는 성장하는 카스트 제도에 맞서서, 굳게 각오했지만 보람없는 싸움을 벌였다. 이 젊은 선지자인 왕자에게는 그 시절에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끈, 대단히 성실하고 독특하게 사심 없는 태도가 있었다. 그는 육체를 학대하고 몸에 고통을 줌으로 개인의 구원을 얻으려 애쓰는 풍습이 가치가 없다고 비방하였다. 그리고 추종자들에게 그의 복음을 온 세계에 가져가라고 훈계하였다.
94:7.3 (1035.3) 인도에서 혼란과 극단적 종파의 풍습이 넘치는 가운데서, 고타마의 온건하고 절제 있는 가르침은 가뭄에 시원한 비처럼 들렸다. 그는 신과 사제들, 그리고 그들에게 희생물 바치는 것을 비난했지만, 그도 마찬가지로 우주의 하나인 이의 성격을 깨닫지 못했다. 개별 인간의 혼이 존재하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고타마는 물론, 혼이 윤회한다는 오래 지녀온 관념에 맞서 용감하게 싸움을 벌였다. 그는 사람들을 두려움에서 구원하고, 큰 우주에서 사람들을 안락하고 편안한 느낌을 가지게 하려고 고귀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하늘 가는 필사자의 진정한 하늘 집으로―파라다이스로―그리고 영원히 존재하여 더욱 봉사하는 길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못했다.
94:7.4 (1035.4) 고타마는 진정한 선지자였다. 은둔자 고닷의 훈계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그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살렘 복음을 부활시키는 영감으로 온 인도를 일깨웠을지 모른다. 고닷은 멜기세덱 선교사들의 전통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은 어느 가족을 통해서 내려왔다.
94:7.5 (1035.5) 베나레스에서 고타마는 학교를 세웠는데, 둘째 해에 한 생도 바우탄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에 관한 살렘 선교사들의 전통을 선생에게 전파했다. 우주의 아버지에 대하여 아주 뚜렷한 개념을 가지지 못했어도, 싯달타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간단한 믿음―에 대하여 진보된 자세를 가졌다. 추종자들 앞에서 그 자신 그렇게 선언했으며, “거저 구원을 주는 반가운 소식, 높은 자와 낮은 자, 모두가 올바름과 응보를 믿음으로 지극한 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인도 사람들에게 선포하라고 학생들을 60명씩 떼를 지어 보내기 시작했다.
94:7.6 (1035.6) 고타마의 아내는 남편의 복음을 믿었고 여승 계급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의 아들은 후계자가 되어 종파의 세를 크게 떨쳤다. 고타마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새로운 관념을 파악했지만, 나이 들었을 때, 믿음만으로 신의 은총을 얻는 살렘의 복음에 주춤하였고, 만년에 죽으면서 말했다. “너 자신의 구원을 해결하라.”
94:7.7 (1036.1) 선포된 중에 최선을 보면 희생물ㆍ자학(自虐)ㆍ의식(儀式)ㆍ사제에 매이지 않고 보편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고타마의 복음은 그 시대에 혁명이요 놀라운 교리였다. 그것은 놀랍게도 살렘 복음의 부흥과 같았다. 그 복음은 수백만의 절망하는 혼들에게 구원을 주었고, 그 뒤에 여러 세기 동안 괴상하게 일그러졌는데도, 수많은 인간의 희망으로서 아직도 지속한다.
94:7.8 (1036.2) 싯달타는 그의 이름을 지닌 현대 종파들에서 살아남은 것보다 훨씬 많은 진리를 가르쳤다. 기독교가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 불교는 고타마 싯달타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94:8.1 (1036.3) 불교도가 되기 위해서 사람은 “나는 부처님께 피신한다. 교리 속에 피신한다. 단체에 피신한다”하고 도피문을 외워서 신앙을 대중 앞에서 고백하기만 했다.
94:8.2 (1036.4) 불교는 신화에 기원을 가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에서 기원을 가졌다. 고타마를 따르는 자들은 주, 또는 선생이라는 뜻으로 그를 사스타라고 불렀다. 자신이나 그의 가르침이 인간을 초월한다는 주장을 전혀 내세우지 않았지만, 제자들은 일찍부터 그를 깨우친 자, 부처, 나중에는 석가모니 부처라고 불렀다.
94:8.3 (1036.5) 고타마의 최초의 복음은 다음의 네 가지 고귀한 진리에 바탕을 두었다:
94:8.8 (1036.10) 고통의 교리와 고통에서 벗어남과 가까이 연결된 것은 팔도(八道)의 철학이었고, 이는 바른 견해, 바른 포부,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생각, 바른 숙고이다.[6] [1745] 고통에서 도피함으로 모든 노력ㆍ욕구ㆍ애정을 없애는 것이 고타마의 의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가르침은 모든 희망과 포부를 전적으로 현세의 목표와 물질 대상에 거는 것이 헛됨을 필사 인간에게 보이려고 고안되었다. 사람이 동료 사랑하기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 신자는 또한 이 물질 세계의 관계를 넘어서, 영원한 앞날의 실체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94:8.9 (1036.11) 고타마가 전파한 도덕 계율은 다섯 가지였다:
94:8.12 (1036.14) 3. 정절(貞節)을 버리지 말라.
94:8.15 (1036.17) 추가 계율, 곧 버금가는 계율이 몇 있었고, 이를 지키는 것은 신자들의 재량이었다.
94:8.16 (1036.18) 싯달타는 인격이 불멸함을 도저히 믿었다고 할 수 없다. 그의 철학은 겨우 일종의 기능 연속성을 생각해 놓았다. 그는 열반이라는 교리 속에 무엇을 담으려 뜻했는지 결코 뚜렷이 정의를 내리지 않았다. 필사자로 존재하는 동안에 이론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열반을 사람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로 보지 않았음을 가리킬 것이다. 열반은 사람을 물질 세계에 묶어두는 모든 사슬이 깨뜨려진, 최고의 깨우침이요 하늘 같이 복된 상태를 가리켰다. 필사 인생의 욕구에 매이지 않고 언제라도 다시 육신이 되는 모든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94:8.17 (1037.1) 고타마의 최초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의 도움은 별도로 하고,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사람을 구원하는 믿음이나 초인간 권력자들에게 드리는 기도가 있을 자리가 없다. 인도의 미신을 최소로 줄이려는 시도로, 고타마는 마술로 사람을 구원한다고 외치는 뻔뻔한 주장으로부터 사람들을 돌이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을 기울이면서, 후계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잘못 풀이하고, 무언가 달성하려 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 싫고 고통스러운 것이라 외치도록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최고의 행복은 바람직한 목표를 총명하게 열심히 추구하는 것과 연결되고, 그러한 성취는 우주에서 자아를 실현하면서 참으로 진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추종자들은 간과하였다.
94:8.18 (1037.2) 싯달타의 가르침에 있는 큰 진리는 우주에 절대적 응보가 있음을 선포한 것이었다. 그는 필사 인간이 일찍이 발명한 가운데, 신이 없이 최선의 철학을 가르쳤다. 그 철학은 이상적 인본주의였고, 미신과 마술 의식(儀式), 귀신이나 악귀 공포증이 생길 근거를 아주 실질적으로 없애버렸다.
94:8.19 (1037.3) 불교에서 최초의 복음에 있는 큰 약점은 그 복음이 사심 없이 사회에 봉사하는 종교를 낳지 않은 것이다. 불교 단체는 오랫동안, 신자들의 우애 단체가 아니라, 오히려 조교(助敎)들의 공동체였다. 고타마는 그들이 돈 받는 것을 금했고, 이렇게 함으로 계층 조직의 성향이 자라는 것을 막으려고 애썼다. 고타마 자신은 상당히 사교적이었다. 참말로 그의 일생은 그의 설교보다 훨씬 위대했다.
94:9.1 (1037.4) 불교가 부처, 곧 깨우친 자를 믿음으로 구원 얻기를 권했기 때문에 불교는 번성했다. 불교는 동 아시아에 두루 발견되는 어느 다른 종교 체계보다 멜기세덱의 진리를 더 많이 대표하였다. 그러나 낮은 카스트의 군주였던 아소카가 자신을 보호하는 노력으로 불교를 지지할 때까지, 불교는 한 종교로서 널리 퍼지지 않았다. 아소카는 에집트의 이크나톤 다음으로, 멜기세덱과 미가엘 사이에 가장 눈에 띄는 국가 통치자 중에 하나였다. 아소카는 불교 선교사들의 선전을 통해서 큰 인도 제국을 세웠다. 25년의 기간에 그는 1만 7천 명이 넘는 선교사를 훈련시키고, 이들을 알려진 온 세계의 가장 먼 미개척지까지 보냈다. 한 세대 안에 그는 세계의 절반에서 불교가 지배적 종교가 되게 만들었다. 불교는 티벳ㆍ카쉬미르ㆍ세일론, 버마ㆍ자바ㆍ시암ㆍ고려[7] [1746]ㆍ중국ㆍ일본에서 곧 자리가 잡혔다. 크게 보아서, 불교는 불교가 갈아치우거나 개량한 것들보다 훨씬 뛰어난 종교였다.
94:9.2 (1037.5) 불교가 인도의 고향으로부터 아시아 전체로 전파된 것은 성실한 종교가들이 영적으로 헌신하고 끈질기게 선교한 흥미 있는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고타마의 복음을 전하는 선생들은 육로로 카라반 길의 위험을 무릅썼을 뿐 아니라, 아시아 대륙을 지나서 사명을 추구하는 동안에 중국해의 위험에 부딪쳤고, 그들의 신앙이 전하는 소식을 모든 민족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이 불교는 이제 더 고타마의 단순한 교리가 아니었다. 그를 신으로 만든, 기적이 된 복음이었다. 그리고 인도에서 그 고지(高地)의 고향으로부터 불교가 멀리멀리 퍼짐에 따라서, 불교는 고타마의 가르침과 더욱 달라졌고, 불교가 갈아치운 종교들과 더욱 비슷해졌다.
94:9.3 (1038.1) 불교는 나중에 중국에서 도교에, 일본에서는 신도에, 티벳에서는 기독교에 많이 영향을 받았다. 1천 년이 지난 뒤에, 불교는 인도에서 단지 시들고 사라졌다. 불교는 브라만화되고 나중에는 비굴하게 이슬람에게 항복했으며, 한편 나머지 동양의 상당 부분에서 고타마 싯달타가 결코 알아보지 못했을 의식(儀式)으로 퇴화되었다.
94:9.4 (1038.2) 남쪽에서 싯달타의 가르침에서 근본주의자의 전형(典型)은 세일론, 버마,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지속하였다. 이것은 초기의 교리, 즉 반사회적 교리를 고수하는, 불교의 히나야나 종파이다.
94:9.5 (1038.3) 그러나 미처 인도에서 붕괴하기 전에, 고타마 추종자의 중국 집단과 북부 인도 집단은, 히나야나, 즉 “소승(小乘)”을 고수한 남쪽의 순수파들과 대조해서, 구원에 이르는 “대승(大乘)” 마하야나 가르침을 비로소 개발하였다. 이 대승 불교 신자들은 불교 교리에 본래부터 있던 사회적 제한에서 풀려났고, 그 뒤로 늘, 불교의 이 북쪽 가지는 중국과 일본에서 계속 진화하였다.
94:9.6 (1038.4) 불교가 오늘날 생생하고 성장하는 종교가 된 것은 불교가 그 신도들의 가장 높은 도덕적 가치를 많이 보존하는 데 성공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차분함과 자제를 권장하고, 마음의 침착과 행복을 키우고, 슬픔과 애통을 막는 데 크게 이바지한다. 이 철학을 믿는 자는 그렇지 않은 많은 사람보다 더 낫게 인생을 산다.
94:10.1 (1038.5) 티벳에는 불교ㆍ힌두교ㆍ도교ㆍ기독교와 통합되어 멜기세덱의 가르침이 가장 이상하게 관련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불교 선교사들이 티벳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이 유럽의 북쪽 부족들 사이에서 발견한 것과 아주 비슷한 원시의 야만 상태와 마주쳤다.
94:10.2 (1038.6) 이 순진한 티벳 사람들은 오래된 마술과 부적을 전부 버리려 하지 않았다. 오늘날 티벳 의식에 있는 종교 예식을 검토해 보면, 머리를 민 사제의 단체가 지나치게 성장한 것을 드러내며, 이들은 종(鐘)ㆍ노래ㆍ향(香), 행렬ㆍ묵주ㆍ형상, 부적ㆍ그림, 거룩한 물, 화려한 의상, 그리고 정성들인 성가대를 포함하는 정교한 의식을 거행한다. 그들은 굳어진 교리와 경직된 신조, 신비스러운 의식과 특별한 금식이 있다. 그들의 계층은 중ㆍ여승ㆍ주지(住持)들과 큰 라마를 포함한다. 그들은 천사와 성자들, 거룩한 어머니와 신들에게 기도한다. 그들은 죄를 고백하고, 연옥을 믿는다. 절은 광대하고 사원(寺院)은 웅장하다. 그들은 성스러운 의식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그러한 예식이 구원을 준다고 믿는다. 기도문을 바퀴에 붙이고, 바퀴가 돌면 그 간구가 효력이 있다고 믿는다. 현대에 어느 다른 민족에서도 그렇게 많은 종교로부터 그렇게 많은 것을 준수하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한 누적된 의식(儀式) 문집은 터무니없이 성가시고 못 견딜 짐이 될 것은 불가피하다.
94:10.3 (1038.7) 티벳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사람끼리 형제인 것, 그리고 영원한 우주에서 늘 올라가는 시민이라는 예수 복음의 간단한 가르침을 제외하고, 모든 주요한 세계 종교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 왔다.
94:11.1 (1038.8) 불교는 그리스도 이후 첫째 천년에 중국으로 들어갔고, 황인종의 종교 관습에 잘 들어맞았다. 조상을 숭배하면서 그들은 죽은 자에게 오랫동안 빌었다. 이제 그들은 또한 죽은 자를 위해서도 빌 수 있었다. 불교는 사그라지는 도교에서 남은 의식 풍습과 곧 섞였다. 예배를 드리는 사원(寺院)과 분명한 종교 의식과 더불어, 새로 합성된 이 종교는 곧 중국ㆍ고려ㆍ일본의 민족들이 널리 받아들인 종파가 되었다.
94:11.2 (1039.1) 고타마의 추종자들이 그 종파의 전통과 가르침을 너무 왜곡하여 그를 신성한 존재로 만들 때까지 불교가 세상에 전해지지 않은 것은, 어떤 면에서 불행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인생에 관한 이 신화는, 수많은 기적으로 실제로 치장되었다시피, 불교의 북부 복음, 곧 마하야나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무척 호소력이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94:11.3 (1039.2) 나중에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더러는 석가모니 부처의 영이 살아 있는 부처로서 땅에 정기적으로 돌아온다고 가르쳤고, 이렇게 부처의 형상ㆍ절ㆍ의식(儀式), 그리고 사기꾼인 “살아 있는 부처들”이 무기한으로 영속하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처럼 위대한 인도인의 신교(新敎)는 궁극에, 그가 아주 두려움 없이 대항하고 그토록 용감히 비난했던 바로 그 예식 풍습에, 그리고 의식용 주문에, 그 자체가 묶여 있음을 발견했다.
94:11.4 (1039.3) 불교도의 철학에서 큰 발전은 모든 진리의 상대성을 이해했다는 데 있다. 이 가설의 작용을 통해서, 불교도는 자신과 다른 여러 사람 사이의 차이 뿐 아니라, 자기네 종교 경전(經典)들의 상이점을 절충하고 상관시킬 수 있었다. 작은 진리는 작은 지성을 위하여, 큰 진리는 큰 지성을 위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94:11.5 (1039.4) 이 철학은 또한 부처의 (신다운) 성품이 모든 사람 안에 거한다고, 사람은 스스로 노력해서 이 속 사람의 신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은 유란시아의 종교가 사람에게 깃드는 조절자의 진리를 가장 뚜렷하게 발표한 것 중에 하나이다.
94:11.6 (1039.5) 그러나 싯달타의 최초의 복음에 있는 큰 제한은, 추종자들이 풀이한 바와 같이, 자아를 객관적 실체로부터 고립시키는 방법으로 필사 성품의 모든 한계로부터 인간의 자아를 완전히 해방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우주에서 자아의 참된 실현은 우주의 실체, 그리고 공간에 제한받고 시간에 제약되는 에너지ㆍ지성ㆍ영으로 이루어진 유한한 우주와 일체가 되는 결과로서 생긴다.
94:11.7 (1039.6) 그러나 불교의 예식과 겉으로 나타나는 행사가 불교가 여행한 여러 나라에 있는 예식과 행사에 엄청나게 오염되었어도, 때때로 이 체계의 사상과 관념을 받아들인 위대한 사상가들의 철학적 생활에 이런 퇴화가 있었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2천 년이 넘도록, 아시아의 많은 최고 지성인은 절대 진리와 절대자에 관한 진리를 확인하는 문제에 힘을 기울였다.
94:11.8 (1039.7) 절대자에 대한 높은 개념의 진화는 많은 생각 경로를 통해서, 빗나간 논리의 길을 거쳐서 이루어졌다. 이 무한의 교리가 위로 올라간 길은 히브리 신학에서 하나님 개념이 진화한 것만큼 뚜렷이 정의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우주들의 시초 근원을 상상하는 도중에, 불교도의 지성이 다다르고, 머무르고, 거쳐 간 어떤 일반 수준이 있었다.
94:11.9 (1039.8) 1. 고타마의 전설. 개념의 근저에는 인도의 선지자였던 왕자, 싯달타의 일생과 가르침, 즉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고타마를 깨우친 자라는 관념의 상태를 넘어서 추가된 속성을 비로소 얻을 때까지, 이 전설은 여러 세기를 통해서, 아시아의 넓은 땅을 통과하며 여행하는 동안, 신화 속에서 자랐다.
94:11.10 (1040.1) 2. 여러 부처. 고타마가 인도의 민족들에게 왔다면, 다음에 아득히 먼 과거에 인류의 종족들은 다른 진리 선생이 오시는 축복을 받았고, 아득히 먼 앞날에 의심할 여지 없이 또 축복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추리하였다. 이것은 부처가 많이, 제한 없이 무한히 있다, 아니 누구나 부처가 되기를―부처의 신성을 얻기를―바랄 수 있다고 하는 가르침도 낳았다.
94:11.11 (1040.2) 3. 절대 부처. 부처들의 수가 무한에 가까이 이를 때가 되자, 다루기 힘든 이 개념을 그 시절의 지성인이 다시 통일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모든 부처가 단지 어떤 더 높은 본질, 무한하고 조건 없이 존재하는 어떤 영원한 하나, 모든 실체의 어떤 절대 근원이 겉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여기서부터 계속, 불교에서 신 개념은, 최선의 형태로 보아서, 고타마 싯달타의 인간 몸을 벗어나고, 그 개념을 끈으로 묶어 두었던, 사람 모습의 제한을 벗어 버렸다. 이 최종 개념, 영원한 부처는 절대자, 때로는 무한한 스스로 계신 이와도 쉽게 동일시될 수 있다.
94:11.12 (1040.3) 이 절대 신 관념은 결코 아시아 민족들 사이에 크게 유행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이 땅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철학을 통일하고 우주론을 조화시키도록 만들었다. 절대 부처 개념은 때때로 준(準)성격을 가졌고, 때때로 온전히 비성격이었다―아니 무한한 창조 세력이기도 했다. 그러한 개념은 철학에 도움이 되어도, 종교의 발전을 좌우하지 않는다. 사람 모습을 한 야웨조차도, 무한히 멀리 있는, 불교나 브라만교의 절대자보다 더 큰 종교적 가치가 있다.
94:11.13 (1040.4) 때때로 절대자는 무한한 스스로 계신 이 안에 담겨 있다고도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 추측은 약속의 말씀,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 신의 은총을 얻고 영원히 살아남는 것을 보장하리라는 살렘의 단순한 복음을 무척 듣고 싶어했던 갈급한 대중에게 찬물을 끼얹어 위로하는 것이었다.
94:12.1 (1040.5) 불교의 우주론에서 큰 약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인도와 중국의 많은 미신으로 불교가 오염된 것이요, 다른 하나는 고타마를 처음에 깨우친 자로서, 나중에 영원한 부처로 높인 것이다. 기독교가 많은 잘못된 인간 철학을 흡수하여 고생한 것처럼, 불교도 사람의 출생 표시를 지닌다. 그러나 고타마의 가르침은 지난 2천5백 년 동안 줄곧 진화해 왔다. 깨우침을 받은 기독교인에게 여호와 개념이 호렙 산의 악령과 동일하지 않은 것 같이, 깨우침을 받은 불교도에게 부처 개념은 이제 더 고타마의 인격이 아니다. 용어의 부족은, 옛날의 명칭을 감상적으로 보유하는 것과 함께, 흔히 종교 개념에 있었던 진화의 참된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게 유도한다.
94:12.2 (1040.6) 절대자와 대조하여 하나님 개념은 불교에서 차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근원은 소승과 대승의 추종자들을 이처럼 구별하던 옛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후자의 불교 종파 사이에서 하나님과 절대자의 두 가지 개념이 마침내 무르익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한 세기 한 세기, 일본에서 료닌(良忍)[8] [1747], 호넨 쇼닌(法然上人)[9] [1748], 신란(親鸞)의[10] [1749] 가르침과 함께, 하나님 개념이 진화하였고, 마침내 이 개념은 아미다 부처 관념에서 열매를 맺었다.
94:12.3 (1041.1) 이 신자들 사이에서, 죽음을 겪고 나서 혼은 궁극의 존재, 열반(涅槃)에 들어가기 전에, 파라다이스에서[11] [1750] 체류하기를 선택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서쪽에 있는 파라다이스의 하나님, 아미다의 신다운 자비와 사랑으로 돌보심을 믿음으로 이 새로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선포되었다. 아미다 신자들의 철학은, 유한한 필사자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무한한 실체를 고수한다. 그들은 그 종교에서 온통 자비로운 아미다를 믿는 신앙에 매달리며, 그 아미다는 세상을 무척 사랑해서, 참으로 믿으면서 깨끗한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필사자 한 명도 파라다이스의 하늘 같은 행복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94:12.4 (1041.2) 불교의 큰 장점은 그 신봉자들이 모든 종교로부터 마음대로 진리를 고르는 것이다. 그러한 선택의 자유는 어느 유란시아 종교의 특징이 된 적이 드물다. 이 점에서 일본의 정토진종(淨土眞宗) 교파는 세계에서 가장 진취적 종교 집단의 하나가 되었다. 이 교파는 고타마 추종자들의 옛 선교 정신을 부활시켰고, 다른 민족들에게 선생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어떤 근원에서도, 아니 온갖 근원에서 이렇게 진리를 기꺼이 취하려 하는 자세는 그리스도 이후 20세기 전반(前半)에 종교 신자들 사이에서 나타난, 정말로 칭찬받을 경향이다.
94:12.5 (1041.3) 불교 그 자체는 20세기의 부흥을 겪고 있다. 기독교와 접촉을 가짐으로 불교의 사회적 모습은 크게 향상되었다. 배우려는 욕구가 그 단체의 승려들 마음 속에서 다시 불이 붙었고, 이 신앙에 두루, 교육의 확산은 종교의 진화에서 새로운 걸음을 분명히 자극할 것이다.
94:12.6 (1041.4) 이 글을 쓸 때, 아시아의 상당 부분은 불교에 희망을 걸고 있다. 인도에서 그 위대한 선생의 제자들이 한때 그가 새 진리를 선포함을 들은 것과 같이, 지난날의 암흑 시대를 통해서 아주 용감히 버티어 온 이 고귀한 신앙은 확대된 우주 실체들에 관한 진리를 다시 한 번 받아들일 것인가? 그렇게 오랫동안 찾던, 하나님과 절대자에 대한 새로운 개념의 발표가 활력을 주며 자극하는 데 이 옛 신앙이 다시 한 번 꿈틀할 것인가?
94:12.7 (1041.5) 진화적 기원을 가진 여러 종교와 접촉함으로 19세기 동안에 축적된 교리와 독단에 방해받지 않은 말씀, 사람을 고귀하게 만드는 미가엘의 말씀이 선포되기를 온 유란시아가 기다리고 있다. 불교ㆍ기독교ㆍ힌두교에게, 아니 온갖 신앙을 가진 민족들에게도, 예수에 관한 복음이 아니라, 예수의 복음의 생생한 영적 실체를 발표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95:0.1 (1042.1) 인도가 동 아시아의 많은 종교와 철학을 낳은 것처럼, 레반트도[1] [1751] 서양 세계에서 신앙의 고향이었다. 살렘 선교사들은 팔레스타인과 메소포타미아, 에집트ㆍ이란ㆍ아라비아를 거쳐서, 서남 아시아 전역에 두루 퍼졌고, 어디서나 좋은 소식, 마키벤타 멜기세덱의 복음을 선포했다. 이 여러 지역의 어떤 곳에서 그들의 가르침은 열매를 맺었다. 다른 데서 그들은 성공한 정도가 달랐다. 때때로 그들의 실패는 지혜가 모자랐기 때문이었고, 때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다.
95:1.1 (1042.2) 기원전 2000년이 되기까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들은 셋 족속의 가르침을 거의 잃어버리다시피 하였고, 두 무리의 침략자가 지녔던 원시 신앙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는데, 하나는 서쪽 사막에서 흘러 들어온 베두인 셈 족속이고, 다른 하나는 북쪽으로부터 내려온, 말 타는 미개 족속이었다.
95:1.2 (1042.3) 그러나 한 주의 일곱째 날을 존중하는 옛 아담 족속의 풍습은 결코 메소포타미아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멜기세덱 시절에, 일곱째 날을 불운 중에서 가장 나쁜 것으로 여겼을 따름이다. 그 시대는 금기로 가득하였고, 나쁜 일곱째 날에 길을 떠나거나, 요리하거나, 불을 지피는 것은 불법이었다. 유대인은 그들이 발견한 메소포타미아의 많은 금기를 팔레스타인으로 가져갔고, 이것들은 일곱째 날, 곧 샤바툼을 지키는 바빌로니아의 풍습에 기초를 두었다.
95:1.3 (1042.4) 살렘 선생들이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종교를 다듬고 개선하려고 많이 수고했지만, 그들은 여러 민족이 유일한 하나님을 영구히 인식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한 가르침은 150년이 넘도록 우세했지만, 그리고 나서 잡다한 신들을 믿는 예전의 신앙에 차츰 무릎을 꿇었다.
95:1.4 (1042.5) 살렘 선생들은 메소포타미아 신들의 수를 크게 줄였고, 한때는 주요한 신을 벨ㆍ샤마쉬ㆍ나부ㆍ아누ㆍ이아ㆍ마르둑ㆍ씬, 이렇게 일곱으로 만들었다. 새 가르침이 절정에 올랐을 때 그들은 이 신들 가운데 셋을 모든 다른 것 위에 최고로 올려놓았는데, 바빌로니아의 삼신은 벨ㆍ이아ㆍ아누, 곧 땅과 바다와 하늘의 신이었다. 또 다른 여러 삼신조(三神組)가 다른 지역에서 생겨났고, 모두가 안드 족속과 수메르인의 삼위일체 가르침을 연상시키고, 멜기세덱의 세 동그라미 표시를 믿는 살렘 사람들의 신앙에 기초를 두었다.
95:1.5 (1042.6) 살렘 선생들은 신들의 어머니이자 성교와 다산(多産)의 영, 이시타르의 인기를 결코 완전히 이기지 못했다. 그들은 이 여신 숭배를 다듬느라고 많이 수고했지만, 바빌로니아인과 그 이웃들은 가장된 형태의 성교 숭배를 결코 극복한 적이 없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두루, 모든 여자가, 적어도 일생의 초기에 한 번, 낯선 사람들의 품에 안기는 것이 보편적 풍습이 되었다. 이것은 이시타르가 요구하는 헌신이라고 생각되었고, 다산은 대체로 이렇게 여성이 몸을 바치는 데 달려 있다고 믿었다.
95:1.6 (1043.1) 멜기세덱의 가르침이 초기에 이룩한 진보는, 키시에 있는 학교의 지도자 나보닷이 유행하던 성전 매춘 풍습을 합동으로 공격하기로 결정할 때까지 어지간히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살렘 선교사들은 이러한 사회 개혁을 일으키려는 노력에 실패했고, 이 실패의 구렁에서 그들의 더 중요한 영적ㆍ철학적 가르침이 모두 패배 속에 사라져 버렸다.
95:1.7 (1043.2) 살렘의 복음이 이렇게 실패한 데 뒤이어 즉시 이시타르의 제사가 크게 유행하였고, 이것은 이미 아스타롯으로서 팔레스타인, 이시스로서 에집트, 아프로디테로서 그리스, 아스타르트로서 북쪽의 부족들을 침범한 의식이었다. 이시타르 숭배의 이러한 부흥과 연결하여 바빌로니아 사제들은 점성술로 다시 돌아섰다. 점성술은 마지막으로 메소포타미아에서 큰 부흥을 겪었으며, 점치기가 유행하고 몇 세기 동안 사제 계층은 갈수록 더 악화되었다.
95:1.8 (1043.3) 멜기세덱은 만물의 아버지요 조물주인 유일한 하나님에 관하여 가르치라고,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신의 은총을 얻는다는 복음을 전파하라고 추종자들에게 전에 경고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일을 시도하고, 천천히 이루어지는 진화 대신에 갑자기 개혁하려고 애쓰는 잘못을 새 진리 선생들이 저지르는 경우가 흔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멜기세덱 선교사들은 도덕 기준을 그 사람들에게 너무 높이 올려놓았다. 그들은 너무 많은 일을 시도했고 그들의 고귀한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그들은 분명한 복음을 설파하라, 우주의 아버지가 실재한다는 진리를 외치라고 임명받았지만, 그들은 도덕 관습을 뜯어고치는 운동, 겉보기에 가치 있는 운동에 얽히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의 큰 사명은 옆길로 빠지고, 좌절과 망각 속에서 거의 사라졌다.
95:1.9 (1043.4) 키시에 있던 살렘 본부는 한 세대 안에 종말에 이르렀고,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선전은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살렘 학교들의 잔재는 버티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작은 무리들은 유일한 창조자를 믿는 신앙을 계속했고, 메소포타미아 사제들의 우상 숭배와 부도덕에 맞서 싸웠다.
95:1.10 (1043.5) 그들의 가르침이 거부되고 난 다음 기간에 살았던 살렘 선교사들은 구약 시편의 많은 부분을 기록하고 돌에 새겼으며, 이것을 후일의 히브리 사제들이 포로 생활 시절에 돌에서 발견했고, 나중에 유대인이 저술했다고 여기는 찬송 모음에 이것들을 합병하였다. 바빌론에서 온 이 아름다운 찬송들은 벨마르둑의 성전에서 기록된 글이 아니다. 이 노래들은 초기 살렘 선교사들 후손의 작품이었고, 바빌로니아 사제들의 마술 수집과 뚜렷이 대조가 된다. 욥기는 키시에,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있던 살렘 학교의 가르침을 무척 잘 반영한다.
95:1.11 (1043.6) 메소포타미아의 상당한 종교 문화가 아메니모피와 이크나톤의 작품을 통해서 에집트를 거쳐, 히브리 문학과 예배문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에집트인은 사회적 의무에 관한 가르침을 놀랍게도 간직했는데, 이것은 예전에 있던 메소포타미아의 안드 족속으로부터 내려왔고,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차지했던 후일의 바빌로니아인은 대체로 이것을 잃어버렸다.
95:2.1 (1043.7) 멜기세덱이 준 최초의 가르침은 에집트에서 정말로 깊이 뿌리내렸고, 거기서 이 가르침은 나중에 유럽으로 퍼졌다. 나일 강 유역의 진화 종교는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있던 우수한 핏줄, 곧 놋 족속, 아담 족속, 그리고 후일에 안드 민족들이 도착함으로 정기적으로 강화되었다. 때때로 에집트의 많은 문관 행정가가 수메르인이었다. 이 시절에 인도가 세계 종족들이 많이 혼합된 사람들을 품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에집트도 유란시아에서 발견되는 바 가장 철저히 혼합된 종류의 종교 철학을 육성했고, 나일 강 유역으로부터 이것은 세계의 여러 구석으로 퍼졌다. 유대인은 바빌로니아인으로부터 세계 창조에 관한 그들의 관념을 상당히 받았지만, 에집트인으로부터 신의 섭리 개념을 얻었다.
95:2.2 (1044.1) 메소포타미아보다 에집트에서 살렘의 가르침을 더 유리하게 만든 것은 철학이나 종교의 성향이 아니라, 정치 및 도덕의 성향이었다. 에집트에서 각 부족의 지도자는 왕좌를 쟁취한 뒤에, 그의 부족 신이 최초의 신이요 모든 다른 신의 창조자라고 선포함으로, 자기의 왕조를 영속시키려고 애썼다. 이 방법으로 에집트인은 차츰 초월신 관념에 익숙해졌는데, 이것은 나중에 우주를 창조한 신의 교리에 이르는 디딤돌이었다. 일신교 개념은 에집트에서 몇 세기 동안 오락가락 흔들렸고,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언제나 세력을 넓혔지만, 결코 진화하는 다신교 개념을 아주 이기지는 않았다.
95:2.3 (1044.2) 오랜 세월 동안, 에집트의 민족들은 자연신 숭배에 젖어 있었다. 더 자세히 말하면, 따로 된 40 부족은 저마다 특별한 집단의 신을 가졌고, 하나는 황소, 하나는 사자, 하나는 숫양, 이런 따위를 숭배했다. 그보다 전에 그들은 아메리카 인디안과 무척 비슷하게, 토템 부족들이었다.
95:2.4 (1044.3) 시간이 지나자 에집트인은, 벽돌로 만든 지하 저장실에 묻힌 시체들은 썩는데, 벽돌이 없는 무덤에 놓여진 시체들은 소다가 스며든 모래의 작용 때문에, 보존―썩지 않도록 처리―되는 것을 관찰하였다. 이러한 관찰은 여러 가지 실험으로 이끌었고, 이것은 후일에 죽은 자를 향료로 처리하는 풍습을 낳았다. 에집트인은 몸을 보존하는 것이 사람이 미래 생애를 거쳐가는 것을 수월하게 만든다고 믿었다. 몸이 썩은 뒤 먼 앞날에 개인을 적절히 확인할 수 있도록, 그들은 시체와 함께, 매장할 때 조상(彫像)을 무덤에 세워 놓고 관 위에 비슷한 모습을 새겨놓았다. 이 무덤에 세우는 조상을 만드는 것은 에집트의 예술을 크게 개선하였다.
95:2.5 (1044.4) 여러 세기 동안 에집트인은 무덤이 시체를 보호하며, 그 결과로 죽은 뒤에 쾌적하게 살아남는 것을 보호하는 장치라고 믿었다. 후일에 마술 풍습의 진화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일생 동안 성가셨지만, 아주 효과적으로 그들이 무덤의 종교를 벗어나게 하였다. 사제들은 관에 부적이 되는 구절을 새기곤 하였고, 이것이 “지하 세계에서 사람의 심장 빼앗기는 것”을 막는 보호 조치라고 믿었다. 이내 여러 종류의 이 주문(呪文)이 수집되었고, 사자(死者)의 서로서 보존되었다. 그러나 나일 강 유역에서 마술 의식은 일찍부터, 그 시절의 의식(儀式)이 흔치 않게 도달하는 정도로, 양심과 인품의 분야와 관련되었다. 그리고 후일에 구원받는 것은 무덤을 공들여 짓기보다 이러한 윤리적ㆍ도덕적 이상에 달려 있었다.
95:2.6 (1044.5) 이 시절의 미신은, 침이 병 고치는 약으로서 효력이 있다는 널리 퍼진 믿음에 잘 나타나는데, 이 관념은 에집트에서 기원이 있었고 거기서부터 아라비아와 메소포타미아로 퍼졌다. 호루스가 셋과 싸움을 벌이는 전설에는 그 젊은 신이 제 눈을 잃어버렸지만, 셋을 정복한 뒤에 지혜로운 신 토스가 이 눈이 다시 보이게 해주었고, 토스는 상처에 침을 뱉어 낫게 하였다.
95:2.7 (1044.6) 에집트인은 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은 자격 있는 죽은 사람의 혼이 살아남는 것을 가리킨다고 오랫동안 믿었다. 다른 생존자들은 해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고 생각했다. 어떤 기간에는 태양 숭배가 일종의 조상 숭배가 되었다. 큰 피라미드의 비탈진 입구로 이끄는 길은 북극성을 똑바로 가리켰다. 그래서 임금의 혼은 무덤에서 나올 때 고정된 별들의 별자리, 움직이지 않는 확정된 별자리로 똑바로 갈 수 있었고, 그러한 별은 임금이 사는 처소로 생각되었다.
95:2.8 (1045.1) 비스듬히 내려오는 태양 빛이 땅을 향하여 구름 속의 구멍을 통해서 통과하는 것을 관찰했을 때, 사람들은 임금과 기타 올바른 사람들이 올라갈 수 있도록 하늘 계단을 내려놓는 것을 상징한다고 믿었다. “페피 임금은 그의 광채를 발 밑에 계단이 되라고 내려놓았고, 이를 딛고서 어머니한테로 올라가려 했다.”
95:2.9 (1045.2) 멜기세덱이 육체를 입고 나타났을 때, 에집트인은 주위의 민족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종교가 있었다. 몸을 잃어버린 혼은 주문으로 알맞게 준비를 갖추면, 중간에 있는 악령들을 피하고 오시리스의 재판실까지 갈 수 있다고, 거기서 “살인ㆍ강도ㆍ거짓ㆍ간음ㆍ도둑질ㆍ이기심”의 죄가 없으면, 지극히 복스러운 나라로 입장이 허락되리라 그들은 믿었다. 이 혼을 저울에 달아서 모자라는 것이 발견되면, 지옥으로, 삼키는 여신에게 맡겨질 것이었다. 이것은 둘러싼 여러 민족의 신앙과 비교해서, 비교적 진보된 미래 생명의 개념이었다.
95:2.10 (1045.3) 땅에서 육체를 입고서 사람이 일생에 지은 죄 때문에 저 세상에서 재판받는다는 개념은 에집트로부터 히브리 신학으로 옮겨갔다. 재판이라는 낱말은 히브리 시편 전체에 꼭 한 번 나타나는데, 에집트인이 바로 그 찬송가를 썼다.
95:3.1 (1045.4) 에집트의 문화와 종교가 주로 안드 족속이 살던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유래했고 히브리인과 그리스인을 통해서 대부분, 후일의 문명에 전달되었어도, 에집트인의 사회 및 윤리적 이상주의의 상당 부분은 순전히 차츰차츰 발달된 것으로서, 나일 강 유역에서 일어났다. 안드 족속에 기원을 가진 진리와 문화를 많이 수입했는데도, 미가엘의 수여가 있기 전에 다른 어느 제한된 지역에서 비슷하게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나타난 것보다 에집트에서 순전히 인간적 발전으로서 도덕 문화가 더 발달되었다.
95:3.2 (1045.5) 도덕의 진화는 계시에 온통 의존하지는 않는다. 높은 도덕 개념은 사람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사람에게 신다운 영이 깃들기 때문에, 사람은 몸소 체험하는 생활로부터 영적 가치 기준을 발달시키고 우주를 보는 통찰력을 얻어낼 수 있다. 양심과 인품이 그랗게 자연스럽게 진화하는 범위는 또한, 옛날에 둘째 에덴으로부터, 나중에는 살렘에 있는 멜기세덱 본부로부터,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들이 정기적으로 나타남으로 커졌다.
95:3.3 (1045.6) 살렘의 복음이 에집트에 침투하기 몇천 년 전에, 에집트에서 도덕의 지도자들은 정의와 공평, 그리고 탐욕 회피를 가르쳤다. 히브리 성서가 쓰여지기 3천 년 전에, 에집트인의 표어는 이것이었다: “올바른 기준을 가진 사람, 올바른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은 서느니라.” 그들은 부드러움과 절제와 신중을 가르쳤다. 이 시대의 큰 선생들 중에 하나는 이런 말을 전했다, “옳게 행하고,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대하라.” 이 시대에 에집트인의 세 가지 표어는 진리ㆍ응보ㆍ올바름이었다. 유란시아에서 순전히 인간다운 종교 가운데 아무것도, 나일 강 유역에서 한때 있던 이 인본주의에서 나타난 사회적 이상과 위대한 도덕성을 일찍이 뛰어넘은 적이 없다.
95:3.4 (1045.7) 발달하는 이 윤리 개념과 도덕적 이상이 담긴 토양 속에서 살렘 종교의 살아남은 교리가 번성했다. 이런 말씀을 믿은 민족의 가슴 속에서 선악 개념은 쉽게 반응했다, “평화로운 자는 생명을 얻고, 죄 있는 자는 죽음을 받느니라,” “사랑받는 일을 행하는 자는 마음이 평안하며, 미움받는 일을 하는 자는 죄가 있도다.” 몇 세기 동안 나일 강 유역의 거주자들은 후일에 생긴, 옳은 것과 그른 것―선악―의 개념을 미처 생각해 보기도 전에, 이 솟아나는 윤리적ㆍ사회적 기준에 따라서 살았다.
95:3.5 (1046.1) 에집트의 사람들은 지적ㆍ도덕적이었으나 영적 성품이 지나치게 높지는 않았다. 에집트인 사이에서 6천 년 동안에 위대한 선지자가 겨우 4명 일어났다. 그들은 아메니모피를 한 동안 따랐고, 옥반을 죽였다. 이크나톤을 짧은 한 세대 동안 건성으로 받아들였고, 모세를 물리쳤다. 종교 상황보다는 다시 정치 상황이, 유일한 하나님을 외치는 살렘의 가르침을 위하여 아브라함이, 그리고 나중에는 요셉이, 에집트 전역에 수월하게 큰 영향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살렘 선교사들이 처음에 에집트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들어온 이민들의 수정된 도덕 기준과 섞인 문화, 상당히 윤리적인 진화된 문화와 마주쳤다. 나일 강 유역에 있던 이 초기의 선생들은 양심이 하나님의 명령이라, 신의 목소리라고 처음으로 선포했다.
95:4.1 (1046.2) 때가 되자 에집트에서 많은 사람이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고, 더러는 아메니모피라 부른 한 선생이 나타났다. 이 예언자는 양심을 옳고 그른 것을 중재하는 가장 높은 정점까지 올려놓았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고 가르쳤으며, 태양신에게 부탁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선포했다.
95:4.2 (1046.3) 아메니모피는 재산과 행운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가르쳤고, 이 개념은 나중에 나타나는 히브리 신학에 속속들이 영향을 미쳤다. 이 고귀한 선생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모든 행위를 결정하는 요소라, 사람은 순간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에 대한 책임을 깨달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이 현자의 가르침은 나중에 히브리어로 번역되었고, 구약을 글로 쓰기 오래 전에 그 민족의 신성한 책이 되었다. 이 선한 사람의 주요한 설교는 정부가 맡긴 직책에 올바르고 정직하게 임할 것을 아들에게 가르치는 것과 상관되었고, 옛날의 이 고귀한 감정은 현대의 어떤 정치가에게도 명예가 될 것이다.
95:4.3 (1046.4) 나일 강에 있던 이 지혜로운 사람은 “재산은 날개를 달고 날아가 버린다”―땅에 있는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다―고 가르쳤다. 그의 큰 기도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사람들의 말”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행위”로 향하라고 타일렀다. 그의 가르침의 요점은 이러했다: 일은 사람이 꾸며도 결과는 하나님이 정한다. 히브리어로 번역된 그의 가르침은 구약에서 잠언의 철학이 되었다. 그리스어로 번역되어서, 그 가르침은 이후의 모든 헬라인의 종교 철학에 영향을 미쳤다. 후일에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 필로는 지혜서의 사본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95:4.4 (1046.5) 아메니모피는 진화로 생긴 윤리와 계시된 교훈을 보존하려고 활동했고, 그의 글에서 이것들을 히브리인과 그리스인, 두 민족에게 전해 주었다. 그는 이 시대의 종교 스승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은 아니었지만, 서양 문명의 성장에서 두 개의 중요한 고리가 되는 후일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으므로 그는 가장 영향력이 있었다―그 하나는 히브리인이고, 이들 가운데서 서양의 종교 신앙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인이니, 그들은 순수한 철학 사상을 유럽에서 가장 높이 발전시켰다.
95:4.5 (1046.6) 히브리인의 잠언에서 15장ㆍ17장ㆍ20장, 그리고 22장 17절에서 24장 22절까지는 거의 글자 그대로, 아메니모피의 지혜서에서 가져갔다. 히브리인 시편의 1편은 아메니모피가 썼고, 이것은 이크나톤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95:5.1 (1047.1) 아메니모피의 가르침은 에집트인의 머리 속에서 그 위력을 천천히 잃고 있었는데, 그때 어느 에집트인, 살렘의 의사의 영향을 통해서, 왕실의 한 여자가 멜기세덱의 가르침을 지원하였다. 이 여자는 아들, 에집트의 파라오, 이크나톤에게 이 유일한 하나님의 교리를 받아들이라고 설득했다.
95:5.2 (1047.2) 육체를 입은 멜기세덱이 사라진 뒤에, 그때까지 어떤 인간도 이크나톤처럼, 살렘에 계시된 종교의 개념, 그렇게 놀랍게 뚜렷한 개념을 가진 적이 없었다. 어떤 면에서 이 젊은 에집트 왕은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비범한 사람들 중에 하나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영적 쇠퇴가 깊어지는 이 시기에, 그는 엘 엘리욘[2] [1752], 유일한 하나님의 교리를 에집트에서 살려 두었고, 이처럼 철학적 일신교의 길을 유지했으며, 이것은 당시에, 미가엘의 미래 수여를 위한 종교적 배경에 중요했다. 다른 이유 중에 이 공훈을 인정해서, 아이 예수가 에집트로 옮겨졌다. 거기서 이크나톤의 영적 후계자들 가운데 더러가 그를 보았고, 유란시아에 대한 그의 신성한 사명의 어떤 국면을 어느 정도 이해하였다.
95:5.3 (1047.3) 멜기세덱과 예수 사이에 가장 큰 인물이었던 모세는 히브리 종족과 에집트 왕실이 함께 세상에 준 선물이었다. 이크나톤이 모세만큼 융통성과 능력이 있고, 그의 놀라운 종교적 지도력에 어울리는 정치적 천재를 보였더라면, 에집트는 그 시대에 일신교를 믿는 큰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이 일어났더라면, 예수가 필사 생애의 반이 넘는 부분을 에집트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조금 있다.
95:5.4 (1047.4) 이 특별한 이크나톤이 한 것처럼, 모든 역사를 통해서 결코 어떤 임금도 그렇게 면밀하게 진행하여 한 나라 전체를 다신교로부터 일신교로 한번에 몰지 않았다. 아주 놀라운 각오를 가지고, 이 젊은 통치자는 과거와 인연을 끊고, 자기 이름을 고치고[3] [1753], 서울을 버리고, 전혀 새 도시를 짓고, 한 민족 전체를 위하여 새로운 예술과 문학을 창조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빨리 움직였다. 그가 사라졌을 때 버틸 수 있는 것보다 더 지었고, 너무 많이 지었다. 또한 그는 민족의 물질적 안정과 번영을 마련해 주지 못했고, 이 모두가 나중에 역경(逆境)과 억압의 물결이 에집트인을 휩쓸었을 때 그의 종교적 가르침에 불리하게 반응했다.
95:5.5 (1047.5) 놀랍게도 맑은 선견이 있고 특별히 단 한 가지 목적에 마음을 쏟은 이 사람이 모세같이 정치적 지혜가 있었더라면, 서양 세계에서 종교 진화와 진리 계시의 역사 전체를 바꾸었을 것이다. 그는 사제들을 대체로 불신했고, 일생 동안 사제들의 활동을 제어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자기네 종파를 몰래 유지했고, 그 젊은 임금이 권력을 놓자마자 뛰쳐나와 행동했다. 그들은 나중에 생긴 에집트의 모든 문제를 그의 통치 기간에 일신교를 세운 것과 재빨리 연결지었다.
95:5.6 (1047.6) 아주 지혜롭게도 이크나톤은 태양신의 모습으로 가장하여 일신교를 세우려고 애썼다. 태양 숭배 속으로 모든 신을 흡수함으로 우주의 아버지를 숭배하려는 이 결정은 살렘의 의사가 준 조언 때문이었다. 이크나톤은 신이 아버지요 어머니인 것에 관하여 당시에 존재했던 아톤 신앙의 일반화된 교리를 취하여 한 종교를 창시했으며, 이것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가깝고 경건한 관계를 인정하였다.
95:5.7 (1048.1) 이크나톤은 충분히 지혜로워서 겉으로 태양신 아톤의 숭배를 유지하였고, 한편 이를 가장하여 유일한 하나님, 곧 아톤의 창조자요 만물의 가장 높은 아버지를 예배하는 길로 동료들을 이끌었다. 이 젊은 선생이자 임금은 글을 많이 썼고,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지닌 해설의 저자였는데, 31장으로 된 이 책을 다시 권력을 잡은 사제들이 모조리 없애버렸다. 이크나톤은 또한 찬송을 137편 썼는데, 이 가운데 열두 편이 지금 구약의 시편(詩篇)에 간직되어 있고, 히브리인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
95:5.8 (1048.2) 일상 생활에서 이크나톤의 종교에서 최고의 말씀은 “올바름”이었고, 그는 옳게 행하는 개념을 재빨리 확대하여, 국가의 윤리 뿐 아니라 국제 윤리까지 포함하였다. 이 세대는 놀랍게 개인의 경건함을 찾았고 총명한 남녀 사이에서 하나님을 찾아내고 이해하려고 진정으로 몹시 바라는 특징이 있었다. 그 시절에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재산이 많은 것은 어떤 에집트인에게도 법 앞에서 전혀 특혜를 주지 않았다. 에집트의 가족 생활은 도덕 문화를 간직하고 육성하는 데 많이 이바지했고, 팔레스타인에서 후일에 유대인에게 훌륭한 가족 생활을 하도록 격려하였다.
95:5.9 (1048.3) 이크나톤의 복음에 치명적 약점은 거기에 담긴 가장 위대한 진리, 즉 아톤이 에집트 뿐 아니라 또한 “온 세계, 사람과 동물, 이 에집트 땅 외에 모든 외국 땅, 아니 시리아와 쿠시까지도 창조하신 분이라. 그는 만물을 제 자리에 두고 만물의 필요를 채워 주시니라”하는 가르침이었다. 이 신 개념은 높고도 높았지만,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그러한 국제 종교를 가졌다는 느낌은 전쟁터에서 에집트 군대의 사기를 높이지 못했고, 한편 이것은 사제들에게 젊은 왕과 그의 새 종교에 대항해서 사용할 유력한 무기(武器)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후일의 히브리인이 가진 개념보다 훨씬 높은 신 개념을 가졌지만, 국가를 세우는 자의 목적에 소용되기에 너무 앞선 것이었다.
95:5.10 (1048.4) 비록 일신교의 이상이 이크나톤의 죽음으로 상처를 받았지만, 유일한 하나님 관념은 많은 집단의 머리 속에 남아 있었다. 이크나톤의 사위는 사제들을 따라가서 다시 옛 신들을 숭배하였고, 이름을 투탄카멘으로 바꾸었다. 서울은 테베로 돌아왔고, 사제들은 땅에서 살찌고 궁극에는 온 에집트의 7분의 1을 소유하였다. 대번에 바로 이 계급의 사제들 중에 하나가 대담하게 왕관을 빼앗았다.
95:5.11 (1048.5) 그러나 사제들은 일신교의 물결을 완전히 이길 수 없었다. 그들은 점점 더 그 신들을 통합하고 두 이름을 붙여서 부를 수밖에 없었고, 갈수록 신들의 가족이 줄어들었다. 이크나톤은 이전에 하늘의 불타는 원반을 창조자 하나님과 연결시켰고, 이 개념은 그 젊은 개혁가가 죽은 지 오랜 뒤에도, 사람들, 아니 사제들의 가슴 속에서도, 줄곧 불타올랐다. 일신교 개념은 결코 에집트에서, 세상에서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개념은 바로 그 거룩한 아버지의 창조 아들이 올 때까지도 버티었고, 이크나톤은 이 유일한 하나님을 온 에집트가 예배하도록 무척 열심히 선포했다.
95:5.12 (1048.6) 이크나톤의 교리의 약점은 그가 너무 앞선 종교를 제시했기 때문에 오직 교육받은 에집트인이 그의 가르침을 넉넉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농사에 종사하는 하층 계급은 결코 그의 복음을 정말로 알아듣지 못했고, 따라서 사제들과 함께, 이시스와 그 배우자 오시리스를 섬기던 예전의 숭배로 돌아갈 준비가 되었으며, 오시리스는 어둠과 악의 신, 셋의 손에 잡혀서 잔혹한 죽음을 당하고 나서 기적으로 부활했다고 생각되었다.
95:5.13 (1049.1) 모든 사람이 불멸한다는 가르침은 에집트인에게 너무 진보된 것이었다. 오직 임금과 부자들에게 부활할 가망이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심판받는 날에 대비하여 몸을 아주 조심스럽게 향료로 처리하고 보존하였다. 그러나 이크나톤이 가르친 대로, 누구나 구원받고 부활한다는 민주주의가 궁극에 이겼고, 나중에 에집트인은 말 못하는 동물이 살아남는다고 믿을 정도까지 되었다.
95:5.14 (1049.2) 유일한 하나님의 숭배를 민족에게 강요하려는 이 에집트 군주의 노력이 비록 실패한 듯했어도, 그가 한 일의 영향은 몇 세기 동안 팔레스타인과 그리스에서 지속되었고, 이렇게 에집트는 나일 강의 진화된 문화와 유프라테스의 계시된 종교, 이 두 가지를 서양에서 후일의 모든 종족에게 전한 중개인이 되었다는 것을 적어야 한다.
95:5.15 (1049.3) 나일 강 유역에서 도덕이 발달하고 사람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던 이 위대한 시대의 영화로움은 히브리인의 민족 생활이 시작되던 무렵에 급속히 사라지고 있었다. 에집트에서 머무른 결과로서 이 베두인 족속은 이 가르침 가운데 많은 것을 가져갔고, 이크나톤의 교리 가운데 상당 부분을 그들의 민족 종교 안에 지속시켰다.
95:6.1 (1049.4) 멜기세덱 선교사들 가운데 더러는 팔레스타인으로부터 메소포타미아를 통해서, 큰 이란 고원으로 계속 지나갔다. 5백 년이 넘도록 살렘의 선생들은 이란에서 전진하였고 그 나라 전체가 멜기세덱의 종교로 휙 넘어가고 있었는데, 그때 통치자가 교체되어서 갑자기 모진 박해를 시작하였고, 이것은 살렘 종파의 일신교 가르침을 실질적으로 그치게 만들었다. 아브라함의 약속에 관한 교리는 페르시아에서 거의 멸종되었는데, 도덕이 부활되던 그 중대한 세기, 그리스도 이전 6세기에, 조로아스터가 꺼져 가는 살렘 복음의 불꽃을 다시 살리는 듯이 보였다.
95:6.2 (1049.5) 이 새 종교의 창시자는 씩씩하고 모험을 좋아하는 젊은이였고,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우르에 처음으로 순례하러 가서 칼리가스티아와 루시퍼 반란에 관한 전통을―다른 여러 전통과 함께―얻어들었으며, 이 모든 것이 그의 종교적 성품에 힘차게 호소하였다. 따라서, 우르에 있을 때 꿈을 꾼 결과로서, 그는 북쪽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민족의 종교를 뜯어고치는 데 착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응보의 하나님이라는 히브리 관념, 신에 관한 모세의 개념을 흡수했다. 최고의 하나님 관념이 그의 머리 속에 뚜렷했고, 그는 모든 다른 신을 악마로 내려놓고, 이들을 메소포타미아에서 듣던 악마들의 신세로 만들었다. 그는 우르에 전통이 남아 있던 일곱 으뜸 영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따라서 최상의 신이 일곱 명 있고, 그 꼭대기에 아우라 마즈다가 있는 그러한 세계를 창조했다. 그는 이 하위 신들을 옳은 율법, 좋은 생각, 고귀한 정부, 거룩한 인품, 건강, 불멸을 이상화한 것과 연결시켰다.
95:6.3 (1049.6) 이 새 종교는 기도하고 의식(儀式)을 치르는 종교가 아니라, 행동―일―하는 종교였다. 이 종교의 하나님은 최고의 지혜를 가진 존재요 문명의 후원자였다. 이것은 악ㆍ무위(無爲)ㆍ후진성을 감히 없애려고 한 호전적 종교 철학이었다.
95:6.4 (1049.7) 조로아스터는 불의 숭배를 가르치지 않았지만, 보편적이고 최상으로 지배하는 영, 순수하고 지혜로운 영의 상징으로서 불꽃을 이용하려 했다. (후일에 추종자들이 이 상징인 불꽃을 모시고 숭배한 것은 너무나 참말이다.) 마침내, 어느 이란 왕을 개종시키고 나서, 이 새 종교는 무력(武力)으로 퍼졌다. 그리고 조로아스터는 “빛의 주(主)의 진리”라고 믿은 것을 위해서 싸움터에서 영웅답게 죽었다.
95:6.5 (1050.1) 조로아스터교는 유란시아에서 일곱 으뜸 영에 관하여 달라마시아와 에덴에서 주었던 가르침을 지속하는 유일한 종파이다. 삼위일체 개념을 진화시키지 못했지만, 어떤 면에서 조로아스터교는 칠중 하나님 개념에 가까이 갔다. 최초의 조로아스터교는 순수한 이원론이 아니었다. 초기의 가르침이 비록 악을 시간 세계에서 선과 동등한 것으로 그렸어도, 악은 분명히 선한 자의 궁극의 실체 속에 영원히 사라졌다. 후일에 와서야 선과 악이 동등한 조건으로 싸운다는 개념을 신봉하였다.
95:6.6 (1050.2) 히브리 성서에 기록되었다시피, 유대인이 지닌 천국과 지옥의 전통, 그리고 악마에 관한 교리는 남아 있는 루시퍼와 칼리가스티아의 전통에 근거를 두었지만, 주로 유대인이 페르시아인의 정치와 문화에 지배되던 시절에 조로아스터 신자들로부터 얻었다. 에집트인처럼 조로아스터는 “심판의 날”을 가르쳤지만, 이 사건을 세상의 끝과 연결하였다.
95:6.7 (1050.3) 페르시아에서 조로아스터교를 이어받은 종교조차 두드러지게 그에 영향을 받았다. 이란의 사제들이 조로아스터교의 가르침을 없애려고 했을 때, 그들은 옛 미트라 숭배를 부활시켰다. 미트라교는 레반트와 지중해 지역에 두루 퍼졌고, 한동안 유대교와 기독교와 같은 시대에 있었다.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은 이처럼 유대교와 기독교, 이를 통해서 모하메드교, 이 세 가지 큰 종교에 연달아 영향을 주게 되었다.
95:6.8 (1050.4) 그러나 조로아스터의 드높은 가르침과 고귀한 찬송가들은 파르시 교도들이 그의 복음을 현대에 왜곡한 것과 거리가 멀며, 그들은 죽은 자를 크게 두려워하였고 아울러 조로아스터가 결코 묵인하지 않았을 그러한 궤변을 믿었다.
95:6.9 (1050.5) 이 위대한 사람은, 어두운 세계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이르는 빛의 길을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살렘의 불빛이 아주 어슴푸레 타면서 완전히, 끝내 꺼지지 않도록 지키려고 그리스도 이전 6 세기에 솟아난 그 독특한 무리 중의 한 사람이었다.
95:7.1 (1050.6) 유일한 하나님에 관한 멜기세덱의 가르침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비교적 최근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조직하는 것에 관한 마키벤타의 지시를 오해했기 때문에 살렘 선교사들은 아라비아에서 실패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처럼 군사력이나 국가의 강요를 통해서 복음을 펼치려고 어떤 노력도 하지 말라는 그의 훈계를 그들 나름대로 해석한 것에 이렇게 방해를 받지 않았다.
95:7.2 (1050.7) 멜기세덱의 가르침은 중국이나 로마에서도, 바로 살렘에 아주 가까이 있는 이 사막 지역보다 더 철저히 실패하지는 않았다. 동양과 서양 민족의 대다수가 각자 불교와 기독교 신자가 된 지 오랜 뒤에도, 아라비아 사막은 몇천 년 동안 있던 그대로 계속하였다. 각 부족은 자체의 옛 주물을 모셨고, 많은 개별 가족은 자기네 집 수호신을 가지고 있었다. 바빌로니아인의 이시타르, 히브리인의 야웨, 이란인의 아우라, 기독교의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사이에 싸움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한 개념이 결코 다른 개념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었다.
95:7.3 (1051.1) 아라비아에 두루 여기저기서, 흐릿한 유일한 하나님 개념에 집착한 가족과 씨족들이 있었다. 그러한 무리들은 멜기세덱ㆍ아브라함ㆍ모세ㆍ조로아스터의 전통을 소중히 간직했다. 예수의 복음에 반응했을지 모르는 수많은 중심이 있었지만, 사막 땅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은, 지중해 여러 나라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타협하고 개혁하는 자들과 반대로, 엄격하고 굽히지 않는 무리였다. 예수의 추종자들이 “온 세계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그의 명령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더 품위를 지키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 스스로가 부수되는 사회적 요구 조건을 그리 엄하지 않게 고안했더라면, 아라비아를 포함하여 많은 지역이 기쁘게 그 목수 아들의 단순한 복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95:7.4 (1051.2) 레반트의 위대한 일신교가 아라비아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이 사실인데도, 이 사막의 땅은 한 신앙을 일으킬 수 있었다. 사회적 요구는 심하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그 신앙은 일신교였다.
95:7.5 (1051.3) 사막에 있는 원시적이고 조직되지 않은 신앙들에 관하여 부족ㆍ종족, 또는 국가의 성질을 가진 오직 한 요인이 있었는데, 그것은 거의 모든 아라비아 부족이 메카에 있는 어떤 성전의 검은 돌 주물에 기꺼이, 특이하게 널리 존경심을 표하는 것이었다. 함께 접촉하고 존경하는 이 자리는 나중에 이슬람 종교가 자리잡게 만들었다. 이 셈족의 유대인이 화산(火山)의 신 야웨를 모신 것과 같이, 그들의 아랍 사촌은 카바의 돌을[4] [1754] 떠받들었다.
95:7.6 (1051.4) 이슬람의 장점은 뚜렷하고 윤곽이 분명하게, 알라가 하나밖에 없는 신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그 약점은 여자의 천대와 함께, 군사력을 종교의 선포와 관련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은 만물의 유일한 신, 우주의 신의 발표를 완강하게 고집해 왔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을 아시도다. 그는 자비롭고 동정심을 가진 이로다.” “참으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선을 넘치게 베푸시도다.” “그리고 내가 아플 때, 그는 나를 고치시도다.” “세 사람이 함께 말할 때는 언제라도, 하나님이 넷째 분으로 계시는 까닭이라,” 왜냐하면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또한 보이는 이요 감추어진 이가 아니냐?”
96:0.1 (1052.1) 신을 생각할 때 사람은 먼저 모든 신을 인정하고, 다음에 모든 외국 신을 자기 부족 신에 종속시키고, 마지막에는 최종ㆍ최상의 가치를 가진 한 분의 하나님 외에 아무 신도 인정하지 않는다. 유대인은 모든 신을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라는 숭고한 개념으로 통합하였다. 마찬가지로 힌두인은 여러 모습의 신들을 릭 베다에서 묘사된 “신들의 한 가지 영성(靈性)”으로 통합하였고, 한편 메소포타미아인은 그 신들을 더 집중된 벨마둑 개념으로 축소하였다. 이러한 일신교 관념은 팔레스타인 지방의 살렘에서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나타난 뒤 오래지 않아서, 온 세계에서 널리 성숙해졌다. 그러나 멜기세덱의 신 개념은, 포함하고 종속시키고 배제하는 진화된 철학 개념과 달랐다. 그 개념은 순전히 창조하는 힘에 기초를 두었고, 얼마 안 되어 메소포타미아ㆍ인도ㆍ에집트에서 가장 높은 신 개념들에 영향을 미쳤다.
96:0.2 (1052.2) 켄 족속과 몇몇 다른 가나안 부족은 살렘의 종교를 전통으로서 존중하였다. 멜기세덱이 육신화한 한 가지 목적은 이것이었다: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 땅에 수여되는 것을 위하여 길을 예비하려고 바로 그 유일한 하나님의 종교가 육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주의 아버지를 믿는 민족이 있어 그가 그들 사이에 나타날 수 있기까지 미가엘은 도저히 유란시아에 올 수 없었다.
96:0.3 (1052.3) 살렘의 종교는 팔레스타인에서 켄 족속 사이에 그들의 신조로서 지속되었고, 이 종교는 히브리인이 나중에 채택한 바와 같이, 처음에 에집트인의 도덕적 가르침에 영향을 받고, 나중에 바빌로니아인의 신학 사상에, 마지막으로 이란인의 선악 개념에 영향을 받았다. 사실로 히브리 종교는 아브라함과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맺은 계약에 바탕을 두었고, 진화적으로 많은 독특한 상황에서 생긴 부산물이지만, 문화적으로 온 레반트의 종교ㆍ도덕ㆍ철학으로부터 마음대로 빌려왔다. 히브리 종교를 통해서, 에집트ㆍ메소포타미아ㆍ이란의 도덕 및 종교 사상의 상당 부분이 서양 민족들에게 전달되었다.
96:1.1 (1052.4) 옛날의 셈 족속은 만물 안에 영이 깃들어 있다고 보았다. 동물과 식물 세계의 영들이 있고, 각 해마다 영이 있고 자손을 돌보는 주(主)가 있으며, 불ㆍ물ㆍ공기의 영들이 있었다. 두려워하고 섬겨야 하는 영이 가득한, 진정한 만신전(萬神殿)이 있었다. 우주의 창조자에 관한 멜기세덱의 가르침은 결코 이 하급 영이나 자연신을 믿는 신앙을 결코 완전히 없애지 못했다.
96:1.2 (1052.5) 다신교로부터 최고신교(最高神敎)를 거쳐 일신교까지 히브리인이 진보한 것은 중단되지 않고 연속하여 일어난 개념의 발전이 아니었다. 신 개념이 진화하는 동안 그들은 여러 번 퇴보를 경험했고, 한편 어느 한 시대에나, 다른 집단의 셈 족속 신자들 사이에서 다른 하나님 개념이 존재했다. 때때로 수많은 명칭이 여러 하나님 개념에 적용되었는데,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유대 신학의 진화에 관계되는 대로 이 여러 가지 신 명칭이 이렇게 정의될 것이다:
96:1.3 (1053.1) 1. 야웨는 남쪽 팔레스타인 부족들의 신이었고, 이들은 이 신(神) 개념을 호렙 산, 곧 시나이 화산과 연결지었다. 야웨는 다만 셈 부족과 종족들의 눈을 끌고 숭배를 요구한 수백ㆍ수천의 자연 신 가운데 하나였다.
96:1.4 (1053.2) 2. 엘 엘리욘. 살렘에서 멜기세덱이 머무른 뒤에 몇 세기 동안 그의 신 교리는 여러 해석판(版)으로 지속되었지만, 대체로 엘 엘리욘, 하늘의 최고 하나님이라는 명칭으로 대체로 암시되었다. 셈 족속의 많은 사람은, 아브라함의 직계 후손을 포함해서, 다른 때에 야웨와 엘 엘리욘, 이 둘을 숭배했다.
96:1.5 (1053.3) 3. 엘 샤다이. 엘 샤다이가 무엇을 대표하는지 설명하기 힘들다. 이 하나님 관념은 아메니모피의 지혜서의 가르침으로부터 유래하고, 이크나톤의 아톤 교리에 영향을 받고, 이 위에 엘 엘리욘의 개념에 담긴 멜기세덱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혼합물이었다. 그러나 엘 샤다이의 개념은 히브리인의 머리에 스며들면서 사막의 야웨 신앙에 철저히 영향을 받게 되었다.
96:1.6 (1053.4) 이 시대의 종교에서 지배했던 관념 중의 하나는 에집트인이 가졌던 신의 섭리 개념, 곧 물질적 번영이 엘 샤다이를 섬기는 것에 대한 보상이라는 가르침이었다.
96:1.7 (1053.5) 4. 엘. 온통 용어가 뒤섞이고 개념이 흐릿한 가운데, 많은 경건한 신자들은 이 모든 진화하는 신 개념을 숭배하려고 진지하게 애썼고, 이 복합된 신을 엘이라고 언급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 용어는 베두인의 자연 신들 중에서 또 다른 신을 포함했다.
96:1.8 (1053.6) 5. 엘로힘. 키시와 우르에는 수메르인과 갈대아인 무리들이 오랫동안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아담과 멜기세덱 시절의 전통에 기초를 둔, 세 분이 하나가 된 하나님을 가르쳤다. 이 교리는 에집트로 옮겨졌고, 거기서 이 삼위일체는 엘로힘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단수(單數)인 엘로아로서 숭배되었다. 에집트의 철학 집단, 그리고 히브리 핏줄을 가진, 후일에 알렉산드리아의 선생들은 여러 신의 이런 통일성을 가르쳤고, 에집트를 탈출하던 시절에 모세의 조언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이 삼위일체를 믿었다. 그러나 삼자가 일체가 된 엘로힘 개념은 그들이 바빌로니아인의 정치적 영향 밑에 들어갈 때까지, 결코 히브리 신학의 참 부분이 되지 못했다.
96:1.9 (1053.7) 6. 잡다한 이름. 셈 족속은 자기네 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 꺼려했고, 따라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때때로 수많은 다른 명칭에 의존했다: 하나님의 영,주(主),주의 천사, 전능자, 거룩한 하나, 최고자, 아도나이, 옛적부터 늘 계신 이,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 하늘과 땅의 창조자, 키리오스, 야, 만군의 주, 하늘의 아버지.
96:1.10 (1053.8) 여호와는 히브리인의 오랜 체험에서 마침내 진화한, 완성된 야웨 개념을 가리키려고 근래에 쓰인 명칭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은 예수의 시절 이후 1천 5백 년이 될 때까지 쓰이지 않았다.
96:1.11 (1054.1) 기원전 약 2000년까지 시나이 산은 이따금 화산으로 활동했고,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머무르던 시절까지, 때때로 분출이 일어났다. 이 화산의 분출과 관련하여 천둥 치듯 폭발이 있었을 때 불과 연기는 모두, 둘러싼 지역의 베두인 족속에게 감동을 주고 겁을 먹게 만들었고, 그들이 야웨를 크게 무서워하게 만들었다. 이 호렙 산의 영은 나중에 히브리인 셈 족속의 신이 되었고, 그들은 결국 그 신이 모든 다른 신 위에 최고라고 믿었다.
96:1.12 (1054.2) 가나안 족속은 오랫동안 야웨를 섬겼고, 비록 켄 족속에서 많은 사람이 살렘 종교의 초월신 엘 엘리욘을 얼마큼 믿었어도, 가나안 족속의 대다수는 적당히 옛 부족 신들의 숭배를 고수하였다. 그들은 행성 사이의 하나님은커녕, 국제적 하나님 편을 들어서 자기네 민족의 신을 도저히 기꺼이 버리려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우주의 신에 생각이 미치지 않았고, 따라서 이 부족들은 야웨와 금ㆍ은 송아지를 포함하여, 그들의 부족 신을 계속 숭배했으며, 송아지는 베두인 목자들의 시나이 화산 영(靈) 개념을 상징했다.
96:1.13 (1054.3) 시리아인은 자기네 신을 섬기면서 또한 히브리인의 야웨를 믿었는데, 그들의 선지자들이 시리아의 임금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저희의 신들은 산의 신들이라. 그러므로 저희가 우리보다 강하도다. 그러나 저희와 맞서 들에서 싸우자. 그리하면 분명히 우리가 저희보다 강하리라.”
96:1.14 (1054.4) 사람의 문화가 앞으로 전진함에 따라서, 작은 신들은 최고의 신에 종속된다. 위대한 조브는[1] [1755] 겨우 감탄 소리로서 남아 있다. 일신교를 믿는 자들은 그들의 하급 신을 영ㆍ악마ㆍ운명, 네레이드ㆍ요정ㆍ브라우니,[2] [1756] 난쟁이ㆍ반쉬[3] [1757], 악한 눈으로서 보존한다. 히브리인은 최고신교를 거쳤고, 오랫동안 야웨 외에도 다른 신들이 있음을 믿었지만, 그들은 점점 더 이 외국 신들이 야웨 밑에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들은 아모리인의 신 케모스가 사실로 있음을 인정했지만, 그가 야웨 밑에 있다고 주장했다.
96:1.15 (1054.5) 야웨 관념은 하나님에 관한 필사자의 모든 이론 가운데 가장 광범위하게 발전하였다. 그 점진적 진화는 오직 아시아에서 있었던 부처 개념의 변화와 비교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야웨 개념이 마지막에 우주의 아버지 개념으로 인도한 것 같이, 끝에는 우주 절대자 개념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한 역사적 사실의 문제로서, 유대인이 이렇게 호렙 산의 부족 신으로부터 후일에 자애롭고 자비로운 창조자인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신을 보는 관점을 바꾸었지만, 그의 이름을 바꾸지는 않았다. 그들은 계속하여 내내, 이 진화하는 신 개념을 야웨라고 불렀다.
96:2.1 (1054.6) 동방의 셈 족속은 잘 조직되고 훈련받은, 말 타는 사람들이었고, 비옥한 초생달의[4] [1758] 동부 지역에 쳐들어가서, 거기서 바빌로니아인과 함께 뭉쳤다. 우르 가까이서 갈대아인은 동쪽 셈 족속 가운데 가장 진보한 편에 속했다. 페니키아인은 지중해의 바닷가를 따라서 팔레스타인의 서부 구역을 차지했던 혼합된 셈 족 집단, 우수하고 조직이 잘 된 집단이었다. 종족 면에서 셈 족속은 유란시아 민족들 가운데 가장 많이 섞인 축에 속했고, 아홉 세계 민족 가운데 거의 모두로부터 얻은 유전 요소를 포함하였다.
96:2.2 (1054.7) 아라비아의 셈 족속은 거듭해서 북쪽에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싸우면서 들어갔지만, 더 조직이 잘 되어 있고 높이 문명화된 북쪽의 셈 족속과 힛 족속에게 번번이 밀려났다. 나중에, 드물게 심한 기근이 있는 동안에, 방랑하는 이 베두인 족속은 에집트의 공공 사업에 계약 노동자로서 큰 떼를 지어 에집트로 들어갔고, 나일 강 유역에서 평범한 짓밟힌 일꾼으로서 날마다 힘든 노동에 종이 되는, 쓰라린 체험을 겪는 신세가 되었을 뿐이다.
96:2.3 (1055.1) 마키벤타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시절 이후에야 겨우, 어떤 셈 부족을 그들의 특이한 종교 관념 때문에, 이스라엘의 자녀라, 나중에는 히브리인, 유대인, “선택된 민족”이라 부르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모든 히브리인에게 시조가 아니었다. 그는 에집트에서 포로로 잡혀 있던 모든 베두인 셈 족속의 선조도 아니었다. 그의 자손이 에집트에서 나와서 나중에 유대 민족의 핵심을 이룬 것은 참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씨족들 속으로 합병된 대다수의 남녀는 에집트에서 결코 머무른 적이 없다. 그들은 에집트에서 온 아브라함의 후손과 그들의 셈 족속 동료들이 아라비아 북부를 거쳐서 여행하는 동안에, 모세의 지휘를 따르기로 결정한 동료 유목민에 지나지 않았다.
96:2.4 (1055.2) 머지 않아 히브리 국가를 형성할 셈 민족이 에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시절이 되자 엘 엘리욘, 최고자, 그리고 믿음을 통해서 신의 은총을 얻는다고 약속했던 멜기세덱의 가르침은 대체로 잊혀졌다. 그러나 포로로 살던 이 기간을 통해서 이 아라비아 유목민은 그들의 종족 신으로서 야웨를 믿는, 남아 있는 전통적 신앙을 유지했다.
96:2.5 (1055.3) 서로 다른 1백이 넘는 아라비아 부족들이 야웨를 숭배하였고, 히브리와 에집트의 혼합된 핏줄을 포함하여, 에집트의 지식 계급 사이에서 지속하던, 멜기세덱의 엘 엘리욘 개념에 물든 것을 제쳐놓고, 포로가 된 하층 계급의 히브리 노예들이 가졌던 종교는 마술을 쓰고 희생물을 바치던 옛 야웨 의식(儀式)의 수정판이었다.
96:3.1 (1055.4) 최상 창조자에 관한 히브리인의 개념과 이상(理想)의 진화가 시작된 것은 그 위대한 지도자요 선생이자 조직자인 모세 밑에서, 셈 족속이 에집트를 떠난 그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어머니는 에집트의 왕족에 속했고, 아버지는 정부와 베두인 포로들 사이에 셈 족속의 연락 장교였다. 이처럼 모세는 우수한 종족 근원으로부터 내려온 성품을 가졌다. 그의 조상은 너무 많이 섞여서 그를 어느 한 종족 집단으로 분류하기 힘들다. 그가 이렇게 섞인 부류가 아니었다면, 궁극에 그의 지휘 하에 에집트에서 아라비아 사막까지 달아난 베두인 셈 족속과 상관하게 된 다양한 무리를 다룰 수 있게 만든 그 드문 재능과 적응 능력을 결코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다.
96:3.2 (1055.5) 나일 왕국의 문화가 유혹이었는데도, 모세는 아버지의 민족과 운명을 같이 하기를 선택했다. 이때 이 위대한 조직자는 아버지의 민족을 궁극에 해방시키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는데, 이 베두인 포로들은 도저히 그 이름에 마땅한 종교가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개념이 거의 없었고, 세상에서 희망이 없었다.
96:3.3 (1055.6) 어떤 지도자도 일찍이 이보다 더 버림받고 풀이 꺾이고 기가 죽고 무지한 인간 집단을 개혁하고 격려하는 일에 결코 손을 댄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노예들은 유전 혈통에 잠자는 발전 가능성을 지녔고, 반란을 일으키고 자유를 얻으려고 투쟁하는 날에 대비하여 유능한 조직자 단체를 구성할 만큼 모세가 지도한, 교육받은 지도자들이 충분히 있었다. 이 우수한 사람들은 그 민족의 토착민 감독자로서 고용되어 있었다. 모세가 에집트의 통치자들에게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큼 교육을 받았다.
96:3.4 (1056.1) 모세는 동포 셈 족속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외교로 협상하려고 애썼다. 그와 동생은 에집트 임금과 협정을 맺었고, 그에 따르면 그들은 아라비아 사막을 향해서 나일 강 유역을 평화롭게 떠나도록 허락을 받았다. 에집트에서 오랫동안 수고한 것에 대한 표시로 그들은 많지 않은 돈과 물건을 받기로 되었다. 히브리인 편에서는 파라오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고 에집트에 맞서 어떤 연방에도 가입하지 않기로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그 임금은 나중에 이 조약을 깨는 것이 좋다고 보았고, 그의 간첩들이 베두인 노예들 사이에서 불충함을 발견했다는 핑계를 이유로 내밀었다. 그들이 에집트에 맞서서 유목민을 조직하려고 사막으로 갈 목적으로 자유를 찾는다고 그는 주장했다.
96:3.5 (1056.2) 그러나 모세는 낙심하지 않았다. 그는 때를 기다렸다. 1년이 채 안 되어 남쪽에서 리비아인이 강력하게 밀고 들어오고, 북쪽에서 그리스 해군이 침입하여 동시에 공격하는 데 저항하느라고 에집트의 군대가 넋이 빠져 있을 때, 이 겁 없는 조직자는 볼만한 야간 도주(逃走)에 동포를 이끌어 에집트에서 탈출하였다. 자유를 향한 이 돌진은 철저히 계획되고 능숙하게 집행되었다. 그들은 파라오와 작은 무리의 에집트인들이 열심히 쫓아 왔는데도 성공했다. 이들은 피난민의 방어에 부딪쳐 모두 쓰러졌고 많은 전리품을 남겨 주었으며, 이 모두가 사막에 있는 조상의 집을 향해서 행진하는 동안, 도망쳐 전진하는 노예 집단의 약탈로 불어났다.
96:4.1 (1056.3) 진화되고 향상된 모세의 가르침은 온 세계의 거의 절반에 영향을 미쳤고, 20세기에도 아직 영향을 미친다. 모세는 더 진보된 에집트의 종교 철학을 이해했고, 한편 베두인 노예들은 그러한 가르침에 관하여 거의 아는 것이 없었지만, 그 선조들이 야웨라고 부른 호렙 산의 신을 결코 완전히 잊은 적이 없다.
96:4.2 (1056.4)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마키벤타 멜기세덱의 가르침을 들은 적이 있었고, 그들의 공통된 종교관은 왕족의 피를 가진 여자와 포로가 된 민족의 남자 사이에 보기 드문 결합이 이루어진 것을 설명한다. 모세의 장인은 엘 엘리욘을 섬기는 켄 사람이었지만, 해방자의 부모는 엘 샤다이를 믿었다. 이처럼 모세는 엘 샤다이 신자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장인(丈人)의 영향을 통해서 그는 엘 엘리욘 신자가 되었다. 히브리인이 에집트에서 탈출한 뒤에 시나이 산 근처에서 야영할 때가 되자, (모든 그의 옛 관념으로부터) 그는 새롭고 확대된 신 개념을 형성했고, 이것을 지혜롭게 그의 민족에게, 확대된 옛 부족 신 야웨 개념으로 선포하기로 작정했다.
96:4.3 (1056.5) 모세는 이 베두인 족속에게 엘 엘리욘의 개념을 가르치려고 애썼지만, 에집트를 떠나기 전에 그들이 결코 이 교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부족이 섬기는 사막(沙漠)의 신을 추종자들의 유일한 신으로서 절충해서 채택하기로 그는 생각 끝에 결정했다. 모세는 다른 민족과 나라가 다른 신을 가지면 안 된다고 꼬집어 가르치지 않았지만, 야웨가 만물 위에 으뜸이라, 특히 히브리인에게 그렇다고 확고히 주장했다. 그러나 옛 이름 야웨의 탈 밑에서, 새롭고 더 높은 신 개념을 이 무지한 노예들에게 제시하려고 애쓰는 거북한 문제로 그는 늘 골치를 앓았으며, 언제나 베두인 부족들의 금 송아지가 이 야웨를 상징했다.
96:4.4 (1056.6) 야웨가 달아나는 히브리인의 신이었다는 사실은 어째서 그들이 거룩한 시나이 산 앞에서 그리 오래 머물렀는가, 어째서 거기서 그들이 십계(十戒)를 받았는가 설명하며, 이것을 모세는 호렙 산의 신 야웨의 이름으로 선포하였다. 시나이 산 앞에서 이렇게 오래 머무르는 동안, 새로이 진화하는 히브리인 예배의 종교 의식(儀式)이 더욱 다듬어졌다.
96:4.5 (1057.1) 그들이 산밑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머무르던 셋째 주에 호렙 산이 사납게 분출하지 않았더라면, 모세는 얼마큼 진보된 예배 예식을 확립하고, 4분의 1세기 동안 추종자들을 그대로 유지하는 데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듯하다. “야웨의 산은 불 속에 휩싸였고, 화로의 연기처럼 연기가 떠오르고 산 전체가 크게 떨었더라.”[5] [1759] 이 천재지변을 보건대, 그들의 하나님은 “막강하고 무서우며, 삼키는 불이요, 두렵고 전능하니라”하는 가르침을 모세가 동포에게 명심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놀랍지 않다.
96:4.6 (1057.2) 야웨는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히브리인을 선민으로 골랐다고 모세는 선포했다. 그는 새 민족을 세우고 있었고, 지혜롭게도 종교적 가르침을 민족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야웨가 엄한 감독자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추종자들에게 일러 주었다. 그런데도, 야웨가 “모든 육체에게 영의 하나님”이라고 그들을 가르쳤을 때,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은 너희의 안식처요, 그 아래에 영원한 팔이 있도다”하고 말했을 때, 모세는 그들의 신 개념을 키우려고 애썼다. 야웨가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이라, 하나님이 “너희를 버리지 않고, 너희를 멸망시키거나 너희 선조와 한 약속을 잊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가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 아버지들에게 한 맹세를 잊지 아니할 것임이라”하고 모세는 가르쳤다.
96:4.7 (1057.3) 야웨가 “진실한 하나님이요 불의가 없고 모든 길에 정당하고 옳다”고 제시했을 때, 모세는 그를 최고 신의 위엄까지 올려놓으려고 영웅다운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도, 이 드높은 가르침이 있었는데도, 추종자들의 이해력이 제한된 것은 하나님을 사람 모습을 한 존재로서, 성내고 진노하고 가혹함으로 날뛰며, 아니 복수심에 불타 있고 사람의 행위에 쉽게 영향을 받는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게 만들었다.
96:4.8 (1057.4) 모세의 가르침 밑에서, 이 부족의 자연신 야웨는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 되었고, 그는 황야를 거쳐서 추방된 곳까지도 그들을 따라갔으며, 거기서 곧 주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라고 생각되었다. 후일에 유대인이 바빌론에서 종으로서 포로 생활을 한 것은, 만국의 하나님이 되는 일신교의 역할을 맡기 위하여, 진화하는 야웨 개념을 드디어 해방하였다.
96:4.9 (1057.5) 히브리인의 종교 역사에서 가장 독특하고 놀라운 모습은 호렙 산의 원시 신으로부터, 뒤이은 영적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거쳐서, 두 이사야의 신 교리에 묘사된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기까지, 신 개념이 이렇게 계속 진화한 것과 관계되며, 두 이사야는 사랑이 넘치고 자비로운 창조자 아버지를 묘사하는 훌륭한 개념을 선포했다.
96:5.1 (1057.6) 모세는 군대 지도자, 사회 조직자, 종교 스승이 특별히 통합된 사람이었다. 그는 마키벤타와 예수 사이의 시절에, 개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세계적 스승이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개혁 조치를 도입하려고 애썼는데, 이에 관하여 아무 기록이 없다. 한 사람의 일생 동안에, 그는 후일에 한 나라가 탄생하고 한 종족이 영속하기 위한 기초를 놓은 한편, 이른바 히브리인이라고 부르고 여러 나라 말을 쓰는 집단을 노예 신세와 개화되지 않고 방랑하던 처지로부터 이끌어냈다.
96:5.2 (1057.7) 탈출하던 당시에 히브리인이 아무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모세의 큰 업적에 관하여 기록이 거의 없다. 모세의 시절과 그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그 위대한 지도자가 죽은 지 천년도 더 지나서 존재하던 전통으로부터 내려왔다.
96:5.3 (1058.1) 모세가 에집트인과 둘러싼 레반트 부족의 종교들보다 앞서서 많이 진행한 것은 멜기세덱 시절의 켄 족속의 전통 때문이었다. 마키벤타가 아브라함, 그리고 같은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지 않았더라면, 히브리인은 희망 없는 어둠 속에서 에집트에서 나왔을 것이다. 모세와 그의 장인 예드로는 멜기세덱 시절에 있던 전통의 잔재를 거두어 들였고, 이 가르침은 에집트인의 학문과 합쳐서, 이스라엘인의 개량된 종교와 의식을 만들도록 모세를 인도하였다. 모세는 조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에집트와 팔레스타인의 종교와 도덕 관습에서 최선을 선택하였고, 이 풍습을 멜기세덱의 가르침에서 내려온 전통과 연결짓고서, 히브리인의 예배 의식 체계를 만들었다.
96:5.4 (1058.2) 모세는 섭리를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초자연의 힘이 나일 강과 자연의 다른 요소들을 통제한다는 에집트의 교리에 흠뻑 젖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하여 큰 환상을 가졌지만, 속속들이 진지한 마음으로 이렇게 가르쳤다. 히브리인이 하나님께 복종하면, “그는 너희를 사랑하고 복을 주고 수를 늘리리라. 그는 너희 자궁의 열매와 너희 땅의 소산(所産)―옥수수와 포도주, 기름과 너희 양 떼―를 늘이리라. 너희를 모든 민족보다 번성하게 만들고, 주 너희 하나님은 너희한테서 모든 병을 떠나게 하고, 에집트의 나쁜 병 중에 아무것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라.” 모세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주 너희 하나님을 기억하라, 이는 그가 재산을 얻을 힘을 너희에게 주심이라.” “너희는 뭇 나라에게 빌려 주어도, 너희는 빌리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많은 나라를 다스릴지나 저희는 너희 위에 다스리지 못할지니라.”
96:5.5 (1058.3) 그러나 이 위대한 인간 모세가 무지하고 무식한 히브리인이 알아듣도록 그의 드높은 엘 엘리욘, 최고자 개념을 적응하려고 애쓰는 것을 구경하기는 참으로 딱했다. 모여든 지도자들에게 그는 우뢰처럼 소리쳤다, “주 너희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요, 그 외에 아무도 없느니라.” 한편 혼합된 군중에게 선포했다, “모든 신 가운데 누가 너희의 하나님과 같으리오?” 모세는 용감하게 주물과 우상 숭배에 저항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고, 이렇게 선언했다, “호렙 산에서 불 한가운데서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날, 너희는 아무 모습을 구경하지 못하였도다.” 그는 또한 어떤 종류의 형상을 만드는 것도 금했다.
96:5.6 (1058.4) 모세는 야웨가 자비롭다고 선포하기를 두려워했고, “주 너희 하나님은 가장 높은 신이요, 가장 높은 주, 위대한 하나님, 막강하고 무서운 하나님이요, 사람을 중시하지 않으시니라”하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응보를 두려워하여 그의 민족이 경외감에 빠지게 만들기를 더 좋아했다. 또 “너희가 복종하지 않을 때 너희 하나님은 죽이시니라. 너희가 복종할 때 그는 너희를 고치고 생명을 주시니라”하고 선포하면서, 그는 난폭한 씨족들을 다루려고 애썼다. 그러나 모세는 이 부족들이 “그의 모든 계명을 지키고 모든 계율에 복종하는” 조건으로 그들이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그들에게 가르쳤다.
96:5.7 (1058.5) 이 옛 시절에 히브리인은 하나님의 자비로움에 대하여 거의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전능자요, 주는 전쟁하는 이, 전쟁의 하나님이요, 권능이 영화롭고, 그의 적들을 가루로 만드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배웠다. “주 너희 하나님은 너희를 구원하려고 장막 가운데서 걸으시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했지만, 또한 “파라오의 마음을 굳어지게 만들고,” “그들의 적을 저주하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96:5.8 (1058.6) 모세는 이스라엘의 아들딸에게 우주적이며 인자한 신을 얼핏 보여주었지만, 대체로, 그들의 일상적 야웨 개념은 둘러싼 민족들의 부족 신보다 거의 낫지 않은 하나님 개념이었다. 그들의 하나님 개념은 원시적이고 투박하고, 사람과 비슷하였다. 모세가 죽었을 때, 이 베두인 부족들은 옛날 호렙 산과 사막의 신들의 개념, 어느 정도 미개한 관념으로 재빨리 되돌아갔다. 모세가 지도자들에게 이따금 제시한 환상, 확대되고 더 숭고한 하나님의 환상은 곧 눈앞에서 사라졌고, 한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주물이었던 금송아지 숭배로 돌아섰는데, 이것은 팔레스타인 목자들에게 야웨의 상징이었다.
96:5.9 (1059.1) 모세가 히브리인의 지휘를 요수아에게 넘겼을 때, 모세는 아브라함ㆍ나홀ㆍ롯의 간접 자손, 그리고 관계된 다른 부족들 안에서 몇천 명을 이미 모았고, 그들을 채찍질하여 스스로 지탱하고 어느 정도 자치하며 목자 생활을 하는 투사들의 민족으로 만들었다.
96:6.1 (1059.2) 모세가 죽고 나서 그의 드높은 야웨 개념은 재빨리 질이 나빠졌다. 요수아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온통 지혜롭고 인자하고 전능한 하나님을 믿는 모세의 전통을 계속 간직했지만, 서민들은 사막에서 가졌던 더 오래 된 야웨 개념으로 재빨리 돌아갔다. 신 개념의 이러한 후퇴는 여러 부족의 족장, 이른바 판관들이 연달아 통치하는 동안에 더욱 계속되었다.
96:6.2 (1059.3) 모세라는 특별한 인물의 마력은 더욱 확대된 하나님 개념의 영감을그 추종자들의 마음 속에서 살려 두었다. 그러나 일단 팔레스타인의 기름진 땅에 다다르자, 그들은 양을 치던 유목민 처지에서, 정착하여 얼마큼 주저앉은 농부로 재빨리 바뀌었다. 이러한 생활 풍습의 진화와 종교 관점의 변화는 그들이 하나님, 야웨의 성품에 대하여 가진 개념의 특징에 얼마큼 철저한 변화를 요구했다. 시나이에 있던 엄격하고 투박하고 가혹하고 천둥처럼 소리치는 사막의 신(神)이 나중에 나타나는 개념, 사랑과 응보와 자비의 하나님 개념으로 성질이 변하기 시작하는 시절에, 히브리인은 모세의 드높은 가르침을 거의 잃어버렸다. 일신교의 모든 개념을 거의 잃어버리다시피 하였다. 그들은 유란시아의 영적 진화에서 불가결한 고리로서 수고할 민족, 멜기세덱이 가르친 유일한 하나님을 바로 그 만물의 아버지의 수여 아들이 육신화하기까지 보존할 집단이 되는 기회를 거의 잃어버릴 뻔하였다.
96:6.3 (1059.4) 절망에 빠져서 요수아는 부족 사람들의 머리 속에 최고의 야웨 개념을 유지하려고 애썼고, 야웨가 “내가 모세와 함께 한 것 같이, 나는 너희와 함께 하리라. 나는 너희를 놓치거나 버리지 아니하리라”하고 선언하게 만들었다. 요수아는 믿지 않는 민족에게 엄격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필요함을 깨달았고, 이 민족은 그들의 옛 토착 종교를 아주 기꺼이 믿으면서, 신앙과 의로움을 부르짖는 종교에서 전진하려 하지 않았다. 요수아의 가르침의 요점은 이렇게 되었다: “야웨는 거룩한 하나님이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그는 너희가 규칙 어긴 것이나 너희의 죄를 잊지 아니하리라.” 이 시대에 가장 높은 개념은 야웨를 “권능과 심판과 응보의 하나님”으로 묘사하였다.
96:6.4 (1059.5) 그러나 이 어두운 시대에도, 이따금 한 선생이 외로이 일어나서 모세의 신 개념을 선포하곤 하였다: “너희 사악한 아이들은 주를 섬길 수 없나니, 그가 거룩한 하나님인 까닭이라.” “필사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 공정하겠느냐? 사람이 창조주보다 더 깨끗하겠느냐?” “너희가 찾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찾아내겠느냐? 너희가 완전에 이르기까지 전능자를 찾아낼 수 있느냐? 보라, 하나님이 크셔도 우리가 그를 알지 못하느니라. 전능자를 만지면서 우리는 그를 발견할 수 없느니라.”
96:7.1 (1060.1) 족장과 사제들의 지도 하에서 히브리인은 팔레스타인에서 허술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들은 곧, 사막에서 가졌던 뒤떨어진 신앙으로 도로 돌아갔고, 덜 진보된 가나안의 종교 풍습에 오염되었다. 그들은 우상 숭배에 빠지고 방종하게 되었고, 그들의 신 개념은 어떤 살아남은 살렘 집단이 유지했던, 에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하나님 개념보다 훨씬 밑으로 떨어졌으며, 이것은 시편의 어느 부분과 이른바 욥기에 기록되어 있다.
96:7.2 (1060.2) 시편은 20명 이상의 저자들이 쓴 작품이다. 많은 것을 에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선생들이 썼다. 레반트가 자연신들을 숭배하던 이 시절에, 엘 엘리욘, 최고자가 제일 높은 것을 믿은 사람들이 아직도 상당히 있었다.
96:7.3 (1060.3) 어떤 종교적 기록의 수집도 시편처럼, 하나님을 예배하고 감동을 주는 하나님 개념을 그렇게 풍부히 표현하지 못했다. 이 놀라운 예배 문헌의 수집을 훑어보면서, 어떤 다른 단일 문집도 그렇게 긴 세월에 걸쳐 쓰이지 않았음을 기억하면서, 찬송하고 찬양하는 독립된 각 노래의 근원과 연대(年代)를 고려할 수 있다면 무척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시편은 레반트에 두루, 살렘 종교를 믿던 사람들이 품었던 다른 하나님 개념을 기록한 것이며, 아메니모피와 이사야 사이의 기간 전체를 포함한다. 시편에는 투박한 부족 신 관념으로부터 나중에 히브리서에 엄청나게 확대된 이상에 이르기까지 온갖 단계의 하나님 개념이 묘사되었으며, 히브리서에는 야웨가 사랑이 그윽한 통치자요 자비로운 아버지로 묘사된다.
96:7.4 (1060.4) 이렇게 볼 때, 이러한 찬송가의 집합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일찍이 모은, 가장 귀중하고 유익한 예배 감정을 수집한 것이다. 이 찬송가집에 담긴 예배 정신은 세상의 모든 다른 신성한 책에 있는 정신을 뛰어넘는다.
96:7.5 (1060.5) 욥기에 제시된 얼룩덜룩한 신의 그림은 거의 3백 년에 걸쳐서, 20명이 넘는 메소포타미아의 종교 스승들이 지은 것이다. 이 메소포타미아 신앙의 수집에서 발견되는 드높은 신 개념을 읽을 때, 너희는 팔레스타인의 어두운 시절, 갈대아 지방의 우르 근처에서 참 하나님의 개념이 최선으로 간직되었음을 깨달을 것이다.
96:7.6 (1060.6) 팔레스타인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혜와 만물에 침투하는 성질을 흔히 파악했지만, 그의 사랑과 자비를 파악한 적은 드물다. 이 시절의 야웨는 “그의 적들의 혼을 지배하려고 악령들을 보내며,” 자기의 복종하는 아이들을 번성케 하고 한편 모든 다른 사람을 저주하고 그들에게 끔찍한 심판을 내린다. “그는 교활한 자의 계교를 망치며, 지혜로운 자를 제가 만든 속임수에 빠뜨려 잡는다.”
96:7.7 (1060.7) 오직 우르에서 한 목소리가 일어나서 하나님의 자비를 외치며 말했다.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에게 은총을 얻고 기쁨으로 그의 얼굴을 뵐지니,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신다운 올바름을 주실 것임이라.” 이렇게 우르에서 믿음으로 구원, 신의 은총을 얻는다는 것이 설파되었다: “그는 뉘우치는 자에게 인자하시며, ‘구렁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그를 구원하라, 내가 몸값을 찾아낸 까닭이라’하고 말씀하시니라. 누구라도 ‘나는 죄를 지었고 옳은 것을 곡해하였으며, 그것이 내게 이롭지 않았도다’하고 말하면, 하나님은 그를 구렁에서 구원하실 것이요, 그는 빛을 볼지니라.” 멜기세덱의 시절 이후로, 레반트 세계는 엘리후의 이 놀라운 가르침처럼, 그렇게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격려하는 소식, 인간이 구원받는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으니, 엘리후는 우르의 선지자였고, 살렘 신자들, 다시 말해서 한때 메소포타미아에서 멜기세덱 거류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사제였다.
96:7.8 (1061.1) 이처럼 메소포타미아에서 살렘 선교사들의 잔재는, 길게 이어진 이스라엘 선생들의 선구자가 나타날 때까지, 히브리 민족의 분열기에 진리의 빛을 유지했다. 이 선생들은 만물에게 우주의 창조자 아버지의 이상, 곧 야웨 개념의 진화가 절정에 이를 때까지, 개념을 하나씩 쌓으면서 결코 멈추지 않았다.
97:0.1 (1062.1) 히브리인의 영적 지도자들은 그들 이전에 다른 아무도 성공한 적이 없는 일―오직 철학자만 이해할 수 있는 추상적 신 관념으로 바꾸지 않고서, 그들의 하나님 개념에서 사람 모습 벗기는 일―을 해냈다. 서민들조차 성숙한 야웨 개념을 개인의 아버지는 아니라도, 적어도 종족의 아버지로 여길 수 있었다.
97:0.2 (1062.2) 멜기세덱 시절에 사람들은 살렘에서 하나님의 성격 개념을 뚜렷하게 가르침 받았지만, 그 개념은 에집트에서 탈주하던 시절에 흐릿하고 안개 같았고, 영적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반응하여 대대로 히브리인의 머리 속에서 겨우 차츰차츰 발달하였다. 야웨의 성격 개념은 신의 여러 다른 속성보다 훨씬 더 연속된 점진적 발달이었다. 모세로부터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히브리인의 머리 속에서 하나님의 성격에 관한 개념은 거의 끊임없이 성장하였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이 궁극에 이 개념을 높고 영화롭게 만들었다.
97:1.1 (1062.3) 팔레스타인에서 둘러싼 민족들의 적대하는 압력은, 곧 히브리인 족장들에게 부족 조직을 중앙 집권적 정부로 연합하지 않으면 살아남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쳤다. 행정 권한이 이렇게 집중된 것은 사무엘이 선생이자 개혁자로서 활동하는 훨씬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97:1.2 (1062.4) 사무엘은 멜기세덱의 진리를 예배 형태의 일부로 지속시켰던 살렘 선생들의 긴 혈통에서 솟아나왔다. 이 선생은 씩씩하고 결의가 굳은 사람이었다. 모세 시절에 믿었던 최고의 야웨를 예배하도록 그가 온 이스라엘을 돌이키기 시작했을 때 그는 거의 보편적 반대에 부딪쳤고, 특별한 각오와 함께, 오직 크게 헌신하는 마음이 그로 하여금 이 반대를 견딜 수 있게 했다. 그때에도 그는 겨우 얼마큼 성공했다. 히브리인 중에서 절반인 지식층만 상급 야웨 개념을 섬기도록 설득했으며, 나머지 반은 그 나라의 부족 신들을 숭배하고 열등한 야웨 개념을 계속 간직하고 있었다.
97:1.3 (1062.5) 사무엘은 일을 후딱 해치우는 부류의 사람이었고, 하루에 동료들과 함께 나가서 바알 장소를 스물이나 뒤엎을 수 있는 실용적 개혁자였다. 그는 순전한 강요의 힘으로 진전을 보았다. 말로 설교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가르치는 적은 더욱 적었지만, 그는 행동으로 옮겼다. 하루는 바알 사제를 조롱하고 있었고, 다음 날은 사로잡힌 임금을 찍어 죽였다. 그는 열심히 유일한 하나님을 믿었고, 그 유일한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라는 뚜렷한 개념을 가졌다: “지구의 여러 기둥은 주의 것이요, 그 위에 주가 세상을 두셨도다.”[1] [1760]
97:1.4 (1063.1) 그러나 사무엘이 신 개념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은 야웨가 변함이 없다, 어김없이 완전하고 신성함을 언제까지나 똑같이 구현한다는 우렁찬 선언이었다. 이 시절에 야웨는 그가 이러저러하게 행한 것을 언제나 뉘우치고, 질투로 마음이 변하는, 변덕스러운 하나님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제, 히브리인이 에집트를 뛰쳐나온 뒤에 처음으로, 그들은 이런 깜짝 놀랄 말씀을 들었다, “이스라엘의 힘은 거짓말하거나 뉘우치지 아니하리니, 그가 사람처럼 뉘우치지 않음이라.” 신과 가지는 거래는 변치 않는다고 외쳤다. 사무엘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되풀이했고,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 모든 진리ㆍ안정ㆍ불변의 근원이라고 선언했다. 히브리인은 언제나 그들의 하나님을 사람으로, 초인간으로, 기원을 알 수 없는 높은 영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듣건대, 옛날에 호렙 산의 신은 창조자의 완전함을 갖춘, 변치않는 하나님으로 높이 올려졌다. 사무엘은 진화하는 하나님 개념이 변덕스러운 사람의 생각과 필사 존재의 부침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도록 돕고 있었다. 그의 가르침을 받고서 히브리인의 하나님은 부족신 서열의 관념에서 전능하고 변함없는 창조자요 모든 창조의 감독자라는 이상의 높이까지 비로소 올라가고 있었다.
97:1.5 (1063.2) 그는 하나님이 성실하며, 계약을 지킬 만큼 믿을 만하다는 이야기를 새롭게 전파했다. 사무엘은 말했다: “주는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그는 우리와 영구한 약속을 하셨고, 이 약속은 모든 면에 체계 있고 확실하니라.” 그래서 온 팔레스타인에 두루, 최고의 야웨를 섬기러 돌아오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활기에 넘친 이 선생은 늘 외쳤다. “아 주 하나님, 주는 위대하시니, 주와 같은 이가 하나도 없고, 주 외에 어떤 다른 하나님도 없음이니이다.”
97:1.6 (1063.3) 그때까지 히브리인은 야웨의 은총을 주로 물질적 번영 면에서 보았다. 이렇게 감히 선포했을 때, 이는 이스라엘에게 큰 충격이었고, 사무엘은 목숨을 거의 잃을 뻔하였다: “주는 사람을 부하게도 만들고 가난하게도 만드시며, 낮추기도 하고 높이기도 하시니라. 그는 티끌 속에서 가난한 자를 높이시고, 거지들을 들어올리사 영광의 보좌를 물려받게 하려고 군주들 사이에 저희를 세우시느니라.” 모세 이후로, 겸손한 자와 복을 적게 받은 자에게 그렇게 마음을 위로하는 약속이 선포된 적이 없었고, 가난한 자들 속에서 절망하던 수많은 사람이 영적 지위를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을 비로소 가지게 되었다.
97:1.7 (1063.4) 그러나 사무엘은 부족 신 개념을 넘어서 그다지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 야웨가 모든 사람을 만들었지만, 주로 히브리인, 그가 택한 민족의 일에 분주하다고 선포하였다. 그렇기는 해도, 모세의 시절처럼, 다시 한 번 하나님 개념은 거룩하고 올바른 신을 묘사했다. “주처럼 거룩한 자가 하나도 없느니라. 누가 이 거룩한 주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느냐?”
97:1.8 (1063.5) 세월이 지나가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나이 든 지도자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진보했으니, 이렇게 외쳤기 때문이다: “주는 지식의 하나님이요, 행동을 저울로 재느니라. 주는 땅 끝까지 심판할 것이요, 자비로운 자에게 자비를 보이며, 또한 곧은 사람을 바르게 대하리라.” 자비로운 자에게 국한되지만, 여기서도 자비의 빛이 밝아온다. 나중에 그들이 곤경에 빠져서, 그의 민족에게 이렇게 타일렀을 때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제 주의 손아귀에 빠지자, 그의 자비가 크심이라.” “사람을 많이 구하든 적게 구하든, 주에게 아무 제한이 없느니라.”
97:1.9 (1063.6) 야웨 성품 개념의 이러한 점진적 발전은 사무엘의 후계자들이 일했을 때에도 계속되었다. 야웨가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이라 제시하려고 애썼지만, 그들은 사무엘의 걸음과 도저히 발을 맞추지 못했다. 그들은 사무엘이 나중에 파악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자비롭다는 개념을 개발하지 못했다. 야웨가 누구보다도 높다고 주장하면서도, 다른 신들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꾸준히,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었다. “아 주여, 나라는 주의 것이니이다. 주는 만물 위에 우두머리로서 높이 계시나이다.”
97:1.10 (1064.1) 이 시대의 기본 생각은 신의 권능이었다. 이 시대의 선지자들은 히브리인의 왕좌에 앉을 임금을 기르도록 고안된 종교를 설파했다. “아 주여, 위대함ㆍ권능ㆍ영광ㆍ승리ㆍ웅대함이 주께 속하나이다. 주의 손 안에 권능과 힘이 있고, 주는 만인을 위대하게 만들고 힘을 줄 수 있나이다.” 이것이 사무엘과 그 직계 후계자들이 살던 시절에 하나님 개념의 형편이었다.
97:2.1 (1064.2) 그리스도 이전 10세기에 히브리 민족은 두 왕국으로 갈라졌다. 이 두 정치 구역에서 진리를 가르치는 많은 선생이 깊어진 영적 퇴폐의 물결, 반작용의 물결을 막으려고 애썼고, 이 물결은 분단하는 전쟁 이후에 비참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결의가 굳고 무서운 줄 모르는 정의의 투사(鬪士) 엘리야가 가르침을 시작하기까지, 히브리인의 종교를 진전시키려는 이런 노력은 성공하지 않았다. 엘리야는 사무엘의 시절에 지녔던 것과 비할 만한 하나님 개념을 북쪽 왕국에서 회복했다. 엘리야는 진보된 하나님 개념을 제시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보다 먼저 있던 사무엘처럼 그는 분주해졌고, 바알의 여러 제단을 뒤엎고 거짓 신들의 우상을 깨 버렸다. 우상을 숭배하는 군주(君主)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혁을 실행했다. 그의 과제는 사무엘이 부닥쳤던 것보다 더욱 거창하고 어려웠다.
97:2.2 (1064.3) 엘리야가 부름받아 떠났을 때, 충실한 동료 엘리사는 그의 일을 떠맡았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가야의 귀중한 도움을 받아서, 팔레스타인에서 진리의 빛을 살려 두었다.
97:2.3 (1064.4) 그러나 이때는 신의 개념이 전진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아직까지 히브리인은 모세의 이상의 높이까지도 도달하지 못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는 상류 계층이 최고의 야웨 숭배로 돌아옴과 함께 막을 내렸고, 사무엘이 두어 둔 자리쯤까지, 우주의 창조자 관념이 회복된 것을 구경하였다.
97:3.1 (1064.5) 야웨 신자와 바알 추종자 사이에 오래 끈 논쟁은 종교 관념의 차이가 아니라 차라리 사회ㆍ경제 이념의 충돌이었다.
97:3.2 (1064.6) 팔레스타인 거주자들은 토지의 사유 재산권에 대하여 태도가 달랐다. 남쪽 부족, 곧 방랑하는 아라비아 부족들(야웨파)은 토지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권리―신이 씨족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땅을 팔거나 저당 잡힐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야웨가 ‘땅은 내 것이니 팔지 못할지니라’ 말씀하셨도다.”
97:3.3 (1064.7) 북쪽에 정착한 가나안 족속(바알파)은 자유롭게 땅을 사고팔고 저당 잡혔다. 바알이라는 말은 소유자를 뜻한다. 바알 종파는 두 가지 주요 교리에 기초를 두었다. 첫째는 재산의 교환ㆍ계약ㆍ약속―땅을 사고 파는 권리―를 정당화한 것이다. 둘째로, 바알은 비를 보낸다고 생각되었다―그는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신이었다. 좋은 수확을 거두는 것은 바알의 은혜에 달려 있었다. 그 종파는 대체로 땅ㆍ소유권ㆍ비옥함에 관심을 가졌다.
97:3.4 (1065.1) 일반적으로 바알파는 집ㆍ땅ㆍ노예를 소유했다. 그들은 귀족인 지주(地主)였고 도시에서 살았다. 각 바알은 신성한 장소와 사제, 그리고 “거룩한 여자,” 곧 의식에 쓰이는 창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97:3.5 (1065.2) 땅을 보는 관점의 이러한 기본적 차이로부터 가나안인과 히브리인의 사회ㆍ경제ㆍ도덕ㆍ종교적 태도에 맹렬한 적대감이 생겼다. 이 사회ㆍ경제적 논쟁은 엘리야의 시절까지 분명한 종교적 쟁점이 되지 않았다. 이 공격적 선지자의 시절부터, 더 엄밀하게 종교적 노선에서―야웨 대 바알―논쟁이 있었고, 이것은 야웨의 승리와 그 뒤에 일신교를 향한 운동으로 끝났다.
97:3.6 (1065.3) 엘리야는 야웨와 바알의 논쟁을 토지 문제로부터 히브리인의 이념과 가나안인의 이념의 종교적 측면으로 옮겼다. 아합이 나봇 일가의 땅을 소유하려는 음모를 꾸며 그들을 죽였을 때, 엘리야는 옛 토지 관습으로부터 도덕적 쟁점을 만들었고, 바알파에 맞서서 힘찬 투쟁을 벌였다. 이것은 또한 도시의 지배에 맞서서 시골 사람들이 벌인 싸움이었다. 주로 엘리야 밑에서 야웨는 엘로힘이 되었다. 그 선지자는 토지 개혁자로서 시작했고, 신을 높임으로 끝을 맺었다. 바알 신은 여럿이었고, 야웨는 하나였다―일신교가 다신교를 물리쳤다.
97:4.1 (1065.4) 부족 신―희생물과 예식으로 아주 오랫동안 섬김을 받던 신, 초기 히브리인의 야웨―가 자신의 민족 안에서도 범죄와 부도덕을 징계하려 하는 하나님이 되는 과도기에 아모스가 큰 걸음을 내디디었다. 그는 북쪽 부족들의 범죄ㆍ만취ㆍ억압ㆍ부도덕을 비난하려고 남부의 산지에서 나타났다. 모세의 시절 이후로, 그렇게 울려 퍼지는 진리가 팔레스타인에서 선포된 적이 없었다.
97:4.2 (1065.5) 아모스는 단지 회복자나 개혁자가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신 개념을 발견한 자였다. 그는 이전 사람들이 발표한 하나님에 관하여 많이 선포하였고, 이른바 선민 사이에서 죄를 묵인할 신성한 존재를 믿는 신앙을 용감히 공격했다. 멜기세덱 시절 이후에 처음으로, 민족의 정의와 도덕에 2중 잣대 사용을 비난하는 소리가 사람의 귀에 들렸다. 그들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바로 그들의 하나님 야웨가 그들의 생활에서 생기는 범죄와 죄를 어떤 다른 민족의 경우보다 더 참고 넘어가지 않는다는 소리를 히브리인의 귀가 들었다. 아모스는 사무엘과 엘리야의 엄하고 공정한 하나님을 상상했지만, 또한 잘못한 것을 벌줄 때 히브리인과 어느 다른 민족을 조금도 달리 생각하지 않는 하나님을 보았다. 이것은 자기 중심의 “선민” 교리에 대하여 정면 공격이었고, 그 시절에 많은 히브리인이 가슴에 사무치게 이를 분개하였다.
97:4.3 (1065.6) 아모스는 말했다: “산을 빚고 바람을 지으신 이, 일곱 별과 오리온을 형성한 이를 찾을지니, 그는 죽음의 그림자를 아침으로 바꾸고 낮을 밤처럼 어둡게 만드시느니라.” 건성으로 종교를 믿고 기회주의이고 때때로 부도덕한 동료들을 비난하면서, 변치 않는 야웨의 어김 없는 응보를 묘사하려고 애쓰면서 그는 행악자들에게 말했다, “비록 저희가 지옥으로 파고 들어가도 거기서 저희를 잡아내리라, 비록 저희가 하늘로 기어오르더라도, 거기서 저희를 끌어내리리라.” “그리고 적들 앞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도, 거기서 나는 응보의 칼을 지시하겠고 그 칼이 저희를 죽일지니라.” 꾸짖고 비난하는 손가락으로 그들을 가리키면서 “분명컨대, 너희가 한 일을 하나도 결코 잊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밀을 체질하는 것 같이, 나는 이스라엘의 집을 모든 나라 사이에 체질하리라”하고 야웨의 이름으로 선언했을 때, 아모스는 청중을 더욱 놀라게 했다.
97:4.4 (1066.1) 아모스는 야웨가 “만국의 하나님”이라고 선포하고, 의식(儀式)으로 올바름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돌로 쳐죽임을 당하기 전에, 이 용감한 선생은 최고의 야웨 교리를 살리기에 넉넉히 진리의 누룩을 퍼뜨렸다. 그는 멜기세덱의 계시가 더욱 진전되는 것을 보장했다.
97:4.5 (1066.2) 호세아는 모세가 가르친 사랑의 하나님 개념을 부활시킴으로, 아모스, 그리고 우주의 하나님이 응보한다는 아모스의 교리를 따랐다. 호세아는 희생물이 아니라 뉘우침을 통해서 용서받기를 외쳤다. 그는 신이 인자하고 자비롭다는 복음을 선포하며 말했다, “내가 너와 언제까지나 약혼하리라. 옳도다, 올바름과 심판 속에서, 인자하고 자비롭게 너희와 약혼하리라. 나는 충실하게 너희와 약혼까지 하리라,” “나는 저희를 아낌없이 사랑하리니, 내 성이 풀렸음이라.”
97:4.6 (1066.3) 호세아는 충실하게 아모스의 도덕적 경고를 계속했고,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저희를 꾸짖는 것이 내가 바라는 바라.” 그러나 “내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 ‘너희는 내 백성이라’ 이르리라, 그리고 저희는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나이다’하고 말하리라,” 이렇게 말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를 반역죄에 가깝게 잔인한 것으로 여겼다. 그는 계속 회개와 용서를 설교하며 말했다, “나는 저희의 타락을 고치리라, 저희를 아낌없이 사랑하리라, 내 성이 풀렸음이라.” 호세아는 늘 희망과 용서를 선포했다. 그의 말씀의 요점은 늘 이것이었다. “내 백성에게 내가 자비를 베풀리라. 저희는 나 외에 아무 하나님을 알지 못할지니, 나 외에 아무 구원자가 없음이라.”
97:4.7 (1066.4) 아모스는 그들이 선택된 백성이라 생각된다고 해서 야웨가 그들 중에서 범죄와 죄를 묵인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도록 히브리인의 민족 양심을 깨우쳤다. 한편 호세아는 신이 동정심이 가득하고 자애롭다는 자비로운 화음(和音)의 첫 음정을 시작했고, 후일에 이사야와 그 동료들은 이 화음을 아주 아름답게 노래했다.
97:5.1 (1066.5) 이때는 북부 씨족들 사이에서 더러가 개인의 죄와 민족의 범죄를 징계한다는 위협을 선언하고, 한편 더러가 남쪽 왕국이 죄지은 것에 대하여 징벌로 재난이 있으리라 예언하던 시절이었다. 히브리 국가들에서 양심과 의식(意識)이 일깨워진 것을 뒤이어 첫 이사야가 등장했다.
97:5.2 (1066.6) 이사야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성품, 곧 무한한 지혜, 변함없이 완전히 믿음직한 성질을 설파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고 묘사했다: “나는 또한 줄자 대로 심판하고 다림추 대로 공의를 펴리라.” “너희의 슬픔과 두려움에서, 너희가 수고하는 고된 속박의 처지에서 벗어나도록 주가 너희에게 휴식을 주리라.” “그리고 너희의 귀는 ‘이것이 길이라, 그 길로 가라’ 하는 말씀을 너희 뒤에서 들을지니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라, 나는 믿고 두려워 아니하리니, 주가 나의 힘이요 내 노래인 까닭이라.” “‘이제 와서 함께 의논하자’ ‘너희의 죄가 진홍 같아도, 눈과 같이 희게 될지라. 심홍처럼 붉어도 양털 같이 될지니라’ 주가 말씀하시니라.”
97:5.3 (1066.7) 두려움에 질리고 혼이 갈급한 히브리인에게 이 선지자는 말했다. “일어나서 빛날지어다. 너희의 빛이 다가왔고, 주의 영광이 너희를 비춤이라.” “주의 영이 내 가까이 오시니, 좋은 소식을 유순한 자에게 전파하라고 그가 내게 기름을 부으셨음이라.” “마음이 상한 자를 동여매고, 포로에게 자유를, 묶인 자에게 감옥 문이 열렸음을 선포하라고 나를 보내셨음이라.” “나는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하리니, 내 혼이 내 하나님 안에서 즐거울지라,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나를 입히고, 올바름의 옷으로 나를 덮으셨음이라.” “저희가 받는 모든 고통 속에 그가 고통을 받았고, 그의 앞에 있던 천사가 저희를 구하였도다.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가 저희를 되찾았도다.”
97:5.4 (1067.1) 이 이사야 뒤를 미가와 오바디아가 따랐고, 이들은 혼을 적셔 주는 그의 복음을 확인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그리고 용감한 이 두 사자는 사제에게 지배된 히브리인 의식(儀式)을 대담하게 비난하고, 두려움 없이 희생 제도 전체를 공격했다.
97:5.5 (1067.2) 미가는 “보상을 받고 재판하는 통치자, 보수를 받고 가르치는 사제, 돈을 받고 점치는 예언자들”을 꾸짖었다. 그는 미신과 제사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날을 가지라고 가르치며 말했다: “그러나 각 사람이 자기의 넝쿨 아래에 앉을지며, 아무도 그에게 겁을 주지 말지니, 이는 각자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대로 모든 사람이 살 것임이라.”
97:5.6 (1067.3) 미가가 전한 말씀의 요점은 늘 이것이었다: “태운 헌물을 가지고 내가 하나님 앞에 오리이까? 주가 숫양 1천 마리나 1만 강(江)에 가득 찬 기름으로 기뻐하시리이까?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내 첫 아이를, 내 혼이 지은 죄 때문에 내 몸의 열매를 드리리이까? 아, 사람아, 그는 나에게 무엇이 좋은지 보여주셨도다, 공정하게 행하고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너희 하나님과 더불어 걷는 것 말고 주가 너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느냐?” 이때는 위대한 시대였다. 정말로 풍운의 시절이었으니, 이때 2천 5백 년도 더 전에, 필사 인간은 사람을 그렇게 해방하는 소식을 들었고 더러는 이를 믿기도 하였다. 사제들의 끈질긴 저항이 없었다면, 이 선생들은 히브리인의 예배 의식에서 피비린내 나는 예식을 통채로 폐지했을 것이다.
97:6.1 (1067.4) 몇몇 선생이 이사야의 복음을 줄곧 해설했지만, 히브리인의 하나님 야웨를 국제적 신으로 만드는 일에 예레미야가 다음으로 과감한 걸음을 내디디었다.
97:6.2 (1067.5) 예레미야는 히브리인이 다른 나라와 전쟁할 때 야웨가 그들 편을 들지 않는다고 두려움 없이 선언했다. 그는 야웨가 온 땅,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다. 예레미야의 가르침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국제화하는, 올라가는 물결이 최고조에 달한 것이었다. 마침내, 언제까지나, 이 대담한 설교자는 야웨가 만국의 하나님이라, 에집트인에게 오시리스, 바빌로니아인에게 벨, 아씨리아인에게 아슈르, 또는 필리스티아인에게 다곤이 도무지 없다고 선포했다. 이렇게 히브리인의 종교는 이 무렵에, 그리고 그 이후로 세계에 두루, 일신교의 부흥을 함께 하게 되었다. 마침내 야웨 개념은 행성의 신 수준으로, 우주의 위엄을 가진 높이까지도 올라갔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동료 중에 많은 사람은 히브리 민족과 따로 있는 야웨를 생각하기가 어려움을 깨달았다.
97:6.3 (1067.6) 예레미야는 또한 이렇게 선언하면서, 이사야가 묘사한, 공정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을 전파했다: “옳도다, 나는 영원한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그러므로 인자함으로 내가 너희를 당기었노라.” “이는 그가 사람의 아들딸에게 고통 주기를 기뻐하지 않으심이라.”
97:6.4 (1067.7) 두려움 없는 이 예언자는 말했다: “우리의 주는 올바르고, 너그럽게 충고하며, 힘차게 일하시느니라. 사람마다 가는 길에 따라서, 사람이 한 일의 열매에 따라서 주려고, 사람의 모든 자손이 가는 길을 다 눈 뜨고 보시니라.” 그러나 예루살렘이 포위된 동안, “그리고 이제 내가 이 땅을 바빌론의 임금 느부갓네살, 내 종의 손에 주었노라”하고 말했을 때 그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반역죄로 생각되었다. 예레미야가 그 도시의 항복을 조언했을 때, 사제와 국가 통치자들은 그를 컴컴한 지하 감방의 더러운 구덩이 속으로 처박았다.
97:7.1 (1068.1) 히브리인의 국가가 멸망하고 메소포타미아에서 포로 생활을 한 것은 그 사제들의 굳게 결의한 행동이 아니었더라면, 그들의 확대되는 신학에 크게 유익함이 입증되었을 것이다. 나라는 바빌론의 군대 앞에서 패했고, 그들 민족을 두둔하던 야웨는 영적 지도자들의 국제적 설교로 고난을 받았다. 그들의 민족 신을 잃어버린 것을 분개했기 때문에, 새롭고 확대된 개념의 하나님이어도, 유대인을 국제화된 만국의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으로 회복시키려는 노력으로, 유대인 사제들은 히브리인의 역사에서 여러 우화(寓話)를 만들어내고 기적으로 보이는 사건들을 불렸다.
97:7.2 (1068.2) 포로 생활 기간에 유대인은 바빌로니아의 전통과 전설에 많이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조상ㆍ역사에 명예와 영광을 돌리려고 이러한 전설을 항상 왜곡했는데도, 그들은 채택한 갈대아인 이야기의 도덕적 바탕과 영적 의미를 어김없이 개선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97:7.3 (1068.3) 이 히브리인 사제와 서기관들은 머리 속에 단 하나의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이는 유대 나라를 복구하고, 히브리인의 전통을 영화롭게 하고, 종족의 역사를 높이는 것이었다. 이 사제들이 그들의 그릇된 생각을 서양 세계의 큰 부분에 부착시켰다는 사실에 분개심이 일어난다면, 그들이 일부러 이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영감을 받아서 썼다고 우기지 않았고 신성한 책을 쓴다고 공언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다만 포로 생활을 하던 동포의 오그라드는 용기를 북돋아 주려고 고안된 교과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민족 정신과 겨레의 사기(士氣) 높이는 것을 겨냥하고 있었다. 후일의 사람들이 이것과 기타 기록들을 모아서,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된 가르침을 적은 안내서로 만들게 되었다.
97:7.4 (1068.4) 유대인 사제들은 포로 생활이 끝난 뒤에 이 기록들을 아낌없이 이용해 먹었지만, 그들은 기를 꺾을 수 없는 젊은 선지자, 둘째 이사야가 있었기 때문에 동료 포로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데 크게 방해를 받았다. 둘째 이사야는 첫 이사야가 외친, 응보ㆍ사랑ㆍ올바름ㆍ자비의 하나님을 완전히 믿는 신자가 되었다. 그는 또한 예레미야와 함께, 야웨가 만국의 하나님이 되었음을 믿었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이 이론들을 아주 효과 있게 설파했고, 그가 유대인과 정복자들을 똑같이 개종시켰다는 것이 이를 나타낸다. 이 젊은 전도자는 그의 가르침을 기록에 남겨 놓았고, 적대하고 용서 없는 사제들은 그 가르침이 그와 전혀 상관없게 만들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과 웅대함을 순전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 기록을 예전의 이사야가 쓴 기록 사이에 집어넣게 되었다. 이처럼 이 둘째 이사야의 기록은 그 이름을 지닌 책에서 발견될 수도 있고, 40장에서 55장 끝까지 포함한다.
97:7.5 (1068.5) 마키벤타로부터 예수의 시절까지, 어떤 선지자나 종교 스승도 이 포로 생활 시절에 둘째 이사야가 선포했던 높은 하나님 개념에 이르지 못했다. 이 영적 지도자가 선포한 것은 작고, 사람 모습을 하고 사람이 만든 하나님은 전혀 아니었다. “보라, 그는 섬들을 티끌처럼 들어올리시느니라.” “그리고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 같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고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97:7.6 (1069.1) 마침내 마키벤타 멜기세덱은 진짜 하나님을 필사 인간에게 선포하는 인간 선생들을 바라보았다. 첫 이사야처럼, 이 지도자는 우주를 창조하고 떠받드는 하나님을 전파하였다. “나는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두었노라. 나는 땅을 헛되이 만들지 아니하였고, 사람이 살라고 땅을 빚었노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나 외에 아무 하나님이 없느니라.”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새 선지자는 말했다. “하늘이 사라지고 땅이 고갈될지라도 나의 올바름은 언제까지나 버티고, 나의 구원은 대대로 버틸지니라.” “너희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음이라, 절망하지 말지니, 내가 너희의 하나님인 까닭이라.” “나 외에 아무 하나님이―공정한 하나님과 구원자가―없느니라.”
97:7.7 (1069.2) 이와 같은 말씀을 듣는 것은 포로가 된 유대인에게 위로가 되었고, 마찬가지로 그 뒤로 늘 허다한 사람들을 위로했다: “주가 이렇게 말씀하시니라, ‘나는 너를 만들었고, 너를 되찾고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노라, 너는 내 것이라.’” “너희가 바다를 지나갈 때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니, 너희가 내 눈앞에 귀중함이라.” “여자가 제 아들을 동정하는 마음이 없다고 해서, 젖 먹는 제 아이를 잊을 수 있느냐? 옳도다, 여자는 잊을지 몰라도, 나는 내 아이들을 잊지 아니하리니, 보라, 내가 저희를 내 손바닥에 새겼음이라. 나는 내 손의 그림자로 저희를 가리기까지 하였노라.” “악한 자는 자기의 길을 버릴지며, 불의한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게 하라. 그러면 주는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리라, 우리 하나님한테 돌아오게 하라, 그가 넘치게 용서할 것임이라.”
97:7.8 (1069.3) 살렘의 하나님을 이렇게 새로 드러내는 복음을 다시 들어 보아라: “그는 제 양 떼를 목자처럼 먹이리라, 양들을 팔 안에 모으고 가슴에 품어 저희를 나르리라. 그는 약한 자에게 힘을 주고, 힘이 없는 자에게 힘을 키워 주도다. 주를 섬기는 자는 힘을 다시 찾겠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가리라. 저희가 달리고서 지치지 아니하겠고, 걸어도 쓰러지지 아니하리라.”
97:7.9 (1069.4) 이 이사야는 확대되는 최고의 야웨 개념을 담은 복음을 멀리 미치도록 선전했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을 우주의 창조자로 묘사함으로 그는 모세와 웅변으로 경쟁하였다. 우주의 아버지의 무한한 속성을 그린 그의 글은 시(詩)와 같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관하여 이보다 더 아름다운 말이 입에서 나온 적이 없다. 시편처럼, 이사야의 글은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오시기 전에 필사 인간의 귀가 들은 바, 영적 하나님 개념을 가장 숭고하고 참되게 발표한 것에 속한다. 그가 신을 묘사한 것을 들어 보아라: “나는 영원에서 거하는 높고 높은 자이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나 외에 아무 다른 하나님이 없느니라.” “그리고 주의 손이 짧아져서 사람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이 아니요, 귀가 어두워서 들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워도 위엄 있는 이 선지자가 신이 변치 않고 하나님이 충실함을 끈질기게 전파한 것은 유대 민족 사이에 새로운 교리였다. “하나님은 잊지 않고, 버리지 않고자 하시리라”하고 그는 외쳤다.
97:7.10 (1069.5) 이 대담한 선생은 사람이 하나님과 무척 가까운 사이라고 선포했고, 이렇게 말했다. “내 이름으로 부르는 자마다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했고, 저희는 나를 찬양함을 보일지니라. 나, 나조차도, 스스로를 위하여 저희가 지은 죄를 지워버리는 자이라, 나는 저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
97:7.11 (1069.6) 이 위대한 히브리인이 민족의 하나님 개념을 때려부수고, 한편 영화롭게 우주의 아버지의 신성을 선포하는 것을 들어 보아라. 그는 우주의 아버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발판이라.” 그런데도 이사야의 하나님은 거룩하고, 훌륭하고, 공정하며, 사람은 그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사막의 베두인 족속이 가졌던 개념, 성이 나 있고 복수심이 가득하고 질투하는 야웨 개념은 거의 사라졌다. 최고이며 보편적인 새 야웨 개념이 필사 인간의 머리 속에 나타났고, 인간의 눈앞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 신의 응보를 깨닫는 것은 원시적 마술과 생물학적 두려움을 없애기 시작했다. 마침내, 사람은 법과 질서가 있는 우주에 대하여 듣고, 믿을 수 있고 확고한 속성을 가진 우주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97:7.12 (1070.1) 숭고한 하나님을 외치는 이 전도자는 그칠 줄 모르고 이 사랑의 하나님을 선포하였다.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뉘우치고 겸손한 정신을 가진 자와 함께 하노라.” 이 위대한 선생은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 위로하는 말씀을 더 주었다: “그리고 주가 너를 줄곧 안내하고 너의 혼을 채워 주시리라. 너는 물을 준 동산 같고 그침 없이 흐르는 샘물과 같을지니라. 그리고 적이 홍수(洪水)처럼 온다면, 주의 영이 그에 맞서서 방어물을 세우리라.” 두려움을 없애는 멜기세덱의 복음과 신뢰를 낳는 살렘의 종교가 인류에게 축복을 내리려고 다시 한 번 앞을 비추었다.
97:7.13 (1070.2) 선견이 있고 용감한 이사야는 최고의 야웨, 사랑의 하나님, 우주의 통치자, 애정을 가진, 온 인류의 아버지의 위엄과 보편적 전능을 숭고하게 그림으로써 민족주의적 야웨가 실제로 빛을 잃게 하였다. 그 중대한 시절 이후로, 서양에서 가장 높은 하나님 개념은 보편적 응보, 신의 자비, 영원한 올바름을 포함했다. 훌륭한 언어로, 비할 데 없는 품위를 갖추고 이 위대한 선생은 전능한 창조자를 만인을 사랑하는 아버지로 그렸다.
97:7.14 (1070.3) 포로로 잡혀 있던 이 선지자는 바빌론의 강가에서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을 때 그의 민족에게, 그리고 뭇 나라의 민족들에게 설파하였다. 그리고 이 둘째 이사야는 약속된 메시아의 임무에 대하여, 종족 면에서 자기 중심인 그릇된 많은 개념을 없애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이 노력에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사제들이 그릇된 생각으로 민족주의를 키우는 일에 헌신하지 않았더라면, 두 이사야의 가르침은 약속된 메시아를 알아보고 받아들이기 위하여 길을 예비했을 것이다.
97:8.1 (1070.4) 히브리인의 체험 기록을 신성한 역사로 바라보고, 나머지 세상의 사무를 세속의 역사로 바라보는 관습은, 역사의 해석에 관하여 사람의 머리 속에 존재하는 많은 혼란에 책임이 있다. 이 문제는 유대인에게 세속의 역사가 없기 때문에 생긴다. 바빌로니아에 추방된 시절에 사제들이, 하나님이 히브리인과 가졌던, 기적이라고 생각된 거래의 기록, 구약에 묘사된 이스라엘의 신성한 역사의 새 기록을 준비한 뒤에, 그들은 히브리인의 나랏일에 관한 기존 기록―히브리 역사에서 얼마큼 정확한 몇 가지 다른 기록과 함께, “이스라엘 왕들의 업적” 과 “유다 왕들의 업적”―을 조심스럽게, 샅샅이 없애버렸다.
97:8.2 (1070.5) 세속의 역사의 통렬한 압력에 눌리고 피할 수 없이 강요당한 것이 어떻게, 포로가 되고 외국인에게 지배받는 유대인을 아주 공포에 빠지게 만들었는가, 그래서 그들이 자기네 역사를 완전히 새로 쓰고 개작하려고 애썼는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복잡한 그들 민족 체험의 기록을 간단히 살펴보아야 한다. 유대인은 신학을 떠나서 인생에 대하여 적당한 철학을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끔찍한 벌을 받고, 아울러 올바르면 신이 보상한다는 개념, 최초의 에집트인의 개념과 씨름했다. 욥의 연극은 이 그릇된 철학에 맞선 일종의 항거였다. 전도서에 담긴 솔직한 비관론은 섭리를 믿는 지나친 이 낙관적 신앙에 대한 반응, 처세에 현명한 반응이었다.
97:8.3 (1071.1) 그러나 외래 통치자의 압제 밑에서 지낸 5백 년은 참을성 있고 오래 견디는 유대인에게도 너무 지나쳤다. 선지자와 사제들은 외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아 주여, 언제까지니이까?” 성서를 탐구하는 동안에, 정직한 유대인의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어느 옛 예언자는 하나님이 그가 “택한 백성”을 보호하고 구원하리라고 약속했다. 아모스는 그들이 민족의 올바름의 기준을 다시 세우지 않으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릴 것이라 전에 위협했다. 신명기의 서기관은―선과 악, 축복과 저주와 같이―큰 선택이 있음을 묘사하였다. 첫 이사야는 인자한 임금이자 구원자에 대하여 설파하였다. 예레미야는 올바른 마음을 가지는―가슴 속 서판에 약속을 적는―시대를 선포하였다. 둘째 이사야는 희생물을 바치고 대속함으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말했다. 에스겔은 헌신적 봉사를 통하여 구원받음을 선포했고, 에즈라는 율법을 지킴으로 번영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있었는데도, 그들은 속박된 채로 남아 있고, 구원은 뒤로 미루어졌다. 그리고 나서 다니엘은 다가오는 “위기”―큰 형상을 깨뜨리고 영원한 올바른 통치, 즉 메시아의 왕국이 즉시 세워지는 것―을 묘사하는 각본을 제시했다.
97:8.4 (1071.2) 이 모든 거짓된 소망이 그 민족이 실망하고 좌절하는 지경까지 이끌었으므로, 유대인 지도자들은 너무 헛갈려서 신다운 파라다이스 아들이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사람의 아들로 육신화되어―금방 그들에게 왔을 때, 그를 알아보고 그의 사명과 봉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97:8.5 (1071.3) 모든 현대 종교는 인간의 역사의 어떤 시대를 기적으로 해석하려고 애씀으로 심각한 실수를 저질러 왔다. 하나님이 섭리로 아버지의 간섭하는 손을 여러 번 인간사의 흐름 속에 밀어넣은 것이 참말이지만, 신학의 독단(獨斷)과 종교적 미신을 이 인간의 역사의 흐름 속에서 기적 행위로 인하여 나타나는 초자연적 침전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최고자들이 사람의 나라에서 다스린다”는 사실은 세속의 역사를 이른바 신성한 역사로 바꾸지 않는다.
97:8.6 (1071.4) 신약의 저자와 후일에 기독교 작가들은 유대인 선지자들을 초월적 존재로 만들려는 시도로, 뜻은 좋았지만 히브리인 역사의 왜곡(歪曲)을 더욱 까다롭게 만들었다. 이처럼 히브리인의 역사는 유대인 저자와 기독교 저자들에게 비참하게 이용되었다. 현세의 히브리인 역사는 철저히 교리화되었다. 신성한 역사라는 허구로 바뀌었고, 이른바 기독교 국가들의 도덕 개념과 종교적 가르침과 헤어날 수 없이 한데 묶이게 되었다.
97:8.7 (1071.5) 히브리인의 역사에서 중대한 시점을 간단히 되새기는 것은 그 민족의 일상적인 현세의 역사를 꾸며낸 신성한 역사로 바꾸려고 유대인 사제들이 어떻게 기록된 사실을 바빌론에서 뜯어 고쳤는가 보여줄 것이다.
97:9.1 (1071.6) 이스라엘 족속에게 결코 12 부족이 없었다―겨우 서너 부족이 팔레스타인에서 정착했다. 히브리인의 국가는 이른바 이스라엘 족속과 가나안 족속이 연합한 결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딸은 가나안 족속 사이에서 살았더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희의 딸들을 아내로 삼고, 자기 딸들을 가나안 족속의 아들들에게 주었더라.” 히브리인이 가나안 족속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냈다고 이에 관한 사제들의 기록이 서슴지 않고 선포했는데도, 그들을 결코 몰아내지 않았다.
97:9.2 (1071.7) 이스라엘 사람 비슷한 의식(意識)은 에브라임의 산지에서 뿌리를 내렸다. 후일의 유대인 의식은 남쪽 유다의 씨족에서 생겼다. 유대인(유다 사람)은 언제나 북쪽 이스라엘 (에브라임) 사람들의 이름을 더럽히고 그 기록에 먹칠하려고 애썼다.
97:9.3 (1072.1) 과장된 히브리인의 역사는 암몬 족속이 요단 강 동쪽에 사는 동포 부족 사람들―길르앗 족속―을 공격하는 데 저항하려고 사울이 북부의 씨족들을 불러모음으로 비롯된다. 그는 3천 명 남짓한 군대로 적을 무찔렀고, 이 공훈이 산지의 부족들에게 그를 임금으로 만들도록 이끌었다. 추방된 사제들이 이 이야기를 다시 썼을 때, 그들은 사울의 군대를 330,000명으로 늘였고, 그 싸움에 참여한 부족들의 명단에 “유다”를 보탰다.
97:9.4 (1072.2) 암몬 족속을 무찌른 직후에, 사울은 그 군대의 인기를 얻어서 임금이 되었다. 이 사건에 아무 사제나 선지자가 끼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사제들은 신의 지시에 따라서 사무엘 선지가 사울을 임금으로 세웠다고 기록에 넣었다. 그들은 다윗의 유다 왕권을 위하여 “신에게서 내려온 후계”를 세우기 위해서 이렇게 했다.
97:9.5 (1072.3) 유대인 역사에서 가장 큰 왜곡은 다윗과 상관이 있었다. 사울이 암몬 족속을 무찌른 뒤에 (이 공을 그는 야웨에게 돌렸지만), 필리스티아 족속이 놀라서 북쪽 씨족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윗과 사울은 결코 뜻을 한데 모을 수 없었다. 6백 명을 거느린 다윗은 필리스티아 연맹에 들어갔고, 바닷가를 따라서 에스드랠론까지 행진했다. 가스에서 필리스티아 족속이 다윗에게 들을 떠나라고 명령했고, 그들은 그가 사울에게로 넘어갈까 두려워했다. 다윗은 물러났고, 필리스티아 족속은 사울을 공격해서 물리쳤다. 다윗이 이스라엘에 충성했더라면, 그들은 이런 짓을 할 수 없었다. 다윗의 군대는 여러 나라 말을 하는 불평꾼의 집합이었고, 대체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와 법을 피한 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97:9.6 (1072.4) 사울이 길보아에서 필리스티아 족속에게 패배한 비극은 둘러싼 가나안 족속이 보기에, 야웨를 신들 사이에서 낮은 자리로 떨어뜨렸다. 보통은 사울의 패배를 야웨를 배반한 탓으로 돌렸겠지만, 이번에 유다의 편집자들은 의식(儀式)을 잘못 치른 탓으로 돌렸다. 이 편집자들은 다윗의 왕권을 세우기 위한 배경으로 사울과 사무엘의 전통이 필요했다.
97:9.7 (1072.5) 다윗은 그의 작은 군대와 함께 히브리인의 도시가 아닌 헤브론에서 본부를 차렸다. 이내 그의 동료들은 그를 새 유다 왕국의 임금으로 선포했다. 유다는 대체로 히브리인이 아닌 요소―켄ㆍ갈렙ㆍ예부스 및 기타 가나안 족속―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유목민―양 치는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히브리인의 토지 소유 관념에 충실했다. 그들은 사막에 사는 씨족들의 이념을 지니고 있었다.
97:9.8 (1072.6) 신성한 역사와 세속의 역사의 차이점은 다윗 임금을 만드는 것에 관하여 구약에서 발견되는 두 가지 다른 이야기가 잘 설명해 준다. 그의 직계 추종자들이 (그의 군대가) 어떻게 그를 임금으로 만들었는가 하는 세속 이야기의 일부가 사제들이 만든 기록에 뜻하지 않게 남게 되었다. 이들은 나중에 신성한 역사에 관하여 길고도 지루한 설명을 준비했고, 거기에는 사무엘 선지가 신의 지시로 어떻게 다윗을 그의 형제들 사이에서 골랐는가, 공식으로 진행하여 정교하고 엄숙한 예식에 따라서 히브리인의 임금이 되도록 그에게 기름을 부었고, 그리고 나서 그를 사울의 후계자로 선포했는가 그려져 있다.
97:9.9 (1072.7) 아주 여러 번 사제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가진 기적같은 거래에 관하여 지어낸 이야기를 준비한 뒤에, 그 기록에 이미 남아 있던 평범하고 사실에 관계되는 언급을 완전히 없애지 못했다.
97:9.10 (1072.8) 다윗은 처음에 사울의 딸, 다음에는 부유한 에돔 사람 나발의 과부, 그 다음에는 게수르의 임금 탈마이의 딸과 결혼함으로, 정치적으로 자신을 키우려고 애썼다. 그는 힛 족속인 아내 밧세바는 말할 것도 없고, 예부스의 여인들로부터 여섯 아내를 골랐다.
97:9.11 (1073.1) 그런 방법으로 그런 민족으로부터, 다윗은 에브라임 족속의 이스라엘 왕국, 사라지는 북쪽 왕국의 유산과 전통을 이어받은 신성한 유다 왕국이라는 허구를 만들었다. 다윗이 거느린 유다의 국제적 부족은 유대인이기보다 오히려 이방인이었다. 그런데도 에브라임의 억압받은 장로들이 내려와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을 만들었다.” 군사적 위협이 있은 뒤에, 다윗은 그때 예부스 족속과 조약을 맺었고, 연합 왕국의 서울을 예부스(예루살렘)에 세웠는데, 이곳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중간 지점에 튼튼히 담을 쌓은 도시였다. 필리스티아 족속이 흥분했고 곧 다윗을 공격했다. 치열한 전투가 있은 뒤에 그들을 물리쳤고, 다시 한 번 야웨는 “만군의 주 하나님”으로 자리를 잡았다.
97:9.12 (1073.2) 그러나 야웨는 어쩔 수 없이 가나안의 신들과 이 영광을 얼마큼 나누어야 했는데, 다윗 군대의 대부분이 히브리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 기록에 (유다의 편집자들이 놓쳐서) 내막을 드러내는 이 말이 나타난다: “야웨가 내 앞에서 내 적들을 부수었도다. 그런즉 그는 그곳의 이름을 바알 페라짐이라 불렀더라.”[2] [1761] 다윗의 병사들 가운데 80퍼센트가 바알의 신도였기 때문에 그들은 이렇게 했다.
97:9.13 (1073.3) 기브온 족속은 에브라임 족속과 평화 조약을 맺었는데, 사울은 가나안 도시 기브온을 쳤다, 이 때문에 야웨가 그를 버렸다고 지적함으로 사울이 길보아에서 졌다고 다윗은 설명했다. 사울의 시절에도 다윗은 필리스티아 족속에 대항하여 가나안 도시 케일라를 방어했고, 다음에 자기 서울을 한 가나안 도시에 정했다. 가나안 족속과 화해하는 정책과 걸음을 맞추어, 다윗은 사울의 후손 일곱 명을 교수대에 달리도록 기브온 족속에게 넘겨주었다.
97:9.14 (1073.4) 필리스티아 족속을 물리친 뒤에 다윗은 “야웨의 상자”를 손에 넣었고, 예루살렘으로 가져 와서, 그의 왕국에서 공식으로 야웨를 숭배하게 하였다. 다음에 그는 이웃 부족들―에돔 족속, 모압 족속, 암몬 족속, 시리아인―에게 무거운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97:9.15 (1073.5) 다윗의 부패한 정치 조직은, 히브리인의 도덕 관습에 어긋나게, 북쪽에서 땅의 개인 소유를 시작했고, 필리스티아 족속이 이전에 거두었던 카라반 관세를 대번에 장악했다. 그리고 나서 유리아를 결국 죽인 일련의 끔찍한 일들이 생겼다. 모든 사법(司法) 상소는 예루살렘에서 판결되었고, “장로”들은 이제 더 판결을 내릴 수 없었다. 반란이 터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압살롬을 선동자로 부를지 모른다. 그의 어머니는 가나안 사람이었다. 밧세바의 아들―솔로몬―외에도 왕좌를 얻으려고 다투는 자가 여섯이나 있었다.
97:9.16 (1073.6) 다윗이 죽은 뒤에 솔로몬은 모든 북쪽 세력의 정치 조직을 없애버렸지만, 아버지의 체제에 있던 모든 폭정과 세금을 계속하였다. 솔로몬은 사치스런 왕궁과 공들인 건축 사업으로 나라를 파산시켰는데, 레바논의 집, 파라오 딸의 궁전, 야웨의 성전, 임금의 궁전, 그리고 많은 도시의 담을 개축하는 공사가 있었다. 솔로몬은 거창한 히브리인의 해군을 만들었고, 시리아인 뱃사람들이 이를 운영하고 온 세계와 무역하였다. 그의 후궁들은 거의 1천 명에 이르렀다.
97:9.17 (1073.7) 이때가 되자 실로에 있던 야웨의 성전은 신용을 잃었고, 나라의 모든 숭배는 예부스에, 화려한 왕실 예배당에 집중되었다. 북쪽 왕국은 엘로힘을 숭배하는 쪽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파라오의 은혜를 누렸고, 파라오들은 나중에 유다를 노예로 만들고 남쪽 왕국이 조공을 바치게 했다.
97:9.18 (1073.8)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에는 풍파가―여러 번 전쟁이―있었다. 4년 동안 내란이 있고 세 왕조(王朝)가 지난 뒤에, 이스라엘은 땅을 사고 팔기 시작한, 도시의 전제 군주의 통치를 받았다. 오므리 왕조차 세메르의 토지를 사려고 했다. 그러나 샬마니저 3세가 지중해 바닷가를 장악하려고 작정했을 때, 종말이 다가왔다. 에브라임의 아합 임금은 다른 열 집단을 모아서 카르카르에서 저항했고, 그 싸움은 무승부였다. 아씨리아인은 제지되었지만, 연합군은 많은 사람을 잃었다. 이 큰 싸움은 구약에 언급되지도 않았다.
97:9.19 (1074.1) 아합 임금이 나봇한테서 땅을 사려고 했을 때 새로이 문제가 터졌다. 그의 페니키아인 아내는 나봇이 “엘로힘과 임금”의 이름을 모독했다는 죄명으로 나봇의 땅을 몰수할 것을 지시하는 서류에, 아합의 이름을 위조했다. 나봇과 그의 아들들은 재빨리 집행되었다. 활기에 찬 엘리야가 그 장면에 나타나서 아합이 나봇 가족을 죽인 것을 비난하였다. 가장 큰 선지자들 가운데 하나인 엘리야는, 땅을 파는 바알파의 태도에 대항하여, 시골을 정복하려는 도시의 시도에 맞서, 옛 토지 관습의 수호자로서 이처럼 그의 가르침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마리아에 있던 바알 선지자(부동산 대리인)들을 죽이려고 시골의 지주 예후가 집시의 족장 예호나답과 합세하기까지 그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
97:9.20 (1074.2) 예호아하스와 그 아들 예로보암이 이스라엘을 적들로부터 구원하자, 새 생활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때가 되자 어느 악당 귀족이 사마리아에서 다스렸고, 그의 약탈 행위는 옛 시절의 다윗 왕조에 필적했다. 국가와 교회는 손을 잡고 따라갔다. 언론의 자유를 누르려는 시도는 엘리야ㆍ아모스ㆍ호세아로 하여금 비밀 기록을 시작하게 만들었고, 이것이 유대교와 기독교 성경의 진짜 시작이었다.
97:9.21 (1074.3) 그러나 이스라엘 왕이 에집트 왕과 계교를 꾸미고 아씨리아에 더 조공 바치기를 거절할 때까지, 북쪽 왕국은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3년 동안 포위가 시작되었고, 뒤이어 북쪽 왕국이 온통 분산되었다. 이렇게 에브라임(이스라엘)은 사라졌다.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더한다”고 이사야가 말한 것 같이, 유다―유대인, “이스라엘의 자투리”―는 몇 사람의 손에 토지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내, 야웨의 성전과 나란히, 바알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생겼다. 이 공포의 통치는 소년 임금 요아스가 이끈 일신교 폭동으로 인하여 막을 내렸고, 그는 35년 동안 야웨를 위한 투쟁을 벌였다.
97:9.22 (1074.4) 다음 임금 아마시아는 세금을 내고 항거하는 에돔 족속 및 그 이웃들과 문제가 있었다. 큰 승리를 거둔 뒤에 그는 북쪽에 있는 이웃들을 치려고 등을 돌렸고, 똑같이 큰 패배를 맛보았다. 그리고 나서 시골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임금을 살해하고 그의 열여섯 살 난 아들을 왕좌에 앉혔다. 이 사람이 아자리아였고, 이사야는 그를 웃시야라 불렀다. 웃시야 이후에, 형편은 더욱 나빠졌고, 유다는 아씨리아 임금들에게 조공을 바침으로 1백 년 동안 존재했다. 첫 이사야는 예루살렘이 야웨의 도시이니까,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서슴지 않고 예루살렘이 망하리라고 선포했다.
97:9.23 (1074.5) 소년 임금 마낫세의 통치 밑에서 활동하던, 썩고 부유한 정치가 일당이 유다의 진짜 파멸을 가져왔다. 변화하는 경제는 바알 숭배가 돌아오는 것을 유리하게 만들었고, 바알의 개인 토지 거래는 야웨의 이념에 어긋났다. 아씨리아의 멸망과 에집트의 우세는 한동안 유다에게 구원을 가져왔고, 시골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았다. 요시아 밑에서 그들은 예루살렘의 썩어빠진 정치가 일당을 격퇴하였다.
97:9.24 (1074.6) 그러나 바빌론에 대항하여 아씨리아를 도우려고 네코의 막강한 군대가 에집트에서부터 바닷가를 따라 올라오자, 요시아가 나가서 감히 그 군대를 가로막으려고 했을 때, 이 시대는 비극의 막을 내렸다. 그는 소탕되어 버렸고, 유다는 에집트에 조공을 바치는 처지로 떨어졌다. 바알의 정당이 예루살렘에서 다시 권력을 잡았고, 이처럼 진짜 에집트 종살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서 바알 정치가들이 궁전과 사제를 모두 장악한 시기가 뒤따랐다. 바알 숭배는 토지의 비옥함과 상관될 뿐 아니라, 재산권을 다루는 경제 및 사회 제도였다.
97:9.25 (1075.1) 느부갓네살이 네코를 타도한 뒤에, 유다는 바빌론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10년의 유예 기간을 주었으나 곧 반란을 일으켰다. 느부갓네살이 그들을 치려고 왔을 때, 유다 족속은 야웨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노예 해방과 같은 사회 개혁을 시작했다. 바빌로니아 군대가 잠시 물러났을 때, 히브리인은 개혁의 마술이 그들을 구원했다고 기뻐했다. 이 기간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멸망이 다가오는 것을 일러 주었고, 대번에 느부갓네살이 돌아왔다.
97:9.26 (1075.2) 그래서 유다의 종말은 갑자기 다가왔다. 도시는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야웨와 바알의 싸움은 포로 생활로 끝이 났다. 포로 생활은 이스라엘의 자투리에게 충격을 주어 일신교로 몰았다.
97:9.27 (1075.3) 바빌론에서 유대인은 그들이 특별한 사회 및 경제 관습을 가졌으니까 팔레스타인에서 작은 집단으로서 존재할 수 없고, 그들의 이념이 이기려면 이방인을 개종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처럼 운명에 관한 새로운 개념―유대인은 야웨가 선택한 종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싹텄다. 구약의 유대 종교는 정말로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에 생성되었다.
97:9.28 (1075.4) 불멸의 교리도 또한 바빌론에서 모습을 갖추었다. 유대인은 미래 생활의 개념이 그들이 사회 정의의 복음을 강조하는 것을 깎아 내린다고 생각했다. 이제 처음으로 신학이 사회학과 경제학을 밀어냈다. 종교가 정치ㆍ사회학ㆍ경제학으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어야 하는, 인간의 생각 및 행동 체계로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97:9.29 (1075.5) 그래서 유대 민족에 관한 진실은 신성한 역사로 여겨 왔던 많은 것이 평범한 세속 역사를 적은 연대기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낸다. 유대교의 토양으로부터 기독교가 자라났지만, 유대인은 기적의 민족이 아니었다.
97:10.1 (1075.6) 이스라엘 족속의 지도자들은, 특별히 관대한 대우를 받고 신의 은총을 독점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에 만물을 지배하는 유일한 하나님의 진리를 들고 가는 특별한 수고를 하라고 선택된 백성이라고 그들을 가르쳤다. 그들이 이 운명을 성취하고자 하면, 모든 민족에게 영적 지도자가 되리라, 오시는 메시아는 그들과 온 세계 위에 평화의 왕으로서 군림하리라고 이 지도자들은 전에 유대인들에게 약속했다.
97:10.2 (1075.7) 페르시아인이 유대인을 해방했을 때, 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서 오직 사제(司祭)가 지배하는 율법ㆍ희생물ㆍ의식의 규율에 묶이게 되었을 뿐이다. 희생물을 바치고 속죄하는 의식을 지지하느라고 히브리 씨족들이 모세가 작별 웅변에서 제시한 놀라운 하나님 이야기를 물리친 것 같이, 이 히브리 민족의 잔재는 성장하는 사제층의 규율ㆍ규칙ㆍ의식을 지지하여 둘째 이사야의 훌륭한 개념을 물리쳤다.
97:10.3 (1075.8) 민족의 자기 본위, 메시아의 오심을 오해한 거짓 믿음, 사제층의 늘어나는 속박과 폭정은 (다니엘ㆍ에스겔ㆍ학개ㆍ말라기를 제외하고) 영적 지도자들로 하여금 언제까지나 입을 다물게 하였다. 그날부터 세례자 요한의 시절까지, 온 이스라엘은 영적 후퇴가 심해지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러나 유대인은 우주의 아버지 개념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리스도 뒤 20세기에 이르기까지도, 그들은 이 신 개념을 줄곧 따랐다.
97:10.4 (1076.1)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까지 일신교의 횃불을 넘겨 준 충실한 선생들이 끊이지 않고 모세로부터 세례자 요한까지 이어졌고, 한편 그들은 절제 없는 통치자들을 그침 없이 꾸짖고, 종교를 상업화하는 사제들을 비난하고, 최고의 야웨,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의 숭배를 고수하라고 사람들에게 늘 타일렀다.
97:10.5 (1076.2) 한 국가로서, 결국 유대인은 정치적 신분을 잃었지만, 하나인 우주의 하나님을 성실하게 믿는 히브리 종교는 흩어진 유랑자들의 가슴 속에 줄곧 살아 있다. 이 종교가 살아남은 것은 그것이 추종자들의 가장 높은 가치 기준을 보존하도록 효과 있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유대 종교는 한 민족의 이상을 보존했지만, 진리의 영역에서 진보를 육성하고 철학으로 창조적 발견을 북돋지 못했다. 유대 종교는 많은 결함이 있었다―철학이 모자랐고 미학적 성질이 거의 빠져 있었다―하지만 도덕적 가치를 보존했고, 따라서 지속하였다. 다른 신 개념들과 비교해서, 최고의 야웨는 뚜렷하고, 선명하고, 개인적이고 도덕이 있었다.
97:10.6 (1076.3) 유대인은 거의 아무 민족도 따른 적이 없을 정도로, 정의ㆍ지혜ㆍ진리ㆍ올바름을 사랑했지만, 신의 이러한 성질을 지적으로 파악하고 영적으로 이해하는 데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적게 기여하였다. 히브리 신학은 성장하고 싶어 하지 않았어도, 다른 두 세계 종교, 기독교와 모하메드교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7:10.7 (1076.4) 유대 종교는 또한 그 제도 때문에 버티었다. 고립된 개인들의 사사로운 관습으로서 종교가 살아남기는 어렵다. 이것은 늘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이었다. 제도화된 종교의 잘못을 보고서, 그들은 집단 활동의 기법을 없애려 한다. 모든 의식을 없애는 대신에, 의식(儀式)을 개혁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이 점에서 에스겔은 같은 시대의 사람들보다 더 지혜가 있었다.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주장하는 데 그들과 합세했지만, 그는 또한 우수하고 정화(淨化)된 의식을 충실히 지키는 관행을 확립하는 데 손을 댔다.
97:10.8 (1076.5) 이처럼 연달아 이스라엘의 선생들은, 일찍이 유란시아에서 있었던 종교의 진화에서 가장 큰 공적을 이루었다: 폭발하는 시나이 화산의 신령, 시샘하는 잔인한 신령, 야만스러운 악귀 야웨라는 미개한 개념으로부터, 나중에 고상하고 하늘 같은 최고의 야웨 개념, 만물의 창조자요, 사랑이 가득하고 자비로운, 온 인류의 아버지 개념이 되기까지 점진적이지만 계속된 변화가 있었다. 히브리인의 이 하나님 개념은 그의 아들, 네바돈 미가엘이 친히 주신 가르침과 일생의 본보기로 인하여 더욱 커지고 아주 아름답게 확대될 때까지, 우주의 아버지를 인간이 가장 높게 상상한 것이었다.
98:0.1 (1077.1) 멜기세덱의 가르침은 여러 길을 따라서 유럽으로 들어갔지만, 주로 에집트를 거쳐서 왔고, 철저하게 헬라화되고 나중에 기독교화된 뒤에 서양 철학에 담기게 되었다. 서양 세계의 이상은 기본적으로 소크라테스를 따랐고, 후일에 그 종교 철학은, 진화하는 서양 철학 및 종교와 접촉하여 수정되고 절충된 대로 예수의 종교 철학이 되었으며, 서양의 종교와 철학은 모두 결국 기독교 교회를 낳았다.
98:0.2 (1077.2) 살렘 선교사들은 유럽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계속하였고, 이것은 이따금 생겨난 많은 종파와 예식을 치르는 집단 속에 차츰 흡수되었다. 가장 순수한 형태로 살렘의 가르침을 유지한 자들 중에서 견유학파를 언급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것을 외치는 이 설교자들은 그리스도 이후 1세기에 로마인의 유럽에서 아직 활동하고 있었고, 새로 형성되는 기독교 속에 나중에 통합되었다.
98:0.3 (1077.3) 서양에서 허다한 군사 전투에서 싸웠던 유대인 용병(傭兵)들이 유럽에서 살렘 교리의 많은 부분을 퍼뜨렸다. 고대에 유대인은 신학의 특수성만큼, 군사적 용맹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98:0.4 (1077.4) 그리스 철학, 유대 신학, 기독교 윤리에서 기본 신조는 근본적으로, 더 이전에 있었던 멜기세덱의 가르침의 영향이었다.
98:1.1 (1077.5) 살렘의 선교사들이 임명시의 서약을 엄격하게 풀이하지 않았더라면, 그리스인 사이에서 큰 종교적 구조를 세웠을지 모른다. 마키벤타가 지워 준 이 서약은 순전히 예배를 위한 모임의 조직을 금하였고, 각 선생에게 결코 사제로서 활동하지 말고, 종교적 서비스 때문에 결코 돈을 받지 말고, 오직 먹을 것, 옷, 잠자리를 받는다는 약속을 강요하였다. 멜기세덱 선생들이 헬라 시대[1] [1762] 이전의 그리스에 파고들었을 때, 그들은 아담손의 전통과 안드 족속의 절기를 아직도 간직한 민족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그리스의 바닷가에 도착한 점점 늘어나는 열등한 노예 떼가 가졌던 개념과 관념에 크게 오염되었다. 이 혼합은 피비린내 나는 의식과 함께, 투박한 물활론(物活論)으로 복귀하게 만들었고, 하층 계급들은 사형 선고받은 죄수들의 집행을 예식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98:1.2 (1077.6) 살렘 선생들의 초기 영향은 남부 유럽과 동방으로부터 이른바 아리아인의 침공을 받아서 거의 없어졌다. 이 헬라인 침공자들은 아리아인 동포가 인도로 가져간 것과 비슷하게, 사람 모습을 닮은 하나님 개념을 가져왔다. 이 개념의 도입은 그리스인의 신과 여신(女神) 가족의 진화를 시작하였다. 이 새 종교는 흘러 들어오는 미개한 헬라인 종파에 일부 기초를 두었지만, 또한 더 오래 전에 그리스에 살던 자들의 신화를 함께 가졌다.
98:1.3 (1078.1) 헬라 시대의 그리스인은 대체로 어머니 숭배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고 있음을 발견하였고, 이 민족들에게 자기네 인신(人神) 댜우스 또는 제우스를 강제했다. 최고신교를 믿는 셈 족속 사이에 있던 야웨처럼, 그는 이미 그리스의 하급 신들의 만신전 전체에서 우두머리가 되었다. 운명이 전체를 통제한다는 생각을 버렸더라면, 그리스인은 제우스 개념에서 참 일신교를 궁극에 이룩했을 것이다. 최종의 가치를 가진 하나님은 자신이 숙명의 중재자요 운명의 창조자이어야 한다.
98:1.4 (1078.2) 종교의 진화에서 이 요인들의 결과로서 올림푸스 산의 태평한 신들을 믿는 유행 관념이 즉시 개발되었다. 이 신들은 신보다 사람에 더 가까웠고, 총명한 그리스인은 결코 이 신들을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자신들이 만들어 낸 이 신들을 크게 사랑하거나 크게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제우스에 대해, 그리고 반인(半人) 반신(半神) 집단에 대하여 애국심과 민족적 느낌을 가졌지만, 그들이 도저히 이 신들을 모시거나 숭배했다고 할 수 없다.
98:1.5 (1078.3) 헬라인은 초기의 살렘 선생들의 반(反)사제 신조에 흠뻑 빠져 있어서, 하찮은 사제라도 전혀 그리스에서 생기지 않았다. 형상을 신들에게 만들어 바치는 것도 숭배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의 일이 되었다.
98:1.6 (1078.4) 올림푸스의 신들은 사람이 만든, 사람 모습의 신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는 윤리보다 미학을 담고 있다. 그리스의 종교는 한 신 집단이 다스리는 우주를 묘사했기 때문에 유익했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도덕ㆍ윤리ㆍ철학은 이내 신 개념을 훨씬 넘어서 진보했고, 지적 성장과 영적 성장의 이러한 불균형은 인도에서 입증되었다시피, 그리스에 위험했다.
98:2.1 (1078.5) 사람이 가볍게 여기는 피상적 종교는 특히 그 형태를 육성하고 신봉자들의 마음을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채워 줄 사제가 없을 때, 오래 버틸 수 없다. 올림푸스 산의 종교는 구원을 약속하지 않았고, 신자들의 영적 목마름을 채워 주지도 않았다. 따라서 멸망할 운명이었다. 생긴 지 1천 년 안에 이 종교는 거의 사라졌고, 그리스인은 민족 종교가 없이 지냈으며, 올림푸스 산의 신들은 상급 지성인에게 위력을 잃었다.
98:2.2 (1078.6) 이것이 동양과 레반트가 영적 의식(意識)의 부활을 겪고 일신교를 인식하려고 새로이 눈떴을 때 그리스도 이전 6세기를 지배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서양은 이 새로운 발전에 함께 하지 않았다. 유럽도 북 아프리카도 이 종교 부흥에 널리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스인은 훌륭한 지적 진보에 착수하였다. 비로소 두려움을 이기고 그 해독제로서 이제 더 종교를 찾지 않았지만, 그들은 참 종교가 혼의 갈급함, 영적 불안, 도덕적 절망에 약인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깊이 생각에 빠져―철학과 형이상학 속에―혼의 위안을 찾으려 했다. 자아의 보존―구원―을 숙고하다가 자아의 실현과 자아의 이해로 눈을 돌렸다.
98:2.3 (1078.7) 엄밀하게 사고함으로 그리스인은 살아남는다는 믿음의 대용품으로 쓰일 평안을 의식(意識)하려고 애썼지만, 그들은 철저히 실패했다. 오로지 헬라 민족들의 상류 사회에서 지식 계급이 이 새로운 가르침을 깨우칠 수 있었다. 옛 세대 노예의 후손인 하층 계급은 종교를 대신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었다.
98:2.4 (1079.1) 거의 모든 철학자가 “우주의 지능,” “하나님의 생각,” “큰 근원”을 가르친 살렘 교리의 신앙 배경에 허술하게 매달려 있었는데도, 그들은 온갖 형태의 숭배를 업신여겼다. 신다운 자와 유한을 초월하는 자를 인정하는 한,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솔직하게 일신교를 믿었다. 그들은 올림푸스 산에 있는 신ㆍ여신들 모임 전체를 그다지 인정하지 않았다.
98:2.5 (1079.2) 5세기와 6세기의 그리스 시인들, 특히 핀달은 그리스의 종교를 개혁하려고 애썼다. 그리스 종교의 이상을 높였지만, 그들은 종교가가 아니라 예술가였다. 최상의 가치 기준을 기르고 보존하는 기법을 개발하지 못했다.
98:2.6 (1079.3) 크세노파네스는 유일한 하나님을 가르쳤지만, 그의 신 개념은 필사 인간에게 친히 아버지가 되기에 너무나 범신적이었다. 첫째 원인, 시초 지성을 인정한 것을 제쳐놓고, 아낙사고라스는 기계론자였다. 소크라테스와 그 후계자, 곧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는 것은 미덕이요, 선한 것은 혼이 건강함을 말하며, 남을 부당하게 대하는 것보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낫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그릇되다, 신들은 지혜롭고 선하다고 가르쳤다. 그들의 주요한 미덕은 지혜ㆍ용기ㆍ절제ㆍ정의였다.
98:2.7 (1079.4) 헬라 종족과 히브리 종족 사이에서 종교 철학의 진화는 문화적 진보의 모습을 결정하는 하나의 제도로서, 교회의 기능을 대조해서 보여준다. 팔레스타인에서 인간의 생각은 너무 사제의 통제를 받고 성서에 지배되었기 때문에, 철학과 미학이 통째로 종교와 도덕 속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그리스에서 사제와 “신성한 기록”이 거의 완전히 없었던 것은 인간의 정신을 해방하고 자유롭게 만들었으며, 깊은 생각이 놀랍게 발전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개인의 체험으로서, 종교는 우주의 성질과 실체를 파고드는 지적 탐구와 발걸음을 맞추지 못했다.
98:2.8 (1079.5) 그리스에서 신앙은 생각에 종속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생각은 신앙의 지배를 받았다. 기독교가 장점이 많은 것은 히브리인의 도덕과 그리스인의 사상으로부터 많이 빌려 왔기 때문이다.
98:2.9 (1079.6) 팔레스타인에서 종교적 교리는 너무나 구체화되어 계속된 성장을 위협하였다. 그리스에서 인간의 생각은 너무 추상적이 되어, 하나님 개념은 분해되어 범신적 추측으로 인하여 뿌연 망상이 되었고, 이것은 브라만 철학자들이 생각한 비성격인 무한자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98:2.10 (1079.7) 그러나 이 시절에 보통 사람들은 자아의 실현과 추상적 신을 가르치는 그리스 철학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그다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기도를 들을 수 있는, 친히 상대하는 하나님과 함께, 구원받는다는 약속을 몹시 바랐다. 그들은 철학자들을 추방하고 살렘 종파의 잔재를 박해했으며, 이 두 신조가 많이 섞이게 되었고, 끔찍한 탐닉에 빠져 신비 종파들의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려고 준비하였고, 신비교는 그때 지중해의 여러 나라에서 번지고 있었다. 엘레우시스의 비밀 의식이 올림푸스 산의 만신전 안에서 성장했고, 이것은 그리스판의 다산(多産) 숭배였다. 디오니수스의 자연 숭배가 번성했다. 그 종파들 가운데 가장 나은 것은 오르페우스 단체였는데, 그 도덕적 설교와 구원을 준다는 약속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끌었다.
98:2.11 (1080.1) 구원에 이르는 이 새 방법, 감정적이고 불 같은 이 예식에 온 그리스가 말려들었다. 어떤 나라도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높은 예술적 철학에 다다른 적이 없다. 실질적으로 신이 없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약속이 전혀 없이, 그러한 진보된 윤리 체계를 아무도 일찍이 만든 적이 없다. 바로 이 그리스 종족들이 신비교의 미친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어느 나라도 그렇게 빨리, 깊게, 맹렬히 그렇게 깊은 지적 침체, 도덕적 결핍, 영적 빈곤으로 곤두박질하지 않았다.
98:2.12 (1080.2) 종교는 철학의 뒷받침 없이 오래 견디어 왔지만, 거의 아무 철학도 자체만으로 얼마큼 종교 편에 서지 않고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철학과 종교의 관계는 생각과 행동의 관계와 같다. 그러나 인간의 이상적 상태는 철학ㆍ종교ㆍ과학이 지혜ㆍ믿음ㆍ체험의 합쳐진 행위로 인하여, 하나의 의미 있는 통일체 속으로 용접되는 것이다.
98:3.1 (1080.3) 가족 신들을 숭배하는 예전의 종교 형태로부터 부족이 전쟁의 신 마르스를 섬기는 것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라틴 족속이 후일에 가졌던 종교는 그리스인과 브라만들의 지적 체계나 또는 몇몇 다른 민족이 가졌던 좀더 영적인 종교보다, 오히려 정치적 준수에 가까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98:3.2 (1080.4) 그리스도 이전 6세기에 멜기세덱의 복음이 크게 일신교의 부흥을 겪는 가운데, 너무 적은 수의 살렘 선교사들이 이탈리아에 침투했고, 침투한 사람들은 급속히 퍼지는 에투루리아 사제, 그리고 새 집단의 신과 성전의 영향을 이겨낼 수 없었으며, 이 모두가 로마의 국가 종교로 조직되었다. 라틴 부족들의 이 종교는 그리스인의 종교처럼 시시하거나 돈으로 움직일 수 없었고, 히브리인의 종교처럼 엄격하거나 전제적이지 않았다. 그 종교는 대체로 단순한 형식ㆍ맹세ㆍ금기를 지키는 일이었다.
98:3.3 (1080.5) 로마인의 종교는 그리스로부터 널리 문화를 도입한 데 크게 영향을 받았다. 결국 올림푸스 산의 신들의 대부분은 라틴 부족의 만신전으로 옮겨지고 통합되었다. 그리스인은 오랫동안 가족 화로의 불을 숭배했다―헤스티아는 화로의 처녀 여신이었다. 베스타는 로마인이 믿는, 집의 여신이었다. 제우스는 주피터, 아프로디테는 비너스가 되었고, 올림푸스 산의 많은 신이 이런 식으로 바뀌었다.
98:3.4 (1080.6) 로마의 젊은이들이 치르는 종교 입회식은 국가 봉사에 엄숙하게 헌신하는 계제였다. 선서와 시민권 부여는 실제로 종교 예식이었다. 라틴 종족들은 성전ㆍ제단ㆍ성소(聖所)를 유지했고, 위기에 신탁을 묻곤 했다. 영웅들의 뼈, 나중에는 기독교 성자들의 뼈를 보존했다.
98:3.5 (1080.7) 그리스인의 상당히 지적이고 예술적 숭배가 신비 종파들의 맹렬하고 대단히 감정적인 숭배 앞에 굴복한 것처럼, 형식을 찾고 감동이 없는 이 형태의 준종교적 애국심은 망할 운명을 가졌다. 이 지독한 종파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신비 종교인 하나님의 어머니 종파였는데, 그 시절에 로마에 현재 성 베드로 교회 바로 그 자리에 본부가 있었다.
98:3.6 (1080.8) 태어나는 로마 국가는 정치적으로 정복했지만, 한편 에집트ㆍ그리스ㆍ레반트의 종파ㆍ의식ㆍ신비ㆍ신 개념들에게 정복되었다. 이 수입된 종파들은 아우구스투스 시절까지 로마 국가 전역에 걸쳐 계속 번성했고, 아우구스투스는 순전히 정치적 이유와 국가적 이유로 신비교들을 퇴치하고 예전의 정치적 종교를 부활하려고 영웅다운 노력을 했으며 얼마큼 성공했다.
98:3.7 (1081.1) 국가 종교를 받드는 사제들 중에 하나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유일한 하나님, 모든 초자연 존재들을 주관하는 최종의 신 교리를 퍼뜨리려고 살렘의 선생들이 먼저 시도한 일이 있었다고 일러 주었다. 이 생각은 그 황제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그래서 그는 많은 성전을 짓고 성전을 아름다운 우상으로 가득 채웠으며, 국가의 사제직을 다시 조직하고, 국교(國敎)를 다시 세우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대사제로 행동하도록 임명했다. 그리고 황제로서 자신이 최고의 신이라고 서슴지 않고 선포했다.
98:3.8 (1081.2) 아우구스투스를 숭배하는 이 새 종교는 번성했고, 이것은 팔레스타인, 곧 유대인의 고향을 제외하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제국에서 두루 신봉되었다. 이 인간 신들의 시대는 공식 로마 종파가 스스로 높인 인간 신을 40명이 넘게 기록부에 가졌을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들 모두가 기적으로 태어나고 다른 초인간 속성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98:3.9 (1081.3) 열심 있는 설교자 집단, 즉 견유학파가 줄어드는 살렘 신자 무리의 마지막 저항이었고, 견유학파는 로마인들에게 거칠고 의미 없는 종교 의식을 버리고 멜기세덱의 복음을 담는 예배 형태로 돌아가라고 훈계했는데, 그 복음은 이전에 그리스 철학과 접촉함으로 수정되고 오염되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견유학파를 물리쳤다. 그들은 신비교 의식에 푹 빠지기를 더 좋아했는데, 신비교는 개인이 구원받는 희망을 주었을 뿐 아니라, 유흥ㆍ흥분ㆍ오락을 바라는 욕구도 또한 채워 주었다.
98:4.1 (1081.4) 그리스와 로마 세계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원시 가족의 종교와 국가 종교를 잃어버렸고, 그리스 철학의 뜻을 이해할 수 없거나 기꺼이 이해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에집트와 레반트에서 온, 볼 만하고 감동적인 여러 신비교에 눈을 돌렸다. 서민들은 구원받는다는 약속―오늘 종교적 위로를 받고 죽은 뒤에 불멸한다는 희망의 보장―을 몹시 바랐다.
98:4.2 (1081.5) 가장 유행하게 된 세 신비교는 다음과 같다:
98:4.3 (1081.6) 1. 쿠벨레와 그 아들 아티스를 믿는 프리지아인의 종파.
98:4.6 (1081.9) 프리지아인과 에집트인의 신비교들은 신의 아들이 (각각 아티스와 오시리스) 죽음을 겪고 신의 힘으로 부활되었으며, 나아가서 신비교에 적절히 입교하고, 신의 죽음과 부활 기념일을 경건하게 축하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함으로 그의 신다운 성품과 불멸을 함께 하는 자가 되리라고 가르쳤다.
98:4.7 (1081.10) 프리지아인의 예식은 무게가 있었지만 품위를 떨어뜨렸다. 피 흘리는 그들의 축제는 이 레반트 신비교들이 얼마나 질이 떨어지고 원시적이 되었는가를 가리킨다. 가장 거룩한 날은 검은 금요일, “피의 날”이었고, 이것은 아티스가 자초하여 죽은 것을 기념했다. 아티스의 희생과 죽음을 사흘 동안 축하한 뒤에, 축제는 그가 다시 살아난 것을 기념하여 기쁨으로 바뀌었다.
98:4.8 (1082.1) 이시스와 오시리스를 숭배하는 의식은 프리지아인의 제사보다 더 세련되고 인상적이었다. 이 에집트인의 의식은 옛날 나일 강 신의 전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 신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이 개념은 식물이 성장하다가 그치는 일이 해마다 되풀이되고, 그 뒤에 봄철에 모든 살아 있는 식물이 되살아나는 것을 관찰한 데서 유래했다. 이 신비교 제사를 준수하는 광란과 예식 때의 방탕한 향연은 신성(神性)을 깨닫는 “열심”으로 이끈다고 생각되었는데, 때때로 아주 구역질나는 것이었다.
98:5.1 (1082.2) 프리지아와 에집트의 신비교들은 결국 모든 신비 종파 가운데 가장 큰 것, 미트라 종파에 무릎을 꿇었다. 미트라 종파는 넓은 범위의 인간 성품에 호소했고, 이전에 있던 두 종파를 차츰 갈아치웠다. 미트라교는 레반트에서 모집한 여러 로마 군단의 선전(宣傳)을 통해서 로마 제국에 퍼졌다. 레반트에서 이 종교가 유행한 것은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이 신앙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새 종교 의식은 먼저 있었던 신비 종파들보다 크게 개선된 것이었다.
98:5.2 (1082.3) 미트라 종파는 이란에서 생겨났고, 조로아스터 추종자들의 호전적 반대가 있었는데도 그 고향에서 오래 버티었다. 그러나 미트라교가 로마에 이를 때가 되자, 이 종파는 조로아스터의 가르침 가운데 많은 것을 흡수하여 크게 개선되었다. 주로 미트라 종파를 통해서, 조로아스터의 종교는 나중에 나타나는 기독교에 영향을 미쳤다.
98:5.3 (1082.4) 미트라 종교는 큰 바위에서 생겨난 호전적 신을 묘사했는데, 그는 용감한 공훈을 세우고, 화살로 맞춘 바위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게 만들었다. 홍수가 일어났고, 이를 피하여 한 사람이 특별히 지어진 배를 타고 달아났으며, 마지막 만찬이 있었는데 이것을 미트라는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 태양신과 함께 축하했다. 이 태양신, 곧 솔 인빅투스는[2] [1763] 조로아스터교의 아우라 마즈다라는 신의 개념이 퇴화한 것이다. 미트라는 태양신이 어둠의 신과 벌인 싸움에서 살아남은, 태양신의 투사로 생각되었다. 미트라는 신화의 신성한 황소를 죽인 것을 인정받아서 불멸하게 되었고, 하늘에 있는 신들 사이에서 인류를 위하여 중재하는 자의 위치로 높아졌다.
98:5.4 (1082.5) 이 종파의 신자들은 동굴과 기타 비밀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고, 찬송을 부르고 마술 주문을 중얼거리며, 희생으로 바친 동물의 고기를 먹고 피를 마셨다. 그들은 하루에 세 번 예배를 드렸고, 주마다 태양신의 날에 특별 예식이 있고, 해마다 미트라 축제, 12월 25일에 전체에서 가장 공들인 행사가 있었다. 성찬을 먹는 것은 영생을 보장했는데, 즉 죽은 뒤에 미트라의 품으로 바로 가서, 거기서 심판하는 날까지 더없는 행복 속에서 머무르는 것이다. 심판하는 날에 미트라의 하늘 열쇠는 충실한 자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파라다이스의 대문을 열고, 다음에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중에서 세례 받지 않은 자들은 모두, 미트라가 지구로 돌아오면 절멸될 것이었다. 남자는 죽으면 재판을 받으려고 미트라의 앞으로 가고, 세상이 끝날 때 미트라는 모든 죽은 자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마지막 심판을 받게 하리라고 가르쳤다. 사악한 자는 불로 멸망하고, 올바른 자는 미트라와 언제까지나 군림하리라는 것이다.
98:5.5 (1082.6) 처음에 이것은 남자만을 위한 종교였고, 신자들이 일곱 가지 다른 계급으로 입문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신자의 아내와 딸들이 큰 어머니의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고, 이 성전은 미트라 성전에 인접해 있었다. 여자들의 제사는 미트라의 의식, 그리고 아티스의 어머니 쿠벨레를 믿는 프리지아 종파 예식의 혼합이었다.
98:6.1 (1083.1) 여러 신비교와 기독교가 오기 전에, 개인적 종교는 북 아프리카와 유럽의 문명화된 여러 나라에서 독립된 제도로서 전혀 개발되지 않았다. 종교는 오히려 가족, 도시 국가, 정치와 제국의 일이었다. 헬라 시대의 그리스인은 중앙에 집중된 숭배 체계를 개발시킨 적이 없다. 의식은 지역에 국한되었고, 그들은 사제 계급도 없고 아무런 “신성한 책”도 없었다. 로마인과 비슷하게 그들의 종교 제도는 상급 도덕 및 영적 가치 기준을 보존하기 위하여 강력히 추진하는 매체가 없었다. 종교의 제도화가 보통 그 영적 질을 떨어뜨린 것이 참말이지만, 어떤 종교도 어느 정도, 크던 작던, 제도적 조직의 도움이 없이, 아직까지 살아남지 못했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98:6.2 (1083.2) 따라서 회의파ㆍ견유학파ㆍ쾌락주의파ㆍ금욕주의파의 시절까지,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미트라교와 바울의 새 종교 기독교가 대단한 경쟁을 벌이던 시절까지, 서양의 종교는 시들고 있었다.
98:6.3 (1083.3) 그리스도 이후 3세기에, 미트라교와 기독교의 교회는 겉모습과 의식의 특성이 무척 비슷했다. 그러한 예배 장소의 대부분은 땅 밑에 있었고, 두 종교의 제단 배경은 죄로 저주받은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온 구세주가 고통받는 것을 다양하게 그렸다.
98:6.4 (1083.4)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손가락을 거룩한 물에 담그는 것이 언제나 미트라교 신자들의 관습이었다. 어느 구역에는 한때 두 종교에 속한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 근처에 있는 대다수의 기독교 교회에 이 관습을 들여왔다. 두 종교가 세례를 이용했고, 빵과 포도주로 된 성찬을 먹었다. 미트라와 예수의 인품은 별도로 하고, 미트라교와 기독교의 한 가지 큰 차이점은, 하나는 군국주의를 북돋았고 다른 하나는 지나치게 평화적이었다. (후일에 기독교를 제외하고) 다른 종교들을 묵인한 것이 미트라교의 마지막 파멸을 가져왔다. 그러나 둘 사이의 싸움에서 결정적 요인은 여자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완전히 친교하도록 허락된 것이다.
98:6.5 (1083.5) 결국 이름으로는 기독교 신앙이 서양을 지배했다. 그리스 철학은 윤리적 가치를 가진 개념들, 미트라교는 예배를 준수하는 의식, 그리고 기독교는 그런 자격으로 도덕 기준과 사회적 기준을 보존하는 기법을 제공했다.
98:7.1 (1083.6) 창조 아들은 성난 하나님을 화해시키려고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자신을 유란시아 인류에게 수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 인류가 아버지의 사랑을 인식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도록 설득하려는 것이었다. 결국, 속죄 교리를 부르짖은 그 위대한 주창자도 이 진리를 얼마큼 깨달았는데, 그가 이렇게 선언했기 때문이다: “세상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3] [1764]
98:7.2 (1084.1) 기독교의 기원과 전파를 다루는 것은 이 논문의 범위가 아니다. 기독교가 나사렛 예수라는 인물을 위주로 세워졌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그는 사람으로 육신화한, 네바돈의 미가엘 아들, 유란시아에서는 그리스도, 즉 기름 부어 거룩하게 된 자로 알려졌다. 이 갈릴리 사람을 따르던 자들이 기독교를 레반트와 서양에 두루 퍼뜨렸고, 그들의 선교하는 열심은 아시아에서 같은 시대에 살던 진지한 사람들, 불교를 가르쳤던 선생들 뿐 아니라, 뛰어난 선구자, 곧 셋 족속과 살렘 사람들의 열심에 필적하였다.
98:7.3 (1084.2) 기독교는 하나의 유란시아 신앙 체계로서, 다음의 가르침ㆍ영향ㆍ신앙ㆍ제사, 그리고 개인의 개별적 태도가 복합되어 생겨났다:
98:7.4 (1084.3) 1. 멜기세덱의 가르침, 이것은 지난 4천 년 동안에 생겨난, 서양과 동양의 모든 종교에 기본 요소이다.
98:7.5 (1084.4) 2. 히브리인의 도덕ㆍ윤리ㆍ신학의 체계, 그리고 섭리와 최고의 야웨를 믿는 신앙.
98:7.6 (1084.5) 3. 우주의 선과 악이 싸운다는 조로아스터교의 개념, 이것은 이미 유대교와 미트라교, 양쪽에 자국을 남겨 놓았다. 미트라교와 기독교 사이의 투쟁에 따른 오래 이어진 접촉을 통해서, 이란 선지자의 교리는 예수의 가르침이 헬라화되고 라틴화된 해석판에 담긴 교리ㆍ신조ㆍ우주론을 이루는 신학 및 철학적 모습과 구조를 결정하는 데 유력한 요소가 되었다.
98:7.7 (1084.6) 4. 신비교, 특히 미트라교, 그러나 또한 프리지아 종파에 있는 큰 어머니 숭배. 예수가 유란시아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조차 이란의 구세주이자 영웅 미트라가 기적으로 출생했다는 로마식 해석에 물들게 되었다. 미트라가 땅에 온 것은, 선물을 들고서, 다가오는 이 사건에 관하여 천사들의 통지를 받은 목자, 손꼽을 수 있는 몇 목자들만 구경했다고 생각되었다.
98:7.8 (1084.7) 5. 요셉의 아들 요수아가 인생을 산 역사적 사실,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인 나사렛 예수의 실체.
98:7.9 (1084.8) 6. 타르수스 바울의 개인적 관점. 미트라교는 바울이 소년이었을 때 타르수스에서 지배적 종교였다는 것을 기록해야 한다. 바울은 그가 개종한 사람들에게 좋은 뜻으로 쓴 편지들이 언젠가 후일에 기독교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길 것이라 꿈도 꾸지 않았다. 선의로 쓴 그러한 선생들의 기록을 후세에 이어받은 사람들이 이용한 책임을 그 선생들에게 물어서는 안 된다.
98:7.10 (1084.9) 7.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옥에서부터 그리스를 거쳐 시라큐스와 로마에 이르기까지 지배했던, 헬라 민족들의 철학적 생각. 그리스인의 철학은 당대의 어느 다른 종교 체계보다 바울판의 기독교와 더 조화되었고, 서양에서 기독교의 성공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리스 철학은 바울의 신학과 함께, 아직도 유럽 사람의 윤리적 기초를 이룬다.
98:7.11 (1084.10) 예수의 최초의 가르침은 서양에 파고들자 서양화되었고, 서양화됨에 따라서 모든 민족과 부류의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호소하는 잠재성을 잃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백인종의 사회ㆍ경제ㆍ정치 관습에 잘 적응된 종교가 되어 버렸다. 그것이 예수의 종교가 되기를 그만둔 지 오래다. 하지만 그 가르침의 길을 성실하게 따르려고 애쓰는 그러한 개인들에게 아직도 용감하게, 예수에 관한 아름다운 종교를 묘사한다. 그리스도,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아로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를 영화롭게 만들었지만, 기독교는 주가 친히 가르친 복음, 곧 하나님이 아버지요 모든 사람이 두루 형제라는 것을 대체로 잊어 버렸다.
98:7.12 (1085.1) 이것이 유란시아에서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가르친 것에 관한 긴 이야기이다. 네바돈의 이 비상시 아들이 자신을 유란시아에 수여한 지 거의 4천 년이 된다. 그 기간에 “엘 엘리욘, 최고 하나님의 사제”의 가르침은 모든 종족과 민족에게 파고들었다. 마키벤타는 그 특별 수여의 목적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나타나려고 준비했을 때, 그 하나님 개념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존재했고, 바로 이 하나님 개념은 우주의 아버지의 다채로운 자녀들이 공간에서 회전하는 행성에서 흥미를 자아내는 인생을 잠시 사는 동안, 그들의 생생한 영적 체험 속에서 아직도 새로이 불타고 있다.
99:0.1 (1086.1) 종교가 사회에서 이 세상의 제도와 관련이 가장 적을 때, 종교는 사회에 가장 높은 직무를 이행한다. 지난 시대에, 사회의 개혁이 대체로 도덕 분야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종교는 그 태도를 경제 및 정치 체제에서 생기는 광범위한 변화에 적응하지 않아도 되었다. 종교의 주요한 문제는 정치 및 경제 문화에 존재하는 사회 질서 속에서 악을 선으로 대체하려는 노력이었다. 이처럼 종교는 사회의 기존 질서를 간접으로 영속시키고, 기존하는 부류의 문명을 유지하도록 조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99:0.2 (1086.2) 그러나 종교는 새 사회 질서를 창조하거나 오래 된 질서를 보존하는 데 직접 관여해서는 안 된다. 참된 종교는 사회를 진화시키는 기법으로서 폭력의 사용에 반대하지만, 사회가 자체의 관례를 적응하고, 사회 제도를 새 경제 조건과 문화적 요구에 맞게 조절하려고 지적 노력을 기울이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
99:0.3 (1086.3) 종교는 지난 여러 세기에 때때로 일어난 사회 개혁을 승인했지만, 20세기에 필요 때문에 광범위하고 계속되는 사회 재건에 따른 조정을 직면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생활 조건이 아주 급속히 바뀌어서 제도의 수정은 크게 가속되어야 하고, 그에 따라서 종교는 새롭고 늘 변하는 이 사회 질서에 대하여 자체의 적응을 서둘러야 한다.
99:1.1 (1086.4) 기계의 발명과 지식의 보급은 문명을 수정하고 있다. 문화적 재난을 피하려면 어떤 경제적 조정과 사회의 변화가 절대로 필요하다. 다가오는 이 새 사회 질서는 천년 동안이나 만족하여 정착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변화하고 조정하고 또 다시 조정하는 과정을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 인류는 새롭고 밝혀지지 않은 행성의 운명을 향하여 행진하고 있다.
99:1.2 (1086.5) 종교는 도덕적 안정과 영적 진보를 위하여, 이렇게 늘 조건이 변하고 경제적 조정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 힘차게 활동하는 막강한 영향력이 되어야 한다.
99:1.3 (1086.6) 유란시아의 사회는 결코 지난 시대처럼 안정되기를 바랄 수 없다. 사회라는 배는 확립된 전통의 보호를 받던 만(灣)에서 바깥으로 나왔고, 진화의 운명이 기다리는 거친 바다로 뱃길을 떠났다. 사람의 혼은, 세계 역사에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시피, 도덕 기준이 적힌 해도(海圖)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종교적으로 안내하는 나침반을 참을성 있게 지켜보아야 한다. 사회적 영향으로서, 종교의 최고의 사명은 문명의 한 국면에서 다음 국면으로, 한 문화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넘어가는 이 아슬아슬한 과도기에, 인류의 이상(理想)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99:1.4 (1087.1) 종교는 성취해야 할 새 임무가 전혀 없지만, 새롭고 빨리 변하는 이 모든 인간 상황에 지혜로운 안내자이자 노련한 조언자로서 활동하는 것이 긴급히 요구된다. 사회는 더욱 기계적이고 밀집하고 복잡해지고 있으며, 더욱 중요하게 서로 의존하게 되고 있다. 종교는 새롭고 밀접한 이 상호 관계가 서로 퇴화하거나 파괴적이 되는 것을 방지하도록 작용해야 한다. 종교는 진보의 효소들이 문명의 문화적 맛을 파괴하는 것을 방지하는, 우주의 소금으로서 작용해야 한다. 이 새로운 사회 관계와 경제적 격변은 오직 종교의 봉사로 인하여, 오래 가는 형제 정신을 낳을 수 있다.
99:1.5 (1087.2) 인간적으로 보면, 신이 없는 인도주의는 고상한 손짓이지만, 참 종교는 다른 집단들의 필요와 고통에 대한 한 사회 집단의 민감성을 오랫동안 높일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과거에는 사회의 상층 계급이 무력한 하층이 겪는 고통과 억압에 귀를 막고 있는 동안 제도화된 종교가 수동적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지만, 현대에는 이 낮은 사회 계급이 이제 더, 그렇게 비참하게 무지하지도 않고 그렇게 정치적으로 무력하지도 않다.
99:1.6 (1087.3) 종교는 사회를 다시 건설하고 경제를 다시 조직하는 현세의 일에 유기적으로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종교는 자체의 도덕적 명령과 영적 교훈, 인간의 삶과 초월적 생존에 관하여 진취적 철학을 뚜렷하고 활기 있게 다시 진술함으로, 문명에서 생기는 이 모든 진보와 활발하게 발걸음을 맞추어야 한다. 종교의 정신은 영원하지만, 그 표현 형태는 인간 언어의 사전(辭典)이 수정될 때마다 다시 진술되어야 한다.
99:2.1 (1087.4) 제도가 된 종교는 앞으로 세계에 널리 사회를 다시 건설하고 경제를 다시 조직하는 이 일에 영감을 주고 지도할 수 없으니, 불행하게도 그런 종교가 재건될 운명을 가진 그 사회 질서와 경제 체제에 얼마큼 유기적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몸소 영적 체험으로 얻은 참 종교가 현재 문명의 위기에 유익하게, 창조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99:2.2 (1087.5) 제도가 된 종교는 이제 악순환의 막다른 골목에 갇혀 있다. 그런 종교가 먼저 자체를 다시 만들지 않고는 사회를 재건할 수 없다. 기존 질서에 너무나 빠뜨릴 수 없는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사회가 근본적으로 재건되기까지 그런 종교는 자체를 다시 만들 수 없다.
99:2.3 (1087.6) 종교가는 사회에서, 산업에서, 정치에서 개인으로서 활동해야 하지만, 집단이나 정당이나 기구(機構)로서 활동해서는 안 된다. 종교 활동을 제쳐놓고, 그러한 자격으로 주제넘게 활동하는 종교 집단은 당장에 정당, 경제 조직, 또는 사회 기구가 된다. 집단적 종교 활동은 종교 운동의 육성에 그 노력을 국한해야 한다.
99:2.4 (1087.7) 종교가 종교가들에게 향상된 우주 통찰력을 주었고,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하늘나라에 있는 형제로서 사랑하려는 진지한 소망에서 태어난, 그 우수한 사회적 지혜를 부여한 것을 제외하면, 사회를 재건하는 과제에서 종교가는 비종교가보다 더 가치가 없다. 이상적 사회 질서 속에서는 누구든지 제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한다.
99:2.5 (1087.8) 제도화된 교회는 기존의 정치ㆍ경제적 질서를 영화롭게 함으로 지난날에 사회에 소용이 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살아남으려면 그 교회는 그러한 활동을 재빨리 그쳐야 한다. 제도화된 교회에 유일하게 적절한 태도는 비폭력을, 곧 폭력을 쓰는 개혁 대신에, 평화로운 진화의 교리―땅에서 평화를 지키고 모든 사람 사이에 선의를 가지는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99:2.6 (1088.1) 현대의 종교는 오직 그 자체가 너무나 철저히 전통이 되고, 독단이 되고, 제도화되도록 버려두었기 때문에, 빨리 움직이는 사회의 변화에 대하여 그 태도를 조정하기가 어려움을 발견한다. 생생하게 체험하는 종교는 이 모든 사회 발전과 경제의 격변을 앞서 가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고, 그 와중에서 그런 종교는 도덕을 안정 시키고 사회를 안내하고 영적으로 인도하는 장치로서 늘 작용한다. 참 종교는 가치 있는 문화,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그와 같이 되려고 애쓰는 체험에서 생겨나는 그 지혜를 한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전해 준다.
99:3.1 (1088.2) 초대 기독교는 모든 국내의 분규, 사회적 책임, 경제 연맹에 전혀 매이는 일이 없었다. 오직 후일에 제도화된 기독교가 서양 문명의 정치 및 사회 구조의 유기적 일부가 되었다.
99:3.2 (1088.3) 하늘나라는 사회 질서도 경제 질서도 아니다. 순전히 하나님을 아는 개인들의 영적 형제 단체이다. 그러한 단체는 본래, 놀라운 정치ㆍ경제적 반응이 뒤따르는, 새롭고 놀라운 사회 현상인 것이 참말이다.
99:3.3 (1088.4) 신자는 사회의 고통에 무심하지 않고 국가의 불공정한 처사에 무관심하지 않으며, 경제적 견해를 무시하지 않고 전제(專制) 정치에 대하여 감각이 무디지도 않다. 개별 시민을 영적ㆍ이상적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에 종교는 사회의 재건에 직접 영향을 준다. 문화가 있는 문명은 이 개별 신자들이 다양한 사회ㆍ도덕ㆍ경제ㆍ정치 집단에서 활발하고 영향력 있는 구성원이 됨에 따라서 그들의 태도에 간접으로 영향을 받는다.
99:3.4 (1088.5) 높은 문화를 가진 문명을 이룩하는 것은 먼저 이상적 부류의 시민을 요구하며, 다음에 그러한 시민이 그러한 진보된 인간 사회의 경제 및 정치 제도를 통제할 수 있는, 이상적이고 적당한 사회 장치를 요구한다.
99:3.5 (1088.6) 지나친 거짓 감정 때문에, 교회는 혜택을 적게 받고 불운한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봉사해 왔고, 이것은 모두 좋았다. 그러나 바로 이 감정은 문명의 진보를 엄청나게 더디게 만든 핏줄, 종족에서 퇴화된 핏줄들을 지혜롭지 못하게 영속하게 만들었다.
99:3.6 (1088.7) 사회를 재건하려는 많은 개인은 제도화된 종교를 맹렬히 거부하면서, 결국 그들의 사회 개혁을 퍼뜨리는 데 열렬한 종교심을 가진다. 그래서 개인적이며 대체로 인식되지 않은 그 종교적 동기가 사회를 재건하는 현대의 예정표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99:3.7 (1088.8) 인정되지 않고 의식하지 않은 종류의 이 모든 종교 활동이 가진 큰 약점은 공개된 종교적 비판으로부터 이득을 얻고, 그렇게 함으로 유익한 수준까지 자기 수정(修正)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건설적 비평으로 단련받고, 철학으로 확대되고, 과학으로 정화(淨化)되고, 충성스러운 친교로 자양분을 받지 않으면, 종교는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다.
99:3.8 (1088.9) 전쟁하는 시기에 싸우는 각 나라가 그 종교를 군사 선전에 팔아넘길 때처럼, 종교가 거짓된 목표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왜곡되고 타락할 큰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사랑이 없는 열심은 반드시 종교에 해롭고, 한편 박해는 종교 활동을 어떤 사회의 추세나 신학의 추세를 따르는 방향으로 돌린다.
99:3.9 (1089.1) 종교는 오직 다음 방법으로 이 세상과 더러운 결속을 계속 피할 수 있다:
99:3.10 (1089.2) 1. 비판적으로 수정하는 철학.
99:3.11 (1089.3) 2. 어떤 사회ㆍ경제ㆍ정치적 연합에도 매이지 않는다.
99:3.12 (1089.4) 3. 창조적이고 사람을 위로하고 사랑을 확대하는 친교.
99:3.15 (1089.7) 신자들은 하나의 집단으로서 결코 종교 외에 어떤 것에도 아랑곳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러한 어떤 신자도, 한 개별 시민으로서, 어떤 사회나 경제나 정치의 재건 운동에 뛰어난 지도자가 되어도 좋다.
99:3.16 (1089.8) 어렵기는 해도 바람직한 이 모든 사회 봉사를 촉진하는 데 성공을 거두기까지 개별 시민을 인도하도록, 우주에 대하여 개별 시민의 충성심을 일으키고, 유지하고 북돋아 주는 것이 종교가 할 일이다.
99:4.1 (1089.9) 진정한 종교는, 신자를 사회에서 매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인간의 친교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부여한다. 그러나 종교 집단의 형식화는 그 집단이 조직하고 추진하려는 바로 그 가치 기준을 파괴하는 일이 흔하다. 인간의 친교와 신성한 종교는, 각각 그 성장이 평준화되고 조화되면 서로에게 유익하고 귀중하게 빛을 비춰줄 것이다. 종교는 모든 집단 관계에―가족ㆍ학교ㆍ클럽에―새로운 의미를 불어넣는다. 종교는 사용할 새 가치 기준을 나누어 주고 모든 참 유머를 높인다.
99:4.2 (1089.10) 사회의 지도층은 영적 통찰력으로 인하여 변화된다. 종교는 모든 집단 운동이 그 참된 목표를 잃지 않게 한다. 종교가 살아 있고 성장하는 신앙이라면, 종교는 아이들과 함께 가족 생활을 조화시키는 좋은 약이다. 아이들 없이는 가족 생활을 누릴 수 없다. 종교가 없이도 가족 생활은 할 수 있지만, 그러한 장애는 이 밀접한 인간 관계에 문제가 엄청나게 불어나게 만든다. 20세기의 처음 몇십 년 동안에, 가족 생활은 개인의 종교적 체험 다음으로 가장 크게 피해를 보는데, 이러한 피해는 종교적 충성으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의미와 가치 기준으로 이동하는 데 따르는 퇴폐로부터 생긴다.
99:4.3 (1089.11) 참된 종교는 일상 생활의 평범한 현실과 마주쳐서 힘차게 살아가는 뜻깊은 방법이다. 그러나 개인의 인품 개발을 자극하고 조정된 인격을 키우려면, 종교는 표준화되어서는 안 된다. 체험의 평가를 자극하고 가치 기준이자 미끼로서 쓰이려면, 종교가 판에 박혀서는 안 된다. 최고의 충성심을 권장하려면, 종교는 형식화되어서는 안 된다.
99:4.4 (1089.12) 문명의 사회적ㆍ경제적 성장에 무슨 격변이 따르는가에 상관 없이, 종교가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이 지배하는 그러한 체험을 개인 속에서 키워준다면 진정하고 가치가 있으니, 그러한 것이 최상 실체의 참된 영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사랑과 예배를 통해서 사람이 서로 친교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됨으로 뜻있게 된다.
99:4.5 (1090.1) 결국, 사람이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믿는가가 행위를 결정하고 개인의 성과를 지배한다. 순전히 사실에 관한 지식은, 감정으로 활성화되지 않으면, 보통 사람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의 활성화는 감정을 초월하며, 필사자의 인생에서 영적 에너지와 접촉함으로, 그리고 그 에너지의 방출을 통해서 초월 수준에서 인간 체험 전체를 조화시킨다.
99:4.6 (1090.2) 20세기의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시대에, 과학 시대의 회오리바람 같은 과도기에 생긴 경제적 격변, 서로 부딪치는 도덕의 풍조, 사회 문제의 역류 속에서, 허다한 남녀가 사람으로서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이들은 안달하고, 들떠 있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안정되지 않았다. 세계 역사에서 유례가 없게, 이들은 건전한 종교의 위로와 안정감이 필요하다. 전례 없는 과학적 성취와 기계의 발전을 직면하여, 사람들은 영적 침체와 철학의 혼란에 빠져 있다.
99:4.7 (1090.3) 종교가 사심 없이, 사랑으로 사회에 봉사하는 동기를 잃지 않으면, 종교가 점점 더 사사로운 문제가 되어도 아무 위험이 없다. 종교는 도시화ㆍ기계화와 함께, 많은 2차 영향, 즉 갑작스러운 문화의 혼합, 신조들의 상호 혼합, 교회 권한의 축소, 가족 생활의 변화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99:4.8 (1090.4) 사람의 가장 큰 영적 위협은 부분적 진보에 있으며, 성장을 미처 마치지 못하여 곤경에 빠지는 것이다. 진화된 종교, 두려움의 종교를 버리면서, 계시된 종교, 사랑의 종교를 즉시 붙잡지 못하는 것이다. 현대 과학, 특히 심리학은, 오직 두려움ㆍ미신ㆍ감정에 대체로 의존하는 종교들만 약화시켰다.
99:4.9 (1090.5) 과도기에는 반드시 혼란이 따르며, 다음 세 가지 경쟁하는 종교 철학 사이에 큰 투쟁이 끝날 때까지, 종교 세계에 평안이 거의 없을 것이다:
99:4.10 (1090.6) 1. 많은 종교에서 심령 현상(섭리적 신)을 믿는 믿음.
99:4.13 (1090.9) 우주의 실체에 다가가는 이 세 가지 부분적 접근법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로부터 진행하는 영ㆍ지성ㆍ에너지, 이 세 가지가 일치되어 존재하며 최상위 신 안에서 시공의 통일이 성취됨을 묘사하는 종교ㆍ철학ㆍ우주론의 계시적 발표로 궁극에 조화되어야 한다.
99:5.1 (1090.10) 종교는 순전히 개인의 영적 체험―하나님이 아버지임을 아는 것―이지만, 이 체험의 필연적 결과―사람이 형제임을 아는 것―에는 타아(他我)들에 대한 자아의 조정이 따르며, 이것은 종교 생활의 사회적 모습, 집단의 모습을 포함한다. 종교는 먼저 마음 속의 조정, 개인적 조정이며, 다음에 종교는 사회 봉사, 집단 조정의 문제가 된다. 사람이 사교성을 가진 사실은 어쩔 수 없이 종교 집단이 생길 것을 결정한다. 이 종교 집단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총명한 지도층에 아주 크게 달려 있다. 원시 사회에서 종교 집단은 반드시 경제 집단이나 정치 집단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종교는 언제나 도덕을 유지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장치였다. 현대에 많은 사회주의자와 인도주의자가 반대로 가르치고 있는데도, 이것은 아직도 참말이다.
99:5.2 (1091.1) 언제나 기억할지어다: 참 종교는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이고 사람이 너희 형제임을 아는 것이다. 종교는 벌을 받는 위협이나 앞날에 신비로운 보상을 받는다는 마술같은 약속을 종처럼 믿는 것이 아니다.
99:5.3 (1091.2) 예수의 종교는 인류를 움직이는 가장 힘찬 영향력이다. 예수는 전통을 산산조각 내고 독단을 파괴했으며, 시간 세계와 영원 속에서 가장 높은 이상을 성취하라―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 같이 완전하라―고 인류를 불렀다.
99:5.4 (1091.3) 종교 집단이 모든 다른 집단―하늘 나라의 영적 구성원의 사회적 모임―과 분리될 때까지, 종교는 활동할 기회가 거의 없다.
99:5.5 (1091.4) 사람이 온통 타락했다는 교리는, 종교가 사람을 향상시키는 성질과 사회에 귀중한 영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많이 없앴다. 예수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 선언했을 때, 그는 사람의 위엄을 회복하려고 애썼다.
99:5.6 (1091.5) 신자를 영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효과 있는 어떤 종교 관념도, 그러한 신자의 사회 생활에서 분명히 강력한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종교적 체험은 영이 인도하는 사람의 일상 생활에서 어김없이 “영의 열매”를 맺는다.
99:5.7 (1091.6) 사람들은 자기의 종교적 믿음을 나누는 것과 똑같이 확실하게, 궁극에 공통된 목표를 창조하는, 어떤 종류의 종교 집단을 만들어낸다. 언젠가 신자들은 함께 모여서 통일된 이상과 목적에 기초를 두고 실제로 협동할 것이요, 심리학 의견과 신학 관념에 근거를 두고서 협동하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신조(信條)가 아니라 목표가 신자들을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 참 종교가 개인의 영적 체험의 문제이므로, 개별 신자 각자가 그 영적 체험을 실현하는 것에 관하여 자신의 개인적 해석을 내리는 것이 불가피하다. “믿음”이라는 말이, 어떤 무리의 필사자들이 공통된 종교적 태도로 찬성할 수 있던 것을 신조로 만든 것이 아니라, 개인과 하나님의 관계를 대표하게 만들라. “네가 믿음을 가졌느냐? 그렇다면, 네 홀로 그 믿음을 간직하여라.”
99:5.8 (1091.7) 믿음이 오직 이상적 가치를 붙잡는 데 관여한다는 것은 신약의 어느 정의(定義)에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믿음이 바라는 사물의 본질이요, 보이지 않는 사물이 있다는 증거라고 선언한다.
99:5.9 (1091.8) 원시인은 자신의 종교적 확신을 말로 표현하는 데 거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종교는 생각으로 나타내기보다 춤으로 표현되었다. 현대인은 많은 신조를 생각해냈고, 종교적 신앙을 재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들어냈다. 앞날의 신자들은 자기의 종교를 생활에서 실천하고, 인간의 형제 정신에 마음을 다하여 봉사하는 데 몸을 바쳐야 한다. 사람의 종교적 체험이 아주 개인적이고 아주 숭고해서, 오직 “너무 깊은 곳에 있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으로만 그 체험을 깨닫고 표현할 수 있을 때가 무르익었다.
99:5.10 (1091.9) 예수는 추종자들이 때때로 모여서, 공통된 신앙을 가리키는 어떤 형식의 말씀을 외워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함께 모여서 실제로 무슨 일을 하라고―유란시아에서 그의 수여 생활을 기억하는, 공동체의 저녁을 먹으라고―정해 놓았을 뿐이다.
99:5.11 (1091.10) 그리스도가 영적 지도자의 최고의 이상이라고 제시하면서, 지난 시대에 국가나 종족의 깨우침에 기여한 사람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역사적 지도자였다는 것을 하나님을 의식하는 남녀가 부인하라고 감히 요구할 때, 기독교인은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지르는가?
99:6.1 (1092.1) 여러 종파로 갈라지는 것은 제도적 종교의 질병이요, 독단적 주장은 영적 성품을 종으로 만든다. 종교가 없는 교회보다는 교회가 없이 종교를 가지는 것이 훨씬 낫다. 20세기의 종교적 혼란은, 그 자체로서 저절로 영적 퇴폐를 가리키지 않는다. 혼란은 파괴에 앞설 뿐 아니라 성장이 있을 때에도 앞서 간다.
99:6.2 (1092.2) 종교를 사회 활동으로 만드는 데는 참된 목적이 있다. 집단 종교 활동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종교에 충성함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의 유혹을 크게 만든다, 최고의 가치 기준의 매력을 키운다, 사심 없이 친교하는 봉사를 향상한다, 가족 생활의 잠재성을 영화롭게 한다, 종교 교육을 촉진한다, 지혜로운 조언과 영적 안내를 마련한다, 모여서 예배보는 것을 격려한다. 모든 살아 있는 종교는 인간의 우정을 격려하며, 도덕을 보존하고 이웃의 복지를 촉진하며, 각 종교의 말씀, 영원한 구원의 말씀에 담긴 기본적 복음의 전파를 수월하게 만든다.
99:6.3 (1092.3) 그러나 종교가 제도화됨에 따라서, 종교가 선을 행할 힘은 줄어들고, 한편 악을 행할 가능성은 크게 늘어난다. 형식이 된 종교의 위험은 다음과 같다: 믿는 관념이 경직되고 감정이 분명한 형태가 된다, 세속화의 증가와 함께 기득권의 축적, 진리를 표준화시키고 경직되게 만들려는 경향, 종교가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봉사하는 옆길로 빠진다, 지도자들이 봉사자가 아니라 행정가가 되는 성향, 다른 종파 및 경쟁하는 파벌을 만드는 경향, 사람을 억압하는 교회 권한의 확립, 귀족 같은 “선민”의 태도가 생기는 것, 신성한 것에 대하여 거짓되고 과장된 관념을 조장하는 것, 종교를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고 예배를 고정시키는 것, 현재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과거를 존중하는 경향, 종교를 현대에 맞게 해석하지 못하는 것, 세속 기구의 기능과 얽히는 것. 여러 종교적 계급의 잘못된 차별을 낳는다. 정통성을 판결하는 참을성 없는 재판관이 된다. 모험을 좋아하는 젊은이의 흥미를 끌지 못하고, 영원한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유익한 말씀을 차츰 잃어버린다.
99:6.4 (1092.4) 형식적 종교는 하늘나라를 세우는 자로서 향상된 봉사를 베풀도록 사람을 해방하는 대신에, 사람들의 개인적 영적 활동을 제어한다.
99:7.1 (1092.5) 교회와 모든 다른 종교 집단이 비록 모든 세속 활동에 초연해야 하지만, 동시에 종교는 인간의 여러 제도의 사회적 조정을 방해하거나 늦추려고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인생은 더욱 의미 깊게 성장해야 한다. 사람은 자기의 철학을 개혁하고 종교를 정화(淨化)하는 일을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
99:7.2 (1092.6) 정치학은 사회 과학으로부터 배운 기술로, 종교 생활이 제공하는 통찰력과 동기를 가지고, 경제 조건과 산업을 재건해야 한다. 모든 사회 재건에서 종교는 초월적 목표, 당장의 일시적 목적을 뛰어넘는, 흔들리지 않는 목표에 안정된 충성심을 바치게 만든다. 환경이 급변하는 혼란의 와중에서, 필사 인간은 멀리 내다보는 우주 시각(視覺)으로부터 자양분을 얻는 것이 필요하다.
99:7.3 (1093.1) 종교는 사람에게 땅의 표면에서 용감하고 기쁘게 살라고 영감을 준다. 종교는 참을성과 정열, 통찰력과 열심, 동정심과 권력, 이상과 에너지를 연결한다.
99:7.4 (1093.2) 하나님의 통치 앞에서 명상하고, 신성한 의미와 영적 가치를 가진 여러 현실을 헤아리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현세의 문제를 지혜롭게 결정하거나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심을 뛰어넘을 수 없다.
99:7.5 (1093.3) 경제적으로 서로 의존하고 사회가 형제같이 지내는 것은 궁극에 형제 정신에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람의 천성은 꿈꾸는 자이지만, 과학은 사람을 정신차리게 만들며, 그래서 종교는 광신 반응으로 곤두박질하는 위험을 훨씬 줄이면서 사람을 당장 움직일 수 있다. 경제적 필요는 사람을 현실에 묶이게 만들고, 몸소 겪는 종교적 체험은 바로 이 사람이 항상 발전하고 진보하는 우주 시민이라는 영원한 현실과 얼굴을 마주하게 만든다.
100:0.1 (1094.1) 힘찬 종교 생활의 체험은 평범한 개인을 하나의 이상주의의 힘을 가진 인격자로 변화시킨다. 종교는 각 사람의 진보를 촉진함으로 모든 사람의 진보를 도우며, 모든 사람의 성취를 통해서 각자는 더욱 진보한다.
100:0.2 (1094.2) 다른 신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은 서로의 영적 성장을 자극한다. 사랑은 종교적 성장이 일어나는 토양―주관적 욕구의 만족이 아니라 객관적 매력―을 제공하지만, 그래도 사랑은 최고의 주관적 만족감을 낳는다. 종교는 일상 생활의 평범한 고역(苦役)을 귀중한 일로 만든다.
100:1.1 (1094.3) 종교는 의미의 성장과 가치 기준의 향상을 낳지만, 순전히 개인적인 평가가 절대적인 것의 수준으로 높아질 때 반드시 해악이 생긴다. 어린아이는 쾌락의 내용에 따라서 체험을 평가한다. 사람의 성숙도는 개인의 쾌락 대신에 더 고상한 의미를 찾는 정도, 아니 다양해진 생활 상황과 우주 관계에서 최고의 개념에 충성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높아진다.
100:1.2 (1094.4) 어떤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성장할 수 없고, 따라서 영적으로 고정되는 심각한 위험에 빠져 있다. 다른 시대에, 연속되는 문화에서, 그리고 진보하는 문명의 지나가는 단계에서, 의미의 성장을 위하여 준비가 있어야 한다. 성장을 억제하는 주요한 요소는 편견과 무지(無知)이다.
100:1.3 (1094.5) 모든 성장하는 어린아이에게 자신의 종교적 체험이 자랄 기회를 주어라. 이미 만들어진 어른의 체험을 아이에게 떠맡기지 말라. 기존 교육 체제를 통해서 해가 갈수록 조금씩 진보하는 것은, 영적 성장은커녕 반드시 지적 진보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어휘가 늘어난다고 인품이 성장한 것을 뜻하지 않는다. 단순히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진보가 성장을 참되게 가리킨다. 이상을 높이는 것, 가치 기준을 더욱 이해하는 것, 가치 기준의 새로운 의미, 그리고 최상의 가치 기준에 더욱 충성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의 성장을 가리킨다.
100:1.4 (1094.6) 아이들은 오직 어른 동료들이 충실해야 영구하게 감명을 받는다. 교훈이나 본보기조차 오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충실한 사람은 성장하는 사람이요, 성장은 감명을 주고 영감을 일으키는 현실이다. 오늘을 충성스럽게 살라―자라라―그러면 내일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올챙이가 가장 빨리 개구리가 되는 길은 순간마다 올챙이로서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100:1.5 (1094.7) 종교적 성장에 필수인 토양의 전제 조건은 자아를 실현하는 진취적 생활, 타고난 성향의 조정, 호기심을 따르고 적당한 모험을 즐기는 것, 만족한 느낌을 맛보는 것, 정신 차리고 깨어 있도록 자극하는 두려움의 작용, 놀라움의 매력, 그리고 자신이 보잘것 없음을 정상으로 의식하는 것, 즉 겸손이다. 성장은 또한 자아의 발견과 그에 따른 자기 비평―양심―에 의존하며, 이는 양심이 참말로 사람이 자신의 가치 기준과 습관, 개인의 이상에 따라서 스스로를 비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00:1.6 (1095.1) 종교적 체험은 몸의 건강, 물려받은 기질, 사회적 환경에 두드러지게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이 현세의 조건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헌신하는 내면의 영적 진보를 막지 않는다. 성장하고 자아를 실현하고 싶은 어떤 타고난 욕구가 모든 정상 필사자에게 있으며, 이것은 특별히 억제되지 않으면 작용한다. 영적 성장 잠재성을 가진 구성 자질을 기르는 확실한 기법은 최상의 가치 기준에 마음을 다하여 헌신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100:1.7 (1095.2) 사람은 종교를 주거나 받거나, 빌리거나 배우거나 잃어버릴 수 없다. 종교는 최종의 가치를 더욱 추구하는 데 비례하여 성장하는 개인적 체험이다. 따라서 우주적 견지에서 성장은 의미가 쌓이고 가치 기준이 늘 높아지는 것을 돕는다. 그러나 사람의 고귀함 그 자체는 언제나 의식하지 않고 성장한다.
100:1.8 (1095.3) 생각하고 행동하는 종교적 버릇은 영적 성장 체제에 기여한다. 사람은 영적 자극에 유리하게 반응하도록, 일종의 영적 조건 반사(反射)를 일으키도록, 종교적 성향을 개발할 수 있다. 종교적 성장을 유리하게 만드는 버릇에는 신성한 가치에 대한 발달된 감수성, 남의 종교 생활의 인식, 우주적 의미가 있는 것을 돌이켜보는 명상, 경건한 마음으로 문제를 푸는 것, 자기의 영적 생활을 동료들과 나누기, 이기심의 회피, 신의 자비를 주제넘게 바라지 않는 것, 하나님 앞에 서 있듯 사는 것을 포함한다. 종교적 성장의 여러 요인은 의도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성장 그 자체는 어김없이 의식하지 않고 일어난다.
100:1.9 (1095.4) 그러나 종교적 성장이 의식하지 않고 일어나는 성질은 그 성장이 인간 지능의 하의식(下意識)이라 생각되는 영역에서 일어나는 활동임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필사자 지성의 상의식(上意識) 수준에 있는 창조적 활동임을 가리킨다. 의식하지 않고 종교적으로 성장하는 현실을 깨닫는 체험은 상의식 기능이 존재함을 가리키는 하나의 분명한 증명이다.
100:2.1 (1095.5) 영적 발전은 첫째로, 참 영적 세력과 생생한 영적 연락을 유지하고, 둘째로 영적 열매를 줄곧 맺는 것에 달려 있다. 즉 사람이 영적 은인으로부터 받은 것을 동료들에게 베푸는 것이다. 영적 진보는 사람이 영적으로 부족함을 머리로 인식하고, 아울러 완전을 향한 욕구, 하나님을 알고 그와 같이 되려는 욕구, 마음을 다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목적을 자의식하는 데 달려 있다.
100:2.2 (1095.6) 영적 성장은 처음에 필요를 각성하고, 다음에 의미 있는 것을 헤아리며, 그리고 나서 가치 기준을 발견하는 것이다. 참된 영적 성장이 일어나는 증거는 사랑으로 동기를 얻고, 사심 없는 봉사로 인하여 자극받고, 신의 완전한 이상을 진심으로 공경하는 마음에 지배된 인격을 전시하는 데 있다. 이 체험 전부가 종교의 실체이며, 단순한 신학적 관념과 대조가 된다.
100:2.3 (1095.7) 종교는 우주에 대하여 영적으로 반응하는 기법, 깨우침을 받은 지혜로운 기법이 되는 체험 수준까지 진보할 수 있다. 그렇게 영화로운 종교는 인격의 세 수준, 지성ㆍ상물질ㆍ영 수준에서, 즉 지성에 대하여, 진화하는 혼 속에서, 깃드는 영과 함께 활동할 수 있다.
100:2.4 (1096.1) 영적 수준은 사람이 하나님과 가까움을 가리키는 지표이자 사람이 동료 존재들에게 쓸모 있음을 재는 자가 된다. 영적 성향은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의미 있는 것에 담긴 진리를 헤아리고, 가치 기준에 담긴 선을 발견하는 능력을 높여 준다. 영적 발전은 발전하는 능력에 따라 결정되며, 사랑의 이기적 성질을 없애는 데 비례하여 커진다.
100:2.5 (1096.2) 실제의 영적 상태는 신에 도달한 정도, 조절자와 조화된 정도를 측정한다. 궁극의 영적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최대의 실체에 이르는 것, 하나님다운 모습의 극대화와 대등하다. 영생은 무한한 가치 기준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다.
100:2.6 (1096.3) 인간이 자아를 실현하는 목표는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 유일하게 얻으려고 애쓸 가치가 있는 것은 신답고, 영적이고, 영원하다. 필사 인간은 육체의 기쁨을 즐기고 인간적 사랑에서 얻는 만족감을 누릴 자격이 있다. 그는 인간 관계와 현세의 제도에 충실함으로 이익을 얻는다. 그러나 이것들은 공간을 뛰어넘고, 시간을 극복하고, 신다운 완전함을 얻고 최후자로 봉사하는 영원한 운명을 성취할 불멸의 인격을 기르기 위한 영원한 기초가 아니다.
100:2.7 (1096.4) “하나님을 알고 하늘나라를 믿는 자에게 땅에 있는 만물이 무너진다 해도 무슨 상관이냐?”하고 말했을 때, 예수는 하나님을 아는 필사자의 깊은 확신을 보여주었다. 현세의 안전은 사라지기 쉽지만, 영적 보장은 깨어질 수 없다. 인간의 곤경ㆍ이기심ㆍ잔인ㆍ미움ㆍ악의ㆍ질투의 큰 물결이 필사자의 혼을 내려칠 때, 너희는 마음 속에 한 거점,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영의 요새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안심해도 좋다. 깃드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에게 자기의 혼을 맡기려고 바친 모든 인간에게 적어도 이것이 참말이다.
100:2.8 (1096.5) 차츰차츰 성장하든지 특정한 위기로 인하여 도달하든지 상관 없이, 그러한 영적 달성이 있은 뒤에, 새 가치 기준이 생길 뿐 아니라 인격의 새로운 적응이 일어난다. 영에게서 태어난 그러한 개인들은 인생에 다시 자극받으며,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포부가 물거품이 되고 아주 간절한 꿈이 깨어지는 동안에 차분히 구경할 수 있다. 그들은 그러한 재난이 단지, 우주에서 새롭고 더 숭고한 성취 수준에서 더 고귀하고 오래 가는 실체들을 육성하기 전에, 사람이 현세에 창조한 것을 부서뜨리는, 방향을 바꾸는 격변인 줄 분명히 안다.
100:3.1 (1096.6) 종교는 정적(靜的)이고 지극한, 정신의 평안을 얻는 기법이 아니다. 종교는 힘찬 봉사를 위하여 혼을 가라앉히는 충동이다. 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시중드는 충실한 봉사에 자아 전체가 지원하는 것이다. 종교는 최고의 목표, 영원한 상을 얻는 데 필수인 어떤 값이라도 치른다. 종교적 충성에는 완벽하게 바치는 마음이 있으며, 이것은 뛰어나게 숭고하다. 이 충성심은 사회적으로 효과 있고 영적 진취성이 있다.
100:3.2 (1096.7) 신자에게 하나님이란 낱말은 사람이 최고의 실체에 접근하고 신성한 가치를 인식하는 것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사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선악을 좌우하지 않는다. 도덕적 가치는 소망의 성취나 감정의 좌절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100:3.3 (1096.8) 가치 기준을 숙고할 때, 너희는 가치 그 자체와 가치가 있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너희는 즐거운 활동, 그리고 늘 점진적으로 더욱 높아지는 인간 체험의 수준에서 즐거운 활동을 뜻 있게 통합하고 더 낫게 진행하는 것, 이 둘 사이의 관계를 헤아려야 한다.
100:3.4 (1097.1) 의미는 체험이 가치 기준에 더하는 무엇이다. 의미는 가치 기준을 이해하여 의식하는 것이다. 혼자서만 누리는 순전히 이기적 기쁨은 실질적으로 목적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상대적 악에 가까워지는 의미 없는 쾌락을 암시할지 모른다. 실체들이 의미가 있고 정신적으로 연결될 때, 지성이 그러한 관계들을 인식하고 이해할 때, 가치는 사람이 체험하는 것이다.
100:3.5 (1097.2) 가치 기준은 결코 정지(靜止) 상태에 있을 수 없다. 실체는 변화, 성장이 있음을 가리킨다. 성장이 없이, 의미가 확대되고 가치가 높아지는 일이 없이, 변화는 가치가 없다―악이 될 가능성이 있다. 우주에 적응이 잘 되어 있을수록, 어떤 체험이라도 더 많은 중요성을 가진다. 가치는 개념의 착각이 아니다. 가치 기준은 실재하지만 반드시 관계라는 사실에 의존한다. 가치 기준은 언제나 실재하면서도 잠재한다―지난날에 어떠했던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것이요, 그리고 앞으로 있을 것이다.
100:3.6 (1097.3) 실재하는 것과 잠재하는 것을 연결하면 성장이 된다, 가치가 체험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은 그저 전진하는 것은 아니다. 전진은 언제나 의미가 있지만, 성장이 없으면 전진은 비교적 가치가 없다. 인생에서 최고로 값진 것은 가치 기준의 성장, 의미 있는 것들의 진보, 그리고 이 두 체험이 우주에서 서로 관계되는 것을 깨닫는 데 있다. 그러한 체험은 하나님을 의식함과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필사자는 자연을 초월하지는 않더라도, 참으로 인간을 초월하고 있다. 죽지 않는 혼이 생성되고 있다.
100:3.7 (1097.4) 사람은 성장을 일으킬 수 없어도 유리한 조건을 마련할 수 있다. 육체의 성장이거나, 지능의 성장이거나 영적 성장이거나 상관 없이, 성장은 반드시 의식하지 않고 일어난다. 따라서 사랑은 자란다. 사랑을 창조하거나, 만들어 내거나, 돈으로 살 수 없다. 사랑은 자라야 한다. 진화는 성장을 일으키는 우주 기법이다. 사회의 성장은 법을 세운다고 보장할 수 없고, 행정을 개선한다고 도덕의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은 기계를 만들어낼지 모르지만, 기계의 진정한 가치는 인간의 문화와 개인의 평가로부터 얻어야 한다. 사람이 성장에 유일하게 기여하는 것은 인격의 온 힘을―살아 있는 믿음을―동원하는 것이다.
100:4.1 (1097.5) 종교 생활은 헌신하는 인생이고, 헌신하는 인생은 창조하는 인생이요, 독창적이고 자연스러운 인생이다. 새로운 종교적 통찰력은 갈등에서 생겨나며, 갈등은 예전에 열등하게 반응하는 형식 대신에, 새롭고 더 낫게 반응하는 버릇의 선택을 개시한다. 새 의미가 있는 것들은 오로지 갈등 속에서 솟아난다. 오직 우수한 의미가 있는 것들에 담긴 상급 가치를 지지하지 않을 때에야 갈등이 지속된다.
100:4.2 (1097.6) 종교적 혼란은 피할 수 없다. 정신적 갈등과 영적 동요가 없이 아무런 성장이 있을 수 없다. 철학적 생활 기준을 세우는 것은 지성의 철학 영역에서 어지간한 소동을 일으킨다. 투쟁이 없이는 위대하고 선하고 참되고 고귀한 것들을 위한 충성심이 우러나지 않는다. 영적 시력이 맑아지고 우주 통찰력이 향상될 때 노력이 따른다. 인간의 지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비영(非靈) 에너지를 먹고 살다가 젖떼듯 떨어져 나가는 것에 저항한다. 게으른 짐승 같은 지성은 우주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씨름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려고 저항한다.
100:4.3 (1097.7) 그러나 종교 생활에서 큰 문제는 사랑이 지배함으로 인격자의 혼의 능력을 통일하는 과제에 있다. 건강, 정신의 효율성, 행복은 육체 체계, 지성 체계, 영 체계가 통일되었을 때 생겨난다. 사람은 건강과 위생에 관하여 이해하는 것이 많지만, 행복에 관해서 참으로 거의 깨우친 것이 없다. 가장 높은 행복은 영적 진보와 떼어낼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영적 성장은 오래 가는 기쁨, 너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평화를 낳는다.
100:4.4 (1098.1)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감각은 사물의 존재에 대하여 일러준다. 지성은 의미 있는 것들의 현실성을 발견하지만, 영적 체험은 개인에게 인생에서 참된 가치가 있는 것들을 드러낸다.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함으로, 사심 없이 사람을 사랑함으로, 인간 생활의 이 높은 수준에 이른다. 네가 동료 인간을 사랑하면, 너는 그들의 가치를 발견했음이 틀림없다. 예수가 사람을 그토록 사랑한 것은 사람을 무척 귀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너는 동료들의 동기를 발견함으로 그들의 가치를 가장 쉽게 발견한다. 누가 너를 짜증나게 하고 분개하는 느낌이 일게 하면, 너는 동정심을 가지고 그렇게 불쾌한 행위를 하는 그의 관점, 이유를 헤아리려고 애써야 한다. 일단 이웃을 이해하면, 너는 너그러워질 터이고, 이러한 너그러움은 자라서 우정이 되고 무르익으면 사랑이 될 것이다.
100:4.5 (1098.2) 정신의 눈을 뜨고서, 사람이 동굴에서 살던 시절에 네 원시 조상 중에 한 사람의 그림을 상상해 보아라―키가 작고, 보기 흉하고, 더럽고, 으르렁거리는 뚱뚱이이며, 바로 앞을 무섭게 쏘아보면서, 다리를 벌리고 서서, 곤봉을 치켜올리고, 미움과 적개심으로 씩씩거린다. 그러한 그림은 도저히 사람의 신다운 위엄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그림을 확대해 보자. 활기가 생긴 이 인간 앞에 칼이를 가진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고, 그 사람 뒤에는 한 여자와 두 아이가 있다. 그러한 그림이 인류 중에서 훌륭하고 고귀한 많은 것의 시작을 나타낸다는 것을 네가 즉시 깨닫지만, 그 사람은 이 두 그림에서 똑같다. 오직 이 둘째 스케치에서 너는 넓어진 시야의 덕을 보고 있다. 거기서 너희는 이 진화하는 필사자의 동기를 헤아린다. 너희가 그를 이해하기 때문에, 그의 태도는 칭찬할 가치가 있게 된다. 오직 동료들의 동기를 헤아릴 수만 있다면, 너희가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더 쉬워질까. 동료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너희는 결국 그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100:4.6 (1098.3) 너는 단순히 의지(意志)하는 행위로 참으로 동료를 사랑할 수는 없다. 오직 이웃의 동기와 감정을 속속들이 이해하는 데서 사랑이 태어난다. 오늘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루하루 네가 한 사람 더 사랑하기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하루 또는 한 주 한 주, 동료 중에 또 한 사람을 이해하는 일을 해낸다면, 그리고 이것이 네 능력의 한계라면, 너는 분명히 친교하고 있고 네 인격을 참으로 영적으로 변화시킨다. 사랑은 전염되며, 사람이 총명하고 지혜롭게 헌신할 때, 사랑은 미움보다 더 잘 번진다. 그러나 오직 진정하고 사심 없는 사랑이라야 참으로 전염된다. 각 필사자가 오직 힘찬 애정을 퍼붓는 초점이 될 수만 있다면, 사랑을 옮기는 이 유익한 바이러스는 곧 인류의 감정 흐름에 크게 침투해서, 모든 문명이 사랑으로 휩싸일 터이고, 그것이 사람의 형제 정신의 실현일 것이다.
100:5.1 (1098.4) 세상에는 길 잃은 혼이 가득하다. 신학적 의미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이 아니라, 방향 면에서 길을 잃었고, 좌절된 철학 시대의 여러 주의와 종파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종교적 권한에 복종하는 대신에 어떻게 생활 철학을 세우는가를 배운 사람들의 수가 너무 적다. (강의 바닥이 강은 아니지만, 성장의 경로인 사회화된 종교의 상징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100:5.2 (1098.5) 종교적 성장의 발걸음은 침체로부터 갈등을 거쳐서 조정된 길로, 불안한 상태로부터 의심하지 않는 믿음으로, 혼란스러운 우주 의식으로부터 통일된 인격으로, 현세의 목표로부터 영원한 목표로, 두려움에 사로잡힌 처지로부터 신의 아들이 되는 자유로 이끈다.
100:5.3 (1099.1) 최고의 이상에 충성함을 고백하는 것―하나님을 의식함을 정신으로, 감정으로, 영적으로 깨닫는 것―은 자연스러운 점진적 성장일 수도 있고, 아니면 위기의 경우처럼, 때때로 어떤 길목에서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 중대한 날에 다마스커스 길에서 바로 그러한, 갑작스럽고 대단한 감화를 받았다. 고타마 싯달타는 혼자 앉아서 궁극의 진리의 신비를 파고들려고 애쓴 그날 밤에 비슷한 체험을 했다. 많은 다른 사람도 비슷한 경험을 했고, 많은 참 신자가 갑작스러운 감화 없이 영적 진보를 이루었다.
100:5.4 (1099.2) 이른바 종교적 감화와 연결된 대단한 현상의 대부분은 전적으로 심리적 성질을 가졌지만, 영적 기원을 가진 체험이 이따금 일어난다. 영적 달성을 향하여 정신적으로 발돋움하는 어떤 수준에서도 절대로 온전히 정신을 기울일 때, 신다운 개념에 인간이 충성하는 동기가 완벽할 때, 믿는 필사자의 상의식(上意識) 지성의 목적, 집중되고 거룩하게 된 목적과 시간을 맞추려고 그 깃드는 영이 갑자기 내려와서 잡아채는 일이 무척 자주 생긴다. 통일된 지적ㆍ영적 현상을 그렇게 체험하는 것이 순전한 심리적 관계를 초월하는 요인에서 생기는 감화를 구성한다.
100:5.5 (1099.3) 그러나 감정만으로는 거짓된 감화이다. 사람은 느낌뿐 아니라 믿음도 가져야 한다. 그러한 정신을 일부 기울이는 그 한도까지, 그러한 인간의 충성심을 불완전하게 기울이는 그 한도까지, 감화 받는 체험은 지적 실체, 감정적 실체, 영적 실체의 혼합이 될 것이다.
100:5.6 (1099.4) 다른 면에서는 통일된 지적 생활에 실용적으로 소용되는 가정(假定)으로서, 사람이 이론적 하의식 지성을 인정하고 싶다면, 다음에 일관성을 지키기 위하여, 사람은 그에 상당하는 비슷한 영역, 더 높은 지적 활동이 있는 상의식 수준을 가정해야 한다. 이 상의식 수준은 깃드는 영 개체, 생각 조절자와 바로 접촉하는 지대이다. 이 모든 정신적 추측에 담긴 큰 위험은 놀라운 꿈과 함께, 환상과 기타 이른바 신비스러운 체험을 신이 인간 지성에게 전하는 것이라 여길지 모른다는 것이다. 지난 시절에, 신성한 존재들은 하나님을 아는 어떤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냈고, 그들이 신비스러운 황홀경이나 병적 환상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현상이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였다.
100:5.7 (1099.5) 감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 조절자와 접촉이 가능한 상물질 지대에 접근하는 더 좋은 방법은, 생생한 믿음과 진정한 예배, 마음을 다하는 사심 없는 기도를 통하는 것이리라. 인간의 지성이 의식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용솟음쳐 오르는 기억 중에 허다한 것이 신의 계시(啓示)요, 영의 인도라고 잘못 생각되어 왔다.
100:5.8 (1099.6) 버릇처럼 종교적 백일몽에 잠기는 습관과 관련하여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신비주의는 때때로 진정한 영적 교통 수단이었지만, 현실을 도피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인생의 바쁜 장면으로부터 잠시 물러나는 것은 심각한 위험이 아닐지 모르지만, 인격이 오랫동안 고립되는 것은 아주 바람직하지 못하다. 어떤 경우라도 환상을 의식하는 황홀경 같은 상태를 종교적 체험으로 길러서는 안 된다.
100:5.9 (1099.7) 신비스러운 상태의 특징은 비교적 수동적인 지능에 작용하면서 주의(注意)가 집중되는 선명한 점들과 함께 의식이 산만해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상의식인 영적 접촉 지대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의식을 향하여 의식을 끌어당긴다. 많은 신비주의자가 정신적 분리를 정신이 비정상으로 표현되는 수준까지 밀고 갔다.
100:5.10 (1100.1) 영적 명상에 잠기는 더욱 건전한 태도는, 돌이켜 신을 예배함으로, 그리고 감사드리는 기도에서 찾아야 한다. 육체를 입은 예수의 일생 후반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사람이 생각 조절자와 직접 교통하는 것을 이른바 이 신비의 체험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신비스러운 교통의 시작에 기여하는 요소들은 그러한 정신 상태가 위험한 것을 가리킨다. 육체의 피로, 금식, 정신의 분리, 깊은 아름다움을 의식하는 체험, 선명한 성욕 충동, 두려움ㆍ걱정ㆍ분노, 그리고 야단스러운 춤과 같은 것들이 신비스러운 상태를 촉진한다. 그러한 기초적 준비의 결과로서 생겨나는 많은 것들은 하의식 지성에서 기원을 가진다.
100:5.11 (1100.2) 신비 현상이 일어날 조건이 얼마나 유리했든지 상관 없이, 나사렛 예수는 파라다이스 아버지와 교통하기 위하여 결코 그런 방법을 쓴 적이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예수는 아무런 하의식의 망상이나 상의식의 착각을 겪지 않았다.
100:6.1 (1100.3) 진화된 종교와 계시된 종교는 방법이 뚜렷이 다를지 모르지만, 동기는 대단히 비슷하다. 종교는 생명의 특정한 기능이 아니라, 오히려 생활 방식이다. 참된 종교는 신자가 자신에게, 그리고 온 인류에게, 최고의 가치를 가졌다고 판단하는 어떤 실체에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 뛰어난 특징은 최고의 가치 기준에 의심 없이 충성하고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것이다. 최상의 가치 기준에 바치는 이 종교적 헌신은 종교심이 없다고 생각되는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에서, 그리고 종교가 없는 자들이 지지하는 운동에 열심히 충성을 바치는 데서 나타난다.
100:6.2 (1100.4) 신자가 인정하는 최고의 가치는 저속하거나 거짓일 수도 있지만, 그런데도 종교성이 있다. 최고로 여기는 가치가 참으로, 진정한 영적 가치를 가진 우주 실체인 그 한도까지, 종교는 진정하다.
100:6.3 (1100.5) 인간이 종교적 충동에 반응하는 표시는 고귀하고 위대한 성질을 띤다. 성실한 신자는 우주 시민임을 의식하고, 초인간 능력의 근원과 접촉함을 의식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우수하고 고결한 단체에 속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쁨에 떨고 활력을 얻는다. 가장 높은 우주 목표―최상의 목표―를 추구하는 자극으로 인하여 자아의 가치를 더욱 의식하게 된다.
100:6.4 (1100.6) 자아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동기의 충동, 흥미를 자아내는 충동에 무릎을 꿇었으며, 그 동기는 더욱 높은 자제를 부과하고 감정의 갈등을 줄이고 필사자의 인생을 참으로 살 가치가 있게 만든다. 인간의 한계의 병적 인식은, 가장 높은 우주 및 초우주 목표에 미치려는 도덕적 각오, 영적 포부와 관련하여 필사자의 결점을 자연히 의식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리고 인간을 초월하는 이상을 달성하려는 이 뜨거운 노력의 특징은 반드시 참을성ㆍ인내심ㆍ불굴ㆍ관대함이 늘어나는 것이다.
100:6.5 (1100.7) 그러나 참된 종교는 실천하는 사랑이요, 봉사하는 인생이다. 신자가 순전히 현세적이고 하찮은 많은 것에 초연하는 것은 결코 사회적 고립으로 이끌지 않으며, 초연하면서 유머 감각을 잃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종교는 인간 존재로부터 아무것도 빼앗지 않지만, 인생의 모든 것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준다. 그런 종교는 새 종류의 열심ㆍ열의ㆍ용기를 불러일으킨다. 십자군 정신까지도 불러일으킬지 모르며, 이것은 영적 통찰력으로, 그리고 인간이 충성하는 평범한 사회적 의무에 충실히 헌신함으로, 고삐를 쥐지 않으면 극도로 위험하다.
100:6.6 (1101.1) 종교 생활의 가장 놀라운 표시 중에 하나는 힘차고 숭고한 평안이니, 이것은 어떤 인간도 이해하기 힘든 평안이요, 모든 의심과 소동이 없음을 가리키는, 우주에 대한 자세이다. 그러한 수준의 영적 안정은 실망에 면역이 되어 있다. 그러한 신자들은 이렇게 말한 사도 바울과 같다: “죽음이나 삶이나, 천사나 군주나 권력이나, 현재 일이나 앞으로 다가올 일이나, 높이나 깊이나,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내지 못할 것을 내가 확신하노라.”
100:6.7 (1101.2) 승리하는 영광을 깨닫는 것과 관련하여 보장받는 느낌이 있으니, 이 느낌은 최상위의 실체를 깨달은 신자, 궁극위에 이르는 목표를 추구하는 신자의 의식 속에 거한다.
100:6.8 (1101.3) 진화된 종교가 진정한 체험이기 때문에, 진화된 종교조차 충성심과 위엄 면에서 이 모든 것이 해당된다. 그러나 계시 종교는 진정할 뿐 아니라 우수하다. 영적 시력이 확대됨으로 생기는 새로운 충성은 새 수준의 사랑과 헌신, 봉사와 친교를 창조한다. 그리고 향상된 이 모든 사회적 전망은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사람이 형제인 것을 더욱 크게 의식하게 한다.
100:6.9 (1101.4) 진화된 종교와 계시된 종교의 특별한 차이점은 새 품질의 신다운 지혜이니, 이 지혜가 순전히 체험으로 얻은 인간의 지혜에 더해진다. 그러나 인간의 종교 안에서, 그리고 그 종교와 더불어 얻는 체험은 더욱 내려주는 신다운 지혜와 우주 통찰력을 나중에 받을 능력을 개발시킨다.
100:7.1 (1101.5) 유란시아의 보통 필사자는 비록 나사렛 예수가 육체를 입고 머무르던 동안에 얻은 그 완벽한 인품의 높이까지 이르기를 바랄 수 없어도, 필사 신자는 누구나 예수의 인격이 완전해진 길을 따라서, 튼튼하고 통일된 인격을 개발하는 것이 아주 가능하다. 주의 인격의 독특한 모습은 그의 인격이 완전하기보다 균형된 것, 인격이 아름답게, 치우치지 않게 통일된 것이다. 예수를 가장 효과 있게 보여주는 것은 다음의 어떤 사람의 예이니, 예수를 고발하는 자들 앞에 서 있는 주를 향하여 손짓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을 보라!”
100:7.2 (1101.6) 예수의 어김없는 친절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지만, 그의 강건한 인품은 따르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참으로 성실했다. 그에게 아무런 위선이 없었다. 전혀 꾸밈이 없었고, 언제나 그는 무척 신선하게 진심이었다. 겉치레에 몸을 굽히지 않았고, 무엇인 체한 적이 없었다. 진리를 가르친 그대로 그는 진리를 실천하였다. 그는 바로 그 진리였다. 그의 세대에게 구원의 진리를 성실하게 선포하는 것이 때때로 고통을 가져왔지만, 그는 그런 진리를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의심하지 않고 모든 진리에 충성했다.
100:7.3 (1101.7) 그러나 주는 무척 분별이 있었고, 사람이 가까이할 수 있는 분이었다. 그가 베푼 모든 봉사는 대단히 실용적이었고, 한편 그의 모든 계획은 그러한 인가된 상식에 벗어나지 않는 특징을 가졌다. 기형(奇形)이고 유별나고 이상한 성향이 전혀 그에게 없었다. 그는 쉽게 변하거나, 변덕을 부리거나 히스테리를 보인 적이 없었다. 어떤 가르침에도, 무슨 일을 행해도, 특별한 예의 바른 감각과 아울러 언제나 지극한 분별이 있었다.
100:7.4 (1102.1) 사람의 아들은 언제나 매우 침착한 인물이었다. 적들조차 그에게 진지한 존경심을 보였다. 그들은 그가 앞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예수는 두려움이 없었다. 신다운 열심이 가득했지만, 결코 광신을 보이지 않았다. 감정이 살아 있어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상상력이 있었으나 언제나 실용적이었다. 그는 솔직하게 인생의 현실에 부딪쳤으나 결코 무디거나 단조롭지 않았다. 용기가 있어도 결코 무모하지 않았고, 신중했으나 결코 비겁하지 않았다. 동정심이 있어도 감상에 빠지지 않았고, 독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경건해도 거룩한 체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 매우 침착했으니, 인품이 아주 완전히 통일되었기 때문이다.
100:7.5 (1102.2) 예수의 독창성은 억눌리지 않았다. 그는 전통에 묶이거나 좁은 관습에 종처럼 순종함으로 지장을 받지 않았다. 의심 없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고, 절대 권한을 가지고 가르쳤다. 그러나 훌륭한 독창성이 있었어도 그의 선조와 그 시대 사람들의 가르침 속에 있는 진리의 보배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에서 가장 독창적인 것은 신을 두려워하고 희생물을 바치는 관습 대신에 사랑과 자비를 강조한 것이었다.
100:7.6 (1102.3) 예수는 대단히 넓은 견지에서 세상을 보았다. 그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도하라고 추종자들에게 타일렀다. 그는 전혀 마음이 좁지 않았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온 인류, 아니 한 우주조차도 담았다. 언제나 그는 이렇게 초청하였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올지어다.”
100:7.7 (1102.4) 예수에 관하여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였더라”하고 사람들이 참되게 말했다. 사람들 사이에 한 사람으로서 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주 숭고하게 의지했다. 어린아이가 땅에서 부모를 의지하는 것처럼 아버지를 의지했다. 그의 믿음은 완전했어도 결코 주제넘지 않았다. 자연이 아무리 모질게 보여도, 땅에 있는 사람의 복지에 아무리 개의치 않는 듯 보여도, 예수는 결코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실망에 면역(免疫)이 되었고, 박해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실패로 보이는 것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100:7.8 (1102.5) 그는 사람들을 형제처럼 사랑했고, 동시에 사람들의 타고난 자질과 얻은 성질이 어떻게 다른가 헤아렸다. “그는 두루 다니며 좋은 일을 하였더라.”
100:7.9 (1102.6) 예수는 드물게 명랑한 사람이었지만, 눈이 먼 분별 없는 낙관주의자가 아니었다. 늘 이렇게 훈계의 말씀을 주었다, “기운을 내라.” 확고히 하나님을 믿고 흔들리지 않고 사람을 신뢰했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자신 있는 태도를 지킬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믿었기 때문에, 언제나 감동을 주도록 사람들에게 마음을 썼다. 그래도 언제나 그의 신념에 충실했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에 헌신하려고 훌륭하게 각오가 굳었다.
100:7.10 (1102.7) 주는 언제나 너그러웠다. 그는 지치지 않고 말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도다.” 그는 말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한없이 너그러웠는데도, 그래도 그는 결코 낭비하거나 사치스럽지 않았다. 구원을 받으려면 너희가 믿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구하는 자는 누구든지 얻을지니라.”
100:7.11 (1102.8) 그는 솔직했으나 언제나 친절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죄인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한다고 거침없이 의견을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놀랍게 솔직하면서 내내 그는 어김없이 공정했다.
100:7.12 (1102.9) 때때로 인간적 슬픔의 잔을 깊숙이 들이켰는데도, 예수는 변치 않고 명랑했다. 두려움 없이 그는 존재의 현실에 부딪쳤고, 그래도 하늘나라 복음을 위한 열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열심을 자제했고, 결코 열심이 그를 지배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일”에 아낌없이 헌신했다. 이 신다운 열심은 영적 생각이 없는 형제들로 하여금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지만, 구경하는 우주는 그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의 모형이라고, 높은 수준의 영적 생활에 필사자가 최고로 헌신하는 본보기라고 그를 평가했다. 그리고 자제된 그의 열심은 쉽게 번졌다. 동료들은 그와 함께 신답게 낙관할 수밖에 없었다.
100:7.13 (1103.1) 이 갈릴리 사람은 슬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즐거운 사람이었다. “기뻐하고 지극히 즐거워하라”하고 늘 말했다. 그러나 의무가 요구할 때, “그늘진 죽음의 골짜기”를 기꺼이 용감히 걸었다. 즐거워했지만 동시에 겸손했다.
100:7.14 (1103.2) 그의 용기는 그의 참을성에 못지 않았다. 때이르게 행동하도록 압력을 받았을 때, 그는 오직 “내 때가 아직 다가오지 않았느니라” 대답하곤 했다.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의 차분한 자세는 탁월하였다. 그러나 악을 보고서 자주 분개하였고, 죄를 참지 못했다. 이따금 땅에 있는 자녀들의 복지에 해로운 것에 저항하도록 힘차게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죄를 분개하는 태도는 결코 죄인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지 않았다.
100:7.15 (1103.3) 그의 용기는 대단했지만 그는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 그의 표어는 “두려워 말라”는 것이었다. 그는 대단히 용기가 있었고, 때때로 영웅답게 용감했다. 그러나 그의 용기에 신중함이 있었고 이성(理性)으로 자제되었다. 그 용기는 믿음에서 생겨난 용기요, 함부로 맹목으로 주제넘게 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참으로 용감했지만 결코 만용을 부리지 않았다.
100:7.16 (1103.4) 주는 존경심의 본보기였다. 젊을 때에도 그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이 거룩하옵소서.” 그는 동료들이 그릇되게 숭배하는 것조차 존중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로 하여금 종교적 전통을 공격하거나 사람의 잘못된 관념을 공격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그는 참된 거룩함을 존중했고, 그래도 “너희 가운데 누가 나를 죄 있다고 선언하느냐?”하고 말하면서 동료들에게 온당하게 호소할 수 있었다.
100:7.17 (1103.5) 예수가 위대한 것은 선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는 어린아이들과 사귀었다. 부드러웠어도 사생활에서 잘난 체하지 않았고, 그래도 우주에서 완전해진 사람이었다. 동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를 주라고 불렀다.
100:7.18 (1103.6) 예수는 완전하게 통일된 인격자였다. 그리고 오늘날, 갈릴리에서 한 것처럼, 그는 계속 필사자의 체험을 통일하고 인간의 수고를 조정한다. 그는 생명을 하나가 되게, 인품을 고귀하게, 체험을 단순하게 만든다. 그는 인간의 지성 속에 들어가서 그 지성을 높이고 변화시키고 그 모습을 바꾼다. 이 말씀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마음 속에 가졌으면 새 사람이라. 오래된 것이 지나가고 있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고 있도다.”
101:0.1 (1104.1) 인간이 체험하는 종교는 진화하는 야만인이 원시적 두려움에 사로잡힌 상태로부터,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당당하게 의식하는, 그러한 문명화된 필사자가 숭고하고 훌륭한 신앙으로 해방을 얻는 수준까지 미친다.
101:0.2 (1104.2) 종교는 진취적 사회의 진화에서 생기는 상급 윤리 및 도덕의 근원이다. 그러나 종교 그 자체는 단지 도덕적 운동이 아니다. 하지만 종교가 겉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모습은 인간 사회의 윤리적ㆍ도덕적 운동력에 힘차게 영향을 받는다. 종교는 반드시 사람의 진화하는 성품에 영감을 주지만, 종교가 그 진화의 비결은 아니다.
101:0.3 (1104.3) 종교, 인격자의 확신과 믿음은, 믿지 않는 물질 지성에서 태어난 논리, 표면상 모순되는 절망의 논리를 반드시 이길 수 있다. 속에서 나오는 참되고 진정한 목소리, 바로 “세상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된 빛”이 정말로 있다. 이 영의 인도하심은 인간의 양심(良心)에서 우러나는 윤리적 재촉과 다르다. 종교적 확신을 가진 느낌은 감정보다 더한 것이다. 종교가 주는 확신은 머리로 따지는 이치, 아니 철학의 논리조차 뛰어넘는다. 종교는 믿음이요, 신뢰요, 확신이다.
101:1.1 (1104.4) 참된 종교는 자연의 증명으로 이치를 따지거나 타당함을 밝힐 수 있는 철학적 관념 체계가 아니며, 오직 낭만적인 신비주의 신봉자가 즐길 수 있는, 말할 수 없는 무아경(無我境)의 느낌에 젖는,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체험도 아니다. 종교는 논리의 산물이 아니지만, 안에서 볼 때 종교는 무척 이치가 있다. 종교는 인간 철학의 논리에서 생겨나지 않지만, 필사자의 한 체험으로서 무척 논리가 있다. 종교는 진화적 기원을 가진 도덕적 존재의 의식 속에서 신성을 체험하는 것이다. 종교는 시간 세계에서 영원한 실체들을 맛보는 참된 체험, 아직 육체를 입은 동안에 영적 만족을 얻는 것을 나타낸다.
101:1.2 (1104.5) 생각 조절자는 자신을 표현할 특별한 장치가 전혀 없다. 종교적 감정을 받아들이거나 나타내는 신비스러운 종교적 재능이 전혀 없다. 필사자의 지성에서 자연스럽게 정해진 작용을 통해서 이러한 체험을 겪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어째서 조절자가 항상 깃드는 그 물질 지성과 직접 교통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는가 한 가지 설명이 있다.
101:1.3 (1104.6) 신다운 영은 느낌이나 감정의 수단이 아니라, 가장 높고 가장 영적인 생각 분야에서 필사 인간과 접촉한다. 너희를 하나님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너희의 생각이지, 느낌이 아니다. 오로지 지성의 눈이 이 신다운 성품을 파악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을 정말로 헤아리고, 깃드는 조절자의 소리를 듣는 지성은 순수한 지성이다. “아무도 거룩하지 않고서 주를 보아서는 안 되느니라.” 마음 속의 모든 그러한 영적 교통은 영적 통찰력이라 언급한다. 그러한 종교적 체험은 하나님의 진화하는 아들들의 생각과 이상, 통찰력과 영적 노력이 있는 가운데서, 그리고 이것들 위에 조절자와 진리의 영이 활동하는 동안, 이 둘의 통합된 작용이 사람의 머리에 주는 인상으로부터 생긴다.
101:1.4 (1105.1) 그러면 시각(視覺)이나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과 통찰력으로 종교는 살아 있고 번성한다. 종교는 새 사실을 찾아내거나 독특한 체험을 발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류에게 이미 잘 알려진 사실에서 새로운 영적 의미를 찾아내는 데 있다. 가장 높은 종교적 체험은 믿음ㆍ전통ㆍ권한, 이러한 이전 행위에 달려 있지 않다. 종교는 숭고한 느낌과 순전한 신비스러운 감정의 산물도 아니다. 종교는 차라리 인간의 지성 안에 거주하는 영의 영향력과 영적 교통을 가지는 체험, 대단히 깊고 실재하는 체험이다. 그러한 체험을 심리학 용어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한, 종교는 다만 하나님을 믿는 현실을 맛보는, 그러한 순전히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현실로서 얻는 체험이다.
101:1.5 (1105.2) 종교는 물질적 우주론의 합리주의적 추측에서 생긴 산물이 아니지만, 그런데도 종교는 사람의 지성 체험에서 생기는 온전히 합리적 통찰력의 작품이다. 종교는 신비스러운 명상에서 태어나지 않고, 따로 떨어져 숙고함으로 생기지도 않는다. 하지만 종교는 늘 얼마큼 신비스러우며, 순전한 지적 이치와 철학적 논리 방식으로 반드시 정의를 내릴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참된 종교의 싹은 사람의 도덕 의식 분야에 기원이 있으며, 이 싹은 사람의 영적 통찰력의 성장에서 드러난다. 이 통찰력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필사 지성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생각 조절자가 계시는 결과로서 생기는, 인격자의 그 능력이다.
101:1.6 (1105.3) 믿음은 도덕적 통찰력과 가치 기준의 양심적 분별을 통합하며, 이전에 존재하던 진화적 의무 감각이 참된 종교의 족보를 완성한다. 종교에서 얻는 체험은 결국 어떤 하나님 의식, 그리고 믿는 인격자가 살아남는다는 의심 없는 확신을 낳는다.
101:1.7 (1105.4) 그러므로 종교적 열망과 영적 욕구는 단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하도록 이끌 그러한 성품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그러한 성품과 힘을 지녔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확신에 깊이 감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시의 빛을 받은 결과로서, 진화적 의무 및 책임 감각이 사람의 도덕적 성품에 아주 깊은 인상을 주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믿지 않을 권리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바로 그 지성의 위치와 바로 그 혼의 태도에 마침내 다다른다. 깨우치고 단련받은 그러한 개인들의 상급 지혜, 철학을 뛰어넘는 지혜는, 궁극에 그들에게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그의 선함을 불신하는 것은 인간의 지성과 혼 속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깊은 것―신다운 조절자―에 충실하지 않음을 입증할 것이라 가르친다.
101:2.1 (1105.5) 종교적 사실은 합리적이고 평범한 인간들이 겪는 종교적 체험으로 온전히 이루어진다. 오직 이런 뜻으로 종교가 과학적이라, 아니 심리적인 것이라고 언제라도 간주할 수 있다. 계시가 계시라는 증명은 인간이 체험하는 바로 이 사실이다: 계시는 겉보기에 서로 갈라지는 자연 과학, 그리고 종교에 관한 신학, 이 두 가지를 일관성 있고 논리적인 하나의 우주 철학으로, 즉 과학과 종교를 일치된 완전한 설명으로, 통합한다는 사실이며, 따라서 지성을 조화시키고 영을 만족시킨다. 그런 설명은 인간의 체험에서 어떻게 무한자가 물질 속에서, 지성들과 함께, 그리고 영에게, 그의 뜻과 계획을 성취하는가 몹시 알고 싶어 하는 필사자의 지성이 던지는 질문을 인간의 체험 속에서 대답한다.
101:2.2 (1106.1) 이성(理性)은 과학의 방법이요, 믿음은 종교의 방법이며, 논리는 철학이 시도하는 기법이다. 지성이 중간에 조절하여 물질과 영의 실체 및 관계를 이해하는 통일된 기법을 마련함으로, 계시는 상물질 관점의 부재를 보상한다. 참된 계시는 결코 과학을 부자연스럽게, 종교를 부조리하게, 또는 철학을 이치에 맞지 않게 만들지 않는다.
101:2.3 (1106.2) 이성은 과학을 연구함으로 자연을 통해서 첫째 원인으로 돌아가도록 이끌 수도 있지만, 과학에서 말하는 첫째 원인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변화시키는 데는 종교적 믿음이 필요하다. 계시는 더 나아가서, 그러한 믿음, 그러한 영적 통찰력이 타당함을 확인하는 데 필요하다.
101:2.4 (1106.3) 인간이 살아남는 것을 보살피는 하나님을 믿는 데는 두 가지 기본 이유가 있다:
101:2.5 (1106.4) 1. 인간의 체험, 개인적 확신, 깃드는 생각 조절자가 시작하여 어떻게든 머리에 떠올린 희망과 신뢰감.
101:2.6 (1106.5) 2. 진리의 영이 직접 손수 봉사하거나, 신다운 아들들이 세계에 자신을 수여하거나, 아니면 기록된 말씀을 계시함으로 진리가 계시되는 것.
101:2.7 (1106.6) 과학은 첫째 원인을 가정하면서 논리와 탐구를 그친다. 종교는 구원하는 하나님을 확신할 때까지 믿음으로 비행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사물을 분별하는 과학적 연구는 한 절대자가 실재하고 존재한다는 것을 논리로 암시한다. 종교는 인격자가 살아남도록 보살피는 하나님이 존재하고 실재한다는 것을 거리낌없이 믿는다. 형이상학이 형편없이 실패한 것, 철학조차도 얼마큼 이루지 못한 것을 계시(啓示)가 해낸다. 다시 말해서, 과학에서 첫째 원인과 종교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은 바로 똑같은 신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101:2.8 (1106.7) 이치는 과학을 증명하고, 믿음은 종교를 증명하며, 논리는 철학을 증명한다. 그러나 오로지 인간의 체험이 계시가 타당함을 확인한다. 과학은 지식을 낳고, 종교는 행복을 낳고, 철학은 통일성을 낳는다. 계시는 우주 실체에 이르는 접근법, 세 가지가 하나에 이르는 이 접근법이 체험으로 조화되는 것을 확인한다.
101:2.9 (1106.8) 자연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자연의 하나님, 운동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자연은 오직 물질ㆍ운동ㆍ생기―생명―을 나타낸다. 물질에 에너지를 더한 것은 어떤 조건 밑에서 살아 있는 형태로, 겉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처럼 자연 생명은 한 현상으로서 비교적 연속되지만, 그 개성은 온전히 일시적이다. 자연은 사람의 인격이 살아남는 것을 논리적으로 믿을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종교적인 사람은 개인을 상대하는 바로 이 하나님을 이미, 먼저 자신의 혼 속에서 발견한 것이다.
101:2.10 (1106.9) 믿음은 혼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낸다. 계시는 진화 세계에서 상물질 통찰력의 대용품이며, 믿음이 혼 속에서 보여주는 바로 그 하나님을 사람이 자연 속에서 볼 수 있게 만든다. 이처럼 계시는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 아니 지음받은 자와 창조자,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다리를 놓는 데 성공한다.
101:2.11 (1107.1) 자연을 숙고하는 것은 총명한 인도가 있다, 아니 생생한 감독이 있다는 방향을 논리적으로 가리키지만, 어떤 만족스러운 방법으로도 성격을 가진 하나님을 드러내지 않는다. 또 한편, 자연은 우주를 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작품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막을 아무것도 노출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는 없지만,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에, 자연의 연구는 우주에 대한 더 높고 더 영적인 해석과 온전히 양립한다.
101:2.12 (1107.2) 신기원(新紀元)의 현상으로서, 계시는 정기적으로 일어난다. 사람이 몸소 겪는 하나의 체험으로서 계시는 연속된다. 필사자의 인격 안에서, 아버지가 준 조절자 선물로서, 아들의 진리의 영으로서, 우주 영의 성령으로서 신이 활동하며, 한편 인간을 초월하는 이 세 가지 재산은 인간이 체험적 진화 속에서 최상위의 봉사로서 통일된다.
101:2.13 (1107.3) 참된 종교는 실체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이요, 도덕 의식이 낳는 믿음의 산물이요, 어떤 독단적 교리 집합에 단지 지적으로 찬성만 하는 것이 아니다. 참된 종교는 “바로 영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임을 우리의 영과 함께 증거하는” 체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종교는 신학적 주장이 아니라, 영적 통찰력과 혼의 숭고한 신뢰에 있다.
101:2.14 (1107.4) 너의 가장 깊은 성품―신다운 조절자―는 올바름을 간절히 목마르게 찾는 마음, 곧 신다운 완전을 찾는 어떤 갈망을 마음 속에서 만들어낸다. 종교는 신에게 도달하려는 이 마음 속의 욕구를 깨닫는 믿음의 행위이다. 구원받는 길이라, 인격이 살아남고, 참되고 선하다고 네가 간주하게 된 모든 가치가 살아남는 기법이라고 네가 의식하게 되는, 그런 혼의 신뢰, 그런 확신이 이처럼 생긴다.
101:2.15 (1107.5) 종교를 깨닫는 것은 결코 큰 학문이나 영리한 논리에 의존한 적이 없으며, 결코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런 깨달음은 영적 통찰력이요,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큰 종교 스승들 가운데 더러가, 아니 선지자들까지도, 때때로 속세의 지혜가 거의 없었는가 하는 이유이다. 종교적 믿음은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똑같이 소용된다.
101:2.16 (1107.6) 종교는 늘 자체의 비평가와 재판관이 되어야 한다. 종교는 바깥에서 이해하기는커녕, 결코 지켜볼 수 없다. 몸소 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너의 유일한 확신은 영적인 것을 믿는 너의 믿음과 그런 체험에 관한 바로 너의 통찰력이다. 비슷한 체험을 가져 본 어떤 동료에게도, 하나님의 성격이나 실체에 관하여 아무런 논의가 필요 없으며, 한편 이렇게 하나님에 관하여 확신이 없는 모든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어떤 가능한 논리도, 참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수 없다.
101:2.17 (1107.7) 심리학은 정말로 사회 환경에 대하여 종교가 반응하는 현상을 연구하려고 애쓸지 모르지만, 종교의 진정한, 내면의 동기와 작용을 파고들기를 바랄 수 없다. 오로지 신학이, 믿음의 범위와 계시의 기법이, 종교적 체험의 성질과 내용을 얼마큼이라도 지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다.
101:3.1 (1107.8) 종교는 생명력이 강해서, 배움이 없는 데서도 지속한다. 그릇된 우주론과 거짓된 철학에 오염되어도 종교는 살아 있다. 형이상학의 혼란을 겪어도 살아남는다. 종교적 흥망의 역사를 통틀어, 또 이를 통해서, 인간이 진보하고 살아남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늘 지속하는데, 곧 윤리적 양심과 도덕 의식이다.
101:3.2 (1108.1) 믿음에서 생기는 통찰력, 곧 영적 직관(直觀)은 생각 조절자와 관련하여 우주 지성이 부여한 것이고, 이 조절자는 아버지가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다. 영적 이성(理性), 곧 혼의 지능은 성령이 준 재산, 창조 영이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다. 영적 철학, 곧 영 실체들을 깨닫는 지혜는 진리의 영이 내려주는 것이요, 진리의 영은 수여 아들들이 함께 사람의 아들딸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리고 이 두 영 재산을 조정하고 서로 연결 짓는 것은 사람을 잠재 운명을 가진 영 인격자로 만든다.
101:3.3 (1108.2) 원시적이고 싹트는 형태로 있는 바로 이 영 인격을 조절자가 소유하는 것이 육체가 자연사를 겪은 뒤에 살아남는다. 살아 있는 움직임이 그쳐서,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의 그러한 일시적 협동 관계가 분리될 때, 영에 기원을 가진 이 복합 개체는 인간의 체험과 결합하여, 신다운 아들들이 마련한 생명의 길의 수단으로, 지성과 물질로 이루어진 물질 자아의 분해를 견디고 (조절자의 보호를 받고) 살아남는다.
101:3.4 (1108.3) 종교적 믿음을 통해서 사람의 혼은 그 자체를 드러내고, 솟아나는 혼의 성품이 지닌 신성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독특한 방법으로 그 믿음은 필사 인격자로 하여금 지적이고 시험하는 어떤 벅찬 사회 상황에 반응하도록 유인한다. 진정한 영적 믿음(참된 도덕 의식)은 다음 면에서 드러난다. 그 믿음은:
101:3.5 (1108.4) 1. 타고난 불리한 동물 성향이 있는데도, 윤리와 도덕이 진보하게 만든다.
101:3.6 (1108.5) 2. 쓰라린 실망과 마음을 짓밟는 패배를 겪고도 하나님이 선함을 믿는 숭고한 신뢰를 낳는다.
101:3.7 (1108.6) 3. 자연의 역경과 물리적 재난을 당하고도 깊은 용기와 자신감을 불러일으킨다.
101:3.8 (1108.7) 4. 좌절시키는 병, 살을 에는 육체의 고통이 있어도 설명할 수 없는 차분함과 지속하는 평안을 드러낸다.
101:3.9 (1108.8) 5. 부당한 대접과 아주 지독한 불공평한 대우를 받아도, 신비스러운 차분함과 인격의 침착성을 잃지 않는다.
101:3.10 (1108.9) 6. 사정없이 닥치는 운명이 잔인한 듯 보이고, 겉보기에 자연력이 인간의 복지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해도 궁극에 승리하는 신을 의지하는 태도를 유지한다.
101:3.11 (1108.10) 7. 온갖 반대되는 논리가 전시되어도, 하나님을 믿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키고, 모든 다른 지적 궤변을 견디는 데 성공한다.
101:3.12 (1108.11) 8. 거짓된 과학의 속이는 가르침과 건전하지 않은 철학의 그럴듯한 망상과 상관 없이, 혼이 살아남는다는 불굴의 신앙을 계속 드러낸다.
101:3.13 (1108.12) 9. 현대의 복잡하고 치우친 문명이 짓눌러 지워준 과중한 짐과 상관 없이, 살고 승리한다.
101:3.14 (1108.13) 10. 인간의 이기심, 사회적 대립, 산업의 욕심, 정치적 부적응이 있는데도 이타정신이 계속 살아남는 데 기여한다.
101:3.15 (1108.14) 11. 죄와 악의 당혹스러운 존재와 상관 없이, 우주의 통일과 신의 인도하심을 믿는 숭고한 믿음에 꿋꿋하게 매달린다.
101:3.16 (1108.15) 12. 어떤 일이 있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줄곧 하나님을 섬긴다. “그가 나를 죽여도, 그래도 나는 하나님을 섬기리라”하고 감히 선언한다.
101:3.17 (1108.16) 그러면 세 가지 현상으로, 우리는 사람이 자기 안에 거주하는 신다운 영이나 영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첫째로, 개인의 체험―종교적 믿음―으로, 둘째로 개인과 종족에게 주는 계시로, 셋째로 진짜 인간 존재에서 실제의 벅찬 상황이 있는 가운데 앞서 말한 12가지의 영다운 성취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사람의 물질 환경에 대하여 그러한 특별하고 부자연스러운 반응을 놀랍게 드러내는 것으로 이를 안다. 그리고 다른 것들이 더 있다.
101:3.18 (1109.1) 종교 분야에서 바로 그렇게 생명력이 강하고 활력 있는 신앙의 성과가, 인간의 성품에서 최고의 재산, 곧 종교적 체험을 몸소 소유하고 그 체험이 영적 현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자격을 필사 인간에게 준다.
101:4.1 (1109.2) 너희 세계가 대체로 기원, 아니 물리적 기원에 관해서도 무지하므로, 때때로 우주론을 가르치는 것이 현명한 듯 보였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앞날에 문제를 일으켰다. 계시의 법칙은 수고하여 얻지 않은 지식, 곧 때 이른 지식을 나누어주는 것을 금지하여 우리를 몹시 방해한다. 계시된 종교의 일부로서 발표하는 어떤 우주론도 시간이 아주 조금 지나면 작아서 못쓰게 되어 있다. 따라서, 그러한 계시를 공부하는 앞날의 학자들은, 계시 안에 발표된 관련된 우주론의 표면에서 오류를 발견하기 때문에, 그 계시가 담고 있을지 모르는 진정한 종교적 진리의 어떤 요소라도 던져 버릴 유혹을 받는다.
101:4.2 (1109.3) 진리의 계시에 참여하는 우리가 상관들이 내린 지침에 무척 엄격히 제한을 받는다는 것을 인류는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1천 년 동안에 있을 과학의 발견을 예상할 자유가 없다. 계시자들은 계시 명령의 일부를 구성하는 지침에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이나 어느 앞날에도, 이 어려움을 극복할 아무 방법을 모른다. 이 시리즈의 계시 발표에 담긴 역사적 사실과 종교적 진리는 다가올 시대의 기록 위에 굳게 서겠지만, 자연 과학에 관하여 우리가 진술한 많은 것이 짧은 몇 년 안에, 추가된 과학의 발전과 새로운 발견의 결과로서 수정할 필요가 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 새로운 발전의 결과를 우리가 지금 내다보기는 하지만, 우리는 계시하는 기록 속에 사람이 찾아내지 않은 그런 사실을 담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계시가 반드시 영감을 받지는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자. 이 계시에 담긴 우주론은 영감을 받지 않았다. 이 우주론은 우리가 오늘날의 지식을 조정하고 분류하라고 받은 허가에 제한을 받는다. 신이 준 통찰력, 영적 통찰력은 선물이지만, 인간의 지혜는 진화되어야 한다.
101:4.3 (1109.4) 진리는 언제나 하나의 계시이다: 깃드는 조절자가 일하는 결과로서 계시가 드러날 때 그것은 자기 계시이다. 어떤 다른 하늘 대리자나 집단이나 성격자의 활동으로 발표되었을 때, 이는 신기원(新紀元)을 여는 계시이다.
101:4.4 (1109.5) 결국, 종교는 그 열매로, 종교가 그 자체에 본래부터 있는 신성한 탁월성을 나타내는 방법과 한도에 따라서, 판단해야 한다.
101:4.5 (1109.6) 계시가 변함없이 영적 현상이지만, 진리는 오직 상대적으로 영감을 받을지 모른다. 우주론을 언급하는 진술 사항은 결코 영감을 받지 않았지만, 그러한 계시는 다음 방법으로 적어도 일시나마 지식을 뚜렷이 설명하므로, 엄청난 가치가 있다:
101:4.6 (1109.7) 1. 권위 있게 오류를 없앰으로 혼란을 줄인다.
101:4.7 (1109.8) 2. 이미 알려졌거나 알려질 때가 가까운 사실과 관찰을 조정한다.
101:4.8 (1110.1) 3. 아득한 과거에 있었던 신기원의 거래들에 관하여, 잃어버린 지식 중에 중요한 조각을 회복한다.
101:4.9 (1110.2) 4. 다른 방법으로 얻은 지식에서 빠진 중요한 간격을 채울 정보를 제공한다.
101:4.10 (1110.3) 5. 수반되는 계시에 담긴 영적 가르침을 비추는 방법으로 우주 자료를 제시한다.
101:5.1 (1110.4) 계시는 영이 획득하는 진리 중에서 진화적 오류를 가려내고 체질하는 필수 작업에서, 말할 수 없이 긴 세월을 절약하는 기법이다.
101:5.2 (1110.5) 과학은 사실을 다루며, 종교는 오로지 가치 기준에 관여한다. 개화된 철학을 통해서 지성은 사실과 가치 기준, 이 두 가지 의미를 통일하려고 애쓰고, 이렇게 함으로 완성된 실체 개념에 다다른다. 과학은 지식의 영토이고, 철학은 지혜의 영역이며, 종교는 믿음을 체험하는 분야임을 기억하여라. 그렇기는 해도 종교는 두 단계에서 겉으로 나타난다:
101:5.3 (1110.6) 1. 진화로 생긴 종교. 원시적 예배의 체험, 지성에서 파생된 종교이다.
101:5.4 (1110.7) 2. 계시된 종교. 우주에 대한 태도, 이것은 영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영원한 실체들이 보존되고, 인격이 살아남고, 궁극에 우주의 신에 도달하며, 그 신의 목적이 이 모두를 가능하게 만들었음을 확신하고 믿는 것. 조만간에 진화 종교가 영적으로 확대된 계시를 받도록 예정된 것은 우주 계획의 일부이다.
101:5.5 (1110.8) 과학과 종교 모두가 논리적 추론을 위하여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어떤 기초를 가정하고서 시작한다. 그래서 철학도 세 가지의 실체를 가정하고 그 경력을 시작해야 한다:
101:5.7 (1110.10) 2. 인간의 초물질 단계, 곧 혼이나 깃드는 영까지도 포함한다.
101:5.8 (1110.11) 3. 인간의 지성, 곧 영과 물질 사이에,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서로 교통하고 서로 상관하는 작용.
101:5.9 (1110.12) 과학자는 사실을 수집하고, 철학자는 관념을 조정하고, 선지자는 이상을 높인다. 느낌과 감정은 종교에 변함없이 따르지만 종교는 아니다. 종교는 체험하는 느낌일지 모르지만, 도저히 느낌을 체험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논리(합리화)도 감정(느낌)도, 본질적으로 종교적 체험의 일부가 아니다. 하지만 개인의 지성 상태와 기질의 경향에 따라서, 이 두 가지는 실체를 꿰뚫는 영적 통찰력을 촉진하는 신앙 연습과 여러 가지로 관련될지 모른다.
101:5.10 (1110.13) 진화 종교는 진화하는 인간 안에서 신을 경배하는 버릇을 만들어내고 육성하는 일을 맡은 지역 우주 지성 보조자가 부여한 자질이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한 원시 종교는 윤리와 도덕, 즉 인간의 의무 감각과 직접 관계된다. 그러한 종교들은 양심의 확신에 바탕을 두며, 비교적 윤리 있는 문명을 안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101:5.11 (1111.1) 개인적으로 계시된 종교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세 분을 대표하는 수여 영들의 후원을 받으며, 특히 진리의 확대에 관여한다. 진화된 종교는 개인에게 개인 의무라는 관념을 못박아 준다. 계시된 종교는 사랑하기를, 즉 황금률을 더욱 강조한다.
101:5.12 (1111.2) 진화된 종교는 온통 믿음에 의존한다. 계시는 신과 실체에 관하여 확대된 진리가 제시된다는 추가된 보장을 받고, 실제 체험에 관하여 더욱 가치 있는 증언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 체험은 진화로 얻은 믿음과 계시된 진리, 이 두 가지가 실제로 소용되는 연합의 결과로서 누적된다. 인간의 믿음과 신이 준 진리의 그러한 소용되는 연합은 상물질 인격을 실제로 얻는 길에 한창 나아간 인품을 소유하게 한다.
101:5.13 (1111.3) 진화적 종교는 믿음의 확신을 주고 양심이 옳음을 확인할 따름이다. 계시적 종교는 믿음의 확신뿐 아니라 계시된 실체들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진리를 마련해 준다. 종교에서 셋째 걸음, 종교의 체험에서 셋째 단계는 상물질 상태와 상관이 있으며, 이것은 상지혜(上知慧)를 더 단단히 붙잡는 것이다. 상물질적 진보에는 계시된 종교의 진리가 갈수록 더 확대된다. 너희는 최상의 가치, 신다운 선, 보편적 관계, 영원한 실체, 궁극의 운명에 관한 진리를 더욱 알게 될 것이다.
101:5.14 (1111.4) 상물질적 진보를 통하여 내내, 진리의 확신은 점점 더 믿음의 확신을 대체한다. 너희가 마침내 실제의 영 세계로 부름받을 때, 그때 순수한 영 통찰력이 주는 확신은 믿음과 진리 대신에 작용하든지, 또는 그보다 인격자가 확신하는 이 예전의 기법과 더불어, 그리고 그 위에 겹쳐서 작용할 것이다.
101:6.1 (1111.5) 계시된 종교의 상물질 단계는 살아남는 체험과 상관이 있으며, 그 단계의 큰 욕구는 영이 완전해지는 것이다. 또한 더욱 윤리적 봉사를 하도록 재촉하는 부름과 관련하여, 신을 예배하려는 상급의 욕구가 있다. 상물질 통찰력에는 일곱 신, 최상위를 아니 궁극위까지도, 늘 더욱 크게 의식하는 일이 따른다.
101:6.2 (1111.6) 맨 처음에 물질 수준에서 시작할 때부터 완전한 영 지위를 얻을 때까지 모든 종교적 체험에 두루, 조절자는 최상위 존재가 실체임을 몸소 깨닫는 비결이다. 바로 이 조절자는 또한 초월적으로 궁극위까지 도달하는 너희 신앙의 비결도 쥐고 있다. 진화하는 사람의 체험적 인격은, 실존적인 하나님의 조절자 본질과 연결되어 최상의 존재를 완성할 잠재성이며, 이것은 본래부터, 유한을 뛰어넘어서 궁극에 초월 인격에 이르기 위한 기초이다.
101:6.3 (1111.7) 도적적 의지는, 이치를 따져 얻은 지식에 기초를 두고 지혜로 인하여 확대되고 종교적 믿음이 인가한 결정을 포함한다. 그러한 선택은 도덕적 성질을 띠는 행위이고 도덕적 인격이 존재함을 증거하며, 도덕적 인격은 상물질 인격, 그리고 궁극에 얻는 참된 영 지위의 선구자이다.
101:6.4 (1111.8) 진화로 얻은 종류의 지식은 오직 원형질의 기억 물질이 축적된 것일 뿐이다. 이것은 가장 원시 형태의 생물 의식이다. 지혜는 관련짓고 다시 통합하는 과정에서 원형질의 기억으로부터 형성된 관념들을 포함하며, 그러한 현상은 인간의 지성을 단순한 동물 지성과 구별한다. 동물은 지식이 있지만, 오로지 사람이 지혜 능력을 소유한다. 그러한 지성 위에 아버지와 아들들의 영, 곧 생각 조절자와 진리의 영을 수여함으로, 진리는 지혜를 부여받은 개인에게 소용될 수 있다.
101:6.5 (1112.1) 유란시아에 수여되었을 때, 그리스도 미가엘은 세례를 받을 때까지 진화된 종교에 지배를 받으면서 살았다. 그 순간부터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건을 포함하여 그때까지, 그는 진화된 종교와 계시된 종교의 인도를 모두 받고서 일을 해 나갔다. 부활한 아침부터 하늘에 오를 때까지, 물질 세계로부터 영의 세계까지, 그는 필사자로 이동하는 여러 단계의 상물질 생명을 거쳤다. 하늘에 오른 뒤에, 미가엘은 최상위 체험, 곧 최상 존재에 이르는 체험을 겪은 주인이 되었다. 네바돈에서 최상위의 실체를 체험하는 무제한 능력을 가진 유일한 성격자이기 때문에, 그의 지역 우주에서, 그 우주에 대하여, 그는 당장에 최상 군주권 지위에 이르렀다.
101:6.6 (1112.2) 사람의 경우에, 깃드는 조절자와 궁극에 융합하고 그 결과로 일체가 되는 것―사람과 하나님의 본질을 인격이 통합하는 것―은 그를 최상위의 살아 있는 부분이 될 수 있게 하며, 최상위를 위해서, 그리고 그와 함께, 마침내 우주에서 봉사를 끝없이 추구하는 영원한 생득권을 한때 필사자였던 그런 사람에게 보장해 준다.
101:6.7 (1112.3) 시간이 흐르는 수단으로 공간을 거치는 그러한 멋지고 흥미를 자아내는 모험을 떠나기 위해서, 계시는 필사 인간에게 먼저 지식을 생각 및 결정으로 체계화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다음에 그는 냉정한 여러 생각을, 아니 생각으로서 무척 이치가 있고 이상으로서 아주 논리적인 그러한 개념까지 포함하여, 갈수록 더 실용적이지만 여전히 고매한 이상으로 변화시키는 고귀한 과제에 끊임 없이 지혜를 이용하라고 명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조절자가 그 개념들을 감히 통합하고 영답게 만들어서, 아들들의 진리 영이 행동하기 위하여 이처럼 준비된, 실제의 인간의 보완물이 되도록 이 개념들을 유한 지성 속에서 그러한 연합에 소용되게 만든다. 이 진리 영은 시공에서 나타나는 파라다이스 진리―보편적 진리―의 표현이다. 생각 및 결정, 논리적 이상, 신성한 진리를 조정하는 것은 올바른 인품을 소유하는 것이며, 이것은 필사자가 상물질 세계들의 실체, 늘 확대되고 점점 더 영적인 현실에 친숙해지는 데 필수 조건이다.
101:6.8 (1112.4) 예수의 가르침은 아름답게 조화된 지식ㆍ지혜ㆍ믿음ㆍ진리ㆍ사랑을 아주 넘치게 담고 있으며, 그래서 현세에서 마음의 평안, 지적 확신, 도덕적 깨우침, 철학적 안정, 윤리적 민감성, 하나님 의식, 그리고 인격이 살아남는다는 분명한 확신을 완벽하게 동시에 마련해 주는 첫 유란시아 종교였다. 예수의 믿음은 다음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에, 확실히 인간이 구원받는 길, 필사자가 우주에서 궁극에 성취하는 길을 가리켰다:
101:6.9 (1112.5) 1. 영이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몸소 깨닫고 물질의 사슬을 벗어나게 한다.
101:6.10 (1112.6) 2. 지적 속박을 벗어나게 한다: 사람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사람을 해방하리라.
101:6.11 (1112.7) 3. 영적으로 눈이 먼 상태를 벗어나게 한다. 필사 존재들의 친교 관계를 사람이 깨닫고 모든 우주 생물이 형제인 것을 상물질적으로 의식하게 한다. 봉사로 영적 현실을 발견하고, 봉사로 영의 가치가 선함을 드러낸다.
101:6.12 (1113.1) 4. 우주의 여러 영 수준을 달성함으로, 그리고 하보나의 조화와 파라다이스의 완전을 궁극에 깨달음을 통해서, 자아의 불완전을 벗어나게 한다.
101:6.13 (1113.2) 5. 자아를 벗어나게 하고, 최상위 지성의 우주 수준에 도달함으로, 자의식하는 모든 다른 존재의 달성과 조정함으로, 자의식의 한계를 벗어나게 한다.
101:6.14 (1113.3) 6. 시간 세계를 벗어나게 한다, 하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께 봉사하면서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한다.
101:6.15 (1113.4) 7. 유한한 것을 벗어나게 한다, 즉 최상위 안에서, 그를 통해서, 신과 하나인 상태가 완전해지고, 이렇게 함으로 인간은 초한(超限)한 것의 최후자 이후 수준에서 초월적으로 궁극위를 찾으려고 애쓴다.
101:6.16 (1113.5) 그러한 일곱 가지 구원은 우주의 아버지를 만나는 궁극의 체험을 완벽하게 완전히 실현하는 것과 대등하다. 이 모든 것의 가능성은 인간의 종교적 체험에서 믿음의 실체 안에 담겨 있다. 그렇게 담겨 있을 수 있으니, 예수의 믿음이 궁극의 것을 뛰어넘은 실체로부터도 자양분을 받았고, 그 실체들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예수의 믿음은 그러한 것이 시공의 진화 우주에서 겉으로 나타날 수 있는 한, 우주의 한 절대자 상태에 접근하였다.
101:6.17 (1113.6) 예수의 믿음을 사용함으로 필사 인간은 시간 세계에서 영원의 실체들을 미리 맛볼 수 있다. 예수는 인간의 체험 속에서 최후의 아버지를 발견했고, 필사 인생의 육체를 입은 그의 형제들은 아버지를 발견하는 바로 그 체험을 따라서 예수를 따라갈 수 있다. 그들은 현재 신분 그대로, 예수가 그의 신분대로 한 것처럼 아버지와 함께 하는 이 체험 속에서 똑같은 만족까지도 얻을 수 있다. 미가엘이 마지막으로 자신을 수여한 결과로서 새로운 여러 잠재성이 네바돈 우주에서 현실이 되었고, 이 중의 하나는 만물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 영원의 길을 새롭게 비추는 것이었다. 이것은 공간의 여러 행성에서 사는 첫 인생에서 물질인 피와 살을 입은 필사자도 거쳐 갈 수 있는 길이다. 예수는 신이 준 재산을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길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 재산은 요청만 하면 사람의 것이 되리라고 아버지가 선포하셨다. 인류가 신답더라도, 인류의 신앙 체험의 처음과 끝이, 예수 안에서 넘치도록 드러난다.
101:7.1 (1113.7) 하나의 생각은 행동을 위한 이론적 계획일 뿐이며, 반면에 분명한 결정은 사람이 인가한 행동 계획이다. 고정 관념은 인가(認可)를 거치지 않고 받아들인 행동 계획이다. 개인의 종교 철학을 세우는데 들어가는 물질은 그 개인의 내면 체험과 환경 체험, 이 두 가지로부터 얻는다. 사람이 처한 시기와 장소에서 사회적 지위, 경제적 조건, 교육받을 기회, 도덕적 경향, 제도의 영향, 정치적 발전, 종족의 경향, 종교적 가르침은 모두 개인의 종교 철학을 형성하는 요인이 된다. 타고난 기질과 지적 소질까지도, 종교적 철학의 형태를 뚜렷이 좌우한다. 직업ㆍ결혼ㆍ친족은 모두 사람의 개인적 생활 기준의 진화에 영향을 미친다.
101:7.2 (1113.8) 종교에 관한 철학은, 관념과 실험적 생활이 모두 동료들을 모방하는 경향에 따라 수정되는 바와 같이, 이 두 가지의 기본적 성장으로부터 진화한다. 철학적 결론이 건전한가 그렇지 않은가는 목적에 대한 민감도 및 평가의 정확성, 그리고 관련된 사고, 날카롭고 정직하고 분별력 있는 사고(思考)에 달려 있다. 도덕적으로 비겁한 자는 결코 높은 수준의 철학적 사고에 이르지 못한다. 새 수준의 체험을 시작하고, 알지 못하는 지적 생활 분야의 탐구를 시도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101:7.3 (1114.1) 당장에 새로운 체계의 가치 기준이 존재하게 된다. 원칙과 기준이 새롭게 형성된다. 버릇과 이상이 다시 모습을 갖춘다. 성격을 가진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을 얻고, 하나님과 가지는 관계에 대하여 확대되는 개념들이 뒤따른다.
101:7.4 (1114.2) 종교적 생활 철학과 비종교적 생활 철학의 큰 차이점은 인정된 여러 가치의 성질과 수준에, 그리고 충성심의 대상에 있다. 종교 철학의 진화에는 네 단계가 있다: 그러한 체험은 전통과 권한에 복종하도록 몸을 맡기면서, 다만 순응하는 체험이 될 수 있다. 아니면 그 철학은 나날의 생활을 안정시키기에 겨우 충분할 정도로, 하찮은 성취로 만족될 수도 있고, 따라서 그러한 우발적 수준에서 일찍부터 성장이 그친다. 그러한 사람들은 충분히 좋은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을 믿는다. 셋째 집단은 논리로 지적 수준까지 진보하지만, 문화에 종이 된 결과로서 거기서 침체에 빠진다. 문화적 사슬의 잔인한 손아귀에 아주 단단히 붙들려 있는 대단한 지성인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로 딱하다. 자기 문화의 사슬을, 과학이라 거짓되게 부르는 유물론적 사슬과 바꾸는 자를 지켜보는 것은 똑같이 애처롭다. 넷째 수준의 철학은 모든 관습과 전통의 장애로부터 자유를 얻고, 감히 정직하게, 충성스럽게, 두려움 없이, 진실하게 생각하고 행위하고 산다.
101:7.5 (1114.3) 어떤 종교 철학이라도 그 진정한 시험은 그 철학이 물질 세계의 현실과 영적 세계의 현실을 구별하는가 못하는가, 그리고 동시에 지적 노력을 기울이고 사회에 봉사할 때 그 현실이 하나로 된 것을 인식하는 데 있다. 건전한 종교 철학은 하나님의 것과 케자의 것을 혼동하지 않는다. 순전한 경이를 찾는 미학(美學) 종파를 종교의 대용품으로 인정하지도 않는다.
101:7.6 (1114.4) 철학은, 대체로 양심을 일깨우는 옛 이야기였던 원시 종교를, 높아지는 우주 현실의 가치를 맛보는, 생생한 체험으로 변화시킨다.
101:8.1 (1114.5) 생활을 자극하고 사는 방식을 정해 줄 때 관념은 믿음의 수준에 이른 것이다. 어느 가르침을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믿는 관념이다. 확실한 것도 확신을 가지는 것도 믿음이 아니다. 지성의 상태는 생활 방식을 실제로 지배할 때에야 믿음의 수준에 이른다. 믿음은 진정한 몸소 겪는 종교적 체험의 생생한 속성이다. 사람은 진리를 믿고,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선을 존중하지만, 이것들을 숭배하지 않는다. 그러한 구제하는 믿음의 태도는 오로지 하나님에 집중하며, 하나님은 이 모두를 성격화한 것이고 그보다 무한히 크다.
101:8.2 (1114.6) 관념은 언제나 사람을 제한하고 묶는다. 믿음은 확대하고 사람을 풀어놓는다. 관념은 고정시키지만, 믿음은 해방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 종교적 믿음은 고귀한 관념들의 관계를 넘는 것이요, 고상한 철학 체계보다 더 크다. 이것은 영적 목적, 신성한 이상, 최고의 가치에 관여하는 산 체험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을 알고, 사람에게 봉사한다. 관념은 집단의 소유물이 될 수도 있지만, 믿음은 개인의 것이다. 신학적 관념을 한 집단에게 제시할 수 있지만, 믿음은 오직 개별 신자의 마음 속에서 일어날 수 있다.
101:8.3 (1114.7) 믿음이 주제넘게 현실을 부인하고 추종자에게 가상된 지식을 수여할 때 믿음은 신뢰를 저버린 것이다. 믿음이 지적 성실성을 지키지 못하도록 조장하고, 최고의 가치와 신다운 이상에 바치는 충성심을 헐뜯을 때, 믿음은 사람을 저버린다. 믿음은 필사자의 인생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의무를 결코 피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믿음은 편협이나 박해나 불관용을 조장하지 않는다.
101:8.4 (1115.1) 믿음은 창조적 상상력에 쇠고랑을 채우지 않으며, 과학적 조사로 얻는 발견에 대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 편견을 유지하지도 않는다. 믿음은 종교를 활기 있게 만들고, 신자에게 영웅답게 황금률의 실천을 강요한다. 믿음의 정열은 지식에 비례하고, 믿음이 기울이는 노력은 숭고한 평안으로 이끄는 전주곡이다.
101:9.1 (1115.2) 이전의 진화 종교가 만들어내고 육성한 윤리적 책임을 지는 의무의 요구를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 종교에서 공언(公言)된 계시도 진정하다고 여길 수 없다. 계시는 진화된 종교의 윤리적 시야를 어김없이 확대하고, 한편 동시에, 어김없이 모든 이전에 있었던 계시의 도덕적 책임을 확대한다.
101:9.2 (1115.3) 인간의 원시 종교에 (또는 원시인의 종교에) 대하여 너희가 감히 비판적 판단을 내릴 때, 너희는 그러한 야만인의 깨우침과 양심의 상태에 따라서, 그들을 판단하고 그들의 종교적 체험을 평가할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종교를 바로 너의 지식 및 진리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101:9.3 (1115.4) 상물질 현실은 사람의 가장 높은 윤리 및 도덕 개념, 인생의 가장 큰 가치와 우주의 가장 심오한 현실에 대한 사람의 최선의 해석이 되며, 참된 종교는 이 상물질 현실을 믿지 않는 것이 그릇되리라고 어쩔 수 없이 사람을 훈계하는 확신, 혼 속의 숭고하고 깊은 확신이다. 그러한 종교는 다만 영적 의식이 내리는 최고의 명령에 지적 충성을 바치는 체험이다.
101:9.4 (1115.5) 오직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한, 그리고 도덕적인 자의 개념을 강화하는 한도까지, 아름다움의 추구는 종교의 일부이다. 높은 영적 동기로부터 얻은 목적으로 예술이 퍼질 때에야 예술은 종교성을 띤다.
101:9.5 (1115.6) 문명화된 사람의 깨우친 영적 의식은 어떤 특정한 지적 관념이나 어느 한 가지 특별한 생활 방식에 관여하기보다, 오히려 생활에 관한 진실, 필사 존재에서 늘 다시 일어나는 상황에 반응하는, 선하고 올바른 기법의 발견에 관여한다. 도덕적 의식은 그저, 나날의 행위를 통제하고 안내하면서 사람이 지켜야 한다고 의무가 요구하는 가치 기준, 윤리적이고 태어나는 그 상물질 가치 기준을 인간이 인식하고 깨닫는 데 적용되는 이름일 뿐이다.
101:9.6 (1115.7) 종교가 불완전한 것을 인정하지만, 종교의 성질과 기능은 적어도 두 가지로 실제로 명시된다:
101:9.7 (1115.8) 1. 종교의 영적 자극과 철학적 압력은 사람으로 하여금, 도덕적 가치에 대한 그의 판단을 직접 바깥으로 동료들의 일에 연장시키게 만든다―이것은 종교의 윤리적 반응이다.
101:9.8 (1115.9) 2. 종교는 인간 지성이 신다운 실체를 영적으로 의식(意識)하게 만들며, 그런 의식은 도덕적 가치가 있는 여러 기존 개념에 바탕을 두고, 이로부터 믿음을 통하여 유래하며, 영적 가치가 있는 첨가된 개념들과 조정된다. 이렇게 함으로 종교는 필사자의 일을 검열하며, 이것은 실제로, 시간 세계의 향상된 실체와 더 오래 지속하는 영원의 실체들을 믿는, 일종의 영화롭게 된 도덕적 신뢰와 확신이다.
101:9.9 (1116.1) 믿음은 도덕적 의식, 그리고 지속하는 실체에 대한 영적 개념을 잇는 다리가 된다. 구원하는 기법으로, 곧 점진적인 상물질의 변화로, 그리고 이를 통해서, 종교는 사람이 현세의 자연 세계의 물질적 한계를 벗어나서 영원한 영적 세계의 하늘같은 여러 실체에 도달하는 길이 된다.
101:10.1 (1116.2) 지능이 있는 사람은 그가 자연에서 생긴 아이, 물질 우주의 일부인 것을 안다. 마찬가지로, 그는 에너지인 우주에서, 수학 수준의 운동과 긴장 속에서 개별 인격이 살아남지 못하는 것을 헤아린다. 물리적 원인과 결과를 살펴본다고 해도 사람은 결코 영적 현실을 헤아릴 수도 없다.
101:10.2 (1116.3) 한 인간은 또한 그가 관념적 우주의 일부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비록 개념이 필사자의 수명을 넘어서 지속되더라도, 개념 속에 본래 있는 아무것도 그 파악하는 인격자가 몸소 살아남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논리와 이치의 가능성을 다 써 버린다 해도, 논리를 따지는 자나 추리하는 자에게 인격이 살아남는다는 영원한 진리를 결코 드러내지도 않을 것이다.
101:10.3 (1116.4) 물질 수준의 법칙은 인과(因果)의 연속성, 선행(先行)하는 행위에 대하여 결과가 끊임없이 반응한다고 정해 놓는다. 지성 수준은 관념의 연속성이 영구한 것, 선재하는 개념들로부터 개념의 가능성이 그침 없이 흐르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우주에서 이 둘 중에 어느 수준도 탐구하는 필사자에게, 지위의 불공평으로부터, 그리고 우주에서 하나의 하루살이 현실이라는 불안, 제한된 생명 에너지를 써버리고 나서 꺼질 운명을 가진 일시적 인격이라는 참을 수 없는 불안에서 벗어날 길을 드러내지 않는다.
101:10.4 (1116.5) 오직 영적 통찰력을 얻도록 이끄는 상물질의 길을 통해서, 사람은 우주에서 그의 필사 지위에 본래 있는 사슬을 언젠가 깨뜨릴 수 있다. 에너지와 지성은 파라다이스와 신에게로 되돌아가도록 인도하지만, 사람의 에너지 재산도 지성 재산도 그러한 파라다이스 신으로부터 직접 나오지 않는다. 오직 영적 의미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오직 영적 의미에서, 파라다이스 아버지가 현재, 사람에게 자질을 부여하고 깃들기 때문에 이것이 참말이다. 종교적 체험의 길을 통하여 참된 믿음을 실천하지 않고서, 인류는 결코 신을 발견할 수 없다. 하나님이 진리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물질적으로 제한된 막힌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게 하고, 죽음이 있는 물질 영토로부터 영생이 있는 영적 영토까지, 안전하게 인도될 합리적 희망을 사람에게 준다.
101:10.5 (1116.6) 종교의 목적은 하나님에 관한 호기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필사인 것과 신다운 것, 부분적인 것과 완전한 것, 사람과 하나님을 섞음으로, 지적 지속성과 철학적 안정을 얻고, 인간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부유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바로 종교적 체험을 통해서 사람의 이상에 대한 개념은 현실성을 부여받는다.
101:10.6 (1116.7) 결코 과학이나 논리로 신이 있음을 증명할 수 없다. 사리(事理)만으로 종교적 체험이 가치 있고 선하다는 것을 결코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진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의지(意志)하는 자는 누구나 영적 가치의 타당성을 이해할 것이다. 이것이 필사자 수준에서 종교적 체험이 실재함을 증명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가능한 접근법이다. 그러한 믿음은 물질 세계의 기계 같은 손아귀로부터, 그리고 지적 세계의 불완전으로 인한 잘못의 왜곡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을 마련해 준다. 믿음은 개별 인격이 계속해서 살아남는 것에 관하여 필사자가 생각하는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는, 유일하게 찾아낸 해결책이다. 사랑과 법칙과 통일이 있는 창조, 진보하면서 신에 도달하는 보편적 창조에서, 믿음은 완성된 실체에 이르고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여권(旅券)이다.
101:10.7 (1117.1) 종교는 사람이 이상주의로 고립되거나 영적으로 외로운 느낌을 실질적으로 치료한다. 종교는 하나님의 한 아들, 새롭고 의미 깊은 한 우주의 한 시민으로서, 믿는 사람을 해방시킨다. 혼 속에서 헤아릴 수 있는,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올바름의 빛을 따르면서, 이렇게 함으로 종교는 사람이 무한자의 계획과 영원자의 목적과 한편이 된다는 확신을 준다. 그러한 해방된 혼은 즉시 이 새 우주, 자기의 우주에서 비로소 평안함을 느낀다.
101:10.8 (1117.2) 네가 그러한 믿음의 변화를 체험할 때, 너는 이제 더 수학적 우주에 노예 같은 일부가 아니라, 오히려 우주의 아버지의 아들, 해방되고 의지를 가진 아들이다. 그러한 해방된 아들은 이제 더, 이 세상에서 존재가 끝날 때, 어찌해 볼 수 없는 멸망에 맞서 혼자서 싸우지 않는다. 이제는 더, 희망 없이 불리한 확률을 가지고 모든 자연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 아마도 희망 없는 환상을 의지하거나, 공상적 오류를 믿었다는 두려움, 몸을 마비시키는 두려움에, 이제는 더 비틀거리지 않는다.
101:10.9 (1117.3) 자,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들은 실체가 존재의 부분적 그림자에게 이기는 싸움에 함께 지원했다. 하나님과 거의 한없는 우주에 사는 모든 신다운 무리들이, 영생과 신성한 지위를 얻으려고 벌이는 천상의 싸움에서 그들 편에 있다는 사실을 마침내 모든 인간이 의식하게 된다. 믿음으로 해방된 그러한 아들들은 영원으로부터 온, 최상의 세력과 신다운 성격자들의 편을 들어, 시간 세계의 전투에 분명히 지원했다. 그들이 가는 길에 이제는 별들도 그들을 위하여 싸우고 있다. 마침내 그들은 안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주를 바라보며, 확실치 않은 물질적 고립 상태에 있다가 영원히 영적으로 진보하는 보장을 받고서 만사가 변화된다. 바로 시간도 겨우 파라다이스 실체들이 공간에서 움직이는 갑옷에 던진 영원의 그림자가 될 뿐이다.
102:0.1 (1118.1) 믿지 않는 유물론자에게 사람은 다만 진화에서 우연히 생긴 것이다. 살아남을 희망은 필사자의 상상력의 결과에 달려 있다. 사람의 두려움ㆍ사랑ㆍ갈망ㆍ관념은 겨우, 생명이 없는 어떤 물질 원자들의 우연한 배열에서 생긴 반응일 뿐이다. 아무리 대단하게 에너지를 전시하거나 신뢰를 표현해도 무덤을 지나서 사람을 데려갈 수 없다. 최선의 사람들이 기울이는 헌신적 노력,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재능도 죽고 나서 사라지도록 운명이 정해졌고, 죽음은 영원히 잊혀지고 혼이 소멸되는 길고도 외로운 밤이다. 필사자로 존재하던 현세의 태양 밑에서 살고 땀흘린 것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절망이 유일한 보상이다. 인생의 하루하루가 무자비한 멸망의 손아귀를 천천히, 단단히 조이며, 냉담하고 혹독한 물질 우주는 이 멸망이 인간의 소망 중에 아름답고 고귀하고, 고상하고 선한 모든 것에 최고의 모욕이 될 것이라 선포했다.
102:0.2 (1118.2) 그러나 그런 것이 사람의 종말과 영원한 운명은 아니다. 그러한 환상은 단지 영적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물질적 철학의 기계론적 궤변에 직면하여 용감하게 싸우며, 복잡한 배움의 혼란과 왜곡으로 인하여 눈이 먼, 어떤 헤매는 사람이 절망에 빠져 내뱉은 외침일 뿐이다.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딸 중에서 가장 겸손하고 배우지 못한 자의 편에서 믿음이 한 번 용감히 손을 뻗으면, 이 캄캄한 죽음이 전부, 그리고 이 모든 절망스러운 운명이, 언제까지나 깨끗이 사라져 버린다.
102:0.3 (1118.3) 인간의 가치 기준이 필사자의 체험에서 물질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으로, 인간다운 것으로부터 신다운 것으로, 시간 세계에서 영원으로 옮겨질 수 있다는 것을 사람의 도덕적 의식이 깨달을 때, 인간의 마음 속에서 이 구원하는 믿음이 태어난다.
102:1.1 (1118.4) 생각 조절자가 하는 일은, 사람의 원시적이고 진화적인 의무 감각이, 계시되는 영원한 실체들에 대하여 더 확실한 상급 신앙으로 변화되는 것을 설명한다. 최상의 달성에 이르는 신앙의 길을 이해할 능력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 속에 완전을 향한 갈망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라도, 신의 뜻을 행하기를 선택하면, 진리의 길을 알게 된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인간의 것은 이해해야 사랑을 받지만, 신다운 것은 사랑해야 이해한다.” 그러나 정직하게 의심하고 진지하게 묻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한 태도는 다만 완전을 달성하기 위하여 진보하는 나그네 길에서 늦어짐을 의미한다. 어린아이처럼 의지하는 것은 사람이 올라가서 하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보장하지만, 진보는 완전히 성장한 어른이 튼튼하고 확신하는 믿음을 힘차게 연습하는 데 온전히 달려 있다.
102:1.2 (1119.1) 과학의 논리는 시간 세계에서 지켜볼 수 있는 사실에 바탕을 두며, 종교에서 믿음은 영원 세계에서 영의 계획에 근거를 두고 주장한다. 우리를 위하여 지식과 논리가 이룰 수 없는 것을, 참된 지혜는 종교적 통찰력과 영적 변화를 통해서 믿음으로 성취하라고 우리에게 타이른다.
102:1.3 (1119.2) 반란으로 고립되었기 때문에, 유란시아에서 진리의 계시는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우주론의 진술과 너무나 자주 혼동되어 왔다. 진리는 대대로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지만, 그와 관련된 가르침, 물리적 세계에 대한 가르침은 날마다, 그리고 해마다 바뀐다. 영원한 진리는 어쩌다가 물질 세계에 관한 낡은 관념과 함께 발견된다고 해서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과학을 알수록 너희는 더욱 확신이 줄어든다. 종교를 믿을수록 너희는 더욱 확신을 가진다.
102:1.4 (1119.3) 과학에서 확실한 것들은 전부 지능으로부터 진행한다. 종교에서 확실한 것들은 전체 인격의 바로 그 기초에서 솟아나온다. 과학은 지성의 이해력에 호소하며, 종교는 육체ㆍ지성ㆍ영의 충성과 헌신에, 아니 인격 전체에도 호소한다.
102:1.5 (1119.4) 하나님은 온통 너무나 현실이고 절대적이어서, 어떤 물질적 증명의 표징이나 이른바 기적의 전시(展示)도 하나님의 실체를 증언하는 데 내놓을 수 없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알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무한한 실체의 신성한 명시에 우리가 몸소 참여하는 데 근거를 둔다.
102:1.6 (1119.5) 깃드는 생각 조절자는 광범위한 호기심과 더불어, 사람의 혼 속에서 완전을 찾으려는 참된 갈망을 어김없이 불러일으킨다. 오로지 하나님, 그 조절자의 신성한 근원과 교통함으로 이 호기심을 적절히 채울 수 있다. 사람의 간절한 혼은 살아 있는 하나님을 몸소 깨달음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것에도 흡족해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높고 완전한 도덕적 성격자보다 더 높은 무엇이든지 상관 없이, 우리의 갈급하고 유한한 개념 속에서 하나님은 그보다 못한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102:2.1 (1119.6) 관찰하는 지성인과 분별하는 사람들은 동료들의 생활에서 종교를 발견할 때 그 종교를 알아본다. 종교는 정의를 내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다 종교의 사회적ㆍ지적ㆍ도덕적ㆍ영적 열매를 알아본다. 이것은 모두, 종교가 인류의 재산이라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종교는 문화의 소산이 아니다. 종교에 대한 사람의 인식은 여전히 인간답고, 따라서 무지의 사슬에 묶이고 미신에 노예가 되며, 궤변의 속임수와 거짓 철학의 망상에 지배된다.
102:2.2 (1119.7) 진정한 종교적 확신을 보여주는 특징 중에 하나는, 그 주장이 절대적이고 태도가 굳건한데도, 확신을 표현하는 정신이 무척 차분하고 부드러워서, 결코 자기 주장이나 자기 본위의 찬미라는 인상을 한 푼도 전하지 않는 것이다. 종교적 체험에서 얻은 지혜는 인간적으로 특유하고 조절자에서 파생되니까 어딘가 역설(逆說)이다. 종교적 힘은 개인의 사사로운 특권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 그리고 모든 지혜의 영구한 근원의 그 숭고한 협동 관계가 해결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참되고 더러워지지 않은 종교에서 나오는 말씀과 행위는 모든 깨우친 필사자에게 강력한 권위를 가지게 된다.
102:2.3 (1119.8) 종교적 체험의 요인을 규명하고 분석하기는 어렵지만, 그러한 종교를 실천하는 자가 마치 영원자가 계신 앞에 이미 있는 것처럼 살고 할 일을 계속하는 것을 지켜보기는 어렵지 않다. 믿는 사람은 마치 불멸을 자기 손아귀에 이미 쥐고 있는 것처럼 이 현세의 생활에 반응한다. 그러한 필사자의 생활에는, 세상의 지혜만 흡수한 동료들의 생활과 그들을 영원히 구분할 타당한 독창성과 꾸밈없는 표현이 있다. 신자들은 현세의 풍조에 본래 있는 흥망으로 인하여 서두르는 고달픔과 고통스러운 압박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나서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생리학ㆍ심리학ㆍ사회학의 법칙이 설명하지 못하는, 안정된 인격과 차분한 인품을 나타낸다.
102:2.4 (1120.1) 시간은 지식을 얻는 데 변치 않는 요소이다. 은총 속에 성장하는 요인, 곧 종교적 체험의 모든 단계에서 분명히 진보하는 중요한 요인이 있지만, 종교는 그 재산을 즉시 소용되게 만든다. 지식은 영원히 추구하는 것이다. 너희는 언제나 배우고 있지만, 결코 절대 진리를 완전히 아는 데까지 도달할 수 없다. 지식만 가지고는 결코 절대로 확실한 것이 있을 수 없고, 오직 어림하는 확률이 늘어날 뿐이다. 그러나 영적 빛을 받은 종교적인 사람은 알고, 지금 안다. 그래도 깊고 분명한 이 확신은 그러한 건전한 머리를 가진 신자로 하여금 인간의 지혜의 진보에서 생기는 기복(起伏)에 조금이라도 흥미를 덜 느끼도록 만들지 않으며, 인간의 지혜는 그 지혜의 물질적 밑바닥에 천천히 움직이는 과학의 발전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102:2.5 (1120.2) 과학에서 얻는 발견조차, 발견한 것들을 파헤치고 서로 관계지을 때까지, 머리 속 생각의 흐름 속에 순회함으로 당면한 여러 사실이 실제로 의미 있는 것이 될 때까지, 인간이 체험하는 의식 속에서 참으로 현실은 아니다. 필사 인간은 그의 물리적 환경조차 지성 수준에서, 지성이 심리적으로 기록한 견지에서 바라본다. 따라서 사람이 우주에 대하여 상당히 통일된 해석을 내리고, 다음에 과학에서 이 에너지의 통일을 그의 종교적 체험에서 영의 통일과 동일시하려고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성은 통일되어 있다. 필사자의 의식은 지성 수준에서 살고, 부여받은 지성의 눈을 통해서 우주의 실체들을 파악한다. 지성의 견지(見地)는 실체의 근원인 첫째 근원 중심의 실존적 통일성을 낳지 못하겠지만, 에너지ㆍ지성ㆍ영이 최상 존재 안에서, 또 최상 존재로서, 체험으로 통합됨을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고, 언젠가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지성이 물질적 사물, 지적 의미를 가진 것, 영적 가치 기준을 단단히 알고 있지 않으면, 지성은 실체의 다양성을 이렇게 통일하는 데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오직 세 가지 기능적 실체가 하나로 조화되어 통일이 있으며, 오직 통일된 가운데 우주의 불변성과 일관성을 깨닫는 인격자가 만족한다.
102:2.6 (1120.3) 통일성은 인간의 체험에서 철학을 통해서 가장 쉽게 발견된다. 그리고 철학적 사고(思考) 전체가 늘 물질적 사실 위에 기초를 두어야 하지만, 참된 철학적 활력의 혼이자 에너지는 필사자의 영적 통찰력이다.
102:2.7 (1120.4) 진화된 인간은 자연히 힘든 일을 즐기지 않는다. 그의 생활 체험에서, 성장하는 종교적 체험의 강제적 요구 및 강력한 충동과 발걸음을 맞추는 것은 영적 성장, 지적 확장, 사실의 확대, 사회 봉사(奉仕) 면에서 끊임없이 활동함을 뜻한다. 상당히 활발한 인격과 따로 아무런 참된 종교가 없다. 따라서 사람들 중에서 게으른 축에 속하는 자는, 판에 박힌 종교의 교리와 신조가 마련하는 가짜 피난처로 물러감으로, 일종의 교묘한 자기 속임수로, 참된 종교 활동의 단련을 피하려고 흔히 애쓴다. 그러나 참된 종교는 살아 있다. 종교적 개념을 지적으로 구체화하는 것은 영적 죽음과 마찬가지다. 너희는 믿는 관념이 없는 종교를 생각할 수 없지만, 일단 종교가 겨우 하나의 관념으로 격하되면, 이제 더 종교가 아니다. 종교가 단지 일종의 인간 철학이 된 것이다.
102:2.8 (1121.1) 또한 불안정하고 잘 훈련받지 못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인생의 짜증나는 책임을 회피하는 길로서 종교의 감상적 관념을 이용하고 싶어한다. 마음이 오락가락 흔들리고 겁이 많은 어떤 필사자들이 진화적 인생의 끊임없는 압박을 벗어나려고 할 때, 그들이 이해하는 종교는 가장 가까운 피난처, 가장 좋은 도망 길을 제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용감하게, 아니 영웅답기까지, 인생의 풍파에 대응하기 위하여 사람을 준비시키는 것이 종교의 사명이다. 종교는 진화된 인간의 최고 재산이요, 사람으로 하여금 꾸준히 버티고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을 보는 듯 계속하게” 만드는 한 가지이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흔히 생활에서 물러나는 것과 같으며, 인간 사회와 상업이 펼쳐지는 확 트인 경기장에서 종교적 인생을 사는 더 벅찬 활동을 즐기지 않는 인간이 그런 후퇴를 받아들인다. 참된 종교는 행동해야 한다. 실제로 사람이 종교를 가졌을 때, 아니면 그보다도 종교가 사람을 참으로 지배하도록 버려둘 때, 행동은 종교의 결과가 될 것이다. 종교는 단지 생각만 하거나, 실행이 없이 느낌만으로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102:2.9 (1121.2) 종교가 흔히 지혜롭지 못하게, 아니 때때로 종교답지 않게 행동하는 사실을 우리가 간과하지 않지만, 종교는 행동한다. 빗나간 종교적 확신이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낳았지만, 언제나, 늘 종교는 무엇인가 행한다. 종교는 힘차다!
102:3.1 (1121.3) 지능의 부족이나 교육의 빈곤은 어김없이 상급의 종교적 달성을 불리하게 만든다. 이것은 영적으로 부족한 환경이 종교가 과학 지식의 세계와 철학적으로 접촉하는 주요 경로를 종교로부터 빼앗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지적 요소가 중요하지만 이 요소가 지나치게 발달하면 마찬가지로, 때때로 무척 장애가 되고 곤란해진다. 종교는 다음의 역설적 필요 밑에서 줄곧 수고해야 한다: 즉 모든 생각의 영적 효용을 경시하면서, 동시에 생각을 효과 있게 이용할 필요가 있다.
102:3.2 (1121.4) 종교적 억측은[1] [1765] 피할 수 없지만 반드시 해롭다. 억측은 어김없이 그 대상을 변조한다. 억측은 종교를 무언가 물질이거나 인본주의인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논리적 사고를 맑게 하지 못하도록 직접 방해하는 한편, 간접으로 종교가 현세의 기능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데, 종교는 바로 그 세상과 영원히 대조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종교는 반드시 역설(逆說)의 특징을 가질 터이고, 이 역설은 우주의 물질 수준과 영 수준 사이에 체험적 연결―상물질계의 상지혜(上知慧), 즉 진리를 헤아리고 통일을 파악하는, 철학을 뛰어넘는 민감성―이 없어서 생겨난다.
102:3.3 (1121.5) 물질적 느낌, 인간의 감정은 물질적 행동, 이기적 행위로 바로 이끈다. 종교적 통찰력, 영적 동기는 종교 활동으로, 사회에 봉사하고 이타심으로 자선을 베푸는 사심 없는 행위로 바로 이끈다.
102:3.4 (1121.6) 종교적 소망은 신다운 실체를 갈급하게 찾는 것이다. 종교적 체험은 하나님을 찾아냈다는 의식을 깨닫는 것이다. 한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낼 때, 그 존재의 혼 속에서, 발견하고서 말할 수 없는 승리에 들뜬 상태를 체험하고, 그래서 그는 그보다 깨달음이 적은 동료들에게 사랑에 넘친 봉사로 그들과 접촉하도록 재촉을 받는다. 그가 하나님을 찾아낸 것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료들이 생기를 되찾게 하고 고귀하게 만들려고 자기 혼 속에서 영원한 선이 넘쳐흐르게 두는 것이다. 진짜 종교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회에 더욱 봉사하게 만든다.
102:3.5 (1122.1) 과학, 곧 지식은 사실을 의식하게 만들고, 종교, 곧 체험은 가치를 의식하게 만든다. 철학, 즉 지혜는 조화된 의식(意識)으로 이끌고, 계시는 (상물질계의 상지혜 대용품) 참된 실체를 의식하게 만든다. 한편 사실, 가치, 참된 실체를 조화되게 의식하는 것은 인격 실체, 곧 최대한의 존재를 깨닫고, 이와 함께 바로 그 인격이 살아남는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102:3.6 (1122.2) 지식은 사람에게 자리를 정해 주며, 사회 계층과 계급 제도를 낳는다. 종교는 사람에게 봉사하는 길로 이끌고, 따라서 윤리와 이타주의를 창조한다. 지혜는 이 두 관념과 사람의 동료들의 유대가 더 깊어지고 나아지도록 인도한다. 계시는 사람을 해방하고 사람이 영원한 모험을 떠나게 한다.
102:3.7 (1122.3) 과학은 사람을 분류하고, 종교는 네 몸과 같이 사람을 사랑한다. 지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공정(公正)하게 대우한다. 그러나 계시는 사람을 돋보이게 하고, 그가 하나님과 협동할 능력이 있음을 드러낸다.
102:3.8 (1122.4) 과학은 문화 단체를 창조하려고 헛되이 애쓴다. 종교는 영의 단체를 낳는다. 철학은 지혜의 단체를 위하여 애쓴다. 계시는 영원한 단체, 파라다이스 최후 군단을 묘사한다.
102:3.9 (1122.5) 지식은 사람이 인격을 가진 사실에 긍지를 가지게 하며, 지혜는 인격의 중요성을 의식하는 것이다. 종교는 인격의 가치를 인식하는 체험이요, 계시는 인격이 살아남는 것을 보장한다.
102:3.10 (1122.6) 과학은 한없는 우주의 분할된 부분들을 확인하고 분석하고 분류하기를 추구한다. 종교는 전체의 관념, 우주 전체를 붙잡는다. 철학은 과학의 여러 물질 부분을 전체의 영적 통찰력 개념과 동일시하려고 애쓴다. 철학이 이 시도에 실패하는 곳에 계시가 성공하며, 우주의 영역이 보편적이고 영원하며, 절대적이고 무한함을 확인한다. 따라서 무한한 스스로 계신 이의 우주는 끝이 없고, 한이 없고, 모든 것을 담는다―시간이 없고 공간이 없고 조건이 없다. 그리고 무한한 스스로 계신 이가 또한 네바돈 미가엘의 아버지이자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인 것을 우리는 증언한다.
102:3.11 (1122.7) 과학은 신이 하나의 사실임을 가리키고, 철학은 한 절대자 개념을 제시한다. 종교는 하나님이 자애로운 영적 성격자라고 상상한다. 계시(啓示)는 신이 계신 사실, 절대자 관념, 하나님의 영적 성격, 이 세 가지가 하나임을 확인하며, 더 나아가서 이 개념―존재하는 보편적 사실, 영원한 지성 관념, 생명을 가진 무한한 영―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제시한다.
102:3.12 (1122.8) 지식의 추구는 과학이며, 지혜의 탐구는 철학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종교요, 진리를 갈급하게 찾는 것은 하나의 계시이다. 그러나 사람이 우주를 꿰뚫어보는 영적 통찰력에 현실의 느낌을 붙여놓는 것은 깃드는 생각 조절자이다.
102:3.13 (1122.9) 과학에서 생각은 생각이 실현되는 표현보다 앞서며, 종교에서 실현하는 체험은 생각의 표현보다 앞서 간다. 깨우친 이성, 종교적 통찰력, 계시, 이 세 가지의 결과―믿는 의지―와 믿고자 하는 진화적 의지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102:3.14 (1122.10) 진화의 경우에, 종교는 흔히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개념들을 지어내게 만든다. 계시는 하나님이 바로 사람을 진화시키는 현상을 드러내며, 한편 그리스도 미가엘이 땅에서 사신 인생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사람에게 계시하는 현상을 바라본다. 진화는 하나님을 사람 모습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계시는 사람을 하나님답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102:3.15 (1122.11) 과학은 오로지 처음 원인(原因)들에 만족하고, 종교는 최상의 성격에, 철학은 통일에 만족한다. 계시는 이 세 가지가 하나이며, 모두가 선한 것을 확인한다. 우주에서 선한 것은 영원히 실재하는 것이요, 공간에서 악한 것이 낳는 일시적 망상은 그렇지 않다. 모든 성격자의 영적 체험에서 이것이 반드시 참이니, 실재하는 것은 선한 것이요, 선한 것은 실재하는 것이다.
102:4.1 (1123.1) 너희의 지성 속에 생각 조절자가 계시기 때문에, 너희가 하나님의 지성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이든 초인간이든, 어느 다른 지성을 이해하는 의식을 확신하는 것보다 더 신비스러운 것은 아니다. 종교와 사회 의식은 이것을 공통으로 가졌다: 두 가지가 남의 생각을 의식하는 데 바탕을 둔다. 너희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너희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법은 “그리스도 안에 있던 지성을 너희가 또한 품을 수 있게” 할 수 있는 바로 그 기법이다.
102:4.2 (1123.2) 인간의 체험은 무엇인가? 이는 다만 활발하고 궁금해하는 자아와 활발하고 바깥에 있는 어느 다른 실체 사이에 생기는 상호 작용이다. 체험의 양은 개념의 깊이, 그리고 외부에 있는 것들의 실체를 전부 인식한 것의 합으로 결정된다. 체험의 운동량은 기대하는 상상의 힘, 그리고 접촉한 실체의 외부 성질을 감각으로 발견하는 민감성을 더한 것이다. 체험하는 사실은 자의식과 기타 존재들―다른 것의 성질, 다른 지성의 성질, 다른 영의 성질―의 합에서 발견된다.
102:4.3 (1123.3) 사람은 아주 일찍부터 그가 세상이나 우주에서 혼자 있지 않음을 의식하게 된다. 자아의 환경 속에서, 남의 생각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저절로 자의식이 생겨난다. 믿음은 이 자연스러운 체험을 종교로 바꾸며, 이것은 남의 생각의 실체로서―근원ㆍ성질ㆍ운명으로서―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그런 지식은 언제나, 반드시 몸소 체험하는 실체이다. 하나님이 성격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한 인간 성격이 얻는 진짜 종교적 체험의 생생한 부분이 될 수 없다.
102:4.4 (1123.4) 인간의 종교적 체험에서 잘못의 요소는 우주의 아버지라는 영적 개념을 오염시키는 유물론의 내용에 정비례한다. 우주에서 영이 되기 전에 사람의 진보는 하나님의 성품과 순수하고 참된 영의 실체, 이 두 가지에 대한 이 그릇된 관념들을 스스로 벗어버리는 체험에 있다. 신은 영보다 더한 것이지만, 영적 접근법은 하늘 가는 사람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접근법이다.
102:4.5 (1123.5) 기도(祈禱)는 정말로 종교적 체험의 일부이지만, 더 본질적 교통, 신을 예배하는 교통을 많이 소홀히 하기까지, 현대 종교는 기도를 그릇되게 강조해 왔다. 지성의 숙고하는 힘은 예배로 인하여 깊어지고 넓어진다. 기도는 인생을 부유하게 만들지만 신을 예배하는 것은 운명이 보이게 빛을 밝힌다.
102:4.6 (1123.6) 계시된 종교는 인간의 존재에서 통일하는 요소이다. 계시는 역사를 통일하며, 지리학ㆍ천문학ㆍ물리학ㆍ화학ㆍ생물학ㆍ사회학ㆍ심리학을 조화시킨다. 영적 체험은 사람의 우주에 담긴 진정한 혼이다.
102:5.1 (1123.7) 무엇을 믿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믿는 그것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것과 대등하지 않지만, 그런데도, 간단한 생명이 인격의 지위까지 진화로 진보하는 것은, 처음부터 인격 잠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시공 우주에서 잠재성은 언제나 사실인 것보다 우월하다. 진화하는 우주에서 잠재성은 앞으로 다가올 무엇이요, 다가올 무엇은 신이 의도하여 내린 명령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102:5.2 (1124.1) 동물의 원시적 두려움이 항상 깊어지는 하나님 존경심으로, 그리고 커지는 우주 경외감으로 변화될 때, 바로 이 의도한 우월성은 지성의 개념 작용이 진화하는 데서 나타난다. 원시인은 믿음보다 종교적 두려움이 더 많았고, 잠재 영들이 실재하는 지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이 소심한 두려움이 영적 실체들을 믿는 생생한 믿음으로 바뀔 때 전시된다.
102:5.3 (1124.2) 너희는 진화 종교를 심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영적 기원을 가진, 몸소 체험하는 종교를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인간의 도덕은 가치를 인식할지 모르지만, 오로지 종교가 그러한 가치를 보존하고, 높이고, 영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한 활동이 있어도, 종교는 감정으로 변한 도덕보다 더한 무엇이다. 종교와 도덕의 관계는, 사랑과 의무, 아들 신분과 노예 신세, 본질과 물질의 관계와 같다. 도덕은 전능한 통제자, 섬겨야 할 신을 드러낸다. 종교는 모두를 사랑하는 아버지, 즉 예배와 사랑을 받을 하나님을 드러낸다. 그리고 다시, 이것은 종교의 영적 잠재성이 진화된 도덕의 사실화된 의무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102:6.1 (1124.3) 종교적 두려움을 철학적으로 없애고 과학이 꾸준히 진보하는 것은 거짓 신들의 사망률을 크게 높인다. 사람이 만든 신들이 이렇게 죽은 것은 잠시 영적 시력을 흐리게 만들지 모르지만, 영원한 사랑이자 살아 있는 하나님을 그렇게 오랫동안 가렸던 그 무지와 미신을 궁극에 없애버린다. 인간과 창조자의 관계는 생생한 체험이요, 힘찬 종교적 믿음이며, 이를 엄밀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다. 생명의 일부를 떼어놓고 이를 종교라 부르는 것은 생명을 해체하고 종교를 왜곡한다. 이것이 바로 예배를 받는 하나님이 모든 충성을 요구하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까닭이다.
102:6.2 (1124.4) 원시인이 섬기던 신들은 자신의 그림자보다 더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살아 있는 하나님은 신성한 빛이요, 그 빛이 중단되는 것은 모든 공간에서 창조의 그림자를 만든다.
102:6.3 (1124.5) 철학으로 도달한 신자는 개인에게 구원을 주는, 개인적으로 대하는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은 한 실체, 한 가치 기준, 하나의 성취 수준, 하나의 고상해진 과정, 하나의 변화, 시공의 궁극, 이상으로 만든 것, 에너지의 인격화, 인력(引力)을 가진 개체, 인간의 한 계획, 자아를 이상으로 만든 것, 자연의 융기(隆起), 선을 향하는 것, 앞을 향하는 진화의 충동, 또는 하나의 숭고한 가설보다 더한 무엇이다. 신자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 사랑은 종교의 본질이요, 우수한 문명이 솟아나는 근원이다.
102:6.4 (1124.6) 믿음은 있음직한 철학적 하나님을 개인의 종교적 체험에서 확실한 구원의 하나님으로 변화시킨다. 회의론은 신학 이론에 도전할지 모르지만, 몸소 겪는 체험의 신빙성을 확신하는 것은, 성장하여 믿음이 된 그 관념이 진실한 것을 확인한다.
102:6.5 (1124.7)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지혜로운 논리를 통해서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은 오로지 믿음으로, 몸소 겪는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 생명에 관계되는 많은 일에는 확률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우주의 실체와 접촉할 때, 그러한 목적과 가치를 팔팔한 믿음으로 접근할 때 확실한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지적 논리가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을 온전히 지지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러한 확신을 부인하는 불신자가 이를 문제 삼을 때에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나는 안다”하고 감히 말한다. 그렇게 의심하는 모든 사람에게, 신자는 이렇게 대답할 뿐이다, “내가 모르는 줄 네가 어찌 아는가?”[2] [1766]
102:6.6 (1125.1) 사리(事理)는 언제나 믿음을 의심할 수 있지만, 믿음은 언제나 사리와 논리를 보충할 수 있다. 사리는 확률을 만들고, 믿음은 가망성을 대단히 확실한 것으로, 아니 영적 체험으로도 바꿀 수 있다. 하나님은 처음 진리이자 마지막 사실이다. 따라서 모든 진리는 하나님에게서 기원을 가지며, 한편 모든 사실은 그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하나님은 절대 진리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진리임을 알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설명하기 위해서―사람은 온 우주의 사실을 탐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진실임을 체험하는 것과 하나님의 사실에 관한 무지 사이의 엄청난 간격에는 오로지 생생한 믿음으로 다리를 놓을 수 있다. 사리만 가지고 무한한 진리와 우주의 사실을 조화시킬 수 없다.
102:6.7 (1125.2) 믿는 관념은 의심에 저항하고 두려움을 물리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믿음은 반드시 의심을 이기며, 이는 믿음이 적극적이고 살아 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보다, 진리는 잘못보다, 체험은 이론보다, 영적 실체는 시공의 따로 떨어진 사실보다 장점이 있다. 이 영적 확신에 대하여 납득이 가는 증거는 영이 사회에서 맺는 열매에 있으며, 그러한 신자, 믿는 사람들은 이 진정한 영적 체험을 얻는 결과로서 그 열매를 맺는다. 예수는 말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친구들을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리라.”
102:6.8 (1125.3) 하나님은 과학에서 하나의 가능성이요, 심리학에서 바람직한 것이며, 철학에서 있음직한 것, 종교에서는 확실히 있는 것, 종교적으로 체험하는 사실이다. 있음직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는 철학은, 확실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고 또 발견하는 그 종교적 믿음을 대단히 존중해야 한다고 논리는 요구한다. 사람이 쉽게 믿는다는 이유로, 과학은 종교적 체험을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 사람의 지적ㆍ철학적 재산이, 멀리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욱 낮은 지능에서 생겨났다고, 마침내 전혀 생각이나 느낌이 없는 원시 생명에서 기원을 가진다고 계속 가정하는 한, 그래서는 안 된다.
102:6.9 (1125.4) 진화의 여러 사실은, 하나님을 아는 필사자의 종교 생활에서 얻는 확실한 영적 체험이 실재한다는 진실에 맞서 대항해서는 안 된다. 총명한 사람들은 아이들처럼 따지기를 그만두고, 사실의 관찰과 나란히, 진리의 개념을 너그럽게 대하는 논리, 일관성 있는 어른의 논리를 사용하려고 애써야 한다. 거듭하여 일어나는 우주 현상 하나하나와 마주쳐서, 틀림없이 높은 것을 틀림없이 낮은 것의 탓으로 돌림으로 현재의 반론을 지속해서 되풀이할 때, 과학적 유물론은 파산되었다. 일관성이 있으려면, 목적을 가진 창조자의 활동을 인정해야 한다.
102:6.10 (1125.5) 유기체의 진화는 하나의 사실이다. 의도한 진화, 곧 진취적 진화는 진실이며, 늘 올라가는 진화적 성취 현상, 다른 면에서 모순되는 현상을 일관성 있게 만든다. 어떤 과학자라도 그가 선택한 과학에서 높이 올라갈수록, 최상 지성이 지배한다는 우주 진리의 편을 들어, 유물론적 사실에 근거를 둔 이론들을 점점 더 버릴 것이다. 유물론은 인생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예수의 복음은 모든 필사자를 엄청나게 향상시키고 하늘 같이 높인다. 필사자의 존재는 사람이 위로 뻗은 손과 신이 아래로 뻗은 구원의 손이 만나는 현실을 깨닫는, 흥미를 자아내는 황홀한 체험이라고 상상해야 한다.
102:7.1 (1126.1) 우주의 아버지는 스스로 존재하므로, 또한 설명이 필요 없다. 그는 모든 합리적인 필사자 안에서 실제로 산다.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를 확신할 수 없다. 아들 신분은 아버지 신분을 확실하게 만드는 유일한 체험이다. 우주는 어디서나 변화를 겪고 있다. 변하는 우주는 의존하는 우주요, 그러한 창조는 최종이거나 절대적일 수 없다. 유한한 우주는 온전히 궁극위와 절대자에게 의존한다. 우주와 하나님은 동일하지 않으니, 하나는 원인이요 다른 하나는 결과이다. 원인은 절대적이고 무한ㆍ영원하고 변함이 없다. 결과는 시공에서 일어나며, 초월성이 있지만 항상 바뀌고 언제나 성장하고 있다.
102:7.2 (1126.2) 하나님은 우주에서 스스로 원인이 된, 하나 뿐인 사실이다. 그는 사물과 존재들로 이루어진 온 창조의 질서ㆍ계획ㆍ목적의 비밀이다. 어디서나 변하는 우주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법칙,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버릇에 따라서 규제되고 안정된다. 하나님의 사실, 신의 법칙은 변함이 없다. 하나님의 진실, 그와 우주의 관계는 항상 진화하는 우주에 늘 적응할 수 있는 상대적 계시이다.
102:7.3 (1126.3) 하나님 없이 종교를 발명하려고 하는 자는 나무 없이 열매를 모으고, 부모 없이 아이들을 가지려 하는 자와 같다. 너희는 원인 없이 결과를 가질 수 없다. 오로지 스스로 계신 이만 원인이 없다. 종교적 체험이 일어나는 사실은 하나님이 계심을 가리키며, 사람이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그러한 하나님은 성격을 가진 신인 것이 틀림없다. 너희는 어느 화학 공식에게 빌거나, 어느 수학 등식에게 애걸하거나, 어느 가정(假定)을 숭배하거나, 어떤 가설에게 속을 털어놓거나, 어떤 과정과 교통하거나, 어떤 추상(抽象)에게 봉사하거나, 어떤 법칙과 함께 사랑에 넘치는 교제를 가질 수 없다.
102:7.4 (1126.4) 겉보기에 종교적인 여러 특성이 비종교적 뿌리에서 자랄 수 있다는 것은 참말이다. 사람은 지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래도 도덕적으로 선하고 충성스럽고, 효도하고 정직하며, 아니 이상주의자일 수도 있다. 사람은 순전히 인도주의인 많은 가지를 그의 기본 영적 성품에 접붙이고, 이처럼 신이 없는 종교의 편을 들어 자기의 주장을 증명하는 듯 보일지 모르지만, 그러한 체험에는 살아남는 가치, 곧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이 빠져 있다. 그러한 필사 체험에는 겨우 사회적 열매는 열려도, 영적 열매는 열리지 않는다. 신이 최초에 부여한 지성과 영의 뿌리로부터 살아 있는 영양소를 뽑아내는데도, 접붙임은 그 열매의 성질을 결정한다.
102:7.5 (1126.5) 종교의 지적(知的) 표시는 확신이다. 그 철학적 특징은 일관성이요, 사회적 열매는 사랑과 봉사이다.
102:7.6 (1126.6) 하나님을 아는 개인은 미신과 전통, 그리고 현대의 유물론 경향이 있는 미로에서 하나님 찾아내는 길을 가로막는 문제들을 못보거나 장애물을 눈치채지 못하는 자가 아니다. 그는 이 모든 방해물과 마주쳐서 이겼고, 팔팔한 믿음으로 이겨내고, 방해물이 있는데도 영적 체험의 고지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 반대 의견을 수집하고 어려움을 불리는 자들이 허다하고 영리하기 때문에, 속으로 하나님에 관하여 확신하는 많은 사람이 그런 확신의 느낌을 주장하기 두려워한다. 결점을 찾아내거나, 질문하거나, 반대 의견을 내놓는 데는 아무런 대단한 지능이 필요 없다. 그러나 이 여러 물음에 대답하고 이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는 눈부신 지성이 요구된다. 모든 그러한 피상적 주장을 다루는 데는 믿음의 확신이 가장 좋은 기법이다.
102:7.7 (1127.1) 과학이나 철학이나 또는 사회학이 참된 종교의 선지자들과 싸우는 데 감히 독단적이 된다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그런 근거없는 독단적 태도에, 개인의 확실한 영적 체험에서 생긴 태도, 더 멀리 내다보는 독단적 태도로 대답해야 한다, “나는 스스로 계신 이의 아들이니까, 내가 무엇을 겪었는가 알고 있다.” 한 신자의 개인적 체험이 독단(獨斷)에 도전받는다면, 사람이 체험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 믿음으로 태어난 이 아들은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바로 그 독단으로, 자기가 실제로 우주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말로 대답해도 좋다.
102:7.8 (1127.2) 오로지 무조건의 실체, 한 절대자가 감히 한결같이 독단을 주장할 수 있다. 독단을 주장하려고 가정하는 자는, 일관성이 있다면 머지않아 에너지 절대자, 보편적 진리, 무한한 사랑의 품으로 끌려감이 틀림없다.
102:7.9 (1127.3) 우주 실체에 이르는 비종교적 접근이, 믿음이 증명되지 않은 상태를 이유로 감히 믿음의 확신에 도전하면, 영을 체험한 사람은 마찬가지로, 과학이 다루는 사실과 철학 관념들이 마찬가지로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에 독단으로 도전하는 길을 택할 수 있다. 이 사실과 관념들이 마찬가지로, 과학자나 철학자의 의식 속에 있는 체험이기 때문이다.
102:7.10 (1127.4) 모든 존재 중에서 가장 피할 수 없고, 모든 사실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며, 모든 진리 가운데 가장 생생하고, 모든 친구 가운데 가장 사랑이 많으며, 모든 가치 중에서 가장 신성한 하나님에 관하여, 우리는 모든 우주 체험 중에서 가장 확실히 해 둘 권리가 있다.
102:8.1 (1127.5) 종교의 실체와 효력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증거는 인간이 체험하는 사실에 있다. 다시 말해서, 천성으로 두려움이 많고 의심하며, 자아를 보존하려는 강한 본능과 죽은 뒤에 살아남고 싶은 갈망을 날 때부터 가진 그 사람은, 오늘과 앞날의 아주 깊은 관심거리를 그의 믿음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권능과 성격자가 보호하고 지도하도록 기꺼이 완전히 맡기려 한다. 이것이 모든 종교의 한 핵심 진리이다. 이러한 보살핌과 마지막 구원을 받는 값으로 그 권능이나 성격자가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에 대하여 어떤 두 종교도 의견이 같지 않다. 사실, 그 종교들은 모두 얼마큼 의견이 다르다.
102:8.2 (1127.6) 어떤 종교라도 진화의 눈금에서 그 종교가 차지하는 지위에 관해서 말한다면, 종교를 도덕적 판단과 윤리적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최선일지 모른다. 어떤 종교라도 그 종류가 높을수록, 항상 나아지는 사회적 도덕과 윤리적 문화를 권장하며, 또한 이에 격려를 받는다. 우리는 종교를 그에 수반되는 문명의 상태에 따라 판단할 수 없다. 차라리 한 문명의 참 본질을 자체 종교의 순수함과 고상함에 따라서 추정하는 것이 좋다. 세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많은 종교 스승은 거의 교육을 받지 않았다. 세상의 지혜는 영원한 실체들을 믿는 유익한 믿음을 실천하는 데 필요하지 않다.
102:8.3 (1127.7) 다른 시대에 있던 여러 종교의 차이점은 사람이 현실을 다르게 이해하는 데, 그리고 도덕적 가치, 윤리적 관계, 영적 실체들을 사람이 다르게 인식하는 데 온통 의존한다.
102:8.4 (1127.8) 윤리는 다른 방법으로 지켜볼 수 없는, 내부의 영적ㆍ종교적 성장의 걸음을 충실하게 비치는 영원한 거울, 사회나 종족의 거울이다. 사람은 언제나 그가 아는 최선의 조건으로, 가장 깊은 개념과 가장 높은 이상의 조건으로, 하나님을 생각했다. 역사적 종교도 반드시 그 종교가 인정하는 가장 높은 가치 기준으로부터 하나님 개념을 만들어냈다. 모든 지적 인간이 그가 아는 바 가장 좋고 가장 높은 것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인다.
102:8.5 (1128.1) 종교가 사리와 지적 표현 방식으로 격하될 때, 자체의 윤리적 문화와 도덕적 진보의 기준에 따라서 판단하는 대로, 종교는 언제나 감히 문명과 진화하는 진보를 비판해 왔다.
102:8.6 (1128.2) 개인적 종교는 인간의 도덕의 진화를 앞서지만, 제도가 된 종교는 천천히 바뀌는 인류의 도덕 관습 뒤에 변함없이 처졌다는 것을 기록하는 것은 유감이다. 조직된 종교는 보수적으로 느린 것이 입증되었다. 종교의 발전에서 보통, 선지자들이 사람들을 이끌었다. 신학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나아가지 못하게 붙들었다. 종교는 마음 속의 문제, 즉 개인이 체험하는 문제이니까, 결코 종족들의 지적 진화보다 훨씬 앞서 발달할 수 없다.
102:8.7 (1128.3) 그러나 종교는 결코, 이른바 기적 같은 것에 호소함으로 향상될 수 없다. 기적을 추구하는 것은 원시의 마술 종교를 돌이켜 부르는 것이다. 참된 종교는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주장하는 것들과 아무 상관이 없고, 계시된 종교는 권위를 증명하려고 기적을 내세우지 않는다. 종교는 늘, 언제나 개인의 체험에 뿌리를 내리고 그에 바탕을 둔다. 너희의 가장 높은 종교, 예수의 일생은, 바로 그렇게 몸소 겪은 체험이었다: 육체를 입고서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찾다가 한껏 찾아내는 사람, 필사 인간이었고, 한편 바로 그 인간 체험 속에서 사람을 찾다가 무한히 높은 완전한 혼이 한껏 만족하기까지, 사람을 찾아내는 하나님이 세상에 나타났다. 그것이 종교, 아니 네바돈 우주에서 아직까지 계시된 가장 높은 종교이다―나사렛 예수가 땅에서 살았던 인생이다.
103:0.1 (1129.1) 사람의 참된 종교적 반응은 모두, 예배 보조자가 일찍부터 베푸는 봉사로 후원을 받고, 지혜 보조자의 검열을 받는다. 사람의 첫 초월 지성의 재산은 우주 창조 영의 성령 안에서 인격이 회로로 연결되는 재산이다. 신다운 아들들이 수여되거나 조절자가 보편적으로 수여되기 오래 전에, 이 영향은 윤리와 종교와 영적 수준에 대하여 사람의 관점을 확대하도록 작용한다. 파라다이스 아들의 수여가 있은 뒤에, 해방된 진리의 영은 종교적 진리를 깨닫는, 인간의 능력을 키우는 데 힘차게 이바지한다. 사람 사는 세계에서 진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생각 조절자는 인간이 가진 상급 부류의 종교적 통찰력을 개발시키는 데 더욱 참여한다. 생각 조절자는 우주의 창문이요, 이를 통하여 유한한 인간은 한없는 신, 우주의 아버지가 확실하고 신다운 것을 믿음으로 볼지도 모른다.
103:0.2 (1129.2) 인류의 종교적 성향은 타고난 것이다. 보편적으로 표현되고 자연 기원을 가진 듯하다. 원시 종교는 반드시 진화로 창시된다. 자연스러운 종교적 체험이 계속 진보함에 따라서, 다른 면에서는 천천히 움직이는 행성의 진화 과정에 진리의 정기적 계시가 때때로 끼어든다.
103:0.3 (1129.3) 유란시아에는 오늘날 네 종류의 종교가 있다:
103:0.4 (1129.4) 1. 자연 종교, 곧 진화 종교.
103:0.5 (1129.5) 2. 초자연 종교, 곧 계시 종교.
103:0.6 (1129.6) 3. 실제의 종교, 곧 유행하는 종교, 다른 정도로 자연 종교와 초자연 종교가 섞여 있다.
103:0.7 (1129.7) 4. 철학적 종교, 사람이 만든 종교, 즉 철학으로 생각해낸 신학 교리, 그리고 이치를 따짐으로 만들어진 종교.
103:1.1 (1129.8) 한 사회 집단이나 민족 집단 사이에서 종교적 체험이 일치하는 것은 개인에 깃드는 하나님의 분신(分身)이 동일한 성질을 가진 데서 생긴다. 다른 사람들의 복지에 관하여 사심 없는 관심을 일으키는 것은 사람 속에 있는 이 성직자이다. 그러나 인격이 독특하기 때문에―어느 두 필사자도 같지 않으니까―따라서 어느 두 인간도 자기 지성 속에 사는 신성한 영의 인도와 재촉을 비슷하게 풀이할 수 없는 것이 필연이다. 한 무리의 필사자는 영적 통일성을 체험할 수 있지만, 결코 철학적으로 균일하게 될 수 없다. 그리고 종교적 생각과 체험의 풀이의 이러한 다양성은 20세기의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종교에 대하여 500가지가 넘게 다르게 정의를 내렸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실제로, 인간은 누구나 자기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솟아나는 신의 충동에 대하여 자신의 체험적 해석으로 종교를 정의하며, 따라서 그러한 해석은 독특하고, 모든 다른 인간의 종교 철학과 온전히 달라야 한다.
103:1.2 (1130.1) 한 필사자가 동료 필사자의 종교 철학에 완전히 찬성할 때, 그 현상은 이 두 존재가 철학적ㆍ종교적 해석의 유사성에 관련된 문제들에 관하여 비슷한 종교적 체험을 겪었음을 가리킨다.
103:1.3 (1130.2) 너의 종교는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문제이지만, 너의 종교 생활이 자기 중심―한정되고 이기적이고 비사회적―으로 되는 것을 막을 목적으로, 너는 방대한 다른 종교적 체험을 (서로 다르고 다채로운 필사자들의 다양한 해석을) 이해하는 지식을 얻어야 한다.
103:1.4 (1130.3) 종교가 처음에 무언가를 믿는 원시적 신념이고, 다음에 가치 기준의 추구가 뒤따른다고 가정할 때, 합리주의는 그릇되다. 종교는 1차적으로 가치 기준의 추구이며, 다음에 해석하는 관념 체계가 형성된다. 믿는 관념―해석―보다 종교적 가치 기준―목표―에 대하여 사람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기가 훨씬 쉽다. 이것이 어째서 종교가 서로 충돌하는 수백 가지 관념―교리―를 유지하는 혼잡한 현상을 나타내면서, 한편 가치 기준과 목표에 찬성할 수 있는가 설명한다. 이것은 또한 특정한 개인이 종교 관념을 버리거나 바꾸는 마당에 자기의 종교적 체험을 지킬 수 있는가 설명한다. 종교적 관념에 혁신적 변화가 있는데도 종교는 버틴다. 신학(神學)은 종교를 낳지 않는다. 신에 관한 철학을 만들어 내는 것은 종교이다.
103:1.5 (1130.4) 신봉자들이 거짓된 것을 무척 많이 믿었다고 해서 종교가 무효로 되지는 않는데, 이는 종교가 가치 인식에 기초를 두고, 개인의 종교적 체험에서 생긴 믿음으로 종교가 입증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종교는 체험과 종교적 생각에 기초를 둔다. 신학, 즉 종교에 관한 철학은 그 체험을 풀이하려는 정직한 시도이다. 그러한 해석하는 관념은 옳거나 그를 수 있고, 아니면 진실과 잘못이 섞인 것일 수도 있다.
103:1.6 (1130.5) 영적 가치 기준을 인식함을 깨닫는 것은 관념 작용을 초월하는 체험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라 부르기로 작정한 이 “감각,” “느낌,” “직관,” 또는 “체험”을 가리키는 데 이용될 수 있는 아무런 낱말이 어느 인간 언어에도 없다. 사람 속에 거하는 하나님의 영은 인격을 가지지 않았다―조절자는 선(先)인격이다―하지만 이 훈계자는 가치를 제시하고, 신성의 맛을 풍기며, 신성은 가장 높고 무한한 의미에서 성격을 가졌다. 하나님이 적어도 성격을 가지지 않았다면, 의식할 수 없으며, 의식(意識)이 없다면 사람 밑에 있을 것이다.
103:2.1 (1130.6) 종교는 인간의 지성 속에서 작용하며 인간의 의식 속에서 종교가 나타나기 전에, 체험 속에서 사람은 종교를 깨달았다. 어린아이는 출생을 체험하기 전에, 약 아홉 달 동안 존재했다. 그러나 종교의 “출생”은 갑작스럽지 않고, 오히려 차츰차츰 솟아나는 것이다. 그런데도 머지않아 “태어나는 날”이 있다. 너희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영에게서 태어나지 않으면―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많은 육체의 출생이 “폭풍 같은 산고”와 기타 비정상 “출산”의 특징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허다한 영적 출생에 영의 고통이 많이 따르고 심리적 동요의 표시가 생긴다. 다른 영적 출생은 영적 체험이 높아짐과 함께, 최고의 가치를 인식하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성장이다. 하지만 의식해서 기울이는 노력, 그리고 분명한 개인적 결심이 없이는 아무런 종교적 발전이 일어나지 않는다. 종교는 결코 소극적 체험, 부정적 태도가 아니다. “종교의 탄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른바 종교적 감화를 받는 체험과 직접 관계되지는 않고, 이러한 감화는 정신의 갈등, 감정의 억압, 기분의 동요가 일어나는 결과로서, 생애의 후기에 일어나는 종교적 사건의 특징을 보통 나타낸다.
103:2.2 (1131.1) 그러나 사랑이 넘치는 하늘 아버지의 자녀임을 의식하면서 자라도록 부모가 기른 사람들은 정신적 위기, 감정의 격변을 통해야 하나님과 그렇게 친교함을 겨우 의식할 수 있는 필사 동료들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103:2.3 (1131.2) 사람의 지성에 있는 진화의 토양에서 계시된 종교의 씨앗이 싹트며, 이 토양은 아주 일찍부터 사회 의식을 낳는 도덕적 성품이다. 한 아이의 도덕적 성품을 처음 자극하는 것은 남녀의 차이나 죄책감이나 개인의 자부심이 아니라, 오히려 정의 및 공평의 충동, 그리고 친절―동료들에게 유익한 봉사―를 베풀려는 충동과 상관이 있다. 일찍부터 생긴 그러한 도덕적 각성을 길렀을 때 갈등ㆍ격변ㆍ위기가 비교적 없는 종교 생활이 차츰 발달한다.
103:2.4 (1131.3) 인간은 누구나 아주 일찍부터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충동과 이타적 충동 사이에 싸움 비슷한 것을 체험한다. 그러한 도덕적 갈등을 해결하는 과제에서 인간을 초월하는 도움을 찾는 결과로서, 흔히 하나님을 의식하는 첫 체험을 얻을 수 있다.
103:2.5 (1131.4) 어린아이의 심리 상태는 부정적이 아니라, 자연히 긍정적이다. 허다한 필사자가 부정적인 것은 그렇게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긍정적이라고 할 때, 그의 도덕적 충동을 언급하며, 이 지성의 힘이 솟아나는 것은 생각 조절자가 도착했음을 알린다.
103:2.6 (1131.5) 그릇된 가르침이 없는 가운데, 정상 아이의 지성은, 부정적으로 죄와 죄책감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의식이 고개를 들면서, 도덕적 올바름과 사회 봉사를 향하여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종교적 체험이 발달하면서 갈등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피할 수 없이 인간 의지의 결정ㆍ노력ㆍ기능이 언제나 있다.
103:2.7 (1131.6) 도덕적 선택에는 많든 적든, 도덕적 갈등이 보통 따른다. 아이의 지성 속에서 맨 처음에 생기는 바로 이 싸움은 이기심의 욕구와 이타심의 충동 사이에 생긴다. 생각 조절자는 이기적 동기를 가진 인격의 가치 기준을 무시하지 않지만, 인간의 행복을 얻는 목표에 이르고, 하늘 나라의 기쁨에 이르는 것으로서, 이타심의 충동을 조금 더 우대하도록 작용한다.
103:2.8 (1131.7) 한 도덕적 존재가 이기심의 욕구가 있는데도 사심 없이 되기를 선택할 때, 그것은 원시 종교의 체험이다. 어떤 동물도 그렇게 선택할 수 없다. 그러한 결정은 인간답고도 종교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실을 용납하고, 사회에 봉사하려는 충동을 나타내며, 이 충동이 사람의 형제 정신의 기초이다. 자유 의지 행위로 머리가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그러한 결정은 종교적 체험이 된다.
103:2.9 (1131.8) 그러나 어린아이가 도덕적 능력을 얻고, 따라서 이타적 봉사를 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장하기 전에, 그는 이미 튼튼하고 잘 통일된 이기적 성품을 개발하였다. 사실로 일어나는 바로 이 상황이 “높은” 성품과 “낮은” 성품 사이에, “죄 많은 늙은이”와 은혜로운 “새 성품” 사이에 싸움이 있다는 이론을 낳는다. 일생에 아주 일찍부터 정상인 어린아이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한다.
103:2.10 (1131.9) 사람은 제 실속을 찾는 욕구를 자아―그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반대로 이타심을 가지려는 의지를 제 몸 바깥에 있는 어떤 영향―하나님―과 동일시하고 싶어한다. 정말로 그러한 판단이 옳으니, 이는 자아를 추구하지 않는 모든 그러한 욕구는 깃드는 생각 조절자의 인도하심에 실제로 기원을 가지며, 이 조절자는 하나님의 분신이다. 인간은 의식 속에서 영 훈계자의 충동을 이타적 욕구, 동료 인간을 생각하는 욕구로서 깨닫는다. 적어도 이것이 어린아이의 머리 속에서 일찍부터 생기는 근본적 체험이다. 자라는 어린아이가 통일된 인격을 얻지 못할 때, 이타심의 욕구가 너무 지나치게 자라서 자아의 복지에 심각한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 그릇된 지도를 받은 양심은 많은 갈등ㆍ걱정ㆍ슬픔, 그리고 인간의 끝없는 불행의 원인이 될 수 있다.
103:3.1 (1132.1) 영ㆍ꿈, 그리고 다양한 기타 미신을 믿는 관념은 모두 원시 종교들의 진화적 기원에 하나의 역할을 했지만, 너희는 씨족이나 부족의 단결 정신의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초기 인간 지성의 도덕적 성품에서 생기는 이기심ㆍ이타심의 갈등에 도전한 바로 그 사회적 상황이 집단 관계에서 제시되었다. 원시적 오스트랄리아인은 영들을 믿는데도, 아직도 종교의 초점을 씨족에 둔다. 시간이 지나면, 그러한 종교 개념은 처음에는 동물로, 나중에는 초인간이나 어떤 신으로서 인격화되는 경향이 있다. 아프리카 부시맨의 신앙은 토템 신앙조차도 되지 않지만, 그처럼 열등한 종족조차 자기 이익과 집단 이익의 차이를 인식하며, 이것은 세속의 것과 신성한 것의 가치를 원시적으로 구별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 집단은 종교적 체험의 근원이 아니다. 사람의 초기 종교에 이 모든 원시적 기여가 어떤 영향을 미치든 상관 없이, 참된 종교적 충동은 사심 없이 되려는 의지를 촉진하는 진정한 영 존재에 그 기원을 가지는 것이 여전히 사실이다.
103:3.2 (1132.2) 자연의 경이와 신비, 즉 비인격 마나를[1] [1767] 믿는 원시 신앙은 후일의 종교가 나타날 것을 예시한다. 그러나 머지않아, 진화하는 종교는 개인이 사회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얼마큼 몸소 희생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더 행복하고 더 풍족하게 만들기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궁극에 종교는 하나님과 사람이 베푸는 봉사가 되도록 정해졌다.
103:3.3 (1132.3) 종교는 사람의 환경을 바꾸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오늘날 필사자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종교에서 많은 것은 이렇게 할 힘이 없게 되었다. 환경이 너무나 자주 종교를 지배하였다.
103:3.4 (1132.4) 어느 시대의 종교에도 지극히 중요한 체험은 신학적 교리나 철학 이론에 관한 생각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 기준과 사회적 의미에 대한 감정이라는 것을 기억하여라. 도덕 개념이 마술 요소를 대체함에 따라서 종교는 유리하게 진화한다.
103:3.5 (1132.5) 사람은 마나, 마술, 자연 숭배, 귀신 공포증, 동물 숭배와 같은 미신을 거쳐서 여러 가지 예식에 이르기까지 진화했고, 그런 예식으로 인하여 개인의 종교적 태도는 씨족의 집단 반응이 되었다. 다음에 이 예식들은 부족 신앙으로 집중되고 구체화되었고, 궁극에 이 두려움과 신앙은 신으로 인격화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종교적 진화에서 결코 도덕 요소가 통째로 빠지지는 않았다.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충동은 언제나 힘이 있었다. 그리고 이 강력한 영향은―하나는 인간의 영향이요 다른 하나는 신의 영향인데―1천 가지의 파괴적 성향과 적대심 때문에 무척 자주 절멸의 위협을 받았는데도 세월의 변천을 통해서 종교가 살아남는 것을 보장했다.
103:4.1 (1133.1) 사회의 행사와 종교적 모임의 차이, 특징이 되는 차이는, 세속의 모임과 반대로 종교적 모임이 친교의 분위기에 젖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인간의 교제는 신다운 자와 친교하는 느낌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집단 예배의 시작이다. 사람들이 함께 먹는 것은 가장 초기 종류의 사회적 친교였고, 그래서 초기 종교들은 예식에서 바치는 희생물의 얼마큼을 예배자들이 먹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기독교에서도 주의 성찬은 이 형태의 친교를 유지한다. 친교 분위기는 이기적 자아와 깃드는 영 훈계자의 이타적 욕구의 싸움에서, 신선한 느낌을 주고 위로하는 휴전 기간을 마련해 준다. 이것이 참된 예배에 이르는 전주곡이다―하나님의 계심을 연습하는 것이요, 궁극에 사람의 형제 정신이 태어나게 만든다.
103:4.2 (1133.2) 원시인이 하나님과 친교가 중단되었다고 느꼈을 때, 그는 속죄하려고, 친한 관계를 되찾으려는 노력으로 어떤 종류의 희생물을 바치는 데 의존하였다. 올바름을 간절히 목마르게 찾는 것은 진리의 발견으로 이끌고, 진리는 이상을 키우며, 이것은 개별 신자에게 새로운 문제를 일으킨다. 이는 우리의 이상이 기하 급수(級數)로 자라는 경향이 있고, 한편 그 이상에 부끄럽지 않게 사는 우리의 능력은 겨우 산술 급수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103:4.3 (1133.3) (죄를 의식함이 아니라) 죄를 지은 느낌은 영적 교통이 중단되거나 사람이 도덕적 이상을 낮추는 데서 생긴다. 사람의 가장 높은 도덕적 이상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비슷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그러한 곤경을 벗어날 수 있다. 사람은 자기의 가장 높은 이상에 부끄럽지 않게 살기를 바랄 수 없지만, 하나님을 찾아내고, 갈수록 더 그를 닮아가는 목표에 충실할 수 있다.
103:4.4 (1133.4) 예수는 희생물을 바치고 속죄하는 예식을 쓸어버렸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선포함으로, 이 모든 꾸며낸 죄책감의 근거와 우주에서 고립된 느낌을 없애버렸다. 인간과 창조자의 관계는 자식과 부모의 기초 위에 놓여 있다. 하나님은 필사 아들딸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된다. 그러한 친밀한 가족 관계의 정당한 부분이 아닌 모든 예식은 영원히 취소된다.
103:4.5 (1133.5) 아버지 하나님은, 자식의 실제 미덕이나 자격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동기―사람의 목적과 의도―를 인식함으로 자식인 사람을 다룬다. 그 관계는 부모와 자식 관계이며, 신의 사랑이 이를 움직이게 만든다.
103:5.1 (1133.6) 초기의 진화적 지성은 두려운 느낌에서 주로 파생되는, 사회적 의무와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느낌이 생기게 만든다. 사회에 봉사하려는 더 분명한 욕구와 이타주의 이상(理想)은 인간의 지성에 깃드는 신다운 영의 직접 충동에서 파생된다.
103:5.2 (1133.7) 남에게 착한 일을 하는 이 생각과 이상―사람이 이웃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이 무엇인가 희생하려는 충동―은 처음에 대단히 제한되어 있다. 원시인은 오직 그에게 아주 가까운 자, 그를 이웃으로 다루는 자들만 이웃으로 여긴다. 종교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사람의 이웃 개념은 씨족ㆍ부족ㆍ나라를 포함하도록 커진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온 인류를 포함하도록, 우리가 적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기까지, 이웃의 규모를 크게 만들었다. 모든 정상 인간의 마음 속에는 이 가르침이 도덕적이라―옳다―고 말해 주는 무엇이 있다. 이 이상을 가장 적게 실천하는 자들조차 이것이 이론적으로 옳다고 인정한다.
103:5.3 (1134.1) 모든 사람은 사심 없고 이타심을 가지려는 이 보편적 인간 욕구가 도덕적인 것을 인식한다. 인본주의자는 이 욕구의 기원을 물질 지성이 자연스럽게 작용하는 탓으로 돌린다. 종교가는 필사 지성이 가진 참으로 사심 없는 욕구는 생각 조절자가 안에서 영적으로 인도하심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더 바르게 인식한다.
103:5.4 (1134.2) 그러나 자아의 의지(意志)와 자아를 넘는 의지 사이에서 생기는 이 초기의 싸움에 관한 사람의 해석은 반드시 믿을 만하지 않다. 오로지 상당히 잘 통일된 인격자가 자아의 갈망과 싹트는 사회 의식이 여러 모습으로 다투는 것을 중재할 수 있다. 자아는 자기의 이웃만큼 권리를 가지고 있다. 둘 중에 어느 것도 개인의 눈길과 봉사를 독점으로 요구하지 못한다.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인간의 가장 초기 형태의 죄책감이 생긴다.
103:5.5 (1134.3) 오로지 자아의 자존심 욕구와 더 높은 자아(신다운 영)의 이타적 욕구가, 통합하고 감독하는 인격의 통일된 의지로 조정되고 절충될 때에야 인간의 행복을 얻게 된다. 진화 인간의 지성은 감정적 충동의 자연스러운 증가, 그리고 영적 통찰력―진정한 종교적 반성―에 바탕을 둔 사심 없는 욕구의 도덕적 성장, 이 둘 사이의 싸움을 심판하는 까다로운 문제에 늘 부딪친다.
103:5.6 (1134.4) 자아를 위해서, 그리고 최다수의 타아(他我)를 위해서 똑같은 이익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시간과 공간의 틀 속에서 반드시 만족스럽게 풀 수 없는 문제를 제시한다. 영원히 산다면 그러한 적대 관계는 해결될 수 있지만, 짧은 인생에서 이것은 해결될 수 없다. 예수는 이렇게 그러한 역설(逆說)을 언급하였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는 자는 잃겠거니와 누구든지 하늘 나라를 위하여 제 목숨을 버리는 자는 얻으리라.”
103:5.7 (1134.5) 이상을 추구하는 것―하나님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죽기 전과 후에 이어지는 노력이다. 죽은 뒤의 인생은 필사 존재와 본질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 이 생명에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좋은 일이 앞날의 생명을 향상하는 데 바로 기여한다. 진정한 종교는 자연사의 문을 거치는 결과로서 사람에게 부여되는 미덕, 고귀한 인품의 모든 미덕을 얻는다는 헛된 희망을 북돋음으로 도덕적 태만과 영적 게으름을 조장하지 않는다. 참된 종교는 필사자가 수명이 있는 동안에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노력을 헐뜯지 않는다. 필사자의 소득은 모두 첫 단계에 살아남는 불멸의 체험을 강화하는 데 바로 기여한다.
103:5.8 (1134.6) 사람의 모든 이타적 충동이 단지 자연스러운 군집 본능이 발달된 것이라 가르칠 때, 이것은 사람의 이상주의에 치명적이다. 그러나 자기 혼의 이 상급 욕구가 필사 지성에 깃드는 영적 세력으로부터 방출된다는 것을 사람이 알게 될 때, 사람은 고귀하게 되고 힘차게 에너지를 얻는다.
103:5.9 (1134.7) 영원하고 신다운 무엇이 자기 속에 살며 애쓴다는 것을 사람이 일단 완전히 깨닫는 것은 사람을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넘어서 들어올린다. 그래서 우리의 이상이 초인간 기원을 가졌다는 힘찬 믿음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의 이타적 확신, 사람이 형제라는 느낌을 현실로 만든다.
103:5.10 (1134.8) 사람은 자기의 영적 분야에서 자유 의지가 있다. 필사 인간은 전능한 하나님의 엄격한 통치에 복종하는 힘없는 종이 아니요, 기계론적 우주 결정론에서 희망 없는 숙명에 희생되는 자도 아니다. 아주 참되게 말하면, 사람은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설계하는 자이다.
103:5.11 (1135.1) 그러나 사람은 압력을 받는다고 구원을 얻거나 고귀하게 되지 않는다. 영의 성장은 진화하는 혼 속에서 일어난다. 압력을 가하면 인격을 비뚤어지게 만들지 모르지만, 결코 성장을 자극하지 않는다. 교육시키는 압력조차도, 비참한 체험을 막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겨우 부정적으로 유익하다. 모든 바깥 압력이 최소인 곳에서 영적 성장이 가장 크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도다.” 사람은 가정과 공동체, 교회와 국가의 압력이 가장 적을 때 가장 좋게 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보하는 사회에서 가정, 사회 단체, 교회, 국가가 할 일이 없다는 뜻으로 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103:5.12 (1135.2) 사회의 종교 집단에서 한 구성원이 그런 단체의 요구 조건을 따랐을 때, 그는 종교적 관념이 진실인가, 그리고 종교적 체험이 사실인가에 관하여 자신의 개인적 해석을 완전히 표현하는 종교의 자유를 누리도록 격려를 받아야 한다. 한 종교 집단의 안전은, 동질의 신학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통일되는 데 달려 있다. 한 종교 집단은 “자유 사상가”가 될 필요 없이, 자유롭게 생각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교회든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람이 형제인 것이 옳다고 인정하고, 감히 그 구성원에게 어떤 교리의 압력도 주지 않는다면 큰 희망이 있다.
103:6.1 (1135.3) 신학은 인간 정신의 행동과 반응을 연구하는 것이다. 신학의 개인적 표현에는 심리학과, 신학의 체계적 묘사에는 철학과, 어느 정도 반드시 통합되어야 하기 때문에, 신학은 결코 하나의 과학이 될 수 없다. 신학은 언제나 너의 종교를 연구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종교를 연구하는 것은 심리학이다.
103:6.2 (1135.4) 사람이 바깥에서 그의 우주를 연구하고 조사하는 일에 접근할 때, 그는 여러 가지 자연 과학을 만들어낸다. 자신과 우주의 연구를 안에서 접근할 때, 그는 신학과 형이상학에 기원을 준다. 사물과 존재들로 이루어진 우주에 접근하는 이 두 가지 정반대되는 길에서 얻은 조사 결과와 가르침 사이에 처음에 나타나도록 정해진 많은 차이점을 조화하려는 노력으로, 후일에 철학이라는 기술이 발달한다.
103:6.3 (1135.5) 종교는 영적 관점, 인간 체험의 내면성을 깨닫는 것과 상관이 있다. 사람의 영적 성품은 그에게 바깥에 있는 우주를 안에서 보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따라서, 순전히 인격이 체험하는 내면성의 견지에서 보았을 때, 모든 창조의 성질이 영적인 듯 보인다는 것이 참말이다.
103:6.4 (1135.6) 사람이 자신의 육체 감각의 물질적 자질 및 관계된 지성의 파악을 통해서 우주를 분석하여 검사할 때, 우주는 기계적이고 에너지와 물질인 듯하다. 실체를 연구하는 그러한 기법은 안에 있는 우주를 바깥으로 내놓는 것이다.
103:6.5 (1135.7) 우주에 대하여 논리와 일관성이 있는 철학 개념은 유물론(唯物論)이나 유심론(唯心論)의[2] [1768] 가설 위에 세울 수 없으니, 이는 이 두 생각 체계가, 보편적으로 적용되었을 때 우주를 왜곡하여 보도록 강요되기 때문이다. 즉 전자는 내면을 바깥에서 보는 우주를 접촉하며, 후자는 바깥을 안에서 보는 우주의 성질을 깨닫는다. 그러면 과학이나 종교는 결코 그 자체로서 저절로, 혼자 힘으로, 인간 철학의 안내가 없이, 신의 계시의 빛을 받지 않고서, 보편적 진리 및 관계를 적절히 이해하기를 바랄 수 없다.
103:6.6 (1136.1) 언제나 사람 속에 있는 영은 자체를 표현하고 자아의 실현을 위하여 지성의 장치와 기법에 의존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물질 실체를 바깥에서 체험하는 것은 그 체험하는 인격자의 지성 의식에 바탕을 둔다. 따라서 영적인 것과 물질인 것, 인간의 속 체험과 바깥 체험은 반드시 지성의 기능과 상관되며, 그들이 의식으로 깨닫는 것에 관하여, 지성의 활동에 제약을 받는다. 사람은 머리 속에서 물질을 체험한다. 사람은 혼 속에서 영적 실체를 체험하지만, 머리 속에서 이 체험을 의식하게 된다. 지능은 필사자가 겪는 체험의 총합을 조화시키고, 항상 조정하고 제한하는 물건이다. 에너지 및 사물, 그리고 영적 가치, 이 두 가지는 의식하는 머리의 매체를 통해서 그 해석에 따라 색깔을 얻는다.
103:6.7 (1136.2) 과학과 종교가 더 조화되도록 조정하는 데 너희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중간에 개재하는 상물질 사물 및 존재가 있는 세계의 영토를 너희가 까맣게 모르기 때문이다. 지역 우주는 물질ㆍ상물질ㆍ영으로 이렇게 실체가 명시되는 세 등급이나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상물질 각도의 접근은 자연 과학에서 발견된 것과 종교 정신의 작용 사이에 있는 모든 차이점을 지워 버린다. 이치를 따지는 것은 과학을 이해하는 기법이요, 믿음은 종교에서 통찰력을 얻는 기법이며, 상지혜는 상물질 수준의 기법이다. 상지혜는 초물질 실체에 대한 감수성이며, 그 내용이 지식 및 이치이고 그 본질이 믿음과 통찰력이기 때문에, 상지혜는 불완전한 성장을 보상하기 시작한다. 상지혜는 물질 인격자가 도달할 수 없는, 서로 달라지는 실체 파악을 초월 철학으로 절충하는 것이다. 상지혜는 어느 정도 육체로 사는 물질 인생 이후에 살아남은 체험에 바탕을 둔다. 그러나 상당히 동떨어진 과학과 종교 분야의 상호 작용을 절충하는 어떤 방법을 소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많은 필사자가 인식했다. 그리고 형이상학은 잘 알려진 이 간격에 다리를 놓으려고, 사람이 쓸데없이 시도한 결과이다. 그러나 인간의 형이상학은 빛을 던지기보다 사람을 헛갈리게 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형이상학은 상물질의 상지혜의 부재를 메우려고, 의도는 좋았지만, 사람이 쓸데없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103:6.8 (1136.3) 형이상학은 실패인 것이 입증되었다. 사람은 상지혜를 파악할 수 없다. 계시는 진리를 알아보는 상지혜 민감성이 물질 세계에 부재하는 것을 메울 수 있는 유일한 기법이다. 계시는 진화하는 구체(球體)에서 이치를 따짐으로 발달한 형이상학의 혼란을 권위 있게 명료하게 해준다.
103:6.9 (1136.4) 과학은 사람이 자기의 물리적 환경, 에너지 및 물질의 세계를 연구하려는 시도이다. 종교는 사람이 영적 가치가 있는 우주를 체험하는 것이다. 상당히 거리가 먼 이 개념들의 조사 결과를 우주에 대한 합리적이고 통일된 태도와 비슷한 무엇으로 조직하고 관련지으려는, 사람의 정신 노력으로 철학이 개발되어 왔다. 계시로 분명해진 철학은, 상지혜가 없는 가운데, 그리고 상지혜를 대신하는, 사람의 이치의 대용품―형이상학―이 붕괴하고 실패한 마당에, 적절하게 활동한다.
103:6.10 (1136.5) 옛날 사람은 에너지 수준과 영 수준을 구별하지 않았다. 수학적인 것과 의지가 있는 것을 처음으로 분리하려고 애쓴 것은 보라 인종과 그 안드 족 후계자들이었다. 문명화된 사람은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한, 아주 예전의 그리스인과 수메르인의 발걸음을 갈수록 더 따라갔다. 그리고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철학은 영 개념과 에너지 개념 사이에 항상 벌어지는 틈에 다리를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간 시대에 이 여러 차이점은 최상위 안에서 조화된다.
103:6.11 (1137.1) 상상과 추측은 과학의 범위를 연장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과학은 반드시 이치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이치를 따지는 것은 안정시키는 영향력이요 도움 되는 하녀이지만, 종교는 언제까지나 믿음에 의존한다. 그리고 자연 세계와 영적 세계 현상의 잘못된 해석, 과학과 종교라고 잘못 부르는 것들이 언제나 있어 왔고, 늘 있을 것이다.
103:6.12 (1137.2) 과학을 어설프게 파악하고, 종교를 힘없이 붙잡고, 하다가 그만둔 형이상학의 시도로부터 사람은 철학의 뼈대를 지으려고 애썼다. 물질 세계와 영 세계 사이에 온통 중요하고 필수인 형이상학의 연결이 붕괴되지 않고, 형이상학이 물리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상물질 간격에 다리 놓는 데 실패하지 않았다면, 현대인은 정말로 자신과 우주에 대하여 가치 있고 마음을 끄는 철학을 세우려할 것이다. 필사 인간에게는 상물질 지성 및 물질에 관한 개념이 모자란다. 계시는 우주에 대한 논리적 철학을 세우기 위하여, 그리고 그 우주에서 확실하고 안정된 자기 자리를 만족스럽게 이해하기 위하여, 사람이 무척 긴급히 필요한 이 개념 자료의 부족을 메우는 유일한 기법이다.
103:6.13 (1137.3) 계시는 진화 인간이 상물질 간격을 메우는 유일한 희망이다. 상지혜의 도움 없이, 믿음과 이치는 합리적 우주를 파악하고 연구할 수 없다. 상지혜의 통찰력이 없이, 필사인은 물질 세계의 현상에서 선(善)ㆍ사랑ㆍ진리를 헤아릴 수 없다.
103:6.14 (1137.4) 사람의 철학은 물질 세계를 향하여 상당히 기울어질 때, 합리주의나 자연주의가 된다. 영적 수준을 향하여 특별히 기울어질 때 철학은 이상주의나 신비주의가 되기도 한다. 몹시 불행하게도 형이상학에 기댈 때, 철학은 어김없이 회의에, 혼란에 빠지게 된다. 지난 시대에, 사람의 지식과 지적 평가의 대부분은 이 세 가지 파악의 왜곡 중 하나에 빠졌다. 철학은 감히 직선 모양의 논리로 실체에 관한 해석을 예측하지 않는다. 철학은 결코 실체가 타원 모양으로 균형된 것, 그리고 모든 관계 개념이 본질적으로 굽어진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03:6.15 (1137.5) 필사인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철학은 과학의 이치에, 종교의 믿음에, 그리고 계시가 주는, 진리를 알아보는 통찰력에, 논리적 기초를 두어야 한다. 이러한 통합으로 사람은 적당한 형이상학을 개발하지 못하고 상물질의 상지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상할 수 있다.
103:7.1 (1137.6) 이치를 따지는 것은 과학을 지탱하고 믿음은 종교를 지탱한다. 추론에 바탕을 두지는 않아도, 믿음은 이치에 맞는다. 비록 논리에 의존하지 않지만, 그런데도 건전한 논리가 믿음을 북돋아 준다. 이상적 철학조차 믿음을 기를 수 없다. 정말로, 과학과 더불어, 믿음은 그러한 철학의 바로 그 근원이다. 믿음, 인간의 종교적 통찰력은 오로지 계시함으로 사람에게 확실히 가르칠 수 있고, 영이신 하나님이 영적 조절자로 깃드심을 필사자가 몸소 겪어야 확실하게 깊어질 수 있다.
103:7.2 (1137.7) 참된 구원은, 물질을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상물질 연락이 있는 분야를 거쳐서, 영적 상호 관계가 있는 높은 우주 상태에 이르기까지, 필사 지성을 신답게 진화시키는 기법이다. 지상의 진화에서 물질적 직관 본능이 논리로 따져 얻은 지식의 출현을 앞서는 것처럼, 영적 직관의 통찰력이 나타나는 것은 상물질 및 영적 추리가 나중에 출현하고 하늘에서 진화하는 훌륭한 프로그람을 체험할 것을 미리 알리며, 이 천상의 진화는 일시적 인간의 잠재성을 실제로, 신다운 영원한 인간, 파라다이스 최후자로 변화시키는 사업이다.
103:7.3 (1138.1) 그러나 하늘 가는 사람이 하나님 체험을 얻으려고 안으로, 파라다이스를 향하여 손을 뻗음에 따라서, 마찬가지로 그 사람은 물질 우주의 에너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바깥으로, 공간을 향하여 손을 뻗고 있을 것이다. 과학의 진보는 사람이 땅에서 사는 인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이 지역 우주와 초우주를 올라가는 체험은, 적지 않게 에너지의 변질과 물질 변형의 연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지만, 신은 하나되는 것이요, 신이 하나됨은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의 영적 가치를 담을 뿐 아니라, 우주 통제자와 파라다이스 섬의 에너지 사실을 또한 인식하고, 한편 이 두 단계의 우주 실체는 합동 행위자의 지성 관계에서 완전히 서로 상관되고, 최상 존재의 솟아나는 신의 유한 수준에서 통일된다.
103:7.4 (1138.2) 체험적 철학의 중재로 과학적 태도와 종교적 통찰력을 연합하는 것은 사람이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오랜 체험의 일부이다. 수학이 추정(推定)한 것과 통찰력이 확실히 얻은 것은 최대의 달성인 최상위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수준의 체험에서, 지성 논리의 조화시키는 기능을 반드시 필요로 할 것이다.
103:7.5 (1138.3) 그러나 한 인격의 과학적ㆍ영적 모습이 진리에 지배되고, 진리가 무슨 결론을 내리든 상관 없이 어디든지 이끄는 대로 진리를 따를 것을 진심으로 바라지 않는 한, 논리는 과학의 조사 결과와 종교의 통찰력을 조화시키는 데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103:7.6 (1138.4) 논리는 철학의 기법이요, 철학의 표현 방법이다. 참 과학의 분야 안에서, 추리는 반드시 진정한 논리에 순종한다. 참된 종교의 분야 안에서, 속을 들여다보는 과학적 접근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믿음이 도무지 근거가 없어 보이더라도, 믿음은 안에서 보는 관점의 기초에서 볼 때 반드시 논리가 있다.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면서, 우주는 물질로 보일지 모른다. 안에서 바깥을 보면, 바로 그 우주는 온통 영적인 듯이 보인다. 이치는 물질을 의식함에서 생기고, 믿음은 영적 의식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계시로 강화된 철학의 중재를 통해서, 논리는 안과 바깥의 관점 모두를 확인할 수도 있고, 이렇게 함으로 과학과 종교, 이 두 가지를 안정시킨다. 따라서, 공동으로 철학의 논리와 접촉함으로, 과학과 종교, 이 두 가지가 갈수록 더 서로에게 관대하게 되고, 회의(懷疑)가 더욱 줄어들 수도 있다.
103:7.7 (1138.5) 발달하는 과학과 종교가 필요한 것은 더욱 탐구하는, 두려움 없는 자아 비판이요, 진화적 지위의 불완전함을 더욱 크게 인식하는 것이다. 과학과 종교의 스승들은 흔히 너무 자신 있고 독단적이다. 과학과 종교는 오로지 그들이 가진 사실에 대하여 자체를 비판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의 무대를 떠나는 순간, 이치는 물러나든지, 아니면 거짓 논리의 배우자로 빨리 퇴화되어 버린다.
103:7.8 (1138.6) 진리―우주 관계, 우주 사실 및 영적 가치의 이해―는 진리의 영이 베푸는 봉사를 통해서 얻는 것이 최선이고, 계시로 비평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계시는 과학도 종교도 창시하지 않는다. 계시의 기능은 과학과 종교를 실체의 진리와 조정하는 것이다. 계시가 없는 가운데서 또는 계시를 받아들이거나 붙잡지 못할 때, 필사 인간은 언제나 자기가 만든 쓸데없는 형이상학의 손짓에 의존했고, 형이상학은 인간에게 진리의 계시, 또는 상물질 인격의 상지혜를 대신하는 유일한 대용품이다.
103:7.9 (1139.1) 물질 세계를 다루는 과학은 사람으로 하여금 물리적 환경을 통제하고, 어느 정도 지배할 수 있게 만든다. 영적 체험의 종교는 친교하는 충동의 근원이며, 이것은 과학 시대의 문명이 복잡한 와중에서 사람들이 함께 살도록 만든다. 형이상학, 그러나 계시는 더 확실히, 과학과 종교, 이 둘을 발견하기 위하여 공통으로 만나는 장소를 마련해 주며, 동떨어졌어도 서로 의존하는 이 생각 분야들을 논리 있게 서로 연결지어서, 과학적으로 안정되고 종교적으로 확실한, 잘 균형된 철학으로 만드는 인간의 노력을 가능하게 한다.
103:7.10 (1139.2) 필사자의 지위에서는 아무것도 절대로 증명할 수 없다. 과학과 종교 모두가 가정(假定)에 바탕을 둔다. 상물질 수준에서 과학과 종교의 여러 가설은 상지혜 논리로 어느 정도 증명이 가능하다. 최대의 지위인 영적 수준에서, 실제로 실체를 맛보고 실체와 함께 맛보는 체험 이전에, 유한한 증명을 보일 필요가 차츰 사라진다. 그러나 그때에도 유한한 것을 지나서 증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이 많이 있다.
103:7.11 (1139.3)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분야는, 증명되지 않았어도, 사람의 지성 자질을 구성하는 실체에 대한 민감성을 이용하여 받아들인 어떤 여러 가정에 근거를 둔다. 물질ㆍ움직임ㆍ생명, 이 세 가지 실체를 가정함으로, 과학은 자랑스러운 그 추리 경력을 시작한다. 종교는 지성ㆍ영ㆍ우주―즉 최상 존재―이 세 가지가 정당함을 가정하고서 시작한다.
103:7.12 (1139.4) 과학은 공간에서 시간적 에너지와 물질을 다루는 수학을 생각하는 분야가 된다. 종교는 유한한 현세의 영 뿐 아니라, 또한 영원한 최고의 영을 다루기를 가정한다. 오로지 상지혜를 오랫동안 겪는 체험을 통해서, 우주를 파악하는 이 두 가지 극단이 기원ㆍ기능ㆍ관계ㆍ실체ㆍ운명을 비슷하게 풀이하도록 만들 수 있다. 일곱 으뜸 영의 회로에는 에너지와 영의 분산이 최대로 조화되어 있다. 최상위의 신 속에 에너지와 영이 처음으로 통일되고, 첫째 근원 중심, 스스로 계신 이의 무한 속에 최종으로 통일된다.
103:7.13 (1139.5) 이치를 따지는 것은 에너지와 물질로 이루어진 물리적 세계 속에서, 그 세계와 함께 겪는 체험에 관하여, 의식이 내리는 결론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믿음은 영적 의식―필사자가 달리 증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정당함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논리는 믿음과 이치가 통일되어 진리를 찾아 통합하여 전진하는 것이며, 필사 존재를 구성하는 지성 자질에, 사물ㆍ의미, 가치 기준을 날 때부터 인식하는 데, 기초를 둔다.
103:7.14 (1139.6) 생각 조절자의 계심에는 영적 실체가 있다는 진정한 증명이 있다. 그러나 이 계심이 정당한 것을 바깥 세계에 증명할 수 없고, 이처럼 하나님이 깃드심을 체험하는 사람에게만 그럴 수 있다. 조절자를 의식하는 것은 진리를 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선을 초월 지성이 파악하는 것, 그리고 인격의 사랑하는 동기에 기초를 둔다.
103:7.15 (1139.7) 과학은 물질 세계를 발견하고, 종교는 그 세계를 평가하고, 철학은 그 의미를 풀이하려 애쓰며, 한편 과학의 물질적 관점과 종교의 영적 개념을 조정한다. 그러나 역사(歷史)는 과학과 종교가 결코 완전히 의견이 같을 수 없는 영역이다.
103:8.1 (1140.1) 과학과 철학이 모두 이치와 논리로 하나님이 있음직하다는 것을 가정할까 싶어도,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몸소 겪는 종교적 체험만이 성격을 가진 그러한 최상의 신이 확실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생생한 진리를 그렇게 육신화하는 기법으로, 하나님이 아마도 있으리라는 철학적 가정은 종교적 현실이 된다.
103:8.2 (1140.2) 하나님이 확실히 계심을 체험하는 것에 관한 혼란은 개인들이 따로, 그리고 다른 종족의 사람들이 그 체험을 달리 풀이하고 진술하는 데서 생겨난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에 관한 대화는 지적ㆍ철학적이니까 서로 다르며, 때때로 혼란을 일으킬 정도로 허위이다.
103:8.3 (1140.3) 착하고 고귀한 남자가 제 아내를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하지만 결혼 애정 심리학의 필기 시험에 도저히 만족스럽게 합격할 수 없을지 모른다. 또 다른 남자는 제 배우자를 거의 또는 전혀 사랑하지 않아도, 그러한 시험에 아주 적절히 합격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의 참된 성품을 들여다보는 통찰력이 불완전하다고 그의 사랑의 현실이나 성실성을 한 푼어치도 무효로 만들지는 않는다.
103:8.4 (1140.4) 너희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믿음으로 그를 알고 사랑한다면―그러한 체험의 현실이, 과학이 의심을 넌지시 비치는 말이나, 논리로 트집잡기나, 철학의 가설, 아니면 하나님 없는 종교를 만들려는, 좋은 뜻을 가진 사람들의 영리한 제안 때문에, 어떤 면에서도 줄어들거나 상처 입게 하지 말라.
103:8.5 (1140.5) 하나님을 아는 신자의 확신은 의심하는 유물론자의 불확신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체험을 가진 신자의 깊은 믿음과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불신자의 불확신에 힘차게 도전해야 한다.
103:8.6 (1140.6) 철학이 과학과 종교 양자에게 최대의 도움을 주려면, 유물론과 범신주의의 두 극단을 피해야 한다. 오로지 인격의 실체―변화 가운데 영구한 것―을 인식하는 철학이 사람에게 도덕적 가치가 있을 수 있고, 물질 과학과 영적 종교를 다루는 이론 사이에 다리로서 소용될 수 있다. 계시는 진화하는 철학의 허약성을 보상하는 물건이다.
103:9.1 (1140.7) 신학(神學)은 종교의 지적 내용을 다루고, 형이상학(계시)은 철학적 모습을 다룬다. 종교적 체험은 종교의 영적 내용이다. 종교의 지적 내용에 신화 같은 변덕과 심리학적 망상이 있고, 형이상학의 잘못된 가정(假定)과 스스로 속이는 기법, 종교의 철학적 내용의 정치적 왜곡과 사회ㆍ경제적 변질이 있는데도, 개인적 종교에서 얻는 영적 체험은 여전히 진정하고 타당하다.
103:9.2 (1140.8) 종교는 단지 생각 뿐 아니라 느낌ㆍ행동ㆍ생활과 상관이 있다. 사고(思考)는 물질 생활과 더 가깝게 관계되며, 온통 그렇지는 않지만, 주로 이치와 과학의 사실에 지배를 받고, 영의 분야를 향한 비물질 범위에서는 진리에 지배를 받아야 한다. 사람의 신학이 아무리 착각이고 그릇되더라도, 사람의 종교는 전적으로 진정하고 영구히 참될 수 있다.
103:9.3 (1141.1) 최초의 형태의 불교는 유란시아의 진화 역사 전체를 통해서 대두된 바, 신이 없는 최선의 종교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이 종교가 발전되자, 신이 없는 채로 남지는 않았다. 신앙이 없는 종교는 모순이다. 하나님 없이, 종교는 하나의 철학적 모순이요 지적 부조리이다.
103:9.4 (1141.2) 자연 종교가 마술과 신화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후일에 계시 종교들의 실체와 진리, 그리고 예수가 가졌던 종교의 완벽하고 유익한 복음을 무효로 만들지 않는다.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은 마침내 종교에서 마술을 믿는 미신, 신화(神話)의 환상, 전통적 독단의 사슬을 벗겨 버렸다. 그러나 이 초기의 마술과 신화는 물질을 초월하는 가치와 존재들의 계심과 실체를 가정함으로써, 나중에 나타나는 우수한 종교를 위하여 무척 효과 있게 길을 닦았다.
103:9.5 (1141.3) 종교적 체험은 순전히 영적ㆍ주관적 현상이지만, 그러한 체험은 우주의 객관적 실체의 가장 높은 영역을 향하여 분명하고 생생한 믿음의 태도를 받아들인다. 종교적 철학의 이상은, 온 우주의 무한한 아버지의 절대적 사랑에 사람이 조건 없이 기대도록 이끌 그러한 믿음이요 신뢰이다. 그러한 진정한 종교적 체험은 이상주의적 욕구를 철학으로 구체화한 것을 훨씬 초월한다. 그런 체험은 실제로 구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오로지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배우고 행하는 일에만 아랑곳한다. 그러한 종교를 가졌다는 표시는, 최상의 신을 믿는 믿음, 영원히 살아남는다는 희망, 그리고 사랑, 특히 동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103:9.6 (1141.4) 신학이 종교의 주인이 될 때, 종교는 죽는다. 종교는 생명이 아니라 교리가 된다. 신학(神學)의 사명은 단지 개인이 영적 체험을 자의식하도록 돕는 것이다. 신학은 종교의 체험적 주장을 정의하고 분명히 밝히고 해설하고 정당화하는 종교적 노력이며, 결국 이 주장은 오직 생생한 믿음으로만 입증할 수 있다. 우주의 상급 철학에서, 지혜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믿음과 연합하게 된다. 이치ㆍ지혜ㆍ믿음은 사람의 가장 높은 인간적 성취이다. 이치를 따지는 것은 사람에게 사실의 세계, 사물을 소개하며, 지혜는 사람에게 진리의 세계, 즉 관계를 소개한다. 믿음은 사람을 신의 세계로, 영적 체험을 겪게 한다.
103:9.7 (1141.5) 믿음은 이치가 갈 수 있는 데까지 아주 기꺼이 이치를 데리고 가며, 그리고 나서 철학의 한계 끝까지 지혜와 함께 계속 간다. 다음에 믿음은 오직 진리의 동반을 받으면서, 한이 없고 결코 그치지 않는 우주 여행 길을 감히 떠난다.
103:9.8 (1141.6) 과학(지식)은 이치가 정당하다, 사람이 우주를 파악할 수 있다는 본래의(보조 영의) 가정 위에 기초를 둔다. 철학(조화된 이해)은 지혜가 정당하다, 물질 우주가 영적 우주와 조화될 수 있다는 본래(지혜 영)의 가정(假定) 위에 기초를 둔다. 종교(몸소 영적으로 체험하는 진리)는 믿음이 정당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는 본래(생각 조절자)의 가정 위에 기초를 둔다.
103:9.9 (1141.7) 필사 인생의 현실을 충분히 깨닫는 것은 이치ㆍ지혜ㆍ믿음, 이 세 가지의 가정을 점진적으로 기꺼이 믿으려 하는 태도에 있다. 그러한 인생은 진리에 자극을 받고 사랑이 지배하는 인생이며, 이것들은, 존재한다는 것을 물질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객관적 우주 실체의 이상이다.
103:9.10 (1142.1) 일단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인식하고 나서, 이치를 따지는 것은 지혜를 나타낸다. 지혜가 옳은 것과 그른 것, 진리와 잘못 사이에서 선택할 때, 지혜는 영의 인도하심을 보여준다. 이처럼 지성ㆍ혼ㆍ영의 활동은 늘 가까이 연합되고, 기능 면에서 서로 연결된다. 이치는 사실에 관한 지식을 다루고, 지혜는 철학과 계시를, 믿음은 살아 있는 영적 체험을 다룬다. 진리를 통해서 사람은 아름다움에 이르고, 영적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선의 높이까지 올라간다.
103:9.11 (1142.2) 믿음은 단지 신의 계심이 주는 신비스러운 느낌 뿐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하는 길로 이끈다. 믿음은 그 감정적 결과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참된 종교는 만족스러운 감정일 뿐 아니라, 믿고 아는 체험이다.
103:9.12 (1142.3) 종교적 체험에는 그 영적 내용에 비례하는 한 실체가 있으며, 그러한 실체는 이치ㆍ과학ㆍ철학ㆍ지혜, 그리고 인간의 모든 다른 성취를 뛰어넘는다. 그러한 체험으로 얻은 확신은 무너질 수 없고, 종교적 생활의 논리는 사람이 반박할 수 없다. 그러한 지식의 확신은 인간을 초월한다. 그 만족감은 극도로 신성하고, 그 용기는 꺾을 수 없고, 그 헌신에 의심이 없으며, 그 충성은 더할 나위 없고, 그 운명은 최종이다―영원하고 최종이고 보편적인 것이다.
104:0.1 (1143.1) 계시된 종교의 삼위일체 개념을 여러 진화 종교에 있는 삼원조(三員組) 관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삼원조 관념은 많은 암시적 관계로부터 생겼지만, 주로 손가락이 세 마디이기 때문에, 최소한 세 다리가 있어야 의자를 안정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떠받쳐 주는 세 점이 텐트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원시인은 오랫동안, 셋을 넘어서 셀 수 없었다.
104:0.2 (1143.2) 지난날과 오늘날, 낮과 밤, 뜨거움과 차가움, 암놈과 숫놈과 같은 어떤 자연스러운 쌍들을 제쳐놓고, 사람은 무릇 삼원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면, 어제와 오늘과 내일, 일출과 정오와 일몰, 아버지와 어머니와 어린아이이다. 사람들은 갈채를 세 차례 승리자에게 보냈다. 죽은 사람은 셋째 날에 묻혔고, 세 번 목욕함으로 귀신을 달랬다.
104:0.3 (1143.3) 인간의 체험에서 이러한 자연스러운 연결의 결과로서 삼원조가 종교에서 나타났고, 그것도 신들의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나 그들의 어떤 대표자도 인류에게 계시되기 오래 전에 나타났다. 나중에 페르시아인ㆍ인도인ㆍ그리스인ㆍ에집트인ㆍ바빌로니아인ㆍ로마인ㆍ스칸디나비아인은 모두 삼원조의 신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아직도 참된 삼자일체(三者一體)가 아니었다. 삼원조의 신들은 모두 자연스러운 기원을 가졌고, 유란시아에서 대부분의 가장 지적인 종족들에게 언젠가 나타났다. 진화로 생긴 삼원조 개념은 계시된 삼위일체 개념과 때때로 섞이게 되었다. 이 경우에는 흔히 두 가지를 구별하기가 불가능하다.
104:1.1 (1143.4)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를 이해하도록 이끈 계시, 유란시아에서 첫 계시를 약 50만 년 전에 칼리가스티아 영주의 참모진이 주었다. 이 최초의 삼위일체 개념은 행성의 반란이 터지고 나서 안정되지 않았던 시절에, 세상에서 사라졌다.
104:1.2 (1143.5) 첫째 동산과 둘째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삼위일체를 두 번째로 발표했다. 이 가르침은 약 3만 5천 년 뒤에 마키벤타 멜기세덱의 시절에도 완전히 잊혀지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셋 족속의 삼위일체 개념이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에서, 그러나 특별히 인도에서 지속했고, 인도에서 아그니, 즉 베다에서 머리가 셋인 불의 신으로, 오랫동안 남았다.
104:1.3 (1143.6)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삼위일체를 세 번째로 발표하였고, 살렘의 현자가 걸쳤던 가슴받이에 세 동심원(同心圓)이 이 교리를 상징하였다. 그러나 마키벤타는 팔레스타인의 베두인 족속에게 우주의 아버지, 영원한 아들, 무한한 영에 관하여 가르치기가 아주 어려움을 알아차렸다. 그의 제자들의 대부분은 삼위일체가 놀라시아덱의 최고자 세 분으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했고, 몇 사람은 삼위일체가 체계 군주, 별자리 아버지, 지역 우주의 창조 신이라고 파악했다.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ㆍ아들ㆍ영의 관계라는 개념을 어렴풋이라도 깨달은 자들은 더욱 적었다.
104:1.4 (1144.1) 살렘 선교사들의 활동을 통해서, 삼위일체에 관한 멜기세덱의 가르침은 유라시아와 북 아프리카의 상당 부분에 걸쳐 차츰 퍼졌다. 후일의 안드 족속 시대와 멜기세덱 이후 시대에 삼원조와 삼자일체를 구별하는 것은 흔히 어렵고, 그때 두 개념은 어느 정도까지 서로 섞이고 한데 엉키었다.
104:1.5 (1144.2) 힌두교 신자 사이에서 삼자일체 개념은 존재ㆍ지능ㆍ기쁨으로서 뿌리를 내렸다. (나중에 인도인의 개념은 브라마ㆍ시바ㆍ비슈누였다.) 셋 족속 사제들이 더 일찍 있었던 삼위일체 묘사를 인도로 가져왔지만, 살렘 선교사들이 후일의 삼위일체 관념을 들여왔고, 인도의 토착 지식인들이 이러한 교리들을 진화된 삼원조 개념과 복합시킴으로 이를 발달시켰다.
104:1.6 (1144.3) 불교 신자의 신앙은 삼자일체의 성질을 가진 두 교리를 개발했다. 먼저 있던 것은 선생ㆍ율법ㆍ우애였고, 고타마 싯달타가 이를 발표하였다. 부다를 따르던 사람들의 북쪽 가지에서 발달한 후일의 개념은 최상의 주, 성령, 육신화한 구원자를 포함했다.
104:1.7 (1144.4) 힌두교와 불교 신자의 이 관념들은 진정한 삼자일체 가설, 다시 말해서 일신교의 하나님이 세 가지로 나타난다는 관념이었다. 참된 삼자일체 개념은 따로 있는 세 신을 그저 한데 모아 놓은 것이 아니다.
104:1.8 (1144.5) 히브리인은 멜기세덱 시절에, 켄 족속의 전통으로부터 삼위일체에 대하여 알았지만, 유일한 하나님, 야웨를 향한 그들의 일신교적 열심이 모든 그러한 가르침을 가리게 만들었고, 그래서 예수가 나타날 때까지 엘로힘 교리는 유대인의 신학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뿌리가 뽑혔다. 히브리인의 지성은 삼자일체 개념을 하나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일신교 관념과 절충할 수 없었다.
104:1.9 (1144.6) 이슬람 신앙의 추종자들도 마찬가지로, 삼위일체 관념을 깨닫지 못했다. 태어나는 일신교는 다신교와 부딪쳤을 때, 언제나 삼자일체 사상을 너그럽게 보기 어렵다. 삼자일체 관념은 교리의 탄력성과 아울러 확고한 일신교 전통이 있는 종교에서 뿌리를 가장 잘 내린다. 위대한 일신론자, 히브리인과 이슬람 교인들은 삼신(三神) 숭배, 다신론, 그리고 삼자일체 사상, 즉 삼자의 신성과 성격이 일체로 명시되어 존재하는 하나의 신을 예배하는 것, 이 세 가지를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104:1.10 (1144.7) 예수는 사도들에게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구성원들에 관한 진리를 가르쳤지만, 그들은 예수가 비유로, 그리고 상징으로 말한다고 생각했다. 히브리인의 일신교에서 양육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지배하는 야웨 개념과 부딪치는 듯이 보이는 어떤 관념에도 귀를 기울이기가 어려움을 깨달았다. 그리고 초대의 기독교인은 삼위일체 개념에 저항하는 히브리인의 편견을 물려받았다.
104:1.11 (1144.8) 기독교에서 삼위일체의 처음은 안티옥에서 선포되었고, 하나님, 그의 말씀, 그의 지혜로 이루어졌다. 바울은 아버지ㆍ아들ㆍ영으로 구성된 삼위일체에 관하여 알았지만, 이에 관하여 설교하는 일이 드물었고, 새로 형성되는 여러 교회에 보낸 몇몇 편지에서만 언급하였다. 그때에도, 동료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은 예수, 곧 지역 우주의 창조 아들과 신의 둘째 분, 곧 파라다이스의 영원한 아들을 혼동하였다.
104:1.12 (1144.9)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은 그리스도 이후 1세기 끝 가까이에 인정받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우주의 아버지, 네바돈의 창조 아들, 구원자별의 신성한 봉사자―지역 우주의 어머니 영이자 창조 아들의 창조 배우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104:1.13 (1145.1) 예수가 살던 시절 이후로, 이 계시 발표문에서 내놓기까지, (특별히 그 계시를 받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 유란시아에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사실적 신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이 사실 면에 잘못이 있었더라도, 영적 관계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참말이었다. 오직 그 철학의 함축성과 우주론에 관한 결과에서, 이 개념은 장애를 겪었다. 우주에 생각이 미치는 많은 사람이 신의 둘째 분, 무한한 삼위일체의 둘째 구성원이 한때 유란시아에 거했다는 것을 믿기는 어려웠다. 정신적으로 이것은 참말이지만, 실제로 사실이 아니다. 미가엘 창조자들은 영원한 아들의 신성을 충분히 담고 있지만, 절대 성격자가 아니다.
104:2.1 (1145.2) 일신교는 다신교의 모순에 맞서는 하나의 철학적 항의로서 일어났다. 처음에 초자연적 활동의 세분화와 아울러 만신전을 조직하고, 다음에 최고신교(最高神敎)로 많은 신 위에 하나의 신을 높이고, 마침내 최종의 가치를 가진 유일한 하나님을 제외하고 모두 배척함을 통해서 일신교가 개발되었다.
104:2.2 (1145.3) 삼자일체 사상은 누구와도 관계 없는 우주 의미를 가진 신, 사람 모습을 벗고 외로운 신이 하나인 것을 상상하기가 불가능한 것에 대한 체험적 항의에서 생겨난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철학은 순전한 일신교의 신 개념으로부터 성격의 품질을 뽑아내는 경향이 있고, 누구와도 관계 없는 이 하나님 관념을 이처럼 범신적 절대자의 지위로 낮춘다. 다른 동급의 성격 존재들과 대등한 성격 관계가 없는 하나님이 무슨 개인적 성품을 가졌는가 이해하기는 언제나 어려웠다. 신 속에 있는 성격은 그러한 신이, 성격을 가진 다른 대등한 신과 관계를 가지고 존재할 것을 요구한다.
104:2.3 (1145.4) 삼위일체 개념의 인식을 통해서, 사람의 지성은 시공의 여러 우주에 있는 사랑과 법칙의 상호 관계를 얼마큼 파악하기를 바랄 수 있다. 영적 믿음을 통해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얻지만, 이 영적 믿음이 물질 우주의 예정된 법칙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곧 알아차린다. 하나님이 자기의 파라다이스 아버지라는, 사람의 믿음이 확고한 것과 상관 없이, 확대되는 우주의 지평은 사람이 또한 파라다이스 신의 실체가 보편적 법칙임을 인정하라, 파라다이스로부터 바깥으로 뻗으며, 영원한 세 분의 창조 아들과 창조 딸들이 만든 진화하는 지역 우주들보다도 더 위에 있는 삼위일체의 통치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이러한 신의 연합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사실이요 실체요 영원한 불가분성이다.
104:2.4 (1145.5) 그리고 바로 이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실재하는 개체이다―성격자가 아니지만, 그런데도 참된 절대 실체이다. 성격자는 아니지만 그런데도 공존하는 성격자―아버지ㆍ아들ㆍ영인 성격자―들과 모순되지 않는다. 삼위일체는 세 파라다이스 신을 한데 모음으로 궁극에 생기는, 총합보다 커지는 신 실체이다. 삼위일체의 질ㆍ특징ㆍ기능은 세 파라다이스 신의 속성을 단순히 더한 것이 아니다. 삼위일체의 기능은 독특하고 고유하며, 아버지ㆍ아들ㆍ영의 속성을 분석함으로 온전히 예측할 수 없는 무엇이다.
104:2.5 (1146.1) 예를 들면, 주는 땅에 계셨을 때, 추종자들에게 응보는 결코 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반드시 집단의 기능이라고 훈계하였다. 신들도 성격자로서 응보를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이 기능을 하나의 집단으로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로서 수행한다.
104:2.6 (1146.2) 아버지ㆍ아들ㆍ영이 삼위일체로 연합된 개념을 파악하는 것은 어떤 다른 세 가지 관계의 연장된 발표를 위하여 인간의 지성을 준비시킨다. 신학적 이유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개념으로 넉넉히 만족될지 모르지만, 철학과 우주론의 논리는 첫째 근원 중심의 다른 여러 삼자일치 연합을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삼자일치 속에서 무한자는 우주에서 나타나는―물력과 에너지와 동력, 원인과 반응, 잠재성과 사실성, 인력과 긴장, 원본과 원칙과 통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여러 관계에서―아버지가 아닌 여러 자격으로 활동한다.
104:3.1 (1146.3) 인류는 때때로 세 분의 신으로 이루어진 삼위일체를 이해하기에 이르렀지만, 일관성을 위해서 모두 일곱 절대자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음을 인간의 지능이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 관하여 참된 모든 것이 어느 삼자일치에 관하여 반드시 참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삼자일치는 삼자일체와 다른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기능적 모습에서, 삼자일치(三者一致)는 삼자일체와 비슷할지 모르지만, 결코 성질이 삼자일체와 같은 형태는 아니다.
104:3.2 (1146.4) 필사 인간은 유란시아에서 시야를 넓히고 개념을 확대하는 중요한 시대를 거치고 있으며, 그의 우주 철학은 인간이 생각하는 지적 무대가 확대되는 것과 발걸음을 맞추기 위하여 진화를 가속해야 한다. 우주 의식이 넓어짐에 따라서, 필사 인간은 물질 과학, 지적 철학, 영적 통찰력에서 그가 발견하는 모든 것이 서로 관계됨을 파악한다. 그래도 우주가 통일되어 있다는 이 모든 믿음과 함께, 사람은 모든 존재의 다양성을 깨닫는다. 신의 불변성에 관한 온갖 개념이 있는데도, 사람은 항상 변하고 체험으로 성장하는 우주 속에서 그가 사는 것을 깨닫는다. 영적 가치가 살아남는 것을 깨달음과 상관 없이, 사람은 물력ㆍ에너지ㆍ동력을 다루는 수학과 예비 수학을 늘 살펴야 한다.
104:3.3 (1146.5) 무한의 영원히 충만한 성질은 진화하는 우주들의 시간적 성장과 또 거기에서 체험하는 거주자들의 불완전성과 어떤 방법으로 절충되어야 한다. 총 무한의 개념은, 필사자의 지능과 상물질 혼이, 최종의 가치가 있고 사람을 영적으로 변화시키는 중요성이 있는 이 개념을 깨닫도록 어떤 방법으로 구분되고 제한되어야 한다.
104:3.4 (1146.6) 이치는 우주 실체의 일신교적 통일성을 요구하지만, 유한한 체험은 여럿인 절대자, 그리고 우주 관계에서 그들이 조화된다는 가설을 요구한다. 동급의 존재들이 없다면 다양한 절대 관계가 나타날 가능성이 전혀 없고, 차이ㆍ변수ㆍ변경자ㆍ감쇠자(減衰者)ㆍ제한자, 또는 감소자들이 활동할 기회가 전혀 없다.
104:3.5 (1146.7) 이 여러 논문에서 총 실체(무한)는 다음 일곱 절대자 안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104:3.13 (1147.5) 첫째 근원 중심은 영원한 아들의 아버지이고, 또한 파라다이스 섬에게 원본이다. 그의 성격은 아들 속에서 제한되지 않았지만, 신 절대자 속에서 성격은 잠재성이 되었다. 아버지의 에너지는 파라다이스와 하보나에서 드러났고, 동시에 무제한 절대자 속에서 그 에너지가 감추어졌다. 무한자는 합동 행위자의 그침 없는 행위 속에서 늘 드러나며, 한편 우주 절대자의 활동, 보상하지만 가려진 활동에서 영원히 작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동급의 여섯 절대자와 관계되며, 따라서 끊임없이 영원이 되풀이되는 동안 내내, 모두 일곱이 무한의 전역을 둘러싼다.
104:3.14 (1147.6) 절대 관계의 삼자일치는 불가피한 듯 보일 것이다. 성격자는 모든 다른 수준과 마찬가지로, 절대 수준에서 다른 성격과 연합하기를 추구한다. 세 파라다이스 성격자의 연합은 첫 삼자일치, 곧 아버지ㆍ아들ㆍ영의 성격 단결을 영원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 세 분이 성격자로서 통일된 기능을 위하여 한데 모일 때, 이로서 기능적으로 통일되는 한 삼자일치를 구성하며, 삼자일체―하나의 유기적 개체―는 아니지만, 그런데도 하나의 삼자일치, 즉 셋이 기능적으로 일치한 총합이다.
104:3.15 (1147.7)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삼자일치가 아니다. 하나의 기능적 일치가 아니라, 오히려 나누어져 있지 않고, 나눠 놓을 수 없는 신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성격자로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데, 이는 삼위일체가 그들의 나눠지지 않는 신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첫째 삼자일치와 아무런 그러한 성격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데, 이는 첫째 삼자일치가 세 분으로서 그들의 기능적 연합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삼위일체로서―나눠지지 않은 신으로서―그들의 성격 집합인 삼자일치에 대하여 외부 관계를 집단으로 유지한다.
104:3.16 (1147.8) 따라서 여러 절대 관계 사이에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독특하며, 실존적 삼자일치가 몇 가지 있지만, 오직 하나의 실존적 삼위일체가 있다. 삼자일치는 하나의 개체가 아니다. 그것은 유기체가 아니라 오히려 기능적인 것이다. 그 구성원은 단체라기보다 협동하는 자들이다. 삼자일치의 구성 분자는 개체일 수도 있지만, 삼자일치 그 자체는 하나의 연합이다.
104:3.17 (1147.9) 그러나 삼자일체와 삼자일치 사이에 한 가지 비교할 점이 있다. 이 두 가지가 궁극에는, 구성 분자가 가진 속성들의 합, 식별할 수 있는 합보다는 다른 무엇인 기능이 된다. 그러나 이들을 이처럼 기능적 관점에서 비교할 수 있지만, 그밖에 그들은 아무런 명백한 관계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대체로 기능이 구조와 가지는 관계로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삼자일치 연합의 기능은 삼자일체의 구조나 개체의 기능이 아니다.
104:3.18 (1147.10) 그렇기는 해도 여러 삼자일치가 실재하며, 이것들은 아주 현실이다. 삼자일치 속에 총 실체가 기능이 되며, 이를 통하여 우주의 아버지는 무한의 총 기능에 대하여 직접, 친히 고삐를 쥔다.
104:4.1 (1147.11) 일곱 가지 삼자일치를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우주의 아버지는 각자의 1차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여라. 그는 우주의 첫 아버지 근원이요, 절대 중심, 시초 원인, 우주의 통제자, 한없는 에너지 공급자, 최초의 통일, 무제한 지지자, 신의 첫째 분, 시초의 우주 원본, 무한의 본질이며, 지난날에 그러했고 늘 그럴 것이다. 우주의 아버지는 성격을 가진, 절대자들의 원인이며, 가장 높은 절대자이다.
104:4.2 (1148.1) 일곱 가지 삼자일치의 성질과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제시해도 좋다:
104:4.3 (1148.2) 제1 삼자일치―성격이 있고 목적을 가진 삼자일치. 이것은 세 신 성격자를 모은 것이다:
104:4.7 (1148.6) 이것은 사랑ㆍ자비ㆍ봉사, 이 세 가지의 통합이다―영원한 세 파라다이스 성격자가 의도하여 친히 사귀는 것이다. 이것은 신답게 친교하고, 지음받은 자를 사랑하고, 아버지답게 행동하고, 하늘에 올라가기를 권장하는 연합이다. 이 제1 삼자일치의 신다운 성격자들은 성격을 물려주고, 영을 수여하고, 지성을 부여하는 신들이다.
104:4.8 (1148.7) 이것은 무한한 의지를 가진 삼자일치이며, 영원한 현재를 통해서, 과거ㆍ현재ㆍ미래 시간의 모든 흐름 속에서 행위한다. 이 연합은 무한한 의지를 낳고, 성격을 가진 신이 진화 우주의 인간에게 스스로를 계시하는 작용을 마련한다.
104:4.9 (1148.8) 제2 삼자일치―동력 원본의 삼자일치. 자그마한 극자(極子)이든지, 타오르는 별이든지 또는 소용돌이치는 성운이든지, 중앙 우주나 초우주들까지도,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 가장 큰 물질 조직에 이르기까지, 물리적 원본―우주의 배치―는 반드시 이 삼자일치의 기능에서 파생된다. 이 연합은 다음으로 구성된다:
104:4.11 (1148.10) 2. 파라다이스 섬.
104:4.13 (1148.12) 셋째 근원 중심의 우주 대리자들이 에너지를 조직한다. 절대 물질이 된 파라다이스 원본을 따라서, 에너지가 형성된다. 그러나 그침 없는 이 모든 조종 뒤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계심이 있고, 그들의 연합은 파라다이스 원본을 처음으로 가동시켜 합동 행위자인 무한한 영이 출생하고 동시에 하보나가 나타나게 만들었다.
104:4.14 (1148.13) 종교적 체험을 겪으면서 사람은 사랑인 하나님과 접촉하지만, 그러한 영적 통찰력은 그 원본, 즉 파라다이스가 우주의 사실인 것을 총명하게 인식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파라다이스 성격자들은 신다운 사랑의 힘,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모든 생물이 자유 의지로 찬미를 드리게 하며, 영에게서 태어난 모든 그러한 성격자를 하나님의 최후자 아들이 끝없이 봉사하는 천상의 기쁨으로 이끈다. 제2 삼자일치는 이러한 작용이 펼쳐지는 공간 무대의 건축자이다. 이 삼자일치는 우주에 배치 되는 원본들을 결정한다.
104:4.15 (1148.14) 사랑은 제1 삼자일치의 신성의 특징을 나타낼지 모르지만, 원본(原本)은 제2 삼자일치가 은하계에 나타난 것이다. 제1 삼자일치와 진화하는 성격자들의 관계는, 제2 삼자일치와 진화하는 우주들의 관계와 같다. 원본과 성격은 첫째 근원 중심의 행위 가운데 두 가지 가장 중요한 표현이다. 그리고 아무리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여전히 동력의 원본과 사랑이 넘치는 성격자는 동일한 보편적 실체인 것이 참말이다. 파라다이스 섬과 영원한 아들은 우주의 아버지 물력의 헤아릴 수 없는 성품이 나란히, 그러나 정반대로 계시된 것들이다.
104:4.16 (1149.1) 제3 삼자일치―영을 진화시키는 삼자일치. 영적 명시의 총체성은 그 처음과 끝이 이 연합에 있으며, 다음으로 구성된다:
104:4.20 (1149.5) 영 잠재성으로부터 파라다이스 영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은 아버지의 순전한 영 본질, 아들ㆍ영의 활동적 영 가치, 신 절대자의 제한 없는 영 잠재성, 이 삼자일치 연합에서 실체가 표현된다. 영의 실존적 가치는 이 삼자일치 속에서 원초적으로 창시되고, 완벽하게 명시되고, 마지막 운명을 가진다.
104:4.21 (1149.6) 아버지는 영에 앞서 존재하고, 아들ㆍ영은 활발한 창조 영으로서 활동하며, 신 절대자는 모두를 둘러싸는 영으로서, 아니 영을 지나서도 존재한다.
104:4.22 (1149.7) 제4 삼자일치―무한 에너지의 삼자일치. 이 삼자일치 안에서, 공간의 잠재력으로부터 일력(一力)에 이르기까지 모든 에너지 실체의 처음과 끝이 영원하게 된다. 이 모임에는 다음이 들어간다:
104:4.25 (1149.10) 3. 무제한 절대자.
104:4.26 (1149.11) 파라다이스는 우주에서 물력과 에너지를 활성화하는 중심이다―첫째 근원 중심의 우주 위치요, 무제한 절대자의 우주 초점이요, 모든 에너지의 근원이다. 이 삼자일치 안에 실존적으로 있는 것은 무한한 우주의 에너지 가능성이며, 이 가운데 대우주와 총우주는 겨우 부분적으로 겉에 나타난 것이다.
104:4.27 (1149.12) 제4 삼자일치는 근본 단위의 우주 에너지를 절대로 통제하며, 모습이 바뀌는 우주를 통제하고 안정시키는 능력, 절대 이하의 능력이 체험적 신들에서 나타나는 것에 정비례하여, 이 에너지를 무제한 절대자의 손아귀로부터 방출한다.
104:4.28 (1149.13) 이 삼자일치는 물력이요 에너지이다. 무제한 절대자의 끝없는 잠재성은 파라다이스 섬의 절대력 둘레에 집중하며, 거기서부터 다른 면에서 정적(靜的)인 무제한자의 고요함 속에서 상상할 수 없는 흥분이 퍼진다. 그리고 무한한 에너지 공급자, 즉 첫째 근원 중심의 헤아릴 수 없는 원본과 아무도 알아낼 수 없는 계획과 조화되어, 무한한 우주의 심장, 물질로 된 파라다이스 심장의 끝없는 맥박이 뛴다.
104:4.29 (1149.14) 제5 삼자일치―무한히 반응하는 삼자일치. 이 연합은 다음으로 이루어진다:
104:4.30 (1149.15) 1. 우주의 아버지.
104:4.32 (1149.17) 3. 무제한 절대자.
104:4.33 (1149.18) 이 모임은 신이 아닌 실체의 영토 안에서 실현할 수 있는 만물의 무한한 기능의 실현을 영원하게 만든다. 이 삼자일치는 다른 삼자일치들이 의지(意志)하고, 원인이 되고 긴장을 일으키고 원본이 되는 행동과 계심에 대하여 한없이 반응하는 능력을 나타낸다.
104:4.34 (1150.1) 제6 삼자일치―우주에서 연합된 신의 삼자일치. 이 배합은 이렇게 구성된다:
104:4.38 (1150.5) 이것은 우주에 계신 신의 연합이요, 신의 초월성과 관련하여, 신이 우주 안에 거하심을 말한다. 이것은 신이 되어버린 실체의 영토 바깥에 놓인 실체들을 향하여 무한 수준에서 신성이 마지막으로 미치는 범위이다.
104:4.39 (1150.6) 제7 삼자일치―무한히 통일되는 삼자일치. 이것은 시간과 영원 속에서 기능적으로 나타나는 무한한 통일, 곧 실재물과 잠재물이 나란히 통일되는 것이다. 이 집단은 다음으로 이루어진다:
104:4.43 (1150.10) 합동 행위자는 유한한 것으로부터 초월적인 것을 거쳐서, 계속하여 절대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온갖 수준의 모습으로 현실이 된 모든 실체의 다른 기능적 모습을 보편적으로 통합한다. 우주 절대자는 활발하고 의지를 가진, 무언가 일으키는 신 실체의 한없는 가능성으로부터, 무제한 절대자의 헤아릴 수 없는 영토에 있는 실체, 곧 정태적이고 반응하는 비신(非神) 실체의 끝없는 가능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불완전한 실체의 다른 모습에 본래 있는 여러 차이점을 완전히 보상한다.
104:4.44 (1150.11) 이 삼자일치 안에서 활동함에 따라서, 합동 행위자와 우주 절대자는 신에 대하여, 또 신이 아닌 계심에 대하여 마찬가지로 민감하다. 또한 첫째 근원 중심도 마찬가지이며, 그는 이 관계에서 모든 의도와 목적으로 볼 때, 스스로 계신 이의 개념과 구분할 수 없다.
104:4.45 (1150.12) 이러한 대략은 여러 삼자일치 개념을 밝히기에 넉넉하다. 여러 삼자일치의 궁극 수준을 모르니까, 너희는 처음 일곱 가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더 자세히 설명하려는 시도가 지혜롭다고 여기지 않지만, 첫째 근원 중심에게는 열 다섯 가지 삼자일치 연합이 있고, 그 가운데 여덟은 이 논문집에서 밝히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밝히지 않은 이 여러 연합은, 최상위의 체험 수준을 지나는 실체ㆍ사실성ㆍ잠재성과 관련된다.
104:4.46 (1150.13) 여러 삼자일치는 무한을 기능적으로 안정시키는 평형 바퀴요, 일곱 무한 절대자의 독특성을 통일하는 것이다. 무한이 일곱 절대자로 다양화되었는데도, 아버지이자 스스로 계신 이로 하여금 기능적 무한의 통일을 체험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여러 삼자일치가 실존적으로 있기 때문이다. 첫째 근원 중심은 어떤 삼자일치에서도 통일하는 구성원이다. 그분 안에서 만물이 제한 없는 시작, 영원한 존재, 무한한 운명을 가진다―”그분 안에 모든 것이 존재한다.”
104:4.47 (1150.14) 비록 이 여러 연합이 아버지이자 스스로 계신 이의 무한성을 늘일 수 없어도, 이런 연합은 그의 실체가 무한 이하와 절대 이하로 나타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듯하다. 일곱 가지 삼자일치는 유연성을 높이고 새로운 깊이를 영원하게 하며, 새로운 가치를 신답게 만들고 새로운 가능성을 드러내며, 새로운 의미를 밝힌다. 시간과 공간에서, 또 영원한 우주에서, 다양하게 겉으로 나타나는 이 모든 모습은 최초에 무한한 스스로 계신 이가 가상적으로 가만히 계신 상태에서 존재한다.
104:5.1 (1151.1) 구성에서 아버지가 들어가지 않는 어떤 다른 삼자일치 관계들이 있지만, 이들은 진정한 삼자일치가 아니며, 그들은 아버지의 여러 삼자일치와 반드시 구별된다. 이들은 여러 가지로, 버금 삼자일치, 나란한 삼자일치, 그리고 삼극일치로 부른다. 이들은 여러 삼자일치가 존재하는 결과로 생긴다. 이 여러 연합 중에서 둘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104:5.2 (1151.2) 사실성의 삼극일치. 이 삼극(三極)일치는 세 가지 절대 사실의 상호 관계에 있다:
104:5.6 (1151.6) 영원한 아들은 영 실체의 절대자, 곧 절대 성격자이다. 파라다이스 섬은 우주 실체에서 절대적인 것이요, 곧 절대 원본이다. 합동 행위자는 지성 실체의 절대자, 곧 절대 영 실체와 동급이며, 성격과 권능이 실존적으로 신으로 합성된 것이다. 이 삼자일치의 연합은 궁극에 현실화된 실체―영, 우주 또는 지성 실체―의 총합을 조화시키기에 이른다. 그것은 사실이 되는 데 제한이 없다.
104:5.7 (1151.7) 잠재성의 삼극일치. 이 삼극일치는 세 잠재성의 절대자의 연합에 있다:
104:5.11 (1151.11) 이처럼 모든 잠자는 에너지 실체―영 실체, 지성 실체 또는 우주 실체―의 무한한 저수지(貯水池)들이 서로 연합되어 있다. 이 연합은 모든 잠자는 에너지 실체를 통합하게 한다. 그 잠재성은 무한하다.
104:5.12 (1151.12) 여러 삼자일치가 무한한 기능의 통일에 1차적으로 관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삼극일치는 체험적 신들이 우주에 출현하는 데 관련이 있다. 여러 삼자일치는 체험적 신―최상위ㆍ궁극위ㆍ절대자―와 간접으로 관련되지만, 삼극일치는 직접 관여한다. 그들은 솟아나는 최상 존재의 권능과 성격을 합성하는 데서 나타난다. 그리고 공간에서 일시 사는 인간에게 최상 존재는 스스로 계신 이의 통일성을 계시한 것이다.
105:0.1 (1152.1) 높은 계급의 우주 지성 존재들도 무한을 겨우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실체의 최종을 오직 상대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지성이, 실재한다고 부르는 모든 것의 기원 및 운명의 영원함과 신비를 꿰뚫어 보기를 추구할 때, 영원ㆍ 무한을 거의 한이 없는 타원이라고 생각함으로 그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도움이 될지 모른다. 이 타원은 하나의 절대 원인으로 말미암아 생겼고, 끝없이 다양화되는 이 우주 영역에 두루 활동하며, 운명의 어떤 절대적이고 무한한 잠재성을 늘 추구한다.
105:0.1 (1152.1) 높은 계급의 우주 지성 존재들도 무한을 겨우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실체의 최종을 오직 상대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지성이, 실재한다고 부르는 모든 것의 기원 및 운명의 영원함과 신비를 꿰뚫어 보기를 추구할 때, 영원ㆍ 무한을 거의 한이 없는 타원이라고 생각함으로 그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도움이 될지 모른다. 이 타원은 하나의 절대 원인으로 말미암아 생겼고, 끝없이 다양화되는 이 우주 영역에 두루 활동하며, 운명의 어떤 절대적이고 무한한 잠재성을 늘 추구한다.
105:0.2 (1152.2) 필사의 지능이 실체 전부의 개념을 파악하려고 애쓸 때, 그러한 유한한 지성은 무한한 실체와 얼굴을 마주친다. 실체의 전부는 무한이며, 따라서 개념 능력이 무한하지 않은 어떤 지성도 이를 결코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105:0.3 (1152.3) 인간의 지성은 영원의 존재들에 관하여 적절한 개념을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고,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실체 전부에 대한 우리의 개념들조차 묘사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렇기는 해도 우리는 그러한 발표를 시도할까 한다. 하지만 필사자의 머리가 이해하는 수준까지 번역하고 수정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개념들이 깊이 왜곡되어야 함을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다.
105:1.1 (1152.4) 여러 우주에 있는 철학자들은 무한 속에서 절대적 시초의 원인은 무한한 자, 영원한 자, 절대적인 스스로 계신 이로서 활동하는 우주의 아버지에게 있다고 말한다.
105:1.2 (1152.5) 이 무한한 스스로 계신 이 관념을 필사 지능에게 발표하는 데 따르는 숱한 위험 요소가 있는데, 이는 이 개념이 인간이 체험으로 이해하는 것과 너무나 거리가 멀어서 의미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가치를 오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해도, 절대 기원과 무한한 운명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데 접근하기 위하여, 스스로 계신 이에 관한 철학적 개념은 유한한 존재들에게 어떤 기초를 마련해 준다. 그러나 실체의 기원과 결실을 밝히려고 어떤 시도를 하더라도, 이 스스로 계신 이 개념은 모든 성격 의미와 가치에서, 신의 첫째 분, 즉 모든 성격자의 우주의 아버지와 뜻이 같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자. 하지만 이 스스로 계신 이라는 가설은 신(神)이 되지 않은 우주 실체의 영역에서 아주 뚜렷이 확인할 수 없다.
105:1.3 (1152.6) 스스로 계신 이는 무한자이다. 스스로 계신 이는 또한 무한이다. 연속되는 시간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실체는 무한한 스스로 계신 이 안에서 기원을 가지고, 과거의 무한한 영원 속에 그가 홀로 존재했다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첫째 철학적 가설임이 틀림없다. 스스로 계신 이의 개념은 제한되지 않은 무한, 곧 무한한 영원 전체 속에서 언제라도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이 아직 분화되지 않은 그러한 실체를 의미한다.
105:1.4 (1153.1) 하나의 실존적 개념으로서 스스로 계신 이는 신화되지도 비신화(非神化)되지도 않았고, 실재하는 것도 잠재성도 아니며, 성격도 비성격도 아니요, 정적(靜的)인 것도 동적(動的)인 것도 아니다. 스스로 계신 이가 계시다고 말하는 것 외에 아무런 제한이 무한자에게 적용될 수 없다. 스스로 계신 이라는 철학적 가정은 무제한 절대자 개념보다 얼마큼 더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의 우주 개념이다.
105:1.5 (1153.2) 유한한 자의 생각에는 단지 시작이 있어야 한다. 실체에는 결코 진정한 시작이 없었어도, 여전히 실체가 무한에게 명시되는 어떤 근원적 관계들이 있다. 그 실체 이전, 원초적 영원의 상황은 다음과 비슷한 무엇으로 생각해도 좋다: 무한히 까마득한 어떤 가상(假想)하는 과거 영원의 순간에, 스스로 계신 이를 물체이자 비물체로서, 원인이자 결과로서, 의지(意志)이자 반응으로서 생각해도 좋다. 이 가상하는 영원의 순간에, 무한 전역에 걸쳐 아무런 구별이 없다. 무한은 무한자로 채워져 있으며, 무한자는 무한을 둘러싼다. 이것이 영원의 가상된 정적 순간이다. 실재하는 것들은 아직도 그 잠재성 안에 담겨 있고, 잠재성이 있는 것들은 스스로 계신 이의 무한 속에서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있으리라 추측하는 이 상황에서도 우리는 자아 의지의 가능성이 존재함을 가정해야 한다.
105:1.6 (1153.3) 사람이 우주의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은 몸소 겪는 체험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여라. 영적으로 아버지인 하나님을 너와 모든 다른 필사자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너희가 체험으로 예배하는 우주의 아버지 개념은 첫째 근원 중심, 즉 스스로 계신 이가 무한하다는 너의 철학적 가설보다 반드시 작은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아버지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높고 낮은 생물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을 뜻하지만, 신에게는 우주의 생물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많이 있다. 너의 아버지요 내 아버지인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 안에서 실제로 체험하는 하나의 실체로서 우리가 파악하는, 무한자의 그 단계이다. 그러나 스스로 계신 이는 첫째 근원 중심에 관하여 알 수 없다고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가설로서 늘 남아 있다. 그리고 그 가설조차 아마도 최초의 실체의 헤아릴 수 없는 무한에 훨씬 못 미친다.
105:1.7 (1153.4) 온 우주는, 거기에 셀 수 없이 많은 집단의 거주하는 성격자들과 함께, 하나의 방대하고 복잡한 유기체이다. 그러나 첫째 근원 중심은 그가 의도한 명령에 반응하여 실재하게 된 우주와 성격자들보다 무한히 더 복잡하다. 네가 총 우주의 엄청난 크기에 두려운 마음이 들 때, 이해할 수 없는 이 창조조차도 무한자의 부분적 계시에 지나지 않음을 멈추어 생각해 보아라.
105:1.8 (1153.5) 무한은 정말로 필사자가 알아듣는 체험 수준과 멀지만, 유란시아에서 현재 시대에도 너희의 무한 개념들이 자라고 있고, 미래 영원으로 계속 뻗어나가는 너희의 끝없는 생애에 두루, 그 개념들은 줄곧 자랄 것이다. 제한 없는 무한은 유한한 인간에게 의미가 없지만, 무한은 스스로를 제한할 수 있고, 모든 수준의 우주 존재들에게 실체의 표현을 허용한다. 그리고 모든 우주 성격자를 향하여 무한자가 돌리는 그 얼굴은 아버지, 사랑이 넘치는 우주의 아버지의 얼굴이다.
105:2.1 (1153.6) 실체의 기원을 생각할 때, 모든 절대 실체는 영원부터 있고, 존재하기 시작한 적이 없이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여라. 우리는 실존적인 세 분의 신과 파라다이스 섬과 세 절대자를 절대 실체로 언급한다. 우리가 인간에게 절대 실체들의 연속되는 기원을 발표하면서 시공의 언어에 의존하는데도, 이 일곱 가지 실체는 나란히 영원하다.
105:2.2 (1154.1) 실체 기원의 연대순 묘사를 따르면서, 스스로 계신 이 안에 “처음” 의지가 표현되고 “처음”으로 반응이 일어나는 한 순간, 이론적으로 가정하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실체의 기원과 발생을 그리려고 시도할 때, 이 단계는 무한한 자가 무한성으로부터 스스로 분화한 것이라 생각해도 좋지만, 이 이원(二元) 관계의 가정은 무한자, 즉 스스로 계신 이가 영원히 연속하는 것을 인식함으로 삼자일치 개념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확대되어야 한다.
105:2.3 (1154.2) 스스로 계신 이가 이렇게 스스로 모습을 바꾸는 것은, 신이 된 실체와 신이 되지 않은 실체, 잠재하는 실체와 실재하는 실체, 그리고 도저히 그리 분류될 수 없는 어떤 다른 실체들로 마침내 몇 가지로 분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론적 일원(一元)인 스스로 계신 이의 이러한 분화(分化)는 바로 그 스스로 계신 이 안에서 일어나는 동시 관계들로 인하여 영원히 통합된다―이 스스로 계신 이는 잠재 이전이자 사실 이전(以前)의 실체이며, 선(先)인격이고 단일성(單一性) 선실체이며, 그 선(先)실체는 무한하지만 첫째 근원 중심의 계심에서 절대로, 그리고 우주의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 속에서 성격으로 드러난다.
105:2.4 (1154.3) 이 내부의 변형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계신 이는 일곱 가지 자아 관계를 위한 기초를 세운다. 혼자인 스스로 계신 이라는 철학적 (시간) 개념과 삼자일치인 과도기의 (시간) 스스로 계신 이 개념은 이제 칠중자인 스스로 계신 이를 포함하도록 확대될 수 있다. 이 칠중―즉 일곱 단계―의 성품은 무한의 일곱 절대자와 가지는 관계로 제시하는 것이 최선일지 모른다:
105:2.5 (1154.4) 1. 우주의 아버지. 영원한 아들의 아버지인 스스로 계신 이. 이것은 사실로 있는 자들의 원초적 성격 관계이다. 아들의 절대 성격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을 절대 사실로 만들고, 모든 성격자의 아들 가능성을 입증한다. 이 관계는 무한자가 성격자임을 입증하고, 최초의 아들의 성격에서 그 영적 계시를 완성한다. 아직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 우리의 아버지를 숭배할 수도 있는 필사자들도 스스로 계신 이의 이 단계를 영적 수준에서 어느 정도 체험할 수 있다.
105:2.6 (1154.5) 2. 우주 통제자. 영원한 파라다이스의 원인인 스스로 계신 이. 이것은 사실로 있는 것들의 원초적 비성격 관계, 최초의 비영적 관련이다. 우주의 아버지는 사랑인 하나님이다. 우주 통제자는 원본인 하나님이다. 이 관계는 형태―배열―의 잠재성을 안정시키고, 비성격 및 비영적 관계의 원판―모든 복사품을 만들게 하는 원판―을 결정한다.
105:2.7 (1154.6) 3. 우주 창조자. 영원한 아들과 하나인 스스로 계신 이. 아버지와 아들의 이 연합은 (파라다이스가 있는 가운데) 창조 집단을 비롯하며, 이것은 마침내 합동 성격자와 영원한 우주가 나타나게 만든다. 유한한 필사자의 관점에서 볼 때, 하보나 창조가 영원히 나타남과 함께 실체가 참으로 시작한다. 신의 이 창조 행위는 행위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또 그를 통해서 일어나며, 그의 본질은 사실인 것들의 모든 수준에서, 또 그에 대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통일되게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신의 창조성은 어김없이 통일된 특징을 가지며, 이 통일성은 이원(二元)인 아버지와 아들이 절대로 하나이고 아버지ㆍ아들ㆍ영의 삼위일체가 바깥으로 반영된 것이다.
105:2.8 (1155.1) 4. 무한한 지지자. 스스로 연합하는 스스로 계신 이. 이것은 실체의 정적(靜的) 상태와 잠재성의 원초적 연합이다. 이 관계에서, 제한받는 것과 제한받지 않는 것 모두가 보상된다. 스스로 계신 이의 이 단계는 우주 절대자―신 절대자와 무제한 절대자를 통일하는 자―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
105:2.9 (1155.2) 5. 무한한 잠재성. 스스로 제한한 스스로 계신 이. 이것은 스스로 계신 이가 의지로 스스로를 제한함을 영원히 증거하는 무한의 기준점이며, 그 덕택으로 세 가지 자기 표현과 자기 계시가 이루어졌다. 스스로 계신 이의 이 국면은 보통 신 절대자라고 이해한다.
105:2.10 (1155.3) 6. 무한한 능력. 정적(靜的)이며 반응하는 스스로 계신 이. 이것은 끝없는 자궁이요, 미래에 모든 우주가 팽창하는 가능성이다. 스스로 계신 이의 이 단계는 아마도 무제한 절대자의 계심, 인력을 초월하는 계심이라고 파악하는 것이 가장 좋다.
105:2.11 (1155.4) 7. 우주의 무한자. 스스로 계신 이로서 스스로 계신 이. 이것은 무한의 정지 상태, 또는 자기 관계, 즉 무한한 실체가 영원한 사실이요 실체가 무한하다는 보편적 진리이다. 이 관계를 성격이라고 식별할 수 있는 한, 이는 모든 성격자의―절대 성격자까지도―신성한 아버지 안에서 여러 우주에게 드러난다. 이 관계가 비성격 방법으로 표현될 수 있는 한, 우주의 아버지가 계신 앞에서 순수 에너지와 순수한 영이 절대로 일치된 것으로서 우주들이 이를 접촉한다. 이 관계를 절대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 한, 그것은 첫째 근원 중심의 제일인 성질에서 드러난다. 공간 세계의 인간으로부터 파라다이스 시민에 이르기까지, 그분 속에서 우리 모두가 살고 움직이고 우리의 존재를 가진다. 그리고 극미한 극자(極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총 우주에 대해서도 참말이며, 지금 있는 것, 지금까지 있어 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있을 것에 대해서도 똑같이 참말이다.
105:3.1 (1155.5) 스스로 계신 이 안에서 일곱 가지 근원적 관계는 무한한 일곱 절대자로서 영원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실체의 기원과 무한의 분화를 연속되는 이야기로 묘사하더라도, 사실은 일곱 절대자 모두가 제한 없이, 나란히 영원하다. 필사자의 머리는 이들의 시작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일곱 절대자가 아무런 시작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 이 개념은 반드시 자리를 비켜야 한다. 그들은 영원하고 언제나 그런 상태로서 있어 왔다. 일곱 절대자는 실체의 전제(前提) 조건이다. 그들은 이 여러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105:3.2 (1155.6) 1. 첫째 근원 중심. 신의 첫째 분이자 원초적 비신(非神)의 원본, 하나님, 우주의 아버지, 창조자, 통제자, 지지자. 보편적 사랑, 영원한 영, 무한한 에너지. 모든 잠재성 중의 잠재성이며 모든 실재하는 것들의 근원. 모든 정적인 것의 안정성이자 모든 변화를 일으키는 활력. 원본의 근원이자 성격자들의 아버지. 집단으로서, 모두 일곱 절대자는 무한과 동등하게 되지만, 바로 그 우주의 아버지는 사실로 무한하다.
105:3.3 (1155.7) 2. 둘째 근원 중심. 신의 둘째 분, 최초의 영원한 아들. 스스로 계신 이의 절대 성격 실체들이며 “스스로 계신 이의 성격”을 실현하고 계시하기 위한 기초. 아무 성격자도 영원한 아들을 통하지 않고서 그의 우주의 아버지에게 도달하기를 바랄 수 없다. 모든 성격자의 이 절대 원본의 행위와 도움이 없이 아무 성격자도 영 수준의 존재에 이를 수 없다. 둘째 근원 중심 안에서 영은 제한이 없고 한편 성격은 절대적이다.
105:3.4 (1156.1) 3. 파라다이스 근원 중심. 둘째이자 비신(非神) 원본, 영원한 파라다이스 섬. “스스로 계신 물력”을 실현하고 계시하기 위한 바탕이요, 우주에 두루, 인력 통제를 확정시키기 위한 기초. 현실화되고 비영적이며, 비성격이고 의지가 없는 모든 실체에게 파라다이스는 절대 원본이다. 영 에너지가 어머니인 아들의 절대 성격을 통해서 우주의 아버지와 관계된 것처럼, 마찬가지로 모든 우주 에너지는 파라다이스 섬의 절대 원본을 통해서 첫째 근원 중심의 인력 통제에 붙잡혀 있다. 파라다이스는 공간 속에 없다. 공간은 파라다이스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존재하며, 장기적 운동은 파라다이스와 가지는 관계를 통하여 결정된다. 영원한 섬은 절대로 쉬고 있으며, 조직되어 있고 조직되는 모든 다른 에너지는 영원히 움직이고 있다. 모든 공간 속에서 오로지 무제한 절대자의 계심만 고요하며, 무제한자는 파라다이스와 동급이다. 파라다이스는 공간의 초점에 존재하며, 무제한자는 공간을 채우고, 모든 상대적 존재는 그 존재를 이 영토 안에서 가진다.
105:3.5 (1156.2) 4. 셋째 근원 중심. 신의 셋째 분, 합동 행위자. 파라다이스의 우주 에너지를 영원한 아들의 영 에너지와 무한히 통합하는 자. 의지(意志)하는 동기와 물력의 작용을 완전히 조정하는 자. 사실인 실체와 사실로 되고 있는 실체를 조정하는 자. 그의 다양한 자식들의 보살핌을 통해서, 무한한 영은 영원한 아들의 자비를 드러내고, 한편 동시에 무한한 조종자로서 활동하면서 영원히 파라다이스의 원본을 공간의 에너지 속으로 엮어 넣는다. 바로 이 합동 행위자, 이 행위의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한없는 계획과 목적을 완전히 표현한 자이며, 한편 그 자신은 방대한 우주의 생물에게 지성의 근원으로서, 또 지능 수여자로서 활동한다.
105:3.6 (1156.3) 5. 신 절대자. 우주 실체의 원인이 되고 잠재적으로 성격이 될 가능성, 신의 모든 잠재성의 총체. 신 절대자는 제한이 없는 절대적 비신(非神) 실체들을 목적에 맞게 제한하는 자이다. 신 절대자는 절대적인 것을 제한하는 자이며, 제한받는 것들을 절대화하는 자―운명 개시자이다.
105:3.7 (1156.4) 6. 무제한 절대자. 정적(靜的)이고 반응하며 정지해 있다. 스스로 계신 이의 밝혀지지 않은 우주 무한성, 신이 되지 않는 총 실체요, 모든 최종 비성격 잠재성이다. 공간은 무제한자의 기능을 제한하지만, 무제한자의 계심은 한이 없고 무한하다. 총 우주에는 개념의 범위가 있지만, 무제한자의 계심은 한이 없다. 영원조차도 이 비신 절대자의 가없는 고요함을 소모할 수 없다.
105:3.8 (1156.5) 7. 우주 절대자. 신이 된 자와 신이 되지 않은 것을 통일하는 자.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을 서로 관련시키는 자. 우주 절대자는 (정적이고 잠재하며 연합 성질이 있으니까) 항상 존재하는 것과 미완성인 것 사이의 긴장을 보상한다.
105:3.9 (1156.6) 무한의 일곱 절대자는 실체의 시초를 구성한다. 필사 지성들이 간주하고 싶어 하는 바와 같이, 첫째 근원 중심이 모든 절대자보다 선행(先行)하는 듯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유익하더라도 그러한 가설은 아들, 영, 세 절대자, 파라다이스 섬이 영원히 공존하기 때문에 무효가 된다.
105:3.10 (1157.1) 절대자들이 스스로 계신 이이자 첫째 근원 중심의 명시라는 것은 하나의 진실이다. 이 절대자들은 결코 시작이 없었으나 첫째 근원 중심과 나란히 영원자인 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영원히 있는 절대자들의 관계를 역설(逆說)에 빠지지 않고 시간적 언어와 공간의 개념 형태로 반드시 발표할 수 있지는 않다. 그러나 무한의 일곱 절대자의 기원에 관하여 무슨 혼란이 있든지 상관 없이, 모든 실체가 그들이 영원에 존재하는 것과 무한한 관계에 근거를 둔다는 것은 사실이자 진리이다.
105:4.1 (1157.2) 우주의 철학자들은 스스로 계신 이가 모든 실체의 최초의 근원인, 영원의 존재라고 가정한다. 그와 동시에 스스로 계신 이가 여러 1차적 자아 관계로―무한의 일곱 단계로―스스로 분할한다고 가정한다. 이 가정과 동시에 셋째 가설이 있다―무한의 일곱 절대자가 영원에 출현했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 계신 이의 일곱 단계와 이 일곱 절대자의 이원(二元) 관계가 영원하게 된 것이다.
105:4.2 (1157.3) 스스로 계신 이의 자아 계시는 이처럼 정적 자아로부터 자아 분할과 자아 관계를 거쳐서 절대 관계까지, 즉 스스로 유래한 절대자들과 가지는 관계에 이르기까지 진행한다. 이원의 성질은 이처럼 무한의 일곱 절대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스스로 계신 이의 자아 분할 단계에서 일곱 가지 무한과 영원히 연합한 속에서 존재한다. 이 여러 이중 관계는 우주들에 대하여 일곱 절대자로서 영원하게 되면서, 모든 우주 실체를 위하여 기본적 근거를 영원하게 만든다.
105:4.3 (1157.4)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삼자일치를 낳으며, 삼자일치는 만물의 영원한 조상이라고 언젠가 진술된 적이 있다. 정말로 세 가지 큰 등급의 원초적 관계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105:4.4 (1157.5) 1. 통일 관계. 스스로 계신 이 안에서 존재하는 여러 관계, 이것들의 통일은 세 가지의 자아 분화로, 다음에는 일곱 가지로 파악되는 바와 같다.
105:4.5 (1157.6) 2. 이원 관계. 칠중인 스스로 계신 이와 무한의 일곱 절대자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관계.
105:4.7 (1157.8) 절대자들의 상호 관계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삼자일치 관계들은 이원의 기초 위에서 생겨난다. 그러한 삼자일치 연합은 모든 실체의 잠재성을 영원하게 만든다. 이러한 연합은 신이 된 실체와 신이 되지 않은 실체 모두를 포함한다.
105:4.8 (1157.9) 스스로 계신 이는 하나인 제한 없는 무한이다. 여러 가지 이원 관계는 실체의 기초를 영원하게 만든다. 여러 삼자일치는 보편적 기능으로서 궁극에 무한의 실현에 이른다.
105:4.9 (1157.10) 실존 이전의 것들은 일곱 절대자 안에서 실존적이 되며, 실존적인 것들은 삼자일치, 즉 절대자들의 기본 관계 속에서 작용하게 된다. 여러 삼자일치가 영원하게 됨과 동시에 우주의 무대가 준비된다―잠재하는 것들이 존재하고 사실이 된 것들이 자리에 있다. 영원이 충만해지면 우주 에너지가 다양해지고, 파라다이스 영이 퍼지고, 성격의 수여와 함께 지성이 부여되는 것을 구경한다. 이 덕분으로 이 모든 신 및 파라다이스 파생물은 생물 수준에서 체험으로 통일되고, 생물을 초월하는 수준에서는 다른 기법으로 통일된다.
105:5.1 (1158.1) 스스로 계신 이의 최초의 분화(分化)를 본래 있는 독립된 의지의 탓으로 돌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한한 실체의 선포를 파라다이스 신이 의지(意志)하는 여러 행위, 그리고 여러 기능적 삼자일치가 이에 반응하여 조정하는 탓으로 돌려야 한다.
105:5.2 (1158.2) 유한한 자가 신이 되기 전에는, 모든 실체의 다양화가 절대 수준에서 일어난 듯 보일 것이다. 그러나 유한한 실체를 선포하는 의지 행위는 절대성이 제한됨을 의미하며 상대적인 것들이 출현함을 암시한다.
105:5.3 (1158.3) 우리가 이 이야기를 하나의 연속된 것으로 발표하고, 절대자로부터 직접 파생된 것으로서 유한한 자의 역사적 등장을 그리지만, 초월자들은 유한한 모든 것을 앞서고 또 뒤따랐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초월 궁극자들은 유한자와 가지는 관계에서, 원인이기도 하고 완성이기도 하다.
105:5.4 (1158.4) 유한한 가능성은 무한자에 본래부터 있지만, 가능성이 가망성과 불가피성으로 변질하는 것은 첫째 근원 중심의 의지, 스스로 존재하는 자유 의지의 탓으로 돌려야 하며, 그는 모든 삼자일치 관계를 활성화시킨다. 오로지 아버지 의지의 무한함이 하나의 궁극자가 궁극에 생기게 하거나 한 유한자를 창조하도록 절대 수준의 존재를 일찍이 제한할 수 있었을 것이다.
105:5.5 (1158.5) 상대적이고 제한된 실체가 나타남과 함께, 실체의 새로운 시대―성장의 시대―가 존재하게 되며, 이것은 무한의 높이에서 유한자의 영토로 당당하게 밑으로 축소되는 것이요, 유한자는 언제까지나 파라다이스와 신에게로 안쪽으로 빙 돌면서, 무한 근원에 합당한 높은 운명을 언제나 추구한다.
105:5.6 (1158.6) 상상할 수 없는 이러한 움직임이 우주 역사의 시작을 표시하고, 시간 그 자체가 존재하게 되는 것을 표시한다. 한 인간에게 유한자의 시작은 실체의 기원이다. 인간의 생각으로 보건대, 유한자에 앞서, 상상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도 없다. 새로이 나타나는 이 유한한 실체는 최초의 두 단계에서 존재한다:
105:5.9 (1158.9) 그러면 이것이 두 가지로 최초에 명백히 나타난 것들이다: 완전하게 구성된 자와 진화로 완전하게 된 자. 이 둘은 영원의 관계에서 동급이지만, 시간의 한계 속에서 다른 듯이 보인다. 자라는 것에게 시간 요인은 성장을 의미한다. 2차 유한자들은 자란다. 따라서 자라고 있는 자는 시간 세계에서 불완전하게 보이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차이점은 파라다이스의 이쪽에서 무척 중요하지만, 영원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105:5.10 (1158.10) 우리는 완전한 자와 완전하게 된 자가 1차와 2차 최대자라고 말하지만, 아직 또 다른 부류가 있다. 1차인 자와 2차인 자 사이에 삼자일체화하는 관계와 기타 여러 관계는 3차 최대자의 출현을 초래한다―이것들은 완전하지도 않고 완전해지지도 않지만, 조상이 되는 두 요인과 동급에 있는 사물ㆍ의미ㆍ가치이다.
105:6.1 (1159.1) 유한한 존재들의 선포 전체가, 기능적 무한의 절대적 관계 안에서, 잠재하는 것들로부터 사실로 있는 것들로 변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유한자의 창조적 현실화에 대한 많은 반응 가운데, 다음을 열거해도 좋다:
105:6.2 (1159.2) 1. 신의 반응은 세 수준에서 체험적 최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보나에서 성격을 가진 영이 최상인 사실, 앞으로 있을 대우주에서 성격 있는 자의 권능이 최상이 될 가능성, 그리고 앞날의 총 우주에서 어떤 최상 수준에서 작용하는 체험적 지성이 가진, 어떤 미지의 기능의 한도.
105:6.3 (1159.3) 2. 우주의 반응은 초우주 공간 수준을 위한 건축 계획들이 활성화되는 것과 관련되며, 이 진화는 일곱 초우주의 물리적 조직에 두루,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105:6.4 (1159.4) 3. 유한한 실체를 선포한 것에 대한 생물의 반응은 하보나의 영원한 거주자 서열에서 완전한 존재, 그리고 일곱 초우주로부터 진화로 완전하게 된 승천자들의 출현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진화하는 (시간 세계에서 창조적) 체험으로서 완전에 이르는 것은 출발점이 완전과 다른 무엇을 암시한다. 따라서 진화된 창조에서 불완전이 생긴다. 그리고 이것이 잘못이 일어날 가능성의 기원이다. 그릇된 적응ㆍ불화(不和)ㆍ투쟁, 이 모든 것은, 물리적 우주로부터 인격을 가진 인간에 이르기까지, 진화로 성장하는 데 본래부터 있다.
105:6.5 (1159.5) 4. 진화로 인한 시간 지연에 본래 있는 불완전에 대한 신의 반응은 칠중 신의 보상하는 계심에서 드러나며, 이들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되고 있는 것은 완전한 자와 완전하게 된 자, 이 둘과 통합된다. 이 시간 지연은 진화와 분리할 수 없고, 진화는 시간이 지나면 창조성이 된다. 다른 여러 이유 뿐 아니라 시간 지연 때문에, 최상위의 전능한 힘은 칠중 신이 신으로서 성공하는 데 근거를 둔다. 이 시간 지연은, 최대의 발전을 이룩하면서 지음 받은 인격자들로 하여금 신과 협동하는 자가 되게 허락함으로, 신이 창조하는 일에 인간이 참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필사 인간의 물질 지성조차 이처럼 신다운 조절자와 둘이서 불멸의 혼을 만드는 일에 파트너가 된다. 칠중 신은 또한 승천 이전에 불완전했던 한계를 보충할 뿐 아니라, 타고난 완전의 체험적 한계를 보충하는 기법도 마련해 준다.
105:7.1 (1159.6) 초월자들은 무한 이하이고 절대 이하이지만 유한을 넘고 생물을 초월한다. 초월자는 절대자의 초월 가치를 유한자의 최대 가치와 서로 연결짓는, 한 통합 수준으로서 궁극에 이른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초월적인 것은 유한자의 결과로서,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유한자를 예상하여, 궁극에 생긴 듯이 보일 것이다. 이것이 유한자를 “예시한 것”이라 본 자들도 있다.
105:7.2 (1159.7) 초월적인 것이 반드시 발전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초월적인 것은 유한한 의미에서 진화를 초월한다. 그것은 비체험적인 것도 아니지만, 그러한 것이 인간에게 의미가 있는 대로, 체험을 초월한다. 아마도 그러한 역설(逆說)의 가장 좋은 예는 완전한 중앙 우주이다: 중앙 우주는 도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없다―오로지 파라다이스 섬이 “물질화되었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절대적이다. 일곱 초우주처럼 진화로 된 유한한 창조가 아니다. 하보나는 영원하지만, 성장하지 않는 우주라는 의미에서 변화가 없지는 않다. 하보나는 인간으로 (하보나 토착민으로) 채워져 있고, 그들은 결코 사실로 창조된 적이 없는데, 왜냐하면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보나는 꼭 유한하지도 않고, 그래도 절대적이라 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을 보여준다. 하보나는 더군다나 절대적 파라다이스와 유한한 창조들 사이에 완충 지대 노릇을 하고, 더 나아가서 초월자들의 기능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보나 자체는 초월적 물건이 아니다―그것은 하보나이다.
105:7.3 (1160.1) 최상위가 유한자들과 관련되는 것 같이, 궁극위는 초월자들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이처럼 최상위와 궁극위를 비교하지만, 그들은 정도 차이가 아닌 무엇이 다르다. 그 차이는 또한 질의 문제이다. 궁극위는 초월 수준에서 예측된, 최상위를 초월하는 것보다 더 큰 무엇이다. 궁극위는 그 모든 것이지만, 그보다 더 크다: 궁극위는 새로운 신 실체들이 궁극에 이르는 것이요, 지금까지 제한이 없던 것의 새로운 여러 단계를 제한하는 것이다.
105:7.4 (1160.2) 초월 수준과 관련된 실체들 가운데 다음이 있다:
105:7.5 (1160.3) 1. 신으로서 궁극위의 계심.
105:7.8 (1160.6) 4. 두 계급의 파라다이스 물력 조직자.
105:7.9 (1160.7) 5. 공간 잠재력의 어떤 수정(修正).
105:7.10 (1160.8) 6. 영의 어떤 가치.
105:7.11 (1160.9) 7. 지성의 어떤 의미.
105:7.12 (1160.10) 8. 초한(超限) 품질과 실체.
105:7.15 (1160.13)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우주는 유한ㆍ초월ㆍ절대 수준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해도 좋다. 이것은 성격자들이 행동하고 에너지가 변형되는 끝없는 드라마가 펼쳐지는 우주 무대이다.
105:7.16 (1160.14) 이 다양한 모든 실체를 몇 가지 삼자일치가 절대로, 총 우주 건축가들이 기능적으로, 그리고 일곱 으뜸 영이 상대적으로 통일하며, 으뜸 영들은 칠중 신의 신성을 최상 수준 밑에서 조정한다.
105:7.17 (1160.15) 칠중 신은 최대의 지위와 최대 아래 지위를 가진 생물에게 우주의 아버지의 성격과 신성(神性)이 계시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영이신 하나님의 신다운 영적 봉사가 나타나는 것과 상관이 없는 관계, 첫째 근원 중심의 다른 일곱 가지 관계가 있다.
105:7.18 (1160.16) 영원히 아득한 과거에 절대자들의 물력, 신들의 영, 그리고 신들이 낳은 성격자들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아 의지의 원초적 자아 의지에 반응하여 술렁거렸다. 이 우주 시대에 이 모든 실체의 한없는 가능성이 절대 이하로 나타나는, 광범위한 우주의 전체 광경에 대하여 일어난 엄청난 반응을 우리 모두가 구경하고 있다. 그리고 첫째 근원 중심의 처음 실체의 계속된 분화가, 세월이 쌓이고 또 쌓이도록, 이어지고 또 이어지기까지, 아득하고 상상할 수 없는 절대적 무한의 지대로, 계속하여, 바깥으로 진행하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하다.
106:0.1 (1162.1) 신과 우주 실체의 기원 및 명시(明示)의 관계를 하늘 가는 필사자가 얼마큼 알아야 한다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는 또한 자신과 실존적 실체와 체험적 실체들, 잠재하는 실체와 실재하는 실체들의 수많은 수준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대하여도 무엇인가 이해해야 한다. 사람이 땅에서 느끼는 방향 감각, 우주를 보는 통찰력, 영적 방향은 모두, 우주 실체들을 더 낫게 이해하고, 이들이 서로 상관되고, 통합되고, 통일되는 기법을 더 잘 이해함으로 개선된다.
106:0.1 (1162.1) 신과 우주 실체의 기원 및 명시(明示)의 관계를 하늘 가는 필사자가 얼마큼 알아야 한다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는 또한 자신과 실존적 실체와 체험적 실체들, 잠재하는 실체와 실재하는 실체들의 수많은 수준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대하여도 무엇인가 이해해야 한다. 사람이 땅에서 느끼는 방향 감각, 우주를 보는 통찰력, 영적 방향은 모두, 우주 실체들을 더 낫게 이해하고, 이들이 서로 상관되고, 통합되고, 통일되는 기법을 더 잘 이해함으로 개선된다.
106:0.2 (1162.2) 현재 대우주와 태어나는 총 우주는 숱한 형태와 단계의 실체로 이루어져 있고, 이것들은 다시 기능적 활동의 몇 가지 수준에서 존재한다. 다양한 이 존재하는 것과 잠재하는 것들은 이 여러 논문에서 이전에 암시되었고, 이것들을 이제 개념의 편리를 위하여 다음의 분류로 묶는다:
106:0.3 (1162.3) 1. 불완전한 유한자. 이것은 대우주에서 하늘 가는 인간의 현재 지위, 유란시아 필사자의 현재 지위이다. 이 수준은 행성의 인간으로부터 운명에 도달하기까지 사람의 존재를 포함하지만, 도달한 자를 제외한다. 이 수준은 초기의 물리적 시작으로부터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기 직전까지, 그러나 안정된 기간을 제외하고서, 그 사이에 있는 우주들에 관계된다. 이 수준은 시공에서 창조 활동이 있는 현재의 범위를 구성한다. 이 수준은 현재 우주 시대가 막을 내리는 것을 위하여, 파라다이스로부터 바깥으로 움직이는 듯하다. 그 시대가 막을 내리면 대우주가 빛과 생명에 이르는 것을 구경하고, 또한 확실히, 첫째 바깥 공간 수준에서 발전하여 성장하는 어떤 새로운 질서의 출현을 구경할 것이다.
106:0.4 (1162.4) 2. 최대 유한자. 이것은 운명에―현재 우주 시대의 규모 안에서 밝혀진 운명에―도달한 모든 체험하는 인간의 현재 지위이다. 우주들도 영적ㆍ물리적으로, 최대의 지위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최대”라는 용어 자체가 상대적 용어이다―무엇과 가지는 관계에서 최대인가? 현재 우주 시대에 최대인 것은 겉보기에 최후인데, 다가올 시대의 조건으로 보면, 참 시작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하보나의 어떤 단계는 최대 서열인 듯이 보인다.
106:0.5 (1162.5) 3. 초월자. 유한을 초월하는 (앞서는) 이 수준은 유한한 진행을 따른다. 유한한 시작이 유한 이전에 가진 기원, 그리고 겉보기에 유한한 모든 종말이나 운명이 유한 이후에 가지는 중요성을 암시한다. 파라다이스와 하보나의 상당 부분이 초월 서열에 있는 듯이 보인다.
106:0.6 (1162.6) 4. 궁극자. 이 수준은 총 우주 중요성이 있고 완성된 총 우주의 운명 수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포함한다. 파라다이스와 하보나는 (특히 아버지 세계들의 회로) 여러 면에서 궁극의 중요성을 가진다.
106:0.7 (1163.1) 5. 공동 절대자. 이 수준은 창조가 표현되는, 총 우주를 초월하는 분야에서 체험하는 자들이 계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106:0.8 (1163.2) 6. 절대자. 이 수준은 실존적 일곱 절대자가 영원부터 계심을 뜻한다. 이 수준은 또한 어느 정도로 연합하는 체험적 달성을 포함할지 모르지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그 방법을 모른다. 아마도 성격의 접촉 잠재성을 통할 것이다.
106:0.9 (1163.3) 7. 무한. 이 수준은 실존 이전이며 체험 이후이다. 무한의 제한 없는 통일은 모든 시작보다 앞에 있고 모든 운명 뒤에 있는 가상하는 실체이다.
106:0.10 (1163.4) 실체의 이 여러 수준은 현재 우주 시대에 절충하는 편리한 상징법이요 필사자의 견지에서 본 것이다. 필사자가 아닌 다른 견지에서, 그리고 다른 우주 시대의 관점에서 실체를 보는 여러 가지 다른 방법이 있다. 따라서 여기에 함께 발표된 개념들은 전부 상대적이며, 다음 여러 가지에 제약을 받고 제한된다는 의미에서 상대적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106:0.11 (1163.5) 1. 필사자 언어의 한계.
106:0.12 (1163.6) 2. 필사자 지성의 한계.
106:0.13 (1163.7) 3. 일곱 초우주의 발달이 제한되어 있다.
106:0.14 (1163.8) 4. 파라다이스로 필사자가 올라가는 데 관계되지 않는 그러한 초우주 발전의 여섯 가지 중요한 목적을 너희는 모른다.
106:0.15 (1163.9) 5. 너희는 영원의 관점을 얼마큼도 파악할 능력이 없다.
106:0.16 (1163.10) 6. 일곱 초우주가 진화로 펼쳐지는 현시대에 관하여 뿐 아니라, 모든 우주 시대와 가지는 관계에서 우주의 진화와 운명을 묘사하기가 불가능하다.
106:0.17 (1163.11) 7. 실존 이전의 존재나 체험 이후의 존재들이―시작보다 앞에, 또 운명 뒤에 놓여 있는 것들이―정말로 무엇을 뜻하는지 어떤 인간도 깨달을 능력이 없는 것.
106:0.18 (1163.12) 실체의 성장은 연속되는 여러 우주 시대의 상황에 제약을 받는다. 중앙 우주는 하보나 시대에 아무런 진화적 변화를 겪지 않았지만, 초우주 시대의 현시기에 하보나는 진화하는 초우주들과 함께 조정함으로 유도된 어떤 진보적 변화를 겪고 있다. 이제 진화하는 일곱 초우주는 언젠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지위를 얻을 터이고, 현재 우주 시대에 그 성장 한계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 없이, 다음 시대, 제1 바깥 공간 수준의 시대는 초우주들을 현시대 운명의 한계로부터 해방할 것이다. 완성된 위에 충만이 계속 쌓이고 있다.
106:0.19 (1163.13) 이것들이 우주에서 사물ㆍ목적ㆍ가치의 성장에 대하여, 그리고 늘 올라가는 실체 수준에서 이들의 통합에 관하여 통일된 개념을 발표하려 애쓰면서 우리가 부딪치는 얼마큼의 한계이다.
106:1.1 (1163.14) 유한한 실체의 1차 단계, 곧 영에 기원을 가진 단계는 인간 수준에서 완전한 인격자로서, 그리고 우주 수준에서는 완전한 하보나 창조로서 직접 표현된다. 체험하는 신조차도 이렇게 하보나에 계신 최상위 하나님의 영(靈) 몸에서 표현된다. 그러나 유한한 자의 2차, 진화 단계, 시간과 물질에 제약을 받는 단계들은 오로지 성장하고 달성하는 결과로서 우주에서 통합된다. 결국에는 2차 유한자, 즉 완전하게 되는 유한자는 모두 1차 완전의 수준과 같은 수준에 이르겠지만, 그런 운명은 시간 지연에 지배되고, 이것은 중앙 창조에서 유전적으로 발견되지 않는 제한, 초우주의 구조에 따르는 제한이다. (우리는 3차 유한자가 존재한다는 말을 들어 보았지만, 그들을 통합하는 기법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106:1.2 (1164.1) 이 초우주의 시간 지연, 완전을 성취하는 데 있는 이 장애물은, 인간이 진화적 성장에 참여하게 만든다. 시간 지연은 이처럼 인간으로 하여금, 바로 그 인간을 진화시키는 데 창조자와 협동하는 관계에 들어갈 수 있게 만든다. 크게 성장하는 이 시절에 불완전한 자는 칠중 신의 봉사를 통해서 완전한 자와 서로 관련을 가진다.
106:1.3 (1164.2) 칠중 신은 공간의 진화하는 여러 우주에서 파라다이스 신이 시간의 장벽을 인식함을 가리킨다. 살아남는 한 물질 인격자가 파라다이스로부터 아무리 멀리 있어도, 공간에 아무리 깊은 데서 기원을 가지더라도, 칠중 신이 거기에 계시며, 불완전하고 허덕이는 그러한 진화 인간에게 진리ㆍ아름다움ㆍ선으로 이루어진 봉사, 사랑으로 자비로운 봉사를 베푸는 일에 종사하는 것이 발견될 것이다. 칠중자가 신으로서 베푸는 봉사는 영원한 아들을 거쳐서 파라다이스 아버지에게 이르기까지 안쪽으로, 그리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을 거쳐서 지역 우주의 아버지―창조 아들―들에게 이르기까지, 바깥으로 손을 뻗는다.
106:1.4 (1164.3) 사람은 인격을 가졌고 영적 진보로 올라가니까, 칠중신의 신성, 성격을 가진 영적 신성을 발견한다. 그러나 인격자의 진보에 관여하지 않는, 칠중자의 다른 단계들이 있다. 이 신 집합에서 신의 모습은 현재, 일곱 으뜸 영과 합동 행위자의 연락 속에서 통합되지만, 이 모습은 최상 존재의 태어나는 성격 속에서 영원히 통일되는 운명을 가졌다. 칠중신의 다른 여러 단계는 현재 우주 시대에 여러 가지로 통합되지만, 모두가 마찬가지로 최상위 안에서 통일되는 운명을 가졌다. 모든 국면에서 칠중자는 현재 대우주의 기능적 실체가 상대적으로 통일되는 근원이다.
106:2.1 (1164.4) 칠중 신이 유한한 진화를 기능적으로 조정하는 것 같이, 최상 존재는 궁극에 운명의 달성을 통합한다. 최상 존재는 신이 대우주의 진화를 완성하는 것이다―영 핵심 주위에 물리적 진화가 있고, 물리적으로 진화하는 영토, 회전하고 소용돌이치는 영토를 영 핵심이 궁극에 지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두가 다음 성격자가 내리는 명령에 따라서 일어난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파라다이스 성격자, 우주 의미에서 창조 성격자, 인간적 의미에서 필사 성격자, 궁극의 의미 또는 체험으로 총합하는 의미에서 최상위 성격자.
106:2.2 (1164.5) 최상위의 개념은 영 성격, 진화적 권능, 그리고 권능과 성격의 합성―진화적 권능을 영 성격과 통일하고 영 성격이 그 권능을 지배하는 것―을 구별하여 인식해야 한다.
106:2.3 (1164.6) 모든 것을 종합해 보건대, 영은 파라다이스로부터 하보나를 거쳐서 온다. 에너지와 물질은 겉보기에 공간의 깊은 데서 진화하는 듯하고, 하나님의 창조 아들들과 함께 무한한 영의 자식들이 이를 동력으로 조직한다. 이 모두가 체험적인 것이다. 이것은 창조자인 신들과 진화하는 인간까지도 포함하여, 넓은 범위의 살아 있는 존재들을 끌어들이는, 시공의 거래이다. 대우주에서 창조자인 신들이 권능을 통달하는 것은 차츰 확대되어 시공의 우주들이 진화로 정착되고 안정되는 것을 포함하며, 이것이 칠중 신의 체험적 권능이 절정에 오르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의 아버지가 조절자를 수여하는 것으로부터 파라다이스 아들들이 일생을 수여하기까지, 시공에서 신성을 달성하는 전역을 둘러싼다. 이것은 벌어들인 권능, 입증한 권능, 체험으로 얻은 권능이며, 파라다이스 신들이 가진 영원의 권능, 헤아릴 수 없는 권능, 실존적 권능과 대조가 된다.
106:2.4 (1165.1) 칠중 신이 신으로서 성취하는 것들로부터 생기는 이 체험적 권능 자체는, 통합―총합―을 이용하여, 진화하는 창조들을 체험으로 통달한 전능한 권능으로서 신의 결합하는 성질을 명시한다. 이 전능한 힘은 다음에 최상위 하나님의 성격, 하보나에 계시는 영 성격과 연합하여, 하보나 세계들 바깥 지대의 시범 구체에서 영 성격이 결합됨을 발견한다. 이처럼 체험적 신은 시공의 산물인 권능에 중앙 우주에서 거하는 영 계심과 신다운 성격을 부여함으로, 긴 진화적 투쟁을 끝마친다.
106:2.5 (1165.2) 이처럼 최상 존재는 시공에서 진화하는 모든 것을 모조리, 궁극에 품에 안으며, 한편 이 성질에 영 성격을 부여한다. 생물이, 아니 필사자도 이 대단한 거래에 참여하는 인격자이니까, 그들도 최상위를 알고, 그러한 체험적 신의 참된 자식으로서 최상위를 알아볼 능력을 분명히 얻는다.
106:2.6 (1165.3) 네바돈의 미가엘은 파라다이스 아버지와 같으니, 아버지의 파라다이스 같은 완전함을 함께 가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진화하는 필사자는 언젠가 체험하는 최상위와 유사함을 얻을 터이니, 그들이 참으로 그가 진화로 얻은 완전함을 함께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106:2.7 (1165.4) 최상위 하나님은 체험을 겪는다. 따라서 그는 완벽하게 체험할 수 있다. 일곱 절대자의 실존적 실체는 체험 기법으로 파악할 수 없다. 기도하고 예배하는 자세로, 유한한 인간의 인격이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성격 실체들만 파악할 수 있다.
106:2.8 (1165.5) 최상 존재의 권능과 성격의 통합이 끝난 가운데, 그렇게 관련될 수 있는 몇 가지 삼극일치의 모든 절대성이 관련될 것이다. 모든 유한한 성격자가 진화된 이 당당한 성격자를 체험으로 도달하고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 가는 사람들이 가정된 일곱째 단계의 영 존재에 도달할 때, 그들은 그 단계에서, 절대 이하 수준에서, 체험을 겪을 수 있는 최상 존재 속에 드러난 바와 같이, 절대적이고 무한한 여러 삼극일치의 새로운 의미와 가치의 실현을 체험할 것이다. 그러나 최대로 발전하는 이 여러 단계에 이르는 것은 아마도 대우주 전체가 빛과 생명 속에 나란히 안정될 때를 기다릴 것이다.
106:3.1 (1165.6) 초한(超限) 건축가들은 계획을 만들어낸다. 최상 창조자들은 계획한 것을 존재하게 만든다. 최상 존재는 시간 속에 최상 창조자들이 창조한 대로, 으뜸 건축가들이 공간에서 예측한 대로, 이를 충만하게 완성시킨다.
106:3.2 (1165.7) 현재 우주 시대에 총 우주의 행정을 조정하는 것은 총 우주 건축가들의 기능이다. 그러나 현재 우주 시대가 종결될 때, 전능 최상위의 출현은 진화로 생긴 유한자가 체험적 운명의 첫째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릴 것이다. 이 사건은 분명히 제1 체험적 삼자일체―최상 창조자들, 최상 존재, 총 우주 건축가들의 통합―의 기능을 완성시킬 것이다. 이 삼자일체는 더 나아가서 총 우주를 진화로 통합하는 일을 성취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106:3.3 (1166.1)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참으로 무한한 삼위일체이고, 이 최초의 삼위일체를 포함하지 않는 어떤 삼자일체도 도저히 무한할 수 없다. 그러나 최초의 삼위일체는 순전히 절대적 신들의 연합으로 생긴 결말이다. 절대 이하의 존재들은 이 원초적 연합과 아무 상관이 없다. 나중에 나타나는 체험적 삼자일체들은 인격자들의 기여까지도 포함한다. 분명히 이것은 궁극 삼자일체의 경우에 참말이며, 거기서 주 창조 아들들이 그 최상 창조자 구성원들 사이에 바로 그렇게 계신 것은 이 삼자일체 연합 안에 인간이 실제로 겪는 진정한 체험이 동시에 자리에 있음을 가리킨다.
106:3.4 (1166.2) 제1 체험적 삼자일체는 궁극의 결말을 집단으로 성취하게 한다. 집단 연합은 개인의 능력을 예시(豫示)할 수 있게, 아니 초월할 수 있게 하며, 이것은 유한 수준을 지나서도 참말이다. 다가올 시대에, 일곱 초우주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뒤에, 의심할 여지 없이, 최후 군단은 궁극 삼자일체의 명령을 받은 대로, 최상 존재 안에서 권능과 성격이 연합된 대로, 파라다이스 신들의 목적을 공포(公布)할 것이다.
106:3.5 (1166.3) 과거 영원과 미래 영원의 모든 거대한 우주 발전을 통하여 두루,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우주의 아버지 요소들이 커지는 것을 탐지한다. 스스로 계신 이로서, 그가 총 무한을 침투한다고 우리는 철학적으로 가정하지만, 어떤 인간도 그러한 가설을 체험으로 이해할 수 없다. 우주들이 확대됨에 따라서, 그리고 시간이 조직하는 공간으로 인력(引力)과 사랑이 뻗어나감에 따라서, 우리는 첫째 근원 중심을 더욱 많이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인력의 행위가 무제한 절대자의 공간 계심을 침입하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우리는 신 절대자가 신으로 계신 가운데 영 생물이 진화하고 커지며, 한편 우주와 영의 진화는 모두, 유한한 신 수준에서 지성과 체험으로 인하여 최상 존재로서 통일되고, 초월 수준에서 궁극 삼자일체로서 조정하고 있음을 탐지한다.
106:4.1 (1166.4)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분명히 궁극의 의미에서 조정하지만, 이 점에서 스스로 제한한 절대자로서 활동한다. 체험하는 궁극 삼자일체는 초월적인 것을 초월자로서 조정한다. 영원한 미래에 이 체험적 삼자일체는 통일성을 높임으로, 궁극 신의 궁극에 이르는 계심을 더욱 활성화할 것이다.
106:4.2 (1166.5) 궁극 삼자일체가 총 우주를 조정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한편, 궁극위 하나님은 총 우주 전체를 지휘하는 초월 권능을 가진 성격이 된 것이다. 궁극위가 궁극에 이르는 일을 마치는 것은 총 우주가 완성됨을 암시하고 이 초월적 신이 완전히 솟아남을 의미한다.
106:4.3 (1166.6) 궁극위가 완전히 솟아나고서 무슨 변화가 터질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최상위가 지금 영적으로 몸소 하보나에 계시는 것 같이, 마찬가지로 궁극위도 또한, 그러나 초한 의미와 성격 초월 의미에서 하보나에 계신다. 그리고 궁극위의 제한된 대관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너희에게 일러 준 적이 있다. 하지만 너희는 그들이 현재 계신 곳이나 기능에 관하여 들은 적이 없다.
106:4.4 (1167.1) 그러나 궁극 신이 솟아나는 데 따르는 행정적 영향과 상관 없이, 그의 초월적 신성의 성격 가치를 이 신 수준의 현실화에 참여했던 모든 성격자가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유한자를 초월하는 것은 오로지 궁극의 달성으로 이끌 수 있을 따름이다. 궁극위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지만, 여전히, 절대자들과 기능적으로 관계하는 능력이 본래부터 있는데도, 절대 이하이다.
106:5.1 (1167.2) 최상위가 진화로 체험하는 실체의 최고점인 것처럼, 궁극위도 초월적 실체의 정점이다. 이 두 체험적 신이 실제로 솟아나는 것은 2차 체험적 삼자일체가 생길 기초를 놓는다. 이것은 절대 삼자일체, 즉 최상위 하나님, 궁극위 하나님, 밝혀지지 않은 우주 운명 종결자, 이 셋의 연합이다. 그리고 이 삼자일체는 이론적으로 잠재성의 절대자―신 절대자, 우주 절대자, 무제한 절대자―를 활성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절대 삼자일체가 마침내 형성되는 것은, 하보나에서부터 제4차, 가장 바깥 공간 수준까지, 총 우주 전체의 진화가 완결된 뒤에야 일어날 수 있다.
106:5.2 (1167.3) 이 체험적 삼자일체들은, 체험하는 신의 성격 품질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도달한 신의 통일된 특징을 나타내는, 성격이 아닌 모든 다른 품질을 서로 연결짓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이 발표가 주로 우주 통일의 성격 국면을 다루지만, 그런데도, 최상 존재의 진화와 연관하여 지금 진행되는, 권능을 가진 성격의 통합이 보여주다시피, 온 우주의 비성격 모습도 마찬가지로 통일을 겪도록 예정된 것이 참말이다. 최상위의 영 성격 품질은 전능자의 권능 특권과 분리할 수 없고, 최상위 지성의 알려지지 않은 잠재성이 이 두 가지를 보충한다. 하나의 성격자인 궁극위 하나님도 궁극 신의 비성격 모습과 동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절대 수준에서 신 절대자와 무제한 절대자는, 우주 절대자가 계신 앞에서 분리할 수 없고 구별할 수 없다.
106:5.3 (1167.4) 삼자일체들은 그 자체로서 저절로 성격이 아니지만,[1] [1769] 성격을 적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성격을 둘러싸고, 집단적 의미에서 비성격 기능과 서로 관련짓는다. 그러면 삼자일체들은 언제나 신의 실체이지만, 결코 성격을 가진 실체는 아니다. 한 삼자일체의 성격 모습은 그 개별 구성원에 본래 있고, 개별 성격자로서 그들은 그 삼자일체가 아니다. 오직 하나의 집합으로서 그들은 삼자일체이며, 바로 그것이 삼자일체이다. 그러나 삼자일체는 둘러싼 신 모두를 포함한다. 삼자일체는 신이 하나되는 것이다.
106:5.4 (1167.5) 세 절대자―신 절대자, 우주 절대자, 무제한 절대자―는 삼자일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신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신이 된 자가 삼자일체가 될 수 있다. 모든 다른 결합은 삼자일치이든지, 아니면 삼극일치이다.
106:6.1 (1167.6) 총 우주의 현재 잠재성은 도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잠재성은 아마도 궁극에 가까울지 모르고, 절대 이하의 우주 규모 안에서 절대적 의미 및 가치를 완전히 계시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우리는 판단한다. 따라서 세 절대자의 한없는 가능성의 모든 표현을 상상하려고 시도하거나, 신 절대자의 현재 비성격 수준에서 절대자 하나님이 체험으로 성격화되는 것을 상상하려고 시도할 때 우리는 상당한 어려움에 부딪친다.
106:6.2 (1168.1) 최상 존재의 현실화를 위하여, 궁극 삼자일체가 형성되고 완전히 활동하는 것을 위하여, 궁극위 하나님이 궁극에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아니 절대 삼자일체가 시작되는 것을 위해서도, 총 우주의 공간 무대는 적절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2차 체험적 삼자일체가 완전히 활동하는 것에 관한 우리의 개념은 널리 퍼지는 총 우주까지도 뛰어넘는 무엇을 의미하는 듯하다.
106:6.3 (1168.2) 우리가 하나의 무한한 우주―총 우주를 지나서 어떤 제한할 수 없는 우주―를 가정하고, 절대 삼자일체의 마지막 발전이 궁극을 초월하는 그러한 활동 단계에서 바깥에서 생길 것이라고 상상한다면, 절대 삼자일체의 완성된 기능은 무한한 여러 창조에서 마지막으로 표현되고, 모든 잠재성이 마침내 절대로 현실화하리라 추측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항상 확대되는 실체의 여러 구역을 통합하고 연합하는 것은 그렇게 연결된 구역들 안에 있는 모든 실체를 포함하는 데 비례하여, 절대 지위에 접근할 것이다.
106:6.4 (1168.3) 달리 말하면 이렇다: 절대 삼자일체는 그 이름이 가리키다시피, 그 총 기능이 정말로 절대적이다. 제약되거나 한정되거나 아니면 달리 제한된 기초 위에서, 어떻게 절대 기능이 총체를 표현할 수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그러한 총체 기능도 (잠재성에) 제약을 받지 않으리라 가정해야 한다. 제약받지 않은 것은 또한, 적어도 질적 관점에서 보면, 한이 없으리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양적 관계에 관하여 우리는 그다지 확실치 않다.
106:6.5 (1168.4)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확신한다: 실존적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무한하고, 한편 체험적 궁극 삼자일체는 무한 이하이지만, 절대 삼자일체는 분류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비록 체험으로 기원이 생기고 구성되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실존적인, 잠재성의 절대자들에 부딪친다.
106:6.6 (1168.5) 인간의 지성이 그러한 아득한 초인간 개념을 파악하려고 애쓰는 것은 도저히 유익하지 않지만, 절대 삼자일체의 영원한 행위는 잠재성의 절대자들이 어떤 식으로 결국 체험적이 된다고 생각해도 좋다. 이것은 무제한 절대자는 아니라도, 우주 절대자에 관하여 이치에 맞는 결론인 듯 보일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우주 절대자가 정적이고 잠재성이 있을 뿐 아니라, 이 낱말들의 총체적 신의 의미에서 또한 다른 것과 연합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상상할 수 있는 신 및 성격의 가치에 관해서 말하면, 이렇게 추측하는 사건들이 신 절대자가 성격화하는 것, 그리고―체험적 신들의 셋째이자 마지막인―절대자 하나님의 성격이 완성되는 데 본래 있는, 성격을 초월하는 가치와 성격을 넘는 의미가 나타나는 것을 암시한다.
106:7.1 (1168.6) 실체의 무한한 통합을 다루는 개념들을 형성하는 데 겪는 어려움 가운데 더러는 모든 그러한 개념이 우주 발전의 최후와 같은 무엇, 언젠가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의 실현, 어떤 종류의 체험적 실현을 포함한다는 사실에 본래부터 있다. 양적 무한을 최종으로 언젠가 마지막에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세 잠재 절대자 안에는, 아무리 많은 체험적 발전도 결코 소모할 수 없는, 탐구하지 않은 가능성이 반드시 남아 있음이 틀림없다. 영원 그 자체는 절대적이지만, 절대를 넘지 않는다.
106:7.2 (1169.1) 최종의 통합이라는 시험적 개념조차, 제한 없는 영원의 결실과 분리할 수 없고, 따라서 상상할 수 있는 어떤 미래 시간에도 실질적으로 실현할 수 없다.
106:7.3 (1169.2)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를 구성하는 신들의 의지 행위가 운명을 확정한다. 운명은 세 가지 큰 광대한 잠재성 안에서 정해지며, 그 절대성은 미래에 발전하는 모든 가능성을 포함한다. 우주 운명 종결자의 행위가 아마도 운명을 성취하고, 이 행위는 아마도 절대 삼자일체 안에서 최상위와 궁극위와 관계된다. 어떤 체험적 운명도, 체험하는 인간이 적어도 얼마큼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무한한 실존자들에 부딪치는 운명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최종 운명은 실존적이자 경험으로 얻는 달성이며 신 절대자를 말려들게 하는 듯하다. 그러나 신 절대자는 우주 절대자의 덕분으로, 무제한 절대자와 영원한 관계를 가진다. 체험 가능성을 지닌 이 세 절대자는 실제로 실존적이고 그보다 크며, 그들은 한없고,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고,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가없고, 측량할 수 없다―참으로 무한하다.
106:7.4 (1169.3) 그러나 목적을 달성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은 그러한 가상(假想) 운명에 대하여 철학적 이론을 세우는 것을 막지 않는다. 도달이 가능한 절대적 하나님으로서 신 절대자의 현실화는 실질적으로 실현하기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런데도, 그러한 최후의 결실은 하나의 이론적 가능성으로 남는다. 무제한 절대자가 어떤 상상할 수 없는 무한 우주에 말려드는 것은 끝없이 영원한 미래에 헤아릴 수 없이 아득할지 모르지만, 그런데도 그러한 가설은 타당하다. 필사자ㆍ상물질자ㆍ영ㆍ최후자ㆍ초월자, 그리고 다른 자들은, 우주들 자체 및 모든 다른 국면의 실체와 더불어, 절대 가치가 있는 잠재적 최종 운명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존재나 우주도 그러한 운명의 모습을 전부 완벽하게 언제라도 도달할 것인가 우리는 의심이 든다.
106:7.5 (1169.4) 아버지를 이해하는 데 너희가 아무리 성장한다 하더라도, 아버지인 스스로 계신 이의 밝혀지지 않은 무한성에 너희의 머리는 언제나 어지러울 것이다. 그 무한의 탐구되지 않은 광대함은, 영원의 주기 전역에 걸쳐서 내내, 언제나 헤아릴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남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무리 많은 부분을 너희가 깨닫더라도, 존재하는지 어쩐지 너희가 미처 의심도 하지 못할 훨씬 많은 부분이 언제나 남아 있을 것이다. 유한한 존재의 영토에서 참말인 것처럼, 똑같이 초월 수준에서도 이것이 참말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일은 끝이 없다!
106:7.6 (1169.5) 최종 의미에서 그렇게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는 것은 어떤 면에서도 우주의 인간이 낙심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정말로 너희는 칠중자ㆍ최상위ㆍ궁극위의 신 수준에 이를 수 있고, 그렇게 하며, 이 수준이 너희에게 가지는 의미는, 아버지 하나님을 무한히 깨닫는 것이 영원히 존재하는 절대 지위를 가진 영원한 아들에게, 그리고 합동 행위자에게 의미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사람을 괴롭히기는커녕, 모든 끝없는 미래를 통해서 내내, 영원조차도 소모하거나 끝내지 않을 가능성, 인격을 개발하고 신과 교제하는 가능성을 하늘 가는 인격자가 앞으로 가지리라는 최상의 확신이 되어야 한다.
106:7.7 (1169.6) 대우주의 유한한 생물에게 총 우주 개념은 거의 무한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 없이, 거기 있는 초한(超限) 건축가들은 끝없는 스스로 계신 이 안에서 상상하지 못한 앞날의 발전에 총 우주가 관계되는 것을 파악한다. 공간 그 자체도 겨우 궁극의 조건, 중부 공간에서 고요한 지대의 상대적 절대성 안에서 제한하는 조건일 뿐이다.
106:7.8 (1170.1) 총 우주 전체가 마침내 완성되는, 상상할 수 없이 아득한 앞날의 영원한 순간에,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역사 전체를 겨우 시작이라고, 지도(地圖)가 그려지지 않은 무한 속에서 더욱 크고 더욱 황홀한 변화를 위해서 어떤 유한한 초월적 기초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우리 모두가 돌이켜볼 것이다. 그러한 미래 영원의 순간에 총 우주는 여전히 젊은 듯이 보일 것이다. 정말로, 결코 그치지 않는 영원의 한없는 가능성에 부닥쳐서 총 우주는 언제나 젊을 것이다.
106:7.9 (1170.2) 무한한 운명을 달성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은 조금이라도 그런 운명에 대한 관념을 생각해 보는 것을 막지 않는다. 그리고 세 가지 절대 잠재성이 언제라도 완벽하게 현실이 될 수 있다면, 총 실체의 마지막 통합을 상상할 수 있으리라고 우리는 서슴지 않고 말한다. 이러한 발전이 일어나는 것은 무제한 절대자, 우주 절대자, 신 절대자가 완벽하게 현실화되는 데 기초를 두고, 세 잠재성의 연합은 스스로 계신 이의 잠재력을 이루며, 이것은 영원의 중지된 실체, 모든 미래와 그보다 더한 것의 정지된 가능성들이다.
106:7.10 (1170.3) 신중히 말해도 그러한 궁극의 사건들은 오히려 아득한 후일의 이야기이다. 그런데도 세 가지 삼자일체의 여러 작용ㆍ성격자ㆍ연합 속에서, 아버지인 스스로 계신 이의 일곱 가지 절대 국면이 다시 통일되는 이론적 가능성을 우리가 탐지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것은 우리가 세 가지 삼자일체 개념과 얼굴을 마주하도록 만들고, 그것은 실존적 지위를 가진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그리고 체험적 성질과 기원을 가지고 나중에 나타나는 두 삼자일체를 포함한다.
106:8.1 (1170.4) 가장 높은 삼자일체의[2] [1770] 성질을 인간의 지성에게 묘사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영원 속에 실현되는 이론적 무한에서 명시되는 바와 같이, 체험적 무한의 전부를 실제로 총합한 것이다. 가장 높은 삼자일체에서, 체험하는 무한자는 실존적 무한자와 같은 신분을 얻으며, 이 둘은 체험 이전(以前)이자 실존 이전의 스스로 계신 이 안에서 하나와 같다. 가장 높은 삼자일체는 15 가지 삼자일치 및 관계된 삼극일치에서 암시되는 모든 것의 최종 표현이다. 상대적 존재는 최후에 이르는 존재를, 실존적이든 체험적이든,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최후에 이르는 자는 반드시 상대적인 것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106:8.2 (1170.5) 가장 높은 삼자일체는 몇 단계에서 존재한다. 그것은 인간 수준보다 훨씬 위에 있는 존재들의 상상력을 어지럽게 하는 그러한 가능성ㆍ확률ㆍ필연성을 포함한다. 그것은 하늘 철학자들이 아마 의심하지 않은 함축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함축성은 삼자일치에 있고, 삼자일치들은 결국 측량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106:8.3 (1170.6) 가장 높은 삼자일체를 묘사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우리는 세 수준의 개념을 제시하기로 선택하니, 다음과 같다:
106:8.4 (1170.7) 1. 세 가지 삼자일체의 수준.
106:8.7 (1170.10) 이것들은 통일성이 높아지는 수준이다. 실제로, 가장 높은 삼자일체는 첫째 수준이고, 한편 둘째와 셋째 수준은 첫째의 통일에서 파생되는 것들이다.
106:8.8 (1171.1) 첫째 수준: 이 첫째 연합 수준에서, 세 가지 삼자일체가 신 성격자들의 집합, 뚜렷하지만 완전하게 동시화된 집합으로서 활동한다고 생각된다.
106:8.9 (1171.2) 1.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세 파라다이스 신―아버지ㆍ아들ㆍ영의 연합.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세 가지 기능―절대 기능, 초월 기능 (궁극성 삼위일체)[3] [1771], 유한 기능(최상 삼위일체)을 포함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언제라도, 항상, 이들 가운데 어느 것도 되고, 모두도 된다.
106:8.10 (1171.3) 2. 궁극 삼자일체. 이것은 최상 창조자들, 최상위 하나님, 총 우주 건축가들이 신으로서 연합한 것이다. 이것이 이 삼자일체의 신 모습을 적절히 제시한 것이지만, 이 삼자일체의 다른 단계들이 있다는 것을 적어야 한다. 하지만 이 단계들은 그 신의 모습과 완전하게 조정되는 듯이 보인다.
106:8.11 (1171.4) 3. 절대 삼자일체. 이것은 신의 모든 가치에 관하여, 최상위 하나님, 궁극위 하나님, 우주 운명 종결자의 집합이다. 이 삼자일치된 집합의 어떤 다른 단계는, 팽창하는 우주에서 신이 아닌 가치들과 상관이 있다. 그러나 체험적 신들의 권능과 성격 모습이 지금 체험으로 통합되는 과정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들은 여러 신 단계와 함께 통일되고 있다.
106:8.12 (1171.5) 가장 높은 삼자일체에서 이 세 가지 삼자일체의 연합은 실체의 가능한 한없는 통합을 마련해 준다. 이 집합은 원인과 중간에 있는 자와 최후에 이른 자, 시작하는 자와 실현하는 자와 성취하는 자, 그리고 시작ㆍ존재ㆍ운명을 포함한다. 아버지ㆍ 아들의 협동 관계는 아들ㆍ영이 되었고, 다음에 영ㆍ최상위, 그리고 계속해서 최상위ㆍ궁극위, 궁극위ㆍ절대자, 아니 절대자와 아버지 무한자까지도 되었다―이것이 실체 집단의 완성이다. 마찬가지로, 신과 성격에 아주 직접 관계되지 않는 다른 여러 단계에서, 위대한 첫째 근원 중심은 영원의 궤도 둘레에서, 절대적인 스스로 존재함으로부터 끝없는 자아 계시를 거쳐서, 최종의 자아 실현에 이르기까지―절대 실존자로부터 최종의 체험자들에 이르기까지―실체의 한없음을 스스로 실현한다.
106:8.13 (1171.6) 둘째 수준: 세 가지 삼자일체의 조정은 불가피하게 체험적 신들이 연합된 연결에 관계되며, 이들은 이 삼자일체들과 유전적으로 연합되어 있다. 이 둘째 수준의 성질은 때때로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106:8.14 (1171.7) 1. 최상위. 이것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파라다이스 신들의 창조 아들 및 창조 딸과 체험적 연락을 가지면서, 신에게 생기는 통일성의 결과이다. 최상위는 첫째 단계인 유한한 진화가 완성되어 신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106:8.15 (1171.8) 2. 궁극위. 이것은 둘째 삼자일체가 궁극에 얻은 통일성이 신에게 나타나는 결과이며, 신이 초월적 초한 성격이 된 것이다. 궁극위는 많은 품질을 가진, 다양하게 간주되는 통일성에 있고, 그에 대한 인간의 개념은 적어도 통제하고 지휘하고, 몸소 체험할 수 있고, 긴장을 통일하는 그러한 단계의 궁극성을 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에 이른 신은 밝혀지지 않은 많은 다른 모습이 있다. 궁극위는 최상위와 비교할 만하지만 동일하지 않으며, 궁극위는 단지 최상위를 확대한 것도 아니다.
106:8.16 (1172.1) 3. 절대자. 가장 높은 삼자일체의 둘째 수준에서 셋째 구성원의 특성에 관하여 많은 이론이 있다. 절대자 하나님은 의심할 여지 없이, 절대 삼자일체의 마지막 기능이 성격에 미치는 결과로서 이 연합에 말려들어 있다. 그래도 신 절대자는 영원의 지위를 가진 실존적 실체이다.
106:8.17 (1172.2) 이 셋째 구성원에 관한 개념의 어려움은 그러한 구성원 자격을 전제하는 것은 절대자가 꼭 하나 있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에 본래부터 있다. 이론적으로, 그러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면, 세 절대자가 하나로서 체험으로 통일된 것을 우리가 구경해야 한다. 무한 속에서 실존적으로 하나의 절대자가 있다고 우리는 가르침을 받았다. 누가 이 셋째 구성원일 수 있는가 조금도 뚜렷하지 않지만, 그러한 것은 어떤 형태로 상상하지 못하게 연락되고 우주에서 명시되는 신 절대자, 우주 절대자, 무제한 절대자로 구성될지 모른다고 흔히 가정된다. 분명히, 가장 높은 삼자일체는 세 절대자를 완전히 통일하지 못하고서 완벽한 기능을 도저히 얻을 수 없고, 세 절대자는 무한한 가능성을 모두 완전히 실현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통일될 수 없다.
106:8.18 (1172.3) 가장 높은 삼자일체의 셋째 구성원이 우주 절대자라고 상상하고, 이 개념이 우주 절대자가 정적(靜的)이고 잠재할 뿐 아니라 연합 성질이 있다고 상상한다면, 아마도 최소한의 진리 왜곡일 것이다. 그러나 총 신의 기능과 창조하고 진화하는 모습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우리는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다.
106:8.19 (1172.4) 비록 가장 높은 삼자일체에 대하여 완성된 개념을 형성하기 어렵지만, 한정된 개념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가장 높은 삼자일체의 둘째 수준이 본질적으로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된다면, 최상위 하나님, 궁극위 하나님, 절대자 하나님의 연합이, 이 체험적 신들의 조상인, 성격을 가진 삼자일체들의 연합이 낳는 성격 반응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아주 가능하게 된다. 체험하는 이 세 신이, 그들의 조상이자 원인이 되고 첫째 수준을 구성하는 삼자일체들이 더욱 통일되는 직접 결과로서, 둘째 수준에서 분명히 통일될 것이라는 의견을 우리는 감히 가져 본다.
106:8.20 (1172.5) 첫째 수준은 세 가지 삼자일체로 구성된다. 둘째 수준은 체험으로 진화한 성격자, 체험으로 궁극에 이른 성격자, 체험적이고 실존적인 신 성격자들의 성격 연합으로서 존재한다. 가장 높은 완벽한 삼자일체를 이해하는 데 무슨 개념의 어려움이 있든지 상관 없이, 둘째 수준에서 이 세 신의 성격 관계는 위엄자가 신이 되는 현상에서, 바로 우리의 우주 시대에 대하여 분명히 나타났다. 신 절대자는 궁극위를 통해서, 그리고 최상 존재의 초기 창조 명령에 반응하여 활동하면서, 이 둘째 수준에서 위엄자를 현실화하였다.
106:8.21 (1172.6) 셋째 수준: 둘째 수준에서 가장 높은 삼자일체의 제한 없는 가정(假定)에서는, 전체 무한에 지금 있거나, 전에 있었거나, 앞으로 있을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실체가 가진 어떤 단계의 상관 관계도 포함된다. 최상 존재는 영일 뿐 아니라 또한 지성ㆍ권능ㆍ체험이다. 궁극위는 이 모두이고 이를 훨씬 넘으며, 한편 이와 관련하여 신 절대자, 우주 절대자, 무제한 절대자가 하나가 된다는 개념에 모든 실체가 실현되는 절대 최후성이 담겨 있다.
106:8.22 (1172.7) 최상위, 궁극위, 완성된 절대자, 이 셋의 연합에는, 스스로 계신 이가 최초에 분할한 모습, 무한의 일곱 절대자를 출현하게 만든 무한의 모습을 기능적으로 다시 조립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비록 우주의 철학자들은 이렇게 될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다고 판단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자주 이렇게 묻는다: 둘째 수준에서 가장 높은 삼자일체가 언젠가 삼자일체의 통일을 성취할 수 있다면, 다음에 그러한 신(神)이 통일되는 결과로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 계신 이를 체험으로 달성 가능한 존재로 현실화하는 길로 직접 이끌 것이라 우리는 확신한다. 성격을 가진 존재들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스스로 계신 이가 아버지 무한자로서 우리가 체험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할 수 있다. 이 절대 운명이 비성격 관점에서 무엇을 의미할까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고, 오로지 영원이 아마도 해명해 줄 수 있을 문제이다. 그러나 가능성이 적은 이 궁극의 일을 우리가 성격을 가진 생물로서 보건대, 모든 성격자의 마지막 운명을 바로 이 성격자들의 우주의 아버지가 마침내 알 것이라 우리는 추측한다.
106:8.23 (1173.1) 우리가 과거 영원에 계셨던 스스로 계신 이를 철학적으로 상상할 때, 그는 혼자 계시고 그 옆에 아무도 없다. 미래 영원 속으로 앞을 내다볼 때, 우리는 스스로 계신 이가 하나의 실존자로서 도저히 변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지만, 광대한 체험적 차이가 있다고 예측하고 싶다. 그러한 스스로 계신 이 개념은 충만한 자아 실현을 의미한다―스스로 계신 이의 자아 계시에 의도하여 참여한 자가 되고, 총 무한의 절대 의지(意志) 부분, 즉 절대적 아버지의 마지막 아들로서 영원히 남아 있을 그러한 성격자들이 사는 한없는 은하계를 포함한다.
106:9.1 (1173.2) 가장 높은 삼자일체 개념에서 우리는 한없는 실체의 가능한 체험적 통일을 가정하며, 이 모두가 아주 먼, 정말로 아득한 영원 속에서 일어날지 모른다는 이론을 때때로 세운다. 그런데도, 모든 과거와 미래의 우주 시대처럼, 바로 이 시대에 실제로 현재, 무한의 통일이 있다. 그러한 통일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안에서 실존적이다. 체험하는 실체로서 무한의 통일은 생각할 수 없이 아득히 멀지만, 무한의 조건 없는 통일은 지금, 우주가 존재하는 현재 순간을 지배하며, 절대적인 실존적 품위를 가지고 모든 실체의 다양한 모습을 뭉친다.
106:9.2 (1173.3) 영원이 성취된 최후 수준에서 무한한 통일을 상상하려고 애쓸 때, 유한한 인간은 그들의 유한한 존재에 본래 있는 지능의 한계와 얼굴을 마주친다. 시간과 공간과 체험은 인간의 개념에 장벽이 된다. 그래도 시간을 들이지 않고, 공간을 제쳐놓고 체험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도 우주 실체에 대하여 제한된 이해조차 얻을 수 없다. 시간에 대한 민감성이 없이, 어떤 진화 인간도 연속되는 관계들을 도저히 파악할 수 없다. 공간을 파악하지 않고는 어떤 생물도 동시에 일어나는 관계를 헤아릴 수 없다. 체험이 없이는, 어떤 진화 인간도 존재할 수조차 없다. 오로지 무한의 일곱 절대자가 정말로 체험을 초월하며, 그들조차 어떤 국면에서는 체험할지 모른다.
106:9.3 (1173.4) 시간ㆍ공간ㆍ체험은 사람이 상대적 실체를 파악하는 데 가장 크게 도움되는 것인데, 그래도 사람이 완벽하게 실체를 파악하는 데 가장 끔찍한 장애물이다. 필사자와 기타 많은 우주 생물은 잠재하는 것들이 공간에서 현실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 진화하여 결실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이 과정 전부가 파라다이스와 영원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시공(時空) 현상이다. 절대 수준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 거기에는 어떤 잠재하는 것도 실재하는 것으로 파악해도 좋다.
106:9.4 (1173.5) 모든 실체를 통일하는 개념은, 이 시대나 어느 다른 우주 시대에 있든지 상관 없이, 실존적인 것과 체험하는 것, 기본적으로 이 두 가지이다. 그러한 통일은 가장 높은 삼자일체 속에서 체험으로 실현되는 과정에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삼자일체가 겉으로 현실화되는 그 정도는 우주에서 실체에 대한 제한과 실체의 불완전성이 사라지는 데 정비례한다. 그러나 실체의 총 통합은 무조건, 영원히, 실존적으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안에 있다. 그 속에서 바로 이 우주 순간에, 무한한 실체는 절대로 통일되어 있다.
106:9.5 (1174.1) 체험하는 자의 관점과 실존적인 자의 관점이 일으키는 역설(逆說)은 피할 수 없고,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와 가장 높은 삼자일체는 각각, 오직 하나의 시공 상대성으로서 필사자들이 파악할 수 있는 영원의 관계라는 사실에 어느 정도 근거를 둔다. 가장 높은 삼자일체가 차츰 체험으로 현실이 되는 것에 관한 인간의 개념―시간 관점―은 이것이 이미 현실이 된 것이라 덧붙여 가정함으로―영원의 관점으로―보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두 관점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실존적으로 무한이 통일된 것이며, 체험하는 가장 높은 삼자일체가 실제로 계시고 완벽하게 겉으로 나타났음을 탐지하지 못하는 것은 얼마큼 다음의 이유 때문에, 서로 일으키는 왜곡에 기인하는 진실을 받아들이라고 우리는 유한한 필사자들에게 제안한다:
106:9.6 (1174.2) 1. 인간의 한정된 관점, 제한되지 않은 영원 개념을 파악할 능력이 없다.
106:9.7 (1174.3) 2. 불완전한 인간 지위, 체험하는 것들의 절대 수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106:9.8 (1174.4) 3.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 인류는 체험하는 기법으로 진화하도록 설계되어 있고, 따라서 본래부터 체질적으로 체험에 기대야 한다는 사실. 오로지 절대자가 실존적이면서 체험할 수 있다.
106:9.9 (1174.5)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서 우주의 아버지는, 가장 높은 삼자일체에서 스스로 계신 이이다. 아버지가 무한함을 사람이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유한한 한계 때문이다. 실존적이고 홀로 계시고, 삼위일체에 앞서고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스스로 계신 이 개념, 그리고 체험하는 가장 높은 삼자일체 뒤에 있고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스스로 계신 이를 가정하는 것은 바로 똑같은 가설이다. 무한자 안에서 아무런 실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겉으로 나타나는 모든 발전은 실체를 받아들이고 우주를 이해하는 능력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106:9.10 (1174.6)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스스로 계신 이는 모든 실존자에 앞서, 그리고 모든 체험자 뒤에 존재해야 한다. 이런 개념들이 인간의 머리 속에서 영원과 무한의 역설(逆說)을 밝혀 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결코 끝나지 않는 이 문제들에 새로 달라붙어 싸우도록 그러한 유한한 지성인들을 자극해야 한다. 이 문제들은 구원자별에서, 그리고 나중에 최후자로서, 그리고 널리 퍼지는 여러 우주에서 너희의 영원한 생애의 끝없는 미래를 통해서, 줄곧 너희의 흥미를 자아낼 것이다.
106:9.11 (1174.7) 머지 않아 모든 우주 성격자는 영원을 향한 마지막 추구가 끝없이 무한을 탐구하는 것, 절대적 첫째 근원 중심을 찾아내는, 결코 그치지 않는 항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머지 않아 우리 모두가, 모든 생물의 성장이 아버지와 같이 되는 것에 비례함을 알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무한 자체의 끝없는 가능성에 이르는 영원한 여권(旅券)임을 이해하게 된다. 무한자를 추구하는 데 성공하는 것은 아버지와 같아짐을 성취하는 데 정비례하고, 이 우주 시대에 아버지의 실체들은 신의 품질 안에 드러난다는 것을 필사자가 언젠가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우주의 인간들은 신답게 사는 체험 속에서 신의 이 품질을 몸소 이용하며, 신답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실제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106:9.12 (1175.1) 물질이고 유한하고 진화하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바탕을 둔 인생은 직접, 인격자의 무대에서 영이 지배권을 얻게 만들고, 그러한 인간을 아버지 무한자를 이해하는 데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데리고 간다. 그러한 아버지다운 인생은 진리에 근거를 두고, 아름다움에 민감하고, 선에 지배되는 인생이다. 하나님을 아는 그러한 사람은 마음 속에서 신을 예배함으로 빛을 받고, 바깥으로 모든 인격자가 두루 형제라는 정신에 마음을 다하여 봉사하는 데 헌신한다. 이것은 자비로 가득 차고 사랑으로 마음이 움직여 봉사를 베푸는 것이며, 한편 우주 지혜와 자아 실현의 수준, 하나님을 찾아내고 아버지를 예배하는, 항상 올라가는 수준에서, 일생의 이 모든 품질은 진화하는 인격 안에서 통일된다.
107:0.1 (1176.1) 우주의 아버지는 파라다이스에, 우주의 바로 한가운데에 몸소 거하지만, 또한 시간 지역에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자녀들의 지성 속에, 공간 세계에 실제로 계시니, 그가 신비의 훈계자로서 그들에게 깃들기 때문이다. 영원한 아버지는 행성에서 사는 필사 아들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동시에 아주 가깝게 관계되어 있다.
107:0.2 (1176.2) 조절자는 사람의 혼 속에서 아버지의 구체적인 사랑이 사실이 된 것이다. 그들은 필사 지성 속에 갇혀 있는 약속, 사람이 영원한 생애를 가진다는 진정한 약속이다. 그들은 사람의 완전하게 된 최후자 인격의 본질이며,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이 본질을,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신성한 계심에 실제로 도달하기까지, 한 걸음 한 걸음 숱한 우주까지 올라감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삶에 이르는 신다운 기법을 점진적으로 통달하는 동안에 미리 맛볼 것이다.
107:0.3 (1176.3) 하나님은 자신이 완전한 것 같이 사람에게 완전하라고 명령하였고, 그처럼 예정된 천상의 운명을 이루는 데 사람에게 체험하는 협동자가 되려고 조절자로서 내려오셨다. 사람의 지성에 깃드는 하나님의 분신(分身)은, 사람이 이 신다운 조절자와 손잡고 우주의 아버지를 찾아낼 수 있다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의 보장이며, 그는 사람이 육체로 사는 시절에도 그를 찾고 아들 삼으려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107:0.4 (1176.4) 창조 아들을 본 필사자는 누구든지 우주의 아버지를 보았고, 신다운 조절자가 깃드는 사람에게는 파라다이스 아버지가 깃든다. 깃드는 조절자의 인도함을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않고서 따르는 필사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다. 조절자의 계심을 의식하는 것은 하나님이 앞에 계심을 의식하는 것이다. 조절자가 사람의 진화하는 혼과 영원히 융합하는 것은 우주에서 신의 동료로서 하나님과 영원히 결합하는 것을 사실로 체험하는 것이다.
107:0.5 (1176.5) 하나님처럼 되고 파라다이스에 이르러서, 거기서 신의 실제 몸 앞에서 신이 준 선물의 무한한 근원을 예배하려는, 가라앉힐 수 없는 그 열망과 그침 없는 갈망을 사람 속에서 만들어내는 것은 조절자이다. 조절자는 필사자인 아들과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실제로 연결하고, 그를 아버지께로 갈수록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살아 있는 계심이다. 조절자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거리에 따라, 그리고 영원한 아버지의 보편성과 반대로 사람이 많이 치우친 정도에 따라 생기는 엄청난 우주 긴장을 우리에게 보상하여 평준화시키는 존재이다.
107:0.6 (1176.6) 조절자는 유한한 인간의 지성 속에 갇혀 있는 무한한 존재의 절대 본질이며, 그러한 필사자가 선택하는 대로, 궁극에는 하나님과 사람의 이 임시 결합을 완성하고 끝없이 우주에 봉사하는 것을 위하여 새 종류의 존재를 진정하게 현실화한다. 조절자는 하나님이 사람의 아버지라는 진리를 사실로 만드는 신다운 우주 실체이다. 조절자는 사람의 틀림없는 우주 나침반이요, 언제나, 어김없이 사람의 혼을 하나님 방향으로 가리킨다.
107:0.7 (1177.1) 진화하는 여러 세계에서, 의지(意志)를 가진 인간은 존재하면서 세 가지 일반적 발전 단계를 거친다: 조절자가 도착할 때부터 사람이 비교적 완전히 성장하기까지, 유란시아에서는 약 스무 살까지, 훈계자를 때때로 생각 변경자라 일컫는다. 이때부터 분별의 나이, 약 마흔에 이르기까지, 신비의 훈계자를 생각 조절자라 부른다. 분별의 나이에 이른 때부터 육체를 벗어나기까지, 그들은 흔히 생각 통제자로서 언급된다. 필사 생명의 이 세 단계는 지성을 복사(複寫)하고 혼을 진화시키면서 조절자가 진보하는 세 단계와 아무 관련이 없다.
107:1.1 (1177.2) 생각 조절자는 최초의 신의 본질로부터 생겼으므로, 그들의 성품과 기원에 대하여 아무도 주제넘게 권위를 가지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나는 겨우 구원자별의 전통과 유버르사의 의견을 나눠줄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다만 우리가 이 신비의 훈계자, 그리고 대우주에 두루 그들과 관계된 존재들을 어떻게 여기는가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107:1.2 (1177.3) 생각 조절자가 어떤 방식으로 수여되는가에 관하여 다채로운 의견이 있어도, 그들의 기원에 관해서는 아무런 그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우주의 아버지, 첫째 근원 중심으로부터 직접 비롯한다고 모두가 동의한다. 그들은 지음받은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무한한 하나님의 실제 계심을 구성하는, 조각이 된 존재이다. 그들의 밝혀지지 않은 많은 동료와 더불어, 조절자는 묽어지지 않고 섞이지 않은 신성(神性), 제한되지 않고 엷어지지 않은, 신의 일부이다. 조절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한, 조절자는 하나님이다.
107:1.3 (1177.4) 첫째 근원 중심의 절대성을 벗고 그들이 언제 따로 존재를 시작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그들이 몇이나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지성에 깃들려고 시간 세계의 행성에 그들이 도착하기까지, 우리는 그들의 생애에 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그때부터 계속, 우리는 삼자일체 운명을 성취하기까지, 그리고 이를 포함한 그들의 우주 진보에 대하여 얼마큼 익숙하다: 어떤 필사 승천자와 융합함으로 성격을 얻는 것, 우주의 아버지의 명령으로 성격을 얻는 것, 또는 생각 조절자들의 알려진 배치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107:1.4 (1177.5) 우리는 모르지만, 우주가 커짐에 따라서, 조절자와 융합할 후보자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서, 조절자들이 항상 개별화되고 있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조절자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 짚어보려 하는 데 우리가 똑같이 틀릴 가능성이 있을지 모른다. 바로 하나님처럼,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 성품을 가진 이 분신들은 실존적으로 무한한지 모른다.
107:1.5 (1177.6) 생각 조절자가 생겨나는 기법은 우주의 아버지의 밝혀지지 않은 기능의 하나이다. 우리는 첫째 근원 중심의 다른 동료 절대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아버지 분신들의 생산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믿을 충분한 이유를 가졌다. 조절자는 다만, 영원히, 신이 준 선물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생겼고,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과 같다.
107:1.6 (1177.7) 융합하는 사람과 가지는 관계에서 그들은 하늘 같은 사랑과 영적 봉사를 드러내며, 이것은 하나님이 영이라는 선언을 충분히 확인한다. 그러나 이 초월적 봉사에 보태서, 유란시아 필사자에게 한 번도 밝혀진 적이 없는 많은 것이 일어난다. 시간 세계에 사는 사람의 인격의 일부가 되라고 우주의 아버지가 자신의 몸을 줄 때, 도대체 무슨 일이 정말로 벌어지는지 우리가 넉넉히 이해하지도 못한다. 파라다이스 최후자들이 올라가면서 진보하는 것은, 아직까지 사람과 하나님의 더할 나위 없는 이 협동 관계에 본래 있는 가능성을 다 드러내지도 않았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보건대, 아버지 분신은 절대적 하나님에 도달할 수 있는 운명을 가진 인간에게 절대적 하나님이 주는 선물임이 틀림없다.
107:1.7 (1178.1) 우주의 아버지가 그의 선(先)인격 신을 조각내는 것처럼, 무한한 영도 영 융합 시리즈에 속하는 살아남는 필사자의 진화하는 혼에 깃들고, 실제로 그와 융합하려고 자기의 선(先)지성 영의 부분을 개체로 만든다. 그러나 영원한 아들의 성품은 이렇게 조각낼 수 없다. 최초의 아들의 영은 퍼지든지, 아니면 따로따로 성격을 가진다. 아들이 융합한 사람은 영원한 아들의 창조 아들이 영을 개별화하여 주신 것과 뭉쳐진다.
107:2.1 (1178.2) 조절자는 처녀 존재로서 개체가 되며, 모두가 해방되거나, 융합하거나, 아니면 인격이 된 훈계자가 되도록 정해져 있다. 우리는 일곱 계급의 생각 조절자가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구분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흔히 다음과 같이 다른 계급들을 언급한다:
107:2.2 (1178.3) 1. 처녀 조절자, 영원히 살아남으려는 진화하는 후보자의 지성 속에서 첫 임무에 봉사하는 자. 신비의 훈계자들의 신다운 성품은 영원히 한결같다. 신별에서 처음에 나갈 때, 그들의 체험적 성품이 또한 한결같다. 그 뒤에 체험의 차이는 우주에서 봉사하면서 실제로 체험하는 결과이다.
107:2.3 (1178.4) 2. 상급 조절자. 시간 지역에 사는 사람의 신분, 그리고 셋째 근원 중심이 지역 우주에서 나타나는, 영의 개별화된 부분, 이 둘 사이에 마지막 융합이 일어나는 세계에서, 의지를 가진 사람과 함께 하나나 몇 생애 동안 봉사한 자.
107:2.4 (1178.5) 3. 최상 조절자. 진화 세계에서 시간 속에 겪는 모험에 근무한 적이 있지만, 그 인간 짝이 어떤 까닭으로 영원히 살아남기를 거절한 그러한 훈계자, 그리고 나중에 다른 진화 세계에서 다른 필사자의 다른 모험에 배치된 훈계자. 최상 조절자는 처녀 훈계자보다 더 신답지는 않아도 체험을 더 겪었으며, 체험을 적게 가진 조절자가 할 수 없는 일을 인간 지성 속에서 할 수 있다.
107:2.5 (1178.6) 4. 사라진 조절자. 여기서 신비의 훈계자의 생애를 따라가는 우리의 노력에 중단이 생긴다. 넷째 단계의 봉사가 있는데 이에 관하여 우리는 확실치 않다. 멜기세덱들은 넷째 단계 조절자들이 온 우주를 돌아다니면서, 파견 임무로 일한다고 가르친다. 외톨 사자들은 이들이 바로 아버지와 함께 참신한 교제 기간을 즐기면서, 첫째 근원 중심과 한 몸이 되어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리고 조절자가 두루 계시는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총 우주를 돌아다니는 것도 아주 가능성이 있다.
107:2.6 (1178.7) 5. 해방된 조절자. 진화하는 구체의 필사자를 위하여 시간 지역에서 봉사하는 일로부터 영원히 풀려난 신비의 훈계자. 그들의 역할이 무엇인가 우리는 모른다.
107:2.7 (1179.1) 6. 융합한 조절자―최후자. 초우주에서 하늘 가는 사람과 하나가 된 자, 파라다이스 최후 군단에 속하는 승천자, 시간 지역에서 영원에 이르는 승천자의 짝. 생각 조절자는 보통, 하늘 가는, 시간 지역의 필사자와 융합하며, 살아남는 그런 필사자와 함께 승천자별에서 출입이 기록된다. 그들은 하늘 가는 존재의 길을 따른다. 하늘 가는 진화하는 혼과 융합하고 나서, 그 조절자는 우주의 절대 실존적 수준으로부터, 하늘 가는 성격자와 함께 기능적으로 연합하는 유한한 체험적 수준으로 옮겨 가는 듯하다. 실존적 신다운 성품의 모든 특성을 지니면서, 융합한 조절자는 살아남는 필사자의 하늘 가는 생애와 분해할 수 없이 연결된다.
107:2.8 (1179.2) 7. 인격이 된 조절자. 육신화한 파라다이스 아들과 함께 봉사한 자, 그리고 필사자에게 깃드는 동안에 특별한 공훈을 세웠지만, 살아남기를 거부한 주체에게 깃들었던 많은 조절자. 우리는 그런 조절자들이 배치받은 초우주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추천을 받아서 인격을 얻는다고 믿을 이유를 가지고 있다.
107:2.9 (1179.3) 이 신비스러운 하나님 조각들을 분류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이 있다. 우주에 배치되는 데 따라서, 개별 필사자에게 깃드는 데 성공한 정도에 따라서, 또는 융합할 필사 후보자의 종족 계보에 따라서 분류할 수도 있다.
107:3.1 (1179.4) 신비의 훈계자의 파송ㆍ관리ㆍ지휘, 그리고 모두 일곱 초우주의 근무로부터 돌아오는 것에 관계된 모든 우주 활동은 신성한 구체 신별에 집중된 듯하다. 내가 아는 한, 오직 조절자 및 아버지의 다른 개체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그 구체에 가 본 적이 없다.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선(先)인격 존재가 신별을 조절자들과 고향 구체로서 함께 쓰는 것 같이 보인다. 우리는 이 동료 존재들이 어떤 방식으로 신비의 훈계자들의 현재 및 미래 봉사에 관계될 수도 있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로 모른다.
107:3.2 (1179.5) 생각 조절자들이 아버지한테로 돌아갈 때, 그들은 기원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영역, 신별로 돌아간다. 아마도 이 체험의 일부로서, 이 비밀 구체에 자리잡고 있다고 보고된 아버지 신성의 특화된 명시 뿐 아니라, 아버지의 파라다이스 성격과 실제로 접촉이 있다.
107:3.3 (1179.6) 파라다이스의 일곱 비밀 구체 모두에 관하여 우리는 무언가 알지만, 다른 데보다 신별에 관하여 아는 것이 적다. 높은 영적 서열에 있는 존재들은 신에게서 오직 세 가지 명령을 받는데, 다음과 같다:
107:3.4 (1179.7) 1. 언제나 자기의 선배와 상관들의 체험과 자질에 알맞는 존경을 보일 것.
107:3.7 (1179.10) 내가 신별로 가는 것은 아주 쓸모 없으리라고 나는 자주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인격이 된 조절자와 같은 자를 제외하고, 어떤 거주하는 존재도 나는 아마 볼 수 없을 터이고, 나는 조절자들을 다른 데서 본 적이 있다. 신별에는 내게 진정한 가치나 이익이 되는 아무것도, 나의 성장과 발전에 필수인 아무것도 없다고 아주 확신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거기로 가는 것이 금지되지 않았을 것이다.
107:3.8 (1180.1) 우리가 신별로부터 조절자의 성품과 기원에 관하여 거의 또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으니까, 우리는 수많은 다른 근원으로부터 정보를 모을 수밖에 없고, 그러한 지식이 유익하려면 이 축적된 자료를 수집하고 연결하고 서로 관련짓는 것이 필요하다.
107:3.9 (1180.2) 생각 조절자가 나타낸 용맹과 지혜는 그들이 엄청난 규모와 범위의 훈련을 거쳤음을 가리킨다. 그들이 인격자가 아니니까, 신별의 여러 교육 기관에서 이 훈련을 제공해야 한다. 인격화된 독특한 조절자들은 의심할 것 없이, 신별에 있는 조절자 훈련 학교들의 직원을 구성한다. 우리는 중앙에 있는 이 감독하는 군단을, 자기 우주 영역의 종족과 민족들에게 일곱 번 자신 수여를 마친, 지금 미가엘 계급의 처음 파라다이스 아들의 조절자, 인격화된 조절자가 주관한다는 것을 안다.
107:3.10 (1180.3) 인격이 되지 않은 조절자에 관하여 우리는 정말로 거의 아는 것이 없다. 우리는 오직 인격이 된 계급들과 접촉하고 통신을 가진다. 이들은 신별에서 이름을 받고, 반드시 번호가 아니라 이름으로 알려진다. 인격이 된 조절자들은 신별에 영구하게 주소를 가지며, 그 신성한 구체가 그들의 집이다. 그들은 오직 우주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그 거처를 떠난다. 거의 아무도 지역 우주의 영토에서는 발견되지 않지만, 더 많은 무리가 중앙 우주에 있다.
107:4.1 (1180.4) 생각 조절자가 신답다고 말하는 것은 오직 기원의 성질을 인정하는 것이다. 영원ㆍ무한한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본질, 보편적으로 계시는 그러한 절대 본질의 조각 안에 담길 수 있는, 신의 모든 잠재 속성의 본질을 그렇게 순수한 신성이 품는 것이 대단히 있음직하다.
107:4.2 (1180.5) 조절자의 실제 근원은 무한한 것이 틀림없고, 진화하는 필사자의 불멸하는 혼과 융합하기 전에는 조절자의 실체가 절대성에 가까움이 틀림없다. 조절자는 보편적 의미에서, 신의 의미로 보아 절대자는 아니지만, 조각난 성품의 가능성으로 보면 그들은 아마 참으로 절대적인 자이다. 그들은 보편성이 제한되어 있지만, 성품은 제한되지 않았다. 바깥으로 뻗는 성질은 한정되어 있지만, 의미ㆍ가치ㆍ사실을 집중하는 성향을 보면 그들은 절대적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신이 주신 선물을 아버지의 제한된 절대 분신이라고 일컫는다.
107:4.3 (1180.6) 아무 조절자도 파라다이스 아버지께 불충한 적이 없다. 하위 계급의 성격 생물은 때때로 불충한 동료들과 다투어야 할지 모르지만, 조절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람에게 봉사하고 우주에서 활동하는 그들의 드높은 영역에서, 그들은 가장 높고 그르칠 수 없다.
107:4.4 (1180.7) 인격을 얻지 못한 조절자들은 오로지 인격이 된 조절자에게만 눈에 보인다. 나의 계급, 외톨 사자는, 영감 받은 삼위일체 영과 함께, 영적 반응 현상의 수단으로 조절자의 계심을 알아낼 수 있다. 그리고 세라핌조차 사람의 물질 지성 속에 훈계자의 계심과 관련된 것으로 짐작되는 영의 빛을 때때로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아무도, 조절자가 인격이 되지 않으면 그들의 참 계심을 실제로 식별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성품은 진화 세계에서 온, 하늘 가는 필사자의 융합된 인격과 뭉친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조절자가 보편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높이, 순전히, 신에게서 기원과 성품을 가졌음을 뚜렷이 가리킨다.
107:4.5 (1181.1) 이 신다운 계심에 따르는, 특징이 되는 빛, 영의 빛남이 있는데, 이것은 생각 조절자와 일반적으로 관련되어 왔다. 네바돈 우주에서 이 파라다이스 광채는 널리 “표시등”으로 알려져 있다. 유버르사에서는 이를 “생명의 빛”이라 부른다. 유란시아에서 이 현상은 때때로 “세상으로 오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으로 언급되었다.
107:4.6 (1181.2) 우주의 아버지께 도달한 모든 존재에게는 인격이 된 생각 조절자들이 눈에 보인다. 어떤 단계에 있는 조절자도, 모든 다른 존재ㆍ개체ㆍ영ㆍ성격자, 그리고 영의 명시와 함께, 파라다이스 신들에 기원이 있고 대우주의 주요 정부를 주관하는 최상 창조 성격자들이 언제나 식별할 수 있다.
107:4.7 (1181.3) 조절자의 깃드심의 참된 중요성을 너희가 깨달을 수 있는가? 너희의 유한한 필사 성품 속에 깃들고 그와 융합하는, 절대적이고 무한한 신, 우주의 아버지의 절대 분신을 가지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말로 헤아릴 수 있는가? 필사 인간이 전체 우주의 실존적 원인의 실제 분신과 융합할 때, 전례 없고 상상할 수 없는 그런 협동 관계의 운명에 결코 아무런 한계가 지워질 수 없다. 영원 속에서, 사람은 객관적 신의 무한함 뿐 아니라, 바로 그 하나님의 주관적 분신의 끝없는 가능성도 발견할 것이다. 조절자는 필사 인격자에게 하나님의 놀라움을 드러내며, 이 하늘 같은 계시(啓示)는 결코 그칠 수 없으니, 이는 조절자가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필사 인간에게는 하나님과 같기 때문이다.
107:5.1 (1181.4) 진화하는 필사자는 지성이 영과 물질 사이에서 우주가 중재하는 것이라고 보기 쉬운데, 이는 중재가 정말로 너희가 식별할 수 있다시피 지성의 주요한 봉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각 조절자가 지성을 가진 것을 인간이 파악하기가 몹시 어려우며, 이는 조절자가 실체의 절대 수준에서 하나님의 분신이고, 이것이 선(先)인격일 뿐 아니라 또한 어떤 에너지와 영의 분산보다도 앞서기 때문이다. 에너지와 영의 구별이 있기 전에 일원론 수준에서는 지성의 아무런 중재 작용이 있을 수 없는데, 이는 조정할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107:5.2 (1181.5) 계획하고 일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조절자는 지성에 비례하여 자아의 힘을 가졌음이 틀림없다. 그들은 서로, 다시 말해서 첫째 또는 처녀 집단보다 높은 온갖 형태의 훈계자들끼리 서로 교통하는 한없는 능력을 소유한다. 그들의 상호 교통의 성질과 취지에 관하여 우리는 밝힐 것이 거의 없는데, 이는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틀림없이 지성을 가졌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결코 인격화될 수 없을 것이다.
107:5.3 (1181.6) 생각 조절자가 지성을 가진 것은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이 지성을 가진 것과 같다―이것은 합동 행위자의 여러 지성에게 조상이 되는 무엇이다.
107:5.4 (1181.7) 조절자 속에 있다고 가정하는 종류의 지성은 수많은 다른 서열의 선(先)인격 존재의 지성 자질과 비슷함이 틀림없는데, 이것들은 짐작컨대, 마찬가지로 첫째 근원 중심에서 기원을 가진다. 이 서열들 가운데 다수가 유란시아에서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들은 모두 지성을 소유한 품질을 드러낸다. 또한 최초의 신의 이러한 개체화는 수많은 진화 종류의 비필사 존재들, 그리고 그러한 신의 분신과 융합하는 능력을 개발한, 제한된 수의 비진화 존재하고도 뭉치는 것이 또한 가능하다.
107:5.5 (1182.1) 한 생각 조절자가 살아남는 인간의 진화하는 혼, 불멸의 상물질 혼과 융합될때, 하늘 가는 그 필사자가 우주에서 진보하는 영 수준에 이를 때까지, 조절자의 지성이 그 인간의 지성과 따로 지속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107:5.6 (1182.2) 하늘 가는 체험을 거친 최후자 수준에 이르고 나서 이 여섯째 단계 영들은, 그러한 하늘 가는 성격자의 신 단계와 인간 단계 사이에 연락자로서 이전에 활동했던 필사자의 지성과 조절자의 지성의 어떤 단계가 연합됨을 나타내는, 어떤 지성 요인을 변화시키는 듯하다. 체험하는 이 지성의 품질은 아마도 진화하는 신―최상 존재―의 체험 자질을 “최상으로 변화시키고” 나중에 확대한다.
107:6.1 (1182.3) 인간의 체험 속에서 생각 조절자와 마주치다시피, 조절자는 영적 영향이 있고 사람을 인도하는 것을 드러낸다. 조절자는 정말로 하나의 영(靈), 순수한 영이지만, 영보다 더한 것이다. 우리는 결코 신비의 훈계자들을 흡족하게 분류할 수 있은 적이 없다. 그들에 관하여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 같다는 것이 전부이다.
107:6.2 (1182.4) 조절자는 사람이 영원을 얻을 가능성이며, 사람은 조절자가 인격을 얻을 가능성이다. 너희의 개별 조절자는 너희의 현세의 신분을 영원하게 만드는 희망을 가지고 너희를 영답게 만들려고 일한다. 조절자는 영 아버지의 사랑, 아름답고 자신을 주는 사랑으로 흠뻑 젖어 있다. 그들은 참으로, 신답게, 너희를 사랑한다. 영의 희망을 가지고 사람의 지성 안에 갇혀 있는 포로이다. 외로움이 끝나고 너희와 함께 물질적 의복과 시간의 옷의 한계를 벗어나도록, 너희의 필사 지성이 신성(神性)에 이르기를 몹시 바란다.
107:6.3 (1182.5) 너희가 파라다이스에 이르는 길은 영에 도달하는 길이요, 조절자의 성품은 우주의 아버지의 영적 성품의 계시를 충실하게 펼쳐 보일 것이다. 파라다이스에 올라간 뒤에, 영원한 생애의 최후자 이후 단계에서, 영으로 하지 않는 다른 봉사에서 조절자는 옛날의 인간 짝과 아마도 접촉할지 모른다. 그러나 파라다이스에 올라가는 것과 최후자로 사는 생애는, 하나님을 알고 영답게 변화하는 필사자, 그리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조절자가 베푸는 영적 봉사가 협동하는 관계이다.
107:6.4 (1182.6) 우리는 생각 조절자가 영, 순수한 영, 짐작컨대 절대 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조절자는 또한 순전한 영 실체보다 더 큰 무엇임이 틀림없다. 지성을 가졌다는 추측에 덧붙여서, 또한 순수 에너지의 요인들도 있다. 하나님이 순수 에너지와 순수 영의 근원임을 너희가 기억한다면, 그의 분신들이 이 두 가지임을 깨닫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조절자가 파라다이스 섬의 순간적ㆍ보편적 인력 회로를 타고 공간을 통과하는 것은 사실이다.
107:6.5 (1182.7) 이처럼 신비의 훈계자가 온 우주의 물질 회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수수께끼이다. 그들이 물질 인력(引力) 회로를 타고 대우주 전역에 걸쳐 번쩍이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그들이 바깥 공간 수준까지 파고들 수 있다는 것이 아주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파라다이스 인력이 있는 자리를 따라서 이 지역들로 분명히 갈 수 있다. 내 계급의 성격자는, 또한 대우주의 경계를 지나서 합동 행위자의 지성 회로를 거쳐 갈 수 있지만, 우리는 바깥 공간에 지도가 그려지지 않은 지역에서 조절자들이 계심을 확실히 탐지한 적이 없다.
107:6.6 (1183.1) 그리고, 물질 인력 회로를 이용하지만, 그래도 조절자는 물질 창조처럼 그에 지배되지 않는다. 조절자는 인력으로부터 생긴 결과가 아니라, 인력의 조상의 분신이다. 그들은 인력의 출현을 앞선다고 가정되는 한 우주 수준의 존재에서 조각이 되었다.
107:6.7 (1183.2) 생각 조절자는 그들이 수여될 때부터 필사 주체가 자연스럽게 죽고 나서 신별을 향하여 떠나려고 풀려나는 날까지 조금도 쉬지 않는다. 자기의 주체가 자연사의 문을 거치지 않는 그러한 조절자는 이 일시의 휴식조차도 얻지 못한다. 생각 조절자는 에너지 흡수가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에너지요, 가장 높고 신성한 서열의 에너지이다.
107:7.1 (1183.3) 생각 조절자는 인격자가 아니지만, 실재하는 개체이다. 필사자에게 깃드는 동안, 결코 실제로 인격을 갖추지 않지만, 그들은 참으로 완전하게 개별화되었다. 생각 조절자는 참 인격자가 아니요, 참 실체이다, 온 우주에서 알려진 가운데 가장 순수한 서열의 실체이다―신의 계심이다. 비록 인격은 없지만, 아버지의 놀라운 이 분신은 존재로서, 그리고 그들이 필사자에게 현재 베푸는 봉사의 영적 단계에 비춰 보아, 때때로 영 개체로서 보통 언급된다.
107:7.2 (1183.4) 생각 조절자가 의지(意志)하는 특권과 선택하는 힘이 있는 인격자가 아니라면, 그들이 어떻게 필사 주체를 고르고 진화 세계에 있는 이 인간들에게 깃들려고 자원할 수 있는가? 이것은 묻기는 쉬워도, 아마도 온 우주에서 아무 존재도 결코 꼭 맞는 답을 발견하지 못했다. 내 계급의 성격자, 외톨 사자들조차, 성격이 아닌 개체에서 의지ㆍ선택ㆍ사랑이 부여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107:7.3 (1183.5) 생각 조절자가 선택하는 모든 선(先)인격 수준에서 의지를 가졌음이 틀림없다고 우리는 가끔 추측해 왔다. 그들은 인간에게 깃들려고 자원하고, 사람의 영원한 생애를 위하여 계획을 세우며, 상황에 따라서 적응하고 수정하고 대체하는데, 이러한 활동은 진정한 의지(意志)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필사자에게 애정을 가졌고, 우주의 위기에 활동하며, 인간의 선택에 따라서 단호하게 행동하기를 늘 기다리고 있는데, 이 모두가 상당히 의지하는 반응이다. 인간 의지의 분야와 관계되지 않은 모든 상황에 그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권한의 행사, 어떤 의미에서도 의지에 해당하는 것, 극대화된 결정을 가리키는 행위를 나타낸다.
107:7.4 (1183.6) 조절자가 의지를 가졌다면, 어째서 필사 의지에 굴종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은 조절자의 의지가 절대 성질이 있기는 하지만, 선(先)인격으로 의지가 표시되기 때문이라 우리는 믿는다. 인간의 의지는 우주 실체의 인격 수준에서 활동하며, 우주에서 두루, 비성격인 것―즉 성격이 아닌 것, 성격 밑에 있는 것, 선(先)인격인 것―은 존재하는 인격자의 의지와 행위에 늘 민감하다.
107:7.5 (1183.7) 창조된 존재들과 비성격 에너지가 있는 우주에 두루, 우리는 성격과 동떨어져서 뜻ㆍ의지ㆍ선택ㆍ사랑이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지 못한다. 조절자와 기타 비슷한 개체들의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는 비성격 실체들과 연합하여 활동하는, 이러한 성격의 속성을 구경하지 못한다. 조절자를 인격 이하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겠고, 그러한 개체를 초월 인격이라고 암시하는 것도 적당하지 않을 터이나, 그러한 존재를 선(先)인격이라 말하는 것이 전적으로 괜찮을 것이다.
107:7.6 (1184.1) 우리 계급의 존재에게, 신의 이 분신은 신의 선물이라 알려져 있다. 조절자는 기원이 신성하다는 것, 그들이 우주의 아버지의 거의 무한한 영역에 두루, 모든 물질 인간과 직접 한없이 교통하는 가능성을 우주의 아버지가 남겨두었음을 가리키는 그럴듯한 증명이자 시범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며, 이 모든 것은 그가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성격 안에 조절자의 계심이나 무한한 영의 성격자들 안에서 조절자가 간접으로 베푸는 봉사를 통하는 것과 별도이다.
107:7.7 (1184.2) 신비의 훈계자를 맞아들이는 주인이 되기를 기뻐하지 않을 지음받은 존재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최후자가 될 운명을 가진 사람, 의지를 가진 진화된 인간을 제외하고, 아무 계급의 존재에게도 이처럼 깃들지 않는다.
108:0.1 (1185.1) 인류에 대하여 생각 조절자가 이룰 사명은 시공의 필사 인간에게 우주의 아버지를 대표하고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의 선물이 근본적으로 할 일이다. 그들의 사명은 또한 필사자의 정신을 키우고, 사람의 불멸의 혼을 신다운 높이까지, 그리고 파라다이스의 완전한 영적 수준까지 변화시키는 사명이다. 이렇게 일시적 생물인 인간의 성품을 영원한 최후자의 신다운 성품으로 변화시키는 체험을 겪으면서, 조절자는 한 독특한 종류의 존재, 완전한 조절자와 완전해진 인간의 영원한 결합인 존재가 생기게 하며, 그런 존재는 우주의 어떤 다른 기술로도 복사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108:0.2 (1185.2) 우주 전체에서 아무것도 비실존적[1] [1772] 수준에서 겪는 체험의 사실을 대신할 수 없다. 무한한 하나님은 언제나 그렇듯이, 충만하고 완벽하며, 악과 사람의 체험을 제외하고, 만물을 무한히 둘러싼다. 하나님은 그릇된 일을 할 수 없고, 그르칠 수 없다. 하나님은 친히 겪어보지 않은 것을 체험적으로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선견은 실존적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영은 파라다이스로부터 내려와서 유한한 필사자와 함께, 하늘 가는 생애에서 일어나는 모든 진정한 체험에 참여한다. 오로지 그러한 방법으로 실존적인 하나님은 진실로, 사실로, 사람에게 체험하는 아버지가 될 수 있다. 영원한 하나님의 무한은 유한한 체험을 거치는 가능성을 포함하며, 정말로 그 가능성은 인간이 인생의 부침을 겪는 체험을 실제로 나누는, 조절자 분신이 베푸는 봉사에서 사실이 된다.
108:1.1 (1185.3) 신별로부터 필사자에게 봉사하려고 파송될 때, 조절자들의 실존적 신성 자질은 동일하지만, 진화하는 인간 속에서, 그들과 이전에 접촉한 것에 비례하여, 체험의 질이 다르다. 우리는 조절자를 배치하는 근거를 설명할 수 없지만, 깃든 성격자에게 적응하는 데 영원히 적합한 어떤 지혜로운 효과적 정책에 따라서, 이 신의 선물이 수여된다고 추측한다. 우리가 지켜보건대, 체험을 더 겪은 조절자가 흔히 상급 부류의 인간 지성에 깃드는 자이다. 따라서 인간의 유전은 선택과 배치를 결정하는 데 상당한 요인임이 틀림없다.
108:1.2 (1185.4) 비록 분명히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모든 생각 조절자가 자원자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언제라도 자원하기에 앞서, 그들은 깃들 후보자에 관하여 완전한 자료를 소유한다. 천사가 작성한 가계(家系)의 초안, 그리고 예상된 생애 활동의 형태가 지역 우주의 서울로부터 초우주 본부까지 안으로 뻗는 반영 기법으로, 파라다이스를 거쳐서 신별에 있는 조절자 예비군에 전달된다. 이 예측은 필사 후보자의 선행(先行)하는 유전 조건 뿐 아니라, 있음직한 지적(知的) 자질과 영적 능력의 평가도 다룬다. 이렇게 조절자들은 지성의 자세한 성품에 관하여 충분히 통지를 받은 그러한 지성에 깃들려고 자원한다.
108:1.3 (1186.1) 자원하는 조절자는 인간 후보자의 세 가지 자격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다:
108:1.4 (1186.2) 1. 지적 능력. 그 지성이 정상인가? 지적 잠재성, 지능 능력이 무엇인가? 그 개인이 진정한 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자랄 수 있는가? 지혜가 활동할 기회가 있는가?
108:1.5 (1186.3) 2. 영적 이해. 경건하게 발전할 전망, 즉 종교적 성품이 태어나고 성장할 전망. 혼의 잠재성, 얼마큼 영적 수용 능력이 예상되는가?
108:1.6 (1186.4) 3. 지적 능력과 영적 능력의 총합. 이 두 자질이 강건한 인품을 낳고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불사(不死)의 혼을 확실히 진화시키는 데 기여하도록 어느 정도로 연합하고 통합하는 것이 가능한가.
108:1.7 (1186.5) 이 여러 사실을 앞에 놓고, 훈계자들은 배치를 받으려고 자유롭게 자원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아마도 조절자가 한 명이 넘게 자원한다. 아마도 이 무리의 자원하는 조절자들로부터 필사 후보자의 인격을 영적으로 변화시키고 영원하게 만드는 과제에 가장 적당한 자를, 인격을 얻은 감독 계급들이 고른다. (조절자들의 배치와 근무에서 사람이 남자인가 여자인가는 고려되지 않는다.)
108:1.8 (1186.6) 조절자가 자원하고 실제로 파송되는 사이에 끼는 짧은 시간은, 추측컨대 인격화 된 훈계자들의 여러 신별 학교에서 보내는데, 거기서 기다리는 필사 지성의 기초 형태가, 성격에 접근하고 지성을 영이 되게 만드는 데 가장 효과 있는 계획에 관하여 배치된 조절자를 가르치는 데 이용된다. 이 지성 모형은 초우주 거울 봉사가 제공하는 자료를 종합하여 작성된다. 적어도 이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요, 외톨 사자들의 긴 우주 생애를 통해서 내내, 인격을 얻은 숱한 조절자와 접촉함으로 얻은 정보를 종합한 결과로서 우리가 얻은 의견이다.
108:1.9 (1186.7) 조절자가 실제로 신별에서 일단 파송되고 나서, 그 순간과 선택한 주체의 지성 속에 나타나는 시각 사이에, 실질적으로 아무런 시간이 개재하지 않는다. 신별로부터 유란시아까지 조절자가 이동하는 데 걸리는 평균 시간은 117 시간, 42분, 7초이다. 이 시간의 거의 모두가 유버르사에서 등록하는 데 쓰인다.
108:2.1 (1186.8) 인격자에 관한 예측이 신별로 전달되자마자 조절자들이 봉사를 자원하지만, 인간 주체가 처음으로 도덕적 인격자로서 결정을 내리기까지, 그들은 실제로 배치되지 않는다. 인간 아이가 처음으로 내리는 도덕적 선택은 일곱째 지성 보조자 안에 자동으로 표시되고, 지역 우주 창조 영을 거쳐서, 초우주 관할 으뜸 영이 계신 가운데 합동 행위자의 보편적 지성 인력(引力) 회로에 순간에 등록된다. 당장에 그 으뜸 영은 이 정보를 신별로 보낸다. 조절자들은 유란시아에, 평균하여 여섯째 생일 바로 전에, 인간 주체에게 도착한다. 현재 세대에, 5년 10개월과 4일이 걸린다. 다시 말해서, 땅에서 살면서 2134번째 날이다.
108:2.2 (1187.1) 보조하는 지성 영들의 깃드는 봉사로 정식으로 준비되고 성령 안에 회로가 이어질 때까지, 조절자는 필사자의 지성에 침투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 조절자를 받기 위하여 인간 지성이 이렇게 자격을 갖추게 하려고 모두 일곱 보조자가 나란히 활동하는 것이 요구된다. 사람의 지성이 예배를 향하여 손을 뻗는 태도를 나타내고, 솟아나는 선과 악의 가치 사이에서 택하는―도덕적 선택―능력을 나타냄으로 지혜가 작용함을 가리켜야 한다.
108:2.3 (1187.2) 이렇게 조절자를 받기 위하여 인간 지성의 무대가 마련된다. 그러나 다른 이 영 봉사의 영적 조정자로서 진리의 영이 활동하고 있는 세계들을 제쳐놓고, 대체로 그들은 그러한 지성에 깃들려고 금방 나타나지 않는다. 수여 아들의 이 영이 계시면, 일곱째 보조 지성 영이 활동하기 시작하고, 이 지성 영이 그러한 필사 지능에게 앞서 봉사한, 관계된 여섯 보조자를 조정하는 잠재성을 얻었다고 우주 어머니 영에게 알리는 그 순간, 조절자가 어김없이 온다. 따라서 오순절 시절 이후로 늘, 유란시아에서 도덕적 지위를 가진 모든 정상 지성에게 신다운 조절자가 보편적으로 수여되었다.
108:2.4 (1187.3) 진리의 영을 받은 지성의 경우에도, 조절자는 도덕적 결정이 나타나기 전에 필사자의 지능에 멋대로 쳐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도덕적 결정이 내렸을 때, 신별로부터 직접, 이 영 조수가 관할권을 맡는다. 신다운 조절자와 그 인간 주체 사이에 작용하는 아무런 중재자나 또는 사이에 끼어드는 다른 권한이나 권력이 없다. 하나님과 사람은 바로 관련되어 있다.
108:2.5 (1187.4) 진화 세계의 거주자들에게 진리의 영이 퍼부어지는 시절 이전에, 조절자의 수여는 여러 가지 영의 영향과 인격자의 태도에 따라서 결정되는 듯하다. 우리는 그런 수여를 지배하는 법칙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한 진화하는 지성에 깃들려고 자원한 조절자들의 해방을 도대체 무엇이 좌우하는지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의 영이 수여되기 전에 그러한 지성 속에 조절자가 도착하는 것과 관계된 듯 보이는 수많은 영향과 조건을 관찰하는데, 다음과 같다:
108:2.6 (1187.5) 1. 개인 수호 천사가 배치되는 것. 한 필사자에게 전에 조절자가 깃들지 않았으면, 개인 수호자의 배치는 조절자를 당장에 데려 온다. 조절자의 봉사와 개인 수호 천사가 베푸는 봉사 사이에 아주 분명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관계가 더러 존재한다.
108:2.7 (1187.6) 2. 지적 달성과 영적 성취 면에서 3급 수준에 이르는 것. 3급 수준에 도달하고 나서, 그러한 성취가 그러한 문제에 관여하는 지역 우주 성격자들에게 미처 알릴 수 있기도 전에, 조절자가 필사 지성 안에 도착하는 것을 나는 지켜보았다.
108:2.8 (1187.7) 3. 특별한 영적 중요성이 있는 최상의 결정을 내리고 나서. 행성에서 개인의 위기가 있을 때, 그러한 인간 행동에는 기다리는 조절자가 즉시 도착하는 일이 따른다.
108:2.9 (1187.8) 4. 형제 사랑의 정신. 정신적 수준에 도달하고 개인 수호자들을 배치받는 것과 상관 없이―위기에 내리는 결정과 비슷한 아무것이 없어도―진화하는 필사자가 동료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지배되고, 육체를 입은 동포에게 사심 없이 봉사하려고 헌신했을 때, 기다리는 조절자는 어김없이 그러한 필사 봉사자의 지성에 깃들려고 내려온다.
108:2.10 (1188.1) 5.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의도(意圖)를 선언하는 것. 공간 세계에서 많은 필사자가 겉보기에 조절자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싶은데, 그래도 훈계자가 나타나지 않음을 우리는 관찰한다. 그러한 사람들이 나날을 사는 대로 그들을 줄곧 지켜보는데, 금방 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추구를 시작할 결정에 조용히, 거의 의식하지 않고서 도달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생각 조절자가 당장에 파송됨을 관찰한다.
108:2.11 (1188.2) 6. 최상 존재의 영향. 조절자가 필사 거주자의 진화하는 혼과 융합하지 않는 세계에서,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영향에 반응하여 조절자가 때때로 수여되는 것을 우리는 지켜본다. 그러한 수여는 최상 존재에서 기원을 가지는 어떤 우주 반사 작용으로 말미암아 결정된다고 우리는 추측한다. 어째서 이 조절자들이 어떤 부류의 진화하는 필사 지성과 융합할 수 없는지 또는 융합하지 않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한 거래는 우리에게 밝혀진 적이 없다.
108:3.1 (1188.3) 우리가 아는 한, 조절자들은 온 우주에서 독립된 작업 단위로 조직되고, 신별로부터 직접 관리되는 듯하다. 그들은 일곱 초우주에 두루 한결같고, 동일한 종류의 신비의 훈계자들이 모든 지역 우주에서 봉사한다. 우리는 수많은 시리즈의 조절자가 있음을 지켜보아서 아는데, 이것은 종족들을 통해서, 섭리 시대를 넘어서, 그리고 여러 세계ㆍ체계ㆍ우주에 뻗는 연속된 조직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들이 대우주에서 두루 서로 교환할 수 있게 활동하기 때문에, 이 신의 선물들을 추적하기가 극도로 어렵다.
108:3.2 (1188.4) 조절자들은 (신별 바깥에서) 오직 일곱 초우주 본부에서만 완벽하게 기록에 올라 있다. 하늘 가는 각 사람에 깃드는 각 조절자의 번호와 계급은 파라다이스 당국이 바깥에 초우주 본부로 보고하며, 거기서부터 관계된 지역 우주 본부에 통신되고, 관련된 특정한 행성에 전달된다. 그러나 지역 우주의 기록은 생각 조절자들의 총 번호를 밝히지 않는다. 네바돈 기록에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대표들이 지정한 대로, 오직 지역 우주의 배치 번호만 들어 있다. 조절자의 총 번호의 참 의미는 오직 신별에서만 알려져 있다.
108:3.3 (1188.5) 인간 주체는 그 조절자의 번호로 흔히 알려진다. 필사자는 조절자와 융합하기까지 진짜 우주 이름을 받지 않으며, 운명 수호자가 그 새 사람에게 새 이름을 수여함으로 그 결합이 알려진다.
108:3.4 (1188.6) 비록 우리가 오르본톤에 있는 생각 조절자들의 기록을 가졌고 그들에 대하여 절대로 아무 권한도 없고 그들과 행정 연락도 없지만, 우리는 지역 우주의 개별 세계들과 신별에 있는 신의 선물들의 중앙 거점(據點) 사이에, 무척 밀접한 행정적 연락이 있다고 굳게 믿는다. 우리는 수여되는 파라다이스 아들이 나타난 뒤에, 진화하는 세계가 행성에서 조절자들의 감독자인, 인격이 된 조절자 하나를 배치받는 것을 안다.
108:3.5 (1189.1) 지역 우주 검열자들이 행성 검사를 시행할 때, 그들이 세라핌의 우두머리들에게, 그리고 한 진화하는 세계의 행정부에 딸린 다른 계급 존재들의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떠맡기는 것과 똑같이, 행성의 생각 조절자의 우두머리에게 언제나 말하는 것을 주목하기는 흥미롭다. 유란시아는 타바만시아에게 그러한 정기 검열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는데, 그는 네바돈 우주에서 모든 생명 실험 행성을 다스리는 감독자이다. 초인간 성격자의 우두머리들에게 훈계와 기소장을 발표한 데 보태어, 그가 조절자의 우두머리에게 다음의 감사 말씀을 또한 발표했다는 것을 여러 기록이 드러낸다. 그 우두머리가 행성이나 구원자별이나 유버르사나 또는 신별에 있었는지 우리는 분명히 알지 못하지만, 타바만시아는 이렇게 말했다:
108:3.6 (1189.2) “이제 당신들, 나보다 훨씬 위에 있는 상관들에게, 체험 행성 시리즈에 일시 권한의 자리에 배치받은 자로서 옵니다. 이 불규칙한 구체(球體)에서 봉사하려고 자청한 이 훌륭한 무리의 하늘 봉사자, 신비의 훈계자들에게 찬미와 깊은 존경을 표현하려고 옵니다. 아무리 어려운 위기에도 당신들은 결코 넘어지지 않습니다. 네바돈의 기록에서나 오르본톤 위원회 앞에서도, 결코 신다운 조절자 하나를 기소한 적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책임을 맡긴 대로 이행하였고, 신답게 충실했습니다. 혼란에 빠진 이 행성에서 수고하는 모든 자의 잘못을 조절하고 부족함을 메우는 데 당신들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당신들은 놀라운 존재요, 이 뒤처진 영역의 혼들 속에서 좋은 것을 지키는 분입니다. 자원 봉사자로서 겉보기에 내 관할 밑에 있는 동안에도, 나는 당신들에게 존경을 표합니다. 당신들의 지극한 사심 없는 정신, 이해심 있는 봉사, 치우치지 않는 헌신을 겸손히 인식하면서 나는 당신들 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당신들에게는 싸움에 찢기고, 비탄에 잠기고, 병에 시달리는 이 세상에서 필사 거주자에게 하나님 같은 봉사자라는 이름이 마땅합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영예를 돌립니다! 경배만 제외하고 당신들에게 모든 것을 인정합니다!”
108:3.7 (1189.3) 암시하는 여러 증거의 결과로서, 우리는 조절자들이 철저히 조직되었고, 아득히 멀고 중앙에 있는 어떤 근원, 아마 신별로부터, 이 신의 선물들을 무척 총명하고 효과 있게 지휘하는 행정부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그들이 신별로부터 여러 세상으로 가고, 그들의 주체가 죽고 나서, 의심할 여지 없이 거기로 돌아간다는 것을 안다.
108:3.8 (1189.4) 상위 영 계급들 사이에서는 행정 작용을 찾아내기가 극도로 어렵다. 내 계급의 성격자들은 우리의 특정한 임무를 집행하면서, 의심할 여지 없이, 널리 퍼진 우주를 서로 관련짓게 하는 자로서 하나되어 활동하고 있는 집단, 수많은 다른 성격 집단 및 신 이하의 비성격 집단과 함께 의식하지 않고서 참여하고 있다. (인격이 된 조절자들을 제쳐놓고) 우리가 수많은 계급의 선(先)인격 개체들의 계심을 한결같이 의식하는, 인격이 된 유일한 집단의 생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처럼 일하고 있다고 우리는 추측한다.
108:3.9 (1189.5) 우리는 조절자들의 계심을 의식하며, 이들은 첫째 근원 중심의 선(先)인격 신 조각이다. 우리는 영감 받은 삼위일체 영들의 계심을 느끼며, 이들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초월 성격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으로부터 솟아나는, 어떤 밝혀지지 않은 여러 계급이 영으로 계심을 어김없이 알아차린다. 그리고 너희에게 밝혀지지 않은 또 다른 개체들에 대하여 우리가 온통 무감각하지는 않다.
108:3.10 (1190.1) 외톨 사자들은 진화하는 최상 존재의 확대되는 신 안에 기록되는 이 여러 가지 영향을 조정하는 성격자라고 네바돈의 멜기세덱들은 가르친다. 시간 세계의 설명되지 않은 숱한 현상을 체험으로 통일하는 데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 매우 가능성이 있지만, 우리는 이렇게 활동하는 것을 확실히 의식하지 않는다.
108:4.1 (1190.2) 신의 다른 분신들과 조정하는 가능성을 제쳐놓고, 조절자는 필사 지성 속에서 활동하는 분야에서 아주 혼자이다. 아버지가 대우주에서 두루, 모든 능력과 권한을 직접 친히 행사하는 것을 그만두신 듯 보이지만, 파라다이스 신들의 자식인 최상 창조자들의 이익을 위하여 이 기권(棄權) 행위가 있는데도, 아버지는 진화하는 인간의 지성과 혼 속에 계시는,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권리를 자신에게 분명히 남겨 놓았다는 사실을 신비의 훈계자들이 웅변으로 말해 준다. 이것은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영적 인력과 일치하여, 창조된 모든 인간을 그에게로 끌어당기도록 행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아직 유란시아에 계실 때, 너희에게 수여된 파라다이스 아들은 말했다, “내가 들려 올라가면, 모든 사람을 끌어당기리라.” 우리는 파라다이스 아들과 그 창조 동료들이 영적으로 당기는 이 힘을 알아차리고 이해하지만, 인간의 지성 안에서 그렇게 용감히 살고 일하는 이 신비의 훈계자 속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온통 지혜로운 아버지가 어떻게 활동하는지 그렇게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108:4.2 (1190.3) 비록 사람의 자녀의 지성 속에서 독립되어 행동하지만, 온 우주의 작업에 종속되거나 이와 조화되거나 또는 겉으로 관계된 듯하지 않으면서, 이 신비스러운 존재들은 깃드는 사람에게 신의 이상을 향하도록 재촉하며, 앞날의 더 나은 삶의 목적과 목표를 향하여 사람을 언제나 위로 유혹한다. 이 신비의 훈계자는 네바돈 우주에서 두루, 미가엘의 영적 국가를 세우는 데 끊임없이 보조하며, 한편 오르본톤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통치권을 안정시키는 데 신비롭게 이바지한다. 조절자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아이인 최상 창조자들이 또한 바로 그 뜻을 몸소 구현하니까, 조절자의 행위와 우주 통치자의 통치권이 서로 의존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비록 겉으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아버지가 조절자로 계심과 아버지가 네바돈 미가엘로 통치하는 권한은 같은 신성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임이 틀림없다.
108:4.3 (1190.4) 생각 조절자는 어떤 다른 영적 계심과 아주 상관 없이, 오가는 듯이 보인다. 그들은 모든 다른 영(靈) 영향의 성과를 다스리고 통제하는 것과 아주 동떨어져서 우주 법칙에 따라서 활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외관상의 독립성과 상관 없이, 장기간에 걸친 관찰의 결과는 보조 지성 영들, 성령, 진리의 영, 그리고 기타 영향을 포함하여, 조절자가 모든 다른 영의 봉사와 완전한 동시화되고 조정되어 인간 지성 속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 없이 드러낸다.
108:4.4 (1190.5) 칼리가스티아 동란이 있은 뒤에 유란시아가 고립되었던 것처럼 한 세계가 반란으로 고립될 때, 한 행성이 모든 바깥의 연결된 통신으로부터 차단될 때, 개인 사자들을 제쳐놓고, 행성 사이나 우주와 직접 통신하는 오직 하나의 가능성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구체들에 있는 조절자들의 연락을 통하는 것이다. 한 세계에서나 한 우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없이, 조절자는 결코 직접 아랑곳하지 않는다. 한 행성의 고립은 결코 조절자에게, 그리고 그들이 지역 우주나 초우주나 중앙 우주의 어느 부분하고도 통신하는 능력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것이 어째서 격리된 세계에서, 운명 예비군에 속하는, 최상이자 스스로 행동하는 조절자들과 접촉이 그리 자주 일어나는가 하는 까닭이다. 행성이 고립되는 장애를 둘러가는 수단으로서 그러한 기법이 이용된다. 최근에는 천사장 회로가 유란시아에서 활동했지만, 그 통신 수단은 대체로 천사장 군단 자체의 거래에 국한된다.
108:4.5 (1191.1) 방대한 우주에서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여 어리둥절한 많은 영 현상을 우리는 인식한다.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우리는 아직도 통달한 자가 아니다. 이 헤아릴 수 없는 일의 상당 부분은 인력 사자와 어떤 종류의 신비의 훈계자들이 해낸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조절자가 오로지 필사의 정신을 개조하는 데만 헌신한다고 믿지 않는다. 인격을 갖춘 조절자와 기타 계급의 밝혀지지 않은 선(先)인격 영들은, 그 영역의 사람들과 우주의 아버지가 직접 가지는 접촉, 설명되지 않은 접촉에 대표자라고 나는 확신한다.
108:5.1 (1191.2) 유란시아에서 사는 것과 같은 복합 존재에 깃들려고 자원할 때 조절자는 어려운 임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들은 너희 지성 속에 존재하며, 거기서 그 영역의 영적 지능들의 훈계를 받고, 그리고 나서 전하는 이 영적 말씀을 물질 지성에게 다시 받아쓰게 하거나 번역해 주는 일을 도맡아 왔다. 그들은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데 꼭 필요하다.
108:5.2 (1191.3) 인간이 충분한 정도로 협동하는 능력이 없거나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 주체의 체험에서 명심하지 못하는 사항을 지금 한 수준에서 다음 수준으로 조절자가 이월하는 것 같이, 생각 조절자가 너의 현재 인생에서 이용할 수 없는 것, 약혼한 사람에게 제대로 전할 수 없는 진리를 그는 다음 단계의 존재에서 쓰도록 충실하게 간직할 것이다.
108:5.3 (1191.4) 한 가지 너희가 믿을 수 있는 것이 있다: 조절자는 자신이 보호하라고 맡긴 어떤 것도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 돕는 영이 일을 게을리 했다는 소리를 우리는 들은 적이 없다. 지역 우주 부류의 아들들도 포함하여, 천사 및 다른 높은 부류의 영 존재들은 때때로 악을 용납하고 때때로 신의 길을 벗어날지 모르지만, 조절자는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절대로 믿을 만하며, 이것은 모두 일곱 집단에게 똑같이 참말이다.
108:5.4 (1191.5) 너의 조절자는 너의 새로운 다음 단계 존재의 잠재성이요, 네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되는 자격을 미리 수여한 것이다. 네 의지가 찬성함으로, 그 찬성을 얻어서, 조절자는 물질 지성의 인간 성향을, 태어나는 상물질 혼의 동기와 목적을 가진 행위, 사람을 변화시키는 행위에 굴복시키는 힘을 가졌다.
108:5.5 (1191.6) 신비의 훈계자는 생각을 돕는 자가 아니라, 생각을 조절하는 자이다. 그들은 새 세계들을 위한 새로운 지성과 너의 미래 생애의 새 이름을 만들 목적으로, 조정하고 영답게 변화시킴으로, 물질 지성과 함께 수고한다. 그들의 사명은 현세의 인생이 아니라, 주로 앞날의 인생과 관계된다. 그들은 이 세상의 조수가 아니라, 하늘의 조수라 부른다. 그들은 필사자의 생애가 술술 풀리게 만드는 데 관심이 없고, 오히려 자극하여 결심하게 하고 결심하는 일이 많이 늘어나도록 너의 생애를 적당히 어렵고 거칠게 만드는 데 관심을 가진다. 위대한 생각 조절자가 계심은 생활을 편안하게 하거나 고심하는 생각으로부터 해방시키지 않지만, 그러한 신의 선물은 지극히 마음을 안정시키고 더할 나위 없이 정신을 평안하게 만들어야 한다.
108:5.6 (1192.1) 일시적이고 항상 변하는 너의 기쁘고 슬픈 감정은 대체로, 네 속의 정신 상태와 바깥 물질 환경에 대한 순전히 인간답고 물질적인 반응이다. 그러므로 이기적 위안과 인간적 위로를 얻으려고 조절자를 바라보지 말라. 영원한 모험을 위하여 너를 준비시키는 것, 네가 꼭 살아남게 하는 것이 조절자가 할 일이다. 너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지거나 너의 다친 자존심을 따독거리는 것이 신비의 훈계자의 사명이 아니다. 조절자의 눈을 끌고 그의 시간을 차지하는 것은, 하늘 가는 오랜 생애를 위하여 너의 혼을 준비하는 일이다.
108:5.7 (1192.2) 조절자가 너희의 지성 속에서, 너희의 혼을 위하여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의심이 든다. 신다운 훈계자와 인간 지성이 우주에서 연합할 때 무슨 일이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가 내가 충분히 인식하는지 나는 모른다. 계획과 목적이 아니라, 성취하는 실제 방식에 관하여,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얼마큼 신비이다. 이것이 바로 어째서 필사 인간에게 주는 이 하늘 선물을 일컬을 적당한 이름을 찾는 데 우리가 그러한 어려움에 부딪치는가 하는 이유이다.
108:5.8 (1192.3) 생각 조절자는 너희의 두려워하는 느낌을 사랑과 자신감의 확신으로 바꾸고 싶어한다. 그러나 기계처럼 멋대로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그것은 네가 할 일이다. 너를 두려움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결정을 집행하면서 너는 글자 그대로 정신적 지레 받침을 제공하고, 그 위에 조절자는 들어올리고 진보하는 빛을 주는 영적 지렛대를 나중에 움직일지 모른다.
108:5.9 (1192.4) 종족들의 높은 성향과 낮은 성향 사이에, (단지 네가 옳다, 그르다 부를까 싶은 것들이 아니라) 정말로 옳거나 그른 것 사이에 날카롭고 윤곽이 뚜렷한 갈등이 일어날 때, 그러한 체험에 조절자가 분명하고 적극적인 어떤 방법으로 반드시 참여할 것을 너는 믿을 수 있다. 그러한 조절자 활동을 그 인간 짝이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조금도 그 가치와 현실성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108:5.10 (1192.5) 네가 개인 운명 수호자를 가지고도 살아남지 못한다면, 그 수호 천사는 그에게 맡긴 일을 충실히 집행했는가 확인 받기 위해서 판결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생각 조절자는 그 주체가 살아남지 못할 때 그렇게 검사를 받지 않는다. 천사는 아마도 완전한 봉사에 미치지 못할지 모르지만, 생각 조절자가 파라다이스의 완전한 방법으로 일하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안다. 그들의 봉사는 신별 바깥에 있는 어떤 존재에게도 비난 받을 가능성이 없는, 티 없는 기법의 특징을 가진다. 너희는 완전한 안내자를 가졌다. 따라서 완전의 목표를 분명히 달성할 수 있다.
108:6.1 (1192.6) 고귀하고 완전한 조절자가 땅에서 동물 기원을 가진 존재와 시험적 결합을 정말로 완성하려고, 유란시아 필사자와 같은 물질 인간의 지성 속에서 실제로 존재하려고 스스로 나서는 것은 정말로 신답게 신분을 낮추는 놀라운 일이다.
108:6.2 (1193.1) 한 세계의 거주자들이 전에 무슨 지위를 가졌든지 상관 없이, 신다운 아들이 자신을 수여한 뒤에, 그리고 진리의 영이 모든 인간에게 내린 뒤에, 조절자는 의지를 가진 모든 정상 인간의 지성에 깃들려고 그러한 세계로 몰려든다. 수여된 파라다이스 아들의 사명이 끝나고 나서, 이 훈계자들은 참으로 “너희 안에 있는 하늘 나라”가 된다. 신의 선물을 내려주심으로 아버지는 죄와 악에 가능한 가장 가깝게 접근한다. 이는 조절자가 인간이 저지르는 불의(不義) 한가운데에서도 필사 지성 속에서 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글자 그대로 참말이기 때문이다. 깃드는 조절자는 순전히 더럽고 이기적인 생각으로 인하여 특히 고통을 받는다. 그들은 아름답고 신성한 것이 무시됨을 답답해하며, 사람의 어리석고 동물 같은 많은 두려움과 유치한 걱정 때문에 그들이 하는 일은 거의 좌절된다.
108:6.3 (1193.2) 신비의 훈계자는 의심할 여지 없이, 우주의 아버지를 수여한 것, 우주에서 바깥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사람은 머리 속의 정신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올바름 속에서, 완벽한 진리 가운데 창조된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한때 어느 위대한 선생이 훈계하였다. 조절자는 신, 하나님이 자리에 계신 표시이다. “하나님의 모습”은 신체의 비슷함이나 사람의 물질적 자질의 제한된 한계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우주에 있는 비천한 인간들에게 생각 조절자를 신이 수여하면서 우주의 아버지가 영으로 계시는 선물을 말한다.
108:6.4 (1193.3) 조절자는 네 안에서 영적 달성의 원천이요, 신다운 인격을 얻을 희망이다. 그는 살아남는 권능이요 특권이요 가능성이니, 이것은 너를 완전히, 언제까지나, 단순한 동물과 구별한다. 물질적 육체의 신경 에너지 작용을 타고 지성에 미치는 바깥의 물리적 자극과 반대로, 그는 더 높고 참으로 내부에 있고 생각하게 하는 영적 자극이다.
108:6.5 (1193.4) 앞날의 생애를 맡은 이 충실한 보관자는 정신이 창조한 것은 무엇이나 영적 사본(寫本)으로 어김없이 복사한다. 이처럼 그들은 살아남는 세계에서 부활하도록 실제로 너희가 있는 그대로 (오직 영적으로), 천천히 확실하게 너희를 다시 만들고 있다. 지극하게 영적으로 다시 창조한 이것들은 모두, 너의 진화하는 불멸의 혼, 너의 상물질 자아로 태어나는 실체 속에 간직되고 있다. 조절자가 이렇게 만든 복사품을 의식이 깨닫는 빛에 드러나도록 충분히 떠올릴 수 있는 일이 드문데도, 이러한 실체들은 실제로 있다.
108:6.6 (1193.5) 참된 너, 너의 더 높고 진보하는 자아, 더 나은 상물질 자아이자 앞날의 영적 자아의 인간 조상이 너인 것처럼, 조절자는 참된 너의 신성한 조상이다. 심판과 검열자들이 네가 살아남는다고 선포하고 새로운 세계로, 너의 충실한 짝―조절자인 하나님―과 영원히 연락하면서 결코 그치지 않는 존재로, 위쪽으로 너를 통과시킬 때, 그들이 식별하는 것은 바로 이 진화하는 상물질 혼이다.
108:6.7 (1193.6) 조절자는 너희의 진화하는 불사의 혼의 영원한 조상이요 신성한 원본이다. 그들은 영적 미래 생애에 비추어서, 물질적인 오늘의 존재를 통달하려고 애쓰라고 사람을 이끄는 그침 없는 충동이다. 훈계자는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 가지고 옥에 갇혀 있는 자요, 영원한 진보의 원천이다. 얼마큼 직접 경로에서 자기의 주체와 교통하는 것을 그들이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상징과 기타 간접 방법을 던져 버리고 인간 파트너의 지능에게 전할 말을 곧장 번쩍 보낼 수 있을 때 얼마나 기뻐하는지!
108:6.8 (1194.1) 너희 인간은 거의 무한한 파노라마를 끝없이 펼치는 일을 시작하였고, 이것은 기운을 북돋아주는 봉사, 비할 데 없는 모험, 알 수 없는 숭고한 경지, 가없는 달성을 위하여, 결코 그치지 않고 항상 넓어지는 기회의 영역을 한없이 확장한다. 어두운 구름이 머리 위에 덮일 때, 너희의 믿음은 깃드는 조절자가 계신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너희는 필사자가 헤아릴 수 없는 안개를 지나서, 사타니아 저택 세계들이 손짓해 부르는 높이에 영원한 올바름의 해가 맑게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109:0.1 (1195.1) 생각 조절자는 우주 생애를 사는 아이이며, 정말로 처녀 조절자는 필사 인간이 자라고 발육하는 동안에 체험을 얻어야 한다. 인간 아이의 인격이 진화로 존재하는 싸움을 위하여 자라는 동안, 조절자도 다음 단계의 올라가는 삶을 연습하면서 성장하게 된다. 어린아이가 어린 시절 초기에 사회 생활과 놀이 생활을 통해서 어른 활동에 적응할 융통성을 얻는 것처럼, 깃드는 조절자도 상물질 생애와 상관 있는 활동을 필사자가 예비로 계획하고 연습하는 덕택으로, 다음 단계의 우주 인생을 위하여 기술을 터득한다. 인간적 존재는 미래 생명의 늘어나는 책임과 더 큰 기회를 위하여 준비하면서 조절자가 효과 있게 이용하는 연습 기간이다. 그러나 네 안에 살기는 해도, 조절자의 노력은 현세의 생활에서, 그리고 행성에서 존재하면서 일어나는 일에 그다지 관계되지 않는다. 오늘날 생각 조절자들은, 말하자면, 인간의 진화하는 지성 속에서 우주 생애의 현실을 미리 연습하고 있는 것이다.
109:1.1 (1195.2) 처녀 조절자가 신별에서 파송되기 전에 그들의 훈련과 발육을 위하여 포괄적이고 공들인 계획이 있는 것이 틀림없지만, 우리는 이에 대하여 그다지 많이 알지 못한다. 의심할 바 없이, 깃드는 체험을 가진 조절자가 필사자와 관계하는 새로운 사명에 발을 내디디기 전에, 다시 훈련시키는 광범위한 체계가 또한 존재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우리는 실제로 모른다.
109:1.2 (1195.3) 훈계자가 깃들었던 한 필사자가 살아남지 못할 때마다, 그 조절자가 신별로 돌아올 때 연장된 훈련 과정에 들어간다고 나는 인격이 된 조절자들한테서 들었다. 이 추가 훈련은 한 인간 속에 깃든 체험으로 인하여 가능하게 되고, 그 조절자가 진화하는 시간 세계들로 방면되기 전에 그 훈련이 실시된다.
109:1.3 (1195.4) 실제 살아보는 체험을 대신할 것은 우주에서 하나도 없다. 새로 생긴 생각 조절자의 완전한 신성은 이 신비의 훈계자에게 어떤 방식으로도 노련하게 봉사하는 능력을 부여하지 않는다. 체험은 살면서 존재하는 것과 떼어낼 수 없다. 체험은 너에게 신다운 자질이 아무리 많아도 실제로 삶으로 얻을 필요가 없다고 너에게 면제해 줄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따라서, 최상위의 현재 분야 안에서 살고 활동하는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생각 조절자는 체험을 얻어야 한다. 낮고, 경험이 없는 무리로부터 더 높고 경험을 얻은 무리로 진화해야 한다.
109:1.4 (1196.1) 조절자는 필사자의 지성 속에서 분명한 발전하는 생애를 거친다. 그들은 달성한 실체를 얻으며, 이것은 영원히 그들의 것이다. 특정한 필사 주체가 살아남든 그렇지 않든, 육체의 종족과 어떤 접촉을 가지더라도 그 결과로서 조절자는 그의 기술과 능력을 점진적으로 획득한다. 그들은 또한 살아남는 능력을 가진 불사의 혼의 진화를 촉진하는 일에 인간 지성과 동등하게 협동하는 자이다.
109:1.5 (1196.2) 조절자의 진화에서 첫 단계는 필사 존재의 살아남는 혼과 융합할 때 도달된다. 따라서, 너희는 본질적으로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 이르기까지 안쪽으로, 위로 진화하는 한편, 조절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바깥으로, 밑으로 진화한다. 그래서 이러한 신과 인간의 결합으로 생기는 최종 산물은 영원히 사람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아들일 것이다.
109:2.1 (1196.3) 너희는 체험과 관련하여 조절자 분류―처녀ㆍ상급ㆍ최상―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너희는 또한 어떤 기능적 분류―스스로 행동하는 조절자―도 알아보아야 한다. 스스로 행동하는 조절자는:
109:2.2 (1196.4) 1. 조절자를 필사 주체에게 빌려 주기만 하는 부류의 세계에서, 아니면 인간이 살아남지 못한, 실제로 융합하는 한 행성에서 일시 깃드는 자로서, 의지를 가진 한 사람의 진화하는 인생 속에서 어떤 필요한 체험을 얻었다. 그러한 훈계자는 상급이나 최상 조절자이다.
109:2.3 (1196.5) 2. 3급 정신 수준에 이르고 개인 수호 천사를 배치받은 한 인간 안에서, 안정된 영적 능력을 얻었다.
109:2.4 (1196.6) 3. 최상의 결정을 내리고 조절자와 엄숙하고 진지한 약혼에 들어간 주체를 가졌다. 그 조절자는 실제로 융합하는 때를 미리 내다보며, 그 결합을 사실로 일어난 사건으로 여긴다.
109:2.5 (1196.7) 4. 필사자가 승천하는 어느 진화 세계에서 운명 예비군 중 하나에 소집된 주체를 가지고 있다.
109:2.6 (1196.8) 5. 언젠가 사람이 잠든 사이에, 어떤 연락ㆍ접촉ㆍ재등록의 공적이나, 또는 배치받은 세계의 영적 행정부와 관련된, 인간 바깥의 다른 수고를 하려고, 갇혀 있는 필사자의 지성으로부터 일시 분리되었다.
109:2.7 (1196.9) 6. 그 행성의 영적 체제에 필수인 어떤 우주 공적을 실행할 책임을 맡은 영 인격자의 육체적 보완자인 어떤 인간의 체험에서 위기에 닥쳐 봉사했다.
109:2.8 (1196.10) 스스로 행동하는 조절자는 소속된 필사 주체의 안과 바깥에서 세운 수많은 공훈이 가리키다시피, 자기가 직접 깃드는 인격자를 끌어들이지 않는 모든 문제에서, 뚜렷한 정도로 의지를 소유하는 듯하다. 그러한 조절자는 그 영역의 수많은 활동에 참여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지상의 거처에서, 탐지되지 않고 깃드는 자로서 활동하는 일이 더 흔하다.
109:2.9 (1196.11) 의심할 여지 없이, 더 경험이 있는 이 상급 부류의 조절자는 다른 영역에 있는 자들과 통신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행동하는 조절자는 이렇게 서로 교통하는 한편, 오직 공동으로 일하는 수준에서, 자기가 머무르는 영역의 조절자 봉사에 필수인 보관 자료를 간직하는 목적으로 그렇게 한다. 하지만 그들은 때때로 위기가 닥쳤을 때 행성간 문제에서 활동한다고 알려져 있다.
109:2.10 (1197.1) 스스로 행동하는 최상 조절자는 인간의 몸을 뜻대로 떠날 수 있다. 깃드는 자는 필사 생명에 유기적(有機的) 또는 생물학적 부분이 아니다. 그들은 그 위에 신답게 얹혀 있다. 최초의 생명 계획에서 조절자가 마련되기는 했지만, 그들은 물질로 존재하는 데 필수는 아니다. 그런데도 깃드는 자리를 일단 잡은 뒤에, 그들이 필사 거처를 잠깐이라도 떠나는 일이 대단히 드물다는 것을 적어야 한다.
109:2.11 (1197.2) 초월 행동을 하는 조절자는 자기에게 맡겨진 과제를 완수했고, 오로지 물질 생명의 수송 수단이 분해되거나 그 불사의 혼이 옮겨지기만을 기다리는 자이다.
109:3.1 (1197.3) 신비의 훈계자가 하는 자세한 일의 특성은 배치의 성질에 따라서, 그가 연락 조절자인가 또는 융합 조절자인가 아닌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어떤 조절자는 그 주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단지 빌려 주기만 한다. 다른 조절자들은, 그 주체가 살아남으면, 영원히 융합하는 허락을 받은 인격 후보자로서, 수여된다. 또한 다른 체계와 우주들 뿐 아니라 다른 행성 부류 사이에서, 그들이 하는 일에 조금 차이가 있다. 그러나 대체로, 그들의 노동은 놀랍게도 한결같으며, 어떤 창조된 계급의 하늘 존재들이 맡는 임무보다도 더 한결같다.
109:3.2 (1197.4) 어떤 원시 세계에서 (1번 시리즈 집단), 조절자는 체험하는 훈련으로서, 주로 자아 교양(敎養)과 진취적 발전을 위하여 인간의 지성에 깃든다. 처녀 조절자는 원시인이 판결의 골짜기에[1] [1773] 도착하는 초기 시절에 보통 그런 세계에 파송되지만, 그때 비교적 극소수가 태동하는 상급 수준의 영적 지위에 이르려고, 자아를 통달하고 인품을 얻는 산을 지나서 도덕적 높이까지 올라갈 것을 택한다. (그러나 조절자와 융합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이 영 융합 승천자로서 살아남기는 한다.) 조절자는 원시 지성과 일시적 관계를 가지면서 값진 훈련을 받고 놀라운 체험을 얻으며, 그들은 다른 세계에서 우수한 존재들의 이익을 위하여 이 체험을 나중에 이용할 수 있다.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도 결코 넓은 온 우주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109:3.3 (1197.5) 또 다른 세계에서는 (2번 시리즈 집단) 조절자를 다만 필사 존재에게 빌려 준다. 여기서 훈계자는 그렇게 깃드는 일을 통해서 결코 융합하는 인격을 얻을 수 없지만, 인간 주체에게 필사 일생 동안에 큰 도움을, 유란시아 필사자에게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이 준다. 조절자는 여기서 상급 영적 달성을 위한 모범으로서, 살아남을 인품을 완전하게 만드는 흥미 있는 과제에 일시 조수로서, 단일 생명 기간에 필사 인간에게 빌려 준다. 그 조절자는 자연사 뒤에 돌아오지 않는다. 살아남는 이 필사자는 영 융합을 통해서 영생을 얻는다.
109:3.4 (1197.6) 유란시아와 같은 세계에서는 (3번 시리즈 집단) 신의 선물과 정말 약혼, 생사(生死)를 정하는 약속이 있다. 네가 살아남으면, 영원한 결합, 영구한 융합, 사람과 조절자를 한 존재로 만드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109:3.5 (1197.7) 이 시리즈의 세계에서 세 골을 가진 필사자의 경우에, 조절자가 한 골 부류와 두 골 부류보다 현세의 인생 동안에 그 주체와 훨씬 많이 실제 접촉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죽은 뒤의 생애에서, 세 골 부류는 한 골 부류와 두 골 종족 ―유란시아 종족―들과 똑같이 진행한다.
109:3.6 (1198.1) 두 골 세계에서는, 수여되는 파라다이스 아들이 머무른 뒤에, 의심할 여지 없이 살아남을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처녀 조절자가 배치되는 일이 드물다. 그러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능력을 가진 총명한 남녀에게 깃드는 거의 모든 조절자는 상급이나 최상 부류에 속한다.
109:3.7 (1198.2) 유란시아에서 초기의 많은 진화 민족에는 세 집단의 존재들이 있었다. 너무 동물 같아서 조절자를 받을 능력이 도무지 모자라는 그러한 자들이 있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조절자를 받을 능력을 드러내고, 도덕적 책임을 질 나이가 되었을 때 즉시 조절자를 받아들인 자들이 있었다. 경계선의 자리를 차지하는 셋째 등급이 있었는데, 그들은 조절자를 받을 능력이 있었지만, 그 사람이 몸소 간청을 하고 나서야 훈계자가 그 지성에 깃들 수 있었다.
109:3.8 (1198.3) 그러나 부적당하고 열등한 조상의 자질을 통해서 권리를 상실함으로 실질적으로 살아남을 자격을 잃은 자의 경우에, 많은 처녀 조절자가 진화 지성과 접촉하면서 값진 예비 체험을 가졌고, 이처럼 어떤 다른 세계에서 더 높은 부류의 지성에게 나중에 배치 받기 위하여 더 나은 자격을 갖추었다.
109:4.1 (1198.4) 깃드는 조절자는 인간들 사이에 상급 형태의 지적 교통에 크게 도움을 준다. 동물은 동료의 느낌을 가지지만, 서로 개념을 교통하지 않는다. 감정을 표현할 수 있어도, 생각과 이상을 표현할 수 없다. 동물의 기원을 가진 사람들도 생각 조절자가 수여되기까지, 동료들과 높은 종류의 지적 대화나 영적 교통을 체험하지 못한다. 하지만 언어를 개발할 때 그러한 진화 인간은 조절자를 받기 위하여 순탄한 길을 밟고 있다.
109:4.2 (1198.5) 동물은 서툰 방법으로 서로 교통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원시 접촉에는 거의 또는 아무런 인격이 없다. 조절자는 인격이 아니다. 그들은 선(先)인격 존재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격의 근원으로부터 오며, 그들의 계심은 사람의 인격의 질적 표현을 확대한다. 조절자가 이전에 체험을 가졌으면, 특히 이것이 참말이다.
109:4.3 (1198.6) 조절자의 부류는 인격 표현의 잠재성과 크게 상관이 있다. 오랜 세월을 통해서 계속하여, 유란시아의 많은 위대한 지적 지도자와 영적 지도자는 주로 그들에게 깃든 조절자의 우수함과 이전에 얻은 체험 때문에 큰 영향을 미쳤다.
109:4.4 (1198.7) 깃드는 조절자들은 옛 시절 원시인의 후손을 변화시키고 사람답게 만드는 데 다른 영적 영향과 적지 않게 협동했다. 만일 유란시아 거주자의 지성에 깃드는 조절자들이 물러난다면, 세계는 원시 시절에 사람들이 보였던 많은 장면과 관습으로 천천히 되돌아갈 것이다. 신다운 훈계자는 진보하는 문명이 가진 하나의 참 가능성이다.
109:4.5 (1198.8) 나는 유란시아에서 어느 지성인에 깃드는 생각 조절자를 지켜보았는데, 유버르사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오르본톤에서 이전에 열 다섯 지성에 깃들었다. 우리는 이 훈계자가 다른 여러 초우주에서 비슷한 체험을 겪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다고 추측한다. 그는 놀라운 조절자요 이 현시대에 유란시아에서 가장 쓸모 있고 강력한 세력 중의 하나이다. 살아남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을 이 인간이 (그리고 너희 온 세계가) 이제 거둔다. 살아남을 자질이 없는 자는 그가 지금 가진 노련한 조절자조차도 빼앗길 터이고, 한편 살아남을 전망이 있는 자는, 게을러 포기한 자가 가졌던, 앞서 경험이 있는 조절자까지 받을 것이다.
109:4.6 (1199.1) 어떤 의미에서 조절자들은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의 영역에서 행성 사이의 교류를 어느 정도 촉진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 같은 행성에서 두 번 깃드는 체험이 주어지는 일은 드물다. 유란시아에서 지금 일하면서 이 세계에 전에 있었던 조절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가 유버르사의 기록 보관소에 그들의 번호와 기록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는 물정을 알고서 말한다.
109:5.1 (1199.2) 스스로 행동하는 최상 조절자들은, 해방되었어도 통제된 경로, 창조적 상상력의 경로에서 인간의 생각이 자유롭게 흐를 때, 영적 중요성이 있는 요인들을 그 머리에 흔히 기여할 수 있다. 그런 때, 그리고 때때로 잠자는 동안에, 조절자는 정신의 흐름을 붙잡아서 그 흐름을 멈추게 하고, 다음에 그 생각의 진행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다. 이 모두가 상의식(上意識)이 있는 높은 구석에서 깊은 영적 변화를 일으키기 위하여 행해진다. 이처럼 지성의 세력 및 에너지가 현재와 미래의 영적 수준에서 접촉하는 기본음에 더 충만하게 조절된다.
109:5.2 (1199.3) 지성에게 빛을 던져 주는 것, 즉 네 안에 항상 거하는 잠재 인격자의 지혜ㆍ진리ㆍ선함ㆍ아름다움을 네가 어느 정도 의식할 수 있도록, 네 안에서 줄곧 말하는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때때로 가능하다.
109:5.3 (1199.4) 그러나 미덥지 않고 빨리 바뀌는 너희의 정신 태도는 흔히 조절자의 계획을 망치고 그의 일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조절자의 일은 필사 종족의 타고난 성품에만 방해를 받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의 선입견, 굳어진 생각, 오래 지녀온 편견으로 인하여 크게 늦어진다. 이러한 장애 때문에, 오직 조절자의 미완성 작품이 의식 속으로 여러 번 떠오르며, 개념의 혼란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정신의 상황을 낱낱이 살펴볼 때, 생각과 체험 하나하나가 어떻게 될 뻔했는가를 통째로 무시하면서, 바로 그것이 실제로, 근본적으로 무엇인가를 재빨리 인식하는 것이 안전하다.
109:5.4 (1199.5) 인생의 큰 문제는 조상의 생활 성향을 신비의 훈계자의 신성한 계심이 시작한 영적 충동의 요구에 적응하는 것이다. 우주 및 초우주 생애에서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지만, 네가 유란시아에서 지금 사는 인생에는 누구나 할 수 없이 두 주인을 섬겨야 한다. 사람은 계속하여 현세에 절충하는 인간적 기술에 재빨라야 하며, 한편 오직 한 주인에게 영적 충성을 바쳐야 한다. 이것이 어째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넘어지고 실패하고 지치며, 진화의 투쟁에서 생기는 압박에 무릎을 꿇는가 하는 이유이다.
109:5.5 (1199.6) 큰 골 자질의 유전적 유산(遺産), 그리고 전기 화학적으로 전체를 통제하는 유산, 이 두 가지는 효과 있게 조절자의 활동 분야를 제한하도록 작용하지만, (정상의 지성에서는) 어떤 유전적 장애도 결코 궁극의 영적 성취를 막지 못한다. 유전은 인격자의 통달하는 속도에 간섭할지 모르지만, 하늘 가는 모험을 궁극에 성취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네가 조절자와 협조하겠다면, 그 신의 선물은 머지 않아 불사의 상물질 혼을 발달시키고, 그와 융합한 뒤에, 그 새 인간을 지역 우주의 군주인 주 아들에게, 그리고 궁극에는 파라다이스에 계신 조절자의 아버지에게 내보일 것이다.
109:6.1 (1200.1) 조절자들은 결코 그르치지 않는다.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어떤 것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의미를 발견하거나 평가하는 인격자가 살아남든 살아남지 못하든 상관 없이, 의지(意志)를 가진 모든 인간 속에 중요한 가치는 모조리 확실히 살아남는다. 그리고 이러하니, 필사 인간은 살아남기 싫다고 해도 좋다. 그래도 그 일생의 체험은 버려지지 않는다. 영원한 조절자는 그러한 실패한 듯한 인생의 가치 있는 모습을 어느 다른 세계로 가지고 가서, 거기서 살아남는 이 의미와 가치를 어떤 더 높은 부류의 필사 지성에게, 살아남을 능력이 있는 지성에게 준다. 가치 있는 체험은 하나도 결코 헛되이 일어나지 않는다. 참된 의미나 진정한 가치는 하나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109:6.2 (1200.2) 융합 후보자에 관계되다시피, 신비의 훈계자가 그 필사 동료에게 버림받고, 그 인간 파트너가 하늘 가는 생애를 추구하기 싫다고 하면, 자연사로 (또는 그 전에) 풀려났을 때, 조절자는 살아남지 못하는 그 사람의 머리 속에서 진화한,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것을 모조리 가지고 간다. 뒤잇는 인간 주체들이 살아남지 못해서 한 조절자가 융합 인격을 얻는 데 거듭 실패하고 이 훈계자가 나중에 인격을 갖춘다면, 이 모든 필사 지성에 깃들고 그 지성을 통달하면서 얻은 체험은 모두 그러한 새로 인격을 갖춘 조절자의 실제 소유물이 될 터이고, 이 재산을 모든 미래 시대를 통해서 즐기고 이용할 것이다. 인격을 갖춘 이 계급의 조절자는 모든 예전 주인들의 살아남는 특성을 모두 복합하여 조립한 것이다.
109:6.3 (1200.3) 오랜 우주 체험을 가진 조절자들이 수여 임무를 띤 신다운 아들에게 깃들려고 자원할 때, 그들은 이 근무를 통해서 인격 달성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영들의 아버지는 이 자원자들에게 흔히 인격을 내려주고, 그들 부류의 지휘자로 세운다. 그들은 신별에서 권한을 영예롭게 받은 인격자이다. 그리고 그들의 독특한 성품은 여러 번 필사자에게 깃든 체험을 모자이크로 인간성을 구현한 것이요, 또한 마지막으로 깃드는 체험을 얻으려고 수여되는 파라다이스 아들의 인간적 신성을 가리키는 영 성적표이다.
109:6.4 (1200.4) 너희 지역 우주에서 조절자들의 활동은 네바돈 미가엘의 인격화된 조절자의 지휘를 받는데, 바로 그 훈계자는 미가엘이 요수아 벤 요셉의 몸을 입고서 인생을 살았을 때, 한 걸음 한 걸음 그를 안내하였다. 이 특별한 조절자는 그에게 맡긴 책임에 충실하였고, 이 용감한 훈계자는 인간 성품을 지혜롭게 지휘하고, 아버지의 완전한 뜻을 행하는 길을 선택하는 데 그 파라다이스 아들의 필사 지성을 늘 안내하였다. 이 조절자는 이전에 아브라함 시절에 마키벤타 멜기세덱과 함께 봉사했고, 이렇게 깃들기 전에, 그리고 이 두 수여 체험 사이에, 엄청난 공훈을 세우는 일에 종사하였다.
109:6.5 (1200.5) 이 조절자는 예수의 인간 지성 속에서 정말로 승리하였다―이것은 인생에서 거듭하여 생기는 상황 하나하나에서,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말하면서, 아버지의 뜻에 거룩하게 헌신함을 유지한 그 지성이었다.
109:6.6 (1200.6) 바로 이 조절자는 그의 힘찬 인격의 헤아릴 수 없는 성품 속에서 세례 받기 전에 요수아 벤 요셉의 인간성을 이제 돌이켜본다. 그 인간성은, 필사의 체험에서 얻을 수 있는 영적 가치가 완전히 소모되기까지 살았던 그 평범한 인생의 비천한 환경으로부터, 모든 유란시아 사람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가 창조한 영원하고 생생한 가치의 성적표, 영원하고 살아 있는 성적표이다.
109:6.7 (1201.1) 한 조절자에게 맡겨진 것, 영구한 가치를 지닌 모든 것은 영원히 살아남는 것이 보장된다. 어떤 경우에는, 앞날에 깃드는 필사 지성에게 수여하려고 훈계자가 이 소유물을 보관한다. 다른 경우에는, 인격을 갖추고 나서, 살아남고 보존된 이 실체들은 총우주 건축가들에게 근무할 때 앞으로 이용하려고 보관된다.
109:7.1 (1201.2) 조절자가 아닌 아버지 분신들이 인격을 갖출 수 있는지 없는지 우리가 말할 수 없지만, 너희는 인격이 우주의 아버지가 군주의 자유 의지로 수여한 것이라고 들었다. 우리가 아는 한, 조절자 부류의 아버지 분신(分身)은 오로지 한 인격 존재에게 베푸는 봉사를 통해서 인격 속성을 획득해야 인격을 얻는다. 인격을 갖춘 이 조절자들은 신별을 집으로 삼고, 거기서 선(先)인격 동료들을 가르치고 지도한다.
109:7.2 (1201.3) 인격을 갖춘 생각 조절자는 방대한 온 우주에서, 매이지 않고, 배치되지 않고 통치하는, 안정시키고 보상하는 자이다. 그들은 창조자와 인간의 체험―실존적인 것과 체험적인 것―을 통합한다. 그들은 시간과 영원이 결합된 존재이다. 우주 행정에서 선(先)인격인 것과 인격인 것을 결합시킨다.
109:7.3 (1201.4) 인격을 갖춘 조절자는 총우주 건축가들의 집행자, 온통 지혜롭고 강력한 집행자이다. 그들은 우주의 아버지의 모든 분야의 봉사―성격, 선(先)인격, 초월 성격 봉사―를 친히 베푸는 대리자이다. 궁극위 하나님의 영토에서 초월적 초한 구체들의 모든 영역에 두루, 아니 절대자 하나님의 수준까지도, 비상한 것, 특별한 것, 기대치 않은 것을 몸소 베푸는 자이다.
109:7.4 (1201.5) 조절자는 자기의 존재 안에 모든 알려진 인격 관계를 받아들이는, 우주에서 독특한 존재이다. 그들은 총(總) 인격이다―인격 이전이고, 인격이며, 인격 이후의 존재이다. 그들은 영원한 과거, 영원한 현재, 영원한 미래에서 한 것 같이, 우주의 아버지의 성격을 보살핀다.
109:7.5 (1201.6) 아버지는 무한자와 절대자 서열에 있는 실존적 성격을 영원한 아들에게 수여했지만, 실존적인 선(先)인격 조절자에게 수여된, 인격화된 조절자 종류의 체험하는 인격을 자신이 봉사하기 위하여 남겨놓기로 하셨다. 이들은 이처럼 궁극위, 최상위ㆍ궁극위, 아니 궁극위ㆍ절대자 수준에 이르기까지, 그 초한(超限) 영역에서 초월적 봉사를 베푸는, 미래에 영원한 초월 성격이 되도록 정해졌다.
109:7.6 (1201.7) 인격이 된 조절자가 우주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눈에 뜨이는 일은 드물다. 때때로 그들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과 의논하며, 때때로 칠중의 창조 아들의 인격화된 조절자들이 보론다덱 통치자들과 협의하려고 별자리 본부 세계들로 온다.
109:7.7 (1201.8) 유란시아의 보론다덱 행성 관찰자―너희 세계의 긴급 섭정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는 관리 담당 최고자―가 주둔하는 총독이 계신 앞에서 그의 권한을 주장했을 때, 그는 자신이 선택한 완전한 참모진과 함께 유란시아의 비상(非常) 행정을 시작했다. 그는 즉시 모든 동료와 조수들에게 그들의 행성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그가 섭정을 맡은 순간 그의 앞에 나타났던, 인격화된 조절자 세 분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이렇게 나타나리라는 것도 몰랐는데, 이는 이전의 섭정 시절에 그들이 신다운 존재를 그렇게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섭정을 맡은 최고자는 인격을 갖춘 이 자원 조절자들을 위하여, 직책을 맡기거나 임무를 정해 주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 세 명의 총(總) 인격 존재는 그때 유란시아에서 근무하던 수많은 계급의 하늘 존재들 가운데, 가장 활동이 많은 축에 속했다.
109:7.8 (1202.1) 인격이 된 조절자들은 수많은 계급의 우주 성격자들을 위하여 광범위한 서비스를 수행하지만, 우리는 조절자가 깃든 진화 인간들과 함께 이러한 봉사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이 특별한 인간 신은 대우주 전체에서 가장 놀라운 성격자들에 속하며, 아무도 그들의 미래 임무가 무엇일까 주제넘게 예측하지 않는다.
110:0.1 (1203.1) 불완전한 존재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데는 피할 수 없는 비극이 따르며, 충실한 친구로서 이러한 고통을 보편적으로, 사랑으로 함께 하는 것이 그 완전한 조상 신의 성품이다.
110:0.2 (1203.2) 내가 한 우주의 사무를 아는 한도에서, 나는 생각 조절자의 사랑과 헌신이 모든 창조에서 참으로 가장 신다운 애정이라고 본다. 아들들이 여러 민족에게 베푸는 봉사에 나타나는 사랑은 훌륭하지만, 조절자가 개인에게 헌신하는 것은 감동을 주도록 숭고하고 신성하게 아버지답다. 파라다이스 아버지는 개별 인간과 몸소 접촉하는 이 형식을 혼자만의 창조자 특권으로 남겨두신 듯하다. 진화하는 행성의 자녀들에게 그렇게 황홀하게 깃드는, 이 비인격 개체들이 베푸는 놀라운 봉사와 엄밀하게 견줄 만한 것은 온 우주에서 아무것도 없다.
110:1.1 (1203.3) 조절자는 인간 존재의 물질적 두뇌 속에서 산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조절자는 그 영역에 사는 육체적 인간의 유기적 부분이 아니다. 생각 조절자는 단일 신체 기관의 경계 안에서 존재하기보다 사람의 필사 지성에 깃든다고 상상하는 것이 더 마땅한 듯하다. 간접으로, 눈치채지 못하게, 조절자는 항상, 특히 상의식(上意識) 속에서 경건하게 지성이 영과 숭고한 접촉을 가지는 동안에, 그 인간 주체와 교통하고 있다.
110:1.2 (1203.4) 나는 진화하는 필사자가 자기 안에 사는 조절자가 사심 없이 하는 훌륭한 일을 더 낫게 이해하고 그 진가(眞價)를 더 잘 깨닫도록 내가 도울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데, 그들은 사람의 영적 복지를 늘이는 과제에 무척 진심으로 충실하다. 이 훈계자는 인간 지성의 상급 단계에 효과적인 봉사자이다. 인간 지능의 영적 가능성을 지혜롭고 익숙하게 조종하는 자이다. 이 하늘 조수들은 행복이 있는 하늘 안식처로, 안으로, 위로 너희를 안전하게 안내하는 엄청난 과제에 헌신한다. 지칠 줄 모르고 수고하는 그들은 너희의 영원한 생명 속에서 신의 진리의 승리, 곧 앞날에 인격자가 되는 일에 거룩히 헌신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인간 지성을 악의 여울목으로부터 멀리 이끌고, 한편 사람의 진화하는 혼을 아득히 먼 영원의 바닷가에, 신의 완전한 항구를 향하여 솜씨 있게 안내하는 조심스러운 일꾼이다. 조절자는 자애로운 지도자요, 땅에서 너희의 짧은 생애에서 어둡고 분명치 않은 미로를 통하여 너희를 인도하는 안전하고 확실한 안내자이다. 그들은 점진적으로 완전하게 되는 길에서, 앞으로 자기의 주체를 항상 재촉하는 참을성 있는 선생이다. 그들은 사람의 인품의 숭고한 가치를 조심스럽게 보관하는 자이다. 너희가 조절자를 더욱 사랑하고, 함께 더욱 충만히 협조하고, 조절자를 사랑으로 더욱 소중히 여길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다.
110:1.3 (1204.1) 신다운 내재자는 결코 그치지 않는 존재의 다음 단계를 위하여 너희를 영적으로 준비시키는 데 주로 아랑곳하지만, 또한 현세에 너희의 복지와 땅에서 너희의 진정한 성취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그들은 너희의 건강, 행복, 참된 번영에 이바지하기를 기뻐한다. 영원히 진보하는 너희의 미래 생명에 불리하지 않은 문제, 행성에서 진보하는 모든 문제에서 너희의 성공에 무관심하지 않다.
110:1.4 (1204.2) 네가 나날이 하는 일과 네 일생의 다양한 세부가, 현세에 너의 중요한 선택과 생사를 좌우하는 영적 결정에 영향을 주고, 따라서 혼이 살아남고 영원히 진보하는 너의 문제를 푸는 데 요인이 되는 바로 그 한도까지, 조절자는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며 아랑곳한다. 순전한 현세의 복지에 관해서 수동적이지만, 조절자는 너의 영원한 앞날의 모든 일에 관하여 신답게 적극성을 띤다.
110:1.5 (1204.3) 어떤 재난이 있어도, 정신력을 완전히 망가뜨리지 않는 어떤 질병에 걸려도, 조절자는 너와 함께 남아 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이 놀라운 선물이 땅에서 거할 천막으로서 써야 되는 그 육체를, 알면서 더럽히거나, 달리 일부러 오염시키는 것은 얼마나 불친절한가. 물리적 독물은 모두, 물질 지성을 높이려는 조절자의 노력을 크게 늦추며, 한편 두려움ㆍ분노ㆍ시샘ㆍ질투ㆍ의심ㆍ불관용 같은 정신적 독물은 마찬가지로 진화하는 혼의 영적 진보를 엄청나게 방해한다.
110:1.6 (1204.4) 오늘 너는 네 조절자가 구애(求愛)하는 시기를 거치고 있다. 너의 지성과 혼의 영원한 결합을 찾는 신의 영이 너에게 맡긴 책임에 네가 충실한 것이 드러나기만 한다면, 상물질로 하나가 된 상태, 그 뛰어난 조화, 그 우주적 조정, 그 신성한 조율, 그 하늘같은 융합, 결코 그침 없는 신분의 혼합, 하나된 그 존재 상태가 궁극에 따를 것이다. 이것은 아주 완전하고 확정된 것이기 때문에 가장 노련한 성격자들조차 융합 파트너―필사 인간과 신다운 조절자―를 따로 된 신분으로 결코 분리하거나 인식할 수 없다.
110:2.1 (1204.5) 생각 조절자는 인간의 지성에 깃들 때, 자신이 그리고 신별에서 인격화된 조절자들이 결정하고 예정한 대로, 모형 생애, 곧 이상적 일생을 가지고 오며 이것은 유란시아의 인격화된 조절자의 인가를 받았다. 이처럼 그들은 인간 주체의 지적ㆍ영적 발전을 위하여 분명하고 미리 정해진 계획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지만, 어떤 인간에게도 이 계획을 받아들이는 의무는 지워지지 않는다. 너희는 모두 숙명을 가진 주체이지만, 신이 준 이 숙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미리 예정되지는 않았다. 너희는 생각 조절자가 짠 순서의 어느 부분이나 전부를 싫다고 할 완전한 자유가 있다. 너희가 기꺼이, 총명하게 허가하는 대로, 인격을 지휘하는 데 그들이 더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그러한 생각의 변화와 영적 조정을 일으키는 것이 그들이 할 일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도 이 신다운 훈계자들은 너희를 이용하거나, 아니면 너희가 선택하고 결정할 때 어떤 방법으로도 멋대로 너희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조절자는 너희 인격이 가진 주권을 존중한다. 조절자는 언제나 너희 뜻에 복종한다.
110:2.2 (1204.6) 일하는 방법을 보면 그들은 끈질기고 영리하고 완전하지만, 주인의 의지하는 자아를 다치지 않는다. 어떤 인간도 결코 제 뜻을 거슬러, 신다운 훈계자에게서 영적 감화를 받지 않는다. 살아남는 것은 신들의 선물이요, 이것은 시간 세계의 인간이 원해야 되는 것이다. 결국, 너를 위하여 조절자가 무슨 일에 성공하든지, 네가 협동하겠다고 찬성함으로 그 변화가 이루어졌음을 기록이 보여줄 것이다. 하늘 가는 생애에서 생기는 엄청난 변화의 발걸음 하나하나를 성취하는 데 너는 조절자와 기꺼이 파트너가 되었을 것이다.
110:2.3 (1205.1) 조절자는 너희의 생각 그 자체를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영적으로 변화시키려고, 영원하게 만들려고 한다. 천사도 조절자도 인간의 생각에 영향을 주는 데 직접 몰두하지 않는다. 사람의 생각은 너희가 독점하는, 인격자의 특권이다. 조절자는 너희의 생각하는 과정을 개선하고, 고치고, 조절하고, 조정하는 일에 헌신한다. 그러나 특히, 구체적으로 너희 생애의 영적 사본(寫本), 즉 살아남는 목적을 위하여 너희의 참된 승진하는 자아의 상물질 성적표를 좋게 만드는 일에 헌신한다.
110:2.4 (1205.2) 조절자는 인간 지성의 상급 수준의 분야에서 일하며, 필사자의 지능에서 생기는 모든 개념의 상물질 복사판을 만들려고 끊임 없이 애쓴다. 따라서 인간의 지성 회로에 부딪치고 그 안에 집중하는 두 가지 실체가 있다. 하나는 생명 운반자들의 최초 계획으로부터 진화한 필사의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신별의 높은 구체들에서 온 불사(不死)의 개체, 하나님으로부터 온 깃드는 선물이다. 그러나 필사의 자아는 또한 인격 자아이며, 인격을 가졌다.
110:2.5 (1205.3) 너는 인격이 있는 한 사람으로서 지성과 의지(意志)를 가졌다. 조절자는 하나의 선(先)인격 생물로서 선지성과 선(先)의지를 가졌다. 네가 눈을 마주하고 보듯 조절자의 지성에 네가 완전히 순응하면, 너희의 두 지성은 하나가 되고, 너는 조절자의 지성으로 보강된다. 나중에, 이 새 지성, 즉 통합된 지성이 내리는 결정을 너의 의지가 하라고 시키고 이를 집행하면, 그 조절자의 선(先)인격 의지는 너의 결정을 통해서 인격 표현을 달성한다. 그 특별한 계획이 관계되어 있는 한, 너와 그 조절자는 하나이다. 너의 지성은 신성과 발걸음을 맞추었고, 그 조절자의 뜻은 인격 표현을 달성하였다.
110:2.6 (1205.4) 이 신분이 실현되는 범위까지, 너는 상물질 서열의 존재에 정신적으로 가까이 가고 있다. 상물질 지성은 다양하게 물질 성품과 영적 성품을 가진, 협동하는 지성들의 내용과 총합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따라서 상물질 지능은 지역 우주에서 한 뜻에 지배되는, 이중 지성을 의미한다. 필사자의 경우에, 이것은 인간에 기원을 가진 의지요, 사람이 인간 지성을 하나님의 생각하심과 일체로 만듦으로 그 의지는 신답게 되고 있다.
110:3.1 (1205.5) 조절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신성하고 더할 나위 없는 경기(競技)를 벌이고 있다. 그들은 시공에서 최상의 모험 중 하나에 말려들었다. 그들의 더 큰 영원의 과제들을 계속 집행하는 동안, 일시적인 너희의 짧은 투쟁에서 너희가 협조하여 그들의 도움을 허락할 때 그들은 얼마나 행복한지! 그러나 보통, 조절자가 너와 교통하려 애쓸 때, 전하는 말씀이 인간 지성의 에너지가 흐르는, 물질의 흐름 속에서 묻혀버린다. 겨우 어쩌다가 너는 그 메아리를, 신의 목소리의 어렴풋하고 아득한 메아리를 듣는다.
110:3.2 (1205.6) 너의 조절자가 필사 인생을 통해서 너를 안내하고 네가 살아남게 만드는 사업에 성공하는 것은 네가 믿는 이론보다 너의 결정과 결심과 굳건한 믿음에 달려 있다. 인격의 성장에서 생기는 이 모든 움직임은 네가 조절자와 협조하는 것을 돕기 때문에, 너의 승진에 유익한 힘찬 영향력이 된다. 그들은 네가 저항을 그치도록 너를 돕는다. 필사자가 완전을 달성하려고 올라가는 길을 따라서 진보하라고 정해진 그 계획에 협조하는 데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한까지, 생각 조절자는 지상(地上)의 사업에 성공하거나 겉보기에 실패한다. 살아남는 비결은 하나님 같이 되려는 최상의 인간 소망에, 그리고 그와 관계되어, 압도하는 그 소망을 마침내 이루는 데 필수인 것은 무엇이나 기꺼이 행하고 무엇이든지 되려는 마음에 달려 있다.
110:3.3 (1206.1) 우리가 한 조절자가 성공하거나 실패한 것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인간이 살아남는가 살아남지 않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조절자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의 본질로부터 왔고, 반드시 각 사업에 승리하여 솟아난다.
110:3.4 (1206.2) 너희 가운데 숱한 사람이 생활의 하찮은 일에 그렇게 많은 시간과 생각을 쓰고, 한편 영원한 중요성을 가진 더 본질적 실체들을 거의 전적으로 못보고 지나치는 것을 나는 지켜볼 수밖에 없는데, 바로 이러한 성취는 너희와 조절자 사이에 더욱 조화되는 기초적 합의를 보는 데 관련된다. 인간의 존재에서 큰 목표는 깃드는 조절자의 신성과 발걸음을 맞추는 것이다. 필사 인생에서 큰 성취는 너의 지성 속에서 기다리며 일하는 신다운 영의 영원한 목표에 참되게, 이해심을 가지고 헌신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운명을 실현하려는, 헌신적이고 굳게 결의한 노력은 명랑하고 즐거운 생활, 그리고 땅에서 성공하고 영예로운 생애를 가지는 것과 전적으로 어울린다. 조절자와 협동하는 데는 자신을 괴롭히거나, 거짓 경건, 또는 위선이고 허식인 자기 비하(卑下)가 따르지 않는다. 이상적인 인생은 두려워 걱정하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봉사하는 인생이다.
110:3.5 (1206.3) 혼란에 빠지고 어리둥절하고 때때로 낙심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조차, 깃드는 조절자의 이끄심에 저항함을 반드시 뜻하지 않는다. 그러한 태도는 어떤 때 신다운 훈계자와 적극 협조하는 자세가 모자람을 뜻할지 모르며, 따라서 영적 진보를 얼마큼 늦출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지적 감정의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혼이 확실히 살아남는 것을 한 치라도 방해하지 않는다. 무지(無知)만으로 결코 살아남는 것을 막을 수 없고, 혼동으로 생기는 의심이나 두려움에 싸인 불안도 그럴 수 없다. 오로지 조절자의 이끄심을, 의식하여 저항하는 것이 진화하는 불사의 혼이 살아남는 것을 막을 수 있다.
110:3.6 (1206.4) 조절자와 협동하는 것을 특별히 의식하는 과정으로 여겨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의 동기와 결정, 너의 충실한 결의와 최상의 소망은 참되고 효과 있는 협동이 된다. 다음과 같이 너는 의식하면서 조절자와 더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
110:3.7 (1206.5) 1. 신의 이끄심에 반응하려는 선택. 진리ㆍ아름다움ㆍ선함을 가장 높이 의식하는 데 인생의 기초를 두고, 다음에 지혜ㆍ예배ㆍ믿음ㆍ사랑을 통해서 이 신성의 질을 조정하는 것.
110:3.8 (1206.6) 2.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것―신다운 아버지를 진심으로 인식하고, 하늘의 어버이를 사랑으로 예배하는 것.
110:3.9 (1206.7) 3. 사람을 사랑하고 성실하게 봉사하기를 바라는 것―동료 필사자 하나하나를 총명하고 지혜롭게 사랑함과 더불어, 사람이 형제임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것.
110:3.10 (1206.8) 4. 우주 시민 자격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최상 존재에 대하여 점진적으로 늘어나는 너의 의무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 진화 인간과 진화하는 신이 서로 의존함을 아는 것. 이것이 우주 도덕의 탄생이요, 보편적 의무를 깨닫는 첫걸음이다.
110:4.1 (1207.1) 조절자는 시공의 주요 회로를 타고 들어오는 계속된 우주 정보의 흐름을 받을 수 있다. 그들은 여러 우주의 영(靈) 정보 및 에너지와 완전히 접촉하고 있다. 그러나 공통된 성품이 모자라고 반응하는 인식이 결여되기 때문에, 이 막강한 내재자(內在者)는 이 풍부한 지혜와 진리를 필사 주체의 지성에게 그다지 많이 전해 줄 수 없다.
110:4.2 (1207.2) 생각 조절자는 너의 상물질 혼을 진화시키도록 너의 지성을 영적으로 변화시키려고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바로 너는 속에서 일어나는 이 봉사를 대체로 의식하지 못한다. 바로 너의 물질 지능의 산물, 그리고 네 혼이 조절자와 같이 활동함으로 생긴 산물을 구별할 능력이 너에게 아주 없다.
110:4.3 (1207.3) 생각ㆍ결론, 그리고 머리 속의 다른 그림들이 갑자기 제시되는 것 중에서 더러는 때때로 조절자가 직접이나 간접으로 일한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흔하게 이것들은 밑에 깔려 있는 정신 수준에서 함께 집합하고 있던 생각들, 즉 진화하는 동물 지성의 회로에 본래 있는 기능, 정상이고 보통인 정신 기능에서 자연스럽고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관념 의식 속으로 갑자기 솟아난 것이다. (이 하의식(下意識)에서 솟아나온 것과 대조해서, 조절자의 계시는 상의식(上意識) 분야를 통해서 나타난다.)
110:4.4 (1207.4) 잔잔한 의식 수준을 지나서 머리 속의 모든 문제를 조절자가 관리하도록 맡기라. 때가 되면, 이 세계가 아니라면 여러 저택 세계에서, 조절자는 맡은 직책에 관하여 세밀한 보고를 하겠고, 궁극에는 그가 보호하고 지키라고 맡긴 그 의미와 가치를 내놓을 것이다. 너희가 살아남는다면, 조절자는 그 필사 지성의 값진 보물을 모조리 부활시킬 것이다.
110:4.5 (1207.5) 인간다운 자와 신다운 자,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광대한 간격이 존재한다. 유란시아 민족들은 아주 대체로 전기로, 그리고 화학적으로 통제되고, 그들의 공통된 행동이 대단히 동물 같고 보통 반응이 너무 감정적이기 때문에, 훈계자들이 그들을 안내하고 지도하기가 극도로 어려워진다. 너희에게 용감한 결정과 헌신적 협조가 너무 모자라서, 너희에게 깃드는 조절자가 인간 지성과 직접 교통하기가 거의 불가능함을 발견한다. 진화하는 필사자의 혼에게 새 진리의 빛을 번쩍 비쳐 주는 것이 가능함을 발견할 때에도, 흔히 이 영적 계시는 그 사람을 너무 눈이 멀게 만들어서, 광신주의의 발작을 일으키거나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 어떤 다른 지적 소동을 일으킨다. 숱한 새 종교와 이상한 “주의(主義)”는 생각 조절자의 통신이 중단되고, 불완전하게 전해지고, 잘못 이해되고, 멋대로 왜곡되어 생겼다.
110:4.6 (1207.6) 몇천 년 동안, 각 세대에 스스로 행동하는 조절자와 함께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는 존재들이 차츰 줄어들었다는 것을 예루셈의 기록이 보여준다. 이것은 깜짝 놀라게 하는 그림이요, 사타니아의 감독 성격자들은 너희 행성의 어떤 직속 감독자들이 내민 여러 제안에 호의를 보이는데, 그들은 상급 영적 부류의 유란시아 민족들을 육성하고 보존하려고 고안된 조치를 개시하라고 주장한다.
110:5.1 (1207.7) 조절자의 사명과 영향을 보통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과 혼동하고 헛갈리지 말지니, 이것들은 직접 관련이 없다. 양심은 인간답고 순전히 정신적 반응이다. 양심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지만, 양심은 도저히 하나님이 혼에게 말씀하는 목소리는 아니다. 그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조절자의 소리가 하나님의 목소리일 것이다. 양심은 옳게 행동하라고 마땅히 너를 타이른다. 그러나 조절자는 그 위에, 무엇이 참으로 옳은지, 다시 말해서 훈계자의 이끄심을 네가 깨달을 수 있을 때, 깨달을 수 있는 대로, 너에게 일러 주려 애쓴다.
110:5.2 (1208.1) 사람의 꿈꾸는 경험, 조절되지 않은 잠자는 머리가 어지럽게, 조리 없이 행진하는 것은 조절자가 인간 지성의 서로 다른 요인들을 조화하고 연결하지 못했다는 적절한 증명이 된다. 조절자는 다만, 단일 생애 동안에 인간다운 것과 신다운 것처럼, 그렇게 다르고 다양한 두 종류의 생각을 멋대로 조화시키고 동시화할 수 없다. 조절자가 그런 일을 할 때, 그들이 가끔 하다시피, 그러한 사람들은 죽는 체험을 거칠 필요 없이 바로 저택 세계로 옮겨진다.
110:5.3 (1208.2) 충분히 의식이 깨어 있는 시간에 결정하고 선택한 대로, 조절자가 깃드는 인격자의 의지가 이전에 충분히 승인한 것,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 상지성(上知性)의 영역에 던져진 것만 잠자는 시기에 조절자가 성취하려 애쓰며, 상지성은 인간과 신이 서로 관계되어 연락하는 영토이다.
110:5.4 (1208.3) 필사 주인이 잠자는 동안, 조절자는 물질 지성의 상급 수준에서 지은 것을 의식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그리고 너희의 괴상한 꿈 중에 더러는 조절자가 효과 있게 접촉하지 못했음을 가리킨다. 꿈 속의 생활에서 불합리한 것들은 표현되지 않은 감정의 압박을 증거할 뿐 아니라, 또한 조절자가 제시한 영적 개념의 표현이 끔찍하게 일그러졌음을 증언한다. 바로 너의 정열ㆍ충동, 그리고 타고난 기타 성향은 자체를 그림으로 나타내고, 의식 없이 자는 동안에, 안에 깃드는 자가 정신의 기록으로 적어 놓으려고 애쓰는 신의 말씀을 자체의 표현되지 않은 욕망으로 갈아치운다.
110:5.5 (1208.4) 꿈 속에서 조절자가 무슨 내용을 전했는가 가정하는 것은 극도로 위험하다. 너희가 잠자는 동안에 조절자가 일하기는 하지만, 너희의 보통 꿈꾸는 체험은 순전히 생리 및 정신 현상이다. 마찬가지로, 조절자가 개념을 등록한 것과 필사자의 양심의 명령을 거의 연속되게 의식하여 받는 것, 이 둘을 구별하려고 애쓰는 것은 위험하다. 이것은 개인이 구별하고 개인적 결정으로 풀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사람은, 필사 지성의 반응을 신의 위엄을 가진 분야로 높이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보다, 조절자의 표현을 순전히 인간적 체험이라고 믿고서 이를 물리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생각 조절자의 영향은 전부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로 상의식 체험이라는 것을 기억하여라.
110:5.6 (1208.5) 너희가 정신의 여러 수준을 올라감에 따라서, 다른 정도로, 점점 더, 어떤 때는 직접, 그러나 더 흔히 간접으로, 너희는 조절자와 교통한다. 그러나 인간의 머리에서 생기는 새로운 개념마다 조절자의 명령이라는 생각을 품는 것은 위험하다. 너희 계급의 존재에게는 네가 조절자의 목소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실제는 너 자신의 지능에서 생겨나온 것일 경우가 더욱 흔하다. 이것은 위험한 분야이며, 사람마다 자신의 자연스러운 인간적 지혜와 초인간적 통찰력에 따라서 스스로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110:5.7 (1208.6) 이 통신을 하는 데 쓰인 인간의 조절자는 그렇게 광범위한 활동을 즐기는데, 이는 주로 그 조절자가 속에 계신 것이 바깥으로 어떻게 나타나더라도 이 인간이 거의 완전히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 전부에 대하여 그가 의식해서 아주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 정말로 다행이다. 그는 그가 사는 시대와 세대에서 상당히 경험 있는 조절자 중에 하나를 지니고 있는데, 그래도 이 다능한 조절자가 그의 지성 속에 있는 것과 관련된 현상에 대하여 그가 수동적으로 반응하고 이에 대하여 개의치 않는 것은 드물고도 다행한 반응이라고 그 운명 수호자가 선언했다. 이 모두가 여러 영향의 유리한 조정을 허락하며, 상급 활동 분야에서 조절자에게, 그리고 건강ㆍ효율ㆍ평안의 관점에서 볼 때 짝이 되는 그 사람에게 유리하다.
110:6.1 (1209.1) 물질 세계에서 인격이 실현한 것의 총합은 필사자가 도달이 가능한, 일곱 정신 수준을 연달아 정복하는 데 담겨 있다. 7급 수준에 들어가는 것은 참 인간 성격이 활동하기 시작했음을 표시한다. 1급 수준을 마치는 것은 필사 존재가 비교적 성숙했음을 의미한다. 우주에서 성장하는 일곱 수준을 거치는 것이 비록 조절자와 융합하는 것과 똑같지 않아도, 이 여러 수준을 통달하는 것은 조절자와 융합하는 예비 단계에 이르렀음을 표시한다.
110:6.2 (1209.2) 일곱 수준을 달성하는―필사자가 비교적 성숙해지는―과제에서 조절자는 너와 대등한 파트너이다. 조절자는 일곱째부터 첫째까지 너와 함께 여러 수준을 올라가지만, 필사자의 지성이 적극 협동하는 것과 아주 상관 없이, 최상 지위와 스스로 행동하는 지위까지 진보한다.
110:6.3 (1209.3) 정신의 여러 수준은 순전히 지적인 것은 아니고, 온전히 상물질인 것도 아니다. 이것들은 인격 지위, 지적 달성, 혼의 성장, 그리고 조절자와 발걸음을 맞추는 것과 상관이 있다. 이 여러 수준을 거치는 데 성공하는 것은 다만 인격의 어느 한 국면이 아니라, 전체 인격이 조화되어 활동하기를 요구한다. 여러 부분이 성장해도 전체의 참된 성숙과 같지는 않다. 자아 전체―전체 자아―물질적ㆍ지적ㆍ영적 자아가 확대되는 것에 비례해서 부분들은 정말로 자란다.
110:6.4 (1209.4) 지적 성품이 영적 성품보다 더 빨리 발달할 때, 그러한 상황은 생각 조절자와 교통하는 것을 어렵고도 위험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지나친 영적 성장은 신다운 내재자의 영적 인도에 대하여 광신적이고 비뚤어진 해석을 낳는 경향이 있다. 영적 능력의 부족은 그러한 물질적 지능에게, 더 높은 상의식(上意識)에 거하는 영적 진리를 전달하는 것을 무척 어렵게 만든다. 깨끗한 버릇, 안정된 신경 에너지, 균형된 화학 작용을 가진 몸 속에 자리잡은 지성, 완전히 차분한 지성에게―육체ㆍ정신ㆍ영의 힘, 세 가지가 하나처럼 조화되어 발달했을 때―현세에 그러한 존재의 진정한 복지를 최소로 위협하거나 위험을 무릅쓰면서 최대의 빛과 진리를 나누어 줄 수 있다. 그렇게 균형되어 성장함으로 사람은 행성에서 진보하는 수준을 일곱째부터 첫째까지, 하나하나 올라간다.
110:6.5 (1209.5) 조절자는 언제나 너희 가까이 있고 너희에게 속하지만, 하나의 다른 존재로서 너에게 직접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은 드물다. 한 수준 한 수준, 너의 지적 결정, 도덕적 선택, 영적 발전은 조절자가 너의 지성 속에서 활동하는 능력을 더해 준다. 한 수준 한 수준 그렇게 함으로 너는 조절자와 교제하고 지성을 조율하는 낮은 단계로부터 올라가며, 그래서 조절자는 하나님을 찾는 이 지성과 혼의 진화하는 의식 위에, 더욱 눈에 선하게, 확신을 가지고, 운명을 그림으로 만든 것을 점점 더 기록할 수 있게 된다.
110:6.6 (1210.1) 네가 내리는 결정 하나하나가 조절자의 활동을 막거나 아니면 수월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바로 이러한 여러 결정은 인간 성취의 여러 수준에서 네가 승진하는 것을 좌우한다. 일생 최대의 결정, 그 결정과 위기의 관계는, 각 수준을 마치는 데 미치는 영향력과 크게 상관이 있다. 그런데도 결정의 빈도, 빈번한 되풀이, 끈질긴 되풀이는 또한 그러한 반응을 확실한 버릇으로 만드는 데 필수이다.
110:6.7 (1210.2) 인간이 진보하는 일곱 수준을 엄밀하게 정의하기는 어려운데, 이는 이 여러 수준이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이 수준들은 각 개인에게 다를 수 있고 각 인간의 성장 능력에 따라서 결정되는 듯하다. 우주의 진화에서 이러한 수준을 통달하는 것은 세 가지 면에서 반영된다:
110:6.8 (1210.3) 1. 조절자와 발걸음 맞추기. 영의 영향을 받는 지성은 수준을 달성하는 데 비례하여 조절자의 계심에 가까이 간다.
110:6.9 (1210.4) 2. 혼의 진화. 상물질 혼이 태어나는 것은 수준 통달의 범위와 깊이를 가리킨다.
110:6.10 (1210.5) 3. 인격의 현실성. 자아의 현실성의 정도는 수준의 통달에 직접 좌우된다. 일곱째부터 첫째 수준의 필사 존재로 올라감에 따라서, 사람은 더욱 현실성을[1] [1774] 가지게 된다.
110:6.11 (1210.6) 여러 수준을 거침에 따라서, 물질적 진화를 겪는 아이는 불사의 가능성을 가진 성숙한 인간으로 자란다. 7급 수준에 있는 자의 실체, 씨눈 성질의 그림자 같은 실체는 한 지역 우주 시민의 태어나는 상물질 성품이 더 맑게 나타날 때 물러난다.
110:6.12 (1210.7) 인간의 성장에서 일곱 수준, 곧 정신 수준을 엄밀하게 정의(定義)하기가 불가능하지만, 성숙이 일어나는 이 여러 단계의 최소 및 최대 한계를 넌지시 제시하는 것을 허락할 수 있다:
110:6.13 (1210.8) 7급 수준. 인간이 손수 선택하고, 개인적 결정을 내리고, 도덕적 책임을 지는 힘, 그리고 영적 개성을 얻는 능력을 개발할 때 이 수준에 들어간다. 이것은 지혜 영의 지휘를 받고서 일곱 보조 지성 영이 연합하여 활동하는 것, 성령의 영향 속에서 필사 인간의 회로가 연결되는 것, 그리고 유란시아에서 필사 지성 속에 생각 조절자를 받아들이는 것과 함께, 진리의 영이 처음으로 활동함을 가리킨다. 7급에 들어가는 것은 한 필사 인간을 지역 우주에서 참된 잠재 시민으로 만든다.
110:6.14 (1210.9) 3급 수준. 조절자의 일은 인간 승천자가 3급 수준에 이르고 개인 운명 수호 천사를 받은 뒤에 훨씬 더 효과 있게 된다. 조절자와 수호 천사 사이에 겉으로 아무런 합동 노력이 나타나지 않지만, 그런데도 개인의 천사 수행원이 배치된 뒤에 우주에서 성취하고 영적으로 발전하는 모든 국면에, 놓칠 수 없는 개선이 있음을 관찰할 것이다. 3급 수준에 이르렀을 때, 조절자는 남은 필사 인생 동안에 사람의 지성을 상물질화하고 나머지 수준들을 마치게 하려고, 그리고 자연사가 그 독특한 협동 관계를 분해하기 전에, 신과 사람의 관계에서 마지막 단계를 성취하려고 노력한다.
110:6.15 (1210.10) 1급 수준. 필사자가 점진적으로 성취하는 1급이자 마지막 수준에 너희가 이르기까지, 조절자는 보통 때에 너와 직접, 즉시 말할 수 없다. 이 수준은 물질 몸인 옷으로부터 진화하는 상물질 혼을 해방하기 전에, 인간의 체험에서 지성ㆍ조절자의 관계가 가능한 최선으로 실현되는 것을 나타낸다. 지성, 감정, 우주 통찰력에 관해서 말하면, 이 1급 정신(精神) 수준의 도달은 인간의 체험에서 물질 지성과 영 조절자가 가능한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다.
110:6.16 (1211.1) 아마도 필사자가 진보하는 이 여러 정신 수준을 우주 수준이라 부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진화하는 혼과 솟아나는 최상 존재의 초기 관계의 상물질 의식을 얻기까지 점진적으로 접근하는, 실제 의미를 파악하고 가치를 깨닫는 수준들이다. 바로 이 관계가 여러 우주 수준의 중요성을 물질 지성에게 충분히 설명하는 것을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러한 수준의 달성은 겨우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식하는 데 관계될 뿐이다. 7급이나 6급 수준에 있는 자는 2급이나 1급에 있는 자처럼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경지에 거의 이를 수 있다―아들임을 의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낮은 수준의 존재는 최상 존재와 가지는 체험적 관계를 훨씬 적게 의식한다. 이 여러 우주 수준의 달성은, 자연사하기 전에 그러한 성취에 실패하면, 여러 저택 세계에서 승천자가 얻는 체험의 일부가 될 것이다.
110:6.17 (1211.2) 믿음이 주는 자극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완전히 깨닫는 것을 체험하게 하지만, 행위, 즉 결심한 것을 마치는 일은 최상 존재가 우주에서 사실이 되는 것과 점진적 친척 관계에 있다는 의식을 진화로 얻는 데 필수이다. 믿음은 영적 세계에서 잠재성을 사실로 변화시키지만, 오로지 선택하는 체험을 얻음으로, 그리고 이를 통해서, 최상위의 유한한 영역에서 잠재성은 사실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선택은 인격자가 행위할 때 물질적 결정에 영적 믿음을 붙여 놓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갈급히 찾는 마음의 인간적ㆍ물질적 지레 장치가 더 효과 있게 작용하도록 신의 영적 받침대를 제공한다. 물질 세력과 영적 세력이 그렇게 지혜롭게 조정되는 것은 우주에서 최상위의 현실화, 그리고 파라다이스 신들에 대한 상물질적 이해를 크게 높인다.
110:6.18 (1211.3) 여러 우주 수준의 통달은 상물질 혼의 양적 성장, 최상의 목적을 이해하는 것과 관계된다. 그러나 이 불멸하는 혼의 질적 지위는 필사인이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 파라다이스 잠재성의 사실 가치를 믿는 생생한 믿음을 붙잡는 데 온전히 달려 있다. 따라서 7급 수준에 있는 자는 2급, 아니 1급 수준에 있는 자와 마찬가지로, 우주적 성장을 더욱 실현하기 위하여 저택 세계들로 간다.
110:6.19 (1211.4) 우주 수준의 통달과 실제로 얻는 영적 종교적 체험 사이에는 간접 관계가 있을 뿐이다. 그러한 달성은 서로 영향을 주며, 따라서 서로 이익이 된다. 순전한 영적 발달은 행성의 물질적 번영과 거의 아무 상관이 없을지 모르지만, 수준의 달성은 인간이 성공하고 필사자가 성취하는 가능성을 반드시 크게 만든다.
110:6.20 (1211.5) 7급부터 3급 수준까지, 상물질 수준의 체험에 더욱 진입하는 데 대비하여, 필사 지성이 물질 생명 작용의 현실에 의존하지 않게 만드는 과제를 수행하면서 일곱 보조 지성 영의 행동이 늘어나고 통일된다. 3급 수준부터 계속하여 보조자의 영향은 차츰 줄어든다.
110:6.21 (1211.6) 일곱 수준은 가장 높은,[2] [1775] 순전한 동물 수준으로부터, 한 인격 체험으로서 자의식하여 실제로 접촉하는, 가장 낮은 상물질 수준까지 이르는 필사자의 체험을 포함한다. 1급 우주 수준의 통달은 필사자가 상물질 이전 상태로 성숙했음을 알리며, 인간 성격에서 지성의 행위에 미치는 순전한 영향으로서 보조 지성 영들의 합동 봉사가 끝났음을 표시한다. 1급 수준을 지나서, 지성은 상물질 진화 단계의 지능과 더욱 비슷하게 되며, 이것은 우주 지성, 그리고 한 지역 우주의 창조 영이 부여한 자질, 보조자를 초월하는 자질이 합동으로 베푸는 봉사이다.
110:6.22 (1212.1) 조절자의 개별 생애에서 중대한 날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인간 주체가 3급 정신 수준을 돌파하고, (그에게 깃든 자가 이미 스스로 활동하지 않으면) 따라서 훈계자가 스스로 행동하며, 활동 범위가 늘어나는 것을 보장할 때이다. 다음에 짝인 사람이 1급 정신 수준에 다다르고, 이렇게 함으로 그들이,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 서로 교통할 수 있게 될 때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들이 마침내, 영원히 융합할 때이다.
110:7.1 (1212.2) 일곱 우주 수준의 달성은 조절자와 융합하는 것과 같지는 않다. 유란시아에는 자기의 여러 수준을 마친 필사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 그러나 융합은 아직도 더 크고 더 숭고한 다른 영적 성취에, 필사자의 의지를 생각 조절자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뜻에 마지막으로 완벽하게 일치시키는 것을 마치는 데 달려 있다.
110:7.2 (1212.3) 한 인간이 여러 수준의 우주적 성취를 마쳤을 때,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필사 의지의 최종 선택이 진화된 육체 생명 동안에 조절자로 하여금 인간의 신분과 상물질 혼의 연합을 마치는 것을 허락할 때, 혼과 조절자의 그러한 완성된 연결은 저택 세계들까지 따로 계속 가며, 거기서 조절자와 상물질 혼을 즉시 융합하라고 지정하는 명령이 유버르사로부터 내린다. 이 융합이 육체 생명 동안에 생기면, 한 순간에 그 물질 몸을 태워버린다. 그러한 광경을 목격할 수도 있는 인간들은 오직 옮겨 가는 그 필사자가 “불 수레 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볼 것이다.
110:7.3 (1212.4) 자기의 주체인 사람을 유란시아로부터 옮겨 간 대부분의 조절자는 상당히 경험이 있고, 다른 구체들에서 수많은 필사자에게 이전에 깃든 자였다는 것이 기록에 남아 있다. 빌려 주는 서열의 행성에서, 조절자는 값진 깃드는 체험을 얻는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살아남지 못하는 필사 주체 안에서만 조절자가 상급 작업을 위하여 체험을 얻는 것은 아니다.
110:7.4 (1212.5) 필사자와 융합하고 나서 조절자는 너의 운명과 체험을 함께 한다. 조절자들은 너희이다. 불사의 상물질 혼, 그리고 관련된 조절자가 융합한 뒤에, 하나가 가졌던 체험과 가치가 모두 결국 다른 하나의 소유물이 되며, 그래서 이 둘은 실제로 한 개체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새로운 존재는 영원한 미래를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영원한 과거로부터 왔다. 살아남는 혼 속에서 한때 인간적이었던 모든 것, 그리고 조절자 속에서 체험으로 신다운 모든 것이, 이제 새롭고 늘 올라가는 우주 인격자의 실제 재산이 된다. 그러나 각 우주 수준에서, 조절자는 그 수준에서 중요하고 가치 있는 속성만 그 새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다. 신다운 훈계자와 절대로 하나인 상태, 한 조절자의 재산을 완전히 소모하는 일은, 영들의 아버지요 항상 이 신의 선물의 근원인 우주의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도달하고 나서 오로지 영원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110:7.5 (1212.6) 진화하는 혼과 신다운 조절자가 마침내, 영원히 융합할 때, 하나는 다른 하나가 가진 체험할 수 있는 품질을 모두 얻는다. 이 동격의 인격자는, 한때 그 조상인 필사 지성이 지녔고 다음에 상물질 혼 안에서 거하던 살아남는 체험적 기억을 모두 소유하며, 그에 덧붙여 이 장래의 최후자는 필사자에게 깃들었던, 만세(萬世)를 통해서 조절자가 체험으로 얻은 모든 기억을 품는다. 그러나 신다운 훈계자가 과거 영원으로부터 앞으로 가져온 의미와 가치를 한 조절자가 인격 협동 관계에 완전히 부여하는 데는 미래 영원이 필요할 것이다.
110:7.6 (1213.1) 대다수의 유란시아인 경우에, 조절자는 죽음으로 구원이 도착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너희의 물질 존재 서열에 본래부터 있는 에너지 형태와 화학적 힘이 거의 완전히 지배하는 상태로부터, 태어나는 혼이 해방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조절자와 접촉하는 데 너희가 겪는 주요한 어려움은 본래부터 가진 바로 이 물질적 성품에 있다. 극소수의 필사자가 정말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너희는 신다운 조절자와 유리하게 연락하는 점까지 너희의 지성을 영적으로 개발하고 훈련하지 않는다. 인간 지성의 귀에는 자비의 아버지로부터 진행하는, 우주의 방송, 사랑의 방송이 전하는 다채로운 말씀으로부터 조절자가 번역해 주는 영적 탄원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 조절자는 너희 육체적 성품에 본래 있는 화학 및 전기(電氣) 세력에 아주 완전히 지배된 동물 지성 속에,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이 영의 인도를 의식하게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함을 발견한다.
110:7.7 (1213.2) 조절자는 필사 지성과 접촉하기를 기뻐한다. 그러나 동물의 저항을 깨뜨리고 너희와 직접 교통할 수 없으면서 말없이 머무르는 오랜 세월을 통해서 그들은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봉사의 눈금에서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생각 조절자는 더욱 유능하게 된다. 그러나 여러 저택 세계에서 지성과 지성이 마주하고 네가 조절자를 알아볼 때 인사하는 것처럼 똑같이 충만한 애정, 동정적이며 깊은 애정으로, 결코 조절자는 네가 육체를 입은 동안에 너에게 인사할 수 없다.
110:7.8 (1213.3) 필사 인생 동안에 물질 몸과 지성은 너를 조절자로부터 떼어놓고 자유롭게 교통하는 것을 막는다. 죽은 뒤, 영원한 융합이 있은 뒤에, 너와 조절자는 하나이다―너희는 따로 된 존재로 구별할 수 없다―따라서 네가 이해하는 식으로 교통할 필요는 존재하지 않는다.
110:7.9 (1213.4) 조절자의 목소리는 늘 네 안에 있지만, 너희의 대부분은 일생 동안에 그 목소리를 듣는 일이 드물 것이다. 3급과 2급을 달성한 수준 밑에 있는 인간은, 최상의 소망을 가진 순간, 최상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린 결과로 생기는 경우를 제외하고, 조절자가 직접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 일이 드물다.
110:7.10 (1213.5) 운명 예비병의 필사 지성과 행성 감독자들 사이에 접촉을 시작하고 그치는 동안에, 깃드는 조절자가 좋은 위치에 있어서 필사자인 짝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이 어떤 때에는 가능하다. 얼마 전에, 유란시아에서, 스스로 행동하는 조절자가 그 인간 동료에게 그런 소식을 전했는데, 그는 운명 예비군의 한 사람이었다. 이 소식은 이 말씀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제, 내가 간절히 보살피는 주인을 다치거나 위태롭게 하지 않으면서, 지나치게 꾸짖거나 낙심케 만들려는 의도가 없이, 나를 위하여, 그에게 이렇게 부탁하는 말을 기록하여라.” 그리고 나서 아름답게 감동을 주며 호소하는 훈계가 뒤따랐다. 다른 것 중에도 그 조절자는 이렇게 간청했다: “그가 나에게 더욱 충실하게 성실히 협조하고, 내가 놓아두는 과제들을 더 즐겁게 견디며, 내가 마련한 순서를 더 충실하게 수행할 것, 내가 선택한 여러 시련을 더 참을성 있게 견디고, 내가 고른 길을 더 끈질기게, 더욱 즐거워하면서 밟으며, 내가 그침 없이 노력한 결과로서 생길지도 모르는 영예를 더 겸손하게 받을 것―내가 깃드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나의 훈계를 전하여라. 그에게 나는 신다운 영의 최고의 헌신과 사랑을 주노라. 나의 사랑하는 주체에게 또한 이를지니, 맨 끝까지, 땅에서 마지막 싸움이 끝날 때까지,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내가 활동하겠고, 나에게 인격을 맡긴 것에 내가 충실하리라고. 그리고 살아남으라고, 나를 실망시키지 말며, 내가 꾹 참고 격렬하게 투쟁하여 생길 보상을 나한테서 빼앗지 말라고 그에게 훈계하노라. 우리가 인격을 얻는 것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노라. 한 수준 한 수준, 나는 이 인간 지성의 높이까지 참을성 있게 올라왔고, 내 부류의 우두머리한테서 인정을 받고 있다는 증언을 받았노라. 한 수준 한 수준 나는 심판을 받기까지 전진하고 있고, 기쁘게, 불안해하지 않으면서 나는 운명의 점호를 기다리며, 나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법정에 모든 것을 제출할 준비가 되어 있노라.”
111:0.1 (1215.1) 신다운 조절자가 인간의 지성 속에 계신 것은 과학이나 철학이 인격자의 진화하는 혼을 흡족히 이해하는 것을 언제까지나 불가능하게 만든다. 상물질 혼은 우주의 산물이며, 오직 우주적 통찰력과 영적 발견을 통하여 정말로 혼을 이해할지 모른다.
111:0.2 (1215.2) 혼, 그리고 안에 깃드는 영이 있다는 개념은 유란시아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 개념은 행성에서 다양한 체계의 신앙에서 자주 나타났다. 어떤 서양 신앙 뿐 아니라 동양의 많은 신앙이 사람이 인간적 재산을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신성한 유산을 가졌음을 깨달았다. 신이 바깥에 두루 계실 뿐 아니라 마음 속에 계시다는 느낌은 오랫동안 많은 유란시아 종교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인간의 성품 안에서 무언가, 잠시 살다가 가는 현세의 인생을 지나서 견딜 운명을 가진, 대단히 중대한 무엇이 자라고 있다고 사람들은 오랫동안 믿어 왔다.
111:0.3 (1215.3) 신의 영이 사람의 진화하는 혼을 낳았다는 것을 사람이 깨닫기 전에, 혼은 몸의 다른 기관―눈ㆍ간ㆍ콩팥ㆍ심장, 그리고 나중에는 골―에 거한다고 생각되었다. 야만인은 혼을 피ㆍ숨ㆍ그림자, 그리고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연결시켰다.
111:0.4 (1215.4) 아트만[1] [1776] 개념으로 힌두교 선생들은 조절자의 성품과 계심을 이해하는 데 정말로 접근했지만, 진화하고 불멸의 잠재성을 가진 혼이 함께 존재함을 구별하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인은 인간 존재의 두 가지 모습, 양(陽)과 음(陰), 혼과 영을 인식하였다. 에집트인과 여러 아프리카 부족도 두 가지 요소, 즉 카와 바를 믿었다. 혼은 선재(先在)하지 않고, 오로지 영이 그렇다고 보통 믿었다.
111:0.5 (1215.5) 나일 강 유역의 거주자들은 은총을 얻은 각 사람은, 태어날 때나 바로 그 뒤에, 보호하는 영을 수여받는다고 믿었고, 이것을 카라고 불렀다. 그들은 이 수호 영이 일생을 통해서 그 필사 주체와 함께 남아 있고, 그보다 먼저 미래 상태로 지나간다고 가르쳤다. 룩소에 있는 한 신전(神殿)의 벽에는 아멘호텝 3세의 출생이 그려져 있는데, 그 어린 왕자가 나일 강 신의 팔 위에 그려져 있고, 그 가까이 왕자와 모습이 똑같은 또 다른 아이가 있는데, 그것은 에집트인이 카라고 부른 그 개체의 상징이다. 이 조각은 기원전 15세기에 완성되었다.
111:0.6 (1215.6) 카는 관계된 필사자의 혼을 현세의 인생에서 더 나은 길로 안내하기를 바라지만, 특별히 다음 세상에서 그 인간 주체의 행운에 영향을 미치고 싶어 하는 우수한 천재 영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시기에는 한 에집트인이 죽었을 때 그의 카가 큰 강의 건너편에서 그를 기다릴 것이라 기대했다. 처음에는, 오직 왕들이 카를 가졌다고 생각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올바른 사람은 모두 카를 소유한다고 믿었다. 어느 에집트 통치자는 마음 속에 있는 카에 대하여 말했다: “나는 카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았다. 나는 카의 지침을 어기기를 두려워했다. 나는 카로 인하여 번영하였고, 카가 나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처럼 성공했다. 나는 그의 지침으로 탁월하게 되었다.” 카는 “모든 사람 속에 하나님이 내리신 신탁”이라고 많은 사람이 믿었다. 많은 사람이 “너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즐겁게 영원을 보내리라”고 믿었다.
111:0.7 (1216.1) 진화하는 유란시아 필사자의 민족들은 모두 혼 개념에 해당하는 낱말을 가졌다. 많은 원시 민족은 혼이 인간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내다본다고 믿었다. 따라서 악한 눈이 악의(惡意)를 가진 것에 겁을 먹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사람의 영은 주의 등불이라”고 오랫동안 믿었다. 릭 베다는 말한다, “나의 지성이 나의 마음에게 말하도다.”
111:1.1 (1216.2) 조절자가 하는 일은 비록 영적 성질을 가졌지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지적 기초 위에 할 일을 모두 해야 한다. 지성은 인간의 토양이요, 그로부터 영 훈계자는 그가 깃드는 인격자의 협조를 얻어서 상물질 혼을 진화시켜야 한다.
111:1.2 (1216.3) 온 우주의 몇 가지 지성 수준에는 우주의 통일성이 있다. 성운들이 우주 공간에 있는 우주 에너지에서 기원을 가지는 것과 비슷하게, 지적(知的) 자아들은 우주 지성에서 기원을 가진다. 지적 자아의 인간 수준에서 (따라서 인격 수준에서), 필사 지성의 찬성을 얻어서, 그러한 인간 자아 속에서 절대 가치를 가진 개체 점(點)의 창조적 계심과 함께 인격자가 받는 영적 재산 때문에, 영의 진화 잠재성이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영이 물질 지성을 지배하는 것은 두 가지 체험에 제약을 받는다. 이 지성이 일곱 보조 지성 영의 봉사를 통해서 진화했어야 하고, 물질 (인격) 자아는 상물질 자아, 즉 진화하고 불사의 가능성이 있는 혼을 창조하고 육성하는 데, 깃드는 조절자와 협동하기를 선택해야 한다.
111:1.3 (1216.4) 물질 지성은, 인격자가 살고 자의식하며, 결정을 내리고 하나님을 택하거나 버리며, 스스로를 영원하게 만들거나 죽이는 무대이다.
111:1.4 (1216.5) 물질적 진화는 너에게 살아 있는 기계, 너의 몸을 마련해 주었다. 아버지 스스로 우주에서 알려진 가장 순수한 영 실체, 너의 생각 조절자를 너에게 부여하셨다. 그러나 네 손 안에, 너 자신의 결정에 지배되는 지성이 수여되었으며, 지성으로 너는 살거나 죽는다. 이 지성 안에서, 너는 이 지성을 가지고 너를 조절자와 같아지게 만들 수 있는 도덕적 결정을 내리며, 조절자와 같아짐은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이다.
111:1.5 (1216.6) 필사자의 지성은 물질적 일생 동안에 쓰기 위하여 인간에게 빌려 준 일시적 지능 체계이며, 인간이 이 지성을 사용함에 따라서 그들은 영원히 존재할 가능성을 받아들이거나 물리친다. 너의 뜻에 지배되는 우주 실체 중에서 지성이 대체로 너의 총재산이며, 혼―상물질 자아―는 필사 자아가 현세에 내리는 결정이 거두는 수확을 충실하게 묘사할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밑으로 전기 화학 작용 위에 살포시 놓여 있고, 위로는 영ㆍ상물질 에너지 체계에 살며시 닿는다. 이 두 체계 중 어느 것도 인간은 그 필사 인생 동안에 결코 완전히 의식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은 자신이 의식하는 지성 속에서 일해야 한다. 지성이 무엇을 이해하는가 하는 것보다 지성이 무엇을 이해하기를 바라는가, 이것이 살아남는 것을 보장한다. 지성이 무엇과 비슷한가가 아니라 지성이 무엇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가, 이것이 영의 신분을 증명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보다 사람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이 우주에서 승천하는 결과를 낳는다. 네가 오늘 무슨 신분인가 하는 것은, 날마다, 영원 속에서, 네가 무슨 신분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보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111:1.6 (1217.1) 지성은 인간의 의지가 죽음의 불협화음을 치거나 아니면 바로 그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을 확인하고 그 결과로 사람을 영원히 살아남게 만드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솟아나게 할 수 있는, 우주의 악기(樂器)이다. 결국, 사람에게 수여된 조절자는 악에 물들 수 없고 죄를 지을 능력이 없지만, 비뚤어지고 자아를 추구하는 인간 의지의 죄 짓는 음모로 인하여 필사자의 지성은 실제로 비틀리고 왜곡될 수 있고, 악하고 더러워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아는 인간의 의지, 영의 빛을 받은 의지에 따라서, 이 지성은 고귀하고, 아름답고, 참되고 선하게―실제로 위대하게―될 수 있다.
111:1.7 (1217.2) 진화된 지성은 우주의 지적 성향의 두 극단―온전히 기계화된 것과 완전히 영답게 변한 것―위에 스스로 명시될 때에야 완전히 안정되고 믿을 만하다. 순수한 기계적 통제와 참된 영 성품, 이 두 가지 지적 극단(極端) 사이에, 거대한 집단의 진화하고 올라 가는 지성들이 개재하며, 이들의 안정성과 차분함은 인격자의 선택, 그리고 영의 신분에 달려 있다.
111:1.8 (1217.3) 그러나 사람은 수동적으로 노예처럼, 의지를 조절자에게 넘겨주지 않는다. 오히려 조절자의 이끄심이 자연스러운 필사 지성의 욕구 및 충동과 다른 것을 의식할 때, 그렇게 의식하면서, 활발하게 적극적으로, 고분고분하게 그의 이끄심을 따르기를 택한다. 조절자는 사람의 지성을 조종하지만, 결코 그의 뜻에 어긋나게 지성을 지배하지 않는다. 조절자에게 인간의 뜻은 가장 중요하다. 진화하는 인간 지능이 활동하는 거의 한없는 무대에서 생각을 조절하고 인품을 변화시키는 영적 목표를 이루려고 애쓰는 동안, 조절자는 인간의 의지를 그렇게 여기고 존중한다.
111:1.9 (1217.4) 지성은 너의 배요, 조절자는 너의 뱃길 안내자, 인간의 의지는 선장(船長)이다. 필사의 배의 주인은, 신다운 안내자가 하늘 가는 혼이 영원히 살아남게 하는 상물질 항구로 안내하는 것을 믿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오로지 이기심과 게으름과 죄 많음으로 사람의 의지는 그러한 충실한 안내자의 지도를 물리치고, 자비를 거절한 나쁜 모래사장 위에, 용납한 죄의 바위들 위에, 필사자의 생애를 궁극에 결딴낸다. 너의 승인을 받아서, 이 충실한 뱃길 안내자는 시간의 장벽과 공간의 장애물을 거쳐서, 신다운 지성의 바로 그 근원까지, 그리고 이를 지나서 계속, 아니 조절자들의 파라다이스 아버지에게 이르기까지, 너를 안전히 데리고 갈 것이다.
111:2.1 (1217.5) 우주 지능의 지적 기능 전역에 걸쳐서, 총 지성이 지적 활동의 여러 부분을 지배한다. 지성의 본질은 기능적 통일이다. 따라서 그릇되게 안내 받은 자아가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하고 선택함으로 저지되고 방해 받을 때에도, 지성은 어김없이 이 구조적 통일성을 보인다. 의지의 위엄과 승천 특권이 있는 자아들과 가지는 모든 수준의 관계에서, 이 통일된 지성은 영의 조정을 변함없이 찾는다.
111:2.2 (1217.6) 필사인의 물질 지성은 상물질 천을 담은 우주의 베틀이며, 깃드는 생각 조절자는 그 천 위에 지속하는 가치와 신성한 의미를 지닌 한 우주 인품―궁극의 운명과 끝없는 생애를 가진 살아남는 혼, 잠재 최후자―의 영 무늬를 짜 넣는다.
111:2.3 (1218.1) 사람의 인격은 물질 몸에 있는 생명으로 말미암아 기능적 관계에 같이 묶여 있는 지성 및 영과 동일시된다. 그러한 지성과 영이 작용하는 이 관계는 지성과 영, 이 둘의 품질이나 속성의 어떤 조합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히 지속할 잠재성이 있는, 전혀 새롭고 독창적이고 고유한 우주 가치, 즉 혼을 낳는다.
111:2.4 (1218.2) 그러한 불사의 혼을 진화로 창조하는 데는 둘이 아니라 세 가지 요인이 있다. 인간의 상물질 혼의 이 세 가지 선행 조건은 다음과 같다:
111:2.5 (1218.3) 1. 인간의 지성, 그리고 그에 선행하고 그 지성에 미치는 모든 우주 영향.
111:2.6 (1218.4) 2. 이 인간의 지성에 깃드는 신다운 영, 그리고 인생에서 관계된 모든 영적 영향 및 요인과 함께, 절대적 영 성질을 가진 그러한 분신 속에 본래부터 있는 모든 잠재성.
111:2.7 (1218.5) 3. 물질 지성과 신다운 영 사이의 관계, 이것은 그러한 관계에 기여하는 어느 쪽 요인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가치를 뜻하고 의미를 지닌다. 이 독특한 관계의 실체는 물질도 영도 아니며, 상물질이다. 그것은 혼이다.
111:2.8 (1218.6) 중도인(中道人)들은 사람이 진화시키는 이 혼을, 하급 또는 물질 지성, 그리고 상급 또는 우주 지성과 구별하여, 중간 지성이라고 이름 지은 지 오래다. 이 중간 지성은 정말로 상물질 현상이니, 그것이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상물질로 진화하는 잠재성은 지성의 두 가지 보편적 충동에 본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을 알고 창조자의 신성에 이르려는, 사람의 유한한 지성의 충동이요, 다른 하나는 사람을 알고 인간의 체험을 얻으려는 창조자의 무한한 지성의 충동이다.
111:2.9 (1218.7) 불사의 혼을 진화시키는 이 숭고한 거래가 가능하게 되는 것은 그 필사 지성이 첫째로 인격을 가졌고, 둘째로 동물을 초월하는 실체들과 접촉하기 때문이다. 그 지성은 우주에서 봉사하는 초물질 자질을 소유하며, 이것은 도덕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도덕적 성품이 생겨나는 것을 보장하고, 그렇게 함으로 관련된 영적 봉사, 그리고 깃드는 생각 조절자와 진정한 창조적 접촉을 가지게 한다.
111:2.10 (1218.8) 인간 지성이 접촉함으로 그렇게 영적으로 변화되는 불가피한 결과는 혼이 차츰 태어나는 것이다. 혼은 하나님을 몹시 알고 싶어 하는 인간 의지에 지배되는 보조 지성이 우주의 영적 세력과 함께 연락하여 일함으로 합동으로 지은 산물이며, 그 우주 세력은 만물을 지으신 바로 그 하나님의 실제 분신―신비의 훈계자―의 전반적 통제를 받는다. 이처럼 자아의 물질적 필사 실체는 육체적 생명 기계가 현세의 한계를 뛰어넘고, 자아를 지속하기 위하여 진화하는 수송 수단 속에서 새 표현과 새 신분을 얻으며, 그 수송 수단이 상물질인 불사의 혼이다.
111:3.1 (1218.9) 필사 지성의 실수와 인간의 잘못된 행동은 혼의 진화를 두드러지게 늦출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잘못은 인간 의지의 찬성을 얻어서 깃드는 조절자가 혼의 진화를 한 번 시작하면, 그러한 상물질 현상을 억제할 수 없다. 그러나 필사자가 죽기 전에 언제라도, 바로 이 물질적 인간 의지는 그러한 선택을 취소하고 살아남기를 거절할 힘이 있다. 살아남은 뒤에도 하늘 가는 그 필사자는 영생을 거부할 이 특권을 아직도 지닌다. 조절자와 융합하기 전에 어느 때라도, 진화하고 승천하는 인간은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기를 선택할 수 있다. 조절자와 융합하는 것은 하늘 가는 필사자가 영원히, 조건 없이, 아버지의 뜻 행하기를 택했다는 사실을 알린다.
111:3.2 (1219.1)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에, 진화하는 혼은 필사 지성이 내린 초물질적 결정을 강화할 수 있게 된다. 혼은 초물질이니까, 인간이 체험하는 물질 수준에서 저절로 작용하지 않는다. 영 밑에 있는 이 혼은 조절자와 같이, 신의 어떤 영이 함께 일하지 않고서는 상물질 수준보다 높이 활동할 수도 없다. 이 물질 지성이, 관계된 기능을 가진 그러한 상물질 혼에게 아낌없이, 기꺼이, 그러한 권한을 넘겨줄 때, 그리고 그렇게 하는 동안을 제외하고, 죽음이나 이동이[2] [1777] 필사 지성과 물질적으로 연합된 상태로부터 혼을 분리할 때까지, 그 혼은 마지막 결정을 내리지도 않는다. 사는 동안에 필사자의 의지, 결정하고 선택하는 인격의 힘은 물질 지성 회로에 거한다. 땅에서 필사자의 성장이 진행됨에 따라서, 이 자아는 귀중한 선택하는 힘과 더불어, 태어나는 상물질 혼 개체와 점점 더 동일시된다. 죽고 나서, 저택 세계에서 부활한 다음에, 그 인격은 상물질 자아와 완전히 동일시된다. 이처럼 혼은 인격 신분을 가진, 앞날에 상물질 수송 수단이 되는 새싹이다.
111:3.3 (1219.2) 이 불사의 혼은 처음에 전적으로 상물질 성질이지만, 발달 능력을 소유하기 때문에, 신의 영들과 융합할 가치가 있는 참 영 수준까지 반드시 올라가며, 보통은 사람의 머리 속에서 그러한 창조 현상을 시작한 우주의 아버지의 바로 그 영과 융합한다.
111:3.4 (1219.3) 인간의 지성과 신다운 조절자, 이 둘은―조절자는 충분히, 지성은 어느 정도― 진화하는 혼의 풍채 및 차별되는 성질을 의식한다. 그 혼은 자체의 진화적 성장에 비례하여, 갈수록 더 지성과 조절자를 연합된 신분으로서 의식하게 된다. 혼은 인간 지성과 신다운 영, 이 둘의 품질을 함께 가지지만, 지성 기능의 육성을 통해서, 영의 통제와 신의 지배를 늘이는 방향으로 끈질기게 진화하며, 지성 기능이 의미하는 것들은 참된 영 가치와 일치하기를 추구한다.
111:3.5 (1219.4) 필사자의 생애, 즉 혼의 진화는 시험 기간이 아니라 교육이다. 최상의 가치가 살아남는 것을 믿는 것이 종교의 핵심이다. 진정한 종교적 체험은 최상의 가치를 가진 것과 우주적 의미가 있는 것들이 뭉쳐서 하나의 우주 실체로 실현되는 데 있다.
111:3.6 (1219.5) 지성은 양(量), 실체, 의미 있는 것들을 이해한다. 그러나 질―가치―는 느껴진다. 느끼는 그 주체는 사물을 아는 지성, 그리고 실체화시키는, 관계된 그 영이 공동으로 창조한 것이다.
111:3.7 (1219.6)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은 하나님을 의식(意識)하는 가치의 실현이며, 사람의 진화하는 상물질 혼이 진리ㆍ아름다움ㆍ선에 젖어 있는 한, 그 결과로 생긴 그러한 존재는 파괴될 수 없다. 사람의 진화하는 혼 속에 영원한 가치가 조금도 살아남지 않으면, 필사의 존재는 의미가 없고, 생명 그 자체가 비극의 망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까지나 참말이다: 시간 세계에서 너희가 시작하는 것을―마칠 가치가 있다면―너희는 영원 속에서 확실히 마칠 것이다.
111:4.1 (1219.7) 인식하는 것은 바깥 세계로부터 받은 감각 인상을 개인의 기억 형태 속으로 맞춰 넣는 지적 과정이다. 이해하는 것은 이 인식된 감각의 인상(印象)과 그에 관계된 기억 형태가 동태적 원칙들의 망으로 통합되거나 조직되었음을 뜻한다.
111:4.2 (1220.1) 의미는 인식과 이해의 조합에서 파생된다. 의미는 완전한 감각 세계나 물질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의미와 가치는 오직 인간 체험의 정신, 즉 초물질 분야에서 파악된다.
111:4.3 (1220.2) 참된 문명의 진보는 모두, 인류의 이 정신 세계에서 태어난다. 참으로 창조적인 것은 오직 정신적 생활이다. 어느 세대라도 젊은이의 대다수가 흥미와 에너지를 감각 세계, 곧 바깥 세계의 추구, 물질만 중시하는 추구에 쏟을 때 문명은 도저히 진보할 수 없다.
111:4.4 (1220.3) 정신 세계와 바깥 세계는 다른 집합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젊은이의 4분의 3이 물질만 중시하는 직업에 들어가서 바깥 세계의 감각 활동을 추구하는 데 전념할 때 어떤 문명이라도 위태롭다. 젊은이가 소홀히 하여 윤리ㆍ사회학ㆍ우생학ㆍ철학ㆍ예술ㆍ종교ㆍ우주론에 흥미를 갖지 않을 때, 문명은 위험에 빠져 있다.
111:4.5 (1220.4) 오로지 인간이 체험하는 영(靈) 영역에 상의식 지성이 부딪침에 따라서 상의식 지성의 상급 수준에서, 더 낫고 더 오래 가는 문명을 세우는 데 이바지할 효과적 기본 모형들과 관련하여 너희는 상급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인격은 본래부터 창조성이 있지만, 이처럼 개인의 정신 생활에서만 활동한다.
111:4.6 (1220.5) 눈의 결정(結晶)은 반드시 육각형의 형태이지만, 결코 어느 두 결정도 같지 않다. 아이들은 종류를 따르지만, 어느 두 아이도, 아니 쌍둥이의 경우에도, 결코 똑같지 않다. 인격은 종류를 따라가지만 반드시 독특하다.
111:4.7 (1220.6) 행복과 기쁨은 정신 생활에서 기원을 가진다. 너는 진짜 기쁨을 아주 혼자서는 맛볼 수 없다. 혼자 사는 생활은 행복에 치명적이다. 가족과 나라조차도, 남과 나누면, 생활을 더욱 즐길 것이다.
111:4.8 (1220.7) 너희는 바깥 세계―환경―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너의 지시에 가장 많이 지배되는 것은 정신 세계의 창조성이니, 거기서 너의 인격은 선행(先行)하는 원인 법칙의 사슬로부터 대체로 해방되기 때문이다. 인격에는 의지의 제한된 주권이 관련되어 있다.
111:4.9 (1220.8) 사람의 이 정신 생활이 참으로 창조성이 있으니까, 이 창조성이 자발적이고 온통 함부로 일어날 것인가, 아니면 통제되고, 지휘되고, 긍정적일 것인가를 선택하는 책임이 각 사람에게 지워진다. 창조적 상상력이 활동하는 그 무대가 이미 편견ㆍ미움ㆍ두려움ㆍ분개심ㆍ앙갚음ㆍ편협으로 차 있을 때, 어떻게 그 상상력이 훌륭한 열매를 맺을 것인가?
111:4.10 (1220.9) 생각은 바깥 세계의 자극에서 기원을 가질지 모르지만, 이상은 오직 사람의 정신 세계의 창조 영역에서 태어난다. 오늘날 좋은 생각이 넘쳐흐르는 사람들이 세계의 여러 나라를 지도하지만, 그들의 이상은 빈곤하다. 이것이 어째서 빈곤ㆍ이혼ㆍ전쟁, 그리고 민족 사이의 반목이 일어나는가 설명한다.
111:4.11 (1220.10) 이것이 문제이다: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이 속 사람의 창조하는 힘을 받으면, 자유 의지 창조성은 자유 의지로 파괴하는 잠재성을 포함한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창조성이 파괴성으로 바뀔 때, 너희는 죄와 악의 황폐한 결과―억압ㆍ전쟁ㆍ파괴―와 얼굴을 마주한다. 악은 창조성이 치우친 것이요, 그것은 붕괴와 궁극의 파괴로 향한다. 모든 대립은 정신 생활의 창조 기능을 억제하므로 악하다―대립은 인격 안에서 내란을 일으키는 종자(種子)이다.
111:4.12 (1221.1) 정신적 창조성은 인격을 통합하고 자아를 통일함으로 인품을 고귀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한다. 이것이 언제까지나 참말이다: 지난날은 바꿀 수 없고, 오로지 속 자아의 현재 창조성이 수고함으로 앞날을 바꿀 수 있다.
111:5.1 (1221.2)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더도 덜도 아니고, 하나님―정신적 의미와 가치가 있는 그러한 인생을 가능하게 만든 바로 그 하나님―과 정신 생활을 사람이 기꺼이 나누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나누는 것은 하나님 같다―신답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과 나누어 가지며, 한편 그들은 다시 여러 우주의 신다운 아들과 영 딸들과 함께 모든 것을 나누어 가진다.
111:5.2 (1221.3) 하나님을 본받는 것은 완전에 이르는 열쇠이다. 그의 뜻을 행하는 것은 살아남는 비결이요, 살아남아서 완전에 이르는 비결이다.
111:5.3 (1221.4) 필사자는 하나님 안에서 살며, 그래서 하나님은 필사자 속에서 살기를 뜻하셨다.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 같이, 그도―그리고 먼저―그렇게 자신의 일부를 사람과 같이 있으라고 맡겼다. 그는 인간의 의지에 복종하여 사람 안에 살고, 사람에게 깃들기로 찬성하였다.
111:5.4 (1221.5) 사람의 인격이 인간의 의지를 아버지의 뜻에 굴복하겠다고 찬성할 때―선택할 때―이 인생에서 평화를 얻고, 죽고 나서 살아남으며, 다음 인생에서 완전하게 되고, 영원까지 봉사하는 것―이 모두가 이제 (정신적으로) 이루어진다. 아버지는 자신의 한 조각을 사람의 인격 의지에 복종하게 만들기를 선택하셨다.
111:5.5 (1221.6) 그러한 인간의 선택은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의지를 거룩하게 바침이요, 의지의 확대, 의지를 영화롭게 함이요, 의지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선택은 사람의 의지를 현세의 중요성을 가진 수준에서 더 높은 지위로 들어올리며, 거기서 인간 아들의 인격은 영 아버지의 성격과 친교한다.
111:5.6 (1221.7) 인간 아들이 파라다이스에 하나님이 사실로 계신 앞에 실제로 서기 전에 한 시대가 지나가야 하더라도, 아버지의 뜻을 이처럼 택하는 것은 필사 인간이 영 아버지를 영적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이 선택은 사람의 의지를 부인하는 데―“내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에 있기보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나의 뜻이나이다”하고 사람이 분명히 확인하는 데 있다. 이렇게 선택하면, 머지 않아 하나님을 택하는 아들은 깃드는 하나님의 분신과 마음 속에서 뭉친(융합한) 것을 발견할 터이고, 한편 완전하게 되는 바로 이 아들은 사람의 인격이 조물주의 성격과 경건한 친교를 가지면서 지극한 인격의 만족을 발견할 것이다. 이 두 성격의 창조 속성은 스스로 의지(意志)한 공통된 표현에서 영원히 합쳐졌다―사람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 사이에 또 하나의 영원한 협동 관계가 태어난 것이다.
111:6.1 (1221.8) 필사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겪는 많은 문제는 우주에 대하여 그가 두 가지 관계를 가진 데서 생겨난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다―자연 속에서 존재하는데―그래도 자연을 초월할 수 있다. 사람은 유한하지만 그에게 무한의 불꽃이 깃들고 있다. 그러한 이중 상황은 잘못이 일어날 잠재성을 마련할 뿐 아니라, 또한 작은 걱정이 아니라 많은 불확실성을 안고 있는 숱한 사회적ㆍ도덕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111:6.2 (1222.1) 천성을 이기고 사람의 자아를 초월하는 데 요구되는 용기는 자만의 유혹에 굴복할지도 모르는 용기이다. 자아를 초월할 수 있는 필사자는 자신의 자의식을 신격화하는 유혹에 무릎을 꿇을지도 모른다. 필사자가 당면하는 궁지는 사람이 자연에 묶여 있고, 한편 동시에 독특한 자유―영적 선택을 내리고 행동하는 자유―를 가졌다는 두 가지 사실에 있다. 물질 수준에서 사람은 자기가 자연에 종속되며, 한편 영적 수준에서 그는 자연을, 그리고 현세의 유한한 모든 것을 이기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한 역설(逆說)은 유혹, 잘못의 가능성, 잘못된 결정과 떼어낼 수 없으며, 자아가 뻐기고 거만하게 될 때, 죄가 생겨날지 모른다.
111:6.3 (1222.2) 죄의 문제는 유한한 세계에서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유한의 사실은 악하지도 않고 죄가 되지도 않는다. 유한한 세계는 한 무한한 창조자에게 지음을 받았고―그의 신다운 아들들의 작품이며―따라서 좋음이 틀림없다. 유한한 것을 악용하고, 왜곡하고, 곡해하는 것이 죄와 악을 낳는다.
111:6.4 (1222.3) 영은 지성을 지배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지성은 에너지를 통제한다. 그러나 물리적 영토에서 지성은 원인과 결과의 수학(數學) 수준에 본래 있는 변화 가능성을 지성 자체가 머리를 써서 조종해야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다. 사람의 지성은 본래부터 에너지를 통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의 특권이다. 그러나 사람의 지성은 물리적 우주의 에너지 비결을 통달한 주인이 된 바로 그 한도 안에서,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한다.
111:6.5 (1222.4) 사람이 물리적 실체를 뜯어고치고 싶을 때, 그것이 자신이든 환경이든, 물질을 통제하고 에너지를 지휘하는 수단과 방법을 발견한 그 범위까지 사람은 성공한다. 도움을 받지 않은 지성은 불가피하게 연결된 자신의 신체 작용을 제외하고, 물질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미칠 힘이 없다. 그러나 육체 작용을 총명하게 사용함으로 지성은 다른 기계 작용, 아니 에너지 관계와 살아 있는 관계까지도 창조할 수 있고, 이것들을 이용해서 이 지성은 우주에서 그 물리적 수준을 더욱 통제하고, 아니 지배할 수도 있다.
111:6.6 (1222.5) 과학은 사실의 근원이요, 지성은 사실을 모르고 작용할 수 없다. 사실은 지혜를 만드는 데 쓰이는 건축 자재이며, 이것은 생활 체험으로 인하여 함께 단단히 붙는다. 사람은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고, 사람은 사랑이 없어도 하나님의 법칙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신의 법칙과 신의 사랑을 발견하고 자신의 진화하는 우주 철학 안에서 이것들을 체험으로 조화하기까지, 사람은 결코 첫째 근원 중심의 성품, 만물을 둘러싸는 그 성품의 무한한 균형미, 숭고한 조화, 지극한 충만함을 이해할 엄두도 낼 수 없다.
111:6.7 (1222.6) 물질적 지식이 늘어나는 것은 생각의 의미와 이상의 가치를 더욱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인간은 정신적 체험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지만, 그가 손수 발견한 진리를 일상 생활에서 생기는 무자비한 실용적 요구에 적용하기 위해서, 사실을 훤하게 알 필요가 있다.
111:6.8 (1222.7) 자신이 헤어날 수 없이 자연에 묶여 있고, 한편 현세의 유한한 모든 것을 완전히 뛰어넘는 영적 힘을 지닌 것을 보면서, 필사 인간이 불안한 느낌에 시달리는 것은 자연스러울 뿐이다. 그러한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 한가운데서, 오직 종교적 자신감―팔팔한 믿음―이 사람을 지탱해 줄 수 있다.
111:6.9 (1223.1) 사람의 필사 성품에 성가시게 붙어 다니고 그의 영적 인품을 위태롭게 하는 모든 위험 중에서 자만심이 가장 위험하다. 용기가 있으면 용감하지만 자기 본위는 허영심이요 자살에 이른다. 적당한 자신감을 슬퍼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스스로를 초월하는 능력은 사람과 동물 왕국을 구별하는 한 가지이다.
111:6.10 (1223.2) 한 개인에게서 발견되든 집단이나 민족이나 국가에서 발견되든, 자만은 사람을 속이고 취하게 하고 죄를 낳는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자만은 몰락을 앞질러 간다.”
111:7.1 (1223.3) 안전에 대한 불확실성―시간 세계와 머리 속에서 불확실성,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면서 펼쳐지는 길에서 무슨 사건들이 생길 것인가에 관한 불확실성―은 파라다이스로 가는 모험의 본질이며, 영적 안전, 그리고 영원한 안전, 우주의 아버지의 신다운 동정심과 무한한 사랑을 아들인 사람이 무조건 신뢰함으로 얻는 안전을 말한다. 우주에서 경험 없는 시민으로서 겪는 불확실성과 전능하고 온통 지혜롭고 만물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여러 우주 저택에서, 하늘 가는 아들로서 얻는 안전을 말한다.
111:7.2 (1223.4) 조절자가 충실하게 네 혼을 부르는 소리가 멀리서 울리는 것을 주의하라고 너에게 훈계해도 좋은가? 깃드는 조절자는 시간 세계에서 네 생애의 투쟁을 중지하거나, 아니 물질적으로 변경할 수도 없다. 이 고난의 세상을 통해서 네가 나그네 길을 가는 동안, 조절자는 인생의 어려움을 덜어줄 수 없다. 신다운 내재자는 너희 행성에서 사는 대로 네가 인생의 투쟁을 벌이는 동안, 오직 참을성 있게 견딜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네가 하려고만 한다면―네가 일하고 걱정하는 동안, 싸우고 수고하는 동안―용감한 조절자가 너와 함께, 너를 위해서, 싸우도록 허락할 수 있다. 너의 현재 물질 세계의 평범한 문제들과 어렵고 벅찬 이 모든 씨름을 하는 참된 동기, 마지막 목표, 영원한 목적을 나타내는 그림을 조절자가 항상 떠올리게 버려두기만 한다면, 너는 무척 위로와 영감을 받고, 아주 황홀해지고 흥미가 생길 수 있다.
111:7.3 (1223.5) 조절자는 이 모든 힘드는 물질적 수고에 필적하여 기울이는 영적 노력을 너에게 보여주는 과제를 수행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조절자를 돕지 않는가? 인간으로 존재하면서 이 세상의 어려움과 씨름하는 동안, 너는 어찌하여 조절자가 우주의 힘을 가진 영적 진리로 너를 강화하도록 허락하지 않는가? 네가 어쩔 줄 몰라서 지나가는 시절의 문제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 어째서 우주 생활의 영원한 전망을 뚜렷이 그린 환상으로 하늘 조수가 너를 응원하도록 격려하지 않는가? 네가 시간 세계의 장애물 한가운데서 수고하고 너의 필사 인생의 나그네 길에 성가신 불확실한 미로에서 갈팡질팡하는 동안, 어째서 너는 우주 관점으로 깨우침과 영감을 받으려 하지 않는가? 비록 너의 발이 땅에서 수고하는, 물질의 길을 밟아야 하더라도, 어째서 너는 조절자가 네 생각에 영적 변화를 일으키도록 허락하지 않는가?
111:7.4 (1223.6) 유란시아의 상급 인종들은 복잡하게 섞였다. 그들은 다른 기원을 가진 여러 종족과 핏줄의 혼합이다. 이 복합 성품은 일생에 조절자가 효과 있게 일하는 것을 극히 어렵게 만들며, 죽은 뒤에 조절자와 수호 세라핌이 닥치는 문제를 분명히 불린다. 내가 구원자별로 갔다가, 한 운명 보호자가 그 필사 주체에게 수고하는 어려움을 참작하는 공식(公式) 진술문을 발표한 것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는다. 이 세라핌은 이렇게 말했다:
111:7.5 (1223.7) “내가 겪는 문제의 상당 부분은 나의 주체의 두 성품 사이에 그치지 않는 싸움 때문이었다. 큰 포부를 가진 욕구가 동물 같은 게으름에 부딪치고, 우수한 민족의 이상이 열등한 종족의 본능과 섞이며, 위대한 지성의 높은 목적이 물려받은 원시적 유산(遺産)의 충동으로 반대에 부딪친다. 멀리 내다보는 훈계자의 장거리 관점이 시간 세계의 인간적 근시안으로 무효가 되고, 하늘 가는 존재의 진취적 계획이 물질적 성질의 욕구와 갈망으로 인하여 수정되며, 우주 지능이 번쩍 떠올린 것은 진화하는 종족의 화학 에너지 명령으로 취소된다. 천사들의 권고가 동물의 감정으로 인하여 반대에 부딪치고, 지능이 받은 훈련이 본능의 성향 때문에 물거품이 되며, 개인의 체험은 종족의 쌓인 성향으로 반대에 부딪친다. 최선의 목적이 최악의 흐름에 빛을 잃고, 천재의 날아오르는 힘이 평범의 인력(引力) 때문에 가라앉으며, 착한 것의 진보는 나쁜 것의 타성에 젖어 늦어진다. 아름다운 자의 예술은 악의 존재로 인하여 더러워지고, 건강한 부력(浮力)은 질병의 무력함에 중화되며, 믿음의 샘물은 두려움의 독에 오염된다. 기쁨의 샘물이 슬픔의 강물로 말미암아 쓰디쓰게 되고, 기대하는 즐거움이 쓰라린 현실로 인하여 사라지며, 삶의 기쁨이 죽음의 슬픔에 늘 위협을 받는다. 그러한 행성에 그러한 인생이라니! 그래도 생각 조절자가 늘 도움을 주고 재촉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상당한 정도의 행복과 성공을 얻었고, 바로 지금 저택 나라의 심판실까지 올라갔다.”
112:0.1 (1225.1) 진화하는 행성들은 인간이 기원을 가지는 구체요, 하늘 가는 필사자의 생애가 시작되는 세계이다. 유란시아가 너의 출발점이고, 여기서 너와 너의 신다운 조절자는 일시 결합하여 붙어 있다. 너는 완전한 안내자를 부여받았다. 따라서 네가 성실하게 시간 세계의 달리기를 하여 믿음의 마지막 목표를 얻고자 하면, 오랜 세월에 걸쳐 얻으려던 보상이 네 것이 될 것이다. 너에게 깃드는 조절자와 너는 영원히 뭉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너의 진짜 생명, 하늘 가는 생명이 시작될 터이고, 너의 현재 필사 상태는 거기에 이르는 현관일 뿐이다. 그때 네 앞에 펼쳐진 영원 속에서 최후자로서 너의 높은 진취적 사명이 시작될 것이다. 진화로 성장하는 이 모든 연속된 세월과 단계에 걸쳐서, 절대로 변하지 않은 채로 남는 너의 일부가 있으니, 그것이 인격이다―변화가 있는 가운데 영구한 것이다.
112:0.2 (1225.2) 성격을[1] [1778] 정의하려 하는 것은 주제넘겠지만, 성격에 관하여 알려진 것들을 더러 열거하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112:0.3 (1225.3) 1. 성격은 바로 우주의 아버지가, 또는 아버지를 대행하는 합동 행위자가 수여한 품질, 실체 속에 있는 그 품질이다.
112:0.4 (1225.4) 2. 성격은 지성이나 영을 포함하여, 어떤 살아 있는 에너지 체계에도 부여될 수 있다.
112:0.5 (1225.5) 3. 성격은 선행(先行)하는 원인의 사슬에 완전히 지배되지는 않는다. 인격은 상대적으로 창조하거나 공동으로 창조하는 성질이 있다.
112:0.6 (1225.6) 4. 진화하는 물질 인간에게 수여되었을 때, 인격은 지성의 중재를 통해서 영이 에너지 물질을 통달하려고 애쓰게 만든다.
112:0.7 (1225.7) 5. 인격은 신분이 결여되어 있지만, 어떤 살아 있는 에너지 체계의 신분도 통일할 수 있다.
112:0.8 (1225.8) 6. 인력에 대하여 질적ㆍ양적 반응을 보이는 세 가지 에너지와 반대로, 인격은 성격 회로에 대하여 오직 질적(質的) 반응을 드러낸다.
112:0.9 (1225.9) 7. 변화가 있는 가운데서 인격은 변하지 않는다.
112:0.10 (1225.10) 8. 인격은 하나님께 선물을 드릴 수 있다―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자유 의지를 바칠 수 있다.
112:0.11 (1225.11) 9. 인격의 특징은 도덕성이다―다른 인격자들과 상대적 관계가 있음을 의식하는 특징이다. 인격은 행동 수준을 식별하고 그 차이를 까다롭게 분별한다.
112:0.12 (1225.12) 10. 인격은 독특하고, 절대로 독특하다. 인격은 시공에서 독특하다. 영원 속에서, 파라다이스에서 독특하다. 인격은 부여되었을 때 독특하다―복사품이 하나도 없다. 인격은 존재하는 순간마다 독특하며, 하나님과 가지는 관계가 독특하다―하나님은 인격자를 차별하지 않지만, 인격자를 더하지도 않으니, 인격자를 하나로 합칠 수 없기 때문이다―그들과 친교할 수 있지만 그들을 더할 수는 없다.
112:0.13 (1226.1) 11. 인격은 다른 성격의 계심에 직접 반응한다.
112:0.14 (1226.2) 12. 성격은 영에게 더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이처럼 아들과 가지는 관계에서 아버지가 먼저임을 보여준다. (지성을 영에 더할 필요는 없다.)
112:0.15 (1226.3) 13. 인격은 필사자가 죽은 뒤에, 살아남는 혼 속에서 신분을 가지고 살아날지도 모른다. 조절자와 인격은 변함이 없다. (혼 속에서) 그들 사이의 관계는 변화, 계속되는 진화에 불과하다. 이 변화(성장)가 그치면, 혼은 그칠 것이다.
112:0.16 (1226.4) 14. 인격은 시간을 독특하게 의식하며, 이것은 지성이나 영이 시간을 파악하는 것과 다른 무엇이다.
112:1.1 (1226.5) 우주의 아버지가 인간에게 잠재적으로 영원한 자질인 성격을 수여한다. 신이 주신 그러한 선물은 수많은 수준에서, 그리고 비천한 유한자로부터 가장 높은 초한자까지, 아니 절대자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연속된 우주 상황에서 작용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이처럼 인격은 세 우주 수준에서, 즉 세 우주 단계에서 작용한다:
112:1.2 (1226.6) 1. 위치 지위. 인격은 지역 우주, 초우주, 중앙 우주에서 똑같이 유능하게 활동한다.
112:1.3 (1226.7) 2. 의미 지위. 인격은 유한자ㆍ초한자(超限者)의 수준에서, 아니 절대자에 부딪치는 지경에도 효과 있게 활동한다.
112:1.4 (1226.8) 3. 가치 지위. 인격은 물질인 것, 상물질인 것, 영적인 것의 점진하는 분야에서 체험으로 실현될 수 있다.
112:1.5 (1226.9) 인격은 우주 차원에서 행위하는 완벽해진 범위가 있다. 유한 인격자의 차원은 셋이며, 대체로 다음과 같이 작용한다:
112:1.6 (1226.10) 1. 길이는 진보―공간을 통과하고 시간을 따르는 움직임―곧 진화의 방향과 성질을 나타낸다.
112:1.7 (1226.11) 2. 수직(垂直)의 깊이는 유기체의 욕구와 태도, 달라지는 수준의 자아 실현, 그리고 환경에 반응하는 일반 현상을 포함한다.
112:1.9 (1226.13) 유란시아 필사자에게 수여된 부류의 인격은 자아를 표현하는, 즉 인격자를 실현하는 일곱 차원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이 여러 차원의 현상은 유한한 수준에서 셋, 초한(超限) 수준에서 셋, 절대 수준에서 하나로 실현될 수 있다. 절대 이하의 수준에서는 이 일곱째 차원, 즉 총체 차원을 인격이 된 사실로서 체험이 가능하다. 가장 높은 이 차원은 연합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며, 무한하지는 않아도, 무한 아래에서 절대적인 것을 침투하는 차원의 잠재성이다.
112:1.10 (1226.14) 인격의 유한 차원은 우주에서 길이ㆍ깊이ㆍ넓이와 상관이 있다. 길이는 의미를 뜻하고, 깊이는 가치를 가리키며, 넓이는 통찰력―확실히 우주 실체를 체험으로 의식하는 능력―을 포함한다.
112:1.11 (1227.1) 상물질 수준에서는, 물질 수준의 이 유한 차원들이 모두 크게 향상되며, 어떤 새 차원의 가치는 실현이 가능하다. 상물질 수준에서 확대된 이 모든 차원의 체험은, 상지혜의 영향을 통해서, 또한 상물질 수학(數學)의 기여 때문에, 가장 높은 차원, 즉 인격의 차원과 함께 놀랍게 표현된다.
112:1.12 (1227.2) 체험으로 인격을 실현하는 데에는 차원 수준과 영적 수준이 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유한한 인간이 기억하려고 하면, 사람의 인격을 연구하는 데 필사자가 겪는 많은 어려움을 피할 수 있다.
112:1.13 (1227.3) 생명은 정말로 유기체(자아)와 그 환경 사이에 일어나는 과정이다. 인격은 신분의 가치와 연속성의 의미를 이 유기체와 환경의 연합에 나눠준다. 인격이 전체 상황에서 한 요인으로서 작용하니까, 이처럼 자극과 반응이 일어나는 현상은 단순한 기계적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너희가 인식할 것이다. 기계 작용은 태어날 때부터 수동적이며, 유기체들은 본래부터 능동적이라는 것은 언제나 참말이다.
112:1.14 (1227.4) 육체적 생명은 유기체 안보다, 유기체와 환경 사이에서 일어나는 과정이다. 그러한 과정은 모두, 그러한 환경에 대하여 유기체의 반응 형태를 지어내고 확립한다. 그리고 모든 그러한 지휘하는 형태는 목적의 선택에 상당히 영향을 미친다.
112:1.15 (1227.5) 지능의 중재를 통해서 자아는 환경과 의미 있는 접촉을 가진다. 유기체가 환경과 그러한 의미 있는 접촉(추진력에 대한 반응)을 가지는 능력과 자진성은 인격 전체의 태도를 나타낸다.
112:1.16 (1227.6) 인격은 고립되었을 때 그다지 잘 행동할 수 없다. 사람은 날 때부터 사회적인 생물이다. 그는 어디엔가 속하려고 몹시 바라는 마음에 지배된다. “아무도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2] [1779]는 것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112:1.17 (1227.7) 그러나 살아 있고 활동하는 인간의 총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인격 개념은 여러 관계를 통합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뜻한다. 인격은 여러 관계를 조정할 뿐 아니라 실체의 모든 요인을 통일함을 가리킨다. 관계는 두 물건 사이에 존재하지만, 셋 이상의 물건들은 궁극에 한 체계를 이루며, 그러한 체계는 그냥 확대되거나 복잡한 관계보다 훨씬 더한 것이다. 이 구별은 극히 중요하며, 한 우주 체계에서 개별 구성원들은, 전체와 가지는 관계에서, 그리고 전체의 개성을 통할 경우를 제외하고,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112:1.18 (1227.8) 인간 유기체의 경우에 유기체의 부분들을 합치면 자아―개성―을 이루지만, 그러한 과정은 인격과 아무 상관이 없고, 우주 실체들에 관계된 바와 같이, 인격은 이 모든 요소를 통일한다.
112:1.19 (1227.9) 집합에서는 부분들이 합쳐지며, 체계에서는 부분들이 정돈된다. 체계는 조직―자리의 가치―때문에 의미가 있다. 좋은 체계에는 모든 요소가 질서 있는 위치에 있다. 나쁜 체계에는 무엇인가 빠져 있든지, 제 자리에서 밀려나 있다―어지러워져 있다. 인간 체계에서는 바로 인격이 모든 활동을 통일하며, 다음에 신분과 창조성의 품질을 부여한다.
112:2.1 (1227.10) 자아를 연구하는 데 다음을 기억하면 유익할 것이다:
112:2.2 (1227.11) 1. 육체적 체계들은 종속된다.
112:2.3 (1227.12) 2. 지적 체계들은 서로 나란히 있다.
112:2.6 (1228.1) 모든 자아 개념에서 산다는 사실이 먼저이고, 그 평가나 해석은 나중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사람의 아이는 먼저 살고, 나중에 삶에 대하여 생각한다. 우주 체제에서 통찰력은 선견보다 앞선다.
112:2.7 (1228.2) 하나님이 사람이 된다는 우주의 사실은 언제까지나 인격의 모든 의미를 바꾸고 가치를 변화시켰다. 낱말의 참 뜻대로 하면, 인간이거나 신이거나, 아니면 인간이면서 신이거나, 사랑은 전체 성격을 서로 존중함을 의미한다. 자아의 부분들은 수많은 방법으로 활동할지―생각하고, 느끼고, 바랄지―모르지만, 지적 활동에는 오로지 전체 인격의 조정된 속성이 집중된다. 이 모든 능력은 한 인간이, 인간이거나 신이거나 다른 한 존재를 성실하게 사심 없이 사랑할 때, 그 필사 지성의 영적 자질과 연결된다.
112:2.8 (1228.3) 실체에 관한 필사자의 모든 개념은 사람의 인격이 사실임을 가정하는 데 기초를 둔다. 초인간 실체에 대한 모든 개념은, 사람의 인격이 어떤 관계된 영적 개체 및 신격자의 우주 실체들과 함께, 그리고 그 실체들 속에서 겪는 체험에 기초를 둔다. 인격을 제외하고, 인간의 체험에서 비영적인 것은 무엇이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필사자가 다른 성격자들과―인간이든 신이든―가지는 모든 참다운 관계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신의 성격과 그러한 친교를 가지는 것이 우주에서 올라가는 영원한 목표이다.
112:2.9 (1228.4) 인격의 소유는 사람이 한 영적 존재인 것을 확인하는데, 이는 자아의 통일성과 인격의 자의식이 초물질 세계가 부여한 자질이기 때문이다. 한 필사 유물론자가 초물질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은, 그 자체로서 저절로, 그의 인간 머리 속에 영(靈)의 통합과 우주 의식이 존재함을 보여주고, 그것들이 작용함을 가리킨다.
112:2.10 (1228.5) 물질과 생각 사이에는 대단히 큰 간격이 존재하며, 물질 지성과 영적 사랑 사이에 있는 이 간격은 측량할 수 없이 더 크다. 기계론에 따른 전자(電子)의 결합이나 유물론의 에너지 현상으로 보는 어떤 이론으로도, 자의식(自意識)은 말할 것도 없고 의식을 설명할 수 없다.
112:2.11 (1228.6) 지성이 실체의 궁극적 분석을 추구함에 따라서, 물질은 물질적 감각에는 사라진 것이지만, 아직도 머리 속에 실체로 남는다. 물질이 사라진 뒤에 남는 바로 그 실체를 영적 통찰력이 추구하고 이의 궁극적 분석을 추구할 때, 실체는 머리 속에 사라진다. 그러나 영의 통찰력은 영적 성품을 지닌 우주의 실체들과 최상의 가치를 여전히 파악한다. 따라서 과학은 철학에게 길을 비키고, 한편 철학은 진정한 영적 체험에 본래 있는 결론에 굴복해야 한다. 생각은 지혜에게 무릎을 꿇고, 깨우침을 받고 돌이켜보는 예배 속에서 지혜는 사라진다.
112:2.12 (1228.7) 과학에서는 인간 자체가 물질 세계를 관찰한다. 철학은 물질 세계의 이러한 관찰 결과를 지켜보는 것이다. 종교, 곧 참된 영적 체험은, 시공에 있는 에너지 물질의 이러한 모든 상대적 통합의 관찰 결과를 지켜보는 것, 곧 우주 현실을 체험으로 깨닫는 것이다. 순전한 유물론에 기초를 두고 우주에 관한 철학을 세우는 것은, 처음에 인간이 의식하는 체험 속에서 모든 물질적인 것이 현실로 느껴진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관찰하는 자는 관찰의 대상(對象)이 될 수 없다. 무엇을 평가하는 것은 평가 받는 바로 그 대상을 어느 정도 초월하기를 요구한다.
112:2.13 (1228.8) 시간 세계에서, 생각하는 것은 지혜로 인도하고, 지혜는 신을 예배하게 만든다. 영원 속에서는 신을 예배하는 것이 지혜로 인도하고, 지혜는 궁극에 최종의 생각을 낳는다.
112:2.14 (1229.1) 진화하는 자아가 통일되는 가능성은 다음 구성 요소의 품질에 본래부터 있다. 즉 기본 에너지, 기본 세포 조직, 근본적인 화학적 전체 통제, 최상의 생각, 최상의 동기, 최상의 목표, 그리고 파라다이스에서 수여된 신다운 영 (사람의 영적 성품이 자의식하는 비밀)이다.
112:2.15 (1229.2) 우주의 진화하는 목적은 영(靈)이 갈수록 더 지배하는 것, 생각 조절자의 가르침과 인도함에 의지로 반응함으로, 인격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인간 및 초인간의 성격은 본래부터 우주적 품질의 특징을 가지며, 이 품질은 “지배의 진화”라고 불러도 좋은데, 성격 자체와 그 환경을 통제하는 힘이 확대되는 것이다.
112:2.16 (1229.3) 한때 인간이었던 하늘 가는 인격자는 자아에 대하여, 그리고 우주에서, 의지가 점점 더 지배하는 큰 두 단계를 거친다:
112:2.17 (1229.4) 1. 우주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고 그 결과로 우주를 통달함과 아울러 신분을 확대하고 현실화하는 기법을 통해서, 자아의 실현을 확대하는 최후자 이전 체험, 즉 하나님을 추구하는 체험.
112:2.18 (1229.5) 2. 하나님을 닮는 신다운 수준에 아직 다다르지 못한, 하나님을 찾는 지적 존재들에게 체험하는 최상 존재를 드러냄으로 자아의 실현을 창조적으로 확대하는, 최후자 이후 체험, 즉 하나님을 드러내는 체험.
112:2.19 (1229.6) 내려오는 성격자들은 최상 신, 궁극 신, 절대 신의 신성한 뜻을 확인하고 집행하는 확대된 자격을 추구함에 따라서, 그들의 여러 가지 우주 모험을 통해서 비슷한 체험을 얻는다.
112:2.20 (1229.7) 물질적 자아, 곧 인간 신분의 자아 개체는, 육체로 사는 동안에 물질 생명이 타고 다니는 수단이 계속 작용하는 데, 그리고 에너지와 지능의 불안한 균형이 계속 존재하는 데 의존하며, 이것은 유란시아에서 생명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러나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자아, 죽는 체험을 초월할 수 있는 자아는, 생명을 수송하는 일시적 수단―물질적 육체―로부터 더 오래 가며 불사의 성질을 가진 상물질 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계속하여 혼이 영 실체의 입김을 받고 궁극에 영 실체의 지위를 얻는 그 수준까지, 진화하는 인격 신분의 자리 이동 잠재성을 만들어 겨우 진화된다. 물질적 연합으로부터 상물질 신분까지 이렇게 실제로 이동하는 것은 지음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으려는 결정, 성실하고 끈질기고 꾸준한 결정을 내림으로 이루어진다.
112:3.1 (1229.8) 유란시아인은 무릇 한 가지 죽음, 생명 에너지의 물리적 중지만 인정한다. 그러나 인격이 살아남는 것에 관하여, 정말로 세 가지가 있다:
112:3.2 (1229.9) 1. 영적 (혼의) 죽음. 필사 인간이 살아남기를 마침내 거절하면, 그리고 거절하고 나서, 조절자와 보살피던 세라핌의 공동 의견에, 그가 영적으로 빚을 갚을 능력이 없고 상물질 면에서 파산했다는 선언이 내리고, 그러한 일치된 조언이 유버르사에 기록되고 나서, 검열자와 그 반영(反映) 동료들이 이 조사 결과를 확인한 뒤에, 그 결과로 오르본톤의 통치자들은 깃드는 훈계자를 즉시 해방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이렇게 조절자가 해방되는 것은 조절자가 버린 그 사람에 관련된, 개인 세라핌이나 집단 세라핌의 임무에 어떤 면에서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육체적 장치와 지성 장치의 살아 있는 에너지가 일시 계속하는 것과 상관 없이, 이 종류의 죽음은 최종의 의미를 가진다. 우주의 견지에서 볼 때 그 필사자는 이미 죽었다. 계속하는 생명은 다만 우주 에너지의 물질적 운동량이 지속하는 것을 가리킨다.
112:3.3 (1230.1) 2. 지적 (지성의) 죽음. 지능의 비정상을 통해서 또는 뇌의 작용이 일부 파괴되었기 때문에 상급 보조 봉사에 관련된 중대한 회로들이 붕괴될 때, 이 조건들이 고칠 수 없는 어떤 임계점을 지날 때, 깃드는 조절자는 신별로 떠나도록 즉시 풀려난다. 우주의 기록에는, 인간의 의지 활동에 필수인 지성 회로들이 망가졌을 때는 언제나, 필사 인격자는 죽었다고 생각된다. 육체의 살아 있는 장치가 계속 작용하는 것과 상관 없이, 이것은 또한 죽음이다. 몸에서 의지(意志)하는 지성을 빼면, 이제 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인간의 의지가 앞서 택한 데 따라서, 그러한 개인의 혼은 살아남을지 모른다.
112:3.4 (1230.2) 3. 육체의 (몸과 지성의) 죽음. 죽음이 한 인간에게 닥칠 때, 지성이 지적 작용으로서 활동을 그칠 때까지, 측량할 수 있는 뇌의 에너지가 리듬 있는 생명의 맥박을 그칠 무렵까지, 조절자는 지성의 요새에 남아 있다. 이 죽음이 있고 나서, 여러 해 전에 몸에 들어갈 때와 똑같이 예식을 차리지 않고, 조절자는 사라지는 그 지성을 떠나며, 유버르사를 거쳐서 신별로 진행한다.
112:3.5 (1230.3) 죽은 뒤에 물질 몸은 그 출처인 원소의 세계로 돌아가지만, 살아남는 인격의 두 가지 비물질 요소는 영속한다: 이전부터 존재하는 생각 조절자는 그 필사자 생애의 기억 사본(寫本)을 가지고 신별로 진행하며, 또한 죽은 인간의 불멸하는 상물질 혼이 남아서 운명 수호자가 보관하도록 맡겨진다. 혼의 이 단계와 형태, 한때 움직였지만 이제 가만히 있는 이 신분의 형태는 상물질 세계에서 다시 인격을 얻는 데 필수이다. 그 조절자와 그 혼의 재회는 살아남는 인격을 다시 조립하며, 상물질로 깨어날 때 네가 다시 정신을 차리게 만든다.
112:3.6 (1230.4) 개인 수호 천사를 가지지 않은 자의 경우에는 집단 관리자들이 신분을 보관하고 인격을 부활시키는 똑같은 서비스를 충실하고 유능하게 실행한다. 세라핌들은 인격을 다시 조립하는 데 필수이다.
112:3.7 (1230.5) 죽고 나서 생각 조절자는 일시 인격을 잃어버리지만, 신분을 잃지 않는다. 그 인간 주체는 일시 신분(身分)을 잃지만, 인격을 잃지 않는다. 저택 세계들에서 이 둘은 다시 뭉쳐 영원한 모습이 된다. 떠나 버린 생각 조절자는 결코 전에 깃들던 존재로서 땅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결코 인격은 인간의 의지가 없이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조절자가 빠진 인간은, 죽은 뒤에 활동하는 신분을 드러내거나, 어떤 방법으로도 땅에 살아 있는 존재들과 교통하지도 않는다. 조절자가 빠진 그러한 혼은 길거나 짧게 죽음의 잠을 자는 동안에, 전적으로, 절대로 의식(意識)이 없다. 살아남는 일을 마치기까지, 다른 인격자들과 교통하는 어떤 종류의 인격이나 능력도 전시될 수 없다. 저택 세계로 가는 자는 사랑했던 자들에게 소식을 보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현재 섭리 시대 기간에, 우주 전역에 걸쳐서 그러한 통신을 금하는 정책이 있다.
112:4.1 (1231.1) 물질적, 지적 또는 영적 성질의 죽음이 일어날 때, 조절자는 그 필사 주인에게 작별을 알리고 신별을 향하여 떠난다. 지역 우주와 초우주의 본부로부터, 두 정부의 감독자들과 반영으로 접촉이 이루어지며, 시간의 영토로 들어갔다고 기록된 것과 같은 번호로 훈계자가 나갔다고 등록된다.
112:4.2 (1231.2) 충분히 이해되지 않은 어떤 방법으로, 깃들었던 지성의 영적 가치와 상물질 의미를 지닌 조절자의 이중 사본에 담긴 대로, 우주 검열자들은 그 인생의 요약을 소유할 수 있다. 검열자들은 죽은 인간의 살아남는 인품과 영적 품질에 관한 조절자의 견해를 이용할 수 있고, 이 모든 자료는 세라핌의 기록과 함께, 관계된 그 개인이 판결을 받을 때 제출하는 데 소용된다. 이 정보는 또한 어떤 승천자들이, 죽고 나서 즉시 상물질 생애를 시작하고, 행성의 섭리 시대가 정식으로 종결되기 전에 저택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초우주 명령을 확인하는 데 쓰인다.
112:4.3 (1231.3) 살아 있는 자 가운데서 옮겨진 개인들의 경우를 제외하고, 육체가 죽은 뒤에, 풀려난 조절자는 즉시 신별의 집 구체로 간다. 살아남는 필사자가 사실로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시간에 그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에 관한 세부는 주로, 그 인간이 자신의 개별 권한으로 저택 세계들로 올라가는가, 아니면 한 행성 시대의 잠자는 생존자들이 섭리 시대의 호출을 기다리는가에 달려 있다.
112:4.4 (1231.4) 필사 동료가 한 섭리 시대 끝에 다시 인격을 얻을 무리에 속하면, 그 조절자는 이전에 봉사하던 체계의 저택 세계로 금방 돌아오지 않을 터이나, 선택에 따라서, 다음의 일시 배치 중 하나에 들어갈 것이다:
112:4.5 (1231.5) 1. 밝혀지지 않은 봉사를 위하여 사라진 훈계자의 서열에 소집된다.
112:4.6 (1231.6) 2. 파라다이스 체제를 관찰하는 데 한동안 배치된다.
112:4.7 (1231.7) 3. 신별의 여러 훈련 학교 중 한 군데에 등록된다.
112:4.8 (1231.8) 4. 아버지의 여러 파라다이스 세계의 회로를 구성하는 다른 신성한 여섯 구체 중 하나에서 학생 관찰자로서 한동안 머무른다.
112:4.9 (1231.9) 5. 인격이 된 조절자들의 사자가 되는 근무에 배치된다.
112:4.10 (1231.10) 6. 처녀 집단에 속하는 훈계자들을 훈련하는 데 전념하는 여러 신별 학교에서 부교사가 된다.
112:4.11 (1231.11) 7. 짝이었던 인간이 살아남기를 거절했을지 모른다고 믿을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경우에 근무할, 한 집단의 가능한 세계들을 택하라고 배치된다.
112:4.12 (1231.12) 죽음이 너에게 닥칠 때, 네가 3급 수준이나 더 높은 수준에 다다랐고, 따라서 개인 운명 수호자를 배치받았고, 조절자가 제출한, 살아남는 인품을 요약한 마지막 성적표가 운명 수호자한테서 무조건 인가를 받고―세라핌과 조절자가 그들이 작성한 생명 기록부와 추천서의 모든 항목에 본질적으로 찬성하고―유버르사에 있는 우주 검열자와 그 반영 동료들이 이 자료를 확인하면서 말을 흐리거나 망설이지 않고 그리 하면, 그런 경우에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구원자별에 이르는 통신 회로를 통해서 상급 지위를 가리키는 명령을 번쩍 내린다. 이렇게 풀려나면, 네바돈 군주의 법정은 살아남는 그 혼을 저택 세계의 부활실까지 즉시 통과시킬 것을 선포한다.
112:4.13 (1232.1) 나는 이렇게 가르침을 받았다. 개별 인간이 지체하지 않고 살아남으면, 그 조절자는 신별에서 등록하고, 파라다이스에서 우주의 아버지가 계신 데까지 나아가며, 즉시 돌아와서, 초우주와 배치받은 지역 우주에서 인격화된 조절자의 품에 안기고, 신별에 있는 인격화된 조절자 우두머리의 인정을 받으며, 그리고 나서 당장에 “신분 이동이 실현”된다. 이로부터 그는, 운명 수호자가 그 형태를 계획한 대로, 지구 출신 필사자의 살아남는 혼을 받기 위하여 준비된 실제 인격 형태를 입고서, 셋째 기간에, 저택 세계에서 호출 받는다.
112:5.1 (1232.2) 자아는 물질이든, 상물질이든, 영적이든, 하나의 우주 실체이다. 인격을 가진 자의 사실성은 아버지가 스스로 혼자 행동하든지, 아니면 다양한 우주 대리자들을 통해서, 우주의 아버지가 수여한 것이다. 한 존재가 성격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우주 유기체 안에서 그러한 존재가 상대적으로 개별화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우주는 실재하는 단위들을 거의 무한히 통합한 덩어리이며, 그 단위들은 모두 전체의 운명에 상대적으로 지배된다. 그러나 인격을 가진 자는 운명을 받아들이거나 운명을 물리치는 실제 선택을 부여 받았다.
112:5.2 (1232.3)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은 영원한 아버지와 같으니, 이것은 신다운 생각 조절자, 하나님의 실제 분신(分身)의 경우에 참인 것처럼 인격의 경우에도 똑같이 참이며, 아버지는 자신의 자유 의지로 선택하여 인격을 주신다. 사람의 인격은 영원하지만, 신분에 관해서, 제약을 받는 영원한 실체이다. 아버지의 뜻에 반응하여 출현했으니까, 인격은 신의 운명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러한 운명이 달성될 때 그가 자리에 있을 것인가 아닌가를 택해야 한다.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 인격은 체험적 신에 직접 도달하고, 최상 존재의 일부가 된다. 그 주기는 예정되었지만, 사람이 거기에 참여하는 것은 선택이요, 개인적이고 체험하는 것이다.
112:5.3 (1232.4) 필사자의 신분은 우주에서 일시적 생명의 상태이다. 그 신분은 인격자가 계속하는 하나의 우주 현상이 되기를 선택하는 그 한도 안에서만 현실이다. 이것이 사람과 한 에너지 체계 사이의 본질적 차이이다. 에너지 체계는 계속해야 하고,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온통 상관이 있다. 조절자는 참으로 파라다이스에 이르는 길이지만, 사람이 스스로 결심하여, 자유 의지로 선택함으로 그 길을 추구해야 한다.
112:5.4 (1232.5) 인간은 오직 물질적 의미에서 신분을 소유한다. 물질 지성이 지능의 에너지 체계 안에서 작용하는 대로, 물질 지성은 자아의 그러한 성질을 표현한다. 사람이 신분을 가졌다고 말할 때, 사람의 인격이 행동하고 그 의지가 선택하는 데 복종하도록 놓여진 지성 회로를 그가 소유한다는 것이 인정된다. 그러나 인간의 태아가 인생에서 일시 기생(寄生) 단계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물질적이고 순전히 일시적 명시이다. 우주의 견지에서 보면, 인간은 비교적 한 순간에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 인간은 오래 가지 않는다. 그러나 필사자의 인격은, 자신의 선택을 통해서, 그 신분의 자리를 잠시 있는 물질적 지능 체계로부터 그보다 더 높은 상물질 혼의 체계로 옮기는 힘을 소유하며, 그 혼은 생각 조절자와 관련하여, 인격이 명백히 나타나는 새 수송 수단으로서 창조된다.
112:5.5 (1233.1) 그리고 바로 이 선택하는 힘, 자유 의지가 있는 인간임을 가리키는 우주 표시가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큰 기회요, 최고의 우주 책임이다. 미래 최후자의 영원한 운명은 인간의 의지가 성실한가에 달려 있다. 신다운 조절자가 영원한 인격을 얻는 것은 필사자의 자유 의지가 진실한가에 달려 있다. 우주의 아버지가 새로운 하늘 가는 아들을 얻는 것은 필사자의 선택이 충실한가에 달려 있고, 최상 존재가 체험적 진화로 사실이 되는 것은 끈질기고 지혜로운 결정과 행동에 달려 있다.
112:5.6 (1233.2) 인격이 성장하는 여러 우주 수준을 궁극에 도달해야 하지만, 너 자신 아무 잘못도 없이, 뜻밖의 사고(事故)와 물질 존재에서 장애물이 네가 태어난 행성에서 이 여러 수준을 통달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그리고 너의 의도와 소망이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면, 시험 기간을 연장하는 선포가 내린다. 너는 자신을 증명할 추가 시간을 받을 것이다.
112:5.7 (1233.3) 한 인간 신분을 저택 세계로 진급시키는 것이 현명한가에 관하여 언제라도 의심이 생기면, 우주 정부들은 변함없이, 그 사람의 개인 이익에 맞게 판결을 내린다. 그들은 서슴지 않고 그러한 혼을 일시적 존재의 지위로 올려 주며, 한편 그들은 태어나는 상물질 의도와 영적 목적을 계속 지켜본다. 그러므로 신의 응보는 분명히 이루어지며, 신의 자비를 연장하여 베풀 기회가 더 주어진다.
112:5.8 (1233.4) 오르본톤 정부와 네바돈 정부는 필사자를 다시 인격화하는 우주 계획의 세부 작용이 절대로 완전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참을성ㆍ관용ㆍ이해와 자비로운 동정심을 나타낸다고 주장하고, 또 그렇게 한다. 어떤 진화 세계에서 오더라도, 발버둥치는 한 필사자로부터 하늘 가는 생애를 추구하는 영원한 기쁨을 빼앗는 위험을 초래하기보다, 우리는 차라리 한 체계가 반란하는 위험을 무릅쓰겠다.
112:5.9 (1233.5) 이것은 인간이 처음 기회를 거절한 마당에 두 번째 기회를 가질 것이라는 뜻이 아니며, 도무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의지(意志)를 가진 모든 사람이, 의심의 여지 없이, 자의식하는 한 가지 최종 선택을 내리는 참 기회를 한 번 얻어야 함을 의미한다. 여러 우주의 통치하는 판사들은 마지막으로 온전히 영원한 선택을 내리지 않은 어떤 존재한테서도 인격의 지위를 빼앗지 않을 것이다. 참된 의도와 진정한 목적을 드러낼 기회, 충분하고 풍부한 기회를 사람의 혼에게 주어야 하며, 또 줄 것이다.
112:5.10 (1233.6) 좀더 영적으로, 우주적으로 더 진급한 필사자는 죽을 때 바로 저택 세계들로 나아간다. 대체로 이 조치는 개인 수호 세라핌을 배치받은 자에게 작용한다. 다른 필사자들은 그들의 일에 대하여 판결이 끝날 때까지 붙잡혀 있을지 모르며, 그 뒤에 저택 세계로 나아가든지, 아니면 현재의 행성 섭리 시대의 끝에, 무더기로 다시 인격화될 잠자는 생존자의 대열에 배치될지 모른다.
112:5.11 (1233.7) 죽을 때 너, 살아남는 너는 떠나는 조절자와 다른데, 그때 너에게 바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설명하려는 내 노력을 번거롭게 하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이 중의 하나는 물리적 영역과 상물질 영역의 경계지에서 생기는 거래에 관하여 네가 알아듣는 수준까지 적절한 설명을 전하기가 불가능한 데 있다. 다른 하나는 유란시아의 하늘 정부 당국이 진리 계시자인 내 위원회에 지워 준 제한 때문에 생긴다. 발표할 수도 있는 흥미 있는 세부가 많이 있지만, 너희의 직계 행성 감독자들의 충고를 받고서 이것들을 내놓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허락받은 한계 안에서, 나는 이만큼 말할 수 있다:
112:5.12 (1234.1) 무언가 실재하는 것, 무언가 인간이 진화시키는 것, 신비의 훈계자에 추가되는 무엇이 있는데, 이것이 죽음 뒤에 살아남는다. 새로이 나타나는 이 개체는 혼이며, 너의 육체와 너의 물질 지성, 이 둘이 죽은 뒤에 혼이 살아남는다. 이 개체는 인간인 네가 신다운 너, 곧 조절자와 연락하여, 통합된 일생을 살고 노력함으로 합동으로 낳은 자식이다. 인간과 신의 족보를 가진 이 아이는 땅에서 기원을 가진 살아남는 요소이다. 그것은 상물질 자아요, 불사의 혼이다.
112:5.13 (1234.2) 지속하는 의미와 살아남는 가치를 가진 이 아이는, 사람이 죽을 때부터 다시 인격화되는 기간에 전혀 의식이 없고, 이 기다리는 시절을 통해서 내내, 운명 수호 세라핌의 보호를 받고 있다. 죽고 나서, 사타니아의 저택 세계에서 새로운 상물질 의식을 얻을 때까지, 너는 의식이 있는 존재로서 활동하지 않을 것이다.
112:5.14 (1234.3) 죽을 때 그 인격과 관련되었된 기능적 신분은, 생명의 움직임이 그침으로 중지된다. 사람의 인격은 그 구성 분자들을 뛰어넘지만, 그 기능적 신분은 그 부분들에 의존한다. 생명의 중지는 지성을 부여 받은 물리적 뇌의 형태를 파괴하며, 지성의 붕괴는 필사자의 의식을 그치게 한다. 바로 그 인격이 살아 있는 에너지와 관련되어 다시 활동하라고 허락할 우주 상황이 마련되기까지, 그 사람의 의식은 나중에 다시 나타날 수 없다.
112:5.15 (1234.4) 기원이 있는 세계로부터 여러 저택 세계까지 살아남는 필사자들이 이동하는 동안, 그들이 셋째 기간에 인격의 재조립을 체험하든지 아니면 집단으로 부활할 때 올라가든지 상관 없이, 인격의 본질에 대한 기록은 천사장들의 특별 활동이 있는 세계에서 그들이 충실하게 간직한다. 이 존재들은 (수호 세라핌이 혼의 보관자인 것처럼) 인격 보관자가 아니지만, 그런데도, 확인할 수 있는 인격 요소는 모조리 필사자의 생존을 관리하는 이 믿을 만한 수탁자들의 보호를 받아 적절히 지켜진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이에 끼는 시간에 필사자의 인격이 정확히 어디 있는가, 우리는 모른다.
112:5.16 (1234.5) 다시 인격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상황은 한 지역 우주의 여러 상물질 접대 행성의 부활실에서 일어난다. 생명을 조립하는 여기 이 여러 방에서 감독하는 당국은 우주―상물질ㆍ지성ㆍ영적―에너지의 관계를 마련해 주며, 이것은 잠자는 생존자가 다시 정신을 차리게 만든다. 한때 물질이었던 인격의 구성 부분들을 다시 짜 맞추는 데는 다음이 들어간다:
112:5.17 (1234.6) 1. 적당한 형태, 상물질 에너지 형태의 조립, 새로 살아남은 자는 이 형태를 입고서 비영(非靈) 실체와 접촉할 수 있고, 그 안에서 우주 지성의 상물질 변종은 회로가 연결될 수 있다.
112:5.18 (1234.7) 2. 조절자가 기다리는 상물질 인간에게 돌아오는 것. 조절자는 너의 하늘 가는 신분의 영원한 보관자이다. 너의 훈계자는 너의 인격이 깨어날 때를 위하여 지은 그 상물질 형태를 남이 아니라 바로 네가 차지할 것을 절대로 보장한다. 그 조절자는 너의 살아남는 자아에게 파라다이스 안내자 노릇을 다시 한 번 맡으려고, 너의 인격이 다시 조립될 때 자리에 있을 것이다.
112:5.19 (1235.1) 3. 이렇게 다시 인격화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 조립되었을 때, 잠자는 불사의 혼 잠재성을 간직한 세라핌 관리자는 수많은 우주 성격자의 도움을 얻어서, 기다리는 지성과 몸 형태 위에, 그 속에, 이 상물질 개체를 수여하며, 한편 최상위의 이 진화하는 아이를 기다리는 조절자와 영원히 연합하도록 맡긴다. 이것이 다시 인격화하는 과정, 즉 기억ㆍ통찰력ㆍ의식―곧 신분―의 재조립을 끝마친다.
112:5.20 (1235.2) 다시 인격화하는 사실은, 깨어나는 인간의 자아가 새로 분리된 우주 지성의 단계, 회로가 연결된 상물질 단계를 붙잡는 것이다. 인격이라는 현상은 우주 환경에 대하여 자아가 반응하는 그러한 신분이 영속하는 데 의존한다. 이것은 오로지 지성의 매체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자아의 모든 구성 요소가 계속 변화하는데도, 자아는 영속한다. 육체의 생명에서 변화는 차츰 일어난다. 죽을 때와 다시 인격을 얻을 때 그 변화는 갑작스럽다. 모든 자아(인격)의 참 실체는 그 구성 분자들이 그침 없이 변하는 덕분에 우주의 조건에 민감하게 활동할 수 있다. 침체는 불가피한 죽음에 이르러 끝난다. 인간의 생명은 변치 않는 안정된 인격이 통일하는, 생명 요소들의 끝없는 변화이다.
112:5.21 (1235.3) 이처럼 네가 예루셈의 저택 세계에서 깨어날 때, 너는 몹시 변해 있고 영적 변화는 대단히 클 것이다. 그래서 너의 생각 조절자와 운명 수호자는 새 세계들에서 너의 새 생명을 첫째 세계에 있던 너의 묵은 생명과 아주 충분히 연결시키는데, 이들이 아니라면, 너는 새 상물질 의식을 되살아나는 너의 예전 신분의 기억과 연결시키는 데 처음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인격을 가진 자아가 계속되는데도, 필사 생명에서 많은 것이 처음에는 흐릿하고 안개 같은 꿈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필사자의 많은 관계가 맑아질 것이다.
112:5.22 (1235.4) 오직 네 우주 생애의 일부이며 그에 필수인 기억과 체험만 생각 조절자가 상기시키고 연습시킬 것이다. 인간의 머리 속에 어떤 것이라도 이를 진화시키는 데 조절자가 협동자였다면, 다음에 이 가치 있는 체험은 조절자의 영원한 의식 속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너의 지난 생명과 그 기억 중에 허다한 것이 영적 의미도 상물질 가치도 없기 때문에, 물질인 두뇌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물질적 체험 가운데 많은 것이 한때 쓰인 발판으로서 사라질 터이고, 이것은 너에게 상물질 수준까지 다리를 놓아 주었으니까, 우주에서 이제 더 소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격, 그리고 인격자 사이의 여러 관계는 결코 발판이 아니다. 인격자들과 관계를 가진 사람의 기억은 우주에서 가치가 있고 영속할 것이다. 유란시아에서 짧지만 흥미를 자아내는 일생에 한때 동료였던 자들을 너는 여러 저택 세계에서 알게 될 터이고 그들은 너를 알 것이다. 게다가 너는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은 너를 기억할 것이다.
112:6.1 (1235.5) 나비가 애벌래 단계에서 솟아나는 것과 똑같이, 인간들의 참 인격은 저택 세계에서 솟아나고, 물질 육체 속에서 한때 가려져 있던 상태로부터 처음으로 드러나 보일 것이다. 지역 우주에서 상물질 생애는, 혼으로 존재하는 초기 상물질 수준에서 영적 정도가 차츰 높아지는 마지막 상물질 수준에 이르기까지, 인격 작용의 계속된 향상과 상관이 있다.
112:6.2 (1235.6) 지역 우주에서 사는 동안에 너희가 입는 상물질 인격 형태에 관하여 너희를 가르치기는 어렵다. 너희에게 인격이 분명히 표시될 수 있는 상물질 형태가 부여될 것이고, 이것은 결국 너희가 이해하지 못하는 옷이다. 그러한 형태는 전적으로 실체이지만, 너희가 지금 이해하는 물질 서열의 에너지 형태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태어난 행성에서 너희의 물질 몸이 어떤 목적에 소용되었던 것 같이, 지역 우주의 여러 세계에서 같은 목적에 소용된다.
112:6.3 (1236.1) 어느 정도까지, 물질 육체의 모습은 인격 신분의 됨됨이에 민감하다. 육체는 얼마큼 그 인격의 타고난 성품에서 무엇인가 반영한다. 상물질 형태는 더욱 그렇다. 육체 생명의 경우에 필사자는 비록 속이 아름답지 않더라도 겉으로 아름다울지 모른다. 상물질 생명의 경우에, 그리고 그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는 더욱, 인격의 형태는 안에 있는 인격자의 성품에 따라 정비례하여 달라질 것이다. 영적 수준에서, 바깥 형태와 속의 성품은 완벽하게 같아지는 점까지 비로소 접근하며, 이것은 더 높은 영 수준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완전해진다.
112:6.4 (1236.2) 상물질 상태에서 하늘 가는 필사자는 오르본톤 으뜸 영의 우주 지성 자질의 네바돈 개량 형태를 부여받는다. 필사자의 지능은 그 자체로서, 사라져 버렸고, 창조 영의 분화하지 않은 지성 회로에서 따로 떨어진 한 집중된 우주 개체로서 존재하기를 그쳤다. 그러나 필사 지성의 의미와 가치는 죽지 않았다. 지성의 어떤 단계들은 살아남는 혼 속에서 이어진다. 예전의 인간 지성의 어떤 체험적 가치를 조절자가 간직하고 있다. 하늘 가는 필사자를 최종으로 평가하는 데 관련된 수많은 존재는, 세라핌으로부터 우주 검열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아마도 이들을 지나서 최상위까지 그 범위가 연장되며, 이 존재들 안에 어떤 살아 있는 기록과 함께, 인간 생명이 육체를 입고 살던 대로 그 인간 생활의 기록이 지역 우주에 지속된다.
112:6.5 (1236.3) 인간의 의지(意志)는 지성 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그 의지는 물질적 지능을 잃어 버렸는데도 지속한다. 살아남고 나서 바로 뒤따르는 시간에, 하늘 가는 인격자는 인생에서 물려받은 인품의 형태와 새로 나타나는, 상물질계 상지혜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대체로 안내를 받는다. 저택 나라에서 가질 몸가짐에 관한 이 안내 지침은 상물질 생명의 초기 단계에서, 하늘 가는 인격자의 충분히 성장한 의지의 표현으로서 상물질 의지가 태어나기 전에, 쓸 만하게 활동한다.
112:6.6 (1236.4) 지역 우주 생애에는 인간으로 존재할 때 있었던 일곱 보조 지성 영에 견줄 만한 영향은 하나도 없다. 우주 지성을 지역 우주 지능의 창조 근원―신성한 봉사자―가 수정하고 표현한 대로, 상물질 지성은 이러한 우주 지성과 바로 접촉함으로 진화해야 한다.
112:6.7 (1236.5) 필사자의 지성은, 죽기 전에, 자의식하면서 조절자의 계심과 독립되어 있다. 보조 지성은 그 지성이 작용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 오직 관계된 물질 에너지의 형태가 필요하다. 그러나 상물질 혼은 초월 보조자이며, 물질 지성의 작용을 빼앗겼을 때, 조절자가 없이 자의식을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진화하는 이 혼은 예전에 관계된 보조 지성이 내린 여러 결정으로부터 얻은, 계속하는 특징을 소유하며, 이 특징은 그 기억 형태가, 돌아오는 조절자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을 때 활발한 기억이 된다.
112:6.8 (1236.6) 기억이 지속하는 것은 최초의 자아 신분이 유지된다는 증명이며, 인격이 연속되고 확대됨을 완벽하게 자의식하는 데 필수이다. 조절자 없이 올라가는 필사자는 인간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하여 천사(天使) 동료들의 지시에 의존한다. 영이 융합한 필사자의 상물질 혼은 이 외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기억의 형태는 혼 속에 존속하지만 이 형태는, 계속되는 기억으로서 즉시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되기 위하여 예전의 조절자의 계심이 요구된다. 조절자가 없으면, 살아남는 필사자가 이전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기억하는 의식을 다시 탐구하고 다시 배우고 다시 붙잡는 데 상당한 시간이 요구된다.
112:6.9 (1237.1)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혼은, 자아의 신분이 전에 앉아 있던 자리인 그 물질 지능의 질적ㆍ양적 행위와 동기를 충실하게 반영한다.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 택하면서, 필사자의 지성은 지혜 영의 지휘 밑에서, 통일된 일곱 보조 지성 영의 보호를 받으면서, 상물질 이전의 우주 생애에 들어간다. 나중에, 상물질 이전(以前)에 달성하는 일곱 수준을 마치고 나서, 상물질 지성의 자질을 보조 지성 위에 얹어 놓는 것은 지역 우주에서 진보하는 영(靈) 이전 생애, 즉 상물질 생애를 시작한다.
112:6.10 (1237.2) 인간은 그가 태어난 행성을 떠날 때, 보조자의 봉사를 뒤에 남겨 놓고, 오직 상물질 지능에 기댄다. 한 승천자가 지역 우주를 떠날 때, 그는 영적 수준에서 존재하게 되었고 상물질 수준을 통과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새로 나타나는 이 영 개체는 오르본톤 우주 지성이 직접 베푸는 봉사에 조율되어 있다.
112:7.1 (1237.3) 생각 조절자와 융합하는 것은 인격에게 영원한 사실로 있는 것들을 나누어 주며, 이것들은 이전에 오직 잠재했을 뿐이다. 새로 부여 받는 이 자질 가운데 다음을 언급해도 좋다: 신다운 성질이 고정되는 것, 과거 영원의 체험과 기억, 불사의 성질, 그리고 제한된 잠재 절대성의 한 단계.
112:7.2 (1237.4) 일시적 형태를 입고 땅에서 사는 너의 과정이 끝났을 때, 너는 더 좋은 세상의 기슭에서 깨어날 것이며, 궁극에 너는 영원한 포옹으로 너의 충실한 조절자와 뭉칠 것이다. 이 융합은 하나님과 사람을 하나로 만드는 신비, 유한한 인간이 진화하는 신비를 이루지만, 이것은 영원히 참이다. 융합은 신성한 승천자별 구체의 비밀이며, 신의 영과 융합을 체험한 자를 제외하고, 시간 세계에서 태어난 한 사람의 신분이 파라다이스 신의 영과 영원히 하나가 될 때 함께 붙은 그 실제 가치의 참된 의미를 어떤 생물도 이해할 수 없다.
112:7.3 (1237.5) 조절자와 융합하는 일은 보통 그 승천자가 지역 체계 안에서 거주하는 동안 이루어진다. 융합은 자연사를 초월하는 것으로서, 출생한 행성에서 일어날지도 모른다. 여러 저택 세계의 어느 한 군데나 또는 체계 본부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융합은 별자리에서 머무르는 때까지 늦춰질 수도 있고, 아니면 특별한 경우에 승천자가 지역 우주의 서울에 있을 때까지, 성취되지 않을지 모른다.
112:7.4 (1237.6) 조절자와 융합이 이루어졌을 때, 그러한 인격자의 영원한 생애에 아무런 앞날의 위험이 있을 수 없다. 하늘 존재들은 오랜 체험을 통하여 시험 받지만, 필사자는 진화 세계와 상물질 세계에서 비교적 짧고 맹렬한 시험을 거친다.
112:7.5 (1237.7) 조절자와 융합하는 것은 그 인간 성품이 마지막으로 돌이킬 수 없이 영원한 생애를 선택했다고 초우주의 명령이 선포할 때까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됨을 인가하는 것이고, 인가가 내렸을 때, 그 융합한 인격자가 초우주의 본부까지 언젠가 나아가도록 지역 우주의 경계를 궁극에 떠나라는 출국 허가이다. 초우주 본부로부터 시간의 순례자는 아득한 앞날에 하보나 중앙 우주와 신을 만나는 모험을 떠나도록 오랜 비행(飛行)을 위하여 2급 천사에 둘러싸인다.
112:7.6 (1238.1) 진화 세계에서 자아는 물질이다. 자아는 우주에서 한 사물이요, 그런 상태로 물질 존재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다. 자아는 시간 세계에서 한 사실이며, 세월 속의 변천에 민감하다. 살아남으려는 결정은 여기서 형성되어야 한다. 상물질 상태에서 자아는 새롭고 더 오래 가는 우주 실체가 되었고, 자아의 계속된 성장은 여러 우주의 지성 회로와 영 회로에 더욱 조율되는 데 달려 있다. 살아남으려는 결정은 이제 확인되고 있다. 자아가 영적 수준에 다다를 때, 자아는 우주에서 안전한 가치가 되었고, 이 새로운 가치는 살아남으려는 결정이 내렸다는 사실에 의존하며, 이 사실은 생각 조절자와 영원히 융합함으로 입증되었다. 참된 우주 가치를 지닌 지위를 성취했으니까, 그 사람은 가장 높은 우주 가치―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해방되는 잠재성을 얻는다.
112:7.7 (1238.2) 그러한 융합된 존재들의 우주 반응은 두 가지이다. 그들은 세라핌과 아주 다르지 않은, 따로 된 상물질 개인이며, 잠재성으로 보면 그들은 또한 파라다이스 최후자 서열에 있는 존재이다.
112:7.8 (1238.3) 그러나 융합된 개인은 정말로 한 인격, 한 존재이고, 이렇게 하나가 된 것을 우주에서 어떤 지적 존재가 분석하려 해도 조금도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낮은 데서부터 가장 높은 데까지 지역 우주의 법정을 거쳤는데, 이 중에서 아무도 사람이나 조절자, 하나와 다른 하나를 구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서 너는 마침내 네바돈의 군주에게, 지역 우주에서 너의 아버지 앞으로 인도된다. 거기서 창조하는 아버지 신분으로 이 시공 우주에서 네 생명의 사실을 가능하게 만든 바로 그 존재의 손에서 너는 신임장을 받을 터이고, 이것은 궁극에 우주의 아버지를 찾아서 너의 초우주 생애로 네가 진행하는 자격을 준다.
112:7.9 (1238.4) 승리한 조절자가 인간에게 훌륭하게 봉사함으로 인격을 얻었는가, 아니면 용감한 인간이 조절자와 같아지려는 성실한 노력을 통해서 불멸을 얻었는가? 이도 저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최상위의 하늘가는 인격자들 중에서 한 독특한 계급의 회원으로 진화를 마쳤으며, 그는 쓸모 있고, 충실하고, 능률 있다는 것이 언제라도 발견될 것이다. 그는 더욱 성장하고 발전하는 후보자요, 하보나의 일곱 회로를 거치고, 한때 땅에서 기원을 가졌던 혼이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의 실제 성격을 경건히 인식하면서 설 때까지, 늘 위로 뻗으며 그칠 줄 모르고 높이 올라간다.
112:7.10 (1238.5) 올라가는 이 장엄한 길에 내내, 생각 조절자는 하늘 가는 필사자를 앞으로 완전히 영적으로 안정시킨다는 신의 약속이다. 그동안에 필사자에게 자유 의지가 있는 것은 조절자에게 신답고 무한한 성품을 해방시키는 영원한 경로를 마련해 준다. 이제 이 두 신분이 하나가 되었다. 세월이나 영원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도 결코 사람과 조절자를 떼어낼 수 없으며, 그들은 갈라놓을 수 없고 영원히 융합되었다.
112:7.11 (1238.6) 조절자가 융합하는 여러 세계에서 신비의 훈계자의 운명은 하늘 가는 필사자의 운명과 동일하다―파라다이스 최후 군단이다. 조절자도 필사자도, 다른 쪽의 완전한 협동과 충실한 도움이 없이 그 독특한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이 특별한 협동 관계는 이 우주 시대의 모든 우주 현상 가운데, 가장 마음을 빼앗고 놀라운 일 중의 하나이다.
112:7.12 (1239.1) 조절자와 융합할 때부터 하늘 가는 자의 지위는 진화 인간의 지위이다. 인간 구성원은 먼저 인격을 누렸고, 따라서 인격자를 인식하는 데 관련된 모든 문제에서 조절자를 앞지른다. 이 융합된 존재의 파라다이스 본부는 신별이 아니라 승천자별이며, 하나님과 사람의 이 독특한 조합은 최후 군단에 이르기까지, 내내 하늘 가는 필사자로서 분류된다.
112:7.13 (1239.2) 조절자가 하늘 가는 필사자와 일단 융합하고 나서, 그 조절자의 번호는 초우주 기록에서 지워진다. 신별의 기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지만, 내가 추측하건대 그 조절자의 기록은 최후 군단의 임시 우두머리인 그랜드판다의 내부 법정의 비밀 영역으로 옮겨진다.
112:7.14 (1239.3) 조절자의 융합과 함께, 우주의 아버지는 물질인 인간에게 자신을 선물로 준다는 약속을 이루었다. 그는 사람에게 신성을 영원히 수여한다는 약속(約束)을 이행하고 그 계획을 성취하였다. 이처럼 사실이 된, 하나님과 가지는 숭고한 협동 관계에 본래부터 있는 한없는 가능성을 실현하고 현실로 만들려는 인간의 시도가 이제 시작된다.
112:7.15 (1239.4) 살아남는 필사자의 현재 알려진 운명은 파라다이스 최후 군단이다. 이것은 또한 필사 동반자와 영원한 결합 속에 합쳐진 모든 생각 조절자에게 운명의 목표이다. 파라다이스의 최후자들은 현재 대우주에 두루, 많은 사업에서 일하고 있지만, 일곱 우주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뒤 그 아득한 앞날에, 유한한 하나님이 이 최상 신을 지금 둘러싸는 신비에서 마침내 솟아났을 때, 그들은 실행할 다른 더욱 고귀한 과제들을 가질 것이라 우리 모두가 추측한다.
112:7.16 (1239.5) 너희는 어느 범위까지, 중앙 우주, 초우주, 지역 우주의 조직과 직원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너희는 방대한 이 창조들을 지금 다스리는 여러 성격자 중에서 어떤 이들의 특성과 기원에 관하여 무언가 일러주는 것을 들었다. 너희는 또한 대우주의 변두리를 지나서 멀리 바깥에, 첫째 바깥 공간 수준에서, 우주들을 담은 광대한 은하들이 조직되는 과정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엮는 과정에서 또한 최상 존재가 바깥 공간에, 지금 지도가 그려지지 않은 이 지역에서, 밝혀지지 않은 그의 3차 활동을 드러낼 것이라고 암시되었다. 너희는 또한 파라다이스 군단의 최후자들은 최상위의 체험하는 자녀라고 일러주는 것을 들었다.
112:7.17 (1239.6) 조절자와 융합한 필사자들은 동료 최후자들과 함께, 첫째 바깥 공간 수준에 있는 우주들의 관리에 어떤 방법으로 활동하도록 예정되었다고 우리는 믿는다. 우리는 때가 되면 이 엄청난 은하(銀河)들이 사람이 사는 우주가 되리라는 것을 한 푼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행정자들 사이에 파라다이스 최후자들이 발견될 것이라고 똑같이 확신하며, 그들의 성품은 인간과 창조자를 섞어서 생긴 우주 결과이다.
112:7.18 (1239.7) 얼마나 놀라운 모험인가! 얼마나 놀라운 모험담인가? 최상위의 자녀들, 인격을 얻고 사람처럼 된 이 조절자들, 조절자와 같아지고 영원하게 된 이 필사자들, 알려진 바 첫째 근원 중심의 본질의 가장 높은 표현, 그리고 우주의 아버지를 이해하고 그에 도달할 능력이 있는 가장 낮은 형태의 지적 생명, 이 둘의 신비스러운 조합이자 영원한 연합이 거대한 창조를 관리할 것이다. 그러한 합쳐진 존재들은 그러한 창조자와 인간의 협동 관계이며, 첫째 바깥 공간의 이 미래 우주들에서 두루 생기게 될지 모르는 모든 형태의 지적 생명의 훌륭한 통치자, 비할 데 없는 행정가, 이해심과 동정심이 있는 지도자가 될 것이라 우리는 상상한다.
112:7.19 (1240.1) 너희 필사자는 땅에서 동물의 기원을 가진 것이 참말이다. 너희의 뼈대는 정말로 티끌이다. 그러나 너희가 실제로 하겠다면, 너희가 정말로 바란다면, 오랜 세월에 걸쳐 내려온 유산(遺産)은 확실히 너희 것이요, 참된 인품을 입고서 너희는 언젠가 우주에서 두루 봉사하게 될 것이다―너희는 경험하는 최상위 하나님의 자녀요, 모든 성격자의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신다운 아들이다.
113:0.1 (1241.1) 시간 세계에서 봉사하는 영과 공간의 사자 무리들에 관한 이야기를 발표했으니, 우리는 수호 천사, 즉 개별 필사자에게 봉사하는 데 헌신하는 세라핌을 고려하게 된다. 필사자를 향상시키고 완전하게 만들기 위하여, 사람을 살아남게 하는 계획, 영적으로 진보하는 광대한 계획 전체가 마련되었다. 유란시아에서 지난 시대에, 이 운명 수호자들은 거의 유일하게 인정받은 천사 무리였다. 정말로 행성의 세라핌은 살아남을 자를 위하여 봉사하라고 파송된, 시중드는 영이다. 이 보살피는 세라핌들은 지난날과 오늘날의 모든 큰 사건에서 필사 인간의 영적 조수로서 활동해 왔다. 많은 계시에서 “천사들이 이렇게 말씀하였다.” 하늘에서 온 많은 지시는 “천사들이 봉사함으로 받았다.”
113:0.2 (1241.2) 세라핌은 전통적인, 하늘의 천사이다. 그들은 너희와 아주 가까이 살고, 너희를 위하여 대단히 많이 일하는, 보살피는 영이다. 그들은 인간의 지능이 발달한 초기부터 유란시아에서 봉사해 왔다.
113:1.1 (1241.3) 수호 천사에 관한 가르침은 신화(神話)가 아니다. 어떤 무리의 인간들은 실제로 개인 천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인정하여, 예수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에 관하여 말씀했다. “이 어린아이들 가운데 하나도 너희가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는 저희의 천사들이 언제나 내 아버지의 영이 계심을 바라보는 까닭이라.”
113:1.2 (1241.4) 최초에 세라핌들은 독립된 유란시아 종족들에게 분명히 배치되었다. 그러나 미가엘이 수여된 이후에, 그들은 인간의 지능, 영적 성향, 운명에 따라서 배치된다. 지능 면에서, 인류는 다음 세 등급으로 나눠진다:
113:1.3 (1241.5) 1. 보통 이하의 지성을 가진 자―정상의 의지력을 쓰지 못하는 자, 보통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자. 이 등급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 자를 포함한다. 그들은 신을 지적으로 예배하는 능력이 모자란다. 유란시아에서 보통 이하의 존재들은 한 대대(大隊)의 케루빔과 더불어, 한 무리의 세라핌, 즉 한 중대(中隊)를 그들에게 시중들라고 배치받으며, 이것은 또한 그 구체의 인생 투쟁에서 그들에게도 응보와 자비가 베풀어진다는 것을 증언한다.
113:1.4 (1241.6) 2. 보통 부류, 정상 부류의 인간 지성. 천사 봉사의 관점에서 볼 때, 대부분의 남녀는 인간이 진보하고 영적으로 발전하는 여러 수준을 거치면서, 그들의 지위에 따라서 일곱 등급으로 분류된다.
113:1.5 (1241.7) 3. 보통 이상의 지성을 가진 자―위대한 결정을 내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영적 성취의 잠재성을 가진 자. 깃드는 조절자와 얼마큼 접촉을 누리는 남녀. 다양한 운명 예비군의 구성원. 한 인간이 어쩌다가 어떤 수준에 있든지 상관 없이, 그러한 개인이 몇몇 운명 예비 군단 중에 어디라도 등록되면, 바로 그때 거기서, 개인 세라핌이 배치되고, 그때부터 땅에서 생애를 마칠 때까지, 그 필사자는 한 수호 천사의 계속된 봉사와 그침없는 보호를 받을 것이다. 또한 어떤 인간이라도, 최대의 결정을 내릴 때, 조절자와 진짜 약혼이 있을 때, 한 개인 수호자가 즉시 그 사람에게 배치된다.
113:1.6 (1242.1) 이른바 정상 존재들에게 봉사하는 경우에 천사의 배치는 인간이 지적ㆍ영적 수준을 도달한 데 따라서 정해진다. 너희는 7급 수준에서 필사의 옷을 입은 지성 속에서 시작하여, 자아를 이해하고, 자아를 정복하고, 자아를 통달하는 과제에서 안으로 여행한다. (자연사가 너의 생애를 끝내고 너의 투쟁을 저택 세계로 옮기지 않으면) 깃드는 조절자와 비교적 접촉이 있고 교통하는 1급 수준, 즉 안쪽 수준에 이를 때까지, 너는 한 수준, 한 수준 올라간다.
113:1.7 (1242.2) 초기 수준, 즉 7급 수준에 있는 인간들은, 필사자 1천 명을 돌보고 관리하는 데 배치된 1개 중대의 보조 케루빔과 함께 수호 천사 1명을 가지고 있다. 6급 수준에서는 1개 중대의 케루빔과 더불어 천사 한 쌍이, 이 하늘 가는 필사자 5백 명의 무리를 안내하는 데 배치된다. 5급 수준에 도달했을 때, 인간들은 약 1백 명의 중대로 분류되며, 한 집단의 케루빔과 함께 수호 세라핌 한 쌍이 책임을 맡는다. 4급 수준에 이르고 나서, 필사 존재들은 10명씩 집단을 이루어 집합되고, 다시 책임이 한 쌍의 세라핌에게 맡겨지고 이들은 1개 중대 케루빔의 도움을 받는다.
113:1.8 (1242.3) 한 필사 지성이 동물적 유산(遺産)의 타성을 깨뜨리고 인간의 지능과 도달한 영적 정도가 3급 수준에 이르렀을 때, 그때부터 개인 천사가 (실제는 둘) 하늘 가는 이 필사자에게 전적으로, 독점하여 헌신한다. 이처럼 이 인간의 혼은, 항상 계시고 점점 더 유능한 깃드는 생각 조절자뿐 아니라, 3급 수준을 마치고 2급 수준을 거치고 1급 수준에 도달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동안, 이 개인 운명 수호자들의 집중된 도움을 받는다.
113:2.1 (1242.4) 세라핌은 세 가지 업적 중에 하나나 그 이상(以上)을 실현한 인간 혼과 관계하는 데 배치될 때까지 운명의 수호자로 알려지지 않는다: 그 사람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최고의 결정을 내렸거나, 3급 수준에 들어갔거나, 아니면 운명 예비군 가운데 하나에 소집되었다.
113:2.2 (1242.5) 민족들의 진화에서, 필요한 도달 수준에 다다른 가장 첫 존재에게 한 운명 수호자가 배치된다. 유란시아에서 개인 수호자를 얻은 처음 필사자는 란토왁이었는데, 그는 오래 전에 홍인종의 현자였다.
113:2.3 (1242.6) 모든 천사 배치는 한 자원하는 세라핌 집단이 정하며, 이 임명은 언제나 인간의 필요에 따라서, 천사 쌍의 지위를 고려해서―천사의 체험ㆍ기술ㆍ지혜에 비추어서―정해진다. 오로지 오랫동안 봉사한 세라핌, 경험이 많고 시험을 겪은 부류가 운명의 파수로서 배치된다. 허다한 수호자가 조절자와 융합하지 않는 시리즈의 세계에서 값진 체험을 많이 겪었다. 조절자와 마찬가지로, 세라핌은 꼭 한 일생 동안 이 존재들을 따라다니며, 다음에 새로운 배치를 받기 위하여 해방된다. 유란시아에 있는 많은 수호자가 다른 여러 세계에서 이전에 이 실제 체험을 가졌다.
113:2.4 (1243.1) 인간들이 살아남지 못할 때, 그들의 개인 수호자나 집단 수호자는 같은 행성에서 비슷한 자격으로 되풀이해서 근무해도 좋다. 세라핌들은 개별 세계에 대하여 감상적인 호감을 가지게 되며, 아주 가깝고 밀접하게 관계했던 어떤 민족과 부류의 필사 인간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품는다.
113:2.5 (1243.2) 천사들은 그 인간 동료에 대하여 오래 가는 애정을 가지게 된다. 너희가 단지 그 세라핌들을 눈에 선하게 볼 수만 있다면, 그들에게 따듯한 애정을 가지게 될 것이다. 물질 몸을 벗어 버리고 영 형태가 주어지면, 너희는 인격의 여러 속성으로 볼 때 천사와 매우 가까울 것이다. 그들은 너희가 가진 감정의 대부분을 함께 가지며, 그 위에 몇 가지를 더 체험한다. 너희를 움직이고 그들이 얼마큼 이해하기 어려운 유일한 감정은, 유란시아에서 사는 보통 거주자의 정신 생활에서 아주 크게 자리잡는 동물적 두려움의 유산이다. 너희가 어째서 상급의 지적 능력, 아니 너희의 종교적 믿음까지도 그렇게 두려움에 지배되도록 버려두는지, 겁에 질려 걱정하며 어리석게 공포에 빠져 아주 철저히 사기가 죽는지, 천사들은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113:2.6 (1243.3) 세라핌은 모두 각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세계 근무에 배치하는 기록에, 그들은 흔히 자기의 행성 번호로 호칭된다. 우주 본부에서 그들은 이름과 번호로 등록된다. 이 접촉하는 통신에 쓰인 인간 주체의 운명 수호자는 네바돈의 제 182,314 천사군의 37 군대, 6 군단, 384 단위, 4 대대(大隊), 126 중대(中隊), 17 소대의 3번이다. 유란시아에서 이 세라핌, 그리고 이 인간 주체에게 주어진 현재 행성 임명 번호는 3,641,852이다.
113:2.7 (1243.4) 개인 수호자의 직무에서, 천사들을 운명 수호자로 배치할 때, 세라핌들은 언제나 봉사를 자원한다. 이번에 방문한 도시에서 어떤 필사자가 최근에 운명 예비군에 가입 허락을 받았다. 모든 그러한 인간에게 개인적으로 수호 천사가 따라붙으니까, 자격 있는 세라핌이 백 명이 넘게 그 배치를 받으려 하였다. 행성 지도자는 경험이 많은 개인들 중에서 12명을 뽑았고, 일생의 여행을 통해서, 이 인간을 안내하기에 가장 알맞다고 그들이 선택한 세라핌을 나중에 임명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똑같이 자격을 갖춘 세라핌 한 쌍을 골랐다. 이 세라핌 쌍 가운데 하나는 언제나 근무 중일 것이다.
113:2.8 (1243.5) 천사의 과제는 끊임 없을지 모르지만, 천사 쌍의 어느 쪽도 모든 시중드는 책임을 처리할 수 있다. 케루빔처럼, 세라핌은 보통 쌍으로 일하지만, 그들 아래에 있는 동료들과 달리, 세라핌은 때때로 혼자서 일한다. 인간들과 가지는 거의 모든 접촉에서 그들은 개인으로서 활동할 수 있다. 오직 우주의 상급 회로에서 통신하고 일하기 위해서, 두 천사가 필요하다.
113:2.9 (1243.6) 수호자 임무를 받아들일 때, 세라핌 한 쌍은 그 인간의 여생 동안 봉사한다. 존재의 보완자가 (두 천사 가운데 하나) 그 사업의 기록자가 된다. 이 보완 세라핌은 여러 진화 세계에서, 필사자의 기록 천사이다. 케루빔 쌍이 (케루빔 1명과 사노빔 1명) 기록을 유지하며, 이들은 언제나 그 수호 세라핌들과 관련되지만, 언제나 세라핌 중 하나가 이 기록을 보증한다.
113:2.10 (1244.1) 쉬고, 우주 회로의 생명 에너지로 다시 충전할 목적으로, 정기적으로 수호자를 그 보완자가 교대한다. 그리고 그가 자리를 비울 때 관련된 케루빔이 기록자로서 활동하며, 이것은 또한 그 보완 세라핌이 비슷하게 자리를 비울 때도 마찬가지이다.
113:3.1 (1244.2) 운명 수호자가 그 필사 주체를 위하여 하는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진화하는 물질 인간의 지성과 혼에 깃들고, 부딪치고, 이를 둘러싸는 수많은 비성격 영의 영향을 친히 조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인격자이며, 비인격 영과 선(先)인격 개체들이 그렇게 다분히 물질적이고 별개의 사적인 지성과 바로 접촉하기는 극히 힘들다. 지키는 천사의 사명에서 이 모든 영향은 얼마큼 통일되고, 진화하는 인간 성격의 성장하는 도덕적 성품이 이를 더 가깝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13:3.2 (1244.3) 특히, 이 수호 세라핌은 물리 통제자와 보조 지성 영들의 영토로부터 신성한 봉사자의 성령, 그리고 파라다이스의 셋째 근원 중심의 두루 계시는 영 계심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영의 다양한 대리자 및 영향을 상관시킬 수 있고, 또 그렇게 한다. 무한한 영의 이 광대한 보살핌을 이처럼 통일하고 더 개인적으로 만들고 나서, 다음에 그 세라핌은 합동 행위자의 이 통합된 영향을 아버지와 아들의 영적 계심과 상관시키는 일에 착수한다.
113:3.3 (1244.4) 조절자는 아버지의 계심이요 진리의 영은 아들의 계심이다. 이 신성한 재산은 수호 세라핌의 봉사로 인하여, 사람의 영적 체험의 하위 수준에서 통일되고 조정된다. 봉사하는 천사들은 필사 인간에게 봉사하면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자비를 통합하는 데 재질이 있다.
113:3.4 (1244.5) 육체가 죽고 상물질로 부활하는 사이의 시간에, 어째서 결국 수호 세라핌이 살아남는 필사자의 생각 형태, 기억 형식, 혼 실체들을 친히 보관하는 자가 되는가 하는 까닭이 여기에 드러난다. 무한한 영의 봉사하는 자손들 외에 아무도 우주의 한 수준에서 다른 더 높은 수준까지 이동하는 이 단계에서, 이렇게 인간을 위하여 활동할 수 없다. 너희가 마지막 이동하는 잠에 들어갈 때, 너희가 시간 세계에서 영원으로 지나갈 때에도, 한 높은 상천사가 인간 신분의 보관자로서, 인격을 고스란히 간직한 보장(保障)으로서, 너와 함께 이동한다.
113:3.5 (1244.6) 영적 수준에서, 세라핌은 우주에서 달리 개인적이 아니고 선(先)인격인 많은 봉사를 친히 베푼다. 그들은 조정하는 자이다. 지적 수준에서 지성과 상물질을 상관시키는 자이다. 그들은 해석하는 자이다. 물리적 수준에서 그들은 물리 통제사들과 연락을 가짐으로, 그리고 중도인의 협조하는 봉사를 통해서, 땅의 환경을 조종한다.
113:3.6 (1244.7) 이것이 시중드는 세라핌의 다채롭고 복잡한 활동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주에서 인류의 수준보다 조금만 높게 창조된, 그런 하급 천사 성격자가 어떻게 그토록 어렵고 복잡한 일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정말로 모르지만, 이 놀라운 봉사는 어떤 밝혀지지 않은 방법으로, 최상 존재의 인식되지 않고 밝혀지지 않은 작용 때문에 수월하게 된다고 추측하며, 그는 시공의 진화하는 여러 우주에서 현실화되고 있는 신이다. 최상 존재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진보하여 살아남는 영역에 두루, 세라핌은 필사자의 계속되는 진보에 필수인 부분이다.
113:4.1 (1245.1) 수호 세라핌은 지성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필사 지성에도 기원을 주는 똑같은 근원, 창조 영으로부터 솟아난다. 세라핌은 생각하는 머리를 자극하는 자이다. 그들은 인간의 머리 속에서 여러 수준에 도달하는 결정을 촉진하려고 줄곧 애쓴다. 조절자가 하듯 안에서부터 혼을 통해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깥에서 안을 향하여, 인간들의 사회ㆍ윤리ㆍ도덕적 환경을 통해서 일한다. 세라핌은 우주의 아버지가 미끼로 쓰는 신다운 조절자는 아니지만, 무한한 영의 봉사를 몸소 베푸는 대리자로서 활동한다.
113:4.2 (1245.2) 조절자의 지도를 받으면서, 필사 인간은 또한 세라핌의 안내를 쉽게 따른다. 조절자는 사람의 영원한 성품의 본질이요, 세라핌은 사람의 진화하는 성품―이 세상에서 필사 지성을, 다음 세상에서는 상물질 혼―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저택 세계에서 너희는 세라핌 강사(講師)들을 의식하고 그들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겠지만, 첫 세상에서 사람들은 보통 그들이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113:4.3 (1245.3) 세라핌은 새로운 진취적 체험이 있는 길로 인간의 발걸음을 안내함으로 사람들의 선생으로서 활동한다. 한 세라핌의 안내를 받아들이는 것은 편안한 생활을 뜻하는 일이 드물다. 이 인도함을 따르면서 너희는 도덕적 선택과 영적 진보가 있는 험한 산에 분명히 부딪치며, 너희가 용기가 있다면 그 산을 거쳐 갈 것이다.
113:4.4 (1245.4) 신을 예배하려는 충동은 대체로 상급 지성 보조자들의 영적 재촉으로 시작되고, 조절자의 이끄심으로 보강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식하는 필사자가 무척 자주 체험하는 기도(祈禱)하고 싶은 충동은 아주 흔히 세라핌이 영향을 미치는 결과로서 일어난다. 수호 세라핌은 하늘 가는 사람의 우주 통찰력을 키우려는 목적으로, 필사자의 환경을 항상 조종하며, 이것은 그러한 생존 후보자가 깃드는 조절자의 계심을 더욱 깨닫고, 이처럼 신의 계심이 이룰 영적 사명에 더욱 협동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113:4.5 (1245.5) 겉보기에, 깃드는 조절자와 둘러싸는 세라핌들 사이에 아무런 통신이 없는 듯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지극하게 한 마음으로 일하는 듯하다. 조절자의 활동이 가장 적을 때 수호자들이 가장 활발하지만, 그들의 봉사는 어떤 방법으로 이상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한 훌륭한 협동은 도저히 어쩌다가 생기거나 우연히 일어난다고 할 수 없다.
113:4.6 (1245.6) 수호 세라핌의 봉사하는 성격, 깃드는 조절자의 하나님 계심, 성령의 연결된 활동, 그리고 진리의 영이 가진 아들의 의식은 모두 한 필사 인격자 안에서, 그리고 그에게 베푸는 영적 봉사가 뜻 깊게 통일됨으로 서로 신성하게 관련된다. 비록 다른 근원과 다른 수준으로부터 오더라도, 이 하늘 영향력은 모두 최상 존재의 둘러싸고 진화하는 계심 속에서 통합된다.
113:5.1 (1245.7) 천사들은 인간 지성의 존엄성을 침범하지 않는다. 그들은 필사자의 의지를 조종하지 않는다. 그들은 깃드는 조절자와 바로 접촉하지도 않는다. 운명 수호자는 네 인격의 위엄을 지키는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너에게 영향을 미친다. 어떤 경우에도 이 천사들은 인간 의지의 자유 행위에 간섭하지 않는다. 천사나 어떤 다른 계급의 우주 성격자도, 인간이 택하는 특권을 줄이거나 단축할 권력이나 권한이 없다.
113:5.2 (1246.1) 천사들은 너희와 아주 가까이 있고 애틋하게 너희에게 관심을 가져서, 비유로 말하자면 “너희가 고집하여 아량이 없고 완고하기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 세라핌은 육체로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육체가 없다. 날개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 감정을 가졌고, 영적 성질의 느낌과 감정을 체험하며, 이것들은 어떤 면에서 인간의 감정과 비할 만하다.
113:5.3 (1246.2) 세라핌은 너희가 직접 하소연하는 것과 아주 상관 없이, 너희를 위하여 행동한다. 그들은 상관들의 명령을 집행하며, 따라서 너희의 지나가는 변덕이나 바뀌는 기분과 상관 없이 활동한다. 이것은 너희가 그들의 과제를 더 쉽게, 또는 더 어렵게 만들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차라리 천사들은 너희의 하소연이나 너희가 드리는 기도에 직접 아랑곳하지 않음을 뜻한다.
113:5.4 (1246.3) 천사들의 지능은 필사 인간이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인간에게 직접 소용되지 않는다. 그들은 대군주나 지도자가 아니다. 다만 수호자일 뿐이다. 세라핌들은 너희를 지킨다. 너희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려고 애쓰지 않는다. 너희는 자신의 갈 길을 계획해야 하지만, 그리고 나서 이 천사들은 네가 고른 길을 가능한 최선으로 이용하려고 행동한다. 그들은 인생의 일상 사무에 (보통은) 멋대로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공적을 세우라고 상관들로부터 지시를 받을 때, 너희는 이 수호자들이 그 명령을 수행하는 어떤 수단을 찾아내리라는 것을 안심하고 믿어도 좋다. 따라서 비상시가 아니면, 그것도 보통은 상관의 직접 명령을 받은 경우가 아니면, 그들은 인간 드라마의 그림 속으로 쳐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너희를 따라다닐 존재이며, 따라서 그들의 미래 작업과 인격 관계에 대하여 기초 교육을 받고 있다.
113:5.5 (1246.4) 세라핌은 어떤 상황에서 인간에게 물질적 봉사자로서 활동할 수 있지만, 이 자격으로 활동하는 일은 아주 드물다. 중도인과 물리 통제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은 인간의 이익을 위하여 넓은 범위에서 활동할 수 있다. 인류와 실제로 접촉하는 일조차 할 수 있지만, 그러한 일은 대단히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에 물질 영역의 상황은 세라핌의 행위에 영향을 받지 않은 채로 진행된다. 하지만 인간의 진화의 사슬에서 사활(死活)을 좌우하는 고리에 위험을 미치는 경우가 일어난 적이 있었고, 그런 경우에 수호 세라핌들이 당연히 솔선해서 행동했다.
113:6.1 (1246.5) 자연 수명을 누리는 동안에 세라핌이 베푸는 봉사에 대하여 무언가 너희에게 일러 주었으니, 나는 그 인간 동료가 필사의 분해를 겪을 때 운명 수호자들이 무슨 행동을 하는가 너희에게 알려주려고 노력하겠다. 네가 죽고 나서, 너의 기록, 신분의 세목, 그리고―필사 지성과 신다운 조절자의 봉사로 인하여 합동으로 진화한―인간 혼의 상물질 개체를, 너의 미래 존재에 관계되는 모든 다른 가치와 함께, 너, 진짜 너를 구성하는 모든 것과 함께, 운명 수호자가 충실하게 간직한다. 떠나는 조절자, 그리고 사실로 있던 인격이 대표하는, 계속 존재하는 신분은 제외된다.
113:6.2 (1246.6) 인간 지성에서 표시등(表示燈), 즉 세라핌이 조절자의 계심과 연결시키는 영(靈)의 광채가 사라지는 순간, 시중드는 천사는 연달아서 그 소대ㆍ중대ㆍ대대ㆍ단위ㆍ군단ㆍ군대의 지휘하는 천사들에게 몸소 보고한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마지막 모험을 위하여 정식으로 등록된 뒤에, 그러한 천사는 이 우주 승천 후보자의 천사군을 지휘하는 저녁별에게(또는 가브리엘의 다른 부관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행성의 세라핌 우두머리의 인가를 받는다. 가장 높은 이 조직 단위의 지휘자로부터 허락을 받고 나서, 그러한 운명 수호자는 첫째 저택 세계로 나아가고, 거기서 예전에 육체를 입고서 보호받던 자가 정신 차리기를 기다린다.
113:6.3 (1247.1) 개인 천사를 배치받고 난 뒤에 인간의 혼이 살아남지 못할 경우에, 시중들던 세라핌은 지역 우주의 본부로 나아가서, 거기서 전에 보고한 대로 그의 보완자의 전체 기록을 증거해야 한다. 다음에 그의 주체가 살아남지 못한 문제에서 책임을 면제받으려고, 천사장들의 법정 앞으로 간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하늘 가는 잠재성을 가진 또 다른 필사자에게, 아니면 세라핌이 봉사하는 어떤 다른 분과로 다시 배치를 받으려고 세계들로 돌아간다.
113:6.4 (1247.2) 그러나 개인 수호자와 집단 수호자 자격으로 봉사하는 것 외에도, 여러 방법으로 천사들은 진화하는 사람들의 시중을 든다. 저택 세계로 바로 가지 않는 주체를 지키던 개인 수호자들은, 할 일 없이 섭리 시대의 심판 점호를 기다리면서 거기에 묵지 않는다. 그들은 우주에 두루, 수많은 봉사 임무에 다시 배치된다.
113:6.5 (1247.3) 수호 세라핌은 필사 인간의 잠자는 혼의 살아남는 가치를 보관하는 수탁자이며, 마찬가지로 자리를 비운 조절자는 그러한 불멸하는 우주 존재의 신분이다. 새로이 빚어낸 상물질 형태와 연결하여 이 둘이 저택 나라의 부활실에서 같이 일할 때, 필사 승천자의 인격을 구성하는 요인들의 재조립이 일어난다.
113:6.6 (1247.4) 조절자는 너를 확인할 것이다. 수호 세라핌은 너를 다시 인격을 갖추게 하고, 그리고 나서 네가 땅에서 살던 시절의 충실한 훈계자에게 너를 다시 내보인다.
113:6.7 (1247.5) 그렇다 하더라도, 한 행성 시대가 끝날 때, 필사자로 하위 수준에 도달한 자들이 같이 모일 때, 여러 저택 구체의 부활실에서 그들을 다시 조립하는 것은 그들의 집단 수호자이며, 너희의 기록도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그는 큰 목소리를 가진 그의 천사들을 보낼 것이요, 그 나라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까지 그가 택한 자들을 함께 모으리라.”
113:6.8 (1247.6) 응보의 기법은 개인 수호자나 집단 수호자들이 살아남지 못하는 모든 성격자를 위하여 섭리 시대의 점호에 응답하라고 요구한다. 그러한 살아남지 못하는 자의 조절자는 돌아오지 않고, 점호를 부를 때 세라핌은 대답하지만, 조절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것이 “불의한 자의 부활”이요, 실제는 사람의 존재가 그침을 공식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 응보의 점호는 반드시 자비의 점호, 즉 잠자는 생존자들의 부활 바로 뒤에 따른다. 그러나 이것은 살아남는 가치를 가리는, 지고하고 전지한 심판들 외에 아무도 아랑곳할 바가 아니다. 그런 판결 문제는 정말로 우리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113:6.9 (1247.7) 집단 수호자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한 행성에서 봉사하고, 결국 수많은 잠자는 생존자의 잠든 혼의 보관자가 될지 모른다. 부활 반응이 저택 세계들에서 일어나니까, 그들은 한 주어진 체계의 많은 다른 세계에서 그렇게 근무할 수 있다.
113:6.10 (1247.8) 사타니아 체계에서, 루시퍼 반란이 있었을 때 잘못된 길에 빠졌던 개인 수호자와 집단 수호자들은, 다수가 어리석음을 진심으로 뉘우쳤는데도, 모두 그 반란의 마지막 판결이 있을 때까지 예루셈에 감금될 것이다. 우주 검열자들은 말을 듣지 않는 불충한 수호자들로부터 그들이 맡았던 혼들의 모든 모습을 가져갔고, 이 상물질 실체들을 안전히 보호하기 위하여 자원한 2품 천사들이 관리하라고 맡겼다.
113:7.1 (1248.1) 저택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이렇게 처음으로 깨어나는 것, 땅에서 살던 시절에 오래 사랑하고 늘 곁에 있던, 너를 동반하던 천사들을 거기서 처음으로 실제로 보는 것, 또한 땅에서 너의 지성에 그렇게 오래 깃들던 신다운 훈계자의 신분과 계심을 거기서 참으로 의식하게 되는 것은 하늘 가는 필사자의 생애에서 정말로 하나의 신기원이다. 그러한 체험은 영화로운 깨어남이요, 진정한 부활이다.
113:7.2 (1248.2) 상물질 구체에서 너의 시중을 드는 세라핌은 (두 명이 있다) 너의 공개된 동반자이다. 이 천사들은 여러 과도기 세계의 생애를 통해서 네가 진보하는 동안, 상물질 지위와 영 지위를 얻는 일에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너를 도우면서 너와 사귈 뿐 아니라, 여러 저택 세계에서 유지되는, 진화 세라핌을 위한 연장(延長) 학교에서 공부함으로 승진할 기회를 이용한다.
113:7.3 (1248.3) 인류는 단순한 부류의 천사 계급들보다 조금 못하게 지어졌다. 따라서 상물질 생활에서 너의 첫 임무는, 육체의 사슬로부터 풀려난 뒤에 인격 의식을 얻을 때 기다리고 있는 과제, 즉시 닥친 과제에서 세라핌에게 조수(助手) 노릇일 것이다.
113:7.4 (1248.4) 저택 세계들을 떠나기 전에, 모든 필사자가 영구한 세라핌 동료나 수호자들을 가질 것이다. 너희가 상물질 구체들을 올라감에 따라서, 생각 조절자와 네가 영원히 결합한다는 선포를 증언하고 인가하는 것은 결국, 수호 세라핌이다. 그들은 함께 너희의 인격 신분이 시간 세계로부터 온 육체를 입은 아이라고 증거한다. 그리고 나서 너희가 성숙한 상물질 상태에 이르면, 그들은 예루셈, 그리고 체계의 진보 및 문화를 가르치는 관련된 세계들을 거쳐서, 너희를 따라간다. 그 다음에 너희와 함께 에덴시아, 그리고 상급 교제가 있는, 그에 소속된 70 구체까지 간다. 나중에 그들은 멜기세덱들 앞까지 너희를 안내하고, 우주 본부 세계들에서 보내는 멋진 생애를 통하여 너희를 따라갈 것이다. 너희가 멜기세덱들의 지혜와 문화를 배우고 나서, 그들은 계속 너희를 구원자별로 데려갈 터이고, 거기서 너희는 온 네바돈의 군주와 얼굴을 마주하고 서게 될 것이다. 아직도 이 안내하는 천사들은 초우주의 소구역과 대구역을 통해서, 유버르사의 접대 세계들까지 줄곧 너희를 따라가고, 너희가 긴 하보나 비행(飛行)을 위하여 마침내 2품 천사에 둘러싸일 때까지, 너희와 함께 남아 있을 것이다.
113:7.5 (1248.5) 필사 생애 동안에 딸려 있던 운명 수호자들 가운데 더러는 하보나를 통해서 하늘 가는 순례자의 과정을 밟는다. 더러는 그들이 오래 사귀던 필사 동료에게 일시 작별하고, 다음에 이 필사자들이 중앙 우주의 궤도들을 통과하는 동안, 이 운명 수호자들은 천사별에서 그 여러 궤도를 마친다. 필사 동료가 시간 세계에서 마지막 이동의 잠에 들어갔다가 영원의 새로운 체험 속으로 깨어날 때, 그들은 파라다이스의 기슭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하늘 가는 세라핌들은 나중에 최후자 군단에서, 그리고 완결 천사 군단에서 다채로운 봉사에 들어간다.
113:7.6 (1248.6) 사람과 천사는 영원히 봉사할 때 다시 합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천사 임무가 어디로 데리고 가든지, 세라핌들은 진화 세계에서 온, 예전에 보호하던 자, 시간 세계의 하늘 가는 필사자와 언제나 교통한다. 인간이 기원을 가졌던 영역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애정을 느끼는 소속감은 결코 잊혀지지 않고, 완전히 끊어지지도 않는다. 사람과 천사는 시간 세계의 생애에서 한 것처럼, 영원한 시대에 신성한 근무에서 협동할 것이다.
113:7.7 (1249.1) 세라핌이 파라다이스 신들에게 도달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진화의 기원을 가진 한 사람을 파라다이스 입구까지 안내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운명 수호자로 배치 받는 것은 가장 높이 치는 천사 임무이다.
113:7.8 (1249.2) 오직 운명 수호자들이 1차 군단, 즉 필사 최후 군단으로 소집된다. 그러한 쌍들은 신분이 하나가 되는 최고의 모험에 말려들었다. 그들이 최후자 군단에 받아들여지기 전에, 두 존재는 천사별에서 영적으로 둘이 하나됨을 이룩한 것이다. 모든 우주 활동에서 그렇게 보완하던 두 천사 성품은, 이 체험에서 궁극에 두 영의 일치를 이룩하며,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비조절자 분신을 받고 그와 융합하는 새로운 능력 반응을 일으킨다. 그래서 시간 세계에서 너희가 사랑하던 천사 동료들 가운데 더러는 또한 영원 속에서 최후자 동료가 되니, 이들은 최상위의 아이요,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완전하게 된 아들이다.
114:0.1 (1250.1) 최고자들은 많은 하늘 세력과 대리자를 통해서, 그러나 주로 세라핌의 봉사를 통해서, 사람의 나라들을 다스린다.
114:0.2 (1250.2) 오늘 정오에, 유란시아에 있는 행성 천사와 수호자, 그리고 다른 자들의 출석 상황은 501,234,619쌍의 세라핌이었다. 나의 지휘 밑에, 200 천사군―세라핌 597,196,800쌍, 곧 개별 천사 1,194,393,600명―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기록부는 천사가 1,002,469,238명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천사 191,924,362명이 이 세계에서 수송ㆍ사자(使者)ㆍ사망의 임무를 띠고 자리를 비운 것이다. (유란시아에는 세라핌과 대체로 같은 수의 케루빔이 있고, 그들은 비슷하게 조직되어 있다.)
114:0.3 (1250.3) 세라핌 및 관계된 케루빔은 한 행성, 특히 반란으로 고립된 세계의 초인간 정부의 세부(細部)와 크게 상관이 있다. 천사들은 중도자(中道者)들의 유력한 도움을 받으며, 거주하는 총독과 그의 모든 동료 및 부하의 명령을 집행하는 봉사자, 실제로 물질을 초월하는 봉사자로서 유란시아에서 활동한다. 세라핌 등급은 개인 수호자와 집단 수호자가 아닌 많은 임무에 종사한다.
114:0.4 (1250.4) 유란시아는 체계ㆍ별자리ㆍ우주의 통치자들로부터 적절하고 효과적인 감독도 없이 지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행성의 정부는 사타니아 체계에서, 아니 온 네바돈에서도, 어느 다른 세계의 정부와도 다르다. 너희를 감독하는 계획이 이렇게 독특한 것은 몇 가지 특별한 상황 때문이다:
114:0.5 (1250.5) 1. 유란시아의 생명 수정(修正) 지위.
114:0.6 (1250.6) 2. 루시퍼 반란의 긴급 사태.
114:0.7 (1250.7) 3. 아담의 직무 불이행이 가져온 소동.
114:0.8 (1250.8) 4. 유란시아가 우주 군주가 수여된 세계들 중에 하나라는 사실로부터 생겨나는 여러 가지 불규칙한 점. 네바돈 미가엘은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이다.
114:0.9 (1250.9) 5. 행성 지도자 24명의 특별 기능.
114:0.10 (1250.10) 6. 행성에 천사장 회로가 설치된 것.
114:0.11 (1250.11) 7. 한때 육신화한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행성 영주 대관(大官)으로 근래에 지명된 것.
114:1.1 (1250.12) 사타니아 체계의 군주가 최초의 유란시아 통치권을 위탁받았다. 그는 이것을 처음에 멜기세덱과 생명 운반자들의 합동 위원회에게 넘겨주었고, 이 집단은 정식으로 선정된 행성 영주가 도착할 때까지 유란시아에서 활동했다. 루시퍼 반란이 있던 시절에 칼리가스티아 영주가 몰락한 뒤에, 유란시아는 미가엘이 육신을 입고 자신 수여를 마칠 때까지, 지역 우주 및 그 행정 분과들과 확실하고 안정된 어떤 관계도 가지지 않았고, 이때 늘 하나된 이는 미가엘이 유란시아의 영주라고 선포했다. 그러한 선포는 확실히, 원칙으로, 언제까지나 너희 세계의 지위를 해결했지만, 실제로 군주인 창조 아들은 유란시아 및 체계에서 격리된 모든 다른 행성의 정부에서 그를 대표할 권한을 가진 위원회, 옛 유란시아인 24명으로 이루어진 예루셈 위원회를 설립한 것을 제외하고, 행성을 친히 관리하려고 아무런 표시도 보이지 않았다. 이 위원회 중에서 한 명은 거주하는 총독으로서, 지금 언제나 유란시아에서 거주한다.
114:1.2 (1251.1) 행성 영주인 미가엘을 대신하는 대행(代行) 권한은 요즈음에 마키벤타 멜기세덱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이 지역 우주 아들은 거주하는 총독들이 연속하여 행정을 맡는 현재의 행성 체제를 수정하려는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114:1.3 (1251.2) 행성 영주 대행이 그의 직함에 따른 책임을 맡으려고 도착하지 않으면, 현재 섭리 시대 동안에, 유란시아 정부에서 아무런 뚜렷한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거의 없다. 우리 동료들 중에서 어떤 자들에게는, 언젠가 가까운 앞날에 24 상담자 가운데 하나를 총독으로서 행동하라고 유란시아로 보내는 계획이,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유란시아를 통치하는 대행 명령을 가지고 정식으로 오는 것으로 대체될 듯이 보인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는 행성 영주 대행으로서, 루시퍼 반란이 마침내 판결될 때까지, 아마도 행성이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는 아득한 그 앞날까지 줄곧, 행성의 책임을 맡을 것이다.
114:1.4 (1251.3) 더러는 현재 섭리 시대가 끝날 때까지, 마키벤타가 유란시아의 사무를 친히 지휘하려고 오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더러는 미가엘이 아직 육체를 입었을 때 약속한 대로 유란시아로 언젠가 돌아올 때까지, 영주 대행은 그런 식으로 오지 않을지 모른다고 주장한다. 또 더러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자도 포함하여, 어느 날 어느 시각이라도, 멜기세덱이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114:2.1 (1251.4) 너희 세계에 미가엘이 수여된 시절 이후로, 유란시아의 일반 관리는 한때 유란시아인이었던 24자로 구성된, 예루셈의 특별 집단에게 맡겨졌다. 이 위원회의 위원 자격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가 지켜보건대 그렇게 임명받은 자는 모두 사타니아 체계에서 최상위의 확대되는 통치권에 이바지한 사람이었다. 성품으로 보면 그들은 유란시아에서 활동할 때 모두 진정한 지도자였고, (마키벤타 멜기세덱을 제외하고) 이 지도자 품질은 저택 세계의 체험으로 인하여 더욱 커지고 예루셈 시민 훈련을 받아서 보충되었다. 위원들은 라나포지의 내각으로부터 24자 자리에 지명을 받으며,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의 재청을 받고 예루셈의 지정된 파수의 인가를 받으며, 미가엘의 명령에 따라서 구원자별의 가브리엘로부터 임명을 받는다. 임시로 임명받은 자는 이 특별 감독자 위원회의 영구 위원과 똑같이 활동한다.
114:2.2 (1251.5) 이 행성 관리자 위원회는 미가엘이 여기서 그의 마지막 자신 수여를 체험했다는 사실로부터 이 세계에서 생기는 활동을 감독하는 데 특히 관심을 가진다. 어떤 찬란한 저녁별의 연락 활동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미가엘과 가깝고도 밀접한 접촉이 유지되며, 그 찬란한 저녁별은 필사자로 자신을 수여하는 동안 예수에게 시중들었던 동일한 존재이다.
114:2.3 (1252.1) 너희에게 “세례자”라고 알려진 어떤 요한이, 현재 이 위원회가 예루셈에서 열릴 때 사회자이다. 그러나 이 위원회의 직권상 우두머리는 사타니아의 지정된 파수이며, 그는 구원자별에 있는 부검열자와 오르본톤의 최상 행정자를 직접 개인적으로 대표한다.
114:2.4 (1252.2) 옛 유란시아인들로 이루어진 바로 이 위원회의 위원들은 또한 체계에서 반란으로 고립된 다른 36 세계에 자문하는 감독자로서 행동한다. 그들은 체계 군주 라나포지가 이 행성들의 사무에 가깝고도 이해심 있는 손길을 유지하게 하는 데 매우 귀중한 봉사를 베푼다. 이 행성들의 사무는 아직도 다소 놀라시아덱의 별자리 아버지들의 전반적 통제 밑에 남아 있다. 이 24 위원은 격리된 각 행성에, 특히 유란시아에, 개인으로서 자주 다녀간다.
114:2.5 (1252.3) 고립된 다른 세계들은, 각각 한때 거기에 거주하던 자들로 이루어진, 비슷하고 크기가 다른 여러 위원회의 자문을 받는다. 그러나 이 다른 위원회들은 유란시아인 24자 집단 밑에 있다. 유란시아 위원회의 위원들은 이처럼 사타니아에서 격리된 각 세계에서 인간이 진보하는 모든 단계에 적극 관심을 가지는 한편, 그들은 특히, 유란시아 필사 민족들의 복지와 진보에 각별히 관심을 가진다. 이는 유란시아를 제외하고, 그들이 아무 행성의 사무도 즉시, 직접 감독하지 않기 때문이며, 여기서도 필사자가 살아남는 것에 관계된 어떤 분야를 제외하고, 그들의 권한은 완벽하지 않다.
114:2.6 (1252.4) 이 유란시아 상담자 24명이 정상적 우주 활동 계획을 벗어나서,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의 현재 지위에서 계속할지 아무도 모른다. 의심할 여지 없이, 한 섭리 시대가 끝나거나,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전권을 맡거나, 루시퍼 반란의 최종 판결이 내리거나, 또는 미가엘이 마지막으로 자신을 수여한 세계에 다시 나타나는 것과 같이, 행성의 지위에 어떤 변화가 뒤따를 때까지 그들은 현재 자격에서 계속 근무할 것이다. 현재 거주하는 유란시아 총독은 사타니아 체계가 별자리 회로들로 회복되는 순간, 마키벤타를 제외하고, 모두 파라다이스로 올라가기 위하여 해방될지 모른다는 의견으로 기우는 듯하다. 그러나 다른 의견들도 또한 유행한다.
114:3.1 (1252.5) 유란시아 시간으로 백년마다, 예루셈에 있는 24명의 행성 감독자 집단은 그들 중에 하나를 집행 대표로서, 거주하는 총독으로 행동하기 위하여 너희 세계에서 머물라고 지명한다. 이 이야기를 준비하는 시절에 이 집행관이 바뀌었고, 열아홉째로 그렇게 근무하는 자를 스무째가 이어받았다. 현재 행성 감독자의 이름을 너희에게 감추는데, 이는 오직 필사 인간이 놀라운 동료와 초인간 상급자들을 숭배하기가, 아니 신으로 모시는 것도 아주 쉽기 때문이다.
114:3.2 (1252.6) 거주하는 총독은 예루셈의 24 상담자의 대표인 것을 제외하고, 세상사의 경영에 아무런 개인적인 실제 권한이 없다. 그는 초인간 행정을 조정하는 자로서 행동하고, 유란시아에서 활동하는 천상 존재들의 존경받는 우두머리요, 널리 인정받는 지도자이다. 모든 계급의 천사 무리는 그를 자기들의 조정하는 지도자로 여기고, 한편 연합 중도자들은 1-2-3 첫째가 24 상담자의 일원이 되려고 떠난 뒤로, 뒤잇는 총독들을 행성에서 그들의 아버지로서 정말로 우러러본다.
114:3.3 (1253.1) 총독은 행성에서 실제의 개인적 권한을 소유하지 않지만, 그는 수십 가지 판결과 결정을 날마다 내려 보내며, 관계된 모든 성격자가 이를 최종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절차에 따른 통치자보다 아버지 같은 조언자에 훨씬 더 가깝다. 어떤 면에서 그는 행성 영주처럼 활동하지만, 그의 행정은 물질 아들들의 행정과 훨씬 더 비슷하다.
114:3.4 (1253.2) 유란시아 정부는 예루셈의 여러 위원회에서 대표되며, 이는 돌아오는 총독이 행성 영주들로 구성된 체계 군주 내각에서 임시 위원으로서 자리에 앉는다는 한 조치에 따른 것이다. 마키벤타가 영주 대행으로 임명되었을 때, 사타니아의 행성 영주 회의에서 그가 즉시 자기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지금까지 이 방향으로 그는 아무런 뜻을 표시하지 않았다.
114:3.5 (1253.3) 유란시아의 초물질 정부는 지역 우주의 상급 단위들과 아주 가까운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거주하는 총독은 예루셈 뿐 아니라 구원자별을 대표한다. 이는 그가 24 상담자를 위하여 행동하기 때문인데, 이들은 미가엘과 가브리엘을 직접 대표한다. 그리고 예루셈 시민이니까, 행성의 총독은 체계 군주를 위하여 대변자로 활동할 수 있다. 한 보론다덱 아들, 즉 에덴시아 관찰자가 별자리 당국을 직접 대표한다.
114:4.1 (1253.4) 유란시아의 통치권은 행성의 반란이 터진 뒤 얼마 안 되어, 놀라시아덱 정부가 행성의 권한을 한때 임의로 빼앗아 더욱 까다로워졌다. 유란시아에는 한 보론다덱 아들이 아직도 거주하는데, 그는 에덴시아 최고자들을 대표하는 관찰자요, 미가엘이 직접 행동하지 않는 마당에 행성 통치권의 수탁자이다. 현재 관찰하는 (그리고 언젠가 섭정하는) 최고자는 이렇게 유란시아에서 스물세 번째로 근무한다.
114:4.2 (1253.5) 에덴시아 최고자들의 통제 밑에 아직 어떤 집단의 행성 문제들이 있는데, 그 관할권은 루시퍼 반란이 있을 때 몰수되었다. 이 문제들에 대한 권한은 한 보론다덱 아들, 놀라시아덱 관찰자가 행사하는데, 그는 행성 감독자들과 아주 가까운 자문 관계를 유지한다. 종족 위원들은 유란시아에서 매우 활발하고, 그 여러 집단의 우두머리들은 거주하는 보론다덱 관찰자에게 비공식으로 부속되어 있으며, 그는 그들의 자문하는 지도자로서 행동한다.
114:4.3 (1253.6) 한 위기에 닥쳐서, 어떤 순전한 영적 문제들을 제쳐놓고, 정부에서 실제 통치하는 우두머리는 지금 관찰 임무를 띤, 에덴시아의 이 보론다덱 아들일 것이다. (이러한 순전한 영적 문제, 그리고 어떤 순전한 개인적 문제에서, 최고의 권한은 유란시아에서 요즈음에 설립된 천사장 계급의 분과 본부에 딸린, 지휘하는 천사장에게 부여된 듯하다.)
114:4.4 (1253.7) 관찰하는 최고자는 그의 재량으로, 심각한 행성 위기가 닥칠 때 행성 정부를 몰수할 권한이 있고, 유란시아의 역사에서 이것이 33번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한 때에 관찰 최고자는 섭정하는 최고자로서 활동하며, 오직 천사장들의 분과 조직을 제외하고, 행성에서 거주하는 모든 봉사자와 행정자에게, 도전받지 않는 권한을 행사한다.
114:4.5 (1253.8) 보론다덱 섭정은 반란으로 고립된 행성에만 특이하게 있지는 않다. 이는 최고자들이 사람이 사는 세계들의 사무에 어느 때라도 간섭해도 좋기 때문이며, 그들은 사람들의 나랏일을 처리하는 데 별자리 통치자들의 우수한 지혜를 집어넣는다.
114:5.1 (1254.1) 유란시아의 실제 행정은 정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우주 조직의 계통을 따라서, 분리된 입법ㆍ집행ㆍ사법 분과와 같은, 아무런 공식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다. 24 상담자는 행성의 정부에서 입법부에 가장 가깝다. 총독은 잠정적이고 자문하는 최고 집행자이며, 거부권은 관찰하는 최고자에게 남아 있다. 그리고 절대 권한을 가진 아무런 사법 권한이 행성에서 작용하지 않는다―오직 화해 위원회들이 있을 뿐이다.
114:5.2 (1254.2) 세라핌과 중도자들이 관련되는 대다수의 문제는, 공동의 찬성을 얻어서 총독이 결정한다. 그러나 24 상담자의 명령을 표현할 때를 제외하고, 그의 판결은 모두 화해 위원회, 행성 활동을 위하여 조직된 지역 당국, 또는 사타니아의 체계 군주에게 올리는 상고(上告)에도 지배를 받는다.
114:5.3 (1254.3) 행성 영주의 유형(有形) 참모진과 아담의 아들딸의 물질 체제가 빠진 것은 세라핌들이 베푸는 특별한 봉사, 그리고 중도인(中道人)들의 특별한 봉사로 어느 정도 보상된다. 천사장들, 관찰하는 최고자, 총독, 이 삼자일치의 존재가 행성 영주의 부재를 효과 있게 보충해 준다.
114:5.4 (1254.4) 어느 정도 느슨하게 조직되고 얼마큼 손수 관리되는 이 행성 정부는 기대한 것보다 효과가 있는데, 이는 천사장들이 베푸는, 시간을 절약하는 도움과 그들의 늘 준비된 회로 때문이고, 이것은 행성의 비상시와 행정의 어려움이 있을 때 자주 이용된다. 법대로 따지면, 행성은 아직도 놀라시아덱의 여러 회로에서 영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그러나 비상시에 천사장 회로를 이용함으로, 이 장애를 둘러갈 수 있다. 물론, 진리의 영이 1천9백년 전에 모든 육체에게 부어진 뒤로, 행성의 고립은 개별 필사자가 아랑곳할 일은 아니다.
114:5.5 (1254.5) 유란시아에서 하루의 행정은 그날의 상담하는 회의로 시작되며, 여기에는 총독, 행성의 천사장 우두머리, 관찰하는 최고자, 감독하는 상천사(上天使), 거주하는 생명 운반자들의 우두머리, 그리고 우주의 높은 아들들, 또는 어쩌다가 행성에 머무르는 어떤 학생 방문자들 사이에서 초청받은 손님들이 참석한다.
114:5.6 (1254.6) 총독 직속의 행정을 담당하는 내각은 12 세라핌으로 이루어지며, 이들은 행성의 진보 및 안정을 담당하는 직계 초인간 지도자로서 활동하는, 12 집단의 특별 천사의 임시 우두머리들이다.
114:6.1 (1254.7) 진리의 영이 퍼부어지는 것과 때를 맞추어 첫 총독이 유란시아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 12 집단의 특별 세라핌, 천사별 졸업생들이 따라왔는데, 이들은 즉시 어떤 특별한 행성 근무에 배치되었다. 이 높은 천사들은 행성을 감독하는 으뜸 세라핌으로 알려져 있고, 행성을 담당하는 관찰 최고자의 전반적 통제와 따로, 거주하는 총독의 직접 지시를 받고 있다.
114:6.2 (1255.1) 이 12 집단의 천사들은 거주하는 총독의 일반 감독을 받으며 활동하지만, 각 집단의 임시 우두머리인 12자 세라핌 회의가 그들을 직접 지휘한다. 이 회의는 또한 거주하는 총독의 자원 내각으로서 봉사한다.
114:6.3 (1255.2) 행성 세라핌의 우두머리로서, 나는 이 세라핌 우두머리들의 회의를 주관하며, 칼리가스티아의 탈퇴가 있을 때 이탈했던 자, 한때 행성에서 천사 무리의 우두머리였던 자를 계승하여, 유란시아에서 자원해서 근무하는 1차 계급 상천사이다.
114:6.4 (1255.3) 행성 감독을 맡는 12 집단의 으뜸 세라핌들은 유란시아에서 다음과 같이 활동한다:
114:6.5 (1255.4) 1. 시대 천사. 이들은 현시대의 천사, 섭리 시대의 집단이다. 이 하늘의 봉사자들은 각 세대의 사무가 일어나는 당대의 모자익에 맞도록 고안된 바와 같이, 그 사무의 감시와 지도를 담당한다. 유란시아에서 근무하는 현재의 시대 천사 집단은, 현재 섭리 시대 동안에 행성에 배치된 세 번째 집단이다.
114:6.6 (1255.5) 2. 진보 천사. 연속되는 사회 시대를 진화로 진보시키는 일을 개시하는 과제가 이 세라핌들에게 맡겨져 있다. 그들은 진화하는 인간의 타고난 진취적 성향을 개발하도록 육성한다. 그들은 마땅히 처리해야 하는 대로 일이 처리되도록 끊임없이 수고한다. 지금 수고하는 집단은 이 행성에 배치된 두 번째 집단이다.
114:6.7 (1255.6) 3. 종교 수호자. 이들은 “교회의 천사”이다. 지금 있고, 이 때까지 있어 왔던 것을 위하여 열심히 투쟁하는 자이다. 그들은 한 시대로부터 다음 시대로 도덕적 가치를 안전히 전달하기 위하여, 살아남은 것의 이상(理想)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그들은 진보 천사들이 이기려고 사용하는 외통수이며,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오래 되고 일시적 형태에 담긴 불멸의 가치를, 새롭고 따라서 덜 안정된 형태의 생각과 행동으로 옮기려고 내내 애쓴다. 이 천사들은 영적 형식을 놓고 경쟁하지만, 그들은 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의 극단적 교파주의, 그리고 의미 없는 논쟁으로 인한 분열의 근원은 아니다. 지금 유란시아에서 활동하는 집단은 이렇게 근무하는 다섯 번째 집단이다.
114:6.8 (1255.7) 4. 국가 생활의 천사. 이들은 “나팔의 천사,” 곧 유란시아에서 국가 생활의 정치적 성과를 지도하는 자이다. 국제 관계를 전반적으로 통제하는 일로 활동하는 이 집단은 행성에서 네 번째로 근무하는 집단이다. 특히 이 천사 분과의 봉사를 통해서, “최고자들은 사람의 나라에서 다스린다.”
114:6.9 (1255.8) 5. 종족의 천사. 정치적 관여와 종교적 분류에 상관 없이, 시간 세계의 진화 종족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일하는 자. 유란시아에는 아홉 인종의 잔재가 남아 있고, 이들은 서로 섞여서 현대 민족으로 통합되었다. 이 세라핌들은 종족 위원회들이 베푸는 봉사와 가깝게 관련되며, 유란시아에 지금 있는 집단은 오순절 뒤에 곧 행성에 배치된 최초의 집단이다.
114:6.10 (1255.9) 6. 미래의 천사. 이들은 예측하는 천사이며, 미래 시대를 예측하고 새롭고 진보하는 섭리 시대의 더 나은 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계획한다. 이들은 연속되는 시대를 설계하는 자이다. 행성에 지금 있는 집단은, 현재 섭리 시대가 비롯한 뒤로 이처럼 활동해 왔다.
114:6.11 (1256.1) 7. 계몽의 천사. 유란시아는 이제 행성의 교육을 촉진하는 데 전념하는 세 번째 세라핌 집단의 도움을 받고 있다. 이 천사들은 정신 및 도덕의 훈련이 개인ㆍ가족ㆍ집단ㆍ학교ㆍ공동체ㆍ국가, 그리고 민족 전체에 관계되는 그런 훈련에 종사한다.
114:6.12 (1256.2) 8. 건강의 천사. 이들은 건강을 증진하고 병을 방지하는 일에 헌신하는 필사 대리자들을 돕는 데 배치된, 봉사하는 천사이다. 현재 집단은 이 섭리 시대에 여섯 번째로 근무하는 집단이다.
114:6.13 (1256.3) 9. 가정 세라핌. 유란시아는 이제 인간 문명의 기본 제도인 가정(家庭)을 보존하고 향상하는 데 헌신하는, 다섯 번째로 봉사하는 천사 집단의 보살핌을 받는다.
114:6.14 (1256.4) 10. 산업 천사. 이 세라핌 무리는 유란시아 민족들 가운데 산업의 발전을 조장하고 경제 상태를 개선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이 집단은 미가엘이 수여된 뒤로, 일곱 번 갈렸다.
114:6.15 (1256.5) 11. 오락 천사. 이들은 놀이ㆍ유머ㆍ휴식의 가치를 돌보는 세라핌이다. 사람의 기분을 바꾸는 오락을 향상시키고, 따라서 인간의 여가를 더욱 유익하게 이용하는 것을 촉진하려고 늘 애쓴다. 현재 집단은 유란시아에서 그 서열에서 세 번째로 봉사하는 집단이다.
114:6.16 (1256.6) 12. 초인간 봉사의 천사. 이들은 천사 중의 천사이다. 행성에서 일시적이거나 영구하게 모든 다른 초인간 생명에게 봉사하는 데 배치된 세라핌이다. 이 집단은 현재 섭리 시대가 시작된 뒤로 일해 왔다.
114:6.17 (1256.7) 행성의 정책이나 과정을 다루는 문제에서, 이 여러 집단의 으뜸 세라핌들이 뜻이 맞지 않을 때 총독이 보통 그들의 의견 차이를 해결하지만, 그의 결정은 모두 그 의견 차이에 관계된 문제들의 성질과 중요성에 따라서, 상고(上告)에 지배를 받는다.
114:6.18 (1256.8) 이 천사 집단들 중에 어느 것도 그들의 임무 분야에 직접, 또는 멋대로 통제권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활동 분야의 사무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지만, 그들이 부속된 인간 활동 분야에 유리하게 영향을 미치도록, 행성의 조건을 조종하고 상황을 연결시킬 수 있고, 또 그렇게 한다.
114:6.19 (1256.9) 행성을 감독하는 으뜸 세라핌들은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많은 대리자를 이용한다. 그들은 개념 교환소, 지성을 집중시키는 자, 사업 추진자로서 활동한다. 새로운 상급 개념을 사람의 머리 속에 집어넣을 수 없지만, 그들은 한 인간 지능 안에 이미 나타난 어떤 상급 이상을 강화하려고 행동하는 일이 흔하다.
114:6.20 (1256.10) 그러나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이 여러 수단을 제쳐놓고, 으뜸 세라핌들은 운명 예비군을 동원하고, 훈련시키고, 유지함으로, 치명적 위험에 대비하여 행성의 진보를 보장한다. 이 예비병들의 주요 기능은 진화로 이루어지는 진보가 붕괴하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뜻밖의 일에 대비하여, 하늘 세력이 준비한 조치이다. 그들은 재난을 막는 보증이다.
114:7.1 (1257.1) 운명 예비군은 세상사를 다루는 초인간 행정부의 특별한 봉사에 가입 허가를 받은 살아 있는 남녀들로 구성된다. 이 군단은 진화 세계에서 시간 세계의 자녀들에게 자비와 지혜를 베푸는 부서의 운영을 도우려고, 그 영역의 영 지도자들이 각 세대에서 뽑은 남녀들로 이루어져 있다. 승천 계획의 사무를 운영하는 데, 의지를 가진 필사 인간이 그러한 책임을 맡을 능력이 있고 믿을 만하면, 즉시 그들을 이처럼 연락하고 이용하기 시작하는 것이 일반 관습이다. 따라서 남자와 여자들이 충분한 정신 능력, 적당한 도덕적 지위, 필요한 영적 성품을 가지고 현세에 행동 무대에 나타나자마자, 그들은 인간 연락자, 곧 필사 조수(助手)로서, 적절한 하늘 집단의 행성 성격자들에게 재빨리 배치된다.
114:7.2 (1257.2) 사람들이 행성 운명의 보호자로 뽑힐 때, 세계 행정가들이 집행하는 여러 계획에서 긴요한 개인이 될 때, 이때 행성의 세라핌 우두머리는 그들이 세라핌 군단에 현세에 부속되는 것을 확인하고, 이 필사 예비병들과 함께 일하도록 개인 운명 수호자들을 임명한다. 예비병은 모두 자의식하는 조절자를 가지고 있고, 그들의 대부분은 지적 성취와 영적 달성의 상급 우주 수준에서 활동한다.
114:7.3 (1257.3) 그 영역의 필사자는 사람이 사는 여러 세계에서 다음 이유로 운명 예비군에서 근무하도록 선택된다:
114:7.4 (1257.4) 1. 세상사(世上事)의 여러 가지 활동을 운영하는 데, 수많은 가능한 비상 임무를 위하여 비밀로 연습하는 특별한 능력.
114:7.5 (1257.5) 2. 사람의 인정과 보상을 받지 않고서 기꺼이 일하려는 마음, 아울러 어떤 특별한 사회적ㆍ경제적ㆍ정치적ㆍ영적 운동이나 또는 다른 운동에 마음을 다하여 헌신한다.
114:7.6 (1257.6) 3. 특별한 재능을 가졌고, 행성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세계에 앞으로 닥칠 비상 사태와 씨름하는 과제에, 아마도 유란시아 이전에 체험을 가진 생각 조절자를 소유한다.
114:7.7 (1257.7) 행성에서 하늘 봉사를 담당하는 각 분과는, 운명 지위를 가진 이 필사자의 연락 군단을 받을 자격이 있다. 사람이 사는 보통 세계는 따로 된, 70개 운명 군단을 고용하며, 이들은 현재 세상사의 초인간 운영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유란시아에는 행성에서 천사가 감독하는 각 집단마다 하나씩, 12 운명 예비군이 있다.
114:7.8 (1257.8) 12 집단의 유란시아 운명 예비병들은, 땅에서 수많은 중대한 직책을 위하여 미리 연습을 받고 가능한 행성 비상시에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 구체의 필사 거주자들로 구성된다. 이 통합 군단은 지금 96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작은 군단은 41명, 가장 큰 군단은 172명이다. 스무 명이 되지 않는 연락 성격자를 제쳐놓고, 이 독특한 집단의 구성원은 어떤 행성 위기에 가능한 활동을 위하여 그들이 준비되는 것을 도무지 의식하지 못한다. 이 필사 예비병들은 그들이 각자 소속된 군단의 선택을 받고, 생각 조절자와 수호 천사가 봉사하는 통합된 기법에 따라서, 지성의 깊은 곳에서 마찬가지로 훈련 받고 미리 연습을 받는다. 의식하지 못하면서 받는 이 훈련에는 수많은 다른 하늘 성격자가 여러 번 참여하는데, 이 모든 특별한 준비를 하는 동안 중도자들은 귀중하고 필수인 봉사를 해낸다.
114:7.9 (1258.1) 많은 세계에는 잘 적응된 2차 중도인들이 생각 조절자가 깃드는 지성에 솜씨 있게 파고들어, 유리하게 구성된 어떤 필사자의 생각 조절자와 다른 정도로 접촉할 수 있다. (우주적 조정이 바로 그렇게 우연히 합쳐서 이 계시가 유란시아에서 영어로 모습을 나타냈다.) 수많은 예비군에서 진화 세계의 그러한 가능한 연락 필사자들을 동원하며, 어느 정도까지, 앞을 내다보는 이 작은 집단의 인격자들을 통해서, 영적 문명이 진보되고 최고자들은 사람의 나라에서 다스릴 수 있다. 이처럼 이 운명 예비군의 남녀는 중도인이 사이에 끼어 봉사함으로, 그들의 조절자와 다른 정도로 접촉한다. 그러나 이 예비병들이 진화된 문화가 붕괴하거나 또는 살아 있는 진리의 빛이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활동하는 그러한 드문, 사회의 비상시와 영적 긴급 사태를 제외하고, 바로 이 필사자들은 동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는다. 유란시아에서 이 운명 예비병들은 인류 역사의 페이지를 장식한 일이 드물다.
114:7.10 (1258.2) 예비병들은 필수 행성 정보를 보존하는 자로서 의식하지 않고서 행동한다. 한 예비병이 죽고 나서, 여러 번 어떤 중대한 자료를 죽어 가는 예비병의 머리로부터 더 젊은 후계자한테로 이전하는 것은, 두 생각 조절자의 연결로 이루어진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예비군과 관련하여, 조절자들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많은 다른 방법으로 활동한다.
114:7.11 (1258.3) 유란시아에서 운명 예비군은 비록 아무런 영구 우두머리가 없어도, 그 다스리는 조직을 구성하는, 자체의 영구한 회의가 있다. 이러한 회의는 사법 회의, 역사성 회의, 정치 주권 회의, 그리고 많은 다른 것을 포함한다. 때때로, 그 예비군의 조직에 따라서, 이러한 영구 회의는 특정한 기능을 위하여, 예비군 전체의 이름 뿐인 (필사자) 우두머리를 임명해 왔다. 그러한 예비병 우두머리의 임기는 보통 몇 시간 지속하는 문제이며, 당면한 어떤 특정한 과제를 달성하는 데 국한된다.
114:7.12 (1258.4) 유란시아 예비군은 아담 족속과 안드 족속이 살던 시절에 그 구성원이 가장 많았는데, 예비군은 보라 피가 묽어짐과 함께 꾸준히 줄어들고 있고, 오순절 시절 무렵에 그 밑바닥에 이르렀으며, 그때부터 예비군 구성원은 꾸준히 늘어났다.
114:7.13 (1258.5) (유란시아에서 우주를 의식하는 시민들로 이루어진 우주 예비군은 지금 1천 필사자가 넘는데, 우주 시민권에 대한 그들의 통찰력은 지상(地上) 거처가 있는 그 구체를 훨씬 뛰어넘는다. 그러나 이 독특한 집단의 살아 있는 인간들의 활동의 진정한 성질이 무엇인가 내가 밝히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114:7.14 (1258.6) 유란시아 필사자는, 그들의 세계가 지역 우주의 어떤 회로들로부터 영적 면에서 비교적 고립되었다고 해서 우주에서 버림받거나 고아(孤兒)가 된 행성이라는 느낌을 가져서는 안 된다. 행성에는 세상사와 인간의 운명을 아주 분명하고 효과 있게 보살피는, 초인간적 감독이 작용하고 있다.
114:7.15 (1258.7) 그러나 너희는 이상적 행성 정부에 대하여 기껏해야 보잘것없는 개념만 가질 수 있는 것이 참말이다. 유란시아는 행성 영주의 초기 시절부터, 세계를 성장시키고 종족을 발전시키는 신의 계획이 유산되어 고통을 겪었다. 사타니아에서 사람 사는 충성한 세계들은 유란시아처럼 다스려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다른 고립된 세계들과 비교해서, 너희 행성의 여러 정부는 그다지 열등하지 않았다. 하나나 두 세계가 더 나쁘다고 말할 수 있고, 몇몇은 조금 나을지 모르지만, 대다수는 너희와 같은 수준에 있다.
114:7.16 (1259.1) 행성 행정의 불안정한 지위가 언제 끝날 것인지 지역 우주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듯하다. 네바돈의 멜기세덱들은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친히 다시 도착할 때까지, 행성 정부와 행정에 거의 변화가 없으리라는 견해를 지지하고 싶어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더 일찍 아니라면 이때, 대규모의 변화가 행성 경영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세계 행정의 그러한 수정이 어떤 성질을 가질 것인가 아무도 추측도 할 수 없는 듯하다. 네바돈 우주에서 사람 사는 세계들의 역사를 통틀어서, 그러한 사건이 일어난 전례가 없다. 유란시아의 미래 정부에 관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많은 것 중에 두드러진 한 가지는 천사장의 회로, 그리고 천사장의 분과 본부가 행성에 있는 것이다.
114:7.17 (1259.2) 우주의 여러 회의에서는 고립된 너희 세계를 잊지 않고 있다. 유란시아는 죄로 낙인이 찍히고, 반란으로 신의 돌보심이 두절된, 우주 고아(孤兒)가 아니다. 유버르사로부터 구원자별까지, 그리고 계속 예루셈까지, 아니 하보나와 파라다이스에서도, 그들은 모두 우리가 여기에 있음을 알고 있다. 유란시아에 지금 거하는 너희 필사자들은, 마치 그 구체가 믿음 없는 행성 영주에게 한 번도 배신을 당하지 않았던 것 같이, 똑같이 사랑스럽게 소중히 여겨지고, 똑같이 충실하게, 아니 그보다 더하게 보살핌을 받는다. “바로 아버지가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은 영원히 참말이다.
115:0.1 (1260.1) 아버지 하나님에게 아들인 것은 엄청난 관계이다. 최상위 하나님에게는 성취가 지위를 얻는 데 필수 조건이다―누구나 무엇일 뿐 아니라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115:1.1 (1260.2) 높거나 낮은 모든 지성이, 한 우주 구조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생각하는 타고난 능력이 없다면,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고 진화하는 지능들은 총 우주에서 무력할 것이요, 합리적 사고(思考) 형태를 시작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머리가 결론을 헤아릴 수 없고 참 기원을 꿰뚫어볼 수 없다면, 머리가 지어낸 이 여러 가설의 테두리 안에서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수단을 가질 수 있도록, 그러한 머리는 어김없이 결론을 가정(假定)하고 기원을 발명할 것이다. 인간의 사고를 위하여 그러한 우주 테두리는 합리적 지능 작용에 필수이지만, 그런 테두리는, 정도가 크던 작던, 예외 없이 잘못되어 있다.
115:1.2 (1260.3) 우주의 개념 구조들은 기껏해야 상대적으로 참되다. 이것들은 쓸모 있는 발판이요, 우주에 대한 이해가 확대되기 전에 궁극에 무너져야 한다. 진리ㆍ아름다움ㆍ선ㆍ도덕ㆍ윤리ㆍ의무ㆍ사랑ㆍ신성(神性)ㆍ기원ㆍ존재ㆍ목적ㆍ운명ㆍ시간ㆍ공간, 아니 신을 이해하는 것조차 상대적으로 참될 뿐이다. 하나님은 아버지보다 아주 훨씬 더 크지만, 아버지는 사람의 가장 높은 하나님 개념이다. 그런데도 창조자와 인간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묘사한 것은 오르본톤에서, 하보나에서, 파라다이스에서 얻을 신 개념, 필사자를 초월하는 개념으로 인하여 확대될 것이다. 사람은 필사자의 우주 테두리 안에서 생각해야 하지만, 생각을 펼칠 수 있는 다른 더 높은 테두리를 사람이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115:1.3 (1260.4) 필사자가 온 우주를 이해하기 쉽게 만들려고 우주 실체의 다양한 수준을 유한 수준, 초한(超限) 수준, 절대 수준이라 언급하였다. 이 중에서 오직 절대적인 것이 무조건 영원하고 참으로 실존적이다. 초한한 것과 유한한 것은 무한의 처음이자 원초적 절대 실체에서 나온 파생물이요, 수정(修正)된 것, 자격 제한이요, 묽게 만든 것이다.
115:1.4 (1260.5) 유한자의 영역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있는 덕택으로 존재한다. 높고 낮은 유한한 생물은, 우주 체제에서 유한자의 필요성에 대하여 여러 이론을 내놓아도 좋고 또 그렇게 했지만, 모든 것을 고려하건대, 유한자는 하나님이 그렇게 의지했기 때문에 존재한다. 우주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요, 조상이 되는 존재들, 즉 창조자나 어버이의 사전(事前) 행위와 선재하는 의지에 호소하지 않고서, 유한한 인간은 어째서 자신이 개인으로 존재하는가 합리적 이유를 내놓을 수도 없다.
115:2.1 (1261.1) 실존적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아무것도 은하(銀河)들에 두루 일어날 수 없으니, 이는 스스로 계신 이 안에 본래 있는 완벽한 무한이 일곱 절대자 안에 영원히 있고, 여러 삼자일치 속에서 기능적으로 관련되고, 여러 삼극일치 안에서 전달되어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여러 절대 관계에 이처럼 무한(無限)이 실존적으로 있다는 사실은, 조금도 우주의 새로운 체험적인 것들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들지 않는다. 유한한 인간의 관점에서, 무한은 잠재성을 가진 많은 것, 현재 사실로 있는 것보다 미래에 가능한 서열에 있는 많은 것을 포함한다.
115:2.2 (1261.2) 가치는 우주 실체에서 독특한 요소이다. 무한하고 신성한 어떤 것의 가치가 도대체 어떻게 늘어날 수 있는가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무한한 신의 관계에서도, 의미 있는 것은 늘어나지는 않더라도 수정될 수 있음을 발견한다. 체험적 우주에게는 실체 의미를 더 많이 이해함으로 신성한 가치조차도 실재하는 물건으로서 늘어난다.
115:2.3 (1261.3) 모든 체험 수준에서, 우주를 창조하고 진화시키는 계획 전체가 잠재하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바꾸는 문제인 듯하다. 이 변화는 공간 잠재력, 지성 잠재력, 영 잠재력의 분야와 똑같이 상관이 있다.
115:2.4 (1261.4) 여러 우주에서 잠재하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겉에 나타나는 그 방법은 수준마다 다르며, 유한자의 경우에는 체험적 진화요, 초한자의 경우에는 체험으로 궁극에 이르는 것이다. 실존적 무한은 정말로 만물을 포함하는 데 제한이 없고, 만물을 포함하는 바로 이 성질은 어쩔 수 없이, 진화로 유한한 체험을 겪는 가능성까지 포함한다. 그러한 체험적 성장 가능성은, 최상위에 부딪치고 또 그분 안에서 삼극일치 관계를 통해서 하나의 우주 사실이 된다.
115:3.1 (1261.5) 절대적 우주의 개념에는 한계가 없다. 이 근원적 실체의 범위와 성질이 어떻다고 정의하는 것은 무한에 조건을 다는 것이요, 영원이라는 순수 개념을 묽게 만드는 것이다. 무한ㆍ영원한 것, 영원ㆍ무한한 것의 개념은 범위에 제한이 없고 사실로 절대적이다. 유란시아의 과거, 현재, 또는 미래에, 무한의 실체나 실체의 무한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용어가 하나도 없다. 사람은 무한한 우주에 있는 유한한 인간이요, 한없고 가없고 결코 시작이 없고 결코 끝이 없는 존재에 대하여 일그러진 그림자와 묽어진 개념으로 만족해야 하며, 이를 이해하는 것은 정말로 사람의 능력을 지나친다.
115:3.2 (1261.6) 사람은 한 절대자라는 실체의 통일성을 먼저 깨뜨리려고 시도하지 않고서, 결코 절대자의 개념을 파악하기를 바랄 수 없다. 지성은 모든 다채로운 것을 통일하고 있지만, 바로 그러한 다양성이 없는 가운데서, 지성은 이해하는 개념들을 형성하려고 애쓸 아무런 근거를 발견하지 못한다.
115:3.3 (1261.7) 무한의 원초적 정지(靜止) 상태는 인간이 이해하려고 애쓰기 전에 분할되기를 요구한다. 무한에는 통일성이 있고, 이것은 이 여러 논문에서 스스로 계신 이로서―인간의 머리로 생각하는 최초의 가설로서―표현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이 통일이 이원(二元)과 삼자일치와 다양성이 되면서 그래도 조건 없이 통일체로 남아 있는지 인간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이 여럿으로 성격이 되는 것과 나란히, 사람이 멈추어서 갈라지지 않은 삼위일체 신을 생각해 볼 때, 비슷한 문제에 부닥친다.
115:3.4 (1262.1) 오로지 사람이 무한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 개념을 한 낱말로 표현하게 된다. 무한은 한편으로 통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끝이나 한계가 없는 다양성이다. 유한한 지능들이 지켜보는 무한은, 인간의 철학과 유한한 형이상학에서 최대의 역설(逆說)이다. 사람의 영적 성품은 예배를 체험할 때 위로 무한한 아버지께 손을 뻗지만, 사람의 지적 이해 능력은 최상 존재라는 최대 개념으로 인하여 소모되어 버린다. 최상위를 지나서, 개념은 갈수록 더 이름이요, 개념이 실체의 참 명칭이 되는 일이 더욱 적어진다. 갈수록 더 개념들은 유한을 초월하는 것을 향하여 사람이 유한하게 이해하는 예측이 된다.
115:3.5 (1262.2) 절대 수준에 관한 하나의 기본 개념은 세 단계의 가정을 포함한다:
115:3.6 (1262.3) 1. 최초자. 제한이 없는 첫째 근원 중심 개념, 스스로 계신 이의 근원의 명시. 거기서부터 모든 실체가 기원을 가진다.
115:3.7 (1262.4) 2. 실재자. 사실인 세 절대자, 곧 둘째 근원 중심, 셋째 근원 중심, 파라다이스 근원 중심을 모은 집단. 영원한 아들, 무한한 영, 파라다이스 섬의 삼극일치는 첫째 근원 중심의 독창성이 실제로 계시된 것이다.
115:3.8 (1262.5) 3. 잠재자. 잠재성의 세 절대자, 즉 신 절대자, 무제한 절대자, 우주 절대자의 연합. 이 실존적 잠재성의 삼극일치는 첫째 근원 중심의 최초인 성질의 잠재적 계시이다.
115:3.9 (1262.6) 최초자ㆍ실재자ㆍ잠재자의 상호 교제는 무한 속에서 긴장을 일으키며, 이것은 우주가 성장하는 모든 가능성을 낳는다. 그리고 성장은 칠중자ㆍ최상위ㆍ궁극위의 성질이다.
115:3.10 (1262.7) 신 절대자, 우주 절대자, 무제한 절대자가 교제할 때 잠재성은 절대적이며, 한편 사실성이 태어난다. 둘째 및 셋째 근원 중심과 파라다이스 근원 중심이 교제할 때 사실성은 절대적이고, 한편 잠재성이 태어난다. 첫째 근원 중심의 최초인 성질에 사실성이나 잠재성이 존재하는지 태어나는지 우리는 말할 수 없다―아버지는 계신다.
115:3.11 (1262.8) 시간 관점에서 볼 때, 실재자는 이미 있었고 지금 있는 무엇이요, 잠재자는 생겨나고 있고 앞으로 있을 무엇이요, 최초자는 지금 있는 무엇이다.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최초자ㆍ실재자ㆍ잠재자의 차이는 이처럼 명백하지 않다. 이 삼자일치의 성질은 파라다이스의 영원 수준에서 그다지 뚜렷하지 않다. 영원 속에 만물이 있다―다만 모두가 시공에서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115:3.12 (1262.9) 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사실성은 알맹이요 잠재성은 능력이다. 사실성은 한가운데 존재하며, 거기서부터 가장자리의 무한으로 확대된다. 잠재성은 무한의 가장자리로부터 안으로 들어오며, 만물의 중심에서 만난다. 최초성은 잠재하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실체를 변형시키고, 존재하는 실재물을 잠재하게 만드는 주기의 이중 운동을 먼저 일으키고, 다음에 이를 균형시키는 무엇이다.
115:3.13 (1262.10) 잠재성의 세 절대자는 우주에서 순전히 영원한 수준에서 작용하고, 따라서 절대 이하 수준에서는 결코 그 자격으로 활동하지 않는다. 실체의 내려가는 수준에서 잠재성의 삼극일치는 궁극위와 함께, 그리고 최상위한테 나타난다. 잠재하는 것은 어떤 절대 이하 수준에서, 한 부분에 관하여 시간에 맞추어 현실이 되는 데 실패할지 모르지만, 총합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뜻이 궁극에 이기며, 개인에 관해서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총합에 관해서는 변함없이 그렇다.
115:3.14 (1263.1) 우주에 존재하는 것들의 중심은 사실성의 삼극일치에 있다. 영이든 지성이든 에너지이든, 모두가 이 아들ㆍ영ㆍ파라다이스 연합에 집중한다. 영인 아들의 성격은 온 우주에 두루, 모든 성격자의 원본이다. 파라다이스 섬의 내용은 원본이요, 하보나는 그 원본의 완전한 계시요, 초우주는 원본의 완전하게 되고 있는 계시이다. 합동 행위자는 동시에 우주 에너지를 지성으로 활성화한 것, 영 목적을 개념화한 것, 그리고 물질 수준의 수학적 원인 및 결과를 영적 수준에서 의도하는 목적 및 동기와 통합하는 것이다. 유한한 우주에서, 그 우주에 대하여, 아들ㆍ영ㆍ파라다이스는 궁극위가 최상위 안에서 조건이 주어지고 제한을 받는 대로, 궁극위 안에서, 또 궁극위에 대하여 활동한다.
115:3.15 (1263.2)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면서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사실성(신)이다. 사람이 그 탐구에서 진화시키는 것은 (인간이 신답게 되는) 잠재성이다. 실재하는 사람, 잠재하는 사람, 그리고 영원한 사람이 함께 존재하고 통합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최초자이다.
115:3.16 (1263.3) 우주들의 마지막 동태(動態)는 실체가 잠재성으로부터 사실성으로 연속하여 이동하는 것과 상관이 있다. 이론적으로 이 변형에 끝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러한 것은 불가능하니, 이는 잠재자와 실재자가 모두 최초자 (스스로 계신 이) 안에서 회로가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분 확인은 우주가 발전적 진보에 어떤 한계를 부과하는 것을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든다. 스스로 계신 이와 일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결코 진보의 끝을 찾을 수 없으니, 이는 스스로 계신 이의 잠재성이 절대로 사실로 있으며, 스스로 계신 이의 사실의 잠재성이 또한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사실로 있는 것은 이제까지 불가능한 잠재하는 것을 실현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 줄 것이다―인간의 결정은 무엇이나 인간의 체험에서 새로운 실체를 현실로 만들 뿐 아니라, 또한 인간이 성장하는 새로운 능력을 개발시킨다. 어떤 어린아이 속에도 어른이 살고, 하나님을 아는 성숙한 사람 속에는 상물질 진보자가 거한다.
115:3.17 (1263.4) 성장의 기초가―절대로 사실로 있는 것들이―제약되지 않으니까, 그리고 성장의 가능성―절대 잠재성―이 제한되지 않으니까, 성장이 정지된 상태는 총 우주에서 결코 나타날 수 없다. 실제의 관점에서 볼 때, 우주의 철학자들은 끝과 같은 것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115:3.18 (1263.5) 제한된 관점에서 볼 때, 정말로 많은 끝, 활동의 많은 종결이 있지만, 더 높은 우주 수준에서 더 넓은 관점으로 볼 때, 아무런 끝이 없다. 다만 발전의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이동이 있을 뿐이다. 총 우주의 주요한 장기(長期) 성향은 몇 우주 시대, 즉 하보나 시대, 초우주 시대, 바깥 우주 시대와 관계된다. 그러나 연속된 관계의 이 기본적 구분조차도, 끝없는 영원의 대로(大路)에서 상대적 경계표보다 더한 것일 수 없다.
115:3.19 (1263.6) 최상 존재의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 마침내 꿰뚫어보는 것은,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의 개념 수준을 지나서 놓여 있는 궁극 신의 초한(超限) 성질을 진보하는 사람에게 열어 보일 수 있을 따름이다.
115:4.1 (1263.7) 최상위 하나님의 기원에 관한 어떤 고찰도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는 삼위일체가 최초의 신이며, 한편 최상위는 파생된 신이기 때문이다. 최상위의 성장에 대한 어떠한 고찰도 여러 실존적 삼극일치를 고려해야 한다. 이것들이 (첫째 근원 중심과 연결하여) 모든 절대 사실성과 모든 무한 잠재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진화하는 최상위는 유한한 존재 수준 속에서, 그리고 그 수준에서, 잠재하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변질―변화―시키는, 절정에 이르고 몸소 의지(意志)하는 초점이다. 실재 삼극일치와 잠재 삼극일치는 여러 우주에서 성장하는 상호 관계의 총체를 포함한다.
115:4.2 (1264.1) 최상위의 근원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영원하고 실재하고 나눠지지 않은 신―에 있다. 첫째로 최상위는 한 영 성격자요, 이 영 성격자는 삼위일체로부터 파생된다. 그러나 둘째로, 최상위는 성장하는―진화로 성장하는―신이며, 이 성장은 사실성의 삼극일치와 잠재성의 삼극일치, 이 두 가지로부터 얻는다.
115:4.3 (1264.2) 무한한 삼극일치들이 유한 수준에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면, 멈추어서 그들의 바로 그 무한성은 자체 속에 유한한 것의 잠재성을 담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라. 무한은 가장 낮고 가장 제한된 유한 존재로부터, 가장 높고 제한 없이 절대적인 실체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포함한다.
115:4.4 (1264.3) 무한한 것이 유한한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이 무한한 것이 유한한 것에게 실제로 나타나는가 이해하는 것보다 어렵지 않다. 그러나 필사인에게 깃드는 생각 조절자는, 절대적 하나님조차도 (절대자로서) 의지를 가진 모든 우주 생물 가운데 가장 낮고 가장 작은 자와도 바로 접촉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는 영원한 증명 중에 하나이다.
115:4.5 (1264.4) 실재하는 것과 잠재하는 것을 집단으로 둘러싸는 삼극일치들은, 최상 존재와 관련하여, 유한 수준에서 명시된다. 그렇게 나타나는 기법은 직접과 간접, 두 가지이다. 삼극일치 관계들이 최상위 안에서 직접 반사되는 한, 직접이고, 그 관계들이 초한자의 궁극에 이른 수준을 통해서 얻어지는 한, 간접이다.
115:4.6 (1264.5) 최상의 실체는 유한한 실체의 총합이며, 바깥 공간의 무제한 잠재성과 만물의 중심에 제한되지 않은 사실성 사이에, 힘차게 성장하는 과정에 있다. 그러므로 유한한 영토는 파라다이스와 시간 세계에서 최상 창조 성격자들의 초한(超限) 대리자들의 협동을 통해서 사실이 된다. 세 명의 큰 잠재 절대자의 제한된 가능성을 성숙하게 만드는 행위는, 총 우주 건축가들과 그 초월 동료들의 초한 기능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말이 어떤 성숙된 점에 다다랐을 때, 최상 창조 성격자들은 진화하는 우주들을 사실의 존재로 만드는 과제, 오랜 세월에 걸치는 과제에 손대려고 파라다이스로부터 솟아나온다.
115:4.7 (1264.6) 최상위의 성장은 삼극일치들로부터, 최상위의 영 성격은 삼위일체로부터 얻는다. 그러나 전능자의 권능 특권은 칠중 신이 신으로서 성공하는 데 바탕을 두며, 한편 전능 최상위의 권능 특권을 최상위 하나님의 영 성격과 합치는 것은 합동 행위자가 베푸는 봉사의 덕택으로 일어나며, 그는 최상위의 지성을 이 진화하는 신 속에서 합치는 요소로서 수여했다.
115:5.1 (1264.7) 최상 존재의 성격 및 영 성품의 실체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존재와 활동에 절대로 의존한다. 최상위의 성장은 삼극일치 관계의 문제이지만, 최상위 하나님의 영 성격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 의존하고, 그로부터 파생된다. 삼위일체는 완전하고 무한한 안정의 절대 중심이자 근원으로서 항상 남아 있고, 그 둘레에서 최상위의 진화적 성장이 점진적으로 펼쳐진다.
115:5.2 (1265.1) 삼위일체의 기능은 최상위의 기능과 관계된다. 이는 삼위일체가 최상위의 기능 수준을 포함하여, 모든 (총) 수준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보나 시대가 초우주 시대에 길을 양보함에 따라서, 직접 창조자인 삼위일체의 탐지 가능한 활동은 파라다이스 신들의 자식들이 창조 행위를 하도록 길을 양보한다.
115:6.1 (1265.2) 사실성의 삼극일치는 하보나 이후 시대에 계속하여 직접 작용한다. 파라다이스의 인력은 물질 존재의 기본 단위들을 붙잡고, 영원한 아들의 영 인력은 영 존재의 근원적 가치에 대하여 직접 작용하며, 합동 행위자의 지성 인력은 지적 존재에서 중요한 의미 있는 모든 것을 틀림없이 붙잡는다.
115:6.2 (1265.3) 그러나 창조 활동의 각 단계가 지도(地圖)에 없는 공간을 통해서 바깥으로 진행함에 따라서, 그 활동은 중앙에 자리잡은 창조 세력과 신다운 성격자―절대적인 파라다이스 섬과 거기에 거주하는 무한한 신―들의 직접 행동으로부터, 갈수록 더 멀리 작용하고 존재한다. 따라서 우주가 존재하는 이 연속되는 여러 수준은 무한의 세 절대자의 잠재성 안에서 생기는 발전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115:6.3 (1265.4) 최상 존재는 영원한 아들이나 무한한 영에게서, 또는 파라다이스 섬의 비성격 실체들에서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우주에 봉사하는 가능성을 포함한다. 이 세 가지 기본 사실이 절대적인 것을 마땅히 존중하고서 이렇게 진술하지만, 최상위의 성장은 이 신 및 파라다이스의 사실성에 의존할 뿐 아니라, 또한 신 절대자, 우주 절대자, 무제한 절대자 안에서 생기는 발전과도 관련된다.
115:6.4 (1265.5) 최상위는 진화하는 여러 우주의 창조자들과 사람이 하나님다움에 도달함에 따라서 성장할 뿐 아니라, 이 유한한 신은 또한 생물과 창조자가 대우주의 유한 가능성을 통달하는 결과로서 성장을 체험한다. 최상위의 움직임은 두 가지이다: 파라다이스와 신을 향하여 집중하여, 그리고 잠재성의 절대자들의 한없음을 향하여 광범위하게 움직인다.
115:6.5 (1265.6) 현재 우주 시대에 이 두 가지 움직임은 대우주에서 내려오는 성격자와 올라가는 성격자들 속에 드러난다. 최상 창조 성격자들,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모든 신다운 동료는 외향적이고 확산되는 최상위의 움직임을 반영하며, 한편 일곱 초우주 출신의 하늘 가는 순례자들은 안을 향하고 집중되는 최상위의 경향을 가리킨다.
115:6.6 (1265.7) 유한한 신은 파라다이스와 거기에 있는 신들을 향하여 안쪽으로, 그리고 무한과 거기에 있는 절대자들을 향하여 바깥으로, 언제나 이중의 상호 관계를 찾는다. 창조 아들들 안에서 성격이 되고 동력 통제자들 안에서 동력을 얻는 파라다이스의 창조적 신이 힘차게 분출하는 것은 최상위가 잠재성의 영토로, 크게 바깥으로 용솟음치는 것을 의미하며, 한편 대우주에서 하늘 가는 인간의 끝없는 행렬은 파라다이스 신과 하나되는 방향으로 최상위가 힘차게 안에서 용솟음치는 것을 증거한다.
115:6.7 (1265.8)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에 미치는 효과를 지켜봄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움직임을 때때로 식별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대우주의 성격자와 원본들에게 생기는 그러한 진화적 반응을 지켜봄으로, 우주에서 우리는 최상위의 움직임과 경향을 탐지하기를 배운 지 오래 된다.
115:6.8 (1266.1) 우리는 확신하지 않아도, 파라다이스 신의 유한한 반영으로서, 최상위는 바깥 공간으로 영원히 진보하는 일로 바쁘다고 믿는다. 그러나 바깥 공간의 세 절대자의 잠재성이 제한된 것으로서, 이 최상 존재는 언제까지나 파라다이스와 일치되기를 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이중 운동은 현재 조직된 여러 우주에서 생기는 기본 활동의 대부분을 설명하는 듯하다.
115:7.1 (1266.2) 최상위 신 안에서 아버지인 스스로 계신 이는 무한한 지위, 영원한 존재, 절대적 성품에 본래 있는 한계로부터 비교적 완벽한 해방을 얻었다. 그러나 최상위 하나님은 오직 우주에서 활동할 때 체험적 제한에 지배됨으로 모든 실존적 한계로부터 풀려났다. 체험 능력을 얻으면서 유한한 하나님은 또한 체험할 필요성에 지배된다. 영원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면서 전능자는 시간의 장벽에 부딪친다. 최상위는 오로지 미완성 존재이자 불완전한 성품의 결과로, 즉 절대적이 아닌 존재가 되는 결과로, 성장과 발전을 겪을 수 있다.
115:7.2 (1266.3) 이 모두가 아버지의 계획에 따른 것임이 틀림없고, 그 계획은 유한한 진보를 노력에 근거를 두고, 인간의 성취는 참을성에, 인격의 개발은 믿음에 근거를 두었다. 이처럼 최상위의 체험적 진화를 예정함으로, 아버지는 유한한 인간이 우주에서 존재하게 하고, 체험적 진보를 통하여 언젠가 최상위의 신성에 이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115:7.3 (1266.4) 일곱 절대자의 무제한 가치를 제쳐놓고, 최상위, 그리고 궁극위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실체는 상대적이다. 최상위가 계신 사실은 파라다이스의 동력과 아들의 성격과 합동자의 행위에 근거를 두지만, 최상위의 성장은 신 절대자, 무제한 절대자, 우주 절대자와 관계된다. 그리고 통합하고 통일하는 이 신―최상위 하나님―은 파라다이스 아버지, 즉 첫째 근원 중심의 헤아릴 수 없는 성품을 무한히 통일함으로써, 대우주에 가로질러 던져진 유한한 그림자가 성격화된 것이다.
115:7.4 (1266.5) 삼극일치가 유한 수준에서 직접 작용하는 범위까지, 그 삼극일치는 최상위에 부딪치며, 최상위는 실재 절대자와 잠재 절대자의 성품에 부과한 유한한 제한이 신으로서 집중되고 우주에서 합계한 것이다.
115:7.5 (1266.6)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절대로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곱 으뜸 영은 삼위일체에게 불가피한 것인 듯하다. 최상위의 권능ㆍ지성ㆍ영ㆍ성격이 사실이 되는 것은 진화적 필연임이 틀림없다.
115:7.6 (1266.7) 최상위 하나님은 제한 없는 무한 속에서 불가피했던 듯 보이지 않지만, 모든 상대성 수준에서 불가피한 듯하다. 그는 진화의 체험을 집중하고 요약하고 포함하는 불가결한 분이며, 그의 신 성품 속에서 효과 있게 이 형태의 실체 파악 결과를 통일한다. 그리고 불가피한 결말의 출현, 즉 궁극위 하나님의 초월 체험과 유한을 초월한 명시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그가 이 모든 일을 하는 듯하다.
115:7.7 (1267.1) 근원ㆍ기능ㆍ운명, 즉 기원을 주는 삼위일체, 활동하는 우주, 그리고 직접 닥치는 운명인 궁극 삼자일체와 가지는 관계, 이 세 가지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최상 존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115:7.8 (1267.2) 합동 행위자의 지성은 성격을 가진 아들의 신다운 영적 성향과 파라다이스 원본의 변치 않는 에너지를 통합하고, 우주 절대자의 계심은 신 절대자의 활성화와 무제한 절대자의 반응을 통일한다. 이와 같이, 진화하는 체험을 더하는 과정을 통해서 최상위는 유한자와 초한자를 연결한다. 이 통일성은 처음 아버지이자 원인이요, 만물과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원본의 최초의 통일성이 탐지되지 않고서 작용함을 드러내는 것이 틀림없다.
116:0.1 (1268.1) 사람이 그의 창조자―직속 감독자―들이 신다우면서 또한 유한하다는 것, 시공의 하나님이 진화하며 절대적이 아닌 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이 세상이 불평등하다는 모순은 이제 더 깊은 종교적 역설(逆說)이 되지 않을 것이다. 종교적 믿음은 이제 더, 사회에서 혜택을 받지 못한 불행한 희생자에게 금욕주의적 단념을 권장하는 데만 쓰이면서, 운이 좋은 자의 사회적 자만을 조장하는 데 팔리지 않을 것이다.
116:0.2 (1268.2) 지극하게 완전한 하보나 구체들을 바라볼 때, 완전ㆍ무한하고 절대적인 창조자가 이를 만들었다고 믿는 것은 이치도 있고 논리적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이치와 논리는 어떤 정직한 존재라도, 유란시아의 소동과 불완전과 불공평함을 볼 때, 절대 이하이고 무한 이전이고 완전하지 않은 창조자들이 너희 세계를 만들고 관리하고 있었다는 결론을 어쩔 수 없이 내리게 할 것이다.
116:0.3 (1268.3) 체험적 성장은 사람과 창조자의 협동 관계―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뜻한다. 성장은 체험하는 신의 표시이다. 하보나는 성장하지 않았다. 하보나는 있으며, 언제나 그대로 있어 왔다. 하보나는 그 근원인 영구한 신들처럼 실존적이다. 그러나 성장은 대우주의 특징을 나타낸다.
116:0.4 (1268.4) 전능 최상위는 권능과 성격을 가진, 살아 있고 진화하는 신이다. 그의 현재 영토인 대우주는 또한 권능과 성격이 성장하는 영역이다. 그의 운명은 완전이지만, 현재 체험은 성장하는 요소와 불완전한 지위를 포함한다.
116:0.5 (1268.5) 최상 존재는, 1차적으로 중앙 우주에서 한 영 성격으로서, 2차적으로 대우주에서 전능한 하나님, 권능을 가진 성격자로서 활동한다. 총 우주에서 최상위의 3차 활동은 지금 숨어 있고, 오로지 알려지지 않은 잠재 지성으로서 존재한다. 최상 존재의 이 셋째 발전이 도대체 무엇을 드러낼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 더러는 초우주들이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될 때, 최상위가 전능하고 체험을 겪은 대우주의 군주로서 유버르사에서 활동하고, 한편 바깥 우주들에서 초월적 전능자로서 힘을 확대할 것이라 믿는다. 더러는 최상위의 셋째 단계는 셋째 수준의 신의 명시를 수반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우리 중에 아무도 정말로 알지 못한다.
116:1.1 (1268.6) 모든 진화하는 사람의 인격이 겪는 체험은 전능 최상위가 체험하는 한 단계이다. 초우주의 모든 물리적 구역을 총명하게 지배하는 것은 전능 최상위의 성장하는 통제력의 일부이다. 권능과 성격의 창조적 합성은 최상위 지성의 창조 욕구의 일부이며, 최상 존재 안에서 진화로 성장하는 통일성의 바로 그 본질이다.
116:1.2 (1269.1) 최상위의 권능과 성격 속성을 통합하는 것은 최상 지성의 작용이며, 전능 최상위의 진화가 완성되면―신다운 속성을 느슨하게 조정한 어떤 연합이 아니라―통일되고 성격을 가진 한 신을 낳을 것이다. 더 넓은 견지에서 볼 때, 최상위와 동떨어져서 어떤 전능자도 없고, 전능자와 따로 어떤 최상위도 없을 것이다.
116:1.3 (1269.2) 여러 진화 시대에 걸쳐서 내내, 최상위의 물리적 동력 잠재성은 일곱 최상 동력 지휘자 속에 투입되었고, 지성 잠재성은 일곱 으뜸 영 안에서 쉰다. 무한한 지성은 무한한 영의 기능이요, 우주 지성은 일곱 으뜸 영이 베푸는 봉사이다. 최상위 지성은 대우주가 조정되면서 사실화되는 과정에 있고, 칠중 신의 계시 및 달성과 기능적으로 연합되어 있다.
116:1.4 (1269.3) 시공의 지성, 즉 우주 지성은 일곱 초우주에서 다르게 작용하고 있지만, 최상 존재 안에서 어떤 알려지지 않은 연합 기법에 따라서 조정된다. 전능자의 전반적 대우주 통제는 순전히 물리적ㆍ영적 일은 아니다. 일곱 초우주에서 그 통제는 주로 물질적ㆍ영적이지만 또한 최상위의 지적ㆍ영적 현상도 있다.
116:1.5 (1269.4) 이 진화하는 신의 어떤 다른 모습보다도 우리는 최상위의 지성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적다. 물어볼 것 없이 그 지성은 대우주에 두루 활발하고, 총 우주에서 활동하는 잠재 운명을 가졌다고 믿어지며, 거기서 활동의 범위는 광대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안다: 체격의 성장은 끝에 다다를지 모르고, 영은 완전히 발육될지 모르지만, 지성은 결코 진보를 멈추지 않는다―지성은 끝없이 진보하는 체험적 기법이다. 최상위는 체험하는 신이며, 따라서 결코 지성의 달성을 끝마치지 못한다.
116:2.1 (1269.5) 전능자가 우주의 권능으로서 계심이 나타나는 것은, 진화하는 여러 초우주의 높은 창조자와 통제자들이 우주의 행동 무대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때에 일어난다.
116:2.2 (1269.6) 최상위 하나님은 그의 영과 성격 속성을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로부터 얻지만, 창조 아들, 옛적부터 늘 계신 이, 으뜸 영들의 행위 속에서 권능을 현실화하고 있으며, 그들의 집단 행위는 일곱 초우주에 대하여, 그리고 거기서 전능한 군주로서, 그의 성장하는 권능의 근원이다.
116:2.3 (1269.7) 시공에서 진화하는 인간은 제한이 없는 파라다이스 신을 이해할 수 없다. 영원과 무한은 시공의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신 실체를 의미한다. 신의 무한성과 절대적 통치권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안에 본래부터 있으며, 삼위일체는 필사 인간이 얼마큼 이해할 수 없는 한 실체이다. 우주 관계들을 파악하고 신성의 의미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시공의 인간은 기원ㆍ관계ㆍ운명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파라다이스 신은 파라다이스 바깥에서 일어나는 신성(神性)의 성격화를 묽게 만들고 달리 제한하며, 이처럼 최상 창조자들과 그 동료들이 존재하게 만든다. 이들은 늘 생명의 빛을, 여러 진화 세계에서 수여 아들들이 땅에서 인생을 살면서 그 빛의 가장 멀고 아름다운 표현을 찾을 때까지, 그 파라다이스 근원으로부터, 멀리멀리 가지고 간다.
116:2.4 (1270.1) 이것이 칠중 신의 기원이며, 필사 인간은 다음 순서로 이들의 연속된 수준과 마주친다:
116:2.5 (1270.2) 1. 창조 아들 (그리고 창조 영).
116:2.12 (1270.9) 처음 세 수준은 최상 창조자들이다. 마지막 세 수준은 파라다이스 신들이다. 최상위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체험적 영 성격이 된 것으로서, 파라다이스 신들의 자손인 창조자들의 초점, 진화적으로 전능한 권능의 체험적 초점으로서, 늘 사이에 낀다. 최상 존재는 일곱 초우주에 대하여, 그리고 현재 우주 시대에, 신이 최대로 계시된 것이다.
116:2.13 (1270.10) 필사자가 논리를 따지는 기법으로, 칠중 신의 처음 세 수준의 집단 행동을 체험으로 다시 통일하는 것은 파라다이스 신 수준과 대등하게 될 것이라 추론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파라다이스 신은 실존적 신이다. 최상 창조자들은 그들의 권능과 성격이 신답게 통일된 가운데 체험하는 신의 새로운 권능 잠재성을 구성하고 표현한다. 그리고 체험적 기원을 가진 이 권능 잠재성은,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체험하는 신―최상 존재―와 불가피하게, 달아날 수 없이 통합됨을 발견한다.
116:2.14 (1270.11) 최상위 하나님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아니며, 초우주 창조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모두도 아니며, 그들의 기능적 활동은 그의 진화하는 전능한 권능을 실제로 통합한다. 최상위 하나님은 삼위일체에서 기원을 가지지만, 오직 칠중 신의 처음 세 수준의 조정된 기능을 통해서, 권능을 가진 성격자로서 진화하는 인간에게 표현된다. 영원 속에서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의 뜻에 따라서 합동 행위자가 번쩍 생긴 것 같이, 전능 최상위는 최상 창조 성격자들의 활동을 통해서 시공에서 사실화되고 있다. 칠중 신의 처음 세 수준에 있는 이 존재들은 전능 최상위의 권능의 바로 그 성질이요 근원이다. 따라서 그들은 늘 그의 행정 행위를 따라가고 유지해야 한다.
116:3.1 (1270.12) 파라다이스 신들은 대우주에서 두루, 그들의 인력(引力) 회로에서 직접 행동할 뿐 아니라, 또한 여러 대리자와 다른 명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활동한다:
116:3.2 (1270.13) 1. 셋째 근원 중심의 지성 집중. 에너지와 영의 유한한 영토는 합동 행위자 지성의 계심으로 인하여, 글자 그대로 함께 유지된다. 지역 우주의 창조 영을 비롯하여 초우주의 거울 영들을 거쳐서, 대우주에 있는 으뜸 영들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참말이다. 다양한 이 지능 초점들로부터 방사되는 지성 회로들은 사람이 선택하는 우주 무대를 대표한다. 지성은 인간과 창조자들이 아주 쉽게 조종할 수 있는 신축성 있는 실체이다. 지성은 물질과 영을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이다. 셋째 근원 중심이 지성을 수여하는 것은 최상위 하나님의 영 몸과 진화하는 전능자가 체험으로 얻는 권능을 하나로 만든다.
116:3.3 (1271.1) 2. 둘째 근원 중심의 성격 계시. 합동 행위자의 지성 계심은 신의 영과 에너지 형태를 통일한다. 영원한 아들과 파라다이스 아들들이 자신 수여로 육신화하는 것은 한 창조자의 신다운 성품을 한 인간의 진화하는 성품과 통일하고, 실제로 융합한다. 최상위는 지음 받은 자이자 창조자이다. 그가 그렇다는 가능성은 영원한 아들, 그리고 그와 동급이거나 그에 부속된 아들들의 자신 수여 행위에서 드러난다. 수여 계급의 아들, 미가엘과 아보날은, 여러 진화 세계에서 실제로 사람의 생애를 살아 봄으로 그들의 것이 되어 버린, 진정한 인간 성품과 함께 그들의 신다운 성품을 실제로 확대한다.
116:3.4 (1271.2) 3. 첫째 근원 중심의 깃드는 계심. 지성은 영 원인을 에너지 반응과 통일한다. 자신을 수여하는 봉사는 신이 내려오는 것과 인간이 올라가는 것을 통일한다. 우주의 아버지의 깃드는 분신들은 진화하는 인간을 파라다이스에 계신 하나님과 실제로 통일한다. 수많은 계급의 성격자에게 깃드는 아버지의 그러한 계심은 허다하며, 필사 인간의 경우에 하나님의 이 신다운 분신은 생각 조절자이다. 신비의 훈계자와 인간의 관계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와 최상 존재의 관계와 같다. 조절자는 절대 기초이며, 절대 기초 위에서 자유 의지의 선택은 영원자 성품의 신다운 실체, 즉 사람의 경우에는 최후자 성품, 최상위 하나님의 경우에는 신의 성품이 진화하도록 만들 수 있다.
116:3.5 (1271.3) 파라다이스 계급의 아들이 생물에게 자신을 수여하는 것은, 이 신다운 아들들이 우주 생물의 실제 성품을 얻음으로 아들들의 성격을 강화하며, 한편 그러한 수여는 바로 그 생물에게 신성을 얻는 길, 파라다이스로 가는 길을 어김없이 드러낸다. 우주의 아버지가 조절자를 수여하는 것은 의지를 가진 사람의 인격을 아버지를 향하여 끌어당기게 만든다. 유한한 우주에서 이 모든 관계에 두루, 합동 행위자는 지성이 베푸는 봉사의 상존(常存)하는 근원이며, 그 덕택으로 이러한 활동이 일어난다.
116:3.6 (1271.4) 이것과 기타 많은 방법으로 파라다이스 신들은, 시간 세계의 진화가 공간의 회전하는 행성에서 펼쳐짐에 따라서, 모든 진화의 결과, 최상위 성격의 결과가 마침내 나타나는 동안 그 진화에 참여한다.
116:4.1 (1271.5) 최상위 총체의 통일성은 유한한 부분들의 점진적 통일에 의존한다. 최상위가 사실이 되는 것은 최상의 요인들―여러 우주의 창조자ㆍ생물ㆍ지능ㆍ에너지―가 바로 이렇게 통일됨으로부터 생기고, 또 그러한 통일을 낳는다.
116:4.2 (1272.1) 최상위의 통치권이 시간이 걸려 발전을 거치고 있는 시대에는, 최상위의 전능한 권능은 칠중 신이 신(神)으로서 하는 행위에 의존하고, 한편 최상 존재와 합동 행위자 및 그의 1차 성격자인 일곱 으뜸 영 사이에, 특별히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 무한한 영은 합동 행위자로서 진화하는 신의 불완전함을 보충하며, 최상위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활동한다. 이 밀접한 관계는 어느 정도 모든 으뜸 영이, 그러나 특히 으뜸 영 7번이 함께 가지며, 그는 최상위를 대신하여 말씀한다. 이 으뜸 영은 최상위를 안다―그와 친히 접촉을 가진다.
116:4.3 (1272.2) 초우주 창조 계획을 예측하면서 일찍부터, 으뜸 영들은 거울 영 49명을 공동으로 창조하는 일에 조상인 삼위일체와 함께 하였고, 동시에 최상 존재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및 파라다이스 신의 창조하는 자식들의 통합된 행동을 완성하는 자로서, 창조하는 일에 활동했다. 위엄자가 나타나서, 그 뒤로 늘 최상 지성의 우주 계심을 집중하였고, 한편 으뜸 영들은 우주 지성이 널리 봉사하도록 근원 중심으로서 계속한다.
116:4.4 (1272.3) 그러나 으뜸 영들은 거울 영들을 계속 감독한다. 일곱째 으뜸 영은 (중앙 우주로부터 오르본톤을 전반적으로 감독하는 작업에서) 유버르사에 자리잡은 일곱 거울 영과 친히 접촉한다 (그리고 그들을 전반적으로 통제한다). 초우주 사이 및 초우주 내부의 통제 및 행정에서, 그는 각 초우주 서울에 자리잡은 자기 종류의 거울 영들과 거울 작용으로 접촉을 가진다.
116:4.5 (1272.4) 이 으뜸 영들은 최상위의 통치권을 지지하고 확대할 뿐 아니라, 다음에 그들은 최상위의 창조 목적에 영향을 받는다. 대체로, 으뜸 영들이 집단으로 창조한 것들은 준(準)물질 계급이며 (동력 지휘자와 기타), 한편 개별로 창조하는 것들은 영적 계급이다 (상천사와 기타). 그러나 으뜸 영들이 최상 존재의 뜻과 목적에 반응하여, 집단으로 일곱 회로 영을 낳았을 때, 이 창조 행위에서 나온 자식은 물질이거나 준물질이 아니라, 영적 자식임을 살펴야 한다.
116:4.6 (1272.5) 그리고 여러 초우주의 으뜸 영들의 경우와 같이, 이 초월 우주들의 삼자일치 통치자―옛적부터 늘 계신 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시공에서 삼위일체의 응보와 판단이 이렇게 성격화된 것들은 최상위의 전능한 권능을 동원하기 위한, 현장의 지레 받침이며, 이것은 시간과 공간의 영토에서 삼위일체 통치권의 진화에 일곱 초점으로서 쓰인다. 파라다이스와 진화하는 세계들의 중간에 있는 유리한 위치로부터,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이 군주들은 양쪽을 보고, 양쪽을 알며, 양쪽을 조정한다.
116:4.7 (1272.6) 그러나 지역 우주는 진짜 실험실이요, 그 속에서 지성의 실험, 은하계 모험, 신성의 전개(展開), 인격의 진보가 해결되어 나가고, 우주에서 합계했을 때 이것들은 체험 속에서, 그리고 체험으로, 최상위가 신의 진화를 성취하는 그 실제 기초를 이룬다.
116:4.8 (1272.7) 지역 우주에서는 창조자도 진화한다: 합동 행위자의 계심은 하나의 살아 있는 권능의 초점으로부터 한 우주 어머니 영의 신다운 성격의 지위로 진화한다. 창조 아들은 실존적 파라다이스 신의 성품으로부터 최상 통치권을 얻는 체험적 성품에 이르기까지 진화한다. 지역 우주는 참된 진화의 출발점이요, 예정된 바와 같이, 스스로 공동 창조자가 되는 자유 의지 선택을 부여받은, 진정한 불완전 인격자들이 태어나는 장소이다.
116:4.9 (1273.1) 진화 세계에 자신을 수여하는 심판 아들들은 물질적 인간 성품의 가장 높은 영적 가치와 체험적으로 통일하면서 궁극에 파라다이스 신을 표현하는 성품을 얻는다. 이 수여와 기타 수여를 통해서, 미가엘 창조자들은 마찬가지로 그들의 실제 지역 우주 자녀들의 성품과 우주 관점을 얻는다. 그러한 주 창조 아들들은 최상 이하 체험의 완수에 접근한다. 그들의 지역 우주 통치권이 관련된 창조 영을 포함할 만큼 커질 때, 그것은 진화하는 대우주의 현재 잠재성 안에서 최상의 한계에 접근한다고 말해도 좋다.
116:4.10 (1273.2)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내는 새 길을 수여 아들들이 드러낼 때, 그들은 신에 이르는 이 길을 창조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들은 최상위의 계심을 거쳐서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몸까지 인도하는, 진보하는 영원한 대로를 비춘다.
116:4.11 (1273.3) 지역 우주는,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성격자, 따라서 우주에서 가장 가파르게 영적 상승을 체험할 수 있고, 자신들을 공동으로 창조하는 데 최대한으로 체험으로 참여할 수 있는 인격자들의 출발점이다. 마찬가지로, 바로 이 지역 우주들은 내려가는 성격자들에게 가능한 가장 깊은 체험을 마련해 주며, 이들은 이 방법으로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것이 하나의 진화하는 인간에게 의미하는 것과 똑같이, 그들에게 의미 있는 무엇을 성취한다.
116:4.12 (1273.4) 칠중 신이 마침내 최상위로 현실화하는 동안에, 필사 인간은 이 신의 집합이 완전히 활동하는 데 필요한 듯하다. 최상위의 전능한 힘을 진화시키는 데 똑같이 필요한, 많은 다른 계급의 우주 성격자들이 있지만, 여기에 기술한 것은 인간의 훈육을 위하여 제시되며, 따라서 필사 인간에게 관계된 칠중 신의 진화에 작용하는 요소에만 대체로 국한된다.
116:5.1 (1273.5) 너희는 칠중 신과 최상 존재의 관계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고, 칠중자가 대우주의 창조자 뿐 아니라 통제자들도 포함한다는 것을 이제 헤아려야 한다. 대우주의 이 일곱 가지 통제자는 다음을 포함한다:
116:5.4 (1273.8) 3. 최상 동력 지휘자.
116:5.9 (1273.13) 이 일곱 집단은 기능적으로 칠중 신과 분리할 수 없고, 이 신 연합에서 물리적 통제 수준을 구성한다.
116:5.10 (1273.14) 일곱 으뜸 영이 뭉쳐서 집단으로 창조하는 첫 행위에 들어갔을 때, 초우주 의미에서 에너지와 영이 두 갈래로 (영원한 아들과 파라다이스 섬이 공동으로 존재함으로부터 파생된다) 갈라지는 것을 상징하였다. 이 사건은 일곱 최상 동력 지휘자의 출현을 입증한다. 그와 동시에 동력 지휘자가 감독하는 물리적 활동과 반대로 으뜸 영들의 영적 회로가 구별되었고, 물질과 영을 조정하는 새 요소로서, 즉시 우주 지성이 나타났다.
116:5.11 (1274.1) 전능한 최상위는 대우주의 물리적 동력을 전반적으로 통제하는 자로서 진화하고 있다. 현재 우주 시대에 이 물리적 동력의 잠재성은 일곱 최상 동력 지휘자에 집중되는 듯하며, 이들은 동력 중심들의 고정된 위치를 통해서, 그리고 물리 통제자들의 움직이는 계심을 통해서 작용한다.
116:5.12 (1274.2) 시간 지역의 우주들은 완전하지 않다. 그것이 그 우주들의 운명이다. 완전을 위한 싸움은 지적ㆍ영적 수준 뿐 아니라, 또한 물리적 수준, 에너지와 질량에도 관계된다. 일곱 초우주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는 것은 그 우주들이 물리적 안정에 도달했음을 미리 가정한다. 물질의 균형을 마침내 이루는 것은 전능자의 물리적 통제가 진화를 마쳤음을 뜻한다고 추측된다.
116:5.13 (1274.3) 우주를 짓는 초기에는 파라다이스 창조자들도 1차적으로 물질의 균형에 관심을 가진다. 한 지역 우주의 형태는 동력 중심들이 활동한 결과일 뿐 아니라, 또한 창조 영의 공간 계심 때문에 모습을 갖춘다. 지역 우주를 짓는 초기 시대를 통하여 내내, 창조 아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물질 통제 속성을 나타내며, 지역 우주가 대체적 균형을 얻을 때까지 그의 서울 행성을 떠나지 않는다.
116:5.14 (1274.4) 모든 것을 고려하건대, 모든 에너지는 지성에 반응하며, 물리 통제자들은 지성 하나님의 자식이요, 이 하나님은 파라다이스 원본을 활성화시키는 분이다. 동력 지휘자들의 지능은 물질을 통제하는 과제에 쉴 사이 없이 전념한다. 에너지의 관계와 질량의 운동을 물리적으로 지배하려는 투쟁은, 그들의 영구한 활동 분야인 에너지와 질량에 대하여 유한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 결코 그치지 않는다.
116:5.15 (1274.5) 시공에서 영의 투쟁은 (인격을 가진) 지성이 중재함으로 영이 물질을 지배하는 진화와 상관이 있다. 우주들의 물리적 (비인격) 진화는 우주 에너지를 영의 전반적 통제 밑에서 지성의 균형 개념과 조화시키는 것과 상관이 있다. 대우주 전체의 총 진화는 에너지를 통제하는 지성, 그리고 영이 조정한 지능, 이 두 가지를 성격이 통일하는 문제이며, 그것은 최상위의 전능한 동력이 완전히 나타남으로 드러날 것이다.
116:5.16 (1274.6) 동태적 균형 상태에 이르는 어려움은 성장하는 우주의 사실에 본래부터 있다. 물리적 창조의 확립된 회로들은 새 에너지와 새 질량이 나타남으로 계속 위협을 받는다. 성장하는 우주는 안정되지 않은 우주이다. 따라서 세월이 충분히 지나서 일곱 초우주가 물질적으로 완성된 것을 입증할 때까지, 전체 우주의 어느 부분도 진정한 안정을 찾을 수 없다.
116:5.17 (1274.7)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우주에서는 기대하지 않은 큰 중요성을 가진 아무런 물리적 사건이 생기지 않는다. 물질 창조에 대하여 비교적 완전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안정된 우주와 진화하는 우주들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아직도 우주 동력 지휘자들의 솜씨에 계속 도전한다. 그러나 대우주가 드디어 진화적 표현의 절정에 가까워짐에 따라서, 이 문제들은 새로운 창조 활동이 줄어드는 것과 함께 차츰 사라질 것이다.
116:6.1 (1275.1) 진화하는 초우주에서는, 성격자의 경우를 제외하고 에너지와 물질이 지배하며, 성격자 안에서는 지성의 중재를 통해서 영이 주도권을 쥐려고 싸운다. 진화하는 우주들의 목표는 지성으로 에너지와 물질을 정복하고 지성과 영을 조정하는 것이며, 창조적이고 통일하는 성격의 덕택으로 이 모두가 일어난다. 따라서 성격과 가지는 관계에서 물리적 체제들은 종속되어 있고, 지성 체계들은 서로 나란히 있으며, 영 체계들은 지휘하게 된다.
116:6.2 (1275.2) 이 권능과 성격의 연합은 최상위 안에서, 그리고 최상위로서, 신 수준에서 표현된다. 그러나 영의 지배가 실제로 진화하는 것은 대우주의 창조자 및 생물들의 자유 의지 행위에 바탕을 둔 성장이다.
116:6.3 (1275.3) 절대 수준에서 에너지와 영은 하나이다. 그러나 그러한 절대 수준에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차이가 나타나고, 에너지와 영이 파라다이스로부터 공간을 향하여 움직임에 따라서, 그 사이의 간격은 지역 우주에서 어지간히 갈라질 때까지 벌어진다. 에너지와 영은 이제 더 동일하지 않고 비슷하지도 않으며, 지성이 그것들을 서로 연결지으려고 간섭해야 한다.
116:6.4 (1275.4) 통제 성격자들의 행위로 에너지의 방향이 정해질 수 있다는 것은 에너지가 지성의 행위에 민감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바로 고삐를 쥐는 이 개체들의 행위를 통하여 질량이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은, 질서를 낳는 지성의 계심에 질량이 민감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의지를 가진 성격 안에서 영 자체가 에너지와 물질을 통달하기 위하여 지성을 통해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유한 창조가 통일될 가능성이 있음을 드러낸다.
116:6.5 (1275.5) 온 우주에 두루, 모든 물력과 성격자는 서로 의존한다. 창조 아들과 창조 영들은 지역 우주를 조직하는 데 동력 중심과 물리 통제자들의 협동하는 기능에 의존한다. 최상 동력 지휘자들은 으뜸 영들의 전반적 통제가 없이 불완전하다. 한 인간 존재에서 육체 생명의 작용은 (성격을 가진) 지성의 지시에 어느 정도 민감하다. 바로 이 지성은 다음에, 의도하는 영의 인도함에 지배될 수도 있고, 그러한 진화적 발전의 결과는 최상위의 새로운 자식을 생산하는 것이요, 이는 몇 종류의 우주 실체를 새로이 성격으로 통일하는 것이다.
116:6.6 (1275.6) 그리고 부분의 경우와 같이, 전체의 경우에도 그렇다. 완성된 신이 되고 삼위일체와 연합하는 운명을 얻기 위해서, 최상위의 영 몸은 전능자의 진화적 힘을 필요로 한다. 시공의 성격자들이 그 노력을 기울이지만, 이 노력이 절정에 이르고 성취되는 것은 전능한 최상위의 행위이다. 이처럼 전체의 성장은 부분들의 집합된 성장의 합계이지만, 마찬가지로 마땅히 부분들의 진화는 전체가 의도한 성장이 분할되어 비친 것이다.
116:6.7 (1275.7) 파라다이스에서, 일력(一力)과 영은 하나와 같다―이름이 아니고는 구별할 수 없다. 하보나에서 물질과 영은 구별할 수 있게 다르지만, 동시에 본질적으로 조화되어 있다. 그러나 일곱 초우주에서 큰 차이가 있다. 우주 에너지와 신다운 영 사이에 넓은 간격이 있다. 따라서 물리적 형태를 영적 목적과 조화시키고 궁극에 통일하는 데, 지성이 활동할 더 큰 체험 잠재성이 있다. 시간 지역에서 진화하는 여러 공간 우주에는 신성이 더 묽어지고, 풀어야 할 어려운 문제들이 더 있고 이를 해결하는 체험을 얻을 기회가 더 크다. 이 초우주 상황 전체는 진화로 존재하는 더욱 큰 경기장이 생기게 하며, 그 속에서 우주적 체험의 가능성은 인간과 창조자에게―최상의 신에게도―똑같이 소용된다.
116:6.8 (1276.1) 영의 지배는 절대 수준에서 실존적이지만, 유한 수준에서, 그리고 일곱 초우주에서 진화하는 체험이 된다. 필사 인간으로부터 최상 존재에 이르기까지, 이 체험을 모두가 함께 한다. 성취하는 일에 모두가 애쓰고, 몸소 애쓴다. 모두가 운명에 참여하고, 몸소 참여한다.
116:7.1 (1276.2) 대우주는 물리적으로 웅장하고 영적으로 숭고하고 지적으로 위대한 물질 창조일 뿐 아니라, 또한 훌륭하고 민감한 살아 있는 유기체이다. 활기에 넘치는 우주에서 광대한 창조의 기계 작용에 두루, 맥박치는 실제 생명이 있다. 우주의 물리적 실체는 파악할 수 있는 전능한 최상위의 실체를 상징한다. 신경(神經) 감각 경로의 망이 인간의 몸을 통과하는 것처럼, 지성 회로들이 물질적이고 살아 있는 이 유기체에 침투한다. 이 물질 우주가 에너지 길로 채워져 있고, 동화(同化)할 수 있는 영양 에너지 산물을 순환하여 분산함으로 인간의 몸이 영양과 에너지를 받는 것처럼, 에너지 길은 효과 있게 물질 창조를 움직이게 만든다. 광대한 우주는, 인체의 작용에서 섬세한 화학적 통제 체계에 견줄까 싶은 중심, 훌륭하게 전반적으로 통제하는 조정 중심들이 없지는 않다. 동력 중심의 체격에 관하여 얼마큼 알기만 한다면, 우리는 유추(類推)함으로 물리적 우주에 관하여 훨씬 더 많이 일러줄 수 있다.
116:7.2 (1276.3) 필사자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태양 에너지에 기대는 것과 비슷하게, 마찬가지로 대우주는 물질의 활동과 공간의 우주 운동을 유지하려고 아래 파라다이스로부터 방사되는 어김없는 에너지에 의존한다.
116:7.3 (1276.4) 신분과 인격을 스스로 의식하도록 지성이 필사자에게 부여되었다. 그리고 지성은―최상 지성조차도―유한자의 총체 위에 수여되었고, 이렇게 함으로 우주에서 솟아나는 이 인격의 영은 에너지와 물질을 통달하려고 늘 애쓴다.
116:7.4 (1276.5) 대우주가 영원한 아들의 널리 퍼진 영 인력의 붙잡는 힘에 반응하는 것 같이, 필사 인간은 영의 안내에 민감하며, 이 힘은 시공의 유한한 우주에서 모든 창조의 영원한 영적 가치가 보편적 초물질로 일체가 된 것이다.
116:7.5 (1276.6) 인간은 파괴할 수 없는 총 우주 실체와 영구하게 자아를 동일시하는 능력―깃드는 생각 조절자와 융합하는 능력―이 있다. 마찬가지로, 최상위는 최초의 신, 곧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절대로 안정된 것에 영구하게 의존한다.
116:7.6 (1276.7) 파라다이스의 완전함에 이르려는 사람의 욕구, 하나님께 도달하려는 사람의 투쟁은 살아 있는 우주에서 신성의 진정한 긴장을 일으키며, 이 긴장은 오직 불사의 혼을 개발함으로 풀릴 수 있다. 이것이 단일 필사 인간의 체험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대우주에서 모든 사람과 모든 창조자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도달하고 신다운 완전함을 얻으려고 애쓸 때, 깊은 우주의 긴장이 쌓이며, 이것은 오로지 전능한 권능을 모든 사람의 진화하는 하나님, 즉 최상 존재의 영 성격의 전능한 힘과 숭고하게 통합하는 데서 해결을 찾을 수 있다.
117:0.1 (1278.1) 우리가 어떤 우주 정거장에서 존재하더라도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범위까지, 그만큼 최상위의 전능한 잠재성은 한 걸음 더 사실에 가까워진다. 하나님의 뜻은 첫째 근원 중심의 목적이요, 이는 세 절대자 안에서 잠재성이 되고 영원한 아들 속에서 성격이 되고, 무한한 영 안에서 우주 활동을 위하여 연결되고, 파라다이스의 영원한 원본에서 영원하게 된 바와 같다. 그리고 최상위 하나님은 하나님의 총 의지의 최대의 유한한 명시가 되고 있다.
117:0.2 (1278.2) 대우주에 사는 존재들이 모두 언제라도 하나님의 뜻을 충만히 행하는 일을 비교적 성취한다면, 그때 시공의 창조들이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될 것이다. 그때 최상위의 신 잠재성인 전능자는 최상위 하나님의 신다운 성격이 솟아나면서 사실이 된다.
117:0.3 (1278.3) 진화하는 지성이 우주 지성의 회로에 조율이 될 때, 진화하는 우주가 중앙 우주의 모습을 따라서 안정될 때, 진보하는 영이 으뜸 영들의 통합된 봉사와 접촉할 때, 하늘 가는 필사 성격자가 깃드는 조절자의 신성한 이끄심에 마침내 조율이 될 때, 이때 최상위의 사실성은 여러 우주에서 한 눈금만큼 더 현실이 된다. 이때 최상위의 신성은 우주에서 실현을 향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117:0.4 (1278.4) 대우주의 부분과 개인들은 최상위의 총 진화가 반영(反映)된 것으로서 진화하며, 한편 다음에 최상위는 모든 대우주의 진화를 통합한 누적 합계이다. 필사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둘은 서로 진화적ㆍ체험적으로 돕는 자이다.
117:1.1 (1278.5) 최상위는 물리적으로 조화된 아름다움이요, 지적 의미를 가진 진리요, 영적 가치를 가진 선(善)이다. 그는 참된 성공의 단 맛이요, 영구한 성취에서 얻는 기쁨이다. 그는 대우주의 대혼(大魂)이요, 유한한 우주의 의식(意識), 유한한 실체의 완성이요, 창조자와 인간의 체험이 성격화된 것이다. 모든 앞날의 영원을 통하여, 최상위 하나님은 신의 여러 삼자일체 관계에서 의지(意志)한 체험의 실체를 표현할 것이다.
117:1.2 (1278.6) 최상 창조자들의 몸을 입고서 신들이 파라다이스로부터 시간과 공간의 영토로 내려왔으니, 이는 거기서 파라다이스에 다다를 능력으로 아버지를 찾아서 그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인간을 창조하고 진화시키려는 것이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내려오는 창조자, 그리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올라가는 인간들로 이루어진 이 우주 행렬은 최상위가 신으로 진화함을 드러내며, 그분 안에서 내려오는 자와 올라가는 자 모두가 서로 이해하고, 영원히 보편적으로 형제임을 발견한다. 최상 존재는 이처럼 원인인 완전한 창조자의 체험과 완전하게 되는 인간의 반응 체험을 유한하게 통합한 것이 된다.
117:1.3 (1279.1) 대우주는 완벽한 통일 가능성을 담고 있고, 늘 이를 추구한다. 이것은 이러한 우주적 존재가 아무 제한 없이 통일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창조 행위와 권능이 내린 명령의 결과라는 사실로부터 생겨난다. 바로 이 삼자일체의 통일성은 최상위 안에서 유한한 우주에서 표현되며, 그의 실체는 우주들이 삼위일체와 동일시하는 최대 수준에 도달함에 따라서, 갈수록 더 분명해진다.
117:1.4 (1279.2) 창조자의 뜻과 인간의 뜻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이것들은 체험적으로 비슷하니, 이는 인간과 창조자가 우주의 완전을 이룩하는 데 함께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연결하여 일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 영원한 최후자를 함께 창조한다. 하나님은 아들들이 육신화될 때 인간으로서도 일할 수 있고, 이 아들들은 이렇게 함으로 인간이 되는 최고의 체험을 얻는다.
117:1.5 (1279.3) 최상 존재의 경우에, 창조자와 인간은 하나의 신 안에서 뭉치며, 그의 뜻은 하나의 신다운 성격을 표현한다. 네바돈의 주 아들의 최고 의지가 이제는 신과 인류의 뜻의 조합보다 더 큰 무엇인 것과 같이, 최상위의 이 뜻은 인간이나 창조자의 뜻보다 더 큰 무엇이다. 파라다이스의 완전함과 시공 체험의 연합은 실체의 신 수준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닌 가치를 낳는다.
117:1.6 (1279.4) 최상위의 진화하는 신다운 성품은 대우주에서 모든 생물과 모든 창조자의 비할 데 없는 체험을 충실히 나타내는 그림이 되고 있다. 최상위 안에서, 지은 자의 신분과 지음 받은 자의 신분이 한 몸이 된다. 모든 유한한 창조가 불완전의 사슬을 벗어나 완전과 해방을 찾아서 영원한 길을 추구하는 동안, 그들을 괴롭히는 다양한 문제의 해결에 따르는 변천에서 생긴 바로 그 체험으로 인하여 그들은 언제까지나 뭉쳐진다.
117:1.7 (1279.5)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은 영이 베푸는 봉사, 파라다이스의 웅장함, 아들의 자비, 그리고 최상위의 체험 안에서 서로 상관된다. 최상위 하나님은 진리요 아름다움이요 선이니, 이러한 신성 개념이 관념적 체험의 유한한 최대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신성의 이 삼자일치 품질의 영원한 근원은 유한 초월의 수준에 있지만, 한 인간은 그러한 근원을 초월 진리, 초월적 아름다움, 초월적 선으로만 겨우 파악할 수 있다.
117:1.8 (1279.6) 창조자 미가엘은 창조자로서 아버지가 지상의 자녀들에 대하여 품는 신의 사랑을 드러냈다. 이 신의 사랑을 발견하고 또 받았으니까, 사람들은 육체를 입은 동포에게 이 사랑을 드러내는 포부를 품을 수 있다. 인간의 그러한 애정은 최상위의 사랑을 참되게 반영하는 것이다.
117:1.9 (1279.7) 최상위는 대칭으로 포함하는 성질이 있다. 첫째 근원 중심은 위대한 세 절대자 안에서 잠재하며, 파라다이스에서, 아들 안 에서, 영 안에서 실재한다. 그러나 최상위는 실재하면서 잠재하며, 최상의 성격과 전능한 힘을 가진 존재요, 인간의 노력과 창조자의 목적에 똑같이 민감하고, 우주에 대하여 스스로 행동하고 우주의 총합에 대하여 스스로 반응하며, 동시에 최상의 창조자이자 최상의 생물이다. 최상위 신은 이처럼 유한자 전체의 총합을 표현한다.
117:2.1 (1280.1) 최상위는 시간 지역에 있는 하나님이다. 시간 지역에서 사람이 성장하는 비결은 그에게 속한다. 불완전한 현재를 정복하는 것, 완전하게 되어 가는 미래를 완성하는 것이 또한 그에게 속한다. 모든 유한한 성장의 마지막 열매는 힘, 즉 통일하고 창조하는 성격이 계시는 덕택으로, 지성을 통해서 영이 통제하는 힘이다. 이 모든 성장이 마침내 가져오는 결과는 최상 존재이다.
117:2.2 (1280.2) 필사 인간에게, 존재는 성장과 마찬가지이다. 더 큰 우주 의미에서도, 정말로 그러한 듯 보일 터인데, 영의 지도를 받는 존재는 체험적 성장―지위의 확대―를 초래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우주 시대에 인간 존재의 특징을 나타내는 지금의 성장은 최상위의 한 기능이라는 의견을 우리는 오랫동안 지녀왔다. 이 종류의 성장은 최상위가 성장하는 시대에 특이한 것이며, 최상위가 성장을 마침과 함께 종결되리라고 우리는 똑같이 주장한다.
117:2.3 (1280.3) 인간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들의 지위를 생각해 보아라. 그들은 현재 우주 시대에 태어나고 산다. 그들은 지성ㆍ영 재산과 함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체험을 겪고 그 기억을 지니지만, 하늘 가는 자처럼 자라지 않는다. 인간이 삼자일체로 낳은 이 아들들이 현재 우주 시대에 있지만, 정말로 그들은 다음 우주 시대―최상위의 성장이 끝난 뒤에 다가올 시대―의 출신이라고 우리는 믿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불완전하고, 따라서 성장하는 최상위의 현재 상태의 시점에서, 그들은 최상위 안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현재 우주 시대의 체험적 성장에 참여하지 않고, 다음 우주 시대를 위하여 예비로 남아 있다.
117:2.4 (1280.4) 내 자신의 계급, 막강한 사자들은 삼위일체의 품에 안겼으니까, 현재 우주 시대의 성장에 참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실로 삼위일체의 고정된 아들인 것처럼,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지위는 지난 우주 시대에 속한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의 지위는 삼위일체의 품에 안김으로 고정되었고, 체험은 이제 더, 궁극에 성장을 낳지 않는다.
117:2.5 (1280.5) 이것은 최후자나 최상위의 성장 과정에 참여하는 계급, 진화하고 체험하는 계급에 속하는 어떤 다른 자들에게는 참말이 아니다. 유란시아에서 지금 살며, 파라다이스에 이르고 최후자 지위를 얻는 큰 뜻을 품을 수도 있는 너희 필사자들은, 너희가 최상위 속에 있고, 그에게서 나왔고, 따라서 최상위가 성장하는 주기(週期)에 참여하기 때문에, 다만 그러한 운명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117:2.6 (1280.6) 언젠가 최상위의 성장이 끝날 것이다. 그의 지위는 (에너지와 영 의미에서) 완성될 것이다. 최상위의 진화가 이렇게 그칠 때 또한 최상위의 일부로서 인간의 진화가 끝나게 될 것이다. 어떤 종류의 성장이 바깥 공간 우주들의 특징을 나타낼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일곱 초우주가 진화하는 현재 우주 시대에 우리가 보아 온 어떤 것과도 매우 다른 무엇일 것이라 우리는 아주 확신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바깥 공간자들이 이렇게 최상위의 성장으로 혜택을 받지 못한 결핍을 메워 주는 것이 대우주에서 진화하는 시민들의 역할일 것이다.
117:2.7 (1280.7) 현재 우주 시대가 끝나고서 계실 최상 존재는 대우주에서 체험적 군주로서 활동할 것이다. 바깥 공간자―다음 우주 시대의 시민―들은 초우주 이후의 성장 잠재성을 가질 터이고, 이것은 전능한 최상위의 통치권을 미리 가정하는, 진화로 얻은 능력이며, 따라서 현재 우주 시대의 권능과 성격을 합성하는 데 인간이 참여하는 것을 막는다.
117:2.8 (1281.1) 이처럼 최상위의 불완전성은 미덕으로 여겨도 좋으니, 이는 그것이 현재 여러 우주에 있는 인간과 창조의 진화적 성장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비어 있는 것은 미덕이 있으니, 빈 것이 체험으로 채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117:2.9 (1281.2) 유한한 철학에서 가장 흥미를 자아내는 물음 중에서 하나는 이것이다: 최상 존재는 대우주의 진화에 반응하여 현실이 되는가, 아니면 최상위가 차츰 현실이 되는 데 반응하여 이 유한한 우주가 점진적으로 진화하는가? 아니면 성장하려고 그들이 서로 의존하는 것, 그들이 진화에서 서로 돕는 자이고, 하나가 다른 하나의 성장을 일으키는 것이 가능한가? 다음에 대하여 우리는 확신한다. 높고 낮은 생물과 우주들은 최상위 안에서 진화하고 있고, 그들이 진화함에 따라서 이 우주 시대의 유한한 활동 전체의 통일된 합계가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최상 존재의 출현이요, 모든 성격자에게 최상위 하나님의 전능한 힘이 진화하는 것이다.
117:3.1 (1281.3) 최상 존재, 최상위 하나님, 전능한 최상위, 이렇게 여러 가지로 일컫는 우주 실체는 태어나는 단계에 있는 모든 유한 실체를 복잡하게 보편적으로 통합한 것이다. 영원한 에너지, 신다운 영, 우주 지성의 방대한 분화는 최상위의 진화에서 유한한 절정에 이르며, 그는 모든 유한한 성장의 총합이요, 유한하게 최대로 완성하는 신 수준에서 스스로 실현한 것이다.
117:3.2 (1281.4) 최상위는 공간에서 은하계의 전체 광경 속에 구체화되는 삼극일치들의 창조적 무한이 흐르는 신성한 경로이다. 그 광경을 배경으로 시간 지역에서 훌륭한 인격자의 드라마가 벌어지는데, 곧 지성의 중재를 통하여 영이 에너지와 물질을 정복하는 드라마이다.
117:3.3 (1281.5) 예수는 말했다: “나는 생명의 길이라,” 그래서 그는 자의식을 가지는 물질 수준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는 영적 수준까지 이르는 생명의 길이다. 예수가 자아로부터 하나님께 도달하기까지 올라가는 이 생명의 길인 것 같이, 최상위는 유한한 의식으로부터 의식을 초월하기까지, 아니 초한(超限) 통찰력까지도 달성하는 생명의 길이다.
117:3.4 (1281.6) 너희의 창조 아들은 실제로, 인간이 신에 이르는 그러한 생명의 경로일 수 있으니, 이는 그가 이 요수아 벤 요셉, 즉 사람의 아들의 참된 인간성으로부터 네바돈 미가엘, 즉 무한한 하나님의 아들의 파라다이스 신성에 이르기까지 우주에서 진보하는 이 길을 몸소 한껏 거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최상 존재는 유한한 한계를 초월하는 우주 접근법으로서 활동할 수 있다. 이는 그가 사람의 모든 진화, 진보, 영적 변화를 사실로 구현한 것이요, 몸소 요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파라다이스로부터 내려오는 성격자들의 대우주 체험조차도 최상 존재가 겪는 체험의 일부이며, 바로 이것은 시간 순례자의 하늘 가는 체험을 그가 총합한 것을 보완한다.
117:3.5 (1281.7) 필사 인간은 비유로 하나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진 것보다 더한 존재이다. 물리적 관점에서, 이 말은 도저히 참말이 아니지만, 어떤 우주 잠재성에 관하여 이것은 실제로 있는 사실이다. 온 우주에서 광대하게 더 큰 규모로 일어나는, 진화로 달성하는 바로 그 드라마와 비슷한 무엇이 인류에게 펼쳐지고 있다. 사람, 즉 의지를 가진 인격자는, 최상위의 유한한 잠재성이 있는 가운데, 비성격 개체인 조절자와 연락하여 창조성을 가지며, 그 결과로 한 불사의 혼이 자란다. 여러 우주에서 시공의 창조 성격자들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비성격 영과 연락하여 활동하며, 이렇게 함으로 신 실체의 새로운 동력 잠재성을 창조하게 된다.
117:3.6 (1282.1) 최상 존재는 신이요, 필사 인간은 지음받은 자이니까, 최상 존재와 똑같지는 않지만 사람의 진화는 어떤 면에서 최상 존재의 성장과 비슷하다. 사람은 자신이 내리는 결정이 얼마나 강하고 힘차고 끈질긴가에 따라서, 물질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을 향하여, 의식하면서 자란다. 사람은 또한 조절자가 영적 수준에서 상물질 혼의 수준으로 손을 뻗으려고 새로운 기법을 개발함에 따라서 자란다. 일단 혼이 생기면, 혼은 그 자체로서 저절로 자란다.
117:3.7 (1282.2) 이것은 최상 존재가 성장하는 방법과 얼마큼 비슷하다. 그의 통치권은 최상 창조 성격자들의 행위와 성취에서, 그리고 그로부터 성장한다. 그것은 대우주의 통치자인 그의 웅대한 권능이 진화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신 성품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선재하는 통일성에 의존한다. 그러나 최상위 하나님의 진화에 아직도 또 다른 모습이 있다. 그를 창조자가 진화시키고 삼위일체가 파생시켰을 뿐 아니라, 그는 또한 스스로 진화하고 스스로 유래한다. 최상위 하나님 자신이 신으로 사실화하는 데 의도하여 창조에 참여한 자이다. 인간의 상물질 혼은 마찬가지로, 자체의 불멸화를 의도하는 공동 창조에 협동자이다.
117:3.8 (1282.3) 파라다이스의 에너지를 조종하고 그 에너지를 최상위에 반응하도록 만드는 데, 아버지는 합동 행위자와 더불어 일한다. 아버지는 창조자인 성격자들을 낳기 위하여 영원한 아들과 함께 일하고, 이들의 활동은 언젠가 최상위의 통치권을 마침내 성취할 것이다. 최상위의 진화가 완성되어 그가 그 통치권을 맡을 자격을 갖추게 할 때까지, 대우주의 통치자로서 활동할 삼위일체 성격자들을 창조할 때 아버지는 아들과 영, 두 분과 함께 일한다. 최상위의 진화를 촉진하면서 이것과 기타 여러 방법으로, 아버지는 신 및 신이 아닌 동급 존재들과 협동하지만, 그는 또한 이런 문제에서 홀로 활동한다. 그리고 그가 혼자 하는 활동은 아마도 생각 조절자 및 관련된 개체들이 베푸는 봉사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117:3.9 (1282.4) 신은 통일성이요, 삼위일체로서 실존적이고 최상위로서 체험하며, 필사자의 경우에는 조절자 융합으로 인간이 실현하는 것이다. 필사 인간 속에 생각 조절자가 계심은 우주가 본질적으로 하나됨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사람, 가능한 가장 낮은 부류의 우주 성격자는, 그 몸 안에 가장 높고 영원한 실체, 아니 모든 성격자의 처음 아버지의 실제 분신조차 품고 있다.
117:3.10 (1282.5) 최상 존재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와 연락하는 덕택으로, 그리고 그 삼위일체의 자식인 창조자와 행정가들이 신으로 성공한 결과로서 진화한다. 사람의 불멸하는 혼은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신다운 계심과 교제함으로, 그리고 인간 지성이 내리는 인격 결정에 따라서,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진화시킨다. 삼위일체와 최상위 하나님의 관계는 조절자와 진화하는 사람의 관계와 같다.
117:3.11 (1282.6) 시공의 창조 대리자들이 유한한 행동 가능성을 소모한 경우를 제쳐놓고, 현재 우주 시대에 최상 존재는 창조자로서 직접 활동할 수 없는 듯하다. 우주 역사에서 이제까지 이런 일은 오직 한 번 벌어졌다. 우주 반영의 문제에서 유한한 행위의 가능성이 소모되었을 때, 이때 이 최상위는 모든 선행하는 창조자의 행위를 창조적으로 완성하는 자로서 활동하였다. 선행(先行)하는 창조권이 창조 활동의 적절한 주기를 마쳤을 때는 언제든지, 미래 시대에 완성자로서 그가 다시 활동하리라고 우리는 믿는다.
117:3.12 (1283.1) 최상 존재는 사람을 창조하지 않았지만, 사람은 글자 그대로, 최상위의 잠재성으로부터 창조되고, 사람의 바로 그 생명은 거기서부터 파생되었다. 그는 사람을 진화시키지도 않는다. 그래도 바로 최상위가 진화의 바로 그 본질이다. 유한한 관점에서 볼 때, 최상위가 우주 안에 계신 가운데 우리는 실제로 살고, 움직이고, 우리의 존재를 가진다.
117:3.13 (1283.2) 최상위는 최초의 원인 작용을 비롯할 수 없는 듯하지만, 모든 우주 성장의 촉매인 듯하며, 겉보기에 체험으로 진화하는 모든 존재의 운명에 관하여 총체의 완성을 마련하도록 예정된 듯하다. 아버지는 유한한 우주 개념을 비롯하신다. 창조 아들들은 창조 영들의 찬성과 협동을 얻어서, 시공에서 이 개념을 사실로 만든다. 최상위는 유한자 총체를 완성시키며, 그 총체와 초한자 운명의 관계를 안정시킨다.
117:4.1 (1283.3) 완전한 지위를 얻고 신다운 존재가 되려는 창조된 생물의 끊임없는 투쟁을 보건대, 우리는 이 끝없는 노력이 최상위가 신성한 자아 실현을 위하여 끝없이 투쟁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최상위 하나님은 유한한 신이며, 그는 유한이란 말의 총 의미에서, 유한자의 문제들과 씨름해야 한다. 공간 세계의 진화에서 세월의 변천과 우리가 벌이는 싸움은, 그의 진화하는 성품이 가장 바깥 한계의 가능성까지 확대하고 있는 행동 분야 안에서, 그가 자아의 실체와 완성된 통치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반영한다.
117:4.2 (1283.4) 대우주에서 두루, 최상위는 표현하려고 애쓴다. 그의 신다운 진화는, 존재하는 모든 성격자의 지혜 및 행동에 어느 정도 근거를 둔다. 한 인간이 영원히 살아남기를 택할 때, 그는 운명을 함께 창조한다. 이 하늘 가는 필사자의 생애에서, 유한한 하나님은 성격의 자아 실현이 늘어나고 체험적 통치권이 커지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영원한 생애를 싫다고 거절하면, 이 사람의 선택에 의존했던, 최상위의 그 부분은 피할 수 없이 지연되며, 이 결핍은 갈아치우거나 평행하는 체험으로 보충되어야 한다. 살아남지 못하는 자의 인격에 대해서 말하면, 그것은 창조의 대혼(大魂)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최상위 신의 일부가 된다.
117:4.3 (1283.5) 하나님은 사람을 무척 신뢰하고 사랑하므로, 보호하고 자아를 실현하라고 신다운 성품의 한 조각을 인간의 손에도 맡긴다. 필사 존재의 선택과 상관 없이, 아버지의 성품, 조절자의 계심은 파괴할 수 없다. 그러한 그릇 인도된 자아의 인격, 잠재적으로 통일하는 인격이 최상위 신의 한 요소로서 지속할 터인데도, 최상위의 아이, 진화하는 자아는 멸망할 수 있다.
117:4.4 (1283.6) 사람의 인격은 인간의 개성을 참으로 파괴할 수 있고, 비록 우주적 자살인 그러한 인생에서 가치 있었던 모든 것이 지속하겠지만, 이러한 품질은 개별 인간으로서 지속하지 않을 것이다. 최상위는 여러 우주에 있는 인간들 속에서 다시 표현을 찾아내겠지만, 결코 다시 그 특정한 인격자로서 표현되지는 않는다. 하늘 가지 않는 자의 독특한 인격은 물 한 방울이 바다로 돌아가듯 최상위에게 돌아간다.
117:4.5 (1284.1) 유한자의 인격 부분들이 어떤 고립된 행동을 하더라도, 최상위 총체가 궁극에 출현하는 데 비교적 상관이 없지만, 그런데도 전체는 다양한 부분의 총 행위에 의존한다. 개별 필사자의 인격은 최상위의 총체가 계신 앞에 하찮은 것이지만, 각 사람의 인격은 유한자에 있는 갈아치울 수 없는 의미와 가치를 대표한다. 인격은 일단 표현되고 나서, 살아 있는 그 인격자가 계속 존재할 경우를 제외하고, 결코 다시 동일한 표현을 찾지 못한다.
117:4.6 (1284.2) 그래서 우리가 자아를 표현을 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최상위는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와 함께, 신을 표현하려고 애쓰고 있다. 우리가 아버지를 찾아내는 것 같이, 마찬가지로 다음에 최상위는 만물의 파라다이스 창조자를 찾아냈다. 우리가 자아를 실현하는 문제를 통달하는 것 같이, 마찬가지로 체험하는 하나님은 시공의 여러 우주에서 전능한 최상 지위에 도달하고 있다.
117:4.7 (1284.3) 인류는 우주에서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올라가지 않는다. 의도하여 총명하게 활동하지 않고는 최상위도 진화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단지 수동적 태도로 완전을 얻지 않으며, 최상위의 영도 유한한 창조에 그침 없이 봉사를 베풀지 않고서 전능자의 힘을 사실로 만들 수 없다.
117:4.8 (1284.4) 사람이 최상위와 현세에 가지는 관계는 우주 도덕성, 곧 의무에 대한 보편적 민감성을 기르고 의무를 받아들이기 위한 기초이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현세의 감각을 뛰어넘는 도덕성이다. 그 도덕성은 자의식하는 인간이 체험하는 신에 대한 체험적 의무를 이해하는 데 직접 달려 있다. 필사 인간과 모든 다른 유한한 생물은 최상위 안에서 존재하는 에너지ㆍ지성ㆍ영의 살아 있는 잠재성으로부터 창조된다. 조절자인 필사 승천자는, 최후자의 불멸하는 신다운 인품을 창조하는 것을 최상위에게 의존한다. 최상위의 바로 그 실체로부터, 인간 의지의 찬성을 얻어서, 조절자는 하나님의 하늘 가는 아들의 영원한 성품을 무늬로 엮는다.
117:4.9 (1284.5) 사람의 인격을 영적으로 변화시키고 영원하게 만드는 일에 조절자 진보의 진화는 최상위의 통치권을 직접 확대한다. 인간의 진화에서 그러한 업적은 동시에, 최상위가 진화로 현실화하는 업적이다. 인간이 최상위 없이 진화할 수 없다는 것이 참말이지만, 모든 인간의 완성된 진화와 상관 없이 최상위의 진화가 결코 완전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아마 참말일 것이다. 여기에 자의식하는 인격자들의 큰 우주 책임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최상 신은 필사자의 의지의 선택에 달려 있다. 사람의 진화와 최상위의 진화가 함께 나아가는 것은, 탐구할 수 없는 우주 거울 작용을 거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에게 충실하고 충분하게 표시된다.
117:4.10 (1284.6) 필사 인간이 닥친 큰 도전은 이것이다: 너는 우주의 체험할 수 있는 가치 의미를 바로 너의 진화하는 자아 속으로, 개인용으로, 투입하려고 결심할 것인가? 아니면 살아남기를 거절함으로, 어떤 다른 때에 유한한 하나님의 진화에 인간의 기여를 자기 방법으로 시도할 또 다른 사람의 행동을 기다리면서, 너는 최상위의 이 비밀이 누워서 자도록 버려둘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너의 기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최상위에게 기여한 것이겠다.
117:4.11 (1284.7) 지금 우주 시대의 큰 싸움은 잠재하는 것과 실재하는 것 사이에 있다―아직까지 표현되지 않은 모든 것이 사실이 되기를 구한다. 필사 인간이 파라다이스 모험을 향하여 나아가면, 그는 시간의 움직임을 따르고 있고, 시간은 영원의 냇물 속에서 물살로서 흐른다. 필사 인간이 영원한 생애를 싫다고 거절하면, 그는 유한한 우주에서 사건들의 흐름을 거슬러 움직이고 있다. 기계적 창조는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펼쳐지는 목적에 따라서 용서 없이 계속 움직이지만, 의지를 가진 창조는 영원의 모험에 인격이 참여하는 역할을 받아들이거나 물리치는 선택이 있다. 필사인은 인간의 존재에서 최고의 가치를 파괴할 수 없지만, 그가 몸소 겪는 체험에서 이 가치의 진화를 아주 분명히 막을 수 있다. 인간의 자아가 이렇게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데 참여하기를 거절하는 한, 바로 그 한도까지 최상위는 대우주에서 신을 표현하는 데 늦어진다.
117:4.12 (1285.1) 필사 인간에게 보관하라고 파라다이스 아버지가 조절자의 계심을 맡겼을 뿐 아니라, 또한 최상위의 미래의 극미 부분의 운명을 통제하는 권한도 맡겼다. 왜냐하면 사람이 인간의 운명에 도달함에 따라서, 마찬가지로 최상위도 신 수준에서 운명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117:4.13 (1285.2) 그래서 한때 우리 각자를 기다렸던 것 같이, 결정이 너희 하나하나를 기다린다: 너는 유한한 지성이 내리는 결정에 무척 의존하는, 시간 세계의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릴 것인가? 너는 동물처럼 후퇴하는 게으름으로 우주들의 최상위 성격자의 기대를 저버릴 것인가? 너는 각 사람에게 그토록 의존하는, 모든 인간의 위대한 형(兄)의 기대를 저버릴 것인가? 우주 생애의 황홀한 경치―파라다이스 아버지를 신성하게 발견하고, 최상위 하나님을 찾아서, 그의 진화에 신답게 참여할 기회―가 네 앞에 놓여 있는 마당에, 너는 실현하지 못한 자의 영토로 자신이 사라지도록 버려둘 수 있는가?
117:4.14 (1285.3) 하나님의 선물―그가 실체를 수여하는 것―은 그의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창조를 멀리하지 않지만, 파라다이스를 도는 여러 창조에서 긴장을 일으켰다. 하나님은 먼저 사람을 사랑하고 그에게 불사의―영원한 실체가 되는―잠재성을 수여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함에 따라서, 사람은 사실로 영원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신비가 있다: 사랑을 통해서 사람이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수록, 그 사람의 현실성―사실성―은 더욱 커진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물러날수록, 더욱 가까이 그는 비현실―존재의 그침―에 접근한다. 사람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그의 뜻을 거룩히 바칠 때,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그 신분보다 더 위대하게 만든다.
117:5.1 (1285.4) 위대한 최상위는 대우주에서 우주적 대혼(大魂)이다. 최상위 안에서 우주의 질과 양은 신(神)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그의 신 성품은 진화하는 여러 우주에 두루, 모든 생물과 창조자 성품의 광대한 총합을 모자익으로 복합한 것이다. 그리고 최상위는 또한 현실화되고 있는 신이며, 진화하는 우주 목적을 포함하는 창조 의지를 구현(具現)한다.
117:5.2 (1285.5) 유한자의 지적 자아, 잠재 인격인 자아들은 셋째 근원 중심으로부터 태어나며, 시공에서 유한한 신의 통합을 최상위 안에서 이룩한다. 사람이 창조자의 뜻에 복종할 때, 그는 자기 인격을 덮어 가리거나 버리고 항복하는 것이 아니다. 유한한 하나님의 현실화에 참여하는 개별 인격자들은, 그렇게 활동함으로 의지하는 자아를 잃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인격자들은 신의 이 큰 모험에 참여함으로 점진적으로 커진다. 신(神)과 그렇게 뭉침으로 사람은 그의 진화하는 자아를 최고의 자리 바로 그 문턱까지 높이고, 강화하고, 영답게 변화시키고 통일한다.
117:5.3 (1286.1) 사람의 진화하는 불멸의 혼, 곧 물질 지성과 조절자가 합동으로 창조한 것은 그런 자격으로 파라다이스까지 올라가며, 나중에 최후 군단에 소집되었을 때, 최후자 초월이라고 알려진 체험 기법으로, 어떤 새로운 방법으로 영원한 아들의 영 인력(引力) 회로와 연합된다. 이처럼 그러한 최후자는 최상위 하나님의 인격자로서 체험적 인정을 얻기에 적절한 후보자가 된다. 최후 군단의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래 임무에서 이 필사 지능들이 일곱째 단계의 영 존재에 다다를 때, 그러한 이중 지성은 삼자일치가 된다. 하나는 인간이고 하나는 신, 조율된 이 두 지성은 이때 현실화된 최상 존재의 체험적 지성과 연합한 가운데, 영화롭게 될 것이다.
117:5.4 (1286.2) 우주의 아버지가 땅에서 예수의 일생에서 그렇게 드러난 바와 같이, 영원한 앞날에, 최상위 하나님은 하늘 가는 사람의 영답게 변화된 지성, 불사의 혼 속에서 현실이 될 것이다―창조적으로 표현되고 영적으로 묘사될 것이다.
117:5.5 (1286.3) 사람은 최상위와 하나되어 그의 인격 신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체험으로 우주에 반응한 것은 이처럼 최상위가 신으로서 겪는 체험의 일부를 이룬다. “행동은 우리가 하고 결과는 하나님이 정한다.”
117:5.6 (1286.4) 진보하는 인격은 여러 우주에서 올라가는 수준을 통과함에 따라서, 현실화된 실체의 자취를 남긴다. 시간과 공간에서 성장하는 우주들은, 지성이든 영이든 에너지이든, 그들의 영토를 통하여 인격이 진보함으로 수정된다. 사람이 행동할 때, 최상위가 반응하며, 이 거래는 사실로 진보가 된다.
117:5.7 (1286.5) 에너지ㆍ지성ㆍ영의 큰 회로들은 결코 하늘 가는 인격자의 영구한 소유물이 아니다. 이러한 봉사는 언제까지나 최상위의 일부로 남는다. 필사자의 체험에서 인간의 지능은 보조 지성 영들의 리듬 있는 맥박 안에 거하며, 이 봉사 안에서 회로가 연결되어 생긴 무대 안에서 지능이 결정한 것을 집행한다. 필사자가 죽고 나서 인간의 자아는 보조자 회로에서 영구하게 떨어져 나간다. 이 보조자들은 결코 인격자들 사이에 체험을 전달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그들은 칠중 신을 거쳐서 최상위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결정과 행위에 대하여 비인격 반응을 전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한다. (적어도 이것이 예배 보조자와 지혜 보조자에게 참말이다.)
117:5.8 (1286.6) 영적 회로의 경우에도 그렇다: 사람이 여러 우주를 거쳐 올라가면서 이 회로들을 이용하지만, 결코 그의 영원한 인격의 일부로서 회로들을 소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적 봉사를 베푸는 이 회로들은, 진리의 영이든, 성령이든, 또는 초우주 영들의 계심이든, 하늘 가는 인격자 안에서 태어나는 가치를 받아들이고 그에 반응하며, 이 가치는 칠중자를 거쳐서 최상위에게 충실하게 전달된다.
117:5.9 (1286.7) 성령과 진리의 영과 같은 영적 영향은 지역 우주에서 베푸는 봉사이지만, 그들의 안내는 한 주어진 지역 창조의 지리적 한계에 온전히 국한되지 않는다. 하늘 가는 필사자가 자기가 태어난 지역 우주의 경계를 지나서 갈 때, 승천하는 동안 위기가 있을 때마다 “이것이 길이라” 늘 말하며 파라다이스 순례자를 어김없이 지도하면서 물질 세계와 상물질 세계의 철학적 미로를 거쳐서 항상 가르치고 안내한 진리의 영의 봉사를 사람은 통째로 빼앗기지 않는다. 네가 지역 우주의 영토를 떠날 때, 태어나는 최상 존재의 영이 베푸는 봉사를 통해서, 초우주 반영 시설을 통해서,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길에 파라다이스에서 수여된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 위로하고 지도하는 영이 여전히 너를 안내할 것이다.
117:5.10 (1287.1) 우주에 봉사하는 이 다양한 회로들이 어떻게 최상위 안에 진화로 얻은 체험의 의미와 가치와 사실을 기록하는가? 우리는 꼭 확신한다고 할 수 없지만, 파라다이스에서 기원을 가진 최상 창조자들의 몸을 통해서 이러한 기록이 일어난다고 믿으며, 그들은 이 시공의 회로들을 직접 수여하였다. 일곱 보조 지성 영의 지적 체험의 축적은, 그들이 물리적 수준의 지능에게 봉사를 베푸는 동안 신성한 봉사자의 지역 우주 체험의 일부이며, 이 창조 영을 통해서 그 축적된 것들이 아마도 최상위의 지성 안에 기록된다. 마찬가지로 필사자가 진리의 영 및 성령을 겪는 체험은 아마도 비슷한 기법으로 최상위의 몸에 기록된다.
117:5.11 (1287.2) 사람과 조절자의 체험조차 최상위 하나님의 신성 안에서 반응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체험을 겪음에 따라서 조절자들은 최상위와 비슷하며, 필사인의 진화하는 혼이 최상위 안에서 그런 체험을 얻을 선재하는 가능성으로부터 창조되기 때문이다.
117:5.12 (1287.3) 이 방법으로 모든 창조의 다양한 체험은 최상위의 진화의 일부가 된다.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동안, 사람들은 다만 유한한 것의 질과 양을 이용한다. 그렇게 이용해서 생기는 비인격 결과는 살아 있는 우주, 즉 최상위의 몸의 일부로 언제까지나 남는다.
117:5.13 (1287.4) 인격의 소유물로서 사람이 몸에 지니는 것은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면서 대우주의 지성 회로와 영 회로를 사용한 체험이 인품에 미친 결과이다. 사람이 결심할 때, 이 결정을 행동으로 옮길 때, 사람은 체험하며, 이 체험의 의미와 가치는 유한 수준으로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수준에서 언제까지나 그의 영원한 인품의 일부이다. 우주에서 도덕적이고 신답게 영적인 인품은, 성실한 예배로 빛을 받고, 지적 사랑으로 영화롭게 되고, 형제에게 봉사함으로 완성된 개인적 결정을 사람이 자본으로 축적한 것을 가리킨다.
117:5.14 (1287.5) 진화하는 최상위는 유한한 인간이 언제라도 온 우주와 제한된 체험 접촉을 가진 것보다 더 성취할 수 없는 것을 궁극에 보상할 것이다. 인간은 파라다이스 아버지에게 도달할 수 있지만, 진화로 얻은 그들의 지성은 유한하니까, 무한하고 절대적인 아버지를 정말로 이해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체험이 최상위 안에 기록되고 그의 일부이니까, 모든 사람이 유한 존재의 마지막 수준에 다다를 때, 우주 발전 전체가 실제 신으로 계신 최상위 하나님께 그들이 도달할 수 있게 만든 뒤에, 이때 그러한 접촉을 가진 사실에 본래부터, 총 체험과 접촉이 생긴다. 시간 세계의 유한자는 자체 안에 영원의 씨앗을 품고 있다. 진화가 충만히 진행되고 우주의 성장 능력이 다 소모되었을 때, 유한자 총체는 궁극위인 아버지를 찾아서, 영원한 생애의 여러 초한(超限) 단계를 시작할 것이라고 우리는 가르침을 받았다.
117:6.1 (1287.6) 우리는 여러 우주에서 최상위를 찾지만, 그를 찾아내지 못한다. “그는 움직이며 고요하며, 모든 사물과 존재 안에, 또 그 바깥에 계시느니라. 그는 신비 속에 가려 알아볼 수 없고, 멀어도 가까우니라.” 전능한 최상위는 “아직 빚어지지 않은 것의 형체요, 아직 짓지 않은 것의 원본이라.” 최상위는 너희의 우주 집이요, 너희가 그를 찾아낼 때, 이는 마치 집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는 너희의 체험하는 부모요, 인간의 체험에서 그런 것 같이, 그는 신으로서 부모 체험을 하면서 성장해 왔다. 그는 너희를 알고 있으니, 이는 그가 창조자 같을 뿐 아니라, 인간 같기 때문이다.
117:6.2 (1288.1) 너희가 참으로 하나님을 발견하고 싶으면, 너희는 최상위 의식을 머리 속에서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너희의 신다운 아버지인 것 같이, 최상위는 너희의 신다운 어머니요, 그분 안에서 너희는 우주의 인간으로서 너희의 생애 동안 내내, 양육 받는다. “최상위는 얼마나 보편적인가―그는 사방에 계시도다! 창조의 한없는 사물이 사는 것은 그의 계심에 의존하며, 그는 아무도 싫다고 물리치지 않도다.”
117:6.3 (1288.2) 미가엘과 네바돈의 관계는 최상위와 유한 우주의 관계와 같다. 그의 신성은 아버지의 사랑이 바깥으로 모든 창조에게 흘러나가는 큰 길이요, 그는 유한한 인간이 아버지를 찾아서 안으로 거쳐가는 큰 길이며, 아버지는 사랑이다. 생각 조절자조차 그와 관련되어 있다. 최초의 성품과 신성으로 보면 조절자는 아버지와 같지만, 공간의 여러 우주에서 시간 세계의 거래를 체험할 때 조절자는 최상위와 같아진다.
117:6.4 (1288.3) 인간이 창조자의 뜻을 행하려고 선택하는 행위는 우주적 가치가 있으며,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디에나 있는 어떤 조정 세력이 즉시 반응하는 그러한 우주 의미가 있고, 그 세력은 아마도 최상 존재의 늘 확대되는 행위의 작용일 것이다.
117:6.5 (1288.4) 진화하는 필사자의 상물질 혼은 정말로 우주의 아버지의 조절자 행위에서 생긴 아들이요, 최상 존재, 곧 우주의 어머니의 우주 반응에서 생긴 자식이다. 성장하는 그 혼이 지역 우주에서 지내는 어린 시절을 통해서 내내, 어머니의 영향은 그 인격을 지배한다. 신 부모의 영향은 조절자와 융합이 있은 뒤에, 초우주 생애 동안에 더 비등해지지만, 시간 세계의 인간이 영원한 중앙 우주를 통과하기 시작할 때, 아버지의 성품은 갈수록 더 명백히 나타나며, 우주의 아버지를 인식하고 최후 군단에 들어가고 나서 최대로 유한하게 명시(明示)된다.
117:6.6 (1288.5) 최후자를 달성하는 체험 속에서, 그리고 그 체험을 통하여, 하늘 가는 자아의 체험적 어머니 성질은 영원한 아들의 영적 계심과 무한한 영의 지성 계심과 접촉하고 주입을 받음으로 엄청나게 영향을 받게 된다. 그리고 나서 대우주에서 최후자의 활동 영역에 두루, 최상위의 잠자는 어머니 잠재성의 새로운 각성, 체험의 의미를 새로이 깨닫는 일, 하늘 가는 생애 전체의 체험적 가치의 새로운 통합이 나타난다. 최상위가 어머니로서 주는 유산이 아버지의 조절자 유산과 유한한 동시성을 얻을 때까지, 여섯째 단계 최후자의 우주 생애에서 이러한 자아 실현이 계속될 듯하다. 흥미를 자아내는 이 대우주 활동 기간은 하늘 가는, 완전해진 필사자의 연속되는 어른 생애를 의미한다.
117:6.7 (1288.6) 여섯째 단계의 존재를 마치고, 일곱째이자 마지막 단계인 영 지위에 들어가고 나서, 체험이 풍성해지고, 지혜가 성숙하고, 신성을 깨닫는 상급 시대가 아마도 뒤따를 것이다. 최후자의 성품에서 이것은 아마도 영의 자아 실현을 위하여 지성의 투쟁을 마친 것, 하늘 가는 사람의 성품을 유한 가능성의 한계 안에서 신다운 조절자 성품과 조정하는 일을 마친 것과 대등할 것이다. 그러한 훌륭한 우주 자아는 어머니 최상위가 우주에서 기른 영원한 아이일 뿐 아니라, 이렇게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영원한 아들 최후자가 되며, 그 아이는 창조되었거나 창조하고 있거나 진화하는 사물 및 존재들의 유한 행정부에 관계되는 어떤 활동이나 사업에서도, 우주와 성격자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을 대표할 자격을 갖춘 우주 자아이다.
117:6.8 (1289.1) 혼을 진화시키는 모든 인간은 글자 그대로,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최상 존재인 어머니 하나님이 낳은 진화의 아들이다. 그러나 필사 인간의 혼이 그의 신다운 혈통을 의식하게 될 때까지, 신과 친척 관계를 가졌다는 이 확신을 믿음으로 얻어야 한다. 인간의 사는 체험은 우주의 고치이며, 그 속에서 최상 존재의 우주 재산과 우주의 아버지의 우주 계심이 (어느 것도 성격이 아니다) 시간 세계에서 상물질 혼, 그리고 우주 운명을 가지고 영원히 봉사할 인품, 인간이자 신다운 최후자 인품을 진화시키고 있다.
117:6.9 (1289.2) 하나님이 인간의 존재에서 가장 큰 체험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잊어버린다. 다른 체험의 성질과 내용은 한정되어 있지만,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이해하는 능력이 제한된 것을 제외하고 아무 한계가 없으며, 바로 이 체험은 그 자체로서 능력을 키운다. 하나님을 찾을 때, 사람들은 모든 것을 찾고 있다. 하나님을 찾아낼 때, 그들은 모든 것을 찾아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은 사랑을 아낌없이 주는 것이요, 거기에는 주어야 할 새롭고 더 큰 사랑을 놀랍게 발견하는 일이 뒤따른다.
117:6.10 (1289.3) 모든 참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사람은 신의 사랑을 받으며, 이것은 마치 사람이 이 사랑을 동료들에게 주는 것과 같다. 사랑은 힘차다. 결코 사랑은 붙잡아 둘 수 없다. 사랑은 팔팔 살아 있고, 자유롭고, 가슴 두근거리게 하며, 언제나 움직인다. 사람은 결코 아버지의 사랑을 붙잡아서 마음 속에 가두어 둘 수 없다. 아버지의 사랑은 오직 필사 인간이 다시 이 사랑을 동료들에게 베푸는 동안, 그 사람의 인격을 거쳐 감으로 그에게 현실이 될 수 있다. 사랑의 큰 회로는 아버지로부터 오며, 아들들을 거쳐서 형제들에게, 그리고 여기서부터 최상위에게로 간다. 아버지의 사랑은 깃드는 조절자가 봉사함으로 필사 인격 안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을 아는 그러한 아들은 이 사랑을 우주의 형제들에게 드러내며, 이 형제 사랑은 최상위의 사랑의 본질이다.
117:6.11 (1289.4) 체험을 통하지 않고서 최상위에게 가까이 가는 길은 없다. 현재의 창조 시대에는 인간이 최상위에 다가가는 길이 오직 세 가지 있다:
117:6.12 (1289.5) 1. 파라다이스 시민은 영원한 섬으로부터 하보나를 거쳐서 내려오며, 거기서 파라다이스와 하보나 실체의 차이를 지켜보고, 그리고 으뜸 영들로부터 창조 아들들에 이르기까지, 최상 창조 성격자들의 다양한 활동을 탐구하여 발견함으로 그들은 최상위를 이해하는 능력을 얻는다.
117:6.13 (1289.6) 2. 최상 창조자들의 진화 우주로부터 올라오는 시공의 승천자들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통일성을 더욱 이해하기 위한 준비로, 하보나를 거치면서 최상위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117:6.14 (1289.7) 3. 하보나 원주민은, 파라다이스로부터 내려오는 순례자, 그리고 일곱 초우주로부터 올라가는 순례자들과 접촉함으로 최상위를 이해하게 된다. 하보나 원주민은 본래부터, 영원한 섬의 시민과 진화 우주의 시민의 관점, 본질적으로 다른 관점들을 조화시키는 자리에 있다.
117:6.15 (1290.1) 진화하는 인간에게는 우주의 아버지께 도달하는 일곱 가지 주요 접근법이 있고,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이 여러 길은 각각, 일곱 으뜸 영 가운데 하나의 신성을 통과한다. 그러한 각 접근법은 그 으뜸 영의 성품을 반영하는 초우주에서 사람이 봉사한 결과로서, 체험 감수성이 커짐으로 가능하게 된다. 이 일곱 가지 체험의 총합은 최상위 하나님의 실체와 사실성을 인간이 의식하는, 현재 알려진 한계이다.
117:6.16 (1290.2) 사람이 유한한 하나님을 찾아내지 못하게 막는 것은 바로 사람의 한계 뿐이 아니다. 우주의 불완전성도 또한 그렇게 만든다. 모든―지난날ㆍ오늘날ㆍ앞날의―생물의 미완성조차 사람이 최상위를 접근할 수 없게 만든다. 하나님을 닮은, 신다운 수준에 이른 어떤 개인도 아버지 하나님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완전을 달성함으로 모든 사람이 동시에 발견하는 그 아득한 시절까지, 최상위 하나님을 어느 한 사람이 결코 개인적으로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117:6.17 (1290.3) 너희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발견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할 것이다. 이처럼 현재 우주 시대에, 너희가 최상위를 개인적으로 발견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인데, 그런데도 파라다이스에 올라가는 것과 그 뒤의 우주 생애는 너희의 의식 속에서, 모든 체험의 하나님이 우주에 계시고 우주에서 활동하심을 차츰 인식하게 될 것이다. 영의 열매는 인간의 체험에서 깨달을 수 있는, 최상위의 본질이다.
117:6.18 (1290.4) 사람이 언젠가 최상위에 도달하는 것은 사람이 파라다이스 신의 영과 융합하는 결과로서 생긴다. 유란시아인에게 이 영은 우주의 아버지가 조절자로 계시는 것이다. 비록 신비의 훈계자가 아버지로부터 오고 아버지 같더라도, 그러한 신의 선물조차 무한한 하나님의 성품을 하나의 유한한 인간에게 드러내는 불가능한 과제를 해낼 수 있는가 우리는 의심이 든다. 조절자가 앞날에 일곱째 단계의 최후자에게 드러낼 것은 최상위 하나님의 신성과 성품일 것이라 우리는 추측한다. 그리고 이 계시(啓示)와 유한한 인간의 관계는 무한자의 계시와 절대 존재의 관계와 같을 것이다.
117:6.19 (1290.5) 최상위는 무한하지 않지만, 아마도 유한한 인간이 일찍이 정말로 이해할 수 있는 무한성 모두를 품는다. 최상위를 넘어서 더 이해하는 것은 유한보다 크게 되는 것이다!
117:6.20 (1290.6) 체험으로 창조된 모든 것은 그들의 운명을 실현하는 데 서로 의존한다. 오로지 실존적 실체가 스스로 충분하고 스스로 존재한다. 하보나와 일곱 초우주는 최대의 유한한 달성을 위하여 서로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유한자의 초월을 얻기 위하여 그들은 언젠가 바깥 공간의 미래 우주들에 의존할 것이다.
117:6.21 (1290.7) 하늘 가는 사람은 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다. 총 우주에서 체험 지위에 상관 없이, 하나님은 실존적이며, 따라서 실재한다. 그러나 모든 승천자가 이 최상위의 발견에 동시에 참여할 자격을 갖출 만큼 우주에서 최대로 성숙해졌을 때까지, 혼자서 하늘 가는 사람은 누구나 결코 최상위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117:6.22 (1290.8)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하늘 가는 아들 하나하나, 그는 우주의 개인으로서 대우한다. 마찬가지로 최상위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그는 체험하는 자녀들을 단일 우주 총체로서 대우한다.
117:6.23 (1290.9) 사람은 마음 속에서 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지만, 그는 모든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서 최상위를 탐구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최상위의 사랑을 완전히 드러낼 때, 이때 그는 모든 사람에게 한 우주 실체가 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우주들이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리라는 것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117:6.24 (1291.1) 모든 인격자가 완전하게 된 자아 실현에 이르고, 또 우주에 두루, 완전하게 된 균형을 얻는 것은 최상위에 도달하는 것과 동등하며, 불완전한 존재의 한계로부터 모든 유한한 실체가 해방됨을 증언하는 것이다. 모든 유한한 가능성을 그렇게 소모하는 것은 마침내 최상위에 도달하는 결과를 낳고, 이것은 바로 최상 존재가 진화로 현실화를 완성한 것이라 달리 정의(定義)해도 좋다.
117:6.25 (1291.2) 지진이 바위를 쪼개듯, 사람들은 갑자기, 볼 만하게 최상위를 발견하지 않는다. 그러나 강이 그 밑에 있는 흙을 조용히 닳아 없애듯, 사람들은 최상위를 천천히, 참을성 있게 발견한다.
117:6.26 (1291.3) 네가 아버지를 발견할 때, 여러 우주에서 네가 영적으로 올라가는 큰 원인을 발견할 것이다. 네가 최상위를 찾아낼 때, 너는 파라다이스로 진보하는 생애의 큰 결과를 발견할 것이다.
117:6.27 (1291.4)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어떤 필사자도 우주를 통해서 가는 나그네 길에 쓸쓸하지 않을 터이니, 이는 그 길의 걸음걸음 아버지가 옆에서 걷고, 한편 그가 거쳐 가는 바로 그 길이 최상위의 계신 앞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117:7.1 (1291.5) 모든 유한한 잠재성이 완벽하게 실현되는 것은 모든 진화적 체험이 완벽하게 실현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최상위가 우주에서 전능한 신의 계심으로서 마침내 솟아나는 것을 가리킨다. 이 발전 단계에서, 최상위가 영원한 아들처럼 따로 성격화되고, 파라다이스 섬처럼 구체적으로 동력화되고, 합동 행위자처럼 완벽하게 통일되리라, 그리고 현재 우주 시대가 완성될 때, 이 모두가 최상위의 유한 가능성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라 우리는 믿는다.
117:7.2 (1291.6) 이것은 최상위의 앞날에 대하여 전적으로 적절한 개념이지만, 우리는 이 개념에 본래 있는 어떤 문제들에 주의를 불러일으키고 싶다:
117:7.3 (1291.7) 1. 최상위의 무제한 감독자들은 그가 진화를 마치기 전 어떤 단계에서도, 도저히 신이 될 수 없다. 그래도 바로 이 감독자들은 지금도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우주들에 대하여, 어느 한도 안에서 최상의 통치권을 행사한다.
117:7.4 (1291.8) 2. 최상위의 우주 지위가 완결된 사실이 될 때까지, 그는 궁극 삼자일체 안에서 도저히 활동할 수 없다. 그래도 궁극 삼자일체는 지금도 제한된 실체이며, 너희는 궁극위의 제한된 대관들이 존재하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었다.
117:7.5 (1291.9) 3. 최상위는 우주 생물에게 완벽하게 현실은 아니지만, 파라다이스에 계신 우주의 아버지로부터 지역 우주의 창조 아들과 창조 영들에 이르기까지, 그가 칠중 신에게 상당히 현실이라고 추론할 많은 이유가 있다.
117:7.6 (1291.10) 유한자의 위쪽 한계에서 시간은 초월 시간과 합쳐지는데, 거기서 순서가 얼마큼 흐려지고 섞이는 일이 있는지 모른다. 최상위는 그의 우주 계심을 이 시간 초월 수준까지 예측하고, 그리고 나서 예측된 미완성자의 내재(內在)로서, 이 미래 예측을 거꾸로 창조된 수준까지 반영함으로, 어느 한도 안에서 앞날의 진화를 예상하는지 모른다. 생각 조절자가 깃드는 사람들이 겪는 체험의 경우와 같이, 그러한 현상은 유한한 것과 유한을 초월하는 것이 접촉하는 데는 어디서나 관찰될지 모르고, 조절자는 모든 영원을 통해서 사람이 앞날에 우주에서 무엇을 달성할 것인가를 진정하게 예측한 것이다.
117:7.7 (1292.1) 필사 승천자가 파라다이스의 최후자 군단에 입단 허가를 받을 때, 그들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게 선서하고, 이 충성 선서를 하면서 이것으로 최상위 하나님에게 영원한 충절을 서약하는 것이며, 그는 모든 유한한 사람의 인격이 이해하는 삼위일체이다. 나중에, 진화하는 우주들에 두루, 최후자 중대(中隊)들이 활동함에 따라서, 지역 우주들이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는 그 중대한 시절까지, 그들은 오직 파라다이스 기원이 있는 명령에만 복종할 의무가 있다. 완전하게 된 이 우주들의 새 정부 조직이 최상위의 태어나는 통치권을 비로소 반영함에 따라서, 우리는 바깥에 있는 최후자 중대들이 이때 그러한 새 정부의 사법 권한을 인정하는 것을 관찰한다. 최상위 하나님은 진화하는 최후 군단의 통일자로서 진화하는 듯하다. 그러나 궁극 삼자일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최상위가 이 일곱 군단의 영원한 운명을 지휘할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
117:7.8 (1292.2) 최상 존재는 우주에서 분명히 나타날 때 유한을 초월하는 세 가지 가능성을 품는다:
117:7.9 (1292.3) 1. 첫째 체험적 삼자일체에서 초한(超限) 공동 작업.
117:7.10 (1292.4) 2. 둘째 체험적 삼자일체에서 공동 절대적 관계.
117:7.11 (1292.5) 3. 가장 높은 삼자일체에서 공동으로 무한히 참여하는 것. 그러나 이것이 정말로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는 흡족한 개념이 없다.
117:7.12 (1292.6) 이것이 최상위의 앞날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설 중에 하나이지만, 현재 우주가 빛과 생명의 지위에 이른 뒤에 최상위와 현재 대우주의 관계가 무엇인가에 관하여 또한 많은 추측이 있다.
117:7.13 (1292.7) 여러 초우주의 현재 목표는, 하보나가 그렇듯이, 그들의 상태 그대로 그들의 잠재성 안에서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완전은 물리적ㆍ영적 달성에, 아니 행정ㆍ정부ㆍ친교의 발전에도 관계된다. 다가올 시대에 불화(不和), 그릇된 조절, 잘못 적응하는 가능성은 초우주에서 궁극에는 없어지리라고 믿어진다. 에너지 회로들은 완전히 균형된 상태에 있고, 지성에 완전히 복종할 것이며, 한편 성격이 있는 가운데 영은 지성의 지배를 마쳤을 것이다.
117:7.14 (1292.8) 아득히 먼 이 시절에, 최상위의 영 성격과 전능자의 달성한 권능은 나란히 발전했을 터이고, 최상 지성 속에서, 또 이로 인하여 통일되어, 그 둘은 최상 존재로서 사실이 되리라고 추측된다. 그는 우주에서 완성된 사실이다―모든 생물의 지능이 지켜볼 수 있고, 모든 창조된 에너지가 그에 대하여 반응하고, 모든 영적 개체 안에서 조정되고, 모든 우주 성격자가 체험하는 그런 사실이다.
117:7.15 (1292.9) 이 개념은 대우주에서 최상위가 실제 통치권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현재 삼위일체 행정가들이 그의 대행(代行)으로서 계속하는 것이 아주 가능성이 있지만, 일곱 초우주 사이의 현재 경계는 차츰 사라질 터이고, 대우주 전부가 완전하게 된 하나의 총체로서 작용하리라 우리는 믿는다.
117:7.16 (1292.10) 이때 아마 최상위는 오르본톤의 본부 유버르사에서 몸소 거할지도 모르고, 거기서부터 시간 세계의 우주들의 행정을 지휘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이것은 정말로 추측일 뿐이다. 그래도 확실히, 최상 존재의 성격을 어떤 특정한 위치에서 분명히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계신 그의 신 존재는 아마도 온 우주를 계속해서 스며들 것이다. 그 시대의 초우주 시민들이 최상위와 무슨 관계를 가질 것인지 우리는 모르지만, 하보나 원주민과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사이의 현재 관계와 비슷한 무엇일지도 모른다.
117:7.17 (1293.1) 그 미래 시절에 완전해진 대우주는 현재 그 처지와 방대하게 다를 것이다. 공간에 있는 은하들의 조직에서 벌어지는 가슴 떨리는 모험, 불확실한 시간 세계들에 생명을 심는 일, 그리고 혼돈으로부터 조화를, 잠재성으로부터 아름다움을, 의미로부터 진리를, 가치로부터 선을 진화시키는 일은 사라질 것이다. 시간 세계의 우주들은 유한한 운명을 달성했을 것이다! 아마도 어느 공간에는 휴식이 있으리니, 이는 진화로 완전을 얻으려고 오랜 세월에 걸쳐 벌인 투쟁으로부터 쉬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 쉬지 않는다! 그들의 진화의 선조, 투쟁하는 선조가 한때 최상위 하나님을 찾는 일에 도전을 받은 것 같이, 분명히, 확실히, 용서 없이, 솟아나는 신, 즉 궁극위 하나님의 수수께끼는 안정된 여러 우주에서 완전하게 된 이 시민들에게 도전할 것이다. 새롭고 더 높은 수준에서, 사람의 궁극의 체험에서 드러나는 우주의 아버지에게 도달하는 추구, 사람을 유혹하는 초한적 추구의 초월적 장려함을 드러내려고 우주 운명의 커튼이 활짝 열릴 것이다.
118:0.1 (1294.1) 신의 몇 가지 성품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해도 좋다:
118:0.2 (1294.2) 1. 아버지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아이다.
118:0.3 (1294.3) 2. 아들은 함께 존재하는 자아이다.
118:0.4 (1294.4) 3. 영은 결합되어 존재하는 자아이다.
118:0.5 (1294.5) 4. 최상위는 진화하고 체험하는 자아이다.
118:0.6 (1294.6) 5. 칠중자는 스스로를 분배하는 신성(神性)이다.
118:0.9 (1294.9) 칠중 신은 최상위를 진화로 달성하는 데 필수이지만, 최상위는 또한 궁극위가 궁극에 솟아나는 데 꼭 필요하다. 최상위와 궁극위, 두분의 계심은 절대 이하의 파생된 신의 기본 관계를 이루는데, 이는 그들이 운명을 달성하는 데 서로 의존하면서 보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함께 총 우주에서 모든 창조적 성장의 시작과 완성을 체험으로 이어주는 다리이다.
118:0.10 (1294.10) 창조적 성장은 그치지 않지만 늘 만족을 주며, 범위가 끝이 없어도 일시적 목표를 달성하는, 인격을 만족시키는 그 순간들이 이따금 사이에 낀다. 그러한 순간은 우주에서 성장하고 우주를 탐구하고 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모험으로 사람을 동원하는 전주곡으로서 아주 효과 있게 쓰인다.
118:0.11 (1294.11) 수학의 영역은 질적 한계에 부딪치지만, 수학은 유한한 머리에게 무한을 곰곰이 생각해 볼 개념의 기초를 마련해 준다. 유한한 머리가 이해하기에도, 수에는 아무런 양적 한계가 없다. 아무리 큰 수(數)를 생각해도, 너희는 언제나 거기에 하나를 더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또한 그 수가 무한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너희가 이해할 수 있으니, 이는 아무리 여러 번 너희가 그 수에 이 덧셈을 거듭해도, 여전히 언제나 하나 더 얹을 수 있기 때문이다.
118:0.12 (1294.12) 동시에, 무한한 시리즈는 어느 고정된 점에서도 합계할 수 있고, 이 총합은 (소계(小計)가 더 알맞다) 어떤 일정한 개인에게 어느 특정한 시간과 상태에, 목적을 달성하는 단맛을 충분히 마련해준다. 그러나 머지 않아, 바로 이 인격자는 비로소 갈급해지고 새로운 더 큰 목표를 바라며, 성장하는 그러한 모험은 시간이 충분히 지나고 영원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언제까지나 앞으로 닥쳐올 것이다.
118:0.13 (1294.13) 이어지는 각 우주 시대는 다음 우주 성장 시대로 인도하는 문간방이요, 각 우주 시기는 모든 이전 단계를 위하여 바로 닥치는 운명을 마련해준다. 하보나는 그 자체로서 저절로 완전하지만, 완전하도록 제한을 받은 창조이다. 하보나의 완전함은 바깥으로 진화하는 초우주들 속으로 확대되면서, 우주의 운명 뿐 아니라, 또한 진화 이전 존재의 한계로부터 해방됨을 발견한다.
118:1.1 (1295.1) 신과 우주의 관계를 가능한 대로 모두 이해하는 것이 사람이 우주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절대적 신의 성품은 영원하지만, 신들은 영원 속에 있는 하나의 체험으로서, 시간과 관계된다. 진화하는 우주에서 영원은 현세가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이다―영구한 현재이다.
118:1.2 (1295.2) 필사 인간의 성격은 아버지의 뜻 행하기를 선택하는 기법을 통해서 깃드는 영과 자신을 일체화함으로 영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뜻을 거룩하게 바치는 것은 목적이 영원의 실체임을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은 순간들이 연속되어도 사람의 목적이 고정되었음을 뜻한다. 달리 말하면, 순간들의 연속이 사람의 목적에 아무런 변화를 입증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1백만이나 10억의 순간이[1] [1780] 지나도 아무런 차이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목적에 관하여, 수(數)의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선택과 하나님의 선택을 더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와 파라다이스 아버지가 영구하게 봉사할 때, 궁극에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성품이 결코 끝없이 연합된 영원한 현실이 된다.
118:1.3 (1295.3) 어느 특정한 지능 안에서도 성숙과 시간을 의식하는 단위 사이에 직접 관계가 있다. 시간 단위는 하루, 1년, 또는 더 긴 기간일 수 있지만, 피할 수 없이 시간 단위는 의식하는 자아가 인생의 상황을 평가하는 기준이며, 파악하는 지능은 그 기준으로 현세에 존재하는 사실을 재고 평가한다.
118:1.4 (1295.4) 체험ㆍ지혜ㆍ판단은 필사자의 체험에서 시간 단위가 길어짐과 함께 생기는 것들이다. 인간의 머리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서 계산할 때, 머리는 지난 체험을 현재 상황에 비춰 보려는 목적으로 지난 체험을 평가한다. 생각하는 머리가 앞날을 알려고 손을 뻗음에 따라서, 머리는 가능한 행동이 미래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평가하려고 애쓴다. 이렇게 체험과 지혜를 모두 계산에 넣었으니까, 인간의 의지는 현재에 판단과 결정을 내리며, 이렇게 지난날과 앞날로부터 태어난 행동 계획이 존재하게 된다.
118:1.5 (1295.5) 발달하는 자아가 성숙하면서, 지난날과 앞날이 함께 모여 오늘의 참 뜻을 비춰준다. 자아가 성숙함에 따라서, 머리는 체험을 찾아서 점점 더 과거로 손을 뻗으며, 한편 그 지혜의 예측은 알려지지 않은 미래 속으로 점점 더 깊이 파고들려고 애쓴다. 그 파악하는 자아가 이렇게 과거와 미래로 더욱 멀리 손을 뻗음에 따라서, 판단이 순간적 현재에 의존하는 일이 더욱 적어진다. 이 방법으로 결정과 행위는 움직이는 현재의 사슬을 벗어나기 시작하며, 한편 과거와 미래 중요성의 모습을 가지기 시작한다.
118:1.6 (1295.6) 짧은 시간 단위로 생각하는 필사자가 참을성을 연습한다. 참된 성숙은 진정한 이해에서 생겨난 자제하는 태도로, 참을성을 초월한다.
118:1.7 (1295.7) 성숙하게 되는 것은 현재에 더욱 맹렬하게 사는 것이요, 동시에 현재의 한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지난 체험에 기초를 둔 성숙한 계획은, 앞날의 가치를 향상하는 방법으로 현재에서 태어나고 있다.
118:1.8 (1295.8) 미숙했을 때의 시간 단위는 현재와 비현재―지난날과 앞날―의 참 관계를 현재와 분리하는 방법으로, 현재 순간으로 의미와 가치를 집중한다. 성숙했을 때의 시간 단위는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동등한 관계를 드러내도록 비례가 맞아서, 자아는 비로소 사건들 전체에 대하여 통찰력을 얻고, 비로소 넓어진 시야로 전체 광경의 견지에서 시간의 경치를 바라보고, 아마도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한 연속체가 있는가 비로소 의심하는데, 그 연속체의 조각들을 시간이라 부른다.
118:1.9 (1296.1) 무한자와 절대자의 수준에서, 현재의 순간은 미래의 모든 것 뿐 아니라 과거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스스로 계신 이는 또한 스스로 계셨던 이요, 스스로 계실 이를 의미한다. 이것이 영원(永遠)과 영원한 자에 대하여 우리가 가진 최선의 개념이다.
118:1.10 (1296.2) 절대적이고 영원한 수준에서, 잠재하는 실체는 실재하는 실체와 똑같이 중요하다. 오로지 유한 수준에서, 시간에 제한된 사람들에게, 그렇게 방대한 차이가 있어 보인다. 절대적인 하나님에게는, 영원한 결정을 내린 하늘 가는 필사자는 이미 파라다이스 최후자이다. 그러나 우주의 아버지는 또한, 깃드는 생각 조절자를 통해서, 이처럼 의식하는 데 제한을 받지 않지만, 동물 같은 수준에서 하나님 같은 수준의 존재로 사람이 올라가는 문제와 벌이는 모든 현세의 싸움을 알 수 있고, 그에 참여할 수 있다.
118:2.1 (1296.3) 신이 어디에나 계신 성질을 신의 두루 계심의 궁극성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우주의 아버지는 시공에 어디에나 계시고 시공을 초월하여 두루 계시는 성질이 있으며, 최상위ㆍ궁극위ㆍ절대자가 이러한 성질을 시간도 공간도 없는 그의 보편ㆍ절대적 계심으로 보상하고, 이와 조정하고, 통일하는 것이 우주의 아버지의 뜻이다. 그리고 신이 어디에나 계시는 성질은 아주 흔히 공간과 관련되지만, 반드시 시간에 제약을 받지는 않는다는 것을 너희는 기억해야 한다.
118:2.2 (1296.4) 필사자이자 상물질 승천자로서 너희는 칠중 신이 베푸는 봉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차츰 식별한다. 하보나를 통해서 너희는 최상위 하나님을 발견한다. 파라다이스에서 너희는 그가 한 성격자임을 발견하며, 다음에 최후자로서 너희는 당장에 그가 궁극위인 것을 알려고 애쓸 것이다. 최후자이니까, 궁극위에 다다른 뒤에 추구할 과정이 오직 하나 있는 듯이 보이고, 이는 절대자를 찾기 시작하는 것이겠다. 아무 최후자도 신 절대자에 도달할까 하는 불확실성에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을 터이니, 최상ㆍ궁극의 승천 끝에 아버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절대자 하나님을 찾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최후자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똑같은 하나님을 발견할 뿐이리라 믿을 터이니, 그는 무한에 더욱 가까운 보편적 수준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파라다이스 아버지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절대적인 하나님에 도달하는 것은 성격자들의 마지막 아버지 뿐 아니라, 우주들의 시초 조상을 드러낼 것이다.
118:2.3 (1296.5) 최상위 하나님은 신이 시공에 두루 계심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지 모르지만, 그는 글자 그대로 신이 어디에나 계심의 분명한 표현이다. 창조자의 영적 계심과 물질로 나타난 창조 사이에는 어디서나 되어 가는―진화하는 신이 우주에서 솟아나는―광대한 영토가 있다.
118:2.4 (1296.6) 최상위 하나님이 언젠가 시공 우주의 통제를 직접 맡는다면, 그러한 신의 행정이 궁극위의 전반적 통제 밑에서 작용할 것이라 우리는 확신한다. 그러한 경우에 궁극위 하나님은 전능한 최상위의 행정 기능에 관하여 초월 시간 및 초월된 공간에 전반적 통제권을 쥐는 초월 전능자(만능자)로서, 시간 세계의 우주들에게 비로소 명백히 나타날 것이다.
118:2.5 (1297.1) 필사자의 지성은 우리처럼 물을지 모른다: 대우주에서 행정 권한을 얻기까지 최상위 하나님이 진화하는 데 궁극위 하나님의 명시가 늘어나는 일이 따른다면, 바깥 공간에서 생길 것이라고 가상된 여러 우주에서 그에 해당하는 궁극위 하나님이 출현할 때도 비슷하게 뒤이어 절대자 하나님의 계시가 늘어날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정말로 모른다.
118:3.1 (1297.2) 오로지 어디에나 있는 성질로 신은 유한자가 이해하도록 시공에서 명시되는 모습을 통일할 수 있는데, 이는 시간이 순간의 연속이요, 한편 공간은 관련된 점들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결국, 너희는 분석함으로 시간을 파악하고, 종합함으로 공간을 파악한다. 너희는 인격자의 통합하는 통찰력으로, 다른 이 두 개념을 조정하고 관련을 짓는다. 동물 세계 전체에서 오직 사람이 이 시간과 공간을 파악하는 능력을 소유한다. 동물에게는 운동이 의미가 있지만, 운동은 오로지 인격 지위를 가진 인간에게만 가치를 나타낸다.
118:3.2 (1297.3) 사물은 시간에 조건을 받지만, 진리는 시간을 초월한다. 너희가 진리를 알면 알수록, 너희가 진리이면 진리일수록, 지난날을 더욱 이해하고 앞날을 더욱 파악할 수 있다.
118:3.3 (1297.4) 결코 죽거나 형식이 아니며, 언제나 살아 움직이고 적응할 수 있지만―빛을 내며 살아 있지만―진리는 흔들릴 수 없는 것이다―영원히 모든 일시적 변천에서 면제된다. 하지만 진리가 사실과 연결될 때, 시간과 공간은 모두 그 의미를 제약하고 그 가치를 서로 연결 짓는다. 사실과 밀착된 그러한 진리의 실체는 개념이 되며, 따라서 상대적 우주 실체의 분야로 지위가 떨어진다.
118:3.4 (1297.5) 창조자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와 현세의 유한한 사람이 사실로 겪는 체험을 연결하는 것은 궁극에 최상위의 새로운 태어나는 가치가 된다. 최상위 개념은 신성하고 변치 않는 위 세계를 유한하고 늘 바뀌는 아래 세계와 조정하는 데 필수이다.
118:3.5 (1297.6) 공간은 모든 비절대 사물 중에서 절대성에 가장 가깝다. 공간은 절대로 궁극의 것인 듯하다. 물질 수준에서 공간을 이해하는 데 우리가 겪는 진정한 어려움은, 물체들이 공간 속에 존재하지만, 공간이 또한 바로 이 물체들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공간에 관하여 절대적인 것이 많아도, 이는 공간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118:3.6 (1297.7) 비교해서 보건대, 공간이 결국 모든 물체의 한 속성이라는 것을 너희가 추측하고자 하면, 공간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따라서 한 물체가 공간을 통해서 움직일 때, 그것은 또한 자체의 모든 속성을, 그러한 움직이는 물체 안에 있고 그 물체에 속한 공간까지도, 가지고 간다.
118:3.7 (1297.8) 실체의 모든 형태는 물질 수준에서 공간을 차지하지만, 영 형태는 오직 공간과 가지는 관계에서만 존재한다. 영 형태는 공간을 차지하거나 밀어내지 않으며, 공간을 담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공간의 큰 수수께끼는 개념의 형태에 관계된다. 우리는 지성 영토에 들어갈 때 많은 수수께끼에 부딪친다. 한 개념의 형태―실체―는 공간을 차지하는가? 정말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개념의 형태는 공간을 담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비물질인 것이 반드시 공간에 없다고 가정하는 것은 도저히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118:4.1 (1298.1) 사람들이 겪는 신학적 문제점과 형이상학의 딜레마 가운데 많은 것은 사람이 신의 성격을 그릇된 위치에 놓고, 그 결과로 무한하고 절대적인 속성을 하위 신성에, 그리고 진화하는 신에 할당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참된 처음 원인이 있는 한편, 또한 나란히 있고 종속된 원인, 부수되고 2차적인 원인의 집단이 있음을 너희는 잊어서는 안 된다.
118:4.2 (1298.2) 1차 원인과 2차 원인의 중대한 차이는, 1차 원인들이 최초의 효과를 낳는 것이며, 이것은 어떤 선행(先行)하는 원인 작용에서 생긴 어떤 요인으로부터 아무것도 물려받지 않는 것이다. 2차 원인은 다른 이전의 원인으로부터 물려받은 결과를 변함없이 드러낸다.
118:4.3 (1298.3) 무제한 절대자 안에 본래 있는 순전한 정적(靜的) 잠재성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행위로 생기는, 신 절대자의 원인 작용에 반응한다. 우주 절대자가 계신 앞에서 이 원인의 씨앗을 받은 정적 잠재성은 당장에 활발해지고 어떤 초월 대리자들의 영향에 민감해진다. 이 대리자들의 행동은 이 활성화된 잠재성을, 발전할 참 우주 가능성, 즉 사실화된 성장 능력을 가진 상태로 변화시킨다. 그러한 성숙한 잠재성 위에, 대우주의 창조자와 통제자들은 우주를 진화시키는, 결코 그치지 않는 드라마를 연출한다.
118:4.4 (1298.4) 실존적인 자들을 무시한다면, 원인의 기본 구성은 세 가지이다. 원인이 현재 우주 시대에 작용하는 바와 같이, 이 일곱 초우주의 유한 수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해도 좋다:
118:4.5 (1298.5) 1. 정적 잠재성의 활성화. 신 절대자의 행위로, 우주 절대자 안에서 운명이 정해지는 것. 신 절대자는 무제한 절대자 안에서, 그리고 그에게 작용하며,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의도하는 명령의 결과로서 작용한다.
118:4.6 (1298.6) 2. 우주를 만들 능력이 궁극에 생기는 것. 이것은 차별되지 않은 잠재성을 분리되고 규명된 여러 계획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이것은 궁극위 신, 그리고 초월 수준에 있는 다양한 대리자들의 행위이다. 그러한 행위는 총 우주 전체의 미래 필요 사항을 완전히 예상한 행위이다. 잠재성을 분리하는 것과 관련하여, 총 우주 건축가들은 우주들에 대한 신의 개념을 진정하게 구현(具現)한 것으로서 존재한다. 그들의 계획의 범위가 궁극에 공간에서 총 우주 개념의 경계에 제한을 받는 듯하지만, 계획으로서 달리 시간이나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118:4.7 (1298.7) 3. 우주에 실재하는 것들의 창조와 진화. 수용 능력을 만들어 내는, 궁극위 신의 계심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한 우주 위에, 성숙한 잠재성을 체험적인 실재물로 시간 속에서 변질시키려고 최상 창조자들이 작용한다. 총 우주 안에서, 잠재하는 실체의 현실화는 모두 궁극의 발전 능력에 제한을 받으며, 마지막 출생 단계에서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는다. 파라다이스로부터 나가는 창조 아들들은 사실로, 우주 의미에서 변화시키는 창조자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면에서도 그들이 창조자라는, 사람의 개념을 무효로 만들지 않는다. 유한한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확실히 창조할 수 있고, 또 창조한다.
118:5.1 (1299.1) 신이 전능(全能)하다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을 행하는 힘을 뜻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서, 필사자가 이해하는 지적(知的) 기준점에서 볼 때, 무한한 하나님조차 네모난 동그라미를 만들거나 본래부터 착한 악을 만들 수 없다. 하나님은 신답지 않은 일을 할 수 없다. 철학 용어의 그러한 모순은 비존재에 상당하며, 아무것도 그렇게 창조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성격의 모습은 동시에 하나님다우면서 신답지 않게 될 수 없다. 공동 가능성은 신의 힘에 본래부터 있다. 이 모두가, 전능한 성질은 성품을 가진 사물을 창조할 뿐 아니라, 또한 모든 물건과 존재의 성품에 기원을 준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118:5.2 (1299.2) 처음에는 아버지가 모든 일을 하지만, 무한자의 뜻과 명령에 반응하여 영원의 전체 광경이 펼쳐짐에 따라서, 생물이, 아니 사람들조차, 최후의 운명을 실현하는 데 하나님과 협동자가 되리라는 것이 더욱 명백해진다. 이것은 육체를 입은 인생에서도 참말이다. 사람과 하나님이 협동 관계에 들어갈 때, 그러한 협동 관계의 미래 가능성에 아무런 한계를 지울 수 없다. 사람이 영원히 진보하면서 우주의 아버지가 짝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가 깃드는 아버지의 계심과 융합할 때, 그는 정신적으로 시간의 사슬을 깨뜨렸고, 우주의 아버지를 추구하면서 영원히 진보하는 길에 이미 들어간 것이다.
118:5.3 (1299.3) 필사자의 의식은 사실로부터 의미까지, 그리고 다음에 가치에 이르기까지 나아간다. 창조자의 의식은 생각과 가치로부터, 말씀과 의미를 거쳐서, 행위하는 사실로 나아간다. 언제나 하나님은 실존적 무한에 본래 있는 무제한 통일의 정지 상태를 깨뜨리려고 행동해야 한다. 언제나 신은 원본이 되는 우주, 완전한 성격자들을 마련하고, 신 아래에 있는 창조들이 얻으려고 애쓰는 최초의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 마련해야 한다. 나중에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내도록, 하나님은 반드시 먼저 사람을 찾아내야 한다. 우주의 아들들, 그리고 그 결과로 우주의 형제 단체가 있을 수 있기 전에, 우주의 아버지가 반드시 계셔야 한다.
118:6.1 (1299.4) 하나님은 참으로 전능하지만 모든 일을 행하지 않는다―행해지는 모든 일을 몸소 하지 않는다. 전능은 전능한 최상위와 최상 존재의 권능 잠재성을 포함하지만, 최상위 하나님이 의지하는 행위는 무한자 하나님이 몸소 하시는 일이 아니다.
118:6.2 (1299.5) 원초적 신이 만사를 행한다고[2] [1781] 주장하는 것은 수많은 집단을 이루어 협력하는 다양한 다른 계급의 창조 조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거의 1백만 명의 파라다이스 창조 아들들의 특권을 빼앗는 것과 같을 것이다. 우주 전체에서 원인 없는 원인이 오직 하나 있다. 모든 다른 원인은 이 하나의 위대한 처음 근원 중심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 철학 중에 아무것도 광대한 우주를 통해서 흩어져 있는, 신의 수많은 아이들의 자유 의지를 조금도 다치지 않는다.
118:6.3 (1299.6) 한 지역의 틀 안에서, 의지(意志)는 원인 없는 원인으로서 작용하는 듯 보일지 모르지만, 독특하고 최초이고 절대적인 처음 원인들과 가지는 관계를 확립하는, 물려받은 요인을 어김없이 나타낸다.
118:6.4 (1299.7) 모든 의지는 상대적이다. 창시하는 의미에서, 오직 아버지인 스스로 계신 이가 최후의 의지를 소유한다. 절대적 의미에서 오직 아버지ㆍ아들ㆍ영이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공간에 제한되지 않는 의지의 특권을 나타낸다. 필사 인간은 자유 의지, 즉 선택하는 힘을 부여 받고, 비록 그러한 선택이 절대적이 아니지만, 그런데도 유한 수준에서, 택하는 그 인격자의 운명에 관하여 상대적으로 최종이다.
118:6.5 (1300.1) 절대자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수준에서도, 의지는 선택하는 힘을 행사하는 바로 그 인격을 구성하는 한계에 부딪친다. 사람은 선택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선택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사람보다 더 크게 되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 그는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 되기를 선택할 수 없다. 우주에서 올라가는 배를 타겠다고 택할 수 있지만, 이것은 인간의 선택과 신의 뜻이 어쩌다가 이 시점에서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아들이 원하고 아버지가 뜻하는 것은 확실히 일어날 것이다.
118:6.6 (1300.2) 필사자의 인생에서, 다른 행위의 길은 줄곧 열리고 닫히며, 선택이 가능한 시절에 인격자는 이 여러 행동 과정 중에서 항상 결정을 내린다. 현세의 의지는 시간과 연결되어 있고, 그 의지는 표현할 기회를 찾으려고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시간의 연속을 얼마큼 벗어나는 데 성공했으니까, 영적 의지는 시간의 사슬로부터 비로소 해방을 맛보았으며, 이는 영적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스스로 한편이 되기 때문이다.
118:6.7 (1300.3) 의지, 선택하는 행위는, 이전의 상급 선택에 반응하여 현실화된 그 우주 틀 안에서 활동해야 한다. 인간 의지의 범위 전체는, 한 가지 세부를 빼고, 엄격하게 유한하고 제한되어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와 같이 되기를 택할 때, 그러한 선택은 유한을 초월한다. 이 선택이 또한 초한(超限)을 초월하는가는 오직 영원이 밝힐 수 있다.
118:6.8 (1300.4) 신이 전능함을 인식하는 것은 너희가 우주 시민으로서 겪는 체험을 안전하게 누리는 것, 파라다이스로 가는 긴 나그네 길이 안전하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신이 모든 것을 행한다는 허위를 받아들이는 것은 범신론(汎神論)이라는 막대한 잘못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118:7.1 (1300.5) 창조자의 의지와 인간 의지의 작용은, 대우주에서, 으뜸 건축가들이 지정한 한계 안에서, 그리고 그 가능성에 따라서 작용한다. 그러나 이 최대 한계를 이처럼 미리 예정한 것은, 이 테두리 안에서 인간 의지의 주권을 조금도 줄이지 않는다. 궁극의 선견(先見)도―모든 유한한 선택을 충분히 허락하면서―유한한 의지를 취소하지 않는다. 성숙하고 멀리 내다보는 인간은 어떤 나이 어린 동료의 결정을 아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선견은 바로 그 결정을 내릴 자유와 진정한 성질을 전혀 빼앗지 않는다. 신들은 미숙한 의지(意志)의 행동 범위를 지혜롭게 제한했지만, 그런데도 그것은 이 정해진 한계 안에서 참된 의지이다.
118:7.2 (1300.6) 모든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선택을 최대로 서로 상관시키는 것조차 그러한 선택이 진정한 것을 무효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미리 예정된 우주의 경향을 가리키며, 모든 실체가 체험으로 현실화하는 데 기여하는 역할을 택할 수도 있는 존재나 그렇지 않은 존재, 그런 의지하는 존재들이 선견이 있음을 암시한다.
118:7.3 (1300.7) 유한한 선택에서 생기는 잘못은 시간에 묶이고 시간에 제한을 받는다. 그 잘못은 오직 시간 속에, 최상 존재의 진화하는 계심 안에 존재한다. 그러한 그릇된 선택은 시간적으로 가능하고, (최상위의 불완전성 외에도) 자유 의지로 실체와 접촉함으로, 미숙한 인간이 우주에서 진보하기 위하여 부여 받아야 할 어떤 선택 범위가 있음을 가리킨다.
118:7.4 (1301.1) 시간에 제약 받는 공간 속에서 죄가 일어나는 것은 유한자의 의지가 현세에서 자유를―아니 방종까지도―가졌음을 증명한다. 죄는 우주 시민권이 주는 최고의 의무와 임무를 깨닫지 못하면서, 미숙한 자가 비교적 자주적인 인격 의지의 자유에 현혹되는 것을 묘사한다.
118:7.5 (1301.2) 사악함은 유한한 영토에서 하나님과 한편이 되지 않은 모든 자아의 일시적 현실을 드러낸다. 오로지 사람이 하나님과 한편이 됨에 따라서, 우주에서 참으로 실재하게 된다. 유한한 인격은 스스로 창조한 것이 아니지만, 초우주의 선택 무대에서 스스로 운명을 결정한다.
118:7.6 (1301.3) 생명의 수여(授與)는 물질 에너지 체계들로 하여금 스스로 영속하게 하고, 스스로 번식하고, 스스로 적응할 수 있게 만든다. 인격의 수여는 살아 있는 유기체들에게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진화하고, 신의 융합 영과 자아가 일체가 되는 늘어난 특권을 나눠준다.
118:7.7 (1301.4) 인격이 없는 살아 있는 존재들은, 처음에는 물리 통제자로서, 다음에는 보조 지성 영으로서, 에너지와 물질을 활성화시키는 지성이 있음을 가리킨다. 인격의 부여는 아버지로부터 오며, 살아 있는 체계에 독특한 선택할 특권을 나눠준다. 그러나 인격이 의지함으로 실체를 확인하려고 선택하는 특권이 있고, 이것이 참되고 자유로운 선택이라면, 진화하는 인격은 또한 자신을 혼동시키고, 자아를 교란하고 자아를 파괴하게 되는 선택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진화하는 인격이 유한자의 의지를 참으로 자유롭게 행사하려면, 우주에서 스스로 파멸하는 가능성은 피할 수 없다.
118:7.8 (1301.5) 따라서 하급 존재 수준에 두루, 인격자의 선택 한계가 좁아지면서 안전성이 늘어난다. 여러 우주를 올라감에 따라서 선택은 갈수록 더 자유롭게 된다. 하늘 가는 인격자가 신의 지위에 도달하고, 우주의 목적에 최고로 헌신하며, 우주 지혜를 달성하고, 하나님의 뜻과 길과 인간이 최종으로 일체화를 완성할 때, 궁극에 선택은 신의 자유에 접근한다.
118:8.1 (1301.6) 시공의 창조에서 자유 의지의 둘레에는 제한 조치로, 한계로, 울타리가 쳐져 있다. 물질 생명의 진화는 처음에는 기계적이고, 다음에는 지성으로 활성화되고, (인격을 받은 뒤에) 영의 지도를 받을지 모른다. 생명 운반자들이 최초에 물질 생명을 심은 것들의 잠재성은 사람 사는 세계에서 유기체의 진화를 물리적으로 제한한다.
118:8.2 (1301.7) 필사 인간은 기계요, 살아 있는 기계 작용이다. 사람의 뿌리는 참으로 물리적 에너지 세계에 있다. 인간의 여러 반응은 기계적 성질이 있고, 생명의 많은 부분이 기계와 같다. 그러나 하나의 기계 작용인 사람은 기계보다 훨씬 더 크다. 그는 지성을 부여 받고 그에게 영이 깃든다. 비록 그가 물질적 인생을 사는 동안 내내, 그의 존재의 화학 및 전기 작용을 피할 수 없어도, 깃드는 생각 조절자의 영적 충동을 집행하는 데 인간의 지성을 거룩하게 바치는 과정으로 인하여, 그는 어떻게 이 물질적 생명 기계를, 체험이 지휘하는 지혜에 굴복시키는가 더욱 배울 수 있다.
118:8.3 (1301.8) 영은 의지의 기능을 해방시키고 기계 작용은 이를 제한한다. 기계 작용으로 통제되지 않고 영과 일체가 되지 않은 불완전한 선택은 위험하고 불안정하다. 기계적 지배는 진보하지 않는 대가(代價)로 안정을 보장한다. 영과 연합하는 것은 선택을 물리적 수준에서 해방시키고, 동시에 늘어난 우주 통찰력과 증가된 우주 이해로 생긴 신다운 안정성을 보장한다.
118:8.4 (1302.1) 인간을 따라다니는 큰 위험은, 생명 작용의 사슬에서 해방을 얻으면서 영과 조화되는 기초적 연락을 이룩함으로 이 안정의 손실을 보상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기계적 안정에서 비교적 해방되었을 때, 인간의 선택은 더욱 영과 한편이 되는 것과 상관 없이, 더욱 자아의 해방을 시도할지 모른다.
118:8.5 (1302.2) 생물학적 진화의 총 원칙은 사람 사는 세계에서 원시인이 어떤 자제하는 큰 자질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진화를 의도한 바로 그 창조적 설계는 시공의 외부 제한, 즉 배고픔과 두려움을 마찬가지로 마련해 주어야 하며, 이것들은 교양이 없는 그러한 인간이 영적 수준 이하로 선택하는 범위에 실질적으로 선을 긋는다. 사람의 머리가 점점 더 어려운 장벽을 넘는 데 성공함에 따라서, 바로 이 창조적 설계는 또한 종족 유산, 곧 피땀 흘려서 얻은 체험적 지혜가 천천히 쌓이도록 마련하였다―다시 말해서, 감소되는 외부 제한과 증가하는 내부 제한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게 만들었다.
118:8.6 (1302.3) 진화, 즉 인간의 문화가 느리게 진보하는 것은 그 브레이크―물질적 타성―이 효과 있음을 증거하며, 이것은 위험한 진보 속도를 늦추도록 아주 효과 있게 작용한다. 이처럼 시간 그 자체는, 인간의 행위를 둘러싸는 다음 장벽을 때 이르게 벗어나는 결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치명적일 결과를 완화시키고 분산시킨다. 문화가 너무 빨리 진보할 때, 물질적 성취가 예배 및 지혜의 진화를 앞지를 때, 이때 문명은 그 속에 퇴보의 씨앗을 품기 때문이다. 체험적 지혜가 빠르게 늘어나서 뒷받침하지 않으면, 그러한 인간 사회는 높지만 때 이르게 도달한 수준에서 물러설 것이요, 지혜의 공백 기간, “암흑 시대”가 자아의 해방과 자제(自制) 사이의 불균형을 용서 없이 원상태로 회복할 것이다.
118:8.7 (1302.4) 칼리가스티아의 사악함은 점진적으로 인간을 해방하는, 시간 조절 장치를 피해 간 데 있다―제어하는 장벽을 까닭 없이 파괴했고, 그것은 그 시대의 필사 지성들이 체험으로 건너지 못한 장벽이었다.
118:8.8 (1302.5) 시간과 공간을 어느 정도 단축할 수 있는 지성(知性)은, 바로 그 행위로, 뛰어넘은 자제의 장벽에 준하여 효과 있게 쓰일 수 있는 지혜의 씨앗을 자체가 소유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118:8.9 (1302.6) 루시퍼는 비슷하게 지역 체계에서 때 이르게 어떤 자유를 얻는 것을 억제하도록 작용하는 시간 조절 장치를 깨뜨리려고 애썼다.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한 지역 체계는 어떤 관점과 통찰력을 체험으로 성취했으며, 이것은 바로 그 영역이 안정되기 전 시대에 질서를 어지럽히고 파괴적일 많은 기법(技法)의 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118:8.10 (1302.7) 사람이 두려움의 쇠고랑을 떨쳐 버림에 따라서, 사람이 기계로 대륙과 대양을 좁히고, 그의 기록으로 여러 세대와 세기(世紀)를 좁힘에 따라서, 성장하는 인간 지혜의 도덕적 명령에 따라서, 그는 뛰어넘은 각 제한을 새롭고 자진해서 부과한 제한으로 갈아치워야 한다. 스스로 부과한 이 제한―응보의 개념과 형제 정신의 이상―은 인간 문명의 모든 요소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도 가장 약하다. 사람은 감히 동료 인간을 사랑할 때 자제하는 자비의 옷을 입을 자격까지 갖추며, 한편 자신이 받고 싶어 하는 대로, 아니 하나님이 인간 동료를 어떻게 대접할 것이라 생각되는 대로 그들을 대우할 때, 비로소 영적 형제 정신에 도달한다.
118:8.11 (1303.1) 우주의 자동 반응은 안정되어 있고, 어떤 형태로서 우주에서 계속한다. 하나님을 알고 그의 뜻을 행하기를 바라는 자, 영 통찰력을 가진 인격자는, 신답게 안정되어 있고 영원히 존재한다. 우주에서 사람의 큰 모험은 그의 필사 지성이 기계 같이 정지된 안정 상태에서 영적으로 힘찬 신성으로 넘어가는 데 있으며, 사람은 인생의 상황 하나하나에서 “주의 뜻을 이루는 것이 내 뜻입니다”하고 선언하면서, 자기 인격이 내린 결정의 힘과 집요함으로 이 변화를 이룩한다.
118:9.1 (1303.2) 시간과 공간은 총 우주에서 한데 붙어 있는 하나의 장치이다. 시공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자와 우주에서 함께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장치이다. 유한한 인간은 시간과 공간으로 인하여 절대 수준과 효과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차단하는 매체가 없이 아무 필사자도 존재할 수 없으며, 이 매체는 유한한 행위의 범위를 제한하도록 직접 작용한다. 시간과 공간이 없이 아무 생물도 행동할 수 없지만, 모든 생물의 행위는 분명히 시공에 제한을 받는다.
118:9.2 (1303.3) 상급 지성들이 만들어낸 기계 장치는 그 창조 근원을 해방하도록 작용하지만, 모든 종속된 지능 존재의 행위를 어느 정도 어김없이 제한한다. 우주의 생물에게 이 제한은 우주들의 기계적 장치로서 분명해진다. 사람은 구속 받지 않은 자유 의지가 없다. 그의 선택 범위에 한계가 있지만, 이 선택의 반경 안에서 그의 의지는 비교적 자주권이 있다.
118:9.3 (1303.4) 필사 인격자의 생명 장치, 곧 인체는, 필사를 초월하는 창조적 설계의 산물이다. 따라서 사람이 스스로 결코 인체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오로지 하늘 가는 사람이 융합한 조절자와 연락하여, 인격 표현 작용을 스스로 만들어낼 때, 인체를 완전히 통제할 것이다.
118:9.4 (1303.5) 대우주는 유기체일 뿐 아니라, 기계적이고 살아 있는 장치이다―최상 지성이 활성화시키고, 최상의 영과 함께 조정하며, 최상 존재로서 권능과 성격을 통일하는 최대 수준에서 표현을 찾는, 살아 있는 장치이다. 그러나 유한 창조가 기계적 장치임을 부인하는 것은 사실을 부인(否認)하고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118:9.5 (1303.6) 여러 기계 장치는 지성, 곧 우주 잠재성 위에, 그 안에서, 행위하는 창조적 지성의 산물이다. 기계 장치들은 창조자의 생각을 단단하게 구체화한 것이며, 그들에게 기원을 준 의도한 개념에 늘 충실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어떤 기계 장치라도 그 목적은 기원에 있고, 기능에 있지 않다.
118:9.6 (1303.7) 이러한 기계 장치는 신의 행위를 제한하는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바로 이 기계학에서 신은 한 단계의 영원한 표현을 이룩한 것이 참말이다. 기본적 우주 장치들은 첫째 근원 중심의 절대적 뜻에 반응하여 존재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것들은 무한자의 계획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어 영원히 작용할 것이다. 이것들은 정말로 바로 그 계획의 형태, 의지(意志)가 없는 형태이다.
118:9.7 (1303.8) 우리는 파라다이스의 장치가 어떻게 영원한 아들의 성격과 서로 상관되는가 얼마큼 이해한다. 이것은 합동 행위자의 기능이다. 우리는 무제한자의 이론적 기계 장치와 신 절대자의 잠재적 몸에 관하여 우주 절대자가 무슨 작용을 하는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그러나 진화하는 최상위와 궁극위의 신 속에서 우리는 어떤 비성격 단계들이 의지를 가진 그들의 짝과 실제로 뭉쳐지고 있으며, 이처럼 형태와 몸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진화되는 것을 지켜본다.
118:9.8 (1304.1) 과거 영원에 아버지와 아들은 일치하여 무한한 영을 표현한 가운데 연합하였다. 미래 영원에 만약 시공의 지역 우주의 창조 아들과 창조 영들이 바깥 공간 영역에서 창조적 연합을 이룬다면, 그들의 신다운 성품의 통합된 표현으로서 그들이 하나됨은 무엇을 창조할 것인가? 여태까지 밝혀지지 않은 궁극 신의 명시, 즉 새로운 부류의 초월 행정가를 우리가 구경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존재들은 성격을 가진 창조자, 비성격인 창조 영, 필사 인간의 체험, 신성한 봉사자의 점진적 성격화의 연합이니까, 고유한 성격 특권을 지닐 것이다. 그들이 성격 및 비성격 실체를 포함하고, 한편 창조자와 인간의 체험을 통합할 것이므로, 그러한 존재들은 궁극의 존재일 수 있다. 바깥 공간의 우주들에서 활동할 것이라고 가정된, 이 여러 삼자일체의 그런 셋째 성격자들이 무슨 속성을 가졌든, 그들은 무한한 영이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과 유지하는 바로 그 관계와 비슷한 무엇을 그들의 창조 아버지와 창조 어머니들에 대하여 유지할 것이다.
118:9.9 (1304.2) 최상위 하나님은 모든 우주 체험의 성격화, 모든 유한한 진화의 집중, 모든 인간 실체의 극대화, 우주 지혜의 절정, 시간 세계 은하들의 조화되는 아름다움을 구현한 것이요, 우주 지성이 가진 의미의 진실, 최상의 영 가치를 가진 선이다. 지금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안에서, 이 여러 가지 유한한 다양성이 절대 수준에서 실존적으로 뭉쳐 있는 것 같이, 영원한 미래에 최상위 하나님은 이를 체험으로, 의미 있는 하나의 전체로 종합할 것이다.
118:10.1 (1304.3) 섭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미리, 모든 것을 정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 일을 할 수 없으니, 그것이 우주의 전제(專制) 정치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비교적 선택하는 능력을 가졌다. 신의 사랑은 사람의 자녀들을, 멋대로 하도록 버려두고 버릇없이 기를 그러한 근시안적 사랑도 아니다.
118:10.2 (1304.4)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삼위일체로서―전능한 최상위가 아니지만, 전능자의 최상 성질은 결코 이분들 없이 나타날 수 없다. 전능자의 성장은 사실성의 절대자들에게 집중하고, 잠재성의 절대자들에 바탕을 둔다. 그러나 전능한 최상위의 기능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기능과 관련을 가진다.
118:10.3 (1304.5) 최상 존재 안에서, 이 체험하는 신의 성격은 모든 단계의 우주 활동을 부분적으로 다시 통일하는 듯이 보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삼위일체를 한 분의 하나님으로 보기를 바랄 때, 그리고 이 개념을 현재 알려지고 조직된 대우주에 국한한다면, 우리는 진화하는 최상 존재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부분 초상(肖像)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 최상위 신이 대우주에서 유한한 물질ㆍ지성ㆍ영을 성격으로 통합한 것으로서 진화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118:10.4 (1304.6) 신들은 속성을 가졌지만, 삼위일체는 기능을 가졌으며, 삼위일체처럼 섭리는 하나의 기능이니, 이것은 온 우주의 통제, 전반적 비성격 통제의 복합체이며, 전능자의 힘 속에서 통합되고 있는 칠중자의 진화 수준으로부터, 궁극위 신의 초월 영역을 거쳐서, 위로 뻗는다.
118:10.5 (1304.7) 하나님은 각 인간을 한 아이로서 사랑하며, 그 사랑은 만세(萬世)와 영원을 통해서 각 인간을 감싼다. 섭리는 전체에 관하여 작용하며, 기능이 전체에 관계되는 대로, 어떤 인간의 기능도 다룬다. 어떤 존재에 관하여도 섭리로 간섭하는 것은, 어떤 총체가 진화로 성장하는 데 관계되는 대로 바로 그 존재의 기능이 중요함을 가리킨다. 그러한 전체는 민족 전체, 국가 전체, 행성 전체, 또는 더 높은 전체까지도 될 수 있다. 하나의 인격자로서 인간의 중요성이 아니라, 그 인간의 기능의 중요성이 섭리에 따른 간섭을 일으킨다.
118:10.6 (1305.1) 그런데도, 한 성격자로서 아버지는 어느 때라도, 모두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에 어울리게, 하나님의 사랑에 자극 받는 대로, 우주 사건들의 흐름 속에 아버지다운 손을 집어넣을지 모른다.
118:10.7 (1305.2) 그러나 사람이 섭리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나 흔히 자신이 상상하는 결과요, 우연한 여러 상황이 어쩌다 옆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가 존재하는 유한한 영역에서 실재하고 태어나는 섭리가 있으니, 이 섭리는 공간의 에너지, 시간의 움직임, 지능이 품는 생각, 인품을 나타내는 이상, 영적 성질의 욕망, 그리고 진화하는 인격자들이 일부러 의지한 행위의 상호 관계를 참되게 현실화하는 것이다. 물질 영역의 여러 상황은 최상위와 궁극위의 맞물리는 계심 속에서, 마지막으로 유한하게 통합된다.
118:10.8 (1305.3) 대우주의 장치가 지성의 전반적 통제를 통해서 마지막으로 정밀한 점까지 완전하게 됨에 따라서, 사람의 지성(知性)이 영과 완전히 통합함으로 신에 도달하는 완전한 수준까지 올라감에 따라서, 그리고 그 결과로 최상위가 이 모든 우주 현상의 실제 통일자로서 솟아남에 따라서, 마찬가지로 섭리는 점점 더 식별할 수 있게 된다.
118:10.9 (1305.4) 진화 세계에서 때때로 생기는 놀랍게 우연한 어떤 조건들은 차츰 솟아나는 최상위의 계심 때문일지 모르고, 이것은 그의 미래 우주 활동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필사자가 섭리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섭리가 아니다. 그러한 문제에 대한 판단은, 인생의 여러 상황의 참 의미까지 멀리 내다보는 시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대단히 지장을 받는다. 필사자가 행운이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많은 것은 정말로 불운인지 모른다. 벌어들이지 않은 여가와 받을 자격이 없는 재산을 주는 행운의 미소는 인간의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것일지도 모른다. 고통받는 어느 필사자에게 시련을 퍼붓는, 잔인하게 보이는 부당한 운명은, 실제로 물렁한 쇠처럼 미숙한 인격을 단련된 강철 같은 참 인품으로 변화시키는, 단련의 불인지 모른다.
118:10.10 (1305.5) 진화하는 여러 우주에 섭리가 있고, 인간이 진화 우주들의 목적을 파악하는 능력을 얻은 바로 그 한도까지, 인간은 이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 우주의 목적을 식별하는 완벽한 능력은 인간이 진화로 완성되는 것과 같으며, 달리 말하면, 불완전한 우주들의 현재 상태의 한계 안에서 최상위에 도달했다고 표현해도 좋다.
118:10.11 (1305.6) 아버지의 사랑은 개인의 마음 속에서, 모든 다른 개인의 행위나 반응에 상관 없이, 직접 작용한다. 그 관계―사람과 하나님―은 개인적이다. 신의 비성격 계심(전능한 최상위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은 부분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체에 대한 존중을 나타낸다. 최상위가 전반적으로 통제한다는 섭리는 유한한 운명에 도달하는 데 우주에서 진보하는 연속된 부분으로서 갈수록 더 명백해진다. 체계ㆍ별자리ㆍ우주ㆍ초우주들이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됨에 따라서, 최상위는 벌어지고 있는 모든 사건을 뜻 있게 상관시키는 자로서 점점 더 솟아나며, 한편 궁극위는 만물의 초월 통일자로서 차츰차츰 솟아난다.
118:10.12 (1306.1) 진화하는 세계에서 처음에는 물질 체제의 자연 현상과 인간의 개인적 소망은 흔히 반대되는 듯이 보인다. 진화 세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것은 오히려 필사 인간이 이해하기 어렵다―자연 법칙은 너무나 흔히 겉보기에 모질고 무정(無情)하며, 인간이 이해하는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모든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나 행성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인류가 진보함에 따라서, 우리는 이 관점이 다음 요인 때문에 수정됨을 지켜본다:
118:10.13 (1306.2) 1. 사람의 확대되는 상상력―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를 더욱 이해하게 되는 것. 시간 세계의 물질적 사실, 생각하는 중요한 관념, 영적 통찰력을 가진 귀중한 이상을 이해하는 능력이 커지는 것. 사람들이 오직 물리적 성질을 가진 사물의 자로 재는 한, 그들은 결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조화를 발견할 희망이 없다.
118:10.14 (1306.3) 2. 사람의 증가하는 통제―물질 세계의 법칙에 대한 지식의 점진적 누적, 영적 존재의 목적, 그리고 이 두 실체를 철학으로 조정하는 가능성. 사람, 야만인은 자연력의 공격을 받고서 무력했고,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에 불쌍하게 지배되어 노예 같았다. 반(半)문명화된 사람은 자연 영역의 비밀이 쌓인 창고를 비로소 열고 있으며, 과학은 느리지만 효과 있게 미신(迷信)을 깨뜨리고 있고, 한편 동시에 철학의 의미와 참된 영적 체험의 가치를 이해하기 위하여, 새롭고 확대된 사실적 기초를 마련해 주고 있다. 문명화된 사람은 언젠가 행성의 자연력을 비교적 통달하는 일을 성취할 것이다.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함은 동료 인간에게 주는 사랑으로서 실질적으로 퍼부어질 것이요, 한편 인간 존재의 가치는 필사자 능력의 한계에 가까이 갈 것이다.
118:10.15 (1306.4) 3. 사람의 우주 통합―인간의 통찰력이 높아지고 그 위에 인간의 체험적 성취가 증가하면, 사람을 최상위의 통일하는 계심―파라다이스 삼위일체와 최상 존재―와 더욱 조화되게 만든다. 바로 이것이 빛과 생명 속에 오랫동안 안정된 세계들에서 최상위의 통치권을 확립한다. 그렇게 진보된 행성들은 정말로 조화의 시(詩)요, 우주 진리를 추구함으로 얻은 선, 성취한 선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그림이다. 그러한 일이 한 행성에서 일어날 수 있다면, 이때 대우주에서 한 체계와 상급 단위에, 그들도 또한 유한한 성장 잠재성이 소모되었음을 가리키는 정착된 상태에 도달함에 따라서, 더욱 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118:10.16 (1306.5) 이 진보된 체제에 속하는 행성에서, 섭리는 하나의 사실이 되었고, 생명의 여러 상황은 서로 상관되지만, 이것은 사람이 세상의 물질 문제를 지배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우주의 경향을 따라서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우주의 아버지께 도달하기까지 최상위의 길을 따르고 있다.
118:10.17 (1306.6)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다. 이 나라가 한 세계의 각 사람 마음 속에서 사실이 될 때, 이때 하나님의 통치는 그 행성에서 사실이 되었다. 이것이 최상 존재의 통치가 달성된 것이다.
118:10.18 (1306.7) 시간 세계에서 섭리를 깨달으려면, 사람은 완전을 성취하는 과제를 마쳐야 한다. 그러나 만물의 아버지를 추구하는 길에서 하나님을 아는 필사자의 전진을 위하여, 선하든 악하든, 만물이 함께 일한다는 우주의 사실을 곰곰이 생각할 때, 사람은 지금도 이 섭리의 영원한 의미를 미리 맛볼 수 있다.
118:10.19 (1306.8) 사람이 물질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위로 손을 뻗을 때, 갈수록 더 사람은 섭리를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완성된 영적 통찰력에 이르는 것은 하늘 가는 인격자로 하여금, 이때까지 혼돈이었던 것 속에서 조화를 탐지할 수 있게 만든다. 상물질의 상지혜조차 이 방향으로 진정한 진보가 있음을 가리킨다.
118:10.20 (1307.1) 섭리는 부분적으로, 미완성 우주에서 불완전한 최상위의 전반적 통제력이 나타나는 것이며, 따라서 늘 이러함이 틀림없다:
118:10.21 (1307.2) 1. 부분적이다―최상 존재의 현실화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118:10.22 (1307.3) 2. 예측할 수 없다―인간의 태도가 변동하기 때문에. 인간의 태도는 늘 수준에 따라서 달라지며, 따라서 최상위 안에서 대응하여 겉보기에 변하는 반응을 일으킨다.
118:10.23 (1307.4) 사람들이 인생의 여러 상황에서 섭리의 간섭이 있기를 빌 때, 그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인생에 대한 그들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섭리는 변덕스럽지 않고, 환상이나 요술도 아니다. 섭리는 유한한 우주들의 강력한 군주가 천천히, 확실히 솟아나는 것이요, 진화하는 인간은 우주에서 진보하면서 때때로 그의 위엄 있는 계심을 탐지한다. 섭리는 처음에 최상위에, 다음에 궁극위에, 그리고 아마도 절대자 안에 있는 영원의 목표들을 향하여, 공간의 은하와 시간 세계의 성격자들이 확실하고 분명하게 행진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한 속에 똑같은 섭리가 있다고 믿으며, 이것이 수많은 우주에서 우주의 전체 광경을 이처럼 동원하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뜻이요, 행위요, 목적이다.
119:0.1 (1308.1) 나는 네바돈 저녁별들의 우두머리요, 네바돈의 우주 군주 미가엘이 일곱 번 자신을 수여한 이야기를 계시하는 사명을 띠고 가브리엘에게서 유란시아로 배치를 받았으며, 내 이름은 가발리아이다. 이 글을 발표하면서, 나는 내 직책이 부과한 제한을 엄격하게 준수하겠다.
119:0.2 (1308.2) 자신을 수여하는 속성은 우주의 아버지의 파라다이스 아들들에게 본래부터 있다. 하급 생물의 사는 체험에 가까이 가려는 소망으로, 다양한 계급의 파라다이스 아들들은 파라다이스 부모의 신다운 성품을 반영하고 있다.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가운데 영원한 아들은 이 관습에 길을 안내하였고, 시공 세계에서 온 첫 필사자 그랜드판다가 승천하던 시절에, 하보나의 일곱 회로에 자신을 일곱 번 수여하였다. 영원한 아들은 공간의 지역 우주들에게, 그의 대표자인 미가엘과 아보날 아들들의 몸을 입고서 자신을 계속하여 수여한다.
119:0.3 (1308.3) 계획중인 한 지역 우주에 영원한 아들이 한 창조 아들을 주실 때, 그 창조 아들은 그 새 우주를 완성하고 통제하고 조직하는 총 책임을 맡으며, 이것은 그가 일곱 번 생물로서 자신 수여를 마치는 데 성공하고, 관할 초우주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인가를 받기까지 그 새 우주의 완전한 통치권을 쥐지 않겠다고 영원한 삼위일체에게 드리는 엄숙한 서약을 포함한다. 우주를 조직하고 창조하는 일에 종사하려고 파라다이스로부터 밖으로 떠나가기를 자청하는 미가엘 아들은 모두 이 의무를 진다.
119:0.4 (1308.4) 이렇게 생물로 육신화하는 목적은 그러한 창조자들로 하여금 지혜롭고 동정심 있고, 공정하고 이해심 있는 군주가 되게 만들려는 것이다. 이 신다운 아들들은 날 때부터 공정하지만, 연속해서 자신을 수여하는 이 체험의 결과로서 이해심을 가지고 자비로워진다. 그들은 날 때부터 자비롭지만, 이 여러 체험은 새롭고 추가된 방법으로 그들을 자비롭게 만든다. 이 자신 수여는 신다운 정으로, 그리고 공정한 판단으로 지역 우주를 다스리는 숭고한 과제를 위하여, 그들이 받는 교육과 훈련에서 마지막 걸음이다.
119:0.5 (1308.5) 이 수여에 영향을 받고 혜택을 얻는 다른 계급의 우주 지성 존재들 뿐 아니라 여러 세계ㆍ체계ㆍ별자리에는 부수되는 수많은 이익이 생기지만, 그래도 수여는 1차적으로 바로 창조 아들이 친히 받는 훈련과 우주 교육을 마치도록 고안되어 있다. 이 수여는 한 지역 우주를 지혜롭고 공정하고 효과 있게 관리하는 데 꼭 필요하지 않지만, 다채로운 형태의 생명과, 지적이지만 불완전한 무수한 생물이 가득한 그러한 우주를 공정하고, 자비롭게, 이해심을 가지고 관리하는 데 절대로 필요하다.
119:0.6 (1308.6) 미가엘 아들들은 그들이 창조한 다양한 계급 존재들에 대하여 충분하고 공정한 동정심을 가지고 우주를 조직하는 일을 시작한다. 그들은 이 모든 다른 생물에게 베풀려고 자비를 엄청나게 축적해놓았으며, 스스로 만든 이기적 수렁에 빠져 실수하고 버둥거리는 자들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까지도 가졌다. 그러나 그러한 응보와 올바름을 부여하는 것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판단하기에 넉넉하지 않을 것이다. 초우주의 이 삼자일치 통치자들은, 창조 아들이 자신이 만든 생물이 존재하는 환경 속에서, 바로 이 지음 받은 자로서 실제로 체험을 겪어서 그들의 관점을 정말로 얻기까지, 결코 한 창조 아들을 우주 군주로 인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방법으로 그러한 아들들은 총명하고 이해심 있는 통치자가 되고, 그들이 다스리고 우주 권한을 행사하는 이 다양한 집단을 알게 된다. 실제 체험을 겪음으로, 그들은 체험을 겪는 지음 받은 존재에서 태어난 실용적 자비, 공정한 판단, 참을성을 스스로 가진다.
119:0.7 (1309.1) 네바돈 지역 우주는 자신 수여 봉사를 마친 한 창조 아들이 지금 다스린다. 진화하고 완전하게 되는 자기 우주의 광대한 영토 전체를 그는 공정하고 자비로운 최고 위치에서 다스린다. 네바돈 미가엘은 시공의 우주들에게 영원한 아들이 611,121번째 보낸 분이며, 그는 4천억 년쯤 전에 너희 지역 우주의 조직을 시작하였다. 미가엘은 유란시아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을 때, 약 10억 년 전에, 첫 수여 모험을 준비했다. 그의 여러 수여는 약 1억 5천만 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났고, 마지막 수여는 1천 9백 년 전에 유란시아에서 일어났다. 나의 직권이 허락하는 만큼 충실하게, 나는 이제 이 여러 수여의 성질과 특징을 펼쳐 보이겠다.
119:1.1 (1309.2) 거의 10억 년 전, 그가 (미가엘이) 아무 말 없이 임무를 띠고 자리를 비울 동안, 형 이마누엘이 네바돈에서 곧 권한을 쥘 것이라는 미가엘의 발표를 네바돈 우주에 모여든 지휘자와 우두머리들이 들었을 때는 구원자별에서 엄숙한 때였다. 이 일에 대하여 달리 아무런 발표가 없었고, 다만 별자리 아버지들에게 주는 작별 방송이 다른 지시 중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 기간에 내가 파라다이스 아버지가 명하신 것을 행하려고 가는 동안, 나는 너희를 이마누엘의 보호와 관리 하에 두노라.”
119:1.2 (1309.3) 이 작별 방송을 내보낸 뒤에, 그가 혼자 왔다는 것을 제외하고 이전에 여러 경우에 유버르사나 파라다이스를 향하여 떠나려고 준비할 때 한 것과 똑같이, 미가엘은 구원자별의 파송하는 들판에 나타났다. 그는 이 말씀으로 출발 선언을 맺었다: “나는 잠시 동안만 너희를 떠나노라. 내가 알건대 너희 가운데 여럿이 나와 함께 가고 싶어 하지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으로 올 수 없느니라. 내가 바야흐로 하고자 하는 것을 너희는 할 수 없느니라. 나는 파라다이스 신들의 뜻을 행하려고 가고, 내 사명을 마치고 이 체험을 얻고 나서, 너희 가운데 내 자리로 돌아오겠노라.” 이렇게 말하고 나서, 네바돈 미가엘은 모여든 모두의 눈앞에서 사라졌고, 표준 시간으로 20년 동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온 구원자별에서, 오로지 신다운 봉사자와 이마누엘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알고 있었고, 늘 하나된 이는 그의 비밀을 오로지 그 우주의 최고 집행자, 곧 찬란한 저녁별 가브리엘과 나누었다.
119:1.3 (1309.4) 구원자별의 모든 거주자, 그리고 별자리와 체계의 본부 세계에서 거하는 자들은 그 임무에 관하여, 그리고 창조 아들이 어디 계신가에 대하여 무슨 소식을 들을까 바라면서, 각자의 우주 정보 수신소(受信所) 둘레에 모였다. 미가엘이 떠난 뒤 사흘째가 되기까지, 가능한 중요성을 가진 아무 소식도 수신되지 않았다. 네바돈에서 멜기세덱 계급의 본부인 멜기세덱 구체로부터 구원자별에, 그날 한 통신문이 기록되었는데, 그것은 단지 놀랍고 결코 전에 들어 본 적이 없는 이 사건을 기록했을 뿐이다: “오늘 정오에 이 세계의 접대하는 들판에 한 이상한 멜기세덱 아들이 나타났는데, 그는 우리 집단의 출신이 아니지만 온전히 우리 계급과 비슷하다. 그에게는 유버르사로부터 신임장을 지닌 전천사(全天使)가 혼자 뒤따라 왔는데, 그 전천사는 우리의 우두머리에게 주는 명령서를 제출했다. 이것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로부터 내려왔고, 구원자별의 이마누엘의 동의를 받았으며, 이 새 멜기세덱 아들을 우리 계급으로 받아들이고, 네바돈 멜기세덱들의 비상 근무에 배치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렇게 하라고 명령이 내렸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119:1.4 (1310.1) 그리고 이것이 미가엘의 첫 자신 수여에 관하여 구원자별의 기록에 나타나는 거의 전부이다. 유란시아 시간으로 1백 년이 지날 때까지 아무 일도 더 나타나지 않으며, 그때 미가엘이 돌아와서 아무 선포 없이, 우주 사무의 지휘를 다시 맡았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멜기세덱 세계에 이상한 기록이 발견될 터이니, 그 시대의 비상 군단에서 이 독특한 멜기세덱 아들이 봉사한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기록은 지금 아버지 멜기세덱의 집 앞뜰을 차지하는 어느 소박한 성전에 보존되어 있는데, 그것은 24가지 우주 비상시 임무에 배치된 것과 관련하여, 잠시 있던 이 멜기세덱 아들이 봉사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아주 최근에 이 기록을 들여다보았는데, 이렇게 끝을 맺는다:
119:1.5 (1310.2) “그리고 오늘 정오에, 이전에 선포가 없이, 우리 단체 중에서 오직 셋이 구경했는데, 우리 계급을 방문한 이 아들은, 그가 왔을 때처럼 오로지 한 전천사의 수행을 받고서, 우리 세계에서 사라졌다. 이 방문자는 한 멜기세덱으로서 살았고, 멜기세덱의 모습을 입고서 멜기세덱으로서 일했으며, 그가 우리 계급의 비상시 아들로서 맡은 임무를 모두 충실하게 수행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이 기록을 마감한다. 보편적 찬성을 얻어서 그는 멜기세덱들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견줄 데 없는 지혜와 최고의 사랑으로, 임무에 훌륭히 헌신함으로, 우리의 사랑과 찬미를 얻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우리와 함께 수고하였으며, 언제까지나 우리는 그에게 충성스럽고 헌신하는 동료 멜기세덱이니, 이는 우리 세계에서 이 낯선 이가 이제는 영원히 멜기세덱 성품을 가진 우주 봉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119:1.6 (1310.3) 미가엘의 첫 자신 수여에 관하여 너희에게 일러 주도록 허락받은 것은 이것이 전부이다. 우리는 물론, 10억 년 전에 멜기세덱들과 함께 어떻게 그렇게 신비스럽게 수고한 이 이상한 멜기세덱이 다른 분이 아니라, 첫 수여 사명으로 육신화한 미가엘이었음을 익히 알고 있다. 그 기록은 독특하고 유능한 이 멜기세덱이 미가엘이었다고 꼬집어 말하지 않지만, 우리는 보편적으로 그였다고 믿는다. 아들별의 기록 외에, 그 사실의 실제 진술은 아마도 발견할 수 없고, 그 비밀 세계의 기록은 우리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오직 신다운 아들들이 거하는 이 신성한 세계에서 육신화와 수여의 신비를 충분히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미가엘이 여러 번 수여한 것이 사실임을 알지만, 그 수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한 우주의 통치자, 곧 멜기세덱들을 지으신 이가,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신비스럽게, 그들 무리의 하나가 되고, 그들 가운데 하나로서, 1백 년 동안 한 멜기세덱 아들로서 그들 사이에 살고 일할 수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어쩌다가 그런 일이 있었다.
119:2.1 (1310.4) 미가엘이 멜기세덱으로 자신을 수여한 일이 있은 뒤 거의 1억 5천만 년 동안, 네바돈 우주에서 모든 일이 순조로웠는데, 이때 37번 별자리의 11번 체계에서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는 체계 군주인 어느 라노난덱 아들의 오해가 관련되었고, 그것은 별자리 아버지들의 판결을 받고, 늘 충실한 이, 곧 그 별자리의 파라다이스 상담자의 승인을 받았지만, 항의하는 체계 군주는 그 판결을 충분히 달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1백 년이 넘도록 불만을 품은 뒤에, 그는 창조 아들의 통치권에 대항하여 네바돈 우주에서 일찍이 선동되었던 바 가장 널리 퍼지고 비참한 반란 중 하나에서 동료들을 이끌었으며, 이 반란은 유버르사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행위로 판결을 받고 종결된 지 오래다.
119:2.2 (1311.1) 이 반역한 체계 군주 루텐시아는 그의 본부 행성에서 네바돈 표준 시간으로 20년이 넘도록 최고로 군림하였다. 그리고 나서, 유버르사로부터 승인을 얻고서 최고자들은 그를 격리하라고 명령하였고, 싸움으로 분열되고 혼란에 빠진, 그 체계에 속한 사람 사는 세계들의 지도를 담당할 새 체계 군주를 지명해달라고, 구원자별의 통치자들에게 요청하였다.
119:2.3 (1311.2) 구원자별에서 이 요청을 받음과 동시에, 미가엘은 우주 본부에서 자리를 비울 뜻을 표시하는 둘째 특별 선포를 시작했는데, 이것은 “내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명을 실행”하려는 목적이었고, “때가 되면 돌아오리라”고 약속하면서, 파라다이스 형인 늘 하나된 이, 이마누엘의 손에 모든 권한을 부여하였다.
119:2.4 (1311.3) 그리고 나서, 멜기세덱 수여와 관련하여 떠났을 때 본 것과 똑같은 기법으로 미가엘은 그의 본부 구체를 다시 떠났다. 설명이 없이 이 휴가를 떠난 뒤 사흘째에, 네바돈의 1차 라노난덱 아들의 예비군 사이에, 새롭고 알려지지 않은 구성원이 나타났다. 이 새 아들은 아무 발표도 없이 정오에 나타났고, 3품 천사 한 명의 수행을 받았는데, 그는 유버르사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로부터 가져온 신임장을 지녔다. 이것은 구원자별의 이마누엘의 인가를 받았으며, 이 새 아들이 폐위된 루텐시아의 후계자로서, 새 군주가 임명될 때까지 체계 군주 대리로서 전권을 가지고 37번 별자리의 11번 체계에 배치하라고 지시하였다.
119:2.5 (1311.4) 지역 우주 시간으로 17년이 넘도록, 낯설고 알려지지 않은 이 임시 통치자는 혼란에 빠지고 사기(士氣)가 꺾인 이 지역 체계의 사무를 관리하고 어려운 일들을 지혜롭게 판결하였다. 아무 체계 군주도 일찍이 더 뜨겁게 사랑을 받거나, 더 널리 명예와 존경을 받지 못했다. 응보와 자비 면에서 이 새 통치자는 그 시끄러운 체계에 질서를 가져왔고, 한편 모든 백성에게 힘들여 봉사하였으며, 모반한 선임자에게 그가 경솔했던 것을 이마누엘에게 사과하기만 한다면, 그 체계 권한의 보좌를 나눠 가지는 특권을 제안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루텐시아는 새롭고 낯선 이 체계 군주가 다른 이가 아니라 미가엘, 그가 아주 최근에 반항했던 바로 그 우주 통치자임을 잘 알고서, 이렇게 자비로 꺼낸 말을 걷어찼다. 그러나 그릇 인도받고 속았던 그의 추종자 수백만 명은 이 새 통치자의 용서를 받아들였고, 이분은 팔로니아 체계의 구원자 군주로서 그 시대에 알려졌다.
119:2.6 (1311.5) 그리고 나서 새로 임명된 체계 군주가 도착한 그 중대한 날이 다가왔는데, 그는 폐위된 루텐시아의 영구한 후계자로 우주 당국으로부터 임명받았고, 네바돈에서 알려진 가장 고귀하고 가장 인자한 체계 통치자가 떠나는 것을 온 팔로니아가 슬퍼하였다. 그는 체계 전체의 사랑을 받고 동료인 모든 라노난덱 아들 집단의 찬미를 받았다. 그가 떠날 때 예식이 없지는 않았다. 그가 체계 본부를 떠났을 때, 큰 잔치가 열렸다. 잘못한 그의 선임자조차 이 말을 남겼다: “당신의 모든 길에서 당신은 공정하고 올바르나이다. 나는 파라다이스의 통치를 계속 거부하지만, 나는 당신이 공정하고 자비로운 행정가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나이다.”
119:2.7 (1312.1) 그리고 나서 모반한 체계의 이 임시 통치자는 행정을 맡는 일로 잠시 머물렀던 그 행성을 떠났고, 그 뒤 사흘째에 미가엘은 구원자별에 나타나서 네바돈 우주의 지휘를 다시 시작했다. 미가엘의 통치와 권한의 높아지는 관할권을 가리키는 셋째 유버르사 선포가 곧 뒤따랐다. 첫째 선포는 그가 네바돈에 도착할 때 내렸고, 둘째는 멜기세덱 수여를 마친 뒤에 곧 있었으며, 이제 셋째 선포는 둘째 임무, 즉 라노난덱 임무가 종결되고 나서 있었다.
119:3.1 (1312.2) 구원자별의 최고 회의는 61번 별자리, 87번 체계, 217번 행성에서, 그들을 돕도록 한 물질 아들을 파송해 달라는 생명 운반자들의 요청의 심의를 막 마쳤다. 이제 이 행성은 또 다른 체계 군주가 타락해 버린, 사람이 거하는 세계들을 다스리는 체계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때까지 온 네바돈에서 그러한 두 번째 반란이었다.
119:3.2 (1312.3) 미가엘의 요청을 받고 나서, 이 행성 생명 운반자들의 탄원에 대한 조처는 이마누엘이 고려하고 이에 대하여 그의 보고가 있을 때까지 연기되었다. 이것은 비정상 과정이었고, 우리 모두가 무언가 특별한 일이 있으리라 어떻게 기대하였는가 나는 잘 기억하는데, 우리는 오랫동안 마음을 졸이지 않았다. 미가엘이 나서서 우주의 지휘를 이마누엘의 손에 맡겼고, 한편 하늘 세력의 지휘를 가브리엘에게 맡겼으며, 이렇게 행정 책임을 처리하고 나서 그는 우주 어머니 영에게 작별을 알리고, 앞서 두 경우에 했던 것과 똑같이, 구원자별의 파송하는 들판으로부터 사라졌다.
119:3.3 (1312.4) 기대된 바와 같이, 그 뒤 사흘째, 아무 발표 없이, 61번 별자리, 87번 체계의 본부 세계에, 2품 천사 혼자의 수행을 받고서, 한 낯선 물질 아들이 나타났는데, 그는 유버르사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승인을 받고, 구원자별의 이마누엘의 인가를 받았다. 즉시, 체계 군주 대리는 새롭고 신비스러운 이 물질 아들을 217번 세계의 행성 영주 대행으로 임명했으며, 이 임명은 당장에 61번 별자리 최고자들의 확인을 받았다.
119:3.4 (1312.5) 이처럼 독특한 이 물질 아들은 격리된 세계, 탈퇴와 반란이 있던 세계에서 어려운 경력을 시작했는데, 그 세계는 바깥 우주와 아무런 직접 통신이 없이 두절된 체계에 자리잡았고, 그는 행성 시간으로 온전히 한 세대 동안 혼자서 일했다. 이 비상시 물질 아들은 직무를 이행하지 않는 행성 영주와 그의 참모진 전체를 뉘우치고 회복하도록 만들었고, 여러 지역 우주에서 확립된 대로 파라다이스 통치에 충성스럽게 봉사하는 길로 그 행성이 회복되는 것을 구경하였다. 시간이 되자 한 물질 아들과 딸이 새로 활력을 얻고 회복한 이 세계에 도착했으며, 그들이 눈에 보이는 행성 통치자로서 정식으로 취임하고 나서, 임시 영주, 즉 비상시 행성 영주는 어느 날 정식으로 떠났으며 정오에 사라졌다. 그 뒤 사흘째, 미가엘은 구원자별에서 그의 눈에 익은 자리에 나타났고, 바로 뒤에 여러 초우주 방송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넷째 선포를 내보냈는데, 이것은 네바돈에서 미가엘의 통치권이 더욱 진전된 것을 발표하였다.
119:3.5 (1312.6) 혼란에 빠진 이 행성에서 이 물질 아들이 참을성 있고 꿋꿋하고 솜씨 있게 시련의 상황에 부닥친 것에 대하여 이야기할 허가를 받지 못해서 나는 서운하다. 이 고립된 세계를 다시 찾은 것은 네바돈에서 두루, 구원의 연대기에서 가장 아름답게 감동을 주는 장(章)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임무가 끝날 때가 되자, 그들의 사랑하는 통치자가 어째서 어느 하위 계급의 지적 존재의 모습을 입고 이러한 수여에 거듭 종사하기를 택하는가 온 네바돈이 분명히 알게 되었다.
119:3.6 (1313.1) 멜기세덱 아들로서, 그리고 나서 라노난덱 아들로서, 다음에 물질 아들로서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한 것은 모두 똑같이 신비스럽고 설명할 수 없다. 각 경우에 그는 갑자기, 수여되는 집단에서 충분히 성장한 개인으로서 나타났다. 그러한 육신화의 신비는, 아들별의 신성한 구체에서 안쪽의 기록 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자들을 제외하고, 아무에게도 결코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119:3.7 (1313.2) 고립되고 반란이 있던 세계의 행성 영주로서 이렇게 놀라운 수여가 있은 뒤로, 네바돈의 어떤 물질 아들이나 딸도, 그들의 임무에 대하여 불평하거나 행성 임무가 어렵다고 비난할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언제나 물질 아들들은 우주의 창조 아들 속에, 이해하는 통치자이자 공감하는 친구, 즉 그들이 단련과 시험을 받아야 하는 것 같이, “모든 면에서 단련과 시험을 받은” 자가 있음을 알고 있다.
119:3.8 (1313.3) 이러한 각 임무에, 그 우주에 기원을 가진 모든 하늘 지성 존재가 더욱 봉사하고 충성하는 시대가 뒤따랐으며, 한편 뒤잇는 각 수여 시대는 우주 행정의 모든 방법과 정부의 모든 기법이 향상되고 개선되는 특징을 나타냈다. 이 수여가 있은 뒤에 어떤 물질 아들이나 딸도, 결코 알면서 미가엘에 맞서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의식하면서 그를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헌신하여 그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오직 속임수와 궤변을 통해서, 근래에 상급 부류의 모반 성격자들이 아담들을 그릇된 길로 이끌었다.
119:4.1 (1313.4) 유버르사에서 1천 년마다 있는 정기 점호 중 하나가 끝나자, 미가엘이 나서서 이마누엘과 가브리엘의 손에 네바돈 정부를 맡겼다. 그리고 물론 그러한 행위에 뒤이어 지난 시절에 일어났던 것을 상기하면서, 우리는 모두 미가엘이 넷째 수여 임무를 띠고 사라지는 것을 구경하려고 준비했다. 우리는 오래 기다리지 않았는데, 그가 곧 구원자별의 파송하는 들판으로 나가서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119:4.2 (1313.5) 이 수여로 사라진 뒤 사흘째에, 유버르사로 보내는 우주 방송에서, 네바돈의 천사 본부로부터 우리는 이 중요한 뉴스 항목을 보았다: “어느 알려지지 않은 세라핌이 예고 없이 도착했음을 알린다. 그에게는 상천사 하나와 구원자별의 가브리엘이 따라왔다. 등록되지 않은 이 세라핌은 네바돈 계급의 출신으로 자격을 갖추었고, 유버르사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준 신임장을 지녔으며, 이것은 구원자별의 이마누엘의 인가를 받았다. 이 세라핌은 지역 우주의 최상 계급 천사에 속하는 것으로 검사 결과가 나왔고, 교육 상담자 군단에 이미 배치되었다.”
119:4.3 (1313.6) 이번에 천사로 자신을 수여하는 동안, 표준 우주 달력으로 40년이 넘도록 미가엘은 구원자별에서 자리를 비웠다. 이 기간에 그는 교육에 관하여 상담하는 천사로 부속되었고, 이것은 26명의 다른 주요 선생들에게 너희가 개인 비서라 부를 만한 직책이었는데, 그는 22개의 다른 세계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마지막 임무, 즉 최종 임무에는 네바돈 우주에서 3번 별자리, 84번 체계, 462번 세계에서, 어느 삼위일체 교육 아들의 수여 임무에 부속된 상담자이자 조수로서 배치되었다.
119:4.4 (1314.1) 7년 동안 이 임무를 통하여 내내, 이 삼위일체 교육 아들은 그의 천사 동료의 신분에 관하여 온전히 납득이 간 적이 없었다. 그 시대에 모든 세라핌이 특별한 관심과 훑어보는 눈길에 대상이 된 것이 참말이다. 우리의 사랑하는 군주가 세라핌으로 꾸미고서 우주에 나가 있음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의 신분을 결코 확신할 수 없었다. 이 삼위일체 교육 아들의 수여 임무에 부속될 때까지 그는 결코 분명히 신분이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대 전체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우리가 생물로서 자신 수여 임무를 띠고 온, 우주의 군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맞아들이는 주인이었던 것을 발견할까 저어하여, 최상 세라핌들은 언제나 특별한 배려로 보는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천사들에 관하여, 그들의 창조자요 통치자가 “모든 면에서 천사 성격의 모습을 입고서 단련과 시험을 받았다”는 것이 언제까지나 참말이 되었다.
119:4.5 (1314.2) 이 연속되는 수여가 갈수록 더 낮은 형태의 우주 생명의 성질을 가짐에 따라서, 가브리엘은 이러한 육신화 모험에서 점점 더 동료가 되었고, 그는 수여된 미가엘과 우주 통치자 대행 이마누엘 사이에 우주 연락원으로서 활동했다.
119:4.6 (1314.3) 이제 미가엘은 그가 창조한 우주 아들들, 즉 멜기세덱, 라노난덱, 물질 아들, 이 세 계급에서 자신을 수여하는 체험을 거쳤다. 그 다음에 의지를 가진 가장 낮은 형태의 생물, 즉 시공의 진화하는 필사자의 하늘 가는 생애의 여러 단계에 눈을 돌리기 전에, 그는 황송하게도, 한 최상 세라핌으로서 천사 생명의 모습으로 성격화된다.
119:5.1 (1314.4) 유란시아에서 시간을 계산하는 대로 3억 년보다 조금 더 전에, 우리는 우주 권한이 이마누엘에게 또 한 번 이양되는 것을 목격하고 미가엘이 떠나려고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번에는 그의 목적지가 오르본톤 초우주의 본부, 유버르사임을 선언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경우들과 달랐다. 때가 되자 우리의 군주는 떠났지만, 초우주의 여러 방송은 결코 미가엘이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법정에 도착한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구원자별을 떠난 뒤 얼마 안 되어, 유버르사 방송에서 이 중요한 발표가 나타났다: “아무 발표도 번호도 없이, 네바돈 우주로부터 필사의 기원을 가진 하늘 가는 순례자가 오늘 도착했는데, 그는 구원자별의 이마누엘의 인가를 받고 네바돈의 가브리엘을 동반하였다. 신분이 확인되지 않은 이 존재는 참 영의 지위인 것을 제시하며, 우리는 그를 받아들여 친교하였다.”
119:5.2 (1314.5) 너희가 오늘 유버르사를 찾아본다면, 에벤톳이 거기에 머무르던 시절의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을 들을 터인데, 시공 세계에서 온 이 특이한 미지의 순례자는 그 이름으로 유버르사에서 알려졌다. 하늘 가는 이 필사자, 적어도 하늘 가는 필사자의 영 단계와 똑같은 모습을 입은 한 훌륭한 인격자가, 유버르사에서 오르본톤 표준 시간으로 11년 동안 살고 활동하였다. 이 존재는 오르본톤의 여러 지역 우주에서 온 동료들과 공통으로, 한 영 필사자의 과제를 받고 임무를 수행하였다.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면에서 그는 시험과 단련을 받았으며,” 모든 경우에 그는 상관들의 신임과 신뢰를 받기에 마땅함을 증명하였고, 한편 그는 어김없이 동료 영들의 존경과 충성스러운 찬미를 받았다.
119:5.3 (1315.1) 구원자별에서 우리는 더 할 나위 없이 흥미를 가지고 이 영 순례자의 생애를 따라다녔고, 가브리엘의 계심 때문에, 티 내지 않고 번호도 없는 이 순례자가 남이 아니라, 우리 지역 우주에서 자신을 수여한 통치자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필사자 진화의 한 단계의 역할로 육신화한 미가엘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온 네바돈을 오싹하게 하고 황홀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일을 들어 본 적이 있지만, 이제 우리는 그런 일을 구경했다. 그는 유버르사에 충분히 성장하고 완전히 훈련받은 영 필사자로서 나타났고, 그런 상태로 하보나로 가는 한 무리의 승천 필사자들이 진급하는 계제까지 그의 생애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즉시 가브리엘의 수행을 받고서 갑자기 아무런 예식 없이 유버르사를 떠났고, 그 뒤에 곧 구원자별에서, 익숙한 그의 자리에 나타났다.
119:5.4 (1315.2) 이 자기 수여를 마칠 때까지, 가장 높은 멜기세덱으로부터 시공의 여러 진화 세계에 있는, 피와 살로 된 필사자에 이르기까지 미가엘이 아마도 여러 계급의 우주 성격자의 모습을 입고 육신화하려 한다는 것이 마침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 무렵에 멜기세덱 학부들은 미가엘이 언젠가 육체를 입은 필사자로서 육신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비로소 가르쳤고, 설명할 수 없는 그러한 자기 수여를 이루는 가능한 기법에 관하여 많은 추측이 오갔다. 미가엘이 하늘 가는 필사자의 역할을 친히 수행했다는 것은 지역 우주와 초우주를 거쳐서 맨 위까지 사람을 진보시키는 계획 전부에 대하여 새로이 흥미가 늘어나게 만들었다.
119:5.5 (1315.3) 그래도 연속하여 자신을 수여하는 이 기법은 신비로 남아 있다. 가브리엘도 이 파라다이스 아들인 우주 창조자가 뜻대로, 자신의 하위 생물 중 하나의 성격을 받고 그 생명을 사는 데 어떤 방법을 썼는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119:6.1 (1315.4) 온 구원자별이 다가오는 수여의 준비 사항에 익숙했기 때문에, 미가엘은 본부 행성에 머무르는 자들을 불러모았고, 처음으로 육신화 계획의 나머지를 펼쳐 보이면서, 그가 제5 별자리의 본부 행성에서 최고 아버지들의 법정에서 한 상물질 필사자의 생애를 보내는 목적으로, 구원자별을 곧 떠나리라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나서 일곱째이자 마지막 수여는 필사자 육체의 모습을 입고 어떤 진화 세계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발표를 우리는 처음으로 들었다.
119:6.2 (1315.5) 여섯 번째 자신 수여를 위하여 구원자별을 떠나기 전에, 미가엘은 그 구체의 모인 거주자들에게 연설하고, 혼자인 세라핌과 네바돈의 밝은 아침별을 수행하고, 모두가 완전히 보는 가운데 떠났다. 우주의 지휘는 이마누엘에게 다시 맡겨졌지만, 행정 책임이 더 널리 분산되었다.
119:6.3 (1315.6) 미가엘은 5번 별자리의 본부에, 하늘 가는 지위를 가진, 완전히 성장한 상물질 필사자로 나타났다. 번호가 없는 이 상물질 필사자 생애의 세부를 내가 드러내지 못하게 금지되어서 나는 서운하다. 이는 그것이, 유란시아에서 그가 눈부시고 비극이었던 체류도 제외하지 않고서, 미가엘의 수여 체험에서 아주 특별하고 놀라운 시기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직책을 받아들이면서 나에게 지워진 여러 제한 가운데, 엔단툼의 상물질 필사자로서, 미가엘의 이 놀라운 생애의 세부를 펼치는 일을 금지하는 제한이 있다.
119:6.4 (1316.1) 미가엘이 이 상물질 수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우리의 창조자가 동료 생물이 되었다는 것, 우주 군주가 또한 그의 영역에서 가장 낮은 형태로 지음받은 지성 존재에게도 친구요, 공감하고 돕는 일꾼이라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명백했다. 우리는 이보다 앞서 우주 행정이 이렇게 점진적으로 지음 받은 자의 관점을 얻는 것을 주목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차츰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물질계 필사자로 수여를 마친 뒤에 그것이 더 명백해졌고, 유란시아에서 목수 아들의 생애를 마치고 그가 돌아온 뒤에 더군다나 명백해졌다.
119:6.5 (1316.2) 미가엘이 상물질 수여에서 풀려나는 시간에 대하여 우리는 미리 가브리엘로부터 통지를 받았고, 따라서 구원자별에서 적절한 접대를 준비했다. 수백만의 존재가 네바돈의 별자리 본부 세계들로부터 모여들었고, 구원자별에 인접한 세계들에 머무르던 자들의 대다수가 우주 통치자 신분으로 그가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려고 함께 모였다. 자기가 지은 존재들에 대하여 지대하게 관심을 가진 군주를 환영하는 여러 연설과 감사하는 표현에 답하여 그는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나는 단지 내 아버지의 일을 보살피고 있었노라. 자기가 지은 존재들을 사랑하고, 이해하기를 갈망하는 파라다이스 아들들이 즐겨 하는 일을 내가 하고 있을 뿐이라.”
119:6.6 (1316.3) 그러나 그날부터, 사람의 아들로서 유란시아 모험에 발을 내디딘 그 시각까지, 그가 머무른 별자리 전체의 물질 세계로부터 모인 동료들처럼 모든 점에서 시험을 받으면서, 진화로 승천하는 상물질 필사자로 수여되어 육신화한 자로서 엔단툼에서 활동하는 동안에 그들의 군주 통치자가 세운 많은 공훈에 대하여 온 네바돈이 계속 논의하였다.
119:7.1 (1316.4) 수만 년 동안 우리는 모두, 미가엘의 일곱째이자 마지막 수여를 기대하였다. 가브리엘은 이 최종 수여가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이루어지리라고 우리에게 가르쳤지만, 우리는 절정에 이르는 이 모험의 시간ㆍ장소ㆍ방법에 관하여 전혀 알지 못했다.
119:7.2 (1316.5) 마지막 수여가 일어날 극장으로서 미가엘이 유란시아를 택했다는 공식 발표는 아담과 이브의 실수에 대하여 우리가 소식을 들은 뒤에 곧 있었다. 따라서, 3만 5천 년이 넘도록, 우주 전체의 회의에서 너희 세계는 아주 눈에 띄는 자리를 차지하였다. 유란시아 수여의 어떤 단계와 관련해서도 (육신화의 신비를 제쳐놓고) 아무런 비밀이 없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미가엘이 최상의 우주 군주로서 구원자별로 마침내 승리해서 돌아오기까지, 작아도 상당히 영예로운 너희 세계에서 벌어진 모든 일이 충분히 우주에 알려졌다.
119:7.3 (1316.6) 이것이 그 방법일 것이라 우리가 믿었지만, 바로 그 사건 자체가 일어날 때까지, 우리는 결코 미가엘이 그 영역에서 힘없는 아기로서 땅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때까지 그는 언제나 수여로 선택받은 성격자 무리 가운데 충분히 성장한 개인으로서 나타났는데, 구원자별의 방송은 베들레헴의 아기가 유란시아에 태어났음을 알리는 가슴 떨리는 발표였다.
119:7.4 (1316.7) 그리고 나서 우리의 창조자이자 친구가, 하나의 힘없는 아기로서 겉보기에 이 자신 수여에 그의 지위와 권한에 대한 위험을 무릅쓰면서, 그의 생애 전체에서 가장 아슬아슬한 걸음을 내딛고 있음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우리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필사자로 자신을 수여하면서 겪는 체험은 네바돈 우주에서 논쟁할 여지 없는 최상의 군주인 그를 영원히 보좌에 앉힐 것을 또한 이해했다. 지구 시간으로 1세기의 3분의 1동안, 이 지역 우주의 어느 구석에서도 눈이 다 유란시아에 집중되었다. 마지막 수여가 진행되고 있음을 모든 지성 존재가 깨달았고, 사타니아에서 있었던 루시퍼 반란과 유란시아에서 칼리가스티아의 불만을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시피, 우리의 통치자가 황송하게도 비천한 형태로,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유란시아에 육신화했을 때 뒤따를 투쟁이 얼마나 맹렬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잘 이해했다.
119:7.5 (1317.1) 유대인 아기 요수아 벤 요셉은, 이 특별한 아기가 신다운 파라다이스 아들이요 사물과 존재들로 이루어진 이 온 지역 우주의 창조자, 네바돈 미가엘의 육신화라는 것을 제쳐놓고, 그 전과 후에 태어난 모든 다른 아기와 똑같이 잉태되고 세상에 태어났다. 예수의 인간 모습 안에서 신이 육신화되는 이 신비는 다른 면에서 세상에서 자연스러운 기원을 가졌고, 언제까지나 풀리지 않은 채로 남을 것이다. 영원 속에서도 너희는 결코 그가 어떻게 지은 생물의 형태와 모습을 입고서 창조자가 육신화되는가 그 기술과 방법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아들별의 비밀이요, 그러한 신비는 자신 수여 체험을 거친 신다운 아들들이 독점하는 재산이다.
119:7.6 (1317.2) 땅에서 어떤 지혜로운 사람들은 미가엘의 강림이 가까워옴을 알았다. 한 세계가 다른 세계와 접촉함으로, 영적 통찰력을 가진 이 현자들은 미가엘의 유란시아 수여가 다가오는 것에 관하여 알게 되었다. 중도인(中道人)들을 통해서, 그 세라핌은 한 무리의 갈대아 사제들에게 발표했는데, 그들의 지도자는 아드논이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 사람들은 갓난아기를 찾아보았다. 예수의 출생과 연결된 유일한 초자연적 사건은, 첫째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예전에 부속되었던 세라핌이 아드논과 그 동료들에게 이렇게 발표한 것이었다.
119:7.7 (1317.3) 예수의 인간 부모는 그들이 살던 시대와 세대에 보통 사람이었고, 육신이 된 이 하나님의 아들은 이처럼 여자에게서 태어나고, 그 민족과 시대의 아이들처럼 평범한 방법으로 자랐다.
119:7.8 (1317.4) 미가엘이 유란시아에서 머무른 이야기, 너희 세계에서 창조 아들이 필사자로 자신을 수여한 이야기는, 이 이야기의 테두리와 목적을 넘는 문제이다.
119:8.1 (1317.5) 유란시아에서 미가엘이 마지막으로 자신 수여에 성공한 뒤에, 그는 네바돈의 군주 통치자로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인가를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스스로 창조한 지역 우주의 확립된 지휘자로서 우주의 아버지의 인정을 받았다. 구원자별로 돌아오고 나서, 사람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아들, 이 미가엘은 네바돈의 안정된 통치자로 선포되었다. 유버르사로부터 미가엘의 통치에서 여덟째 선포가 내려왔고, 한편 파라다이스로부터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의 합동 선언(宣言)이 왔는데, 이것은 이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그 우주의 유일한 우두머리로 만들며, 구원자별에 주둔하는 늘 하나된 이에게 파라다이스로 물러갈 뜻을 알리라고 지시하였다. 별자리 본부에 있는 늘 충실한 이들도 또한 최고자 회의에서 물러나라고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미가엘은 상담하고 협조하는 삼위일체 아들들이 물러나는 데 찬성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구원자별에 그들을 모으고 네바돈에 언제까지나 남아 있으라고 친히 부탁했다. 그들은 이 요청에 따르겠다는 소망을 파라다이스에 있는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알렸고, 그 뒤에 얼마 안 되어 파라다이스의 분리 명령이 내렸는데, 이것은 중앙 우주에서 온 이 아들들을 네바돈 미가엘의 법정에 영원히 부속시켰다.
119:8.2 (1318.1) 미가엘이 수여 생애를 마치고 자신이 창조한 우주에서 최고 권한을 마침내 안정시키는 데 유란시아 시간으로 거의 10억 년이 걸렸다. 미가엘은 창조자로 태어나고, 행정가로 교육받고, 집행자로 훈련을 받았지만, 그의 통치권을 체험으로 얻는 것이 요구되었다. 이처럼 너희의 작은 세계는 온 네바돈에서 두루, 자신이 만든 우주에 대하여 제한 없는 통제 및 지휘 권한이 주어지기 전에, 모든 파라다이스 창조 아들에게 요구되는 체험을 미가엘이 마친 경기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지역 우주를 올라감에 따라서, 너희는 미가엘의 이전 수여에 관계된 성격자들의 이상에 대하여 더 배울 것이다.
119:8.3 (1318.2) 지음 받은 인간으로 자신 수여를 마치면서, 미가엘은 그의 통치권을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또한 최상위 하나님의 진화하는 통치권을 확대하고 있었다. 이 여러 수여 과정에서 창조 아들은 생물 성격자의 여러 성품을 내려가면서 탐구하는 데 종사했을 뿐 아니라, 또한 파라다이스 신들의 여러 가지 다양한 뜻을 계시하였고, 그분들의 종합된 통일은, 최상 창조자들이 드러낸 바와 같이, 최상 존재의 뜻을 드러낸다.
119:8.4 (1318.3) 신들의 이 다양한 의지(意志)의 모습은 일곱 으뜸 영의 다른 성품에서 영원히 성격이 되었고, 미가엘의 각 수여는 이 신의 모습 가운데 하나를 특별히 드러냈다. 멜기세덱으로 자신을 수여할 때 그는 아버지ㆍ아들ㆍ영의 하나된 뜻, 그리고 라노난덱 수여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뜻을 나타냈다. 아담으로 자신을 수여할 때는 아버지와 영의 뜻을, 천사(天使)로 수여할 때는 아들과 영의 뜻을 드러냈다. 유버르사에서 필사자로 자신을 수여할 때 그는 합동 행위자의 뜻을, 상물질계 필사자로 수여할 때는 영원한 아들의 뜻을 묘사하였다. 그리고 유란시아에서 육체로 자신을 수여할 때, 피와 살을 입은 하나의 필사자로서, 그는 우주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다.
119:8.5 (1318.4) 일곱 번 이렇게 자신 수여를 마친 것은 미가엘의 최고 통치권을 해방하고, 또한 네바돈에서 최상위 통치권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미가엘의 어느 수여에서도 그는 최상위 하나님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모두 일곱 수여의 총합은 최상 존재를 새롭게 네바돈에서 계시한 것이었다.
119:8.6 (1318.5)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내려오는 체험에서 미가엘은 동시에, 유한 행위의 부분적 명시로부터 최상 수준까지, 그리고 그의 초한 활동 잠재성의 최종 해방을 체험하였다. 창조 아들 미가엘은 시공에서 창조자이지만, 칠중의 주아들 미가엘은 궁극 삼자일체를 구성하는 한 신다운 집단의 구성원이다.
119:8.7 (1318.6) 일곱 으뜸 영에게 나타난 삼위일체의 뜻을 계시하는 체험을 거치면서, 창조 아들은 최상위의 뜻을 드러내는 체험을 거쳤다. 최상위의 뜻을 계시하는 자로서 활동하면서, 미가엘은 모든 다른 주 아들과 더불어, 그 자신 최상위와 영원히 한편이 되었다. 현재 우주 시대에 그는 최상위를 계시하며, 최상위의 통치권을 사실화하는 데 참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다음 우주 시대에 바깥 공간에서 생길 우주들을 위하여, 그리고 거기서, 첫째 체험적 삼자일체 안에서 최상 존재와 함께 일하리라고 믿는다.
119:8.8 (1319.1) 유란시아는 온 네바돈에서 감상을 일으키는 성지(聖地)요, 사람 사는 1천만 세계에서 으뜸이다. 그리스도 미가엘, 온 네바돈의 군주, 그 영역에 멜기세덱 봉사자요, 한 체계의 구세주, 아담인 구원자, 천사 동료, 하늘 가는 영들의 친구요, 상물질 진보자,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었던 사람의 아들이요,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가 필사자로 있던 집이다. 너희의 기록이, 바로 이 예수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수여한 세계, 십자가의 세계로 언젠가 돌아오리라 약속했다고 할 때, 그 기록은 진실을 일러 준다.
119:8.9 (1319.2) [그리스도 미가엘이 일곱 번 자신을 수여한 것을 그리는 이 글은 한 시리즈의 발표 중에서 63번째 글이며, 이 시리즈는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미가엘이 땅에 나타날 때까지, 유란시아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수많은 성격자의 후원을 받았다. 이 여러 논문은 만투시아 멜기세덱의 지휘 하에 활동하는, 12자로 이루어진 한 네바돈 위원회의 허가를 받았다. 우리는 유란시아 시간으로 서기 1935년에 우리의 상관들이 허가한 기법에 따라, 이 이야기를 쓰고 영어로 기록하였다.]
이 논문집은 멜기세덱 계시 지휘자의 감독 밑에서 행동하는 유란시아의 열두 중도자로 구성된 위원회의 후원을 받았다.
이 이야기의 근거는 한때 사도 안드레를 초인간적으로 보호하는 데 배치된 한 2차 중도자가 제공하였다.
120:0.1 (1323.1) 나는 미가엘이 유란시아에서, 그리고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산 일생을 다시 진술하는 일을 감독하라고 가브리엘로부터 배치받고서 이 일을 맡은 계시 위원회의 위원장 멜기세덱이며, 창조 아들이 그의 우주에 스스로를 수여하는 체험의 마지막 단계를 개시하려고 유란시아에 도착하기 바로 전에 있었던 어떤 사건들에 관하여 이 이야기를 발표할 허락을 받았다. 자신이 창조한 지적 존재들에게 부여하는 것과 똑같은 삶을 살고 여러 계급의 지음받은 존재의 모습을 입고서 자신을 이렇게 수여하는 것은 자신이 만든 우주, 사물과 존재들이 사는 우주를 다스리는 완전한 최고 권한을 얻기 위하여, 창조 아들은 누구나 치러야 하는 값의 일부이다.
120:0.2 (1323.2) 내가 묘사하려 하는 사건들이 있기 전에, 네바돈의 미가엘은 자신이 다양하게 창조한 지적 존재들 가운데서, 다른 여섯 계급 존재의 모습을 입고서 여섯 번이나 자신을 수여하였다. 그 다음에 필사 육체, 곧 지적(知的) 의지를 가진 생물 중에서 가장 낮은 계급의 모습을 입고서, 물질 영역에서 그런 인간으로서, 유란시아로 내려와서, 온 우주를 다스리는 신성한 파라다이스 통치자들의 명령대로 우주 통치권을 얻는 연극의 마지막 막(幕)을 연출하려고 준비하였다.
120:0.3 (1323.3) 앞서 있었던 이 여러 수여의 각 과정에서, 미가엘은 자신이 창조한 한 집단의 존재들의 유한한 체험을 얻었을 뿐 아니라, 또한 파라다이스와 협동하는 필수 체험을 얻었으며, 이 체험은 그 자체로서 저절로, 그를 자신이 만든 우주의 군주로 만드는 데 더욱 기여한다. 지나간 지역 우주 시간 전체를 통해서 어느 순간에도, 미가엘은 한 창조 아들 자격으로 친히 다스릴 권한을 주장할 수 있었고, 창조 아들로서 자신이 선택하는 대로 자신의 우주를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런 경우에 이마누엘 및 관련된 파라다이스 아들들은 그 우주를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미가엘은 단지 자신의 고립된 권한으로, 창조 아들로서, 네바돈을 다스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게 협조하여 복종하면서, 실제 체험을 통하여, 언젠가 최상 존재의 드높은 통치의 특징이 될 그러한 완전한 통찰력과 집행 지혜를 가지고, 자신의 우주를 다스리고 그 사무를 보살필 자격을 갖출 만큼 우주 지위에서 높은 그 자리까지 올라가기를 바랐다. 창조 아들로서 완전한 통치를 바란 것이 아니라, 최상 존재의 우주 지혜와 신다운 체험을 몸에 담은 자로서 최상으로 관리할 뜻을 품었다.
120:0.4 (1324.1) 따라서 미가엘이 여러 계급의 우주 생물에게 이렇게 일곱 번 자신을 수여하는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로, 그는 지음받은 자를 이해하는 필요한 체험을 마치고 있었고, 이것은 어떤 창조 아들에게도 완전한 통치권을 얻기 전에 요구된다. 어느 때라도 창조 아들은 자신의 권리로 자기 우주를 다스려도 좋지만, 일곱 번 우주에서 생물로서 자신 수여를 거친 뒤에야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최상 대표자로서 다스릴 수 있다. 둘째로, 그는 한 지역 우주를 직접, 친히 관리하는 데 행사할 수 있는 권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최대 권한을 대표하는 특권을 얻을 뜻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우주에서 자신 수여(授與)를 하나하나 체험하는 동안,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성격자들의 다양한 결합에서 다르게 구성된 뜻에, 자원하여 만족스럽게 복종하는 데 성공하였다. 다시 말해서, 첫째 자신 수여에서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통합된 뜻, 그리고 둘째 수여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뜻, 셋째 수여에서 아버지와 영의 뜻, 넷째 수여에서 아들과 영의 뜻, 다섯째 수여에서 무한한 영의 뜻, 여섯째 수여에서 영원한 아들의 뜻, 일곱째이자 마지막 수여에서는 유란시아에서 우주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였다.
120:0.5 (1324.2) 그러므로 미가엘이 친히 다스리는 권한은 우주 창조자들의 일곱 단계의 신의 뜻을 지역 우주 생물을 이해하는 체험과 통합한다. 이처럼 그의 행정은, 전혀 임의로 권한을 취하지 않아도 가능한 최대의 권력과 권한을 대표하게 되었다. 그 권한에 제한이 없는데, 왜냐하면 파라다이스 신들과 숙련된 관계를 통하여 얻었기 때문이다. 그 권한은 의심받지 않는데, 이는 그가 우주 생물의 모습을 입고 실제로 체험을 겪음으로 얻은 권한이기 때문이다. 그 통치권은 최상이니, 파라다이스 신의 일곱 가지 관점과 시공에서 사는 생물의 관점을 함께 동시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120:0.6 (1324.3) 마지막 자신 수여가 있을 시간을 정하고 이 특별한 사건이 벌어질 행성을 선택했기 때문에, 미가엘은 가브리엘과 함께 수여에 앞서 보통 있는 회담을 가졌고, 다음에 형이자 파라다이스 상담자, 이마누엘 앞에 나타났다. 예전에 가브리엘에게 부여되지 않았던 우주 행정의 전권을 이제 미가엘은 이마누엘에게 관리하라고 맡겼다. 유란시아에서 육신화(肉身化)하기 위하여 미가엘이 떠나기 바로 전에, 이마누엘은 유란시아 수여 동안에 우주의 관리를 받아들이면서, 이어서 수여를 위한 조언을 나눠주었는데, 이것은 얼마 안 있어 유란시아에서 그 영역의 한 필사자로서 자랄 때 미가엘을 위하여 육신화 지침으로서 쓰일 것이었다.
120:0.7 (1324.4) 이와 관련하여, 미가엘이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이 수여를 실행하기로 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창조 아들은 우주 통치권을 얻으려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이 육신화를 실행하기 위하여 아무에게도 지시받을 필요가 없었지만, 그는 최상위를 드러내는 계획에 착수했고, 이것은 파라다이스 신들의 다양한 뜻에 협조하여 활동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처럼 그의 통치권을 마침내 친히 얻었을 때, 그것은 최상위 안에서 절정에 이르는, 신의 일곱 가지 뜻을 실제로 모두 포함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여러 파라다이스 신 및 그 결합을 친히 대표하는 자들로부터 전에 여섯 번이나 지시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이제 늘 하나된 이의 지시를 받았는데, 그는 우주의 아버지를 대행하여,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네바돈 지역 우주에 보내는 대사(大使)이다.
120:0.8 (1325.1) 이 막강한 창조 아들이 다시 한 번 파라다이스 신들의 뜻에, 이번에는 우주의 아버지의 뜻에, 자진해서 기꺼이 복종한 결과로 즉석의 이득과 엄청난 보상이 생겼다. 그렇게 조합에 복종하는 일을 해내려는 이 결심으로, 미가엘은 이 육신화에서 필사 인간의 성품 뿐 아니라 또한 만물의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도 체험할 것이었다. 더군다나, 유란시아 수여로 자리를 비운 동안, 우주를 관리하는 일에 이마누엘이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전권(全權)을 행사하겠다는 것 뿐 아니라, 초우주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수여 기간 내내, 그의 영역이 안전할 것을 선포했다는 마음 놓이는 정보를 받고서, 그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이 독특한 수여에 들어갈 수 있었다.
120:0.9 (1325.2) 이것이 이마누엘이 일곱째 수여 사명을 제안했을 때 그 중대한 계제의 배경이었다. 나중에 유란시아에서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 미가엘이) 된 우주 통치자에게, 이마누엘이 수여에 앞서 책임을 지워주는 이 말씀으로부터, 나는 다음에 발췌한 것을 발표할 허락을 받았다:
120:1.1 (1325.3) “창조자인 아우여, 일곱째이자 마지막 우주 수여를 내가 바야흐로 구경하려 하는구나. 너는 대단히 충실하고 완벽하게 이전의 임무를 여섯 번 수행하였고, 통치권을 얻는 이 마지막 수여에 똑같이 승리하리라는 것 외에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구나. 이제까지 너는 선택한 계급에서 완전히 발육된 존재로서, 자신을 수여하는 구체에 나타났느니라. 네가 선택한 행성, 질서를 잃고 어지러워진 행성 유란시아에, 이제 너는 완전히 성장한 필사자가 아니라 하나의 무력한 아기로서 나타나려고 하느니라. 친구여, 이것은 너에게 새롭고 해본 적이 없는 체험이리라. 너는 자신을 수여하는 값을 완전히 치르고, 지음받은 자의 모습을 입고서 창조자가 육신화하는 완벽한 깨우침을 얻으려 하느니라.
120:1.2 (1325.4) “이전에 거친 각 수여를 통해서 언제나, 너는 파라다이스 신 세 분과 그 신성한 상호 연합의 뜻에 복종할 것을 자진하여 선택했느니라. 최상위의 뜻의 일곱 단계에서, 이전의 여러 수여 생애에서 네 파라다이스 아버지 혼자의 뜻을 제외하고 모든 것에 복종해 왔느니라. 일곱째 수여를 거치는 동안 내내, 네가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기로 하였은즉, 나는 우리 아버지의 개별 대표로서, 네가 육신화하는 동안에 네 우주의 무제한 관할권을 맡노라.
120:1.3 (1325.5) “유란시아 수여에 들어가면서, 자신이 창조한 어떤 생물이 줄 수도 있는 모든 행성 바깥의 지원과 특별한 도움을 바로 네가 자청해서 마다하였도다. 네가 창조한 네바돈의 아들들이 우주 생애를 통해서 계속, 안전한 경영을 너에게 온통 의존하는 것 같이, 이제 너는 뒤따르는 네 필사 생애에 밝혀지지 않은 풍파를 통해서 내내, 안전한 행동을 파라다이스 아버지께 전적으로 거리낌없이 의존해야 하느니라. 지역 우주의 창조자요 아버지인 너와 가지는 밀접한 관계의 일부로서 너는 모든 생물에게 믿음과 신뢰를 통달하라고 변함없이 요구하는데, 이 수여 체험을 마치고 나서 너는 그러한 믿음과 신뢰의 완전한 의미와 귀중한 뜻을 진실로 알게 될지니라.
120:1.4 (1326.1) “유란시아에서 자신을 수여하는 동안 내내, 오직 한가지, 너는 네 파라다이스 아버지와 끊임없이 교통하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느니라. 그러한 관계가 완전하게 됨으로, 네가 자신을 수여하는 세계는, 아니 네가 지은 우주 전체까지도, 네 아버지이자 내 아버지요, 만물에게 우주의 아버지인 분의 계시, 새롭고 더욱 이해할 수 있는 계시를 보리라. 따라서 네가 아랑곳할 것은 오직 유란시아에서 너의 개인적 생활에만 상관이 있느니라. 네가 자진하여 권한을 포기하는 그 순간부터, 우주 군주로서 파라다이스의 확인을 받고 우리에게 돌아와서, 이제 나에게 넘겨주는 대행 권한이 아니라, 그 대신에 네 우주를 다스리는 최고 권한과 관할권을 내 손에서 돌려받을 때까지, 나는 네 우주의 행정이 안전하고 중단되지 않도록 완전하고도 유능하게 책임을 지겠노라.
120:1.5 (1326.2) “(나의 말대로 내가 충실히 수행한다는 보장, 온 파라다이스의 보장임을 잘 아는즉) 이제 약속하는 모든 것을 행할 권력이 내게 있음을 네가 확실히 알도록, 유버르사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명령이 내게 막 통보되었음을 너에게 알리노라. 이것은 네가 자원해서 자신을 수여하는 기간을 통해서 내내, 네바돈에서 모든 영적 위험을 방지할 것이라. 네가 의식(意識)을 포기하는 순간부터, 필사 육신화가 시작되고 나서, 스스로 만들고 조직한 이 우주에서 최상의 무제한 군주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 때까지, 온 네바돈에서 심각하게 중요한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느니라. 네가 육신화하는 이 막간에 나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명령을 쥐고 있으니, 이것은 이 수여 사명으로 자리를 비운 동안, 네바돈 우주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죄가 있거나 감히 반항을 선동하는 어떤 존재라도 한 순간에 자동으로 소멸될 것을 무조건 명령하느니라. 아우여, 내 자리에 본래 있는 권한, 파라다이스에서 유래하고 유버르사의 사법(司法) 명령으로 확대된 권한으로 보건대, 너의 우주와 거기서 충성하는 모든 생물은 네가 자신을 수여하는 동안 안전할 것이라. 너는 오직 한 가지―네 우주의 지적 존재들에게 우리 아버지를 높이 드러내는―생각만 가지고 사명을 시작하여도 좋으니라.
120:1.6 (1326.3) “앞서 거친 각 수여의 경우와 같이, 형이자 수탁자(受託者)로서 내가 네 우주의 관할권을 받은 자임을 상기시키고자 하노라. 나는 네 이름으로 모든 권한을 행사하고 모든 권력을 사용하노라. 우리의 파라다이스 아버지가 하시는 것 같이, 그리고 너 대신에 이렇게 행하라고 분명히 요구한 데 따라서 내가 활동하노라. 그러함이 사실인즉, 넘겨받은 이 모든 권한은, 돌려달라고 청하기에 적당하다고 보는 어느 순간이라도 네가 다시 행사해도 좋으니라. 네가 자신을 수여하는 것은 내내, 전적으로 자청한 것이라. 그 땅에서 육신화된 필사자로서 너는 하늘 재산이 없으나, 어느 순간이라도 네 몸에 우주 권한을 회복하여, 포기한 모든 권한을 가져도 좋으니라. 만일 자신의 권력과 권한의 회복을 선택한다면, 기억할진대 이는 전적으로 개인적 이유일 터이니, 내가 살아 있는 최고의 서약이요, 나의 존재와 서약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네 우주가 안전히 관리될 것을 보장하는 까닭이라. 네바돈에서 세 번 일어났던 것과 같은 반란은, 이번 수여로 네가 구원자별에서 자리를 비운 동안 일어날 수 없느니라. 유란시아에서 수여하는 기간에, 네바돈에서 생기는 반란에는 자체를 멸망시키는 자동 씨앗을 투입하겠다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선포하였느니라.
120:1.7 (1326.4) “이 마지막 특별 수여로 네가 자리를 비우는 한, 나는 (가브리엘의 협조를 얻어서) 너의 우주를 충실히 관리할 것을 서약하노라. 신의 계시(啓示)를 베푸는 이 사명을 시작하고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는 이 체험을 겪으라고 네게 부탁하는즉, 나는 내 아버지요 네 아버지인 분을 위하여 행동하며, 다음의 조언을 주노니, 이는 육체를 입고 네가 계속 머무르는 동안에 이룰 그 신성한 사명을 네가 차츰차츰 자의식하게 됨에 따라서, 땅에서 일생을 사는 데 너를 안내해야 하느니라.
120:2.1 (1327.1) “1. 아들별의 관례를 따라서, 그리고 그 기법을 좇아서―파라다이스에 계신 영원한 아들의 명령에 순응하여―네가 작성하고 가브리엘이 내게 보관하라고 준 계획들과 조화되게, 네가 필사자로 수여하는 이 일을 즉시 시작하도록 나는 모든 면에서 주선하였노라. 너는 유란시아에서 그 영역의 어린아이로서 자라겠고, 사람으로서 교육을 마치고―그동안 내내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면서―네가 결심한 대로 유란시아에서 일생을 살다가 그 행성에서 체류를 마치고, 네 우주의 최고 통치권을 받으려고 아버지께 올라가려고 준비할 것이라.
120:2.2 (1327.2) “2. 네가 지상에서 맡을 임무와 너의 우주에 계시하는 것과 달리, 그러나 이 두 가지에 부수되어 생기는 일로서, 신의 신분을 네가 충분히 자의식한 뒤에, 사타니아 체계에서 루시퍼 반란을 법적으로 종결하는 추가된 과제를 맡고, 이 모든 일을 사람의 아들로서 하라고 조언하노라. 따라서, 약한 가운데 믿음으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함으로 강하게 된 그 땅의 필사 인간으로서, 죄 많고 부당한 이 반란의 초기에 네가 그렇게 부여 받았을 때 가졌던 권력과 힘으로 임의로 달성하기를 거듭 물리쳤던 그 모든 것을 네가 품위 있게 성취하라고 제안하노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 네 우주의 최고 군주일 뿐 아니라, 사람의 아들,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온다면, 나는 이를 너의 필사 수여 생애의 걸맞는 절정으로 여기리라. 한 필사 인간, 네바돈에서 가장 낮은 부류의 지적 생물로서, 신성을 욕되게 하는 칼리가스티아와 루시퍼의 거짓 주장에 맞서고 이를 판결하며, 네가 맡은 낮은 지위에서, 타락한 이 빛의 아이들이 부끄럽게 왜곡한 것을 영원히 매듭지어라. 너는 창조자 특권을 행사함으로 이 반역자들의 체면 손상하기를 완강하게 거절했은즉, 네가 창조한 가장 낮은 생물의 모습을 입고, 이 타락한 아들들의 손에서 지배권을 빼앗는 것이 이제 마땅하리라. 그래서 아주 공정하게 말하자면, 너의 자비심이 임의의 권한으로 달성하지 말라고 훈계했던 그러한 일을 네가 필사 육체의 자격으로 행하는 것이 정당함을 너의 온 지역 우주가 뚜렷이, 영원히 인정하리라. 네가 자신을 수여함으로 이렇게 네바돈에서 최상위의 통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나서, 이 업적을 이루는 데 얼마큼 시간이 지연되기는 했어도, 너는 앞서 있었던 모든 반란 사건에서 미결된 사무를 실제로 매듭지었을 것이라. 이 행위로 말미암아 네 우주에서 처리중인 분쟁들이 실질적으로 정리될 것이라. 너의 우주를 다스릴 최고 통치권을 나중에 부여 받고 나서, 친히 만든 위대한 세상의 어느 구석에도, 너의 권한에 대하여 비슷한 도전이 결코 다시 일어날 수 없느니라.
120:2.3 (1327.3) “3. 조언하건대, 의심할 여지 없이 너는 해내겠지만, 유란시아 탈퇴 사건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나서, 너의 우주가 마지막 자신 수여 체험을 영원히 인정하여, 가브리엘로부터 ‘유란시아 행성 영주’ 칭호가 내리는 것을 받아들이라, 그리고 칼리가스티아의 배반과 그 뒤에 아담의 불이행으로 인하여 유란시아에 쏟아진 슬픔과 혼란을 보상하기 위하여, 자신을 수여하는 목적과 일치되는 대로, 어떤 일이라도 더 하라.
120:2.4 (1328.1) “4. 네 요청에 따라서, 가브리엘 및 관계된 모든 존재는 그 영역의 섭리시대 판결이 선포됨과 함께, 네가 유란시아에서 자신 수여를 마치는 데 너와 협조할 것을 분명히 표현하였고, 그 선포에 뒤이어 한 시대가 종결되고, 잠자는 필사 생존자들이 부활하며 수여된 진리의 영의 섭리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
120:2.5 (1328.2) “5. 네가 자신을 수여하는 행성에, 그리고 네가 필사자로 머무르는 시절에 거기에 사는 바로 그 세대의 사람들에 관해서 말하면, 대체로 네가 선생의 신분으로 활동하라고 조언하노라. 먼저 사람의 영적 성품을 해방하고 북돋아 주는 데 눈을 돌리라. 다음에, 어둠에 빠진 지식층에게 빛을 비추고, 사람들의 혼을 치유하며, 오랜 세월 동안 지녔던 두려움에서 저희의 정신을 해방하라. 다음에, 필사자로서 너의 지혜에 맞게, 육신을 입고 사는 네 형제들의 육체적 복지와 물질적 평안을 보살피라. 너의 우주 전체에게 영감을 주고 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이상적 종교 생활을 하라.
120:2.6 (1328.3) “6. 자신을 수여하는 행성에서, 반란으로 격리된 인간을 영적으로 해방하라. 유란시아에서 최상위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데 더욱 이바지하고, 이처럼 네가 친히 창조한 넓은 영토에 두루 이 통치권이 확대되게 하라. 육신의 모습을 입고 물질로 자신을 수여하는 이 과제에서, 너는 바야흐로 시공 창조자의 마지막 깨우침, 즉 사람의 성품 안에서 네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에 맞게 일하는 이중의 체험을 겪으려 하느니라. 유한한 인간의 뜻과 무한한 창조자의 뜻이 최상 존재의 진화하는 신 안에서 하나가 되고 있는 것 같이, 너의 속세의 일생에서 이 둘은 하나처럼 되어야 하느니라. 자신을 수여하는 행성에 진리의 영을 퍼붓고, 고립된 그 구체에서 모든 정상(正常) 필사자가 우리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격리된 계심, 곧 그 영역에 생각 조절자의 보살핌을 이처럼 즉시, 충분히 이용할 수 있게 만들라.
120:2.7 (1328.4) “7. 수여 세계에서 네가 무슨 일을 행해도, 너의 우주 전체를 가르치고 정신을 고취하려고 일생을 살고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어라. 너는 유란시아에서 필사자로 육신화하는 이 생명을 수여하고 있지만, 너의 행정 영토인 광대한 은하계의 일부를 형성했거나 지금 형성하거나 아직도 형성할 수 있는, 사람이 사는 모든 행성에서, 지금까지 살아왔거나, 지금 존재하거나, 앞으로 살지 모르는 모든 인간 및 초인간 지성 존재에게 영적 감화를 주는 그러한 일생을 살아야 하느니라. 네가 땅에서 머무르는 시절에 사는 유란시아 필사자들을 위해서나, 유란시아나 또는 어떤 다른 세상에서 이후의 인간들에게 모범이 되려고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땅에서 네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되느니라. 그보다 유란시아에서 육체를 입은 일생이, 다가올 어느 시대, 어느 세대에도, 모든 네바돈 세계의 모든 생명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라.
120:2.8 (1328.5) “8. 필사자로 육신화하여 이룩하고 체험해야 하는 큰 사명은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진심으로 자극 받은 일생을 살고, 그래서 육체를 입고서, 특히 육체로 지어진 인간들에게, 네 아버지 하나님을 드러내려는 결심에 포함되어 있느니라. 동시에 너는 또한 온 네바돈의 초인간 존재들에게, 우리 아버지의 의도를 새로이 향상된 방법으로 설명하리라.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인간 및 초인간 부류의 지성에게 새로이 드러내고 확대하여 해석하는 이 봉사와 똑같이, 너는 또한 하나님에게 사람을 새로이 드러내려고 활동하리라. 육체를 입은 짧은 일생에, 온 네바돈에서 전에 본 적이 없다시피, 필사자로 존재하는 짧은 생애 동안 하나님을 아는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초월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사람에 대하여, 또 행성 생애에서 겪는 풍파를 온 네바돈의 모든 초인간 지성 존재에게, 어느 시대를 위해서도, 새롭고 빛나게 설명하라. 너는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유란시아로 내려가야 하고, 너의 시절과 세대의 한 사람으로 살면서, 광대한 우주 사무에 최상으로 종사하는 기법, 완전하게 된 이상적 기법을 너의 우주 전체에게 보여주도록 네가 활동하리라: 그 기법은 사람을 찾다가 찾아내어 하나님이 목적을 이루는 것이요, 사람이 하나님을 찾다가 찾아내는 현상이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서로 흡족하게, 그것도 육체로 사는 짧은 일생 동안에 하는 것이라.
120:2.9 (1329.1) “9. 사실은 네가 그 영역에 보통 인간이 되겠지만, 너의 잠재성은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창조 아들로 남아 있을 것을 늘 명심하라고 주의를 주노라. 이 육신화를 통해서 내내, 비록 너는 사람의 아들로서 살고 행동하겠지만, 신으로서 네 자신의 창조 속성은 구원자별로부터 유란시아까지 너를 따라다닐 것이라. 너의 생각 조절자가 도착하고 나서, 어느 순간이라도 육신화를 끝내는 것은 항상 너의 의지에 달려 있으리라. 조절자가 도착하고 그를 받아들이기 전에 너의 몸이 온전할 것을 내가 보장하겠노라. 그러나 너의 조절자가 도착하고 나서, 너의 수여 사명의 성질과 중요성을 차츰차츰 인식함과 동시에, 창조자 특권을 너 개인의 몸에서 떼어낼 수 없기 때문에, 이 속성이 너의 필사 인격과 붙은 채로 남아 있으리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어떤 초인간적 달성 의지(意志)나 성취나 또는 권력의 표현을 삼가야 하느니라. 그러나 의식하여 신중하게 의도한 행위로서, 전신을 다하여 내린 선택을 끝마치는 단호한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을 제외하고, 네가 땅에서 보낼 생애에서 아무런 초인간적 결과가 뒤따르지 아니하리라.
120:3.1 (1329.2) “자, 아우여, 네가 유란시아를 향하여 떠나려고 준비하는 동안에, 네가 자신을 수여하는 동안에 일반적 처신에 관하여 조언한 뒤에, 너를 떠나 보내면서, 가브리엘과 의논하여 얻은 조언을 제시하고자 하노니, 이것은 너의 필사 생애의 사소한 여러 단계에 관계되느니라. 우리는 다음을 더 제안하노라:
120:3.2 (1329.3) “1. 필사자로서 지상 생애의 이상을 추구하면서, 동료 인간에게 실용적이고 즉시 도움되는 일을 실현하고 예를 보이는 데 또한 얼마큼 눈을 돌리라.
120:3.3 (1329.4) “2. 가족 관계에 대하여 말하면, 네가 발견하는 관습, 자신을 수여하는 시절과 세대에 확립된 가족 생활의 관습이 우선함을 인정하여라. 네가 태어나기로 선택한 그 민족의 관습에 따라서 가족 및 공동체 생활을 하여라.
120:3.4 (1329.5) “3. 사회 체제와 너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면, 영적 부흥과 지적(知的) 해방에 너의 노력을 국한하라고 우리는 조언하노라. 네가 사는 시대의 경제 구조와 정치적 헌신에 얽매이는 것은 무엇이나 피하여라. 특히 유란시아에서 이상적 종교 생활을 실천하는 데 몸을 바쳐라.
120:3.5 (1329.6) “4. 어떤 상황에도, 하찮은 세부라도, 유란시아 민족들의 정상적이고 질서 있는 점진적 발달에 간섭해서는 안 되느니라. 그러나 이 금지(禁止) 조치가 유란시아에서 지속되는 개량된 체계의 적극적 종교 윤리를 남겨놓으려는 노력을 제한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느니라. 한 섭리 시대의 아들로서 너에게는 세계 민족들의 영적ㆍ종교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것과 관련하여 어떤 특권이 허락되느니라.
120:3.6 (1330.1) “5. 네가 좋게 여기는 대로 유란시아에서 발견되는 기존의 종교적ㆍ영적 운동과 관계를 가져야 하지만, 조직된 종파, 경직된 종교, 또는 필사 존재들의 분리된 윤리적 집단을 공식으로 세우는 일을 어떤 방법으로든 피하여라. 너의 일생과 가르침은 모든 종교와 민족에게 공통된 유산(遺産)이 되어야 하느니라.
120:3.7 (1330.2) “6. 후일에 판에 박힌 체계의 유란시아 종교 관념이나 또는 다른 종류의 진취성 없는 종교적 충성을 창시하는 데 쓸데없이 기여하지 않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우리는 더 조언하노라: 행성에 아무런 기록을 뒤에 남기지 말라. 영구(永久)한 물질에 기록하는 것을 모두 삼가라. 동료들에게 육체를 입은 너 자신의 형상이나 기타 비슷한 것을 만들지 말라고 명하라. 우상 숭배의 잠재성을 가진 것은 무엇이나, 네가 떠날 때 행성에 남기지 않도록 처리하여라.
120:3.8 (1330.3) “7. 너는 남성 가운데 정상적인 한 사람이 되어 행성에서 정상이고 보통의 사회 생활을 하는 동안 아마도 결혼 생활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요, 결혼 생활은 온전히 명예롭고 너의 자신 수여에 어긋나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는 아들별의 육신화(肉身化) 지침 중에 하나가 파라다이스 기원을 가진 수여 아들이 어떤 행성에서도 인간 자손을 남기지 말라 금하는 것을 너에게 상기시켜야 하노라.
120:3.9 (1330.4) “8. 다가오는 수여의 모든 다른 세부에서, 우리는 깃드는 조절자의 이끄심, 곧 인간을 인도하는 늘 계시는 신다운 영의 가르침에, 그리고 유전으로 부여받는 너의 확대되는 인간 지성의 분별과 판단에 너를 맡기고자 하노라. 인간과 창조자의 속성의 그러한 결합은 우리를 위하여 너로 하여금 행성 구체에서 완전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만들리라. 그런 인생은 어느 세계에서 (유란시아는 물론이고), 어느 시대에 누가 보아도 반드시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라, 방대한 너의 우주에서 더욱 높이 완전하게 된 세계와 완전하게 되고 있는 세계들이 평가하건대, 온전히 최상으로 충만한 생애일 것이라.
120:3.10 (1330.5) “이제, 네가 우리를 떠나고 성격 의식을 포기(抛棄)하는 순간부터, 인간의 형태로 육신화한 신의 신분을 차츰 네가 인식하는 동안 내내, 그리고 나서 계속하여 유란시아에서 수여 체험 전체를 거치고, 육체를 벗어나고 우리 아버지의 바른 편에 통치권 자리로 올라올 때까지, 모든 지난 업적을 통하여 우리를 늘 지탱하신, 너와 나의 아버지가 너를 안내하고 지지하고 너와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라. 내가 너를 구원자별에서 다시 볼 때, 바로 네가 창조하고 봉사하고 완벽히 이해하는 이 우주를 제한 없이 최상으로 다스리는 군주로서 우리에게 돌아오기를 환영할 것이라.
120:3.11 (1330.6) “네 자리에 이제 내가 군림하노라. 유란시아에서 네가 일곱 번째이자 필사자로서 자신을 수여하는 짧은 기간에 군주의 대리로서, 내가 온 네바돈의 관할권을 맡노라.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아들로서 얼마 후에, 권능과 영광을 얻고서 내게로 돌아올 때까지, 앞으로 사람의 아들이 될 자의 보호를 너 가브리엘에게 맡기노라. 미가엘이 그렇게 돌아올 때까지, 가브리엘아, 나는 너의 군주이라.”
120:3.12 (1330.7) 그리고 나서 즉시, 구원자별의 모든 존재가 있는 자리에서, 미가엘은 우리 가운데서 사라졌고, 유란시아에서 수여 생애를 마치고 나서, 지역 우주에서 최고로 친히 다스리는 통치자로서 돌아올 때까지, 낯익은 그의 자리에서 우리는 그를 더 만나보지 못했다.
120:4.1 (1331.1) 그래서 아버지인 창조자가 이기심으로 통치권을 추구한다고 비난하고, 비굴한 생물들이 사는 우주, 미혹된 우주가 영문도 모르고 충성한 덕분에 창조 아들이 멋대로의 독재로 권력을 유지했다고 넌지시 비난하는 일에 빠졌던, 미가엘의 어떤 자격 없는 아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내내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면서―사람의 아들로서 이제 시작한 봉사, 자신을 잊고 봉사하는 일생으로 인하여 언제까지나 입을 다물고 어리둥절해하고 잘못된 생각에서 깨어나게 될 것이었다.
120:4.2 (1331.2) 그러나 오해하지 말라. 참으로 이중 기원을 가진 존재이나 그리스도 미가엘은 이중 성격자가 아니었다. 사람과 관련된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 속에 육신이 된 하나님이었다. 그는 언제나, 바로 그 통합된 존재였다. 그러한 이해할 수 없는 관계에서 유일한 점진적 요소는 하나님이자 사람이라는 이 사실을 (인간 지성으로) 점진적으로 자의식하는 깨달음과 인식이었다.
120:4.3 (1331.3) 그리스도 미가엘은 차츰차츰 하나님이 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예수가 땅에서 산 생애의 어떤 중대한 순간에 사람이 되지 않았다. 예수는―언제나, 아니 언제까지나―하나님이자 사람이었다. 세 존재로 구성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실제로 하나의 신인 것 같이, 이 하나님과 이 사람은 하나였고, 지금도 하나이다.
120:4.4 (1331.4)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하는 최고의 영적 목적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방법을 향상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라.
120:4.5 (1331.5) 유란시아 필사자들은 기적(奇蹟)인 것에 대하여 다른 개념들을 지니고 있지만, 지역 우주의 시민으로서 우리에게는 기적이 거의 없고, 기적 중에서 뛰어나게 가장 흥미를 자아내는 것은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육신화 수여이다. 겉보기에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너희 세계 속에서, 거기서 한 신다운 아들이 나타난 것을 우리는 기적으로 여긴다―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우주 법칙의 작용이다. 나사렛 예수는 기적의 인격자였다.
120:4.6 (1331.6) 이 모든 특별한 체험 속에서, 그리고 이를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은 늘 하시는 바와 같이―보통 방법으로―신(神)이 행위하는 방법, 정상이고, 자연스럽고, 믿을 만한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기를 택하셨다.
121:0.1 (1332.1) 나는 우리 계급을 주관하는 우두머리와 기록을 맡은 멜기세덱의 공동 후원을 받고서, 유란시아 중도자 연합회 회원 12명으로 구성된 한 위원회의 감독 하에 활동하며 한때 사도 안드레에게 부속되었던 2차 중도자(中道者)이다. 내 계급의 지구 생물이 지켜본 그대로, 현세에서 나의 보호 대상이었던 사람이 나중에 일부 기록한 대로, 나는 나사렛 예수의 일생에 있었던 사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라고 허락을 받았다. 주가 기록된 글을 뒤에 남기지 않으려고 얼마나 면밀하게 피했는가 알았기 때문에, 안드레는 자신이 쓴 이야기의 사본(寫本)을 여러 부 만드는 것을 완강하게 거절했다. 예수의 다른 사도들 편에서 비슷한 태도를 가진 것은 복음서의 기록을 크게 지연했다.
121:1.1 (1332.2) 예수는 영적으로 퇴폐한 시대에 이 세상에 오지 않았다. 그가 태어날 때 유란시아는 그 전에 아담 이후 역사 전체를 통하여 들어보지 못하고 그 뒤에 어느 시대에도 겪어보지 못했던 그러한 영적 생각과 종교 생활의 부흥을 겪고 있었다.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육신화했을 때, 세계는 창조 아들의 수여를 위해서, 그때까지 지배했거나 그 뒤에 생긴 가운데 가장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이 시대 바로 앞 여러 세기 동안에,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 언어가 서양과 근동(近東)에 퍼졌으며, 유대인이 레반트 종족이니까 그 성질이 일부 서양이고 일부 동양이었기 때문에, 동양과 서양, 양쪽에 새 종교를 효과적으로 퍼뜨리기 위하여 그러한 문화와 언어의 배경을 이용하기에 뛰어나게 적절하였다. 대단히 유리한 이 상황은 로마인이 지중해 세계를 관대한 정치로 다스림으로 인하여 더욱 좋아졌다.
121:1.2 (1332.3) 세계 영향의 이러한 조합은 전부 바울의 활동에 잘 나타난다. 그는 종교적 교양 면에서 가장 뛰어난 히브리인이었고, 그리스어로 유대인 메시아의 복음을 선포했으며, 한편 그 자신은 로마 시민이었다.
121:1.3 (1332.4) 예수가 살던 시절의 문명과 같은 것은 서양에서 그 시절 이전이나 이후에도 전혀 없었다. 유럽의 문명은 특별한 세 가지 영향 밑에서 통일되고 조정되었다:
121:1.4 (1332.5) 1. 로마의 정치 및 사회 체계.
121:1.7 (1332.8) 예수가 태어났을 때, 지중해 세계 전부가 통일된 제국이었다. 세계 역사에서 처음으로 좋은 도로가 많은 주요 도시를 서로 연결하였다. 바다에는 해적들이 없어졌고, 무역하고 여행하는 대단한 시대가 급히 다가오고 있었다. 유럽은 그리스도 이후 19세기까지 그렇게 여행하고 무역하는 시대를 또 다시 구경하지 못했다.
121:1.8 (1333.1) 그리스ㆍ로마 세계는 안으로 평화롭고 겉으로 번영하고 있었는데도, 제국 주민의 대다수는 더러움과 빈곤 속에서 시들었다. 소수(小數)의 상류 계급은 부유했으나, 불쌍하고 궁핍한 하층 계급은 인류의 서민들을 포함하였다. 그 시절에는 행복하고 번영하는 중류 계급이 없었다. 중류 계급이 로마의 사회에서 막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21:1.9 (1333.2) 팽창하는 로마 국가와 파르티아 국가 사이의 첫 싸움은, 당시로 보아서 최근에 끝이 났고 시리아를 로마인의 손에 넘겨주었다. 예수의 시절에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는 번영하고 비교적 평화롭고 동서 양쪽의 나라들과 널리 상업 교역(交易)이 있는 시기를 맞이하였다.
121:2.1 (1333.3) 유대인은 이전에 있던 셈 종족의 한 가지였고, 이 셈족은 또한 바빌로니아인, 페니키아인, 그리고 최근에 로마의 적이었던 카르타고인도 포함했다. 그리스도 이후 1세기 전반에, 유대인은 셈 종족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집단이었다. 당시에 그 지역이 통치되고 무역을 위하여 조직된 바와 같이, 그들은 우연히 세계에서 특이하게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리적 위치를 차지했다.
121:2.2 (1333.4) 고대의 나라들을 연결하는 많은 큰 도로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갔고, 이처럼 이 지역은 세 대륙이 만나는 자리, 교차로가 되었다. 여행, 무역, 그리고 바빌로니아ㆍ아씨리아ㆍ에집트ㆍ시리아ㆍ그리스ㆍ파르티아ㆍ로마의 군대가 잇달아 팔레스타인을 휩쓸었다. 기억할 수도 없이 아득한 시절부터, 허다한 카라반 길이 동양으로부터 이 지역의 어느 부분을 거쳐서, 지중해 동쪽 끝에 좋은 몇 항구까지 이르렀고, 거기서부터, 배들은 그 화물을 온 서양의 해안으로 날랐다. 이 카라반 교통의 반 이상이 갈릴리의 작은 마을 나사렛을 거치거나 그 근처를 지나갔다.
121:2.3 (1333.5) 비록 팔레스타인이 유대인의 종교 문화의 고향이요 기독교가 태어난 곳이었지만, 유대인은 세계에서 바깥으로 나가 있었고, 여러 나라에서 살면서 로마 국가와 파르티아 국가의 어느 지방에서나 장사하고 있었다.
121:2.4 (1333.6) 그리스는 언어와 문화를 제공했고, 로마는 길을 만들고 하나의 제국을 통일했다. 그러나 유대인이 분산된 것은 로마 세계에 두루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2백이 넘는 회당과 잘 조직된 종교 공동체와 함께, 문화의 중심들을 마련해 주었다. 그런 곳에서 하늘나라의 새 복음을 초기에 받아들였고, 거기서부터 후일에 복음이 세상의 가장 먼 구석까지 퍼졌다.
121:2.5 (1333.7) 유대인 회당은 각자 소수의 이방인 신도(信徒), “경건한”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였는데, 바로 이 소수의 전향자들 사이에서 바울은 초기에 기독교로 개종한 신자들의 대부분을 얻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도, 화려한 이방인의 마당이 있었다. 예루살렘과 안티옥에서는 문화ㆍ상업ㆍ예배 사이에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안티옥에서 바울의 제자들을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렀다.
121:2.6 (1333.8) 유대인의 성전 예배를 예루살렘에 집중한 것은 그들의 일신교가 살아남게 만든 비결이었고, 마찬가지로 만국의 그 유일한 하나님, 만인의 아버지를 전하는 새롭고 확대된 개념을 육성하고 세계에 전파하는 것을 보장했다.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는 이방 국가의 군주와 종족 박해자들이 잇달아 몰락하는 가운데 종교 문화의 개념이 살아남아 있다는 것을 나타냈다.
121:2.7 (1334.1) 이 시절의 유대 민족은, 로마의 치하에 있었어도 상당한 정도로 자치를 누렸고, 유다 마카비, 그리고 직후에 계승한 자들이 수행한 공적, 당시로 보아서 최근에 영웅답게 나라를 구원한 공적을 기억하면서, 더욱 큰 구원자, 오래도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곧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로 활기에 넘쳐 있었다.
121:2.8 (1334.2) 팔레스타인, 즉 유대인의 왕국이 반 독립된 국가로서 살아남은 것은 로마 정부의 대외 정책에 그 비결이 있었다. 로마는 동양과 서양을 잇는 카라반 길의 서부 종착역 뿐 아니라, 시리아와 에집트 사이에 팔레스타인의 여행 도로를 계속 장악하기를 바랐다. 레반트에서 로마가 미래에 확장하는 것을 억제할 수도 있는 어떤 강대국이라도 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것을 로마는 바라지 않았다. 술책을 쓰는 정책의 목적은 실루시드의 시리아와 프톨레미의 에집트가 서로 맞서서 다투게 하는 것이었고, 그런 정책은 팔레스타인을 하나의 따로 독립된 국가로 양육하는 것을 필요하게 만들었다. 로마의 정책과 에집트의 붕괴, 그리고 파르티아의 강성해지는 힘 앞에 실루시드 왕조가 차츰 쇠약해진 것은, 어째서 몇 세대 동안 작고도 힘없는 유대인 무리가 북으로 실루시드 왕조와 남으로 프톨레미 왕조, 이 두 나라에 대항하여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 설명한다. 둘러싼 강대 민족들의 통치로부터 어쩌다가 얻은 이 자유와 독립을 유대인은 그들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야웨가 직접 간섭한 덕분으로 돌렸다. 자기 민족이 우월하다는 그런 태도는 로마의 압제가 마침내 그들의 땅에 닥쳤을 때, 이를 더욱 견디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슬픈 시점에도, 유대인은 세상에서 그들이 정치적 사명이 아니라 영적 사명을 가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121:2.9 (1334.3) 그때 외부 사람, 이두미아인 헤롯이 유대인을 다스렸기 때문에, 예수가 살던 시절에 유대인은 특별히 조심스럽고 의심이 많았다. 헤롯은 영리하게 로마 통치자들의 비위를 맞춤으로 유대 땅의 통치권을 손에 넣었다. 헤롯은 히브리인의 예식 절차에 충실할 것을 공언했으나, 낯선 신들을 위하여 여러 신전의 건축을 진행했다.
121:2.10 (1334.4) 헤롯과 로마의 지배자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유대인이 세계를 여행하기에 안전하게 만들었고, 따라서 로마 제국 및 조약을 맺은 여러 외국의 먼 구석까지도 하늘나라의 새 복음을 가지고 유대인이 더욱 침투하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헤롯의 통치는 또한 히브리 철학과 헬라파 철학이 더욱 섞이는 방향으로 크게 기여했다.
121:2.11 (1334.5) 헤롯은 케자리아 항구를 지었고, 이것은 팔레스타인을 문명 세계의 교차로로 만드는 데 더욱 도움이 되었다. 헤롯은 기원전 4년에 죽었고, 그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가 어렸을 때와 봉사하던 기간에, 서기 39년까지 갈릴리와 페레아를 다스렸다. 안티파스는 아버지처럼 위대한 건축가였고, 중요한 무역 중심 세포리스를 포함하여, 갈릴리의 많은 도시를 다시 지었다.
121:2.12 (1334.6)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와 율법 선생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갈릴리는 유대인 지역이기보다 이방(異邦)에 더 가까웠다.
121:3.1 (1334.7) 로마 국가의 사회 및 경제 조건은 가장 높은 수준은 아니었어도, 안으로 평화와 번영이 널리 퍼진 것은 미가엘의 수여에 적당하였다. 그리스도 이후 1세기에, 지중해 세계의 사회는 분명히 구분이 된 다섯 계층으로 이루어졌다:
121:3.2 (1335.1) 1. 귀족 계급. 돈과 공식 권력을 가진 상류 계급, 특권을 가진 통치 집단.
121:3.3 (1335.2) 2. 상업 집단. 거상(巨商)과 은행가, 무역상―큰 수입ㆍ수출상―국제 상인.
121:3.4 (1335.3) 3. 작은 중류 계급. 이 집단은 정말로 작기는 했어도 아주 영향력이 있었고, 초대 기독교 교회의 정신적 뼈대를 마련해 주었으며, 교회는 이 집단에게 다양한 기술과 상업을 계속할 것을 권장했다. 유대인 가운데 많은 바리새인이 이 계급의 상인에 속했다.
121:3.5 (1335.4) 4. 자유로운 노동자 계급. 이 집단은 거의 또는 아무런 사회적 지위가 없었다. 비록 자유를 자랑스럽게 느꼈지만, 노예 노동과 경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크게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상류 계급은 이들이 “번식하는 목적” 외에 쓸모 없음을 인정하면서 이들을 경멸하였다.
121:3.6 (1335.5) 5. 노예. 로마 국가 인구의 절반은 노예였고, 다수가 우수한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빨리 진출해서 자유 노동자, 그리고 상인(商人)들 틈에도 끼었다. 대다수는 평범하거나 아주 열등했다.
121:3.7 (1335.6) 우수한 민족들이 노예가 되었어도, 노예 제도는 로마의 군사(軍事) 정복의 특징이었다. 노예에 대한 주인의 권한은 무제한이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하층 계급과 이 노예들로 구성되었다.
121:3.8 (1335.7) 우수한 노예들은 흔히 임금을 받았고, 소득을 저축해서 자유를 살 수 있었다. 해방된 많은 그런 노예는 국가ㆍ교회ㆍ상업계에서 높은 자리에 올랐다. 바로 그런 가능성이 초대 기독교 교회가 이 수정된 형태의 노예 제도를 그토록 묵인하게 만들었다.
121:3.9 (1335.8) 서기 1세기에 로마 제국에는 널리 퍼진 사회 문제가 없었다. 민중의 대부분은 그들이 어쩌다 태어난 집단에 자신들이 속한다고 여겼다. 재능 있고 유능한 사람들이 로마 사회의 낮은 계층에서 더 높은 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문이 언제나 열려 있었으나,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의 사회적 지위에 만족했다. 그들은 계급 의식이 없었고, 이 계급의 차별이 부당하거나 그릇되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도 억압받는 계급의 곤경을 개선(改善)하는 목적을 가진 경제 운동이 아니었다.
121:3.10 (1335.9) 여자는 팔레스타인에서 신분에 제한을 받은 것보다 로마 제국 전역에서 더 자유를 누렸지만, 유대인이 가족에게 바치는 헌신과 자연스러운 애정은 이방 세계보다 훨씬 나았다.
121:4.1 (1335.10) 도덕적 견지에서, 이방인은 유대인보다 얼마큼 못했지만, 고상한 이방인들의 가슴 속에는 타고난 선한 자질과 잠재하는 인간적 애정을 기를 비옥한 토양이 있었고, 거기서 기독교의 씨앗이 싹트고, 도덕적 인격과 영적 성취의 수확을 풍부히 거두는 것이 가능했다. 그때 이방 세계에는 4대 철학이 유행하였는데, 모두가 전에 있었던 그리스인의 플라톤 사상에서 어느 정도 파생되었다. 이 철학 학파들은 다음과 같다:
121:4.2 (1335.11) 1. 쾌락주의자. 이 사상의 학파는 행복의 추구에 마음을 쏟았다. 상급 쾌락주의자들은 지나친 육욕에 빠지지 않았다. 적어도, 이 교리는 그보다 더 치명적 형태의 숙명론으로부터 로마인을 벗어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데, 사람들이 무엇인가 노력하면 현세에서 지위를 개선할 수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지한 미신(迷信)을 효과적으로 퇴치하였다.
121:4.3 (1336.1) 2. 금욕주의자. 금욕주의는 상류 계층이 지녔던 우수한 철학이었다. 금욕주의자는 통제하는 이성(理性)과 운명이 모든 자연을 지배한다고 믿었다. 이들은 사람의 혼은 신성하며 육체의 성품을 가진 악한 몸 속에 갇혀 있다고 가르쳤다. 사람의 혼은 자연, 곧 하나님과 조화되어 삶으로 해방을 얻으며, 따라서 미덕은 그 자체가 보상이었다. 금욕주의는 숭고한 도덕 수준까지 올라갔고 그 후에 어떤 순전한 인간적 철학 체계도 결코 뛰어넘지 못한 이상이었다. 금욕주의자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손”이라고 공언했으나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하나님을 찾아내지 못했다. 금욕주의는 하나의 철학으로 남았고, 결코 종교가 되지 못했다. 그 추종자들은 그들의 지성을 우주 지성과 조화시키려고 애썼지만, 그들이 사랑의 아버지의 자녀인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어떤 상태에 처해 있든지, 그에 만족하기를 배웠노라”하고 기록했을 때, 바울은 금욕주의에 깊이 젖어 있었다.
121:4.4 (1336.2) 3. 견유학파. 견유학파의 철학은 아테네의 디오게네스까지 유래를 추적할 수 있으나, 교리의 상당 부분은 마키벤타 멜기세덱의 가르침의 잔재로부터 파생되었다. 이전에 견유주의는 철학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였다. 적어도 견유학파는 그들의 종교 철학을 민주화하였다. 들에서 시장에서, 이들은 “사람은 자기가 원하면 자신을 구할 수 있다”는 교리를 줄곧 전파했다. 단순과 미덕을 가르쳤고, 사람들에게 겁 없이 죽음을 맞이하라고 권했다. 이 떠돌이 견유학파(犬儒學派) 전도사들은 영적으로 갈급한 민중을 후일에 기독교 선교사들을 위하여 준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들 사이에 유행한 설교 순서는 바울 서한의 형식과 그 문체를 많이 따랐다.
121:4.5 (1336.3) 4. 회의주의자. 회의주의(懷疑主義)는 지식은 허위요, 확신과 보장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순전히 부정적 태도였고, 결코 널리 퍼지지 않았다.
121:4.6 (1336.4) 이 여러 철학은 종교에 준하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흔히, 활력을 불어넣고 윤리적이고 사람을 고상하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대개는 서민의 수준을 넘었다. 아마도 견유주의를 제외하고, 이것들은 강한 자와 지혜로운 자를 위한 철학이었고,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도 구원을 주는 종교는 아니었다.
121:5.1 (1336.5) 이전의 시대 전체를 통해서, 종교는 주로 부족이나 국가의 일이었고, 흔히 개인이 아랑곳할 문제가 아니었다. 신들은 개인이 아니라, 부족이나 민족을 상대하였다. 그러한 종교 체계는 보통 사람이 개인으로서 가진 영적 열망을 거의 채워주지 못했다.
121:5.2 (1336.6) 예수의 시절에 서양의 종교는 다음과 같았다.
121:5.3 (1336.7) 1. 이교도의 종파. 이 종파들은 헬라인과 라틴 족의 신화(神話)ㆍ애국심, 그리고 전통의 조합이었다.
121:5.4 (1336.8) 2. 황제 숭배. 유대인과 초대 기독교인들은 국가의 상징으로서 이렇게 사람을 신격화하는 것을 몹시 분개하였고, 이러한 신격화는 이 두 종파의 교회가 로마 정부의 모진 핍박을 받게 만드는 직접 원인이었다.
121:5.5 (1337.1) 3. 점성술. 바빌론의 이 사이비(似而非) 과학은 그리스와 로마 제국에 두루, 종교로 발전되었다. 20세기에도 사람은 이 미신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121:5.6 (1337.2) 4. 신비 종파. 그토록 영적으로 갈급한 세계에 신비 종파들의 홍수가 밀려 들어왔는데, 레반트에서 온 새롭고 이상한 종교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고 이들에게 개인의 구원을 약속했다. 이 종교들은 급속히 그리스ㆍ로마 세계의 하류 계급이 받아들인 신앙이 되었다. 이 종교들은 훨씬 우수한 기독교의 가르침이 급속히 퍼지도록 길을 예비하는 데 많이 이바지하였다. 지적인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신학, 그리고 그 시절에 무지하지만 영적으로 갈급한 서민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엄청난 제안과 관련하여, 기독교의 가르침은 신에 관하여 탁월한 개념을 제시했다.
121:5.7 (1337.3) 신비 종교들은 민족 신앙의 종말을 가져왔고, 개인을 상대하는 수많은 종파를 탄생하게 하였다. 수가 많았어도 신비교는 모두 다음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121:5.8 (1337.4) 1. 어떤 신화(神話) 같은 전설, 즉 신비―여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미트라교의 가르침이 보여주다시피, 대체로, 이 신비는 어떤 신(神)의 일생ㆍ죽음ㆍ부활 이야기와 상관이 있었다. 이 미트라교는 한동안 바울이 세운, 팽창하는 기독교와 같은 시대에 존재했고, 함께 자리를 다투었다.
121:5.9 (1337.5) 2. 신비교들은 민족 종교가 아니고 종족을 초월하였다. 개인적이고 친교하는 종파였고, 그 결과로 종교적 친목 사회와 수많은 종파 사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121:5.10 (1337.6) 3. 이들의 예배는 정교한 입회 예식, 그리고 예배 드릴 때 인상적인 성찬식의 특징을 가졌다. 이들의 비밀 의식과 예식은 때때로 끔찍스럽고 메스꺼운 것이었다.
121:5.11 (1337.7) 4. 그러나 예식의 성질이나 지나친 정도와 상관 없이, 이 신비교들은 변함없이 신도들에게 구원, “악에서 벗어나고, 사후에 살아남고, 슬픔과 노예 제도가 있는 이 세상을 넘어서 행복한 나라에서 오래오래 살 것”을 약속했다.
121:5.12 (1337.8)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과 신비교를 혼동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이런 신비교들이 유행한 것은 사람이 사후에 살아남기를 추구했다는 것을 보이며, 따라서 개인을 상대하는 종교와 개인의 올바름을 진정하게 갈망하고 목마르게 찾았음을 보여준다. 신비교들은 이런 소망을 적절히 채워주지 못했지만, 후일에 예수가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길을 예비했고, 이 예수는 참으로 이 세상에 생명의 빵과 생명의 물을 가져왔다.
121:5.13 (1337.9) 사람들이 상급의 신비 종교에 널리 집착한 것을 이용하려고, 개종(改宗)할 가망이 있는 큰 집단의 사람들이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려고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얼마큼 고쳤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바울이 절충한 것조차 (기독교) 최선의 신비 종파들보다 다음 이유로 더 우수하다:
121:5.14 (1337.10) 1. 바울은 도덕의 회복, 즉 윤리적 구원을 가르쳤다. 기독교는 새로운 삶을 향하게 하고 새로운 이상을 선포했다. 바울은 요술 의식(儀式)과 예식의 마술적 요소를 버렸다.
121:5.15 (1337.11) 2. 기독교는 인간의 문제에서 궁극의 답을 얻으려고 애쓰는 종교를 제시했는데, 이는 이 종교가 슬픔, 그리고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구원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죄에서 구원받는 것도 약속했고, 이에는 영원히 살아남는 올바른 인품의 부여가 뒤따랐다.
121:5.16 (1338.1) 3. 신비교는 신화(神話)에 기초를 두고 세워졌다. 바울이 전파한 바와 같이, 기독교는 인류에게 미가엘, 즉 하나님의 아들이 수여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를 두었다.
121:5.17 (1338.2) 이방인 사이에서 도덕은 반드시 철학이나 종교와 관련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바깥에서는, 종교의 사제(司祭)가 도덕적 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머리에 반드시 떠오르지는 않았다. 유대인의 종교, 다음에 예수의 가르침, 그리고 그 뒤에 발전하는 바울 판의 기독교는 한 손에 도덕을 다른 손에는 윤리를 쥐고서, 신자들이 이 두 가지에 어느 정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최초로 주장한 유럽의 종교였다.
121:5.18 (1338.3) 그토록 어설픈 철학 체계에 영향을 받고, 그렇게 복잡한 종교의 종파들 때문에 갈피를 못 잡는 그런 세대의 사람들 가운데, 예수는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다. 나중에 그는 개인적 종교―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가르치는―복음을 바로 이 세대에게 주었다.
121:6.1 (1338.4) 그리스도 이전 1세기가 막을 내릴 때가 되자, 예루살렘의 종교 사상은 그리스 문화의 가르침에, 그리고 그리스 철학에도, 엄청나게 영향을 받고 얼마큼 수정되었다. 히브리 사상의 동부와 서부 학파의 관점 사이에 오랜 싸움이 있다가, 예루살렘, 그리고 나머지 서양(西洋)과 레반트는 대체로 서부 유대인의 관점, 즉 수정된 헬라파 관점을 채택하였다.
121:6.2 (1338.5) 예수의 시절에는 세 가지 말이 팔레스타인에서 통용되었다. 서민들은 아람어의 어떤 방언을 말했고, 사제(司祭)와 랍비들은 히브리어를 썼으며, 교육받은 계급과 상류 계층의 유대인은 대체로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유대 문화와 신학 중에서 그리스파가 나중에 우세하게 된 데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 성서를 그리스어로 일찍 번역한 것이 적지 않은 원인이었다. 기독교 선생들의 기록이 바로 그 언어로 곧 나타나게 되었다. 유대주의의 부흥은 히브리 성서를 그리스어로 옮긴 데서 비롯된다. 이 영향으로 말미암아, 나중에 바울의 기독교 종파가 동양이 아니라 서양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121:6.3 (1338.6) 헬라화된 유대인의 신앙은 쾌락주의자의 가르침에 아주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이들은 플라톤의 철학, 그리고 극기(克己)를 가르치는 금욕주의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마카비 4서는 금욕주의 세력이 크게 신장된 것을 보여준다. 플라톤의 철학과 금욕주의 신조, 이 두 세력의 침투는 솔로몬의 지혜서에 나타난다. 헬라화된 유대인들은 히브리 성서를 그렇게 우화(寓話)로 풀이했기 때문에, 히브리 신학을 그들이 숭상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순응시키는 것을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두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손으로 처리되기까지 비참한 혼란을 낳았는데, 필로는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을 간결하고 상당히 일관성 있는 하나의 종교 관념 및 관습 체계로 조화시키고 체계화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바로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을 통합한 이 후일의 가르침이 예수가 살고 가르치던 때에 팔레스타인에 유행하였는데, 이를 바울은 더욱 진보되고 계몽적인 기독교 종파를 세우는 데 기초로 이용하였다.
121:6.4 (1338.7) 필로는 위대한 선생이었다. 모세 이후로 서양 세계의 윤리 및 종교 사상에 그렇게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었다. 당대의 윤리와 종교적 가르침의 체계 속에 있는 좋은 요소들을 통합하는 문제에 뛰어난 인간 선생이 일곱 사람 있었으니, 곧 세타드ㆍ모세ㆍ조로아스터ㆍ노자ㆍ부다ㆍ필로ㆍ바울이다.
121:6.5 (1339.1) 그리스의 신비주의 철학과 로마의 금욕주의 교리를 히브리인의 율법 신학과 통합하려는 노력에서 생기는 필로의 부조리를 바울은 전부는 아니라도 많이 인식했으며, 현명하게도 그가 지녔던 기독교 이전의 기본 신학에서 이 부조리를 없애버렸다. 필로는 바울이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개념을 더 충실하게 회복하도록 길을 인도했는데, 그 개념은 유대 신학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다. 바울의 오직 한 가지 문제점은 필로와 발걸음을 맞추거나, 부유하고 교육받은 이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의 가르침을 뛰어넘지 못하였으니, 곧 속죄 교리였다. 필로는 오로지 피를 흘려야 용서받는다는 교리를 벗어나라고 가르쳤다. 그는 또한 아마 바울보다 더 맑게 생각 조절자의 실체와 계심을 얼핏 본 듯하다. 그러나 바울의 원죄(原罪) 이론, 곧 물려받은 죄, 타고난 악, 그리고 그로부터 회복한다는 교리는 그 기원의 일부가 미트라교에 있고, 이는 히브리 신학이나 필로의 철학이나 또는 예수의 가르침과 거의 공통점이 없다. 원죄와 속죄(贖罪)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의 어떤 단계는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다.
121:6.6 (1339.2) 예수가 땅에서 산 생애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인 요한 복음은 서양 민족들을 향하여 말한 것이었고, 후일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기독교 신자들의 관점에 많이 비추어서 그 이야기를 엮었는데, 이들은 또한 필로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121:6.7 (1339.3) 그리스도가 살던 무렵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에 대하여 이상하게 감정이 악화되었다. 이 옛 유대인 본거지로부터 지독한 박해의 물결이 퍼져 나갔고, 이것은 로마에까지도 퍼져서 거기서 수천 명이 추방되었다. 그러나 사실을 왜곡하는 그러한 투쟁은 길게 가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서 제국 정부는 제국 전역에 걸쳐 유대인의 축소된 자유를 완전히 회복시켰다.
121:6.8 (1339.4) 넓은 온 세계에 두루, 상업이나 박해로 인하여 유대인이 어디에 흩어져 있든지 상관 없이, 모두가 하나 같이 예루살렘의 거룩한 성전에 마음을 두었다. 유대인의 신학은 어떤 바빌로니아 선생들이 때에 알맞게 개입한 덕택으로 잊혀지지 않고 몇 번이나 구조되었다. 이런 일이 있었어도, 유대인의 신학은 예루살렘에서 해석하고 실천한 대로 살아남았다.
121:6.9 (1339.5) 250만에 이르는 이 흩어진 유대인들은 민족의 종교적 축제를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오곤 했다. 동부(바빌로니아파)와 서부(헬라파) 유대인의 신학이나 철학에 무슨 의견 차이가 있든 상관 없이,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이 그들의 예배의 중심이라는 것, 그리고 메시아가 올 것을 늘 기대하는 의견이 같았다.
121:7.1 (1339.6) 예수가 살던 시절이 되자, 유대인은 그들의 기원ㆍ역사ㆍ운명에 대하여 고정된 개념에 도달하였다. 자신과 이방인 세계를 갈라놓는 굳은 벽을 쌓았고, 이방인의 모든 생활 방식을 속속들이 경멸하는 눈으로 보았다. 율법을 글자 그대로 숭상했고 일종의 독선(獨善)에 빠졌으며, 이것은 거짓된 겸손을 떠는 자만에서 생겨났다. 그들은 메시아가 온다는 약속에 관하여 선입관이 있었고, 대부분은 그들의 국가와 민족 역사의 일부로서 메시아가 온다고 생각하였다. 그 시절의 히브리인에게 유대 신학은 고칠 수 없이 확고하고 영원히 고정된 것이었다.
121:7.2 (1339.7) 관용과 친절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는 유대인이 이교도로 여긴 다른 민족들에 대하여 그들이 오랫동안 지녔던 태도와 상반되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유대인은 바깥 세계에 대하여, 사람이 서로 영적 형제라는 주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불가능하게 만든 그러한 태도를 길러 왔다. 그들은 이방인과 동등한 조건으로 야웨를 기꺼이 함께 섬기려 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새롭고 이상한 교리를 가르친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121:7.3 (1340.1)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은 의식과 율법주의의 무서운 사슬에 유대인을 묶어놓았고, 이것은 로마의 정치적 사슬보다도 더 가까이 있는 현실이었다. 예수의 시절에 유대인은 율법의 지배를 받았을 뿐 아니라, 사람을 종으로 만드는 전통의 요구에 똑같이 묶여 있었고, 이것은 개인 및 사회 생활의 모든 분야에 관계되고 침투했다. 이 자디잔 행동 규칙은 모든 충실한 유대인을 따라다니고 지배했다. 그들의 신성한 전통(傳統)을 주제넘게 무시하고, 오랫동안 지켜 왔던, 사회의 행동 규칙을 감히 조롱한 사람,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단번에 물리친 것은 당연하다. 바로 아버지 아브라함이 예정해 놓았다고 생각된 교리에 서슴지 않고 맞선 자의 가르침을 도저히 좋게 볼 수 없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율법을 준 것이고, 그들은 타협하려 들지 않았다.
121:7.4 (1340.2) 그리스도 이후 1세기가 되자, 이름 있는 선생과 서기관들이 율법을 풀이한 말씀은 기록된 율법 자체보다도 더 높은 권한을 가졌다. 이 모든 이유로, 유대인의 어떤 종교 지도자들은, 새 복음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는 편으로 사람들을 더욱 쉽게 집결시킬 수 있었다.
121:7.5 (1340.3) 이러한 상황은 유대인이 종교의 자유와 영적 해방을 부르짖는 새 복음의 사자(使者)가 되어 신성한 운명을 달성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전통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예레미야는 “사람의 마음 속에 새겨야 할 율법”에 관하여 말한 적이 있고, 에스겔은 “사람의 혼 속에서 살 새 영”에 관하여 말했으며, 시편의 저자(著者)는 하나님이 “사람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고 올바른 영을 다시 새롭게 할 것”을 기도했다. 그러나 선한 일을 하고 율법에 굴종할 것을 부르짖는 유대 종교가 전통적 습성의 수준까지 침체되었을 때, 종교적 발전의 움직임은 서쪽으로, 유럽 민족들에게 넘어가 버렸다.
121:7.6 (1340.4) 그래서 진보하는 신학을 세상에 전하는 데 다른 한 민족이 부름받았다. 이 신학은 그리스인의 철학, 로마인의 법, 히브리인의 도덕과 함께, 인격의 신성함과 영적 해방을 주장하는 복음, 바울이 형성하고 예수의 가르침에 기초를 둔 복음을 담은 체계의 가르침이었다.
121:7.7 (1340.5) 바울이 세운 기독교 종파는, 거기에 담긴 도덕이 유대교에서 태어난 자국을 드러낸다. 유대인은 역사를 하나님―일하는 야웨―의 섭리라고 보았다. 그리스인은 좀더 뚜렷한 영생(永生) 개념을 이 새 가르침에 도입하였다. 바울의 교리에 담긴 신학과 철학은 예수의 가르침 뿐 아니라, 플라톤과 필로의 영향도 받았다. 바울의 윤리는 그리스도 뿐 아니라 금욕주의자로부터도 영감을 받았다.
121:7.8 (1340.6) 예수의 복음은, 바울의 안티옥 기독교 종파에 담겨 있는 바와 같이, 다음의 가르침과 섞이게 되었다:
121:7.9 (1340.7) 1. 유대교로 전향한 그리스인의 철학 논리. 이것은 영생(永生) 개념을 얼마큼 포함한다.
121:7.10 (1340.8) 2. 유행하던 신비주의 종파들의 매력 있는 가르침, 특히 어떤 신이 희생물을 바침으로 사람을 되찾고, 속죄하고 구원한다는 미트라교의 교리.
121:7.12 (1341.1) 예수가 살던 시절에 지중해의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왕국, 그리고 인접한 민족들은 모두, 세계의 지리(地理)ㆍ천문ㆍ건강ㆍ질병에 관하여 투박한 원시 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나사렛 목수의 새롭고 경이로운 발언에 당연히 놀라워했다. 좋은 영과 나쁜 영에게 신들린다는 생각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모든 돌과 나무에도 영이 들어 있다고 보았다. 이때는 마술에 홀린 시대였고, 누구나 기적(奇蹟)이 보통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었다.
121:8.1 (1341.2) 받은 지침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가능한 한, 우리는 유란시아에서 예수의 일생과 상관 있는 기존의 기록을 이용하고 어느 정도 조정하려고 애썼다. 우리는 사도 안드레의 잃어버린 기록을 들여다볼 기회를 가졌고,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하던 시절에 땅에 있었던 광대한 무리의 하늘 존재들(특히 지금은 인격이 된 그의 조절자)의 협조를 받았지만, 마태ㆍ마가ㆍ누가ㆍ요한 복음이라 칭하는 복음들을 이용하는 것도 우리의 목적이었다.
121:8.2 (1341.3) 이러한 신약(新約) 기록은 다음 상황에서 그 기원을 가졌다:
121:8.3 (1341.4) 1. 마가가 쓴 복음. 요한 마가는 (안드레의 노트를 제쳐놓고) 예수의 일생에 관하여 가장 일찍, 가장 짧고 간단한 기록을 남겼다. 주를 봉사자로서,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사람으로 제시했다. 마가는 자기가 묘사하는 여러 장면에 얼씬거리던 젊은이였지만, 실제로 그의 기록은 시몬 베드로에 따른 복음이다. 그는 초기에 베드로, 나중에는 바울과 관련을 가졌다. 마가는 베드로의 격려를 받고, 로마에 있던 교회의 간절한 부탁을 받고서 이 글을 썼다. 주가 땅에서 육신을 입었을 때 자신의 가르침을 얼마나 한결같이 기록하지 않으려 했는가 알았기 때문에, 마가는 사도와 기타 유력한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주의 가르침을 기록하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로마 교회가 그러한 기록된 이야기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마가는 이를 준비하는 일을 떠맡기로 찬성했다. 마가는 서기 67년, 베드로가 죽기 전에 짧은 기록을 많이 적어 놓았고, 베드로가 인가한 줄거리에 따라서, 그리고 로마에 있는 교회를 위하여 베드로가 죽고 난 바로 뒤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복음은 서기 68년이 저물 무렵에 완성되었다. 마가는 전적으로 자신의 기억과 베드로의 기억을 살려서 썼다. 이 기록은 그 뒤에 상당히 수정되었고 수많은 구절이 삭제되었으며, 최초의 복음에서 마지막 5분의 1은 처음 원본으로부터 베끼기도 전에 없어졌는데, 이를 대신하기 위하여 후일의 어떤 사건들이 끝에 첨가되었다. 마가가 쓴 기록은, 안드레와 마태의 노트와 함께,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을 그리려고 애쓴 모든 후일의 복음 이야기 기록에 기초가 되었다.
121:8.4 (1341.5) 2. 마태의 복음. 이른바 마태에 따른 복음은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주의 일생에 관하여 적은 기록이다. 이 기록의 저자는 예수의 일생에서, 그가 행한 많은 일이 “선지자들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보이려고 항상 애쓴다. 마태 복음은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 묘사하고 율법과 선지자들을 크게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121:8.5 (1341.6) 사도 마태는 이 복음을 쓰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이사돌이 이 복음을 썼고, 이 일에 도움되는 자료로서, 이 사건들에 관하여 마태가 개인적으로 기억한 것뿐 아니라, 예수의 말씀에 관하여, 주가 십자가에 못박힌 바로 뒤에 마태가 써놓았던 어떤 기록을 또한 가지고 있었다. 마태의 이 기록은 아람어로 썼고, 이사돌은 그리스어로 썼다. 그 저서를 마태의 것으로 돌린 데에는 아무런 속일 뜻이 없었다. 그 시절에는 제자들이 이렇게 스승에게 명예를 돌리는 것이 관습이었다.
121:8.6 (1342.1) 마태가 최초에 쓴 기록은 그가 복음 전도에 들어가려고 예루살렘을 떠나기 바로 전에, 서기 40년에 편집되었고 여기에 다른 것이 첨가되었다. 이것은 사사로운 기록이었고, 그 마지막 사본은 서기 416년에 시리아의 어느 수도원이 불탔을 때 사라졌다.
121:8.7 (1342.2) 이사돌은 서기 70년에 타이투스의 군대가 예루살렘에 투입된 뒤에, 그 도시로부터 피했으며 마태가 적은 기록의 사본(寫本) 하나를 펠라로 가지고 갔다. 71년에, 펠라에서 사는 동안, 이사돌은 마태에 따른 복음을 썼다. 그는 또한 마가의 이야기에서 처음 5분의 4를 가지고 있었다.
121:8.8 (1342.3) 3. 누가가 쓴 복음. 피시디아 지방의 안티옥에서 살던 의사 누가는 바울이 개종시킨 이방인이었고, 주의 일생에 대하여 아주 다른 이야기를 적었다. 그는 서기 47년에 비로소 바울을 따르고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었다. 누가는 바울 및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 여러 사실을 모은 대로, 그의 기록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하여 많은 것을 간직한다. 누가는 주를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내세운다. 그는 바울이 죽을 때까지 이 기록을 복음서로 만들지 않았다. 누가는 아카이아에서 82년에 기록했다.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역사를 다루는 세 권의 책을 쓰려고 계획했으나 이 작업에서 둘째 책, “사도들의 행적”을 마치기 바로 전, 서기 90년에 죽었다.
121:8.9 (1342.4) 누가는 그의 복음을 수집하기 위한 자료로서, 먼저 바울이 그에게 전해 준, 예수의 일생 이야기에 의존했다. 그러니까 누가의 복음은 어떤 면에서, 바울에 따른 복음이다. 그러나 누가는 다른 근원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누가는 예수의 일생에서 기록하는 수많은 사건의 증인을 몇십 명 만나서 물어보았을 뿐 아니라, 또한 마가의 복음, 다시 말해서 처음 5분의 4의 사본, 그리고 이사돌의 이야기, 또 세데스라는 이름을 가진 한 신도가 안티옥에서 서기 78년에 만든 간단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누가는 또한 사도 안드레가 적었다고 주장되는 어떤 기록들의 사본, 절단되고 많이 편집된 사본을 가지고 있었다.
121:8.10 (1342.5) 4. 요한의 복음. 요한에 따른 복음은 다른 기록에 담겨 있지 않은, 유대 땅에서, 그리고 예루살렘 근처에서 예수가 하신 일을 많이 적는다. 이것이 이른바 세베대의 아들 요한에 따른 복음이며, 비록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쓰지 않았어도 그 생각을 불어넣었다. 처음 기록된 뒤에, 바로 요한이 쓴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려고 여러 번 편집을 거쳤다. 이 기록이 만들어졌을 때, 요한은 다른 복음서들을 가지고 있었고, 허다한 것이 빠져 있음을 알았다. 따라서, 서기 101년에 그는 케자리아에서 온 그리스계 유대인 동료 나단에게 글을 쓰기 시작하라고 격려했다. 요한은 기억을 더듬고, 이미 존재하는 세 가지 기록을 참조함으로 자신의 자료를 주었다. 그는 자신이 적은 저서가 하나도 없었다. “요한 1서”라고 알려진 편지는 그의 지도 하에서 나단이 쓴 작품을 소개하는 편지로서, 요한 자신이 썼다.
121:8.11 (1342.6) 이 저자들은 모두 그들이 본 대로 기억한 대로, 또는 들은 대로, 그리고 바울의 기독교 신학을 나중에 옹호함으로 이 아득히 먼 사건들에 대하여 그들의 개념이 영향을 받은 대로, 예수의 모습을 솔직하게 그렸다. 어설프기는 해도, 이 기록들은 거의 2천 년 동안 유란시아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121:8.12 (1343.1) [인정하는 말씀: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을 다시 적고 그의 행적을 다시 이야기하라는 임무를 수행하느라고 나는 모든 근원의 기록과 행성에 있는 정보를 마음대로 이용하였다. 나의 주요한 동기는 지금 살고 있는 세대의 사람들을 깨우칠 뿐 아니라, 앞날의 모든 세대에게도 도움이 될까 싶은 기록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용하도록 제공된 광대한 정보의 저장으로부터, 나는 이 목적을 이루는 데 가장 적당한 것을 골랐다. 가능한 한, 나는 순전히 인간의 근원으로부터 정보를 얻어냈다. 오로지 그러한 근원이 부족했을 때, 초인간 기록에 의존했다.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대한 생각과 개념을 한 인간의 지성이 쓸 만하게 표현했을 때, 변함없이 인간이 생각하는 형태로 보이는 것을 우대하였다. 주의 일생과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와 참 중요성에 관하여 우리의 개념에 더 잘 맞도록 언어 표현을 조정하려고 애썼지만, 가능한 한, 내 이야기 전체에서 실제의 인간적 개념과 생각 방식을 고수하였다. 인간의 머리 속에서 생겨난 개념들이 모든 다른 인간이 이해하기에 더 쓸 만하고 유익함이 입증될 것을 나는 잘 안다. 인간의 기록에서나 인간의 표현에서 필요한 개념을 찾을 수 없을 때, 다음으로 바로 내가 속한 계급의 지구 생물, 즉 중도자(中道者)들의 기억 자료에 의존했다. 그 2차 근원의 정보가 부적당한 것이 드러났을 때, 서슴지 않고 나는 행성 바깥에서 가져온 정보에 의존했다.
121:8.13 (1343.2) 사도 안드레의 기록에 담긴 기억은 별도로 하고―예수의 시절부터 이 계시, 더 정확히 말하면, 다시 진술하는 이 글을 쓸 때까지, 땅에서 산 2천 명이 넘는 인간으로부터 끌어 모은, 예수의 가르침에 관한 보석 같은 생각과 우수한 개념을 담고 있는 메모, 내가 수집해온 여러 메모로부터 나는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관하여 이 이야기를 준비했다. 인간의 기록과 인간의 개념이 적당한 생각 형태를 제공하지 못할 때에야 허락받은 계시를 이용했다. 계시 위원회는, 순전히 인간의 근원으로부터 필요한 개념의 표현을 찾으려는 노력이 실패했다고 증언할 수 있을 때까지, 인간 바깥 근원의 정보나 표현을 사용하지 말라고 금하였다.
121:8.14 (1343.3) 내 동료 중도자 11명과 함께 일하면서, 기록을 책임진 멜기세덱의 감독 하에서, 효과적으로 배열하려는 내 생각대로, 즉시 표현한 선택에 따라서, 이 이야기를 엮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이용한 대다수의 관념과 효과적인 어떤 표현조차, 이 사업을 시작할 때 아직 살아 있었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중간에 존재한 여러 세대에 걸쳐 땅에서 살았던 여러 민족의 사람들 머리 속에서 기원을 가졌다. 여러 면에서, 나는 독창적인 이야기꾼이라기보다 수집하고 편집하는 자로서 일했다. 나로 하여금 예수의 일생을 가장 효과적으로 묘사할 수 있게 만드는 생각과 개념, 그리고 가장 뛰어나게 유익하고 널리 사람을 숭고하게 만드는 표현을 써서, 견줄 데 없는 주의 가르침을 다시 진술하게 만드는, 될 수 있으면 인간다운 생각과 개념을 나는 서슴지 않고 이용했다. 유란시아 연합 중도자들을 대신하여, 땅에서 사신 예수의 일생을 다시 진술하는 자세한 글에서 다음에 이용된 모든 근원의 기록과 개념에 대하여 우리가 빚진 것을 아주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認定)한다.]
122:0.1 (1344.1)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할 나라로서 팔레스타인을 선택하게 만든 많은 이유, 그리고 특히 이 하나님의 아들이 유란시아에 나타나서 즉시 마주칠 환경으로서 도대체 어째서 요셉과 마리아의 가족이 선택되어야 했는가에 대하여 충분히 설명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122:0.2 (1344.2) 격리된 여러 세계의 상황에 관하여 멜기세덱들이 준비한 특별 보고서를 연구한 뒤에, 가브리엘과 의논하고서 미가엘은 최종으로 자신 수여를 연출할 행성으로서 마침내 유란시아를 선택하였다. 이 결정이 내린 뒤에, 가브리엘은 친히 유란시아를 찾아보았으며, 인간 집단들에 관하여 연구하고 세계와 그 민족들의 영적ㆍ지적 특징, 종족과 지리적 특징을 조사한 결과, 히브리인이 비교적 장점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을 수여 종족으로 선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이 미가엘의 인가를 받고 나서, 가브리엘은―상급의 우주 성격자들로부터 뽑은―12자 가족 위원회를 임명하고 이들을 유란시아로 파견했다. 유대인의 가족 생활을 조사하는 일이 이 위원회에 맡겨졌다. 이 위원회가 수고를 마쳤을 때 가브리엘은 유란시아에 있었고, 미가엘이 계획한 육신화를 위하여 이 위원회가 보건대, 수여 가족으로서 똑같이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장차 결혼할 세 쌍의 사람들을 지명하는 보고를 받았다.
122:0.3 (1344.3) 지명된 세 쌍 가운데, 가브리엘은 친히 요셉과 마리아를 골랐고, 그 뒤에 마리아에게 친히 나타났으며, 마리아에게 그 여자가 수여되는 아이에게 땅에서 어머니가 되도록 선택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알려주었다.
122:1.1 (1344.4) 예수(요수아 벤 요셉[1] [1782])의 인간 아버지 요셉은, 가장 특출한 히브리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선조 중 여자 쪽 가지에는 조상 계보에 때때로 비유대 종족 혈통이 많이 더해졌다. 예수의 아버지의 족보는 아브라함의 시절까지, 그리고 이 존경받을 시조(始祖)를 통해서, 더 일찍 있던 족보까지 거슬러 올라갔고, 이것은 수메르인과 놋 족속까지, 그리고 옛날 청인(靑人)의 남쪽 부족들을 통해서, 안돈과 폰타에까지 이어졌다. 다윗과 솔로몬은 요셉의 직계 조상에 속하지 않았고, 요셉의 혈통이 아담까지 바로 거슬러 올라가지도 않았다. 요셉의 직계 조상들은 기계공이었다―건설업자ㆍ목수ㆍ석공ㆍ대장장이였다. 바로 요셉은 목수였고 나중에는 계약 공인이었다. 그의 가족은 고귀한 서민의 혈통, 길게 이어진 뛰어난 혈통에 속했으며 이 혈통은 유란시아에서 종교의 발달과 연관하여 두각을 나타냈던 특별한 사람들이 나타남으로 이따금 강화되었다.
122:1.2 (1345.1) 땅에서 예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는 유란시아의 종족 역사에서 아주 놀라운 여자들을 많이 포함한 선조, 길게 이어진 독특한 선조들의 후손이었다. 마리아는 비록 그 시절과 세대에 상당히 정상 기질을 가진 보통 여자였지만, 그 여자는 아논ㆍ타말ㆍ룻ㆍ밧세바ㆍ안지ㆍ클로아ㆍ이브ㆍ엔타ㆍ라타와 같이 이름난 여자들을 선조로 여겼다. 그 시절에 어느 유대 여인도 마리아보다 더 뛰어난 혈통을 가진 공통된 조상이나, 더 상서로운 시작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혈통을 가지지 않았다. 마리아의 족보의 특징은 요셉의 족보와 마찬가지로, 굳세지만 보통 사람이 주류를 이루었고, 이 족보는 문명이 진전되고 종교가 차츰 발달하는 동안에 이따금 수많은 뛰어난 인물이 나타남으로 변화가 생겼다. 종족 면에서 고려하면, 마리아를 유대 여인으로 보는 것은 도저히 마땅치 않다. 교양과 신앙 면에서 마리아는 유대인이었지만, 유전 자질로 보면 오히려 시리아ㆍ힛ㆍ페니키아ㆍ그리스ㆍ에집트인 혈통이 혼합되었고, 마리아의 종족 유산(遺産)은 요셉보다 더 평범하였다.
122:1.3 (1345.2) 미가엘의 수여가 계획될 무렵에 팔레스타인에서 살던 모든 부부 가운데, 요셉과 마리아는 널리 퍼진 종족 친척들의 가장 이상적 조합이었고, 평균보다 높은 인격 자질을 가졌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땅에서 보통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 미가엘의 계획이었고, 따라서 가브리엘은 바로 요셉과 마리아와 같은 사람들을 수여자의 부모로 선택하였다.
122:2.1 (1345.3) 세례자 요한이 유란시아에서 예수가 일생에 할 일의 첫걸음을 정말로 내디디었다. 요한의 아버지 사가리아는 유대인 사제(司祭) 계급에 속했고, 한편 어머니 엘리자벳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속했던 어느 큰 가족 집단에서 부유한 가지의 한 사람이었다. 사가리아와 엘리자벳은 결혼한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아이가 없었다.
122:2.2 (1345.4) 나중에 마리아에게 나타난 것을 알린 것과 똑같이 가브리엘이 어느 날 정오에 엘리자벳에게 나타난 것은 기원전 8년 6월 말, 요셉과 마리아가 결혼한 지 3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가브리엘은 말했다:
122:2.3 (1345.5) “네 남편 사가리아는 예루살렘에서 제단 앞에 서 있고, 모인 사람들이 한 구원자가 오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가운데, 나 가브리엘은 이 신다운 선생의 선구자가 될 아들을 네가 곧 낳으리라는 것을 알리러 왔노니, 너는 아들을 요한이라 부를지니라. 그는 자라서 주 너의 하나님께 헌신하겠고, 나이가 차면 너의 마음을 기쁘게 하리니, 이는 그가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이킬 것이요, 또한 너희 민족의 혼을 치유하는 자, 온 인류의 영을 해방하는 자가 오심을 선포할 것임이라. 너의 친척 마리아는 약속된 이 아이의 어머니가 될지니, 내가 또한 그 여인에게 나타나리라.”
122:2.4 (1345.6) 이 환상은 엘리자벳을 크게 놀라게 했다. 가브리엘이 떠난 뒤에, 엘리자벳은 머리 속에서 이 체험을 다시 살펴보고, 당당한 그 방문자의 말씀을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나중에 다음 해 2월 초순에 마리아를 찾아볼 때까지, 남편 외에 그 계시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입을 열지 않았다.
122:2.5 (1345.7) 그러나 다섯 달 동안 엘리자벳은 비밀을 남편에게도 감추었다. 가브리엘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자, 사가리아는 대단히 의심하였고, 몇 주 동안 그 체험 전체를 믿지 않았다. 그 여자가 잉태한 것을 더 의심할 수 없었을 때에야, 가브리엘이 자기 아내를 찾아온 것을 마지못해 믿을 뿐이었다. 사가리아는 엘리자벳이 장래에 어머니가 될 것인가 대단히 당황스러워 했지만, 자신이 나이가 지긋이 들었는데도 아내의 인격을 의심하지 않았다. 요한이 태어나기 6주 전쯤이 되어 인상 깊은 꿈을 꾼 결과로 엘리자벳이 운명의 아들, 즉 메시아가 오시는 것을 위하여 길을 예비할 자의 어머니가 되리라는 것을 사가리아는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다.
122:2.6 (1346.1) 가브리엘은 기원전 8년 11월 중순 무렵에, 마리아가 나사렛의 집에서 일하는 동안에 그 여자에게 나타났다. 나중에, 마리아가 의심할 여지 없이 어머니가 되리라는 것을 안 뒤에, 예루살렘에서 6.4킬로미터 서쪽으로, 산지(山地)에 있는 유다 시로 엘리자벳을 찾아보도록 다녀오게 해 달라고 마리아는 요셉을 설득했다. 가브리엘은 앞으로 어머니가 될 두 사람에게 각각 그가 다른 쪽에게 나타났음을 알렸다. 당연히, 그들은 같이 모여서 경험을 비교하고, 자기네 아들들의 가능한 장래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 안타까워했다. 마리아는 먼 사촌 집에서 함께 3주 동안 머물렀다. 가브리엘을 본 환상을 마리아가 굳게 믿게 하려고 엘리자벳은 많이 애썼다. 그래서 그 여자는 집에 돌아와서 운명의 아이를 돌보는 직분에 더 충만히 헌신하게 되었고, 마리아는 곧 무력한 아기, 이 땅에서 보통이며 정상인 아기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122:2.7 (1346.2) 요한은 기원전 7년 3월 25일, 유다 시에서 태어났다. 사가리아와 엘리자벳은, 가브리엘이 약속한 대로 한 아들이 그들에게 왔음을 깨닫고 크게 기뻐했다. 여드렛날에 할례를 받도록 아이를 내놓았을 때, 미리 지시받은 대로, 그를 요한이라고 정식으로 이름 지었다. 이미 사가리아의 한 조카가 나사렛을 향해 떠났는데, 그는 엘리자벳이 아들을 낳았고 그 이름은 요한이 되리라 선언하는 엘리자벳의 소식을 마리아에게 전했다.
122:2.8 (1346.3)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요한이 자라서 영적 지도자요 종교 선생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부모는 그에게 주의 깊게 감명을 주었다. 요한의 마음 속의 토양은 그렇게 넌지시 비치는 씨앗들을 뿌리는 것에 늘 반응했다. 그는 어릴 적에도, 아버지가 일하는 기간에 성전에서 자주 눈에 띄었고, 그가 본 모든 것의 의미에 엄청나게 감명을 받았다.
122:3.1 (1346.4) 어느 날 저녁 해질 무렵, 요셉이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가브리엘은 낮은 돌 식탁 옆에 있는 마리아에게 나타났는데, 그 여자가 침착을 찾은 뒤에, 가브리엘은 말했다. “나는 내 주이자 네가 사랑하고 기를 자의 지시를 받고 오노라. 너 마리아에게, 내가 반가운 소식을 가져오노니, 네 안에 잉태된 자를 하늘에서 예정하셨고, 때가 되면 네가 한 아들의 어머니가 될 것을 내가 알리노라. 너는 그를 요수아라 부를지니, 그가 땅에서, 사람 가운데서 하늘나라 시대를 열리라. 요셉과 너의 친척 엘리자벳을 제외하고 이 일로 입을 열지 말라. 엘리자벳에게도 내가 나타난 적이 있고, 그 여자도 곧 한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 될지며, 너의 아들이 사람들에게 큰 권능과 깊은 확신을 가지고 선포할 구원의 소식을 위하여 길을 예비하리라. 나의 말을 의심하지 말지니, 마리아야, 이 집이 운명(運命)의 아이가 사람으로 거할 곳으로 선택되었음이니라. 나의 축복이 너에게 머무르고, 최고자들의 권능이 너를 굳세게 하겠으며, 온 땅의 주가 너를 덮으리라.”
122:3.2 (1346.5) 마리아는 아이 가진 것을 확실히 알기까지, 이 특별한 사건들을 남편에게 감히 털어놓기 전에, 여러 주 동안 마음 속에서 이 방문을 몰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에 관하여 모든 것을 들었을 때, 요셉은 마리아를 크게 신뢰하기는 했어도 몹시 난처했고 여러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처음에 요셉은 가브리엘이 찾아온 것에 대하여 의심이 들었다. 다음에, 마리아가 정말로 신의 사자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 모습을 보았다는 것을 거의 납득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그러한 일이 생길 수 있는가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그의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인간의 자식이 신성한 운명을 가진 아이가 될 수 있는가? 요셉은 이 상반되는 개념들을 결코 조화시킬 수 없었다. 기대하던 구원자가 신다운 성질을 가지리라는 것은 도저히 유대인의 개념이 아니었지만, 몇 주 동안 생각한 뒤에, 그와 마리아는 자신들이 메시아의 부모가 되도록 선택되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중대한 결론에 이르고 나서, 마리아는 엘리자벳과 이야기하려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122:3.3 (1347.1) 집으로 돌아온 뒤에, 마리아는 자기 부모, 요아킴과 한나를 찾아보러 갔다. 그 여자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두 남동생과 두 여동생은 언제나 예수가 신성한 임무를 가졌는가 대단히 회의를 품었다. 하지만 물론 이때, 그들은 가브리엘이 찾아온 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나 제 아들이 위대한 선생이 될 운명을 가졌다 생각한다고 마리아는 여동생 살로메에게 털어놓았다.
122:3.4 (1347.2) 예수를 잉태한 다음 날에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선언하였고, 이것은 약속의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그 여자의 체험 전부와 연결되어 일어난 유일한 초자연적 사건이었다.
122:4.1 (1347.3) 대단히 인상 깊은 꿈을 꾸기 전까지, 요셉은 마리아가 특별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리라는 생각을 달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꿈 속에, 한 눈부신 하늘 사자가 나타나서, 다른 말씀 가운데 이렇게 말했다. “요셉아, 지금 높은 곳에서 다스리는 이의 명령을 받고서 내가 나타나노라. 마리아가 낳을 아들, 세상에서 큰 빛이 될 아들에 관하여 너에게 이르라고 나는 지시를 받았노라. 그 아들 안에는 생명이 있고, 그의 일생은 인류의 빛이 될지니라. 그는 먼저 자신의 민족에게 올 터이나, 저희는 좀처럼 그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를 받아들이는 많은 사람에게,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밝히리라.” 이 체험을 겪은 뒤에, 가브리엘이 찾아온 것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세상에서 신의 사자(使者)가 되리라는 약속에 대하여 마리아가 한 이야기를 요셉은 결코 다시 송두리째 의심하지는 않았다.
122:4.2 (1347.4) 이 가운데 어떤 방문에서도, 다윗의 집에 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예수가 “유대인의 구원자,” 아니 오랫동안 고대하던 메시아가 되리라는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암시가 없었다. 예수는 유대인이 기대하던 메시아가 아니었지만, 세상의 구원자였다. 그의 사명은 어느 한 집단이 아니라, 모든 종족과 민족을 위한 사명이었다.
122:4.3 (1347.5) 요셉은 다윗 왕의 직계 혈통이 아니었다. 마리아가 요셉보다 더 많이 다윗의 혈통을 가졌다. 로마의 인구 조사를 위하여 등록하려고 요셉이 다윗의 도시, 베들레헴으로 간 것은 참말이지만, 이는 여섯 세대 전에, 요셉 아버지 쪽의 조상이 고아가 되어서, 어떤 사독이라는 사람의 집에 입양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독은 다윗의 직계 후손이었다. 따라서 요셉은 또한 “다윗의 집” 출신으로 간주되었다.
122:4.4 (1347.6) 구약에서 이른바 메시아 예언의 대부분은, 예수가 땅에서 산 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그에게 맞도록 이용되었다. 몇 세기 동안, 히브리 선지자들은 한 구원자가 올 것이라 예언해 왔다. 그리고 뒤이은 세대들은 이 약속이 다윗의 왕좌에 앉을 새 유대인 통치자, 모세가 사용하던 소문난 기적의 방법으로,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들이 어떤 외국의 지배도 받지 않는 그러한 강국으로 세울 사람을 언급하는 것이라 믿도록 해석하였다. 또 히브리 성서에서 두루 발견되는 많은 상징적 구절이 후일에 예수 일생의 사명에 잘못 적용되었다. 구약(舊約)의 많은 구절이 주가 땅에서 사신 일생의 어떤 사건에 맞는 것같이 보이도록 왜곡되었다. 바로 예수는 다윗의 왕가(王家)와 아무 연관이 없다고 대중 앞에서 한때 부인하였다. “한 젊은 여인이 아들을 낳으리라”는 구절조차 “한 처녀가 아들을 낳으리라”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요셉과 마리아, 이 두 사람의 족보도 이처럼 왜곡되었는데, 이 족보들은 미가엘이 땅에서 일생을 보낸 이후에 만들어졌다. 이 계보 가운데 다수는 주의 선조들 가운데 많은 것을 포함하지만, 대체로 이것들은 진정하지 않으며 사실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예수를 초기에 따르던 사람들은 옛날 예언의 말씀이 모두 그들의 주, 선생의 일생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이게 만들려는 유혹에 너무나 자주 빠졌다.
122:5.1 (1348.1) 요셉은 태도가 부드러운 사람이요, 극히 양심적이고, 모든 면에서 자기 민족의 종교 관습과 관례를 충실히 지켰다. 그는 말이 적었어도 많이 생각하였다. 유대 민족의 딱한 곤경은 요셉에게 많은 슬픔을 주었다. 젊은이로서, 여덟 형제 자매 사이에서 명랑한 편이었지만, 결혼 생활 초기에 (예수가 어린 시절에) 그는 이따금 영적으로 가볍게 낙심하는 때가 있었다. 이런 성향은, 그가 때 이르게 죽기 전에, 목수 신분에서 번창하는 계약자의 지위로 승진하여 집안의 경제 조건이 향상된 뒤에, 훨씬 나아졌다.
122:5.2 (1348.2) 마리아의 기질은 남편과 아주 반대였다. 그 여자는 보통 명랑했고, 풀이 죽는 일이 아주 드물었으며, 항상 밝은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마리아는 자기의 느낌을 마음대로 자주 표현했고, 요셉이 갑자기 죽기까지 슬픔이 가득 찬 표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 이 충격에서 회복하자마자, 맏아들의 특별한 생애 때문에 생긴 걱정과 의문이 그 여자에게 밀어닥쳤고, 아들의 생애는 마리아의 놀라워하는 눈앞에 매우 빠르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특별한 체험을 통해서 내내, 이상하고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맏아들, 그리고 예수의 살아 있는 형제 자매들과 가진 관계에서 마리아는 차분하고 용감하며 썩 지혜로웠다.
122:5.3 (1348.3) 예수는 아버지로부터 특별히 부드러운 기질, 그리고 인간의 성품에 공감하는 놀라운 이해심을 많이 물려받았다. 위대한 선생으로서 그의 재능, 의분(義憤)을 느끼는 엄청난 능력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 생활 환경에 대하여 어른으로서 예수의 감정적 반응을 보면 한때는 아버지처럼 명상에 잠기고 경건하며, 때때로 슬퍼 보이는 특징이 있었다. 그러나 낙관적이고 결단력 있는 어머니의 성향을 따라서 앞으로 돌진하는 일이 더 흔했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그가 자라서 어른의 생애에서 중대한 걸음을 갑자기 내디디면서, 마리아의 기질이 신다운 아들의 생애를 지배하는 경향이 있었다. 어떤 세부에서 예수는 부모의 특징을 섞어 닮았고, 다른 면에서는 한 사람의 특징과 반대되는 다른 사람의 특징을 나타냈다.
122:5.4 (1348.4) 요셉으로부터 예수는 유대인의 의식(儀式) 풍습에 대하여 엄격한 훈련을 받고 히브리 성서에 관하여 특별한 식견을 확보했다. 마리아로부터 그는 종교 생활의 폭 넓은 관점과 개인의 영적 자유에 관하여 더 개방적인 개념을 얻었다.
122:5.5 (1349.1) 요셉과 마리아의 가족들은 모두 그 시절로 보아서 잘 교육받은 편이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그 시절과 신분으로 보면 평균보다 훨씬 넘는 교육을 받았다. 요셉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마리아는 계획하는 사람이었고, 민첩하게 적응하고, 실제적으로 즉시 실행했다. 요셉은 까만 눈을 하고 갈색 머리였고 마리아는 갈색 눈에 머리털이 아주 거의 금발이었다.
122:5.6 (1349.2) 요셉이 살아 있었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맏아들의 신성한 사명을 굳게 믿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마리아는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했고, 다른 자녀들과 친구와 친척들의 견해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가 잉태된 바로 뒤에 가브리엘이 자기에게 나타났던 기억 때문에, 마리아의 마지막 태도는 언제나 차분해졌다.
122:5.7 (1349.3) 마리아는 직물 짜는 솜씨가 좋았고, 그 시절에 하던 대부분의 가정 일에 보통이 넘게 숙련되었다. 마리아는 살림을 잘하는 여인이었고, 우수한 가정 주부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다 유능한 선생이었고, 아이들이 그 시절의 공부를 반드시 통달하게 하였다.
122:5.8 (1349.4) 젊은이였을 때, 요셉은 마리아의 아버지에게, 그 집에 덧붙인 건물을 짓는 일에 고용되었고, 점심 식사 중에 마리아가 요셉에게 물 한 잔을 가져왔을 때 예수의 부모가 될 운명을 가진 그 두 사람의 구애(求愛)가 정말로 시작되었다.
122:5.9 (1349.5) 요셉이 스물 한 살이 되었을 때, 나사렛 근방에 마리아의 집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서 결혼했다. 이 결혼은 거의 2년에 걸쳐 지속된 정상적 구애 끝에 이루어졌다. 그 뒤에 얼마 안 되어, 그들은 나사렛에 있는 새 집으로 옮겼는데, 요셉은 두 형제의 도움을 받아서 이 집을 지었다. 이 집은 근처의 높은 언덕 아래 가까이에 자리잡았고, 그 언덕에서는 마음에 썩 들게 둘레의 시골이 내려다보였다. 특별히 마련된 이 집에서, 아기를 기다리는 이 젊은 부모는 약속된 아이를 환영하려고 생각했고, 우주의 이 중대한 사건이, 그들이 집을 떠나서 유대 지방의 베들레헴에 있는 동안에 벌어질 것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122:5.10 (1349.6) 요셉의 집안에서 반 이상이 예수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이 되었지만, 마리아 의 집안 사람들 중에는 주가 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거의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다. 요셉은 기대하는 메시아가 영적 인물이라는 개념을 더 지지했지만, 마리아와 그 가족, 특히 마리아의 아버지는 메시아가 현세의 구원자요 정치적 통치자라는 관념을 고수했다. 마리아의 조상들은 당시로 보아서 최근에 있었던 마카비 운동을 눈에 띄게 편들었다.
122:5.11 (1349.7) 요셉은 유대 종교의 동부 관점, 즉 바빌로니아의 관점을 굳게 지켰다. 마리아는 율법과 선지자를 더 자유롭게, 폭 넓게 풀이하는 서부(西部), 즉 헬라파 해석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122:6.1 (1349.8) 예수의 집은 나사렛 북부에 있는 높은 언덕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마을의 샘물에서 얼마큼 떨어져 있었는데, 이 샘물은 마을 동쪽 구역에 있었다. 예수의 가족은 그 도시의 교외에서 살았고, 이것은 그로 하여금 나중에 시골 길에서 자주 산보를 즐기고 가까이 있는 고지(高地) 꼭대기까지 나들이를 더욱 쉽게 만들었는데, 이곳은 동쪽으로 타볼 산맥, 그리고 거의 같은 높이의 나인 산을 빼고, 갈릴리 남쪽의 모든 산 가운데 가장 높았다. 그들의 집은 이 산의 남쪽 돌출부에서 조금 남동쪽에, 이 고지의 아래와 나사렛에서 가나 방향으로 가는 길 사이의 중간쯤에 자리를 잡았다. 그 산 오르기를 제쳐놓고, 예수가 가장 좋아하는 산책은 동북 방향으로 산밑 둘레를 구불구불 돌아가는 좁은 산길을 따라서, 세포리스로 가는 길과 만나는 곳까지 가는 것이었다.
122:6.2 (1350.1) 요셉과 마리아의 집은 돌로 지은 한 칸 방이었고 지붕이 평평했는데, 인접한 건물에는 가축이 살았다. 가구(家具)는 낮은 돌 식탁 하나, 토기(土器)와 돌 접시와 돌 단지들, 베틀 하나, 등받침 하나, 조그만 의자 몇 개, 돌 마루에서 자는 데 쓰는 깔개들이었다. 뒤뜰에는, 동물이 사는 인접한 우리 가까이에, 아궁이 그리고 곡식 빻는 맷돌을 덮는 오두막이 있었다. 이 종류의 맷돌을 움직이는 데, 한 사람은 갈고 다른 사람은 알곡을 맷돌에 집어넣고, 이렇게 두 사람이 필요했다. 어린 소년이었을 때 예수는 어머니가 가는 돌을 돌리는 동안, 이 맷돌에 알곡 집어넣는 일을 가끔 했다.
122:6.3 (1350.2) 후일에 식구가 늘어나면서, 이들은 음식을 먹으려고, 크게 만든 돌 식탁 둘레에 모두 웅크리고 앉아서, 공동으로 쓰는 접시나 그릇에서 음식을 덜어먹곤 했다. 겨울에는 저녁 식사 때, 진흙으로 만든 작고 납작한 등불이 식탁을 비추었고, 등불은 올리브 기름으로 채웠다. 마르다가 태어난 뒤에, 요셉은 이 집에, 큰 방 하나를 덧붙여 지었는데, 이 방은 낮에 목수 작업장으로 쓰이고, 밤에는 잠자는 방으로 쓰였다.
122:7.1 (1350.3) 기원전 8년 3월 (요셉과 마리아가 결혼한 달), 케자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모든 주민의 수를 세어야 한다, 징세 개선에 사용될 수 있는 인구(人口) 조사를 해야 한다고 칙령을 내렸다. 유대인들은 언제나 “사람들의 수를 세려는” 시도는 무엇이나 반대하는 큰 편견을 가졌고, 이것은 유대 임금 헤롯의 심각한 집안 문제와 관련하여, 유대 왕국에서 1년 동안 인구 조사의 실시를 연기하게 만들었다.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서, 이 인구 조사는 기원전 8년에 기록되었고, 예외로 헤롯의 팔레스타인 왕국에서는 1년 뒤 기원전 7년에 조사가 실시되었다.
122:7.2 (1350.4) 등록을 위해서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가야 할 필요는 없었다―요셉은 가족을 위하여 등록할 권한이 있었다―하지만 마리아는 모험을 좋아하고 적극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따라가겠다고 고집하였다. 요셉이 집을 떠나 있는 동안에 아이가 태어나지 않을까 걱정하여 그 여자는 혼자 남아 있기를 두려워했고, 다시 생각해 보니, 베들레헴은 유다 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므로, 마리아는 자기 친척 엘리자벳과 즐거운 대화를 나눌 가능성을 내다보았다.
122:7.3 (1350.5) 요셉은 마리아가 따라오는 것을 실질적으로 막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나흘 동안의 여행을 위해서 먹을 것을 챙기고 있을 때, 마리아는 분량을 두 배로 마련하고 여행을 위하여 준비했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떠나기 전에, 요셉은 마리아가 따라가는 것을 좋게 여겼고, 날이 밝자 그들은 즐겁게 나사렛을 떠났다.
122:7.4 (1350.6) 요셉과 마리아는 가난했다. 짐 싣는 짐승이 하나만 있었으므로 아이 때문에 배가 부른 마리아가 식량을 실은 동물에 올라탔고, 요셉은 그 짐승을 이끌면서 걸었다. 요셉의 아버지가 최근에 몸을 쓰지 못하게 되어서 부모를 부양하는 데도 돈을 내야 했기 때문에, 집을 짓고 가구를 장만하는 일이 요셉에게 몹시 힘에 겨웠다. 그리고 나서 이 유대인 부부는 기원전 7년 8월 18일에 아침 일찍, 초라한 집을 뒤로 하고 베들레헴으로 여행 길을 떠났다.
122:7.5 (1351.1) 여행의 첫날 그들은 길보아산 기슭의 언덕 둘레에 이르렀고, 거기서 그들은 요단강 가에 그날 밤 텐트를 치고서 어떤 종류의 아들이 태어날 것인가, 여러 가지로 추측을 해보았다. 요셉은 아들이 영적 선생이 될 것이라는 개념에 집착했고, 마리아는 유대인의 메시아, 히브리 국가의 구원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고수하였다.
122:7.6 (1351.2) 8월 19일 밝은 이른 아침에, 요셉과 마리아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사르타바산 밑에서 요단강 유역을 내려다보면서 점심을 먹었고, 걸음을 계속하여 그날 밤 예리고에 다다랐으며, 거기서 그 도시 교외의 도로에 있는 어느 여인숙에서 멈추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로마 통치의 억압, 헤롯, 인구 조사를 위한 등록, 유대인의 배움과 문화의 중심지인 예루살렘과 알렉산드리아의 비교적 영향에 관하여 실컷 토론한 뒤에, 나사렛 나그네들은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다. 8월 20일 아침 일찍 다시 길을 떠났고 한낮이 되기 전에 예루살렘에 다다랐다. 성전을 찾아보고, 목적지를 향해 계속 걸어서, 오후 중반에 베들레헴에 도착했다.
122:7.7 (1351.3) 여인숙은 사람들로 들끓었고, 따라서 요셉은 먼 친척들한테서 잠잘 곳을 찾았지만, 베들레헴에 있는 방마다 넘치도록 사람들이 가득하였다. 요셉은 여인숙의 안뜰로 돌아오면서, 바위 옆을 깎아서 만든 마구간, 그 여인숙(旅人宿) 바로 밑에 카라반 손님을 위한 마구간이 짐승들을 치우고 숙박하는 손님을 받기 위하여 깨끗이 치워졌다는 통지를 받았다. 당나귀를 안마당에 두고 요셉은 옷가지와 먹을 것을 담은 자루들을 어깨에 메고, 마리아와 함께 돌 계단을 내려가서 밑에 있는 숙박소로 갔다. 그들은 마구간과 말구유 앞 쪽에 곡식 저장소로 쓰였던 곳에 자신들이 와 있음을 알았다. 천막 커튼이 쳐져 있었고, 그들은 그렇게 편안한 잠자리를 가지게 되어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122:7.8 (1351.4) 요셉은 당장 나가서 등록할까 생각해 보았지만, 마리아는 지쳐 있었다. 마리아는 상당히 고통스러워했고, 그에게 옆에 남아 있으라고 부탁했으며, 요셉은 그렇게 했다.
122:8.1 (1351.5) 밤새도록 마리아가 뒤척였기 때문에, 둘 중에 아무도 잠을 많이 자지 못했다. 동이 틀 때가 되어서 산통의 증거가 뚜렷해졌고, 기원전 7년 8월 21일 한낮에, 동료 여인 여행자들의 도움과 친절한 보살핌을 받아서 마리아는 사내아이를 낳았다. 나사렛 예수는 세상에 태어났고, 그러한 가능성에 대비하여 마리아가 가져왔던 옷 속에 둘둘 싸여서, 가까이 있는 말구유에 눕혀졌다.
122:8.2 (1351.6) 그날 이전과 이후로 모든 아기가 세상에 온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약속된 아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여드렛날에, 유대인의 풍습에 따라서, 그는 할례를 받았고, 정식으로 요수아(예수)라는 이름을 받았다.
122:8.3 (1351.7) 예수가 태어난 다음 날, 요셉은 등록을 마쳤다. 이틀 전 밤에 예리고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여인숙에서 묵고 있던 어떤 부유한 친구에게 요셉을 데리고 갔고 그 사람은 나사렛 부부와 기꺼이 숙소를 맞바꾸겠다고 말했다. 그날 오후에 그들은 그 여인숙으로 옮겼고, 요셉의 어느 먼 친척 집에서 묵을 곳을 찾을 때까지 거기서 거의 3주 동안 살았다.
122:8.4 (1351.8) 예수가 태어난 뒤 둘째 날, 마리아는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엘리자벳에게 보냈고, 그들의 모든 일을 사가리아와 함께 이야기하려고 예루살렘까지 요셉을 초대한다는 회답을 받았다. 그 다음 주에 요셉은 사가리아와 의논하려고 예루살렘으로 갔다. 사가리아와 엘리자벳은 다 예수가 정말로 유대인의 구원자 메시아가 되고, 아들 요한이 그 부관들의 우두머리, 즉 오른 팔처럼 믿는 운명의 사람이 될 것이라는 진지한 확신에 홀려 있었다. 그리고 마리아가 바로 이런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가 자라서 온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아서 다윗의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다윗의 도시 베들레헴에 남아 있으라고 요셉을 설득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1년이 넘도록 베들레헴에 남아 있었고, 요셉은 그동안에 목수 직업에서 얼마큼 일했다.
122:8.5 (1352.1) 정오에 예수가 태어날 때, 유란시아의 세라핌들은 그들의 지도자들 밑에 모여서 베들레헴의 말구유를 내려다보며 영광의 찬송을 불렀다. 그러나 이러한 찬미 소리는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우르에서 온 어떤 사제들, 사가리아가 예루살렘에서 보낸 사제들이 도착한 날까지 어떤 목동이나 다른 필사 인간도 베들레헴의 아기에게 경의(敬意)를 표하러 오지 않았다.
122:8.6 (1352.2)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이 사제들은, 자기 나라에서 한 이상한 종교 선생으로부터, “생명의 빛”이 땅에서 한 아기로서, 유대인 사이에 바야흐로 나타나려 한다는 말씀을 그가 꿈 속에서 받았다는 이야기를 얼마 전에 들었다. 그곳으로 이 세 선생은 이 “생명의 빛”을 찾으러 갔다. 예루살렘에서 몇 주 동안 헛되이 찾다가 우르로 막 돌아가려 했는데, 그때 사가리아가 그들을 만났고 예수가 그들이 찾는 분이라 믿는다고 밝히고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냈다. 거기서 그들은 아기를 발견하고, 땅에서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가져온 선물들을 전해 드렸다. 그들이 찾아왔을 때, 아기는 태어난 지 거의 3주가 되었다.
122:8.7 (1352.3) 이 현자들은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안내하는 별을 전혀 구경하지 못했다. 베들레헴의 별에 관한 아름다운 전설은 이렇게 비롯되었다. 예수는 기원전 7년, 8월 21일 정오에 태어났다. 기원전 7년 5월 27일에, 물고기 별자리에서 목성과 토성의 보기 드문 합(合)이[2] [1783] 일어났다. 비슷한 합이 같은 해, 9월 29일과 12월 5일에 일어난 것은 천문학에서 놀라운 사실이다. 특별하지만 온통 자연스러운 이 사건들에 근거를 두고, 후세에 좋은 의도를 가진 열심있는 신자들은 베들레헴의 별과 찬미하는 점성가들의 전설, 그들이 말구유까지 별의 안내를 받고, 거기서 갓난아이를 보고 경배했다는 흥미 있는 전설을 만들었다. 동양과 근동의 사람들은 옛날 이야기를 좋아하며, 그들의 종교 지도자와 정치적 영웅들의 생애에 관하여 그러한 아름다운 신화(神話)를 계속 지어내고 있다. 인쇄술이 없이, 대부분의 인간 지식이 입에서 입으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해졌을 때, 신화가 전통이 되고, 전통이 궁극에 사실로 인정되기가 아주 쉬웠다.
122:9.1 (1352.4) 첫아들은 누구나 주에게 속하며, 이방 국가들 사이에 첫아들을 희생물로 바치기가 관습이었다시피 이 희생 대신에, 공인된 어느 제사장에게 부모가 다섯 세겔을 바쳐서 아들을 되찾는다면 그러한 아들은 살아도 좋다고 모세는 유대인에게 가르쳤다. 또한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 어머니가 정화(淨化)를 받으려고 성전에 와서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또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여자 대신 적절한 희생을 바치게 해야 한다고) 지시하는 모세의 규례가 있었다. 이 두 가지 의식을 같은 때에 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요셉과 마리아는 몸소 가서 사제들에게 예수를 보이고 몸값을 치렀고, 또한 출산 때문에 몸이 더러워진다는 주장대로, 이로부터 마리아의 몸이 의식(儀式)으로 정화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하여 적당한 희생물을 바치러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올라갔다.
122:9.2 (1353.1) 성전의 마당 근처에는 놀라운 두 인물, 곧 가수 시미온과 여자 시인 안나가 항상 서성거리고 있었다. 시미온은 유대 지방 사람이지만, 안나는 갈릴리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은 빈번히 같이 다녔고 사가리아 사제와 가까웠는데, 사가리아가 요한과 예수의 비밀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시미온과 안나는 모두 메시아가 오실 것을 몹시 바라고 있었고, 사가리아를 신뢰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가 유대 민족이 기대하는 구원자라고 믿게 되었다.
122:9.3 (1353.2) 사가리아는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어느 날에 나타날 것을 알았고, 손을 올려 인사함으로 처음 낳은 아이들의 행렬에서 어느 아이가 예수인가 가리켜 주기로 시미온과 안나와 미리 약속해 두었다.
122:9.4 (1353.3) 이 경사(慶事)를 위하여 안나는 전에 시(詩)를 써 두었고, 시미온이 그 시를 노래하기 시작했는데, 요셉과 마리아와 성전 마당에 모여든 사람들이 다 깜짝 놀랐다. 다음이 첫아들을 대속하는 그들의 찬송이었다:
122:9.5 (1353.4)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복이 있나니,
122:9.6 (1353.5) 우리를 찾아와 그의 민족을 위하여 값을 치렀음이라.
122:9.7 (1353.6) 그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122:9.8 (1353.7) 그의 종 다윗의 집에서 길렀도다.
122:9.9 (1353.8)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 같이―
122:9.10 (1353.9) 우리의 적과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이라.
122:9.11 (1353.10) 우리 선조들에게 자비를 보이고, 그의 거룩한 약속을 기억하려고―
122:9.12 (1353.11) 적들의 손에서 구원을 받았으니
122:9.13 (1353.12) 우리가 사는 동안 그 앞에서 거룩하고 올바른 가운데
122:9.14 (1353.13) 두려움 없이 그를 섬김을 허락한다고
122:9.15 (1353.14) 우리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하신 서약.
122:9.16 (1353.15) 옳도다, 너 약속(約束)의 아이를 최고자의 선지자라 부를지니,
122:9.17 (1353.16) 주의 나라를 세우려고 주의 얼굴 앞으로 네가 갈 것임이라.
122:9.18 (1353.17) 저희의 죄를 뉘우치는 가운데,
122:9.19 (1353.18) 그의 백성에게 구원의 지식을 주려 함이라.
122:9.20 (1353.19) 어두움 속에, 죽음의 그림자 속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빛을 비추려고 우리의 발길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려고
122:9.21 (1353.20) 하늘에서부터 날의 근원이 이제 우리를 찾았으니,
122:9.22 (1353.21) 우리 하나님의 부드러운 자비를 기뻐하여라.
122:9.23 (1353.22) 아 주여, 이제 주의 종이 당신의 말씀을 좇아서 평안히 떠나게 하소서.
122:9.24 (1353.23) 모든 민족의 얼굴 앞에 주가 예비하신
122:9.25 (1353.24) 구원을 나의 눈이 보았음이니이다.
122:9.28 (1353.27)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길에, 요셉과 마리아는 말이 없었다―당황하고 경외감에 넘쳤다. 늙은 여자 시인 안나의 작별 인사 때문에 마리아는 마음이 많이 흔들렸고, 예수를 유대 민족이 기대하는 메시아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는, 때 이른 이 노력이 요셉은 달갑지 않았다.
122:10.1 (1353.28) 그러나 헤롯이 보낸 감시원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르에서 온 사제들이 베들레헴을 찾아갔다고 그들이 헤롯에게 보고했을 때, 헤롯은 자기 앞에 나타나라고 이 갈대아인들을 호출했다. “유대인의 새 임금”에 관하여 열심히 이 현자들에게 물어 보았지만, 그들은 인구 조사에 등록하기 위하여 남편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내려온 어느 여자에게 그 아기가 태어났다고 설명했는데, 이것은 조금도 흡족하지 않았다. 이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고 헤롯은 그들에게 돈 자루를 주어 보내면서, 그 왕의 나라가 영적인 것이고 현세의 나라가 아니리라 그들이 선언했은즉 자기도 가서 그에게 경배드리도록 그 아이를 찾아야 한다고 지시했다. 그러나 현자(賢者)들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 헤롯은 의심이 들었다. 이런 일을 머리 속에서 이모저모 뜯어보고 있을 때, 그의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성전에서 요즘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상세한 보고를 드렸고, 예수를 대속(代贖)하는 의식에서 시미온이 불렀던 노래의 몇 부분의 사본 하나를 가져왔다. 그러나 정탐꾼들이 요셉과 마리아를 따라가지 못했고 그 부부가 아기를 어디로 데려갔는가 일러 주지 못했을 때, 헤롯은 그들에게 몹시 성을 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요셉과 마리아를 찾으라고 탐색대를 보냈다. 헤롯이 나사렛 가족을 추적한다는 것을 알고서, 사가리아와 엘리자벳은 베들레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기 예수는 요셉의 친척들에게 몰래 옮겨졌다.
122:10.2 (1354.1) 요셉은 일거리를 찾기가 두려웠고, 얼마 안 되는 저축은 눈 녹듯 사라지고 있었다. 성전에서 정화(淨化) 예식이 있을 때에도, 모세가 가난한 자에게 어머니의 정화를 위해 지시한대로, 마리아를 위해서 어린 비둘기 두 마리를 바쳐도 괜찮을 만큼, 요셉은 자신을 충분히 가난하게 여겼다.
122:10.3 (1354.2) 1년이 넘도록 수색한 뒤에, 헤롯의 첩자들이 예수를 찾아내지 못했을 때, 그 아기가 아직도 베들레헴에 숨어 있다고 의심했기 때문에, 베들레헴에서 집집마다 샅샅이 수색하라, 그리고 두 살이 안 된 모든 남자 아기를 죽여야 한다는 명령 문서를 준비했다. 이 방법으로 헤롯은, “유대인의 왕”이 될 이 아이가 꼭 죽도록 처리하기를 바랐다. 이처럼 유대 땅의 베들레헴에 있는 남자 아기 열 여섯 명이 하루에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술수(術數)와 살인은 자신의 직계 가족 안에서도, 헤롯의 궁정에서 보통 있는 일이었다.
122:10.4 (1354.3) 이 아기들의 학살은 기원전 6년 10월 중순경에 일어났고, 그때 예수는 한 살이 조금 넘었다. 그러나 헤롯의 궁정 수행원들 가운데도 다가오는 메시아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에 하나가, 베들레헴의 남자 아기들을 도륙하라는 명령을 듣고 나서 사가리아에게 알렸고 그는 다시 요셉에게 사자를 보냈다. 학살(虐殺)이 있기 전날 밤에,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를 안고 베들레헴을 뒤로 하고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향하여 떠났다. 사람의 눈길을 피하려고, 그들만 예수를 데리고 에집트로 길을 떠났다. 사가리아가 마련해 준 자금으로 알렉산드리아로 갔고, 거기서 요셉은 자기 직업에서 일했으며, 한편 마리아와 예수는 요셉 쪽의 부유한 친척들의 집에서 묵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만 2년이 차도록 머무르고 헤롯이 죽기까지 베들레헴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123:0.1 (1355.1) 베들레헴에서 머무른 동안에 생긴 위험과 불안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에 안전히 도착하기까지 마리아는 아기에게 젖을 떼지 않았고, 거기서 이 가족은 정착하여 정상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 그들은 친척들과 함께 살았고, 도착한 뒤에 얼마 안 되어 일자리를 잡아놓자 요셉은 가족을 넉넉히 부양할 수 있었다. 그는 몇 달 동안 목수로서 고용되었고, 그때 한 공공 건물을 짓는 데 고용된 큰 노동자 무리의 우두머리 자리로 승진되었다. 이 새로운 경험 때문에 그들이 나사렛으로 돌아온 뒤에, 그는 청부업자이자 건설업자가 될 생각을 품게 되었다.
123:0.2 (1355.2) 예수가 무력한 아기였던 이 처음 몇 해 동안 내내, 마리아는 아이의 복지를 위태롭게 하거나 땅에서 그의 사명을 어떻게라도 방해할 수도 있는 무슨 일이 닥칠까 두려워 오랫동안, 늘 지키고 있었다. 마리아보다 제 아이에게 더 헌신한 어머니는 없었다. 예수가 어쩌다 머무른 집에는 같은 나이 또래의 아이가 둘이 더 있었고, 가까운 이웃에는 바로 그와 나이가 아주 비슷한 다른 아이가 여섯 명 있어서 적당한 놀이 동무가 되었다. 처음에 마리아는 예수를 곁에 가까이 두고 싶어했다. 마리아는 그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뜰에서 놀게 놓아두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했지만, 요셉은 친척들의 도움을 얻어서, 그러한 방식은 예수가 같은 나이 또래 아이들에게 어떻게 적응하는가 배울 유익한 체험을 얻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지나치게 감싸고 특별히 보호하는 그러한 과정은 그에게 자신을 의식하고 얼마큼 자기 중심인 사람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서, 마침내 마리아는 약속의 아이를 어떤 다른 아이와도 똑같이 자라도록 놓아두는 계획에 찬성했다. 비록 이 결정을 따랐어도, 마리아는 작은 꼬마들이 집 근처나 뜰에서 놀고 있는 동안에 언제나 경계하는 것을 일로 삼았다. 그가 유아기와 어린 시절을 거치던 이 여러 해 동안, 아들의 안전을 위하여 마리아가 가슴 속에 지고 있던 짐은 오직 다정한 어머니가 알 수 있을 것이다.
123:0.3 (1355.3)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들이 머물렀던 두 해 동안 내내 예수는 튼튼했고, 줄곧 정상으로 자랐다. 몇 친구와 친척들을 제쳐놓고, 아무도 예수가 “약속의 아이”라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요셉의 친척들 가운데 한 사람이 멤피스에 사는, 아득한 이크나톤의 후손인 몇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밝혔다. 이들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작은 무리의 지지자들과 함께, 요셉의 친척이 되는 후원자의 궁전 저택에서 모였다. 이 모임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기 얼마 전에 나사렛 가족에게 작별을 알리고 아이에게 경의를 표하려는 것이었다. 모여든 친구들은 이 기회에 히브리 성서의 그리스어 번역판의 완전한 사본(寫本) 한 부를 예수에게 바쳤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가 에집트에 남아 있으라고 멤피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친구들이 청하는 것을 마침내 사양할 때까지, 유대인의 성스러운 기록의 이 사본은 요셉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지지자들은 운명의 아이가 팔레스타인에서 선정된 어떤 곳보다도, 알렉산드리아의 주민으로서 훨씬 더 크게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권유는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을 받은 뒤에 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떠나는 것을 얼마 동안 늦추었다.
123:0.4 (1356.1) 요셉과 마리아는 그들의 친구 에즈레욘이 소유하는, 요파로 가는 배를 타고 마침내 알렉산드리아를 떠났고 기원전 4년 8월말에 그 항구에 도착했다. 그들은 바로 베들레헴으로 갔고, 그들이 거기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나사렛으로 돌아갈 것인가, 친구와 친척들과 의논하느라고 거기서 9월 한 달을 꼬박 보냈다.
123:0.5 (1356.2) 마리아는 다윗의 도시,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자라야 한다는 생각을 결코 완전히 버린 적이 없었다. 요셉은 아들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구원자가 될 것이라 정말로 믿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이 정말로 다윗의 후손이 아니요, 그가 다윗의 자손으로 간주되는 것은 선조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윗 혈통의 집에 입양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리아는 물론, 다윗의 도시가 다윗의 왕좌를 이을 새 후보자가 자랄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장소라고 생각했지만, 요셉은 아켈라우스보다 차라리 그의 동생 헤롯 안티파스에게 운명을 걸었다. 그는 유대 땅의 베들레헴이나 어느 다른 도시에서 아이가 안전할까 크게 두려워했고, 갈릴리를 다스리는 안티파스보다, 아켈라우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의 위험한 정책을 추구할 가능성이 더 많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 모든 이유 외에도, 요셉은 아이를 기르고 교육하기에 더 나은 장소인 갈릴리가 더 좋다고 거리낌없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마리아의 반대를 극복하는 데는 3주가 걸렸다.
123:0.6 (1356.3) 10월 1일이 되어서, 그들이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요셉은 마리아와 모든 친구를 설득했다. 따라서, 기원전 4년 10월초에 베들레헴을 떠나서, 나사렛을 향했고, 리다와 스키토폴리스를 거쳐서 갔다. 그들은 어느 일요일 아침 일찍 떠났고, 마리아와 아이는 새로 산, 짐 싣는 짐승에 올라탔으며, 한편 요셉과 따라오는 친척 남자 다섯 명은 걸어갔다. 친척들은 요셉의 가족만 나사렛까지 여행하라고 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요단강 유역을 지나서 갈릴리로 가기가 두려웠고, 서쪽 통로도 외로운 두 나그네와 나이 어린 아이에게 아주 안전하지는 않았다.
123:1.1 (1356.4) 길 떠난 지 나흘째에, 그 일행은 목적지에 안전히 이르렀다. 그들은 나사렛 집에 아무런 예고 없이 도착했다. 그 집은 3년이 넘도록, 요셉의 결혼한 형제 중에 한 사람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들을 보고 정말로 놀랐다. 아주 조용히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요셉의 가족도 마리아의 가족도 그들이 전에 알렉산드리아를 떠났다는 것조차 몰랐다. 이튿날 요셉의 형제는 가족을 옮겼고, 마리아는 예수가 태어난 뒤에 처음으로, 자기 집에서 생활을 즐기려고 작은 가족과 함께 정착했다. 한 주도 채 되기 전에, 요셉은 목수로서 일자리를 얻었고,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123:1.2 (1356.5) 나사렛으로 돌아왔을 때 예수는 3살, 2개월쯤 되었다. 그는 이 여행을 모두 매우 잘 견디었고 아주 건강했으며, 자기 마당을 가져서 뛰어다니고 즐길 수 있는 것에 아이다운 기쁨과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같이 놀던 알렉산드리아의 친구들을 몹시 그리워하였다.
123:1.3 (1356.6)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길에, 갈릴리 친구와 친척들 사이에 예수가 약속의 아이라는 말을 퍼뜨리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요셉은 마리아를 설득했다. 그들은 이 문제를 아무에게도 전혀 입 밖에 내지 않도록 말을 삼가기로 찬성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 약속을 아주 충실히 지켰다.
123:1.4 (1357.1) 예수가 네 살 되던 해 전체가 몸이 정상으로 자라고 특별한 정신 활동이 있는 기간이었다. 그동안 그는 야곱이라 이름하는 자기 또래의 이웃 소년과 아주 가까워졌다. 예수와 야곱은 같이 놀 때 언제나 행복했고, 자라서 훌륭한 친구요 충실한 동무가 되었다.
123:1.5 (1357.2) 이 나사렛 가족의 생활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사건은, 기원전 3년 4월 2일 이른 아침에, 둘째 아이 야고보가 태어난 것이다. 예수는 아기 동생이 하나 생긴다는 생각에 기뻤고, 아기의 초기 활동을 그저 지켜보려고 계속 둘레에서 서성거리곤 했다.
123:1.6 (1357.3) 바로 이 해 한여름에, 요셉은 마을 샘물에서 가깝고 카라반이 머무르는 마당 가까운 곳에 조그만 작업장을 지었다. 이 뒤에 그는 일당(日當)으로 하는 목수 일이 거의 없었다. 그는 형제 중 두 사람과 다른 몇 직공을 동료로 두었는데, 이들을 일하러 밖으로 내보내고, 한편 그는 멍에와 쟁기를 만들고 다른 목공 일을 하면서 작업장에 남아 있었다. 또한 가죽 일, 그리고 밧줄과 캔바스 일을 얼마큼 하였다. 예수는 자라면서, 학교에 가지 않을 때, 어머니의 집안 일을 돕고, 지구의 사방에서 온 카라반 안내자와 여행자들의 대화와 잡담을 들으면서, 아버지가 작업장에서 일하는 것을 구경하는 데 시간을 대체로 반반씩 보냈다.
123:1.7 (1357.4) 이 해 7월, 예수가 만 네 살 되기 한 달 전, 카라반 여행자들과 접촉함으로 악성 장(腸) 질환이 온 나사렛에 번졌다. 이 유행병에 예수가 노출되는 위험 때문에 너무 놀라서, 마리아는 두 아이를 싸들고 나사렛에서 몇 킬로미터 남쪽에, 사리드 가까이 메기도 길에 있는, 동생의 시골 집으로 달아났다. 두 달이 넘도록 그들은 나사렛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예수는 처음으로 농가(農家)에서 사는 이 경험을 크게 즐겼다.
123:2.1 (1357.5) 나사렛으로 돌아온 뒤 1년하고도 얼마큼 더 지나자, 소년 예수는 개인적이고 진심으로 도덕적인 첫 결정을 내릴 나이에 이르렀다.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신성한 선물, 곧 생각 조절자가 함께 거하려고 왔는데, 이 조절자는 전에 마키벤타 멜기세덱과 함께 봉사한 적이 있었고, 따라서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사는 초인간 존재의 육신화와 관련하여 활동하는 체험을 얻었다. 이 사건은 기원전 2년 2월 11일에 일어났다. 예수는 수많은 다른 아이들보다 신다운 훈계자가 오는 것을 더 의식하지 않았고, 그날 이전과 이후에 사람의 지성에 깃들고 궁극에 그 지성을 영적으로 변화시키고 또한 차츰 발달하는 불멸의 혼(魂)이 영구히 살아남게 하려고 일하는 이 생각 조절자를 마찬가지로 받았다.
123:2.2 (1357.6) 2월의 이날, 미가엘이 아이의 모습으로 온전히 육신화되는 것과 관련하여, 우주 통치자들이 직접 친히 감독하는 일은 끝났다. 그때부터 인간으로서 육신이 된 생애가 펼쳐지는 동안 내내, 예수를 지키는 일은 깃드는 이 조절자, 그리고 관련된 수호 천사들의 책임에 맡겨지도록 정해졌고, 이 일은 행성 상관들의 지시에 따라서 어떤 분명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배치된 중도인(中道人)들이 봉사함으로 때때로 보충되었다.
123:2.3 (1357.7) 이 해 8월에, 예수는 만 다섯 살이 되었고[1] [1784], 따라서 우리는 이 해를 그의 생애에서 (달력으로) 다섯 살 되는 해라 부르겠다. 이 해, 기원전 2년, 다섯 살 되는 생일이 되기 달포 전에, 예수는 여동생 미리암이 태어나서 몹시 즐거워했고, 여동생은 7월 11일 밤에 태어났다. 이튿날 저녁에, 예수는 여러 집단의 살아 있는 것들이 따로 된 개체로서 세상에 태어나는 방법에 관하여, 아버지와 함께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예수의 초기 교육 중에서 가장 값진 부분은 생각 깊고 탐구하는 물음에 대답하는 부모로부터 얻었다. 요셉은 소년의 수많은 물음에 대답하려고 공을 들이고 시간을 들여 어김없이 임무를 충실히 행하였다. 다섯 살 때부터 열 살이 될 때까지, 예수는 계속 쏘아대는 하나의 질문 덩어리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물음에 반드시 대답할 수 있지는 않았지만, 항상 그가 묻는 것을 충분히 검토하고 또한 그의 빠른 머리가 제시한 문제에 만족스러운 답을 찾으려는 노력을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도와주었다.
123:2.4 (1358.1) 나사렛으로 돌아온 뒤에, 이들의 집은 분주했고, 요셉은 새 작업장을 짓고 사업을 다시 시작하는 데 특별히 골똘해 있었다. 그가 너무 바빠서, 야고보를 위해서 요람을 만들 시간을 낼 수 없었지만, 이 문제는 미리암이 태어나기 오래 전에 시정되었다. 그래서 미리암은 푹 파묻혀 있을 아주 푹신한 아기 침대가 있었고, 가족은 아기를 보고 감탄하였다. 아이 예수는 이 모든 자연스러운 정상 가정의 체험을 실컷 겪었다. 그는 꼬마 동생과 아기 여동생을 몹시 좋아했고, 동생들을 돌보는 일에 마리아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123:2.5 (1358.2) 그 시절의 이방 세계에는, 갈릴리의 유대인 가정(家庭)보다 더 나은 지적ㆍ도덕적ㆍ종교적 훈련을 줄 수 있는 집이 거의 없었다. 이 유대인들은 아이들을 기르고 교육하는, 체계 있는 순서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어린아이의 생활을 일곱 단계로 나누었다:
123:2.6 (1358.3) 1. 갓난아이, 첫날부터 여드렛날까지.
123:2.9 (1358.6) 4. 어머니에게 의지하는 기간, 다섯째 해 끝까지 지속된다.
123:2.10 (1358.7) 5. 아이의 자립 정신의 시작. 아들의 경우, 아버지가 그 교육을 책임진다.
123:2.13 (1358.10) 만 다섯 살 되는 생일까지, 어머니가 아이를 훈련하는 책임을 지고, 다음에 소년이면, 그때부터 아버지가 계속 그 소년의 교육을 책임지게 하는 것이 갈릴리 유대인의 관습이었다. 그러므로 이 해에, 예수는 갈릴리 유대인 아이의 경력에서 다섯째 단계에 들어갔고, 따라서 기원전 2년 8월 21일에, 더 교육을 받으라고 마리아는 그를 정식으로 요셉에게 넘겼다.
123:2.14 (1358.11) 요셉이 이제 예수의 지적ㆍ종교적 교육에 직접 책임을 지지만, 어머니는 아직도 가정 교육에 관심을 가졌다. 어머니는 집터를 완전히 둘러싸는 뜰의 벽 근처에서 자라는 덩굴과 꽃들을 알아보고 돌보는 일을 그에게 가르쳤다. 어머니는 또한 집의 지붕 위에 (여름에는 침실), 모래 놀이하는 낮은 틀을 여러 개 마련해 주었고, 예수는 그 안에서 지도를 그리고, 아람어ㆍ그리스어, 나중에는 히브리어 글자 쓰기의 기초 연습을 상당히 했다. 왜냐하면 때가 되자 그가 모두 세 나라 언어로 술술 읽고, 쓰고, 말하기를 배웠기 때문이다.
123:2.15 (1358.12) 예수는 신체적으로 거의 완벽한 아이인 듯했고, 정신과 감정 면에서 줄곧 정상으로 진보했다. (달력으로) 다섯 살 되던 이 해의 후반에, 배탈이 조금 났는데, 이것은 처음으로 앓은 작은 병이었다.
123:2.16 (1359.1) 요셉과 마리아는 가끔 맏아들의 앞날에 관하여 이야기했지만, 너희가 거기 있었더라면, 그때 그 자리에서 오직 정상이고 튼튼하고, 구김 없지만 지나치게 따져 묻는 아이가 자라고 있음을 보았을 것이다.
123:3.1 (1359.2)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서, 예수는 이미 아람어의 갈릴리 방언을 통달했고, 이제 아버지는 그에게 그리스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그리스어를 거의 말하지 못했지만 요셉은 아람어와 그리스어를 모두 거침없이 쓰는 사람이었다. 그리스어 공부에 쓰인 교과서는 히브리 성서(聖書)의 사본―시편을 포함하여, 율법과 선지자의 완역판―이었고, 그들이 에집트를 떠날 때 선물로 받은 책이었다. 온 나사렛에 그리스어 성서의 완전한 사본(寫本)이 꼭 두 권 있었다. 목수의 가족이 이 중에 하나를 소유한 것은 요셉의 집을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장소로 만들었고, 예수가 성장함에 따라서, 그에게 거의 끊임없이 이어진 성실한 학생과 진지한 진리 추구자의 무리를 만나게 해 주었다. 이 해가 가기 전에, 예수는 그 신성한 책을 알렉산드리아의 친구와 친척들로부터 선물로 받았다는 이야기를 만 여섯 살 되는 생일에 듣고 나서, 이 귀중한 사본의 관리를 맡았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쉽사리 그 책을 읽을 수 있었다.
123:3.2 (1359.3) 아직 여섯 살이 채 안 되었을 때, 예수가 어릴 때 처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사건이 일어났다. 그 소년에게, 아버지는―적어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함께―모든 것을 아는 듯 보였다. 그러니까 막 일어난 가벼운 지진(地震)의 원인을 아버지에게 물었을 때, “아이야, 나는 정말 모른다”하고 요셉이 말하는 것을 듣고 질문했던 이 아이가 얼마나 놀랐는가 상상해 보라. 이렇게, 오랜 기간에 걸친 불안한 각성이 시작되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예수는 땅에 있는 그의 부모가 완전히 지혜롭지도 않고, 모든 것을 알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123:3.3 (1359.4) 요셉에게 처음 떠오른 생각은, 하나님이 지진을 일으킨다고 예수에게 일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동안 숙고해보니, 그러한 대답이 더 많이, 더욱 난처한 질문을 자극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도, 자연이나 사회 현상에 관하여 예수가 묻는 말에, 하나님이나 악마의 책임이라는 생각 없는 말로 대답하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예수는 선한 영(靈)과 악한 영이 정신 현상과 영적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그럴듯한 설명이라는 신조를 오랫동안 기꺼이 받아들였고, 이것은 유대 민족 사이에 유행하는 믿음과 조화되었으나, 보이지 않는 그러한 영향이 자연 세계의 물리적 사건을 일으킨다는 생각을 그는 아주 일찍부터 의심하게 되었다.
123:3.4 (1359.5) 예수가 여섯 살이 되기 전, 기원전 1년 초여름에, 사가리아와 엘리자벳과 그 아들 요한이 나사렛 가족을 찾아보러 왔다. 그들의 기억으로 처음인 이 방문 기간에 예수와 요한은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비록 방문객들이 며칠만 머무를 수 있었지만, 부모들은 두 아들의 장래 계획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일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이렇게 그들이 열중하고 있는 동안, 아이들은 집 꼭대기에서, 나무토막들을 가지고 모래 속에서 놀았고,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참으로 사내다운 방식으로 즐겁게 지냈다.
123:3.5 (1359.6) 예루살렘 근처에서 온 요한을 만났기 때문에, 예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비상한 관심을 쏟고, 또 안식일 의식(儀式)과 회당의 설교, 되풀이해서 돌아오는 기념 축제의 의미에 관하여 아주 샅샅이 묻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이 모든 계절의 의미에 관하여 설명해 주었다. 첫째는 한겨울 명절에 불을 밝히는 것이었고, 첫날 밤에 촛불 하나로 시작해서, 뒤이은 밤마다 하나씩 더하며, 여드레 동안 이어진다. 이것은 유다 마카비가 모세의 예배를 부활시킨 뒤에 성전을 봉헌한 것을 기념하였다. 다음에는 푸림의 이른 봄 축제, 즉 에스터와 그 여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축제가 다가왔다. 그리고 나서 엄숙한 유월절이 따랐고, 어른들은 될 수 있으면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지내고 아이들은 집에서 한 주일 내내 아무런 누룩 넣은 빵을 먹지 않을 것을 기억하곤 했다. 그 뒤에 첫 열매의 축제, 즉 추수가 다가왔고, 마지막으로, 가장 엄숙한 것은 새해의 축제, 속죄(贖罪)하는 날이었다. 이 가운데 어떤 경축일과 관습은 예수의 어린 머리에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그는 이것들을 깊이 생각하고, 그리고 나서 초막절의 즐거움에 흠뻑 빠졌는데, 이때는 온 유대 민족이 해마다 휴가로 지내는 철, 바깥에서 나뭇잎에 덮인 초막에서 야영하고 즐거움과 쾌락에 빠지는 때였다.
123:3.6 (1360.1) 이 해 동안에,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가 기도를 드리는 것에 관하여 곤경을 치렀다. 땅에서 아버지인 요셉에게 말하는 것과 아주 비슷하게 예수는 하늘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고집했다. 더 엄숙하고 경건한 방식으로 신과 교통하지 않는 것은 부모에게, 특히 어머니에게 조금 불안한 일이었지만, 그의 태도를 바꾸도록 설득할 수 없었다. 그는 가르침받은 대로 기도를 드리곤 했지만, 다음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와 그저 잠깐 이야기하기”를 고집했다.
123:3.7 (1360.2) 이 해 6월에 요셉은 나사렛에 있는 작업장을 형제들에게 넘기고, 건설업자로서 정식으로 일을 시작했다.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가족의 소득은 3배가 넘게 늘어났다. 요셉이 죽기까지 나사렛 가족은 결코 다시 가난의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가족은 점점 더 불어났고 교육과 여행에 추가로 많은 돈을 썼지만, 언제나 요셉의 증가하는 소득이 늘어나는 지출과 보조를 맞추었다.
123:3.8 (1360.3) 다음 몇 해 동안, 요셉은 나사렛과 그 근처에서 많은 건축 공사를 했을 뿐 아니라, 가나ㆍ(갈릴리의)베들레헴ㆍ막달라ㆍ나인ㆍ세포리스ㆍ가버나움, 그리고 엔도르에서 상당히 일을 했다. 야고보가 어머니의 집안 일을 거들고 더 어린아이들을 보살필 만큼 자랐을 때, 예수는 아버지와 함께 주위의 이 여러 도시와 마을까지, 집을 떠나서 자주 여행했다. 예수는 날카롭게 관찰하는 눈이 있었고, 집을 떠나는 이런 여행으로부터 실용적 지식을 많이 얻었다. 사람, 그리고 사람이 땅에서 사는 방법에 관하여 부지런히 지식을 쌓고 있었다.
123:3.9 (1360.4) 이 해에 예수는 가족의 협동과 가정 규율의 요구 사항에 대하여 싫은 감정과 강한 충동을 조절하는 데 크게 나아졌다. 마리아는 사랑이 가득한 어머니였지만, 상당히 엄격한 훈육자였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요셉은 예수에게 더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이는 소년과 함께 앉아서, 가족 전체의 복지와 평안을 고려하여, 개인의 욕구를 통제하는 진정한 근본적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기 때문이다. 형편을 설명해 주었을 때, 예수는 언제나 기꺼이 부모가 바라는 것과 가족의 규칙을 영리하게 지켰다.
123:3.10 (1360.5) 남는 시간의 상당한 부분이―집안에서 어머니가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을 때―낮에는 꽃과 식물(植物), 밤에는 별을 공부하는 데 쓰였다. 질서가 잘 잡힌 이 나사렛 가정에서 보통 잠잘 시간이 훨씬 지난 뒤에, 그는 드러누워서 경이에 찬 눈으로 별이 보이는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걱정스러운 습성을 나타냈다.
123:4.1 (1361.1) 이 해는 정말로 예수의 일생에서 사건이 많은 해였다. 1월 초에 갈릴리에 큰 눈보라가 닥쳤다. 60센티미터나 깊이 눈이 내렸는데, 예수가 일생 동안 본 중에 가장 큰 폭설이었고, 1백 년 동안에 나사렛에서 가장 많이 눈이 내린 것 중의 하나였다.
123:4.2 (1361.2) 예수의 시절에 유대인 어린이의 오락 생활은 제한된 편이었다. 아이들이 나이 먹은 사람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고 그런 심각한 짓을 하면서 노는 때가 너무 흔했다. 아이들은 결혼식과 장례식에서 많이 놀았는데, 이런 의식을 빈번히 보았고, 이것들은 아주 볼 만했다. 아이들은 춤추고 노래를 불렀지만, 후일의 아이들이 그렇게 많이 즐기는 것과 같은, 조직된 경기(競技)가 거의 없었다.
123:4.3 (1361.3) 예수는 한 이웃 소년과 함께, 그리고 후일에는 동생 야고보를 데리고, 가족의 목수 작업장 먼 구석에서 놀기를 좋아했고, 거기서 대패 밥과 나무토막을 가지고 아주 재미있게 놀았다. 안식일에 금지된 어떤 종류의 놀이가 무슨 해악이 있는지 언제나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예수는 반드시 부모가 바라는 대로 순응했다. 그는 유머와 놀이를 즐길 능력이 있었는데, 그 시절 그 세대가 처한 환경에서 그런 능력을 표현할 기회가 드물었지만, 그는 열네 살까지 거의 항상 명랑하고 밝았다.
123:4.4 (1361.4) 마리아는 집에 인접해 있는 동물 우리 꼭대기에 비둘기장을 두었고, 비둘기를 팔아서 나오는 이익을 특별한 자선 기금으로서 사용했다. 예수는 십일조(十一租)를 떼어내서 회당장에게 넘긴 뒤에, 그 기금을 관리했다.
123:4.5 (1361.5) 이때까지 예수에게 유일하게 일어난 정말 사고(事故)는 천막 지붕이 있는 침실로 통하는 뒤뜰의 돌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것이다. 이것은 7월에 동쪽에서 예상치 않았던 모래 폭풍이 부는 동안에 일어났다. 휘몰아치는 잔 모래를 실은 뜨거운 바람이 보통 비오는 철에, 특히 3월과 4월에 불었다. 그러한 폭풍이 7월에 닥친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 폭풍이 닥쳤을 때, 예수는 하던 버릇대로 집 꼭대기에서 놀고 있었는데, 이는 건조한 철에 흔히 여기가 익숙한 놀이 방이었기 때문이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모래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아 넘어졌다. 이 사고가 있은 뒤에, 요셉은 계단 양쪽에 난간을 만들었다.
123:4.6 (1361.6) 이 사건을 방지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현세에 보호하는 중도자들, 즉 1차 중도자 한 명과 2차 중도자 한 명이 그 아이를 지키는 데 배치되었는데, 이들이 소홀한 탓으로 돌릴 수 없고 수호 세라핌의 책임이라 할 수도 없었다. 다만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요셉이 엔도르에 가서 없는 동안에 일어난 이 하찮은 사고는 마리아의 마음 속에 아주 큰 근심거리가 되었고, 그래서 마리아는 지혜롭지 못하게, 몇 달 동안 예수를 곁에, 아주 가까이 두려고 했다.
123:4.7 (1361.7) 하늘 존재들은 물질적 사고(事故), 물리적 성질을 가진 보통 일에 멋대로 간섭하지 않는다. 보통 상황에는 오로지 중도인(中道人)들이 큰 운명을 가진 남녀의 몸을 지키기 위하여 물질 조건에 간섭할 수 있고, 특별한 상황에도 이 존재들은 오직 상관의 특정한 명령에 따라서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
123:4.8 (1361.8) 이것은 캐묻기 좋아하고 모험을 좋아하는 이 소년에게 나중에 생겼던 그런 사소한 사건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적극적인 소년의 보통 아동기와 소년기를 그려본다면, 너희는 예수의 소년 시절에 관해서 제법 정확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을 터이고, 그가 부모, 특히 어머니에게 얼마나 많이 걱정을 끼쳤는가 대체로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123:4.9 (1362.1) 나사렛 가족의 넷째 식구 요셉이 서기 1년 3월 16일, 수요일 아침에 태어났다.
123:5.1 (1362.2) 이제 예수는 일곱 살이었고, 이 나이에 회당(會堂) 학교에서 유대인 아이들은 정식 교육을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해 8월에 나사렛에서 사건이 많았던 학교 생활에 들어갔다. 이미 이 소년은 두 나라 말, 아람어와 그리스어를 거침없이 읽고 쓰고 말했다. 이제 히브리어를 읽고 쓰고 말하기를 배우는 과제를 익혀야 했다. 그는 앞에 부닥친 새 학교 생활에 참으로 열심이었다.
123:5.2 (1362.3) 3년 동안―열 살이 될 때까지―그는 나사렛 회당의 초등 학교를 다녔다. 이 3년 동안 그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율법서의[2] [1785] 기초를 공부했다. 다음 3년 동안, 상급 학교에서 공부했고, 신성한 율법의 상급 가르침을 큰 소리로 되풀이하는 방법으로 외웠다. 열세 살 되던 해에 이 회당 학교를 졸업했고, 회당 책임자들은 교육받은 “계명의 아들”이 된 그를 부모에게 돌려보냈다―그때부터 이스라엘 공동체의 책임 있는 시민이었다. 이 모든 것에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에 참석하는 것이 필요했다. 따라서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반하여 그 해에 처음으로 유월절에 참석했다.
123:5.3 (1362.4) 나사렛에서 생도들은 반원을 지어 마루에 앉았고, 한편 선생, 즉 하잔, 그 회당의 교직자는 그들을 마주 보고 앉았다. 레위기에서 시작하여 다른 율법서들까지 공부하였고, 선지자와 시편(詩篇)의 공부가 뒤따랐다. 나사렛 회당은 히브리어로 된 성서의 완본을 한 권 소유하였다. 열두 살이 되기 전까지 성서밖에 아무것도 공부하지 않았다. 여름 몇 달 동안에는 수업 시간이 크게 짧아졌다.
123:5.4 (1362.5) 예수는 일찍 히브리어를 통달했고, 어쩌다가 아무런 유명한 방문객이 나사렛에 머무르고 있지 않을 때, 젊은이로서, 정식 안식일 예배에 회당에서 모인 신앙심 있는 사람들에게 히브리 성서를 읽어달라고 자주 부탁을 받곤 하였다.
123:5.5 (1362.6) 물론, 이 회당 학교에는 아무런 교과서가 없었다. 가르칠 때, 하잔은 한 마디 말하고, 한편 생도들은 한 목소리로 따라서 되풀이하곤 했다. 기록된 율법서가 가까이 있을 때, 학생들은 큰 소리로 읽고, 늘 되풀이함으로 자기의 과목을 배웠다.
123:5.6 (1362.7) 다음에, 정식 학교 공부 외에,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아버지의 수선(修繕) 작업장을 드나드는 동안에, 예수는 지구의 사방에서 온 사람들의 성품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더 나이 들었을 때, 카라반들이 쉬고 음식을 먹으려고 샘물 가까이 머무르는 동안, 그들과 자유로이 섞였다. 그리스어를 거침없이 말했기 때문에, 그는 대다수의 카라반 여행자와 안내자들과 이야기하는 데 거의 어려움이 없었다.
123:5.7 (1362.8) 나사렛은 카라반이 경유하는 지점이요 여행의 교차로였고, 그 주민은 대체로 이방인이었다. 동시에 그 도시는 유대인의 전통 율법을 자유롭게 해석하는 중심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갈릴리에서는 유대 땅의 관습과 달리, 유대인이 좀더 자유롭게 이방인과 섞였다. 이방인과 접촉한 결과로서 오염될까 하는 두려움에 근거를 둔 여러 사회적 제한이 있었는데, 갈릴리에 있는 모든 도시 중에서, 나사렛의 유대인들은 이런 제한을 가장 자유롭게 해석했다. 이러한 조건으로 인하여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속담이 예루살렘에서 생기게 되었다.
123:5.8 (1363.1) 예수는 주로 집에서 도덕 훈련과 영적 교양을 얻었다. 지적 교육과 신학(神學) 교육의 대강은 하잔으로부터 얻었다. 그러나 참 교육, 생활의 어려운 문제들과 씨름하는 실제 시험에 쓰일 머리와 마음의 준비는, 동료 인간들과 섞임으로 얻었다. 동료 인간들, 젊은이와 늙은이, 유대인과 이방인과 이렇게 가까이 관계를 가진 것이 그에게 인류를 알 기회를 주었다. 예수는 사람들을 속속들이 이해했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사랑했다는 의미에서, 그는 많이 교육받은 것이다.
123:5.9 (1363.2) 회당에서 보낸 여러 해 동안 내내 그는 명석한 학생이었고, 세 나라 말에 정통했기 때문에 크게 유리했다. 예수가 학교의 과정을 마치는 행사가 있었을 때, 나사렛의 하잔은 그가 “소년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보다 “예수의 파고드는 질문으로부터 더 배웠다” 생각한다고 요셉에게 소견을 말했다.
123:5.10 (1363.3) 공부 과정 전체를 통해서, 예수는 회당에서 정식 안식일 설교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큰 영감을 얻었다. 안식일에 나사렛에서 멈추는 저명한 방문객들에게 회당에서 연설하라고 요청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자라면서 그는 유대인 세계 전체에서 많은 위대한 사상가, 그리고 정통 유대인이라고 하기 어려운 숱한 사람이 견해를 펼치는 것을 들었는데, 이것은 나사렛 회당이 히브리 사상(思想)과 문화의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123:5.11 (1363.4) 일곱 살에 학교에 들어갔을 때 (이때 유대인은 의무 교육법을 막 시행했다) 생도들이 자기의 “생일 구절,” 즉 학생 시절을 통해서 내내 그들을 안내할 일종의 황금률을 고르는 것이 관례였고, 이에 대하여 그들은 열세 살 때 졸업식에서 흔히 길게 설명하였다. 예수가 고른 구절은 선지자 이사야에 있었다: “주 하나님의 영이 내게 다가오시니, 주가 내게 기름을 부으셨음이라. 그는 온유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가 된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영적으로 갇힌 자를 풀어 놓으라고 나를 보내셨도다.”
123:5.12 (1363.5) 나사렛은 유대 국가에서 24 사제 중심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갈릴리 사제들은 유대 지방의 서기관과 랍비들보다 더 자유롭게 전통적 율법을 풀이하였다. 나사렛에서 그들은 또한 안식일을 더 자유롭게 지켰다. 따라서 요셉이 안식일 오후에, 산보하려고 예수를 데리고 나가는 것이 관습이었고, 가장 좋아하는 산책 중에 하나는 집 가까이 있는 높은 언덕에 올라가는 것이었는데, 거기서 그들은 온 갈릴리를 둘러볼 수 있었다. 북서쪽으로, 맑은 날에, 바다까지 이어지는 갈멜 산의 긴 줄기를 볼 수 있었고, 여러 번 예수는 아버지가 엘리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엘리야는 길게 이어진 초기 히브리 선지자들 중의 하나였으며, 이 선지자들은 아합을 꾸짖고 바알 사제들의 비리를 폭로했다. 북쪽으로 헤르몬산이 웅장한 광채 속에서 눈 덮인 봉우리를 보이며 지평선을 혼자 차지했고, 위쪽 비탈에서 거의 900미터까지는 만년설로 하얗게 빛났다. 동쪽으로 멀리, 요단강 유역을 알아볼 수 있었고, 그 너머 멀리 모압 지방의 험한 산이 놓여 있었다. 남쪽과 동쪽에도, 해가 대리석 벽을 비추었을 때, 원형(圓形) 극장과 웅장하게 지은 성전들과 함께, 데카폴리스 지역에 그리스ㆍ로마 식의 도시들을 볼 수 있었다. 태양이 지는 것을 보느라고 머뭇거릴 때, 그들은 서쪽으로 먼 지중해에서 항해하는 선박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123:5.13 (1364.1) 예수는 사방에서 카라반들이 나사렛을 천천히 들어가고 나가는 동안에 그들의 행렬을 지켜볼 수 있었고, 남쪽으로 길보아산과 사마리아를 향해 뻗어 있는, 넓고 기름진 에스드랠론 평야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123:5.14 (1364.2) 먼 경치를 보려고 고지까지 오르지 않을 때, 그들은 시골 길을 통해서 거닐었고, 철 따라 다채로운 분위기에 젖어 있는 자연을 공부했다. 따뜻한 가정에서 받은 훈련은 별도로 하고, 예수가 아주 어릴 때 했던 공부는 존중하고 이해하는 태도로 자연을 접촉한 것이었다.
123:5.15 (1364.3) 여덟 살이 되기 전에, 예수는 나사렛의 어머니와 젊은 여자들 모두에게 알려졌고, 이들은 샘물 가에서 그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샘물은 집에서 멀지 않았고, 마을 전체에서 사람들이 만나고 잡담하는 사회 중심의 하나였다. 이 해에, 예수는 가족이 기르는 송아지의 젖을 짜고 다른 동물을 돌보는 일을 배웠다. 이 해와 그 이듬해에, 또한 치즈 만들기와 직물 짜기를 배웠다. 열 살이 되었을 때, 그는 베틀을 작동하는 데 전문가가 되었다. 이 무렵에 예수와 이웃 소년 야곱이, 흐르는 샘물 가까이에서 일하던 도공(陶工)과 좋은 친구가 되었다. 나단의 민첩한 손가락이 도공의 바퀴 위에서 진흙으로 모양 만드는 것을 구경했을 때, 여러 번 그 두 사람은 자라서 도공이 되기로 결심했다. 나단은 소년들을 무척 좋아했고, 장난할 진흙을 주어서, 여러 가지 물건과 동물 형태 만들기를 경쟁하라고 제안하여 그들의 창조적 상상력을 자극하려고 했다.
123:6.1 (1364.4) 이 해는 학교에서 흥미 있는 해였다. 예수는 비범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부지런한 생도였고, 반에서 상급인 3분의 1에 속했다. 공부를 아주 잘 했기 때문에, 달마다 한 주는 출석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 주간을 보통, 어부(漁夫)인 삼촌과 함께 막달라 가까이 갈릴리 바다의 해안가에서 보내거나, 또는 나사렛에서 8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다른 삼촌(어머니의 형제)의 농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123:6.2 (1364.5) 어머니는 그의 건강과 안전에 대해서 지나치게 근심했어도, 집을 떠나는 이 여행에 차츰 마음을 놓게 되었다. 예수의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은 모두 그를 몹시 좋아했고, 이 해와 바로 뒤 몇 해 동안, 달마다 이렇게 그가 방문하는 동안 그와 친교하는 기회를 잡으려고 그들 사이에서 치열한 경쟁이 따랐다. 삼촌의 농장에서 (아기였던 때부터) 처음으로 한 주 동안 머무른 것은 이 해 1월이었다. 5월에 갈릴리 바다에서 처음으로 한 주 동안의 고기잡이 경험을 가졌다.
123:6.3 (1364.6) 이 무렵에, 예수는 다마스커스에서 온 어느 수학 선생을 만났는데, 새로운 계산 기술을 배우고 나서, 몇 해 동안 수학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수ㆍ거리ㆍ비율에 대하여 날카로운 감각을 개발했다.
123:6.4 (1364.7) 예수는 동생 야고보를 아주 좋아하기 시작했고, 이 해가 저물 때가 되어서 그에게 비로소 알파벳을 가르쳤다.
123:6.5 (1364.8) 이 해에 예수는 낙농품을 하프 수업과 바꾸도록 주선했다. 음악에 관한 것은 무엇이나 특별히 좋아했다. 나중에는 어린 동료들 사이에서 노래 부르기에 관심을 불러일으키려고 무척 애썼다. 열한 살이 되었을 때 솜씨 좋은 하프 연주자가 되었고, 특별한 해석과 유능한 즉흥 연주로 가족과 친구들 접대하기를 아주 즐거워했다.
123:6.6 (1365.1) 예수는 학교에서 부러울 만한 진보를 계속했어도, 부모나 선생들에게는 만사가 순조롭지는 않았다. 그는 과학과 종교, 특히 지리학, 천문학에 관해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질문을 계속하여 많이 퍼부었다. 팔레스타인에 어째서 비 오지 않는 철과 비 오는 철이 있는가 찾아내려고 특별히 애썼다. 여러 번, 그는 나사렛과 요단강 유역에 왜 기온 차이가 크게 나는가 해답을 찾으려고 했다. 그는 다만, 총명하지만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그런 질문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123:6.7 (1365.2) 셋째 동생 시몬이 이 해, 서기 2년 4월 14일, 금요일 저녁에 태어났다.
123:6.8 (1365.3) 2월에, 예루살렘의 랍비 학교에서 선생 나호르가 예수를 지켜보려고 나사렛으로 왔는데, 그는 비슷한 임무를 띠고 예루살렘 가까이, 사가리아의 집에 들린 적이 있었다. 그는 요한의 아버지의 부추김을 받아서 나사렛으로 왔다. 처음에는, 예수의 솔직함, 그리고 관습에 매이지 않은 방법으로 종교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데 얼마큼 충격을 받았지만, 이를 갈릴리가 히브리인의 배움과 문화의 중심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예수를 데려가도록 허락해 달라, 예루살렘에는 그가 유대인 문화의 중심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는 이점을 누릴 수 있다고 요셉과 마리아에게 조언했다. 마리아는 찬성하는 쪽으로 마음이 반은 기울었다. 맏아들이 유대인의 구원자, 메시아가 되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요셉은 망설였다. 예수가 자라서 큰 운명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라고 똑같이 확신했지만, 그 운명이 무엇이 될까 깊은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아들이 땅에서 어떤 위대한 사명을 이룰 것을 결코 정말로 의심하지 않았다. 나호르의 조언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는 예수를 예루살렘에서 머무르게 하려는 제안이 지혜로운가 더욱 묻게 되었다.
123:6.9 (1365.4) 요셉과 마리아가 이렇게 의견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나호르는 그 문제 전체를 예수 앞에 펼쳐놓게 해달라고 하였다. 예수는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고,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이웃인 석공(石工) 야곱과 의논했다. 야곱의 아들은 가장 친한 놀이 친구였다. 이틀이 지난 뒤에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부모와 조언자들 사이에 그러한 의견 차이가 있다, 자기가 그러한 결정에 책임질 능력이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자기가 꼭 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전체 상황을 보아서 마침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와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그 대답에 대해서 완전히 확실치 않지만 “내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집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차라리 느낀다. 그리고 그는 덧붙여 말했다. “오직 내 몸을 보고 머리 쓰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고 도저히 나를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사람들보다, 나를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위하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리이다.” 그들은 모두 놀랐다. 그리고 나호르는 예루살렘으로 갈 길을 재촉하였다. 예수가 집을 떠나는 문제를 다시 고려하기까지 여러 해가 흘렀다.
124:0.1 (1366.1)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갈릴리보다 학교 공부를 하는 기회가 더 좋았을지 모르지만, 예수가 최소의 교육을 받고서 자신의 생활 문제를 해결하는 그렇게 멋진 환경을 가지면서, 동시에 문명 세계의 모든 구석에서 온 온갖 종류의 남녀, 그렇게 많은 남녀를 항상 접촉하는 큰 장점을 누릴 수 없었다. 알렉산드리아에 남았더라면, 유대인들이 순전히 유대인 방식으로 그의 교육을 지도했을 것이다. 나사렛에서 받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그는 이방인을 이해하는 데 적절히 준비가 되었고, 히브리 신학의 동부, 즉 바빌로니아파의 견지, 그리고 서부, 즉 헬라파 견지의 장단점에 대하여 더 낫고 치우치지 않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124:1.1 (1366.2) 예수가 언제라도 몹시 아팠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어도, 남동생들과 아기 여동생과 함께 이 해에 그는 아이들이 걸리는 하찮은 병을 얼마큼 앓았다.
124:1.2 (1366.3) 학교 공부는 계속되었고 그는 아직도 총애를 받는 학생이었으며, 달마다 한 주 동안 자유로웠다. 아버지와 함께 이웃 여러 도시까지 여행하는 데, 그리고 나사렛 남쪽에 있는 삼촌의 농장에서 머무르는 데, 그리고 막달라에서 출발하여 고기잡이하는 나들이에, 시간을 계속 똑같이 나누어 썼다.
124:1.3 (1366.4) 학교에서 지금까지 닥친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늦겨울에 일어났다. 이때 모든 형상ㆍ그림ㆍ펜화가 우상 숭배의 성질이 있다는 가르침에 대하여 예수는 하잔에게 감히 이견을 내밀었다. 예수는 도공의 진흙으로 아주 다채로운 물건들을 빚는 것 뿐 아니라, 풍경화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런 종류는 무엇이나 유대인의 율법에 엄격히 금지되었지만, 이때까지 이런 활동을 계속하도록 부모가 놓아둘 정도로, 예수는 부모의 반대를 적당히 무마하였다.
124:1.4 (1366.5) 그러나 학교에서는 소동이 다시 일고 있었는데, 이때 공부가 부진한 어느 생도가 교실 마루 바닥에 예수가 목탄으로 선생을 그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명백하게 그 그림이 드러났다. 한 위원회가 요셉을 호출하고서 맏아들이 율법을 무시하는 성향을 막으려고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요구하러 가기 전에 여러 장로가 보았다.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재능 있고 적극적인 아이가 한 일에 대하여 그들에게 불평이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것은 지금까지 받은 비난 가운데 가장 심각하였다. 예수는 바로 뒷문 바깥에, 큰 바위 위에 앉아서, 그의 예술적 노력을 비난하는 말에 얼마 동안 귀를 기울였다. 그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주장 때문에 그들이 아버지를 비난하는 것을 분개하였다. 그래서 씩씩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비난하는 사람들과 겁 없이 맞섰다. 장로들은 혼란에 빠졌다. 더러는 그 사건을 우스운 일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지만, 한편 한두 사람은 그 소년이 신성 모독까지는 아니라도 거룩한 것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요셉은 어찌할 바를 몰랐고 마리아는 분개했지만, 예수는 말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을 했고, 용감히 자기의 관점을 변호했다. 지극한 자제력을 가지고, 논쟁이 되는 모든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 문제에서 아버지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장로 위원회는 말없이 떠났다.
124:1.5 (1367.1) 마리아는 예수가 이 의심스러운 활동 가운데 어느 것도 학교에서 계속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는 조건으로, 예수가 집에서 진흙 빚기를 허락하도록 요셉에게 영향을 미치려 애썼지만, 요셉은 둘째 계명에 관한 랍비의 해석이 우선해야 한다고 판정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그날부터 아버지 집에서 사는 동안, 어떤 것의 모습도 더 이상 그리거나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가 한 일이 잘못이라고 확신하지 않았고, 아주 좋아하는 그러한 오락을 포기하는 것은 어린 시절에 큰 시련 중의 하나였다.
124:1.6 (1367.2) 6월 후반에, 예수는 아버지를 따라서 처음으로 타볼산 꼭대기에 올랐다. 이날은 맑았고, 경치는 훌륭했다. 아홉 살 먹은 이 소년에게는 그가 인도ㆍ아프리카ㆍ로마를 제외하고, 온 세계를 정말로 바라본 듯했다.
124:1.7 (1367.3) 예수의 둘째 여동생 마르다가 9월 13일 목요일 밤에 태어났다. 마르다가 태어나고 3주가 지나서, 집에 한동안 있던 요셉은 집에 덧붙인 건물을 짓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작업장이자 침실이었다. 예수를 위해서 작은 작업 벤치가 만들어졌고,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연장을 소유했다. 여러 해 동안, 남는 시간에, 그는 이 벤치에서 일했고, 멍에를 만드는 데 상당히 솜씨가 좋아졌다.
124:1.8 (1367.4) 이 해 겨울과 이듬해 겨울은 나사렛에서 몇십년 만에 가장 추웠다. 예수는 산에서 눈을 본 적이 있었고, 이전에 몇 번이나 나사렛에 눈이 왔는데, 잠시만 땅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번 겨울까지는 얼음을 본 적이 없었다. 물이 고체ㆍ액체ㆍ증기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물을 끓이는 그릇에서 달아나는 수증기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는데―물리적 세계와 그 구성에 대하여 소년으로 하여금 많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자라는 이 소년 속에 들어 있는 성격자는 여태까지, 방대한 한 우주에 두루 있는 이 모든 것을 실제로 창조하고 조직한 분이었다.
124:1.9 (1367.5) 나사렛의 기후는 혹독하지 않았다. 1월이 가장 추운 달이었고, 평균 기온은 화씨로 약 50도였다. 7월과 8월이 가장 더운 달이었고, 그때 기온은 화씨 75도에서 90도까지 변하곤 했다. 산에서부터 요단강과 사해(死海) 계곡까지, 팔레스타인의 기후는 몹시 추운 날씨로부터 바짝 타는 정도에 이른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유대인은 세계의 변화하는 기후 지대에 어디서나 살도록 준비가 되어 있다.
124:1.10 (1367.6) 가장 더운 여름 몇 달 동안에도, 시원한 바닷바람이 보통 아침 10시부터 저녁 10시쯤까지 서쪽으로부터 불었다. 그러나 이따금 끔찍하게 뜨거운 바람이 동쪽 사막으로부터, 온 팔레스타인에 불어오곤 했다. 이 뜨거운 강풍은 보통 2월과 3월, 비 오는 철이 끝날 무렵에 닥쳤다. 그 시절에는 11월부터 4월까지 비는 시원한 소나기로 내렸지만, 비가 꾸준히 오지는 않았다. 팔레스타인에는 단지 두 계절, 여름과 겨울, 즉 건조한 철과 비 오는 철밖에 없었다. 1월에 꽃이 피기 시작했고, 4월말이 되어서는 온 땅이 하나의 광대한 꽃밭이었다.
124:1.11 (1367.7) 이 해 5월에, 예수는 삼촌의 농장에서, 처음으로 곡식 거두는 일을 도왔다. 열세 살이 되기 전에, 그는 대장장이 일 외에는 나사렛 근방에서 남녀들이 일하는 거의 모든 직종에 대해서 그럭저럭 무엇인가 발견했고, 나이가 더 들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대장간에서 몇 달 지냈다.
124:1.12 (1368.1) 일과 카라반의 여행이 뜸할 때, 예수는 아버지와 함께 근처의 가나ㆍ엔도르ㆍ나인으로 구경 삼아 또는 일 때문에 여러 번 여행했다. 소년일 때도 세포리스를 자주 찾아보았는데 이곳은 나사렛으로부터 북서쪽으로 겨우 4.8킬로미터 조금 넘는 거리에 있었고, 기원전 4년부터 서기 약 25년까지 갈릴리의 서울이요 헤롯 안티파스의 거처 중의 하나였다.
124:1.13 (1368.2) 예수는 계속하여 육체와 지능 면에서 자라고 사회적ㆍ영적으로 성장하였다. 집을 떠난 여행은 자신의 가족을 더 낫게 더 큰 아량을 가지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이때가 되자 부모조차 그를 가르칠 뿐 아니라 그에게서 배우기 시작했다. 예수는 소년기에도, 독창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요 솜씨 좋은 선생이었다. 그는 이른바 “구전(口傳) 율법”과 항상 견해가 달랐지만, 언제나 집안 풍습에 적응하려고 애썼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꽤 잘 어울렸으나 그들의 머리가 더디게 돌아가는 것에 가끔 실망했다. 그는 열 살이 되기 전에―신체적ㆍ지적ㆍ종교적으로―어른이 될 인품을 장려하는 모임을 만든 일곱 소년의 무리에서 지도자가 되었다. 이 소년들 가운데서 예수는 여러 가지 새로운 놀이와 신체적으로 오락을 즐기는 개량된 방법을 소개하는 데 성공했다.
124:2.1 (1368.3) 7월 5일, 그달의 첫 안식일에 아버지와 함께 시골 길을 걷는 동안에, 예수는 일생의 사명의 특별한 성질을 자각하는 것을 가리키는 느낌과 생각을 처음으로 표현했다. 요셉은 아들의 중대한 말을 주의 깊게 들었지만,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 정보도 자진해서 주지 않았다. 이튿날 예수는 어머니와 함께, 비슷하지만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리아도 마찬가지로 소년이 꺼내는 말을 들었지만, 아무 정보도 자청해서 주지 않았다. 그의 인격의 성품과 땅에서 이루어야 할 사명의 성질에 관하여 자신의 의식 안에서 커지는 이 계시(啓示)에 대하여, 부모에게 예수가 다시 말을 꺼내기까지는 거의 두 해가 흘렀다.
124:2.2 (1368.4) 8월에 그는 회당의 상급 학교에 들어갔다. 학교에서 끈질기게 묻는 질문 때문에 항상 말썽을 일으키고 있었다. 갈수록 더 그는 온 나사렛을 얼마큼 시끄럽게 만들었다. 부모는 소란을 일으키는 이 여러 질문을 그만두라고 하기 싫었고, 주임 교사는 소년이 보인 호기심과 통찰력과 지식 욕구에 크게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24:2.3 (1368.5) 예수의 놀이 친구들은 그의 행동에서 아무런 초자연적인 것을 구경하지 못했고, 대부분의 방법으로 그는 아주 그들과 비슷하였다. 공부에 대한 관심은 평균이 넘었지만, 온통 유별나지는 않았다. 반에서 다른 학생들보다 더 많이 질문을 던지기는 하였다.
124:2.4 (1368.6) 아마도 가장 특별하고 눈에 띄는 특성은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고 싸우기 싫어하는 것이었다. 나이로 보아서 아주 잘 발육된 소년이었기 때문에, 불공평한 처사나 인신 공격을 받을 때에도 자신을 방어하기 싫어한 것이 놀이 친구들에게 이상하게 보였다. 우연하게도, 이 특성 때문에 크게 시달리지는 않았는데, 이는 그가 한 살 더 먹은 이웃 소년 야곱과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요셉의 한 사업 동료인 석공(石工)의 아들이었다. 야곱은 예수를 크게 찬미하는 사람이었고, 예수가 몸으로 싸우기 싫어하는 것 때문에 아무도 예수를 함부로 다루지 않도록 처리하는 것을 자기의 일로 삼았다. 여러 번, 더 나이 많고 촌스러운 소년들이 예수의 소문난 온순함을 믿고 그를 공격했지만, 이들은 그의 보호자로 자처하고 늘 준비된 경호원, 석공의 아들 야곱의 손에 반드시 신속하고 확실한 징벌을 받았다.
124:2.5 (1369.1) 예수는 그 시절과 세대의 드높은 이상을 대표하는 나사렛 소년들에게 널리 인정받는 지도자였다. 정말로 그는 어린 친구들한테서 사랑을 받았는데, 이는 그가 공평했을 뿐 아니라, 애정이 있음을 가리키고 분별 있는 동정심에 가까운, 보기 드물고 이해하는 태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124:2.6 (1369.2) 이 해에 비로소 그는 더 나이 먹은 사람들과 사귀기를 뚜렷이 좋아하는 성향을 보였다. 자기보다 윗 사람들과 문화ㆍ교육ㆍ사회ㆍ경제ㆍ정치ㆍ종교적인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좋아했고, 그의 깊은 논리와 날카로운 관찰력이 어른 친구들의 마음을 끌었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그와 함께 이야기 나누기를 무척 좋아하였다. 집을 부양할 책임을 지게 될 때까지, 예수는 자기보다 나이를 더 먹고 지식이 많은 사람들을 더 좋아하는 성향을 보였는데, 부모는 이런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또래나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과 사귀도록 그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항상 애썼다.
124:2.7 (1369.3) 이 해에 늦게, 갈릴리 바다에서 삼촌과 함께 그는 두 달 동안 고기잡이 경험을 가졌는데, 성과가 아주 좋았다. 그는 어른이 되기 전에, 솜씨 좋은 어부가 되었다.
124:2.8 (1369.4) 신체의 발육은 계속되었고, 그는 학교에서 상급에 속하고 특혜를 받는 생도였다. 그는 집안 아이들 중에서 바로 밑 동생보다 3살 반 더 나이 먹은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어린 남동생ㆍ여동생들과 함께 썩 잘 어울렸다. 예수는 나사렛에서 평판이 좋았고, 다만 좀 우둔한 어떤 아이들의 부모는 예수가 너무 건방지며, 적절히 겸손하지 않고 소년답게 자제함이 없다고 자주 말했다. 예수는 어린 친구들의 놀이 활동을 더욱 심각하고 생각 깊은 방향으로 이끌려는 경향을 차츰 나타냈다. 그는 타고난 선생이었고 놀이에 열중하고 있다고 생각된 때조차, 다만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4:2.9 (1369.5) 요셉은 일찍부터 예수에게 생계를 잇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공업ㆍ상업보다 농업의 장점을 설명했다. 갈릴리는 유대 지방보다도 더 아름답고 번영하는 지역이었고, 거기서 생활하는 데는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 사는 비용의 겨우 4분의 1쯤 들었다. 갈릴리는 농사 짓는 마을과 번성하는 산업 도시들이 있는 지방이었고, 인구가 5천이 넘는 마을이 2백이 넘고, 1만 5천이 넘는 도시가 서른이나 있었다.
124:2.10 (1369.6) 갈릴리 호수에 있는 고기잡이 산업을 살펴보려고 아버지와 처음 여행 갔을 때, 예수는 어부가 되려고 거의 마음먹었다. 그러나 나중에 아버지의 직업과 가까이 한 것이 그에게 목수(木手)가 되도록 영향을 미쳤고, 그 뒤에 여러 가지 영향이 섞여, 마지막에는 새로운 체제의 종교 선생이 되는 선택으로 이끌었다.
124:3.1 (1369.7) 이 한 해 동안 내내,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집을 떠나 여행을 계속했지만, 또한 삼촌의 농장을 자주 찾아보았고, 이따금 막달라로 가서 그 도시 근처에 근거지를 둔 삼촌과 함께 고기잡이에 들어갔다.
124:3.2 (1369.8)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에게 어떤 특별한 편애를 보이거나, 아니면 그가 약속의 아이, 운명의 아들이라는 것을 안다고 털어놓고 싶은 유혹을 가끔 받았다. 그러나 부모는 이 모든 문제에서 특별히 지혜롭고 현명했다. 어떤 방법으로 그에게 어떤 편애를 조금이라도 보인 것이 몇 번 되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소년은 모든 그러한 특별 배려를 재빨리 물리쳤다.
124:3.3 (1370.1) 예수는 카라반에게 소모품을 파는 상점에서 어지간히 시간을 보냈고, 세상의 모든 지방에서 온 여행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눔으로, 그의 나이로 보아서 놀랍게, 세계의 동향에 관하여 정보를 쌓았다. 이 해는 그가 자유롭게 놀고 어린이로서 즐거움을 많이 누린 마지막 해였다. 이때부터 계속, 이 소년의 생활에서 어려움과 책임이 빠르게 늘어났다.
124:3.4 (1370.2) 서기 5년, 6월 24일, 수요일 저녁에 유다가 태어났다. 이 일곱째 아이의 출생에 관련된 병이 뒤따랐다. 마리아가 몇 주 동안 몹시 아파서, 요셉이 집에 남아 있었다. 예수는 아버지의 심부름과 어머니의 심각한 병 때문에 생긴 여러 가지 할 일로 아주 바빴다. 이 소년은 다시 어린 시절, 어린이의 위치로 돌아갈 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어머니가 아플 때부터―그가 열한 살이 막 되기 전에―그는 정상으로 마땅히 그의 어깨에 지워지는 것보다 만 1년이나 2년 앞서 맏아들의 책임을 지고, 이 모든 일을 해낼 수밖에 없었다.
124:3.5 (1370.3) 하잔은 예수가 히브리 성서를 통달하도록 돕느라고 그와 함께 한 주에 하루 저녁을 보냈다. 그는 싹이 보이는 생도(生徒)의 진보에 크게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예수를 여러 면에서 기꺼이 도와주었다. 이 유대인 훈장은 성장하는 이 젊은이의 지성에 큰 영향력을 미쳤지만, 학식 있는 랍비들 밑에서 공부를 계속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전망에 관하여 온갖 제안을 내밀어도, 어째서 예수가 그토록 흥미를 보이지 않았는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124:3.6 (1370.4) 5월 중순경에, 소년은 스키토폴리스까지 아버지가 출장갈 때 따라갔는데, 이곳은 데카폴리스 지방의 주요한 그리스 풍의 도시이며, 또한 베스쉬안 지역의 고대 히브리인 도시였다. 가는 길에 요셉은 사울 왕과 블레셋인의 오랜 역사의 상당한 부분, 그리고 그 뒤에 이스라엘의 파란 많은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일러 주었다. 예수는 이른바 이 이방인 도시의 깨끗한 모습, 가지런한 질서 있는 배열에 엄청나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노천 극장을 보고 감탄하고, “이교도” 신들의 예배에 바쳐진 아름다운 대리석 성전을 찬미했다. 요셉은 그 소년의 열심에 상당히 마음이 흔들렸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성전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찬양하여 이 좋은 인상을 지우려고 애썼다. 예수는 가끔 나사렛의 언덕에서 이 웅장한 그리스 풍의 도시를 호기심 있게 바라보았고, 대규모의 공공(公共) 사업과 화려한 여러 건물에 관하여 여러 번 물은 적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이러한 물음에 대답을 피하려 했다. 이제 그들은 이 이방인 도시의 아름다움과 얼굴을 마주했고, 요셉은 예수가 묻는 말에 점잖게 못 들은 척할 수 없었다.
124:3.7 (1370.5) 마침, 이때 데카폴리스 지역의 그리스 풍의 도시들 사이에 해마다 있는 경기, 그리고 신체의 우수함을 보이는 대중 전시가 스키토폴리스의 원형 경기장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예수는 아버지에게 경기를 보러 데려가 달라고 졸랐고, 너무 졸라서 요셉은 부탁을 물리치기를 망설였다. 소년은 여러 경기를 보고 흥분했고, 사람들이 신체의 발육과 운동 기술을 전시하는 정신에 아주 흠뻑 젖었다. 예수가 이 허영에 찬 “이방인”의 전시를 보는 동안, 요셉은 아들이 열심에 빠진 것을 지켜보고 말할 수 없이 충격을 받았다. 경기가 끝난 뒤에, 예수가 이 여러 경기가 좋다고 인정하면서, 야외에서 건전한 신체 활동을 하여 이렇게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면 나사렛의 젊은이들에게 좋을 것이라고 제안하는 것을 들었을 때, 요셉은 일생 최대의 충격을 받았다. 요셉은 그러한 관습이 어떻게 나쁜가 예수와 함께 오랫동안 열심히 이야기했지만, 소년이 납득하지 않았음을 잘 알았다.
124:3.8 (1371.1) 아버지가 자기에게 성난 것을 예수가 꼭 한 번 본 것은 그날 밤 여인숙에서 그들의 방에서 토론하던 중에, 소년이 유대인 사상(思想)의 경향을 아주 까마득하게 잊고서 집으로 돌아가 나사렛에서 원형 경기장을 짓기 위해 일하자고 제안했을 때였다. 맏아들이 유대인답지 않게 그런 감정을 표시하는 것을 들었을 때, 요셉은 평상시의 차분함을 잊어버리고, 예수의 어깨를 움켜잡고, 성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아들아, 네가 살아 있는 동안, 그런 나쁜 생각을 입 밖에 내는 것을 다시는 듣고 싶지 않다.” 예수는 아버지의 감정 표현에 깜짝 놀랐다. 결코 전에는 아버지가 분개하여 몸소 따끔하게 야단치는 것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 단지 이렇게 대답했다, “좋아요 아버지, 그렇게 하지요.” 아버지가 살아 계신 동안, 소년은 그리스 풍의 경기와 기타 체육 활동을 비치는 말을 조금도 다시 꺼내지 않았다.
124:3.9 (1371.2) 나중에,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그리스 풍의 원형 경기장을 보았고, 유대인의 관점에서 그런 것들이 얼마나 싫은 것인가 알았다. 그런데도, 일생을 통해서 내내, 그는 자신의 계획에, 그리고 유대인의 풍습이 허락하는 한, 열두 사도를 위하여 후일의 정규 활동 계획에, 건전한 오락 관념을 소개하려고 애썼다.
124:3.10 (1371.3) 열한 살 되던 이 해가 저물 때, 예수는 활기 있고 잘 성장하고 적당히 익살이 있고 썩 명랑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이 해부터 계속하여, 깊이 생각에 잠기고 골똘히 생각하는 별다른 시간을 보내는 버릇에 점점 더 빠져 들어갔다. 어떻게 가족에 대하여 책임을 수행하고, 동시에 세상에 사명(使命)을 다하라는 요청에 복종할 것인가 많은 생각에 빠졌다. 그는 사명이 유대 민족의 지위를 향상하는 데 한정된 것이 아님을 이미 깨달았다.
124:4.1 (1371.4) 이 해는 예수의 일생에서 사건이 많은 해였다. 그는 학교 공부에 계속하여 진전이 있었고, 자연을 연구하는 데 지칠 줄 몰랐으며, 한편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 생계를 이어가는가 더욱 공부하였다. 그는 집에 있는 목수 작업장에서 정규적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자신이 번 돈을 관리하라고 허락을 받았는데, 이것은 유대인 가정에서 아주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 해에 그는 또한 그런 일을 가족에게 비밀로 하는 지혜를 배웠다. 마을에서 어떤 방법으로 자기가 문제를 일으켰는가 의식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혹시 동료들과 다르게 여기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점점 더 신중하게 감추었다.
124:4.2 (1371.5) 이 해 내내 그의 사명의 성질이 무엇인가 실제로 의심하지는 않더라도, 확실치 않게 느끼는 기간이 여러 번 있었다.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그의 인간 지성은 자신이 두 성품을 가졌다는 현실을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그가 꼭 하나의 인격을 가졌다는 사실이, 바로 그 인격과 결합된 성품의 구성 요소들이 두 가지 기원을 가진 것을 그가 인식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124:4.3 (1371.6) 이때부터 계속, 그는 동생들과 어울리는 데 더 나아졌다. 갈수록 더 요령 있게 행동하였고, 늘 이해심을 가지고 그들의 복지와 행복을 배려했으며, 대중 봉사를 시작할 때까지 그들과 좋은 관계를 가졌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야고보와 미리암과 사이가 좋았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두 동생, 아모스와 룻과 사이가 아주 뛰어나게 좋았다. 마르다하고는 언제나 사이가 썩 좋았다. 그가 집에서 어려움을 겪은 것은 대체로, 요셉과 유다, 특히 유다와 마찰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났다.
124:4.4 (1372.1) 전례 없이 이렇게 신과 합쳐진 인간을 기르는 일을 떠맡은 것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벅찬 체험이었고, 그들은 부모의 책임을 아주 충실하고 성공적으로 이행한 큰 공로를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예수의 부모는 이 맏아들 안에 초인간적인 무엇이 거함을 갈수록 더 깨달았지만, 이 약속의 아들이 정말로, 진실로, 사물과 존재들이 가득한 이 지역 우주를 실제로 창조한 분이라는 것을 결코 털끝만큼도 꿈꾸지 못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 예수가 정말로, 필사의 몸으로 육신화한 우주 창조자인 것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죽었다.
124:4.5 (1372.2) 이 해에 예수는 여느 때보다 더 음악에 마음을 쏟았고, 동생들을 위해서 집에서 공부를 줄곧 가르쳤다. 자기의 사명의 성질에 관하여 요셉과 마리아의 견해가 다른 것을 소년이 날카롭게 의식하게 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는 부모의 견해 차이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고, 그가 깊이 잠들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가끔 부모가 의논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갈수록 더 아버지의 관점으로 기울었다. 그래서 그의 생애와 상관 되는 문제에서 어머니는 차츰 아들이 자기의 지도를 따르지 않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상하게 되도록 정해져 있었다. 해가 지남에 따라서, 이렇게 견해의 차이가 커졌다. 점점 더 마리아는 예수의 사명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고, 가장 아끼는 아들이 자기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여 이 착한 어머니는 갈수록 더 마음을 상했다.
124:4.6 (1372.3) 요셉은 예수의 사명이 영적 성질을 가졌다는 것을 차츰 더 믿었다. 다른 더 중요한 이유가 아니었다면, 땅에서 예수의 자신 수여에 대한 요셉의 관점이 실현되는 것을 그가 살아서 볼 수 없었던 것은 유감스러운 듯하다.
124:4.7 (1372.4) 학교에서 마지막 해를 보내는 동안에, 그가 12살이 되었을 때 집으로 들어가거나 나갈 때마다 문설주에 못박힌 양피지 조각을 만지고, 다음에 그 양피지를 만진 손가락에 입맞춤하는 유대인의 관습에 대하여 예수는 아버지에게 항의하였다. 이 절차의 일부로서, “우리가 들어가고 나감을 지금부터, 아니 영원까지도 주가 보호하실지라” 말하는 것이 풍습이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형상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리지 말라는 이유에 대해서 거듭하여 가르치고, 그러한 작품들이 우상(偶像) 숭배의 목적으로 쓰일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들이 형상과 그림을 금지한 까닭을 예수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는 높은 일관성 개념을 가졌고, 따라서 문설주의 양피지에 이렇게 경의를 표하는 버릇이 본질적으로 우상 숭배의 성질이 있다고 아버지에게 지적했다. 예수가 이렇게 아버지한테 지적한 뒤에, 요셉은 그 양피지를 없애버렸다.
124:4.8 (1372.5) 시간이 지나자, 예수는 가정 기도(祈禱)와 기타 관례와 같은 그들의 종교 형식의 습관을 고치느라고 많이 애썼다. 나사렛에서는 그러한 일을 많이 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이름난 나사렛 선생 요세의 예를 보다시피, 그 회당이 자유로운 랍비 학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124:4.9 (1372.6) 이 해와 다음 두 해 동안 내내, 종교 관습과 사회 예절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부모의 고정된 관념에 적응시키려고 꾸준히 노력한 결과로서, 예수는 크게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자신의 확신에 충실하려는 욕구, 그리고 부모에게 충실히 복종하라는 양심의 훈계, 이 둘의 갈등으로 마음이 산란하였다. 제일 큰 갈등은 그의 어린 생각에 가장 중요했던 두 가지 큰 계명(誡命) 사이에서 생겼다. 하나는 “진리와 올바름에 대한 너의 최상의 확신이 내리는 명령에 충실하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네 부모를 존경할지니, 저희가 너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길렀음이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개인적 확신, 그리고 가족에 대한 의무, 이 두 가지에 충실하면서 하루하루 필요한 대로 적응하는 책임을 그는 결코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개인의 확신과 가족에 대한 의무, 이 두 가지를 조화되게 섞어서, 충성ㆍ공정ㆍ관용ㆍ사랑에 기초를 둔 개념, 훌륭한 집단 결속의 개념으로 만드는 만족감을 얻었다.
124:5.1 (1373.1) 이 해에 나사렛 소년은 어린 시절을 지나서 청년기의 시초로 들어갔다. 목소리가 바뀌기 시작했고, 그 외에도 정신과 육체의 모습이 곧 어른이 되어간다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124:5.2 (1373.2) 서기 7년, 1월 9일, 일요일 밤에, 아기 남동생 아모스가 태어났다. 유다는 채 두 살이 되지 않았고, 아기 여동생 룻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다음 해에 사고(事故)로 돌아가셨을 때, 예수는 어린아이들이 있는 상당히 큰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24:5.3 (1373.3) 땅에서 사람을 깨우치고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운명을 가진 것을 예수가 인간으로서 확신하게 된 것은 2월 중순 무렵이었다. 원대한 계획과 함께 중대한 결정이 이 소년의 머리 속에서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그는 겉으로 보아서 나사렛의 보통 유대인 소년이었다. 이 모든 것이 이제 청년기에 접어든 목수 아들의 생각과 행동에서 비로소 펼쳐지자, 온 네바돈의 지적 생명이 황홀하고 놀란 가운데 계속 바라보았다.
124:5.4 (1373.4) 서기 7년, 3월 20일, 그 주 첫 날, 나사렛 회당에 부속된 지역 학교에서 예수는 훈련 과정을 졸업했다. 이것은 큰 꿈을 가진 어떤 유대인 가족에서도 생활에 중요한 날, 첫아들이 “계명의 아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의 되찾은 첫아들, “최고자의 아이요” 온 땅의 주의 종으로 선포되는 날이었다.
124:5.5 (1373.5) 요셉은 세포리스에서 새 공공(公共) 건물을 짓는 일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지난 주 금요일에 이 경사에 참석하려고 거기서 왔다. 예수의 선생은 총명하고 부지런한 생도가 어떤 특별한 생애, 어떤 탁월한 사명을 타고났다고 굳게 믿었다. 전통을 따르지 않는 예수의 성향 때문에 온갖 문제가 있었는데도, 장로들은 소년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고, 이름난 히브리 학원에서 교육을 계속할 수 있도록 그를 예루살렘에 보낼 계획을 이미 세우기 시작했다.
124:5.6 (1373.6) 이따금 이 계획이 거론되는 것을 듣는 동안, 예수는 랍비들과 어울려 공부하려고 예루살렘에는 결코 가지 않겠다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일어날 비극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이것은 그로 하여금 어머니와 자신은 물론, 곧 다섯 남동생과 세 여동생으로 구성될 큰 가족을 부양하고 지도하는 책임을 지게 만들었고, 그래서 모든 그런 계획을 단념하도록 보장할 것이었다. 예수는 아버지 요셉에게 주어진 것보다 더 크고 긴 체험, 이 가족을 양육하는 체험을 겪었고 나중에 자신이 부과한 기준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것은 너무 갑자기 슬픔에 빠지고 너무 뜻밖에 아버지를 잃은 이 가족―그의 가족―에게 현명하고, 참을성과 이해심이 있고 유능한 선생이자 큰형이 되는 것이었다.
124:6.1 (1374.1) 이제 청년기의 문턱에 이르렀고 정식으로 회당 학교를 졸업했으니까, 예수는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서, 같이 그의 첫 유월절 축하에 참석할 자격이 있었다. 이 해에 유월절 축제는 서기 7년 4월 9일, 토요일에 있었다. 상당히 큰 무리가 (103 명) 4월 4일 월요일 아침 일찍,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려고 준비했다. 그들은 남쪽으로 사마리아를 향하여 길을 떠났지만, 예즈릴에 다다르자, 사마리아 지나가는 것을 피하려고 동쪽으로 향했고, 길보아 산을 돌아서 요단강 유역으로 갔다. 요셉과 그 가족은 야곱의 우물과 베델의 길을 거쳐 사마리아를 통해서 내려가는 것을 좋아했을 터이지만,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관하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웃 사람들과 함께 요단강 유역의 길을 거쳐서 가기로 작정하였다.
124:6.2 (1374.2) 무척 두려워했던 아켈라우스는 폐위되었고, 그들은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기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첫째 헤롯이 베들레헴의 아기를 죽이려고 한 지 12년이 지났고, 아무도 이제는 그 사건을 이름 없는 이 나사렛 소년과 연관 지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었다.
124:6.3 (1374.3) 예즈릴 교차점에 이르기 전에, 그들이 계속 여행하자, 오래지 않아서 왼편에 고대의 슈넴 마을을 지났는데, 예수는 거기서 한때 살았던, 온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소녀, 그리고 또한 엘리사가 거기서 행한 놀라운 이적(異蹟)에 관하여 다시 이야기를 들었다. 예즈릴을 지나치면서, 예수의 부모는 아합과 예세벨이 한 일과 예후의 공적을 이야기했다. 길보아 산 둘레를 지나면서, 그들은 이 산의 비탈에서 목숨을 끊은 사울, 그리고 다윗 왕과 이 역사적 장소에 관계된 것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124:6.4 (1374.4) 길보아산 기슭을 돌면서, 순례자들은 바른쪽에 그리스 풍 도시 스키토폴리스를 볼 수 있었다. 멀리서 대리석 구조를 바라보았지만, 몸을 더럽혀서, 예루살렘에서 다가오는 유월절의 엄숙하고 신성한 예식에 참석할 수 없게 될까 두려워, 그들은 이방 도시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 마리아는 어째서 요셉이나 예수가 스키토폴리스에 대해서 입을 열려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리아는 지난 해에 그들에게 불편한 대화가 있었던 것을 몰랐는데, 그들이 이 사건을 마리아에게 털어놓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24:6.5 (1374.5) 길은 이제 열대 지역인 요단강 유역 밑으로 바로 이끌었고, 사해(死海)를 향하여 흘러 내려가고 물결이 반짝이고 찰랑거리는 요단강, 구부러지고 늘 굽이쳐 흐르는 강이 감탄하는 예수의 눈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 열대의 골짜기에서 남쪽으로 여행하면서, 그들은 겉옷을 벗어놓고 화려한 곡식 밭, 그리고 분홍 꽃이 잔뜩 핀 아름다운 올리앤더를 보고 즐겼다. 한편 꼭대기에 눈이 덮인 거대한 헤르몬산이 북쪽에 멀리 서서 웅장한 모습으로 이 역사적인 골짜기를 내려다보았다. 스키토폴리스의 맞은편으로부터 세 시간 남짓 여행하자, 그들은 부글부글 솟아오르는 샘물에 다다랐고, 여기서 그들은 밤에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서 텐트를 쳤다.
124:6.6 (1374.6) 여행하던 이틀째, 그들은 얍복강이 동쪽으로부터 요단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곳을 지났고, 동쪽을 향하여 이 강 유역을 바라보면서, 기드온 시절의 이야기를 했는데, 이때 미디안 족은 그 땅에 퍼지려고 이 지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틀째 여행하던 끝에, 그들은 요단강 유역을 내려다보는 가장 높은 산, 사르타바산 밑 가까이에서 텐트를 쳤다. 이 산 꼭대기는 알렉산드리아의 요새가 차지했고, 거기서 헤롯은 아내들 가운데 하나를 감옥에 가두었고, 목 졸라 죽인 두 아들을 땅에 묻었다.
124:6.7 (1375.1) 셋째 날에 그들은 헤롯이 최근에 지은 두 마을을 지났고, 그 우수한 건축과 아름다운 야자나무 동산을 눈여겨보았다. 밤이 되기까지 예리고에 이르렀고, 거기서 아침까지 머물렀다. 그날 저녁에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는 2.4킬로미터 걸어서 고대의 예리고 터로 갔는데,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거기서 요수아가 공훈을 세웠다는 소문이 있었고, 예수의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124:6.8 (1375.2) 넷째 날이자 여행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 도로에는 이어진 순례자들로 줄을 이루었다. 그들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이끄는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꼭대기에 가까워 오자, 요단강을 건너 그 뒤의 여러 산까지, 그리고 남쪽으로 사해의 느릿한 물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예루살렘까지 이르는 길의 중간쯤에서, 예수는 올리브산을 (그 뒤에 무척 그의 일생의 일부가 될 지역) 처음 구경했고, 요셉은 그 거룩한 도시가 이 산마루 바로 건너에 있다고 그에게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었다. 그 도시와 하늘 아버지의 집을 곧 보게 된다는 즐거운 기대에 소년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124:6.9 (1375.3) 올리브산 동쪽 비탈에서 그들은 베다니라고 부르는 작은 마을의 경계에서 쉬려고 멈추었다. 친절한 마을 사람들은 순례자들을 보살피려고 쏟아져 나왔고, 마침 요셉과 그의 가족은 어느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 가까이서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에게는 예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세 아이―마리아ㆍ마르다ㆍ나사로―가 있었다. 그들은 마실 것을 들자고 나사렛 가족을 안으로 초청하였고, 그 두 가족 사이에는 일생 동안의 우정이 생겼다. 그 뒤에 여러 번, 파란 많은 생애에서 예수는 이 집에 머물렀다.
124:6.10 (1375.4) 그들은 길을 재촉하여 곧 올리브산 가장자리에 섰고, 예수는 (그가 기억하건대) 처음으로 그 거룩한 도시, 허세로 크게 지은 여러 궁전, 그리고 영감을 주는 아버지의 성전을 보았다. 예루살렘의 처음 광경을 황홀히 바라보면서 4월 이날 오후에 거기 올리브산에서 서 있는 동안, 이때 그렇게 온통 마음을 빼앗기면서 가졌던 순전히 인간적 흥분을 예수는 일생에 어느 때에도 느낀 적이 없었다. 후일에 바로 이 자리에 서서, 또 하나의 선지자, 하늘의 선생들 가운데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사람을 물리치려 한 그 도시 때문에 그는 눈물을 흘렸다.
124:6.11 (1375.5) 그러나 그들은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계속 갔다. 이제 목요일 오후였다. 도시에 이르자, 그들은 성전을 지나쳤고, 예수는 그렇게 많은 인간 무리를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이 유대인들이 문명 세계의 가장 먼 곳으로부터 와서 여기에 모였는가 깊이 생각했다.
124:6.12 (1375.6) 그들은 유월절 주간에 숙박하려고 미리 정해놓은 장소에 곧 이르렀다. 이곳은 마리아의 어느 부유한 친척이 사는 큰 집이었고, 그는 사가리아를 통해서 요한과 예수의 초기 내력에 관하여 얼마큼 아는 사람이었다. 이튿날, 준비하는 날에, 그들은 유월절 안식일을 적절히 축하하려고 준비했다.
124:6.13 (1375.7) 유월절을 위해 준비하느라고 온 예루살렘이 떠들썩한 동안에, 요셉은 아들을 데리고 어느 학교를 방문할 틈을 냈고, 거기서 2년 뒤에 예수가 적절한 나이, 열 다섯 살이 되자마자, 교육을 다시 시작하도록 주선이 되어 있었다. 세심하게 짜놓은 이 계획에 예수가 거의 흥미를 보이지 않는 것을 지켜보고 요셉은 참으로 어리둥절했다.
124:6.14 (1375.8) 예수는 성전과 그에 관계된 모든 예배(禮拜)와 기타 활동에 깊이 감명을 받았다. 네 살이 되고 난 뒤에 처음으로, 자신의 명상에 너무 깊히 빠져서, 많이 묻지 않았다. 그러나 (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에게, 어째서 하늘 아버지가 죄 없고 무력한 동물의 도살(屠殺)을 그토록 많이 요구하는가, 몇 가지 난처한 질문을 던졌다. 소년의 얼굴 표정으로부터, 자기의 대답과 설명하려는 노력이 깊이 생각하고 날카롭게 따지는 아들에게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것을 아버지는 잘 알았다.
124:6.15 (1376.1) 유월절 안식일 전날에, 영적 빛의 큰 물결이 예수의 필사 지성을 휩쓸었고, 옛날부터 내려온 유월절을 기념하여 축하하려고 모인, 영적으로 눈멀고 도덕적으로 무지한 군중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느낌이 그의 인간 가슴을 넘치도록 채웠다. 이날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를 입고 보낸 가장 특별한 날 중의 하나였다. 그날 밤에, 땅에서 살던 생애에 처음으로, 이마누엘의 임명을 받고서, 구원자별로부터 배치된 사자(使者)가 그에게 나타났다. 그 사자는 말했다. “때가 왔나이다. 당신의 아버지의 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이다.”
124:6.16 (1376.2) 그래서 나사렛 가족의 무거운 책임이 어린 그의 어깨에 지워지기도 전에, 아직 열세 살이 채 안 된 이 소년에게, 한 우주의 책임을 비로소 다시 질 때가 왔다고 상기시키려고 이제 하늘의 사자가 도착한 것이다. 이것은 유란시아에서 아들의 자신 수여를 마침내 완수하고, “인간이자 신(神)인 그의 어깨 위에 한 우주의 정부”를 되돌려 놓은, 길게 이어지는 여러 사건 중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124:6.17 (1376.3) 시간이 지나자, 육신화의 신비는 우리 모두에게, 갈수록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우리는 이 나사렛 소년이 온 네바돈의 창조자라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오늘날 어떻게 바로 이 창조 아들의 영과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영이 인류의 혼들과 결합되는가도 이해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가 육체를 입고 인생을 살지만, 정신적으로 그의 어깨 위에 한 우주의 책임이 놓여 있음을 그의 인간 지성이 점점 더 깨닫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124:6.18 (1376.4) 이렇게 나사렛 소년의 경력이 끝나고, 청년기에 들어간 그 젊은이―점점 더 자의식하는 신다운 인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확대되는 일생의 목적을 부모의 소망, 그리고 가족과 그가 사는 시대의 사회에 대한 의무와 통합하려고 애쓰면서, 이제 그는 세계적 생애를 비로소 깊이 생각한다.
125:0.1 (1377.1) 파란 많았던 예수의 지상 생애에서, 그의 기억으로 처음인 이 예루살렘 방문보다 더 마음을 끌고, 인간적으로 더 가슴 설레게 하는 사건은 없었다. 혼자서 성전 토론에 참석하는 체험에 특별히 자극을 받았고, 이것은 어린 시절 후반과 소년 시절 초기에 있었던 큰 사건으로서 그의 기억에 오랫동안 뚜렷이 남았다. 이 방문은 그가 며칠 동안 독립된 생활, 아무런 금지와 제한이 없이 오가는 기쁨을 누릴 첫 기회였다. 유월절에 뒤이어 한 주 동안 아무런 지시 없이 사는 이 짧은 기간은, 그가 일찍이 누린 바 처음으로 책임에서 완전히 해방된 기간이었다. 잠시라도, 이와 비슷하게 모든 책임감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기간을 다시 가진 것은, 이 다음에 여러 해가 지난 뒤였다.
125:0.2 (1377.2) 여자들은 예루살렘의 유월절 축제에 가는 일이 드물었고, 참석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예수는 어머니가 그들을 따라오지 않는 한, 사실상 가기를 거절하였다. 어머니가 가기로 결심했을 때, 다수의 다른 나사렛 여인들도 여행할 마음이 들었고, 그래서 그 유월절 일행은 나사렛에서 유월절을 지내려고 올라간 중에서, 남자에 비해서 여자의 수가 가장 많았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그들은 이따금 시편 130편을 노래했다.
125:0.3 (1377.3) 나사렛을 떠날 때부터 그들이 올리브 산마루에 이를 때까지, 예수는 기대에 차서 오랫동안 긴장하였다. 즐거웠던 어린 시절 동안 내내,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루살렘과 그 성전에 대하여 소문을 들어 왔는데, 이제 그는 곧 실제로 구경할 것이었다. 올리브산에서부터, 그리고 바깥에서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성전은 예수의 기대를 뛰어넘었다. 그러나 일단 거룩한 입구에 들어서자, 큰 환멸이 시작되었다.
125:0.4 (1377.4) 부모의 일행 속에서, 이스라엘의 시민으로서 성화(聖化)를 막 받으려 하는 새 율법의 아들 집단과 합세하려고 가는 길에 예수는 성전 구역을 지나갔다. 성전에 모인 군중의 일반 태도를 보고 조금 실망했지만, 그날의 가장 큰 충격은 어머니가 여인 구역으로 가는 길에 그들을 떠났을 때였다. 어머니가 성화 예식까지 자신을 따라오면 안 된다는 생각이 결코 예수의 머리에 떠오른 적이 없었고, 그는 어머니가 그렇게 부당한 차별을 받게 된 것에 온통 화가 났다. 몹시 분개했지만, 항의하는 몇 마디를 아버지에게 한 것 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며, 이것은 한 주 뒤에 서기관과 선생들에게 던진 여러 질문에서 드러났다.
125:0.5 (1377.5) 성화 의식을 거쳤지만, 그는 이 의식(儀式)이 형식적이고 일상적인 것에 실망을 느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여 주는 것이 나사렛 회당 의식의 특징이었는데, 여기서는 그런 맛이 없어 서운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어머니에게 인사하려고 돌아갔고, 성전과 그 안에 있는 여러 뜰과 회랑과 복도를 오가는 첫 나들이에 아버지를 따라가려고 준비했다. 성전 구역은 한꺼번에 예배자를 20만 명 넘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이 건물의 방대함은―일찍이 보아 온 어느 것과 비교해도―머리 속에 크게 감명을 주었지만, 그는 성전 의식과 이와 관련된 예배의 영적 중요성을 깊이 생각하는 데 더 골똘해 있었다.
125:0.6 (1378.1) 아름다운 것과 상징적인 것을 느끼는 그의 감각은 성전의 많은 의식에 몹시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파고드는 여러 질문에 답하여 이 의식의 참 중요성이 무엇인가 부모가 제시한 설명에 그는 언제나 실망했다. 하나님이 노여워하거나 전능자가 진노한다는 신앙에 근거하여 예배와 종교적 헌신을 설명하는 말을 예수는 단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성전 방문을 마친 뒤에, 이 질문에 대하여 계속 논의할 때, 예수가 정통파 유대인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인정하라고 아버지가 가볍게 고집했을 때, 예수는 갑자기 부모에게 돌아서서, 하소연하는 얼굴로 아버지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버지, 그럴 리가 없나이다―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땅에서 잘못하는 자녀를 그렇게 대할 수 없나이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늘 아버지가 자신의 자녀를 덜 사랑할 수 없나이다. 내가 아무리 지혜롭지 못한 짓을 하더라도 아버지는 결코 내게 진노를 퍼붓거나 성내지 않으실 줄 내가 잘 아나이다. 땅에서 내 아버지가, 신을 닮은 그런 인간다운 그림자를 가졌다면, 하늘의 아버지는 얼마나 더 선이 가득하고 자비로 넘쳐흐를까. 땅에 있는 내 아버지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나를 덜 사랑한다는 것을 나는 믿지 못하나이다.”
125:0.7 (1378.2) 맏아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요셉과 마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두 번 다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비로움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바꾸려 애쓰지 않았다.
125:1.1 (1378.3) 성전 마당에 어디를 가도, 경건치 않은 정신에 예수는 충격을 받고 메스꺼워졌다. 그는 성전에 있던 군중의 행동은 그들이 “아버지 집에” 있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를 이방인의 마당으로 데리고 갔을 때, 그는 젊은 나이에 최대의 충격을 받았는데, 거기에는 시끄러운 속어(俗語)와 떠들고 욕하는 소리가 양들이 매― 하고 우는 소리, 그리고 왁자지껄한 잡음과 한데 어울려 섞였고 이것은 환전상(換錢商), 그리고 희생 동물 및 기타 잡동사니 상품을 파는 장사꾼들이 자리에 있음을 드러냈다.
125:1.2 (1378.4)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전의 이 구역 안에서, 이리저리 누비고 다니는 경박한 창녀들을 보고 그의 예절 바른 감정이 분노로 끓어올랐는데, 이들은 세포리스를 방문했을 때 아주 최근에 보았던, 바로 그런 분칠한 여자들이었다. 이러한 성전 훼손은 온통 젊은이의 분개심을 일으켰고, 그는 요셉에게 느낀 대로 자기 생각을 서슴지 않고 표현했다.
125:1.3 (1378.5) 예수는 성전에서 받은 느낌과 성전 예배에 대하여 좋게 말했지만, 그렇게 많은 지각 없는 신자들의 얼굴에 비친 영적 더러움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다.
125:1.4 (1378.6) 그들은 수많은 동물의 도살과 놋 분수대에서 도살을 주관하는 사제들이 손에서 피 씻는 것을 지켜보려고, 이제 성전 앞에 바위 선반 밑으로, 제단이 세워진 사제들의 마당으로 내려갔다. 피로 얼룩진 포장된 길, 사제들의 피투성이 손, 그리고 죽어 가는 짐승들이 지르는 소리를 자연을 사랑하는 이 소년은 견딜 수 없었다. 그 끔찍한 광경은 이 나사렛 소년을 역겨워하게 만들었고, 그는 아버지의 팔을 잡고 다른 데로 가자고 애원했다. 그들은 이방인의 마당으로 도로 돌아갔고, 거기서 들었던 거친 웃음소리와 쌍스러운 농담조차, 막 구경한 광경으로부터 한숨 돌리는 것이었다.
125:1.5 (1379.1) 요셉은 아들이 성전의 의식을 보고 얼마나 메스꺼워하는가 보았고, 현명하게 그를 이끌어 “미문(美門)”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고린도의 놋으로 만들어진 예술적 대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첫 성전 방문으로서 충분히 보았다. 그들은 마리아를 찾으려고 윗 마당으로 돌아갔고, 건물 바깥에서 군중과 떨어져 한 시간 동안 걸으면서, 헤롯의 웅장한 집이었던 아스모니아 궁전과 로마 경비병의 탑을 보았다. 이렇게 걷는 동안, 오직 예루살렘 주민들이 성전에서 날마다 희생물 바치는 의식을 구경하는 것이 허락된다, 갈릴리에 사는 사람들은 성전 예배에 참석하려고 유월절, 오순절 축제 (유월절 뒤 일곱 주가 지나서), 10월의 초막절에, 이렇게 1년에 겨우 세 번 올라온다고 요셉은 예수에게 설명했다. 모세가 이 축제들을 제정하였다. 다음에 그들은 나중에 제정된, 헌당 축제와 푸림 축제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그 뒤에, 묵는 곳으로 가서 유월절 축하를 위하여 준비했다.
125:2.1 (1379.2) 베다니의 시몬이 그 일행을 위하여 유월절 양을 샀기 때문에, 나사렛의 다섯 가족이 유월절을 축하하려고 시몬 가족의 손님과 동료가 되었다. 바로 이 양들을 엄청나게 많이 도살한 것이 성전을 방문할 때 예수에게 그토록 영향을 주었다. 마리아의 친척들과 함께 유월절 저녁을 먹을 계획이 있었지만, 예수는 베다니로 가는 초청을 받아들이라고 부모를 설득했다.
125:2.2 (1379.3) 그날 밤 그들은 유월절 의식을 치르려고 모였고, 구운 고기를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과 함께 먹었다. 새 언약의 아들이 되었으니까, 예수는 유월절의 기원을 자세히 이야기하라고 요청을 받았고, 이것을 잘 해냈다. 그러나 그가 얼마 전에 듣고 본 것으로 말미암아, 어려도 생각 깊은 그의 머리에 새겨진 인상을 넌지시 비추는 논평을 많이 덧붙여 예수는 부모의 속을 얼마큼 흔들어 놓았다. 이날은 7일 동안 치르는 유월절 축제 의식(儀式)의 시작이었다.
125:2.3 (1379.4) 이날부터도 벌써, 비록 그러한 문제에 관하여 부모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도살한 양 없이 유월절을 지내도 좋은가, 예수는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머리 속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이 희생 제물 바치는 광경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확신하였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언젠가 피 흘리지 않는 유월절 축하 예식을 만들어야겠다고 더욱 마음을 굳게 먹었다.
125:2.4 (1379.5) 예수는 그날 밤 거의 자지 못했다. 짐승이 도살당하고 고통받는 메스꺼운 꿈 때문에 휴식을 얻기가 힘들었다. 유대인의 예식 체계 전체에 담긴 신학의 모순과 부조리 때문에, 그는 머리가 산란했고 마음이 아팠다. 부모도 마찬가지로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막 지나간 그날의 사건들 때문에 크게 마음이 혼란했다. 그들은 소년의 태도가 이상하고 단호하다고 생각되어서 마음이 온통 언짢았다. 그날 밤 초저녁에 마리아는 불안하여 마음의 평정을 잃었지만, 요셉은 똑같이 당황했어도 침착을 잃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해서 두 사람은 소년과 솔직하게 말하기가 두려웠다. 하지만 그들이 용감히 말을 꺼냈더라면, 예수는 부모와 함께 기쁘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125:2.5 (1379.6) 성전에서 다음 날 예배는 예수에게 비교적 마음에 들었고, 전날의 불쾌한 기억을 많이 지워버렸다. 다음 날 아침, 어린 나사로는 예수의 손을 잡았고, 그들은 예루살렘과 그 둘레를 체계적으로 뒤지기 시작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예수는 성전 가까이에 강의와 질문이 있는 회의가 진행되는 여러 장소를 발견했다. 막아놓은 베일 뒤에 정말로 무엇이 있는가 궁금해서 구경하려고 지성소(至聖所)에 몇 번 들린 것 외에, 예수는 대부분의 시간을 성전 근처에서, 이 강의하는 회의에서 보냈다.
125:2.6 (1380.1) 유월절 주간 내내, 예수는 새 계명의 아들들 사이에서 자기 자리를 지켰고, 이것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시민 자격을 갖추지 않은 모든 사람을 따로 갈라놓는 난간 바깥에 앉아 있어야 했음을 의미했다. 이렇게 나이 어린 것을 의식(意識)하게 되었으니까, 그는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떠오르는 여러 질문을 던지기를 삼갔다. 적어도 유월절 축하가 끝나고, 새로이 성화 예식을 거친 소년들에게 지워진 제한이 풀릴 때까지, 자제하였다.
125:2.7 (1380.2) 유월절 주간의 수요일에, 예수는 나사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서 베다니에서 밤을 지내도록 허락을 받았다. 이날 저녁에, 나사로ㆍ마르다ㆍ마리아는 예수가 현세의 것과 영원한 것, 인간다운 것과 신다운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고, 그날 밤부터 계속 그들 세 사람 모두, 마치 예수가 오빠나 형인 것처럼 그를 좋아했다.
125:2.8 (1380.3) 주말이 되자 예수는 나사로를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 나사로가 성전 토론이 있는 바깥 구역까지도 들어갈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사로는 바깥 마당에서 진행된 공개 담화에 얼마큼 참석했다. 그는 예수와 나이가 같았지만, 예루살렘의 소년들은 만 열세 살이 될 때까지, 계명의 아들의 성화(聖化) 예식에 참석이 허락되는 일이 드물었다.
125:2.9 (1380.4) 유월절 주간에, 예수의 부모는 여러 번 그가 혼자 따로 앉아서, 어린 나이에 머리를 두 손에 괴고 깊이 생각하는 것을 발견하곤 했다. 그들은 예수가 이처럼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겪고 있는 체험 때문에 머리가 얼마나 혼란스럽고 정신적으로 고민하는가 몰랐기 때문에, 몹시 당황했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몰랐다. 유월절 주간의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것이 반가웠고, 이상하게 행동하는 아들을 안전하게 나사렛으로 데리고 돌아가기를 바랐다.
125:2.10 (1380.5) 하루하루 예수는 문제들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 주말까지, 그는 태도를 많이 조정했다. 그러나 나사렛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을 때, 그의 젊은 머리 속은 아직도 착잡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고, 해답을 찾지 못한 수많은 물음과 풀리지 않은 문제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125:2.11 (1380.6)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에, 나사렛의 선생을 동반하여, 예수가 열 다섯 살이 될 때 돌아와서 최고로 이름난 랍비 학교 중 하나에서 오랜 공부 과정을 시작하도록 분명히 주선해 놓았다. 학교를 찾아볼 때 예수는 부모와 선생을 따라갔지만, 그들이 말하고 주선한 모든 것에 그가 얼마나 무관심한가 지켜보고 그들 모두가 걱정하였다. 예루살렘 방문에 대한 그의 반응을 보고 마리아는 마음이 무척 상했고, 요셉은 소년의 이상한 논평과 별다른 행동에 몹시 당황했다.
125:2.12 (1380.7) 어쨌든 유월절 주간은 예수의 생애에서 큰 사건이었다. 그는 제 또래의 소년들, 즉 성화 예식에 참석한 동료 후보자 수십 명을 만나는 기회를 누렸고, 로마의 극서(極西) 지방 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ㆍ투르키스탄ㆍ파르티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 배우려고 그러한 접촉을 이용했다. 그는 에집트에서, 그리고 팔레스타인 근방의 다른 지역에서 소년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이미 상당히 알고 있었다. 이때 예루살렘에는 젊은이가 수천 명 와 있었는데, 나사렛 소년은 150명이 넘는 사람들을 몸소 만나고, 얼마큼 광범위하게 회견하였다. 그는 극동과 아주 먼 서쪽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특별히 관심이 있었다. 이렇게 접촉한 결과로서, 소년은 여러 집단의 동료 인간들이 생계를 잇기 위하여 어떻게 수고하는가 배우려는 목적으로, 세계를 돌아다닐 소망을 품기 시작했다.
125:3.1 (1381.1) 유월절 축제가 끝난 다음 주, 첫째 날 늦은 아침에, 성전 지역에서 나사렛 일행이 모이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대로 했고,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여행길을 떠났다. 예수는 토론하는 것을 들으려고 성전으로 들어가 있었고, 한편 부모는 동료 여행자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당장에 그 일행은 떠나려고 준비했고, 남자들이 한 무리를 이루고 여자들은 다른 무리를 지어서 갔는데, 이것이 예루살렘 축제에 다녀오는 여행에 그들의 관습이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예수는 어머니와 여자들의 일행에 섞여 있었다. 이제 성화 의식을 마친 젊은이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아버지와 남자들 일행 속에 끼어 나사렛까지 여행길을 간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사렛 무리가 베다니를 향하여 가는 동안에, 예수는 성전에서, 천사들에 관한 토론에 완전히 몰두해 있었고, 부모의 출발 시간이 지난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정오에 성전 회의가 끝날 때까지, 그는 자기가 뒤에 처져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125:3.2 (1381.2) 마리아는 예수가 남자들과 함께 여행한다고 짐작했고, 한편 요셉은 그가 마리아의 당나귀를 이끌고 여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으므로 여자들과 함께 여행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사렛 여행객들은 예수가 없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예리고에 다다라서 그날 밤에 묵으려고 준비할 때까지, 그들은 예수가 자리에 없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예리고에 마지막으로 도착한 일행에게 물어 보고, 아무도 아들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 그들은 잠을 못 이루며 밤을 지샜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머리 속에서 곰곰이 살펴보고, 유월절 주간에 일어났던 여러 사건에 대한 그의 별다른 반응을 돌이켜보며,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에 그 무리에 그가 있도록 처리하지 않은 것을 가볍게 서로의 탓으로 돌렸다.
125:4.1 (1381.3) 그동안, 오후 내내 예수는 성전에 남아서 토론을 들었고, 유월절 주간의 큰 군중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전보다 조용하고 예의 바른 분위기를 즐겼다. 오후 토론 중 어디에도 예수는 끼지 않았고, 이 토론이 끝났을 때 베다니를 향해 갔으며, 시몬의 가족이 저녁을 먹으려고 준비할 때 막 도착했다. 세 아이는 예수를 만나게 되어 기뻐서 어쩔 줄 몰랐고, 그날 밤에 그는 시몬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날 저녁에 그는 말이 거의 없었고, 명상하느라고 상당한 시간을 혼자 뜰에서 보냈다.
125:4.2 (1381.4) 이튿날 아침 일찍 예수는 일어나서 성전으로 갔다. 올리브 산마루에서 멈추었고, 눈에 들어온 광경―전통에 묶여 있고, 로마 군단의 감시 하에 사는 영적으로 궁핍한 민족―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오전 초반에, 토론에 끼려고 마음먹고 그는 성전에 나타났다. 그동안에, 요셉과 마리아도 또한 예루살렘까지 온 길을 되찾아 갈 생각으로 새벽에 동이 트자 일어났다. 먼저 그들은 유월절 주간에 한 가족으로서 묵었던 그 친척의 집으로 서둘러 갔지만, 물어 본 결과는 아무도 예수를 구경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하루 종일 찾다가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하고, 그들은 그날 밤 그 친척의 집으로 돌아갔다.
125:4.3 (1382.1) 둘째 회의에서 예수는 감히 질문을 던졌는데, 대단히 놀라운 방법으로 성전 토론에 끼었으나 어린 나이에 맞게 반드시 예의를 차렸다. 어떤 때는, 그의 날카로운 물음이 학식 있는 유대 율법 선생들에게 얼마큼 당황스러운 것이었지만, 알려고 하는 분명한 욕구와 함께 그렇게 순수한 공평 정신을 보였기 때문에, 대다수의 성전 선생들은 세심한 배려로 그를 대우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방인의 마당 바깥에서 거닐다가, 신성하다고 소문난 성전 금지 구역에 멋모르고 발을 들인, 술 취한 이방인을 사형(死刑)에 처하는 것이 타당한가 감히 물었을 때, 너그럽지 못한 어느 선생이 소년의 말 속에 담긴 비난에 참을성을 잃고, 그를 노려보면서 나이가 얼마인가 물었다. 예수는 대답했다, “열 세 살에서 넉 달하고 며칠 모자라나이다.” 이제 성난 선생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너는 계명의 아들이 될 나이가 아니 되었은즉, 어찌하여 여기 있는고?” 그가 유월절에 성화 의식을 거쳤고 나사렛 학교를 졸업한 학생이라고 설명했을 때, 선생들은 한 목소리로 비웃으며 대답했다: “짐작할 만하이. 그가 나사렛에서 왔구려.” 그러나 예수가 엄밀하게 말해서 열 세 살이 아니고 열 두 살인데, 나사렛 회당의 책임자들이 그를 졸업시켰다면 예수는 잘못이 없다고 사회자가 주장했다. 그를 훼방한 몇 사람이 일어서서 떠났는데도, 소년이 성전 토론의 생도로서 방해받지 않고 계속해도 좋다는 판결이 내렸다.
125:4.4 (1382.2) 이날 성전에서 둘째 날이 끝났을 때, 그날 밤을 지내려고 그는 다시 베다니로 돌아갔다. 명상하고 기도하려고 다시 뜰로 갔다. 그의 머리가 중대한 문제들을 깊이 생각하는 데 골똘한 것이 분명했다.
125:5.1 (1382.3) 예수가 성전에서 서기관과 선생들과 함께 보낸 셋째 날에는 많은 구경꾼이 모여들었다. 갈릴리로부터 온 이 소년의 소문을 듣고서, 이들은 소년이 율법을 아는 현자들을 혼란에 빠지게 만드는 것을 구경하려고 왔다. 시몬도 그 소년이 무슨 속셈이 있는가 보려고 베다니로부터 내려왔다. 이날 하루 종일 요셉과 마리아는 계속 걱정하며 예수를 찾았는데, 성전으로 몇 번 들어갔어도, 결코 토론하는 몇 집단을 샅샅이 훑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황홀한 그의 목소리를 거의 들을 만한 거리에 한 번 왔다.
125:5.2 (1382.4) 그날이 저물기 전에, 성전의 주요 토론 집단의 눈길은 온통, 예수가 내놓은 여러 질문에 집중되어 있었다. 여러 질문 가운데 다음이 있었다.
125:5.3 (1382.5) 1. 베일 뒤, 지성소(至聖所)에 정말로 무엇이 있는가?
125:5.4 (1382.6) 2. 어째서 이스라엘에서 어머니들이 성전에서 예배하는 남자들과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가?
125:5.5 (1382.7) 3.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신의 은총을 얻으려고 이 모든 동물을 도살하다니 무엇 때문인가―모세의 가르침을 오해하고 있는가?
125:5.6 (1382.8) 4. 성전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예배하는 곳이므로 속세의 물물 교환과 상업(商業)에 종사하는 자들이 자리에 있도록 두는 것이 이에 합당한가?
125:5.7 (1382.9) 5. 올 것이라 기대하는 메시아가 다윗의 왕좌에 앉을 현세의 왕이 될 것인가, 아니면 영적인 나라를 세우는 데 생명의 빛으로서 활동할 것인가?
125:5.8 (1383.1) 그날 하루 종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이 여러 질문에 놀라워했고, 시몬보다 더 크게 놀란 사람은 없었다. 네 시간이 넘도록, 이 나사렛 소년은 생각을 자극하고 마음 속을 살펴보는 질문으로 이 유대인 선생들에게 캐물었다. 그는 연장자들의 말에 거의 논평하지 않았다. 묻고자 하는 물음으로 그는 가르침을 전했다. 질문을 알맞고 미묘하게 표현함으로, 한꺼번에 그들의 가르침에 도전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제시하곤 했다. 질문하는 방법에 슬기와 유머가 매력 있게 섞였으며, 이것은 그의 어린 나이를 얼마큼 못마땅하게 보는 사람들조차 그를 귀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파고드는 이 여러 질문을 던지면서 그는 반드시 더할 나위 없이 공정(公正)하였고 사람을 배려하였다. 성전에서 별일이 많았던 이날 오후에, 그는 상대편의 약점을 부당하게 이용하기를 꺼려함을 보였고, 이것은 후일에 그의 대중 봉사 전체에 나타난 특징이었다. 소년으로서, 그리고 나중에 어른으로서, 그는 단지 동료들에게 논리적 승리를 얻으려고 논쟁에 이기려는, 자기 중심의 욕구에 전혀 매이지 않는 듯하였고, 오직 한 가지에 최고의 관심을 가졌으니, 곧 영구한 진리를 선포하고 그렇게 영원한 하나님을 더욱 충만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125:5.9 (1383.2) 그날이 저물었을 때, 시몬과 예수는 베다니로 되돌아갔다. 길을 가는 동안 대체로 그 어른과 소년은 조용했다. 다시 올리브 산마루에서 멈추었지만, 도시와 성전을 보면서 예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고요히 예배하는 마음으로 머리를 숙였을 뿐이다.
125:5.10 (1383.3) 베다니에서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 그는 즐거운 모임에 끼는 것을 다시 사양했다. 그러나 그 대신 뜰로 나가서, 거기서 밤늦게 남아 있으면서, 일생에 할 일의 문제를 해결하는 어떤 분명한 계획을 생각해내고, 영적으로 눈먼 동포(同胞)에게 하늘 아버지에 대하여 전보다 더 아름다운 개념을 계시하고, 그렇게 함으로 율법과 의식과 예식, 또 곰팡이 냄새 나는 전통의 끔찍한 사슬에서 그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어떻게 수고하는 것이 최선일가 결정하려고 헛되이 노력했다. 그러나 진리를 찾는 소년에게 밝은 빛은 다가오지 않았다.
125:6.1 (1383.4) 예수는 이상하게도 땅에 있는 부모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 때에도, 부모가 그때면 집에 거의 다다랐음이 틀림없다고 나사로의 어머니가 한 마디 던졌을 때에도, 그가 뒤에 처진 것 때문에 부모가 얼마큼 걱정하리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였다.
125:6.2 (1383.5) 다시 그는 성전으로 길을 떠났지만, 올리브 산마루에서 명상하려고 멈추지 않았다. 아침 토론의 과정에서 많은 시간이 율법과 선지자에 할애되었고, 선생들은 그리스어 뿐 아니라 히브리어로도 예수가 성서를 훤히 아는 것에 놀랐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진리를 아는 것보다 나이에 더 놀랐다.
125:6.3 (1383.6) 오후의 회의에서, 기도(祈禱)의 목적이 무엇인가 물은 데 대하여 그들이 대답을 시작하자마자, 사회자가 소년에게 앞으로 나와서, 자기 옆에 앉아서, 기도와 예배에 관하여 자신의 견해를 펴라고 지시했다.
125:6.4 (1383.7) 전날 저녁에, 예수의 부모는 율법 해설자들과 아주 재치 있게 싸운 이 이상한 소년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 소년이 그들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예수가 엘리자벳과 요한을 만나러 거기로 갔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사가리아의 집을 향하여 길을 떠나려고 거의 마음을 먹었다. 사가리아가 혹시 성전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유다 시로 가는 길에 거기에 들렸다. 성전의 마당을 통해서 걷고 있을 때, 잃어버린 소년의 목소리를 알아보고 성전의 선생들 사이에 그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이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을까 상상해 보라.
125:6.5 (1384.1) 요셉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마리아는 놀란 부모에게 이제 인사하려고 서 있는 소년에게 달려가서, 오랫동안 두려움과 걱정에 싸여 참고 있었던 말을 뱉었다. “아들아, 어째서 너는 우리를 이렇게 대하였느냐? 슬픔에 빠져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은 지가 이제 사흘이 넘었느니라. 우리를 버리다니, 너는 무엇에 홀렸느냐?” 긴장된 순간이었다. 예수가 무슨 말을 하려는가 들으려고 모든 눈이 그에게 쏠렸다. 아버지는 나무라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25:6.6 (1384.2) 예수가 젊은이로 생각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이로서 정규 수업을 마쳤고 율법의 아들로서 인정받았으며, 이스라엘의 시민으로서 성화 의식을 거쳤다. 그래도 어머니는 모여든 모든 사람 앞에서, 젊은 나이에 가장 심각하고 숭고한 노력을 기울이는 순간에 가볍지 않게 그를 꾸짖었다. 이렇게 하여 진리의 선생으로서, 올바름을 외치는 자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하는 성품을 드러내는 자로서 활동하라고 그에게 일찍이 주어진 가장 큰 기회 중 하나에 명예롭지 않은 종말을 가져왔다.
125:6.7 (1384.3) 그러나 소년은 그 경우에도 만만치 않았다. 함께 이 상황을 구성한 모든 요소를 마땅히 고려한다면, 너희는 어머니의 뜻하지 않은 꾸지람을 듣고서 소년이 대답한 말이 얼마나 슬기로웠는가 헤아릴 준비가 잘 되었을 것이다. 잠깐 생각한 뒤에, 예수는 어머니에게 대답하였다. “어찌하여 어머니는 나를 그토록 오래 찾으셨나이까? 내가 아버지의 일을 보살필 때가 왔사오니, 어머니는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나를 찾기를 기대하지 않으시나이까?”
125:6.8 (1384.4) 모두가 소년의 말하는 태도에 놀랐다. 그들은 부모와 예수만 세워두고 모두 조용히 물러났다. 젊은이는 즉시 모두 세 사람의 어색한 분위기를 덜어주며 조용히 말했다, “자, 부모님, 아무도 각자가 최선이라고 생각한 일밖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나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이러한 것들을 예비하셨나이다. 집으로 떠납시다.”
125:6.9 (1384.5) 말없이 그들은 떠났고, 그날 밤 예리고에 다다랐다. 꼭 한 번 멈추었는데, 올리브 산마루에서였다. 그때 소년은 지팡이를 높이 쳐들고, 벅찬 감정이 끓어올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거기에 사는 사람들아, 너희는 무슨 노예인가―로마의 멍에에 굴종하고, 자신의 전통에 희생된 자여―그러나 나는 저 멀리 성전을 깨끗이 하고 이 사슬에서 내 민족을 구하러 돌아오리라!”
125:6.10 (1384.6) 나사렛까지 사흘 여행 길에, 예수는 거의 말이 없었다. 부모도 그 앞에서 입을 많이 열지 않았다. 그들은 맏아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서 참으로 어찌할 줄 몰랐다. 그러나 그 뜻을 넉넉히 알아듣지는 못했어도, 그들은 가슴 속에 그의 말을 소중히 간직했다.
125:6.11 (1384.7) 집에 도착하자, 그는 부모에게 간단한 말씀을 드렸고, 이것은 부모를 사랑한다고 그들을 안심시키고, 그의 행동 때문에 부모에게 걱정을 끼쳐 드릴 기회가 다시 올까 근심할 필요가 없음을 암시하였다. 이 중요한 선언을 이렇게 맺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 하지만, 나는 땅에 있는 아버지에게도 또한 복종하리이다. 나는 때를 기다리겠나이다.”
125:6.12 (1384.8) 머리 속에서, 그가 어떤 방향으로 생각하라고 지시하거나 땅에서 그의 할 일을 계획하려는 부모의 노력, 의도는 좋아도 그릇 인도된 노력을 여러 번 거절했지만, 그래도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그의 헌신적 마음과 일치되는 모든 면에서, 그는 땅에 있는 아버지가 바라는 것과 육체를 입은 가족의 관습을 아주 훌륭하게 따랐다. 찬성할 수 없을 때에도 그는 따르려고 최선을 다하려 했다. 가족에게 충실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책임을 다하는 그의 헌신적 태도를 그는 솜씨 있게 조절하였다.
125:6.13 (1385.1) 요셉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체험을 돌이켜보면서 위로를 얻었고, 결국은 올리브산에서 그가 입 밖에 낸 말씀을 아들이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될 메시아의 사명을 예언하는 것으로 보았다. 마리아는 애국과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길로 그의 생각에 틀을 잡아주려고 새로이 힘을 얻어 일하기 시작했고, 자기 동생, 예수가 가장 좋아하는 삼촌의 도움을 청했다. 예수의 어머니는 온갖 다른 방법으로, 다윗의 왕좌를 회복하고, 정치적으로 구속하는 이방인의 멍에를 영원히 떨쳐 버릴 사람들 중에서 맏아들이 지도권을 쥐도록 준비시키는 과업에 팔을 걷어붙였다.
126:0.1 (1386.1) 예수가 땅에서 일생 동안에 겪은 모든 체험 가운데, 열네 살 때와 열다섯 살 때가 가장 어려웠던 해였다. 자기의 신성과 운명을 비로소 깨달은 뒤에, 그에게 깃드는 조절자와 상당히 많이 교통하기 전에, 이 두 해는 유란시아에서 파란 많았던 일생에서 가장 시련이 많은 해였다. 큰 시험, 참 유혹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은 이 2년 동안이었다. 어떤 젊은이도 청년기의 혼란과 적응하는 문제들을 거치면서, 예수가 어린 시절부터 청년이 되는 과도기에 겪은 것보다 더 결정적인 시험을 겪지는 않았다.
126:0.2 (1386.2) 예수가 젊은이로 성장하는 이 중요한 기간은 예루살렘 방문을 마치고 그가 나사렛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되었다. 아들을 다시 찾아왔다는 것, 예수가 집으로 돌아와서 의무에 충실한 아들이 되었다는 것―언제라도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그의 장래를 위하여 세운 계획에 그가 이제부터 더 반응이 있으리라 생각하고서 마리아는 처음에 행복했다. 그러나 물질적 망상, 그리고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이 가족이 지닌 긍지(矜持)의 밝은 빛을 오래 즐기도록 예정되지는 않았다. 금방 그 여자는 전보다 더 철저하게 미몽에서 깨어나야 했다. 소년은 점점 더 아버지와 함께 다녔고, 문제를 가지고 어머니에게 오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으며, 한편 어째서 이 세상 일, 그리고 그와 아버지 일의 관계를 자주 번갈아서 숙고하는지 부모는 갈수록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참으로 사랑했다.
126:0.3 (1386.3) 나이가 들면서 예수는 유대 민족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졌지만, 해가 지남에 따라서, 머리 속에서 아버지의 성전에 정치적으로 임명된 사제들이 있다는 것에 차츰 의분(義憤)이 커졌다. 예수는 진지한 바리새인과 정직한 서기관들을 크게 존경했지만, 위선적인 바리새인과 정직하지 않은 신학자들을 크게 경멸하였다. 성실하지 않은 모든 종교 지도자를 경시하였다. 이스라엘의 지도층을 자세히 훑어보았을 때, 자기가 유대인이 기대하는 메시아가 되는 가능성을 좋게 보려는 유혹을 가끔 받았지만, 결코 그러한 유혹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126:0.4 (1386.4) 예루살렘에서 성전의 현자(賢者)들 사이에 그가 공훈을 세운 이야기는 온 나사렛, 특히 회당 학교에서 예전에 그를 가르치던 선생들에게 흐뭇한 일이었다. 한동안, 사람마다 그를 칭찬하는 말이 입에서 그치지 않았다. 온 마을이 그가 어릴 때 보인 지혜와 칭찬할 만한 행동을 하나하나 열거하였고, 이스라엘에서 그가 큰 지도자가 될 운명을 가졌다, 마침내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정말로 위대한 선생이 나올 것이라 예언했다. 그리고 그가 열다섯 살이 되어, 안식일에 회당에서 성서를 정기적으로 읽도록 허락될 때를 모두가 기대했다.
126:1.1 (1387.1) 이 해는 달력으로 열네 살이 되는 생일을 맞는 해이다. 그는 멍에를 잘 만드는 사람이 되었고, 캔바스와 가죽 다루는 일을 잘 했다. 급속히, 그는 또한 솜씨 있는 목수이자 가구공(家具工)이 되고 있었다. 이 해 여름에 그는 기도하고 명상하려고 나사렛 북서쪽에 있는 언덕 꼭대기까지 자주 다녔다. 그는 땅에서 자신을 수여하는 일의 성질을 차츰 더욱 자각하게 되었다.
126:1.2 (1387.2) 이 언덕은, 1백 년 조금 더 전에, “바알의 산당”이었고, 이제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성자 시므온의 무덤 자리였다. 이 시므온의 언덕 꼭대기로부터 예수는 나사렛과 둘러싼 시골을 내려다보았다. 메기도를 바라보고, 에집트 군대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큰 승리를 거두고, 후일에 어떻게 또 다른 그런 군대가 유다 왕 요시아를 물리쳤는가 하는 이야기를 회상하곤 했다. 멀지 않은 곳에, 타나크를 바라볼 수 있었고, 거기서 드보라와 바락이 시세라를 물리쳤다. 멀리 도탄산을 볼 수 있었는데, 거기서 요셉의 형제들이 그를 에집트인의 노예로 팔았다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에발과 게리짐으로 눈을 돌리고 아브라함ㆍ야곱ㆍ아비멜렉의 전통을 스스로 열거하곤 했다. 이처럼 머리 속에서 아버지 요셉의 민족 역사와 전통에 있는 사건들을 돌이켜보고 곰곰이 살펴보았다.
126:1.3 (1387.3) 그는 회당 선생들 밑에서 상급 독서 과목을 줄곧 공부해 나갔고, 또한 동생들이 적당한 나이에 이르자 그들의 가정 교육을 계속했다.
126:1.4 (1387.4) 그가 다음 해 8월에 열다섯이 될 때 예루살렘으로 갈 계획이 세워졌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오랜 공부 과정에 드는 학비를 물려고, 이 해 일찍부터 요셉은 나사렛과 가버나움에 있는 재산으로부터 나오는 소득을 따로 떼어 놓도록 주선하였다.
126:1.5 (1387.5) 이 해가 시작되자, 요셉과 마리아는 맏아들의 운명에 관하여 자주 의심을 품었다. 그는 정말로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지만, 몹시 이해하기 힘들고 헤아리기 어려웠고, 게다가 특별하거나 기적 같은 일은 하나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자랑스러운 어머니는 수십 번 숨을 죽이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서서, 아들이 어떤 초인간이나 기적 같은 일을 해내는가 보려고 기대했지만, 언제나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 어머니는 몹시 실망하였다. 이 모두가 어머니를 낙심하게 하고, 아니 마음 아프게 하였다. 선지자, 그리고 약속된 운명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부름받은 사실을 증거하고, 기적을 행하고 놀라운 일을 함으로 신으로부터 받은 권한을 증명한다고 그 시절의 경건한 사람들은 참으로 믿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앞날을 깊이 생각하면서 부모의 혼란이 꾸준히 늘어났다.
126:1.6 (1387.6) 나사렛 가족의 나아진 경제 사정은 집 근처에서 여러 면으로, 특히 반반한 흰 판자들의 수가 늘어난 데서 나타났는데, 이것은 글 쓰는 판자로 쓰였고, 목탄으로 글을 썼다. 예수에게 또한 음악 수업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그는 하프 켜기를 몹시 좋아했다.
126:1.7 (1387.7) 이 해 내내, 예수는 “사람과 하나님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고 참으로 말할 수 있다. 가족의 전망은 좋아 보였고, 앞날은 밝았다.
126:2.1 (1388.1) 9월 25일, 운명의 그 화요일까지 만사가 순조로웠다. 이날 세포리스에서 달려 온 한 사람이, 요셉이 총독의 저택에서 일하다가, 기중기가 떨어져 몹시 다쳤다는 비극의 소식을 이 나사렛 가정으로 가져왔다. 세포리스에서 온 사자는 요셉의 집으로 가던 길에 작업장에 멈추어 예수에게 아버지의 사고를 알렸고, 그들은 함께 집으로 가서 슬픈 소식을 마리아에게 알렸다. 예수는 즉시 아버지에게 가고 싶었지만, 마리아는 자기가 남편 곁에 서둘러 가야 한다는 것 외에 아무 말에도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때 열 살인 야고보가 세포리스까지 자기를 따라가고 한편 예수에게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동생들과 함께 집에 남아 있으라고 지시했는데, 왜냐하면 요셉이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가 도착하기 전에, 부상(負傷) 때문에 죽었다. 그들은 요셉을 나사렛으로 모셔 왔고, 다음 날 그는 선조들과 함께 묻혔다.
126:2.2 (1388.2) 전망이 좋고 앞날이 밝아 보였던 바로 그때, 겉보기에는 모진 손이 나사렛 가족의 머리를 내려쳤다. 이 집안의 일은 쑥밭이 되었으며, 예수와 그의 장래 교육을 위한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 이 소년 목수는 이제 막 만으로 열네 살이 되었고, 땅에서 육체를 입고서 신의 성품을 드러내라는, 하늘 아버지의 명령을 수행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과부가 된 어머니와 일곱 동생과 태어날 아기까지 보살필 책임을 젊은 인간 성품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나사렛 젊은이는 이제, 이렇게 갑자기 아버지를 여읜 가족의 유일한 기둥이자 위로가 되었다. 한 인간 가족의 머리가 되고 동생들에게 가장(家長)이 되고 어머니를 부양하고 보호하며, 아버지의 집, 즉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가 알게 된 유일한 가정의 보호자로서 활동하는 데 따르는 책임은 무겁지만, 상당히 교육이 되고 훈련이 된다. 이렇게 이 책임을 아주 일찍 맡도록 이 운명의 젊은이를 강요할 자연스러운 사건들이 유란시아에서 일어나는 것이 허락되었다.
126:2.3 (1388.3) 예수는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끝까지 충실히 수행해 나갔다. 적어도, 일생에서 한 가지 큰 문제이며 예상했던 곤경이 비극으로 해결되었다―이제는 사람들이 그가 랍비들 밑에서 공부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기대하지 않을 것이었다. 예수가 “누구의 제자도 되지 않았다”하는 것은 언제나 참말이었다. 가장 낮은 어린아이들로부터도 언제나 기꺼이 배우려 했지만, 그는 결코 인간적 근원으로부터 진리를 가르칠 권한을 얻지 않았다.
126:2.4 (1388.4) 아직까지, 태어나기 전에 가브리엘이 어머니를 방문한 사실에 대하여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대중에게 봉사하는 일이 시작될 때, 세례받은 날에, 그는 이 말을 요한으로부터 들었을 뿐이다.
126:2.5 (1388.5) 해가 지남에 따라서, 나사렛의 이 젊은 목수는 갈수록 모든 사회 제도와 종교 관습을 변함없는 이 방법으로 시험하게 되었다: 그것이 인간의 혼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가? 하나님을 사람에게 가까이 오시게 하는가? 사람을 하나님께로 데려오는가? 이 젊은이가 인생에서 오락 및 사회적 면을 온통 소홀히 하지는 않았어도, 가족을 보살피는 것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땅에서 행하려고 준비하는 것, 꼭 이 두 가지 목적에 그는 더욱 시간과 에너지를 바쳤다.
126:2.6 (1389.1) 이 해에는 겨울 저녁에 예수가 하프 켜는 것을 듣고, (소년이 솜씨 좋은 이야기꾼이었으니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그리스 성서 읽는 것을 들으려고 이웃 사람들이 들리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126:2.7 (1389.2) 죽을 때에 요셉이 어지간히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정의 경제적인 일은 계속해서 썩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예수는 일찍부터 날카로운 사업 판단력과 재무의 지혜를 가졌음을 보였다.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썼지만 검소했고, 저축하고 있었지만 관대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현명하고 유능하게 관리하는 사람인 것이 판명되었다.
126:2.8 (1389.3) 예수와 나사렛 이웃들이 이 가정을 즐겁게 만들려고 힘이 자라는 대로 무슨 일이든 했어도 마리아와 아이들까지 슬픔의 그림자로 덮여 있었다. 요셉이 사라진 것이다. 요셉은 특별한 남편이요 아버지였고, 모두 그가 없어 서운해하였다. 그에게 말을 하거나, 마지막 축복의 말씀도 들을 수 있기 전에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니 더군다나 비극인 듯하였다.
126:3.1 (1389.4) 열다섯 살 되던 이 해 중반이 되어서―유대인의 해가 아니라, 20세기 달력에 따라 시간을 계산하건대―예수는 가족의 재정을 잘 운영하고 있었다. 이 해가 가기 전에 저축은 거의 사라졌고, 요셉과 이웃 야곱이 공동으로 소유했던 나사렛 집들 중에 하나를 처분해야 할 필요에 부딪쳤다.
126:3.2 (1389.5) 서기 9년, 4월 17일 수요일 저녁에, 그 집안의 아기 룻이 태어났고, 예수는 힘이 자라는 데까지, 벅차고 특별히 슬픈 이 시련 기간에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를 위로하고 돌보느라고 애썼다. 거의 20년 동안 (대중 봉사를 시작할 때까지) 예수가 어린 룻을 돌본 것보다 더 자기 딸을 귀하고 충실하게 사랑하고 기른 아버지는 없었다. 가족의 모든 다른 사람에게 그는 똑같이 훌륭한 아버지가 되었다.
126:3.3 (1389.6) 이 해에, 예수는 나중에 사도들에게 가르친 기도문(祈禱文)을 처음으로 지었는데, 이것은 “주의 기도”로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가족 제단이 진화된 것이었고, 그들은 여러 형태의 찬송과 몇 가지 형식의 기도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자기가 평소 즐겨 기도하는 것처럼―예수는 큰 아이들에게 각자 자신의 표현 방법으로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애썼지만, 그들은 그 생각을 헤아릴 수 없었고, 변함없이 그들이 외운 형식의 기도로 돌아가곤 했다. 나이 든 동생들에게 자기 나름대로 기도하도록 자극하는 노력으로, 제시하는 구절을 가지고 예수는 이들을 인도하려고 애쓰곤 했다. 뜻하지 않았는데, 예수가 기도를 어떻게 하는가 제시하는 이 구절로부터 대체로 만들어진 형태의 기도를 그들이 곧 모두 사용하게 되었다.
126:3.4 (1389.7) 마침내, 예수는 가족의 각 식구가 즉석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리게 하려는 생각을 버렸다. 10월 어느 날 저녁에, 낮은 돌 식탁 위에 있는 작고 납작한 등불 옆에 앉아서, 가로 세로가 45 센티미터쯤 되는 한 조각의 반반한 백향목(柏香木) 판자 위에, 목탄 조각으로 기도문을 적었고, 그때부터 계속 이것은 표준 가족 기도가 되었다.
126:3.5 (1389.8) 이 해에 예수는 혼란스러운 생각으로 많이 고민하였다. 가족에 대한 책임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아버지의 일을 돌보라”는 지시에 응답하여 무슨 계획이라도 즉시 실행하려던 어떤 생각도 사실상 거의 없애버렸다. 땅에서 아버지의 가족을 지키는 것이 모든 다른 의무보다 우선해야 한다,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첫째 의무가 되어야 한다고 예수는 옳게 추리하였다.
126:3.6 (1390.1) 이 해가 지나는 동안에 예수는 이른바 “에녹서”에서 한 구절을 찾아냈는데, 이에 영향을 받아 나중에 유란시아 수여 사명을 위하여 “사람의 아들”이라는 용어를 호칭으로서 채택하게 되었다. 그는 유대인의 메시아 개념을 철저히 생각해 보았고 그런 메시아가 되지 않으리라 굳게 확신했다. 아버지의 민족을 몹시 돕고 싶어했지만, 외국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타도하기 위하여 자신이 유대인 군대(軍隊)를 이끌 것이라고는 결코 예상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결코 예루살렘에서 다윗의 왕좌에 앉지 않을 것을 알았다. 오직 유대 민족에게 영적 구원자나 도덕적 선생이 되는 것이 그의 사명이라 믿지도 않았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도, 일생의 사명은, 히브리 성서에 나타난 강렬한 소망과 메시아가 온다는 예언을 성취하는 것일 수 없었다. 적어도 유대인들이 이 선지자들의 예언을 이해하는 것과 달랐다. 마찬가지로, 그는 결코 선지자 다니엘이 묘사했던 사람의 아들로서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126:3.7 (1390.2) 그러나 세상의 선생으로 나설 때가 되었을 때, 자기를 무엇이라고 부를까? 그의 사명에 대하여 무엇을 주장해야 할까? 그의 가르침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를 무슨 이름으로 부를 것인가?
126:3.8 (1390.3) 이 모든 문제를 머리 속에서 이모저모 살피는 동안, 그는 나사렛의 회당 도서관에서, 그가 공부하고 있던 묵시록들 사이에서 “에녹서”라고 부르는 이 필사본을 찾아냈다. 옛날에 살았던 에녹이 그 책을 쓰지 않았음을 확실히 알았지만, 그 책은 그에게 매우 흥미를 자아낸 것이 드러났고, 그는 여러 번 다시 읽었다. 특별히 감명을 준 한 구절이 있었으니,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 용어가 나타난 구절이다. 이른바 이 에녹서의 저자(著者)는 이 사람의 아들에 대하여 더 이야기하고, 그가 땅에서 할 일을 적었는데, 인류에게 구원을 주려고 이 땅에 내려오기 전에, 이 사람의 아들은 그의 아버지, 만물의 아버지와 함께 하늘의 영광이 가득한 궁정을 거닐었다, 빈곤한 필사자들에게 구원을 선포하러 땅으로 내려오려고, 그가 이 모든 위엄과 영광을 등지었다고 설명했다. 이 구절들을 읽는 동안에 (이 가르침과 섞이게 된 동부 신비주의 가운데 많은 것이 그릇됨을 잘 알았다), 그는 마음 속에서 응답했고, 머리 속에서, 히브리 성서의 모든 메시아 예언 중에, 그리고 유대인 구원자에 대한 모든 이론 가운데 아무것도, 겨우 부분적으로 인정된 이 에녹서에 감춰진 바로 이 이야기처럼 그토록 진리에 가깝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때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하는 칭호로서 “사람의 아들”을 채택하기로 결심했다. 나중에 대중을 위하여 일을 시작했을 때, 그는 그대로 했다. 예수는 어김없이 진리를 알아보는 능력을 가졌고, 겉보기에 무슨 근원에서 쏟아져 나오든지, 조금도 서슴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였다.
126:3.9 (1390.4) 이때가 되어서, 앞으로 세상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많은 의문을 하나하나 정리하였지만, 그는 이 문제들에 관해서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가 유대인 메시아가 된다는 생각에 아직도 끈질기게 집착하였다.
126:3.10 (1390.5) 예수의 소년 시절에 이제 큰 혼란이 생겼다. 땅에서 이룰 사명, “아버지의 일을 돌보는 것,” 온 인류에게 아버지의 사랑하는 성품을 보여주는 것에 대하여 무엇인가 해답을 얻었으므로, 그는 민족의 구원자, 즉 유대인 선생이나 임금이 온다고 언급하는 성서의 여러 구절을 다시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이 예언들이 무슨 사건을 언급했는가? 그는 유대인이 아닌가? 혹은 유대인인가? 다윗의 집 출신인가, 아닌가? 어머니는 그렇다고 단언했고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고 판결을 내렸다. 예수는 자기가 그렇지 않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선지자들이 메시아의 본질과 사명을 혼동했는가?
126:3.11 (1391.1) 결국은, 어머니가 옳을 수도 있을까? 대부분의 문제에서 과거에 의견 차이가 생겼을 때 어머니가 옳았다. 그가 새로운 선생이고 메시아가 아니라면, 땅에서 사명을 수행하는 동안 예루살렘에 그러한 사람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그가 메시아를 알아볼 것인가? 더 나아가서, 이 유대인 메시아와 그는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가? 일생의 사명을 시작한 뒤에, 그는 가족과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 유대인 연방 및 종교와 가지는 관계는? 로마 제국과 그의 관계는? 이방인과 그 종교에 대해서는? 목수의 벤치에서 계속 일하며, 자신과 어머니와 배고픈 다른 여덟 동생의 입에 풀칠하기 위하여 힘들게 생활을 꾸려 나가면서, 이 중대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이 어린 갈릴리 사람은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살피고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126:3.12 (1391.2) 이 해가 저물기 전에, 마리아는 가족의 저축한 돈이 줄어드는 것을 깨달았다. 마리아는 비둘기 장사를 야고보에게 넘겼다. 곧 그들은 둘째 송아지를 샀고, 미리암의 도움을 입어 나사렛 이웃들에게 우유를 팔기 시작했다.
126:3.13 (1391.3) 예수가 깊이 생각에 잠기는 것, 기도하려고 언덕 꼭대기까지 자주 나들이하는 것, 그리고 때때로 예수가 떠올린 여러 가지 이상한 생각은 어머니를 속속들이 놀라게 했다. 어떤 때 어머니는 소년이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가, 결국은 그가 약속의 아이요, 어떤 면에서 다른 소년들과 다르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두려움을 가라앉히곤 했다.
126:3.14 (1391.4) 그러나 예수는 자기 생각을 모두 말하지 않는 것, 모든 생각을 세상에, 아니 자신의 어머니에게조차 내보이지 않는 것을 배웠다. 이 해부터 계속, 예수가 머리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밝히는 일이 꾸준히 줄어들었다. 다시 말해서, 보통 사람이 파악할 수 없는 일, 그로 하여금 특이하거나 보통 사람과 다르게 보이게 만들 것에 관하여 말하는 일이 적었다. 겉모습 어디를 보아도 그는 평범하고 전통적인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누군가가 그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기를 몹시 바랐다. 믿을 수 있고 비밀을 털어놓을 친구를 몹시 바랐지만, 그의 문제들은 너무 복잡하여 인간 친구들이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특별한 상황이 독특하여 그는 짐을 혼자 질 수밖에 없었다.
126:4.1 (1391.5) 만 열다섯 살이 되는 생일이 다가오자, 예수는 안식일에 회당 설교단에 정식으로 설 수 있었다. 연설할 사람들이 없을 때, 성서(聖書)를 읽어 달라고 전에 여러 번 요청을 받은 적이 있었으나, 이제 율법에 따라서 예배를 인도할 수 있는 날이 왔다. 따라서 열다섯 살 되는 생일이 지난 뒤 첫째 안식일에, 하잔은 회당의 아침 예배를 예수가 인도하도록 주선하였다. 나사렛의 신앙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였을 때, 이미 성서의 구절을 골랐으므로, 이 젊은이는 일어서서 읽기 시작했다:
126:4.2 (1391.6) “주 하나님의 영이 내게 다가오시니, 주가 내게 기름을 부으셨음이라. 그는 온유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싸매고, 포로가 된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영적으로 갇힌 자를 풀어 놓으라고 나를 보내셨도다. 하나님이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이 불공평 시정의 날을 선포하고,[1] [1786] 통곡하는 자를 모두 위로하고, 저희에게 재 대신에 아름다움을, 통곡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슬픈 마음 대신에 찬양의 노래를 주어서, 저희가 올바른 나무라, 이것으로 주가 영광을 받도록 주가 심으신 것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126:4.3 (1392.1) “살 수 있도록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으라, 주, 만군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할지며, 성문(城門)에서 판결을 정하라. 어쩌면 주 하나님이 요셉의 남은 자손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126:4.4 (1392.2) “너희 자신을 씻고, 너희 자신을 깨끗이 할지니라. 내 눈앞에서 너희가 행하던 악을 던져 버리고, 악행을 그치고 선행하기를 배우라. 정의(正義)를 구하고 억압받는 자를 놓아 주라. 아비 없는 자를 보호하고 과부를 위해 간구하라.
126:4.5 (1392.3) “무엇을 가지고 내가 주 앞에 나아와서, 온 땅의 주 앞에 경배하리요? 태운 제물을 가지고, 한 살 된 송아지들을 가지고 내가 그 앞에 나아가리요? 산양 수천 마리나 양 1만 마리나 강처럼 많은 기름으로 주가 기뻐하실까? 내 허물 때문에 첫아들을, 내 혼의 죄 때문에 내 몸에서 난 열매를 드리리요? 아니라, 주가 우리에게 보이셨음이라. 아 사람들아, 무엇이 좋은가. 오직 공평하게 대하고 자비를 사랑하며 너희 하나님과 함께 겸손히 걷는 것밖에, 주가 너희에게 무엇을 요구하느냐?
126:4.6 (1392.4) “그러면 땅위의 둥근 하늘에 앉으시는 하나님을 너희가 누구와 견주겠느냐? 너희의 눈을 들어 이 모든 세상을 누가 창조했는가, 누가 그 무리들을 세어서 생기게 하며, 이름으로 저희 모두를 부르는가 보라. 위대한 힘으로 그는 이 모든 것을 행하며, 힘이 강한즉, 한 가지도 실패하지 않느니라. 그는 약한 자에게 힘을 주고, 지친 자에게 힘을 더하시니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음이로다. 절망하지 말지니, 내가 너희의 하나님인 까닭이라. 나는 너희에게 힘을 주겠고, 너희를 도우리라. 옳도다, 내 정의의 바른 손으로 내가 너희를 들어올리리니,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인 까닭이라. 나는 너희의 바른 손을 잡고 너희에게 이르리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를 도울 것임이라.
126:4.7 (1392.5) “그리고 주가 말씀하시되, 너는 나의 증인이요, 모두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영원자임을 알도록 내가 택한 나의 종이라. 나, 내가 주이니, 나 외에 아무 구원자가 없느니라.”
126:4.8 (1392.6) 이렇게 읽고 나서, 그는 앉았다.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렇게 품위 있게 그가 읽은 말씀을 깊이 생각했다. 그렇게 대단히 엄숙한 그의 모습을 마을 사람들이 본 적이 없었다. 그토록 열심이고 그렇게 진지한 그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남자답고 결의가 굳고, 그토록 권위 있는 그의 모습을 지켜본 적이 없었다.
126:4.9 (1392.7) 이 안식일 오후에, 예수는 야고보와 함께 나사렛 언덕으로 올라갔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두 개의 반반한 판자에 목탄으로 십계명을 그리스어로 썼다. 나중에 마르다는 이 판자들을 색칠하고 꾸몄고, 이것들은 오랫동안 야고보의 작은 작업 벤치 위에, 벽에 걸려 있었다.
126:5.1 (1392.8) 차츰차츰 예수와 가족은 몇 년 전의 소박한 생활로 돌아왔다. 옷과 먹을 것조차 더 간소해졌다. 젖과 버터와 치즈는 풍부하게 있었다. 철마다 밭의 소산을 즐겼지만, 달이 지날 때마다 더욱 검소하게 사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아침 식사는 아주 간단했고, 제일 좋은 음식은 저녁 식사를 위해서 남겨 두었다. 하지만 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가난은 사회에서 열등함을 의미하지 않았다.
126:5.2 (1392.9) 이미 이 소년은 그 시절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거의 통달하고 있었다. 집과 들과 작업장에서 얼마나 삶을 잘 이해했는가는 나중에 그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며, 그 가르침은 온갖 단계의 인간 체험을 피부로 겪었음을 아주 넉넉히 드러낸다.
126:5.3 (1392.10) 나사렛 하잔은 예수가 위대한 선생,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이름난 가말리엘의 후계자가 되리라는 믿음을 계속 지녔다.
126:5.4 (1393.1) 겉보기에, 예수의 일생을 위한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된 듯하였다. 지금 펼쳐진 사태를 보건대 앞날은 밝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고 낙심하지 않았다. 현재의 임무를 잘 수행하였고, 생애의 정거장에서 눈앞에 닥친 여러 책임을 충실하게 처리하면서, 하루하루 계속 살았다. 예수의 일생은 낙심한 모든 이상주의자에게 영구한 위로가 된다.
126:5.5 (1393.2) 날품팔이하는 보통 목수의 수입은 천천히 줄어들었다. 이 해의 마지막이 되어서, 예수는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해서 하루에 약 25센트에[2] [1787] 해당하는 돈을 벌었다. 다음 해가 되어서, 회당의 부과금과 반 세겔의 성전 세금은커녕, 국민 세금을 물기에도 벅찼다. 이 해에, 세리는 예수한테서 여분의 세금을 짜내려고 애썼고, 하프를 가져가겠다고 을러대기도 하였다.
126:5.6 (1393.3) 그리스어 성서의 사본이 발견되어 세리에게 빼앗길까 두려워서, 예수는 열 다섯 살 되는 생일에, 주께 바치는 성년(成年) 헌물로서 성서를 나사렛 회당 도서관에 바쳤다.
126:5.7 (1393.4) 사고로 죽었을 때 요셉이 받을 돈에 대하여 소송이 있었고, 헤롯에 대하여 취해진 상소에 대하여 헤롯의 판결을 받으려고 세포리스로 갔을 때, 예수는 열다섯 살 되던 해 최고의 충격을 받았다. 전에 세포리스에서 회계원이 하찮은 금액을 제안했을 때, 예수와 마리아는 상당히 큰 돈을 받으리라 희망했다. 요셉의 형제들은 헤롯 본인에게 상소(上訴)했고, 이제 예수는 궁전에서 서서, 아버지는 돌아가셨을 때 한 푼도 받을 것이 없었다고 헤롯이 선포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한 부당한 판결 때문에, 예수는 결코 다시는 헤롯 안티파스를 신뢰하지 않았다. 한때 헤롯을 “그 여우”라고 넌지시 비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26:5.8 (1393.5) 이 해와 그 뒤 몇 년 동안에 목수의 벤치 가까이에서 일했기 때문에 예수는 카라반 여객들과 섞이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가족의 소모품 상점은 이미 삼촌에게 넘어갔고, 예수는 전적으로 집에 있는 작업장에서 일했으며, 거기서 가족을 보살피는 마리아를 도우려고 가까이 있었다. 이 무렵에, 야고보를 낙타 휴식소에 보내서 세계 사정에 관한 정보를 모았고, 이렇게 그날의 소식을 얻으려고 애썼다.
126:5.9 (1393.6) 자라서 어른이 되면서, 그는 그 전과 그 후 시대에 보통 젊은이들이 겪었던 모든 갈등과 혼동을 겪었다. 가족을 부양하는 벅찬 체험은 게으른 명상이나 신비적 경향에 빠질 만큼 지나친 여유를 없애는 확실한 조치였다.
126:5.10 (1393.7) 이 해에 예수는 집 바로 북쪽에, 상당히 큰 땅을 빌려서 가족의 채소밭으로 나누어 주었다. 나이 많은 아이들은 저마다 개인의 밭이 있었고, 농사를 잘 지으려고 열심히 경쟁했다. 맏형은 채소를 가꾸는 철에 밭에서 날마다 함께 얼마큼 시간을 보냈다. 밭에서 동생들과 같이 일하는 동안, 번거로운 생활을 피해서 자유와 해방을 누릴 수 있는 시골에서, 모두가 농장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꿈을 예수는 여러 번 품었다. 하지만 그들은 시골에서 자라고 있지 않았다. 이상주의자일 뿐 아니라 철저히 실용적인 소년이었기 때문에, 문제를 발견하는 대로 영리하고 힘차게 처리해 나갔고, 자신과 가족을 닥친 상황의 현실에 적응시키며, 개별 및 집단의 소망을 가능한 최대로 만족시키도록 그들의 조건을 적응하려고 있는 힘을 다하였다.
126:5.11 (1393.8) 헤롯의 궁전에서 일한 대가로 아버지가 받을 상당한 돈을 그들이 받을 수 있다면, 작은 농장 하나 사는 것을 보장할 만큼 넉넉한 밑천을 모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한때 예수는 실낱 같은 희망을 가졌다. 그는 가족을 시골로 이주시키는 이 계획을 정말로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헤롯이 요셉이 받을 돈을 한 푼도 내주지 않으려 했을 때, 시골에서 집을 소유하는 꿈을 버렸다. 그 형편대로, 농장 생활의 체험을 많이 즐기려고 그럭저럭 애썼고, 이제 비둘기 외에도, 송아지 세 마리, 양 네 마리, 닭 한 떼, 당나귀 한 마리, 개 한 마리가 있었다. 잘 통제된 경영 계획 속에서, 작은 꼬마들까지도 수행해야 될 정규 임무가 있었고, 이것이 이 나사렛 가족의 가정 생활의 특징이었다.
126:5.12 (1394.1) 열 다섯 살이 되던 이 해가 저물 때, 예수는 인간 존재에서 위험하고 어려운 그 기간을 거쳤는데, 이때는 온순한 어린이 시절과 다가오는 성년기를 의식하는 사이의 과도기였고, 성년기에는 고귀한 인품을 기르는 상급 체험을 얻기 위하여 책임과 기회가 늘어난다. 머리와 몸이 자라는 기간은 끝났고, 이제 이 나사렛 젊은이의 진짜 생애가 시작되었다.
127:0.1 (1395.1)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예수는 자신이 큰 가족의 가장(家長)이자 유일한 기둥임을 깨달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몇 년 안에, 재산이 모두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자, 그는 갈수록 자신이 이전에 존재했음을 의식하게 되었다. 동시에,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사람의 자녀들에게 드러내는 명백한 목적을 위하여 그가 땅에서 육체를 입고 있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깨닫기 시작했다.
127:0.2 (1395.2) 이 세상이나 다른 어느 세계에서 살았던 어떤 젊은이도, 예수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까다로운 문제를 풀어야 할 경우를 당하지 않았고, 앞으로 언젠가 살 어떤 젊은이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유란시아의 어떤 젊은이도, 열 다섯에서 스무 살까지 그 벅찬 기간에 바로 예수가 견딘 것보다 사람을 시험하는 갈등이나 쓰라린 형편을 겪으라고 요구되지 않을 것이다.
127:0.3 (1395.3) 악에 시달리고 죄로 인하여 어지러워진 세상에서 이 청년기 시절을 사는 실제 체험을 이렇게 맛보았으니까, 사람의 아들은 네바돈의 모든 영역에 있는 젊은이의 생활 체험에 대하여 넉넉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지역 우주에서 두루, 어느 시대나 어느 세계에서도, 곤궁에 빠지고 어쩔 줄 모르는 청년들에게 영원히, 공감하는 친구가 되었다.
127:0.4 (1395.4) 느리지만 확실하게, 실제로 체험을 겪음으로, 이 신다운 아들은 자기 우주의 군주가 될 권리를 얻고 있다. 그 군주는 지역 우주의 어떤 세계에서 창조된 지성 존재도 도전할 수 없는 최고 통치자요, 어느 시대에 어떤 등급의 성격 자질과 체험을 가진 존재에게도 공감하는 벗이다.
127:1.1 (1395.5) 육신화된 아들은 아기 시절을 지났고, 파란이 없는 어린 시절을 겪었다. 다음에 어린 시절과 청년기 사이에 시험을 거치는 벅찬 과도기에서 솟아나왔다. 청년 예수가 되었다.
127:1.2 (1395.6) 이 해에는 몸이 완전히 성장했다. 그는 남자답고 잘 생긴 젊은이였다. 더욱 차분하고 심각해졌어도 친절하고 이해심이 있었다. 눈은 친절하지만 꿰뚫어보는 눈이었고, 빙그레 웃는 웃음은 언제나 사람을 끌어들이고 안심시켰다. 목소리는 아름답지만 위엄이 있었고, 인사는 따듯해도 꾸밈이 없었다. 언제나, 가장 평범한 사람들과 만날 때에도 사람과 신, 이 이중 성질의 분위기를 증거하는 듯했다. 그는 공감하는 친구이자 권위 있는 선생, 이 두 가지를 합친 성품을 언제나 나타냈다. 이런 성격의 특징은 일찍부터 이 청년기 시절에도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127:1.3 (1395.7) 신체가 강하고 튼튼한 이 젊은이의 인간 지능도 또한 완전히 발달하였다. 인간으로서 생각하는 충분한 체험을 겪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지적 성장 능력을 충분히 얻었다. 건강하고 균형이 잘 잡힌 몸, 날카롭고 분석적인 머리, 친절하고 이해심 있는 기질, 얼마큼 변동이 있어도 적극적인 기질을 소유했고, 이 모두가 튼튼하고 놀랍고 매력 있는 인격으로 구성되고 있었다.
127:1.4 (1396.1) 시간이 지나자, 어머니와 동생들은 그를 이해하기가 갈수록 더 어렵게 되었다. 그의 말에 갈피를 잡지 못했고 그의 행동을 오해했다. 모두가 맏형의 생애를 이해할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이는 전에 그가 유대 민족의 구원자가 될 운명을 가졌다고 생각하도록 어머니가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족의 비밀이라고 넌지시 일러주는 말을 마리아에게서 들은 뒤에, 예수가 모든 그러한 생각과 의도를 솔직하게 부인하려 했을 때 그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가 상상해 보라.
127:1.5 (1396.2) 이 해에 시몬은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또 집 한 채를 팔 수밖에 없었다. 야고보는 이제 세 여동생을 가르치는 책임을 맡았고, 그 중에 둘은 어려운 공부를 할 나이가 되었다. 좀 자라자마자, 룻은 미리암과 마르다의 손에 맡겨졌다. 유대인 가정의 여자 아이들은 보통,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예수는 여자가 남자와 똑같이 학교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어머니도 찬성했다), 회당 학교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그들을 위해서 가정 학교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127:1.6 (1396.3) 이 해 내내, 예수는 작업 벤치 가까이에 묶여 일했다. 다행히, 할 일이 풍부했고, 그가 만든 물건은 품질이 아주 우수해서, 그 지역에 일거리가 아무리 뜸해도 그는 결코 놀고 지내지 않았다. 이따금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야고보가 돕곤 했다.
127:1.7 (1396.4) 이 해가 저물 때가 되자, 그는 가족을 양육하고 식구들이 결혼하는 것을 본 뒤에,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그리고 하늘 아버지를 세상에 드러내는 자로서, 일을 공식으로 시작하겠다고 거의 마음먹었다. 자신이 사람들이 기대하는 유대인의 메시아가 되지 않을 것을 알았고, 이 문제를 어머니와 상의해 보아야 거의 쓸데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품든지 그대로 버려두기로 작정했는데, 이는 과거에 그가 무슨 말을 일러주어도 어머니에게 거의 또는 도무지 효과가 없었고, 아버지가 말로 결코 어머니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다는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이 해부터 계속, 그는 어머니나 어떤 다른 사람에게도, 이 문제들에 관하여 말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의 사명은,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땅에서 사는 누구도 충고해줄 수 없는 그렇게 특이한 것이었다.
127:1.8 (1396.5) 젊기는 했어도 그는 가족에게 진정한 아버지 노릇을 하였다. 어린것들과 함께 있는 대로 시간을 보냈고, 그들은 참으로 그를 사랑했다. 어머니는 그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고 슬픔에 잠겼다. 그들이 아주 즐거워하며 계획했던 대로 예루살렘에서 랍비들과 함께 공부하는 대신에, 가족을 위하여 생활비를 벌면서, 목수의 벤치에서 하루하루 수고하고 있는 것이 어머니는 서러웠다. 아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이 있었어도 마리아는 아들을 사랑했고, 가정의 책임을 그가 기꺼이 어깨에 진 것을 대단히 고마워하였다.
127:2.1 (1396.6) 이 무렵에, 특히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 로마에 세금 내는 것을 반대하는 반란에 찬성하는 어지간히 큰 소동이 있었다. 머지 않아 열심당이라고 부르게 될, 강력한 민족주의 당파가 생기고 있었다. 열심당원은 바리새인과 달리, 메시아가 오는 것을 기다리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치적 투쟁을 통해서 끝장을 보자고 제안했다.
127:2.2 (1396.7) 예루살렘에서부터 한 집단의 조직자들이 갈릴리에 도착했고, 나사렛에 이르기까지 크게 진전을 보았다. 예수를 만나보려고 왔을 때, 그는 그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질문을 많이 던졌지만, 그 당에 들어가기를 거절했다. 참가하지 않는 까닭을 충분히 밝히려 하지 않았고, 이 거절은 나사렛의 젊은 동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그 운동에 불참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127:2.3 (1397.1) 마리아는 아들의 입당(入黨)을 유인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그를 한 치도 움직이게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자기의 요청에 따라서 민족주의자 운동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불복종이요, 예루살렘에서 돌아오고 나서 부모에게 복종하겠다고 한 서약을 어기는 것이라 비추어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렇게 넌지시 하는 말에 답하여 그는 어머니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고,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어머니, 어찌 그러실 수 있나이까?” 마리아는 자신의 말을 취소하였다.
127:2.4 (1397.2) 예수의 삼촌들 중에 하나가 (마리아의 동생 시몬) 이 무리에 이미 가담했고, 나중에 갈릴리 분과의 장교가 되었다. 몇 년 동안 예수와 그 삼촌 사이에는 무언가 거리가 있었다.
127:2.5 (1397.3) 그러나 나사렛에서 소동이 일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관한 예수의 태도는 그 도시의 유대인 젊은이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켰다. 반쯤은 민족주의자 조직에 가담했고, 나머지 반은 좀더 온건한 애국자로 이루어진 반대 집단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예수가 지도자가 되기를 기대했다. 가족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구실로 탄원하면서 그에게 내민 명예를 물리쳤을 때, 모두가 그 책임을 인정했지만 그들은 놀랐다. 그러나 아직 상황은 더욱 까다로워졌는데, 당장에, 이방인들에게 돈 빌려 주는 사람, 이삭이라는 어느 부자 유대인이 나서서, 예수가 연장을 내려놓고 이 나사렛 애국자들의 지도를 맡는다면, 예수의 가족을 부양하겠다고 나섰다.
127:2.6 (1397.4) 그때 열일곱이 채 되지 않은 예수는 일생의 초기에 가장 아슬아슬하고 어려운 한 상황에 부딪쳤다. 애국 문제는, 특히 세금을 걷는 외국 억압자들 때문에 까다롭게 될 때, 언제나 영적 지도자들이 처신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경우에 로마에 항거하는 이 모든 선동에 유대 종교가 관련되었기 때문에, 두 배나 어려웠다.
127:2.7 (1397.5) 예수의 처지는 더욱 어렵게 되었는데, 어머니와 삼촌, 그리고 동생 야고보조차, 모두 민족주의자 운동에 합세하라고 밀었기 때문이다. 나사렛의 똑똑한 유대인은 모두 가담했고, 아직 그 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청년들은 예수가 생각을 바꾸는 순간에 가담하려고 했다. 온 나사렛에서 현명한 상담자가 겨우 한 사람 있었으니, 나이 든 선생 하잔이었다. 나사렛의 시민 위원회가 전에 대중에게 호소한 것에 대하여 대답을 요구하러 올 때 그들에게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그에게 조언을 주었다. 예수의 젊은 나이를 통해서, 이번이 바로 처음으로 의식해서 대중 전략에 의존한 때였다. 이때까지는 언제나, 상황을 밝히려고 진실을 솔직하게 말하는 방법을 썼지만, 지금은 진실을 있는 그대로 선언할 수 없었다. 자기가 사람보다 더 높은 존재라고 털어놓을 수 없었고, 더 성숙한 나이에 이르기까지 그를 기다리는 사명에 대하여 그의 생각을 밝힐 수 없었다. 이런 제한이 있었는데도, 그의 신앙심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직접 도전을 받고 있었다. 가족은 소동에 말려들었고, 젊은 친구들은 파가 갈라졌으며, 마을의 유대인 무리 전부가 떠들썩했다. 이 모두가 그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다니! 이 종류의 소동은커녕, 어떤 종류의 문제라도 일으킬 의도가 전혀 없지 않았는가.
127:2.8 (1397.6) 무엇인가 해야 했다. 자기의 처지를 설명해야 했고, 용감하게, 외교적으로, 모든 사람은 아니라도 많은 사람의 마음에 흡족하게 이 일을 해냈다. 그는 처음에 탄원했던 구실을 고수했다. 첫째 의무는 가족에 대한 것이요, 과부가 된 어머니와 여덟 동생은 겨우 돈이 살 수 있는 것―물질적 생활 필수품―보다 더한 것이 필요하다, 가장의 보살핌과 지도를 받을 권리가 있다, 맑은 양심에 비추어서, 모진 사고가 그에게 밀어붙인 의무에서 자신을 해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를 기꺼이 놓아주겠다고 하는 어머니와 맨 위 동생에게 감사를 표시했지만, 가족을 물질적으로 부양하기 위해서 앞으로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오든지 상관 없이, “돈은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고 결코 잊어서 안될 말을 하면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가족을 떠날 수 없다고 되풀이하여 말했다. 이 연설을 하는 과정에서, 예수는 “일생의 사명”에 대하여 몇 번 분명치 않게 언급했지만, 그것이 군사적 관념과 일치하든 않든 상관 없이, 가족에 대한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할 수 있도록, 생애의 모든 다른 것과 함께, 일생의 사명도 포기했다고 설명했다. 나사렛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가족에게 좋은 가장이었음을 잘 알았다. 이것은 모든 고귀한 유대인의 마음에 아주 가까이 와 닿는 문제였기 때문에, 예수의 탄원은 말씀을 듣던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그에게 공감하는 반응을 일으켰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 더러는 야고보가 한 연설에 마음이 풀어졌고, 계획에 없었으나 이때 그는 한바탕 연설하였다. 바로 그날, 하잔은 야고보에게 연설을 미리 연습시켰지만 그것은 그들의 비밀이었다.
127:2.9 (1398.1) 야고보는 그가 (야고보) 가족을 위하여 책임을 질 만큼 나이 들었다면, 예수가 민족을 해방하는 일을 도우리라 확신한다, 그들이 예수를 “우리와 함께, 우리의 가장과 선생으로 남아 있도록 허락한다면, 여러분은 요셉의 가족에서 지도자를 하나만 얻는 것이 아니라, 곧 충성스러운 민족주의자 다섯 명을 얻으리이다, 왜냐하면, 우리 가장인 형님의 지도를 받고, 자라서 우리 나라에 봉사하려고 나설 소년이 다섯이나 있지 않나이까?”하고 말했다. 그 소년은 이렇게, 아주 긴장되고 아슬아슬한 형편을 무척 즐거운 종말로 이끌었다.
127:2.10 (1398.2) 위기는 얼마 동안 그쳤지만, 결코 이 사건은 나사렛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선동이 계속되었고, 예수는 다시 널리 총애를 받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감정이 갈라진 것은 결코 충분히 회복되지 않았다. 이것이, 그 뒤의 다른 사건들로 말미암아 확대되어, 예수가 후일에 가버나움으로 이사한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이때부터 나사렛은 사람의 아들에 대해서 대립된 감정을 유지했다.
127:2.11 (1398.3) 야고보는 이 해에 학교를 졸업했고 집에 있는 목수 작업장에서 정식 노동자로 일을 시작했다. 그는 연장을 솜씨 있게 사용하는 노동자가 되었고 이제 멍에와 호미를 만드는 일을 도맡았다. 한편 예수는 건물 마무리 손질과 전문적인 가구(家具) 일을 더 하기 시작했다.
127:2.12 (1398.4) 이 해에 예수는 머리 속에서 생각을 많이 정리하였다. 차츰차츰 신과 인간의 성품을 한데 모았고, 자신의 결심으로, 그리고 그에게 깃드는 훈계자의 도움만 얻어서, 머릿속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이 모든 일을 해냈다. 수여 아들이 오신 어느 세상에 사는 어떤 정상 필사자도 바로 그러한 훈계자를 머리 속에 가지고 있다. 이제까지 한 사자가 방문한 것을 빼고, 아무런 초자연적 일이 이 젊은이의 생애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형 이마누엘이 그의 사자를 파송했는데, 그는 예루살렘에서 밤에 한 번 예수에게 나타났다.
127:3.1 (1398.5) 이 해가 지나는 동안, 집과 뜰을 제쳐놓고 모든 가족 재산이 처분되었다. 이미 저당 잡힌 가버나움 재산의 마지막 일부가 (다른 한 재산에 있는 지분을 빼고) 팔렸다. 수익금은 세금을 내기 위해서 쓰였고, 야고보에게 새 연장을 얼마큼 사 주기 위해서, 또 카라반 휴식처 가까이에 있는, 가족의 오래 된 소모품 및 수선 가게의 지불금을 내는 데 쓰였다. 야고보가 집의 작업장에서 일하고 집 근처에서 마리아를 도울 만큼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예수는 이제 이 가게를 다시 사자고 제안했다. 당분간 재정의 압박이 이처럼 줄어들었기 때문에, 예수는 야고보를 유월절 예식에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예루살렘에 하루 일찍 올라갔고 두 사람만 사마리아의 길로 갔다. 그들은 걸어갔고 아버지가 5년 전에 비슷한 여행길을 가면서 가르쳤던 것처럼, 가는 길에 예수는 야고보에게 역사적 장소들에 대하여 일러주었다.
127:3.2 (1399.1) 사마리아를 지나가면서, 그들은 많은 낯선 광경을 보았다. 이 여행길에서 개인ㆍ가족ㆍ국가의 여러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야고보는 대단히 종교적 부류의 소년이었다. 예수가 일생의 할 일에 대하여 무슨 계획이 있는가 거의 알지 못하였고 그에 대하여 어머니와 완전히 같은 생각을 갖지는 않았지만, 예수가 자기의 사명을 시작할 수 있도록 그가 가족을 위해서 책임을 맡을 수 있을 때가 오기를 그는 기대하였다. 예수가 그를 유월절 예식에 데리고 가는 것을 그는 무척 고맙게 여겼다. 그리고 그들은 여느 때보다 더 자세히 앞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127:3.3 (1399.2) 사마리아를 통해서 여행하는 동안에, 특히 베델에서, 그리고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마실 때, 예수는 많이 생각했다. 동생과 함께 그는 아브라함ㆍ이삭ㆍ야곱의 전통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야고보가 바야흐로 구경하려 하는 것을 위해서 그를 준비시키려고 많이 애썼고, 그래서 자신이 성전을 처음 방문했을 때 겪었던 그러한 충격을 줄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야고보는 이 여러 광경 가운데 어떤 것에 그다지 예민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사제들이 건성으로 마음에 없이 임무를 수행하는 태도에 대하여 논평했지만, 대체로 예루살렘 체류를 크게 즐거워했다.
127:3.4 (1399.3) 예수는 유월절 저녁을 먹으려고 야고보를 베다니로 데리고 갔다. 시몬은 이미 선조들과 함께 묻혔다. 성전에서 희생 양을 가져왔기 때문에, 예수는 유월절 가족의 가장으로서 이 가정을 주관하였다.
127:3.5 (1399.4) 유월절 저녁 식사 뒤에, 마리아는 야고보와 함께 이야기하려고 앉았고, 한편 마르다와 나사로와 예수는 밤 늦게까지 함께 이야기했다. 다음 날 그들은 성전 예배에 참석했고, 야고보는 이스라엘 연방에 가입이 허락되었다. 그날 아침, 성전을 보려고 올리브 산마루에서 멈추었을 때, 야고보가 놀라워하며 감탄하는 동안, 예수는 잠자코 예루살렘을 바라보았다. 야고보는 형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다시 베다니로 돌아갔다. 다음 날, 집을 향해 떠났을 터이지만, 야고보는 선생들의 강론을 듣고 싶다고 설명하면서, 성전을 찾아보려고 돌아가기를 고집하였다. 이것은 참말이었지만, 가슴 속에 몰래, 어머니의 말씀을 들은 대로, 그는 예수가 토론에 참여하는 것을 듣고 싶어했다. 따라서 그들은 성전에 가서 토론을 들었지만, 예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인간이자 하나님인 그의 깨어나는 지성에 모두가 시시하고 하찮게 보였다―그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을 뿐이었다. 야고보는 예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실망했다. 그가 묻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내 때가 아직 오지 않았느니라.”
127:3.6 (1399.5) 이튿날, 그들은 예리고와 요단강 유역을 거쳐 집을 향해 길을 떠났고, 그가 열세 살이었을 때 이 길로 전에 여행한 것을 포함해서, 길가에서 여러 가지 일을 이야기했다.
127:3.7 (1399.6) 나사렛으로 돌아와서, 예수는 가족의 낡은 수선 가게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날마다 나라의 모든 지역과 둘러싼 여러 지방에서 온 숱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어 크게 즐거워했다. 예수는 참으로 사람―그저 보통 사람들―을 사랑했다. 매달 그 가게에 대하여 지불금을 냈고, 야고보의 도움을 얻어서, 줄곧 가족을 부양했다.
127:3.8 (1399.7) 1년에 몇 번, 방문객들이 이렇게 성서를 읽으려고 회당에 오지 않았을 때, 예수는 계속 회당에서 안식일 성서를 읽었고, 여러 번 교과에 대하여 논평했지만, 논평이 필요 없는 구절을 보통 골랐다. 그는 재능이 있었고, 한 구절이 다른 구절에 빛을 던지도록, 여러 구절의 읽는 순서를 짜 맞추었다. 날씨가 허락하는 한, 안식일 오후에 자연 속을 걸으려고 동생들을 데리고 나가기를 거른 적이 없었다.
127:3.9 (1400.1) 이 무렵에, 하잔은 철학 토론을 하는 젊은 남자들의 모임을 시작했다. 이것은 다른 회원들의 집에서, 또 가끔 자기 집에서 만났는데, 예수는 이 무리의 특출한 회원이 되었다. 이 방법으로, 최근의 민족주의자 논쟁이 있을 때 지역에서 잃었던 위신의 얼마큼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127:3.10 (1400.2) 그의 사회 생활은 제한되었어도 이를 완전히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그는 나사렛의 젊은 남녀 사이에서 따듯이 대하는 친구와 굳건한 숭배자가 여럿 있었다.
127:3.11 (1400.3) 9월에, 엘리자벳과 요한이 나사렛 가정을 찾아보려고 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요한은 목수 일이나 어떤 다른 직종의 일에 착수하도록 나사렛에 남아 있으라고 예수가 조언하지 않으면, 농사를 짓고 양 기르는 일을 시작하려고 유대의 고지로 돌아갈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나사렛 가정이 실지로 한 푼도 없음을 몰랐다. 마리아와 엘리자벳이 자기네 아들들에 관하여 이야기하면 할수록, 두 젊은이가 같이 일하고 서로를 더 보는 것이 좋겠다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127:3.12 (1400.4) 예수와 요한은 함께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대단히 사사롭고 개인적인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그들이 해야 할 일로 “하늘 아버지가 부르신” 뒤에, 대중에게 봉사하면서 만날 때까지 서로 다시 만나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사렛에서 본 것 때문에 요한은 집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서 수고해야 한다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자기가 예수 일생의 사명에서 한 몫을 하리라고 확신하게 되었지만, 여러 해 동안 예수가 집안을 돌보는 일에 바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네 작은 농장을 돌보고 어머니의 필요를 보살피는 일을 훨씬 더 만족스럽게 여겼다. 사람의 아들이 요단강 물가에서 세례를 받으려고 나선 그날까지 요한과 예수는 다시 서로 만나지 않았다.
127:3.13 (1400.5) 이 해의 12월 3일, 토요일 오후에, 두 번째로 죽음이 이 나사렛 가족에게 덥쳤다. 아기 남동생, 꼬마 아모스가 한 주 동안 고열로 앓다가 죽었다. 이 슬픈 때를 유일한 기둥인 맏아들과 함께 보내고 나서, 마리아는 마침내 예수를 가족의 참 가장으로 완전히 인정했다. 그는 참으로 자격 있는 가장이었다.
127:3.14 (1400.6) 4년 동안, 생활 수준은 꾸준히 떨어졌다. 그들은 해마다 깊어지는 가난의 아픔을 느꼈다. 이 해가 저물 때가 되어서, 모든 벅찬 싸움에서 가장 어려운 체험 중 하나에 부닥쳤다. 야고보는 아직도 많은 돈을 벌기 시작하지 않았고, 모든 다른 것 위에 장례비는 집안을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는 초조하고 슬퍼하는 어머니에게 단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어머니, 슬퍼하는 것이 우리를 돕지 아니하리이다.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고, 어머니의 웃음이 어쩌면, 우리가 더 잘 하도록 격려할 수도 있나이다. 우리는 하루하루, 더 좋은 날이 앞에 있다는 희망 때문에 이 일을 할 힘을 얻나이다.” 흔들리지 않고 실용적인 그의 낙천적 태도는 참으로 쉽게 번졌다. 아이들은 모두 더 좋은 때와 좋은 것을 기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살았다. 가난이 사람을 침울하게 만드는데도, 희망에 찬 이러한 용감한 자세는 튼튼하고 고귀한 인격을 개발하는 데 힘차게 기여하였다.
127:3.15 (1400.7) 예수는 바로 눈앞에 닥친 과제에, 머리와 혼과 몸의 온 힘을 효과 있게 동원하는 능력을 소유했다. 풀고 싶어 하는 그 한 가지 문제에, 깊이 생각하는 머리를 집중할 수 있었고, 이것은 지칠 줄 모르는 인내와 더불어, 어렵게 필사자로 존재하며 거치는 시련을 차분히 견딜 수 있게, 마치 “보이지 않는 분을 보고” 있는 것처럼 살 수 있게 만들었다.
127:4.1 (1401.1) 이때가 되어서, 예수와 마리아는 사이가 훨씬 더 좋았다. 그를 아들로 여기는 일이 적었다. 마리아의 눈에, 그는 아이들에게 오히려 아버지처럼 되었다. 나날의 생활은 실제적이고 눈앞에 닥친 문제로 가득하였다. 그의 일생의 일에 관하여 말하는 일이 뜸해졌는데,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남자 아이 넷과 여자 아이 셋으로 이루어진 가족을 부양하고 기르는 데 그들이 공통으로 모든 생각을 쏟았기 때문이다.
127:4.2 (1401.2) 이 해가 시작되자, 아이를 훈련하는 그의 방법―즉 악을 행하지 말라고 금하는 옛 유대인 방법 대신에 선을 행하라는 적극적 명령―을 받아들이도록 예수는 어머니를 완전히 설득했다. 집에서, 그리고 대중을 가르치는 생애를 통해서 내내, 예수는 적극 형태의 훈계를 변함없이 이용했다. 언제 어디서나 말했다. “너희는 이를 행하라―저를 행해야 하느니라.” 옛날의 금기로부터 내려오는, 금지 형태의 가르침을 결코 이용하지 않았다. 금지함으로 악을 강조하는 일을 삼가고, 한편 선을 행하라 명령함으로 선한 것을 높이 올렸다. 이 집안에서 기도 시간은 가족의 복지에 관계되는 어떤 것이나, 무엇이든지 토론하는 기회였다.
127:4.3 (1401.3) 그렇게 어릴 때부터 동생들에게 현명한 훈련을 시작했기 때문에, 즉석에, 진심으로 복종을 얻는 데 거의 또는 결코 아무 벌이 필요하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유다였고, 여러 경우에 집안의 규칙을 어긴 것 때문에 벌을 내리는 것이 필요했다. 세 번이나, 가족의 행동 규칙을 일부러 위반했다고 자백했기 때문에 유다를 벌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명되었는데 그때 벌은 그보다 나이 먹은 아이들이 만장 일치로 선포하여 정해졌고, 벌을 주기 전에 바로 유다가 찬성하였다.
127:4.4 (1401.4) 예수는 무슨 일을 행하든지 대단히 규율과 체계가 있었지만, 관리적인 모든 판결은 신선하게 해석하는 신축성이 있었고 개인에 맞게 적용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 가장인 형을 움직이는 정의(正義)의 정신으로 아이들 모두에게 크게 감명을 주었다. 결코 멋대로 동생들을 징계하지 않았고, 그렇게 한결같은 공평함과 개인적 배려로 말미암아 예수는 가족 모두에게 무척 소중하게 되었다.
127:4.5 (1401.5) 야고보와 시몬은, 싸우기 좋아하고 때때로 성내는 놀이 친구들을 설득과 무저항으로 달래는 예수의 계획을 따르려고 애쓰면서 자랐고, 상당히 성공했다. 그러나 요셉과 유다는, 집에서 그런 가르침에 머리를 끄덕였지만, 친구들에게 공격을 받았을 때 자신의 방어를 서둘렀다. 특히, 유다는 이 가르침의 정신을 위반한 잘못이 있었다. 그러나 무저항은 가족의 규칙은 아니었다. 개인에 관한 가르침을 어기는 데는 아무런 벌이 따르지 않았다.
127:4.6 (1401.6) 대체로, 아이들은 모두, 특히 여자아이들은, 애정 있는 아버지의 경우에 하는 것과 똑같이, 예수에게 어린 시절의 어려움을 의논하고 속을 털어놓았다.
127:4.7 (1401.7) 야고보는 안정되고 성질이 차분한 젊은이로 자라고 있었지만, 예수처럼 영적 성향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요셉보다 공부를 훨씬 더 잘하는 학생이었고, 요셉은 충실한 일꾼이긴 했어도 영적 생각이 더욱 부족했다. 요셉은 꾸준히 일하는 사람이었고, 다른 아이들의 지적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시몬은 착한 생각을 가진 소년이었으나 너무나 꿈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살면서 안정된 직업을 쉽게 가지지 못했고 예수와 마리아에게 상당한 걱정거리였다. 그러나 언제나 선하고 좋은 의도를 가진 소년이었다. 유다는 걸핏하면 싸우는 사람이었다. 가장 높은 이상을 가졌지만, 성질이 안정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각오와 공격성 모두를 더 많이 가졌지만, 어머니가 가진 균형 감각과 신중함이 상당히 모자랐다.
127:4.8 (1402.1) 미리암은 고귀한 것과 영적인 것을 날카롭게 이해하는, 안정되고 분별 있는 딸이었다. 마르다는 생각과 행동이 느렸어도 아주 믿을 만하고 유능한 아이였다. 아기 룻은 집안에서 햇빛 같은 사람이었다. 생각 없이 말을 해도 아주 마음이 진지했다. 가장인 큰 오빠를 그 아이는 거의 숭배하듯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룻의 버릇을 잘못 들이지는 않았다. 룻은 예쁜 아이였지만, 미리암처럼 잘생기지는 않았고, 미리암은 그 도시에서 첫째 가는 미인은 아니라도, 그 가족 안에서 미인이었다.
127:4.9 (1402.2)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예수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종교의 다른 여러 단계에 관계된 가족 교육과 관습을 자유화하고 개량하려고 많이 수고했고, 이 모든 변화에 마리아는 진심으로 찬성했다. 이때가 되어서, 예수는 의문의 여지 없이,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127:4.10 (1402.3) 이 해에 유다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이 비용을 치르기 위해서 예수가 하프를 파는 것이 필요했다. 이렇게 마지막 오락의 즐거움이 사라졌다. 머리가 피곤하고 몸이 지쳤을 때 하프 켜기를 무척 좋아했지만, 최소한 세리(稅吏)에게 그 하프를 빼앗기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는 위로를 얻었다.
127:5.1 (1402.4) 비록 가난하기는 했어도 나사렛에서 예수의 사회적 지위는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 도시에서 으뜸가는 젊은이들 중의 하나였고, 대부분의 젊은 여자들 사이에서 대단히 평판이 좋았다. 예수가 튼튼하고 지적인 남성의 아주 훌륭한 표본이었으니까, 그리고 영적 지도자로서 그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나사렛의 부유한 상인이자 무역가 에즈라의 맏딸, 레베카가 이 요셉의 아들을 차츰 사랑하게 되었음을 깨달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여자는 예수의 누이동생 미리암에게 먼저 사랑을 고백했고, 미리암은 다시 이 모두를 어머니와 의논했다. 마리아는 크게 마음이 흔들렸다. 이제 그는 가족에게 없어서는 안될 가장이 되었는데, 아들을 잃게 되려는가? 문제가 결코 그치지 않으려는가?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리고 나서 멈춰서, 결혼이 예수의 앞날에 무슨 영향을 미칠 것인가 깊이 생각했다. 자주는 아니라도 적어도 어떤 때는, 예수가 “약속의 아이”였다는 사실을 회상했다. 마리아와 미리암이 이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한 뒤에, 그들은 바로 레베카에게 가서, 그 여자 앞에 사연(事緣)을 모두 털어놓고, 예수가 운명의 아들이다, 그가 위대한 종교 지도자, 아마도 메시아가 될 것이라 믿는다고 그 여자에게 정직하게 일러줌으로, 예수가 미처 알기도 전에 그 일을 그만두게 하려고 노력을 기울이기로 작정하였다.
127:5.2 (1402.5) 레베카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 이야기에 마음이 떨렸고, 그 여자가 선택한 이 남자와 운명을 같이 하고, 지도자의 일생을 함께 하겠다고 갈수록 더 마음이 굳어졌다. (마음 속으로) 그러한 남자는 더군다나 충실하고 유능한 아내가 필요하리라고 주장했다. 그 여자는 마리아가 자기를 말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집안의 가장이자 유일한 기둥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목수의 아들에게 마음 끌리는 것을 아버지가 승인함을 알고서, 예수가 버는 돈을 잃는 손해를 전부 보상하려고 아버지가 그 가족에게 충분한 소득을 기꺼이 주리라 생각했고 그 여자는 옳았다. 아버지가 그러한 계획에 찬성했을 때, 레베카는 마리아와 미리암과 더 의논했고, 지지를 얻지 못하자 그 여자는 대담하게 직접 예수에게 갔다. 그 여자는 아버지의 협조를 얻어 이렇게 했고, 그는 레베카의 열일곱 살 되는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예수를 집으로 초대했다.
127:5.3 (1403.1) 예수는 주의 깊게 이해하는 태도로, 처음에는 레베카의 아버지가, 다음에 레베카 자신이 이 일을 이야기하는 것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리 많은 돈도 자기 아버지의 가족을 몸소 부양하는 의무, “인간의 모든 책임 가운데 가장 신성한 것―사람이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눈 가족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는 취지로 그는 친절히 대답했다. 레베카의 아버지는 가족에게 헌신하는 예수의 말에 마음이 깊이 움직였고 그 회담에서 물러났다. 단지 아내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우리는 그를 아들로 삼을 수 없소. 그는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고귀한 사람이요.”
127:5.4 (1403.2) 그리고 나서 레베카와 중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제까지 그의 생애에서, 소년과 소녀, 젊은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사귀었다. 그의 머리는 실용적인 세상일을 해결하는 다급한 문제들, 그리고 “아버지의 일을 수행하는” 궁극의 생애를 골똘히 생각하는 데 전적으로 너무 빠져 있었다. 그래서 개인적 사랑을 인간의 결혼으로 매듭짓는 것을 언제라도 심각하게 생각해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보통 인간이 부닥치고 결정해야 하는 그런 문제 하나와 마주친 것이다. 정말로, 그는 “너희와 마찬가지로 모든 면에서 시험을 받았다.”
127:5.5 (1403.3) 주의 깊게 말을 듣고 난 뒤에, 찬미의 표현에 대하여 레베카에게 진심으로 감사했고, “이것은 내 일생에 날마다 나를 기쁘게 하고 위로하리라”고 덧붙였다. 그는 단순한 형제 같은 대우와 순수한 친구 관계 외에 어떤 여자와도 관계를 가질 자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첫째 가는 가장 중요한 의무는 아버지의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며,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결혼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나서 덧붙여 말했다: “내가 운명의 아들이라면, 내 운명이 분명히 나타날 때까지 나는 일생 동안 지속되는 책임을 져서는 안 되지요.”
127:5.6 (1403.4) 레베카는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 위로받기를 마다하고, 아버지가 마침내 세포리스로 이사하는 데 찬성할 때까지 아버지에게 나사렛을 떠나자고 졸랐다. 후일에 결혼하려고 찾아 온 숱한 남자들에게, 레베카는 같은 대답을 주었을 뿐이다. 그 여자는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일찍이 살았던 가운데 그 여자에게 가장 위대한 이 사람이 생명의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첫발을 내디딜 때를 기다리며 산다고. 그 여자는 그가 대중을 위해 수고하는 파란 많은 몇 년을 통해서 헌신적으로 그를 따랐으며, 그가 예루살렘으로 승리에 넘쳐 나귀를 타고 들어간 그날, 자리에 있었고 (예수의 눈에 뜨이지 않았다),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렸던 그 비참한 운명의 날 오후에, 마리아의 옆에서 “다른 여자들 속에” 서 있었다. 이 사람의 아들은 하늘에 있는 수많은 세계 뿐 아니라 그 여자에게도 “몹시 사랑스럽고, 만인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자”였다.
127:6.1 (1403.5) 레베카가 예수를 사랑했다는 이야기를 나사렛 근처에서, 나중에는 가버나움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래서 그 뒤 몇 년 동안, 남자들이 그를 아낀 것처럼 많은 여자가 예수를 사랑했지만, 두 번 다시 그는 또 다른 착한 여인의 헌신적 사랑을 물리치지 않아도 되었다. 이때부터 계속, 예수를 향한 인간의 사랑은 존경과 찬미의 성질을 띠게 되었다. 남자와 여자들이 다 그를 헌신적으로 사랑했고, 자아 만족의 성질을 띠거나 애정으로 소유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그의 됨됨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예수의 인품에 대하여 이야기가 나올 때는 언제나, 레베카의 헌신적 사랑이 입에 오르내렸다.
127:6.2 (1404.1) 미리암은 레베카의 사건을 잘 알고, 어떻게 오빠가 아름다운 여인의 사랑조차 버렸는가 알고서 (앞날에 운명의 생애의 요인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를 이상으로 여기고, 감동적인 깊은 애정으로, 오빠일 뿐 아니라 한 가장으로서, 그를 아끼게 되었다.
127:6.3 (1404.2) 돈을 쓸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지만, 예수는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싶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레베카와 최근에 만난 경험을 알고서, 어머니는 지혜롭게 길을 떠나라고 재촉하였다. 뚜렷하게 의식하지 않았지만, 그가 가장 바란 것은 나사로와 이야기하고 마르다ㆍ마리아와 이야기할 기회였다. 그는 자기 가족 다음으로, 이 세 사람을 누구보다도 가장 사랑했다.
127:6.4 (1404.3) 예루살렘으로 이 여행길을 떠나면서, 메기도ㆍ안티파트리스ㆍ리다의 길로 갔고, 부모가 에집트에서 나사렛으로 그를 데리고 돌아오는 길에 지났던 같은 길을 일부 거쳤다. 유월절 예식에 가는 데 나흘을 썼고, 팔레스타인의 국제 전쟁터인 메기도와 그 주위에서 벌어졌던 지난 사건들에 대하여 많이 생각했다.
127:6.5 (1404.4) 예수는 성전과 모여드는 방문자들의 무리를 바라보려고 잠시 멈추고, 예루살렘을 통하여 계속 갔다. 헤롯이 지은 이 성전과 정치적으로 임명된 이 사제들에 대하여 그는 이상한 반감을 더욱 느꼈다. 무엇보다도 나사로ㆍ마르다ㆍ마리아를 보고 싶었다. 나사로는 예수와 같은 나이였고, 이제는 집안의 가장이었다. 이번 방문할 때가 되자 나사로의 어머니도 또한 무덤에 묻혀 있었다. 마르다는 예수보다 한 살 남짓 나이가 위였고, 마리아는 두 살 아래였다. 예수는 세 사람 모두에게 우상처럼 이상적인 사람이었다.
127:6.6 (1404.5) 이번 방문이 있을 때, 전통에 대하여 때때로 일어나는 반항심이 한 번 치솟았다―예수가 판단하건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그릇 대표하는 의식(儀式) 풍습을 분개하는 표현이었다. 예수가 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나사로는 예리고 길에 인접한 마을에서 친구들과 유월절을 축하하려고 주선해 놓았다. 이제 예수는 그들이 있는 곳, 나사로의 집에서, 유월절을 지내자고 제안했다. 나사로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희생 양이 하나도 없소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러한 유치하고 의미 없는 의식에 참으로 관심이 없다는 취지로, 길지만 납득이 가는 설명을 시작했다. 그들은 엄숙하고 뜨겁게 기도를 드린 뒤에 일어섰고 예수는 말했다. “내 민족의 유치하고 어두운 지성들은 모세가 지시한 대로 저희의 하나님을 섬기게 하라. 저희가 그리하는 것이 좋지만, 생명의 빛을 본 우리는 이제 더, 어두운 죽음의 길을 통해서 우리 아버지께 다가가지 말자. 우리 아버지의 사랑이 영원하다는 진리를 알고서 해방되자.”
127:6.7 (1404.6) 그날 저녁 땅거미가 질 무렵에, 네 사람은 앉아서 희생 양 없이 경건한 유대인들이 축하한 첫 유월절 축제의 저녁을 먹었다. 부풀리지 않은 빵과 포도주가 이 유월절을 위하여 준비되었다. 예수는 “생명의 빵”과 “생명의 물”이라 이름 지은 이 상징적 음식을 친구들에게 덜어주었고, 막 나누어 준 가르침을 엄숙히 좇아서 먹었다. 나중에 베다니를 찾았을 때는 언제나, 이 성스러운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 그의 버릇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에게 이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처음에 깜짝 놀랐지만, 차츰 그의 생각을 알아듣기 시작했다. 그랬어도 이 새로운 유월절 개념을 집안에 들여올 생각이 없다고 안심시켰을 때, 어머니는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이들과 함께 집에서 그는 해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계속하여 유월절을 지냈다.
127:6.8 (1404.7) 이 해 동안에 마리아는 결혼에 대하여 예수와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는 그가 가족을 돌보는 책임에서 풀려난다면 결혼할 것인가 터놓고 물었다. 눈앞에 닥친 의무가 결혼을 막았기 때문에 그 문제를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어머니에게 설명했다. 언제라도 결혼 생활에 들어갈 것인가 의심이 든다고 표현했다. 모든 그러한 일은 “나의 때”, 즉 “내 아버지의 일이 시작되어야 할”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육신으로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머리 속에서 이미 작정했기 때문에, 그는 인간적 결혼 문제를 전혀 거들떠보지 않았다.
127:6.9 (1405.1) 이 해에 그는 필사 성품과 신의 성품을 더욱 섞어서 단순하고 효과적인 한 인간 개성으로 만드는 과제를 새롭게 시작했다. 계속하여 그의 도덕적 지위가 높아지고 영적 깨달음이 늘어났다.
127:6.10 (1405.2) (집을 제외하고) 나사렛 재산이 다 사라졌지만, 이 해에 가버나움에 있던 한 부동산의 지분(持分)을 팔아서 조금 재정의 도움을 받았다. 이것은 요셉의 전 재산의 마지막이었다. 이 가버나움 부동산은 세베대라 이름하는 배 만드는 사람과 함께 처분했다.
127:6.11 (1405.3) 요셉은 이 해에 회당 학교를 마쳤고, 집의 목수 작업장에 있는 작은 벤치에서 일을 시작하려고 준비했다. 아버지의 재산은 바닥이 났지만, 세 사람이 이제 정상으로 일하고 있으니 가난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리라는 전망이 보였다.
127:6.12 (1405.4) 예수는 빨리 남자, 그저 젊은이가 아니라 어른이 되고 있다. 책임지는 일을 잘 배웠다. 실망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일을 해나가는가 알고 있다. 계획이 꺾이고 목적이 일시 실패했을 때 태연히 견딘다. 불공평을 당했을 때에도 공정하고 정당하기를 배워왔다. 영적으로 살려는 이상과 땅에서 존재하는 실용적 요구를 어떻게 조절하는가 배우고 있다. 가깝게 눈앞에 닥친 필요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수고하면서, 더 높고 멀리 있는 이상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어떻게 계획하는가 배우고 있다. 큰 뜻을 인간적 상황에서 닥치는 평범한 요구에 적응하는 솜씨를 꾸준히 쌓고 있다. 물질적 성취 작용을 개시하기 위하여 영적 추진 에너지를 이용하는 기술을 아주 거의 통달했다. 땅에서 계속 살면서, 어떻게 하늘의 삶을 사는가 천천히 배우고 있다. 한편으로 땅에 있는 가족의 아이들을 안내하고 지도하는 아버지 노릇을 맡으면서, 갈수록 더 하늘 아버지가 궁극에 인도하시는 데 의존한다. 패배에 빠지려 하는 바로 그 문턱에서 솜씨 있게 승리를 낚아채는 데 숙달되고 있다. 시간 세계에서 닥치는 어려움을 어떻게 영원한 승리로 바꾸는가 배우고 있다.
127:6.13 (1405.5) 그래서 해가 지남에 따라서, 시공 세계에서 필사 육체가 사는 것처럼, 이 나사렛 젊은이는 계속 인생을 체험한다. 유란시아에서 한껏, 대표적이고 충만한 인생을 산다. 그가 만든 인간들이 첫 생애, 즉 육체를 입고 사는 일생에 짧고 벅찬 여러 해 동안에 거치는 체험을 겪으면서 성숙하여, 이 세상을 떠났다. 이 인간 체험 모두가 우주 군주의 영원한 재산이다. 그는 우리를 이해하는 형이자 공감하는 친구요, 경험이 많은 군주이자 자비로운 아버지이다.
127:6.14 (1405.6) 아이로서 방대한 양의 지식을 쌓았고, 젊은이로서 이 정보를 가려내고 분류하고 연결 지었으며, 이제 그 땅에서 어른으로서, 이 세상을 비롯하여 온 네바돈 우주에 두루, 사람이 사는 모든 다른 구체에 있는 동포 필사자의 이익을 위하여 나중에 그의 가르침과 헌신과 봉사에서 이용하려는 준비로 이 정신 재산을 비로소 정리한다.
127:6.15 (1405.7) 그는 이 땅의 아기로서 세상에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연달아 소년기와 청년기 단계를 거쳤다. 이제 성년기의 문턱에 서 있고, 인간 생활의 체험을 풍부히 겪어 왔다. 인간 성품을 충만히 이해하며, 인간 성품의 약점을 알아보는 이해심이 가득하다. 그는 어떤 나이나 어느 단계에 있는 필사 인간에게도,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계시하는 신다운 기술에 숙달되고 있다.
127:6.16 (1406.1) 이제 완전히 자란 남자, 그 땅에 어른으로서, 하나님을 사람에게 드러내고,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최고의 사명을 계속하려고 준비한다.
128:0.1 (1407.1) 어른 시절에 접어들면서, 나사렛 예수는 땅에서 정상이며 보통 사람으로 살아 갔고, 계속 그렇게 살았다. 예수는 다른 아이들이 오는 것과 똑같이 이 세상에 왔고, 부모를 선택하는 데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일곱째이자 마지막 자신 수여, 즉 필사 육체의 모습으로 육신화(肉身化)를 실천할 행성으로서 이 특별한 세계를 선택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밖에 그는 세상에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나타났고, 다른 필사자들이 이 세계에서, 또 비슷한 세계에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역의 아이로서 자라고 환경의 변천과 씨름하였다.
128:0.2 (1407.2)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자신을 수여하는 두 가지 목적을 반드시 기억하여라:
128:0.3 (1407.3) 1. 필사 육체를 입고서 한 인간의 일생을 끝까지 사는 체험을 통달하는 것, 즉 네바돈에서 그의 통치권을 완전히 얻는 것.
128:0.4 (1407.4) 2. 우주의 아버지를 시공 세계에서 거주하는 필사자들에게 드러내는 것, 바로 이 필사자들이 우주의 아버지를 더 잘 이해하도록 더 효과 있게 인도하는 것.
128:0.5 (1407.5) 모든 다른 생물의 이익과 우주의 이점은 부수되는 것이요, 필사자로 자신을 수여하는 이 주요 목적에 2차적인 것이었다.
128:1.1 (1407.6) 성년기에 도달하면서, 예수는 가장 낮은 형태로 사는 지적(知的) 인간의 일생에 관하여 지식을 통달하는 체험을 마치는 과제를 열심히, 그리고 완전히 자의식하면서 시작하였고, 이로서 자신이 창조한 우주를 제한 없이 다스리는 권한을 마침내, 완전히 얻었다. 그는 자기의 두 가지 성품을 충분히 깨닫고서 이 엄청난 일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이 두 성품을 하나로, 나사렛 예수로 효과적으로 통합하였다.
128:1.2 (1407.7) 요수아 벤 요셉은 그가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필사 인간임을 잘 알았다. 이것은 첫 칭호, 사람의 아들을 고른 데서 나타난다. 참으로 피와 살로 된 몸을 가진 자였으니, 지금도 군주 권한으로 한 우주의 운명을 주관하면서, 수고를 톡톡히 해서 얻은 수많은 칭호 가운데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아직도 지닌다. 우주의 아버지의 창조하는 말씀, 즉 창조 아들이 “육체가 되어 유란시아에서 이 땅의 사람으로서 거했다”는 말씀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그는 수고하고 지쳤고 쉬고 잠을 잤다. 배고픔을 느끼고 그런 욕구를 먹을 것으로 채웠다. 목이 말랐고, 목마름을 물로 가라앉혔다. 그는 인간의 온갖 느낌과 감정을 체험하였다. “모든 일에 너희처럼 시험을 받았으며” 고통을 받다가 죽었다.
128:1.3 (1407.8) 이 땅의 다른 필사자와 똑같이, 지식을 얻고 경험을 쌓았으며, 이 두 가지를 통합하여 지혜로 만들었다. 세례를 받기까지, 아무런 초자연의 힘을 이용하지 않았다.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서 받은 인간 자질의 일부가 아닌 어떤 수단도 사용하지 않았다.
128:1.4 (1408.1) 인간이 되기 전의 존재로 지녔던 속성에 관하여 언급하면, 이를 자신의 몸에서 비웠다. 대중을 위한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는 사람과 사건들에 관한 지식을 전적으로 스스로 제한하였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참된 사람이었다.
128:1.5 (1408.2) 영원히, 영화롭게 이것은 참말이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느낌으로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 높은 통치자이라. 우리처럼 모든 점에서 단련되고 시험받았으되 죄가 없는 군주를 우리가 가졌느니라.” 자신이 고통받고, 시험받고 단련되었기 때문에, 혼란과 곤궁에 빠진 자들을 넘치게 이해하고 보살필 수 있다.
128:1.6 (1408.3) 나사렛 목수는 자기 앞에 닥친 일을 충분히 이해했지만, 인간 생애가 자연히 흘러가는 경로를 따라서 살기를 택하였다. 이 중에 어떤 문제에서 이처럼 기록되었다시피, 그는 필사 인간에게 정말로 본보기였다: “이 정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던 것 같이, 너희 속에 있도록 하라. 하나님의 성품을 타고났은즉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자기를 조금도 중요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생물의 형태를 취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났느니라. 이렇게 사람으로 모습을 입었은즉, 자기를 낮추어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서 죽기까지도 복종하였느니라.”
128:1.7 (1408.4) 인간 가족에서 모든 다른 사람이 인생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필사자로 살았으며 “그는 육체로 있던 시절에 무척 자주, 모든 악에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분에게, 간절한 느낌으로 눈물을 흘리기까지 기도와 간구를 드렸느니라. 그리고 믿었은즉 그의 기도가 효력이 있었느니라.” 따라서 자비와 이해심으로 형제들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도록, 모든 면에서 그들과 같이 지음받는 것이 당연하다.
128:1.8 (1408.5) 그는 자기가 인간의 성품을 지녔다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그 인간 성품은 자명한 것이었고, 언제나 인간 성품이 그의 의식 속에 있었다. 그러나 신다운 성품에 대해서 말하면, 언제나 의심과 추측의 여지가 있었고, 적어도 세례받는 사건 바로 전까지, 이것이 참말이었다. 신성(神性)의 자각은 느렸고,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스럽게 점진적으로 드러났다. 신성이 이렇게 드러나고 이를 자각한 것은 예루살렘에서, 열세 살이 채 안 되었을 때, 그가 사람으로 살면서 처음으로 초자연적 일이 일어난 것과 함께 시작되었다. 신의 성품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이 체험은, 육체로 있는 동안 두 번째 초자연적 체험을 거칠 때 끝났다. 이 사건은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을 때 따라서 일어났고, 이 사건은 봉사하고 가르치는 공생애(公生涯)의 시작을 표시했다.
128:1.9 (1408.6) 한 번은 열세 살 때, 한 번은 세례받을 때, 이렇게 두 번 하늘의 방문이 있던 사이에 육신화된 이 창조 아들의 생활에서 아무런 초자연이나 초인간의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는 해도, 베들레헴의 아기였고 나사렛의 소년이요 젊은이였던 이 나사렛 사람은 실제로, 한 우주의 육신화된 창조자였다. 그러나 결코 이 힘을 조금도 쓴 적이 없다. 또한 인생을 살면서, 요한에게 세례받은 날까지, 수호 세라핌의 안내를 제외하고, 하늘 존재들의 안내도 받지 않았다. 이처럼 증언하는 우리는 무엇에 관하여 말하는가 사정을 알고 있다.
128:1.10 (1408.7) 그래도 육체를 입고 살았던 이 여러 해 동안, 그는 참으로 신다웠다. 실제로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한 창조 아들이었다. 통치권을 얻는, 순전한 필사자 체험을 절차에 따라 완수하고 나서, 일단 공생애를 채택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대중 앞에서 서슴지 않고 인정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시작이요 끝이라,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서슴지 않고 선언했다. 후일에 사람들이 이렇게 일컬었을 때, 그는 조금도 마다하지 않았다: 영광의 주, 우주의 통치자, 모든 창조의 주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만민의 주, 우리의 주 우리의 하나님, 우리와 함께 있고 어느 세계에 어떤 이름보다도 높은 이름을 가진 하나님, 우주의 전능자, 이 세계를 창조한 우주 지성,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물을 몸에 감춘 이, 만물을 채우는 충만한 이, 영원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을 몸 안에 담고 계신 이, 하늘과 땅의 창조자, 우주의 지지자, 온 땅의 재판관, 영생 수여자, 참 목자, 세상의 구원자, 우리를 구원하는 선장이라고.
128:1.11 (1409.1) 순전히 인간다운 생활로부터, 인간 속에서, 인간을 위하여, 이 세상의 인류에게, 그리고 모든 다른 세계를 위하여 신의 직분을 자의식(自意識)하는 후기에 들어간 뒤에 이 칭호들이 적용되자, 그는 어느 것에도 결코 반대하지 않았다. 예수는 그에게 적용된 오직 한 가지 칭호를 사양했다. 한때 이마누엘이라 일컬음을 받았을 때, 단지 “내가 아니라, 그는 내 형이라”하고 대답했다.
128:1.12 (1409.2) 언제나, 땅에서 생활의 폭이 넓어진 뒤에도, 예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온순하게 복종하였다.
128:1.13 (1409.3) 세례를 받은 뒤에 그는 진지한 신자와 감사하는 추종자들이 숭배하도록 버려두고 개의치 않았다. 가난과 씨름하고, 가족을 위해서 생활에 필요한 것을 마련하려고 두 손으로 수고하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식은 짙어지고 있었다. 하늘을 짓고 인간의 존재로서 지금 살아 가고 있는 바로 이 땅을 지은 이가 자신임을 알았다. 바라보고 있는 큰 우주에 두루, 하늘 존재들의 무리도 마찬가지로, 이 나사렛 사람이 사랑하는 군주요 아버지인 창조자인 것을 알았다. 이 여러 해 동안 내내, 심오한 긴장감이 네바돈 우주를 휩쓸었다. 하늘의 모든 눈이 줄곧 유란시아에, 팔레스타인에 쏠렸다.
128:1.14 (1409.4) 이 해에 예수는 요셉과 함께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성화 예식을 치르려고 야고보를 성전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요셉을 데리고 가는 것이 의무라고 판단했다. 가족을 다루는 데 예수는 결코 조금도 편애를 보인 적이 없었다. 여느 때 다니던 요단강 유역의 길로 요셉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지만, 요단강 동쪽 길로 나사렛으로 돌아왔고, 이 길은 아마투스를 통과했다. 요단강을 내려가면서, 예수는 유대인의 역사를 요셉에게 일러주었고, 돌아오는 길에 강 동쪽의 이 지역에 거주했다는 전통이 있는, 이름난 루벤ㆍ갓ㆍ길르앗 부족들의 경험에 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128:1.15 (1409.5) 요셉은 형의 일생의 사명에 관하여 유도하는 질문을 많이 했으나 이 대부분의 물음에 예수는 다만 “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하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나 이 사사로운 토론에서 여러 말씀이 흘러나왔고, 후일에 세상을 뒤흔드는 사건들 가운데서 요셉은 이를 기억했다. 요셉과 함께, 예수는 베다니에서 세 친구와 더불어 이 유월절을 지냈고, 이 축제 기념 행사에 참석하려고 예루살렘에 있을 때 이렇게 하는 버릇이 있었다.
128:2.1 (1409.6) 이 해는 예수의 동생들이 청년기의 문제와 적응에 따르는 특별한 시련과 고난에 부딪치는 몇 년 중 한 해였다. 예수는 이제 일곱 살에서 열 여덟 살에 이르는 동생들이 있었고, 이들이 새로이 지적 및 감정적 생활을 자각하는 데 적응하도록 도와주느라고 계속 바빴다. 청년기 문제들이 어린 동생들의 생활에서 일어남에 따라서, 그는 이처럼 그러한 문제들과 맞붙어 씨름해야 했다.
128:2.2 (1410.1) 이 해에 시몬은 학교를 졸업했고, 예수의 옛날 소년 시절의 친구이자 항상 대기하여 그를 방어했던 석공(石工) 야곱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몇 차례 가족 회의를 연 결과, 소년들이 모두 목수 일에 손대는 것이 현명치 않다는 결정이 내렸다. 직업을 다양화함으로 그들이 건물 전체를 세우는 계약을 받을 준비가 될 것이라 생각되었다. 또 한편, 세 사람이 전시간 목수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바쁘지는 않았다.
128:2.3 (1410.2) 예수는 이 해에 주택의 끝 손질과 가구 만드는 일을 계속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카라반 수선 작업장에서 보냈다. 야고보가 작업장 지키는 일을 교대하기 시작했다. 이 해의 후반에, 나사렛 근방에서 목수 일이 뜸할 때, 예수는 야고보에게 수선 작업장을 맡기고, 요셉을 집 벤치에 두었고, 한편 그는 대장장이와 함께 일하려고 세포리스로 건너갔다. 금속을 가지고 여섯 달 동안 일했고, 모루 일에 어지간한 기술을 쌓았다.
128:2.4 (1410.3) 세포리스에서 새 일자리를 잡기 전에, 예수는 정기 가족 회의를 열고 그때 열여덟 갓 넘은 야고보를 엄숙하게 임시 가장으로 임명했다. 동생에게 마음을 다하여 지원하고 충분히 협조하기로 약속했고, 가족의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야고보에게 복종하겠다는 정식 약속을 받아냈다. 이날부터 야고보는 가족을 위하여 완전한 재정 책임을 맡았고, 예수는 동생에게 주마다 정해진 돈을 냈다. 예수는 다시 야고보의 손에서 고삐를 빼앗지 않았다. 세포리스에서 일하는 동안, 필요하다면 밤마다 집으로 걸어갈 수 있었지만, 날씨와 다른 이유들을 대면서, 일부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참 동기는 야고보와 요셉에게 가족을 책임지는 훈련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서서히 가족이 혼자 서게 만드는 과정을 시작했다. 새 계획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조언을 주고 도움되는 제안을 하려고, 안식일마다 예수는 나사렛으로 돌아왔고 필요한 경우에는 때때로 주중에 왔다.
128:2.5 (1410.4) 여섯 달 동안이나 세포리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예수에게 이방인의 생활 관점을 더 잘 알게 하는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이방인들과 함께 일하고 함께 살았으며,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들의 사는 습성과 이방인의 생각에 대해서 자세히 공들여 연구하였다.
128:2.6 (1410.5) 헤롯 안티파스의 고향인 이 도시의 도덕 수준은 카라반 도시 나사렛의 수준에도 훨씬 못 미쳤기 때문에, 세포리스에서 여섯 달 머무른 뒤에, 예수는 기꺼이 나사렛으로 돌아오는 구실을 찾았다. 그가 소속되어 일하던 집단은 세포리스와 새 도시 티베리아스, 두 곳에서 공공 사업에 종사하기로 되었고, 그는 헤롯 안티파스의 감독 밑에서는 어떤 종류의 일자리도 상관하기 싫었다. 예수의 견지에서 다른 여러 이유로 그가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것이 현명하였다. 수선 작업장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가족의 일을 몸소 지시하는 일을 다시 맡지 않았다. 그는 작업장에서 야고보와 함께 일했고, 가능한 한 야고보가 집의 감독을 계속하도록 두었다. 그는 야고보가 가족 경비를 관리하고 가정 예산을 처리하는 것을 다치지 않은 채로 두었다.
128:2.7 (1410.6) 예수는 바로 그러한 현명하고 생각 깊은 계획으로, 가족 일에 적극 참여하지 않고 마침내 물러서기 위하여 길을 준비하였다. 가족의 임시 우두머리로서 야고보가 2년 동안 경험을 가졌을 때, 그(야고보)가 결혼하기 꼭 2년 전에, 요셉이 가족 기금을 책임지는 자리에 앉았고, 그가 집의 일반 관리를 맡았다.
128:3.1 (1411.1) 이 해에, 네 사람이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정의 압박이 조금 덜어졌다. 미리암은 우유와 버터를 팔아서 어지간히 벌었고, 마르다는 천 짜는 데 솜씨 있는 사람이 되었다. 수선 작업장의 구입 가격은 3분의 1이 넘게 지불되었다. 형편이 좋아서 유월절을 치르기 위하여, 시몬을 예루살렘으로 데려가려고 예수는 3주 동안 일을 쉴 정도였다. 이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가장 오랫동안 나날의 노동에서 벗어난 기간이었다.
128:3.2 (1411.2) 그들은 데카폴리스의 길로, 펠라ㆍ게라사ㆍ필라델피아ㆍ헤스본ㆍ예리고를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했다. 바닷가 길로 리다ㆍ요파ㆍ케자리아를 지나치고, 다음에 갈멜산을 돌아서 프톨레마이스로, 그리고 나사렛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으로 인하여 예수는 예루살렘 지역 북쪽의 팔레스타인 전체에 익숙하게 되었다.
128:3.3 (1411.3) 필라델피아에서 예수와 시몬은 다마스커스에서 온 한 상인(商人)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나사렛에서 온 형제를 크게 좋아하게 되었고, 그래서 함께 자기의 예루살렘 본부에서 멈추자고 고집하였다. 시몬이 성전 행사에 참석한 동안에, 예수는 잘 교육받고 많이 여행한 사람, 세상일에 훤한 이 사람과 이야기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상인은 카라반 낙타를 4천 마리 넘게 소유했고, 로마 세계 전역에 걸쳐 사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로마로 가는 길이었다. 예수에게 다마스커스로 와서 그의 동양 수입(輸入) 사업에 손을 대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자기 가족을 그렇게 멀리 떠나는 것이 정당하다 느끼지 않는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아득히 먼 도시들, 그리고 극서와 극동의 더욱 먼 나라들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았다. 이 나라들에 대해서 카라반 승객과 안내자들이 말하는 것을 귀가 닳도록 전에 들었다.
128:3.4 (1411.4) 시몬은 예루살렘 방문이 대단히 즐거웠다. 새 계명의 아들들이 유월절에 성화 예식을 치를 때, 시몬은 정식으로 이스라엘 연방에 가입되었다. 시몬이 유월절 예식에 간 동안에, 예수는 방문자들 무리와 섞였고, 수많은 개종한 이방인들과 함께 흥미 있는 시간을 개인적으로 많이 가졌다.
128:3.5 (1411.5) 아마도 이 모든 접촉 가운데 가장 주목할 것은 스테반이라는 이름의 젊은이, 그리스어를 하는 사람과 만난 것이었다. 이 젊은이는 예루살렘을 처음 방문하는 길이었고, 유월절 주간 목요일 오후에 우연히 예수를 만났다. 둘이서 아스모니아 궁전을 구경하며 거니는 동안, 예수는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렇게 그들은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은 생명의 길과 참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관하여 네 시간의 토론으로 이어졌다. 스테반은 예수의 말씀에 엄청나게 감명을 받았고, 결코 그 말씀을 잊지 않았다.
128:3.6 (1411.6) 이 사람이 나중에 예수의 가르침을 믿게 된 바로 그 스테반이었다. 이 초기의 복음을 대담하게 전파한 것 때문에 그는 성난 유대인들에게 돌로 쳐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새 복음에 대하여 스테반이 자기의 견해를 선포하면서 보인 특별한 대담성은 어느 정도, 전에 예수와 가졌던 이 회견에 직접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그러나 스테반은 15년쯤 앞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갈릴리 사람이, 나중에 세상의 구원자라고 자신이 선포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는 것을 결코 털끝 만큼도 짐작하지 못했다. 스테반은 예수를 위해서 오래지 않아 죽게 될 운명이었고, 이처럼 새로이 생성되는 기독교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유대인의 성전과 그 전통적 관습을 공격한 값으로 목숨을 바쳤을 때, 타르수스 시민,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구경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 그리스인이 신앙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가 보았을 때, 사울의 가슴 속에 어떤 감정이 북받쳐 올랐고, 이것은 마침내 그로 하여금 스테반이 목숨을 바쳐 싸운 그 운동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후일에 그는 과감하고 꺾일 줄 모르는 바울, 유일하게 그 기초를 세운 사람은 아니라도, 기독교의 철학자가 되었다.
128:3.7 (1412.1) 유월절 주간이 지나고 첫 일요일에, 시몬과 예수는 나사렛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떠났다. 시몬은 이번 여행에서 예수에게서 받은 가르침을 결코 잊지 않았다. 예수를 언제나 사랑했지만, 이제 그는 가장인 형을 비로소 이해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골을 통해서 여행하고 길가에서 식사를 준비하면서, 그들은 가슴을 털어놓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요일 한낮에 집에 다다랐고, 시몬은 자기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느라고 그날 밤, 가족을 늦게까지 붙들어 두었다.
128:3.8 (1412.2) 예루살렘에 있을 때 “낯선 사람들, 특히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예수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고 시몬이 보고하여 마리아는 상당히 마음이 언짢았다. 예수가 어째서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가졌는가, 어째서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그들의 생활 방식에 대하여 듣고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발견하고 싶어 하는가, 가족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128:3.9 (1412.3) 갈수록 더 나사렛 가족은 눈앞에 닥친 여러 인간적 문제에 정신을 빼앗겼다. 예수의 앞날의 사명을 언급하는 일이 뜸하였고, 그 자신도 앞날의 생애에 대하여 입을 여는 일이 아주 드물었다. 어머니는 그가 약속의 아이라는 생각을 떠올리는 일이 드물었다. 땅에서 예수가 어떤 신성한 사명이라도 이룰 것이라는 생각을 어머니는 천천히 버리고 있었다. 그래도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가브리엘이 방문한 것을 멈추어 돌이켜볼 때, 어머니의 믿음은 이따금 되살아났다.
128:4.1 (1412.4)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필라델피아에서 처음 만났던 상인의 손님이 되어 예수는 다마스커스에서 이 해의 마지막 넉 달을 보냈다. 이 상인의 대표 하나가 나사렛을 지나면서 예수를 수소문하였고 다마스커스까지 그를 동반하였다. 일부 유대인의 피를 받은 이 상인은 다마스커스에 종교 철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하나 세우는 데 엄청난 돈을 바치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능가할 학문의 중심을 세울 계획을 품고 있었다. 이 새 사업에 우두머리가 되는 준비로, 예수가 당장 긴 여행을 떠나서 세계의 여러 교육 중심을 둘러보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것은 순전히 인간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예수가 일찍이 마주친 가장 큰 유혹 가운데 하나였다.
128:4.2 (1412.5) 대번에 이 상인은 새로 계획하는 이 학교를 지원하기로 찬성한 열두 명의 상인 및 은행가의 무리를 예수 앞으로 데려왔다. 예수는 학교를 만드는 제안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그들이 그 조직을 계획하는 데 도왔다. 그러나 언제나 다른 의무, 말하지 못하지만 이전에 지워진 의무 때문에, 그렇게 야심에 찬 사업을 지도하는 책임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를 후원하려는 사람은 집요했고, 집에서 얼마큼 번역하는 일에 예수를 돈을 주고 고용하였다. 한편 그와 아내, 아들과 딸들은 그들이 내민 명예를 예수가 받아들이게 만들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는 찬성하려 하지 않았다. 땅에서 그의 사명이 교육 기관의 지원을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아무리 좋은 뜻을 가졌더라도, 사람에게 빚을 져서 조금이라도 “사람의 심의”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128:4.3 (1412.6) 그가 지도력을 보인 뒤에도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물리쳤는데, 그는 대선생으로서 다마스커스의 사업가와 은행가들의 인정과 환호를 받았으며, 이름 없고 알려지지 않은 나사렛 목수였을 때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128:4.4 (1412.7) 그는 이 제안에 대하여 가족에게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 해가 저물 때, 마치 다마스커스의 친구들이 치켜세워 내민 제안에 전혀 유혹받은 일이 없었던 것처럼 나사렛으로 돌아와서 나날의 책임을 돌보았다. 이 다마스커스 사람들도, 후일에 온 유대인 사회를 뒤집어엎은 가버나움 시민, 그리고 그들의 총 재산으로 샀을지 몰랐던 명예를 감히 물리친 예전의 나사렛 목수, 이 두 사람을 연결짓지 않았다.
128:4.5 (1413.1) 예수는 아주 슬기롭게, 일부러 생애의 여러 사건을 분리시키려고 머리를 썼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것들이 단 한 사람이 행한 일로 연결되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와 경쟁할 학교를 다마스커스에 창립하는 기회를 물리친, 바로 이 이상한 갈릴리 사람의 이야기가 되풀이되는 것을 그는 후일에 여러 번 들었다.
128:4.6 (1413.2) 땅에서 얻는 체험의 어떤 모습들을 분리하려고 애썼을 때 염두에 두었던 한 가지 목적이 있었으니, 다능하고 눈부신 경력 쌓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그러한 경력은 후일의 세대로 하여금 그가 실천하고 가르친 진리에 복종하는 대신에, 그 선생을 숭배하게 만들 것이었다. 예수는 인간으로 이룬 업적의 기록을 쌓음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가르침 대신에 다른 데 한눈 팔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추종자들이 그에 관한 종교를 만들 유혹을 받으리라는 것, 그런 종교가 그가 세상에 선포하려 의도한 하늘나라 복음과 경쟁이 될지 모른다는 것을 아주 일찍부터 깨달았다. 따라서 그의 가르침을 선포하는 대신에, 가르치는 그 선생을 높이는, 자연스러운 이 인간적 성향에 이용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이나 그의 파란 많은 생애에서 억제하려고 한결같이 애썼다.
128:4.7 (1413.3) 바로 이 동기가 또한 땅에서 다채롭게 살았던 일생의 여러 기간에 어째서 그가 다른 칭호로 알려지도록 버려두었는가 설명한다. 또한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부당한 영향이라도 미쳐서 자신들의 정직한 확신을 버리고 그를 믿도록 이끌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지성을 부당하거나 불공평하게 이용하기를 언제나 물리쳤다. 그의 가르침에서 드러나는 영적 실체에 사람들의 마음이 반응하지 않으면, 자기를 신뢰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128:4.8 (1413.4) 이 해가 저물 때가 되자 나사렛 가정은 상당히 순조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자라고 있었고, 마리아는 예수가 집을 떠나 있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는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서, 번 돈을 계속 야고보에게 넘겨주었고, 아주 작은 금액만 당장 개인이 쓸 비용으로 남겨 두었다.
128:4.9 (1413.5) 세월이 지나면서 이 사람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보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이 땅의 사람, 사람들 사이에 그저 평범한 사람과 아주 비슷하게 된 듯하였다. 그 수여가 바로 이런 방법으로 펼쳐지도록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예정하셨다.
128:5.1 (1413.6) 이때가 가족에 대한 책임을 벗고 예수가 비교적 자유를 얻은 첫해였다. 야고보는 예수의 조언과 재정적 도움을 얻어 가정을 아주 훌륭하게 관리하였다.
128:5.2 (1413.7) 이 해의 유월절 다음 주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한 젊은이가, 이 해 얼마 뒤에 팔레스타인의 바닷가에 어떤 지점에서 예수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의 무리가 만나는 것을 주선하려고 나사렛으로 왔다. 이 회담은 6월 중순으로 정해졌고, 예수는 알렉산드리아의 저명한 유대인 다섯 명을 만나려고 케자리아로 갔다. 그들은 자기네 도시에서 한 종교 스승으로서 그에게 자리를 잡으라고 간청했고, 시작하라는 권유로 주요 회당에서 하잔에게 조수(助手)가 되는 자리를 내밀었다.
128:5.3 (1414.1) 이 위원회의 대변자들은 알렉산드리아가 전 세계를 위하여 유대인 문화의 본부가 될 운명을 가졌다, 유대인의 관심사의 헬라파 경향은 바빌로니아 학파를 실질적으로 앞섰다고 예수에게 설명했다.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팔레스타인 전역에 걸쳐 반란이 있으리라는 불길한 소문을 예수에게 상기시켰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이 어떤 폭동을 일으키더라도 이는 민족의 자살 행위와 다름없으리라, 로마의 철권은 석 달 안에 반란을 짓밟으리라, 그리고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성전은 파괴되리라,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으리라고 그에게 장담했다.
128:5.4 (1414.2) 그들이 하고 싶어 했던 말을 전부 듣고서, 예수는 그들이 흉금을 털어놓은 것에 감사를 표했다. 알렉산드리아로 가기를 사양하면서, “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내용의 말을 하였다. 애써서 그들이 부여하려 했던 명예에 그가 관심이 없는 듯이 보여서 그들은 어리둥절했다. 예수와 작별하기 전에, 알렉산드리아 친구들의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과 회담하려고 케자리아로 오는 데 든 시간과 경비를 보상하는 뜻으로 돈 봉투를 예수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마찬가지로 돈을 물리치며 말했다. “요셉의 집은 자선금을 받은 적이 없소. 내 팔이 건강하고 동생들이 일할 수 있는 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빵을 먹을 수 없소이다.”
128:5.5 (1414.3) 에집트에서 온 친구들은 집을 향해 돛을 달았고, 팔레스타인에서 그렇게 큰 소동을 벌인 사람, 배 만드는 가버나움 사람의 소문을 후일에 들었을 때, 그가 장성한 베들레헴 아기요, 알렉산드리아에서 큰 선생이 되라는 초청을 긴 말 없이 그렇게 물리친 사람, 이상하게 행동하던 바로 그 갈릴리 사람이었다는 것을 거의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128:5.6 (1414.4) 예수는 나사렛으로 돌아왔다. 이 해의 나머지는 전생애에서 가장 사건이 없었던 반년이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보통 일과에서 벗어나 잠시 이 휴식을 즐겼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많이 대화를 나누었고, 자신의 인간 정신을 통솔하는 데 크게 진전을 보았다.
128:5.7 (1414.5) 그러나 시공 세계에서 사람의 일은 오랫동안 사건 없이 진행되지 않는다. 12월에 야고보는 예수와 사사롭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가 나사렛의 젊은 여인 에스타와 깊이 사랑에 빠졌다, 주선해 줄 수 있다면 언젠가 결혼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그는 요셉이 곧 열여덟이 될 터이고, 가족의 임시 가장으로서 수고하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좋으리라는 사실에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예수는 야고보가 결혼하기 전에, 요셉이 집안 일의 관리를 맡도록 적절히 훈련시킨다는 조건으로, 2년 뒤에 야고보가 결혼하는 데 찬성하였다.
128:5.8 (1414.6) 이제 일이 터지기 시작했다. 결혼 이야기가 퍼졌다. 야고보가 결혼 일로 예수의 승낙을 얻는 데 성공한 것은 미리암으로 하여금 자기 계획을 가지고 용감히 오빠인 가장에게 다가가게 만들었다. 석공인 아들 야곱은 한때 예수의 보호자로 자처하였고, 지금은 야고보와 요셉의 사업 동료이며, 오랫동안 미리암과 결혼하려고 애썼다. 예수 앞에 미리암이 자기의 계획을 내놓았을 때, 그는 야곱이 찾아와서 여동생을 얻으려고 정식으로 요청해야 한다고 지시하고, 마르다가 제일 나이 먹은 딸로서 임무를 맡을 능력이 있다고 느끼는 때가 오자마자, 미리암이 결혼하도록 축복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28:5.9 (1414.7) 집에 있을 때, 그는 한 주에 세 번 야간 학교에서 줄곧 가르쳤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자주 성서를 낭독하고, 어머니와 이야기하고, 아이들을 가르쳤고, 대체로 이스라엘 연방에서 자격 있고 존경받는 나사렛 시민으로서 처신하였다.
128:6.1 (1415.1) 나사렛 가족이 모두 건강한 가운데 이 해가 시작되었고, 마르다가 룻을 위해서 해야 되는 어떤 일을 제외하고, 아이들이 모두 정규 학교를 마치게 되었다.
128:6.2 (1415.2) 예수는 아담 시절 이후에, 땅에서 나타난 남성 중에 가장 튼튼하고 세련된 한 표본이었다. 몸은 훌륭하게 성장했다. 머리는 활발히 움직였고, 날카롭고, 사물을 꿰뚫어보았다. 즉 같은 시대 사람들의 평균 정신 수준과 비교해서, 그의 지능은 엄청나게 발달했다. 그의 정신은 정말로 인간으로서 신다웠다.
128:6.3 (1415.3) 요셉의 재산이 없어진 이후로, 가족의 재정은 최상으로 조건이 좋았다. 카라반 수선 작업장에 대한 마지막 지불금을 치렀고,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았으며 몇 년 동안 처음으로 얼마큼의 저축이 남았다. 이것이 참말이고, 다른 동생들을 예루살렘으로 첫 유월절 예식을 위하여 데리고 간 일이 있었으니까, 예수는 (회당 학교에서 막 졸업한) 유다가 처음으로 성전을 방문하는 데 함께 가기로 했다.
128:6.4 (1415.4)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가, 사마리아를 통해서 동생을 데리고 가면 문제가 생길까 염려되어, 요단강 유역으로, 같은 길로 돌아왔다. 급한 기질과 아울러 강한 애국심 때문에, 유다는 이미 나사렛에서 몇 번이나 하찮은 문제에 말려들었다.
128:6.5 (1415.5) 시간이 되자 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했고, 성전을 처음으로 방문하러 갔다. 성전의 바로 그 광경은 혼의 아주 깊숙한 곳까지 유다를 뒤흔들고 짜릿하게 만들었는데, 이때 베다니 사람 나사로를 우연히 만났다. 예수가 나사로와 이야기하고, 합동으로 유월절 저녁을 주선하려 애쓰는 동안, 유다는 모두에게 진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가까이에 로마인 경비병 하나가 서 있었는데, 지나가는 어느 유대인 여자에게 예의에 벗어나는 말을 몇 마디 던졌다. 유다는 불 같이 분개하여 얼굴이 달아올랐고, 그 군인에게 직접, 귀에 들리는 거리 안에서, 예절 없는 것에 대하여 바로 분통을 터뜨렸다. 그런데 로마 군인들은 유대인이 불경에 가까운 어떤 태도를 보여도 이에 무척 민감했다. 그래서 경비병은 당장에 유다를 체포했다. 이것은 젊은 애국자에게 너무 지나쳤다. 예수가 경계하는 눈으로 주의를 줄 수 있기 전에, 그는 이제까지 참았던 반(反)로마 감정을 담은 비난을 거침없이 퍼부었다. 이 모두가 일을 더욱 악화시켰을 뿐이다. 예수를 동반하여, 유다는 당장에 군대의 감옥으로 끌려갔다.
128:6.6 (1415.6) 예수는 유다를 위해서 즉석 재판이나, 아니면 그날 저녁 유월절 축하에 때를 맞추어 석방을 얻어내려고 애썼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에 예루살렘에서 “거룩한 집회”가 있었기 때문에, 로마인들도 감히 한 유대인에 대한 고발을 심의하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다는 체포된 뒤 다음날 아침까지 갇혀 있었고, 예수는 함께 감옥에서 지냈다. 그들은 율법의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완전한 시민으로 받아들이는 예식이 있을 때 성전에 있지 않았다. 그 다음 어느 유월절에, 열심당을 위한 선전 활동과 관련하여 예루살렘에 갔을 때까지, 유다는 이 정식 예식을 몇 년 동안 치르지 못했다. 그가 속한 열심당은 애국 조직이었고, 그는 그 당에서 크게 활약했다.
128:6.7 (1415.7) 감옥에서 보낸 둘째 날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 예수는 유다를 위해서 군대의 판사 앞에 섰다. 예수는 동생이 나이 어린 것을 사과하고, 계속된 설명이었지만 동생의 체포로 이끈 이 사건의 도발적 성질에 관하여 분별 있는 말을 하여 그 경우를 다루었기 때문에, 재판관은 그 유대인 젊은이가 사납게 분을 터뜨린 것에 아마도 어떤 이유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의견을 표현했다. 그러한 경솔한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말라고 유다에게 경고한 뒤에, 그들을 내보내면서 예수에게 말했다. “당신은 그 소년을 지켜보는 것이 좋겠소. 당신들 모두에게 걸핏하면 많은 문제를 일으키리이다.” 그 로마인 판사의 말은 진실이었다. 유다는 예수에게 상당한 문제를 일으켰고, 언제나 그 문제는 바로 이런 성질을 가졌다. 곧 생각 없고 지혜롭지 못한 애국심의 폭발 때문에 국가의 권한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128:6.8 (1416.1) 그날 밤을 지내려고 예수와 유다는 베다니로 걸어갔다. 어째서 유월절 저녁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가 설명하였고 이튿날 나사렛을 향하여 출발했다. 예수는 가족에게 어린 동생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것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지만, 돌아온 뒤 3주쯤 되어, 이 사건에 관하여 유다와 길게 이야기했다. 예수와 이 말을 나눈 뒤에, 유다 스스로가 가족에게 이야기했다. 그는 이 고달픈 체험 전부를 통해서 가장인 형이 참을성을 보이고 관용을 베푼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128:6.9 (1416.2) 이것은 자기 가족의 한 식구와 함께 예수가 마지막으로 참석한 유월절이었다. 사람의 아들은 자신의 피붙이와 가까운 관계가 점점 더 끊어지게 될 것이었다.
128:6.10 (1416.3) 이 해에 깊이 명상에 잠기는 시간은 룻과 그 놀이 친구들 때문에 가끔 중단되었다. 이 꼬마들의 기쁨과 어린이다운 즐거움을 같이 나누려고, 예수는 언제라도 세상과 우주를 위하여 미래에 할 일의 숙고를 다음으로 미룰 준비가 되어 있었다. 꼬마들은 예수가 여러 번 예루살렘으로 여행한 체험담을 듣는 데 지칠 줄 몰랐다. 또한 동물과 자연에 대하여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크게 즐거워했다.
128:6.11 (1416.4) 수선 작업장에서는 아이들을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었다. 예수는 모래와 나무토막과 돌을 작업장 옆에 마련해 놓았고, 아이들은 떼지어 재미를 보려고 모여들었다. 놀다가 지치면, 대담한 아이들은 작업장을 들여다보았고, 주인이 바쁘지 않으면, 용감히 들어가서 말하곤 했다, “요수아 아저씨, 나와서 우리에게 신나는 이야기를 해주세요.” 그리고 나서 아이들은 손을 잡아 끌면서 그를 바깥으로 이끌곤 했다. 작업장의 모퉁이 옆에 가장 좋아하는 바위 위에 예수가 앉고, 아이들은 예수 앞에 반원을 지어 땅 바닥에 앉았다. 작은 꼬마들이 얼마나 요수아 아저씨를 좋아했는지! 꼬마들은 웃는 것, 마음껏 웃는 것을 배우고 있었다. 제일 작은 꼬마들 가운데 하나나 둘이 그의 무릎에 기어오르고 거기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표현하는 모습을 놀라워하면서 올려다보는 것이 버릇이었다. 아이들은 예수를 사랑했고, 예수는 아이들을 사랑했다.
128:6.12 (1416.5) 친구들은 그가 정치나 철학 또는 종교에 관한 깊은 토론을 하다가 어떻게 그가 그렇게 갑자기, 아주 완전히 다르게 다섯 살에서 열 살에 이르는 이 꼬마들과 명랑하고 즐겁게 장난하는 기분에 젖는가, 그의 지적 활동의 범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동생들이 자라고 여가를 더 얻게 됨에 따라서, 그리고 조카들이 생기기 전에, 그는 이 꼬마들에게 크게 주의를 기울였다. 하지만 조카들을 많이 즐길 만큼 땅에서 오래 살지는 않았다.
128:7.1 (1416.6) 이 해가 시작되자, 나사렛 예수는 그가 폭 넓은 잠재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똑같이, 적어도 때가 올 때까지는 사람의 아들로서 자신의 인격이 이 능력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충분히 확신하였다.
128:7.2 (1417.1) 이때 자신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관계에 대하여, 많이 생각은 했어도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이 모든 생각의 결론이 산 꼭대기에서 드린 기도에 한 번 나타났는데, 그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누구이든, 내가 무슨 능력을 행사하든 하지 않든 상관 없이, 나는 언제나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에 복종해 왔고, 언제나 복종하리이다.” 그래도 광대한 한 우주에 관하여 말하면, 이 사람이 나사렛 근처에서 일터로 오갈 때, “그분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물이 감춰져 있도다”하는 것이 글자 그대로 참말이었다.
128:7.3 (1417.2) 이 해 내내, 가족의 일은 유다를 제쳐놓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몇 년 동안, 야고보는 막내 동생과 문제가 있었는데, 그는 정착해서 일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생계비의 제 몫 내는 것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는 집에서 살고 싶어 했지만, 가족 유지비에서 자기 몫을 버는 데 성실하지 않았다.
128:7.4 (1417.3) 예수는 평화로운 사람이었고, 유다의 호전적 행위와 잦은 애국심의 폭발 때문에 이따금 당황했다. 야고보와 요셉은 그를 집에서 쫓아내는 데 찬성했으나 예수는 찬성하려 하지 않았다. 참을성이 몹시 요구될 때, 예수는 오직 이렇게 조언하곤 했다. “참아라. 어린 동생이 먼저 더 좋은 길을 찾고 그 길 안에서 자제하여 너희를 따르도록, 지혜롭게 조언하고 너희의 삶으로 모범을 보여라.” 예수가 지혜와 사랑으로 주는 조언은 가족의 분열을 막았고 그들은 함께 살았다. 그러나 결혼할 때까지 유다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128:7.5 (1417.4) 마리아는 예수의 앞날의 사명에 대하여 입을 여는 일이 드물었다. 이 화제가 나올 때마다, 예수는 다만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나이다.” 가족이 예수를 가까이 두고 의존하려는 경향을 벗어나게 만드는 어려운 과제를 그는 거의 마쳤다. 사람들을 위하여 실제로 봉사하는 일을 더 활발히 시작하려고, 이 나사렛 집을 때때로 비울 수 있는 날을 위하여 서둘러 준비하고 있었다.
128:7.6 (1417.5) 예수의 일곱 번째 수여에서 첫째가는 사명은 인간의 체험을 얻는 것, 네바돈 통치권의 획득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라. 바로 이 경험을 쌓으면서, 그는 유란시아와 지역 우주 전체에게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최상으로 계시하였다. 이 목적에 우연히 따르는 것으로, 그는 또한 루시퍼 반란에 관련되었던 이 행성의 복잡한 사무를 처리하는 데 착수했다.
128:7.7 (1417.6) 이 해에 예수는 여느 때보다 더 여가가 많았고, 수선 가게의 경영에 야고보를 훈련시키고 또한 집안 일을 지도하도록 요셉을 훈련시키는 데 많은 시간을 썼다. 마리아는 그가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들을 두고 어디로 가려고? 무엇을 하려고? 어머니는 이미 예수가 메시아라는 생각을 거의 버렸다.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단지 맏아들의 심중을 헤아릴 수 없었다.
128:7.8 (1417.7) 예수는 이 해에 식구들과 개인적으로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산으로 오르는 길에, 그리고 시골 길을 통해서, 오랫동안 걸을 때 자주 그들을 데리고 가곤 하였다. 추수하기 전에, 유다를 나사렛 남쪽에서 농사짓는 삼촌에게 데리고 갔으나 유다는 추수가 끝난 뒤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달아났고, 나중에 시몬은 호수에서 유다가 어부들과 함께 있음을 발견했다. 시몬이 그를 집으로 데리고 돌아왔을 때, 예수는 달아난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어부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함께 막달라로 가서, 어부인 어느 친척의 보호 밑에 그를 맡겼다. 유다는 그때부터 죽 결혼할 때까지, 꽤 무던하게 정규적으로 일했고, 결혼한 뒤에 어부로서 계속 일했다.
128:7.9 (1418.1) 마침내 예수의 남동생들이 다 일생의 직업을 고르고, 자리를 잡은 날이 왔다. 예수가 집을 떠나는 것을 위해서 무대가 준비되고 있었다.
128:7.10 (1418.2) 11월에 쌍 결혼이 있었다. 야고보와 에스타, 그리고 미리암과 야곱이 결혼했다. 이때는 참으로 기쁜 때였다. 마리아도 다시 한 번 행복했지만, 이따금 예수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큰 불안의 짐을 지고 고통스러워 했다. 예수가 소년이었을 때 했던 것처럼, 앉아서 어머니와 터놓고 이야기하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는 한결같이 의사(意思) 표시를 하지 않았고, 앞날에 대해서 도무지 입을 열지 않았다.
128:7.11 (1418.3) 야고보와 신부 에스타는 마을 서편에 작고 아담한 집으로 이사했고, 이 집은 시아버지의 선물이었다. 야고보가 어머니의 집을 계속 지원했지만, 결혼했기 때문에 그의 몫은 반으로 줄어들었다. 예수는 요셉을 가장으로 정식으로 임명하였다. 유다는 이제, 달마다 아주 충실하게 자기 몫의 돈을 집으로 보내고 있었다. 야고보와 미리암의 결혼은 유다에게 대단히 유익한 영향을 미쳤고, 쌍 결혼이 있은 다음 날, 고기잡이 터로 떠날 때, 그는 “내 임무를 충실히 하고, 필요하다면 더 할 것”을 믿어도 좋다고 요셉을 안심시켰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128:7.12 (1418.4) 아버지 야곱이 선조들과 함께 묻혔으므로, 미리암은 야곱의 집에서, 마리아의 이웃에서 살았다. 마르다는 집에서 미리암의 자리를 차지했고, 새로운 조직은 이 해가 저물기 전에 순조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128:7.13 (1418.5) 이 쌍 결혼이 있은 다음 날, 예수는 야고보와 중요한 회의를 가졌다. 그가 집을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야고보에게 비밀로 말했다. 야고보에게 수선 가게의 완전한 권리를 주었고, 정식으로 엄숙하게 그가 요셉 가문의 가장인 것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무척 감동스럽게 동생 야고보를 “내 아버지 집의 가장이자 보호자”로 세웠다. 비밀 계약을 작성하고 그들 둘이 서명했다. 수선 가게를 선물로 주는 대신에, 이제부터 야고보가 가족을 위하여 완전히 재정 책임을 맡으며, 이렇게 이 문제에 관해서 예수는 더 이상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고 분명히 적었다. 계약서에 서명한 뒤에, 예수가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아도 가족의 실제 비용을 치르도록 예산을 맞춘 뒤에, 야고보에게 말했다. “그러나, 얘야, 내 때가 올 때까지, 달마다 너에게 얼마큼 계속 보내겠다. 그러나 내가 보내는 돈은 경우에 따라 네가 써야 하느니라. 이 돈은 좋게 여기는 대로, 가족의 필수품이나 즐거움을 위해 쓰거라. 병이 있을 때 쓰거나, 가족의 어느 식구에게 뜻하지 않게 생기는 긴급 사태를 대비하여 쓰도록 하여라.”
128:7.14 (1418.6) 이렇게 아버지의 일을 공식으로 시작하기 전에, 예수는 어른으로서 살면서 집을 떠나 둘째 국면에 들어가려고 준비했다.
129:0.1 (1419.1) 예수는 나사렛 가족의 집안 일을 관리하고 식구 각자를 직접 지도하는 일로부터 완전히, 마침내 손을 떼었다. 세례받는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전까지, 그는 가족의 재정에 줄곧 돈을 부었고, 동생들 하나하나의 영적 복지에 몸소 깊은 관심을 가졌다. 과부가 된 어머니의 평안과 행복을 위하여, 언제나 인간으로서 가능한 모든 것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29:0.2 (1419.2) 사람의 아들은 이제 나사렛 집에서 영구히 떨어져 나가려고 모든 준비를 마쳤는데, 이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연히 예수는 민족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했으며, 이 자연스러운 애정은 그들에게 특별히 사랑을 쏟았기 때문에 엄청나게 커졌다. 사람은 동료에게 충만하게 헌신하면 할수록, 그들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 예수는 가족에게 아주 완전히 헌신했기 때문에, 크고 뜨거운 애정으로 가족을 사랑했다.
129:0.3 (1419.3) 예수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온 집안이 천천히 깨달았다. 오로지 예수가 출발할 뜻을 발표하기 위하여 그들을 이렇게 차츰차츰 준비시켰기 때문에, 기대하던 이별의 슬픔이 줄어들었다. 그가 이러한 궁극의 이별을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차리는 데는 4년이 넘게 걸렸다.
129:1.1 (1419.4) 이 해, 서기 21년 1월, 어느 비 오는 일요일 아침에, 예수는 아무런 절차 없이 가족을 떠났다. 단지 티베리아스에 가서, 다음에 갈릴리 바다 근처의 다른 도시들을 방문하러 간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렇게 떠났고, 결코 다시 그 집의 정규 식구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129:1.2 (1419.5) 티베리아스에서 한 주를 보냈는데, 이곳은 갈릴리의 서울인 세포리스를 곧 이어받을 새 도시였다. 흥미 있는 것을 별로 발견하지 못하자, 계속하여 막달라와 벳세다를 거쳐 가버나움으로 갔고, 거기서 멈춰서 아버지의 친구 세베대를 찾아보았다. 세베대의 아들들은 어부였고, 바로 세베대는 배 만드는 사람이었다. 나사렛 예수는 설계와 건축에 전문가였고, 나무를 다루는 일에 대가였다. 세베대는 나사렛 장인(匠人)의 솜씨를 오랫동안 듣고 있던 터였다. 오랫동안 세베대는 개량된 배를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예수 앞에 계획을 내밀고, 찾아온 목수에게 사업을 함께 하자고 제의했다. 예수는 즉시 찬성하였다.
129:1.3 (1419.6) 예수는 1년 남짓하게 세베대와 함께 일했을 뿐이었지만, 그동안에 새 종류의 배를 만들어냈고, 전혀 새로운 배 건조법을 창안하였다. 우수한 기술로, 그리고 판자를 수증기로 쪼이는 크게 개량된 방법으로, 예수와 세베대는 아주 우수한 종류의 배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 배는 옛날 종류보다 호수에서 돛을 달고 가기에 훨씬 더 안전했다. 몇 년 동안 세베대는 그의 작은 작업장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일이 더 많았고, 이런 새 종류의 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5년 안에, 호수에 있는 거의 모든 배가 가버나움에 있는 세베대의 작업장에서 건조되었다. 예수는 이 새로운 배의 설계자로서 갈릴리의 어부들에게 잘 알려지게 되었다.
129:1.4 (1420.1) 세베대는 얼마큼 부유한 사람이었다. 배 만드는 그의 작업장은 가버나움 남쪽, 호수에 있었으며, 집은 벳세다의 고기잡이 본부 가까이, 호숫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예수는 가버나움에서 머물렀던 이 해와 그 후에, 세베대의 집에서 살았다. 그는 세상에서 오랫동안 혼자, 다시 말해서 아버지 없이 일했고, 아버지의 동업자와 일하는 이 기간을 매우 즐겁게 보냈다.
129:1.5 (1420.2) 세베대의 부인 살로메는 안나스의 친척이었다. 안나스는 한때 예루살렘에서 대사제였는데, 아직도 사두개 집단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고 8년 전에야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살로메는 예수를 크게 칭찬하는 사람이 되었다. 자기의 아들들, 야고보ㆍ요한ㆍ다윗처럼 그를 사랑했고, 한편 네 딸은 예수를 오빠로 대접했다. 예수는 가끔 야고보ㆍ요한ㆍ다윗과 함께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 그들은 예수가 숙달된 조선공일 뿐 아니라 숙련된 어부인 것을 알게 되었다.
129:1.6 (1420.3) 이 해에 계속, 예수는 달마다 야고보에게 돈을 보냈다. 10월에 마르다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나사렛으로 돌아왔고, 시몬과 유다의 쌍 결혼식을 올리기 바로 전에 돌아오기까지, 2년이 넘도록 다시 나사렛에 있지 않았다.
129:1.7 (1420.4) 이 해 내내 예수는 배를 만들었고, 사람들이 어떻게 땅에서 사는가 줄곧 지켜보았다. 가버나움이 다마스커스에서 남쪽으로 가는 직통 여행 길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주 카라반 정거장에 이야기하러 가곤 하였다. 가버나움은 로마의 견고한 군사 기지였고, 수비대의 지휘관은 야웨를 믿는 이방인, 즉 “경건한 사람”이었는데, 유대인은 개종한 사람들을 그렇게 부르는 버릇이 있었다. 이 장교는 부유한 로마인 가족에 속했는데, 가버나움에 아름다운 회당 짓는 일을 자진하여 떠맡았다. 예수가 세베대와 함께 살려고 오기 얼마 전에, 그는 이 회당을 유대인들에게 기증하였다. 예수는 이 해 동안 절반이 넘게 예배를 이 새 회당에서 인도했다. 어쩌다가 예배에 참석한 카라반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그가 나사렛에서 온 목수임을 기억했다.
129:1.8 (1420.5) 세금을 물 때가 되었을 때, 예수는 자신이 “가버나움의 숙련 기술자”라고 등록하였다. 이날부터 계속 땅에서 생명이 끝날 때까지, 그는 가버나움의 거주자로 알려졌다. 결코 어떤 다른 법적 거주지를 주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사람들이 그의 거주지가 다마스커스ㆍ베다니ㆍ나사렛 아니 알렉산드리아라고 지명해도 그대로 버려두었다.
129:1.9 (1420.6) 가버나움 회당의 도서관 서고에서 그는 많은 새 책을 발견했고, 한 주에 다섯 번 저녁 시간을 열심히 공부하는 데 보냈다. 하루 저녁은 나이 든 사람들과 교제하는 데 쓰고, 하루 저녁은 젊은이들과 보냈다. 예수의 인격에는 품위 있고 영감을 주는 무엇이 있었고, 그 인격은 변함없이 젊은 사람들을 끌었다. 언제나 사람들이 그 앞에서 편안하게 느끼도록 해주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비결은 아마도 그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 언제나 관심을 가졌고, 묻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충고하는 일이 드물었다는 이 두 가지 사실에 있었다.
129:1.10 (1420.7) 세베대 가족은 예수를 거의 숭배하듯 했고, 그가 회당에 공부하러 가기 전, 저녁을 먹고 나서 밤마다 그가 진행하는 문답 시간에 거르지 않고 참석했다. 젊은 이웃 사람들도 이 저녁 식사 후 모임에 참석하려고 자주 들어왔다. 이 작은 모임에서 예수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다채로운 상급 과정을 가르쳤다. 이들과 함께 아주 거리낌없이 이야기했고, 정치ㆍ사회학ㆍ과학ㆍ철학에 대해서 그의 생각과 이상을 표현했다. 그러나 종교, 즉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하여 토론할 때를 제외하고, 감히 최종의 권한을 가지고 말하지 않았다.
129:1.11 (1421.1) 한 주에 한 번 예수는 집ㆍ작업장ㆍ호숫가의 조수들 전체와 회의를 가졌는데, 이는 세베대가 일꾼들을 많이 거느렸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일꾼들 사이에서 예수를 처음으로 “주”라고 일컬었다. 그들은 모두 그를 사랑했다. 그는 가버나움에서 세베대와 함께 즐겁게 일했지만, 나사렛 목수 작업장 옆에서 놀던 아이들을 그리워했다.
129:1.12 (1421.2) 세베대의 아들들 가운데, 야고보는 선생이자 철학가인 예수에게 가장 흥미를 가졌다. 요한은 그의 종교적 가르침과 의견에 가장 관심이 있었다. 다윗은 그를 기술공으로서 존경했지만, 종교적 견해와 철학적 가르침은 거의 믿지 않았다.
129:1.13 (1421.3) 유다는 안식일에 예수가 회당에서 말씀하는 것을 들으려고 자주 건너왔고, 남아서 함께 이야기하곤 했다. 맏형을 보면 볼수록, 유다는 예수가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라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129:1.14 (1421.4) 이 해에 예수는 그의 인간 정신을 더욱 통솔하는 데 크게 발전했고, 깃드는 생각 조절자와 의식하여 접촉하는 새로운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129:1.15 (1421.5) 이 해는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마지막 해였다. 두 번 다시, 그는 한 곳이나 한 가지 일에 한 해를 모두 보내지 않았다. 땅에서 순례할 날이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맹렬하게 활동하는 기간이 멀지 않았다. 그러나 단순했지만 맹렬히 활동하던 지난날의 생애와 더욱 격심하고 벅찬 대중(大衆) 봉사 기간 사이에, 널리 여행하고 상당히 다양하게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몇 해가 이제 사이에 끼려고 한다. 유란시아에서 자신을 수여하는 동안, 인간 이후의 신다운 단계에서, 완전하게 된 신이자 인간으로서 가르치고 전도하는 생애에 들어갈 수 있기 전에, 이 땅의 사람으로서 훈련을 마쳐야 했다.
129:2.1 (1421.6) 서기 22년 3월, 예수는 세베대와 가버나움을 떠났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경비를 치르려고 그는 돈을 조금 요구했다. 세베대와 일하는 동안에 그는 돈을 조금만 인출해서 달마다 나사렛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곤 했다. 한 달은 요셉이 돈을 받으려고 가버나움으로 왔고, 다음 달에는 유다가 가버나움으로 와서 예수에게서 돈을 받아서 나사렛으로 가지고 가곤 했다. 유다의 고기잡이 본부는 가버나움 남쪽에서 몇 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129:2.2 (1421.7) 세베대의 가족을 떠났을 때, 예수는 유월절 때까지 예루살렘에 남아 있기로 찬성했고, 모두가 그 행사에 참석하기로 약속했다. 그들은 유월절 저녁 식사를 같이 축하하도록 주선까지 하였다. 예수가 떠났을 때 모두, 특히 세베대의 딸들이 슬퍼했다.
129:2.3 (1421.8) 가버나움을 떠나기 전에, 예수는 새로 찾아낸 친구이자 가까운 동료, 요한 세베대와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때가 올 때”까지 널리 여행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요한에게 일러 주고, 받을 돈이 없어질 때까지 달마다 나사렛에 있는 가족에게 얼마큼 돈 보내는 일을 대신 해달라고 부탁했다. 요한은 약속했다. “내 선생이여, 할 일을 보시고, 세상에서 당신의 일을 하소서. 이 일이나 어느 다른 일에도 나는 당신을 위하여 행동하리이다. 내가 내 어머니를 보살피고 형제 자매를 돌보는 것 같이, 당신의 가족을 보살피리이다. 아버지가 쥐고 있는 당신의 기금을 지시한 대로, 필요한 대로 보내리이다. 당신의 돈이 떨어지고 나서, 당신한테서 돈을 더 받지 않으면, 그리고 당신의 어머니가 형편이 어렵다면, 바로 내가 번 돈을 당신의 어머니와 나누리이다. 평안히 길을 가소서. 이 모든 일에 나는 당신을 대신하여 행동하리이다.”
129:2.4 (1422.1) 따라서, 예수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난 뒤에, 요한은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예수가 받을 돈에 대하여 의논했고, 그것이 그렇게 큰 돈인 것에 놀랐다. 예수가 이 문제를 송두리째 그들의 손에 맡겼기 때문에, 이 기금을 부동산에 투자해서, 그 소득을 나사렛 가족을 돕는 데 쓰는 것이 상책일 것이라 의견을 모았다. 저당 잡혀 있고 팔려고 내놓은, 가버나움의 한 작은 집을 세베대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세베대는 예수의 돈으로 이 집을 사서, 친구를 위하여 집의 권리를 맡아서 가지고 있으라고 요한에게 지시했다. 요한은 아버지가 조언한 대로 했다. 2년 동안 이 집세는 저당금을 무는데 쓰였고, 이것은 예수가 가족이 필요한 대로 쓰라고 요한에게 당장 보낸 어떤 큰 금액과 합쳐서, 이 부채 금액과 거의 맞먹었다. 세베대는 그 차액을 냈다. 그래서 요한은 저당금 잔액을 물 때가 되었을 때 물었고, 이렇게 해서 이 두 칸 방 집에 대하여 완전한 권리를 확보하였다. 이 방법으로 예수는 가버나움에서 한 집의 소유자가 되었지만, 이에 대하여 통지를 받지 않았다.
129:2.5 (1422.2) 나사렛 가족이 예수가 가버나움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은 재정에 관하여 요한과 이렇게 주선한 것을 몰랐으니까, 이제 더 예수의 도움이 없이 지내야 할 때가 왔다고 믿었다. 야고보는 예수와 한 계약을 기억했고, 동생들의 도움을 얻어서, 당장에 가족을 돌보는 총 책임을 맡았다.
129:2.6 (1422.3)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를 지켜보자. 그는 거의 두 달 동안 성전의 토론을 듣고 랍비들이 있는 여러 학교를 가끔 찾아보느라고 절반이 넘게 시간을 썼다. 안식일이 되면 그날의 대부분은 베다니에서 보냈다.
129:2.7 (1422.4) 예수는 세베대의 아내 살로메의 편지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갔는데, 이 편지는 전직(前職) 대사제 안나스에게 그를 “내 아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안나스는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를 친히 데리고 예루살렘의 종교 선생들이 있는 여러 학원을 방문하였다. 예수는 이 학교들을 샅샅이 들여다보고 그들이 가르치는 방법을 조심스럽게 관찰했지만, 대중 앞에서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안나스는 예수를 위대한 사람으로 여기기는 했어도, 어떻게 조언할까 어리둥절해하였다. 그는 학생으로서 예루살렘의 어느 학교라도 들어가라 제안하는 것이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예수가 이 학교들에서 훈련받은 적이 없었으니까, 결코 예수가 정규 선생의 지위를 받지 못할 것을 잘 알았다.
129:2.8 (1422.5) 곧 유월절이 가까이 다가왔고, 온 사방에서 군중과 함께, 가버나움으로부터 세베대와 그 가족이 모두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들은 모두 안나스의 너른 집에 멈추었고, 거기서 하나의 행복한 가족으로서 유월절을 축하하였다.
129:2.9 (1422.6) 이 유월절 주간이 끝나기 전에, 겉보기에는 우연하게, 예수는 부유한 어느 여행자와 그 아들, 열일곱 살쯤 된 젊은이를 만났다. 이 여행자들은 인도에서 왔다. 로마와 지중해의 여러 다른 도시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도록 주선하였다. 그들은 그 두 사람에게 통역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아들에게 가정 교사로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를 희망했다. 그 아버지는 예수에게 함께 여행하자고 고집하였다. 예수는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또 거의 2년 동안 떠나 있는 것이 도저히 공평하지 않고, 그동안에 가족이 빈궁하게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자 동양에서 온 이 여행자는, 예수에게 1년 동안의 임금을 선불하겠다, 그러면 가족을 빈곤하지 않게 보호하기 위하여 예수가 그러한 기금을 친구들에게 맡길 수 있다고 제안해 왔다. 예수는 그 여행을 하기로 찬성했다.
129:2.10 (1423.1) 예수는 이 큰 돈을 세베대의 아들 요한에게 넘겼다. 너희는 요한이 가버나움 재산의 저당금을 청산하는 데 이 돈을 어떻게 사용했는가 이야기를 들었다. 이 지중해 여행에 관하여 예수는 세베대에게 완전히 속을 털어놓았지만, 아무에게도,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눈 가족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세베대에게 부탁했다. 세베대는 거의 2년에 걸치는 이 긴 세월 동안 예수가 어디 있는지 안다고 결코 밝히지 않았다. 이 여행에서 예수가 돌아오기 전에, 나사렛 가족은 그가 죽은 것으로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였다. 몇 번의 경우에 세베대가 아들 요한과 함께 나사렛까지 갔고 그들을 안심시킨 그의 말이 겨우 마리아의 가슴 속에서 계속 희망이 살아 있게 하였다.
129:2.11 (1423.2) 이 기간에 나사렛 가족은 무척 잘 어울렸다. 유다는 자기의 몫을 상당히 늘였고, 결혼할 때까지 이 여분의 몫을 계속 냈다. 거의 도움이 필요 없었는데도 예수가 지시한대로, 달마다 마리아와 룻에게 선물을 가지고 가는 것이 요한 세베대의 버릇이었다.
129:3.1 (1423.3) 예수가 스물아홉 되던 해 전부가 지중해 세계의 여행을 마치는 데 쓰였다. 이 체험담을 밝히도록 우리가 허락을 받은 한도까지, 일어난 주요 사건들은 이 글을 바로 뒤잇는 이야기들의 주제가 된다.
129:3.2 (1423.4) 로마 세계를 둘러보는 이번 여행 동안 내내, 여러 가지 이유로 예수는 다마스커스 서기관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돌아오는 여행 길에 고린도와 다른 여러 정박지에서 그는 유대인 가정 교사로 알려졌다.
129:3.3 (1423.5) 이때는 예수의 일생에서 파란 많은 기간이었다. 이번 여행에 그는 동포 인간과 많이 접촉했으나 이 체험은 가족 누구에게도, 사도들 중 아무에게도 결코 밝히지 않은 일생의 한 단계였다. 이렇게 널리 여행했다는 것을 아무도 (벳세다의 세베대를 제외하고) 알지 못한 채, 예수는 육체를 입고 일생을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났다. 친구들 가운데 더러는 그가 다마스커스로 돌아갔다고, 더러는 그가 인도로 갔다고 생각했다. 가족은 그가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다고 믿고 싶어했다. 그가 부(副)하잔이 될 목적으로 거기에 가도록 한 번 초대받은 적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129:3.4 (1423.6)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을 때, 예수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알렉산드리아로 갔다고 믿는 가족의 의견을 조금도 바꾸려 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에서 자리를 비운 동안 내내, 그 학문과 문화의 도시에서 지냈다고 가족이 계속 믿도록 버려두었다. 오로지 벳세다의 조선공 세베대만 이 문제에 관하여 사실을 알았지만, 세베대는 아무에게도 이를 밝히지 않았다.
129:3.5 (1423.7) 유란시아에서 예수의 일생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해독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일 때, 너희는 미가엘이 어떤 동기로 자신을 수여했는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상하게 보이는 여러 행적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너희 세계에서 그가 머무른 그 목적을 헤아려야 한다. 그는 지나치게 흥미를 자아내고 사람들의 눈을 끄는 개인 생애를 살지 않으려고 한결같이 조심했다. 그는 특별하거나 압도적인 방법으로 동포 인간에게 호소하기를 전혀 바라지 않았다.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동료 필사자에게 드러내는 일에 전념하였고, 동시에 바로 그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에 계속 복종하면서, 땅에서 필사 생애를 사는 숭고한 일에 헌신하였다.
129:3.6 (1424.1) 또한 이 신의 수여를 연구하는 모든 필사 학자가, 유란시아에서 육신을 입고 이 일생을 살았지만 예수가 자신의 우주 전체를 위하여 살았음을 기억한다면 땅에서 사신 그의 일생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유익할 것이다. 온 네바돈 우주에 두루, 사람이 사는 모든 개별 세계에, 필사 성질의 육체를 입고서 사신 일생과 관련되어 무언가 특별하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있었다. 유란시아에서 머무르면서 파란 많았던 시절 이후로, 사람이 살 수 있게 된 모든 세계에도 또한 그렇다. 마찬가지로, 이 지역 우주의 모든 미래 역사에서 의지(意志)를 가진 인간이 살게 될지 모르는 어느 세계에도 이것이 똑같이 참말이다.
129:3.7 (1424.2) 사람의 아들은 이번에 로마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그 체험을 통해서, 그 시대와 세대에 세상에서 살았던 다채로운 민족들과 교육적인 접촉을 가지고 훈련하는 일을 실지로 마쳤다. 나사렛으로 돌아올 때가 되자, 그는 이 여행 훈련의 매체를 통해서, 유란시아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고 생계를 이어가는가 거의 배웠다.
129:3.8 (1424.3) 지중해 분지 주위에서 여행하는 참 목적은 사람을 알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여행에서 수백 명의 인간에게 무척 가까이 다가갔다. 부자와 가난한 자, 지위가 높은 자와 낮은 자, 흑인과 백인, 교육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 교양 있는 자와 없는 자, 동물 같은 자와 영적인 자, 종교적인 자와 비종교적인 자, 도덕이 있는 자와 부도덕한 자, 이렇게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했다.
129:3.9 (1424.4) 이 지중해 여행에서, 예수는 물질에 기초를 둔 필사 지성을 통솔하는 자신의 인간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 크게 진전을 보았고, 그에게 깃들어 있는 조절자는 바로 이 인간적 지능을 진보시키고 영적 수준에 이르게 하는 데 크게 나아졌다. 이 여행이 끝날 때가 되자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우주의 아버지의 창조 아들이라는 것을 실질적으로―인간으로서 아주 확실히―알았다. 조절자는 그가 일찍이 이 네바돈 지역 우주를 조직하고 관리하러 오기 전에 신성한 아버지와 관련하여 파라다이스에서 가졌던 체험의 기억, 그림자 같은 기억을 점점 더 사람의 아들의 머리 속에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 조절자는 영원에 가까운 과거의 여러 시기에, 예전에 신다운 존재였던 필요한 그 기억을 조금씩, 예수의 인간 의식(意識)으로 떠올렸다. 사람 이전의 체험 중에서 조절자가 가져와야 할 마지막 사건은 유란시아 육신화를 개시하려고 자신의 의식(意識)을 내놓기 바로 전에 작별하면서 구원자별의 이마누엘과 가졌던 회의였다. 사람 이전의 존재에 대한 이 마지막 기억의 그림은,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받던 바로 그날, 예수의 의식 속에서 뚜렷해졌다.
129:4.1 (1424.5) 구경하는 지역 우주의 하늘 지성 존재들에게는, 적어도 전 생애에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사람의 죽음을 겪은 사건 바로 전까지, 이 지중해 여행이 예수가 땅에서 겪은 온갖 체험 중에서 가장 마음을 빼앗는 것이었다. 이때는 곧 뒤잇는 대중 봉사 시기와 대조해서, 개인으로서 봉사하는 황홀한 기간이었다. 이 독특한 사건이 더군다나 흥미를 끌었던 것은 이때 그가 아직도 나사렛의 목수요, 가버나움의 조선 기술자요, 다마스커스의 서기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사람의 아들이었다. 그는 아직까지 자신의 인간 정신을 완벽하게 통솔하지 못했다. 조절자는 예수의 필사 신분을 완전히 지휘하고 그와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 아직도 그는 사람들 가운데 있는 사람이었다.
129:4.2 (1425.1) 사람의 아들이 겪은 순전히 인간다운 종교적 체험―즉 개인의 영적 성장―은 스물 아홉 되던 이 해에, 거의 절정에 이르렀다. 영적으로 발전하는 이 체험은 생각 조절자가 도착한 순간부터, 사람의 물질 지성과 영(靈)이 부여한 지성 사이에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고 정상인 관계가 완성되고 확인되는 날까지, 한결같이 차츰차츰 자란 것이었다―이 두 지성을 하나로 만드는 현상은 이 땅에서 육신화한 필사자로서 요단강에서 세례받은 날, 사람의 아들이 완벽하게 최종으로 마친 체험이었다.
129:4.3 (1425.2)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정식으로 교통하는 시간이 많이 없었던 듯 보였지만, 이 여러 해 동안 내내, 그는 영으로 깃들어 계시는 파라다이스 아버지와 몸소 친교하는 더욱 효과 있는 방법을 통달하였다. 그는 육체를 입고서 진정한 인생, 충만한 인생, 그리고 참으로 정상이고 자연스럽고 평범한 인생을 살았다. 시공의 물질 세계에서 인간들이 사는 실제의 인생살이 전부와 본질에 해당하는 것을 그는 피부로 겪어서 안다.
129:4.4 (1425.3) 사람의 아들은 숭고한 기쁨으로부터 깊은 슬픔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인간의 감정을 맛보았다. 그는 기쁨이 넘치는 아이였고, 보기 드물게 좋은 유머가 있는 존재였다. 마찬가지로 “슬픔을 겪은 사람이요 비애를 알았다.” 영적 의미에서, 밑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필사자의 일생을 거쳤다. 물질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존재에서 사회의 두 극단을 거치는 인생을 피한 듯 보일지 모르지만, 그는 인류의 온전한 체험 전부에 지적으로 온통 익숙하게 되었다.
129:4.5 (1425.4) 예수는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여러 영역에서 진화하고 승천하는 필사자의 생각과 느낌, 욕구와 충동을 알고 있다. 신체적ㆍ지적ㆍ영적 자아의 시초로부터 유아기ㆍ아동기ㆍ소년기ㆍ성년기까지―인간의 죽음을 체험하기까지―인생을 살았다. 지적ㆍ영적 진보가 있는 기간, 사람이 보통 겪는 익숙한 기간들을 거쳤을 뿐 아니라, 유란시아 필사자 가운데 거의 아무도 도달해보지 못한 국면, 인간과 조절자가 조화를 이루는 상급의 진보된 국면도 또한 충분히 겪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너희 세상에서 사는 것과 같을 뿐 아니라, 시공의 모든 다른 진화 세계에서, 아니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모든 세계 중 최고로 진보한 세계에서 사는 것과 같이, 필사 인간의 생활을 충만히 체험했다.
129:4.6 (1425.5) 동료 필사자, 즉 땅에서 우연히 같은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살았던 이 완전한 인생을 조건 없이 보편적으로 좋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그래도 육체를 입고 유란시아에서 나사렛 예수가 산 일생은, 바로 그 사람의 일생 동안, 필사 인간에게 영원한 하나님을 충분히 계시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무한한 창조자가 흡족해하기까지 완전하게 된 인격을 제시한 것이라고 우주의 아버지로부터 완벽하고 조건 없는 승인을 받았다.
129:4.7 (1425.6) 바로 이것이 그의 참된 최고의 목표였다. 그가 살던 시대나 다른 시대에, 어느 아이나 어른, 어느 남자나 여자에게 완전하고 자세한 본보기로 유란시아에 살려고 내려오지 않았다. 충만하고 풍부하고 아름답고 고귀한 그의 일생에서 더할 나위 없는 모범이 되고 신성하게 영감을 주는 많은 것을 참으로, 실로, 우리 모두가 발견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참된 일생, 진정하게 인간다운 일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모든 다른 인간이 모방할 본보기를 보여주려고 땅에서 일생을 살지 않았다. 그는 자비를 베풀어 육체를 입고 이 인생을 살았고, 너희 모두가 땅에서 똑같이 자비를 베풀며 인생을 살 수 있다. 그 시절에 그가 당면한 그대로 필사 생애를 산 것 같이, 그는 그렇게 함으로 이 시대에, 또 우리가 처한 대로 일생을 살도록 우리 모두를 위하여 모범이 되었다. 너희는 예수의 일생을 살려는 꿈을 가져서는 안 되지만, 그가 일생을 살았을 때 쓴 것과 같은 방법으로 너희의 일생을 살려고 결심할 수 있다. 예수는 이 지역 우주의 모든 세상에서 온 세월을 통하여, 모든 필사자에게 엄밀하고 자세한 본보기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초기에 올라가는 여러 세계로부터, 온 우주를 거쳐서, 계속하여 하보나를 통하고 파라다이스에 이르기까지, 그는 모든 파라다이스 순례자에게 언제까지나 영감을 주는 사람이요 안내자이다. 예수는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 이르기까지, 부분적인 것으로부터 완전한 것으로, 땅에 있는 것으로부터 하늘에 있는 것으로, 시간 세계에서 영원까지 이르는 새로운 길, 생명의 길이다.
129:4.8 (1426.1) 스물아홉 살 되던 해가 저물 때까지, 나사렛 예수는 육체를 입고 머무르는 자로서 필사자에게 요구되는 인생살이를 거의 마쳤다. 그는 사람에게 완전한 하나님을 명백히 보여주기 위하여 땅에 오셨다. 이제 그는 거의 완전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에게 명백하게 나타날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이 모두를 이루었다.
130:0.1 (1427.1) 로마 세계의 여행은 예수가 땅에서 산 일생에서 스물여덟 되던 해의 대부분과 스물아홉 되던 해 전부를 써버렸다. 예수와 인도에서 온 두 원주민―고노드와 아들 가니드―는 서기 22년 4월 26일, 일요일 아침에 예루살렘을 떠났다. 그들은 일정대로 여행했고, 예수는 페르시아 만에서 이듬해, 서기 23년, 12월 10일, 카락스 시(市)에서 그 아버지와 아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130:0.2 (1427.2) 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요파의 길을 따라 케자리아로 갔다. 케자리아에서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배를 탔다. 알렉산드리아로부터 크레테 섬의 라시아를 향하여 돛을 달았다. 크레테에서부터 키레네에 들리고, 카르타고를 향해서 항해하였다. 카르타고에서 나폴리로 가는 배를 탔고, 말타ㆍ시라큐스ㆍ메시나에서 멈추었다. 나폴리에서 카푸아로 갔고, 거기서 아피아 길을 따라서 로마로 여행하였다.
130:0.3 (1427.3) 로마에서 머무른 뒤에, 육로로 타렌툼까지 갔고, 거기서 그리스의 아테네를 향하여 돛을 달았으며, 니코폴리스와 고린도에서 멈추었다. 아테네에서 트로아 길을 따라서 에베소로 갔다. 에베소에서 키프러스로 항해했고, 가는 길에 로드에 들렸다. 키프러스에서 방문하고 쉬느라고 상당한 시간을 보냈고, 다음에 시리아의 안티옥을 향해 돛을 달았다. 안티옥에서 남쪽에 시돈으로 갔고, 다음에 다마스커스로 건너갔다. 거기서부터 카라반을 이용하여 메소포타미아로 여행했으며, 탑사쿠스와 라리사를 지나쳤다. 바빌론에서 얼마 동안 지내고, 우르와 다른 곳들을 찾아보았고, 다음에 수사로 갔다. 수사에서 카락스로 여행했고, 그 장소에서 고노드와 가니드는 인도를 향해서 출발했다.
130:0.4 (1427.4) 다마스커스에서 넉 달 일하는 동안, 예수는 고노드와 가니드가 사용하는 언어의 기본을 깨우쳤다. 거기서 그는 그리스어를 어느 인도 언어로 번역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보냈고, 고노드의 고향 지역에서 온 본토인의 도움을 받았다.
130:0.5 (1427.5) 이 지중해 여행에서, 예수는 가니드를 가르치고 고노드의 사업 회의와 사교 접촉이 있을 때 통역으로 활동하면서 하루의 절반쯤을 보냈다. 날마다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써도 되었고, 이 시간을 동료 인간들과 몸소 가깝게 접촉하는 데 썼다. 이 땅의 필사자들과 이렇게 친밀한 관계를 가진 것이 대중(大衆)에게 봉사하기 바로 전에 이 몇 해 동안 그의 활동의 특징을 나타냈다.
130:0.6 (1427.6) 눈으로 직접 관찰하고 실제로 접촉함으로 예수는 서양과 레반트 지방의 상급 물질적ㆍ지적 문명을 알게 되었다. 고노드와 똑똑한 그의 아들로부터 인도ㆍ중국의 문명과 문화에 대해서 많이 배웠으니, 바로 고노드가 인도 시민이요, 황인종의 제국을 세 번 널리 여행했기 때문이다.
130:0.7 (1427.7) 젊은이 가니드는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던 이 기간에 예수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들은 서로에게 깊이 정이 들었고, 소년의 아버지는 함께 인도로 돌아가자고 여러 번 예수를 설득하려고 애썼지만, 예수는 언제나 팔레스타인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가야 하는 필요성을 이유로 들어 사양하였다.
130:1.1 (1428.1) 요파에서 머무르는 동안, 예수는 가디아를 만났는데, 이 사람은 어느 시몬이라는 무두장이를 위해서 일하는 필리스티아인 통역이었다.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고노드의 대리인들은 이 시몬과 거래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고노드와 아들은 케자리아로 가는 길에 그를 방문하고 싶어했다. 요파에서 묵는 동안, 예수와 가디아는 따듯한 친구가 되었다. 이 젊은 필리스티아인은 진리를 찾는 사람이었다. 예수는 진리를 주는 사람이었고, 유란시아에서 그 세대의 사람들에게 진리였다. 진리를 찾는 위대한 사람과 진리를 주는 위대한 사람이 만날 때, 그 결과로 새 진리의 체험 속에서 사람을 해방하는 큰 깨우침이 생겨난다.
130:1.2 (1428.2) 어느 날 저녁을 먹고 난 뒤에, 예수와 젊은 필리스티아인은 바닷가를 걸었다. 가디아는 이 “다마스커스 서기관”이 히브리인의 전통에 정통한 줄 모르고서, 예수에게 어느 부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그곳에서 요나가 타르쉬시를 향하여 불운의 항해를 떠났다는 소문이 있었다. 논평을 마치고 나서, 그는 예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당신은 큰 물고기가 정말로 요나를 삼켰다고 생각하시나이까?” 예수는 이 젊은이의 생애가 이 전설에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고, 이를 깊이 생각해 본 결과로 의무를 회피하려 애쓰는 것이 어리석음을 통감했다는 것을 파악했다. 따라서 예수는 가디아가 현재 실용적으로 살려는 동기의 근거를 갑자기 무너뜨릴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물음에 대답하여 예수는 말했다. “친구여,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인생을 살아야 하는 요나와 같으니라. 현재의 생활 의무를 피하여 멀리 유혹하는 것들이 있는 곳으로 달아나려고 할 때는 언제나, 그리함으로 우리는 진리의 힘과 올바른 세력이 지도하지 않는 그런 영향을 직접 받느니라. 의무의 회피는 진실을 희생하는 것이라. 빛과 생명의 봉사를 회피하는 것은, 오로지 다루기 힘든 고래 같은 이기심과 괴로운 갈등만 일으킬 수 있느니라. 아주 깊은 절망의 늪 한가운데 있을 때에도, 하나님을 저버리는 그런 요나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의 선하심을 찾으려고 마음을 돌이키지 않으면 궁극에 이 이기심은 어두움과 죽음으로 이끄느니라. 그러한 낙심한 자들이 진지하게 하나님을―진리를 갈망하고 올바름을 목마르게―찾을 때, 아무것도 저희를 더 이상 포로로 붙잡아둘 수 없느니라. 아무리 깊은 수렁에 저희가 빠졌을지라도, 마음을 다하여 저희가 빛을 구하면,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의 영이 저희를 포로 생활에서 구제하리라. 불운한 생활 형편은 새로이 봉사하고 더 지혜롭게 사는 새 기회가 있는 마른 땅으로 저희를 뱉어낼 것이라.”
130:1.3 (1428.3) 가디아는 예수의 가르침에 마음이 힘차게 움직였다. 그들은 바닷가에서 밤늦게 이야기했고, 숙박소로 가기 전에 함께, 서로를 위하여 기도했다. 이 사람은 나중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 나사렛 예수를 깊이 믿었고, 도르가의 집에서 어느 날 저녁에 베드로와 잊을 수 없는 논쟁을 했던 바로 그 가디아였다. 가디아는 부유한 가죽 상인 시몬이 마침내 기독교를 받아들이려고 결심한 것과 많은 상관이 있었다.
130:1.4 (1428.4) (이 지중해 여행에서 예수가 동료 필사자들과 함께 개인적으로 하신 일에 관한 이 이야기에는 허락을 받은 대로, 이것을 발표할 때 유란시아에서 쓰이는 현대의 표현으로 우리는 그의 말씀을 자유롭게 번역할 것이다.)
130:1.5 (1429.1) 예수가 가디아와 마지막으로 가졌던 담화는 선과 악에 대한 토론이었다. 이 젊은 필리스티아인은 세상에 선과 악이 나란히 존재하기 때문에 불공평하다는 느낌으로 많이 염려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무한히 선하시다면, 어찌하여 우리가 악으로 생긴 슬픔을 당하도록 버려둘 수 있나이까, 결국 누가 악을 창조하나이까?” 그 시절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선과 악을 다 창조한다고 믿었지만, 예수는 결코 그런 잘못을 가르치지 않았다. 이 물음에 대답하여 예수는 말했다. “아우여, 하나님은 사랑이라. 그런즉 선하심이 틀림없도다. 그의 선하심이 너무나 크고 현실이기 때문에, 그의 선은 작고 비현실인 악한 것을 품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은 아주 분명히 선하시므로, 부정적인 악이 절대로 그분 속에 들어설 자리가 없느니라. 선에 대항하고 아름다움을 물리치고 진리에 충성하지 않는 자가 미숙하게 선택하고 생각 없이 발을 헛디디는 것이 악이라. 악(惡)은 다만 미숙하여 형편에 잘못 적응하는 것이거나 또는 사실을 뒤집고 왜곡하는 무지의 영향이라. 악은 현명치 못하게 빛을 물리치는 발꿈치를 따르는 불가피한 어두움이라. 악은 어둡고 참이 아닌 어떤 것이요, 알면서 받아들이고 일부러 지지했을 때, 그 악이 죄가 되느니라.
130:1.6 (1429.2)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진실과 잘못 사이에 선택하는 힘을 너에게 부여함으로, 빛과 생명의 길, 긍정적 길에서 부정적 잠재성을 만드셨느니라. 그러나 총명한 사람이 사는 길을 잘못 택하여 그러한 악한 잘못이 존재하도록 의도(意圖)할 때까지, 그런 잘못은 정말로 존재하지 않느니라. 그러한 고의적이고 반항하는 사람이 알면서 계획하여 선택함으로 그러한 악은 나중에 죄의 자리까지 올라가느니라. 수확할 때까지 자연이 밀과 독보리가 나란히 자라도록 버려두는 것 같이, 이것이 생명이 끝날 때까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선한 것과 악한 것이 나란히 가도록 버려두는 까닭이라.” 그들이 나중에 가진 토론이 머리 속에서 이 중대한 말씀의 참 의미를 뚜렷하게 해준 뒤에, 가디아는 그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에 충분히 만족해하였다.
130:2.1 (1429.3) 그들이 타려고 생각했던 배에 거대한 방향타 하나가 갈라질 위험이 있는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예수와 친구들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오래 케자리아에 머물렀다. 선장은 새 방향타가 만들어지고 있는 동안, 항구에서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이 일에 나무를 다루는 숙련된 세공인(細工人)들이 부족했고, 그래서 예수는 돕겠다고 자청하였다. 저녁에 예수와 친구들은 항구 둘레에서 산책길로 쓰이는 아름다운 담벽 위에서 걸었다. 도시의 수도(水道) 체계, 그리고 도시의 길거리와 하수도를 씻어내는 데 파도를 이용하는 기법을 예수가 설명하는 것을 듣고 가니드는 크게 좋아했다. 인도에서 온 이 젊은이는 아우구스투스의 성전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것은 고지에 자리를 잡았고 그 위에는 로마 황제의 거대한 조각(彫刻)이 세워져 있었다. 그들이 머무르던 둘째 날 오후에 세 사람은 2만 명을 앉힐 수 있는 거대한 원형 극장에서 벌어지는 공연에 참석했고, 그날 밤 극장으로 그리스 연극을 보러 갔다. 이것은 가니드가 일찍이 구경한 이런 종류의 첫 전시였고, 그는 예수에게 연극에 대하여 많이 물었다. 셋째 날 아침에, 그들은 총독의 궁전을 공식으로 방문했다. 케자리아가 팔레스타인의 서울이었고 로마의 행정 장관의 거처였기 때문이었다.
130:2.2 (1429.4) 여인숙에는 몽골리아에서 온 한 상인이 또한 묵고 있었다. 극동에서 온 이 사람이 그리스어를 썩 잘 했기 때문에, 예수는 몇 차례나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사람은 예수의 생활 철학에 많이 감명을 받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날마다 복종하는 방법으로 땅에 있는 동안 하늘의 삶을 사는 것”에 관한 지혜로운 말씀을 결코 잊지 않았다. 이 상인은 도교 신자였는데, 이 가르침 때문에 우주의 신이 있다는 교리를 굳게 믿는 사람이 되었다. 몽골리아로 돌아갔을 때, 이 상급 진리를 이웃과 사업 친구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러한 활동의 직접 결과로서, 그의 맏아들은 도교의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 젊은이는 일생을 통해서, 상급의 진리를 위하여 큰 영향력을 미쳤고, 그의 아들과 손자는 그를 이어받아, 마찬가지로 하나의 신―즉 하늘의 최고 통치자―를 믿는 교리에 열심으로 충성하였다.
130:2.3 (1430.1) 초대 기독교 교회의 동부 지파는 필라델피아에 본부가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형제들보다 예수의 가르침을 더 충실하게 간직했지만,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아무도 중국에 가거나, 바울과 같은 사람이 아무도 인도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은 유감이었다. 거기에는 그때 새 하늘나라 복음의 씨를 심기에 영적 토양이 아주 좋았다. 필라델피아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었던 바로 이 예수의 가르침은,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가 서양에서 한 것처럼, 영적으로 갈급한 아시아 민족들의 지성에 바로, 즉시 효과 있게 호소했을 것이다.
130:2.4 (1430.2) 어느 날 방향타에서 예수와 같이 일하던 젊은이들 가운데 하나가, 조선소에서 수고하는 동안 예수가 시간마다 들려준 말씀에 무척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땅에 있는 자녀들의 복지에 관심을 가진다고 예수가 넌지시 비쳤을 때, 이 젊은 그리스인 아낙산드는 말했다. “만약에 신들이 내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어찌하여 이 작업장에 있는 모질고 부당한 반장을 없애버리지 않나이까?” 그는 예수의 대답에 놀랐다. “네가 친절을 베푸는 방법을 알고 정의를 존중하는 까닭에, 더 좋은 이 길로 이끌라고 아마도 신들이 잘못하는 이 사람을 가까이 데리고 오신 듯하구나. 아마도 너는 이 형제가 모든 다른 사람에게 더 친절한 사람으로 만들 소금인가 하나니, 다시 말해서 네가 맛을 잃지 않았다면 그러하니라. 지금 상태로 그의 악한 방법이 너에게 불리하게 영향을 미치므로 이 사람이 네 주인이라. 어찌하여 선의 힘으로 악을 지배하기를 주장하지 않느냐? 그리하면 두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에서 네가 주인이 되리라. 네가 이 일에 마땅하고 진정한 기회를 주면, 내가 예측하건대, 네 안의 선이 그 사람 안의 악을 이길 수 있느니라. 잘못과 악을 이기는 하나의 투쟁에서 얻는 영적 에너지와 신성한 진리를 가지고 물질적 생활에서 동료가 되는 흥분을 맛보는 것보다 필사자로 사는 동안에 더 황홀한 모험이 없느니라. 영적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영적 빛의 통로, 생명의 통로가 되는 것은 놀랍고도 사람을 변화시키는 체험이라. 네가 이 사람보다 더 많이 진리를 축복받았다면, 너는 그의 곤궁한 처지에 자극을 받아야 하느니라. 분명컨대 너는 바닷가에서 기다리면서 헤엄칠 수 없는 동료 인간이 죽는 것을 구경할 겁쟁이는 아니라! 물에 빠져 죽는 몸과 비교하건대 어둠 속에 발버둥치는 이 사람의 혼은 얼마나 더 귀중한고!”
130:2.5 (1430.3) 아낙산드는 예수의 말씀에 힘차게 마음이 움직였다. 당장에 그는 예수가 한 말씀을 상관에게 이야기했고, 그날 밤 두 사람은 어떻게 혼이 복을 받는가 예수에게 조언을 구하였다. 나중에 기독교의 소식이 케자리아에 선포된 뒤에, 이 두 사람, 하나는 그리스인이요 다른 하나는 로마인이었는데, 빌립이 전파한 것을 믿었고, 그가 세운 교회에서 뛰어난 신자들이 되었다. 나중에 이 젊은 그리스인은 로마인 백부장 코넬리우스의 집사로 임명되었고, 코넬리우스는 베드로의 봉사를 통해서 신자가 되었다. 바울이 케자리아에서 감옥에 갇혀 있던 시절까지 아낙산드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계속 빛을 비쳐주었다. 그때, 아낙산드는 2만 유대인의 대학살이 일어났을 때 고통받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돌보는 동안, 사고로 죽었다.
130:2.6 (1431.1) 가니드는 이 무렵에 선생이 동료 인간들에게 이렇게 특별히 친히 봉사하는 일에 여가를 어떻게 쓰는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젊은 인도인은 그침 없이 이렇게 활동하는 동기가 무엇인가 찾아내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물었다. “어째서 당신은 낯선 사람들과 이렇게 이야기하는 데 계속하여 몰두하시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가니드야,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는 아무도 낯선 자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내는 체험을 겪으면서 너는 모든 사람이 형제임을 발견하느니라. 새로 발견한 형제를 만나는 기쁨을 즐기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느냐? 사람의 형제 자매와 알게 되고 저희의 문제를 알고 저희를 사랑하기를 배우는 것은 인생에서 최고의 체험이라.”
130:2.7 (1431.2) 이것은 밤늦게까지 이어진 회담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 젊은이는 하나님의 뜻, 그리고 의지라고 부르기도 하는 인간 지성의 선택하는 행위, 이 둘의 차이를 일러 달라고 예수에게 부탁했다. 예수는 다음의 내용으로 말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길이요, 어떤 가능한 대안(代案)에 부딪치더라도, 하나님의 선택과 협동하는 자가 되는 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차츰차츰 하나님처럼 되는 점진적 체험이요, 하나님은 선하고 아름답고 참된 모든 것의 근원이요 운명이다. 사람의 뜻은 사람의 길이요, 필사자가 되고자 하고 행하고자 하는 그 목표의 총합이요 본질이다. 의지(意志)는 스스로 의식하는 존재가 알면서 선택하는 것이요, 이것은 지적 숙고에 근거를 둔 결정과 행위로 이끈다.
130:2.8 (1431.3) 그날 오후에, 예수와 가니드는 아주 영리한, 양 지키는 개와 즐겁게 놀았다. 가니드는 개가 혼(魂)이 있는지 개가 의지를 가졌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 물음에 응답하여 예수는 말했다. “개는 물질 인간, 주인을 알아볼 수 있는 머리가 있으나,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개는 영적 성품을 소유하지 않고, 영적 체험을 겪을 수 없느니라. 개가 성품으로부터 유래하고 훈련으로 확대된 의지를 가졌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머리의 능력은 영적 힘이 아니라. 지난 일을 돌이켜보지 않는 한, 인간의 의지와 비교할 수도 없느니라―그 능력은 상급의 도덕적 의미를 구별하거나 또는 영원한 영적 가치 기준을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영적으로 분별하고 진리를 택하는 그러한 능력을 소유하는 것이 필사 인간을 도덕적 존재, 영적 책임을 느끼는 속성과 영원히 살아남는 가능성을 부여받은 인간으로 만드느니라.” 예수는 이어서, 동물에 그러한 정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동물 세계는 시간이 지나도 언어를 개발하거나 영원 속에서 성격의 생존과 비슷한 무엇이라도 체험하기를 영원히 불가능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이날 가르침을 받은 결과로, 가니드는 사람의 혼이 동물의 몸 속으로 옮겨간다는 관념을 다시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130:2.9 (1431.4) 다음 날 가니드는 이 모두를 아버지와 함께 이야기했다. 고노드의 물음에 답하여 예수는 설명했다. “동물로 존재하는 물질적 문제와 상관되는 현세의 결정을 내리는 데만 완전히 몰두하는 인간의 의지는 시간이 지나면 멸망할 운명을 가졌소이다. 진심으로 도덕적 결정을 내리고 조건 없이 영적으로 선택하는 자는, 이처럼 깃드는 신의 영과 점진적으로 한 편이 되고, 이렇게 함으로 영원히 살아남는 가치로 더욱 변화되오이다―신성한 봉사로 끝없이 진보하오이다.”
130:2.10 (1431.5) 바로 이날 우리는 이 중대한 진리를 처음으로 들었다. 현대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다음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의지는 인간의 지성이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요, 지성은 주관적 의식이 자체를 객관적으로 표현하고 하나님처럼 되기를 열망하는 현상을 체험하게 만든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지난 일을 돌이켜보고 영적 생각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창조성을 가지게 될 수 있다.
130:3.1 (1432.1) 이번 케자리아 방문에서는 사건이 많았다. 배가 준비되었을 때, 예수와 두 친구는 어느 날 한낮에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향하여 떠났다.
130:3.2 (1432.2) 세 사람은 알렉산드리아까지 아주 유쾌한 여행을 즐겼다. 가니드는 그 항해를 매우 기뻐했고 예수는 질문에 대답하느라고 바빴다. 그 도시의 항구에 다가가자, 젊은이는 어느 섬에 있는 파로스의 큰 등대를 보고 기쁨에 떨었다. 알렉산더는 방파제로 이 섬을 대륙까지 연결하였다. 알렉산더는 이렇게 훌륭한 두 항구를 지었고, 이렇게 함으로 알렉산드리아를 아프리카ㆍ아시아ㆍ유럽의 해상 무역의 교차로로 만들었다. 이 큰 등대는 세계의 칠대 경이의 하나였고, 그 뒤의 모든 등대의 효시가 되었다. 이들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이 눈부신 장치를 구경하려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가니드가 탄성을 지르는 가운데, 예수는 말했다: “자, 얘야 인도로 돌아갈 때, 아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너는 이 등대처럼 될 것이라. 어둠 속에서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처럼 되리니, 그렇게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안전하게 구원이 있는 항구로 이르는 길을 보여주리라.” 예수의 손을 꽉 잡으면서, 가니드는 말했다, “그렇게 하리이다.”
130:3.3 (1432.3) 초기 기독교의 선생들이 오로지 로마 세계의 서양 문명에만 눈을 돌린 것이 큰 잘못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지적한다. 여러 집단의 아시아 종교가들은 1세기에 메소포타미아의 신자들이 지니고 있었던 예수의 가르침을 쉽사리 받아들였을 것이다.
130:3.4 (1432.4) 상륙한 지 세 시간이 지나서, 그들은 넓고도 긴 시가의 동쪽 끝 가까이에 정착했다. 이 거리는 넓이가 30미터요 길이가 8킬로미터였으며, 1백만 인구를 가진 이 도시의 서쪽 경계까지 뻗어 있었다. 그 도시의 주요한 구경거리―대학(박물관), 도서관, 알렉산더의 왕립 대무덤, 궁전, 넵튠 신전, 극장, 체육관―을 처음 살펴본 뒤에, 고노드는 사업을 돌보았다. 한편 예수와 가니드는 도서관으로 갔는데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컸다. 여기에 모든 문명화된 세계, 그리스ㆍ로마ㆍ팔레스타인ㆍ파르티아ㆍ인도ㆍ중국, 그리고 일본으로부터도, 거의 1백만의 원고가 수집되어 있었다. 이 도서관에서 가니드는 온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도 문학 도서의 수집을 보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머무르는 동안 내내, 그들은 날마다 여기서 얼마큼 시간을 보냈다. 예수는 이 장소에서 히브리 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된 것에 관하여 가니드에게 일러주었다. 세계의 모든 종교에 관하여 이야기를 거듭했고, 예수는 각 종교에 담긴 진리를 이 젊은 지성에게 지적하려고 애쓰면서, 언제나 덧붙여 말했다. “그러나 야웨는 멜기세덱의 계시와 아브라함의 약속으로부터 발전된 하나님이라.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멜기세덱이 살고 가르치던 바로 그 땅을 나중에 차지했고, 거기서부터 멜기세덱은 온 세계에 선생들을 보냈느니라. 다른 어느 세계 종교보다 유대인의 종교는 궁극에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우주의 아버지인 것을 더 뚜렷하게 인식했음을 보여주었느니라.”
130:3.5 (1432.5) 예수의 지도를 받으며 가니드는, 비록 하위의 신들을 다소 인정하더라도 우주의 신을 인정하는, 세상의 모든 종교의 가르침을 수집하였다. 많은 토론이 있은 뒤에 예수와 가니드는 로마인의 종교에는 참된 하나님이 없다고, 그 종교는 도저히 황제 숭배를 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그리스인은 철학은 있어도, 성격을 가진 하나님이 있는 종교를 도저히 가지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신비 종파들은 빼버렸는데, 여러 종파가 있어 생기는 혼란 때문이었다. 그들의 다양한 신 개념들이 다른 더 오래 된 종교들로부터 유래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130:3.6 (1433.1) 알렉산드리아에서 이 번역서들이 만들어졌지만, 로마에서 체류가 끝날 때가 가까워서야 가니드는 이 발췌한 기록을 마침내 정리하고 자신의 개인적 결론을 덧붙였다. 세계의 신성한 문헌을 기록한 가장 훌륭한 저자들이 모두 영원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얼마큼 뚜렷이 인정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하나님과 필사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상당히 생각이 같은 것을 발견하고 가니드는 많이 놀랐다.
130:3.7 (1433.2) 예수와 가니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박물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박물관은 보기 드문 물건들을 수집해 놓은 곳이 아니라, 오히려 미술ㆍ과학ㆍ문학을 가르치는 대학이었다. 학식 있는 교수들이 여기서 날마다 강의했고 그 시절에 여기는 서양 세계의 지적 중심이었다. 하루하루 예수는 여러 강의를 가니드에게 통역해 주었다. 둘째 주의 어느 날, 젊은이는 소리를 질렀다. “요수아 선생이여, 당신은 이 교수들보다 더 아시나이다. 당신은 일어서서, 내게 말한 놀라운 것들을 저희에게 일러주어야 하나이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저희는 안개 속에 쌓여 있나이다. 아버지께 말씀 드려 그렇게 주선하도록 하리이다.” 예수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너는 선생을 칭찬하는 생도로구나. 하지만 이 선생들은 너와 내가 저희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지 않느니라. 영적 변화 없이 학문을 배움으로 생기는 자만은 인간의 체험에서 위험한 것이라. 참된 선생은 늘 배우는 사람이 됨으로 지적 성실성을 유지하느니라.”
130:3.8 (1433.3) 알렉산드리아는 서양 문화가 혼합된 도시였고, 로마 다음으로 세계에서 제일 크고 웅장했다. 여기에 세계에서 제일 큰 유대인 회당이 자리를 잡았는데, 알렉산드리아 산헤드린, 즉 통치하는 70 장로의 행정부였다.
130:3.9 (1433.4) 고노드가 사업에서 거래하는 숱한 사람 가운데 어떤 유대인 은행가 알렉산더가 있었는데, 그의 형제 필로는 당시에 이름난 종교 철학가였다. 필로는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을 조화시키는, 칭찬받을 만하지만 아주 어려운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가니드와 예수는 필로의 가르침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하였고, 그의 강의에 더러 참석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머무르는 동안 내내, 이 이름난 헬라파 유대인은 아파서 드러누워 있었다.
130:3.10 (1433.5) 예수는 가니드에게 그리스 철학과 금욕주의 신조들 중 많은 것을 칭찬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민족 중에서 더러가 준 분명치 않은 가르침과 같이, 이 체계의 관념들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영원자를 이해하는 생생한 체험을 즐기도록 사람을 이끄는 의미에서만 종교라는 진실을 젊은이에게 인식시켰다.
130:4.1 (1433.6) 알렉산드리아를 떠나기 전날 밤, 가니드와 예수는 플라톤의 가르침에 관하여 대학에서 강의하던, 정부 임용 교수들 중의 한 사람과 오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수는 학식 있는 그 그리스인 선생을 위하여 통역해주었지만, 그리스 철학을 반박하는 자신의 가르침을 주입하지는 않았다. 고노드는 그날 저녁에 볼일이 있어 떠나 있었다. 그래서 그 교수가 떠난 뒤에, 선생과 생도는 플라톤의 신조에 관하여, 오랫동안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상에 물질인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더 본질적인 영적 실체들의 그림자라는 이론과 관계된 그리스인의 어떤 가르침을 조건을 달아 인정했지만, 젊은이의 생각을 위하여 더 튼튼한 기초를 놓으려고 애썼다. 그래서 그는 우주에 있는 실체의 성질에 관하여 긴 논설을 시작하였다. 내용으로 보아서, 현대의 표현법을 빌리면, 예수는 가니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130:4.2 (1434.1) 우주 실체의 근원은 무한자이다. 유한한 우주에서 물질인 것들은 파라다이스의 원본과 영원한 하나님의 우주 지성, 이 두 가지가 시공에서 미친 결과이다. 물리적 세계에서 원인, 지적 세계에서 자의식, 영 세계에서 진보하는 자아―즉 우주의 규모로 설계되고, 영원한 관계 속에 통합되고, 완전한 품질과 신다운 가치를 체험한 이 세 가지 실체―는 최상위의 실체를 이룬다. 그러나 늘 변하는 우주에서 원인이자 지능이요 영 체험을 일으키는 최초의 성격자는 변함이 없고 절대적이다. 절대자들, 그리고 물리적 상태나 지적 인식이나 영적 신분에 이른 절대적인 것들을 제외하고, 한없는 가치와 신성한 품질을 지닌 영원한 우주에서도 모든 것은 변할 수 있으며 때때로 변하기도 한다.
130:4.3 (1434.2) 유한한 인간이 진보하여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은 우주의 아버지를 인식하는 것이요 최상위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도 최종에 이른 그런 존재들은 물리적 세계의 움직임에서, 그리고 그 물질 현상에서 줄곧 변화를 체험한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영적 우주를 계속 올라가면서 자아가 진보하는 것, 그리고 지적 우주를 더 깊이 이해하고, 또 그러한 우주에 대한 반응을 차츰차츰 의식하는 것을 알고 있다. 오로지 의지(意志)가 완전해지고, 조화되고, 일치되는 가운데, 인간은 창조자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오직 인간이 유한한 개인 의지를 창조자의 신성한 뜻에 한결같이 맞추어 시간과 영원 속에서 계속 사는 방법으로 그러한 신다운 상태에 도달하고 그 상태를 유지한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욕구가 하늘 가는 하나님의 아들의 혼 속에서 언제나 가장 높고 그 정신을 지배해야 한다.
130:4.4 (1434.3) 눈이 하나인 사람은 결코 원근의 깊이를 선명히 보기를 바랄 수 없다. 한 눈으로 보는 물질 과학자나, 한 눈으로 보는 영적 신비주의자와 우화(寓話) 작가들은 우주 실체의 참 깊이를 정확하게 상상하고 적절히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체험에서 모든 참다운 가치는 인식의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다.
130:4.5 (1434.4) 생각이 없는 인과 작용은, 투박하고 간단한 것으로부터 세련되고 복잡한 것을 진화시킬 수 없고, 영이 없는 체험은 시간 세계 필사자의 물질 지성으로부터 영원히 살아남는 신다운 인품을 진화시킬 수 없다. 무한한 신의 특징을 유일하게 나타내는, 우주의 한 가지 속성은 이렇게 점진적으로 신에 도달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성격을 끝없이 창조적으로 수여하는 것이다.
130:4.6 (1434.5) 인격(人格)은 한없는 변화와 공존할 수 있고, 동시에 모든 그러한 변화가 있는 바로 그 와중에서, 그리고 그 뒤에 언제까지나 신분을 지니는, 바로 그 우주 재산이요, 우주 실체의 바로 그 단계이다.
130:4.7 (1434.6) 생명은 최초의 우주 원인이 우주 상황에서 생기는 요구와 가능성에 대하여 적응하는 것이다. 우주 지성의 작용으로 인하여, 영이신 하나님의 영(靈) 불꽃을 붙임으로 생명이 존재하게 된다. 생명의 의미는 그 적응 능력에 있고, 생명의 가치는 진보할 수 있는― 즉 하나님을 의식하는 높이까지 이르는―그 능력에 있다.
130:4.8 (1434.7) 자의식을 가진 생명이 우주에 잘못 적응하면 우주에 부조화를 일으킨다. 인격 의지가 우주의 경향을 마침내 벗어나는 것은 지적 고립, 인격이 분리됨으로 끝난다. 깃드는 영 안내자를 잃어버리면 존재가 영적으로 중지되는 일이 따른다. 진보하는 지적 생명은 그러면 그 자체로서 저절로, 신성한 창조자의 뜻을 표현하는 우주, 목적 있는 우주가 존재한다는 논쟁할 여지가 없는 증명이다. 이 생명 전체가 더 높은 가치를 향하여 투쟁하며, 그 마지막 목표는 우주의 아버지이다.
130:4.9 (1435.1) 지능이 베푸는 상급의 준(準)영적 보살핌을 제쳐놓고, 사람은 겨우 어느 정도 동물 수준을 넘는 머리를 소유한다. 따라서 (예배하는 정신과 지혜가 없는) 동물은 상의식(上意識), 가장 높은 의식을 체험할 수 없다. 동물의 머리는 오직 객관적 우주를 의식한다.
130:4.10 (1435.2) 지식은 물질적 지성, 즉 사실을 분별하는 지성의 분야이다. 진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의식하는, 영적으로 부여받은 지능이 활동하는 분야이다. 지식은 보여줄 수 있는 것이요, 진리는 체험하는 것이다. 지식은 머리가 가진 재산이요, 진리는 혼, 즉 진보하는 자아의 체험이다. 지식은 비영(非靈) 수준의 작용이며, 진리는 우주들의 지성 영이 활동하는 수준의 한 단계이다. 물질적 지성으로 보는 눈은 실재하는 지식 세계를 파악하지만, 영적으로 변화된 지능의 눈은 참다운 가치가 있는 세계를 헤아린다. 이 두 눈이 보는 관점은 동시에 작용하고 조화되어 실체의 세계를 드러내며, 그 안에서 지혜는 진보하는 개인적 체험의 관점에서 우주의 현상을 풀이한다.
130:4.11 (1435.3) 잘못(악)은 불완전한 것에 대한 벌이다. 불완전의 질이나 잘못 적응하는 사실은 물질 수준에서 비판적 관찰과 과학적 분석으로 드러나고 도덕 수준에서 인간의 체험으로 드러난다. 악이 존재하는 것은 생각이 틀리고 진화하는 자아가 미숙하다는 증명이다. 따라서 잘못은 또 사람이 얼마나 우주를 불완전하게 해석하는가 가리킨다.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은 지혜를 얻는 과정에서, 즉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부터 완전하고 영원한 것으로,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것으로부터 최종이며 완전해진 것으로 나아가는 계획에 본래부터 생긴다. 잘못은 사람이 파라다이스의 완전함까지 올라가는 우주의 길에서 반드시 마주쳐야 하는 상대적 불완전의 그림자이다. 잘못(악)은 실재하는 우주의 질이 아니라, 단지 부족한 유한자의 불완전이 최상위 및 궁극위의 올라가는 수준과 관련하여 상대성이 관찰되는 것이다.
130:4.12 (1435.4) 예수가 비록 이 모두를 가니드가 알아듣기에 가장 적당한 말로 소년에게 이야기했지만, 이야기 끝에 가니드는 눈꺼풀이 무거워졌고 곧 잠에 빠졌다. 이튿날 아침 크레테 섬의 라시아를 향하는 배를 타려고 일찍 일어났다. 그러나 출발하기 전에, 소년은 악에 대하여 아직도 질문이 더 있었고, 이에 대하여 예수는 대답했다:
130:4.13 (1435.5) 악은 하나의 상대적인 것의 개념이다. 사물과 존재들이 가득한 하나의 유한한 우주가 무한한 자의 영원한 실체들이 우주에 표현하는 생명의 빛을 가림에 따라서, 그러한 우주가 던지는 그림자에서 나타나는 결점을 관찰함으로 악이 생긴다.
130:4.14 (1435.6) 악의 잠재성은 무한과 영원이 시간과 공간에 국한되어 표현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계시가 반드시 불완전하게 나타나는 데 본래부터 있다. 완전한 것이 있는 앞에 부분적인 것이 있다는 사실은 상대적 실체이며, 총명하게 선택할 필요를 만들어내고, 영이 인식하고 반응하는 여러 가치 수준을 확립한다. 일시적이고 제한된 인간의 머리가 생각하는, 무한한 자에 대한 불완전하고 유한한 개념은 그 자체로서 저절로 악의 잠재성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본래 있던 이 지적 부조화와 영적 부족을 이치에 맞게 영적으로 수정할 때, 부당하게 결함을 확대하는 잘못은 실재 악을 실천하는 것에 해당한다.
130:4.15 (1436.1) 정적(靜的)이고 죽은 개념은 다 악할 잠재성이 있다. 상대적이고 살아 있는 진리가 던지는 유한한 그림자는 계속 움직인다. 정적 개념은 변함없이 과학ㆍ정치ㆍ사회ㆍ종교의 발달을 지연시킨다. 정적 개념은 어떤 지식을 대표할지 모르지만, 지혜가 모자라고 진리가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상대성 개념에 빠져, 우주 정신의 인도를 받으면서 우주가 조정되고, 최상위의 영과 에너지로 말미암아 우주가 안정되도록 통제되는 것을 간과하지 말라.
130:5.1 (1436.2) 그 여행자들은 크레테에 가는 목적이 꼭 하나 있었는데, 놀고 섬 주위를 걸어 다니고 산을 오르는 것이었다. 그 시절의 크레테 사람들은 주위의 민족들 사이에서 부러워할 평판을 가지지 않았다. 그렇기는 해도 예수와 가니드는 많은 사람을 높은 수준의 생각과 생활로 이끌었고, 예루살렘으로부터 첫 전도자들이 도착했을 때 후일에 복음의 가르침을 빨리 받아들일 기초를 놓았다. 나중에 그 섬에 교회를 다시 조직하려고 타이투스를 보냈을 때 바울은 크레테인에 관하여 지나친 말을 했지만, 예수는 이 크레테인들을 사랑했다.
130:5.2 (1436.3) 크레테의 산허리에서, 예수는 종교에 관하여 고노드와 처음으로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크게 감명을 받고서 말했다, “당신이 일러주는 모든 말씀을 소년이 믿다니 놀라운 일이 아니요, 하지만 다마스커스는커녕, 예루살렘에도 사람들이 그런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을 나는 결코 몰랐소이다.” 바로 이 섬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고노드는 처음으로 예수에게 함께 인도로 돌아가자고 제안하였다. 가니드는 예수가 그러한 주선에 아마 찬성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기뻐하였다.
130:5.3 (1436.4) 어느 날 가니드가 예수가 어째서 대중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지 않았는가 물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아이야, 모든 일은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느니라. 너는 세상에 태어났지만, 아무리 걱정하고 아무리 조바심을 내도 네가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 모든 그러한 문제에 너는 때를 기다려야 하느니라. 오직 때가 되어야 나무에 달린 푸른 과일이 익으리라. 시간이 지나야 계절이 바뀌고, 해가 뜬 뒤에 해가 지는 것도 그러하니라. 나는 지금 너와 네 아버지와 함께 로마로 가는 길이고,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하니라. 내 앞날은 송두리째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느니라.” 그리고 나서, 모세, 그리고 그가 40년 동안 조심스럽게 기다리고 계속 준비했던 이야기를 가니드에게 일러주었다.
130:5.4 (1436.5) 좋은 항구를[1] [1788] 방문하던 길에 가니드가 결코 잊지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의 기억은 그가 태어난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바꾸려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언제나 바라게 만들었다. 어느 술 취한 타락한 사람이 공공(公共) 도로에서 한 여자 노예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 소녀의 곤경을 보았을 때, 예수는 앞으로 달려가서 미친 사람에게 공격받던 소녀를 구출하였다. 놀란 아이가 그에게 달라붙어 있는 동안에, 그 딱한 사람이 화가 나서 주먹으로 허공을 치느라고 지칠 때까지, 그는 힘차게 바른 팔을 내밀어 성난 사람을 안전한 거리에 붙들어 두었다. 가니드는 예수가 그 일을 처리하는 것을 돕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아버지가 제지하였다. 모두 세 사람이 그 소녀를 집까지 바래다주었을 때, 그들이 그 소녀가 쓰는 언어로 말하지 못했어도 소녀는 그들의 자비로운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고,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예수가 육체로 있던 일생을 통해서 동포를 만난 중에서 아마도 이처럼 사람들과 몸으로 씨름한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 어째서 술 취한 사람을 주먹으로 치지 않았는가 가니드에게 설명하느라고 어려움을 겪었다. 가니드는 적어도 이 사람은 그 소녀를 때린 것만큼이나 두들겨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30:6.1 (1437.1)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예수는 두려움이 많고 풀이 죽은 한 젊은이와 함께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료들과 사귐으로 위로와 용기를 얻지 못하고, 이 젊은이는 산에서 고독을 찾고 있었다. 그는 무력하고 열등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자랐다. 이 타고난 성향은 그 소년이 자라면서 부딪쳤던 수많은 어려운 상황 때문에 악화되었는데, 그 중에 주목할 것은 열두 살이었을 때 아버지를 잃은 것이다. 그들이 만났을 때, 예수는 말했다: “여보게 친구여! 이렇게 좋은 날에 어찌하여 그리 풀이 죽어 있는가? 너에게 무슨 슬픈 일이 일어났다면, 아마도 내가 어떤 방법으로 도울 수 있느니라. 어쨌든 도움을 제공하게 되어 참으로 마음이 기쁘구나.”
130:6.2 (1437.2) 젊은이는 입을 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는 그의 혼에 두 번째 접근하며 말했다. “네가 사람들을 피하려고 이 산에 올라온 것을 내가 아노라. 그래서 물론, 나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겠구나. 그러나 네가 이 산에 익숙한지 어쩐지 알고 싶노라. 산길의 방향을 아느냐? 혹시, 피닉스로 가려면 어느 길이 제일 좋은가 내게 일러줄 수 있느냐?” 자, 이 젊은이는 이 산에 아주 익숙했고, 정말로 예수에게 피닉스로 가는 길을 일러주는 일에 무척 구미가 당겼다. 매우 신이 나서 그는 땅에 산길을 모두 표시하고 모든 세부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나 잘 가라 하고 예수가 마치 떠나려는 것처럼 하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말했을 때 그는 깜짝 놀랐고 호기심이 생겼다. “네가 위로받지 못하고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을 내가 잘 아노라. 하지만 피닉스로 가는 길을 어떻게 찾는 것이 최선인가 너한테 그렇게 관대하게 도움받고 나서, 여기 산허리에 머물러 있는 동안 마음 속에서 찾는 운명의 목표까지 어떻게 가는 것이 최선인가 도움과 안내를 청하는 것을 들으려고 조금도 애쓰지 않고 생각 없이 떠나는 것은 친절하지도 공평하지도 않도다. 여러 번 오르내려 피닉스로 가는 산길을 네가 잘 아는 것 같이, 너의 달성하지 못한 희망과 이루지 못한 포부가 있는 도시로 가는 길을 내가 잘 아노라. 더군다나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니, 실망을 주지 아니하리라.” 젊은이는 거의 목이 메었으나 그럭저럭 더듬거렸다. “하지만― 당신께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았나이다―” 그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으면서 예수는 말했다. “그렇다, 얘야, 말로 하지는 않았어도, 몹시 바라는 눈으로 내 마음에 호소하였느니라. 얘야, 동료를 사랑하는 자가 보기에 낙심과 절망에 가득 찬 네 얼굴에 도움을 하소연하는 웅변이 있느니라. 여기 함께 앉아라. 그러면 봉사하는 산길과 행복의 큰길에 관하여 너에게 이르리니, 이 길은 슬픔에 빠진 자아를 사람들이 형제 정신으로, 애정으로 활동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봉사하는 기쁨으로 이끌리라.”
130:6.3 (1437.3) 이때가 되어서, 젊은이는 예수와 몹시 말하고 싶어 했다.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서 도와달라고, 슬픔과 패배의 세계를 벗어날 길을 보여달라고, 예수에게 간청했다. 예수가 말했다. “친구여, 일어나라! 대장부처럼 일어서라! 조그만 적들에게 둘러싸이고 숱한 장애물 때문에 뒤처졌는지 모르지만, 이 세상과 우주의 큰 일과 진정한 일이 네 편을 드느니라. 땅에서 가장 권세 있고 번영하는 사람과 똑같이 너에게 태양은 아침마다 인사하느니라. 보아라―너는 튼튼한 몸과 힘센 근육을 가졌고 육체의 자질은 보통을 넘는도다. 물론, 여기 산허리에 앉아서 진정한 불운과 상상하는 불운을 슬퍼하는 동안에는 네 몸이 거의 쓸모가 없도다. 하지만 큰 할 일이 기다리는 곳으로 서둘러 간다면, 너는 그 몸으로 큰 일을 할 수 있느니라. 불행한 자신으로부터 달아나려 하지만, 그리할 수는 없는 것. 너와 너의 살아가는 문제는 현실이요, 네가 살아 있는 한, 이 문제를 피할 수 없느니라. 하지만 다시 볼지니, 네 머리는 맑고 능력이 있으며, 튼튼한 몸을 지휘할 총명한 머리가 있느니라. 문제를 푸는 데 머리를 쓰고, 지능이 너를 위하여 일하도록 가르치라. 그리고 이제 그만 생각 없는 짐승처럼 겁을 먹지 말라.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두려움에 빠진 비천한 노예가 되고 우울과 패배에 종이 되기보다, 두뇌는 함께 용감하게 싸우는 친구가 되어 일생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느니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은 진정한 업적을 이룰 잠재성, 네 안에 사는 영이라. 이처럼 두려움의 사슬에서 몸을 해방하고, 이처럼 팔팔한 믿음을 가진 힘찬 존재로 영적 성품이 비로소 너를 무위(無爲)의 잘못에서 벗어나게 만든다면, 그 영은 머리가 스스로 통솔하도록 자극하고 영감을 주고 몸을 움직이게 하리라. 다음에 당장에, 새롭고 모든 것을 지배하는, 동료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존재함으로, 이 믿음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생각을 이기리라. 이 사랑이 곧 너의 혼을 넘치게 채우리니, 네가 하나님의 아이라는 의식이 네 마음 속에 태어났음이라.
130:6.4 (1438.1) “오늘, 얘야, 하나님을 위하여, 너는 믿음과 용기로 사람에게 몸 바쳐 봉사하는 사람으로서 다시 태어나고 다시 세움받아야 하느니라. 네가 마음 속의 생활에 다시 적응하였을 때, 마찬가지로 너는 세상에 다시 적응하느니라. 다시 태어났으니―영에게서 태어났으니―이제부터 전 생애가 승리를 얻는 일생이 되리라. 어려움은 너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실망은 너에게 박차를 가하리라. 어려움은 너에게 도전하고 장애물은 너를 자극하리라. 일어나라, 젊은이여! 두려움에 위축되고 비겁하게 도망치는 생활에 작별을 고하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땅에서 사람에게 고귀하게 봉사하는 데 헌신하고, 영원 속에서 하나님께 훌륭하게 영원히 봉사하도록 예정된 한 사람으로서, 서둘러 임무로 돌아가 육체를 입은 네 인생을 살라.”
130:6.5 (1438.2) 이 젊은이 포춘은 나중에 크레테에서 기독교 신자들의 지도자가 되었고, 타이투스가 크레테 신자들을 일깨우려고 수고할 때 가까운 동료가 되었다.
130:6.6 (1438.3) 참으로 푹 쉬고 기분이 상쾌해진 어느 날 한낮 무렵에, 나그네들은 북 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향하여 돛을 달려고 준비했다. 키레네에서 이틀 동안 멈추었다. 여기서 예수와 가니드는 루푸스라는 한 소년을 응급 치료했는데, 그는 짐을 싫은 송아지 수레가 무너져서 다쳤다. 그를 집으로 어머니한테로 데려갔다. 아버지 시몬은 후일에 한 로마 군인의 명령을 받아서 어느 사람의 십자가를 지었는데, 그 사람이 한때 아들을 보살핀 낯선 사람이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130:7.1 (1438.4) 카르타고로 가는 길에 예수는 사회ㆍ정치ㆍ상업에 관하여 동료 여행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거의 한 마디도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처음으로 고노드와 가니드는 예수가 훌륭한 이야기꾼인 것을 발견했고, 갈릴리에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하도록 그를 바쁘게 만들었다. 그들은 또한 그가 예루살렘이나 다마스커스가 아니라, 갈릴리에서 자랐음을 알게 되었다.
130:7.2 (1438.5) 어쩌다 만난 사람들의 대다수가 예수에게 이끌리는 것을 눈여겨보았기 때문에, 가니드는 사람이 친구를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물었을 때 선생은 말했다. “동료들에게 관심을 가지라. 어떻게 사랑하는가 배우고, 저희가 무슨 일이 처리되기를 바란다고 확신이 들면, 그런 일을 저희에게 해줄 기회를 살펴보라.” 그리고 나서 유대인의 옛 속담을 인용하였다―”친구를 가지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친절을 보여야 한다.”
130:7.3 (1439.1) 카르타고에서 예수는 한 미트라교 사제와 함께 불멸에 대하여, 시간과 영원에 대하여, 길고 기억에 남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페르시아인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을 받았고, 정말로 예수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했다. 그가 던진 여러 질문에 답하여, 오늘날의 말로 표현하면, 예수는 다음 내용으로 이야기했다:
130:7.4 (1439.2)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 인간의 의식이 파악하는 현세의 사건들이 흘러간다. 시간은 사건들이 인식되고 분리되는 연속된 배열에 주어진 이름이다. 공간의 우주는 고정된 파라다이스 거처 바깥에 어떤 내부 위치에서도 보이는, 시간에 관계된 현상이다. 시간의 움직임은 오직, 공간에서 움직이지 않는 어떤 것과 관련하여 시간적 현상으로서만 드러난다. 온 우주에서, 파라다이스와 거기에 있는 신들은 시간과 공간, 모두를 초월한다. 사람이 사는 여러 세계에서,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영이 깃들고 인도하는) 사람의 인격은 현세의 사건들이 진행되는 물질적 순서를 뛰어넘을 수 있는, 물리적으로 관련된 유일한 실체이다.
130:7.5 (1439.3) 동물은 사람처럼 시간을 느끼지 않는다. 사람에게도 부분적이고 제한된 관점 때문에, 시간은 사건들의 연속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람이 위로 올라감에 따라서, 사람이 안쪽으로 진보함에 따라서, 이러한 사건의 행렬을 보는 시야는 넓어져 그 전체의 모습이 점점 더 식별된다. 예전에 사건의 연속으로 보이던 것이, 전체로서, 완벽하게 관련된 집합으로 보일 것이다. 이 방법으로 동그라미처럼 동시에 일어나는 성향은 일직선으로 연속된 사건들로 보던 예전의 의식(意識)을 점점 더 대체할 것이다.
130:7.6 (1439.4) 시간에 제약을 받는 일곱 가지 다른 공간 개념이 있다. 공간은 시간으로 측정하며, 시간을 공간으로 측정하지 않는다. 과학자가 겪는 혼란은 공간의 실체가 무엇인가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다. 공간은 겨우 우주 물체들 사이의 변하는 관계를 보는 지적 개념이 아니다. 공간은 비어 있지 않으며, 사람이 아는 바 어느 정도라도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지성이다. 지성은 물체들이 공간과 관계된 개념과 따로 활동할 수 있다. 공간은 생물의 지위를 가진 모든 존재에게 상대적으로, 비교적 유한하다. 의식이 일곱 가지 우주 차원을 자각함에 가까워질수록, 잠재 공간 개념은 궁극에 더욱 가까워진다. 하지만 공간의 잠재성은 오직 절대 수준에서만 참으로 궁극에 이른다.
130:7.7 (1439.5) 사람이 승천하고 완전하게 되는, 우주의 여러 수준에서 우주의 실체는 확대되는 의미, 언제나 상대적 의미를 가졌음이 명백하다. 궁극에, 살아남는 필사자가 일곱 차원의 우주에서 신분을 얻는다.
130:7.8 (1439.6) 물질에 기원을 가진 지성의 시공(時空) 개념은, 의식하고 상상하는 인격자가 여러 우주 수준까지 올라감에 따라서, 연달아 확대되도록 정해져 있다. 사람이 존재의 물질 수준과 영적 수준 사이에 개재하는 지성에 도달할 때, 그의 시공 관념은 질적 파악과 양적 체험 면에서 엄청나게 확대될 것이다. 진보하는 영(靈) 인격자의 우주 개념이 커지는 것은 통찰력의 깊이와 의식의 규모, 이 두 가지가 확대되기 때문이다. 인격이 위로, 안으로 계속, 신을 닮는 초월 수준까지 지나감에 따라서, 시공 개념은 절대자들의 개념, 시간이 없고 공간이 없는 개념에 점점 더 가까워질 것이다. 상대적으로, 그리고 초월적 달성에 따라서, 궁극의 운명을 가진 자녀들이 이 절대 수준의 개념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130:8.1 (1440.1)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 처음으로 멈춘 곳은 말타 섬이었다. 여기서 예수는 클라우두스라 이름하는, 기가 죽고 낙심한 젊은이와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친구는 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했지만, 다마스커스 서기관과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말했다. “나는 대장부처럼 굳세게 살리이다. 겁쟁이 노릇은 끝났나이다. 내 친족에게 돌아가서 모두 다시 시작하리이다.” 얼마 안 되어 그는 견유학파를 열심으로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베드로와 함께 손을 잡고 로마와 나폴리에서 기독교를 선포하였다. 베드로가 죽은 뒤에 그는 계속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도했다. 그러나 말타에서 그를 격려해준 사람이 그가 나중에 세상의 구원자라고 선포했던 예수였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했다.
130:8.2 (1440.2) 시라큐스에서 한 주를 꼬박 보냈다. 여기에 멈춘 동안에 주목할 사건은, 신앙을 버린 유대인 에즈라를 회개시킨 것이었는데, 그는 예수와 동반자들이 묵은 여인숙을 경영했다. 에즈라는 예수의 태도에 반했고 이스라엘의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도와달라고 예수에게 부탁했다. “나는 아브라함의 참된 아들이 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을 찾을 수 없나이다”하고 말하면서 절망을 하소연했다. 예수는 대답했다. “참으로 하나님을 찾고 싶다면, 그 소망 자체가, 네가 이미 그를 찾아냈다는 증거이라. 너의 어려움은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니, 아버지가 이미 너를 찾아냈음이라. 너의 어려움은 단지 하나님을 모르는 데 있느니라. 예레미야의 예언서에서 이런 말을 읽지 못하였느냐? ‘너희는 나를 찾아 다니겠고, 마음을 다하여 나를 찾아 다닐 때, 나를 찾아내리라’ 또 한편, 바로 이 선지자가 이렇게 말하지 않더냐? ‘나는 나를 알아보는 마음, 내가 주(主)임을 아는 마음을 너희에게 주겠고, 너희는 내 백성에 속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너는 성서(聖書)에서[2] [1789] 또한 이런 말씀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는 사람을 내려다보며 누구라도, 나는 죄를 범하고 옳은 것을 곡해하였고 그것이 내게 유익하지 못했도다 하면, 그때 하나님이 그 사람의 혼을 어둠 속에서 구원하겠고 그는 빛을 보리라.’” 에즈라는 그의 혼에 넘치게 하나님을 발견했다. 나중에 이 유대인은 어느 개종한 부자 그리스인과 제휴하여 시라큐스에서 첫 기독교 교회를 세웠다.
130:8.3 (1440.3) 그들은 메시나에서 하루만 멈췄지만 과일 행상을 하는 한 어린 소년의 일생을 바꾸기에는 길고도 남았다. 예수는 그에게서 과일을 사는 한편 그에게 생명의 빵을 먹였다. 소년은 예수의 말씀과 함께 그의 친절한 눈빛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때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예수는 말했다. “부디 잘 가라, 아이야, 어른으로 자라기까지 용기를 가져라, 몸이 자란 다음에 또한 어떻게 혼을 키우는가 배우라. 하늘의 내 아버지가 너와 함께 계시고 네 앞에 가리라.” 이 소년은 미트라교의 신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130:8.4 (1440.4) 마침내 그들은 나폴리에 이르렀고, 목적지 로마에서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고 느꼈다. 고노드는 나폴리에서 사업 거래가 많이 있었다. 예수가 통역으로서 필요한 시간을 제외하고 그와 가니드는 도시를 찾아보고 탐구하는 데 여가를 보냈다. 가니드는 곤경에 빠진 듯한 사람들을 찾아내는 데 재빨라졌다. 그들은 이 도시에서 빈곤한 자를 많이 발견했고 자선금을 많이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거리의 한 거지에게 동전을 주고 나서 예수가 멈춰 그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하지 않으려 했을 때, 예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그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는 말했다. “네 말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 자에게 어찌하여 말을 낭비하느냐? 아버지의 영은 아들 될 능력이 전혀 없는 자를 가르치고 구할 수 없느니라.” 예수의 말씀은 그 사람이 정상의 정신을 가지지 않았다, 영의 인도에 반응할 능력이 모자란다는 뜻이었다.
130:8.5 (1441.1) 나폴리에서는 특별한 체험이 없었다. 예수와 그 젊은이는 그 도시를 샅샅이 뒤지면서 수백명의 어른과 아이들에게 따듯한 웃음을 많이 보내어 명랑한 기분을 퍼뜨렸다.
130:8.6 (1441.2) 여기서부터 카푸아를 거쳐서 로마로 갔고, 카푸아에서는 사흘 동안 머물렀다. 아피아 길을 따라서, 짐 실은 짐승들을 거느리고 로마를 향하여 계속 여행했다. 세 사람 모두가 제국의 여왕, 전세계 최대의 도시를 구경하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131:0.1 (1442.1) 알렉산드리아에서 예수와 고노드와 가니드가 머무르는 동안에,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과 필사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세계의 여러 종교의 가르침을 수집하느라고 이 젊은이는 많은 시간과 아버지의 돈을 적지 않게 썼다. 신들에 관한 세상의 여러 종교의 교리를 이렇게 요약하면서, 가니드는 학식 있는 통역자를 60명이 넘게 고용하였다. 일신교를 묘사하는 이 모든 가르침은 대체로, 직접 또는 간접으로, 마키벤타 멜기세덱 선교사들의 전도로부터 유래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이 선교사들은 한 분의 하나님―최고자―의 교리를 땅 끝까지 퍼뜨리려고 살렘 본부를 떠나갔다.
131:0.2 (1442.2) 이 글로 가니드가 작성한 원고의 요점을 발표한다. 그는 이것을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에서 준비했으며, 이것은 그가 죽은 뒤에 몇백 년 동안 인도에서 보존되었다. 그는 이 자료를 열 가지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수집했다:
131:1.1 (1442.3) 멜기세덱 제자들의 가르침의 잔재는 유대교에서 지속한 것을 제쳐놓고, 견유학파의 교리에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가니드가 고른 것은 다음을 포함한다:
131:1.2 (1442.4) “하나님은 최상이요 하늘과 땅에서 최고자이로다. 하나님은 완전하게 된 영원의 동그라미요, 온 우주를 다스리도다. 하늘과 땅을 혼자 만드신 분이라. 사물이 있으라 그가 선포하면 그것이 존재하느니라. 우리의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요, 이해심이 있고 자비롭도다. 높고 거룩하고 참되고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나 우리 하나님을 닮았도다. 최고자는 하늘과 땅의 빛이요 동서남북에 두루 계시는 하나님이라.
131:1.3 (1442.5) “땅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최상위의 눈부신 얼굴은 위엄과 영광 속에 거하리라. 최고자는 만물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요, 시작이자 끝이라. 오직 한 분, 이 하나님이 계시니 그 이름은 진리이라.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고 분노와 적개심이 전혀 없으며, 불멸하고 무한하시도다. 우리의 하나님은 전능하고 관대하시도다.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시나 오직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예배하노라. 하나님은 만물―곧 우리의 속 생각과 입 밖에 내는 말―을 아시며, 또한 우리 각자가 무엇을 받아야 마땅한지 아시니라. 그의 힘은 만물을 감당하시니라.
131:1.4 (1442.6) “하나님은 평화를 주시는 분이요, 그를 두려워하고 믿는 모든 사람에게 충실한 보호자이라. 섬기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도다. 모든 창조된 세계는 최고자의 권능 안에 존재하느니라. 그의 신다운 사랑은 그의 거룩한 권능에서 솟아나오며 사랑은 그의 위대한 힘으로부터 생겨나느니라. 최고자는 육체와 혼이 연합하라고 선포하였고 사람에게 자신의 영을 부여하였도다. 사람이 하는 일은 틀림없이 끝나지만 창조자가 하는 일은 언제까지나 이어지도다. 우리는 사람의 경험으로부터 지식을 얻으나 최고자를 숙고함으로 지혜를 뽑아내느니라.
131:1.5 (1443.1) “하나님은 땅에 비를 내리고 싹트는 곡식 위에 해가 비치게 만드시며, 이 생애에서 좋은 것을 풍성하게 수확하게 하며, 다가오는 세상에서 영원한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느니라. 우리의 하나님은 큰 권한을 누리시고 그의 이름은 높이 솟아오르며 그의 성품은 깊이를 잴 수 없도다. 아플 때 너희를 고치는 분은 최고자이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향하여 선을 가득히 품으시며, 우리는 최고자와 같은 친구가 없도다. 그의 자비는 모든 곳을 채우며, 그의 선하심은 모든 혼을 품에 안도다. 최고자는 변함이 없고, 우리가 곤경에 빠질 때마다 도우시는 분이라. 기도하려고 너희가 어디를 향해도 최고자의 얼굴이 있고 우리 하나님의 열린 귀가 있도다. 너는 사람을 피하여 숨어도 좋지만, 하나님을 피하여 숨어서는 안 되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멀리 계시지 않고, 어디에나 계시니라. 하나님은 모든 곳을 채우며, 거룩한 이름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사시니라. 창조된 세계는 창조자 안에 있고, 창조자는 그 창조된 세계 안에 계시니라. 우리는 최고자를 찾다가 그분이 마음 속에 계심을 발견하느니라. 귀한 친구를 찾으러 나갔다가 네 혼 속에서 그를 발견하느니라.
131:1.6 (1443.2)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바라보나니, 저희는 형제이라. 이기심이 있는 자, 육체를 입은 형제를 업신여기는 자는 오직 지루함을 상으로 받느니라. 동료를 사랑하는 자와 마음이 깨끗한 자는 하나님을 보리라. 하나님은 결코 사람의 성실함을 잊지 아니하시니라. 마음이 정직한 자를 진리로 인도하시리니, 하나님이 진리인 까닭이라.
131:1.7 (1443.3) “생명의 진리를 사랑함으로, 너의 일생에 잘못을 버리고 악을 이기라. 사람들과 어떤 관계에 있어도 악 대신에 선(善)을 행하라. 주 하나님은 자비롭고 애정이 깊고, 용서하시는 분이라. 하나님을 사랑하자,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리고 그의 자비를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으리라.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는 형제요, 하나님은 저희의 아버지이라. 너희가 받기 싫어하는 악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
131:1.8 (1443.4) “항상 그의 이름을 부르라. 그리하면 그 이름을 믿는 그대로 네 기도를 들으리라. 최고자를 예배하는 것은 얼마나 큰 명예인가! 모든 세상과 우주가 최고자를 예배하도다. 무슨 기도를 하든지 감사를 드리라―예배의 높이까지 올라가라. 기도로 넘치는 예배는 악을 피하고 죄를 막느니라. 항상 최고자의 이름을 찬양하자. 최고자에게 피난하는 사람은 자기의 허물을 우주로부터 숨기느니라.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 천지 만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느니라. 최고자는 애정 깊은 아버지와 어머니 같으니, 우리를, 땅에 있는 자녀를 정말로 사랑하시니라.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고 구원의 길로 발걸음을 인도하시리라. 우리의 손을 잡고 그에게 인도하시리라. 하나님은 믿는 자를 구원하고, 사람에게 그의 이름을 섬기라 강요하지 않느니라.
131:1.9 (1443.5) “최고자의 믿음이 가슴 속에 들어갔으면, 너희는 일생토록 날마다 두려움 없이 거하리라. 불경(不敬)한 자가 번영한다고 안달하지 말고 악행하려고 계획하는 자를 두려워 말라. 혼으로 하여금 죄로부터 돌아서게 하며, 온 믿음을 구원의 하나님께 맡기라. 방랑하는 필사자의 지친 혼은 최고자의 팔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느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신의 품에 안기기를 그리워하며, 땅에서 사는 아이는 우주의 아버지의 팔에 안전히 안기기를 몹시 바라느니라. 고귀한 사람은 필사자의 혼이 최상위의 영과 섞이는 높은 땅을 추구하느니라. 하나님은 공정하시니, 이 세상에서 심고서 받지 못하는 열매를 다음 세상에서 받을지니라.”
131:2.1 (1444.1) 팔레스타인의 켄 족속은 멜기세덱의 가르침을 많이 건졌고 이러한 기록으로부터 유대인이 보존하고 수정한 대로 예수와 가니드는 다음을 선택하였다:
131:2.2 (1444.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셨더라. 보라, 창조하신 만물이 아주 좋았더라. 주, 그는 하나님이요, 위로 하늘이나 아래에 땅에서도 견줄 이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할지어다. 물이 바다를 덮는 것 같이, 땅은 주의 지식으로 가득하리라.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창공이 그의 솜씨를 보이느니라. 날마다 낮이 입을 열고, 밤마다 밤이 지식을 보여주느니라. 어느 나라 말이나 언어에도 그 목소리가 반드시 들리니라. 주의 하시는 일은 위대하며 주는 지혜롭게 만물을 지으셨도다. 주의 위대함은 헤아릴 수 없도다. 별의 수를 아시며, 별들의 이름을 지으시도다.
131:2.3 (1444.3) “주의 권능은 크고, 그의 이해력은 무한하니라. 주가 이르시되,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 같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은 깊고 비밀스러운 것들을 드러내시니, 빛이 함께 거하심이라. 주는 자비롭고 인자하시며, 오래 참고 선과 진실이 가득하도다. 주는 선하고 올바르며, 온순한 자의 판단을 인도하시리라. 주의 선하심을 맛보고 눈으로 볼지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니, 곤경에 빠졌을 때 분명히 도우시는 분이로다.
131:2.4 (1444.4) “주의 자비는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베풀고, 그의 올바르심은 대대로 우리 자손에게도 미치느니라. 주는 인자하고 동정심이 가득하시니라. 주는 모든 사람에게 선하시며 부드러운 자비는 모든 창조를 덮도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저희의 상처를 동여매시니라. 하나님의 영을 피하여 내가 어디로 갈까? 신성한 계심을 피하여 내가 어디로 달아날까? 영원에 거하시는 높고 거룩한 이가 말씀하시니 그의 이름은 거룩이로다.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서 거하나니, 뉘우치는 마음과 겸손한 영을 가진 자도 함께 있도다!’ 아무도 우리 하나님을 피하여 숨을 수 없으니, 주가 하늘과 땅을 채우심이라. 하늘이여 기뻐하고 땅이여 즐거워하라. 열강이여 외치라. ‘주가 군림하시도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라, 그의 자비가 언제까지나 지속됨이로다.’
131:2.5 (1444.5) “하늘이 하나님의 올바름을 선포하며, 온 민족이 그의 영광을 보았도다. 우리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요, 우리가 스스로를 만들지 않았도다.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목초지에 있는 양이로다. 그의 자비는 영원히 이어지고 진리는 언제까지나 지속하도다. 우리 하나님은 열강의 통치자이라. 땅은 그의 영광으로 가득할지어다! 아, 그가 선하시고 사람의 자녀에게 놀라운 선물을 주셨으니 사람이 주를 찬양하면 좋으리라!
131:2.6 (1444.6) “하나님은 사람을 신다움이 조금 못하게 만들었고 사랑과 자비를 그 머리 위에 씌웠도다. 주는 올바른 자의 길은 알거니와 불경한 자의 길은 멸망할지니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이로다. 최상위를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 전능한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내 앞에서 걷고 완전하라.’ 자만이 패망 앞에 가고 오만한 정신이 몰락보다 앞서 가느니라. 자신의 정신을 다스리는 자는 한 도시를 점령하는 자보다 강하니라. 주 하나님, 거룩하신 분이 말씀하시도다. ‘영적 안식처로 돌아갈 때 네가 구원받으며, 평온과 확신 속에 너의 힘이 있을지니라.’ 주의 시중을 드는 자는 힘을 되찾고, 독수리 같이 날아 올라가리라. 저희가 달려도 지치지 아니하며 걸어도 쓰러지지 아니하리라. 주가 너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주가 말씀하시니, ‘두려워 말라, 내가 함께 있음이라. 절망하지 말지니, 내가 너의 하나님인 까닭이라. 너에게 힘을 주고, 너를 도우리라. 옳도다, 내 정의(正義)의 바른 손으로 너를 지지하리라.’
131:2.7 (1445.1)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주는 구원자이라. 하나님이 우주의 무리들을 지으셨고 저희를 모두 보존하시니라. 그의 올바름은 산 같고 그의 판단은 대양과 같도다. 우리로 하여금 기쁨의 강물을 마시게 하며, 우리가 그의 빛 가운데서 빛을 보리라. 주께 감사를 드리고 최고자에게 찬송을 올리며, 아침에 인자함을 보이고 밤마다 신다운 충실함을 보이는 것이 좋으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영토는 온 세대에 두루 지속되도다. 주는 나의 목자요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는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며,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도다. 그는 내 혼을 회복하시며,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도다. 옳도다, 내가 어두운 죽음의 골짜기를 거닐지라도 전혀 악을 겁내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로다. 선과 자비가 일생토록 분명히 나를 따르겠고, 내가 주의 집에서 영원히 거하리라.
131:2.8 (1445.2) “야웨는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 그러므로 나는 신의 이름을 의지하리라. 나는 마음을 다하여 주를 의지하겠고, 내 자신의 분별에 의존하지 아니하리라. 어떤 길을 걸어도 주를 인정하겠고 주는 나의 길을 인도하리라. 주는 충실하시며, 그를 섬기는 자와 약속을 지키시니, 올바른 자는 믿음으로 살지니라. 네가 성공하지 못하면, 죄가 문에서 기다리고 있는 까닭이라. 사람들은 저희가 땅을 갈아 심은 악을 거두며 뿌린 죄를 거두느니라. 악행하는 자로 인하여 안달하지 말라. 마음 속에 불의를 생각하면 주는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 죄를 지으면, 또한 자신의 혼에게 잘못하느니라. 선하든 악하든 모든 비밀과 함께, 하나님은 누구든지 행한 대로 재판하시니라. 사람이 마음 속에 무엇을 생각하면, 그 사람됨도 마찬가지이라.
131:2.9 (1445.3) “주는 성실하고 진실하게 주께 부탁하는 모든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니라. 울음이 밤새 지속될까 싶어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느니라. 즐거운 마음은 약처럼 좋으니라. 하나님은 올바르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하나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을 지킬지니, 그것이 사람이 할 일의 전부임이라. 하늘을 만드시고 땅을 빚으신 주가 이처럼 말씀하시니라. ‘나 외에 아무 하나님, 공의로운 하나님과 구원자가 없느니라. 땅의 모든 끝이여, 나를 바라보고 구원을 받으라. 나를 추구하고 마음을 다하여 나를 찾으면, 나를 찾아낼지니라.’ 온유한 자는 땅을 물려받겠고, 큰 평화를 기뻐할지니라. 불법을 심는 자는 재난을 거둘지며 풍파의 씨앗을 뿌리는 자는 회오리바람을 거두리라.
131:2.10 (1445.4) “‘이제 오라, 함께 따져보자’하고 주가 말씀하시니라.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 같이 희게 되리라. 죄가 핏빛처럼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그러나 사악한 자에게는 아무 평화가 없느니라. 좋은 것을 네가 받지 못하는 것은 바로 네가 지은 죄 때문이라. 하나님은 나의 얼굴빛을 건강하게 하며, 내 혼에 기쁨이로다. 영원한 하나님은 나의 힘이요, 우리의 거처이니 그 밑에 영원한 팔이 있도다. 주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계시며, 어린아이와 같은 영을 가진 자를 다 구원하시니라. 올바른 사람에게 고난이 많아도 주는 그 모든 고난에서 그를 구원하시니라. 주에게 너의 길을 맡기라―곧 믿을지니―그가 이루시리라. 최고자의 비밀한 곳에 사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라.
131:2.11 (1445.5)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며, 아무에게도 불평을 품지 말라. 네가 싫어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하지 말라. 형제를 사랑할지니, ‘내 아이들을 아낌없이 내가 사랑하리라’ 주가 말씀하셨음이라. 공정한 자의 길은 반짝이는 빛과 같으니, 맑은 날이 될 때까지 더욱 빛나리라. 지혜로운 자는 하늘이 밝은 것처럼 빛나겠고, 많은 사람을 올바름으로 돌이키는 자는 별처럼 영원토록 빛나리라. 사악한 자는 악한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반역하는 생각을 버릴지어다. 주가 말씀하시니라, ‘저희로 하여금 내게로 돌아오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리라. 내가 넘치게 용서하리라.’
131:2.12 (1446.1) “하늘과 땅을 지으신 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내 율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큰 평화가 있느니라. 내 계명(誡命)은 이것이라. 마음을 다하여 나를 사랑할지니라.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내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를 기억하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탐하지 말라.’
131:2.13 (1446.2) “주를 지극히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나는 무덤에서 너를 되찾으리라. 너를 죽음에서 구제하리라. 나는 네 아이들에게 공정할 뿐 아니라 자비를 베풀리라. 땅에 사는 내 사람들에게, 너희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내가 말하지 않더냐? 내가 너희를 영원한 애정으로 사랑하지 않더냐? 나와 같이 되고, 파라다이스에서 나와 함께 영원히 거하자고 너희를 부르지 아니하더냐?’”
131:3.1 (1446.3) 하나님이 없이, 성격을 가진 우주의 신이 없이, 불교가 위대하고 아름다운 종교에 얼마큼 가까이 접근했는가 발견하고서 가니드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어떤 초기 신앙의 기록을 얼마큼 찾아냈고 이것은 부다의 시절에도 인도에서 계속해서 일했던 멜기세덱 선교사들의 가르침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반영하였다. 예수와 가니드는 불교의 문헌으로부터 다음의 말씀을 수집했다:
131:3.2 (1446.4) “깨끗한 마음으로부터 기쁨이 솟아나 무한자에게 이르리라. 나의 존재 전체가 인간을 초월하는 이 기쁨과 조화를 이루리라. 내 혼은 만족하게 채워졌고, 마음은 평온히 확신하는 지극한 행복으로 넘쳐흐르도다. 나는 아무 두려움이 없고 걱정에 매이지 않노라. 나는 안전 속에 거하며, 적들이 나를 놀라게 할 수 없도다. 확신의 열매로 나는 만족하노라. 나는 불멸자에게 다가가는 것이 쉬움을 발견했노라. 긴 나그네 길에 나를 유지할 믿음을 얻고자 기도하노라. 건너 세상에서 온 믿음이 나를 실망케 하지 않음을 아노라. 불멸자를 믿는 믿음, 곧 겸손ㆍ정직ㆍ지혜ㆍ용기ㆍ지식ㆍ인내를 만들어 내는 믿음이라도, 형제가 그런 믿음으로 가득차 있으면 번영할 것을 아노라. 슬픔을 버리고 두려움을 던져 버리자. 믿음으로 참된 올바름과 진정한 남자다움을 지니자. 정의(正義)와 자비에 관하여 명상하기를 배우자. 믿음은 사람의 참 재산이요, 이는 미덕과 영광의 자질이라.
131:3.3 (1446.5) “불의는 경멸할 것, 죄는 멸시할 것이라. 생각으로 가지든 행위로 실천하든, 악은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니라. 먼지가 바람을 따르는 것 같이, 악한 길에는 아픔과 슬픔이 따르느니라. 그림자가 물질인 것의 본질을 따르는 것 같이, 행복과 정신의 평안은 깨끗한 생각과 고결한 생활을 따르느니라. 악은 잘못 생각하여 얻는 열매이라. 죄가 없는 데서 죄를 보는 것과 죄가 있는 데서 죄를 못 보는 것은 악하니라. 악은 거짓된 교리의 길이라. 사물을 그대로 봄으로 악을 피하는 자는 이처럼 진리를 품어서 기쁨을 얻느니라. 죄를 싫어함으로 너의 불쌍한 처지를 벗어날지어다. 고귀한 분을 바라볼 때, 마음을 다하여 죄에서 돌이키라. 악행에 핑계를 대지 말며 죄지은 것을 변명하지 말라. 지난 죄를 갚으려고 노력함으로 너는 앞날에 죄지으려는 성향에 저항하는 힘을 얻느니라. 자제는 뉘우침에서 태어나느니라. 고귀한 분에게 남김없이 잘못을 고백하라.
131:3.4 (1447.1) “명랑함과 즐거움은 잘 한 일에 대한 보상이며 불멸자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 아무도 네 정신의 자유를 빼앗을 수 없느니라. 네 종교를 믿는 신앙이 마음을 해방시켰을 때, 머리 속이 산처럼 안정되고 꼼짝하지 않을 때, 혼의 평화가 강물처럼 고요히 흐르리라. 구원을 확신하는 자는 영원히 육욕ㆍ질투ㆍ미움에서, 그리고 재산을 모으려는 망상에서 벗어나느니라. 믿음이 더 낳은 생활을 하게 만드는 에너지이나, 그런데도 너는 인내함으로 바로 너의 구원을 해결해야 하느니라. 마지막에 구원받는 것을 확신하려면, 모든 올바름을 성취하려고 꼭 성실하게 애쓰도록 하라. 안에서 솟아나오는 마음의 확신을 기르고, 이처럼 영원히 구원받는 큰 기쁨을 즐기러 오라.
131:3.5 (1447.2) “어떤 신자도 태만하고 게으르며 허약하고 빈둥거리며 부끄러움이 없고 이기심을 고집하면, 불멸의 지혜를 깨우치기를 바라지 못하느니라. 누구나 생각이 깊고 신중하고 반성하며 열심 있고 성실하면―아직 땅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도―신의 지혜로 평화와 해방을 얻는 최고의 깨우침에 이를 수 있느니라. 모든 행위에 보상이 따른다는 것을 기억하라. 악은 슬픔을 낳고, 죄는 아픔으로 끝나느니라. 기쁨과 행복은 선한 생활의 결과이라. 악을 행하는 자조차 악행이 무르익기 전에 유예 기간을 즐기나 악행에 대하여 한껏 수확을 거두는 일이 불가피하게 틀림없이 다가오느니라. 아무도 마음 속에 ‘악행에 대한 벌이 가까이 오지 않으리라” 하면서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 지혜로운 심판이 있을 때, 네가 행한 것을 그대로 네가 받을지니라. 동료들에게 불공정하게 행한 것은 너에게 돌아올지니라. 사람은 자기 행위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느니라.
131:3.6 (1447.3) “바보가 마음 속에 ‘악이 나를 따라잡지 못할지라’하였더라. 그러나 오로지 혼이 책망을 몹시 바라고 머리가 지혜를 구할 때에야 안전하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고귀한 혼이니, 적들 한가운데서도 친절하고 난폭한 자 사이에서 차분하며 탐욕스러운 자 사이에서 너그러우니라. 자신을 사랑함은 좋은 밭에 잡초와 같으니라. 이기심은 슬픔을 낳고, 끊임없는 걱정은 사람을 죽이느니라. 유순한 정신은 행복을 낳느니라. 자신을 이기고 복종시키는 자는 가장 큰 용사이라. 모든 일에 삼가는 것이 좋으니라. 오직 미덕을 귀중히 여기고 의무를 이행하는 자가 뛰어난 사람이라. 분노와 미움에 지배되지 말라.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모질게 말하지 말라. 만족이 가장 큰 재산이라. 지혜롭게 준 것은 잘 저축한 것이라. 너에게 행해지기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 선으로 악을 갚으라. 착한 것으로 악을 이기라.
131:3.7 (1447.4) “의로운 혼은 온 땅을 다스리는 왕이 되는 것보다 더 바람직하니라. 성실하면 불멸에 이르며, 죽음은 경솔하게 산 결과이라. 진지한 자는 죽지 않으나 생각없이 사는 자는 이미 죽었느니라. 죽음이 없는 경지를 꿰뚫어보는 자는 복이 있도다. 산 자를 괴롭히는 자는 죽은 뒤에 도저히 복을 얻지 못하리라. 이기심이 없는 자는 하늘로 가며, 거기서 무한히 자유로운 행복을 즐기고 더욱 고귀하게 너그러워지느니라. 올바르게 생각하고 고상하게 말하며 사심 없이 행하는 필사자마다 여기서 이 짧은 일생 동안 덕을 누릴 뿐 아니라, 몸이 썩은 뒤에도 계속 하늘의 기쁨을 누리리라.”
131:4.1 (1447.5) 멜기세덱의 선교사들은 어디로 여행하든지 유일신의 가르침을 가지고 갔다. 이 일신교 교리 중에 많은 것은, 다른 이전의 개념들과 함께, 후일에 힌두교의 가르침에 담겨지게 되었다. 예수와 가니드는 다음을 추려냈다:
131:4.2 (1448.1) “그는 크신 하나님이요 모든 면에서 최상이라. 그는 만물을 둘러싸는 주요, 온 우주를 창조하고 통제하는 분이라. 하나님은 유일한 분이요, 홀로, 혼자서 계시며, 오직 한 분이라. 한 분인 이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이요, 혼의 마지막 운명이라. 최상자는 말할 수 없이 빛나며 빛 중의 빛이라. 이 신성한 빛이 모든 마음과 세계를 비추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요―사람들의 곁에 계시며―그를 알려고 배우는 자는 불멸하게 되느니라. 하나님은 큰 에너지 근원이요, 큰 혼이라. 만물 위에 우주의 지배권을 행사하시니라. 이 유일한 하나님은 사랑이 깊고 영화로우며 찬송받을 만하니라. 우리 하나님은 최상의 권능을 가졌고 가장 높은 거처에 계시니라. 이 참된 분은 영원하고 신성하니, 하늘의 첫째 가는 주이라. 모든 선지자가 갈채하여 그를 맞이하였고 그는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냈도다. 우리는 그를 예배하나이다. 아, 최상 성격이여, 존재들의 근원, 창조의 주, 우주의 통치자여, 어디에나 계시는 능력을 당신이 지은 사람들, 우리에게 드러내소서! 하나님은 해와 별을 만드셨고, 밝고 깨끗하며 스스로 계시니라. 그의 영원한 지식은 신답게 지혜로운 것이라. 영원자는 악에 물들지 않았도다. 우주가 하나님으로부터 솟아났은즉, 그는 우주를 적절히 다스리는도다. 그는 창조의 원인이요, 따라서 만물이 그분 안에 자리를 잡느니라.
131:4.3 (1448.2) “하나님은 어떤 선한 사람에게도 곤경에 빠져 있을 때 확실한 피난처이라, 불멸자는 모든 인류를 돌보시니라. 하나님의 구원은 힘차고 그는 품위 있게 친절을 베풀도다. 그는 사랑이 많은 보호자요, 복된 방어자이로다. 주가 말씀하시되, ‘나는 저희의 혼 속에, 지혜의 등불로서 거하노라. 나는 빛나는 것 중에 빛이며, 선한 것 속에 선이라.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내가 또한 있느니라.’ 사람은 창조자가 계신 앞에서 달아날 수 없느니라. 주는 모든 필사자가 끊임없이 눈을 깜빡하는 것까지 세며, 우리는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 이 신다운 존재를 예배하노라. 그는 만물에 스며들고 아낌없이 주시며, 두루 계시고 무한히 친절하시니라. 주는 우리의 통치자, 피난처요 최고의 통제자이니, 그 시원(始原)의 영이 필사의 혼 속에 거하도다. 악과 미덕을 보는 영원한 증인은 사람의 마음 속에 거하시니라. 찬미할 만하고 신다운 생명 수여자를 오랫동안 묵상하자. 그의 영이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지도하게 할지어다. 이 비현실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우리를 이끄소서! 어둠에서 빛으로 우리를 이끄소서! 죽음에서 불멸로 우리를 안내하소서!
131:4.4 (1448.3) “마음 속에 모든 미움을 없애버리고, 영원자를 경배하자! 우리의 하나님은 기도의 주이니, 자녀들의 외치는 소리를 들으시니라. 모든 백성이 뜻을 그에게, 의지가 굳센 이에게 바칠지어다. 기도의 주가 관대하심을 기뻐하자. 기도를 가장 가까운 친구로 삼고 예배가 네 혼의 기둥이 되게 하라. 영원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오직 사랑으로 나를 경배하면 나에게 도달할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나를 경배하는 것이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미덕임이라.’ 하나님은 마음이 암담한 자에게 빛을 밝히시는 분이요 힘없는 자에게 힘이라. 하나님이 우리의 강한 친구이니 우리는 두려움이 없도다. 진 적이 없는 정복자의 이름을 우리가 찬송하노라. 우리가 그를 경배하는 것은 그가 사람에게 충실하고 영원히 도우시는 분인 까닭이라. 하나님은 우리의 확실한 지도자요 어김없는 안내자이라. 하늘과 땅의 위대한 부모요, 한없는 에너지와 무한한 지혜를 가지셨나니라. 그의 광채는 숭고하고 아름다움은 신성하니라. 그는 우주에서 최상의 피난처요, 영구한 법칙을 변함없이 수호하는 분이라. 우리의 하나님은 생명의 주요, 모든 사람에게 위로자이라. 인류를 사랑하는 분이요 곤경에 빠진 자를 돕는 분이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요 인간 무리에게 선한 목자이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형이요 친구이라. 우리의 정신적 존재에서 이 하나님을 몹시 알고 싶어 하노라.
131:4.5 (1448.4) “가슴 속에 동경함으로 우리는 믿음 얻기를 배웠도다. 감각을 자제함으로 지혜를 얻었고 지혜로 최상위 안에서 평화를 얻었도다. 믿음이 가득한 자는 속 사람이 하나님에 몰두할 때 참으로 예배하느니라. 우리 하나님은 하늘을 외투로 입고 또한 널리 펼쳐지는 다른 여섯 우주에 거하시니라. 그는 만물 위에, 만물 안에서 최상이로다. 우리는 동료들에게 지은 모든 죄에 대하여 주께 용서받기를 몹시 바라며, 친구가 우리에게 행한 잘못을 용서하고자 하나이다. 우리의 영은 모든 악을 싫어하오니, 그러므로 아 주여, 죄의 온갖 얼룩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소서. 위로자, 보호자, 구원자, 곧 우리를 사랑하는 분,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하나이다.
131:4.6 (1449.1) “우주 관리자의 영은 단순한 사람의 혼에 들어가느니라. 유일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은 지혜로우니라. 완전하게 되려고 애쓰는 자는 정말로 최상의 주를 알아야 하느니라. 최상위의 지극히 복된 안전을 아는 자는 결코 두려워 아니하니, 최상위가 그를 섬기는 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심이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음이라.’ 섭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다. 하나님은 진리이라. 사람들이 그를 이해하기를―진리를 충분히 알게 되기를―하나님이 소망하시니라. 진리는 영원하고 우주를 떠받치느니라. 우리의 최고의 소망은 최상위와 연합하는 것이라. 위대한 통제자는 만물을 생성케 하는 분이라―모든 것이 그로부터 발생하느니라. 이것이 의무의 전부이라: 누구든지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지어다. 악의(惡意)를 품지 말고 너를 치는 자를 치지 말지며, 자비로 분노를 이기고 너그러움으로 미움을 극복하라. 우리가 이 모두를 행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친절한 친구요 우리가 땅에서 행하는 모든 불법을 용서하는 인자하신 아버지인 까닭이라.
131:4.7 (1449.2)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땅은 어머니요 우주는 우리의 출생지이라. 하나님 없이 혼은 죄수요 하나님을 아는 것이 혼을 해방하느니라. 하나님을 명상함으로, 그와 연합함으로, 악의 망상으로부터 구원을 얻고 모든 물질의 사슬에서 궁극에 벗어나느니라. 사람이 한 조각 가죽처럼 공간을 말아 올릴 때 악이 끝나리니,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냈음이라. 아, 하나님, 지옥의 세 가지 패망―육욕ㆍ분노ㆍ탐욕―으로부터 우리를 살려주소서! 아, 혼이여, 불멸을 얻는 영적 투쟁을 위하여 허리를 졸라매라! 필사 생명이 끝날 때, 더 알맞고 아름다운 모습을 입고 최상위와 불멸자의 나라에서 깨어나기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이 몸을 버릴지니, 거기에는 두려움도 슬픔도, 배고픔도 목마름도, 죽음도 없도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죽음의 끈을 잘라 버리는 것이라. 우유 위에 크림이 나타나듯,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주에서 올라서느니라. 우리는 하나님, 모든 일을 하시는 분, 위대한 혼을 예배하며, 그는 언제나 지으신 사람들의 마음 속에 늘 앉아 계시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 속 보좌에 앉아 계심을 아는 자는 그와 같이―불멸하게―될 운명을 가졌느니라. 악은 이 세상에 남겨두어야 하나 미덕은 하늘까지 혼을 따라가느니라.
131:4.8 (1449.3) “‘우주에는 진리도 다스리는 자도 없고 오로지 우리의 육욕을 위하여 고안되었다’ 말하는 것은 오직 사악한 자 뿐이라. 그러한 사람들은 지능이 왜소하여 속느니라. 그래서 저희는 육욕을 즐기는 데 투신하며, 자기 혼에게서 미덕의 기쁨과 올바름의 즐거움을 빼앗느니라. 죄에서 구원을 받는 체험보다 무엇이 더 클 수 있으랴? 최상위를 본 자는 불멸하느니라. 육체로 사람의 친구인 자들은 죽음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 없으며, 사람이 즐겁고 햇빛 비치는 파라다이스의 들을 향하여 늘 여행하는 동안, 오로지 미덕이 곁에서 동행하느니라.”
131:5.1 (1449.4) 조로아스터 자신은 초기 멜기세덱 선교사들의 후손들과 직접 접촉하였고 그들의 유일신 교리는 그가 페르시아에서 창시한 종교에서 핵심적 가르침이 되었다. 유대교를 제쳐놓고 그 시절의 어떤 종교도 이 살렘의 가르침을 더 많이 담지 못했다. 이 종교의 문서로부터 가니드는 다음을 추려냈다:
131:5.2 (1450.1) “만물이 유일한 하나님―전적으로 지혜롭고 선하며 올바르고 거룩하며 눈부시고 영화로운 하나님―으로부터 생기고 그에게 속하도다. 우리의 이 하나님은 모든 빛의 근원이로다. 창조자요, 온갖 좋은 의도를 가진 하나님이요 우주 정의의 수호자이라. 일생에서 현명한 길은 진리의 영과 조화되어 행동하는 것이라. 하나님은 만물을 보시고, 사악한 자의 악행과 올바른 자의 선행을 보시니라. 우리의 하나님은 번쩍이는 눈으로 만물을 지켜보시니라. 그의 손길은 치유하는 손길이라. 주는 전능한 후원자이라. 하나님은 인자한 손을 올바른 자와 사악한 자 모두에게 내미시느니라. 하나님은 세계를 세우고 선과 악에 대하여 보상을 예비하셨도다. 전적으로 지혜로운 하나님은 생각이 깨끗하고 행동이 올바른 경건한 혼들에게 불멸을 약속하셨도다. 네가 무엇을 지극하게 바라면 너도 그처럼 될지니라. 햇빛은 우주에서 하나님이 계심을 헤아리는 자에게 지혜와 같으니라.
131:5.3 (1450.2) “지혜자가 기뻐하는 것을 추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가 계시한 종교로 예비한 길을 즐겁게 걸으면서 빛의 하나님을 경배하라. 오직 한 분, 최상의 하나님, 빛의 주가 계시니라. 물ㆍ식물ㆍ동물ㆍ땅ㆍ하늘을 만드신 이를 우리가 경배하나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가장 인자하신 주로다. 우리는 가장 아름답고 풍부한 불멸자, 영원한 빛을 가진 분을 경배하나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아주 멀리 계시며, 동시에 우리 혼 안에 거하시니 우리와 아주 가까이 계시니라. 우리의 하나님은 신답고 가장 거룩한 파라다이스 영이요, 그래도 모든 생물 중에 가장 친절한 자보다 사람에게 더 친절하시도다. 모든 사업 중에 가장 큰 일, 하나님을 아는 일에, 그는 우리에게 대단히 도움이 되도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가장 찬미할 만하고 올바른 친구이라. 그는 우리의 지혜요 생명이요, 혼과 몸의 활기이라. 우리의 선한 생각을 통해서 지혜로운 창조자는 우리가 그의 뜻을 실행하게 하실 것이요, 그렇게 함으로 신성하게 완전한 모든 것을 이루리라.
131:5.4 (1450.3) “주여, 영의 다음 생명을 위하여 준비하는 동안 육체를 입은 이 일생을 어떻게 사는가 우리에게 가르치소서. 주여 우리에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당신이 명하시는 대로 하리이다. 착한 길을 가르치소서, 그리하면 바른 길로 가리이다. 우리가 당신과 하나가 되기를 허락하소서. 올바름과 연합하도록 이끄는 종교가 옳은 줄 우리가 아나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혜로운 성품이요, 가장 좋은 생각, 올바른 행위이로다. 하나님이 신다운 영과 자신 안에 있는 불멸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를!
131:5.5 (1450.4) “이 지혜자의 종교는 믿는 자에게서 악한 생각과 죄짓는 행위를 모조리 깨끗이 없애시느니라. 나는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으로―의도했거나 의도하지 않았거나―잘못하였는가 뉘우치면서 하늘의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자비를 얻고자 기도를 드리고 용서를 얻고자 찬미를 드리나이다. 죄를 고백할 때, 악한 일을 다시 하지 않으려고 뜻하면, 그 죄가 내 혼에서 없어질 것을 아나이다. 용서하면 죄의 사슬을 거두어 감을 아나이다. 악행하는 자는 벌을 받으려니와 진리를 따르는 자는 영원히 구원받는 행복을 누리리라. 은혜를 통해서 우리를 붙잡고 우리 혼에게 구제하는 힘을 베푸소서. 완전에 도달하기를 몹시 바라는 까닭에 우리가 자비를 요청하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사옵나이다.”
131:6.1 (1450.5) 인도에서 유일신의 교리―곧 멜기세덱의 가르침의 잔재―를 간직한 셋째 집단의 종교 신자들은 그 시절에 수두안 교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나중에 이 신자들은 자이나교의 추종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은 이렇게 가르쳤다:
131:6.2 (1450.6) “하늘의 주는 가장 높으니라. 죄를 짓는 자는 하늘에 오르지 못하나 올바른 길을 걷는 자는 하늘에서 자리를 찾으리라. 우리가 진리를 알면 다음 세상에서 생명을 보장받느니라. 사람의 혼은 가장 높은 하늘까지 올라갈 수 있고, 거기서 참다운 영적 성품을 기르고 완전에 이르느니라. 하늘에 있는 재산은 사람을 죄의 사슬에서 구원하고 궁극의 아름다움의 첫걸음을 보여주느니라. 올바른 사람은 이미 죄와 그에 관련된 모든 고난의 종말을 체험하였느니라. 자아는 사람이 이길 수 없는 적이요, 사람의 네 가지 큰 정열로 나타나니, 분노ㆍ자만ㆍ기만ㆍ욕심이라. 사람의 가장 큰 승리는 자신을 정복하는 것이라. 사람이 용서를 얻으려고 하나님을 찾을 때, 그러한 해방을 얻으려고 감히 나설 때, 그렇게 함으로 두려움에서 벗어나느니라. 사람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동료 인간들을 대하면서 일생을 통해서 나그네 길을 가야 하느니라.”
131:7.1 (1451.1) 최근에 와서야 이 극동(極東) 종교의 원고들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맡겨졌다. 신도(神道)는 가니드가 들어 본 적이 없는 세계 종교였다. 다음 요약에서 보다시피, 이 신앙도 초기 멜기세덱의 가르침의 잔재를 담고 있다:
131:7.2 (1451.2) “주가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모두 나의 신성한 권능을 받은 자이니라. 모든 사람은 내가 베푸는 자비를 얻느니라. 땅에 두루, 올바른 사람이 늘어나는 것을 내가 크게 기뻐하노라. 자연의 아름다움과 사람의 미덕에서 하늘의 임금은 스스로를 드러내고, 그의 올바른 성품을 보이기를 구하시니라. 옛 사람들이 내 이름을 몰랐은즉 눈에 보이는 존재로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스스로를 드러냈고, 사람이 내 이름을 잊지 않기까지 굴욕을 견디었노라. 내가 하늘과 땅을 만들었고 해와 달과 모든 별이 내 뜻에 복종하느니라. 나는 육지와 사해(四海)에 있는 모든 생물의 통치자이라. 비록 내가 크고 아주 높아도 아주 가난한 사람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노라. 어떤 사람이라도 나를 예배하고자 하면, 그의 기도를 듣고 가슴 속에 바라는 것을 허락하리라.’
131:7.3 (1451.3) “‘사람이 걱정에 빠질 때마다 마음 속 영의 인도하심에서 한 걸음 멀어지느니라.’ 자만이 하나님을 가리느니라. 하늘의 도움을 받고자 하면 자만을 버리라. 자만의 털 하나하나가, 말하자면 큰 구름처럼 구제하는 빛을 가리느니라. 마음 속이 옳지 않으면, 바깥의 것을 얻으려고 비는 것이 쓸모 없느니라. ‘내가 너희의 기도를 들으면, 네가 깨끗한 마음으로 거짓과 위선이 없이, 거울처럼 진리를 비치는 혼을 가지고 내 앞에 오기 때문이라. 불멸을 얻고 싶으면, 세상을 버리고 내게로 오라.’”
131:8.1 (1451.4) 멜기세덱의 사자들은 중국으로 깊이 침투하였고, 유일한 하나님의 교리는 몇몇 중국 종교에서 초기 가르침의 일부가 되었다. 가장 오랫동안 버티고 일신교의 진리를 대체로 지닌 것은 도교(道敎)였다. 가니드는 그 창시자의 가르침으로부터 다음을 수집하였다:
131:8.2 (1451.5) “최상위는 얼마나 순수하고 조용한지, 그런데도 얼마나 힘있고 막강한지, 얼마나 깊고 헤아릴 수 없는지! 하늘에 계신 이 하나님은 만물의 존경받는 조상이로다. 영원자를 알면, 너는 깨우침을 얻었고 지혜로우니라. 영원자를 모르면 무지는 악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내나니, 이렇게 죄 지을 정열(情熱)이 일어나느니라. 이 놀라운 존재는 하늘과 땅이 있기 전에 계셨느니라. 참으로 영적이고, 홀로 계시며 변치 않느니라. 그는 정말로 세상의 어머니요, 모든 창조가 그의 둘레를 도는도다. 이 위대한 이는 사람에게 자신을 나누어 주시며, 이로서 저희를 뛰어나게 만들고 살아남게 하시느니라. 아는 것이 적더라도 사람은 최상위의 길을 걷고 하늘의 뜻을 따를 수 있느니라.
131:8.3 (1452.1) “참되게 봉사하는 선행은 모두 최상위로부터 나오느니라. 만물이 살려고 위대한 근원에 의존하느니라. 위대한 최상위는 그가 주신 것 때문에 조금도 공로를 찾지 않느니라. 그의 권력은 최상이나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가려져 있도다. 사람들을 완전하게 만들면서 그는 자기의 속성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느니라. 하늘의 도리는 느리고 참을성 있게 계획하여도 확실히 성취하느니라. 최상위는 우주를 펼치고 그 모든 것을 떠받들도다. 그의 넘쳐흐르는 영향과 당기는 힘은 얼마나 크고 막강한지! 참된 선(善)은 물과 같으니 만물에게 복을 주되 아무것도 해치지 않느니라. 참된 선은 물과 같아 가장 낮은 곳, 아니 남들이 피하는 바닥까지도 찾으니, 최상위와 비슷하기 때문이라. 최상위는 만물을 창조하고 사실상 저희를 기르며 영적으로 저희를 완전케 하느니라. 최상위가 강요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기르고 보호하고 완전하게 만드는 방법은 신비로다. 그는 자기 주장 없이 안내하고 지도하며, 지배하지 않고서 진보를 돌보시느니라.
131:8.4 (1452.2) “현명한 사람의 마음은 한 곳에 치우치지 않느니라. 어설프게 아는 것이 위험하니라. 큰 뜻을 품은 자는 자신을 낮추기를 배워야 하느니라. 창조함으로 최상위는 세계의 어머니가 되었도다. 사람이 어머니를 아는 것은 제가 아들임을 깨닫는 것이라. 전체의 관점에서 모든 부분을 보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이라. 누구에게나 네가 그의 처지에 놓여 있는 것 같이 말하라. 모욕을 친절로 갚으라. 사람들을 사랑하면 저희가 네 가까이 오리니, 저희를 설득하기에 아무 어려움이 없으리라.
131:8.5 (1452.3) “위대한 최상위는 만물에 침투하며 왼편에도 바른편에도 있도다. 그는 모든 창조를 지원하고 모든 참다운 존재 안에 깃들도다. 너희는 최상위가 어디 계신가 찾아낼 수 없고 계시지 않은 곳으로 갈 수도 없느니라. 사람이 자기의 길이 악함을 깨닫고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면 용서를 구해도 좋으니라. 그는 벌을 피할 수도 있고 재난을 복으로 바꿀 수도 있느니라. 최상위는 모든 창조에게 안전한 피난처요 인류의 수호자요 구원자이라. 너희가 날마다 그를 찾으면 찾아내리라. 그가 죄를 용서할 수 있은즉, 그는 정말로 모든 사람에게 아주 귀중하니라. 하나님은 행위가 아니라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상(賞) 주심을 늘 기억하라. 그런즉 보상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동료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느니라. 자기의 이익을 생각지 말고 좋은 일을 하라.
131:8.6 (1452.4) “영원자의 율법을 아는 자는 지혜로우니라. 신의 율법을 모름은 고난이요 재난이라.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는 생각이 자유로우니라. 네가 영원자를 알면 네 몸이 죽더라도 혼이 살아남아 영적으로 봉사하리라. 너의 하찮음을 깨달으면 참으로 지혜로우니라. 네가 영원자의 빛에 거하면 최상위가 깨우쳐주는 것을 맛보리라. 최상위에게 봉사하는 데 헌신하는 자는 이렇게 기뻐하면서 영원자를 추구하느니라. 사람이 죽으면 고향으로 가는 큰 여행 길에 그 영이 긴 비행을 시작하느니라.”
131:9.1 (1452.5) 세계의 큰 종교들 중에서 가장 적게 하나님을 인정하는 종교조차도 멜기세덱 선교사와 끈질긴 그 후계자들의 일신교를 인정했다. 가니드가 이렇게 유교(儒敎)를 요약하였다:
131:9.2 (1452.6) “하늘이 예정하는 것은 틀림이 없도다. 진리는 참이며 신성하니라. 만물이 하늘에서 비롯되며 큰 하늘은 실수가 없느니라. 하늘은 열등한 사람을 교육하고 개선하는 일을 도우려고 많은 부하를 임명하였느니라. 하늘 높은 데서 사람을 다스리는 유일한 하나님은 크고도 크시도다. 하나님의 권능은 대단하고 그 판단은 무섭도다. 그러나 이 큰 하나님은 많은 열등한 민족에게도 도덕 감각을 주셨느니라. 하늘의 은혜는 결코 그치지 않느니라. 자비심은 하늘이 사람에게 내리는 최고의 선물이라. 하늘은 사람의 혼에게 기품을 주었고 사람의 미덕은 하늘의 기품을 이렇게 부여함으로 생긴 열매이라. 큰 하늘은 만물을 헤아리고 사람이 행하는 모든 일에 동행하시니라. 큰 하늘을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 좋으니라. 이렇게 우리가 신성한 조상들의 하인이면 하늘에게 비밀로 기도를 드려도 좋으니라. 항상, 무슨 일에나 하늘의 위엄을 경외하자. 아 하나님, 최고자, 통치하는 군주여. 심판이 주께 달려 있고 모든 자비가 신의 마음으로부터 진행하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나이다.
131:9.3 (1453.1)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런즉 우리 마음 속에 아무 두려움이 없도다. 나에게 어떤 미덕이라도 발견되면 이는 나와 함께 거하는 하늘이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그러나 내 안에 있는 이 하늘은 가끔 내 신앙에 어려운 요청을 하도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나는 마음 속에 아무 의심을 갖지 않기로 결심하였노라. 믿음은 사물의 진실에 아주 가까이 있음이 틀림없고, 이 좋은 믿음 없이 사람이 어찌 살 수 있을까 나는 알지 못하노라. 좋은 일과 나쁜 일은 까닭 없이 사람에게 닥치지 아니하느니라. 하늘은 사람의 혼의 의도에 따라서 그 혼을 다루시니라. 네가 잘못했음을 깨달을 때, 망설이지 말고 네 잘못을 고백하고 빨리 배상하라.
131:9.4 (1453.2) “지혜로운 사람은 진리 탐구에 몰두하며, 그저 살아갈 방도만 추구하지 않느니라. 하늘의 완전함에 이르는 것이 사람의 목적이라. 우수한 사람은 자아 조절에 마음을 쓰며, 걱정과 두려움에 매이지 않느니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니 가슴 속에 의심을 품지 말라. 모든 착한 행실은 보상을 받느니라. 군자(君子)는 하늘에 투덜거리지 않으며 사람에게 불평을 품지도 않느니라. 바로 네가 당하기 싫어할 일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 어떤 벌에도 동정심을 섞고 어떻게 해서든 징벌이 축복이 되도록 노력하라. 큰 하늘의 길이 이러하니라. 모든 사람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나 귀인(貴人)의 영은 떠나가서 하늘에서 전시되며, 더할 나위 없이 빛나는 영화로운 빛에 이르기까지 올라가느니라.”
131:10.1 (1453.3) 세계 종교들이 파라다이스 아버지에 관하여 가르친 것을 이처럼 수집하느라고 힘들여 수고한 뒤에, 가니드는 예수가 가르친 결과로 하나님에 관하여 얻은 신앙의 요약이라 판단되는 것을 작성하는 과제를 시작했다. 이 젊은이는 그러한 믿음을 “우리의 종교”로 언급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131:10.2 (1453.4) “우리의 주 하나님은 유일한 주이다. 생각과 마음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고, 한편 네 몸을 사랑하는 것 같이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하늘 아버지요, 그분 안에 만물이 존재를 가지며, 그 영으로 말미암아 그는 모든 성실한 인간의 혼 안에 거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성실한 창조자인 그에게 어떻게 우리 혼을 맡기는가 배워야 한다. 우리 하늘 아버지에게 모든 일이 가능하다. 만물과 모든 존재를 창조하셨으니, 그는 창조자요 그렇지 않을 수 없다. 볼 수는 없어도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날마다 실천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동료 인간에게 드러낼 수 있다.
131:10.3 (1453.5) “하나님 성품의 신성한 재산은 무한히 깊고 영원히 지혜롭다. 지식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지만, 마음 속에서 몸소 체험함으로 그를 알 수 있다. 우리는 그의 응보를 깨달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땅에서 가장 비천한 존재도 그의 자비를 얻을 수도 있다. 아버지는 우주를 채우나 또한 우리 마음 속에도 사신다. 사람의 생각은 인간답고 반드시 죽지만 사람의 영은 신성하고 불멸한다. 하나님은 전능할 뿐 아니라 또한 전적으로 지혜롭다. 땅에서 우리 부모가 악한 성향이 있어도 어떻게 자식을 사랑하고 좋은 선물을 주는가 안다면, 하늘에서 선한 아버지는 어떻게 땅에 있는 자녀들을 지혜롭게 사랑하는가, 어떻게 알맞는 축복을 내릴까 얼마나 더 잘 아시겠는가.
131:10.4 (1454.1) “한 아이라도 아버지를 찾아내기를 바라고 참으로 그와 같기를 동경하면 하늘 아버지는 그 아이가 땅에서 죽도록 버려두지 않으시리라. 우리 아버지는 악한 자를 사랑하기까지 하며 고마움을 모르는 자에게 언제나 친절하시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 많은 인간이 알 수만 있다면, 잘못된 길을 뉘우치고 사람이 아는 온갖 죄를 버리도록 저희를 분명히 인도하시리라. 모든 좋은 것은 빛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며, 그분 안에 아무 변동이 없고 변화의 그림자도 없다. 참된 하나님의 영은 사람의 마음 속에 계신다. 그는 모든 사람이 형제가 되기를 뜻하신다.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님을 더듬어 찾으면, 이는 하나님이 저희를 찾아냈고 저희가 그를 알려고 찾고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며,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
131:10.5 (1454.2) “나는 하나님이 내 민족 전체의 아버지임을 믿는 것으로 이제 더 만족하지 못하겠다. 이제부터 또한 내 아버지임을 믿겠다. 진리의 영의 도움을 얻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언제나 애쓰겠다. 그 영은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알게 된 때 나를 돕는 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행하는가 배워서 나는 하나님 예배하기를 연습하려고 한다. 즉, 하나님이 내 동료 필사자 각자가 대접받기 바라는 대로 저희를 대하도록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육신을 입고 이와 같은 일생을 살면,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것을 청구해도 좋다. 더 준비를 잘하여 동료들에게 봉사하도록 그는 우리 마음 속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사랑으로 베푸는 이 봉사는 모두, 하늘의 기쁨을 우리가 받고 체험할 능력을 키워 주며, 이것은 하늘의 영이 베푸는 높은 기쁨이다.
131:10.6 (1454.3)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선물 때문에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겠다. 사람의 자녀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로 그를 찬미하겠다. 그는 나에게 전능자ㆍ창조자요, 권능과 자비이지만, 무엇보다도 나의 영 아버지이다. 땅에 있는 자식으로서, 나는 언젠가 그를 만나러 떠나간다. 하나님을 추구함으로 그와 같이 될 것이라고 내 가정 교사가 말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나는 하나님과 평화롭게 지낸다. 우리의 이 새 종교는 기쁨으로 충만하며, 오래 가는 행복을 낳는다. 내가 죽기까지도 충실할 것이요, 분명히 영생의 영광을 받으리라 나는 확신한다.
131:10.7 (1454.4) “나는 만물을 증명하는 것과 선을 붙잡기를 배운다. 사람들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이나 동료들에게 행하겠다. 이 새로운 믿음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음을 내가 안다. 그러나 멈추어서 모든 사람이 내 형제임을 생각하면 때때로 무서워지지만 이것은 참말임이 틀림없다. 사람이 형제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내가 기뻐할 수 있는지 나는 모른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참이라면, 모든 사람이 내 형제임이 틀림없다.
131:10.8 (1454.5) “이제부터 선행을 남 모르게 하겠다. 또한 홀로 있을 때 기도를 가장 많이 하겠다. 동료들에게 불공평하지 않기 위하여 사람을 판단하지 않겠다. 내 적을 사랑하기를 배우려 한다. 하나님과 같이 되는 이 연습을 나는 아직 참으로 통달하지 못했다. 다른 이 여러 종교에서 하나님을 보기는 해도, 나는 ‘우리의 종교’에서 하나님이 더 아름답고 사랑이 있으며, 자비롭고, 친히 대하시며, 긍정적임을 발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크고 영화로운 이 존재는 나에게 영적 아버지요, 나는 자식이다. 아버지처럼 되려는 정직한 소망이 없으면 나는 어떤 방법으로도 궁극에 그를 발견하고 영원히 그를 섬기지 못할 것이다. 마침내 나는 하나님, 놀라운 하나님이 있는 종교를 가졌으니, 그는 영원한 구원을 주는 하나님이다.”
132:0.1 (1455.1) 고노드가 인도의 영주들로부터 인사장을 로마의 통치자 티베리우스에게 가지고 갔기 때문에, 로마에 도착한 뒤 사흘째에 두 인도인과 예수는 그 앞에 나타났다. 시무룩하던 황제는 이날 특별히 명랑했고 세 사람과 오랫동안 잡담을 나누었다. 그들이 앞에서 사라졌을 때, 황제는 예수를 언급하면서 바른 쪽에 서 있던 보좌관에게 한 마디 던졌다: “저 친구의 임금다운 태도와 품위 있는 예절을 가졌다면, 내가 진짜 황제가 될 터인데, 응?”
132:0.2 (1455.2) 로마에 있으면서, 가니드는 공부하고 도시 근처에 흥미 있는 장소들을 찾아보는 데 정기적으로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처리할 업무가 많았다. 아들이 자라서 광대한 상업 이권을 관리하는 훌륭한 후계자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소년에게 사업 세계의 기초를 가르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로마에는 인도 시민이 많이 있었고, 바로 고노드의 고용자 중에서 한 사람이 흔히 통역으로서 따라가곤 해서, 예수는 하루 종일 혼자서 지내곤 하였다. 이것은 2백만 주민이 사는 이 도시를 샅샅이 눈에 익힐 시간을 주었다. 그는 포럼에서 자주 눈에 띄게 되었는데, 여기는 정치와 법률과 사업 생활의 중심이었다. 그는 자주 카피톨리움으로 올라갔고, 주피터ㆍ주노ㆍ미네르바를 모시는 이 웅장한 신전(神殿)을 바라보는 동안, 이 로마 사람들이 무지의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또한 팔라틴 언덕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는데, 거기에는 황제의 저택, 아폴로 신전과 그리스 및 라틴 도서관들이 있었다.
132:0.3 (1455.3) 이때에 로마 제국은 유럽 남부, 소 아시아, 시리아, 에집트, 북서 아프리카를 모두 포함했다. 그 거주민은 동반구의 모든 국가의 시민을 포함했다. 이러한 국제적인 유란시아 필사자 집단에 대하여 공부하고 함께 어울리려는 소망이 예수가 이 여행을 하는 데 찬성한 주요한 이유였다.
132:0.4 (1455.4) 로마에 있는 동안 예수는 사람들에 관하여 많이 배웠지만, 그 도시에서 여섯 달 머무르는 동안에 얻은 다양한 모든 체험 중에 가장 귀중한 것은 제국의 서울에 있던 종교 지도자들과 접촉하고 그들에게 영향을 준 것이었다. 로마에서 첫 주말이 되기 전에, 예수는 견유학파, 금욕주의파, 신비 종파, 특히 미트라 집단에서, 쓸 만한 지도자들을 수소문하고 얼굴을 익혔다. 유대인이 그의 사명을 거부하리라는 것이 명백했든 그렇지 않았든, 하늘나라를 선포하려고 사자(使者)들이 곧 로마로 올 것을 예수는 아주 확실히 내다보았다. 따라서 가장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이 전하는 말씀이 더 낫게, 더 확실히 받아들여지도록 길을 예비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으뜸가는 금욕주의자 다섯 명, 견유학파 열한 명, 신비 종파 지도자 열 여섯 명을 골랐고 거의 여섯 달 동안, 남는 시간의 상당 부분을 이 종교 선생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지냈다. 그는 이렇게 가르쳤다: 한 번도 그들의 잘못을 공격하거나 가르침에 있는 결점을 언급하지도 않았다. 경우마다 그들의 가르침 속에 있는 진리를 고르고 더 나아가서 그들의 머리 속에서 이 진리를 돋보이게 하고 비추어서, 아주 짧은 동안에 이렇게 향상된 진리는 관련된 잘못을 실질적으로 밀어내었다. 예수가 가르친 이 남녀들은 이렇게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의 가르침 속에서 추가된 비슷한 진리를 후일에 깨닫도록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복음 전도자들의 가르침을 바로 이렇게 일찍 받아들인 것은 로마에서, 그리고 거기서부터, 제국 전역에 걸쳐 기독교가 급히 퍼지도록 힘차게 추진력을 주었다.
132:0.5 (1456.1) 로마에서 예수가 가르친 이 종교 지도자 32명의 무리에서 겨우 두 사람이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것을 기록할 때, 이 놀라운 행적의 중요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30인은 로마에서 기독교를 세우는 주축을 이루는 사람이 되었고, 더러는 또한 으뜸가는 미트라 성전을 그 도시의 첫 기독교 교회로 바꾸는 일에 협조하였다. 장면 뒤에서, 그리고 1천 9백 년의 세월에 비추어 인간의 활동을 바라보는 우리는 유럽에 두루 기독교가 급속히 전파되게 만든 무대의 초기 배경에서 최고의 가치가 있는 꼭 세 가지 요인을 인정하며, 이는 다음과 같다:
132:0.6 (1456.2) 1. 시몬 베드로를 사도로 고르고 붙들어 둔 것.
132:0.7 (1456.3) 2. 예루살렘에서 스테반과 이야기한 것. 그의 죽음은 타르수스의 사울의 지지를 얻도록 이끌었다.
132:0.8 (1456.4) 3. 로마에서, 그리고 제국 전역에서 후일에 새로운 종교를 주도하도록 이 로마인 30명을 미리 예비한 것.
132:0.9 (1456.5) 스테반이나 선택된 30인도 그들의 모든 체험을 통해서 그 사람과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고 그의 이름이 그들의 종교적 가르침의 주제가 되었다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했다. 최초의 32인을 위하여 예수가 한 일은 전부 직접 만나서 한 것이다. 이 사람들을 위하여 수고하면서 다마스커스 서기관은 한 번에 세 명을 넘게 만나지 않았고 두 명을 넘게 만나는 일이 드물었으며, 한편 이들을 하나씩 가르친 적이 가장 많았다. 이 남녀들이 전통에 묶이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 훈련을 시키는 이 큰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이들은 모든 앞날의 종교 발전에 관하여 굳어진 선입견에 젖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132:0.10 (1456.6) 곧 뒤잇는 여러 해 동안,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로마에 있던 다른 기독교 선생들은 이 다마스커스 서기관에 관하여 여러 번 소문을 들었는데, 그는 그들보다 먼저였고 (눈치 채지 못하고 상상한 바와 같이) 그들이 새 복음을 가지고 오는 것을 위하여 길을 예비한 것이 아주 분명했다. 바울은 결코 이 다마스커스 서기관의 신분을 정말로 추측하지 못했지만 죽기 조금 전에, 인물 묘사가 비슷했기 때문에, “안티옥의 천막 만드는 사람”은 또한 “다마스커스의 서기관”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어느 때 한 번 로마에서 설교하는 동안, 시몬 베드로는 다마스커스 서기관의 인물 묘사를 들으면서 이 사람이 예수였을지 모른다고 추측했지만 주가 로마에 계신 적이 없었음을 잘 알았으므로 (그렇게 생각했다) 재빨리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132:1.1 (1456.7) 로마에서 머무르던 기간의 초기에, 예수는 금욕주의파의 지도자 앙가몬과 함께 밤이 새도록 이야기했다. 이 사람은 나중에 바울과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로마에서 기독교 교회의 강력한 지지자 중에 하나가 되었다. 현대의 말투로 다시 표현하면, 예수가 앙가몬에게 가르친 내용은 이렇다:
132:1.2 (1457.1) 참된 가치의 기준은 영적 세계에서, 영원한 실체의 신성한 수준에서 찾아야 한다. 하늘 가는 필사자에게 이보다 낮은 물질적 기준은 모두 일시적ㆍ부분적이며 열등한 것을 인식해야 한다. 과학자는 과학자로서 여러 물질적 사실이 관계된 것을 발견하는 데 국한된다. 엄밀하게 말하면, 과학자는 자기가 유물론자나 이상주의자라고 주장할 아무 권리가 없다. 그러한 태도를 가지려는 모든 주장이 철학의 바로 그 핵심이니까, 그렇게 주장하면서 감히 참된 과학자의 태도를 버리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132:1.3 (1457.2) 필사자의 통찰력과 인류의 영적 달성이 비례해서 커지지 않으면, 순전히 물질적 문화가 한없이 진보하는 것은 궁극에 문명에 위협이 된다. 순전히 물질적인 과학은 그 속에 모든 과학적 노력을 파괴하는 잠재 씨앗을 품고 있다. 바로 이 태도가, 도덕적 가치를 느끼는 감각을 포기하고 영적 달성의 목표를 거부한 문명이 궁극에 붕괴한다는 것을 예시하기 때문이다.
132:1.4 (1457.3) 유물론적 과학자와 극단적 이상주의자는 언제나 다투게 되어 있다. 높은 도덕적 가치관과 영적 시험 수준, 공통된 기준을 소유한 과학자와 이상주의자는 그렇지 않다. 각 시대에 과학자와 종교인은 인간의 필요라는 심판대 앞에서 재판을 받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의 진보에 봉사하는 데 더 낫게 헌신함으로 그들의 계속된 생존을 정당화하려고 용감하게 싸우는 한편, 자기들 사이에 어떤 투쟁도 피해야 한다. 어느 시대에도 이른바 과학이나 종교가 거짓되다면, 그들은 그 활동을 정화(淨化)하든지, 아니면 더 참되고 더 가치 있는 체제의 물질 과학이나 영적 종교가 탄생하기 전에 사라져야 한다.
132:2.1 (1457.4) 마르두스는 로마의 견유학파에서 인정받은 지도자였고, 다마스커스 서기관과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는 날마다 예수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밤마다 예수의 고귀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마르두스와 가진 비교적 중요한 토론 가운데, 선과 악에 관하여 이 진지한 견유학자의 질문에 대답하려고 고안된 것이 하나 있다. 내용으로 보아서, 20세기의 표현을 쓰자면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132:2.2 (1457.5) 아우여, 선과 악은 다만 관측할 수 있는 우주를 인간이 이해하는 그 상대적 수준을 가리키는 낱말일 뿐이다. 네가 윤리적으로 깨끗하지 않고 사회에 무관심하면, 통용되는 사회 관습을 네 선(善)의 기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영적으로 게으르고 도덕적 진취성이 없으면, 같은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종교적 관습과 전통을 네 선의 기준으로 가져도 좋다. 그러나 시간 세계에서 살아남고 영원으로 태어나는 혼은 그러한 선과 악 사이에 현실적으로 몸소 선택해야 하며, 선과 악은 사람의 마음 속에서 살라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보낸 신다운 영이 세워놓은 영적 기준의 참된 가치관에 따라 결정된다. 사람에게 깃드는 이 영은 인격이 살아남는가를 정하는 기준이다.
132:2.3 (1457.6) 진리와 마찬가지로, 선은 언제나 상대적이고 어김없이 악과 반대가 된다. 선과 진리의 이 성질을 파악하는 것이 사람의 성장하는 혼으로 하여금 영원히 살아남는 데 필수인 결정, 몸소 선택하는 결정을 내리게 한다.
132:2.4 (1458.1) 과학의 명령과 사회의 관습과 종교의 독단(獨斷)을 논리적으로 따르는,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은 도덕적 자유를 희생하고 영적 해방을 잃어버릴 심각한 위험과 마주친다. 그러한 혼은 지적(知的) 앵무새가 되고 사회적 자동 인형이 되며 종교적 권한에 노예가 되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다.
132:2.5 (1458.2) 도덕적으로 자아를 실현하고 영적 인격을 달성하는―깃드는 조절자를 발견하고 그와 한편이 되는―자유가 늘어나는 새 수준을 항하여 선은 언제나 자라고 있다.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감각을 높이고 도덕적 의지를 키우며, 진리를 헤아리는 눈을 높이고, 동료를 사랑하고 섬길 능력을 키우며, 영적 이상을 높이고 시간 세계에서 최고의 인간다운 동기를 깃드는 조절자의 영원한 계획과 하나가 되게 만들 때, 경험은 선하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려는 소망이 커지도록 직접 인도하며,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을 찾아내고 더욱 그와 같이 되려는 신성한 열정을 길러준다.
132:2.6 (1458.3) 우주에서 인간이 발전하는 눈금을 올라감에 따라서, 선을 체험하고 진리를 헤아리는 능력과 완전히 발걸음을 맞추어, 너는 선이 커지고 악이 줄어드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하늘 가는 인간의 혼이 마지막 영 수준에 이르기까지, 잘못을 마음에 품거나 악한 것을 체험하는 능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132:2.7 (1458.4) 선(善)은 생생하고 상대적이고 언제나 진보하는 체험, 변함없이 몸소 겪는 체험이며, 진리와 아름다움을 헤아리는 것과 언제까지나 서로 연결된다. 선은 영적 수준에서 긍정적 진리와 가치를 인식하는 데서 발견되며, 이것은 인간의 체험에서 그 반대에 해당하는 개념―잠재 악의 그림자―와 대조되어야 한다.
132:2.8 (1458.5) 파라다이스 수준에 이를 때까지, 선은 언제나 소유하는 물건이 아니라 정복하는 것이요, 달성하는 체험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目標)일 것이다. 그러나 올바름을 간절히 목마르게 찾더라도, 너는 선을 부분적으로 달성하는 데 더욱 만족을 느낀다. 세상에 선과 악이 있는 것은 그 자체로서 사람의 도덕적 의지, 즉 인격이 존재하고 실재한다는 분명한 증명이며, 인격은 이러한 선악의 가치를 확인하고 또한 그 사이에 선택할 수 있다.
132:2.9 (1458.6) 파라다이스에 이를 때가 되면, 하늘 가는 필사자가 참된 영 가치와 일체가 되는 능력이 아주 커져서 생명의 빛을 완전히 소유하는 결과를 낳는다. 완전해진 그러한 영 인격은 긍정적이고 최상질의 선ㆍ아름다움ㆍ진리와 아주 온전히 신성하게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서, 무한한 파라다이스 통치자들의 빛, 사람을 살피는 신성한 광원의 빛에 노출되었을 때, 그러한 올바른 영은 악의 잠재성을 가진 어떤 부정적 그림자라도 던질 가능성이 전혀 남지 않는다. 모든 그러한 영 인격 안에서 선은 이제 더, 부분적이고 반대되고 상대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 선은 신답게 완성되었고 영적으로 충만하다. 선은 최상위의 순수함과 완전함에 가까이 간다.
132:2.10 (1458.7) 악의 가능성은 도덕적 선택에 필요하지만, 악이 현실이 될 필요는 없다. 그림자는 오직 상대적으로 실재한다. 현실로 나타나는 악은 개인의 체험이 될 필요가 없다. 악의 잠재성은 영적 발전이 낮은 수준에 있을 때, 도덕적으로 진보하는 영역에서 결정을 내리게 하는 자극으로서 똑같이 효력이 있다. 오로지 한 필사 지성이 악한 것을 선택할 때 악은 몸소 체험하는 현실이 된다.
132:3.1 (1459.1) 나본은 그리스계 유대인이요, 로마에서 주요 신비 종파 미트라교에서 으뜸가는 지도자였다. 미트라교의 이 대사제는 다마스커스 서기관과 많은 회담을 가졌지만, 어느 날 저녁에 진리와 믿음에 관하여 가졌던 토론에 아주 오랫동안 영향을 받았다. 나본은 예수를 개종시키려고 생각하였고 그에게 미트라교 선생으로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라고 제안까지 하였다. 하늘나라 복음으로 초기에 개종(改宗)한 사람들 축에 속하도록 예수가 그를 준비시키고 있음을 그는 조금도 깨닫지 못했다. 현대의 말투를 빌려서 다시 말하면, 예수의 가르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32:3.2 (1459.2) 진리는 말이 아니라, 오직 실천함으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진리는 반드시 지식보다 더한 것이다. 지식은 지켜본 사물에 관한 것이지만, 진리가 지혜와 사귀고, 인간의 체험, 아니 영적이고 생생한 실체들과 같이 저울질 할 수 없는 것을 담기 때문에, 진리는 그렇게 순전한 물질 수준을 초월한다. 지식은 과학에서 비롯하며, 지혜는 참된 철학에서, 진리는 영적으로 사는 종교적 체험에서 비롯한다. 지식은 사실을 다루고, 지혜는 관계를, 진리는 실체의 가치관을 다룬다.
132:3.3 (1459.3) 사람은 과학을 구체화하고 철학을 형식으로 만들고 진리를 교리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는 사람이 진보적 생활 투쟁에 적응하는 데 정신적으로 게으르고 한편 또한 미지의 것을 끔찍하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자연인은 생각하는 버릇과 생활 기법을 바꾸는 데 느리다.
132:3.4 (1459.4) 계시된 진리, 몸소 발견한 진리는 인간의 혼이 얻는 최고의 기쁨이다. 이는 물질 지성과 깃드는 영이 합동으로 창조한 것이다. 진리를 분별하고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혼이 영원히 구원받는 것은 선을 간절히 바라고 목마르게 찾음으로 보장되며, 이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을 찾아내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오직 한 가지 목적을 개발하도록 이 필사자를 인도한다. 참된 지식과 진리 사이에는 결코 갈등이 없다. 지식, 그리고 인간의 관념, 편견으로 물들고 두려움으로 왜곡되고 물질적 발견이나 영적 진보와 같은 새로운 사실에 직면하는 두려움에 지배된 관념 사이에는 갈등이 있을지 모른다.
132:3.5 (1459.5) 그러나 믿음을 실천하지 않고서 진리는 결코 사람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 이것이 참말이니, 사람의 생각ㆍ지혜ㆍ윤리ㆍ이상은 그의 믿음, 숭고한 소망보다 결코 더 높이 솟아오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그러한 참된 믿음은 깊은 반성(反省), 진지한 자기 비평, 굽히지 않는 도덕 의식에 근거를 둔다. 믿음은 영의 영향을 받은 창조적 상상력이 주는 영감이다.
132:3.6 (1459.6) 믿음은 신성한 불꽃, 곧 불멸하는 씨눈의 초인간적 활동을 해방하도록 작용하고, 그 씨눈은 사람의 지성 속에서 살며 이것이 영원히 살아남을 잠재성이다. 식물과 동물은 한 세대로부터 다른 세대로 자체와 동일한 다른 입자(粒子)들을 전하는 방법으로 시간 세계에서 살아남는다. 사람의 혼(인격)은 깃드는 이 신성의 불꽃과 신분을 연합함으로 필사자의 죽음을 견디고 살아남는다. 그 불꽃은 불멸하며 또 계속되는 상급 수준의 진취적 우주 생활에서 인격을 영속(永續)시키도록 작용한다. 인간의 혼에 감추어진 씨앗은 불사의 영이다. 혼의 둘째 세대는, 진보하는 영적 존재들의 인격이 명시되는 순서에서 처음이요, 이 순서는 오직 이 신다운 개체가 그 존재의 근원, 모든 존재의 성격 근원인 하나님, 우주의 아버지께 이르렀을 때에야 끝난다.
132:3.7 (1459.7) 인간의 생명은 이어진다―살아남는다. 그 생명이 우주 기능, 곧 하나님을 찾아내는 과제를 가졌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활기를 얻은 사람의 혼은 이 운명의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 멈출 수 없다. 이 신성한 목표를 일단 이룩하면, 결코 그칠 수 없으니, 그 혼이 하나님처럼―영원하게―되었기 때문이다.
132:3.8 (1460.1) 영적 진화는 갈수록 더 자진해서 선을 선택하는 체험이며, 여기에는 똑같이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의 점진적 감소(減少)가 뒤따른다. 선을 택하는 결의, 진리를 이해하는 완벽해진 능력을 얻는 것과 함께 완전한 아름다움과 거룩함이 생기게 되며, 이 두 가지의 올바름은 잠재 악의 개념이 솟아날 가능성조차 영원히 억제한다. 하나님을 아는 그러한 혼은 신다운 선의 그러한 높은 영 수준에서 활동할 때, 의심하는 악의 그림자를 조금도 던지지 않는다.
132:3.9 (1460.2) 사람의 지성 속에 파라다이스 영이 계신 것은 우주의 아버지의 불멸하는 이 깃드는 영 조각과 같은 신분이 되려고 애쓰는 모든 혼에게, 신답게 진보함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을 계시하는 약속이요, 믿음의 서약이다.
132:3.10 (1460.3) 사람이 우주에서 진보하는 것은 인격의 자유를 확대시키는 특징이 있으며, 그 진보가 점점 더 높아지는 수준에서 자아를 이해하고 그에 따라 자진하여 자제력을 점진적으로 얻는 것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완전한 영적 자제에 도달하는 것은 우주에서 자유를 얻고 인격의 해방을 성취하는 것과 같다. 그러한 광대한 우주에서 사람이 초기에 적응하는 혼란의 와중에서, 믿음은 사람의 혼을 육성하고 유지한다. 한편 기도(祈禱)는 창조적 상상력으로부터 얻는 다채로운 영감, 그리고 깃드는 관련된 신성한 계심의 영적 이상과 발걸음을 맞추려고 애쓰는 혼의 신앙 욕구, 이 두 가지를 통일하는 좋은 약이 된다.
132:3.11 (1460.4) 예수와 이야기할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나본은 이 말씀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 진리는 가슴 속에서 줄곧 타올랐고, 그는 예수의 복음을 가지고 나중에 도착한 전도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132:4.1 (1460.5) 예수는 로마에 있는 동안, 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 앞날에 제자가 되도록 남녀들을 준비시키는 이 일에만 여가를 전부 쓰지는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국제적인 이 도시에 사는 온갖 종족과 계급의 사람들에 관하여 피부로 지식을 얻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수많은 인간과 접촉할 때마다 예수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육체를 입고 사는 인생에 대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배우고 싶어했고 또한 그 인생을 더욱 풍부하고 가치 있게 만들려고 무언가 말씀하거나 행할 생각을 가졌다. 이 몇 주 동안의 종교적 가르침은 열두 사람의 선생으로서, 그리고 군중에게 설교자로서 그의 후기 생애의 특징을 나타냈던 가르침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132:4.2 (1460.6) 언제나 그가 전하는 말씀의 요점은,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사실이요 그의 자비가 진실이라는 것이었고, 아울러 사람은 바로 이 사랑의 하나님에게 믿음의 아들이 된다는 좋은 소식이었다. 예수가 사회적 접촉을 가질 때 쓰는 보통 기술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짐으로 그들을 끌어내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 회견은 보통 그가 질문을 던져 시작되고 그들이 그에게 질문함으로 끝나곤 했다. 그는 묻거나 질문에 대답함으로 가르치는 데 똑같이 솜씨가 있었다. 대체로, 가장 많이 가르친 자에게 말을 매우 적게 하였다. 몸소 베푸는 봉사로 가장 많이 이익을 얻은 자는 무거운 짐을 지고 근심하며 풀이 죽은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큰 위안을 얻은 것은 동정심과 이해심으로, 말을 듣는 사람에게 자기 혼의 짐을 내려놓을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사람이요 그보다 더한 사람이었다.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한 이 인간들이 예수에게 걱정거리를 이야기했을 때, 언제나 그들의 진정한 어려움을 시정하는 방향으로 실용적이고 즉시 도움되는 충고를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는 당장 희망을 주는 말과 즉시 위안이 되는 말씀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어김없이, 곤궁에 빠진 이 필사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일러주고, 다양한 여러 방법으로, 그들이 하늘에 계신 이 인자한 아버지의 자녀라는 소식을 나누어 주곤 했다.
132:4.3 (1461.1) 이 방법으로, 로마에 머무르는 동안, 예수는 이 땅에서 5백 명이 넘는 사람과 함께 친히 애정이 넘치고 기운을 북돋아주는 접촉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인류의 다른 종족들에 대한 지식, 예루살렘에서는 결코, 아니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도저히 얻을 수 없었던 지식을 얻었다. 그는 땅에서 살았던 어떤 비슷한 기간보다도 언제나 이 여섯 달을 가장 값지고 견문을 넓힌 시절 중의 하나로 여겼다.
132:4.4 (1461.2) 아마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다능하고 적극적인 사람은 세계의 대도시에서 수많은 사람과 접근하지 않고 6개월이나 이렇게 활동할 수 없다. 이들은 어떤 사업에 연관되어, 또는 더 흔히 어떤 교육이나 사회 개혁이나 종교 운동 계획을 위하여 그가 봉사하겠다는 보장을 얻으려 했다. 그러한 제안이 열두 번도 더 있었는데, 적절한 말씀을 하거나 어떤 정중한 봉사를 베풀어, 각 제안을 영적으로 고귀한 어떤 생각을 나누어주는 기회로 이용했다. 예수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작은 일까지도―무척 좋아하였다.
132:4.5 (1461.3) 그는 정치와 정치 정신에 대하여 로마의 어느 상원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수와 한 번 이렇게 접촉한 것은 이 입법가에게 무척 감명을 주었고, 그래서 그는 정부가 사람들을 지원하고 부양하는 관념으로부터 사람들이 정부를 지원하는 관념으로 통치 정책 과정을 바꾸려고 동료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헛되이 애쓰면서 여생을 보냈다. 예수는 하루 저녁을 어느 부유한 노예 소유자와 함께 보냈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에 대하여 말씀했다. 이튿날 이 사람, 클라우디우스는 노예 117명에게 자유를 주었다. 정찬에 어느 그리스인 의사와 환담하였다. 환자들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과 혼을 가졌다고 일러주었고, 이렇게 이 유능한 의사가 더욱 원대한 봉사를 동료 인간에게 베풀려고 애쓰게 만들었다. 그는 인생에서 온갖 직업을 가진 모든 종류의 사람들과 이야기했다. 로마에서 그가 찾아보지 않은 유일한 곳은 공동 목욕탕이었다. 거기에는 난잡한 성(性) 관습이 유행했기 때문에 그는 목욕탕에 친구들을 따라가기를 거절했다.
132:4.6 (1461.4) 티버 강을 따라 걸으면서, 그는 어느 로마 군인에게 말했다: “손뿐 아니라 마음도 용감할지어다. 감히 정의(正義)를 행하고, 관대하여 자비를 보이라. 네가 상관에게 복종하는 것 같이 너의 낮은 성품이 높은 성품에 복종하도록 강요하라. 선을 존경하고 진리를 높이라. 더러운 것 대신에 아름다운 것을 선택하라. 동료들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뻗을지니,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임이라.”
132:4.7 (1461.5) 포럼에서 그는 연사(演士)에게 말했다: “너의 웅변은 마음을 즐겁게 하고 논리는 칭찬받을 만하며 목소리는 듣기가 좋구나. 그러나 너의 가르침은 도저히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너의 영적 아버지임을 아는, 힘이 솟게 하는 만족감을 네가 즐길 수만 있다면 어둠의 사슬에서, 그리고 무지의 노예 상태에서 동료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네 말솜씨를 사용해도 좋으리라.” 이 사람은 로마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후계자가 된 마커스였다. 사람들이 시몬 베드로를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 바로 이 사람이 로마의 박해자들에게 대항하고 용감하게 새 복음을 계속 전도하였다.
132:4.8 (1462.1) 억울하게 고발당한 어느 가난한 사람을 만나고서, 예수는 함께 판사 앞으로 갔다. 그를 위하여 변론하도록 특별 허락을 얻고서 훌륭하게 연설했으며, 그 과정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정의(正義)는 나라를 위대하게 만들며, 나라가 위대할수록 가장 비천한 시민도 부당한 판결을 받지 않도록 처리하려고 더욱 애쓸 것이라. 어떤 나라라도 오직 돈과 권력 있는 자가 법정 앞에서 신속하게 정의를 얻을 수 있다면 한탄이 있을진저! 죄 있는 자를 벌하는 것뿐 아니라 무죄한 자를 놓아 주는 것이 판사의 신성한 임무이나이다. 나라가 오래 가는 것은 법정이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고 건전함에 달려 있나이다. 참된 종교가 자비에 기초를 두는 것 같이 국가의 정부는 정의에 기초를 두나이다.” 그 판사는 소송 사례를 다시 열고 증거를 샅샅이 조사한 뒤에, 그 죄수를 풀어주었다. 개인적으로 봉사하는 이 기간에 예수가 한 모든 활동 중에 이것이 대중 앞에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132:5.1 (1462.2) 로마 시민이요 금욕주의자인 어떤 부자가 앙가몬의 소개를 받고서 예수의 가르침에 크게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여러 번 친밀한 회담을 가진 뒤에 이 부유한 시민은 예수가 재산을 가졌다면 무슨 일을 하겠는가 물었고 예수는 대답했다: “지적 생활을 풍성하게 만들고 사회 생활을 고귀하게 만들고 영적 생활의 진보를 위하여 내가 지식과 지혜와 영적 봉사를 베풀고자 하는 것 같이, 나는 물질 생활의 향상을 위하여 물질 재산을 사용하리라. 한 세대의 자원의 지혜롭고 효과 있는 관리자로서 다음에 뒤잇는 세대들의 이익과 품위를 위하여 물질 재산을 관리하겠노라.”
132:5.2 (1462.3) 그러나 그 부자(富者)는 예수의 대답에 마음이 흡족하지 않았다. 다시 대담하게 물었다: “그러나 내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기 재산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이까? 재산을 간직하리이까 아니면 남에게 주어야 하리이까?” 하나님께 충성하고 사람에 대한 의무에 관하여 그가 진리를 정말로 더 알고 싶어하는 것을 파악했을 때, 예수는 이어서 대답했다: “선한 친구여, 네가 진지하게 지혜를 찾고 정직하게 진리를 사랑하는 자임을 내가 알아보노라. 그러므로 재산을 책임지는 데 상관되는 네 문제의 해결에 대하여 내 소견을 펼칠 생각이 있노라.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나에게 조언을 요청했기 때문이라. 이 충고를 주면서 나는 어느 다른 부자의 재산에 아랑곳하지 않노라. 오직 너에게, 너 한 사람을 안내하기 위하여 조언하노라. 정직하게 네 재산을 신탁(信託)으로 여기기를 바라고 쌓은 재산을 지혜롭고 유능하게 관리하는 자가 되기를 정말로 원한다면, 재산의 근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분석할 것을 너에게 조언하고자 하노라. 어디로부터 이 재산이 왔는가 스스로 물어 보고 최선을 다하여 정직한 대답을 찾으라. 너의 큰 재산의 근원을 연구하는 데 도움되는 것으로서 물질 재산을 쌓는 다음 열 가지 다른 방법을 기억할 것을 제안하리라:
132:5.3 (1462.4) “1. 물려받은 재산―부모, 그리고 다른 조상으로부터 얻은 재산.
132:5.4 (1462.5) “2. 발견한 재산―대지(大地)의 개발되지 않은 자원으로부터 얻은 재산.
132:5.5 (1462.6) “3. 상업 재산―물질 상품의 교환과 물물 교역에서 정당한 이익으로 얻은 재산.
132:5.6 (1462.7) “4. 부당한 재산―사람의 동료들을 부당하게 착취하거나 노예로 만들어서 얻은 재산.
132:5.7 (1463.1) “5. 이자(利子)로 얻은 재산―투자한 자본으로부터 공평하고 정당하게 버는 가능성에서 생기는 소득.
132:5.8 (1463.2) “6. 천재(天才)로 얻은 재산―인간 정신의 창조하고 발명하는 자질에 대한 보상으로부터 생기는 재산.
132:5.9 (1463.3) “7. 우연히 얻은 재산―동료의 관대함에서 생기거나 생활 형편에 기원이 있는 재산.
132:5.10 (1463.4) “8. 훔친 재산―불공평ㆍ부정직ㆍ도둑질 또는 사기(詐欺)로 확보한 재산.
132:5.11 (1463.5) “9. 신탁(信託) 기금―현재나 미래에 어떤 특정한 용도를 위하여, 동료들이 네 손에 맡긴 재산.
132:5.12 (1463.6) “10. 벌어들인 재산―스스로 몸소 수고하여 직접 얻은 재산, 바로 너의 정신과 몸이 나날이 노력하여 얻는 공평하고 마땅한 보상.
132:5.13 (1463.7) “그래서 친구여, 하나님 앞에서, 또 사람들에게 봉사하면서 너의 큰 재산을 충실하고 정당하게 관리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거든 재산(財産)을 이 열 가지 큰 부문으로 대강 나누고, 정의ㆍ공평ㆍ공정, 그리고 참된 효율성의 법칙을 지혜롭고 정직하게 해석하고 그에 따라 각 부분을 처분하도록 진행해야 하느니라. 그러나 필사 인생의 불행한 상황에서 고생하는 자의 곤경을 자비롭게 사심 없이 배려하는 방향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따금 실수한다면 하늘의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으리라. 물질적 상황이 공평하고 정당한가 솔직하게 의심이 들 때, 곤궁한 자에게 유리하게, 부당한 시련으로 불행을 당한 자에게 유리하게 결정을 내리라.”
132:5.14 (1463.8) 몇 시간 동안 이 문제들을 토론한 뒤에, 이어서 더욱 자세한 지침을 달라는 부자의 요청에 응답하여, 예수는 계속하여 확대하여 조언하였다. 그 말씀의 내용은 이렇다: “재산을 다루는 태도에 관하여 더 제안하지만, 오직 너에게 주는 것으로서 너 개인을 안내하기 위하여, 내 조언을 받으라고 훈계하고자 하노라. 질문하는 친구인 너에게 오직 내 생각을 이르노라. 다른 부자들이 자기 재산을 어떻게 여겨야 하는가 명령하는 자가 되지 말라 부탁하노라. 나는 이렇게 너에게 조언하겠노라:
132:5.15 (1463.9) “1. 너는 물려받은 재산의 관리자로서 그 근원을 고려해야 하느니라. 지금 세대의 이익을 위하여 공평한 보수를 뺀 뒤에 정당한 재산을 뒤잇는 세대들에게 정직하게 전달할 때, 너는 지난 세대를 대표할 도덕적 책임이 있느니라. 그러나 너는 선조들이 부당하게 재산을 모으면서 생긴 부정직이나 불의를 계속할 의무가 없느니라. 네가 물려받은 중에 사기(詐欺)로 얻거나 불공평하게 얻은 것으로 판명된 재산이 있다면 그 부분을 어떻게 올바르게, 관대하게 배상하는가 확신이 서는 대로 지불해도 좋으니라. 물려받은 나머지 정당한 재산은 공평하게 쓰고 한 세대의 관리자로서, 다른 세대를 위하여 안전히 전달해도 좋으니라. 재산을 후계자들에게 물려줄 때 지혜롭게 구별하고 건전하게 판단함으로 결정을 내려야 하느니라.
132:5.16 (1463.10) “2. 발견의 결과로서 부(富)를 누리는 자는 누구나 사람이 땅에서 잠시만 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고 따라서 가능한 최다수의 동료 인간에게 도움되는 방법으로 이 발견한 재산을 나누기 위하여 적절히 준비해야 하느니라. 발견한 자는 그 노력에 대하여 모든 보상을 빼앗겨서는 안 되지만 자연이 쌓아 둔 자원을 발굴하여 얻을 모든 이익과 축복을 주제넘게 이기적으로 주장해서도 안 되느니라.
132:5.17 (1464.1) “3. 사람들이 상업과 물물 교환으로 세상의 사업을 경영하는 한 저희는 공평하고 정당한 이익을 받을 자격이 있느니라. 장사하는 사람마다 제공한 수고에 대하여 임금을 받아 마땅하고 상인(商人)은 그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느니라. 세상의 조직된 사업에서, 공정하게 장사하고 동료들을 정직하게 대우하는 것은 이익이 남는 많은 다른 종류의 재산을 창조하며, 이 재산의 모든 근원은 가장 높은 정의ㆍ정직ㆍ공평의 원칙에 따라서 판정되어야 하느니라. 정직한 상인은 비슷한 거래에서 그가 동료 상인에게 기꺼이 지불하고자 하는 금액만큼 이익 남기기를 주저해서는 안 되느니라. 이 종류의 재산은 큰 규모로 사업을 운영했을 때 개인이 번 소득과 동일하지 않지만, 정직하게 쌓은 그러한 재산은 동시에 그 재산을 나중에 어떻게 분배하는가에 대하여 상당한 권리를 그 소유자에게 부여하느니라.
132:5.18 (1464.2) “4. 하나님을 알고 신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필사자는 누구나 돈으로 남을 억압함으로 품위를 떨어뜨릴 수 없느니라. 고귀한 사람은 아무도 육체를 입은 형제를 노예로 만들거나 부당하게 착취함으로 재산을 축적하고 재력을 쌓으려고 애쓰지 아니하리라. 억압받는 필사 인간의 피땀을 쥐어짠 결과로 생긴 재산은 도덕적 저주요 영적 낙인이라. 모든 그러한 재산은 이렇게 빼앗긴 자에게, 아니면 저희의 자식과 그 자손에게 돌려주어야 하느니라. 지속하는 문명은 노동자로부터 임금을 속여 빼앗는 관습을 토대로 하여 세워질 수 없느니라.
132:5.19 (1464.3) “5. 정직하게 얻은 재산은 이자를 받아 마땅하니라. 사람들이 빌리고 빌려주는 한, 빌려준 자본이 정당한 재산이라면 정당한 이자를 거두어도 좋으니라. 이자를 청구하기 전에, 먼저 너의 자본을 깨끗이 하여라. 품위를 떨어뜨려 고리로 빌려주는 습관에 빠질 정도로 지나치게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자가 되지 말지니라. 재력을 이용하여, 허덕이는 동료들보다 부당하게 유리한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너무 이기심에 빠지지 말라. 재정적 곤경에 처한 형제로부터 고리(高利)를 받아내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라.
132:5.20 (1464.4) “6. 천재(天才)가 넘쳐흘러 어쩌다가 재산을 확보한다면, 너의 재산이 발명하는 자질의 보상으로 생긴 것이라면 그러한 보상에서 부당한 몫을 주장하지 말라. 천재는 조상과 후손에게 무언가 빚지고 있느니라. 마찬가지로 민족과 나라에게, 그리고 새로운 발명이 생긴 환경에 빚지고 있느니라.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으로서 일하고 발명품을 만들어냈음을 기억해야 하느니라. 재산 증가분 전부를 천재로부터 빼앗는 것은 똑같이 부당하리라. 재산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이 모든 문제에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원칙과 법규를 사람이 정하는 것은 언제라도 불가능하리라. 먼저 사람이 형제임을 깨닫고, 너에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그대로 네가 형제에게 해주기를 정직하게 바라면, 정의ㆍ정직ㆍ공평을 찾으라는 평범한 명령은 모든 되풀이되는 경제적 보상과 사회 정의(正義)의 문제를 정당하게, 그리고 치우치지 않게 해결하도록 너를 안내하리라.
132:5.21 (1464.5) “7. 재산의 관리로부터 정당하고 합법적인 보수를 버는 것을 제외하고, 누구도 때 맞게 행운으로 손에 굴러들어온 재산을 개인적으로 주장해서는 안 되느니라. 우연히 생긴 재산은 사람의 사회 집단이나 경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써야 할 신탁(信託) 재산이라는 관점에서 얼마큼 보아야 하느니라. 그런 재산의 소유자에게 굴러들어온 그러한 자원의 지혜롭고 효과적인 분배를 결정하는 데 큰 발언권을 주어야 하느니라. 문명화된 사람은 그가 관리하는 모든 것을 반드시 개인의 사유(私有) 재산으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132:5.22 (1465.1) “8. 모은 돈의 어느 부분이라도 알면서 사기(詐欺) 행위로 얻었거나, 재산의 어떤 부분이라도 정직하지 않은 업무 처리나 불공평한 방법으로 쌓아 왔거나, 재산이 동료들을 부당하게 대우한 결과라면, 그릇되게 얻은 이 모든 이익을 정당한 주인에게 서둘러 돌려주라. 충분히 손해를 배상하고 이처럼 네 재산 중에서 정직하지 않은 부(富)를 모두 깨끗이 없앨지어다.
132:5.23 (1465.2) “9. 한 사람의 재산을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관리하는 것은 엄숙하고 신성한 책임이라. 그러한 신탁 재산을 위험에 빠지게 하거나 위태롭게 하지 말라. 어떤 신탁 재산 중에서도, 어떤 정직한 사람이라도 허락할 만큼만 네가 가지라.
132:5.24 (1465.3) “10. 너의 재산 중에 자신의 정신과 육체적 노력이 번 것을 대표하는 부분은―네 일이 공평하고 공정하게 실행되었다면―참으로 네 것이라. 아무도 그러한 재산을 네가 소유하고 너의 생각대로 처분할 권리를 부인할 수 없느니라. 하지만 이 권리의 행사(行事)는 동료들에게 해를 미치지 않아야 하느니라.”
132:5.25 (1465.4) 예수가 상담을 마쳤을 때, 이 부유한 로마 사람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날 밤 작별 인사를 하면서 그는 이렇게 약속하였다: “좋은 친구여, 당신은 대단히 지혜롭고 선한 사람인 것을 내가 깨닫나이다. 당신이 조언한 대로 내일 모든 재산의 관리를 시작하리이다.”
132:6.1 (1465.5) 여기 로마에서 또한 한 우주의 창조자가 길 잃은 아이를 안타까워하는 어머니에게 돌려주느라고 몇 시간을 보낸 감동적 사건이 일어났다. 이 어린 소년은 집을 떠나서 헤매었고, 슬피 울고 있는 것을 예수가 발견했다. 도서관으로 가는 길이었지만, 그와 가니드는 그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에 몰두했다. 가니드는 예수가 하신 말씀을 결코 잊지 않았다: “너도 알다시피, 가니드야, 대부분의 인간은 길을 잃은 아이와 같으니라. 저희는 두려움에 울고 슬픔에 빠져 많은 시간을 보내느니라. 이 아이가 집에서 조금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 같이, 진실로 저희는 안전하고 안정된 곳으로부터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느니라. 진리의 길을 알고 하나님을 안다는 확신을 가진 자는 모두, 생활의 만족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 동료를 안내하는 것을 의무가 아니라 특권(特權)으로 여겨야 하느니라. 그 아이를 어머니에게 되찾아주는 이 수고를 우리가 더할 나위 없이 즐기지 아니하였느냐? 마찬가지로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자는 사람에게 봉사하는 최상의 만족을 맛보느니라.” 그날 이후로, 사는 날까지, 가니드는 집을 찾아줄까 하여 길 잃은 아이들을 줄곧 주의하여 보았다.
132:6.2 (1465.6) 다섯 아이를 가진 과부가 있었는데, 그 남편은 이전에 사고로 죽었다. 예수는 가니드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사고로 잃은 것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들은 이 어머니와 아이들을 위로하려고 여러 번 갔고, 한편 가니드는 먹을 것과 옷가지를 마련하려고 아버지에게 돈을 구하였다. 그들은 맏아들에게 일자리를 찾아주어서 그 가족을 보살피는 일을 도울 수 있을 때까지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132:6.3 (1465.7) 그날 밤 고노드는 이 경험담을 들으면서 예수에게 친절하게 말했다: “나는 아들을 학자나 사업가로 만들려고 궁리하는데 이제 당신은 그를 철학자나 박애가로 만들기 시작하는구려.” 예수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우리는 그를 모두 네 가지 인물로 만들 것이외다. 그러면 인간의 멜로디를 알아듣는 귀가 한 음정이 아니라 네 음정을 들을 수 있으리니, 가니드가 인생에서 네 배나 만족할 수 있으리이다.” 그리고 나서 고노드가 말했다: “당신이 정말로 철학자인 줄 내가 깨닫소. 당신은 미래 세대를 위하여 책을 써야 하오.” 예수는 대답했다: “책이 아니라―내 사명은 이 세대에, 그리고 모든 세대를 위하여 일생을 사는 것이외다. 나는―” 그러나 멈추어서 가니드에게 일렀다, “아이야, 잘 때가 되었구나.”
132:7.1 (1466.1) 예수와 고노드와 가니드는 로마를 벗어나, 근처의 지역에서 흥미 있는 장소들로 다섯 번 여행하였다. 북부 이탈리아의 호수들을 찾아보는 길에,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지 않으면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치기가 불가능한 것에 관하여, 예수는 가니드와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수로 여행하는 길에 지각(知覺) 없는 한 이방인을 어쩌다가 만났다. 예수가 영적 질문을 하는 토론으로 자연히 이끄는 대화를 하면서 사람을 끌어내는 평상시의 버릇을 따르지 않아서 가니드는 놀랐다. 어째서 선생이 이 이방인에게 조금도 흥미를 나타내지 않는가 가니드가 물었을 때, 예수는 대답했다:
132:7.2 (1466.2) “가니드야, 그 사람은 진리에 갈급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불만이 없었느니라. 도움을 요청할 준비가 되지 않았고, 마음의 눈은 혼을 위하여 빛을 받으려고 열려 있지 않았는지라. 그 사람은 구원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준비가 되지 않았도다. 인생의 시련과 곤경으로 인하여 지혜와 상급의 배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려면 그에게 시간을 더 주어야 하느니라. 그렇지 않고 우리와 함께 살도록 만들 수 있다면, 우리의 생활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그에게 보여줄 수도 있고,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우리의 삶에 무척 이끌려서 어쩔 수 없이, 우리 아버지에 대하여 묻게 되리라.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을 드러낼 수 없느니라. 마음에 내켜 하지 않는 사람을 구원의 기쁨으로 이끌 수 없도다. 사는 체험의 결과로서 사람이 진리에 갈급해야 하느니라.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러한 동료 필사자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수단으로서 활동할 수 있기 전에, 신성한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의 생활과 접촉한 결과로 그가 하나님을 알고 싶어해야 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땅에서 우리가 정말로 할 일은 생활 속에서 아버지가 드러나도록 사는 것이라. 하나님을 찾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아버지를 보고서 우리 생활 속에서 이 방법으로 표현하는 하나님에 관하여 더 많이 알려고 우리에게 도움을 부탁하리라.”
132:7.3 (1466.3) 스위스를 방문하는 길에, 산 속에서, 예수는 하루 종일 불교에 대하여 그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이야기했다. 여러 번 가니드는 예수에게 부다에 대하여 직접 물은 적이 있었지만 언제나 다소 분명치 않은 대답을 받았다. 이제, 아들 앞에서, 아버지는 부다에 관해 솔직하게 물었고 솔직한 대답을 얻었다. 고노드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부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로 알고 싶소이다.”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132:7.4 (1466.4) “당신이 아는 부다는 불교보다 훨씬 나았소이다. 부다는 위대한 사람이었고 그 민족에게 선지자이기도 했지만 고아 선지자였소이다. 그 말은 정말로 영적 아버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일찍부터 눈에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외다. 그의 체험은 비극이었소이다. 하나님의 사자로서 살고 가르치려고 애썼지만, 하나님 없이 그렇게 하였소이다. 부다는 안전한 항구 바로 앞까지, 사람을 구원하는 피난처 입구(入口) 바로 앞까지 구원의 배를 안내하였고 거기서 잘못된 해도(海圖) 때문에, 좋은 배가 땅으로 올라가 버렸소이다. 거기서 배는 이 여러 세대 동안, 움직이지 않고 거의 희망 없이 버려졌소이다. 그 배 위에 당신의 민족 중에 많은 사람이 여태까지 남아 있었소이다. 쉴 수 있는 안전한 바다에서 소리쳐 부를 만큼 가까이 살지만, 선한 부다의 귀중한 배가 항구 바로 바깥에서 좌초하는 불행을 만났기 때문에 저희는 항구로 들어가려 하지 않소이다. 불교를 믿는 민족들은 그 선지자가 만든 철학의 배를 버리고 그의 고귀한 정신을 붙잡지 않으면 이 항구에 결코 들어가지 못하리이다. 당신의 민족이 부다의 정신에 충실한 채로 있었다면, 당신은 영적 평온, 혼의 휴식, 구원의 확신이 있는 피난처로 들어간 지 오래 되었으리이다.
132:7.5 (1467.1) “보시오, 고노드씨여, 부다는 영적으로 하나님을 알았지만, 머리로 하나님을 뚜렷하게 깨닫지 못했소이다. 유대인은 머리로 하나님을 깨달았지만 크게 보아서 영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소이다. 오늘날, 불교도는 하나님 없는 철학 속에서 발버둥치고, 한편 내 민족은 생명과 자유의 철학, 유익한 철학(哲學)이 없이, 불쌍하게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노예가 되었소이다. 당신들은 하나님 없는 철학을 가졌고, 유대인은 하나님을 가졌지만 그와 관련된 생활 철학이, 크게 보아서 없소이다. 하나님이 영이고 아버지인 것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종교가 한 민족을 변화시키고 한 나라를 높이기 위해서 가져야 할 도덕적 에너지와 영적 추진력을 부다는 그의 가르침 속에서 마련하지 못했소이다.”
132:7.6 (1467.2) 그때 가니드가 외쳤다: “선생이여, 당신과 내가 새 종교를, 인도를 위해서 충분히 좋고 로마를 위해서 충분히 큰 종교를 만듭시다. 아마도 우리가 유대인에게 그 종교를 야웨와 바꿀 수 있으리이다.” 예수는 대답했다. “가니드야, 종교는 만들어지지 않느니라. 사람의 종교는 오랜 세월 동안 성장하며, 한편 하나님을 동료에게 드러내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땅에 번쩍 나타나느니라.” 그러나 그들은 이 예언하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알아듣지 못했다.
132:7.7 (1467.3) 그날 밤, 그들이 잠자리에 들어간 뒤에, 가니드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버지와 함께 오랫동안 이야기했고, 마침내 말했다, “아세요, 아버지, 나는 때때로 요수아가 선지자라고 생각하나이다.” 아버지는 잠이 오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아들아, 다른 이도 있느니라―”
132:7.8 (1467.4) 이날부터 남은 수명이 다하기까지, 가니드는 자신의 종교를 계속 발전시켰다. 머리 속에서 그는 예수의 넓은 마음, 공평하고 관대함에 힘차게 감동을 받았다. 철학과 종교에 관하여 그들이 무슨 토론을 하더라도 이 소년은 결코 분개하는 느낌이나 적대하는 반응을 체험하지 않았다.
132:7.9 (1467.5) 천상(天上)의 지적 존재들이 얼마나 대단한 장면을 바라보는가. 인도인 소년이 한 우주의 창조자에게 새 종교를 만들자고 제안하는 이 광경을! 비록 그 젊은이는 알지 못했어도, 바로 그때 거기서 새롭고 영구한 종교―구원의 길, 예수를 통하여, 예수 안에서, 사람에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이 새 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 소년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가 가장 하고 싶었던 바로 그 일을 실제로 하고 있었다. 지난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늘 이와 같다. 영적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받고서, 깨우치고 숙고하는 인간이 상상하여 마음을 다하여 사심 없이 하고 싶은 바로 그 일, 그리고 되고 싶은 바로 그 목표는 아버지의 뜻을 신성하게 행하려는 필사자가 헌신하는 정도에 따라서, 눈에 뜨일 정도로 창조력을 가지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 대단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또 일어난다.
133:0.1 (1468.1) 로마를 떠나려고 준비할 때 예수는 친구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 다마스커스 서기관은 예고 없이 로마에 나타났고, 같은 방법으로 사라졌다. 만 1년이 지나서야 그를 알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다시 그를 만날 희망을 버렸다. 둘째 해가 저물기 전에, 그를 알던 사람들의 작은 무리가 그의 가르침에 공통으로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와 더불어 즐거운 시간을 가졌던 서로의 기억을 통해서 함께 이끌림을 발견하였다. 금욕주의파, 견유학파, 신비 종파로 이루어진 이 작은 집단은 기독교의 첫 전도자들이 로마에 나타나기 바로 전까지, 불규칙하게 이 비공식 회의를 계속 열었다.
133:0.2 (1468.2) 고노드와 가니드는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에서 물건을 무척 많이 샀기 때문에 소유한 재산을 모두 타렌툼까지 짐 꾸러미 행렬 편으로 미리 보냈고, 한편 세 나그네는 이름난 아피아 길로 이탈리아를 가로질러서 한가히 걸었다. 이 여행에서 그들은 온갖 종류의 인간들과 마주쳤다. 고귀한 로마 시민과 그리스 거류민이 숱하게 이 길을 따라서 살았지만, 이미 열등한 노예들의 자손이 큰 무리를 지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133:0.3 (1468.3) 타렌툼까지 가는 중간쯤에서 어느 날 점심을 먹으면서 쉬는 동안, 가니드는 예수가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솔직하게 물었다. 예수는 말했다: “비록 인간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서로 여러 면에서 다르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또 영적 세계에서 모든 필사자는 똑같은 자리에 서 있느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오직 두 무리의 필사자가 있을 뿐이니, 그의 뜻을 행하기를 바라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이라. 우주가 사람 사는 세계를 바라볼 때, 우주는 마찬가지로 두 큰 계급을 인식하나니, 하나님을 아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이라.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자는 어느 주어진 영역의 동물과 함께 간주되느니라. 인류는 다른 자격에 따라서, 신체ㆍ정신ㆍ사회ㆍ직업, 또는 도덕 면에서 저희를 보는 대로 여러 계급으로 적절히 분류될 수 있지만, 이 다른 등급의 필사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석 앞에 나타날 때 똑같은 자리에 서느니라. 하나님은 참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니라. 비록 너는 지식ㆍ사회ㆍ도덕 문제에서 차별 되는 인간의 능력과 자질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더라도, 하나님이 계신 앞에서 예배하려고 모였을 때 사람의 영적 모임에서 전혀 그러한 차별을 해서는 안 되느니라.”
133:1.1 (1468.4) 타렌툼에 가까이 갔을 때 길가에서 어느 날 오후에 아주 흥미 있는 사건이 일어났다. 거칠고 약자를 괴롭히는 한 소년이 더 어린 소년을 사정없이 때리는 것을 보았다. 예수는 얻어맞는 소년을 서둘러 도왔고 그 아이를 구조했을 때, 어린 소년이 달아날 때까지 때리던 소년을 단단히 붙들었다. 예수가 작은 깡패를 놓아준 순간 가니드는 소년에게 달려들어 흠씬 두들겨 패기 시작했고 가니드는 예수가 재빨리 간섭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그가 가니드를 제지하고 놀란 소년이 달아나게 만든 뒤에, 젊은이는 숨을 돌리자마자 흥분해서 소리쳤다: “선생이여,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나이다. 자비로운 마음이 그 어린 소년을 구하라고 요구한다면, 응보는 몸집이 더 큰, 폭행하는 젊은이를 벌주라고 요구하지 않나이까?” 예수는 대답하여 말했다:
133:1.2 (1469.1) “가니드야, 네가 알아듣지 못하는 게 참말이라. 자비를 베푸는 것은 반드시 개인의 일이지만, 응보로 벌을 내리는 것은 사회나 정부나 우주 행정 집단의 기능이라. 한 개인으로서 나는 자비를 보여야 하느니라. 나는 얻어맞는 소년을 구하러 가야 하고 때리는 자를 말리려고 충분한 힘을 써도 전혀 모순이 없느니라. 바로 그것이 내가 한 일이라. 나는 얻어맞는 소년을 구했고 그것이 자비를 베푸는 목적이었느니라. 그리고 나서 싸움에서 약한 쪽이 달아나게 할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폭행자를 강제로 붙들어두었고 그 뒤에 그 일에서 물러났노라. 더 나아가서 폭행자를 심판하고 그렇게 그의 동기를 판단하려고―동료를 때리게 만든 모든 것을 심의하려고―하지 않았고, 다음에 또 그의 악행에 대하여 공정한 벌이라 내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벌을 집행하려 들지도 않았느니라. 가니드야, 자비는 아낌없이 베풀어도 좋지만 응보는 정밀한 것이라. 무슨 벌이 응보의 요구 사항을 만족시키는가에 대하여 어떤 두 사람도 찬성할 것 같지 않음을 깨달을 수 없느냐? 한 사람은 40번이나 채찍질을 내리고 싶어 하고, 한 사람은 스무 번, 또 다른 사람은 독방에 가두는 것이 정당한 벌이라 조언하리라. 이 세상에서 그러한 책임은 집단에게 맡겨지거나 그 집단이 선택한 대표자들이 이행하는 것이 더 좋음을 너는 헤아릴 수 없느냐? 우주에서 심판은 동기뿐 아니라 모든 잘못 이전에 생긴 일을 십분 아는 자들에게 맡겨지느니라. 문명화된 사회에서, 그리고 조직된 우주에서, 응보의 시행은 공평한 재판을 연 결과로 공정한 선고를 내리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러한 특권은 여러 세계의 재판하는 집단과 모든 창조의 상급 우주들을 다스리는 전지(全知)한 행정가들에게 맡겨지느니라.”
133:1.3 (1469.2) 그들은 여러 날 동안 자비를 보이고 응보를 시행하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가니드는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 어째서 예수가 몸싸움에 말려들려고 하지 않는가 이해했다. 그러나 가니드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 물었고 결코 충분히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지 못했다. 그 질문은 이러했다: “그러나 선생이여, 더 힘세고 성질 나쁜 사람이 당신을 공격하고 죽이려고 위협한다면, 당신은 어찌하겠나이까? 자신을 방어하려고 아무 노력을 하지 않겠나이까?” 구경하고 있는 우주에게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사랑을 모범으로 보이려고 그(예수)가 땅에서 살고 있다고, 가니드에게 밝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는 비록 소년의 물음에 충분하고 만족스럽게 대답할 수 없었지만, 이만큼 말했다:
133:1.4 (1469.3) “가니드야, 이 문제들 가운데 더러는 너를 얼마나 어리둥절하게 만드는지 내가 잘 알 수 있고 네 물음에 답하려고 애써 보겠노라. 첫째로, 내 몸이 무슨 공격을 받더라도 나는 공격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육체를 입은 내 형제―인가 아닌가 결정하고, 그러한 사람이 도덕적 판단과 영적 분별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공격한 자에게 무슨 결과가 생기든지, 서슴지 않고 저항하는 힘이 자라는 데까지 나를 방어하리라. 그러나 자기 방어의 경우에도, 나는 아들 지위를 가진 동료 인간에게 그렇게 폭력을 쓰지 아니하리라. 다시 말해서, 나에게 폭력을 썼다고 해서 재판도 받기 전에 미리 그를 벌 주지 아니하리라. 모든 가능한 술책을 동원하여 그런 공격을 미리 막고 공격하지 않도록 설득하며, 그만두게 하지 못할 경우에는 완화시키려고 애쓰리라. 가니드야, 내 하늘 아버지가 넘치게 돌보심을 나는 절대로 확신하노라. 나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몸을 바쳤노라. 나는 진정한 해악이 나에게 쏟아질 수 있다고 믿지 않고, 적들이 나에게 무슨 해를 끼치고 싶어 하더라도 그 때문에 일생의 일이 정말로 위태롭게 될 수 있다고 믿지 않으며, 분명히 친구들의 폭력을 두려워할 필요는 전혀 없느니라. 나는 우주 전체가 나에게 친절하다는 것을 절대로 확신하노라―겉모습이 모두 반대로 보인다 하더라도 진심으로 확신을 가지고 나는 이 전능한 진리를 믿기를 주장하노라.”
133:1.5 (1470.1) 그러나 가니드는 완전히 만족해하지 않았다. 여러 번 이 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수는 어린 시절의 체험을 얼마큼, 또한 석공의 아들 야곱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어떻게 야곱이 예수를 방어하는 일을 스스로 맡았는가 듣고 나서 가니드는 말했다: “아하, 비로소 알겠나이다! 첫째로, 어떤 멀쩡한 사람도 당신처럼 그렇게 친절한 사람을 공격하고 싶어 하는 일은 극히 드물고, 생각이 아주 모자라서 누가 그런 일을 하더라도,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면 당신이 언제나 구조하러 가는 것 같이 당신을 도우려고 급히 달려올 어떤 다른 사람이 가까이 있을 것이 아주 확실하나이다. 마음 속으로, 선생이여 나는 찬성하나이다. 그러나 머리 속에는 아직도, 내가 야곱이었더라면, 단지 당신이 자신을 방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당신을 주제넘게 공격하는 버릇없는 친구들을 즐겁게 벌 주었으리라 생각하나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돕고 곤경에 빠진 동료들을 보살피는 데 시간을 많이 쓰시므로, 일생을 통하여 걷는 나그네 길에 당신은 꽤 안전하다 짐작하나이다―참, 언제나 당신을 방어할 누군가가 가까이 있을 것 같사옵나이다.” 예수는 대답하였다: “그 시험은 아직까지 오지 않았느니라, 가니드야. 시험이 다가올 때,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지켜야 하리라.” 자기 방어와 무저항을 다루는 이 어려운 주제에 대하여 소년은 선생에게서 더 말씀을 들을 수 없었다. 또 다른 기회에 그는 예수에게서, 조직된 사회는 자체의 정당한 명령을 집행하는 데 무력(武力)을 사용할 모든 권한이 있다는 의견을 유도해 냈다.
133:2.1 (1470.2) 배가 상륙하는 지역에서 머무르며 배가 짐 내리기를 기다리면서 그 나그네들은 자기 아내를 학대하는 어떤 사람을 보았다. 버릇대로 예수는 얻어맞는 사람을 위해서 간섭했다. 성난 남편 뒤에 걸어가서,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툭툭 두드리고 말했다: “친구여, 잠깐 따로 이야기해도 좋으냐?” 성난 사람은 그런 접근에 어리둥절했고 부끄럽게 망설이던 한 순간이 지나자 더듬거렸다―“어― 어째서요― 좋소이다, 나한테서 무엇을 원하시나이까?” 예수가 그를 한쪽으로 이끌고 가서 말했다: “친구여, 보아하니 무언가 끔찍한 일이 너에게 일어났음이 틀림없도다. 내가 무척 바라노니, 그렇게 힘센 남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서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를, 그것도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바로 여기 바깥에서 때리게 만들 수 있는가 내게 이르라. 내가 확신하건대, 이렇게 때리는 어떤 마땅한 이유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 틀림없도다. 남편에게 그러한 대접을 받아 마땅할 만큼 아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를 바라보니, 생각하건대, 네 얼굴에 자비를 베풀 소망은 아니라도 정의를 사랑하는 빛이 있는 것을 헤아리노라. 감히 말하노니, 길 옆에서 내가 강도들에게 공격받은 것을 발견했다면 네가 나를 구하려고 서슴지 않고 달려왔으리라. 감히 말하노니, 네 일생을 살면서 그런 용감한 일을 많이 했으리라. 이제, 친구여, 무슨 일인가 내게 이르라. 여인이 무슨 잘못을 했느냐, 아니면 어리석게 정신을 잃고 생각 없이 아내를 때렸느냐?” 이 사람의 가슴을 움직인 것은 말씀이 아니라 예수가 말을 마쳤을 때 그를 내려다 본 친절한 모습과 인자한 웃음이었다. 그 사람은 말했다: “당신이 견유학파의 사제인 줄 깨닫나이다. 당신이 나를 말리셨사오니 고맙소이다. 내 아내는 아무런 큰 잘못이 없고 아내는 착한 여자이나이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헐뜯는 태도로 나의 성미를 돋우어, 내가 침착을 잃게 되나이다. 삼가지 못하여 죄송하나이다. 약속하오니, 여러 해 전에 더 나은 길을 가르쳐 준 당신의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예전에 서약한 것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애쓰리이다. 약속하나이다.”
133:2.2 (1471.1) 그리고 나서, 작별을 알리면서 예수는 말했다: “여보게, 여자가 기꺼이 자원해서 그러한 권한을 주지 않으면 남자는 여자에게 아무런 정당한 권한이 없음을 늘 기억하라. 네 아내는 함께 일생을 지내고, 네가 투쟁하도록 도우며,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짐을 너보다 훨씬 무겁게 지고 있느니라. 이렇게 특별히 봉사한 대가로, 아이들을 잉태하고 낳고 길러야 하는 동반자로서, 남자가 여자에게 줄 수 있는 특별한 보호를 너에게서 받아야 가까스로 공평할 따름이라. 기꺼이 아내와 자식들을 사랑으로 보살피고 배려하는 것은 남자가 상급 수준의 창조적ㆍ영적 자의식에 도달한 것을 재는 척도이라. 자라서 불멸의 혼 잠재성을 소유할 존재들을 만들려고 협동한다는 의미에서,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과 동업자인 줄 모르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주에 있는 자녀들의 영 어머니를 자신과 동등한 이로서 대우하느니라. 아이들의 생명 속에서 자식 낳는 신성한 체험을 충분히 너와 함께 하는 어머니 동업자와 동등한 조건으로, 네 일생과 그에 관계된 모든 것을 함께 하는 것이 하나님다우니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듯, 네가 아이들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무한한 영, 광대한 우주의 모든 영 자식의 어머니에게 영예를 돌리고 그를 높이는 것 같이, 너는 아내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리라.”
133:2.3 (1471.2) 배에 올랐을 때 그들은 눈물을 글썽이는 부부가 말없이 부둥켜안고 서 있는 장면을 되돌아보았다. 예수가 그 사람에게 준 말씀의 후반(後半)을 귀담아들었기 때문에, 고노드는 하루 종일 그에 대한 명상에 잠겼고 인도로 돌아갔을 때 가정을 개혁하기로 결심하였다.
133:2.4 (1471.3) 니코폴리스로 가는 여행은 즐거웠지만, 바람이 유리하게 불지 않아서 느렸다. 세 사람은 로마에서 체험한 것을 여러 시간 동안 낱낱이 이야기하고, 예루살렘에서 처음 만난 뒤로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회상하였다. 가니드는 몸소 봉사하는 정신에 젖게 되었다. 그는 배에서 접대하는 일을 시작했지만, 둘째 날에 종교적으로 깊은 문제에 빠졌을 때 요수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33:2.5 (1471.4) 그들은 니코폴리스에서 며칠을 보냈다. 이 도시는 아우구스투스가 악티움 전투를 기념하여 “승리의 도시”로 50여 년 전에 세웠고, 악티움은 전투하기 전에 자신의 군대와 함께 텐트를 쳤던 땅이었다. 그들은 어느 예라미라는 사람의 집에서 묵었다. 그는 유대 신앙으로 개종한 그리스인이었는데 갑판에서 그를 만났다. 사도 바울은 세 번째 선교 여행 과정에서 바로 그 집에서 예라미의 아들과 겨울 내내 지냈다. 니코폴리스로부터, 그들은 같은 배로 고린도를 향하여 돛을 달았는데, 여기는 로마의 아카이아 지방의 서울이었다.
133:3.1 (1471.5) 고린도에 다다를 때가 되자 가니드는 유대 종교에 무척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어느 날 회당을 지나칠 때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 예수에게 예배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그날 그들은 학식 있는 어느 랍비가 “이스라엘의 운명”에 관하여 강론하는 것을 들었다. 예배가 끝난 뒤에 그들은 어떤 그리스보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이 회당에서 주 회당장이었다. 여러번 그들은 예배하러 회당에 돌아갔지만, 주로 그리스보를 만나려는 것이었다. 가니드는 그리스보와 그 아내, 그리고 아이들이 다섯인 그 가족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어떻게 유대인이 가족 생활을 하는가 지켜보는 것을 무척 기뻐했다.
133:3.2 (1472.1) 가니드가 가족 생활을 연구하는 동안, 예수는 상급의 종교 생활을 그리스보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예수는 진취적인 이 유대인과 스무 번이 넘게 회담을 가졌다. 여러 해 뒤에 바울은 바로 이 회당에서 설교하고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그가 전하는 말씀을 물리치고 회당에서 그가 더 설교하지 못하게 투표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가 이방인에게 갔을 때, 그리스보는 가족 전부와 함께 새 종교를 받아들였고 바울이 나중에 고린도에서 조직한 기독교 교회에서 주요한 지지자 중에 하나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33:3.3 (1472.2) 바울은 고린도에서 18개월 동안 전도했고 나중에 실라스와 디모데가 함께 하였다. 이 전도 기간에 바울은 “어느 인도인 상인 아들의 유대인 가정 교사”에게 가르침을 받은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133:3.4 (1472.3) 고린도에서 그들은 세 대륙에서 온 모든 종족의 사람들을 만났다. 알렉산드리아와 로마 다음으로 고린도는 지중해 제국에서 가장 국제적인 도시였다. 이 도시에는 사람의 눈을 끄는 것이 많이 있었다. 가니드는 요새를 방문하는 데 지칠 줄 몰랐고, 이것은 바다에서 거의 600미터나 솟아 있었다. 또한 여가 중 상당히 많은 시간을 회당 근처에서, 그리고 그리스보의 집에서 보냈다. 그는 처음에 유대인 가정에서 여자가 누리는 지위에 대하여 충격을 받았고 나중에는 매력을 느꼈다. 이 젊은 인도인에게는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133:3.5 (1472.4) 예수와 가니드는 또 다른 유대인, 유스도의 집에서 가끔 손님이 되었다. 그는 회당 옆에서 살던 경건한 상인이었다. 후일에 여러 번, 사도 바울이 이 집에 머물렀을 때, 인도인 젊은이와 유대인 가정 교사가 이렇게 방문한 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한편 바울과 유스도는 그렇게 지혜롭고 놀라운 히브리인 선생이 어떻게 되었는가 궁금해하였다.
133:3.6 (1472.5) 로마에 있을 때, 가니드는 예수가 공동 목욕탕으로 따라가려 하지 않는 것을 관찰하였다. 몇 번이나 나중에 그 젊은이는 남녀의 관계에 관하여 예수가 의견을 더 말하도록 유인하려고 애썼다. 젊은이의 물음에 대답하려고 했어도 그는 결코 이 주제를 길게 논하고 싶어 하지 않는 듯했다. 어느 날 저녁, 고린도에서 요새의 담이 바다로 이어지는 곳 가까이서 걷고 있을 때, 두 매춘부가 인사를 건네었다. 가니드는 예수가 높은 이상을 가진 사람이요, 더러운 티가 나거나 악한 느낌이 나는 것을 모두 싫어한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고 그는 또한 옳았다. 따라서 그는 이 여자들에게 독하게 쏘아붙였고, 무례하게 손짓해서 보냈다. 이것을 보자 예수는 가니드에게 일렀다: “너는 좋은 의도를 가졌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 비록 어쩌다가 저희가 잘못하는 자녀일지라도, 그렇게 주제넘게 말해서는 안 되느니라.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 여자들을 판단하느냐? 생계를 잇는 그러한 방법에 의존하도록 이끈 모든 상황을 혹시 아느냐? 우리가 이 문제들을 논하는 동안에 나와 함께 멈추라.” 그 말씀에 창부들은 가니드보다 더욱 놀랐다.
133:3.7 (1472.6) 그들이 그곳에 달빛 아래에 서 있는 동안 예수는 말씀을 이었다: “모든 인간 정신 안에 신다운 영이 살고 있으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선물이라. 이 착한 영은 늘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고,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내고 하나님을 알도록 도우려고 애쓰느니라. 그러나 필사자 안에는 또한 자연스러운 육체적 성향이 많이 있고, 이것을 창조자는 개인과 종족의 복지에 쓰이도록 집어넣었느니라. 자, 때때로, 남자와 여자는 자신들을 이해하려고, 그리고 대체로 이기심과 죄에 지배된 세상에서 생계를 잇는 다양한 어려움을 이기려고 노력하면서 헛갈리게 되느니라. 가니드야, 보아하니 이 여자들 가운데 아무도 의도하여 악하지 않으니라. 얼굴을 보아하니, 저희가 많은 슬픔을 겪었음을 알 수 있도다. 잔인한 운명의 손에 저희가 많이 고생한 듯하고, 의도하여 이 종류의 생활을 택하지 않았느니라. 거의 절망에 빠져 낙심하는 가운데 저희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굴복하였고, 희망 없어 보이는 상황을 벗어나는 최선의 길로서, 생계를 잇는 이 불쾌한 수단을 받아들였느니라. 가니드야,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정말로 사악하며 못된 일을 일부러 선택하느니라. 그러나 내게 이르라, 지금 눈물로 얼룩진 이 얼굴을 들여다볼 때, 너는 나쁘거나 사악한 무엇이 보이느냐?” 예수가 대답을 들으려고 멈추자, 가니드는 더듬어 대답하며 목이 메었다: “아니, 선생이여, 보이지 않나이다. 저희에게 내가 무례했던 것을 사과하나이다―나는 저희의 용서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저희를 용서했음을 내가 아버지 대신 말하는 것 같이, 저희가 너를 용서한 것을 저희를 대신하여 말하노라. 이제 모두 나와 함께 한 친구의 집으로 가자. 거기서 마실 것을 들면서 새롭고 더 좋은 앞날의 생활을 위하여 계획하리라.” 이때까지 깜짝 놀란 여인들은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서로를 바라보고, 남자들이 길을 이끄는 대로 조용히 따라갔다.
133:3.8 (1473.1) 이 늦은 시간에 예수가 가니드와 낯선 두 사람을 데리고 나타났을 때 유스도의 아내가 얼마나 놀랐을까 상상해 보라. 예수는 말했다: “이 시간에 우리가 온 것을 네가 용서하겠지만, 가니드와 나는 조금 먹고 싶고, 새로 발견한 이 친구들과 더불어 나누어 먹고자 하니, 이들도 또한 영양이 필요하니라. 이 모든 것 외에도 우리가 온 것은 이 여인들이 인생을 새로 출발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무엇이 최선인가 함께 의논하는 데 네가 관심을 가지리라 생각하였음이라. 저희는 사정 이야기를 해줄 수 있으나, 추측컨대 저희는 많은 곤경을 겪었고, 여기 이 집에 와 있는 바로 그 사실이 저희가 선한 사람들을 얼마나 진지하게 알고 싶어 하는가, 그리고 온 세계에―하늘의 천사들에게도―저희가 어떤 용감하고 고귀한 여자가 될 수 있는가 보여줄 기회를 얼마나 잡고 싶어 하는가 증언하느니라.”
133:3.9 (1473.2) 유스도의 아내, 마르다가 음식을 식탁 위에 펼쳐 놓았을 때, 예수는 뜻밖에 떠나면서 말했다: “때가 늦었고, 젊은이의 아버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너희―세 여인―최고자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함께 여기 두고 떠남을 용서하기 바라노라. 땅에서 새롭고 더 좋은 생활을 하고 다음의 큰 세상에서 영생할 것을 계획하는 동안 너희가 영적 안내를 받도록 기도하리라.”
133:3.10 (1473.3) 이렇게 예수와 가니드는 여인들을 떠났다. 이제까지 두 창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가니드도 말이 없었다. 몇 순간 동안 마르다도 그랬지만, 당장에 그 형편에 대처했고 이 낯선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가 희망했던 대로 모두 처리하였다. 둘 중에 나이 든 여인은 그 뒤에 얼마 있다가 영생을 얻으리라는 밝은 희망을 가지고 죽었고, 나이 어린 여자는 유스도의 사업 장소에서 일하다가, 후일에 고린도의 첫 기독교 교회에서 평생 회원이 되었다.
133:3.11 (1473.4) 그리스보의 집에서 예수와 가니드는 어느 가이우스라는 사람을 몇 번 만났는데, 그는 나중에 바울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들은 고린도에서 이 두 달 동안에 몇십 명의 쓸 만한 사람들과 밀접한 이야기를 가졌다. 우연으로 보이는 이 모든 접촉의 결과로 이렇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의 과반수가 나중에 기독교 공동체의 회원이 되었다.
133:3.12 (1473.5) 처음에 고린도에 갔을 때, 바울은 오랫동안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 가정 교사가 그가 수고하도록 얼마나 길을 잘 예비했는지 알지 못했다. 게다가, 바울은 아퀼라와 프리실라가 이미 큰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아퀼라는 로마에 있을 때 예수가 접촉하게 된 견유학파의 한 사람이었다. 이 부부는 로마에서 온 유대인 피난민이었고 재빨리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바울은 그들과 함께 살고 일했는데, 그들이 또한 천막 만드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편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에서 체류를 연장하였다.
133:4.1 (1474.1) 예수와 가니드는 고린도에서 흥미 있는 체험을 더 많이 겪었다. 큰 무리의 사람들과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들은 예수로부터 받은 가르침으로 인하여 큰 소득을 얻었다.
133:4.2 (1474.2) 신다운 인생에서 어려운 것들을 동료 인간들 가운데 약하고 힘없는 사람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생활 체험의 방아에서 진리의 알곡을 가루로 만드는 것에 관하여 그는 방앗간 주인에게 가르쳤다. 예수는 말했다: “영적(靈的) 깨달음이 젖먹이 수준에 있는 자에게 진리의 젖을 주라. 생생하게 사랑으로 봉사를 베풀면서, 네게 묻는 자 하나하나의 받아들이는 능력에 맞게 영적 음식을 먹음직스럽게 준비하여라.”
133:4.3 (1474.3) 로마의 백부장에게 말했다: “케자의 것은 케자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리라. 신이 홀로 주장할 수 있는 존경을 케자가 주제넘게 가로채지 않는 한, 하나님께 성실히 봉사하는 것과 케자를 충실히 섬기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느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충성은 네가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자격 있는 황제에게 헌신하는 데 너를 더욱 충성스럽고 충실한 사람으로 만들리라.”
133:4.4 (1474.4) 미트라 종파의 성실한 지도자에게 말했다: “영원한 구원이 있는 종교를 찾으니 너는 잘 하는구나. 하지만 사람이 만든 신비와 인간의 철학 가운데서 그러한 영화로운 진리를 찾으러 다니는 것은 잘못이라. 영원한 구원의 신비(神秘)는 바로 너의 혼 안에 거함을 알지 못하느냐? 하늘의 하나님은 그의 영을 네 안에 살라고 보내셨고, 이 영은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께 봉사하는 모든 사람을 이 생명으로부터 죽음의 입구를 거쳐서, 하나님이 자녀들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영원한 빛의 나라까지 인도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 결코 잊지 말라. 하나님을 아는 너희는 그와 같이 되기를 참으로 동경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133:4.5 (1474.5) 쾌락주의파의 선생에게 말했다: “너는 최선을 고르고 좋은 것을 존중하니 잘 하는구나. 그러나 인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깨달음으로 얻은, 영 분야에 담겨 있는 것, 필사자의 일생에서 더 중요한 것들을 헤아리지 못하니 너는 지혜가 있느냐? 인간의 모든 체험 속에서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깨달음이요, 그의 영은 네 안에 살면서, 우리 모두의 아버지, 모든 세상의 하나님, 우주들의 주(主)가 몸소 계신 앞에 이르는 길, 길고도 거의 끝없는 나그네 길에서, 너를 인도하고자 하느니라.”
133:4.6 (1474.6) 청부업자요 건축가인 그리스인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친구여, 사람들의 물질 건물을 짓는 동안, 네 혼 안에 신성한 영의 모습을 좇아서 영적 인품을 기르라. 하늘나라의 영적 아들로서 세울 업적이 이 세상에서 건축가로서 세우는 업적보다 뒤지지 않게 하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이 시대의 저택을 짓는 동안, 바로 너를 위하여 영원한 저택에서 살 권리 얻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 의로움과 진리에 기초를 두고 하나님이 건축하고 지으신 한 도시가 있음을 늘 기억하라.”
133:4.7 (1474.7) 로마인 재판관에게 말했다: “네가 사람들을 재판하는 것 같이, 바로 네가 언젠가 우주 통치자들의 법정 앞에 재판받으러 올 것을 기억하라. 네가 언젠가 이렇게 최상 중재자의 손에서 자비로운 배려를 몹시 바라리니, 올바르게, 아니 자비롭게 판단하라. 쓰인 글자 그대로만 아니라 이렇게 법률 정신에 안내를 받아, 비슷한 형편에서 네가 재판받고 싶은 대로 재판하라. 네 앞에 끌려 온 사람들의 필요에 비추어 네가 공평한 정신으로 응보를 내리는 것 같이, 언젠가 온 땅의 재판관 앞에 설 때, 너는 자비로 완화된 응보를 기대할 권리가 있으리라.”
133:4.8 (1475.1) 그리스 여인숙의 안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최고자의 자녀들을 대접하는 자로서 친절을 베풀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살려고 내려온 영이 깃드는 사람들 안에 계신 하나님께 네가 봉사함을 더욱 깨닫고서, 날마다 하는 너의 고된 일을 예술의 높은 경지까지 올리라. 이로서 저희의 정신을 변화시키고 혼을 인도하여, 이 모든 선물, 신성한 영을 주신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알게 하라.”
133:4.9 (1475.2) 예수는 어느 중국 상인(商人)과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별 인사를 하면서, 예수는 훈계하였다: “오직 하나님을 예배할지니, 그는 참된 영 조상이라. 아버지의 영이 네 안에 늘 살고, 언제나 네 혼의 방향을 하늘 쪽으로 가리킴을 기억하라. 의식하지 않아도 네가 이 불멸하는 영의 인도하심을 따르면, 하나님을 발견하는 높은 길을 네가 계속 가는 것이 분명하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다다르는 것은 그를 찾으려 함으로 네가 점점 더 그를 닮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자 장씨여, 잘 가거라. 하지만 오직 잠시 동안이니, 영혼의 아버지가 파라다이스를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즐거운 정거장을 많이 마련해 놓은 빛의 세계들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것임이라.”
133:4.10 (1475.3) 브리튼에서 온 나그네에게 말했다: “형제여, 내가 보아하니, 너는 진리를 찾고 있고, 모든 진리의 아버지 영이 어쩌면 네 안에 거할지 모른다고 나는 제시하노라. 자기 혼 안에 계신 영과 이야기하려고 너는 언제라도 진지하게 애썼느냐? 그러한 일은 정말로 어렵고, 성공했다고 의식하는 일이 드무니라. 모든 그러한 멋진 인간 체험의 대다수가 하나님을 아는 그러한 필사자의 혼 속에, 상의식(上意識)에 기록되어 오래 남아 있어야 하느니라, 그렇다 하여도 물질 정신이 그에게 깃드는 영과 교통하려는 정직한 시도는 모두 분명히 성공하느니라.”
133:4.11 (1475.4) 집을 뛰쳐나온 소년에게 예수는 일렀다: “하나님과 바로 너―이 두 가지로부터 네가 달아날 수 없는 것을 기억하여라. 어디로 가든지, 너는 네 몸, 그리고 네 마음 속에서 사는 하늘 아버지의 영, 이 둘을 가지고 가느니라. 아이야, 자신을 속이는 일을 그만두어라. 정착하고서 인생의 사실을 직면하는 용감한 습관을 가져라. 내가 가르친 대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분명히 영생한다는 확신을 굳게 가지라. 오늘부터 계속, 진정한 대장부, 용감하고 총명하게 인생을 직면하려고 각오한 대장부가 될 뜻을 가지라.”
133:4.12 (1475.5) 그는 선고받은 죄수에게 마지막 시간에 말했다: “형제여, 너는 불운을 당하였구나. 길을 잃어버렸고 범죄의 그물 속에 걸려들었구나. 너와 말한 것으로 보아, 계획하고서 현세의 목숨을 바야흐로 잃게 만들 일을 하지 않은 줄 내가 잘 아노라. 그러나 너는 이 해악을 저질렀고, 동료들은 네가 죄 있다, 죽어야 한다고 판결하였구나. 너나 나나 국가가 선택하는 방법에 따라서, 국가가 자체를 방어할 이 권리를 부인해서는 안 되느니라. 네 잘못에 대한 벌을 인간적으로 피할 길이 전혀 없는 듯하구나. 동료들은 네가 저지른 죄에 따라서 너를 판단해야 하지만, 용서를 얻으려고 상소를 드려도 좋은 재판관이 있으니, 그는 너의 진정한 동기와 더 좋은 의도에 따라서 너를 판단하리라. 네가 진지하게 뉘우치고 성실하게 믿으면, 너는 하나님의 심판받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느니라. 너의 실수에 사람이 부과한 사형(死刑)의 벌이 따른다는 사실은, 하늘 법정 앞에서 네 혼이 응보를 받고 자비를 얻을 기회를 줄이지 않느니라.”
133:4.13 (1476.1) 예수는 큰 무리의 갈급한 사람들과 친밀한 이야기를 많이 가졌고, 이 기록에서 자리를 할애하기에는 너무나 많다. 세 나그네는 고린도에서 체류한 동안 즐겁게 지냈다. 교육 중심으로서 더 이름난 아테네를 제쳐놓고, 고린도는 이 로마 시대에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이 번성하는 상업 중심에서 두 달 동안 머무른 것은 세 사람 모두에게 값진 체험을 많이 얻을 기회를 주었다. 이 도시에서 묵은 것은 로마에서부터 돌아가는 길에 가장 흥미 있는 체류 중의 하나였다.
133:4.14 (1476.2) 고노드는 고린도에서 많은 사업이 있었지만, 마침내 사업을 마쳤고 아테네를 향하여 출범하려고 준비했다. 작은 배를 타고 여행했는데, 그 배는 고린도의 한 항구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항구로, 육지에 있는 길을 따라서 땅 위로 운반할 수 있었다.
133:5.1 (1476.3) 그들은 그리스의 과학과 배움의 옛 중심에 곧 다다랐고, 가니드는 아테네에, 그리스에 와 있다는 생각으로 기쁨에 떨었다. 그리스는 한때 알렉산더 제국의 문화 중심이었고 그 제국의 경계는 자기 나라 인도에까지도 뻗었다. 거래할 일이 거의 없어서 고노드는 대부분의 시간을 예수와 가니드와 함께 보냈고, 흥미 있는 여러 장소를 찾아보고 젊은이와 다능한 선생의 흥미 있는 토론에 귀를 기울였다.
133:5.2 (1476.4) 한 큰 대학이 아직도 아테네에서 번성하였고, 세 사람은 아테네에 있는 배움의 학당을 자주 방문했다. 알렉산드리아의 박물관에서 열렸던 여러 강의에 참석했을 때, 예수와 가니드는 플라톤의 가르침을 샅샅이 토론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의 예술을 즐겼고 그 예술의 표본을 아직도 여기저기 도시 근방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133:5.3 (1476.5) 아버지와 아들 모두가 어느 날 저녁에 여인숙에서 예수가 어느 그리스 철학자와 과학에 대하여 토론하는 것을 즐겁게 들었다. 이 학자가 거의 세 시간 동안 이야기한 뒤에, 강연을 마쳤을 때, 예수는 현대의 생각으로 보면, 이렇게 말했다:
133:5.4 (1476.6) 과학자는 언젠가 인력ㆍ빛ㆍ전기(電氣)가 에너지나 물력으로 명시되는 것을 측량할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이 과학자들은 결코 (과학적으로) 이 우주 현상이 무엇인가 말할 수 없다. 과학은 물리적 에너지 활동을 다루고, 종교는 영원한 가치를 다룬다. 참된 철학은 지혜로부터 생기며, 지혜는 이 양적ㆍ질적 관찰 결과를 서로 관련 지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순전히 자연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영적으로 눈이 먼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수학적 자만과 자기 중심의 통계만 믿는 병에 걸릴 위험이 언제나 존재한다.
133:5.5 (1476.7) 논리는 물질 세계에서 효력이 있고 수학은 물리적 사물에 국한되었을 때 믿을 만하다. 하지만 생활 문제에 적용되었을 때, 논리나 수학 중에 어느 것도 완전히 믿을 만하거나 절대로 확실하다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생명은 온전히 물질이 아닌 현상을 포함한다. 한 사람이 10분에 양 한 마리의 털을 깎는다면, 수학은 10 사람이 그 양털을 1분에 깎을 수 있다고 한다. 수학적으로 맞지만 참말이 아니니, 왜냐하면 10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로 아주 몹시 방해가 되어서 일은 크게 지연될 것이다.
133:5.6 (1477.1) 한 사람이 지적ㆍ도덕적 가치의 어떤 한 단위를 나타낸다면, 10 사람이 이 가치의 10배를 나타낼 것이라 수학은 주장한다. 그러나 인격자를 다룰 때, 그러한 인격의 결합은 단순한 산술 합계이기보다 등식(等式)에서 관련된 사람의 수를 제곱한 것과 같은 양이라 말하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조정되어 어느 정도 서로 조화된 인간들의 사회 집단은 그 부분들의 단순 합계보다 훨씬 더 큰 세력을 대표한다.
133:5.7 (1477.2) 수량은 하나의 사실로 확인될 수 있고 이처럼 과학적 균일성이 된다. 질(質)은 머리가 해석하는 물건이므로 가치의 어림 값을 대표하며, 따라서 개인의 체험으로 남아야 한다. 과학과 종교 모두가 독단을 줄이고 비판을 더 너그럽게 대할 때, 철학은 비로소 통일되어 우주를 지적으로 이해할 것이다.
133:5.8 (1477.3) 네가 실제로 우주의 작용을 헤아려볼 수만 있다면, 우주에는 통일성이 있다. 실재하는 우주는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 누구에게나 친절하다. 진정한 문제는, 사람의 유한한 정신이 어떻게 논리적이고 참되고 부합되는 통일된 생각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오로지 양적 사실과 질적 가치의 공통된 원인이 파라다이스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우주를 파악하는 이 정신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한 실체의 파악은 우주 현상에서 목적 있는 통일성을 보도록 시야가 넓은 통찰력을 낳으며, 인격이 점진적으로 성취하는 영적 목표까지도 드러낸다. 이것은 계속 변하는 비인격 관계와 발전하는 인격 관계로 이루어진, 생생한 우주의 변하지 않는 배경을 감지할 수 있는 통일성 개념이다.
133:5.9 (1477.4) 물질과 영(靈)과 그 사이의 상태는, 실재하는 우주가 참으로 통일되는 수준, 서로 관계되고 서로 얽혀 있는 세 수준이다. 사실과 가치가 있는 우주 현상이 얼마나 서로 갈라지는 듯 보이는가 상관 없이, 이것들은 결국 최상위 안에서 하나가 된다.
133:5.10 (1477.5) 물질로 존재하는 실체는 눈에 보이는 물질뿐 아니라 인식되지 않는 에너지에도 달라붙는다. 우주의 에너지가 필요한 운동의 정도까지 늦춰질 때, 그때 적당한 조건 밑에서 바로 이 에너지는 질량이 된다. 오직 지성이 명백한 실체들이 앞에 있음을 혼자 파악할 수 있는데, 그 자체가 또한 실체임을 잊지 말라. 이 에너지 및 질량, 지성ㆍ영으로 이루어진 이 우주의 근본 원인은 영원하다―우주의 아버지 그리고 그와 절대로 동등한 자들의 성질 및 반응 안에서 존재하고, 또 그러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133:5.11 (1477.6) 예수의 말씀에 그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도 남았다. 그리스인이 그들을 떠나면서 말했다: “민족이 우수하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고 종교 외에 무언가 이야기하는 유대인을 마침내 만나게 되었소이다.” 그들은 잠을 자려고 물러갔다.
133:5.12 (1477.7) 아테네에서 체류한 것은 즐겁고 유익했지만, 사람들과 접촉한 성과가 특별히 좋지는 않았다. 그 시절에는 허다한 아테네 사람이, 지난 시절의 명성에 관하여 지적 자만심을 가졌든지 아니면 머리가 어리석고 무지했고, 그들은 그리스에 영화(榮華)가 있고 그 민족의 지성인들이 지혜가 있던 초기 시절의 열등한 노예들의 자손이었다. 그때에도 아테네 시민 가운데 아직도 명석한 지성인이 많이 있었다.
133:6.1 (1477.8) 아테네를 떠나면서 그 나그네들은 트로아스 길로 에베소로 갔는데 여기는 로마의 아시아 지방의 서울이었다. 에베소 사람들의 이름난 아르테미스 신전(神殿)까지 여러 번 찾아갔는데, 이곳은 그 도시에서 3.2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아르테미스는 온 소 아시아에서 가장 이름난 여신이었고, 이것은 훨씬 전에 고대 아나톨리아 시절의 어머니 여신이 지속되어 내려온 것이다. 그 여신을 숭배하는 엄청난 신전에 전시된 투박한 우상은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소문이 있었다. 가니드는 일찍부터 우상을 신(神)의 상징으로 존중하는 훈련을 받았고 이것이 모두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는 소 아시아 지방에서 모시는 이 다산(多産)의 여신을 기념하는 작은 은(銀) 제단을 사는 것이 아주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그들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물건을 숭배하는 것에 관하여 길게 이야기했다.
133:6.2 (1478.1) 머무른 지 사흘이 되어 그들은 항구 입구의 바닥을 훑어내는 것을 구경하려고 강가를 내려갔다. 한낮에 어느 젊은 페니키아인과 이야기했는데, 그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많이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제쳐놓고 진급한 어떤 젊은이를 질투하였다. 예수는 위로하는 말씀을 주고 옛 히브리 속담을 인용하였다: “재능은 사람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고, 그를 위대한 사람 앞으로 데려간다.”
133:6.3 (1478.2) 이 지중해 여행에서 방문한 모든 큰 도시 중에서 그들이 이곳에서 얻은 성과는 후일에 기독교 선교사들의 일에 가장 가치가 적었다. 기독교가 에베소에서 뿌리를 내린 것은 대체로 바울의 노력을 통한 것이었다. 바울은 여기서 2년이 넘도록 거주했고, 생계를 위하여 텐트를 만들면서 티라누스의 학교 주요 강당에서 밤마다 종교와 철학에 대하여 강의하였다.
133:6.4 (1478.3) 이 지역의 철학 학교와 관련된 어느 진취적 사상가가 있었고 예수는 그와 더불어 몇 차례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이 담화를 가지는 과정에서 예수는 되풀이하여 “혼”이라는 낱말을 썼다. 이 학식 있는 그리스인은 마침내 “혼”이 무엇을 뜻하는가 물었고, 대답은 이러했다:
133:6.5 (1478.4) “혼(魂)은 사람이 자아를 비추어 보고, 진리를 헤아리고 영을 파악하는 그 부분이며, 이것은 언제까지나 인간을 동물 세계의 수준보다 높이 올려놓느니라. 자의식 그 자체는 저절로 혼이 아니라. 도덕적 자의식은 인간의 참된 자아가 실현된 것이요 인간 혼의 기초를 이루며, 혼은 인간의 체험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가치를 나타내는, 사람의 그 부분이라. 도덕적 선택과 영적 달성, 하나님을 알고 그와 같이 되려는 충동은 혼의 특징이라. 사람의 혼은 도덕적 생각과 영적 활동과 동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느니라. 침체한 혼은 죽어 가는 혼이라. 하지만 사람의 혼은 그 지성에 거하는 신다운 영과 뚜렷이 다르니라. 신다운 영(靈)은 인간 지성의 첫 도덕적 활동이 일어남과 동시에 도착하며 그때가 혼이 태어나는 기회이라.
133:6.6 (1478.5) “혼을 구하거나 잃어버리는 것은 도덕적 의식이 그와 관련된 불멸의 영 재산과 영원히 연합하여 살아남는 지위를 얻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상관이 되느니라. 구원은 도덕적 의식의 자각(自覺)이 영적으로 변화되는 것이요, 그렇게 함으로 살아남는 가치를 소유하게 되느니라. 혼이 겪는 온갖 형태의 갈등은 도덕적 또는 영적 자의식과 순전한 지적(知的) 자의식, 이 둘 사이에 조화가 모자라서 생기느니라.
133:6.7 (1478.6) “성숙하고 고상해지고 영적으로 변화되었을 때 인간의 혼은,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 물질 자아와 신다운 영 사이에 개재하는 개체에 가까워진다는 의미에서 하늘의 지위에 다가가느니라. 물질을 조사하거나 영적 증명 방법으로 인간의 진화하는 혼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혼이 어떻게 생겼는가 묘사하기 힘들고 보여주기는 더욱 어려우니라. 물질 과학은 혼이 존재하는 것을 보여줄 수 없고 순전한 영의 시험도 그럴 수 없느니라. 물질 과학과 영적 기준이 인간의 혼이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데도, 도덕 의식을 가진 필사자는 누구나 실재하고 실제로 몸소 겪는 하나의 체험, 즉 자신의 혼이 존재하는 것을 아느니라.”
133:7.1 (1479.1) 얼마 안 있어 나그네들은 키프러스를 향해 돛을 달았고, 로드에서 멈추었다. 긴 항해는 즐거웠고, 몸을 푹 쉬고 맑은 정신으로 그들은 목적지인 섬에 다다랐다.
133:7.2 (1479.2) 지중해 여행 길의 끝이 가까워지고 있으므로 이번 키프러스 방문에 정말로 쉬고 노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들은 바보스에 상륙해서 가까이 있는 산에서 몇 주 동안 머물려고 당장에 식량을 모으기 시작했다. 도착한 뒤 사흘째에 짐을 단단히 실은 짐승들과 함께 산을 향하여 떠났다.
133:7.3 (1479.3) 두 주 동안 세 사람은 무척 즐겁게 지냈는데, 그리고 나서 아무 예고 없이 젊은 가니드가 갑자기 몹시 아팠다. 두 주 동안 끓어오르는 열병을 앓았고, 때때로 헛소리를 했다. 예수와 고노드는 아픈 소년을 보살피느라고 바빴다. 예수는 능숙하고 부드럽게 소년을 돌보았다. 아버지는 아픈 젊은이를 정성으로 보살필 때마다 나타난 예수의 부드러움과 재빠름에 놀랐다. 그들은 사람이 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소년이 너무 아파서 옮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최선을 다하여 거기 산 속에서 소년이 건강을 되찾도록 보살피려고 준비하였다.
133:7.4 (1479.4) 가니드가 건강을 회복하는 3주 동안, 예수는 그에게 자연과 그 여러 변화에 대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그들이 산을 거닐면서, 소년은 묻고 예수는 대답하며, 아버지는 그 구경거리 전체를 감탄하면서, 얼마나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는지.
133:7.5 (1479.5) 산에서 머무르던 마지막 주에, 예수와 가니드는 인간 지성의 작용에 대하여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시간 동안 토론한 뒤에, 소년은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선생이여, 고등 생물보다 사람이 더 높은 형태의 자의식을 체험한다고 하시니,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나이까?” 현대의 말투를 빌려서 다시 표현하면,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133:7.6 (1479.6) 아이야, 사람의 지성과 그 안에 사는 신의 영에 관하여 이미 너에게 많이 일러 주었다. 그러나 이제 자의식이 하나의 실체임을 강조해야겠다. 어느 동물이라도 자의식을 가질 때 원시인이 된다. 그러한 달성은 비성격 에너지, 그리고 영을 파악하는 지성, 이 둘 사이의 작용을 조정함으로 생긴다. 바로 이 현상이 한 절대 초점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영을, 인간의 성격에게 내려주는 것을 정당화한다.
133:7.7 (1479.7) 관념은 그저 감각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관념은 감각에 인격 자아의 돌이켜보는 해석을 더한 것이다. 자아는 사람이 가진 감각의 합보다 더 큰 것이다. 성장하는 자아 속에는 통일에 접근하는 무엇이 비로소 생긴다. 그 하나는 절대적 하나의 일부분이 깃든 계심에서 파생되며, 동물 기원을 가진 그러한 자의식하는 지성을 영적으로 활성화시킨다.
133:7.8 (1479.8) 어떤 단순한 동물도 시간적 자의식을 소유할 수 없다. 동물은 관련된 감각 및 인식과 그 기억을 생리적으로 조정하는 능력이 있지만, 인간이 지적으로 돌이켜보고 해석하여 얻은 결론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어떤 동물도 감지한 것의 중요성을 인식(認識)하거나, 이 통합된 육체적 체험을 의도하여 연결 짓는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의식을 가지고 존재하는 이 사실은, 나중에 영적 체험의 실체와 연합하여, 사람이 우주에서 아들이 되는 잠재성을 이루며, 궁극에는 사람이 우주를 다스리는 최상의 하나에 도달한다는 것을 미리 예시한다.
133:7.9 (1480.1) 인간의 자아는 단지 연속된 의식 상태의 총합도 아니다. 의식을 분류하고 연결 짓는 기능이 효율적으로 작용하지 않으면, 하나의 자아(自我)라고 부르는 것을 정당화할 만큼 충분한 통일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통일되지 않은 그러한 머리는 인간의 지위를 가진 의식 수준에 도저히 이를 수 없다. 의식한 것들을 연결시키는 작용이 그저 우연(偶然)으로 생긴다면, 모든 사람의 지성은 정신병의 어떤 단계들이 질서 없이 닥치는 대로 연결된 것을 드러낼 것이다.
133:7.10 (1480.2) 오로지 육체적 감각의 의식으로부터 만들어진 인간 지성은, 결코 영적 수준에 이를 수 없다. 이 종류의 물질 지성은 도덕적 가치를 깨닫는 감각(感覺)이 전혀 모자라고, 사람을 영적으로 지배하는 안내 감각이 결여될 것이다. 안내하는 감각은 이 세상에서 조화된 통일된 인격을 얻는 데 필수이며, 이것은 영원 속에 인격이 살아남는 것과 따로 분리할 수 없다.
133:7.11 (1480.3) 인간의 지성은 일찍부터 물질을 초월하는 성질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참으로 돌이켜보는 인간 지능은 전적으로 시간의 한계에 묶이지는 않는다. 개인들이 일생에 이룩한 업적이 무척 다르다는 것은 서로 다른 유전(遺傳) 자질과 상이한 환경의 영향뿐 아니라, 자아가 성취한 바 아버지의 깃드는 영과 어느 정도 통일되었는가를 가리키며, 이것은 자아가 얼마나 아버지의 영과 일치되었는가를 재는 척도이다.
133:7.12 (1480.4) 인간의 지성은 두 가지에 충성하는 갈등을 잘 견디지 못한다. 선과 악, 이 두 가지를 섬기려고 애쓰는 체험은 그 혼에게 벅찬 부담이 된다. 최상으로 행복하고 효과 있게 통일된 지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데 전적으로 몸을 바친 지성이다. 해결되지 않은 갈등은 통일을 해치며, 지성의 분열로 끝날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값을 치르든 지성의 평화를 얻으려고 애쓰고, 고귀한 포부를 내던지고, 영적 이상(理想)을 타협한다고 해서 혼의 살아남는 인품이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평화는 참된 것의 승리를 꿋꿋하게 주장함으로 얻으며, 선의 강한 힘으로 악을 이겨서 이러한 승리를 달성한다.
133:7.13 (1480.5) 이튿날 그들은 살라미스를 향해서 떠났고, 거기서 시리아의 바닷가에 있는 안티옥을 향하여 출발했다.
133:8.1 (1480.6) 안티옥은 로마의 시리아 지방의 서울이었고, 제국의 총독은 여기에 거처를 두었다. 안티옥은 50만의 주민을 가졌는데, 제국에서 셋째로 큰 도시요, 사악함과 지독한 부도덕 면에서는 첫째였다. 고노드는 처리할 업무가 어지간히 있었다. 그래서 예수와 가니드는 둘이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다프니의 숲만 제외하고, 그들은 여러 나라 말을 쓰는 이 도시 근처를 모조리 찾아 다녔다. 고노드와 가니드는 악명 높은 이 치욕의 사당(祠堂)을 찾아갔지만 예수는 따라가기를 거절했다. 그러한 장면은 인도인에게 그다지 충격이 아니었지만 이상을 추구하는 히브리인에게는 불쾌하였다.
133:8.2 (1480.7) 팔레스타인에 다가가고 여행의 끝이 가까워짐에 따라서, 예수는 여행 기분에서 깨어나 회상에 젖었다. 안티옥에서는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고, 도시에서 돌아다니는 일이 드물었다. 안티옥에 관하여 선생이 어째서 별로 흥미를 나타내지 않는가 여러 번 물은 뒤에, 가니드는 예수가 마침내 입을 열게 하였다: “이 도시는 팔레스타인에서 그다지 멀지 않으니라. 아마도 나는 언젠가 여기에 돌아올 것이라.”
133:8.3 (1481.1) 가니드는 안티옥에서 무척 흥미 있는 체험을 겪었다. 이 젊은이는 자신이 영리한 생도임을 입증했고, 이미 예수의 가르침을 얼마큼 실천하기 시작했다. 안티옥에는 아버지의 사업과 관련된 어떤 인도인이 살았는데, 그는 아주 불쾌하고 불평을 많이 해서, 그를 해고하는 것이 고려되었다. 가니드가 이 말을 듣자 아버지의 사업 장소로 가서 동료 인도인과 함께 길게 의논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적당하지 않는 자리에 배치되었다고 느꼈다. 가니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관하여 일러주었고, 여러 모로 그의 종교적 시야를 넓혀 주었다. 그러나 가니드가 말한 모든 것 중에, 히브리 속담을 인용한 것이 가장 효력이 있었다. 그 지혜의 말씀은 이러했다: “네 손에 무슨 일이 맡겨지든지, 힘을 다하여 일하라.”
133:8.4 (1481.2) 낙타 카라반에 실을 짐을 준비한 뒤에 시돈으로, 그리고 거기서부터 다마스커스로 계속 내려갔고, 사흘 뒤에 모래 사막을 횡단하는 먼 길을 위하여 준비하였다.
133:9.1 (1481.3) 사막(沙漠)을 횡단하는 카라반 여행은, 여행에 이력이 난 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험이 아니었다. 선생이 낙타 스무 마리에 짐 싣는 일 돕는 것을 구경하고, 동물을 몰려고 자원하는 것을 지켜본 뒤에, 가니드는 외쳤다: “선생이여, 당신이 할 수 없는 일도 있나이까?” “부지런한 생도의 눈에는 분명히, 선생에게 훌륭한 점이 없지는 않는가 보다” 하면서, 예수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이렇게 옛 도시 우르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133:9.2 (1481.4) 예수는 우르의 초기 역사에 무척 관심이 있었고, 여기는 아브라함의 출생지였다. 그는 수사의 옛터와 전통에 똑같이 마음이 끌렸다. 너무나 마음이 끌려서, 예수에게 조사(調査)할 시간을 더 주고 또한 함께 인도로 돌아가자고 설득할 더 좋은 기회를 잡으려고, 고노드와 가니드는 이 지역에서 3주 동안 체류를 연장했다.
133:9.3 (1481.5) 가니드는 우르에서 지식ㆍ지혜ㆍ진리의 차이에 관하여 예수와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히브리인 현자의 말에 크게 반하였다: “지혜가 첫째 가는 것이라. 그러므로 지혜를 얻으라. 지식을 얻으려는 온갖 노력으로 사물을 이해하라. 지혜를 높이라, 그리하면 지혜가 너를 높이리라. 오로지 지혜를 품고자 하면 지혜가 너에게 명예를 가져오리라.”
133:9.4 (1481.6) 마침내 이별의 날이 왔다. 모두가, 특히 소년이 용감했지만, 이것은 어려운 시련이었다. 그들은 눈물을 글썽였어도 마음을 굳게 먹었다. 선생에게 작별을 알리면서 가니드는 말했다: “잘 가소서, 선생이여, 하지만 영원히 가는 것은 아니요. 다마스커스로 다시 돌아올 때, 당신을 찾아보리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틀림없이 무언가 당신과 같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나이다. 적어도 아버지에 관하여 당신이 내게 일러준 것과 당신이 무척 비슷한 줄 내가 아나이다. 나는 당신의 가르침을 기억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결코 당신을 잊지 않으리이다.” 아버지는 말했다: “위대한 선생이여, 우리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고 하나님을 알도록 도와주신 분에게 작별이오.” 예수는 대답했다. “당신에게 평화가 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축복이 늘 당신과 함께 있기를.” 작은 배가 바다로 그들을 정박한 배까지 나르는 동안 예수는 바닷가에 서서 구경했다. 이렇게 주는 인도에서 온 친구들을 카락스에서 떠나 보냈고 세상에서 다시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 이 세상에서, 그들도 나중에 나사렛 예수로 나타난 그 사람이 막 떠나 보낸 바로 이 친구―그들의 선생 요수아―인 줄 결코 알지 못했다.
133:9.5 (1481.7) 인도에서 가니드는 자라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 탁월한 아버지의 마땅한 후계자가 되었고 사랑하는 선생 예수에게서 배운 고귀한 많은 진리를 널리 퍼뜨렸다. 가니드는 십자가에서 생애를 마친, 이상한 선생이 팔레스타인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만년에 들었을 때, 이 사람의 아들이 전한 복음과 유대인 가정 교사의 가르침 사이에 비슷한 점이 있음을 깨닫기는 했어도, 이 둘이 실제로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결코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133:9.6 (1482.1) 이렇게 사람의 아들의 일생에서 요수아 선생의 사명이라고 불러도 좋은 장(章)이 끝났다.
134:0.1 (1483.1) 지중해를 여행하는 동안에 예수는 만난 사람과 거쳐 간 나라들을 신중하게 연구했고, 이 무렵에 땅에서 보낼 여생(餘生)에 관하여 마지막 결정에 이르렀다.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부모에게 태어나도록 마련한 계획을 전에 충분히 검토해보았고, 이제 마침내 승인하였다. 따라서 대중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일생의 일이 시작되는 것을 기다리려고, 의도하여 갈릴리로 돌아갔다. 아버지 요셉의 민족이 사는 땅에서 공적(公的) 생애를 살려고 비로소 계획을 세웠고, 자신의 자유 의지로 이렇게 하였다.
134:0.2 (1483.2) 예수는 몸소 겪은 인간적 체험을 통해서 온 로마 세계에서 팔레스타인이, 땅에서 생애의 마지막 장(章)을 꾸미고, 마지막 장면을 연출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임을 발견했다. 그가 태어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서, 그의 참된 성품을 숨김없이 나타내고 신다운 신분을 드러내는 계획에 처음으로 충분히 만족하게 되었다. 무력한 아기로서 인간의 체험을 시작한 바로 그 땅에서, 지상의 일생을 끝내고 필사자로 존재하는 생애를 마치기로 분명히 결심하였다. 그의 유란시아 생애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사이에서 비롯하였고 그는 일생을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사이에서 마치기로 하였다.
134:1.1 (1483.3) 카락스에서 (서기 23년 12월) 고노드와 가니드와 작별한 뒤에, 예수는 우르의 길로 바빌론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있던 어느 사막의 카라반과 합세하였다. 다마스커스에서 나사렛으로 갔고, 가버나움에서 겨우 몇 시간 멈추었으며, 그곳에서 잠시 쉬고 세베대의 가족을 찾아보았다. 거기서 동생 야고보를 만났는데 그는 얼마 전에 세베대의 배 작업장에서 예수를 대신하여 일하러 왔다. 야고보와 (또한 가버나움에 어쩌다 들린) 유다와 이야기하고 나서, 그리고 요한 세베대가 그럭저럭 샀던 작은 집을 아우 야고보한테 넘겨준 뒤에, 예수는 계속하여 나사렛으로 갔다.
134:1.2 (1483.4) 지중해 여행이 끝났을 때, 예수는 대중 봉사를 시작할 때가 거의 되기까지 드는 생활비를 치르기에 넉넉한 돈을 받았다. 그러나 가버나움의 세베대와 이 특별한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을 제쳐놓고, 세상 사람들은 그가 이렇게 여행한 것을 결코 알지 못했다. 가족은 그가 이 시간을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하면서 보냈다고 언제나 믿었다. 예수는 이 생각이 결코 옳다 하지 않았고 그러한 오해를 드러내놓고 부인하지도 않았다.
134:1.3 (1483.5) 나사렛에서 몇 주 머무르는 동안, 예수는 가족과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아우 요셉과 함께 수선소에서 얼마큼 시간을 보냈지만, 대체로 마리아와 룻에게 주의를 쏟았다. 룻은 그때 거의 열다섯 살이었고, 이때가 룻이 젊은 여인이 된 뒤에 처음으로 누이와 길게 이야기한 기회였다.
134:1.4 (1484.1) 시몬과 유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지만, 예수의 찬성이 없이 그렇게 하기 싫어했다. 따라서 이 일을 미루었고 맏형이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비록 모두가 대부분의 일에 야고보를 가장(家長)으로 여겼어도 결혼에 관한 문제에서는 예수의 축복을 바랐다. 그래서 시몬과 유다는 이 해, 서기 24년 3월초에 쌍 결혼식을 올렸다. 나이 든 아이들은 이제 다 결혼했고 오직 막내 룻이 마리아와 함께 집에 남았다.
134:1.5 (1484.2) 예수는 가족의 개별 식구들과 함께 아주 정상으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모두 함께 모였을 때 그는 너무 할 말이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끼리 그에 대하여 한마디 논평하였다. 마리아는 맏아들의 특별히 이상한 이 행동에 특히 불안해하였다.
134:1.6 (1484.3) 예수가 나사렛을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을 무렵에 그 도시를 지나치고 있던 어느 큰 카라반의 안내자가 극심하게 앓게 되었다. 예수는 언어에 능통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고 자청했다. 이 여행이 1년 동안 자리를 비우는 것을 필요하게 만들 터이고, 아우들이 모두 결혼했고 어머니가 집에서 룻과 함께 살고 있었으므로 예수는 가족 회의를 열고 그 자리에서 바로 얼마 전에 야고보에게 준 집에서 살도록 어머니와 룻이 가버나움으로 갈 것을 제안하였다. 따라서 예수가 카라반과 함께 떠난 며칠 뒤에 마리아와 룻은 가버나움으로 이사했고 거기서 그들은 예수가 마련해 준 집에서 마리아의 여생 동안 살았다. 요셉과 그 가족은 옛 나사렛 집으로 이사했다.
134:1.7 (1484.4) 이 해는 사람의 아들의 정신적 체험에서 특별한 몇 해 중에 하나였다. 인간 지성과 깃드는 조절자 사이에 기본적 조화를 이룩하는 데 큰 진전이 있었다. 조절자는 멀지 않은 앞날에 닥칠 큰 사건들을 위하여 생각을 다시 정리하고 머리를 연습시키는 일에 활발하게 들어갔다. 예수의 인격은 세계를 향한 그의 태도에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을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는 막간의 시절이었고, 사람으로 보이는 하나님으로서 일생을 시작하고 하나님으로 보이는 사람으로서 땅에서 생애를 마치려고 이제 준비하는 그 존재가 거치는 과도기였다.
134:2.1 (1484.5) 카스피 바다 지역까지 가는 카라반 여행 길에 예수가 나사렛을 떠난 것은 서기 24년 4월 1일이었다. 예수가 안내자로서 함께했던 그 카라반은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커스와 우르미아 호수의 길로, 아씨리아ㆍ메디아ㆍ파르티아를 거쳐서, 카스피 바다의 남동 지역까지 가고 있었다. 이 여행에서 돌아오는 데 만 1년이 걸렸다.
134:2.2 (1484.6) 예수에게 이 카라반 여행은 탐구하고 몸소 봉사하는 또 다른 모험이었다. 카라반 일행―승객, 보초, 낙타 운전수―와 그는 흥미 있는 체험을 겪었다. 카라반이 지나간 길을 따라서 수십 명의 어른과 아이들이 예수와 접촉한 결과로 더욱 값진 인생을 살았고, 이들에게 그는 평범한 카라반의 비범한 안내자였다. 그가 몸소 수고한 이 기회를 즐긴 사람들이 모두 이 때문에 이익을 얻지는 않았지만 그를 만나고 그와 이야기를 나눈 자들의 대다수는 자연스러운 여생에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
134:2.3 (1484.7) 모든 세계 여행 가운데 이 카스피 바다 여행은 예수를 동양에 가장 가깝게 데려갔고, 극동 민족들에 대한 이해를 높여 주었다. 그는 홍인종을 제외하고, 유란시아에 남아 있는 각 종족과 가깝게, 친히 접촉했다. 이 다양한 종족과 혼합 민족 각자에게 몸소 봉사하는 것을 그는 똑같이 기뻐했고, 이들은 모두 그가 가져온 생명의 진리를 쉽게 받아들였다. 극서로부터 온 유럽 사람과 극동에서 온 아시아 사람들은 똑같이, 희망과 영생을 전하는 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였고 그들 가운데 무척 인자하게 실천한 일생, 사랑으로 섬기고 영적 봉사를 베푸는 일생에 똑같이 영향을 받았다.
134:2.4 (1485.1) 모든 면에서 그 카라반 여행은 성공이었다. 이것은 예수의 인간 생활에서 아주 흥미 있는 사건이었는데, 그가 이 해에 경영자 자격으로서 활동했고 그에게 맡겨진 물질에 대하여, 그리고 카라반 일행을 구성하는 여행자들의 안전한 인도를 책임졌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충실하게, 능률 있게, 지혜롭게, 여러 가지 임무를 이행하였다.
134:2.5 (1485.2) 카스피 지방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예수는 우르미아 호수에서 카라반의 지휘를 그만두었고, 거기서 2주 조금 넘게 머물렀다. 나중에 어느 카라반과 함께 승객으로서 다마스커스로 돌아갔는데, 거기서 낙타의 주인들은 그에게 남아서 수고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제안을 물리치고 그 카라반 행렬과 함께 가버나움까지 줄곧 여행했고, 서기 25년 4월 1일에 도착했다. 그는 이제 더 나사렛을 집으로 여기지 않았다. 가버나움이 예수와 야고보ㆍ마리아ㆍ룻의 집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결코 다시 가족과 함께 살지 않았다. 가버나움에 있을 때 그는 세베대의 집에 거처를 정하였다.
134:3.1 (1485.3) 카스피해로 가는 길에, 예수는 우르미아 호수의 서쪽 물가에 있는 옛 페르시아 도시 우르미아에서, 쉬고 기운을 되찾으려고 며칠 동안 멈추었다. 우르미아 가까이 호숫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여러 섬 중에서 가장 큰 섬에는 큰 건물―강의용 원형 극장―이 자리잡았고 이것은 “종교의 정신”에 바쳐진 것이었다. 이 건물은 정말로 종교 철학의 전당(殿堂)이었다.
134:3.2 (1485.4) 우르미아의 시민인 어느 부유한 상인과 세 아들이 이 종교의 전당을 세웠다. 이 사람은 심보이톤이었고 그 선조들 가운데는 많은 다른 민족이 있었다.
134:3.3 (1485.5) 이 종교 학교에서 강의와 토론은 주중에 아침마다 10시에 시작되었다. 오후 수업 시간은 3시에 시작했고 저녁 토론은 8시에 열렸다. 심보이톤이나 세 아들 중의 하나가 이 강의ㆍ논의ㆍ토론 시간에 언제나 사회(司會)를 보았다. 이 독특한 종교 학교의 창시자는 자신의 종교 관념을 밝히지 않고서 살다가 죽었다.
134:3.4 (1485.6) 여러 기회에 예수는 이 토론에 참가했다. 심보이톤은 그가 우르미아를 떠나기 전에, 예수가 돌아오는 여행 길에 그들과 함께 2주 동안 머무르고, “사람이 형제”인 것에 대하여 스물네 번 강의하고, 특히 그 강의에 대하여,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람이 형제인 것에 대하여 질문하고 토론하고 논쟁하는 저녁 시간을 열두 차례 진행하도록 주선했다.
134:3.5 (1485.7) 이러한 주선에 따라서, 예수는 돌아오는 여행 길에 멈추어서 이 여러 강연을 베풀었다. 이것은 유란시아에서 주의 모든 가르침 가운데 가장 체계 있고 공식적인 것이었다. 사람이 형제인 것에 관한 이 강의와 토론에 담겨 있는 것만큼, 이전이나 이후에 결코 한 주제에 대하여 그렇게 많이 말씀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 여러 강연은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의 나라”에 대한 것이었다.
134:3.6 (1486.1) 이 종교 철학의 전당에서 교사진은 서른이 넘는 종교와 종파를 대표하였다. 각 종교 집단이 이 선생들을 선택하고 지원하고 전적으로 인가하였다. 이 시절에 그 교직원에 선생이 75명쯤 있었는데, 그들은 여러 오두막에서 살았으며, 각 오두막은 약 열두 사람에게 숙소를 제공하였다. 초승달이 뜰 때마다 이 집단은 제비를 뽑아서 교체되었다. 아량 없는 태도, 싸우기 좋아하는 정신, 또는 공동체의 순조로운 운영에 간섭하는 어떤 다른 경향을 보여도 그 위반하는 선생은 재빨리, 즉결로 해임되곤 하였다. 그는 예식도 없이 쫓겨났고 교대하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바로 그 자리에 임명되곤 하였다.
134:3.7 (1486.2) 이 여러 종교의 선생들은 이 생명과 다음 생명의 근본적인 것에 관하여 그들의 종교가 얼마나 비슷한가를 보여주려고 크게 노력했다. 이 교사진에 자리를 얻기 위하여 인정해야 하는 신조(信條)가 꼭 하나 있었는데, 선생은 누구나 하나님―어떤 종류의 최고의 신―을 인정하는 한 종교를 대표해야 했다. 직원 가운데 조직을 가진 어떤 종교도 대표하지 않는 독립된 선생이 다섯 명 있었고, 그러한 독립된 선생으로서 예수는 그들 앞에 나타났다.
134:3.8 (1486.3) [우리 중도자들이 우르미아에서 예수가 하신 강연의 요약을 처음에 준비했을 때, 이 가르침을 유란시아 계시에 넣는 것이 지혜로운가에 대하여 교회 세라핌과 진보 세라핌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생겼다. 20세기에 종교와 인간의 정부를 지배하는 조건은 예수 시절의 조건과 너무 달라서, 우르미아에서 주가 강연한 것을, 이 여러 세상 직무가 20세기에 존재하는 대로,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의 나라 문제들에 적응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이 행성 정부를 담당하는 두 세라핌 집단이 만족하기까지 우리는 결코 주의 가르침에 대한 진술문을 작성할 수 없었다. 마침내, 유란시아에서 20세기 종교 및 정치 조건에 맞게 적응한 주의 우르미아 가르침에 대하여 우리의 견해를 준비하라고 계시 위원회의 멜기세덱 의장이 우리 가운데 세 명으로 된 위원회를 임명했다. 따라서 우리 2차 중도자(中道者) 세 명은 예수의 가르침을 그렇게 조정하는 일을 마쳤고, 오늘날의 세계 조건에 우리가 적용하고 싶은 대로 그가 발표한 말씀을 다시 진술하고, 계시 위원회의 멜기세덱 의장이 편집한 뒤에 그대로 이제 이 진술문을 발표한다.]
134:4.1 (1486.4) 사람이 형제인 것은 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에 기초를 둔다. 하나님의 가족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유래한다―하나님은 사랑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신답게 자녀들 모두를 사랑한다.
134:4.2 (1486.5) 하늘나라, 곧 신의 정부(政府)는 신이 통치권을 가진 사실에 기초를 둔다―하나님은 영이다. 하나님이 영이니까 이 나라는 영적인 나라이다. 하늘나라는 물질이 아니요 단지 지적인 것도 아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영적 관계이다.
134:4.3 (1486.6) 다른 종교들이 아버지 하나님이 영적 통치권을 가졌음을 인정하면 모든 그러한 종교는 평화롭게 남아 있을 것이다. 한 종교가 자체가 어떤 면에서 모든 다른 종교보다 우수하다, 그리고 다른 종교들을 다스릴 독점 권한을 소유한다고 가정할 때에야 그러한 종교는 주제넘게 다른 종교들에게 관용을 보이지 않거나, 감히 다른 종교의 신자들을 박해할 것이다.
134:4.4 (1487.1) 모든 종교가 기꺼이 모든 교회 권한을 온전히 벗어버리고, 그들이 영적 통치권을 가졌다는 모든 개념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한, 종교적 평화―형제 정신―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 홀로 영 군주이다.
134:4.5 (1487.2) 모든 종교가 모든 종교적 통치권을 어떤 초인간 수준에, 바로 하나님에게 넘겨 주는 데 찬성하지 않는 한, 종교 전쟁을 치르지 않고서 종교들 사이에 평등을 (종교적 자유를) 얻을 수 없다.
134:4.6 (1487.3)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하늘나라는 (반드시 획일성이 아니라) 종교의 화합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한 종교적 신자들로 이루어진 모든 종교 집단이, 어떤 개념의 교회 권한―종교적 통치권―에도 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34:4.7 (1487.4) 하나님은 영이요 하나님은 그의 영 자아의 분신(分身)을 사람의 마음 속에 거주하라고 주신다. 영적으로, 만민은 평등하다. 하늘나라에는 카스트와 계급, 사회 계층과 경제 집단이 전혀 없다. 너희는 모두 형제이다.
134:4.8 (1487.5)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영 통치권을 너희가 간과하는 순간에, 어느 한 종교가 그것이 다른 종교들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할 것이다. 다음에 땅에서 평화와 사람들 사이에 선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의견 차이와 반박, 아니 종교 전쟁까지도, 적어도 신자들 사이에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134:4.9 (1487.6) 자신들이 동등하다고 여기는 자유 의지 존재들은, 어떤 초월 통치권, 그들 위에 있는 어떤 권한의 지배를 받는다고 서로 인정하지 않는 한, 머지 않아 다른 개인과 집단을 다스릴 권력과 권한을 얻으려고 자기 능력을 시험해볼 유혹을 받는다. 위에서 지배하는 초월 통치권의 어떤 영향력을 서로 인정할 경우를 제외하고, 평등 개념은 결코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134:4.10 (1487.7) 우르미아 종교가들은 비교적 평화롭고 조용한 가운데 함께 살았는데, 어떤 개념의 종교적 통치권도 완전히 포기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모두가 군주인 하나님을 믿었다. 사회적으로, 충분하고 도전할 수 없는 권한은 주관하는 우두머리―심보이톤―에게 있었다. 어떤 선생이 동료 선생들에게 주인 행세를 하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들은 잘 알았다. 각 종교 집단이 신의 총애를 받는다, 선택받은 민족이다, 종교적 통치권을 가졌다는 개념을 모두 아낌없이 던져 버리기까지, 유란시아에서 오래 가는 종교적 평화는 전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아버지 하나님이 가장 높을 때,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형제가 되고, 땅에서 종교적 평화를 누리면서 함께 살 것이다.
134:5.1 (1487.8) [하나님이 통치권을 가졌다는 주의 가르침이 진리이지만―세계 종교들 사이에서 주에 관한 종교가 나중에 나타남으로 단지 까다롭게 되었을 뿐이다―정치적 통치권에 관하여 그가 발표한 말씀은 지난 1천9백여 년 동안에 국가 생활의 정치적 진화로 인하여 대단히 복잡해졌다. 예수의 시절에 세계적 강대국이 오로지 둘―서양에 로마 제국과 동양에 한(漢) 제국―이 있었다. 이 나라들은 파르티아 왕국, 그리고 중간에 카스피와 투르키스탄 지역의 다른 국가들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발표에서 정치적 통치권에 관하여 우르미아에서 주가 가르친 내용으로부터 더욱 널리 벗어나며, 동시에 그러한 가르침이 그리스도 이후 20세기에 정치적 통치권이 어떻게 진화할지 모르는 특히 위급한 단계에 적용되는 대로, 그러한 가르침의 취지를 그리려고 시도한다.]
134:5.2 (1487.9) 국가가 무제한 통치권을 가졌다는 허망한 개념에 국가들이 집착하는 한, 유란시아에서 전쟁은 결코 그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사는 세계에는 오직 두 수준의 상대적 통치권이 있으니, 즉 개별 필사자의 영적 자유 의지, 그리고 인류 전체의 집합 통치권이다. 개별 인간 수준과 인류 전체 수준 사이에 있는 어떤 집합과 연합도 상대적ㆍ일시적이며, 개인과 행성의 대합계―사람과 온 인류―의 행복ㆍ복지ㆍ진보의 질을 높이는 한, 가치가 있다.
134:5.3 (1488.1) 종교 선생들은 하나님의 영적 통치권이, 사이에 개재하는 중간 단계의 모든 영적 충성 행위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언젠가 국가 통치자들은 최고자들이 사람의 나라에서 다스린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134:5.4 (1488.2) 사람의 나라에서 최고자들의 이러한 통치는 특별 혜택을 받는 어느 필사자 집단의 특별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선택된 민족”과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최고자, 즉 위에서 정치적 진화를 다스리는 자들의 통치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최다수에게, 최장(最長) 기간에, 최대의 이익을 도모하도록 고안된 통치이다.
134:5.5 (1488.3) 통치권은 권력이요, 권력은 조직함으로 자란다. 정치 권력을 가진 조직이 이렇게 성장하는 것은 좋고 적당하며, 그런 조직이 인류 전체의 늘 확대되는 부분들을 포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정치 조직들의 성장은 정치 권력의 자연스러운 초기 조직―가족―그리고 정치적 성장의 마지막 성취―온 인류의 정부, 온 인류가 다스리고 온 인류를 위한 정부―사이의 어떤 단계에도 문제를 만들어낸다.
134:5.6 (1488.4) 가족 집단에 있는 부모의 권력을 비롯하여, 가족들이 합쳐 같은 피를 가진 씨족을 이룸에 따라서, 정치적 통치권은 조직함으로 발달하며, 이 씨족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부족 단위로―핏줄을 뛰어넘은 정치 집단으로―뭉치게 된다. 다음에 무역ㆍ상업ㆍ정복을 통해서 부족들은 한 나라로서 연합되며, 한편 때때로 제국이 여러 나라를 통일한다.
134:5.7 (1488.5) 작은 집단에서 더 큰 집단으로 통치권이 넘어감에 따라서, 전쟁이 줄어든다. 다시 말해서, 작은 나라들 사이에 사소한 전쟁이 줄어든다. 그러나 통치권을 행사하는 나라들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 큰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진다. 당장에, 온 세계를 탐험하고 차지했을 때, 나라들의 수가 적고 힘세고 강력할 때, 통치권을 가졌다고 생각되는 이 큰 나라들이 경계선에서 닿게 될 때, 오직 대양(大洋)이 나라들을 분리할 때, 무대는 대전, 세계 전쟁을 위하여 준비될 것이다. 싸움을 일으키고 궁극에 전쟁하지 않고는 이른바 통치권을 가진 나라들이 교제할 수 없다.
134:5.8 (1488.6) 가족으로부터 인류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통치권의 진화에서 생기는 어려움은 사이에 개재하는 모든 수준에서 나타나는 타성이자 저항에 있다. 때때로 가족들은 씨족에 항거했고, 한편 씨족과 부족들은 가끔 그 영토를 가진 국가의 통치권을 뒤엎으려 하였다. 정치 조직에서 이전에 개발된 “임시 발판 단계”는 정치적 통치권에서 새롭고 전진하는 진화를 하나하나 저지하고 방해한다 (그리고 언제나 방해해 왔다). 그리고 이것이 참말이니, 일단 일으키면, 인간의 충성심은 바꾸기 힘들기 때문이다. 부족의 진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바로 그 충성심은 초월 부족―영토가 있는 국가―의 형성을 어렵게 만든다. 영토가 있는 국가의 진화를 가능하게 하는 바로 그 충성심(애국심)은 온 인류의 정부가 진화로 생성되는 것을 엄청나게 까다롭게 만든다.
134:5.9 (1488.7) 처음에 가족 안에서 개인이, 다음에 부족 및 더 큰 집합과 가지는 관계에서 가족과 씨족들이, 자결주의를 포기함으로 정치적 통치권이 생긴다. 작은 데서부터 항상 더 큰 정치 조직으로 자결(自決)을 이렇게 점진적으로 이양하는 것은 명(明) 나라와 모굴 왕조가 세워진 뒤로, 동양에서 대체로 줄어들지 않고 진행되어 왔다. 서양에서 이것은 1천 년이 넘도록, 바로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진행되었고, 이때 유럽에서 수많은 작은 집단이 사라졌던 정치적 통치권을 다시 확립함으로 유감스러운 역행(逆行) 운동이 이 정상 경향을 일시 거꾸로 돌이켰다.
134:5.10 (1489.1) 이른바 통치권을 가진 국가들이 그 통치권을 사람의 형제 단체―즉 인류의 정부―의 손에 총명하게 완전히 내어주기까지, 유란시아는 오래 가는 평화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 국제주의―국제 연맹―은 결코 인류에게 영구한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나라들의 세계적 연방들이 작은 전쟁을 효과적으로 막고 작은 나라들을 만족스럽게 통제할 것이다. 그러나 그 연방들은 세계 전쟁을 방지하거나, 가장 강력한 정부 셋이나 넷, 다섯을 통제하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충돌이 일어날 때, 이 강대국들 가운데 하나가 그 연맹에서 탈퇴하고 전쟁을 선포할 것이다. 국가가 통치권을 가졌다는 망상(妄想) 바이러스에 전염되어 있는 한, 나라들이 전쟁터에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국제주의는 올바른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디딘 것이다. 국제 경찰단은 많은 작은 전쟁을 방지하겠지만, 대전쟁, 땅에서 큰 군사 정부들 사이에 생기는 충돌을 방지하는 데 효력이 없을 것이다.
134:5.11 (1489.2) 참으로 통치권을 가진 국가(강대국)의 수가 줄어드는 데 따라서, 인류 정부의 기회와 필요가 늘어난다. 정말로 통치권을 가진 (큰) 강국들이 겨우 몇 있을 때, 민족(제국)의 우위를 얻으려고 생사를 건 싸움을 시작하든지, 아니면 통치하는 어떤 특권을 자진해서 포기함으로, 온 인류를 다스리는 참된 통치권의 시작으로서 쓰일 핵심, 국가를 초월하는 권력의 필수 핵심을 창조해야 한다.
134:5.12 (1489.3) 이른바 통치권을 가진 모든 국가가 전쟁을 수행하는 권한을 온 인류의 대표 정부에게 양보할 때까지, 평화는 유란시아에 오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통치권은 세계의 여러 민족이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것이다. 유란시아의 모든 민족이 한 세계 정부를 창조할 때, 그들은 그러한 정부를 통치자로 만들 권한과 힘이 있다. 그러한 대표적 또는 민주적 세계 권력이 지구에서 세계의 육군ㆍ해군ㆍ공군을 통제할 때, 땅에 평화가 있고 사람들 사이에서 선의가 지배할 것이다―그러나 그때까지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134:5.13 (1489.4) 19세기와 20세기의 중요한 예를 들자: 아메리카 연방의 48주는 오랫동안 평화를 누려왔다. 자기들끼리 이제 더 전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통치권을 연방 정부에게 넘겨주었고 투쟁의 판결을 통해서, 자결의 망상에 대한 주장을 모두 버렸다. 각 주가 그 내부 사무를 규제하지만, 외교 관계, 관세, 이민, 군사(軍事) 또는 주 사이의 상업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개별 주(州)도 시민권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 48주는 오직 연방 정부의 통치권이 어떤 면에서 위협을 받을 때에야 전쟁의 상처를 입는다.
134:5.14 (1489.5) 이 48주는 통치권과 자결(自決), 이 두 가지 궤변을 버렸고, 주 사이에 평화와 평안을 누린다. 마찬가지로 유란시아의 나라들은 각자의 통치권을 세계 정부의 손에―즉 사람의 형제 단체의 통치권에―자유롭게 양보할 때 비로소 평화를 누릴 것이다. 인구가 많은 뉴욕주나 큰 텍사스주와 똑같이, 작은 로드 아이랜드주가 미국 국회에 상원(上院) 의원 두 명을 가진 것처럼, 이 세계 국가에서 작은 나라들은 큰 나라만큼 강력해질 것이다.
134:5.15 (1490.1) 이 48주(州)의 제한된 (주) 통치권은 사람들이, 사람들을 위하여 만들었다. 아메리카 연방이 가진, 주를 초월하는 (국가) 통치권은 이 여러 주 가운데 최초의 13주가 자체의 이익을 위하여,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창조하였다. 언젠가 행성의 인류 정부의 초국가 통치권을 여러 나라가 비슷하게, 자체의 이익을 위하여,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창조할 것이다.
134:5.16 (1490.2) 시민들은 정부의 이익을 위하여 태어나지 않는다. 정부는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창조되고 고안되는 조직이다. 온 인류에게 통치권을 주는 정부가 나타나지 못하면, 정치적 통치권의 진화에 끝이 있을 수 없다. 모든 다른 통치권은 상대적 가치가 있고, 중간 단계의 의미가 있으며, 하등 지위를 가진다.
134:5.17 (1490.3) 과학의 진보와 함께, 거의 종족 자살이 될 때까지 전쟁은 갈수록 더 세상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사람들이 인류의 정부를 기꺼이 세우고, 영구한 평화의 복을 비로소 누리고, 사람들 사이에 선의―세계적 선의―로 얻은 평안 속에서 번성하기까지, 몇 차례나 세계 전쟁을 치러야 하고, 얼마나 많은 국가 연맹이 실패해야 하는가?
134:6.1 (1490.4) 한 사람이 자유―해방―을 몹시 바라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자유를 동경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자유를 사랑하는 그러한 필사자 집단은 각 사람에게 같은 정도의 자유를 주고, 동시에 모든 동료 인간에게 똑같은 정도의 자유를 보호할 그러한 법ㆍ규칙ㆍ규제에 복종하지 않고는 평화롭게 함께 살 수 없다. 한 사람이 절대로 자유롭게 되려면 또 한 사람이 절대로 노예가 되어야 한다. 자유는 사회ㆍ경제ㆍ정치 면에서 상대적 성질을 가진 것이 참말이다. 자유는 법을 집행함으로 가능하게 된 문명의 선물이다.
134:6.2 (1490.5) 종교는 사람이 형제임을 깨닫는 것을 영적으로 가능하게 하지만, 인류의 정부로 하여금 인간의 행복 및 효율성과 같은 목표와 관련하여 사회ㆍ경제ㆍ정치 문제를 단속하기를 요구할 것이다.
134:6.3 (1490.6) 세계의 정치적 통치권을 한 집단의 민족 국가들이 나누어 가지고 부당하게 차지하는 한, 전쟁이 있고, 전쟁의 소문이 있을 것이다―나라와 나라가 대항하여 일어날 것이다. 잉글랜드ㆍ스콧트랜드ㆍ웨일즈는 각자의 통치권을 버리고 연합 왕국에 맡겨둘 때까지 언제나 서로 싸우고 있었다.
134:6.4 (1490.7) 또 하나의 세계 전쟁은 이른바 통치권을 가진 국가들에게 어떤 종류의 연방을 형성하고, 이처럼 작은 전쟁, 작은 나라들 사이에 전쟁을 막는 장치를 창조하는 것을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정부가 창조되기까지 세계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세계적 통치권이 세계 전쟁을 막을 것이다―그 외에 아무것도 그렇게 할 수 없다.
134:6.5 (1490.8) 아메리카의 자유로운 48주는 평화로이 함께 산다. 늘 전쟁하는 유럽 국가들에서 사는 여러 국민과 종족 모두가 이 48주의 시민들 사이에 끼어 있다. 이 미국 사람들은 넓은 전 세계에서 거의 모든 종교ㆍ교파ㆍ종파들을 대표하며 그래도 여기 북 아메리카에서 평화로이 함께 산다. 이 48주가 통치권을 포기하고, 자결 권리라고 생각된 모든 개념을 버렸기 때문에 이 모두가 가능하게 되었다.
134:6.6 (1490.9) 무장이나 비무장의 문제가 아니다. 징병 또는 자원 군대 복무를 채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이 문제와 상관이 없다. 모든 형태의 기계적 현대 무기와 모든 종류의 폭발물을 강대국으로부터 빼앗는다면 국가의 통치권이 신(神)이 준 권리라는 망상에 달라붙는 한, 주먹과 돌과 곤봉을 가지고 싸울 것이다.
134:6.7 (1491.1) 전쟁은 크고 끔직한, 인간의 병이 아니다. 전쟁은 증상이요 결과이다. 진짜 병은 국가의 통치권이라는 바이러스이다.
134:6.8 (1491.2) 유란시아 국가들은 진정한 통치권을 소유한 적이 없다. 결코 세계 전쟁의 참화와 황폐를 겪지 않도록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통치권을 가진 적이 없다. 인류의 세계 정부를 창조하는 것은 국가들이 통치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고 진정하고 오래 가는 세계 통치권을 실제로 창조하는 것이며, 그때부터 그들을 온갖 전쟁으로부터 충분히 보호할 수 있다. 지역 사무는 지역 정부가, 나라의 사무는 국가 정부가, 국제 사무는 세계 정부가 관리할 수 있다.
134:6.9 (1491.3) 세계의 평화는 조약, 외교, 대외 정책, 연합군, 힘의 균형으로 또는 민족주의를 부르짖는 독립 국가들을 어떤 다른 종류의 임시 손재주로 조종하여 유지될 수 없다. 세계 법이 생기고 이를 세계 정부가―온 인류의 통치권이―집행해야 한다.
134:6.10 (1491.4) 세계 정부 밑에서 개인은 훨씬 더 많은 자유를 누릴 것이다. 오늘날 강대국 시민들은 거의 강제로 세금을 물고 규제와 통제를 받는다. 국가의 정부들이 국제 사무에 관한 그들의 통치권을 기꺼이 세계 정부의 손에 넘길 때, 현재 이처럼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는 일이 많이 사라질 것이다.
134:6.11 (1491.5) 세계 정부 밑에서 국가 집단들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부르짖는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고 누릴 진정한 기회를 얻을 것이다. 자결의 허위는 그칠 것이다. 돈과 무역의 세계적 규제와 더불어 새로운 세계적 평화 시대가 다가올 것이다. 곧 세계적 언어가 진화될지 모르고, 적어도 언젠가 세계적 종교를―아니면 세계적 관점을 가진 종교들을―가질 희망이 얼마큼 생길 것이다.
134:6.12 (1491.6) 집단의 안전은 그 집단이 온 인류를 포함할 때까지, 결코 평화를 가져올 수 없을 것이다.
134:6.13 (1491.7) 대표로 다스리는 인류 정부의 정치적 통치권은 땅에서 오래 가는 평화를 가져 오고, 사람의 영적 형제 정신은 언제까지나 모든 사람 사이에 선의를 보장할 것이다. 땅에서 평화,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선의를 실현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하나도 없다.
134:6.15 (1491.8) 심보이톤이 죽은 뒤에, 그 아들들은 평화로운 교사진을 유지하는 데 큰 어려움에 부닥쳤다. 우르미아 교사진에 들어간 후일의 기독교 선생들이 더 지혜를 보이고 더 관대했더라면, 예수의 가르침의 영향은 훨씬 더 컸을 것이다.
134:6.16 (1491.9) 심보이톤의 맏아들은 필라델피아에 있던 아브너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브너가 선택한 선생들은 무척 유감스럽게도 완고하고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 선생들은 그들의 종교가 다른 신앙을 지배하게 만들려고 애썼다. 그들은 바로 예수가, 자주 입에 오르내리던 카라반 안내자의 강연을 하셨다는 것을 결코 짐작하지 못했다.
134:6.17 (1491.10) 교사진에서 혼란이 커지자 세 형제는 재정 지원을 그만두었고, 5년 뒤에 학교는 문을 닫았다. 나중에 그 학교는 미트라 신전으로서 다시 열렸고, 결국에는 그들의 질탕한 한 잔치와 연관하여 불에 타버렸다.
134:7.1 (1492.1) 카스피 바다로 가는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예수는 그의 세계 여행이 거의 끝났음을 알았다. 팔레스타인 바깥으로 겨우 한 번 더 여행했는데, 시리아 여행이었다. 가버나움에 잠깐 들린 뒤에 나사렛으로 갔고, 방문하려고 며칠 동안 멈추었다. 4월 중순에 나사렛을 떠나서 티레를 향하였다. 거기서부터 계속 북쪽으로 여행하고 며칠 동안 시돈에서 묵었지만 목적지는 안티옥이었다.
134:7.2 (1492.2) 이 해는 예수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통하여 혼자서 돌아다니던 해였다. 여행하던 이 해 내내, 그 나라의 다른 지역에서, 나사렛 목수, 가버나움의 조선공, 다마스커스 서기관, 알렉산드리아의 선생, 그는 이렇게 여러 이름으로 알려졌다.
134:7.3 (1492.3) 안티옥에서 사람의 아들은 일하고, 관찰하고, 공부하고, 방문하고, 봉사하면서 두 달이 넘도록 살았다. 그동안 계속, 사람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인간으로 존재하는 환경에 반응하는가 배웠다. 이 기간의 3주 동안, 그는 텐트 만드는 사람으로서 일했다. 이 여행에서 방문한 어느 다른 곳보다, 그는 안티옥에서 더 오래 남아 있었다. 10년 뒤에, 사도 바울이 안티옥에서 전도하면서, 추종자들이 다마스커스 서기관의 교훈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의 제자들이 바로 주의 목소리를 듣고 그 가르침을 귀담아들었음을 조금도 몰랐다.
134:7.4 (1492.4) 안티옥에서부터 예수는 남쪽으로 바닷가를 따라서 케자리아로 갔고 거기서 몇 주 동안 묵었으며, 계속해서 바닷가를 따라 요파로 내려갔다. 요파로부터 내륙으로 잠니아ㆍ아쉬돗ㆍ가자까지 여행하였다. 가자로부터 내륙의 길을 타고 비엘세바까지 가서, 거기서 한 주 동안 남아 있었다.
134:7.5 (1492.5) 그리고 나서 남모르게 혼자서 예수는 마지막 여행을 떠났고, 팔레스타인의 심장부를 거쳐서 남쪽에 비엘세바로부터 북쪽으로 단까지 갔다. 북쪽으로 가는 이 여행에서 헤브론, 베들레헴 (여기서 그가 태어난 곳을 보았다), 예루살렘 (베다니에 들리지 않았다), 비어롯ㆍ레보나ㆍ시카, 세켐ㆍ사마리아ㆍ게바, 엔가님ㆍ엔도르ㆍ마돈에서 멈추었다. 막달라와 가버나움을 거쳐서 북쪽으로 줄곧 여행했다. 메롬의 물 동쪽을 지나서, 가라타의 길로 단, 곧 케자리아 빌립비로 갔다.
134:7.6 (1492.6) 깃드는 생각 조절자는 이제 사람들의 거처를 버리고 헤르몬산으로 가라고 예수를 이끌었다. 여기서 인간 지성을 통달하는 일을 끝내고 땅에서 여생의 일에 충만히 헌신하는 과제를 마치려는 것이었다.
134:7.7 (1492.7) 이때는 주가 유란시아에서, 땅에서 지낸 일생에서 진기하고 특별한 기간이었다. 또 다른 아주 비슷한 기간은 세례를 받고 난 바로 뒤에, 펠라 가까이 산에서 혼자 있을 때 거친 체험이었다. 헤르몬산에서 혼자 있던 이 기간은 순전히 인간적 생애의 종결, 다시 말해서 그가 필사자로 자신을 수여하는 일이 절차상 종결되었음을 표시한다. 한편 후일에 혼자 지낸 것은 자신 수여의 더욱 신다운 단계가 시작된 것을 표시했다. 예수는 헤르몬산의 비탈에서 여섯 주 동안 하나님과 함께 혼자서 살았다.
134:8.1 (1492.8) 케자리아 빌립비 근처에서 얼마 동안 시간을 보낸 뒤에, 예수는 식량을 준비하였다. 짐 나르는 짐승과 티글라스라는 이름의 소년을 구하고 나서, 다마스커스 길을 따라서 가다가, 헤르몬산 기슭의 언덕에, 언젠가 베이트젠이라고 알려진 마을로 들어갔다. 서기 25년 8월 중순 가까이 되어 그는 여기에 본부를 정했다. 식량을 티글라스에게 맡기고 나서 외딴 산비탈을 올라갔다. 티글라스는 산을 향하여, 이 첫날에 해수면 위로 1800미터쯤에 지정된 곳까지 예수를 따라서 올라갔다. 거기서 그들은 돌 무더기 상자를 지었고 그 속에 티글라스는 한 주에 두 번, 먹을 것을 집어넣어야 했다.
134:8.2 (1493.1) 티글라스를 떠난 뒤에, 첫째 날에 예수는 산을 조금만 올라갔고 기도하려고 멈추었다. 다른 일 가운데 아버지에게 수호 세라핌을 “티글라스와 함께 있도록” 돌려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필사자로 존재하는 현실과 싸우는 마지막 투쟁까지 그가 혼자 진행하도록 허락해주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이 요청은 허락되었다. 그를 안내하고 버티게 할 깃드는 조절자만 함께 하고 그는 큰 시험에 들어갔다.
134:8.3 (1493.2) 예수는 산에 있는 동안 아껴서 먹었다. 한 번에 하루나 이틀 동안만 전혀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이 산에서 그가 만난 초인간 존재들, 정신적으로 씨름하고 능력으로 물리친 자들은 실재했다. 그들은 사타니아 체계에서 그의 큰 적이었다. 병든 정신에서 생겨난 환상(幻想)과 현실을 구별할 수 없는 필사자, 허약해지고 굶은 필사자의 지적 변덕에서 생긴 상상의 착각이 아니었다.
134:8.4 (1493.3) 예수는 8월의 마지막 3주와 9월의 첫 3주를 헤르몬산에서 보냈다. 이 몇 주 동안, 정신을 이해하고 인격을 통제하는 여러 수준에 도달하는 필사자의 과제를 마쳤다. 하늘 아버지와 교통하는 이 기간 내내, 깃드는 조절자도 또한 주어진 임무를 마쳤다. 거기서 이 지상의 사람으로서 인간의 목표를 성취했다. 오로지 정신을 조절자와 조율하는 마지막 단계를 마치는 일이 남았다.
134:8.5 (1493.4) 5주가 넘도록 파라다이스 아버지와 끊임없이 친교한 뒤에, 예수는 자신의 성품 뿐 아니라 시공에서 인격이 표현되는 물질 수준을 확실히 뛰어넘었다는 것을 절대로 확신하게 되었다. 그의 신다운 성품이 인간 성품을 지배하는 것을 충분히 믿고, 이를 서슴지 않고 주장하였다.
134:8.6 (1493.5) 산에서 체류가 끝날 때가 가까이 되어, 예수는 사람의 아들로서, 요수아 벤 요셉으로서 사타니아에 있는 적들과 회담을 가지도록 허락해주실 것을 아버지께 요청하였다. 이 요구는 허락되었다. 헤르몬산에서 마지막 주에, 큰 유혹, 즉 우주의 재판이 일어났다. (루시퍼를 대표하는) 사탄, 그리고 반역한 행성 영주 칼리가스티아가 예수와 함께 자리에 있었고 그의 눈에 완전히 보이게 나타났다. 이 “유혹,” 모반한 성격자들의 곡해를 직면하여 인간적 충성심을 재는 이 마지막 시련은 먹을 것이나 성전 뾰족탑이나 주제넘은 행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세상의 나라들이 아니라 막강하고 영화로운 우주의 통치권과 상관이 있었다. 너희의 기록에 나타나는 상징은 세상이 유치하게 생각하던 뒤떨어진 시대를 위하여 의도한 것이었다. 후일의 세대들은 헤르몬산에서 그 중대한 날에 사람의 아들이 얼마나 큰 투쟁을 겪었는가 이해해야 한다.
134:8.7 (1493.6) 루시퍼의 밀사들이 내민 여러 제안과 반대 제안에 대하여 예수는 이렇게만 대답하였다: “나의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그리고 너, 반역한 아들아,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너를 신답게 재판하기를! 나는 너의 창조자인 아버지이라. 나는 너를 도저히 공정하게 판단할 수 없고 너는 내 자비를 이미 걷어찼느니라. 나는 너를 더 큰 우주의 재판관들이 판결하도록 넘기노라.”
134:8.8 (1494.1) 루시퍼가 제시한 모든 절충안과 임시 방편에 대하여, 육신화로 자신을 수여함에 관하여 내놓은 모든 그러한 허울 좋은 제안에 대하여,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을 뿐이다, “파라다이스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벅찬 시련이 끝났을 때, 떨어져 있던 수호 세라핌이 예수의 옆으로 돌아와서 그를 보살폈다.
134:8.9 (1494.2) 늦은 여름 어느 날 오후, 나무들 사이에 고요한 자연 속에서, 네바돈의 미가엘은 그의 우주를 다스리는, 아무도 도전하지 못하는 통치권을 얻었다. 그날에 시공의 진화 세계에서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육신화된 생명을 한껏 살라고 창조 아들들에게 주어진 과제를 마쳤다. 몇 달 뒤에 세례를 받는 날까지, 이 중대한 업적은 우주에서 발표되지 않았으나 이 모두가 그날, 산에서 정말로 일어났다. 헤르몬산에서 머무르다가 예수가 내려왔을 때, 사타니아에 일어났던 루시퍼 반란과 유란시아에서 칼리가스티아가 탈퇴한 일은 실질적으로 해결되었다. 자신이 지은 우주의 통치권을 얻는 데 요구되는 마지막 대가를 예수는 치렀다. 이 통치권은 그 자체로서 모든 반역자의 지위를 규제하고 앞날의 모든 그러한 봉기를 (언제라도 일어난다면) 단숨에 효과적으로 처리해도 좋다고 확정한다. 따라서 이른바 예수의 “큰 시험”은 그가 세례받기 얼마 전에 일어났고 그 사건 바로 뒤에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34:8.10 (1494.3) 산에서 이 체류를 마쳤을 때, 산을 내려가는 동안에 예수는 먹을 것을 가지고 만날 장소로 올라오는 티글라스를 만났다. 그를 돌려보내며 예수는 다만 이렇게 말했다: “쉬는 시간이 지났느니라. 나는 아버지의 일로 돌아가야 하노라.” 단으로 돌아가는 동안 그는 말이 없었고, 많이 변화된 사람이었다. 단에서 예수는 소년을 보내고 당나귀를 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가 왔던 똑같은 길로, 남쪽으로 가버나움까지 나아갔다.
134:9.1 (1494.4) 이제는 여름의 끝이 가까웠고 속죄의 날과 초막 축제가 있을 무렵이었다. 예수는 가버나움에서 안식일 동안에 가족 회의를 열었다. 다음 날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났고, 호수의 동쪽으로 가서, 게라사를 지나서 요단강 유역으로 내려갔다. 가는 길에 동반자와 얼마큼 이야기하는 동안 요한은 예수에게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을 눈치챘다.
134:9.2 (1494.5) 예수와 요한은 베다니에서 나사로와 그 자매들과 함께 그날 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 일찍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들은 그 도시 안과 주위에서 거의 3주를 보냈다. 적어도 요한은 그랬다. 여러 날 동안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혼자 갔고, 한편 예수는 근처에 있는 언덕 위를 걸어 다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영적으로 친교하는 시간을 여러 번 가졌다.
134:9.3 (1494.6) 두 사람은 속죄의 날에 진행되는 엄숙한 예배에 참석했다. 요한은 유대인의 종교 의식 중 어느 날보다 이날의 의식(儀式)에 크게 감명을 받았지만 예수는 생각에 잠긴, 말 없는 구경꾼이었다. 사람의 아들에게 이 연출은 불쌍하고 보기에 딱했다. 모두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과 속성을 잘못 나타낸다고 보았다. 이날의 행사는 신이 재판하는 사실과 무한히 자비를 베푼다는 진리의 엉터리 시늉으로 보았다. 아버지의 사랑하는 성품과 우주에서 자비롭게 안내하심에 관하여 참된 진리를 선포하고 싶어 속이 탔지만 충실한 훈계자는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타일렀다. 그러나 그날 밤 베다니에서 예수는 수많은 논평을 하였고, 이것은 요한의 마음을 크게 뒤흔들었다. 요한은 그날 저녁에 그들이 듣는 앞에서 예수가 하신 말씀의 참 중요성을 결코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134:9.4 (1495.1) 예수는 요한과 함께 초막 축제가 있던 주간 내내 남아 있으려고 계획하였다. 이 축제는 온 팔레스타인에서 해마다 있는 휴일이었고 유대인의 휴가철이었다. 비록 예수는 그 절기의 흥겨움에 끼지 않았어도 젊은이와 늙은이들이 태평하고 기쁘게 마음껏 노는 것을 구경하는 동안 그가 기뻐하고 만족해하는 것이 분명하였다.
134:9.5 (1495.2) 축하하는 주간의 한가운데 축제 행사가 끝나기 전에, 예수는 파라다이스 아버지와 교통하기에 더 좋을 듯한 산으로 가서 쉬고 싶다고 말하고 요한을 떠났다. 요한은 함께 갔을 터이지만, 예수는 그가 축제 행사 끝까지 남아 있으라 고집하며 말했다: “네가 사람의 아들의 짐을 질 필요는 없느니라. 도시가 평화롭게 자는 동안 파수꾼만 밤새 지켜야 하느니라.”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베다니 가까이, 산에서 거의 한 주 동안 혼자 지낸 뒤에 그는 가버나움을 향하여 떠났다. 집으로 가는 길에 길보아의 비탈에서 하루 낮과 밤을 혼자 보냈다. 거기는 사울 왕이 목숨을 끊은 곳에서 가까웠다. 가버나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예루살렘에서 요한을 떠났을 때보다 더욱 명랑한 듯하였다.
134:9.6 (1495.3) 다음 날 아침 예수는 소지품이 들어 있는 상자가 있는 곳으로 갔고, 이것은 세베대의 작업장에 남아 있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일하러 나서면서 말했다.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바쁘게 일하는 것이 내게 마땅하도다.” 이듬해 1월까지, 배 작업장에서, 아우 야고보 옆에서 여러 달 동안 일했다. 예수와 함께 일하는 이 기간이 지난 뒤에, 무슨 의심이 떠올라 사람의 아들이 일생에 할 과업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든 상관 없이, 야고보는 예수의 사명에 대한 믿음을 다시는 정말로 송두리째 버리지 않았다.
134:9.7 (1495.4) 배 작업장에서 일하던 이 마지막 기간에, 예수는 몇몇 큰 배의 내부 끝손질을 하느라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손으로 하는 어떤 일에도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칭찬할 만한 작품을 마쳤을 때 인간적 성취에 만족감을 느끼는 듯하였다. 그는 비록 하찮은 일에 거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어도 어떤 주어진 과업에 필수인 것이 닥치면 공들여 일하는 노동자였다.
134:9.8 (1495.5) 시간이 지나자, 요단강에서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며 설교하는 어떤 요한이라는 사람의 소문이 가버나움에 도착했다. 요한은 이렇게 설교하였다: “하늘나라가 가까웠도다. 뉘우치고 세례를 받으라.” 예루살렘에서 가장 가까운 강 여울에서부터 요한이 요단강 유역을 거슬러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 예수는 이 여러 보고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다음 해, 서기 26년 1월에 펠라에 가까운 점까지 요한이 강을 거슬러 올라올 때까지 예수는 배 만드는 일을 계속하였고, 이때 연장을 내려놓고 외쳤다, “때가 왔도다.” 당장에 그는 세례를 받으려고 요한 앞에 나섰다.
134:9.9 (1495.6) 그러나 예수에게 큰 변화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땅에서 이리저리 다니는 동안 그가 방문하고 보살폈던 사람들 중에 거의 아무도, 대중을 가르치는 그 선생이 예전에 한 사사로운 개인으로서 알고 사랑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는 것을 후일에 알아보지 못했다. 초기에 은혜를 입은 자들이 그가 나중에 대중을 가르치는 권위 있는 선생의 역할로 나타난 그를 이렇게 알아보지 못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여러 해 동안 이 정신과 영(靈)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이것은 헤르몬산에서 그 중대한 체류 동안에 끝났다.
135:0.1 (1496.1) 세례자 요한은 가브리엘이 엘리자벳에게 그 전년 6월에 약속한 대로, 기원전 7년 3월 25일에 태어났다. 다섯 달 동안 엘리자벳은 가브리엘이 찾아온 것을 비밀로 지켰다. 엘리자벳이 남편 사가리아에게 이야기했을 때 그는 크게 불안해하였다. 요한이 태어나기 약 6주 전에 특별한 꿈을 꾼 뒤에야 아내의 이야기를 완전히 믿었다. 가브리엘이 엘리자벳을 방문한 것과 사가리아의 꿈을 제외하고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연결되어 아무런 특별하거나 초자연적 사건이 없었다.
135:0.2 (1496.2) 여드렛날에 유대인의 풍습에 따라서 요한은 할례를 받았다. 예루살렘에서 6.4킬로미터쯤 서쪽에, 그 시절에 유다 시로 알려진 작은 마을에서 날마다, 해마다 보통 아이로서 자랐다.
135:0.3 (1496.3) 요한의 어린 시절 초기에 일어난 가장 중대한 사건은 부모와 함께 예수와 나사렛 가족을 찾아본 것이었다. 이 방문은 기원전 1년 6월에 있었고 이때 그는 여섯 살이 조금 넘었다.
135:0.4 (1496.4) 나사렛에서 돌아온 뒤에 요한의 부모는 소년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기 시작했다. 이 작은 마을에는 아무런 회당 학교가 없었다. 그러나 사가리아는 사제였기 때문에 교육을 썩 잘 받았고 엘리자벳은 보통 유대 여인보다 훨씬 낫게 교육을 받았다. “아론의 딸들”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그 여자 또한 사제 집안이었다. 요한이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에게 정신적ㆍ영적 훈련을 시키는 데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사가리아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잠시만 근무했고 그래서 아들을 가르치는 데 시간을 많이 들였다.
135:0.5 (1496.5) 사가리아와 엘리자벳은 작은 농장이 있었고 거기서 양을 길렀다. 이 토지에서 도저히 생계를 이을 수 없었지만, 사가리아는 사람들이 사제들에게 바친 성전 기금으로부터 정기 수당을 받았다.
135:1.1 (1496.6) 요한은 열네 살에 졸업하는 어떤 학교에도 다니지 않았지만, 부모는 이 해가 정식으로 나지르인의 서약을 하기에 적당한 해라고 정했다. 따라서 사가리아와 엘리자벳은 아들을 아래로, 사해(死海) 옆에 있는 엥게디로 데려갔다. 여기는 나지르인 단체의 남쪽 본부였고 거기서 그 아이는 일생토록 이 계급에 정식으로 엄숙하게 가입하였다. 이 예식이 있고 나서, 그리고 어떤 취하는 음료도 삼가고, 머리를 기르고, 죽은 사람 만지기를 삼가겠다는 서약이 있은 뒤에, 그 가족은 예루살렘으로 나아갔다. 거기서 성전 앞에서 요한은 나지르인 서약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헌물 바치는 일을 마쳤다.
135:1.2 (1496.7) 요한은 뛰어난 선구자들, 곧 삼손과 선지자 사무엘에게 행했던 바로 그 일생의 서약을 하였다. 종신 나지르인은 몸을 성스럽게 바친 거룩한 인물이라고 간주되었다. 유대인들은 대사제와 거의 가까운 정도로 존경심과 공경하는 태도로 나지르인을 보았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 대사제들을 제외하고, 오직 일생토록 몸을 바친 나지르인만 성전에서 지성소(至聖所)에 들어가도록 허락받았기 때문이다.
135:1.3 (1497.1)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의 양을 쳤고, 자라서 고귀한 인격을 가진 튼튼한 사람이 되었다.
135:1.4 (1497.2)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엘리야에 관하여 글을 읽은 결과로 요한은 갈멜산의 선지자에게 크게 감명을 받았고 그의 옷 스타일을 채택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날부터 요한은 언제나 털 있는 옷을 입고 가죽 허리띠를 띠었다. 열여섯에 키가 1.8미터 넘었고 거의 완전히 자랐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과 특이한 옷 모습 때문에 그는 정말로 그림 같은 소년이었다. 부모는 이 외아들, 약속의 아이이자 종신 나지르인에게 대단한 것을 기대했다.
135:2.1 (1497.3) 몇 달 동안 앓고 난 뒤에, 사가리아는 서기 12년 6월에 죽었다. 이때 요한은 열 여덟을 갓 넘었다. 나지르인 서약이 자신의 집안에서도 죽은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이때는 크게 난처한 때였다. 비록 죽은 사람에게 오염되는 것에 관하여 서약한 조건을 따르려고 애쓰기는 했어도 요한은 자기가 나지르인 계급의 요구 조건에 온전히 복종했는가 의심하였다. 따라서, 아버지가 묻힌 뒤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거기에 여인들 마당의 나지르인 구역에서 정화(淨化)에 요구된 희생물을 바쳤다.
135:2.2 (1497.4) 이 해 9월에 엘리자벳과 요한은 마리아와 예수를 찾아보려고 나사렛으로 여행하였다. 요한은 일생의 일을 시작하려고 거의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뿐 아니라 그의 모범을 보고서 요한은 집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를 돌보고 “아버지의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즐거운 방문이 끝났을 때, 예수와 마리아에게 작별을 알린 뒤, 요단강에서 예수에게 세례 주는 사건이 있기까지 요한은 예수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135:2.3 (1497.5) 요한과 엘리자벳은 집으로 돌아가서 앞날을 위하여 비로소 계획을 세웠다. 요한이 성전 기금으로부터 받을 사제의 수당을 거절했으므로 2년이 지나자 그들은 거의 집을 잃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양 떼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작정하였다. 따라서 요한이 스무 살이 되던 해 여름에, 그들은 헤브론으로 옮겨 갔다. 이른바 “유대의 황무지”에서, 엥게디로부터 사해로 들어가는 큰 물줄기의 가지인 어느 시냇물을 따라서, 요한은 양을 쳤다. 엥게디 촌은 종신 및 시한부로 헌신하는 나지르인뿐 아니라, 금욕하는 수많은 다른 목축자를 포함했다. 이들은 이 지역에서 가축 떼와 함께 모여서 나지르인 단체와 사귀었다. 그들은 양을 길러서, 그리고 부유한 유대인들이 그 계급에게 준 물품으로 생계를 이었다.
135:2.4 (1497.6) 시간이 지나자 요한은 헤브론으로 돌아가는 일이 뜸해졌고, 한편 엥게디로 빈번히 찾아갔다. 그는 대다수의 나지르인과 아주 온통 달랐기 때문에 그 단체와 친밀하게 사귀기가 어려움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엥게디 촌이 인정하는 지도자요 우두머리인 아브너를 무척 좋아했다.
135:3.1 (1497.7) 이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따라서 요한은 돌 오두막과 밤에 쓰는 울타리를 열둘 이상 지었고, 이것은 쌓아 놓은 돌로 이루어졌다. 그 안에서 그는 양과 염소 떼를 지키고 보호할 수 있었다. 목동으로 지내는 요한의 생활은 생각할 시간을 상당히 주었다. 그는 베스주르의 고아 소년 에즈다와 많이 이야기했다. 어떤 면에서 이 아이를 양자로 삼았다. 안식일 예배를 위하여 엥게디로 내려갔을 때 뿐 아니라 어머니를 만나고 양을 팔려고 헤브론으로 여행 갔을 때, 에즈다는 양 떼를 돌보았다. 요한과 그 소년은 무척 검소하게 살았고 양고기, 염소 젖, 야생 꿀, 그리고 그 지역에서 먹을 수 있는 메뚜기를 먹고 살았다. 때때로 헤브론과 엥게디에서 가져온 식량으로 이 정규 식사를 보충하였다.
135:3.2 (1498.1) 엘리자벳은 요한에게 팔레스타인과 세상일에 대하여 소식을 알려주었다. 옛 체제가 막을 내리는 때가 급히 다가오고 있다, 그가 새 시대, 곧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사자가 되리라는 그의 확신은 더욱 더 깊어졌다. 이 거친 목자는 다니엘 선지(先知)가 쓴 글을 무척 좋아했다. 다니엘이 큰 우상을 묘사한 것을 1천 번 읽었다. 사가리아는 이것이 바빌론으로부터 시작하여,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마침내 로마까지 세계의 열강의 역사를 대표한다고 일러주었다. 이미 로마가 다국어를 쓰는 그런 민족과 종족들로 구성되어서, 요한은 로마가 결코 강하게 결속되고 굳게 단결된 제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시절에도 그는 로마가 시리아ㆍ에집트ㆍ팔레스타인 그리고 기타 여러 지방으로 갈라져 있다고 믿었다. 다음에 그는 더 읽었다: “이 왕들의 시절에 하늘의 하나님이 결코 멸망하지 아니할 나라를 세우리라. 이 나라는 다른 민족에게 맡겨지지 않겠으나 이 모든 나라를 산산조각 부수고 삼켜 버릴지며 그 나라는 영원토록 서리라,” “그에게 영토와 영화(榮華)와 나라를 주었고 모든 민족과 나라와 언어가 그를 섬길지니라. 그의 영토는 영원한 영토요 사라지지 아니하며 그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아니하리라.” “나라와 영토, 그리고 온 하늘 아래에서 나라의 위세를 최고자의 성자(聖者) 민족에게 주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모든 영토가 그를 섬기고 복종할지니라.”
135:3.3 (1498.2) 요한은 예수에 관하여 부모한테서 들은 것, 그리고 성서에서 읽은 이 구절들이 일으킨 혼란에서 결코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다니엘서에서 그는 읽었다: “내가 밤에 환상을 보았으니, 보라, 사람의 아들과 같은 자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왔고 그에게 통치권과 영화와 나라가 주어졌느니라.” 그러나 선지자의 이 말씀은 부모가 가르쳐 준 것과 조화되지 않았다. 열여덟 살에 방문했을 때 예수와 나눈 이야기도 성서의 이 말씀과 맞지 않았다. 이런 혼란이 있었는데도 온갖 혼란을 통해서 내내, 먼 사촌 나사렛 예수가 참 메시아이다, 다윗의 왕좌에 앉으려고 왔다, 그리고 자기(요한)는 그가 미리 보낸 사자(使者)요 으뜸가는 지지자가 되리라고 어머니는 확신을 주었다.
135:3.4 (1498.3) 로마의 악덕과 사악함, 제국의 방탕하고 부도덕함에 대하여 그가 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헤롯 안티파스와 유대 총독들의 악행에 관하여 아는 것으로부터 요한은 시대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거칠고 고귀한 이 자연의 아이에게는 사람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신성한 시대―하늘나라―가 밝아오는 것을 위하여 세상이 무르익은 듯하였다. 자기가 옛 선지자들의 마지막이요, 새 선지자들의 처음이 되리라는 느낌이 요한의 가슴 속에서 자랐다. 박차고 나가서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외치고 싶은 끓어오르는 충동으로 무척 마음이 설렜다. “회개하라! 하나님께 바르게 행하라! 마지막 날을 위하여 준비하라. 세상일의 새롭고 영원한 체제, 하늘나라가 오는 것을 위하여 너희 스스로 준비하라.”
135:4.1 (1499.1) 서기 22년 8월 17일, 요한이 스물 여덟이었을 때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엘리자벳의 친구들은 자신의 가족 안에서도 죽은 사람과 접촉하지 말라는 나지르인의 제한을 알고서, 요한을 부르기 전에 엘리자벳의 장례를 위하여 모든 주선을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에즈다에게 양 떼를 엥게디로 몰라고 지시하고 헤브론을 향하여 떠났다.
135:4.2 (1499.2) 어머니의 장례식을 지내고 엥게디로 돌아와서 그는 양 떼를 그 단체에게 내어주었다. 그리고 금식하고 기도하는 동안에 바깥 세계로부터 한동안 따로 떨어져 있었다. 요한은 신에게 접근하는 옛 방법들만 알았다. 오직 엘리야ㆍ사무엘ㆍ다니엘서와 같은 기록들만 알고 있었다. 엘리야는 그에게 선지자의 이상(理想)이었다. 엘리야는 선지자로 여겨지게 된, 이스라엘 최초의 선생이었다. 요한은 자기가 길고도 뛰어난 이 계열의 하늘 사자 중에서 마지막이 되리라고 참으로 믿었다.
135:4.3 (1499.3) 2년 반 동안 요한은 엥게디에서 살았다. “시대의 끝이 가까웠다,” “하늘나라가 바야흐로 나타나려 한다”고 그 단체의 대부분을 설득하였다. 그의 초기 가르침은 모두, 메시아가 유대 국가를 이방(異邦) 통치자의 지배에서 구원하리라 약속된 사람이라는 당대 유대인의 생각과 개념에 바탕을 두었다.
135:4.4 (1499.4) 이 기간 내내, 요한은 엥게디에 있는 나지르인들의 집에서 발견한 신성한 기록을 많이 읽었다. 특히 이사야서, 그리고 그 시대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선지자였던 말라기의 기록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 그는 이사야서의 마지막 5장을 읽고 또 읽고 이러한 예언을 믿었다. 다음에 말라기서를 읽곤 하였다: “보아라, 주의 크고 무서운 날이 오기 전에 너희에게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리라. 내가 와서 저주로 땅을 칠까 하여,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이들에게 돌이키게 하고 아이들의 마음을 저희 아버지에게 돌이키게 하리라.” 엘리야가 돌아오리라는 이 말라기의 약속이 가까스로 요한이 나가서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전도하고 동료 유대인들에게 다가올 진노를 피하라고 훈계하는 것을 막았다. 요한은 다가오는 하늘나라의 소식을 선포할 준비가 되고도 남았지만, 엘리야가 오리라는 이 기대(企待)는 2년이 넘도록 그를 붙들어 두었다. 그는 자신이 엘리야가 아님을 알았다. 말라기가 무슨 뜻으로 말했는가? 그 예언이 글자 그대로인가 아니면 상징인가? 어떻게 진실을 알 수 있을까? 마침내, 첫 선지자가 엘리야라는 이름이었으니까, 마지막 선지자도 궁극에는 똑같은 이름으로 알려질 것이라고 감히 생각했다. 그런데도 의심이 들었고 이 의심은 언제라도 자신을 엘리야라고 일컫지 못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135:4.5 (1499.5) 엘리야의 영향 때문에, 요한은 같은 시대에 살던 사람들의 죄와 악덕을 직접 퉁명스럽게 공격하는 방법을 채택하게 되었다. 그는 엘리야처럼 옷을 입고 엘리야처럼 말하려고 애썼다.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 그는 옛 선지와 꼭 같았다. 바로 그렇게 튼튼하고 그림 같은 자연의 사람이요, 바로 그러한 겁 없고 담대한, 정의(正義)를 부르짖는 전도자였다. 요한은 글을 모르지 않았고 유대인의 성스러운 기록을 익히 알았지만, 그가 교양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는 생각이 뚜렷한 사람이요, 힘차게 외치는 연설가요, 불 같이 비난하는 자였다. 도저히 그 시대에 본보기라 할 수 없었지만, 그는 거침없이 꾸짖는 소리였다.
135:4.6 (1499.6) 마침내 그는 새 시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메시아가 오는 것을 알리는 사자가 되리라고 작정했다. 서기 25년 3월 어느 날, 그는 모든 의심을 떨쳐 버리고 엥게디를 떠나서, 대중 전도자로서 짧기는 했지만 찬란한 경력을 시작했다.
135:5.1 (1500.1) 요한이 전한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활동 무대에 나타났던 당시에 유대 민족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를 고려해야 한다. 거의 1백 년 동안, 온 이스라엘은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들이 어찌하여 이방의 군주들에게 줄곧 예속되었는가 설명하기가 난처했다. 의로움은 언제나 번영과 권력으로 보상을 받는다고 모세가 가르치지 않았는가? 그들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아니었는가? 어째서 다윗의 왕좌가 황폐하고 비어 있는가? 모세의 신조와 선지자들의 훈계에 비추어볼 때, 유대인들은 그들의 나라가 어째서 오랫동안 황폐해졌는가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깨달았다.
135:5.2 (1500.2) 예수와 요한의 시절보다 1백 년쯤 앞서, 팔레스타인에서 새로운 학파의 종교 선생, 곧 묵시론자들이 일어났다. 이 새 선생들은 민족의 죄 때문에 유대인이 벌을 받고 있다고 주장함으로 그들이 고통과 치욕을 당한다고 설명하는 한 신앙 체계를 개발했다. 그들은 예전에 바빌로니아 및 기타 포로 생활을 설명하는 데 적용된 잘 알려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묵시론자들은 이렇게 가르쳤다: 이스라엘은 기운을 내야 한다, 고통받는 날이 거의 끝났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단련이 거의 끝났다, 하나님은 이방의 외국인들에 대하여 참을성이 거의 없어졌다. 로마 통치의 끝은 그 시대의 끝,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의 종말과 비슷한 말이었다. 이 새 선생들은 다니엘의 예언에 무척 의존하였고, 창조는 마지막 단계에 막 들어가려 한다, 이 세상의 나라들은 바야흐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려 한다고 한결같이 가르쳤다. 그 시절에 유대인의 머리에는 이것이 요한과 예수의 가르침에 두루 이어지는 구절―하늘나라―의 뜻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에게, “하늘나라”라는 구절은 오직 한 가지 뜻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다스리는 것처럼 하나님이 (메시아가) 완전한 권력을 가지고 땅의 나라들을 다스리는 상태―“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절대로 올바른 국가를 의미했다.
135:5.3 (1500.3) 요한의 시절에 유대인은 모두 기대하며 물었다, “얼마나 빨리 그 나라가 올 것인가?” 이방 국가들의 통치가 종말에 가까웠다는 느낌이 일반적으로 퍼져 있었다. 온 유대인 사회에서 오랜 시대에 걸쳐 품었던 소망이 그 세대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팔팔한 희망과 강렬한 기대가 퍼져 있었다.
135:5.4 (1500.4) 다가오는 나라가 어떤 성질을 가졌는가 추정하는 데 크게 의견이 달랐어도, 유대인들은 그 사건이 가까이, 아니 바로 문 앞에 다가왔다는 믿음을 똑같이 가졌다. 구약을 읽는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눈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새 임금이 나타나기를 찾고 있었다. 적들의 손에서 구원받은 나라, 다윗 왕의 후계자, 곧 마땅하고 올바른 전 세계 통치자로서 빨리 인정받을 그러한 메시아가 주재하는, 다시 태어난 유대인의 나라를 글자 그대로 기대하고 있었다. 이보다 작지만 또 다른 집단의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엄청나게 다른 견해를 가졌다. 다가오는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세상은 확실한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나님 나라가 서도록 안내하리라, 이 나라는 영원한 영토가 되리라, 죄는 그치게 될 것이요, 새 나라의 시민들은 이 끝없는 행복을 누리면서 불멸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135:5.5 (1500.5) 깨끗이 하거나 정화(淨化)하는 어떤 철저한 훈련이 땅에서 새 나라가 서기 전에 반드시 앞설 것이라고 모두가 의견을 모았다. 글자대로 풀이하는 사람들은 모든 불신자를 죽이는 세계적 전쟁이 따를 것이요, 한편 충실한 자는 계속하여 보편적이고 영원한 승리로 밀고 갈 것이라고 가르쳤다. 영적 해석자들은 하나님의 큰 심판이 그 나라의 도래를 알리리라, 그 심판은 불의한 자를 벌 주고 최종으로 소멸하는 마땅한 판결을 받도록 넘길 것이라, 동시에 선택된 백성 가운데 믿는 성자(聖者)들을 사람의 아들과 함께 높은 영예와 권한의 자리로 높일 것이요, 이 사람의 아들은 되찾은 나라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스릴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 후자 집단은 새 나라에 많은 경건한 이방인이 가입하는 것이 허락될 수 있다고 믿기도 하였다.
135:5.6 (1501.1) 유대인 가운데 더러는 하나님이 어쩌면 직접 신의 간섭으로 이 새 나라를 세울지 모른다는 의견을 지녔지만, 대다수는 하나님이 어떤 대표하는 중재자, 메시아를 사이에 둘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이 예수와 요한의 세대에 살던 유대인들의 머리 속에서 메시아라는 낱말이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하게 가능한 의미였다. 메시아는 도저히, 그저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거나 올바르게 살 필요성을 외치는 사람을 언급할 수 없었다. 그러한 모든 거룩한 사람에게 유대인들은 선지자라는 칭호를 주었다. 메시아는 선지자보다 더한 사람이어야 했다. 메시아는 새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것이었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유대인의 전통적 의미에서 메시아일 수 없었다.
135:5.7 (1501.2) 누가 이 메시아일까? 또 다시 유대인 선생들의 의견은 달랐다. 옛 선생들은 다윗의 아들이라는 신조에 집착했다. 새 선생들은, 새 나라가 하늘나라이니까, 새 통치자는 또한 신다운 인물, 하늘에서 하나님의 바른 편에서 오래 앉아 있던 자일지 모른다고 가르쳤다.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새 나라의 통치자를 이렇게 상상했던 사람들은 그가 인간 메시아가 아니요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하나님의 아들―로서 새롭게 된 땅의 통치를 이렇게 맡으려고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하늘의 왕자라고 보았다. “뉘우치라, 하늘나라가 가까웠음이라!” 하고 요한이 외치면서 떠나갔을 때 유대인 세계의 종교적 배경이 이러했다.
135:5.8 (1501.3) 그러니까 하늘나라가 다가온다는 요한의 선포는 그의 정열적 전도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적어도 여섯 가지 다른 뜻이 있었음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요한이 사용한 구절에 그들이 어떤 의미를 부여했든지 상관 없이, 이 유대 왕국을 기다리는 여러 집단은 각자, 성실하고 열심 있고 올바름과 뉘우침을 부르짖는 이 투박한 전도자의 외침에 흥미를 느꼈고, 그는 청중에게 “다가올 진노를 피하여 달아나라”고 매우 엄숙하게 훈계하였다.
135:6.1 (1501.4) 서기 25년 3월에 일찍, 요한은 사해의 서쪽 해안을 돌아서, 요단강을 거슬러 올라가 예리고의 맞은 편으로 여행했는데, 이 고대의 여울을 지나서 요수아와 이스라엘의 자손이 약속된 땅으로 처음 들어갔다. 강 저편으로 건너가서 여울의 입구 가까이에 자리잡고 그는 강을 건너 오가는 길에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요단강을 건너는 모든 길목 중에서 왕래가 가장 빈번한 곳이었다.
135:6.2 (1501.5)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에게 요한은 설교자보다 더한 사람인 것이 분명했다. 유대의 황야에서 올라온 이 이상한 사람에게 귀를 기울인 사람들의 대다수는 선지자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믿으며 떠나갔다. 지치고 누구인가 기대하던 이 유대인들의 혼이 그런 현상에 깊이 마음이 흔들린 것은 당연하다. 온 유대인 역사에서 아브라함의 경건한 자손들이 “이스라엘이 위로받기”를 그토록 고대하거나 더 열심히 “나라가 회복되기”를 목마르게 기다린 적이 없었다. 유대인 역사 전체에서 “하늘나라가 가까웠다”는 요한의 말이 요단강의 이 남쪽 길목의 둑에서 그렇게 신비스럽게 나타난 바로 그때처럼 그렇게 깊이, 널리 호소한 적도 없었다.
135:6.3 (1502.1) 그는 아모스처럼 목자 출신이었다. 옛날의 엘리야처럼 옷차림을 했고 “엘리야의 기백과 권능”으로 우렁차게 훈계하고 경고를 퍼부었다. 요단강 가를 따라서 그가 전도한다는 소식을 여행자들이 널리 퍼뜨리자, 온 팔레스타인에 두루 이 이상한 전도자가 대단한 소동을 일으킨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35:6.4 (1502.2) 이 나지르인 전도자가 하는 일에는 아직도 또 다른 새로운 모습이 있었다. 요단강에서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그는 신자들에게 모조리 세례를 주었다. 비록 세례가 유대인 사이에 새로운 예식은 아니었어도 그들은 지금 요한이 사용하는 것처럼 세례가 쓰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성전 바깥 마당에서 친교하도록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이렇게 세례를 주는 것이 오랫동안 관례였지만, 바로 유대인들은 회개하는 뜻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요구된 적이 없었다. 요한이 전도하고 세례를 주기 시작한 때부터 헤롯 안티파스의 부추김으로 체포되고 갇힐 때까지 겨우 열다섯 달이 사이에 끼었지만, 그는 이 짧은 기간에 10만 명이 훨씬 넘는 회개자에게 세례를 주었다.
135:6.5 (1502.3) 요단강을 거슬러 북쪽으로 떠나기 전에 요한은 베다니 여울에서 넉 달 동안 전도했다. 수만 명의 청중, 더러는 호기심이 있었지만 열심 있고 심각한 많은 사람이 유대ㆍ페레아ㆍ사마리아의 모든 지역으로부터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왔다. 몇 사람이 갈릴리에서 오기도 했다.
135:6.6 (1502.4) 이 해 5월에, 아직도 베다니 여울에 남아 있을 때, 사제와 레위인들은 그가 메시아임을 주장하는가, 누구의 권한으로 설교하는가 요한에게 물으려고 대표단을 보냈다. 요한은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가서 너희 주인들에게 ‘황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를 들었다고 이르라. 선지자가 이렇게 말씀한 바와 같으니라: ‘주의 길을 예비하라, 우리 하나님을 위하여 큰길을 곧게 하라. 골짜기가 모두 채워지겠고 산과 언덕이 모조리 낮아지리라. 고르지 않은 땅이 평지가 되고 거친 곳이 매끄러운 골이 되리라.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135:6.7 (1502.5) 용감하기는 했어도 요한은 입이 거친 설교자였다. 어느 날 요단강 서쪽 둑에서 설교하며 세례를 주고 있을 때, 바리새인 한 무리와 사두개인 여럿이 앞으로 나와 세례를 받으려고 나섰다. 물 속으로 이끌기 전에, 요한은 그 무리에게 일렀다: “불 앞에 있는 독사들처럼, 누가 너희에게 다가올 진노를 피하라고 경고하더냐? 나는 너희에게 세례를 주겠거니와 너희 죄를 용서받고 싶으면 진지한 회개에 마땅한 열매를 맺으라 경고하노라. 아브라함이 너희 선조라 내게 이르지 말라. 내가 선언하노니 하나님은 여기 너희 앞에 있는 돌 열두 개를 아브라함에게 합당한 자손으로 세울 수 있느니라. 지금도 도끼가 나무의 바로 그 뿌리에 놓여 있느니라.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자르고 불에 던지도록 정해졌느니라.” (그가 언급한 돌 열두 개는 “열두 부족”이 약속된 땅에 처음 들어갔을 때 바로 이 자리에서 그들이 건너간 것을 기념하려고 요수아가 세운 이름난 기념비였다.)
135:6.8 (1502.6) 요한은 제자들을 위하여 학급을 인도했고 그렇게 인도하면서 새로운 생활의 세부를 가르치고 많은 질문에 대답하려고 애썼다. 율법의 글자 뿐 아니라 정신을 가르치라고 선생들에게 충고하였다. 부유한 자에게 가난한 자를 먹이라고 가르쳤고 세금 걷는 자에게 일렀다: “너희에게 배당된 것보다 더 빼앗지 말라.” 군인들에게 그는 일렀다: “폭력을 쓰지 말고 그릇되게 아무것도 빼앗지 말라―봉급에 만족하라.” 한편 모든 사람에게 충고하였다: “시대의 끝을 위하여 준비하라―하늘나라가 가까웠느니라.”
135:7.1 (1503.1) 요한은 다가오는 나라와 그 임금에 대하여 아직도 뒤범벅이 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오래 전도할수록 더욱 헛갈렸지만 다가오는 나라의 성질에 관한 이 지적(知的) 불확실성은 그 나라가 즉시 나타나는 것이 확실하다는 신념을 조금도 줄이지 않았다. 머리 속에서 요한은 헛갈렸을지 모르지만 영적으로 결코 그렇지 않았다. 다가오는 나라에 관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예수가 그 나라의 통치자가 될 것인가 아닌가, 도저히 확신이 없었다. 요한이 다윗의 왕좌가 회복되리라는 관념에 매달리는 한, 다윗의 도시에서 태어난 예수가 오랫동안 고대하던 구원자라는 부모의 가르침은 일관성이 있는 듯하였다. 그러나 영적 국가, 땅에서 현세의 시대가 끝난다는 교리 쪽으로 마음이 더 기울었을 때, 그러한 사건이 생길 때 예수가 무슨 역할을 할 것인가 못 견디게 의심이 들었다. 어떤 때는 모든 것을 의심했으나 의심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사촌과 이야기할까 정말로 바랐지만 이것은 그들이 명시한 협정에 어긋났다.
135:7.2 (1503.2) 북으로 여행하면서 요한은 예수에 대하여 많이 생각해 보았다. 요단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멈춘 데는 열두 곳이 넘었다. 아담에서 제자들이 “당신이 메시아니이까?” 다짜고짜 던진 질문에 답하여 “내 뒤에 오실 다른 분”이라고 처음으로 언급했다. 그는 덧붙여 말했다: “나보다 더 큰 분이 내 뒤에 오시리라,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 끈을 풀 만한 자격이 없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리라. 도리깨질하는 마당을 샅샅이 깨끗이 하려고 그의 손에 삽이 있느니라. 그는 곡창으로 밀을 모으겠으나 쭉정이는 심판의 불에 태우리라.”
135:7.3 (1503.3) 제자들의 물음에 답하여 요한은 가르침을 계속 확대하였다. “뉘우치고 세례를 받으라”는 수수께끼 같은 초기의 말과 비교해서 유익하고 위로하는 말을 나날이 더하였다. 이때가 되자, 갈릴리와 데카폴리스로부터 군중이 도착하고 있었다. 날마다 열심 있는 신자 몇십 명이 우러러보는 선생과 함께 남아 있었다.
135:8.1 (1503.4) 서기 25년 12월에 요단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요한이 펠라 근처에 이르렀는데 이때가 되자 그의 이름은 온 팔레스타인에 두루 퍼졌고, 그가 한 일은 갈릴리 호수 둘레의 모든 마을 사람이 대화할 때 주요한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예수는 요한이 전하는 말씀에 대하여 좋게 말했고, 이것은 가버나움으로부터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세례받는, 요한의 종파에 합세하게 만들었다. 요한이 펠라 가까이 전도할 자리를 잡은 뒤에 곧, 12월에 어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내려갔고, 나서서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한 주에 한 번씩 요한을 보러 가서, 그 복음 전도자가 하는 일에 관하여 새롭고 눈으로 보고 들은 것을 예수에게 보고하였다.
135:8.2 (1503.5) 예수의 동생 야고보와 유다는 세례를 받으러 요한에게 내려가는 것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었다. 유다가 안식일 예배를 보려고 가버나움으로 건너왔기 때문에 그와 야고보는 회당에서 예수의 강론을 들은 뒤에, 그들의 계획에 대하여 그와 함께 의논하기로 작정하였다. 때는 서기 26년 1월 12일, 토요일 밤이었다. 예수는 이튿날까지 의논을 미룰 것을 요청했고, 그때 그들에게 대답을 줄 것이었다. 그는 그날 밤에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가까이 교통하고 있었다. 동생들과 한낮에 점심을 먹고 요한에게 세례받는 것에 관하여 조언하도록 주선이 되어 있었다. 그 일요일 아침에 예수는 여느 때처럼 배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야고보와 유다는 점심을 가지고 도착했다. 아직 쉬는 정오 시간이 되지 않았다. 예수가 그런 일에 무척 규칙적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목재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35:8.3 (1504.1) 쉬는 정오 시간 바로 전에, 예수는 연장을 내려놓고 작업용 앞치마를 벗고 나서 방에 함께 있던 세 일꾼에게 그저 발표했다, “내 때가 왔도다.” 그는 나가서 동생 야고보와 유다에게 되풀이해서 말했다. “내 때가 왔도다―요한을 만나러 가자.” 그들은 바로 펠라를 향해서 떠났고 여행하면서 점심을 먹었다. 때는 1월 13일, 일요일이었다. 요단강 유역에서 밤을 지냈고, 다음 날 한낮 무렵에 요한이 세례를 주는 장면에 다다랐다.
135:8.4 (1504.2) 요한은 그날 후보자들에게 막 세례를 주기 시작했다. 회개하는 사람 몇십 명이 줄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예수와 두 동생이 열심 있는 남녀들의 줄에서 자리를 잡았고, 이들은 다가오는 나라에 관한 요한의 설교를 믿게 된 사람들이었다. 요한은 세베대의 아들들에게 예수의 소식을 묻고 있었다. 자기의 설교에 대하여 예수가 논평한 것을 들은 적이 있었고 요한은 날마다 그가 그 장면에 도착하는 것을 보기를 기대했지만, 예수가 세례받는 후보자들의 줄에서 인사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135:8.5 (1504.3) 그렇게 큰 무리의 전향자들에게 빠르게 세례를 주는 세부에 열중해서, 요한은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앞에 설 때까지 예수를 올려다보지 못했다. 요한이 예수를 알아보았을 때, 예식(禮式)은 잠시 중지되었고 그동안에 그는 육체의 사촌에게 인사하며 물었다. “어째서 당신은 내게 인사하려고 물 속으로 내려오시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너에게 세례를 받기 위함이라.” 요한이 응답했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나이다. 어째서 당신이 내게 오시나이까?” 예수는 요한에게 속삭였다. “이제 참고 내 말을 들으라. 나와 함께 여기 서 있는 동생들에게 이 모범을 보이는 것이 우리에게 어울리고, 사람들이 내 때가 왔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135:8.6 (1504.4) 예수의 목소리에는 단호하고 권위 있는 빛이 서려 있었다. 서기 26년 1월 14일, 월요일 한낮에, 요단강에서 나사렛 예수에게 세례를 주려고 준비하면서 요한은 감동하여 부르르 떨었다. 이처럼 요한은 예수와 두 동생, 야고보와 유다에게 세례를 주었다. 세 사람에게 세례를 주고 나서, 요한은 그날 이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해산하면서 다음 날 정오에 다시 세례를 시작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사람들이 떠나는 동안, 네 사람은 아직도 물 속에 서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당장에 예수의 머리 바로 위에 한 순간 환영(幻影)이 나타났고 그들은 한 목소리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아주 기뻐하는 자이라.” 큰 변화가 예수의 얼굴에 왔다. 물 속에서 나오자 그는 말없이 그들을 떠나서, 동쪽으로 산을 향하여 갔다. 그리고 아무도 예수를 40일 동안 다시 구경하지 못했다.
135:8.7 (1504.5) 요한은 멀찌감치 떨어져 따라가면서, 어머니의 입으로부터 여러 번 들은 대로, 둘 중에 어느 쪽도 태어나기 전에 가브리엘이 예수의 어머니를 방문했다는 이야기를 그에게 일러주었다. “이제 나는 당신이 구원자임을 확실히 아나이다” 하고 말한 뒤에 예수가 길을 계속 가게 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135:9.1 (1505.1) 요한이 제자들에게 돌아갔을 때 (이제 함께 항상 거하는 사람이 스물 다섯이나 서른 명 정도 있었다), 예수의 세례와 연결되어 무슨 일이 막 일어났는가 토론하면서 그들이 열심히 의논하는 것을 발견했다. 예수가 태어나기 전에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방문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또 그가 이 이야기를 해준 뒤에도 예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요한이 이제 일러주었을 때, 그들은 더군다나 놀라워했다. 그날 저녁에 비가 내리지 않았고, 30명 남짓한 이 무리는 별이 빛나는 밤에 늦게까지 이야기하였다. 예수가 어디로 가버렸는가, 언제 그를 다시 볼 것인가 궁금해하였다.
135:9.2 (1505.2) 이날의 체험이 있은 뒤로 요한의 설교는 다가오는 나라와 기대하는 메시아에 관하여 선포하는, 새롭고 확실한 음정이 있었다. 예수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머무르던 이 40일 동안은 긴장된 때였다. 그러나 요한은 큰 힘을 가지고 계속 전도했고, 그의 제자들은 요단강에서 요한의 주위에 넘쳐흐르게 모인 군중에게 이 무렵에 설교하기 시작했다.
135:9.3 (1505.3) 기다리는 이 40일 동안에 많은 소문이 시골에, 티베리아스와 예루살렘에도 퍼졌다. 수천 명이 요한의 야영지에서 새 구경거리, 소문난 메시아를 보려고 왔지만, 예수는 눈에 띄지 않았다. 요한의 제자들이 그 이상한, 하나님의 사람이 산으로 가 버렸다고 주장했을 때, 많은 사람이 그 이야기 전체를 의심했다.
135:9.4 (1505.4) 예수가 떠난 지 3주쯤 되었을 때, 예루살렘에서 사제(司祭)와 바리새인들로부터 새 대표단이 펠라에, 그 장면에 도착했다. 요한에게 다짜고짜 그가 엘리야인가, 아니면 모세가 약속한 선지자인가 물었다. 요한이 “나는 아니라”하고 말했을 때, 그들은 대담하게 물었다 “네가 메시아이냐?” 요한은 “나는 아니라” 대답했다. 그러자 예루살렘에서 온 이 사람들은 말했다. “네가 엘리야가 아니요 선지자도 메시아도 아니어든, 어찌하여 너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이 모든 소란을 피우느냐?” 요한은 대답하였다: “내 말을 듣고 나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 내가 누구인가 말해야 할 것이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돌아와서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 줄 사람이 우리 가운데 있었느니라.”
135:9.5 (1505.5) 이 40일은 요한과 그 제자들에게 어려운 기간이었다. 요한과 예수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토론할 질문이 백 가지나 생겼다. 정치와 이기적 자리싸움이 비로소 모습을 나타냈다. 메시아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과 개념에 대하여 맹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그가 군사 지도자요 다윗 같은 왕이 될 것인가? 요수아가 가나안 사람들을 친 것 같이, 그가 로마 군대를 칠 것인가? 아니면 그가 영적인 나라를 세우러 올 것인가? 하늘나라를 세우는 이 사명 안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갈 것인가, 비록 자신의 머리 속에서 아주 뚜렷하지는 않았어도, 요한은 차라리 소수파와 함께 예수가 하늘나라를 세우러 왔다고 결정했다.
135:9.6 (1505.6) 이때는 요한의 체험 중에서 어려운 시절이었고 그는 예수가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요한의 제자 중에 더러는 예수를 찾으러 가려고 수색대를 조직했지만, 요한은 막으며 말했다: “우리의 때는 하늘의 하나님 손에 있나니, 그가 택한 아들을 인도하시리라.”
135:9.7 (1505.7) 2월 23일, 토요일 아침 일찍, 요한의 일행이 아침 식사를 들며 북쪽을 향하여 올려보다가 예수가 그들에게 오는 것을 보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요한은 큰 바위 위에 올라서서, 우렁차게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원자를 보라!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말하였으되, ‘내 뒤에 나보다 더 나은 자가 오리니, 그가 나보다 먼저 있었음이라.’ 이 일로 인하여 내가 광야에서 나와, 회개하라 외치고 물로 세례를 주었고, 하늘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하였노라. 이제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 줄 이가 오느니라. 이 사람 위에 신의 영(靈)이 내려오는 것을 내가 보았고 ‘이 사람은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요 내가 아주 기뻐하는 자라’하고 외치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내가 들었노라.”
135:9.8 (1506.1) 예수는 그들에게 식사를 계속하라고 이르고, 한편 동생 야고보와 유다가 가버나움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요한과 함께 먹으려고 앉았다.
135:9.9 (1506.2) 이튿날 아침 일찍 그는 요한과 그 제자들을 떠나서 갈릴리로 돌아갔다. 언제 다시 그들이 그를 볼 것인가 아무 말도 일러주지 않았다. 자신의 전도와 사명에 대하여 요한이 묻자 예수는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내 아버지가 지난날에 하신 것 같이, 이제와 앞날에도 너를 안내하시리라.” 위대한 이 두 사람은 그날 아침, 요단강 둑에서 헤어졌고, 육체를 입고 다시는 서로 인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135:10.1 (1506.3) 예수가 북쪽으로 갈릴리에 갔으므로, 요한은 왔던 길로 남쪽으로 되돌아갈 마음이 생겼다. 따라서, 3월 3일 일요일 아침에, 요한과 남은 제자들은 남쪽으로 여행 길을 떠났다. 요한의 가까운 추종자 중에 4분의 1쯤이 그동안에 예수를 찾아서 갈릴리를 향하여 떠났다. 요한에게는 혼란에 빠진 슬픈 빛이 보였다. 결코 예수에게 세례 주기 전에 했던 것처럼, 다시 전도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다가오는 나라에 대한 책임이 자기 어깨에 더 지워지지 않았다고 느꼈다. 그는 할 일이 거의 끝났다고 느꼈고, 쓸쓸하고 외로웠다. 그러나 그는 전도하고 세례를 주며 남쪽으로 계속 여행하였다.
135:10.2 (1506.4) 아담이라는 마을 가까이에서, 요한은 몇 주 동안 머물렀다. 여기서 헤롯 안티파스가 다른 남자의 아내를 불법으로 빼앗은 것 때문에, 기억에 남을 공격을 그에게 퍼부었다. 이 해 (서기 26년) 6월이 되자, 요한은 요단강의 베다니 여울로 돌아갔다. 거기는 1년도 더 전에, 다가오는 나라에 대하여 전도를 시작한 곳이었다. 예수가 세례받은 뒤에 몇 주 동안, 요한의 설교의 특징은 차츰 서민들에게 자비를 선포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한편 그는 되살아난 열정으로 썩은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들을 비난하였다.
135:10.3 (1506.5)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의 영토에서 전도하고 있었는데, 안티파스는 요한과 그 제자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놀라게 되었다. 헤롯은 또한 요한이 자기 집안 일을 드러내놓고 비난하는 것을 분개하였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헤롯은 요한을 잡아 가두기로 작정하였다. 따라서, 6월 12일 아침 아주 일찍, 설교를 듣고 세례 주는 것을 구경하러 군중이 도착하기 전에, 헤롯의 관리들이 요한을 체포했다. 몇 주가 지나도 석방되지 않자 제자들은 온 팔레스타인에 흩어졌고, 그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의 추종자들과 합세하려고 갈릴리로 갔다.
135:11.1 (1506.6) 요한은 감옥에서 외롭고 얼마큼 쓰라린 체험을 가졌다. 추종자 가운데 거의 아무도 그를 면회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예수를 보고 싶어했지만, 추종자 중에 사람의 아들을 믿게 된 사람들을 통해서 그가 하는 일에 관하여 소식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요한은 때때로 예수와 그의 신성한 사명을 의심할 유혹을 받았다. 예수가 메시아라면, 어째서 참을 수 없는 이 감옥 생활에서 그를 구원하려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가? 1년 반이 넘도록, 하나님의 광야에서 살던 이 거친 사람은 끔찍한 감옥에서 시들었다. 그리고 이 체험은 예수를 믿는 믿음과 그에게 바치는 충성심을 크게 시험하였다. 정말로 이 체험 전체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해서도 큰 시험이었다. 여러 번 그는 자신의 사명과 체험이 진정한 것이었는가도 의심할 유혹을 받았다.
135:11.2 (1507.1) 몇 달 동안 감옥에 갇혀 있은 뒤에, 제자들의 한 무리가 그에게 와서, 예수의 대중 활동에 관하여 보고한 뒤에 말했다: “선생이여, 이런즉 요단강 상류에서 당신과 함께 있던 자는 번영하고 그에게 오는 자를 모두 받나이다. 그는 세리와 죄인들과 잔치까지 하나이다. 당신은 그에 대하여 용감하게 증언했는데, 그래도 그는 당신을 구원하려고 아무 일도 하지 않나이다.” 그러나 요한은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가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나는 메시아가 아니라, 그러나 그를 위하여 길을 예비하려고 미리 앞에 파송된 자라’ 말한 것을 너희가 기억하느니라. 그리고 그 일을 내가 하였노라. 신부(新婦)를 가진 자는 신랑이지만, 가까이 서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 신랑의 친구는 그 신랑의 목소리 때문에 크게 기뻐하느니라. 그러므로 나의 이 기쁨이 이루어졌도다. 그는 번창해야 하지만 나는 쇠퇴해야 하느니라. 나는 이 땅에서 왔고 내가 전할 말씀을 선포하였노라. 나사렛 예수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고 우리 모두 위에 계시느니라.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왔고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외치리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분량을 재지 않고 영을 주시기 때문이라. 아버지는 그 아들을 사랑하사, 당장에 이 아들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시리라. 그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지느니라. 내가 말하는 이 말씀은 참이요 지속하느니라.”
135:11.3 (1507.2) 이 제자들은 요한의 선언에 놀랐고 너무 놀라서 말없이 떠났다. 요한도 또한 마음이 많이 착잡해졌는데, 예언을 입 밖에 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시는 예수의 사명과 신성에 대하여 송두리째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가 그에게 아무 말도 보내오지 않은 것, 자기를 보러 오지 않은 것, 자기를 감옥에서 구원하려고 큰 권능을 전혀 쓰지 않은 것이, 요한에게는 마음 아프게 실망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것을 모두 알았다. 요한을 크게 사랑했지만, 자기의 신다운 성품을 이제 깨달았다. 요한이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를 위하여 큰 일이 준비되어 있음을 잘 알고 또한 땅에서 요한의 일이 끝났음을 알았기 때문에, 위대한 전도자이자 선지자의 생애가 자연스럽게 풀려나가는 데 간섭하지 않으려고 자제하였다.
135:11.4 (1507.3) 감옥에서 오랫동안 겪은 이 불안감은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었다. 죽기 겨우 며칠 전에 요한은 신뢰하는 사자들을 다시 예수에게 보내어 물었다: “나의 일이 끝났나이까? 어째서 나는 감옥에서 시드나이까? 당신은 참으로 메시아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하리이까?” 이 두 제자가 이 전하는 말씀을 예수에게 주었을 때, 사람의 아들은 대답했다: “요한에게 돌아가서, 내가 잊지 않았으나 내게 또한 이것을 용납하라고 이를지니, 올바른 것을 모두 이루는 것이 우리에게 어울리는 까닭이라.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전하라―가난한 자들이 좋은 소식을 듣느니라―그리고 마지막으로, 땅에서 내 사명을 전한 사랑하는 사자에게, 의심하고 나 때문에 넘어지지 않으면, 그가 다가올 시대에 넘치게 복을 받으리라 전하라.” 이것이 예수로부터 요한이 받은 마지막 말씀이었다. 이 말씀은 그를 크게 위로하고 믿음을 안정시켰고, 육체를 입은 생애에 비극의 종말을 위하여 준비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 죽음은 기억할 만한 이 사건 바로 뒤에 곧 다가왔다.
135:12.1 (1508.1) 붙잡혔을 때 남부 페레아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한은 즉시 마캐루스 요새의 감옥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집행될 때까지 갇혀 있었다. 헤롯은 갈릴리 뿐 아니라 페레아도 다스렸고 이때 페레아의 줄리아스와 마캐루스, 두 곳에서 거주를 유지했다. 갈릴리에서 관저는 세포리스로부터 새 서울 티베리아스로 이전에 옮겼다.
135:12.2 (1508.2) 헤롯은 요한이 반란을 선동하지 않을까 하여 그를 석방하기를 두려워했다. 수천 명의 페레아 사람들이 요한이 거룩한 사람, 선지자라고 믿었기 때문에 수도에서 군중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여 헤롯은 그를 죽이기가 두려웠다. 그래서 헤롯은 나지르 전도자를 감옥에 가두었고 달리 어떻게 할 줄 몰랐다. 몇 번 요한은 헤롯 앞에 섰지만, 풀려난다면 헤롯의 영토를 떠나거나 모든 대중 활동을 삼가겠다고 결코 동의하려 하지 않았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이 새 소동이 꾸준히 커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헤롯에게 요한을 석방할 때가 아니라고 훈계하였다. 게다가 요한은 헤롯이 불법으로 취한 아내 헤로디아스를 맹렬하고 극심하게 미워했다.
135:12.3 (1508.3) 여러 차례 헤롯은 하늘나라에 대하여 요한과 이야기했고 때때로 그의 말씀에 심각하게 감명을 받기는 했어도 요한을 감옥에서 석방하기가 두려웠다.
135:12.4 (1508.4) 티베리아스에서 많은 건축 공사가 아직도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헤롯은 페레아 저택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고 마캐루스 요새를 무척 좋아했다. 티베리아스에 있는 모든 공공 건물과 관저가 완성되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135:12.5 (1508.5) 생일을 축하하느라고 헤롯은 마캐루스 궁정에서, 갈릴리와 페레아 지방의 정부 의회에서 주요한 관리들과 기타 고위층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다. 헤로디아스는 헤롯에게 직접 호소하여 요한을 죽게 만드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이제 교활한 계획으로 요한을 죽이는 일에 착수했다.
135:12.6 (1508.6) 그날 저녁에 잔치하고 접대하는 과정에서, 헤로디아스는 딸을 잔치에 온 손님들 앞에 춤을 추도록 내놓았다. 헤롯은 그 계집아이의 연기를 매우 기뻐하였고, 딸을 앞으로 부르면서 말했다. “너는 예쁘구나. 썩 마음에 든다. 내 생일에 무엇을 바라든지 요구하여라. 그러면 그것을, 아니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헤롯은 포도주를 많이 마신 기운에 이 모든 일을 저질렀다. 소녀는 옆으로 가서 어머니에게 자기가 헤롯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할까 물었다. 헤로디아스는 말했다. “헤롯한테 가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소녀는 잔치하는 식탁으로 돌아오면서 헤롯에게 말했다. “당장에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 위에 담아 주시기를 요청하나이다.”
135:12.7 (1508.7) 헤롯은 두려움과 슬픔에 휩싸였지만 그 서약 때문에 그리고 같이 회식하던 모든 사람 때문에 그 요구를 물리치려 하지 않았다. 헤롯 안티파스는 한 병사를 보내서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했다. 이렇게 요한은 그날 밤에 감옥에서 목이 잘렸다. 그 병사는 선지자의 머리를 쟁반 위에 가지고 와서, 연회실의 뒷줄에 있는 그 소녀에게 내밀었다. 계집아이는 쟁반을 어머니에게 올렸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서, 요한의 시체를 얻으려고 감옥으로 갔고 무덤에 시체를 내려놓은 뒤에 예수에게 가서 소식을 전했다.
136:0.1 (1509.1) 요한의 전도에 대하여 대중의 관심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유대 민족이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열심히 찾고 있을 때, 예수는 대중 활동을 시작했다. 요한과 예수는 크게 대조가 되었다. 요한은 열심이 있고 성실한 일꾼이었지만 예수는 차분하고 행복한 노동자였다. 일생을 통해서 겨우 몇 번 서두른 일이 있었다. 예수는 세상에 따듯한 위안이요 얼마큼 모범이었고 요한은 도저히 위로가 되거나 모범은 아니었다. 그는 하늘나라를 전파했지만 도저히 그 나라의 행복을 맛보았다고 할 수 없다. 비록 예수가 옛 서열의 선지자 중에서 요한이 가장 크다고 말했어도, 또한 새 길의 큰 빛을 보고 이렇게 하늘나라로 들어간 자 중에 가장 적은 사람도 요한보다 정말로 크다고 말했다.
136:0.2 (1509.2) 요한이 다가오는 나라를 전파했을 때 그의 말씀의 요점은, 뉘우치라! 다가올 진노를 피하여 달아나라는 것이었다. 예수가 전도하기 시작했을 때, 회개하라는 훈계가 여전히 있었지만 그런 말씀에는 언제나 복음, 새 나라의 기쁨과 해방을 알리는 좋은 소식이 뒤따랐다.
136:1.1 (1509.3) 유대인은 기대하던 구원자에 대하여 여러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메시아가 온다고 가르치는 이 다른 학파들은 각자 히브리 성서의 여러 구절이 자기들의 주장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지적할 수 있었다. 대체로 유대인은 그 민족의 역사가 아브라함과 함께 시작되고, 끝에는 메시아가 오고 새 시대인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고 보았다. 초기에는 이 구원자가 “주의 종”이라, 다음에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상상했으며, 한편 후일에 더러는 메시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씨”나 “다윗의 아들”이라 부르든 상관 없이 모두가 그는 메시아,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되리라고 의견을 모았다. 이렇게 그 개념은 “주의 종”으로부터 “다윗의 아들,” “사람의 아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에 이르기까지 발전하였다.
136:1.2 (1509.4) 요한과 예수가 살던 시절에, 학식 있는 유대인들은 오실 메시아가 완전하게 된 대표적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관념을 개발했다. 이 인물 속에 선지자ㆍ사제ㆍ임금, 이 세 가지 직분을 “주의 종”으로 통합하였다.
136:1.3 (1509.5) 모세가 놀라운 기적으로 그들의 선조를 에집트인에게 속박된 상태에서 구원한 것 같이, 오시는 메시아는 더 큰 강력한 기적을 행하고, 민족의 승리로 이끄는 이적(異蹟)을 행함으로써 유대 민족을 로마의 지배로부터 구원할 것이라고 유대인들은 진지하게 믿었다. 랍비들은 성서로부터 거의 5백 구절을 한데 모았는데, 이것들은 서로 명백히 모순이 있는데도 이 구절들이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한다고 단언했다. 오시는 시간과 그 기법과 직분에 관하여 사소한 것까지 자세히 설명하면서도 그들은 약속된 메시아의 인격을 거의 통째로 못보고 놓쳤다. 세상의 구원보다 유대 민족의 영광이 회복되기를―이 세상에서 이스라엘 높이기를―기대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사렛 예수가 유대인이 머리에 지녔던 이 물질적 메시아 개념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소문난 많은 메시아 예언은 그들이 이 예언의 말씀을 다른 빛에 비춰보기만 했다면, 예수가 한 시대를 끝내는 자요, 새롭고 더 좋은 섭리 시대, 모든 나라에게 자비와 구원의 섭리 시대를 여는 자임을 인식하도록 그들의 사고방식을 아주 자연스럽게 준비하였을 것이다.
136:1.4 (1510.1) 유대인은 신의 모습이[1] [1790] 나타난다는 신조를 믿도록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러나 신의 계심을 가리키는 이 이름난 상징은 성전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면 이 상징을 회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종족의 죄, 악하다고 생각된 인간 성품에 대하여 뒤범벅이 된 생각을 가졌다. 더러는 아담의 죄가 인류를 저주했다, 메시아는 이 저주를 없애고, 사람이 신의 은총을 다시 받게 만들 것이라고 가르쳤다. 더러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면서 좋은 성품과 나쁜 성품을 모두 그 존재 속에 넣었다, 이런 배합이 전개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을 때 하나님은 크게 실망했다, “그는 이렇게 사람을 지은 것을 뉘우쳤다”고 가르쳤다. 이렇게 가르친 사람들은 메시아가 본래부터 악한 이 성품으로부터 사람을 구출하려고 오실 것이라고 믿었다.
136:1.5 (1510.2) 유대인의 대다수는, 민족의 죄 때문에, 그리고 개종한 이방인들이 성실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계속하여 로마의 통치 밑에서 시든다고 믿었다. 유대 민족은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았다, 따라서 메시아는 오기를 지체한다. 회개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이 때문에 “뉘우치고 세례를 받으라, 하늘나라가 가까웠음이라”하는 요한의 설교가 힘차고 즉시 호소력이 있었다. 하늘나라는 어떤 경건한 유대인에게도 오직 한 가지를 뜻하였으니, 메시아의 오심이었다.
136:1.6 (1510.3) 미가엘의 자신 수여에는 유대인의 메시아 개념과 도무지 관계 없는 한 가지 모습이 있었으니, 인간다운 성품과 신다운 성품, 이 둘의 연합이었다. 유대인은 메시아가 완전하게 된 인간이라, 초인간이라, 아니 신다운 자라고 여러 가지로 상상하기도 했지만, 결코 인간의 성품과 신의 성품의 연합이라는 개념을 도무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의 초기 제자들에게 큰 장애물이었다. 그들은 초기의 선지자들이 발표한 바와 같이 메시아가 다윗의 아들이라는 인간적 개념을 파악했다. 사람의 아들, 즉 다니엘과 어떤 후일의 선지자들이 가졌던 초인간 관념을 파악했고, 에녹서의 저자(著者) 및 같은 시대에 살던 어떤 사람들이 묘사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까지 이해하였다. 그러나 한 순간이라도, 인간의 성품과 신의 성품, 이 두 가지를 땅에서 하나의 인격 안에 뭉친다는 참 개념이 떠오르지 않았다. 창조자가 인간의 모습을 입고 육신이 되는 것은 이전에 계시된 적이 없었다. 오로지 예수 안에서 계시되었고, 창조 아들이 육체가 되어서 이 땅의 필사자 가운데 거하기까지, 세상은 그런 일을 까맣게 몰랐다.
136:2.1 (1510.4)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 요한이 전한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팔레스타인이 불이 붙었을 때, 온 유대인 사회가 심각하고 엄숙하게 자기 반성에 들어갔을 때, 요한의 전도가 바로 그 절정에 이른 때에, 예수는 세례를 받았다. 유대인은 민족의 단결에 대하여 대단히 깊은 감각이 있었다. 유대인은 아버지의 죄로 인하여 아이들이 고통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죄가 나라를 저주할 수도 있다고 굳게 믿었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려고 나선 자들이 모두 요한이 비난한 특정한 죄를 자신이 저질렀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경건한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의 이익을 위하여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들 편에서 모르고 지은 어떤 죄가 메시아의 오심을 늦추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죄가 있고 죄로 저주받은 나라에 자신들이 속한다고 느꼈고 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 민족 회개의 열매를 보일까 하여 세례를 받으러 나섰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도, 회개하는 의식(儀式)으로서 또는 죄를 용서받으려고 예수가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요한의 손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예수는 다만 많은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의 모범을 따른 것이다.
136:2.2 (1511.1) 요단강으로 세례받으려고 내려갔을 때, 나사렛 예수는 정신을 정복하고 자아를 영과 일체로 만드는 데 관계된 모든 문제에서, 이 땅에서 인간으로서 진화적 승천의 절정에 도달한 필사자였다. 그날 시공(時空)의 여러 진화 세계에서 그는 완전하게 된 한 필사자로서 요단강에서 섰다. 예수의 인간 지성과 깃드는 영 조절자 사이에 완전한 동시화와 충만한 교통이 이루어졌으며, 조절자는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의 신성한 선물이다. 미가엘이 우주의 우두머리 자리로 올라간 뒤에, 바로 그러한 조절자가 유란시아에 사는 모든 정상 인간에게 깃든다. 예수의 조절자는 예외이며, 그는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육신화하여 다른 초인간, 곧 마키벤타 멜기세덱에게 이와 비슷하게 깃들어 이 특별 사명을 위하여 전에 준비되었다.
136:2.3 (1511.2) 세상의 한 필사자가 그런 높은 수준의 완전한 인격을 달성할 때, 보통은 영적으로 높아지는 예비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그 필사자의 성숙한 혼이 그와 관계된 신다운 조절자와 궁극에 융합함으로 종결된다. 그런 변화는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두 동생과 함께 요단강으로 내려간 바로 그날, 나사렛 예수의 인격 체험에서 일어나기로 예정되었던 듯하다. 이 예식은 유란시아에서 순전히 인간적 일생에서 마지막 행위였고, 많은 초인간 관찰자는 조절자가 그 깃든 정신과 융합하는 것을 구경할까 기대했지만 모두 실망하도록 예정되었다. 무언가 새롭고 더 큰 일이 일어났다.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주려고 손을 얹었을 때, 깃들던 조절자는 요수아 벤 요셉의 완전하게 된 인간 혼(魂)을 마지막으로 떠났다. 몇 순간이 지나자 이 신성한 개체는 신별로부터 인격화된 하나의 조절자로, 네바돈 지역 우주 전체에 걸쳐서 그 종류의 우두머리가 되어 돌아왔다. 이렇게 예수는 자신이 전에 지녔던 그 신성한 영이 돌아올 때, 인격이 된 모습을 입고 내려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파라다이스 기원을 가진 바로 이 영이 이제 말씀하는 것을 들었다: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아주 기뻐하는 자라.” 또한 요한도 예수의 두 동생과 함께 이 말씀을 들었다. 요한의 제자들은 물가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지 못했고, 인격이 된 조절자의 환영(幻影)도 구경하지 못했다. 오직 예수의 눈이 인격이 된 조절자를 보았다.
136:2.4 (1511.3) 돌아와서 이제 신분이 높아진, 인격화된 조절자가 이렇게 말씀했을 때, 모두가 말이 없었다. 네 사람이 물 속에서 기다리는 동안, 예수는 가까이 있는 조절자를 우러러보면서 기도했다: “하늘에서 군림하시는 내 아버지여, 주의 이름이 거룩하옵소서. 주의 나라가 오소서!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기도하고 나자 “하늘이 열렸고” 사람의 아들은 이제, 인격이 된 조절자가 제시한 환상을 보았다.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땅으로 내려오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육신화된 생명이 끝났을 때 같은 신분이 될 자신의 환상이었다. 이 하늘의 환상은 예수의 눈에만 보였다.
136:2.5 (1512.1) 요한과 예수가 들은 것은 우주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말씀하는, 인격이 된 조절자의 목소리였고, 이는 조절자가 파라다이스 아버지로부터, 아버지로서 왔기 때문이다. 예수가 땅에서 살던 여생 동안 내내, 인격이 된 이 조절자는 그가 어떤 노력을 했어도 그와 관련되어 있었다. 예수는 신분이 높아진 이 조절자와 항상 교통하고 있었다.
136:2.6 (1512.2) 세례를 받았을 때, 예수는 아무런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고, 아무 죄도 고백하지 않았다. 그의 세례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거룩하게 바쳐진 세례였다. 그는 세례를 받을 때 아버지의 분명한 부르심, 아버지의 일을 돌보라는 마지막 호출을 들었고, 이 여러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40일 동안 혼자서 은둔하려고 떠나갔다. 땅에 있는 동료들과 활발한 개인적 접촉을 하지 않고 한동안 이렇게 물러나면서, 예수는 한 승천하는 필사자가 마음 속에서 우주의 아버지의 계심과 융합할 때는 언제나 상물질 세계에서 일어나는 바로 그 과정을 그의 신분으로서 유란시아에서 밟고 있었다.
136:2.7 (1512.3) 이 세례받은 날은 예수의 순전히 인간다운 인생을 종결하였다. 신다운 아들은 아버지를 발견했고 우주의 아버지는 육신화한 아들을 발견했으며, 서로 말을 건다.
136:2.8 (1512.4) (세례받을 때, 예수는 거의 서른한 살 반이었다. 누가는 예수가 티베리우스 케자가 통치하던 15년째 해에 세례받았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투스가 서기 14년에 죽었으니까, 이 해는 서기 29년일 것이다. 한편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전에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2년 반 동안 공동으로 황제였고, 후자를 기념하려고 서기 11년 10월에 주화(鑄貨)를 찍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실제로 통치하던 15년째는 바로 서기 26년, 예수가 세례를 받은 해이다. 이 해는 또한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서 통치를 시작한 해였다.)
136:3.1 (1512.5) 여섯 주 동안 헤르몬산에서 이슬에 젖어 있을 때, 예수는 세례받기 전에 필사자로 자신을 수여하는 생애에서 큰 시험을 견디었다. 거기 헤르몬산에서, 이 땅에서 도움받지 않은 필사자로서, 유란시아의 허세부리는 자, 칼리가스티아, 곧 이 세상의 임금을 만나서 물리쳤다. 그 중대한 날에, 우주의 기록에 따르면 나사렛 예수는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가 되었다. 이내 네바돈의 최고 군주라 선포되기로 예정된 이 유란시아의 영주는 이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새 나라를 선포할 계획을 세우고 그 기법을 결정하려고 40일 동안 은둔에 들어갔다.
136:3.2 (1512.6) 세례를 받은 뒤에, 그는 조절자가 인격화함으로 말미암아 달라진 세상 및 우주 관계에 40일 동안 자신을 적응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페레아 언덕에서 혼자 있던 이 기간에, 그는 바야흐로 개시하려고 하는 지상 생활의 새로운 변화된 단계에서 어떤 정책을 추구하고 어떤 방법을 사용할 것인가 결정했다.
136:3.3 (1512.7) 예수는 금식할 목적으로, 혼에 고통을 주려고 은둔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금욕주의자가 아니었고, 하나님께 접근하는 데 관한 모든 그러한 개념을 영원히 깨뜨리려고 왔다. 이렇게 은둔하기를 구하는 이유는 모세와 엘리야, 아니 세례자 요한을 움직인 이유들과 전혀 달랐다. 예수는 그와 자신이 만든 우주의 관계, 또한 온 우주와 그의 관계를 온통 자의식하고 있었고, 파라다이스 아버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감독을 받았다. 유란시아에서 육신화에 들어가기 전에, 형 이마누엘이 그에게 수여 임무를 맡긴 것과 그 지침을 이제 충분히 기억했다. 이제 방대한 이 모든 관계를 뚜렷하고 완전하게 이해했다. 그리고 이 세상과 지역 우주에 있는 모든 다른 세계를 위하여, 대중을 위하여 수고하는 계획을 생각해 보고 그 과정을 결정할 수 있도록, 그는 한동안 조용히 명상하려고 떠나 있기를 바랐다.
136:3.4 (1513.1) 산에서 적당한 피난처를 찾아서 헤매 다니면서, 예수는 그의 우주의 최고 집행자, 네바돈의 밝은 아침별, 곧 가브리엘을 만났다. 가브리엘은 이제 우주의 창조 아들과 친히 교통하는 경로를 다시 열었다. 유란시아 수여에 들어가는 준비로 에덴시아에 갔을 때 미가엘이 구원자별에서 동료들을 떠난 뒤에 처음으로, 직접 만났다. 이마누엘의 지시에 따라서, 그리고 유버르사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권한으로, 가브리엘은 이제, 그의 우주를 다스리는 완벽하게 된 통치권의 획득, 그리고 루시퍼 반란의 종결, 이 두 가지와 관련된 한, 유란시아에서 예수의 자신 수여 체험이 실지로 종결되었음을 가리키는 정보를 예수 앞에 제시하였다. 전자(前者)는 세례받는 날에 이루어졌고, 그때 그의 조절자가 인격화된 것은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행한 자신 수여(授與)가 완전하고 완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후자는 기다리는 소년 티글라스와 함께 하려고 헤르몬산에서 내려온 그날, 역사적 사실이 되어버렸다. 예수는 지역 우주와 초우주의 가장 높은 권한에 근거하여, 그의 개인 지위가 통치권 및 반란에 영향을 받는 부분에 한하여 그의 수여 과업은 끝났다는 통지를 받았다. 세례를 받으며 본 환상에서, 그리고 깃드는 생각 조절자가 인격이 된 현상에서 그는 이미 이 확신을 파라다이스로부터 직접 받았다.
136:3.5 (1513.2) 가브리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에서 머무르는 동안, 에덴시아의 별자리 아버지가 예수와 가브리엘에게 친히 나타나서 말했다: “기록이 완성되었나이다. 미가엘 611,121번이 네바돈 우주를 다스리는 통치권은, 완전히 얻은 상태로 우주의 아버지의 바른 편에 보존되어 있나이다. 유란시아에서 육신화하는 일에 당신의 후원자였던 형 이마누엘이 당신을 수여에서 해방한다는 것을 내가 알리나이다. 지금이나 나중 어느 때라도 자신이 택하는 방법으로 육신화 수여를 끝내고 아버지의 바른 편으로 올라가서 통치권을 받고, 톡톡히 피땀 흘려 얻은 권리, 온 네바돈을 조건 없이 통치하는 권리를 자유롭게 맡아도 좋사옵나이다. 또한 당신의 우주에서 일어난 모든 죄와 반란을 종결하는 데 상관되는 기록, 그리고 앞날에 어떤 그러한 가능한 반란이 일어나더라도 이를 처리할 완전하고 제한 없는 권리를 당신에게 부여하는 것과 관계된 초우주의 기록이 끝났다는 것을,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권한으로 또한 증언하나이다. 절차로 볼 때, 유란시아에서 필사 인간의 육체를 입고 당신이 하실 일은 끝났사옵나이다. 이제부터 당신이 걷는 길은 당신이 선택할 문제이나이다.”
136:3.6 (1513.3) 에덴시아의 최고 아버지가 떠났을 때, 예수는 우주의 복지(福祉)에 대하여 가브리엘과 오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마누엘에게 안부를 전하면서, 유란시아에서 바야흐로 착수하려는 일로 구원자별에서 자신 수여 이전에 부여된 책임과 관련하여 그가 받았던 충고를 늘 염두에 두겠다고 확언을 주었다.
136:3.7 (1514.1) 혼자 있던 이 40일 동안 내내,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를 찾는 일에 열중했다. 여러 번 그가 거하는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왔지만 결코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136:4.1 (1514.2) 산 위에서 날마다, 예수는 남은 유란시아 수여 생애를 위하여 계획을 세웠다. 그는 먼저 요한과 같은 시기에 가르치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요한의 일이 목적을 이룰 때까지, 아니면 감옥에 갇혀서 요한이 갑자기 멈출 때까지, 그는 비교적 은둔 상태에 남아 있기로 계획하였다. 예수는 요한의 두려움 없고 분별 없는 설교가 곧 집권자들의 두려움과 적의를 일으킬 것을 잘 알았다. 요한의 불안한 상황에 비추어서, 예수는 민족과 세계의 이익을 위하여, 그의 광대한 우주에 두루, 사람 사는 모든 세계를 위하여, 대중에게 봉사하는 계획을 분명히 세우기 시작했다. 필사자로 미가엘이 자신을 유란시아에 수여했지만 이는 네바돈의 모든 세계를 위한 것이었다.
136:4.2 (1514.3) 자기의 계획을 요한의 동향과 조정하는 대체적 계획을 살펴본 뒤에, 예수가 먼저 한 일은 머리 속에서 이마누엘의 지시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수고하는 방법에 관하여 받은 충고, 그리고 행성에 영구한 기록을 하나도 남기면 안 된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았다. 모래 위가 아니고 예수는 결코 다시 어떤 것에도 글을 쓰지 않았다. 다음에 나사렛을 방문했을 때 동생 요셉이 아주 서운해하였지만, 예수는 목수 작업장 근처의 여러 판자에 보존되어 있고 옛 집의 벽에 걸려 있던 그의 글을 모조리 없애버렸다. 그가 본 세상에 대하여 그가 어떤 경제ㆍ사회ㆍ정치적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관하여 이마누엘이 준 충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136:4.3 (1514.4) 예수는 혼자 있던 이 40일 동안에 금식하지 않았다. 먹을 것이 없이 지낸 가장 오랜 기간은 산 속에서 처음 이틀이었고, 그때 너무 골똘히 생각에 빠져서 먹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나 사흘째에 그는 먹을 것을 찾아 갔다. 이 기간에 그는 이 세상에 주둔하거나 어느 다른 세상에서 온, 어떤 악한 영이나 반란에 가담했던 성격자들의 시험을 받지도 않았다.
136:4.4 (1514.5) 이 40일은 인간의 지성과 신(神)의 지성 사이에 마지막 회의가 있은 기회, 아니 오히려 이 두 지성이 이제 하나가 되어 처음으로 정말로 활동하는 때였다. 이 중대한 명상 시간으로부터 생긴 결과는, 신의 지성이 인간의 지능을 이기고 영적으로 지배했음을 확고히 보여주었다. 이때부터 계속, 사람의 지성은 하나님의 지성이 되었다. 비록 인간 지성의 자아(自我)가 늘 자리에 있었어도, 영적으로 변화된 이 인간 지성은 언제나 말한다. “내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136:4.5 (1514.6) 이 중대한 시간에 처리한 것들은 굶고 허약해진 정신에 황홀한 환상을 본 것이 아니다. “황야에서 받은 예수의 시험”이라고 나중에 기록에 남은, 뒤범벅이 된 유치한 상징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 기간은 유란시아에 자신을 수여하던 동안에 파란 많고 다채로웠던 생애 전체에 대하여 생각하고, 한편 또한 반란으로 고립된 모든 다른 구체를 개선하는 데 무언가 이바지하면서, 최선으로 이 세상에 소용이 되도록 계속 봉사하는 계획을 조심스럽게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안돈과 폰타의 시절부터 아담의 직무 불이행을 거쳐서, 또 살렘에 있던 멜기세덱의 봉사에 이르기까지, 예수는 유란시아에서 인간 생활의 폭 전체를 생각해 보았다.
136:4.6 (1514.7) 유란시아에 한동안 머무르기로 작정할 경우에, 자신을 세상에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 있다고 가브리엘은 예수에게 상기시켰다. 이 문제에서 그가 무엇을 선택하든지 우주 통치권이나 루시퍼 반란의 종결과 아무 상관이 없으리라는 것이 예수에게 뚜렷이 전달되었다. 세계에 봉사하는 두 가지 길은 다음과 같다:
136:4.7 (1515.1) 1. 자신의 길―이 세상에서 당면한 필요의 관점, 그리고 당장 자신의 우주를 교육시키는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쾌적하고 유익하게 보일 수도 있는 길.
136:4.8 (1515.2) 2. 아버지의 길―온 우주의 파라다이스 행정부에 있는 높은 성격자들이 상상한 대로, 사람의 일생의 이상, 멀리 내다보는 이상을 모범으로 보이는 것.
136:4.9 (1515.3) 땅에서 여생을 정리할 수 있는 두 가지 길이 있다는 것이 이처럼 예수에게 뚜렷해졌다. 이 두 길은 각기, 눈앞의 상황에 비추어서 볼 때, 좋다고 볼 수 있는 무엇이 있었다. 이 두 가지 행동 방법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도 우주 통치권을 받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으리라는 것을 사람의 아들은 분명히 깨달았다. 그것은 이미 결정되었고 온 우주의 기록에서 봉인된 문제요, 친히 나타나서 청구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렇게 고귀하게 시작한 것 같이, 예수가 언제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땅에서 육신화 생애를 끝마치는 것을 좋다고 본다면, 파라다이스 형 이마누엘이 크게 만족할 것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이렇게 혼자 있는 가운데 사흘째, 예수는 땅에서 생애를 마치기 위하여 세상으로 돌아가겠다고, 두 가지 길이 있는 상황에서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택하리라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그 결심에 언제나 충실하게 그는 땅에서 여생을 끝까지 살았다. 쓰디쓴 마지막 날까지 최고의 뜻을 하늘 아버지의 뜻에 변함없이 복종시켰다.
136:4.10 (1515.4) 산의 불모지에서 지낸 40일은 큰 시험을 받는 기간이 아니라 오히려 주가 큰 결정을 내린 기간이었다. 자신과 외롭게, 그리고 아버지의 가까운 계심과―인격이 된 조절자와―교통하던 이 기간에 (개인 수호 천사가 이제 더 없었다) 하나하나 큰 결정에 도달했고 이것은 땅에서 여생 동안 그의 정책과 행위를 규제하게 되었다. 헤르몬산에서 투쟁했던 토막 이야기들과 뒤섞여, 그리고 더 나아가서 모든 위대한 선지자와 인간 지도자가 금식하고 기도했다고 생각되었고, 이렇게 함으로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하게 만드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에, 큰 시험이 있었다는 전통이 후일에 이 고립된 기간에 따라붙게 되었다. 새롭거나 심각한 어떤 결정에 부닥쳤을 때,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애쓰도록 자신의 영과 교통하려고 은둔하는 것이 언제나 예수의 버릇이었다.
136:4.11 (1515.5) 땅에서 여생을 보내는 이 모든 계획에서, 예수는 두 가지 상반되는 행동 과정 때문에 언제나 그의 인간 마음 속에 갈등이 있었다:
136:4.12 (1515.6) 1. 민족이―그리고 전 세계가―그를 믿고 영적인 새 하늘나라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려는 강력한 소망을 품었다. 오시는 메시아에 관하여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136:4.13 (1515.7) 2. 아버지가 승인할 것이라고 생각한 대로 살고 일하며, 곤경에 빠진 다른 세계들의 이익을 위하여 일을 처리하고 하늘나라를 세우는 일을 하면서 계속 아버지를 드러내고 아버지의 신다운, 사랑하는 성품을 보여주는 것.
136:4.14 (1515.8) 이 중대한 기간 내내, 예수는 오래 된 어느 바위 동굴 안에서 살았고 이곳은 언젠가 바이트 아디스라고 부른 마을 가까이, 산 옆에 있는 피난처였다. 그는 바위로 된 이 피난처 가까이 있는 산 옆에서 나오는 작은 샘물에서 물을 마셨다.
136:5.1 (1516.1) 자신, 그리고 인격이 된 조절자와 함께 이 회의를 시작한 지 사흘째에, 집합한 네바돈 하늘 무리의 환상(幻想)이 예수에게 제시되었는데 그 지휘관들이 사랑하는 군주의 뜻을 보살피라고 이들을 파송하였다. 이 막강한 무리는 12 군단의 세라핌, 그리고 비례대로 모든 계급의 지적 우주 존재를 포함하였다. 예수가 고립되어 있는 동안에 처음으로 내린 큰 결정은, 뒤이어 유란시아에서 대중 사업을 벌이는 계획과 연결하여 이 막강한 성격자들을 이용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과 상관이 있었다.
136:5.2 (1516.2)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이 명백해지지 않는 한, 그는 이 광대한 집합 중에 한 성격자도 이용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 일반적 결정을 내렸는데도, 이 광대한 무리는 땅에서 여생 동안 내내 함께 남아 있었고, 군주의 뜻이 실오라기만큼 표현되어도 언제나 이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예수는 따라다니는 이 성격자들을 항상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았어도 그와 관련된, 인격이 된 조절자는 그들을 항상 보았고 모두와 교통할 수 있었다.
136:5.3 (1516.3) 산에서 40일 동안 은둔하다가 내려오기 전에, 예수는 이 시중드는 우주 성격자 집단의 통솔권을 인격이 된 조절자에게 최근에 주었다. 그리고 모든 부서의 우주 지성 존재들로부터 선택된 이 성격자들은 유란시아 시간으로 4년이 넘는 동안, 높고 노련하고 인격이 된 이 신비의 훈계자의 지혜로운 인도를 받으며 온순하고 공손하게 활동하였다. 이 강력한 집회의 지휘를 맡으면서, 그 조절자는 한때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일부였고 본질이었으니까, 아버지가 간섭을 뜻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어떤 경우에도 이 초인간 관리들이 땅에서 그의 생애와 연결하여, 또는 그의 생애를 위하여 봉사하거나 자신들을 드러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예수에게 다짐하였다. 이렇게 한 가지 큰 결정으로, 아들이 땅에서 수고하는 동안 어떤 분명한 행위나 사건에 아버지가 따로 참여하려고 하지 않으면, 그의 필사 여생과 상관되는 어떤 문제에도, 어떤 초인간적 협조도 받지 않겠다고 예수는 자진해서 포기하였다.
136:5.4 (1516.4) 그리스도 미가엘에게 시중드는 이 우주 집단의 지휘권을 받아들이면서, 인격이 된 조절자는 그러한 집합의 우주 생물은 창조자가 이양한 권한으로 인하여 그 공간 활동에 제약을 받을 수 있지만 그들의 시간 활동과 관련된 경우에 그런 제한은 효력이 없다고 힘들여 지적하였다. 이 제한은, 일단 인격이 되었을 때 조절자는 비시간 존재라는 사실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그의 지휘를 받는 살아 있는 지성들을 조절자가 통제하는 것은, 공간을 다루는 어떤 문제에 관해서도 완벽하고 완전할 터이지만, 시간에 관하여 그런 완전한 제한을 부과할 수 없다고 예수는 훈계를 받았다. 조절자는 말했다: “너의 지상(地上) 생애와 관련하여 어떤 면에서도 네가 지시한 대로, 시중드는 이 집단의 우주 지성들이 이용되는 것을 내가 금하겠노라. 그러나 네가 택한 대로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신성한 뜻이 성취되도록 아버지가 그런 관리들을 해방하라고 지시하는 경우는 예외요, 그리고 너의 신 및 인간 의지로 말미암아 오직 시간에 관해서 네가 자연스러운 땅의 질서를 벗어나게 만들 어떤 선택을 내리거나 행위할 경우는 예외이라. 모든 그러한 경우에 나는 무력(無力)하며, 통일된 권력 밑에 여기 완벽하게 모인 너의 생물은 마찬가지로 무력하니라. 너의 연합된 두 성품이 일단 그러한 소망을 품는다면, 네가 선택하여 내린 이 명령은 대번에 집행될 것이라. 모든 그러한 문제에서 너의 소망은 시간의 단축일 터이고, 계획한 물건은 이미 존재하느니라. 나의 지휘 밑에서 이것은 너의 잠재 통치권에 부과될 수 있는 가능한 최대의 제한이라. 내 자의식(自意識) 안에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시간에 관련된 어떤 일에도 나는 네가 지은 생물을 제한할 수 없노라.”
136:5.5 (1517.1) 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에서 한 사람으로서 계속 살겠다는 결정이 처리되는 것에 대하여 예수는 통지를 받았다. 오직 시간에 관련된 그런 문제를 제쳐놓고, 한 가지 결정으로, 그는 시중드는 모든 우주 집단의 다채로운 지성 존재들이 뒤따르는 대중 봉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막았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특정하게 달리 판결하지 않으면, 예수의 봉사에서 어떤 가능한 초자연의 일이나 초인간적이라 생각되는 일이 생기는 것은 온전히 시간의 제거에 관계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렇게 분명히 말한 시간 문제를 제외하고 그가 유란시아에서 사는 동안에, 예수가 땅에서 앞으로 할 수고와 관련하여 어떤 기적이나 자비로운 봉사나 어떤 다른 가능한 사건도, 인간사에서 확립되고 정상으로 작용하는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행위임을 가리키는 성질이나 특징이 전혀 있을 수 없다. 물론, “아버지의 뜻”이 나타나는 데는 아무런 제한을 둘 수 없다. 한 우주의 이 잠재 군주가 분명히 나타낸 소망과 관련하여, 이 하나님인 사람의 뜻을 직접, 분명히 표현한 행위로만 시간의 제거를 피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의지 행위는 문제가 된 행위나 사건에 관계되는 대로 시간이 단축되거나 제거되어서는 안 된다는 효과를 가진다. 명백한 시간 기적이 나타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예수는 항상 시간을 의식(意識)하는 것이 필요했다. 분명한 소망을 품는 것과 관련하여, 그의 편에서 어떤 시간 의식의 착오가 생기면, 이 창조 아들의 머리 속에서 생각한 일이 집행되며, 게다가 시간의 간섭이 없이 그렇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136:5.6 (1517.2) 인격이 된, 관계된 조절자의 감독과 통제를 통해서, 미가엘은 공간에 대하여 땅에서 친히 하는 활동을 완전히 제한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시간에 관해서는, 네바돈의 잠재 군주로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그의 새로운 지위를 이렇게 제한하기가 불가능했다. 나사렛 예수가 유란시아에서 대중에게 봉사를 시작하려고 나섰을 때 이것이 그의 실제 지위였다.
136:6.1 (1517.3) 신이라는 그의 새로운 지위에 본래 있는 잠재성에 비추어서 결정될 수 있는 한, 지음받은 지성 존재의 모든 등급, 모든 성격자에 관하여 정책을 결정하고 나서, 예수는 이제 생각을 자신에게 돌렸다.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사물과 존재를 창조한 자, 이제 충분히 자의식하는 그가 사람들 사이에서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갈릴리로 돌아갔을 때 즉시 부닥칠 되풀이되는 생활 형편에서, 그가 이 창조자 특권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사실은, 이미 이 외로운 산 속에, 바로 그가 있던 자리에서, 이 문제는 먹을 것을 얻는 일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난 적이 있다. 혼자 명상에 잠긴 사흘째가 되어서 인간의 몸은 배가 고파졌다. 어떤 보통 사람이 하는 것처럼 먹을 것을 찾아서 나설 것인가, 아니면 단지 정상의 창조 능력을 써서 적당한 육체의 영양을 손 닿는 곳에 창조할 것인가? 너희에게 주의 이 큰 결심은 하나의 시험으로서―가상(假想)의 적들이 “이 돌로 하여금 빵 덩어리가 되라 명령하라고” 도전했다고―묘사되었다.
136:6.2 (1518.1) 따라서 예수는 땅에서 남은 수고를 베푸는 것에 대하여 또 하나의 일관성 있는 정책에 이르렀다. 개인의 필요가 관련된 한, 그리고 대체로 다른 인물과 가지는 관계에서도 이제 의도하여 땅에서 정상으로 존재하는 길을 추구하기로 하였다. 자신이 확립한 자연 법칙을 뛰어넘거나 위반하거나 짓밟을 정책을 쓰지 않기로 분명히 작정하였다. 그러나 인격이 된 조절자로부터 이미 경고를 받았다시피, 어떤 상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 자연 법칙이 크게 가속될 수 없다고 스스로 다짐할 수 없었다. 예수는 일생의 일이 자연 법칙에 따라서, 그리고 기존의 사회 조직과 조화되게 구성되고 실행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결정했다. 이로서 주는 기적과 이적을 행하지 않는다는 결정이나 마찬가지인 생활 계획을 선택하였다. 다시 “아버지의 뜻”에 찬성하는 쪽으로 결정했다. 다시 그는 만사를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손에 맡기었다.
136:6.3 (1518.2) 예수의 인간 성품은 첫째 의무가 자아 보존이라고 명령했다. 그것이 시간과 공간의 여러 세계에서 자연인(自然人)의 정상 태도요, 따라서 유란시아 필사자의 정당한 반응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 세상과 거기에 사는 인간에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방대한 우주의 다양한 생물을 가르치고 영감을 주도록 고안된 인생을 살고 있었다.
136:6.4 (1518.3) 세례로 깨우침을 받기 전에, 그는 하늘 아버지의 뜻과 인도하심에 완전히 복종하면서 살았다. 그는 필사자로서 아버지의 뜻에 절대로 의존하는 그런 태도를 계속하겠다고 힘차게 결정하였다. 그는 자연스럽지 않은 과정을 밟으리라 마음을 정했다―자아 보존을 추구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 정책을 계속 추구하기로 했다. 그의 인간 머리에 익숙한 성서의 말씀 속에서 결론을 내렸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지니라.” 배고픔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육체의 성질을 가진 식욕에 관하여 이러한 결론을 내리면서, 사람의 아들은 육체의 모든 다른 욕구, 인간의 성질을 가진 자연스러운 충동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선언하였다.
136:6.5 (1518.4) 초인간 능력을 남을 위하여 아마 쓸지 모르지만, 자신을 위하여는 결코 그렇지 않다. “저가 남은 구하였으되, 스스로를 구할 수 없도다”하고 사람들이 놀리는 말을 했을 때―그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종말까지 이 정책을 한결같이 따랐다.
136:6.6 (1518.5) 유대인은 모세보다 더욱 큰 이적을 행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세는 사막에서 바위로부터 물이 솟아나게 하고 황무지에서 만나로 조상들을 먹였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예수는 동포가 어떤 종류의 메시아를 기대하는가 알았고 가장 낙천적인 기대에 맞게 행할 모든 능력과 특권이 있었지만, 그러한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는 대단한 계획에 반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예수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기적을 행하는 그러한 과정은 야만인 주술사들이 무지한 마술을 쓰고, 퇴화된 관습을 가졌던 옛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아마도 자기가 지은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연 법칙을 가속할지 몰랐지만, 자기 이익을 위해서나 동료 인간을 위압하기 위해서, 자신의 법칙을 뛰어넘는 일은 하려 하지 않았다. 주는 최종의 결정을 내렸다.
136:6.7 (1518.6) 예수는 자기 민족의 처지를 슬퍼했다. 그들이 오시는 메시아를 기대하고, “땅이 열매를 1만 배 맺고 한 포도나무에는 1천 가지가 있으며, 가지마다 1천 송이를 생산하고 송이마다 포도 알 1천 개를 맺으며 포도 알마다 포도주 1갤론을 생산할” 그때를 기대하도록 어떻게 유도되어 왔는가 잘 알았다. 유대인은 메시아가 기적 같이 풍성한 시대를 개시할 것이라 믿었다. 히브리인은 기적의 전통과 이적(異蹟)의 전설에 오랫동안 젖어 있었다.
136:6.8 (1519.1) 그는 빵과 포도주를 몇 배로 불리려고 오는 메시아가 아니었다. 겨우 이 세상의 필요를 보살피려고 오지 않았다. 땅에 있는 자녀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드러내려고 왔고, 한편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살려는 진지한 노력을 그와 함께 하라고 땅에 있는 자녀들을 이끌려고 애썼다.
136:6.9 (1519.2) 이 결정을 내리면서 개인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나 순전히 이기적 이익과 영광을 얻기 위하여, 신성한 재능과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팔아넘기는 것이 어리석고 죄가 된다는 것을 나사렛 예수는 구경하는 우주에게 보여주었다. 바로 그것이 루시퍼와 칼리가스티아의 죄였다.
136:6.10 (1519.3) 예수의 이 큰 결정은 이기심을 채우고 오감을 충족하는 것은, 그것만으로 그 자체로, 진화하는 인간에게 행복을 줄 수 없다는 진리를 눈부시게 보여준다. 필사자로 사는 데에는 더 높은 가치―지적(知的) 통달과 영적 성취―가 있고 이것은 사람의 순전히 육체적 욕구 및 충동의 충족, 필요한 충족을 훨씬 초월한다. 사람이 천성으로 부여받은 재능과 능력은 더 높은 정신 및 영 능력을 개발하고 높이는 데 주로 바쳐야 한다.
136:6.11 (1519.4) 이렇게 예수는 새롭고 더 낫게 사는 방법, 즉 인생에서 상급의 도덕적 가치, 그리고 공간 세계에서 진화하는 인간으로 존재하면서 심오한 영적 만족을 얻는 방법을 우주의 인간들에게 드러냈다.
136:7.1 (1519.5) 먹을 것, 그리고 물질인 몸의 필요를 육체적으로 보살피는 것, 자신과 동료들의 건강을 돌보는 일과 같은 문제에 관하여 결정을 내리고 나서, 해결해야 할 다른 문제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신변의 위험에 부닥쳤을 때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가? 인간으로서 그의 안전에 대하여 정상으로 경계하고, 육체를 입은 생애가 때 이르게 끝나지 않도록 적당히 조심하지만, 육체를 입은 일생에 위기가 닥칠 경우에, 그는 어떤 초인간적 간섭도 삼가기로 결심하였다. 이 결정을 내리고 있을 때, 예수는 앞에 벼랑이 있는 바로 거기에 툭 튀어나온 바위 선반 위에, 어느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 선반에서 훌쩍 몸을 던져서 공중으로 나갈 수 있고, 유란시아에서 일생의 일을 집행하는 데 하늘 지성 존재들이 개입하라고 부르지 않겠다는 처음 큰 결정을 취소하고, 자아를 보존하는 태도와 관계되는 둘째 결정을 돌이킨다면, 몸을 다치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깨달았다.
136:7.2 (1519.6) 예수는 같은 민족의 사람들이 자연 법칙을 초월할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 구절을 잘 배웠다: “아무런 악한 것도 너에게 닥치지 아니하리라, 아무 전염병이 네 거처에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라. 네가 어떤 길을 가더라도 그가 천사들에게 너를 맡아서 지키라 할 것임이라.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손 안에 너를 붙들리라.” 이 따위의 주제넘은 태도, 아버지의 인력(引力) 법칙을 이렇게 무시하는 것이, 가능한 해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또는 혹시나 잘못 가르침받고 혼란에 빠진 민족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러나 그런 과정은, 표징을 구하는 유대인들이 아무리 흡족해 하더라도, 아버지를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확립된 법칙을 집적거리는 의심스러운 일이리라.
136:7.3 (1519.7)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서, 개인적 처신에 관계된 한, 주가 확정된 자연 법칙을 무시(無視)하면서 일하기를 물리쳤음을 아니까, 그가 결코 물 위로 걷거나 세계를 다스리는 물질적 질서를 짓밟는 어떤 다른 일도 하지 않았음을 너희가 분명히 안다. 물론, 인격이 된 조절자의 관할에 맡겨진 문제들과 관련하여, 시간 요소를 통제하는 힘이 없는 것으로부터 그를 온전히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아직까지 전혀 발견되지 않았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136:7.4 (1520.1) 땅에서 전 생애를 통하여, 예수는 이 결정에 한결같이 충실했다. 바리새인들이 표징을 보이라고 비웃든지, 아니면 갈보리에서 구경꾼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감히 덤비든지, 그는 산허리에서 이때 내린 결정을 변치 않고 고수하였다.
136:8.1 (1520.2) 이 하나님인 사람이 씨름하던 문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즉시 결정한, 다음으로 큰 문제는 동료 인간들의 눈길을 끌고 지지를 얻을 목적으로 그의 초인간 능력을 얼마큼이라도 사용해야 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었다. 굉장하고 놀라운 것을 갈망하는 유대인들을 만족시키려고 어떤 방법으로든 우주 권능을 써야 할 것인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결심하였다. 사람들이 그의 사명을 주목하게 만드는 방법과 같은 모든 그러한 습관을 없애는 과정을 따르겠다고 방침을 결정하였다. 그는 이 큰 결정에 한결같이 충실히 살았다. 시간 단축으로 수많은 자비 행위가 명백히 나타나는 것을 허락했을 때에도, 치료받은 자에게 받은 이익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입을 열지 말라고 거의 변함없이 타일렀다. 신성을 증명하고 나타내라고 “우리에게 징조를 보이라” 적들이 비웃으며 도전하는 것을 언제나 물리쳤다.
136:8.2 (1520.3) 기적을 행하고 놀라운 일을 하는 것은 물질 지성을 위압함으로 기껏해야 겉으로 나타나는 충성을 요구하리라는 것을 예수는 아주 지혜롭게 내다보았다. 그런 연출은 하나님을 계시하지도 사람을 구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순히 이적(異蹟)을 행하는 자가 되지 않으려 하였다. 오직 한 가지 일에―하늘나라를 세우는 데―전념하기로 결의하였다.
136:8.3 (1520.4) 예수가 자신과 교통하는 이 중대한 대화 전체를 통해서, 따져 보며 의심하는 듯한 인간적 요소가 있었으니, 이는 예수가 하나님일 뿐 아니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유대인들이 그를 메시아로서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이 뻔했다. 게다가 그가 꼭 한 가지 초자연적 일을 하기로 한다면, 그의 인간 지성은 그것이 참으로 신의 지성에 복종해서 된 것임을 확실히 알 것이다. 의심하는 성질을 가진 인간 지성에게 신의 지성이 이렇게 양보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과 일치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결정했고, 인격이 된 조절자가 자리에 계신 것이 신성이 인간과 협동하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라고 지적하였다.
136:8.4 (1520.5) 예수는 발이 닳도록 여행하였고, 로마ㆍ알렉산드리아ㆍ다마스커스를 회상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법을―정치와 상업에서 사람들이 타협과 외교로 어떻게 목적을 이루는가―알았다. 땅에서 사명을 촉진하는 데 이 지식을 이용할 것인가? 아니라! 마찬가지로, 하늘나라를 세우는 데 세상의 지혜와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고 재력의 영향도 받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다시 그는 아버지의 뜻에 순전히 의존하기로 작정하였다.
136:8.5 (1520.6) 예수는 자신의 권능 중 하나를 행사하는 여러 지름길을 잘 알았다. 나라와 온 세상의 눈길을 자신에게 즉시 집중시킬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알았다. 얼마 안 있어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유월절을 축하할 터이고 그 도시는 방문자들로 들끓을 것이었다. 그는 성전의 꼭대기에서 내려와서 놀란 군중 앞에서 공중에서 걸을 수 있었다. 이것이 그들이 찾고 있던 종류의 메시아였다. 그러나 그가 다윗의 왕좌를 다시 세우려고 오지 않았으므로 나중에 그들에게 실망을 줄 것이었다. 신의 목적을 이루는 길, 자연스럽고 느리고 확실한 길보다 더 앞서 가려고 애쓰는, 칼리가스티아의 방법이 쓸모 없음을 알았다. 다시, 사람의 아들은 아버지의 길, 아버지의 뜻에 온순하게 머리를 숙였다.
136:8.6 (1521.1) 예수는 자연스럽고 평범하고 어렵고 시련을 견디는 방법으로, 인류의 마음 속에서 하늘나라를 세우기로 했다. 후일에 하늘나라를 확장하고 그 세력을 키우는 일을 하면서 땅에 있는 자녀들은 바로 그런 과정을 따라야 한다. “숱한 시련을 통해서 대대로 많은 자손이 하늘나라로 들어가리라”는 것을 사람의 아들이 잘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문명인의 가장 큰 시험, 권력을 가지고 이를 순전히 이기적이거나 사사로운 목적에 쓰기를 굳건히 물리치는 큰 시험을 지금 거치고 있었다.
136:8.7 (1521.2) 사람의 아들의 일생과 체험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아들은 20세기나 다른 세기에 살던 필사자의 지성이 아니라, 1세기 인간의 지성 속에서 육신화되었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의 인간 자질을 자연스럽게 얻었다는 생각을 전하려는 것이다. 그는 그가 살던 시대의 유전(遺傳) 및 환경 요소, 그리고 그가 받은 훈련과 교육의 영향으로 얻은 결과였다. 그의 인간성은 진정하고 자연스러웠고, 그 시절과 그 세대에 선행(先行)하던 실제의 지적 상태와 사회 및 경제 조건으로부터 얻어졌고, 이로 인하여 육성되었다. 이 하나님인 사람의 체험 속에서 신(神)의 지성이 인간의 지능을 초월할 가능성이 언제나 있었다. 그렇기는 해도 그의 인간 지성이 활동할 때, 그리고 그렇게 하는 동안, 그의 인간 지성은 그 시절에 살던 인간의 환경 조건 밑에서 참된 필사자의 지성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했다.
136:8.8 (1521.3) 내키는 대로 권한을 보여줄 목적으로 인위적 상황을 만들어 내거나, 또는 도덕적 가치를 향상시키거나 영적 진보를 가속할 목적으로 특별한 권능을 헤프게 휘두르는 것이 어리석음을 예수는 광대한 우주의 모든 세계에 보여주었다. 땅에서 이룰 그의 사명이 마카비 통치가 가져온 실망의 되풀이가 되지 않게 하려고 결심하였다. 피땀 흘리지 않고 인기(人氣)를 얻으려는 목적이나 정치적 위신을 얻기 위하여 신의 속성을 팔아버리려 하지 않았다. 그는 신성하고 창조적인 에너지를 국가 권력이나 국제적 위신으로 변질시키는 것을 묵인하려 하지 않았다. 나사렛 예수는 죄와 동행하기는커녕 악과 타협하기를 거절하였다. 주는 땅에서 현세에 중요시할 모든 다른 것 위에, 승리의 기분으로 아버지의 뜻에 충성하는 일을 올려놓았다.
136:9.1 (1521.4) 자신과 자연 법칙 및 영적 능력의 관계에 대하여 그러한 원칙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세우는 데 어떤 방법을 선택할 것인가에 주의를 기울였다. 요한은 이미 이 일을 시작했다. 전하는 말씀을 그가 어떻게 계속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요한의 사명을 이어받아야 하는가? 효과적 노력과 총명한 협동을 위하여 요한의 추종자들을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가? 예수는 더 이상 자신을 유대인의 메시아로, 적어도 그 시절에 대중이 상상한 메시아로 보는 것을 금할 최종의 결정에 지금 이르고 있었다.
136:9.2 (1522.1) 기적 같은 권력을 입고 이스라엘의 적들을 동댕이치고 빈곤과 억압에서 해방된 유대인을 세계의 통치자로서 세울 구원자를 유대인들은 마음 속에 상상하고 있었다. 예수는 이런 희망이 결코 실현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늘나라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악을 내쫓는 것과 상관이 있고 순전히 영적 관심거리임을 알았다. 눈부시게 번쩍 권력을 전시함으로 영적인 나라를 개시하는 것이 현명한가 생각해 보았지만―그러한 과정은 허락될 수 있고, 온전히 미가엘의 관할권에 속했다―그러한 계획을 반대하기로 완전히 결심하였다. 칼리가스티아의 혁명적 기법과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에 복종함으로 잠재적으로 세상을 이겼고, 그가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로서 할 일을 마치기로 계획하였다.
136:9.3 (1522.2) 이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력을 소유할 가능성을 지니면서, 하나님인 이 사람이 통치권의 깃발을 펄럭이겠다, 기적을 행하는 대군을 전투 대열로 정렬하겠다고 일단 결심하면 유란시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인가 너희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타협하려 들지 않았다. 짐작컨대 이렇게 함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숭배하게 만들 것이라 하더라도 그는 그러한 악을 섬기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을 지키려 하였다.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을 예배하고 오로지 그를 섬길지니라”하고 바라보는 우주에게 선포하고 싶었다.
136:9.4 (1522.3) 여러 날이 지나자, 점점 더 또렷하게 예수는 어떤 종류의 진리 계시자가 될 것인가 깨달았다. 하나님의 길이 쉬운 길이 되지 않을 것을 그는 헤아렸다. 그의 인간 체험에서 마실 남은 잔이 아마 씁쓸할지 모른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지만, 그는 이를 들이키기로 결심했다.
136:9.5 (1522.4) 그의 인간 지능조차 다윗의 왕좌에 작별을 알리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이 인간의 지성은 신의 지성이 가는 길을 따라간다. 인간의 지성은 아직도 질문하지만 아버지의 영원하고 신성한 뜻을 행하는 데 조건 없이 항상 복종하면서, 세상에서 사람으로 사는 이 통합된 일생에서 신이 준 대답을 마지막 판결로 어김없이 받아들인다.
136:9.6 (1522.5) 로마는 서양 세계의 여왕이었다. 혼자 있는 가운데 이 중대한 여러 결정에 이르렀으므로, 지금 하늘 무리들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의 아들은 유대인이 세계 정복을 성취할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그렇게 엄청난 지혜와 권력을 소유했는데, 땅에서 태어난 이 유대인은 자기 지위를 높이거나 그의 민족을 왕좌에 올려놓기 위하여 자신의 우주 재산을 쓰기를 거부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이 세상의 나라들”을 보았고 이를 점령할 능력을 소유했다.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은 이 모든 권력을 그의 손에 맡기었지만 그는 원하지 않았다. 땅의 나라들은 한 우주의 창조자인 통치자의 흥미를 끌기에 하찮은 것이었다. 그에게 오직 한 가지 목적이 있었으니, 즉 하나님을 더욱 사람에게 드러내는 것, 하늘나라를 세우는 것, 인류의 마음 속에서 하늘 아버지가 다스리는 것이었다.
136:9.7 (1522.6) 전투ㆍ싸움ㆍ학살의 관념은 예수에게 싫은 것이었고, 그는 이를 거들떠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의 하나님을 드러내는 평화의 왕으로서 땅에서 나타나고 싶었다. 세례받기 전에 그는 로마의 억압자들에 항거하여 일으키는 반란에서 열심당원들을 이끌라는 제안을 다시 물리친 적이 있었다. “주가 내게 말씀하셨으니,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면 너의 유산으로서 이교도를, 땅에서 가장 먼 나라들을 네 소유물로 주리라. 너는 쇠막대기로 저희를 부숴버리고 도공(陶工)의 그릇처럼 산산조각 부술지니라’” 이렇게 어머니가 가르쳐 준 그 성서 구절에 관하여 그는 최후의 결정을 내렸다.
136:9.8 (1522.7) 나사렛 예수는 그러한 발언이 자신을 언급하는 말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드디어 사람의 아들의 인간 지능은 이 모든 메시아의 문제점과 모순―히브리 성서, 부모의 훈련, 하잔의 가르침, 유대인의 기대, 인간적 야망―을 싹 쓸어버렸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그는 갈 길을 결정했다. 갈릴리로 돌아가서 조용히 하늘나라의 선포를 시작하고 그의 아버지(인격이 된 조절자)를 의지하고서 하루하루 과정의 세부를 해결해 나가려 하였다.
136:9.9 (1523.1) 예수가 영적 문제의 증명을 위해서 물질적 분석을 이용하지 않으려 했을 때, 자연 법칙을 주제넘게 무시하려 하지 않았을 때, 그는 광대한 우주에 두루, 모든 세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여러 가지 결정으로 훌륭한 본보기를 보였다. 영적 영광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 이 세상의 권력 붙잡기를 마다했을 때, 그는 우주에 충성하고 도덕적으로 고귀한 모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모범을 보였다.
136:9.10 (1523.2) 세례를 받고 나서 산으로 올라갔을 때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사명과 그 성질에 대하여 혹시 어떤 의심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혼자 있으면서 결심하던 40일 뒤에 동료들에게 돌아왔을 때는 전혀 의심이 없었다.
136:9.11 (1523.3) 아버지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예수는 한 계획을 세웠다. 사람들에게 육체적 만족을 제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로마에서 아주 최근에 행해지는 것을 본 것처럼 군중에게 빵을 나누어주지 않을 것이다. 비록 유대인이 바로 그런 종류의 구원자를 기대하고 있더라도, 이적을 행하여 자신에게 눈을 끌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권한이나 현세의 권능을 보여서 세상이 그가 전하는 영적 말씀을 받아들이게 만들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136:9.12 (1523.4) 기대하는 유대인들의 눈에, 다가오는 나라를 돋보이게 하는 이 여러 방법을 물리치면서 예수는 바로 이 유대인들이 그에게 권한이 있고 그가 신(神)이라는 주장을 분명히, 마침내 모두 물리칠 것을 확신하였다. 이 모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는 초기의 추종자들이 그를 메시아로 언급하는 것을 막으려고 오랫동안 애썼다.
136:9.13 (1523.5) 대중에게 봉사하는 동안 내내, 그는 항상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세 가지 상황을 처리할 필요성에 부딪쳤다. 먹여 달라 소리치며, 기적을 행하라고 고집하며, 마지막으로 추종자들이 그를 임금으로 만들게 해달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예수는 페레아 산 속에서 혼자 지내던 이 여러 날 동안 내린 결정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136:10.1 (1523.6) 혼자 있던, 기억에 남을 이 기간의 마지막 날에, 요한과 그 제자들과 함께 하려고 산을 내려가기 전에 사람의 아들은 마지막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을 인격이 된 조절자에게 다음의 말씀으로 전했다: “그리고 이제 결정되고 기록된 이 문제들과 같이, 모든 다른 문제에서도 내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겠다고 나는 당신께 서약하나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산을 내려갔다. 그의 얼굴은 영적 승리를 얻고 도덕적으로 성취한 영광으로 빛났다.
137:0.1 (1524.1) 서기 26년 2월 23일 토요일 아침 일찍, 예수는 산에서 내려와서, 펠라에서 야영하던 요한의 일행과 다시 합세하였다. 그날 하루 종일 예수는 군중과 섞였다. 쓰러져서 몸을 다친 한 소년을 보살폈고, 안전하게 부모의 품에 데려다 주려고 가까운 펠라 마을까지 여행하였다.
137:1.1 (1524.2) 이 안식일에 요한의 수제자 둘이 예수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요한의 모든 추종자 가운데 안드레라 이름하는 사람이 예수에게 가장 깊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다친 소년과 함께 펠라로 여행 갈 때 예수를 따라갔다. 요한의 회합 장소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예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목적지에 이르기 바로 전에 두 사람이 잠깐 이야기하려고 멈추었는데, 그동안에 안드레가 말했다: “당신이 가버나움에 온 뒤에 당신을 지켜보았나이다. 나는 당신이 새 선생이라 믿고, 비록 당신의 가르침을 내가 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당신을 따르려고 완전히 결심하였나이다. 당신 밑에서 가르침받으며 새 나라에 대한 진리를 모두 배우고자 하나이다.” 예수는 진심으로 확신을 주면서 사도들 중에 첫 사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 열두 명의 무리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새 나라를 세우는 일에 함께 수고할 것이었다.
137:1.2 (1524.3) 안드레는 요한이 하는 일을 말없이 지켜보고 이를 진지하게 믿은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아주 유능하고 열심 있는 시몬이라는 이름의 아우가 있었는데, 그는 요한의 으뜸가는 제자들 중의 하나였다. 시몬이 요한의 주요한 지지자 중에 하나였다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137:1.3 (1524.4) 예수와 안드레가 캠프로 돌아온 뒤에 곧, 안드레는 아우 시몬을 찾아 다녔다. 옆으로 그를 불러서, 자기 생각에 예수가 위대한 선생이라고 결정했다, 자신이 제자가 되겠다 서약했다고 일러주었다. 더 나아가서 자기가 섬기겠다는 제안을 예수가 받아들였다고 말하고, (시몬이) 마찬가지로 예수한테 가서 새 나라에서 봉사하는 친교 모임에 자청해서 들어가라고 제안하였다. 시몬이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이 세베대의 작업장으로 일하러 온 뒤에 하나님이 그를 보내셨다고 믿었지만, 요한을 어떻게 할까? 우리가 그를 버려야 하느냐? 그것이 옳은 일이냐?” 이렇게 되자 그들은 당장에 요한에게 의논하러 가기로 하였다. 유능한 조언자요, 가장 장래가 있는 제자 가운데 둘이나 잃는다는 생각에 요한은 슬퍼졌지만, 용감하게 물음에 대답했다: “이것은 겨우 시작이라. 당장에 내 일은 끝날 터이고 우리 모두가 그의 제자가 될 것이라.” 그리고 나서 안드레는 예수에게 옆으로 오라고 손짓하였고 한편 아우가 새 나라에 봉사하는 데 가입하기를 바란다고 선언하였다. 시몬을 둘째 사도로 반가이 맞으면서, 예수는 말했다: “시몬아, 너의 열심은 칭찬할 만해도 하늘나라의 일에는 위험하니라. 너에게 훈계하노니, 말할 때 더욱 조심하라. 나는 네 이름을 베드로로 바꾸고자 하노라.”
137:1.4 (1525.1) 다친 소년은 펠라에서 살았는데 그의 부모는 예수가 함께 그날 밤을 지내라고, 자기 집을 거처로 쓰라고 이전에 간청하였고 예수는 약속했다. 안드레와 그 동생을 떠나 보내기 전에, 예수는 말했다: “아침 일찍, 우리는 갈릴리로 가느니라.”
137:1.5 (1525.2) 예수가 밤을 지내려고 펠라로 돌아온 뒤에, 안드레와 시몬이 다가오는 하늘나라를 세우는 데 그들이 어떤 성질의 봉사를 할 것인가 아직 의논하고 있는 동안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산에서 예수를 오랫동안 헛되이 찾다가 막 돌아와서 그 장면에 도착하였다. 시몬 베드로가 어떻게 자기와 형 안드레가 새 나라에서 처음으로 받아들인 조언자가 되었는가, 그리고 아침에 그들이 새 주(主)와 함께 갈릴리를 향하여 떠나기로 예정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야고보와 요한 두 사람은 슬펐다. 그들은 예수를 얼마 동안 알고 있었고 예수를 아끼었다. 산에서 여러 날 동안 그를 찾아다녔는데, 이제 돌아와서 남들이 우대받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예수가 어디로 갔는가 묻고 그를 찾으려고 서둘렀다.
137:1.6 (1525.3) 그의 거처에 다다랐을 때 예수는 잠들어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를 깨우고 말했다: “그토록 오래 같이 살던 우리가 산에서 당신을 찾는 동안에, 우리보다 먼저 남들을 우대하여, 새 나라에서 첫 동료로서 안드레와 시몬을 고르시다니, 어찌 된 일이니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행할 때, 그를 찾아야 한다고 누가 지시하였는가’ 스스로 물어 보라.” 그들이 산에서 오랫동안 찾던 이야기를 자세히 늘어놓은 뒤에, 예수는 그들을 더 가르쳤다: “산이 아니라 너희 마음 속에서 새 나라의 비밀 찾기를 배워야 하느니라. 찾고 있던 것은 이미 너희 혼 속에 있었느니라. 너희는 정말로 내 형제요―내가 너희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느니라―이미 너희는 그 나라에 속했고 명랑해야 하며, 또한 내일 갈릴리로 함께 갈 준비를 하여라.” 그러자 요한은 감히 물었다. “하지만 주여, 안드레와 시몬처럼 야고보와 나도 새 나라에서 당신과 동료가 되겠나이까?” 각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예수는 말했다: “내 형제여, 다른 이 사람들이 받아달라고 청하기도 전에 너희는 이미 하늘나라 정신 속에 나와 함께 있었느니라. 내 형제인 너희는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할 필요가 없느니라. 처음부터 그 나라에서 나와 함께 있었느니라. 사람들 앞에서는 남들이 너희 앞에 먼저 갈지 모르지만, 너희가 내게 이렇게 청할 생각을 가지기도 전에, 내 마음 속에서 너희를 하늘나라 회원으로 또한 셈하여 두었노라. 그렇다 해도, 좋은 뜻을 가지기는 했어도, 잃어버리지 않은 자를 찾으려고 스스로 나선 일에 분주하여 자리를 비우지 않았더라면 사람 앞에서도 너희가 처음이 되었을까 하니라. 다가오는 나라에서, 걱정을 일으키는 일에 머리를 쓰지 말고 오히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만 항상 아랑곳할지니라.”
137:1.7 (1525.4) 야고보와 요한은 꾸지람을 달게 받아들였다. 결코 안드레와 시몬을 더 질투하지 않았다. 그들은 두 동료 사도와 함께 다음 날 아침에 갈릴리로 떠나려고 준비하였다. 예수가 선택한 조언자 일행과 나중에 그를 따른 광대한 무리의 믿는 제자들을 구별하려고 이날 이후부터 사도(使徒)라는 칭호가 쓰였다.
137:1.8 (1525.5) 그날 밤 늦게, 야고보ㆍ요한ㆍ안드레ㆍ시몬은 세례자 요한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물을 글썽였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강직한 유대인 선지자는 수제자 가운데 두 사람이나 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 갈릴리 영주의 사도가 되라고 내놓았다.
137:2.1 (1526.1) 서기 26년 2월 24일 일요일 아침, 예수는 펠라 가까이 강가에서 세례자 요한과 헤어졌고 육체를 입고서 결코 그를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137:2.2 (1526.2) 그날 예수와 네 제자 사도가 갈릴리를 향하여 떠나자, 요한을 따르던 사람들의 야영지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처음으로 큰 분열이 막 일어나고 있었다. 그 전날 요한은 예수가 구원자라고 안드레와 에즈라에게 분명히 선언하였다. 안드레는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했지만, 에즈라는 태도가 부드러운 나사렛 목수를 물리치며 동료들에게 외쳤다: “다니엘 선지는 사람의 아들이 권력과 큰 영광을 입고서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리라 선언하느니라. 이 갈릴리 목수, 가버나움의 이 조선공은 구원자일 수 없느니라. 그런 하나님의 선물이 나사렛에서 나올 수 있느냐? 이 예수는 요한의 친척이요, 우리 선생은 마음이 몹시 선하여 속았도다. 우리는 이 거짓 메시아를 가까이 하지 말자.” 이 발언 때문에 요한이 꾸짖자 에즈라는 많은 제자를 이끌고 남쪽으로 서둘러 갔다. 이 무리는 요한의 이름으로 계속 세례를 주었다. 결국 그들은 요한을 믿지만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종파를 세웠다. 이 무리의 잔재가 오늘날까지도 메소포타미아에 남아 있다.
137:2.3 (1526.3) 요한의 추종자 사이에서 이 소동이 일고 있는 동안, 예수와 네 제자 사도는 갈릴리를 향하여 한창 가고 있었다. 나인의 길로 나사렛으로 가려고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예수는 앞으로 길을 올려다보다가, 벳세다의 어느 빌립이라는 사람이 한 친구와 함께 그들을 향해 오는 것을 보았다. 예수는 예전부터 빌립을 알았고 그는 또한 새 사도 네 사람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다가올 것이라 소문이 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더 배우기 위하여 펠라에 있는 요한을 찾아보려고 그는 친구 나다니엘과 함께 길을 가고 있었는데 예수를 만나게 되어 기뻤다. 예수가 처음 가버나움에 온 뒤로 그는 예수를 칭찬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다니엘은 갈릴리의 가나에서 살았고 예수를 알지 못했다. 나다니엘이 길 옆에 나무 그늘 아래서 쉬는 동안 빌립은 앞으로 나서서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137:2.4 (1526.4) 베드로는 빌립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자기와 안드레ㆍ야고보ㆍ요한을 언급하며 모두가 새 나라에서 예수의 동료가 되었다고 설명하기 시작했고, 빌립에게 봉사를 자청하라고 세게 재촉하였다. 빌립은 난처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한 순간의 경고도 없이, 여기서―요단강 가까이 길 옆에서―즉시 결정하라는 일생의 가장 중대한 문제가 닥쳤다. 이때가 되어 그는 베드로ㆍ안드레ㆍ요한과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었고, 한편 예수는 갈릴리를 거쳐 계속 가버나움까지 가는 여행의 대강을 야고보에게 일러주었다. 마침내 안드레는 빌립에게 제안했다. “선생한테 물어보는 것이 어떠냐?”
137:2.5 (1526.5) 갑자기 빌립에게 예수는 정말로 위대한 사람, 아마도 메시아라는 생각이 떠올랐고 이 문제는 예수의 결정을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곧장 예수에게로 가서 물었다: “선생이여, 내가 요한에게로 가리이까 아니면 당신을 따르는 친구들과 함께 하리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나를 따르라.” 빌립은 구원자를 찾았다는 확신에 마음이 떨렸다.
137:2.6 (1526.6) 빌립은 이제 그 일행에게 그 자리에 남아 있으라고 손짓하였고, 한편 그가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을 알리려고 친구 나다니엘에게 서둘러 돌아갔다. 나다니엘은 뽕나무 밑에서 아직도 뒤에 남아 있었고, 세례자 요한, 다가오는 나라, 기대된 메시아에 관하여 들은 많은 것을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뜯어보고 있었다. 이 명상을 깨뜨리고 빌립이 외쳤다, “구원자, 그 사람을 찾았노라. 모세와 선지자들이 그에 관하여 기록했는데 요한이 그를 선포하였느니라.” 나다니엘은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이 선생이 어디 출신이냐?” 빌립은 대답했다. “그는 나사렛 예수요, 요셉의 아들이자 목수이고, 요즈음에는 가버나움에 거하니라.” 그러자 얼마큼 충격을 받고 나다니엘은 물었다, “나사렛에서 무슨 그런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느냐?” 하지만 빌립은 그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와서 보라.”
137:2.7 (1527.1) 빌립은 나다니엘을 예수에게로 데리고 갔다. 그는 진지하게 의심하는 사람의 얼굴을 인자하게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을 보라, 속에 아무 거짓이 없도다. 나를 따르라.” 나다니엘은 빌립을 향하여 말했다. “네 말이 맞도다. 그는 정말로 사람들의 선생이라. 자격이 있다면, 나도 따르겠노라.” 예수는 나다니엘에게 머리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나를 따르라.”
137:2.8 (1527.2) 예수는 이제 미래에 절친하게 지낼 동료 무리의 절반을 모았다. 다섯은 얼마 동안 그를 알았고 하나는 낯선 사람 나다니엘이었다.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그들은 요단강을 건넜고 나인 마을 옆을 지나며, 그날 저녁 늦게 나사렛에 다다랐다.
137:2.9 (1527.3) 예수가 소년 시절에 살던 집에서 그들 모두가 요셉과 함께 그날 밤을 묵었다. 예수의 동료들은 새로 찾아낸 선생이 어째서 십계명과 기타 여러 금언과 말씀 형태로 집 근처에 남아 있는 그의 기록의 흔적을 모두, 샅샅이 없애느라고 그렇게 마음을 쓰는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처사는―흙 위나 모래에 쓴 것을 빼고―나중에 그가 글 쓰는 것을 결코 구경하지 못한 사실과 함께, 그들의 머리 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었다.
137:3.1 (1527.4) 그들 모두가 마을에서 유명한 젊은 여인의 결혼식에 초대받았기 때문에, 이튿날 예수는 사도들을 가나로 먼저 보냈다. 한편 가버나움에 계신 어머니를 급히 찾아보려고 준비했고, 막달라에서 동생 유다를 보려고 멈추었다.
137:3.2 (1527.5) 나사렛을 떠나기 전에, 예수의 새 동료들은 그때로 보아서 최근에 일어났던 놀라운 사건들에 대하여 요셉에게, 그리고 예수 집안의 다른 식구들에게 이야기하고, 예수가 오래 기대하던 구원자라는 그들의 신념을 아낌없이 표현하였다. 예수의 이 집안 식구들은 이 모든 것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고, 요셉은 말했다: “어쩌면 결국은 어머니가 옳았는가 보다―아마도 이상한 형님이, 오실 임금인가 보다.”
137:3.3 (1527.6) 유다는 예수가 세례받을 때 자리에 있었고, 형 야고보와 함께 땅에서 예수의 사명을 굳게 믿는 사람이 되었다. 야고보와 유다 두 사람은 비록 형의 사명이 무슨 성질을 가졌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어머니는 예수가 메시아요, 다윗의 아들이라는 옛 희망을 모두 다시 살려냈고, 형이 이스라엘의 구원자라는 믿음을 가지도록 아들들을 북돋았다.
137:3.4 (1527.7) 예수는 월요일 밤 가버나움에 도착했으나 야고보와 어머니가 사는 자기 집으로 가지 않고 바로 세베대의 집으로 갔다. 가버나움에 있는 친구들 모두가 그에게 크고 즐거운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보았다. 다시 한 번 그는 비교적 명랑한 듯하고 나사렛에서 어렸던 시절에 그의 모습과 더 비슷한 듯하였다. 세례받기 전 여러 해 동안, 그리고 바로 전에 혼자 있던 기간과 그 직후에, 그는 갈수록 더 심각해졌고 말이 없었다. 이제 이들 모두에게 그는 옛날의 모습과 아주 비슷해 보였다. 그에게 무언가 무게 있는 기품과 고상한 모습이 있었지만, 그는 다시 한 번 마음이 가벼웠고 기쁨에 넘쳐 있었다.
137:3.5 (1528.1) 마리아는 기대에 부풀어 마음이 떨렸다. 가브리엘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가 가까왔다고 예상하였다. 얼마 안 있어, 아들이 초자연 능력을 가진, 유대인의 임금이라는 기적 같은 계시에 온 팔레스타인이 소스라치게 놀라고 어리둥절할 것이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와 야고보ㆍ유다ㆍ세베대가 무엇을 물어도 예수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내가 여기서 얼마 동안 머무르는 것이 더 좋으니라. 나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 하노라.”
137:3.6 (1528.2) 이튿날 화요일에, 나오미의 결혼식 때문에 모두 가나로 여행했다. 결혼식은 다음 날에 거행될 예정이었다. “아버지의 때가 올 때까지” 아무에게도 자기에 관하여 말하지 말라고 예수가 거듭 경고했는데도, 그들은 고집하여 구원자를 찾았다는 소식을 조용히 널리 퍼뜨렸다. 가나에서 있을 결혼식에서 예수가 메시아의 권한을 맡는 일을 시작하리라, 큰 능력과 당당한 위엄을 갖추고 그렇게 하리라, 각자가 자신 있게 기대하였다. 그들은 세례에 뒤따라 일어난 현상에 대하여 들은 것을 기억하였고, 땅에서 그의 앞길에 초자연적 이적과 기적 같은 전시가 더욱 나타날 것이라 믿었다. 따라서 시골 전체가 나오미와 요압, 곧 나단의 아들의 결혼 잔치를 위하여 가나에서 함께 모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137:3.7 (1528.3) 마리아는 몇 년 동안 이렇게 즐거운 적이 없었다. 아들의 즉위식을 구경하려고 행차하는 황태후의 기분으로 가나로 여행하였다. 그가 열세 살이 된 뒤로, 예수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가 그렇게 태평하고 행복하며, 동료들의 소원과 소망을 그렇게 헤아리고 이해하며, 그렇게 마음에 들게 공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작은 무리를 지어 모두 속삭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 하였다. 이 이상한 사람이 다음에 무슨 일을 할까? 어떻게 그가 다가오는 나라의 영광을 열어 보일까? 그들이 있는 앞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힘과 권능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생각에 모두가 마음이 떨렸다.
137:4.1 (1528.4) 수요일 한낮이 되어서, 거의 1천 명의 손님들이 가나에 도착했는데 결혼 잔치에 부른 수보다 4배가 넘었다. 수요일에 결혼을 축하하는 것이 유대인의 풍습이었고, 결혼식을 위하여 초청장이 한 달 전에 나갔다. 오전과 이른 오후에, 형편은 결혼식이라기보다 예수를 위한 대중 환영회처럼 보였다. 유명 인사에 가까운 이 갈릴리 사람에게 누구나 인사하기를 바랐고, 그는 젊은이와 늙은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아주 정중하였다. 예수가 예비 결혼 행렬을 이끌기로 동의했을 때 모두가 기뻐했다.
137:4.2 (1528.5) 예수는 이제 그의 인간 존재, 신으로서 선재(先在)했던 것, 그의 인간 성품과 신다운 성품이 통합되거나 융합된 상태를 속속들이 자각하고 있었다. 완전한 몸가짐으로 한 순간에 사람의 역할을 해내거나 즉시 신다운 성품에 따르는 인격의 특권을 취할 수 있었다.
137:4.3 (1528.6) 시간이 지나자, 예수는 사람들이 그가 무슨 놀라운 일을 할까 기대하고 있음을 더욱 의식하게 되었다. 특히, 가족과 제자인 여섯 사도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어떤 초자연적 일을 보여줌으로 하늘나라가 다가온 것을 적절히 선포하기를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37:4.4 (1529.1) 오후에 일찍 마리아는 야고보를 불러냈다. 결혼 예식(禮式)과 관련하여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초자연적인 자”로서 자신을 드러내려고 계획했는가 그들을 믿고 비밀을 알려 주겠는가 물으려고 두 사람이 함께 예수에게 감히 다가왔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에게 말문을 떼자마자 그의 특유한 분개심을 일으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렇게만 말했다: “당신들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보살피는 동안에, 기꺼이 함께 기다리라.” 그러나 그의 꾸짖는 웅변은 얼굴빛에 나타나 있었다.
137:4.5 (1529.2) 어머니의 이 행동은 인간 예수에게 큰 실망이었다. 겉으로 그의 신성(神性)을 어떤 방법으로 전시하는 즐거움에 빠지라는 어머니의 은근한 제안에 자신이 반응한 것을 깨닫고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것은 바로 얼마 전에 산 속에서 혼자 있을 때,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바로 그런 일 중에 하나였다. 몇 시간 동안 마리아는 많이 우울하였다. 어머니는 야고보에게 말했다: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노라. 이 모두가 무엇을 뜻할 수 있느냐? 그의 이상한 행동은 언제 끝나느냐?” 야고보와 유다는 어머니를 위로하려고 애썼고, 한편 예수는 한 시간 동안 혼자 지내려고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돌아왔고 다시 한 번 명랑하고 즐거워하였다.
137:4.6 (1529.3) 기대하는 마음으로 침묵 가운데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예식 전부가 끝났는데 그 귀빈으로부터 아무 움직임도, 말 한마디도 없었다. 그리고 나서 요한이 “구원자”라고 선포한 그 목수요, 조선공이 저녁 잔치에, 아마도 결혼식 저녁 식사에 솜씨를 보일 것이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러나 결혼식 저녁 식사가 있기 바로 전, 제자인 사도 여섯을 불러모으고 그가 아주 진지하게 말했을 때, 그렇게 솜씨 보이기를 바라는 모든 기대가 머리에서 싹 사라졌다. “호기심 있는 자를 만족시키거나 의심하는 자에게 확신을 주기 위하여 무슨 놀라운 일을 하려고 내가 여기 왔다 생각지 말라. 오히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을 받들려고 여기에 있느니라.” 그러나 그가 동료들과 의논하는 것을 보았을 때, 마리아와 다른 사람들은 무슨 특별한 일이 바야흐로 일어나려 한다고 머리 속에서 충분히 납득하였다. 결혼식 저녁 식사와 잔치 기분으로 친교하는 저녁을 즐겁게 보내려고 모두가 앉았다.
137:4.7 (1529.4) 신랑의 아버지는 결혼 잔치에 초청한 모든 손님을 위하여 포도주를 넘치게 마련했다. 그러나 아들의 결혼식이, 예수가 메시아인 구원자라는 것을 기대한 대로 보여주는 일과 아주 밀접히 연결된 사건이 될 줄을 그가 어떻게 알 것인가? 그는 이름난 갈릴리 사람을 손님으로 대접하는 영광을 얻어서 기뻐했다. 그러나 결혼 저녁 식사가 끝나기 전에, 포도주가 동이 나고 있다는 불안한 소식을 하인들이 가져왔다. 정식 저녁 식사가 끝나고 손님들이 뜰에서 이리저리 거닐고 있을 때가 되어서, 신랑(新郞)의 어머니는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마리아에게 털어놓았다. 마리아는 자신 있게 말했다: “아무 걱정 마시게―우리 아들에게 이르겠노라. 그가 우리를 도울 것이야.” 겨우 몇 시간 전에 꾸지람을 들었는데도, 이렇게 어머니는 주제넘게 말했다.
137:4.8 (1529.5) 여러 해 동안 내내,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가정 생활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언제나 도움을 받으려고 예수에게 호소했다. 그래서 이때 그를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포부가 큰 어머니는 이 기회에 맏아들에게 하소연할 또 다른 동기가 있었다. 예수가 뜰 한 구석에서 혼자 서 있는데, 어머니가 다가와서 말했다: “아들아, 저희는 포도주가 떨어졌느니라.” 예수는 대답했다: “착한 여인이여,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마리아가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때가 왔다고 믿노라. 네가 우리를 도와줄 수 없느냐?” 예수는 대답했다: “내가 이런 식으로 일하러 오지 않았다고 다시 선언하나이다. 이 문제로 어찌하여 어머니는 나를 다시 괴롭히나이까?” 그러자 마리아는 눈물을 흘리며 쓰러지면서 그에게 탄원하였다: “하지만 아들아, 네가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 저희에게 약속했느니라. 제발 나를 위해서 무엇인가 하지 않겠느냐?” 그러자 예수는 말했다: “여인이여, 어머니가 무슨 상관이 있어 그렇게 약속하였나이까?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하소서. 모든 일에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야 하나이다.”
137:4.9 (1530.1)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풀이 꺾였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눈물이 얼굴에서 주르르 흘러내리면서, 어머니가 거기 앞에 꼼짝 않고 서 있자, 예수의 인간 가슴에는 육체로 그를 낳은 여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앞으로 몸을 굽히면서, 어머니의 머리에 손을 부드럽게 얹으며 말했다. “자, 자, 어머니 마리아여, 냉정하게 들리는 내 말에 슬퍼 마소서. 오로지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내가 어머니에게 여러 번 이르지 아니하더이까? 아버지의 뜻의 일부라면, 어머니가 내게 부탁하는 것을 아주 기쁘게 할 터인데―” 예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였다. 마리아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챈 듯하였다. 벌떡 뛰어오르면서 마리아는 예수의 목에 팔을 감고 그에게 입맞추고, 하인들 구역으로 쏜살같이 달려가서 말했다. “내 아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행하라.” 그러나 예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다―아니, 차라리 바라는 마음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다.
137:4.10 (1530.2) 마리아는 기뻐서 덩실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포도주가 만들어질까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권한을 주장하라고, 감히 앞으로 나서서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메시아의 권력을 드러내라고 마침내 맏아들을 설득했다고 자신 있게 믿었다.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이 전혀 모르는 어떤 우주 동력자와 성격자들이 자리에 있고 결합했기 때문에, 그 여자는 실망하지 않게 되어 있었다. 마리아가 바라고, 예수, 하나님인 사람이 인간적으로, 동정심에서 바랐던 포도주가 막 생기고 있었다.
137:4.11 (1530.3) 물로 채워진, 여섯 돌 항아리가 가까이 있었고, 하나에 20갤론쯤 들어 있었다. 이 물은 결혼식의 마지막 정화(淨化) 예식에 나중에 쓰려던 것이었다. 어머니가 바쁘게 지휘하는 가운데, 이 커다란 돌 그릇들 둘레에서 하인들이 법석을 떠는 모습이 예수의 눈길을 끌었다. 거기로 가면서, 그는 사람들이 포도주를 항아리에서 주전자로 가득 쏟아 붓는 것을 지켜보았다.
137:4.12 (1530.4) 예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차츰 생각이 떠올랐다. 가나의 결혼 잔치에 온 모든 사람 가운데 예수가 가장 놀랐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놀라운 일 하기를 기대했으나 그것은 바로 그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사람의 아들은 산에서, 인격화된 조절자가 훈계한 말씀을 기억하였다. 어떤 권력자나 권한도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창조자 특권을 그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고 전에 조절자가 어떻게 경고했는가 회상했다. 이 경우에는 동력 변화자, 중도자, 그리고 다른 모든 필요한 성격자가 물과 기타 필요한 요소 가까이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우주의 창조 군주가 소망을 표현한 앞에서, 포도주가 순간에 나타나는 것을 피할 길이 없었다. 인격이 된 조절자가 아들의 소망대로 집행하는 것이 전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뜻을 알렸기 때문에, 이 일은 이중으로 확실해졌다.
137:4.13 (1530.5) 그러나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기적은 아니었다. 아무런 자연 법칙을 수정하거나 취소하거나 초월하지도 않았다. 포도주를 공들여 만드는 데 필요한 화학 요소들을 하늘에서 조합하는 것과 관련하여 시간이 제거된 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나에서 이 기회에 창조자의 관리들은, 필요한 화학 구성 요소들을 공간에서 조립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초인간 관리들이 개입하여 이 일을 했다는 것 외에, 보통 자연 과정에 따라서 사람들이 하는 그대로 포도주를 만들었다.
137:4.14 (1531.1) 게다가 이른바 이 기적을 행하는 것은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든 일에 아버지의 뜻에 예수가 이미 복종했으니까,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137:4.15 (1531.2) 하인들이 이 새 포도주를 부어서 신랑 들러리, 즉 “잔치의 사회자”에게 들고 갔을 때, 포도주를 맛본 뒤에 그는 신랑을 부르며 말했다: “처음에는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잔뜩 마신 뒤에는 포도나무의 못한 소산을 가져오는 것이 풍습이어늘, 그대는 잔치의 마지막까지 가장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었도다.”
137:4.16 (1531.3) 마리아와 예수의 제자들은 기적이라고 생각된 일이 일어나서 크게 기뻐했고, 예수가 의도해서 기적을 행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예수는 뜰의 아늑한 구석으로 물러가서 짧은 몇 순간 심각한 생각에 잠겼다. 그 상황 아래에서 이 사건은 그가 친히 고삐를 쥘 수 없었다, 아버지의 뜻에 반대되지 않았은즉 불가피했다고 마침내 결정하였다. 사람들에게 돌아왔을 때, 그들은 그를 두렵게 여겼다. 그가 메시아라고 모두 믿었다. 그러나 예수는 몹시 당황하였고, 오직 뜻하지 않게 막 구경한 특별한 일 때문에 그들이 그를 믿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 모두를 돌이켜볼까 하여 예수는 다시 한동안 집 꼭대기로 물러갔다.
137:4.17 (1531.4)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느낌에 빠지는 것이 이 종류의 사건을 거듭 낳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예수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런데도 사람의 아들이 육체를 입은 필사 인생을 마침내 떠나기 전에, 많은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137:5.1 (1531.5) 많은 손님이 결혼 잔치하는 한 주 동안 남아 있었지만, 예수는 새로 뽑은 제자 사도들―야고보ㆍ요한ㆍ안드레ㆍ베드로ㆍ빌립ㆍ나다니엘―과 함께, 이튿날 아침 아주 일찍 가버나움을 향하여 출발했고 아무에게도 작별을 알리지 않고 떠났다. 예수의 가족과 가나에 있는 친구들 모두가, 그가 그렇게 갑자기 떠나서 아주 걱정하였다. 예수의 막내 동생 유다는 그를 찾아서 나섰다. 예수와 사도들은 벳세다에 세베대의 집으로 바로 갔다. 이번 여행에서 예수는 새로 뽑은 동료들과 함께 다가오는 하늘나라에 중요한 많은 일에 관하여 이야기했고, 물을 포도주로 만든 것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특별히 타일렀다. 또한 그들이 앞으로 일할 때 도시 세포리스와 티베리아스를 피하라고 조언하였다.
137:5.2 (1531.6) 그날 저녁에 식사가 끝난 뒤에 이 세베대와 살로메의 집에서, 예수의 지상 생애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회의 중 하나가 열렸다. 오직 여섯 사도가 이 모임에 참석하였다. 막 헤어지려 할 때 유다가 도착했다. 선택된 이 여섯 사람은 가나에서 벳세다까지 예수와 함께 여행했고, 말하자면 공중에 붕 떠서 걸었다. 이들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생기가 넘쳐 있었고, 사람의 아들의 가까운 친구로 선택되었다는 생각으로 짜릿하였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 그리고 땅에서 그의 사명이 무엇이고 그 사명이 과연 어떻게 끝날 것인가, 예수가 분명히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들은 예수가 일러주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들은 말이 없었다. 베드로까지 말할 수 없이 움츠러들었다. 깊이 생각하는 안드레만 예수의 조언하는 말씀에 감히 대답했다. 하신 말씀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함을 깨달았을 때, 유대인 메시아에 대한 생각이 아주 완전히 굳어져 있음을 보았을 때, 예수는 그들을 쉬라고 보냈고, 한편 아우 유다와 함께 걸으면서 이야기했다. 예수를 떠나기 전에, 유다는 많이 감동하여 말했다: “우리의 가장인 형이여, 나는 형을 이해한 적이 없나이다. 나는 형이 어머니가 우리에게 이야기해 준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지 못하고 다가오는 나라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형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인 줄 아나이다. 나는 요단강에서 그 목소리를 들었고, 형이 어떤 분이든지 형을 믿는 사람이나이다.” 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떠났고 막달라에 있는 자기 집으로 갔다.
137:5.3 (1532.1) 그날 밤 예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저녁에 두르는 천을 몸에 걸치고서, 생각에 잠겨, 이튿날 새벽까지 생각에 잠겨 호숫가에 앉아 있었다. 그날 밤에 오래 명상하는 동안, 결코 추종자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닌 어떤 다른 각도에서 그를 보게 만들 수 없으리라는 것을 뚜렷이 이해하게 되었다. 하늘나라를 전하는 말씀이 요한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유대인들이 찾고 있던 자로서 전하지 않으면 이를 도무지 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다. 비록 다윗과 같은 종류의 메시아는 아니었어도, 결국, 그는 옛 예언자들 가운데 좀더 영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예언이 참으로 이루어진 그런 사람이었다. 결코 다시 그는 자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온통 부인하지는 않았다. 이 까다로운 형편의 최종 해결을 아버지의 뜻이 풀려나가는 대로 맡기기로 결심하였다.
137:5.4 (1532.2) 이튿날 아침 예수는 아침 식사에 친구들과 함께 하였지만 그들은 김 빠진 무리였다.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식사가 끝났을 때, 그는 둘레에 그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한동안 이 근처에 우리가 묵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라. 요한이 그가 하늘나라를 위하여 길을 예비하려고 왔다고 이르는 것을 너희가 들었느니라. 따라서 요한의 전도가 끝나기를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람의 아들의 선구자가 자기 일을 마쳤을 때, 우리가 비로소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을 선포할 것이라.” 그는 사도들에게 그물 던지는 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였다. 한편 세베대와 함께 배 작업장으로 가려고 준비하고 다음 날 회당에서 그들을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거기서 그는 설교하기로 예정되었고, 그들과 그 안식일 오후에 회의를 가지기로 약속하였다.
137:6.1 (1532.3) 서기 26년 3월 2일,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는 세례받은 뒤에 처음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다. 회당에는 사람들이 넘치게 몰렸다. 요단강에서 세례받은 이야기는 이제 가나에서 도착한 소식, 물과 포도주에 관한 새로운 소식으로 인하여 불어났다. 예수는 여섯 사도를 귀빈석에 앉히었고, 육체로 동생인 야고보와 유다가 그들과 함께 앉았다. 어머니도 전날 저녁에 야고보와 함께 가버나움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참석하였고 회당의 여인들 구역에서 자리에 앉았다. 청중 모두가 바짝 긴장하였다. 그날 그들에게 말씀하기로 예정된 사람의 성품과 권한에 걸맞는 증언이 될 초자연 능력이 더러 특별히 나타나는 것을 구경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하도록 정해졌다.
137:6.2 (1532.4) 예수가 일어섰을 때, 회당장은 그에게 성서 두루말이를 건네주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로부터 읽었다: “이처럼 주가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라. 너희가 나를 위하여 지은 집이 어디 있느냐? 그리고 내가 거할 장소가 어디 있느냐? 이 모두를 내 손이 지었도다’ 하시니라. ‘그러나 가난하고, 뉘우치는 정신이 있고, 내 말에 떠는 이 사람을 내가 보살피리라.’ 떨고 두려워하는 너희는 주의 말씀을 들으라: ‘너희의 형제는 너를 미워하였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내쫓았도다.’ 그러나 주가 영광을 받을지어다. 그는 기쁨 속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겠고 모든 다른 자가 부끄럽게 될지니라. 도시로부터 들리는 목소리, 성전에서 오는 목소리, 주로부터 오는 목소리가 말하느니라. ‘그 여자가 산고에 시달리기 전에 낳았도다. 아픔이 오기 전에 사내아이를 낳았도다.’ 누가 그런 일을 들은 적이 있느냐? 땅이 하루에 생겨나겠느냐? 아니면 한 민족이 순간에 태어날 수 있느냐? 그러나 이렇게 주가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강물처럼 평화를 펼치겠고, 이방인의 영광도 흐르는 냇물과 같을지니라. 사람이 어머니에게 위로받는 것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는 예루살렘에서도 위로받을지니라. 너희가 이것들을 볼 때, 너희의 가슴이 기뻐할지니라.’”
137:6.3 (1533.1) 이 낭독을 마치고 나서, 예수는 두루마리를 관리자에게 돌려주었다. 앉기 전에 다만 이렇게 말했다: “참으라, 그리하면 너희는 아버지의 영광을 볼지니라. 나와 함께 머물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 행하기를 이처럼 배우는 자에게도 그렇게 될지니라.” 사람들은 이 모든 말씀이 무슨 뜻인가 궁금해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137:6.4 (1533.2) 그날 오후에 예수와 사도들은 야고보와 유다와 함께 배를 타고 물가를 따라 얼마큼 내려갔다. 거기서 닻을 내리고, 한편 그는 다가오는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들은 목요일 밤보다 말씀을 더 많이 알아들었다.
137:6.5 (1533.3) 예수는 “하늘나라가 오는 그 시간”까지 그들에게 일상 임무에 몰두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들을 권장하기 위하여 배 작업장에서 정상으로 일하려고 돌아감으로 모범을 보였다. 앞날의 일을 위한 공부와 준비로 저녁마다 세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예수는 덧붙였다: “너희를 부르라고 아버지가 명하실 때까지 우리 모두가 이 근처에서 남아 있으리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너희는 각자가 익숙한 일로 이제 돌아가야 하느니라. 아무에게도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말라. 내 나라는 시끄럽고 화려하게 오지 않을 것이요, 오히려 너희의 마음 속에서, 그리고 하늘나라 회의에 너희와 함께 하라고 부름받을 자들의 마음 속에서 내 아버지가 이루실 큰 변화를 통해서 그 나라가 와야 함을 기억하여라. 너희는 이제 나의 친구요, 나는 너희를 믿고 사랑하노라. 너희는 얼마 안 있어 나의 가까운 동료가 되리라. 참고 관대하라. 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라. 하늘나라의 부름을 받기 위하여 스스로 준비하라. 내 아버지를 섬기면서 너희가 큰 기쁨을 얻겠으나 또한 어려움에 대비해야 하느니라. 너희에게 훈계하노니, 많은 시련을 겪어야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임이라. 그러나 하늘나라를 찾은 자에게는 기쁨이 가득하겠고 저희는 온 땅에서 복받은 자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그러나 거짓된 희망을 품지 말라. 세상은 내 말을 듣고 넘어지리라. 너희, 내 친구들도 혼란스러운 머리에 내가 펼쳐 보이는 것을 완전히 깨닫지 못하느니라. 잘 알아들으라, 우리는 표징을 구하는 세대를 위하여 수고하러 나가느니라. 저희는 내 아버지가 나를 보내셨다는 증거로서 이적 행하기를 요구할 것이요, 저희는 내 아버지의 사랑이 계시될 때 내 사명의 신임장을 더디게 알아보리라.”
137:6.6 (1533.4) 그날 밤 육지로 돌아갔을 때, 그들이 길을 떠나기 전에 예수는 물가에서 서서 기도하였다: “내 아버지여, 이 어린 사람들을 주시니 감사하나이다. 저희는 의심이 드는데도 이제는 믿나이다. 그리고 저희를 위하여,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내 자신을 따로 두었나이다.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이제 저희가 하나 되는 것을 배우기를.”
137:7.1 (1533.5) 길게 넉 달 동안―3월ㆍ4월ㆍ5월ㆍ6월―기다리는 이 시간이 계속되었다. 예수는 이 여섯 동료와 아우 야고보와 함께, 1백 번이 넘도록 즐겁고 기쁘지만 길고도 진지한 수업을 가졌다. 집안에 질병이 있어서, 유다는 이 수업에 다닐 수 있는 적이 드물었다. 예수의 아우 야고보는 믿음을 잃지 않았지만, 지연되고 활동이 없는 이 몇 달 동안 마리아는 아들을 거의 단념하였다. 어머니의 믿음은 가나에서 그렇게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가, 이제 새로운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어머니는 너무나 자주 되풀이하던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를 이해할 수 없구나. 이 모두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낼 수 없구나.” 그러나 야고보의 아내는 마리아의 용기를 북돋아 주느라고 많이 애썼다.
137:7.2 (1534.1) 이 넉 달 동안 내내, 이 일곱 신자는 예수와 함께 서로 알게 되었고, 이 중에 한 사람은 육체로 아우였다. 그들은 이 하나님인 사람과 함께 산다는 생각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비록 그를 랍비라고 부르기는 했어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배우고 있었다. 예수는 비할 데 없이 품위 있는 인격을 소유했고, 이것은 그들이 그의 신성에 기가 죽지 않고서 그가 그들 사이에 살 수 있게 만들었다. 그들은 하나님,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육신화한 이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것이 정말로 쉬운 것을 알아차렸다. 이 기다리는 시간은 신자들 무리 전체를 몹시 시험했다. 기적 같은 일은 아무것도, 절대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날마다 그들은 보통 일을 하고 다녔고 밤마다 예수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견줄 데 없는 그의 인품이, 그리고 저녁마다 하신 그의 인자한 말씀이 그들을 함께 뭉치게 하였다.
137:7.3 (1534.2) 기다리고 가르침을 받던 이 기간은 특히 시몬 베드로에게 힘들었다. 그는 요한이 유대 지방에서 전도를 계속하는 동안, 갈릴리에서 하늘나라의 전도를 시작하라고 예수를 설득하려고 거듭 애썼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예수가 대답한 말은 늘 같았다: “참아라 시몬아. 진전을 보이라. 아버지가 부르실 때 우리는 조금도 지나치게 준비되어 있지 않으리라.” 노련하고 철학이 담긴 조언으로 안드레는 때때로 베드로를 가라앉히곤 했다. 안드레는 예수의 자연스러운 인간성에 엄청나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과 그렇게 가까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어찌 그리 친근하고 사려 깊을 수 있는가 자주 생각해보았다.
137:7.4 (1534.3) 이 기간 전체를 통해서 예수는 회당에서 겨우 두 번 말씀하였다. 기다리던 이 여러 주가 끝날 때가 되자 그의 세례와 가나의 포도주에 대한 보고가 비로소 조용해졌다. 예수는 기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이 기간에 더 일어나지 않도록 처리하였다. 그러나 벳세다에서 그렇게 조용히 살았어도 예수의 이상한 행적에 대한 보고가 헤롯 안티파스에게 전해졌다. 다음에 그는 예수가 무슨 일을 하려는가 확인하려고 첩자들을 보냈다. 그러나 헤롯은 요한의 설교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예수를 괴롭히지 않기로 작정했고, 예수는 가버나움에서 아주 조용히 일을 계속하였다.
137:7.5 (1534.4) 기다리는 이 시간에, 예수는 동료들에게 여러 종교 집단과 팔레스타인의 여러 정당에 대하여 그들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가르치려고 애썼다. 예수의 말씀은 언제나 같았다: “우리는 저희 모두를 설득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저희 가운데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느니라.”
137:7.6 (1534.5) 서기관과 랍비들을 한데 모아서, 바리새인이라 불렀다. 그들은 자기네끼리 “동료”라고 언급했다. 이들은 여러 면에서 유대인 사이에서 진취적인 무리였고 히브리 성서에 뚜렷하게 발견되지 않는 많은 가르침을 채택했는데,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관념과 같은 것이요, 이것은 오직 후기 선지자 다니엘이 언급한 신조였다.
137:7.7 (1534.6) 사두개인은 사제 계급과 어떤 부유한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율법 시행의 세부를 까다롭게 따지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정말로 종파라기보다 종교적 정당이었다.
137:7.8 (1534.7) 에센인은 참으로 한 종파였고 마카비의 봉기가 일어날 때 시작되었다. 그 요구 사항은 어떤 면에서 바리새인보다 더 힘들었다. 그들은 페르시아인의 많은 관념과 관습을 받아들였고, 수도원에서 단체를 이루어 살며 결혼을 삼가고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가졌다. 그들은 천사에 대한 가르침을 전문으로 다루었다.
137:7.9 (1535.1) 열심당원은 맹렬한 유대인 애국자 집단이었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의 사슬에서 벗어나려는 투쟁에는 어떤 방법도 정당화된다고 주장하였다.
137:7.10 (1535.2) 헤롯당원은 순전한 정당이었다. 헤롯 왕조를 회복함으로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받는 처지에서 해방될 것을 주장하였다.
137:7.11 (1535.3) 팔레스타인 한가운데에는 사마리아인이 살았다. 유대인의 가르침과 비슷한 많은 관점을 가졌는데도 이들과 “유대인은 전혀 교류가 없었다.”
137:7.12 (1535.4) 이보다 작은 나지르인 단체를 포함하여, 이 정당과 종파들은 모두, 메시아가 언젠가 오신다는 것을 믿었다. 이들 모두가 민족의 구원자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와 제자들이 이 사상이나 관습을 가진 학파들 중에 어느 쪽과도 연합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주 단호하게 밝혀주었다. 사람의 아들은 나지르인도 에센인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137:7.13 (1535.5) 예수는 후일에, 요한이 한 것처럼, 사도들이 떠나서 복음을 전파하고 신자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지시했지만, 그는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동료들에게 “사랑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동정심을 보여야” 한다는 것을 어김없이 인식시켰다. 하늘나라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시는 것과 상관되는 영적 체험이라고 추종자들에게 일찍부터 가르쳤다.
137:7.14 (1535.6) 활발하게 대중 전도에 들어가기 전에 이렇게 머무르는 동안, 예수와 일곱 사람은 히브리 성서를 공부하느라고 회당에서 한 주에 이틀 저녁을 보냈다. 열심히 대중 활동을 하던 시절이 지난 뒤 후일에, 사도들은 주와 관계를 가졌던 중에서 이 넉 달이 가장 값지고 유익했다고 회상했다. 예수는 이 사람들에게 소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쳤다. 그는 지나치게 가르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들이 이해할 능력을 너무 뛰어넘어 진리를 제시하여 혼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137:8.1 (1535.7) 6월 22일 안식일에, 첫 전도 여행을 나가기 얼마 전에, 그리고 요한이 갇힌 뒤 열흘쯤 되어서, 예수는 사도들을 가버나움으로 데려온 뒤에 두 번째로 회당의 설교단을 차지하였다.
137:8.2 (1535.8) “하늘나라”에 대하여 이 설교를 하기 며칠 전에, 예수가 배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 베드로는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예수는 연장을 다시 한 번 내려놓고, 앞치마를 벗고서 베드로에게 말했다: “아버지의 때가 왔도다.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준비하자.”
137:8.3 (1535.9) 예수는 서기 26년 6월 18일, 이 화요일에 목수 벤치에서 마지막으로 일했다. 베드로는 작업장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오후 중반이 되자 동료들을 모두 몰아왔고 물가의 숲에 그들을 남겨 두고서, 예수를 찾으러 갔다. 그러나 예수를 찾아낼 수 없었으니 주가 다른 숲으로 기도하러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그날 저녁 늦게 세베대의 집으로 돌아와서 먹을 것을 청할 때까지 그들은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 다음 날 그는 다가오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할 기회를 부탁하려고 동생 야고보를 보냈다. 회당장은 예수가 다시 예배를 기꺼이 인도한다고 크게 기뻐하였다.
137:8.4 (1536.1)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억에 남을 이 설교는 대중을 위한 생애에서 처음으로 당당해 보이는 노력이었는데, 설교하기 전에, 예수는 성서로부터 이 몇 구절을 읽었다: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 곧 거룩한 민족이 될지니라. 야웨는 우리의 재판관이요, 우리에게 율법을 주는 이요, 야웨는 우리의 임금이라. 그가 우리를 구하리라. 야웨는 나의 임금, 나의 하나님이라. 온 땅 위에 큰 임금이라. 자애가 이 나라 안에서 이스라엘에게 다가오도다. 그는 우리의 임금이니 주의 영광은 복되도다.”
137:8.5 (1536.2) 읽기를 마치고 나서 예수는 말씀하였다:
137:8.6 (1536.3) “나는 아버지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선포하려고 왔노라. 이 나라는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자유로운 자와 매여 있는 자의 예배하는 혼을 포함하리니, 내 아버지가 사람을 차별하는 분이 아닌 까닭이라. 그의 사랑과 자비는 만민에게 베풀어지느니라.
137:8.7 (1536.4)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사람의 정신 속에 깃들라고 그의 영을 보내시며, 땅에서 내가 일을 마치고 나서 마찬가지로 진리의 영이 모든 육체에 부어지리라. 내 아버지의 영과 진리의 영은 다가오는 하늘나라, 영적 이해와 신의 올바름이 있는 나라에서 너희를 세우리라. 내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은 권력의 보좌나 현세에 영화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전투에서 군대를 이끌지 아니하리라. 내 나라가 다가오면 사람의 아들이 평화의 왕이요, 영원한 아버지의 계시인 것을 너희가 알지니라. 이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나라들을 세우고 크게 만들려고 다투거니와 내 제자들은 도덕적 결정과 영적 승리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리라. 일단 거기에 들어가면, 저희가 기쁨과 올바름과 영생을 얻으리라.
137:8.8 (1536.5)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며 이처럼 내 아버지와 같이 고귀한 인격을 얻으려고 비로소 애쓰는 자는 필요한 모든 다른 것을 얼마 안 있어 소유하리라. 그러나 아주 진지하게 너희에게 이르노니, 어린아이의 믿음과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구하지 않으면 너희는 도무지 들어가지 못할지니라.
137:8.9 (1536.6) “와서 여기 하늘나라가 있다, 저기 하늘나라가 있다 하고 이르는 자에게 속지 말지니 내 아버지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에 아랑곳하지 않음이라. 그리고 이 나라는 이제도 너희 사이에 있으니,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혼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곳에 실제로 하늘나라가 있는 까닭이라. 이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 있는 올바름이요, 평화와 기쁨이라.
137:8.10 (1536.7) “요한은 회개의 표시로, 그리고 너희의 죄를 용서하려고 정말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137:8.11 (1536.8) “내 아버지의 나라에는 유대인도 이방인도 없고, 오직 봉사를 통해서 완전하게 되기를 구하는 자들만 있으리라. 내가 선언하노니,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먼저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이라. 사람의 모습을 입고 섬김으로 내가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와 함께 곧 앉으리니, 이와 같이 너희가 동료들을 기꺼이 섬기면 내 나라에서 나와 함께 앉을지니라.
137:8.12 (1536.9) “이 새 나라는 밭에 있는 좋은 흙 속에 자라는 씨앗과 같으니라. 씨앗은 하루 아침에 익은 열매를 맺지 않느니라. 사람의 혼 속에서 하늘나라가 세워지고 나서 그 나라가 성숙하여 익은 열매, 영구히 올바르고 영원히 구원받는 완전한 열매를 맺기까지 시간이 걸리느니라.
137:8.13 (1536.10)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외치는 이 나라는 권력과 풍요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 온전히 봉사하는 가운데 차츰 올바르게 되고 기쁨이 커지는 생활이라. 아버지가 세상의 자녀들에 관하여 말씀하지 아니하더냐? ‘내가 완전한 것 같이 저희가 궁극에 완전하게 되는 것이 나의 뜻이라.’
137:8.14 (1537.1) “나는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려고 왔노라. 이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의 무거운 짐을 더 무겁게 만들려고 온 것이 아니라. 새롭고 더 좋은 길을 선포하노니, 다가오는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신성한 휴식을 즐기리라. 세상의 물건으로 비용이 얼마큼 들든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고 무슨 값을 치르든지 상관없이, 너희는 이 세상에서 기쁨과 영적 진보를 여러 배나 얻고, 다가오는 시대에 영생을 얻을지니라.
137:8.15 (1537.2)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군대의 행진이나, 이 세상의 나라가 뒤엎어지거나, 포로의 멍에가 부서진 뒤에 생기는 일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가까웠으니 거기에 들어가는 자는 모두 풍부한 자유와 기쁨에 넘치는 구원을 얻으리라.
137:8.16 (1537.3) “이 나라는 영구한 영토이라. 그 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내 아버지께로 올라갈지며 파라다이스에서 그의 영광 바른 편에 확실히 이르리라.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 되겠고, 다가오는 시대에 아버지께로 그렇게 올라가리라. 의로운 체하는 자가 아니라, 죄인, 그리고 신답게 완전한 올바름을 간절히 바라고 목마르게 찾는 모든 사람을 부르려고 내가 왔노라.
137:8.17 (1537.4) “요한은 와서 너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도록 준비시키려고 회개를 부르짖었느니라. 나는 이제 와서 믿음, 곧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데 치를 값이라 선포하노라. 무한한 사랑으로 내 아버지가 너희를 사랑함을 믿기만 하면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느니라.”
137:8.18 (1537.5) 이렇게 말씀하고 나서 그는 앉았다.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말씀에 놀랐다. 제자들은 감탄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하나님인 사람의 입으로부터 좋은 소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말씀을 들은 자의 약 3분의 1은 충분히 알아듣지 못했어도 그 말씀을 믿었다. 약 3분의 1은 기대하는 나라에 관한 그러한 순전한 영적 개념을 거부하려고 마음 속에서 준비하였다. 한편 나머지 3분의 1은 그 가르침을 깨달을 수 없었고, 많은 사람은 그가 “돌았다”고 참으로 믿었다.
138:0.1 (1538.1) “하늘나라”를 주제로 설교한 뒤에, 예수는 그날 오후에 여섯 사도를 불러모으고 갈릴리 바다 둘레와 그 근처의 여러 도시를 방문하는 계획을 비로소 알려주었다. 동생 야고보와 유다는 이 회의에 부름받지 않아서 몹시 마음이 상하였다. 이때까지 그들은 예수의 핵심 동료의 모임에 자신들이 속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예수는 가까운 친척을 아무도 하늘나라의 이 사도 지도자 집단의 구성원으로 넣지 않으려고 계획하였다. 선택된 몇 사람 중에 야고보와 유다를 이렇게 넣지 못한 것은 가나의 체험 이후로 어머니를 멀리하는 듯한 태도와 함께, 예수와 그 집안 사이에 나날이 틈이 벌어지는 시초가 되었다. 이 상황은 대중 봉사를 통해서 내내 계속되었고―그들은 아주 그를 버리다시피 하였다―이 거리는 그가 죽고 다시 살아나기까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오르내리는 믿음과 희망, 더욱 커지는 실망과 창피와 절망의 감정 사이에 항상 이리저리 흔들렸다. 오로지 막내 룻이 가장인 오라버니에게 흔들리지 않고 충성한 채로 남아 있었다.
138:0.2 (1538.2) 부활이 있을 때까지, 예수의 가족 모두가 그의 봉사와 거의 아무 상관이 없었다. 선지자가 자기 나라 바깥에서만 존경받는다면, 자기 가족 바깥에서 사람들은 그를 고맙게 여기었다.
138:1.1 (1538.3) 이튿날, 서기 26년 6월 23일 일요일에 예수는 마지막 지침을 여섯 사람에게 주었다. 둘씩 나가서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을 가르치라고 지시했다. 사람들에게 세례 주는 것을 금하였고 대중 전도를 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조언하였다. 나중에 그들이 대중 앞에서 전도하는 것을 허락하겠지만, 한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동포를 몸소 상대하는 실용적 체험을 얻기 바란다고 이어서 설명하였다. 예수는 첫 여행을 전적으로 몸소 일하는 여행으로 만들 생각을 품었다. 비록 이 발표가 사도들에게 얼마큼 실망이 되었으나 그래도, 적어도 어느 정도, 그들은 예수가 하늘나라의 선포를 이렇게 시작하는 이유를 깨달았고, 기운차게 대담한 열심으로 일을 시작했다. 이들을 둘씩 보냈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게레사로, 안드레와 베드로는 가버나움으로, 한편 빌립과 나다니엘은 타리케아로 갔다.
138:1.2 (1538.4) 이 처음 2주 동안에 봉사를 시작하기 전에, 예수는 그가 떠난 뒤에 하늘나라 일을 계속하도록 열두 사도를 세우기 바란다고 발표했다. 각자에게 일찍 전도받은 사람들 중에서 계획한 사도 단체에 들어가는 자격을 얻는 사람을 하나 선택하는 권한을 주었다. 요한이 입을 열어 물었다. “하지만 주여, 이 여섯 사람이 우리 사이에 들어와서 함께 모든 것을 똑같이 나눌 것이니이까? 우리는 요단강의 일이 있은 뒤로 당신과 함께 있어 왔고, 이 수고, 하늘나라를 위한 우리의 첫 수고를 하는 준비로서 당신의 가르침을 모두 들어 왔나이다.” 예수는 대답하였다 “그렇다 요한아. 너희가 고르는 사람들은 우리와 하나가 되겠고, 내가 너희를 가르친 것 같이 너희는 하늘나라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저희에게 가르치리라.” 이렇게 말한 뒤에, 예수는 그들을 떠났다.
138:1.3 (1539.1) 각자 새 사도를 골라야 한다는 예수의 지시를 논의하면서 많은 의견을 나누었을 때까지 그들은 흩어져서 일하러 가지 않았다. 안드레의 조언이 마침내 지지를 얻었고 그들은 일하러 떠나갔다. 안드레는 이런 내용으로 말했다. “주가 옳도다. 우리는 이 일을 성취하기에 수가 너무 적으니라. 더 많은 선생이 필요하고, 새로운 이 여섯 사도를 선택하는 일을 우리에게 맡겼으니, 주는 우리를 크게 신뢰함을 보이셨느니라.” 이날 아침 흩어져서 일하러 갈 때, 각자의 가슴 속에는 얼마큼 침울한 느낌이 감추어져 있었다. 그들은 예수가 없어 서운하리라는 것을 알았고, 두렵고 겁이 나기도 했지만 이런 식으로 하늘나라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전에 상상하지 않았다.
138:1.4 (1539.2) 여섯 명이 2주 동안 수고하도록 예정되었고 그 뒤에 회의하려고 세베대의 집으로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예수는 그동안에 요셉과 시몬, 그리고 근처에 사는 다른 식구들과 이야기하려고 나사렛으로 갔다. 가족의 신임과 애정을 유지하려고, 헌신하여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과 어긋나지 않는 한, 예수는 인간으로서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 그는 이 문제에서 책임을 다하고도 남았다.
138:1.5 (1539.3) 사도들이 이 임무를 띠고 떠난 동안 예수는 지금 감옥에 있는 요한에 대하여 많이 생각했다. 요한을 석방하려고 그의 잠재 권력을 쓰는 것은 큰 유혹이었지만, 다시 한 번 그는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데” 몸을 맡겼다.
138:2.1 (1539.4) 여섯 사람의 이 첫 선교 여행은 대단한 성공이었다. 모두가 사람들과 직접, 몸소 접촉하는 것이 크게 가치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종교가 결국 순전히 전적으로 몸소 체험하는 문제임을 더욱 충만히 깨닫고 예수에게 돌아왔다. 종교적으로 위로가 되고 영적으로 격려하는 말씀을 서민들이 얼마나 듣고 싶어 하는가 비로소 알아차렸다. 예수의 주위에 모였을 때 그들은 모두 한꺼번에 이야기하고 싶어했지만, 안드레가 지휘를 맡았다. 그가 한 사람 한 사람 부르자 각자 주께 정식 보고를 드렸고, 새로 여섯 사도가 될 사람을 지명하였다.
138:2.2 (1539.5) 각 사람이 새 사도가 되도록 선택한 사람을 제시한 뒤에 예수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그 지명에 대하여 투표하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새 여섯 사도 모두가 여섯 명의 고참 모두에게 정식으로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그들이 다 이 후보자들을 만나보고 봉사를 요청할 것이라 발표했다.
138:2.3 (1539.6) 새로 뽑힌 사도들은 다음과 같았다:
138:2.4 (1539.7) 1. 마태 레위는 가버나움의 세리요, 도시의 바로 동쪽에 바타니아 경계 가까이에 사무소가 있었다. 안드레가 그를 선택했다.
138:2.5 (1539.8) 2. 토마스 디디머스는 타리케아의 어부요, 가다라에서 한때 목수이자 석공이었다. 빌립이 선택했다.
138:2.6 (1539.9) 3. 야고보 알패오는 게레사의 어부이자 농부였고 야고보 세베대가 그를 선택했다.
138:2.7 (1539.10) 4. 유다 알패오는 야고보 알패오의 쌍둥이 형제요, 또한 어부이며, 요한 세베대가 선택했다.
138:2.8 (1540.1) 5. 열심당원 시몬은 열심당이라는 애국 조직에서 높은 직위에 있었다. 그는 예수의 사도들과 함께 하려고 이 자리를 버렸다. 열심당에 들어가기 전에, 시몬은 상인이었다. 베드로가 그를 선택했다.
138:2.9 (1540.2) 6. 가룟 유다는 예리고에서 사는 어느 부유한 유대인 부모의 외아들이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따라다니게 되었고 사두개인 부모는 그와 인연을 끊었다. 예수의 사도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 그는 이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주로 재무에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나다니엘은 그들의 대열에 끼라고 그를 초청하였다. 가룟 유다는 열두 사도 가운데 유일한 유대 지방 사람이었다.
138:2.10 (1540.3) 예수는 여섯 사도의 물음에 대답하고 그들이 드린 보고의 세부를 들으면서 함께 꼬박 하루를 썼다. 그들이 이야기하고 싶은 흥미 있고 유익한 체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당당해 보이는 대중 사업을 벌이기 전에, 조용하고 개인적인 방법으로 수고하라고 그들을 내보낸 주의 계획이 지혜로웠음을 이제 깨달았다.
138:3.1 (1540.4) 이튿날 예수와 여섯 사람은 세리 마태를 찾아보러 갔다. 마태는 장부를 맞추어 놓고 사무소의 일을 형제에게 넘길 준비를 해놓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세금 징수소에 가까이 가자, 안드레가 예수와 함께 앞으로 나섰다. 예수는 마태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말했다, “나를 따르라.” 그는 일어서서 예수와 사도들과 함께 자기 집으로 갔다.
138:3.2 (1540.5) 마태는 그날 저녁을 위하여 마련한 연회에 관하여 예수에게 말씀 드렸다. 예수가 귀빈으로 참석하는 것을 승인하고 찬성한다면 가족과 친구들에게 그런 만찬을 차리기 바란다는 것까지는 적어도 말했다. 예수는 찬성하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마태를 옆으로 데리고 가서, 그가 어떤 시몬이라는 사람을 사도들 틈에 끼라고 초청했다고 설명하고 시몬이 이 잔치에 또한 초청을 받도록 허락을 얻었다.
138:3.3 (1540.6) 마태의 집에서 한낮에 점심을 먹은 뒤에, 모두 베드로와 함께 열심당원 시몬을 찾아보러 갔다. 그들은 시몬이 전에 사업하던 장소에서 그를 찾았다. 그 사업은 이제 그의 조카가 운영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예수를 시몬에게 모시고 갔을 때, 주는 그 불 같은 애국자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를 따르라”고 말했을 뿐이다.
138:3.4 (1540.7) 모두 마태의 집으로 돌아갔고 거기서 저녁 식사 때까지 정치와 종교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했다. 레위 집안은 오랫동안 장사와 세금 걷는 일에 종사하였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이 연회에 마태에게 초대받은 많은 손님을 “세리와 죄인”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138:3.5 (1540.8) 그 시절에 유명한 사람을 위하여 이런 종류의 환영회나 연회가 열렸을 때, 손님들이 음식 먹는 것을 구경하고 귀빈들이 말씀하고 연설하는 것을 들으려고 관심 있는 모든 사람이 연회실 주위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관습이었다. 따라서 가버나움 바리새인의 대부분이 이 보기 드문 사교(社交) 모임에서 예수의 행동을 구경하려고 이 기회에 와 있었다.
138:3.6 (1540.9) 저녁 식사가 진행되자, 저녁 먹는 사람들의 흥겨움이 썩 좋은 정도로 무르익었다. 사람마다 무척 흥겨운 시간을 가졌고 그래서 그렇게 분위기가 즐겁고 태평한 행사에 예수가 참석한 것 때문에 구경하는 바리새인들은 마음 속에서 그를 헐뜯기 시작했다. 저녁이 얼마큼 지나서 사람들이 연설하고 있을 때 심술궂은 바리새인들 중에 한 사람이 베드로에게 예수의 행동을 비난하기에 이르렀고, 이렇게 말했다 “어찌 감히 너는 이 사람이 의롭다고 가르치느냐? 그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이처럼 경솔하게 즐거워하는 장면에 얼굴을 보이는도다.” 예수가 모인 사람들에게 작별하면서 축복의 말씀을 하기 전에, 베드로는 이런 비판을 예수에게 속삭여 일러 주었다. 예수는 비로소 입을 열고 이렇게 말씀하였다: “마태와 시몬을 우리 모임으로 환영하려고 오늘 밤 여기에 와서 너희가 즐겁고 서로 흥겨워하는 것을 구경하니 내가 기쁘도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이 다가오는 영(靈)의 나라에 들어가리니, 더욱 기뻐해야 하느니라. 거기서 너희는 하늘나라의 좋은 것을 더 풍성하게 즐기리라. 이 친구들과 즐거이 지내려고 내가 여기 왔다고 해서, 둘러 서서 마음 속에 나를 비난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회에서 천대받는 자에게 기쁨을, 그리고 도덕적으로 포로가 된 자에게 영적 해방을 선포하려고 내가 왔노라.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병든 사람이 의사(醫師)가 필요함을 너희에게 상기시킬 필요가 있느냐? 의인(義人)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고 내가 왔노라.”
138:3.7 (1541.1) 참으로 이것은 온 유대 민족이 보기에 이상한 광경이었다. 올바른 인품과 고상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 서민들, 아니 종교심이 없고 쾌락을 찾는 무리, 세리와 소문난 죄인의 무리와 함께 자유롭고 즐겁게 어울리는 것을 보다니! 마태의 집에서 있었던 이 모임에서 열심당원 시몬도 한 바탕 연설하고 싶어했으나 다가오는 하늘나라가 열심당의 운동과 혼동되는 것을 예수가 원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에, 안드레는 그에게 어떤 공식 논평도 하지 말라고 말렸다.
138:3.8 (1541.2) 예수와 사도들은 그날 밤에 마태의 집에서 묵었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자, 그들은 예수가 선하고 친절한 것, 오직 이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138:4.1 (1541.3) 이튿날 아침, 아홉 사람 모두가 다음 두 사도, 야고보와 유다, 즉 알패오의 쌍둥이 아들들을 정식으로 부르려고 배를 타고 게레사로 갔다. 야고보 세베대와 요한 세베대가 이들을 지명하였다. 어부인 쌍둥이는 예수와 사도들이 오기를 기대하였고 따라서 호숫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야고보 세베대는 주를 게레사 어부들에게 소개하였다. 예수는 그들을 지켜보고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를 따르라.”
138:4.2 (1541.4) 함께 지낸 그날 오후에, 예수는 잔치하던 모임에 다녀온 것에 관하여 그들에게 충분히 가르쳤다. 예수는 이렇게 말씀을 맺었다: “모든 사람이 내 형제이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는 우리가 만든 어떤 사람도 업신여기지 않느니라. 하늘나라는 모든 남녀에게 열려 있느니라. 그곳에 들어가려고 애쓸지 모르는 어떤 갈급한 혼 앞에서 아무도 자비(慈悲)의 문을 닫아서는 안되느니라. 우리는 하늘나라에 관하여 듣고자 하는 모든 사람과 함께 식탁에 앉으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사람들을 내려다보실 때, 저희는 모두 비슷하니라. 그러므로 바리새인이나 죄인, 사두개인이나 세리, 로마인이나 유대인, 부자(富者)나 가난한 자, 자유로운 자나 매인 자, 이들과 함께 먹기를 거절하지 말라. 하늘나라의 문은 진리를 알고 하나님을 찾아내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려 있느니라.”
138:4.3 (1541.5) 그날 밤 알패오의 집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을 때, 쌍둥이 형제는 사도의 일행에 가입했다. 저녁에 얼마 있다가 예수는 깨끗하지 않은 영들의 기원ㆍ성질ㆍ운명을 다루는 첫 수업을 사도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가 일러준 말씀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없었다. 예수를 사랑하고 찬미하기는 매우 쉽지만, 그의 가르침 가운데 많은 것이 알아듣기가 아주 어려움을 깨달았다.
138:4.4 (1542.1) 밤에 쉬고 난 뒤에, 이제 열한 명이 된 일행 전체는 배를 타고 타리케아로 건너갔다.
138:5.1 (1542.2) 어부 토마스와 방랑자 유다는 타리케아에서 고기잡이 배를 대는 곳에서 예수와 사도들을 만났다. 토마스는 그 일행을 근처에 자기 집으로 인도하였다. 빌립은 토마스를 이제 사도로 지명한 사람이라고 소개하였고 나다니엘은 유대 출신 가룟 유다를 비슷한 예절을 갖추어 소개하였다. 예수는 토마스를 보고 말했다: “토마스야, 너는 믿음이 부족하구나. 그렇기는 하여도 너를 받아들이노라. 나를 따르라.” 가룟 유다에게 주는 말했다: “유다야, 우리는 모두 한 몸에서 생겨났느니라. 내가 너를 우리 가운데 받아들이는 것 같이, 갈릴리 형제들에게 네가 언제나 충실하기를 기도하노라. 나를 따르라.”
138:5.2 (1542.3) 그들이 원기를 되찾고 나서 예수는 열두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서 한동안 함께 기도하고 성령의 성질과 성령이 하는 일을 가르쳤다. 그러나 가르치려고 애쓴 그 놀라운 진리의 의미를 그들은 또 다시 대체로 알아듣지 못했다. 이 사람은 이것을 알아듣고 저 사람은 저것을 알아듣곤 했지만, 아무도 가르친 것을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언제나 그들은 예수의 새 복음을 옛 형태의 종교 관념에 끼워 맞추려고 애쓰는 잘못을 저지르곤 했다. 구원을 부르짖는 새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을 찾아내는 새 길을 열려고 예수가 왔다는 관념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그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새로운 계시임을 깨닫지 못했다.
138:5.3 (1542.4) 이튿날 예수는 열두 제자를 자기들끼리 있게 두었다. 그들이 얼굴 익히기를 원했고 가르친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라고 그들끼리만 있기를 바랐다. 주는 저녁 식사에 돌아왔다. 저녁을 들고난 뒤에 그는 세라핌이 베푸는 봉사에 관하여 일러주었는데, 사도들 가운데 몇은 가르침을 알아들었다. 그들은 밤에 쉬고 이튿날 배로 가버나움을 향하여 떠났다.
138:5.4 (1542.5) 세베대와 살로메는 아들 다윗과 함께 살려고 가버렸다. 그래서 큰 집을 예수와 열두 사도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 여기서 예수는 선택한 사자들과 함께 조용한 안식일을 보냈다.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계획의 윤곽을 주의 깊게 설명하였고, “집권자들을 꾸짖어야 한다면, 그 일을 내게 맡기라. 케자나 그 신하들을 너희가 아예 비난하지 않도록 하여라”하고 말해서 정부 당국과 어떤 충돌이라도 피하는 것이 중요함을 충분히 설명했다. 바로 이날 저녁에 가룟 유다는 예수를 옆으로 이끌고 어째서 요한을 감옥에서 구출하려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가 물었다. 유다는 예수의 태도에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았다.
138:6.1 (1542.6) 다음 주간은 맹렬히 훈련받는 과정에 시간을 썼다. 하늘나라의 일을 위한 준비로, 배우고 체험한 모든 것을 샅샅이 복습하려고 날마다 새 사도 여섯이 각자 자기를 지명한 사람의 손에 맡겨졌다. 먼저 된 사도들은 새 여섯 사도의 이익을 위하여 그 시각까지 받은 예수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복습하였다. 저녁에 예수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모두 세베대의 집 뜰에서 모였다.
138:6.2 (1542.7) 바로 이때에 예수는 휴식과 기분 전환을 위하여 주중에 노는 날을 정했다. 육체로 여생 동안 내내, 예수는 주마다 하루 동안 쉬는 이 계획을 좇았다. 대체로, 수요일에는 결코 정규 활동을 하지 않았다. 주마다 이 휴일에, 예수는 보통 그들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아, 하루 동안 놀러 나가라. 하늘나라의 벅찬 수고를 그만두고 휴식을 취하고, 예전에 하던 직업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새 종류의 오락 활동을 발견하여 새로운 기분을 즐기라.” 땅에서 사신 이 기간에, 예수는 이렇게 노는 날이 실제로 필요하지 않았지만, 이것이 인간 동료들에게 최선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이 계획을 좇았다. 예수는 선생―주―였고 동료들은 생도―제자―였다.
138:6.3 (1543.1) 예수는 그의 가르침 및 그들 가운데서 사신 일생, 그리고 나중에 그에 관하여 생겨날지 모르는 가르침, 이 둘의 차이를 사도들에게 분명히 밝히려고 애썼다. 예수는 말했다: “내 나라와 이에 관계된 복음은 너희가 전하는 말의 요점이 될지니라. 옆길로 빠져, 나에 관하여 그리고 내 가르침에 관하여 전도하지 말라.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하늘 아버지를 내가 계시한 것을 보여주라. 그러나 샛길로 잘못 빠져서, 나의 신앙과 가르침에 관한 신앙과 가르침에 관련하여 전설을 만들고 종파를 세우지 말라.” 그러나 또 다시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지 알아듣지 못했고 아무도 어째서 그가 그렇게 가르치는가 감히 묻지 않았다.
138:6.4 (1543.2)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그릇된 개념에 관계되는 것을 제외하고, 예수는 이 초기의 가르침에서 가능한 한 사도들과 논쟁을 피하려고 애썼다. 모든 그러한 문제에서 그는 결코 서슴지 않고 그릇된 관념을 고쳐주었다. 유란시아에서 세례받은 이후에 예수의 생애에서 꼭 한 가지 동기가 있었으니,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더 낫게, 참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에게 이르는 새롭고 더 좋은 길, 믿음과 사랑의 길을 여는 개척자였다. 이것이 사도들에게 늘 준 훈계였다, “가서 죄인을 찾으라. 낙심한 자를 찾아내고 근심하는 자를 위로하라.”
138:6.5 (1543.3) 예수는 상황을 완전히 파악했다. 임무를 진척시키는 데 이용될 수 있는 한없는 능력을 소유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적당하다고 여기고 중요치 않다고 보았을 그러한 수단과 인물에 온전히 만족하였다. 엄청난 극적 가능성이 있는 사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가장 조용하고 평범한 방법으로 아버지의 일을 해 나가기를 고집했다. 그는 어떤 권력의 전시도 애써서 피하였다. 이제 적어도 몇 달 동안, 갈릴리 바다 근처에서 둘러싼 열두 사도와 함께 조용히 일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138:7.1 (1543.4) 예수는 다섯 달 동안 개인적으로 일하는 조용한 선교 운동을 전에 계획하였다. 이것이 얼마나 오래 갈지 사도들에게 일러주지 않았다. 그들은 한 주 한 주 일했다. 그 주간의 이 첫째 날 일찍부터 이것을 열두 사도에게 막 발표하려 했을 때, 시몬 베드로, 야고보 세베대, 가룟 유다가 함께 개인적으로 대화하려고 왔다. 예수를 옆으로 이끌고 베드로는 감히 말했다: “주여,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가 이제 무르익지 않았는가 물어보라고, 동료들이 부추겨서 우리가 오나이다. 당신은 가버나움에서 하늘나라를 선포할 것이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계속하여 예루살렘으로 옮길 것이니이까? 하늘나라를 세우는 데 우리 각자가 당신과 함께 무슨 자리를 차지하는지 우리가 언제 알게 되리이까―” 베드로는 이어서 더 물으려 했겠지만, 예수는 꾸짖는 듯 손을 올려 그를 막았다. 가까이 대기하던 다른 사도들에게 한데 모이라고 손짓하면서 예수는 말했다: “어린것들아, 얼마나 오랫동안 너희를 참으랴!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너희에게 분명히 이르지 않았더냐? 내가 다윗의 왕좌에 앉으려고 오지 않았다고 여러 번 일렀는데, 아버지의 나라에서 각자 무슨 자리를 차지할까 묻고 있으니, 자 어인 일이냐? 영적 왕국의 대사(大使)로서 너희를 부른 것을 깨달을 수 없느냐? 내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지금 대표하는 것 같이, 곧, 오래지 않아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일에 너희가 나를 대표할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내가 너희를 선택하고 하늘나라의 사자로서 너희를 가르쳤어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신이 높이 계시는 이 다가오는 하늘나라의 성질과 중요성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다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친구들아, 한 번 더 내 말을 듣거라. 내 나라가 권력으로 다스리거나 영화로운 통치라는 이 생각을 머리에서 없애버리라. 정말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력이 곧 내 손에 쥐어질 터이나, 이 시대에 신이 준 이 재산을 바로 우리를 영화롭게 하는 데 쓰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다른 시대에 너희는 정말로 권력과 영광을 가지고 나와 함께 앉으려니와 우리가 이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고 땅에서 그가 명하는 일을 집행하도록 겸손히 복종하여 앞으로 가는 것이 마땅하니라.”
138:7.2 (1544.1) 다시 한 번 동료들은 충격을 받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예수는 둘씩 기도하러 보내고 정오에 그에게 돌아오라고 하였다. 이 중대한 아침 나절에, 각자 하나님을 찾으려고 애썼다. 서로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힘을 주려고 수고하였으며 지시한 대로 예수에게 돌아왔다.
138:7.3 (1544.2) 예수는 이제 그들을 위하여, 요한이 온 것, 요단강에서 세례받은 것, 가나에서 있었던 결혼 잔치, 여섯 사람을 최근에 선택한 것, 육체로 자신의 형제들이 그들로부터 물러난 것을 이야기했고, 하늘나라의 적(敵)은 또한 그들을 빼앗아 가려고 애쓸 것이라 경고했다. 짧지만 진지했던 이 말씀이 있은 뒤에, 사도들은 모두 일어나서, 주께 변치 않고 헌신할 것을 선언하고, 하늘나라에 대하여, 베드로의 지휘 밑에서, 토마스가 표현한 바와 같이, “다가오는 이 하늘나라에,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리고 내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충성을 바칠 것을 서약했다. 비록 예수의 가르침을 충분히 알아듣지 못했어도 그들 모두가 참으로 예수를 믿었다.
138:7.4 (1544.3) 예수는 이제 돈이 얼마나 그들 사이에 있는가 물었다. 또한 그들의 가족을 위하여 무슨 생활 대책이 마련되었는가 물었다. 2주 동안 끼니를 잇는 데 도저히 충분하지 않은 기금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 말했다: “이런 식으로 일을 시작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여기 바닷가에서 2주 동안 남아서 물고기를 잡든지, 아니면 손이 닿는 대로 무슨 일이라도 하리라. 그러는 동안에, 처음 뽑힌 사도 안드레의 지도 하에서, 현재 개인적 봉사를 위하여, 그리고 또한 복음을 전파하고 믿는 자들을 가르치려고 나중에 너희를 세울 때를 위하여, 너희 앞날의 일에 무엇이 필요하든지 이를 마련하도록 너희 스스로를 조직하여라.” 모두가 이 말씀에 크게 기운을 얻었다. 이것이 예수가 나중에 더 적극적이고 당당해 보이는 대중 사업에 들어가려고 계획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뚜렷하고 분명하게 알려준 것이었다.
138:7.5 (1544.4) 모두가 고기잡이에 전념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사도들은 조직을 마무리하고, 이튿날 고기잡이를 시작하려고 배와 그물을 얻으려는 주선을 마치면서 그날의 나머지를 보냈다. 예수가 숙련된 뱃사공이요 어부인 것처럼, 이들의 대부분은 어부였다. 다음 몇 년 동안 그들이 이용한 많은 배가 바로 예수의 손으로 전에 만든 배였다. 그 배들은 좋고 안심할 수 있었다.
138:7.6 (1544.5) 예수는 2주 동안 고기잡이에 전념하라고 타이르며 덧붙였다: “그리고 나서 너희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려고 떠나리라.” 그들은 세 무리를 지어서 고기를 잡았고 예수는 밤마다 다른 무리와 함께 나갔다. 그들은 모두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을 무척 즐거워하였다! 그는 솜씨 있는 어부요, 명랑한 동반자, 영감을 주는 친구였다. 함께 일하면 할수록 그들은 예수를 더욱 사랑했다. 마태는 어느 날 말했다: “우리가 알면 알수록 덜 찬미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사람의 경우에는 갈수록 그를 이해하기가 어려워지는데도, 나는 더욱 그를 사랑하노라.”
138:7.7 (1545.1) 2주 동안 고기를 잡고 2주 동안 하늘나라를 위하여 개인적으로 일하러 나가는 이 계획은 다섯 달이 넘도록, 아니 이 해 서기 26년 말까지, 요한이 감옥에 갇히고 나서 그 제자들에 대하여 특별한 박해가 그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138:8.1 (1545.2) 2주 동안 물고기 잡은 것을 처분한 뒤에 가룟 유다, 곧 열두 사람의 회계로 일하기로 선택된 사람은, 부양 가족들을 돌볼 기금이 이미 마련되어 있으므로 사도의 기금을 여섯 등분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나서 서기 26년 8월 중순 가까이, 안드레에게 배치를 받은 일터로 그들은 둘씩 떠나갔다. 처음 2주 동안 예수는 안드레와 베드로와 함께, 다음 2주 동안은 야고보와 요한, 이런 식으로 그들이 선택한 순서대로 다른 쌍과 함께 나갔다. 이런 방법으로 대중 봉사를 시작하려고 그들을 한데 부르기 전에, 예수는 각 쌍과 함께 적어도 한 번 나갈 수 있었다.
138:8.2 (1545.3) 예수는 그들에게 고행(苦行)하거나 희생물을 바치지 않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똑같이 영원한 사랑으로 자녀를 모두 사랑한다는 것을 전파하라고 가르쳤다. 다음을 논하기를 삼가라고 사도들에게 타일렀다:
138:8.3 (1545.4) 1. 세례자 요한이 한 일과 그가 감옥에 갇힌 것.
138:8.4 (1545.5) 2. 세례받을 때 들린 목소리. 예수는 말했다: “오직 그 목소리를 들은 자들이 이를 언급해도 좋으니라. 나에게서 들은 것만 말하라. 소문을 말하지 말라.”
138:8.5 (1545.6) 3.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것. “아무에게도 물과 포도주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말라” 이르면서 예수는 그들에게 심각하게 당부하였다.
138:8.6 (1545.7) 이들은 이 대여섯 달 동안 내내 신나는 시간을 가졌고, 그동안에 번갈아 두 주 마다 어부로서 일했다. 이렇게 해서 하늘나라를 위해 선교하는 다음 두 주 동안에 일터에서 자신들을 부양하기에 넉넉한 돈을 벌었다.
138:8.7 (1545.8) 서민들은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과 봉사에 놀라워했다. 랍비들은 무지한 자는 경건하거나 올바를 수 없다고 유대인들에게 오랫동안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의 사도들은 경건하고도 올바른 사람이었다. 그래도, 랍비의 지식과 세상 지혜를 많이 모르고서 즐거웠다.
138:8.8 (1545.9) 예수는 유대인들이 가르쳤던 바와 같이 이른바 선행으로 회개하는 것, 그리고 믿음으로 얻는 정신의 변화―새로 태어나는 것―의 차이를 분명히 말했다. 그리고 새로 태어나는 것을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값으로 요구하였다. 예수는 믿음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유일한 필요 조건이라고 사도들에게 가르쳤다. 요한은 그들에게 전에 “회개―다가올 진노를 피해 달아날 것”을 가르쳤다. 예수는 “믿음이 지금 하나님의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으로 들어가는 데 열려 있는 문이라”고 가르쳤다. 예수는 선지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러 오는 자처럼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권한을 가진 자로 언급하는 듯하였다. 예수는 기적을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사랑과 유익한 은총을 베푸는 하나님의 영이 안에 깃들어 만족감과 확신을 몸소 얻는 진정한 체험을 발견하도록 그들의 생각을 돌리려고 애썼다.
138:8.9 (1545.10) 주가 만난 인간 하나하나를 깊이 존경하고 이해한다는 것을 제자들은 일찍부터 배웠다. 이렇게 한결같이, 변함없이 온갖 종류의 어른과 아이들을 아주 일관성 있게 배려하는 것에 엄청나게 감동을 받았다. 길에 나가서, 몸과 혼의 짐을 무겁게 지고 지나가는 여인에게 격려하는 말을 일러주려고, 심오한 강연 한가운데서 멈추곤 했다. 사이에 뛰어드는 아이와 사귀려고 사도들과 심각한 회의를 중단하곤 했다. 예수에게는 항상 아무것도 눈앞에 어쩌다가 나타난 개인보다도 중요한 듯이 보이지 않았다. 선생이요 교육자였지만, 그보다 더한 분이었다―또한 친구요 이웃이요 이해하는 벗이었다.
138:8.10 (1546.1) 대중을 가르친 말씀은 주로 비유와 짧은 강론으로 이루어졌어도, 예수는 질문과 답변으로 변함없이 사도들을 가르쳤다. 후일에는 공개 강연에서 진지한 물음에 대답하려고 언제나 멈추곤 하였다.
138:8.11 (1546.2) 사도들은 처음에 예수가 여인들을 대하는 태도에 깜짝 놀랐지만, 일찍부터 익숙해졌다. 그는 하늘나라에서 여자에게 남자와 똑같은 권리를 주리라는 것을 아주 분명히 밝혔다.
138:9.1 (1546.3) 번갈아서 물고기를 잡고 개인적으로 일하던 기간, 얼마큼 단조로웠던 이 기간은 열두 사도에게 몹시 지치는 체험이었으나 그들은 그 시험을 견디었다. 온갖 불평과 의심, 그리고 일시적 불만이 있었는데도, 그들은 주께 헌신하고 충성하겠다는 서약을 지켰다. 시험하는 이 여러 달 동안 예수와 개인적 관계를 가진 것이 사도들로 하여금 그를 소중히 여기게 만들었다. 그래서 재판받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 절망의 시간에도 (가룟 유다를 빼고) 모두가 그에게 충성하고 진실했다. 사람다운 사람들은 다만 예수처럼 그렇게 그들과 가까이 살고 그렇게 그들에게 헌신했던 존경받는 선생을 실제로 버릴 수 없었다. 주가 돌아가시던 암담한 시간을 통해서, 이 사도들은 가슴 속에서, 꼭 하나의 특별한 인간적 감정―우정과 충성의 감정, 최고의 감정―을 좇아서 모든 이유와 판단과 논리를 제쳐놓았다. 예수와 일하던 이 다섯 달은 이 사도들 하나하나에게, 그를 온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로 여기게 만들었다. 그의 훌륭한 가르침이나 놀라운 행적이 아니라 이 인간다운 감정이, 부활이 있고 하늘나라 복음을 다시 선포할 때까지 그들을 한데 붙들어 두었다.
138:9.2 (1546.4) 조용히 일하던 이 여러 달이 사도들에게 큰 시험이었고 그들은 이 시험을 견디었지만, 대중 활동이 없던 이 기간은 예수의 가족에게도 큰 시련이었다. 예수가 대중을 위한 일을 개시할 준비가 되었을 때가 되자 (룻을 빼고) 집안 전부가 예수를 실질적으로 저버렸다. 겨우 몇 번 기회가 닿았을 때 그들은 나중에 그와 접촉하려고 했고 그것도 함께 집으로 돌아오라고 설득하려는 것이었는데, 예수가 미쳤다고 거의 믿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단지 그의 철학을 헤아리거나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눈 자들에게 너무 지나쳤기 때문이다.
138:9.3 (1546.5) 사도들은 가버나움, 벳세다-줄리아스, 코라진, 게라사, 히포, 막달라, 가나, 갈릴리의 베들레헴, 요타파타, 라마, 사펫, 기스칼라, 가다라, 아빌라에서 개인을 상대로 일을 계속 해나갔다. 이 여러 도시 외에도 시골 뿐 아니라 여러 마을에서 수고했다. 이 기간이 끝날 때가 되자, 열두 사도는 각자의 가족을 돌보는 썩 만족스러운 계획을 세웠다. 대부분의 사도들은 결혼했고 더러는 아이가 여럿 있었지만, 그들은 집안 식구들을 부양하도록 주선하였고 그래서 사도들의 기금에서 얼마큼 조금 도움을 받아서, 가족의 재정적 복지를 걱정할 필요 없이, 모든 에너지를 선생이 하는 일에 바칠 수 있었다.
138:10.1 (1547.1) 사도들은 일찍부터 다음 방법으로 자체를 조직했다:
138:10.2 (1547.2) 1. 안드레, 처음 선택된 사도는 열두 사람의 의장(議長)이요 총재로 임명되었다.
138:10.3 (1547.3) 2.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은 예수를 몸소 시중드는 동반자로 임명되었다. 밤낮 그에게 시중들고 육체적 필요 및 다양한 필요를 보살피며, 밤을 새워 기도할 때,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신비스러운 교통을 가질 때, 따라가야 했다.
138:10.4 (1547.4) 3. 빌립은 그 집단의 식사 담당자가 되었다. 먹을 것을 마련하고, 방문객들이, 때때로 말씀 들으러 온 군중까지도, 먹을 것이 있도록 처리하는 것이 임무였다.
138:10.5 (1547.5) 4. 나다니엘은 열두 사도 가족들의 필요를 돌보았다. 각 사도 집안의 필요 사항에 대하여 정규적으로 보고를 받았고, 그는 회계인 유다에게 청구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마다 돈을 보내곤 했다.
138:10.6 (1547.6) 5. 마태는 사도단의 재무 담당자였다. 예산을 맞추고 금고가 채워지도록 처리하는 것이 의무였다. 공동으로 지원할 기금이 들어오지 않고 일행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기부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마태는 열두 사도가 한동안 물고기 그물로 돌아가라고 명령할 권한을 가졌다. 그러나 대중을 위한 일을 시작한 뒤로 결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활동에 돈을 대도록 충분한 기금이 언제나 회계의 손에 있었다.
138:10.7 (1547.7) 6. 토마스는 여행 일정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숙소를 주선하고, 가르치고 전도할 장소를 대체로 골랐고, 이렇게 순조롭고 신속한 여행 계획을 보장하는 일이 그에게 맡겨졌다.
138:10.8 (1547.8) 7. 알패오의 쌍둥이 두 아들, 야고보와 유다는 군중 관리에 배치되었다. 설교 시간에 안내원들이 군중 사이에서 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충분한 수의 보조 안내원을 임명하는 것이 그들의 과제였다.
138:10.9 (1547.9) 8. 열심당원 시몬은 오락과 놀이의 책임을 맡았다. 수요일의 계획을 담당했고 또한 날마다 몇 시간 동안 휴식과 기분 전환을 마련하려고 애썼다.
138:10.10 (1547.10) 9. 가룟 유다는 회계로 임명되었다. 돈 자루를 들고 다녔다. 그는 모든 비용을 지출하고 장부를 적었다. 마태를 위해서 한 주 한 주, 예산을 어림하고 또한 안드레에게 주마다 보고했다. 유다는 안드레의 인가를 받아서 돈을 지출했다.
138:10.11 (1547.11) 초기에 조직될 때부터 배반자 유다가 이탈하여 다시 조직할 필요가 있을 때까지 열두 사람은 이 방법으로 활동했다. 주와 제자인 사도들은 서기 27년 1월 12일 일요일까지 이 간단한 방법으로 계속했다. 이날 예수는 그들을 한데 불러 모으고 하늘나라의 대사로서, 그리고 정식으로 즐거운 소식을 전파하는 사람으로 세웠다. 그 뒤에 곧, 처음으로 대중 전도 여행을 가는 길에 예루살렘과 유대 땅을 향하여 떠나려고 준비하였다.
139:0.1 (1548.1) 비록 예수가 거듭하여 사도들의 희망을 산산이 부서뜨리고 개인적으로 높아지려는 모든 포부를 산산 조각내었어도 한 사람만 예수를 저버렸다는 것은 예수가 땅에서 아름답고 올바른 일생을 살았다는 것을 웅변으로 증언한다.
139:0.2 (1548.2) 사도들은 예수로부터 하늘나라에 관하여 배웠다. 예수는 그들로부터 사람의 나라에 대하여, 유란시아에서, 그리고 시공에서 진화하는 다른 세계들에 사는 인간의 성품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이 열두 사람은 많은 다른 종류의 인간 기질을 대표했고 교육을 받아서 비슷하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1백 년 전에 갈릴리의 이방 인구를 강제로 개종시킨 결과로서 이 갈릴리 어부들의 다수가 이방인의 핏줄을 상당히 지녔다.
139:0.3 (1548.3) 사도들이 전부 무지하고 배우지 못했다고 여기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알패오 쌍둥이를 제외하고, 이들은 모두 회당 학교의 졸업생이었고 히브리 성서로, 그리고 그 시절에 소용되는 많은 지식을 얻느라고 철저히 교육받았다. 일곱 사람이 가버나움 회당 학교의 졸업생이었고, 온 갈릴리에 그보다 더 좋은 유대인 학교가 없었다.
139:0.4 (1548.4) 이 하늘나라 사자들이 “무지하고 배우지 못했다”고 너희의 기록들이 언급할 때, 그들이 평범한 사람이라, 랍비의 학문을 배우지 않고 랍비의 성서 해석 방법으로 훈련받지 않았다는 생각을 전하려 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른 바 대학 교육이 모자랐다. 현대에 그들은 분명히 교육받지 못했다 생각되고, 어떤 사회 집단에서는 교양이 없다고까지 생각될 것이다. 한 가지는 분명하니, 모두가 똑같이 경직되고 판에 박힌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사춘기부터 계속 그들은 어떻게 사는가를 배우는 체험을 따로 가졌다.
139:1.1 (1548.5) 하늘나라 사도단의 단장 안드레는 가버나움에서 태어났다. 가족이 다섯―자신, 아우 시몬, 세 누이―인 집안에서 그는 맏아들이었다. 이미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는 가버나움의 고기잡이 항구 벳세다에서, 물고기를 말리는 사업에서 전에 세베대와 동업자였다. 사도가 되었을 때 안드레는 미혼이었지만, 결혼한 아우 시몬 베드로와 함께 거처를 정했다. 두 사람은 어부였고, 세베대의 아들들,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동업자였다.
139:1.2 (1548.6) 서기 26년 사도로 뽑힌 해에 안드레는 33살이었다. 예수보다 만 1살이 많았으며 사도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들었다. 뛰어난 혈통의 선조들로부터 내려왔고 열두 사도 중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이었다. 웅변을 제외하고,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면에서 능력이 동료들과 같은 수준이었다. 예수는 안드레에게 별명, 친근한 호칭을 준 적이 없다. 그러나 사도들이 금방 예수를 주(主)라 부른 것처럼, 또한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명칭으로 안드레를 불렀다.
139:1.3 (1549.1) 안드레는 조직에 능했지만, 행정에 더욱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핵심 집단인 네 사도 중에 한 사람이었으나, 예수가 그를 사도 집단의 우두머리로 세운 것은 동료들과 함께 계속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게 만들었고, 한편 나머지 세 사람은 주와 아주 가깝게 친교하였다. 바로 마지막까지 안드레는 사도단의 감독으로 남아 있었다.
139:1.4 (1549.2) 결코 효과 있는 설교자는 아니었어도, 안드레는 개인을 상대로 일하는 유능한 일꾼이었다. 먼저 선택된 사도로서 즉시 아우 시몬을 예수에게 데려왔으니까, 하늘나라의 개척 선교사였고, 시몬은 나중에 가장 위대한 하늘나라 전도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안드레는 하늘나라의 사자로서 열두 사도를 훈련시키는 수단으로, 개인적으로 일하는 계획을 이용하는 예수의 정책의 주요한 지지자였다.
139:1.5 (1549.3) 예수가 사도들을 개인적으로 가르치든 군중에게 설교하든, 안드레는 무슨 일이 있는지 보통 알고 있었다. 이해심 있는 집행자요 유능한 행정가였다. 눈앞에 닥친 모든 문제를 신속히 결정하였고, 권한 바깥 분야의 문제라고 판단될 경우에는 곧장 예수에게로 가져가곤 하였다.
139:1.6 (1549.4) 안드레와 베드로는 인품과 기질이 무척 달랐지만, 더할 나위 없이 서로 사이가 좋았다는 것은 칭찬받을 일로 영원히 기록되어야 한다. 안드레는 베드로의 웅변 능력을 질투한 적이 없었다. 나이가 위인 안드레 부류의 사람이 어리고 재주 있는 동생에게 그렇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를 보기는 흔치 않을 것이다. 안드레와 베드로는 서로의 능력이나 업적을 조금이라도 시샘하는 듯하지 않았다. 오순절 날 저녁 늦게, 대체로 힘차고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2천 명이나 하늘나라에 더해졌을 때, 안드레는 아우에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지만 그럴 수 있는 동생이 있어서 기쁘구나.” 이에 베드로는 대답했다: “하지만 형이 나를 주께 데리고 가고 끈질기게 나를 그에게 붙들어두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런 일을 하려고 여기에 있지 않았겠지.” 안드레와 베드로는 통례에서 벗어난 예외였고, 형제들도 평화롭게 살고 효과적으로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139:1.7 (1549.5) 오순절 뒤에 베드로는 이름이 났다. 그러나 나이가 위인 안드레는 “시몬 베드로의 형”이라고 소개를 받으며 여생을 보내는 것을 언짢아한 적이 없다.
139:1.8 (1549.6) 모든 사도 가운데, 안드레는 사람을 판단하는 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다른 아무도 회계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의심하지 않았을 때에도 그는 가룟 유다의 마음 속에서 문제가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것을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안드레가 하늘나라에 크게 봉사한 것은 복음을 선포하려고 파송된 첫 선교사들을 선택하는 문제로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을 조언한 것, 또한 하늘나라 행정 사무를 조직하는 일에 관하여 이 초기 지도자들과 상담한 것이다. 안드레는 젊은 사람들에게서 감춰진 자원과 잠자는 재능을 발견하는 큰 재주를 가졌다.
139:1.9 (1549.7) 예수가 하늘에 올라간 뒤에 곧, 안드레는 떠나신 주의 말씀과 하신 일 가운데 많은 것을 손수 기록하기 시작했다. 안드레가 죽은 뒤에 이 개인 기록의 다른 복사판들이 만들어지고 이것은 기독교 교회의 초기 선생들 사이에서 자유로이 돌려가며 읽혔다. 안드레가 쓴 이 비공식 노트는 땅에서 주의 일생을 어지간히 연속된 이야기로 만들어질 때까지, 후일에 편집되고 수정되고 바뀌었고 또 다른 것이 추가되었다. 변경되고 고쳐진 이 몇 권의 마지막 복사판은 열두 사도 중에 처음 선택된 사람이 그 원본을 기록한 지 1백 년쯤 되어 알렉산드리아에서 불에 타버렸다.
139:1.10 (1550.1) 안드레는 맑은 통찰력, 논리적 생각, 굳은 각오를 가진 사람이었고 그의 인격의 큰 장점은 뛰어나게 차분한 성질이었다. 그의 기질의 문제점은 열심이 모자라는 것이었다. 분별 있게 칭찬하여 동료들을 북돋아주지 못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친구들의 훌륭한 업적을 칭찬하지 않고 입을 다무는 성향은 그가 아첨과 불성실을 싫어하기 때문에 생겨났다. 안드레는 무던하고 차분하고, 스스로 일어서고 수수한 정도로 실무에 성공한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139:1.11 (1550.2) 사도들은 누구나 예수를 사랑했지만, 개별 사도에게 특별히 마음을 끄는 어떤 몇 가지 성격 특성 때문에 열두 사람은 각자 예수에게 이끌렸다. 한결같은 진실성, 꾸밈 없는 기품 때문에 안드레는 예수를 찬미하였다. 사람들이 일단 예수를 알면, 친구들에게 그를 알리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 사람들은 정말로 온 세상이 예수를 알기를 바랐다.
139:1.12 (1550.3) 후일의 박해로 인하여 마침내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흩어졌을 때, 안드레는 아르메니아, 소 아시아, 마케도니아를 거쳐서 여행했다. 수천 명을 하늘나라로 인도한 뒤에 마침내 붙잡혀서 아카이아 지방의 파트라스에서 십자가에 못박혔다. 이 튼튼한 사람이 십자가에서 숨이 끊어지기까지 꼬박 이틀이 걸렸고, 이 비극의 시간 내내 하늘나라의 구원을 알리는 기쁜 소식을 계속 효과 있게 선포했다.
139:2.1 (1550.4) 사도들과 합세했을 때 시몬은 서른 살이었다. 결혼했고 아이가 셋 있었으며 가버나움 가까이 벳세다에서 살았다. 형 안드레와 장모(丈母)가 함께 살았다. 베드로와 안드레, 이 두 사람은 세베대의 아들들과 함께 고기잡이하는 동업자였다.
139:2.2 (1550.5) 안드레가 시몬을 둘째 사도로 소개하기 전에, 주는 얼마 동안 그를 알았다. 예수가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었을 때 빙그레 웃으며 그렇게 했고, 그것은 일종의 별명이 될 것이었다. 시몬은 모든 친구에게 변덕스럽고 충동에 움직이는 사람으로서 잘 알려져 있었다. 나중에, 가볍게 준 이 별명에 새롭고 중요한 뜻을 예수가 붙인 것은 참말이다.
139:2.3 (1550.6) 시몬 베드로는 충동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요 낙천가였다. 격한 감정에 마음대로 빠지면서 자랐다. 생각 없이 말을 계속 뱉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곤경에 빠졌다. 이런 종류의 무분별은 모든 친구와 동료에게 끊임없는 문제를 안겨주었고 이것은 주로부터 여러 번 가볍게 꾸지람을 받은 원인이었다. 베드로가 생각 없는 말로 더 곤란에 빠지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과감히 대중에게 제안을 내놓기 전에, 많은 계획과 설계에 대하여 아주 일찍부터 형 안드레와 상의하기를 배웠기 때문이다.
139:2.4 (1550.7) 베드로는 말을 잘하고 극적이고 유창한 연설가였다. 또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타고난 지도자요, 머리가 빨리 도는 사람이요, 깊이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질문을 많이 했고 모든 사도가 합쳐서 질문한 것보다 더 많이 물었다. 대부분의 질문은 좋았고 그 상황에 적절했지만, 허다한 질문이 생각 없고 어리석었다. 베드로는 깊이 따지는 머리를 가지지 않았지만, 자기의 머리를 무척 잘 헤아렸다. 따라서 빨리 결심하고 갑자기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남들은 바닷가에서 예수를 보고 놀라서 떠들었지만, 베드로는 물 속에 첨벙 뛰어들어 주를 맞이하러 물가로 헤엄쳤다.
139:2.5 (1551.1) 베드로가 가장 찬미한 예수의 한 가지 특성은 더할 나위 없는 부드러움이었다. 베드로는 예수의 참을성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잘못한 사람을 겨우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이나 용서한다는 교훈을 결코 잊지 않았다. 대사제의 안뜰에서 생각 없이, 뜻하지 않게 예수를 부인한 직후에, 캄캄하고 비참했던 며칠 동안 주의 용서하는 인격으로부터 받은 이 인상(印象)을 많이 생각해 보았다.
139:2.6 (1551.2) 시몬 베드로는 딱할 정도로 변덕스러웠다. 갑자기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행동이 달라지곤 했다. 처음에는 예수가 발 씻는 것을 물리쳤고, 다음에 주의 대답을 듣고 나서 온 몸을 씻어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결국 예수는 베드로의 결점이 머리에 있고 마음에 있지 않음을 알았다. 땅에서 일찍이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서 용기와 비겁을 아주 설명하기 힘들게 섞어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인품의 큰 장점은 충성심과 우정이었다. 베드로는 정말로, 참으로 예수를 사랑했다. 헌신하는 기백이 하늘을 찌를 듯해도, 아주 불안했고 차분하지 못해서, 주(主)인 선생을 부인하기까지 여종이 그를 놀려대도록 버려두었다. 베드로는 박해와 어떤 다른 형태의 직접 공격도 견딜 수 있었지만, 그는 비웃음 앞에서 시들고 오그라들었다. 정면 공격에 부딪쳤을 때 용감한 군인이었으나 뒤에서 공격받아 놀랐을 때는 두려워서 움츠러드는 겁쟁이였다.
139:2.7 (1551.3) 베드로는 빌립이 사마리아인 사이에서, 그리고 바울이 이방인 사이에서 하는 일을 예수의 사도 중에서 처음으로 앞에 나서서 변호하였다. 그래도 나중에 안티옥에서 비웃는 유대주의자들과 마주쳤을 때, 그는 태도를 바꾸고 일시 이방인들로부터 물러났고, 이렇게 하여 바울의 두려움 없는 비난을 받게 만들었다.
139:2.8 (1551.4) 그는 사도들 가운데 처음으로 예수가 사람과 신의 성품을 한 몸에 가졌음을 진심으로 고백하였고 또 처음으로―유다를 빼고―예수를 부인한 사람이었다. 대단한 몽상가는 아니었지만, 베드로는 환희의 구름 속에 싸이고 극적인 열심에 빠졌다가 평범하고 사무적인 현실 세계로 내려오기를 싫어했다.
139:2.9 (1551.5) 예수를 따르면서, 글자 그대로, 그리고 비유로 말하자면, 그는 행렬을 이끌든지 아니면 뒤에서 처졌다―“멀찌감치 뒤에서 따랐다.” 그러나 그는 열두 사도 가운데서 뛰어난 전도사였다. 하늘나라를 세우고 사자들을 한 세대 동안에 사방으로 보내기 위해서, 바울을 제쳐놓고 다른 어느 한 사람보다도 더 공헌이 많았다.
139:2.10 (1551.6) 경솔하게 주를 부인한 뒤에 그는 자아를 발견했고, 안드레의 동정과 이해심 있는 안내를 받아서 다시 고기잡이 그물로 돌아갔다. 한편 사도들은 십자가 처형이 있은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살피려고 기다렸다. 예수가 용서했다는 것을 완전히 확신했을 때, 주의 양 떼 속에 다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하늘나라의 불꽃은 그의 혼 안에서 아주 밝게 타올라서, 그는 어둠 속에 앉아 있던 수천 명에게 구제하는 큰 빛이 되었다.
139:2.11 (1551.7) 예루살렘을 떠난 뒤에, 그리고 바울이 이방 기독교 교회 사이에서 으뜸가는 인물이 되기 전에, 베드로는 두루 여행하면서 바빌론으로부터 고린도까지 모든 교회를 찾아보았다. 바울이 세운 많은 교회를 찾아보고 돌보기까지 하였다. 베드로와 바울은 성질과 교육, 신학조차 많이 달랐지만 나이가 지긋했을 때 교회를 강화하기 위하여 잘 어울려 일했다.
139:2.12 (1552.1) 베드로의 말투와 가르침의 얼마큼은 누가가 부분적으로 기록한 설교와 마가 복음에 나타난다. 그의 힘찬 말투는 베드로 전서라고 알려진 서한에 더 잘 나타나며, 그 편지를 나중에 바울의 제자가 고치기 전까지는 적어도 이것이 참말이었다.
139:2.13 (1552.2)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가 결국, 정말로 참으로 유대인 메시아라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확신시키려고 애쓰는 잘못을 계속하였다. 죽는 바로 그날까지, 시몬 베드로는 머리 속에서 예수가 유대인의 메시아라는 개념,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원자라는 개념,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 즉 온 인류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계시라는 개념, 이 세 가지 사이에서 계속하여 갈팡질팡하였다.
139:2.14 (1552.3) 베드로의 아내는 대단히 유능한 여인이었다. 여러 해 동안 그 여자는 여인단의 회원으로서 쓸모 있게 수고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을 때 베드로의 모든 선교 여행 뿐 아니라 여러 교회로 가는 모든 여행에 그를 따라다녔다. 훌륭한 남편이 목숨을 바친 날, 이 여인은 로마의 경기장에서 사나운 짐승들에게 던져졌다.
139:2.15 (1552.4) 이렇게 예수와 가까웠던 사람, 핵심 집단의 하나인 이 사람 베드로는 직무가 충만하게 성취될 때까지, 힘차고 영화롭게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외치면서 예루살렘을 떠나갔다. 주가 돌아가신 것처럼―십자가에서―죽어야 한다고 그를 체포한 사람들이 그에게 귀띔해 주었을 때, 자신을 높은 명예를 받은 자라고 여겼다. 이렇게 시몬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못박혔다.
139:3.1 (1552.5) 세베대의 두 아들인 사도들에게 예수는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둘 중에 형인 야고보는 사도가 되었을 때 서른이었다. 결혼하고 아이가 넷 있었고, 가버나움의 교외, 벳세다에서 부모 집 가까이 살았다. 그는 어부였고, 아우 요한과 일행이 되어 안드레와 시몬과 손잡고 직분에 힘썼다. 야고보와 아우 요한은 사도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예수를 더 오래 알았던 장점이 있었다.
139:3.2 (1552.6) 이 유능한 사도의 기질은 모순 덩어리였다. 그는 정말로 두 가지 성품을 가진 듯하였고 그 두 가지가 격한 감정에 자극되었다. 분개심을 일단 충분히 건드렸을 때 그는 특히 격렬했다. 일단 적당히 도발되었을 때 그는 불 같은 성미를 가졌고, 폭풍이 가신 뒤에 그것이 전적으로 올바른 분개심의 표현이었다는 핑계를 대어 성낸 것을 언제나 정당화하고 변명하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이렇게 이따금 분노를 터뜨리는 것을 제쳐놓고, 야고보의 성격은 안드레의 성격과 무척 비슷했다. 안드레의 신중함이나 인간의 성품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없었지만, 그는 훨씬 뛰어난 대중 연설가였다. 베드로 다음으로, 마태가 아니라면 야고보가 열두 사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연설가였다.
139:3.3 (1552.7) 야고보는 어떤 의미에서도 변덕스럽지 않았어도, 하루는 조용하고 말이 없다가 다음 날에는 아주 훌륭한 연사요 이야기꾼이었다. 보통 예수와 함께 거리낌없이 이야기했지만, 열두 사도 가운데, 한 번에 며칠씩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한 가지 큰 약점은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게, 조용한 이 시기가 가끔 찾아오는 것이었다.
139:3.4 (1552.8) 야고보의 인격에서 뛰어난 모습은 한 가지 제안의 모든 면을 볼 수 있는 능력이었다. 모두 열두 사도 가운데서 예수의 가르침의 참 뜻과 중요성을 가장 가깝게 깨달았다. 처음에는 그도 주의 뜻을 알아차리는 데 더디었지만, 훈련을 마치기 전에 예수가 하신 말씀에 담긴 우수한 개념을 알아들었다. 야고보는 광범위한 인간 성품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능한 안드레와 성급한 베드로, 그리고 말이 적은 아우 요한과 잘 어울렸다.
139:3.5 (1553.1) 야고보와 요한이 함께 일하려고 애쓰면서 비록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그들이 얼마나 잘 어울렸는가 지켜보면 감동이 된다. 안드레와 베드로처럼 아주 잘 하지는 못했어도, 두 형제, 특히 그렇게 고집 세고 결의가 굳은 형제에게 보통 기대하는 것보다 이들은 훨씬 잘 어울렸다. 그러나 이상하게 보일 듯하지만, 세베대의 이 두 아들은 낯선 사람들을 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서로에게 관대했다. 서로에게 무척 다정했고 언제나 행복한 놀이 친구였다. 주께 주제넘게 무례한 태도를 보였던 사마리아인들을 죽이라고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리고 싶어 한 것은 이 “우뢰의 아들”들이었다. 그러나 야고보가 때 이르게 죽은 것은 동생 요한의 격렬한 성질을 크게 고쳤다.
139:3.6 (1553.2) 예수의 인품에서 야고보가 가장 감탄한 것은 주가 이해심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예수가 성공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를 이해하고 관심을 보인 것은 그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139:3.7 (1553.3) 야고보 세베대는 안정된 사색가요 계획하는 사람이었다. 안드레와 함께, 사도단에서 냉정한 축에 들었다. 활기가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베드로를 안정시키는 뛰어난 평형 바퀴와 같은 사람이었다.
139:3.8 (1553.4) 그는 겸손하고 꾸밈 없이 나날이 섬기는 사람이요, 허세부리지 않는 일꾼이었다. 하늘나라의 참 뜻에 관하여 무언가 일단 깨닫자 아무런 특별한 보상을 찾지 않았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그 여자는 자기 아들들에게 예수의 바른 편과 오른 편 자리를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는데, 이렇게 요청한 사람은 어머니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한 책임을 맡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의사를 밝혔을 때, 그들은 주가 로마의 권력에 대하여 항거한다고 추측했고 그에 따르는 위험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그 값을 기꺼이 치르려 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 잔을 마실 준비가 되어 있는가 예수가 물었을 때 그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야고보에 관해서 이 대답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었다―그는 주와 함께 그 잔을 마셨고 순교를 체험하는 첫 사도가 되도록 처신하였으며, 헤롯 아그립바의 칼에 일찍 이슬로 사라졌다. 이렇게 야고보는 열두 사도 중에서 맨 처음으로 하늘나라의 새 싸움터에서 목숨을 바쳤다. 헤롯 아그립바는 어느 다른 사도보다도 야고보를 두려워했다. 정말로 그는 흔히 조용하고 말이 없었지만, 그의 확신을 누가 건드리고 도전했을 때, 용감하고 각오가 굳었다.
139:3.9 (1553.5) 야고보는 일생을 충만히 살았다. 종말이 다가왔을 때 얼마나 은혜롭고 꿋꿋하게 견디었는지, 그를 고발하고 밀고한 사람이 그의 재판과 집행에 참석했는데 그 사람조차 너무 감동을 받아서 야고보가 사형받는 장소로부터 뛰쳐나가서 자신이 예수의 제자들과 합세하였다.
139:4.1 (1553.6) 사도가 되었을 때 요한은 스물 네 살이었고, 열두 사도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다. 그는 미혼이었고 부모와 함께 벳세다에서 살았다. 어부였고, 안드레와 베드로와 동업하여, 형 야고보와 함께 일했다. 사도가 되기 전과 후에 요한은 주의 가족을 상대하는 일을 맡아서 예수의 개인 대리자로서 활동했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살아 있는 한, 이 책임을 계속해서 맡았다.
139:4.2 (1553.7) 요한이 열두 사도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고, 예수의 집안 일을 담당하여 주와 가까이 관련되었기 때문에 주께 무척 소중하기는 했지만, 그가 “예수가 사랑한 제자”였다고 진실로 말할 수는 없다. 예수처럼 그러한 관대한 인물이 사도들 중에 한 사람을 남보다 더 사랑해서, 편애를 보인 죄가 있다고 너희는 도저히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형 야고보와 함께, 다른 사람들보다 예수를 더 오래 알았음은 말할 것도 없고, 요한이 예수의 개인 조수 세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은 이 그릇된 생각을 더욱 그럴듯하게 만들었다.
139:4.3 (1554.1)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사도가 된 뒤에 곧, 예수에게 개인 조수로서 배치되었다. 열두 사도가 선택된 뒤에 얼마 안 있어, 안드레를 그 집단의 우두머리로 행동하도록 임명했을 때, 예수는 그에게 말했다: “나와 함께 있고 내 옆에 남아 있으며, 나를 위로하고 날마다 나의 필요를 보살피기 위하여, 동료들 가운데 두셋을 배치하기를 이제 내가 바라노라.” 안드레는 처음에 뽑힌 다음 세 사도를 이 특별 임무를 맡도록 고르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축복받은 근무에 자신이 자원하고 싶어했을 터이나 주는 이미 그에게 임무를 주었다. 그래서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에게 예수와 함께 붙어 다니라고 즉시 지시했다.
139:4.4 (1554.2) 요한 세베대의 인격은 사랑스러운 특성을 많이 가졌지만, 그리 사랑스럽지 못한 점은, 지나치지만 보통은 잘 감추어진 자만심이었다. 예수와 오랫동안 교제한 것은 그의 인품에 크고 많은 변화를 주었다. 이 자만심은 크게 줄어들었으나 늙고 얼마큼 아이 같아진 뒤에 이 자존심은 어느 정도 다시 나타났다. 그래서 지금 그의 이름을 지닌 복음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면서 나단에게 지시할 때, 나이 지긋한 사도는 서슴지 않고 자신을 “예수가 사랑한 제자”라고 거듭 언급했다. 땅에서 다른 어느 필사자보다 요한은 예수의 절친한 친구에 가까웠고, 허다한 문제에서 예수가 선택한 개인 대표자라는 사실에 비추어서, 자기가 “예수가 사랑한 제자”라고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으니, 자신이 예수가 빈번히 일을 맡긴 제자였음을 아주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다.
139:4.5 (1554.3) 요한의 인격에서 가장 좋은 특징은 신뢰할 수 있는 성품이었다. 즉시 행동하고 용감하며 충실하고 헌신적이었다. 가장 큰 약점은 그의 특징인 이 자만심이었다. 자기 집안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이요 사도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다. 아마도 그저 조금 버릇이 없었을 뿐이다. 어쩌면 조금 지나치게 그를 얼러서 길렀는지 모른다. 그러나 늙었을 때 요한은, 스물네 살이 되었을 때 예수의 사도들 축에 끼어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 멋대로 행동하던 젊은이와 무척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139:4.6 (1554.4) 요한이 가장 고맙게 여긴 예수의 특성은 주의 사랑, 그리고 이기심이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의 특성은 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그래서 그 뒤에 사랑과 형제에게 헌신하는 감정이 후일에 그의 인생 전체를 지배하였다.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사랑에 대하여 글을 썼다. 이 “우뢰의 아들”은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 에베소에서 나이가 지긋한 이 주교가 강단에 서서 설교할 수 없어 그를 의자에 앉혀 교회로 날라야 했을 때, 그리고 예배가 끝난 뒤에 신자들에게 몇 마디 말씀하라고 부탁받았을 때, 몇 년 동안 오직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아, 서로 사랑하라.”
139:4.7 (1554.5) 요한은 그의 성미를 건드렸을 때를 제외하고, 말이 많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도 말이 적었다. 늙어감에 따라서 성질은 더욱 누그러졌고 더 자제되었지만, 입을 열기 싫어하는 성향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다. 말을 별로 하지 않는 이 성질을 결코 충분히 이겨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놀라운 창조적 상상력을 타고 났다.
139:4.8 (1555.1) 요한에게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이 부류에게 기대하지 못할 또 다른 면이 있었다. 얼마큼 편협하고 지나치게 참을성이 없었다. 이런 점에서 그와 야고보는 무척 비슷했다―두 사람 다 무례한 사마리아인들 머리 위에 쏟아지도록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고 싶어했다.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는 어떤 낯선 사람들을 요한이 만났을 때, 그는 당장 그들을 제지하였다. 그러나 열두 사도 중에서 이 종류의 자만심과 우월 의식으로 물든 사람은 요한뿐이 아니었다.
139:4.9 (1555.2) 예수가 얼마나 충실하게 자신의 어머니와 가족을 돌보려고 준비했는가 알았기 때문에, 예수가 집 없이 지내는 것을 보고서 요한의 생애는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다. 요한은 또한 예수의 가족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깊이 동정하였고 그들이 차츰 그를 멀리하고 있음을 알았다. 예수가 아주 작은 소망까지도 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맡기고, 절대로 의지하며 날마다 생활하는 것과 함께, 이 상황 전체가 요한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이것은 그 뒤에 여생 전체에 걸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그의 인격에 뚜렷하고 영구한 변화를 일으켰다.
139:4.10 (1555.3) 요한은 다른 사도들 가운데 거의 아무도 가지지 않은 차분하고 대담한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가 붙잡힌 날 밤에 즉시 그를 따라갔고, 감히 바로 죽음의 문턱까지 주와 함께 간 유일한 사도였다. 땅에서 바로 그 마지막 시간까지 그는 자리에, 가까이 있었다. 예수의 어머니에 관하여 그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 그리고 주가 사람으로 존재하는 마지막 순간에 줄까 싶은 그러한 추가 지시를 받을 준비가 된 것이 눈에 띄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니, 요한은 철저히 믿을 만하였다. 열두 사도가 식사할 때 요한은 보통 예수의 바른 편에 앉았다. 열두 사도 중에서 처음으로 정말로, 완전히 부활을 믿은 자였다. 그리고 주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 바닷가에서 그들에게 왔을 때, 먼저 주를 알아본 사람이었다.
139:4.11 (1555.4) 세베대의 이 아들은 초기 기독교 운동이 전개될 때 베드로와 아주 밀접히 관계되었고, 예루살렘 교회의 주요한 지지자 중의 하나가 되었다. 오순절 날에 베드로의 오른팔과 같은 지지자였다.
139:4.12 (1555.5) 야고보가 순교한 뒤 몇 년이 지나자, 요한은 형의 부인과 결혼했다. 여생에 마지막 20년 동안 그는 사랑스러운 손녀의 보살핌을 받았다.
139:4.13 (1555.6) 요한은 몇 차례 감옥에 갇혔고, 다른 황제가 로마에서 권력을 잡을 때까지 4년 동안 팟모 섬으로 추방되었다. 요한이 눈치와 지혜가 없었더라면, 말을 거침없이 뱉는 형 야고보처럼 의심할 여지 없이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자, 주의 동생 야고보와 함께, 요한은 민사(民事) 재판관들 앞에 나타났을 때 지혜롭게 사람들을 어루만지기를 배웠다. 그들은 “부드러운 대답이 노여움을 거둔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교회가 “하늘나라”이기보다 차라리 “인류에게 사회적으로 봉사하는 데 헌신하는 영적 모임”이라고 설명하기를 배웠다. 통치하는 권력―나라와 임금―이 아니라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을 가르쳤다.
139:4.14 (1555.7) 팟모 섬에 잠시 추방되었을 때 요한은 계시록을 썼고, 너희는 그것을 이제 대단히 축소되고 왜곡된 형태로 가지고 있다. 이 계시록은 큰 계시 중에 살아남은 조각들을 담고 있다. 요한이 쓴 뒤에, 계시의 큰 부분들이 없어졌고 다른 부분들은 제거되었다. 조각나고 불순물이 섞인 형태로만 간직되었다.
139:4.15 (1555.8) 요한은 많이 여행하고 끊임없이 수고했으며, 아시아 교회들의 주교가 된 뒤에, 에베소에서 주저앉았다. 99살이 되었을 때 에베소에서 이른바 “요한에 따른 복음”을 쓰는 작업을 하면서 동료 나단을 지도했다. 모두 열두 사도 가운데, 요한 세베대는 결국 뛰어난 신학자가 되었다. 에베소에서 서기 103년에 자연사했고, 그때 나이는 101살이었다.
139:5.1 (1556.1) 빌립은 다섯째로 뽑힌 사도였고, 예수와 처음 네 사도가 요단강에 있던 요한의 회합 장소로부터 갈릴리의 가나로 가는 길에 부름을 받았다. 벳세다에서 살았으므로 빌립은 한동안 예수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요단강 유역에서 예수가 “나를 따르라”하고 이른 그날까지, 예수가 정말로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빌립은 또한 안드레ㆍ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이 예수를 구원자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얼마큼 영향을 받았다.
139:5.2 (1556.2) 빌립은 사도들과 합세했을 때 27살이었다. 최근에 결혼했지만, 이때 아이가 하나도 없었다. 사도들이 그에게 준 별명은 “호기심”을 가리켰다. 빌립은 언제나 눈으로 보기를 바랐다. 결코 어떤 제안이라도 그리 깊숙이 들여다보지 못하는 듯했다. 꼭 둔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상상력이 모자랐다. 이 상상력의 부족은 그의 인품에 큰 약점이었다. 그는 평범하고 사무적인 사람이었다.
139:5.3 (1556.3) 사도들이 봉사하려고 조직되었을 때 빌립은 식사 담당이었다. 그들에게 항상 식량을 조달하도록 처리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리고 그는 훌륭한 식사 담당자였다. 가장 좋은 특징은 철저하게 일을 처리하는 성향이었다. 수학(數學) 머리가 있고 체계 있게 일을 처리했다.
139:5.4 (1556.4) 빌립은 세 소년과 네 소녀, 이렇게 일곱 사람으로 이루어진 가족의 출신이었다. 위에서 둘째로 나이가 많았고, 주가 부활하신 뒤에 가족 전체를 하늘나라에 들어가도록 세례를 주었다. 빌립의 친척들은 어부였다. 아버지는 대단히 유능한 사람이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나 어머니는 아주 평범한 가족 출신이었다. 빌립은 큰 일 하기를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작은 일을 대단한 방법으로, 잘 처리하고 쓸 만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4년 동안 오직 몇 번,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먹을 것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들의 일생을 따라 생겼던 많은 긴급시의 필요에도 그가 준비되지 않은 적이 드물었다. 사도 일행의 식당 부서는 총명하고 유능하게 관리되었다.
139:5.5 (1556.5) 빌립의 장점은 꼼꼼하게 일을 확실히 처리하는 것이었다. 그의 체질에서 약점은 전혀 상상력이 없는 것, 둘에 둘을 더해서 넷을 얻는 능력이 없는 것이었다. 추상적으로 수학을 알았지만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지 못했다. 그는 어떤 종류의 상상력이 거의 통째로 모자랐다. 그는 날마다 보는, 평범한 보통 사람의 전형이었다. 예수가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을 들으려고 온 군중 속에는 그러한 남녀가 허다하게 있었고, 그들은 주의 자문(諮問) 위원회에 자기들과 같은 사람이 명예로운 자리에 올라 있는 것을 지켜보고 큰 위로를 얻었다. 그들은 자기들과 같은 사람이 이미 하늘나라 일에 높은 자리를 찾았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었다. 빌립의 어리석은 물음을 아주 참을성 있게 듣고, 그렇게 여러 번 식사 담당자가 “보여 달라”는 요청을 따르면서, 예수는 어떤 인간의 머리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가 많이 배웠다.
139:5.6 (1556.6) 빌립이 그렇게 끊임없이 찬미한 예수의 한 가지 성질은 한없는 너그러움이었다. 빌립은 예수에게서 잘아 보이거나 아까워하거나 구두쇠 같은 성향을 결코 찾을 수 없었고, 그는 언제나 어김없이 아끼지 않고 베푸는 이 태도를 존경했다.
139:5.7 (1557.1) 빌립의 성격에는 인상적인 것이 거의 없었다. 때때로 “안드레와 베드로가 사는 마을 벳세다의 빌립”으로 언급되었다. 그는 앞을 헤아리는 선견이 거의 없었다. 주어진 상황에서 극적 가능성을 깨달을 수 없었다. 비관적인 것이 아니라 그는 다만 평범했다. 또한 영적 통찰력이 크게 모자랐다. 주의 가장 심오한 어느 강론 한가운데서 어리석게 보이는 질문을 하려고 서슴지 않고 예수를 멈추게 하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이 모자라는 것 때문에 예수는 한 번도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예수는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들었고, 그에게 가르침의 더 깊은 의미를 깨닫는 능력이 없음을 헤아렸다. 이런 답답한 질문을 하는 것 때문에 한 번 꾸짖으면, 이 정직한 사람을 다칠 뿐 아니라 그러한 꾸지람은 빌립의 마음을 너무 상하게 하여 다시는 마음 놓고 묻지 않을 것을 예수는 잘 알았다. 공간에 그가 만든 세계들에는 더디게 생각하는 비슷한 필사자가 셀 수도 없이 많이 있음을 예수는 알았고, 그는 모두가 그를 의지하고 언제나 마음 놓고 질문과 문제들을 가지고 그에게 오도록 격려하기를 바랐다. 결국, 예수는 설교하던 말씀보다 빌립의 어리석은 질문에 정말로 더욱 흥미를 느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온갖 종류의 사람들에게 최고로 관심을 가졌다.
139:5.8 (1557.2) 식사를 담당하던 이 사도는 훌륭한 대중 연설가가 아니었지만, 개인을 상대로 매우 설득력 있고 성공적인 일꾼이었다. 그는 쉽게 낙심하지 않았다. 꾸준히 일하는 사람이었고 어떤 일에 손을 대도 아주 끈질겼다. “오라”하고 말하는 크고도 드문 재주를 가졌다. 그가 처음으로 전향시킨 나다니엘이 예수와 나사렛의 장단점에 대하여 따지고 싶어했을 때 빌립의 효과적인 대답은 “와서 보라”는 것이었다.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가라”―이리하고 저리하라―하고 훈계하는 독단적 설교자가 아니었다. 그가 하는 일에 “오라”―”나를 따라 오라, 내가 길을 보여주리라” 하면서 모든 상황이 일어나는 대로 부딪쳤다. 그것이 어떤 형태와 단계의 가르침에서도 언제나 효과 있는 기법이다. 부모들도 아이들에게 “가서 이리 하고 저리 하라”하지 않고, “우리를 따라 오라, 우리가 더 좋은 방법을 너희에게 보여주고 가르쳐주리라” 말하는 것을 빌립으로부터 배워도 좋다.
139:5.9 (1557.3) 빌립이 새로운 형편에 적응하는 능력이 없는 것은 그리스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그를 찾아왔을 때 잘 나타났는데,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선생이여 우리는 예수를 만나고 싶소이다.” 자, 빌립은 어떤 유대인이 그러한 질문을 하더라도 “오라”하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외국인이었고 그는 그런 문제에 관하여 윗사람들로부터 아무런 지시를 받은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우두머리 안드레와 의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은 수소문하는 그리스인들을 예수에게 데리고 갔다. 마찬가지로, 사마리아로 들어가서, 주한테서 지시를 받은 대로 신자들에게 설교하고 세례를 주었을 때, 그는 이들이 진리의 영을 받았다는 표시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손 얹기를 삼갔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 일을 했고, 이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어머니 교회를 위하여 빌립이 하는 일을 구경하려고 당장 내려왔다.
139:5.10 (1557.4) 주가 돌아가신 어려운 시절을 거치면서 빌립은 계속 일하였다. 열두 사도를 다시 조직하는 데 참여했고, 가까운 유대인 사회를 넘어서 하늘나라를 위하여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처음으로 떠나갔다. 그가 사마리아인을 위하여 한 일, 그리고 복음을 위하여 나중에 한 모든 수고는 대단히 성공했다.
139:5.11 (1557.5) 빌립의 아내는 여인단에서 유능한 회원이었고, 그들이 예루살렘의 박해를 피하여 급히 달아난 뒤에, 남편의 복음 사업과 관련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빌립의 아내는 담대한 여자였다. 그 여자는 빌립의 십자가 밑에 서서 그를 죽이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소식을 선포하라고 그를 북돋아 주었다. 그의 기운이 다했을 때, 그 여자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성난 유대인들이 그 여자에게 달려가서 돌로 쳐죽였을 때에야 조용해졌다. 맏딸 레아는 부모의 일을 계속하였고, 나중에는 히에라폴리스의 이름난 선지자가 되었다.
139:5.12 (1558.1) 한 때 열두 사도의 식사 담당이었던 빌립은 하늘나라에서 대단한 사람이었고, 어디에 가든지 영혼을 구했다. 믿음 때문에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혔고 히에라폴리스에서 묻혔다.
139:6.1 (1558.2) 나다니엘은 주가 스스로 고른 여섯째이자 마지막 사도였고, 친구 빌립이 그를 예수에게 데리고 갔다. 그는 빌립과 몇 가지 사업에 관련되었고 그들이 예수와 마주쳤을 때, 빌립과 함께 세례자 요한을 보려고 내려가는 길이었다.
139:6.2 (1558.3) 나다니엘은 사도들 틈에 끼었을 때 25살이었고 그 무리에서 둘째로 나이가 어렸다. 그는 식구가 일곱인 집안에서 가장 어리고 미혼이었다. 그는 늙고 허약한 부모의 유일한 기둥이었고 부모와 함께 가나에서 살았다. 형제와 누이들은 결혼했거나 죽었고 아무도 거기서 살지 않았다. 열두 사도 가운데 나다니엘과 가룟 유다가 가장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었다. 나다니엘은 전에 상인이 되려고 생각했다.
139:6.3 (1558.4) 예수 자신은 나다니엘에게 별명을 주지 않았으나, 열두 사도는 곧 정직과 성실을 나타내는 명칭으로 그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는 “속임수가 없었다.” 이것은 그의 큰 미덕이었고 그는 정직하고도 성실했다. 그 인격의 약점은 자부심이었다. 그의 집안, 그가 살던 도시, 그의 명성과 민족을 아주 자랑스러워하였고, 너무 지나치지 않으면 이 모두가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다니엘의 개인적 편견은 극단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었다. 자신의 개인 의견에 따라서 사람들을 미리 판단하는 성향이 있었다. 예수를 만나기도 전에, “나사렛에서 어떤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느냐?”하고 서슴지 않고 물었다. 그러나 자만심이 있어도 나다니엘은 완고하지 않았다. 한 번 예수의 얼굴을 보자 그는 얼른 생각을 바꾸었다.
139:6.4 (1558.5) 여러 면에서 나다니엘은 열두 사도 가운데 이상한 천재였다. 사도 중에 철학자요 몽상가였지만, 무척 실용적 종류의 몽상가였다. 한 때는 깊은 철학에 잠기었다가 다음에는 보기 드문 우스운 농담을 하곤 하였다. 적당히 기분이 내키었을 때 그는 아마도 열두 사도 가운데 최고의 이야기꾼이었다. 예수는 심각한 것과 쓸데없는 것에 대하여 나다니엘이 길게 연설하는 것을 듣기를 대단히 좋아했다. 나다니엘은 차츰차츰 예수와 하늘나라를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지만, 결코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139:6.5 (1558.6) 사도들은 모두 나다니엘을 사랑하고 존경했다. 그는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사도들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유다는 나다니엘이 사도 직분을 충분히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한 번은 분별도 없이 몰래 예수에게 가서 그에 대하여 불평하였다. 예수는 말했다: “유다야, 네 걸음을 조심하여라, 네 직분을 너무 크게 여기지 말라. 우리 가운데 누가 형제를 판단할 능력이 있느냐? 자녀들이 인생의 심각한 일만 함께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내가 되풀이하노니, 육체를 입은 내 동포가 기쁨과 즐거움과 생명을 더욱 풍성히 가지도록 내가 왔노라. 그러면 유다야, 가서 너에게 맡겨진 일을 잘 하고 형제 나다니엘로 하여금 하나님께 자신을 변명하도록 버려두라.” 많은 비슷한 체험의 기억과 함께, 이 기억은 자신을 속이는 가룟 유다의 가슴 속에 오래 남아 있었다.
139:6.6 (1559.1) 여러 번, 예수가 떠나서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과 함께 산에 있고 사도들이 긴장하고 일이 얽혔을 때, 안드레조차 위로받지 못한 형제들에게 무슨 말을 할까 불안해할 때, 나다니엘은 얼마큼의 철학이나 번쩍이는 유머, 그것도 고상한 유머로 긴장을 풀어주곤 했다.
139:6.7 (1559.2) 나다니엘의 의무는 열두 사도의 가족을 돌보는 일이었다. 그는 때때로 사도 회의에서 자리를 비웠다. 병이나 심상치 않은 어떤 일이라도 그가 책임지고 있는 한 사람에게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한시가 급하게 그 집으로 갔기 때문이다. 열두 사도는 자기 집안의 복지가 나다니엘의 손에서 안전히 지켜진다는 것을 알고서 안심하고 쉬었다.
139:6.8 (1559.3) 나다니엘은 예수의 너그러움 때문에 그를 아주 존경했다. 그는 사람의 아들이 얼마나 마음이 넓고 관대한가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았다.
139:6.9 (1559.4) 나다니엘의 아버지(바돌로뮤)는 오순절 뒤에 곧 돌아가셨다. 그 뒤에 이 사도는 메소포타미아와 인도로 가서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외치고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동료들은 한때 그들의 철학자요, 시인(詩人)이요, 우스운 이야기꾼이 어떻게 되었는가 결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비록 후일에 기독교 교회를 조직하는 데 참가하지 않았어도, 그는 또한 하늘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이었고 주의 가르침을 퍼뜨리느라고 많은 공헌을 세웠다. 나다니엘은 인도에서 죽었다.
139:7.1 (1559.5) 안드레가 일곱째 사도 마태를 뽑았다. 마태는 징세원, 즉 세리의 가족에 속했지만, 자신은 그가 살던 가버나움에서 세금 걷는 사람이었다. 그는 서른한 살이었고, 결혼하고 네 아이가 있었다. 어느 정도 재물이 있는 사람이었고 사도단에 속하면서 얼마큼이라도 재산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훌륭한 사업가요, 사회에서 잘 교제하는 사람이었고, 친구를 만들고 매우 다양한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재주를 가졌다.
139:7.2 (1559.6) 안드레는 마태를 사도들의 재무 담당자로 세웠다. 어떤 면에서 그는 사도 조직에서 회계 담당자요 홍보 대변인이었다. 인간의 성품을 날카롭게 판단하는 자요 무척 유능한 전도자였다. 그의 인격은 상상하기 힘든 인격이었지만, 매우 진지한 제자요, 날이 갈수록 예수의 사명을 믿고 하늘나라를 확실히 믿은 사람이었다. 예수는 레위에게 별명을 준 적이 없었지만, 동료 사도들은 보통 그를 “돈줄”이라 불렀다.
139:7.3 (1559.7) 레위의 장점은 마음을 다하여 사도들의 운동에 헌신한 것이다. 세리인 그를 예수와 사도들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지난날에 세금을 걷었던 사람 편에서 넘치게 감사할 원인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사도들이, 특히 열심당원 시몬과 가룟 유다가 그들 중에 세리가 있다는 것을 납득하는 데는 얼마큼 시간이 좀 걸렸다. 마태의 약점은 인생을 근시안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보는 관점이었다. 그러나 여러 달이 지나는 동안에 그는 이 모든 면에서 크게 나아졌다. 물론, 금고를 채우는 것이 임무였으므로 교육이 있던 가장 귀중한 기간에 그는 자주 자리를 비워야 했다.
139:7.4 (1559.8) 마태가 가장 고맙게 여긴 것은 주의 용서하는 성품이었다. 오직 믿음이 하나님을 발견하는 사업에 필요하다는 것을 지치지 않고 되풀이하곤 했다. 언제나 하늘나라를 “하나님을 발견하는 이 사업”이라 말하기를 좋아했다.
139:7.5 (1560.1) 비록 과거가 있는 사람이었어도 마태는 훌륭하게 처신했고, 시간이 지나자 동료들은 세리의 성과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그는 예수의 말씀에 대하여 광범위하게 노트를 적은 사도들 중의 하나였다. 이 노트는 나중에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적은 이사돌의 이야기에 기초로 쓰였으며, 그 이야기는 마태에 따른 복음이라 알려지게 되었다.
139:7.6 (1560.2) 가버나움의 실업가요 세금 걷는 사람이었던 마태의 위대하고 쓸모 있었던 생애는 후세를 통해서 수천의 다른 실업가ㆍ관리ㆍ정치가도 “나를 따르라” 이르는 주의 매력 있는 목소리를 듣도록 인도하는 수단이 되었다. 마태는 정말로 날카로운 정치가였지만, 예수에게 뜨겁게 충성했고, 다가오는 하늘나라 사자들에게 적절히 자금이 조달되도록 처리하는 일에 더할 나위 없이 헌신했다.
139:7.7 (1560.3) 마태가 열두 사도 사이에 있는 것은, 자신이 종교적 위안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빠진 지 오래다고 여긴, 낙심하고 버림받은 큰 무리의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놓는 수단이었다. 버림받고 절망하는 남녀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였고, 그는 결코 한 사람도 돌려보내지 않았다.
139:7.8 (1560.4) 마태는 믿는 제자들과 주의 가르침을 직접 듣는 사람들로부터 자유롭게 내는 헌금을 받았으나 결코 드러내놓고 군중에게 돈을 요청하지 않았다. 조용하고 개인적인 방법으로 모든 재무를 돌보았고, 관심 있는 신자들 중 재력이 있는 부류로부터 대부분의 돈을 걷었다. 그리 많지 않은 자기 재산의 거의 전부를 주와 사도들의 일에 바쳤지만, 이것을 전부 알고 있던 예수를 제외하고 그들은 이렇게 돈 낸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예수와 동료들이 그의 돈을 더럽게 여길까 두려워서 마태는 공개적으로 사도의 기금에 기부하기를 망설였다. 그래서 그는 다른 신자들의 이름으로 많이 냈다. 초기에 몇 달 동안 그들 사이에 그가 끼어있는 것이 얼마큼 시련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마태는 그가 낸 헌금이 날마다 먹는 빵을 그들에게 자주 공급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유혹을 크게 받았지만 항복하지 않았다. 세리를 천시하는 증거가 나타났을 때, 레위는 그가 후하게 기부했음을 그들에게 드러내고 싶어 속이 끓어올랐지만, 언제나 그럭저럭 잠자코 견디었다.
139:7.9 (1560.5) 한 주의 헌금이 필요하다고 예상한 금액에 미치지 못했을 때, 레위는 자주 자기 개인 재산을 많이 꺼내 쓰곤 하였다. 때때로 예수의 가르침에 크게 흥미가 생겼을 때, 필요한 헌금을 간청하지 못한 것 때문에 자신이 충당해야 하는 것을 알았어도 그는 남아서 가르침 듣기를 더 좋아하였다. 그러나 레위는 많은 돈이 그의 주머니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예수가 알았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는지! 주가 이것을 다 알고 있음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박해가 시작된 뒤에 그가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러 떠났을 때 실질적으로 무일푼이 되었을 정도까지 마태가 그들에게 기부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어느 사도도 모르고 죽었다.
139:7.10 (1560.6) 이 박해 때문에 신자들이 예루살렘을 버렸을 때, 마태는 북쪽으로 여행하면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도하고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옛 사도 동료들에게 그의 소식이 끊어졌지만, 그는 전도하고 세례를 주면서, 계속하여 시리아ㆍ카파도치아ㆍ갈라시아ㆍ비티니아ㆍ트레스를 거쳐 갔다. 트레스 지방의 리시마키아에서, 어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로마 군인들과 짜고 그를 죽음으로 몰았다. 얼마 전에 주가 땅에 머물렀을 때 그의 가르침으로부터 아주 확실히 배운 구원을 믿으면서, 다시 태어난 이 세리는 승리를 거두고 죽었다.
139:8.1 (1561.1) 토마스는 여덟째 사도였고, 빌립이 그를 선택하였다. 후일에 그는 “의심하는 토마스”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도저히 동료 사도들이 그를 늘 의심하는 사람으로 보았다고 할 수 없다. 그의 머리는 논리적이고 회의하는 종류였던 것이 참말이지만, 그는 일종의 대담한 충성심을 가졌고, 이것은 절친한 사람들이 그를 하찮은 회의론자로 여기지 않게 만들었다.
139:8.2 (1561.2) 토마스가 사도들과 함께했을 때 그는 29살이었다. 결혼했고 네 아이가 있었다. 전에는 목수요 석공이었지만, 나중에 어부가 되었고 타리케아에서 거주했다. 이 마을은 갈릴리 바다로부터 흘러나오는 요단강의 서쪽 둑에 자리잡았다. 이 작은 마을에서는 그를 유지(有志)로 여겼다.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날카롭고 추리하는 머리를 가졌다. 그는 우수한 부모의 아들이었으며 부모는 티베리아스에서 살았다. 토마스는 열두 사도 중에서 참으로 분석하는 머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사도 집단에서 참된 과학자였다.
139:8.3 (1561.3) 토마스가 어렸을 때의 가정 생활은 불행했다. 부모의 결혼 생활은 대체로 행복하지 않았고, 이것은 토마스의 어른 시절의 체험에 나타났다. 그는 자라서 무척 까다롭고 다투기 좋아하는 성질을 가졌다. 아내조차도 그가 사도들과 합세하는 것을 보고 반가워했다. 비관적인 남편이 대체로 집을 떠나 있으리라는 생각에 그 여자는 마음이 놓였다. 토마스는 또한 의심하는 버릇을 가졌고, 이것은 그와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베드로는 처음에 토마스 때문에 아주 속이 뒤집혔고, 토마스가 “모질고 못생겼고 언제나 의심한다”고 형 안드레에게 불평을 털어 놓았다. 그러나 토마스를 알면 알수록, 동료들은 그를 더욱 좋아했다. 그들은 그가 더할 나위 없이 정직하고 굽힘없이 충성스러운 것을 발견했다. 완전히 성실하고 의심할 수 없이 진실했지만, 그는 날 때부터 헐뜯는 사람이었고 자라서 참으로 비관론자가 되었다. 분석적인 머리는 의심에 시달렸다. 열두 사도와 관계를 가지게 되었을 때, 그는 동료 인간에 대한 믿음을 빨리 잃고 있었고, 이처럼 예수의 고귀한 인격과 접촉하게 되었다. 주와 이렇게 관계를 가진 것은 당장에 토마스의 성향 전체를 바꾸기 시작했고, 동료 인간에 대한 그의 정신적 반응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139:8.4 (1561.4) 토마스의 큰 장점은―그가 일단 마음을 먹었을 때―움츠러들지 않는 용기와 함께, 뛰어난 분석하는 머리였다. 큰 약점은 의심하는 성향이었고, 육체를 입은 일생 동안 내내 이것을 완전히 이기지 못했다.
139:8.5 (1561.5) 열두 사도의 조직에서 토마스는 여행 일정을 주선하고 관리하는 데 배치되었고, 그는 사도단의 일과 움직임을 유능하게 지도하였다. 훌륭한 집행자요, 뛰어난 사업가였지만, 그의 변덕스러움은 장애가 되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고 다음 날에는 또 다른 사람이었다. 사도들 틈에 들어갔을 때, 그는 우울한 생각에 잠기는 성향이 있었지만, 예수와 사도들과 접촉한 것이 이 더러운 내향성을 대체로 고쳐주었다.
139:8.6 (1561.6) 예수는 토마스를 매우 좋아했고, 여러 번 함께 길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도들 가운데 그가 있다는 것은 정직하게 의심하는 모든 사람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문제가 있는 허다한 인물이 예수의 가르침의 영적ㆍ철학적 단계에 대하여 모든 것을 온전히 알아듣지 못했어도 그들을 하늘나라로 들어가도록 북돋아주었다. 열두 사도 사이에 토마스가 낀 것은 예수가 정직하게 의심하는 사람들도 사랑했다는 변치 않는 선언이었다.
139:8.7 (1562.1) 다른 사도들은 예수의 충만한 인격에서 어떤 특별하고 뛰어난 특성 때문에 예수를 존경하는 눈으로 보았지만, 토마스는 예수가 더할 나위 없이 안정된 인품을 가졌기 때문에 주를 존경했다. 아주 사랑이 넘치게 자비로워도 전혀 굽힘없이 정당하고 공평하며, 단호하지만 결코 완고하지 않으며, 아주 차분해도 결코 무관심하지 않으며, 무척 도움이 되고 이해심이 있어도 결코 간섭하거나 독재하지 않으며, 아주 강해도 동시에 무척 부드러우며, 아주 분명하지만 결코 거칠거나 무례하지 않으며, 매우 부드러워도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아주 순수하고 티 없어도 동시에 남자답고 적극적이고 힘차며, 그렇게 참으로 용감하지만 결코 성급하거나 무턱대고 덤비지 않으며, 그렇게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자연을 숭배하는 성향이 도무지 없고, 무척 유머와 익살이 있어도 들뜨거나 경박하지 않은 사람을 토마스는 갈수록 더 찬미하고 존경했다. 이렇게 비할 수 없이 안정된 인격은 토마스의 마음을 무척 끌었다. 아마도 그는 열두 사도 가운데 누구보다도, 예수를 가장 높이 지적으로 이해하고 그의 인격을 파악했다.
139:8.8 (1562.2) 열두 사도로 이루어진 자문 회의에서 토마스는 언제나 조심스럽고 안전 제일 정책을 주장했지만, 그의 보수주의가 투표에서 지거나 거부되었을 때, 결정된 계획을 실행하는 데 언제나 먼저 두려움 없이 나섰다. 거듭하여 그는 어떤 계획이 어리석고 주제넘다고 반대하고 나서곤 했다. 끝까지 논쟁하곤 했지만, 안드레가 그 제안을 투표에 붙이고, 그가 무척 애써서 반대한 것을 열두 사람이 하기로 정한 뒤에, 토마스는 “합시다!”하고 먼저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지는 것을 잘 견디는 사람이었다. 투덜거리거나 상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예수가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거듭 반대했지만, 주가 그런 위험을 택하기로 결정하려 했을 때 “친구들아, 움직여라. 같이 가서 함께 죽자꾸나!”하는 용감한 말로 사도들을 일깨웠다.
139:8.9 (1562.3) 토마스는 어떤 점에서 빌립과 같았다. 그도 또한 “보여주기”를 바랐지만 겉으로 나타나는 의심의 표현은 도무지 다른 지적 작용에 근거를 두었다. 토마스는 분석하는 성질이었고 단순히 회의하지는 않았다. 개인의 육체적 용기에 관한 한, 그는 열두 사도 가운데 가장 용감한 축에 속했다.
139:8.10 (1562.4) 토마스는 아주 마음이 언짢은 날이 더러 있었고, 때때로 우울하고 시무룩했다. 아홉 살 때 쌍둥이 누이를 잃은 것이 어릴 때 슬픔을 많이 주었고, 만년에 그의 기질 문제를 악화시켰다. 토마스가 기운이 빠졌을 때, 회복하도록 도와준 사람은 때때로 나다니엘이었고 때때로 베드로였으며 알패오 쌍둥이 중 하나도 자주 그렇게 하였다. 아주 침울해졌을 때 그는 불행하게도 예수와 직접 만나기를 언제나 피했다. 그러나 주는 이것을 모두 알았고 그가 이렇게 우울증으로 시달리고 의심으로 고생할 때 그의 사도를 이해하는 마음을 가졌다.
139:8.11 (1562.5) 때때로 토마스는 혼자 하루나 이틀 떠나 있도록 안드레에게 허락받곤 했다. 그러나 그러한 길이 지혜롭지 않음을 곧 깨달았다. 풀이 죽었을 때 할 일에 아주 충실하고 동료들 가까이 남아 있는 것이 최선임을 일찍 발견했다. 감정의 변화가 있는 생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 없이, 계속 사도의 노릇을 하였다. 앞으로 나갈 때가 실제로 다가왔을 때, “갑시다!”하고 말한 것은 언제나 토마스였다.
139:8.12 (1562.6) 토마스는 의심을 품고 부닥치고 이기는 인간의 위대한 본보기이다. 그는 위대한 지성을 가졌고, 헐뜯는 비평가는 아니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예수와 동료 사도들에게 산성(酸性) 시험이었다. 예수와 그의 일이 진정하지 않았더라면 토마스와 같은 사람을 처음부터 끝까지 붙들어둘 수 없었다. 그는 사실에 대하여 날카롭고 확실한 감각을 가졌다. 사기(詐欺)나 속임수가 처음 나타나는 순간에 토마스는 그들 모두를 버렸을 것이다. 과학자들은 예수와 그가 땅에서 한 일에 관하여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주와 그 인간 동료들과 함께 한 사람이 살고 일했으니 그의 머리는 참된 과학자―토마스 디디머스―의 머리였고, 그는 나사렛 예수를 믿었다.
139:8.13 (1563.1) 토마스는 재판과 십자가 처형이 있던 시절에 시련을 견디었다. 한동안 절망의 늪에 빠졌지만,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사도들에게 충실했고,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를 환영하려고 함께 있었다. 한동안 의심하는 우울증에 굴복했으나 결국 믿음과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오순절 뒤에 그는 사도들에게 지혜롭게 조언하였고 박해가 신자들을 흩어 버렸을 때, 키프러스, 크레테, 북 아프리카 해안, 시실리로 가서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도하고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로마 정부의 관리들에게 체포되고 말타에서 처형될 때까지 토마스는 줄곧 전도하고 세례를 주었다. 죽기 바로 몇 주 전에, 그는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관하여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139:10.1 (1563.2) 알패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유다는 케레사 가까이서 살던 쌍둥이 어부였고, 아홉째와 열째 사도였다. 야고보와 요한 세베대가 이들을 선택하였다. 이들은 26살이었고 결혼했다. 야고보는 아이가 셋, 유다는 둘이 있었다.
139:10.2 (1563.3) 이 평범한 두 어부에 대하여 할 말이 별로 없다. 그들은 주를 사랑했고 예수는 그들을 사랑했지만 그들은 한 번도 질문으로 예수의 강연을 멈추지 않았다. 동료 사도들의 철학 토론이나 신학(神學) 논쟁을 아주 거의 알아듣지 못했으나 그러한 무리의 막강한 사람들 사이에 자기들이 낀 것을 알고 기뻐했다. 이 두 사람은 용모, 정신의 특성, 영적 이해의 범위가 거의 동일했다. 한 사람에 관하여 이렇다고 말해도 좋다면 다른 사람에 관하여도 그렇다고 적어야 한다.
139:10.3 (1563.4) 안드레는 이들을 군중을 정리하는 일에 배치했다. 그들은 설교 시간에 주요 안내자였다. 사실은 열두 사도 중에서 보통 일을 하는 하인이요 심부름꾼이었다. 소모품 다루는 일에 빌립을 도왔고 나다니엘을 위하여 돈을 가족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리고 어느 사도에게도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뻗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139:10.4 (1563.5) 서민들의 무리는 자기들과 같은 두 사람이 사도들 틈에 자리를 얻어 존경받는 것을 알고 크게 용기를 얻었다. 그들을 사도로 받아들였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이 평범한 쌍둥이는 소심한 신자들의 무리를 하늘나라로 데려오는 수단이었다. 서민들도 자기들과 무척 비슷한 공식 안내원들이 그들을 인도하고 관리한다는 생각을 더 친절하게 받아들였다.
139:10.5 (1563.6) 야고보와 유다는 또한 타대오와 레베오라고도 불렀고, 장점도 단점도 없었다. 사도들이 그들에게 준 별명은 평범을 부드럽게 가리키는 호칭들이었다. 그들은 “모든 사도 가운데 가장 작은 자”들이었다. 이를 알고 기뻐하였다.
139:10.6 (1563.7) 야고보 알패오는 주의 단순한 성향 때문에 예수를 특별히 사랑했다. 이 쌍둥이들은 예수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기들과 주의 마음 사이에 동정의 끈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의 머리는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공손한 의미에서 우둔하다고 할까 싶지만, 그들의 영적 성품은 진정한 체험을 겪었다. 그들은 예수를 믿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하늘나라의 동료였다.
139:10.7 (1564.1) 유다 알패오는 주가 티 내지 않고 겸손했기 때문에 예수에게 마음이 이끌렸다. 그러한 인격의 위엄과 연결된 그러한 겸손이 유다의 마음을 크게 끌었다. 언제나 예수가 특별히 행한 일에 관하여 침묵을 지키라고 분부한 사실은 이 단순한 자연의 아이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139:10.8 (1564.2) 쌍둥이는 성품이 좋고 생각이 단순한 일꾼이었고, 누구나 그들을 좋아했다. 예수는 한 가지 재능을 가진 이 젊은이들을 하늘나라에서 그의 개인 참모진의 영예로운 자리로 환영했다. 공간의 세계들에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사람, 그렇게 단순하고 겁에 질린 사람들이 있으며, 마찬가지로 자신과 함께 그리고 그가 쏟아 부은 진리의 영과 함께, 적극적이고 믿는 모임에 이들을 환영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찮은 신분을 업신여기지 않고 오직 죄와 악을 업신여긴다. 야고보와 유다는 하찮은 사람이었지만 또한 충실했다. 단순하고 무지했어도 또한 마음이 넓었고 친절하고 너그러웠다.
139:10.9 (1564.3) 어떤 부자가 재산을 팔아 치우고 가난한 자를 돕지 않으면, 주가 전도사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거절한 그날, 이 겸손한 사람들은 얼마나 고마운 마음으로 자랑스러워했는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그 쌍둥이가 조언자들 사이에 있음을 보았을 때, 예수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분임을 분명히 알았다. 그러나 오직 신(神)의 제도―하늘나라―가 그러한 평범한 인간의 기초 위에 언제라도 세워질 수 있었다.
139:10.10 (1564.4) 예수와 가졌던 모든 관계에서 겨우 한두 번 쌍둥이는 대중 앞에서 감히 물었다. 주가 터놓고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했을 때 유다는 예수에게 물어볼 흥미를 한 번 가졌다. 열두 사도 사이에 아무런 비밀이 이제 더 없으리라는 것에 조금 실망을 느끼고, 그는 감히 물었다: “그러나 주여, 이렇게 당신이 세상에 자신을 선포하시면, 어떻게 당신의 선함을 특별히 나타내시어 우리를 우대하시겠나이까?”
139:10.11 (1564.5) 쌍둥이는 끝까지, 심판과 십자가 처형과 절망이 있던 그 어두운 날까지 충실하게 섬겼다. 예수를 믿는 중심 신앙을 결코 잃지 않았고 (요한을 빼고) 그의 부활을 처음으로 믿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늘나라가 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주가 십자가에 못박힌 뒤에 곧, 가족에게 그리고 고기잡이 그물로 돌아갔고 그들의 일은 끝났다. 그들은 하늘나라의 더욱 까다로운 싸움에서 버틸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한 우주를 지으신 군주와 함께 4년 동안 가깝고 개인적 관계를 가지는 영예와 복을 받았음을 의식하면서 살다가 죽었다.
139:11.1 (1564.6) 시몬 베드로가 열한째 사도, 열심당원 시몬을 선택하였다. 그는 좋은 가문을 가진 유능한 사람이었고 가족과 함께 가버나움에서 살았다. 사도들 틈에 끼었을 때 28살이었다. 그는 불 같은 선동자요 또한 생각지 않고 떠벌리는 사람이었다. 열심당이라는 애국 조직에 온통 열중하기 전에 그는 가버나움에서 상인이었다.
139:11.2 (1564.7) 열심당원 시몬에게는 사도 무리의 오락과 휴식을 맡는 책임이 주어졌다. 그는 열두 사도의 노는 생활과 오락 활동을 매우 효과 있게 조직한 사람이었다.
139:11.3 (1564.8) 시몬의 장점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충성심이었다.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일을 결심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남자나 여자를 만났을 때 사도들은 시몬을 찾으러 보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라 부르짖는 이 열렬한 사람이, 모든 의심을 치워버리고 망설이는 태도를 일소하고 새 사람이 “믿음의 자유와 구원의 기쁨” 속으로 태어나는 것을 보는 데는 보통 겨우 15분 정도 걸렸다.
139:11.4 (1565.1) 시몬의 큰 약점은 물질적인 머리였다. 유대인 민족주의자로부터 영적 생각을 가진 국제주의자로 빨리 바뀔 수 없었다. 그러한 지적 변화와 감정의 변화를 이룩하는 데 4년은 너무 짧았지만, 예수는 언제나 그에게 참을성을 보였다.
139:11.5 (1565.2) 시몬이 예수에 대하여 무척 찬미한 한 가지는 주의 침착성, 곧 확신, 차분한 태도, 설명할 수 없는 평온함이었다.
139:11.6 (1565.3) 시몬은 과격한 혁명가요 두려움 없이 사람을 부추기는 선동자였어도 “땅에는 평화요 사람들 사이에 선의”를 힘차고 유능하게 전도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불 같은 성품을 차츰차츰 다졌다. 시몬은 토론에 뛰어난 사람이었고 논쟁하기를 좋아했다. 교육받은 유대인 중에서 율법을 따지는 지적 인물이나 그리스인의 지적 논쟁을 다루는 일이 닥치면 그 과제가 언제나 시몬에게 배당되었다.
139:11.7 (1565.4) 그는 타고난 반항아였고 전통을 깨뜨리는 사람으로 훈련을 받았지만 예수는 하늘나라라는 상급 개념을 받아들이도록 시몬을 설득했다. 그는 언제나 저항하는 당의 편을 들었지만, 이제 영과 진리의 한없고 영원한 진보를 부르짖는 진보 당파에 들어갔다. 시몬은 뜨거운 충성심을 가졌고 열심으로 몸소 헌신하는 사람이었으며 예수를 깊이 사랑했다.
139:11.8 (1565.5) 예수는 사업가와 노동자, 낙천주의자와 비관주의자, 철학자와 회의론자, 세리와 정치가와 애국자와 같은 편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139:11.9 (1565.6) 주는 시몬과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는 이 열렬한 유대인 민족주의자를 국제주의자로 만드는 데 결코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다. 예수는 사회ㆍ경제ㆍ정치 질서의 개선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시몬에게 자주 이야기했다. 그러나 예수는 늘 이렇게 덧붙이곤 했다: “그것은 하늘나라의 사업이 아니라.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몸을 바쳐야 하느니라. 우리의 할 일은 하늘에 있는 영적 나라의 대사가 되는 것이요, 신성한 아버지의 뜻과 성품을 대표하는 외에 아무것도 우리가 당장 관여해서는 안 되느니라. 아버지는 그 나라의 꼭대기에 계시고 우리는 그의 신임장을 지니고 있느니라.” 모든 것이 시몬이 알아듣기에 어려웠지만 차츰 그는 주의 가르침이 무슨 뜻인가 얼마큼 깨닫기 시작했다.
139:11.10 (1565.7) 예루살렘의 박해 때문에 흩어진 뒤에 시몬은 잠시 물러나 있었다. 글자 그대로 마음이 짓밟혔다. 민족주의 애국자로서, 예수의 가르침을 좇아 항복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그는 절망에 빠졌지만 몇 년 안에 희망을 불러일으켰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러 떠나갔다.
139:11.11 (1565.8) 그는 알렉산드리아로 갔고, 나일강 상류에서 일한 뒤에 아프리카의 심장부로 파고 들어갔다. 그는 어디서나 예수의 복음을 전도하고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처럼 그는 늙고 허약해지기까지 수고했다. 그리고 죽어서 아프리카의 심장부에 묻혔다.
139:12.1 (1565.9) 나다니엘이 열두째 사도 가룟 유다를 골랐다. 그는 유대 땅 남부의 작은 마을 케리옷에서 태어났다. 소년이었을 때 부모는 예리고로 이사했고 그곳에 살면서 세례자 요한의 설교와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될 때까지, 아버지의 여러 사업에서 고용되었다. 유다의 부모는 사두개인이었고, 아들이 요한의 제자들과 합류했을 때 그와 인연을 끊었다.
139:12.2 (1566.1) 나다니엘이 타리케아에서 유다를 만났을 때, 그는 갈릴리 바다의 남쪽 끝에서 물고기 말리는 사업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사도들과 합세했을 때 서른이었고 미혼이었다. 열둘 가운데 아마도 교육을 가장 많이 받았고, 주의 사도 집단에서 유일하게 유대 지방 사람이었다. 유다에게는 인격의 장점인 두드러진 특징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 교양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습관과 훈련받은 버릇을 가졌다. 머리가 잘 도는 사람이었으나 언제나 참으로 정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유다는 정말로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정말로 성실하지 않았다.
139:12.3 (1566.2) 안드레는 유다를 열두 사도의 회계로 임명했고, 이것은 그가 맡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직책이었다. 주를 배신하기 직전까지, 그는 정직하고 충실하고 아주 유능하게, 맡은 직무를 수행했다.
139:12.4 (1566.3) 대체로 매력 있고 지극하게 호감이 가는 주의 인격 외에, 유다가 찬미한 예수의 특성은 하나도 없었다. 유다는 갈릴리 동료들을 차별하는 유대 지방의 편견을 결코 버릴 수 없었다. 그는 머리 속에서 예수에 대하여 많은 것을 비판하고 싶어 하기도 하였다. 열한 사도가 완전한 사람, “온통 사랑스럽고 만인 중에 가장 으뜸가는 분”으로 우러러본 그 사람을 자기 만족에 빠진 이 유대 지방 사람은 마음 속에서 주제넘게 자주 비판했다. 그는 예수가 두려움이 많고 자신의 권력과 권한을 주장하기를 더러 두려워한다는 생각을 정말로 품었다.
139:12.5 (1566.4) 유다는 유능한 사업가였다. 어떤 사도들이 허둥지둥 처리한 사무를 수습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와 같은 이상주의자의 재무를 관리하기에는 고된 헌신 뿐 아니라 재치와 능력과 참을성이 요구되었다. 유다는 정말로 뛰어난 경영자요 멀리 내다보는 유능한 재정가였다. 그리고 조직에 빈틈없는 사람이었다. 열둘 가운데 아무도 유다를 비판한 적이 없다. 그들이 보기에 가룟 유다는 비할 데 없는 회계요, 배운 사람이요, (때때로 비판적이긴 했어도) 충성스러운 사도였고, 어떤 의미로 보아도 잘 선택한 사람이었다. 사도들은 유다를 아꼈고 그는 정말로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예수를 믿었음이 틀림없지만 우리는 그가 정말로 진심으로 주를 사랑했는지 의심이 든다. 유다의 경우는 이 속담의 진실을 보여준다: “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듯해도 그 마지막은 죽음으로 이끄는 길이 있다.” 죄와 죽음에 이르는 길로 즐겁게 적응하는 평화로운 속임수에 희생되는 것이 온통 가능하다. 유다는 주와 동료 사도들에게 언제나 재정적으로 충실했다는 것을 안심하고 믿으라. 돈은 결코 그가 주를 저버린 동기가 될 수 없었다.
139:12.6 (1566.5) 유다는 지혜롭지 못한 부모의 외아들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 부모가 애지중지해서 길렀고 귀여워했다. 그는 버릇없는 아이였다. 자라는 동안에 자신을 지나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지는 것을 못 견디는 사람이었다. 공평에 대하여 흐릿하고 비뚤어진 생각을 가졌고 미움과 의심에 잘 빠졌다. 친구들의 말과 행동을 오해하는 재주가 있었다. 전 생애를 통해서, 그를 잘못 대접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앙갚음하는 버릇을 길렀다. 가치와 충성의 감각에 결함이 있었다.
139:12.7 (1566.6) 예수에게, 유다는 믿음의 모험이었다. 처음부터 주는 이 사도의 약점을 충분히 이해했고 그를 사도 모임에 들어오게 하는 위험을 잘 알았다. 그러나 모든 지음받은 존재에게 구원받고 살아남도록 충분하고 똑같은 기회를 주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성품이다. 예수는 한 사람이 하늘나라에 성실하고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가 의심이 들 때, 사람의 재판관들이 의심스러운 후보자를 온전한 자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변치 않는 관습이라는 것을, 이 세상의 필사자 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다른 세계에서 구경하는 자들도 알기를 바랐다. 영생의 문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다; “오고 싶은 자는 누구나 와도 좋다.” 오는 사람의 믿음 외에 아무런 제한이나 자격 조건이 없다.
139:12.8 (1567.1) 이것이 어째서 예수가 유다로 하여금 맨 끝까지 계속하도록 버려두고, 약하고 혼란에 빠진 이 사도를 변화시키고 구원하려고 항상 가능한 모든 일을 했는가 하는 바로 그 이유이다. 그러나 빛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충실하게 살지 않을 때 빛은 그 혼 안에서 어두움이 되는 경향이 있다. 예수의 하늘나라 가르침에 대하여 유다는 지적으로 자랐지만, 다른 사도들처럼 영적 인격을 얻는 데 진전이 없었다. 그의 개인적 영적 체험은 만족스럽게 진보하지 못했다.
139:12.9 (1567.2) 유다는 개인적으로 겪은 실망에 갈수록 더 속을 끓이는 사람이 되었고, 드디어 그는 분개심에 희생이 되었다. 기분을 여러 번 상했고, 가장 좋은 친구들, 아니 주까지도 비정상으로 의심하게 되었다. 얼마 안 되어, 복수하려고 무엇이든지, 그렇다, 동료들과 주를 저버리기까지, 앙갚음하려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139:12.10 (1567.3) 그러나 사악하고 위험한 이러한 생각은 고마워하는 어떤 여인이 비싼 향(香)이 든 상자를 예수의 발 앞에 깨뜨린 그날까지 분명한 모습을 갖추지 않았다. 유다에게 이것은 낭비인 듯하였다. 그의 공개적 항의가 모든 사람이 듣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에게 싹 묵살되었을 때 그것은 너무했다. 그 사건은 쌓이고 쌓였던 모든 미움ㆍ상처ㆍ악의ㆍ편견ㆍ질투, 그리고 일생 최대의 원한을 가지도록 결정하였고, 그는 누구에게 할까 몰랐던 앙갚음을 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그 사건에서 어쩌다 예수가 주요한 인물이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의 불행한 생애의 모든 더러운 연극에서 죄 없는 한 사람에게 자기 성품에 담긴 모든 악을 뚜렷하게 쏟아 부었고, 그 사건은 진보하는 빛의 나라로부터 그가 스스로 택한 어두움의 땅으로 건너간 것을 표시하였다.
139:12.11 (1567.4) 주는 여러 번 개인적으로, 그리고 대중 앞에서 그가 그르치고 있다고 유다에게 경고했지만, 신의 경고는 마음이 상한 인간의 성품을 다루는 데 보통 쓸모가 없다. 예수는 사람의 도덕적 자유를 다치지 않으면서 유다가 나쁜 길로 가려 하는 것을 막으려고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 원한이 쌓인 아들은 실패했고, 지나치게 자기를 중요시하는 정신, 거만하고 앙갚음하는 정신에 빠져 졸렬하고 더러운 명령에 굴복했으며 혼란과 절망과 타락으로 재빨리 굴러 떨어졌다.
139:12.12 (1567.5) 그리고 나서 유다는 그의 주, 선생을 배반하는 천하고 치욕스러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고 극악한 계획을 재빨리 행동으로 옮겼다. 분노로 싹이 튼 배반 계획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뉘우침과 부끄러움을 몇 순간 겪었다. 정신이 맑은 이 기간에 마음이 약해져서, 자신의 머리 속에 하나의 변명으로서 예수가 아마도 권능을 행사하여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구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품었다.
139:12.13 (1567.6) 더럽고 죄 많은 일이 모두 끝났을 때, 오랫동안 품었던 복수 욕구를 채우려고 은화 서른 잎에 친구 팔기를 가벼이 여긴 이 변절한 필사자는, 달려나가서 필사 존재의 현실을 도피하는 연극에서 마지막 행위를 저질렀다―목숨을 끊었다.
139:12.14 (1567.7) 열한 사도는 소름이 끼쳤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예수는 배반자를 불쌍히 여길 뿐이었다. 세계들은 유다를 용서하기 어려움을 깨달았고 방대한 우주에서 두루 그의 이름을 피하게 되었다.
140:0.1 (1568.1) 서기 27년 1월 12일 일요일 정오 바로 전에, 예수는 하늘나라 복음을 대중에게 전하는 자로 세우려고 사도들을 불러 모았다. 열두 사도는 이제나저제나 하고 부름받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날 아침에 고기를 잡으러 물가에서 그리 멀리 나가지 않았다. 몇몇은 그물을 고치고 고기잡이 도구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물가 가까이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140:0.2 (1568.2) 사도들을 부르려고 바닷가로 나가면서, 예수는 먼저 안드레와 베드로를 소리쳐 불렀는데, 이들은 물가 가까이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다. 다음에 야고보와 요한에게 손짓했다. 이들은 가까이 배 안에 있었고 아버지 세베대와 이야기하며 그물을 고치고 있었다. 예수는 둘씩 다른 사도들을 모았다. 모두 열두 사도를 모으고 나서 함께 가버나움 북쪽의 고지로 여행했다. 거기서 정식 임명을 준비하려고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40:0.3 (1568.3) 한 번, 모두 열두 사도가 조용했다. 베드로조차도 회상하는 기분에 젖어 있었다. 마침내 오랫동안 기다리던 때가 다가왔다! 아버지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는 주를 대표하는 신성한 일에 몸소 일생을 바치고 집단으로 헌신하는, 일종의 엄숙한 예식에 참여하려고 주와 따로 가는 것이다.
140:1.1 (1568.4) 정식 임명 예배가 있기 전에, 열두 사람이 주위에 자리에 앉는 동안 예수는 말했다. “형제들아, 이 하늘나라의 때가 왔느니라. 하늘나라의 대사(大使)로서 아버지께 너희를 내보이려고 따로 여기에 데리고 왔노라. 너희 가운데 더러는 처음에 부름받았을 때, 내가 회당에서 이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느니라. 갈릴리 바다 근처의 여러 도시에서 나와 함께 일하였은즉, 너희 각자가 아버지의 나라에 대하여 더 배웠도다. 그러나 바로 이제 이 하늘나라에 관하여 너희에게 무언가 더 가르치고자 하노라.
140:1.2 (1568.5) “내 아버지가 땅에서 사는 자녀들의 마음 속에 세우고자 하는 새 나라는 영구한 나라이라. 그의 신성한 뜻을 행하기를 바라는 자의 마음 속에서 내 아버지는 이렇게 끝없이 다스릴 것이라.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내 아버지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하나님이 아니라. 허다한 사람이 동에서 오고 서(西)에서 와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우리와 함께 자리에 앉겠고, 아브라함 자손 중에 많은 사람이 인간 자녀의 마음 속에서 아버지 영(靈)이 다스리는, 이 새 형제 단체에 들어가고자 하지 않으리라.
140:1.3 (1568.6) “이 나라의 권력은 군대의 세력이나 재산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다운 영의 영광에 있으리니, 그 영이 이 하늘나라의 다시 태어난 시민, 하나님 아들들의 정신을 가르치고 마음을 다스리러 올지니라. 이것은 사랑의 단체요 그 안에는 정의가 다스리며, 부르짖는 표어는, 땅에서 평화요 모든 사람에게 선의(善意)가 될지니라. 너희가 이 나라를 선포하러 곧 떠나가리니, 이 나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선한 사람들이 바라던 것이요, 온 땅의 희망, 모든 선지자가 받은 지혜로운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라.
140:1.4 (1569.1) “그러나 아이들아, 너희에게, 그리고 너희를 따라 이 나라로 들어오고자 하는 모든 다른 사람에게 어려운 시험이 기다리고 있느니라. 오직 믿음이 너희를 이 문으로 들어가게 하겠으나, 신과 친교하는 진취적 일생을 살면서 계속 올라가고자 하면 내 아버지 영(靈)의 열매를 맺어야 하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나라로 들어가지는 못하려니와 오히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들어갈지니라.
140:1.5 (1569.2) “너희는 이 소식을 세상에 전하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올바름을 얻고자 애쓰라. 이를 얻으면 영원히 살아남는 데 필수인 모든 다른 것이 함께 보장되리라. 내 아버지의 나라는 권력을 겉으로 나타내거나 보기 싫게 전시(展示)함으로 오지 않을 것을 이제 분명히 이르고자 하노라.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면서 하늘나라를 선포하며 떠나가지 말지니 너희가 전파하는 이 나라가 너희 안에 계신 하나님인 까닭이라.
140:1.6 (1569.3)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모두를 섬기는 자가 될지니라. 너희 사이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형제에게 시중드는 자가 될지어다. 그러나 일단 하늘나라에서 시민으로 받아들이면, 너희는 이제 더 종이 아니라, 아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래서 이 나라가 모든 장벽을 허물고 모든 사람에게 내 아버지를 알게 하고 구제하는 진리를 믿게 할 때까지 그 나라는 세상에서 진보하리라. 나는 그러한 진리를 선포하고자 왔노라. 지금도 하늘나라가 가까웠고, 너희 중에 더러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큰 권능으로 오는 것을 보기까지 죽지 아니하리라.
140:1.7 (1569.4) “너희 눈이 지금 보는 이것, 평범한 열두 사람이 작게 시작한 것이, 궁극에 온 땅이 내 아버지를 찬미하는 노래로 가득하기까지 커지고 성장하리라. 너희의 말이 아니라 오히려 인생을 보고서, 너희가 나와 함께 있었고 하늘나라의 현실을 배웠음을 사람들이 알리라. 너희 정신에 아무런 무거운 짐을 얹지는 않겠으나 육체를 입고 사는 이 생명으로 내가 지금 아버지를 대표하는 것 같이, 곧 너희를 떠날 때 세상에서 나를 대표하는 엄숙한 책임을 너희 혼에게 지우고자 하노라.” 이렇게 말씀을 마치고 나서 그는 일어섰다.
140:2.1 (1569.5) 예수는 하늘나라에 관하여 선포하는 말씀을 막 들은 열두 사람에게, 이제 그의 둘레에 동그라미를 지어 무릎을 꿇으라고 지시했다. 다음에 주는 가룟 유다로부터 시작하여 안드레에게 이르기까지, 각 사도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었다.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그는 두 손을 뻗어 기도했다:
140:2.2 (1569.6) “아버지여, 이제 나는 이 사람들, 내 사자들을 아버지께 데려오나이다. 아버지를 대표하려고 내가 온 것 같이, 땅에서 사는 자녀들 가운데서 나를 대표하려고 떠나갈 이 열두 사람을 선택하였나이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고 함께 계신 것 같이 저희를 사랑하고 함께 하소서. 이제, 내 아버지여, 다가오는 하늘나라의 모든 일을 이 사람들 손에 맡기오니 저희에게 지혜를 주소서. 아버지의 뜻이라면, 저희가 하늘나라를 위하여 수고할 때 나는 저희를 도우려고 땅에서 한동안 머무르고자 하나이다. 다시, 내 아버지여, 이 사람들로 인하여 감사하나이다. 아버지가 내게 주신 일을 마치려고 계속하는 동안, 저희를 아버지의 보호에 맡기나이다.”
140:2.3 (1570.1) 예수가 기도를 마쳤을 때, 사도들은 저마다 자리에서 고개를 숙인 채로 남아 있었다. 베드로조차 감히 눈을 들어 주를 바라보기까지 몇 분이 흘렀다.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를 끌어안았지만 아무도 말이 없었다. 한 무리의 하늘 존재들이 엄숙하고 거룩한 이 장면―우주의 창조자가 사람의 신성한 단체의 일을 인간 지성이 지휘하도록 맡기는 것―을 내려다보는 동안, 큰 고요함이 그 장소를 덮었다.
140:3.1 (1570.2) 다음에 예수는 말씀했다: “너희는 내 아버지 나라의 대사(大使)이니 이로써 땅에 있는 모든 다른 사람과 따로, 다른 계급의 사람이 되었느니라. 너희는 이제 사람들 사이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 어두운 세계의 무지한 사람들 가운데서 또 다른 나라, 하늘나라의 깨우친 시민으로서 있느니라. 이 시간 이전에 하던 대로 사는 것은 충분하지 않으니라. 그러나 너희는 더 좋은 생활의 영화로움을 맛보고, 새롭고 더 좋은 그 세상을 다스리는 군주의 대사로 땅에 파송된 자로서 이제부터 살아야 하느니라. 생도(生徒)보다 선생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기대하느니라. 종보다 주인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내느니라. 땅의 통치를 받는 시민보다 하늘나라의 시민한테서 더 많이 요구하느니라. 너희에게 이르고자 하는 것 가운데 더러는 어렵게 보일지 모르나, 내가 이제 아버지를 대표하는 것 같이 너희는 세상에서 나를 대표하기를 택하였도다. 땅에서 나의 대리자로서, 너희는 공간의 세계들에서 필사자 생활에 대한 나의 이상(理想)을 반영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드러내느라고 땅에서 사는 동안 내가 본보기로 보이는 가르침과 관습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으리라.
140:3.2 (1570.3) “영적으로 포로 된 자에게 해방을, 두려움에 빠져 있는 자에게 기쁨을 선포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좇아서 병든 자를 고치라고 너희를 보내노라. 슬픔에 잠긴 내 아이들을 발견할 때 이렇게 말하여 저희를 북돋우라:
140:3.3 (1570.4) “마음이 낮아져 있는 자, 겸손한 자는 행복하나니 하늘나라의 보물이 저희의 것임이라.
140:3.4 (1570.5) “올바름을 간절히 바라고 목마르게 찾는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채워질 것임이라.
140:3.5 (1570.6) “온유한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땅을 물려받을 것임이라.
140:3.6 (1570.7) “마음이 깨끗한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
140:3.7 (1570.8) “그렇다 해도 영적으로 위로하고 약속하는 이 말씀을 내 아이들에게 더 일러주어라:
140:3.8 (1570.9) “슬퍼하는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위로받을 것임이라. 눈물을 흘리는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기뻐하는 영(靈)을 받을 것임이라.
140:3.9 (1570.10) “자비를 베푸는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자비를 얻을 것임이라.
140:3.10 (1570.11) “화해시키는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
140:3.11 (1570.12) “올바른 일을 위하여 박해받는 자는 행복하나니, 하늘나라가 저희 것임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대적하여 온갖 모습의 악한 것을 거짓되게 말할 때, 너희는 행복하니라.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할지니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140:3.12 (1570.13) “형제들이여, 내가 너희를 보내기는 하여도, 너희는 세상의 소금, 맛을 내는 소금이라. 그러나 이 소금이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소금을 짜게 하리요? 이제부터 버려지고 사람들의 발에 짓밟힐 뿐, 아무 쓸모가 없느니라.
140:3.13 (1570.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세워진 도시는 감출 수 없느니라. 촛불도 사람들이 켜서 됫박 밑에 두지 않고 촛대 위에 두느니라. 촛불이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느니라.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에 아주 빛나서, 너희의 착한 일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이끌라.
140:3.14 (1571.1) “나를 대표하고 내 아버지 나라의 대사로서 행하라고 너희를 세상으로 보내노라. 기쁜 소식을 선포하러 떠날 때 아버지를 신뢰하라, 너희는 그의 사자이라. 부당한 처사에 힘으로 저항하지 말라. 육체의 힘을 신뢰하지 말라. 이웃이 오른 뺨을 치면, 왼 편도 내밀라. 너희 가운데서 법대로 처리하기보다 공평치 않은 처사를 기꺼이 견디라. 슬퍼하고 곤궁에 처한 자는 누구에게나 친절과 자비로 베풀라.
140:3.15 (1571.2) “너희에게 이르노니,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며,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심술궂게 이용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내가 사람들에게 해주리라 믿는 것은 무엇이나 또한 저희에게 행하라.
140:3.16 (1571.3)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는 착한 자 뿐 아니라 악한 자에게도 햇빛이 비치게 하시며, 마찬가지로 옳은 자와 그른 자에게 비를 내리시느니라.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한층 더하여 이제 아버지 나라의 대사이라. 하나님이 자비로운 것 같이 너희는 자비로우라. 너희의 하늘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하늘 나라의 영원한 앞날에 너희가 완전할지니라.
140:3.17 (1571.4) “너희는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구하라고 임명받느니라. 땅에서 일생이 끝나면 너희는 모두 자비를 기대하리라. 그러므로 필사 생애에 육체를 입은 모든 형제에게 자비를 보이라고 너희에게 요구하노라. 너희 눈에 대들보가 있으면서 형제의 눈에서 티를 뽑아내려 애쓰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너희 눈에서 먼저 대들보를 뽑고 나서, 눈이 더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뽑아버릴 수 있으리라.
140:3.18 (1571.5) “진리를 맑게 헤아리라. 두려움 없이 올바르게 살라. 그렇게 너희는 내 사도, 내 아버지의 대사가 될지니라. ‘소경이 소경을 이끌면 모두가 구렁에 빠지리라’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느니라. 다른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인도하고자 하면, 너희 스스로 살아 있는 진리의 맑은 빛 가운데서 걸어야 하느니라. 어떤 하늘나라 일을 하더라도 너희가 올바른 판단과 날카로운 지혜를 보이라고 훈계하노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내밀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지니, 저희가 보물을 발로 짓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을까 두려우니라.
140:3.19 (1571.6) “속으로는 굶주린 늑대 같으면서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올 거짓 선지자들에 대하여 내가 경고하노라.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저희를 알지니라.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거두거나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더냐? 그렇다 하더라도,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으나 썩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느니라.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썩은 나무도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없느니라. 좋은 열매를 얻지 않는 나무마다 얼마 안 있어 찍혀 불 속에 던져지리라.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데 중요한 것은 동기이라. 내 아버지는 사람들의 마음 속을 꿰뚫어보시며 저희 마음 속의 소망과 진지한 의도로 판단하시니라.
140:3.20 (1571.7) “하늘나라 심판이 있는 큰 날에 많은 사람이 내게 말하리라,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당신의 이름을 힘입어 놀라운 일을 많이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나는 너희를 안 적이 없었노라. 거짓 선생인 너희는 나를 떠나라’ 내가 이렇게 이를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아버지를 대표한 것 같이 이 부탁을 듣고 사람들 앞에서 나를 대표하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자마다 나의 봉사하는 길로, 하늘 아버지의 나라로 넘치게 들어가리라.”
140:3.21 (1571.8) 사도들은 한 번도 이전에 예수가 이처럼 말씀하심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그가 최고의 권한을 가진 자로서 그들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해질 무렵에 산에서 내려왔으나 아무도 예수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140:4.1 (1572.1) 이른바 “산상(山上) 설교”는 예수의 복음이 아니다. 유익한 가르침을 많이 담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열두 사도를 임명하는 훈시였다. 예수가 그렇게 힘찬 소리로 완전하게 아버지를 대표한 것 같이, 사람들의 세계에서 계속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그를 대표할 뜻을 품을 사람들에게 주가 친히 임무를 지우는 것이었다.
140:4.2 (1572.2) “너희는 세상의 소금, 맛을 내는 소금이라. 그러나 이 소금이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소금을 짜게 하리요? 이제부터 버려지고 사람들의 발에 짓밟힐 뿐, 아무 쓸모 없느니라.”
140:4.3 (1572.3) 예수의 시절에 소금은 값진 것이었다. 돈으로도 쓰였다. 현대의 말 “샐러리”는 소금으로부터 유래한다. 소금은 먹을 것을 맛있게 만들 뿐 아니라 또한 보존제이다. 소금은 다른 것들을 더욱 맛있게 만들며 이처럼 소모됨으로 일한다.
140:4.4 (1572.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세워진 도시(都市)는 감출 수 없느니라. 촛불도 사람들이 켜서 됫박 밑에 두지 않고 촛대 위에 두느니라. 촛불이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느니라.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에 아주 빛나서, 너희의 착한 일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이끌라.
140:4.5 (1572.5) 빛은 어두움을 떨쳐 버리지만, “눈을 멀게 할 만큼 밝아서”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고 좌절시킬 수도 있다. 동료들을 더 낫게 사는 새롭고 거룩한 길로 안내하도록 우리의 빛을 밝게 하라고 훈계를 받는다. 우리의 빛은 자신에게 눈을 끌지 않도록 밝아야 한다. 사람의 직업조차 이 생명의 빛을 퍼뜨리기 위하여 효과적인 “반사경”으로서 이용될 수 있다.
140:4.6 (1572.6) 강건한 인격은 나쁜 일을 하지 않음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제로 옳은 일을 함으로부터 얻는다. 이기심이 없음은 사람의 위대함을 가리키는 표시이다. 신을 예배하고 봉사함으로 가장 높은 수준의 자아 실현이 이루어진다. 행복하고 유능한 사람은 악한 짓이 두려워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옳은 일 하기가 좋아서 마음이 움직인다.
140:4.7 (1572.7) “너희는 열매를 보고 사람을 알지니라.” 인격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자라는―것은 도덕적 인품이다. 현대 종교의 큰 잘못은 부정적 사고이다. 아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히고 불 속에 던져지리라.” 도덕적 가치는 단순한 억압으로―”하지 말라”는 금지령에 복종한다고―얻을 수 없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은 종교 생활을 하는 동기로서 가치가 없다. 오직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드러내고 사람이 형제인 것을 존중할 때에야 종교가 타당하다.
140:4.8 (1572.8) 효과적인 생활 철학은 우주를 보는 통찰력, 그리고 사회 및 경제 환경에 대한 사람의 감정적 반응의 총합, 이 두 가지를 합침으로 형성된다. 기억하라: 타고난 욕구는 근본적으로 수정될 수 없지만, 그러한 욕구에 대한 감정의 반응은 바뀔 수 있다. 따라서 도덕적 성품은 수정될 수 있고, 인품은 개선될 수 있다. 튼튼한 인품 안에서는 여러 가지 감정의 반응이 통합되고 조정되며 이처럼 통일된 인격이 만들어진다. 통일성의 부족은 도덕적 성품을 약화시키고 불행을 일으킨다.
140:4.9 (1572.9) 가치 있는 목표가 없으면 인생은 목적이 없고 무익하며 많은 불행이 일어난다. 열두 사도를 세울 때 예수가 하신 말씀은 뛰어난 생활 철학이다.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체험으로 믿음을 연습하라고 훈계하였다. 그는 단순히 머리로 찬성하는 태도, 쉽사리 믿는 성향, 확립된 권한에 의존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140:4.10 (1573.1) 교육은 자연스럽고 물려받은 욕구를 채우는 좋은 방법을 배우는 (발견하는) 기술이 되어야 한다. 행복은 감정을 만족시키는 이 개선된 기법으로 얻는 결과의 총합이다. 행복은 환경과 거의 상관이 없다. 하지만 쾌적한 환경은 행복에 크게 이바지할 수도 있다.
140:4.11 (1573.2) 필사자는 누구나 완성된 인간이 되기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완전하기를 정말로 갈망한다. 결국 “우주는 참으로 아버지 같기” 때문에 그러한 달성이 가능하다.
140:5.1 (1573.3) 산상(山上) 설교로부터 마지막 만찬에서 하신 강론에 이르기까지,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형제 사랑보다 아버지 사랑을 나타내라고 가르쳤다. 형제 사랑이라면 네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할 것이요, 이것은 “황금률”을 충분히 지키는 것이리라.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은 예수가 너를 사랑하는 것 같이 동료 필사자를 사랑해야 한다고 요구할 것이다.
140:5.2 (1573.4) 예수는 인류를 두 가지 애정으로 사랑한다. 그는 땅에서 두 가지 성격으로―인간과 신으로서―살았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한다―그는 사람의 창조자요, 우주에서 사람의 아버지이다. 사람의 아들로서 예수는 형제로서 필사자들을 사랑한다―참으로 사람들 사이에 있던 사람이었다.
140:5.3 (1573.5)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불가능할 정도로 형제 사랑을 나타내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바라보는 것처럼 사람을 바라보고,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 같이 비로소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아버지 사랑의 첫걸음을 보여주도록―예수는 추종자들이 하나님을 닮으려고―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완전하려고―애쓰기를 기대하였다. 열두 사도에게 이렇게 훈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이 아버지 사랑 개념을 드러내려고 애썼고, 아버지 사랑은 수많은 사회적 환경에 적응하는 데 관한 어떤 감정적 태도에 관계된다.
140:5.4 (1573.6) 단순한 형제 사랑의 한계와 비교해서, 후일에 초월적인 아버지 사랑의 네 가지 최고의 반응을 묘사하는 준비로서 네 가지 신앙 태도에 주의를 불러일으키면서 주는 이 중대한 강론을 소개하였다.
140:5.5 (1573.7) 그는 먼저, 마음이 낮아져 있는 사람, 올바름을 갈급히 찾고, 온유함으로 견디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하였다. 영을 헤아리는 그러한 필사자는 아버지 사랑을 놀랍게 연습해 보려고 애쓸 수 있는, 신성한 비이기적 수준에 도달하기를 기대할 수 있다. 그래서 통곡을 하면서도 그들은 자비를 보이고 평화를 촉진하며, 박해를 견디고, 이 모든 쓰라린 상황을 거치면서 내내, 사랑스럽지 못한 인류조차도 아버지 사랑으로 사랑할 힘을 얻을 것이다. 아버지 사랑은 형제 사랑을 측량할 수 없이 한참 뛰어넘도록 헌신하는 수준에 이를 수 있다.
140:5.6 (1573.8) 이 지극한 축복에 나타난 믿음과 사랑은 도덕적 인품을 강화하고 기쁨을 창조한다. 두려움과 노여움은 인품을 약화시키고 행복을 파괴한다. 이 중대한 설교는 행복의 음정으로 시작되었다.
140:5.7 (1573.9) 1. “마음이 낮아져 있는 자―겸손한 자―는 행복하나니.” 어린아이에게 기쁨은 당장에 즐거움을 찾는 욕구를 채우는 것이다. 어른은 나중에 큰 행복을 거두기 위하여 자제의 씨를 기꺼이 뿌린다. 예수의 시절과 그 이후로, 행복은 재산의 소유에 있다는 관념과 너무 흔히 연결되어 왔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에 한 사람은 마음이 높아져 있었고―자기 중심이었고―다른 사람은 “마음이 낮아져 있었다”―겸손했다. 한 사람은 부족함이 없었고 다른 한 사람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고 진리를 찾았다. 마음이 낮아져 있는 사람은 영적 재산을 얻는 목표―하나님―을 찾는다. 진리를 찾는 그런 사람은 먼 앞날에 받을 보상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지금 보상을 받는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 하늘나라를 발견하며 그런 행복을 지금 체험한다.
140:5.8 (1574.1) 2. “올바름을 간절히 바라고 목마르게 찾는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채워질 것임이라.” 자신이 보잘것없다고 느끼는 사람이라야 언제라도 올바름을 간절히 찾을 것이다. 오직 겸손한 자가 신의 힘을 찾고 영적 권능을 갈망한다. 그러나 영적 자질을 얻고 싶은 욕구를 강화하려고, 영적으로 일부러 금식에 들어가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육체의 금식은 나흘이나 닷새 뒤에 위험해진다. 모든 식욕을 잃어버리기 쉽다. 지속된 금식은 육체의 배고픔이나 영적 갈망을 없애는 경향이 있다.
140:5.9 (1574.2) 체험으로 얻는 올바름은 기쁨이요 의무가 아니다. 예수의 올바름은 힘찬 사랑이다―아버지와 형제의 사랑이다. 부정적이거나 무엇을 하지 말라 하는 종류의 올바름이 아니다. 어떻게 사람이 언제라도 부정적인 것―무엇을 “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수 있는가?
140:5.10 (1574.3) 어린아이의 머리에 이 지극한 축복(祝福)의 처음 두 가지를 가르치기는 그리 쉽지 않지만, 성숙한 지성은 그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140:5.11 (1574.4) 3. “온유한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땅을 물려받을 것임이라.” 진정한 온유함은 두려움과 아무 관계가 없다.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의 태도이다―“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온유함은 참을성과 인내심을 담으며, 질서 있고 친절한 우주를 믿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 자극을 받는다. 온유함은 신의 이끄심에 반항하려는 모든 유혹을 이긴다. 예수는 유란시아에서 이상적인 온유한 사람이었고 방대한 우주를 물려받았다.
140:5.12 (1574.5) 4. “마음이 깨끗한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 영적 순수성은 의심과 복수심이 없는 것을 제외하고 부정적 성질이 아니다. 순수성을 논할 때, 예수는 순전히 인간의 성생활 태도만 다룰 의도는 없었다. 그보다 사람이 동료 인간에 대하여 가져야 할 믿음, 부모가 어린아이를 믿는 것, 아버지가 사랑하는 것 같이 동료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믿음을 언급하였다. 아버지의 사랑은 응석을 받아줄 필요가 없고 악을 묵인하지 않지만, 언제라도 비웃는 일이 없다. 아버지의 사랑은 한 가지 목적을 가졌고, 반드시 사람 안에서 최선을 찾는다. 그것이 참 부모의 태도이다.
140:5.13 (1574.6) 하나님을―믿음으로―보는 것은 참된 영적 통찰력을 얻음을 의미한다. 영적 통찰력은 조절자가 잘 인도할 수 있게 하며 결국에는 하나님 의식을 키워준다. 너희가 아버지를 알 때, 너희가 신의 아들이라는 보장이 확인되며, 육체를 입은 형제들을 하나하나, 형제로서―형제 사랑으로―사랑할 뿐 아니라 또한 아버지로서―아버지 사랑으로―더욱 사랑할 수 있다.
140:5.14 (1574.7) 이 훈계를 어린아이에게도 가르치기 쉽다. 어린아이들은 자연히 사람을 쉽게 믿으며, 부모는 아이들이 이 단순한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을 다룰 때, 어떤 속임수도 피하고 의심을 넌지시 비추기를 삼가라. 자기가 우러러보는 사람을 선택하고 자기 일생에 할 일을 고르도록 지혜롭게 도와주라.
140:5.15 (1574.8) 다음에 예수는 더 나아가서, 인간의 모든 투쟁의 주요한 목적―완전―의 실현을, 아니 신성에 이르는 것까지도, 추종자들에게 가르쳤다. 언제나 예수는 타일렀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열두 사도에게 훈계하지 않았다. 그것은 쓸모 있는 성취였을 터이고 형제 사랑의 실천을 가리켰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그들을 사랑한 것 같이 사도들에게 사람들을 사랑하라고―형제의 애정 뿐 아니라 아버지의 애정으로―사랑하라고 타일렀다. 그는 아버지 사랑의 네 가지 최고의 반응을 지적함으로 이를 보여주었다:
140:5.16 (1575.1) 1. “슬퍼하는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위로받을 것임이라.” 이른바 상식이나 최선의 논리로 따져도 슬퍼함으로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겉으로 또는 꾸며서 슬퍼함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부드러운 마음으로 감동하는 태도를 가리켰다. 부드러움을 보이거나 아니면 감정이나 육체가 고통받는 증거를 보이는 것이 남자답지 않다고 소년과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동정심은 여자 뿐 아니라 남자에게도 귀중한 속성이다. 남자답기 위하여 냉담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용감한 사람을 만드는 잘못된 방법이다.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들은 슬퍼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세는 슬퍼하는 사람이요 삼손이나 골리앗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었다. 모세는 훌륭한 지도자였으나 또한 온유한 사람이었다. 인간의 필요를 헤아리고 그에 민감한 것은 진정하고 오래 가는 행복을 창조하며, 한편 그런 친절한 태도는 노여움ㆍ미움ㆍ의심의 파괴적 영향으로부터 혼을 보호한다.
140:5.17 (1575.2) 2. “자비를 베푸는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자비를 얻을 것임이라.” 여기서 자비는 절정에 이르고 가장 깊고 넓은, 정말로 참된 우정―자애로움―을 가리킨다. 자비는 때때로 수동적일지 모르지만 여기서 자비는 능동적이고 힘차다―지극히 아버지답다. 사랑이 있는 부모는 아이를 용서하는 것을 여러 번이라도, 조금도 어렵게 느끼지 않는다. 버릇이 나쁘지 않은 아이의 경우에 고통을 벗어나려는 욕구는 자연스럽다. 실제 형편을 이해할 만큼 나이가 들 때, 아이들은 보통 친절하고 동정심이 있다.
140:5.18 (1575.3) 3. “화해시키는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 예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화해시키는 자를 바란 것이 아니라 군사적 구원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평화는 유순하고 소극적 종류가 아니다. 시련과 박해와 마주쳐 그는 말했다. “나의 평화를 너희에게 두고 가노라.” “너희는 마음에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것은 파괴하는 투쟁을 방지하는 평화이다. 개인의 평화는 인격을 통합한다. 사회의 평화는 두려움ㆍ욕심ㆍ분노를 막는다. 정치적 평화는 종족 사이의 적대 감정, 국가적 의심, 전쟁을 방지한다. 화해하는 것은 불신과 의심을 고치는 약이다.
140:5.19 (1575.4) 화해시키는 자로 활동하라고 아이들을 가르치기는 쉽다. 이들은 집단 활동을 즐기고 함께 놀기를 좋아한다. 또 다른 때에 주는 말했다: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자마다 목숨을 잃겠으나 자기 목숨을 버리고자 하는 자마다 목숨을 찾으리라.”
140:5.20 (1575.5) 4. “올바른 일을 위하여 박해받는 자는 행복하나니, 하늘나라가 저희 것임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대적하여 온갖 모습의 악한 것을 거짓되게 말할 때, 너희는 행복하니라.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할지니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140:5.21 (1575.6) 평화가 있은 후에 흔히 박해가 따른다. 그러나 젊은이와 용감한 어른들은 결코 어려움이나 위험을 피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아버지의 사랑은 이 모두를―형제 사랑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것을―아낌없이 할 수 있다. 진보는 언제나 박해로부터 마지막에 얻은 수확이었다.
140:5.22 (1575.7) 아이들은 용기를 보일 기회가 올 때 반드시 반응한다. 젊은이는 언제라도 기꺼이 “용감하게 도전한다.” 아이들은 모두 일찍부터 희생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140:5.23 (1575.8) 그래서 산상 설교의 지극한 축복은 믿음과 사랑에 기초를 두었고 율법에―윤리와 의무에―두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140:5.24 (1575.9) 아버지의 사랑은 악을 선으로―불의를 선행으로―갚기를 기뻐한다.
140:6.1 (1576.1) 일요일 저녁에, 가버나움의 북쪽 산지를 떠나서 세베대의 집에 도착하고 나서, 예수와 열두 사도는 조촐한 저녁을 들었다. 그 뒤에 예수가 물가를 따라 걸으려고 나간 동안, 열두 사도는 자기들끼리 이야기했다. 짧은 회의가 있은 뒤에, 쌍둥이가 불을 쪼이고 빛을 더 밝히려고 모닥불을 지피는 동안, 안드레는 예수를 찾으러 나갔고, 따라잡았을 때 말했다: “주여, 내 형제들은 하늘나라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나이다. 우리에게 더 가르쳐 주시기까지, 우리는 이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이다. 뜰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신 말씀의 뜻을 저희가 이해하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하러 왔나이다.” 예수는 사도들을 만나려고 안드레와 함께 갔다.
140:6.2 (1576.2) 뜰로 들어갔을 때 예수는 사도들을 둘레에 모으고 이렇게 말하며 더 가르쳤다: “너희는 옛 가르침 바로 위에 새 가르침을 세우려 하는 까닭에, 내가 하는 말을 깨닫기가 어려움을 발견하지만, 내가 선언하노니 너희는 다시 태어나야 하느니라. 어린아이처럼 새로 시작하고 기꺼이 내 가르침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어야 하느니라. 하늘나라의 새 복음을 예부터 내려온 것에 끼워 맞출 수 없느니라. 너희는 사람의 아들과 땅에서 그가 이룰 사명에 관하여 그릇된 생각을 가졌느니라. 그러나 내가 율법과 선지자들을 제쳐놓으려고 왔다고 잘못 생각하지 말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이루고 개선하고 밝게 비추려고 내가 왔노라. 율법을 어기려는 것이 아니라, 이 새 계명을 너희 마음 속 서판에 새겨주려고 내가 왔노라.
140:6.3 (1576.3) “자선하고 기도하고 금식함으로 아버지의 은혜를 얻고자 하는 자를 뛰어 넘을 그러한 올바름을 너희에게 요구하노라.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거든, 사랑ㆍ자비ㆍ진리로 이루어진 올바름―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진지한 욕구―를 가져야 하느니라.”
140:6.4 (1576.4)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말했다: “주여, 당신이 새로운 계명을 가졌으면, 듣고 싶나이다. 새 길을 우리에게 보이소서.” 예수가 베드로에게 대답하였다. “너희는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이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지니라’함을 들었느니라. 그러나 나는 행위 외에 동기를 밝히려고 보노라.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형제에게 성내는 자마다 죄 있다고 판결받을 위험이 있느니라. 마음 속에 미움을 품고 머리 속에 앙갚음하려고 궁리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을 위험이 있도다. 너희는 행위로 동료들을 판단해야 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의도를 보고 판단하시느니라.
140:6.5 (1576.5) “‘간음하지 말라’ 율법 선생들이 이르는 것을 너희가 들었느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란한 생각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마다 이미, 그 여자와 마음 속에서 간음하였느니라. 너희는 오직 행위로 사람들을 판단할 수 있으나 내 아버지는 자녀들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그 의도(意圖)와 진정한 욕구에 따라서 자비롭게 판단하시니라.
140:6.6 (1576.6) 예수는 다른 계명들에 대하여 계속 논의할 생각이 있었지만 이때 야고보 세베대가 끼어들어 물었다: “주여, 이혼(離婚)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가르쳐야 하리이까? 모세가 지시한 대로 남자가 아내와 이혼하도록 버려두어야 하리이까?” 이 질문을 듣자 예수는 말했다: “나는 율법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깨우치게 하려고 왔노라. 이 세상의 나라들을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하늘나라를 세우려 왔노라. 정부나 무역이나 또는 사회 행동에 관한 규칙을 너희에게 가르칠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 이것들은 오늘날 좋을지 모르나 다른 시대의 사회에 도무지 맞지 아니하리라. 나는 오로지 정신을 위로하고 영을 해방하고 사람의 혼을 구원하려고 이 땅에 왔노라. 그러나 이 이혼 문제에 관하여 내가 이르리니, 모세는 그러한 일을 승인했어도 아담 시절에 동산에서는 그렇지 않았도다.”
140:6.7 (1577.1) 사도들끼리 잠시 동안 이야기한 뒤에, 예수는 말씀을 이었다: “너희는 사람의 모든 행위에 두 가지 관점―인간의 관점과 신의 관점, 육체의 길과 영의 길, 시간적 평가와 영원의 관점―이 있음을 언제나 인식해야 하느니라.” 비록 열두 사도는 그가 가르친 것을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어도 이 가르침은 참으로 도움이 되었다.
140:6.8 (1577.2) 다음에 예수는 말했다: “그러나 너희는 내 교훈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는 버릇이 있는 까닭에 내 가르침에 걸려 넘어지며, 내 가르침의 정신을 깨닫는 데 더디구나. 너희는 내 사자임을 다시 기억해야 하며, 내가 영적으로 내 삶을 살아온 것 같이 너희 생애를 살아야 하느니라. 너희는 나를 개인적으로 대표하지만 모든 사람이 세세히 너희가 하는 대로 살기를 그릇되이 기대하지 말라. 나는 이 무리에 속하지 않는 양들을 가졌고, 내가 저희에게도 필사 성품으로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모범을 마련할 의무가 있음을 너희가 또한 기억해야 하느니라.”
140:6.9 (1577.3) 그러자 나다니엘이 물었다: “주여, 우리는 응보를 인정하지 말아야 하나이까?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 모세의 율법이 이르나이다. 우리는 무어라고 말하리이까?” 예수의 대답은 이러했다: “너희는 악을 선으로 갚을지니라. 내 사자(使者)들은 사람들과 다투지 말고, 누구에게나 관대해야 하느니라. 받은 만큼 그대로 갚는 것을 너희의 규칙으로 만들지 말라. 사람을 다스리는 자는 그러한 율법을 가질지 몰라도 하늘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으니라. 언제나 자비가 너희의 판단을 결정하고 사랑이 행위를 결정할지니라. 이러한 말이 지키기 어려우면, 너희는 이제라도 돌아갈 수 있느니라. 사도직의 요구 조건이 너무 어렵거든, 그보다 힘들지 않은 제자의 길로 돌아가도 좋으니라.”
140:6.10 (1577.4) 깜짝 놀랄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사도들끼리 한동안 물러났지만 곧 돌아왔고, 베드로가 말했다: “주여, 우리는 계속하여 당신과 함께하고자 하나이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사오이다. 덤을 치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고 그 잔을 마시겠나이다. 그저 제자가 아니라 사도가 되고 싶사오이다.”
140:6.11 (1577.5) 이 말을 듣자 예수는 말했다: “그러면 기꺼이 너희의 책임을 지고 나를 따르라. 착한 일을 몰래 하라. 자선금 낼 때 바른 손이 무엇을 하는지 왼 손이 모르게 하라. 기도할 때, 너희끼리 따로 가라, 말을 헛되이 되풀이하고 뜻 없는 구절을 쓰지 말라. 아버지는 구하기도 전에 너희가 무엇이 필요한 줄 아심을 언제나 기억하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슬픈 얼굴로 금식(禁食)에 빠지지 말라. 하늘나라의 봉사를 하려고 이제 따로 구별하여 내가 택한 사도로서, 자신을 위하여 땅에서 보물을 쌓지 말고, 사심 없이 봉사함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을지니, 보물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또한 있음이라.
140:6.12 (1577.6) “육체의 등불은 눈이라. 그런즉 너그럽게 헤아리는 눈이 있으면 온 몸이 빛으로 가득 차리라. 그러나 욕심에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두움에 싸이리라. 네 안에 있는 바로 그 빛이 어두워지면 그 어두움이 오죽하겠느냐!”
140:6.13 (1577.7) 그리고 나서 토마스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계속 가져야” 하는가 물었고, 주의 대답은 이러했다: “옳도다, 형제들아, 내가 바라건대, 이해심 있는 한 가족으로서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하느니라. 너희에게 큰 일이 맡겨졌고, 한눈 팔지 않고 봉사하기를 몹시 바라노라.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좋은 말씀을 너희가 아느니라. 너희는 하나님을 성실하게 예배하고 동시에 진심으로 재물을 섬길 수 없느니라. 이제 하늘나라 일을 하려고 아낌없이 지원하였은즉 너희의 생활을 걱정하지 말라.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너희 몸을 위해서도 무슨 옷을 입을까 더군다나 걱정하지 말라. 기쁘게 일하는 손과 진지한 마음을 가진 자는 배고프게 지내지 않을 것을 너희가 이미 배웠느니라. 이제, 너희가 온 에너지를 하늘나라 일에 바치려고 준비할 때, 아버지가 너희의 필요를 모른 체하지 않으실 것을 확실히 믿으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찾으라. 너희가 거기에 들어가는 문을 찾아냈을 때, 무엇이 필요하든지 너희가 더 받으리라. 그러므로 내일을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라. 하루의 어려움은 그날로 충분하니라.”
140:6.14 (1578.1) 그들이 밤새도록 질문하면서 늦게 있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 예수는 말했다: “형제들아, 너희는 흙으로 만든 그릇이라. 내일 일을 준비하도록 잠자러 가는 것이 최선이라.” 그러나 그들의 눈에서 이미 잠이 달아났다. 베드로는 나서서 주에게 요청했다: “나는 당신과 개인적으로 그저 조금 의논할 것이 있나이다. 형제들과 따로 무슨 비밀을 가지고 싶은 것이 아니라, 마음이 괴롭고, 혹시라도 주로부터 꾸지람을 받아야 한다면, 당신하고만 따로 있으면 더 쉽게 견딜 수 있나이다.” 집안으로 길을 인도하며 예수는 말했다 “베드로야, 따라 오라.” 주가 계신 곳으로부터 베드로가 무척 명랑해지고 크게 격려받고 돌아왔을 때, 야고보는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러 들어가려고 마음먹었다. 이런 식으로 날이 샐 때까지, 다른 사도들은 하나씩 주와 함께 이야기하러 갔다. 잠든 쌍둥이를 제쳐놓고 모두가 예수와 개인적으로 상담을 마쳤을 때, 안드레는 예수가 계신 데로 들어가서 말했다: “주여, 쌍둥이는 뜰에서 불 옆에 잠들었나이다. 당신과 또한 이야기하고 싶은지 저희를 깨워서 물어 보리이까?” 예수는 빙그레 웃으며 안드레에게 말했다. “저희는 잘 하는구나―그냥 두어라.” 이제 밤이 지나갔고, 새 날의 빛이 밝아오고 있었다.
140:7.1 (1578.2) 몇 시간 동안 잠자고 난 뒤에, 열둘이 함께 늦은 아침을 먹으려고 모였을 때, 예수는 말했다: “이제 너희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신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해야 하느니라. 예루살렘으로 갈 준비를 하여라.” 예수가 말한 뒤에, 토마스는 용기를 불러 일으키고 말했다: “주여 그 일을 시작하려고 우리가 준비되어야 함을 아나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직 이 큰 사업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드나이다. 우리가 하늘나라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며칠만 더 이 근처에 우리가 남아 있도록 허락하시겠나이까?” 사도들이 모두 똑같이 이 두려움에 빠져 있음을 보고서 예수는 말했다: “너희가 요청한 대로 되리라. 우리는 안식일 동안 여기에 남아 있으리라.”
140:7.2 (1578.3) 몇 주 동안,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작은 무리의 사람들이 호기심에 이끌린 구경꾼들과 함께 예수를 보려고 벳세다로 오고 있었다. 이미 그에 관한 소식이 시골에 퍼졌다. 티레ㆍ시돈ㆍ다마스커스ㆍ케자리아ㆍ예루살렘과 같이 먼 도시로부터 수소문하는 무리가 왔다. 여태까지 예수는 이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하늘나라에 관하여 가르쳤으나 이제 주는 이 일을 열둘에게 넘겼다. 안드레는 사도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한 집단의 방문자들에게 배치했고 때로는 열둘이 다 그렇게 바빴다.
140:7.3 (1578.4) 낮에는 가르치고 밤이 늦도록 사사로운 모임을 가지면서, 그들은 이틀 동안 일했다. 사흘째에, “고기를 잡으러 가거나, 홀가분하게 변화를 찾거나, 아니면 혹시 너희 가족을 찾아보라”하고 사도들을 보낸 동안, 예수는 세베대와 살로메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흘 동안 더 가르침을 받으려고 그들은 목요일에 돌아왔다.
140:7.4 (1578.5) 연습하는 이 주간에, 예수는 세례받은 뒤에 그가 땅에서 이루어야 할 사명의 두 가지 큰 동기(動機)를 여러 번 사도들에게 되풀이했다:
140:7.5 (1578.6) 1. 아버지를 사람에게 드러내는 것.
140:7.6 (1578.7) 2. 사람들이 아들 의식을 갖도록―최고자의 자녀임을 믿음으로 깨닫도록―이끄는 것.
140:7.7 (1579.1) 한 주 동안 이렇게 다양한 체험을 겪은 것은 열두 사도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다. 더러는 지나치게 자신감이 생기기도 하였다. 마지막 회의에서, 안식일이 끝난 그날 밤에 베드로와 야고보가 예수에게 와서 말했다, “우리는 준비가 되었나이다―이제 하늘나라를 치러 갑시다.” 이에 예수는 대답하였다. “너희가 열심인 만큼 지혜롭고, 너희의 용기가 무지(無知)를 보충하기를―.”
140:7.8 (1579.2) 비록 가르침을 많이 알아듣지 못했어도, 사도들은 예수가 그들과 함께 지낸 기막히게 아름다운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 놓치지 않고 깨달았다.
140:8.1 (1579.3) 예수는 사도들이 그의 가르침을 완전히 새겨듣지 못했음을 잘 알았다.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에게 얼마큼 특별 교육을 주기로 작정하였고, 그들이 동료들에게 그 개념을 뚜렷하게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랐다. 열두 사도가 영적 하늘나라 관념의 어떤 모습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들이 다윗의 왕좌를 회복하고 땅에서 현세의 권력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시 세운다는, 글자 그대로의 나라 개념, 오래 되고 뿌리 깊은 개념 바로 위에, 이 새 영적 가르침을 붙이려고 끈질기게 고집하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목요일 오후에 하늘나라의 일을 의논하려고 예수는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과 함께 배를 타고 물가를 떠나갔다. 이것은 네 시간 동안 가르치는 회의였고 수십 가지 질문과 대답을 포함하였다. 시몬 베드로가 형 안드레에게 다음 날 아침에 준 대로, 이 중대한 오후의 요점을 다시 정리하여 이 기록에 넣는 것이 가장 유익할까 한다:
140:8.2 (1579.4) 1.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 하늘 아버지가 넉넉히 돌보심을 믿으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맹목적ㆍ수동적 운명론이 아니었다. 이날 오후에 어느 옛 히브리 속담이 옳다고 인용했다: “일하려 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지니라.” 그의 체험이 그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충분한 논평이라고 지적하였다. 아버지를 신뢰하라는 교훈을 현대나 어느 다른 시대의 사회 또는 경제 조건에 비추어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의 가르침은 어느 시대나 어느 세계에도, 하나님과 가까이 사는 이상적 원칙을 담고 있다.
140:8.3 (1579.5) 예수는 사도(使徒)와 제자가 되는 요건의 차이를 세 사람에게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나서도 열두 사도에게 신중하게 움직이고 조심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 앞일에 대한 생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근심 걱정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였다.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정신차리고 복종하기를 가르쳤다. 검소와 절약에 관한 많은 질문에 답하여, 다만 목수와 조선공과 어부로서 살았던 그의 생활, 그리고 열두 사도를 신중하게 조직한 것을 주목하라고 했다. 세상을 적(敵)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생활 환경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작용하는 신의 섭리라는 것을 분명히 설명하려고 애썼다.
140:8.4 (1579.6) 몸으로 저항하지 않는 자신의 습관을 이해시키는 데 예수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아예 자신을 방어하려 하지 않았다. 사도들의 눈에는 그들이 똑같은 원칙을 따른다면 주가 기뻐할 듯이 보였다. 악에 대항하지 말라고, 부당한 처사나 권리 침해에 맞서 싸우지 말라고 가르쳤으나 악행을 수동적으로 묵인하기를 가르치지는 않았다. 행악자와 범죄자를 사회가 처벌하는 것을 승인한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리고 법을 집행하느라고 국가의 정부가 때때로 무력(武力)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이날 오후에 예수는 분명히 밝혔다.
140:8.5 (1579.7) 예수는 앙갚음하는 악습을 주의하라고 제자들에게 자주 경고하였다. 그는 복수, 앙갚음하는 관념을 어떤 경우에도 인정하지 않았다. 불평 품는 것을 슬프게 여겼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는 관념을 금하였다. 그는 사사로이 개인적으로 앙갚음하는 개념 전체를 찬성하지 않았고, 이러한 문제를 한편으로 국가 정부에, 또 한편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맡겼다. 그의 가르침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세 사람에게 뚜렷이 말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그때까지 가르친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140:8.6 (1580.1) 너희의 적을 사랑하라―인간이 형제라는 도덕적 주장을 기억하라.
140:8.7 (1580.2) 악(惡)은 무익하다: 복수한다고 잘못이 고쳐지지 않는다. 악한 수단으로 악에 대항하여 싸우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140:8.9 (1580.4) 2. 정치적 태도. 당시에 유대 민족과 로마 정부 사이에 존재하던 긴장된 관계에 대하여 논평을 삼가라고 사도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어떤 면에서도 그들이 이 난국에 말려드는 것을 금했다. 그는 적들이 놓은 정치적 덫을 피하려고 늘 조심스러웠고 “케자의 것을 케자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늘 대답했다. 구원받는 새 길을 만드는 사명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다른 것에 관여하도록 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사생활에서 언제나 국가의 모든 법과 규칙을 마땅히 준수했다. 어떤 대중 교육에서도 그는 시민ㆍ사회ㆍ경제 분야에 관여하지 않았다. 오직 사람의 정신적 생활, 개인의 영적 생활의 원칙에만 관심을 가진다고 세 사도에게 일러주었다.
140:8.10 (1580.5) 따라서 예수는 정치적 개혁가가 아니었다. 그는 세상을 다시 조직하려고 오지 않았다. 그런 일을 했어도 그것은 그 시대와 세대에만 적용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최선으로 사는 길을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어떤 세대도 예수의 생애를 어떻게 자체의 문제에 최선으로 적용하는가 발견하는 수고를 아끼면 안 된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어떤 정치 이론이나 경제 이론, 어떤 사회 체제나 산업 체제와 동일시하는 잘못을 결코 저지르지 말라.
140:8.11 (1580.6) 3. 사회적 태도. 유대인 랍비들은 이 문제를 오랫동안 논의해 왔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예수가 와서 적극적이고 저절로 우러나오는 친절 관념을 제시하였다.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진지하였고, 그 사랑이 전 세계를 포함하고 그래서 모든 사람을 자기 이웃으로 만들기까지 이웃을 확대했다. 그러나 이 모두와 함께, 예수는 대중이 아니라 오직 개인에 관심을 가졌다. 예수는 사회학자가 아니었지만, 온갖 형태의 이기적 고립을 깨뜨리려고 수고했다. 순전한 동정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르쳤다. 네바돈의 미가엘은 자비에 지배를 받는 아들이다. 동정심이 바로 그의 성품이다.
140:8.12 (1580.7) 사람들이 결코 친구에게 식사를 대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주는 추종자들에게 가난한 자와 불행한 자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예수는 확고한 응보 감각을 가졌지만 그 감각은 반드시 자비로 부드럽게 되었다. 예수는 사도들에게 사회의 기생충이나 또는 전문(專門)으로 자선금을 얻어내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사회학적 선언에 아주 가깝게 간 말씀은 “판단을 받지 않도록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한 것이다.
140:8.13 (1580.8) 그는 가리지 않고 베푸는 친절이 여러 가지 사회악에 책임이 있을지 모른다고 분명히 말했다. 다음 날, 그가 요청하거나 두 사도가 공동으로 간청할 때를 제쳐놓고, 사도의 기금을 조금도 자선금으로 써서는 안 된다고 유다에게 분명히 지시했다. 이 모든 문제에서 “뱀 같이 지혜로우나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늘 말하는 것이 예수의 버릇이었다. 어떤 사회적 상황에도 참을성ㆍ관용ㆍ용서를 가르치는 것이 목적인 듯하였다.
140:8.14 (1581.1) 가족은―여기서 그리고 다음 세상에서―예수의 생활 철학의 바로 그 핵심을 차지했다. 하나님에 관한 그의 가르침은 가족에 기초를 두었고, 한편 그는 조상을 지나치게 존경하는 유대인의 성향을 고치려고 애썼다. 가족 생활을 인간의 가장 높은 임무로 높였지만, 가족 관계가 종교적 의무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가족은 이 세상의 제도요, 죽음 뒤에 살아남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가족이 아버지의 뜻에 어긋날 때 예수는 가족을 서슴지 않고 버렸다. 사람이 형제라는 새롭고 더 큰 정신―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예수의 시절에 팔레스타인에서, 그리고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이혼 관습은 엄하지 않았다. 그는 결혼과 이혼에 관하여 율법 만들기를 거듭 물리쳤지만, 초기에 예수를 따르던 많은 사람은 이혼에 관하여 뚜렷한 의견을 가졌고 그런 의견을 서슴지 않고 예수의 덕분으로 돌렸다. 요한 마가를 제외하고, 신약(新約)의 저자들은 모두 결혼에 대하여 이렇게 좀더 엄격하고 진보된 관념을 지켰다.
140:8.15 (1581.2) 4. 경제적 태도. 예수는 그가 당면한 세상에서 일하고 살고 물건을 교환했다. 경제 개혁가가 아니었지만 그는 재산의 불평등한 분배가 부당한 것에 빈번히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그는 아무런 대안(代案)을 내놓지 않았다. 사도들이 재산을 차지해서는 안 되지만, 부와 재산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평등하지 않고 공평하지 않은 재산 분배에 반대함을 설파했다고 세 사람에게 분명히 일러주었다. 그는 사회 정의(正義)와 산업의 공평이 필요함을 인정했지만,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아무런 원칙을 내놓지 않았다.
140:8.16 (1581.3) 그는 추종자들에게 세상의 소유물을 피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었고 다만 열두 사도에게 그렇게 했다. 의사(醫師)인 누가는 평등한 사회를 굳세게 주장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개인적 관점과 어울리게 예수의 말씀을 해석하려고 많이 애썼다.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공동체 형태의 생활을 채택하라고 친히 지시한 적이 없었고 그러한 문제에 관하여 어떤 종류의 선언도 하지 않았다.
140:8.17 (1581.4) 예수는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탐욕을 피하라고 자주 경고했고, “사람의 행복은 물질 재산의 풍부함에 있지 않느니라” 선언하였다. 그는 항상 되풀이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혼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으리요?” 그는 재산 소유를 직접 공격하지 않았지만, 영적 가치의 우선이 영원히 필수라고 주장했다. 후기의 가르침에는, 대중에게 봉사하는 과정에서 제시한 수많은 비유를 들어 유란시아의 그릇된 여러 생활 관점을 고치려고 애썼다. 예수는 결코 경제 이론을 만들려고 의도하지 않았다. 각 시대는 기존의 문제에 대하여 자체의 처방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았다. 오늘날 육체를 입고 살면서 땅에 계시다면 예수는 대다수의 선한 남녀의 기대에 크게 어긋날 터이니, 오늘날의 정치나 사회나 경제에 대한 논쟁이 있을 때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리라는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순전히 인간적인 너희 문제들을 풀려고 너희를 몇 배나 더 유능하게 만들기 위하여 마음의 영적 생활을 어떻게 완전하게 하는가 가르치면서 그는 아주 초연(超然)할 것이다.
140:8.18 (1581.5) 예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처럼 만들고, 다음에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신의 정치ㆍ사회ㆍ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이해심을 가지고 구경하려 할 것이다. 그가 비난한 것은 재산이 아니라, 재산에 굴종하는 대다수의 사람에게 재산이 미치는 영향이었다. 이 목요일 오후에 예수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처음으로 동료들에게 말했다.
140:8.19 (1581.6) 5. 개인적 종교. 너희는 예수의 사도들처럼, 예수의 생애를 보고 그 가르침을 더욱 이해해야 한다. 그는 완전하게 된 일생을 유란시아에서 살았고 오직 그가 당면한 배경을 두고서 그 일생을 상상할 때에야 그의 독특한 가르침을 겨우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의 신다운 성품과 사랑하는 성격을 드러내는 데 가장 도움이 될 것은 그의 일생이요, 열두 사도에게 준 가르침이나 군중에게 한 설교가 아니다.
140:8.20 (1582.1) 예수는 히브리인 선지자나 그리스인 도덕가들의 가르침을 공격하지 않았다. 주는 이 위대한 선생들이 부르짖는 많은 좋은 것을 인식했으나 무언가 더 큰 것, “사람의 뜻이 자진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땅에 내려왔다. 예수는 다만 종교인, 온통 종교적 느낌에 싸여 있고 오직 영적 충동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사람을 만들기를 원하지 않았다. 너희가 한 번 얼핏 그를 볼 수 있었다면, 예수가 이 세상일에 큰 경험을 가진 실재한 사람이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점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기독교 시대의 여러 세기를 통해서 계속, 터무니없이 왜곡되고 많이 와전(訛傳)되었다. 너희는 또한 주의 온유함과 겸손함에 대하여 비뚤어진 생각을 지녀 왔다. 그가 일생에서 목표로 한 것은 당당한 자존심이었던 듯하다. 사람이 참으로 높아질 수 있도록 자신을 낮추라고 충고했다. 그가 정말로 목표로 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겸손이었다. 그는 성실함―깨끗한 마음―을 높이 평가했다. 인품을 평가할 때 충실은 으뜸가는 미덕이었고, 한편 용기는 그의 가르침의 바로 그 핵심이었다. “두려워 말라”가 표어요, 참을성 있게 견디는 태도는 강건한 인품의 이상(理想)이었다. 예수의 가르침은 용맹과 용기와 용감한 정신의 종교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보통 사람 열두 명을 개인 대표로서 선택한 이유이며, 이들의 대다수는 거칠고 튼튼하고 남자다운 어부였다.
140:8.21 (1582.2) 예수는 그 시대의 사회악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이 거의 없었다. 도덕적 방탕을 언급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는 참된 미덕을 가르치는 적극적인 선생이었다. 무엇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방법을 세심하게 피했고 악을 선전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도덕을 개혁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인류의 육욕(肉慾)은 종교적 꾸지람이나 율법으로 금지한다고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고 그렇게 사도들에게 가르쳤다. 얼마 안 되는 비난은 대체로 자만ㆍ잔인ㆍ억압ㆍ위선에 대한 것이었다.
140:8.22 (1582.3) 예수는 요한처럼, 바리새인조차 맹렬히 비난하지 않았다. 많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마음은 정직함을 알았고, 종교적 전통에 노예처럼 매여 있는 것을 이해했다. 예수는 “먼저 나무를 좋게 만드는 일”을 크게 강조했다. 그가 어떤 몇 가지 특별한 미덕 뿐 아니라, 생애 전체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세 사람에게 강조하였다.
140:8.23 (1582.4) 요한이 이날의 가르침으로부터 한 가지 얻은 것은 예수가 믿는 종교의 핵심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동기를 가진 인품, 그리고 이와 더불어 자비로운 인격을 얻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140:8.24 (1582.5) 베드로는 그들이 바야흐로 선포하려는 복음은 온 인류를 위하여 정말로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을 깨달았다. 그는 이 인상을 나중에 바울에게 전했고, 바울은 이로부터 그리스도가 “둘째 아담”이라는 교리를 지어냈다.
140:8.25 (1582.6) 야고보는 땅에서 자녀들이 마치 완성된 하늘나라 시민이 이미 된 것처럼 살기를 예수가 바란다는 감격스러운 진리를 깨달았다.
140:8.26 (1582.7) 예수는 사람들이 다른 것을 알았고 사도들에게 그렇다고 가르쳤다. 제자와 신자들을 어떤 정해진 형태에 맞추어 한 모양으로 만들려고 애쓰기를 삼가라고 사도들에게 항상 훈계하였다. 각 사람이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 앞에서 완전해지고 있는 독립된 개인을 개발하도록 버려두려고 애썼다. 베드로의 여러 질문 중 하나에 대답하여, 주는 말씀했다: “어린아이로서 새롭고 더 나은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해방하기를 내가 원하노라.” 예수는 참된 선함은 의식(意識)하지 않고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자선을 베풀 때 바른 손이 무엇을 하는지 왼손이 모르게 하기를 언제나 주장하였다.
140:8.27 (1583.1) 이날 오후에 세 사도는 주의 종교가 영적 자기 반성에 대하여 아무런 제한이 없음을 깨닫고 놀랐다. 예수의 시절 이전과 이후에 있던 모든 종교는, 기독교조차 양심적으로 자기를 반성하라고 조심스럽게 지시한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의 종교는 그렇지 않았다. 예수의 생활 철학에는 아예 종교적 자아 반성이 없다. 목수의 아들은 결코 인품을 만들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인품의 성장을 가르쳤고,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외쳤다. 그러나 예수는 오만한 자기 본위를 막는 수단으로 자아 분석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전혀 하지 않았다.
140:8.28 (1583.2) 하늘나라에 들어갈 권리는 신앙, 곧 개인의 믿음에 달려 있다. 하늘나라로 진보하여 계속 올라가느라고 치르는 값은 진주, 사람이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얻고자 하는 값비싼 진주와 같다.
140:8.29 (1583.3) 예수의 가르침은 약자와 노예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종교이다. 그의 종교는 (당대에) 결코 신조와 신학 법칙으로 구체화되지 않았다. 그는 한 줄의 글도 뒤에 남기지 않았다. 그의 일생과 가르침은 어느 시대나 어느 세계에도, 영적 안내와 도덕적인 가르침이 되기에 적당한 유산(遺産), 영감을 주는 이상적 유산으로, 우주에 남겼다. 오늘날도 예수의 가르침은 각 종교에게 살아 있는 희망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서, 모든 종교와 따로 구별된다.
140:8.30 (1583.4) 예수는 종교가 땅에서 사람이 유일하게 추구할 일이라고 사도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관한 유대인의 관념이었다. 그러나 종교가 열두 사도가 전념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예수가 신자들의 진정한 교양 추구를 막으려고 가르친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그는 전통에 묶인 예루살렘의 종교 학당들을 비난하였다. 그는 생각이 자유롭고 마음이 넓었고, 박식하고 너그러웠다. 올바르게 사는 그의 철학에는 자의식하는 경건한 언행이 설 자리가 없다.
140:8.31 (1583.5) 주는 자신이 살던 시대나 후일에 어느 시대에도 비종교적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해결책을 내놓지 않았다. 예수는 영원한 실체들을 꿰뚫어보는 영적 통찰력을 개발하고 독창적으로 사는 주도권을 자극하고 싶어했고 인류의 기초에 있는 영구한 영적 필요에만 순전히 관심을 가졌다. 그는 하나님과 같은 정도의 선(善)을 드러냈다. 사랑―진리ㆍ아름다움ㆍ선―이 신의 이상이요 영원한 실체라고 찬양하였다.
140:8.32 (1583.6) 주는 사람 속에서 새로운 정신, 새로운 의지를 창조하려고―진리를 알고, 동정심을 체험하고 선을 택하는 새 능력을 전하려고―오셨으니, 이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완전하게 되려는 영원한 욕구와 아울러,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려 하는 의지이다.
140:9.1 (1583.7) 예수는 다음 안식일에 사도들에게 몰두했고 사도들을 세웠던 산지로 돌아갔다. 길고도 더할 나위 없이 감동적인 격려의 말씀을 친히 주신 뒤에, 열두 사도를 성직에 임명하는 엄숙한 행위에 들어갔다. 이 안식일 오후에 예수는 산허리에서 둘레에 사도들을 모으고, 세상에 그들만 두고 떠나야 하는 날에 대비하여 그들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손에 맡기었다. 이 계제에 아무런 새로운 가르침이 없었고 다만 이야기와 친교에 시간을 보냈다.
140:9.2 (1584.1) 예수는 바로 이 자리에서 했던 사도 임명 설교의 여러 모습을 돌아보았고, 다음에 하나씩 앞으로 부르고 그의 대표로서 세상으로 떠나가도록 임명했다. 성직 임명식에서 주의 명령은 이것이었다, “온 세계로 가서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라. 영적으로 포로 된 자를 해방하고 억압받는 자를 위로하며, 고통받는 자를 돌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140:9.3 (1584.2) 예수는 돈이나 여벌 옷을 가지고 가지 말라 타이르며 말했다 “일꾼은 임금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마침내 그는 말했다. “보라, 내가 이리들 한가운데 양처럼 너희를 보내노라. 그런즉 너희는 뱀과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그러나 살필지니, 너희의 적이 너희를 공회(公會) 앞으로 끌고 갈 것이요 회당에서 너희를 징계할 것임이라. 이 복음을 믿는다고 너희는 총독과 권력자들 앞에 넘겨지겠고 너희의 바로 그 간증이 저희에게 나를 위한 증언이 될지니라. 그리고 너희를 재판으로 이끌 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 내 아버지의 영이 너희 안에 깃들고 그런 때에 너희를 통해서 말씀하시리라. 너희 중에 더러는 죽음을 당하겠고 땅에서 하늘나라를 세우기 전에 이 복음 때문에 숱한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러나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고, 내 영이 온 세상으로 너희 앞에 가리라. 그리고 너희가 먼저 유대인에게, 그리고 나서 이방인에게 가는 동안, 내 아버지가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140:9.4 (1584.3) 그리고 산에서 내려와서 그들은 세베대 집의 거처로 돌아갔다.
140:10.1 (1584.4) 비가 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날 저녁에 집에서 가르치는 동안 예수는 오랫동안 말씀했다.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열둘에게 보여주려 했다. 그들은 올바름―구원―에 이르는 수단으로서 어떤 일을 하라고 짐을 지우는 종교만 알았다. 그러나 예수는 되풀이하곤 했다. “하늘나라에서는 너희가 일하기 위하여 의로워야 하느니라.” 여러 번 되풀이했다. “그런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는 완전하라.” 그는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려고 왔고 오직 믿음으로, 단순하고 성실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그동안 내내 주는 놀란 사도들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예수는 말했다: “요한은 회개하는 세례, 옛 생활 방식을 뉘우치라는 세례를 외쳤느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친교하는 세례를 선포해야 하느니라. 회개하라는 가르침이 필요한 자에게 회개를 외치라. 그러나 하늘나라로 들어가기를 이미 진지하게 추구하는 자에게는, 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즐거이 친교하는 곳으로 들어오라 청하라.” 그러나 이 갈릴리 어부들에게, 하늘나라에서 믿음으로 올바르게 되는 것이 땅에서 필사자가 하루하루 사는 동안 바르게 행하는 것보다 앞서야 한다고 설득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140:10.2 (1584.5) 열두 사도를 가르치는 이 일에 또 다른 큰 장애물은, 상당히 이상적이고 영적인 원칙, 종교적 진리의 원칙을 구체적인, 개인의 행동 규칙으로 다시 만드는 경향이었다. 예수는 사람의 태도에 담긴 아름다운 정신을 제시하곤 했지만, 그들은 그러한 가르침을 개인의 행동 규칙으로 풀이하기를 고집했다. 주가 하신 말씀을 분명히 기억했을 때, 그들은 예수가 무슨 말씀을 하지 않았는가 거의 확실히 잊어버린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가르친 그대로 사신 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천천히 그 가르침을 소화했다. 말씀으로 가르쳐서 얻을 수 없는 것은 그와 함께 살면서 차츰차츰 얻었다.
140:10.3 (1585.1) 주가 방대한 우주의 어느 세계에, 어느 시대의 어떤 사람에게도, 영감을 주는 인생을 사는 데 전념했다는 것이 사도들의 눈에 명백하지 않았다. 이따금 예수가 말씀했는데도 사도들은 그가 이 세상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광대한 창조에 존재하는 모든 다른 세계를 위하여 일한다는 생각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는 이 세상의 남녀를 위하여 필사자로 사는 본보기를 친히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세계의 모든 필사 존재를 위하여 영적이며 영감을 주는 높은 이상을 만들려고 유란시아에서 지상의 인생을 살았다.
140:10.4 (1585.2) 바로 이날 저녁에 토마스는 예수께 물었다: “주여,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전에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당신이 말씀하시고, 그래도 거짓 선지자에게 속지도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잘못도 저지르지 말라 당신이 경고하였나이다. 이제,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어찌할까 모르겠나이다. 당신의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없나이다.” 예수는 토마스에게 대답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너희를 참으리요! 너희는 나의 모든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 듣기를 늘 고집하는도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값으로 어린아이 같이 되라 요구했을 때, 쉽게 속거나 단지 기꺼이 믿으라거나 호감이 가는 낯선 사람을 얼른 신뢰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느니라. 그 예로부터 너희가 얻기를 내가 바란 것은 아이와 아버지의 관계였느니라. 너는 어린아이요 네가 들어가고자 하는 곳은 네 아버지의 나라이라. 모든 보통의 아이와 아버지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애정이 있으니, 이것은 이해하고 사랑하는 관계를 보장하며 또한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얻으려고 협상하는 어떤 성향도 영원히 미리 제외하느니라. 너희가 나가서 전하려는 그 복음은 바로 이 영원한, 아이와 아버지의 관계를 믿음으로 깨달아서 얻는 구원과 상관되느니라.”
140:10.5 (1585.3) 예수의 가르침의 한 가지 특징은 그의 철학에 담긴 도덕이 개인과 하나님의 개인적 관계에서―바로 이 아이와 아버지의 관계에서―생겨난다는 것이다. 예수는 종족이나 나라가 아니라 개인에 중점을 두었다. 저녁을 들면서 예수는 마태와 이야기했고 그 말씀 가운데 어떤 행동의 도덕성도 개인의 동기에 따라 좌우된다고 설명하였다. 예수의 도덕은 언제나 긍정적이었다. 예수가 고쳐서 말씀한 황금률은 적극적 사회 접촉을 요구한다. 무엇을 하지 말하는 오래 된 규칙은 고립된 가운데 지킬 수 있다. 예수는 도덕에 붙어 있는 모든 법칙과 예식을 벗기고 도덕을 영적으로 생각하고 참으로 올바르게 사는 훌륭한 수준으로 높이 올려 놓았다.
140:10.6 (1585.4) 예수의 이 새 종교는 실용적으로 암시하는 것이 없지 않았지만 그 가르침에서 실용적인 정치적ㆍ사회적, 또는 경제적 가치를 가진 무엇이 발견되든지 그것은 혼이 마음 속에서 얻는 이 체험이 자연히 풀려나가는 작용이며, 그 혼은 진정한 개인적 종교 체험을 겪으면서 날마다 자진하여 봉사함으로 영의 열매를 보여준다.
140:10.7 (1585.5) 예수와 마태가 이야기를 마친 뒤에, 열심당원 시몬이 물었다. “그러나 주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니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옳도다 시몬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것이 너희가 선포할 좋은 소식이라.” 그러나 사도들은 그러한 교리를 깨달을 수 없었다. 새롭고 이상하고 깜짝 놀랄 발언이었다. 이 진리를 그들의 마음에 깊이 새기게 하려는 소망 때문에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모든 사람을 형제로 대우하라고 가르쳤다.
140:10.8 (1585.6) 안드레의 물음에 답하여, 주는 그의 가르침에 담긴 도덕은 그가 실천하는 종교와 따로 구별할 수 없다고 분명히 일러주었다. 사람의 성품으로부터 도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로부터 도덕을 가르쳤다.
140:10.9 (1585.7) 요한이 예수에게 물었다: “주여, 하늘나라는 무엇이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하늘나라는 이 세 가지 요건으로 이루어지느니라. 첫째는 하나님이 그 나라를 다스리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를 믿는 것이요, 셋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하나님을 닮으려는―인간 최고의 소망이 효력이 있음을 믿는 것이라. 믿음으로 어떤 필사자도 이 구원의 조건을 모두 갖출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복음이 주는 좋은 소식이라.”
140:10.10 (1586.1) 그리고 이제 기다리는 주간이 지났다. 그들은 이튿날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려고 준비하였다.
141:0.1 (1587.1) 서기 27년 1월 19일, 그 주 첫째 날에 예수와 열두 사도는 벳세다의 본부를 떠나려고 준비했다. 4월에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려고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 그리고 요단강 유역의 길로 여행할 생각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열두 사도는 주의 계획에 대하여 전혀 몰랐다. 사도의 가족들과 다른 제자들이 작별 인사를 하고 바야흐로 시작하려는 새 일의 성공을 빌려고 왔기 때문에, 그들은 한낮 가까이 되기까지 세베대의 집을 벗어나지 못했다.
141:0.2 (1587.2) 떠나기 바로 전에, 사도들은 주를 만나지 못했으며 안드레가 그를 찾으러 나갔다. 잠깐 찾다가 안드레는 물가에서 예수가 배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열둘은 주가 슬퍼하는 듯한 때를 자주 보았고 잠시 동안 심각하게 생각에 몰두한 것을 보았지만, 아무도 주가 눈물 흘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기 바로 전에 주가 이렇게 감동한 것을 보고 안드레는 얼마큼 놀랐다. 그는 예수에게 감히 다가가서 물었다: “이렇게 좋은 날에, 주여, 아버지의 나라를 선포하려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야 하는데, 눈물을 흘리시니 어인 일이니이까? 우리 가운데 누가 당신께 무례하였나이까?” 안드레와 함께, 열두 사도와 합세하려고 가면서 예수는 대답했다. “너희 가운데 아무도 나를 슬프게 하지 않았느니라. 내가 슬퍼하는 것은 내 아버지 요셉의 집안에서 아무도 기억하여 성공을 빌러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 이때 룻은 나사렛에 있는 오빠 요셉을 방문하고 있었다. 가족 중에 다른 사람들은 감정이 상한 결과로 자만심ㆍ실망ㆍ오해, 사소한 분개심에 빠져 그를 멀리하였다.
141:1.1 (1587.3) 가버나움은 티베리아스에서 멀지 않았고, 예수의 명성(名聲)은 온 갈릴리에, 그리고 거기를 지나서 여러 곳에도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헤롯이 그가 하는 일을 곧 주목하기 시작하리라는 것을 예수는 알았다. 그래서 남쪽으로, 유대 땅으로 사도들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1백 명이 넘는 신자들 일행이 함께 가고 싶어했으나 예수는 그들에게 말씀하며, 요단강으로 내려가는 길에 사도 집단을 따라오지 말라고 부탁했다. 뒤에 남아 있기로 찬성했어도 그들 가운데 여럿이 며칠 안에 주의 뒤를 따라 갔다.
141:1.2 (1587.4) 첫날에 예수와 사도들은 겨우 타리케아까지 여행했고, 거기서 그날 밤에 쉬었다. 이튿날 펠라 가까이 요단강의 한 지점, 요한이 1년 전쯤에 전도하고 예수가 세례를 받은 곳까지 여행했다. 여기서 2주가 넘도록 머무르며 가르치고 전도하였다. 첫째 주말이 되어서 몇백 명이 예수와 열두 사도가 거하는 곳 가까이 야영지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갈릴리ㆍ페니키아ㆍ시리아ㆍ데카폴리스ㆍ페레아, 그리고 유대에서 왔다.
141:1.3 (1588.1) 예수는 아무런 대중 설교를 하지 않았다. 안드레는 군중을 나누고 오전과 오후 집회에 설교할 사람들을 배치했다. 저녁 식사 뒤에 예수는 열두 사도와 함께 이야기하였다. 아무런 새 가르침을 주지 않았지만, 앞서 가르친 것을 다시 검토하고 여러 질문에 답하였다. 이렇게 하던 어느 날 저녁, 이 장소 가까이, 산에서 40일 보낸 것에 대하여 열둘에게 무언가 일러주었다.
141:1.4 (1588.2) 페레아와 유대 지방에서 온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적이 있었고 예수의 가르침에 관하여 더 알아보는 데 관심이 있었다. 사도들은 어떤 면에서도 요한의 설교를 깎아내리지 않았고 이때 새 제자들에게 세례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요한의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많이 진전을 보았다. 요한이 예수에 대하여 선포한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예수가 그를 감옥에서 구해내려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요한의 추종자들에게 언제나 걸림돌이었다. 요한의 제자들은 어째서 그들이 아끼는 지도자가 모진 죽음을 당하는 것을 예수가 막지 않았는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141:1.5 (1588.3) 밤마다 안드레는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들과 원만하게 어울리는 일, 까다롭고 어려운 일을 동료 사도들에게 조심스럽게 가르쳤다. 예수가 대중에게 봉사하던 첫해 동안, 추종자의 4분의 3이 넘는 수가 이전에 요한을 따랐고 그에게 세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이해, 서기 27년 전부가 페레아와 유대에서 요한이 하던 일을 조용히 이어받는 데 쓰였다.
141:2.1 (1588.4) 펠라를 떠나기 전날 밤에 예수는 새 나라에 관하여 얼마큼 더 가르쳤다. 주는 말했다: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오는 것을 기대하라고 가르침 받았으며, 내가 와서, 이제 오래 기대하던 이 나라가 가까이 왔고 이미 여기에 우리 가운데 있음을 선포하노라. 어느 나라에도 보좌에 앉아서 나라의 율법을 선포하는 임금이 있어야 하느니라. 그래서 유대 민족이 땅의 모든 민족을 영화롭게 다스린다는 개념, 메시아가 다윗의 보좌에 앉아서 이 기적의 권능을 가진 자리에서 온 세상의 율법을 선포한다는 하늘나라 개념을 너희가 개발하였느니라. 그러나 아이들아, 너희는 보아도 믿음의 눈이 없고, 들어도 영이 이해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선포하노니, 하늘나라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이 다스림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라. 참으로 이 나라에는 임금이 있고, 그 임금은 내 아버지요 너희 아버지이라. 정말로 우리는 그에게 충성하는 백성이나 그 사실을 훨씬 초월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아들이라는 진리, 사람을 변화시키는 진리이라. 나의 일생이 이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리라. 우리 아버지는 또한 보좌에 앉으시나 손으로 만든 보좌가 아니라. 무한자의 보좌는 가장 높은 하늘에 아버지가 거하시는 영원한 자리이라. 그는 만물을 채우고 온 우주에 율법을 선포하시니라. 아버지는 필사 인간의 혼 속에서 살라고 보내신 영으로, 땅에 있는 자녀들의 마음 속에서 또한 다스리시니라.
141:2.2 (1588.5) “너희가 이 나라의 백성일 때, 정말로 우주 통치자의 율법을 듣게 되느니라. 그러나 내가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러 왔는데 그 복음으로 인하여 너희가 아들임을 믿음으로 발견할 때, 너희는 이제부터 전능한 임금의 율법에 지배 받는 백성이 아니라, 사랑이 많은 신성한 아버지의 아들, 특권을 가진 아들로서 자신을 바라보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버지의 뜻이 너희의 율법이 될 때 너희는 도저히 하늘나라에 있다 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 참으로 너희의 뜻이 될 때, 너희는 참으로 하늘나라 안에 있으니, 그리함으로 하늘나라가 너희 안에서 확고한 체험이 되었음이라. 하나님의 뜻이 너희의 율법일 때, 너희는 고귀한 노예 백성이라. 그러나 신의 아들이라는 이 새 복음을 믿을 때, 내 아버지의 뜻은 너희의 뜻이 되고 너희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녀, 하늘나라의 해방된 아들의 높은 자리로 올라가느니라.”
141:2.3 (1589.1) 어떤 사도들은 이 가르침에서 무언가 깨달았지만, 혹시 야고보 세베대를 제외하고, 아무도 이 엄청난 선언의 중요성을 완전히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았고 봉사하는 후일에 떠올라서 그들의 직분을 기쁘게 해주었다.
141:3.1 (1589.2) 주와 사도들은 거의 3주 동안 아마투스 가까이 남아 있었다. 사도들은 날마다 두 차례 군중에게 계속하여 설교했고, 예수는 안식일 오후마다 설교했다. 수요일의 노는 시간을 계속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안드레는 한 주에 6일 동안 매일 두 사도가 쉬어야 한다고 정했고 한편 모두가 안식일 예배에 근무했다.
141:3.2 (1589.3)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이 대중 설교의 대부분을 맡았다. 빌립과 나다니엘, 토마스와 시몬은 개인을 상대로 상당히 일했고, 특별히 질문자들을 위하여 학급을 운영했다. 쌍둥이는 일반 치안 감독을 계속하였고, 한편 안드레ㆍ마태ㆍ유다는 세 사람으로 구성된 일반 관리 위원회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은 또한 각자 종교적인 일을 상당히 하였다.
141:3.3 (1589.4) 안드레는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새 제자들 사이에, 항상 되풀이해서 생기는 오해와 의견 차이를 조정하는 일을 맡아서 많이 분주했다. 며칠마다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곤 했지만, 안드레는 동료 사도들의 도움을 받아서 다투는 편들을 그럭저럭, 적어도 일시나마, 어느 정도 합의를 보도록 유도했다. 예수는 이 회담 중 어디에도 참여하려 하지 않았고, 이 난관을 적절히 조정하는 데 아무 조언도 주려 하지 않았다. 사도들이 이 난처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제안한 적도 없었다. 안드레가 이 문제들을 가지고 왔을 때, 예수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주인이 손님들의 집안 문제에 끼어드는 것이 지혜롭지 않느니라. 슬기로운 부모는 아이들의 사소한 싸움에서 결코 편을 들지 않느니라.”
141:3.4 (1589.5) 주는 사도들, 그리고 모든 제자를 다루는 온갖 일에 큰 지혜를 보이고 완전히 공평함을 보였다. 예수는 참으로 사람들을 통달한 분이었다. 그의 인격의 매력과 힘 때문에 그는 동료 인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거칠고 방랑하며 집 없이 사는 그의 일생에는 존경심을 일으키는 미묘한 힘이 있었다. 권위 있게 가르치는 자세, 맑은 논리, 추리하는 힘, 지혜로운 통찰력, 날카로운 지성, 비할 데 없이 차분한 태도, 더할 나위 없는 너그러운 태도에는 지적 매력, 그리고 영적으로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그는 단순하고 남자답고 정직하며 두려움이 없었다. 주의 인품에 나타난 이 모든 신체적ㆍ지적 영향과 함께, 그의 인격과 관련되었던, 존재의 모든 영적 매력이 있었다―참을성 있고 싹싹하고 온유하고 부드럽고 겸허했다.
141:3.5 (1589.6) 나사렛 예수는 정말로 강인하고 힘찬 인격자였다. 지적 세력이요 영적 요새였다. 그의 인격은 추종자들 가운데 영적 생각을 가진 여인들 뿐 아니라 교육받고 지적인 니고데모, 그리고 강인한 로마 군인의 마음도 움직였으니, 십자가를 지키며 머물렀던 지휘관은 주가 돌아가시는 것을 끝까지 보고 나서 말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그리고 기운차고 거친 갈릴리 어부들은 그를 주라고 불렀다.
141:3.6 (1590.1) 이제까지 예수의 초상화들은 아주 보기 민망하였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그림들은 청년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쳐 왔다. 그가 너희 미술가들이 보통 묘사해 왔던 그런 사람이었다면, 성전의 상인들은 예수 앞에서 도저히 달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품위 있는 남성이었다. 선하지만 자연스러웠다. 예수는 연약하고 다정하고 부드럽고 상냥한 신비주의자의 자세를 가지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은 가슴이 떨리도록 힘에 넘쳤다. 그는 좋은 의도를 가졌을 뿐 아니라 실제로 좋은 일을 하며 다녔다.
141:3.7 (1590.2) 주는 결코 “게으르고 꿈꾸는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말씀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번 일렀다: “수고하는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휴식―영적 힘―을 주리라.” 주의 멍에는 정말로 가볍지만, 그렇다 해도 결코 그 멍에를 강제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자기의 자유 의지대로 이 멍에를 메어야 한다.
141:3.8 (1590.3) 예수는 희생함으로, 자만과 이기심을 희생함으로 승리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비를 보임으로 온갖 불만ㆍ불평ㆍ노여움으로부터, 그리고 이기적 권력과 복수를 갈망함으로부터 영적으로 벗어남을 보여주려고 뜻하였다. “악에 저항하지 말라” 했을 때 죄를 묵인하거나 불의를 가까이 하라고 조언함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나중에 설명하였다. 용서를 더욱 가르치고 “사람의 인격을 악하게 대하는 것, 인격의 위엄을 가진 사람의 감정에 사악하게 상처를 주는 것에 저항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141:4.1 (1590.4) 아마투스에 머무르는 동안, 예수는 사도들에게 새로운 하나님 개념을 가르치면서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하나님은 아버지요 땅에서 잘못하는 아이들에게 손해되는 기록, 나중에 온 창조의 공정한 재판관으로서 판결을 내릴 때 불리하게 쓰일 죄와 잘못을 장부에 적느라고 주로 바쁜, 크고 높은 기록관이 아니라고 사도들에게 거듭 강조했다. 유대인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모든 사람 위에 있는 임금으로, 아니 민족의 아버지라고까지 상상했지만, 이전에는 필사 인간의 큰 집단이 하나님이 개인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생각을 품은 적이 없었다.
141:4.2 (1590.5) “하늘나라를 다스리는 이 하나님은 누구시나이까?” 하는 토마스의 물음에 예수는 대답했다. “하나님은 너의 아버지요, 종교―내 가르침―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를 믿고 인정(認定)하는 것, 이보다 더도 아니요 덜도 아니라. 내 일생과 가르침에서 이 두 개념을 분명히 해주려고 나는 육체를 입고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
141:4.3 (1590.6) 예수는 또한 동물을 잡아 바치는 것이 종교적 의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도록 사도들의 생각을 해방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날마다 희생물을 바치는 종교에서 훈련 받은 이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더디었다. 그렇기는 해도, 주는 가르치는 데 지치지 않았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모든 사도의 생각에 미치지 못할 때, 그는 교훈을 고쳐 말씀하고, 해명할 목적으로 또 다른 종류의 비유를 이용하곤 했다.
141:4.4 (1590.7) 이때 예수는 “고통 받는 자를 위로하고 병자를 돌보는” 임무에 관하여 더 자세히 열둘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주는 온전한 인간―남자나 여자 개인을 구성하는 육체ㆍ지성ㆍ영의 연합―에 대하여 많이 가르쳤다. 예수는 동료들에게 그들이 마주칠 세 가지 형태의 고통에 대하여 이야기했고, 더 나아가서 인간의 질병의 슬픔을 겪는 모든 사람을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가 설명했다. 다음을 헤아리라고 가르쳤다:
141:4.5 (1591.1) 1. 육체의 병―몸의 병으로 보통 간주되는 질병.
141:4.8 (1591.4) 예수는 그 시절에 흔히 더러운 귀신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이 악한 영들의 성질, 그리고 그 기원에 관하여 몇 번 사도들에게 얼마큼 설명했다. 주는 악한 귀신에 들린 것과 미친 것의 차이를 잘 알았지만 사도들은 그렇지 않았다. 유란시아의 초기 역사에 관한 그들의 제한된 지식에 비추어 볼 때 예수가 이 문제를 그들이 충분히 알아듣도록 시도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 악한 영들을 언급하면서, 여러 번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올라가고 나서, 하늘나라가 큰 권능과 영적 영화로움을 입고 오는 그 시절에, 모든 육체에게 내 영을 퍼붓고 난 뒤에, 저희는 사람들을 더 괴롭히지 아니하리라.”
141:4.9 (1591.5) 주마다, 달마다, 이 해 내내, 사도들은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에 갈수록 더 주의를 기울였다.
141:5.1 (1591.6) 아마투스에서 있었던 모든 저녁 회의 중에서 아주 중대한 한 회의는 영적으로 하나되는 것에 관한 토론과 관련된 회의였다. 야고보 세베대가 물었다, “주여, 어떻게 우리가 같은 눈으로 보기를 배우고, 그렇게 함으로 우리끼리 더 조화를 이루겠나이까?” 예수는 이 질문을 듣고 정신이 흥분하였다. 너무나 흥분하여 대답했다. “야고보야 야고보야, 너희가 모두 같은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 언제 너희에게 가르치더냐? 필사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고유하고 각자의 자유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할 목적으로 영적 해방을 선포하려고 내가 세상으로 왔노라. 사회에서 조화(調和)되고 형제 사이의 평화를 얻는 대가로 자유로운 인격과 영적 독창성을 희생하기를 바라지 않노라. 너희 내 사도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영이 하나되는 것이요―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진심으로 행하려고 너희가 뭉쳐 헌신하는 기쁨 속에서 너희가 이를 체험할 수 있느니라. 영적으로 같아지기 위하여 같은 눈으로 보거나 같은 느낌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한 같은 생각을 가질 필요조차 없느니라. 영적으로 하나되는 것은 너희 각자에게 하늘 아버지의 영 선물이 깃들고, 그에 점점 더 지배된다는 의식으로부터 얻느니라. 너희 사도들의 조화는 각자가 가진 영적 희망의 기원ㆍ성품ㆍ운명이 동일하다는 사실로부터 생겨나야 하느니라.
141:5.2 (1591.7) “이 방법으로 영의 목적과 영적 이해가 완전히 통일되는 것을 체험할까 하나니, 이것은 너희 각자에게 깃드는 파라다이스 영의 신분을 서로 의식함으로부터 생겨나느니라. 지적 사고(思考), 기질의 감정, 사회적 행동 면에서 개인의 태도가 최대한으로 다양해도, 너희는 이 모든 심오한 영적 조화를 누릴 수 있느니라. 너희의 인격은 신선하게 다채롭고 뚜렷이 다를지 모르지만, 한편 신을 예배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영적 성품과 영의 열매가 아주 통일되어, 너희의 생애를 누가 보아도 이렇게 너희가 영적으로 통일되고 혼(魂)이 하나가 된 것을 분명히 인식하리라. 너희가 나와 함께 있었고 이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어떻게 적절히 행하는가 배웠음을 저희가 인식하리라. 바로 너희가 고유하게 받은 정신ㆍ육체ㆍ혼의 재산을 쓰는 솜씨에 따라서 그런 봉사를 베푸는 동안에도, 너희는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봉사하는 일을 해낼 수 있느니라.
141:5.3 (1592.1) “너희의 영이 하나가 되는 것은 두 가지를 암시하며, 개별 신자의 생활에서 두 가지가 조화됨을 언제나 발견하리라. 첫째로, 너희는 일생 동안 봉사하려는 공통된 동기에 지배되느니라. 무엇보다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를 너희 모두가 바라느니라. 둘째로, 너희 모두가 공통된 존재 목표를 가지고 있느니라. 너희는 모두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찾으려 하고, 이렇게 함으로 너희가 그와 같이 되었음을 우주에게 증명하느니라.”
141:5.4 (1592.2) 예수는 열두 사도가 훈련 받는 동안 여러 번 이 주제를 되풀이하였다. 선한 사람들의 종교적 해석이라도, 주를 믿는 자들이 그런 해석에 따라서 독단이 되고 표준화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거듭하여 말했다.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안내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서 신조(信條)를 작성하고 전통 세우는 것을 막으려고 주는 사도들에게 여러 번 경고하였다.
141:6.1 (1592.3) 아마투스에서 마지막 주말이 가까워 오자 열심당원 시몬은 예수에게 어느 테헤르마라는 사람을 데려왔다. 그는 다마스커스에서 사업하는 페르시아인이었다. 테헤르마는 예수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고 그를 만나려고 가버나움으로 왔다. 거기서 예수가 사도들과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요단강으로 가셨다는 말을 듣고 주를 찾으러 나섰다. 안드레는 테헤르마를 시몬에게 교육 받으라고 소개하였다. 불은 다만 눈에 보이는 깨끗하고 거룩한 이의 상징일 뿐이라고 테헤르마가 힘들여 설명했지만 시몬은 그 페르시아인을 “불을 숭배하는 자”로 여겼다. 예수와 이야기한 뒤에, 페르시아인은 가르침을 듣고 설교를 들으려고 며칠 남아 있겠다는 뜻을 표시했다.
141:6.2 (1592.4) 열심당원 시몬과 예수만 따로 있을 때, 시몬은 주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나는 그를 설득할 수 없었나이까? 어찌하여 그는 나에게 그렇게 저항하고 당신의 말씀은 그토록 쉽사리 들으려 하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시몬아 시몬아, 구원을 찾는 자들의 마음 속에서 무엇을 없애려는 노력을 전혀 삼가라고 몇 번이나 가르쳤느냐? 다만 갈급한 이 혼들 속으로 무언가 집어넣으려고 수고하라, 얼마나 자주 일렀느냐?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인도하라. 그러면 크고도 생생한 진리, 하늘나라의 진리가 금방 모든 심각한 잘못을 몰아내리라. 너희가 필사 인간에게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좋은 소식을 제시했을 때, 그가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더욱 쉽게 납득시킬 수 있느니라. 그렇게 했은즉, 너희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자에게 구원의 빛을 가져온 것이라. 시몬아, 사람의 아들이 처음에 너희에게 왔을 때, 모세와 선지자들을 비난하고 새롭고 더 좋은 생명의 길을 선포하더냐? 아니라. 너희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요, 너희 조상이 겨우 일부만 본 어떤 것의 완전하게 된 모습을 보여주려고 내가 왔노라. 그러니 시몬아, 가서 하늘나라를 가르치고 전하라. 네가 하늘나라 안에 한 사람을 안전히, 확실히 들여보냈을 때, 그런 사람이 질문을 가지고 오면 그때가 신의 나라 안에서 그 혼이 차츰 앞으로 나아가는 데 상관되는 가르침을 나누어줄 때이니라.”
141:6.3 (1592.5) 이 말씀에 깜짝 놀랐지만 시몬은 예수가 가르친 대로 하였고 페르시아인 테헤르마는 하늘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의 무리 가운데 끼었다.
141:6.4 (1592.6) 그날 밤, 예수는 하늘나라의 새 생활에 관하여 사도들에게 강론하였다. 하신 말씀의 일부는 이렇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 너희는 다시 태어나느니라. 오직 육체로부터 난 자에게 영의 깊은 일을 가르칠 수 없느니라. 영의 높은 길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애쓰기 전에, 먼저 저희가 영에게서 태어났는가 보라. 너희가 먼저 성전으로 사람들을 데려가기까지, 성전의 아름다움을 보이는 일에 손대지 말라.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사람이 아들이라는 교리를 너희가 강론하기에 앞서, 사람들을 하나님께,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소개하라. 사람들과 다투지 말라―언제나 참으라. 그것은 너희의 나라가 아니요 너희는 대사일 뿐이라. 다만 가서 외치라: 이것이 하늘나라이니―하나님은 너희 아버지요 너희는 그의 아들이라, 너희가 진심으로 믿으면 이 좋은 소식이 너희의 영원한 구원이라.”
141:6.5 (1593.1) 사도들은 아마투스에서 머무르는 동안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요한의 제자들을 다루는 문제에 대하여 예수가 아무 제안도 하려 하지 않아서 무척 실망했다. 중요한 세례 문제에서도 예수는 겨우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요한은 정말로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하늘나라로 들어갈 때 너희는 영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141:7.1 (1593.2) 2월 26일에 예수와 사도들, 그리고 따르는 큰 무리가 페레아 지방의 베다니에 가까운 여울까지 요단강으로 내려왔다. 여기는 요한이 처음으로 다가오는 하늘나라를 선포한 곳이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4주 동안, 예수는 사도들과 함께 여기에 남아서 가르치고 전도하였다.
141:7.2 (1593.3) 요단강 건너 베다니에서 머무르던 둘째 주에, 예수는 사흘 동안 쉬려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강 건너 산에, 예리고 남쪽으로 데리고 갔다. 주는 하늘나라에 대하여 많은 새로운 상급 진리를 이 세 사람에게 가르쳤다. 여기에 기록할 목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 가르침을 다시 정리하고 분류하고자 한다:
141:7.3 (1593.4) 제자들이 하늘나라의 좋은 영 실체를 맛보았은즉, 사람들이 그들의 생애를 봄으로 하늘나라를 의식하게 되고 따라서 신자들에게 하늘나라의 길에 관하여 묻고 싶은 생각이 나도록 제자들이 세상에서 살기를 바란다는 것을 예수는 분명히 밝히려고 애썼다. 진리를 진지하게 찾는 모든 그러한 사람은 영원하고 신성한 영 실체가 있는 하늘나라로 들어가기를 보장하는 믿음의 선물, 그 기쁜 소식을, 언제나 반갑게 듣는다.
141:7.4 (1593.5) 하늘나라 복음을 가르치는 모든 선생의 유일한 일거리는 각 사람에게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드러내는 것―이 각 사람이 아들임을 의식하도록 인도하는 것, 다음에 바로 그 사람을 하나님께 믿음의 아들로 소개하는 것임을 인식시키려고 애썼다. 이 두 가지 필수 계시(啓示)는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정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었다. 예수의 종교는 땅에서 자신을 수여하는 일생을 사는 데 전적으로 기초를 두었다. 예수는 이 세상을 떠났을 때, 개인의 종교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아무런 책이나 율법이나 다른 형태의 인간 조직을 남겨놓지 않았다.
141:7.5 (1593.6) 예수는 그가 사람들과 개인적이고 영원한 관계를 세우려고 왔고, 이것이 언제까지나 모든 다른 인간 관계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분명히 설명했다. 가까운 이 영적 친교는 어느 시대, 어떤 사람에게도, 어느 민족 사이에 어떤 사회 조건 하에서도, 확대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이들에게 내민 유일한 보상은, 이 세상에서―영적 기쁨, 그리고 신(神)과 교통하는 것이요, 다음 세상에서―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신성한 영 실체들이 있는 곳까지 진보하는 영원한 생명이었다.
141:7.6 (1593.7) 예수는 하늘나라를 가르치는 데 제일 중요한 두 가지 진리라 부른 것을 크게 강조하였다. 곧 믿음으로, 그리고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요, 이와 아울러 진리를 진지하게 인식함으로 인간의 해방을 얻는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는 혁신적 가르침이었다. 예수는 육체를 입고 나타난 바로 그 진리였다.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돌아간 뒤에 모든 자녀의 마음 속에 진리의 영을 보내리라 약속했다.
141:7.7 (1594.1) 주는 땅에서 한 시대 전체를 위하여 진리의 본질을 이 사도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그들은 흔히 가르침을 귀담아들었지만, 그 말씀은 실제로 다른 세계들에게 영감을 주고 교화하려고 의도(意圖)한 것이었다. 그는 인생을 사는 새롭고 독창적인 계획을 본보기로 보였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정말로 유대인이었지만, 이 땅의 한 필사자로서 온 세상을 위하여 일생을 살았다.
141:7.8 (1594.2) 하늘나라의 계획을 펼치면서 아버지를 반드시 인식하게 하려고 예수는 “지상의 위대한 사람들”을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일을 시작했고, 이들은 이전 시대에 대부분의 진화 종교가 아주 소홀히 해왔던 바로 그 계급이었다. 그는 아무도 업신여기지 않았다. 그의 계획은 세계적인 것, 아니 우주를 위한 것이었다. 이런 말씀을 아주 용감하고 힘차게 했기 때문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조차 예수가 아마도 제 정신이 아니라 생각할 유혹을 받았다.
141:7.9 (1594.3) 땅에 있는 몇 사람을 위하여 모범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우주 전체에 두루, 어떤 세계의 어떤 민족을 위해서도 인생의 표준을 세우고 또 보이려고 이 수여 사명을 띠고 왔다는 진실을 주는 이 사도들에게 가볍게 전하려 하였다. 이 표준은 가장 높은 완전, 아니 우주의 아버지의 최종 선(善)의 경지에까지 접근하였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뜻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141:7.10 (1594.4) 그는 선생으로서, 물질적 지성에게 영적 진리를 제시하려고, 하늘에서 파송된 선생으로서 활동하려고 왔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그렇게 했다. 그는 선생이요 설교자가 아니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베드로는 예수보다 훨씬 더 유능한 설교자였다. 예수의 설교는 마음을 끄는 웅변이나 감정에 호소하기 때문이 아니라, 독특한 인품 때문에 무척 힘이 있었다. 예수는 사람의 혼에게 직접 말씀하였다. 사람의 영을 가르치는 선생이었지만, 지성을 통해서 가르쳤다. 그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다.
141:7.11 (1594.5) 이 기회에 예수는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에게 땅에서 그가 하는 일은 어떤 면에서 “하늘에 있는 동료”가 당부한 것에 제한을 받는다고 털어놓았다. 이것은 자신 수여에 앞서 파라다이스 형 이마누엘이 준 지침을 언급한다. 그는 아버지의 뜻,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왔다고 일러주었다. 진심으로 한 가지 목적에 이렇게 자극받았기 때문에, 그는 세상에 있는 악을 언짢아하지 않았다.
141:7.12 (1594.6) 사도들은 예수의 꾸밈없는 친절을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비록 그를 가까이하기 쉬웠어도, 주는 언제나 어떤 인간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어떤 인간보다 높이 살았다. 한 순간이라도 어떤 순전히 인간적 영향에 지배를 받거나 허약한 인간적 판단에 지배된 적이 없었다. 그는 대중의 의견(意見)을 거들떠보지 않았고 칭찬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멈추어서 오해를 밝히거나 왜곡을 분개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는 결코 아무에게도 조언을 구하지 않았고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다.
141:7.13 (1594.7) 예수가 처음부터 끝까지 사물을 꿰뚫어보는 듯한 것에 야고보는 놀랐다. 주는 놀란 듯이 보이는 적이 드물었다. 결코 흥분하거나 답답해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에게도 사과한 적이 없었다. 때때로 슬퍼했지만, 결코 낙심하지 않았다.
141:7.14 (1594.8) 모든 신다운 자질이 있었는데도 결국은 그가 사람이라는 것을 요한은 더욱 뚜렷이 인식했다. 예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사람으로서 살았고,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였으며 사람들을 상대할 줄 알았다. 그의 사생활은 아주 인간다웠고 그래도 아무 잘못이 없었다. 언제나 이기심이 없었다.
141:7.15 (1595.1)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비록 예수가 이 기회에 하신 말씀을 그다지 많이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품위 있는 말씀은 그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었고 십자가 처형과 부활이 있은 뒤에 솟아나와서 후일에 베푼 봉사를 보람있고 기쁘게 하였다. 이 사도들이 주의 말씀을 완전히 알아듣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니, 그가 새 시대의 계획을 그들에게 미리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141:8.1 (1595.2) 요단강 건너 베다니에서 4주 머무르는 동안 내내, 주마다 몇 번 안드레는 쌍으로 사도들에게 하루나 이틀 동안 예리고로 올라가라고 배치하곤 하였다. 요한은 전에 예리고에 많은 신자를 거느리고 있었고 그 대다수가 예수와 사도들의 더 진보된 가르침을 환영하였다. 이번 예리고 방문에서, 사도들은 아픈 사람들을 보살피라는 예수의 지시를 비로소 더 구체적으로 수행하였다. 그 도시에서 그들은 집집마다 방문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모두 위로하려고 애썼다.
141:8.2 (1595.3) 사도들은 예리고에서 대중을 상대로 얼마큼 일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대체로 전보다 조용하고 개인적인 성질의 것이었다.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은 아픈 사람들에게 매우 위로가 된다, 전하는 말씀이 고통받는 사람을 치유(治癒)하는 힘을 지녔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리고에서 열두 사도에게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고 병자들을 보살피라는 예수의 지시가 처음으로 충분히 수행되었다.
141:8.3 (1595.4)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그들은 예리고에서 멈추었다. 예수와 회담하려고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온 어느 대표단이 그들을 따라잡았다. 사도들은 여기서 하루만 보내려고 계획했지만, 동부에서 진리를 찾는 이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예수는 그들과 함께 사흘을 보냈다. 그들은 하늘나라의 새 진리를 알고서, 흐뭇한 마음으로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서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141:9.1 (1595.5) 3월의 마지막 날 월요일에, 예수와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파른 여행 길에 올랐다. 베다니의 나사로는 예수를 만나려고 요단강에 두 번 내려온 적이 있었고,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머무르기를 바라는 한,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와 그 누이들의 집에서, 주와 사도들이 본부를 차리도록 만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141:9.2 (1595.6) 요한의 제자들은 요단강 건너의 베다니에 남아서 군중을 가르치고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예수가 나사로의 집에 다다랐을 때 오직 열두 사도가 그를 동반하였다.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여기서 예수와 사도들은 닷새 동안 머물러서 쉬고 원기를 회복했다. 주와 사도들을 나사로의 집에 모시는 것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생애에 큰 사건이었고 두 여인은 이들의 시중을 들 수 있었다.
141:9.3 (1595.7) 4월 6일 일요일 아침에, 예수와 사도들은 예루살렘으로 내려갔다. 이번에 처음으로 주와 열두 사도 모두가 함께 거기에 있었다.
142:0.1 (1596.1) 4월에 예수와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일했고, 저녁마다 도시 바깥으로 나가서 베다니에서 밤을 지냈다. 예수 자신은 예루살렘에 플라비우스의 집에서 주마다 하루나 이틀 밤을 보냈다. 그는 그리스계 유대인이었고 그의 집으로 많은 저명한 유대인이 몰래 예수를 만나보려고 왔다.
142:0.2 (1596.2) 예루살렘에서 첫째 날에 예수는 예전에 그의 친구였던 안나스를 찾아보았는데, 그는 한때 대사제였고 세베대의 부인 살로메의 친척이었다. 안나스는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전에 소문을 들었고, 예수가 대사제의 집을 찾았을 때 안나스는 대단히 거리끼며 접대하였다. 안나스가 냉담한 것을 알아차렸을 때 예수는 즉시 떠났는데, 가면서 말했다: “두려움은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 중에 으뜸이요 자만은 사람의 큰 약점이라. 당신은 본심을 드러내어 기쁨과 자유를 없애는 이 두 가지에 노예가 되려는가?” 그러나 안나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안나스가 사위와 함께 사람의 아들을 재판하는 자리에 앉을 때까지 주는 다시 그를 만나지 않았다.
142:1.1 (1596.3) 이 달 내내 예수나 사도들 중에 하나가 성전에서 날마다 가르쳤다. 유월절 군중이 너무 많아서 성전에서 가르치는 곳에 들어갈 수 없을 때, 사도들은 신성한 구역 바깥에서 가르치는 여러 집단을 운영했다. 그들이 전한 말씀의 요점은 이와 같았다:
142:1.2 (1596.4) 1.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142:1.3 (1596.5) 2.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믿음으로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도 좋으며,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142:1.4 (1596.6) 3. 하늘나라 안에서는 사랑이 생활 규칙이다―하나님께 더할 나위 없이 헌신하고 한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142:1.5 (1596.7) 4.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는 것, 곧 사람의 사생활에서 영의 열매 맺는 것이 하늘나라 율법이다.
142:1.6 (1596.8) 유월절을 축하하려고 온 군중은 예수의 이 가르침을 들었고, 수백 명이 좋은 소식을 듣고 기뻐하였다. 주사제와 유대인 권력자들은 예수와 사도들에 대하여 많이 염려하고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자기들끼리 의논했다.
142:1.7 (1596.9) 성전 안과 그 근처에서 가르치는 것 외에, 사도와 기타 신자들은 유월절 군중 사이에서 개인을 상대로 많은 일을 하느라고 바빴다. 관심을 가진 이 남녀들은 이 유월절 경축 행사(行事)에 예수가 전한 말씀의 소식을 로마 제국의 가장 먼 곳까지, 그리고 또한 동부까지 가지고 갔다. 이때부터 하늘나라의 복음이 바깥 세계로 비로소 퍼졌다. 예수의 일은 이제 더 팔레스타인에 국한될 것이 아니었다.
142:2.1 (1597.1) 예루살렘에는 유월절 축제에 어떤 야곱이라는 사람이 참석하였다. 그는 크레테에서 온 부유한 유대인 상인이었고 안드레에게 다가가서 예수를 사사롭게 만나기를 요청했다. 안드레는 이튿날 저녁에 플라비우스의 집에서 예수와 이 비밀 회담을 마련했다. 이 사람은 주의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그가 온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묻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야곱이 예수에게 말했다: “하지만 랍비여, 모세와 옛 선지자들은 야웨가 질투하는 하나님, 크게 노여워하고 불 같이 성내는 하나님이라고 우리에게 이르나이다. 선지자들은 야웨가 행악자를 미워하고 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복수한다고 말씀하나이다. 당신과 제자들은 하나님이 친절하고 동정심 있는 아버지요, 모든 사람을 무척 사랑하사, 당신은 이 새 하늘나라가 아주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고, 이 새 하늘나라로 저희를 반가이 맞이하리라 우리에게 가르치나이다.”
142:2.2 (1597.2) 야곱이 말을 마쳤을 때 예수는 대답했다: “야곱아, 너는 옛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잘도 말하였도다. 저희는 그 시절의 빛에 따라서 저희 세대의 아이들을 가르쳤느니라. 파라다이스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변함이 없느니라. 그러나 그의 성품에 대한 개념은 모세의 시절부터 아모스의 시절을 거쳐 선지자 이사야의 세대에 이르기까지도 확대되고 성장하였느니라. 이제, 새로이 영화로운 아버지를 드러내고 그의 사랑과 자비를 모든 세계의 만민에게 보이려고 내가 육체를 입고 왔노라. 모든 사람을 격려하고 선의(善意)를 전하는 말씀과 함께, 이 하늘나라 복음이 세상에 퍼짐에 따라서, 모든 국가 집단 사이의 관계가 개선되고 나아질 것이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아버지와 아이들은 더욱 서로 사랑하고 이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땅에서 사는 자녀들을 사랑하심을 더욱 낫게 이해하게 되리라. 야곱아, 착하고 참된 아버지는 집안 전체를―한 가족으로서―사랑할 뿐 아니라 또한 개별 식구 하나하나를 참으로 사랑하고 애정으로 보살피시느니라.”
142:2.3 (1597.3) 하늘 아버지의 성품에 대하여 상당히 토론이 있은 뒤에, 예수는 멈추어 말했다: “야곱아, 너는 여러 아이의 아버지인즉, 내 말이 진실함을 잘 아느니라.” 야곱이 말했다: “하지만 주여, 내가 여섯 아이의 아버지라고 누가 당신께 일렀나이까? 나에 관하여 이를 어찌 아셨나이까?” 주는 대답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만사를 안다 하면 충분하나니, 정말로 저희가 만물을 보는 까닭이라. 땅에서 아버지로서 네 아이들을 사랑하므로 하늘 아버지가 너를 사랑함을―아브라함의 모든 자손 뿐 아니라 너를, 너 개인의 혼을 사랑하는 것을 이제 너는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느니라.”
142:2.4 (1597.4) 그리고 나서 예수는 말씀을 이었다: “네 아이들이 아주 어리고 미숙할 때, 아이들을 꾸짖어야 할 때 아이들은 아버지가 성이 나서 격노하고 있다고 돌이켜볼지 모르느니라. 아이들이 미숙하여, 멀리 내다보고 바로잡는 아버지의 사랑을 헤아리기까지, 벌받는 것을 넘어서 앞을 볼 수 없느니라. 그러나 바로 이 아이들이 성장한 남녀가 될 때 아버지에 대하여 옛날에 가졌던 그릇된 개념에 집착하는 것이 어리석지 않겠느냐? 어른으로서 저희는 옛날에 이 모든 징계를 받은 데서 아버지의 사랑을 이제 헤아려야 하느니라. 여러 세기가 지남에 따라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참된 성질과 사랑하는 성품을 인류가 더 잘 이해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모세와 선지자들이 본 대로 하나님을 보기를 고집한다면, 영적으로 빛을 받는 연속된 세대로부터 너희가 무슨 이득을 얻느냐? 너에게 이르노니, 야곱아 너는 이 시간의 밝은 빛 아래서 앞에 간 자들이 본 것과 전혀 다르게 아버지를 보아야 하느니라. 이렇게 아버지를 보는즉 그러한 자비로운 아버지가 다스리는 하늘나라로 들어감을 기뻐하고 아버지의 사랑하려는 뜻이 이제부터 너의 일생을 지배하기를 구해야 하느니라.”
142:2.5 (1598.1) 야곱은 대답했다: “랍비여 내가 믿나이다. 나를 아버지의 나라로 인도해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142:3.1 (1598.2) 사도들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이 토론을 귀담아 들었고, 열두 사도는 그날 밤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하여 예수에게 많이 물었다. 이 여러 질문에 대한 주의 대답은 현대의 표현으로 다음과 같은 요약으로 제시하는 것이 최선이다:
142:3.2 (1598.3) 예수는 열두 사도를 가볍게 꾸짖었는데 그 말씀의 내용은 이렇다: 너희는 야웨 개념의 성장에 관계되는 이스라엘의 전통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교리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느냐? 다음에, 주는 더 나아가서, 유대 민족이 발전하는 과정에 걸쳐서 신 개념이 어떻게 발전했는가 사도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하나님 개념이 성장하는 다음 단계에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142:3.3 (1598.4) 1. 야웨―시나이 씨족의 신. 이것은 원시 개념의 신이었고 모세가 더 높이,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의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신 개념이 아무리 투박하든지 또는 무슨 이름으로 그의 신다운 성품을 상징하든지 상관 없이 땅에 있는 자녀들의 진정한 예배를 반드시 받아들인다.
142:3.4 (1598.5) 2. 최고자. 멜기세덱이 하늘에 계신 이 아버지 개념을 아브라함에게 선포했다. 커지고 확대된 이 신 관념을 후일에 믿은 사람들이 이것을 살렘으로부터 멀리 가지고 갔다. 태양 숭배가[1] [1791]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그 동생은 우르를 떠났으며 그들은 멜기세덱이 가르친 엘 엘리욘―최고자―를 믿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들이 가진 것은 복합된 하나님 개념이었고, 이는 옛 메소포타미아 관념들과 최고자의 교리가 혼합되어 생겼다.
142:3.5 (1598.6) 3. 엘 샤다이. 이 초기 시절에 많은 히브리인이 엘 샤다이를 숭배했다. 에집트인이 가졌던 하늘의 하나님 개념이며, 히브리인은 나일강이 흐르는 땅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에 이것을 배웠다. 멜기세덱의 시절이 오래 지난 뒤에, 이 세 가지 하나님 개념은 모두 한데 합쳐서 창조자인 신,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의 교리를 이루었다.
142:3.6 (1598.7) 4. 엘로힘. 아담의 시절부터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이 지속되었다. “태초에 하나님들이[2] [1792] 하늘과 땅을 지으시니라” 주장함으로 성서가 어떻게 시작되는가 생각나지 않느냐? 이는 그 기록이 만들어졌을 때, 한 분 속에 계신 세 하나님이라는 삼위일체 개념이 우리 선조의 종교에 들어갔음을 가리킨다.
142:3.7 (1598.8) 5. 최고의 야웨. 이사야의 시절이 되자 하나님에 대한 이 관념들은, 전능하고 동시에 온통 자비로운 우주의 창조자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진화하고 확대되는 이 하나님 개념은 우리 선조의 종교에서 모든 이전의 신 개념을 거의 갈아치웠다.
142:3.8 (1598.9) 6.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임을 안다. 우리의 가르침이 마련하는 종교에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것이 하늘나라 복음(福音)이 전하는 좋은 소식이다. 아들과 영은 아버지와 함께 공존한다. 하늘가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원히 영적으로 진보하는 끝없는 시대를 통해서, 이 파라다이스 신들의 성품과 봉사를 계시(啓示)하는 일은 줄곧 확대되고 밝게 보일 것이다. 항상 어느 시대에 어떤 인간이 참으로 예배하더라도―개인의 영적 진보에 관계되는 대로―참된 예배는 그에게 깃드는 영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리는 경배로서 인식된다.
142:3.9 (1599.1) 사도들은 이전 세대 유대인의 머리 속에서 하나님의 개념이 성장해 온 것을 하나하나 이야기하는 이 말씀을 듣고서 받은 것보다 더한 충격을 받은 적이 없었다. 너무나 어리둥절하여 질문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예수 앞에서 말없이 앉아 있는 동안 주는 말씀을 이었다: “너희가 성서를 읽었다면 이 진리를 알았으리라.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적하여 주의 노여움이 타올랐고 너무 심하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人口)를 세라 이르면서 저희를 대적하려고 다윗을 움직였더라’ 하고 기록된 것을 너희는 사무엘에서 읽지 아니하였느냐? 이것은 이상하지 않았으니, 사무엘의 시절에 아브라함의 자손은 야웨가 선과 악을 모두 만든다고 정말로 믿었음이라.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유대인의 개념이 확대된 뒤에, 후일에 어느 기록자가 이 사건들을 이야기했을 때 감히 악을 야웨의 탓으로 돌리지 못하였고, 그러므로 ‘그리고 사탄이 이스라엘에 대적하여 일어나서 다윗을 움직여 이스라엘의 인구를 세게 하였더라’하고 말하였느니라. 너희는 성서(聖書)에 그러한 기록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개념이 어떻게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계속하여 성장하였는가 뚜렷이 보여주는 것을 헤아릴 수 없느냐?
142:3.10 (1599.2) “이 확대되는 신(神) 개념들과 완전히 발걸음을 맞추어 신의 율법을 더욱 이해하게 된 것을 너희는 또한 헤아렸어야 하느니라. 야웨의 개념이 확대되어 계시되기 전 시절에, 에집트에서 나왔을 때 이스라엘의 자손은 십계명이 있었고 이것은 바로 시나이 산 앞에서 야영하던 시절 바로 전까지 저희의 율법으로 쓰였느니라. 이 십계명은 다음과 같았는지라:
142:3.11 (1599.3) “1. 주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니, 너희는 아무런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142:3.12 (1599.4) “2. 녹여 부은 신들을 만들지 말라.
142:3.13 (1599.5) “3. 효소 없는 빵의 축제를 지키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
142:3.14 (1599.6) “4. 사람이나 가축의 모든 수컷 가운데 처음 난 것은 내 것이라, 주가 말씀하시니라.
142:3.15 (1599.7) “5. 너희는 엿새 동안 일해도 좋으나 이렛날에 쉴지니라.
142:3.16 (1599.8) “6. 첫 열매의 축제와 연말에 거두는 축제 지키기를 거르지 말라.
142:3.17 (1599.9) “7. 어떤 희생물의 피도 효소 넣은 빵과 함께 드리지 말라.
142:3.18 (1599.10) “8. 유월절 축제에 바친 희생물을 아침까지 남겨놓지 말라.
142:3.19 (1599.11) “9. 땅에서 얻은 첫 열매 중 처음 것을 주 너희 하나님의 집으로 가져올지니라.
142:3.21 (1599.13) “그리고 나서 시나이 산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는 가운데, 모세는 저희에게 새 십계명을 주었고, 너희는 모두 이것이, 야웨라는 확대되는 신 개념에 어울리게 더 가치 있는 말씀이라 인정하리라. 너희는 이 계명(誡命)들이 성서에 두 번 기록된 것을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아니하였느냐? 처음 경우에는 에집트로부터 구원받은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까닭이라고 지정되었고, 한편 후일의 기록에 우리 선조의 진보하는 종교 관념은 창조라는 사실이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라 인정하는 것이라고 이를 시정하기를 요구하였느니라.
142:3.22 (1599.14) “다음에―이사야의 시절에 더 크게 영적 깨우침을 받아―이 부정적 십계명이 크고 긍정적인 사랑의 율법으로, 하나님을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바뀌었음을 너희가 다시 한 번 기억하리라. 나도 또한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이 최상의 율법이 사람의 총 의무이니라.”
142:3.23 (1600.1) 말씀을 마쳤을 때,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저마다 잠자러 갔다.
142:4.1 (1600.2) 플라비우스는 그리스계 유대인이요, 할례도 세례도 받지 않고서 문전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예술품과 조각(彫刻)을 크게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머무를 때 그가 차지한 집은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이 집은 세계를 여행할 때 여기저기서 수집했던 귀중한 보물로 절묘하게 꾸며져 있었다. 처음에 예수를 집으로 초대하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이른바 이 우상(偶像)들을 보고서 주가 언짢아할까 두려웠다. 하지만 예수가 집에 들어섰을 때, 집에 여기저기 흩어 놓은, 우상이라고 생각되는 물건들 때문에 그를 꾸짖는 대신에 예수는 수집품 전체에 크게 흥미를 나타냈다. 이 방 저 방 예수를 안내하고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조각들을 모두 보여드리는 동안에 예수가 각 작품에 대하여 식견이 있는 질문을 많이 던져서 플라비우스는 놀랍고 기뻤다.
142:4.2 (1600.3) 주는 호감(好感)을 가지고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 주인이 어리둥절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므로 수집품 전부를 둘러보기를 마치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내 아버지가 지으신 것과 사람의 예술적인 손이 빚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네가 이해한다고 해서, 너는 어찌하여 꾸지람을 기대하느냐? 모세가 한때 우상 숭배와 거짓 신 섬기는 일을 퇴치하려고 애썼다고 해서, 어찌하여 품위와 아름다움을 재생한 작품에 모든 사람이 눈살을 찌푸려야 하느냐? 너 플라비우스에게 이르노니, 모세의 자손들은 그를 오해하였고 이제는 하늘과 땅에 있는 것들의 우상과 형상(形象)에 관한 그의 금지 조치도 저희가 거짓 신으로 만드느니라. 그러나 그 시절의 무지한 자들에게 모세가 그러한 제한 조치를 가르쳤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만물을 다스리는, 우주의 영 통치자임이 드러난 오늘날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플라비우스야 내가 선언하노니, 다가오는 하늘나라에는 사람들이 ‘이를 섬기지 말라, 저를 섬기지 말라’ 더 가르치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이 이제는 더 이것을 삼가고 저것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명령에 아랑곳하지 아니하리라. 오히려 모두가 한 가지 최고의 임무에 마음을 쓰리라. 사람의 이 임무는 두 가지 큰 특권에 나타나 있으니, 무한한 창조주,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진지하게 섬기는 것과 동료 인간에게 사랑으로 봉사를 베푸는 것이라. 네 몸을 사랑하는 것 같이 네가 이웃을 사랑하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너는 정말로 아느니라.
142:4.3 (1600.4) “내 아버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던 시대에, 모세가 우상을 물리치려 했던 시도는 옳다고 생각되었으나 다가오는 시대에 아버지는 아들의 일생에서 드러나리라. 하나님의 이 새로운 계시는 영원히, 창조주 아버지를 돌로 만든 우상이나 금은으로 만든 형상과 혼동할 필요가 언제까지나 없게 하리라. 이제부터, 총명한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그렇게 물질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 만물과 모든 존재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을 혼동하지 않고서 소중한 예술품을 즐겨도 좋으니라.”
142:4.4 (1600.5) 플라비우스는 예수가 가르친 것을 다 믿었다. 이튿날 요단강 건너에 베다니로 가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한 것은 예수의 사도들이 믿는 사람들에게 아직 세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플라비우스는 예수를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고 친구 60명을 불렀다. 이 손님들 가운데 다수가 또한 다가오는 하늘나라를 전하는 말씀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
142:5.1 (1601.1) 이 유월절 주간에 성전에서 예수가 하신 큰 설교 중의 하나는 말씀을 듣던 사람, 다마스커스에서 온 한 남자의 물음에 답하여 한 설교이다. 이 사람은 예수에게 물었다: “하지만 랍비여, 하나님이 당신을 보냈는지, 그리고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치는데 거기에 우리가 참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나이까?” 그리고 예수는 대답했다:
142:5.2 (1601.2) “나의 말과 내 제자들의 가르침에 관하여 말하면, 너희는 이를 그 열매로 판단해야 하느니라. 우리가 영의 진리를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 영이 너희 마음 속에서 우리가 전하는 말이 진정함을 증언하리라. 하늘나라에 관하여, 그리고 하늘의 아버지가 받아들인다는 너의 확신에 관하여 말하노니, 내가 묻건대 너희 가운데 훌륭하고 마음이 친절한 어떤 아버지가, 집안에서 아들이 어떤 지위에 있는가 또는 아버지의 마음 속에서 사랑받는 안전한 처지에 있는가 아들을 걱정시키거나 불안(不安)에 떨도록 버려두겠느냐? 너희는 땅에서 아버지이면서, 자식들이 인간적인 너희 마음 속에서 변치 않는 사랑을 받는 자리에 있는가 불안하게 의심하도록 자녀 괴롭히기를 좋아하느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믿는 자녀, 영의 자녀들이 하늘나라에서 저희가 어떤 자리에 있는가 불안하게 의심하도록 버려두지 않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면, 정말로 그리고 진실로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가 아들이어든, 영원하고 신다운 아들에 관계되는 어떤 일에도 너희의 위치와 신분은 안전하니라. 너희가 내 말을 믿으면, 믿음으로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요, 이렇게 아버지를 믿음으로 하늘 시민의 지위를 확실하게 만들었느니라.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면 신의 나라에서 진보(進步)하는 영생을 얻는 데 결코 그르치지 아니하리라.
142:5.3 (1601.3) “최상의 영은 너희가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너희 영에게 증언하리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너희는 하나님의 영에게서 태어났느니라. 영에게서 태어난 자는 누구나 몸 안에 어떤 의심도 이길 힘을 가졌고, 이것이 의심스러운 모든 것, 아니 너희의 믿음조차 이기는 승리이라.
142:5.4 (1601.4) “선지자 이사야가 이 시절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더라: ‘영이 위에서부터 우리에게 쏟아질 때, 올바름의 결과는 영원히 평화ㆍ고요함ㆍ확신이 되리라.’ 이 복음을 참으로 믿는 모든 사람에게, 나는 영원한 자비와 영생이 있는 내 아버지의 나라로 저희를 받아들인다는 보장이 되리라. 그러면 이 소식을 듣고 이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영원한 생명을 가지느니라. 온 세계에 너희가 영에게서 태어났다는 증명은 너희가 진지하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
142:5.5 (1601.5) 듣고 있던 군중은 오랜 시간 예수와 함께 남아 있었고, 말씀을 묻고 위로가 되는 그의 대답을 주의 깊게 들었다. 예수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사도들도 대담해져서 더 큰 힘과 확신을 가지고 하늘나라 복음을 전파하였다. 예루살렘에서 가진 이 체험은 열두 사도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이렇게 엄청난 군중과 접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들은 많은 귀중한 교훈을 얻었고 이것이 후일에 일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142:6.1 (1601.6) 플라비우스의 집에서 어느 날 저녁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예수를 만나러 왔다. 그는 부유하고 나이가 지긋한, 유대인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다. 그는 이 갈릴리 사람의 가르침에 관하여 많은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어느 날 오후 예수가 성전 마당에서 가르치는 동안 말씀을 들으러 갔다. 예수가 가르치는 것을 자주 들으러 갔을 터이지만 그는 가르침에 참석한 사람들의 눈에 뜨일까 두려워했다. 유대인 권력자들이 예수와 너무나 사이가 틀어져 있어서, 어떤 산헤드린 회원도 드러내놓고 한편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고데모는 바로 이날 저녁에, 밤이 된 뒤에 은밀하게 예수와 만나려고 안드레와 주선하였다. 회견이 시작되었을 때,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은 플라비우스의 집 뜰에 있었지만 나중에 모두 강론이 진행되고 있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142:6.2 (1602.1) 니고데모를 맞이하면서 예수는 아무런 특별한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함께 이야기하는 동안 아무런 타협이나 지나친 설득이 없었다. 주는 남몰래 찾아온 사람을 내쫓으려 하지 않았고 빈정거리지도 않았다. 탁월한 방문자를 다루는 모든 면에 예수는 차분하고 진지하고 위엄이 있었다. 니고데모는 산헤드린이 보낸 공식(公式) 대표가 아니었다. 예수를 만나려고 온 것은 전적으로 주의 가르침에 개인적으로 진지하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142:6.3 (1602.2) 플라비우스가 인사를 시키고 나자, 니고데모는 말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생인 줄을 우리가 아오니,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고 보통 사람이기만 하다면 그리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나이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다가올 나라에 관한 당신의 가르침을 더욱 알고 싶나이다.”
142:6.4 (1602.3)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대답했다. “진실로 진실로 너 니고데모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하늘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러자 니고데모가 대답했다: “그러나 나이 든 사람이 어찌 다시 태어날 수 있나이까? 사람은 태어나려고 또 다시 어머니 자궁 속으로 들어갈 수 없나이다.”
142:6.5 (1602.4) 예수는 말했다: “그렇다 하여도 내가 선언하노니, 사람이 영에게서 태어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체에게서 태어난 것은 육체요 영에게서 태어난 것은 영이라. 그러나 네가 하늘로부터 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에 놀라지 말아야 하느니라. 바람이 불 때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나―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바람은 보이지 않으며, 영에게서 태어난 자는 누구나 또한 그러하니라. 육체의 눈으로 사람은 영이 나타나는 표현을 볼 수 있어도 그 영을 실제로 헤아려 볼 수 없느니라.”
142:6.6 (1602.5) 니고데모는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알아듣지 못하나이다―어찌 그럴 수 있나이까?” 예수가 말했다: “네가 이스라엘에서 선생이면서도 이 모든 것을 모르다니 그럴 수 있느냐? 그러면 물질 세계에서 눈에 보이는 현상만 알아보는 자에게 이를 드러내는 것이 영의 실체들을 아는 자의 의무가 되느니라. 그러나 우리가 하늘의 진리를 너에게 이르면 네가 우리를 믿겠느냐? 니고데모야, 하늘에서 내려온 자를, 아니 사람의 아들까지도 네가 믿을 용기가 있느냐?”
142:6.7 (1602.6) 니고데모는 말했다: “그러나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준비로서 나를 다시 만들 이 영을 어떻게 내가 비로소 붙잡을 수 있나이까?” 예수가 대답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영이 이미 네 안에 깃드시느니라. 네가 하늘로부터 온 이 영의 인도함을 받고자 하면, 오래지 않아 너는 비로소 영의 눈으로 보리라. 그리고 나서 네가 사는 유일한 목적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리니, 영의 안내를 받은 진지한 선택으로 인하여 네가 영에게서 태어나리라. 네 몸이 영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에서 행복하게 태어났음을 그렇게 발견하고 나서, 일상 생활에서 너는 영의 풍부한 열매를 비로소 맺으리라.”
142:6.8 (1602.7) 니고데모는 속속들이 진지했다. 깊이 감명을 받았으나 어리둥절해서 가버렸다. 니고데모는 자아의 개발, 자제, 그리고 높은 도덕적 성품 면에서 성숙한 사람이었다. 그는 세련되었고 자기 본위요 이타심이 있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지혜롭고 인자한, 세상의 아버지의 안내와 인도함에 기꺼이 복종하는 것 같이, 어떻게 그의 뜻을 신성한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키는가, 이렇게 함으로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 영원한 나라를 물려받는 진보하는 상속자가 되는가 알지 못했다.
142:6.9 (1603.1) 그러나 니고데모는 하늘나라를 붙잡기에 충분한 믿음을 불러일으켰다. 산헤드린의 동료들이 심문하지도 않고 예수를 정죄하려 했을 때 그는 미약하게 항의(抗議)했다. 나중에 대부분의 제자들이 주가 마지막으로 고통받고 죽는 장면에서 무서워 달아났을 때에도,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신앙을 용감하게 인정하고 예수의 시체를 요청했다.
142:7.1 (1603.2)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주간에 가르치고 개인을 상대로 일하던 바쁜 기간이 지난 뒤에, 예수는 다음 수요일에 베다니에서 사도들과 함께 쉬면서 지냈다. 그날 오후에 토마스는 한 말씀을 물었고 이것은 길고도 교육이 되는 대답을 끌어냈다. 토마스가 말했다: “주여, 우리가 하늘나라의 대사로서 따로 세움받은 날에, 당신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르시고 우리의 개인적 생활 형태에 관하여 가르쳤나이다. 그러나 우리가 군중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리이까? 하늘나라가 더 분명히 온 뒤에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리이까? 당신의 제자들은 종을 가져야 하리이까? 당신을 믿는 자들은 가난과 벗하고 재산을 멀리 해야 하리이까? 자비만 우선하고, 그래서 이제 우리에게 아무런 율법과 응보가 없어야 하리이까?” 예수와 열두 사도는 오후 내내, 또 식사가 있은 뒤에 그날 저녁 내내, 토마스의 질문을 논의하면서 보냈다. 여기에 기록할 목적으로 우리는 주의 가르침의 다음 요약(要約)을 제시한다:
142:7.2 (1603.3) 예수는 사도들에게 먼저 다음을 분명히 일러주려고 애썼다. 자신은 땅에서 육체를 입고 독특한 일생을 살고 있다, 그들 열두 사람은 사람의 아들의 수여 체험에 참여하라고 부름받았다, 그렇게 같이 일하는 사람으로 그들도 수여 체험 전체에서 많은 특별한 제한과 의무를 같이 져야 한다고.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깊은 중심과 사람의 혼의 가장 깊은 곳을 동시에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 땅에서 일찍이 산 유일한 사람인 것을 넌지시 비치는 말씀이 있었다.
142:7.3 (1603.4) 예수는 하늘나라가 여기 땅에서 시작하여, 연달아 생명의 여러 정거장을 거쳐 파라다이스까지 진보하는, 점진적 체험이라고 아주 뚜렷이 설명했다. 저녁이 지나는 동안, 하늘나라가 발전하는 어떤 미래 단계에 그가 영적 권력과 신의 영광을 입고서 이 세계를 다시 찾아보리라고 분명히 말했다.
142:7.4 (1603.5) 다음에 “하늘나라 관념”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런 비유법을 쓴 것은 유대 민족이 하늘나라를 기대했고 요한이 다가올 나라라는 표현으로 전도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수는 말했다: “또 다른 시대의 사람들은 하늘나라 복음이 가족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제시되었을 때―종교는 하나님이 아버지이며 사람들이 형제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사람이 이해할 때―그 복음을 더욱 잘 알아들으리라.” 다음에 주는 하늘 가족을 보여주는 예로서 이 세상의 가족에 관하여 얼마큼 길게 강론(講論)하고, 두 가지 근본 생활 법칙을 다시 표현하였다: 아버지, 곧 집안의 우두머리를 사랑하는 첫째 계명, 그리고 아이들끼리 서로 사랑하라, 형제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이다. 그리고 나서 그러한 성질의 형제 사랑은 항상, 사심없이 사랑으로 사회에 봉사함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하였다.
142:7.5 (1603.6) 이 뒤에, 가족 생활의 근본적 특징에 관하여, 그리고 이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대하여 기억에 남을 토론이 뒤따랐다. 예수는 참된 가족이 다음 일곱 가지 사실에 바탕을 둔다고 말했다:
142:7.6 (1604.1) 1. 존재에 관한 사실. 성품이 관계된 것과 사람이 서로 비슷한 현상은 가족 안에서 연결된다: 아이들은 부모의 어떤 특성을 물려받는다.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생겨난다. 인격자의 존재는 부모의 행위에 달려 있다. 아버지와 아이의 관계는 모든 자연에 본래부터 있고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 퍼져 있다.
142:7.7 (1604.2) 2. 안전과 쾌락. 참된 아버지는 아이들이 필요한 것을 마련해주기를 크게 기뻐한다. 아버지들 중에 다수는 아이들의 단순한 필요만 충족시키는 데 만족하지 않으며, 쾌락도 즐겁게 마련해준다.
142:7.8 (1604.3) 3. 교육과 훈련. 지혜로운 아버지는 아들딸의 교육과 적당한 훈련을 주의 깊게 계획한다. 아이들은 어릴 때 후일의 생애에 더 큰 책임을 맡으려고 준비된다.
142:7.9 (1604.4) 4. 규율과 자제. 멀리 내다보는 아버지는 또한 어리고 미숙한 자식의 필요한 징계ㆍ안내ㆍ교정, 그리고 때로는 금지 조치를 마련한다.
142:7.10 (1604.5) 5. 교제와 충성. 인정 많은 아버지는 아이들과 가깝고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한다. 언제나 귀는 간청을 들으려고 열려 있으며, 그들의 어려움을 나누고 어려운 문제에 닥쳐 늘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아버지는 자식의 진보하는 복지에 더할 나위 없이 흥미를 가진다.
142:7.11 (1604.6) 6. 사랑과 자비.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는 아낌없이 용서하며,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앙갚음하려는 기억을 간직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재판관이나 적이나 채권자와 같지 않다. 진정한 가족은 너그러움ㆍ참을성ㆍ용서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
142:7.12 (1604.7) 7. 미래를 위한 준비. 현세의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유산(遺産)을 남겨주고 싶어한다. 가족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죽음은 오직 한 세대를 끝내고 다른 세대가 시작됨을 표시한다. 죽음은 개인의 생명을 그치게 하지만 반드시 가족의 생명을 그치게 하지 않는다.
142:7.13 (1604.8) 몇 시간 동안 주는 가족 생활의 이 모습이 땅에서 아이인 사람과 파라다이스 아버지인 하나님의 관계에 적용되는 것을 논의했다. 이것이 결론이었다: “아들과 아버지의 모든 관계를 내가 완벽하게 아노니, 영원한 미래에 너희가 아들로서 도달해야 하는 모든 것을 내가 지금 이미 도달하였음이라. 사람의 아들은 아버지의 바른 편으로 올라갈 준비가 되어 있고, 그래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가 완전하게 되는 영화로운 진보를 마치기 전에 너희 모두가 하나님을 보라고 내 안에 길이 더욱 활짝 열려 있느니라.”
142:7.14 (1604.9) 이 놀라운 말씀을 들었을 때, 사도들은 예수가 세례받을 때 요한이 선언한 말씀을 상기했다. 주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뒤에, 그들이 전도하고 가르친 것과 연관하여 이 체험을 또한 눈에 선하게 기억했다.
142:7.15 (1604.10) 예수는 신다운 아들, 우주의 아버지가 완전히 신임하는 아들이다.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 아버지를 완전히 이해한다. 이제 아버지의 마음에 흡족하기까지 땅에서 일생을 살았다. 육체를 입은 이 육신화는 그로 하여금 사람을 충분히 이해하게 만들었다. 예수는 완전한 사람이었다. 모든 참 신자가 그 안에서, 그를 통하여, 달성할 운명을 가진 바로 그러한 완전에 그는 이미 도달했다.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을 사람에게 계시하였고, 자신의 몸 속에 이 땅에서 완전하게 된 아들을 하나님께 내놓았다.
142:7.16 (1605.1) 예수는 몇 시간 동안 말씀했지만, 토마스는 아직 만족해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여, 우리가 보아하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를 언제나 친절하고 자비롭게 다루시지는 아니하나이다. 여러 번 우리는 땅에서 가혹하게 고생하고, 우리의 기도가 언제나 응답받지는 못하나이다. 어느 부분에서 우리가 당신의 가르침의 뜻을 깨닫지 못하나이까?”
142:7.17 (1605.2) 예수는 대답하였다: “토마스야 토마스야, 얼마나 있어야 네가 영의 귀로 듣는 능력을 얻겠느냐? 이 나라는 영적인 나라요, 내 아버지 또한 영적 존재인 것을 헤아리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리겠느냐? 하늘의 영 가족의 우두머리인 아버지는 무한하고 영원한 영이며, 너희를 그 가족의 영적 자식으로서 내가 가르치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내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 물질적 일에 적용하지 않고서 내가 땅의 가족을 신성한 관계의 예로 사용하는 것을 너희가 막겠느냐? 머리 속에서 하늘나라의 영적 실체들과 당대의 물질ㆍ사회ㆍ경제ㆍ정치 문제를 분리할 수 없느냐? 내가 영의 언어(言語)로 말할 때, 예를 들 목적으로 평범하고 글자 그대로의 관계를 감히 쓴다고 해서, 어찌하여 내가 의미한 것을 육체의 언어로 풀이하기를 고집하느냐? 아이들아 부탁하건대, 너희는 영의 나라의 가르침을 노예 제도, 빈곤, 집, 토지와 같은 더러운 일에, 그리고 인간의 공평과 응보라는 물질적 문제에 적용하기를 그만두어라. 이 현세의 문제들은 이 세상 사람들의 걱정거리요, 어떤 면에서 그 문제들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는 하여도, 내가 내 아버지를 대표하는 것 같이 너희는 세상에서 나를 대표하라고 부름받았느니라. 너희는 영의 나라를 대표하는 영적 대사(大使)요, 영 아버지의 특별한 대표이라. 이때가 되어서, 영의 나라에서 완전히 성장한 어른으로서 너희를 가르칠 수 있어야 하리라. 내가 늘 너희를 겨우 어린아이로 대해야 하느냐? 언제 너희의 영적 이해가 자라겠느냐? 그렇다 하여도, 육체를 입은 우리의 관계가 끝나는 바로 그날까지도 나는 너희를 사랑하고 참으리라. 그때에도 내 영이 너희보다 먼저, 온 세상으로 가리라.”
142:8.1 (1605.3) 4월 말이 되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사이에서 예수에 대한 반대가 너무 두드러져서 주와 사도들은 한동안 예루살렘을 떠나기로 작정했고, 베들레헴과 헤브론에서 일하려고 남쪽으로 갔다. 5월 한 달 전체가 이 두 도시에서, 그리고 둘러싼 마을의 사람들 사이에서, 개인을 상대로 하는 일에 쓰였다. 이 여행에는 아무런 대중 전도가 없었고 그들은 다만 집집마다 사람들을 방문하였다. 사도들이 복음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보살피는 동안, 예수와 아브너는 이 기간의 일부를 엥게디에서 지내면서 나지르인의 거류지를 찾아보았다. 세례자 요한은 전에 이 자리에서 길을 나섰고 아브너는 이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나지르인 단체의 여러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이 이상한 고행자들의 대다수는 예수를 하늘이 보낸 선생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가 금식 및 다른 형태의 금욕(禁慾)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142:8.2 (1605.4)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을 몰랐다. 대다수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언제나 주가 나사렛에서 태어났으리라 짐작했지만, 열두 사도는 사실을 알았다.
142:8.3 (1605.5) 유대 지방의 남부에서 머무른 이 기간은 편안하고 수고의 열매가 풍부히 열린 때였다. 하늘나라에 많은 사람이 늘어났다. 6월초가 되자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반대하는 소동이 아주 잠잠해졌고, 그래서 주와 사도들은 신자들을 가르치고 위로하는 일로 돌아갔다.
142:8.4 (1606.1) 예수와 사도들이 6월 전체를 예루살렘 안이나 근처에서 보냈어도 이 기간에는 조금도 대중을 가르치지 않았다. 대체로 텐트 안에서 살았고 그 시절에 겟세마네라고 알려진 그늘진 공원(公園), 즉 동산에 텐트를 세웠다. 이 공원은 올리브산의 서쪽 비탈에 있었고 기드론 시냇물에서 멀지 않았다. 그들은 안식일 주말에 보통 베다니에서 나사로와 그 자매들과 함께 보냈다. 예수는 겨우 몇 번 예루살렘의 담 안으로 들어갔으나 관심이 있어 묻는 사람들의 큰 무리가 그와 이야기하려고 겟세마네로 나왔다. 어느 금요일 저녁 니고데모와 어떤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를 보러 왔지만, 주의 텐트 입구 앞에서 서 있기까지 했는데 그 뒤에 두려워서 돌아갔다. 물론, 예수가 그들이 무슨 일을 했는가 모두 알고 있음을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142:8.5 (1606.2)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을 알았을 때, 유대인 권력자들은 예수를 붙잡으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그가 전혀 대중을 가르치지 않는 것을 지켜보고, 그들이 이전에 소동을 벌인 것에 그가 겁을 먹었는가 보다고 결론을 내렸고 그를 더 다치지 않고 이렇게 사사로운 방법으로 계속 가르치는 것을 버려두기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6월 마지막 날까지 일은 조용히 진행되었다. 이때 어떤 시몬이라는 산헤드린 회원이 예수의 가르침을 드러내놓고 지지하였고, 이미 유대인 권력자들 앞에서 그렇게 선언하였다. 당장에 예수를 체포하려는 새로운 소란이 벌어졌고, 너무나 시끄러워서 주는 사마리아와 데카폴리스 지방의 여러 도시로 물러가기로 결정했다.
143:0.1 (1607.1) 서기 27년 6월말에,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의 반대가 커졌기 때문에, 예수와 열두 사도는 텐트와 자질구레한 개인 소지품을 베다니의 나사로 집에 저장하려고 보낸 뒤에 예루살렘을 떠났다. 북쪽으로 사마리아로 들어가면서 그들은 안식일 동안 베델에서 머물렀다. 여기서 그들은 고프나와 에브라임에서 온 사람들에게 며칠 동안 전도했다. 아리마대와 탐나에서 온 시민들의 무리가 와서 자기네 마을을 방문해달라고 예수를 초청하였다. 주와 사도들은 이 지역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을 가르치면서 2주가 넘게 시간을 보냈다. 여러 사람이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을 들으려고 멀리 안티파트리스에서도 왔다.
143:0.2 (1607.2) 남부 사마리아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사도들은 사마리아인에 대하여 많은 편견을 버리는 데 성공했다. 유다가 이 사마리아인들을 사랑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7월 마지막 주에 예수와 동료들은 요단강 가까이, 새 그리스 풍의 도시 파사엘리스와 아켈라이스를 향하여 떠나려고 준비했다.
143:1.1 (1607.3) 8월의 처음 절반 동안 사도 일행은 그리스 풍의 도시 아켈라이스와 파사엘리스에서 본부를 차렸다. 거기서 거의 순전히 이방인― 그리스인ㆍ로마인ㆍ시리아인―들의 모임에게 전도하는 첫 경험을 얻었는데, 거의 아무 유대인도 이 두 그리스 풍의 마을에서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로마 시민들과 접촉하면서 사도들은 다가오는 하늘나라 소식을 선포하는 데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直面)하고 예수의 가르침에 대하여 새로운 반대에 부닥쳤다. 사도들과 가진 많은 저녁 회의 중 하나에서, 열두 사도가 개인적으로 수고하여 얻은 사람들과 겪은 체험을 되풀이하는 동안, 예수는 이들이 하늘나라 복음에 반대하는 이유를 주의 깊게 들었다.
143:1.2 (1607.4) 빌립의 질문은 사도들이 겪는 대표적인 어려움이었다. 빌립은 말했다: “주여, 이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우리가 전하는 소식을 가벼이 여기고 그러한 가르침은 오직 허약자와 노예에게 어울린다 하나이다. 이방인의 종교는 힘세고 튼튼하고 공격적 인품을 얻으라고 북돋아주므로 우리의 가르침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하나이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고분고분한 무저항자의 허약한 표본으로 바꾸려 하고 그런 자들은 지상에서 곧 멸망하리라 주장하나이다. 주여, 저희는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의 가르침이 하늘같고 이상적이라고 아낌없이 인정하지만 우리를 진지하게 상대하려 하지 않나이다. 당신의 종교는 이 세상에 맞지 않고 사람들은 당신이 가르치는 대로 살 수 없다고 주장하나이다. 이제 주여, 이 이방인들에게 우리가 무어라고 이르리이까?”
143:1.3 (1607.5) 토마스, 나다니엘, 열심당원 시몬, 마태가 내놓은 이유, 하늘나라 복음을 반대하는 비슷한 이유를 듣고 난 뒤에, 예수는 열두 사도에게 말했다:
143:1.4 (1608.1)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의 사랑하는 성품을 온 인류에게 드러내려고 내가 이 세상으로 왔노라. 형제들아, 그것이 내 사명이라. 오늘날이나 또 다른 세대에 유대인이나 이방인(異邦人)이 내 가르침을 오해하는 것과 상관 없이 나는 이것 하나를 해내리라. 그러나 너희는 신의 사랑에도 엄한 징계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라.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생각이 모자라는 자식의 지혜롭지 못한 행위를 억제하도록 아버지를 때때로 재촉하느니라. 지혜롭게 사랑으로 아버지가 징계하는 그 동기를 자식이 반드시 이해하지는 못하느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파라다이스에 계시는 내 아버지는 저항할 수 없는 사랑의 힘으로 온 우주를 다스리느니라. 사랑은 모든 영 실체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라. 진리는 사람을 해방하는 계시이지만, 사랑은 최상의 관계이라. 너희 동료 인간들이 오늘날의 세계를 관리하면서 무슨 잘못을 저지르든 상관 없이,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에는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는 복음이 바로 이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 인간의 진보가 이룰 궁극의 목표는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경건하게 인식하는 것과 사람이 형제임을 사랑으로 실현하는 것이라.
143:1.5 (1608.2) “그러나 내 복음이 겨우 노예나 허약자에게 주려고 의도한 것이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렀느냐? 너희, 내가 뽑은 사도들이 허약자를 닮았느냐? 요한이 허약자 같더냐? 너희는 내가 두려움에 노예가 된 것을 보느냐? 이 세대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이 복음을 전도받은 것이 참말이라. 이 세상의 종교들은 가난한 자를 소홀히 여겼으나, 내 아버지는 사람을 차별하는 분이 아니라. 게다가 오늘날의 가난한 자는, 뉘우치고 아들인 것을 받아들이라는 부름을 먼저 주목하는 자이니라. 하늘나라의 복음은 모든 사람―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인과 로마인, 부자와 가난한 자, 자유로운 자와 매인 자―에게, 그리고 젊은이와 늙은이, 남자와 여자에게 똑같이 전파되어야 하느니라.
143:1.6 (1608.3) “내 아버지가 사랑의 하나님이요 자비 베풀기를 기뻐한다고 해서, 하늘나라의 봉사가 지루하게 편한 일이라는 생각에 젖지 말라.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것은 영원히 최고의 모험이요 영원을 향하는 험난한 성취이라. 땅에서 하늘나라에 봉사하는 것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일하는 자들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용감한 남성(男性) 자질을 모두 요구하리라. 너희 가운데 여럿은 이 하늘나라 복음에 충성한 까닭에 죽음을 당하리라. 함께 싸우는 친구들이 있어 너희의 용기가 강화될 때는 육체의 싸움터에서 죽기가 쉽거니와, 인간의 가슴 속에 소중히 여기는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차분하게, 온전히 혼자서 목숨을 버리는 데는 더 높고 깊은 형태의 인간다운 용기와 헌신이 요구되느니라.
143:1.7 (1608.4) “오늘날, 믿지 않는 자는 무저항의 복음을 전도하고 폭력을 쓰지 않고 일생을 사는 너희를 비웃을지 모르나, 너희는 이 하늘나라 복음을 진지하게 믿는 자의 긴 대열에서 처음으로 나선 자요, 이 가르침에 영웅답게 헌신함으로 온 인류를 놀라게 하리라. 너희와 충성스러운 너희의 후계자들은 좋은 소식―하나님이 아버지요 사람들이 형제임―을 외치며 온 세계로 떠나가리니, 저희가 장래에 보일 것보다 세계의 어느 군대도 더 큰 용기와 용감을 보인 적이 없느니라. 육체의 용기는 가장 낮은 형태의 용감이라. 정신의 용기는 더 높은 종류의 인간다운 용기이나, 가장 높고 지극한 용기는 깊은 영적 실체들을 깨우친 확신에 굳세게 충성하는 것이라. 그러한 용기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영웅다운 정신이라. 너희는 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요, 진실로 개인적으로 사람의 아들을 아는 동료이라.”
143:1.8 (1608.5) 이것은 그 기회에 예수가 하신 말씀의 전부가 아니라 그 연설의 서론이다. 예수는 이 선언을 확대하고 예를 들면서 아주 자세히 말씀을 이었다. 이 말씀은 예수가 일찍이 열두 사도에게 가장 열심히 하신 연설 중에 하나였다. 주는 뜨거운 감정이 눈에 뜨일 정도로 사도들에게 말씀한 적이 드물었다. 그러나 이것은 뚜렷한 감정과 더불어, 열심히 말씀하신 드문 기회 중의 하나였다.
143:1.9 (1609.1) 사도들이 대중에게 전도하고 개인을 상대로 봉사한 결과는 즉시 나타났다. 바로 그날부터 그들이 전파하는 소식에는 용기가 솟아오르는 새로운 음성이 담겨 있었다. 열두 사도는 하늘나라의 새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하는 정신을 계속 몸에 익혔다. 이날 이후로 계속하여 그들은 다채로운 주의 가르침 중에 소극적 미덕과[1] [1793] 수동적 명령을 전파하는 데 분주하지 않았다.
143:2.1 (1609.2) 주는 인간의 자제(自制)를 완전히 통달한 표본이었다. 욕설을 듣고서 욕하지 않았다. 고통받을 때, 괴롭히는 사람에게 위협하는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적들에게 비난을 받았을 때,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올바른 판결에 자신을 맡겼다.
143:2.2 (1609.3) 어느 날 저녁 회의에서, 안드레는 예수께 물었다: “주여, 요한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처럼 우리가 금욕(禁慾)을 실천해야 하나이까, 아니면 당신이 가르치는 자제를 얻고자 애써야 하리이까? 당신의 가르침과 요한의 가르침이 어떤 점에서 다르니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요한은 정말로 조상들의 빛과 율법에 따라서 올바른 길을 너희에게 가르쳤고, 그 길은 자기 반성과 금욕의 종교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자기를 잊고 자제하라는 새 소식을 가지고 오노라. 나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나에게 드러내신 생명의 길을 너희에게 보이노라.
143:2.3 (1609.4)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자아를 다스리는 자는 한 도시를 점령하는 자보다 크니라. 자제는 사람의 도덕적 성품을 재는 척도요, 영적 성장의 정도를 가리키는 지표이라. 옛 체제 밑에서 너희는 금식하고 기도하였느니라. 영에게서 다시 태어난 새 사람으로서 너희는 믿고 기뻐하라는 가르침을 받느니라.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는 새 사람이 되어야 하고 옛 것은 사라져야 하느니라. 보라, 어떻게 모든 것이 새롭게 될 것인가 내가 보이노라. 너희가 서로 사랑함으로 속박된 처지를 벗어나 해방된 신분을 얻고, 죽음을 벗어나 영생(永生)을 얻었다는 확신을 너희가 세상에 주어야 하느니라.
143:2.4 (1609.5) “옛 길을 따르면 너희는 참고 복종하고 생활 규칙에 순응하기를 구하느니라. 새 길을 따르면 먼저 진리의 영이 너희를 변화시키고, 이렇게 함으로 네 정신을 항상 영적으로 새롭게 하여 네 마음 속 혼이 강하게 되며, 너희는 그렇게 하나님의 인자하고 적절하고 완전한 뜻을 확실히 기쁘게 행하는 힘을 부여받느니라. 잊지 말라―하나님의 지극히 크고 값진 약속을 개인적으로 믿는 것이 네가 신다운 성품을 받는 자가 되는 것을 보장하느니라. 이처럼 너희의 믿음으로, 영이 변화됨으로 너희는 실제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며 그의 영이 사실로 네 안에 거하느니라. 그런즉 그 영이 네 안에 거하면, 너희는 이제 더 육체에 매인 노예가 아니라 자유롭고 해방된 영의 아들이라. 자아를 구속하는 두려움과 금욕에 노예가 되는 옛 율법 대신에, 영의 새 율법은 자제로 생기는 해방을 너희에게 부여하느니라.
143:2.5 (1609.6) “너희가 나쁜 일을 했을 때, 여러 번, 너희 행위를 악한 자의 탓으로 돌리려고 생각했으나, 실제는 자신의 자연스러운 성향에 따라서 그릇된 길에 빠졌을 뿐이라. 오래 전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인간의 마음은 무엇보다도 속이는 성향이 있고, 때로는 지독하게 사악(邪惡)하기까지 하다고 너희에게 이르지 않더냐? 너희가 스스로 속고, 그리하여 어리석은 두려움, 약간의 탐욕, 비굴한 쾌락, 악의, 질투, 아니 복수하려는 증오심에 빠지기가 얼마나 쉬운 것이냐!
143:2.6 (1610.1) “육체의 독선적 행위가 아니라 영이 재생함으로 구원을 얻느니라. 너희는 믿음으로 정당하게 되고, 두려움과 육체의 금욕이 아니라 은혜로 친교를 얻느니라. 하지만 영에게서 태어난 아버지의 자녀들은 늘, 언제나 자아, 그리고 육체의 욕구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주인이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알 때, 너희는 하나님과 더불어 진정한 평화를 가지느니라. 이 하늘의 평화에 이르는 길을 따르는 자는 누구나 영원한 하나님의 늘 진보하는 아들로서 영원히 봉사하는 일에 헌신하도록 예정되느니라. 이제부터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너희가 완전을 추구하는 동안, 스스로 정신과 육체에서 모든 악을 깨끗이 없애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오히려 높은 특권이라.
143:2.7 (1610.2) “너희의 아들 신분은 믿음에 바탕을 두며, 너희는 두려움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하니라. 너희의 기쁨은 신의 말씀을 신뢰함에서 생기며, 따라서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가 현실임을 의심할 유혹을 받지 말라. 하나님의 바로 그 선이 사람들을 참되고 진정한 뉘우침으로 인도하느니라. 자아를 통달하는 비밀은 깃드는 영을 너희가 믿는 것과 밀접히 관계되고 그 영은 늘 사랑으로 일하느니라. 구원하는 이 믿음조차 너희는 저절로 가지지 않으니, 그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라. 너희가 이 살아 있는 믿음의 자녀라면, 이제 더 자아의 노예가 아니라 오히려 자아를 다스리는 승리한 주인이요, 하나님의 해방된 아들이라.
143:2.8 (1610.3) “그러면 아이들아, 너희가 영에게서 태어났다면, 금욕하고 육체의 욕구를 경계하는 생활에 자의식하여 매인 처지에서 벗어나 너희는 언제까지나 구원받으며, 너희는 즐거운 영의 나라로 옮겨지느니라. 거기서부터 너희는 나날의 생활에서 영의 열매를 저절로 맺느니라. 영의 열매는 사람을 고상하게 만드는 즐거운 자제, 아니 땅에서 필사자가 도달하는―참된 자아 통달의―높이까지 이르는, 가장 높은 종류의 자제의 본질이라.”
143:3.1 (1610.4) 이 무렵에 사도와 그 직계 제자인 동료들 사이에서 크게 신경이 곤두서고 감정이 날카로워진 사태가 벌어졌다. 그들은 함께 살고 일하는 데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요한의 제자들과 순탄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골칫거리가 늘어나고 있었다. 이방인과 사마리아인들과 접촉하는 것은 이 유대인들에게 큰 시련이었다. 이 모든 것 외에도, 예수가 요즘에 하신 말씀은 그들의 정신 상태를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안드레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까 몰랐고, 그래서 문제와 복잡한 일을 가지고 주에게 갔다. 사도의 우두머리가 걱정거리 설명하는 것을 듣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안드레야, 사람들이 그렇게 몰두한 단계에 이를 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격한 감정을 가지고 관여할 때, 말로 그 곤경에서 사람들을 구해낼 수 없느니라. 네 요청을 들어줄 수 없노라―나는 개인의 사회적 문제에 끼어 들지 아니하리라―그러나 사흘 동안 쉬고 긴장을 풀면서 너희와 함께 즐기리라. 너희 형제들에게 가서, 모두가 나와 함께 사르타바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알리라, 거기서 내가 하루나 이틀 동안 쉬기를 바라노라.
143:3.2 (1610.5) “이제 열한 형제 각자에게 가서, 남이 보지 않는 데서 이렇게 말해야 하느니라: ‘주가 한동안 쉬고 긴장을 풀려고, 우리만 그와 함께 가기를 바라시느니라. 우리 모두가 요즈음 정신이 많이 시달리고 긴장하였으니, 이 휴일 동안에 우리가 겪은 시련과 곤경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내가 제안하노라. 이 문제에 네가 협조할 것을 내가 기대할 수 있느냐?’ 이 방법으로 형제 각자에게 사사롭게 친히 접근하여라.” 그리고 안드레는 지시받은 대로 하였다.
143:3.3 (1611.1) 이것은 각자의 체험 중에서 놀라운 기회였고 그들은 산에 올라갔던 그날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 여행 동안 내내, 그들의 골칫거리에 대하여 거의 한 마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산 꼭대기에 다다르자 예수는 둘레에 그들을 앉히면서 말했다: “형제들아, 너희는 모두 휴식의 가치와 긴장 풀기의 효능을 배워야 하느니라. 어떤 뒤얽힌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은 이를 한동안 버려두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느니라. 그리고 나서 너희가 휴식이나 예배를 마치고 새롭게 돌아갈 때, 더욱 굳은 각오는 말할 것도 없고 더 맑은 정신과 더 믿음직한 손으로 너희 문제와 씨름할 수 있느니라. 게다가 머리와 육체가 쉬는 동안, 문제의 크기와 비중이 줄어든 것을 여러 번 발견하느니라.”
143:3.4 (1611.2) 이튿날 예수는 열두 사도 각자에게 토론할 주제를 나누어 주었다. 지난 일을 돌이켜 보고 그들의 종교적 일과 관계 없는 문제를 이야기하는 데 그날 전부를 썼다. 한낮의 점심으로 빵을 먹을 때, 예수가 감사를―입으로―드리는 것조차 소홀히 했을 때, 그들은 한 순간 충격을 받았다. 이때에 주가 그런 형식을 소홀히 함을 처음 보았다.
143:3.5 (1611.3) 산으로 올라갔을 때, 안드레의 머리는 문제들로 꽉 차 있었다. 요한은 마음 속에서 지나치게 혼란에 빠져 있었다. 야고보의 혼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이방인들 사이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마태는 기금이 모자라 가슴을 태우고 있었다. 베드로는 과로했고 최근에는 여느 때보다 변덕이 심했다. 유다는 때때로 찾아오는 과민과 이기심에 시달렸다. 시몬은 애국심과 형제 사랑을 절충하려는 노력으로 특별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빌립은 일이 되어 가는 형편을 보고 갈수록 어리둥절하였다. 이방(異邦) 인구와 접촉한 뒤로 나다니엘은 유머가 줄어들었고 토마스는 심한 우울증에 깊이 빠져 있었다. 오직 쌍둥이가 정상이었고 흔들리지 않았다. 요한의 제자들과 어떻게 사이좋게 지낼 것인가 모두가 갈피를 잡지 못했다.
143:3.6 (1611.4) 사흘째에 산 밑에 있는 야영지로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그들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인간의 숱한 골칫거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급박한 문제들은 과장된 두려움의 산물이요 불안이 확대되어 생겨난 것이라는 중요한 발견을 했다. 그러한 모든 골칫거리는 버려두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훌쩍 떠남으로 그런 문제들이 저절로 풀리도록 버려두었다.
143:3.7 (1611.5) 이 휴일이 끝나고 돌아온 것은 요한의 추종자들과 사이가 크게 개선된 기간이 시작되었음을 가리켰다. 생활의 일상적 임무에서 떠나 사흘 동안 휴가를 보낸 결과로, 그들이 모든 사람의 정신 상태가 달라진 것을 눈치채고 신경 과민에서 해방된 것을 바라보았을 때 열두 사도 중 다수가 정말로 기뻐하였다. 인간의 접촉이 단조로우면 골칫거리가 크게 불어나고 문제가 확대할 위험이 언제나 있다.
143:3.8 (1611.6) 두 그리스 풍의 도시, 아켈라이스와 파사엘리스에서, 많지 않은 이방인이 복음을 믿었지만, 처음으로 열두 사도는 순전한 이방 인구와 이번에 널리 일하면서 값진 체험을 얻었다. 그 달 중순쯤, 어느 월요일 아침에 예수는 안드레에게 말했다: “사마리아로 들어가자.” 그들은 야곱의 우물 가까이 시카 시(市)를 향하여 당장에 길을 떠났다.
143:4.1 (1612.1) 6백 년이 넘도록 유대 지방의 유대인, 그리고 나중에는 갈릴리의 유대인도 사마리아인과 적대 관계에 있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이 반감은 이런 식으로 생겼다: 기원전 7백 년 무렵에, 아씨리아의 임금 사르곤은 팔레스타인 중부에서 일어난 폭동을 진압하면서,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유대인을 2만 5천 명이 넘게 포로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거의 같은 수의 큣ㆍ세파르브ㆍ하마트 족속의 후손들을 정착하게 하였다. 나중에 아슈바니팔은 또 다른 여러 이민단을 사마리아에 거주하라고 보냈다.
143:4.2 (1612.2)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종교적 불화는 바빌로니아 포로 생활이 끝나고 유대인이 돌아올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의 재건을 방해하는 일을 하였다. 그들은 나중에 알렉산더의 군대를 친절히 도와줌으로 유대인들의 기분을 건드렸다. 이 친절에 대한 보답으로 알렉산더는 사마리아인들이 게리짐 산에 한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야웨 및 부족 신들을 섬기고,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 체제를 비슷하게 좇아서 희생물을 바쳤다. 적어도 마카비의 시절까지 이 예배를 계속했고, 그때 요한 히르카누스는 게리짐 산에 있는 그들의 성전을 파괴했다. 예수가 돌아가신 뒤에, 사마리아인들을 위하여 수고하면서, 사도 빌립은 이 옛 사마리아 성전 터에서 많은 모임을 가졌다.
143:4.3 (1612.3)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불화는 전통이 오래고 역사(歷史)가 깊다. 알렉산더 시절 이후로 그들은 갈수록 더 서로 상관하지 않았다. 열두 사도는 데카폴리스 지방과 시리아에 있는 그리스 및 기타 이방인 도시들에서 전도하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마리아로 들어가자”고 예수가 말했을 때 그것은 주에게 바치는 충성심을 재는 어려운 시험이었다. 그러나 한 해 남짓 예수와 함께 지내는 동안에 그들은 일종의 개인적 충성심을 길렀고 이것은 그의 가르침을 믿는 신앙과 사마리아인에 대한 편견도 뛰어넘었다.
143:5.1 (1612.4) 주와 열두 사도가 야곱의 우물에 다다랐을 때, 여행에 지쳤기 때문에 예수는 우물가에서 기다렸다. 그동안에 빌립은 시카에서 먹을 것과 텐트 가져오는 것을 도우려고 사도들을 데리고 갔는데, 사도들이 한동안 이 근처에서 머무를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들은 예수와 함께 남아 있었을 터이지만, 예수는 형제들과 함께 가라고 이들에게 부탁하며 말했다: “조금도 내 걱정을 하지 말라, 이 사마리아인들은 친절할 것이라. 오직 우리의 형제, 유대인들이 우리를 해치려 하느니라.” 예수가 우물가에서 앉아서 사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을 때는 이 여름 날 저녁, 거의 6시가 되었다.
143:5.2 (1612.5) 야곱의 우물 물은 시카의 우물에서 나오는 물보다 광물(鑛物)이 적었고, 따라서 마시는 물로 훨씬 높게 쳤다. 예수는 목이 말랐지만 우물에서 물을 길을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시카의 어느 여인이 물그릇을 가지고 와서 우물에서 물을 길으려고 준비했을 때 예수는 말했다. “내게 물을 다오.” 이 사마리아 여인은 모습과 옷차림으로 예수가 유대인인 줄 알았고 말씨로 보아 갈릴리 유대인이라 짐작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날다였고 잘 생긴 인물이었다. 유대인 남자가 이렇게 우물가에서 말을 걸고 물을 달라 하여 많이 놀랐다. 자존심 있는 남자가 버젓이 여자에게 말 거는 것, 더군다나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이야기하는 것을 그 시절에 마땅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다는 예수께 물었다: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마실 물을 달라 하시니 어인 일이니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내가 정말로 너에게 마실 물을 달라 하였으나, 네가 알 수만 있다면 생명의 물 한 모금을 달라 내게 청하리라.” 그러자 날다가 말했다: “하지만 주여, 당신은 물을 길어 올릴 그릇이 없고 우물은 깊사오이다. 그러니 어디에서 이 생명(生命)의 물을 얻으시나이까? 당신은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하시나이까? 그는 우리에게 이 우물을 주었고 자기와 아들들과 가축도 그 물을 마셨나이다.”
143:5.3 (1613.1) 예수는 대답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목이 다시 마르려니와 살아 있는 영(靈)의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생명의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솟아올라 바로 영생(永生)에 이르는 시원한 샘물이 되리라.” 그러자 날다가 말했다. “내게 이 물을 주시사 나로 하여금 목도 마르지 않고 물 길으러 여기까지 멀리 오지도 않게 하소서. 게다가 사마리아 여인이 그런 훌륭한 유대인에게 받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기쁨이 되리이다.”
143:5.4 (1613.2) 날다는 예수가 자기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 여자는 주의 얼굴에서 올바르고 거룩한 사람의 빛을 보았다. 그러나 친절을 흔히 있는 친숙함으로 잘못 생각했고 그 비유를 자기에게 일종의 추파를 던지는 것으로 잘못 해석했다. 품행이 단정치 않은 여인이었으므로 그 여자는 드러내놓고 희롱할 생각이 있었는데, 그때 그 여자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예수는 명령하는 음성으로 말했다: “여자여, 가서 네 남편을 찾아 여기로 데려오라.” 이 명령에 날다는 정신이 들었다. 주의 친절함을 그릇 판단했음을 깨달았고 자기가 그의 말투를 오해한 것을 알아차렸다. 놀라서 자기가 특별한 사람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고 머리 속에서 적당한 대답을 더듬으며, 크게 산만하여 말했다. “그러나 주여, 남편을 부를 수 없사오니 남편이 없음이니이다.” 그러자 예수는 말했다: “네가 진실을 말하였으니, 네가 한때는 남편이 있었는가 싶으나 네가 이제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은 네 남편이 아님이라. 내 말을 가지고 장난하지 말고 내가 오늘 너에게 내민 생명의 물을 구하는 것이 더 좋으리라.”
143:5.5 (1613.3) 이때가 되어서 날다는 정신이 맑아졌고 제 정신이 들었다. 그 여자는 전적으로 선택해서 부도덕한 여자는 아니었다. 남편에게 모질게 또 부당하게 버림받았고 막다른 골목에서 어떤 그리스인의 아내로서, 하지만 결혼도 하지 않고 같이 살기로 하였다. 날다는 이제 예수에게 생각 없이 말한 것을 크게 부끄럽게 느꼈고, 몹시 뉘우치는 마음으로 주를 향하여 말했다: “내 주여, 당신께 버릇없이 말씀드린 것을 뉘우치오니, 당신은 거룩한 사람이든지 아마도 선지자인 것을 깨닫기 때문이나이다.” 주께 직접 개인적으로 도움을 막 구하려고 할 때, 그 여자는 허다한 사람이 그전에도 그후에도 한 것과 같이 행하였다―신학과 철학 토론에 주의를 돌림으로 개인이 구원받는 문제를 피했다. 그 여자는 재빨리 자신의 필요로부터 신학(神學) 논쟁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게리짐 산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의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그래도 당신은 예루살렘이 사람들이 예배해야 할 곳이라고 말씀하리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하나님을 예배할 바른 장소이나이까?”
143:5.6 (1613.4) 예수는 그 여자의 혼이 직접 조물주와 면밀한 접촉을 피하려고 애쓰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또한 더 좋은 생명의 길을 알려는 소망이 그 혼 속에 있음을 보았다. 결국, 날다의 가슴 속에 생명의 물을 바라는 참된 목마름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참을성 있게 다루며 말했다: “여자여, 네게 이르노니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너희가 아버지를 예배하지 않을 날이 곧 다가오리라. 그러나 너는 알지 못하는 것을 지금 예배하나니 여러 이교도 신(神)들의 종교와 이방의 철학이 섞인 것이라. 유대인들은 적어도 누구를 예배하는지 알며, 예배를 한 분의 하나님, 야웨에 집중하여 모든 혼란을 없애버렸느니라. 그러나 진지하게 예배하는 사람이 모두 정신적으로, 진실로 아버지를 예배할 때가 곧 오리라―바로 지금이 그런 때라―고 말할 때 나를 믿어야 하나니, 이는 아버지가 바로 그러한 예배자를 찾으시기 때문이라. 하나님은 영이요, 그를 예배하는 자는 정신적으로 진실하게 예배해야 하느니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또는 어디서 예배해야 하는가 안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바로 지금 내미는 이 생명의 물을 네 마음 속에 받아들임으로 너의 구원이 오느니라.”
143:5.7 (1614.1) 그러나 날다는 땅에서 자기의 개인 생활과 하나님 앞에서 자기 혼의 처지에 관한 거북한 질문에 대한 논의를 피하려고 다시 한 번 애썼다. 한 번 더 일반 종교에 관한 질문을 택하고 말했다: “예 주여, 요한은 교화자(敎化者)가 오신다고 설교했는데, 그를 구원자라 부를 것이요 그가 오실 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선언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날다의 말을 막으며, 예수는 놀라운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너에게 말하는 내가 그니라.”
143:5.8 (1614.2) 이것은 예수가 땅에서 자신이 신의 성품을 지닌 아들임을 처음으로 바로, 분명히 감추지 않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것도 한 여자에게,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순간까지 남자들 눈에 의심스러운 인격을 가진 여자에게 선언하였다. 그러나 신의 눈은, 자신이 원해서 죄를 짓기보다 남이 그 여자에게 죄를 저질렀다고, 그 여자는 지금 구원을 바라는, 성실하게 마음을 다하여 구원을 바라는 인간 혼이라고 보았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143:5.9 (1614.3) 날다가 더 보람있고 고귀한 생활 방법을 찾으려는 진정한 개인적 소망을 막 말하려 했을 때, 마음 속의 진정한 소망을 말할 준비가 되었을 때, 열두 사도가 시카에서 돌아왔다. 예수가 이 여자와 함께―이 사마리아 여자와, 그것도 두 사람만―아주 친밀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에 들이닥쳤을 때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랐다. 소모품을 재빨리 저장하고 옆으로 비켰고 아무도 감히 비난하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한편 예수는 날다에게 말했다: “여자여, 길을 가라. 하나님이 너를 용서하였느니라. 이제부터 너는 새 인생을 살리라. 생명의 물을 받았으니, 새 기쁨이 네 혼 속에서 솟아나겠고 너는 최고자의 딸이 될지니라.” 그 여자는 사도들이 싫어하는 눈치를 채고서, 물동이를 버리고 도시로 달아났다.
143:5.10 (1614.4) 도시로 들어가면서, 만난 모든 사람에게 외쳤다: “야곱의 우물로 가라, 빨리 가라, 왜냐하면 거기서 내가 일찍이 한 일을 모두 내게 일러준 사람을 너희가 볼 것이기 때문이라. 이 사람이 교화자일 수 있느냐?” 해가 지기 전에, 큰 무리가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야곱의 우물에서 모였다. 그리고 주는 생명의 물, 깃드는 영이 주는 선물에 대하여 그들에게 더 말씀했다.
143:5.11 (1614.5) 사도들은 예수가 여자, 그것도 의심스러운 인격을 가진 여자, 아니 부도덕한 여자와도 기꺼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서 받은 충격을 결코 떨쳐 버리지 못했다. 여자, 아니 이른바 부도덕한 여자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택할 수 있는 혼을 가졌고, 이로써 하나님의 딸이요 영생을 받을 후보자가 된다는 것을 예수가 사도들에게 가르치기는 무척 어려웠다. 19세기가 지난 뒤에도 많은 사람이 주의 가르침을 깨닫기를 꺼려하는 똑같은 태도를 보인다. 기독교조차 그리스도의 일생의 진리가 아니라 그가 죽은 사실을 중심으로 끈질기게 쌓아 올렸다. 세상은 예수의 비극적이고 슬픈 죽음보다 행복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그의 삶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143:5.12 (1614.6) 날다는 이튿날 이 이야기를 전부 사도 요한에게 일러주었지만 그는 다른 사도들에게 다 밝히지 않았고 예수는 열두 사도에게 이 일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하지 않았다.
143:5.13 (1615.1) 날다는 예수가 “내가 일찍이 행한 모든 것”을 자기에게 일러주었다고 요한에게 말했다. 여러 번 요한은 날다와 이렇게 이야기하신 것에 관하여 예수께 묻고 싶었지만,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예수는 그 여자에 관하여 오직 한 가지를 일러주었지만, 눈을 들여다보고 그 여자를 다룬 태도는 한 순간에 날다의 머리 속에 얼룩진 생활 전부를 파노라마처럼 머리 속에서 다시 보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여자는 과거의 생활을 이렇게 자신이 밝힌 것을 모두 주의 눈길과 말씀과 연결하였다. 예수는 그 여자에게 다섯 남편이 있다고 이르지 않았다. 그 여자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뒤에 다른 네 남자와 살았다. 이것은 모든 과거와 함께, 예수가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을 깨달은 순간, 머리 속에 아주 선하게 살아났고, 그래서 예수가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정말로 자기에게 일러주었다고 나중에 요한에게 되풀이하였다.
143:6.1 (1615.2) 날다가 시카에서 예수를 보라고 군중을 이끌어낸 날 저녁에, 열두 사도는 먹을 것을 가지고 막 돌아왔다. 사람들에게 말씀하기 전에 예수에게 함께 드시라고 청했는데, 그들이 하루 종일 끼니를 걸러서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어둠이 곧 다가올 것을 알았고, 그래서 사람들을 돌려보내기 전에 말씀할 결심을 버리지 않았다. 군중에게 말씀하기 전에 예수에게 한 입 잡수시라고 안드레가 설득하려고 했을 때 예수는 말했다 “나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고기가 있노라.” 이 말을 듣자 사도들끼리 말했다: “누군가 그에게 무슨 잡수실 것을 가져왔느냐? 도대체 그 여자가 예수께 마실 것 뿐 아니라 잡수실 것도 드렸느냐?”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듣자, 사람들에게 말씀하기 전에 예수는 옆으로 머리를 돌려 열두 사도에게 말했다: “내가 먹을 고기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이루는 것이라. 너희는 이제 더 추수할 때까지 시간이 어느만큼 있다고 말하지 말라. 사마리아의 한 도시에서 이 사람들이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들으려고 나오는 것을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판이 추수하도록 이미 허옇게 되었느니라. 거두는 자는 삯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이 열매를 거두느니라. 그 결과로 씨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이는 ‘한 사람이 씨 뿌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하는 말씀이 여기서 참인 까닭이라.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곳에서 거두라고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 남들이 수고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하던 일을 막 시작하려 하느니라.”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전도한 것을 언급한 것이다.
143:6.2 (1615.3) 예수와 사도들은 시카로 들어갔고 게리짐 산에서 캠프를 세우기 전에 이틀 동안 전도했다. 시카에서 많은 주민이 복음을 믿고 세례받기를 청했지만 예수의 사도들은 아직 세례를 주지 않았다.
143:6.3 (1615.4) 게리짐 산에서 야영하던 첫날 밤에 사도들은 야곱의 우물에서 그 여자에게 보인 태도 때문에 예수가 꾸짖으리라 기대했으나 그 문제에 대하여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대신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중심인 실체들”에 관하여 기억에 남을 이야기를 그들에게 해주었다. 어떤 종교에서도 가치가 한 쪽으로 치우치도록 버려두고, 사람의 신학에서 진리 대신에 사실이 자리를 차지하도록 버려두기가 너무나 쉽다. 십자가의 사실은 후일에 기독교의 바로 그 핵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렛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종교의 핵심 진리가 아니다.
143:6.4 (1615.5) 게리짐 산에서 예수가 가르친 말씀의 주제는, 그가 (예수가) 형제요 친구인 것 같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이자 친구로서 보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진리가 이 신성한 두 관계를 관찰한 것에 대하여 가장 큰 선언인 것같이, 사랑은 세상에서―우주에서―가장 큰 관계라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143:6.5 (1616.1) 예수가 사마리아인들에게 그렇게 자신을 한껏 선언한 것은 그가 안전하게 그렇게 할 수 있었고, 하늘나라 복음을 전도하려고 사마리아의 심장부로 그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143:6.6 (1616.2) 예수와 열두 사도는 8월말까지 게리짐 산에서 야영했다. 여러 도시에서 낮에는 사마리아인들에게 좋은 하늘나라 소식―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을 전도하고 밤에는 야영지에서 지냈다. 사마리아의 이 여러 도시에서 예수와 열두 사도가 한 일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많은 사람을 얻었고, 예수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뒤에, 예루살렘에서 신자들을 모질게 박해함으로 사도들이 땅 끝까지 흩어지고 나서, 이 지역에서 빌립이 놀라운 일을 하도록 길을 예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43:7.1 (1616.3) 게리짐 산에서 저녁 회의가 있을 때, 예수는 큰 진리를 많이 가르쳤고 특히 다음을 강조했다:
143:7.2 (1616.4) 참된 종교는 창조자와 자의식하는 관계를 가지면서 생기는 개별 혼의 행위이다. 조직된 종교는, 사람이 개별 신자의 예배를 사회 활동으로 만드는 시도이다.
143:7.3 (1616.5) 예배는―영적인 것을 숙고하는 것―봉사, 즉 물질적 현실과 접촉하는 것과 번갈아 있어야 한다. 일하고 노는 것을 번갈아 해야 하며, 종교는 유머로 균형을 얻어야 한다. 깊은 철학은 리듬 있는 시(詩)로 긴장을 풀어야 한다. 생활의 긴장은―인격이 시간 속에서 받는 긴장―예배가 주는 휴식으로 풀어야 한다. 우주에서 인격이 고립되는 두려움에서 생기는 불안한 느낌은 아버지를 믿고 숙고함으로, 그리고 최상위를 깨달으려고 애씀으로 중화(中和)되어야 한다.
143:7.4 (1616.6) 기도는 사람에게 머리를 덜 쓰고 깨달음을 더 얻게 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기도는 지식을 늘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통찰력을 키우도록 고안되어 있다.
143:7.5 (1616.7) 예배를 드리는 의도는 앞으로 개선된 생활을 예상하고 다음에 이 새로운 영적 의미를 현재 닥친 생활에 다시 비쳐 보는 것이다. 기도는 영적 자양분을 주지만 예배는 신성하게 창조하는 성향이 있다.
143:7.6 (1616.8) 예배는 여러 사람에게 봉사하려는 영감을 불러일으키려고 하나인 분을 바라보는 기술이다. 예배는 혼이 물질 우주로부터 얼마큼 떨어져 있는가를 재고, 또한 혼이 동시에 모든 창조의 영적 실체들에 얼마나 안전하게 붙어 있는가 재는 척도이다.
143:7.7 (1616.9) 기도는 자아를 생각하게 한다―숭고한 사고(思考)이다. 예배는 자아를 잊는 것이다―초월 사고이다. 예배는 힘 안드는 집중이요, 혼의 참되고 이상적인 휴식, 일종의 편안한 영적 노력이다.
143:7.8 (1616.10) 예배는 한 부분이 전체와, 그리고 유한자가 무한자와, 아들이 아버지와 일체가 되는 행위요, 시간이 영원과 발걸음을 맞추는 행위이다. 예배는 아들이 신다운 아버지와 몸소 친교하는 행위요, 인간의 혼과 영이 신선하고 창조적인 태도, 친근하고 열렬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143:7.9 (1616.11) 사도들은 야영지에서 그가 가르친 것 중에서 몇 가지밖에 깨닫지 못했지만 다른 세상들은 그 가르침을 깨달았고 땅에서 다른 세대들도 그럴 것이다.
144:0.1 (1617.1) 9월과 10월은 길보아 산의 비탈에 자리 잡은 한적한 캠프에서 은둔한 가운데 보냈다. 9월 한 달을 예수는 여기서 사도들하고만 지냈고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진리를 가르치고 교훈을 주었다.
144:0.2 (1617.2) 사마리아와 데카폴리스 지방의 경계에서 이때 예수와 사도들이 은둔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대단히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헤롯 안티파스는 아직도 요한을 감옥에 가두어 놓고 석방하거나 처형하기를 두려워했고, 한편 요한과 예수가 어떤 면에서 관련되었다는 의심을 계속 품었다. 이러한 형편 때문에 유대나 갈릴리에서 적극적 활동을 계획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았다. 셋째 이유가 있었는데, 요한의 수석 제자들과 예수의 사도들 사이에 서서히 긴장이 팽팽해지고 있었고, 이것은 신자들의 무리가 늘어나면서 악화되었다.
144:0.3 (1617.3) 예수는 가르치고 전도하는 예비 작업 시절이 거의 끝났고 다음의 행동은 땅에서 그의 일생에 한껏 마지막 노력을 시작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도 세례자 요한을 괴롭히거나 난처하게 만들지 않기를 바랐다. 따라서 예수는 사도들을 연습시키면서 은둔하여 얼마 동안 시간을 보내고, 다음에 요한이 집행되든지 아니면 석방되어서 단결된 노력을 기울이려고 그들과 합세할 때까지,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에서 조용히 얼마큼 일하기로 결심하였다.
144:1.1 (1617.4)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열두 사도는 예수에게 더욱 헌신하고 하늘나라 일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그들의 헌신은 대체로 개인적으로 충성하는 문제였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의 여러 모습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의 성품이나 땅에서 그의 수여의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144:1.2 (1617.5) 그들이 세 가지 이유로 은둔하고 있다고 예수는 사도들에게 분명히 설명했다:
144:1.3 (1617.6) 1. 하늘나라의 복음을 그들이 이해하고 믿는 것을 확인하려고.
144:1.6 (1617.9) 길보아 산에서 머무르면서, 예수는 어린 시절의 생활과 헤르몬산에서 겪은 체험에 대하여 많은 것을 열두 사도에게 일러주었다. 또한 세례를 받은 바로 뒤 40일 동안에 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얼마큼 밝혔다.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가기까지 이 여러 체험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직접 당부했다.
144:1.7 (1618.1) 그들은 이 9월 몇 주 동안 쉬면서 예수가 그들을 봉사하는 일로 처음 부른 뒤에 겪은 체험을 이야기하고 되새겼으며, 주가 이때까지 가르친 것을 조정하려고 진지하게 노력을 기울였다. 어느 정도 모두가 이것이 길게 쉬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라 느꼈다. 그들은 유대나 갈릴리에서 다음에 대중에게 기울일 노력이 다가오는 하늘나라의 마지막 선포의 시작을 가리키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하늘나라가 다가왔을 때 그 나라가 어떠할까에 대하여 거의 또는 아무런 정해진 관념이 없었다. 요한과 안드레는 하늘나라가 이미 왔다고 생각했고, 베드로와 야고보는 하늘나라가 앞으로 올 것이라고 믿었다. 나다니엘과 토마스는 영문을 모른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마태와 빌립과 열심당원 시몬은 확신이 없었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 쌍둥이는 다행히도 그 논쟁을 눈치채지 못했다. 가룟 유다는 말이 없고 무어라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144:1.8 (1618.2) 이때에 예수는 야영지 가까이, 산에서 혼자 지내는 적이 많았다. 때때로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을 데리고 갔지만, 기도하거나 혼자서 교통하느라고 훌쩍 떠나는 일이 더 흔했다. 예수가 세례를 받고 페레아의 산지에서 40일 보낸 뒤에, 아버지와 이때 교통한 시절에 기도했다고 하기는 도저히 적당하지 않으며, 예수가 예배했다고 말하는 것도 조리가 없다. 그러나 이 기간을 아버지와 친히 교통한 기간이라 하는 것이 아주 정확하다.
144:1.9 (1618.3) 9월 한달 내내, 토론의 중심 주제는 기도와 예배였다. 며칠 동안 예배에 대하여 논의한 뒤에 “주여,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하는가 가르쳐주소서”하고 토마스가 요청한 데 답하여, 예수는 마침내 기억에 남을 가르침을 주었다.
144:1.10 (1618.4) 요한은 전에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는데, 다가오는 나라에서 구원을 얻기 위한 기도였다.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요한의 기도 형식을 쓰지 말라고 금한 적이 없다. 그러나 고정되고 판에 박힌 기도문을 외우는 습관을 주가 충분히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도들은 아주 일찍 알아차렸다. 그렇기는 해도 신자들은 어떻게 기도하는가 가르쳐달라고 항상 요청하였다. 열두 사도는 예수가 어떤 형식의 간구를 승인할 것인가 몹시 알고 싶어했다. 주로, 서민들을 위하여 어떤 간단한 기도가 이렇게 필요했기 때문에, 예수는 이때 토마스의 요청에 답하여, 방법을 제시하는 형식의 기도를 가르치는 데 찬성하였다. 길보아 산에서 그들이 머무르던 셋째 주, 어느 날 오후에 예수는 이 교훈을 주었다.
144:2.1 (1618.5) “요한은 정말로 너희에게 간단한 형태의 기도를 가르쳤느니라: ‘아 아버지여, 우리에게서 죄를 없애시고, 아버지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이고 사랑을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영이 우리의 마음을 영원히 거룩하게 하소서, 아멘!’ 그는 너희가 군중에게 무언가 가르칠 것을 가지도록 이 기도를 가르쳤느니라. 기도하는 자신의 혼의 표현으로서 너희가 그렇게 고정되고 판에 박힌 간청을 드려야 한다고 의도한 것이 아니라.
144:2.2 (1618.6) “기도는 영에 대하여 혼이 어떤 태도를 가졌는가 보이는 표현, 온전히 개인적으로 저절로 나오는 표현이라. 기도는 아들 신분으로 하는 교통, 친교의 표현이어야 하느니라. 기도는 영이 표현했을 때, 협동하는 영적 진보의 길로 인도하느니라. 이상적인 기도는 지적 예배로 이끄는 일종의 영적 교통이라. 참된 기도는 너희의 이상을 이루려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뻗는 성실한 태도이라.
144:2.3 (1619.1) “기도는 혼의 숨결이요,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려는 끈질긴 시도로 너희를 이끌어야 하느니라. 너희 가운데 누가 이웃이 있어, 한밤에 그에게 가서 ‘친구여, 빵 세 덩이를 꾸어달라, 내 친구가 여행하는 길에 나를 보러 왔는데 친구 앞에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노라’ 말하니, 네 이웃이 대답하되 ‘나를 성가시게 굴지 말라, 이제 문이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들었음이라, 그러니 일어나서 빵을 줄 수 없노라’하면, 너는 친구가 배고프다, 그에게 먹을 것을 하나도 줄 수 없다고 설명하며 고집하리라. 너희에게 이르노니, 네 친구라고 해서 이웃이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을 터이나 그래도 끈질기게 조르는 까닭에, 일어나서 네가 필요한 대로 너에게 빵을 주리라. 그래서 끈질긴 요청이 필사 인간에게서도 특혜(特惠)를 얻는다면, 너희가 영적으로 끈질기게 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낌없는 손에서 생명의 빵을 얼마나 더 얻겠느냐.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내리라, 두드리라 그리하면 문이 열리리라. 누구든지 구하는 자는 받으며, 찾는 자는 찾아내며, 구원의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는 문이 열리리라.
144:2.4 (1619.2) “너희 가운데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지혜롭지 못하게 간청하면, 아들이 잘못 간구하는 그대로가 아니라 부모의 지혜에 따라서 주기를 망설이겠느냐? 빵이 필요하면, 아이가 지혜롭지 못하게 돌을 달라 한다고 해서 아이에게 돌을 주겠느냐? 네 아들이 물고기가 필요하면, 그물 속에 물뱀이 어쩌다가 물고기와 함께 올라오고 단지 아이가 어리석게 뱀을 달라 요구한다고 해서 그에게 물뱀을 주겠느냐? 그러면 죽을 수밖에 없으며, 유한한 너희가 기도(祈禱)에 응답하고 아이들에게 좋고 적당한 선물 줄 것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는 구하는 자에게 영을 비롯하여 많은 다른 복을 얼마나 더 부어주시겠느냐? 사람들은 언제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144:2.5 (1619.3) “어느 사악한 도시에 살았던 어떤 재판관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이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존경하지도 않았느니라. 자, 그 도시에 어떤 빈궁한 과부가 있었더니, 이 부당한 판사에게 거듭 찾아와서 ‘내 원수로부터 나를 보호해주소서’ 말하였는지라. 얼마 동안 그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으나, 곧 그가 혼잣말을 하였더라.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아도 이 과부가 나를 때 없이 번거롭게 하니, 계속 찾아와서 나를 지치게 하지 않도록 그 여자를 변호하리라.’ 너희가 끈질기게 기도하라 격려하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요, 너희의 간구가 하늘에 계신 공평하고 올바른 아버지의 마음을 바꾸리라 비추려 함이 아니라. 그러나 너희의 끈질긴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너희의 태도를 바꾸고 혼이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키우려는 것이라.
144:2.6 (1619.4) “그러나 기도할 때 너희는 거의 믿음이 없느니라. 진정한 믿음은 혼이 성장하고 영적으로 진보하는 길에 어쩌다 놓인 산더미 같은 물질적 어려움을 없애리라.”
144:3.1 (1619.5) 그러나 사도들은 아직 마음이 흡족하지 않았다. 그들이 새 제자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기도의 본보기를 예수가 주시기를 바랐다. 기도에 대한 이 강론을 들은 뒤에 야고보 세베대가 말했다: “아주 좋소이다, 주여,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어떻게 적절히 기도하는가 우리에게 가르치소서’하고 우리에게 무척 자주 부탁하는 새 신자들을 위하여, 한 모형의 기도를 원하나이다.”
144:3.2 (1619.6) 야고보가 말을 마치자 예수는 말했다: “그래, 너희가 아직도 그런 기도를 바란다면, 내 아우와 누이들에게 나사렛에서 가르친 것을 하나 제시하고자 하노라.”:
144:3.3 (1620.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144:3.4 (1620.2) 그 이름이 거룩하옵소서.
144:3.5 (1620.3)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144:3.6 (1620.4)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44:3.7 (1620.5) 내일을 위하여 오늘 우리에게 빵을 주시고
144:3.8 (1620.6) 생명의 물로 우리의 혼을 새롭게 하소서.
144:3.9 (1620.7)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한 것 같이
144:3.10 (1620.8) 또한 우리의 빚을 모두 용서하소서.
144:3.13 (1620.11) 사도들이 신자들을 위하여 예수가 기도의 본보기를 가르쳐주기를 바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세례자 요한은 따르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기도를 가르쳤다. 위대한 선생들은 모두 생도들을 위하여 기도를 지었다. 유대인의 종교 선생들은 스물다섯이나 서른 가지 정도의 고정된 기도가 있었고 이것을 회당에서, 길거리 구석에서도 외웠다. 예수는 대중 앞에서 기도하기를 특별히 꺼렸다. 이때까지 열두 사도는 그가 기도하는 것을 겨우 몇 번 들었다. 예수가 밤새도록 기도하거나 예배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그가 어떻게, 어떤 형식으로 간청하는가 매우 알고 싶어했다.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처럼 어떻게 기도하는가 가르쳐 달라고 요청을 받았을 때, 그들은 대중에게 무어라고 대답할지 몰라서 정말로 궁지에 빠졌다.
144:3.14 (1620.12) 예수는 열두 사도에게 언제나 남모르게 기도하라, 기도에 들어갈 때 훌쩍 떠나 혼자서 조용한 자연 환경 가운데로 가거나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으라고 가르쳤다.
144:3.15 (1620.13) 예수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께로 올라간 뒤에, 많은 신자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를 덧붙여, 이른바 이 주의 기도문을 끝내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그 뒤에, 두 줄이 베끼다가 없어졌고 이 기도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임이나이다” 하는 여분의 구절이 더해졌다.
144:3.16 (1620.14) 예수는 나사렛 집에서 사람들이 기도한 그대로, 공동(共同) 형태의 기도를 사도들에게 주었다.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문구를 가르친 적이 없었고, 오직 집단, 가족 또는 사회가 드리는 간청을 가르쳤다. 그리고 예수는 결코 그런 기도를 가르치겠다고 자청(自請)하지 않았다.
144:3.17 (1620.15) 예수는 효력이 있는 기도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144:3.18 (1620.16) 1. 이기심 없이―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144:3.19 (1620.17) 2. 믿으면서―믿음에 따라서.
144:3.20 (1620.18) 3. 성실하게―마음이 정직하게.
144:3.23 (1620.21) 예수가 기도하느라고 산에서 밤새도록 있을 때, 그것은 주로 제자들, 특히 열두 사도를 위한 것이었다. 주는 자신을 위하여 거의 기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라다이스 아버지와 함께, 이해하며 교통하는 성질을 가진 예배에 많이 잠겨 있었다.
144:4.1 (1620.22) 기도에 대한 강론이 있은 뒤에 여러 날, 사도들은 전적으로 중요하고 경건한 이 습관에 대하여 주께 계속하여 물었다. 예수가 이 기간에 사도들에게 기도와 예배에 관하여 교육한 것은 다음과 같이 현대의 말투로 요약하고 다시 정리할 수 있다:
144:4.2 (1621.1) 어떤 간구라도 진지하게 간절히 되풀이하는 것은, 그런 기도가 하나님의 자녀의 진지한 표현이고 믿음으로 입에서 나왔을 때, 직접 응답하는 것이 아무리 현명치 못하거나 불가능하더라도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혼의 능력을 어김없이 키워 준다.
144:4.3 (1621.2) 어떤 기도를 드리더라도 아들 신분이 선물인 것을 기억하라. 어떤 아이도 아들이나 딸의 신분을 얻으려고 무엇인가 해야 되는 것이 아니다. 땅에 있는 아이는 부모의 의지에 따라서 생겨나게 된다. 과연 그러하니, 하나님의 아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은총을 얻고 영(靈)의 새 생명에 들어간다. 따라서 하늘나라를―신의 아들 신분을―어린아이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너희는 올바름―점진적 인품의 성장―을 노력으로 얻지만, 은총으로, 믿음을 통해서 아들 신분을 받는다.
144:4.4 (1621.3) 기도는 혼이 온 우주의 최상 통치자들과 초월적 교통을 가지는 경지까지 예수를 이끌었다. 기도는 세상의 필사자를 참된 예배 정신으로 교통하는 경지까지 이끌 것이다.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혼의 능력은 하늘이 내리는 축복의 양(量)을 좌우한다. 이 축복은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고, 그 축복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을 의식하여 깨달을 수 있다.
144:4.5 (1621.4) 기도, 그리고 그에 결부된 예배는 생활의 일상적인 것, 물질 존재의 단조로운 고역(苦役)을 벗어나는 기법이다. 기도는 영적으로 변화된 자아 실현, 그리고 지적ㆍ종교적으로 성취하는 개성에 접근하는 길이다.
144:4.6 (1621.5) 기도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해로운 버릇에 해독제이다. 적어도, 주가 가르친 것과 같은 기도는 혼에 매우 유익한 보살핌이다. 예수는 사람이 동료들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의 유익한 영향력을 한결같이 이용했다. 주는 보통 때, 자신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생각하여 기도했다. 오직 땅에서 보낸 일생의 큰 위기에 부닥쳤을 때 예수는 자신을 위하여 기도한 적이 있다.
144:4.7 (1621.6) 기도는 인류의 여러 종족이 세운 물질 문명의 와중에서 영적 생명이 숨을 내쉬는 소리이다. 예배는 쾌락을 추구하는 필사자 세대를 구원하는 줄이다.
144:4.8 (1621.7) 기도가 혼의 영적 전지(電池)를 다시 충전하는 것과 비유해도 좋은 것 같이, 예배는 우주의 아버지의 무한하신 영이 보내는 우주 방송을 들으려고 혼을 조절하는 행위와 비교해도 좋다.
144:4.9 (1621.8) 기도는 아이가 영 아버지를 진지하게 갈급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요, 기도는 인간의 뜻을 버리고 신의 뜻을 얻는 심리학 과정이다. 기도는 현재의 상태를 고쳐서 앞으로 되어야 할 상태로 만드는 신의 계획의 일부이다.
144:4.10 (1621.9) 예수가 오래 밤늦게 깨어 있을 때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이 그를 무척 자주 동반했는데 이들이 예수가 기도하는 것을 듣지 못한 이유 중에 하나는, 주가 소리나게 기도를 입 밖에 내서 드린 적이 아주 드물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드린 거의 모든 기도는 정신으로, 마음 속에서―말없이―하였다.
144:4.11 (1621.10) 모든 사도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가 기도와 예배에 대한 주의 가르침을 알아들었다고 볼 수 있다.
144:5.1 (1621.11) 땅에서 머무르던 나머지 기간에, 때때로 예수는 사도들에게 몇 가지 추가된 기도 형식을 주목하게 했으나 다만 다른 문제들을 설명하느라고 그렇게 했다. 이 여러 가지 “비유의 기도”를 군중에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다. 이 기도문 가운데 여럿은 사람이 사는 다른 행성들에서 온 것이지만 이 사실을 예수는 열두 사도에게 밝히지 않았다. 이 기도문 가운데 다음이 있었다:
144:5.2 (1622.1) 우주 영토가 우리 아버지 안에 있으니
144:5.3 (1622.2) 그 이름과 온통 영화로운 성품이 높임을 받으소서.
144:5.4 (1622.3) 아버지의 계심은 우리를 둘러싸고, 그 영광이 하늘에서 완전히
144:5.5 (1622.4) 보이는 것 같이 우리를 통해서 불완전하게 나타나나이다.
144:5.6 (1622.5) 오늘날 우리에게 빛의 활력을 주시고,
144:5.7 (1622.6) 우리가 상상하는 악한 옆길로 우리가 빠지지 않게 하소서.
144:5.8 (1622.7) 영화로운 깃드심, 영구한 권세는 아버지의 것이요,
144:5.9 (1622.8) 아들의 무한한 사랑은 우리에게 영원한 선물인 까닭이나이다.
144:5.10 (1622.9) 바로 그러하니, 언제까지나 참이나이다.
144:5.12 (1622.10) 우주의 중심에 계시고 창조하시는 우리 아버지여
144:5.13 (1622.11) 우리에게 아버지의 성품을 주시고 그 됨됨이를 주소서.
144:5.14 (1622.12) 은총으로 우리를 아들딸로 만드시고,
144:5.15 (1622.13) 우리의 영원한 성취를 통해서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
144:5.16 (1622.14) 천사들이 빛 가운데 아버지의 명령을 듣는 것 같이, 우리가 이 구체에서
144:5.17 (1622.15) 아버지의 뜻을 행하도록, 조절하고 통제하는 영이 우리 안에 살고 거하게 하소서.
144:5.18 (1622.16) 오늘 진리의 길을 따라 나아가는 동안 우리를 버티게 하시고
144:5.19 (1622.17) 타성과 악과 온갖 죄짓는 행위에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144:5.20 (1622.18) 우리가 동료에게 친절을 보이는 것 같이 우리를 참으소서.
144:5.21 (1622.19) 자비의 정신을 우리 인간 마음 속에 널리 펼치소서.
144:5.22 (1622.20) 불안한 인생의 미로를 통해서 걸음걸음 아버지의 손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144:5.23 (1622.21) 우리의 끝날이 다가올 때, 우리의 충실한 영을 아버지 품 안에 받으소서.
144:5.24 (1622.22) 그렇다 해도, 우리의 소망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144:5.26 (1622.23) 완전하고 올바른 우리 하늘 아버지여,
144:5.27 (1622.24) 오늘 우리의 여행길을 안내하고 지도하소서.
144:5.28 (1622.25) 우리의 발걸음을 거룩히 하고 우리의 생각을 조절하소서.
144:5.29 (1622.26) 영원히 진보하는 길에서 우리를 늘 이끄소서.
144:5.30 (1622.27) 권능이 충만하기까지 우리를 지혜로 채우시고
144:5.31 (1622.28) 무한한 에너지로 우리에게 활력을 주소서.
144:5.32 (1622.29) 우리를 북돋아 천사 무리의 계심과 안내를
144:5.33 (1622.30) 신성하게 의식하게 하소서.
144:5.34 (1622.31) 빛의 길에서 위를 향하여 항상 우리를 안내하소서.
144:5.35 (1622.32) 큰 심판의 날에 우리를 충분히 정당하게 만드소서
144:5.36 (1622.33) 우리를 영원한 영광 속에 계신 아버지처럼 만드시고
144:5.37 (1622.34) 하늘에서 끝없이 봉사하는 길로 우리를 받으소서.
144:5.39 (1622.35) 신비 속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144:5.40 (1622.36) 주의 거룩한 성품을 우리에게 드러내소서.
144:5.41 (1622.37) 땅에 있는 자녀들에게, 오늘을 주시사
144:5.42 (1622.38) 길과 빛과 진리를 보게 하소서.
144:5.43 (1622.39) 영원히 진보하는 길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144:5.441 (1622.40) 그 안에서 걸을 의지를 주소서.
144:5.45 (1622.41) 우리 안에서 아버지가 신성한 임금이 되시고
144:5.46 (1622.42) 그리하여 우리가 자아를 완전히 통달하게 하소서.
144:5.47 (1622.43) 어둠과 죽음의 길로 빗나가지 않게 하시고
144:5.48 (1622.44) 생명의 물가로 영원히 우리를 이끄소서.
144:5.49 (1622.45) 바로 아버지를 위하여 우리의 기도를 들으소서.
144:5.50 (1622.46) 우리를 더욱 아버지처럼 만들기를 기뻐하소서.
144:5.51 (1623.1) 마지막에는 신다운 아들을 위하여,
144:5.52 (1623.2) 영원한 팔 안에 우리를 받으소서.
144:5.53 (1623.3) 그렇다 해도, 우리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144:5.55 (1623.4) 한 부모로 하나된 영화로운 아버지와 어머니여,
144:5.56 (1623.5) 그 신다운 성품에 우리가 충성하리이다.
144:5.57 (1623.6) 신의 영을 선물로 주심으로
144:5.58 (1623.7) 바로 주가 우리 안에, 우리를 통해 다시 살도록
144:5.59 (1623.8) 주가 하늘에서 완전하고 당당하게 보이는 것 같이
144:5.60 (1623.9) 이 구체에서 이렇게 주를 불완전하게 흉내를 내나이다.
144:5.61 (1623.10) 날마다 형제 되어 달갑게 봉사할 일을 주시고
144:5.62 (1623.11) 사랑으로 봉사하는 길에서 순간마다 우리를 이끄소서.
144:5.63 (1623.12) 주의 참을성을 우리가 아이들에게 보이는 것 같이
144:5.64 (1623.13) 늘 어김없이 우리를 참으소서.
144:5.65 (1623.14) 모든 일을 잘 처리하는 신의 지혜와 모든 생물에게 자비로운,
144:5.66 (1623.15) 그 무한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144:5.67 (1623.16) 우리의 자선이 이 땅의 약한 자를 품어 안도록
144:5.68 (1623.17) 주의 참을성과 인자함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144:5.69 (1623.18) 우리의 생애가 끝날 때, 그것이 주의 이름에 명예요,
144:5.70 (1623.19) 주의 착한 영에게 기쁨이요, 우리 혼을 돕는 이에게 만족이 되게 하소서.
144:5.71 (1623.20)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여, 우리가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144:5.72 (1623.21) 필사 자녀들에게 영원히 좋은 것을 주가 바라시는 대로, 바로 그렇게 되어지이다
144:5.74 (1623.22) 모든 것에 충실한 우리의 근원이여 모든 것에 능한 중심이여,
144:5.75 (1623.23) 모두에게 인자한 아들의 이름을 경건하고 거룩하게 하옵소서.
144:5.76 (1623.24) 아버지의 은혜와 복이 우리에게 내려와서
144:5.77 (1623.25)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명령을 수행하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나이다.
144:5.78 (1623.26) 순간마다 생명나무의 자양분을 우리에게 주시고,
144:5.79 (1623.27) 날마다 거기 있는 강의 생명의 물로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
144:5.80 (1623.28) 한 걸음 한 걸음 어둠에서 신성한 빛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144:5.81 (1623.29) 깃드는 영이 우리를 변화시킴으로 우리의 정신을 새롭게 하소서.
144:5.82 (1623.30) 마침내 죽는 날이 우리에게 닥칠 때
144:5.83 (1623.31) 바로 아버지가 우리를 받으시고 우리를 영원으로 보내소서.
144:5.84 (1623.32) 열매 많은 봉사로 얻는 하늘 왕관을 우리에게 얹으소서,
144:5.85 (1623.33)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거룩한 영향에게 영광을 돌리리니,
144:5.86 (1623.34) 끝없는 우주에 두루 바로 그러하리이다.
144:5.88 (1623.35) 우주의 은밀한 곳에 거하시는 우리 아버지여
144:5.89 (1623.36) 주의 이름이 영예롭고, 자비가 존경받고, 판단이 존중받으옵소서.
144:5.90 (1623.37) 한낮에 태양처럼 올바름이 우리를 비추게 하소서
144:5.91 (1623.38) 또한 땅거미 질 때 길을 벗어난 우리의 걸음을 안내하시기 바라나이다.
144:5.92 (1623.39) 아버지가 택하는 길에서 우리를 손잡아 이끄시고
144:5.93 (1623.40) 길이 험하고 날이 어두울 때 우리를 버리지 마소서.
144:5.94 (1623.41) 우리가 아버지를 무척 자주 소홀히 하고 잊는 것처럼 우리를 잊지 마시고
144:5.95 (1623.42) 우리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자비를 베풀고 우리를 사랑하소서.
144:5.96 (1623.43) 우리를 괴롭히고 해치는 자를 우리가 공평하게 용서하는 것 같이
144:5.97 (1623.44) 친절히 우리를 내려다보시고 자비롭게 우리를 용서하소서.
144:5.98 (1624.1) 훌륭한 아들의 사랑과 헌신과 수여가
144:5.99 (1624.2)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와 더불어 영생을 베푸소서.
144:5.100 (1624.3) 우주의 하나님이 그 영을 충분히 우리에게 내려주시기를.
144:5.101 (1624.4) 우리에게 이 영의 인도하심을 받아들일 은혜를 내리소서.
144:5.102 (1624.5) 헌신하는 천사 무리가 사랑으로 베푸는 봉사로 인하여
144:5.103 (1624.6) 아들이 시대의 끝까지 우리를 안내하고 인도하기를.
144:5.104 (1624.7) 갈수록 더 우리를 늘 아버지처럼 만드시고
144:5.105 (1624.8) 우리의 마지막 날에 영원한 파라다이스 품으로 우리를 받으소서.
144:5.108 (1624.11) 사도들은 대중을 교육할 때 마음대로 이 기도들을 수업 시간에 가르칠 수 없었지만, 개인의 종교적 체험으로 보아서 이 모든 계시로부터 많은 소득을 얻었다. 예수는 열두 사도를 가까이 두고 교육하는 과정에서 이 여러 기도와 다른 기도 모형(模型)을 이용했으며, 이 일곱 가지 표본 기도를 이 기록에 옮겨 적도록 특별 허가가 내렸다.
144:6.1 (1624.12) 10월 초하루 무렵에 빌립과 동료 사도 몇 사람이 가까운 마을에서 먹을 것을 사고 있었는데, 그때 세례자 요한의 사도 몇 사람을 만났다. 시장에서 우연히 이렇게 만난 결과로 길보아 야영지에서 예수의 사도와 요한의 사도들 사이에 3주 동안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예수의 선례를 따라서, 요한이 유력(有力)한 제자들 가운데 열두 사람을 사도로 얼마 전에 임명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충성스러운 지지자들의 우두머리, 아브너의 재촉을 받아서 요한은 그렇게 했다. 이 합동 회의가 있던 첫째 주간 내내, 예수는 길보아 야영지에 있었지만, 마지막 두 주 동안에 자리를 비웠다.
144:6.2 (1624.13) 이 달의 둘째 주가 시작되자 아브너는 동료들을 모두 길보아 야영지에 모았고, 예수의 사도들과 함께 회의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 3주 동안 이 스물네 사람은 하루에 세 번, 한 주에 6일 동안 회의를 가졌다. 첫째 주에 예수는 오전ㆍ오후ㆍ저녁 회의 사이에 그들과 함께 섞였다. 그들은 주가 함께 만나서 합동 회의를 주관하기를 바랐지만, 그는 토론에 참여하기를 굳게 물리쳤다. 하지만 세 번 그들에게 말씀하는 데 찬성했다. 예수가 스물네 사람에게 한 이 연설은 동정심ㆍ협동ㆍ관용에 대한 것이었다.
144:6.3 (1624.14) 안드레와 아브너는 두 사도 집단의 이 합동 회의를 번갈아 주관하였다. 이 사람들은 토론할 어려운 일이 많았고, 수많은 문제를 풀어야 했다. 거듭하여 그들은 문제를 예수에게 가져가곤 했지만, 오직 이런 말씀을 들었다: “나는 오직 너희의 개인적이고 순전히 종교적 문제에만 아랑곳하노라. 나는 개인에게 아버지의 대표요, 집단에게는 아니라. 너희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개인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다면, 내게로 오라. 그러면 너희 말에 귀를 기울이고, 너희 문제를 푸는 데 조언하리라. 그러나 너희가 종교 문제에서 서로 다른 인간적 해석을 조정하고 종교를 사회 조직으로 만드는 일을 시작할 때, 너희는 자신들의 결정에 따라서 모든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도록 운명이 정해졌느니라. 그래도 나는 늘 공감하고 언제나 관심을 가지며, 너희가 모두 찬성한다면, 영적 중요성이 없는 이러한 문제들에 관하여 결론을 내릴 때, 완전히 승인하고 한껏 협동할 것을 내가 미리 서약하노라. 그리고 이제, 너희가 심의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나는 2주 동안 떠나겠노라. 내 걱정을 하지 말지니, 내가 돌아올 것임이라.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으리니 우리가 이 세상 외에 다른 나라들을 가지고 있음이라.”
144:6.4 (1625.1) 이렇게 말한 뒤에, 예수는 산허리로 내려갔다. 그들은 꼬박 2주 동안 그를 더 구경하지 못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이 동안에 무엇을 했는지 결코 알지 못했다. 스물네 사람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들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할 수 있기까지 얼마큼 시간이 걸렸고, 그들은 주가 자리에 계시지 않아서 당황하였다. 그러나 한 주 안에 다시 토론에 열중하였고, 그들은 도움을 청하러 예수에게 갈 수 없었다.
144:6.5 (1625.2) 그 집단이 찬성한 첫째 항목은 예수가 아주 최근에 그들에게 가르친 기도를 채택한 것이다. 이 기도를 두 사도 집단이 신자들에게 가르칠 기도로 받아들일 것을 만장 일치로 투표하였다.
144:6.6 (1625.3) 다음에, 감옥에 있든 풀려나든, 요한이 살아 있는 한, 두 사도 집단이 자체의 할 일을 계속할 것, 그리고 때때로 합의(合意)할 장소에서 석 달마다 한 주 동안 합동 회의를 열기로 결정했다.
144:6.7 (1625.4) 그러나 모든 어려움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세례 문제였다. 예수가 그 주제에 대하여 전에 전혀 발언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어려움은 더군다나 악화되었다. 요한이 살아 있는 한, 아니면 이 결정을 합동으로 수정할 때까지, 오직 요한의 사도들이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오직 예수의 사도들이 마지막에 새 제자들을 가르치기로 마침내 찬성했다. 따라서 그때부터 요한이 죽기까지, 요한의 두 사도가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려고 예수와 그의 사도들을 따라다녔다. 이는 세례가 하늘나라 일과 동맹하는 것을 겉으로 표시하는 첫 걸음이라고 합동 회의가 만장(滿場) 일치로 가결했기 때문이다.
144:6.8 (1625.5) 다음에, 요한이 죽을 경우에 요한의 사도들은 예수 앞에 나타나서 그의 지시에 복종하고 예수나 그의 사도들이 인가하지 않는 한, 더 세례를 주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
144:6.9 (1625.6) 다음에, 요한이 죽을 경우에 예수의 사도들은 신성한 영이 세례를 준다는 표시로, 비로소 물로 세례를 주기로 가결했다. 세례를 외치는 데 회개가 붙어야 하는가 아닌가는 선택이 되도록 두었고 그 집단을 제한하는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요한의 사도들은 “뉘우치고 세례받으라”하고 전도했고, 예수의 사도들은 “믿고 세례받으라”하고 외쳤다.
144:6.10 (1625.7) 이것이 예수의 추종자들이 다양한 노력을 조정하고 의견 차이를 조절하며, 집단의 사업을 조직하고 외관상 관습을 정하며, 개인의 종교적 습관을 사회에 적용시키려고 처음으로 시도한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144:6.11 (1625.8) 다른 사소한 문제들이 많이 고려되었고 그 해결은 만장 일치로 합의를 보았다. 예수가 없이 문제들에 부닥치고 어려움을 수습하도록 강요되었을 때, 이 스물네 사람은 이 2주 동안 참으로 놀라운 체험을 가졌다. 그들은 의견을 달리하고, 토론하고 다투고 기도하고 타협하기를 배웠고, 그동안 내내 다른 사람의 관점에 공감하며, 적어도 정직한 의견에 어느 정도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기를 배웠다.
144:6.12 (1625.9) 재정 문제를 마지막으로 토론하던 날 오후에 예수가 돌아왔다. 그는 심의한 결과를 듣고 결정에 귀를 기울이고 나서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 너희가 결정하였구나. 너희가 합동으로 결정한 그 정신대로 각자 수행하도록 내가 너희를 도우리라.”
144:6.13 (1626.1) 이때부터 2달 반이 되어 요한은 처형되었다. 이 기간 내내 요한의 사도들은 예수와 열두 사도와 함께 남아 있었다.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에서 수고하는 이 기간에, 모두 함께 일하고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길보아 야영은 서기 27년 11월 2일에 걷어치웠다.
144:7.1 (1626.2) 11월과 12월 내내, 예수와 스물네 사람은 데카폴리스의 여러 그리스 풍의 도시에서, 주로 스키토폴리스ㆍ게라사ㆍ아빌라ㆍ가다라에서 조용히 일했다. 이때는 정말로 요한의 일과 조직을 이어받는 예비 기간의 끝이었다. 새로운 계시를 사회에 퍼뜨린 종교는 그것이 구원하고자 하는 기존 종교의 확립된 형식 및 관습과 절충하는 값을 반드시 치른다. 세례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사회에 퍼진 한 종교 집단으로서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들을 흡수하려고 치른 값이었다. 요한의 추종자들은 예수의 추종자들과 합세하면서, 물 세례 외에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144:7.2 (1626.3)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로 가는 이 전도 사업에서 예수는 거의 대중에게 설교하지 않았다. 스물네 사람을 가르치는 데 어지간히 시간을 썼고, 요한의 열두 사도와 함께 많은 특별 회의를 가졌다.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예수가 어째서 감옥에 있는 요한을 찾아보러 가지 않는가, 어째서 그의 석방을 위하여 예수가 아무 노력을 하지 않는가 더욱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째서 예수가 아무런 놀라운 일을 하지 않는가, 어째서 신의 권한을 바깥에 나타내는 표징(標徵)을 보이려 하지 않는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길보아 야영지에 오기 전에 대체로 요한의 증언 때문에 예수를 믿었지만, 자신들이 주와 그 가르침과 접촉한 결과로 곧 믿기 시작했다.
144:7.3 (1626.4) 이 두 달 동안 그 집단은 대체로 짝을 지어 일했다. 예수의 사도들 중에 하나가 요한의 사도 하나와 함께 나갔다. 요한의 사도들은 세례를 주고 예수의 사도들은 가르쳤으며, 한편 알아들은 대로 모두가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했다. 이 이방인들과 신앙을 버린 유대인들 사이에서 많은 사람을 설득했다.
144:7.4 (1626.5) 요한의 사도들 중에 우두머리 아브너는 예수를 열심히 믿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나중에 복음을 전파하라고 주가 임명한 70인 선생의 집단에서 우두머리로 임명되었다.
144:8.1 (1626.6) 12월 후반에 그들 모두가 펠라 가까이 요단강 근처로 가서, 거기서 다시 가르치고 전도하기 시작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복음을 들으려고 이 캠프로 왔다. 예수가 어느 날 오후 군중을 가르치고 있는 동안, 요한의 특별한 친구 몇 사람이 세례자로부터 마지막 소식을 가져왔다.
144:8.2 (1626.7) 요한은 이제 1년 반 동안 감옥에 있었다. 이 기간의 대부분에 예수는 아주 조용히 일했다. 그래서 요한이 하늘나라에 대하여 궁금히 여기게 된 것은 당연하다. 요한의 친구들은 예수가 가르치는 중간에 말씀을 막고 말했다. “당신이 참으로 구원자인가,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찾아야 하는가―세례자 요한이 물어보라고 우리를 보냈나이다.”
144:8.3 (1626.8) 예수는 말씀을 멈추고 요한의 친구들에게 말했다: “돌아가서 요한에게 그를 잊지 않았다고 이르라. 너희가 보고 들은 것, 가난한 자에게 좋은 소식이 전파된다고 이르라.” 요한의 사자들에게 말씀을 더하고 나서, 예수는 다시 군중을 향하여 말했다: “요한이 하늘나라의 복음을 의심한다고 생각지 말라. 오로지 내 제자이기도 한 그의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려고 묻느니라. 요한은 약자가 아니라. 내가 묻노니, 헤롯이 그를 감옥에 가두기 전에 요한이 설교한 것을 누가 들어보았느냐. 요한에게서 너희가 무엇을 보았느냐―바람에 흔들린 갈대이더냐? 변덕스럽고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더냐? 무릇 화려한 옷을 입고 세련되게 사는 자들은 임금의 궁정과 부자들의 저택에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요한을 바라보았을 때 무엇을 보았더냐? 선지자냐? 옳도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훨씬 더 큰 사람이라. 요한에 관하여 기록되었으되, ‘보라, 네 얼굴 앞에 내가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네 앞에서 길을 예비하리라’ 하였느니라.
144:8.4 (1627.1)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일어나지 않았느니라. 그래도 하늘나라에서는 작은 사람도 요한보다 더 크나니, 그가 영에게서 태어났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아는 까닭이라.”
144:8.5 (1627.2) 그날 예수의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려고 나아왔고, 이렇게 하여 하늘나라로 들어간다는 것을 대중 앞에서 공언했다. 요한의 사도들은 그날 이후로 예수와 단단히 결속되었다. 이 일은 요한과 예수의 추종자들이 정말로 뭉쳤음을 표시했다.
144:8.6 (1627.3) 사자들은 아브너와 이야기를 나눈 뒤에, 이 모든 소식을 요한에게 전하려고 마캐루스를 항하여 떠났다. 그는 크게 위로를 받았고, 그의 믿음은 예수의 말씀과 아브너가 준 소식을 받고서 더욱 굳건하게 되었다.
144:8.7 (1627.4) 이날 오후에 예수는 이렇게 말하며 계속 가르쳤다: “그러나 이 세대를 내가 무엇에 견주랴? 너희 중 많은 사람이 요한이 전하는 말도 내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장터에서 노는 어린아이들 같으니 동무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소리쳐 울어도 너희는 슬퍼하지 않았더라.’ 너희 가운데 더러도 마찬가지이라. 요한이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더니, 저희는 그가 악마에 들렸다 하였더라.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니, 바로 이 사람들이 말하되 ‘보라 게걸스레 먹는 자요 술꾼이로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이라!’ 진실로, 지혜가 옳은 것은 결과가 입증하느니라.
144:8.8 (1627.5)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이 진리 중에 얼마큼을 박식하고 거만한 자로부터 감추고 아기들에게는 드러낸 듯 보이리라. 그러나 아버지는 모든 일을 잘 하시니라. 아버지는 스스로 택하신 방법으로 우주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니라. 그러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는 다 오라, 그리하면 너희의 혼이 휴식을 얻으리라. 신이 주는 멍에를 너희가 지라, 그리하면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평안을 너희가 맛보리라.”
144:9.1 (1627.6) 세례자 요한은 서기 28년 1월 10일 저녁에, 헤롯 안티파스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다. 이튿날 마캐루스에 갔던 요한의 제자들 몇이 그가 집행되었다는 말을 듣고 헤롯에게 가서 그의 시체를 요구했으며, 어느 무덤에 두었다가 나중에 세바스티에서, 아브너의 집에서 장례를 치렀다. 이튿날 1월 12일 그들은 북쪽으로 펠라 가까이에 있던 요한과 예수의 사도들의 캠프로 떠났고 예수에게 요한의 죽음에 관하여 일러주었다. 그 보고를 듣자 예수는 군중을 해산하고 스물네 사람을 함께 불러서 말했다: “요한이 죽었도다. 헤롯이 그의 목을 베었더라. 오늘밤 합동 회의를 열고 그에 따라 너희의 일을 정리하여라. 더 지체하지 말라. 하늘나라를 드러내놓고 힘차게 선포할 때가 왔느니라. 내일 우리는 갈릴리로 떠나리라.”
144:9.2 (1627.7) 따라서, 서기 28년 1월 13일 아침 일찍 예수와 사도들은 25명쯤 되는 제자들을 동반하여 가버나움으로 진행했고, 그날 밤 세베대의 집에서 묵었다.
145:0.1 (1628.1) 예수와 사도들은 1월 13일 화요일 저녁에 가버나움에 다다랐다. 여느 때처럼 그들은 벳세다에서 세베대의 집에 본부를 차렸다. 세례자 요한이 처형되었으므로 예수는 갈릴리에서 처음인 공개 대중 전도 여행을 시작하려고 준비했다. 예수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도시에 두루 빨리 퍼졌다. 이튿날 일찍,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서둘러서 나사렛으로 아들 요셉을 찾아보러 떠났다.
145:0.2 (1628.2) 광범위한 첫 대중 전도 여행을 준비하느라고 예수는 수요일ㆍ목요일ㆍ금요일을 세베대의 집에서 사도들을 가르치면서 보냈다. 또한 진지하게 묻는 많은 사람을 하나씩, 그리고 집단으로 받아들이고 가르쳤다. 안드레를 통해서, 다가오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연설하도록 주선해 두었다.
145:0.3 (1628.3) 금요일 저녁 늦게, 예수의 막내 누이 룻이 몰래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물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정박한 배 안에서, 함께 거의 한 시간을 보냈다. 요한 세베대를 제외하고 아무도 이번의 방문을 알지 못했고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부탁을 받았다. 룻은 아주 일찍 영적 의식이 들었을 때부터, 예수의 집안에서, 파란이 많았던 봉사, 그리고 죽음ㆍ부활ㆍ승천을 바로 거치기까지, 땅에서 그의 사명이 신성함을 한결같이 흔들리지 않고 믿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가장인 오라버니가 육체를 입고 행하는 임무의 초자연적 성질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마침내 저 세상으로 갔다. 땅에 있던 그의 가족에 대하여 말하면, 그가 재판받고 버림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벅찬 시련을 통해서 내내, 막내 룻은 예수에게 최고의 위안이 되었다.
145:1.1 (1628.4) 바로 이 주 금요일 아침에 예수가 바닷가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사람들이 물가에 너무 가까이 그를 에워싸서 그는 가까이 있는 배에 타고 있던 어떤 어부들에게 구조(救助)하러 오라고 손짓했다. 배에 들어서서, 그는 모인 군중에게 두 시간이 넘도록 줄곧 가르쳤다. 이 배는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시몬 베드로가 예전에 고기잡이하던 배였고 예수가 손수 이 배를 만들었다. 이 특별한 날 아침에 다윗 세베대와 두 동료가 그 배를 쓰고 있었고, 호수에서 고기잡이하느라고 헛되이 밤을 새다가 물가 가까이로 막 들어왔다. 예수가 도움을 청했을 때, 그들은 그물을 깨끗이 하고 고치고 있었다.
145:1.2 (1628.5)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마친 뒤에 예수는 다윗에게 말했다: “나를 도우려고 와서 너희가 지체되었으니, 내가 너희와 함께 일하리라. 고기를 잡으러 가자. 저쪽 깊은 데로 배를 띄워 그물을 내려서 한 번 끌어당기라.” 그러나 다윗의 조수들 중의 한 사람, 시몬이 대답했다: “주여, 소용 없나이다.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했고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나이다. 그러나 당신이 명령하시니, 우리가 배를 띄워 그물을 내리리이다.” 시몬은 주인 다윗이 손짓했기 때문에 예수의 지시를 따르는 데 찬성하였다. 예수가 가리킨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렸고, 물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서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까 두려웠다. 하도 많아서 물가에 있는 동료들에게 도와달라고 손짓했다. 배 세 척 모두를 거의 가라앉기까지 물고기로 채웠을 때, 이 시몬은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서 말했다. “나를 떠나소서 주여, 나는 죄 많은 사람인 까닭이니이다.” 시몬과 이 사건에 관계된 모든 사람이 얼마나 많이 물고기가 잡혔는가 보고 놀랐다. 그날부터 다윗 세베대와 이 시몬과 그 동료들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145:1.3 (1629.1) 그러나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기적으로 물고기를 잡아올린 것이 아니다. 예수는 자연을 자세히 살피는 연구자였다. 그는 경험 있는 어부였고 갈릴리 바다 물고기의 습성을 알았다. 이 경우에 다만 하루 중 이때에 물고기가 보통 발견되는 곳으로 이 사람들에게 가라고 지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것을 기적으로 여겼다.
145:2.1 (1629.2) 다음 안식일, 회당에서 오후 예배에, 예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관하여 설교했다. 아침에는 시몬 베드로가 “하늘나라”에 대하여 설교했다. 그전에 회당의 목요일 저녁 모임에서는 안드레가 가르쳤고, 그의 주제는 “새 길”이었다. 이 특별한 시기에, 땅에서 다른 어느 도시보다 가버나움에서 더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
145:2.2 (1629.3) 이 안식일 오후에 회당에서 가르치면서, 예수는 관습대로 처음 구절을 율법에서 골라서, 출애굽기로부터 읽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을 섬기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의 빵과 물에 복을 내리겠고, 모든 병이 너희에게서 물러가리라.” 예언서에서 둘째 구절을 골라서, 이사야에서부터 읽었다: “일어나서 빛을 내라, 이는 네 빛이 다가왔고 주의 영광이 네 위에 이르렀음이라. 어둠이 땅을 덮고 큰 어둠이 사람들을 덮을지 모르나, 주의 영이 네 위에 이르겠고 신의 영광이 너와 함께 하심이 보이리라. 이방인들조차 이 빛으로 다가오고, 많은 위대한 사람이 이 빛이 밝은 것에 항복할지니라.”
145:2.3 (1629.4) 이 설교는 예수 편에서 종교가 개인적 체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려는 노력이었다. 다른 여러 가지 가운데 주는 말씀했다:
145:2.4 (1629.5) “너희가 잘 알다시피, 마음이 친절한 아버지는 가족 전체를 사랑하며, 한 무리로서 그렇게 여기는 것은 그 가족의 식구 하나하나를 깊이 사랑하는 까닭이라. 너희는 이제 더 이스라엘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가까이 가야 하느니라. 한 무리로서 너희는 정말로 이스라엘의 자손이지만, 개인으로서 너희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자식이라. 아버지를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을 가져오고, 개인적으로 겪는 진정한 체험으로서 개별 신자에게 그의 사랑과 자비를 계시하려고, 내가 왔노라. 야웨가 그의 민족을 보살피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한다고 선지자들이 다 너희를 가르쳤느니라. 그러나 더욱 큰 진리를 선포하려고 내가 너희 사이에 왔나니 하나님이 너―너희 하나하나―를 개인으로서 사랑한다는 이 진리를 많은 후기 선지자가 또한 깨달았느니라. 이 모든 세대에 걸쳐서 너희는 민족이나 종족의 종교가 있었으나 이제 너희에게 개인적 종교를 주려고 내가 왔노라.
145:2.5 (1630.1) “그러나 이것조차도 새로운 생각이 아니라. 선지자들 중에 더러가 그렇게 너희에게 가르쳤은즉, 너희 사이에 영적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이 이 진리를 알았느니라. 성서에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렇게 이르는 것을 너희가 읽지 아니하였느냐? ‘그 시절에 저희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되 아이들의 이가 시다고 사람들이 더 말하지 않으리라. 사람마다 자신의 불의(不義) 때문에 죽을 것이요, 신 포도를 먹는 사람은 누구나 이가 시리라. 보라, 내가 내 민족과 새 언약을 맺는 날이 이르리니, 내가 에집트 땅에서 저희의 조상을 데리고 나올 때 저희와 약속한 대로가 아니라 새 방법을 따르리라. 나는 내 율법을 저희의 가슴 속에 쓰기까지 하리라. 나는 저희의 하나님이 되겠고 저희는 내 민족이 될지니라. 그날에 한 사람이 이웃에게, 네가 주를 아느냐? 하고 말하지 않으리라. 아니라! 이는 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저희가 모두 나를 개인적으로 알게 될 것임이라.’
145:2.6 (1630.2) “이 약속을 너희가 읽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성서(聖書)를 믿지 아니하느냐? 선지자의 말씀이 바로 오늘날 너희가 바라보는 것 중에 이루어졌음을 깨닫지 못하느냐? 종교를 마음의 일로 만들고, 바로 너희가 하나님께 개인으로서 이야기하라고 예레미야가 너희에게 훈계하지 않더냐? 하늘의 하나님은 너희 개인의 마음을 훑어보리라고 그 선지가 너희에게 이르지 않더냐? 인간의 타고난 마음은 무엇보다도 속이는 성향이 있고, 때때로 지독하게 사악하다고 너희가 경고를 받지 아니하였느냐?
145:2.7 (1630.3) “종교가 너희 개인의 체험에서 현실이 되어야 한다고 에스겔이 바로 너희 조상에게 가르친 구절을 또한 읽지 아니하였느냐?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더니 아이들의 이가 시더라’하는 속담을 너희가 이제 더 사용하지 아니하리라. 주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내가 살아 있다시피, 보라 모든 혼이 내 것이로다, 아버지의 혼처럼 아들의 혼도 마찬가지라. 오직 죄짓는 혼이 죽을지니라.’ 그리고 나서 에스겔은 오늘날까지도 내다보았으니, 그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했더라: ‘내가 또한 새로운 마음을 너희에게 줄 것이요, 새 영을 너희 안에 두리라.’
145:2.8 (1630.4) “한 사람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한 민족을 벌하리라고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한 민족이 지은 죄 때문에 믿는 자녀들 중에 한 사람을 벌하지도 아니하리라. 하지만 어떤 가족의 개별 식구도 가족의 잘못과 집단의 범죄로 생기는 물질적 결과를 흔히 겪어야 하느니라. 더 좋은 나라가―더 좋은 세상이―올 희망은 개인의 진보와 깨우침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지 못하느냐?”
145:2.9 (1630.5) 그 다음에 사람이 이 영적 자유를 깨달은 뒤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뜻하는 것은 땅에 있는 자녀들이 파라다이스로 영원히 올라가는 생애를 시작하는 것이라고 주는 묘사했다. 이 생애는 창조자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알고 그와 같이 되려고 애쓰라는, 깃드는 영의 신성한 재촉에 사람이 의식하여 반응하는 것이다.
145:2.10 (1630.6) 사도들에게 이 설교는 크게 도움이 되었다. 모두가 하늘나라의 복음이 민족이 아니라 개인에게 전하는 소식임을 아주 충분히 깨달았다.
145:2.11 (1630.7)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익숙하기는 했어도, 이 안식일에 하신 설교를 듣고 놀라워했다. 그는 정말로, 서기관이 아니라 권한을 가진 자로서 가르쳤다.
145:2.12 (1630.8) 예수가 말씀을 막 마쳤을 때, 회중 가운데 말씀에 아주 흥분한 어느 젊은이가 사나운 간질병으로 발작이 일어나 크게 소리쳤다. 발작이 끝났을 때, 정신을 차리면서 꿈 같은 상태에서 말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요, 당신은 우리를 죽이러 왔나이까?” 예수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 명하고, 젊은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 “정신을 차려라”―그리고 그는 즉시 깨어났다.
145:2.13 (1631.1) 이 젊은이는 더러운 귀신이나 악마에 들려 있지 않았다. 평범한 간질로 고생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기의 질병이 악한 귀신에 들렸기 때문이라고 가르침을 받아왔다. 그는 이 가르침을 믿었고, 자기 병에 관하여 생각하고 말한 모든 것을 믿었던 대로 행동하였다. 사람들은 더러운 귀신들이 들어가 그런 현상을 직접 일으킨다고 모두 믿었다. 따라서 예수가 이 사람한테서 악마를 내쫓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때 예수는 그 간질을 고치지 않았다. 이 사람은 그날 조금 뒤에 해가 질 때까지 정말로 고침을 받지 않았다. 오순절(五旬節) 날이 오래 지난 뒤에, 예수의 행적을 마지막으로 기록한 사도 요한은 이른 바 “악마를 내쫓는” 이 행적에 대하여 전혀 언급을 피했고, 악마에 들린 그런 경우가 오순절 뒤에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사실에 비추어 그렇게 했다.
145:2.14 (1631.2) 이 평범한 사건의 결과로, 회당에서 오후 설교를 마쳤을 때 예수가 한 사람에게서 악마를 쫓아냈고 기적으로 그를 고쳤다는 보고가 가버나움을 통해서 빨리 퍼졌다. 안식일은 그런 깜짝 놀랄 헛소문이 빠르게 효과적으로 퍼지기에 꼭 맞는 때였다. 이 보고는 또한 가버나움 둘레의 모든 작은 촌락까지 전해졌고, 많은 사람이 이를 믿었다.
145:2.15 (1631.3) 예수와 열두 사도가 본부를 두었던 세베대의 큰 집에서, 음식 만드는 일과 집안 일은 대체로 시몬 베드로의 아내와 장모가 맡아서 하였다. 베드로의 집은 세베대의 집 가까이에 있었다. 예수와 친구들은 회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집에 들렸는데, 베드로의 장모가 몸이 떨리고 열이 나서 며칠 동안 아팠기 때문이었다. 예수가 서서 이 아픈 여인을 내려다보고, 손을 만지고 이마를 쓰다듬으며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씀을 할 때쯤에, 어쩌다가 열이 떨어졌다. 예수는 회당에서 아무런 기적(奇蹟)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사도들에게 설명할 겨를이 아직 없었다. 이 사건이 머리 속에 아주 새롭고 눈에 선하였고, 가나에서 있었던 물과 포도주를 상기하면서 그들은 이 우연을 또 하나의 기적이라고 잡아챘고 몇 사람은 달려나가서 도시 전역에 널리 그 소식을 퍼뜨렸다.
145:2.16 (1631.4) 베드로의 장모 아마타는 말라리아 열병을 앓고 있었다. 이때 예수에게 기적으로 치유받지 않았다. 세베대의 집 앞뜰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과 관련하여, 그 여자가 고침받은 것은 해가 지고 나서 몇시간 더 지난 뒤였다.
145:2.17 (1631.5) 이 사례들은, 이적을 찾는 세대와 기적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모든 그런 우연의 일치를 예수가 또 하나의 기적을 행했다고 선포하는 구실로 어김없이 이용하는 방식의 전형(典型)이다.
145:3.1 (1631.6) 예수와 사도들이 사건이 많았던 이 안식일이 저물 무렵에, 저녁을 먹으려고 준비할 때가 되자 온 가버나움과 그 주위는 기적으로 병을 고쳤다는 이 소문으로 시끌벅적했다. 바로 해가 지자마자, 아프거나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 예수에게 가거나, 친구들에게 몸을 실어 나르게 하려고 준비를 시작했다. 유대인의 가르침에 따르면, 거룩한 안식일 동안에는 병 고침을 추구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145:3.2 (1632.1) 따라서 해가 지평선 밑으로 가라앉자마자, 병든 남녀와 아이들 수십명이 벳세다의 세베대 집을 향하여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해가 이웃 집 뒤로 지자마자, 중풍이 든 딸과 함께 길을 떠났다.
145:3.3 (1632.2) 그날 하루 종일 있었던 사건들이 이 놀라운 해질녘의 장면을 위하여 무대를 마련했다. 오후의 설교에 예수가 이용한 구절조차 질병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했다. 그는 그러한 전례 없는 힘과 권한을 가지고 말씀했다! 그의 말씀은 사람을 사로잡았다! 아무런 인간적 권위로 호소하지 않았어도 사람들의 양심과 혼에게 직접 말했다. 논리나 율법의 말씨름이나 재치 있는 말을 이용하지 않았어도 듣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힘차게 직접, 뚜렷하게 개인적으로 호소했다.
145:3.4 (1632.3) 그 안식일은 예수가 땅에서 산 생애에서, 옳거니, 한 우주의 역사에서 대단한 날이었다. 지역 우주의 모든 계획과 목적으로 볼 때, 작은 유대 도시 가버나움은 네바돈의 참 서울이었다. “미움은 두려움의 그림자요 복수는 비겁을 감추는 가면이라”는 말씀, 예수의 설교에서 중대한 끝맺는 말씀을 들은 존재들은 가버나움 회당에 있었던 유대인 몇 사람만이 아니었다. 청중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악마의 자녀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복된 말씀을 잊을 수도 없었다.
145:3.5 (1632.4) 해가 진 뒤에 곧, 예수와 사도들이 아직 저녁상 근처에 남아 있었는데, 베드로의 아내가 앞뜰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를 들었다. 문까지 가면서 큰 무리의 아픈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 가버나움에서부터 예수의 손에서 병 고침을 받으려고 오고 있는 사람들로 길이 메어진 것을 보았다. 이 광경을 보고 나서 그 여자는 대번에 남편에게 가서 일렀고 남편은 예수에게 알렸다.
145:3.6 (1632.5) 세베대의 집 앞문에서 한 걸음 내디디었을 때, 주는 줄지어 선 사람들, 병들고 고통받는 인류를 보았다.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 거의 1천 명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그만큼의 사람들이 주 앞에 모여들었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몸이 아프지는 않았다. 더러는 그들이 아끼는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으려고 이렇게 애쓰는 것을 도우려고 왔다.
145:3.7 (1632.6) 대체로, 자신이 신뢰했던, 우주 행정을 담당한 아들들의 잘못과 그릇된 행동의 결과로서 고통받는 이 사람들, 어른과 아이들의 모습은, 특별히 예수의 인간 마음을 움직였고 이 인자한 창조 아들의 신다운 자비로움에 도전했다. 하지만 예수는 순전히 물질적 기적(奇蹟)에 기초를 두고 오래 가는 영적 운동을 결코 추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창조자 특권 드러내기를 삼가는 것이 그의 일관적 정책이었다. 가나 이후에 초자연적인 일이나 기적 같은 일이 그의 가르침을 따라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고통받는 이 군중은 그의 동정심을 움직였고 이해심을 가진 그의 사랑에 힘차게 호소했다.
145:3.8 (1632.7) 앞뜰에서 한 사람이 외쳤다: “주여, 말씀을 하시고 우리의 건강을 되찾아주소서, 우리의 병을 고치고 우리의 혼을 구원하소서!”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육신이 된 이 우주 창조자를 항상 따라다니던 세라핌, 물력 통제자, 생명 운반자, 중도자들로 이루어진 방대한 수행원들이, 군주가 신호(信號)를 내릴 경우에 창조 능력으로 행동하려고 준비했다. 예수의 지상 생애에서, 신의 지혜와 인간의 동정심이 사람의 아들의 판단 속에 서로 얽혀서, 아버지의 뜻에 호소함으로 피난처를 찾은 순간이었다.
145:3.9 (1632.8) 도와달라고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베드로가 주께 애원했을 때, 예수는 병든 무리를 내려다보고 대답했다. “나는 아버지를 드러내고 그의 나라를 세우려고 세상에 왔고, 이 목적을 위하여 내가 이 시간까지 생애를 살아 왔노라. 그러므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이라면, 그리고 하늘나라 복음의 선포에 헌신하는 것과 어긋나지 않는다면 내 아이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을 보고 싶노라― 그리고―” 그러나 더 하신 말씀은 떠들썩한 가운데 파묻혔다.
145:3.10 (1633.1) 예수는 병 고치는 이 결정의 책임을 아버지의 판결에 넘겼다. 분명하건대, 아버지는 아무런 반대할 뜻을 보이지 않았으니, 주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인격이 된 예수의 조절자의 지휘 하에서 수고하는 하늘 성격자 집단이 힘차게 술렁거렸기 때문이다. 병든 필사자들이 뒤섞인 이 무리 사이에 방대한 수행원들이 내려왔으며, 한 순간에 어른과 아이들 683명이 온전하게 되었고 모든 육체의 병과 기타 물질적 질환을 완전히 고침받았다. 그날 이전이나 이후에, 결코 그런 장면을 땅에서 구경한 적이 없었다. 병을 고치는 이 창조적 물결을 구경하려고 자리에 있던 우리에게, 이것은 정말로 가슴 떨리는 광경이었다.
145:3.11 (1633.2) 그러나 갑작스럽고 기대하지 않았던 초자연적 치유가 이렇게 일어난 데 놀란 모든 존재 가운데 예수가 가장 놀랐다. 인간적 관심과 동정심이 그 앞에 펼쳐진 고통과 질병의 장면에 집중된 순간에, 어떤 조건과 어떤 상황 아래서, 창조 아들의 창조 특권에서 시간 요소를 제한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인격화된 조절자가 타일러 경고한 것을 그의 인간 정신은 미처 기억하지 못했다. 예수는 이렇게 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어기지 않는다면 이 고통받는 필사자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인격이 된 예수의 조절자는 그때 그런 창조적 에너지 행위는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을 어기지 않으리라고 순식간에 판결했다. 그런 결정에 따라서―병 고치려는 소망을 예수가 앞서 표현한 데 비추어―그 창조 행위는 이미 일어났다. 창조 아들이 바라고 아버지가 뜻하시는 것은 이미 존재한다. 그 뒤에 예수가 땅에서 산 여생 동안 내내, 그렇게 집단으로 필사자의 육체를 치유한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145:3.12 (1633.3) 너희가 혹시 기대할까 싶지만, 가버나움의 벳세다에서 해질 때 이렇게 사람들을 고쳤다는 소문은 온 갈릴리와 유대에 두루, 그리고 그 지역을 지나서 퍼졌다. 다시 한 번 헤롯은 두려워졌고,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에 대하여 보고하고 그가 이전의 나사렛 목수인가 아니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세례자 요한인가 확인하라고 감시자들을 보냈다.
145:3.13 (1633.4) 육체의 치유를 뜻하지 않게 이렇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주로, 이때부터 땅에서 여생 동안 내내, 예수는 설교자일 뿐 아니라 의사가 되었다. 계속 가르친 것이 참말이지만, 몸소 한 일은 대체로 병자와 쇠약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이었고, 한편 사도들은 대중에게 설교하고 신자들에게 세례 주는 일을 했다.
145:3.14 (1633.5) 그러나 해질 때 신의 에너지가 전시되었을 때 초자연이나 창조의 힘으로 육체의 병을 고침받은 사람들의 대다수는, 특별한 자비가 이렇게 나타난 것에 영구하게 영적 소득을 얻지 못했다.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이 육체적 보살핌으로부터 참으로 교훈을 받았지만, 시간을 초월한 창조적 치유가 이렇게 놀랍게 일어난 것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영적인 나라가 진보하지는 않았다.
145:3.15 (1633.6) 땅에서 예수의 사명에 이따금 따랐던 병 고치는 이적(異蹟)들은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그의 계획의 일부가 아니었다. 전례 없이 신의 자비와 인간의 동정심이 결합되는 것과 관련하여, 거의 한없는 창조자 특권을 가진 신다운 존재를 땅에 계시게 할 때 본래부터 이러한 이적들이 우연히 따르게 된다. 그러나 편견을 일으키는 명성과 구하지 않던 나쁜 평판을 많이 안겨주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이른바 기적들은 예수에게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145:4.1 (1634.1) 이 병 고치는 사건이 크게 터지고 나서 저녁 내내, 기쁘고 즐거운 군중이 세베대의 집에 밀어닥쳤고, 예수의 사도들은 흥분의 절정에 이르렀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이날은 아마도 예수와 함께 지냈던 동안에 모든 좋은 날 중에서도 가장 좋은 날이었다. 그전이나 그후 어느 때에도 사도들의 희망이 자신 있게 기대하는 그런 경지(境地)까지 솟아오르지 않았다. 겨우 며칠 전에, 그리고 아직 사마리아 경계 안에 있을 때, 예수는 그들에게 하늘나라가 권능으로 선포될 때가 다가왔다고 일렀고, 그 약속의 성취라고 생각되는 것을 이제 눈으로 보았다. 치유하는 힘이 이렇게 놀랍게 나타난 것이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하는 환상으로 그들은 몸이 부르르 떨렸다. 예수가 신인가에 대하여 남았던 의심은 사라졌다. 그들은 글자 그대로, 어리둥절한 가운데 황홀한 기쁨에 취했다.
145:4.2 (1634.2) 그러나 그들이 예수를 찾았을 때, 그는 눈에 띄지 않았다. 주는 벌어진 일 때문에 마음이 많이 언짢았다. 여러 가지 병을 고침받은 이 어른과 아이들은 저녁 늦게까지 남아 있었고 감사의 말씀을 드릴까 하여 예수가 돌아오기를 바랐다. 시간이 지나고 예수가 은둔해 있자 사도들은 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계속 자리를 비우지만 않았다면, 그들의 기쁨은 충만하고 완벽했을 것이다. 예수가 돌아왔을 때, 시간이 늦었고 병 고치는 사건으로 혜택받은 거의 모든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예수는 열두 사도, 그리고 그에게 인사하려고 남아 있던 다른 사람들의 축하와 찬미를 물리치고, 오직 말했다: “내 아버지가 몸을 고칠 힘이 있다고 기뻐하지 말고, 오히려 혼을 구원할 힘이 있음을 기뻐하여라. 쉬러 가자, 내일 우리는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함이라.”
145:4.3 (1634.3) 또 다시, 실망하고 당황하고 슬픈 열두 사람은 쉬러 갔다. 쌍둥이를 빼고, 거의 아무도 그날 밤에 별로 눈을 붙이지 못했다. 사도들의 기운을 북돋우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무슨 일을 하자마자, 주는 즉시 그들의 희망을 박살내고 용기와 열심의 근거를 샅샅이 파괴하는 듯하였다. 어리둥절한 이 어부들이 서로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 오직 한 가지 생각 뿐이었다: “그를 이해할 수 없구나. 이 모두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145:5.1 (1634.4) 예수도 그 토요일 밤에 잠을 많이 자지 못했다. 세상이 육체의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물질적 어려움이 넘쳐흐르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영적 나라를 세우는 사명이, 육체적인 것을 보살피는 데 방해받거나, 아니면 적어도 예속되기까지 병자와 고통받는 자를 돌보는 일에 시간을 아주 많이 바치도록 강요 당하는 큰 위험을 숙고해보았다. 그날 밤에 예수의 인간 정신을 차지한 이 생각, 그리고 비슷한 생각들 때문에, 그는 날이 새기 오래 전,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아버지와 교통하려고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한 곳으로 혼자서 갔다. 이 이른 아침에 예수가 기도한 주제(主題)는, 필사자의 고통을 직면하여 영적인 것을 소홀히 하면서 육체적으로 봉사하는 일이 그의 시간을 모두 차지하도록 그렇게 신의 자비와 인간적 동정심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지혜와 판단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비록 병자 돌보는 일을 완전히 피하기를 바라지는 않았어도, 그는 또한 영적 가르침과 종교 훈련과 같은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145:5.2 (1635.1) 개인적으로 예배하기에 적당한 혼자 쓸 방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는 아주 여러 번 산으로 기도하러 나갔다.
145:5.3 (1635.2) 베드로는 그날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가 기도하러 나간 뒤에 즉시, 야고보와 요한을 깨웠고 세 사람은 주를 찾으러 갔다. 한 시간이 넘도록 찾다가 예수를 찾아냈고 그가 이상하게 행동하는 까닭을 설명해달라고 청하였다. 모든 사람이 기쁨에 넘쳐 있고 사도들이 대단히 기뻐하며, 치유하는 영이 힘차게 퍼부어진 것이 그를 불편하게 만든 듯이 보이는데 어째서 그런가 알고 싶어 했다.
145:5.4 (1635.3) 네 시간이 넘도록 예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 세 사도에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가르치고 그러한 전시의 위험을 설명했다. 그는 기도하러 나온 까닭을 그들에게 털어놓았다. 어째서 아버지의 나라가 이적을 행하고 육체를 치유하는 데 기초를 두고 세워질 수 없는가 하는 참 이유를 동료들에게 분명히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었다.
145:5.5 (1635.4) 그동안, 일요일 아침 일찍, 병을 앓는 다른 사람들의 무리와 호기심으로 찾아오는 많은 사람이 세베대의 집 근처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수를 만나려고 떠들썩했다. 안드레와 사도들은 너무 당황해서, 열심당원 시몬이 모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안드레는 몇몇 동료와 함께 예수를 찾으러 갔다. 세 사람과 함께 있는 예수를 찾아냈을 때, 안드레는 말했다: “주여, 당신은 어째서 우리만 군중과 함께 있도록 두시나이까? 보소서, 모든 사람이 당신을 찾나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당신의 가르침을 찾은 적이 전에 없었나이다. 지금도 당신이 하신 막강한 일 때문에, 가까이서 멀리서 온 사람들로 집이 둘러싸였나이다. 우리와 함께 저희를 보살피러 돌아가지 않겠나이까?”
145:5.6 (1635.5) 이 말을 듣자 예수는 대답했다: “안드레야, 땅에서 내 사명은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이요, 내가 전할 말은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너와 이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가르치지 않더냐? 그렇다면, 호기심 있는 자를 충족시키고, 징조와 이적 찾는 자를 만족시키려고 네가 나로 하여금 내 일을 제쳐놓게 하고 싶어 하다니 어인 일이냐? 이 몇 달 동안 내내 이 사람들 사이에 우리가 있지 않았더냐,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을 들으려고 저희가 무리를 지어 모였느냐? 어찌하여 저희가 와서 지금 우리를 둘러싸느냐? 저희가 혼의 구원을 받으려고 영적 진리를 받아들인 결과가 아니라 육체의 치유 때문이 아니냐? 특별한 전시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에게 끌릴 때, 저희 가운데 많은 사람은 진리와 구원을 찾으러 오지 않고, 오히려 육체의 병을 고침받고 물질적 문제에서 구원을 받으려고 오는 것이라.
145:5.7 (1635.6) “여태까지 내가 가버나움에 있었고, 회당에서, 바닷가에서, 들을 귀가 있고 진리를 받을 마음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였노라. 호기심 있는 이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영적인 것을 제쳐놓고 육체의 일을 보살피는 데 바빠지려고 너와 함께 돌아가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아픈 자를 보살피라고 내가 너희를 세웠으나, 내 가르침을 제쳐놓기까지 병 고치는 일에 내가 파묻혀서는 안 되느니라. 안드레야, 아니라 나는 너와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에게 가서, 우리가 저희에게 가르친 것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 됨으로 얻은 자유를 기뻐하라 이르라. 그리고 갈릴리의 다른 여러 도시를 향하여 우리가 떠날 준비를 하여라. 거기에는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길이 준비되어 있느니라. 이 목적을 위하여 내가 아버지로부터 왔노라. 그러면 여기서 네가 돌아오기를 내가 기다리는 동안, 가서 즉시 떠날 준비를 하여라.”
145:5.8 (1636.1) 예수가 말씀하고 나자, 안드레와 동료 사도들은 슬픔에 잠겨 세베대의 집으로 돌아가서 모인 군중을 해산하였고, 예수가 지시한 대로 여행을 위하여 재빨리 준비했다. 그래서, 서기 28년 1월 18일 일요일 오후에, 예수와 사도들은 갈릴리의 여러 도시에서 처음으로 정말로 공개된 대중 전도 여행을 떠났다. 이 첫번째 여행을 하면서 여러 도시에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도했지만 나사렛에 들리지는 않았다.
145:5.9 (1636.2) 그 일요일 오후에, 예수와 사도들이 림몬을 향하여 떠난 뒤에 조금 있다가, 아우 야고보와 유다가 그를 만나러 왔고 세베대의 집에 들렸다. 그날 한낮 무렵에 유다는 형 야고보를 찾아다녔고 같이 예수한테로 가자고 졸랐다. 야고보가 유다와 함께 가기로 찬성했을 때가 되자 예수는 이미 떠나버렸다.
145:5.10 (1636.3) 사도들은 가버나움에서 크게 관심을 휘저어 놓고 떠나기가 싫었다. 베드로는 1천 명 이상의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어 하늘나라로 들여보낼 수 있었다고 계산했다. 예수는 참을성 있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지만, 돌아가는 데 찬성하려 하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나서 토마스가 동료 사도들에게 말했다. “가자! 주가 말씀하셨느니라. 하늘나라의 신비(神秘)를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없어도 상관 없으니, 우리가 한 가지는 확실하니라.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아무 영광을 찾지 않는 선생을 따르노라.” 마지못해서 그들은 갈릴리의 여러 도시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떠났다.
146:0.1 (1637.1) 갈릴리 지방을 도는 첫 대중 전도 여행은 서기 28년 1월 18일 일요일에 시작되어 약 두 달 동안 이어졌고, 3월 17일에 가버나움으로 돌아와서 끝을 맺었다. 이 여행에서 예수와 열두 사도는 요한의 옛 사도들의 도움을 받아서, 림몬ㆍ요타파타ㆍ라마ㆍ스불론ㆍ이론ㆍ기스칼라ㆍ코라진ㆍ마돈ㆍ가나ㆍ나인ㆍ엔도르에서 복음을 전하고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여러 도시에서 묵고 가르쳤으며, 한편 많은 다른 작은 마을을 지나면서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였다.
146:0.2 (1637.2) 이번에 처음으로 예수는 동료들에게 자유롭게 전도하라고 허락하였다. 이 여행에서 오직 세 가지 경우에만 주의를 주었다. 나사렛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가버나움과 티베리아스를 지나갈 때 조심하라고 타일렀다. 마침내 제한 없이 마음대로 전도하고 가르친다고 느낀 것은 사도들에게 큰 만족의 근원이었다. 그들은 복음 전하는 일에 투신했고, 대단한 열심과 기쁨으로 아픈 자를 보살피고 믿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
146:1.1 (1637.3) 작은 도시 림몬은 한때 바빌로니아의 공기(空氣)의 신 람만을 모시었다. 옛 바빌로니아와 후일 조로아스터의 가르침 가운데 많은 것이 아직도 림몬 사람들의 관념에 담겨 있었다. 따라서 예수와 스물네 사람은 이 옛 신앙과 새로운 하늘나라 복음의 차이를 설명하는 과제에 시간을 많이 썼다. “아론과 금 송아지”에 대하여, 베드로는 초기 경력 중에서 큰 설교 하나를 여기서 했다.
146:1.2 (1637.4) 림몬의 많은 시민이 예수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이 되었으나 후일에 신자들에게 큰 문제를 일으켰다. 짧은 일생 동안에 자연 숭배자들을 영적 이상을 찬미하는 완전한 단체로 바꾸기는 어렵다.
146:1.3 (1637.5)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에 있던 빛과 어둠, 선과 악, 시간과 영원에 관한 많은 상급 관념은 나중에 이른바 기독교 교리 안에 흡수되었고 이를 포함한 것은 근동의 민족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더 쉽사리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나중에 필로가 히브리 신학에 맞게 조정한 바와 같이, 이상적 정신, 즉 눈에 보이고 물질적인 만물의 보이지 않는 원본에 대한 플라톤의 이론(理論)을 집어넣은 것은 바울의 기독교 가르침을 서쪽의 그리스인이 더 받아들이기 쉽게 만들었다.
146:1.4 (1637.6) 림몬에서 토단이 처음으로 하늘나라의 복음을 들었다. 그는 나중에 메소포타미아로, 또 거기를 훨씬 지나서 이 소식을 가져갔다. 그는 유프라테스를 지나서 사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처음으로 전한 사람들에 속했다.
146:2.1 (1638.1) 요타파타의 서민들은 예수와 사도들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고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요타파타 전도 임무에서 특별한 것은 이 작은 마을에서 머무른 둘째 날 저녁에, 예수가 스물네 사람에게 강론하신 것이었다. 나다니엘은 기도ㆍ감사ㆍ예배에 관한 주의 가르침에 머리가 헛갈렸다. 그의 물음에 대답하여 예수는 가르침을 연장하여 설명하느라고 길게 말씀하였다. 현대의 표현으로 요약하면 이 강론은 다음 몇 가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발표할 수 있다:
146:2.2 (1638.2) 1.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의식하며 불의(不義)를 끈질기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과 창조주 사이에, 인간의 혼이 영적 통신 회로와 기도(祈禱)로 연락하는 길을 차츰차츰 파괴한다. 하나님은 자연히 자식의 간청을 듣지만, 인간의 마음이 일부러 끈질기게 불의한 생각들을 품고 있을 때, 땅에 있는 아이와 하늘 아버지 사이에 개인적 교통이 차츰차츰 줄어든다.
146:2.3 (1638.3) 2. 알려지고 확정된 하나님의 법칙에 어긋나는 기도는 파라다이스 신들에게 지긋지긋한 것이다. 신들이 영ㆍ정신ㆍ물질의 여러 법칙에 따른 창조에게 말씀하실 때, 사람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으면, 지음받은 자가 그렇게 일부러 의식하여 멸시하는 바로 그 행위는, 법을 무시하고 복종하지 않는 그런 필사자의 개인적 간청을 영 성격자들이 듣지 않고 멀리하게 만든다. 예수는 사도들에게 선지자 스가랴를 인용했다. “저희가 듣기 싫어하여 등을 돌리고,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더라. 옳도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내 영이 보낸 내 율법과 말씀을 들을까 저어하여 저희는 돌처럼 마음을 굳게 하였더라. 그러므로 악한 생각의 결과가 저희의 죄 지은 머리 위에 큰 진노로 내렸더라. 그래서 저희가 자비를 외쳤어도 들을 귀가 하나도 없게 되었느니라.” 그리고 나서 예수는 이렇게 말한 현자의 잠언을 인용했다: “신의 율법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돌리는 자에게는, 그 기도조차 지긋지긋한 것이 될지니라.”
146:2.4 (1638.4) 3. 하나님과 사람이 교통하는 경로에서 인간 쪽을 열어놓으면 여러 세계의 사람들에게 베푸는, 항상 쏟아지는 신의 봉사의 흐름을 필사자는 즉시 이용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영이 말씀하는 것을 들을 때, 그런 체험에는 하나님이 동시에 그 사람의 기도에 귀를 기울인다는 사실이 저절로 생긴다. 죄의 용서조차도 어김없이 바로 이 모습으로 작용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네가 구하려고 생각하기도 전에 너를 용서했다. 그러나 동료 인간을 용서할 때까지 그런 용서는 너 개인의 종교적 체험에서 소용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용서(容恕)가 네가 동료를 용서하는 데 달려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용서를 체험하는 것은 꼭 그렇게 조건을 받는다. 이처럼 신과 인간의 용서가 동시에 일어나는 이 사실은 예수가 사도들에게 가르친 기도에서 인식되고 서로 연결되었다.
146:2.5 (1638.5) 4. 우주에는 자비가 피해 갈 힘이 없는 기본적 응보의 법칙이 있다. 시간과 공간의 영역에서 철저히 이기적인 사람은 파라다이스의 사심(私心) 없는 영광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조차, 살아남기를 선택하지 않는 어떤 필사 인간에게도 영원히 살아남는 구원을 강제로 줄 수 없다. 자비를 베푸는 범위는 넓지만, 결국 자비가 섞인 사랑조차 실질로 취소할 수 없는 응보의 명령이 있다. 다시 예수는 히브리 성서를 인용했다: “내가 불렀어도 너희는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뻗었어도 거들떠보는 자가 없었도다. 너희는 나의 조언을 모두 무시하고 내 책망을 물리쳤으며 이런 모반하는 태도로 인하여 피할 수 없이, 너희가 나를 불러도 대답을 얻지 못하느니라. 생명의 길을 물리쳤으매, 너희가 고통받을 때 나를 부지런히 찾을까 싶으나 나를 찾아내지 못하리라.”
146:2.6 (1639.1) 5. 자비를 받고자 하는 자는 자비를 보여야 한다. 판단을 받지 않도록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그 정신으로 너희가 또한 판단을 받을지니라. 자비는 우주의 공평(公平)을 완전히 지워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마지막에는 참인 것이 판명되리라, “가난한 자가 외치는 소리에 귀를 막는 자는 누구나, 또한 언젠가 도움을 외치겠으나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리라.” 진지한 기도는 하나님이 귀를 기울임을 보장한다. 어떤 간구라도 거기에 담긴 영적 지혜와 우주적 일관성이 그 대답이 언제, 어떻게, 어느 만큼 오는가 결정하는 요인이다. 지혜로운 아버지는 무지하고 경험 없는 자녀들의 어리석은 기도를 글자 그대로 들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터무니없는 간청을 드림으로 아이들은 많은 기쁨과 혼의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도 있다.
146:2.7 (1639.2) 6.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온전히 몸을 바쳤을 때, 너희의 모든 간구에 대하여 응답이 다가오리니, 너희의 기도가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따른 것이요 아버지의 뜻은 광대한 우주에 두루, 늘 명백하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아들이 바라고 무한한 아버지가 뜻하는 것은 실재한다. 그런 기도는 응답받지 않을 수 없으며 다른 어떤 종류의 간구도 도저히 충분히 응답받을 수 없다.
146:2.8 (1639.3) 7. 올바른 자의 외침은 하나님의 자녀가 보이는 믿음의 행위이다. 이 믿음의 행위는 선ㆍ진리ㆍ자비로 가득 찬 아버지의 창고 문을 열며, 이 좋은 선물은 아들이 다가와서 손수 쓰라고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기도는 사람을 대하는 신의 태도를 바꾸지 않지만, 변함없는 아버지를 향하는 사람의 태도를 바꾼다. 기도하는 사람의 사회ㆍ경제적 지위나 또는 외관상의 종교적 지위가 아니라, 동기가 그 기도로 하여금 신의 귀에 이르는 통행권을 준다.
146:2.9 (1639.4) 8. 시간의 지연을 피하거나 공간의 장애를 뛰어넘으려고 기도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 기도는 자신을 확대하거나 동료보다 부당하게 유리한 자리를 얻는 기법으로 고안되지 않았다. 철저히 이기적인 사람은 낱말의 참 뜻으로 볼 때, 기도할 수 없다. 예수는 말했다: “너는 하나님의 성품을 최고로 기뻐하라. 그리하면 네 마음이 진지하게 바라는 것을 분명히 주시리라.” “너의 길을 주께 맡기라. 그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그가 행하리라.” “주가 빈궁한 자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빈곤한 자의 기도를 눈여겨볼 것임이라.”
146:2.10 (1639.5) 9. “나는 아버지로부터 왔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아버지께 무엇을 구할까 언제라도 의심이 들면,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리하면 너의 진정한 필요와 소망에 따라서, 그리고 내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내가 너의 간구(懇求)를 내놓으리라.” 기도할 때 자기 중심이 되는 큰 위험을 조심하라. 자신을 위하여 많이 기도하기를 피하라. 너희 형제의 영적 진보를 위하여 더욱 기도하라. 물질적인 기도를 피하라. 영적으로 기도하고 영의 선물이 풍부하기를 기도하라.
146:2.11 (1639.6) 10. 너희가 아픈 자와 고통받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 이 고통받는 자들의 필요에 따라서 사랑으로 총명하게 보살피는 일을 너희의 간구가 대신할 것이라 기대하지 말라. 너희의 가족ㆍ친구ㆍ동료의 복지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러나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사랑으로 간구를 드리라. “그러나 언제 기도할까 나는 이르지 아니하리라. 오직 너희 안에 깃드는 영이 너희에게 감동을 주어 영들의 아버지와 너희가 마음 속에서 가지는 관계를 나타내는 간구를 입에 올릴까 하니라.”
146:2.12 (1640.1) 11. 많은 사람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에야 기도에 매달린다. 그런 관습은 경솔하며 잘못으로 이끈다. 괴로울 때 기도가 상책인 것이 참말이지만, 네 혼 속에 만사가 순조로울 때에도 아버지께 아들로서 말씀을 드리도록 머리를 써야 한다. 진정한 간구를 언제나 남모르게 드리라. 사람들이 네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기도를 듣지 못하게 하라. 예배하는 자들의 무리가 감사드리는 기도는 적절하지만, 혼이 드리는 기도는 개인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자녀 모두에게 적절한 오직 한 가지 형태의 기도가 있으니, 이와 같다: “하오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146:2.13 (1640.2) 12. 이 복음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늘나라가 펼쳐지기를 진지하게 기도해야 한다. 그는 히브리 성서의 모든 기도 중에서 시편(詩篇) 작가의 간구를 가장 좋게 보아 논평했다. “내 안에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아 하나님, 내 안에서 옳은 정신을 새롭게 하소서. 비밀스러운 죄를 내게서 없애고 거만하게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이 종을 붙드소서.” 기도와 경솔하고 거슬리는 말의 관계에 대하여 예수는 길게 논평하며 이렇게 인용하였다: “아 주여, 내 입 앞에 파수를 두소서.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예수는 말했다: “인간의 혀는 거의 아무도 길들일 수 없는 부분이나, 마음 속에 있는 영은 다스리기 힘든 이 부분을 친절한 관용의 목소리로, 그리고 영감을 주는 자비로운 봉사자로 변화시킬 수 있느니라.”
146:2.14 (1640.3) 13. 땅에서 살며 걷는 길에 신이 안내하시기를 구하는 기도는 아버지의 뜻을 알려고 드리는 기도 다음으로 중요하다. 실제로 이것은 신의 지혜를 얻으려는 기도를 뜻한다. 예수는 결코 인간의 지식과 특별한 기술을 기도로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기도는 사람이 신다운 영의 계심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키우는 한 요인이라고 가르쳤다. 예수가 정신적으로 진실하게 기도하라고 가르쳤을 때, 성실하게, 자기의 깨우침에 따라서 기도하는 것, 진심으로, 총명하게,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기도하는 것을 언급한다고 동료들에게 설명하였다.
146:2.15 (1640.4) 14. 화려한 말을 되풀이하거나 웅변의 문구를 쓰거나, 금식(禁食)하거나 고행하거나 또는 희생물을 바친다고 기도가 더욱 효력 있게 되리라는 생각을 품지 말라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감사를 통하여 참된 예배에 이르는 수단으로서, 기도를 이용하라고 신자들을 타일렀다. 그는 추종자들의 기도와 예배에 감사의 정신이 너무 적게 보인다고 한탄했다. 그는 이 기회에 성서를 이렇게 인용하였다. “주께 감사드리고 최고자의 이름을 찬송하며, 아침마다 그의 인자함을 인정하고 밤마다 그의 충실함을 인정하는 것은 좋은 일이니, 그가 하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를 기쁘게 하였음이라.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나는 감사를 드리리라.”
146:2.16 (1640.5) 15. 다음에 예수는 말했다: “너희의 평범한 필요에 대하여 항상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라. 땅에서 너희가 살면서 생기는 문제들에 관하여 불안해하지 말 것이나, 이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진지하게 감사의 정신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 너희가 필요한 것을 펼쳐놓으라.” 그리고 나서 성서를 인용했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겠고, 감사로 그의 이름을 높이리라. 이것이 뿔과 발굽 있는 수소나 송아지를 바치는 것보다 주를 더 기쁘게 하리라.”
146:2.17 (1641.1) 16. 아버지께 기도드리고 나서, 깃드는 영이 귀를 기울이는 혼에게 말할 좋은 기회를 주도록 고요히 받는 자세로 한동안 남아 있어야 한다고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가르쳤다. 인간의 정신이 참으로 예배하는 태도로 있을 때, 아버지의 영이 사람에게 말하기가 가장 좋다. 깃드는 아버지 영의 도움을 얻어서, 그리고 진리의 수단을 통하여 인간의 정신이 빛을 비춤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예배는 사람으로 하여금 예배받는 존재와 점점 더 같게 만든다고 예수는 가르쳤다. 예배는 유한자가 무한자의 계심 앞에 차츰 가까이 가고, 궁극에 그에게 이르게 하는 체험, 사람을 변화시키는 체험이다.
146:2.18 (1641.2) 예수는 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에 대하여 많은 다른 진리를 사도들에게 일러주었다. 그러나 많지 않은 사람이 그의 가르침을 충분히 깨우칠 수 있었다.
146:3.1 (1641.3) 라마에서 예수는 나이 든 그리스인 철학자와 기억에 남을 토론을 가졌는데, 이 사람은 과학과 철학이 인간의 체험에서 생기는 필요를 채우는 데 충분하다고 가르쳤다. 인내와 동정심으로 예수는 이 그리스인 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말한 많은 것이 진리임을 인정했으나 말을 마쳤을 때, 그가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논할 때 “어디로부터 와서, 어째서,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를 설명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덧붙였다. “네가 그만둔 곳에서 우리가 시작하느니라. 종교는 사람의 혼에게 주는 계시(啓示)요, 이것은 정신만으로 결코 발견하거나 충분히 헤아릴 수 없는 영적 실체를 다루느니라. 지적 노력은 생명에 관한 사실을 드러낼지 모르나, 하늘나라 복음은 존재에 관한 진리를 펼쳐보이느니라. 너는 진리의 물질적 그림자를 논하였는데, 영원한 영적 실체들에 관하여 이르는 동안 너는 듣겠느냐? 그러한 실체들은 필사 존재에서 보는 물질적 사실의 그림자, 일시적으로 시간에 이 그림자를 던지느니라.” 한 시간이 넘도록 예수는 하늘나라 복음의 유익한 진리를 이 그리스인에게 가르쳤다. 늙은 철학자는 주의 접근 방법에 민감했고, 마음이 정말로 정직했기 때문에 이 구원의 복음을 즉시 믿었다.
146:3.2 (1641.4) 사도들은 그리스인의 여러 주장(主張)에 예수가 드러내놓고 동의하는 태도에 얼마큼 당황했으나 나중에 예수는 사사로운 자리에서 말했다: “아이들아, 내가 그 그리스인의 철학을 너그럽게 대했다고 해서 놀라지 말라. 속으로 참되고 진정한 확신은 바깥에서 분석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 아니하고, 진리는 정직한 비판을 분개하지도 않느니라. 너그럽지 못한 것은 자기의 믿음이 참된가 하고 남몰래 의심 품는 것을 덮는 가면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느니라. 진심으로 믿는 것이 진리라고 완전한 확신을 가졌을 때, 사람은 어느 때라도 이웃의 태도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느니라. 용기는 사람이 믿는다고 공언하는 것에 대한 확신, 철저히 정직한 확신이라. 성실한 사람은 자기의 참된 확신과 고귀한 이상을 비판적인 눈으로 검토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느니라.”
146:3.3 (1641.5) 라마에서 둘째 날 저녁에, 토마스는 예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주여, 당신의 가르침을 새로 믿는 자가, 이 하늘나라 복음이 진리인가 어떻게 정말로 알고, 정말로 확신할 수 있나이까?”
146:3.4 (1641.6) 예수는 토마스에게 말했다: “너희가 아버지의 하늘나라 집안으로 들어갔고, 너희가 하늘나라의 자녀들과 함께 영원히 살아남으리라는 확신은 전적으로 개인적 체험―진리의 말씀을 믿는 신앙―의 문제이라. 영적 확신은 신성한 진리의 영원한 실체들을 너희가 몸소 종교적으로 체험하는 것과 동등하며, 달리 말하면 진리인 실체들을 너희가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영적 믿음을 더하고 정직하게 의심하는 것을 뺀 것과 같으니라.
146:3.5 (1642.1) “아들은 아버지의 생명을 날 때부터 부여받느니라. 아버지의 살아 있는 영을 받았은즉, 따라서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아버지의 살아 있는 영, 곧 영생의 선물을 가진 신분이라고 보기 때문에, 너희는 육체로 사는 물질 세계에서 인생이 끝난 뒤에 살아남느니라. 정말로 내가 아버지로부터 오기 전에, 많은 사람이 이 생명을 가졌고, 더욱 많은 사람이 내 말을 믿었으므로 이 영을 받았느니라. 그러나 내가 선언하노니,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 아버지는 그의 영을 모든 사람의 마음 속으로 보내리라.
146:3.6 (1642.2) “너희는 머리 속에서 신의 영이 일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으나, 혼의 능력을 통제하는 것을 얼마큼 하늘 아버지의 영, 깃드는 이 영의 가르침과 안내에 맡겼는가 그 정도를 발견하는 실용적 방법이 있으니, 곧 너희가 동료 인간을 사랑하는 정도이라. 아버지의 이 영은 아버지의 사랑을 함께 가지느니라. 이 영이 사람을 지배함에 따라서, 신을 예배하는 방향으로, 그리고 동료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방향으로 어김없이 인도하느니라. 처음에는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으니, 나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우리 아버지가 안에 계시면서 마음 속에서 인도하는 것을 너희가 더욱 의식하게 된 까닭이라.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진리의 영이 모든 육체에게 퍼부어지겠고, 내가 지금 너희 가운데 살고 진리의 말씀을 일러주는 것 같이, 이 영은 사람들 사이에 살고 모든 사람을 가르치리라. 이 진리의 영은 너희 혼의 영적 재산을 대변하면서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도록 도우리라. 이 영은 아버지의 깃드는 계심을 어김없이 증언하겠고, 너희의 영은, 몇 사람 안에 지금 살고 있는 것 같이, 모든 사람 안에 살면서 너희가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르느니라.
146:3.7 (1642.3) “이 영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땅에서 난 자녀는 누구나 궁극에 하나님의 뜻을 알며, 내 아버지의 뜻에 굴복하는 자는 언제까지나 살리라. 땅의 생명으로부터 영원한 영토로 가는 길은 너희에게 쉽게 설명되지 않았으나, 한 길이 있고 언제나 있었느니라. 그 길을 새 생명의 길로 만들려고 내가 왔노라.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이미 영생(永生)을 가졌느니라―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고 나서 이 말씀 중에 많은 것을 너희가 더욱 잘 알아듣겠고, 너희는 지금의 체험을 돌이켜볼 수 있느니라.”
146:3.8 (1642.4) 이 복된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크게 즐거워하였다. 의로운 자가 살아남는 지 어쩐지에 대하여 유대인의 가르침은 뒤죽박죽이고 분명치 않았다. 모든 참된 신자(信者)가 영원히 살아남는다고 확신을 주는 아주 뚜렷하고 분명한 말씀을 듣고서 예수의 추종자들은 새 힘을 얻고 영감을 받았다.
146:3.9 (1642.5) 사도들은 계속하여 전도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한편 집집마다 방문하는 습관을 계속 지키며 낙심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환자와 고통받는 자를 보살피었다. 예수의 사도들 각자가 이제 요한의 사도 하나를 동료로 가졌으므로 사도의 조직은 확대되었다. 아브너는 안드레의 동료였다. 이 계획은 다음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내려갈 때까지 지속되었다.
146:3.10 (1642.6) 스불론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있었던 예수의 특별 교육은 하늘나라에서 서로의 의무에 관하여 계속된 토론을 주로 다루었고, 개인의 종교적 체험과 사회적ㆍ종교적 의무를 가진 친교 관계, 이 둘의 차이를 밝히려고 고안된 가르침이 담겨 있었다. 이것은 종교의 사회적 모습에 대하여 주가 일찍이 말씀하신 몇 번 안 되는 기회 중의 하나였다. 땅에서 사신 생애 전체를 통하여 예수는 종교를 사회 조직으로 만드는 것에 대하여 추종자들에게 가르침을 거의 주지 않았다.
146:3.11 (1643.1) 스불론 사람들은 혼합된 종족이었고 도저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라 할 수 없었다. 가버나움에서 병자들을 고쳤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거의 아무도 정말로 예수를 믿지 않았다.
146:4.1 (1643.2) 갈릴리와 유대 지방에서 작은 축에 속하는 많은 도시와 마찬가지로, 이론에는 회당이 하나 있었다. 예수는 그가 봉사하던 초기 시절에 안식일에 이런 회당에서 말씀하는 것이 버릇이었다. 때때로 아침 예배에 그가 말씀하고,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오후 시간에 설교하곤 하였다. 예수와 사도들은 또한 아주 흔히, 회당에서 주중에 저녁 집회에서 가르치고 설교하곤 하였다.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은 갈수록 예수를 적대하게 되었지만, 다른 도시에 있는 회당들에 대하여 직접 아무런 통제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예수의 대중 봉사 후기까지, 그가 가르치지 못하게 거의 보편적으로 회당(會堂) 문을 닫도록 널리 그에 반대하는 감정을 일으킬 수 없었다. 이때 갈릴리와 유대의 모든 회당은 그에게 문을 열고 있었다.
146:4.2 (1643.3) 그 시절에 이론은 광범위한 광산이 있던 장소였고, 광부(鑛夫)의 생애를 함께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는 이론에 머무르는 동안 광산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사도들이 집을 방문하고 공공 장소에서 전도하는 동안, 예수는 이 지하 노동자들과 함께 광산에서 일했다. 병 고치는 사람으로서 예수의 이름이 이 구석진 마을에까지 퍼져 있었다. 많은 병자와 고통받는 자가 도움을 구했고 많은 사람이 병 고치는 봉사로부터 크게 소득을 얻었다. 그러나 문둥병자의 경우를 제쳐놓고, 어떤 경우에도 주는 이른바 병 고치는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146:4.3 (1643.4) 이론에서 사흘째 오후 늦게, 광산에서 돌아오면서 예수는 투숙하는 장소로 가는 길에 어쩌다가 좁은 샛길을 지나가게 되었다. 문둥병에 걸린 어떤 남자의 더러운 오두막 가까이 다가갔을 때, 치유자라는 그의 명성을 들었으므로 그 병자는 예수가 문 앞을 지나갈 때,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대담하게 인사를 드리며 말했다. “주여, 당신이 원하시기만 하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당신이 거느리는 선생들이 전하는 말씀을 내가 들었사온데 깨끗하게 될 수 있다면 나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나이다.” 그 문둥병자가 이렇게 말한 것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문둥병자는 회당에 가거나, 달리 대중 예배에 참석하는 것조차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문둥병을 치유받지 못하면 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정말로 믿었다. 그가 질병이 걸렸음을 보고 매달리는 믿음의 말을 들었을 때, 예수의 사람 마음은 감동했고 신의 마음은 동정하여 움직였다. 예수가 바라보자, 그 사람은 엎드려서 경배하였다. 그러자 주는 손을 뻗어 그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내가 바라노니―깨끗하여라.” 그는 즉시 고침을 받았다. 문둥병이 이제 더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146:4.4 (1643.5) 발 앞에 꿇어 엎드린 사람을 일으켰을 때 예수는 당부했다: “아무에게도 네가 병 고침받은 것을 말하지 말고, 오히려 조용히 네 일을 보도록 처리하여라. 사제에게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증언으로 모세가 명한 희생물을 바치라.”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가 지시한 대로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마을에 두루, 예수가 그의 문둥병을 고쳤다고 떠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온 마을에 알려져 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병이 깨끗이 나은 것을 뻔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예수가 충고한 대로 사제들에게 가지 않았다. 예수가 병을 고쳐주었다는 소식을 그가 널리 퍼뜨린 결과로 주는 병자들에게 너무나 둘러싸여서,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마을로 들어가지 않았어도, 예수는 광산 가까운 교외에서 이틀 동안 남아 있었고, 믿는 광부들에게 하늘나라 복음에 관하여 계속하여 더 가르쳤다.
146:4.5 (1644.1) 문둥병자를 이렇게 고친 것은 이때까지 예수가 마음먹고 계획하여 행한, 이른바 첫 기적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진짜 문둥병의 경우였다.
146:4.6 (1644.2) 그들은 이론으로부터 기스칼라로 가서 이틀 동안 복음을 선포하며 지냈다. 다음에 코라진을 향하여 떠났고, 거기서 좋은 소식을 전하면서 거의 한 주를 보냈다. 그러나 코라진에서는 하늘나라로 들어오는 신자를 많이 얻을 수 없었다. 예수가 가르친 어느 곳에서도, 사람들이 말씀을 그렇게 일반적으로 거부하는 일에 부닥친 적이 없었다. 코라진에서 머문 것은 대부분의 사도들에게 아주 침울하였다. 안드레와 아브너는 동료들의 사기를 지탱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가버나움을 조용히 지나치면서, 줄곧 마돈 마을로 갔는데 거기서도 운이 좋지 않았다. 아주 최근에 방문한 이 여러 마을에서 그들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가르치고 전도하면서 예수가 치유자라는 언급을 삼가라고 예수가 고집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대부분 사도들의 머리 속에 자리잡았다. 예수가 또 다른 문둥병자를 고치든지, 아니면 어떤 다른 방법으로 권능을 드러내서 사람들의 눈을 끌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그러나 주는 그들이 열심히 재촉해도 꼼짝하지 않았다.
146:5.1 (1644.3) “내일 우리는 가나로 가느니라” 예수가 발표했을 때, 사도 일행은 크게 기운이 났다. 가나에서 알아듣는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으니, 예수가 거기에서 대단히 이름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데려오는 일을 잘 해 나가고 있었는데, 사흘째에 가버나움의 어떤 특출한 시민, 타이투스가 가나에 도착했다. 그는 얼마큼 믿는 사람이었고 그의 아들이 위독했다. 그는 예수가 가나에 계시다는 말을 들었고, 그래서 서둘러 예수를 만나러 갔다. 가버나움에 있는 신자들은 예수가 어떤 병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46:5.2 (1644.4) 가나에서 예수를 찾아냈을 때, 이 귀인(貴人)은 예수에게 가버나움으로 서둘러 가서 앓는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청했다. 사도들이 숨을 죽이고 기대하며 서 있는 동안, 예수는 아픈 소년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너희를 얼마나 오래 참으랴? 하나님의 권능이 너희 사이에 있거늘 너희는 징조(徵兆)를 보고 이적을 구경하지 않으면, 믿으려 하지 않는도다.” 그러나 그 귀인은 예수에게 간청하며 말했다: “내 주여, 나는 믿나이다. 그러나 내 아이가 죽기 전에 오소서. 내가 떠날 때도 그가 죽을 지경에 있었던 까닭이나이다.” 예수가 한 순간 머리를 숙이고 명상에 잠겼다가 갑자기 말했다: “네 집으로 돌아가라, 네 아들이 살리라.” 타이투스는 예수의 말씀을 믿었고 가버나움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돌아가는 동안에, 종들이 만나려고 나와서 말했다: “기뻐하소서, 당신의 아들이 낫고 있기 때문이나이다―그가 살았나이다.” 그러자 타이투스는 어느 시간에 그 소년이 낫기 시작했는가 물었다. “어제 오후 1시쯤에 아이가 열이 내렸더이다” 종들이 대답했을 때, 그는 그때가 “네 아들이 살리라”하고 예수가 말씀하신 그 시간쯤이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타이투스는 이때부터 마음을 다하여 믿었고 또한 온 집안이 믿었다. 이 아들은 하늘나라의 힘찬 봉사자가 되었고, 나중에 로마에서 처형받은 자들과 함께 목숨을 바쳤다. 타이투스의 집안 전체와 그 친구들, 그리고 사도들까지 이 사건을 기적이라고 여겼어도 기적은 아니었다. 적어도 육체의 병을 고치는 기적은 아니었다. 다만 자연 법칙의 과정에 관하여 선견(先見)이 있었던 경우였을 뿐이고, 세례받은 뒤에 예수는 자주 그런 지식을 이용하였다.
146:5.3 (1645.1) 이 마을에서 베푼 봉사에 뒤따라 이런 종류의 둘째 사건으로 지나치게 눈을 끌었기 때문에, 예수는 다시 가나로부터 서둘러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물과 포도주를 기억하였고, 그가 아주 먼 거리에서 귀인의 아들을 고쳤다고 생각했으므로, 사람들은 병자와 고통받는 사람들만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병자들을 먼 거리에서 고치라고 요청하는 사자들을 보냈다. 온 시골이 떠들썩함을 보자, 예수는 말했다, “나인으로 가자.”
146:6.1 (1645.2) 이 사람들은 징조를 믿었고 이들은 이적을 찾는 세대였다. 이때가 되어서 갈릴리의 중부 및 남부의 사람들은 예수에 대하여, 그리고 개인적 봉사를 베푸신 것에 대하여, 기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순전한 신경(神經) 질환으로 고생하고 감정의 장애로 고통받는 몇십ㆍ몇백의 정직한 사람들이 예수 앞으로 왔고, 그리고 나서 친구들에게 예수가 그들을 고쳤다고 외치면서 친구들에게, 집으로 돌아갔다. 무지하고 생각이 단순한 이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치유된 그런 사례를 육체적 치유라, 기적으로 고친 것이라고 생각했다.
146:6.2 (1645.3) 예수가 가나를 떠나서 나인으로 가려 했을 때, 큰 무리의 신자들과 호기심 있는 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다. 그들은 기적과 이적을 구경하려고 단단히 별렀고 실망하지 않게 되어 있었다. 예수와 사도들이 도시의 대문 가까이 다가가자, 근처의 공동 묘지로 가는 길에 있던 장례 행렬을 만났는데, 이들은 나인에서 과부가 된 어머니의 외아들을 나르고 있었다. 이 여인은 많이 존경받는 사람이었고 마을 사람들의 절반이, 죽었다고 생각된 이 소년을 실은 들것을 나르는 자들을 따라갔다. 장례 행렬이 예수와 추종자들에게 다가왔을 때, 과부와 그 친구들은 주를 알아보고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기적을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지, 그들은 예수가 어떤 인간의 병도 고칠 수 있고 그런 치유자가 죽은 자도 살릴 수 없는가 생각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성가시게 졸라대는데, 예수는 앞으로 나서서, 들것의 덮개를 열고 소년을 들여다보았다. 젊은이가 정말로 죽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그가 그 자리에 있음으로 비극을 막을 수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 어머니를 향하여 말했다: “울지 말라. 네 아들이 죽지 않았고 잠자느니라. 네 품에 그를 돌려받으리라.” 그리고 나서 소년의 손을 잡고 말했다, “깨어서 일어나라.” 죽었다고 생각된 소년이 당장에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 시작했다. 예수는 그들을 집으로 보냈다.
146:6.3 (1645.4) 예수는 군중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아이가 정말로 죽지 않았다, 자기가 그를 무덤에서 살려낸 것이 아니라 설명하려고 헛되이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따라오던 군중, 그리고 나인 마을 전체가 열광의 극치에 이르기까지 자극을 받았다. 두려움이 많은 사람을 휩쓸었고 더러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더러는 기도를 시작하고 그들의 죄 때문에 슬피 울었다. 밤이 다가오고 오래 지나서야 시끄럽던 군중이 흩어질 수 있었다. 물론, 소년이 죽지 않았다고 예수가 말했는데도, 사람마다, 기적이 일어났다, 죽은 자조차 살아났다고 주장하였다. 소년이 다만 깊이 잠들어 있었다고 예수가 일렀어도, 그들은 그것이 예수의 말버릇이라고 설명했고 예수가 언제나 대단히 겸손하게 기적을 감추려 했다는 사실에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146:6.4 (1646.1) 그래서 갈릴리에 두루, 그리고 유대까지, 예수가 과부의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냈다는 말이 퍼졌고 이 보고를 들은 많은 사람이 믿었다. 예수가 과부의 아들에게 깨어서 일어나라고 명했을 때, 그 소년이 정말로 죽지 않았다는 것을 예수는 모든 사도에게도 결코 충분히 납득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을 제쳐놓고, 후일의 모든 기록에 들어가지 않을 만큼 예수는 충분히 그들에게 강조했다. 누가는 이 사건을 전해 들은 그대로 이야기를 기록했다. 또 다시 예수는 치료자로서 너무나 사람들에게 에워싸여서, 이튿날 일찍 엔도르를 향하여 떠났다.
146:7.1 (1646.2) 엔도르에서 예수는 육체의 병 고침을 얻으려고 아우성치는 군중을 며칠 동안 피했다. 이곳에서 머무르는 동안, 예수는 사도들을 가르치려고 사울 임금과 엔도르의 마녀 이야기를 해주었다. 죽은 자의 영이라고 생각된 것을 때때로 흉내내던 중도자, 그릇된 길에 빠진 모반한 중도자들이 곧 통제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이상한 짓을 계속할 수 없으리라 예수는 사도들에게 알기 쉽게 일러주었다.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간 뒤에,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영을 모든 육체에게 퍼부어 준 뒤에, 그러한 준영(準靈) 존재―이른바 더러운 귀신―이 필사자들 중에서 정신이 박약하고 악한 생각을 가진 자에게 더 들어갈 수 없으리라고 일러주었다.
146:7.2 (1646.3) 예수는 더 나아가서, 세상을 떠난 인간의 영은 살아 있는 친구들과 교통하려고 기원이 있던 세계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사도들에게 설명했다. 오직 한 섭리 시대가 지난 뒤에야 필사 인간의 진보하는 영이, 그것도 특별한 경우에 그 행성의 영적 행정부의 일부로서, 땅으로 돌아오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146:7.3 (1646.4) 이틀 동안 쉬고 나자, 예수는 사도들에게 말했다: “시골이 조용해지는 동안, 내일 아침에 가버나움으로 돌아가서 머무르고 가르치자. 고향에서 이때가 되어서는 사람들이 이 종류의 흥분에서 얼마큼 회복되었으리라.”
147:0.1 (1647.1) 예수와 사도들은 3월 17일 수요일에 가버나움에 이르렀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떠나기 전에 벳세다 본부에서 2주를 보냈다. 이 2주 동안 사도들은 바닷가에서 사람들을 가르쳤고, 한편 예수는 산에서 혼자 아버지의 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기간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예수는 두 차례 티베리아스로 몰래 여행했으며 거기서 신자들을 만나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가르쳤다.
147:0.2 (1647.2) 헤롯 집안의 여러 사람이 예수를 믿었고, 이 모임에 참석했다. 헤롯의 정식 가족 중에서 이 신자(信者)들의 영향이 예수에 대하여 권력자의 적대감을 줄이도록 도왔다. 티베리아스에 있는 이 신자들은 예수가 선포한 그 “나라”는 영적 성질을 가졌고 정치적 사업이 아니라고 충분히 헤롯에게 설명했다. 헤롯은 자기 집안에 있는 이 사람들을 오히려 믿었고, 따라서 예수의 가르침과 병 고침에 관한 여러 보고가 널리 퍼지는 것에 지나치게 놀라지 않았다. 그는 병 고치는 자나 종교 선생으로서 예수가 일하는 것에 아무런 반대가 없었다. 헤롯의 많은 조언자와 바로 헤롯조차 호의적 태도를 가졌는데도, 한 무리의 부하들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의 영향을 너무 받아서 예수와 사도들에게 몹시 미워하고 위협하는 적으로 남았고 후일에 그들의 대중 활동을 많이 방해했다. 예수에게 가장 큰 위험은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었고 헤롯에게 있지 않았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와 사도들은 예루살렘과 유대보다, 갈릴리에서 무척 많은 시간을 보내고 대부분의 대중 전도를 거기서 하였다.
147:1.1 (1647.3) 유월절 축제를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려고 준비하기 전날, 가버나움에 주둔하던 로마인 수비대의 백부장(百夫長), 지휘관 망구스가 회당장들에게 가서 말했다: “나의 충실한 전령이 아프고 죽을 지경에 있나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나를 대변하여 예수에게 가서 내 종을 고쳐달라고 그에게 부탁드리겠나이까?” 로마인 지휘관이 이렇게 한 것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에게 더 영향력을 미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장로들이 예수를 만나러 갔고 그 대변자가 말했다: “선생이여, 당신이 가버나움으로 가서 로마인 백부장이 가장 아끼는 종을 구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하나이다. 당신이 그를 눈여겨볼 가치가 있는 것은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당신이 회당에서 여러 번 말씀하셨사온데 바로 그 회당을 우리에게 지어주기까지 한 까닭이나이다.”
147:1.2 (1647.4) 그들의 말을 듣고 나서 예수가 말했다: “내가 너희와 함께 가겠노라.” 그가 그들과 함께 백부장의 집으로 갔는데, 그 집 뜰로 들어가기 전에, 로마 군인은 예수를 맞이하러 친구들을 보내서, “주여, 내 집으로 들어오는 수고를 그만두소서, 당신이 내 지붕 밑으로 들어오실 만큼 나는 자격이 없음이니이다. 당신에게 갈 자격이 있다 생각지도 않나이다. 그러므로 당신 민족의 장로들을 보냈나이다. 그러나 당신이 서신 자리에서 말씀할 수 있고 그리하면 내 종이 나을 것을 아나이다. 이는 바로 내가 다른 사람의 지휘 밑에 있고 내 아래에 병사들이 있으며,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다른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오며, 내 종들에게 이리 하라, 저리 하라 하면 저희가 그대로 하나이다.”
147:1.3 (1648.1) 예수가 이 말을 들었을 때, 돌이켜 사도들, 그리고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 이방인의 믿음이 놀랍도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그렇게 큰 믿음을 본 적이 없노라, 아니라, 이스라엘에서는 아니라.” 돌아서면서 예수는 말했다. “여기서 가자.” 백부장의 친구들이 그 집으로 들어가서 예수가 말씀한 것을 망구스에게 일렀다. 그 시간부터 그 종은 낫기 시작했고, 결국은 정상의 건강과 쓸모를 회복하였다.
147:1.4 (1648.2) 그러나 이 경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결코 몰랐다. 단지 이렇게 기록할 뿐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백부장의 종에게 병을 고쳐주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예수를 따라다니던 존재들에게 드러나지 않았다. 우리는 오직 그 종이 완전히 회복했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 뿐이다.
147:2.1 (1648.3) 3월 30일 화요일 아침 일찍, 예수와 사도 일행은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났고, 요단강 유역의 길로 갔다. 4월 2일 금요일 오후에 도착했고, 여느 때처럼 베다니에서 본부를 두었다. 예리고를 통과하면서 그들은 쉬려고 멈추었으며 그동안에 유다는 가족의 한 친구가 경영하는 은행에 공동 자금의 얼마를 저축했다. 이때 처음으로 유다는 여분의 돈을 지녔다. 이 저축은 예수가 재판받고 죽기 바로 전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마지막 중대한 여행에서 예리고를 다시 지날 때까지 다치지 않고 두었다.
147:2.2 (1648.4) 예루살렘까지 가는 동안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베다니에서 자리를 잡자마자, 가까이서 멀리서, 육체의 병을 고침받고 시달린 정신에 위로를 얻고 혼의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너무 많이 모여서 예수는 쉴 겨를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겟세마네에서 텐트를 치고, 항상 그에게 몰려드는 군중을 피하려고 주는 베다니로부터 겟세마네까지 오가곤 하였다. 사도의 일행은 예루살렘에서 거의 3주 동안 지냈지만, 예수는 그들에게 아무런 대중 전도를 하지 말고 오직 사사로운 자리에서 가르치고 개인을 상대로 일하라고 타일렀다.
147:2.3 (1648.5) 베다니에서 그들은 조용히 유월절을 축하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예수와 열두 사도 모두가 피 흘리지 않고서 유월절 잔치 음식을 함께 먹었다. 요한의 사도들은 예수와 그의 사도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들은 아브너, 그리고 요한의 설교를 초기에 믿은 사람들과 함께 축제를 보냈다. 이것은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함께 지킨 두 번째 유월절이었다.
147:2.4 (1648.6) 예수와 열두 사도가 가버나움을 향하여 떠났을 때, 요한의 사도들은 함께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아브너의 지휘 하에서 예루살렘과 그 주위의 시골에 남아서, 하늘나라를 널리 펴려고 조용히 수고했다. 그동안에 예수와 열두 사도는 갈릴리에서 일하려고 돌아갔다. 전도사 70인을 임명하고 떠나보내기 얼마 전까지, 스물네 사람 모두가 다시 함께 모이지 않았다. 그러나 두 집단은 협조하였고, 의견을 달리 했는데도 최선의 감정을 유지했다.
147:3.1 (1649.1) 예루살렘에서 둘째 안식일 오후에, 주와 사도들이 성전 예배에 참석하려 할 때 요한이 예수에게 말했다. “나를 따라 오소서. 당신에게 무엇인가 보여드리고자 하나이다.” 요한은 예루살렘의 한 성문을 거쳐서 밖으로 벳세다라고 부르는 물 웅덩이까지 안내했다. 이 웅덩이 둘레에는 다섯 현관으로 된 구조가 있었고 그 밑에 병을 고치려는 큰 무리의 병자들이 얼씬거렸다. 여기는 온천이었고 붉은 빛이 도는 물이 웅덩이 밑에 바위 동굴에서 가스가 모이기 때문에 불규칙한 간격을 두고 끓어올랐다. 따듯한 물이 이따금 이렇게 끓어오르는 것을 많은 사람이 초자연의 영향 때문이라 믿었다. 그렇게 부글거린 뒤에 그 물에 처음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을 가졌든지 고침을 받으리라는 믿음이 유행하였다.
147:3.2 (1649.2) 사도들은 예수가 부과한 금지 조치 하에서 얼마큼 조바심을 냈고, 열둘 가운데 가장 어린 요한은 이런 제한 밑에서 특별히 마음이 들떠 있었다. 모여든 병자들의 광경이 주의 동정심에 크게 호소하여 병 고치는 기적을 행하도록 마음이 움직이리라, 이리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라고 당장에 하늘나라 복음을 믿도록 설득되리라 생각하면서 예수를 웅덩이로 모시고 왔다. 요한이 예수에게 말했다: “주여, 이 고통받는 자들을 다 보소서, 우리가 저희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요한아, 어찌하여 내가 택한 길로부터 돌이키라고 나를 유혹하느냐? 영원한 진리의 복음을 선포하는 대신에 어찌하여 이적을 행하고 병자 고치기를 네가 계속 바라느냐? 이 사람아, 네가 원하는 것을 내가 해서는 안 되지만, 이 병자와 고통받는 자들에게 힘을 주고 영원히 위로하는 말을 하도록 저희를 함께 모으라.”
147:3.3 (1649.3)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는 말했다: “여러 해 동안 그릇되게 살아온 까닭에 너희 가운데 다수가 아프고 병들어 여기에 왔느니라. 더러는 뜻밖의 사고로, 더러는 조상이 잘못한 결과로 고생하며, 한편 더러는 현세에 존재하는 불완전한 조건의 방해로 허덕이느니라. 그러나 땅에서 너희 상태를 개선하려고, 하지만 특히 영원한 신분을 보장하려고 내 아버지가 일하시며, 나도 일하고자 하노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원하심을 발견하지 않으면 우리 중에 아무도 생활의 곤경을 바꾸기 위하여 많이 일할 수 없느니라. 결국 우리는 모두 영원한 이의 뜻을 행하도록 은혜를 입었도다. 너희가 다 육체의 질병을 고침받을 수 있다면, 너희가 정말로 놀라리라. 그러나 모든 영적 병이 깨끗해지고 모든 도덕적 허약을 고침받는 것이 더욱 좋은 일이라. 너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요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라. 시간의 속박은 너희를 괴롭히는 듯하나 영원의 하나님은 너희를 사랑하시니라. 심판의 때가 다가올 때, 두려워 말라, 너희 모두가 응보 뿐 아니라 넘치는 자비를 발견할지니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나라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이 가르침을 믿는 자는 영생(永生)을 가졌느니라. 그러한 신자들은 이미 심판과 죽음으로부터 빛과 생명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느니라. 무덤에 있는 사람들조차 부활의 목소리를 들을 때가 다가오는도다.”
147:3.4 (1649.4)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의 복음을 믿었다. 병자들 가운데 더러는 무척 감명을 받고 영적으로 다시 생기를 얻어서, 그들이 또한 육체의 병을 고침받았다고 선포하며 다녔다.
147:3.5 (1649.5) 혼란한 정신 질환 때문에 여러 해 동안 풀이 죽고 심하게 앓던 어느 사람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다. 그날이 안식일이었는데도 제 자리를 들고 집으로 가 버렸다. 고통받던 이 남자는 누군가가 그를 도와주기를 여러 해 동안 기다렸다. 자신이 무력하다는 느낌의 피해자였기 때문에, 결코 한 번도 자신을 도울 생각을 품은 적이 없었다.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돕는 것이 해야 했던 유일한 일―자리를 들고 걷는 것―임이 드러났다.
147:3.6 (1650.1) 다음에 예수는 요한에게 말했다: “주사제(主司祭)와 서기관들이 들이닥쳐 이 병자들에게 우리가 생명의 말씀을 일러주었다고 성을 내기 전에 떠나자.” 그들은 동반자들과 합치려고 성전으로 돌아갔고, 당장에 모두 베다니에서 밤을 지내려고 떠났다. 그러나 요한은 다른 사도들에게 이 안식일 오후에 벳세다의 웅덩이까지 자신과 예수가 이렇게 방문한 사실을 결코 일러주지 않았다.
147:4.1 (1650.2) 바로 이 안식일 저녁에 베다니에서 예수와 열두 사도, 그리고 한 무리의 신자들이 나사로의 집 뜰에서 불 근처에 모여 있는 동안에, 나다니엘은 예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주여, 남들이 우리에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대로 우리가 저희에게 해야 한다고 당신이 가르치며 인생을 사는 옛 법칙의 긍정 형식을 가르쳤어도, 나는 어떻게 그런 명령을 언제나 지킬 수 있는가 충분히 헤아리지 못하나이다. 교제하려 하는 사람을 이처럼 죄 속에서 사악하게 바라보는 음탕한 사람의 예를 들어서, 내 주장을 보이게 하소서. 남들이 자기에게 하기를 바라는 대로, 나쁜 생각을 품은 사람이 저희에게 행해야 한다고 어찌 우리가 가르칠 수 있나이까?”
147:4.2 (1650.3) 나다니엘의 물음을 듣자, 예수는 벌떡 일어나서 손가락으로 그 사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다니엘아 나다니엘아! 너는 마음 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너는 영에게서 태어난 자로서 내 가르침을 받지 않느냐? 너희는 지혜롭고 영적 이해를 가진 사람으로서 진리를 듣지 않느냐? 남들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저희에게 행하라 훈계하였을 때, 나는 이상이 높은 사람들에게 이른 것이요, 악행을 권하기 위하여 내 가르침을 방종으로 왜곡할 시험을 받을 자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노라.”
147:4.3 (1650.4) 말씀을 마치자 나다니엘이 일어나서 말했다: “하지만 주여, 당신의 가르침을 그리 해석하는 것을 내가 승인하리라 생각하시면 안 되나이다. 허다한 그런 사람이 그렇게 당신의 훈계를 잘못 판단하리라 추측하고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에게 더 가르치시리라 희망한 까닭에 여쭈었나이다.” 그리고 나서 나다니엘이 앉자 예수는 말씀을 이었다: “나다니엘아, 네 머리 속에 그렇게 악한 생각을 승인하지 않음을 잘 아노라. 그러나 너희 모두가 너무나 자주 나의 평범한 가르침에 대하여 진정한 영적 해석을 내리지 못하므로 실망하노니, 그 가르침은 인간의 언어로, 틀림없이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너희에게 주어야 하느니라. ‘남들이 너희에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대로 저희에게 하라,’ 인생을 사는 이 법칙, 이 훈계의 해석에 붙는 다른 수준의 의미에 관하여 너희를 가르치마:
147:4.4 (1650.5) “1. 육체의 수준. 네 질문에서 가정한 것이 그러한 순전히 이기적이고 음탕하게 해석한 예를 잘 보여주리라.
147:4.5 (1650.6) “2. 느낌의 수준. 이 수준은 육체의 수준보다 한 단계 높으며,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이 인생을 사는 법칙을 사람이 높게 해석할 것을 의미하느니라.
147:4.6 (1650.7) “3. 머리의 수준. 이제 머리의 논리와 체험의 지능이 활동하게 되느니라. 고귀한 깊은 자존심에 담겨 있는 최고의 이상(理想)에 어울리게 그런 인생의 원칙을 해석해야 한다고 바른 판단이 지시하느니라.
147:4.7 (1651.1) “4. 형제 사랑의 수준. 한층 높은 경지에서 동료의 복지에 사심 없이 헌신하는 수준을 발견하느니라. 더 높은 이 수준,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의식하고 그 결과로 사람이 형제임을 인식함으로 생기는 수준, 진심으로 사회에 봉사하는 수준에서, 이 기본적 생활 원칙의 새롭고 훨씬 아름다운 해석이 발견되느니라.
147:4.8 (1651.2) “5. 도덕 수준. 다음에, 참된 철학적 수준에서 해석할 때, 사물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진정한 통찰력을 가질 때, 너희가 영원히 건전한 인간 관계를 깨달을 때, 생활 형편에 적응하는 너희 개인의 문제에 적용되는 대로, 고상한 생각과 이상을 가진 제삼자, 지혜롭고 치우치지 않은 자가 그런 명령을 보고 해석하리라 생각되는 대로, 너희가 그러한 해석 문제를 비로소 바라보리라.
147:4.9 (1651.3) “6. 영적 수준. 다음에 마지막이지만 가장 중대한 수준, 영적 통찰력과 영적 해석의 수준에 이르나니, 이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어떻게 대우하리라 생각되는 대로 저희를 대우하라는 신의 명령을 우리가 이 인생을 사는 법칙 속에서 인식할 것을 강요하느니라. 이것이 우주에서 인간 관계의 이상(理想)이라. 너희 최고의 소망이 언제라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일 때, 이것이 모든 그런 문제에 대하여 너희가 가질 태도이라. 그러므로 비슷한 상황에서, 모든 사람에게 내가 하리라 생각되는 대로 너희가 저희에게 행하기를 바라노라.”
147:4.10 (1651.4) 이때까지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중에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이 없었다. 그들은 주가 물러나신 뒤에 오랫동안 그 말씀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나다니엘은 자기가 한 질문의 정신을 예수가 오해했다는 생각에서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다른 사람들은 철학적인 동료 사도가, 사람의 생각을 자극하는 그런 질문을 던질 용기를 보인 것을 고맙게 여기고도 남았다.
147:5.1 (1651.5) 시몬은 유대인의 산헤드린 회원이 아니었어도 예루살렘에서 영향력 있는 바리새인이었다. 건성으로 믿는 사람이었는데, 심하게 비난을 받을까 싶은데도 예수와 개인 동료들,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을 집으로, 연회에 감히 초대하였다. 시몬은 주를 오랫동안 지켜보았고, 그의 가르침에, 그리고 그 인격에 더욱 깊이 감명을 받았다.
147:5.2 (1651.6) 부유한 바리새인들은 자선에 마음을 쏟았고, 그들의 자선 행위가 알려지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때때로 어떤 거지에게 자선(慈善)을 베풀려 할 때 나팔까지 불곤 하였다. 이 바리새인들은 귀빈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 때 대문을 열어놓는 것이 관습이었고, 그래서 길거리의 거지들도 들어와서 저녁 먹는 사람들의 소파 뒤에서 벽 앞에 늘어서서, 잔치하는 사람들이 던져줄까 싶은 먹을 것을 받을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147:5.3 (1651.7) 시몬의 집에서 이 특별한 기회에, 길거리에서 들어온 사람들 중에 평판이 좋지 않은 어느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자는 최근에 좋은 소식인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 이 여인은 이방인의 성전 마당 바로 옆에 자리잡은 이른바 고급 창녀 집 중에 하나를 예전에 운영하던 사람으로서 온 예루살렘에 두루 잘 알려져 있었다. 그 여자는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나서, 못된 장사를 하던 자리를 걷어치웠고 관련을 가졌던 대다수의 여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사는 방식을 바꾸도록 유도했다. 이렇게 했는데도 아직도 바리새인들에게 크게 업신여김을 받았고―매춘의 표시로―머리털을 내리도록 강요받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여자는 머리에 붓는 향기로운 로션이 든 큰 병을 가져왔고, 예수가 음식을 들며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동안, 뒤에 서서 그의 발에 로션을 바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서 또한 감사의 눈물로 그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발을 닦고 있었다. 이렇게 바르기를 마치고 나서, 그 여자는 줄곧 눈물을 흘리며 그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147:5.4 (1652.1) 이 모든 것을 보자 시몬은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 선지자라면, 이렇게 그를 만지는 이 사람이 누구이고 어떤 종류의 여자인가, 악명 높은 죄인임을 알아차렸으리라.” 시몬이 머리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예수는 입을 열어 말씀했다. “시몬아, 너에게 이르고 싶은 것이 있노라.” 시몬이 대답했다, “선생이여, 말씀을 계속하소서.”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돈 빌려주는 어떤 부자에게 빚진 자가 둘 있었는지라. 하나는 그에게 5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다른 하나는 오십을 빚졌더라. 자, 둘 가운데 아무도 갚을 돈이 없어서, 그는 두 사람을 용서해주었더라. 시몬아, 네 생각에는 둘 가운데 누가 그를 가장 많이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했다. “제 생각에는 빚을 가장 많이 용서해 준 자니이다.” 그리고 예수는 말했다: “네가 옳게 판단하였도다.” 그 여인을 가리키면서, 예수는 말을 이었다: “시몬아, 이 여인을 잘 들여다보라. 초청받은 손님으로 내가 집에 들어왔는데, 그래도 너는 내게 발 씻을 물을 주지 않았고, 감사하게 여기는 이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씻고 자기의 머리털로 내 발을 닦았느니라. 너는 친절한 인사로 내게 입맞추지 않았으되 이 여인은 들어온 뒤로 죽,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내 머리에 기름 붓기를 소홀히 하였으되 그 여인은 비싼 로션을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다만, 이 여인은 많은 죄를 용서받았고, 이것이 그 여자로 하여금 많이 사랑하게 하였느니라. 그러나 조금만 용서받은 자는 때때로 조금만 사랑하느니라.” 그 여인을 돌아보고, 여인의 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말했다: “너는 정말로 네 죄를 뉘우쳤고 용서를 받았느니라. 동포의 생각 없고 불친절한 태도에 낙심하지 말라. 하늘나라의 기쁨과 자유 속에 계속하여라.”
147:5.5 (1652.2)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시몬, 그리고 함께 저녁을 먹던 친구들은 더욱 놀랐고, 자기들끼리 속삭이기 시작했다. “감히 죄도 용서하다니 이 사람이 누구이냐?”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예수는 돌이켜서 여자를 보내며 말했다: “여자여, 평안히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147:5.6 (1652.3) 친구들과 함께 떠나려고 일어나면서, 예수는 시몬을 돌아보고 말했다: “시몬아, 네가 믿음과 의심 사이에 얼마나 갈팡질팡하는가, 얼마나 두려움 때문에 난처하고 자존심 때문에 괴로운가, 네 마음을 아노라. 그러나 네가 빛에 굴복하도록 너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며, 청하지 않고 반가이 맞지 않은 손님의 마음 속에서 하늘나라 복음이 이미 일으킨 엄청난 변화와 비교할 만하게, 바로 그런 정신과 영의 힘찬 변화를 인생의 네 위치에서 맛보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노라. 너희 모두에게 선언하노니, 들어갈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누구나 아버지가 하늘나라 문을 열어놓았고, 땅에서 가장 비천한 사람이나 가장 극악하다 생각되는 죄인조차도 진지하게 들어가기를 구하면, 그러한 자에게 어떤 사람이나 집단도 문을 닫을 수 없느니라.”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과 함께 예수는 청한 주인에게 작별을 알리고, 겟세마네 동산의 야영지에 있는 나머지 사도들과 합치려고 떠났다.
147:5.7 (1653.1) 바로 그날 저녁에 예수는 하나님과 관계된 지위의 상대적 가치, 그리고 파라다이스로 영원히 올라가는 진보에 관하여 사도들에게 오래 기억해야 할 연설을 하였다. 예수는 말했다: “아이들아, 아이와 아버지 사이에 참되고 살아 있는 연결이 존재한다면, 아이는 아버지의 이상을 향하여 계속 나아가는 것이 확실하니라. 아이가 처음에는 느리게 나아갈지 모르는 것이 참말이나 그래도 진보는 확실하니라. 중요한 것은 나아가는 속도(速度)가 아니라, 오히려 확실성이라. 너희가 실제로 거두는 성과는 너희의 나아가는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는 사실처럼 중요하지 않으니라. 날마다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오늘 너희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보다 무한히 중요하니라.
147:5.8 (1653.2) “너희 중에 몇이 오늘 시몬의 집에서 본 이 변화된 여인은 이 순간에, 시몬, 그리고 선의를 가진 그 친구들의 수준보다 훨씬 밑에서 살고 있느니라. 그러나 이 바리새인들은 의미 없는 예식으로 예배하는 수준, 사람을 속이는 수준을 거친다고 착각하면서 거짓된 진보에 골몰하지만, 이 여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길고도 파란 많은 탐험을 하느라고 아주 열심히 길을 떠났고, 하늘을 향한 그 여인의 길은 영적 자만과 도덕적 자기 만족으로 막혀 있지 않느니라. 인간적으로 볼 때 이 여인은 시몬보다 하나님으로부터 훨씬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 혼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느니라. 앞으로 이 여인에게 엄청난 영적 가능성이 있느니라. 너희 가운데 더러는 영과 혼의 실제 수준으로 볼 때 높은 자리에 서 있지 않을지 몰라도 너희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이르기까지 열려 있는 생명의 길에서 날마다 나아가고 있느니라. 너희 각자에게 미래에 엄청난 가능성이 있으며, 세상의 지혜와 영적 불신(不信)이 활기 없이 쌓인 위대한 지능을 소유하는 것보다, 작더라도 팔팔하고 성장하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훨씬 좋으니라.”
147:5.9 (1653.3)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자녀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예수는 사도들에게 진지하게 경고했다. 하늘 아버지가 늘 쉽게 죄를 묵인(黙認)하고 무자비함을 용서하는 부모, 물렁하거나 미지근하거나 어리석게 눈감아주는 부모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땅에서 어리석은 자들과 공모하여 생각이 모자라는 아이들의 도덕적 몰락을 초래하고, 그리하여 자식이 비행(非行)을 저지르고 일찍부터 타락에 빠지게 만드는 데 확실하게, 직접 기여하는 부모, 지나치게 무르고 지혜롭지 못한 어떤 부모처럼 하나님이 보이게 만들기까지 아버지와 아들의 예를 그릇 적용하지 말라고 듣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였다. 예수는 말했다: “내 아버지는 아이들이 도덕적으로 성장하고 영적으로 나아가는 모든 발걸음에서 자폭ㆍ자살하는 자녀들의 행위와 버릇을 응석받듯 묵인하지 않느니라. 그러한 죄 많은 버릇은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것이라.”
147:5.10 (1653.4) 예수와 사도들이 드디어 가버나움을 향해 떠나기 전에,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지위가 높은 자와 낮은 자, 부자와 가난한 자들과 함께, 반쯤 사사로운 다른 여러 모임과 잔치에 참석했다. 많은 사람이 정말로 하늘나라 복음의 신자가 되었고 나중에 아브너와 그 동료들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들은 예루살렘과 그 근처에서 하늘나라에 대하여 관심을 일으키려고 뒤에 남았다.
147:6.1 (1653.5) 4월의 마지막 주에, 예수와 열두 사도는 예루살렘 가까이 있는 베다니 본부를 떠났고, 예리고와 요단강의 길을 거쳐 가버나움으로 돌아가는 여행 길을 떠났다.
147:6.2 (1654.1) 주사제들 및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결정할 목적으로 비밀 회의를 많이 열었다. 모두가 예수의 가르침을 그만두게 하려고 무슨 일인가 해야 한다고 찬성했으나 그 방법에는 찬성할 수 없었다. 헤롯이 요한을 끝장낸 것 같이, 전에는 국가 당국이 그를 처분하기 바랐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인 관리들이 그의 전도(傳道)에 그다지 놀라지 않도록 예수가 일을 처리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따라서 예수가 가버나움을 향해서 떠나기 전날 열린 회의에서, 예수가 종교적 죄목으로 체포되고 산헤드린의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결정이 내렸다. 그러므로 비밀 첩자(諜者) 6인 위원회가 예수의 언행을 지켜보려고 따라다니라고 임명되었다. 이들은 율법을 어기고 신성을 모독하는 충분한 증거를 쌓았을 때 보고서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 여섯 유대인은 예리고에서 약 30명에 이르는 사도의 일행을 따라잡았다. 이들은 제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핑계로, 예수의 추종자 일행에 따라붙었으며 갈릴리에서 둘째 전도 여행이 시작될 때까지 그 무리와 함께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 가운데 세 사람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주사제들과 산헤드린에게 보고하였다.
147:6.3 (1654.2) 베드로는 요단강 건널목에서 모인 군중에게 설교했다. 이튿날 아침 그들은 아마투스 쪽으로 강을 따라 올라갔다. 가버나움까지 곧바로 진행하기를 바랐지만, 어찌나 큰 무리가 모였는지 여기서 전도하고 가르치고 세례를 주면서 사흘을 묵었다. 5월 초하루, 그들은 안식일 이른 아침까지 집을 향하여 발을 내딛지 않았다. 안식일에 예수가 주제넘게 여행을 떠나려 했으니, 예루살렘 첩자들은 예수에 대하여 첫 죄목―안식일을 어겼다는 죄목―을 이제 확보하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하도록 정해졌는데, 떠나기 바로 전에 예수가 안드레를 앞으로 불러서 모든 사람 앞에서 안드레에게 오직 9백 미터까지만 진행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대인이 합법적으로 안식일에 여행하는 거리였다.
147:6.4 (1654.3) 그러나 첩자들은 예수와 동료들이 안식일을 어겼다고 고발할 기회를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일행이 좁은 길을 따라서 지나가는 동안, 그때 막 익고 있던 밀, 바람에 넘실거리는 밀이, 길 어느 편에도 가까이 있었다. 사도들 가운데 몇이 배가 고파서 익은 이삭을 따서 먹었다. 나그네들이 길을 지나면서 이삭 따먹는 것이 관습이었고, 따라서 그런 행위가 잘못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첩자들은 예수를 공격하기 위한 핑계로서 이것을 붙잡았다. 안드레가 이삭을 손에 비비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다가가서 말했다: “안식일에 이삭을 따서 비비는 것이 율법에 어긋남을 너는 모르느냐?” 안드레가 대답했다. “그러나 우리는 배가 고프고, 겨우 필요를 채울 만큼만 비비노라. 그리고 언제부터 안식일에 이삭 먹는 것이 죄가 되었느냐?”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대답했다: “먹는 것은 아무 잘못이 없지만, 이삭을 따서 두 손 사이에 비비면서 너는 율법(律法)을 어기느니라. 분명히 너의 주는 그런 행위를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 그리고 나서 안드레가 말했다: “그러나 이삭 먹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면, 분명컨대 우리 손에 비비는 것은 네가 허락하는 이삭 씹기보다 도저히 더 큰 일이 아니라. 어째서 그런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느냐?” 안드레가 그들이 트집꾼이라고 비추자 그들은 분개했고, 예수가 마태에게 말씀하면서 따라 걷는 데로 달려가서, 항의하며 말했다: “보소서, 선생이여, 당신의 사도들이 안식일에 율법에 어긋나는 일을 하나이다. 저희가 이삭을 따서 비벼서 먹나이다. 우리는 당신이 저희에게 그만두라고 명하시리라 확신하나이다.” 그러자 예수는 고발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정말로 율법에 열심이로다. 너희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를 잘도 기억하였구나. 그러나 너희는 성서에서 읽은 적이 없느냐? 어느 날 다윗이 배가 고파서, 다윗과 그와 함께 있던 자들이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서 제사 빵을 먹었는데, 사제들을 제외하고 누구라도 이를 먹는 것이 율법에 어긋나느니라. 게다가 다윗은 그와 함께 있던 자들에게 또한 이 빵을 주었느니라. 안식일에 많은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함을 우리 율법에서 읽지 아니하였느냐?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오늘의 허기를 채우려고 가져온 것을 너희가 먹는 것을 내가 구경하지 아니하겠느냐? 착한 사람들아, 안식일을 위하여 열심을 가진 것이 잘하는 일이어도 동료의 건강과 안녕을 지키는 것이 더욱 좋으리라. 내가 선언하노니,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졌고 사람이 안식일(安息日)을 위하여 만들어지지 않았느니라. 너희가 내 말을 감시하려고 우리와 함께 있다면 나는 드러내놓고 선언하리니,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도 다스리는 주인이라.”
147:6.5 (1655.1) 바리새인들은 분별 있고 지혜로운 그의 말씀에 깜짝 놀라고 당황했다. 남은 그날 동안 자기들끼리 있었고, 감히 아무 질문도 더 하지 않았다.
147:6.6 (1655.2) 유대인의 전통, 그리고 종처럼 예식 따르기를 반대하는 예수의 태도에는 언제나 적극성이 있었다. 그는 반대를 행동으로 옮겼고 확신대로 하였다. 주는 부정적으로 비난하는 데 시간을 거의 쓰지 않았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멋대로 죄를 지어 자신을 속이지 않고 사는 자유를 즐길 수 있다고 가르쳤다. 예수는 사도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아, 너희가 진리로 깨우침을 받고 무슨 일을 하는지 정말로 안다면, 너희는 복을 받았느니라. 그러나 신다운 길을 모른다면, 너희는 불행하고 이미 율법을 어기는 자이라.”
147:7.1 (1655.3) 예수와 열두 사도가 타리케아에서 배를 타고 벳세다로 온 것은 5월 3일 월요일 한낮 무렵이었다. 함께 여행하던 사람들을 피하려고, 그들은 배를 타고 여행했다. 그러나 이튿날이 되자,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공식(公式) 첩자들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은 다시 예수를 찾아냈다.
147:7.2 (1655.4) 화요일 저녁에 묻고 대답하는 관례적 수업 하나를 예수가 진행하고 있을 때, 여섯 첩자의 두목이 그에게 말했다: “나는 여기 당신의 가르침에 참석하고 있는 요한의 제자 한 사람과 오늘 이야기하고 있었나이다. 우리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것 같이, 그리고 요한이 그 추종자들에게 명하는 것처럼, 어찌하여 당신은 한 번도 제자들에게 금식하고 기도하라 명하지 않는가 우리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나이다.” 요한이 한 말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질문한 사람에게 예수는 대답했다: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 혼인집의 손님들이 금식하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한, 저희는 도저히 굶을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리니, 그때 혼인집의 손님들이 물론 금식하고 기도하리라. 기도하는 것은 빛의 아이들에게 자연스러우나 금식하는 것은 하늘나라 복음의 일부가 아니라. 지혜로운 재단사(裁斷師)는 줄어들지 않은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꿰매어 붙이지 않음을 기억하라, 젖었을 때 줄어들어 더 나쁘게 찢어질까 두려움이라. 사람은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넣지도 않으니, 새 포도주가 가죽을 터뜨려 포도주와 가죽이 다 못 쓰게 될까 두려움이라. 지혜로운 사람은 새 포도주를 새 가죽 부대에 넣느니라. 그런즉 내 제자들이 옛 질서를 새로운 하늘나라 복음의 가르침 속에 지나치게 집어넣지 아니하는즉 저희가 지혜를 보이느니라. 선생을 잃은 너희는 한동안 금식(禁食)할 명분이 있을까 하니라. 금식은 모세 율법에서 타당한 부분일지 모르지만, 다가오는 하늘나라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신성한 정신으로 기쁨을 누리리라.”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요한의 제자들은 위로를 받았고, 한편 바리새인들은 더욱 어리둥절하였다.
147:7.3 (1656.1) 다음에 주는 더 나아가서, 모든 옛 가르침을 전적으로 새로운 신조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품지 않도록 청중에게 경고했다. 예수는 말했다: “오래 되고 또한 참된 것은 지속되어야 하며, 마찬가지로, 새로워도 거짓인 것은 물리쳐야 하느니라. 그러나 새롭고도 참된 것을 받아들일 믿음과 용기를 가지라. 이렇게 기록된 것을 기억하라: ‘오래 된 친구를 버리지 말지니, 새 친구가 저와 견줄 만하지 못함이라. 새 친구는 새 포도주와 같으니, 포도주가 오래 되면 너희가 즐겁게 마시리라.’”
147:8.1 (1656.2) 그날 밤에, 보통 있던 청중이 물러간 뒤에 오랫동안, 예수는 사도들을 계속 가르쳤다. 선지자 이사야를 인용함으로 이 특별 강의를 시작했다:
147:8.2 (1656.3) “‘너희가 어째서 금식하였느냐? 너희가 계속하여 남을 압박하는 기쁨을 맛보고 불법을 기뻐하면서, 무슨 까닭으로 너희 혼을 괴롭히느냐? 보라, 너희는 싸우고 다투기 위하여, 그리고 사악한 주먹으로 사람을 치려고 금식하는구나. 그러나 너희 목소리가 하늘에 들리게 하려면 이런 식으로 금식하지 말라.
147:8.3 (1656.4) “‘내가 택한 것이 그러한 금식일이냐―사람이 제 혼을 괴롭히는 날이냐? 파피루스 갈대와 같이 머리를 수그리는 것, 베옷과 재 속에서 기는 것이겠느냐? 너희가 감히 이것을 금식일이라 부르고, 주가 보시기에 마음에 드는 날이라 하겠느냐? 내가 선택할 금식은 사악한 쇠사슬을 풀어주고 무거운 짐을 묶은 매듭을 풀어주며, 억압받는 자를 풀어주고 멍에를 모조리 꺾어버리는 것이 아니겠느냐? 내 빵을 배고픈 자와 나누며 집 없고 가난한 자를 내 집으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냐? 헐벗은 자를 보면, 내가 저희에게 옷을 입히리라.
147:8.4 (1656.5) “‘그리하면 아침 같이 네 빛이 퍼질 것이요, 한편 네 건강이 빨리 좋아지리라. 너의 올바름이 네 앞에 가며 주의 영광이 네 뒤를 지키리라. 그리고 나서 네가 주를 부르면 그가 대답하리라. 네가 부르짖을 때―내가 여기 있다―주가 말하리라. 네가 억압과 정죄와 허영을 삼가면 주가 이 모든 것을 행하리라. 네가 마음 속에 귀중한 것을 배고픈 자에게 베풀고 고통받는 자를 보살피기를 아버지가 오히려 바라시느니라. 그리하면 네 빛이 컴컴한 데서 빛나며, 너의 어둠조차 대낮처럼 밝으리라. 그리하면 주가 너를 줄곧 안내하며, 너의 혼을 채워주고 네 힘을 새롭게 하리라. 너는 물을 준 동산 같이, 그침없이 솟아나는 샘 같이 되리라. 이 일을 하는 자는 지나간 영광을 회복하리라. 저희는 여러 세대의 기초를 세우겠고, 저희를 무너진 담을 새로 세운 자라, 안전하게 다닐 길을 회복한 자라 부르리라.’”
147:8.5 (1656.6) 그리고 나서, 현재와 미래의 하늘나라에 그들이 있도록 보장하는 것은 믿음이요, 혼을 괴롭히거나 육체로 굶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예수는 밤이 늦도록 사도들에게 제시했다. 적어도 옛 선지자의 이상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사도들을 훈계하였고, 이사야와 옛 선지자들의 이상도 훨씬 뛰어넘어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리라는 희망을 표현했다. 그날 밤에 마지막 말씀은 이러하였다: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동시에 모든 사람이 형제임을 인정하는 사실을 깨닫는 생생한 믿음으로, 은혜 속에서 성장하여라.”
147:8.6 (1656.7) 새벽 2시가 지나서야 예수는 말씀을 그쳤고 사람마다 잠을 자러 자리에 들어갔다.
148:0.1 (1657.1) 서기 28년 5월 3일부터 10월 3일까지, 예수와 사도 일행은 벳세다에서 세베대의 집에 거하고 있었다. 이 다섯 달 동안의 건조기에 내내, 세베대의 주택 가까이 바닷가에서 거대한 캠프가 유지되었고, 늘어나는 예수의 일행에게 잠자리를 마련해 주려고 크게 확장되었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 병 고침을 받으려 하는 자, 호기심 있는 신자들의 항상 변동하는 인구가 이 바닷가 캠프를 차지했고, 이들의 수는 5백에서 1천 5백 명에 이르렀다. 다윗 세베대가 이 텐트 도시의 일반 감독을 맡았고 알패오 쌍둥이의 도움을 받았다. 야영지는 일반 행정 뿐 아니라, 질서와 위생 면에서도 본보기였다. 서로 다른 종류의 병자들은 분리되었고 신자인 어느 의사, 엘만이라 이름하는 시리아인의 감독을 받았다.
148:0.2 (1657.2) 이 기간을 통하여 내내, 사도들은 한 주에 적어도 하루, 물고기를 잡으러 가곤 하였다. 그들은 잡은 것을 바닷가 야영지에서 소비하도록 다윗에게 팔았다. 이렇게 받은 돈은 집단 금고에 넘겼다. 열두 사도는 달마다 한 주,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허락되었다.
148:0.3 (1657.3) 안드레는 사도 활동의 전반적 책임을 계속 맡았고, 베드로는 전도사 학교를 완전히 책임졌다. 사도들은 모두 매일 오전에 전도사 무리를 가르치는 일을 나누었고, 선생과 생도들이 모두 오후에 사람들을 가르쳤다. 저녁 식사 뒤, 한 주에 닷새 저녁에 사도들은 전도사들을 위하여 질문하는 학급을 운영했다. 한 주에 한 번, 예수는 이 질문 시간을 주관하였고 이전 수업에서 넘어온 질문에 대답했다.
148:0.4 (1657.4) 다섯 달 동안 수천 명이 이 야영지를 다녀갔다. 흔히 로마 제국의 곳곳으로부터, 그리고 유프라테스 강 동쪽 지역으로부터,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참석했다. 이때는 주가 가르친 가운데 가장 오래 정착되고 잘 조직된 기간이었다. 예수의 직계 가족은 이 시간의 대부분을 나사렛이나 가나에서 보냈다.
148:0.5 (1657.5) 야영지는 사도의 일행처럼, 공동 관심거리를 가진 공동체로서 운영되지 않았다. 아무도 거절해서 돌려보내지 않았는데도, 다윗 세베대는 자급하는 기업(企業)이 되도록 이 큰 텐트 도시를 운영했다. 항상 변하는 이 캠프는 베드로의 전도사 훈련 학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었다.
148:1.1 (1657.6) 베드로ㆍ야고보ㆍ안드레는 전도사 학교에 입학하려고 지원하는 자들을 심사하라고 예수가 임명한 위원회였다. 이 새 선지자 학교의 학생들은 로마 세계, 그리고 멀리 인도까지, 동부의 모든 종족과 국민을 대표하였다. 이 학교는 배우고 실천하는 계획에 바탕을 두고 운영되었다. 학생들이 아침 시간에 배운 것을 오후에 바닷가에서 회중(會衆)에게 가르쳤다. 저녁을 먹은 뒤에, 오전에 배운 것과 오후에 가르친 것을 다 격식 차리지 않고 토론했다.
148:1.2 (1658.1) 사도인 선생들은 각자 하늘나라 복음에 대하여 자기의 견해를 가르쳤다. 똑같이 가르치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다. 신학 교리를 표준화하거나 신조의 형식으로 만들지 않았다. 비록 모두가 같은 진리를 가르쳤어도 각 사도는 주의 가르침에 대하여 자기 개인의 해석을 제시하였다. 예수는 하늘나라의 일을 하면서 얻는 다양한 개인 체험을 이렇게 발표하는 것을 지지했고, 주마다 있는 질문 시간에 복음에 대하여 많고 다양한 이 여러 관점을 어김없이 조화하고 조정하였다. 가르치는 문제에서 이렇게 크게 개인적 자유가 있었는데도, 시몬 베드로는 전도사 학교의 신학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었다. 베드로 다음에는, 야고보 세베대가[1] [1794] 가장 크게 개인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148:1.3 (1658.2) 바닷가에서 이 다섯 달 동안 훈련받은 1백 명이 넘는 전도사들이 바탕이 되어, 이들로부터 (아브너를 비롯한 요한의 사도들을 제쳐놓고) 나중에 70인의 복음 선생과 설교자가 뽑혔다. 전도사 학교는 열두 사도가 한 것과 같은 정도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지 않았다.
148:1.4 (1658.3) 이 전도사들은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기는 했어도, 70인의 하늘나라 사자로서 나중에 예수가 그들을 세우고 임명할 때까지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지 않았다. 해지는 장면에서 병 고침받은 큰 무리 가운데 겨우 일곱 사람이 이 학생 전도사들 사이에 있는 것이 눈에 띄게 되었다. 가버나움 귀인(貴人)의 아들은 베드로의 학교에서 복음 봉사를 위하여 훈련받은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148:2.1 (1658.4) 바닷가 야영지와 관련하여 시리아인 의사 엘만은 젊은 여자 25명과 남자 12명으로 된 집단의 도움을 얻어서, 하늘나라의 첫 병원이라고 여겨야 할 것을 조직하고 넉 달 동안 운영했다. 주요 텐트 도시의 남쪽에서 짧은 거리에 자리잡은 이 병원에서, 그들은 기도하고 믿음으로 격려하는 영적 관습 뿐 아니라 모든 알려진 물질적 방법으로 병자들을 치료했다. 예수는 한 주에 적어도 세 번, 이 야영지의 병자들을 찾아보고 각 병자와 친히 접촉했다. 우리가 아는 한, 좋아지거나 치유되어서 이 병원을 떠난, 고통받고 앓던 사람 1천 명 가운데, 이른바 초자연적으로 치유받은 기적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덕을 본 사람들의 대다수가 예수가 그들을 고쳤다고 그침 없이 선포하였다.
148:2.2 (1658.5) 예수가 엘만의 환자들을 위하여 베푼 봉사와 관련하여 일어난 많은 치유는 정말로 기적의 작용과 비슷한 듯했다. 그러나 그 병 고침은 믿음에 지배되고 기대하는 사람들의 체험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정신과 영의 변화일 뿐이라고 우리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은 힘차고 적극적이고 인자한 인격자로부터 직접 격려하는 영향을 받았고 그런 인격자의 보살핌은 두려움과 걱정을 없앤다.
148:2.3 (1658.6) 엘만과 그 동료들은 “악령에 들리는 것”에 관하여 이 환자들에게 진실을 가르치려고 애썼지만, 조금도 성공하지 못했다. 환자의 머리나 몸에 이른바 더러운 귀신이 거함으로 육체의 병과 정신의 혼란이 생길 수 있다는 관념은 거의 보편적이었다.
148:2.4 (1659.1) 병자와 고통받는 자와 어떤 접촉을 가져도, 치료하는 기법이나 또는 병의 알려지지 않은 원인을 밝히는 문제에 부닥쳤을 때, 예수는 유란시아에서 육신화 모험을 시작하기 전에 파라다이스 형 이마누엘이 준 지침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러긴 했어도 병자를 보살핀 사람들은 예수가 어떻게 아프고 고통받는 자의 믿음과 확신을 불러 일으키는가 지켜보고서 많은 유익한 교훈을 얻었다.
148:2.5 (1659.2) 말라리아가 늘어나는 철이 다가오기 얼마 전에 그 야영지는 해산되었다.
148:3.1 (1659.3) 이 기간을 통하여 내내 예수는 열두 번이 안 되게 야영지에서 대중 예배를 인도했다. 그리고 새로 훈련받은 전도사들과 함께 갈릴리로 두 번째 전도 여행을 떠나기 전 둘째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오직 한 번 말씀했다.
148:3.2 (1659.4) 세례받은 뒤로, 주는 벳세다에서 전도사들을 훈련하는 이 야영 기간처럼 많이 혼자 지낸 적이 없었다. 사도들 가운데 누구라도 예수에게 어째서 그들 사이에서 그렇게 자주 자리를 비우는가 감히 물을 때마다, “아버지의 일을 돌보고” 있다고 변함없이 대답하곤 하였다.
148:3.3 (1659.5) 자리를 비운 이 기간에, 예수는 오직 두 사도를 데리고 다녔다. 1백 명이 넘는 새 전도사 후보들을 훈련하는 일에 참석할 수 있도록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도 그를 몸소 동반하는 임무로부터 일시 풀어주었다. 아버지의 일과 관련하여 산으로 가고 싶었을 때, 그는 시간이 있을까 싶은 사도들 중에 아무나 두 사람을 따라오라고 불러내곤 했다. 이 방법으로 열두 사람은 각자, 예수와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친밀하게 접촉할 기회를 누렸다.
148:3.4 (1659.6) 이 기록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에게 계시되지는 않았으나, 산에서 혼자 있는 이 여러 기간에 우리는 주가 우주 사무를 담당하는 주요 지도자들에게 직접, 지시를 내리는 접촉을 하고 있었다고 짐작하게 되었다. 세례받은 무렵 이후로 내내, 우리 우주의 육신화된 이 군주는 우주 행정의 어떤 국면을 지휘하는 데 더욱 의식하여 활동적이 되었다. 가까운 동료들에게 드러나지 않은 어떤 방법으로, 지상의 사무에 참여하는 일이 줄어든 이 몇 주 동안, 그는 광대한 우주를 운영하는 책임을 맡은 높은 영 지성 존재들의 지휘에 몰두하였고, 인간 예수가 그런 활동을 그의 편에서 “아버지의 일을 돌본다”고 말하기로 작정하였다는 의견을 우리는 언제나 유지해 왔다.
148:3.5 (1659.7) 여러 번, 예수가 몇시간 동안 혼자 계실 때, 그러나 사도들 가운데 둘이 가까이 있을 때 예수가 아무 말씀을 하는 것을 듣지는 못했어도 그들은 예수의 모습이 빠르고 다채로운 변화를 겪는 것을 지켜보았다. 더러가 나중 기회에 구경한 것처럼, 그들은 주와 교통하고 있었을까 싶은 하늘 존재들이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것도 도무지 관찰하지 못했다.
148:4.1 (1659.8) 한 주에 이틀 저녁은 세베대의 집 뜰에서, 떨어지고 아늑한 어느 구석에서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개인들과 특별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예수의 버릇이었다. 이러한 어느 저녁 대화에서 토마스가 개인적으로 이렇게 물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찌하여 사람들이 영에게서 태어나야 하나이까?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악마의 손아귀를 벗어나는 데 필요하나이까? 주여, 무엇이 악이나이까?” 이 물음을 듣자, 예수는 토마스에게 말했다:
148:4.2 (1660.1) “악과 악마, 더 분명히 말하면 불의한 자,[2] [1795] 이 두 가지를 혼동하지 말라. 네가 악마라고 부르는 자는 이기심의 아들이요, 내 아버지와 그에 충성하는 아들들의 통치에 대항하여, 일부러 계획하여 반란을 일으킨 높은 행정가이라. 그러나 나는 이 죄 많은 반역자들을 이미 이겼노라. 아버지와 우주에 대하여 다른 이 여러 가지 태도를 네 머리 속에서 분명히 해두어라. 아버지의 뜻에 관계되는 이 법칙을 결코 잊지 말라:
148:4.3 (1660.2) “악은[3] [1796] 신의 율법, 즉 의식하지 못하거나 뜻하지 않게, 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 마찬가지로 악은 아버지의 뜻에 얼마나 불완전하게 복종하는가를 재는 척도이라.
148:4.4 (1660.3) “죄는 의식하고 알면서 일부러, 신의 율법, 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 죄는 신의 이끄심을 받고 영적으로 지도받기를 얼마나 꺼려하는가를 재는 척도이라.
148:4.5 (1660.4) “불의(不義)는 의지하여, 굳게 결의하고, 끈질기게 신의 율법, 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 불의는 사랑으로 인격자를 살아남게 하는 아버지의 계획, 그리고 아들들이 베푸는 자비로운 구원을 얼마나 계속 물리치는가를 재는 척도이라.
148:4.6 (1660.5) “영이 다시 태어나기 전에 필사 인간은 본래부터 못된 성향에 자연히 지배를 받으나 그러한 자연스러운 행동이 불완전한 것은 죄도 불의도 아니라. 필사 인간은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의 완전함에 이르는 긴 오르막길을 막 내딛고 있느니라. 타고난 자질이 불완전하고 치우친 것은 죄가 없느니라. 사람은 정말로 잘못에 지배되어도, 죄의 길과 불의한 생활을 알면서 일부러 택하지 않으면 어떤 의미에서도 악마의 자식이 아니라. 잘못은 이 세상의 자연 질서 안에 본래부터 있으나, 죄는 영적 빛으로부터 짙은 어둠 속에 빠진 자들이 이 세상으로 가져온 태도, 의식하여 반역하는 태도이라.
148:4.7 (1660.6) “토마스야, 너는 그리스인의 신조와 페르시아인의 오류로 인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느니라. 인류가 완전한 아담과 함께 땅에서 시작했다가 죄를 통하여 사람의 불쌍한 현재의 처지로 빨리 타락했다고 보는 까닭에 너는 악과 죄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느니라. 어떻게 아담의 아들 가인이 놋의 땅으로 건너가서 아내를 얻었는가 드러내는 기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찌하여 너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느냐? 어찌하여 너는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내를 찾는다고 묘사하는 기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석하려 하지 않느냐?
148:4.8 (1660.7) “사람은 정말로 성품이 나빠도 반드시 죄가 있지는 않느니라. 새로 태어나는 것―영의 세례를 받는 것―은 악에서 벗어나는 데 필수이고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데 필요하지만, 이 중에 아무것도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손상치 않느니라. 이러한 나쁠 잠재성이 본래부터 있는 것은 사람이 어떤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멀어져서, 외래인이나 외국인이나 의붓아들로서 어떤 방법으로 아버지의 합법적 양아들이 되기를 추구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느니라. 모든 그러한 개념은 첫째로, 네가 아버지를 오해한 데서, 둘째로 사람의 기원ㆍ성품ㆍ운명을 몰라서 생기느니라.
148:4.9 (1660.8) “그리스인 및 다른 사람들은 사람이 신 같이 완전한 처지에서 망각이나 파멸로 꾸준히 떨어지고 있다고 가르쳐 왔느니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하늘나라로 들어감으로 하나님과 신의 완전함에 이르기까지 확실하고 분명하게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 어떤 면에서도 영원한 아버지가 뜻하는 신성한 영적 이상에 미치지 못하는 존재는 누구나 나쁠 잠재성이 있으나 그러한 존재는 어떤 의미에서도 불의는커녕 죄도 없느니라.
148:4.10 (1661.1) “토마스야, 이것을 성서에서 읽지 않았느냐, 거기에 쓰여 있으되,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자녀이라.’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겠고 그는 내 아들이 될지니라.’ ‘내 아들이 되라고 내가 그를 선택하였도다―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리라.’ ‘내 아들들을 멀리서, 내 딸들을 땅 끝으로부터 데려 오라.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마다 데려올지니,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저희를 지었음이라.’ ‘너희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영을 가진 자는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친자식 안에는 인간 아버지를 닮은 물질 부분이 있으나, 하늘나라에는 모든 믿음의 아들에게 하늘 아버지를 닮은 영적 부분이 있느니라.”
148:4.11 (1661.2) 이 모든 것과 더 많은 것을 예수는 토마스에게 일러주었고 그 사도는 많이 알아들었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까지 이 문제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 하고 예수는 당부했다. 주가 이 세상을 떠난 뒤까지 토마스는 이 회견을 언급하지 않았다.
148:5.1 (1661.3) 뜰에서 또 다른 개인적 회견이 있었는데 나다니엘이 예수에게 물었다: “주여, 당신이 어찌하여 가리지 않고 병 치료하기를 거절하는가 비로소 이해가 가오나, 하늘에 계신 사랑의 아버지가 어찌하여 땅에서 허다한 자녀들이 그렇게 많은 병을 앓도록 놓아두는가 아직도 알 수 없나이다.” 주는 나다니엘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148:5.2 (1661.4) “나다니엘아, 너와 많은 다른 사람이 그렇게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한 어떤 반역자들이 죄 많은 모험을 한 까닭에 어떻게 이 세상의 자연 질서가 여러 번 뒤집혔는가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이라. 이것들을 비로소 정리하려고 내가 왔노라. 그러나 우주의 이 부분을 옛 길로 돌이키고 사람의 아이들을 그렇게 더 얹은 죄와 반란의 짐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리리라. 악의 존재만으로도 사람이 승천(昇天)하기 위하여 충분한 시험이라―죄는 살아남는 데 필수인 것이 아니라.
148:5.3 (1661.5) “그러나 이 사람아, 너는 아버지가 일부러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사람은 신의 뜻을 따르는 더 좋은 길을 걷지 않으려고 끈질기게 거절하는 결과로 필요 없는 고통을 초래하며, 고통은 잘못 속에 잠재하지만 고통의 상당 부분은 죄와 불의로 인하여 생겼느니라. 많은 특별한 사건이 이 세상에서 벌어졌고, 분별 있는 모든 사람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장면을 구경하고서 당황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으나 너는 한 가지를 확신해도 좋으니라: 아버지는 잘못을 임의로 벌하려고 질병을 보내지 않느니라. 잘못을 저지르는 불완전함과 장애는 본래부터 있는 것이요, 죄에 대한 벌은 불가피하고, 불의(不義)의 파괴적 결과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 사람은 자신이 선택하는 생활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얻는 질병 때문에 하나님을 탓해서는 안 되며, 이 세상에서 사는 그러한 생활의 일부로 겪는 체험을 불평해서도 안 되느니라. 땅에서 지위의 개선을 위하여 끈질기게, 한결같이 필사 인간이 일해야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 머리를 총명하게 쓰면 사람이 땅에서 겪는 많은 불행을 이겨낼 수 있게 하리라.
148:5.4 (1662.1) “나다니엘아, 사람들이 저희의 영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돕는 것, 그리고 다양한 물질적 문제를 열심히 해결하기 위하여 저희가 더 낫게 준비되고 영감을 받도록 이렇게 정신을 자극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 네가 성서를 읽으면서 어떤 혼란을 겪는지 내가 아노라. 무지한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려 하는 경향이 너무나 흔히 지배하였느니라.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아버지는 몸소 책임이 없느니라. 그가 예비하신 어떤 바르고 지혜로운 법칙이 네가 몰라서 또는 일부러 그러한 신의 법령을 어긴 까닭에 어쩌다가 너를 괴롭힌다고 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
148:5.5 (1662.2) “그러나 나다니엘아, 헤아리면서 읽기만 했다면 성서에서 많은 것을 네가 배웠으리라. 이렇게 기록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 아들아, 주의 징벌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그의 징계를 싫어하지도 말라, 이는 아버지가 기뻐하는 아들을 꾸짖는 것 같이, 주가 꾸짓는 자를 사랑함이라.’ ‘주는 괴롭히기를 달가워하지 않느니라.’ ‘고통을 받기 전에 내가 길을 잃었으나 이제 내가 율법을 지키노라. 고통이 내게 약이 되었으니, 이리하여 내가 신의 계명을 배울까 함이라.’ ‘나는 너희의 슬픔을 아노라. 영원한 하나님은 너희의 피난처요 그 밑에 영원한 팔이 있느니라.’ ‘주는 또한 억눌린 자에게 피난처요 어려운 시절에 쉴 안식처이라.’ ‘주는 병상에 누워 있는 자에게 힘을 주실 것이요 병자를 잊지 아니하리라.’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동정심을 보이는 것 같이, 주는 그를 두려워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니라. 그는 너의 몸을 알고 네가 티끌임을 기억하시니라.’ ‘그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저희의 상처를 동여매시니라.’ ‘그는 가난한 자의 소망이요, 슬픔에 빠진 곤궁한 자에게 힘이요, 폭풍을 피하는 항구요, 불같은 더위를 피하는 그늘이라.’ ‘그는 기력 없는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아무 힘도 없는 자에게 힘을 키워 주시니라.’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리라.’ ‘고통의 물결을 지나갈 때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역경의 강물이 넘쳐 너를 덮을 때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마음이 상한 자를 싸매고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통곡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라고 그가 나를 보내셨도다.’ ‘고통 속에 꾸지람이 있고 질병은 티끌에서 솟아나지 않느니라.’”
148:6.1 (1662.3) 바로 이날 저녁에 벳세다에서 요한이 또한 예수에게 어째서 겉보기에 결백한 수많은 사람이 많은 병으로 고생하고 그렇게 많이 고통을 받는가 물었다. 요한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다른 여러 가지 가운데, 주는 말했다:
148:6.2 (1662.4) “이 사람아, 너는 역경의 뜻이나 고통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하는도다. 너는 셈족 문학의 걸작―성서에 욥이 고통받는 이야기―를 읽지 아니하였느냐? 이 놀라운 비유가 주의 종의 물질적 번영을 읊으면서 시작되는 것을 기억하지 않느냐? 욥은 자식ㆍ재산ㆍ위엄ㆍ지위ㆍ건강, 그리고 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이 귀중히 여기는 모든 다른 것으로 복을 받았음을 네가 잘 기억하느니라. 아브라함 자손들의 전통으로 내려오는 가르침에 따르면, 그러한 물질적 번영은 신의 은총을 받았다는 온통 충분한 증거였도다. 그러나 그러한 물질 재산과 현세의 번영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키지 않느니라. 하늘에 계시는 내 아버지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똑같이 사랑하시니 그가 사람을 차별하는 분이 아님이라.
148:6.3 (1663.1) “신의 율법을 어기면 머지 않아 벌을 거두는 일이 따르고 분명히 사람들은 궁극에 저희가 뿌린 것을 거두느니라. 그래도 인간의 고통은 반드시 앞서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욥과 그의 친구들은 저희의 당황스러운 처지에 대하여 참된 답을 찾아내지 못하였더라. 네가 지금 가진 깨달음에 비추어, 이 독특한 비유에서 사탄이나 하나님이 행하는 일을 너는 도저히 하나님과 사탄에게 돌리지 아니하리라. 욥은 고통을 통해서 지적(知的) 문제를 해결하거나 철학적 곤경에 해답을 찾지는 못했어도, 큰 승리를 거두었느니라. 신학적 방어가 무너지는 바로 그 마당에서도 ‘나는 내가 몹시 싫도다’하고 진지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영적 높이까지 올라갔고, 그리고 나서 그는 하나님의 환상을 보는 구원을 받았느니라. 그래서 어찌하여 고통받는가 오해했어도 욥은 도덕적 이해와 영적 통찰력을 얻는 초인간 수준에 올라갔느니라. 고통받는 종이 하나님의 환상을 볼 때,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혼의 평화가 따르느니라.
148:6.4 (1663.2) “욥의 첫째 친구 엘리바스는, 그 고통받는 자가 번영하던 시절에 다른 사람들에게 처방한 것과 똑같은 인내심을 욥이 고난받는 가운데 보이라고 훈계하였더라. 이 거짓 위로자가 가로되 ‘욥아 네 종교를 신뢰하라. 고통받는 것은 사악한 자요 올바른 자가 아님을 기억하라. 너는 이 벌을 받아 마땅함이 틀림없으니, 마땅하지 않다면 네가 고통받지 아니하리라. 아무도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를 수 없음을 네가 잘 아는도다. 사악한 자가 결코 정말로 번영하지 않음을 네가 아는지라. 어쨌든 사람은 고생하라고 미리 운명을 타고난 듯하고, 아마도 주는 너에게 좋으라고 너를 꾸짖을 뿐이라’ 하였더라. 인간이 고통받는 문제를 그렇게 해석함으로 불쌍한 욥이 크게 위로받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
148:6.5 (1663.3) “그러나 둘째 친구 빌닷의 충고는 그때 인정된 신학(神學)의 관점에서 볼 때 건전하였어도 마음을 더욱 답답하게 하였더라. 빌닷이 말하되, ‘하나님은 부당하실 수 없도다. 네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으니 죄인임이 틀림없느니라. 네가 잘못했음이 틀림없으니, 잘못하지 않았다면 네가 그리 고통받지 아니하리라. 네가 정말로 올바르다면 하나님이 확실히 너를 고통에서 건지리라. 하나님이 사람을 상대한 역사로부터 너는 전능자가 오직 사악한 자를 멸망시킴을 배워야 하느니라.’
148:6.6 (1663.4) “다음에 욥이 친구들에게 어떤 말로 대답했는가 네가 기억하느니라: ‘하나님은 내가 도와달라 외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심을 내가 잘 아노라. 어찌 하나님이 옳으면서 동시에 나의 결백을 철저히 무시할 수 있느냐? 전능자에게 호소하여 내가 아무 만족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노라. 선한 자가 사악한 자에게 박해받는 것을 하나님이 참는 것을 너는 헤아릴 수 없느냐? 그리고 사람이 아주 약한즉, 전능한 하나님 손에서 사람이 무슨 배려를 받을 기회가 있느냐? 하나님은 내 모습대로 나를 지으셨고 이렇게 나를 치실 때 나는 막을 수 없노라. 도대체 어찌하여 하나님이 이 비참한 모양으로 그저 고통을 받으라고 나를 지으셨더냐?’
148:6.7 (1663.5) “친구들의 조언, 그리고 머리를 차지했던 하나님에 관한 그릇된 관념에 비추어 볼 때, 누가 욥의 태도에 도전할 수 있느냐? 욥이 사람다운 하나님을 몹시 바란 것, 사람의 죽어야 할 지위를 알고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긴 여행에 이 첫 생명의 일부로서 올바른 자가 결백하면서도 때때로 고통받아야 함을 이해하는 그런 신다운 존재와 욥이 몹시 교통하고 싶어한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그런즉 이제부터 욥이 견딘 고통을 견디라고 요청받을 모든 사람을 위로하고 구원할 수 있도록 사람의 아들이 육체를 입고 인생을 살려고 아버지로부터 왔느니라.
148:6.8 (1663.6) “그리고 나서 욥의 셋째 친구 소팔이 더군다나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을 이렇게 뱉었더라: ‘네가 이렇게 고통받는 것을 보아하니, 네가 올바르다고 주장하는 것이 어리석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을 이해하기 불가능함을 내가 인정하노라. 아마도 너의 모든 불쌍한 처지에 어떤 목적이 감추어져 있는가 보다.’ 모두 세 친구의 말을 듣고 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목숨이 길지 않고 고생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내세우면서 욥은 도와달라고 바로 하나님께 하소연하였더라.
148:6.9 (1664.1) “다음에 친구들과 둘째 회견이 시작되었는데, 엘리바스는 더욱 준엄해졌고 그를 헐뜻고 빈정거렸더라. 빌닷은 욥이 친구들을 경멸하는 것을 분개하게 되었고 소팔은 우울한 조언을 되풀이하였더라. 이때가 되자 욥은 친구들에게 진절머리가 나서 다시 하나님께 호소하였고, 친구들의 철학에 모습이 나타나고 자신의 종교적 태도에도 소중히 간직했던 불공평한 하나님에 맞서서 공정한 하나님에게 이제 하소연하였더라. 다음에 욥은 필사 존재에서 생기는 불평등이 좀더 공정하게 시정될까 싶은 미래 생명에서 위안을 얻으려 하였더라. 사람한테서 도움을 받지 못하자 욥은 하나님께로 향하느니라. 그리고 나서 마음 속에서 믿음과 의심의 큰 싸움이 따르느니라. 마침내, 고통받던 인간이 비로소 생명의 빛을 보고 시달리던 혼(魂)이 희망과 용기를 얻는 새로운 경지까지 올라가느니라. 계속 고생할지 몰라도, 아니 죽을지 몰라도, 깨우침받은 그의 혼은 이제 승리의 탄성을 부르짖느니라, ‘내 옹호자가 살아 계시도다!’
148:6.10 (1664.2) “하나님이 부모를 벌하려고 아이들을 괴롭힌다는 신조가 타당한가 의심했을 때 욥은 아주 옳았느니라. 언제라도 하나님이 올바름을 쉽사리 인정했으나 욥은 영원자의 성품에 대하여 혼을 만족시키는 어떤 계시를 몹시 바랐더라. 그리고 이것이 땅에서 우리의 사명이라. 고통받는 필사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비를 이해함으로 위로받는 것을 이제 더 막지 말지니라. 회오리바람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말씀한 시절에 훌륭한 개념이었으나, 아버지는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아니하며 ‘이것이 길이라, 그 안에서 걸으라’하고 조용히 작은 목소리로서 인간의 마음 속에서 이르심을 너는 이미 배웠느니라. 하나님이 네 안에 거하고 너를 그처럼 만들려고 그가 너와 같이 되었음을 너는 알아듣지 못하느냐!”
148:6.11 (1664.3) 그리고 나서 끝으로 이렇게 말씀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사람의 자녀 괴롭히기를 기뻐하지 않으시니라. 사람은 첫째로 뜻밖의 사고(事故)로, 그리고 미숙한 육체적 존재의 잘못으로 생기는 불완전으로부터 고통을 받느니라. 다음에 사람은 죄의 결과―생명과 빛의 법을 어긴―냉혹한 결과로 괴로움을 받느니라. 마지막으로, 사람은 땅에서 하늘의 올바른 통치에 맞서 불의한 저항을 계속함으로 그 수확을 거두느니라. 그러나 사람의 곤경은 신의 심판이 개인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현세의 고통을 줄이려고 많이 일할 수 있고 그렇게 하리라. 그러나 이번을 마지막으로, 악마가 부추기는 바람에 하나님이 사람을 괴롭힌다는 미신을 벗어나라. 욥기를 공부하고서, 착한 사람들조차 솔직하게 하나님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그릇된 생각을 품을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을 발견하라. 다음에 모질게 고통받던 욥조차 그런 그릇된 가르침을 받았는데도 위로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찾아냈는가 주목하라. 마침내 그의 믿음은 고통의 구름을 꿰뚫었고, 아버지로부터 쏟아지는 생명의 빛이 사람을 치유하는 자비요 영원한 올바름인 것을 헤아렸더라.”
148:6.12 (1664.4) 요한은 여러 날 동안 마음 속에 이 말씀을 숙고하였다. 뜰에서 주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 결과로 그후에 요한의 전생애가 뚜렷하게 바뀌었다. 후일에 그는 인간의 평범한 고통의 근원ㆍ성질ㆍ목적에 관하여 다른 사도들의 관점을 바꾸려고 많이 애썼다. 그러나 요한은 주가 떠나실 때까지 이 회견에 대하여 입을 열지 않았다.
148:7.1 (1664.5) 사도들과 새 전도단이 두 번째 갈릴리 전도 여행을 떠나기 전 둘째 안식일에, 예수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올바른 삶의 기쁨”에 대하여 말씀했다. 예수가 말씀을 마치자, 큰 무리의 불구자ㆍ절름발이ㆍ병자,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둘레에 몰려들어서 병 고침을 받으려 하였다. 또한 이 무리에는 사도들과 많은 새 전도사,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 첩자들이 있었다. 예수가 가신 데는 어디나 (아버지의 일을 보살피느라고 산에 있을 때를 제쳐놓고) 예루살렘 첩자 여섯 명이 꼭 따라왔다.
148:7.2 (1665.1) 정탐하는 바리새인들의 두목은 예수가 서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마른 손을 가진 사람에게, 예수에게 다가가서 안식일에 고침받는 것이 합당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날 도움을 구해야 할까 물으라고 유도했다. 그 사람을 보고, 할 말을 듣고 나서, 바리새인들이 그를 보냈음을 알아차리고 예수는 말했다: “너에게 한 마디 묻고자 하니 앞으로 나아오라. 너에게 양 한 마리가 있어,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다면 손을 뻗어 양을 붙잡아 들어올리겠느냐?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그 사람은 대답했다: “예 주여, 안식일에 그처럼 좋은 일 하는 것이 합당하리이다.” 그러자 예수가 모두에게 말했다. “무엇 때문에 너희가 이 사람을 내 앞으로 보냈는가 내가 아노라. 내가 안식일에 자비를 보이도록 유혹할 수 있으면 너희는 나에게서 안식일 어긴 근거를 찾으리라. 안식일에도 불행한 양을 구덩이에서 들어올리는 것이 합당하다고 너희는 모두 말없이 찬성하였느니라. 안식일에 동물 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자애심을 보이는 것이 합당함을 너희가 증거하라고 내가 청하노라. 사람은 양보다 얼마나 더 소중한지고! 내가 선포하노니, 안식일에 사람들에게 좋은 일 하는 것이 합당하니라.” 그 앞에서 다 조용히 서 있자, 예수는 손이 마른 남자에게 일렀다. “모두가 너를 보도록 여기 내 옆에 일어서라. 그리고 이제 너희가 안식일에 좋은 일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줄 너희가 알까 하나니 네가 고침받을 믿음이 있으면, 너에게 명하노니 손을 펴라.”
148:7.3 (1665.2) 이 사람이 마른 손을 폈을 때, 손이 온전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에게 달려들 생각이 있었지만 예수는 차분히 있으라 명하며 말했다: “안식일에 착한 일 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이 합당(合當)하다고 너희에게 막 일렀으나 사람을 해치고 죽이고 싶은 욕심에 굴복하라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였도다.” 성난 바리새인들은 사라졌고, 안식일이었는데도 당장에 허둥지둥 티베리아스로 가서 헤롯과 의논했다. 헤롯당원들을 예수를 적대하는,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그들은 헤롯이 편견을 갖도록 힘이 자라는 데까지 무슨 일이든지 했다. 그러나 헤롯은 예수를 적대하여 행동하려 하지 않았고 예루살렘에 가서 불평(不平)하라고 조언하였다.
148:7.4 (1665.3) 이것은 적들의 도전에 반응하여 처음으로 기적을 일으킨 경우이다. 병 고치는 능력을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종교적 휴식을 온 인류에게 의미 없이 제한하는 진정한 속박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강력한 항의로서 이른바 이 기적을 행하였다. 이 사람은 석공으로서 자기 일로 돌아갔다. 병 고침을 받고 나서 그는 감사하고 올바르게 산 사람이었음을 입증하였다.
148:8.1 (1665.4) 벳세다에서 머무르던 마지막 주에, 예루살렘에서 온 첩자(諜者)들은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의견이 크게 달랐다. 이 바리새인들 가운데 세 사람은 듣고 본 것에 엄청나게 감명을 받았다. 한편, 예루살렘에서 산헤드린 법정의 젊고 영향력 있는 회원 아브라함은 예수의 가르침을 드러내놓고 지지하였고 실로암 못에서 아브너에게 세례를 받았다. 온 예루살렘이 이 사건을 놓고 떠들썩하였고 바리새인 첩자 여섯 명을 불러들이려고 사자들이 벳세다로 즉시 파송되었다.
148:8.2 (1666.1) 이전의 갈릴리 여행에서 하늘나라를 믿도록 설득된 그리스인 철학자가 알렉산드리아의 어떤 부자 유대인들과 함께 돌아왔다. 그들은 병자를 위한 병원 뿐 아니라, 철학과 종교를 가르치는 합동 학교를 세울 목적으로 자기네 도시로 오라고 한 번 더 예수를 초청했다. 그러나 예수는 정중하게 그 초청을 물리쳤다.
148:8.3 (1666.2) 이 무렵에 벳세다 야영지에 박다드로부터 어떤 키르메스라 하는, 최면에 빠지는 선지자가 도착했다. 선지자라고 생각된 이 사람은 최면 상태에 있을 때 특이한 환상들을 보았고 잠이 방해를 받았을 때 환상적인 꿈을 꾸었다. 그는 야영지에서 어지간히 소동을 일으켰다. 열심당원 시몬은 스스로 속는 그 시늉꾼을 오히려 거칠게 다루기를 지지했지만 예수가 간섭하였고 며칠 동안 그에게 완전한 행동의 자유를 주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은 모두, 하늘나라 복음으로 판단하건대 그의 가르침이 건전하지 않음을 금방 깨달았다. 얼마 있다가 그는 박다드로 돌아갔고 불안정하고 이상한 사람 여섯 명만 데리고 갔다. 그러나 박다드 선지자를 위하여 예수가 중재하기 전에, 다윗 세베대는 한 자청한 위원회의 도움을 받아서 키르메스를 호수로 데리고 가서 물 속에 그를 연거푸 처박은 뒤에, 거기서 떠나라―자신의 캠프를 조직하고 세우라―고 조언했다.
148:8.4 (1666.3) 바로 그날, 어느 페니키아 여인 베스마리온이 너무 미쳐서 정신이 나갔고 물 위에서 걸으려고 애쓰다가 거의 물에 빠져 죽게 된 뒤에, 친구들이 그 여자를 떠나게 하였다.
148:8.5 (1666.4) 예루살렘에서 온 새로 전향한 바리새인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서 가진 재산 모두를 사도의 금고에 기부하였다. 이 기부금은 새로 훈련받은 전도사 1백 명을 즉시 보낼 수 있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안드레는 야영지를 걷어치운다고 이미 발표했고, 모두가 집으로 가든지 아니면 전도사들을 따라서 갈릴리로 가려고 준비했다.
148:9.1 (1666.5) 10월 1일 금요일 오후에 세베대의 집에, 널찍하고 확장한 앞쪽 방에서 예수가 사도와 전도사들, 흩어지는 야영지의 다른 지도자들, 그리고 이 모임에서 앞줄에 앉아 있던, 예루살렘에서 온 여섯 바리새인과 마지막 회의를 하고 있을 때, 예수가 땅에서 사신 전 생애에서 가장 이상하고 독특한 여러 사건 중의 하나가 벌어졌다. 이때 주는 이 큰 방에서 서서 말씀하고 있었다. 이 방은 비오는 철 동안에 이러한 모임에 편리를 주려고 지었다. 그 집은 예수의 강론 중에 얼마큼 얻어들으려고 귀를 쫑긋 기울이는 방대한 무리의 사람들로 온통 둘러싸여 있었다.
148:9.2 (1666.6) 집이 이렇게 사람들로 들끓고 열심 있는 청중에게 온통 둘러싸여 있는 동안, 중풍으로 오래 앓고 있던 어떤 사람을 가버나움에서 친구들이 작은 침상에 실어 내려보냈다. 이 중풍병자는 예수가 벳세다를 막 떠나려한다는 말을 들었고, 아주 최근에 몸이 온전하게 된 석공 아론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므로, 병을 고침받을 수 있도록 예수 앞으로 들려 가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친구들이 앞문과 뒷문으로 세베대의 집으로 들어가려고 애썼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이 붐비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풍병자는 그만두려고 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사다리를 얻어 오라고 지시했고, 사다리로 친구들은 예수가 말씀하고 있는 방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타일을 벗겨 놓은 뒤에, 친구들은 아픈 사람이 바로 주 앞에 마루에 놓일 때까지 밧줄로 침상에 들린 병자를 대담하게 내려보냈다. 그들이 한 일을 보자 예수는 말씀을 그쳤고, 한편 방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아픈 사람과 그 친구들의 끈질김에 감탄했다. 중풍병자가 말했다: “주여, 나는 당신의 가르침을 방해하고 싶지 않사옵나이다. 하오나 나는 온전히 되고자 결심하였나이다. 나는 고침을 받는 즉시 당신의 가르침을 잊어버린 자들과 같지 않사옵나이다. 하늘나라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나는 온전히 되고자 하나이다.” 자, 스스로 생애를 잘못 보내서 이 사람이 병을 얻었는데도, 예수는 그 믿음을 보고 중풍병자에게 말했다: “얘야 무서워 말라, 너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할지니라.”
148:9.3 (1667.1) 예루살렘에서 왔던 바리새인들이, 같이 앉아 있던 다른 서기관과 율법사들과 더불어 예수의 이런 선언을 들었을 때, 속으로 비로소 혼잣말을 했다: “이 사람이 어찌 감히 이리 말하는가? 그런 말이 신성 모독임을 저가 알지 못하는가? 하나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이렇게 머리 속에서 자기들끼리 따지는 것을 영적으로 알아차리고 주는 그들에게 말씀했다: “어찌하여 너희가 마음 속에서 그리 따지느냐? 나를 판단하다니 너희는 누구이냐? 이 중풍병자에게, 너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든지 아니면 일어나서 네 침구(寢具)를 들고 걸으라 하든지 무슨 차이가 있느냐?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구경하는 너희가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할 권한과 능력이 있음을 마침내 알도록 이 병자에게 이르리라. 일어나서 네 침구를 들고 집으로 가라.” 예수가 이렇게 말씀하시자 중풍병자는 일어났고, 사람들이 길을 비키는 대로 모두 앞에서 걸어 나갔다. 이를 구경한 사람들은 놀랐다. 베드로는 집회를 해산했고, 한편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그렇게 이상한 일을 한 번도 전에는 본 적이 없다고 털어놓았다.
148:9.4 (1667.2) 이 무렵에 산헤드린의 사자들이 여섯 첩자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 명하려고 도착했다. 이 소식을 듣자 자기들끼리 진지하게 토론에 빠졌다. 의논을 마치고 난 뒤에 두목과 두 동료가 사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한편 정탐하던 세 바리새인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였고 바로 호수(湖水)로 가서 베드로에게 세례받고 하늘나라의 식구가 되어 사도들과 사귀었다.
149:0.1 (1668.1) 갈릴리에서 두 번째 대중 전도 여행은 서기 28년 10월 3일 일요일에 시작되었고 거의 석 달 동안 계속되어 12월 30일에 끝났다. 이 노력에는 예수와 열두 사도가 참여했고 새로 모집한 117명의 전도사 집단, 그리고 관심 있는 수많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이 여행에서 가다라ㆍ프톨레마이스ㆍ야피아, 다바리타ㆍ메기도ㆍ예즈릴, 스키토폴리스ㆍ타리케아ㆍ히포, 가말라ㆍ벳세다 줄리아스, 그리고 기타 여러 도시와 마을을 방문했다.
149:0.2 (1668.2) 이 일요일 아침에 떠나기 전에 안드레와 베드로는 예수에게 새 전도사들에게 마지막 책임을 맡기는 말씀을 부탁했으나 예수는 남들이 적절히 수행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그의 직분이 아니라 하면서 물리쳤다. 마땅한 검토를 거친 뒤에, 야고보 세배대가 책임 지우는 선서를 시행하기로 결정이 내렸다. 야고보의 논평이 끝났을 때 예수는 전도사들에게 말했다: “이제 떠나서 너희가 책임을 맡은 대로 일하러 떠나라, 나중에 너희가 능력과 충성심이 있음을 보였을 때, 하늘나라 복음을 전도하도록 너희를 세우리라.”
149:0.3 (1668.3) 이 여행에는 오직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와 함께 길을 떠났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저마다 전도사를 열두 명쯤 데리고 갔으며 전도하고 가르치는 일을 해나가는 동안 그들과 밀접하게 연락을 유지했다. 신자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되자마자 사도들이 세례를 주곤 하였다. 예수와 두 동반자는 이 석 달 동안 널리 여행했다. 전도사들의 일을 지켜보고 하늘나라를 세우려는 노력을 격려하느라고 때때로 하루에 두 도시를 방문했다. 이 둘째 전도 여행 전부가 주로, 새로 훈련받은 이 전도사 117명의 무리를 위하여 실용적 경험을 마련해 주려는 노력이었다.
149:0.4 (1668.4) 이 기간 내내, 그리고 그 뒤에 예수와 열두 사도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마침내 떠날 때까지, 다윗 세베대는 벳세다에 있는 아버지 집에서 하늘나라 일을 위하여 영구 본부를 유지했다. 여기가 땅에서 예수의 일을 위한 정보 교환소였고 사자들의 봉사를 위하여 연결하는 역(驛)이었으며, 다윗은 팔레스타인의 여러 곳과 인접 지역에 있는 일꾼들 사이에서 이 봉사를 계속하였다. 그는 이것을 모두 솔선해서, 그러나 안드레의 승인을 얻어서 했다. 다윗은 급히 커지고 뻗어나가는 하늘나라 사무의 정보 분과에서 40에서 50명의 사자(使者)를 고용했다. 이렇게 일하는 동안 다윗은 예전의 고기잡이 일에 얼마큼 시간을 써서 어느 정도 자신을 부양했다.
149:1.1 (1668.5) 벳세다의 캠프가 해산될 때가 되자, 예수의 이름은 특히 병 고치는 자로서, 팔레스타인의 구석구석, 그리고 시리아와 그 주위의 여러 지역 전체를 통해서 알려졌다. 그들이 벳세다를 떠난 뒤에 몇 주 동안, 병자들이 계속 도착했다. 주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다윗으로부터 그가 어디에 계신가 알아내고서 예수를 찾으러 가곤 하였다. 이 여행에서 예수는 병 고치는 기적이라 부르는 일을 일부러 전혀 행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병자 몇십 명이 병 고침을 찾게 한 맹렬한 믿음의 치유 능력의 결과로서 건강과 행복을 되찾았다.
149:1.2 (1669.1) 이 사명을 수행하던 무렵에―그리고 땅에서 예수의 여생 동안 내내―특이하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치유 현상이 계속하여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석 달 동안 여행하는 과정에서 유대ㆍ이두미아ㆍ갈릴리ㆍ시리아ㆍ티레ㆍ시돈으로부터, 또 요단강 건너로부터, 1백 명이 넘는 어른과 아이들이 예수의 이러한 무의식 치유의 수혜자였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예수의 이름을 더욱 퍼뜨렸다. 뜻밖에 고침받은 이 경우를 지켜볼 때마다, 예수가 “아무에게 말하지 말라”고 수혜자들에게 직접 당부하곤 했는데도 그리하였다.
149:1.3 (1669.2) 뜻밖에, 즉 의식하지 않으면서 고치는 이 여러 경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는 계시받은 적이 없다. 몇몇 경우에 단지 “권능이 내게서 나갔음을 내가 깨닫노라” 말한 것 외에 주는 사도들에게 어떻게 이 치유가 일어났는가 설명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 어느 아픈 아이가 그를 만졌을 때 말씀하였다: “생명이 내게서 나갔음을 내가 깨닫노라.”
149:1.4 (1669.3) 이러한 의식하지 않고 치유하는 사례들의 성질에 관하여 주로부터 직접 말씀이 없는 마당에 우리 편에서 어떻게 이 일이 이루어졌는가 설명하려는 시도는 주제넘을 터이지만, 모든 그런 치유 현상에 대하여 우리의 의견을 기록하는 것은 괜찮을 것이다. 병 고치는 기적으로 보이는 이 일들은, 땅에서 예수가 봉사를 베푸는 과정에서 일어난 바와 같이, 강력하고 유효하고 관련된 다음 세 가지 영향이 공존한 결과였다고 우리는 믿는다:
149:1.5 (1669.4) 1. 끈질기게 치유를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 속에, 강하고 지배적이고 생생한 믿음이 있는 것. 아울러 순전히 육체의 회복보다 오히려 그 영적 이익 때문에 그러한 치유가 바람직하다는 사실.
149:1.6 (1669.5) 2. 그러한 인간의 믿음과 동시에, 육신화되고 자비에 지배된, 하나님의 창조 아들의 큰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존재하는 것. 그는 몸 안에 거의 한없고 시간을 초월하는 창조적 치유 권능과 특권을 실제로 소유했다.
149:1.7 (1669.6) 3. 인간의 믿음과 창조자의 생명과 함께, 하나님인 이 사람이 아버지의 뜻이 인격으로 표현된 것임을 또한 주목해야 한다. 인간의 필요와 이를 채우는 신의 권능이 접촉할 때 아버지가 달리 뜻하지 않으면, 그 둘이 하나가 되고 인간 예수가 의식하지 않고서 치유가 일어났지만, 즉시 신다운 성품이 이를 인식했다. 그러면 병을 고친 이 많은 사례(事例)의 설명은 우리에게 오랫동안 알려진 큰 법칙에서 찾아야 하는데, 이렇다: 창조 아들이 바라고 영원한 아버지가 뜻하시는 것은 동시에 존재한다.
149:1.8 (1669.7) 그러면 예수가 친히 계신 앞에서, 어떤 형태의 심오한 인간의 믿음은 우주의 어떤 창조 세력, 그리고 당시에 사람의 아들과 아주 밀접히 연결된 성격자들로 말미암아 치유가 나타나는 것을 글자 그대로, 참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의견이다. 따라서 예수는 그가 계신 앞에서 사람들이 힘찬 개인적 믿음으로 스스로 고치도록 흔히 버려두었다는 것이 기록된 사실이 된다.
149:1.9 (1670.1) 다른 여러 사람은 온전히 이기적 목적으로 치유받기를 추구했다. 티레의 어느 부유한 과부는 수행원들과 함께 질병을 고침받으려고 왔는데, 여러 가지 병이 있었다. 갈릴리를 통해서 여기저기 예수를 따라다니는 동안, 마치 하나님의 권능이 돈을 가장 많이 내는 사람이 살 물건인 듯, 점점 더 많은 돈을 계속 내밀었다. 그러나 한 번도 하늘나라의 복음을 거들떠보려 하지 않았다. 얻고자 한 것은 오직 육체의 병의 치유였다.
149:2.1 (1670.2) 예수는 사람들의 정신을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가 알았다. 그의 가르침이 그가 제시한 대로 간직되었더라면, 그에 관한 유일한 해설(解說)이 땅에서 사신 그의 생애가 허락하는 해석, 영감을 주는 해석이므로, 세상의 모든 민족과 종교가 빨리 하늘나라 복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초기 추종자들이 특정한 민족ㆍ종족ㆍ종교가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쉽게 만들려고 노력을 기울인 것은 의도는 좋았지만, 다만 그러한 가르침을 모든 다른 민족ㆍ종족ㆍ종교가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149:2.2 (1670.3) 사도 바울은 당대에 예수의 가르침을 특정한 집단들이 호감을 가지고 주목하게 만들려는 노력으로, 교육하고 훈계하는 편지를 많이 썼다. 예수의 복음을 가르치는 다른 선생들도 똑같이 하였다. 그러나 이런 기록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담은 것이라고 발표하려는 자들이 후일에 이 중에 더러를 수집하리라는 것을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이른바 기독교가 다른 어떤 종교보다 주의 복음을 더 담고 있지만, 거기에는 또한 예수가 가르치지 않은 것이 허다하다. 페르시아의 신비교로부터 온 많은 가르침과 그리스 철학의 많은 것을 기독교로 끌어들인 외에도 두 가지 큰 잘못을 저질렀다:
149:2.3 (1670.4) 1. 기독교의 속죄(贖罪) 교리가―예수가 아버지의 엄격한 응보를 만족시키고 신의 진노를 달래려고 하는 희생된 아들이라는 가르침이―보여주다시피, 복음의 가르침을 유대인의 신학(神學)과 직결시키려 하는 노력. 이 가르침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하늘나라 복음을 받아들이기 쉽게 만들려고 하는 칭찬할 노력에서 생겼다. 유대인을 설득하려는 이 노력은 실패했어도, 모든 이후 세대에 많은 정직한 사람을 헛갈리게 하고 따돌리는 데 실패하지는 않았다.
149:2.4 (1670.5) 2. 주의 초기 추종자들이 저지른 둘째로 큰 잘못, 모든 후일의 세대가 영구하게 지속한 큰 잘못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아주 온통 예수라는 인물에 관하여 체계화한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의 인격을 이렇게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그의 가르침을 가리도록 작용했고, 이 모두가 유대인ㆍ이슬람교인ㆍ힌두교인, 그리고 기타 동방(東方)의 종교인이 예수의 가르침을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예수의 이름을 지닐까 싶은 종교에서 예수 본인이 차지하는 자리를 깎아내리고 싶지 않지만, 우리는 그러한 배려가 영감을 받은 그의 생애가 빛을 잃게 만들거나 구원하는 그의 말씀―하나님이 아버지요 사람이 형제임―을 대신하도록 버려두고 싶지 않다.
149:2.5 (1670.6) 예수의 종교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공통으로 지니는 진리를 인정하고서 (이 중에 많은 것이 직접ㆍ간접으로 예수의 말씀으로부터 온다) 다른 종교들에 접근해야 하며, 한편 지나치게 차이를 강조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149:2.6 (1671.1) 바로 그 시절에, 예수의 이름은 주로 병 고치는 자로서 얻은 평판에 달려 있었지만 계속 그랬다고 할 수는 없다. 시간이 지나자, 갈수록 더욱 사람들이 영적 도움을 받으려고 그를 찾았다. 그러나 서민들에게 아주 직접, 즉시 호소한 것은 육체의 치유였다. 도덕적으로 종살이하고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예수를 더욱 찾았고 그는 변함없이 구원의 길을 가르쳤다. 아버지들은 아들을 다루는 것에 관하여 조언(助言)을 구했고, 어머니들은 딸을 지도하는 데 도움을 얻으려고 왔다. 어둠 속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그를 찾아 왔고 그는 생명의 빛을 드러냈다. 귀는 언제라도 인류의 슬픔을 들으려고 열려 있었고, 그는 언제나 보살핌을 찾는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149:2.7 (1671.2) 바로 창조자가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육신화하여 땅에 계실 때,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너희는 결코 이른바 이 기적이 일어난 것을 통해서 예수를 접근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통해서 기적(奇蹟)에 접근하기를 배우고, 기적을 통해서 예수한테 다가가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나사렛 예수가 땅에서 초물질 행위를 연출했던 유일한 종교 창시자였는데도 이 훈계는 틀림없다.
149:2.8 (1671.3) 땅에서 미가엘의 사명 중에 가장 놀라운 혁신적 특징은 여자에 대한 태도였다. 공적인 자리에서 남자가 자기 아내에게도 인사를 건네지 않기로 되어 있던 시절과 세대에, 예수는 셋째 갈릴리 여행과 관련하여 감히 여자들을 복음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데리고 갔다. “율법의 말씀을 여자에게 전하는 것보다 불에 태우는 것이 낫다”하고 선포했던 율법학자들의 가르침 앞에서 이렇게 행하는 최고의 용기를 가졌다.
149:2.9 (1671.4) 오랜 세월에 걸쳐 무시되어 잊혀지고 노예처럼 고된 일을 하는 상태로부터, 한 세대 안에 예수는 여자들을 구조했다. 후일에 여자에 대한 태도에 이 고귀한 모범을 따를 도덕적 용기가 모자란 것은 예수의 이름을 주제넘게 가져간 종교에 한 가지 부끄러운 일이다.
149:2.10 (1671.5) 예수가 사람들과 섞이는 동안, 사람들은 예수가 도무지 그 시절의 미신에 매어 있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는 종교적 편견이 조금도 없었고, 결코 관대함이 모자라지 않았다. 사회에 대하여 적대감과 비슷한 아무것도 마음 속에 지니지 않았다. 조상의 종교에 있는 좋은 것에 순응했으나 미신과 속박과 같은, 사람이 만든 전통을 서슴지 않고 무시했다. 자연의 재난, 뜻밖의 사고, 기타 재앙은 신이 내리는 심판이나 섭리의 신비로운 작용이 아니라고 감히 가르쳤다. 의미 없는 예식에 종처럼 헌신하는 것을 비난했고, 물질적 예배의 잘못됨을 밝혔다. 그는 대담하게 사람의 영적 자유를 선포했고, 육체를 가진 필사자가 정말로, 진실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감히 가르쳤다.
149:2.11 (1671.6) 깨끗한 손이 아니라 깨끗한 마음이 참된 종교의 표시(表示)라고 했을 때, 예수는 조상의 모든 가르침을 초월했다. 전통 대신에 현실을 존중하였고 허영과 위선이 가득한 모든 허식을 치워버렸다. 그래도 두려움 없는 이 하나님의 사람은 파괴적인 비난을 퍼붓거나 그 시대의 종교ㆍ사회ㆍ경제ㆍ정치 관습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싸우기 좋아하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는 점진적 진화를 부르짖는 이였다. 동료들에게 있어야 할 우수한 것을 동시에 제공할 때에야 그는 지금 있는 것을 없애는 일에 들어갔다.
149:2.12 (1672.1) 예수는 강요하지 않고서 추종자들로부터 복종을 얻었다. 그가 친히 부른 사람들 중에서 세 사람만 제자가 되라는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 대하여 특별히 마음을 끄는 힘을 가졌지만 독재자처럼 행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고, 아무도 그의 지시를 분개하지 않았다. 제자들에 대하여 절대 권한을 가졌지만, 아무도 항의한 적이 없었다. 추종자들이 그를 주라고 부르도록 두었다.
149:2.13 (1672.2) 뿌리 깊은 종교적 편견을 품은 사람이나 그의 가르침에 정치적 위험이 있음을 식별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을 제쳐놓고 그를 만난 모든 사람이 주를 찬미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의 독창성과 권위에 놀랐다. 뒤처지고 성가시게 구는 질문자들을 다루면서 참을성을 보인 것에 사람들은 감탄했다. 그의 봉사 활동 밑에 들어온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희망과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오직 그를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마음 속에 꼭 붙들고 있으려고 작정했던 해악과 잘못을 뒤집어엎도록 정해진 진리를 예수가 옹호한다고 생각한 사람들만 그를 미워했다.
149:2.14 (1672.3) 그는 친구와 적, 모두에게 강하고 특이하게 매혹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군중은 그저 품위 있는 말씀을 듣고 소박한 생활을 구경하려고 몇 주 동안 따라다니곤 하였다. 헌신하는 남녀들이 거의 초인간적 애정으로 예수를 사랑했다. 그를 알면 알수록, 예수를 더욱 사랑했다. 이 모두가 아직도 참말이다. 오늘날도, 그리고 모든 미래 시대에, 하나님인 이 사람을 알면 알수록 사람들은 더욱 예수를 사랑하고 그의 뒤를 따를 것이다.
149:3.1 (1672.4) 서민들이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호의로 받아들였는데도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더욱 놀라고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체계 있는 독단적 신학을 형성하였다. 예수는 경우가 닿는 대로 가르친 선생이었다.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었다. 예수는 율법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생활에서 비유를 들어 가르쳤다. (그의 말씀의 의미를 예를 들어 설명하려고 비유를 썼을 때 그 목적을 위하여 이야기의 꼭 한 모습을 이용하려고 머리를 썼다. 그의 비유로부터 우화를 지어내려고 애씀으로 예수의 가르침에 관하여 많은 그릇된 관념이 생길 수 있다.)
149:3.2 (1672.5)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젊은 아브라함이 최근에 전향한 결과로, 그리고 베드로에게 세례받은 세 첩자가 도망한 것 때문에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이 되었으며, 이들은 이제 이 둘째 갈릴리 전도(傳道) 여행에 전도사들과 함께 나다녔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두려움과 편견에 더욱 눈이 멀었고, 한편 하늘나라 복음의 매력 있는 진리를 계속 물리침으로 마음이 굳어졌다. 사람들이 안에 깃드는 영의 호소에 귀를 막을 때, 그 태도를 고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149:3.3 (1672.6) 벳세다 캠프에서 전도사들을 처음 만났을 때 예수는 연설을 마치면서 말했다: “너희는 몸과 머리 속에서―감정으로―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반응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느니라. 사람들에게 오직 한 가지 한결같은 것은 깃드는 영이라. 신다운 영들이 어느 정도 체험의 성질과 범위가 다를지라도, 저희는 어떤 영적 호소에도 한결같이 반응하느니라. 오직 이 영을 통해서, 그리고 그 영에게 호소함으로 인류는 언제라도 하나가 되고 형제가 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느니라.” 그러나 유대인의 많은 지도자가 복음의 영적 호소에 마음 문을 닫았다. 이날부터 계속, 주의 파멸을 계획하고 일을 꾸미기를 그치지 않았다. 종교범으로서, 유대인의 신성한 율법의 으뜸가는 가르침을 어긴 자로서, 그들은 예수를 잡아들이고, 선고(宣告)하고 처형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149:4.1 (1673.1) 이 전도 여행에서 예수는 대중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어쩌다가 머무른 대부분의 도시와 마을에서, 신자들과 함께 저녁 수업을 많이 열었다. 어느 날 이 저녁 시간에, 새로 된 어느 전도사가 예수에게 성내는 것에 대하여 물었고, 주는 다른 것들과 함께 이런 말씀으로 대답하였다:
149:4.2 (1673.2) “성내는 것은 무릇, 영적 성품이 지능과 육체의 두 성품을 제어하지 못한 척도를 가리키는 물질적 현상이라. 성내는 것은 너그러운 형제다운 사랑이 모자라고 자존심과 자제가 모자람을 가리키느니라. 성내는 것은 건강을 소모하고, 지능의 질을 떨어뜨리며 인간의 혼을 가르치는 영 선생을 방해하느니라. ‘분노가 어리석은 사람을 죽이느니라,’ 사람은 ‘성이 나서 스스로를 상하느니라’ 함을 너희가 성서에서 읽지 아니하였느냐? ‘더디게 성내는 자는 큰 이해심을 가졌고’ 한편 ‘급히 성내는 자는 어리석음을 찬양하느니라’ 하는 것을? ‘부드러운 대답이 진노를 거두느니라’ 그리고 어떻게 ‘모진 말이 진노를 불러일으키는가’ ‘신중함은 진노를 늦추며’ 한편 ‘자신을 제어할 줄 모르는 자는 담이 없어 방어할 수 없는 도시와 같다’ 함을 너희가 아느니라. ‘진노하는 것은 잔인하며 성내는 것은 터무니 없느니라.’ ‘성난 자는 싸움을 부채질하고 격노한 자는 계율을 많이 어기느니라.’ ‘서두르는 마음을 갖지 말지니, 분노가 바보들의 가슴 속에서 쉬는 까닭이라.’” 말씀을 그치기 전에, 예수는 이어서 말했다: “사랑이 너희 마음을 다스려서, 신의 아들인 지위와 어울리지 않게 동물처럼 분노를 터뜨리는 경향으로부터 영 안내자가 너희를 구원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도록 하라.”
149:4.3 (1673.3) 바로 이 기회에 주는 그 무리에게 차분한 인격의 소유가 바람직하다는 것을 말씀하였다.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 직업을 통달하기까지 그에 헌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예수는 인정했다. 하지만 지나친 전문화를 향하고 일생의 활동에 생각이 좁아지고 제한하는 모든 경향을 한탄했다. 어떤 미덕이라도 지나치게 실행하면 악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예수는 늘 절제를 외치고 일관성―생활 문제를 균형 있게 조정하는 것―을 가르쳤다. 지나치게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태도는 심각한 불안감으로 변할 수 있다, 열심이 계속되면 광신(狂信)으로 발전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예수는 옛 동료들 중 한 사람에 관하여 논의했는데, 그의 공상은 환상적이고 쓸모 없는 사업을 하도록 이끌었다. 동시에 예수는 지나친 보수적 평범은 지루해질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였다.
149:4.4 (1673.4) 그리고 나서 예수는 용기와 믿음의 위험에 대하여, 어떻게 때때로 이것들이 생각 없는 사람들을 무모(無謀)와 과신(過信)으로 이끄는가 강론하였다. 또한 어떻게 조심과 신중함이 너무 지나치면 비겁과 태만으로 이끄는가 보여주었다. 말씀 듣는 자들에게 비정상으로 가는 온갖 성향을 피하면서, 독창적이 되려고 애쓰라고 훈계하였다. 감상적이 되지 않으면서 동정심을 보이며, 신성한 체하지 않으면서 경건하라고 타일렀다. 두려움과 미신에 매이지 않고 공손하기를 가르쳤다.
149:4.5 (1674.1) 동료들을 감동시킨 것은 예수가 차분한 인품에 대하여 말씀으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의 일생 자체가 그 가르침의 본보기였다는 사실이다. 긴장과 폭풍 한가운데서 살았지만 그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적들은 그를 잡으려고 계속 덫을 놓았지만, 결코 그를 옭아매지 못했다. 지혜롭고 학식 있는 자들이 그를 넘어지게 하려고 애썼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그를 토론에 말려들게 하려 했지만, 그의 대답은 언제나 사람을 깨우치고 위엄이 있고 단호하였다. 강론하다가 가지가지의 물음으로 중단되었을 때, 그의 대답은 언제나 의미가 깊었고 확실하였다. 적들의 계속된 압력과 맞서면서, 한 번도 비열한 술수를 쓰지 않았고, 그들은 서슴지 않고 온갖 종류의 거짓되고 부당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149:4.6 (1674.2) 많은 남녀가 생계를 잇는 직업으로 어떤 분명한 업무에 부지런히 힘써야 하는 것이 참말이지만, 그런데도 땅에서 사는 대로, 인생에 대하여 두루 문화적 지식을 개발하는 것이 전적으로 바람직하다. 참으로 교육받은 사람들은 동료의 생활과 행적을 모르고 지내면서 만족하지 않는다.
149:5.1 (1674.3) 열심당원 시몬의 감독 하에서 일하는 전도사 무리를 예수가 찾아보았을 때, 저녁 회의 동안에 시몬이 주께 물었다: “어째서 어떤 사람들은 남보다 훨씬 더 행복하고 만족하나이까? 만족은 종교적 체험의 문제이나이까?” 다른 것들 가운데, 시몬의 물음에 대답하여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149:5.2 (1674.4) “시몬아, 어떤 사람들은 남보다 자연히 더 행복하니라. 많은 것, 허다한 것이 사람이 자신 안에 사는 아버지의 영이 이끌고 지도하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데 달려 있느니라. 성서에서 너는 현자의 말씀을 읽지 아니하였느냐?, ‘사람의 영은 주의 촛불이니, 마음 속의 모든 구석을 훑어보느니라.’ 또한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필사자들이 말하느니라. ‘경계선이 내가 기뻐하는 곳에 떨어졌구나. 옳거니, 나는 값진 유산을 물려받았구나.’ ‘올바른 자의 작은 재산이 악한 자 여럿의 재산보다 나으니’ 왜냐하면 ‘착한 사람은 마음 속에서 만족할 것임이라.’ ‘즐거운 마음은 얼굴빛을 밝게 하며 또한 계속되는 잔치이라. 주를 경외하고 조금 가진 것이 큰 보물과 아울러 골칫거리를 가진 것보다 좋으니라. 사랑이 있는 곳에서 쓴 나물로 저녁 먹는 것이 미워하면서 살찐 송아지 고기를 먹는 것보다 낫도다. 올바르게 조금 가진 것이 옳지 않게 큰 돈을 버는 것보다 낫도다.’ ‘즐거운 마음은 약처럼 좋으니라.’ ‘평온하게 한 줌 가진 것은 슬퍼하며 영이 괴로운 가운데 넘치게 풍부한 것보다 나으니라.’
149:5.3 (1674.5) “사람의 많은 슬픔은 포부를 이루지 못하여 실망함으로, 그리고 자존심을 다침으로 생기느니라. 땅에서 일생을 최선으로 이용하는 것이 자신에게 의무일지라도, 이렇게 성실하게 힘쓴 뒤에 사람들은 즐겁게 제 운명을 받아들이고 저희 손에 들어온 것을 최선으로 이용하는 머리를 써야 하느니라. 사람의 허다한 문제가 모두 자신의 평상시의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의 흙에서 생기느니라. ‘사악한 자는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데 달아나느니라.’ ‘사악한 자는 사나운 바다와 같으니, 쉴 수 없지만 그 물이 더러운 것과 쓰레기를 던져 올리는 까닭이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사악한 자에게는 평화가 없느니라.’
149:5.4 (1674.6) “그러면 거짓된 평화와 일시의 기쁨을 찾지 말고, 오히려 믿음의 확신과 신의 아들이라는 보장을 찾을지니, 이것들은 정신적 안정과 만족과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낳느니라.”
149:5.5 (1675.1) 예수는 도저히 이 세상을 “눈물의 골짜기”로 여겼다고 할 수 없다. 그는 이 세상이 오히려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영원한 불멸의 영들이 태어나는 구체, “혼을 만드는 골짜기”로 보았다.
149:6.1 (1675.2) 가말라에서 저녁 회의 동안에, 빌립이 예수에게 말했다: “주여, 어찌하여 성서는 우리에게 ‘주를 두려워하라’ 가르치며, 한편 당신은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바라보기를 원하시나이까? 우리가 어떻게 이 두 가르침을 조화시켜야 하리이까?” 예수는 빌립에게 대답했다:
149:6.2 (1675.3) “아이들아, 네가 그렇게 묻는 것에 나는 놀라지 아니하노라. 시초에는 오직 두려움을 통해서 사람이 신을 공경하는 것을 배울 수 있었느니라. 그러나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려고 온 것은 아버지의 깊고 완전한 사랑을 아들이 애정으로 인식하고 그에 보답하도록 당기는 힘으로 너희가 영원자를 예배하려는 마음이 생기게 하고자 함이라. 노예처럼 두려워서, 질투하고 진노하는 임금이자 하나님을 지겹게 섬기라고 너희를 족치는 속박에서 너희를 벗어나게 하고자 하노라. 다정하고 공정하고 자비로운 아버지 하나님을 숭고하게,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롭게 예배하는 길로 즐겁게 마음이 이끌리도록,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너희에게 가르치고자 하노라.
149:6.3 (1675.4)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움에서 시작하여 고민하고 불안해 하는 단계를 거쳐서 경외하고 공경하는 높이까지 올라오면서, 연속된 여러 시대에 다른 뜻을 가졌느니라. 이제 공경함에서 시작하여 인식(認識)하고 깨닫고 이해함을 거쳐서 사랑하는 높이에 이르기까지 너희를 이끌고자 하노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만 인식할 때, 사람은 최상위를 두려워하게 되느니라.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격과 성품을 비로소 이해하고 체험할 때, 사람은 그렇게 좋고 완전한, 우주의 영원한 아버지를 더욱 사랑하도록 마음이 끌리느니라. 바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이렇게 변화시키는 것이 땅에서 사람의 아들이 이룰 사명이라.
149:6.4 (1675.5) “총명한 아이들은 아버지의 손에서 좋은 선물을 받을까 하여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느니라. 그러나 아들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가 주신 좋은 것들을 이미 풍부히 받았은즉 사랑을 많이 받은 이 아이들은 아낌없이 베푸는 그런 은혜를 민감하게 인식하고 이해함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느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은 사람을 뉘우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봉사로, 하나님의 자비는 구원으로 이끌며, 한편 하나님의 사랑은 지적으로, 자유로운 마음으로 그를 예배하게 하느니라.
149:6.5 (1675.6) “너희의 선조(先祖)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니, 그가 막강하고 신비스러웠음이라. 너희는 그를 찬미할지니 그의 사랑이 견줄 데 없고 자비가 넘치며 그의 진리가 영화로움이라. 하나님의 권능은 사람의 마음 속에 두려움을 일으켜도 그 성격의 고귀함과 올바름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얻고 즐거이 그를 예배하게 하느니라. 의무에 충실하고 애정을 가진 아들은 막강하고 고귀한 아버지라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느니라. 내가 온 것은 신을 두려워하는 대신에 사랑하고, 슬퍼하는 대신에 기뻐하며, 두려워하지 말고 믿으며, 노예처럼 속박되어 의미 없는 예식을 치르지 말고 사랑으로 봉사하고 감사함으로 신을 예배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자에게는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하는 것이 아직도 참말이라. 그러나 빛이 더욱 충만히 다가왔을 때, 하나님의 아들들은 무한자가 하시는 일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그 성품 때문에 찬미할 마음이 생기느니라.
149:6.6 (1675.7) “아이들이 어리고 생각이 없을 때는 부모를 존경하라고 반드시 훈계를 받아야 하지만 아이들이 나이가 들고 부모의 보살핌과 보호가 유익함을 얼마큼 더 이해하게 될 때, 저희는 공경하는 마음과 늘어나는 애정을 통해서 부모가 한 일보다 부모이기 때문에 부모를 실제로 사랑하는 체험 수준까지 올라가게 되느니라. 아버지는 자연히 자식을 사랑하지만, 아이는 무슨 일을 아버지가 할 수 있는가 두려워하다가 경외하고 무서워하고 의존하고 존경하는 수준을 거쳐서, 사랑을 이해하고 깊이 존중하기까지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야 하느니라.
149:6.7 (1676.1)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지니, 그것이 사람의 온전한 의무임이라’하고 너희는 가르침을 받았도다. 그러나 내가 온 것은 너희에게 새롭고 더 높은 계명을 주고자 함이라. 이렇게 너희에게 가르치고자 하노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을 행하기를 배울지니, 이것이 하나님의 해방된 아들들의 최고 특권인 까닭이라.’ 너희의 조상은 ‘하나님―전능한 임금―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침을 받았느니라. 나는 너희에게 가르치노니, ‘하나님―온통 자비로운 아버지―를 사랑하라.’
149:6.8 (1676.2) “나는 하늘나라를 선포하러 왔나니 거기에는 높고 강력한 임금이 없느니라. 이 나라는 신의 가족이라. 방대한 이 지적(知的) 존재인 형제들의 중심,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아낌없이 섬김받는 중심이자 우두머리는 내 아버지요 너희 아버지라. 나는 그의 아들이요 너희도 또한 아들이라. 그러므로 하늘의 지위로 보면 너희와 내가 형제인 것이 영원히 진리요, 땅에서 사는 인생에서 육체를 입고 우리가 형제가 되었은즉 더욱 그러하니라. 그러면 하나님을 임금으로 두려워하거나 주인으로 섬기지 말라. 창조자인 그를 존경하기를 배우고 너희 어린 영의 아버지로 공경하며 자비로운 변호자인 그를 사랑하라. 궁극에는 너희가 더 성숙하게 영적으로 깨닫고 이해하는 아버지, 사랑이 깊고 전적으로 지혜로운 아버지로 예배하라.
149:6.9 (1676.3)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너희의 그릇된 개념들로부터 거짓된 겸손 개념이 자라고 많은 위선(僞善)이 솟아나느니라. 사람의 성품과 기원은 흙 속의 벌레일지 모르지만, 내 아버지의 영이 깃들 때 그 사람의 운명이 신성하게 되느니라. 내 아버지가 수여하는 영은 분명히 그 신성한 근원으로, 기원이 있던 우주 수준까지 돌아가겠고, 필사자의 인간 혼은 이 깃드는 영으로부터 다시 태어난 아이가 되었을 것이요, 그 혼은 신다운 영과 더불어 영원한 아버지가 계신 바로 그 앞까지 확실히 올라가리라.
149:6.10 (1676.4) “하늘나라의 영원으로 올라가는 모든 그러한 믿음의 후보자에게 비록 신다운 위엄이 붙을지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이 모든 선물을 받는 필사 인간에게 겸손이 정말로 어울리느니라. 의미 없이 비천하게, 보아란 듯 거짓 겸손을 떠는 것은 구원의 근원을 이해하고 영에게서 태어난 너희 혼의 운명을 인식하는 것과 모순되느니라. 마음 속 깊이, 하나님 앞에 겸손함은 아주 적절하니라. 사람들 앞에서 온유함은 칭찬할 만하여도, 자의식하면서 몹시 눈을 끌고 싶어 겸손을 떠는 위선은 유치하며, 하늘나라의 깨우친 아들들에게 어울리지 않느니라.
149:6.11 (1676.5)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온유하고 사람들 앞에서 자제하는 것이 좋으니라. 그러나 온유함이 영적 기원으로부터 나오게 하고, 혼자만 옳다는 우월감을 자각하는, 스스로 속이는 표현이 되게 하지 말라. 선지자가 ‘하나님과 함께 겸손히 걸으라’하였을 때 지혜롭게 말하였으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무한자요 영원자이기는 하여도 또한 ‘뉘우치는 정신과 겸손한 영과 더불어’ 거하심이라. 내 아버지는 자만을 멸시하고 위선을 몹시 싫어하며 불의를 언짢아하시니라. 성실의 가치를 강조하고 하늘 아버지가 사랑으로 지원하고 충실히 안내함을 완전히 의지할 것을 강조하려고, 생각하는 태도와 영의 반응을 보여주는 예로서 어린아이를 내가 무척 자주 언급하였으니, 그런 태도와 반응이 필사 인간이 하늘나라의 영적 실체로 들어가는 데 아주 필요하니라.
149:6.12 (1677.1) “‘너희가 입으로는 하나님께 가까이 있어도 마음 속에서는 멀도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했을 때 숱한 사람을 잘도 묘사하였느니라. ‘거기 있는 사제들은 보수를 받고 가르치며, 거기 있는 선지자들은 돈을 받고 점을 치는도다. 동시에 저희는 경건함을 고백하고, 주가 저희와 함께 있다고 선포하는도다’ 하고 이른 선지자의 끔찍한 경고를 너희는 또한 읽지 아니하였느냐. ‘마음 속에 해악이 있으면서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는’ 자, ‘입으로는 칭찬하나 마음에 두 생각을 품는’ 자에 대하여 너희는 좋이 경고를 받지 아니하였느냐? 사람을 믿는 자의 모든 슬픔 가운데, ‘믿었던 친구의 집에서 상처를 받는’ 것만큼 끔찍한 일이 없느니라.”
149:7.1 (1677.2) 시몬 베드로와 상의하고 예수의 승인을 얻어서, 안드레는 벳세다에 있는 다윗에게, 여행을 마치고 12월 30일 목요일 아무 때나 벳세다로 돌아오라는 지시를 주어 사자들을 여러 전도 집단에게 보내라고 지시했다. 비가 오는 그날 저녁때가 되자, 사도 일행을 비롯하여 가르치는 전도사들은 모두 세베대의 집에 도착했다.
149:7.2 (1677.3) 그 일행은 안식일에 함께 남아 있었고, 벳세다의 여러 집과 근처 가버나움에서 묵었다. 그 뒤에 일행 전부가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거나, 친구들을 찾아보거나, 물고기를 잡으러 가도록 2주 동안 휴가를 얻었다. 함께 벳세다에서 지낸 이삼일은 정말로 상쾌하고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고참(古參) 선생들조차 새 전도사들이 자기 체험을 이야기할 때 교훈을 얻었다.
149:7.3 (1677.4) 이 둘째 갈릴리 전도 여행에 참여한 전도사 117명 가운데 오직 약 75명이 실제로 체험하는 시험을 견디었고, 2주 동안의 휴가를 마치고 봉사에 배치되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안드레ㆍ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과 함께, 예수는 세베대의 집에 남아 있었고, 하늘나라의 복지와 확장에 관하여 회의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
150:0.1 (1678.1) 서기 29년 1월 16일 일요일에, 아브너는 요한의 사도들과 함께 벳세다에 이르렀고, 이튿날 안드레, 그리고 예수의 사도들과 함께 합동 회의에 들어갔다. 아브너와 그 동료들은 본부를 헤브론에 두었고, 이 회의에 참석하려고 정기적으로 벳세다로 올라오는 버릇이 있었다.
150:0.2 (1678.2) 이 합동 회의에서 여러 문제 중에, 병 고치기 위한 기도와 관련하여 어떤 형태의 기름을 병자들에게 바르는 관습을 고려하였다. 다시 예수는 토론에 참여하거나 그들의 결론에 관하여 자기 의사(意思)를 밝히려 하지 않았다. 요한의 사도들은 병자와 고통받는 자를 보살피면서 바르는 기름을 언제나 썼고 이것을 두 집단의 통일된 관습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예수의 사도들은 그러한 규칙에 묶이려 하지 않았다.
150:0.3 (1678.3) 1월 18일 화요일에, 세 번째 갈릴리 전도 여행에 파송되기 위한 준비로, 벳세다의 세베대 집에서 스물네 사람과 단련된 전도사 약 75명이 합세하였다. 이 셋째 사명은 7주 동안 이어졌다.
150:0.4 (1678.4) 전도사들은 다섯 명씩 무리를 지어 파송되었고, 한편 예수와 열두 사도는 거의 항상 함께 여행하였다. 사도들은 경우가 닿는 대로 둘씩 짝지어 나가서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거의 3주 동안 아브너와 그 동료들도 전도사 집단과 함께 일했고, 그들에게 조언하고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들은 막달라ㆍ티베리아스ㆍ나사렛, 그리고 갈릴리 중부와 남부의 모든 주요한 도시와 마을, 즉 이전에 방문했던 모든 곳과 다른 여러 군데를 찾아보았다. 이것은 북쪽 지역을 빼고, 갈릴리에서 마지막 전도였다.
150:1.1 (1678.5) 땅에서 산 생애와 관련하여 예수가 행한 대담한 모든 일 가운데, 1월 16일 저녁에 갑작스런 선언이 가장 놀라운 일이었다: “내일 우리는 하늘나라에 봉사하는 일을 위하여 여인 열 명을 따로 세우리라.” 사도와 전도사들이 휴가를 얻어 벳세다에서 자리를 비울 2주 기간이 시작되자, 다윗에게 예수는 자신의 부모를 집으로 부르라, 그리고 이전에 야영지와 텐트 병원에서 행정 사무에 수고했던 경건한 여인 10명을 벳세다로 부르려고 사자들을 보내라고 요청했다. 젊은 전도사들에게 준 지침을 이 여인들 모두가 들었지만, 그들이나 그 선생들에게나, 예수가 하늘나라 복음을 가르치고 아픈 사람들을 보살피라고 감히 여자들을 세우리라는 생각이 결코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예수가 선택하고 임명한 이 여자 10명은 다음과 같다: 수잔나는 나사렛 회당의 옛 하잔의 딸이요, 요안나는 헤롯 안티파스의 집사 추자의 아내요, 엘리자벳은 티베리아스와 세포리스의 어느 부유한 유대인의 딸이며, 마르다는 안드레와 베드로의 누나요, 라헬은 육체로 주의 아우 유다의 처제요, 나산타는 시리아인 의사 엘만의 딸이요, 밀가는 사도 토마스의 사촌이요, 룻은 마태 레위의 맏딸이며, 켈타는 로마인 백부장의 딸이요, 아가만은 다마스커스의 과부였다. 나중에 예수는 이 무리에 다른 두 여자―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의 딸 레베카―를 더했다.
150:1.2 (1679.1) 예수는 이 여인들에게 자체 조직을 만들라고 인가하고서, 장비와 짐 싣는 짐승을 살 돈을 마련해 주라고 유다에게 지시했다. 열 사람은 수잔나를 단장(團長)으로, 요안나를 회계로 뽑았다. 이때부터 계속 그들은 자체의 기금을 마련하였고 결코 다시 지원을 받으려고 유다로부터 돈을 인출하지 않았다.
150:1.3 (1679.2) 여자들이 (여인의 회랑에 국한되어) 회당 1층에도 허락되지 않던 그 시절에, 하늘나라의 새 복음을 가르치도록 허가받은 선생으로 인정됨을 보는 것은 무척 놀라운 일이었다. 예수가 열 여인을 복음을 가르치고 봉사하라고 따로 구별했을 때, 그가 이 여인들에게 책임지는 선서(宣誓)를 시킨 것은 모든 여자를 앞으로 영원히 자유롭게 만든 해방 선언이었다. 남자는 이제 더 여자를 영적으로 열등한 사람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되었다. 이것은 열두 사도에게도 명백한 충격이었다. “하늘나라에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고 자유로운 자도 매인 자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도 없고 모두가 똑같이 하나님의 아들딸이라” 주가 말씀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는데도, 예수가 이 열 여인을 종교 선생으로 임명하고 그들과 함께 여기저기 여행하라고 허락하는 것까지 정식(正式)으로 제안했을 때, 그들은 글자 그대로 깜짝 놀랐다. 전국이 이 조치에 떠들썩하였고 예수의 적들은 이 움직임을 크게 이용했다. 그러나 어디서나 좋은 소식을 믿는 여자들은 선택받은 누이들을 굳게 지지했고, 종교적인 일에서 여자의 자리를 이렇게 늦게나마 인정한 것에 대하여 분명한 지지(支持)를 표현했다. 주가 떠난 바로 뒤에는 여자를 마땅히 인정하면서 사도들이 이렇게 여자의 해방을 실천하였다. 하지만 그 뒤 세대에 사람들은 옛 관습으로 돌아갔다. 기독교 교회의 초기를 통해서 내내, 여자 선생과 봉사자들을 여집사로 불렀고 이들은 널리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바울이 이론으로는 이 모두를 인정한 것이 사실인데도, 결코 자신의 태도에 정말로 이를 적용하지 않았고, 이를 실천하기가 어려움을 몸소 발견했다.
150:2.1 (1679.3) 사도 일행이 벳세다로부터 길을 떠나자, 여자들은 뒤에서 여행했다. 회의 시간에 그들은 언제나 앞자리에, 연사(演士)의 바른쪽에 무리를 지어 앉았다. 갈수록 더 여자들이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 그들이 예수나 사도들 중 하나와 개인적으로 이야기하기를 바랐을 때, 이것은 많은 어려움의 근원이었고 난처한 일이 그치지 않았다. 이제 이 모두가 달라졌다. 여신도 가운데 누구라도 주를 만나거나 사도들과 의논하고 싶었을 때는 수잔나에게 갔고, 열두 여전도사 가운데 한 사람을 동반하여, 당장에 주나 사도들 중 한 사람 앞으로 가곤 하였다.
150:2.2 (1680.1) 막달라에서 여자들이 처음으로 쓸모 있음을 보여주었고 그들을 택한 것이 지혜로웠음을 입증했다. 안드레는 전에 여자들, 특히 인품이 의심스러운 사람들과 함께 개인적으로 일하는 것에 대하여 동료들에게 오히려 엄격한 규칙을 부과했다. 그 일행이 막달라에 들어갔을 때, 이 여전도사 열 명은 나쁜 유흥지로 마음대로 들어가서 기쁜 소식을 모든 동료에게 직접 전파했다. 병자들을 찾아볼 때, 이 여자들은 봉사를 베풀면서 병든 형제들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이곳에서 이 여인 열 명이 봉사를 베푼 결과로, 막달라 마리아가 하늘나라에 들어오도록 설득되었다. (이들은 나중에 열두 여자로 알려졌다.) 연달아 불행이 겹치고, 그렇게 판단을 잘못 내린 여자들에 대하여 존경받는 사회가 취한 태도의 결과로, 이 여자는 막달라의 못된 유흥지 가운데 하나에 굴러떨어졌다. 마르다와 라헬이 마리아에게, 그 여자 같은 사람에게도 하늘나라의 문이 열려 있다고 설명했다. 마리아는 좋은 소식을 믿었고 이튿날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150:2.3 (1680.2) 막달라 마리아는 이 열두 전도사 무리에서 가장 유능한 복음 선생이 되었다. 새로 전향하고 나서 약 4주 뒤에 요타파타에서 레베카와 함께, 그렇게 봉사하도록 따로 구별되었다. 마리아와 레베카는 이 집단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수가 땅에서 사신 여생을 통해서 일을 계속했고, 짓밟힌 형제들을 깨우치고 격려하기 위하여 충실하고 유능하게 수고했다. 예수 일생의 드라마에서 마지막 비극의 사건이 연출되고 있을 때, 한 사람만 제외하고 사도들이 모두 달아났는데도 이 여인들은 모두 자리에 있었고 한 사람도 그를 부인(否認)하거나 저버리지 않았다.
150:3.1 (1680.3) 사도 일행의 안식일 예배는 예수의 지시를 받고 나서 안드레가 여자들의 손에 맡겼다. 물론, 이것은 예배가 새 회당에서 진행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여자들은 이 행사의 책임을 맡으라고 요안나를 뽑았다. 그 모임은 헤롯의 새 궁전 연회실에서 열렸는데, 헤롯은 페레아의 줄리아에서 거주하느라고 떠나 있었다. 요안나는 이스라엘의 종교 생활에서 여자가 한 일에 관하여 성서를 읽었고 미리암과 데보라와 에스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언급했다.
150:3.2 (1680.4) 그날 저녁 늦게 예수는 그 연합된 집단에게 “마술과 미신”에 관하여 기억에 남을 말씀을 하였다. 그 시절에, 새 별이라고 생각되는 밝은 별이 나타나는 것은 위대한 사람이 땅에 태어난 것을 가리키는 징조로 여겼다. 그러한 별이 그때 최근에 관측되었기 때문에, 안드레는 예수에게 이러한 믿음에 타당한 근거가 있는가 물었다. 안드레의 물음에 길게 대답하면서, 주는 인간의 미신(迷信)이라는 주제 전체에 관하여 철저한 논의에 들어갔다. 이때 예수가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이 현대의 표현으로 간추려도 좋다:
150:3.3 (1680.5) 1. 하늘에서 별들의 운행은 땅에서 인간 생활의 사건과 아무 관계가 없다. 천문학은 적절한 과학적 연구이지만, 점성술은 하늘나라 복음에서 아무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미신의 오류 덩어리이다.
150:3.4 (1680.6) 2. 갓 죽인 동물의 내장(內臟)을 살피는 것은 날씨나 앞날의 사건이나 인간사의 결과에 관하여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다.
150:3.5 (1680.7) 3. 죽은 자의 영은 살아 있는 자 사이에, 가족이나 한 때 친구였던 자와 교통하려고 돌아오지 않는다.
150:3.6 (1681.1) 4. 부적과 유물(遺物)은 병을 고치거나 재난을 막거나 악령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영적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그러한 물질적 방법을 믿는 것은 터무니없는 미신일 뿐이다.
150:3.7 (1681.2) 5. 제비 뽑기는 많은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는 편리한 방법일지 모르지만, 신의 뜻을 드러내도록 고안된 방법이 아니다. 그러한 결과는 순전히 물질적으로 우연히 일어나는 문제이다. 영적 세계와 교통하는 유일한 수단은, 아들이 쏟아 부은 영과 무한한 영의 두루 계시는 영향과 더불어, 인류의 영 재산, 곧 아버지의 깃드는 영 속에 담겨 있다.
150:3.8 (1681.3) 6. 점치기ㆍ요술ㆍ마법은, 마술의 미혹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자들이 믿는 미신이다. 마술 숫자, 행운의 전조(前兆), 불운을 알리는 전령을 믿는 것은 순전하고 근거 없는 미신이다.
150:3.9 (1681.4) 7. 꿈의 풀이는 대체로 미신이고 근거 없는 방식, 무지하고 환상적 추측 방식이다. 하늘나라의 복음은 원시 종교의 점치는 사제들과 아무 공통점이 없다.
150:3.10 (1681.5) 8. 착한 영이나 악한 영은 진흙이나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물질적 상징 안에 거할 수 없다. 우상은 그 자체를 만든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150:3.11 (1681.6) 9. 주문 외는 자, 요술사ㆍ마술사ㆍ마법사의 관습은 에집트인과 아씨리아인, 바빌로니아인과 고대 가나안 사람들의 미신으로부터 유래되었다. 부적과 온갖 종류의 주문(呪文)은 착한 영들의 보호를 얻거나 악한 영이라고 생각된 것들을 막는 데 쓸모가 없다.
150:3.12 (1681.7) 10. 그는 주문, 죄를 시험하는 단련, 마술 걸기, 저주, 상징, 만드레이크[1] [1797], 매듭진 끈, 그리고 무지하고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온갖 다른 형태의 미신을 믿는 신앙을 폭로하고 비난했다.
150:4.1 (1681.8) 다음 날 저녁, 열두 사도, 요한의 사도들, 그리고 새로 임명한 여인 집단을 한데 모으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수확이 풍부하나 일꾼이 적은 것을 바로 너희가 보느니라. 그러므로 수확하시는 주께 들로 더욱 많은 일꾼을 보내달라고 우리 모두 기도하자. 내가 남아서 새로 된 선생들을 위로하고 가르치는 동안, 아직 형편이 좋고 평화로운 동안에 하늘나라 복음을 전도하면서 온 갈릴리를 빨리 지나가도록, 먼저 된 자들을 둘씩 보내고자 하노라.” 그리고 나서 그가 떠나 보내기를 원한 대로 사도들의 쌍을 정해 주었는데, 다음과 같다: 안드레와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 세베대, 빌립과 나다니엘, 토마스와 마태, 야고보와 유다 알패오, 열심당원 시몬과 가룟 유다였다.
150:4.2 (1681.9) 예수는 나사렛에서 열두 사도를 만나는 날을 정했고, 떠나면서 말했다: “이 임무에는 어떤 이방인 도시에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에도 가지 말라. 그러나 대신에 이스라엘의 집에서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하늘나라 복음을 전도하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유익한 진리를 선포하라. 제자는 도저히 선생보다 낫지 않고, 종이 주인보다 크지 않음을 기억하라. 제자가 선생과 대등하고 종이 주인과 같이 되는 것으로 넉넉하니라. 어떤 사람들이 집주인을 비엘세붑의 친구라고 감히 불렀다면, 그 집안 사람들을 그보다 얼마나 더 나쁘게 여기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이 믿지 않는 적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밝히 드러내지 않으려고 감춘 것이 하나도 없고, 알리지 않으려고 숨긴 것이 하나도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몸소 가르친 것을 터놓고 지혜롭게 전도하라. 안방에서 너희에게 드러낸 것을 때가 되면 너희가 집 꼭대기에서 선포해야 하느니라. 친구와 제자들아, 너희에게 이르노니, 몸을 죽일 수 있어도 혼을 죽일 수 없는 자를 두려워 말라. 차라리 몸을 지탱하고 혼을 구할 수 있는 분을 너희가 신뢰하라.
150:4.3 (1682.1) “참새 두 마리가 동전 한 잎에 팔리지 아니하느냐? 그래도 내가 선언하노니,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눈앞에서 잊혀지지 않느니라. 너희 머리에 바로 그 털조차 센 것을 모르느냐? 그러므로 두려워 말라, 너희는 허다한 참새보다 더 귀중하니라. 내 가르침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 가서 평화와 선의를 선포하라, 그러나 속지 말라―평화가 반드시 너희의 전도(傳道)를 따르지는 아니하리라. 나는 땅에 평화를 주려고 왔어도 사람들이 내 선물을 물리칠 때, 분열과 소동이 따르느니라. 한 집안에서 모두가 하늘나라 복음을 받아들일 때 참으로 평화가 그 집에 머물러도, 집안에서 더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더러는 복음을 물리칠 때 그러한 분열은 오직 슬픔과 불행을 낳을 수 있느니라. 사람의 적이 집안에 있는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집안 전체를 구하려고 열심히 수고하라. 그러나 각 집안의 모든 사람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나서, 너희에게 선포하노니, 이 복음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느니라.”
150:4.4 (1682.2) 열두 사도는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떠나려고 준비했다. 그들은 주가 주선한 대로 예수와 다른 제자들과 만나려고 나사렛에서 모일 때까지 다시 함께 모이지 않았다.
150:5.1 (1682.3) 요한의 사도들이 헤브론으로 돌아간 뒤, 그리고 예수의 사도들이 둘씩 파송된 뒤에, 슈넴에서 어느 날 저녁, 주가 야곱의 지휘 하에서 수고하고 있던 새 전도사 열두 명의 무리를 가르치느라고 몰두해 있을 때, 라헬은 열두 여인과 함께, 예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주여, ‘구원을 받으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리이까’ 하고 여자들이 물으면 우리가 어떻게 대답하리이까?” 이 물음을 듣자, 예수는 대답했다:
150:5.2 (1682.4) “남자와 여자들이 구원받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물을 때, 너희는 대답할지어다. 이 하늘나라 복음을 믿고, 신의 용서를 받아들이라. 하나님의 영이 깃드심을 믿음으로 인식할지니, 그 영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느니라. 너희는 성서를 읽지 아니하였느냐. 거기에는 쓰였으되, ‘주 안에서 내가 올바름과 힘을 가졌노라.’ 거기에 또한 아버지가 이르시되 ‘나의 올바름이 가까웠도다, 나의 구원이 떠나갔고 내 팔이 내 민족을 감싸리라.’ ‘내 혼이 하나님의 사랑 속에 기뻐하리니,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나를 입히고 올바름의 예복으로 나를 덮으셨음이라.’ 너희는 또한 아버지에 관하여, 그의 이름을 ‘우리의 올바른 주라 부를지니라’ ‘독선(獨善)의 더러운 누더기를 버리고 신다운 올바름과 영원한 구원의 예복으로 내 아들을 입히라’한 것을 읽지 아니하였느냐. 이것이 언제까지나 참이라, ‘옳은 자는 믿음으로 살리라.’ 아버지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은 모두 거저이나, 그 안에서 계속하는 데는 진보가―은혜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필수이라.
150:5.3 (1682.5) “구원은 아버지의 선물이요, 아들들이 구원을 드러내느니라. 네 편에서 믿음으로 받아들임은 너를 신다운 성품을 같이 하는 자, 하나님의 아들이나 딸로 만드느니라. 너희는 믿음으로 옳게 되고 믿음으로 구원받으며 바로 이 믿음으로 진보하고 신다운 완전에 이르는 길로 영원히 올라가느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옳게 여김을 받았고, 멜기세덱의 가르침으로 구원받았음을 깨달았더라. 오랜 세월을 통해서 내내, 바로 이 믿음이 사람의 아들들을 구하였으나 구원을 더욱 현실로, 받아들이기 쉽게 만들려고 이제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다가왔느니라.”
150:5.4 (1683.1) 예수가 말씀을 멈추었을 때, 이 은혜로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고, 뒤이은 여러 날 동안 모두가 새 힘과 되찾은 에너지와 열심을 가지고 하늘나라 복음을 줄곧 선포하였다. 여자들은 땅에서 하늘나라를 세우는 이 계획에 여자들이 포함되었음을 알고 더군다나 기뻐했다.
150:5.5 (1683.2) 마지막 말씀을 요약하면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없느니라. 수고한다고 올바름을 벌어들일 수 없느니라.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올바름은 하늘나라에서 아들 신분의 생명, 영에게서 태어난 생명이 맺는 자연스러운 열매이라. 너희가 올바른 인생을 산다고 해서 구원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아들 신분을 하나님의 선물로,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봉사함을 땅에서 일생에 최고의 기쁨으로 여겼으므로 너희가 올바른 인생을 사는 것이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이 복음을 믿을 때, 저희는 사람이 아는 모든 죄를 스스로 뉘우치게 되리라. 아들임을 깨닫는 것은 죄를 저지르려는 욕구와 모순되며, 하늘나라를 믿는 자는 올바름을 간절히 바라고 신의 완전함을 목마르게 찾느니라.”
150:6.1 (1683.3) 저녁 토론 시간에 예수는 많은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이 남은 여행을 마치는 동안에―모두 나사렛에서 다시 모이기 전에―“하나님의 사랑,” “꿈과 환상,” “악의,” “겸손과 온유,” “용기와 충성,” “음악과 예배,” “봉사와 복종,” “자만과 주제넘기,” “용서와 뉘우침의 관계,” “평화와 완전,” “악하게 말하기와 질투,” “악과 죄와 유혹,” “의심과 불신,” “지혜와 예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고참 사도들이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이 새 집단의 남녀들은 주와 함께 더 거리낌없이 이 토론에 들어갔다.
150:6.2 (1683.4) 한 무리의 열두 전도사와 이삼일 보낸 뒤에 예수는 자리를 떠서 또 다른 무리에 합세하곤 하였고, 다윗의 사자들로부터 이 모든 일꾼이 있는 곳과 그 움직임에 대하여 통지를 받았다. 이것이 처음 여행이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예수와 함께 남아서 보냈다. 사자의 봉사를 통해서 이 집단들은 저마다 여행의 진전에 관하여 충분히 통지받았고, 다른 집단으로부터 소식을 듣는 것은 흩어지고 따로 떨어진 이 일꾼들에게 언제나 용기를 북돋아주는 근원이었다.
150:6.3 (1683.5) 흩어지기 전에, 열두 사도는 전도사들과 여인단과 더불어, 3월 4일 금요일에 주를 만나려고 나사렛에서 모이기로 미리 주선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무렵에, 중부 및 남부 갈릴리의 모든 지방으로부터 이 여러 집단의 사도와 전도사들이 나사렛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후 중반이 되어서, 마지막으로 온 안드레와 베드로는 그 도시의 북쪽, 고지(高地)에 자리잡은 야영지에 이르렀고, 일찍 도착한 사람들이 야영지를 준비하였다. 대중 봉사를 시작한 뒤로 이번에 처음으로 예수는 나사렛을 방문했다.
150:7.1 (1683.6) 이 금요일 오후에 예수는 사람들 눈에 아주 띄지 않고 전혀 알아보지 못하게 나사렛 주위를 걸어다녔다. 어릴 때 살던 집과 목수 작업장을 지나쳤고, 소년이었을때 무척 즐기던 언덕에서 반 시간을 보냈다.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받은 날 이후로, 사람의 아들은 혼 속에서 그러한 인간적 감정의 큰 물결이 이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나사렛에서 자라는 소년이었을 때 아주 여러 번 들은 것과 똑같이, 귀에 익은 소리, 해가 지는 것을 알리는 트럼펫 부는 소리를 들었다. 야영지로 돌아가기 전에, 공부하러 다니던 회당 옆으로 걸어서 내려갔고, 머리 속에서 소년 시절의 여러 가지를 회상하는 데 빠졌다. 그날 일찍, 안식일 아침 예배에 그가 설교하도록 회당장과 주선하라고 토마스를 미리 보냈다.
150:7.2 (1684.1) 나사렛 사람들은 경건하고 올바르게 사는 것으로 소문난 적이 없었다. 세월이 지나자, 이 마을은 근처 세포리스의 낮은 도덕 수준에 더욱 오염되었다. 예수의 어릴 때와 청년기를 통해서, 나사렛에서는 그에 대하여 의견이 갈라져 있었다. 가버나움으로 이사갔을 때, 사람들은 무척 분개했다. 나사렛의 주민들은 옛 목수가 한 일에 관하여 익히 소문을 듣기는 했어도, 초기 전도 여행 중 어디에도 그의 잔뼈가 굵었던 마을을 넣지 않은 것에 감정이 상했다. 정말로 그들은 예수의 명성을 들었지만, 대다수의 시민은 그가 어릴 때 자란 도시에서 대단한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 나 있었다. 여러 달 동안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에 대하여 많이 떠들었지만 그에 대한 의견은 대체로 좋지 않았다.
150:7.3 (1684.2) 이렇게 사람들이 반가이 맞아주는 귀향이 아니라 뚜렷이 적대시하고 지나치게 비판하는 분위기 한가운데에 주는 자신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나사렛에서 이 안식일을 보낼 것을 알고 회당에서 그가 말씀할 것을 짐작하고서, 적들은 그를 괴롭히고 가능한 모든 면에 소동을 일으키려고 거칠고 천한 수많은 사람을 고용했다.
150:7.4 (1684.3) 예수의 옛 친구들의 대부분은, 어릴 때 그에게 쏙 빠졌던 하잔[2] [1798] 선생을 포함하여 죽었거나 이미 나사렛을 떠났고, 젊은 세대는 심한 질투로 그의 명성을 분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그가 예전에 아버지의 가족에게 헌신했던 것을 기억하지 못했고, 나사렛에서 살고 있는 동생과 시집간 누이들 찾아보기를 소홀히 하였다고 지독하게 비난하였다. 예수의 집안이 그에게 취하는 태도도 또한 시민의 불친절한 느낌을 부채질하는 경향이 있었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예수가 이 안식일 아침에 회당으로 가는 길에 너무 빨리 걸었다고 해서 주제넘게 헐뜯기까지 했다.
150:8.1 (1684.4) 이 안식일은 화창한 날이었고, 온 나사렛, 친구와 적들이 마을의 이 옛 시민이 회당에서 하는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사도 수행원들 가운데 여럿이 회당 바깥에 남아 있어야 했다. 말씀을 들으려고 온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리가 없었다. 젊은이로서 예수는 이 예배 장소에서 가끔 말씀하였고, 이날 아침에 회당장이 성서 교훈을 읽으라고 신성한 기록이 적힌 두루마리를 넘겨주었을 때, 이것이 이 회당에 그가 드린 바로 그 사본(寫本)이라는 것을 거기 있던 사람들 중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였다.
150:8.2 (1684.5) 이날의 예배는 예수가 소년으로 참석했을 때와 똑같이 진행되었다. 그는 회당장과 함께 연단에 올라갔고, 예배는 두 기도문을 낭독함으로 시작되었다: “주는 복되시니 그는 세상의 임금이요, 빛을 짓고 어둠을 창조하며 평화를 주고 만물을 지으시도다. 그는 자비롭게 땅과 거기에 사는 자들에게 빛을 주시며, 선하여 하루하루, 날마다 창조하신 작품을 새롭게 하시도다. 그의 영화로운 솜씨 때문에, 그리고 그를 찬미하라고 만드신 빛, 밝게 비치는 그 빛 때문에 주, 우리의 하나님은 복되도다. 셀라. 주, 우리 하나님은 복되시니, 빛을 지으셨도다.”
150:8.3 (1685.1) 한 순간 멈춘 뒤에 그들은 다시 기도했다: “큰 사랑으로 주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 아버지여, 우리 임금이여, 그를 신뢰한 우리 조상을 위하여, 넘쳐흐르는 동정심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도다. 주는 저희에게 생명의 규율을 가르치셨으니,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고 우리를 가르치소서. 우리의 눈을 밝혀 율법을 보게 하소서. 우리의 마음이 주의 계명에 충실하게 하소서. 주의 이름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만드소서. 그리하면 영원토록 우리가 부끄럽게 되지 아니하리이다. 주는 구원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요, 모든 민족과 국민 가운데서 우리를 고르셨고, 주가 하나임을 우리가 사랑으로 찬미하도록 주의 크신 이름―셀라―가까이에 진실로 우리를 데려오셨나이다. 주는 복되시며 사랑으로 그의 민족 이스라엘을 택하셨도다.”
150:8.4 (1685.2) 그리고 나서 회중은 쉬마, 즉 유대인의 신조를 낭독했다. 이 의식은 율법의 수많은 구절을 되풀이하는 것이요, 예배하는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멍에, 또한 밤과 낮에 적용되는 여러 계명의 멍에를 스스로 지는 것을 가리켰다.
150:8.5 (1685.3) 다음에 셋째 기도가 이어졌다: “주는 야웨, 우리의 하나님이요 조상의 하나님인 것이 참이나이다. 우리의 임금, 우리 조상의 임금이며, 우리의 구원자 우리 조상의 구원자요, 우리의 창조자, 우리를 구원하는 바위요, 우리의 도움, 우리의 구원자이로다. 주의 이름은 영원부터 계시고 주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도다. 구원받은 자들이 바닷가에서 주의 이름에 맞춰 새 노래를 부르나이다. 모두가 함께 찬미하고 주를 임금으로 인정하며 말하도다, 야웨가 영원토록 군림하리라. 이스라엘을 구하시는 주는 복되도다.”
150:8.6 (1685.4) 그리고 나서 회당장은 신성한 기록들이 들은 궤, 곧 상자 앞에 자리를 차지했고, 열 아홉 가지 축복의 기도, 곧 축도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귀빈에게 강론할 시간을 더 주도록 예배를 짧게 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따라서 축복의 처음과 마지막 구절만 낭독하였다. 이것이 처음 구절이었다: “주 우리의 하나님이여, 우리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ㆍ이삭ㆍ야곱의 하나님은 복되도다. 크고 막강하고 두려운 하나님, 자비와 친절을 보이고 만물을 지으시며, 조상에게 하신 은혜로운 약속을 기억하고,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사랑으로 저희 후손의 후손에게 구원자를 불러오시도다. 아 임금, 도와 주는 자, 구원자여, 방패여! 아 주 야웨여, 아브라함의 방패는 복되도다!”
150:8.7 (1685.5) 다음에 마지막 축복이 따랐다. “주는 임금이요 모든 평화의 주인이니, 아 주의 민족 이스라엘에게 큰 평화를 언제까지나 내리소서. 항상 어느 때라도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내리심이 주의 눈에 보기 좋사옵나이다. 주 야웨는 복되시니, 그의 민족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내리시나이다.” 회당장이 축도를 낭독할 때 회중은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축도가 끝난 뒤에 그 경우에 적당한 비공식 기도를 드렸고 이것이 끝나자 모든 회중이 합쳐서 아멘 하였다.
150:8.8 (1685.6) 그리고 나서 하잔은 궤로 다가가서 한 두루마리를 꺼냈고, 성서 교훈을 읽으라고 예수에게 내밀었다. 일곱 사람을 불러서 율법(律法)에서 적어도 세 구절을 읽게 하는 것이 관습이었지만, 방문객이 자신이 선택한 교훈을 읽도록 이 경우에 이 관습이 보류되었다. 예수는 두루마리를 받고서, 일어서서 신명기에서 읽기 시작했다: “오늘날 내가 너희에게 주는 이 계명을 너희에게 감추지 않았고 이것이 멀리 있지도 않음이라. 그 계명이 하늘에 있어,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행하도록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서 가져올까? 하고 너희가 말하지 못하느니라. 계명이 바다 건너에 있어,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실천하도록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서 그 계명을 가져올까? 하고 너희가 말하지도 못하느니라. 아니라, 네가 생명의 말씀을 알고 그에 복종하도록 그 말씀은 너에게 무척 가까이, 아니 네가 있는 앞과 네 마음 속에도 있느니라.”
150:8.9 (1686.1) 그리고 율법에서 읽기를 그쳤을 때, 그는 이사야로 눈을 돌려 읽기 시작했다: “주의 영이 내게 가까이 오시니, 가난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라고 내게 기름을 부으셨음이라. 포로가 된 자에게 해방을, 눈먼 자에게 눈이 다시 보임을 선포하며, 다친 자를 놓아 주고, 주의 마음에 들 해를 선포하라고 나를 보내셨도다.”
150:8.10 (1686.2) 책을 덮고, 회당장에게 책을 넘겨 준 뒤에, 예수는 앉아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했다: “오늘 이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졌도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거의 15분 동안 “하나님의 아들딸”에 대하여 말씀하였다. 많은 사람이 그 말씀을 기뻐했고 그의 품위와 지혜에 감탄했다.
150:8.11 (1686.3) 정식 예배가 끝난 뒤에, 관심이 있을까 싶은 사람들이 질문할 수 있도록 연사가 남아 있는 것이 회당의 관습이었다. 따라서 이 안식일 아침에 예수는 질문을 던지려고 앞으로 밀어닥치는 군중 속으로 걸어 내려왔다. 이 무리에는 그를 해치려고 굳게 작정한 사나운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한편 이 군중의 가장자리 근처에는 예수에게 문제를 일으키려고 고용된 저질의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바깥에서 남아 있던 많은 제자와 전도사가 이제 회당으로 밀고 들어갔고, 문제가 터지려 하는 것을 눈치 채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주를 멀리 이끌려고 애썼지만, 주는 함께 가려 하지 않았다.
150:9.1 (1686.4) 예수는 회당에서 큰 무리의 적들과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둘러싸여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무례한 물음과 심술궂은 농담에 응답하여 반은 유머로 대답했다: “옳도다, 나는 요셉의 아들이라. 나는 목수요, 너희가 나로 하여금 ‘의사여, 자신을 고치라’하는 속담을 생각나게 하느니라. 너희가 듣던 바와 같이 내가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나사렛에서 하라고 도전하는 데 놀라지 않노라. 그러나 ‘선지자가 제 나라와 제 민족 바깥에서는 명예가 없지 않도다’ 성서도 선언하는 것을 너희가 증언하라고 요청하노라.”
150:9.2 (1686.5)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떠밀고 비난하는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너는 나사렛의 사람들보다 네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구나. 너는 우리를 떠났어도 네 동생은 평범한 일꾼이요, 네 누이들은 아직도 우리 사이에 사느니라. 우리는 네 어머니 마리아를 아노라. 오늘날 저희가 어디 있느냐? 너에 관하여 우리는 큰 소문을 들으나 우리가 보아하니, 네가 돌아와서 아무 기적도 행하지 않는구나.” 예수는 대답했다: “내가 자랐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내가 사랑하고 너희가 모두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것 보기를 내가 기뻐하겠으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라. 은혜로 생기는 변화는 받는 자의 살아 있는 믿음에 반응하여 일어나느니라.”
150:9.3 (1686.6) 자신의 사도들 중 한 사람, 열심당원 시몬이 전략의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예수는 군중을 기분 좋게 다루고 사나운 적들도 효과적으로 가라앉혔을 것이다. 시몬은 새로 된 전도사들 가운데 한 사람 나홀의 도움을 얻어서, 군중 가운데서 예수의 친구들 한 집단을 그동안에 모았고, 호전적 자세를 취하면서 주의 적들에게 떠나라고 주의를 주었다. 부드러운 대답이 진노를 거둔다고 예수가 사도들에게 오래 가르쳤지만, 추종자들은 사랑하는 선생, 마음에 우러나서 주라고 부르는 분이, 그렇게 무례하고 멸시하는 대접을 받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이것은 너무 지나쳤다. 그들은 뜨겁고 맹렬하게 분개하는 말을 하게 되었다. 이 모두가 사악하고 거친 회중 가운데서 폭도의 분위기를 건드리는 방향으로 가기만 했다. 그래서 돈 받은 건달들의 지휘 하에, 이 깡패들은 예수를 붙잡고 회당 바깥으로, 근처의 가파른 산 벼랑까지 몰아세웠고, 거기서 벼랑 끝을 지나 밑으로 떨어져 죽으라고 밀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바야흐로 벼랑 끝으로 밀려고 했을 때, 예수는 붙잡은 자들에게 갑자기 돌아서서, 마주보고 조용히 팔짱을 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앞으로 걷기 시작하자, 폭도들은 갈라졌고 손대지 않고 지나가도록 버려두었을 때, 친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50:9.4 (1687.1) 제자들의 수행을 받으며 예수는 야영지로 진행했다. 거기서 사람들이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예수가 지시한 대로, 이튿날 일찍 가버나움으로 돌아가려고 그날 저녁에 준비했다. 셋째 대중 전도가 이렇게 시끄럽게 끝난 것은 예수의 모든 추종자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효과를 가졌다. 주의 어떤 가르침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많은 슬픔과 쓰라린 실망을 통해야 하늘나라가 오리라는 사실에 눈을 뜨고 있었다.
150:9.5 (1687.2) 그들은 이 일요일 아침에 나사렛을 떠났고, 다른 길로 여행하면서, 3월 10일 목요일 한낮이 되어서, 모두가 마침내 벳세다에 모였다. 열심이 있고 만사를 정복하는 한 떼의 승리한 십자군이 아니라, 제 정신이 들고 심각한 무리, 꿈에서 깨어난 진리 복음의 전도사로서, 함께 왔다.
151:0.1 (1688.1) 3월 10일이 되자, 전도하고 가르치는 모든 집단이 벳세다에 모여들었다. 목요일 밤과 금요일에 그들 중에 여럿이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다. 한편 안식일에 다마스커스에서 온, 어느 나이 든 유대인이 조상 아브라함의 영광에 대하여 강연하는 것을 들으려고 그들은 회당에 참석했다. 예수는 이 안식일의 대부분을 혼자서 산에서 지냈다. 그 토요일 밤에 주는 모여든 무리에게 “역경의 역할과 실망의 영적 가치”에 대하여 한 시간이 넘도록 이야기했다. 이것은 기억할 만한 경우였고,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누어준 교훈을 결코 잊지 않았다.
151:0.2 (1688.2) 예수는 나사렛에서 최근에 거절당한 슬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사도들은 여느 때처럼 즐거운 태도에 섞인 그의 특이한 슬픔을 알아차렸다. 야고보와 요한은 대부분의 시간을 그와 함께 있었고, 베드로는 새 전도단의 복지와 지도에 관계되는 여러 책임에 몰두하여 여념이 없었다. 여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내려고 떠나기 전에 이 기다리는 시간을 이집 저집 찾아다니며, 가버나움과 그 주위의 여러 도시와 마을의 병자들을 돌보면서 보냈다.
151:1.1 (1688.3) 이 무렵에 예수는 주위에 무척 자주 모여드는 군중을 비유로 가르치는 방법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예수가 사도 및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밤이 늦도록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 일요일 아침에 그 무리 중에 거의 아무도 아침을 먹으려고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바닷가로 나가서, 안드레와 베드로가 예전에 고기잡이하던 배, 언제나 그가 뜻대로 쓰도록 둔 배 안에서 예수는 혼자 앉아 있었고, 하늘나라를 펼치는 일을 하는 데 다음에 취해야 할 행동에 관하여 명상했다. 그러나 주는 오래도록 혼자 있게 되지 않았다. 금방 사람들이 가버나움과 이웃의 여러 마을에서 도착하기 시작했고, 아침 10시가 되자 거의 1천 명이 물가에, 예수의 배 가까이 모여들었고 주의를 끌려고 아우성을 쳤다. 베드로는 이제 일어나서, 배 있는 데로 가면서 말했다. “주여, 내가 저희에게 이야기하리이까?” 그러나 예수가 대답했다. “아니라 베드로야, 내가 저희에게 이야기를 해주리라.” 그리고 나서 예수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비로소 말씀했고, 이것은 따라다닌 군중에게 가르친 비유, 길게 연속된 그런 초기 비유 중의 하나였다. 이 배에는 높이 세워진 자리가 있었고 물가에 모인 군중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가르칠 때 앉는 것이 버릇이었으므로) 예수는 거기에 앉았다. 베드로가 몇 마디 한 뒤에 예수는 입을 열었다:
151:1.2 (1688.4) “어느 씨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갔는데, 씨를 뿌리자, 더러는 길가에 떨어져 발에 짓밟히고 하늘의 새들이 삼키게 되었더라. 다른 씨는 흙이 거의 없는 돌밭에 떨어졌고, 흙이 깊지 않으매 즉시 싹이 났으나 해가 비치자마자 물기를 빨아들일 뿌리가 없어 말라버렸더라. 다른 씨는 가시나무 사이에 떨어져서 가시나무가 자라자 그 씨가 숨이 막혀 전혀 결실하지 못하였더라. 또 다른 씨는 좋은 땅에 떨어졌고 자라서 더러는 30배, 더러는 60배, 더러는 100배 결실하였더라.” 이 비유 말씀을 마치고 나서 군중에게 말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51:1.3 (1689.1) 사도들, 그리고 함께 있던 자들은, 예수가 이 방법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을 듣고서 크게 어리둥절하였다: 자기들끼리 많이 이야기를 나눈 뒤에, 그날 저녁 세베대의 집 뜰에서 마태가 예수에게 말했다: “주여, 군중에게 당신이 제시하는 아리송한 말씀의 뜻이 무엇이나이까? 진리를 찾는 자들에게 어찌하여 당신은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151:1.4 (1689.2) “내가 이제까지 참으며 너희를 가르쳤노라.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깨닫지 못하는 군중과 우리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자에게는 이제부터, 하늘나라의 신비를 비유로 제시하리라. 우리가 이렇게 하리니, 정말로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자는 그 가르침의 뜻을 헤아리고 따라서 구원을 얻으며, 한편 다만 우리를 옭아매려고 귀를 기울이는 자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까닭에 저희가 더욱 어리둥절하게 될까 함이라. 아이들아, 너희는 영의 법칙을 깨닫지 못하느냐. 가진 자는 받아서 풍부하게 되겠으나 없는 자는 가진 것조차 빼앗기리라, 그 법칙이 선포하느니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많은 것을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리니, 우리의 친구와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자는 찾는 것을 찾아내겠으나 한편 우리의 적과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이 사람들 가운데 여럿이 진리의 길을 따르지 않느니라. 선지자가 ‘이 민족의 마음은 둔해졌고 귀는 어두워 듣지 못하며, 진리를 헤아리고 마음 속에서 이해할까 두려워 눈을 가렸음이라’ 하였을 때, 정말로 그렇게 깨닫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묘사하였느니라.”
151:1.5 (1689.3) 사도들은 주가 무슨 의미로 말씀하시는가 완전히 알아듣지 못했다. 안드레와 토마스가 예수와 함께 더 이야기하는 동안,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뜰의 다른 구석으로 물러가서, 거기서 진지하고 길어진 토론에 들어갔다.
151:2.1 (1689.4) 베드로와 그 주위에 있던 무리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우화(寓話)이다, 각 모습에 어떤 감추어진 의미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에게 가서 설명해달라 청하려고 작정하였다. 따라서 베드로는 주께 다가가서 말했다. “우리는 이 비유의 뜻을 깨우칠 수 없고,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허락되었다고 말씀하시오니 우리에게 풀이해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이 말을 듣고, 예수는 베드로에게 말했다: “이 사람아, 나는 너희에게 주지 않고자 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나 먼저 너희가 무엇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는가 내게 이르면 어떠하겠느냐, 그 비유를 너는 어찌 풀이하느냐?”
151:2.2 (1689.5) 한 순간 침묵이 흐른 뒤에 베드로는 말했다: “주여, 우리는 그 비유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했고, 나는 이렇게 풀이하려고 마음 먹었나이다. 씨 뿌리는 자는 복음을 전하는 자요,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이나이다. 길 옆에 떨어진 씨앗은 복음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를 가리키나이다. 굳은 땅에 떨어진 씨앗을 빼앗아 간 새들은 사탄 곧 악마를 대표하고, 그는 이 무지(無知)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뿌려진 것을 훔쳐 가나이다. 돌밭에 떨어졌다가 아주 갑자기 솟아나온 씨앗은 겉치레하고 생각이 모자라는 자를 대표하니, 저희가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 기쁨으로 전하는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깊이 이해하기까지 진리가 아무런 참된 뿌리를 내리지 못한 까닭에 저희의 헌신은 시련과 박해에 부닥쳐서 잠시 있다가 없어지나이다. 시련이 닥쳐올 때 이 신자들은 넘어지고 유혹을 받을 때 저버리나이다. 가시나무 사이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세상의 걱정거리와 사람을 속이는 재산으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에 숨통을 막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버려두는 자를 가리키나이다. 자, 좋은 땅에 떨어지고 싹이 나서, 더러는 30배, 더러는 60배, 더러는 100배 열매 맺은 씨앗은 진리를 들었을 때―저희의 다른 지적(知的) 자질 때문에―다른 정도로 이해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따라서 다른 정도로 이 종교적 체험을 드러내는 자들을 대표하나이다.”
151:2.3 (1690.1) 베드로가 비유를 풀이한 것을 들은 뒤에, 예수는 다른 사도들도 제안이 없는가 물었다. 이 초청에 오직 나다니엘이 응답하여 말했다: “주여, 시몬 베드로가 그 비유를 풀이한 것에 좋은 점이 많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와 의견이 완전히 같지는 않사오이다. 이 비유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사오이다: 씨앗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대표하며, 씨 뿌리는 자는 하늘나라의 사자를 나타내오이다. 길가에 굳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전하는 말씀에 관심 없는 자와 마음이 굳어진 자와 더불어, 복음을 조금만 들은 자를 대표하오이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을 채어간 하늘의 새들은 사람의 생활 버릇, 악의 유혹, 육체의 욕구를 나타내오이다. 돌 틈에 떨어진 씨앗은 새로운 가르침을 재빨리 받고, 이 진리에 부끄럽지 않게 사는 데 생기는 어려움과 그 현실에 부닥쳤을 때 진리를 마찬가지로 재빨리 버리는 감정적인 사람들을 나타내며 저희는 영적 이해가 모자라오이다. 가시나무 사이에 떨어진 씨앗은 복음의 진리에 마음이 끌리는 자를 대표하며, 가르침을 따를 생각이 있어도, 인생의 자부심ㆍ질투ㆍ시샘, 그리고 인간으로 살면서 생기는 걱정으로 방해를 받사오이다. 좋은 땅에 떨어지고 싹이 나서 더러는 30배, 더러는 60배, 더러는 100배 열매를 맺는 씨앗은 다른 자질의 영적 빛을 소유한 남녀들이 진리를 알아듣고 그 영적 가르침에 반응하는 능력, 자연스럽고 정도가 다른 능력을 대표하오이다.”
151:2.4 (1690.2) 나다니엘이 말을 마치자, 사도들과 그 동료들은 심각한 토론에 빠졌고 진지한 논쟁에 들어갔다. 더러는 베드로의 해석이 옳다고 우기고 한편 거의 같은 수가 나다니엘의 해석을 옹호하려 했다. 그동안에 베드로와 나다니엘은 물러나 집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납득시키고 생각을 바꾸게 하려고 힘차고 굳세게 애썼다.
151:2.5 (1690.3) 주는 이 혼란이 가장 심하게 표현될 때가 지나기까지 버려두었고, 그리고 나서 손바닥을 치고서 그들을 주위에 불렀다. 다시 한 번 모두가 주위에 모이자 말했다: “내가 이 비유에 대하여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누구라도 할 말이 있느냐?” 한 순간 침묵이 흐른 뒤에, 토마스가 입을 열었다: “예 주여, 내가 몇 마디 하고자 하나이다. 한 번 당신이 바로 이것을 조심하라고 우리에게 이르신 것을 나는 기억하나이다. 우리가 설교를 위한 예를 들 때, 우리는 우화(寓話)가 아니라 참 이야기를 써야 하며,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바라는, 핵심이 되고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진리를 보여주기에 가장 적당한 이야기를 골라야 한다는 것, 그 이야기를 그렇게 이용하고 나서, 그 이야기에 들어간 모든 자질구레한 세부를 영적으로 적용하려고 애써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나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 비유를 풀이하려는 베드로와 나다니엘의 시도는 다 틀렸나이다. 이렇게 하는 저희의 능력을 나는 칭찬하지만, 자연 비유의 모든 세부(細部)가 영적으로 비슷한 의미를 갖게 만들려는 그러한 시도는 무엇이나 혼란을 일으키고 그런 비유의 참 목적을 심각하게 오해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이라고 나는 똑같이 확신하나이다. 한 시간 전에 우리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으나 이제는 우리가 따로 두 집단으로 나누어진 사실이 내가 옳음을 넉넉히 증명하나이다. 두 집단이 이 비유에 관하여 다른 의견을 가졌고, 너무나 열심히 그런 의견을 가져서, 내 생각에는 당신이 이 비유를 군중에게 발표할 때, 그리고 나중에 우리에게 논평하라고 요청했을 때 당신이 생각하고 있던 큰 진리를 우리가 충분히 깨달을 수 없게 지장을 주나이다.”
151:2.6 (1691.1) 토마스가 한 말은 모두에게 찬물 끼얹는 효과를 가졌다. 그는 예수가 이전에 여러 경우에 가르친 것을 생각나게 했다. 예수가 다시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안드레가 일어나서 말했다: “내 생각에는 토마스가 옳다고 보노라.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그가 무슨 의미를 붙이는지 그가 일러주기를 바라노라.” 예수가 토마스에게 말하라고 손짓한 뒤에 그는 말했다: “형제들아, 나는 이 토론을 길게 끌기를 바라지 않지만, 너희가 바란다면 말하리니, 내 생각에는 한 가지 큰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주가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지라. 우리가 아무리 충실하고 효과적으로 신성한 임무를 집행한다고 하여도 하늘나라 복음을 가르치는 데에는 성공의 정도가 다르리라는 것, 모든 그런 결과의 차이는 직접적으로, 봉사를 베푸는 상황에 본래부터 있는 조건 때문이요, 우리는 그러한 조건을 거의 또는 도무지 좌우할 수 없느니라.”
151:2.7 (1691.2) 토마스가 말을 마치고 나서 동료 설교자들의 대다수는 쉽게 동의하려 했다. 베드로와 나다니엘조차 그와 이야기하려고 가고 있었는데 그때 예수가 일어나서 말했다: “잘했도다 토마스야, 너는 비유의 참 의미를 헤아렸도다. 그러나 베드로와 나다니엘이 내 비유로부터 우화를 만들려고 애쓰는 위험을 아주 넉넉히 보여주었으니, 저희는 똑같이 잘했느니라. 마음 속에서 너희가 그렇게 추측하는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 것이 때때로 유익할까 하지만, 대중을 가르치는 일의 일부로서 그런 결론을 제공하려고 애쓸 때 너희는 잘못하느니라.”
151:2.8 (1691.3) 긴장이 풀렸기 때문에, 베드로와 나다니엘은 서로의 해석을 축하했다. 알패오 쌍둥이를 빼고 사도들은 각자 그날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대담하게 풀이해보려고 했다. 가룟 유다조차도 매우 그럴듯한 해석을 내놓았다. 열두 사도는 때때로 자기들끼리, 우화를 풀이하듯 주가 말씀하신 여러 비유를 이해하려고 애쓰곤 했지만, 다시는 결코 그런 추측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것은 사도와 그 동료들에게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고, 계속 대중을 가르치는 것과 관련하여 이때부터 예수가 비유를 점점 더 이용했기 때문에 더군다나 그랬다.
151:3.1 (1691.4) 사도들의 머리는 비유에 파묻혀 있었고 너무 지나쳐서 다음 날 저녁 전체가 비유를 더 토론하는 데 쓰였다. 예수는 저녁 회의를 이 말씀으로 서두(序頭)를 꺼냈다: “사랑하는 자들아, 진리의 발표가 너희 앞에 있는 사람들의 지능과 마음에 맞도록 너희는 반드시 가르침을 다르게 해야 하느니라. 다른 지능과 성질을 가진 대중 앞에 설 때, 각 등급의 듣는 사람들을 위하여 다른 말씀을 할 수 없으나, 가르침을 전하는 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느니라. 무리마다 아니 각 개인조차, 자신의 지적ㆍ영적 자질에 따라서 너희의 비유를 제 나름대로 풀이할 수 있느니라. 너희의 빛이 비치게 해야 하지만 지혜롭고 신중하게 그렇게 하여라. 아무도 등불을 켤 때, 그릇으로 덮거나 침대 밑에 두지 않고 등불을 받침 위에 두나니, 그곳에서 모두가 그 빛을 볼 수 있느니라.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나라에는 밝히지 말라고 감춘 것이 하나도 없고 궁극에 알려서는 안될 비밀이 하나도 없느니라. 궁극에는 이 모든 것이 빛에 드러나리라. 군중, 그리고 군중이 어떻게 진리를 듣는가 하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또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자신에게 눈을 돌리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일렀음을 기억하라: 가진 자는 더욱 받겠고 가지지 않은 자는 자신이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마저 빼앗기리라.”
151:3.2 (1692.1) 비유에 대한 이어진 토론, 그리고 그 해석에 관한 계속된 가르침은 현대의 말투로 다음과 같이 간추리고 표현해도 좋다:
151:3.3 (1692.2) 1. 예수는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는 데 꾸며낸 이야기나 우화(寓話)를 쓰지 말라고 조언하였다. 그는 비유, 특히 자연을 소재로 한 비유를 아낌없이 쓰기를 권고했다. 진리를 가르치는 수단으로 자연 세계와 영적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이용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강조했다. 자연에 있는 것이 “영 실체의 그림자, 휙 지나가는 비현실적 그림자”라고 자주 언급했다.
151:3.4 (1692.3) 2. 예수는 히브리 성서로부터 서너 가지 비유를 말씀했고, 이 교육 방법이 온통 새롭지는 않다는 사실에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때부터 계속 이용한 바와 같이, 비유는 거의 새로운 교육 방법이 되었다.
151:3.5 (1692.4) 3. 사도들에게 비유의 가치를 가르치면서, 예수는 다음 몇 가지에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151:3.6 (1692.5) 비유는 방대하게 다른 수준의 지성과 영에게 동시에 호소할 수 있게 한다. 비유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분별력을 요구하며 비판하는 생각을 촉진시킨다. 비유는 적대 감정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이해를 촉진시킨다.
151:3.7 (1692.6) 비유는 아는 것으로부터 알지 못하는 것을 깨우치는 경지까지 나아간다. 비유는 영적이고 초물질인 것을 소개하는 수단으로서, 물질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을 이용한다.
151:3.8 (1692.7) 비유는 치우치지 않은 도덕적 결정을 내리기 쉽게 만든다. 비유는 많은 편견을 피하고 새로운 진리를 품위 있게 머리 속에 받아들이게 하며, 개인적으로 분개하는 자기 방어를 최소로 줄이면서 이 모든 것을 이룬다.
151:3.9 (1692.8) 비유의 유사한 점에 담긴 진리를 물리치는 것은 의식하여 머리 쓰는 것이 요구되며, 이것은 사람의 정직한 판단과 정당한 결정을 직접 무시한다. 비유는 듣는 감각을 통해서, 사람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151:3.10 (1692.9) 비유 형태의 가르침을 쓰는 것은 그 선생으로 하여금 새로운, 아니 놀랍기도 한 진리를 내놓게 만들며, 한편 동시에 어떤 논쟁도, 그리고 전통과 확립된 권한과 겉으로 부딪치는 것을 대체로 피한다.
151:3.11 (1693.1) 비유는 또한 나중에 똑같은 익숙한 장면과 마주칠 때, 가르친 진리를 기억하도록 자극하는 이점을 가진다.
151:3.12 (1693.2) 이 방법으로 예수는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대중을 가르칠 때 어째서 점점 더 비유를 쓰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는가 알게 하려고 애썼다.
151:3.13 (1693.3) 저녁 수업이 끝날 무렵에, 예수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하여 처음으로 논평했다. 그 비유가 두 가지를 언급한다고 했다: 첫째로, 그 비유는 그때까지 자신의 사명에 대한 평가였고, 땅에서 여생 동안에 자기 앞에 놓인 일을 예측한 것이었다. 둘째로,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사도들, 그리고 다른 하늘나라 사자들이 대대로 봉사하면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넌지시 암시한 것이었다.
151:3.14 (1693.4) 예수는 또한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의 세심한 노력에 대하여 가능한 최선의 반박으로서 비유를 쓰는 데 의존했는데, 이들은 그가 한 일이 모두 악령과 악마 임금의 도움을 얻어서 행해졌다고 가르쳤다. 모든 자연 현상이 영적 존재들과 초자연 물력의 직접 행위로 생긴 산물이라고 그 시절의 사람들이 여겼기 때문에, 자연에 호소하는 것은 그러한 가르침에 대한 반박이었다. 이 교육 방법을 택한 것은 또한 그로 하여금 더 나은 길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중대한 진리를 선포할 수 있게 하였고, 동시에 적들이 기분 상하여 그를 고발할 구실을 찾을 기회를 줄이기 때문이었다.
151:3.15 (1693.5) 밤 동안에 그 무리를 해산하기 전에, 예수는 말했다: “이제 내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마지막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너희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알려고 너희를 시험하고자 하노라: 하늘나라는 또한 땅에 좋은 씨앗을 던지는 사람과 같으니라. 밤에는 자고 낮에 일에 몰두하는 동안 그 씨가 싹트고 자랐고, 비록 어찌 그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으나 그 식물이 열매를 맺게 되었더라. 처음에 잎이 나고 다음에 이삭이, 다음에 이삭에서 익은 알곡이 생겼더라. 그리고 나서 곡식이 익었을 때 낫을 휘둘렀고 추수가 끝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51:3.16 (1693.6) 여러 번 사도들은 머리 속에서 이 말씀을 숙고해보았지만, 주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덧붙인 이 말씀을 더 언급하지 않았다.
151:4.1 (1693.7) 이튿날 예수는 다시 배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며 말했다: “하늘나라는 밭에 좋은 씨앗을 뿌린 사람과 같으니라. 그러나 그가 자는 동안, 적이 와서 밀 사이에 잡초를 뿌리고 서둘러 사라졌고, 그래서 어린 잎이 솟아나고 나중에 열매를 맺으려 했을 때 잡초들도 또한 생겼더라. 그러자 이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당신이 좋은 씨앗을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어디서부터 이 잡초들이 생기나이까?’ 그가 종들에게 대답하되, ‘적이 이 일을 하였도다.’ 그러자 종들이 주인에게 묻되, ‘우리가 나가서 이 잡초들을 뽑아 버리기를 원하시나이까?’ 그러나 그가 대답하였더라. ‘아니라, 잡초들을 모으면서 너희가 밀까지 뿌리를 뽑을까 두려우니라. 차라리 거둘 때까지 모두 자라게 버려두라. 그때 거두는 사람들에게 이르리니, 가서 먼저 잡초들을 모으고 다발로 묶어 불태우고, 그리고 나서 밀을 거두어 내 창고에 저장하라.’”
151:4.2 (1693.8) 사람들이 몇 마디 묻고 난 뒤에 예수는 또 다른 비유를 말했다: “하늘나라는 사람이 자기 밭에 뿌린 겨자 씨앗 같으니라. 자, 겨자씨는 씨들 가운데 가장 적으나, 제대로 자라면, 모든 풀 가운데 가장 크게 되고 나무 같아서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서 쉴 수 있느니라.”
151:4.3 (1694.1) “하늘나라는 또한 누룩과 같으니, 한 여인이 누룩을 가져다가 가루로 세 그릇 속에 감추어 두었고 이 방법으로 가루 전부가 부풀려졌느니라.”
151:4.4 (1694.2) “하늘나라는 또한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으니라. 한 사람이 보물을 발견하였더니, 기뻐하면서 그 밭 살 돈을 마련하려고 전 재산을 팔러 갔더라.”
151:4.5 (1694.3) “하늘나라는 또한 참한 진주를 찾고 있는 상인과 같으니, 큰 값어치가 있는 진주를 찾고 나서, 그 특별한 진주를 살 수 있도록 가진 것을 모두 팔려고 나갔더라.”
151:4.6 (1694.4) “또, 하늘나라는 바다 속에 던진 후릿그물 같으니, 온갖 종류의 물고기를 거두었더라. 이제, 그물이 찼을 때 어부들이 바닷가에 당겨놓고, 거기에 앉아서 물고기를 추려내며, 좋은 물고기는 그릇에 모으고 나쁜 물고기는 던져 버렸더라.”
151:4.7 (1694.5) 예수는 많은 다른 비유를 군중에게 이야기하였다. 사실은, 이때 이후로, 이 수단 외에 대중을 가르치는 일이 드물었다. 비유로 공석에서 청중에게 말씀한 뒤에, 저녁 수업 동안에, 그는 사도와 전도사들에게 가르침을 더욱 자세하고 분명하게 풀이하곤 했다.
151:5.1 (1694.6) 군중이 그 주 내내 계속 불어났다. 안식일에 예수는 서둘러 산으로 갔지만, 일요일 아침이 다가왔을 때, 군중이 돌아왔다. 베드로가 설교한 뒤에 예수는 오후에 일찍 말씀했고, 말씀을 마치자 사도들에게 말했다: “내가 군중에 지쳤으니, 우리가 하루를 쉬도록 저편으로 건너가자.”
151:5.2 (1694.7) 호수를 건너가는 길에 그들은 사납고 갑작스러운 폭풍을 만났는데, 이것은 특히 해마다 이 계절에 갈릴리 바다의 특징이었다. 이 수역(水域)은 해면 밑으로 거의 210미터이고, 특히 서쪽은 높은 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호수로부터 산으로 이르는 가파른 골짜기들이 있었다. 낮 동안에 호수 위에서 수직(垂直) 기류를 타고 뜨거워진 공기가 올라옴에 따라서, 해가 진 뒤에 골짜기의 식어가는 공기가 호수 위로 급히 쏟아져 내려오는 경향이 있었다. 이 강풍은 재빨리 오고 때로는 똑같이 갑자기 사라졌다.
151:5.3 (1694.8) 바로 그러한 저녁 강풍이 이 일요일 저녁에 예수를 맞은편으로 실어 나르는 배를 낚아채었다. 새 전도사 몇 사람을 실은 다른 배 세 척이 뒤에서 쫓아오고 있었다. 서쪽 물가에는 폭풍의 증거가 도무지 없었고, 이 폭풍우는 호수의 이 지역에 국한되었는데도 심했다. 바람이 너무 세서 물결이 배 위를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사도들이 돛을 말 수 있기 전에, 센 바람이 돛을 찢어 버렸고, 2.4킬로미터가 조금 넘게 떨어진 해안으로 힘들여 저어가는 동안, 그들은 이제 노에만 전적으로 매달렸다.
151:5.4 (1694.9) 그동안에 예수는 머리 위의 작은 해 가리개 밑에서, 배의 고물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벳세다를 떠났을 때 주는 지쳐 있었고, 쉬려고 그들에게 배를 띄워 건너편으로 그를 싣고 가라고 지시하였다. 이 왕년의 어부들은 힘이 세고 노 젓기에 노련했지만, 이것은 그들이 일찍이 만난 가장 사나운 강풍 중의 하나였다. 바람과 물결이 배를 마치 장난감 배처럼 이리저리 던졌어도, 예수는 꼼짝 않고 계속 자고 있었다. 베드로는 고물 가까이 바른편 노를 저었다. 배가 비로소 물로 차자, 베드로는 노를 놓고 예수에게 달려가서 깨우려고 세차게 흔들었다. 그가 깨어나자 베드로가 말했다: “주여, 우리가 사나운 폭풍 속에 있는 줄 모르시나이까? 우리를 구하지 않으면 우리가 모두 죽으리이다.”
151:5.5 (1695.1) 빗속으로 나왔을 때 예수는 먼저 베드로를 보았다. 다음에 애써서 노 젓는 사람들을 어둠 속으로 들여다보면서, 흥분하여 아직 자기 노로 돌아가지 않은 시몬 베드로를 얼른 돌아보고 예수는 말했다: “어찌하여 모두가 그리 두려움에 가득 차 있느냐? 너희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조용히. 조용히 하라.”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 꾸지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베드로에게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도록 평안을 찾으라 명하자마자, 그때 휘저어진 공기가 균형을 찾고 나서 가라앉아 크게 고요해졌다. 성난 물결은 거의 즉시 가라앉았다. 한편 검은 구름은 짧은 소나기에 힘을 소모했으므로 사라지고 하늘의 별들이 머리 위로 빛났다.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한, 이 모두가 순전히 우연히 일어났다. 그러나 사도들, 더군다나 베드로는 결코 이 사건을 자연의 기적으로 여기지 않은 적이 없다. 모든 자연이 영 세력과 초자연 존재들이 직접 지배하는 현상이라고 굳게 믿었으므로, 그 시절의 사람들이 특히 자연의 기적을 믿기가 쉬웠다.
151:5.6 (1695.2) 예수는 그들의 불안한 정신을 향하여 말했고, 두려움에 질린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자연에게 그의 말에 복종하라 명하지 않았다고 열두 사도에게 분명히 설명했지만, 아무 쓸모가 없었다. 주를 따르는 자들은 언제나 그렇게 우연히 일어난 모든 일에 자기 해석을 붙이기를 고집했다. 이날부터 계속, 그들은 고집하여 주가 자연력에 대하여 절대 권력을 가졌다고 생각하였다. 베드로는 어떻게 “바람과 물결조차 그에게 복종하는가” 이야기를 늘어놓는 데 결코 지치지 않았다.
151:5.7 (1695.3) 예수와 동료들이 호숫가에 닿았을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밤이었기 때문에, 모두 배에서 쉬었다. 이튿날 아침 해가 뜨고 조금 지났을 때까지 물가로 가지 않았다. 거의 40명이 함께 모였을 때 예수는 말했다: “아버지 나라의 문제들을 우리가 숙고하는 동안, 저쪽 산으로 올라가서, 며칠 동안 머무르자.”
151:6.1 (1695.4) 호수의 가까운 동쪽 물가의 대부분이 건너의 산지까지 밋밋하게 비탈졌어도, 이 특별한 장소에는 가파른 산허리가 있었고, 호숫가의 어떤 곳은 호수로 깎아질러 내려갔다. 근처의 산허리를 가리키면서 예수는 말했다: “아침을 먹으러 이 산허리로 올라가서 어느 아늑한 곳에서 쉬고 이야기하자.”
151:6.2 (1695.5) 이 산허리 전부가 동굴로 덮였고, 이것들은 바위에서 파여진 곳이었다. 이 많은 구멍이 고대의 무덤이었다. 산허리로 중간쯤 올라가서 비교적 평평한 작은 장소에 작은 마을 케레사의 공동 묘지가 있었다. 예수와 동료들이 이 무덤 터 가까이 지나가는 동안에, 이 산허리의 동굴에서 살고 있던 어느 미치광이가 그들에게 달려왔다. 머리가 돈 이 사람은 이 근방에서 잘 알려져 있었고, 한때 쇠사슬과 쇠고랑에 묶여서 어느 석굴에 갇혀 있었다. 그는 쇠고랑을 부순 지 오래 되었고 이제 무덤과 버려진 묘들 사이로 멋대로 돌아다녔다.
151:6.3 (1696.1) 이 사람은 이름이 아모스였는데, 정기적으로 미치는 증세가 있었다. 옷을 더러 찾아 입고 동료들 가운데서 제법 처신을 잘하는 기간이 어지간히 있었다. 생각이 멀쩡했던 이 여러 기간 중 하나에 그는 벳세다로 갔고 거기서 예수와 사도들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때 하늘나라 복음을 반쯤 믿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곧 병세가 심한 국면이 나타났고 그는 무덤으로 달아났다. 거기서 신음하고 크게 울부짖었고, 그래서 어쩌다 만난 사람들을 다 두려움에 질리게 만들었다.
151:6.4 (1696.2) 예수를 알아보자 아모스는 털썩 주저앉아서 외쳤다: “나는 당신, 예수를 아오나 나는 여러 귀신이 들렸고 당신이 나를 괴롭히지 말기를 부탁하나이다.” 정기적으로 겪는 정신적 고통은 그런 때에 악하거나 더러운 귀신들이 그에게 들어가서 머리와 몸을 지배하는 사실 때문이라고 이 사람은 참으로 믿었다. 그의 병은 대체로 감정의 병이었다―머리는 크게 병들지 않았다.
151:6.5 (1696.3) 동물처럼 그의 발 밑에 웅크리고 있는 그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예수는 손을 뻗어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말했다: “아모스야, 너는 악귀가 들리지 아니하였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좋은 소식을 이미 들었느니라. 내가 너에게 명하노니, 이 발작에서 깨어나라.” 예수가 이렇게 말씀하심을 들었을 때, 아모스의 지능에 큰 변화가 일어나서, 그는 금방 제 정신이 들었고 정상으로 감정을 자제하였다. 이때가 되자 근처의 마을로부터 어지간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위의 산지로부터 온 돼지 치는 자들 때문에 수가 불어난 이 사람들은 그 미치광이가 예수와 그 추종자들과 함께 앉아서, 멀쩡한 정신으로 자유롭게 함께 이야기하고 있음을 보고 깜짝 놀랐다.
151:6.6 (1696.4) 미치광이를 길들였다는 소식을 퍼뜨리려고 그 돼지 치는 사람들이 마을로 부리나케 달려가자, 서른 마리쯤 되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작은 돼지 떼에 개들이 돌진하여, 벼랑을 넘어 바다로 대부분의 돼지들을 몰았다. 이 우연한 일이, 예수가 계신 것과 그 미치광이가 기적으로 고침을 받았다고 생각된 것과 관련하여, 아모스로부터 한 군대의 악귀들을 몰아냄으로 예수가 그의 병을 고쳤다, 그리고 이 악귀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서 돼지들이 당장 밑에 있는 바다로 곤두박질쳐서 죽게 만들었다는 전설을 낳았다. 그날이 저물기 전에, 돼지 치는 사람들이 이 사건을 널리 퍼뜨렸고 그 마을 전체가 이를 믿었다. 아모스는 아주 확실히 이 이야기를 믿었다. 불안한 정신이 가라앉은 뒤에 곧 그는 언덕의 벼랑을 넘어서 돼지들이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히고 병들게 한 바로 그 악령들을 돼지들이 데리고 갔다고 언제나 믿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병이 영구히 나은 것과 크게 상관이 있었다. (토마스를 제쳐놓고) 예수의 사도들 모두가, 그 돼지 사건이 아모스의 병이 고쳐진 것과 직접 관련되었다고 믿은 것이 똑같이 참말이다.
151:6.7 (1696.5) 예수는 찾고 있던 휴식을 얻지 못했다. 그날의 대부분, 아모스가 병 고침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온 사람들, 악귀들이 그 미치광이한테서 나와서 돼지 떼에게 들어갔다는 이야기에 이끌린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래서 겨우 하루 밤 쉬고 난 뒤에, 화요일 아침 일찍, 예수와 친구들은 돼지를 기르는 이 이방인 대표단 때문에 잠이 깨었다. 그들은 예수가 그들 가운데서 떠나라고 요구하러 왔다. 그들의 대변인이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말했다: “갈릴리의 어부들이여, 우리한테서 떠나시고 당신의 선지자를 모시고 가소서. 우리는 그가 거룩한 분인 줄 알지만, 우리 시골의 신들은 그를 모르고 우리는 돼지를 많이 잃을 위험에 처해 있나이다. 당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닥쳤고 그래서 당신이 여기를 떠나시기를 비나이다.” 예수가 이들의 말을 듣고 나서 안드레에게 말했다. “우리 장소로 돌아가자.”
151:6.8 (1697.1) 막 떠나려 하는데, 아모스가 예수에게 그들과 함께 돌아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지만 주는 찬성하려 하지 않았다. 예수는 아모스에게 말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잊지 말라. 친족에게 돌아가서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얼마나 큰 일을 하셨는가 보이라.” 아모스는 예수가 그의 불안한 혼으로부터 한 군대의 악귀들을 몰아냈다, 이 악령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서 돼지들을 빨리 죽게 몰았다고 말을 퍼뜨리고 다녔다. 데카폴리스의 모든 도시로 가기까지 예수가 그를 위하여 얼마나 큰 일을 했는가 외치면서 그는 멈추지 않았다.
152:0.1 (1698.1) 케레사의 미치광이 아모스가 고침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벳세다와 가버나움에 다다랐다. 그래서 그 화요일 아침 나절에 예수의 배가 상륙했을 때 큰 무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군중 속에는 예루살렘 산헤드린으로부터 온 새 감시인들이 있었고, 그들은 주를 체포하고 유죄 판결을 내릴 구실을 찾으려고 가버나움으로 왔다. 그를 맞이하려고 모인 사람들과 예수가 말씀하는 동안, 회당장들 중에서 한 사람 야이루스가 군중을 헤치고 다가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면서 그의 손을 잡고, 함께 예수가 서둘러 가기를 청하며 말했다: “주여, 내 어린 딸, 외동딸이 죽을 지경이 되어 집에 누워 있나이다. 비옵나니 오셔서 딸을 고쳐주옵소서.” 이 아버지의 요청을 듣자 예수는 말했다: “너와 함께 가겠노라.”
152:0.2 (1698.2) 예수가 야이루스와 함께 가자, 아버지의 요청을 들은 큰 무리가 무슨 일이 일어날까 보려고 계속 따라왔다. 회당장의 집에 이르기 얼마 전에, 좁은 길을 통해서 서둘러 가다가, 그리고 군중이 밀치자 예수는 갑자기 멈추어 외쳤다: “누군가가 나를 만졌도다.” 그에게 가까이 있던 자들이 예수를 만지지 않았다고 부인했을 때, 베드로가 입을 열었다: “주여, 이 군중이 당신을 밀고 우리를 깔아뭉개려고 위협하는 것을 보실 수 있사온데, 그래도 당신은 ‘누군가가 나를 만졌도다’ 말씀하시나이다. 어인 말씀이오이까?”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누가 나를 만졌는가 물었으니, 생명의 에너지가 내게서 나갔음을 깨달았음이라.” 예수가 주위를 둘러보자, 그의 눈은 가까이 있는 어느 여인에게 미쳤다. 그 여인은 앞으로 다가오면서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말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몹시 괴로운 출혈로 고생하고 있었나이다. 여러 의사에게서 많은 것을 겪었고, 내 재산을 다 써버렸지만 아무도 나를 고칠 수 없었나이다. 그러자 당신의 소문을 들었고 그 옷자락만이라도 만질 수 있다면 확실히 내가 온전히 되리라 생각이 들었나이다. 그래서 당신 가까이 설 때까지 군중이 움직이는 데 따라서 군중과 함께 밀어 제치며 나아왔나이다. 주여, 당신의 옷자락을 만졌더니, 온전하게 되었고 내 병이 고쳐졌음을 아나이다.”
152:0.3 (1698.3) 이 말을 들었을 때, 예수는 여자의 손을 붙들어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온전하게 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그 여자를 낫게 만든 것은 그 믿음이요 만진 것이 아니었다. 이 경우는 예수가 땅에서 사신 생애에 따른 치유, 겉보기에 기적 같으나 어떤 의미에서도 예수가 의식하여 뜻하지 않고서 일어난 많은 치유의 좋은 본보기이다. 시간이 경과하자 이 여자의 병이 정말로 치유된 것이 분명했다. 그 여자의 믿음은 주의 몸에 거하는 창조적인 힘을 직접 붙잡은 그러한 종류였다. 그 여자가 가진 믿음으로는 오직 주의 몸에 가까이 가는 것이 필요했다. 그의 옷을 만지는 것은 도무지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그 여자의 믿음에서 미신 같은 부분이었다. 그 여자의 머리 속에 남아 있거나 이 병 고침을 구경한 자들의 머리 속에 지속했을지 모르는 두 가지 잘못을 시정하려고 예수는 이 여인, 케자리아 빌립비의 베로니카를 앞으로 불러들였다. 두려워하며 치유를 훔치려 한 시도를 허락했다거나 또는 옷 만진 것과 병의 치유를 관련짓는 미신(迷信)이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베로니카가 떠나기를 예수는 바라지 않았다. 병을 낫게 한 것은 그 여자의 순수하고 살아 있는 믿음이었다는 것을 모두가 알기를 원했다.
152:1.1 (1699.1) 물론, 야이루스는 집에 도착하는 데 이렇게 늦어져서 무척 초조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종종걸음으로 줄곧 서둘러 갔다. 회당장의 뜰로 미처 들어가기도 전에, 종들 가운데 하나가 나와서 말했다: “주를 번거롭게 하지 마소서,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 종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듯하였으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면서 예수가 돌이켜 슬픔에 휩쓸린 아버지에게 “두려워 말라, 믿기만 하라” 하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집에 들어갔을 때, 예수는 피리 부는 사람들이 애도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미 거기에 있음을 발견했다. 이들은 보기 딱하게 떠들썩했고 친척들은 이미 눈물을 흘리고 소리쳐 울고 있었다. 애도하는 사람들을 다 방 바깥으로 내보내고 나서 예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세 사도와 함께 들어갔다. 애도하는 사람들에게 그 처녀가 죽지 않았다고 일러주었지만 그들은 코웃음쳤다. 예수는 이제 어머니에게 돌이켜 말했다: “네 딸이 죽지 않았도다. 잠자고 있을 뿐이라.” 집이 조용해지자, 예수는 아이가 누워 있는 곳으로 가서 아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 “딸아, 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깨어서 일어나라!”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그 여자 아이는 즉시 일어나서 방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멍한 상태에서 아이가 정신이 든 뒤에, 아이가 오랫동안 먹지 않고 지냈으므로 예수는 아이에게 무언가 먹을 것을 주라고 당장 지시하였다.
152:1.2 (1699.2) 가버나움에서 그를 적대하여 상당한 소동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그 가족을 불러모으고 소녀가 오랫동안 열병을 앓고 나서 혼수 상태에 있었다, 그는 아이를 깨웠을 뿐이다, 죽음에서 아이를 살려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이 모두를 사도들에게 설명했지만 쓸모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예수가 여자아이를 죽음에서 살렸다고 믿었다. 기적으로 보이는 이 일을 설명하려고 예수가 말한 것은 추종자들에게 조금도 효과가 없었다. 그들은 머리 속에 기적 생각만 하고 있었고, 또 하나의 이적을 예수의 공으로 돌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모두에게 특별히 타이른 뒤에, 예수와 사도들은 벳세다로 돌아왔다.
152:1.3 (1699.3) 야이루스의 집에서 나올 때, 귀머거리 소년이 이끄는 두 소경이 그를 따라와서 고쳐달라고 소리쳤다. 이 무렵에 병 고치는 자로서 예수의 이름은 절정에 이르렀다. 어디로 가든지 아픈 자와 병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는 이제 무척 고달파 보였고 그가 실제로 쓰러지기까지 가르치고 병 고치는 일을 계속하지 않을까 친구들 모두가 걱정스러웠다.
152:1.4 (1699.4) 서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의 사도들은 이 하나님인 사람의 성품과 속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후일의 어느 세대도 땅에서 나사렛 예수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평가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이나 네바돈의 어느 다른 세계에서도 그러한 특별한 상황이 다시 일어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과학이나 종교가 이 놀라운 사건들을 검토할 기회가 결코 생길 수 없다. 이 우주 전체의 어느 세계에서도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동시에 시간과 대부분의 다른 물질적 한계를 초월하는 영적 자질을 갖추고 창조 에너지의 모든 속성을 몸에 지니는 한 존재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152:1.5 (1700.1) 예수가 땅에서 계시기 이전이나 이후에, 필사 인간들의 힘찬 살아 있는 믿음에 따르는 결과를 그렇게 직접, 그림을 보듯 얻는 것이 결코 가능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을 되풀이하려면, 창조자 미가엘이 바로 계신 앞까지 우리가 가서, 그 시절에 신분―사람의 아들―그대로 그를 발견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가 자리에 계시지 않은 것은 그러한 물질적 명시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지만, 너희는 그의 영적 능력의 가능한 전시에 어떤 종류의 제한이라도 부과하기를 삼가야 한다. 한 물질 존재로서 계시지 않더라도, 주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한 영적 영향으로서 계신다. 이 세상에서 떠나심으로, 예수는 모든 인류의 정신에 깃드는 아버지의 영과 나란히 그의 영이 살 수 있게 만들었다.
152:2.1 (1700.2) 예수는 계속하여 낮에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사도와 전도사들을 교육했다.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기 전에, 그는 추종자들이 모두 며칠 동안 집이나 친구들에게 가도록 금요일에 한 주 동안 휴가를 선언했다. 그러나 제자들의 과반수가 그를 떠나려 하지 않았고 군중은 나날이 불어나고 있었다. 너무나 불어나서 다윗 세베대는 새 야영지를 세우고 싶었지만, 예수는 찬성하지 않았다. 안식일 동안에 거의 쉬지 못해서, 3월 27일 일요일 아침에 그는 사람들을 떠나려고 애썼다. 전도사들이 더러 대중에게 이야기하도록 두고, 한편 예수와 열두 사도는 들키지 않고 호수의 맞은 편 물가로 달아나려고 계획했다. 거기서 그들은 벳세다 줄리아스 남쪽의 아름다운 공원에서 많이 필요했던 휴식을 가지려고 생각하였다. 이 지역은 가버나움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휴양지였다. 그들 모두가 동쪽 해안에 있는 이 여러 공원에 익숙하였다.
152:2.2 (1700.3)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버려두려 하지 않았다. 예수의 배가 가는 방향을 보고서 그들은 닥치는 대로 배를 모조리 고용하여 추적하기 시작했다. 배를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은 호수의 위쪽 끝을 둘러서, 걸어서 길을 재촉하였다.
152:2.3 (1700.4) 오후 느지막하게 되자,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어느 공원에 계신 주를 찾아냈다. 그는 잠깐 말씀하였고 베드로가 뒤를 이었다. 이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먹을 것을 가져왔다. 저녁을 먹은 뒤에 그들은 작은 무리를 지어 여기저기 모였고, 예수의 사도와 제자들이 그들을 가르쳤다.
152:2.4 (1700.5) 월요일 오후에 군중은 3천 명이 넘게 늘어났다. 아직도―저녁이 훨씬 지나서―온갖 종류의 병자들을 데리고 사람들이 계속하여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관심 있는 사람 수백 명이 유월절 예식에 가는 길에 가버나움에 멈추어서 예수를 보고 말씀을 들으려고 계획을 세웠고, 그들은 단지 단념하려 하지 않았다. 수요일 한낮이 되기까지, 어른과 아이가 거의 5천 명이 벳세다 줄리아스 남쪽, 여기 이 공원에 모였다. 이 지역에서 비 오는 철의 끝이 가까웠으니까, 날씨는 좋았다.
152:2.5 (1700.6) 예수와 열두 사도를 위하여 빌립은 사흘어치의 먹을 것을 마련했는데, 이것을 소년 마가가 보관하고 있었다. 마가는 모든 자질구레한 일을 맡은 소년이었다. 이 셋째 날 오후가 되자, 이 군중의 거의 절반에게는 가져온 음식이 거의 없어졌다. 다윗 세베대는 그 군중을 먹이고 재울 만한 텐트 친 도시가 여기에 없었다. 빌립은 그런 군중을 위해서 식량을 준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배가 고프기는 해도 사람들은 떠나려 하지 않았다. 헤롯을 비롯하여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충돌을 피하고 싶어서, 임금으로 즉위할 적당한 장소로 쓰려고 모든 적의 관할 바깥에 이 조용한 장소를 예수가 선택했다고 사람들이 조용히 속삭였다. 사람들의 흥분은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아무도 예수에게 한 마디 말씀을 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물론, 그는 되어 가는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 열두 사도조차, 특히 새로 된 전도사들이, 아직도 그런 개념에 물들어 있었다. 예수를 임금으로 선포하려는 이 시도에 찬성한 사도들은 베드로, 요한, 열심당원 시몬, 가룟 유다였다. 그 계획에 반대한 사람들은 안드레ㆍ야고보ㆍ나다니엘ㆍ토마스였다. 마태와 빌립과 알패오 쌍둥이는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예수를 임금으로 만들려는 이 계획의 주모자는 새로 된 전도사 중의 한 사람, 요압이었다.
152:2.6 (1701.1) 이것이 수요일 오후 5시쯤에 예수가 야고보 알패오에게 안드레와 빌립을 부르라고 부탁했을 때 무대의 배경이었다. 예수는 말했다: “우리가 군중을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저희가 이제 사흘 동안 우리와 함께 있었고, 저희 가운데 많은 사람이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없느니라.” 빌립과 안드레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서 빌립이 대답했다: “주여, 당신은 사람들을 보내서, 저희가 근처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사게 해야 하나이다.” 안드레는 임금을 만들려는 계획이 실현될까 두려워서, 재빨리 빌립과 합세하여 말했다: “예 주여, 군중을 해산하여, 당신이 얼마큼 쉬는 동안 저희가 떠나서 먹을 것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나이다.” 이때가 되어서 열둘 가운데 다른 사람들도 의논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나서 예수가 말했다: “그러나 나는 저희를 배고픈 채로 보내고 싶지 않도다. 너희는 저희를 먹일 수 없느냐?” 이 말씀은 빌립에게 지나쳤고 그는 이내 입을 열었다: “주여, 이 촌구석에 어디서 이 군중을 위하여 우리가 빵을 살 수 있나이까? 2백 데나리온어치가 점심 먹기에도 넉넉하지 않으리이다.”
152:2.7 (1701.2) 사도들이 한 마디씩 할 기회를 가지기 전에 예수는 안드레와 빌립을 향하여 말했다: “이 사람들을 보내고 싶지 않노라. 저희는 목자 없는 양 같이 여기 있느니라. 나는 저희를 먹이고 싶도다. 무슨 먹을 것이 우리에게 있느냐?” 빌립이 마태와 유다와 함께 이야기하는 동안, 안드레는 저장한 식량이 얼마큼 남았는가 확인하려고 마가를 찾았다. 그는 예수에게 돌아와서 말했다: “이 소년에게 겨우 보리 빵 다섯 덩이와 말린 물고기 두 마리가 있나이다”―베드로는 재빨리 덧붙였다, “우리는 아직 오늘 저녁도 먹어야 하나이다.”
152:2.8 (1701.3) 한 순간 예수는 말없이 서 있었다. 그의 눈에는 아득히 멀리 바라보는 눈빛이 있었다. 사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수는 갑자기 안드레를 향하여 말했다. “빵과 물고기를 가져오라.” 안드레가 광주리를 예수에게 가져오자 주는 말했다: “네가 전도사들을 모두 여기 우리한테로 데려오는 동안에 사람들에게 1백 명씩 무리를 지어 풀 위에 앉고 각 무리마다 한 대표를 세우라 지시하여라.”
152:2.9 (1701.4) 빵 덩이들을 손에 쥐고 감사(感謝) 기도를 드린 뒤에, 예수는 빵을 떼어서 사도들에게 주었다. 사도들은 빵을 동료들에게 넘겨주었고 이들은 다시 빵을 군중에게 날랐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예수는 물고기를 떼어서 나눠주었다. 이 군중은 먹고 배가 불렀다. 그들이 먹기를 마치자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아무것도 없어지지 않도록 남은 조각들을 모으라.” 빵 조각 거두기를 마치고 나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하였다. 이 특별 잔치에 먹은 사람들은 어른과 아이가 약 5천 명이었다.
152:2.10 (1702.1) 이것은 의식하여 미리 계획한 결과로서 예수가 행한 처음이자 유일한 자연의 기적이다. 제자들이 기적 아닌 많은 것을 기적이라 부르고 싶어 한 것이 참말이지만, 이것은 진정한 초자연적 보살핌이었다. 이 경우에 시간 요소와 눈에 보이는 생명의 통로를 제거한 것을 빼고, 늘 하시다시피 미가엘이 식량의 요소를 늘였다고 우리는 가르침을 받았다.
152:3.1 (1702.2) 5천 명을 초자연 에너지로 먹인 것은 인간의 동정심과 창조 능력을 더한 결과가 바로 일어난 또 하나의 경우였다. 군중을 배가 부르도록 먹였기 때문에, 또 이 엄청난 이적으로 예수의 명성이 그때 거기서 높아졌으니까, 주를 붙들어 임금이라 선포하는 계획은 더 개인의 지휘가 필요 없었다. 이 생각은 군중을 통해서 유행병처럼 퍼지는 듯했다. 육체의 필요를 이렇게 갑자기 눈부시게 채워준 데 대하여 군중의 반응은 깊고 압도적이었다. 다윗의 아들, 메시아가 온다면, 땅이 다시금 젖과 꿀로 흐르게 만들리라, 생각컨대 마치 만나가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조상들에게 떨어졌던 것 같이 그들에게 생명의 빵이 수여되리라고 오랫동안 유대인들은 가르침을 받아 왔다. 이렇게 기대했던 것이 모두, 바로 눈앞에서 이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배고프고 영양이 모자라는 이 군중이 이 놀라운 먹을 것으로 배를 채우고 나서, 오직 한 가지 만장 일치의 반응이 있었다: “여기에 우리 임금이 있구나.” 기적을 행하는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오셨다. 생각이 단순한 이 사람들이 보기에, 사람을 먹이는 권능에는 다스리는 권리가 따랐다. 그러면 군중이 실컷 먹기를 마치고 나서, 한 사람처럼 일어나서 “그를 임금으로 세우라!” 외친 것은 당연하다.
152:3.2 (1702.3) 이 우렁찬 외침은 베드로, 그리고 사도들 가운데 예수가 다스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보는 희망을 아직도 품은 자들의 열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거짓된 희망은 오래 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군중의 이 우렁찬 외침이 근처의 바위에서 메아리치는 소리가 그치기 무섭게, 예수는 거대한 바위에 올라서서 바른 손을 들어올리고 주의를 모으고 말했다: “아이들아, 좋은 뜻을 가졌으나 너희는 근시안이요 물질에 머리를 쓰는도다.” 잠시 멈추었다가 이 튼튼한 갈릴리 사람은 황혼이 황홀하게 타오르는 그 동쪽 빛을 받으며 거기에 당당하게 몸을 가다듬었다. 숨을 죽이고 듣는 이 군중에게 계속 말씀하시는 동안 그는 어디를 보아도 임금으로 보였다: “너희의 혼이 위대한 진리로 빛을 받아서가 아니라, 배가 빵으로 채워졌다고 하여 너희가 나를 임금으로 세우고 싶어 하는도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너희에게 일렀더냐? 우리가 선포하는 이 하늘나라는 영적 형제의 모임이요, 아무도 물질로 된 보좌에 앉아서 이를 다스리지 않느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는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이 영적 형제 모임을 다스리는, 온통 지혜롭고 전능한 통치자이라. 육체를 입은 아들을 너희가 임금으로 만들고 싶어 하기까지, 너희에게 영들의 아버지를 드러내는 일을 내가 아주 그르쳤느냐! 이제 모두 자기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임금을 가져야 한다면, 빛의 아버지로 하여금 너희 각자의 마음 속에서 만물의 영 통치자로서 보좌에 앉으시게 하여라.”
152:3.3 (1702.4) 예수의 이 말씀은 군중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실망을 주어 보냈다. 그를 믿었던 많은 사람이 돌아섰고 그날부터 그를 더 따르지 않았다. 사도들은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은 먹다 남은 부스러기 열두 광주리 둘레에 말없이 모여 섰다. 오로지 잡일하는 아이, 소년 마가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임금 되기를 마다하였나이다.” 혼자서 산에 있으려고 훌쩍 떠나기 전에 예수는 안드레를 향하여 말했다: “너희 형제들을 세베대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저희와 함께, 특히 네 아우 시몬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
152:4.1 (1703.1) 주를 동반하지 않고―자기들끼리 가라고 보냈으므로―사도들은 배에 타고 말없이 호수의 서쪽 물가에 벳세다를 향하여 배를 젓기 시작했다. 열둘 가운데 아무도 시몬 베드로처럼 움츠러들고 풀이 죽지 않았다. 거의 한 마디 말도 없었다. 모두가 산에서 혼자 계신 주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을 버렸는가? 전에는 그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그가 함께 가기를 마다하신 적이 없었다. 이 모두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152:4.2 (1703.2) 어둠이 그들에게 다가왔고, 센 역풍(逆風)이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가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힘들게 몇 시간 동안 노를 저은 뒤에, 베드로는 지쳤고 피곤해서 깊은 잠에 빠졌다. 안드레와 야고보는 그를 배의 고물에, 방석 있는 자리에 쉬게 두었다. 다른 사도들이 바람과 물결과 싸우는 동안, 베드로는 꿈을 꾸었다. 바다에서 예수가 걸어서 그들에게 오는 환상을 보았다. 배 옆으로 주가 계속 걸어가는 듯했을 때 베드로는 소리를 질렀다, “우리를 구하소서, 주여 우리를 구하소서.” 배의 뒤쪽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얼마큼 들었다. 베드로의 머리 속에서, 밤에 나타난 이 유령이 계속되는 동안, 꿈 속에서 그는 예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기운을 내라, 내로라, 두려워 말라.” 이것은 베드로의 불안한 혼에 길르앗의 발삼과[1] [1799] 같았다. 이것은 그의 불안한 정신을 어루만져 주었고 그래서 (꿈 속에서) 주께 외쳤다: “주여, 정말로 당신이면 와서 당신과 함께 물 위에서 걸으라 내게 명하소서.” 베드로가 물 위에서 걷기 시작했을 때, 철썩거리는 물결이 그를 놀라게 하였고, 막 가라앉으려 하자 그는 소리를 질렀다, “주여, 나를 구하소서!” 열둘 가운데 여럿이 그가 이렇게 외침을 들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예수가 구하러 와서 손을 뻗어서 그를 붙잡아 들어올리며, “아, 믿음이 적은 자여, 어찌하여 네가 의심하였느냐?”하고 말하는 꿈을 꾸었다.
152:4.3 (1703.3) 꿈의 끝 부분과 관련하여 베드로는 자던 자리에서 일어나, 배 바깥으로, 물 속으로 실제로 발을 내디디었다.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이 손을 뻗어서 바다에서 그를 끌어내자 그는 꿈에서 깨어났다.
152:4.4 (1703.4) 베드로에게 이 체험은 언제나 현실이었다. 예수가 그날 밤에 그들에게 왔다고 진지하게 믿었다. 그는 요한 마가를 겨우 어느 정도 확신시켰고, 이것이 어째서 마가가 자기 기록에서 그 이야기의 한 부분을 빼놓았는가 설명한다. 의사인 누가는 이 문제를 샅샅이 조사하고 그 사건이 베드로의 환상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그의 기록을 준비하면서 이 이야기에 자리를 할애하려 하지 않았다.
152:5.1 (1703.5) 목요일 아침, 날이 새기 전에, 그들은 세베대의 집 가까이 앞바다에서 닻을 내리고 한낮 무렵까지 잠을 청했다. 안드레가 먼저 일어났고, 바닷가에 걸으러 갔다가, 잡일하는 소년과 더불어 물가에서 돌 위에 앉아 계신 예수를 찾아냈다. 군중 가운데 여러 사람과 젊은 전도사들이 밤새, 그리고 이튿날 상당한 시간을 동쪽 산 근처에서 예수를 찾는 데 썼는데도, 어쨋든 한밤이 지난 뒤 얼마 안 되어, 예수와 소년 마가는 호수를 돌아서, 그리고 강을 건너서, 벳세다로 돌아가려고 걷기 시작했다.
152:5.2 (1704.1) 기적으로 먹을 것을 얻어먹고, 배가 차고 마음이 텅 비어 있을 때 그를 임금으로 세우려 했던 5천 명 가운데 겨우 약 5백 명이 끈덕지게 그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벳세다로 돌아왔다는 말을 이들이 받기 전에, 예수는 열두 사도, 그리고 여자들까지 포함해서, 동료들을 모으라고 안드레에게 부탁하며 말했다: “나는 저희와 말하기를 바라노라.” 모두가 준비되었을 때, 예수는 말했다:
152:5.3 (1704.2) “얼마나 오래 내가 너희를 참으랴? 너희는 모두 영적 깨우침이 더디고 살아 있는 믿음이 모자라느냐? 이 여러 달 동안 줄곧 하늘나라의 진리를 가르쳤더니, 그래도 너희는 영적 배려보다 물질적 동기에 지배되고 있느니라. ‘두려워 말라, 가만히 서서 주의 구원을 보라’ 말하며 모세가 믿음 없는 이스라엘 자손을 훈계하는 것을 너희는 성서에서 읽지도 못하였느냐? 그 찬미자가 말하되, ‘너희의 주를 신뢰하라.’ ‘참으라, 주를 기다리고 용기를 내라. 그가 너희의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리라.’ ‘너희의 짐을 주께 던지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 힘을 북돋아주리라. 항상 그를 신뢰하고 너희의 마음을 그에게 토하라, 하나님이 너의 안식처임이라.’ ‘최고자의 비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살리라.’ ‘인간 임금을 신임하는 것보다 주를 신뢰하는 것이 나으니라.’
152:5.4 (1704.3) “그리고 기적을 행하고 물질적 이적을 연출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영적 나라에 들어가라고 설득하지 못할 것을 이제 너희가 모두 깨닫느냐? 우리는 군중을 먹였으나, 이들로 하여금 생명의 빵을 갈급히 찾거나 영적으로 올바른 물을 목마르게 찾도록 이끌지 아니하였도다. 배를 채웠을 때, 저희는 하늘나라로 들어가기를 찾지 아니하였어도 다만 수고할 필요 없이 계속 빵을 먹을까 하여, 오히려 이 세상 임금들의 방식을 좇아서 사람의 아들을 임금으로 선포하려 애썼느니라. 이 모든 것에 너희 가운데 여럿이 얼마큼 참여하였는데, 그것은 하늘의 아버지를 드러내거나 땅에서 그의 나라를 진전시키는 데 아무 효과가 없느니라. 또한 집권자들에게 찬물 끼얹을 듯한 일을 하지 않고도 우리는 나라의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적들이 충분히 있지 아니하냐? 내가 가르친 복음을 너희가 충분히 믿게 하려는 목적으로, 아버지가 눈에 기름을 발라 너희가 보고 귀를 열어 너희가 듣을 수 있게 해주시기를 내가 기도하노라.”
152:5.5 (1704.4) 그리고 나서, 예수는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기 전에 사도들과 함께 며칠 동안 쉬려고 물러나기 바란다고 발표했다. 어떤 제자나 군중도 따라오지 말라고 명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이삼일 쉬고 잠자려고 게네사렛 지역으로 배를 타고 갔다. 예수는 땅에서 일생의 큰 위기를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고, 따라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교통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
152:5.6 (1704.5) 5천 명을 먹였고 예수를 임금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소식은 널리 사람들의 호기심을 일으켰고, 온 갈릴리와 유대에 두루, 종교 지도자와 집권자들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이 큰 기적은 물질에 머리를 쓰고 건성으로 믿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늘나라 복음을 진전시키는 데 아무 효과가 없었으나 예수의 직계 일행, 즉 사도와 가까운 제자들이 가졌던 성향, 기적을 추구하고 임금을 몹시 바라는 성향을 막바지로 이끄는 효과를 낳았다. 이 볼 만한 사건은 가르치고 훈련하고 치유하는 초기 시대의 막을 내렸고, 이로써 하늘나라의 새 복음―신의 아들, 영적 해방, 영원한 구원―의 상급 단계, 더 영적인 단계를 선포하는 이 마지막 해를 개시하기 위하여 길을 예비하였다.
152:6.1 (1705.1) 게네사렛 지역에 어느 부유한 신자의 집에서 쉬면서, 예수는 열두 사도와 함께 오후마다 비공식 회의를 가졌다. 하늘나라의 대사들은 심각하고 제 정신이 들고 꾸지람을 받은, 꿈에서 깨어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벌어진 뒤에도, 또 나중의 사건들이 드러낸 바와 같이, 이 열두 사람은 유대인 메시아가 오신다는 개념, 날 때부터 오래 간직했던 개념을 아직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 몇 주 동안의 사건들이 너무나 빠르게 움직여서, 놀란 이 어부들이 사건들의 의미를 충분히 깨달을 수 없었다. 남자와 여자들이 사회적 행위, 철학적 태도, 종교적 확신의 기초와 근본이 되는 개념들을 철저히 널리 바꾸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152:6.2 (1705.2) 예수와 열두 사도가 게네사렛에서 쉬는 동안, 군중은 흩어졌다. 더러는 집으로 더러는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계속 갔다. 열심히 드러내놓고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갈릴리에서만 5만 명이 넘었는데, 한 달이 채 안 되는 동안에 5백 명도 안 되게 줄어들었다. 예수는 사도들에게 대중(大衆)의 환호가 변덕스러움을 그렇게 맛보게 하여, 그들끼리 하늘나라 일을 하도록 버려두고 자신이 떠난 뒤에 그들이 잠시 종교적 히스테리가 그렇게 나타나는 데 의존할 유혹을 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 노력은 어느 정도만 성공했다.
152:6.3 (1705.3) 게네사렛에서 머무르던 둘째 날 밤에, 주는 다시 사도들에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일러주고, 이 말씀을 덧붙였다: “아이들아 보라, 인간의 느낌에 호소하는 것은 잠시요 철저히 실망이 되며, 순전히 사람의 지능에 호소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속이 비고 보람이 없느니라. 오직 인간의 지성 속에 사는 영에게 호소함으로 오래 가는 성공을 얻고 인품의 놀라운 변화를 이룩하기를 바랄 수 있느니라. 그런 변화는 영이 믿음의 빛 속으로―하늘나라로―태어남으로, 어두운 의심을 이처럼 벗어나는 모든 사람의 일상 생활에서 진정한 영의 열매를 풍부하게 맺음으로 당장 나타나느니라.”
152:6.4 (1705.4) 예수는 지적으로 사람들의 주의(注意)를 끌고 집중하는 수법으로서 감정에 호소하는 것을 가르쳤다. 그는 이처럼 자극받고 예민해진 정신이 혼에 이르는 통로라고 하였는데, 혼 속에는 참된 인품을 변화시키는 영구한 결과를 낳기 위하여, 진리를 인식하고 복음의 영적 매력에 반응하는, 사람의 영적 성품이 거한다.
152:6.5 (1705.5) 이렇게 예수는 사도들을 다가오는 충격에 대비하게 하려고 애썼다―겨우 며칠만 있으면 대중이 그를 대하는 태도에 닥칠 위기였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을 없애려고 헤롯 안티파스와 공모할 것이라고 열둘에게 설명했다. 열두 사도는 예수가 다윗의 왕좌에 앉지 않으리라는 것을 (마침내 깨닫지는 못했어도) 비로소 좀더 깨달았다. 영적 진리는 물질의 기적으로 진전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더 잘 깨달았다. 5천 명을 먹인 것과 예수를 임금으로 세우려는 대중의 움직임은 사람들이 기적을 찾고 이적 행하기를 기대하는 태도의 정점이요, 대중이 예수에게 최대의 갈채를 보낸 것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들은 영적 시련과 쓰라린 역경(逆境)의 시절이 다가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희미하게 내다보았다. 이 열두 사람은 하늘나라의 대사로서 맡은 과제의 참 성질이 무엇인가 천천히 깨닫게 되었고, 땅에서 주가 수고하신 마지막 해의 벅차고 힘드는 시련에 대비하여 비로소 단단히 몸을 가다듬었다.
152:6.6 (1706.1) 게네사렛을 떠나기 전에, 예수는 5천 명을 기적으로 먹인 것에 관하여 가르쳤다. 어째서 그가 창조 능력을 이렇게 특별히 나타냈는가 일러주었고 또한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임을 확인할 때까지, 군중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그렇게 굴복한 것이 아니라고 그들을 안심시켰다.
152:7.1 (1706.2) 4월 3일 일요일에 예수는 열두 사도만 데리고서, 벳세다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여행길을 떠났다. 군중을 피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의 눈을 끌지 않으려고, 게라사와 필라델피아의 길로 여행했다. 이 여행에서 대중을 가르치는 어떤 일도 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예루살렘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그들이 가르치거나 전도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4월 6일 수요일 저녁 늦게, 예루살렘 가까이 베다니에 도착했다. 이 하루 밤을 나사로ㆍ마르다ㆍ마리아의 집에서 쉬었지만, 이튿날 흩어졌다. 예수는 요한과 함께, 베다니의 나사로 집 가까이, 시몬이라 이름하는 어느 신자의 집에서 묵었다. 가룟 유다와 열심당원 시몬은 예루살렘에서 친구들과 함께 묵었고, 한편 나머지 사도들은 둘씩 다른 집에서 머물렀다.
152:7.2 (1706.3) 예수는 이 유월절 동안에 겨우 한 번 예루살렘에 들어갔고, 축제의 큰 날에 그렇게 했다. 아브너가 예수를 베다니에서 만나려고 예루살렘의 많은 신자들을 데리고 나왔다. 예루살렘에서 이번에 머무르는 동안, 열두 사람은 주에 대한 감정이 얼마나 지독하게 나빠지고 있는가 알게 되었다. 위기(危機)가 다가온다고 모두 믿으면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났다.
152:7.3 (1706.4) 4월 24일 일요일에 예수와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서 벳세다를 향했고, 해안 도시 요파ㆍ케자리아ㆍ프톨레마이스를 거쳐서 갔다. 거기서부터 육로로 라마와 코라진을 지나서 벳세다로 갔고 4월 29일 금요일에 도착하였다. 집에 다다르자 즉시, 예수는 이튿날,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오후 예배에 말씀하도록 회당장에게 허락을 요청하라고 안드레를 보냈다. 이번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설교하라고 허락할 마지막 기회가 되리라는 것을 예수는 잘 알았다.
153:0.1 (1707.1) 벳세다에 도착한 날, 금요일 저녁에 그리고 안식일 아침에, 사도들은 예수가 어떤 중대한 문제에 심각하게 골똘해 있음을 눈치챘다. 주가 어떤 중요한 문제에 특별히 머리를 쓰고 있음을 알아챘다. 아침을 전혀 들지 않았고, 점심때도 거의 잡숫지 않았다. 안식일 아침 내내, 또 전날 저녁에 열두 사람과 그 동료들은 작은 무리를 지어 집 근처에, 뜰에, 바닷가를 따라서 모여 있었다. 어찌될까 하는 긴장감과 불안한 느낌이 그들 모두에게 덮쳤다. 예루살렘을 떠난 뒤로 예수는 그들에게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53:0.2 (1707.2) 주가 그렇게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고 말이 없는 것을 그들은 몇 달 동안 본 적이 없었다. 시몬 베드로조차 풀이 죽지는 않았어도 우울했다. 안드레는 기운 빠진 동료들을 위하여 무엇을 할지 몰라서 쩔쩔매고 있었다. 나다니엘은 그들이 “폭풍 전의 고요” 한가운데에 있다고 말했다. 토마스는 “보통 아닌 무슨 일이 바야흐로 일어나려 한다”는 의견을 표현했다. 빌립은 다윗 세베대에게 “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알기까지, 군중을 먹이고 재우는 계획을 잊어버리라”고 조언했다. 마태는 금고를 다시 채우려고 다시 새롭게 노력을 기울였다. 야고보와 요한은 회당에서 있을 설교에 대하여 이야기했고, 그 설교의 성질과 규모가 어떨 것인가 많이 추측해 보았다. 열심당원 시몬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아들이 옳음을 입증하고 지지하려고 어떤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개입하려 할지 모른다”는 생각, 실제로는 희망을 입 밖에 냈다. 한편 가룟 유다는 주제넘게 “예수가 5천 명이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선포하는 것을 허락할 용기가 없었고 대담하지 못했음”을 뉘우치면서 아마 마음이 답답하리라고 생각하였다.
153:0.3 (1707.3) 날씨가 아름다운 이 안식일 오후에, 우울하고 위로받지 못한 그런 추종자들의 무리 사이에서 예수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획기적인 설교를 하려고 나섰다. 직계 추종자들 가운데서 영문을 모르는 알패오 쌍둥이 중 하나가 유일하게 즐거운 인사, 행운을 비는 말을 하였다. 그는 예수가 회당으로 가려고 집을 떠날 때, 명랑하게 인사를 드리며 말했다: “아버지가 당신을 돕고, 언제보다도 더욱 큰 군중이 오기를 우리가 기도하나이다.”
153:1.1 (1707.4)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이 안식일 오후, 3시에 새 가버나움 회당에서, 저명한 신도들이 예수를 맞이했다. 야이루스가 사회를 보았고 예수에게 읽으라고 성서를 건네주었다. 그 전날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53명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도착하였다. 이웃 여러 회당에서 30명이 넘는 지도자와 회당장들이 또한 자리에 있었다. 이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고서 행동했고, 예수와 제자들을 적대하여 공개 투쟁을 개시하려고 온 정통파의 선봉이었다. 이 유대인 지도자들 옆에, 회당의 귀빈 자리에는 헤롯 안티파스의 공식 감시인들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건너 그 형제 빌립의 영토에서 대중이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선포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불안한 보고에 관하여 진상(眞相)을 확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53:1.2 (1708.1) 예수는 불어나는 적들이 공언하던 공개 투쟁이 바로 선포되는 것을 눈앞에 두고 있음을 깨달았고, 대담하게 공격 자세를 취하기로 하였다. 5천 명을 먹였을 때 그는 이들의 물질적 메시아 관념에 도전했다. 이제 다시 이들의 유대인 구원자 개념을 드러내놓고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5천 명을 먹임으로 시작되고 이 안식일 오후 설교로 끝난 이 위기는, 대중의 평판과 갈채의 파도를 겉보기에 가라앉혔다. 이제부터 하늘나라의 일은, 인류의 참된 종교적 형제 정신을 위하여, 오래 지속하는 영적 전향자(轉向者)를 얻는 더 중요한 일에 더욱 관여하게 되었다. 이 설교는 토론하고 논쟁하고 결심하는 기간으로부터, 드러내놓고 투쟁하고 마침내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기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위기를 표시한다.
153:1.3 (1708.2) 주는 많은 추종자가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마침내 그를 버리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잘 알았다. 마찬가지로, 많은 제자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어떤 정신 훈련과 혼의 단련을 거치고 있으며,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의심을 이기게 하고,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완전히 성장한 신앙을 용감하게 주장할 수 있게 만들리라는 것을 알았다. 선과 악이 되풀이되는 여러 상황 사이에 반복하여 선택하는 느린 과정을 통해서 위기에 결정을 내리고 용감히 선택한 것을 갑자기 실천하려고 사람들이 어떻게 준비하는가 예수는 충분히 알았다. 택한 사자들에게 거듭하여 실망을 연습시켰고, 영적 시련에 부닥치는 올바른 길과 그릇된 길 사이에 선택하는 빈번한 시험 기회를 마련하였다. 추종자들이 마지막 시험에 부딪쳤을 때, 이전에 버릇이 된 정신 태도와 영적 반응에 따라서, 생사를 가르는 결정을 내릴 것이라 믿을 수 있음을 알았다.
153:1.4 (1708.3) 땅에서 사신 예수의 일생에서 이 위기는 5천 명을 먹임으로 시작되고 회당에서 이 설교와 함께 끝났다. 사도들의 생애에서 위기(危機)는 회당에서 이 설교로 비롯하여 온전히 한 해 동안 계속되었고, 주가 재판받고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겨우 끝났다.
153:1.5 (1708.4) 예수가 말씀을 시작하기 전, 그날 오후에 그들이 회당에 앉아 있는 동안, 모든 사람의 머리 속에는 꼭 한 가지 큰 신비, 꼭 한 가지 최고의 질문이 있었다. 친구와 적 모두가 꼭 한 가지 일을 깊이 생각하였으니, 이것이었다: “어째서 그가 사람들의 열광이 고조에 달한 것을 그렇게 일부러, 그리고 실질적으로 가라앉혔는가?” 이 설교가 있기 직전과 직후에, 투덜거리는 지지자들의 의심과 실망은 의식하지 못하면서 반대로 커졌고, 궁극에 실제로 미워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가룟 유다가 처음으로 의식하여 저버릴 생각을 품은 것은 회당에서 이 설교가 있은 뒤였다. 그러나 그는 한동안, 그리하고 싶은 온갖 생각에 효과적으로 고삐를 쥐었다.
153:1.6 (1708.5) 누구나 다 어리둥절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예수는 그들을 어이없게 하고 혼란에 빠뜨렸다. 그는 요즈음 전 생애의 특징을 가리키는 초자연 능력을 최대한으로 나타내는 일에 분주하였다. 5천 명을 먹인 것은 땅에서 그의 일생에 유대인이 기대하던 메시아 개념에 가장 크게 호소한 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즉시,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가 신속하고 뚜렷하게, 왕이 되기를 거절함으로 이 특별한 이점(利點)이 사라졌다.
153:1.7 (1709.1) 금요일 저녁에, 그리고 안식일 아침에 다시, 예수가 회당에서 말씀하는 것을 막으려고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야이루스를 설득하려고 열심히 수고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 모든 간청에 야이루스는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나는 이 요청을 허락했고 내 말을 어기지 않겠소이다.”
153:2.1 (1709.2) 신명기에서 보는 대로, 율법에서부터 읽으면서 예수는 이 설교의 서두를 꺼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 이 민족이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자 하면, 죄지어 생긴 저주가 확실히 저희를 따라잡으리라. 주는 너희가 적들에게 얻어맞게 만들겠고, 너희는 땅에 있는 모든 나라로 옮겨질지니라. 주는 너희, 그리고 너희 위에 세운 왕을 이상한 민족의 손에 넘기리라. 너희는 모든 나라 사이에서 놀라운 일, 속담, 웃음거리가 될지니라. 너희의 아들딸은 포로 생활을 할지니라. 너희는 아주 낮아지는 반면에 너희 중에 낯선 사람들이 높은 권한에 오를지니라. 이런 일이 너희와 너희 자손에게 영원히 다가오리니, 너희가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음이라. 그러므로 너희를 대항하여 올 적들을 너희가 섬길지니라. 너희는 배고픔과 목마름을 견디고, 이 이방의 쇠 멍에를 질지니라. 주는 멀리서, 땅 끝으로부터, 너희를 대적하여 한 민족을 데려오리니, 너희는 그 민족의 말을 알지 못하며 저희는 얼굴이 사나운 민족이요 너희를 하찮게 여길 민족이라. 너희가 믿고 있던 담, 높은 강화된 담이 무너질 때까지 저희가 너희의 마을 모두를 둘러싸겠고, 온 땅이 저희의 손에 넘어가리라. 이런 일이 일어나리니, 너희가 포위된 이 시절에, 적들이 철저히 너희를 압박하기 때문에, 너희 몸이 낳은 자식, 너희 아들딸의 고기를 먹기까지 몰리는 일이 생기리라.”
153:2.2 (1709.3) 예수가 이렇게 읽기를 마쳤을 때, 예언서로 넘어가서 예레미야로부터 읽었다: “‘내 종, 내가 너희에게 보낸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자 하면, 나는 이 집을 실로처럼 만들겠고, 이 도시를 땅의 온 민족에게 저주가 되게 만들리라.’ 사제와 선생들이 예레미야가 주의 집에서 이렇게 말씀하심을 들었느니라. 그리고 이런 일이 생겼더라. 주가 모든 사람에게 이르라 명령하신 모든 것을 예레미야가 말하기를 그쳤을 때, 사제와 선생들이 그를 붙잡고 ‘네가 반드시 죽을지니라’ 하였더라. 모든 사람이 주의 집에서 예레미야를 둘러쌌더라. 유다의 제후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저희는 예레미야를 재판하였더라. 그리고 나서 사제와 선생들이 제후들과 모든 사람에게 이르되 ‘이 사람은 죽어 마땅하니, 우리 도시에 못되게 예언하였고 그가 말한 것을 바로 여러분의 귀로 들었나이다.’ 다음에 예레미야가 모든 제후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더라, ‘네가 들은 모든 말로 이 집을 적대하여, 그리고 이 도시를 적대하여 예언하라고 주가 나를 보내셨느니라. 그런즉 너희에게 선포된 악을 너희가 피하도록, 자 너희의 행실을 고치고 너희가 하는 일을 개혁하며, 주 너희 하나님의 목소리에 복종하라. 나에 대해서 말하면, 보라 내가 너희 손 안에 있느니라. 너희 눈에 좋게, 옳게 보이는 대로 나를 처분하라. 그러나 분명히 알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너희가 죄 없는 피를 너희 몸에, 그리고 이 민족에게 퍼부으리니, 이는 참으로 주가 이 모든 말씀을 너희 귀에 이르라고 나를 보내셨음이라.’
153:2.3 (1710.1) “그 시절의 사제와 선생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애썼으나, 판관(判官)들이 찬성하려 하지 않았는지라. 그래도 그가 경고한 말씀 때문에, 더러운 지하 감옥에서 예레미야의 겨드랑이가 진창에 빠질 때까지 밧줄로 저희가 그를 내려보냈더라. 예레미야 선지가 다가오는 정치적 몰락(沒落)을 동포에게 경고하라는 주의 명령에 복종했을 때, 이 사람들이 그에게 이렇게 하였더라. 오늘날, 너희에게 묻고자 하니, 이 민족이 영적으로 멸망하는 날을 감히 경고하는 사람을 저희의 주사제와 종교 지도자들이 어찌하겠느냐? 주의 말씀을 감히 선포하는 선생, 하늘나라의 입구로 이끄는 빛의 길을 걷기를 너희가 거절한다고 겁 없이 지적하는 선생을, 너희도 또한 죽이려 애쓰겠느냐?
153:2.4 (1710.2) “땅에서 내 사명의 증거로 너희가 무엇을 찾느냐? 가난한 자와 버림받은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동안, 우리는 권세와 권력의 자리에 있는 너희를 다치지 않고 두었노라. 우리는 너희가 존중하는 것을 조금도 공격하지 않았거니와 오히려 겁에 질린, 사람의 혼에게 새 자유를 선포하였노라. 나는 내 아버지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적 형제 단체, 곧 하늘나라를 땅에서 세우려고 세상으로 왔노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여러 번 너희에게 상기시켰는데도, 그래도 증거로서 영적 변화와 새롭게 만드는 일을 더욱 하신 것 외에도 너희에게 물질적 이적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내 아버지가 허락하였느니라.
153:2.5 (1710.3) “너희가 내 손에서 무슨 새로운 표징을 구하느냐? 내가 선언하노니, 너희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이미 넉넉한 증거를 가졌도다. 진실로 진실로, 오늘 내 앞에 앉은 여러 사람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어느 길로 갈 것인가 택할 필요가 생겼느니라. 요수아가 너희 선조에게 이른 것 같이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누구를 섬길까 오늘 택하라.’ 오늘,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이 갈림길에 서 있도다.
153:2.6 (1710.4) “저 건너편에서 군중이 배불리 먹고 난 뒤에 나를 찾을 수 없었을 때, 너희 중에 더러는 나를 추적하려고, 한 주 전 폭풍우가 있을 때 근처에서 대피했던 티베리아스의 고기잡이 배들을 고용하였으니, 무엇 때문이냐? 진리와 올바름을 찾거나, 동료 인간을 어떻게 섬기고 보살피는가 더 잘 알고자 한 것이 아니라! 아니라, 너희가 수고하지 않고 얻은 빵을 더 많이 가지려 함이라. 생명의 말씀으로 혼을 채우려 함이 아니요, 오직 쉬이 얻는 빵으로 너희 배를 채울까 하였음이라. 메시아가 온다면, 택한 백성 모두를 위하여 생활을 즐겁고 안일하게 만들 이적을 행하리라고 너희가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았느니라. 그러면 이렇게 가르침받은 너희가 빵과 물고기를 몹시 바라는 것이 이상하지 않도다. 그러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그런 것은 사람의 아들의 사명이 아니라. 나는 영적 자유를 선포하고 영원한 진리를 가르치고 살아 있는 믿음을 길러주려고 왔노라.
153:2.7 (1710.5) “형제들아, 썩어 버리는 고기를 그리워 말고 차라리 영생(永生)에 이르기까지 양분을 주는 영적 양식을 찾으라. 이것이 받아서 먹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아들이 주는 생명의 빵이니, 아버지가 이 생명을 한없이 아들에게 주셨음이라.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이까’ 너희가 물었을 때, 나는 알기 쉽게 일렀노라: ‘하나님이 보낸 자를 너희가 믿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153:2.8 (1710.6) 그리고 나서, 이 새 회당 문의 가로대를 장식하던 항아리, 포도송이로 치장된 만나 항아리의 무늬를 가리키면서 예수는 말했다: “너희 선조가 황야에서 만나―하늘의 빵―을 먹었다고 너희가 생각해 왔으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은 세상의 빵이었도다. 모세는 너희 조상에게 하늘에서 온 빵을 주지 않았거니와 이제 내 아버지는 너희에게 참 생명의 빵을 주려고 준비가 되었느니라. 하늘의 빵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이요, 세상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느니라. 우리에게 이 생명의 빵을 달라 너희가 말하면, 나는 대답하리라: 내가 이 생명의 빵이라. 내게로 오는 자는 배고프지 않겠고,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이 마르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나를 보고 나와 함께 살며 내가 한 일을 보아 왔거늘, 아직도 내가 아버지로부터 온 것을 믿지 않느니라.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두려워 말라. 아버지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다 내게로 오겠고, 내게로 오는 자는 결코 쫓겨나지 아니하리라.
153:2.9 (1711.1) “이제, 이번을 마지막으로 너희에게 선언하고자 하니, 내가 땅에 내려온 것은 나 자신의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자 함이라. 그가 나에게 주신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는 것, 이것이 나를 보내신 이의 마지막 뜻이라. 그리고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생을 얻으리라. 바로 어제 내가 너희 몸을 위하여 너희에게 빵을 먹였고, 오늘 나는 너희의 주린 혼을 위하여 너희에게 생명의 빵을 내미노라. 그때 이 세상의 빵을 그리 달갑게 먹었던 것 같이, 이제 너희는 영의 빵을 받겠느냐?”
153:2.10 (1711.2) 회중을 둘러보려고 예수가 한 순간 멈추자, 예루살렘에서 온 한 선생(산헤드린의 회원)이 일어서서 물었다: “너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요, 모세가 황야에서 우리 조상에게 준 만나는 그렇지 않다 하니, 내가 너의 말을 알아들었느냐?” 그리고 예수는 그 바리새인에게 대답했다: “네가 똑바로 알아들었느니라.” 그러자 바리새인이 말했다: “그러나 너는 나사렛 예수,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네 남동생과 누이들 뿐 아니라 네 아비와 어미도 우리 중 여럿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느냐? 그러면 어째서 네가 여기 하나님의 집에 나타나서, 네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선언하느냐?”
153:2.11 (1711.3) 이때가 되자 회당에는 사람들이 많이 수군거렸고, 큰 소동이 일어날 듯하여 예수는 일어나서 말했다: “우리가 참자, 정직하게 살펴보아도 진리는 결코 상하지 않느니라. 나는 네 말대로이나, 그보다 더한 사람이라. 아버지와 나는 하나요, 아들은 오직 아버지가 가르치는 것을 행하며,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시는 모든 사람을 아들은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느니라. ‘너희는 모두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을지니라,’ 그리고 ‘아버지가 가르치는 자는 또한 아들의 말을 들으리라’하고 예언서에 쓰인 것을 너희가 읽었느니라. 깃드는 아버지 영의 가르침에 무릎을 꿇는 자마다 궁극에 나에게 오리라. 누구라도 아버지를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 사람 안에 사는 까닭이라. 하늘에서 내려온 아들은 분명히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이 아들을 참으로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느니라.
153:2.12 (1711.4) “내가 이 생명의 빵이라. 너희 조상은 황야에서 만나를 먹었고 이제 죽었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이 빵을 사람이 먹으면 그 영이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내가 되풀이하노니, 내가 이 생명의 빵이요, 하나님과 사람의 이 통일된 성품을 실현하는 사람마다 언제까지나 살리라. 받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는 이 생명의 빵은 바로 나의 살아 있는 통합된 성품이라. 아들 속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와 하나가 된 아들―이것이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나의 계시요, 모든 나라에게 내가 주는 구원의 선물이라.”
153:2.13 (1711.5) 예수가 말씀을 마치자 회당 지도자가 회중을 해산했지만 그들은 떠나려 하지 않았다. 예수 둘레에 밀어닥쳐 더 물으려 하였고, 한편 다른 사람들은 중얼거리고 자기들끼리 말다툼을 하였다. 이 상태가 세 시간이 넘어 계속되었다. 청중이 마침내 흩어지기까지는 7시가 훨씬 넘었다.
153:3.1 (1712.1) 이 예배 후의 모임에서 예수에게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더러는 어리둥절한 제자들이 물은 것이었다. 그러나 트집잡는 불신자들이 더욱 많이 물었고 이들은 오로지 예수를 난처하게 만들고 옭아매려고 했다.
153:3.2 (1712.2) 방문하는 바리새인들 가운데 하나가 등불 받침에 올라서면서 이렇게 소리쳐 물었다: “당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우리에게 이르시오이다. 어찌 당신이 우리에게 당신의 살을 먹으라거나 피를 마시라고 줄 수 있소이까? 당신의 가르침을 실행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소이까?” 예수는 이 질문에 대답하여 말했다: “내 살이 생명의 빵이라거나 내 피가 생명의 물이라고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였노라. 그러나 육체를 입은 내 일생이 하늘의 빵을 주는 것이라 일렀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육체로 내려준 사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현상은 신의 영양분과 대등한 체험의 현실이니라. 너희는 내 살을 먹거나 내 피를 마실 수 없으나 내가 아버지와 영적으로 하나인 것 같이, 너희는 영적으로 나와 하나가 될 수 있도다. 너희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으로 영양을 받을 수 있으니, 그 말씀은 정말로 생명의 빵이요 이 빵을 필사 육체의 모습으로 내려주셨느니라. 너희의 혼은 신다운 영에게서 물을 받을 수 있고 그 영은 참으로 생명의 물이라. 아버지가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깃들고 지도하기를 바라는가 보여주려고 아버지가 나를 세상으로 보내셨고,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로, 깃드는 하늘 아버지를 알고 그의 뜻을 행하기를 늘 구하도록 격려하고자 육체를 입은 이 생명을 내가 살아 왔노라.”
153:3.3 (1712.3) 그리고 나서 예수와 사도들을 지켜보고 있던 예루살렘 첩자들 가운데 하나가 말했다: “우리가 보아하니, 빵을 먹기 전에 당신이나 사도들이 적절히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더러워지고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그런 관습은 장로들의 율법을 어기는 것인 줄 잘 아심이 틀림없나이다. 마시는 잔과 먹는 그릇도 당신은 제대로 씻지 않나이다. 어째서 조상의 전통과 장로들의 율법을 그렇게 경시함을 보이시나이까?” 그의 말을 듣자, 예수는 대답했다: “어찌하여 전통의 율법으로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계명은 이르되,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그리고 필요하면 너희의 물질을 부모와 나누라고 지시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전통의 율법을 세우니, 이것이 의무를 지키지 않는 아이들로 하여금 부모를 도왔을지 모르는 돈을 ‘하나님께 바쳤다’ 말하는 것을 허락하느니라. 아이들이 나중에 모든 그런 돈을 자기의 안락을 위하여 쓰는데도, 이처럼 장로들의 율법은 그러한 교활한 아이들의 책임을 덜어주느니라. 무슨 까닭에, 너희가 이 방법으로 자신의 전통으로 계명을 무효로 만드느냐?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에 대하여 잘도 예언하여 말하였더라: ‘이 민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여도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헛되이 저희가 나를 숭상하고, 사람들의 교훈을 저희의 교리로 가르치는도다.’
153:3.4 (1712.4) “어떻게 너희가 사람들의 전통을 굳게 붙들고 계명을 버리는가 너희가 잘 알 수 있느니라. 자신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즐거이 물리치는도다. 많은 다른 방법으로 너희는 감히 너희의 가르침을 율법과 선지자 위에 올려놓느니라.”
153:3.5 (1712.5) 그리고 나서 예수는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논평하였다. 그는 말했다: “그러나 너희는 다 내 말을 귀담아들으라. 사람을 영적으로 더럽히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입에서,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 그러나 사도들조차도 그 말씀의 뜻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으니, 시몬 베드로도 또한 물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말씀을 듣는 자들 가운데 더러가 필요 없이 기분 상하지 않도록, 당신이 이 말씀의 뜻을 우리에게 풀이해 주시겠나이까?” 그리고 나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말했다: “너도 알아듣기가 어려우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심지 않은 초목마다 뿌리가 뽑힐 것을 네가 모르느냐? 진리를 알고자 하는 자에게 이제 눈길을 돌리라. 사람들에게 진리를 사랑하라고 강요할 수 없느니라. 이 선생들 가운데 다수가 눈먼 안내자이라. 소경이 소경을 이끌면, 모두가 구렁에 빠질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덕적으로 사람을 더럽히고 영적으로 오염시키는 것에 관하여 너희에게 진리를 일러주는 동안, 귀담아들으라. 내가 선언하노니,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입으로 몸에 들어가거나, 눈과 귀를 통해서 정신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 속에서 생길 수 있는 잘못과, 그러한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의 언행에서 표현되는 그 잘못으로 사람이 더러워지느니라. 질투ㆍ자만심ㆍ분노ㆍ복수ㆍ욕설, 거짓 증거와 함께, 악한 생각, 살인ㆍ도둑질ㆍ간음과 같은 사악한 계획이 마음 속에서 솟아나오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요, 저희가 예식 면에서 더러운 손으로 빵을 먹는 것이 아니라.”
153:3.6 (1713.1)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바리새인 위원들은 신성을 모독한 죄목이나 유대인의 신성한 율법을 우롱한 죄목으로 예수를 체포해야 한다고 이제 거의 확신했다. 그러므로 장로들의 전통, 즉 이른바 민족의 구전(口傳) 율법을 더러 토론하고, 가능하면 공격하도록 그를 말려들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물이 아무리 귀하더라도, 전통에 노예가 된 이 유대인들은 식사할 때마다 먹기 전에 예식에서 요구하는 손 씻기를 결코 거르려 하지 않았다. “장로들의 계명을 어기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이 그들의 관념이었다. 첩자들이 이렇게 물은 것은 예수가 “구원은 깨끗한 손이 아니라 깨끗한 마음의 문제이라”고 말했다는 보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관념은 일단 사람의 종교의 일부가 되었을 때, 벗어나기 어렵다. 이날 이후에 여러 해가 지났어도 사도 베드로는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에 대한 이러한 전통을 아직도 두려워하는 압박감에 빠져 있었고 특별하고 눈에 선한 꿈을 꾼 뒤에야 마침내 벗어났다. 이 유대인들은 손 씻지 않고 먹는 것을 창녀와 거래하는 것과 같은 각도에서 보았고, 두 가지 다 똑같이 추방되는 벌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때, 이 모든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153:3.7 (1713.2) 주는 이처럼 구전 율법―장로들의 전통―이 대표하는 랍비 체계의 규칙, 규제 전체가 어리석은 것을 논의하고 폭로하기로 결심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성서의 가르침보다도 유대인에게 더 거룩하고 속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종교 지도자들과 이제 더 터놓고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막으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가 왔음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는 거리낌없이 말했다.
153:4.1 (1713.3) 이 예배 후 모임에서 한창 토론하는 가운데, 예루살렘에서 온 한 바리새인이, 다루기 힘들고 반항하는 귀신에 들린 한 미친 소년을 예수께 데리고 왔다. 이 미친 아이를 예수 앞으로 이끌면서 그는 말했다: “이와 같은 병에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나이까? 당신은 악귀들을 내쫓을 수 있나이까?” 소년을 보았을 때, 주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들었다. 소년에게 오라고 손짓하고 나서,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니, 그에게서 나오라. 네가 돌아오지 않도록 처리하라고 너의 충실한 동료들 중 하나에게 내가 명하노라.” 즉시 그 소년은 정상이 되고 제 정신이 들었다. 이것은 예수가 한 인간에게서 처음으로 “악령”을 정말로 쫓아낸 경우이다. 전에 있었던 모든 경우는 다만 악귀에 들렸다고 생각된 경우였지만 이것은 그 시절에 오순절 직전까지 때때로 일어났다시피, 정말로 악마에 들린 경우였다. 오순절에 주의 영(靈)이 모든 육체 위에 부어졌고, 이 하늘의 몇몇 반역자가 어떤 불안정한 부류의 인간들을 속여 이용하는 것을 언제까지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153:4.2 (1714.1) 사람들이 놀라워하자, 바리새인 가운데 하나가 일어서서, 악마들과 결탁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이 악마를 내쫓으면서 사용한 표현에 그들이 서로 아는 처지임을 예수가 인정했다고 비난하였다. 더 나아가서, 예수가 악마의 두목인 비엘세붑의 권능을 입어서 이른바 그의 모든 기적을 일으켰다고 예루살렘의 종교 선생과 지도자들이 전에 결정하였다고 말했다. 그 바리새인은 말했다: “이 사람과 상관하지 말라. 그는 사탄과 함께 일하느니라.”
153:4.3 (1714.2) 그리고 나서 예수가 말했다: “어찌 사탄이 사탄을 내쫓을 수 있느냐? 자기들끼리 갈라져 싸우는 나라는 설 수 없느니라. 한 집에서 서로 갈라져 싸우면, 곧 황폐해지느니라. 뭉치지 않으면 한 도시가 포위 공격을 견딜 수 있느냐? 사탄이 사탄을 내쫓으면, 그는 자신에 대항하여 싸우느니라. 그러면 어찌 그 나라가 서겠느냐? 그러나 너희가 모두 알아야 할지니, 아무도 힘센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서 먼저 그 사람을 힘으로 이기고 묶어놓지 않으면, 그의 물건을 빼앗을 수 없느니라. 그래서 내가 비엘세붑의 힘을 입어 악마들을 내쫓으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으로 악마들을 내쫓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의 재판관이 될지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내가 악마들을 내쫓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참으로 너희에게 다가왔느니라. 너희가 편견으로 눈이 멀고 두려움과 자만 때문에 잘못 인도받지 않으면, 악마들보다 더 큰 사람이 너희 사이에 서 있음을 쉽게 깨달으리라. 너희로 인하여 이렇게 선포할 수밖에 없나니, 나와 함께 있지 않은 자는 나를 적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이지 않는 자는 사방으로 흩어지느니라. 두 눈을 뜨고, 미리 계획한 악의(惡意)로, 알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악마의 일로 주제넘게 돌리고자 하는 너희에게 내가 엄숙히 경고하고자 하노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의 모든 죄, 아니 너희의 신성 모독조차 모두 용서를 받으리라. 그러나 깊이 생각한 끝에 사악한 뜻으로 하나님을 거슬러 모독하는 자는 누구든지 결코 용서를 얻지 못하리라. 그렇게 끈질기게 불의를 저지르는 자는 결코 용서를 구하지도 받지도 않으리니, 저희는 신의 용서를 영원히 물리치는 죄가 있느니라.
153:4.4 (1714.3) “너희 가운데 여럿이 오늘 갈림길에 다다랐고, 너희는 아버지의 뜻과 자신이 고른 어두운 길 사이에 처음으로 불가피한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렀느니라. 이제 택하는 그대로, 너희는 궁극에 그렇게 될지니라. 너희는 나무를 좋게 만들고 그 열매를 좋게 만들어야 하나니, 그렇지 않으면 나무가 썩고 그 열매가 썩으리라. 내가 선언하노니, 내 아버지의 영원한 나라에서는 열매로 그 나무를 알아보느니라. 그러나 너희 가운데 더러는 독사와 같고, 이미 악을 택하였으매, 어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느냐? 결국 너희 마음 속에 가득한 악을 너희의 입으로 뱉아내느니라.”
153:4.5 (1714.4) 그리고 나서 또 다른 바리새인이 일어나서 말했다: “선생이여, 당신이 가르칠 권한과 권리를 확증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찬성할 표징, 미리 정해진 표징(標徵)을 우리에게 주시기 바라나이다. 당신이 그렇게 주선하는 데 찬성하시겠나이까?” 그리고 이 말을 듣자, 예수는 말했다: “믿음이 없고 표징을 찾는 이 세대가 표시를 찾는도다. 그러나 너희가 이미 받은 것, 그리고 너희 가운데서 사람의 아들이 떠날 때 너희가 볼 것 외에, 아무런 표징을 받지 못할지니라.”
153:4.6 (1714.5) 말씀을 마치고 나서 사도들은 그를 둘러쌌고, 회당 바깥으로 인도했다. 말없이 그들은 벳세다까지 함께 집으로 길을 떠났다. 주의 가르치는 전술이 갑자기 바뀐 것에 모두가 놀랐고 얼마큼 두려워졌다. 그들은 주가 그렇게 투쟁하는 태도로 행동하는 것을 보는 데 도무지 익숙하지 않았다.
153:5.1 (1715.1) 여러번 예수는 사도들의 희망을 산산이 조각냈고, 가장 좋아하는 소망을 거듭하여 짓밟았다. 그러나 어떤 실망스러운 시간이나 슬픈 기간도 지금 그들을 휩쓴 것과 같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 그들의 신변의 안전에 관한 진짜 두려움이 우울한 느낌과 함께 섞였다. 민중이 갑자기, 철저히 그들을 저버린 데 그들 모두가 너무나 소스라치게 놀랐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바리새인들이 뜻밖에 대담해지고 단호한 결의를 나타낸 것에 그들은 또한 얼마큼 놀라고 당황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가 갑자기 전술을 바꾼 것에 어리둥절했다. 보통 상황에서는 이렇게 더 투쟁하는 태도가 나타난 것을 반가워했을 터이지만, 실제로 일어난 바와 같이, 이것은 기대하지 않았던 많은 것과 함께,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
153:5.2 (1715.2) 이제, 이 모든 걱정 위에, 그들이 집에 도착했을 때 예수는 잡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몇 시간 동안 한 2층 방에서 혼자 계셨다. 거의 한밤이 되어서야, 전도사들의 지도자 요압이 돌아와서, 동료들 가운데 약 3분의 1이 그 운동을 버리고 갔다고 보고했다. 저녁 내내 충성스러운 제자들이 오갔고, 주에 대한 감정의 돌변이 가버나움에 널리 퍼졌다고 보고했다. 예루살렘에서 온 지도자들은 재빨리 이 불만스러운 감정에 부채질하고,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멀리하는 운동을 조장하려고 애썼다. 이 시련의 시간에, 열두 여인은 베드로의 집에서 회의를 열었다. 대단히 당황하였지만, 아무도 버리고 떠나지 않았다.
153:5.3 (1715.3) 자정이 조금 지났을 때 예수가 2층 방에서 내려와서 열두 사도와 그 동료들 가운데 섰는데, 이들은 모두 30명쯤 되었다. 그는 말했다: “하늘나라가 이렇게 체질하여 가려내는 것이 너희를 괴롭힘을 헤아리나 이는 피할 수 없느니라. 아직도, 모든 훈련을 받은 뒤에도 너희는 내 말을 듣고 실수할 무슨 좋은 까닭이 있었느냐? 하늘나라가 이 미지근한 군중과 마지못해 믿는 제자들을 떨어버린 것을 보고서, 너희는 어찌하여 두려움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느냐? 하늘나라의 영적 가르침이 새 영광 속에 빛나려고 새 날이 밝아오는 데, 어찌하여 너희는 슬퍼하느냐? 이 시험을 견디기 어려워한다면,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때, 너희가 무슨 일을 하겠느냐? 내가 이 세상으로 오기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갈 때를 위하여 너희가 언제, 어찌 준비하겠느냐?
153:5.4 (1715.4) “사랑하는 자들아, 되살아나는 것은 영(靈)임을 너희가 기억해야 하고, 살과 그에 관계된 모든 것은 전혀 유익하지 않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준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라. 기운을 내라!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았노라. 이 며칠 동안 분명히 한 말에 많은 사람이 기분을 상하리라. 내 제자들 가운데 여럿이 돌아갔다는 말을 너희가 이미 들었고 저희는 이제 더 나와 함께 다니지 않느니라. 건성으로 믿는 이 사람들이 길가에서 떨어져 나갈 것을 처음부터 알았노라. 내가 너희 열두 사람을 골라서 하늘나라의 대사로 따로 세우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이와 같은 때에 너희도 또한 저버리고자 하느냐? 너희 하나하나가 자기 믿음을 들여다볼지니, 너희 가운데 하나가 크게 위험한 까닭이라.” 예수가 말씀을 마치고 나서 시몬 베드로가 말했다: “예, 주여, 우리는 슬프고 어리둥절하지만 당신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리이다. 당신은 우리에게 영생(永生)의 말씀을 가르쳤나이다. 우리는 당신을 믿어 왔고 지금까지 당신을 따라왔나이다. 우리는 돌아가지 않겠사오니, 하나님이 당신을 보내셨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니이다.” 베드로가 말을 마치자, 그의 충성 서약을 승인한다는 뜻으로 모두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153:5.5 (1716.1) 그리고 나서 예수가 말했다: “너희는 가서 쉬라, 바쁜 때가 우리에게 다가왔음이라. 바삐 움직일 시절이 바로 앞에 다가왔느니라.”
154:0.1 (1717.1) 4월 30일, 중대한 그 토요일 밤에 풀이 죽고 어리둥절한 제자들에게 예수가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말씀을 하는 동안, 티베리아스에서 헤롯 안티파스, 그리고 예루살렘 산헤드린을 대표하는 특별 위원 집단 사이에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헤롯에게 예수를 체포하라고 재촉했고, 예수가 민중에게 분쟁을, 아니 반란까지도 선동하고 있음을 납득시키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헤롯은 예수를 정치범으로 다루어 행동을 취하기를 거절하였다. 사람들이 예수를 임금으로 선포하려고 했을 때 호수 건너편에서 일어난 사건과 어떻게 그가 그 제안을 물리쳤는가 헤롯의 조언자들이 이미 정확하게 보고했다.
154:0.2 (1717.2) 헤롯의 정식 가족의 한 사람인 추자의 아내는 여인 봉사 집단에 속했는데 추자는 예수가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간섭하기를 제안하지 않았다, 오직 신자(信者)들의 영적 형제 정신을 정착시키는 데만 아랑곳한다, 그 정신을 하늘나라라 부른다는 것을 헤롯에게 알려주었다. 헤롯은 추자의 보고를 신뢰했고, 너무 믿어서 예수의 활동에 간섭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이때, 예수에 대한 헤롯의 태도는 세례자 요한을 미신으로 두려워하는 영향을 받았다. 헤롯은 아무것도 믿지 않지만 만사를 두려워한, 종교를 버린 유대인이었다. 요한을 사형에 처한 것 때문에 양심이 거리꼈고, 그는 예수를 해치려는 이 음모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그는 예수가 치유한 것으로 보이는 많은 병의 사례를 알고 있었고, 그는 예수가 선지자가 아니면 비교적 해롭지 않은 광신자라고 여겼다.
154:0.3 (1717.3) 반역하는 시민을 그가 두둔한다고 케자에게 보고하겠다고 유대인들이 위협했을 때 헤롯은 그들을 회의실에서 쫓아내라 명령했다. 이처럼 문제는 한 주 동안 잠잠했고, 그동안에 예수는 곧 흩어지기 위하여 추종자들을 준비시켰다.
154:1.1 (1717.4) 5월 1일부터 5월 7일까지 세베대의 집에서 추종자들과 함께 예수는 사사로운 회의를 가졌다. 오직 단련받고 신뢰를 얻은 제자들만 이 회의에 입장이 허락되었다. 이때 바리새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수를 지지한다고 드러내놓고 선언할 정신적 용기를 가진 제자들이 겨우 약 1백 명 있었다. 이 무리와 함께 그는 아침ㆍ오후ㆍ저녁에 회의를 열었다. 작은 일행의 질문자들이 오후마다 바닷가에서 모였고, 여기서 전도사나 사도들이 더러 그들에게 강연하였다. 이 무리는 50명이 넘는 적이 드물었다.
154:1.2 (1717.5) 이 주 금요일에 가버나움 회당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집을 예수와 모든 추종자에게 닫는다고 공식(公式) 결정을 내렸다. 이 조처는 예루살렘 바리새인들의 선동을 받아서 취해졌다. 야이루스는 우두머리 회당장 자리에서 물러났고, 드러내놓고 예수와 한 편이 되었다.
154:1.3 (1718.1) 마지막 바닷가 회의는 5월 7일 안식일 오후에 열렸다. 예수는 그때 모인, 150명이 채 안 되는 사람들에게 말씀했다. 이 토요일 밤은 예수와 그의 가르침의 인기가 가장 낮은 수준까지 내려간 때를 표시하였다. 그때부터 계속, 우호적인 감정이 꾸준하고 느리기는 해도, 더 건전하고 믿을 만하게 퍼졌다. 새 추종자들은 영적 믿음과 참된 종교적 체험의 기초, 전보다 더 튼튼한 기초 위에 뿌리를 두었다. 주를 따르던 사람들이 지녔던 물질적 하늘나라 개념, 그리고 그보다 더 이상적이고 영적인, 예수가 가르친 개념, 이 두 가지가 얼마큼 섞이고 절충하는 과도기 단계가 이제 분명히 끝났다. 이제부터 계속하여 규모가 더욱 크게, 원대한 영적 함축성을 가지고 하늘나라 복음은 더욱 드러내놓고 선포되었다.
154:2.1 (1718.2) 서기 29년, 5월 8일, 일요일, 예루살렘에서 산헤드린은 팔레스타인의 모든 회당을 예수와 그 추종자들에게 닫는다는 법령을 통과했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이 새로이, 전례 없이 권한을 침해한 것이었다. 이때까지 각 회당은 예배자들의 독립된 회중으로 존재하고 활동했으며, 자체 이사회의 지배를 받고 그 지시를 받았다. 오직 예루살렘의 회당들이 산헤드린의 권한에 지배를 받고 있었다. 산헤드린의 이 즉결 행위에 뒤이어, 그 회원 다섯 명이 사퇴했다. 사자 1백 명이 이 법령을 전하고 집행하려고 즉시 파송되었다. 2주의 짧은 기간에 헤브론의 회당을 제외하고, 팔레스타인의 모든 회당(會堂)이 이 산헤드린 성명서에 순응했다. 헤브론의 회당 지도자들은 산헤드린이 자기들의 집회에 대하여 그런 관할권을 행사하는 권리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예루살렘의 포고에 이렇게 찬성하지 않은 것은 예수의 운동에 동정하기보다는 회중(會衆)이 자치한다는 주장에 근거를 두었다. 그 뒤에 얼마 있다가 헤브론 회당은 불에 타버렸다.
154:2.2 (1718.3) 바로 이 일요일 아침에 예수는 한 주의 휴가를 선언했다. 제자들 모두가 집이나 친구들에게 가서 시달린 혼을 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격려하는 말을 하라고 재촉했다. 그는 말했다: “너희는 하늘나라가 진전되기를 기도하면서, 사방으로 가서 놀거나 물고기를 잡으라.”
154:2.3 (1718.4) 쉬는 이 한 주간은 예수에게 바닷가 근처에 있는 여러 가족과 무리를 찾아볼 수 있게 하였다. 그는 또한 다윗 세베대와 함께 몇 번 물고기를 잡으러 갔고, 그동안 대체로 혼자서 다녔지만, 다윗이 가장 신뢰하는 사자 두셋이 언제나 근처에서 얼씬거리고 있었다. 이들은 예수의 신변 보호에 관하여 그 우두머리로부터 분명한 명령을 받았다. 쉬는 이 한 주 동안 어떤 모양으로도 대중을 가르치는 일이 없었다.
154:2.4 (1718.5) 이 주에는 나다니엘과 야고보 세베대가 가볍지 않은 병을 앓았다. 사흘 낮과 밤 동안 고통스러운 소화기 질병으로 격심하게 앓았다. 셋째 날 밤에 예수는 야고보의 어머니 살로메를 쉬라고 보냈고 한편 그는 앓고 있는 사도들을 보살폈다. 물론, 예수는 한 순간에 이 두 사람을 고칠 수 있었지만, 이것은 시공(時空)의 진화 세계들에서 사람의 아이들이 겪는 이런 보통의 곤경과 질병을 다루는 데 아들이나 아버지가 쓰는 방법이 아니다. 한 번도, 육체를 입은 파란 많은 일생을 통해서 내내, 예수는 땅에 있는 가족의 어떤 식구에게나 또는 직계 추종자 중에 누구를 위해서도, 어떤 종류의 초자연적 보살핌도 베풀지 않았다.
154:2.5 (1719.1) 필사 인간은 그 진화하는 혼이 성장하고 발전하며, 점진적으로 완전해지도록 마련된 체험 훈련의 일부로서, 우주의 어려움과 마주쳐야 하고 행성의 장애물에 부닥쳐야 한다. 인간의 혼을 영답게 변화시키는 것은 광범위한 실제의 우주 문제를 교육으로 해결하는 체험을 피부로 겪기를 요구한다. 동물의 천성, 그리고 의지(意志)를 가진 하등 형태의 생물은 환경이 편안하면 순조롭게 진보하지 않는다. 힘든 일이 주는 자극과 더불어, 문제가 되는 상황은 필사자를 진보시키는 귀중한 목표를 성취하는 데, 그리고 상급 수준의 영적 운명을 달성하는 데, 힘차게 이바지하는 그 정신ㆍ혼ㆍ영의 활동을 함께 낳는다.
154:3.1 (1719.2) 5월 16일에 티베리아스에서 예루살렘 당국과 헤롯 안티파스 사이에 2차 회의가 열렸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종교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갈릴리와 유대에 있는 거의 모든 회당이 예수가 가르치지 못하도록 문을 닫았다고 헤롯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헤롯으로 하여금 예수를 체포하게 하려는 새로운 노력이 있었지만, 그는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5월 18일에 헤롯은, 유대의 로마 통치자가 동의하는 조건으로, 산헤드린 당국이 예수를 체포하고 종교적 죄목으로 재판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데려가는 것을 허락하는 계획에 찬성했다. 그러는 동안에, 예수의 적들은 헤롯이 예수를 적대하게 되었다, 그의 가르침을 믿는 모든 사람의 뿌리를 뽑을 생각이 있다고 갈릴리에 두루, 뜬소문을 부지런히 퍼뜨리고 있었다.
154:3.2 (1719.3) 유대 민족의 신성한 율법을 조롱했다는 죄목으로 산헤드린 앞에서 재판을 받기 위하여 예수를 체포해서 예루살렘으로 이송(移送)해야 한다고 헤롯과 바리새인들이 맺은 협정에 대하여 예루살렘에서 국가 당국이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5월 21일 토요일 밤에 티베리아스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날 자정이 되기 바로 전에, 헤롯은 한 포고문에 서명했는데, 이것은 산헤드린의 관리들이 헤롯의 영토 안에서 예수를 체포하고, 재판을 받게 하기 위하여 강제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허가했다. 헤롯이 이렇게 허가하는 데 찬성하기 전에, 여러 편에서 센 압력이 헤롯에게 쏟아졌고, 그는 예루살렘에서 한을 품은 적들 앞에서 예수가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154:4.1 (1719.4) 바로 이 토요일 밤에 가버나움에서 유지(有志) 시민 50명의 무리가 회당에서 “우리가 예수를 어찌할 것인가?”하는 중대한 문제를 의논하려고 만났다. 자정이 지나기까지 이야기하고 토론했어도 의견을 모을 아무런 공통된 근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 예수가 메시아, 적어도 거룩한 사람이 아니면 아마 선지자일지 모른다고 믿는 쪽으로 기우는 몇 사람을 제쳐놓고, 그 회의는 거의 대등한 네 집단으로 갈라졌는데, 각자 예수를 다음 견지에서 보았다:
154:4.2 (1719.5) 1. 망상에 빠져 있는, 해롭지 않은 광신자이다.
154:4.3 (1719.6) 2.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위험하고 음모를 꾸미는 선동자이다.
154:4.6 (1720.3) 서민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교리를 예수가 전파하는 데 대하여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의 가르침은 실용적이 아니다, 그의 생각에 따라서 살려고 사람마다 정직하게 노력한다면 모든 것이 박살이 나리라고 적들은 주장했다. 뒤를 이어 여러 세대의 사람들이 똑같이 말했다. 이 계시를 받은 비교적 깨우친 시대에도 총명하고 좋은 뜻을 가진 많은 사람이, 현대 문명은 예수의 가르침 위에 세워질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그리고 이들은 어느 정도 옳다. 그러나 그런 의혹을 품는 사람들은 모두, 훨씬 더 좋은 문명이 그의 가르침 위에 세워질 수 있었고 언젠가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잊어버린다. 이른바 기독교의 교리를 따르려는 미지근한 시도가 가끔 있기는 했어도 이 세상은 결코 예수의 가르침을 대규모로 실행하려고 심각하게 애써본 적이 없다.
154:5.1 (1720.4) 5월 22일은 예수의 일생에서 사건이 많았던 날이었다. 이 일요일 아침에 동이 트기 전에, 다윗의 사자들 가운데 하나가 티베리아스로부터 허겁지겁 도착했다. 그는 산헤드린의 관리들이 예수를 체포하는 것을 헤롯이 이미 허락했든지 아니면 막 허가하려 한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다가오는 이 위험을 알리는 소식을 받은 것은 다윗 세베대로 하여금 사자(使者)들을 깨우고 그날 아침 7시에 비상 회의를 위하여 호출하려고 모든 지역의 제자 집단에게 이들을 보내게 하였다. 깜짝 놀랄 이 보고를 들었을 때, 유다(예수의 아우)의 처제는 근처에 살던 예수의 가족 모두에게 세베대의 집에서 모이라고 당장에 호출하는 말을 황급히 전했다. 이 급한 호출에 반응하여, 당장에 마리아ㆍ야고보ㆍ요셉ㆍ유다ㆍ룻이 모였다.
154:5.2 (1720.5) 이 이른 아침 회의에서 예수는 모인 제자들에게 작별의 지시를 내렸다. 다시 말해서, 가버나움으로부터 그들이 곧 흩어질 것을 잘 아니까, 당분간 그들에게 작별을 알렸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안내를 간구하고, 결과와 상관 없이 하늘나라 일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전도사들은 부름받을 때까지 그들이 좋게 생각하는대로 수고해야 했다. 그는 전도사들 가운데 따라오라고 열두 사람을 택했다. 열두 사도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와 함께 남아 있으라고 지시했다. 열두 여인에게는 오라고 부를 때까지 세베대의 집과 베드로의 집에 남아 있으라고 지시를 내렸다.
154:5.3 (1720.6) 예수는 다윗 세베대가 전국에 보내는 사자의 봉사를 계속하는 데 찬성했다. 금방 주께 작별을 알리면서 다윗은 말했다: “주여, 당신의 일을 하러 떠나소서. 그 편협한 자들이 당신을 붙잡지 못하게 하시고 사자들이 당신의 뒤를 따를 것을 결코 의심하지 마소서. 내 일꾼들은 결코 당신과 접촉을 잃지 않겠고, 저희를 통해서 당신은 다른 지방에서 생기는 하늘나라 일에 관하여 알고 저희로 인하여 우리 모두가 당신에 관하여 소식을 들으리이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 봉사가 방해받지 않으리니, 내가 첫째와 둘째 지도자를, 아니 셋째까지도 세웠음이니이다. 나는 선생도 전도자도 아니지만, 내 마음 속에 이 일을 꼭 하고 싶사오니, 아무도 나를 그만두게 할 수 없나이다.”
154:5.4 (1720.7) 이날 아침 7시 반쯤에, 예수는 말씀을 들으려고 집안으로 밀어닥친 신자들, 거의 1백 명에게 작별의 말씀을 시작했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엄숙한 때였지만, 예수는 특별히 명랑하게 보였다. 다시 한 번 정상적인 자신과 같았다. 심각했던 몇 주가 지나갔고, 그는 믿음과 희망과 용기의 말씀으로 그들 모두를 북돋아 주었다.
154:6.1 (1721.1) 유다의 처제(妻弟)가 급히 호출한 데 반응하여 땅에서 예수 집안의 다섯 식구가 그 장면에 도착한 것은 이 일요일 아침 8시쯤이었다. 육체의 가족 전체에서 오직 한 사람, 룻이 땅에서 그의 사명이 신성함을 진심으로, 그리고 계속 믿었다. 유다와 야고보, 그리고 요셉조차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아직도 많이 유지했지만, 그들의 좋은 판단과 진정한 영적 성향은 자만 때문에 방해를 받았다. 마찬가지로 마리아는 사랑과 두려움 사이에, 모성애와 가족의 긍지 사이에 오락가락하였다. 어머니는 의심에 빠지기는 했어도 예수가 태어나기 전에 가브리엘이 방문한 것을 결코 아주 잊어버릴 수 없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제 정신이 아니다, 미쳤다고 마리아를 설득하려고 수고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리아에게 아들들과 함께 가서, 예수가 대중을 더 가르치는 노력을 그만두도록 힘써 말리라고 재촉했다. 곧 예수의 건강이 나빠질 것이다, 그가 계속하도록 버려두면 그 결과로 오직 불명예와 창피가 온 가족에게 쏟아질 수 있을 뿐이라고 마리아에게 장담했다. 그래서 유다의 처제한테서 소식이 왔을 때, 마리아의 집에서 그 전날 저녁에 바리새인들을 만났기 때문에, 다섯 사람 모두가 함께 거기에 있었고, 그들은 즉시 세베대의 집을 향하여 떠났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지도자들과 밤이 늦도록 이야기했다. 예수가 이상하게 행동하고 있으며, 얼마 동안 이상하게 행동하였다고 모두가 얼마큼 확신했다. 룻은 그의 행동을 다 설명할 수 없지만, 그가 언제나 가족을 공정하게 대하였다고 주장하고, 일을 그만두라고 그를 설득하려는 계획에 찬성하려 하지 않았다.
154:6.2 (1721.2) 세베대의 집으로 가는 길에 그들은 이 일에 대해 의논하였다. 그리고 함께 집으로 오라고 예수를 설득해 보기로 자기들끼리 찬성했는데, 마리아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가 집으로 와서 내 말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아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을 내가 아노라.” 야고보와 유다는 예수를 체포해서 재판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는 계획에 관하여 소문을 전에 듣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안전을 두려워했다. 대중의 눈에 예수가 인기 있는 인물인 한, 그의 가족은 사태가 흘러가는 대로 구경만 하고 있었지만, 가버나움 사람들과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갑자기 그에게 반감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곤란한 처지에 놓여서 그들이 받을 것이라 생각했던 치욕의 압박감을 비로소 따갑게 느꼈다.
154:6.3 (1721.3) 그들은 예수를 만나서 옆으로 데리고 가서, 함께 집으로 가자고 그를 재촉할 것을 전에 기대했다. 오로지 자신에게 문제만 일으키고 가족에게 불명예만 가져올 수 있는 새 종교를 전파하려고 애쓰는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기만 하겠다면, 예수가 자기들을 박대한 것을 잊어버리겠다―용서하고 잊겠다―고 그를 안심시키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룻은 다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오빠에게 이렇게 말하리라. 나는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 생각하고, 이 사악한 바리새인들이 그의 전도를 멈추게 하기 전에 기꺼이 죽을 생각이 있기를 바란다고.” 요셉은 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동안에 룻의 입을 막겠다고 약속했다.
154:6.4 (1721.4) 그들이 세베대의 집에 이르렀을 때, 예수는 제자들에게 한창 작별 연설을 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집으로 들어가려고 애썼으나 집에는 군중이 넘쳐흘렀다. 그들은 마침내 뒷문 현관에서 자리를 잡고, 입에서 입으로 말을 예수에게 전하게 했다. 그래서 마침내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귓속말로 속삭여 이를 전했는데, 베드로는 그 때문에 예수의 말씀을 가로막고 말했다: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아우들이 바깥에 있고, 저희가 몹시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어 하나이다.” 자, 어머니는 이 작별의 말씀을 주는 것이 추종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고, 그를 체포할 사람들이 도착해서 어느 순간이라도 연설이 중단될 것 같은지도 알지 못했다. 겉보기에 그리 오랫동안 멀어진 뒤에 어머니와 예수의 아우들이 실제로 그에게 오기까지 아량을 보인 사실에 비추어서, 그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예수가 말씀을 중단하고 그들에게 오리라고 어머니는 정말로 생각했다.
154:6.5 (1722.1) 이것이 바로, 땅에 있는 가족이 예수가 아버지의 일을 돌보아야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던 경우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전하는 말을 받으려고 연설을 잠깐 멈추었는데도,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은 몹시 마음이 상했다. 그들에게 인사하려고 그가 달려나오는 대신에, 그들은 노래처럼 아름다운 목소리가 더 크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내 어머니와 아우들에게, 나 때문에 아무 걱정을 하지 말라 이르라. 세상으로 나를 보내신 아버지는 나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요, 아무런 피해도 내 가족에게 닥치지 아니하리라. 저희에게 용기를 내고 하늘나라의 아버지를 신뢰하라고 이르라. 그러나 결국, 누가 내 어머니요 누가 내 아우들이냐?” 방에 모인 모든 제자에게 두 손을 쭉 뻗으면서 말했다: “나는 어머니가 없고 아우들이 없노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을 보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는 누구나 내 어머니요, 아우요, 누이임이라.”
154:6.6 (1722.2)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마리아는 유다의 팔에 힘없이 쓰러졌다. 예수가 작별의 말씀을 끝맺는 동안, 그들은 마리아를 정신 차리게 하려고 뜰로 날랐다. 그때 그는 어머니와 아우들과 함께 의논하러 나갔을 터이나, 한 사자가 티베리아스로부터 급히 도착했고, 산헤드린의 관리들이 예수를 체포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갈 권한을 가지고 오는 길이라는 소식을 가져왔다. 안드레는 이 소식을 받고서, 예수의 말씀을 중단하고 이를 알렸다.
154:6.7 (1722.3) 다윗이 25명쯤 되는 파수들을 세베대의 집 근처에 세워 놓은 것, 그리고 아무도 갑작기 들이닥칠 수 없다는 것을 안드레는 상기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찌 해야 할까 예수에게 물었다. “나는 어머니가 없고” 하는 말을 듣고 나서 어머니가 뜰에서 충격에서 회복하고 있는 동안, 주는 말없이 거기 서 있었다. 바로 이때, 방에서 한 여자가 일어서서 외쳤다: “당신을 밴 자궁이 복이 있고, 당신을 젖먹인 가슴이 복이 있도다.” 안드레와 이야기하다가 예수는 이 여자에게 대답하려고 한 순간 돌이켜서 말했다: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에 감히 복종하는 자가 오히려 복이 있도다.”
154:6.8 (1722.4)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은, 예수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관심을 잃었다고 생각했고, 바로 그들이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음을 조금도 깨닫지 못했다. 사람들이 자기의 과거를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예수는 충분히 이해했다. 인간들이 어떻게 설교자의 웅변에 좌우되고, 머리가 논리와 이성에 반응하듯, 양심이 어떻게 감정에 호소하는 데 반응하는가 알았다. 그러나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와 관계를 끊으라고 설득하기가 얼마나 더욱 어려운가 알았다.
154:6.9 (1722.5) 오해받거나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 안에 공감하는 친구요 이해하는 조언자를 가졌다는 것이 언제까지나 참말이다. 사람의 적은 제 집안에 있는 사람일 수 있다고 사도들에게 전에 경고(警告)했지만, 그는 이 예언이 자신의 체험에 얼마나 가깝게 적용될 뻔했는가 도저히 깨닫지 못했다. 예수는 아버지의 일을 하느라고 땅에 있는 가족을 버리지 않았다―가족이 그를 버렸다. 나중에, 주가 죽고 부활한 뒤에, 야고보가 초기 기독교 운동에 연결되었을 때, 그는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더 일찍 교제를 가지지 못한 결과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고생했다.
154:6.10 (1723.1) 이 사건들을 겪으면서, 예수는 지식이 제한된 그의 인간 지성의 안내를 받기를 선택하였다. 단순한 사람으로서 동료들과 체험을 겪기를 바랐다. 떠나기 전에 가족을 볼 생각이 예수의 인간 머리 속에 있었다. 그는 강론 한가운데서 멈추고 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은 뒤에 처음 만나는 것을 그런 대중 행사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연설을 마치고, 그리고 나서 떠나기 전에 가족들과 이야기할 뜻이 있었지만, 즉시 뒤따라 생긴 사건들이 한꺼번에 어울려 이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154:6.11 (1723.2) 세베대의 집 뒷문에 다윗의 사자 일행이 도착한 것이 그들을 더욱 황급히 달아나게 만들었다. 이 사람들이 일으킨 소동은 사도들을 놀라게 해서, 새로 도착한 이 사람들이 그들을 체포하는 사람들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당장 잡히는 것이 두려워 그들은 앞문을 통해서 대기하고 있던 배까지 서둘러 나갔다. 이 모두가 어째서 예수가 뒤쪽 현관에서 기다리던 가족을 만나지 못했는가 설명한다.
154:6.12 (1723.3) 그러나 황급히 달아나서 배를 탈 때, 그는 다윗 세베대에게 말했다: “내 어머니와 아우들에게 저희가 온 것을 내가 고맙게 여긴다고, 또 저희를 만나려고 했다고 이르라. 나에게 마음 상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구하고 그 뜻을 행할 은혜와 용기를 구하라고 저희에게 타이르라.”
154:7.1 (1723.4) 그래서 서기 29년 5월 22일, 이 일요일 아침에 예수는 이렇게 열두 사도와 열두 전도사와 함께 산헤드린의 관리들을 피해서 서둘러 달아났다. 신성을 모독하였다, 그리고 유대인의 신성한 율법을 달리 어겼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하려고 그 관리들은 헤롯 안티파스로부터 예수를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갈 권한을 가지고 벳세다로 오는 도중이었다. 날씨가 아름다운 이날 아침, 거의 8시 반에 이 일행 스물 다섯 명은 노에 사람을 배치하고 갈릴리 바다 동쪽 해안을 향하여 배를 저었다.
154:7.2 (1723.5) 주의 배 뒤에 다른 더 작은 배가 따랐는데, 다윗의 사자 여섯 명을 태웠다. 이들은 예수와 그 동료들과 접촉을 유지하고 그들의 거처와 안전에 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벳세다에 있는 세베대의 집으로 전달하도록 처리하라고 지시를 받았으며, 그 집은 전에 한동안 하늘나라 일을 위한 본부로서 쓰였다. 그러나 예수는 다시 세베대의 집에서 편안히 지내게 되지 못했다. 이제부터 계속하여, 땅에서 사신 여생을 통해서, 주는 참으로 “머리를 둘 곳이 없었다.” 정착된 거처 비슷한 것조차 이제 더 없었다.
154:7.3 (1723.6) 그들은 게레사 마을 가까이까지 저어 갔고, 친구들이 관리하라고 배를 맡기었다. 땅에서 보낸 주의 일생에서 파란 많은 이 마지막 해 동안의 떠돌이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한동안 빌립의 영토에 남아 있었고, 게레사로부터 케자리아 빌립비까지 올라가서, 거기서부터 페니키아의 바닷가로 나아갔다.
154:7.4 (1723.7) 군중은 세베대의 집 근처에 남아 있었고 이 배 두 척이 동쪽 물가를 향하여 호수를 건너가는 것을 구경했다. 예루살렘의 관리들이 서둘러 와서 예수를 수색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한창 떠난 뒤였다. 이들은 예수가 이미 그들을 피해서 달아났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와 일행이 바타니아를 거쳐서 북쪽으로 여행하는 동안, 바리새인들과 그 조수들은 가버나움 이웃에서 헛되이 그를 수색하느라고 거의 한 주를 꼬박 보냈다.
154:7.5 (1724.1) 예수의 가족은 가버나움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고,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기도하면서 거의 한 주를 보냈다. 그들은 혼란과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목요일 오후에, 룻이 세베대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까지, 조금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 집에서 룻은 가장인 오빠가 안전하고 건강히 있으며, 페니키아 해안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소식을 다윗으로부터 들었다.
155:0.1 (1725.1) 사건이 많았던 이 일요일에 게레사 근처에 배를 댄 뒤에 곧, 예수와 스물네 사람은 북쪽으로 얼마큼 갔다. 거기서 벳세다 줄리아스 남쪽에 있는 어느 아름다운 공원에서 밤을 지냈다. 지난 날에 거기서 멈춘 적이 있으니까, 그들은 이 야영지가 눈에 익었다.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주는 추종자들을 주위에 부르고 바타니아와 갈릴리 북부를 거쳐서 페니키아 해안까지 가려고 예정한 여행을 위하여 계획을 함께 의논했다.
155:1.1 (1725.2) 예수가 말했다: “시편의 저자(著者)가 이 시절에 대하여 어떻게 말했는가 너희는 모두 기억을 살려야 하느니라, ‘어째서 이교도가 격분하고 민족들이 헛되이 음모를 꾸미는가? 자비의 사슬을 잘라 버리고 사랑의 끈을 던져 버리자 말하면서, 땅의 임금들이 주에 대항하여, 그리고 그가 기름 부은 자에 대항하여, 관원들이 함께 의논하는도다.’
155:1.2 (1725.3) “오늘날 너희는 이 말씀이 너희 눈앞에서 이루어짐을 보느니라. 그러나 시편 저자의 나머지 예언이 이루어짐을 구경하지 못할지니, 그가 사람의 아들에 대하여, 그리고 땅에서 이룰 그의 사명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품었음이라. 내 나라는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자비롭게 선포되며 사심(私心) 없는 봉사로 세워지느니라. 내 아버지는 이교도를 비웃으면서 하늘에 앉아 있지 않으며, 크게 불쾌하여 진노하지 않느니라. 아들이 이른바 이 이교도(실제는 무지하고 가르침 받지 못한 형제)를 유산으로 받으리라는 약속은 참말이요, 나는 자비와 사랑의 팔을 펼쳐 이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리라. 승리한 아들이 ‘저희를 쇠막대기로 부수고 도공의 그릇처럼 산산조각 내리라’고 암시하는 기록이 유감스러운 선언을 했어도, 이 모든 친절이 이른바 이교도에게 베풀어지리라. 시편의 저자는 ‘두려움으로 주를 섬기라’고 너희에게 훈계하였느니라―나는 너희가 믿음으로 신의 아들이 되는 높은 특권을 받으라 이르노라. 그 저자는 너희가 떨면서 기뻐하라고 명령하나, 나는 너희가 확신을 가지고 기뻐하라 명하노라. 그는 말하되 ‘아들이 성내지 않도록 그에게 입맞추라, 그의 진노가 불이 붙으면 너희가 멸망할까 하니라.’ 그러나 너희는 나와 함께 살아 왔은즉 진노와 격노가 사람의 마음 속에서 하늘나라를 세우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음을 잘 아느니라. 그러나 이 훈계를 마치면서, ‘이 아들을 신뢰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말했을 때, 그 시편 저자는 참 빛을 어렴풋이 보았느니라.”
155:1.3 (1725.4) 예수는 스물네 사람에게 계속 가르치며 말했다: “이교도가 우리에게 격분할 때 저희는 구실이 없지 않으니라. 저희는 시야(視野)가 작고 좁으므로 에너지를 열심히 집중할 수 있느니라. 저희의 목표는 가깝고 다소 눈에 보이는 것이니, 그러므로 용감하고 유능하게 처리하려고 애쓰느니라. 하늘나라로 들어간다고 고백한 너희의 가르치는 행동은 너무 오락가락하며 분명치 않구나. 이교도는 저희의 목표를 얻으려고 정면으로 공격하지만, 너희는 너무 오랫동안 동경하는 죄가 있도다. 너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다면, 이교도가 포위한 도시를 점령하는 것 같이, 어찌하여 영적 공격으로 하늘나라를 차지하지 않느냐? 대체로 지난날을 뉘우치고 오늘을 불평하며 헛되이 앞날을 희망하는 태도로 너희가 봉사할 때, 너희는 도저히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느니라. 어째서 이교도가 격분하느냐? 저희가 진리를 모르는 까닭이라. 어찌하여 너희는 쓸데없이 꿈을 꾸며 시드느냐? 너희가 진리에 복종하지 않는 까닭이라. 쓸데없이 꿈꾸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서 하늘나라를 세우는 데 관계되는 일을 용감히 하라.
155:1.4 (1726.1) “너희가 무슨 일을 하여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지나치게 전문화하지 말라. 우리의 멸망을 추구하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섬기는 일을 한다고 진실로 생각하며, 저희는 전통 때문에 아주 좁아져서, 편견으로 눈이 멀고 두려움으로 마음이 굳어졌느니라. 그리스인을 생각해 보라, 저희는 종교 없이 과학을 가졌으나 유대인은 과학이 없이 종교를 가졌도다. 이처럼 좁고 혼잡스럽게 부서진 진리 조각을 받아들이도록 잘못 인도될 때, 사람들이 구원받을 유일한 희망은 진리와 조화되는 것―전향하는 것이라.
155:1.5 (1726.2) “이 영원한 진리를 강조해 보자: 진리와 조화됨으로 너희의 인생에서 올바름의 이 아름다운 순수함을 모범으로 보여주기를 배우면 동료들이 너희를 찾으리니, 너희가 그렇게 얻은 것을 저희가 얻을까 함이라. 진리를 추구하는 자가 너희에게 마음이 끌리는 만큼, 너희는 진리 재산, 올바름을 가진 것을 가리키느니라. 너희가 전하는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얼마나 멀리 가야 하는가, 이것은 어떤 면에서 온전하거나 올바른 생애, 진리와 조화된 생애를 얼마나 너희가 살지 못하였는가를 재는 척도이라.”
155:1.6 (1726.3) 사도와 전도사들이 밤 인사를 드리고 베개 위에 잠을 청하기 전에, 주는 다른 여러 가지를 가르쳤다.
155:2.1 (1726.4) 5월 23일 월요일 아침에, 예수는 베드로에게 열두 전도사와 함께 코라진으로 가라 지시했고, 그동안에 열한 사도와 함께 케자리아 빌립비를 항하여 떠났다. 요단강 길을 거쳐 다마스커스-가버나움 길로 갔다. 거기서부터 북동쪽으로 케자리아 빌립비에 이르는 길과 만나는 점까지 갔고, 그리고 나서 그 도시로 들어가서, 거기서 2주 동안 머무르고 가르쳤다. 5월 24일 화요일 오후에 도착했다.
155:2.2 (1726.5) 베드로와 전도사들은 코라진에서 2주 동안 머물렀고, 작지만 열심 있는 무리의 신자들에게 하늘나라 복음을 전도했다. 그러나 새로운 전향자를 많이 얻을 수 없었다. 하늘나라를 위하여, 온 갈릴리의 어느 도시에서도 코라진만큼 사람들을 적게 설득한 곳이 없었다. 베드로의 지시에 따라서, 열두 전도사는 치유―육체적인 것―에 대하여 할 말이 적었고, 한편 하늘나라의 영적 진리를 더욱 활기 있게 전도하고 가르쳤다. 코라진에서 보낸 이 2주는, 여태까지 생애에서 가장 어렵고 보람없는 기간이었으므로 열두 전도사에게 진정한 역경(逆境)의 세례였다. 하늘나라로 사람들을 들어가라고 설득하는 만족감을 이렇게 빼앗겼기 때문에, 그들은 각자 자신의 혼을, 그리고 새 생활의 영적 길에서 혼이 얼마나 진보하였는가 더욱 진지하고 정직하게 돌이켜보았다.
155:2.3 (1726.6) 아무도 더 하늘나라에 들어갈 생각이 없는 듯 보였을 때, 6월 7일 화요일에 베드로는 동료들을 한데 부르고 예수와 사도들과 합세하려고 케자리아 빌립비를 향하여 떠났다. 수요일 한낮 무렵에 도착하였고 코라진의 불신자들 가운데서 겪은 체험을 저녁 내내 되돌아보면서 보냈다. 이날 저녁 토론하는 동안에 예수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더 언급했고, 일생의 사업에서 실패로 보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많이 가르쳤다.
155:3.1 (1727.1) 케자리아 빌립비 가까이에서 이렇게 2주 머무르는 동안에 예수는 대중을 위해서 일하지 않았어도 사도들은 그 도시에서 조용한 저녁 모임을 수없이 열었고 많은 신자가 주와 이야기하려고 야영지로 나왔다. 이 방문의 결과로 신자들의 무리는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예수는 사도들과 날마다 이야기했고 그들은 하늘나라를 전파하는 일의 새 국면이 이제 시작되고 있음을 더욱 뚜렷하게 깨달았다.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신의 아들임을 받아들이는 영적 기쁨을 깨닫는 것”임을 알아듣기 시작했다.
155:3.2 (1727.2) 케자리아 빌립비에서 머무른 것은 열한 사도에게 진정한 시험이었고 견디기 어려운 2주였다. 그들은 거의 우울증에 빠졌고 열심인 베드로의 인격이 이따금 주는 자극이 없어서 서운했다. 이 시절에 예수를 믿고, 나가서 그를 따르는 것은 참으로 크고 벅찬 모험이었다. 이 2주 동안 전향자를 거의 얻지 못했어도 주와 날마다 가진 회의로부터 그들은 무척 유익한 것을 많이 배웠다.
155:3.3 (1727.3) 진리를 구체적 신조(信條)로 만들었기 때문에, 유대인이 영적으로 침체되고 죽어 가고 있으며, 진리가 영적 안내와 진보의 길 표시로 쓰이는 대신에, 혼자만 옳다는 배타적 경계선으로 모습을 갖출 때 그런 가르침은 창조력과 생명력을 잃고 궁극에는 단지 보존제가 되고 화석(化石)이 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사도들은 깨달았다.
155:3.4 (1727.4) 그들은 시간과 영원 속에서, 가능성 면에서 사람의 인격을 바라보는 것을 예수에게서 더욱 배웠다.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제를 사랑하기를 먼저 배움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많은 사람을 최선(最善)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바로 이와 관련하여, 동료들에게 사심 없이 봉사하는 것에 대하여, “내 형제 가운데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만큼 너희는 그렇게 나에게 행한 것이니라” 하는 주의 선언에 새로운 의미가 붙게 되었다.
155:3.5 (1727.5) 케자리아에서 이번에 머무른 동안에 얻은 가장 큰 교훈의 하나는 종교적 전통의 기원에 관계되었다, 즉 신성하지 않은 것이나 보통 생각이나 일상적인 사건에 신성한 느낌이 붙도록 버려두는 심각한 위험에 관계되었다. 그들은 한 회의에서 참된 종교는 사람이 가장 높고 참된 확신에 진심으로 충성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얻고 나왔다.
155:3.6 (1727.6) 종교적 열망(熱望)이 겨우 물질적이라면, 늘어나는 과학 지식은 사물의 초자연적 기원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점진적으로 갈아치움으로 궁극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빼앗으리라, 하지만 종교가 영적이라면, 자연 과학의 진보는 영원한 실체와 신다운 가치들을 믿는 신앙을 결코 흔들 수 없다고 예수는 신자들에게 훈계하였다.
155:3.7 (1727.7) 종교가 온전히 영적 동기를 가졌을 때, 종교는 모든 인생을 갈수록 더 가치 있게 만들며, 높은 목적으로 인생을 채우고 초월적 가치로 인생에 위엄을 주며, 훌륭한 동기로 인생을 북돋우고, 그렇게 하면서 숭고하고 북돋아주는 희망으로 인간의 혼을 위로한다는 것을 그들은 배웠다. 참된 종교는 존재의 긴장을 줄이도록 고안되어 있으며, 나날이 살아가고 사심 없이 봉사하도록 믿음과 용기를 방출한다. 믿음은 영적 활력을 갖게 하고 올바른 열매를 맺도록 촉진한다.
155:3.8 (1727.8) 어떤 문명도 종교의 최선을 잃고는 오래 지속할 수 없다고 예수는 거듭해서 사도들에게 가르쳤다. 종교적 체험 대신에 종교적 상징과 예식을 받아들이는 큰 위험을 지칠 줄 모르고 열두 사람에게 지적했다. 얼어붙은 형태의 종교를 녹여서, 깨우친 아들의 자유, 물처럼 흐르는 자유로 만드는 사명에 그는 지상 생애 전부를 한결같이 바쳤다.
155:4.1 (1728.1) 6월 9일 목요일 아침에 벳세다에서 다윗의 사자들이 가져온 소식, 하늘나라가 어떻게 진전되는가 소식을 받은 뒤에, 진리를 가르치는 이 스물다섯 선생의 무리는 케자리아 빌립비를 떠나서 페니키아 해안을 향하여 여행을 시작했다. 늪 지대를 돌아서 룻츠의 길로 지나갔고, 막달라에서 레바논산에 이르는 오솔길과 만나는 교차점까지,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돈으로 이어지는 길과 만나는 점까지 갔으며, 금요일 오후에 시돈에 다다랐다.
155:4.2 (1728.2) 룻츠 가까이서, 튀어나온 바위 선반 그림자 밑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멈추는 동안, 예수는 그와 함께 했던 여러 해를 통하여 사도들이 들은 중에 가장 놀라운 말씀을 하였다. 빵을 먹으려고 자리를 잡자마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에게 물었다: “주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모든 것을 아시고, 그의 영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세우는 일에 우리를 지원하시는데, 어찌하여 우리가 적들의 위협을 받고 도망치나이까? 어찌하여 진리의 적들과 대결하려 하지 않나이까?” 그러나 베드로의 물음에 예수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토마스가 끼어들어 물었다: “주여, 예루살렘에 있는 우리 적들의 종교에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는가 나는 정말로 알고 싶나이다. 저희의 종교와 우리의 종교는 무엇이 정말 다르니이까? 우리 모두가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어찌하여 우리의 믿음이 그렇게 차이가 있나이까?” 토마스가 말을 마치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베드로의 물음을 내가 무시하고 싶지 않으나, 바로 이때에 유대인 권력자들과 드러내놓고 충돌하기를 내가 피하는 까닭을 오해하기 얼마나 쉬울 것인가 잘 아는 까닭에, 차라리 토마스의 물음에 대답하기를 택한다면, 그래도 너희 모두에게 더욱 도움이 되리라. 너희가 점심을 마치고 나서 대답을 시작하겠노라.”
155:5.1 (1728.3) 종교에 대한 잊지 못할 이 강론은 현대의 말투로 간추리고 다시 진술하면, 다음의 진리를 표현하였다:
155:5.2 (1728.4) 세계의 종교들은 두 가지 기원―자연의 기원과 계시적 기원―이 있지만, 어느 시대, 어떤 한 민족 사이에서도, 세 가지 분명히 다른 형태의 종교적 헌신이 발견되도록 정해졌다. 종교적 욕구는 다음 세 가지로 형태로 나타난다:
155:5.3 (1728.5) 1. 원시 종교. 신비스러운 에너지를 두려워하고 자기보다 큰 물리적 힘을 섬기려는 반 자연스러운 본능적 욕구, 주로 물리적 자연을 믿는 종교, 두려움의 종교.
155:5.4 (1728.6) 2. 문명의 종교. 진보하는 종교적 개념과 문명화하는 민족들의 관습―머리를 쓰는 종교―확립된 종교적 전통의 권위를 가진 지적(知的) 신학.
155:5.5 (1728.7) 3. 참된 종교―계시 종교. 초자연적 가치가 있는 계시, 영원한 실체들을 꿰뚫어보는 부분적 통찰력,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무한한 성품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한 번 보는 것―인간의 체험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영의 종교.
155:5.6 (1729.1) 자연인의 육체적 느낌과 미신을 믿는 두려움에서 생겨난 종교를 주는 비난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원시 형태의 예배가 인류에서 총명한 축에 속하는 종족들의 종교 형태에서 너무 많이 지속한다는 사실을 한탄하였다. 지적 종교와 영적 종교의 큰 차이점은, 전자(前者)가 교회의 권위로 지탱하는 데 반하여, 후자는 온전히 인간의 체험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155:5.7 (1729.2) 그리고 나서, 가르치는 시간에 주는 계속하여 이러한 진리를 뚜렷하게 설명했다:
155:5.8 (1729.3) 민족들이 상당히 지적이고 충분히 문명화될 때까지 유치하고 미신을 믿는 많은 예식이 지속할 터이고, 이것은 원시적이고 뒤떨어진 민족들의 진화적 종교 관습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인류가 영적 체험의 현실을 더 높이 더 널리 인정하는 수준으로 진보할 때까지, 큰 집단의 남녀가 지적 동의(同意)만 요구하는 권위적 종교를 개인적으로 더 좋아하는 성향을 계속 보일 것이다. 이와 반대로 영의 종교에는 진취적 인간 체험을 겪는 벅찬 현실과 씨름하는 신앙의 모험에 지성과 혼의 적극적 참여가 따른다.
155:5.9 (1729.4) 권위를 내세우는 전통적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영적 성품의 간절한 소망을 채우려는 사람의 충동에 대하여 쉬운 해결책을 제시한다. 정착되고 굳어지고 확립된, 권위의 종교는 어지럽고 산란해진 사람의 혼이 두려움에 떨고 불안에 시달릴 때, 도피해도 되는 즉석의 안식처를 마련해 준다. 그런 종교는 만족과 확신을 얻는 값으로 신자들에게 오직 시키는 대로, 순전히 지적(知的) 동의를 요구한다.
155:5.10 (1729.5) 이런 방법으로 종교적 위로를 얻는 것을 더 좋아할 사람, 겁먹고 두려워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이 땅에서 오랫동안 살 것이다. 권위를 내세우는 종교와 그렇게 운명을 같이 함으로, 그들은 인격의 주권을 더럽히고 자아의 존엄성을 떨어뜨리며, 가능한 모든 인간 체험 가운데 가장 가슴 떨리고 영감을 주는 다음과 같은 체험에 참여하는 권리를 모조리 넘겨준다 하더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즉 진리의 개인적 추구, 지적 발견의 위험에 부딪치는 흥분, 개인의 종교적 체험의 실체를 탐구하려는 결심, 그리고 인간의 존재에서 최대의 모험―사람이 혼자 힘으로, 또 스스로 하나님을 찾다가 찾아내는 모험―에서 정직하게 얻는 승리, 영적 믿음이 지적 의심을 이기는 것을 실제로 깨닫는 만족, 개인적으로 승리하는 최고의 만족을 얻는 체험이다.
155:5.11 (1729.6) 영의 종교는 노력ㆍ투쟁ㆍ싸움ㆍ신앙ㆍ결심ㆍ사랑ㆍ충성ㆍ진보를 의미한다. 지성의 종교―권위를 내세우는 신학(神學)―은 형식을 따르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있는 힘을 다하라고 거의 또는 조금도 요구하지 않는다. 두려워하고 건성으로 믿는 혼에게 전통은 안전한 피난처요 쉬운 길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진취적 인간 지성이 발견하고 진화하는 인간 혼이 체험할 수도 있는, 먼 바닷가의 영적 현실을 찾아서, 탐구되지 않은 진리의 거센 파도를 무릅쓰고 모험하는 믿음의 항해에서 겪는, 그러한 영적 투쟁과 정신적 불안을 본능적으로 피한다.
155:5.12 (1729.7) 예수는 말씀을 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전통적 선생과 지난 시대 선지자들의 여러 신조를 확립된 체계의 지적 관념으로, 즉 권위의 종교로 만들었느니라. 모든 그러한 종교는 대체로 지성에 호소하느니라. 우리가 얼마 안 있어 비로소 새 종교를 용감하게 선언할 것이므로, 이제 우리는 바야흐로 그러한 종교와 목숨을 건 싸움에 들어가려 하느니라―이 새 종교는 그 말이 오늘날 뜻하는 종교가 아니라, 사람의 정신에 거하는 내 아버지의 신성한 영에게 주로 호소하는 종교이라. 그 종교는 이를 받아들여 생기는 열매로부터 권위를 얻어내리니, 그 열매는 이렇게 더 높은 영적 교통이 있다는 진실을 정말로, 참으로 믿는 모든 사람이 몸소 겪는 체험에서 아주 확실히 나타날 것이라.”
155:5.13 (1730.1) 스물네 사람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이름을 부르면서 예수는 말했다: “그리고 자, 하늘나라의 영원한 진리와 최고의 장려함을 생생하게 몸소 체험하는 아름다운 현실을 스스로 발견하는 만족을 느끼면서, 너희 중에 누가 사람들을 구원하는 더 좋은 길을 선포하는 사명에 따르는 어려움과 박해를 견디겠느냐? 아니면 예루살렘에 있는 바리새인들이 방어하는 길, 확립되고 굳어진 종교에 순응하는 이 쉬운 길을 택하는 것이 더 좋으냐? 너희는 무섭고 연약하고 안일을 찾느냐? 너희는 앞날을 진리의 하나님 손에 맡기기가 두려우냐, 너희는 누구의 아들이냐? 너희는 아들이어든 아버지를 믿지 못하느냐? 너희는 전통적 권위의 종교가 주는 확신과 지적 안정으로 이끄는 쉬운 길로 돌아가겠느냐, 아니면 몸을 가다듬고서, 영의 종교의 새로운 진리,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미래, 확실치 않고 어지러운 미래를 향하여 나와 함께 가겠느냐?”
155:5.14 (1730.2) 이것은 예수가 일찍이 하신 몇 번 안 되는 이러한 감정적 호소 중 하나였고, 말씀을 듣던 스물네 사람이 모두 일어나서, 이에 뭉쳐서 충성한다는 반응을 표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는 손을 올려서 그들을 멈추고 말했다: “이제 너희는 따로 가라, 각 사람이 혼자서 하나님과 함께, 거기서 내 질문에 대하여 냉철한 대답을 찾아내고 그러한 참되고 진지한 혼의 태도를 찾고 나서, 그 대답을 내 아버지요 너희 아버지께 거리낌 없이 용감히 대답하라. 사랑을 주는 그의 무한한 생명은 우리가 선포하는 종교의 바로 그 정신이라.”
155:5.15 (1730.3) 전도사와 사도들은 잠시 동안 자기들끼리 따로 갔다. 그들의 정신은 격려를 받고 지성은 영감을 받았으며, 감정은 예수의 말씀에 힘차게 움직였다. 그러나 안드레가 그들을 함께 불러 모았을 때, 주는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여행을 다시 떠나자. 우리는 페니키아로 가서 한동안 머무르고 너희는 모두, 너희의 육체와 지성의 감동을 더 높은 지적 충성으로, 그리고 더욱 만족스러운 영의 체험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해야 하느니라.”
155:5.16 (1730.4) 길을 따라 여행하면서 스물네 사람은 말이 없었지만, 금방 서로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날 오후 세 시가 되자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그들은 멈추었고 베드로는 예수에게 가서 말했다: “주여, 당신은 우리에게 생명과 진리의 말씀을 주셨나이다. 우리는 더 듣고자 하나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더 말씀해 주시기를 간청하나이다.”
155:6.1 (1730.5) 그래서, 산허리의 그늘에서 멈춘 동안, 예수는 영의 종교에 관하여 계속 가르쳤는데, 이런 내용으로 말씀하였다:
155:6.2 (1730.6) 너희는 지성의 종교에 만족한 채로 있기로 작정한 너희 동료들 사이에서 뛰쳐나왔고, 저희는 안전(安全)을 몹시 바라고 전통에 순응하기를 더 좋아하느니라. 너희는 권위적 확신의 느낌을 버리고, 모험적이고 진취적 믿음을 주는 영의 보장을 선택하였도다. 너희는 제도적 종교의 모진 속박에 감히 저항하고,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기는, 기록된 전통의 권위를 물리쳤느니라. 우리의 아버지는 정말로 모세ㆍ엘리야ㆍ아모스ㆍ호세아를 통하여 말씀하였으나, 이 옛 선지자들은 말씀을 그쳤어도 그는 세상에 진리의 말씀을 그치지 않고 주셨도다. 내 아버지는 진리의 말씀을 한 시대에 허용하고 다른 시대에 허락하지 않으면서 민족이나 세대를 차별하는 분이 아니라. 온전히 인간다운 것을 신답다고 부르는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지 말며,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전통적 신탁(神託)을 통하지 않고서 오는 진리의 말씀을 놓치지 말고 헤아리라.
155:6.3 (1731.1) 나는 너희에게 다시 태어나라, 영에게서 태어나라 요구하였노라. 나는 권위의 어두움과 무기력한 전통으로부터 너희를 끌어내어, 인간의 혼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발견―혼자 힘으로, 자신 속에서,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내며, 자기 개인 체험에서 하나의 사실로서 이 모두를 행하는 천상의 체험―가능성을 실현하는 초월적 빛 속으로 인도하였노라. 그렇게 너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전통의 권위에서 하나님을 아는 체험으로 건너가기 위한 것이라. 이처럼 너희는 어둠에서 빛으로, 물려받은 민족의 신앙으로부터 실제 체험을 거친 개인적 신앙으로 옮겨갈 것이요, 그렇게 함으로 너희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지성의 신학으로부터, 영원한 재산으로서 너희 혼 안에서 세워질, 참된 영의 종교에 이르기까지 진보하리라.
155:6.4 (1731.2) 너희의 종교는 전통적 권위를 믿는 단순한 지적 관념으로부터, 하나님의 실체 그리고 아버지의 신다운 영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붙잡을 수 있는, 생생한 믿음을 얻는 실제 체험으로 바뀌리라. 지성의 종교는 너희를 희망 없이 지난날에 묶어 놓지만, 영의 종교는 점진적 계시에 있고, 영적 이상과 영원한 실체 면에서 더욱 높고 거룩한 것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계속 가도록 늘 너희에게 손짓하느니라.
155:6.5 (1731.3) 권위의 종교는 즉시 자리잡힌 안전한 느낌을 줄지 모르지만, 그러한 일시적 만족을 위하여 너희는 영적 자유와 종교적 해방을 잃음으로 대가(代價)를 치르느니라.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대가로, 내 아버지는 너희에게 영적으로 불쾌하고 거룩하지 않고 진실하지 않은 것을 믿는 신앙을 강제로 지지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느니라. 낡아빠진 체계의 종교적 형태와 예식에 굴복함으로 바로 너의 자비ㆍ정의ㆍ진리의 감각을 짓밟으라고 요구하지 않느니라. 영의 종교는 영의 인도하심이 어디로 데려가든지, 언제까지나 진리를 따르도록 너희를 자유롭게 두느니라. 누가 판단할 수 있느냐?―아마도 이 영은 다른 세대가 듣기 싫어한 무엇인가를 이 세대에게 나누어줄 수도 있느니라.
155:6.6 (1731.4) 거짓 종교 선생들에게 치욕이 있을진저! 저희는 갈급한 사람들을 어둠침침하고 먼 과거로 도로 끌어다가 거기에 버려두려 하는도다. 그래서 이 불행한 사람들은 새로운 발견이 있을 때마다 그렇게 깜짝 놀랄 운명을 가졌고, 한편 진리가 새롭게 계시될 때마다 저희는 당황하느니라. “생각이 하나님께 머물러 있는 자는 완전한 평화 속에 있으리라”고 말한 선지자는[1] [1800] 단지 권위의 신학을 지적으로 믿기만 한 자가 아니었도다. 진리를 아는 이 사람은 하나님을 찾아냈고 하나님에 대하여 입으로 말만 하지 않았느니라.
155:6.7 (1731.5) 너희에게 훈계하노니, 항상 옛 선지자들을 인용하고 이스라엘의 영웅들을 찬양하는 관습을 버리라, 그 대신에 최고자의 살아 있는 선지자가 되고 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 영적 영웅이 될 포부를 가지라. 지난날에 하나님을 아는 지도자들에게 명예를 돌리는 것이 정말로 가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면서 어찌하여 인간의 존재에서 최대의 체험, 하나님을 너희 혼자서 찾아내고 자신의 혼 속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체험을 너희가 버려야 하느냐?
155:6.8 (1732.1) 인류의 어떤 종족이든지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자체의 지적 견해를 가지며, 따라서 지성의 종교는 종족의 이 여러 가지 관점에 늘 충실해야 하느니라. 권위의 종교는 결코 통일에 이를 수 없고, 인류의 통일과 필사자의 형제 정신은 오로지, 영의 종교를 위에서 부여함으로, 그리고 이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느니라. 종족의 지성은 서로 다를지 모르나 온 인류에게 똑같이 신답고 영원한 영이 깃드느니라. 권위를 내세우는 갈라지는 지성의 종교들 속에, 사람을 하나가 되게 하고 고귀하게 만드는 영의 종교―개인이 영적 체험을 얻는 종교―가 침투하고 압도할 때에야, 그리고 그렇게 됨에 따라서, 인간이 형제가 되는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느니라.
155:6.9 (1732.2) 권위의 종교는 오직 사람들을 갈라놓고 양심적으로 서로 맞서는 대열에 서게 하며, 영의 종교는 점진적으로 사람들을 함께 모으고, 서로 이해하는 태도로 공감하게 하느니라. 권위의 종교는 사람들에게 신조(信條)가 한결같기를 요구하지만, 이것은 현재의 세계 상태에서 실현이 불가능하니라. 영의 종교는 오직 체험이 하나되기―운명이 한결같기―를 요구하고, 신조의 다양성을 충분히 허락하느니라. 영의 종교는 관점과 전망이 한결같은 것이 아니라 오직 통찰력이 한결같기를 요구하느니라. 영의 종교는 지적 관점이 한결같기를 요구하지 않고, 오직 영의 느낌이 하나되기를 요구하느니라. 권위의 종교는 굳어져서 생명이 없는 신조들로 변하며, 한편 영의 종교는 성장해서, 사랑으로 봉사하고 자비를 베푸는 행위, 사람을 고귀하게 만드는 일을 하는, 늘어나는 기쁨과 자유로 이끄느니라.
155:6.10 (1732.3)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이 전통적으로 무력한 이러한 불운을 만났다고 해서 너희 중 누구도 저희를 가벼이 여기지 않도록 경계하라. 우리의 조상은 하나님을 집요하게 열심히 찾느라고 헌신했고, 아담 시절 이후로 어떤 다른 민족도 저희가 찾아낸 만큼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나, 아담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므로 이를 많이 알았느니라. 내 아버지는 모세의 시절 이후로,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투쟁, 길고도 지칠 줄 모르는 이스라엘의 투쟁을 놓치지 않고 주목해 왔느니라. 지친 여러 세대 동안에, 유대인은 그침없이 수고하고 땀 흘리고 신음하고 진통을 겪었고, 오해받고 경시(輕視)당한 민족의 고통을 견디고 서러움을 겪었으며, 이 모두가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발견하는 데 조금 더 가까이 가기 위한 것이었느니라. 이스라엘이 온갖 실패와 실수를 겪었어도, 점진적으로 모세로부터 아모스와 호세아 시절까지, 우리의 조상은 온 세계에 영원한 하나님의 그림, 갈수록 더 맑고 참된 그림을 늘 드러냈느니라. 그리하여 아버지의 더 큰 계시를 받기 위하여 길이 준비되었으며, 너희는 그 계시를 함께 가지라고 부름받았느니라.
155:6.11 (1732.4) 살아 계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더 만족스럽고 떨리는 모험이 오직 하나 있음을 잊지 말지니, 곧 신의 뜻을 행하려고 정직하게 애쓰는 최상의 체험이라. 땅에서 어떤 직업을 가져도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음을 반드시 기억하라. 어떤 직업은 거룩하지 않고 어떤 것은 세속적이라. 영에게 인도받는 자, 다시 말해서, 진리에 복종하고 사랑으로 고귀하게 되며, 자비에 지배되고 공정으로―정의로―몸을 삼가는 자의 생활에는 모든 것이 거룩하니라. 내 아버지와 내가 세상으로 보낼 영은 진리의 영일 뿐 아니라 또한 이상과 같이 아름다운 영이라.
155:6.12 (1732.5) 너희는 신학적 권위가 있는, 오래 된 기록의 페이지에서만 하나님의 말씀 찾기를 그쳐야 하느니라. 하나님의 영에게서 태어난 자는, 어디에 기원이 있는 듯 보이는가에 상관 없이,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헤아릴지니라. 말씀을 주신 경로가 인간을 통한 듯 보인다고 해서 그 신성한 진리를 깎아내려서는 안 되느니라. 너희 형제 중에 다수가 하나님에 관한 이론(理論)을 받아들이는 머리를 가졌어도, 영적으로 하나님의 계심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진지한 어린아이의 영적 태도를 얻어야 하늘나라를 최선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너희에게 그리 자주 가르친 까닭이라. 너희에게 권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정신적 미숙함이 아니라, 오히려 쉽게 믿고 완전히 의지하는 어린아이의 그러한 영적 단순성이라. 하나님의 사실에 관하여 너희가 알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심을 느끼는 능력이 더욱 자라야 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으니라.
155:6.13 (1733.1) 일단 너희의 혼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기 시작하면, 너희는 당장에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의 혼에서 비로소 발견하고 궁극에는 막대한 우주의 모든 인간과 창조에서 발견하리라. 그러나 그런 영원한 실체를 깊이 생각하는 데 거의 또는 도무지 시간을 쓰지 않는 사람들의 혼 속에서 아버지가 최상으로 충실하고 신다운 이상적 하나님으로서 나타날 무슨 가망이 있느냐? 지성은 영적 성품이 거할 자리는 아니어도, 지성은 정말로 거기에 이르는 출입구이라.
155:6.14 (1733.2)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을 찾아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려고 애쓰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너희는 의식하여 그런 정당한 증명을 내놓을 수 없느니라. 하지만 너희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고 힘차게 보여주는 두 가지 증거가 있으니 다음과 같으니라:
155:6.15 (1733.3) 1. 날마다 너의 일상 생활에서 나타나는, 하나님 영(靈)의 열매.
155:6.16 (1733.4) 2. 너의 전 생애의 계획이 영원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희망을 추구하면서, 죽은 뒤에 살아남는 모험에 너 자신 모두, 그리고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걸었다는 분명한 증명을 마련해준다는 사실. 그 하나님의 계심을, 때에 맞게 너는 미리 맛보았느니라.
155:6.17 (1733.5) 자, 잘못 알아듣지 말지니, 내 아버지는 꺼질 듯 가물거리는 아주 가냘픈 믿음에도 늘 반응하시리라. 그는 원시인의 육체적인 미신(迷信) 감정도 주목하시니라. 믿음이 아주 약하여 권위의 종교에 수동적으로 찬성하는 태도, 지적 순응에 지나지 않는 그러한 믿음을 가진 자, 정직해도 두려워하는 자의 경우에, 아버지를 향하여 손을 뻗으려는 어떤 그러한 미약한 시도까지도 허락하고 길러주려고 아버지는 늘 깨어 계시니라. 그러나 어둠에서 빛으로 부름받은 너희에게는 마음을 다하여 믿는 것이 기대되느니라. 너희의 믿음이 육체ㆍ지성ㆍ영, 이 셋의 통합된 태도를 지배할지니라.
155:6.18 (1733.6) 너희는 내 사도요, 너희에게 종교는 영적 진보와 이상적 모험이 있는 험난한 현실에 부딪치는 것이 두려워, 너희가 달아나서 지내도 좋은 그러한 신학적 피난처가 되지 말지니라. 그러나 차라리 너희의 종교는 진정한 체험하는 사실이 될지니, 그런 사실이 하나님이 너희를 발견하고, 이상으로 만들고, 고귀하게 하고, 영답게 변화시켰음을 증거하며, 이렇게 너희를 발견하고 아들 삼은 하나님을 발견하는 영원한 모험을 하려고 너희가 지원하였음을 증거하느니라.
155:6.19 (1733.7) 말씀을 마치고 나서, 예수는 안드레에게 손짓하고 페니키아를 향하여 서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갈 길을 재촉하자.”
156:0.1 (1734.1) 6월 10일 금요일 오후에, 예수와 동료들은 시돈의 근방에 다다랐고, 거기서 어느 부유한 여인의 집에서 멈추었는데, 그 여자는 예수의 인기가 절정에 있던 시절에, 벳세다 병원에서 환자였던 적이 있었다. 전도사와 사도들은 바로 근처에, 그 여자의 친구들 집에 투숙했고, 그들은 이 신선한 환경 속에서 안식일 동안 쉬었다. 북쪽으로 해안가 도시들을 방문하려고 준비하기 전에, 시돈과 근처에서 거의 2주 반을 지냈다.
156:0.2 (1734.2) 이 6월의 안식일은 대단히 조용한 날이었다. 전도사와 사도들은 시돈으로 가는 길에 들은 강론, 종교에 대한 주의 강론에 관하여 명상하느라고 아주 몰두해 있었다. 모두 예수가 일러준 것을 얼마큼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아무도 그 가르침의 의미를 완전히 깨닫지 못했다.
156:1.1 (1734.3) 주가 묵고 있던, 카루스카의 집 근처에, 한 시리아 여인이 살았는데, 예수가 큰 치유자요 선생이라는 소문을 많이 들었고, 이 안식일 오후에 어린 딸을 데리고 건너왔다. 열두 살쯤 된 이 아이는 발작과 기타 비참한 증세의 특징이 있는, 심한 신경 질환으로 앓고 있었다.
156:1.2 (1734.4) 예수는 쉬고 싶다고 설명하면서, 동료들에게 그가 카루스카의 집에 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들은 주의 명령에 복종했지만, 카루스카의 종은 이 시리아 여인 노라나의 집으로 건너가서, 예수가 자기 여주인의 집에 묵고 있다고 알려주었고, 안달하는 이 어머니가 병든 딸을 데려와서 치료받으라고 재촉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어머니는 딸이 악마, 더러운 귀신에 들렸다고 믿었다.
156:1.3 (1734.5) 노라나가 딸과 도착했을 때, 알패오 쌍둥이는 어느 통역을 통해서 주가 쉬고 있으며 방해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노라나는 주가 휴식을 마칠 때까지 아이와 함께 바로 거기서 남아 있겠다고 대답했다. 베드로도 알아듣도록 설명하고 집으로 가라고 설복하려고 애썼다. 많이 가르치고 병 고친 것 때문에 예수가 지쳤다, 한동안 조용히 있고 쉬려고 페니키아로 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쓸데없었다. 노라나는 떠나려 하지 않았다. 베드로의 간청에 그 여자는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당신의 주를 만날 때까지 떠나지 않겠소이다. 그가 내 아이에게서 악귀를 내쫓을 수 있음을 알고 치유자가 내 딸을 보기까지 가지 않겠소이다.”
156:1.4 (1734.6) 다음에 토마스가 그 여자를 보내려고 애썼지만 실패를 겪었을 뿐이다. 토마스에게 그 여자는 말했다: “내 아이를 괴롭히는 이 악귀를 당신의 주가 내쫓을 수 있다고 믿나이다. 그가 갈릴리에서 위대한 일을 하셨다고 소문을 들어 왔고, 나는 그를 믿나이다. 제자인 당신들한테 무슨 일이 생겼기에, 당신 선생의 도움을 얻으려고 오는 자들을 당신들이 돌려보내려 하나이까?” 그 여자가 이렇게 말하고 나자 토마스는 물러났다.
156:1.5 (1735.1) 그리고 나서 노라나를 타이르려고 열심당원 시몬이 앞으로 나섰다. “여자여, 너는 그리스 말을 하는 이방인이라. 은혜 받은 집의 아이들에게 주려고 생각한 빵을 가져다 주가 개들에게 던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라.” 그러나 시몬의 공격에 노라나는 기분 상하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예 선생이여,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나이다. 유대인의 눈에 나는 개밖에 안 되어도 당신의 주에 관해서 말하면, 나는 믿는 개이나이다. 그가 내 딸을 보도록 하겠다고 작정했사오니, 내 딸을 보시기만 하면 딸을 고치리라 내가 믿음이니이다. 당신조차도, 선한 사람이여, 아이들의 식탁에서 어쩌다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는 특권을 개한테서 감히 빼앗으려 하지 않으리이다.”
156:1.6 (1735.2) 바로 이때 그 어린 여자아이는 모두 앞에서 사나운 경련을 일으켰고, 그 어머니는 외쳤다: “저런, 여러분은 내 아이가 악귀에 들린 것을 볼 수 있나이다. 우리의 필요가 여러분에게 감명을 주지 않으면 당신들의 주께는 호소하리이다. 그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이방인조차도 믿을 때는 감히 고친다는 말을 내가 들어왔나이다. 당신들은 그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나이다. 내 아이가 고침을 받을 때까지 가지 않겠나이다.”
156:1.7 (1735.3) 열린 창문을 통해서 이 대화를 모두 들은 예수는 그들이 깜짝 놀라도록 이제 바깥으로 나와서 말했다: “아 여자여, 네 믿음이 크니라. 너무 큰즉 네가 바라는 것을 주지 않을 수 없도다. 평안히 네 길을 가라. 너의 딸은 이미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 어린 여자아이는 그 시각부터 나았다. 노라나와 아이가 떠나자, 예수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동료들은 이 요청을 따랐지만, 그 어머니와 아이는 온 시골에 두루, 또 시돈에서도, 어린 여자아이가 병이 나은 사실을 그치지 않고 외쳤다. 너무 지나쳐서 예수는 며칠 안에 숙소를 바꾸는 것이 상책임을 깨달았다.
156:1.8 (1735.4) 이튿날 사도들을 가르칠 때, 예수가 시리아 여인의 딸을 치유한 것을 논평하면서 말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계속 그래 왔느니라. 이방인들이 하늘나라 복음의 가르침에 담긴 유익한 믿음을 어떻게 쓸 수 있는가 너희 스스로 보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이르노니,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충분한 믿음을 보일 생각이 없으면 이방인이 그 나라를 차지할지니라.”
156:2.1 (1735.5) 시돈으로 들어가면서, 예수와 동료들은 다리를 건너갔다. 그들 중 여럿이 처음 본 다리였다. 이 다리 위를 걸으면서, 예수는 다른 말씀 중에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은 오직 다리이라. 너희는 다리를 지나가도 좋지만 그 위에 거처를 지을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느니라.”
156:2.2 (1735.6) 스물네 사람이 시돈에서 수고를 시작하자, 예수는 도시의 바로 북쪽에 있는 어느 집, 주스타와 그 어머니 버니스의 집에 묵으려고 갔다. 아침마다 주스타의 집에서 예수는 스물네 사람을 가르쳤고, 그들은 오후와 저녁에 시돈에서 가르치고 전도하러 바깥으로 나갔다.
156:2.3 (1735.7) 사도와 전도사들은 전하는 말씀을 시돈의 이방인이 받아들이는 태도에 크게 기운을 얻었다. 짧게 머무르는 동안,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에 더해졌다. 페니키아에서 보낸 약 6주 동안의 이 기간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에 대단히 수확이 많았지만, 후일에 복음서를 쓴 유대인 저자들은, 바로 예수의 민족 가운데 그렇게 큰 무리가 적대하는 대열에 선 바로 그때, 이 이방인들이 그의 가르침을 이렇게 따듯하게 받아들였다는 기록을 가볍게 지나치는 버릇이 있었다.
156:2.4 (1736.1) 여러 면에서 이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보다 예수의 가르침을 더 잘 알아들었다. 그리스어를 하는 많은 이 시리아ㆍ페니키아인들은 예수가 하나님 같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예수 같음을 알게 되었다. 이른바 이 이교도(異敎徒)는 이 세상과 전체 우주의 법칙이 한결같다는 주의 가르침을 잘 알아들었다. 하나님은 사람이나 민족이나 나라를 차별하는 분이 아니다, 우주의 아버지는 조금도 편애하지 않는다, 우주는 전적으로 항상 법을 지키고 어김없이 믿을 만하다는 가르침을 깨달았다. 이 이방인들은 예수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전하는 말씀을 감히 받아들였다. 오랜 세월을 통해서 계속, 사람들은 예수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156:2.5 (1736.2) 예수는 적과 대결할 용기가 모자라서 갈릴리에서 달아나지 않았다는 것을 스물네 사람에게 분명히 설명했다. 그가 기존의 종교와 드러내놓고 충돌할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다, 순교자가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이해했다. 주스타의 집에 있었던 이 회의 중 하나에서 주는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말했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지라도, 내 진리의 말은 사라지지 아니할지니라.”
156:2.6 (1736.3) 시돈에서 머무르는 동안 예수의 가르침의 주제는 영적 진보였다. 그들이 가만히 서 있을 수 없다, 의로운 가운데 전진하든지, 죄와 악의 길로 후퇴하든지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날에 있었던 것들을 잊어버리고, 한편 너희는 하늘나라의 더 큰 현실을 붙잡기 위하여 앞으로 나가라”고 훈계했다. 복음을 배우는 어린아이 시절에 만족하지 말고, 영과 교통이 있는 가운데, 그리고 신자들과 친교하는 가운데, 신의 아들이 되는 어른 높이에 도달하기까지 애쓰라고 타일렀다.
156:2.7 (1736.4) 예수는 말했다: “내 제자들은 악한 일을 그칠 뿐 아니라, 좋은 일 하기를 배워야 하느니라. 의식해서 저지르는 모든 죄로부터 깨끗하게 될 뿐 아니라, 죄를 지었다는 느낌조차 마음에 품지 말아야 하느니라. 죄를 고백하면 그 죄가 용서되나니, 그런즉 너희는 죄짓지 않는 양심을 지켜야 하느니라.”
156:2.8 (1736.5) 예수는 이 이방인들이 나타낸 날카로운 유머 감각을 크게 기뻐했다. 시리아 여인 노라나의 크고 집요한 믿음 뿐 아니라 그 여자가 드러낸 유머 감각이 주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의 자비에 호소했다. 그의 민족―유대인―이 유머가 아주 모자라서 주는 크게 서운해 하였다. 한때 토마스에게 말했다: “내 민족은 자신들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고 유머를 거의 알아듣지 못하느니라. 바리새인의 짐스러운 종교는 유머 감각을 가진 민족 사이에서 생길 수 없었느니라. 저희는 또한 일관성이 모자라니,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156:3.1 (1736.6) 6월 28일 화요일에 주와 동료들은 시돈을 떠나서 포르피리온과 헬두아까지 해안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방인들은 그들을 후하게 접대하였고, 가르치고 전도하는 이 주간에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에 더해졌다. 사도들은 포르피리온에서 전도하고 전도사들은 헬두아에서 가르쳤다. 스물네 사람이 이렇게 일에 분주한 동안, 예수는 사나흘 동안 그들을 떠나서 해안 도시 베이룻을 방문했는데, 거기서 말락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리아인과 이야기했으며, 그는 믿는 사람이었고 지난해에 벳세다에 있었다.
156:3.2 (1737.1) 7월 6일 수요일에 그들 모두 시돈으로 돌아왔고 일요일 아침까지 주스타의 집에서 머물렀으며, 이때 티레를 향하여 떠나, 사렙타의 길로 해안을 따라서 남으로 내려갔고, 7월 11일 월요일에 티레에 도착했다. 이때가 되자 사도와 전도사들은 이른바 이 이방인(異邦人) 사이에서 일하는 데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들은 실제로, 더 거슬러 올라가 셈족 기원을 가졌던 초기 가나안 부족들로부터 주로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이 민족들은 모두 그리스어를 썼다. 이 이방인들이 복음을 열심히 듣는 것을 지켜보고, 다수가 쉽게 믿음을 주목한 것은 사도와 전도사들에게 크게 놀라운 일이었다.
156:4.1 (1737.2) 7월 11일부터 7월 24일까지 그들은 티레에서 가르쳤다. 사도들은 각자 전도사 한 명을 데리고 갔고, 이렇게 둘씩 티레의 온 구석과 그 주위에서 가르치고 전도했다. 이 바쁜 항구 도시에서 여러 나라 말을 쓰는 주민은 말씀을 기쁘게 들었고,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고 공개적으로 하늘나라의 친교에 들어갔다. 예수는 요셉이라는 유대인 집에서 본부를 유지했다. 이 신자는 티레에서 남쪽에 5, 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거기는 다윗과 솔로몬의 시절에, 도시 국가 티레의 임금이었던 히람의 무덤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156:4.2 (1737.3) 이 2주 동안, 날마다 사도와 전도사들은 조그만 모임을 열기 위하여 알렉산더의 방파제의 길을 거쳐 티레로 들어갔고, 밤마다 대부분은 도시의 남쪽, 요셉의 집에 있는 야영지로 돌아오곤 했다. 날마다 신자들이 예수가 쉬는 곳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도시에서 나왔다. 주는 겨우 한 번 티레에서 7월 20일 오후에 말씀했다. 그때 온 인류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에 관하여, 또 모든 종족의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드러내는 아들의 사명에 관하여 신자들에게 가르쳤다. 이 이방인들 사이에서 하늘나라 복음에 너무 관심이 많아서, 멜카트 성전의 문이 그에게 개방되었다. 이 고대의 성전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기독교 교회 하나가 후일에 세워졌음을 기록하는 것이 흥미 있다.
156:4.3 (1737.4) 티레의 자주 물감 제조업의 많은 유지(有志)가 하늘나라를 믿었다. 자주는 티레와 시돈을 세계에서 유명하게 만들고 그들의 세계적 상업과 그에 따른 부강(富强)에 아주 크게 이바지한 물감이었다. 그 뒤에 얼마 안 있어, 이 물감의 근원이었던 바다 동물의 공급이 줄어들기 시작했을 때, 물감 만드는 이 사람들은 이 조개의 새로운 서식처를 찾아서 떠났다. 이처럼 땅 끝까지 옮겨 다니면서, 하나님은 아버지요 사람은 형제라는 소식을―하늘나라의 복음을―가지고 갔다.
156:5.1 (1737.5) 이 수요일 오후에 연설하는 과정에서, 예수는 따르는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백합 이야기를 했다. 백합은 밑에 있는 검은 흙 속에 썩은 물질과 거름 속에 뿌리를 내리지만, 순수하고 눈 같이 흰 꽃 송이를 햇빛 속에 높이 드러낸다. 그는 말했다: “마찬가지로, 필사자는 인간 성품의 동물같은 토양 속에 기원의 뿌리와 존재가 있지만, 믿음으로 영적 성품을 위로, 하늘 진리가 담긴 햇빛 속으로 올리고, 실제로 영의 고귀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느니라.”
156:5.2 (1738.1) 바로 이 설교를 하는 동안, 예수는 자기 직업―목수일―과 상관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비유를 썼다. “영적 자질을 가진 고귀한 인격의 성장을 위하여 기초를 튼튼히 세우라”고 훈계하는 과정에서 말했다: “영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너희는 영에게서 태어나야 하느니라. 친구들 사이에 영으로 채워진 인생을 살고자 하면, 영에게 가르침을 받고 영의 인도를 받아야 하느니라. 그러나 어리석은 목수의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벌레 먹고 안으로 썩고 있는 재목을 반듯하게 만들고, 재고, 반들반들하게 손질하느라고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나서, 튼튼하지 않은 들보에 이처럼 모든 수고를 퍼붓고 나서, 그 나무를 세월과 폭풍우의 공격을 견디기 위하여 지을 건물의 기초로 쓰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퇴짜놓아야 하느니라. 사람마다 인격의 지적ㆍ도덕적 기초가 그 상부(上部) 구조, 사람을 키우고 고상하게 하는 영적 성품을 적절히 떠받치는가 확인하여라. 영적 성품은 이처럼 필사 지성을 변화시키고, 다시 만들어진 그 지성과 결합하여, 불멸의 운명을 가진 혼을 생성하리라. 너희의 영적 성품―합동으로 창조된 혼―은 살아 있고 자라는 것이지만, 개인의 지성과 도덕률은 그 토양이요, 그로부터 인간을 발전시키고 신다운 운명을 가진 이러한 상급 명시가 솟아나야 하느니라. 진화하는 혼이 담긴 그 토양은 인간답고 물질이지만, 지성과 영을 통합한 이 사람의 운명은 영답고 신다운 것이라.”
156:5.3 (1738.2) 바로 이날 저녁에 나다니엘은 예수에게 물었다: “주여, 어찌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으로 이끌지 말라고 우리가 기도하나이까? 우리는 당신이 아버지를 계시하는 것을 보고서 아버지가 그런 일을 결코 하지 않는 줄 잘 아나이다.” 예수는 나다니엘에게 대답했다:
156:5.4 (1738.3) “초기에 히브리 선지자들이 아버지를 아주 어렴풋이 본 것과 달리,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이 네가 비로소 아버지를 아는 것을 보니, 그리 묻는 것이 이상하지 않도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거의 모든 일 중에 우리 조상이 어떻게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였는가 너희가 잘 아느니라. 우리 조상은 모든 자연 현상에, 또 인간 체험의 모든 특별한 사건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는가 찾았느니라. 저희는 하나님을 선과 악, 양쪽에 연결지었느니라. 하나님이 모세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파라오의 마음을 굳어지게 했다고 생각하였느니라. 좋든 나쁘든, 무슨 일을 몹시 하고 싶은 욕구를 가졌을 때, 사람은 ‘주가 이리저리 하라, 아니면 어디어디로 가라 내게 말씀하였도다’하고 논평하면서 이 특별한 감정을 설명하는 버릇이 있었느니라. 따라서 사람들이 아주 빈번히, 아주 맹렬히 유혹에 빠졌으므로, 우리 조상은 하나님이 시험하거나 벌주거나 힘을 북돋우려고 하나님이 그 방향으로 이끈다고 믿는 것이 버릇이 되었으나, 정말로 이제 너희가 더 잘 아느니라. 자신의 이기심의 재촉에 따라서, 동물 성질의 충동에 따라서, 사람들이 너무나 자주 유혹(誘惑)에 빠지는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이런 방법으로 유혹을 받을 때, 내가 너희에게 훈계하노니, 그 유혹이 도대체 무엇인가 정직하게 진지하게 인식하는 한편, 어떻게 표현할까 찾고 있는 영ㆍ지성ㆍ육체의 에너지를 한층 더 높은 경로로, 더 이상적 목표로 총명하게 다시 방향을 돌리라. 이 방법으로 동물 성품과 영 성품 사이에, 쓸데없고 사람을 약화시키는 투쟁을 거의 온전히 피하면서, 유혹을 필사자의 가장 높은 종류의 봉사, 격려하는 봉사로 변화시킬 수도 있느니라.
156:5.5 (1738.4) “그러나 단순히 인간 의지의 힘을 통해서, 한 가지 욕구를 더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다른 욕구로 대체하려는 노력으로 유혹을 이기려고 시도하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너희에게 경고하노라. 못되고 낮은 성질의 유혹을 참으로 이기고 싶으면, 너희가 유혹이라고 인식하는 행동, 낮고 이상적이지 못한 이 행동 버릇을 버리고 너희의 정신이 대신 얻고 싶어 하는, 높고 더 이상적인 행위 형태에 실제 관심을 정말로 참으로 개발하고, 또 이를 사랑하게 된 영적으로 유리(有利)한 장소로 너희가 와야 하느니라. 필사자의 욕구를 속여 억압하는 짐에 너희가 더욱 눌려 지내기보다 오히려, 이 방법으로 영적 변화를 통해서 너희는 구원을 받으리라. 낡고 열등한 것은 새롭고 우수한 것을 사랑하는 가운데 잊혀지리라. 진리를 사랑함으로 빛을 받는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서 아름다움은 언제나 더러움을 이기느니라. 새롭고 진지한 영적 애정의 분출하는 에너지에 막대한 힘이 있느니라.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에 지지 말고,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라.”
156:5.6 (1739.1) 밤이 늦도록 사도와 전도사들은 계속 질문했고, 많은 대답으로부터 우리는 현대의 표현법으로 다시 말하여, 다음 여러 생각을 제시하려 한다:
156:5.7 (1739.2) 강력한 포부, 총명한 판단, 경험을 쌓아 얻은 지혜는 물질적 성공에 필수이다. 지도력은 타고난 능력과 신중함, 의지력과 결심에 달려 있다. 영적 운명은 믿음ㆍ사랑ㆍ진리에 바치는 헌신에―올바름을 갈급히 목마르게 찾는 데―하나님을 찾아내고 그와 같이 되려 하는, 마음을 다한 소망에 달려 있다.
156:5.8 (1739.3) 너희가 인간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낙심하지 말라. 인간 성품은 잘못하는 경향이 있을지 모르지만 본래부터 죄로 차 있지 않다. 유감스러운 체험을 더러 잊으려는 데 온전히 실패한다고 낙심하지 말라. 세월이 지나도 네가 잊지 못하는 잘못은 영원 속에서 잊혀지리라. 네 운명에 대하여, 네 생애가 우주에서 펼쳐지는 장거리 관점을 빨리 얻음으로 네 혼의 짐을 가볍게 하라.
156:5.9 (1739.4) 정신의 불완전이나 육체의 욕구에 따라서 혼의 가치를 평가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단 하나의 불행한 인간적 사건의 기준으로 혼을 판단하거나 그 운명을 평가하지 말라. 영적 운명은 네가 영적으로 동경(憧憬)하는 것과 그 목적에 따라서 좌우된다.
156:5.10 (1739.5) 종교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진화하는 불멸의 혼이 겪는 순전히 영적 체험이지만, 도덕적 힘과 영적 에너지는 어려운 사회 상황에 대처하고, 까다로운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용될 수 있는 힘찬 세력이다. 이 도덕적ㆍ영적 자질은 어떤 수준의 인간 생활도 더욱 부유하고 의미 있게 만든다.
156:5.11 (1739.6)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기를 배우면, 너희는 옹졸하고 초라한 인생을 살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다. 인간의 사랑은 정말로 서로 주고받는 것일까 싶지만, 신의 사랑은 어떤 만족을 추구하더라도 바깥을 향한다. 어떤 사람의 성품에 사랑이 적을수록 사랑의 필요는 더욱 커지고, 신의 사랑은 그러한 필요를 채우려고 더욱 애쓴다. 사랑은 결코 자아를 찾지 않으며, 자신에게 줄 수 없다. 신의 사랑은 스스로 억제할 수 없으며, 그 사랑은 사심(私心) 없이 남에게 주어야 한다.
156:5.12 (1739.7) 하늘나라를 믿는 자는 올바름이 확실히 승리한다는 절대적 믿음, 혼을 다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하늘나라를 세우는 자는 영원한 구원의 복음이 진리인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신자들은 경건한 교통을 가짐으로 혼을 새롭게 하고, 지성을 북돋우고 영을 새롭게 하면서, 생활의 급류(急流)로부터 어떻게 훌쩍 물러나는가―물질적 존재에서 사람을 성가시게 하는 것들을 피하는가―를 더욱 배워야 한다.
156:5.13 (1739.8)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불행에 닥쳐 낙심하거나 실망으로 기가 꺾이지 않는다. 믿는 자는 순전히 물질적 격변의 결과로서 생기는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 영적 인생을 사는 자는 물질 세계의 사건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다. 영생(永生)을 얻고자 하는 자는 필사자의 생활에서 온갖 변천과 골칫거리에 대처하는 기법, 활력을 불어넣는 건설적 기법을 실천하는 자이다. 참 신자는 날마다 살면서, 바른 일 하기가 더욱 수월해짐을 발견한다.
156:5.14 (1740.1) 영적 생활은 참된 자존심을 힘차게 키운다. 그러나 자존심은 자아를 찬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존심은 사람의 동료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봉사하는 것과 언제나 나란히 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너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하나가 다른 하나의 능력을 재는 척도이다.
156:5.15 (1740.2)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모든 참된 신자는 동료들이 영원한 진리를 사랑하도록 유혹하는 데 더욱 솜씨가 늘어난다. 너는 어제보다 오늘, 인류에게 선(善)을 드러내는 일에 더 주변이 좋은가? 너는 지난해보다 올해에 올바름을 권장하는 데 더 나아지고 있는가? 갈급한 혼을 영의 나라로 인도하는 너의 솜씨가 갈수록 더 예술적이 되는가?
156:5.16 (1740.3) 필사 동료들과 제휴하여 땅에서 너를 쓸모 있는 시민으로 활동하도록 너의 생각이 실용적이고, 한편 너의 영원한 구원을 보장하도록 너의 이상(理想)이 충분히 높은가? 영적으로 너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지만, 육체를 입고서 너희는 아직도 땅의 나라의 시민이다. 물질인 것을 케자에게 돌리고, 영적인 것을 하나님께 돌리라.
156:5.17 (1740.4) 진화하는 혼의 영적 능력을 재는 척도는 진리를 믿는 너의 믿음과 사람에게 주는 너의 사랑이지만, 인격의 인간적 힘을 재는 척도는 불평을 품지 않으려는 능력이요, 깊은 슬픔을 닥쳐서 속을 끓이지 않고 견디는 능력이다. 패배는 너의 진정한 자아를 정직하게 볼 수 있는 참된 거울이다.
156:5.18 (1740.5) 너희가 더 나이 들고 하늘나라 일에 숙련됨에 따라서, 너희는 문제 있는 필사자를 다루는 데 더 요령이 생기고 완고한 동료들과 함께 사는 데 더욱 관대해지는가? 요령(要領)은 사회적 지렛대에 받침이요, 관용은 위대한 사람을 가리키는 표시이다. 드물고 매력 있는 이 두 선물을 가지면,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온갖 필요 없는 사회적 오해를 피하는 귀중한 노력을 기울이면서 너희는 더욱 민첩하고 숙달될 것이다. 그러한 지혜로운 사람은 많은 어려움을 피할 수 있고, 감정 조절이 모자라는 자, 성장하려고 하지 않는 자, 품위 있게 늙으려 하지 않는 자는 모두 분명히 그런 어려움을 상당히 배당받을 것이다.
156:5.19 (1740.6) 진리를 전파하고 복음을 선포하려고 너희가 온갖 노력을 기울이면서, 거짓과 불공정을 피하라. 땀 흘리지 않고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마땅치 않은 동정을 바라지 말라. 사랑하라, 너희의 공적과 상관 없이, 신과 인간의 자원으로부터 거리낌없이 받고, 그 보답으로 아낌없이 사랑하라. 그러나 명예와 칭찬에 관계된 모든 다른 일에는 정직하게 오직 너희에게 속하는 것만 구하라.
156:5.20 (1740.7) 하나님을 의식하는 필사자는 구원받음을 확신한다. 그는 인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정직하고 한결같다. 피할 수 없는 괴로움을 어떻게 용감히 견디는가 알고, 어쩔 수 없는 어려움이 닥칠 때 투덜거리지 않는다.
156:5.21 (1740.8) 참된 신자는 벽에 부딪친다고 해서 좋은 일 하는 데 지치지 않는다. 어려움은 진리를 사랑하는 자의 열심을 돋우며, 한편 장애물은 겁 없는 하늘나라를 세우는 자의 노력을 자극할 뿐이다.
156:5.22 (1740.9) 그리고 티레를 떠나려고 준비하기 전에 예수는 다른 여러 가지를 가르쳤다.
156:5.23 (1740.10) 갈릴리 바다 지역으로 돌아오려고 티레를 떠나기 전날에, 예수는 동료들을 불러모으고, 그와 열두 사도가 가기로 한 길과 다른 길로 돌아가라고 열두 전도사에게 지시했다. 여기서 예수를 떠난 뒤에 전도사들은 결코 다시 그렇게 가까이 주와 함께 지내지 못했다.
156:6.1 (1741.1) 7월 24일 일요일 정오 무렵에 예수와 열두 사람은 티레의 남쪽에 요셉의 집을 떠나서, 해안가를 따라 프톨레마이스로 내려갔다. 여기서 하루 묵었고, 거기에 사는 신자들 일행에게 위로하는 말씀을 주었다. 베드로는 7월 25일 저녁에 그들에게 설교했다.
156:6.2 (1741.2) 화요일에 프톨레마이스를 떠나서, 티베리아스 길을 경유하여 요타파타 가까운 곳까지 내륙으로 동쪽으로 갔다. 수요일에 요타파타에서 멈추었고, 신자들에게 하늘나라 일에 대하여 더 가르쳤다. 목요일에 요타파타를 떠나서, 스불론 마을까지 나사렛-레바논산을 잇는 길에서 북쪽으로 라마의 길로 갔다. 금요일에 라마에서 모임을 가졌고 안식일 동안 남아 있었다. 31일 일요일에 스불론에 이르렀고, 그날 저녁에 모임을 열었으며, 이튿날 아침에 떠났다.
156:6.3 (1741.3) 스불론을 떠나면서, 기스칼라 가까이 막달라-시돈 길과 만나는 교차점까지 여행했고, 거기서부터 갈릴리 호수의 서쪽 해안에 가버나움 남쪽에 있는 게네사렛으로 갔다. 거기서 다윗 세베대와 만나기로 전에 약속했는데, 거기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과제에서 다음에 취해야 할 행동에 관하여 의논할 생각이었다.
156:6.4 (1741.4) 다윗과 잠깐 회의하는 동안에, 그들은 케레사 가까이 호수의 맞은편에 그때 많은 유지(有志)가 함께 모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바로 그날 저녁에 배 한 척이 그들을 건너편으로 날랐다. 그들은 하루 동안 고지에서 조용히 쉬었고, 이튿날 가까이 있는 공원으로 갔으며 여기는 주가 한때 5천 명을 먹인 곳이다. 여기서 사흘 동안 쉬고, 날마다 회의를 열었으며, 여기에 남녀가 약 50 명 참석했다. 이들은 가버나움과 그 부근에서 살던, 한때 허다했던 신자 무리의 나머지였다.
156:6.5 (1741.5) 예수가 가버나움과 갈릴리에서 자리를 비운 동안, 페니키아에서 머무른 동안에, 적들은 그 운동 전체가 소탕되었다고 보았고, 예수가 급히 물러난 것은 그가 너무 소스라치게 놀라서 언제라도 돌아와서 그들을 성가시게 굴 듯하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의 가르침에 대한 어떤 적극적 반대도 거의 가라앉았다. 신자들은 다시 한 번 공개 모임을 열기 시작했고, 복음 신자들이 막 거친 큰 시련을 통해서 단련받고 정말로 견딘 자들 사이에서 차츰차츰, 그러나 효과적 단결이 생기고 있었다.
156:6.6 (1741.6) 헤롯의 형제 빌립은 건성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고, 주가 그의 영토 안에서 자유롭게 살고 일해도 된다는 말을 보내 왔다.
156:6.7 (1741.7) 예수와 모든 추종자가 가르침을 전하지 못하도록 온 유대 민족의 회당 문을 닫으라는 명령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논쟁의 대상인 예수가 스스로 자리를 비우고 나서 즉시, 유대 민족 전체에서 반작용이 일어났다. 예루살렘의 바리새인과 산헤드린 지도자들에 대하여 분개심이 널리 퍼졌다. 많은 회당 지도자가 아브너와 그 동료들에게 몰래 회당(會堂)을 열기 시작했고, 그들은 이 선생들이 요한의 추종자요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156:6.8 (1741.8) 헤롯 안티파스조차 마음이 움직였다. 예수가 그의 형제 빌립의 영토에서 호수 건너편에 체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가 갈릴리에서 예수를 잡아들일 영장(令狀)에 서명한 적이 있지만, 페레아에서 그를 잡으라고 그렇게 허가하지는 않았다는 말을 보내 왔으며, 따라서 갈릴리 바깥에 남아 있으면 예수를 괴롭히지 않으리라는 것을 가리켰다. 그는 바로 이 판결을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알렸다.
156:6.9 (1742.1) 이것이 서기 29년 8월 1일 무렵의 형편이었다. 이때 주는 페니키아 전도에서 돌아와서, 땅에서 그의 사명에서 마지막이자 파란 많았던 이 한 해 동안에, 흩어지고 시험받고 고갈된 전도단을 다시 조직하기 시작했다.
156:6.10 (1742.2) 주와 동료들이 새 종교를 비로소 선포하려고 준비하는 동안, 투쟁의 논점에 뚜렷하게 선이 그어졌다. 이 종교는 사람들의 정신 속에 거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을 가르치는 종교였다.
157:0.1 (1743.1) 케자리아 빌립비 근처에서 잠시 머무르려고 열두 사도를 데리고 가기 전에, 예수는 다윗의 사자들을 통해서 8월 7일 일요일에 자기 가족을 만나려는 목적으로, 가버나움으로 가려고 주선했다. 미리 주선하여 이번에는 세베대의 배 작업장에서 만나기로 되었다. 다윗 세베대는 나사렛 가족 전부―마리아, 그리고 예수의 아우와 누이들 모두―가 오도록 동생 유다와 전에 약속했고, 이 약속을 지키려고 예수는 안드레와 베드로와 함께 갔다. 마리아와 아이들은 이 약속을 분명히 지킬 의도가 있었지만, 바리새인의 한 무리가 예수가 빌립의 영토에 호수 맞은편에 있음을 알고서, 할 수 있으면 예수가 어디에 있는가 알아내려고 어쩌다가 마리아를 방문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예루살렘 밀사들이 도착한 것은 마리아를 크게 언짢게 만들었다. 그들은 가족 전체의 긴장과 불안을 눈치채고서 예수가 그들을 찾아올 것을 기대하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밀사들은 마리아의 집에서 진을 치고, 증원 부대를 부른 뒤에, 예수가 도착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실질적으로 가족 중에 누구도 예수와 약속을 지키려는 시도를 못하게 만들었다. 몇 번이나 낮에 유다와 룻은 예수에게 소식을 전하려는 노력으로, 바리새인들의 경계를 피하려고 애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157:0.2 (1743.2) 오후에 일찍, 다윗의 사자들은 바리새인들이 어머니 집 문앞 계단에서 야영하고 있다는 말을 가져왔고, 따라서 예수는 가족을 찾아보려고 전혀 애쓰지 않았다. 그래서 또 다시, 어느 누구의 잘못도 없이, 예수와 땅에 있는 가족은 만나지 못했다.
157:1.1 (1743.3) 안드레와 베드로와 더불어, 예수가 배 작업장 가까이 호숫가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성전의 세리가 다가와서 예수를 알아보고서, 베드로를 옆으로 끌고 가서 말했다: “너의 주는 성전 세금을 물지 않느냐?” 적이라 선언한 자들의 종교 활동을 유지하는 데 예수가 돈 내기를 기대해야 한다는 제안에, 베드로는 분통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세리(稅吏)의 얼굴에서 야릇한 표정을 눈치챘고,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를 지원하는 데, 관례대로 반 세겔 내는 것을 거절하는 행위로 그들을 옭아매는 것이 목적임을 똑바로 짐작했다. 따라서 베드로는 대답했다: “뭐라고, 물론 주는 성전 세금을 내시느니라. 너는 문 옆에서 기다리라. 그러면 세금을 가지고 당장 돌아오겠노라.”
157:1.2 (1743.4) 자, 베드로는 말을 서둘러 뱉어 버렸다. 유다가 자금을 가지고 다녔고 그는 호수 건너편에 있었다. 베드로나 그의 형이나 예수도 돈 한 푼을 가져오지 않았다. 바리새인들이 그들을 찾고 있음을 아니까, 돈을 얻으러 벳세다로 쉽게 갈 수 없었다. 세리에 관하여, 그리고 그에게 자기가 돈을 내기로 약속했다고 베드로가 예수께 말씀드리자, 예수는 말했다: “약속했으면, 돈을 내야 하느니라. 그러나 네가 무슨 돈으로 약속을 지키겠느냐? 약속을 지키고자 다시 어부가 되려느냐? 그래도 베드로야, 우리가 세금 내는 것이 그 상황에 좋으니라. 이 사람들이 우리 태도에 성낼 핑계를 하나도 주지 말자. 우리는 여기서 기다릴 터이니, 그동안에 너는 배를 타고 가서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으라. 물고기를 저 건너 시장에 팔고 나서, 우리 셋 모두를 위하여 세리에게 돈을 내라.”
157:1.3 (1744.1) 가까이 서 있던 다윗의 비밀 사자가 이 모든 것을 엿들었고, 다음에 물가 가까이 고기잡고 있던 한 동료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려고 배를 타고 나가려고 준비했을 때, 이 사자(使者)와 친구 어부는 물고기가 든 큰 광주리 몇 개를 베드로에게 내밀었고, 베드로가 물고기를 근처의 생선 장수에게 나르는 것을 도왔다. 그 상인은 잡은 물고기를 샀고, 다윗의 사자가 보탠 것과 함께 세 사람의 성전 세금을 물기에 넉넉할 만큼 돈을 치렀다. 세리는 세금을 받았고 그들이 얼마 동안 갈릴리에서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늦게 낸 것에 대하여 벌금을 받지는 않았다.
157:1.4 (1744.2) 베드로가 입에 한 세겔을 물고 있는 한 물고기를 잡았다는 기록을 너희가 가진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 시절에 물고기 입에서 보물을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떠돌았다. 거의 기적 같은 그런 이야기는 보통이었다. 그래서, 베드로가 배를 향하여 떠나자, 예수는 반은 유머로 한마디 말씀하였다: “임금의 아들들이 세금을 내야 하다니 이상한지고. 보통은 궁정을 유지하려고 낯선 자가 세금을 물되, 우리가 전혀 당국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니라. 떠나라! 아마도 세겔을 입에 문 물고기를 네가 잡으리라.” 예수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베드로가 어느 틈에 세금을 가지고 나타났으니까, 마태 복음 저자가 기록한 바와 같이, 이 사건이 나중에 하나의 기적으로 불어난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157:1.5 (1744.3) 안드레와 베드로와 함께, 예수는 거의 해질 때까지 바닷가에서 기다렸다. 사자들은 마리아의 집이 아직도 감시받고 있다는 말을 가져왔다. 따라서, 어두워지자 기다리던 세 사람은 배를 타고 천천히 갈릴리 바다의 동쪽 해안을 향하여 저어갔다.
157:2.1 (1744.4) 8월 8일 월요일에, 예수와 열두 사도가 벳세다 줄리아스 가까이 마가단 공원에서 야영(野營)하는 동안에, 하늘나라를 세우는 데 관심을 가진, 1백 명이 넘는 신자와 전도사, 여인단,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회의에 참여하려고 가버나움에서 건너 왔다. 예수가 여기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또한 많은 바리새인이 왔다. 이때가 되자, 사두개인들 중에 더러는 바리새인들과 연합하여 예수를 옭아매려고 노력했다. 신자들과 비공개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예수는 공개 회의를 열었다. 거기에는 바리새인도 있었는데, 주에게 빈정대는 말을 던지고, 다른 방법으로 그 모임을 방해하려고 애썼다. 방해꾼들의 우두머리가 말했다: “선생이여, 당신이 가르칠 권한이 있다는 표징을 우리에게 주시기 바라나이다. 그리고 나서 그 표징이 일어나면, 하나님이 당신을 보내신 줄 모든 사람이 알겠나이다.” 예수는 대답했다: “저녁에는 하늘이 붉은즉 날씨가 좋으리라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찌푸리므로 날씨가 나쁘리라 너희가 말하느니라. 서쪽에서 구름이 올라오는 것을 볼 때, 너희는 소나기가 쏟아지리라, 바람이 남쪽에서 불 때, 너희는 타는 듯한 더위가 오리라 말하느니라. 너희가 하늘의 표정을 살필 줄 그리 잘 알면서 어찌하여 세월의 징조(徵兆)를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느냐? 진리를 알고자 하는 자에게는 표징을 이미 주었느니라. 그러나 나쁜 생각을 가진 위선(僞善)의 세대는 아무 표징을 받지 못하리라.”
157:2.2 (1745.1)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예수는 물러가서 추종자들과 가지는 저녁 회의를 위하여 준비했다. 이 모임에서, 그들이 제안한 대로 예수와 열두 사도가 케자리아 빌립비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데카폴리스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연합 전도를 개시하기로 결정이 내렸다. 주는 데카폴리스 전도 사업을 계획하는 데 참여했고, 그 무리를 해산하면서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저희가 많이 배웠음을 나타내는 데, 그리고 저희가 종교 형식에 깊이 충성하는 데 속지 말라. 살아 있는 진리의 영과 참된 종교의 힘에만 아랑곳하라. 죽은 종교의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나라의 영적 실체들을 맛보는 산 체험을 믿는 것이 너희를 구하리라. 바로 너희가 편견에 눈이 멀고 두려움에 몸이 마비되도록 버려두지 말라. 전통을 존중하는 것이 너희의 시력을 나쁘게 함으로 너희의 눈이 보지 못하고 귀가 듣지 못하게 만들지 말라. 참된 종교의 목적은 단지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진보를 보장하는 것이라. 너희가 마음을 다하여 진리를, 영원한 실체들의 이상(理想)을 사랑하는 데 빠지지 아니하면, 마음 속에 아무 평화도 없고 머리 속에 아무 진보도 없으리라. 삶과 죽음의 문제가―세월 속에 죄 많은 쾌락이 영원의 올바른 실체들과 대조가 되어―너희 앞에 놓여 있느니라. 믿음과 희망을 가진 새 인생을 살기 시작하면서, 지금도 너희는 두려움과 의심의 사슬을 비로소 벗어나야 하느니라. 동료 인간들을 위하여 봉사할 느낌이 혼 속에서 일어날 때, 그 숨통을 막지 말라. 이웃을 사랑하는 감정이 마음 속에서 솟구칠 때, 동료들의 진정한 필요에 총명하게 봉사함으로 그러한 애정의 욕구를 표현하라.”
157:3.1 (1745.2) 화요일 아침 일찍 예수와 열두 사도는 마가단 공원을 떠나서 케자리아 빌립비를 향했는데, 그 도시는 사분(四分) 영주 빌립의 영토의 서울이었다. 케자리아 빌립비는 놀랍게 아름다운 지역에 있었다. 이 도시는 요단강이 지하 동굴로부터 솟아나오는 경치 좋은 언덕 사이에, 황홀한 골짜기에 자리잡았다. 헤르몬산 꼭대기가 북쪽에 완전히 모습이 드러났고, 한편 언덕으로부터 바로 남쪽에 요단강 상류와 갈릴리 바다의 장대한 경치가 보였다.
157:3.2 (1745.3) 하늘나라의 일을 초기에 경험하면서 예수는 헤르몬산으로 간 적이 있었다. 그의 사명의 마지막 시기에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시련과 승리가 있었던 이 산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거기서 사도들이 책임에 관하여 새로운 선견을 얻고, 바로 눈앞에 닥친 시련의 때를 위하여 새 힘을 얻기를 바랐다. 길을 따라 여행하는 동안, 메롬의 물 남쪽을 지나칠 무렵에 사도들은 페니키아와 다른 곳에서 요즈음에 겪은 체험에 대하여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그리고 다른 민족들이 주를 어떻게 여기는가 하나하나 열거하게 되었다.
157:3.3 (1745.4) 점심을 먹으려고 멈추었을 때, 예수는 갑자기 열두 사람에게 자신에 관하여, 그들에게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는 질문을 처음으로 던졌다. 이 놀라운 질문은 이러했다: “사람들은 내가 누구라고 하느냐?”
157:3.4 (1746.1) 하늘나라의 성질과 특징에 관하여 이 사도들을 훈련시키느라고 예수는 전에 여러 달을 보냈고, 그 자신의 성품, 하늘나라와 그의 개인적 관계에 대하여 더 가르치기 시작해야 할 때가 왔음을 잘 알았다. 그리고 이제, 뽕나무 밑에 앉아 있는 동안에 주는 선택한 사도들과 오랫동안 관계를 가졌던 중에서 아주 중대한 한 모임을 가지려고 준비했다.
157:3.5 (1746.2) 사도들의 과반수가 예수의 물음에 대답하는 데 거들었다. 예수를 아는 모든 사람이 그를 선지자로, 또는 특별한 사람으로 여긴다, 예수가 악마들의 왕과 연합하고 있다고 고발함으로 그의 권능을 설명하면서, 적들조차 그를 크게 두려워한다고 그들은 말했다.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를 친히 만나본 적이 없는 어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세례자 요한이라 믿는다고 예수에게 말했다. 여러 번, 그리고 가지가지의 사람들이 예수를 모세ㆍ엘리야ㆍ이사야ㆍ예레미야와 견주었다고 베드로는 설명했다. 이 보고에 귀를 기울이고 나서, 예수는 똑바로 일어서서, 둘레에 반원을 이루어 앉아 있는 열두 사도를 내려다보면서, 깜짝 놀라게 힘을 주어, 손을 한 번 휘둘러 그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누구라 하느냐?” 긴장하고 고요한 순간이 있었다. 열두 사람은 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시몬 베드로가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당신은 구원자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나이다.” 그리고 앉아 있던 열한 사도가 하나같이 일어나서, 이렇게 그들 모두의 의견을 베드로가 대신하여 말했음을 가리켰다.
157:3.6 (1746.3) 다시 앉으라고 손짓하고 나서, 아직 그들 앞에 서서, 예수는 말했다: “내 아버지가 이를 너희에게 드러냈느니라. 나에 관하여 너희가 진실을 알아야 할 때가 왔도다. 그러나 한동안 너희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노라. 길을 떠나자.”
157:3.7 (1746.4) 그래서 케자리아 빌립비로 걸음을 다시 재촉했고, 그날 저녁 늦게 도착해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셀수스의 집에서 멈추었다. 사도들은 그날 밤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의 생애에서, 그리고 하늘나라 일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을 느끼는 듯했다.
157:4.1 (1746.5)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경사가 있은 뒤에, 여러 차례 사도들은 실질적으로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였다. 잠시 동안, 그들 중에 더러는 예수가 기대하던 메시아라고 참으로 믿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이 가슴 속에서 솟아나자마자, 어떤 호된 말씀이나 실망을 안겨주는 행위로 주는 그 희망을 산산조각냈다. 머리 속에 지녔던 기대하던 메시아 개념, 그리고 가슴 속에 지녔던, 이 특별한 사람과 각별한 관계를 가졌던 체험, 이 둘 사이의 갈등 때문에, 그들은 오랫동안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157:4.2 (1746.6) 사도들이 셀수스의 집 뜰에서 점심 식사를 하려고 모인 것은 이 수요일 늦은 아침이었다. 밤 동안 대체로, 그리고 그날 아침에 일어난 뒤로, 시몬 베드로와 열심당원 시몬은 주가 메시아일 뿐 아니라 또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신다운 아들이라고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수준까지 모두가 이르게 하려고 형제들과 함께 열심히 수고하고 있었다. 두 시몬은 예수를 평가하는 의견이 거의 같았고, 그들의 관점을 형제들이 완전히 받아들이게 만드느라고 부지런히 수고하였다. 안드레는 사도단의 단장으로 계속 일했지만, 동생 시몬 베드로가 갈수록 더, 모두의 지지를 받아서 열두 사도의 대변인이 되고 있었다.
157:4.3 (1747.1) 거의 한낮 무렵에 주가 나타났을 때 그들은 모두 뜰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품위 있는 엄숙한 표정을 지었고, 예수가 다가가자 모두 일어섰다. 예수는 상냥하고 친숙한 빙그레 웃음으로 그들의 긴장을 풀어주었는데, 추종자들이 자신이나 그들에게 관계된 무슨 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때 이렇게 하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다. 위엄 있는 손짓으로 그들에게 앉으라고 하였다. 열두 사도는 주가 그들 앞에 왔을 때, 결코 다시는 일어서서 인사를 드리지 않았다. 그렇게 겉으로 존경심을 보이는 것을 그가 허락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157:4.4 (1747.2)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다가오는 데카폴리스 여행을 위한 계획을 의논하기 시작한 뒤에, 예수는 갑자기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고 말했다. “사람의 아들의 신분에 관하여 시몬 베드로가 선언한 것에 너희가 찬성한 지 꼭 하루가 지났으니, 아직도 너희의 결심을 지키려는가 내가 묻고자 하노라.” 이 말을 듣자, 열두 사도는 일어섰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를 향하여 몇 발자국 나서서 말했다: “예 주여, 그러하나이다. 당신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우리가 믿나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형제들과 함께 앉았다.
157:4.5 (1747.3) 그리고 나서 아직도 서서 예수는 열두 사람에게 말했다: “너희는 내가 선택한 대사(大使)이나 이 상황에 그냥 인간적 지식의 결과로 너희가 이 믿음을 품을 수 없음을 내가 아노라. 이것은 너희 혼 아주 깊숙이 내 아버지의 영이 주신 계시이라. 그런즉 너희 안에 거하는 내 아버지 영의 통찰력으로 이렇게 고백할 때, 나는 이 기초 위에 하늘나라의 형제 정신을 세우리라 선언할 생각이 드노라. 이 영적 현실의 반석 위에, 내 아버지 나라의 영원한 실체 속에서 영적으로 친교하는, 살아 있는 성전을 세우겠노라. 어떤 악한 세력과 죄의 무리도 신다운 영이 이처럼 인간과 교제하는 것에 맞서서 이기지 못하리라. 내 아버지의 영은 이 영적 친교로 유대 관계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에게 늘 신다운 안내자요 스승이 되려니와 너희와 너희 후계자들에게 겉에서 보이는 하늘나라의 열쇠를―현세의 것에 대한 권력을―주리니, 그것이 하늘나라의 동료로서 이 남녀들의 교제가 가지는 사회ㆍ경제적 특징이라.” 다시,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한동안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157:4.6 (1747.4) 예수는 사도들의 충성과 인품을 비로소 신뢰하게 되었다. 그가 선택한 대표들이 최근에 겪은 것을 견딜 수 있는 믿음은 의심할 여지 없이 바로 눈앞에 닥친 불 같은 시련을 견디리라는 것, 그리고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고 나서 그 믿음이 새 섭리 시대의 새 빛 속으로 솟아나고, 그렇게 함으로 나가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세상을 깨우칠 수 있을 것을 주는 깨달았다. 이날 주는, 한 사람을 빼고 사도들이 가진 신앙을 비로소 믿었다.
157:4.7 (1747.5) 그 이후로 바로 이 예수는 신다운 아들이 되는 바로 그 영원한 기초 위에 살아 있는 성전을 짓고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 자의식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는 인간 돌이요, 이 돌들은 영들의 영원한 아버지의 지혜와 사랑에 영광과 명예를 돌리는, 아들들의 살아 있는 이 성전이 된다.
157:4.8 (1747.6) 이렇게 말씀하고 나서, 예수는 열두 사도에게 저녁 식사 때까지 지혜와 힘과 영적 안내를 구하기 위하여 산으로 자기들끼리 따로 가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주가 훈계한 대로 했다.
157:5.1 (1748.1) 베드로의 고백에서 새롭고 중대한 특징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 의심할 수 없는 그의 신성(神性)을 뚜렷이 인식한 것이다. 그가 세례를 받고 가나에서 결혼식이 있은 뒤로 이 사도들은 여러 면에서 그를 메시아로 여겼지만, 유대인은 그 민족의 구원자가 신다워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유대인은 메시아가 신으로부터 솟아나올 것이라고 가르친 적이 없었다. 그는 “기름 부음받은 자”로 예정되었지만 그들은 도저히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두 번째 고백에서는 통합된 성품, 곧 사람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숭고한 사실이 더욱 강조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성품과 신의 성품이 통합된다는 이 위대한 진리 위에 예수는 하늘나라를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157:5.2 (1748.2) 예수는 전에 사람의 아들로서 땅에서 일생을 살고 수여 임무를 마치려고 애썼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를 기대하던 메시아로 여기고 싶어했다. 그들이 메시아에게 걸었던 기대를 결코 채워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그 기대를 어느 정도 채워줄 수 있도록 그들의 메시아 개념을 수정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러한 계획을 실행하는 데 도저히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다. 따라서 대담하게 셋째 계획을 드러내기로 했다―그의 신성을 드러내놓고 선포하고, 베드로의 고백이 참된 것을 인정하고 열두 사도에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직접 선포하기로 작정했다.
157:5.3 (1748.3) 3년 동안 예수는 그가 “사람의 아들”이라 선포하고 있었고 바로 이 3년 동안 사도들은 그가 기대하던 유대인의 메시아라고 더욱 고집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냈고,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의 통합된 성품 개념 위에 하늘나라를 세우기로 작정했다. 메시아가 아니라고 그들을 확신시키려는 노력을 이제 삼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이제 그가 누구인가 대담하게 드러내고 다음에 그를 메시아로 여기려고 고집하는 그들의 결심을 무시하기로 했다.
157:6.1 (1748.4) 예수와 사도들은 셀수스의 집에서 하루 더 남아 있었고, 다윗 세베대로부터 사자들이 자금을 가지고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대중에게 예수의 인기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나서 소득이 크게 줄었다. 케자리아 빌립비에 이르렀을 때 금고는 텅 비었다. 마태는 그런 때에 예수와 형제들을 두고 떠나기가 아주 싫었고, 과거에 아주 여러 번 그랬던 것처럼 유다에게 즉시 건네줄 자신의 자금이 수중에 없었다. 그러나 다윗 세베대는 수입(收入)이 아마 이렇게 줄어들 것이라 미리 내다보았다. 따라서 사자들이 유대ㆍ사마리아ㆍ갈릴리를 거쳐 가는 동안, 추방된 사도들과 주에게 전해 줄 돈을 거두는 사람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전에 그들에게 지시했다. 그래서 이날 저녁이 되자 이 사자들이 자금을 가지고 벳세다에서 돌아왔는데, 이것은 사도들이 데카폴리스 여행을 개시하려고 돌아올 때까지 그들을 부양하기에 넉넉했다. 마태는 그때까지 가버나움에 있는 그의 마지막 부동산을 처분해서 돈을 손에 쥐기를 기대했고, 이 자금이 무명(無名)으로 유다에게 넘겨지도록 주선했다.
157:6.2 (1749.1)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도 예수의 신성(神性)에 대하여 아주 적당한 개념을 가지지 않았다. 이때가 땅에서 주의 생애에서 새 시대의 시작이라는 것을 조금도 깨닫지 못했다. 이때는 선생이요 병 고치는 자가 새로 생각한 메시아―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때였다. 이때부터 계속, 주의 말씀에 새로운 음정이 나타났다. 이때부터 그의 생활에서 한 가지 이상은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이요, 한편 그의 가르침에서 한 가지 개념은 오직 실천해야만 깨달을 수 있는 그 최고의 지혜가 인격화된 모습을 그의 우주에게 제시하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가 생명을 가지고,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가질 수 있기 위하여 그가 오셨다.
157:6.3 (1749.2) 예수는 이제 육체를 입은 인간 생활에서 넷째이자 마지막 단계에 들어갔다. 첫째 단계는 어린이 단계, 한 인간 존재로서 그의 기원ㆍ성품ㆍ운명을 겨우 어렴풋이 의식했던 시절이다. 둘째 단계는 젊은이이자 성장하는 청년으로서 더욱 자의식하는 시절이었다. 이때 그는 자기의 신다운 성품과 인간적 사명을 더욱 뚜렷하게 깨닫게 되었다. 이 둘째 단계는 세례와 관련되었던 체험 및 계시와 함께 끝났다. 주가 땅에서 겪은 체험의 셋째 단계는, 세례 받은 때부터 선생이자 병 고치는 자로서 봉사하던 시절을 거쳐서, 케자리아 빌립비에서 베드로가 고백하던 이 중대한 시간까지 이어졌다. 지상의 인생에서 이 셋째 기간은 사도와 직계 추종자들이 그가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그를 메시아로 여긴 때를 포함했다. 지상 생애에서 넷째이자 마지막 기간은 여기 케자리아 빌립비에서 시작되고 십자가 처형까지 이어졌다. 그의 봉사에서 이 단계의 특징은 신성을 인정한 것이고 육체를 입고 사신 마지막 해의 수고를 포함했다. 넷째 기간에, 추종자들의 대다수는 아직도 그를 메시아로 여겼지만 사도들에게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베드로의 고백은 유란시아에서, 하나의 전체 우주를 위하여 수여 아들로서 그가 최상으로 봉사하는 그 진리를 더욱 철저히 실현하는 새 기간이 시작된 것, 선택된 대사(大使)들이 적어도 어렴풋이나마 그 사실을 인식한 것을 표시하였다.
157:6.4 (1749.3) 예수는 힘차게 진보하는 기법으로 영적 성품이 성장함을 가르쳤고, 이처럼 그의 종교에서 가르친 것을 일생 동안에 모범으로 보였다. 후일에 추종자들이 한 것처럼, 혼과 육체 사이의 끊임없는 싸움을 강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이 이 두 가지를 쉽게 이기며, 이 지적ㆍ본능적 투쟁의 상당 부분을 유익하게 절충하는 데 유능하다고 가르쳤다.
157:6.5 (1749.4) 이때부터 계속하여, 예수의 모든 가르침에 새로운 의미가 붙는다. 케자리아 빌립비 이전에 그는 하늘나라의 대선생으로서 하늘나라 복음을 제시했다. 케자리아 빌립비 이후에 그는 단지 선생일 뿐 아니라 이 영적 세계의 중심이자 둘레인 영원한 아버지의 신성한 대표로서 나타났고, 한 인간, 사람의 아들로서, 이 모두를 행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157:6.6 (1749.5) 예수는 한 선생으로서, 다음에는 선생이자 병 고치는 자로서, 추종자들을 영적 세계로 진지하게 이끌려고 전에 애썼지만 그들은 그렇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땅에서 그의 사명은 유대 민족이 메시아에게 건 기대를 도저히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았다. 그는 결코 옛 선지자들이 묘사한 메시아가 될 수 없었다. 사람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나라를 세우려고 애썼지만, 추종자들은 그 모험에서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이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다음에 예수는 신자들과 중간에서 절충하기로 했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수여 아들의 역할을 드러내놓고 맡으려고 준비했다.
157:6.7 (1750.1) 따라서, 뜰에서 이날 예수가 이야기하는 동안에, 사도들은 많은 새로운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이 선언들 중에 더러는 그들에게도 이상하게 들렸다. 깜짝 놀라게 하는 다른 여러 선언 중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다:
157:6.8 (1750.2) “이때부터 계속, 어떤 사람이라도 우리와 친교하고자 하거든 아들의 책임을 맡고 나를 따를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더 있지 않을 때, 세상이 너희의 주를 대접한 것보다 너희가 더 나은 대접을 받으리라 생각지 말라. 나를 사랑한다면, 너희가 최상의 희생을 기꺼이 바쳐서 이 애정을 증명하기 위하여 준비하여라.”
157:6.9 (1750.3) “내 말을 잘 주의하여라. 올바른 자가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고 내가 왔노라. 사람의 아들은 시중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봉사를 베풀고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려고 왔도다.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잃어버린 자를 찾고 구원하려고 내가 왔노라.”
157:6.10 (1750.4) “아버지로부터 나온 아들 외에 이 세상에서 아무도 지금 아버지를 바라보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들려 올라가면 아들은 모든 사람을 끌어당길 것이요, 이 진리, 아들의 통합된 성품을 믿는 자는 누구나 오랜 세월보다 더 긴 생명을 받을지니라.”
157:6.11 (1750.5)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아직도 드러내놓고 선포해서는 안 되지만 너희에게는 계시되었느니라. 그런즉 이 신비에 관하여 너희에게 내가 담대히 말하노라. 이 육체의 모습을 입고 너희 앞에 서 있어도, 나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왔노라.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내가 있었노라. 너희가 나를 이해한 바와 같이, 나는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으로 왔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얼마 안 있어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의 일로 돌아가야 하노라.”
157:6.12 (1750.6) “너희 조상이 메시아를 상상했던 대로 사람의 아들이 그 기대를 채우지 못하리라는 내 경고를 받고서, 이 선언이 진실임을 너희의 믿음이 이제 이해할 수 있느냐?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느니라. 여우는 굴이 있고 하늘의 새는 보금자리가 있어도,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는 것이 사실인데도, 너희가 나에 관한 진실을 믿을 수 있느냐?”
157:6.13 (1750.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이 모든 일에 내 아버지는 나와 함께 일하시며 아버지는 내 사명을 혼자 이루라고 버려두지 아니하시리라. 마찬가지로 너희가 세상에 두루 이 복음을 선포하려고 곧 떠나갈 때 나는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157:6.14 (1750.8) “이러한 일생을 살라고 너희를 불렀으니, 그 일생의 영광을 이해하고 그 장엄함을 깨닫도록 내가 너희를 따로, 너희들만 잠시 동안 데려왔노라: 곧 인류의 가슴 속에서 내 아버지의 나라를 세우는 모험, 이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의 혼과 생생한 관련을 가지며 나와 친교를 도모하는 믿음의 모험이라.”
157:6.15 (1750.9) 사도들은 대담하고 놀라운 이 말씀을 조용히 들었고, 깜짝 놀랐다. 주의 말씀을 토론하고 생각해 보려고 작은 무리들을 지어 흩어졌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에 고백한 적이 있었지만, 그들은 무엇을 하라고 주가 이끌었는가 그 의미를 완전히 깨달을 수 없었다.
157:7.1 (1750.10) 그날 저녁에 안드레는 형제들 각자와 개인적이고 심중을 살피는 회담을 가지는 일을 떠맡았다. 가룟 유다를 빼고, 그는 동료들 모두와 유익하고 기운을 북돋아주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드레는 다른 사도들과 한 것처럼, 유다와 그런 가깝고 개인적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따라서 유다가 사도단의 우두머리와 자유롭게 속을 터놓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던 것을 전에 심각한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드레는 이제 유다의 태도에 너무 걱정이 되어서, 그날 밤 늦게 모든 사도가 잠에 곯아떨어진 뒤에, 예수를 찾았고 걱정의 원인을 주께 말씀드렸다. 예수는 말했다: “네가 이 문제로 내게 온 것은 잘못이 아니라, 안드레야,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더 없느니라. 계속하여 이 사도를 최고로 신뢰하기만 하여라. 형제들에게 나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 것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하지 말라.”
157:7.2 (1751.1) 안드레는 이것밖에 아무것도 예수로부터 얻어낼 수 없었다. 언제나 이 유대 지방 사람과 갈릴리 형제들 사이에 얼마큼 서먹함이 있었다. 유다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몇몇 경우에 주의 꾸지람에 몹시 마음이 상했고, 예수가 임금이 되기를 마다했을 때 실망했다. 바리새인들을 피해 도망했을 때 창피를 느꼈고, 표징(標徵)을 달라는 바리새인들의 도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 때 분하게 여겼다. 주가 권능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것에 어리둥절했고, 이제 요즈음에 금고가 텅 빈 때문에 우울하고 때때로 낙심이 되었다. 그리고 유다는 군중의 자극이 없어 서운했다.
157:7.3 (1751.2) 다른 사도들은 저마다 얼마큼 다른 정도로 바로 이 시험과 시련에 마찬가지로 영향을 받았지만 예수를 사랑했다. 적어도 유다보다 더 주를 사랑했음이 틀림없으니, 그들이 쓰라린 종말까지 함께 고난을 거쳤기 때문이다.
157:7.4 (1751.3) 유대 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유다는 사도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최근에 예수가 경고한 것을 개인적으로 불쾌하게 여겼다. 이 말을 빗대어 그를 가리킨 말로 여기고 싶어했다. 그러나 유다의 큰 잘못은 이것이었다: 여러 번 예수가 사도들을 혼자서 기도하라고 떠나보냈을 때, 우주의 영적 세력과 진지한 교통을 하는 대신에, 유다는 인간적으로 두려운 생각에 빠졌고 한편 앙갚음하려는 느낌을 품는 유감스러운 성향에 굴복할 뿐 아니라, 예수의 사명에 대하여 미묘한 의심을 계속 가졌다.
157:7.5 (1751.4) 이제 예수는 헤르몬산으로 사도들을 데려가려고 했고, 거기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땅에서 그가 넷째 단계의 봉사를 시작하려고 전에 예정하였다. 그들 가운데 몇은 그가 요단강에서 세례받을 때 자리에 있었고 사람의 아들로서 그의 생애가 시작되는 것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새로운 대중 임무를 맡을 권한에 관하여 듣도록 그들 중에 몇 사람이 또한 자리에 있기를 바랐다. 따라서 8월 12일 금요일 아침에, 예수는 열두 사도에게 말했다: “건너의 산으로 여행하기 위하여 식량을 저장하고 준비하여라. 거기서 땅에서 내 일을 마치도록 자질을 받으라고 영이 나에게 명하느니라. 이 체험을 통하여 나와 함께 가는 벅찬 시절 동안 내 형제들도 또한 힘을 얻도록 내가 저희를 데리고 가고자 하노라.”
158:0.1 (1752.1) 서기 29년 8월 12일 금요일 오후, 거의 해질녘이 되어, 예수와 동료들은 헤르몬산의 기슭에 이르렀다. 여기는 유란시아의 영적 운명을 결정하고 루시퍼 반란을 절차에 따라 마무리하느라고 주가 혼자 산으로 올라간 동안에 소년 티글라스가 한때 기다렸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가까웠다. 오래지 않아 닥칠 사건들을 위하여 영적 준비를 갖추면서, 그들은 여기서 이틀 동안 머물렀다.
158:0.2 (1752.2) 대체로, 예수는 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미리 알았고, 사도들 모두가 이 체험을 함께하기를 몹시 바랐다. 자신을 이렇게 계시하기 위하여 그들을 준비시키려고 산기슭에서 함께 머물렀다. 그러나 그들은 땅에 머지않아 나타나기로 된 하늘 존재들의 방문을 완전히 체험하는 것을 정당화할 영적 수준에 도달할 수 없었다. 동료들을 모두 거느리고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는 그러한 특별한 철야 기도에 따라가는 버릇이 든 세 사람만 데리고 가기로 작정하였다. 따라서 오직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이 이 독특한 체험의 일부만이라도 주와 함께 가졌다.
158:1.1 (1752.3) 8월 15일 월요일 아침 일찍, 예수와 세 사도는 헤르몬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때는 뽕나무 밑에 길가에서 베드로가 대낮에 기억에 남을 고백을 한 지 6일이 되었다.
158:1.2 (1752.4) 육체를 입은 수여 체험이 자기가 창조한 우주에 관계되다시피, 수여의 진전에 상관되는 중요한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하여, 예수는 산으로 혼자 올라가라고 이전에 부름받았다. 예수와 사도들이 이방인의 땅에 있는 동안에 때를 맞추어 이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 이것이 이방인의 산에서 실제로 벌어졌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158:1.3 (1752.5) 한낮이 되기 얼마 전에 그들은 산으로 오르는 중턱쯤에, 목적지까지 이르렀고, 점심을 먹는 동안 예수는 세례받고 얼마 뒤에 요단강 동쪽의 산에서 겪은 체험에 대하여 무언가, 그리고 이 쓸쓸한 피서지를 그가 예전에 방문한 것과 연관하여 헤르몬산에서 겪은 체험을 얼마큼 더 이야기했다.
158:1.4 (1752.6) 소년이었을 때, 예수는 집 가까이 있는 산으로 올라가서, 에스드랠론 평야에서 제국(帝國)들의 군대가 벌였던 전투를 꿈꾸곤 하였다. 유란시아에서 자신 수여 연극의 마지막 장면을 연출하기 위하여 요단 평야로 내려가도록 그를 준비시킬 자질을 받으려고 이제 헤르몬산으로 올라갔다. 주는 이날 헤르몬산에서 투쟁을 그만두고 우주 영토를 통치하는 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파라다이스에 계신 영원한 아들의 명령에 담겨 있는 신다운 아들 계급의 필요 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선택했을 뿐 아니라, 또한 당면한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을 마지막까지 충분히 만족시키려고 결심하였다. 8월의 이날, 세 사도는 그가 완전한 우주 권한의 부여를 물리치는 것을 보았다. 그가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로서 땅에서 생애를 혼자서 마치도록 버려두고 하늘 사자들이 떠나는 동안에 그들은 놀라서 구경하고 있었다.
158:1.5 (1753.1) 사도들의 믿음은 5천 명을 먹였을 때 꼭대기까지 올라갔고, 그리고 나서 거의 밑바닥까지 빨리 내려갔다. 이제, 주가 자기의 신성(神性)을 인정한 결과로서, 열두 사도의 처지는 믿음은 다음 몇 주 동안 가장 높은 음까지 올라갔고, 다만 차츰차츰 갈수록 떨어지게 될 것이었다. 주가 부활하기까지, 세 번째 믿음의 회복은 일어나지 않았다.
158:1.6 (1753.2) 날씨가 아름다운 이날 오후 3시쯤에, 예수는 세 사도를 떠나며 말했다: “아버지와 그의 사자들과 한동안 교통하려고 나는 혼자서 따로 가노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여기서 머무르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사람의 아들의 계속된 수여 임무와 관련하여 너희가 온갖 체험을 겪으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여라.” 이렇게 말한 뒤에, 예수는 가브리엘과 아버지 멜기세덱과 함께 오랫동안 회의하려고 물러났고, 6시쯤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서 그들이 걱정함을 보았을 때 예수는 말했다: “어찌하여 너희가 두려워하였느냐? 내가 아버지 일을 보아야 함을 너희가 잘 아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않을 때 무엇 때문에 의심하느냐? 이제 내가 선언하노니, 사람의 아들이 너희 한가운데서, 너희 중 하나로서 일생을 끝까지 거치기로 하였느니라. 기운을 내어라. 내 일이 끝나기까지 나는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158:1.7 (1753.3) 조촐한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동안에, 베드로는 주에게 물었다. “이 산에서 형제들과 떨어져서 우리가 얼마나 오래 남아 있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영광을 보고, 내가 너희에게 선언한 것은 무엇이나 참이라는 것을 너희가 알 때까지라.” 그들은 피운 불의 이글거리는 잉걸덩이 둘레에 앉아 있으면서, 루시퍼 반란 사건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이것은 어둠이 다가오고 사도들의 눈꺼풀이 무거워지기까지 계속되었는데, 그들이 그날 아침 아주 일찍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158:1.8 (1753.4) 세 사람은 거의 반시간 동안 잠에 곯아떨어져 있다가 가까이 불 튀는 소리에 갑자기 깨어났다. 너무 놀라고 어리둥절한 가운데, 주위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예수가 하늘 세계의 빛나는 옷을 걸친 눈부신 두 존재와 함께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음을 보았다. 예수의 얼굴과 모습은 하늘 빛으로 밝게 빛났다. 이 셋은 낯선 말로 이야기했지만, 그들이 말한 어떤 것을 듣고서 베드로는 예수와 함께 있는 존재들이 모세와 엘리야라고 잘못 짐작했다. 실제로 그들은 가브리엘과 아버지 멜기세덱이었다. 물리 통제자들은 예수의 요청 때문에 사도들이 이 장면을 구경하도록 미리 주선하였다.
158:1.9 (1753.5) 세 사도는 너무 지나치게 놀라서 정신을 차리는 데 느렸지만, 눈부신 환상이 그들 앞에서 흐려지고 예수가 혼자 서 있는 것을 보자, 먼저 정신이 든 베드로가 말했다: “예수여, 주여, 여기에 와 본 것이 좋사옵고, 이 영광을 보아서 우리가 기쁘오이다. 우리는 영화롭지 않은 세상으로 돌아가기가 싫사옵나이다. 당신이 기꺼이 바라신다면 우리가 여기서 살게 하소서. 그러면 우리가 텐트 셋을 세우리니, 하나는 당신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세우리이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 것은 머리가 헛갈렸기 때문에,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아무런 다른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58:1.10 (1753.6) 베드로가 아직 말하는 동안, 은빛 구름이 가까이 와서 그들 넷을 가렸다. 사도들은 이제 크게 놀랐다. 예배하려고 엎드리자 한 목소리를 들었는데, 예수가 세례받을 때 말했던 바로 그 목소리가 말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구름이 사라지자, 다시 예수는 셋하고만 자리에 있었고 이들에게 손을 뻗어 어루만지며 말했다: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너희는 이보다 더 큰 것들을 볼지니라.” 그러나 사도들은 참으로 두려웠다. 자정 조금 전에 산을 내려가려고 준비하는 동안, 그들 세 사람은 말이 없고 생각이 깊었다.
158:2.1 (1754.1) 산을 반쯤 내려가는 동안 한 마디 말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대화를 시작하며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아무에게도, 너희 형제들에게도, 사람의 아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까지, 이 산에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도록 하여라.” 세 사도는 “사람의 아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까지”라는 주의 말씀에 충격을 받고 어리둥절했다. 예수가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들의 믿음을 아주 최근에 다시 다짐한 적이 있었고 바로 눈앞에서 영화롭게 그의 모습이 바뀐 것을 보았는데, 이제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내다니!
158:2.2 (1754.2) 베드로는 주가 죽는다는 생각에 몸서리쳤고―생각해 보기에 너무나 언짢았다―야고보나 요한이 이 말씀과 관련하여 무슨 말씀이라도 물을까 두려워, 다른 데로 돌리는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무슨 다른 말을 할까 몰랐기 때문에, 머리 속에 처음 떠오르는 생각을 이렇게 표현했다: “주여, 어째서 메시아가 나타나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서기관들이 말하나이까?” 예수는 베드로가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언급을 피하려는 것을 알고서 대답했다: “엘리야는 사람의 아들을 위하여 길을 예비하려고 정말로 먼저 오고, 사람의 아들은 많이 고통받고 마침내 거절당해야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고, 저희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이나 그에게 행하였도다.” 그리고 나서 세 사도는 예수가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언급한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여기기를 고집한다면, 요한은 예언에 나오는 엘리야임이 틀림없다는 것을 예수는 알았다.
158:2.3 (1754.3) 예수는 그가 부활 이후에 누릴 영광을 맛보기로 구경한 것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라고 당부했다. 이제 그들이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였으니까, 그가 이적을 행하는 구원자라는 그릇된 개념을 조금이라도 정당화할 것이라는 생각을 키워주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은 이 모든 것을 머리 속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주가 부활할 때까지 아무에게도 이에 대하여 입을 열지 않았다.
158:2.4 (1754.4) 그들이 산을 계속 내려가는 동안 예수는 말했다: “너희는 나를 사람의 아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도다. 그러므로 너희의 굳은 결심대로 나를 받아들이는 데 내가 찬성하였노라. 그러나 잘못 생각하지 말지니, 내 아버지의 뜻이 이겨야 하느니라. 이처럼 자신이 뜻하는 경향을 따르기로 하면, 너희는 많은 실망을 견디고 많은 시련을 겪을 준비를 해야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를 훈련시킨 것은 스스로 택한 이 슬픔조차 거치고 너희를 승리로 이끌기에 충분하니라.”
158:2.5 (1754.5) 베드로와 야곱과 요한이, 벌어진 일을 구경하기에 다른 사도들보다 어떤 의미에서도 준비가 더 잘 되었거나 그런 보기 드문 특권을 누리기에 영적으로 더 적합했기 때문에 예수가 이들을 변모(變貌)의 산으로 함께 데리고 올라가지는 않았다. 조금도 그렇지 않다. 이 체험을 하기에 열두 사도 가운데 아무도 영적으로 자격이 없음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홀로 교통하려고 혼자 있기 바랐을 때 그를 따라다니라고 배치된 세 사도만 함께 데리고 갔다.
158:3.1 (1755.1) 변모의 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본 것은 그 중대한 날에 헤르몬산에서 벌어진 하늘 야외극을 순식간에 구경한 것이었다. 그 변모는 다음의 계제였다:
158:3.2 (1755.2) 1. 유란시아에서 미가엘이 육신화하여 사는 수여 생애를 마친 것을 파라다이스에 계신 어머니, 영원한 아들이[1] [1801] 받아들인 것. 영원한 아들의 요구 조건에 관계된 한, 예수는 이제 조건을 만족시켰다는 확언을 받았다. 가브리엘이 예수에게 그런 확신의 말씀을 가져왔다.
158:3.3 (1755.3) 2.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유란시아에서 수여를 충실히 행한 것에 무한한 영이 만족해 한다는 증언. 무한한 영의 우주 대표, 곧 구원자별에서 미가엘의 가까운 동료이자 항상 계시며 함께 일하는 분이, 이 경우에 아버지 멜기세덱을 통해서 말했다.
158:3.4 (1755.4) 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의 사자들이 땅에서 그의 사명이 성공한 것에 대하여 제시한 이 증언을 반갑게 받아들였지만, 예수는 아버지가 유란시아에서 수여가 끝났다고 지적하지 않은 것을 주목했다. 인격화된 예수의 조절자를 통하여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말함으로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계심이 증거했을 뿐이다. 이것은 세 사도에게도 들리는 말로 말씀하였다.
158:3.5 (1755.5) 하늘에서 이 방문이 있은 뒤에 예수는 아버지의 뜻을 알려고 애썼고, 자연스럽게 끝날 때까지 필사 수여를 추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이 예수에게 변모의 의미였다. 세 사도에게, 변모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로서 땅에서 주가 일생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갔음을 표시하는 사건이었다.
158:3.6 (1755.6) 가브리엘과 아버지 멜기세덱의 공식 방문이 있고 나서, 예수는 이들, 봉사하는 그의 아들들과 비공식 회의를 가졌고 함께 우주 사무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158:4.1 (1755.7) 예수와 동반자들이 사도들의 야영지에 다다른 것은 이 화요일 아침, 식사 조금 전이었다. 가까이 오자, 그들은 사도들 주위에 상당한 군중이 모여 있음을 헤아렸고, 곧 약 50명으로 된 이 집단이 다투고 논쟁하는 큰 소리를 비로소 들었다. 이들은 아홉 사도와 한 무리를 포함했는데, 이 무리는 마가단으로부터 여행하면서 예수와 그 동료들을 추적하던 예루살렘 서기관들과 믿는 제자들로 반씩 갈라져 있었다.
158:4.2 (1755.8) 군중은 수많은 말다툼에 빠져 있었지만, 으뜸가는 논쟁은 예수를 찾아서 그 전 날에 도착한 어떤 티베리아스 시민에 관한 것이었다. 이 사람, 사펫에서 온 야고보는 14살쯤 되는 아들, 외아들이 있었는데, 간질로 몹시 앓고 있었다. 이 신경 질환 외에도 이 소년에게 그때 땅에 있으면서 감독받지 않던 중도자, 떠돌아 다니는 짓궂고 반항하는 중도자들 중에 하나가 들어가 있었고, 그래서 그 소년은 간질병자이면서 악귀에 들려 있었다.
158:4.3 (1755.9) 속이 타는 이 아버지는 헤롯 안티파스의 하급 관리였고 예수에게 이 병든 아들을 고쳐달라고 부탁할까 하여, 예수를 찾아서 빌립의 영토 서쪽 경계지를 거쳐서 거의 2주 동안 이리저리 헤매 다녔다. 이날 정오 무렵까지 그는 사도 일행을 따라잡지 못했고 그때 예수는 세 사도와 함께 산에 있었다.
158:4.4 (1756.1) 이 사람이 예수를 찾고 있던 다른 사람들, 거의 40명을 동반하고서, 갑자기 들이닥쳤을 때, 아홉 사도는 많이 놀랐고 상당히 동요되었다. 이 무리가 도착했을 때, 아홉 사도는, 적어도 그들 가운데 대다수는 오래 된 유혹―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 누가 가장 높을 것인가 논의하는 유혹―에 이미 굴복하였다. 그들은 개별 사도들에게 배치될 그럴 듯한 자리를 놓고 다투느라고 바빴다. 그들은 다만 오래 간직했던, 물질적 사명을 가진 메시아 관념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구원자라는 그들의 고백을 바로 예수가 받아들였으므로―적어도 그의 신성(神性)이 사실임을 인정했으니까―주와 떨어져 있는 이 기간에, 마음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희망과 포부에 관하여 떠드는 일에 빠지는 것보다 무엇이 더 자연스러운가. 예수를 찾는, 사펫에서 온 야고보, 그리고 같이 찾던 동료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들은 이런 토론을 하느라고 바빴다.
158:4.5 (1756.2) 안드레는 이 아버지와 아들에게 인사하려고 다가가서 말했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야고보가 말했다: “선한 사람이여, 당신의 주를 찾나이다. 병든 내 아들을 고쳐주시기를 구하나이다. 내 아이에게 들린 이 악마를 예수가 쫓아주시기를 바라나이다.” 그리고 나서 그 아버지는 아들의 병이 너무 깊어서, 어떻게 여러 번 이 악성 발작의 결과로 그가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는가 사도들에게 계속 이야기했다.
158:4.6 (1756.3) 사도들이 듣고 있는 동안, 열심당원 시몬과 가룟 유다가 그 아버지 앞으로 걸어가서 말했다: “우리는 그를 고칠 수 있고, 당신은 주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느니라. 우리는 하늘나라의 대사요, 이런 일을 더 비밀로 하지 않느니라. 예수는 구원자요, 우리는 하늘나라 열쇠를 받았노라.” 이때가 되자 안드레와 토마스는 한쪽에서 의논하고 있었다. 나다니엘과 다른 사람들은 놀라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시몬과 유다가 주제넘지는 않더라도 갑자기 대담해진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다: “이런 일을 하는 권한을 받았다면 당신들이 내 아이를 이 사슬에서 벗어나게 할 말씀을 주시기를 비나이다.” 그리고 나서 시몬은 앞으로 나서서, 손을 아이의 머리 위에 얹고,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명령했다: “그에게서 나오라, 너 더러운 귀신아. 예수의 이름으로 내 말에 복종하라.” 그러나 소년은 더욱 사나운 발작을 일으켰고, 한편 서기관들은 사도들을 비웃으면서 조롱했으며, 그 실망한 신자들은 이 불친절한 비평가들의 비웃음을 당했다.
158:4.7 (1756.4) 안드레는 이 분별 없는 노력과 그 비참한 실패에 마음이 몹시 분했다. 상의하고 기도하려고 그는 사도들을 옆으로 불렀다. 이 명상의 시간이 지난 뒤에, 그들의 실패의 따끔한 맛을 통렬하게 느끼고 모두에게 덮친 부끄러움을 감지하면서, 안드레는 두 번째 시도로 그 악귀를 내쫓으려고 했다. 그 노력은 실패로 끝났을 뿐이었다. 안드레는 솔직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그 아버지가 밤 동안 아니면 예수가 돌아오기까지 함께 남아 있기를 청하며 말했다: “아마도 이 종류는 주가 몸소 명령하지 않으면 나가지 않는 듯하구나.”
158:4.8 (1756.5) 그래서 기운이 넘쳐흐르고 날아갈 듯한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과 함께 예수가 산에서 내려오고 있는 동안에, 아홉 형제는 혼란에 빠지고 풀이 꺾여 부끄러운 가운데 마찬가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은 기가 죽고 수그러진 무리였다. 그러나 사펫의 야고보는 단념하려 하지 않았다. 언제 예수가 돌아올지 그들이 전혀 일러줄 수 없었지만, 그는 주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 머무르기로 작정하였다.
158:5.1 (1757.1) 예수가 가까이 오자, 아홉 사도는 안심이 되어 그를 환영하였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얼굴에 나타난 명랑한 빛과 드문 열심을 보고 크게 기운을 얻었다. 모두 앞으로 달려나가서 예수와 세 형제를 맞이했다. 인사를 나누는 동안에, 군중이 다가왔고 예수는 물었다: “우리가 가까이 오는 동안 너희가 무엇을 가지고 다투었느냐?” 그러나 당황하고 창피를 겪은 사도들이 주의 물음에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병든 소년의 안달하는 아버지가 앞으로 나서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말했다: “주여, 저는 아들, 외아들이 있사온데 악귀에 들렸나이다. 무서워서 소리지르고 입에 거품을 물고, 발작할 때 죽은 사람처럼 쓰러질 뿐 아니라, 그에게 들어간 이 악귀가 때때로 그를 찢고, 때때로 물 속에, 아니 불 속에도 그를 던졌나이다. 이를 많이 갈았고, 타박상을 많이 입은 결과로 내 아이가 시드나이다. 그가 사는 것은 죽는 것보다 못하나이다. 아이 어머니와 나는 마음이 슬프고 낙심이 되나이다. 어제 한낮 무렵에, 당신을 찾아다니다가 당신의 제자들을 따라잡았고,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 당신의 사도들이 이 악마를 쫓으려고 애썼사오나 저희는 할 수 없었나이다. 그리고 이제 주여,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하시겠나이까, 내 아들을 고쳐주시겠나이까?”
158:5.2 (1757.2)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예수는 무릎 꿇고 있는 아버지를 만지고 일어나라고 명했고, 한편 가까이 있는 사도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그 앞에 서 있던 모든 사람에게 말했다: “아, 믿음이 없고 타락한 세대여, 얼마나 오래 너희를 참으리오? 얼마나 오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오? 믿음의 효과는, 의심하면서 내리는 명령에 반응하여 나타나지 않는 것을 배우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리겠느냐?” 그리고 나서, 어리둥절한 아버지를 가리키며 예수는 말했다: “여기로 네 아들을 데려오라.” 그리고 야고보가 소년을 예수 앞으로 데려 오자 물었다, “얼마나 오래 소년이 이렇게 앓아 왔느냐?” 아버지는 대답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랬나이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그 소년은 사나운 발작이 일어나서 그들 한가운데 쓰러졌고 이를 갈면서 입에 거품을 물었다. 사나운 발작이 한 바탕 연속된 뒤에 그는 죽은 사람처럼 그들 앞에 누웠다. 이제 아버지는 다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서 주께 애원하며 말했다: “탄원하오니, 당신이 고칠 수 있으면, 우리에게 동정을 보이사 우리를 이 고통에서 구원하소서.” 이 말을 들었을 때, 예수는 그 아버지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아버지의 사랑의 힘을 의심말고 오직 네 믿음의 진실함과 그 한계를 의심하라. 정말로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 그리고 나서 사펫의 야고보는 믿음과 의심이 섞인, 오래 기억에 남을 말을 남겼다, “주여, 나는 믿나이다. 비오니, 나의 믿지 못함을 도와주소서.”
158:5.3 (1757.3) 이 말을 들었을 때, 예수는 앞으로 걸어가서 그 소년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살아 있는 믿음의 명예를 위하여 내가 이 일을 하노라. 얘야, 일어나라! 복종하지 않는 영아, 그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소년의 손을 아버지의 손에 쥐어 주며, 예수는 말했다: “네 갈 길을 가라. 아버지가 네 혼의 소망을 허락하셨느니라.”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은, 아니 예수의 적들조차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158:5.4 (1757.4) 동료 사도들이 실패하고 좌절된 이 장면으로 그렇게 곧 돌아온 것은, 아주 최근에 변모하는 그 장면과 체험의 영적 환희를 맛본 세 사도에게는 정말로 꿈에서 깨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이 열두 대사에게는 늘 이러했다. 그들의 생활 체험에서 번갈아 환희에 올랐다가 창피에 빠지는 일을 거듭하였다.
158:5.5 (1758.1) 이것은 두 가지 병, 육체의 질병과 영의 병을 참으로 고친 것이다. 소년은 그 시각부터 영구하게 고침을 받았다. 야고보가 회복한 아들을 데리고 떠나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우리는 이제 케자리아 빌립비로 가느니라. 당장에 준비하여라.” 남쪽으로 여행하는 동안에 그들은 말이 없는 무리였고, 한편 군중은 뒤에서 계속 따라갔다.
158:6.1 (1758.2) 그들은 셀수스와 함께 밤을 지냈다. 그날 저녁에 뜰에서 저녁을 먹고 휴식을 가진 뒤에, 열두 사도가 예수의 둘레에 모이자 토마스가 말했다: “주여, 뒤에 남아 있던 우리는 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도 모르고, 그 일로 당신과 함께 있던 우리 형제들은 크게 기운을 얻었사오나, 산에서 일어난 것들을 이때 밝힐 수 없음을 아는 까닭에, 당신이 우리의 실패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하고 이 문제에 대하여 가르치시기를 원하나이다.”
158:6.2 (1758.3) 예수는 토마스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너희 형제들이 산에서 들은 것은 모두, 때가 되면 너희에게 드러내겠노라. 그러나 아주 지혜롭지 못하게 시도한 것을 너희가 어찌하여 실패하였는가 이제 너희에게 보여주리라. 너희의 주와 동반자, 곧 너희 형제들이 아버지의 뜻을 더 알기를 구하려고, 그리고 그 신성한 뜻을 효과적으로 행할 지혜를 더 풍부히 받으려고 어제 건너편 산으로 올라간 동안에, 여기 남아서 지키던 너희는 정신이 영적 통찰력을 가지도록 애쓰고 아버지의 뜻을 더욱 충만히 계시받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기도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신앙을 뜻대로 연습하지 못하였도다. 그러나 그 대신, 유혹에 무릎을 꿇고 자신을 위하여 하늘나라에서 좋은 자리―너희가 고집해서 생각하는 물질적인 현세의 나라―를 찾는 잘못된 옛 버릇에 빠졌느니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내가 거듭 선언하였는데도, 너희는 이 그릇된 개념에 매달리는도다.
158:6.3 (1758.4) “너희의 믿음이 사람의 아들의 신분을 파악하기 무섭게, 현세의 높은 자리를 바라는 이기적 욕심이 몰래 돌아와서, 하늘나라에서 누가 가장 클 것인가 너희끼리 논의에 빠지느니라. 너희가 고집하여 생각하는 그런 하늘나라는 없고, 언제라도 존재하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의 영적 형제들이 사는 나라에서 제일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자신의 눈에 작게 되어야 하고, 그처럼 형제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더냐? 영적 위대함은 하나님 같이 이해하는 사랑에 있고, 자기를 높이려고 물질적 힘을 즐겨 쓰는 데 있지 않느니라. 너희는 시도한 것에 철저히 실패했고 그 목적이 순수하지 않았느니라. 신성한 동기가 없었고 영적 이상(理想)이 없었으며 이타적 포부가 없었느니라. 너희의 과정은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았고 달성하려는 너희의 목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도다.
158:6.4 (1758.5) “아버지의 뜻을 따를 때를 제외하고, 확립된 자연 현상의 과정에서 시간을 단축할 수 없다는 것을 너희가 깨닫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리리오? 영적 능력이 없는 마당에 너희는 영적 일을 할 수도 없느니라. 이 중에 어느 것도, 그 잠재성이 있을 때에도, 셋째이자 필수인 그 인간 요소, 팔팔한 믿음을 가지는 개인적 체험이 존재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느니라. 너희는 하늘나라의 영적 실체들을 얻기 위한 유혹으로서 물질적 표현이 반드시 있어야 하느냐? 특별한 일이 눈에 보이게 전시되지 않으면 너희는 내 사명의 영적 중요성을 깨달을 수 없느냐? 모든 물질적 표현이 겉으로 나타나는 것과 상관 없이, 너희가 하늘나라의 높은 영적 실체들에 집착하기를 언제 내가 기대할 수 있느냐?”
158:6.5 (1759.1) 예수는 이렇게 열두 사람에게 말씀하고 나서, 덧붙였다: “그리고 이제 너희는 가서 쉬라, 내일 우리는 마가단으로 돌아가서,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와 마을로 가는 전도 사업에 관하여 의논할 것임이라. 오늘 얻은 체험의 결론으로, 내가 너희 형제들에게 산에서 말한 것을 너희 하나하나에게 선언하노라, 그리고 이 말씀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도록 하여라: 사람의 아들은 이제 수여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가느니라. 우리가 바야흐로 어떤 수고를 시작하고자 하나니, 나를 죽이려 애쓰는 사람들의 손에 내가 넘겨질 때, 이 수고가 너희의 믿음과 헌신의 마지막 큰 시험으로 곧 이끌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것을 기억하여라: 사람의 아들은 죽음에 던져지겠으나 다시 살아나리라.”
158:6.6 (1759.2) 그들은 그날 밤, 슬프게 물러났다. 어리둥절했고 이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가 말씀하신 것에 관하여 아무것도 묻기 두려웠지만, 그가 부활하신 뒤에 이 모두를 상기했다.
158:7.1 (1759.3) 이 수요일 아침 일찍, 예수와 열두 사도는 케자리아 빌립비를 떠나서 벳세다 줄리아스 가까이 마가단 공원을 향했다. 사도들은 그날 밤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고, 그래서 일찍 일어나서 갈 준비가 되었다. 무딘 알패오 쌍둥이조차 예수의 죽음에 관한 이 말씀에 충격을 받았다. 남쪽으로 내려가자, 메롬의 물 바로 건너서, 다마스커스 길에 이르렀다. 예수는 서기관과 다른 사람들이 뒤에 금방 따라올 것을 알았고, 이들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갈릴리를 거치는 다마스커스 길로 가버나움까지 계속 가라고 그들에게 지시했다. 예수가 이렇게 한 것은 뒤를 따라오는 자들이 예수와 사도들이 헤롯 안티파스의 영토 지나기를 두려워할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들이 요단강 동쪽으로 갈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이날 사도들하고만 있을까 하여 따라오는 비난자들과 군중을 피하려고 애썼다.
158:7.2 (1759.4) 그들은 점심 먹을 때가 훨씬 지나기까지 갈릴리를 통하여 계속 여행했고, 그때 기운을 차리려고 그늘에서 멈추었다. 음식을 먹고 난 뒤에, 안드레는 예수에게 말했다: “주여, 내 형제들은 당신의 깊은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나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완전히 믿게 되었사온데, 이제 우리를 떠나는 것, 죽는 것에 대하여 이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나이다. 우리는 당신의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없나이다. 당신은 비유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니이까? 당신이 우리에게 직접, 숨김없이 그대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간청하나이다.”
158:7.3 (1759.5) 안드레의 말에 대답하여 예수는 말했다: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너희가 고백한 까닭에, 땅에서 사람의 아들의 수여의 종말에 관하여 진실을 너희에게 비로소 펼쳐 보일 수밖에 없노라. 너희는 내가 메시아라는 믿음에 집착하기를 고집하고, 메시아가 예루살렘에서 보좌에 앉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려 하지 않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고집하여 이르노니, 사람의 아들이 얼마 안 있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많은 고난을 견디고, 서기관과 장로와 주사제들에게 거절당하며, 이 모든 일이 있은 뒤에 죽음을 당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리라. 나는 너희에게 비유를 이르지 않노라. 이 사건들이 우리에게 갑자기 닥칠 때 이를 위하여 너희가 준비될까 하여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이르노라.” 그가 아직도 말씀하는 동안, 시몬 베드로가 성급하게 다가와서, 손을 주의 어깨에 얹고 말했다: “주여, 우리가 당신과 다투지 않게 하소서, 하오나 내가 선언하오니, 이런 일이 결코 우리에게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이다.”
158:7.4 (1760.1) 베드로는 예수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주의 인간 성품은 좋은 뜻을 가진 이 사랑의 말 속에,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대로 땅에서 수여 생애를 끝까지 추구하는 정책을 바꾸라고 유혹하는 미묘한 제안이 있음을 깨달았다. 사랑에 넘치고 충성스러운 친구들이지만 그를 말리려는 제안을 수락하는 위험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 너에게는 적, 유혹자의 기운이 도는구나. 이런 식으로 말할 때, 너는 내 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적 편에 있도다. 이런 식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장애물이 되느니라. 사람의 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살피어라.”
158:7.5 (1760.2) 예수의 따끔한 꾸지람에 처음에 충격을 받고 나서 그들이 정신을 차린 뒤에, 여행을 다시 시작하기 전에 주는 더 말씀했다: “누구라도 내 뒤를 좇으려 하거든, 자기를 돌보지 말고 날마다 자기 책임을 지고 내 뒤를 따를지어다. 누구든지 이기심으로 자기 목숨을 건지려 하는 자는 목숨을 잃을진대,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그리고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을지니라.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 자기 혼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느냐? 영생을 얻기 위하여 사람이 무엇을 대신 바치리요? 이 죄 많은 위선의 세대에 나와 내 말씀을 부끄러워 말라. 마찬가지로, 내가 모든 하늘 무리가 있는 가운데 내 아버지 앞에 영화롭게 나타날 때, 내가 부끄러워 하지 않고 너희를 인정하리라. 그런데도 이제 내 앞에 서 있는 너희 중에 여럿은 이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오는 것을 보기까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할지니라.”
158:7.6 (1760.3) 예수는 그를 따르려면 걸어야 할 고통스럽고 충돌하는 길을 이렇게 열두 사도에게 분명히 밝혔다. 이 말씀은 자신들이 명예의 자리에 오르는 세상의 나라를 꿈꾸기를 고집하던 이 갈릴리 어부들에게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그러나 그들의 충성스러운 마음은 이 용감한 호소에 움직였고, 한 사람도 그를 버리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는 싸움터로 그들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오직 용감히 따르기를 요구했다.
158:7.7 (1760.4) 열두 사도는 예수가 죽는 가능성에 대하여 그가 그들에게 무언가 일러주고 있다는 생각을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말한 것을 겨우 어렴풋이 알아들었고, 한편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에 관한 말씀은 도무지 그들의 머리 속에 기록되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자,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은 변모의 산에서 겪은 체험을 돌이켜보고 이 문제들 중 어떤 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158:7.8 (1760.5) 주와 가진 모든 관계에서, 열두 사도는 겨우 몇 번만, 그 성난 눈을 보았고 이 경우에 베드로와 나머지에게 쏟아진 것처럼, 금방 꾸짖는 말씀을 들었다. 예수는 언제나 인간적으로 부족한 것에 참을성을 보였지만, 땅에서 그의 여생(餘生)에 대하여 아버지의 뜻을 절대로 수행하는 계획에 상반되는 절박한 위협에 부딪쳤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사도들은 글자 그대로 깜짝 놀랐다. 놀라고 무서워졌다. 슬픔을 표현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주가 무엇을 견디어야 하는가, 그들이 함께 이 체험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천천히 깨닫기 시작했으나, 그의 말년에 임박한 비극을 가리키는 이 초기의 힌트가 있고서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까지 그들은 다가오는 이 사건들의 현실을 깨닫지 못했다.
158:7.9 (1761.1) 말없이 예수와 열두 사람은 마가단 공원에 있는 그들의 야영지를 향하여 떠났고, 가버나움 길로 갔다. 오후가 얼마 지나자, 예수와 이야기하지 않았어도 자기들끼리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한편 안드레는 주와 함께 이야기했다.
158:8.1 (1761.2) 땅거미가 질 때 가버나움으로 들어가면서, 그들은 저녁을 먹으려고,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바로 통하는, 잘 다니지 않는 통로로 갔다. 다윗 세베대가 그들을 호수 건너편으로 나르려고 준비하는 동안에 그들은 시몬의 집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예수는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올려다 보면서 물었다: “너희가 오늘 오후에 함께 걸으면서, 너희끼리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이야기하였느냐?” 사도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 가운데 여럿이, 다가오는 나라에서 그들이 무슨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누가 가장 클 것인가 따위에 관하여, 헤르몬산에서 시작한 토론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날 무엇이 그들의 생각을 차지했는가 알았기 때문에, 베드로의 어린아이들 중에서 하나를 손짓하여 부르고 그 아이를 그들 사이에 앉히고 말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서 이 아이와 더욱 같아지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서 조금도 진보하지 못하리라. 자기를 낮추고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자는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자가 되리라. 그런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나를 받아들이며,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이를 또한 받아들이느니라. 너희가 하늘나라에서 첫째가 되고자 하면, 이 좋은 진리를 육체를 입은 형제들에게 베풀기를 구하라. 그러나 이 어린아이를 하나라도 넘어지게 하는 자는 누구나,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더 좋으리라. 손으로 행하는 일이나 눈으로 보는 물건이 하늘나라로 진보하는 길에 죄를 짓게 하면, 간직한 이 우상들을 희생할지니, 인생에서 아끼는 많은 것을 버리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이 우상들에 집착하고 바로 네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함을 깨닫는 것보다 좋으니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너희가 이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도 가벼이 여기지 아니하도록 처리할지니, 저희의 천사들이 언제나 하늘 무리의 얼굴을 바라보는 까닭이라.”
158:8.2 (1761.3) 예수가 말씀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배에 들어가서 맞은 편에 마가단으로 저어갔다.
159:0.1 (1762.1) 예수와 열두 사람이 마가단 공원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여인단까지 포함하여 거의 1백 명의 전도사와 제자들의 무리가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에서 가르치고 전도(傳道)하는 여행을 시작하려고 즉시 준비가 되었다.
159:0.2 (1762.2) 8월 18일, 이 목요일 아침에, 주는 추종자들을 한데 불러 모으고, 사도들은 각자 열두 전도사 가운데 하나와 함께 협동해야 한다, 나머지 전도사들과 함께 열두 무리를 지어, 나가서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와 마을에서 수고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여인단과 다른 제자들은 그와 함께 남아 있으라고 지시했다. 예수는 이 여행에 4주를 배당하였고, 추종자들에게 9월 16일 금요일을 넘기지 않고 마가단으로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그는 이 기간에 그들을 자주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이 달이 지나는 동안에 이 열두 무리는 게라사ㆍ가말라ㆍ히포, 자폰ㆍ가다라ㆍ아빌라, 에드레이ㆍ필라델피아ㆍ헤스본, 디움ㆍ스키토폴리스, 그리고 많은 다른 도시에서 수고했다. 이 여행을 통해서 내내, 병 고치는 기적이나 다른 특별한 사건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159:1.1 (1762.3) 히포에서 어느 날 저녁에 한 제자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예수는 용서에 관하여 교훈을 가르쳤다. 주는 말했다:
159:1.2 (1762.4) “마음이 친절한 어느 사람이 양 1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으면, 즉시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길 잃은 양을 찾아서 나가지 않느냐? 그가 좋은 목자이면, 잃은 양을 찾아낼 때까지 계속 찾지 않겠느냐? 그리고 나서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내면, 그 양을 어깨에 메고 기뻐하면서 집으로 가서 친구와 이웃들에게 소리치리라, ‘함께 즐거워하자, 내가 잃어버린 내 양을 찾아냈음이라.’ 내가 선언하노니, 회개할 필요 없는 올바른 아흔아홉 사람보다 뉘우치는 죄인 하나를 놓고서 하늘에서 더욱 크게 기뻐하느니라. 그렇다 해도, 이 어린아이들 가운데 하나가 죽기는커녕 길을 잃는 것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너희의 종교에는 하나님이 뉘우치는 죄인들을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하늘나라의 복음에서 아버지는 저희가 뉘우치기를 심각하게 생각하기도 전에 저희를 찾으러 나가시느니라.
159:1.3 (1762.5)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며, 따라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기를 배워야 하느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너희의 죄를 용서하시며, 따라서 너희는 서로 용서하기를 배워야 하느니라.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그에게 가서 요령 있고 참을성 있게 잘못을 보여주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너와 그 사람 둘이서만 하라. 그가 네 말을 듣거든 너는 형제를 설득하였느니라. 그러나 형제가 네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그가 자기의 잘못된 길을 고집하거든, 그에게 다시 가라. 서로 친구인 사람 한두 명을 데리고 가서, 이처럼 둘 아니 세 증인이라도 너의 증언을 확인하고, 죄를 저지르는 형제를 네가 공정하고 자비롭게 다루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라. 이제 그가 형제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거든 너는 회중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도 좋고, 다음에 그가 단체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거든 저희가 현명하다고 판단하는 행동을 택하게 하라. 다루기 힘든 그런 회원이 하늘나라에서 추방자가 되게 하라. 너희는 동료들의 혼을 심판하는 시늉을 할 수 없고 너희가 죄를 용서해 주거나 다른 방법으로 하늘 무리의 감독자들의 특권을 주제넘게 빼앗을 수 없지만, 동시에 세상의 나라에서 현세의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일이 너희 손에 맡겨졌느니라. 영생에 대한 신의 선포에 너희가 개입해서는 안될지라도, 땅에서 너희는 형제들이 현세에 누리는 복지에 관계되는 행동 문제들을 결정할지니라. 그래서 형제들을 훈련시키는 데 관련된 이 모든 문제에서 땅에서 너희가 무엇을 선포하든지 하늘에서 인정받을지니라. 비록 너희가 개인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수 없어도 집단 행위에 관하여 너희는 법을 제정해도 좋으니, 이는 이 일 중에 어떤 것에 관해서도 너희 가운데 두셋이 찬성하고 내게 요청하면, 그 간청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지 않으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 이 모든 것이 언제라도 참말이니, 믿는 사람 두셋이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 가운데 있느니라.”
159:1.4 (1763.1) 시몬 베드로는 히포에 있는 일꾼들을 책임진 사도였다. 예수가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듣자 그는 말했다: “주여, 얼마나 자주 내 형제가 내게 죄를 지어도 그를 용서하나이까? 일곱 번까지이나이까?” 예수는 베드로에게 대답했다: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여라.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집사들과 함께 회계(會計)를 명한 어떤 임금과 견주어도 좋으니라. 저희가 이 장부(帳簿) 검사를 시작하고 나서, 우두머리 고용자들 중에서 하나가 앞에 끌려 와서 그가 임금에게 1만 달란트를 빚졌다고 고백하였더라. 임금의 궁정에 있는 이 관리는 어려운 시절이 그에게 닥쳤고 이 빚을 갚을 물건이 없다고 간청하였더라. 그래서 그 임금은 재산을 몰수하고 그 빚을 갚도록 그의 자식들을 팔라고 명령하였는지라. 이 엄한 선포를 듣자 이 우두머리 집사는 임금 앞에서 쓰러져 머리를 조아리며, 자비를 베풀고 그에게 시간을 더 달라고 임금에게 탄원하며 말하였더라, ‘주여, 나를 조금 더 참아 주소서, 그리하면 내가 모두 갚으리이다.’ 이 나태한 종과 가족을 바라보았을 때 임금은 동정하여 마음이 움직였더라. 임금은 그를 풀어주라, 빚을 전부 용서하라 명하였더라.
159:1.5 (1763.2) “이 우두머리 집사가 임금의 손에서 이렇게 자비와 용서를 받고 나서 일에 골몰하였는데, 그에게 겨우 1백 데나리온 빚진 그의 하급 집사(執事) 하나를 발견하고서 그를 붙잡아 멱살을 잡고 말하였더라, ‘네가 빚진 것을 모두 내라.’ 그리고 나서 이 동료 집사는 우두머리 집사 앞에 쓰러져서 탄원하며 말하였더라, ‘나를 참아 주소서. 그렇게만 하시면 내가 곧 당신께 갚을 수 있으리이다.’ 그러나 우두머리 집사는 동료 집사에게 자비를 보이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빚을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던졌더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보았을 때 동료 종들은 아주 마음이 아파서 저희의 주, 상전인 임금에게 가서 말하였는지라. 우두머리 집사가 한 일을 들었을 때, 그 임금은 고마움을 모르고 용서하지 않는 이 사람을 앞에 부르고 일렀더라: ‘너는 악하고 자격이 없는 집사이라. 네가 동정을 구했을 때 나는 너의 빚을 다 아낌없이 용서하였느니라. 내가 너에게 자비를 보인 것 같이, 어찌하여 너도 동료 집사에게 자비를 보이지 아니하였느냐?’ 그 임금은 아주 몹시 성이 나서, 고마움을 모르는 우두머리 집사가 빚진 것을 모두 갚을 때까지 붙들어 두도록 간수에게 그를 넘겨주었더라. 그렇다 해도 동료에게 자비를 아낌없이 보이는 자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는 더욱 풍부하게 자비를 보이리라. 똑같은 이 인간의 약점을 가진 죄 때문에 너희가 형제를 꾸짖는 버릇이 있는데 어찌 너희의 부족함을 배려해 달라고 하나님께 올 수 있느냐? 내가 너희 모두에게 이르노니, 하늘나라의 좋은 것들을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땅에 있는 동료들에게 거저 주라.”
159:1.6 (1764.1) 이렇게 예수는 사람이 동료를 개인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위험함을 가르치고 그 불공평함을 보여주었다. 훈련을 유지하고 응보를 베풀어야 하지만, 이 모든 문제에서 형제 정신의 지혜가 앞서야 한다. 예수는 입법과 사법 권한을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게 맡겼다. 이렇게 권한을 집단에 맡기는 것조차 개인의 권한으로서 행사해서는 안 된다. 한 개인의 판결이 편견 때문에 치우치거나 정열 때문에 왜곡될 위험이 언제나 있다. 집단의 판결은 개인적 편견에 따르는 위험을 없애고 불공평을 제거할 가능성이 더 많다. 예수는 언제나 불공평ㆍ앙갚음ㆍ복수(復讐)의 요소를 최소로 줄이려고 애썼다.
159:1.7 (1764.2) [자비와 참을성의 예로 일흔일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라멕이 몹시 기뻐함을 언급하는 성서로부터 유래되었다. 라멕은 그의 아들 두발 가인이 가진 금속 무기 때문에, 적들의 무기(武器)와 이 우수한 도구를 비교하면서 “아무 무기도 손에 쥐지 않고 가인이 일곱 배 원수를 갚았다면, 나는 이제 일흔일곱 배 원수를 갚겠다”하고 외쳤다.]
159:2.1 (1764.3) 예수는 가말라로, 거기서 요한과 그와 함께 일하던 사람들을 찾아보러 갔다. 그 날 저녁에 질문 대답 시간이 있은 뒤에, 요한은 예수에게 말했다: “주여, 나는 어제 아스타롯에 가서, 당신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있던 사람, 아니 악귀들을 내쫓을 수 있다고도 주장하는 사람을 보았나이다. 자, 이 친구는 우리와 한 번도 함께 있은 적이 없었고 우리를 따르지도 않나이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일을 하지 말라 명하였나이다.” 그러자 예수가 대답했다: “그를 막지 말라. 이 하늘나라 복음이 곧 온 세상에 선포될 것을 너는 깨닫지 못하느냐? 복음을 믿을 모든 사람이 너의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고 어찌 기대할 수 있느냐? 우리의 가르침이 이미 우리의 개인적 영향의 테두리를 넘어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기뻐하라. 요한아, 내 이름으로 큰 일을 한다고 고백하는 자들이 궁극에는 우리 운동을 지지해야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분명히 저희는 서둘러 나를 나쁘게 평하지 않으리라. 이 사람아, 이런 종류의 문제에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지지(支持)한다고 여기는 것이 더 나으리라. 후세에는 온전히 자격 있지 않은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이상한 일을 많이 할 터이나 나는 저희를 막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게 이르노니, 찬물 한 잔을 목마른 사람에게 주었을 때에도 아버지의 사자들은 그런 사랑의 봉사를 늘 기록하리라.”
159:2.2 (1764.4) 이 지시는 요한을 크게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나와 함께 있지 않은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라”하는 주의 말씀을 그가 듣지 않았는가? 이 경우에는 사람과 하늘나라의 영적 가르침 사이의 개인적 관계를 언급했고, 한편 다른 경우에는 한 집단의 신자들이, 앞으로 생길 세계적 형제 단체를 궁극에 구성할 기타 집단의 일을 행정적으로 통제하고 관할하는 권리에 관하여, 겉으로 나타나는 광범위한 관계, 신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언급했음을 요한은 깨닫지 못했다.
159:2.3 (1765.1) 그러나 하늘나라를 위하여 그가 나중에 수고한 것과 연관하여 요한은 때때로 이 체험을 돌이켜보았다. 그런데도 사도들은 감히 주의 이름으로 가르친 자들에게 여러 번 화를 냈다. 예수 밑에서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이 감히 그의 이름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언제나 그들에게 마땅치 않아 보였다.
159:2.4 (1765.2)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일하지 말라고 요한이 막은 이 사람은 사도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노력을 계속하였고, 메소포타미아로 계속 가기 전에 카나타에서 상당한 무리의 일행을 모았다. 이 사람 아덴은 케레사 가까이에서 예수가 고쳐 준 미친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주가 그에게서 내쫓았다고 생각한 그 악령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서, 돼지들을 몰아 벼랑을 넘어 거꾸로 떨어져 죽게 만들었다고 아주 확신했던 사람이었다.
159:3.1 (1765.3) 토마스와 그 동료들이 수고했던 에드레이에서 예수는 낮과 밤을 보냈다. 저녁에 토론하는 과정에서, 그는 진리를 전도하는 자들을 안내하고 하늘나라 복음을 가르치는 모든 사람을 활성화해야 할 원칙을 표현했다. 현대의 말투로 간추리고 다시 진술하면, 예수는 이렇게 가르쳤다:
159:3.2 (1765.4) 언제나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라. 올바른 운동을 결코 무력(武力)으로 권장해서는 안 된다. 영적 승리는 오직 영적 힘으로 얻을 수 있다. 물질적 영향을 이용하지 말라는 이 명령은 물리적 힘 뿐 아니라 정신의 힘도 언급한다. 압도하는 논리와 우수한 정신력이 남녀들을 하늘나라로 들어가라고 강요하는 데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의 지성을 단순히 논리의 무게로 짓밟거나, 재빠른 웅변으로 겁을 주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결정을 내리는 데 한 요소인 감정을 전부 없앨 수 없지만, 하늘나라의 운동을 진전시키려 하는 자들을 가르칠 때, 감정에 직접 호소해서는 안 된다. 두려움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나 단순한 감상(感傷)에 호소하지 말라. 사람들에게 호소할 때 공정하게 하라. 자제하고 마땅한 절제를 보이라. 생도들의 인격을 적절히 존중하라. 내가 이렇게 이른 것을 기억하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리라.”
159:3.3 (1765.5)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데려오면서 자존심을 상하거나 꺾지 말라. 지나친 자존심은 적절한 겸손을 잃게 만들며 자만과 우쭐함과 거만(倨慢)에 이를지 모르지만, 자존심을 잃는 것은 때때로 의지(意志)의 마비를 낳는다. 자존심을 잃은 자에게 자존심을 회복하고 가진 자에게 삼가게 하는 것이 이 복음의 목적이라. 너희 생도들의 생활에서 오직 실수만 꾸짖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그들의 생활에서 가장 칭찬할 것들을 너그럽게 인정하기를 또한 기억하라. 자존심을 잃고서 정말로 다시 찾고 싶어 하는 자에게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하여 나는 어떤 일도 서슴지 아니할 것을 잊지 말라.
159:3.4 (1765.6) 겁이 많고 두려움이 가득한 사람들의 자존심을 너희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라. 생각이 단순한 내 형제들을 희생하면서 빈정거리는 일에 빠지지 말라. 두려움에 빠진 내 자녀들을 비웃지 말라. 게으름은 자존심을 파괴한다. 따라서 너희 형제들이 자기가 택한 일을 하는 데 늘 바쁘게 지내라 타이르고, 직업을 찾지 못한 자를 위하여 일자리를 확보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라.
159:3.5 (1766.1) 겁을 주어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몰려고 애쓰는 것처럼 비열한 술책 쓰는 죄를 저지르지 말라. 애정을 가진 아버지는 겁을 주어 아이들에게 정당한 요구에 복종하게 만들지 않는다.
159:3.6 (1766.2) 뜨거운 감정을 느끼는 것은 신다운 영의 인도하심과 같지 않음을 하늘나라의 자녀들은 언젠가 깨달을 것이다.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곳으로 가도록 깊이 이상하게 감명을 받는 것은 안에 깃드는 영이 그런 충동을 이끈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159:3.7 (1766.3) 육신을 입고 사는 인생으로부터 영적으로 사는 상급 생활로 옮겨가는 사람이 다 거쳐야 하는 갈등의 범위에 관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리 경고하라. 아주 전적으로 어느 한쪽 영역 안에서 사는 자에게는 거의 갈등이나 혼란이 없으나, 모든 사람이 인생의 두 수준 사이를 거치는 과도기에 얼마큼 불안을 겪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다. 하늘나라로 들어가면서, 너희는 그 나라의 책임을 벗거나 그 의무를 피할 수 없지만, 기억하라: 복음의 멍에는 쉽고 진리의 짐은 가볍다.
159:3.8 (1766.4) 세상은 생명의 빵을 바로 눈앞에 두고 굶는 갈급한 혼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자신 안에 사는 바로 그 하나님을 찾다가 죽는다. 팔팔한 믿음이 바로 붙잡는 거리에 하늘나라의 보물이 모두 있는데, 사람들은 동경(憧憬)하는 마음과 지친 발로 이 보물을 찾는다. 믿음과 종교의 관계는 돛과 배의 관계와 같다. 믿음은 능력이 늘어나는 것이요, 생명의 짐이 무거워지는 것이 아니다.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자에게 오직 하나의 투쟁이 있으니, 즉 신앙의 싸움을 잘 싸우는 것이다. 믿는 사람은 오직 한 가지 투쟁이 있으니, 즉 의심―불신―을 이기는 것이다.
159:3.9 (1766.5) 하늘나라 복음을 전파할 때 너희는 다만 하나님과 친구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 친교는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똑같이 호소할 것이요, 그들의 특징인 열망과 이상을 아주 참되게 채워주는 무엇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아이들에게 이르라. 나는 그들의 느낌을 다치지 않으려 애쓰고 약점을 참을 뿐 아니라, 또한 죄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불의를 참지 못한다. 나는 아버지가 계신 앞에서 정말로 온유하고 겸손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일부러 저지르는 악행과 사악한 반란의 와중에서 나는 똑같이, 사정없이 용서하지 않는다.
159:3.10 (1766.6) 너희의 선생을 슬픈 사람으로 묘사하지 말라. 앞날의 세대는 또한 우리의 빛나는 기쁨, 우리의 선의가 주는 부력(浮力), 우리의 좋은 유머가 주는 영감을 식별하리라. 우리는 좋은 소식이 담긴 말씀을 선포하고, 변화시키는 그 힘은 사람들에게 퍼진다. 우리의 종교는 새 생명과 새 의미로 고동친다.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자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고, 가슴 속에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다. 늘어나는 행복은 하나님을 확신하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겪는 체험이다.
159:3.11 (1766.7) 거짓 동정심이라는 불안한 버팀목에 기대는 것을 피하라고 모든 신자에게 가르치라. 너희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데 빠져서는 튼튼한 인품을 기를 수 없다. 불쌍한 처지를 단지 같이 슬퍼하는 거짓된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정직하게 애쓰라. 생활의 시련 앞에서 겨우 마지못해 버티는 비겁한 사람에게 지나친 동정을 삼가며, 담대하고 용감한 자에게 동정(同情)을 베풀라. 한 번 싸우지도 않고 자기 문제 앞에 드러눕는 자를 위로하지 말라. 단지 친구들이 보답으로 너희를 불쌍히 여길까 하여 친구들을 동정하지 말라.
159:3.12 (1766.8) 내 자녀들이 일단 신이 앞에 계시다는 확신을 스스로 의식하게 될 때, 그러한 믿음은 시야를 넓히고, 혼을 고귀하게 만들고, 인격을 단련하며, 행복을 키우고, 영적 이해를 깊이 하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능력을 키워준다.
159:3.13 (1767.1)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그렇게 한다고, 어쩌다 생기는 사고나 자연에 일어나는 보통 재앙에서 면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든 신자에게 가르치라. 복음을 믿는 것은 곤경에 빠지지 않게 만들지 않을 터이나, 너희에게 고난이 덮칠 때 너희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을 보장하리라. 너희가 감히 나를 믿고 마음을 다하여 나서서 나를 따르고자 하면, 그리함으로 분명한 고난의 길로 아주 확실히 들어설 것이다. 나는 역경(逆境)의 바다에서 너희를 구하리라 약속하지 않지만, 그 모든 역경을 통해서 너희와 함께 갈 것을 약속한다.
159:3.14 (1767.2) 그리고 이 무리의 신자들이 밤에 자려고 준비하기 전에 예수는 그들에게 훨씬 더 가르쳤다. 그리고 듣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했고, 이 말씀이 있을 때 자리에 없던 사도와 제자들의 수련을 위하여 이 말씀을 자주 되풀이했다.
159:4.1 (1767.3) 그리고 나서 예수는 아빌라로 갔는데, 거기에는 나다니엘과 그 동료들이 수고하였다. 예수의 선언 중에 더러가 인정된 히브리 성서(聖書)의 권한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나다니엘은 상당히 마음에 걸렸다. 따라서 이날 밤에, 여느 때처럼 질문 대답 시간이 지난 뒤에, 나다니엘은 다른 사람들과 떨어진 데로 예수를 모시고 가서 물었다: “주여, 당신은 성서에 관하여 내가 진실을 안다고 생각할 수 있나이까? 내가 지켜보기에, 당신은 우리에게 신성한 기록의 일부만―내가 보건대 최선을―가르치고, 아브라함과 모세의 시절 이전에도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사오니, 내가 추측하건대 율법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취지로 랍비들이 가르치는 것을 당신은 거절하시나이다. 성서에 관하여 무엇이 진실이나이까?”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도의 물음을 듣고서 예수는 대답했다:
159:4.2 (1767.4) “나다니엘아, 네가 옳게 판단하였으니, 나는 랍비들과 같은 견지에서 성서를 바라보지 않노라. 너의 형제들이 모두 이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지는 않았으니 저희에게 이 일을 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 문제에 대하여 너와 함께 이야기하리라. 모세의 율법에 담긴 말씀과 성서의 가르침은 아브라함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겨우 요즈음에 와서 성서가 우리가 가진 대로 수집되었느니라. 유대 민족의 상급 사상과 최선의 소망을 담고 있어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과 가르침을 대표하기에는 아득히 먼 것을 또한 많이 담고 있느니라. 그런즉 나는 상급의 가르침 중에서 하늘나라 복음을 위하여 이삭을 줍듯 진리를 골라야 하노라.
159:4.3 (1767.5) “이 여러 기록은 사람들이 쓴 것이요, 저희 가운데 더러는 거룩한 사람이었고, 더러는 그다지 거룩하지 않았느니라. 이 책들의 가르침은 그 기원이 있던 시절에 깨우친 관점과 정도를 나타내느니라. 진리의 계시(啓示)로서, 마지막 것은 처음 것보다 더 믿을 만하니라. 성서는 결함이 있고 그 기원이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지만, 그릇 생각하지 말라, 성서는 이때에 온 세상에서 발견되는 종교적 지혜와 영적 진리 가운데 최선의 수집(收集)이라.
159:4.4 (1767.6) “이 책들 가운데 여럿은 그 책들이 지닌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쓰지 않았으나 이는 그 책에 담긴 진리의 가치를 조금도 떨어뜨리지 않느니라. 요나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도, 요나가 결코 세상을 산 적이 없다 하더라도, 이 이야기의 깊은 진리, 곧 하나님이 니느베와 이른바 이교도를 사랑하는 것은 그래도 역시 동료 인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눈에 여전히 귀중하니라. 성서가 거룩한 것은 성서가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위를 제시하는 까닭이요, 저희는 이 여러 글에서 올바름과 진리와 거룩함에 대하여 가장 높은 개념을 기록으로 남겼느니라. 성서는 참인 것을 많이, 허다하게 담고 있으나, 너희의 현재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이 기록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그릇 대표하는 많은 것을 또한 담고 있음을 네가 알며, 나는 그 사랑의 하나님을 온 세상에 드러내려고 왔노라.
159:4.5 (1768.1) “나다니엘아, 사랑의 하나님이 너의 조상에게 싸움터에 나가서, 적을 모두―어른과 아이들을―도륙하라 지시했다고 이르는 성서의 기록을 한 순간이라도 믿으려 하지 말라. 그러한 기록은 사람들, 그다지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이 한 말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성서는 성서를 쓴 사람들의 지적ㆍ도덕적ㆍ영적 상태를 언제나 비쳐 왔고, 언제나 그러하리라. 선지자들이 사무엘부터 이사야까지 기록을 만드는 동안, 야웨 개념이 더 아름답고 영화롭게 성장하는 것을 너는 눈치채지 못하였느냐? 그리고 성서의 의도(意圖)는 종교적 교육과 영적 안내를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하느니라. 성서는 역사가나 철학자의 작품이 아니라.
159:4.6 (1768.2) “가장 한탄할 것은 단지 성서 기록이 절대 완전하고 그 가르침에 오류가 없다는 이 그릇된 생각 뿐 아니라, 오히려 전통에 노예가 된, 예루살렘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 신성한 기록을 혼동하여 그릇 해석하는 것이라. 저희가 하늘나라 복음, 이 새로운 가르침에 저항하려고 굳게 각오하고, 이제 성서가 영감을 받았다는 교리와 그에 관한 저희의 그릇된 해석을 이용하리라. 나다니엘아, 결코 잊지 말라, 아버지는 진리의 계시를 어느 한 세대나 어느 한 민족에게만 주지 않느니라. 진지하게 진리를 찾는 많은 사람이 성서가 완벽하다는 이 교리(敎理)에 헛갈리고 낙심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하리라.
159:4.7 (1768.3) “진리의 권위는 진리의 생생한 명시에 깃드는 바로 그 정신이요, 다른 세대에 깨우침이 덜한 사람들,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죽은 말이 아니라. 이 거룩한 옛 사람들이 영감을 받고 영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저희의 말씀이 마찬가지로 영감을 받았음을 의미하지 않느니라. 내가 떠났을 때, 내 가르침을 다양하게 풀이하는 결과로 너희가 진리를 놓고 다투는 자들의 잡다한 집단으로 급속히 갈라질까 저어하여, 오늘날 이 하늘나라 복음의 가르침을 우리가 하나도 기록하지 않느니라. 기록 만들기를 피하면서 우리가 이 진리를 행하는 것이 이 세대에게 최선이라.
159:4.8 (1768.4) “내 말을 잘 주목하여라, 나다니엘아, 인간의 성품이 만진 것은 무엇이나 전혀 오류가 없다고 여길 수 없느니라. 사람의 머리를 통해서 신성한 진리는 정말로 빛을 낼지 모르지만 언제나 그것은 비교적 순수하고 부분적으로 신성한 진리이라. 사람은 전혀 잘못이 없기를 몹시 바랄지 몰라도 오직 창조자들이 절대로 잘못이 없는 속성을 가지느니라.
159:4.9 (1768.5) “그러나 성서에 관한 가르침에 가장 큰 착오는 성서가 오로지 그 민족의 지혜로운 지성인만 감히 풀이하는 봉인된 책, 신비와 지혜의 책이라는 교리이라. 신성한 진리의 계시는 인간의 무지, 편견, 좁게 생각하는 불관용이 아니면 봉인되지 않느니라. 성서의 빛을 오직 편견이 가리고 미신이 어둡게 만드느니라. 신성한 것을 헛되이 두려워하는 것은 종교가 상식(常識)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막아왔느니라. 지난날의 신성한 기록의 권한을 무서워하는 것은 오늘날 정직한 사람들이 복음의 새로운 빛, 지난 세대에 하나님을 아는 바로 이 사람들이 지극히 보고 싶어했던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실질적으로 막느니라.
159:4.10 (1769.1) “그러나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슬픈 특징은 이 전통이 신성하다고 가르치는 선생들 중에 더러가 바로 이 진실을 안다는 사실이라. 저희는 성서의 이 한계를 대체로 충분히 알지만, 도덕적으로 겁쟁이요, 지적으로 정직하지 않으니라. 저희는 신성한 기록에 관하여 진실을 알아도 사람들에게 그런 불안한 사실을 알리지 않기를 더 좋아하느니라. 이렇게 저희는 성서를 달리 해석하고 왜곡하며, 그 신성한 기록이 다른 세대에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도덕적 지혜, 종교적 영감, 영적 가르침의 저장소라고 호소하는 대신에, 성서를 일상 생활의 깨알 같은 세부를 담은 안내서요, 비영적인 것에 관한 권위 있는 책으로 만드느니라.”
159:4.11 (1769.2) 나다니엘은 주의 선언에 깨우침과 충격을 받았다. 마음 속 깊이 이 이야기를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예수가 승천하기까지 이 회담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그때도 주가 가르친 이야기를 전부 전하기를 두려워했다.
159:5.1 (1769.3) 필라델피아에는 야고보가 일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예수는 하늘나라 복음의 적극적 성질에 관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논평을 하는 과정에서, 성서의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진리를 더 담고 있음을 넌지시 비추었고, 듣는 사람들에게 영적 양식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자기 혼에게 먹이라고 훈계했을 때, 야고보는 주의 말씀을 가로막고 물었다: “주여, 우리 개인의 수양을 위하여 성서로부터 좀더 나은 구절을 어떻게 선택하는가, 당신이 친절을 베풀어 우리에게 제안하시겠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그렇다 야고보야, 너희가 성서를 읽을 때, 다음과 같이 영원히 참되고 신성하게 아름다운 가르침을 찾아보라:
159:5.2 (1769.4) “아 주여,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이 생기게 하옵소서.”
159:5.3 (1769.5) “주는 나의 목자요, 나에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59:5.4 (1769.6) “너희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느니라.”
159:5.5 (1769.7) “나, 주 너희 하나님이 너의 바른 팔을 붙들고,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이를 것임이라.”
159:5.7 (1769.9) 이것은 예수가 어떻게 히브리 성서의 노른자를 추종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그리고 하늘나라의 새 복음의 가르침에 넣으려고 날마다 이용했는가 예를 든 것이다. 다른 종교들은 하나님이 사람과 가까이 있다는 생각을 제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이 사람을 보살피는 것을 다정한 아버지가 의존하는 자녀들의 복지를 위하여 걱정하는 것으로 비유했고, 다음에 이 가르침을 그의 종교의 주춧돌로 만들었다. 이처럼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신조는 사람이 형제 정신을 실천하라고 명령한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은 그의 종교의 총합이요 요점이 되었다. 예수는 유대 종교의 최선을 가져다가 하늘나라 복음의 새 가르침에서 쓸 만한 배경으로 바꿔놓았다.
159:5.8 (1769.10) 예수는 유대 종교의 소극적 교리 속에 적극적 행동 정신을 집어넣었다. 예식의 요구 조건에 소극적으로 순응하는 대신에, 예수는 새 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새 종교가 요구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행하라고 명령했다. 예수의 종교는 그 복음이 요구한 것을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하는 데 있다. 그의 종교의 핵심이 사회 봉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 봉사는 참된 종교 정신을 가져서 생기는 한 가지 확실한 결과라고 가르쳤다.
159:5.9 (1770.1) 예수는 서슴지 않고 성서에서 더 좋은 반쪽을 이용했고, 한편 못한 부분을 거부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의 큰 훈계는 “너희는 네 민족의 아이들에게 원수를 갚지 말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할지니라”하고 기록한 성서로부터 고른 것이다. 예수는 부정적 부분을 물리치면서 이 성서의 적극적 부분을 이용했다. 부정적이거나 순전히 소극적 무저항도 반대하였다. 그는 말했다: “적이 네 한쪽 뺨을 치거든, 잠자코 소극적으로 서 있지 말고, 적극적 태도로 다른 뺨을 돌려 대라. 다시 말해서, 잘못에 빠진 네 형제를 잘못된 길로부터 올바르게 사는 더 나은 길로 이끌도록 가능한 최선의 것을 적극적으로 행하라.”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어떤 생활 상황에 대해서도 긍정적ㆍ적극적 반응을 요구했다. 다른 뺨을 돌려 대는 것이나 또는 그것이 무슨 행위를 상징하든지, 주도권을 요구하고 그 신자의 인격이 활기 있고 능동적이고 용기 있게 표현하기를 요구한다.
159:5.10 (1770.2) 예수는 악에 대하여 무저항을 실천하는 자를 일부러 악용할 자가 모욕을 주는 데 소극적 굴복을 실천하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종자들이 선으로 악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목적으로, 지혜롭고 민첩하게 악에 대하여 선으로 빨리 적극 반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된 선은 가장 지독한 악보다 변함없이 훨씬 더 힘이 있음을 잊지 말라. 주는 올바름의 적극적 표준을 가르쳤다: “내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나 자신을 거들떠보지 말고 나를 따르기 위하여 날마다 책임을 한껏 지라.” 그리고 “그가 선한 일을 하며 다녔으므로” 자신이 그렇게 살았다. 복음의 이 모습은 나중에 추종자들에게 말씀한 여러 비유에 그 예가 잘 나타났다. 결코 추종자들에게 자기 책임을 참을성 있게 지라고 훈계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인간적 책임과 신성한 특권을 한껏 수행하기 위하여 에너지와 열심을 가지고 책임을 지라고 하였다.
159:5.11 (1770.3) 사람이 겉옷을 부당하게 빼앗을 때 다른 옷도 내밀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쳤을 때, 예수는 글자 그대로 또 다른 겉옷이 아니라, 앙갚음하라는 옛 충고―”눈에는 눈으로” 따위―대신에 행악자를 구원하려고 긍정적인 무슨 일을 하는 생각을 언급했다. 예수는 복수하거나 그저 불공평을 소극적으로 참거나 그에 희생되는 자가 되는 관념을 몹시 싫어했다. 이 경우에 그는 악에 맞서 싸우고 저항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음을 가르쳤다:
159:5.12 (1770.4) 1. 악을 악으로 갚는 것―적극적이지만 올바르지 않은 방법.
159:5.13 (1770.5) 2. 불평 없이 저항하지 않고 악을 견디는 것―순전히 부정적인 방법.
159:5.14 (1770.6) 3. 악을 선으로 갚는 것, 그 상황의 주인이 되도록 의지(意志)를 주장하는 것,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적극적이고 올바른 방법.
159:5.15 (1770.7)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한때 물었다: “주여, 어느 낯선 자가 짐을 지고 십리를 가라 강제하면 어찌해야 하나이까?” 예수는 대답하였다: “소리를 죽여 그 낯선 자를 헐뜯으면서, 앉아서 위안을 얻으려 한숨을 쉬지 말라. 올바름은 그러한 수동적 태도에서 솟아나오지 않느니라. 더 효과 있게 적극적인 일을 전혀 생각할 수 없거든, 적어도 그 짐을 십리 더 나를 수 있느니라. 이것은 부당하고 사악한 낯선 사람에게 분명히 도전이 되리라.”
159:5.16 (1770.8) 유대인은 뉘우치는 죄인을 용서하고 그릇된 행위를 잊으려고 애쓰는 하나님에 관하여 들은 적이 있었지만, 예수가 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고, 먼저 죄인을 찾아 나서며, 그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기꺼이 돌아오려고 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기뻐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듣지 못했다. 종교에서 이 적극적 음성을 예수는 기도(祈禱)에도 연장하였다. 무엇을 하지 말라는 황금률을 사람이 공정해야 한다는 적극적 훈계로 바꾸었다.
159:5.17 (1771.1) 어떤 가르침에도 예수는 어수선한 세부를 어김없이 피했다. 화려한 언어를 피하고 말장난인 단순한 시(詩)같은 묘사를 피했다. 그는 작은 표현 속에 큰 의미를 넣는 버릇이 있었다. 예를 들어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소금ㆍ누룩ㆍ고기잡이ㆍ어린아이와 같은 여러 낱말의 현재 통용되는 뜻을 뒤집었다. 정반대를 가장 효과 있게 이용했고, 티끌과 무한, 그리고 그런 따위를 비교했다. “소경을 이끄는 소경”처럼 그의 그림은 놀라웠다. 그러나 예를 보이는 가르침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힘은 그 자연스러움이었다. 예수는 종교의 철학을 하늘로부터 땅까지 가져왔다. 그는 새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사랑을 새로이 줌으로 혼의 근원적 필요를 묘사했다.
159:6.1 (1771.2) 데카폴리스에서 4주 동안의 임무는 어지간히 성공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을 하늘나라에 받아들였고, 사도와 전도사들은 예수가 친히 가까이 계심으로 격려받지 않고서 할 일을 수행하는 값진 체험을 가졌다.
159:6.2 (1771.3) 9월 16일 금요일에, 일꾼들의 일행 전부가 마가단 공원에서 미리 주선하여 모였다. 안식일에 1백 명이 넘는 신자들의 회의가 열렸고, 거기서 하늘나라의 일을 확장하기 위하여 앞날의 계획이 충분히 고려되었다. 다윗의 사자들이 자리에 있었고, 유대ㆍ사마리아ㆍ갈릴리, 그리고 인접한 구역에 두루, 신자들의 복지에 관하여 보고가 있었다.
159:6.3 (1771.4) 이때 예수의 추종자들 가운데 거의 아무도 사자단이 얼마나 값진 수고를 했는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사자(使者)들은 팔레스타인에 두루, 신자들이 서로, 그리고 예수와 사도들과 연락을 유지하게 했을 뿐 아니라, 이 어두운 시절에 또한 자금을 모으는 자로서 예수와 그 동료들을 부양할 뿐 아니라, 또한 열두 사도와 열두 전도사의 가족들을 원조하기 위하여 일했다.
159:6.4 (1771.5) 이 무렵에 아브너는 활동의 근거지를 헤브론에서 베들레헴으로 옮겼는데, 여기는 또한 유대 지방에서 다윗의 사자들의 본부였다. 다윗은 예루살렘과 벳세다 사이에 주자를 바꾸어 밤 동안에 사자 봉사를 유지했다. 이 주자(走者)들은 저녁마다 예루살렘을 떠나서 시카와 스키토폴리스에서 교체되었고, 이튿날 아침 식사 때에 벳세다에 도착했다.
159:6.5 (1771.6) 예수와 동료들은 이제 하늘나라를 위하여 수고하는 마지막 시기를 개시할 준비가 되기 전에, 한 주 동안 휴식을 취하려고 준비했다. 이것은 마지막 휴식이었는데, 페레아 사명이 전도하고 가르치는 운동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예루살렘에 그들이 도착하고 예수의 지상 생애를 마무리하는 사건들을 연출할 때까지 바로 이어졌다.
160:0.1 (1772.1) 9월 18일, 일요일 아침에, 안드레는 다음 주에 아무 일도 계획하지 않으리라고 발표했다. 나다니엘과 토마스를 제쳐놓고, 사도들은 다 가족을 찾아보거나 친구들과 함께 머물려고 집으로 갔다. 이 주에 예수는 거의 완벽하게 휴식하는 기간을 가졌지만, 나다니엘과 토마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로단이라는 어떤 그리스인 철학자와 토론하느라고 무척 바빴다. 이 그리스인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임무를 수행했던 아브너의 동료인 한 사람의 가르침을 통해서, 요즘에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로단은 이제 자기의 생활 철학과 예수의 새로운 종교적 가르침을 조화시키는 일에 진지하게 몰두해 있었고, 주가 이 문제들을 함께 이야기하기를 희망하면서 마가단으로 왔다. 그는 또한 예수나 사도들 중의 한 사람으로부터 직접 들은, 복음의 권위 있는 해석을 손에 쥐기를 바랐다. 로단과 그런 회담을 가지기를 거절했어도, 예수는 그를 정중하게 받아들였고, 나다니엘과 토마스에게 그가 하고 싶어했던 말을 모두 듣고 그 보답으로 복음에 관하여 일러주라고 즉시 지시했다.
160:1.1 (1772.2) 월요일 아침 일찍, 로단은 나다니엘과 토마스, 그리고 어쩌다가 마가단에 들렸던 스무댓 명 남짓한 신자 집단에게 열 번 연속된 강연을 시작했다. 현대의 어법으로 요약하고 통합하고 다시 말하면, 이 여러 연설은 다음의 여러 생각을 고려할 것을 제시한다:
160:1.2 (1772.3) 인생은 세 가지 큰 욕구―충동ㆍ욕망ㆍ유혹―에 담겨 있다. 강인한 인격, 위엄 있는 인격은 오직 인생의 자연스러운 충동을 사회에서 살아가는 기술로 바꿈으로, 현재의 욕망을 지속된 성취가 가능한 상급 욕망으로 변화시킴으로 얻는다. 한편 존재에서 평범한 유혹은 사람의 전통적이고 확립된 관념으로부터 아직 탐구되지 않은 관념과 발견되지 않은 이상(理想)의 상급 분야로 옮겨져야 한다.
160:1.3 (1772.4) 문명이 복잡하게 되면 될수록, 살아가는 기술은 더욱 어렵게 될 것이다. 사회 관습의 변화가 빠를수록, 인격을 개발하는 과제는 더욱 까다로워질 것이다. 진보가 계속되려면, 열 세대마다 인류는 살아가는 기술을 새로 배워야 한다. 사람이 아주 영리해서 더욱 빨리 사회를 복잡하게 만든다면, 살아가는 기술을 더 짧은 시간 안에, 아마도 한 세대마다, 다시 통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살아가는 기술의 진화가 존재하는 기법과 발걸음을 맞추지 못하면, 인류는 생활의 단순한 충동―현재 욕망의 만족―으로 재빨리 돌아갈 것이다. 따라서 인류는 미숙한 채로 남아 있고, 사회는 완전히 성숙하기까지 자라지 못할 것이다.
160:1.4 (1773.1) 사회는 사람이 단지 일시적이고 눈앞에 닥친 욕망의 만족을 기꺼이 버리고 더 우수한 열망을 품는 정도까지 성숙해지며, 그런 열망을 성취하려는 노력은 영구한 목표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더욱 풍부한 만족을 낳는다. 그러나 사회가 성숙했는가를 가리키는 참된 지표는 기존 관념 및 전통적 생각이 가진 유혹의 기준, 안일을 권장하는 기준 아래서 한 민족이 평화롭게 만족하여 사는 권리를 기꺼이 버리고, 아직 찾지 못한 목표, 이상적 영적 실체들을 달성하는, 아직 살펴보지 않은 가능성을 추구하는 유혹, 불안하고 에너지를 소모하는 유혹을 택하는 것이다.
160:1.5 (1773.2) 동물은 생명의 충동에 훌륭하게 반응하지만, 오직 사람이 살아가는 기술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인류의 대다수는 겨우 살려고 하는 동물의 충동만 느낀다. 동물은 오직 이 맹목이고 본능적인 충동만 알며, 사람은 자연스럽게 작용하는 이 충동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 사람은 지적 예술의 높은 수준에서, 아니 하늘의 기쁨과 영적 환희가 있는 수준에서, 살기를 택해도 좋다. 동물은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 묻지 않는다. 따라서 결코 걱정하지 않고 자살하지도 않는다. 자살(自殺)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러한 사람이 순전한 동물 단계의 존재에서 솟아나왔고, 더 나아가서 그러한 인간의 탐구 노력이 필사 체험의 예술적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동물은 생명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다. 사람은 가치 기준을 인식하고 의미 있는 것을 이해하는 능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또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깨닫는다―통찰력을 가졌음을 스스로 의식한다.
160:1.6 (1773.3)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욕구대로 사는 인생을 감히 버리고, 모험하는 기술과 확실치 않은 논리로 가득한 인생을 살 때, 적어도 어느 정도 지능과 감정이 성숙할 때까지, 감정의 피해―갈등ㆍ불행ㆍ불확실―의 결과로 생기는 위험에 부딪칠 것을 기대해야 한다. 낙심ㆍ걱정ㆍ게으름은 사람이 도덕적으로 미숙함을 가리키는 분명한 증거이다. 인간 사회는 두 가지 문제, 곧 개인의 성숙과 종족의 성숙에 이르는 문제에 부닥친다. 성숙한 인간은 이내 모든 다른 필사자를 부드러운 느낌과 너그러운 감정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성숙한 인간은 부모가 자식에게 품는 것과 같은 사랑과 배려로 미숙한 사람을 바라본다.
160:1.7 (1773.4) 인생에 성공하는 것은 평범한 문제를 해결하는 믿을 만한 기법을 통달하는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문제라도 그 해결의 첫 걸음은 어려움을 찾아내고 그 문제를 분리하고 솔직하게 그 성질과 중대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큰 잘못은 생활 문제가 우리의 깊은 두려움을 일으킬 때, 우리가 그런 문제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데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어려움을 인정하는 것이 오래 간직한 자부심을 깎아내리거나 질투를 인정하거나 뿌리 깊은 편견 버리기를 수반할 때, 보통 사람은 안전한 옛 망상(妄想), 그리고 오래도록 간직했던 거짓된 안정감에 달라붙기를 더 좋아한다. 오직 용감한 사람이, 성실하고 논리적인 머리가 발견하는 것을 기꺼이 솔직하게 인정하고 두려움 없이 그에 부닥친다.
160:1.8 (1773.5) 어떤 문제라도 지혜로운 효과적 해결은, 해결하도록 나타나는 문제를 구성하는 실제 요인의 냉정한 조사를 방해할 수 있는 편견과 정열, 그리고 순전히 개인적인 어떤 다른 선입관에도, 지성이 매이지 않기를 요구한다. 인생에서 생기는 문제의 해결은 용기와 성실성을 요구한다. 오직 정직하고 용감한 사람들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인생의 미로(迷路)를 거쳐서, 두려움 없는 지성의 논리가 어디로 이끌더라도 대담하게 따라갈 수 있다. 이러한 지성과 혼의 해방은, 종교적 정열에 가까이 가는, 지적인 열심의 추진력 없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어려운 물질적 문제와 다양한 지적(知的) 위험이 가득한 목표를 추구하도록 사람을 움직이는 데는 위대한 이상의 유혹이 필요하다.
160:1.9 (1774.1) 너희가 인생의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려고 유능하게 준비되었다 하더라도, 너희로 하여금 동료들로부터 진심으로 지지와 협동을 얻게 만들 수 있는, 지성의 그 지혜와 인격의 매력을 갖추지 않으면, 도저히 성공을 기대할 수 없다. 어떻게 동료들을 설득하는가, 사람들을 설복하는가 너희가 배울 수 없다면, 세속의 일이나 종교적 일에 너희는 대단히 성공하기를 바랄 수 없다. 너희는 다만 요령(要領)과 관대함을 지녀야 한다.
160:1.10 (1774.2)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는 모든 방법 중에서 가장 중대한 것을 나는 너희의 주, 예수로부터 배웠다. 그가 아주 한결같이 실천하는 것, 그리고 아주 충실히 너희에게 가르친 것, 곧 예배하는 정신으로 따로 명상에 잠겨 있는 것을 언급한다. 예수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교통하려고 아주 빈번히 혼자 훌쩍 떠나가는 이 버릇에서, 생활의 보통 갈등을 다룰 힘과 지혜를 모을 뿐 아니라, 또한 도덕적ㆍ영적 성질을 가진 상급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에너지를 이용하는 기법이 발견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는 올바른 방법조차도 인격의 타고난 결함을 보상하거나, 참된 올바름을 간절히 바라고 목마르게 찾는 욕구의 부재를 보상하지 못할 것이다.
160:1.11 (1774.3) 예수가 혼자서 따로 가는 버릇에 나는 깊이 감명을 받는다. 이것은 사는 문제를 이렇게 고독하게 살펴보는 시간에 잠겨 있으려는 것이요, 사회에 봉사하는 다채로운 요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새로 저장된 지혜와 에너지를 찾으려는 것이다. 신성(神性)에 닿는 의식에 인격 전부를 실제로 맡김으로 인생 최고의 목적을 자극하고 강화하려는 것이요, 살아 있는 존재가 마주치는 늘 변하는 상황에 자신을 적응하는 새롭고 더 좋은 방법을 강구하려는 것이다. 사람의 개인적 태도를 다시 갖추고 조정하려는 지극히 중대한 일을 성취하는 것이요, 그런 태도는 가치 있고 실재하는 만물을 꿰뚫어보는 향상된 통찰력을 얻는 데 아주 필수이다. 다른 뜻을 품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하려는 것―“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고 너희의 선생이 가장 좋아하는 기도를 진지하게 조용히 드리기 위한 것이다.
160:1.12 (1774.4) 너희 선생이 예배에 잠기는 이 버릇은 정신을 새롭게 하는 휴식을 가져온다. 사람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빛, 그리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문제에 용감하게 부딪치게 하는 용기, 사람을 무력(無力)하게 만드는 두려움을 없애는 자아 이해,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하나님을 닮게 만드는 확신을 사람에게 주는, 신성과 연합되는 그 의식을 가져온다. 주가 실천한 바와 같이, 예배하는 휴식, 곧 영적 교통은 긴장을 해소하고 갈등을 없애며, 인격의 총 재산을 힘차게 늘인다. 이 모든 철학과 하늘나라 복음을 더하면, 내가 알기에, 새 종교가 된다.
160:1.13 (1774.5) 편견(偏見)은 혼이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눈이 멀게 만든다. 오직 동료 인간을 모두 에워싸고 모든 것을 포함하는 운동을 찬미하는 데 혼을 진지하게 바침으로 편견을 없앨 수 있다. 편견은 이기심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오직 자아의 추구를 버리고, 자아보다 더 클 뿐 아니라 모든 인류보다도 훨씬 더 큰 운동에 봉사하는 만족을 추구함으로―하나님 찾기, 신성의 달성으로―그 자리를 채워야 편견을 없앨 수 있다. 인격이 성숙하다는 증거는, 가장 높고 가장 신성하게 실재하는 가치의 실현을 항상 추구하도록 인간의 소망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
160:1.14 (1774.6) 계속 변하는 세상에서, 진화하는 사회 체제의 와중에서 안정되고 확립된, 운명의 목표를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무한히 달성하는 영원한 목표로서, 오직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받아들인 자가 안정된 인격을 얻을 수 있다. 이처럼 사람의 목표를 시간에서 영원으로, 땅에서 파라다이스로, 인간다운 것으로부터 신다운 것으로 바꾸는 것은, 사람이 재생하고 변화되고 다시 태어날 것, 신다운 영이 다시 만든 아이가 될 것, 사람이 하늘나라의 형제 단체에 들어갈 것을 요구한다. 이 이상(理想)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철학과 종교도 미숙하다. 내가 가르치는 철학은 너희가 전파하는 복음과 연결되어 있고 성숙한 새 종교, 모든 미래 세대의 이상을 대표한다. 또 이것이 참말이니, 우리의 이상은 최종이요 결코 틀릴 수 없고 영원하며, 보편ㆍ절대적이고 무한하기 때문이다.
160:1.15 (1775.1) 나의 철학(哲學)은 나에게 참으로 달성할 실체, 성숙의 목표를 추구하려는 충동을 주었다. 그러나 나의 충동은 무력했고 나의 탐구는 추진력이 모자랐다. 나의 추구는 지향할 확신이 없어 타격을 받았다. 예수의 이 새 복음이, 통찰력을 향상하고 이상을 높이고 목표를 안정시킴과 함께, 이 부족함을 풍성하게 채워주었다. 의심과 불안이 없이, 나는 이제 진심으로 영원한 모험에 들어갈 수 있다.
160:2.1 (1775.2) 사람들은 꼭 두 가지 방법으로 함께 살아도 좋으니, 물질의 길, 곧 동물의 길, 그리고 영적 길, 곧 인간다운 길이다. 신호(信號)와 소리로 동물은 제한된 방법이나마 서로 교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형태의 교통은 의미 있는 것이나 가치 기준이나 생각을 전하지 못한다. 사람과 동물 사이에 하나의 차이점은 사람이 상징의 수단으로 동료들과 의사를 전할 수 있는 것이며, 상징은 의미ㆍ가치ㆍ개념, 아니 이상까지도 아주 확실히 표시하고 확인한다.
160:2.2 (1775.3) 서로 생각을 전달할 수 없으니까, 동물은 인격을 개발할 수 없다. 사람은 생각과 이상에 관하여 이렇게 동료들과 교통할 수 있기 때문에 인격을 개발한다.
160:2.3 (1775.4) 인간의 문화의 바탕을 이루고 사람으로 하여금 사회 관계를 통하여 문명을 세우게 하는 것은 뜻을 전달하고 공유하는 이 능력이다. 지식과 지혜가 쌓이는 것은 사람이 이 재산을 뒤잇는 세대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종족의 문화 활동, 즉 예술ㆍ과학ㆍ종교ㆍ철학이 일어난다.
160:2.4 (1775.5) 인간들 사이에 상징으로 교통하는 것은 사회 집단이 생성될 것을 예정한다. 모든 사회 집단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가족, 더 자세히 말하면 부모이다. 개인적 애정은 이 물질적 관계를 함께 붙들어 두는 영적 끈이다. 그러한 효과적 관계는 또한, 진정한 우정을 쏟는 데서 아주 풍부하게 나타나다시피, 동성(同性)의 두 사람 사이에도 가능하다.
160:2.5 (1775.6) 이러한 우정 관계와 서로 사랑하는 관계는 사람 사이에 교제하고 사람을 훌륭하게 만들며, 이는 그러한 관계가 살아가는 기술의 상급 수준에서 다음의 필수 요소를 권장하고 수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160:2.6 (1775.7) 1. 서로 자아를 표현하고 자아를 이해하는 것. 인간의 많은 고귀한 충동은 그 표현을 들어줄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죽어 버린다. 참으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다. 어느 정도 인정받고 얼마큼 평가를 받는 것은 사람의 인품이 성장하는 데 필수이다. 가정에서 진정한 사랑이 없이, 어떤 아이도 정상 인품을 제대로 기를 수 없다. 인품은 단순한 지성과 도덕률보다 더 큰 무엇이다. 인품을 길러준다고 평가된 모든 사회 관계 가운데 가장 효율적이고 이상적인 것은 총명한 결혼 생활에서 서로의 품속에서 남녀가 사랑하고 이해하는 우정(友情)이다. 결혼은 그 다양한 관계와 함께, 튼튼한 인품을 기르는 데 불가결한 값진 충동과 상급의 동기를 이끌어 내도록 최선으로 고안되어 있다. 이처럼 나는 서슴지 않고 가족 생활을 찬미하는데, 너희의 선생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 새 하늘나라 복음의 바로 그 주춧돌로 지혜롭게 골랐기 때문이다. 그러한 견줄 데 없는 관계의 공동체, 세월을 통해서 가장 높은 이상, 즉 남녀가 다정한 품에 안겨 있는 것은 아주 값지고 흐뭇한 체험이니까, 이를 얻기 위해 필요한 어떤 값,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가치가 있다.
160:2.7 (1776.1) 2. 사람들의 연합―지혜의 동원. 모든 인간은 얼마 있으면 이 세상에 대하여 어떤 개념을 얻고 다음 세상에 대하여 어떤 선견을 얻는다. 인격의 교제를 통해서, 현세의 존재와 영원한 전망, 이 두 관점을 통일하는 것이 이제 가능하다. 이처럼 한 사람의 지성은 다른 사람의 통찰력을 많이 얻음으로 자체의 영적 가치를 크게 만든다. 이 방법으로 사람들은 각자의 영적 재산을 한데 합침으로 그 혼을 부유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바로 이 방법으로 사람은 왜곡된 시력(視力), 치우친 관점, 좁은 판단에 피해자가 되는, 상존하는 그 성향을 피할 수 있게 된다. 두려움ㆍ질투ㆍ자만은 오로지 다른 지성들과 가까이 접촉해야 막을 수 있다. 하늘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수고하라고 주가 결코 너희를 혼자 내보내지 않는 사실을 너희가 주목하기를 바란다. 그는 언제나 너희를 둘씩 내보낸다. 지혜는 초월 지식이니까, 지혜를 통합할 때, 사회 집단은 작건 크건, 서로 모든 지식을 함께 가진다.
160:2.8 (1776.2) 3. 살려는 열심. 고립되는 것은 혼의 충전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이 친구들과 관계를 가지는 것은 살려는 열심을 새롭게 하는 데 필수이며, 인간 생활의 상급 수준으로 올라가는 결과로 생기는 투쟁에서 싸울 용기를 유지하는 데 필수이다. 우정은 기쁨을 더하고 인생의 승리를 영화롭게 한다. 서로 사랑하는 가까운 인간 관계는 인생의 슬픔과 어려움을 맛볼 때 고통의 쓴 맛을 많이 가시게 한다. 친구가 곁에 있으면 어떤 아름다움도 어떤 좋은 일도 돋보인다. 지능적 상징으로 사람은 친구들의 이해하는 능력을 자극하고 키워준다. 인간의 우정에서 더할나위 없는 한 가지 영광은 이렇게 서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힘과 가능성이다. 큰 영적 힘은 공통되는 명분에 진심으로 헌신하는 것, 곧 우주의 신에게 공동으로 충성하는 것을 의식하는 데 본래부터 생긴다.
160:2.9 (1776.3) 4. 모든 악에 대하여 강화된 방어. 인격의 교제를 가지고 서로 사랑하는 것은 악에 저항하는 효과적 보장이다. 어려움ㆍ슬픔ㆍ실망ㆍ실패는 혼자 겪을 때 더 고통스럽고 마음 아프다. 사람과 사귀는 것은 잘못을 올바름으로 변화시키지 않지만, 쏘는 아픔을 크게 더는 데 도움이 된다. 너희의 선생은 말했다: “슬퍼하는 자는 행복하나니”―친구가 위로하려고 가까이 있으면 그렇다. 너희가 다른 사람의 복지(福祉)를 위하여 산다는 것, 그리고 이 다른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너희의 복지와 발전을 위하여 산다는 것을 아는 데 긍정적인 힘이 있다. 사람은 고립된 가운데 시든다. 세월의 일시적 거래만 볼 때, 인간은 어김없이 낙심하게 된다. 지난날과 앞날로부터 분리된 오늘은 어이없을 정도로 하찮다. 오직 영원의 동그라미를 한 번 보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도록 북돋아주며, 사람 속에 있는 최선의 자질이 최대로 일하도록 도전할 수 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할 때, 사람은 다른 사람들, 시간과 영원 속에서 함께 사는 동료들의 이익을 위하여 가장 사심 없이 산다.
160:2.10 (1777.1) 되풀이하건대, 영감을 주고 사람을 고귀하게 만드는 그러한 교제는 인간의 결혼 관계에서 그 이상적 가능성을 발견한다. 결혼 바깥에서 많은 것이 성취되고, 허다한 결혼이 이 도덕적ㆍ영적 열매를 도무지 맺지 못하는 것이 참말이다. 너무나 자주, 인간을 성숙하게 만드는 이 우수한 성취보다 낮은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자들이 결혼에 들어간다. 이상적 결혼은 감정의 변동과 단순한 성적 매력의 변덕스러움보다 더 안정된 무엇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그러한 결혼은 진정하게 서로 몸소 헌신하는 데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래서 그렇게 믿을 만하고 효과적인 단위, 인간적 교제의 작은 단위들을 너희가 세울 수 있다면, 이 단위들이 총합으로 모였을 때, 세계는 크고 영화롭게 된 사회 구조, 도덕적으로 성숙한 문명을 바라볼 것이다. 그러한 종족은 너희 선생의 이상, “땅에는 평화요, 사람들 사이에 선의”와 같은 무엇을 비로소 실현할지 모른다. 그러한 사회가 완전하거나 악이 전혀 없지는 않을 터이나, 적어도 안정된 성숙에 가까이 갈 것이다.
160:3.1 (1777.2) 성숙을 향한 노력은 일을 필요하게 만들며, 일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어디서부터 이 모두를 성취할 힘이 나오는가? 물리적인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지만, 주가 좋은 말씀을 하셨으니,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도다.” 정상의 몸과 썩 좋은 건강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다음에 우리는 사람의 잠자는 영적 힘을 불러일으킬 자극제로서 작용할 유혹물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 안에 산다고 예수는 우리에게 가르쳤다. 그러면 혼에 묶여 있는 이 신답고 무한한 힘을 방출하기 위하여 사람을 어떻게 유도할 수 있는가? 바로 우리의 혼이 바깥을 향하여 이동하는 동안, 그 혼을 새롭게 하려고 하나님이 솟아나오고, 그리고 나서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사람을 깨우치고 격려하고 복을 주는 목적에 쓰이도록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해방하도록 유인할 것인가? 너희 혼 속에 잠자는, 선을 행하는 이 잠재 능력을 내가 어떻게 최선으로 일깨울 수 있는가? 내가 확신하는 한 가지는 이것이다: 감정의 흥분은 이상적인 영적 자극이 아니다. 흥분은 에너지를 증가시키지 않는다. 흥분은 오히려 머리와 몸의 힘을 써버린다. 그러면 어디서 이 큰 일을 할 에너지가 오는가? 너희의 선생에게 눈을 돌리라. 우리가 여기서 에너지를 쓰고 있는 동안에, 지금도 그는 산에서 힘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모든 문제의 신비는 영적 교통에, 예배에 감추어져 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명상과 휴식을 합친 문제이다. 명상은 지성이 영과 접촉하게 만든다. 긴장이 풀린 정도에 따라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좌우된다. 그리고 허약함을 버리고 힘을, 두려움을 버리고 용기를,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가지는 것이, 예배의 본질을 이룬다. 적어도 철학자는 이 교환을 이렇게 본다.
160:3.2 (1777.3) 이 여러 체험이 자주 되풀이될 때, 체험은 버릇으로, 힘을 주는 경건한 버릇으로 굳어지며, 그러한 버릇은 궁극에 자체를 영적 인품으로 형성하고 그러한 인품은 마침내 사람의 동료들에게 성숙한 인격으로 인식된다. 이 관습은 처음에 어렵고 시간이 걸리지만, 버릇이 되면 즉시 휴식을 주고 시간을 절약한다. 사회가 더욱 복잡해지고 문명에서 유혹물이 증가할수록,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자기의 영적 에너지를 보존하고 증대하기 위하여 고안된 관습, 그러한 보호하는 버릇된 관습을 기를 필요성이 더욱 급해진다.
160:3.3 (1778.1) 성숙에 이르는 데 또 다른 요건은 늘 변화하는 환경에 사회 집단들이 협동으로 적응하는 것이다. 미숙(未熟)한 사람은 동료의 반감을 일으킨다. 성숙한 사람은 동료한테서 마음에서 우러난 협동을 얻으며, 그렇게 함으로 일생의 노력에서 얻는 열매를 여러 배로 늘인다.
160:3.4 (1778.2) 필요하다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개념을 방어하기 위하여 싸워야 할 때가 있다고 나의 철학은 내게 이른다. 그러나 더 성숙한 종류의 인격을 가진 주는, 우수하고 매력 있는 기술, 수완과 관용의 기술로, 똑같은 승리를 쉽고도 품위 있게 얻을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너무나 자주, 우리가 권리를 위하여 투쟁할 때, 승자와 패자(敗者), 모두가 진 것이 판명된다. “잠긴 문을 통해서 들어가려고 할 때, 지혜로운 사람은 문을 부수기보다 오히려 문을 열기 위하여 열쇠를 찾으려 하리라” 하는 주의 말씀을 바로 어제 들었다. 단지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우리 스스로 확신하려고 싸움에 빠지는 일이 너무 흔하다.
160:3.5 (1778.3) 이 새로운 하늘나라 복음은, 더 질 높은 생활을 위하여 새롭고 더 값진 동기를 주므로, 살아가는 기술에 크게 쓸모가 있다. 그 복음은 새롭고 높은 운명의 목표, 최상의 사는 목적을 제시한다. 이 새로운 개념, 존재의 영원하고 신성한 목표는 그 자체로 초월 자극이요, 사람의 상급 성품에 거하는 최선이 반응하기를 요구한다. 지적(知的) 생각이 산꼭대기에 이를 때마다 정신에게 휴식, 혼에게 힘, 영을 위한 교통이 발견될 것이다. 상급 생활의 그러한 유리한 지점으로부터, 사람은 더 낮은 수준의 생각―걱정ㆍ질투ㆍ시샘ㆍ앙갚음, 그리고 미숙한 인격의 자만심―의 물질적 염증을 초월할 수 있다. 높이 올라가는 이 사람들은 인생의 하찮은 것 중에 역행(逆行)하는 수많은 갈등에서 자신을 구원하고, 이처럼 영 개념과 하늘 교통이 있는 상류의 흐름을 의식하도록 자유롭게 된다. 그러나 쉬운 일시적 달성을 추구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인생의 목적을 부지런히 보호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목적은 비참한 광신주의 위협에 면역이 되도록 육성되어야 한다.
160:4.1 (1778.4) 영원한 실체들을 달성하는 데 마음을 다하면서, 너희는 또한 이 세상의 생활에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야 한다. 영은 우리의 목표이지만 육체는 사실이다. 때때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우연히 우리 손에 굴러 떨어질지 모르지만, 무릇 우리는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영리하게 일해야 한다. 인생의 두 가지 주요한 문제는, 현세의 생활을 꾸려 나가고 영원히 살아남기를 성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계를 잇는 문제조차도 그 이상적 해결에는 종교가 필요하다. 이 두 가지 다 상당히 개인적인 문제이다. 사실, 참된 종교는 개인과 따로 떨어져서 작용하지 않는다.
160:4.2 (1778.5) 현세의 생활에 필수인 것들은, 내가 보건대 다음과 같다:
160:4.4 (1778.7) 2. 맑고 깨끗한 생각.
160:4.6 (1778.9) 4. 재산―생활에 쓰이는 물품.
160:4.9 (1779.1) 몸의 건강과 능률에 관계되는 신체의 문제조차도, 이를 주의 가르침의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최선으로 해결된다: 사람의 육체와 지성은 신들의 선물이 거하는 자리요,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영이 된다. 이처럼 사람의 지성은 물질인 것과 영적 실체 사이에 중재자가 된다.
160:4.10 (1779.2) 사람이 인생에서 바람직한 것을 한 몫 확보하는 데는 지능이 필요하다. 사람이 날마다 할 일에 충실하면 꼭 재산으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그릇되다. 때때로 어쩌다가 생기는 재산이 아니면, 현세의 생활에서 물질적 보상은 잘 조직된 어떤 경로에서 흐르는 것이 발견되며, 오직 이 경로에 가까이 가는 자가 현세에 기울인 노력에 대하여 충분히 보상 받을 것을 기대해도 좋다. 가난은 언제나, 동떨어진 개별 경로에서 부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의 운명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계획은 이 세상에서 번영하는 데 한 가지 꼭 필요한 것이다. 성공하려면 자기 일에 헌신할 뿐 아니라 또한 사람이 물질적 부(富)가 흐르는 어떤 경로의 일부가 되어 활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이 지혜롭지 못하면 자기 세대에 인생을 바치고도 물질적 보상을 받지 못할 수 있다. 사람이 어쩌다가 재산의 흐름의 혜택을 받는 자가 되면, 동료 인간들을 위하여 가치 있는 일을 전혀 하지 않았더라도 사치(奢侈)에 파묻혀 살지 모른다.
160:4.11 (1779.3) 능력은 사람이 물려받는 것이요, 기술은 얻는 것이다. 인생은 어느 한 가지 일을 잘, 솜씨 있게 처리할 수 없는 자에게는 현실이 아니다. 기술은 생활에서 만족을 가져오는 하나의 진정한 근원이다. 능력은 선견(先見), 멀리 내다보는 눈을 선물로 받았음을 뜻한다. 정직하지 않은 성취가 유혹하는 보상에 속지 말라. 정직한 노력에 본래부터 있는, 후일의 보상을 위하여 기꺼이 수고하라. 지혜로운 사람은 수단과 목적을 구별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앞날을 위한 지나친 계획은 때때로 그 자체의 높은 목적을 망친다. 기쁨을 추구하는 자로서, 사람은 소비자일 뿐 아니라 생산자가 되려고 언제나 노력해야 한다.
160:4.12 (1779.4) 인생에서 힘을 주는 가치 있는 사건들을 신성하게 간직하도록 기억(記憶)을 훈련하라. 그런 사건들을 너희는 기쁨과 수련을 위하여 뜻대로 회상할 수 있다. 이처럼 아름답고 선하고 예술적으로 웅대한 예비 미술관을 자신을 위하여 네 몸 속에 지어라. 그러나 모든 기억 가운데 가장 고귀한 것은 훌륭한 우정을 나누는 위대한 순간을 소중히 회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힘을 방출하는 영적 예배의 손길 밑에서, 보물 같은 이 모든 기억은 가장 귀중하고 정신을 높여주는 영향력을 방출한다.
160:4.13 (1779.5) 그러나 사람이 실패를 품위 있게 받아들이기를 배우지 않으면, 목숨은 존재에서 짐이 될 것이다. 실패에는 훌륭한 사람들이 반드시 얻는 한 예술이 있다. 너희는 어떻게 즐겁게 지는가 알아야 한다. 너희는 실망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실패를 인정하기를 결코 망설이지 말라. 속이는 웃음과 활짝 웃는 낙천주의 밑에 실패를 감추려 하지 말라. 성공했다고 우기는 말은 언제나 듣기 좋지만, 마지막 결과는 끔찍하다. 그러한 수법은 비현실 세계를 지어내고 궁극에는 미몽(迷夢)에서 깨어나는 불가피한 파멸로 바로 이끈다.
160:4.14 (1779.6) 성공은 용기를 내게 하고 자신감을 촉진할지 모르지만, 지혜는 오직 사람이 실패한 결과에 적응하는 체험에서 생긴다. 낙관적 망상을 현실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지혜롭게 될 수 없다. 오직 사실을 직면하고 사실을 이상에 조절하는 자가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지혜는 사실과 이상, 이 두 가지를 포함하며, 따라서 지혜의 신봉자가 철학에서 열매 없는 두 극단을 벗어나게 한다―하나는 사실을 제쳐놓는 이상주의를 가진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영적 안목(眼目)이 결여된 물질주의자이다. 성공한다는 계속된 거짓 망상의 도움으로 인생의 투쟁을 겨우 유지할 수 있는 비겁한 사람은, 궁극에 자신이 상상하는 꿈의 세계에서 깨어날 때, 실패를 겪고 패배를 맛보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다.
160:4.15 (1780.1) 이렇게 실패에 부딪치고 패배에 적응하는 데는 종교의 원대한 환상이 최고의 영향을 미친다. 우주를 탐험하는 영원한 모험을 시작한 사람,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의 체험에서, 실패는 다만 교육이 되는 사건이다―지혜를 얻는 데 교양이 되는 실험이다. 그러한 사람에게 실패는 다만 더 높은 수준의 우주 실체를 성취하는 데 쓰이는 새 연장일 뿐이다.
160:4.16 (1780.2) 비록 현세의 인생 사업 전체가 사람을 압도하는 실패로 보인다 하더라도, 인생의 실패 하나하나가 지혜로운 교양과 영적 성취를 낳는다면,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의 생애는 영원의 빛으로 비추어 볼 때 큰 성공임이 드러날지 모른다. 지식과 교양과 지혜를 혼동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이것들은 인생에서 관계되지만, 대단히 다른 영적 가치를 대표한다. 지혜는 언제라도 지식을 이기고, 언제나 교양을 영화롭게 만든다.
160:5.1 (1780.3) 너희의 선생은 인간의 진정한 종교가 개인이 영적 현실을 체험하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너희가 내게 일러주었다. 종교는 사람이 온 인류의 경의(敬意)와 헌신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어떤 것에 반응하는 인간의 체험으로 나는 간주해 왔다. 이런 뜻으로 종교는, 실체의 이상에 대한 우리의 가장 높은 개념, 그리고 영원한 영적 달성 가능성을 향하여 우리의 지성이 미치는 가장 먼 한계, 이 두 가지를 대표하는 것에 우리가 최고로 헌신함을 상징한다.
160:5.2 (1780.4) 사람들이 종교에 관하여 부족ㆍ민족, 또는 종족의 의미에서 반응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 집단 바깥에 있는 자를 참으로 인간이 아니라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종교적 충성을 받는 대상(對象)이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종교는 결코 단순한 지적 관념이나 철학 논리의 문제일 수 없다. 종교는 언제나, 언제까지나 생활의 상황에 반응하는 방식이요, 종교는 일종의 행위이다. 종교는 보편적으로 찬미를 받아 마땅하다고 우리가 판단하는 어떤 실체를 향하여 경건하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을 포함한다.
160:5.3 (1780.5) 무엇이 너의 체험에서 종교가 되었으면, 너는 이미 그 종교의 활발한 전도사가 된 것이 자명하니, 이는 네 종교에서 최고의 개념이 온 인류, 모든 우주의 지성 존재들의 숭배를 받아 마땅하다고 네가 판단하기 때문이다. 네가 네 종교를 적극적으로 퍼뜨리고 선교(宣敎)하는 전도사가 아니라면, 네가 종교라 부르는 것은 겨우 전통적 관념이나 단순히 지적 철학 체계이니까, 너는 스스로 속는다. 너의 종교가 영적 체험이라면, 너의 예배 대상은 보편적 영 현실이요, 영적으로 변화된 너의 모든 개념의 이상(理想)이어야 한다. 두려움ㆍ감정ㆍ전통ㆍ철학에 근거를 둔 모든 종교를 나는 지적 종교라 부르고, 한편 참된 영 체험에 기초를 둔 것을 참된 종교라 부르겠다. 종교적 헌신의 대상은 물질이거나 영적이거나, 거짓되거나 참되거나, 현실이거나 비현실이거나, 인간답거나 신성할지 모른다. 따라서 종교는 선하거나 악할 수 있다.
160:5.4 (1780.6) 도덕과 종교는 반드시 같지는 않다. 한 체계의 도덕률은 예배의 대상(對象)을 붙잡아서 종교가 될지도 모른다. 한 종교는 충성과 최고의 헌신을 요구하는 보편적 호소력을 잃어버림으로, 철학 체계나 도덕률의 법전(法典)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종교적 충성을 받을 최고의 이상을 구성하고, 섬기는 자의 종교적 헌신을 받는 이것, 이 분, 이 상태 또는 서열의 존재, 또는 달성 가능성이 하나님이다. 영 실체의 이 이상에 무슨 이름이 적용되든지 상관 없이, 그것은 하나님이다.
160:5.5 (1781.1) 참된 종교의 사회적 특징은 그것이 변함없이 개인의 생각을 바꾸고 세계를 변화시키기를 추구한다는 사실에 있다. 종교는 발견되지 않은 이상이 존재함을 암시하며, 이것은 문명에서 가장 성숙한 제도의 가장 높은 사회 관습에도 담겨 있는, 그런 윤리 및 도덕의 알려진 표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종교는 발견되지 않은 이상, 탐구되지 않은 실체, 초인간적 가치, 신다운 지혜, 참된 영적 달성을 향하여 손을 뻗는다. 참된 종교는 이 모든 것을 실행하며, 모든 다른 신앙은 그 이름으로 부를 가치가 없다. 영원한 하나님이라는 가장 높고 하늘같은 이상(理想)이 없이, 사람은 진정한 영적 종교를 가질 수 없다. 하나님 없는 이러한 종교는 사람이 발명한 것이요, 생명 없는 지적 관념과 의미 없는 감정적 예식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제도이다. 종교는 하나의 큰 이상이 숭배받을 대상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비현실의 이상들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한 개념은 착각이다. 인간의 달성을 허용하는 유일한 이상은 영원한 하나님이 계신 영적 사실에 거하는, 무한히 가치 있는 신성한 현실이다.
160:5.6 (1781.2) 하나님이라는 낱말, 하나님이라는 이상과 대조하여 하나님이라는 관념은 어쩌다가 아무리 유치하고 거짓된 종교라도, 그런 종교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이 하나님 관념은 신봉자들이 선택하는대로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 하등 종교는 인간의 마음의 자연스러운 상태에 대처하려고 그 자체의 하나님 관념을 형성한다. 상급 종교는 참된 종교의 이상이 요구하는 것을 만족시키려고 인간의 마음이 바뀌기를 요구한다.
160:5.7 (1781.3) 예수의 종교는 우리가 예배라는 생각에 대하여 예전에 가졌던 모든 개념을 초월한다. 이는 예수가 그의 아버지를 무한한 실체의 이상으로 묘사할 뿐 아니라, 땅에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택하고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사람과 형제임을 받아들이는 것을 인정하는 모든 필사 인간이, 가치의 이 신다운 근원과 우주의 영원한 중심에 참으로 몸소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실히 선언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건대, 이것은 세상이 일찍이 본 가운데 가장 높은 종교 개념이다. 내가 선언하건대, 이 복음이 무한한 현실, 신성한 가치, 영원한 보편적 달성을 포함하니까, 이보다 더 높은 개념이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러한 개념은 최상이고 궁극인 것의 이상적 모습을 체험하는 것이다.
160:5.8 (1781.4) 나는 너희의 선생이 가진 이 종교의 더할 나위 없는 이상에 흥미가 당길 뿐 아니라 또한 영적 현실의 이 이상(理想)을 사람이 달성할 수 있다는 그의 선언을 믿는다, 파라다이스의 입구에 우리가 궁극에 확실히 도달한다는 그의 보장을 받아들이고 너와 내가 길고 영원한 이 모험에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고백하도록 나는 힘차게 마음이 움직인다. 형제들아, 나는 믿는 사람이요, 배를 타 버렸다. 이 영원한 모험으로 너희와 함께 가는 길이다. 주는 그가 아버지로부터 왔고, 그가 우리에게 길을 보이리라 하신다. 그가 진실을 말한다고 나는 충분히 확신한다. 영원한 우주의 아버지와 동떨어져서, 달성할 수 있는 현실의 이상이나 완전한 가치가 하나도 없다고 나는 마침내 확신한다.
160:5.9 (1781.5) 그러면 단지 존재하고 있는 것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미래에 존재가 가능한 모든 것의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내가 온다. 그러므로 최고의 이상이 실재한다면, 그 이상에 바치는 너희의 헌신은 이 하나님께, 사물과 존재들이 거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우주의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아무런 다른 하나님이 없으니, 도저히 어떤 다른 하나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다른 신은 상상으로 지어낸 헛것이요, 필사 지성의 환상이요, 거짓 논리로 왜곡(歪曲)한 것이요, 그것을 빚어낸 자들의 우상(偶像), 스스로 속이는 우상이다. 그렇다, 너희는 이 하나님 없이 종교를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이 이상의 실체 대신에 하나님이라는 낱말을 갈아치우고자 하면, 너는 한 이상, 신다운 실체가 있는 자리에 한 개념을 집어넣음으로 오직 자신을 속였을 뿐이다. 그런 관념은 몹시 바라는 공상(空想)의 종교에 지나지 않는다.
160:5.10 (1782.1) 예수의 가르침에서 나는 최선에 이른 종교를 본다. 이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찾아낼 수 있게 만든다. 그러나 하늘나라로 이렇게 들어가는 값을 우리가 기꺼이 치르겠는가? 우리는 기꺼이 다시 태어나고, 다시 지음받겠는가? 자아를 죽이고 혼을 다시 만드는 엄청나고 벅찬 이 과정을 우리가 기꺼이 거치겠는가? 주가 말씀하지 않았는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목숨을 잃어야 하느니라. 내가 평화를 가져오려고 왔다고 생각지 말라, 오히려 혼의 투쟁을 가져오려는 것이라.” 아버지의 뜻에 헌신하는 값을 치른 뒤에, 거룩히 헌신하여 사는 이 영적 길을 줄곧 걷는다면, 우리가 큰 평화를 맛본다는 것이 참말이다.
160:5.11 (1782.2) 이제 우리는 알려진 종류의 유혹물을 참으로 내버리고 있으며, 한편 상급의 이상, 신다운 실체를 추구하는 영 세계들에서 미래에 모험하는 생활, 알려지지 않고 탐구해 보지 않은 서열의 존재로 이끄는 유혹물을 찾는 데 아낌없이 몸을 바친다. 우리는 예수의 종교에 담긴 이러한 이상주의적 실체의 개념들을 동료 인간에게 전하는 데 사용할 의미 있는 상징을 찾고 있다. 온 인류가 이 최고의 진리를 담은 공동체의 환상으로 인하여 기쁨에 떨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그치지 않고 기도할 것이다. 바로 이제, 우리 마음 속에 간직된 바와 같이, 초점을 맞춘 우리의 하나님 개념은 하나님이 영이요, 우리의 동료에게 전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160:5.12 (1782.3) 예수의 종교는 생생한 영적 체험을 요구한다. 다른 종교는 전통적 관념, 감정적 느낌, 철학적 의식(意識)에 있고, 또 이 모든 것에 있을지 모르지만, 주의 가르침은 진정하게 영이 진보하는 실제 수준에 이르기를 요구한다.
160:5.13 (1782.4) 하나님처럼 되려는 충동을 의식하는 것은 참 종교가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감정을 느끼는 것은 참 종교가 아니다. 자아를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려는 확신을 아는 것은 참 종교가 아니다. 이 종교가 모든 것 가운데 최선이라고 조리 있게 따지는 지혜는 몸소 영적 체험을 겪는 종교는 아니다. 참된 종교는 진심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의 실체와 이상주의 뿐 아니라, 달성할 운명과 그 실체와도 관련이 있다. 진리의 영이 계시(啓示)함으로 이 모두가 우리에게 몸소 겪는 것이 되어야 한다.
160:5.14 (1782.5) 이처럼 예수의 복음을 믿는 사람이 된 그리스인 철학자, 그의 종족에서 가장 위대한 자 중 한 사람의 논설이 끝났다.
161:0.1 (1783.1) 서기 29년 9월 25일 일요일에, 사도와 전도사들은 마가단에 모였다. 그날 저녁에 동료들과 함께 긴 회의가 있은 뒤에, 예수는 이튿날 아침 일찍 그와 열두 사도가 천막 축제에 참석하려고 예루살렘으로 떠나겠다고 발표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는 전도사들에게 갈릴리에 있는 신자들을 찾아보라, 여인단은 한동안 벳세다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161:0.2 (1783.2)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날 시각이 되었을 때, 나다니엘과 토마스는 아직도 알렉산드리아의 로단과 한창 토론 중이었고, 며칠 동안 마가단에 남아 있도록 주로부터 허락을 얻었다. 그래서 예수와 열 사도가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난 동안, 나다니엘과 토마스는 로단과 진지한 토론에 들어갔다. 그 전주에 로단은 자기의 철학을 해설했고, 토마스와 나다니엘은 하늘나라 복음을 그리스인 철학자에게 번갈아서 발표했다. 로단은 예전에 세례자 요한의 옛 사도들 중 한 사람으로부터 예수의 가르침에 관하여 자신이 잘 교육받았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그의 선생이었다.
161:1.1 (1783.3) 로단과 두 사도가 다르게 보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곧 하나님의 성격이었다. 로단은 하나님의 속성에 관하여 그에게 제시된 모든 것을 쉽사리 받아들였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사람이 인격을 상상하는 것과 같은 성격자가 아니고 그럴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도들은 하나님이 성격을 가진 분인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면서 자신들이 곤경에 빠진 것을 발견했고, 한편 로단은 하나님이 성격자가 아님을 증명하기가 한층 더 어려움을 깨달았다.
161:1.2 (1783.4) 성격이라는 사실은 동등한 존재들, 공감하여 이해할 능력이 있는 존재들이 충분히 서로 교통한다는, 공존하는 사실에 달려 있다고 로단은 주장했다. 로단이 말했다: “성격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와 접촉하는 자들이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영이 교통하는 상징을 가져야 하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ㆍ영원하며, 모든 다른 존재의 창조자이니까, 따라서 동등한 존재에 관하여 말하면, 하나님은 우주에서 혼자이라. 그와 동등한 이가 아무도 없고, 동등한 이로서 그가 함께 교통할 분이 하나도 없느니라. 하나님은 정말로 모든 성격의 근원일지 모르지만, 그런 분으로서 창조자가 지음받은 자 위에 초월하여 계시는 것 같이, 하나님은 성격을 초월하느니라.”
161:1.3 (1783.5) 이 주장은 토마스와 나다니엘을 크게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예수에게 구조하러 와달라고 요청했지만, 주는 그 토론에 끼어들려 하지 않았다. 그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귀띔해 주기는 하였다: “너희가 아버지의 이상적인 무한ㆍ영원한 성품을 영적으로 숙지하는 한, 아버지에 대하여 너희가 무슨 개념을 품는가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느니라.”
161:1.4 (1784.1) 하나님은 사람과 교통하며, 따라서 로단의 정의(定義)를 쓰더라도 아버지는 성격자라고 토마스는 주장했다. 이것을 그리스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몸소 드러내지 않는다, 하나님은 아직도 신비라는 이유로 물리쳤다. 그리고 나서 나다니엘은 자기가 몸소 하나님을 체험한 것을 예를 들어 호소했다. 로단은 그가 요즈음에 비슷한 체험을 가진 적이 있다고 증언하면서 이를 인정했지만, 이런 체험은 오직 하나님이 실체임을 증명할 뿐이고 성격임을 증명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161:1.5 (1784.2) 월요일 밤이 되자 토마스는 두 손을 들었다. 그러나 화요일 밤이 되어서, 나다니엘은 로단이 아버지가 성격을 가진 분임을 믿도록 설득했고, 다음 단계의 논리로 그리스인의 관점을 바꾸게 하였다:
161:1.6 (1784.3) 1.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는 적어도 다른 두 존재와 동등하게 교통하며, 이들―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은 자신과 완전히 대등하고 자신과 온전히 비슷하다. 삼위일체 교리에 비추어서, 그리스인은 우주의 아버지가 성격자일 가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토론을 후일에 고려한 것은 열두 사도의 머리 속에, 확대된 삼위일체 개념으로 이끌었다. 말할 것도 없이, 예수가 영원한 아들이라고 일반적으로 믿었다).
161:1.7 (1784.4) 2. 예수가 아버지와 대등하니까, 그리고 이 아들이 땅에 있는 자녀들에게 인격을 드러내 보이는 일을 해냈으므로, 그러한 현상은 세 신격(神格)이 모두 성격을 소유한다는 사실과 또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명이 되며, 하나님이 사람과 교통하는 능력이 있는가,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에 영원한 해답을 준다.
161:1.8 (1784.5) 3. 예수가 사람과 서로 교제하고 완전히 교통하는 사이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동등하게 교통하고 같은 감정으로 서로 이해하는 것을 전제(前提)로 한다, 예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예수는 동시에 하나님과 사람, 양쪽과 이해하면서 교통을 유지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양자가 예수가 교통하는 상징의 뜻을 이해하니까, 서로 교통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필요 조건이 관계되는 한, 하나님과 사람이 모두 성격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예수의 인격은 하나님의 성격을 보여주며, 한편 사람 속에 하나님이 계심을 확고하게 증명한다. 똑같은 것에 관련된 두 가지는 서로 관계된다.
161:1.9 (1784.6) 4. 인격은 인간적 실체와 신다운 가치에 대하여 사람이 가진 최고의 개념을 대표한다, 하나님은 또한 신다운 실체와 무한한 가치에 대하여 사람이 가진 최고의 개념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답고 무한한 성격임이 틀림없다, 실제로 비록 사람의 인격 개념 및 정의(定義)를 무한히, 영원히 뛰어넘는 성격이지만, 그런데도 언제나 보편적으로 성격이다.
161:1.10 (1784.7) 5. 하나님이 모든 성격의 창조자요 모든 성격의 운명이니까, 하나님은 성격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하는 예수의 가르침에 로단은 이전에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다.
161:1.11 (1784.8) 이 여러 논점을 듣자, 로단이 말했다: “확신이 드는구나. 초인간ㆍ초월ㆍ최상, 무한ㆍ영원ㆍ최종, 그리고 보편성과 같은 연장된 가치들을 성격의 의미에 붙여서, 그런 믿음에 대하여 나의 고백을 제한해도 된다면, 하나님이 성격자임을 나는 고백하겠노라. 하나님이 성격보다는 무한히 크심이 틀림없지만, 성격보다 작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 확신하노라. 논쟁을 그만두고, 예수가 아버지가 몸소 계시된 것이요, 예수가 논리ㆍ이성ㆍ철학에서 충족되지 않은 모든 요소를 충족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나는 만족하노라.”
161:2.1 (1785.1) 로단이 하늘나라 복음에 대하여 가진 견해를 나다니엘과 토마스가 아주 충분히 인정했으므로, 더 고려할 것이 오직 하나 남았는데, 즉 예수의 신다운 성품을 다루는 가르침, 겨우 최근에야 터놓고 선언한 신조이다. 나다니엘과 토마스는 주의 신다운 성품에 관하여 견해를 공동으로 발표했고, 다음 이야기는 그들의 가르침을 요약하고 다시 정리하고 다시 적어 발표하는 것이다:
161:2.2 (1785.2) 1. 예수는 그의 신성(神性)을 이미 인정했고, 우리는 그를 믿는다. 사람의 아들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어야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일이 그의 사명과 관련하여 일어났다.
161:2.3 (1785.3) 2. 일생동안 그와 우리의 관계는 인간 우정의 이상(理想)을 본보기로 보여준다. 오직 신다운 존재가 아마도 그러한 인간 친구일 수 있다. 그는 우리가 일찍이 알게 된 가운데 참으로 가장 이기심 없는 사람이다. 죄인에게도 친구이고, 감히 적을 사랑한다. 그는 우리에게 무척 충실하다. 서슴지 않고 우리를 꾸짖지만, 그가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 모두에게 명백하다. 사람이 그를 잘 알수록, 더욱 그를 사랑할 것이다.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 그의 헌신적 태도에 마음이 끌릴 것이다. 우리가 그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 여러 해 동안 내내, 그는 충실한 친구였다. 비위 맞추는 말을 전혀 하지 않지만, 우리 모두를 똑같이 친절하게 다루며, 변함없이 부드럽고 동정심이 있다. 그의 인생과 모든 다른 것을 우리와 함께 나누었다. 우리는 행복한 공동체요, 무엇이나 공동으로 함께 쓴다. 우리는 그렇게 벅찬 상황 밑에서 한낱 인간이 그런 티없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161:2.4 (1785.4) 3. 예수가 결코 그릇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신성하다고 생각한다. 아무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는 놀랍게 지혜롭고, 더할 나위 없이 경건하다. 날마다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맞추어 산다. 아버지의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으니까 결코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와 함께 기도하지만, 결코 우리에게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요청하지 않는다. 그는 변함 없이 죄를 짓지 않는다고 우리는 믿는다. 겨우 인간인 자가 일찍이 그러한 삶을 산다고 공언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완전한 삶을 산다고 주장하고, 그가 그렇게 한다고 우리는 인정한다. 우리의 경건함은 뉘우침에서 생기지만 그의 경건함은 올바름에서 솟아나온다. 그는 죄를 용서한다고 공언하기도 하며 병을 고친다. 한낱 인간이 멀쩡한 정신에 죄를 용서한다고 공언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신의 특권이다. 우리가 그와 처음 접촉했을 때부터 그는 올바름 속에 이렇게 완전한 듯하였다. 우리는 은혜 속에서, 그리고 진리를 아는 가운데 자라지만, 우리의 주는 처음부터 성숙한 올바름을 나타낸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모두가 예수 안에서 이 선한 요소를 알아본다. 그래도 그의 경건함은 결코 눈에 거슬리거나 꾸미는 듯하지 않다. 그는 온유하고도 두려움이 없다. 우리가 그의 신성을 믿는 것을 승인하는 듯하다. 그는 공언하는 대로 그런 분이든지, 아니면 세상에 일찍이 알려진 가운데 최대의 위선자요 사기꾼이다. 그는 자기가 주장하는 대로 바로 그런 분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161:2.5 (1785.5) 4. 그의 독특한 성품, 그리고 감정의 완전한 자제는 그가 인간과 신(神)의 결합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준다. 그는 인간적 필요가 있는 장면에 어김없이 반응하며, 사람의 고통이 그의 마음에 호소하지 않는 적이 없다. 그의 동정심은 육체의 고통, 정신의 고뇌, 또는 영적 슬픔에 똑같이 반응한다. 동료 인간에게 믿음이나 어떤 다른 장점이 있음을 재빨리 알아보고 너그럽게 인정한다. 아주 공정하고 공평하며, 동시에 무척 자비롭고 배려가 깊다. 사람들의 영적 완고함을 슬퍼하고, 사람들이 진리의 빛을 보는 것에 찬성할 때 기뻐한다.
161:2.6 (1786.1) 5. 그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을 알고 마음 속의 소망을 이해하는 듯하다. 그리고 우리의 영이 불안한 것에 반드시 공감한다. 우리 인간의 감정을 모두 가진 듯하지만, 그 감정은 훌륭하게 영화롭게 되었다. 선을 뚜렷이 사랑하고 죄를 똑같이 미워한다. 신이 앞에 계심을 초인간적으로 의식하고 있다. 사람처럼 기도하지만 하나님처럼 행동한다. 사물을 미리 아는 듯하다. 지금도 감히 그의 죽음에 대하여 말하고, 앞날에 그가 영화롭게 된다고 어떤 신비스러운 말씀을 한다. 친절하지만, 또한 대담하고 용감하다. 의무를 다하는 데 결코 그르치지 않는다.
161:2.7 (1786.2) 6. 우리는 그가 초인간적 지식을 가진 현상에 항상 감명을 받는다. 미처 하루가 지나기 전에, 바로 그가 계신 데서 떨어진 곳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주가 아는 것을 드러내는 무슨 일이 벌어진다. 그는 동료들의 생각을 또한 아는 듯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는 하늘 성격자들과 교통하며, 질문의 여지 없이 나머지 우리보다 훨씬 높은 영적 수준에서 산다. 독특하게 알아보는 그의 눈앞에 모든 것이 펼쳐진 듯하다. 그는 우리와 대화하려고 묻는 것이지, 정보를 캐내려고 묻지 않는다.
161:2.8 (1786.3) 7. 요즘에 주는 자기의 초인간성을 서슴지 않고 주장한다. 우리가 사도로서 세움받은 날부터 바로 최근에 이르기까지, 결코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부인한 적이 없다. 그는 신다운 선생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한다. 주는 서슴지 않고 오늘날 종교 선생들의 종교적 가르침을 논박하고, 분명한 권위를 가지고 새 복음을 선포한다. 그는 주장을 내세우며, 적극적이고 권위가 있다. 세례자 요한조차 예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마음 속에 아주 부족함이 없는 듯하다. 군중의 지지(支持)를 갈망하지 않으며, 사람들의 의견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용감해도 도무지 자만이 없다.
161:2.9 (1786.4) 8. 무슨 일을 행하든 그는 늘 계시는 동료인 하나님에 대하여 항상 이야기한다. 좋은 일 하는 데 몰두하며, 이는 하나님이 안에 계신 듯하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땅에서 그의 사명에 대하여 대단히 놀라운 주장을 하며, 그런 주장은 그가 신이 아니라면 터무니없다. 그는 한때 선언했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었노라.” 분명히 신성을 주장해 왔고 하나님과 동업자라고 공언한다. 하늘 아버지와 가까운 관계를 가졌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느라고 가능한 언어를 거의 다 동원한다. 감히 자기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누구라도 그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한다. 아이처럼 자연스럽게 이 엄청난 일을 모두 말하고 행한다. 그와 우리의 관계를 언급하는 바로 그런 식으로 그와 아버지의 관계를 비쳐 말한다.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아주 확신하는 듯하고, 그런 사무적인 방법으로 이 관계들에 대하여 말한다.
161:2.10 (1786.5) 9. 기도(祈禱)하는 생활을 보면 그는 아버지와 바로 교통하는 듯하다. 우리는 그가 드리는 기도를 조금 밖에 듣지 못했지만 몇 번 안 되는 이 기도는, 말하자면 그가 얼굴을 마주하고 하나님과 이야기함을 가리킬 것이다. 지난날 뿐 아니라 앞날을 아는 듯하다. 그가 인간을 넘는 무엇이 아니라면, 그는 단지 이 모든 것일 수 없고 이 모든 놀라운 일을 할 수 없다. 우리는 그가 사람임을 알고 그렇다고 확신하지만, 또한 신이라고 거의 똑같이 확신한다. 우리는 그가 신이라고 믿는다. 그가 사람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신한다.
161:2.11 (1787.1) 로단과 회의를 마치고 나서, 나다니엘과 토마스는 동료 사도들과 함께 하려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서둘러 갔고 그 주 금요일에 도착했다. 이 세 신자 모두의 생애에서 이것은 큰 체험이었다. 다른 사도들은 나다니엘과 토마스가 겪은 이 체험을 돌이켜보고 많은 것을 배웠다.
161:2.12 (1787.2) 로단은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갔고, 거기서 오랫동안 메간타 학교에서 그의 철학을 가르쳤다. 그는 후일의 하늘나라 업무에서 막강한 사람이 되었다. 땅에서 마지막 날까지 충실한 신자였고 박해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리스에서 목숨을 바쳤다.
161:3.1 (1787.3) 신(神)이라는 의식은 예수가 세례 받을 때까지 머리 속에서 차츰차츰 자랐다. 자신의 신다운 성품, 인간이 되기 전의 존재, 우주 특권을 충분히 자의식하게 된 뒤에, 자신의 신성을 인간으로서 의식하는 것을 그는 여러 가지로 제한하는 능력을 가졌던 듯하다. 우리에게는, 그가 세례받은 때부터 십자가에 처형되기까지 오직 인간 지성에만 의존하든지 아니면 인간 및 신의 지성, 이 두 가지 지식을 이용하든지, 전적으로 예수의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때로 그는 오직 인간 지능에 거하는 정보만 이용하는 듯했다. 다른 경우에는 신의 의식에 있는 초인간적 내용을 이용해야만 얻을 수 있는 그러한 충만한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그가 행동하는 듯했다.
161:3.2 (1787.4) 그가 신이라는 의식을 뜻대로 스스로 제한할 수 있다는 이론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그의 독특한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여러 사건에 대한 선견을 동료들에게 주지 않는 일이 흔했고, 동료들의 생각과 계획의 성질을 그가 알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인식한다. 우리가 이해하건대, 예수가 그들의 생각을 헤아리고 계획을 꿰뚫어볼 수 있다는 것을 추종자들이 너무 잘 알기를 그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사도와 제자들이 머리 속에 지녔던, 인간의 개념을 너무 멀리 초월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161:3.3 (1787.5) 신으로서 자기의 의식(意識)을 스스로 제한하는 습관, 그리고 미리 알고 생각을 꿰뚫어보는 것을 인간 동료들로부터 감추는 기술, 이 둘의 차이를 우리는 도무지 구별하지 못한다. 그가 이 두 가지 기술을 쓴다고 확신하지만, 우리는 어느 주어진 경우에 그가 어느 방법을 이용했는가 반드시 잘라서 말할 수 없다. 인간 의식에 들어 있는 내용만으로 그가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관찰했으며, 우주의 하늘 집단의 지도자들과 그가 회의하는 것을 보고, 의심할 여지 없이 신의 지성이 활동함을 헤아리곤 했다. 그리고 나서 거의 수없이 많은 경우에, 인간 및 신의 지성이 겉보기에 완전히 통일된 가운데 활성화되어, 이러한 사람과 하나님의 통합된 성격이 일하는 것을 우리는 구경했다. 이것이 그러한 현상에 대하여 우리가 가진 지식의 한계이다. 우리는 정말로 이 신비에 관하여 완전한 진실을 실제로 알지 못한다.
162:0.1 (1788.1) 열 사도와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났을 때, 예수는 사마리아를 거쳐서 가기로 계획했고 이것이 지름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호수의 동쪽 물가를 따라 내려갔고, 스키토폴리스를 거쳐서 사마리아의 경계지에 들어섰다. 밤이 가까워 오자, 예수는 일행을 위해서 투숙할 곳을 잡으려고 길보아산 동쪽 비탈에 있는 마을로 빌립과 마태를 보냈다. 어쩌다가 이 마을 사람들은 유대인에게 크게 반감(反感)을 가지고 있었고, 보통 사마리아인보다 더욱 그러했는데, 아주 많은 사람이 천막 축제에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특히 이 시기에 이런 감정이 악화되었다. 이 사람들은 예수에 대하여 거의 아무것도 몰랐고, 그와 동료들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예수에게 묵을 장소를 거절하였다. 마태와 빌립이 분개하는 태도를 보이고 이 사마리아인들에게 그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를 접대하기를 거부하고 있다고 일러주자, 머리끝까지 화가 난 마을 사람들은 막대기와 돌을 가지고 작은 마을 바깥으로 그들을 쫓아냈다.
162:0.2 (1788.2) 빌립과 마태가 동료들에게 돌아와서 어떻게 그들이 마을 바깥으로 쫓겨났는가 보고한 뒤에,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 앞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주여,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게으르고 뉘우치지 않는 이 사마리아인들을 삼키라고 우리가 명하는 것을 허락하시기를 비나이다.” 그러나 이 앙갚음하려는 말을 듣자, 예수는 세베대의 아들들과 맞서서 따끔하게 꾸짖었다: “너희가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너희는 모르는도다. 복수심은 하늘나라를 바라본다는 느낌을 주지 않느니라. 다투기보다 길을 떠나 요단강 여울목 옆에 있는 작은 마을까지 가자.” 종파적 편견 때문에, 이처럼 이 사마리아인들은 한 우주의 창조 아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놓쳐버렸다.
162:0.3 (1788.3) 예수와 열 사람은 요단강 여울목 가까이 있는 마을에서 그날 밤을 지내려고 멈추었다. 이튿날 일찍 그들은 강을 건넜고, 요단강 동쪽의 대로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계속 가서, 수요일 저녁 늦게 베다니에 다다랐다. 토마스와 나다니엘은 금요일에 도착했고, 로단과 회의하느라고 늦어졌다.
162:0.4 (1788.4) 다음 달 (10월) 끝까지 약 4주 반 동안, 예수와 열두 사도는 예루살렘 근처에 남아 있었다. 예수 자신은 몇 번만 그 도시로 들어갔고, 천막 축제의 며칠 동안에 이런 짧은 방문이 있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아브너와 그 동료들과 함께 10월의 상당한 부분을 지냈다.
162:1.1 (1788.5) 갈릴리에서 달아나기 오래 전에, 추종자들은 예수의 말씀이 유대인의 문화와 학문의 중심에서 전파되었다는 평판을 가지도록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고 예수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가르치려고 그가 예루살렘으로 실제로 오자 그들은 예수가 목숨을 잃을까 두려웠다. 재판을 하려고 산헤드린이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했다는 것을 알고, 주가 사형당해야 한다는 선언을 최근에 되풀이한 것을 상기하면서, 예수가 천막 축제에 참석하겠다고 갑자기 결정한 것에 사도들은 글자 그대로 깜짝 놀랐다.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그들이 이전에 부탁할 때마다, 그는 전에 이렇게 대답했다, “때가 아직 오지 않았도다.” 이제, 두려워서 그들이 반대하는 데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하지만 때가 왔느니라.”
162:1.2 (1789.1) 천막 축제 동안에 예수는 몇 번이나 예루살렘으로 대담하게 들어가서 성전에서 대중 앞에서 가르쳤다. 사도들이 말리려고 노력했는데도 이렇게 했다. 비록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말씀을 선포하라고 전에 오랫동안 그를 재촉했어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죽게 만들려고 단단히 결심한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이때 예수가 도시에 들어가는 것을 보기가 두려웠다.
162:1.3 (1789.2) 예수가 예루살렘에 대담하게 나타난 것은 어느 때보다 더욱 추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많은 제자가, 아니 가룟 유다조차, 유대인 지도자들과 헤롯 안티파스가 두려워서 예수가 페니키아로 황급히 달아났다고 전에 감히 생각했다. 그들은 주가 움직이는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추종자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그가 천막 축제 동안에 예루살렘에 계신 것은, 그가 겁을 먹었다든가 비겁하다든가 하는 온갖 수군거리는 소리를 그치게 하기에 언제까지나 충분했다.
162:1.4 (1789.3) 천막 축제 동안에, 로마 제국의 모든 지방에서 온 수천의 신자들은 예수를 보고 그의 가르침을 들었으며, 그들의 고향 지역에서 하늘나라가 진전되는 것에 관하여 그와 회담하려고 많은 사람이 베다니로 여행하기도 하였다.
162:1.5 (1789.4) 축제가 있는 여러 날 동안 내내, 성전의 안마당에서 예수가 대중 앞에서 전도할 수 있은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이 중에 주요한 것은 자체의 계급 안에서 은밀하게 의견이 서로 달라진 결과로, 산헤드린의 관리들이 겁을 먹은 것이다. 산헤드린의 많은 회원이 몰래 예수를 믿거나, 아니면 그렇게 큰 집단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축제 동안에 예수가 체포되는 것을 확실히 싫어한 것이 사실이었고, 그 무리 가운데 많은 사람은 예수를 믿거나 적어도 그가 후원하는 영적 운동에 호감을 가졌다.
162:1.6 (1789.5) 아브너와 그 동료들이 유대 지방에 두루 노력을 펼친 것은 또한 하늘나라에 대한 호감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그래서 예수의 적들은 감히 크게 반대를 부르짖지 못했다. 이것이 어째서 예수가 대중 앞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살아서 돌아갈 수 있었는가 하는 이유 중에 하나였다. 이보다 한두 달 전에, 그는 분명히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162:1.7 (1789.6) 그러나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대중 앞에 나타나는 대담한 용기를 보인 것은 적들을 두려움에 질리게 만들었다. 그들은 그러한 대담한 도전에 맞설 준비가 되지 않았다. 여러 번 이 달에 산헤드린이 주를 체포하려는 미약한 시도가 있었지만, 이런 노력으로부터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적들은 예수가 뜻하지 않게 예루살렘에서 대중 앞에 나타난 것 때문에 깜짝 놀라서, 예수가 로마 당국의 보호를 약속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추측했다. 빌립이 (헤롯 안티파스의 형제) 거의 예수의 추종자임을 알았으므로, 빌립이 예수를 위하여 적들로부터 그가 보호받는다는 약속을 얻어냈을 것이라고 산헤드린 회원들은 추측했다. 예수가 갑자기 대담하게 예루살렘에 나타난 것은 로마인 관리들과 비밀 협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잘못 믿은 것을 그들이 깨닫기 전에, 예수는 그들의 관할 구역을 떠나버렸다.
162:1.8 (1789.7) 그들이 마가단을 떠났을 때, 열두 사도만 예수가 천막 축제에 참석할 생각이 있는 것을 알았다. 다른 추종자들은 주가 성전 안마당에 나타나서 대중 앞에서 비로소 가르칠 때 크게 놀랐고, 유대인 당국은 그가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이루 말할 수 없이 놀랐다.
162:1.9 (1790.1) 제자들은 예수가 축제에 참석하기를 기대하지 않았어도, 예수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멀리서 온 순례자의 대다수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볼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망하지 않았는데, 몇 차례 그는 솔로몬 회랑에서, 그리고 성전 마당의 다른 곳에서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은 유대 민족과 온 세계에 예수의 신성을 공식(公式)으로, 즉 정식으로 선언한 것이다.
162:1.10 (1790.2) 주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 군중은 의견이 갈라졌다. 더러는 그가 좋은 사람이라, 더러는 선지자이라, 더러는 그가 참으로 메시아라고 했다. 더러는 그가 짓궂은 장난꾼이라, 이상한 교리로 사람들이 길을 잃게 만든다고 말했다. 적들은 그를 편드는 신자들이 두려워서 드러내놓고 예수를 비난하기를 망설였다. 한편 친구들은 산헤드린이 그를 사형(死刑)에 처하려고 결심한 것을 알고서, 유대인 지도자들이 무서워서, 드러내놓고 예수를 인정하기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예수가 랍비 학교에서 교육받은 적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적들도 그의 가르침에 감탄하였다.
162:1.11 (1790.3)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갈 때마다 사도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땅에서 이룰 그의 사명의 성질에 관하여 예수가 갈수록 더 대담하게 선언하는 것을 들으면서, 하루하루 더욱 두려워졌다. 친구들 사이에서 전도할 때조차, 그들은 예수의 그런 적극적 선언과 놀라운 주장을 듣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162:2.1 (1790.4) 예수가 성전에서 가르친 첫날 오후에, 상당히 큰 일행이 새 복음에서 얻는 자유, 그리고 좋은 소식을 믿는 사람들의 기쁨을 묘사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앉아 있었다. 그때 말씀을 듣던 호기심 있는 한 사람이 예수의 말을 막고 물었다: “선생이여, 당신은 랍비의 학문을 배우지 않았다고 제가 들었사온데, 어찌하여 당신은 성서를 인용하고 아주 거침없이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나이까?” 예수가 대답했다: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는 진리를 아무도 나에게 가르치지 않았느니라. 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 누구라도 정말로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바라면, 내 가르침에 대하여, 이 가르침이 하나님의 것인지, 아니면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말하는지, 분명히 알리라. 자기를 위하여 말하는 자는 자기의 영광을 구하거니와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선언할 때, 나는 이렇게 함으로 나를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새 빛으로 들어가려 애쓰기 전에, 오히려 너희가 이미 가진 빛을 따라야 하지 않느냐? 모세는 너희에게 율법을 주었으나 그래도 너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요구대로 정직하게 행하고자 하느냐? 이 율법에 ‘너희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하고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느니라. 이 명령이 있는데도, 너희 가운데 더러는 사람의 아들을 죽이려 하느니라.”
162:2.2 (1790.5) 이 말을 듣자, 군중은 자기들끼리 말다툼에 빠졌다. 더러는 그가 미쳤다, 더러는 그가 악마에 들렸다고 말했다. 더러는 이 사람이 정말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오랫동안 죽이려고 했던 갈릴리 선지자라 했다. 더러는 종교 당국이 그를 다치기를 두려워한다 했고, 더러는 그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손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지간히 논쟁이 있은 뒤에,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앞으로 걸어나와서 예수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권력자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나이까?” 그는 대답했다: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에 대하여 내가 가르치는 것을 분개하는 까닭에 권력자들이 나를 죽이고자 하느니라. 이 복음은 이 선생들이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지지하려고 각오한 종교, 예식을 중시하는 형식적 종교의 무거운 전통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하는 복음이라. 저희는 안식일에 율법에 따라서 할례를 행하나,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던 어떤 사람을 한때 내가 안식일에 해방했다 하여, 나를 죽이고자 하느니라. 저희는 나를 감시하려고 안식일에 내 뒤를 따르나, 또 다른 기회에, 몹시 앓는 사람을 내가 안식일에 온전히 낫게 하였으므로 나를 죽이고자 하느니라. 너희가 내 가르침을 정직하게 믿고 감히 받아들이면, 저희의 전통적 종교 체계가 뒤집어지고 영구히 붕괴될 것을 잘 아는 까닭에 저희가 나를 죽이고자 하느니라. 하나님 나라의 새롭고 더욱 영화로운 이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저희가 집요하게 물리치므로, 일생을 바쳐 얻은 것에 대한 권한을 저희가 이처럼 빼앗기리라. 그리고 이제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호소하노니,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에 따라서 판단하지 말고, 오히려 이 가르침의 참된 정신으로 판단하라. 올바르게 판단하라.”
162:2.3 (1791.1) 다음에 다른 사람이 물었다: “옳소이다, 선생이여, 우리는 메시아를 찾고 있으나, 그가 오실 때 그 모습이 신비 속에 가려 있을 줄 아나이다. 우리는 당신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아나이다. 당신은 처음부터 당신의 형제들 사이에 있었나이다. 구원자는 다윗 왕국의 보좌를 회복하려고 권능을 입고 오시리이다. 당신은 정말로 메시아라고 주장하나이까?” 그리고 예수는 대답했다: “너는 나를 알고 내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안다고 주장하는구나. 너의 주장이 참이기를 내가 원하노니, 그렇다면 정말로 이를 알고서 네가 풍부한 생명을 찾을 것임이라. 그러나 내가 선언하노니, 나는 나를 위하여 너희에게 오지 아니하였노라. 아버지가 나를 보내셨고,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고 충실하시니라. 내 말 듣기를 거부함으로 너희는 나를 보내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도다.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자 하면, 너희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게 될지니라. 나는 아버지를 아노니, 아버지를 너희에게 선언하고 드러내려고 내가 아버지로부터 왔음이라.”
162:2.4 (1791.2) 서기관의 관리들이 예수를 체포하고 싶어 했지만 군중을 두려워했으니, 많은 사람이 그를 믿었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가 한 일은 모든 유대인에게 잘 알려졌고,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면서 자기들끼리 말했다: “비록 이 선생이 갈릴리에서 왔어도, 비록 우리가 메시아에게 기대하는 것을 그가 모두 채우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구원자가 올 때 이 나사렛 예수가 이미 행한 것보다 더 놀라운 무슨 일을 정말로 할 것인가 궁금하구나.”
162:2.5 (1791.3)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듣자, 바리새인과 그 관리들은 자기의 지도자들과 함께 의논했고, 성전 마당에서 예수가 이렇게 대중 앞에 나타나는 것을 중지하려고 당장에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대체로, 로마 당국이 예수에게 면제권을 약속했다고 믿고서, 예수와 충돌하기를 피하고 싶어 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이때 예루살렘으로 대담하게 온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산헤드린의 관리들은 이 소문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다. 로마의 통치자들이 몰래, 유대 나라의 최고 통치 기구에 알리지 않고 그런 일을 하지 않으리라고 추리했다.
162:2.6 (1791.4) 따라서, 산헤드린의 정식 관리 이버가 두 조수와 함께, 예수를 잡으려고 파송되었다. 이버가 예수를 향하여 다가가자, 주는 말했다: “두려워 말고 나에게 가까이 오라. 내 가르침을 들으면서 가까이 오라. 나를 잡으라고 너희가 파송된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나 때가 오기까지 아무 일도 사람의 아들에게 닥칠 수 없음을 너희가 알아야 하느니라. 너희는 나를 적대하여 여기에 서 있지 않느니라. 단지 주인의 명령을 행하려고 너희가 오는 것이요, 이 유대인 권력자들조차 남몰래 나를 죽이려고 할 때, 저희는 하나님 섬기는 일을 하고 있다고 진실로 생각하느니라.
162:2.7 (1792.1) “나는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않노라. 아버지는 너희를 사랑하고, 따라서 편견의 사슬과 어두운 전통에서 너희가 벗어나기를 내가 몹시 바라노라. 나는 너희에게 생명의 자유와 구원의 기쁨을 내미노라. 새 생명의 길, 곧 악에서 구원하고 죄의 사슬을 깨버릴 것을 선포하노라. 너희가 생명을 가지고, 영원히 가지도록 하려고 내가 왔노라. 너희는 나를 없애고 또한 너희를 불안하게 만드는 내 가르침을 없애려고 애쓰느니라. 내가 잠시 동안만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을 너희가 깨달을 수만 있다면! 조금만 있으면, 나를 이 세상으로 보내신 이에게로 내가 가노라. 그리고 나서 너희 중 여럿이 나를 부지런히 찾겠으나 너희는 내 모습을 찾지 못하리니, 내가 가고자 하는 곳에 너희가 올 수 없음이라. 그러나 나를 찾고자 참으로 애쓰는 자는 모두 내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인도하는 생명을 언젠가 얻으리라.”
162:2.8 (1792.2) 비웃는 몇 사람이 자기들끼리 말했다: “우리가 찾지 못하도록 이 사람이 가면 어디로 가겠느냐? 저가 그리스인 가운데 살려고 가겠느냐? 저가 스스로 죽겠느냐? 곧 저가 우리를 떠나고 저가 가는 곳으로 우리가 갈 수 없다고 선언하니, 도대체 무슨 소리이냐?”
162:2.9 (1792.3) 이버와 조수들은 예수를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 그를 잡지 않고 그들이 만나는 장소로 돌아갔다. 그래서 주사제와 바리새인들이 이버와 그 조수들이 예수를 잡아오지 않았다고 하여 힐책하자, 이버는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를 믿기 때문에, 우리는 군중 한가운데서 그를 체포하기가 두려웠나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 사람처럼 말하는 사람을 한 번도 구경하지 못했나이다. 이 선생에 대하여 특별한 무엇이 있나이다. 여러분은 모두 그의 말을 들으러 가보는 것이 좋으리이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으뜸 권력자들은 놀랐고, 조롱하며 이버에게 말했다: “너도 미혹되었느냐? 너는 이 사기꾼을 믿으려 하느냐? 우리 학식 있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라도, 아니면 권력자들 가운데 누구라도 그를 믿었다는 말을 네가 들은 적이 있느냐?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 가운데 누구라도 그의 교묘한 가르침에 속았느냐? 율법도 선지자도 모르는 이 무지(無知)한 군중의 행동에 네가 영향을 받다니 어인 일이냐? 그런 교육받지 않은 사람들은 저주받은 줄 네가 모르느냐?” 그리고 나서 이버가 대답했다: “그렇다 해도, 내 주인들이여, 하지만 이 사람은 군중에게 자비와 희망에 넘친 말씀을 하나이다. 그는 풀이 죽은 자를 격려하며, 그의 말씀은 우리 혼에게도 위로가 되나이다. 그가 비록 성서의 메시아가 아닐지라도 이 가르침에 무슨 잘못이 있을 수 있나이까? 그리고 그럴 때에도 우리의 율법은 공평(公平)을 요구하지 않나이까? 우리는 사람의 말을 듣기도 전에 정죄하나이까?” 산헤드린의 우두머리는 이버에게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그에게 대들어 말했다: “너는 미쳤느냐? 너도 혹시 갈릴리 출신이냐? 성서를 훑어보라, 그러면 갈릴리에서 메시아는커녕, 선지자가 하나도 나오지 않음을 네가 발견하리라.”
162:2.10 (1792.4) 산헤드린은 혼란 속에 해산되었고, 예수는 그날 밤을 지내려고 베다니로 물러갔다.
162:3.1 (1792.5) 이번 예루살렘 방문 중에, 예수는 평판이 나쁜 어떤 여자를 다루었는데, 그 여자를 고발하는 사람들과 예수의 적들이 그 여자를 앞으로 데리고 왔다. 이 사건에 대한 너희의 왜곡된 기록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자를 예수 앞으로 끌고 왔으며, 예수가 그들을 어떻게 다루어서 이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 자체가 부도덕한 죄가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지적한다고 암시할 것이다.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전통에 충성함으로 영적으로 눈이 멀고 지적 편견을 가졌지만, 그 시대와 세대에 가장 철저히 도덕적인 사람들로 간주되어야 함을 예수는 잘 알았다.
162:3.2 (1793.1)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축제의 셋째 날 아침 일찍, 성전에 가까이 가자 예수는 산헤드린이 고용한 관리들의 무리를 만났는데, 그들은 한 여자를 끌고 오고 있었다. 그들이 가까이 오자, 그 대변인이 말했다: “주여, 이 여자가 간통하다가―바로 그 현장에서―잡혔나이다. 자, 모세의 율법은 우리가 그런 여자를 돌로 쳐죽여야 한다고 명하나이다. 당신은 이 여자를 어찌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나이까?”
162:3.3 (1793.2) 자백한 위법자를 돌로 쳐죽여야 한다고 요구하는 모세의 율법을 예수가 지지한다면, 그가 로마 당국과 시비에 말려들게 만들려는 것이 예수의 적들의 계획이었다. 로마 당국은 유대인이 로마 법정의 승인 없이 사람을 사형(死刑)에 처하는 권한을 허락하지 않았다. 예수가 그 여자를 돌로 치지 말라 하면, 자신을 모세와 유대인의 율법 위에 올려놓는다고 산헤드린 법정 앞에서 예수를 고발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잠자코 있으면, 그들은 예수가 비겁하다고 비난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는 그 상황에 잘 대처하여, 그 계략 모두가 그 자체의 지독한 부도덕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
162:3.4 (1793.3) 한때는 참하게 생겼던 이 여인은 나사렛의 열등한 시민, 예수가 소년이었던 시절 내내, 예수를 성가시게 굴었던 사람의 아내였다. 이 사람은 이 여자와 결혼하고 나서, 이 여자에게 몸을 팔아서 생계를 이으라고 아주 창피스럽게 강요했다. 아내가 재정적 이득을 보려고 이렇게 육체의 매력을 팔 수 있을까 하여 그는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축제에 올라왔다. 이렇게 자기 아내를 상업화된 악행에 팔려고 그는 유대인 권력자들이 고용한 사람들과 계약을 맺었다. 그래서 예수가 잡힐 경우에 예수로 하여금 자신에게 불리하게 이용될 수 있는 어떤 진술을 하도록 옭아맬 목적으로 그들은 그 여자, 그리고 함께 죄지은 동반자를 끌고 왔다.
162:3.5 (1793.4) 예수는 군중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들 뒤에 서 있는 그 여자의 남편을 보았다. 예수는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 줄 알았고 그가 비열한 거래의 당사자임을 깨달았다. 예수는 먼저 이 타락한 남편이 서 있는 곳 가까이로 돌아서 걸어가 모래 위에 몇 마디를 적었고, 이것은 그가 황급히 자리를 뜨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 여자 앞으로 돌아와 그 여자를 고발하려고 하는 자들이 보라고 땅 위에 다시 글을 썼다. 그 말씀을 읽자, 그들도 하나씩 떠나버렸다. 그리고 주가 모래에 세 번째 썼을 때, 그 여자와 함께 나쁜 일을 하던 자가 떠났고, 그래서 이 글을 쓰고 나서 주가 몸을 일으켰을 때 그는 앞에 혼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예수는 말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는 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돌로 치려고 아무도 남지 아니하였느냐?” 그리고 그 여자는 눈을 들어 대답했다: “주여, 아무도 없나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나는 너에 관하여 알고, 나도 너를 책망하지 않노라. 평안히 네 길을 가라.” 그리고 이 여자, 힐다나는 사악한 남편을 버리고 하늘나라의 제자들 속에 가입하였다.
162:4.1 (1793.5) 스페인으로부터 인도까지, 알려진 모든 세계로부터 온 사람들이 자리에 있는 것은 천막 축제를 예수가 그의 복음 전부를 예루살렘에서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선언하는 이상적인 기회로 만들었다. 이 축제가 있을 때 사람들은 대체로 노천에서, 잎으로 덮은 초막에서 살았다. 이것은 곡식을 거두는 축제였고, 실제로 그렇다시피, 축제가 가을철에 서늘할 때 다가왔기 때문에, 겨울이 끝날 때의 유월절이나 여름이 시작될 때의 오순절보다, 세계의 유대인들이 더 널리 참석했다. 사도들은 말하자면,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주가 땅에서 그의 사명을 대담하게 선언하는 것을 마침내 구경했다.
162:4.2 (1794.1) 이것은 축제 중의 축제였는데, 다른 축제에 드리지 못한 어떤 희생물도 이때 바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는 성전에 드리는 헌물을 받는 기회였다. 이것은 휴가의 즐거움과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엄숙한 예식이 합쳐진 것이었다. 여기에 민족이 즐거워하는 때가 있었고, 이것은 희생물과 레위의 노래, 그리고 사제들의 은빛 트럼펫을 엄숙히 부는 일과 섞였다. 밤에는 성전과 그 순례자 무리의 인상적인 광경이, 성전 안마당 근처에 세워진 수십 횃불의 번뜩이는 빛 뿐 아니라, 여인들의 마당에서 밝게 타오르는 큰 촛불로 눈부시게 비춰졌다. 차갑게 대조가 되어, 축제 기분이 드는 이 경건한 장면을 내려다보는 성, 로마인의 안토니아 성(城)을 제쳐놓고, 온 도시가 명랑하게 꾸며졌다. 그리고 항상 로마의 지배를 상기시키는 이 성을 유대인들이 얼마나 미워했는지!
162:4.3 (1794.2) 황소 70마리를 축제 동안에 잡아바쳤는데 이것은 이교도의 70 국가를 상징했다. 물을 쏟아붓는 예식은 신성한 영이 쏟아 부어지는 것을 상징했다. 이 물 예식은 해 돋을 때 사제와 레위들의 행진 뒤를 따라 있었다. 예배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마당에서 여인의 마당으로 이끄는 계단을 지나서 내려갔고, 한편 사람들이 은빛 트럼펫을 연속으로 불었다. 그리고 나서 충실한 신자들은 아름다운 문을 향하여 줄곧 행진했고, 이 문은 이방인의 마당 쪽으로 열려 있었다. 여기서 그들은 서쪽을 향해서 돌았고, 찬송을 되풀이하고 상징의 물을 향하여 계속 행진했다.
162:4.4 (1794.3) 축제의 마지막 날에, 거의 450명의 사제와 그와 비슷한 수의 레위인이 행사를 주관했다. 해가 뜰 때 순례자들은 도시의 모든 구석으로부터 모였고, 각자 바른손에 도금양ㆍ버드나무ㆍ종려 가지를 한 다발 쥐고, 왼손에는 사람마다 천국의 사과―시트론, 즉 “금지된 열매”―를 쥐었다. 이 순례자들은 이 이른 아침 예식을 위해서 세 무리로 나누어졌다. 한 무리는 아침 희생 예식에 참석하려고 성전에 남았고, 또 한 무리는 희생 제단을 장식하기 위하여 버드나무 가지를 자르려고 마자 가까이까지, 예루살렘 밑으로 행진해서 내려갔으며, 한편 셋째 무리는 물 사제 뒤에 성전으로부터 행진할 행렬을 이루었다. 물 사제는 은빛 트럼펫 소리에 맞추어, 상징의 물을 담을 금 주전자를 지고서 오펠을 통하여 나가서 실로암 가까이 갔는데, 거기에는 샘물 문이 있었다. 금 주전자를 실로암의 샘에서 가득 채운 뒤에, 그 행렬은 성전으로 행진하여 되돌아갔고, 물 문을 거쳐서 들어가 바로 사제들의 마당으로 갔는데, 거기서 물 주전자를 들고 있던 사제는 마시는 헌물을 위하여 포도주를 들고 있는 사제와 합쳤다. 그리고 나서 이 두 사제는, 제단의 기초로 이끄는 은 깔때기들이 있는 곳까지 서둘러 가서 그 속에 주전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쏟아부었다. 포도주와 물을 붓는 이 의식(儀式)의 집행은 모여든 순례자들이 시편 113편부터 118편 끝까지, 레위인들과 번갈아서 노래를 시작하라는 신호였다. 이 여러 구절을 되풀이하는 동안 그들은 가진 다발을 제단에서 흔들곤 했다. 그리고 나서, 그날의 시편(詩篇)을 되풀이하는 것과 관련하여 그날의 희생 예식이 따랐고, 축제 마지막 날의 시편은 82편이고 5절부터 시작되었다.
162:5.1 (1794.4) 축제 마지막 날의 전날 저녁에, 무대의 배경이 큰 촛대와 횃불들의 빛으로 밝게 비춰졌을 때, 예수는 모인 군중 한가운데서 일어서서 말했다:
162:5.2 (1795.1)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에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주제넘게 나를 재판에 넘기고 나의 재판관이 되려고 가정하면서, 너희는 내가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이 참일 수 없다고 선언하는도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창조자를 재판할 수 없느니라. 나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더라도 내 증언은 언제까지나 참이니, 내가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내가 아는 까닭이라. 사람의 아들을 죽이고자 하는 너희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 또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오직 육체의 모습으로 판단하고 영의 현실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나는 아무도, 아니 나의 큰 적조차 판단하지 않노라. 그러나 내가 판단하기를 택한다면 나의 판단은 참되고 올바르리니, 나는 혼자가 아니라 내 아버지와 손잡고 판단할 것임이라. 아버지는 나를 세상으로 보냈고 그는 모든 참된 판단의 근원이라. 너희는 믿을 만한 두 사람의 증언은 받아도 좋다고 허락하기도 하는도다―자, 그러면 나는 이 진리를 증언하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도 또한 그렇게 하시니라. 내가 이를 어제 너희에게 일렀을 때, 너희의 어둠 가운데서 ‘어디에 너의 아버지가 계시냐?’하고 너희가 내게 물었도다. 참으로 너희는 나도 내 아버지도 모르나니, 나를 알았다면 너희는 또한 아버지를 알았을 것임이라.
162:5.3 (1795.2) “내가 떠난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나를 찾아내지 못하리니,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올 수 없는 까닭이라, 나는 이미 너희에게 일렀노라. 이 빛을 물리치고자 하는 너희는 밑에서 왔거니와 나는 위에서 왔노라. 어둠 속에 앉아 있기를 더 좋아하는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며,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빛의 아버지의 영원한 빛 속에 사노라. 너희는 모두 내가 누구인지 알 기회를 넉넉히 가졌으나 사람의 아들 신분을 확인하는 또 다른 증거를 너희가 받으리라. 나는 생명의 빛이요, 알고서 또 이해하면서 이 구원의 빛을 물리치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 속에서 죽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너희는 내 말을 받아들일 수 없느니라. 그러나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고 충실하며, 내 아버지는 잘못하는 아이들조차 사랑하시니라. 그리고 내 아버지가 말씀하신 모든 것을 나도 또한 세상에 선포하노라.
162:5.4 (1795.3) “사람의 아들이 들려 올라갈 때, 그때 너희는 모두 내가 그인 것, 그리고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나 오직 아버지가 내게 가르친 대로 행한 것을 너희 모두가 알리라. 나는 이 말씀을 너희와 너희 자손에게 하노라. 나를 보내신 이는 이제도 나와 함께 계시니라. 그는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았으니, 그의 눈에 보기 좋은 것을 내가 언제나 행하는 까닭이라.”
162:5.5 (1795.4) 예수가 이렇게 성전 안마당에서 순례자들을 가르쳤을 때, 많은 사람이 믿었다. 그리고 아무도 감히 그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162:6.1 (1795.5) 마지막 날, 축제의 중대한 날에, 실로암 못에서 온 행렬이 성전 마당을 통해 지나가는 동안, 사제들이 물과 포도주를 제단 위에 붓고 난 직후에 예수는 순례자들 사이에 서서 말했다: “누구든지 목이 마르면, 내게로 와서 마시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나는 이 세상에 생명의 물을 가져오노라. 나를 믿는 자는 이 물이 대표하는 영으로 가득 채워지리니, ‘그에게서 생명수의 강이 흐르리라’ 성서도 말하였음이라.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일을 마치고 나서, 모든 육체 위에 살아 있는 진리의 영이 부어지리라. 이 영을 받는 자는 결코 영적으로 목마른 줄 모르리라.”
162:6.2 (1795.6) 예수는 이 말씀을 하려고 예배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는 할렐의 찬송이 있은 뒤 즉시 예배자들에게 연설했는데, 할렐은 시편을 화답하여 읽는 것이며 그 뒤에 제단 앞에서 나무 가지들을 흔드는 일이 뒤따른다. 희생물이 준비되는 동안, 바로 여기서 휴식이 있었고, 이때에 순례자들은 그가 영적으로 갈급한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물을 주는 자라고 주가 선언하는 황홀한 목소리를 들었다.
162:6.3 (1796.1) 이 이른 아침 예배의 끝에 예수는 군중을 계속 가르치며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성서에서 읽지 아니하였느냐? ‘보라, 마른 땅에 물이 쏟아지고 바짝 탄 흙 위에 흩어지는 것 같이, 너희 자녀의 자녀에게도 축복을 주기 위하여 너희의 자녀에게 쏟아붓도록 너희에게 거룩한 영을 주리라.’ 예식에 쓰이는 깨진 주전자로부터 부어 사람들의 전통(傳統)으로 너희가 혼에 물을 주려고 하는 마당에, 어찌하여 너희가 영의 봉사를 목마르게 찾겠느냐? 너희가 이 성전 근처에서 행해지는 것을 본 것과 같은 방법으로, 너희의 조상은 믿음의 자녀에게 신의 영이 수여되는 것을 상징하려고 하였느니라. 그리고 너희는 오늘날까지도 이 상징을 지속한 것이 좋았도다. 그러나 이제 아들의 수여를 통해서, 영들의 아버지의 계시가 이 세대에 다가왔고, 이 모든 것에 뒤이어 사람의 자녀에게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 분명히 내리리라.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수여하는 이 영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땅에 있는 하늘나라에서, 그리고 저 건너 아버지의 파라다이스에서, 참된 생명의 물로 인도하는 길에 참 선생이 되리라.”
162:6.4 (1796.2) 예수는 군중과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계속 대답했다. 더러는 그가 선지자라 생각했고, 더러는 그가 메시아라고 믿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갈릴리로부터 왔고, 메시아가 다윗의 보좌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예수가 그리스도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이들은 감히 예수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162:7.1 (1796.3) 축제의 마지막 날 오후에, 예수에게 예루살렘에서 달아나라고 설득하려는 사도들의 노력이 실패한 뒤에, 예수는 다시 성전으로 가르치려고 갔다. 큰 무리의 신자들이 솔로몬 회랑에 모인 것을 보고서, 그들에게 말했다:
162:7.2 (1796.4) “내 말이 너희 속에 거하고 너희가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할 생각이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내 제자이라.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되겠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너희가 나에게 어찌 대답할까 내가 아노라: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우리는 아무에게도 매여 있지 않노라.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자유롭게 되겠느냐? 그렇다 하여도, 나는 겉보기에 다른 사람의 통치에 지배됨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혼이 해방됨을 말하노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짓는 자마다 죄에 노예가 된 종이라. 너희는 종이 언제까지나 주인의 집에서 머무르지 않을 것 같음을 아느니라. 또한 아들은 제 아버지의 집에 남아 있는 것을 아느니라.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해방하고 너희를 아들로 삼으면, 너희가 정말로 자유로울지니라.
162:7.3 (1796.5) “너희가 아브라함의 씨인 것을 내가 아노라, 그래도 너희 지도자들이 저희의 마음 속에서 변화시키는 내 말에 영향을 받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저희가 나를 죽이려 하느니라. 저희의 혼은 편견(偏見)으로 인하여 닫혀 있고, 복수할 자만심으로 눈이 멀었도다. 나는 영원한 아버지가 내게 보여주는 진리를 너희에게 선언하거늘, 이 현혹된 선생들은 오직 현세의 조상한테서 배운 것만 행하려고 하느니라. 아브라함이 너희 조상이라고 대답할 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아브라함의 일을 하고자 하리라. 너희 가운데 더러는 내 가르침을 믿으나 더러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른 까닭에 나를 죽이려고 하는도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진리를 그렇게 대접하지 않았느니라. 너희 가운데 더러는 악마의 일을 하려고 굳게 마음먹은 것을 내가 깨닫노라. 하나님이 너희의 아버지라면 너희는 나를 알고 내가 드러내는 진리를 사랑하리라. 너희는 내가 아버지로부터 왔고, 하나님이 나를 보냈으며, 내가 이 일을 혼자서만 하고 있지 않음을 깨닫지 못하겠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너희가 악의 자식이 되기로 작정한 까닭이냐? 너희가 어둠의 자식이라면, 도저히 내가 드러내는 진리의 빛 가운데서 걷지 아니하리라. 악의 자식들은 저희 조상의 길을 따를 뿐이니, 그는 속이는 자였고 자신 안에 아무 진리가 없게 되었으매, 진리를 대표하지 않았더라. 그러나 진리를 말하고 실천하는 사람의 아들이 이제 오거늘, 너희 가운데 많은 자가 믿으려 하지 않는도다.
162:7.4 (1797.1) “너희 가운데 누가 나를 죄 있다 하느냐? 그래서 아버지가 내게 보여준 진리를 내가 선포하고 실천하면, 어찌하여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느냐?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듣느니라. 이 때문에 너희 중 많은 사람이 내 말을 듣지 않으니,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음이라. 너희 선생들은 악마 왕의 힘을 입어 내가 일을 한다고 주제넘게 말하기까지 하였도다. 가까이 있는 한 사람이 내가 악마를 가졌다, 내가 악마의 자식이라 금방 말하였도다. 그러나 너희 중에 자신의 혼을 정직하게 대하는 자는 모두, 내가 악마가 아님을 잘 아느니라. 너희가 나를 모욕하려 하는 동안에도 나는 아버지께 명예를 돌림을 너희가 아느니라. 나는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오로지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노라. 그리고 나는 너희를 심판하지 않으니, 나 대신에 심판하는 이가 계심이라.
162:7.5 (1797.2) “진실로 진실로, 복음을 믿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이 진리의 말씀을 마음 속에 살려두면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이제 바로 내 곁에 서기관이, 아브라함이 죽었고 선지자들도 그런 줄 알고서, 이 말씀이 내 안에 악마가 있음을 증명한다 말하는구나. 그가 묻되, ‘너는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보다 훨씬 더 위대해서, 네가 여기 서서, 네 말을 지키는 자는 누구나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감히 말하느냐? 신성을 모독하는 그런 말을 네가 감히 배앝으니 너는 누구라 주장하느냐?’ 모든 그런 말에 대답하노니, 내가 자신을 영화롭게 하면, 나의 영화가 헛일이라. 그러나 나를 영화롭게 하실 이는 아버지이라, 아니 너희가 하나님이라 부르는 바로 그 아버지이라. 그러나 이 너희 하나님인 내 아버지를 너희는 알지 못하였고 너희를 한데 모으려고, 어떻게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가 보여주려고 내가 왔노라. 비록 너희가 아버지를 알지 못해도, 나는 참으로 아노라. 아브라함조차 내 시절이 올 것을 보고 기뻐하였고, 믿음으로 이를 보고 즐거워하였더라.”
162:7.6 (1797.3) 이때가 되어 근처에 모여든 믿지 않는 유대인과 산헤드린 관리들이 이 말을 듣자, 소동을 일으키며 소리를 질렀다: “너는 오십이 되지 않았는데, 그래도 아브라함을 만나보았다고 말하는구나. 너는 악마의 자식이라!” 예수는 강론을 계속할 수 없었다. 떠나면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노라.” 믿지 않는 많은 사람이 그를 치려고 돌을 찾아 달려 나갔다. 산헤드린의 관리들이 그를 체포하려 했지만, 주는 재빨리 성전 복도를 통해서 빠져 나가서, 베다니 가까이에 비밀 회합 장소로 피했는데, 거기에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162:8.1 (1797.4) 예수는 나사로와 누이들과 함께 어느 친구의 집에서 투숙하도록 주선이 되어 있었고, 한편 사도들은 작은 무리를 지어 여기저기 흩어졌다. 유대 당국이 다시 예수를 잡으려는 계획을 대담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경계 조치가 취해졌다.
162:8.2 (1797.5) 예수가 어쩌다가 찾아올 때마다, 몇 년 동안 이 세 사람은 만사를 제쳐놓고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것이 관례였다. 부모를 잃고 나서, 마르다는 집안 살림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이 기회에, 나사로와 마리아가 예수 밑에서 신선한 가르침에 흠뻑 빠져 있는 동안에, 마르다는 저녁 식사를 대접하려고 준비했다. 마르다는 수많은 쓸데없는 일에 필요 없이 마음을 빼앗겼고, 많은 하찮은 걱정거리에 싸여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이것이 그 여자의 성향이었다.
162:8.3 (1798.1) 마르다는 자기가 할일이라고 생각한 이 모든 일을 바삐 처리하는 동안에 마리아가 아무 일도 도와주지 않아서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에게 가서 말씀드렸다: “주여, 내 동생이 접대하는 일을 나 혼자 모두 하라고 둔 것을 당신은 살피지 않으시나이까? 와서 나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명하시지 않겠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어찌하여 언제나 그리 많은 일을 걱정하고, 그리 많은 하찮은 일에 마음을 쓰느냐? 오직 한 가지가 정말로 가치 있고, 마리아가 이미 좋고 필요한 이 부분을 택하였으니, 내가 이를 빼앗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대로 살기를, 둘이 협조하여 섬기고 한 목소리로 너희 혼을 새롭게 하는 것을 너희 둘이 언제 배우려느냐? 모든 것에 때가 있는 것―하늘 나라의 중요한 일 앞에, 인생의 사소한 일은 양보해야 하는 것―을 너는 깨달을 수 없느냐?”
162:9.1 (1798.2) 천막 축제가 있고 나서 다음 주간 내내, 신자 수십 명이 베다니에 모여서 열두 사도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예수가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산헤드린은 이러한 모임을 방해하려고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기간 내내, 아브너와 그 동료들과 함께 베들레헴에서 일하고 있었다. 축제가 끝난 다음 날, 예수는 베다니를 향하여 떠났고, 이번의 예루살렘 방문 동안에 다시 성전에서 가르치지 않았다.
162:9.2 (1798.3) 이때 아브너는 베들레헴에서 본부를 두고 있었고, 그 중심으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 남부에 있는 여러 도시에,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도 많은 일꾼이 전에 파송되었다. 그가 도착하고 며칠 안에, 예수와 아브너는 두 사도 집단의 일을 통합하기 위하여 준비를 마쳤다.
162:9.3 (1798.4) 천막 축제를 방문한 기간 내내, 예수는 베다니와 베들레헴에 시간을 거의 똑같이 나누었다. 베다니에서 상당한 시간을 그의 사도들과 함께 보냈고, 베들레헴에서 아브너, 그리고 요한의 다른 옛 사도들을 많이 가르쳤다. 그리고 이 친밀한 접촉이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도록 이끌었다. 세례자 요한의 이 옛 사도들은 베들레헴에서 그가 사사롭게 가르칠 때 주의 공감하는 마음을 느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대중을 가르치면서 주가 용기를 보인 것에 영향을 받았다. 이 영향은 마침내 그리고 충분히, 아브너의 동료들 하나하나가 하늘나라, 그리고 그러한 걸음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다.
162:9.4 (1798.5) 베들레헴을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에, 주는 그들 모두가 그와 연합하여 노력하는 데 함께 하도록 주선했고, 육체를 입고 땅에서 사는 생애가 끝나기 전에 이러한 노력이 있어야 했다. 아브너와 그 동료들은 마가단 공원에서 가까운 장래에 예수와 열두 사도와 함께 합세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162:9.5 (1798.6) 이 협정에 따라서, 11월초에 아브너와 열한 친구는 예수 및 열두 사도와 운명을 같이 했고, 십자가 처형이 있기 직전까지 하나의 조직으로서 함께 수고했다.
162:9.6 (1798.7) 10월 후반에 예수와 열두 사도는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곳으로부터 물러갔다. 10월 30일 일요일에, 예수와 동료들은 에브라임 시를 떠났는데, 여기서 그는 며칠 동안 은둔하면서 쉬고 있었다. 그리고 요단강 서쪽 큰길로 바로 마가단 공원까지 가서 11월 2일 수요일 오후에 늦게 도착했다.
162:9.7 (1799.1) 사도들은 우방의 땅으로 주가 돌아와서 크게 마음이 놓였다.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예수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더 재촉하지 않았다.
163:0.1 (1800.1) 예루살렘에서 예수와 열두 사도가 마가단으로 돌아오고 나서 며칠 뒤에, 아브너와 50명쯤 되는 제자 무리가 베들레헴으로부터 도착했다. 이때 마가단 캠프에는 또한 전도단과 여인단이 있었고, 팔레스타인의 모든 지방으로부터 온, 진실하고 고난을 견딘 다른 제자들이 150명쯤 모여 있었다. 캠프를 방문하고 다시 조직하는 데 며칠을 보낸 뒤에, 예수와 열두 사람은 이 특별 집단의 신자들을 집중 훈련시키는 과정을 시작했다. 잘 훈련받고 경험 있는 이 집단의 제자들로부터 주는 나중에 70명의 선생을 고르고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라고 내보냈다. 이 정규 교육은 11월 4일 금요일에 시작되었고 11월 19일 안식일까지 계속되었다.
163:0.2 (1800.2) 예수는 이 일행에게 아침마다 말씀했다. 베드로는 대중에게 설교하는 법을 가르쳤고, 나다니엘은 가르치는 기술을 가르쳤다. 토마스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가 설명했고, 한편 마태는 그들 집단의 재정을 어떻게 체계화하는가 지도했다. 다른 사도들도 특별한 체험과 타고난 재능에 따라서 이 훈련에 참가하였다.
163:1.1 (1800.3) 마가단 캠프에서 11월 19일 안식일 오후에 예수는 70인을 사자로 세웠고, 아브너는 이 복음 전도자와 선생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 70명의 무리는 아브너, 그리고 요한의 옛 사도 10명, 초기의 전도사들 중에서 51명, 그리고 하늘나라의 봉사에서 이름을 떨친 다른 제자 8명으로 이루어졌다.
163:1.2 (1800.4) 이 안식일 오후에 2시쯤, 소나기가 그친 사이에 다윗과 사자단(使者團)의 대다수가 도착하여 수가 늘어났고, 4백 명이 넘는 신자의 일행이 70인이 임명받는 것을 구경하려고 갈릴리 호숫가에 모였다.
163:1.3 (1800.5) 복음 사자로서 따로 구별하려고 70인의 머리 위에 손을 얹기 전에 예수는 그들에게 말씀했다: “수확은 정말로 풍성하나 일꾼이 적으니라. 그런즉 너희 모두에게 훈계하노니, 추수하실 주(主)가 이 거두는 일에 또 다른 일꾼들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하라. 나는 너희를 하늘나라의 사자로서 구별하려고 하며,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늑대 사이에 양처럼 너희를 보내고자 하노라. 둘씩 길을 가는 동안, 돈주머니나 여분의 옷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 명하노니, 너희가 이 처음 사명에 잠깐 동안만 떠나감이라.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를 건네지 말며, 오직 할 일을 보살피라. 너희가 한 집에 묵으러 갈 때마다, 먼저 말하라: 평화가 이 집에 있을지어다. 평화를 사랑하는 자들이 거기에 살면 너희는 거기에 묵고, 그렇지 않으면 떠날지니라. 이 집을 택하고 나서 네 앞에 차려진 대로 무엇이나 먹고 마시며 그 도시에서 너희가 묵는 동안 거기에 남아 있으라. 그리고 너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아 마땅함이라. 더 좋은 잠자리를 누가 제공한다고 해서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라. 떠나가서 땅에는 평화와 사람들 사이에 선의가 있기를 선포할 때, 너희는 모질고 자신을 속이는 적들과 다투어야 함을 기억하라. 그런즉 너희는 비둘기 같이 순진하면서 한편 뱀 같이 지혜로우라.
163:1.4 (1801.1) “너희가 어디로 가든지 ‘하늘나라가 가까웠도다’하고 전파하고, 정신이나 몸이 아픈 사람은 누구든지 보살피라. 하늘나라의 좋은 것을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어느 도시에서도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면, 저희는 아버지의 나라로 많이 들어감을 발견하리라. 그러나 어느 도시에서도 사람들이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자 하면, 그래도 믿지 않는 그 공동체를 떠나면서 너희의 소식을 선포할지니라. 너희의 가르침을 물리치는 자에게 떠나면서 말하라, ‘너희가 진리를 물리친다 하여도,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느니라.’ 너희의 말을 듣는 자는 내 말을 들으며, 내 말을 듣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의 말을 듣느니라. 너희가 전하는 복음 소식을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물리치느니라.”
163:1.5 (1801.2) 이렇게 70인에게 말씀하고 나서 그들이 둘레에 동그라미를 지어 무릎을 꿇자, 예수는 아브너에서 시작하여 각 사람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163:1.6 (1801.3) 이튿날 아침 일찍, 아브너는 70명의 사자를 갈릴리ㆍ사마리아ㆍ유대의 모든 도시로 보냈다. 이 35쌍은 약 6주 동안 떠나가서 전도하고 가르쳤으며, 모두 12월 30일 금요일에 페레아 지방의 펠라 가까이, 새 캠프로 돌아왔다.
163:2.1 (1801.4) 성직을 받고 70인 중에 한 사람으로 임명받으려고 시도한 50명이 넘는 제자들은, 이 후보자들을 뽑으라고 예수가 임명한 위원회에게 퇴짜를 맞았다. 이 위원회는 안드레와 아브너와 전도단의 임시 우두머리로 구성되었다. 이 3인 위원회가 만장 일치로 찬성하지 않는 모든 경우에, 그들은 후보자를 예수에게 데리고 왔고, 예수는 복음 사자로서 세움받기를 몹시 바란 사람을 하나도 물리치지 않았지만, 열둘이 넘는 사람이 예수와 말씀을 나누고 나서, 더 복음 사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163:2.2 (1801.5) 열심 있는 한 제자가 예수에게 와서 말했다: “주여, 나는 당신의 새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되고 싶지만, 내 아버지가 무척 나이 드셨고 돌아가실 때가 가까웠나이다. 그를 장사(葬事) 지내려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될 수 있나이까?” 이 사람에게 예수는 말했다: “이 사람아, 여우는 굴이 있고 하늘의 새는 보금자리가 있으되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둘 데가 없느니라. 너는 충실한 제자요, 네가 사랑하던 사람들을 보살피러 집으로 돌아가고 제자로 남아 있을 수 있어도 내 복음 사자는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는 나를 따르고 하늘나라를 선포하려고 모든 것을 버렸느니라. 네가 세움받은 선생이 되고자 하면, 네가 좋은 소식을 널리 알리러 나간 동안 다른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묻게 해야 하느니라.” 이 사람은 크게 실망하여 떠나갔다.
163:2.3 (1801.6) 또 다른 제자가 주께 와서 말했다: “나는 세움받은 사자가 되고 싶지만, 내 가족을 위로하러 잠시 동안 집으로 돌아가고 싶나이다.” 예수는 대답했다: “세움받으려거든, 너는 기꺼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느니라. 복음(福音) 사자들은 두 군데 마음을 빼앗길 수 없느니라. 아무도 손에 쟁기를 잡고 나서, 몸을 돌이키면 하늘나라 사자가 될 자격이 없느니라.”
163:2.4 (1801.7) 다음에 안드레는 예수에게 어떤 부유한 젊은이를 데리고 왔는데, 그는 경건한 신자였고 세움받기를 희망하였다. 이 젊은이 마타돌무스는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다. 예수가 가르치는 것을 들었고, 그후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서 하늘나라 복음을 가르침받았다. 예수는 제자 임명의 요건에 관하여 마타돌무스와 이야기했고 그 문제에 관하여 더 자세히 생각해 볼 때까지 결정을 미루라고 요구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예수가 산책하러 가는 동안에, 이 젊은이는 예수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주여, 나는 당신으로부터 영생(永生)을 어떻게 보장하는가 듣고 싶나이다. 어릴 때부터 모든 계명을 지켜 왔음을 아는 까닭에,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 알고 싶나이다.” 이 물음에 대답해서 예수는 말했다: “간통하지 말라, 사람을 죽이지 말라, 훔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이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네가 이 모든 계명을 지키면, 너는 잘 하느니라. 그러나 구원은 믿음에 대한 보상이요, 단지 한 일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너는 이 하늘나라 복음을 믿느냐?” 마타돌무스는 대답했다: “예 주여, 당신과 당신의 사도들이 내게 가르친 것을 모두 믿나이다.” 예수는 말했다. “그러면 너는 정말로 내 제자요, 하늘나라의 아이니라.”
163:2.5 (1802.1) 그리고 나서 그 젊은이는 말했다: “그러나 주여, 나는 당신의 제자가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나이다. 나는 당신의 새 사자들 중에 하나가 되고자 하나이다.” 이 말을 듣자, 예수는 그 젊은이를 큰 사랑으로 내려다보고 말했다: “네가 기꺼이 값을 치르고자 하면, 네가 모자라는 한 가지를 내고자 하면, 내 사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게 하리라.” 마타돌무스는 대답했다: “주여, 내가 당신을 따르도록 허락을 받는다면 무엇이든지 하겠나이다.” 예수는 무릎 꿇은 젊은이의 이마에 입맞추며 말했다: “내 사자가 되고자 하면, 가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라, 그리고 네가 그 돈을 가난한 자와 너희 형제들에게 주었을 때, 와서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너는 하늘나라에서 보물을 받으리라.”
163:2.6 (1802.2) 마타돌무스는 이 말씀을 듣자,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일어서서 슬프게 떠나갔는데 그가 큰 재산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 부유한 젊은 바리새인은 재산이 하나님의 은총의 표시라고 믿도록 교육을 받아 왔다. 예수는 그가 제 몸과 재산을 사랑하는 데 매인 것을 알았다. 주는 반드시 재산으로부터 구원이 아니라, 재산 사랑으로부터 그를 구원하기를 바랐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이 가진 모든 속세의 물건을 버리지 않았지만, 사도들과 70인은 그렇게 했다. 마타돌무스는 70인의 새 사자들 중에 하나가 되기를 바랐고, 이것이 예수가 그에게 속세의 재산을 모두 버리라고 요구한 까닭이었다.
163:2.7 (1802.3) 거의 모든 인간은 아끼는 나쁜 버릇으로 붙들고 있는 무엇이 한 가지 있고,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데 입장료의 일부로 이를 요구한다. 마타돌무스가 재산을 내어놓았더라면, 아마도 70인의 회계로서 관리하라고 바로 그의 손에 도로 넘겨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세워진 뒤에, 그는 주의 명령에 복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70인의 회원 자격을 누리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회계가 되었는데, 육체로 주의 아우인 야고보가 그 교회의 우두머리였다.
163:2.8 (1802.4) 그래서 언제나 이와 같았고 언제까지나 이럴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필사자가 누려도 좋은 선택의 자유에는 어떤 테두리가 있다. 영적 세계의 세력은 사람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는 길을 가라고 버려둔다.
163:2.9 (1802.5) 마타돌무스가 재산을 가지고는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에게, 같이 세움받은 동료가 도저히 될 수 없다는 것을 예수는 내다보았고, 동시에 재산이 없으면 그가 그들 전체에서 궁극의 지도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바로 예수의 형제들처럼, 그는 하늘나라에서 결코 크게 되지 못했다. 주와 더불어 가깝고도 개인적인 바로 그 친교를 빼앗겼기 때문이고, 예수가 요청한 바로 그 일을 이때 기꺼이 행했더라면 그러한 친교를 누렸을지 몰랐다. 몇 년이 지나서 그는 예수가 요구한 대로 실제로 하였다.
163:2.10 (1803.1) 재산은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것과 직접 아무 상관이 없지만, 재산 사랑은 상관이 있다. 하늘나라에 영적으로 충성하는 것과 물질적 부(富)에 굴종하는 것은 양립할 수 없다. 사람은 최고의 충성심을 영적 이상과 물질적 열심에 나누어 바쳐서는 안 된다.
163:2.11 (1803.2) 예수는 결코 재산을 가지는 것이 그릇되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오직 열두 사도와 70인에게 속세의 재산을 모두 공동 목적에 바치기를 요구했다. 그리고 나서도 사도 마태의 경우처럼, 그들이 재산을 유익하게 처분하도록 마련했다. 예수는 살림이 넉넉한 제자들에게 로마의 부자(富者)를 가르친 것처럼 여러 번 조언을 주었다. 주는 남는 소득을 지혜롭게 투자하는 것을 앞날의 피할 수 없는 역경(逆境)에 대비한 정당한 형태의 보험으로 여겼다. 사도의 금고가 넘쳐흐를 때, 유다는 수입이 줄어들어서 그들이 크게 고생할지 모르는 후일에 쓰려고 자금을 저축해 놓았다. 유다는 안드레와 의논한 뒤에 이렇게 했다. 예수는 자선금을 지출할 때를 제외하고, 결코 사도의 재정과 조금도 친히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여러 번 비난한 경제적 악습이 하나 있었는데, 즉 약하고 배우지 못하고 운이 나쁜 사람들을 힘세고 날카롭고 더 지능적인 동료들이 부당하게 착취하는 것이었다. 어른과 아이들을 그렇게 인간답지 않게 대우하는 것은 하늘나라 형제의 이상과 양립하지 않는다고 예수는 선언했다.
163:3.1 (1803.3) 예수가 마타돌무스와 이야기를 마칠 때가 되자, 베드로와 사도 몇 명이 둘레에 모여 있었고, 그 부유한 젊은이가 떠나는 동안에 예수는 몸을 돌이켜 사도들을 마주보며 말했다: “재산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완전히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너희가 보는도다! 물질을 숭배하면서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없고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느니라. ‘이교도가 영생을 물려받기보다 낙타가 바늘 구멍을 지나가기가 더 쉽다’하는 속담이 너희에게 있느니라. 내가 선언하노니, 낙타가 바늘 구멍을 지나가는 것이 스스로 만족한 이 부자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만큼 쉬우니라.”
163:3.2 (1803.4) 베드로와 사도들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대단히 놀랐고, 너무 놀라서 베드로가 말했다: “그러면 주여,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나이까? 재산을 가진 자가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아니라 베드로야, 그러나 재산을 의지하는 자는 모두 영원한 진보로 이끄는 영적 생명에 도저히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나 그 경우에도 사람에게 불가능한 많은 일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손이 미치는 곳에 있으며,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에게 모든 것이 가능함을 깨달아야 하느니라.”
163:3.3 (1803.5) 자기들끼리 가버리자, 예수는 마타돌무스가 그들과 함께 남아 있지 않아서 슬퍼했는데, 예수가 그를 크게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호수 가까이 걸어 내려가서 거기서 물가에 앉았고, 베드로는 (이때가 되어서 거기에 모두 있던) 열두 사도를 대신하여 말했다: “그 부유한 젊은이에게 당신이 하신 말씀을 듣고 우리는 걱정이 되나이다.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속세(俗世)의 물건을 다 버리라 우리가 요구하리이까?” 예수는 말했다: “아니라 베드로야, 오직 사도가 되고자 하는 자와 너희가 하듯이 한 가족으로서 나와 함께 살기를 바라는 자들 뿐이라. 그러나 아버지는 아이들의 애정이 순수하고 나누어지지 않기를 요구하며, 너희와 하늘나라 진리를 사랑하는 것 사이에 끼는 어떤 물건이나 사람도 내던져야 하느니라. 사람의 재산이 혼의 구역을 침범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의 영적 생활에 아무 영향이 없느니라.”
163:3.4 (1804.1) 그리고 나서 베드로가 말했다, “그러나 주여, 우리는 당신을 따르려고 모든 것을 버렸나이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가지리이까?” 예수는 열두 사도 모두에게 말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위하여, 그리고 하늘나라를 위하여 재산이나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아이들을 버리고서, 아마도 얼마큼 박해와 함께 이 세상에서 몇 배나 받고 다가올 세상에서 영생을 받지 아니할 사람이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인 많은 사람이 마지막이 되겠고, 마지막인 자가 흔히 처음이 되리라. 아버지는 사람의 필요에 따라서, 자비롭게 사랑으로 우주의 복지를 고려하는 공정한 율법에 복종하여, 사람을 다루시니라.”
163:3.5 (1804.2) “하늘나라는 사람들을 많이 고용한 집 주인,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사려고 아침 일찍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라. 일꾼들에게 하루에 한 데나리온을 내기로 약속하고 나서, 저희를 포도원으로 보냈더라. 그리고 나서 9시쯤에 나가서, 더러가 시장에서 빈둥거리고 서 있음을 보고 저희에게 일렀더라: ‘너희도 가서 내 포도원에서 일하라, 그리하면 무엇이든지 마땅한 대로 너희에게 값을 치르리라.’ 저희는 대번에 일하러 갔더라. 다시 그는 12시쯤에, 그리고 3시쯤에 나갔고 마찬가지로 하였더라. 그리고 오후 5시쯤에 시장에 나가서, 아직도 더러가 빈둥거리고 서 있음을 발견하고, 저희에게 물었더라. ‘어찌하여 너희는 여기서 하루 종일 빈둥거리고 서 있느냐?’ 그리고 사람들이 대답하되 ‘아무도 우리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나이다.’ 그러자 그 집 주인이 말하되 ‘너희도 가서 내 포도원에서 일하라, 그리하면 무엇이든지 마땅한 대로 내가 너희에게 값을 치르리라.’
163:3.6 (1804.3) “저녁이 와서, 이 포도원 주인이 집사에게 말하되 ‘일꾼들을 불러서, 저희에게, 마지막에 고용한 자들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들에 이르기까지, 저희의 품삯을 주라.’ 5시쯤에 고용된 자들이 왔을 때, 저희는 한 데나리온씩 받았고, 다른 일꾼들도 각각 그리하였더라. 그날 아침에 고용된 사람들이 나중에 온 자들이 얼마나 받았는가 보았을 때, 정한 금액보다 더 받을 줄 기대하였더라. 그러나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마다 오직 한 데나리온을 받았더라. 그리고 사람마다 제 품삯을 받고 나서, 저희가 집주인에게 불평하되 ‘마지막에 고용된 이 사람들은 겨우 한 시간 일하였고, 그래도 타는 볕에서 하루의 짐을 진 우리와 똑같이 당신은 저희에게 돈을 주었나이다.’
163:3.7 (1804.4) “그러자 그 집주인이 일렀더라: ‘친구들이여, 나는 너희에게 아무 잘못이 없노라. 너희 각자가 하루 한 데나리온에 일하기로 찬성하지 않았느냐? 이제 네 것을 가지고 길을 떠나라, 너희에게 준 것만큼 마지막에 온 자들에게 주기를 내가 바라기 때문이라. 내 것을 내 뜻대로 하는 것이 법에 어긋나느냐? 아니면 내가 선하고 자비를 보이기를 원한다고 해서, 너희가 나의 관대함에 불평을 품느냐?’”
163:4.1 (1804.5) 70인이 첫 임무를 띠고 떠나간 날은 마가단 캠프 근처에서 가슴 설레는 때였다. 그날 아침 일찍, 70인과 마지막 말씀을 하며 예수는 다음을 강조했다:
163:4.2 (1804.6) 1. 하늘나라 복음은 온 세상에,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선포되어야 한다.
163:4.3 (1804.7) 2. 병자들을 보살피면서, 기적을 기대하는 가르침을 삼가라.
163:4.4 (1805.1) 3. 속세의 권력과 물질적 영화가 있는, 겉으로 보이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적으로 형제인 것을 선포하라.
163:4.5 (1805.2) 4. 지나친 사교적 방문과 다른 사소한 일로 시간 낭비를 피하라, 이것이 너희가 한눈을 팔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지 못하게 할까 하니라.
163:4.6 (1805.3) 5. 본부로 선택할 첫 집이 마땅한 가정인 것이 판명되면, 그 도시에서 머무르는 동안 내내 거기서 지내라.
163:4.7 (1805.4) 6. 예루살렘의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과 드러내놓고 갈라질 때가 이제 왔음을 충실한 신자들 모두에게 분명히 이르라.
163:4.8 (1805.5) 7. 사람의 온전한 의무는 이 한 계명에 요약되었음을 가르치라: 정신과 혼을 다 하여 너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을 바리새인들이 해설한 613개 생활 규칙 대신에 사람의 온전한 임무라고 그들이 가르쳐야 했다.)
163:4.9 (1805.6) 사도와 제자들이 모두 있는 가운데 예수가 이렇게 70인에게 말씀하고 나서, 시몬 베드로는 이들을 따로 데리고 가서 임명하는 훈시를 주었다. 이 설교는 예수가 그들에게 손을 얹고 하늘나라의 사자로서 구별할 때 예수가 주신 지침을 공들여 다듬은 것이다. 베드로는 70인에게 그들의 체험에서 다음의 미덕을 간직하라고 타일렀다:
163:4.10 (1805.7) 1. 거룩하게 헌신할 것. 복음의 수확을 거두는 일에 더 많은 일꾼이 파송되기를 언제나 기도할 것. 사람이 그렇게 기도할 때 “여기 내가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말하기가 더 쉬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매일의 예배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163:4.11 (1805.8) 2. 참된 용기. 그들이 적대 행위에 직면하고 분명히 박해를 만나리라고 그는 경고했다. 베드로는 그들의 사명이 겁쟁이가 맡을 사업은 아니라고 일러주었고 두려운 사람들은 시작하기 전에 물러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아무도 물러서지 않았다.
163:4.12 (1805.9) 3. 믿음과 신뢰. 그들은 이 짧은 임무에 전혀 지원받지 않고 떠나야 한다. 먹을 것과 잠자리와 모든 다른 필요한 것을 아버지에게 의존해야 한다.
163:4.13 (1805.10) 4. 열심과 창의력. 그들은 열의가 있고 현명하게 열심이 있어야 한다. 엄밀하게 주의 일을 보살펴야 한다. 동방의 인사는 길고 공들인 예식이다. 그러므로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고 전에 지시를 받았는데, 이것은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사람이 제 일에 몰두하라고 보통 훈계하는 방법이었다. 친절하게 인사하는 문제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163:4.14 (1805.11) 5. 친절과 예의. 주는 그들에게 사회적 예식에 필요 없는 시간 낭비를 피하라고 지시했지만, 그들이 접촉하게 되는 모든 사람에게 예의 바를 것을 명했다. 그들을 집으로 접대할 수도 있는 자에게 모든 친절을 보여야 했다. 더 편안하거나 영향력 있는 가정에서 접대받으려고 소박한 집을 떠나지 말라고 엄하게 경고를 받았다.
163:4.15 (1805.12) 6. 병자를 보살피기. 70인은 정신과 몸이 병든 자를 찾아내고, 질병을 덜거나 고치려고 그들이 능력이 닿는 데까지 무엇이든 하라고 베드로가 당부하였다.
163:4.16 (1805.13) 그리고 이렇게 책임과 지시를 받고 나서, 그들은 갈릴리ㆍ사마리아ㆍ유대에서 사명을 다하려고 둘씩 떠나갔다.
163:4.17 (1806.1) 비록 이교도 국가들의 수가 70이라는 것을 때때로 생각하면서 유대인들은 70이라는 수를 특별하게 여겼고, 비록 이 사자(使者) 70인이 복음을 가지고 모든 민족에게 가기로 정해지기는 했어도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한, 이 무리가 어쩌다가 꼭 70인이었다는 것은 단지 우연일 뿐이다. 여섯 이상의 다른 사람들을 예수가 받아들였을 것이 분명했지만, 그들은 재산과 가족을 버리라는 대가를 기꺼이 치르지 않았다.
163:5.1 (1806.2) 예수와 열두 사도는 이제 페레아 지역의 마지막 본부를 펠라 가까이서 세우려고 준비했는데, 여기서 주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11월의 마지막 열흘은 마가단에서 회의하느라고 보냈고, 12월 6일 화요일에 거의 3백 명 되는 일행 전부가, 그날 밤 펠라 가까이 강가에서 묵으려고 소지품을 모두 가지고 새벽에 떠났다. 여기는 샘물가에, 세례자 요한이 몇년 전에 천막을 가지고 차지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163:5.2 (1806.3) 마가단 캠프가 해산된 뒤에, 다윗 세베대는 벳세다로 돌아가서 사자 봉사를 즉시 축소하기 시작했다. 하늘나라는 새로운 국면의 성질을 띠고 있었다. 날마다 팔레스타인의 모든 구역으로부터, 아니 로마 제국의 먼 지역에서도 순례자들이 도착했다. 신자들은 때때로 메소포타미아에서, 그리고 티그리스 동쪽 땅으로부터 왔다. 따라서 12월 18일 일요일에, 다윗은 사자단의 도움을 얻어서, 캠프 장비를 짐 싣는 짐승들 위에 실었고, 그리고 나서 아버지의 집에 저장했는데, 이것으로 그는 예전에 호숫가에서 벳세다 캠프를 운영하였다. 벳세다를 한동안 작별하고, 그는 호숫가에 밑으로 요단강을 따라서, 사도의 캠프에서 북쪽으로 8백 미터쯤 되는 지점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한 주도 채 되지 않아서 거의 1천 5백 명의 순례하는 방문자들을 접대할 준비가 되었다. 사도의 캠프는 거의 5백 명에게 잠자리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이때는 팔레스타인에서 비가 오는 철이었고, 이 숙박 시설은 항상 수가 늘어나는 질문자, 예수를 보고 가르침을 들으려고 페레아 지역으로 들어온, 대체로 열심 있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데 필요했다.
163:5.3 (1806.4) 마가단에서 빌립과 마태와 의논한 적이 있었지만, 다윗은 이 모든 것을 솔선해서 했다. 그는 예전의 사자단의 과반수를 이 캠프를 운영하는 데 조수로서 고용했다. 이제 정규 사자 임무에 고용된 사람은 20명이 채 되지 않았다. 12월 말 가까이, 그리고 70인이 돌아오기 전에, 거의 8백 명의 방문객이 주의 둘레에 모여들었고 이들은 다윗의 캠프에서 잠자리를 얻었다.
163:6.1 (1806.5) 12월 30일 금요일에, 예수가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과 함께 근처의 산으로 떠난 동안, 70인의 사자들은 둘씩, 수많은 신자를 동반하고 펠라 본부에 도착하고 있었다. 예수가 캠프로 돌아왔을 때, 5시쯤에 가르치는 장소에서 70인이 모두 모였다. 하늘나라 복음에 열심인 이 사람들이 자기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동안 저녁 식사는 한 시간이 넘게 늦어졌다. 다윗의 사자들이 지난 몇 주 동안 사도들에게 이 소식의 상당 부분을 가져왔지만, 새로 세움받은 이 복음 선생들이 갈급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참으로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마침내 예수는 그가 몸소 있지 않아도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퍼뜨리러 나가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 주는 하늘나라의 진보를 심각하게 방해하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163:6.2 (1807.1) 70인이 어떻게 그들에게 “악귀들조차 굴복하는가”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신경 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놀랍게 그들이 병 고친 것을 언급하였다. 그런데도, 이 봉사자들이 구제한, 정말로 귀신 들린 몇 경우가 있었고, 이를 언급하며 예수는 말했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짐을 본 것을 생각하니, 복종하지 않던 이 작은 영들이 너희에게 굴복한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그러나 이것으로 지나치게 기뻐하지 말라,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자마자 길 잃은 이 몇 귀신이 불행한 필사자의 지성 속에 이제 더 들어갈 수 없도록 우리의 영을 사람들의 바로 그 지성 속에 보낼 것임이라. 너희가 사람들에 대하여 능력을 가진 것을 너희와 함께 내가 기뻐하여도, 이 체험 때문에 용기를 얻지 말고 오히려 너희의 이름이 하늘의 두루마리에 적힌 것, 그리고 너희가 영적으로 정복하는 끝없는 생애에서 이처럼 앞으로 나아갈 것을 기뻐하라.”
163:6.3 (1807.2) 바로 이때, 저녁 식사를 나누기 바로 전에, 예수는 추종자들이 때때로 목격한 바와 같이, 감정의 환희를 맛보는 드문 한 순간을 체험했다. 그는 말했다: “내 아버지여, 하늘과 땅의 주여, 이 놀라운 복음이 지혜롭고 스스로 옳게 여기는 자에게 감추어졌어도, 영은 이 영적 영광을 이 하늘나라 아이들에게 드러냈음을 감사드리나이다. 그러하나이다 아버지여, 이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 보시기에 기뻤음이 틀림없나이다. 내가 아버지께로, 그리고 내게 행하라고 주신 일로 돌아간 뒤에도, 좋은 소식이 온 세상에 퍼질 것을 알고 나는 기뻐하나이다. 아버지가 내 손에 모든 권한을 주려 하심을 깨달으면서, 내가 누구인 줄 오직 아버지가 정말로 아시며, 내가 저희에게 아버지를 드러냈으므로, 오직 나와 저희가 아버지를 정말로 아는 것에 힘차게 감동이 되나이다. 그리고 육체를 입은 내 형제들에게 이 계시를 마쳤을 때, 나는 하늘 높이 있는 당신의 여러 생물에게 계시를 계속하리이다.”
163:6.4 (1807.3) 이렇게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나서, 예수는 얼굴을 돌려 사도와 봉사자들에게 말했다: “이 일을 보는 눈과 듣는 귀는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지난 시대의 숱한 선지자와 많은 위대한 사람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고 싶어했으되 저희에게 허락되지 아니하였느니라. 앞으로 생길 많은 세대에 빛의 아이들이 이 소식을 들을 때, 이를 듣고 본 너희를 부러워하리라.”
163:6.5 (1807.4) 그리고 나서, 모든 사도에게 말했다: “너희는 얼마나 많은 도시와 마을이 하늘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였는가, 어떻게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내 봉사자와 선생들을 받아들였는가 들었느니라. 하늘나라의 복음을 믿기로 작정한 이 여러 공동체는 정말로 복이 있도다. 그러나 코라진, 벳세다 줄리아스, 가버나움, 이 사자들을 좋게 받아들이지 않은 도시에서 빛을 물리치는 주민들은 아― 한탄이 있을진저. 내가 선언하노니, 이 여러 곳에서 행해진 막강한 일을 티레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이른바 이 이교도 도시의 사람들은 삼베와 재 속에서 뉘우친 지 오래되었으리라. 심판하는 날에 티레와 시돈이 정말로 더 견딜 만하리라.”
163:6.6 (1807.5) 다음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70인과 함께 따로 가서 그들에게 말했다: “갈릴리와 사마리아와 유대에 두루 흩어진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너희가 돌아왔을 때 나는 정말로 너희와 함께 기뻐하였노라. 그러나 어째서 너희는 그렇게 놀랍게 기운을 얻었느냐? 너희가 전하는 소식이 전달될 때 힘을 나타낼 것이라고 너희가 기대하지 않았더냐? 이 복음을 거의 믿지 않고 떠나갔으므로 너희가 그 효력에 놀라서 돌아왔느냐? 그리고 이제, 너희의 기뻐하는 정신에 물을 끼얹지 않겠으나, 미묘한 자만, 영적 자만에 대하여 너희에게 엄하게 경고하고자 하노라. 루시퍼, 불의한 자의 몰락을 이해할 수 있다면, 너희는 온갖 형태의 영적 자만심을 엄숙하게 피하리라.
163:6.7 (1808.1) “너희는 필사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그에게 가르치는 이 큰 일을 시작하였도다. 나는 너희에게 길을 보여주었으니, 가서 너희 사명을 다하고 일을 잘 처리하는 데 지치지 말라. 너희에게, 그리고 오랜 세월을 통해서 너희의 걸음을 따를 모든 사람에게 내가 이르노라: 내가 언제나 가까이 서 있고, 나의 초청하는 부름은 이것이요 언제나 그러하리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휴식을 주리라. 나의 멍에를 너희가 지고 나에게서 배우라, 이는 내가 참되고 충실하며, 너희의 혼이 영적 휴식을 찾을 것임이라.”
163:6.8 (1808.2) 예수의 약속을 시험해 보았을 때, 그들은 주의 말씀이 참말인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셀 수없이 많은 사람이 또한 바로 이 약속을 시험해 보았고 그 약속이 확실함을 입증했다.
163:7.1 (1808.3) 다음 며칠은 펠라 캠프에서 바쁜 나날이었다. 페레아 전도를 위한 준비가 끝나고 있었다. 예수와 그 동료들은 마지막 전도 사명, 온 페레아 지방에서 석 달 여행을 막 시작하려 했고, 이것은 땅에서 마지막 수고를 위하여 주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끝났다. 이 기간 내내, 예수와 열두 사도의 본부는 여기 펠라 캠프에서 유지되었다.
163:7.2 (1808.4) 이제는 더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예수가 외국으로 갈 필요가 없었다. 주마다 모든 지방으로부터, 팔레스타인 뿐 아니라 온 로마 세계와 근동(近東)으로부터,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수가 더욱 늘어났다. 비록 페레아 여행에 70인과 함께 참여했어도 주는 군중을 가르치고 열두 사도를 교육하면서 많은 시간을 펠라 캠프에서 보냈다. 이 석 달 동안 내내, 적어도 열 사도가 예수와 함께 남아 있었다.
163:7.3 (1808.5) 70인이 페레아의 여러 큰 도시에서 수고하는 동안, 여인단도 둘씩 나가려고 준비했다. 열두 여인으로 이루어진 이 최초의 집단은 가정을 방문하는 일과 병든 자와 고통 받는 자를 돌보는 기술을 여인 50명으로 된 더 큰 집단에게 최근에 훈련시켰다. 시몬 베드로의 아내, 퍼페투아가 여인단의 이 새 부서에 회원이 되었고 아브너 밑에서 여인들의 확대된 일의 지도를 맡았다. 오순절 뒤에 이 여인은 뛰어난 남편과 함께 있었고, 모든 선교 여행에 남편을 따라다녔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날, 그 여자는 경기장에서 사나운 짐승들에게 먹혔다. 이 새 여인단에는 또한 빌립과 마태의 아내들과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회원이었다.
163:7.4 (1808.6) 하늘나라의 일은 이제 예수가 친히 지휘하는 밑에서 최종 단계에 들어가려고 준비했다. 그리고 이 현재 단계는, 갈릴리에서 인기가 있던 옛 시절에 주를 따라다니던 군중, 기적을 기대하고 이적을 찾던 군중과 반대로, 영적 깊이가 있는 단계였다. 그러나 물질적 생각을 가진 추종자, 그리고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우주의 아버지라는 영원한 사실에 기초를 둔, 사람의 영적 형제 단체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추종자들이 아직도 얼마든지 있었다.
164:0.1 (1809.1) 펠라에서 캠프가 세워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는 나다니엘과 토마스를 데리고서 헌당 축제에[1] [1802] 참석하려고 예루살렘으로 몰래 올라갔다. 베다니 여울목에서 요단강을 건널 때까지, 두 사도는 주가 예루살렘으로 계속 가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정말로 헌당 축제에 참석할 뜻이 있음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무척 진지하게 항의하고, 온갖 종류의 논리로 예수를 말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고, 예수는 예루살렘을 방문하기로 각오가 굳어 있었다. 자신이 산헤드린의 손아귀에 빠지는 어리석음과 위험을 강조하면서 그들이 온갖 간청과 경고를 드린 데 대하여 그는 이렇게만 대답하곤 하였다, “내 때가 오기 전에, 나는 이스라엘의 이 선생들에게 빛을 볼 기회를 또 한 번 주고자 하노라.”
164:0.2 (1809.2)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계속 갔고, 두 사도는 두려운 느낌을 줄곧 표현하고, 겉보기에 대담한 그러한 시도가 지혜로운가 의심한다고 투덜거리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예리고에 4시 반쯤에 이르렀고, 거기서 밤 동안 지내려고 준비했다.
164:1.1 (1809.3) 그날 저녁에 상당히 큰 일행이 예수와 두 사도의 둘레에 말씀을 물으려고 모였다. 질문 중 많은 것을 사도들이 대답하였고 나머지는 주가 논의하였다. 저녁에, 어떤 율법사가 체신을 떨어뜨리는 논쟁에 예수를 옭아매려 애쓰면서 말했다: “선생이여, 영생(永生)을 얻기 위하여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당신께 묻고자 하나이다.” 예수는 대답했다: “율법과 선지자에 무엇이 쓰여 있느냐, 너는 성서를 어찌 해석하느냐?” 예수와 바리새인, 양쪽의 가르침을 알기 때문에 율법사는 대답했다: “마음과 혼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니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네가 옳게 대답하였도다. 네가 정말로 행하면, 이것이 영생으로 이끌리라.”
164:1.2 (1809.4) 그러나 이렇게 물으면서 율법사는 온전히 성실하지는 않았다. 자신을 정당화하기를 바라고 또한 예수를 난처하게 만들기를 희망하면서 과감하게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주께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는 말했다. “그러나 선생이여, 도대체 누가 내 이웃인지 당신이 나에게 일러주셨으면 하나이다.” 그 율법사는 예수가 사람의 이웃을 “자기 민족의 자녀들”로 정의한 유대인 율법에 어긋나는 어떤 진술을 하도록 예수를 덫에 걸리게 만들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물었다. 유대인은 모든 다른 사람을 “이방의 개”로 여겼다. 이 율법사는 예수의 가르침에 얼마큼 익숙했고, 따라서 주가 다르게 생각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주를 유도하여 신성한 율법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할 수 있는 무슨 말씀을 예수가 하게 만들기를 바랐다.
164:1.3 (1810.1) 그러나 예수는 그 율법사의 동기를 헤아렸고, 덫에 빠지는 대신에, 나아가서 듣는 사람들에게 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예리고의 어떤 청중도 넉넉히 알아들을 이야기였다. 예수가 말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다가 사나운 도적들의 손에 걸렸더니, 저희가 그의 물건을 약탈하고 옷을 벗기고 그를 매질하고 떠나면서 반 죽은 채로 두었더라. 금방 어떤 사제(司祭)가 어쩌다가 그 길을 내려가다가, 다친 사람을 발견하고 그 불쌍한 모습을 보고서, 길 건너편으로 지나갔더라. 그리고 한 레위인도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같은 방법으로 건너편으로 지나갔더라. 자, 이 무렵에 어떤 사마리아인이 예리고로 길을 가다가, 이 다친 사람과 마주쳤더니, 그 사람이 어떻게 강도에게 빼앗기고 얻어맞았는가 보고서 불쌍한 느낌이 들었고, 그에게 다가가서 상처를 싸매고,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그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우고서, 여기서 여인숙까지 데리고 가서 그를 돌보았더라. 이튿날 아침에, 그가 돈을 얼마큼 꺼내어 주인에게 주면서 말하되, ‘내 친구를 잘 보살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다시 돌아올 때 갚으리라’ 하였더라. 자 이제 내가 너에게 묻노니,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를 만난 자의 이웃인 것이 드러났느냐?” 그 율법사는 자신이 놓은 덫에 빠졌음을 깨달았을 때 대답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리고 예수는 말했다, “가서 이와 같이 하라.”
164:1.4 (1810.2) 그 율법사는 싫은 말, 사마리아인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삼갈까 하여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했다. “누가 내 이웃인가?” 하는 질문에 율법사는 예수가 주고 싶은 바로 그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고, 만일 예수가 그렇게 말했다면, 이단(異端)이라는 죄목으로 그를 직접 말려들게 했을 것이다. 예수는 정직하지 않은 그 율법사를 쩔쩔매게 했을 뿐 아니라 청중에게 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이야기는 동시에 모든 추종자에게 아름다운 훈계요, 사마리아인에 대한 태도에 관하여 모든 유대인을 깜짝 놀라게 하는 꾸지람이었다. 이 이야기는 그후에 예수의 복음을 믿은 모든 사람 사이에서 형제 사랑을 줄곧 촉진했다.
164:2.1 (1810.3) 예수는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온 순례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할까 하여 전에 천막 축제에 참석했다. 이제 그는 꼭 한 가지 목적으로 헌당 축제에 올라갔는데, 곧 산헤드린과 유대 지도자들에게 다시 한 번 빛을 볼 기회를 주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이 며칠 동안의 주요한 사건은 니고데모의 집에서 금요일 밤에 일어났다. 예수의 가르침을 믿은 유대 지도자들이 25명 정도 함께 여기에 모였다. 이 무리 가운데 당시에, 아니면 최근에 산헤드린 회원이었던 사람이 열네 명 있었다. 이 모임에는 이버, 마타돌무스, 아리마대 요셉이 참석했다.
164:2.2 (1810.4) 이 기회에 예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모두 학식 있는 사람이었고, 이들과 두 사도는 이 탁월한 집단에게 주가 논평하신 말씀이 얼마나 넓고 깊은가 놀랐다. 예수가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에서, 그리고 지중해 섬들에서 가르친 시절 이후로, 그렇게 박식함을 나타내고, 세속인과 종교인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일을 그렇게 이해하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164:2.3 (1810.5) 이 작은 모임이 해산되었을 때, 모두가 주의 인품에 신비를 느꼈고 품위 있는 예절에 매혹되고 그 인품에 반하여 돌아갔다. 산헤드린의 나머지 회원들을 설득하려는 그의 소망에 관하여 그들은 예수에게 조언하려고 애썼다. 주의 깊게, 그러나 말없이, 주는 모든 제안(提案)을 들었다. 그들의 계획 중에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할 것을 잘 알았다. 그는 유대 지도자들의 대다수가 하늘나라 복음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으리라고 추측했다. 그래도 그들 모두에게 이번에 선택할 기회를 다시 한 번 주었다. 그러나 나다니엘과 토마스와 함께 올리브산에서 묵으려고 그날 밤에 나갔을 때, 한 번 더 산헤드린이 그의 일을 주목하게 만들기 위하여 어떤 방법을 추구할 것인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164:2.4 (1811.1) 그날 밤에 나다니엘과 토마스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니고데모의 집에서 들은 것에 너무 많이 놀랐다. 그와 함께 70인[2] [1803] 앞으로 가자고 하는, 산헤드린의 과거 및 현직 회원들의 제안에 대하여 예수가 마지막으로 논평한 것을 두고 그들은 많이 생각해 보았다. 주는 말했다: “아니라 형제들아, 아무 소용이 없느니라. 너희 머리 위에 쏟아질 진노를 너희가 더할 뿐이나 나를 미워하는 마음을 저희가 조금도 줄이지 못하리라. 내 아버지가 지시하는 방법으로 다시 한 번 하늘나라를 저희가 주목하게 하는 동안, 너희는 각자 가서 영이 인도하는 대로 아버지의 일에 힘쓰라.”
164:3.1 (1811.2) 이튿날 아침 세 사람은 아침을 먹으러 베다니에 마르다의 집으로 갔고, 다음에 즉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이 안식일 아침에, 예수와 두 사도가 성전에 가까이 다가가자, 어느 이름난 거지와 마주쳤는데, 날 때부터 눈먼 이 사람은 늘 있던 장소에 앉아 있었다. 이 거지들은 안식일에 구걸하거나 자선금을 받지 않았어도, 이렇게 자기의 보통 장소에서 앉아 있는 것이 허락되었다. 예수는 멈추어서 그 거지를 바라보았다. 날 때부터 눈먼 이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어떻게 한 번 더, 땅에서 그의 사명을 산헤드린과 기타 유대 지도자와 종교 선생들이 주목하게 만들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164:3.2 (1811.3) 주가 깊이 생각에 빠져서, 눈먼 사람 앞에 거기 서 있는 동안, 이 사람이 눈이 멀게 된 가능한 원인을 생각하며 나다니엘이 물었다: “주여, 그가 날 때부터 눈이 멀었으니 누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지었나이까?”
164:3.3 (1811.4) 랍비들은 날 때부터 소경인 모든 그러한 경우는 죄가 원인이라고 가르쳤다. 아이들이 죄 속에서 잉태되고 태어날 뿐 아니라, 아이는 아버지가 저지른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벌로서 소경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 그들은 바로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죄를 지을 수 있다고까지 가르쳤다. 또한 그 아이를 밴 동안에 어머니의 어떤 죄나 다른 방탕함이 그러한 결함이 생기게 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164:3.4 (1811.5) 이 모든 지역에 두루, 윤회(輪廻)를 믿는 관념이 남아 있었다. 플라톤과 필로와 많은 에센인과 함께, 옛 유대인 선생들은 사람들이 하나의 생애에서 전생(前生)에 씨 뿌린 것을 거둘지 모른다는 이론을 용납했다. 이처럼 한 인생 동안에, 여러 전생에서 지은 죄를 보상하고 있다고 믿었다. 주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혼이 전에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을 믿게 만들기가 어려움을 깨달았다.
164:3.5 (1811.6) 모순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런 소경이 죄의 결과라고 생각되었어도 이 눈먼 거지들에게 자선금 주는 것은 높이 칭찬할 일이라고 유대인들은 주장했다. “아, 마음이 부드러운 이여, 소경을 도우사 공을 쌓으소서”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항상 되풀이하는 것이 이 눈먼 사람들의 관습이었다.
164:3.6 (1811.7) 예수는 나다니엘과 토마스와 함께 이 경우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날 한 번 더 뚜렷하게 유대 지도자들이 그의 사명을 주목하게 하는 수단으로, 이 눈먼 사람을 쓰기로 이미 마음먹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연 현상이든 영적 현상이든, 모든 현상의 참된 원인을 사도들이 추구하도록 언제나 격려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있는 물리적 사건을 영적 원인의 탓으로 돌리는 흔한 경향을 피하라고 예수는 자주 전에 그들에게 경고했다.
164:3.7 (1812.1) 예수는 그날의 일을 위한 계획에 이 거지를 쓰기로 작정했지만, 이름이 요시아인 그 소경을 위하여 어떤 일도 미처 해주기 전에, 나다니엘의 물음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주는 말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 사람에게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그도, 부모도 죄를 짓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렇게 눈먼 것은 자연스러운 사건의 과정으로 그에게 일어났으나, 아직 낮인 동안에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이제 해야 하나니, 밤이 확실히 올 것임이라. 그때에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가 불가능하리라. 내가 세상에 있을 때 나는 세상의 빛이지만, 조금만 있으면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64:3.8 (1812.2) 말씀을 마치고 나서 예수는 나다니엘과 토마스에게 일렀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사람의 아들을 고발하려고 찾는 충분한 근거를 주도록 이 안식일에 이 소경이 눈을 뜨게 만들자.” 그리고 나서 몸을 굽히면서 땅에 침을 뱉고 진흙을 침과 섞었다. 그리고 소경이 들을 수 있게 이 모든 것을 말하면서, 요시아에게 다가가서, 앞이 보이지 않는 두 눈 위에 진흙을 얹고 말했다: “이 사람아, 가서 이 진흙을 실로암 못에서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네 눈이 즉시 보게 될지니라.” 그리고 실로암의 못에서 그렇게 씻고 나자, 요시아는 눈이 보게 되었고 친구들과 가족한테로 돌아갔다.
164:3.9 (1812.3) 언제나 거지였으니까, 그는 다른 일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눈이 보게 되어 처음 흥분이 사라졌을 때, 여느 때에 자선(慈善)을 구하던 장소로 돌아갔다. 친구와 이웃들, 그리고 그를 전에 알았던 모든 사람이, 그가 눈이 멀쩡한 것을 지켜보자 모두 말했다: “이 사람은 눈먼 거지 요시아가 아니냐?” 더러는 그라 하고, 더러는 말했다, “아니라, 그와 비슷한 자이나 이 사람은 볼 수 있구나.” 그러나 그들이 본인에게 물었을 때, 그는 대답했다, “내가 그 사람이요.”
164:3.10 (1812.4) 어떻게 그가 볼 수 있는가 그들이 비로소 묻자, 그는 대답했다: “예수라 하는 사람이 이 길로 와서, 친구들과 함께 내 이야기를 하면서, 침으로 진흙을 만들어 내 두 눈에 바르고, 내가 가서 실로암 못에서 씻어야 한다고 지시하였나이다. 나는 이 사람이 내게 이른 대로 했고, 즉시 내 시력을 얻었나이다. 그리고 이 일은 겨우 몇 시간 전에 일어났나이다. 내가 보는 많은 것이 무슨 의미(意味)인가 아직 모르나이다.” 주위에 모이기 시작한 사람들이, 그를 고쳐준 이상한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물었을 때, 요시아는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164:3.11 (1812.5) 이것은 주가 행한 모든 기적(奇蹟) 가운데 하나의 아주 이상한 일이다. 이 사람은 고쳐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그에게 실로암에서 씻으라고 지시하고 그에게 눈을 뜨게 해준다고 약속한 그 예수가 천막 축제 동안에 예루살렘에서 설교했던 갈릴리 선지자인 것을 그는 몰랐다. 이 사람은 그가 시력을 얻을 것이라고 거의 믿지 않았지만, 그 시절의 사람들은 위대하거나 거룩한 사람의 침이 효력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나다니엘과 토마스가 예수와 나눈 말씀으로 미루어, 요시아는 자청해서 은혜를 베푼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나 또는 학식 있는 선생이나 거룩한 선지자라고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그는 예수가 지시한 대로 했다.
164:3.12 (1812.6) 다음 세 가지 이유로 예수는 진흙과 침을 썼고, 그에게 상징인 실로암 못에서 씻으라고 지시했다:
164:3.13 (1812.7) 1. 이것은 개인의 믿음에 반응하여 일어난 기적이 아니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예수가 행하기로 한 이적이었지만, 이 일로 이 사람이 오랫동안 혜택을 받도록 마련한 이적이었다.
164:3.14 (1813.1) 2. 그 소경이 고쳐달라 부탁하지 않았고 그의 믿음이 적었기 때문에, 이 물질적 행위는 그를 격려하려는 목적으로 제안한 것이다. 그는 침이 효력이 있다는 미신을 믿었고, 실로암 못이 반 거룩한 장소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에게 발라준 진흙을 씻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도저히 거기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 대화에는 그를 움직이도록 유인하기에 가까스로 넉넉한 절차가 있었다.
164:3.15 (1813.2) 3. 그러나 이 독특한 대화와 관련하여 예수는 이 물질적 수단에 의존한 셋째 이유가 있었다. 이것은 순전히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일으킨 기적이었고, 그렇게 함으로 그 시절과 이후 시대에 계속, 추종자들이 병자를 고치면서 물질적 수단을 가벼이 보거나 소홀히 하지 않도록 가르치기를 바랐다. 기적이 인간의 질병을 고치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고 싶었다.
164:3.16 (1813.3) 예수는 이 안식일 아침에, 성전에서 가까이 예루살렘에서, 기적을 일으켜 이 사람의 눈을 뜨게 만들었고, 이 행위를 산헤드린과 모든 유대 선생 및 종교 지도자에게 공개(公開) 도전으로 만드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었다. 이것은 그가 바리새인들과 드러내놓고 갈라지는 것을 선언하는 방법이었다. 행하는 모든 일에 그는 언제나 적극적이었다. 산헤드린 앞에 이 문제를 제기할 목적으로, 이 안식일 오후에 일찍 예수는 두 사도를 이 사람에게 데리고 와서 일부러 논쟁을 일으켰고,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어쩔 수 없이 그 기적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164:4.1 (1813.4) 오후 중반이 되어, 요시아를 치유한 것이 성전 주위에서 얼마나 큰 이야기거리를 만들었는지, 산헤드린의 지도자들은 평상시의 성전 회의 장소에서 회의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안식일에 산헤드린의 집회를 금하는 오래 된 규칙을 어기고 이렇게 했다. 예수는 마지막 시험이 다가왔을 때, 안식일 어기는 것이 그를 고발하는 주요한 죄목 중의 하나일 것을 알았다. 그는 안식일에 눈먼 사람을 고쳤다는 죄목으로 판결을 받으려고 산헤드린 앞으로 끌려가기를 바랐으며, 이 자비로운 행위 때문에 그를 재판하는 높은 유대 법정(法廷)의 바로 그 회의가 안식일에, 스스로 부과한 율법을 직접 어기고 이 문제를 심의할 것이었다.
164:4.2 (1813.5)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앞으로 부르지 않았고, 그렇게 하기가 두려웠다. 그 대신에 당장에 요시아를 부르러 보냈다. 얼마큼 예비 질문이 있은 뒤에, (약 50명의 회원이 자리에 있었다) 산헤드린의 대변인이 요시아에게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르라고 지시했다. 그날 아침에 고침을 받은 뒤에, 요시아는 토마스와 나다니엘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바리새인들이 그가 안식일에 고침 받았다고 하여 화가 났다는 것, 그리고 관계된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문제를 일으킬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예수가 사람들이 구원자라고 부르는 바로 그 사람인 것을 요시아는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물었을 때 말했다: “이 사람이 나타나서, 내 두 눈에 진흙을 얹고, 가서 실로암에서 씻으라고 내게 일렀는데, 이제 내가 보나이다.”
164:4.3 (1813.6) 나이 든 바리새인들 중의 하나가, 한바탕 연설한 뒤에 말했다: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을 수 없으니, 너희가 보다시피 그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까닭이라. 첫째, 진흙을 빚고, 다음에 이 거지를 안식일에 실로암에서 씻으라 보내면서, 그는 율법을 어기는도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생일 수 없느니라.”
164:4.4 (1813.7) 그러자 예수를 몰래 믿던 젊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말했다: “이 사람을 하나님이 보내지 않았다면, 어찌 그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소이까? 우리가 알기에는, 보통 죄인인 사람은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없소이다. 우리는 다 이 거지를 알고, 그가 날 때부터 눈이 먼 것을 아온데, 이제 그가 보오이다. 당신들은 이 선지자가 악마 왕의 힘으로 이 모든 기적을 행한다고 아직도 말하고자 하오이까?” 바리새인 하나가 예수를 감히 고발하고 비난하면, 또 한 사람이 일어나서 복잡하고 당황스런 질문을 던지곤 하였고, 그래서 그들 사이에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다. 주관하는 관리는 그들이 어느 쪽으로 흘러가는가 보았고, 논쟁을 가라앉히려고 자신이 그 사람을 더 심문하려고 준비했다. 요시아를 향하여 그는 말했다: “너는 이 사람, 네가 주장하건대 네 눈을 뜨게 한 이 예수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그리고 요시아는 대답했다. “나는 그가 선지자라 생각하나이다.”
164:4.5 (1814.1) 지도자들은 크게 난처했다. 달리 어떻게 할 줄 몰라서, 요시아가 실제로 날 때부터 눈이 멀었는가 알려고 요시아의 부모를 찾으러 사람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거지가 고침받은 것을 믿기가 몹시 싫었다.
164:4.6 (1814.2) 예수가 어떤 회당에도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로 회당에서 쫓겨났다, 이스라엘의 회중에서 추방되었다는 것이 예루살렘 근처에서 잘 알려졌다. 그리고 이것은 생활 필수품을 사는 권리 외에 유대인 사회에서 두루, 모든 권리와 온갖 종류의 특권을 잃는다는 것을 뜻했다.
164:4.7 (1814.3) 그래서 요시아의 부모, 가난하고 겁에 질린 사람들이 존엄한 산헤드린 앞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자유로이 말하기가 무서웠다. 법정 대변인이 말했다: “이 사람이 네 아들이냐? 그가 소경으로 태어났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데 맞느냐? 이것이 정말이면 어찌하여 이제 그가 볼 수 있느냐?” 그리고 나서 요시아의 아버지가 대답하였고 어머니도 찬성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이고 그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을 아오나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또는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하였는지 모르오이다. 그에게 물으소서. 그가 나이를 먹었으니 자신이 변호하게 하소서.”
164:4.8 (1814.4) 그들은 이제 요시아를 두 번째로 불러들였다. 정식 재판을 여는 계획을 순조로이 진행하지 못했고, 더러는 안식일에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하여 비로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따라서 요시아를 불렀을 때, 그들은 다른 공격 방법으로 그를 옭아매려고 시도했다. 법정의 관리는 예전에 눈이 멀었던 사람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너는 이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느냐? 너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진실을 전부 우리에게 이르지 않느냐?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우리 모두가 아노라. 어찌하여 너는 진실을 깨달으려 하지 않느냐? 너와 이 사람은 안식일 어기는 것 때문에 정죄받음을 네가 아느니라. 오늘 네가 눈을 떴다고 아직도 주장한다면, 하나님이 너를 고친 분이라고 인정함으로 네 죄를 대속(代贖)하지 않겠느냐?”
164:4.9 (1814.5) 그러나 요시아는 어리석지도 유머가 모자라지도 않았다. 그래서 법정 관리에게 대답했다: “이 사람이 죄인인지 나는 모르오이다. 그러나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내가 전에 눈이 멀었지만, 이제 나는 보오이다.” 요시아를 덫에 걸리게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에게 더 물어 보려고 애썼다: “도대체 어떻게 그가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그가 실제로 너에게 무슨 일을 하였느냐? 그가 무어라고 너에게 이르더냐? 그가 너에게 그를 믿으라고 요구하더냐?”
164:4.10 (1814.6) 요시아는 얼마큼 성급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모든 것이 일어났는지 그대로 나는 여러분에게 일렀는데 내 증언을 믿지 않았다면, 왜 다시 듣고자 하시오이까? 혹시 여러분도 그의 제자가 되고 싶사오이까?” 이렇게 요시아가 말하자, 산헤드린은 혼란 속에 거의 난폭하게 해산되었는데, 지도자들이 요시아 앞에 달려와서 성나서 소리쳤기 때문이다: “너는 이 사람의 제자인 것에 관하여 떠들어도 좋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이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신 줄 알지만, 이 사람 예수에 대해서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우리는 모르노라.”
164:4.11 (1814.7) 그러자 의자 위에 올라서서 요시아는 들을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널리 외쳤다: “들으소서, 온 이스라엘의 선생이라 주장하는 여러분, 내가 선언하오니, 여러분은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고백하면서, 그래도 여러분이 들은 증언으로부터 그가 내 눈을 뜨게 한 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아시오니, 여기에 큰 놀라운 일이 있소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그런 일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은 오직 참된 예배자―거룩하고 올바른 사람―의 요청을 받고서야 그런 일을 하리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아오이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세상이 비롯된 뒤로, 날 때부터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했다는 소리를 여러분이 들어본 적이 없소이다. 그러면 여러분 모두가 나를 보시고, 예루살렘에서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깨달으소서! 여러분께 말씀드리오니, 이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이 일을 할 수 없소이다.” 그리고 산헤드린 회원들은 진노하고 뒤죽박죽이 되어 떠나면서 그에게 소리질렀다: “너는 온전히 죄 속에 태어났는데, 이제 네가 주제넘게 우리를 가르치느냐? 어쩌면 너는 날 때부터 소경이 아니었는가 보다. 그리고 네 두 눈이 이 안식일에 뜨게 되었어도, 이것은 악마 왕의 힘으로 되었느니라.” 그들은 요시아를 추방하려고 당장에 회당으로 갔다.
164:4.12 (1815.1) 요시아는 예수와 치유의 성질에 대하여 어렴풋한 생각을 가지고 이 재판에 들어갔다. 온 이스라엘의 이 최고 법정 앞에서 그가 아주 영리하고 용감하게 말한 대담한 증언의 대부분은 재판이 그렇게 불공정하고 부당한 길로 진행됨에 따라서, 그의 머리 속에서 발전되었다.
164:5.1 (1815.2) 안식일을 어기는 이 산헤드린 회의가 성전의 한 방에서 진행되는 동안 내내, 예수는 가까이서 걷고 있다가 솔로몬의 회랑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산헤드린 앞으로 호출받고 거기서 좋은 소식, 곧 하나님의 나라에서 신의 아들이 되는 자유와 기쁨을 그들에게 일러줄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부르러 사람을 보내기가 두려웠다.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이처럼 갑자기 대중 앞에 나타날 때 그들은 언제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무척 열심히 찾던 바로 그 기회를 예수가 이제 주었지만, 산헤드린 앞에 증인으로도 그를 불러오기가 두려웠고, 체포하기는 더군다나 두려웠다.
164:5.2 (1815.3) 이때는 예루살렘에서 한겨울이었고, 사람들은 솔로몬의 회랑에서 반 피난처를 찾았다. 예수가 남아 있는 동안에, 군중은 그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고, 그는 두 시간이 넘도록 이들을 가르쳤다. 유대인 선생들 가운데 더러는 대중 앞에서 그에게 질문하여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은 우리를 궁금한 채로 두려 하나이까? 당신이 메시아라면, 어째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이르지 아니하나이까?” 예수는 말했다: “바로 나와 내 아버지에 대하여 여러 번 너희에게 일렀으나 너희는 나를 믿으려 하지 않는도다.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위하여 증언함을 깨달을 수 없느냐? 너희 중에 많은 사람이 나를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떼에 속하지 않는 까닭이라.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은 오직 진리를 간절히 찾고 올바름을 목마르게 찾는 자만 끌어당기느니라. 내 양은 내 목소리를 듣고,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나는 영생을 주노라. 저희는 결코 멸망하지 않고 아무도 저희를 내 손에서 잡아채지 못하리라. 이 아이들을 내게 주신 아버지는 모든 사람보다 크시고, 그래서 아무도 저희를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더러 예수에게 던질 돌을 주우려고 성전을 아직 짓고 있는 데로 달려나왔으나, 믿는 사람들이 막았다.
164:5.3 (1815.4) 예수는 가르침을 계속했다: “아버지로부터 나는 사랑의 일을 많이 너희에게 보여주었더니, 그래서 이 좋은 일 가운데 어느 것 때문에 너희가 나를 돌로 칠 생각을 하는가 이제 묻고자 하노라.” 그리고 나서 바리새인들 가운데 하나가 대답했다: “아무런 선한 일 때문이 아니라, 네가 사람이면서 감히 너 자신을 하나님과 같게 만드는 까닭에, 신성 모독으로 우리가 너를 돌로 치고자 하노라.” 그리고 예수는 대답했다: “하나님이 나를 보냈다고 내가 너희에게 선언할 때 너희가 나를 믿지 않으려 한 까닭에,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신성 모독으로 고발하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나를 믿지 말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 너희가 나를 믿지 않더라도, 너희는 그 일을 믿으리라 생각하노라. 그러나 내가 선포하는 것을 너희가 확신하도록 내가 다시 주장하노니, 아버지는 내 안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거하시는 것 같이, 이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 안에 나도 마찬가지로 거하리라.”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자, 그들 중 여럿이 그에게 던지려고 돌을 집으려고 달려 나왔으나 예수는 성전 구역을 통해서 나갔다. 산헤드린 회의에 참석했던 나다니엘과 토마스를 만나고서, 그들과 함께 요시아가 회의실로부터 나올 때까지 성전 가까이에서 기다렸다.
164:5.4 (1816.1) 예수와 두 사도는 요시아가 회당에서 추방되었다는 말을 듣기까지 집에 있는 요시아를 찾으러 가지 않았다. 그들이 이 집으로 왔을 때, 토마스는 뜰에서 그를 불러냈고 예수는 그에게 말했다: “요시아야, 너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느냐?” 요시아는 대답했다, “내가 그를 믿을 수 있도록 그가 누구인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고 예수는 말했다: “너는 그를 보았고 그의 말도 들었으며, 그는 이제 너에게 말하는 자이라.” 요시아가 말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그리고 엎드리며 요시아는 경배했다.
164:5.5 (1816.2) 요시아는 그가 회당에서 추방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에 크게 낙심했지만, 펠라의 캠프로 그들과 함께 가려고 즉시 준비해야 한다고 예수가 지시했을 때 크게 기운을 얻었다. 생각이 단순한 이 예루살렘 사람은 정말로 유대인 회당에서 추방되었지만, 그 시절과 세대의 영적 귀족들과 사귀도록 한 우주의 창조자가 그를 인도하는 것을 보라.
164:5.6 (1816.3) 이제 예수는 예루살렘을 떠났고, 이 세상을 떠나려고 준비할 때가 가깝기까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두 사도와 요시아와 함께, 주는 펠라로 돌아갔다. 요시아는 주가 베푸신 기적의 보살핌을 받고서 열매를 많이 맺게 된 한 사람인 것이 입증되었는데, 왜냐하면 그가 하늘나라 복음을 일생토록 전파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165:0.1 (1817.1) 세례자 요한은 나지르인이요 한때 엥게디에서 나지르인 학교의 우두머리였다. 아브너는 그의 열두 사도 중에서 예전에 우두머리였고, 지금은 하늘나라 사자 70인의 우두머리이다. 그는 서기 30년 1월 3일 화요일에 동료들을 불러 모으고, 페레아의 모든 도시와 마을로 선교 사명을 주어 보내기 전에 그들에게 마지막 지침을 주었다. 이 페레아 선교는 거의 석 달 동안 이어졌고 주의 마지막 사명이었다. 이 일을 하다가 예수는 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육체를 입고서 마지막 체험을 거쳤다. 70인은 예수와 열두 사도의 정기적 수고로 지원을 받으며, 다음 도시와 마을에서, 또 그 밖에 50여개 되는 다른 마을에서 일했다: 자폰ㆍ가다라ㆍ마캇ㆍ아르벨라ㆍ라마트ㆍ에드레이ㆍ보소라ㆍ카스핀ㆍ미스페ㆍ게라사ㆍ라가바ㆍ수콧ㆍ아마투스ㆍ아담ㆍ페누엘ㆍ카피톨리아ㆍ디온ㆍ하티타ㆍ가다ㆍ필라델피아ㆍ욕베하ㆍ길르앗ㆍ베드님라ㆍ티루스ㆍ엘레알라ㆍ리비아스ㆍ헤스본ㆍ칼릴호ㆍ베스포ㆍ시팀ㆍ시브마ㆍ메데바ㆍ베스메온ㆍ아레오폴리스ㆍ아로어.
165:0.2 (1817.2) 이 페레아 여행을 통해서 계속, 이제 62명이 되는 여인단은 병자 보살피는 일을 대부분 인계받았다. 이때는 하늘나라 복음에서 상급의 영적 모습이 발달하는 마지막 기간이었고, 따라서 기적을 행하는 일이 없었다. 팔레스타인의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예수의 사도와 제자들이 이렇게 철저히 일하지 않았고, 어느 다른 지역에서도 상류 시민 계급이 이렇게 널리 주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65:0.3 (1817.3) 유대인이 유다 마카비 시절에 대체로 이 지역에서 이주해 나갔으므로, 이 시절에 페레아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거의 똑같이 반반이었다. 페레아는 온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아름답고 그림 같은 지방이었다. 유대인은 여기를 일반적으로 “요단강 건너 땅”이라 언급하였다.
165:0.4 (1817.4) 이 기간 내내, 예수는 펠라의 캠프에서, 그리고 70인이 가르치고 전도했던 여러 도시에서 그들을 도우려고 열두 사도와 같이 여행하는 데 시간을 나누어 썼다. 예수가 그렇게 지시하지 않았지만, 아브너의 지휘 하에서 70인은 모든 신자에게 세례를 주었다.
165:1.1 (1817.5) 1월 중순이 되어, 1천 2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펠라에 모였다. 예수는 그 캠프에 거할 때 하루에 적어도 한 번 이 군중을 가르쳤고, 비가 내려 방해받지 않으면 보통 아침 9시에 말씀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날마다 오후에 가르쳤다. 예수는 열두 사도와 다른 상급 제자들과 함께, 질문하고 응답하는 보통 시간을 위하여 저녁때를 예정해 놓았다. 저녁 집단은 평균 50명쯤 되었다.
165:1.2 (1817.6) 3월 중순에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행을 시작했고, 이때가 되자 4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아침마다 예수나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큰 무리를 이루었다. 주는 그가 전하는 말씀에 대한 관심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땅에서 일을 마치기로 작정했고, 그 절정은 하늘나라의 진보에서 이 둘째 단계, 곧 기적이 없는 단계에서 가장 높이 도달한 정점이었다. 군중의 4분의 3은 진리를 찾는 사람이었으나, 의심하고 헐뜯는 많은 사람과 함께, 예루살렘과 다른 곳에서 온 큰 무리의 바리새인이 또한 자리에 있었다.
165:1.3 (1818.1) 예수와 열두 사도는 펠라 캠프에 모인 군중에게 시간을 많이 썼다. 열두 사도는 현장 작업에 거의 또는 아예 눈을 돌리지 않았고, 겨우 아브너의 동료들을 가끔 찾아보려고 예수와 함께 나갔을 뿐이다. 아브너는 페레아 구역에 아주 익숙했는데, 여기가 그의 옛 선생, 세례자 요한이 하던 일의 대부분을 했던 현장이었다. 페레아 선교가 시작된 뒤에, 아브너와 70인은 결코 펠라 캠프로 돌아오지 않았다.
165:2.1 (1818.2) 헌당 축제가 끝나고 유대인 권력자들의 관할 구역에서 예수가 서둘러 떠났을 때, 3백 명이 넘는 예루살렘 사람, 곧 바리새인과 다른 사람들의 일행이 북쪽으로, 펠라까지 예수를 따라갔다. 열두 사도가 듣는 가운데, 그리고 이러한 유대인 선생과 지도자들이 있는 앞에서, 예수는 “선한 목자”에 대하여 설교했다. 반시간 동안 비공식 토론이 있은 뒤에, 1백 명쯤 되는 무리에게 예수는 말했다:
165:2.2 (1818.3) “오늘밤에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도다. 너희 가운데 여럿이 내 제자요, 더러는 나를 몹시 미워하는 적인 까닭에, 너희 각자가 마음 속에 와 닿는 것을 스스로 가지도록 내가 비유로 가르치리라.
165:2.3 (1818.4) “오늘 밤 여기 내 앞에는, 나를 위하여, 그리고 이 하늘나라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죽을 사람들이 있고, 이들 가운데 더러는 다가오는 앞날에 그렇게 몸을 바치리라. 여기에 또한 너희 중에 더러, 전통의 노예가 있으니, 예루살렘에서부터 나를 따라와서 어둠과 거짓에 빠진 너희 지도자들과 함께 사람의 아들을 죽이려 하는도다. 육체를 입고 내가 지금 사는 인생은 너희 참된 목자와 거짓 목자들 모두를 판단하리라. 거짓 목자가 눈이 멀었으면 아무 죄가 없을 터이나 너희는 본다고 우기느니라. 너희는 이스라엘에서 선생이라고 고백하니, 그런즉 너희의 죄가 너희에게 남아 있느니라.
165:2.4 (1818.5) “참 목자는 위험할 때 양떼를 밤에 우리 안으로 모으느니라. 아침이 왔을 때 문으로 우리 속에 들어가며, 그가 부를 때 양들은 그 목소리를 알아듣느니라. 문이 아니라 다른 수단으로 양 우리에 들어가는 목자(牧者)는 모두 도둑이요 강도이라. 참 목자는 문지기가 문을 열어준 뒤에 우리로 들어가며, 양들이 그 목소리를 알아보므로 그의 말을 듣고 나오느니라. 그의 양들이 이렇게 나왔을 때, 참 목자는 양들 앞에 가며, 그는 길을 인도하고 양들은 따르느니라. 양들이 따르는 것은 그의 목소리를 아는 까닭이요 낯선 자를 따르지 아니하리라. 양들은 낯선 자를 피하여 달아나리니, 그의 목소리를 알지 못함이라. 여기 우리 주위에 모인 이 군중은 목자 없는 양 같으나, 우리가 저희에게 말할 때 저희는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우리 뒤를 따라오며, 적어도 진리를 간절히 찾고 올바름을 목마르게 찾는 자는 그렇게 하느니라. 너희 가운데 더러는 내 양떼에 속하지 않으니, 너희는 내 목소리를 알지 못하고 나를 따르지 않느니라. 너희가 거짓 목자이매, 양들이 너희 목소리를 알지 못하고 너희를 따르지 아니하리라.”
165:2.5 (1819.1) 예수가 이 비유를 마쳤을 때, 아무도 그에게 묻지 않았다. 얼마 시간이 지난 뒤에, 그는 다시 말씀을 시작하고 그 비유를 논하기 시작했다:
165:2.6 (1819.2) “내 아버지의 양떼에게 조수(助手) 목자가 되고자 하는 너희는 자격 있는 지도자이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좋은 먹이로 양떼를 먹여야 하느니라. 양떼를 푸른 풀밭으로, 고요한 물가로 이끌지 아니하면 너희는 참 목자가 아니라.
165:2.7 (1819.3) “이제, 너희 중에 더러 이 비유를 너무 쉽게 알아들을까 저어하여 내가 선언하리니, 나는 아버지의 우리까지 이끄는 문이요, 동시에 아버지의 양떼에게 참 목자이라. 내가 없이 우리로 들어가고자 하는 목자는 누구나 실패하겠고, 양들은 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리라. 나와 함께 봉사하는 자들과 더불어, 나는 문이라. 내가 만들고 예비한 방법으로 영원한 길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고 계속하여 파라다이스의 영원한 풀밭에 이를 수 있으리라.
165:2.8 (1819.4) “그러나 나는 또한 양들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까지도 버리는 참 목자이라. 도둑은 오로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우리로 침입하지만, 내가 온 것은 너희가 모두 생명을 얻고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고자 함이라. 삯꾼은 위험이 생길 때 달아나고 양들이 흩어져 죽게 버려두리라. 그러나 참 목자는 늑대가 올 때 달아나지 아니하리라. 참 목자는 제 양떼를 지키고, 필요하다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 친구와 적들에게 이르노니, 나는 참 목자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알며, 위험에 부닥쳐서 나는 달아나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이 봉사를 내가 마치겠고, 아버지가 내게 지키라고 맡긴 양떼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165:2.9 (1819.5)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많은 다른 양이 있나니, 이 말씀은 이 세상에서만 참인 것이 아니라. 이 다른 양들도 내 목소리를 듣고 알고, 저희가 모두 한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들의 한 형제 단체로 모이게 하리라고 나는 아버지께 약속하였노라. 그리고 나서 너희 모두가 한 목자, 참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모두가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인정할지니라.
165:2.10 (1819.6) “그래서 어찌하여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고 그의 양떼를 모두 이 땅에서 내 손에 지키라고 맡기셨는지 너희가 알지니라. 내가 양의 우리를 지키는 일을 그르치지 않고 내 양들을 버리지 않으며, 필요하다면 다양한 양떼에게 봉사하는 데 서슴지 않고 목숨 버릴 것을 아버지가 아시는 까닭이라. 그러나 잘 들으라, 내가 목숨을 버리면 다시 목숨을 찾으리라. 어떤 사람이나 어떤 다른 지음받은 존재도 내 목숨을 가져갈 수 없느니라. 나는 내 목숨을 버릴 권리와 능력이 있고 다시 찾을 능력과 권리가 있노라. 너희는 이것을 알 수 없어도, 이 세상이 있기도 전에 나는 아버지로부터 그런 권한을 받았느니라.”
165:2.11 (1819.7)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예수의 사도들은 헛갈리고 제자들은 놀랐으며, 한편 예루살렘과 그 근처에서 온 바리새인들은 밤에 나가서 말했다. “저 자는 미쳤든지 아니면 악마가 들렸구나.” 그러나 어떤 예루살렘 선생들조차 말했다: “저는 권한을 가진 사람처럼 말씀하시니라. 게다가 악마에 들린 자가 날 때부터 소경인 자의 눈을 뜨게 하고, 이 사람이 행한 모든 놀라운 일을 하는 것을 누가 언제라도 보았더냐?”
165:2.12 (1819.8) 이튿날 아침에 이 유대 선생들 가운데 반쯤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고, 나머지 반은 절망에 빠져 예루살렘과 집으로 돌아갔다.
165:3.1 (1819.9) 1월말이 되어서, 안식일 오후의 군중은 거의 3천 명을 헤아렸다. 1월 28일 토요일에, “신뢰와 영적 준비”에 대하여 예수는 기억에 남을 설교를 했다. 시몬 베드로가 서언을 마친 뒤에, 주는 말씀했다:
165:3.2 (1820.1) “여러 번 내 사도와 제자들에게 이른 것을 이제 이 군중에게 선언하노라.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할지니, 그 누룩은 위선이요 편견 속에 태어나고 전통의 사슬에 묶여 육성되었느니라. 하지만 이 바리새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마음이 정직하고, 저희 가운데 더러는 내 제자로서 여기에 머무르고 있느니라. 얼마 안 있어 너희 모두가 내 가르침을 알아들으리니, 드러내지 말라고 감춘 것이 이제 하나도 없는 까닭이라. 너희에게 이제 감추어진 것은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육체를 입은 사명을 마쳤을 때, 다 알게 되리라.
165:3.3 (1820.2) “우리의 적들이 이제 몰래 어둠 속에서 계획하는 것들이 곧, 금방, 빛 속에 드러나고 집 꼭대기에서 선포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친구들이여, 저희가 사람의 아들을 죽이려고 애쓸 때, 저희를 두려워 말라. 비록 몸을 죽일 수 있더라도 그 뒤에 너희에게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에게 타이르노니,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아무도 두려워 말고, 모든 불의(不義)로부터 너희를 구원하고 한 우주의 심판석 앞에 너를 티없이 내놓을 힘을 가진 그를 아는 것을 기뻐하라.
165:3.4 (1820.3) “참새 다섯 마리가 동전 두 잎에 팔리지 아니하느냐? 그래도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푸르르 날 때 그 새들 가운데 하나도 모든 생명의 근원인 아버지가 모르고서 존재하지 않느니라. 수호 천사들은 너희 머리의 바로 그 털도 다 세었느니라. 이 모두가 참말이면, 어찌하여 너희가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많은 하찮은 일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두려워 말라, 너희는 참새 여럿보다 훨씬 더 값이 있느니라.
165:3.5 (1820.4) “사람들 앞에서 내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할 용기를 가졌던 너희 모두를 머지 않아 내가 하늘의 천사들 앞에서 인정하리라.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내 가르침의 진리를 일부러 부인하는 자는 하늘의 천사들 앞에 서기도 전에, 운명의 천사들이 부인하리라.
165:3.6 (1820.5) “사람의 아들에 대하여 너희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용서받으리라. 그러나 하나님을 주제넘게 모독하는 자는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지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면서 악의 힘으로 돌리는 데까지 갈 때, 그렇게 고의로 모반하는 자는 도저히 죄의 용서를 얻지 못하리라.
165:3.7 (1820.6) “우리의 적들이 여러 회당장과 다른 높은 권력자들 앞에 너희를 끌고 올 때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 말고, 저희의 물음에 어찌 대답할까 걱정하지 말지니, 너희 안에 거하는 영이 하늘나라 복음의 명예를 위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바로 그 시각에 너희를 분명히 가르치리라.
165:3.8 (1820.7) “너희는 결심의 골짜기에서 얼마나 오래 머무르겠느냐? 너희는 어찌하여 두 의견 사이에서 멈추느냐? 어찌하여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그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좋은 소식을 망설이고 받아들이지 못하느냐? 우리가 너희의 영적 유산을 기쁘게 받아들이라고 너희를 설득하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리겠느냐? 아버지를 너희에게 드러내고 너희를 아버지께 인도하려고 내가 이 세상으로 왔노라. 처음 일은 내가 하였으나 다음 일은 너희의 찬성 없이 하면 안 되느니라. 아버지는 어떤 사람도 하늘나라로 들어가라 결코 강요하지 않느니라. 초청은 늘 이러했고 언제나 그러하리라: 누구든지 마시고 싶은 자는 와서 생명의 물을 아낌없이 마시라.”
165:3.9 (1820.8) 예수가 말씀을 마쳤을 때, 많은 사람이 요단강에서 사도들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나섰고, 그동안에 예수는 남아 있는 사람들의 질문에 귀를 기울였다.
165:4.1 (1821.1) 사도들이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동안에, 주는 남아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했다. 어떤 젊은이가 말했다: “주여, 내 아버지는 많은 재산을 나와 내 형제에게 남겨놓고 돌아가셨지만, 내 형제는 내 몫을 주려 하지 않나이다. 그러면 당신이 내 형제에게 이 유산(遺産)을 나와 함께 나누라고 명하시겠나이까?” 물질에 머리를 쓰는 이 젊은이가 그러한 사무에 관한 문제를 의논하려고 가져온 것을 주는 가볍게 분개했지만, 나아가서 연장된 가르침을 주려고 그 기회를 이용했다. 예수는 말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에게 분배하는 자로 삼았느냐? 이 세상의 물질적 일에 내가 관심을 가진다는 생각을 네가 어디서 얻었느냐?” 그리고 나서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말했다: “조심하여 너희는 탐욕에 매이지 말라. 사람의 생명은 소유물의 풍부함에 있지 않느니라. 행복은 재산의 힘에서 생기지 않고 기쁨은 부(富)에서 솟아나지 않느니라. 재산 자체는 저주가 아니나 재산을 사랑함은 흔히 이 세상의 물건에 그토록 마음을 쏟도록 이끌며, 그래서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적 실체의 아름다운 매력과 하늘에서 영생하는 기쁨을 혼이 깨닫지 못하게 되느니라.
165:4.2 (1821.2) “풍성하게 거두는 땅을 가진 어떤 부자(富者)의 이야기를 너희에게 일러주리라. 그가 대단히 부유하게 되고 나서, 비로소 스스로 따지며 말하였더라: ‘내가 모든 재산으로 무엇을 할꼬? 이제 나는 너무 많이 가져서 재산을 쌓아둘 곳이 없구나.’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나서, 그가 말하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창고들을 허물고 더 큰 것들을 지으리라. 그러면 나는 이렇게 내 과일과 물건을 쌓을 자리가 풍부히 있으리라. 그리고 나서 내 혼에게 말할 수 있노라, 혼이여, 너는 여러 해 동안 많은 재산을 쌓았구나. 이제 편안히 쉬라, 먹고 마시고 즐기라. 네가 부자요 물건이 많아졌음이라.’
165:4.3 (1821.3) “그러나 이 부자는 또한 어리석었으니, 그의 정신과 몸의 물질적 필요를 마련하면서, 영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지 못하였더라. 그리고 나서도 쌓아 놓은 재산을 소비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도록 정해졌으니, 바로 그날 밤에 그의 혼이 요구되었음이라. 그날 밤에 집에 강도들이 들어 그를 죽였고, 저희가 창고를 노략하고 나서 남은 것을 불태웠더라. 그리고 강도들이 놓친 재산을 놓고 상속자들끼리 싸움에 빠졌더라. 이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땅에서 보물을 쌓았어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부자가 아니었도다.”
165:4.4 (1821.4) 이렇게 예수는 그 젊은이, 그리고 상속 문제를 다루었는데, 예수는 그 젊은이의 문제가 탐욕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주는 간섭하지 않았을 터이니, 제자는커녕 사도들의 세상 문제에도 결코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65:4.5 (1821.5) 예수가 이 이야기를 마치자, 다른 사람이 일어서서 물었다: “주여, 제가 알기에, 당신의 사도들은 당신을 따르려고 이 세상의 재산을 모두 팔았고, 저희는 에센인처럼 모든 것을 공동(共同)으로 가지지만, 당신은 제자인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로 하기를 바라시나이까? 정직한 재산을 소유하는 것이 죄니이까?” 예수는 이 물음에 대답했다: “친구여, 정당하게 번 재산을 가지는 것은 죄가 아니라. 그러나 물질적으로 소유한 재산을 보물로 다루면 죄이니, 그것이 너희의 마음을 빼앗고 하늘나라의 영적 추구에 마음을 쏟지 못하도록 애정을 다른 데로 돌릴 수도 있느니라. 너희의 보물이 하늘에 있다면, 땅에서 정직한 재산을 가져도 아무 죄가 없으니, 아끼는 물건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을 것임이라. 사람을 탐욕과 이기심으로 이끄는 재산, 그리고 이 세상의 재물을 풍부히 소유하면서, 하늘나라 일에 온 정성을 바치는 자를 지원하는 데 아주 넉넉히 기부하는 자가 청지기 정신으로 지키고 처분하는 재산,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느니라. 너희 가운데 여기 돈 없이 지내는 많은 사람을 저 건너 텐트 도시에서 먹이고 잠을 재우나니, 이는 재산 있는 관대한 남녀들이 너희의 주인 다윗 세베대에게 그런 목적으로 자금을 주었기 때문이라.
165:4.6 (1822.1) “그러나 결국은 재산이 오래 가지 않음을 결코 잊지 말라. 부를 사랑하는 마음은 영적 눈을 흐리게 하고 멀게 만드는 일이 너무 흔하니라. 재산이 너희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되는 위험을 간과하지 말라.”
165:4.7 (1822.2) 예수는 낭비, 게으름, 사람의 가족에게 물리적 필수품을 마련하지 않는 무관심, 또는 자선금에 의존하기를 가르치거나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물질적인 현세의 일보다 혼의 복지와 하늘나라에서 영적 성품의 진보가 우선이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165:4.8 (1822.3) 그리고 나서 세례 주는 것을 구경하려고 사람들이 강가로 내려가는 동안에, 처음 사람이 예수가 그를 거칠게 다루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유산에 대하여 물으려고 예수에게 개인적으로 왔다. 다시 그의 말을 듣고 나서 주는 대답했다: “이 사람아, 너의 탐욕스러운 성향에 빠지려고 어찌하여 오늘 같은 날에 생명의 빵 먹을 기회를 놓치느냐? 너의 불평을 회당의 법정에 가서 호소하면 유대인의 상속법이 공정하게 시행될 것을 모르느냐? 내가 할 일은 너의 하늘 유산에 대하여 네가 꼭 알도록 하는 것과 상관 있음을 깨달을 수 없느냐? 너는 성서를 읽지 못하였느냐? ‘걱정하고 많이 아낌으로 부유하게 된 자가 있나니, 이것이 그가 보상받는 몫이라: 내가 휴식을 찾았고 이제 내 물건을 계속 먹을 수 있으리라 하고 말하되, 그래도 그는 시간이 지나면 무슨 일이 닥칠지, 또한 그가 죽을 때 이 모든 것을 남에게 두고 가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하더라.’ 너는 계명을 읽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탐내지 말라.’ 또 ‘저희가 먹고 배를 채우고 살이 쪘으며, 그리고 나서 저희가 다른 신들에게로 돌이켰더라.’ 시편(詩篇)에서 ‘주는 탐욕 있는 자를 싫어하시니라,’ 그리고 ‘올바른 사람이 조금 가진 것이 허다한 악한 자의 재산보다 나으니라’하는 것을 너는 읽지 아니하였느냐? ‘재산이 늘어나면, 거기에 너희 마음을 돌리지 말라.’ ‘부자는 제 재산을 자랑하지 말지니라’ 예레미야가 말한 곳을 읽었느냐? 그리고 ‘입으로 저희는 사랑을 표시해도, 마음은 자신의 이익에 가 있느니라’ 했을 때 에스겔은 진실을 말하였도다.”
165:4.9 (1822.4) 예수는 그 젊은이를 떠나보내면서 말했다: “이 사람아, 네가 온 세상을 얻고 바로 너의 혼을 잃으면 너에게 무슨 소득이 되겠느냐?”
165:4.10 (1822.5) 가까이 서 있던 다른 사람이 부자들이 심판의 날에 어떻게 견딜까 묻자, 예수는 대답했다: “나는 부자나 가난한 자를 재판하러 오지 않았으나 사람들이 사는 그 인생이 모든 것을 판결하리라. 심판할 때 다른 무슨 일이 부자들과 상관되든지, 큰 재산을 얻는 사람은 모두, 적어도 세 가지 물음에 대답하여야 하나니, 이러하니라:
165:4.11 (1822.6) “1. 얼마나 많은 재산을 쌓았느냐?
165:4.14 (1822.9) 그리고 나서 예수는 저녁 식사 전에 한동안 쉬려고 자기 텐트로 들어갔다. 사도들이 세례 주기를 마쳤을 때 그들도 왔고, 땅에 있는 재산과 하늘에 있는 보물에 관하여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예수는 잠들어 있었다.
165:5.1 (1823.1) 그날 저녁 식사 뒤에, 예수와 열두 사도가 날마다 있는 회의를 하려고 모였을 때 안드레가 물었다: “주여, 우리가 신자들에게 세례 주는 동안에, 남아 있는 군중에게 여러 말씀을 하셨고 우리는 듣지 못했나이다.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같은 말씀을 기꺼이 되풀이하시겠나이까?” 안드레의 요청에 따라 예수는 말했다:
165:5.2 (1823.2) “그래, 안드레야, 재산, 그리고 자신을 부양하는 이 문제에 관하여 너희에게 이르겠으나 너희 사도들에게 이르는 말은 제자들과 군중에게 주는 말과 얼마큼 달라야 하니, 나를 따르는 것 뿐 아니라, 하늘나라 대사로 세움받으려고 너희가 모든 것을 버렸음이라. 이미 너희는 몇 년의 체험을 가졌고, 아버지가 너희를 버리지 않을 것을 알며, 너희는 그의 나라를 선포하느니라. 너희는 하늘나라에 봉사하는 데 인생을 바쳤느니라. 그러므로 현세에 생활에 쓰이는 물건에 대하여 무엇을 먹을까, 너희 몸을 위해서도 무엇을 입을까 안달하거나 걱정하지 말라. 혼의 복지는 먹고 마시는 것보다 더 귀중하며, 영적 진보는 걸치는 것의 필요보다 훨씬 중요하니라. 너희의 먹을 것이 확실히 있는가 의심이 들 때, 까마귀를 생각하라. 까마귀는 씨 뿌리지도 거두지도 않고 창고나 헛간도 없거늘, 그래도 먹이를 구하는 까마귀마다 아버지가 먹이를 마련해 주시느니라. 너희는 허다한 새보다 얼마나 더 귀중한고! 게다가, 너희가 아무리 걱정하거나 근심해도 물질적 필요를 채우는 데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느니라.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키를 한 뼘이라도 더하거나 너희 목숨을 하루 연장할 수 있느냐? 그러한 문제들은 너희 손에 달려 있지 않거늘, 어찌하여 너희가 이런 문제들을 하나라도 걱정하느냐?
165:5.3 (1823.3) “백합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라. 백합은 수고하지 않고 실을 잣지도 않느니라. 그래도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든 영화(榮華)를 누리던 솔로몬조차 이 꽃들 가운데 하나처럼 입지 못하였도다. 오늘 살아 있어도 내일 꺾여 불 속에 던져질 들풀을 하나님이 그렇게 입히시거든, 하늘나라 대사(大使)인 너희를 얼마나 더욱 잘 입히시겠느냐. 아, 너희는 믿음이 적구나! 마음을 다하여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는 데 너희 몸을 바칠 때, 자신이나 너희가 버린 가족들을 어찌 먹여 살릴 수 있는가 의심하는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되느니라. 너희가 참으로 복음에 일생을 바치면, 너희는 복음에 따라 살지니라. 너희가 기껏해야 믿는 제자라면 너희는 자신의 먹을 것을 벌어야 하며, 또한 가르치고 전도하고 병 고치는 모든 사람을 부양하는 데 기여해야 하느니라. 먹을 것과 마실 것이 걱정이 되면, 너희는 그러한 필수품을 아주 부지런히 찾는 세상의 나라들과 어디가 다른지고? 이 모든 것이 필요한 줄을 아버지와 내가 아는 것을 믿으면서, 너희 일에 마음을 쏟으라. 이번을 마지막으로 내가 분명히 말하노니, 너희가 하늘나라 일에 일생을 바치면, 너희의 참 필요가 다 채워지리라. 더 큰 것을 구하라. 그리하면 그보다 작은 것들이 그 속에 있음을 발견하리라. 하늘의 것을 구하라. 그러면 땅의 것이 그 안에 들어 있으리라. 그림자는 분명히 알맹이를 따르느니라.
165:5.4 (1823.4) “너희는 작은 무리일 뿐이나, 믿음을 가지고, 두려움에 빠져 실수하지 않으면, 내가 선언하노니, 너희에게 이 하늘나라를 주는 것이 내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이라. 너희는 돈 주머니가 낡아지지 않는 곳, 아무 도둑이 들 수 없는 곳, 아무 좀이 먹을 수 없는 곳에 너희의 보물을 쌓았느니라. 내가 사람들에게 이른 것 같이,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으리라.
165:5.5 (1824.1) “그러나 너희 바로 앞에 놓인 일,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로 간 뒤에 너희에게 남겨준 일을 하면서, 너희는 뼈아프게 시련을 받으리라. 너희는 다 두려움과 의심을 경계해야 하느니라. 너희 하나하나가, 단단히 정신을 차리고 등불을 계속 밝히라. 너희는 결혼 잔치로부터 주인이 돌아오기를 지키는 사람들처럼 지키라. 그리하여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릴 때, 그에게 빨리 문을 열어줄 수 있으리라. 정신 차리고 지키는 그러한 종들이 그렇게 중대한 순간에 충성스러운 것을 알고 주인이 저희를 축복하느니라. 그리고 나서 주인은 저희를 앉게 하면서, 바로 주인이 종들에게 시중들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일생의 위기가 바로 눈앞에 닥쳤고, 경계하고 준비하는 것이 너희에게 마땅하니라.
165:5.6 (1824.2)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지 안다면 아무도 누가 제 집에 침입하도록 버려두지 않을 것을 너희가 잘 아느니라. 너희는 또한 자신을 위하여 지키라. 너희가 가장 의심하지 않는 시간에, 생각지 않는 방법으로 사람의 아들이 떠날 것임이라.”
165:5.7 (1824.3) 몇분 동안 열두 사도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 경고 가운데 더러는 전에 들은 적이 있지만, 이때 그들에게 닥친 배경에서 듣지는 않았다.
165:6.1 (1824.4) 그들이 앉아서 생각에 잠긴 동안, 시몬 베드로가 물었다: “당신은 이 비유를 우리에게, 당신의 사도들에게 하시나이까? 아니면 모든 제자를 위한 것이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165:6.2 (1824.5) “시험이 있을 때, 사람의 혼이 드러나느니라. 시련은 정말로 가슴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느니라. 종이 시험받고 충실함이 입증되었을 때, 집 주인은 그러한 종으로 하여금 집을 감독하라 세우고, 이 충실한 집사가 그의 자녀들을 먹이고 양육하도록 일을 처리할 것을 안심하고 믿느니라. 마찬가지로,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갔을 때 누구에게 내 아이들의 복지를 맡길 수 있는가 내가 곧 알게 되리라. 집의 주인이 참되고 단련받은 종으로 하여금 집안 사무를 감독하게 하는 것 같이, 나도 내 나라의 일을 집행하면서 이 시대의 시련을 견디는 자를 높이 세우리라.
165:6.3 (1824.6) “그러나 종이 게으르고, 마음 속에서 ‘내 주가 오는 것이 지연되는구나’ 비로소 말하고, 동료 종들을 잘못 다루고 술 취한 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 시작하면, 종이 그 주인을 기대하지 않는 시간에 주인이 와서 그가 충실하지 않음을 보고, 부끄럽게 내쫓으리라. 그런즉 갑자기, 뜻하지 않은 방법으로 방문할 그날을 위하여 너희가 준비하는 것이 좋으니라. 너희에게 많은 것을 주었음을 기억하라. 그런즉 너희에게 많은 것이 요구되리라. 불 같은 시련이 너희에게 가까이 다가오느니라.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고, 이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경계하노라. 너희는 땅에서 평화를 외쳐도 나의 사명은 사람의 물질적인 일에―적어도 한동안―평화를 가져오지 아니하리라. 한 집안에서 두 사람이 나를 믿고 세 사람이 이 복음을 저버리는 곳에 오직 분열이 생길 뿐이라. 친구와 친척과 사랑하는 자들이 너희가 외치는 복음 때문에 서로 대적할 운명을 가졌느니라. 이 신자들 하나하나가 마음 속에 크고 오래 가는 평화를 가질 것이 참말이기는 하여도, 모두가 기꺼이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영화로운 유산을 받을 때까지 땅에서 평화는 오지 아니하리라. 그래도 온 세상으로 가서, 모든 민족에게, 어른과 아이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라.”
165:6.4 (1824.7) 이것이 충만하고 바쁜 안식일의 끝이었다. 이튿날 아침, 예수와 열두 사도는 70인을 찾아보려고 북부 페레아의 여러 도시로 들어갔는데, 이들은 아브너의 감독 밑에서 이 지역에서 일하고 있었다.
166:0.1 (1825.1) 2월 11일부터 20일까지, 예수와 열두 사도는 북 페레아 지방의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둘러보았는데, 거기에는 아브너의 동료와 여인단의 단원들이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복음 사자들이 잘 해나가는 것을 발견했고, 예수는 기적과 이적이 따르지 않고 하늘나라의 복음이 퍼질 수 있다는 사실에 거듭 사도들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166:0.2 (1825.2) 페레아에서 석 달 동안의 이 전도 사업 전체가 열두 사도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진행되었고, 이때부터 계속하여, 복음은 예수의 인격보다 그의 가르침을 반영하였다. 그러나 추종자들은 그의 지침을 오래 따르지 않았는데, 예수가 죽고 다시 살아나신 뒤에 곧 그의 가르침에서 벗어났고, 예수의 신이자 사람의 인격이 베푼 기적의 개념과 영화로운 기억을 중심으로 초대(初代)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66:1.1 (1825.3) 2월 18일 토요일에 예수는 라가바에 있었고, 거기에는 나다니엘이라는 부유한 바리새인이 살았다. 전국에서 상당히 많은 동료 바리새인들이 예수와 열두 사도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안식일 아침에 그들 모두, 약 20명을 위하여 아침 식사를 차렸고 예수를 귀빈으로 초청했다.
166:1.2 (1825.4) 예수가 이 아침 식사에 도착할 때가 되자, 두세 율법사와 함께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이미 거기 있었고 식탁에 앉았다. 주는 손을 씻으러 물 대야에 가지 않고, 즉시 나다니엘의 왼쪽에, 자리에 앉았다. 많은 바리새인, 특히 예수의 가르침을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가 오직 깨끗이 할 목적으로 손을 씻으며, 순전히 예식인 이 행위를 몹시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손을 두 번 씻지 않고 그가 식탁으로 바로 온 것에 그들은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나다니엘은 바리새인 관습의 엄격한 요건을 주가 따르지 않은 것에 충격을 받았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이 하는 것처럼, 음식의 각 과정 뒤에나 식사가 끝난 뒤에도, 손을 씻지 않았다.
166:1.3 (1825.5) 나다니엘과 그의 바른 쪽에 어느 쌀쌀한 바리새인 사이에 상당히 수군거림이 있은 뒤, 그리고 주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이 여러 번 눈썹을 치켜올리고 비웃는 입을 삐죽거리고 난 뒤에, 예수는 마침내 말했다: “너희와 함께 빵을 나누고 아마도 하나님 나라의 새 복음을 선포하는 것에 관하여 물으려고 너희가 나를 이 집으로 초대했다고 생각하였노라. 그러나 너희가 독선적으로 예식을 충실히 지킴을 보이는 것을 구경하라고 나를 여기에 불렀음을 내가 깨닫노라. 너희가 이제 나에게 그 수고 베풀기를 마쳤으니, 다음으로 이 기회에 너희의 손님인 나에게 무엇으로 경의를 표하려느냐?”
166:1.4 (1826.1) 주가 이렇게 말씀을 마치자, 그들은 식탁을 내려다보며 말없이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는 말씀을 이었다: “너희 바리새인의 다수가 친구로서 나와 함께 여기 있고 더러는 내 제자이기도 하나, 바리새인의 대다수는 복음의 일이 막강하게 눈앞에 닥쳤어도 빛을 보고 진리를 인정하기를 끈덕지게 거절하는도다. 영적 음식 그릇이 지저분하고 더럽거늘, 얼마나 면밀하게 너희는 컵과 접시의 겉을 씻느냐! 너희는 경건하고 거룩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어김없이 보이지만, 마음 속의 혼은 독선과 탐욕과 착취, 그리고 온갖 모양의 영적 사악함이 가득하니라. 너희의 지도자들은 감히 사람의 아들을 죽이려고 모의(謀議)하고 계획까지 하느니라. 너희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겉치레 허식과 경건한 고백 뿐 아니라, 혼 속에 동기를 보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자선금을 내고 십일조 내는 것이 너희의 불의를 씻어주고 모든 사람의 재판관이 계신 앞에 너희가 깨끗이 설 수 있게 하리라 생각지 말라. 생명의 빛을 끈질기게 물리친 너희 바리새인은 아 ― 한탄이 있을진저! 꼼꼼히 십일조를 내고 보아란 듯 자선해도, 너희는 알면서 하나님의 벌을 비웃고 사랑의 계시를 저버리느니라. 너희가 이 하찮은 의무에 마음 쓰는 것은 괜찮아도, 더 중대한 이 요구 조건을 행하지 않은 채로 버려두지 않았어야 하느니라. 정의를 피하고, 자비를 가벼이 여기고, 진리를 저버리는 모든 사람은 아 ― 한탄이 있을진저! 아버지의 계시를 깔보면서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찾고 시장에서 아첨하는 인사를 몹시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166:1.5 (1826.2) 예수가 떠나려고 일어서려 했을 때, 식탁에 앉았던 율법사들 가운데 하나가 예수에게 말했다: “그러나 주여, 당신의 말씀 가운데 더러는 우리도 꾸짖나이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이나 율법사에게 좋은 것이 하나도 없나이까?” 예수는 서서 그 율법사에게 대답했다: “너희는 바리새인과 같이 무거운 짐, 지기에 괴로운 짐을 사람들의 어깨에 지우면서, 잔치에서 상석(上席)에 앉는 것과 긴 옷 입기를 즐기느니라. 사람들의 혼이 이 무거운 짐 밑에서 비틀거릴 때, 너희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 하지 않느니라. 조상(祖上)이 죽인 선지자들을 위하여 무덤 짓기를 크게 기뻐하는 너희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그리고 선지자들이 저희 시절에 한 일―하나님의 올바름을 선포하고 하늘 아버지의 자비로움을 드러내는 일―을 오늘날에 와서 하는 자들을 이제 너희가 죽이려 계획할 때, 조상이 한 일에 너희가 찬성함을 분명히 나타내느니라. 그러나 지난 모든 세대 가운데서, 선지자와 사도들이 흘린 피를 비뚤어지고 독선적인 이 세대에게 요구하리라. 서민들로부터 지식의 열쇠를 빼앗은 너희 율법사 모두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바로 너희가 진리의 길로 들어가기 싫어하면서, 동시에 너희는 거기로 들어가고자 하는 모든 다른 사람을 방해하고자 하는도다. 그러나 너희는 이렇게 하늘나라의 문을 닫을 수 없느니라. 들어갈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우리는 이 문을 열었고, 거짓 선생과 참되지 않은 목자의 편견과 거만이 이 자비의 입구를 닫지 못하리니, 저희는 흰 칠한 무덤 같아서, 겉으로 아름답게 보여도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모양의 영적 더러움이 가득하니라.”
166:1.6 (1826.3) 나다니엘의 식탁에서 말씀을 마쳤을 때, 예수는 음식을 들지 않고 집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 가운데 더러는 그의 가르침을 믿고 하늘나라에 가입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이 어둠의 길에서 버티었고, 예루살렘에서 산헤드린 앞에 그를 재판하고 판결하는 데 쓰일 수 있는 말씀을 얼마큼 주울까 하여, 그를 두고 보려고 더욱 굳게 마음먹었다.
166:1.7 (1827.1) 바리새인들이 각별히 주의한 것이 꼭 세 가지가 있었다:
166:1.8 (1827.2) 1. 엄격히 십일조를 바치는 관습.
166:1.11 (1827.5) 이때 예수는 처음 두 관습이 영적으로 무익함을 밝히려고 애썼고, 한편 바리새인이 바리새인 아닌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교제하지 않으려 하는 태도를 꾸짖으려고 고안된 논평을 나중에 바로 이 사람들 중 여럿과 다시 정찬(正餐)을 드는 또 다른 기회를 위하여 남겨 두었다.
166:2.1 (1827.6) 이튿날 예수는 열두 사도와 사마리아의 경계 가까이 아마투스로 갔는데, 그 도시에 가까이 가자 이 근처에 머무르던 문둥병자 열 명의 무리와 마주쳤다. 이 무리 가운데 아홉은 유대인이요 하나는 사마리아인이었다. 대체로 이 유대인들은 이 사마리아인과 어떤 관계나 접촉도 삼갔을 터이지만, 같은 병을 앓는 것은 모든 종교적 편견을 극복하기에 넉넉하고도 남았다. 그들은 예수와 그가 전에 병을 고친 기적에 대하여 익히 들어 왔고, 이 여행에 열두 사도와 함께 주가 나들이할 때 예수가 도착하기로 예정된 시간을 70인이 발표하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에, 문둥병자 열 명은 이 무렵에 예수가 이 근처에서 나타날 것이라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곳, 도시의 교외에서 지키고 있었고, 거기서 예수의 눈을 끌고 고쳐달라고 부탁할 희망을 품었다. 예수가 그들 가까이 오는 것을 보았을 때, 문둥병자들은 감히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서서 그에게 소리쳤다: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보이소서, 우리의 병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고친 것 같이 우리를 고쳐주소서.”
166:2.2 (1827.7) 예수는 어째서 페레아의 이방인, 그리고 정통성이 떨어지는 유대인이 정통성이 높고 전통에 묶여 있는, 유대 지방의 유대인보다 70인이 전파한 복음을 더 기꺼이 믿으려 하는가 열두 사도에게 방금 설명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갈릴리 사람이, 그리고 사마리아인조차, 그들이 전한 말씀을 더욱 쉽사리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예수는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열두 사도는 오랫동안 업신여기던 사마리아인에 대하여 아직도 좀처럼 친근한 느낌을 기꺼이 품지 않았다.
166:2.3 (1827.8) 따라서, 열심당원 시몬이 문둥병자들 가운데서 사마리아인을 지켜보았을 때, 그는 이들에게 인사하려고 멈추지도 말고 지나쳐서 도시로 들어가도록 주를 유인하려고 애썼다. 예수가 시몬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 사마리아인이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면 어찌하겠느냐? 동료 인간을 우리가 판단해야 하느냐? 누가 알 수 있느냐? 우리가 이 열 사람을 온전히 만들면, 아마도 그 사마리아인이 유대인들보다 더욱 고마워하는 것이 드러나리라. 시몬아, 네 의견이 확실하다고 느끼느냐?” 시몬은 재빨리 대답했다: “당신이 저희를 깨끗케 하시면, 곧 알게 되리이다.” 그리고 예수는 대답했다: “그렇게 될지어다 시몬아, 그리하면 네가 사람들의 고마워하는 태도와 하나님이 사랑으로 베푸는 자비에 관하여 진실을 곧 알게 되리라.”
166:2.4 (1827.9) 문둥병자들에게 가까이 가면서 예수가 말했다: “너희가 온전히 되고 싶으면, 당장에 가서 모세의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가는 동안에 그들은 온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기가 치유되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사마리아인은 몸을 돌이켜 예수를 찾으러 가면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시작했다. 주를 찾아냈을 때, 그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서 그를 깨끗하게 해준 것에 감사를 드렸다. 다른 아홉 유대인도 그들이 치유되었음을 깨달았고, 그들이 깨끗하게 된 것을 고맙게 여겼어도, 사제들에게 몸을 보이려고 계속하여 길을 갔다.
166:2.5 (1828.1) 사마리아인이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린 채로 있으므로, 주는 열두 사도를 돌아보고, 특히 열심당원 시몬을 보고 말했다: “열 명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면 다른 아홉, 유대인들은 어디 있느냐? 오직 한 사람, 이 외국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돌아왔느니라.” 그리고 나서 그 사마리아인에게 말했다. “일어나서 네 길을 가라. 너의 믿음이 너를 온전히 만들었느니라.”
166:2.6 (1828.2) 낯선 사람이 떠나자 예수는 다시 사도들을 바라보았다. 눈을 땅에 떨군 열심당원 시몬 외에, 사도들은 모두 예수를 바라보았다. 열두 사람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예수도 말이 없었고, 그럴 필요가 없었다.
166:2.7 (1828.3) 비록 이 열 사람 모두가 그들이 문둥병이 있다고 정말로 믿었어도, 오직 네 사람이 그런 병을 앓았다. 나머지 여섯은 문둥병으로 잘못 생각했던 피부병을 치료받았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정말로 문둥병이 있었다.
166:2.8 (1828.4) 예수는 열두 사도에게 문둥병자들을 깨끗이 고친 것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명했고, 그들이 계속 아마투스로 들어가는 동안에 논평했다: “주인집의 아이들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지 않을 때에도, 어찌하여 저희가 받는 축복을 당연하게 여기는가 너희가 보는도다. 아버지가 저희의 병을 고쳐줄 때, 저희는 감사드리기를 게을리하는 것을 하찮게 여기느니라. 그러나 낯선 자들은 집주인한테서 선물을 받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저희에게 준 좋은 것들을 알아보고 감사드릴 수밖에 없느니라.” 아직도 사도들은 주의 말씀에 대꾸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66:3.1 (1828.5) 예수와 열두 사람이 게라사에서 하늘나라 사자들과 이야기하는 동안에, 믿는 바리새인들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물었다: “주여, 적은 사람이, 아니면 많은 사람이 정말로 구원을 받으리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166:3.2 (1828.6) “너희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이 구원받으리라, 오직 입양된 이방인이 구원을 얻을 희망이 있다고 가르침을 받았느니라. 에집트를 떠난 모든 무리 가운데서 오직 갈렙과 요수아가 약속된 땅으로 살아서 들어갔다고 성서가 기록하므로, 너희 중에 더러는, 하늘나라를 추구하는 자 가운데 비교적 적은 수만 거기로 들어가는 문을 찾으리라 추리하였느니라.
166:3.3 (1828.7) “또한 너희 사이에 다른 속담이 있으니, 이것은 많은 진실을 담고 있느니라: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은 곧고 좁으며 거기로 인도하는 문은 마찬가지로 좁아서, 구원을 찾는 자 가운데 거의 아무도 이 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없도다. 너희는 또한,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고 거기로 들어가는 문은 너르며, 이 길을 가기를 택하는 사람이 많다 하는 가르침이 있느니라. 이 속담은 의미가 없지 않느니라. 그러나 내가 선언하노니, 구원은 먼저 너희 개인이 선택하는 문제이라. 생명의 길로 이끄는 문이 좁더라도, 들어가기를 진심으로 구하는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기에 넉넉히 넓으니, 내가 그 문임이라. 아들을 통해서 믿음으로 아버지를 찾고자 애쓰는 아이, 우주의 어떤 아이가 들어오는 것도 아들은 결코 막지 아니하리라.
166:3.4 (1829.1) “그러나 미숙하여 쾌락을 계속 추구하고 이기적 만족에 빠지면서 하늘나라로 들어가기를 미루려고 하는 모든 사람에게 여기에 위험이 있느니라: 영적 체험인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거절하였으므로, 다가올 시대에 더 좋은 길의 영화로움이 드러나게 될 때, 저희는 나중에 하늘나라로 들어가려고 애쓸 수도 있느니라. 그런즉 들어가는 문이 신성한 모습으로 드러났을 때, 인간의 모습을 입고 내가 왔을 때 하늘나라를 비웃던 자가 그리로 들어가기를 구하면, 그때 그러한 이기적인 모든 사람에게 내가 이르리라: 나는 너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노라. 이 하늘 시민권을 얻으려고 준비할 기회가 있었으나 너희는 모든 그러한 자비로운 제안을 물리쳤고, 문이 열린 동안에 오라는 초청을 다 물리쳤느니라. 구원을 거절한 너희에게 이제 문이 닫혔도다. 이기적 영광을 얻으려고 하늘나라로 들어가고자 하는 자에게 이 문은 열려 있지 않느니라. 구원은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값을 기꺼이 치르지 않는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마음 속 깊이, 너희가 아버지의 나라에 등을 돌렸을 때, ‘주여, 우리에게 문을 여소서, 우리도 하늘나라에서 크게 되고자 하나이다’하며 이 문 앞에 서서 두드리는 것은 지성과 몸에 소용이 없느니라. 그러면 내가 선언하리니, 너희는 내 양떼에 속하지 않느니라. 훌륭한 믿음으로 싸우고 땅에 있는 하늘나라에서 사심(私心) 없이 봉사한 값으로 상을 얻은 자 사이에 끼라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당신과 어울려 먹고 마시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리고 당신은 우리의 거리에서 가르치지 아니하였나이까?’하고 너희가 말할 때, 나는 다시 선언하리니, 영적으로 너희는 낯선 자이라, 우리는 땅에서 아버지의 자비를 베푸는 일에 함께 일하던 종이 아니었도다, 나는 너희를 모르노라. 그리고 온 땅의 재판관이 너희에게 이르리라: ‘불의의 일을 기뻐한 너희는 모두 우리를 떠나라.’
166:3.5 (1829.2) “그러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으로 영생(永生)을 찾으려고 성실하게 바라는 자는 누구나 분명히 그런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나 이 구원을 물리치는 너희는 아브라함 자손의 선지자들이, 영화롭게 된 이 나라에서 생명의 빵을 먹고 거기 있는 물로 원기를 찾으려고 이방 나라의 신자들과 함께 앉아 있는 것을 언젠가 보리라. 이처럼 영적 권능으로, 그리고 생생한 신앙으로 집요하게 공격하여 하늘나라를 차지할 자는 남에서 북에서, 동에서 서에서 오리라. 그리고 보라, 첫째인 많은 사람이 마지막이 되겠고, 마지막인 자가 여러 번 첫째가 되리라.”
166:3.6 (1829.3) 이것은 오래 되고 귀에 익은, 곧고 좁은 길의 속담을 정말로 이상하게 새로 해석한 말씀이었다.
166:3.7 (1829.4) 사도들과 많은 제자가 예수가 초기에 선언하신 말씀의 뜻을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너희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영에게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런데도 마음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이것이 영원히 참말이다: “보라, 사람들의 마음 문 앞에 서서 내가 두드리니,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서 저녁을 같이 들고 그에게 생명의 빵을 먹이리라. 우리는 한 가지 정신과 목적을 가지겠고, 마찬가지로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찾는, 길고도 열매가 풍성한 봉사를 하면서 늘 형제가 되리라.” 그래서 적은 사람이 구원받는가 또는 많은 사람이 구원받는가 하는 것은 이 초청을 적은 사람이, 또는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가에 온전히 달려 있다: “나는 문이요 새로운, 생명의 길이니 누구든지 바라는 자는 영생을 찾아서 끝없이 진리 탐구하는 일을 시작해도 좋으니라.”
166:3.8 (1829.5) 정신적으로, 전적으로 중요한, 새 생명의 영적 가치를 붙잡는 길에 어쩌다 가로막는 지상의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하여 영적 힘을 써야 하며, 모든 물질적 저항을 헤치고 나아갈 목적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해방된 아들로서, 이렇게 영적 힘을 쓰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의 가르침을 사도들조차 충분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166:4.1 (1830.1)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사람이 하루에 두 끼만 먹었지만, 여행할 때 쉬고 기운을 차리려고 한낮에 멈추는 것이 예수와 사도들의 버릇이었다. 필라델피아로 가는 길에 그렇게 정오에 멈추었을 때, 토마스가 예수에게 물었다: “주여, 오늘 아침에 우리가 여행하는 동안에 당신이 하신 말씀을 듣고서, 나는 영적 존재들이 물질 세계에서 이상하고 특별한 사건을 일으키는 데 관여하는가 묻고, 더 나아가서 천사와 다른 영 존재들이 사고(事故)를 막을 수 있는지 묻고 싶사옵나이다.”
166:4.2 (1830.2) 토마스의 물음에 답하여 예수는 말했다: “내가 너와 함께 무척 오래 있었거늘 그래도 나에게 그런 질문을 계속하느냐? 사람의 아들이 어떻게 너희와 하나가 되어 사는가, 몸소 먹을 것을 얻으려고 하늘 세력을 이용하기를 한결같이 물리치는 것을 너희는 지켜보지 못하였느냐? 모든 사람이 존재하는 바로 그 수단으로 우리 모두가 살지 않느냐? 아버지를 계시하는 것과 병든 자녀들을 언젠가 고친 것을 제쳐놓고, 너희는 이 세상의 물질 생활에서 영적 세계의 힘이 나타난 것을 보느냐?
166:4.3 (1830.3) “번영은 신이 인정하는 표시요 역경은 하나님이 언짢아하심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너무 오랫동안 너희 조상들이 믿어 왔느니라. 내가 선언하노니, 그러한 관념은 미신이라. 훨씬 많은 가난한 자들이 기쁘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즉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너희가 지켜보지 아니하느냐? 재산이 신의 은혜를 증거한다면, 어찌하여 부자(富者)들이 여러 번 하늘로부터 온 이 좋은 소식을 믿고자 하지 않느냐?
166:4.4 (1830.4) “아버지는 의로운 자와 의롭지 못한 자에게 비를 내리시며, 마찬가지로 햇빛은 올바른 자와 올바르지 못한 자에게 비치느니라. 너희는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과 섞은 일에 관하여 알지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바로 이런 일이 저희에게 일어났다고 하여, 이 갈릴리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도 저희의 모든 동료보다 더한 죄인이 아니었도다. 너희는 또한 실로암의 탑이 무너져 열여덟 사람을 죽인 것에 관하여 아느니라. 이렇게 죽음을 당한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형제보다 더한 범죄자라 생각지 말라. 이 사람들은 다만 우연히 일어난 사고(事故)에 죄 없이 희생되었느니라.
166:4.5 (1830.5) “너희의 생활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세 종류의 사건들이 있느니라:
166:4.6 (1830.6) “1. 너희는 땅 위에서 너희와 동료들이 사는 인생의 일부로서 정상의 사고를 함께 당할지 모르느니라.
166:4.7 (1830.7) “2. 너희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사고에, 사람들이 겪는 불운 중 하나에 어쩌다가 희생될지 모르며, 그러한 일은 어떤 면에서도 미리 정해지거나, 달리 이 땅의 영적 세력들이 일으키지 않음을 잘 아느니라.
166:4.8 (1830.8) “3. 너희는 세상을 지배하는 자연 법칙에 순응하기 위하여 직접 기울인 노력의 결과를 받을지 모르느니라.
166:4.9 (1830.9) “어떤 사람이 있어 뜰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더니, 나무에서 열매를 여러 번 찾았으나 하나도 얻지 못하자, 포도원 일꾼들을 앞에 불러서 일렀더라: ‘내가 여기에 지난 3년 동안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았으나 하나도 얻지 못하였도다. 열매 없는 이 나무를 자르라. 어찌 그것이 땅을 번거롭게 해야 하느냐?’ 그러나 우두머리 정원사가 주인에게 대답하였더라: ‘한 해를 더 버려두소서.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줄까 하나이다. 그리고 나서 이듬해에 아무 열매도 맺지 않으면, 자르겠나이다.’ 저희가 이렇게 열매 맺는 법칙을 따랐을 때, 그 나무가 살아 있고 좋았으므로, 풍부한 수확을 얻어 보상을 받았더라.”
166:4.10 (1831.1) “질병과 건강의 문제에서, 이러한 몸의 상태는 물질적 원인에서 생겨난 결과임을 너희가 알아야 하느니라. 건강은 하늘이 빙긋 웃는 것이 아니요, 질병도 하나님이 이맛살 찌푸리는 것이 아니라.
166:4.11 (1831.2) “아버지의 인간 자손은 물질적 축복을 받는 능력을 똑같이 가졌느니라. 그러므로 그는 차별하지 않고 사람의 자녀에게 물질인 것을 주시니라. 영적 선물을 내릴 때, 신이 준 이 재산을 사람이 받아들이는 능력에 따라 아버지는 제한을 받느니라. 비록 아버지는 사람을 차별하는 분이 아니어도, 영적 선물을 수여할 때, 아버지는 사람이 얼마큼 믿는가, 그리고 사람이 언제나 기꺼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행동할 생각이 있는가에 제한을 받느니라.”
166:4.12 (1831.3) 그들이 필라델피아를 향해서 줄곧 여행하는 동안, 예수는 계속해서 가르치고 사고ㆍ질병ㆍ기적에 상관되는 여러 물음에 대답했지만, 그들은 이 가르침을 완전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 시간의 가르침은 일생토록 지녔던 관념을 통째로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전하는 말씀을 되풀이하는 것, 그들이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을 여러 번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서도 예수가 죽고 다시 살아난 뒤까지 그들은 땅에서 그의 사명이 무슨 의미를 가졌는가 깨닫지 못했다.
166:5.1 (1831.4) 예수와 열두 사도는 아브너와 그 동료들을 찾아보러 가는 길이었는데, 이들은 필라델피아에서 전도하고 가르치고 있었다. 페레아 지방의 모든 도시 가운데, 필라델피아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의 큰 무리가 70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이렇게 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갔다. 필라델피아 회당은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감독 하에 있은 적이 없고, 따라서 예수와 그 동료들이 가르치지 못하게 문을 닫은 적이 없었다. 바로 이때, 아브너는 필라델피아 회당에서 하루에 세 번 가르치고 있었다.
166:5.2 (1831.5) 바로 이 회당은 나중에 기독교 교회가 되었고, 동쪽에 있는 그 지역에 두루 복음을 퍼뜨리기 위한 선교 본부였다. 오랫동안 주의 가르침의 요새였고, 이 지역에서 몇 세기 동안 기독교에서 배움의 중심으로서 혼자 우뚝 서 있었다.
166:5.3 (1831.6)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언제나 필라델피아의 유대인들과 다투고 있었다. 예수가 죽고 다시 살아나신 뒤에, 주의 동생 야고보가 우두머리였던 예루살렘 교회는 필라델피아 신자 회중과 심각한 불화(不和)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브너는 필라델피아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죽을 때까지 그런 자격으로 계속했다. 예루살렘과 이렇게 거리가 멀어진 것은 어째서 아브너와 그가 한 일에 대하여 신약의 복음서 기록에 아무 언급이 없었는가 설명한다. 예루살렘과 필라델피아 사이에 있던 이 다툼은 야고보와 아브너의 일생을 통하여 지속되었고, 예루살렘이 멸망한 뒤에 얼마 동안 이어졌다. 안티옥이 북쪽과 서쪽에서 그랬던 것처럼, 필라델피아는 남쪽과 동쪽에서 정말로 초대 교회의 본부였다.
166:5.4 (1831.7) 초대 기독교 교회의 모든 지도자와 사이가 틀어진 것은 아브너의 불운으로 보였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행정과 관할권에 대한 문제로 베드로와 야고보(예수의 아우)와 사이가 틀어졌다. 철학과 신학(神學)의 차이점에 대하여 그는 바울과 갈라졌다. 아브너는 철학 면에서 헬라파이기보다 바빌로니아파였고, 먼저 유대인에게, 그리고 나서 여러 신비교를 믿는 그리스 및 로마인 신자들에게, 불쾌한 것을 적게 제시하기 위하여 예수의 가르침을 개조하려는 바울의 온갖 시도를 끈질기게 저항했다.
166:5.5 (1832.1) 이처럼 아브너는 고립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한 교회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주의 아우 야고보에게 감히 도전한 적이 있었고, 야고보는 나중에 베드로의 지지를 받았다. 그런 행위는 모든 옛 동료로부터 그를 실질적으로 고립시켰다. 그리고 나서 그는 감히 바울에게 대항했다. 비록 이방인에게 전도하는 바울의 사명을 전적으로 동정했고,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와 논쟁할 때 그를 지지하기는 했어도, 그가 전도하기로 선택한, 예수의 가르침의 바울 판(版)을 통렬하게 반대했다. 마지막 몇 해에, 아브너는 바울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가 일생에 가르친 것을 교묘하게 부패시킨 자” 라고 비난했다.
166:5.6 (1832.2) 아브너의 나이가 지긋했을 때, 그리고 그 뒤 얼마 동안, 필라델피아의 신자들은 예수의 종교를 예수가 실천하고 가르친 그대로, 땅에서 어느 다른 집단보다도 더 엄격하게 고수했다.
166:5.7 (1832.3) 아브너는 89세가 되기까지 살았고, 필라델피아에서 서기 74년, 11월 21일에 죽었다. 죽는 바로 그날까지, 그는 하늘나라 복음을 충실히 믿는 신자요 가르친 선생이었다.
167:0.1 (1833.1) 이 페레아 전도 기간을 통해서 내내, 70인이 일하고 있던 여러 지역을 방문하는 예수와 사도들을 언급할 때, 대체로 열 명만 그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군중을 가르치기 위하여 펠라에 적어도 두 사도를 남겨 두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필라델피아로 계속 가려고 준비하자, 시몬 베드로와 형 안드레는 펠라 야영지로, 거기에 모인 군중을 가르치려고 돌아왔다. 주가 페레아 근처를 찾아보려고 펠라에 있는 캠프를 떠났을 때, 3백에서 5백 명의 야영자들이 그를 따라가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필라델피아에 다다랐을 때, 6백 명이 넘는 추종자들이 그를 따라갔다.
167:0.2 (1833.2) 데카폴리스 지방을 거쳐 간 최근의 전도 여행에는 아무런 기적이 따르지 않았다. 문둥병자 열 명을 깨끗하게 한 것을 제쳐놓고, 이때까지 이 페레아 전도 사명에 아무런 기적이 없었다. 이때는 기적이 없이, 대부분의 시간에 예수나 사도들조차 친히 자리에 없는 가운데, 복음이 힘차게 선포된 기간이었다.
167:0.3 (1833.3) 예수와 열 사도는 2월 22일 수요일에 필라델피아에 도착했고, 최근의 여행과 수고를 그치고, 쉬면서 목요일과 금요일을 보냈다. 그 금요일 밤에 야고보는 회당에서 말씀했고, 이튿날 저녁에 일반 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들은 필라델피아에서, 또 근처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이 진전된 것을 무척 기뻐했다. 다윗의 사자들은 알렉산드리아와 다마스커스로부터 좋은 소식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전역에 걸쳐 하늘나라가 더욱 진척된다는 소식을 또한 가져왔다.
167:1.1 (1833.4) 필라델피아에는 아주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바리새인이 살았는데, 그는 전에 아브너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안식일 아침에 식사를 대접하려고 예수를 집으로 초청했다. 이때에 예수가 필라델피아로 오실 것이라 사람들이 기대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많은 바리새인을 포함하여 큰 무리의 방문자들이,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다른 곳으로부터 와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유지(有志) 약 40명과 율법사 몇 명이 이 아침 식사에 초대받았고, 아침 식사는 주께 명예를 돌리기 위하여 미리 주선되어 있었다.
167:1.2 (1833.5) 아브너와 이야기하면서 예수가 문 옆에서 남아 있는 동안, 주인이 자리에 앉은 뒤에, 예루살렘의 바리새인 유지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산헤드린의 회원이었고, 버릇대로 주인의 왼편, 귀빈의 자리를 향하여 곧장 갔다. 그러나 이 자리가 주를 위하여, 그리고 바른 쪽 자리는 아브너를 위하여 미리 예정되었기 때문에, 주인은 예루살렘의 바리새인에게 네 자리 왼쪽으로 앉으라고 손짓했고, 이 고관(高官)은 귀빈의 자리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무척 기분을 상했다.
167:1.3 (1834.1) 곧 그들은 모두 자리에 앉았고, 자리에 참석한 대다수가 예수의 제자이거나 아니면 복음을 좋게 여겼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즐기고 있었다. 오직 예수의 적들이 그가 식사하려고 앉기 전에 손 씻는 예식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았다. 아브너는 식사가 시작될 때 손을 씻었지만, 음식을 대접하는 동안에는 씻지 않았다.
167:1.4 (1834.2) 식사가 끝날 때가 가까워 오자, 고질병으로 오래 앓다가 이제 수종(水腫)의 증세가 있는 사람이 거리에서 들어왔다. 이 사람은 신자였고, 아브너의 동료들에게서 최근에 세례를 받았다. 예수에게 고쳐달라고 아무런 요청을 하지 않았지만, 이 병자가 예수를 에워싼 군중을 피하기 바라면서, 그래서 예수의 눈길을 더 끌 것 같아서 이 아침 식사에 왔다는 것을 주는 잘 알았다. 이 사람은 그때 주가 거의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불쌍한 처지가 아마도 주의 동정심에 호소할지 모른다고 마음 속에서 궁리하였다. 그리고 그는 틀리지 않았으니, 그가 방으로 들어갔을 때, 예수와 예루살렘에서 온 독선적인 바리새인이 그를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 바리새인은 그런 사람을 방으로 들어오라고 허락한 것을 분개하는 말을 재빨리 뱉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 아픈 사람을 바라보고 아주 인자하게 빙그레 웃었기 때문에, 그는 가까이 다가와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식사가 끝나고 있었기 때문에, 주는 동료 손님들을 둘러보았고, 다음에 수종 걸린 사람을 뜻있게 들여다본 뒤에, 말했다: “친구들이여, 이스라엘의 선생과 학식 있는 율법사들이여, 나는 너희에게 하나 묻고자 하노라. 아프고 병든 자를 안식일에 고치는 것이 율법에 합당하냐 아니면 어긋나느냐?” 그러나 거기 있던 사람들은 예수를 너무나 잘 알았다. 잠자코 있었고,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167:1.5 (1834.3) 그리고 나서 예수는 병자가 앉은 데로 가서, 손을 붙들고 말했다: “일어나서 네 길을 가라. 너는 고쳐달라 부탁하지 않았어도 나는 네 마음 속의 소망과 네 혼의 믿음을 아노라.” 그 사람이 방을 떠나기 전에, 예수는 자리에 돌아가서, 아침 드는 자들을 향하여 말했다: “너희를 하늘나라로 유혹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이미 들어간 자에게 자신을 드러내려고 내 아버지가 그러한 일을 하시니라. 바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버지 같으리라는 것을 너희가 깨달을 수 있느니라. 왜냐하면, 너희 가운데 누가 안식일에 아주 아끼는 동물이 우물에 빠졌는데, 즉시 나가서 그 동물을 끌어당기지 아니하겠느냐?” 아무도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려 했고, 주인이 일이 되어 가는 것을 승인함이 분명했기 때문에, 예수는 일어서서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했다: “형제들이여, 결혼 잔치에 부름받을 때 너희는 상석(上席)에 앉지 말라. 혹시나 너보다 더 명예로운 사람이 초대받고 주인이 너에게 와서 네 자리를 다른 귀빈에게 주라 요청할까 두려우니라. 이 경우에 부끄럽게 네가 식탁에서 더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잔치에 부름 받을 때, 너희는 잔치 식탁에 도착하여 가장 낮은 자리를 찾고 거기에 네 자리를 잡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리라. 그래서 주인이 손님들을 둘러보고, 너에게 이를 수도 있느니라: ‘친구여, 어찌하여 가장 낮은 자리에 앉느냐? 더 높이 올라오라.’ 이렇게 그런 사람이 동료 손님들이 있는 가운데 영광을 받으리라. 잊지 말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누구나 낮아지겠고, 참으로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러므로 너희가 정찬을 베풀거나 저녁을 대접할 때, 언제나 너희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만 초대하지 말라. 저희가 보답하여 잔치에 너희를 부르고, 그렇게 너희가 보상을 받을 수도 있느니라. 너희가 축연을 베풀 때, 때때로 가난한 자와 불구(不具)인 자와 눈먼 자를 청하라. 이런 방법으로 너희는 마음 속에서 복을 받을지니, 절름발이와 다리를 저는 자는 너희가 사랑으로 베푼 것을 갚을 수 없음을 너희가 잘 아는 까닭이라.”
167:2.1 (1835.1) 예수가 바리새인의 아침 식탁에서 말씀을 마치자, 자리에 있던 율법사들 가운데 하나가 침묵을 깨뜨리기 바라며 생각 없이 말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빵을 먹을 자는 복이 있도다”―이것은 그 시절에 보통 하는 말이었다. 그러자 예수는 한 비유를 말씀했고, 친절한 주인도 이것을 가슴 속에 새길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말했다:
167:2.2 (1835.2) “어떤 통치자가 큰 만찬을 베풀었더니, 많은 손님을 불렀으매 저녁 때, 초대받은 자들에게 가서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되었사오니, 오소서’ 이르라고 종들을 보냈더라. 그리고 저희는 다 한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더라. 첫 사람이 이르되 ‘나는 막 농장(農場)을 샀고, 어떻게든 이를 증명하러 가야 하니, 나를 용서하기를 바라노라.’ 또 한 사람이 말하되 ‘나는 황소 다섯 쌍을 샀는데, 소들을 받으러 가야 하니, 나를 용서하기를 바라노라,’ 또 하나가 ‘나는 막 장가를 들었고, 따라서 갈 수 없노라’ 하는지라. 그래서 종들이 돌아가서 이를 주인에게 보고하였더라. 이 말을 듣자 집주인은 대단히 성이 났고 종들에게 돌이켜 일렀더라: ‘나는 이 결혼 잔치를 준비하였노라. 살진 소를 잡고, 손님들을 위하여 만사가 준비되었거늘 저희가 내 초청을 가벼이 여겼도다. 저희가 각자 자기 땅과 물건을 쫓아갔고, 내 잔치에 오라 저희를 부르는 내 종들에게 무례하게 굴기까지 하는도다. 그러므로 결혼 잔치에 손님이 차도록, 빨리 도시의 큰 거리와 골목 길, 큰 길과 샛길로 가서 가난한 자와 쫓겨난 자, 눈먼 자와 다리 저는 자를 여기로 데려오라.’ 종들이 주인이 명령한 대로 하였는데, 그리고 나서도 더 많은 손님을 위하여 자리가 있었더라. 그때 주인이 종들에게 말하되 ‘내 집이 차도록, 이제 여러 길과 시골로 가서, 거기 있는 자들을 강제하여 불러 오라. 내가 선언하노니, 먼저 부름 받은 자들은 하나도 내 만찬을 맛보지 못할지니라.’ 종들은 주인이 명한 그대로 했고, 그 집이 찼더라.”
167:2.3 (1835.3) 이 말씀을 듣고서 그들은 떠났다. 각자 자기의 곳으로 갔다. 적어도 그날 아침에 자리에 있어 비웃던 바리새인들 가운데 하나는 이 비유의 뜻을 알아들었으니, 그가 그날로 세례를 받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믿는다고 대중 앞에서 고백했기 때문이다. 아브너는 그날 밤에 신자들의 일반 회의에서 이 비유에 대하여 설교했다.
167:2.4 (1835.4) 이튿날 모든 사도는 이 큰 만찬의 비유의 의미가 무엇인가 풀이하려 애쓰는 철학 연습에 몰두했다. 예수는 서로 다른 이 해석을 모두 관심을 가지고 듣기는 했어도, 사도들이 그 비유를 이해하도록 더 돕는 것을 완강하게 물리쳤다. 다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각자 혼자서, 자기 혼 속에서 그 의미를 찾을지어다.”
167:3.1 (1835.5) 아브너는 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주가 가르치도록 미리 주선했는데, 모든 회당이 산헤드린의 명령으로 그의 가르침을 금지한 뒤로, 이번이 주가 회당에 처음으로 나타난 때였다. 예배가 끝났을 때, 예수는 그 앞에 풀이 죽은 얼굴을 하고 몸이 몹시 굽어진 나이 많은 한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이 여자는 오랫동안 겁에 질려 있었고 모든 기쁨이 생애에서 사라졌다. 단상(壇上)에서 걸어 내려오자, 예수는 그 여자에게 가서, 그 여자의 굽어진 어깨를 만지며 말했다: “여자여, 네가 오직 믿고자 하면, 허약한 정신에서 온전히 풀려날 수 있느니라.” 그리고 18년이 넘도록 몸을 굽히고 두려워하는 우울증에 빠져 있던 이 여자는 주의 말씀을 믿었고, 믿음으로 즉시 몸을 곧게 세웠다. 자기가 곧게 되었음을 보았을 때, 그 여인은 소리를 높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167:3.2 (1836.1) 이 여자의 굽은 형태는 우울한 정신의 결과였으므로, 여자의 병이 전적으로 정신에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예수가 진정한 신체의 병을 고쳤다고 생각했다. 필라델피아 회당의 회중이 예수의 가르침에 대하여 호의를 가졌어도, 그 으뜸 회당장은 쌀쌀한 바리새인이었다. 예수가 신체의 병을 고쳤다는 회중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예수가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주제넘게 했다고 분개했기 때문에, 회중(會衆) 앞에 일어서서 말했다: “사람들이 자기의 모든 일을 할 날이 엿새가 있지 아니하냐? 그러므로 이 일하는 날에 와서 고침을 받으라,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러지 말라.”
167:3.3 (1836.2) 냉정한 그 회당장이 이렇게 말을 마치자, 예수는 연사(演士)의 단상으로 돌아가서 말했다: “어찌하여 위선자 노릇을 하느냐? 너희 가운데 누구나 안식일에 마구간에서 황소를 풀고 물을 마시게 하려고 소를 끌어내지 아니하느냐? 그러한 수고가 안식일에 허락된다면, 이 여인, 지난 18년 동안 잘못에 묶여 있던 아브라함의 딸이, 이 안식일에도 이 사슬에서 풀려나고 해방과 생명의 물을 마시도록 앞으로 인도해야 하지 않느냐?” 그 여인이 하나님을 계속 찬양하는 동안, 그 비판자는 창피를 당했고 회중은 그 여인이 고침받은 것을 함께 기뻐했다.
167:3.4 (1836.3) 이 안식일에 예수를 대중 앞에서 비판한 결과로, 그 으뜸 회당장은 쫓겨났고 예수의 한 추종자가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167:3.5 (1836.4) 예수는 두려움에 빠진 그런 자들을 허약한 정신, 정신의 우울증, 그리고 두려움의 사슬로부터 자주 구원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든 그러한 질병이 신체의 질병이든지, 아니면 악령에 들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167:3.6 (1836.5) 예수는 일요일에 다시 회당에서 가르쳤고, 많은 사람이 그날 정오에 강에서 아브너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이 강은 도시의 남쪽으로 흘렀다. 이튿날 예수와 열 사도는 다윗의 한 사자가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펠라 야영지로 돌아가려고 떠났을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 가까이 베다니에 있는 친구들로부터 예수에게 급한 소식을 가져왔다.
167:4.1 (1836.6) 2월 26일 일요일 밤 아주 늦게, 베다니로부터 달려온 사람이 필라델피아에 도착했고, 마르다와 마리아로부터 “주여, 당신이 사랑하는 자가 대단히 아프오이다” 하는 소식을 가져왔다. 이 소식은 저녁 회의가 끝날 때, 밤 동안 사도들을 막 떠나고 있을 때 예수에게 도착했다. 처음에 예수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상한 막간의 일이 하나 일어났는데, 이것은 그가 몸 바깥에, 몸 건너에 있는 무엇과 교통하는 듯 보이는 때였다. 그리고 나서 위를 우러러보면서, 사도들이 듣는 가운데 그 사자에게 말했다: “이 병은 정말로 죽음에 이르지 않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아들을 높이는 데 쓰일 것을 의심하지 말라.”
167:4.2 (1837.1) 예수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그 오라비 나사로를 아주 좋아했다. 이들을 뜨겁게 사랑했다. 처음에 가졌던 인간적 생각은 당장에 그들을 도우러 가는 것이었지만 다른 생각이 그의 통합된 지성에 떠올랐다. 예루살렘의 유대인 지도자들이 언제라도 하늘나라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희망을 거의 버렸지만 그는 아직도 그 민족을 사랑했고, 예루살렘에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기회를 한 번 더 줄 수 있는 계획이 이제 머리에 떠올랐다. 아버지가 원하시면, 그는 예루살렘에게 하는 이 마지막 호소가 땅에서 살던 전 생애에서 가장 깊고 엄청난, 바깥에 드러나는 일이 되게 만들려고 결심하였다. 유대인은 구원자가 이적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관념에 매달렸다. 물질적 기적을 행하거나 정치적 힘을 현세에 나타내는 행위를 하기까지 품위를 떨어뜨리려 하지는 않았어도, 여태까지 드러나지 않은, 생사(生死)를 주관하는 힘을 나타내려고 이제 그는 아버지의 찬성을 구했다.
167:4.3 (1837.2) 유대인은 죽은 사람을 죽은 그날에 묻는 관습이 있었다. 이것은 그렇게 따듯한 기후에서 필요한 관습이었다. 그들이 단지 혼수 상태에 빠진 사람을 무덤에 넣어서, 둘째, 아니 셋째 날에도 그런 사람이 무덤에서 일어나곤 하는 일이 때때로 생겼다. 그러나 영이나 혼이 이삼일 동안 몸 가까이 꾸물거릴지 모르지만, 셋째 날 뒤에는 결코 남아 있지 않는다, 넷째 날이 되어서는 부패가 한창 진행된다, 그러한 기간이 지난 뒤에 아무도 무덤에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유대인의 관념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는 베다니를 향해서 떠나려고 준비하기 전에 필라델피아에서 아직도 꼬박 이틀을 머물렀다.
167:4.4 (1837.3) 따라서 수요일 아침 일찍 그는 사도들에게 말했다: “당장에 다시 유대 땅으로 갈 준비를 하자.” 주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사도들은 한동안 서로 의논하려고 자기들끼리 물러났다. 야고보는 그 회의의 지도를 맡았고, 그들은 예수를 다시 유대 땅으로 가도록 허락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뿐이라고 모두가 의견을 모았고, 하나같이 돌아와서 그렇게 예수께 말씀드렸다. 야고보가 말했다: “주여, 당신은 몇 주 전에 예루살렘에 계셨고 지도자들은 당신을 죽이고자 하였으며, 한편 사람들은 당신을 돌로 칠 생각이 있었나이다. 그때 당신은 이 사람들에게 진리를 받을 기회를 주었고, 우리는 당신이 유대로 다시 가시는 것을 허락하지 못하겠나이다.”
167:4.5 (1837.4)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그러나 일을 안전히 해도 좋은 때가 하루에 열두 시간 있음을 너희는 깨닫지 못하느냐? 사람이 낮에 걸으면, 빛이 있으매 넘어지지 않느니라. 사람이 밤에 걸으면, 빛이 없으매 넘어지기 쉬우니라. 내 날이 지속하는 한, 나는 유대에 들어가기가 두렵지 않고, 이 유대인들을 위하여 한 번 더 대단한 일을 하고자 하노라. 나는 저희의 조건―겉으로 영광이 드러나고 아버지의 힘과 아들의 사랑을 눈에 보이게 나타내라는 조건―을 따르더라도 저희에게 한 번 더 믿을 기회를 주고자 하노라. 게다가 너희는 우리의 친구 나사로가 잠든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나는 가서 그를 이 잠에서 깨우려 하노라!”
167:4.6 (1837.5) 그리고 나서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말했다: “주여, 나사로가 잠이 들었으면, 더욱 확실히 회복하리이다.” 이 시절에 죽음을 일종의 잠으로 말하는 것이 유대인의 관습이었지만, 나사로가 이 세상을 떠났음을 예수가 의미한다는 것을 사도들이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 분명히 말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다른 자들이 이것으로 구원받지 않더라도, 너희가 새로운 이유로 나를 믿을까 하여, 내가 거기 있지 않은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라. 그리고 너희가 목격할 것으로 인하여, 내가 너희를 떠나고 아버지께로 가는 날을 위하여 준비하면서, 너희 모두가 힘을 얻어야 하느니라.”
167:4.7 (1838.1) 예수가 유대로 가는 것을 그만두라고 설득할 수 없었을 때, 그리고 사도들 중 더러가 그를 따라가는 것조차 싫어했을 때, 토마스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주께 우리의 걱정을 말씀드렸지만, 주는 베다니로 가기로 마음이 굳어졌느니라. 나는 그것이 끝장을 의미한다는 것에 만족하고, 저희는 분명히 그를 죽이겠지만, 주가 그리 선택하신다면, 용감한 사나이답게 처신하자.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 그리고 언제나 이랬다. 신중하고 지속되는 용기를 요구하는 문제가 닥쳤을 때, 토마스는 언제나 열두 사도의 기둥이었다.
167:5.1 (1838.2) 유대 땅으로 가는 길에, 예수에게 거의 50명이 되는 친구와 적들이 따랐다. 수요일 한낮, 점심 시간에 그는 사도들과 이 무리의 추종자들에게 “구원의 조건”에 관하여 말씀했고, 이 수업의 끝에 바리새인과 세리(세금 걷는 자)의 비유를 이야기했다. 예수는 말했다: “그러면 너희가 보나니, 아버지는 사람의 자녀들에게 구원을 주시며, 이 구원은 신의 가족 안에서 아들 신분을 받을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거저 주는 선물이라. 이 구원을 벌기 위하여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느니라. 자신을 옳게 여겨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살 수 없고, 대중 앞에서 많이 기도하는 것도 가슴 속에 생생한 믿음이 모자람을 메울 수 없느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수고로 너희는 사람을 속일지 모르나, 하나님은 너희 혼을 꿰뚫어보시니라. 기도하러 성전에 간 두 사람이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것을 예로 잘 보여주나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이라. 바리새인은 일어서서 속으로 기도하되 ‘아 하나님, 나는 나머지 사람들, 착취하는 자나 배우지 못한 자, 부당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지 않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당신께 감사드리나이다. 나는 한 주에 두 번 금식하며, 내가 버는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러나 세리는 멀찌감치 떨어져 서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더라. ‘하나님이여, 죄인인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집에 돌아갔으니, 자신을 높이는 자는 누구나 낮아지겠거니와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여질 것임이라.”
167:5.2 (1838.3) 그날 밤에 예리고에서, 적대하는 바리새인들이, 한때 그의 동료들이 갈릴리에서 했던 것처럼, 결혼과 이혼에 관하여 주가 말씀하도록 유인하여 주를 덫에 걸리게 만들려고 애썼지만, 주는 그에게 이혼에 관한 율법과 충돌하게 만들려는 그들의 노력을 솜씨 있게 피했다. 세리와 바리새인이 좋은 종교와 나쁜 종교를 실례로 보여주다시피, 그들의 이혼(離婚) 관습은 유대 율법의 좋은 결혼법을 이 모세의 이혼 조항의 해석, 창피할 정도로 미지근한 바리새인의 해석과 대조하여 보여준다. 바리새인은 가장 낮은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했고, 세리는 가장 높은 이상에 따라 올바른 자세를 취했다. 바리새인에게 예배는 자신을 옳게 여김으로 무위(無爲)로 유도하는 수단이요, 영적 안전을 헛되게 보장하는 것이었다. 세리에게 예배는 사람이 회개와 고백의 필요를 깨닫고, 믿음으로 자비로운 용서를 받아들이도록 자기 혼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이었다. 바리새인은 응보를 구했고, 세리는 자비를 구했다. 우주의 법칙은 이것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라, 찾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아내리라.
167:5.3 (1838.4) 비록 이혼에 관하여 바리새인들과 논쟁에 말려들기를 거절했어도, 예수는 결혼에 관하여 가장 높은 이상(理想)을 담은 긍정적 가르침을 선포했다. 결혼을 모든 인간 관계에서 가장 이상적이고 높은 것으로 올려놓았다.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느슨하고 불공평한 이혼 관습을 뚜렷이 반대하는 것을 넌지시 비쳤다. 이 유대인들은 그 시절에, 요리 솜씨 없는 사람, 알뜰하지 못한 살림꾼과 같이 아주 하찮은 이유로, 아니면 더 예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보다 낫지 않은 이유로 남자가 아내와 이혼하는 것을 허락했다.
167:5.4 (1839.1)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쉬운 종류의 이혼은 유대 민족, 특히 바리새인에게 내린 특별한 섭리라고 가르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결혼과 이혼을 다루는 발표를 하지 않으려 했어도, 그는 결혼 관계를 이렇게 부끄럽게 조롱하는 처사를 아주 따끔하게 비난했고 그것이 여자와 아이들에게 부당함을 지적했다. 여자보다 남자에게 무슨 이점이라도 주는 어떤 이혼 관습도 그는 결코 묵인하지 않았다. 주는 오로지 여자에게 남자와 동등한 자격을 부여하는 가르침만 인정하였다.
167:5.5 (1839.2) 비록 결혼과 이혼을 다스리는 새 지침을 권하지 않았어도, 예수는 유대인에게 바로 그들의 율법과 높은 가르침에 부끄럽지 않게 살기를 촉구했다. 이 사회적 기준에 따라서 관습을 개선하려는 노력으로 그는 항상 기록된 성서에 호소했다. 예수는 높은 이상적 결혼 개념을 이렇게 지지하면서, 문서화된 율법이나 그들이 소중하게 간직한 이혼 특권이 가리키는 사회 관습에 대하여 질문하는 자들과 충돌하기를 솜씨 있게 피했다.
167:5.6 (1839.3) 사도들은 주가 과학ㆍ사회ㆍ경제ㆍ정치 문제와 관련하여 분명한 발언을 꺼려하는 것을 아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땅에서 예수의 사명이 영적ㆍ종교적 진리를 계시하는 데 순전히 관여한다는 것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다.
167:5.7 (1839.4) 예수가 결혼과 이혼에 대하여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그날 저녁에 시간이 더 지난 뒤 사도들이 추가된 질문을 개인적으로 많이 던졌고, 이 여러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들의 머리 속에 여러 가지 오해를 풀어주었다. 이 회의의 끝에 예수는 말했다: “결혼은 명예로운 것이요, 모든 남자가 소망할 대상이라.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사명을 혼자서 추구하는 사실은 어떤 면에서도 결혼이 바람직한가 어떤가를 반영하지 않느니라. 내가 그리 일해야 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나 바로 이 아버지는 남자와 여자의 창조를 지시했고, 아이들을 받아들이고 훈련시키기 위하여 가정을 세움으로 남녀가 가장 높은 사명, 그리고 그에 따른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 이 자녀를 창조하는 일에 이 부모는 하늘과 땅의 창조자와 협동자가 되느니라. 이 때문에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아내와 결합하며, 저희 둘이 하나와 같이 될지니라.”
167:5.8 (1839.5) 이 방법으로 예수는 결혼에 관하여 사도들의 머리에서 많은 걱정을 덜어주었고, 이혼에 관한 여러 가지 오해를 풀어주었다. 동시에 사회적 연합에 관한 그들의 이상을 높이고,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가정을 존중하는 마음을 더욱 가지게 하려고 많이 기여했다.
167:6.1 (1839.6) 그날 저녁에 결혼, 그리고 아이들이 복된 것에 관한 예수의 말씀은 온 예리고에 퍼졌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 예수와 사도들이 떠나려고 준비하기 오래 전에, 아침 먹을 때가 되기도 전에, 어머니들 수십 명이 아이들을 팔에 안고, 손에 이끌고, 예수가 투숙(投宿)하는 곳으로 와서 주가 어린것들을 축복해주기를 바랐다. 아이를 데려온 어머니들이 이렇게 군집한 것을 보려고 나갔을 때, 사도들은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 여자들은 주가 아이들에게 손을 얹고 축복하기까지 떠나려 하지 않았다. 사도들이 큰 소리로 이 어머니들을 나무라자, 예수는 그 떠들썩한 소리를 듣고 나와서, 분개하여 사도들을 꾸짖어 말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도록 버려두라. 저희를 금하지 말지니, 하늘나라가 그러한 자에게 속함이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누구나 도저히 거기에 들어가서 완전한 영적 어른 수준까지 자라지 못하리라.”
167:6.2 (1840.1)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나서, 주는 아이들을 다 받았으며 아이들에게 손을 얹었고, 그동안에 어머니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씀을 하였다.
167:6.3 (1840.2) 예수는 자주 사도들에게 하늘의 저택에 대해서 이야기하였고, 마치 아이들이 육체적으로 이 세상에서 자라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급하는 자녀들은 거기서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네바돈의 구경하는 지성 존재들이 한 우주의 창조자와 함께 놀고 있는 예리고의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을 이날 이 아이들과 그 어머니들이 조금도 깨닫지 못한 것 같이, 성스러운 것은 때때로 평범(平凡)한 것으로 보인다.
167:6.4 (1840.3) 팔레스타인에서 여자의 지위는 예수의 가르침 때문에 많이 나아졌다. 그의 추종자들이 예수가 힘들여 가르친 것으로부터 그다지 멀리 벗어나지 않았던들, 여자의 지위는 온 세상에 두루 그렇게 나아졌을 것이다.
167:6.5 (1840.4) 또한 예리고에서, 예수는 신을 예배하는 버릇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초기의 종교적 훈련의 토론과 연관하여, 예배하고 싶은 충동으로 이끄는 영향으로서, 특히 아이들의 경우에 아름다움이 귀중하다는 것을 사도들에게 강조했다. 교훈과 예를 통하여, 주는 창조의 자연스러운 배경 한가운데서 창조자를 예배하는 것이 가치 있음을 가르쳤다. 그는 나무들 사이에서, 자연 세계의 비천한 생물 가운데서, 하늘의 아버지와 교통하기를 더 좋아했다. 그는 별이 반짝이는 창조 아들들의 영역의 광경, 영감을 일으키는 광경을 통해서, 아버지를 생각해 보기를 즐거워했다.
167:6.6 (1840.5) 자연의 예배처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때, 하나님과 영적 교통을 가지는 지적 접근법과 관련하여, 인간의 가장 높은 감정이 일어나도록 사람들은 아름다운 집, 마음을 끄는 단순하고 예술적으로 꾸민 성소(聖所)를 마련하려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진리ㆍ아름다움ㆍ거룩함은 참된 예배를 힘차게 효과 있게 돕는다. 그러나 공들이고 허세부리는, 인간의 예술로 단지 거대하게 치장하고 지나치게 장식한다고 영의 교통을 촉진할 수는 없다. 아름다움은 아주 단순하고 자연스러울 때 가장 종교성을 가진다. 아름다운 매력이 아주 결여되고, 명랑한 기분과 영감을 주는 성스러움을 전혀 연상시키지 않는, 차갑고 메마른 방에서 어린아이들에게 대중 예배를 보는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것은 얼마나 딱한 일인가! 아이는 자연이 있는 바깥에서 처음 예배에 들어가고, 나중에는 적어도 날마다 거하는 집만큼 물질적으로 매력 있고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건물, 종교 집회가 있는 공공 건물로 부모를 따라가야 한다.
167:7.1 (1840.6) 그들이 예리고로부터 베다니까지 언덕을 올라가는 길을 가는 동안, 나다니엘은 그 길의 대부분에서 예수 곁에서 걸었고, 하늘나라와 관련하여 아이들에 대하여 토론한 것은 간접으로 천사들의 봉사의 고려로 이어졌다. 마침내 나다니엘은 주께 이렇게 물었다: “대사제가 사두개인임을 아는 까닭에,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천사를 믿지 않으므로, 하늘 봉사자들에 관하여 우리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리이까?” 그러자 다른 것 중에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167:7.2 (1841.1) “천사 무리는 따로 된 계급의 창조된 존재이라. 저희는 물질 서열의 필사 인간과 전혀 다르며, 뚜렷이 다른 무리의 우주 지성 존재로서 활동하느니라. 천사는 성서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생물 집단에 속하지 않으며, 하늘의 저택들을 거쳐서 계속 올라간 필사 인간이 영화롭게 변화된 영도 아니라. 천사들은 직접 지음받은 생물이요 자식을 낳지 않으며, 천사 무리는 인류와 오직 영적 친척 관계가 있느니라.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께로 여행하며 올라가는 동안에 사람은 한때 천사 상태와 비슷한 존재 상태를 거치지만, 사람은 결코 천사가 되지 않느니라.
167:7.3 (1841.2) “천사는 사람이 죽는 것처럼 결코 죽지 않으며, 루시퍼의 속임수에 말려든 어떤 천사들처럼 어쩌다가 죄에 말려들지 않으면, 천사는 불멸하느니라. 천사는 하늘에서 종으로 일하는 영이요, 저희는 전적으로 지혜롭지도 전능하지도 않으니라. 그러나 충성스러운 천사들은 모두 참으로 깨끗하고 거룩하니라.
167:7.4 (1841.3) “너희의 영적 눈이 기름 부음을 받으면, 너희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리라고 내가 한 번 전에 이른 것을 기억하지 않느냐? 천사들이 베푸는 봉사로 인하여 한 세계는 다른 세계들과 연결이 유지되나니, 왜냐하면 이 양떼에 속하지 않는 다른 양들이 내게 있다고 내가 너희에게 거듭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이 천사들은 너희를 감시하고 나서, 나가서 네 마음 속의 생각을 아버지께 일러바치고 육체가 행한 일을 보고하는, 영 세계의 첩자(諜者)가 아니라. 아버지는 자신의 영이 너희 안에 사시므로 그러한 수고가 필요 없느니라. 그러나 이 천사 영들은 하늘 창조의 한 부분에게 우주의 다른 먼 구석에서 행하는 일에 관하여 알려주려고 활동하느니라. 아버지의 정부와 아들들의 우주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천사가 인류에게 봉사하는 데 배치되느니라. 이들 가운데 많은 세라핌이 봉사하는 영이라고 너희에게 가르쳤을 때 나는 비유하는 말이나 시(詩) 구절로 말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을 너희가 알아듣기 어려워도 상관 없이, 이 모두가 참이라.
167:7.5 (1841.4) “이 천사들 가운데 다수는 사람들을 구하는 일에 바쁘니, 왜냐하면 한 사람이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비로소 추구할 때 천사가 기뻐한다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더냐? 뉘우치는 한 죄인을 놓고 하늘의 천사들 앞에서 기쁨이 있다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도 하였고, 이로서 필사 인간의 영적 복지(福祉)와 신성한 진보에 마찬가지로 관심을 가지는, 다른 더 높은 계급의 하늘 존재들이 있음을 가리켰노라.
167:7.6 (1841.5) “또한 이 천사들은 사람의 영이 육체의 거처로부터 해방되고 그 혼이 하늘에 있는 저택까지 호송되는 그 수단에 상당히 관여하느니라. 천사들은 육체가 죽고 영의 거처에서 새로이 사는 사이에 끼는 기간, 지도에 그려지지 않고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기간에, 사람의 혼을 인도하는 확실한 하늘 안내자이라.”
167:7.7 (1841.6) 그는 천사들이 베푸는 봉사에 관하여 나다니엘과 더욱 말씀했을 터이지만 마르다가 가까이 와서 중단되었는데, 그 여자는 동쪽으로 예수가 올라오는 것을 지켜본 친구들한테서 주가 베다니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고 통지받았다. 그 여자는 이제 서둘러 예수에게 인사를 드렸다.
168:0.1 (1842.1) 예수가 베다니 가까이 언덕의 꼭대기로 오는 동안, 마르다가 그를 만나려고 떠난 것은 한낮이 조금 지나서였다. 동생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고, 일요일 오후 늦게, 동산의 먼 끝에 있는 사립(私立) 무덤에 안치되어 있었다. 무덤 입구에 있는 돌은 이날, 목요일 아침에 굴려서, 자리에 놓여 있었다.
168:0.2 (1842.2) 마르다와 마리아가 나사로의 병에 관하여 예수에게 소식을 보냈을 때, 그들은 주가 이에 대하여 무슨 일인가 하리라고 확신했다. 나사로가 가망(可望) 없이 아픈 줄 알았고, 비록 예수가 가르치고 전도하는 일을 제쳐놓고 그들을 도우러 오리라고 감히 꿈을 꾸지 않았어도, 그들은 예수가 병을 고칠 힘이 있는 것을 너무 확신하여, 예수가 그냥 고치라고 말씀하리라, 그러면 나사로는 즉시 온전히 되리라고 생각했다. 사자가 필라델피아를 향하여 베다니를 떠나고 몇 시간 뒤에 나사로가 죽었을 때, 이리 된 것은 너무 늦을 때까지,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몇 시간 되었을 때까지,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주가 듣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판단했다.
168:0.3 (1842.3) 그러나 달리는 사람이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화요일 오전에 그가 가지고 온 소식을 듣고서 그들은 믿는 친구들 모두와 함께 대단히 어리둥절했다. 그 사자는 “...이 병은 정말로 죽음에 이르지 않느니라”하고 예수가 말씀하심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어째서 예수가 아무 말도 전하지 않고, 달리 도우려고 제안하지 않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168:0.4 (1842.4) 근처의 여러 촌락에서 온 많은 친구와 예루살렘에서 온 다른 사람들은 슬픔에 빠진 자매를 위로하려고 왔다. 나사로와 두 자매는, 작은 마을 베다니에서 유지였던, 살림이 넉넉하고 존경받을 유대인의 자녀들이었다. 그리고 모두 세 사람이 오랫동안 예수를 열심히 따른 사람이었는데도, 아는 모든 사람이 그들을 높이 존경하였다. 그들은 이 근처에서 광범위한 포도원과 올리브 밭들을 물려받았고, 그들이 부유했다는 것은 자기네 터에 사립 무덤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증명한다. 부모 두 분은 이미 이 무덤에 안치되어 있었다.
168:0.5 (1842.5) 마리아는 예수가 오리라는 생각을 이미 버렸고 슬픔에 잠겨 있었지만, 바로 그날 아침 무덤 앞에 그들이 돌을 굴려서 입구를 틀어막던 바로 그때까지도, 마르다는 예수가 오리라는 희망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나서도 마르다는 어느 이웃 소년에게 언덕 꼭대기에서 베다니 동쪽까지 이르는 예리고 길을 지켜보라고 지시했다. 바로 이 소년이 예수와 그 친구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마르다에게 가져왔다.
168:0.6 (1842.6) 예수를 만나자 마르다는 그의 발 앞에 털썩 쓰러지면서 외쳤다. “주여, 당신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으리이다!” 여러 가지 걱정이 머리를 스쳐가고 있었지만 마르다는 아무런 의심을 비치지 않았고, 나사로의 죽음과 관련하여 주의 행위를 비난하거나 따지려고 나서지도 않았다. 그 말이 끝나자, 예수는 손을 뻗어, 여자를 일으켜 세우고 말했다: “오직 믿음을 가지라 마르다야, 그리하면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러자 마르다가 말했다: “마지막 날에 부활이 있을 때 그가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그리고 이제도 당신이 하나님께 무엇을 청하든지, 우리 아버지가 당신에게 주실 것을 믿나이다.”
168:0.7 (1843.1) 그리고 나서 예수는 마르다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지니라. 참으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누구나 결코 정말로 죽지 아니하리라. 마르다야, 네가 이를 믿느냐?” 마르다는 주께 대답했다: “예, 나는 당신이 구원자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아니 이 세상에 오셔야 할 분인 것까지도 믿은 지 오래 되나이다.”
168:0.8 (1843.2) 마리아에 관하여 예수가 물었기 때문에, 마르다는 바로 집으로 들어가서, 동생에게 속삭이며 말했다: “주가 여기 계신데, 너를 찾았느니라.” 마리아가 이 말을 들었을 때, 그 여자는 벌떡 일어나서 서둘러 예수를 만나려고 나갔다. 예수는 집에서 좀 떨어져, 마르다가 처음에 그를 만났던 곳에 아직 머물러 있었다. 마리아를 위로하려 애쓰면서 같이 있던 친구들은 그 여자가 벌떡 일어나서 나가는 것을 보자, 울려고 무덤에 간다고 생각하면서 따라갔다.
168:0.9 (1843.3)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다수가 예수를 지독히 미워하는 적이었다. 이것이 어째서 마르다가 그를 혼자서 만나려고 나왔는가, 또한 예수가 찾고 있다고 마리아에게 알려주려고 마르다가 몰래 갔는가 하는 까닭이었다. 예수를 몹시 보고 싶었지만, 마르다는 예수가 큰 무리의 예루살렘 적들 한가운데로 갑자기 들어와서 일어날 수도 있는 어떤 가능한 불상사가 일어나는 것도 피하기를 바랐다. 마리아가 예수를 맞이하러 나간 동안에 친구들과 함께 집에 남아 있으려는 것이 마르다의 속셈이었지만 그 여자는 실패했는데, 모두 마리아를 따라가서 이렇게 주가 계신 앞에 그들이 뜻하지 않게 들이닥친 것을 깨달았다.
168:0.10 (1843.4) 마르다는 마리아를 예수께로 이끌었고, 예수를 보자 마리아는 그의 발 앞에 쓰러지며 외쳤다. “당신이 여기 계시기만 했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으리이다!” 그들이 나사로의 죽음을 얼마나 슬퍼하는가 보았을 때, 예수의 혼은 동정심으로 움직였다.
168:0.11 (1843.5) 마리아가 예수를 맞이하려고 나간 것을 보고서, 애도하는 사람들은 조금 떨어진 곳으로 물러났다. 그동안에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와 이야기하고, 아버지를 굳게 믿는 믿음과 신의 뜻에 완전히 맡기는 태도를 유지하라는, 위로와 훈계의 말씀을 더 들었다.
168:0.12 (1843.6) 한편 나사로와 그를 잃은 자매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있고, 또 한편 믿지 않고 사람을 죽이려고 생각하는 이 유대인들 중에 몇 사람이 겉으로 나타낸 애정 표시를 경멸하고 경시(輕視)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인간 정신은 힘차게 움직였다. 그러한 거짓된 슬픔이 그들의 가슴 속에 자신에 대한 아주 사무친 적의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친구라고 자칭하는 이들 중에 더러가 억지로, 겉으로 애도(哀悼)함을 보이는 것을 예수는 몹시 분개하였다. 그러나 이 유대인들 가운데 몇몇은 진지하게 애도했으니, 그들이 그 가족의 참 친구였기 때문이다.
168:1.1 (1843.7) 애도하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져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면서 몇 순간을 보낸 뒤에 예수는 그들에게 물었다: “어디에 그를 놓아두었느냐?” 그러자 마르다가 대답했다, “와서 보소서.” 슬퍼하는 두 자매를 계속 말없이 따라가면서 그는 눈물을 흘렸다. 뒤따라간 친근한 유대인들이 그의 눈물을 보자 하나가 말했다: “그가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하였는가 보라.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자가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이때가 되어서, 그들은 가족 무덤 앞에 서 있었고, 이것은 동산 터의 먼 끝에 9미터쯤 우뚝 솟은 바위 선반에 있는 작은 천연 동굴, 즉 내리막 경사(傾斜)였다.
168:1.2 (1844.1) 도대체 어째서 예수가 눈물을 흘렸는가 인간의 지성에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인간의 감정, 인격화된 조절자의 지성에 기록된 신다운 생각, 이 두 가지의 통합된 기록을 이용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이 감정이 나타난 진정한 원인에 대하여 온전히 확실하지는 않다. 우리는 이때 그의 머리를 거쳐 가고 있던 다음의 몇 가지 생각과 느낌 때문에 예수가 눈물을 흘렸다고 믿고 싶다:
168:1.3 (1844.2) 1. 그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진정하고 슬픔에 찬 느낌을 가졌다. 오라비를 잃은 이 두 자매에게 진정하고 깊은 인간 애정을 느꼈다.
168:1.4 (1844.3) 2. 애도하는 군중, 더러는 진지한 애도자이고 더러는 다만 애도하는 체하는 자들이 자리에 있어서 마음이 어지러웠다. 겉으로 애도하는 이런 표시를 그는 언제나 분개했다. 그 두 자매가 오라비를 사랑했고 신자들이 살아난다는 믿음을 가진 것을 알았다. 이 감정의 갈등이 그들이 무덤에 가까이 가는 동안 어째서 그가 신음 소리를 냈는가 아마도 설명할지 모른다.
168:1.5 (1844.4) 3. 그는 나사로를 필사의 생명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을 참으로 망설였다. 두 자매는 정말로 그가 필요했지만, 예수는 모진 박해를 받도록 친구를 불러내야 했던 것을 뉘우쳤고, 사람의 아들의 신성한 능력을 가장 크게 나타내는 대상자가 되는 결과로서, 나사로가 이러한 박해를 견디어야 하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168:1.6 (1844.5) 이제 우리는 흥미 있고 교훈이 되는 한 사실을 이야기해도 좋다: 이 이야기는 인간사에서 겉보기에 자연스러운 정상 사건으로 펼쳐져도, 측면에서 매우 흥미 있는 빛을 얼마큼 던진다. 일요일에 사자(使者)가 예수에게 가서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말씀드렸고, 예수는 그것이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는 말을 보냈어도, 동시에 베다니로 몸소 가서 그 자매에게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하고 묻기까지 했다. 이 모두가 이 일생의 방식을 좇아서, 인간 지성의 제한된 지식에 따라서 주가 진행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듯하지만, 그런데도 나사로가 죽은 뒤에 나사로의 생각 조절자를 무기한으로 붙들어두도록 인격화된 예수의 조절자가 명령을 내렸고 이 명령은 나사로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기 꼭 15분 전에 기록된 것을 우주의 기록이 드러낸다.
168:1.7 (1844.6) 나사로가 미처 죽기도 전에 그가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킬 것을 예수의 신다운 지성이 알았는가? 우리는 모른다. 다만 여기에 우리가 기록하는 것을 알 따름이다.
168:1.8 (1844.7) 예수의 적들 가운데 다수는 그의 애정 표시를 비웃고 싶어 했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그가 이 사람을 그리 소중히 여겼다면, 베다니로 오기 전에 어찌하여 그리 오래 머물렀는가? 그가 사람들이 주장하는 그런 인물이라면, 어찌하여 아까운 친구를 구하지 않았던가? 사랑하는 자를 구할 수 없다면, 갈릴리에서 낯선 자를 고치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많은 다른 방법으로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한 일을 빈정거리고 비웃었다.
168:1.9 (1844.8) 그래서 이 목요일 오후 2시 반쯤에, 네바돈의 미가엘이 땅에서 베푼 봉사와 관련된 모든 일 중에 가장 큰 일을 연출하려고 이 조그만 베다니 마을에 무대가 모두 마련되었고, 필사 거처(居處)의 사슬로부터 주가 해방된 뒤에 자신의 부활이 일어났으므로, 이것은 육체를 입고 육신화한 동안에 신의 능력을 가장 크게 나타낸 것이었다.
168:1.10 (1845.1) 가브리엘의 지휘 하에 온갖 계급의 하늘 존재들의 광대한 집단이 가까이 옆에 있고, 인격화된 예수의 조절자의 지휘에 따라서 기대에 차 부르르 떨면서 사랑하는 군주의 명령을 집행하려고 준비된 채로 지금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나사로의 무덤 앞에 모인 그 작은 무리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168:1.11 (1845.2) 예수가 “그 돌을 치우라”고 명하는 말씀을 내렸을 때, 모인 하늘 무리들은 필사 육체의 모습대로 나사로를 부활시키는 극을 연출하려고 준비했다. 그러한 형태의 부활을 집행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며, 이것은 상물질 형태로 필사 인간을 다시 살리는 보통 기법을 훨씬 뛰어넘고, 훨씬 더 많은 하늘 성격자와 훨씬 더 큰 체계의 우주 시설이 필요하다.
168:1.12 (1845.3) 마르다와 마리아가 무덤 앞에 있는 돌을 굴려서 치우라고 예수가 이렇게 지시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들은 엇갈리는 감정에 젖어 있었다. 마리아는 나사로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를 희망했지만, 마르다는 동생의 믿음을 어느 정도까지 같이 가졌어도, 나사로가 예수와 사도들과 친구들 앞에 나설 수 없는 모습일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더 걱정이 되었다. 마르다가 말했다: “우리가 돌을 굴려 치워야 하나이까? 내 오라비는 이제 죽은 지 나흘이 되었고, 그래서 이때가 되어 몸이 썩기 시작하였나이다.” 마르다는 어째서 주가 돌을 옮기라고 요청했는가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또한 이렇게 말했고, 아마도 예수가 다만 나사로를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싶어 했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는 태도가 차분하거나 평온하지 않았다. 그들이 돌을 굴려 움직이기를 망설이자 예수는 말했다: “처음에 이 병이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고 너희에게 이르지 않았느냐? 약속을 이루려고 내가 오지 않았느냐?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온 뒤로, 오직 믿기만 하면 너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이르지 않았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의심하느냐? 얼마나 있어야 너희가 믿고 복종하겠느냐?”
168:1.13 (1845.4) 예수가 말씀을 마치고 나서, 기꺼이 일하는 이웃들의 도움을 얻어, 사도들은 그 돌을 붙들고 무덤의 입구에서 굴려서 치웠다.
168:1.14 (1845.5) 사망의 천사의 칼 끝에서 쓸개 즙의 방울이 셋째 날 끝이 되어야 비로소 작용하고, 그래서 넷째 날에 완전 효력(效力)이 생긴다는 것이 유대인이 공통으로 가진 믿음이었다. 그들은 사흘째 끝까지 사람의 혼이 무덤 근처에서 얼쩡거리며, 죽은 몸을 다시 살리려고 애쓴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러한 혼이 넷째 날이 동트기 전에, 떠난 영들의 거처로 가버린다고 굳게 믿었다.
168:1.15 (1845.6) 죽은 자, 그리고 죽은 자의 영이 떠난다는 이 관념과 견해는, 이제 나사로의 무덤에 있던 모든 사람의 머리 속에, 그리고 바야흐로 벌어지려고 하는 일에 관하여 소문을 들을 수도 있는 모든 사람에게 후일에, 자기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한 이가 친히 일함으로, 이것이 정말로, 참으로, 죽은 자를 일으킨 경우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소용되었다.
168:2.1 (1845.7) 45명쯤 되는 이 필사자의 일행이 무덤 앞에 서 있는 동안, 그들은 리넨 붕대에 쌓여서 무덤 동굴의 바른쪽 아래 틈에 놓여 있는 나사로의 형태를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땅에 있는 이 인간들이 거기서 거의 숨을 죽이고 말없이 서 있는 동안, 광대한 무리의 하늘 존재들은, 사령관 가브리엘이 행동하라는 신호를 줄 때 응답하기 위한 준비로 자기 자리를 휙 찾아갔다.
168:2.2 (1846.1) 예수는 눈을 들어 말했다: “아버지여, 나의 청을 듣고 허락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아버지가 언제나 내 말을 들으시는 줄 알지만, 여기 나와 함께 서 있는 자들 때문에, 아버지가 세상으로 나를 보내셨음을 저희가 믿고, 우리가 바야흐로 하려는 일에 아버지가 나와 함께 일하심을 저희가 알도록, 내가 이렇게 아버지와 말씀하나이다.” 기도(祈禱)를 마치고서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나사로야, 앞으로 나오라.”
168:2.3 (1846.2) 구경하는 이 인간들은 꼼짝하지 않고 있었어도, 광대한 하늘 무리는 모두 창조자의 말씀에 복종하여 하나같은 행동으로 술렁거렸다. 땅의 시간으로 꼭 12초 안에, 여태까지 핏기 없던 나사로의 모습은 비로소 움직였고, 누워 있던 돌 선반의 모서리에 당장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의 몸은 시신(屍身)을 싸는 천으로 둘둘 말려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덮여 있었다. 그들 앞에―살아서―그가 일어서자 예수는 말했다.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라.”
168:2.4 (1846.3) 마르다와 마리아와 사도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집으로 달아났다. 그들은 두려움에 질려 얼굴이 하얗게 되었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더러는 기다렸지만, 많은 사람은 황급히 자기 집으로 갔다.
168:2.5 (1846.4) 나사로는 예수와 사도들에게 인사하고, 시신을 감는 천이 웬일인가, 어째서 그가 동산에서 깨어났는가 물었다. 예수와 사도들은 옆으로 옮겨 갔고, 한편 마르다는 나사로에게 그가 죽어서 묻혔다가 부활했다고 일러주었다. 잠들어 죽은 뒤로 시간 의식이 없었으니까, 그가 일요일에 죽었다가 이제 목요일에 살아났다고 마르다는 나사로에게 설명해야 했다.
168:2.6 (1846.5)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자, 이제 이 지역 우주에서 조절자 부류의 우두머리가 된, 인격화된 예수의 조절자는 이제 기다리고 있는 나사로의 옛 조절자에게 다시 살아난 그 사람의 정신과 혼 속에서 다시 거주를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168:2.7 (1846.6) 그리고 나서 나사로는 예수에게로 다가가서, 두 자매와 함께 주의 발 아래에 무릎을 꿇고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 예수는 나사로의 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말했다: “이 사람아, 너에게 일어난 것을 이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이 또한 겪을 것이요, 다만 저희는 더 영화로운 형태로 부활하리라. 너는 내가 말하는―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는―진리의 산 증인이 될지니라. 그러나 이제 모두 집으로 들어가서 이 육체들을 위하여 음식을 먹자.”
168:2.8 (1846.7) 그들이 집을 향하여 걸어가자, 가브리엘은 모인 하늘 무리의 여분의 집단을 해산했고, 한편 한 필사 인간이 죽은 육체의 모습을 입고 부활한, 유란시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를 기록했다.
168:2.9 (1846.8) 나사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대단히 아팠던 것을 알았지만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난 것만 기억할 수 있었다. 온전히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무덤에서 지낸 이 나흘에 대하여 그는 아무것도 결코 이야기할 수 없었다. 죽음의 잠을 자는 자에게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168:2.10 (1846.9) 이 막대한 일의 결과로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어도, 다른 사람들은 그를 거부하는 마음이 더욱 굳어졌을 뿐이다. 이튿날 한낮이 되어서, 이 이야기는 온 예루살렘에 퍼졌다. 수십 명의 남녀가 나사로를 보고 그와 이야기하려고 베다니로 갔고, 깜짝 놀라고 뒤숭숭해진 바리새인들은 이 새로운 사태에 관하여 무슨 조치가 있어야 하는가 결정할까 하여 서둘러 산헤드린 회의를 소집했다.
168:3.1 (1847.1)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이 사람의 증언이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대중(大衆)의 믿음을 강화하는 데 많이 기여했어도,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 지도자와 권력자들의 태도에는 거의 또는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예수를 죽이고 그의 일을 멈추게 하려는 그들의 결정을 재촉했을 뿐이다.
168:3.2 (1847.2) 이튿날 금요일 1시에, “나사렛 예수를 우리가 어찌할까?”하는 문제에 대하여 더 심의하려고 산헤드린이 회의를 열었다. 두 시간이 넘도록 논의하고 매서운 토론이 있은 뒤에, 어떤 바리새인이 예수를 즉시 사형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내놓았는데, 이 결의안은 예수가 온 이스라엘에 위협이라고 선포하고, 재판 없이, 모든 선례(先例)를 무시하고 정식으로 산헤드린이 사형을 결정하도록 태도를 정하는 것이었다.
168:3.3 (1847.3) 이 존귀한 유대인 지도자 단체는 신성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그리고 유대인의 신성한 율법을 조롱했다는 수많은 다른 비난으로 예수를 체포해서 재판하라고 몇 번이나 거듭 선포했다. 그들은 전에 그가 죽어야 한다고 한 번 선언하는 지경까지 간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재판하기 전에 예수의 죽음을 선포하기를 원했다고 산헤드린은 기록했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표결에 붙여지지 않았다. 들어 본 적이 없는 그런 행동을 제안했을 때 산헤드린 회원 14명이 무더기로 사퇴했기 때문이다. 이 사퇴에 대하여 거의 2주 동안 아무런 공식 조치가 없었어도, 이 14명의 무리는 그날부터 산헤드린에서 물러났고 다시는 회의석에 앉지 않았다. 나중에 이 사퇴를 받아들였을 때 다른 다섯 명이 쫓겨났는데, 이들이 예수에 대하여 친근한 감정을 품었다고 그 동료들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 19명이 빠진 뒤에, 산헤드린은 만장 일치에 가깝게 단결하여 예수를 재판하고 정죄할 위치에 있었다.
168:3.4 (1847.4) 다음 주에 나사로와 두 자매는 산헤드린 앞에 나타나라고 호출 받았다. 그들의 증언을 청취하고 나서, 나사로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에 대하여 아무런 의심이 있을 수 없었다. 산헤드린의 처리는 나사로가 부활한 것을 실질적으로 인정했어도, 그 기록은 이 기적과 예수가 행한 모든 다른 이적을 악마 왕의 힘으로 돌리고 예수가 그와 결탁하고 있다고 선포하는 결의안을 포함했다.
168:3.5 (1847.5) 이적(異蹟)을 행하는 그의 힘의 근원이 무엇이든지 상관 없이, 이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를 즉시 멈추게 하지 않으면, 오래지 않아 서민들이 다 그를 믿을 것이라, 더 나아가서 그를 믿은 허다한 사람이 그를 메시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여기므로, 로마 당국과 심각한 분규가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168:3.6 (1847.6) 바로 이 산헤드린 회의에서 대사제 가야바는 유대인의 옛 격언을 처음으로 표현했고, 그는 이 말을 아주 여러 번 되풀이했다: “공동체가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나으니라.”
168:3.7 (1847.7) 예수는 이 어두운 금요일 오후에 산헤드린이 한 일에 관하여 경고를 받기는 했어도 조금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고, 베다니에서 가까운 마을 벳바게에서 친구들과 함께 안식일 동안 계속 쉬었다. 미리 약정하여, 예수와 사도들은 나사로의 집에서 일요일 아침에 일찍 모였고, 베다니 가족에게 작별을 알리고 펠라 야영지로 돌아가는 여행 길을 재촉하였다.
168:4.1 (1848.1) 베다니에서 펠라로 가는 길에 사도들은 예수에게 여러 말씀을 물었고, 주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세부에 관계되는 것을 제외하고, 이 모든 것에 서슴지 않고 대답하였다. 제외된 문제들은 사도들의 이해하는 한계를 벗어났고 따라서 이런 질문에 대하여 그들과 이야기하기를 거절했다. 그들이 베다니에서 몰래 떠났으니까, 그들끼리만 자리에 있었다. 따라서 예수는 열 사도에게 여러 가지를 일러줄 기회를 가졌고, 이것이 바로 눈앞에 닥친 시련의 나날을 위하여 그들을 준비시킬 것이라 생각했다.
168:4.2 (1848.2) 사도들은 많이 흥분했고, 최근에 겪은 체험이 기도와 그 응답에 관계되었기 때문에, 그 체험을 논의하느라고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모두가 필라델피아에서 베다니 사자에게 예수가 하신 말씀을 상기했고, 그때 그는 분명히 말했다, “이 병은 정말로 죽음에 이르지 않느니라.” 그래도, 이렇게 장담했는데도, 나사로는 실제로 죽었다. 하루 내내, 그들은 기도의 응답에 관한 이 문제를 토론하는 일로 여러 번 되돌아갔다.
168:4.3 (1848.3) 여러 질문에 대하여 예수가 대답한 말씀을 다음과 같이 간추려도 좋다:
168:4.4 (1848.4) 1. 기도는 무한자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으로 유한한 지성이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드리는 것은 유한자의 지식ㆍ지혜ㆍ속성에 제한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그 응답은 무한자의 선견ㆍ목표ㆍ이상ㆍ특권에 제약을 받는다. 기도를 드리고 그에 대하여 충분한 영적 응답을 받는 사이에, 물질 현상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관찰할 수 없다.
168:4.5 (1848.5) 2. 하나의 기도에 응답이 없는 듯이 보일 때, 그 지연은 가끔, 더 좋은 대답을 가리킨다. 하지만 어떤 좋은 까닭이 있어서 크게 늦어지는 응답이다. 나사로의 병이 정말로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고 예수가 말했을 때, 그는 이미 죽은 지 11시간이 되었다. 영적 세계의 우수한 관점이 더 나은 응답을 고안했을 때를 제외하고, 어떤 진지한 기도도 응답을 받으며, 그것은 사람의 단순한 지성이 드리는 기도와 대조하여, 사람의 영이 드리는 간구(懇求)를 들어주는 응답이다.
168:4.6 (1848.6) 3. 영이 묘사하고 믿음으로 표현되었을 때, 시간 세계에서 드리는 기도는 흔히 너무나 광대하고 모든 것을 에워싸기 때문에 오직 영원 속에서만 응답을 받을 수 있다. 유한한 간구는 때때로 무한자의 통제가 너무 많기 때문에, 그 응답은 받아들일 적절한 능력의 창조를 기다리기까지 오래 미루어야 한다.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아주 모든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오직 파라다이스에서 그 응답을 받을 수 있다.
168:4.7 (1848.7) 4. 필사자의 지성이 드리는 기도에 대한 응답은 바로 그 기도하는 지성이 불멸의 상태에 다다른 뒤에야 받아들이고 인식할 수 있는 그러한 성질인 경우가 자주 있다. 물질 존재의 기도는 흔히 그런 개인이 영 수준으로 나아갔을 때에야 응답이 있을 수 있다.
168:4.8 (1848.8) 5. 하나님을 아는 개인의 기도는 무지로 인하여 너무 왜곡되고 미신(迷信)으로 일그러져서, 그에 대한 응답은 대단히 바람직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면 사이에 있는 영 존재들이 그런 기도를 다르게 해석해서, 그 응답이 올 때, 간구하던 사람은 그것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을 까맣게 깨닫지 못한다.
168:4.9 (1848.9) 6. 참된 기도는 모두 영적 존재들에게 드리는 것이요, 그런 간구는 다 영적 방법으로 응답이 있어야 하고, 그러한 응답은 다 영적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 물질 존재들이 드리는 영적 간구에도 영 존재들은 물질적 대답을 줄 수 없다. 물질 존재들은 “영적으로 기도할” 때에야 효과 있게 기도할 수 있다.
168:4.10 (1849.1) 7. 어떤 기도도 영에게서 태어나고 믿음으로 이를 육성하지 않으면 응답을 바랄 수 없다. 너의 신앙은 최고의 지혜와 신의 사랑이 너의 기도를 받는 존재들을 언제나 움직인다고 보며, 너의 진지한 신앙은 그런 지혜와 사랑에 따라서, 기도를 듣는 이들에게 네 간구에 응답할 완전한 권한을 네가 미리 실질적으로 주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168:4.11 (1849.2) 8. 아이가 감히 부모에게 간청을 드릴 때, 아이는 언제나 그럴 권리가 있다. 그리고 아이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늦추거나 수정하거나 분리하거나 초월하거나, 또는 영적으로 올라가는 다른 단계까지 미룰 것을 부모의 뛰어난 지혜가 명령할 때, 부모는 미숙한 아이에 대하여 언제나 부모로서 그렇게 할 책임이 있다.
168:4.12 (1849.3) 9. 망설이지 말고 영적으로 갈망하는 것을 위하여 기도하라. 네 간구에 응답받을 것을 의심하지 말라. 이 응답은 실제로 우주에서 달성하는 미래의 여러 영적 수준에 네가 도달하기를 기다리면서, 이 세계 아니면 다른 세계에서 저장되어 있을 것이요, 거기서 네가 예전에, 그러나 때 이르게 간청한 것들에 대하여, 오래 기다렸던 응답을 네가 인식하고 이용하기가 가능할 것이다.
168:4.13 (1849.4) 10. 영에게서 생겨난 모든 진정한 간구는 분명히 응답을 받는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라. 그러나 너희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 진보하는 사람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의 다양한 기도와 간구에 대하여 몸소 충분한 응답을 받는 체험을 겪으면서, 너희는 항상 시공 요인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68:5.1 (1849.5) 나사로는 진정한 많은 신자와 호기심 있는 수많은 사람에게 큰 관심의 초점이었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주간까지 베다니 집에 남아 있었는데, 그때 산헤드린이 그에게 사형(死刑)을 선포했다는 경고를 받았다. 유대인 권력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더 이상 퍼지는 것을 중지하기로 결의했고, 예수의 기적 행위의 바로 그 절정을 대표하는 나사로를 살려두고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려냈다는 사실을 증언하라고 버려둔다면, 예수를 사형에 처하는 것이 쓸모 없으리라고 똑바로 판단했다. 이미 나사로는 그들로부터 모진 박해를 받고 있었다.
168:5.2 (1849.6) 그래서 나사로는 두 자매를 베다니에 두고 서둘러 떠났고, 예리고를 거쳐 요단강을 건너 달아났으며, 필라델피아에 이를 때까지 결코 길게 쉬지 않았다. 나사로는 아브너를 잘 알았고, 여기서 그는 사악한 산헤드린의 살인 음모(陰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느꼈다.
168:5.3 (1849.7) 이 뒤에 곧, 마르다와 마리아는 베다니에 있던 토지를 처분해 버리고 페레아에서 나사로와 합세했다. 그동안에 나사로는 필라델피아 교회에서 회계(會計)가 되었다. 나사로는 아브너가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와 논쟁할 때 그를 굳게 지지하는 사람이 되었고, 67세가 되었을 때, 베다니에서 젊은이였을 때 그를 죽게 했던 똑같은 병으로 결국 죽었다.
169:0.1 (1850.1) 3월 6일 월요일 저녁 늦게, 예수와 열 사도는 펠라 캠프에 다다랐다. 이때는 거기서 예수가 머무르는 마지막 주간이었고, 그는 군중을 가르치고 사도들을 교육하는 데 매우 분주했다. 군중에게 매일 오후에 설교했고, 밤마다 사도들, 그리고 캠프에서 거하는 어떤 상급 제자들을 위하여 질문에 대답했다.
169:0.2 (1850.2) 주가 도착하기 이틀 전에 나사로가 부활했다는 소문이 야영지에 이르렀고, 집회 전체가 흥분에 들떠 있었다. 5천 명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후로, 사람들의 상상력을 이렇게 자극한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하늘나라의 대중 봉사에서 둘째 단계의 바로 그 절정에 이르러, 예수는 짧은 이 한 주 동안 펠라에서 가르치고 다음에 페레아 남부의 여행을 시작하기로 계획했으며, 이것은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주에 마지막 비극(悲劇)의 체험까지 바로 이끌었다.
169:0.3 (1850.3) 바리새인과 주사제들은 여러 죄목을 작성하고 고발 사항을 구체화하는 일을 이미 시작했다. 그들은 다음 이유로 주의 가르침을 비난하였다:
169:0.4 (1850.4) 1. 그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다. 불경한 자들을 받아들이고, 아니 그들과 함께 먹기까지 한다.
169:0.5 (1850.5) 2. 그는 신성을 모독하는 자요,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라고 말하고 자신이 하나님과 대등하다고 생각한다.
169:0.6 (1850.6) 3. 그는 율법을 어기는 자이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다른 여러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신성한 율법을 우롱한다.
169:0.7 (1850.7) 4. 그는 악마들과 결탁하고 있다. 악마의 왕, 비엘세붑의 힘으로 놀라운 일을 행하고 겉보기에 기적으로 보이는 일을 행한다.
169:1.1 (1850.8) 목요일 오후에 예수는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군중에게 말씀했다. 이 설교를 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동전 이야기를 다시 했고, 그리고 나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비유, 방탕한 아들의 비유를 덧붙였다. 예수는 말했다:
169:1.2 (1850.9) “사무엘로부터 요한에 이르기까지 선지자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진리를 추구하라고―훈계를 받았느니라. 언제나 저희는 말하되 ‘찾아낼 수 있는 동안 주를 찾으라’ 하였고, 모든 그러한 가르침을 마음 속에 간직해야 하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동안에,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너희를 찾고 있음을 보이려고 내가 왔노라. 우리에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서, 잃어버린 양 하나를 찾으러 떠난 선한 목자, 그리고 길 잃은 양을 찾아낸 뒤에, 그가 어떻게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부드럽게 우리로 지고 갔는가 하는 이야기를 내가 너희에게 여러 번 일렀느니라. 그리고 길 잃은 양을 우리에 되돌린 뒤에 선한 목자가 친구들을 부르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낸 것에 대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기를 청했음을 너희가 기억하느니라. 다시 내가 이르노니, 뉘우침이 필요 없는 올바른 사람 아흔 아홉보다 뉘우치는 죄인 하나를 놓고 하늘에서 더 크게 기뻐하느니라. 사람들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은 하늘 아버지의 관심을 더욱 돋울 뿐이라. 나는 내 아버지의 명령을 행하고자 이 세상으로 왔고, 사람의 아들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사람들이 언급한 것이 참말이라.
169:1.3 (1851.1) “너희가 뉘우친 뒤에, 너희가 희생물을 바치고 회개하는 모든 일의 결과로서, 그 뒤에 신이 너희를 받아들인다고 가르침을 받았으나 내가 너희에게 보장하노니, 아버지는 너희가 미처 뉘우치기도 전에 너희를 받아들이며, 너희를 찾아내고 다시 우리로, 아들이 되고 영적으로 진보하는 하늘나라로, 기뻐하며 너희를 데려오라고 아들과 그 동료를 보내시느니라.
169:1.4 (1851.2) “한 여인이 은화 열 잎을 장식 목거리로 만들고서 한 잎을 잃어버렸다가, 어떻게 등불을 켜고 그 집을 샅샅이 쓸고 잃어버린 은화를 찾아낼 때까지 계속 뒤졌는가 하는 이야기를 너희는 또한 기억해야 하느니라. 잃어버린 은전을 찾아내자마자 그 여자는 친구와 이웃들을 함께 부르고 말하였더라, ‘나와 함께 기뻐하자. 내가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냈음이라.’ 다시 내가 이르노니, 뉘우치고 아버지의 우리로 돌아오는 한 죄인을 놓고 하늘의 천사들 앞에서 언제나 기쁨이 있느니라. 아버지와 아들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나간다는 것을 너희에게 강조하려고 내가 이 이야기를 하노라. 이 탐색에서 길 잃은 자, 구원이 필요한 자를 찾아내려고 부지런히 노력할 때 우리는 도움이 될 수 있는 모든 영향력을 이용하느니라. 그래서 사람의 아들은 길 잃은 양을 찾으러 황무지로 나가며 또한 집에서 잃어버린 은전을 뒤지느니라. 양은 뜻하지 않게 길을 헤매며, 은전은 시간이 지나면서 먼지에 덮이고 사람들의 물건이 쌓임으로 감춰지느니라.
169:1.5 (1851.3) “그리고 이제 살림이 넉넉한 어느 농부의 아들, 생각이 모자라는 아들의 이야기를 너희에게 하고자 하노니, 그는 깊이 생각한 끝에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낯선 땅으로 가버렸고, 거기서 많은 시련(試鍊)에 부닥쳤더라. 너희는 뜻하지 않게 양이 길 잃은 것을 상기하지만, 이 젊은이는 미리 깊이 생각하고서 집을 떠났더라. 그 이야기는 이러하니라:
169:1.6 (1851.4)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더니, 나이 어린 아들은 명랑하고 구김이 없고, 언제나 즐거운 시간을 찾고 책임을 피하였으며, 한편 그 형은 심각하고 침착하고 열심히 일하며 기꺼이 책임을 졌더라. 자, 이 두 형제는 서로 잘 어울리지 않았고, 언제나 다투고 헐뜯었는지라. 어린 소년은 밝고 활발하였으나 게으르고 믿음직하지 않았으며, 나이 든 형은 꾸준하고 부지런하며 동시에 자기 중심이고 무뚝뚝하고 자만심이 있었더라. 동생은 놀기를 즐겼으나 일을 피하였고, 형은 일에 몰두하였어도 노는 일이 드물었더라. 이 관계가 아주 불쾌해져서 동생은 아버지께 가서 말하였더라: ‘아버지여, 아버지 재산 가운데 3분의 1, 내게 돌아올 몫을 주시고, 나로 하여금 출세 길을 찾으러 세상으로 나가게 하소서.’ 아버지가 이 요청을 들었을 때, 그 젊은이가 얼마나 집에서, 그리고 형과 지내기가 얼마나 불행한가 알았은즉, 재산을 나누어서 젊은이에게 그의 몫을 주었더라.
169:1.7 (1851.5) “몇 주 안에 그 젊은이는 자금을 모두 모아서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났고, 즐겁고도 이익 되는 일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였으므로, 곧 유산(遺産)을 모두 방탕한 생활에 낭비하였더라. 재산을 다 써버리고 나서, 그 나라에 오래 이어진 기근이 생겼고, 그는 궁핍에 빠졌더라. 그래서 배가 고프고 고생이 심했을 때, 그 나라의 한 시민에게서 일자리를 얻었는데, 이 사람은 돼지를 먹이라고 그를 들로 보냈더라. 그 젊은이가 돼지가 먹는 겨로 기꺼이 배를 채우고 싶었어도 누구 하나 그에게 아무것도 주려 하지 않았더라.
169:1.8 (1852.1) “어느 날, 몹시 배가 고팠을 때, 그가 제 정신이 들어 말하되, ‘내 아버지에게는 얼마나 많은 품꾼이 고용되어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빵이 있는가, 그런데 나는 여기 낯선 나라에서, 돼지를 먹이며 배가 고파서 죽는구나! 일어서서 아버지께로 가서, 내가 아버지께 이르리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나이다. 이제 더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 부름받기에 마땅치 아니하나이다. 다만 기꺼이 나를 아버지의 품꾼의 하나로 만들어 주소서.’ 이 결심이 서자, 젊은이는 일어서서 아버지의 집을 향하여 떠났더라.
169:1.9 (1852.2) “자, 이 아버지는 아들 때문에 크게 슬퍼하였는데, 생각은 없어도 명랑한 젊은이가 없어 서운했는지라. 이 아버지는 이 아들을 사랑하였고, 그가 돌아올까 늘 지키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가 자기 집으로 가까이 오는 날,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달려나가서 맞이하였고 반가운 인사로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더라. 그리고 이렇게 저희가 만난 뒤에, 아들이 아버지의 눈물 어린 얼굴을 올려다보고 말하되, ‘아버지여, 나는 하늘에, 또 아버지 보시기에 죄를 지었나이다. 나는 이제 아들이라 부름받을 자격이 없나이다’―그러나 그 젊은이는 고백을 마칠 겨를을 얻지 못하였으니,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아버지가 이때가 되자 달려오는 종들에게 이렇게 말했음이라: ‘그의 가장 좋은 옷, 내가 간직했던 옷을 얼른 가져와서 그에게 입히고, 아들의 반지를 손에 끼우고 신을 샌달을 가져오라.’
169:1.10 (1852.3) “그리고 나서, 기뻐하는 아버지가 발 아프고 지친 젊은이를 집으로 데리고 온 뒤에, 종들을 불렀더라: ‘살진 송아지를 가져다 잡으라.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았음이라. 그를 잃었다가 찾아냈느니라.’ 저희가 다 아버지 둘레에 모여서, 아들을 되찾은 것 때문에 그와 함께 기뻐하였더라.
169:1.11 (1852.4) “이 무렵에, 저희가 축하하고 있는 동안 맏아들이 들에서 하루 일을 마치고 들어왔고 집으로 가까이 오는 동안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를 들었는지라. 뒷문으로 다가와서 종들 가운데 하나를 불러내어 이 모든 잔치가 무슨 영문인가 물었더라. 그러자 그 종이 말하되 ‘오랫동안 잃어 버렸던 당신의 아우가 돌아왔고, 당신의 아버지가 아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기뻐하려고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들어와서 당신도 또한 아우를 맞이하고 당신 아버지의 집으로 그를 받아들이소서.’
169:1.12 (1852.5) “그러나 이 말을 들었을 때, 맏아들은 아주 마음이 상하고 성이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더라. 맏아들이 제 아우의 환영식을 분개한다는 말을 아버지가 듣고 그에게 간청하러 나왔더라. 그러나 맏아들은 아버지의 설득에 굽히려 하지 않았고 아버지께 이렇게 대답하였더라: ‘여기서 이 여러 해 동안 나는 아버지를 섬기었고, 아버지의 계명 중 가장 작은 것조차 한 번도 어기지 않았사온데 그래도 아버지는 내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새끼 염소 한 마리도 주지 아니하셨나이다. 이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보살피려고 여기 남아 있었어도 아버지는 나의 충실한 봉사를 결코 기뻐하지 않으셨사오나, 이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들과 탕진하고 돌아오는데,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서둘러 잡고 그 때문에 기뻐하시나이다.’
169:1.13 (1852.6) “두 아들을 참으로 사랑하였으므로 이 아버지는 이 맏아들을 설득하려고 애썼느니라: ‘그러나 아들아, 너는 나와 함께 죽 있었고, 내가 가진 이 모든 것이 네 것이라. 네가 함께 즐겁게 지내려고 친구들을 만들었다면 어느 때라도 네가 새끼 염소를 잡을 수 있었느니라. 그러나 네 아우가 돌아왔으니, 이제 네가 나와 함께 기뻐하고 즐기는 것이 마땅할 뿐이라. 아들아, 생각해 보라, 네 아우를 잃었다가 찾았고 그가 살아서 우리에게 돌아왔느니라!”
169:1.14 (1853.1) 이것은 청중에게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들어가기를 구하는 모든 사람을 기꺼이 받아들임을 강조하려고 예수가 일찍이 발표한 비유, 가장 감동적이고 효과적인 모든 비유 가운데 하나였다.
169:1.15 (1853.2) 예수는 이 세 이야기를 같은 때에 하기를 무척 좋아했다. 길 잃은 양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사람들이 뜻하지 않게 생명의 길로부터 벗어났을 때, 아버지가 그러한 길 잃은 사람을 염려하고, 양떼의 참 목자인 아들들과 함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간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물질적 걱정과 생활에서 쌓인 것 때문에 혼동하거나 어리둥절하거나 아니면 영적으로 눈먼 모든 사람을 얼마나 샅샅이 신이 찾고 있는가 보여주려고, 집에서 잃어버린 은전 이야기를 들려 주곤 했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의 집에서, 그리고 마음 속에서 잃어버린 아들의 지위가 얼마나 완벽하게 회복되는가 보여주려고, 이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돌아오는 탕자(蕩子)를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다.
169:1.16 (1853.3) 가르치던 여러 해 동안 아주 여러 번, 예수는 이 방탕한 아들의 이야기를 거듭 되풀이하였다. 이 비유와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아버지의 사랑과 사람의 이웃 정신을 가르치는 데 그가 가장 좋아한 수단이었다.
169:2.1 (1853.4) 어느 날 저녁 열심당원 시몬은 예수의 말씀 중 하나를 논평하며 말했다: “주여, 세상의 자녀들 가운데 다수가 불의의 재물을 써서 친구를 만드는 데 솜씨 있으므로 저희가 그 세대의 하늘나라 자녀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당신이 오늘 말씀하셨사온데 무슨 의미이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169:2.2 (1853.5) “너희 가운데 더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무척 기민(機敏)하게 사업 동료를 다루었느니라. 너희가 부당하고 때때로 불공평했다면, 그래도 너희가 오늘의 이익과 앞날의 안전에 열중하여 너희의 사업을 처리하였으므로, 너희는 신중하고 멀리 내다보는 눈이 있었느니라. 마찬가지로 현재의 즐거움을 마련하고 한편 또한 하늘에 쌓은 보물을 너희가 미래에 꼭 즐기도록, 너희는 이제 하늘나라 안에서 인생을 정리해야 하느니라. 자신을 위하여 일할 때 자기 이익을 얻느라고 너희가 아주 부지런하였거든, 너희가 이제 사람의 형제 단체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집사인즉, 어찌하여 하늘나라를 위하여 너희는 그리 부지런히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하느냐?
169:2.3 (1853.6) “재빠르지만 불의(不義)한 집사를 둔 어떤 부자의 이야기에서 너희는 모두 교훈을 얻을 수도 있느니라. 이 집사는 이기심으로 자기 이익을 위하여 주인의 손님들을 억압했을 뿐 아니라 또한 주인의 자금도 직접 낭비하고 탕진하였더라. 이 모두가 마침내 주인의 귀에 들어갔을 때, 그는 그 집사(執事)를 앞에 부르고 이 소문이 무슨 의미인가 물으며, 당장에 그 집사 직분에 관하여 보고하고 주인의 사무를 다른 자에게 넘겨줄 준비를 하라고 요구하였더라.
169:2.4 (1853.7) “이제 불충한 이 집사가 비로소 혼잣말을 하되, ‘내가 이 집사 자리를 잃으려 하니, 어찌하리요?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구걸하자니 부끄럽구나. 이 집사 자리에서 쫓겨났을 때, 내 주인과 거래하는 모든 사람의 집에서 내가 분명히 환영받도록 무슨 일을 할지 아노라.’ 그리고 나서, 주인에게 빚진 자를 하나씩 부르면서 첫 사람에게 묻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하니 그가 대답하되 ‘기름 1백 되라’ 하였더라. 그리고 나서 그 집사가 이르되 ‘너의 밀랍판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서 50이라 고치라.’ 그리고 나서 또 다른 빚진 자에게 ‘네가 얼마나 빚졌느냐?’ 물으니 그가 대답하되 ‘밀 1백 되라’하였고, 다음에 그 집사가 말하되 ‘네 계약서를 가지고 80이라 적으라’ 하였으며, 수많은 다른 빚진 자들에게 이렇게 하였더라. 그래서 정직하지 않은 이 집사는 제 직분에서 쫓겨난 뒤에 자신을 위하여 친구를 만들려고 애썼더라. 그의 주, 주인조차 나중에 이를 발견한 뒤에, 앞날의 궁핍과 역경에 대비하여 마련하려고 쓴 방법으로 그 불충한 집사가 적어도 현명함을 보였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더라.
169:2.5 (1854.1) “그리고 이런 방법으로 이 세상의 아들들은 빛의 자녀들보다 앞날을 위하여 준비하면서 더 지혜를 보이느니라. 하늘의 보물을 얻고 있다고 공언하는 너희에게 내가 이르노라: 불의의 재물과 사귀는 자들에게서 교훈을 얻고, 마찬가지로 너희 인생에 처신하여, 땅의 일이 모두 실패할 때 너희가 영원한 거처에서 기쁘게 환영받도록 올바른 세력과 영원한 우정(友情)을 맺으라.
169:2.6 (1854.2) “내가 단언하노니, 작은 일에 충실한 자는 큰 일에도 충실하며, 한편 작은 일에 불의한 자는 또한 큰 일에도 불의하리라. 너희가 이 세상 일에 선견과 인품을 보이지 않았으면, 너희에게 하늘나라의 참된 재산의 관리를 맡겼을 때 어찌 너희가 충실하고 신중하기를 바랄 수 있느냐? 너희가 선한 집사요 충실한 은행가가 아니고 너희가 다른 사람의 재산을 충실히 다루지 않았다면, 누가 그리 어리석어 너희 이름으로 너희에게 큰 보물을 주겠느냐?
169:2.7 (1854.3) “그리고 다시 내가 주장하노니,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느니라. 사람이 하나를 미워하고 다른 하나를 사랑하든지, 아니면 하나에 매달리면서 다른 하나를 경멸하리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느니라.”
169:2.8 (1854.4)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재산을 모으는 데 탐닉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웃고 코웃음치기 시작했다. 적의(敵意)를 가진 이 사람들은 예수를 무익한 논쟁에 말려들게 하려고 애썼지만, 그는 적들과 토론하려 하지 않았다. 바리새인들끼리 말다툼에 빠졌을 때, 그 시끄러운 말소리가 근처에서 야영하는 큰 군중의 눈을 끌었고 그들이 서로 다투기 시작했을 때, 예수는 물러나서 밤을 지내려고 자기 텐트로 갔다.
169:3.1 (1854.5) 모임이 너무 시끄러워졌을 때, 시몬 베드로가 일어나서 지휘하며 말했다: “여러분, 형제들아, 이렇게 너희 사이에 다투는 것이 보기가 딱하구나. 주는 말씀을 마쳤고, 너희는 그의 말씀을 숙고하는 것이 좋으니라. 이것은 주가 너희에게 새로 선포한 교리가 아니라. 부자와 거지에 관한 나지르인의 우화(寓話)를 너희가 또한 들은 적이 없느냐? 우리 가운데 더러는 재물을 사랑하고 부당한 재산을 탐내는 자에게 경고하는 이 비유를 세례자 요한이 천둥처럼 외치는 것을 들었느니라. 이 옛 비유는 우리가 설파하는 복음과 일치하지 않아도, 하늘나라의 새 빛을 이해하는 때가 오기까지 너희는 다 그 교훈을 주목하는 것이 좋으리라. 요한이 일러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으니라:
169:3.2 (1854.6) “디베스라 이름하는 어떤 부자(富者)가 있었는데, 자주 옷과 고운 리넨을 입고 날마다 명랑하고 찬란하게 살았는지라. 그리고 나사로라 이름하는 어떤 거지가 있었는데, 그는 헌데가 가득한 채로 이 부자 집 대문에 누워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싶어 하였더라. 그렇다, 개들까지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더라. 그러다가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쉬었더라. 그리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이 부자도 죽고, 크게 화려하고 임금처럼 찬란하게 매장되었느니라. 이 세상을 떠나자, 그 부자는 지옥에서 깨어났고 자신이 고통스러움을 발견하고서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안긴 나사로를 보았는지라. 그러자 디베스가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게 자비를 베푸시고, 나사로를 이리로 보내사 손가락 끝을 물에 담가 내 혀를 식히게 하소서, 내 벌 때문에 내가 크게 괴로움이니이다.’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이 대답하되 ‘이 사람아, 너는 일생 동안 좋은 것을 누렸고, 나사로는 마찬가지로 나쁜 것을 견디었음을 네가 기억해야 하느니라. 그러나 나사로는 위로를 받는데 네가 고통 받는 것을 보니, 이제 이 모두가 바뀌었구나. 게다가 우리와 너 사이에 큰 심해(深海)가 있어, 우리가 너한테 갈 수 없고 너도 우리에게 건너올 수 없느니라.’ 그리고 나서 디베스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더라, ‘내게 다섯 형제가 있으니, 내 형제들이 이 고통스러운 곳으로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나사로가 증언하도록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려보내시기를 내가 비나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 사람아,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저희의 말을 듣게 하여라.’ 그리고 나서 디베스가 대답하되, ‘아니, 아니,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그러나 한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서 저희에게 가면, 저희가 뉘우치리이다.’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이 말하였더라, ‘저희가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한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지언정 저희가 알아듣지 못하리라.’”
169:3.3 (1855.1) 베드로가 나지르인 단체의 이 옛 비유를 이야기한 뒤에, 그리고 군중이 조용해졌기 때문에 안드레가 일어나서 밤 동안에 자라고 해산했다. 사도와 제자들이 예수에게 디베스와 나사로의 비유에 대하여 자꾸 물었어도, 예수는 거기에 대하여 아무런 논평을 하지 않았다.
169:4.1 (1855.2) 사도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선포했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임금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에게 설명하려고 애쓰는 데 예수는 언제나 애를 먹었다. 예수가 땅에서 살고 육체를 입고 가르쳤을 때, 유란시아의 사람들은 대체로 여러 나라 정부에 있는 임금과 황제들에 대하여 알았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을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다. 이것과 기타 이유 때문에, 주는 사람의 영적 단체를 하늘나라라고, 이 단체의 영적 우두머리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결코 아버지를 임금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사도들과 친밀하게 나눈 이야기에서 그는 언제나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서, 그들의 형으로 언급했다.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을 인류의 하인으로, 하늘나라 복음의 사자로 묘사했다.
169:4.2 (1855.3) 예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격과 속성에 관하여 사도들에게 체계적 수업을 준 적이 없었다. 그는 결코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았고, 그들이 믿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예수는 아버지가 실재함을 증명하는 논리를 내놓음으로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아버지에 관한 그의 가르침은 모두, 그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아들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아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안다, 오로지 아들, 그리고 아들로부터 아버지를 계시받을 자가 정말로 아버지를 안다, 아들을 아는 자는 또한 아버지를 안다, 그리고 그들의 통합된 성질을 드러내고 그들이 결합하여 하는 일을 보이려고 아버지가 그를 세상으로 보냈다는 선언에 집중된다. 야곱의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은 영이라”고 선포했을 때를 제쳐놓고, 아버지에 대하여, 주는 결코 다른 선언을 한 적이 없다.
169:4.3 (1856.1) 예수의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 그의 일생이 신다운 것을 관찰함으로 너희는 그로부터 하나님에 관하여 배운다. 주의 일생으로부터 너희는 각자 하나님 개념을 소화할지 모르며, 이 개념은 영적이고 신성한 실체, 실재하는 영원한 진리를 깨닫는 너희 능력의 정도를 가리킨다. 나사렛 예수의 인생에서, 유한한 체험을 겪은 그 시공 인격 안에 무한자가 집중된 경우를 제외하고, 유한자는 결코 무한자를 이해하기를 바랄 수 없다.
169:4.4 (1856.2) 오직 체험을 실제로 겪어야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결코 지적 가르침만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예수는 잘 알았다. 사도들이 결코 하나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어도, 그들이 사람의 아들을 알고 지내온 것 같이, 아주 확실히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고 예수는 사도들을 가르쳤다. 예수가 말씀한 것을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어떤 분이었는가를 깨닫고서 너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였다.
169:4.5 (1856.3) 히브리 성서를 인용(引用)할 때를 제외하고, 예수는 하나님과 아버지, 오직 이 두 이름으로 신을 언급했다. 그의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주가 언급했을 때, 유대인의 부족 신의 진보된 개념을 대표한 야웨라는 낱말이 아니라, 여럿인 하나님(삼위일체)를 가리키는 히브리 단어를 보통 사용했다.
169:4.6 (1856.4) 예수는 결코 아버지를 임금이라 부르지 않았고, 유대인들이 왕국의 회복을 희망하고 요한이 한 왕국이 다가온다고 선포했기 때문에, 자신이 제안한 영적 형제 정신을 하늘나라라 이름 붙이는 것이 필요했음을 무척 유감으로 생각했다. 한 가지 예외―”하나님은 영이라”는 선언―을 제외하고, 예수는 결코 파라다이스의 첫째 근원 중심과 자신의 개인적 관계를 설명하는 조건이 아닌 어떤 다른 방법으로 신을 언급하지 않았다.
169:4.7 (1856.5) 예수는 신 개념을 가리키려고 하나님이라는 낱말을 쓰고, 하나님을 아는 체험을 가리키려고 아버지라는 낱말을 썼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데 아버지라는 낱말이 쓰일 때, 가능한 가장 큰 뜻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하나님이라는 낱말은 정의를 내릴 수 없고, 따라서 아버지의 무한한 개념을 대표하며, 한편 아버지라는 용어는 부분적으로 정의(定義)를 내릴 수 있으니까, 필사자로 존재하는 과정에서 사람과 상관되는 대로, 신다운 아버지에 대하여 인간이 가진 개념을 대표하는 데 써도 좋다.
169:4.8 (1856.6) 유대인에게 엘로힘은 신 중의 신이었고, 한편 야웨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다. 예수는 엘로힘 개념을 받아들였고, 이 최고 집단의 존재들을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종족의 신 야웨 개념 대신에, 하나님이 아버지요 사람은 세상에 두루 형제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그는 신화(神化)된, 종족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야웨 개념을 사람의 모든 자손의 아버지라, 개별 신자의 신다운 아버지라는 관념으로 높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주의 이 하나님과 모든 사람의 이 아버지는 하나요, 동일한 파라다이스 신이라고 가르쳤다.
169:4.9 (1856.7) 예수는 결코 그가 엘로힘(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나타난 것이라 주장하지 않았다. 그가 여러 세상에 대하여 엘로힘(하나님)를 계시하는 자라고 결코 선언하지 않았다. 그를 본 사람이 엘로힘(하나님)을 보았다고 결코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아버지가 육체의 모습으로 계시(啓示)된 것이라고 선언했고, 그를 본 자는 누구나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했다. 신다운 아들로서 그는 오로지 아버지를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169:4.10 (1857.1) 정말로 주는 엘로힘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하나님의 필사 아들들에게, 그런 계시를 필사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한, 일생의 계시를 아버지 성품의 묘사에 국한하기로 하였다.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다른 성격자들의 성품에 관하여 말하면, 우리는 그들이 전적으로 아버지와 같다는 가르침에 만족해야 할 것이고, 아버지는 육신화한 아들, 나사렛 예수의 일생에 담긴 인품 묘사에 드러났다.
169:4.11 (1857.2) 땅에서 일생을 살면서 하늘 아버지의 참 성품을 드러내기는 했어도, 예수는 아버지에 대하여 거의 가르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오직 두 가지만 가르쳤다: 하나님 자신은 영이며, 지음받은 존재들과 가지는 관계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에서 아버지라는 것이다. 이날 저녁에 “나는 아버지로부터 왔고 나는 이 세상으로 왔노라. 또 나는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리라” 선언했을 때, 예수는 자기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하여 최종 선언을 했다.
169:4.12 (1857.3) 그러나 너희는 잘 들어라! 예수는 결코 “내 말을 들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하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였다.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대등하지 않지만, 예수를 보는 것은 그 자체로서 아버지를 그 사람에게 계시하는 그런 체험이다. 우주들의 하나님은 방대한 창조를 다스려도, 자기의 영을 너희 지성 안에 거하라고 보내는 분은 하늘에 계신 그 아버지이다.
169:4.13 (1857.4) 예수는 인간의 모습을 가진 영적 렌즈요, 이 렌즈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분을 물질 인간이 볼 수 있게 만든다. 그는 너희의 형이요, 육체를 입고서, 하늘의 무리들조차도 감히 넉넉히 이해할 수 없는 무한한 속성을 가진 한 존재를 너희가 이해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개별 신자가 몸소 겪는 체험에 있음이 틀림없다. 하나님은 영이고, 오직 영적 체험으로서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영적 영역을 다스리는 신다운 아들들은 하나님을 오직 아버지로서 물질 세계의 유한한 아들들에게 드러낼 수 있다. 너희는 영원자가 아버지인 것을 알 수 있고, 그를 우주의 하나님, 모든 존재의 무한한 창조자로 예배할 수 있다.
170:0.1 (1858.1) 3월 11일, 토요일 오후에, 예수는 펠라에서 마지막으로 설교하였다. 이것은 그의 대중 봉사에서 주목할 만한 연설에 속하며, 하늘나라에 대하여 충분하고 완벽한 논설을 담고 있다. 그는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의 뜻과 중요성에 관하여, 사도와 제자들의 머리 속에 혼란이 존재하는 것을 알았고, 이 두 가지를 자신 수여 사명에서 서로 바꿀 수 있는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하늘의 나라라는 바로 그 용어는 그것이 대표하는 의미를 땅의 나라 및 현세의 정부들과 전혀 상관 없이 구분하기에 충분해야 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단 한 세대 안에 없애기에는 현세의 임금 관념이 유대인 머리 속에 너무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육성해 온 이 왕국 개념을 예수는 처음에 드러내놓고 반대하지 않았다.
170:0.2 (1858.2) 이 안식일 오후에 주는 하늘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분명히 밝히려고 애썼다. 그 주제를 모든 관점에서 논의하고, 그 용어가 어떤 많은 다른 의미로 쓰였는가 밝히려고 애썼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전 경우에 예수가 하신 수많은 말씀을 덧붙이고, 바로 이날 저녁 토론 시간에 사도들에게만 주신 논평을 얼마큼 넣어서 그 연설을 확대하겠다. 우리는 또한 하늘나라 관념이 후일에 기독교회에 관계되는 대로, 나중에 결국 어떻게 되어 갔는가 다루는 논평을 더러 하겠다.
170:1.1 (1858.3) 예수의 설교를 발표하는 것과 관련하여, 히브리 성서 전체에 걸쳐서 하늘나라에 관하여 두 가지 개념이 있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70:1.2 (1858.4) 1. 오늘의 현실로서, 그리고
170:1.3 (1858.5) 2. 앞날의 희망으로서―메시아가 출현하고 나서 하늘나라가 충만하게 실현될 때. 이것이 세례자 요한이 가르쳤던 하늘나라 개념이었다.
170:1.4 (1858.6) 맨 처음부터 예수와 사도들은 이 두 개념을 다 가르쳤다. 머리 속에 간직해야 할 두 가지 다른 하늘나라 이념이 있었다.
170:1.5 (1858.7) 3. 후일에 유대인이 가진 개념, 곧 초자연적 기원을 가지고 기적으로 개시되는 세계적 초월 왕국의 개념.
170:1.6 (1858.8) 4. 세상이 끝날 때 선이 악에 승리함으로 신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그리는 페르시아인의 가르침.
170:1.7 (1858.9) 예수가 땅에 오시기 바로 전에 유대인은 이 모든 하늘나라 이념을 유대인이 승리하는 시대를 개시하려고 메시아가 온다는 묵시적 개념으로 통합하고 혼동하였다. 이 시대는 땅에서, 새 세상에서, 하나님이 최상으로 다스리는 영원한 시대, 온 인류가 야웨를 예배할 시대였다. 이 하늘나라 개념을 이용하기로 하면서 예수는 유대 및 페르시아 종교의 가장 중요한 최고의 유산(遺産)을 이용하기로 작정했다.
170:1.8 (1859.1) 기독교 시대의 여러 세기를 통하여 사람들이 이해하고 오해한 바와 같이, 하늘나라는 네 가지 뚜렷이 다른 집단의 관념을 담고 있다:
170:1.10 (1859.3) 2. 페르시아인의 개념.
170:1.11 (1859.4) 3. 몸소 체험한다는 예수의 개념―”너희 안에 있는 하늘나라.”
170:1.12 (1859.5) 4. 기독교를 창시하고 전파한 자들이 세상에 강조하려고 애쓴, 복합되고 혼동된 개념들.
170:1.13 (1859.6) 다른 때와 달라지는 상황에서, 예수는 대중을 가르칠 때 수많은 “하늘나라” 개념을 제시한 듯하지만, 사도들에게 언제나 하늘나라는 땅에 있는 동료들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가지는 관계에서 사람이 몸소 겪는 체험을 포함하는 것이라 가르쳤다. 하늘나라에 관하여, 그의 마지막 말씀은 언제나 “너희 안에 있는 나라”였다.
170:1.14 (1859.7) “하늘나라”라는 용어의 뜻에 관하여 여러 세기에 걸쳐 있던 혼동은 다음 세 가지 요인 때문이다:
170:1.15 (1859.8) 1. 예수와 사도들이 “하늘나라” 개념을 다시 진술하는 여러 진보적 단계를 거침에 따라서 그 하늘나라 개념을 지켜보고서 생긴 혼동.
170:1.16 (1859.9) 2. 유대 지방에서 이방의 땅으로 초대(初代) 기독교를 옮겨 심는 것과 불가피하게 연결된 혼동.
170:1.17 (1859.10) 3. 기독교가 그 핵심 관념인 예수의 인물에 관하여 조직된 종교가 되었다는 사실에 처음부터 생긴 혼동. 하늘나라 복음은 갈수록 더 그에 관한 종교가 되었다.
170:2.1 (1859.11)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진리,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람이 형제라는 사실, 이 두 가지 개념으로 시작되고 거기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는 분명히 밝혔다. 그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랜 세월에 걸친 동물적 공포의 속박으로부터 사람을 해방하고, 동시에 영적으로 자유로운 새 삶이 부여하는 다음 재산으로, 인간의 생활을 풍성하게 할 것이라고 예수는 선언했다:
170:2.2 (1859.12) 1. 새로운 용기와 늘어난 영적 힘을 소유하는 것. 하늘나라 복음은 사람을 해방하고 사람이 영생(永生)을 감히 바라도록 격려할 것이다.
170:2.3 (1859.13) 2. 그 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아니 가난한 사람에게도, 새로운 확신과 참된 위로의 말씀을 담았다.
170:2.4 (1859.14) 3. 복음 자체가 도덕적 가치의 새 표준이요, 인간의 행위를 재는 새 윤리의 자였다. 복음은 그 결과로 생기는 새 체제의 인간 사회의 이상을 묘사했다.
170:2.5 (1859.15) 4. 그 복음은 물질적인 것에 비하여 영적인 것이 우수하다고 가르쳤다. 영적 실체들을 영화롭게 하고 초인간적 이상을 찬미했다.
170:2.6 (1860.1) 5. 이 새 복음은 영적 달성을 인생의 참된 목표로 높였다. 인간의 생명은 도덕적 가치와 신다운 위엄을 띠는 새 자질을 받았다.
170:2.7 (1860.2) 6. 영원한 실체들은 땅에서 올바르게 애쓴 결과라(그에 대한 보상이라)고 예수는 가르쳤다. 고귀한 운명을 깨닫는 결과로서, 땅에서 사람이 필사자로 머무르는 일은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170:2.8 (1860.3) 7. 인간의 구원은 원대한 신의 목적의 계시임을 새 복음이 확인했으며, 신의 목적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아들들이 끝없이 봉사하는 미래 운명에 성취되고 실현될 것이다.
170:2.9 (1860.4) 이 여러 가르침은 예수가 가르쳤던 확대된 하늘나라 이념을 담는다. 이 위대한 개념은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 초보이며 뒤범벅이 된 하늘나라 가르침에 거의 담겨 있지 않다.
170:2.10 (1860.5) 사도들은 하늘나라에 관하여 주가 발표하신 말씀의 참 뜻이 무엇인가 깨우칠 수 없었다. 신약(新約)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의 가르침이 후일에 왜곡된 것은 복음서 기록자들의 개념이 예수가 그때 세상에서 잠시만 자리를 비우고, 권능과 영광을 입고 하늘나라를 세우려고 곧 돌아올 것이라는 관념에―그가 육체를 입고 함께 있는 동안 그들이 지녔던 것과 같은 바로 그런 생각에―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새 시대”의 도래를 가리키는 아무 징조도 없이 여러 세기가 지났다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
170:2.11 (1860.6) 이 설교에 담겨 있는 대단한 노력은 하늘나라 개념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상적 관념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였다. 오랫동안 주는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기를 가르쳤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때 그는 같은 뜻이지만 더 실용적 용어, 하나님의 뜻을 사용하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를 그들이 사용하지 않도록 유인하려고 진지하게 애썼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170:2.12 (1860.7) 예수는 왕국ㆍ임금ㆍ백성 관념 대신에 하늘 가족, 하늘 아버지, 그리고 동료 인간을 위하여 기쁘게 자원하여 봉사하며 아버지 하나님을 숭고하고 총명하게 섬기는 데 몰두하는, 하나님의 해방된 아들들, 이 세 가지 개념으로 갈아치우기를 바랐다.
170:2.13 (1860.8) 이때까지 사도들은 하늘나라에 대하여 두 가지 관점을 습득했고, 다음과 같이 보았다:
170:2.14 (1860.9) 1. 그 당시에 참 신자들의 마음 속에 있던, 몸소 체험하는 문제, 그리고
170:2.15 (1860.10) 2. 종족이나 세계 현상의 문제. 하늘나라가 미래에 온다는 것, 기대할 어떤 것.
170:2.16 (1860.11) 사도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하늘나라가 오는 것을, 마치 반죽 속에 있는 누룩과 같거나 겨자씨가 자라는 것 같은, 점진적 발전으로 보았다. 종족의 의미나 세계적 의미에서 하늘나라의 도래는 갑작스럽고 볼 만하리라고 믿었다. 예수는 하늘나라가 상급의 영적 생활을 실천하는 그들의 개인적 체험이라, 영을 체험하는 이 실체들은 신처럼 확실하고 영원히 장대한 새로운 상급 수준까지 점진적으로 변화된다고, 지치지 않고 그들에게 일러주었다.
170:2.17 (1860.12) 이날 오후에 다음 두 단계를 묘사했으므로, 주는 하늘나라의 두 가지 성질에 관한 새로운 개념을 뚜렷이 가르쳤다:
170:2.18 (1860.13) “첫째.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최고의 소망. 사람을 사심없이 사랑하는 것, 이것은 개선(改善)된 윤리적ㆍ도덕적 행위와 같은 좋은 열매를 맺는다.
170:2.19 (1861.1) “둘째.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필사 신자들의 목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완전해지고, 하나님의 뜻이 더욱 신답게 이루어지는 상태.”
170:2.20 (1861.2) 예수는 신자들이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지금 들어간다고 가르쳤다. 여러 강론에서 두 가지가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수라고 가르쳤다:
170:2.21 (1861.3) 1. 믿음, 성실성. 어린아이처럼 와서, 아들 신분의 수여를 선물로 받는 것. 묻지 않고, 아버지의 지혜로움을 완전히 믿고 진심으로 의지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복종하는 것. 전혀 편견과 선입관(先入觀)이 없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것. 버릇이 나빠지지 않은 어린이처럼, 생각이 트여 있고 배울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
170:2.22 (1861.4) 2. 진리를 간절히 찾기. 올바름을 목마르게 찾는 것. 생각의 변화, 하나님과 같이 되고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동기를 얻는 것.
170:2.23 (1861.5) 죄는 결함이 있는 성품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복종하지 않는 의지에 지배된, 고의적 지능의 소산이라고 예수는 가르쳤다. 죄에 관하여 말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셨다, 우리의 동료를 용서하는 행위가 그러한 용서를 개인적으로 소용되게 만든다고 가르쳤다. 육체를 입은 네 형제를 용서할 때, 그렇게 함으로 자신의 혼 속에서 너는 하나님이 바로 너의 잘못을 용서하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만들어낸다.
170:2.24 (1861.6) 사도 요한이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관한 이야기를 비로소 기록할 무렵에, 초대의 기독교인은 박해의 근원인 하나님의 나라 관념 때문에 너무 곤경을 겪어서, 대체로 그 용어(用語)의 사용을 포기하였다. 요한은 “영생”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했다. 예수는 영생을 또한 “생명의 나라”라고 이야기했다. 또한 “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자주 언급했다. 한때 그러한 체험을 “아버지 하나님과 가지는 가족의 친교”라고 말했다. 예수는 많은 용어를 하늘나라 대신에 쓰려고 애썼지만, 언제나 성공하지 못했다. 다른 것 가운데, 다음을 썼다: 하나님의 가족, 아버지의 뜻, 하나님의 친구들, 신자들의 친교, 사람의 형제 정신, 아버지의 양 떼, 하나님의 자녀, 충실한 자들의 친교, 아버지를 섬기는 것, 하나님의 해방된 아들들.
170:2.25 (1861.7) 그러나 그는 하늘나라 관념의 사용을 피할 수 없었다. 50년도 더 지난 뒤에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파괴한 뒤까지 이 하늘나라 개념은 영생(永生) 종파로 바뀌기 시작하지 않았고, 한편 재빨리 커지고 틀이 잡혀가는 기독교회가 하늘나라의 사회적ㆍ제도적 모습을 이어받았다.
170:3.1 (1861.8) 어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세상이 보는 앞에서 아주 허세부리며 과시한, 종처럼 따라 행하는 올바름을 뛰어넘을 그러한 올바름을 사도와 제자들이 신앙으로 얻어야 한다고 예수는 언제나 애써서 강조하였다.
170:3.2 (1861.9) 믿음, 어린애 같이 단순한 믿음이, 하늘나라 문의 열쇠라고 가르쳤지만, 예수는 또한 문으로 들어간 뒤에, 하나님의 건장한 아들의 어른 키까지 자라기 위하여, 모든 믿는 어린아이가 올라가야 하는, 점진적 올바름의 단계가 있다고 가르쳤다.
170:3.3 (1861.10)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기법(技法)을 고려할 때 사람이 하늘나라의 올바름에 도달했는가가 드러난다. 믿음은 하나님의 가족에 들어가는 데 너희가 치르는 값이다. 그러나 용서(容恕)는 너희의 믿음을 입장료로 받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하늘나라를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한 실제 체험을 수반하며, 다음 네 단계로, 마음 속의 올바름을 얻는 하늘나라 단계로 이루어진다:
170:3.4 (1862.1) 1. 하나님의 용서는 사람이 동료를 용서하는 바로 그 한도까지, 실제로 이용할 수 있고 몸소 체험한다.
170:3.5 (1862.2) 2. 사람은 동료를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참으로 동료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170:3.6 (1862.3) 3. 이처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가장 높은 윤리이다.
170:3.7 (1862.4) 4. 그렇다면 도덕적 행위, 참된 올바름은 그러한 사랑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170:3.8 (1862.5) 그러니까 하늘나라의 참된 종교, 마음 속의 종교는, 어김없이 더욱, 사회에 봉사하는 실용적 경로에서 명시(明示)되는 경향이 있음이 분명하다. 예수는 신자들이 어쩔 수 없이 사랑으로 봉사에 종사하게 만드는 그러한 살아 있는 종교를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는 종교를 대신하는 자리에 윤리를 두지 않았다. 종교는 원인이요 윤리는 결과라고 가르쳤다.
170:3.9 (1862.6) 어떤 행위가 올바른가는 동기(動機)에 따라서 재야 한다. 따라서 가장 높은 형태의 선은 의식되지 않는다. 예수는 도덕률이나 윤리 그 자체에 결코 관여하지 않았다.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과 가지는 마음 속의 영적 친교에만 온통 관심을 가졌고, 그런 친교는 사람을 위하여 겉에서 사랑으로 베푸는 봉사로서, 아주 확실히 직접 나타난다. 하늘나라의 종교는 아무도 몸 안에 가둘 수 없는 몸소 겪는 진정한 체험이다, 신자 가족의 한 사람임을 의식(意識)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가족 행위 교훈을 실천하는 것으로, 곧 형제 정신을 높이고 확대하려는 노력으로, 형제와 자매에게 봉사하는 길로 인도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170:3.10 (1862.7) 하늘나라의 종교는 개인적ㆍ개별적 종교이다. 그 열매, 그 결과는 가족과 사회에 나타난다. 예수는 공동체와 대조하여 어김없이 개인의 신성함을 높였다. 그러나 사람은 사심(私心) 없는 봉사로 인품을 기른다는 것, 사람은 동료를 사랑하는 관계에서 도덕적 성품을 펼친다는 것을 그는 또한 인식했다.
170:3.11 (1862.8) 하늘나라가 마음 속에 있다고 가르치고 개인을 높임으로 사회의 참된 올바름을 실현하는 새 섭리 시대를 열었으니까, 예수는 옛 사회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 세상이 이 새 체제의 사회를 거의 알지 못한 것은 세상이 하늘나라 복음의 원칙을 실행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우수한 이 하늘나라가 땅에 다가올 때, 단지 개량된 사회적ㆍ물질적 조건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향상되고 강화된 영적 가치의 영화로움에서 나타날 것이요, 그러한 가치는 다가오는 시대의 특징, 개선된 인간 관계와 진보하는 영적 성취의 특징을 나타낸다.
170:4.1 (1862.9) 예수는 하늘나라를 결코 엄밀하게 정의하지 않았다. 한때 하늘나라의 한 국면에 대하여 강론하고, 또 다른 때에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런 형제들의 다른 모습을 이야기하곤 했다. 이 안식일 오후에 설교하는 과정에서, 예수는 적어도 하늘나라의 다섯 단계나 시대를 주목하였으니, 다음과 같다:
170:4.2 (1862.10) 1. 개별 신자가 아버지 하나님과 친교하는 영적 생활을 개인적으로 마음 속에서 겪는 체험.
170:4.3 (1863.1) 2. 복음을 믿는 사람들의 확대되는 형제 단체, 곧 개별 신자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영이 다스리는 결과로 도덕률이 향상되고 윤리가 자극되는 사회적 모습.
170:4.4 (1863.2) 3. 땅과 하늘에 널리 퍼져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의 초월 필사 형제 단체. 인간을 초월하는 자들의 하나님의 나라.
170:4.5 (1863.3) 4. 하나님의 뜻이 더욱 완벽하게 이루어진다는 기대, 개선된 영적 생활과 관련하여 새 사회 체제―사람의 다음 시대―의 여명을 향한 전진.
170:4.7 (1863.5) 그러므로 주가 하늘나라라는 용어를 쓸 때, 이 다섯 단계 가운데 어느 것을 언급하는가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주의 가르침을 검토해야 한다. 사람의 뜻을 차츰차츰 바꾸는 이 과정으로, 이렇게 인간의 결정에 영향을 미침으로, 미가엘과 그 동료들은 마찬가지로, 사회적 및 기타 형태의 과정, 인간의 진화 과정 전체를 차츰차츰, 하지만 확실히 바꾸고 있다.
170:4.8 (1863.6) 주는 이 기회에 하늘나라 복음의 가장 중요한 모습을 대표하는 다음 다섯 항목을 강조했다:
170:4.9 (1863.7) 1. 개인이 첫째로 중요하다.
170:4.10 (1863.8) 2. 사람의 체험에서 결정 요소인 의지.
170:4.11 (1863.9) 3. 아버지 하나님과 영적 친교를 가지는 것.
170:4.14 (1863.12) 이 세상은 예수가 가르친 하늘나라 교리의 힘찬 관념과 신다운 이상을 한번도 심각하게, 진지하게, 또는 정직하게 시험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너희는 유란시아에서 하늘나라 관념이 겉보기에 느리게 진보한다고 낙심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 나아가는 진화(進化)의 순서는 물질과 영, 이 두 세계에서 갑작스럽고 예상하지 못하게 주기적 변화를 거친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육신화된 아들로서 예수가 수여된 것은 세상의 영적 생활에서 바로 그러한 이상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하늘나라가 오는가 시대적 증표를 찾느라고 자신의 혼 속에서 하늘나라를 세우지 못하는 치명적 잘못을 저지르지도 말라.
170:4.15 (1863.13) 예수가 하늘나라의 한 단계를 미래로 넘겼고, 수많은 경우에 그러한 사건이 세계적 위기의 일부로서 나타날 수도 있다고 넌지시 비추기는 했어도,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가 아주 확실히, 몇 번이나 유란시아로 언젠가 돌아올 것을 분명히 약속했더라도, 결코 이 두 개념을 확실히 한데 연결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적어야 한다. 그는 땅에서, 어느 미래에 하늘나라를 새로이 계시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언젠가 이 세상으로 친히 돌아오리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이 같은 의미를 가졌다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모든 지식을 종합해 보건대, 이 두 약속은 같은 사건을 언급할지도,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170:4.16 (1863.14) 사도와 제자들은 이 두 가르침을 함께 연결지은 것이 아주 확실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이 기대했던 대로 구체화되지 않았을 때, 앞날의 나라에 관한 주의 가르침을 상기하고 그가 다시 오리라는 약속을 기억하면서, 그들은 이 두 약속이 동일 사건을 언급한다고 서둘러 단정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완벽하게, 권능과 영광으로 하늘나라를 세우려고 예수가 즉시 다시 오기를 희망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뒤이은 신자 세대들은 영감을 주지만 헛된 바로 그 희망을 품고서 땅에서 계속 살았다.
170:5.1 (1864.1) 하늘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요약했으므로, 우리는 하늘나라 관념에 붙게 된 어떤 후일의 관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하늘나라가 미래 시대에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가, 하늘나라를 미리 예측하도록 허락받았다.
170:5.2 (1864.2) 기독교가 전파되는 처음 몇 세기를 통해서 내내, 하늘나라 관념은 그때 재빨리 퍼지는 그리스인의 이상주의 개념, 자연의 것은 영적인 것의 그림자―현세의 것은 영원한 것이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그림자―라는 관념에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다.
170:5.3 (1864.3) 그러나 유대인의 땅에서 이방인의 땅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옮겨심은 것을 표시한 큰 걸음은 하늘나라의 메시아가 교회에서 구원자가 되었을 때였는데, 교회는 바울과 그 후계자들의 활동으로부터 생겨나고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를 둔 종교적ㆍ사회적 조직이었으며, 그 가르침은 필로의 여러 개념과 페르시아인의 선악 교리로 보충되었다.
170:5.4 (1864.4) 하늘나라 복음의 가르침에 담긴 예수의 관념과 이상은 그 추종자들이 그의 선언을 점진적으로 왜곡했기 때문에 거의 실현되지 못할 뻔했다. 주의 하늘나라 개념은 두 가지 큰 경향으로 인하여 눈에 띄게 수정되었다:
170:5.5 (1864.5) 1. 유대인 신자들은 계속 예수를 메시아로 여겼다. 세계적이고 대체로 물질적인 나라를 세우려고 예수가 오래지 않아 실제로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170:5.6 (1864.6) 2. 이방(異邦)의 기독교인들은 아주 일찍부터 바울의 교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예수가 교회 신도들의 구원자라는[1] [1804] 일반적 관념으로 더욱 이끌었는데, 구원자는 초기 개념, 곧 하늘나라의 순전한 영적 형제 정신을 새로이 제도적으로 이어받은 개념이었다.
170:5.7 (1864.7) 하늘나라의 사회적 결과로서 생긴 교회는 온전히 자연스럽고 바람직하기도 했을 것이다. 교회의 잘못은 교회가 존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예수의 하늘나라 개념을 거의 완벽하게 갈아치웠다는 것이다. 바울이 만든 제도화된 교회는 예수가 선포했던 하늘나라를 사실상 대체하는 조직이었다.
170:5.8 (1864.8) 그러나 의심하지 말라. 주가 가르친 바로 이 하늘나라는 신자의 가슴 속에서 존재하며, 땅에서 모든 다른 종교ㆍ종족ㆍ나라에게―아니 각 사람에게―선포되는 것 같이, 언젠가 이 기독교회에 선포될 것이다.
170:5.9 (1864.9) 예수가 가르친 하늘나라, 개인의 올바름을 추구하는 영적 이상과 사람이 하나님과 신성한 친교를 가진다는 개념은, 예수의 인격이 구원자, 창조자요, 사회 조직이 된 종교 공동체의 영적 우두머리라는 신비스러운 개념 속으로 차츰 가라앉게 되었다. 이 방법으로 형식적이고 제도화된 교회는 개별로 영의 인도를 받는 하늘나라 형제 단체의 대용품이 되었다.
170:5.10 (1864.10) 교회는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서 생겨난 불가피하고 유익한 사회적 결과였다. 하늘나라의 가르침에 대한 이 사회적 반응이, 예수가 가르치고 실천했던 진정한 하늘나라의 영적 개념을 아주 완전히 갈아치웠다는 사실에 비극이 있다.
170:5.11 (1865.1) 유대인에게, 하늘나라는 이스라엘 족속의 공동체였고, 이방인에게 하늘나라는 기독교회가 되었다. 예수에게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믿음을 고백하고,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마음을 다하여 헌신함을 선언하고, 따라서 사람의 영적 형제 단체의 구성원이 되는 개인들의 집합이었다.
170:5.12 (1865.2) 하늘나라 복음이 퍼지는 결과로서 어떤 사회적 결실이 세상에 나타날 것을 주는 충분히 깨달았다. 그러나 모든 그러한 바람직한 사회적 겉 모습이 개별 신자가 마음 속에서 겪는 이 개인적 체험, 모든 그러한 신자에게 깃들고 그들을 움직이는 신다운 영과 이렇게 순전히 영적으로 친교하고 교통함으로 의식하지 않고 불가피하게 생기는 결과로서, 또는 자연스러운 열매로서 나타나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170:5.13 (1865.3) 예수는 한 사회 조직, 곧 교회가 참된 영적 국가의 진보에 뒤따라 생길 것을 미리 예측하였고, 이것이 어째서 사도들이 요한의 세례 의식을 행하는 것을 결코 반대하지 않았는가 하는 까닭이다. 그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 올바름 곧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고 목마르게 찾는 사람은, 믿음으로 영적인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된다고 가르쳤다. 동시에 사도들은 그러한 신자는 겉으로 나타나는 세례 의식(儀式)으로 제자들의 사회 조직에 가입이 허락된다고 가르쳤다.
170:5.14 (1865.4) 영이 개별 신자를 지배하고 안내함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하늘나라를 세우는 예수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부분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을 예수의 직계 추종자들이 깨달았을 때 그들은 주의 하늘나라 이상 대신에, 눈에 보이는 사회 조직, 기독교회를 차츰 세움으로 예수의 가르침이 완전히 잊혀지지 않도록 구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대체 계획을 성취하고 나서, 일관성을 유지하고 하늘나라의 사실에 관한 주의 가르침을 인정하려고, 더 나아가서 하늘나라를 미래에 생길 일로 분리해 놓았다. 교회의 지위가 안정되자마자 교회는 기독교 시대가 절정에 이를 때,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하늘나라가 실제로 나타날 것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170:5.15 (1865.5) 이 방법으로 하늘나라는 한 시대의 개념, 미래에 찾아온다는 관념이요, 최고자의 성자(聖者)들이 마지막으로 구출된다는 이상이 되었다. 초대 기독교인들(그리고 후일에 허다한 교인들)은 예수의 하늘나라 가르침에 담겨 있는 아버지와 아들 관념을 대체로 간과했으며, 한편 이를 교회의 잘 조직된 사회적 교제로 대체하였다. 이처럼 교회는 크게 보아서 사회적 형제 단체가 되었고, 이것은 예수의 영적 형제 단체라는 개념과 이상을 실질적으로 갈아치웠다.
170:5.16 (1865.6) 예수의 이상적 개념은 대체로 실패했지만, 주의 개인적 생애와 가르침의 기초 위에 바울은 나서서 유란시아에서 일찍이 존재한 바, 대단히 진취적인 한 인간 사회를 세웠으며, 이것은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의 영생 개념으로 보충되고, 영적인 것과 현세의 것을 대조하는 필로의 교리로 인하여 확대되었다.
170:5.17 (1865.7) 예수의 개념은 세계의 진보된 종교들 속에 아직도 살아 있다. 바울의 기독교회는 예수가 만들려 의도했던 하늘나라―그리고 아주 확실히 하늘나라가 다다를 그 미래―의 사회화되고 인간화된 그림자이다. 바울과 그 후계자들은 영생의 문제를 개인으로부터 교회로 일부 옮겨 버렸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아버지의 하늘나라 가족 안에서 개별 신자 하나하나에게 형이 되기보다,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바울, 그리고 같은 시대의 사람들은, 예수가 자신과 개별 신자에 관하여 영적으로 암시한 모든 것을 신자의 집단인 교회에 적용했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예수의 개념, 개별 신자의 마음 속에 있는 신의 나라 개념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
170:5.18 (1866.1) 그래서, 여러 세기 동안 기독교 교회는 큰 창피를 겪으며 수고했는데, 왜냐하면 교회가 하늘나라의 신비스러운 권능과 특권, 오직 예수와 영적 신자 형제들 사이에만 행사하고 체험할 수 있는 권능과 특권을 감히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에서 회원 자격을 얻는 것은 반드시 하늘나라에서 친교함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하나는 영적인 것이요, 다른 하나는 주로 사회적이다.
170:5.19 (1866.2) 머지 않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도다”하고 외치는 다른 더 큰 세례자 요한이 나타날 예정이고―이것은 하늘나라가 신자의 마음 속에서 하늘 아버지의 뜻이 지배하고 초월하는 것이라 선포한 예수의 높은 영적 개념으로 돌아감을 뜻한다―그는 땅에서 눈에 보이는 교회나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을 어떤 방법으로도 언급하지 않고서, 이 모두를 이룰 것이다. 예수의 실제 가르침이 부활되어야 하며, 그렇게 다시 적은 이야기는 미가엘이 땅에서 머무른 사실에 관하여 사회ㆍ철학적 신앙 체계를 만드는 데 분주했던 초기 추종자들의 실수를 돌이킬 것이다. 짧은 시일 안에 예수에 관한 이 이야기의 가르침은 예수의 하늘나라 복음 설교를 거의 대체해 버렸다. 이 방법으로 역사적 종교가 예수의 가르침을 바꿔치웠으며, 예수의 가르침은 사람의 가장 높은 도덕적 관념과 영적 이상을 미래에 대한 사람의 가장 숭고한 희망―영생―과 섞었다. 그것이 하늘나라 복음이었다.
170:5.20 (1866.3) 예수의 복음이 아주 여러 모습을 가졌다는 바로 그 이유로, 몇 세기 안에 그의 가르침의 기록을 연구한 학자들은 그렇게 많은 종파와 분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기독교 신자들의 이 딱한 분열은 주의 다양한 가르침 속에서, 신과 하나가 된 일생, 비할 데 없는 그의 일생을 헤아리지 못함으로 생겨난다. 그러나 언젠가 예수를 참되게 믿는 사람들의 태도는 불신자 앞에서 이처럼 영적으로 분열되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우리의 지적 이해와 해석은 다양해도 좋고, 사회적 친교가 어느 정도 달라져도 좋지만, 영적 형제 정신의 부족(不足)은 용서할 수 없고 꾸짖어 마땅하다.
170:5.21 (1866.4) 오해하지 말라! 예수의 가르침 속에는 생각하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언제까지나 열매 맺지 않은 채로 가만 두지 않을 영원한 성질이 있다. 예수가 상상했던 하늘나라는 대체로 땅에서 실패했고, 한동안 겉으로 나타나는 교회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 교회는 다만 좌절된 영적 하늘나라의 애벌레 단계요, 이 물질 시대를 거쳐서 하늘나라를 더 영적인 섭리 시대로 실어 나를 터이고, 그때 주의 가르침은 성장할 기회를 더 충만히 누릴지 모른다. 이처럼 이른바 기독교 교회는 고치가 되며, 그 속에서 예수의 개념인 하늘나라는 지금 잠을 잔다. 신다운 형제들의 하늘나라는 아직도 살아 있으며, 모습을 바꾸어 성장하는, 매력이 떨어지는 생물이 아름답게 펼쳐져 궁극에 나비가 솟아나는 것과 똑같이 확실하게, 이 오랜 침체로부터 궁극에 확실히 솟아날 것이다.
171:0.1 (1867.1) “하늘나라”에 대하여 잊지 못할 설교를 하신 다음 날, 예수는 그와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내려고 그 이튿날 떠나리라, 가는 길에 페레아 남부의 수많은 도시를 찾아보리라고 발표했다.
171:0.2 (1867.2) 하늘나라에 관한 연설과 그가 유월절에 가려고 한다는 발표는, 모든 추종자로 하여금 유대인이 최고로 다스리는 현세의 왕국을 개시하려고 그가 예루살렘에 간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늘나라의 비물질적 성질에 관하여 무슨 말씀을 하든지, 예수는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의 머리 속에서, 예루살렘에 본부를 가진 어떤 종류의 민족주의 정부(政府)를 메시아가 세울 것이라는 관념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 없었다.
171:0.3 (1867.3) 안식일 설교에서 예수가 하신 말씀은 추종자의 대다수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경향만 있었고, 거의 아무도 주의 강론에 깨우침을 받지 못했다. 주요 선생들은 마음 속의 나라, “너희 안에 있는 하늘나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얼마큼 알아들었지만, 그들은 또한 예수가 또 다른 미래의 나라에 대하여 전에 말씀한 것을 알았고, 바로 이런 나라를 세우려고 그가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기대가 어긋났을 때, 유대인들이 그를 저버렸을 때, 그리고 후일에 예루살렘이 글자 그대로 파괴되었을 때, 그들은 아직도 이 희망에 매달렸고, 주가 큰 권능과 대단한 영화로움을 입고서 약속했던 나라를 세우려고 세상으로 곧 돌아오리라고 진지하게 믿었다.
171:0.4 (1867.4) 이 일요일 오후에 야고보와 요한 세베대의 어머니 살로메는 사도인 두 아들과 함께 예수에게 와서, 동양(東洋)의 권력자에게 접근하는 방식으로, 그 여자가 무엇을 요청하든지 예수가 미리 허락할 것을 약속하게 만들려고 애썼다. 그러나 주는 약속하려 하지 않았고, 그 대신에 그 여자에게 물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하기를 바라느냐?” 그러자 살로메가 대답했다: “주여, 당신이 예루살렘으로 나라를 세우러 가시오니, 이 내 아들들이 당신과 함께, 당신의 나라에서 하나는 당신 바른편에 앉고 하나는 왼편에 앉을 영광을 얻으리라고 당신이 내게 약속하시기를 미리 청하고 싶사옵나이다.”
171:0.5 (1867.5) 살로메의 요청을 듣자 예수는 말했다: “여자여, 너는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그리고 나서 영예를 추구하는 두 사도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그는 말했다: “내가 오랫동안 너희를 알고 사랑했기 때문에, 내가 네 어머니 집에서 살기까지 했기 때문에, 그래서 너희 어머니가 몰래 와서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요청을 하도록 너희가 버려두는도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내가 마시려 하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야고보와 요한은 대답했다. “예, 주여, 우리는 할 수 있나이다.” 예수가 말했다: “어찌하여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지 너희가 모르니 내가 슬프고, 내 나라의 성질을 너희가 알아차리지 못하니 마음이 아프도다. 내게 이 부탁을 하라고 너희 어머니를 불러왔으니 내가 실망이 되지만 너희가 마음 속에는 나를 사랑함을 내가 아노라. 그런즉 내가 선언하노니, 너희는 정말로 나의 쓴 잔을 마시고 나의 치욕을 함께 하리라만, 내 바른편과 내 왼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그러한 영예는 내 아버지가 지명하신 자들을 위하여 예비되었느니라.”
171:0.6 (1868.1) 이때가 되자 어떤 사람이 이 회담에 대한 말을 베드로를 비롯하여 다른 사도들에게 전했고, 그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그들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으려고 애쓴 것과 둘이 몰래 어머니와 함께 가서 그런 요청을 드리려 한 것에 크게 분개하였다. 그들끼리 다툼에 빠지자, 예수는 모두를 불러모으고 말했다: “너희는 이방인의 권력자들이 저희 백성을 부리고 위대한 자들이 어떻게 권한을 행사하는가 잘 아느니라.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그렇지 아니하리라. 너희 가운데 크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먼저 너희의 종이 될지어다. 하늘나라에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에게 봉사하는 자가 될지어다.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사람의 아들은 보살핌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려고 왔느니라. 나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 그리고 내 형제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내 목숨을 버리려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라.” 이 말씀을 듣자 사도들은 자기들끼리 기도하러 물러났다. 그날 저녁에, 베드로가 수고한 데 응답하여, 야고보와 요한은 열 사도에게 적절히 사과했고, 형제들의 호의를 되찾았다.
171:0.7 (1868.2)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바른 편과 왼 편 자리를 요청하면서, 세베대의 아들들은 한 달이 채 못 되어, 사랑하는 선생이 한 편에 죽어 가는 도둑과 다른 편에 또 다른 범죄자와 더불어, 로마인의 십자가에 달릴 것을 조금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의 어머니는 십자가 처형 때 자리에 있었고, 펠라에서 사도인 아들들을 위하여 아주 지혜롭지 못하게 추구한 명예에 관하여 예수에게 어리석은 부탁을 드린 것을 잘 기억했다.
171:1.1 (1868.3) 3월 13일, 월요일 아침 나절에, 예수와 열두 사도는 드디어 펠라 야영지를 떠났고, 아브너의 동료들이 일하고 있는 페레아 남부의 도시들을 둘러보려고 남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70인 사이에 방문하면서 2주가 넘도록 보냈고, 그리고 나서 유월절을 지내려고 바로 예루살렘으로 갔다.
171:1.2 (1868.4) 주가 펠라를 떠났을 때, 제자들은 사도들과 함께 야영했고, 이들 약 1천 명이 주를 뒤따라갔다. 예수가 헤스본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리고 그가 “비용 계산”에 대하여 설교한 뒤에, 이 무리의 약 절반이 예리고로 가는 길에 요단강 여울에서 그를 떠나보냈다. 그들은 예루살렘까지 줄곧 올라갔고, 한편 나머지 반은 2주 동안 예수를 따라서 페레아 남부에서 여러 마을을 방문했다.
171:1.3 (1868.5) 펠라의 캠프를 떠났다는 것을 예수의 직계 추종자들의 대부분이 대체로 이해했지만, 그들은 이것이 주가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다윗의 왕좌를 주장할 의도를 가리킨다고 정말로 생각했다. 추종자들의 대다수는 어떤 다른 하늘나라 개념도 결코 깨우칠 수 없었다. 예수가 무엇을 가르치든지, 그들은 이 유대인 왕국 개념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171:1.4 (1868.6) 사도 안드레의 지시에 따라서, 다윗 세베대는 3월 15일 수요일에, 펠라에 있던 방문자 캠프를 걷어치웠다. 이때 거의 4천 명의 방문자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것은 선생들의 캠프라고 알려진 곳에서 사도들과 함께 머무르고 예수와 열두 사도와 더불어 남쪽으로 간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넣지 않는다. 무척 하기 싫었어도, 다윗은 수많은 구매자에게 장비 전체를 팔아치우고 예루살렘으로 자금을 가지고 갔고, 나중에 그 돈을 가룟 유다에게 넘겨주었다.
171:1.5 (1869.1) 비극의 마지막 주에 다윗은 예루살렘에 있었고, 십자가 처형이 있은 뒤에 자신의 어머니를 벳세다로 모시고 갔다. 예수와 사도들을 기다리면서, 다윗은 베다니에 나사로의 집에서 멈추었고, 그가 부활한 뒤로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그를 박해하고 괴롭히는가 보고 몹시 흥분하였다. 안드레는 다윗에게 사자(使者) 서비스를 중단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에서 하늘나라가 일찍 세워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모두가 풀이했다. 다윗은 할 일이 없음을 깨달았고, 그가 분개한 근심의 대상(對象)이 당장에 서둘러 필라델피아로 달아났을 때, 그는 자청해서 나사로의 방어자가 되려고 거의 마음먹었다. 따라서, 부활이 있은 뒤, 또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얼마 있다가, 먼저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들의 부동산 처분하는 것을 돕고 나서, 다윗은 필라델피아로 옮겨 갔다. 그리고 거기서 아브너와 나사로와 관계를 가지면서 여생을 보냈고, 아브너의 일생 동안에 필라델피아에 집중되었던 하늘나라의 모든 큰 거점들의 재정 감독자가 되었다.
171:1.6 (1869.2) 예루살렘이 파괴된 뒤에 얼마 안 되어 안티옥이 바울파 기독교의 본부가 되었고, 한편 필라델피아는 아브너파 하늘나라의 중심으로 남았다. 안티옥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에 관한 가르침의 바울 판(版)이 온 서양 세계로 퍼졌다. 예수의 가르침을 외치는, 타협하지 않는 이 밀사들이 후일에 이슬람이 갑자기 흥성함으로 압도될 때까지, 필라델피아로부터 아브너 판의 하늘나라를 외치는 선교사들이 메소포타미아와 아라비아에 두루 퍼졌다.
171:2.1 (1869.3) 예수와 거의 1천 명의 추종자 일행이, 때때로 베다바라로 부르는, 요단강의 베다니 여울목에 다다랐을 때, 제자들은 그가 예루살렘으로 바로 가지 않는 것을 비로소 눈치챘다. 그들이 망설이고 자기들끼리 토론하는 동안에, 예수는 거대한 바위 위로 올라가서 강론하였고, 이것은 “비용 계산”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주는 말씀했다:
171:2.2 (1869.4) “이때부터 계속 내 뒤를 따르고자 하는 너희는,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값을 기꺼이 치러야 하느니라. 너희가 내 제자가 되고자 하면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식들, 형제와 자매를 기꺼이 버려야 하느니라. 너희 가운데 누구라도 이제 내 제자가 되고자 하면,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육체를 입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명을 마치기 위하여 목숨을 바야흐로 내놓으려 하는 것과 똑같이, 너희 목숨조차 기꺼이 버려야 하느니라.
171:2.3 (1869.5) “충분한 값을 기꺼이 치르지 않겠다면, 너희는 도저히 내 제자일 수 없도다. 더 나아가기 전에, 너희는 각자 앉아서 내 제자가 되는 데 얼마나 비용이 드는가 계산해야 하느니라. 망루를 완성할 돈이 충분히 있는가 보려고 먼저 앉아서 비용을 계산하지 않고서, 너희 중에 누가 땅에서 망대 짓는 일에 손을 대겠느냐? 너희가 기초를 놓은 뒤에 이렇게 비용을 계산하지 않으면, 시작한 것을 마칠 수 없음을 너희가 알게 될지 모르느니라. 그런즉 이웃이 다 너희를 비웃으리라, ‘보라, 이 사람이 건물을 짓기 시작했으나 하던 일을 마칠 수 없구나.’ 다시 이르노니,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전쟁하려고 준비할 때, 병사(兵士) 1만을 가지고서 그를 대적하여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항할 수 있는가 먼저 앉아서 의논하지 않겠느냐? 준비되지 않아서 적을 대항할 여유가 없으면, 그 임금은 이 다른 임금에게, 아직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사절단을 보내어 평화 조건을 묻느니라.
171:2.4 (1870.1) “자, 그러면 이제 너희는 각자 앉아서, 내 제자가 되는 비용을 계산해야 하느니라. 이제부터 계속 너희는 우리 뒤를 따르면서, 가르침을 듣고, 하는 일을 구경할 수 없으리라. 너희에게 모진 박해에 부딪치는 것이 요구되고, 사람을 압도하는 실망에 직면하여 이 복음을 증언하는 것이 요구되리라. 기꺼이 네 신분을 모두 포기하고 가진 것을 모두 바칠 뜻이 없다면, 너는 내 제자가 될 자격이 없느니라. 마음 속에서 네 자신을 이미 정복했거든, 사람의 아들이 주사제와 사두개인들에게 거절당하고 비웃는 불신자(不信者)들의 손에 넘겨질 때, 너는 당장에 틀림없이 구경할 그 외관상의 승리를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느니라.
171:2.5 (1870.2) “이제 너는 스스로를 살펴서, 내 제자가 되는 동기를 찾아내야 하느니라. 너희가 명예와 영광을 추구하고 세상에 생각이 있다면, 너희는 맛을 잃은 소금과 같으니라. 그리고 짠맛 때문에 소중히 여김받는 것이 그 맛을 잃으면, 소금이 무엇으로 맛을 내리요? 그러한 양념은 쓸모가 없고, 오직 쓰레기 사이에 던지기에 적당하니라. 준비되고 있는 잔을 나와 함께 기꺼이 마시고 싶지 않거든, 너희 집으로 평안히 돌아가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경고하였노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너희에게 거듭 일렀거늘 너희가 나를 믿으려 하지 않는도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내가 이르는 것을 들으라.”
171:2.6 (1870.3) 이 말씀을 하고 나서 바로, 예수는 열두 사람을 이끌고, 헤스본으로 길을 떠났고, 약 5백 명이 뒤를 따랐다. 잠깐 동안 지체한 뒤에, 군중의 나머지 반은 계속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사도들은 주요한 제자들과 함께, 이 말씀에 대하여 많이 생각했지만, 이 역경과 시련이 잠시 있은 뒤에, 오래 간직했던 희망에 얼마큼 따라서 하늘나라가 확실히 세워질 것이라는 관념에 여전히 매달렸다.
171:3.1 (1870.4) 2주가 넘도록 예수와 열두 사도는 뒤따르는 수백 제자의 군중과 더불어, 페레아 남부에서 이리저리 여행했고, 70인이 수고하던 마을들을 모두 찾아보았다. 많은 이방인이 이 지역에서 살았고, 예루살렘의 유월절 축제에 올라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하늘나라 사자들은 가르치고 전도하는 일에 즉시 착수했다.
171:3.2 (1870.5) 예수는 헤스본에서 아브너를 만났고, 안드레는 70인의 수고가 유월절 축제로 중단되지 않아야 한다고 지시했다. 예루살렘에서 바야흐로 일어나려 하는 것을 완전히 무시(無視)하고 사자들이 할 일을 진행해야 한다고 예수는 조언했다. 또한 아브너에게 여인단이, 적어도 원하는 사람들이,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가도록 허락하라고 조언하였다. 이때가 아브너가 육체를 입은 예수를 마지막으로 본 때였다. 이렇게 아브너에게 그는 작별의 말씀을 하였다: “이 사람아, 네가 하늘나라에 충실할 것을 내가 알고, 형제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도록 너에게 지혜 주시기를 내가 아버지께 기도하노라.”
171:3.3 (1870.6) 이 도시 저 도시로 다니는 동안,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큰 무리가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줄곧 갔고, 그래서 예수가 유월절을 지내려고 떠날 때가 되자, 주를 함께 따라온 사람들의 수는 날마다 줄어들어 2백 명이 채 되지 않았다.
171:3.4 (1871.1) 사도들은 예수가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에 간다고 알아들었다. 그들은 예수가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산헤드린에게 통지해야 한다고 전하는 말을 산헤드린이 온 이스라엘에 퍼뜨린 것을 알았다. 이 모든 일이 있었는데도, 여전히, 그들은 그가 나사로를 보려고 베다니로 간다고 필라델피아에서 발표했을 때만큼 놀라지는 않았다. 몹시 두려워하는 태도를 가졌다가 입다물고 기대하는 상태로 이렇게 태도가 바뀐 것은 대체로 나사로의 부활(復活) 때문이었다. 그들은 비상시에, 예수가 신의 권능을 주장하고 적들에게 창피를 줄지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희망은 주가 영적 지배권을 가졌다는 더 깊고 성숙한 믿음과 함께, 직계 추종자들이 겉으로 용기를 보인 것을 설명하며, 이들은 그가 죽어야 한다는 산헤드린의 공개 선포가 있는 바로 그 마당에, 이제 예루살렘으로 그를 따라가려고 준비했다.
171:3.5 (1871.2) 사도들의 대다수와 여러 핵심 제자들은 예수가 죽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다. 그가 “부활이요 생명”임을 믿었으니까, 그들은 예수가 불사(不死)이며 이미 죽음을 이겼다고 보았다.
171:4.1 (1871.3) 3월 29일 수요일 저녁에, 예수와 추종자들은 페레아 남부의 여러 도시를 둘러보는 여행을 마친 뒤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리비아에서 야영했다. 열심당원 시몬과 시몬 베드로는 1백 자루가 넘는 검(劍)을 이 자리에서 그들 손에 배달되도록 함께 일을 꾸몄기 때문에, 이날 밤에 리비아에서 이 무기들을 받았고, 칼을 받고 외투 속에 감추어 칼을 차려는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 시몬 베드로는 뜰에서 주를 저버리는 날 밤에 아직도 칼을 차고 있었다.
171:4.2 (1871.4) 목요일 아침 일찍, 다른 사람들이 깨어나기 전에, 예수는 안드레를 불러서 말했다: “네 형제들을 깨우라! 내가 저희에게 할 말이 있느니라.” 예수는 검에 대하여, 또 사도들 가운데 누가 이 무기를 받고 휴대하고 있는가 알았지만, 그런 일을 안다는 것을 그들에게 결코 알리지 않았다. 안드레가 동료들을 일으켰고, 그들끼리 모였을 때, 예수는 말했다: “아이들아, 너희는 나와 함께 오랫동안 지냈고, 이때를 위하여 필요한 것을 많이 너희에게 가르쳤느니라. 그러나 이제 너희에게 경고하노니, 육체의 불확실한 것이나 또는 너희 앞에 놓인 시련과 시험에 대한 인간의 허약한 방비를 의지하지 말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음을 한번 더 분명히 이르려고 내가 따로 너희끼리만 불러모았으니, 예루살렘에서 사람의 아들이 이미 사형 선고를 받았음을 너희가 아느니라.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아들이 주사제와 종교 지도자들의 손에 넘겨지겠고, 저희가 그를 정죄하고 다음에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주리라. 그래서 저희가 사람의 아들을 조롱하고, 아니 그에게 침 뱉고 때리기까지 하겠고, 그를 죽음으로 인도하리라. 그리고 저희가 사람의 아들을 죽일 때, 절망하지 말라. 내가 선언하노니, 사흘째에 그가 일어날 것임이라. 너희끼리 조심하고 내가 너희에게 미리 경고한 것을 기억하라.”
171:4.3 (1871.5) 또 다시, 사도들은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주의 뜻이 말씀하신 바로 그대로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루살렘에 본부를 둔, 땅에 있는 현세의 나라를 믿는 집요한 믿음에 너무 눈이 멀어서, 그들은 단지 예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런 이상한 발표로 주가 무엇을 의도할 수 있는가 그들은 하루 종일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나 이 말씀에 대하여 아무도 감히 그에게 물으려 하지 않았다. 이 어리둥절한 사도들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힐 것을 예상하고서 주가 그들에게 분명히, 직접 말씀했다는 것을 주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깨닫지 못했다.
171:4.4 (1872.1) 여기 리비아에서, 아침 식사 바로 뒤에, 어떤 친절한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와서 말했다: “이 지역에서 어서 달아나소서, 요한을 잡으려 애쓴 것과 마찬가지로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다. 그는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킬까 두려워하고 당신을 죽이기로 작정하였나이다. 당신이 피하도록 우리가 당신에게 이렇게 경고하나이다.”
171:4.5 (1872.2) 이것은 어느 정도 참말이었다. 나사로의 부활은 헤롯을 두렵고 놀라게 했고, 재판이 있기도 전에 산헤드린이 감히 예수를 정죄(定罪)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헤롯은 예수를 죽이든지 아니면 자기 영토 바깥으로 몰아내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정말로 뒤의 경우를 바랐는데, 헤롯이 예수를 너무나 두려워하여 어쩔 수 없이 예수를 처형하게 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171:4.6 (1872.3) 바리새인들이 하고 싶어 했던 말을 듣고서 예수는 대답했다: “헤롯에 대하여, 또 그가 이 하늘나라 복음을 두려워함을 내가 잘 아노라. 그러나 잘못 생각지 말라, 그는 사람의 아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주사제들의 손에 고통받고 죽기를 더욱 좋아하리라. 제 손을 요한의 피로 더럽혔으므로, 사람의 아들의 죽음을 책임지고 싶어 안달하지는 않느니라. 너희는 가서 그 여우에게 이르라. 사람의 아들이 페레아에서 오늘 전도하고, 내일은 유대로 가고, 며칠 지난 뒤에, 땅에서 사명을 마치고 아버지께로 올라가려고 준비되리라.”
171:4.7 (1872.4) 그리고 나서 사도들을 향하여 예수는 말했다: “옛적부터 선지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이슬로 사라졌고,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집이 있는 도시로 올라가서 인간의 편협에 대한 값으로, 그리고 종교적 편견과 영적 무분별의 결과로 희생되는 것이 어울릴 따름이라. 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선지자들을 죽이고 진리의 선생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밑에 모으는 것 같이, 얼마나 자주 내가 네 자손을 모으고 싶어 하였느냐, 그러나 너는 내가 그리하도록 가만두려 하지 않는구나! 보라 네 집은 바야흐로 황폐한 채로 너에게 맡겨지려 하는구나! 너는 여러 번 나를 보고 싶어 하리라만 보지 못할지니라! 그때 네가 나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할지니라!” 말씀을 마치고 나서, 둘레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였다: “그렇기는 해도, 유월절에 참석하기 위하여,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우리에게 어울리는 일을 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
171:4.8 (1872.5) 이날 예리고로 예수를 따라간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고 어리둥절한 신자 무리였다. 사도들은 하늘나라에 관한 예수의 선언에서 마지막으로 승리한다는 확실한 목소리만 헤아릴 수 있었다. 다가오는 좌절에 관한 경고를 파악하는 경지까지 도저히 이를 수 없었다. 예수가 “사흘째에 일어난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이 말씀을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불쾌한 예비 충돌이 있은 직후에, 하늘나라가 분명히 승리함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였다. “사흘째”는 “당장에” 아니면 “얼마 있다가”를 뜻하는 표현, 유대인이 보통 쓰는 표현이었다. 예수가 “일어난다”고 말했을 때, 그가 “하늘나라가 일어남”을 언급한다고 생각했다.
171:4.9 (1872.6) 이 신자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였고, 유대인들은 고통받는 메시아에 대하여 거의, 또는 전혀 몰랐다. 그들은 예수가 살아서 결코 성취할 수 없던 많은 것을 죽어서 성취하리라는 것을 알아듣지 못했다. 사도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도록 용기를 준 것은 나사로의 부활이었지만, 주의 수여 생애에서 이 시련 기간에 주를 버티게 한 것은 변모(變貌)의 기억이었다.
171:5.1 (1873.1) 3월 30일, 목요일 오후 늦게, 예수와 사도들은, 약 2백 명이 되는 추종자 일행에 앞서서, 예리고의 성벽으로 다가갔다. 도시의 대문에 가까이 가자, 그들은 한 떼의 거지들과 마주쳤다. 그 중에 바티메우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눈이 멀었던 늙은이였다. 이 눈먼 거지는 예수에 대하여 소문을 많이 들었고, 예루살렘에서 그가 눈먼 요시아를 고친 것에 대하여 모두 알았다. 베다니로 계속 갔을 때까지, 그는 예수가 예리고를 요즘에 방문했다는 것을 몰랐다. 바티메우스는 예수가 예리고를 방문하기만 하면 시력(視力)을 되찾게 해달라고 예수에게 꼭 호소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171:5.2 (1873.2) 예수가 다가온다는 소식이 이미 예리고에 두루 알려졌고, 거민 수백 명이 그를 만나려고 바깥으로 나와 떼를 지었다. 이 큰 무리가 주를 도시 안으로 호송해서 돌아왔을 때, 군중이 시끄럽게 쿵쿵거리며 걷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서, 바티메우스는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았고, 그래서 가까이 서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가 물었다. 거지들 가운데 하나가 대답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네.” 예수가 가까이 있다는 말을 듣자, 바티메우스는 목청을 높여서 비로소 크게 외쳤다: “예수여 예수여,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가 계속 더욱 크게 소리치자, 예수에게 가까이 있던 사람들 중에서 몇 사람이 그에게 다가가서 꾸짖으며, 조용히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는 더욱, 더 큰 소리로 외칠 뿐이었다.
171:5.3 (1873.3) 그 소경이 소리치는 것을 들었을 때, 예수는 가만히 멈추었다. 그를 보았을 때, 예수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 사람을 내게로 데려오라.” 그리고 나서 그들이 바티메우스에게 가서 말했다: “기운을 차리라, 우리를 따라 오라. 주가 너를 부르심이라.” 이 말씀을 듣자 바티메우스는 외투를 옆에 던져 버리고, 길 가운데를 향하여 앞으로 뛰쳐나갔고, 한편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그를 예수에게로 안내했다. 바티메우스를 향하여 예수가 말했다: “무엇을 해주기 원하느냐?” 그리고 나서 눈먼 사람이 대답했다. “제 시력을 되찾고 싶나이다.” 이 요청을 듣고 그의 믿음을 보았을 때, 예수는 말했다: “네가 시력을 받으리라. 길을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느니라.” 즉시 그는 시력을 되찾았고, 주가 이튿날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날 때까지 예수 가까이 남아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나서 대중 앞으로 가서 예리고에서 어떻게 그가 시력을 되찾았는가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말했다.
171:6.1 (1873.4) 주의 행렬이 예리고로 들어갔을 때는 해질 무렵이었고, 그는 거기서 밤을 지낼 생각이 들었다. 예수가 세관을 지나갔을 때, 세무장, 다시 말해서 세리(稅吏) 삭개오가 어쩌다가 자리에 있었는데, 예수를 몹시 보고 싶어했다. 이 세무장은 아주 부자였고 이 갈릴리 선지자에 대하여 익히 들어 왔다. 다음에 예수가 어쩌다 예리고를 찾을 때 예수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보겠다고 전에 결심하였다. 따라서 삭개오는 군중 속을 밀고 나가려 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그는 키가 작아서 군중의 머리 위로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세무장은 도시의 중심 가까이, 그가 사는 데서 멀지 않은 곳에 올 때까지 군중과 함께 계속 따라갔다. 군중을 뚫고 들어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예수가 멈추지 않고 도시를 바로 통과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앞으로 계속 달려가서 어느 무화과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는데, 그 나무의 퍼진 가지들은 길 쪽으로 늘어져 있었다. 이 방법으로 그는 주가 지나가실 때 주를 잘 볼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실망하지 않았으니, 왜냐하면 예수가 지나갈 때, 멈추어서 삭개오를 올려다보고 말했기 때문이다: “삭개오야 서둘러 내려오라, 오늘 밤 내가 너의 집에서 묵어야 하니라.” 이 놀라운 말씀을 들었을 때, 허겁지겁 내려오면서 삭개오는 나무에서 하마터면 떨어질 뻔하였고, 예수에게로 다가가면서, 주가 그의 집에서 기꺼이 머무르겠다는 말씀에 크게 기뻐하였다.
171:6.2 (1874.1) 그들은 당장 삭개오의 집으로 갔고, 예리고에서 살던 사람들은 예수가 세무장과 함께 묵기로 하겠다는 데 많이 놀랐다. 주와 사도들이 집 문 앞에서 삭개오와 함께 서성거리는 동안에도 가까이 서 있던 예리고의 바리새인들 가운데 하나가 말했다: “어떻게 죄인, 제 민족을 강탈하는 자요 강도, 아브라함의 배신(背信)한 아들의 집에 이 사람이 묵으려고 갔는가 너희가 보느니라.” 이 말을 들었을 때, 예수는 삭개오를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그러자 삭개오는 등 없는 의자 위에 올라서서 말했다: “예리고의 여러분, 내 말 을 들 으소서 내가 세리요 죄인일지 모르나, 큰 선생이 내 집에 머무르려고 오셨는지라. 그가 안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여러분에게 이르오니, 내가 온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고, 내일부터 시작하여, 누구에게도 내가 무엇이든지 그릇되게 빼앗았다면, 4배로 갚으리이다. 나는 마음을 다하여 구원을 찾고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르게 행하기를 배우고자 하나이다.”
171:6.3 (1874.2) 삭개오가 말을 마치자 예수가 말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고, 너는 정말로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었도다.” 주위에 모인 군중을 향하여 예수는 말했다: “내가 한 말에 놀라지 말고, 우리가 하는 일에 성내지도 말지니,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자를 찾고 구원하러 왔다고 내가 지금까지 선언하였음이라.”
171:6.4 (1874.3) 그들은 그날 밤 삭개오와 함께 머물렀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서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내려고 가는 길에, 베다니까지 “강도의 길”을[1] [1805] 올라갔다.
171:7.1 (1874.4) 예수는 어디를 가든지 즐거운 기분을 퍼뜨렸다. 그는 인자함과 진실이 가득하였다. 동료들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인자한 말씀에 끊임없이 놀랐다. 사람은 품위를 기를 수 있어도 인자함은 사랑에 흠뻑 젖은 혼에서 솟아나오는 친절의 향기이다.
171:7.2 (1874.5) 선은 반드시, 어쩔 수 없이 존경심을 일으키지만, 선에 인자함이 결여되면 사랑을 밀어내는 일이 흔하다. 선은 오직 인자할 때 보편적으로 마음을 끈다. 선은 오직 마음을 끌 때 효과가 있다.
171:7.3 (1874.6) 예수는 정말로 사람들을 이해하였다. 그래서 진정한 동정심을 나타내고 진지한 인정(人情)을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불쌍히 여기는 느낌에 깊이 빠지는 일이 드물었다. 이해심은 한이 없었지만, 동정심은 실용적이요, 개인적이고 건설적이었다. 고통에 익숙했어도 결코 무관심해지지 않았고, 비탄에 빠진 사람들에게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느낌을 더하지 않으면서 봉사를 베풀 수 있었다.
171:7.4 (1874.7) 예수가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도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람들을 아주 진지하게 사랑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 하나하나를 사랑했다. 놀라운 통찰력 때문에 그토록 참된 친구가 될 수 있었다―그는 사람의 마음 속에, 그리고 머리 속에 무엇이 있는가 아주 충분히 알았다. 그는 관심이 있고 날카롭게 지켜보는 사람이었다. 인간의 필요를 이해하는 데 통달한 사람이었고, 인간의 소망을 기민하게 탐지하였다.
171:7.5 (1874.8) 예수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지나는 동안”에 동료 인간을 위로할 시간을 가졌다. 그는 언제나 친구들이 편안한 마음을 가지게 해주었다. 남의 말을 귀담아듣는, 매력 있는 사람이었다. 동료들의 마음을 떠보려고 시시콜콜히 캐묻는 일이 결코 없었다. 진리에 굶주린 정신을 위로하고 갈급한 사람에게 봉사하는 동안, 그의 자비를 받은 사람들은 그에게 고백한다기보다 그와 함께 의논한다고 느꼈다. 그가 그들을 아주 깊이 신임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한없이 신뢰했다.
171:7.6 (1875.1) 그는 결코 사람들에 대하여 캐묻는 듯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지시하거나 관리하거나 추적하려는 욕구를 보이지 않았다. 그와 관계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깊은 자신감과 확고한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그가 사람에게 빙그레 웃을 때, 그 사람은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커졌다.
171:7.7 (1875.2) 예수는 사람들을 아주 많이, 무척 지혜롭게 사랑했기 때문에, 단련을 요구하는 경우가 생길 때 그는 결코 서슴지 않고 심하게 대했다. 흔히, 도움을 요청함으로 사람을 돕는 데 착수했다. 이 방법으로 그는 흥미를 불러일으켰고, 인간의 좋은 성품에 호소했다.
171:7.8 (1875.3) 그의 옷자락을 만져서 치유받기를 구한 여인의 천한 미신(迷信) 속에 그는 예외적인 믿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언제나 설교를 멈추거나 군중을 기다리게 할 자세가 되었고, 기꺼이 그렇게 했으며, 한편 한 사람, 아니 한 어린아이의 경우에도 그 필요를 돌보았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을 뿐 아니라, 또한 예수가 그들을 아주 많이 믿었기 때문에 큰 일들이 일어났다.
171:7.9 (1875.4) 예수가 말씀하거나 실행한 정말로 중요한 일의 대부분은 생각지 않게 “그가 지나가는 동안에” 일어나는 듯했다. 땅에서 주가 베푼 봉사에는 전문적이거나 잘 계획하거나 미리 생각해 놓은 것이 거의 없었다. 일생을 통해서 여행하는 동안, 그는 자연스럽고 품위 있게 건강을 베풀고 행복을 나누어주었다. “그는 좋은 일을 하며 다녔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171:7.10 (1875.5) 어떤 시대에도, 주의 추종자들이 “지나가는 동안에” 봉사하기를 배우는 것―나날의 임무에 몰두하는 동안 사심 없이 좋은 일 하는 것―이 마땅하다.
171:8.1 (1875.6) 그 전날 밤에 예수가 삭개오와 그 가족에게 하늘나라 복음을 가르치는 동안 늦게까지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거의 한낮까지 예리고를 떠나지 못했다. 베다니로 올라가는 길의 중턱 부근에서, 그 일행은 점심을 먹으려고 멈추었고, 한편 군중은 예수와 사도들이 그날 밤에 올리브산에서 묵으리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계속하여 예루살렘으로 갔다.
171:8.2 (1875.7) 파운드의 비유는, 모든 제자에게 주려고 뜻한 달란트 비유와 달리, 각별히 사도들에게 말씀한 것이고, 대체로 아켈라우스의 체험과 유대 왕국의 통치권을 얻으려고 그가 헛되이 시도한 데에 근거를 둔다. 이것은 실제로 역사적 인물에 근거를 둔, 몇 안 되는 주의 비유 가운데 하나이다. 예리고에서 삭개오의 집이 아켈라우스의 화려한 궁전에서 아주 가까이 있었고, 그의 수로(水路)가 그들이 예리고를 떠나면서 걸었던 길을 따라서 이어졌으니까, 그들이 아켈라우스를 염두에 두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171:8.3 (1875.8) 예수는 말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한 나라를 받으려고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선언하노니, 너희는 실망할 운명을 가졌도다. 너희는 어떤 임금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혼자서 한 나라를 받으려고 먼 나라로 갔으나 그가 미처 돌아올 수 있기도 전에, 그 지방의 시민들이 마음 속에서 이미 그를 저버렸으므로 그의 뒤를 좇아 사신(使臣)을 보내어 말하였더라.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겠노라.’ 현세에 이 임금의 통치가 거절당한 것 같이,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의 영적 통치도 거절당하리라. 다시 내가 선언하노니,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느니라. 그러나 사람의 아들에게 자기 백성을 영적으로 통치하는 권리가 주어졌다면, 그러한 인간 혼을 다스리는 나라를 받고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그러한 영토에서 군림하였으리라. 내가 영적으로 저희를 다스리는 것을 저희가 물리쳐도, 지금 거절당한 그러한 영의 나라를 다른 이들로부터 받으러 내가 다시 돌아오리라. 사람의 아들이 이제 거절당하는 것을 너희가 볼 터이나, 다른 시대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지금 물리치는 것을 받아들이고 높이리라.
171:8.4 (1876.1) “그리고 이제, 이 비유에서 거절당한 귀족으로서, 내 앞에 열두 종, 특별 집사들을 부르고, 너희의 손 하나하나에 돈 한 파운드를 주면서, 내 지시를 잘 주목하라고 각자에게 훈계하고자 하노라. 즉 내가 돌아올 때, 너희에게 계산을 요구할 때, 그 자금으로 너희의 집사 노릇을 정당화하도록 내가 떠나 있는 동안에 너희에게 맡긴 자금(資金)으로 부지런히 장사하여라.
171:8.5 (1876.2) “그리고 거절당한 이 아들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또 다른 아들이 이 나라를 받으려고 파송되리니, 이 아들은 그때 너희의 관리 보고를 받고 너희가 남긴 이익을 기뻐하려고 너희 모두를 부르러 사람을 보내리라.
171:8.6 (1876.3) “이 집사들이 나중에 회계하려고 한데 부름받았을 때, 첫째 사람이 앞으로 나와서, ‘주여, 당신의 파운드로 나는 열 파운드를 더 만들었나이다’ 하였더라. 그리고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잘 하였도다. 너는 착한 종이요, 네가 이 문제에 충실하였음이 입증되었으매, 너에게 열 도시를 다스릴 권한을 주리라’ 하였더라. 둘째 사람이 와서 ‘주여, 당신이 내게 맡긴 파운드가 다섯 파운드를 벌었나이다’하였는지라. 주가 가로되 ‘따라서 내가 너를 다섯 도시의 통치자로 만들리라’하였더라. 그리고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거쳐서 마지막 종까지 내려갔더니, 설명하라고 부름받자 그는 이렇게 보고하였더라: ‘주여, 보소서, 여기 당신의 파운드가 있나이다. 이 수건에 싸서 안전히 두었나이다. 내가 이렇게 한 것은 당신이 두려웠음이니이다. 당신은 놓아두지 않은 데서 가져가고, 씨 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려 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나는 당신이 분별이 없다고 믿었나이다.’ 그리고 나서 주인이 말하였더라: ‘너 게으르고 불충한 종아, 네 입에서 나오는 말로 내가 너를 판단하리라. 겉보기에 내가 씨 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는 것을 네가 아느니라. 그러므로 이 계산을 하라 요구할 것을 네가 알았느니라. 알았은즉, 내가 올 때 본전과 적당한 이자(利子)를 받도록 적어도 내 돈을 은행에 주었어야 하느니라.’
171:8.7 (1876.4) “그리고 나서 이 통치자는 대기하던 자들에게 말하였더라: ‘이 게으른 종에게서 돈을 가져다가 열 파운드 가진 자에게 주라.’ 그런 사람이 이미 열 파운드를 가졌다고 저희가 주에게 상기시키자, 그가 말하였더라: ‘가진 자마다 더 받겠거니와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조차 빼앗기리라.’”
171:8.8 (1876.5) 그리고 나서 사도들은 이 비유의 뜻과 앞서 달란트 비유의 뜻의 차이를 알려고 했으나, 예수는 여러 질문에 대답하여 다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희 각자가 그 참 뜻을 찾아내면서, 마음 속에서 이 말씀을 잘 생각해 보아라.”
171:8.9 (1876.6) 후일에 이 두 비유의 뜻을 아주 잘 가르친 사람은 나다니엘이었고, 그는 다음 결론에서 그의 가르침을 간추렸다:
171:8.10 (1876.7) 1. 능력은 인생의 기회를 재는 실용적 척도이다. 너희는 능력 바깥에 있는 것을 성취하라는 책임을 결코 지게 되지 않을 것이다.
171:8.11 (1876.8) 2. 충실함은 인간의 믿을 만함을 재는 어김없는 척도이다. 작은 일에 충실한 자는 또한 그의 자질에 맞는 모든 일에 충실함을 나타내기 쉽다.
171:8.12 (1876.9) 3. 비슷한 기회가 있을 때, 주는 적게 충실한 것에 대하여 적게 보상을 내린다.
171:8.14 (1877.2) 그들이 점심을 마쳤을 때, 그리고 따르던 군중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계속 간 뒤에, 예수는 길가에 튀어나온 어느 바위의 그늘에서 사도들 앞에 서서, 명랑한 기품과 인자한 위풍으로 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오라, 형제들아, 계속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을 받자. 이처럼 모든 일에 하늘 아버지의 뜻을 우리가 이루리라.”
171:8.15 (1877.3) 그래서 예수와 사도들은, 필사 인간 육체의 모습을 입은 주의 이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에 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172:0.1 (1878.1) 예수와 사도들은 서기 30년 3월 31일, 금요일 오후에 4시가 조금 지나서 베다니에 다다랐다. 나사로와 두 자매와 친구들은 그들을 기대하고 있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나사로가 부활한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려고 날마다 왔기 때문에, 예수는 이웃에 어느 시몬이라는 신자의 집에 머무르도록 주선이 되었다는 통지를 받았는데, 이 사람은 나사로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그 작은 마을의 촌장이었다.
172:0.2 (1878.2) 그날 저녁에, 예수는 많은 방문객을 받았고, 베다니와 벳바게의 서민들은 그를 환영하는 느낌이 들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산헤드린의 사형 선포를 철저히 무시하고, 자신이 유대인의 임금이라 선포하려고 예수가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고 숱한 사람이 생각했어도, 베다니 가족―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는―주가 그런 종류의 임금이 아니라는 것을 더 잘 깨달았다. 그들은 이것이 그가 예루살렘과 베다니를 마지막으로 찾아보는 것일지 모른다고 어렴풋이 느꼈다.
172:0.3 (1878.3) 주사제들은 예수가 베다니에서 묵는다는 정보를 받았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그를 체포하려 시도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예수가 계속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예수는 이 모든 것을 알았지만 차분하게 품위를 지켰다. 친구들은 그가 이보다 더 침착하고 유쾌한 것을 결코 본 적이 없었다. 산헤드린이 온 유대인에게 그를 자기들의 손에 넘기라고 요구했을 때 그가 그다지 아랑곳하지 않은 것에 사도들조차 놀랐다. 주가 그날 밤에 주무시는 동안, 사도들은 둘씩 그를 지켰고, 여럿이 칼을 차고 있었다. 그들은 이튿날 아침 일찍 수백 명의 순례자 때문에 잠이 깨었는데, 이들은 안식일에도 예수와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켰던 나사로를 보려고 예루살렘에서 나왔다.
172:1.1 (1878.4) 유대 당국 뿐 아니라 유대 바깥에서 온 순례자들은 모두 이렇게 물었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예수가 축제에 올라오겠느냐?” 그러므로 예수가 베다니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기뻐했지만, 주사제와 바리새인들은 얼마큼 어리둥절했다. 그들은 예수를 관할 하에 두어서 기뻤지만, 예수의 대담성에 조금 불안하였다. 그가 이전에 베다니를 방문했을 때 나사로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던 것, 또 나사로가 예수의 적들에게 큰 문제가 되고 있음을 기억했다.
172:1.2 (1878.5) 유월절 엿새 전, 안식일 다음 날 저녁에, 온 베다니와 벳바게는 시몬의 집에서 대중 연회(宴會)를 열어 예수가 도착한 것을 축하하는 데 참석하였다. 이 만찬은 예수와 나사로 두 사람에게 영예를 돌리려는 것이었고 산헤드린을 무시하고 베풀어졌다. 마르다는 식사 대접을 지시했고, 동생 마리아는 여자가 대중 연회에 앉아 있는 것이 유대인 관습에 어긋났기 때문에 여자 구경꾼들 사이에 있었다. 산헤드린의 관리들이 자리에 있었지만 예수의 친구들 한가운데서 그를 체포하기를 두려워했다.
172:1.3 (1879.1) 예수의 이름은 옛날의 여호수아를 따서 지었는데, 그는 이 여호수아에 대하여 시몬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떻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리고를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가 이야기했다. 예리고의 담이 무너졌다는 전설에 대하여 논평하면서 예수는 말했다: “나는 벽돌과 돌로 만든 그러한 담에 관심이 없지만, 아버지가 모든 사람을 사랑함이 이렇게 전파되는 앞에서, 편견ㆍ독선ㆍ미움의 담을 무너뜨리고자 하노라.”
172:1.4 (1879.2) 사도들이 모두 드물게 차분한 것을 제외하고, 연회는 아주 명랑하고 정상으로 무르익었다. 예수는 눈에 띄게 명랑했고, 식탁에 다가올 때까지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
172:1.5 (1879.3) 잔치가 끝날 때가 가까워지기까지 보통 아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때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여자 구경꾼들 무리 가운데서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 귀빈인 예수가 기댄 곳까지 가서, 아주 드물고 비싼 기름이 든, 큰 알라바스터 항아리를 열었다. 주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뒤에, 마리아는 머리털을 풀어 헤치고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문지르면서 그 발에 향유를 붓기 시작했다. 온 집이 그 향유의 냄새로 가득하였고,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마리아가 한 일에 놀랐다. 나사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중얼거리고, 그렇게 비싼 향유를 이렇게 사용한다고 분개하는 빛을 보이자, 가룟 유다는 안드레가 기대어 있는 곳으로 걸어와서 말했다: “어째서 이 향유를 팔고, 그 돈이 가난한 자들을 먹이는 데 기부되지 않았느냐? 그러한 낭비를 꾸짖으라고 너는 주께 말씀드려야 하느니라.”
172:1.6 (1879.4)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가 알고 무어라고 말했는가 들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곁에서 무릎을 꿇은 동안 예수는 마리아의 머리에 손을 얹고, 다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희는 모두, 이 여자를 가만두라. 이 여자가 마음 속에 좋은 일을 한 줄 알면서, 어찌 이 일로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 투덜거리며 이 향유를 팔아서 돈을 가난한 자에게 주었어야 한다 하는 너희에게 내가 이르노라. 너희에게 언제나 가난한 자들이 함께 있으니, 너희가 좋게 여기는 대로 아무 때나 저희에게 봉사를 베풀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항상 있지 아니하리니, 내가 곧 아버지께로 감이라. 이 여인은 장례할 때 내 몸에 바르려고 이 향유를 오랫동안 저축해 왔고, 내 죽음을 예상하여 이렇게 기름 붓는 것을 좋게 여겼은즉, 이 여인이 그리하고 싶어 하는 일을 막지 못할지니라. 이 일을 하면서, 내가 죽는 것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것에 대하여 내가 일러 온 것을 믿음을 마리아가 이 행동으로 나타냈으니, 이 여인은 너희 모두를 꾸짖었도다. 오늘 밤에 행한 일로 이 여인을 나무라지 말지니라. 오히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다가오는 시대에, 온 세상에 두루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은 어디에나 이 여인이 행한 일을 말하여 이 여인을 기억하리라.”
172:1.7 (1879.5) 가룟 유다는 이것을 친히 책망을 받았다고 생각했고, 이 책망 때문에, 감정이 상한 것을 앙갚음하려고 마침내 마음먹었다. 여러 번 그러한 생각을 전에 의식하지 않고 품었지만, 이제 머리 속에서 솔직하게 의식하여 감히 그런 사악한 생각을 품었다. 이 향유 값이 한 사람이 1년 동안 버는 것에 해당하는 금액이었기 때문에―5천 명에게 빵을 마련하기에 넉넉했으므로―많은 다른 사람이 이런 그의 태도를 북돋아 주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를 사랑했고, 돌아가신 뒤에 그의 몸을 보존하려고 이 비싼 향유를 전에 마련했는데, 이는 그가 죽어야 한다고 그들에게 미리 경고했을 때 그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이 달라져서, 아직 살아 계시는 동안 주께 이 헌물을 드리기로 했다면, 그 여자가 그리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172:1.8 (1879.6) 나사로와 마르다는 마리아가 백송향(白松香)이 담긴 이 항아리를 사려고 돈을 오랫동안 저축해 온 것을 알았고, 그런 문제에서 마음에 원하는 대로, 마리아가 하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했는데, 그들은 살림이 넉넉했고, 그런 헌물을 쉽사리 장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72:1.9 (1880.1) 주사제들이 예수와 나사로를 위하여 베다니에서 이 만찬을 베풀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은 나사로를 어떻게 처분할까 자기들끼리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번에 나사로도 또한 죽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 낸 나사로를 살려둔다면, 예수를 사형에 처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고 똑바로 결론을 내렸다.
172:2.1 (1880.2) 이 일요일 아침에, 시몬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주는 열두 사도를 주위에 부르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준비로서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아버지께 돌아가기 전에 그가 아마도 많은 연설을 하고 많은 교훈을 가르칠 것이라고 일렀지만, 예루살렘에서 이 유월절에 머무르는 동안, 대중(大衆)을 상대로 어떤 일도 삼가라고 사도들에게 훈시했다. 가까이 남아 있고 “경계하고 기도하라”고 지시했다. 사도와 직계 추종자들의 다수가 그때도 몸에 칼을 감추고 다니는 것을 알았지만, 이 사실에 대하여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172:2.2 (1880.3) 이날 아침의 가르침에는 가버나움 근처에서 사도로 세움받은 날부터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고 준비하는 이날까지 그들이 베푼 봉사에 대한 간단한 검토가 포함되었다. 사도들은 잠자코 귀를 기울였고,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172:2.3 (1880.4) 그날 아침 일찍, 다윗 세베대는 펠라 야영지의 장비를 팔아서 얻은 자금을 유다에게 넘겨주었고, 유다는 다시 이 돈의 반 이상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비상시를 예상하여 보관하려고 그들을 청한 주인 시몬의 손에 맡겼다.
172:2.4 (1880.5) 사도들과 회의를 가진 뒤에 예수는 나사로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복수심에 불탄 산헤드린에게 목숨 희생하는 일을 피하라고 그에게 지시했다. 이 훈계에 복종하여, 며칠 뒤에 나사로는 필라델피아로 피신했는데, 그때 산헤드린의 관리들이 그를 잡으려고 사람들을 보냈다.
172:2.5 (1880.6) 어떤 면에서, 예수의 추종자들은 모두 닥쳐오는 위기를 느꼈지만, 주가 드물게 명랑하고 뛰어나게 좋은 유머를 보였기 때문에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충분히 깨닫지 못하게 되었다.
172:3.1 (1880.7) 베다니는 성전으로부터 약 3.2킬로미터 되었고, 예수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려고 준비가 된 것은 그 일요일 오후 1시 반이었다. 그는 베다니와 거기 있는 소박한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는 감정을 간직했다. 나사렛과 가버나움과 예루살렘은 그를 물리쳤지만, 베다니는 그를 받아들이고 그의 인품을 믿었다. 그리고 이 작은 마을에는 거의 모든 어른과 아이가 믿는 사람이었고, 그는 땅에서 자신 수여에서 가장 막강한 일, 나사로 살리는 일을 여기서 행하기를 택했다. 나사로를 살린 것은 마을 사람들이 믿을까 싶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이미 믿었기 때문이다.
172:3.2 (1880.8) 아침 내내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하여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가 메시아라는 대중의 모든 주장을 억제하려고 언제나 애써 왔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랐다. 그는 육체를 입은 생애의 끝에 다가가고 있었고, 산헤드린은 이미 그가 죽어야 한다고 선포했다. 제자들이 자유롭게 느낌을 표현하도록 놓아둔다고 해서 아무런 해로운 일이 생길 수 없었고, 그가 정식으로 대중 앞에 떳떳이 도시로 들어가기를 택한다면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172:3.3 (1881.1) 그는 사람들의 인기를 얻으려는 마지막 노력으로서, 또는 권력의 마지막 쟁취로서 예루살렘으로 대중이 보는 가운데 들어가려고 결심하지 않았다. 전적으로 제자와 사도들의 인간적 열망을 채우려고 이렇게 하지도 않았다. 환상에 빠진 몽상가의 헛된 꿈을 예수는 전혀 품지 않았다. 그는 이 방문의 결과가 어떠할 것인가 잘 알았다.
172:3.4 (1881.2) 예루살렘으로 대중이 보는 가운데 들어가기로 작정하고 나서, 주는 그러한 결심을 실행할 적당한 방법을 선택할 필요성에 부딪쳤다. 얼마큼 모순되는 숱한 예언, 이른바 메시아 예언을 모두 생각해 보았지만, 그가 따르기가 조금이라도 적당한 것이 꼭 하나 있는 듯했다. 이 예언하는 말씀의 대부분은 임금, 다윗의 아들이자 후계자, 온 이스라엘을 외국인의 지배를 받는 멍에로부터 현세에 구원할 자, 용감하고 공격적인 사람을 묘사했다. 그러나 메시아 사명의 영적 개념을 더 지지했던 사람들이 때때로 메시아와 연결했던 성서 구절이 하나 있었는데,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계획을 위한 지침으로 같은 맥락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구절은 스가랴에서 발견되는데 이렇게 적혀 있다: “크게 기뻐하라, 아 시온의 딸아. 외치라, 아 예루살렘의 딸아. 보라, 네 임금이 너에게 오도다. 그는 공정하고 구원을 가져오도다. 비천한 자로서 나귀를 타고 오시니, 새끼, 곧 나귀의 새끼라.”
172:3.5 (1881.3) 전쟁하는 임금은 반드시 말을 타고 도시에 들어갔다. 평화와 우정의 사명으로 가는 임금은 반드시 나귀를 타고 들어갔다. 예수는 말 탄 사람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나귀를 탄 사람의 아들로서 평화롭게, 좋은 뜻을 가지고 기꺼이 들어갈 생각이 있었다.
172:3.6 (1881.4) 예수는 그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 나라는 순수하게 영적 문제라는 것을 직접 가르침으로 사도들에게 강조하려고 오랫동안 애썼지만, 이 노력에 성공하지 못했다. 쉽게 친히 가르쳐 실패한 것을 이제 상징에 호소하여 성취하기를 시도하려고 한다. 따라서, 점심 식사 바로 뒤에, 예수는 베드로와 요한을 불렀고, 큰길에서 조금 떨어져 있고 베다니의 북서쪽에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웃 마을 벳바게로 가라고 지시한 뒤에, 말씀을 이었다: “벳바게로 가서, 십자로에 이르면, 너희는 거기 묶여 있는 나귀 새끼를 발견하리라. 그 나귀를 풀어서 이리로 가져오라. 어째서 너희가 이렇게 하느냐 누구라도 묻거든, 다만 ‘주께서 나귀가 필요하니라’ 말하라.” 주가 지시한 대로 두 사도가 벳바게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트인 거리에, 구석에 있는 어느 집 근처에, 어미 가까이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발견했다. 베드로가 그 나귀 새끼를 풀기 시작하자, 주인이 다가와서 어째서 그가 이렇게 하는가 물었고, 예수가 지시한 대로 베드로가 대답하자 그 사람은 말했다: “너희의 주가 갈릴리에서 온 예수라면, 그에게 나귀 새끼를 가지고 가라.” 그래서 그들은 그 나귀 새끼를 끌고 돌아왔다.
172:3.7 (1881.5) 이때가 되자 순례자 수백 명이 예수와 사도들의 둘레에 모여 있었다. 늦은 아침부터 유월절에 가는 길에 지나는 방문자들이 머물러 있었다. 그동안에, 다윗 세베대와 옛 사자였던 동료들 가운데 몇 사람은 자청하여 예루살렘으로 서둘러 내려갔고, 거기서 나사렛 예수가 개선(凱旋) 행진으로 도시에 들어간다는 보고를 성전 주위에 방문하던 순례자 무리 사이에 효과 있게 퍼뜨렸다. 따라서 이 방문자 수천 명이, 입에 오르내리던 이 선지자요 이적을 행하는 이, 더러는 메시아라고 믿은 사람을 맞이하려고 떼를 지어 나왔다. 예루살렘에서 바깥으로 나왔기 때문에 이 군중은, 도시로 들어가는 예수와 군중이 올리브산 꼭대기를 넘어서 도시로 내려가기 시작한 바로 뒤에 그들을 만났다.
172:3.8 (1882.1) 행렬이 베다니를 출발하자, 축제에 들뜬 제자, 신자, 방문하는 순례자로 이루어진 군중이 크게 흥분하였고, 순례자들 가운데 다수가 갈릴리와 페레아에서 왔다. 그들이 출발하기 바로 전에, 최초의 여인단의 열두 여인이 동료들을 더러 데리고 그 장면에 이르렀고, 그 진기한 행렬이 도시를 향하여 즐거워하며 계속 움직이자 거기에 합세했다.
172:3.9 (1882.2) 출발하기 전에, 알패오 쌍둥이는 자신들의 외투를 나귀 위에 올려놓고 주가 올라타는 동안 주를 붙들었다. 그 행렬이 올리브산 꼭대기를 향하여 움직이자, 임금의 아들, 약속된 메시아를 태운 나귀를 위하여 영예로운 깔개를 만들려고, 축제 기분에 싸인 군중이 땅에 옷을 벗어 던지고 가까이 있는 나무에서 가지들을 꺾어 왔다. 즐거운 군중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계속 움직이는 동안, 그들은 시편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아니 차라리 한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다윗의 아들에게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는 자는 복이 있도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나라는 복이 있을지어다.”
172:3.10 (1882.3) 그들이 따라 움직이자 예수는 명랑하고 즐거웠으며, 올리브산 꼭대기에 이르자, 거기서 도시와 성전의 탑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거기서 주는 행렬을 멈추었고, 그들이 예수가 눈물 흘리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큰 침묵이 모두를 덮었다. 도시에서 그를 환영하려고 쏟아져 나오는 방대한 군중을 내려다보며, 주는 크게 감동하고 눈물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예루살렘아, 너라도, 적어도 너의 한창 때, 무엇이 너의 평화시에 속하고 무엇을 아주 거저 가질 수 있었는가 네가 알기만 했더라면! 그러나 이제 이 영광이 바야흐로 네 눈에 보이지 않게 감춰지려 하는구나. 너는 이제 평화의 아들을 물리치고 구원의 복음에 등을 돌리려 하는구나. 네 둘레에 도랑을 파고 사방(四方)에서 너를 포위할 시절이 곧 네게 닥치리라.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기까지 저희가 너를 남김없이 파괴할지니라. 신이 방문하는 시절을 네가 알지 못하였으니 이 모든 것이 너에게 닥칠지니라. 너는 바야흐로 하나님의 선물을 거절하려 해도, 모든 사람이 너를 거절하리라.”
172:3.11 (1882.4) 그가 말씀을 마치고 나자, 그들은 올리브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종려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를 외치며, 달리 한껏 기뻐하고 즐거운 기분을 나누는 무리, 예루살렘에서 나온 방문자들의 무리와 금방 합세하였다. 주는 이 군중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와서 그들을 맞이하도록 계획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한 일이었다. 극적인 아무 일도 그는 결코 미리 꾸미지 않았다.
172:3.12 (1882.5) 주를 환영하려고 쏟아져 나온 군중과 아울러, 또한 숱한 바리새인과 다른 적들이 왔다. 민중의 환호가 갑자기 생각지 않게 터진 것에 너무나 불안해져서, 그들은 체포하는 행동이 민중이 터놓고 폭동을 터뜨리게 만들지 않을까 저어하여 예수를 체포하기가 두려웠다. 그들은 큰 방문자 무리가 어떤 태도를 가질까 크게 두려워했는데, 이들은 전에 예수에 대하여 많이 소문을 들었고, 이들 가운데 다수가 예수를 믿었다.
172:3.13 (1882.6)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자, 군중은 점점 더 시위하는 모습이었고, 너무 지나쳐서 바리새인들 가운데 더러는 예수 옆에 다가와서 말했다, “선생이여, 당신은 제자들을 꾸짖고 저희에게 더 점잖게 행동하라고 타일러야 하나이다.” 예수는 대답했다: “주사제들이 거절한 평화의 아들을 이 아이들이 환영하는 것이 마땅할 따름이라. 길가에 있는 이 돌들이 저희 대신에 외치지 않을까 하나니, 저희를 멈추는 것이 소용 없으리라.”
172:3.14 (1882.7) 바리새인들은 황급히 행렬을 앞질러 가서 산헤드린으로 다시 돌아갔다. 산헤드린은 그때 성전에서 심의하는 중이었고 그들은 동료들에게 보고했다: “보라,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 아무 소용이 없도다. 우리는 이 갈릴리 사람 때문에 엉망진창이 되었도다. 사람들은 저에게 미쳤는지라. 우리가 이 무지한 자들을 멈추지 아니하면, 온 세상이 저를 뒤쫓아 가리라.”
172:3.15 (1883.1) 이렇게 겉으로 자연스럽게 군중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지게 된 것에 붙여야 할 아무런 깊은 의미가 정말로 없었다. 이러한 환영은 비록 즐겁고 진지하기는 했어도 흥겨운 이 군중의 마음 속에 진정하거나 뿌리 깊은 어떤 확신이 있음을 가리키지 않았다. 바로 이 군중은 이 주의 후반(後半)에, 산헤드린이 일단 예수를 적대하여 굳고 단호한 태도를 취하자, 그리고 그들이 환상에서 깨어났을 때―오랫동안 간직했던 기대에 따라서 예수가 하늘나라를 세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똑같이 기쁘게 예수를 재빨리 거부했다.
172:3.16 (1883.2) 그러나 온 도시가 힘차게 술렁거렸고, 그래서 사람마다 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구뇨?” 군중은 응답했다, “갈릴리 선지자, 나사렛 예수라.”
172:4.1 (1883.3) 알패오 쌍둥이가 나귀를 주인에게 돌려주는 동안에, 예수와 열 사도는 가까운 동료들과 따로 떨어져, 성전 둘레를 거닐며, 유월절을 위한 준비를 구경하였다. 산헤드린이 사람들을 크게 두려워했기 때문에, 예수에게 손대려는 아무런 시도도 없었고, 이것이 결국은 예수가 군중으로 하여금 이렇게 그를 환호하도록 버려둔 이유 중에 하나였다. 이것이 도시에 들어가고 나서 예수가 즉시 붙잡히는 것을 막는 데 효과적일 수 있었던 유일한 인간적 과정이었다는 것을 사도들은 조금도 깨닫지 못했다. 주는 유월절에 온 수만의 방문자 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높고 낮은 주민에게 복음을 들을 기회, 그들이 원한다면 평화의 아들을 받아드릴 이 마지막 기회를 한번 더 주고 싶었다.
172:4.2 (1883.4) 이제, 저녁이 다가오자, 군중은 먹을 것을 찾으러 갔고, 예수와 직계 추종자들만 남았다. 얼마나 이상한 날이었는가! 사도들은 생각이 깊었지만 말이 없었다. 예수와 관계를 가졌던 여러 해 동안, 그런 날을 구경한 적이 없었다. 한 순간 그들은 성전 금고 옆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 떨어뜨리는 것을 구경했다: 부자들은 돈 받는 상자 속에 많이 넣었고, 모두가 가진 재산의 한도에 따라서 무엇인가 냈다. 마침내, 제대로 옷을 걸치지 못한 어느 가난한 과부가 왔고, 그 여자가 (작은 동전) 두 잎을 나팔 속으로 넣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서 사도들이 과부를 주목하게 하며 예수는 말했다: “너희가 방금 본 것을 잘 주목하여라. 이 가난한 과부는 모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던졌으니, 이 모든 다른 사람은 남는 데서 하찮은 것을 얼마큼 헌금으로 던졌거니와 이 가난한 여인은 비록 빈궁한데도 가진 것을 모두, 아니 생활에 쓸 것까지도 내놓았느니라.”
172:4.3 (1883.5) 저녁이 가까워지자, 그들은 말없이 성전 마당 근처에 이리저리 걸었고, 이 낯익은 장면들을 다시 한번 둘러본 뒤에, 더 일찍 있었던 방문도 제외하지 않고 이전의 여러 방문과 관련된 느낌을 회상하며, 예수는 말했다: “베다니로 올라가서 쉬자.”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예수는 시몬의 집으로 갔고, 한편 다른 사도들은 베다니와 벳바게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묵었다.
172:5.1 (1883.6) 이 일요일 저녁에, 그들이 베다니로 돌아가는 동안 예수는 사도들 앞에서 걸었다. 그들이 시몬의 집에 이른 뒤에 헤어질 때까지, 말 한 마디도 떨어지지 않았다. 어떤 열두 사람도, 이 하늘나라 대사(大使)들의 정신과 혼을 통하여 지금 솟구치고 있는 것처럼 다양하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일찍이 느낀 적이 없었다. 이 억센 갈릴리 사람들은 어리둥절하고 당황하였다. 다음에 무엇을 기대할지 몰랐다. 너무 놀라서 그다지 두려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주가 다음 날 무엇을 계획하는가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들은 숙소로 돌아갔지만, 쌍둥이를 제외하고, 별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시몬의 집에서, 무기(武器)를 가지고 예수를 지키지는 않았다.
172:5.2 (1884.1) 안드레는 완전히 어리둥절했고 거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는 대중의 환호가 터진 것을 평가하려고 진지하게 애쓰지 않은 유일한 사도였다. 사도단의 우두머리로서 자기 책임을 생각하는 데 너무 몰두해서, 군중이 크게 호산나를 외친 것에 무슨 의미나 중요성이 있는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안드레는 동료들 가운데 몇 사람을 지켜보느라고 바빴고, 그들이, 특히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과 열심당원 시몬이, 흥분한 동안에 감정을 못 이길까 두려워했다. 이날 하루 종일, 그리고 뒤이은 며칠 동안, 안드레는 심각한 의심이 들었지만, 사도 동료들에게 이러한 걱정거리를 전혀 털어놓지 않았다. 그는 열둘 가운데 몇 사람이 칼로 무장한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의 태도가 걱정되었지만, 바로 아우 베드로가 그런 무기를 지니고 있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행렬은 안드레에게 비교적 깊지 않은 인상을 주었다. 자기 책임에 너무 바빠서, 그는 달리 영향을 받을 수 없었다.
172:5.3 (1884.2) 시몬 베드로는 민중이 이처럼 열광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거의 날 듯한 기분이었지만, 그들이 그날 밤 베다니로 돌아올 때가 되자, 그는 어지간히 정신이 들었다. 베드로는 다만 주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열광의 파도에 뒤이어, 예수가 어떤 종류의 발표를 하지 않아서 몹시 실망했다. 베드로는 그들이 성전에 도착했을 때, 어째서 예수가 군중에게 말씀을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적어도 사도들 중 한 사람에게 군중에게 연설하라고 허락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베드로는 위대한 설교자였고, 그렇게 술술 받아들이고 열광하는 큰 청중을 헛되이 보내는 것을 보고 아까워했다. 군중에게 성전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하늘나라 복음을 무척 전파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는 이 유월절 주간에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전혀 가르치거나 설교해서는 안 된다고 그들에게 특별히 당부했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이 볼 만한 행렬이 보인 반응은 시몬 베드로에게 비참했다. 밤이 되자 그는 제 정신이 들었고 말할 수 없이 슬펐다.
172:5.4 (1884.3) 야고보 세베대에게, 이 일요일은 어리둥절하고 깊은 혼란에 빠진 날이었다. 그는 진행되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알아차릴 수 없었다. 주가 무슨 목적으로 사람들이 이렇게 사납게 환호하도록 버려두고 나서, 그들이 성전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에게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행렬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리브산을 내려가는 동안에, 특히 그들이 주를 환영하려고 쏟아져 나온 수천의 순례자와 마주쳤을 때, 야고보는 구경한 것에 대하여 가슴 뿌듯함과 만족이 엇갈리는 감정 때문에, 또 그들이 성전에 다다랐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깊은 두려운 느낌 때문에, 마음이 몹시 산란하였다. 그리고 나서 예수가 나귀에서 내려서, 느긋하게 성전 마당 둘레를 계속 거닐었을 때, 그는 풀이 죽었고 실망에 빠졌다. 하늘나라를 선포할 그러한 대단한 기회를 던져 버리는 이유를 야고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밤이 되자 그의 정신은 슬프고 끔찍한 불안 속에 빠져 있었다.
172:5.5 (1884.4) 요한 세베대는 어째서 예수가 이렇게 했는가 얼마큼 가깝게 이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적어도 이렇게 이른바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이 무슨 영적 의미가 있는가 얼마큼 깨달았다. 군중이 성전을 향하여 계속 움직임에 따라서, 그리고 거기 주가 나귀 새끼에 걸터앉아 있는 것을 보는 동안, 요한은 예수가 한때 성서의 구절, 스가랴의 말씀을 인용한 것을 기억했는데, 이것은 메시아가 평화의 사람으로 오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을 묘사했다. 이 구절을 머리 속에서 이모저모 따져보자, 요한은 이 일요일 오후의 구경거리가 무슨 의미를 상징하는가 비로소 알아차렸다. 적어도 그는 이 구절의 뜻을 넉넉히 깨달았고, 이것은 그로 하여금 그 사건을 얼마큼 즐기고, 겉보기에 목적 없이 승리의 행진이 끝난 것을 보고 지나치게 우울해지지 않게 하였다.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상징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성향이 있는 종류의 머리를 가졌다.
172:5.6 (1885.1) 빌립은 갑자기, 저절로 군중이 열광한 것에 온통 들떠 있었다. 올리브산에서 내려가는 길에, 이 모든 시위가 도대체 무슨 일인가 어떤 정돈된 개념에 도달할 만큼 충분히 생각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주가 영예를 받았기 때문에, 그는 어떤 면에서 그 연출을 기쁘게 보았다. 그들이 성전에 이를 때가 되자, 그는 예수가 아마도 그에게 군중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요청할까 하는 생각에 움찔했고, 그래서 군중으로부터 여유 있게 돌아서는 예수의 행동이 대다수의 사도들에게 그토록 쓰라린 실망을 주었지만, 빌립에게는 크게 안심이 되었다. 군중은 때때로 열두 사도의 집사에게 큰 시련이었다. 군중의 물질적 필요에 관하여 이런 개인적 걱정을 덜고 난 뒤에, 빌립은 군중을 가르치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베드로와 함께 실망을 표현했다. 그날 밤에 빌립은 이 체험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고, 하늘나라 관념 전부를 의심하는 유혹이 들었다. 이 모든 일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솔직하게 궁금했지만, 의심을 아무에게도 나타내지 않았는데, 예수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주를 크게 신뢰하였다.
172:5.7 (1885.2) 상징과 예언 같은 모습을 제쳐놓고, 나다니엘은 주가 어째서 유월절의 순례자들로부터 일반적 지지를 구했는가 가장 가깝게 이해하였다. 그들이 성전에 이르기 전에, 예루살렘으로 그렇게 시위(示威)하며 들어가지 않고는 주제넘게 도시로 들어가는 순간, 예수가 산헤드린의 관리들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던져졌으리라는 것을 생각해서 알아냈다. 그러므로 예수가 도시의 담 안으로 일단 들어가고,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를 즉시 체포하는 일을 삼가도록 이렇게 그들에게 강력하게 감명을 주고 나서, 주가 즐거워하는 군중을 더 이상 이용하지 않은 것을 보고 나다니엘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이런 방법으로 주가 도시에 들어간 참 이유를 알았기 때문에, 나다니엘은 자연히 더 차분히 따라갔고, 다른 사도들보다 예수의 나중 행동에 그다지 마음이 흔들리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나다니엘은 까다로운 상황을 다루는 데 예수가 지혜롭고 영리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을 크게 신뢰했다.
172:5.8 (1885.3) 마태는 처음에 이 구경거리의 진행을 보고 어쩔 줄을 몰랐다. 예루살렘의 임금이 구원을 가져오고 나귀 새끼를 타고서 왔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기뻐하는 것을 선지자가 언급하는 스가랴의 구절을 또한 상기할 때까지, 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깨닫지 못했다. 그 행렬이 도시 방향으로 움직이고, 그리고 나서 성전에 가까워지자, 마태는 환희에 빠졌다. 소리지르는 이 군중의 선두에 서서 주가 성전에 도착했을 때, 무슨 놀라운 일이 일어나리라고 확신했다. 바리새인들 가운데 하나가, “모두 보라, 누가 여기에 오는가, 유대인의 임금이 나귀를 탔구나!”하며 예수를 비웃었을 때, 마태는 겨우 크게 자제하여 가까스로 그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날 저녁에 베다니로 돌아가는 길에 열두 사도 중에서 아무도 그보다 더 우울하지 않았다. 시몬 베드로와 열심당원 시몬 다음으로, 그는 신경이 아주 날카롭게 곤두섰고, 밤이 되자 지친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마태는 훨씬 즐거워졌다. 결국 그는 지고도 즐거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172:5.9 (1886.1) 토마스는 모두 열두 사도 가운데서 가장 어리둥절하고 당황한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에 그냥 따라다녔고, 그 광경을 보면서 주가 그러한 특이한 시위에 참가한 동기가 도대체 무엇일까 정직하게 의문을 품었다. 가슴 속 깊이 그 연출 전체가, 명백히 어리석지는 않더라도, 조금 유치하다고 여겼다. 이와 같은 어떤 일도 예수가 하신 것을 본 적이 없었고, 이 일요일 오후에 예수의 이상한 행동을 설명하지 못하여 그는 어리둥절했다. 그들이 성전에 이를 때가 되어서, 토마스는 이 민중 시위의 목적은 산헤드린을 깜짝 놀라게 해서, 그들이 감히 주를 즉시 체포하려 하지 않도록 하는 것임을 추측했다. 베다니로 돌아가는 길에, 토마스는 생각이 많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잘 때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시끌벅적한 입성을 연출한 예수의 영리함이 얼마큼 유머 있게 호소하기 시작했고, 그는 이 반응 때문에 기분이 많이 즐거워졌다.
172:5.10 (1886.2) 열심당원 시몬에게 이 일요일은 멋진 날로 시작되었다. 다음 며칠 동안 예루살렘에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환상을 보았고, 그 점에서 그는 옳았다. 그러나 이 시몬은 예수가 다윗의 왕좌에 앉고, 유대인들이 새로이 나라를 통치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꿈꾸었다. 하늘나라가 선포되자마자 민족주의자들이 행동에 나서고, 바로 그는 새 나라에서 모이는 군대의 최고 지휘를 맡는 것을 보았다. 올리브산으로 내려가는 길에, 그날 해가 지기 전에 산헤드린과 그 동조자들이 다 죽는 것을 환상으로 보기까지 했다. 무슨 큰 일이 일어나려 한다고 정말로 믿었다. 그는 군중 전체에서 가장 시끄러운 사람이었다. 그날 오후 5시가 되자, 그는 말이 없고 움츠러들고 환상에서 깨어난 사도였다. 적어도 주가 부활하고 시간이 오래 지나기까지, 그는 이날의 충격을 받은 결과로 그에게 덮친 우울함에서 결코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172:5.11 (1886.3) 알패오 쌍둥이에게 이날은 완벽한 날이었다. 끝까지 하루를 정말로 즐겼고, 성전 근처에서 주가 조용히 둘러보는 동안에 옆에 없었기 때문에, 민중 봉기의 시시한 끝을 상당히 피했다. 그날 저녁에 베다니로 돌아왔을 때, 풀이 죽은 사도들의 행동을 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쌍둥이가 기억하기로, 이날이 언제나 땅에서 하늘에 가장 가까운 날이었다. 이날은 사도로서 그들의 생애 전체에서 흐뭇한 절정이었다. 이 일요일 오후의 가슴 뿌듯했던 기억은 파란 많은 이 주간의 비극 모두를 치르고, 십자가 처형이 있던 바로 그 시간까지 그들을 버티게 했다. 그것은 쌍둥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어울리는, 임금의 입성(入城)이었고, 그들은 구경거리 전부를 순간마다 즐겼다. 그들은 본 것을 모두 완전히 좋게 여겼고, 오랫동안 그 기억을 간직했다.
172:5.12 (1886.4) 모든 사도 가운데, 가룟 유다는 이 행렬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것에 가장 나쁘게 영향을 받았다. 시몬의 집에서 잔치할 때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것과 관련하여 그 전날 주의 꾸지람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머리는 불만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유다는 그 광경 전부에 속이 메스꺼웠다. 그에게 이것은 정말로 우스꽝스럽지는 않더라도 유치하게 보였다. 복수심에 찬 이 사도가 이 일요일 오후의 행렬을 보았을 때, 그에게 예수는 임금이라기보다 어릿광대와 비슷하게 보였다. 그는 마음 속에서 그 연출 전체를 분개하였다. 그는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관점을 가졌고, 이들은 나귀나 나귀 새끼를 타겠다고 찬성할 사람은 누구든지 깔보았다. 승리의 행렬이 도시로 들어갔을 무렵에, 유다는 그러한 하늘나라 관념 전부를 버리기로 거의 작정하였다. 하늘나라를 세우려는 모든 그러한 어처구니없는 시도를 그만두기로 거의 결심하였다. 그리고 나서 나사로의 부활과 많은 다른 일을 생각했고, 적어도 하루 더, 열둘과 함께 계속 남아 있기로 마음먹었다. 게다가 그는 돈 가방을 지녔고 사도의 자금을 몸에 지니고서, 버리고 달아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날 밤에 베다니로 돌아가는 길에 그의 행동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는데, 사도들이 다 똑같이 풀이 죽었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172:5.13 (1887.1) 유다는 사두개인 친구들의 조롱에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다. 예수가 도시의 대문에 막 이르자 일어난 어떤 작은 사건만큼, 어떤 한 가지 다른 요인도 그에게 그렇게 강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어떤 저명한 사두개인이 (유다 집안의 한 친구) 즐겁게 비웃는 생각으로 그에게 달려가서 등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내 좋은 친구여, 어찌하여 그리 근심하는 얼굴인가. 이 나사렛 예수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대문들을 지날 때 우리가 그를 유대인의 임금이라 갈채하는 동안, 기운을 내고 우리 모두와 합세하게나.” 유다는 박해를 받는다고 움츠러든 적이 없었지만, 이 따위의 비웃음은 견딜 수 없었다. 오래 간직했던 복수의 감정과 함께, 웃음거리가 될까 하는 이 치명적 두려움, 주와 동료 사도들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이 끔찍하고 두려운 느낌이 이제 섞였다. 마음 속에서, 사도로 세움받은 이 하늘나라 대사는 이미 배반자였다. 주와 드러내놓고 갈라지는 어떤 그럴듯한 핑계를 찾는 일이 남았을 뿐이다.
173:0.1 (1888.1) 이 월요일 아침 일찍, 미리 주선하여, 예수와 사도들은 베다니에, 시몬의 집에서 모였고, 간단한 회의를 가진 뒤에 예루살렘으로 떠났다. 성전을 향하여 길을 가는 동안 열두 사도는 이상하게 말이 없었고, 전날의 체험을 겪고 나서 아직 회복하지 못했다. 그들은 기대에 차 있고 두려웠으며, 이 유월절 주간 내내, 아무 대중 교육도 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와 함께, 주가 갑작스럽게 전술을 바꿔서 생긴 느낌, 어떤 거리감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
173:0.2 (1888.2) 이 무리가 올리브산을 내려가는 동안, 예수는 앞장섰고 사도들은 생각에 잠겨 말없이 바짝 뒤에 따라갔다.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의 머리 속에서 맨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꼭 하나 있었는데, 이것이었다: 오늘 주가 무슨 일을 하실까? 유다가 열중한 한 가지 생각은 이것이었다: 어찌할까? 예수와 동료들과 함께 계속 갈까, 아니면 물러날까? 그리고 내가 그만두려면, 어떻게 사이를 끊을까?
173:0.3 (1888.3) 이 사람들이 성전에 도착했을 때는 날씨가 산뜻한 이날 아침, 9시쯤이었다. 그들은 대번에 예수가 아주 흔히 가르치던 큰 마당으로 갔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신자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에, 예수는 가르치는 연단(演壇) 가운데 하나에 올라가서, 모여드는 군중에게 연설하기 시작했다. 사도들은 좀 떨어진 곳으로 물러나서 형편이 어찌 되어 가는가 보려고 기다렸다.
173:1.1 (1888.4)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 및 예식과 관련하여 거대한 상업이 발달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제물을 바치는 데 적당한 동물을 마련해주는 장사가 있었다. 예배하는 사람이 자신의 제물을 마련하는 것이 허락되기는 했어도, 레위 율법의 뜻으로 보아서, 그리고 성전의 공식 검열자들이 판단하건대 전혀 “흠”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완전하다고 생각된 자기의 짐승을 성전 검사원에게 퇴짜맞는 창피를 많은 예배자가 겪었다. 따라서 희생에 바치는 짐승을 성전에서 사는 것이 더 널리 퍼진 관습이 되었다. 가까운 올리브산에 몇 군데에서 짐승을 살 수 있었지만, 이런 짐승을 성전의 우리에서 직접 사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차츰, 성전 마당에서 온갖 종류의 희생 짐승을 파는 이 관습이 생겨났다. 엄청난 이익을 남기는 대규모 장사가 이렇게 생겨나게 되었다. 이 이익의 일부는 성전 금고에 들어가도록 예정되었지만, 반 이상이 현임(現任) 대사제 가족들의 손에 간접으로 넘어갔다.
173:1.2 (1888.5) 성전에서 이렇게 짐승 파는 일이 번영한 것은 예배자가 그러한 짐승을 샀을 때 값이 얼마큼 높을지 몰라도, 더 이상 요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고, 의도한 제물이 진짜 흠이나 율법상 흠이 있다는 이유로 퇴짜맞지 않을 것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인가, 특히 나라의 큰 축제 동안에, 서민들에게 터무니없이 지나친 값을 요구하는 제도가 실행되었다. 한때 탐욕스러운 사제들은 가난한 사람에게 동전 몇 잎에 팔았어야 할 비둘기 한 쌍에 한 주 동안의 노동에 해당하는 값을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안나스의 아들들”은 성전 구역 안에서 그들의 상점가를[1] [1806] 이미 정착시키기 시작했고, 바로 이 상품 시장은 성전 자체가 멸망하기 3년 전에, 군중이 마지막으로 뒤집어엎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173:1.3 (1889.1) 그러나 희생 짐승과 잡동사니 상품의 거래만이 성전 마당을 더럽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었다. 이 시절에, 바로 성전 구역 안에서 행해진 광범위한 체계의 금융 및 상업 거래가 조장되었다. 이는 모두 다음 방식으로 생겼다. 아스모니아 왕조 시절에 유대인들은 자체의 은화(銀貨)를 찍었고, 이 유대의 은전으로 반 세겔의 성전 세금과 모든 기타 성전 요금을 내라고 요구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이 규정은 팔레스타인과 로마 제국의 다른 지방에서 두루 유통되는 많은 종류의 화폐를 유대인이 찍은 이 정통 세겔로 바꾸는 허가를 환전상들이 받는 것을 필요하게 만들었다. 여자ㆍ노예ㆍ미성년을 제외하고 모두가 내야 하는 성전 인두세(人頭稅)는 반 세겔이었고, 다임과[2] [1807] 같은 크기였지만, 두 배나 두꺼웠다. 예수의 시절이 되자, 사제들은 또한 성전 세금을 내는 것이 면제되었다. 따라서, 유월절 전달 15일부터 25일까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에 그들에게 성전 세금을 물 적당한 돈을 마련해주는 목적으로, 인가받은 환전상들이 팔레스타인의 주요 도시에서 노점을 세웠다. 이 열흘 기간이 지난 뒤에, 이 환전상들은 예루살렘으로 계속 옮겨갔고, 나아가서 성전의 여러 마당에서 돈을 바꾸어주는 탁자를 세웠다. 그들은 약 10전의 가치가 있는 은전을 바꾸는 데, 3전에서 4전에 해당하는 수수료를 받는 것이 허락되었고, 더 큰 가치가 있는 은화를 바꾸려고 내놓을 경우에, 두 배를 걷는 것이 허락되었다. 마찬가지로 이 성전 은행가들은 희생 짐승을 사고, 서약한 것을 지불하고 헌물 바치려고 뜻한 모든 돈을 바꿔주면서 이익을 챙겼다.
173:1.4 (1889.2) 성전에 있는 이 환전상들은 방문하는 순례자들이 정기적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스무 종류가 넘는 돈을 교환하면서 이익을 얻으려고 정규 은행 사업을 운영했을 뿐 아니라, 또한 은행 사업에 관계되는 모든 다른 종류의 거래에 종사했다. 성전의 금고와 성전의 권력자들은 이 상업 활동에서 엄청나게 이익을 남겼다. 서민들이 가난에 시들고 이 부당한 세금을 계속 내는 동안, 성전 금고가 1천만 달라 넘게 보유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173:1.5 (1889.3) 이 시끄러운 환전상, 장사꾼, 가축 상인들이 모여 있는 한 가운데서, 이 월요일 아침에 예수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가르치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성전 모독에 대하여 예수 혼자 분개하지는 않았다. 서민들, 특히 외국 지방에서 온 유대인 방문자들도 이렇게 폭리를 남기면서 민족의 예배 장소를 훼손하는 것을 진심으로 분개하였다. 이때 바로 산헤드린은 장사하고 물물 교환하는 이 모든 왁자지껄하는 소리와 혼란에 둘러싸인 어느 방에서 정기(定期) 회의를 열었다.
173:1.6 (1890.1) 예수가 막 연설을 시작하려 하자, 어쩌다가 두 가지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가까이 있던 환전상의 돈 바꾸는 탁자에서,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어느 유대인에게 바가지를 씌웠다는 주장에 대하여 사납고 맹렬한 말다툼이 일어났고, 한편 동시에 짐승 우리의 한 구역에서 다른 구역으로 몰려가는 1백여 마리 황소 떼의 울음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잠시 멈춰서 말은 없어도, 이러한 장사와 혼란의 장면을 깊이 생각하는 동안에, 예수는 가까이서 순진한 갈릴리 사람, 한때 이론에서 함께 이야기한 적이 있는 사람이, 거드름피고 잘난 체하는 유대 지방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어 이리저리 떠밀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한데 모여, 예수의 혼 속에서 이상하게 이따금 생기는 분한 감정이 한번 북받쳐 올랐다.
173:1.7 (1890.2) 가까이 서 있던 사도들은 금방 뒤따라 생긴 일에 참여하기를 삼갔고, 이들이 놀란 가운데 예수는 가르치는 연단에서 걸어 내려가서, 마당을 통해서 가축을 몰고 가던 젊은이에게로 가서, 노끈으로 된 채찍을 빼앗아 재빨리 짐승들을 성전으로부터 몰아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성전 마당에 모인 수천 명이 놀라서 구경하는 앞에서, 가장 먼 가축 우리까지 당당히 걸어가서, 다음에 외양간마다 문을 열고 갇혀 있는 짐승들을 몰아냈다. 이때가 되자, 모인 순례자들은 그 충격에 흥분하였다. 아우성치면서 그들은 저잣거리를 향하여 움직였고, 환전상들의 탁자를 뒤집어엎기 시작했다. 5분도 채 안 되어 모든 장사가 성전으로부터 치워져 버렸다. 가까이 있던 로마 호위병들이 그 장면에 나타났을 때가 되자, 모두가 조용해졌고, 군중은 질서를 찾았다. 예수는 연단으로 돌아와서 군중에게 말씀했다: “오늘 너희는 성서에 기록된 것을 목격하였느니라: ‘내 집은 모든 민족이 기도하는 집이라 부를지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를 강도의 굴로 만들었느니라.’”
173:1.8 (1890.3) 그러나 그가 다른 말을 입 밖에 내기도 전에, 큰 회중이 찬송하는 호산나를 외쳤고, 당장에 젊은이의 무리가 군중으로부터 걸어나와서, 신성을 모독하고 폭리를 취하는 상인들이 신성한 성전에서 쫓겨난 것을 고맙게 여기는 감사 찬송을 불렀다. 이때가 되자 어떤 사제들이 그 장면에 나타났고, 그들 가운데 하나가 예수에게 말했다: “너는 레위의 자손들이 말하는 것을 듣지 않느냐?” 주는 대답했다: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으로부터 찬송이 완전하게 되었도다’함을 너는 읽어본 적이 없느냐?” 예수가 가르치는 동안, 나머지 하루 종일, 사람들이 세워놓은 파수들이 아치 길마다 망을 보았고, 누가 빈 그릇을 들고 성전 마당을 통과하는 것조차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173:1.9 (1890.4) 이 일에 관하여 소식을 들었을 때, 주사제와 서기관들은 어이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주를 두려워했고, 더군다나 주를 죽이려고 결의(決意)가 굳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쩔 줄 몰랐다. 어떻게 그를 죽게 만들까 알지 못했으니, 군중을 크게 두려워했기 때문이고, 이들은 주가 신성을 모독하는 모리배를 타도한 것을 이제 거리낌없이 지지했다. 그리고 이날 내내, 성전 마당에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날에,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글자 그대로 그 말씀에 매달렸다.
173:1.10 (1890.5) 사도들은 예수의 이 놀라운 행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작스럽고 뜻하지 않게 주가 이렇게 행동한 데 너무 놀라서, 그 사건 전체를 통해서 그들은 연사(演士)의 강단 가까이 떼를 지어 함께 남아 있었다. 그들은 결코 이 성전 치우는 일을 도우려고 손을 까딱하지 않았다. 이 볼 만한 사건이 그 전날, 군중이 큰 소리로 즐겁게 소리지르는 동안 내내, 도시의 대문을 거쳐 가는 떠들썩한 그의 행렬이 끝났을 때, 예수가 성전에 승리하여 도착했을 때 일어났더라면, 그 사건을 위하여 준비되었을 터이지만, 일이 벌어진 바와 같이, 그들은 전혀 참여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173:1.11 (1891.1) 성전을 이렇게 깨끗이 치운 것은 가난한 자와 배우지 못한 자를 희생하면서 생기는 온갖 형태의 불공평한 처사와 폭리를 그가 싫어한 것 뿐 아니라, 종교 관습을 상업화하는 것에 대한 주의 태도를 드러낸다. 이 사건은 또한 정치ㆍ재정, 또는 교회의 권력 뒤에 자리를 굳힐 수 있는 부당한 소수의 관습, 불공평하고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관습에 대항해서, 어떤 주어진 인간 집단의 대다수를 보호하기 위하여 무력(武力) 쓰기 싫어하는 것을 예수가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또한 보여준다. 자기 보호를 위해서나 칭찬할 만한 일생의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서, 이상주의 때문에 무력에 의존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누르려고, 눈치 빠르고 사악하고 술책을 꾸미는 사람들이 자체를 조직하도록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173:2.1 (1891.2) 일요일에 개선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은 유대 지도자들을 너무나 두렵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들은 삼가 예수를 체포하지 않았다. 오늘, 이 볼 만한 성전 치우기는 마찬가지로 주의 체포를 미루는 효과를 가졌다. 날마다 유대인 권력자들은 그를 죽이겠다는 결심이 점점 더 굳어졌지만, 두 가지 두려움 때문에 난처했고, 그 두려움 때문에 공격 시간이 늦어졌다. 주사제와 서기관들은 군중이 분개하여 날뛰며 그들을 공격할까 두려워서 대중 앞에서 예수 체포하기를 망설였다. 그들은 또한 로마 파수병들이 민중의 봉기(蜂起)를 진압하려고 소집되는 가능성을 두려워했다.
173:2.2 (1891.3) 산헤드린의 정오 회의에서, 주의 친구들이 하나도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를 신속히 없애버려야 한다고 만장 일치로 가결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 어떻게 그를 잡아 가두어야 하는가 찬성할 수 없었다. 사람들 사이로 나가서, 예수의 가르침에서 그를 옭아매거나, 아니면 그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체면을 깎아내리려고 애쓸 다섯 무리를 임명하는 데 마침내 찬성하였다. 따라서, 두 시쯤에, 예수가 “아들의 자유”에 대하여 말씀을 막 시작하자, 이 이스라엘 장로들의 한 무리가 헤치고 예수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보통 관습대로 말씀을 가로막고 이렇게 물었다: “어떤 권한으로 네가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너에게 이 권한을 주었느냐?”
173:2.3 (1891.4) 예수의 특징이었던 특별한 방법으로, 특히 성전에서 모든 상업(商業)을 치워버린 최근의 행동과 상관되다시피, 감히 가르치고 행동하는 어떤 사람에게도 성전 권력자와 유대인 산헤드린의 관리들이 이렇게 묻는 것은 아주 당연했다. 이 장사꾼과 환전상들은 모두 최고 책임자들로부터 직접 면허를 얻어서 운영했고, 그들이 얻는 이익의 일부가 성전 금고로 곧장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다. 권한이 온 유대인의 금언(金言)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 선지자들은 언제나 문제를 일으켰는데, 이는 그들이 권한이 없이, 랍비 학원에서 정식으로 가르침을 받고 나중에 산헤드린의 공식 임명을 받지 않고서, 아주 용감히 주제넘게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버젓이 대중을 가르치면서 이 권한이 없는 것은 무식하게 주제넘거나 드러내놓고 반항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시절에 오직 산헤드린이 장로(長老)나 선생을 세울 수 있었고, 그런 예식은 이전에 그렇게 세움받은 사람들이 적어도 세 명 있는 자리에서 행해져야 했다. 그러한 임명은 그 선생에게 “랍비”라는 칭호를 수여했고, 또한 그에게 “판결을 하라고 그 앞에 가져올지 모르는 그런 문제들을 매듭짖고 푸는” 재판관으로서 행위할 자격을 주었다.
173:2.4 (1892.1) 성전 권력자들은 이날 오후 시간에 예수 앞에 와서, 그의 가르침 뿐 아니라 행위에 도전하였다. 예수는 바로 이 사람들이 그의 가르치는 권한은 사탄의 것이요, 그의 모든 대단한 이적(異蹟)은 악마의 왕의 권한으로 행해졌다고 오랫동안 공개적으로 가르친 것을 알고도 남았다. 따라서 도리어 질문을 던짐으로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예수는 말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고자 하노니, 너희가 내게 대답하겠다면, 나도 마찬가지로 무슨 권한으로 내가 이런 일을 하는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왔느냐? 요한이 그의 권한을 하늘로부터 받았느냐, 아니면 사람들로부터 받았느냐?”
173:2.5 (1892.2) 그에게 질문한 사람들이 이 말을 듣자, 어떻게 대답할까 의논하려고 자기들끼리 한쪽으로 물러갔다. 군중 앞에서 예수에게 창피를 주려고 전에 생각했지만, 그때 성전 마당에서 모인 모든 사람 앞에서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큰 혼란 속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예수에게 돌아와서 “요한의 세례에 관하여 우리는 대답할 수 없노라, 우리는 모르노라” 말했을 때, 그들의 패배는 더군다나 분명하였다. 그들이 주께 그렇게 대답한 것은 이렇게 자기들끼리 이치를 따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권한이 하늘로부터 왔다고 말하면, 그가 말하리라. 어째서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느냐, 아마도 그가 권한을 요한으로부터 받았다고 덧붙이리라. 그리고 우리가 권한이 사람들로부터 왔다 하면, 군중이 우리에게 대들까 싶으니라. 왜냐하면 군중의 대부분이 요한이 선지자였다 여기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없이 예수와 사람들 앞으로 와서 그들이, 이스라엘의 종교 선생과 지도자들이, 요한의 사명에 대하여 의견을 밝힐 수 없다고 (아니면 밝히지 않겠다고) 고백했다. 그들이 말을 마치자, 예수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173:2.6 (1892.3) 예수는 결코 그의 권한을 요한으로부터 받았다고 호소할 뜻이 없었다. 요한은 산헤드린으로부터 세움받은 적이 없었다. 예수의 권한은 그 자신과 아버지의 영원한 지고(至高)함에 있었다.
173:2.7 (1892.4) 적들을 이런 방법으로 다루면서 예수는 질문을 피할 생각이 아니었다. 언뜻 보면 그가 교묘하게 회피한 죄가 있는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예수는 결코 적이라도 부당하게 이용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렇게 회피하는 듯 보이면서, 그의 사명을 뒷받침하는 권한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듣는 사람 모두에게 정말로 주었다. 그들은 그가 악마 임금의 권한으로 행동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예수는 모든 그의 가르침과 행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힘과 권한에 따른 것이라고 거듭하여 주장했다. 이것을 유대 지도자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그가 결코 산헤드린의 인가(認可)를 받은 적이 없으니까, 그가 비공식 선생임을 인정하는 궁지에 그를 몰려고 애썼다. 그가 실제로 한 바와 같이 그들에게 대답하고, 한편 요한으로부터 권한을 받았다 주장하지 않으면서, 그를 옭아매려는 적들의 노력은 바로 그들을 공격하였고,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보기에 그들의 체신이 많이 떨어졌다는 추측으로 사람들을 아주 만족하게 해주었다.
173:2.8 (1892.5) 적들을 다루는 주의 이 재능은 그들로 하여금 주를 그토록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그날 아무것도 더 물으려 하지 않았고, 자기들끼리 더 의논하려고 물러났다. 그러나 사람들은 유대인 권력자들이 던진 이 물음에 담긴, 정직하지 못하고 불성실한 태도를 헤아리는 데 더디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도 주의 도덕적 당당함과 술수를 쓰는 적들의 위선(僞善)의 차이를 놓칠 수 없었다. 그러나 성전을 깨끗이 치운 일은 예수를 죽이려는 계획을 완성하도록 사두개인들을 바리새인 편으로 몰았다. 그리고 지금 사두개인은 산헤드린의 대다수를 대표했다.
173:3.1 (1893.1) 트집 잡는 바리새인들이 말없이 앞에 서 있는 동안, 예수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희가 요한의 사명에 관하여 의심을 가졌고, 사람의 아들의 가르침과 행적을 적대하여 진을 치고 있으니, 귀를 기울이라, 내가 너희에게 한 비유를 이르리라: 위대하고 존경받는 어떤 지주(地主)에게 두 아들이 있었더니, 큰 토지를 관리하는 데 아들들의 도움을 바라면서, 그가 한 아들에게 와서 일렀더라. ‘아들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오늘 일하라.’ 생각이 모자라는 이 아들은 아버지께 대답하여 말하되, ‘나는 가지 않겠나이다.’ 그러나 나중에 뉘우치고서 갔더라. 아버지가 맏아들을 발견하자, 마찬가지로 그에게 일렀더라. ‘아들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그리고 위선적이고 성실하지 않은 이 아들이 대답하되, ‘예,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였더라. 그러나 아버지가 떠나자, 그는 가지 않았더라. 내가 너희에게 묻건대, 이 두 아들 가운데 누가 정말로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173:3.2 (1893.2)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말했다. “첫 번째 아들이니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가 말했다: “바로 그러하니라. 이제 내가 선언하노니, 세리와 창기들은, 저희가 뉘우치라는 부름을 마다하는 듯하여도, 자기들이 가는 길이 잘못됨을 보고, 계속하여 너희보다 앞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리라. 너희는 아버지의 일을 행하려 하지 않으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섬기는 티를 크게 내느니라. 요한을 믿은 사람은 너희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아니라, 오히려 세리와 죄인이었도다. 너희도 내 가르침을 믿지 않으나 서민들은 내 말을 기쁘게 듣느니라.”
173:3.3 (1893.3) 예수는 개인적으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경멸하지 않았다. 그가 깎아내리려 한 것은 그들의 교육 및 관습 체계였다. 그는 아무에 대해서도 적의를 가지지 않았지만, 여기에 새롭고 살아 있는 영의 종교, 그리고 예식ㆍ전통ㆍ권한에 바탕을 둔 오래 된 종교, 이 둘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173:3.4 (1893.4) 여태까지 열두 사도는 주께 가까이 서 있었지만,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도 일이 이렇게 진행되는 데 끼어들지 않았다. 육체를 입고 예수가 봉사하는 이 마지막 며칠 동안의 사건에 열두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특이한 방법으로 반응하고 있었고, 각자 마찬가지로 이 유월절 주간에 어떤 대중 교육과 전도도 삼가라는 주의 명령에 계속 복종했다.
173:4.1 (1893.5) 질문으로 예수를 옭아매려고 했던 우두머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두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더 의논하려고 물러났고, 주는 귀를 기울이는 군중에게 눈길을 돌리면서 또 다른 비유를 말씀했다:
173:4.2 (1893.6) “집 주인이 되는 어떤 좋은 사람이 있었는데, 포도원에 나무를 심었더라. 그가 그 둘레에 울타리를 두르고, 포도즙 짜는 틀을 지으려고 구덩이를 파고, 파수꾼들을 위하여 망대를 지었더라. 그리고 나서 다른 나라로 멀리 길을 떠난 동안, 소작인들에게 이 포도원을 빌려주었더라. 열매가 열리는 계절이 가까워지자, 그는 소작인들에게 임대료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는지라. 그러나 저희는 자기들끼리 의논하고 주인이 받아야 할 소산을 이 종들에게 주려 하지 않았고, 대신에 그 종들에게 달려들어, 하나는 때리고, 하나는 돌로 치고, 나머지 사람들을 빈손으로 보냈더라. 그리고 집주인이 이 모든 것에 관하여 소식을 듣고서, 이 사악한 소작인(小作人)들을 다루라고 다른 더 신임하는 종들을 보냈더니, 저희가 이 종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한 창피하게 다루었더라. 그리고 나서 그 집 주인이 가장 아끼는 종, 그의 집사를 보냈더니, 저희가 그를 죽였는지라. 그래도 참을성과 인내를 가지고, 많은 다른 종을 파송하였는데, 저희는 아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더라. 저희가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였고, 집 주인이 이렇게 대접받고 나서, ‘저희가 내 종들을 푸대접할지 몰라도 나의 사랑하는 아들에게는 분명히 존경심을 보이리라’ 혼잣말을 하며, 은혜를 모르는 이 소작인들을 다루려고 제 아들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더라. 그러나 뉘우치지 않는 사악한 소작인들이 그 아들을 보았을 때, 저희끼리 판단하되, ‘이 사람은 상속자라. 자, 그를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遺産)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였더라. 그래서 저희가 그를 붙잡아서, 포도원에서 쫓아낸 뒤에 그를 죽였더라. 그 포도원의 주인이 저희가 제 아들을 어떻게 물리치고 죽였는가 소식을 들을 때, 은혜를 모르는 이 사악한 소작인들에게 어떻게 하겠느냐?”
173:4.3 (1894.1) 사람들이 이 비유, 그리고 예수가 던진 질문을 들었을 때, 그들은 대답했다: “그가 이 염치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제 철에 과일을 그에게 바칠 농부, 다른 정직한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빌려주리이다.” 그들 중에 이 말을 들은 몇 사람이 이 비유(比喩)가 유대 민족, 그 민족이 선지자들을 대접한 것, 예수와 하늘나라의 복음을 앞으로 거절할 것을 언급함을 알아차렸을 때, 그들은 슬픔에 잠겨 말했다: “우리가 계속 이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막으소서.”
173:4.4 (1894.2) 군중을 헤치고 한 무리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서 예수는 잠깐 멈추었고, 그들이 가까이 오자 말했다: “너희의 조상이 어떻게 선지자들을 거부하였는가 너희가 알며, 사람의 아들을 거절하려고 너희가 마음에 작정했음을 너희가 잘 아느니라.” 그리고 나서, 가까이 서 있는 사제와 장로들을 꿰뚫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예수는 말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 사람들이 발견하고 나서 주춧돌로 만든 돌에 관하여 너희는 성서에서 읽은 적이 없느냐? 그래서 한 번 더 내가 너희에게 경고하노니, 너희가 이 복음을 계속 물리치면, 머지 않아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에게서 빼앗아, 기꺼이 좋은 소식을 받아들이고 영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에게 주리라. 그리고 이 돌에 대하여 신비가 있으니, 누가 그 돌에 떨어지든지 그렇게 조각이 나더라도 구원을 받으리라. 그러나 이 돌이 누구에게 떨어지든지, 그는 가루가 되고, 그 재는 사방으로 흩어지리라.”
173:4.5 (1894.3) 이 말을 듣자,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자기들과 기타 유대 지도자들을 언급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그때 거기서 그를 몹시 붙잡고 싶었지만, 군중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주의 말씀에 아주 성이 나서, 자기들끼리 물러나서 어떻게 그를 죽게 할까 더 의논했다. 그리고 그날 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이튿날 그를 옭아매는 계획을 세우느라고 손을 잡았다.
173:5.1 (1894.4) 서기관과 성전 권력자들이 물러간 뒤에, 예수는 모인 군중에게 다시 연설했고, 결혼 잔치의 비유를 말씀했다. 그는 말했다:
173:5.2 (1894.5) “하늘나라는 아들을 위하여 결혼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 비유해도 좋으니, ‘임금의 궁전에서 결혼 잔치를 위하여 만사가 준비되었도다’ 말하며 잔치에 오라고 앞서 초청한 자들을 찾아보라고 그가 사자들을 보내었더라. 자, 오겠다고 한때 약속했던 많은 사람이 이때에 오려 하지 않았는지라. 초청이 거절당했다는 말을 그 임금이 듣자 다른 종과 사자들을 보내면서 말하였더라, ‘부름 받은 모든 사람에게 오라고 이르라, 보라 내 만찬이 준비되었음이라. 황소와 살찐 송아지들을 잡았고, 내 아들의 임박한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모든 것이 준비되었도다.’ 그러나 생각이 모자라는 자들은 다시 저희 임금의 부름을 가벼이 여겼고, 하나는 농장으로, 하나는 도기 굽는 곳으로, 더러는 상업으로, 저희가 갈 길을 갔는지라. 더러는 이렇게 그 임금의 초청을 가벼이 여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드러내놓고 반항하여 저희가 임금의 사자들을 붙잡아서 모욕을 주었고, 그 중에 몇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더라. 그리고 그가 택한 손님들, 예비 초청을 받아들이고 결혼 잔치에 오겠다고 약속한 자들까지도 그의 초청을 마침내 물리치고, 반항하여 그가 택한 사자들을 공격하고 죽인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몹시 성이 났느니라. 그리고 나서 모욕을 당한 이 임금은 자기 군대와 연합군의 군대를 내보내고, 이 항거하는 살인자들을 죽이고 저희의 도시를 불태우라고 지시하였더라.
173:5.3 (1895.1) “그의 초청에 코웃음치던 자들을 벌하고 나서, 그는 결혼 잔치를 하려고 또 다른 날을 잡아서 사자들에게 말하였더라: ‘처음에 결혼식에 부름받은 자들은 자격이 없도다. 그러니 이제 갈림길로, 큰길로, 도시의 경계를 넘어서도 가라, 그리고 너희가 찾아낼 수 있는 만큼, 이 낯선 자들까지도 와서 이 결혼 잔치에 참석하라고 청하라.’ 그리고 나서 이 종들은 여러 큰길과 외딴 곳으로 갔고, 찾아낼 수 있는 만큼, 선한 자와 악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를 모았고, 그래서 마침내 결혼식장이 기쁘게 온 손님들로 가득 찼더라. 만사가 준비되었을 때, 임금이 손님들을 보려고 나왔더니, 놀랍게도 거기에 결혼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았는지라. 그가 모든 손님에게 결혼 예복을 거저 주었으므로, 임금이 이 사람에게 말하되, ‘친구여, 결혼 예복(禮服)을 입지 않고 이 경사에 내 접대실로 들어오다니 어인 일인고?’ 준비되지 않은 이 사람은 말이 없었더니, 다음에 임금이 종들에게 일렀더라: ‘내 친절을 가벼이 여기고 내 초청을 물리친 모든 다른 사람과 운명을 함께 하도록, 지각없는 이 손님을 내 집에서 쫓아내라. 내 초청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모든 사람에게 거저 마련해 준 손님 예복을 입어, 내게 예를 표하는 자들 외에 아무도 여기에 있게 하지 않으리라.’”
173:5.4 (1895.2) 이 비유를 말씀한 뒤에, 예수는 대중을 막 해산하려 했는데, 그때 공감(共感)하는 어느 신자가 그를 향하여 군중을 헤치고 와서 물었다: “그러나 주여, 우리가 이런 일을 어찌 알리이까? 어떻게 임금의 초청을 위하여 우리가 준비하리이까? 당신이 무슨 표징(標徵)을 우리에게 주시어, 우리가 그것으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리이까?” 이 말을 듣자, 주는 말했다. “오직 한 표징을 너희에게 주리라.” 그리고 나서 자기 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성전을 부수라, 그리하면 사흘 안에 내가 다시 일으키리라.” 그러나 그들은 그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고, 흩어지면서 자기들끼리 말했다. “거의 50년 동안 이 성전을 짓고 있었거늘, 그래도 그가 성전을 헐고 사흘 안에 다시 일으키리라 말하는구나.” 자신의 사도들조차 이 말씀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중에 그가 부활한 뒤에, 그가 하신 말씀을 회상했다.
173:5.5 (1895.3) 이날 오후 4시쯤에, 예수는 사도들에게 손짓하여, 그가 성전을 떠나서 저녁 식사를 하고 하루 밤 쉬려고, 베다니로 가기를 바란다는 뜻을 표시하였다. 올리브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는 안드레ㆍ빌립ㆍ토마스에게 이튿날, 유월절 주간의 나머지 동안 그들이 차지할 수 있는 캠프를 도시에서 더 가까운 곳에 세우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서 이튿날 아침 그들은 겟세마네의 야영 공원을 내려다보는 언덕 옆 골짜기에서, 베다니의 시몬에 속하는 땅뙈기에 텐트를 쳤다.
173:5.6 (1896.1) 이 월요일 밤에, 또다시 말없는 유대인 일행이 올리브산의 서쪽 비탈로 길을 올라갔다. 이 열두 사람은, 전과 달리, 비극적인 무슨 일이 바야흐로 일어나려 하는 것을 비로소 감지(感知)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성전을 눈부시게 깨끗이 치운 것은 주가 자신을 주장하고 막강한 힘을 나타내는 것을 보리라는 희망을 불러일으켰지만, 오후 전체의 사건들이 유대인 당국이 예수의 가르침을 확실히 거부할 것을 가리켰기 때문에, 그 모두가 씁쓸한 실망으로 작용했을 뿐이다. 사도들은 긴장에 휩싸여 있었고, 심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다. 막 지나간 그날의 사건들과 다가오는 파멸의 충격이 오기까지, 짧게 겨우 며칠 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가 엄청난 무슨 일이 바야흐로 일어나리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무엇을 기대할지 몰랐다. 그들은 여러 군데로 쉬러 갔어도 거의 눈을 붙이지 못했다. 알패오 쌍둥이조차 주의 일생의 사건들이 마지막 고비를 향하여 바람 같이 움직이고 있음을 마침내 깨달았다.
174:0.1 (1897.1) 이 화요일 아침 7시쯤에, 예수는 사도들, 여인단, 그리고 스물네 명 남짓한 다른 특출한 제자들을 시몬의 집에서 만났다. 이 모임에서 주는 나사로에게 작별을 알리고 무슨 지시를 주었는데, 이것은 나사로로 하여금 페레아 지역의 필라델피아로 대번에 피신하게 만들었다. 거기서 그는 나중에 그 도시에 본부를 가진 선교 운동과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 예수는 또한 나이 든 시몬에게 작별하고, 여인단을 보내면서 충고의 말씀을 주었고, 다시는 결코 공식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았다.
174:0.2 (1897.2) 이날 아침에 그는 열두 사도 각자에게 친히 인사했다. 안드레에게 말했다: “바로 앞에 다가오는 사건들을 보고 절망하지 말라. 너희 형제들을 꼭 붙들고, 네가 낙심하는 것을 저희에게 보이지 않도록 처리하여라.” 베드로에게 그는 말했다: “육체의 무기나 철로 만든 무기(武器)를 신뢰하지 말라. 영원한 바위로 된 영적 기초 위에 자리를 잡으라.” 야고보에게 말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 때문에 넘어지지 말라. 너의 믿음을 굳게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믿는 것이 현실임을 곧 알게 되리라.” 요한에게 말했다: “부드러운 태도를 가지라. 네 적들조차 사랑하고, 너그럽게 되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겼음을 기억하라.” 나다니엘에게 말했다: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고, 모든 것이 사라지는 듯이 보일 때 너의 믿음을 굳게 지키라. 하늘나라의 대사(大使)로서 네 직책에 충실하라.” 빌립에게 말했다: “이제 다가오는 사건들에 마음이 흔들리지 말라. 네가 갈 길을 볼 수 없을 때에도, 차분히 있으라. 성스럽게 네가 서약한 것에 충성하라.” 마태에게 말했다: “너를 하늘나라로 받아들인 자비를 잊지 말라. 아무도 너를 속여 너의 영원한 보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필사 성품의 성향을 네가 견딘 것 같이, 기꺼이 버티라.” 토마스에게 말했다: “아무리 어려울지언정, 바로 지금, 보는 것을 의지하지 말고 믿음으로 네가 걸어야 하느니라. 내가 시작한 일을 마칠 수 있고, 궁극에 저 건너 나라에서 내가 충실한 대사들을 모두 볼 것을 의심하지 말라.” 알패오 쌍둥이에게 말했다: “너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기가 꺾이지 말라. 가슴 속의 애정에 충실하고, 너희는 위대한 사람도 민중의 변하는 태도도 믿지 말라. 너희 형제들을 지원하라.” 그리고 열심당원 시몬에게 말했다: “시몬아, 너는 실망으로 가슴이 무너지듯 할지 모르지만, 너의 영은 너에게 닥칠 모든 것을 이겨내리라. 네가 나에게 배우지 못한 것을 내 영이 가르치리라. 영의 참다운 현실을 추구하고, 비현실이고 물질인 그림자에 이제 더 유혹받지 말라.” 그리고 가룟 유다에게 말했다: “유다야, 내가 너를 사랑했고, 네가 형제들을 사랑하도록 내가 기도하였노라. 일을 잘 처리하는 데 지치지 말라. 내가 너에게 경고하고자 하니, 미끄러운 아첨의 길과 비웃는 독화살을 조심하라.”
174:0.3 (1897.3) 이 인사를 마치고 나서, 그는 안드레ㆍ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났다. 그동안에 다른 사도들이 겟세마네 캠프를 세우는 일에 착수했고, 거기로 그들은 그날 밤에 가기로 되었는데, 거기서 육체를 입은 주의 여생(餘生) 동안 본부를 만들었다. 올리브산의 비탈을 반쯤 내려가서, 예수는 멈추어서 네 사도와 함께 한 시간이 넘도록 이야기했다.
174:1.1 (1898.1) 며칠 동안 베드로와 야고보는 죄의 용서에 관한 주의 가르침에 대하여 그들의 견해 차이를 논하는 데 들어갔다. 그들은 그 문제를 예수 앞에 펼쳐놓기로 하였고, 베드로는 주의 조언을 얻는 적당한 기회로 이때를 붙잡았다. 따라서 시몬 베드로는 찬송과 예배의 차이를 다루는 대화에 뛰어들어 물었다: “주여, 야고보와 나는 죄의 용서와 상관 되는 당신의 가르침에 대하여 의견이 같지 않나이다.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우리를 용서한다고, 당신이 가르친다 야고보가 주장하며, 나는 뉘우침과 고백이 용서에 앞서야 한다고 주장하나이다. 우리 가운데 누가 맞사옵나이까? 당신은 무어라 말씀하시나이까?”
174:1.2 (1898.2) 잠깐 침묵이 흐른 뒤에, 예수는 네 사람 모두를 의미 있게 바라보고 대답했다: “형제들아, 너희의 의견이 잘못되었으니, 이는 인간과 창조자 사이에,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가깝고도 사랑하는 관계의 성질을 너희가 헤아리지 못하는 까닭이라. 지혜로운 부모가 미숙하고 때때로 잘못하는 아이의 형편을 헤아리는 이해심을 가진 것을 너희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총명하고 애정이 있는 부모가 언제라도 보통이고 정상인 아이를 용서하라고 부탁을 받는가 정말로 의심스러우니라. 사이가 서먹해지면 아이의 뉘우침과 부모의 용서를 나중에 다시 조정하는 것을 필요하게 만들며, 사랑하는 태도와 연결된 이해하는 관계는 그렇게 사이가 서먹해지는 것을 실질적으로 막느니라.
174:1.3 (1898.3) “어떤 아버지도 그 일부가 아이 속에 살며, 부모와 자식 사이에 관련된 모든 문제에서, 아버지는 먼저 있은 자의 권리와 우수한 이해력을 가지느니라. 부모는 더 진보된 어버이의 성숙함, 나이 든 편의 노련한 경험에 비추어 아이의 미숙함을 볼 수 있느니라. 땅에 있는 아이와 하늘 아버지의 경우에, 신성한 어버이는 무한하고 신다운 동정심, 그리고 사랑으로 헤아리는 능력을 소유하시니라. 신의 용서는 필연이요, 하나님이 무한히 이해하는 가운데, 아이의 그릇된 판단과 잘못된 선택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완전히 아는 가운데, 용서는 본래부터 있고 사람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이라. 신의 정의(正義)는 아주 영원히 공평하나니, 헤아림으로 자비 베푸는 것을 어김없이 포함하느니라.
174:1.4 (1898.4) “지혜로운 사람은 동료의 마음 속 충동을 이해할 때 저희를 사랑하리라. 형제를 사랑할 때, 너희는 이미 그를 용서하였느니라. 사람의 성품을 이해하고 사람의 잘못으로 보이는 것을 용서하는 능력은 하나님다운 것이라. 너희가 지혜로운 부모이어든, 이 방법으로 너희가 아이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일시적 오해가 너희를 갈라놓은 듯 보일 때 저희를 용서하기도 하느니라. 아이는 미숙하고, 아버지와 아이 관계의 깊이를 헤아림이 모자라매, 아버지의 충분한 승인을 받지 못하고 죄를 지어 소원해지는 느낌을 자주 느끼지만 참된 아버지는 결코 그러한 거리를 조금도 의식하지 못하느니라. 죄는 사람이 의식하는 체험이요, 하나님의 의식에 조금도 남아 있지 않느니라.
174:1.5 (1898.5) “동료를 용서할 수 없거나 기쁘게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너희의 미숙함, 너희가 어른 수준의 동정심ㆍ이해ㆍ사랑에 이르지 못함을 재는 척도이라. 너희의 자식과 동료 존재들의 마음 속 성품과 참된 소망을 알지 못하는 만큼 그에 비례하여, 너희는 불만을 품고 앙갚음할 생각을 품느니라. 사랑은 생명의 충동, 마음 속에 있는 신다운 충동이 일하여 이루는 것이라. 사랑은 이해심에 기초를 두며, 사심 없는 봉사로 육성되고 지혜 속에서 완전하게 되느니라.”
174:2.1 (1899.1) 월요일 저녁에 산헤드린, 그리고 서기관ㆍ바리새인ㆍ사두개인들로부터 뽑은 50명쯤 되는 추가된 지도자들 사이에 회의가 열렸다. 예수가 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으므로, 그를 대중 앞에서 체포하는 것은 위험하리라는 것이 이 모임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그를 붙잡아서 재판에 넘기기 전에, 군중이 보는 앞에서 그의 체면을 깎아내리려고 굳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또한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따라서 어려운 질문으로 그를 옭아매는 일에 착수하고, 사람들 앞에서 달리 그에게 창피 주기를 도모하려고 이튿날 아침 성전에서 몇 집단의 학식 있는 사람들이 대기하라고 임명되었다. 마침내, 바리새인ㆍ사두개인, 아니 헤롯 당원들까지 유월절 군중이 보는 앞에서 예수의 체면을 깎아내리려는 이 노력에 모두 뜻을 같이 하였다.
174:2.2 (1899.2) 화요일 아침, 예수가 성전 마당에 도착하고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겨우 몇 마디 말씀하자, 여러 학원으로부터 한 무리의 젊은 학생들이 앞으로 왔다. 이들은 이 목적을 위하여 미리 연습했는데, 그 대변인이 예수에게 말했다: “주여, 우리는 당신이 올바른 선생인 줄 알며, 당신이 진리의 길을 선포하고, 아무 사람을 두려워 아니하므로 오직 하나님을 섬기며,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아나이다. 우리는 학생일 뿐이요,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에 관하여 진실을 알고자 하나이다. 우리의 문제는 이러하나이다: 우리가 세금을 케자에게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우리가 세금을 바쳐야 하리이까, 아니면 바치지 말아야 하리이까?” 예수는 그들의 위선(僞善)과 교활함을 알아차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너희가 이렇게 나를 시험하려고 오느냐? 세금 내는 돈을 내게 보이라. 그리하면 내가 대답하리라.” 그들이 그에게 한 데나리온을 내밀었을 때, 이를 보고서 물었다. “이 은전(銀錢)에 누구의 모습과 새긴 글이 있느냐?” 그리고 “케자의 것이니이다”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는 말했다: “케자의 것은 케자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174:2.3 (1899.3) 그가 이처럼 이 젊은 서기관들과 그 헤롯당의 공모자들에게 대답하고 나자, 그들은 앞에서 물러났고 사람들, 아니 사두개인들까지 그들의 패배를 고소해하였다. 그를 옭아매려고 애썼던 젊은이들까지 주의 대답이 뜻밖에 슬기로움에 크게 감탄하였다.
174:2.4 (1899.4) 전날에 권력자들은 교회 권한의 문제로 군중 앞에서 그를 걸고 넘어지려 했고, 실패하고 나서 이제 국가 권한에 관하여 손해되는 토론에 그를 말려들게 하려 했다. 빌라도와 헤롯은 이때 예루살렘에 있었고, 그가 감히 케자에게 세금 내는 것에 반대하여 조언한다면, 예수의 적들은 당장에 로마 당국 앞으로 가서 그를 선동죄로 고발할 수 있다고 추측했다. 또 한편, 그가 여러 말로 세금 내라고 조언한다면, 그러한 발언이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의 민족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히고, 이렇게 함으로 군중의 호의와 사랑을 잃으리라고 그들은 옳게 계산했다.
174:2.5 (1899.5) 이 모든 일에 예수의 적들이 패배했는데, 이는 “돈을 찍는 권한에는 세금을 부과하는 권한이 따른다”는 것이 이방 국가들 사이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지도하려고 산헤드린이 내린, 잘 알려진 판결이었기 때문이다. 이 방법으로 예수는 그들의 올가미를 피했다. 그들의 물음에 “바치지 말라”는 대답은 반란을 선동하는 것과 같았고, “바치라”는 대답은 그 시절에 뿌리 깊은 민족주의 감정에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주는 그 질문을 피하지 않았고, 다만 이중으로 대답하는 지혜를 이용했을 뿐이다. 예수는 결코 회피하지 않았지만 그를 괴롭히고 죽이려 하는 사람들을 언제나 슬기롭게 다루었다.
174:3.1 (1900.1) 예수가 가르침을 시작할 수 있기 전에, 또 다른 무리가 그에게 질문하러 앞으로 나왔는데, 이번에는 학식 있고 교활한 사두개인 일행이었다. 그들의 대변인이 그에게 다가오면서 말했다: “주여, 결혼한 남자가 아이를 남기지 않고 죽는다면, 그의 아우가 그 아내를 데려가고 죽은 형을 위하여 씨를 길러야 한다고 모세가 일렀나이다. 자, 어떤 사람이 여섯 아우가 있었는데 아이가 없이 죽은 일이 생겼나이다. 첫째 아우가 그의 아내를 데려갔지만 아이가 없이 또한 곧 죽었나이다. 마찬가지로 둘째 아우가 그 아내를 데려갔으나, 그도 또한 자손을 남기지 않고 죽었나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모두 여섯 아우가 그 여자를 데려갔다가 모두 여섯이 아이들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나이다. 그리고 나서, 모두를 따라서, 그 여인도 죽었나이다. 이제, 당신에게 이것을 묻고자 하나이다: 이 일곱 형제 모두가 그 여자를 데려갔으니, 부활하면 그 여인이 뉘 아내가 되리이까?”
174:3.2 (1900.2) 이렇게 물으면서 이 사두개인들이 진지하지 않았음을 예수가 알았고 사람들도 알았으니,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고, 게다가 죽은 남자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자식을 낳아주려 하는 이 관습은 이 시절에 유대인 사이에서 실질적으로 사문(死文)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예수는 그들의 짓궂은 질문에 지체를 낮추어 대답하였다. 그는 말했다: “너희가 성서도, 하나님의 살아 계신 권능도 알지 못하므로, 너희가 다 그렇게 묻는 잘못을 저지르는도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장가들고 시집갈 수 있음을 너희가 알지만, 다가오는 세상에 도달할 자격이 있다고 간주되는 자는 올바른 자의 부활을 통해서,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 것을 너희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도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겪는 자는 하늘의 천사와 더 비슷하니, 저희는 결코 죽지 아니하느니라. 이 부활한 자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 저희는 영생을 얻어 진보하는 길로 부활한, 빛의 아이들이라. 너희 조상(祖上) 모세조차도 이를 알았으니, 떨기나무에서 그가 겪은 체험과 연관하여, 아버지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말씀하심을 들었느니라. 그래서 모세를 따라서 내가 선언하노니, 내 아버지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 하나님 안에서 너희 모두가 살고, 자식을 낳고, 너희의 필사 존재를 가지느니라.”
174:3.3 (1900.3) 예수가 이 질문에 대답을 마치고 나서 사두개인들은 물러났고, 어떤 바리새인들은 까맣게 자기를 잊어버리고 이렇게 외쳤다, “옳소이다, 옳소이다, 주여, 당신은 믿지 않는 이 사두개인들에게 잘도 대답하셨나이다.” 사두개인들은 그에게 아무 질문도 더 하지 않았고, 서민들은 그의 가르침이 지혜로운 데 감탄하였다.
174:3.4 (1900.4) 사두개인들과 대결했을 때 예수는 모세만 언급하였는데, 이 종교 당파는 오직 이른바 모세의 책 다섯 권만 정당하다고 인정했고,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교리의 정설을 위한 근거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대답 중에 주는 부활의 기법으로 필사 인간이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긍정했어도, 어떤 의미에서도 글자 그대로 인간의 몸이 부활한다는 바리새인의 관념을 인정하는 뜻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예수가 강조하고 싶어한 점은 이것이었다: 아버지가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말씀했고, 내가 예전에 그들의 하나님이었다 하지 않은 것이다.
174:3.5 (1900.5) 대중 앞에서 박해하는 것은 아주 확실히 대중의 머리 속에서 더욱 그를 동정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할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사두개인들은 예수를 조롱함으로 움츠러들게 만들려고 생각했다.
174:4.1 (1901.1) 또 다른 무리의 사두개인들이 천사들에 관하여 말려들게 하는 질문을 예수에게 하라고 지시를 받았지만, 부활에 관한 질문으로 그를 덫에 걸리게 만들려고 했던 동료의 운명을 보자, 아주 현명하게 잠자코 있기로 작정했고, 묻지 않고 물러났다. 사람을 말려들게 하는 이 여러 질문으로 하루를 전부 채우고,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예수의 체면을 깎아내리면서 동시에 민심을 어지럽히는 가르침을 선포할 겨를이 없도록 효과적으로 막으려는 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 사두개인과 헤롯당원들이 한데 뭉쳐 미리 주선한 계획이었다.
174:4.2 (1901.2) 그리고 나서 바리새인 무리 가운데 하나가 성가신 질문을 하려고 앞으로 나왔는데, 그 대변인은 예수에게 신호를 주면서 말했다: “주여, 나는 율법사요, 당신의 의견에 무엇이 가장 큰 계명(誡命)인가 당신께 묻고자 하나이다.” 예수가 대답했다: “오직 한 계명이 있나니, 이것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이요, 그 계명은 이러하니라: ‘아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의 하나님, 주는 한 분이요, 너희는 마음을 다하여, 혼을 다하여, 정신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할지니라.’ 이것이 첫째이자 큰 계명이라. 그리고 둘째 계명은 이 첫째와 같고, 정말로 거기서 바로 솟아나오니, 이것이라: ‘너희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할지니라.’ 이것들보다 더 큰 다른 계명이 없느니라.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이 두 계명에 매달리느니라.”
174:4.3 (1901.3) 예수가 유대교의 가장 높은 개념과 일치하는 대답을 했을 뿐 아니라, 또한 모인 군중이 보는 앞에서 지혜롭게 대답했음을 알아차렸을 때, 그 율법사는 주의 대답을 드러내놓고 칭찬하는 것이 훌륭한 용기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말했다: “주여, 진리에 관하여, 하나님이 한 분이요, 그 외에 아무도 없으며, 마음과 이해와 힘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첫째이며 큰 계명이라고 말씀을 잘 하셨나이다. 그리고 이 큰 계명을 모든 태운 제물과 희생물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리라 우리는 찬성하나이다.” 그 율법사가 이렇게 신중하게 대답했을 때, 예수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친구여, 보아하니,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않도다.”
174:4.4 (1901.4) 이 율법사가 “나라에서 멀리 않도다”하고 언급했을 때 예수는 진실을 말했는데, 바로 그날 밤에 그는 겟세마네 가까이 주의 캠프로 가서,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하였고, 아브너의 제자들 중 하나인 요시아에게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174:4.5 (1901.5) 다른 두세 집단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리에 있었고 질문할 생각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 율법사에게 예수가 대답한 것에 마음이 풀어졌거나 아니면 그를 덫에 걸리게 만들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의 패배를 보고서 단념하였다. 이 뒤에 아무도 대중 앞에서 그에게 감히 또 다른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174:4.6 (1901.6) 아무런 질문이 더 나오지 않았을 때, 그리고 정오(正午)가 가까웠기 때문에, 예수는 가르침을 다시 시작하지 않고 바리새인과 그 동료들에게 한 마디 묻는 것으로 만족했다. 예수는 말했다: “너희가 아무 질문도 더 하지 않으니, 너희에게 하나 묻고자 하노라. 너희는 구원자를 어찌 생각하느냐? 다시 말해서 그는 누구의 아들이냐?” 잠깐 멈춘 뒤에, 서기관들 가운데 하나가 대답하였다. “메시아는 다윗의 아들이니이다.” 그리고 자기 제자들 사이에서도, 그가 다윗의 아들인가 아닌가, 많은 논쟁이 있은 줄 알았기 때문에, 예수는 이어서 이렇게 물었다: “구원자가 정말로 다윗의 아들이라면, 너희가 다윗이 지었다고 인정하는 시편(詩篇)에, 어찌하여 바로 다윗이 영으로 ‘주가 내 주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의 적들을 네 발판으로 만들 때까지 내 바른 편에 앉으라’ 말하였느냐. 다윗이 그를 주라고 부른다면, 어찌 그가 다윗의 아들일 수 있느냐?” 권력자ㆍ서기관ㆍ주사제들이 이 물음에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어도, 그들은 마찬가지로 그를 옭아매려는 노력으로 더 질문하기를 삼갔다. 그들은 예수가 그들에게 던진 물음에 결코 대답하지 않았지만, 주가 돌아가신 뒤에, 그것이 메시아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언급하도록 이 시편의 해석을 바꾸어 그 곤경을 피하려고 했다. 더러는 다윗이 이른바 이 메시아 시편의 저자라는 것을 부인하여 그 곤경(困境)을 벗어나려 했다.
174:4.7 (1902.1) 얼마 전에 바리새인들은 주가 사두개인들의 입을 다물게 했던 그 형편을 고소해하였고 이제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이 패배한 것을 기뻐하였지만, 그런 경쟁심은 잠시였을 뿐이다. 그들은 예수가 가르치고 행하는 것을 못하게 만들려는 통일된 노력으로 그들이 오랫동안 지녀왔던 견해 차이를 재빨리 잊어버렸다. 그러나 이 모든 체험을 통해서 내내, 서민들은 예수의 말씀을 즐겁게 들었다.
174:5.1 (1902.2) 정오 무렵에, 빌립이 그날 겟세마네 가까이에 세워지고 있는 새 캠프에서 쓸 소모품을 사는 동안, 낯선 사람들, 알렉산드리아ㆍ아테네ㆍ로마에서 온 그리스인 신자들의 무리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고, 이들의 대변인은 그 사도에게 말했다: “당신을 아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당신이 어디 있는가 가리켜 주었나이다. 그래서 선생이여, 당신에게 우리는 당신의 주, 예수를 만날 요청을 드리나이다.” 수소문하는 이 탁월한 이방 그리스인들을 이렇게 시장에서 만나서 그는 움찔 놀랐고, 유월절 주간에 대중을 가르치는 어떤 일에도 말려들지 말라고 예수가 열두 사도 모두에게 아주 분명히 부탁했기 때문에, 그는 이 문제를 어찌 다루어야 좋을까 조금 당황했다. 이 사람들이 외국에서 온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또한 마음이 산란했다. 그들이 유대인이나 근처의 익숙한 이방인이었다면, 그렇게 눈에 띄게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했다: 이 그리스인들에게 바로 그 자리에 남아 있으라고 부탁했다. 그가 서둘러 떠나자, 그들은 그가 예수를 찾으러 갔다고 상상했지만, 실제로 요셉의 집으로 황급히 갔고, 그는 거기에 안드레와 다른 사도들이 점심을 먹고 있음을 알았다. 안드레를 불러내서 그가 온 목적을 설명했고, 다음에 안드레를 데리고, 그는 기다리던 그리스인들에게 돌아갔다.
174:5.2 (1902.3) 빌립이 소모품 사는 일을 거의 마쳤기 때문에, 그와 안드레는 그리스인들과 함께 요셉의 집으로 돌아갔고, 거기서 예수는 그들을 응접하였다. 이 점심 식사에 모인 사도들과 한 무리의 주요 제자들에게 그가 말씀하는 동안, 그들은 가까이 앉아 있었다. 예수가 말했다:
174:5.3 (1902.4) “내 아버지가 그의 자애심을 사람의 아이들에게 드러내라고 이 세상으로 나를 보내셨거늘 내가 먼저 찾아간 자들은 나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였도다. 정말로,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이 내 복음을 스스로 믿은 것이 참말이나, 아브라함의 자손과 저희의 지도자들은 나를 물리치려 하고, 그렇게 함으로 나를 보내신 이를 물리치느니라. 나는 구원의 복음을 이 민족에게 아낌없이 선포하였고, 영적으로 기쁨과 해방과 생명을 더욱 풍부하게 가지는 아들 신분에 대하여 저희에게 일렀느니라. 두려움에 빠진, 이 사람의 아들들 사이에서 내 아버지는 놀라운 일을 많이 하셨느니라. 그러나 ‘주여, 누가 우리의 가르침을 믿었나이까? 그리고 주가 누구에게 드러나셨나이까?’하고 적었을 때 선지자 이사야는 참으로 이 민족을 두고 말하였느니라. 참으로 내 민족의 지도자들은 보지 못하도록 일부러 저희 눈을 가렸고, 믿고 구원을 받을까 저어하여 저희 마음을 굳게 다졌느니라. 이 여러 해 동안 저희가 아버지의 영원한 구원을 받는 자가 될까 하여 나는 저희의 불신을 고치고자 하였노라. 모두가 나를 저버리지는 않은 줄 내가 알고, 너희 중에 더러는 정말로 내가 전하는 말을 믿었느니라. 한때 산헤드린의 회원이었거나 나라의 회의에서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이 방에 지금 꼭 스무 명 있도다. 하지만 너희 가운데 더러도 회당에서 쫓겨날까 저어하여 아직도 진실을 드러내놓고 고백하지 못하고 움츠러드느니라. 너희 가운데 더러는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는 유혹을 받는도다.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내 가까이 있었고, 내 옆에서 아주 가까이 살던 자들 가운데 몇 사람까지 그 안전과 충성이 걱정되므로, 내가 용서할 수밖에 없노라.
174:5.4 (1903.1) “보아하니, 이 연회실에 거의 같은 수의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였는데,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전에, 내가 하늘나라의 일을 가르치도록 그러한 집단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너희에게 말하고자 하노라.”
174:5.5 (1903.2) 이 그리스인들은 성전에서 예수가 가르칠 때 충실히 참석하고 있었다. 지난 월요일 저녁에 그들은 니고데모의 집에서 회의를 열었는데, 회의는 날이 새기까지 계속되었고, 그들 가운데 서른 명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174:5.6 (1903.3) 이때 그들 앞에 서 있는 동안, 예수는 한 섭리 시대가 끝나고 다른 섭리 시대가 비롯되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인들을 주목하면서, 주는 말했다:
174:5.7 (1903.4) “이 복음을 믿는 자는, 나 뿐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느니라. 나를 바라볼 때, 너희는 사람의 아들 뿐 아니라 또한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느니라. 나는 세상의 빛이요, 내 가르침을 믿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이제 더 어둠 속에서 거하지 않으리라. 너희 이방인들이 내 말을 들으면,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받고, 즐거운 해방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진리를, 당장에 얻으리라. 내 동포 유대인들이 나를 버리고 내 가르침을 물리치기를 택하면 나는 저희를 판단하지 않으리니, 이는 내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 구원을 내밀려고 왔음이라. 그런데도 나를 거부하고 내 가르침 받기를 거절하는 자는 때가 되면, 내 아버지에게, 그리고 자비의 선물과 구원의 진리를 물리친 것을 심판하라고 그가 임명한 자들의 심판을 받을지니라. 너희는 모두 기억하라,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사람의 아이들에게 드러내라고 아버지가 명령하신 것을 너희에게 충실하게 선언하였노라. 아버지가 세상에 주라고 지시하신 이 말씀은 신성한 진리, 영구한 자비,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라.
174:5.8 (1903.5)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선언하노니, 사람의 아들이 영화로움을 받을 때가 거의 다가왔도다. 밀 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것이 혼자 있음을 너희가 잘 알거니와, 그 밀 알이 좋은 땅에서 죽으면 다시 생명으로 솟아나서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기심으로 제 목숨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위험이 있으나 나와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기꺼이 버리는 자는 땅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더욱 풍부한 존재, 영원한 생명을 누리리라.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간 뒤에도 너희가 참으로 나를 따르고자 하면, 너희는 내 제자가 되고 필사 동료들에게 성실한 종이 될지니라.
174:5.9 (1903.6) “내 때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내가 알고, 마음이 답답하니라. 내 민족은 하늘나라를 걷어차기로 뜻이 굳은 줄 깨닫지만 빛의 길을 찾아 물으며 오늘 여기 온, 진리를 찾는 이 이방인(異邦人)들을 받아서 내가 기쁘도다. 그런데도, 내 민족을 위하여 내 가슴이 에이는 듯 아프고, 바로 앞에 닥친 것으로 인하여 내 혼이 괴로우니라. 내가 앞을 내다보고, 내게 막 쏟아지려 하는 것을 헤아리면서 무엇을 이르리오? 아버지가 이 끔찍한 때에 나를 구해달라고 말하리오? 아니라! 바로 이 목적으로 내가 세상으로, 아니 이 시간까지도 왔노라.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너희가 나와 함께 하기를 기도하리라: 아버지여,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174:5.10 (1904.1) 예수가 이렇게 말씀을 마치자, 세례받기 전 시절에 그에게 깃들던, 인격화된 조절자가 그 앞에 나타났고, 예수가 확실히 멈추자, 아버지를 대표하는, 이제는 막강한 이 영이 나사렛 예수에게 말했다: “너의 수여 생애에서 여러 번 나는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였고, 한 번 더 내가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리라.”
174:5.11 (1904.2) 여기 모인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아무 목소리도 못 들었지만, 어떤 초인간 근원으로부터 그에게 전하는 말씀이 오는 동안에 주가 말씀을 멈춘 것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각자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구나.”
174:5.12 (1904.3) 그리고 나서 예수는 말씀을 이었다: “이 모두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일어났느니라. 아버지가 나를 받아들이고 너희를 위하여 내 사명을 받아들일 줄 내가 확실히 알지만, 너희가 격려를 받고, 바로 앞에 놓인 불 같은 시련을 위하여 준비가 필요하니라. 너희에게 보장하노니, 세상을 깨우치고 인류를 해방하려는 우리의 뭉친 노력은 궁극에 승리로 보답을 얻으리라. 옛 체제는 재판을 받으러 다가오며, 내가 이 세상의 임금을 내던졌노라. 내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로 올라간 뒤에, 내가 모든 육체에 퍼부을 영의 빛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되리라.
174:5.13 (1904.4) “그리고 이제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내가 땅에서, 너희의 생활에서 높이 올려지면, 내가 모든 사람을 내게로, 내 아버지와 친교하도록 끌어당기리라. 구원자가 언제까지나 땅에서 거하리라고 너희가 믿어 왔으나, 내가 선언하노니, 사람의 아들이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 잠시만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고, 잠시만 살아 있는 빛이 이 어두운 세대 사이에 있으리라. 다가오는 어둠과 혼란이 너희를 따라잡기 전에, 이 빛이 있는 동안 너희가 걸으라. 어둠 속에서 걷는 자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빛 속에서 걷기를 택하면, 너희는 모두 정말로 하나님의 해방된 아들이 될지니라. 우리가 성전으로 돌아가서 주사제와 서기관, 바리새인ㆍ사두개인ㆍ헤롯당원, 그리고 이스라엘의 미개한 권력자들에게 작별의 말을 하리니, 이제 너희는 다 나를 따라오라.”
174:5.14 (1904.5) 이렇게 말하고 나서, 예수는 예루살렘의 좁은 거리를 지나 성전으로 돌아가는 길을 인도하였다. 이것이 성전에서 작별 강연이 되리라고 주가 말씀하는 것을 방금 들었고, 그들은 말없이 깊이 생각에 잠겨 그를 따라갔다.
175:0.1 (1905.1) 이 화요일에 오후 2시가 조금 지나서, 예수는 열한 사도, 아리마대 요셉, 그리스인 30명, 그리고 어떤 다른 제자들을 데리고 성전에 도착했고, 신성한 건물의 마당 안에서 마지막 연설을 시작했다. 이 강연은 유대 민족에 대한 그의 마지막 호소요, 맹렬히 반대하는 적과 그를 죽이려 하는 자―서기관ㆍ바리새인ㆍ사두개인, 그리고 이스라엘의 으뜸 권력자―들을 마지막으로 고발하는 말씀이 되도록 의도한 것이다. 아침 나절 내내, 여러 집단이 예수에게 질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날 오후에는 아무도 그에게 묻지 않았다.
175:0.2 (1905.2) 주가 말씀을 시작하자, 성전 마당은 조용하고 질서가 있었다. 환전상과 상인들은 예수와 흥분한 군중이 그 전날 그들을 몰아냈기 때문에, 감히 다시 성전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다.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예수는 부드러운 눈길로 이 청중을 내려다보았는데, 이들은 거짓 선생과 유대인의 편협한 권력자들에 대한 그의 마지막 비난과 아울러, 인류에게 작별을 알리는 대중 연설, 자비의 연설을 곧 들을 것이었다.
175:1.1 (1905.3) “아버지가 사람의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선포하면서, 땅에서 여기저기 다니며 이렇게 오랫동안 나는 너희와 함께 있었고, 많은 사람이 빛을 보고서,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갔느니라. 이 가르침과 전도와 연관하여, 아버지는 많은 놀라운 일을 하셨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기까지 하였도다. 허다한 아픈 자와 병자들이 믿었기 때문에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그러나 이 모든 진리의 선포와 병의 치유는 빛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자, 이 하늘나라 복음을 거부하기로 작정한 자들의 눈을 뜨게 하지 못하였도다.
175:1.2 (1905.4)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과 일치되는 모든 방법으로, 나와 내 사도들은 우리 동포와 평화롭게 살려고, 모세의 율법과 이스라엘의 전통이 요구하는 온당한 조건을 따르려고 최선을 다하였느니라. 우리는 끈질기게 평화를 찾았어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평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느니라. 하나님의 진리와 하늘의 빛을 물리침으로 저희는 잘못과 어두움의 편을 드느니라. 빛과 어두움 사이, 삶과 죽음 사이, 진리와 잘못 사이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도다.
175:1.3 (1905.5) “너희 가운데 여럿이 감히 내 가르침을 믿었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의식하는 기쁨과 해방을 이미 얻었느니라. 그리고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격을 온 유대 민족에게, 아니 이제 나의 파멸을 추구하는 바로 이 사람들에게도 내밀었음을 너희가 증언하리라. 지금도 내 아버지는 이 눈먼 선생과 이 위선하는 지도자들이 그에게 호소하고 자비를 받고자 한다면, 저희를 받아들이려 하시느니라. 이 민족이 하늘의 말씀을 받고 사람의 아들을 환영하는 것이 지금도 너무 늦지 아니하니라.
175:1.4 (1906.1) “내 아버지는 오랫동안 이 민족을 자비롭게 대하셨느니라. 대대로 우리는 저희를 가르치고 경고하라고 선지자들을 보내었거늘, 대대로 저희는 하늘이 보낸 이 선생들을 죽였느니라. 그리고 이제 외고집인 너희의 높은 사제(司祭)와 완고한 권력자들이 바로 이 일을 계속 하느니라. 헤롯이 요한을 죽게 만든 것처럼, 마찬가지로 너희는 이제 사람의 아들을 죽이려고 준비하는도다.
175:1.5 (1906.2) “유대인들이 내 아버지께 호소하고 구원을 추구할 기회가 있는 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너희를 향하여 자비의 손을 뻗은 채로 계시리라. 그러나 너희가 회개하지 않는 잔을 일단 채웠을 때, 그리고 한 번 너희가 마침내 내 아버지의 자비를 물리치고 나서, 이 나라는 스스로 의논하도록 버려지겠고 급속히 치욕스러운 종말에 이르리라. 이 민족은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나님을 아는 종족의 영적 영광을 보여주라고 부름받았거늘, 너희는 신성한 특권을 실현하는 것과 너무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느니라. 그래서 너희 지도자들이 온 인류에게, 어느 시대에도 주는 하나님의 선물―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계시―를 마침내 물리칠 지경에 있으므로, 저희는 만세에 걸쳐 최대의 어리석은 짓을 바야흐로 저지르려 하는도다.
175:1.6 (1906.3)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리 계시하는 것을 일단 물리치고 나서, 하늘나라는 다른 민족들에게, 계시를 기뻐하고 즐거이 받을 사람들에게 주리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엄숙히 너희에게 경고하노니, 영원한 진리의 기수(旗手)이자 신의 율법을 맡은 자로서, 너희는 세상에서 너희의 자리를 바야흐로 잃으려 하느니라. 앞으로 나와서 뉘우치고, 너희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고, 어린아이처럼, 그리고 성실한 믿음으로, 하늘나라의 안전과 구원을 얻으려는 뜻을 알릴 마지막 기회를 내가 바로 지금 너희에게 내밀고 있노라.
175:1.7 (1906.4) “내 아버지는 너희를 구원하려고 오랫동안 일하셨고, 너희 사이에 살고 몸소 너희에게 길을 보이려고 내가 내려왔노라. 많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아니 이방인까지도 하늘나라 복음을 믿었으되, 먼저 앞으로 나서서 하늘의 빛을 받아야 할 자들은 하나님의 진리가 계시되는 것을―하나님이 사람 속에 드러나고 사람이 하나님께로 들어올려진 것을―완고하게 믿기를 거절해 왔느니라.
175:1.8 (1906.5) “오늘 오후에는 내 사도들이 여기 너희 앞에 말없이 서 있으나, 구원을 받으라 부르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나라와 연합하라 재촉하는 사도들의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너희가 곧 들으리라. 그리고 내가 한 번 더 이스라엘과 그 권력자들에게 구출과 구원을 내밀었다는 것을 증언하라고, 이들, 내 제자와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자, 그리고 저희 옆에 보이지 않는 사자(使者)들을 내가 이제 부르노라. 그러나 저희가 어떻게 아버지의 자비를 소홀히 하고, 어떻게 진리의 사자들을 물리치는가 너희 모두가 보느니라. 그런데도 내가 너희에게 타이르노니,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아직도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으며, 따라서 사람의 나라에서 다스리는 최고자들이 마침내 이 나라를 뒤집어엎고 이 권력자들의 자리를 파괴할 때까지, 너희가 이스라엘에서 이 장로들과 협조하라고 내가 명하노라.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죽이려는 저희의 계획에 함께 단결하라고 요구되지는 않으나 이스라엘의 평화와 관계된 모든 일에 너희는 저희에게 복종해야 하느니라. 이 모든 일에 저희가 너희에게 무엇을 명하든지 행하고 율법의 기본을 지키되, 저희의 악한 일을 본따지 말라. 이것이 이 권력자들의 죄임을 기억하라: 저희는 좋은 것을 말해도 행하지는 않느니라. 이 지도자들이 무거운 짐, 지기에 괴로운 짐을 너희 어깨에 얹으며, 너희가 이 무거운 짐 지는 것을 도우려고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고자 하지 않음을 너희가 잘 아는도다. 저희는 너희를 예식으로 억압하였고, 전통으로 너희를 종으로 만들었도다.
175:1.9 (1907.1) “그 위에, 자기 중심인 이 권력자들은 사람들 눈에 보이도록 좋은 일 하기를 기뻐하느니라. 저희는 성구함(聖句函)을 넓히고 공식 예복의 테두리를 크게 만드느니라. 저희는 잔치에서 상석에 앉기를 몹시 좋아하고 회당에서 중요한 자리를 요구하며, 시장에서 칭찬하는 인사 듣기를 탐내고 모든 사람이 저희를 랍비라 부르기를 원하느니라. 사람들로부터 이 온갖 존경을 받으려고 하면서, 저희는 몰래 과부의 집들을 붙잡고, 신성한 성전의 예배로부터 이득을 챙기느니라. 이 위선자들은 대중 앞에서 겉치레로 길게 기도하고 동료들의 눈을 끌려고 자선금을 내는도다.
175:1.10 (1907.2) “너희의 권력자들을 공경하고 너희의 선생들을 존경해야 하되, 너희는 어떤 사람도 영적 의미에서 아버지라 부르지 말지니, 너희의 아버지인 분, 아니 하나님이 계심이라. 하늘나라에서 너희는 동포를 부리려 해도 안 되느니라.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크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너희를 가르쳤음을 기억하라. 주제넘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높이면 너희가 분명히 낮아지려니와, 참으로 자기를 낮추는 자는 누구나 분명히 높임을 받으리라. 날마다 너희 생활에서, 자기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라. 총명하게 너희의 뜻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키라.
175:1.11 (1907.3)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지금도 나를 죽이기를 구하는 이 주사제와 권력자들에게 나는 아무런 적의(敵意)를 품지 아니하고, 내 가르침을 거절하는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아무런 악의를 품지 않노라.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이 몰래 믿음을 내가 알고, 내 때가 올 때 하늘나라에 충성함을 너희가 드러내놓고 고백할 줄을 아노라. 그러나 너희의 랍비들이 하나님과 이야기한다고 공언하면서, 아버지를 세상에 드러내려고 오는 자를 주제넘게 물리치고 죽이려 하거늘, 어찌 저희가 자신을 정당화하리오?
175:1.12 (1907.4) “너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위선자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성실한 사람들이 어쩌다 너희가 가르치는 길에서 학문을 배우지 않았다고 하여 너희는 저희에게 하늘나라의 문을 닫으려 하는도다.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않으려 하면서 동시에 모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으려고 있는 힘을 다하는구나. 너희는 구원의 문 앞에 등지고 서서, 안으로 들어가려는 모든 사람과 싸우는도다.
175:1.13 (1907.5)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너희는 위선자로다! 개종한 사람 하나를 얻으려고 정말로 땅과 바다를 둘러싸면서, 성공하고 나서 그가 이방인의 자식으로 있던 형편보다 두 배나 나빠지게 만들 때까지 너희가 만족하지 않음이라.”
175:1.14 (1907.6) “너희 주사제와 권력자들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너희는 가난한 자의 재산을 붙잡고, 하나님을 섬기려는 자에게 모세가 예정했다고 생각하는 무거운 세금을 요구하는도다. 자비를 베풀려 하지 않으면서 너희가 다가오는 세상에서 자비를 바랄 수 있느뇨?
175:1.15 (1907.7) “너희의 거짓 선생, 눈먼 안내자들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소경이 소경을 이끌 때 한 나라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느냐? 저희 둘이 파멸의 구덩이로 빠지리라.
175:1.16 (1907.8) “서약할 때 모른 체하는 너희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성전으로 서약하면 그 서약을 깨도 좋거니와 성전에 있는 금(金)으로 서약하는 자는 누구나 묶인 채로 남아야 한다고 가르치니 너희는 사기꾼이라. 너희는 모두 바보요 소경이라. 정직하지 못하면서 너희는 일관성도 없으니, 왜냐하면 금과 그 금을 성스럽게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성전, 이 둘 사이에 어느 것이 더 크냐? 사람이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것도 아니라 하되, 사람이 제단에 놓여 있는 헌물로 맹세하면 그를 빚진 자로 붙잡을지라 너희가 또한 가르치는구나. 다시 너희는 눈이 멀어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니, 헌물과 그 헌물을 성스럽게 만든 제단, 이 둘 사이에 어느 것이 더 크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너희가 어찌 그런 위선과 속임을 정당화할 수 있느뇨?
175:1.17 (1908.1) “너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박하ㆍ아니스ㆍ쿠민을 십일조로 드리면서, 율법에서 더 무거운 문제를―믿음과 자비와 심판을―무시하는 모든 다른 위선자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한, 너희는 하나를 해야 하고 다른 하나를 하지 않은 채로 두어서는 안 되느니라. 너희는 참으로 눈먼 안내자요, 벙어리 선생이라.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175:1.18 (1908.2) “너희 서기관ㆍ바리새인ㆍ위선자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왜냐하면 너희는 잔과 큰 접시의 겉을 빈틈없이 깨끗이 하되, 속에는 강제로 빼앗고 낭비하고 속이는 더러움이 남아 있음이라. 너희는 영적으로 눈이 멀었구나.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는 것이 얼마나 더 좋은가 깨닫지 못하느냐? 그리하면 다음에 넘치는 것이 저절로 겉을 깨끗이 하리라. 버림받은 너희 사악한 자들아! 너희의 혼은 불의(不義)에 깊이 젖어 있고 살인으로 가득하면서, 모세의 율법을 너희가 풀이하여 글자대로 따르려고 너희의 종교를 겉으로 연출하느니라.
175:1.19 (1908.3) “진리를 물리치고 자비를 걷어차는 너희 모두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이 흰 칠한 무덤과 같으니, 겉으로 아름답게 보이나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움이 가득하니라. 과연 그러하니, 하나님의 충고를 알면서 물리치는 너희가 겉으로 사람들에게 거룩하고 올바르게 보이되, 속으로 너희 마음은 위선과 불의로 가득하니라.
175:1.20 (1908.4) “민족의 거짓 안내자, 너희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너희는 옛날에 순교한 선지자들에게 저 건너 기념비를 세웠고 한편 저희가 언급한 자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도다. 너희는 올바른 자의 무덤을 꾸미고 너희가 조상 시절에 살았던들 그 선지자들을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 자신을 칭찬하는구나. 그리고 나서 그렇게 스스로를 옳게 생각하는 가운데 너희는 그 선지자들이 언급한 자, 사람의 아들을 죽이려고 준비하는구나. 이런 일을 하는 까닭에, 너희는 선지자들을 죽인 자의 사악한 아들임을 자신에게 증언하느니라. 그러면 가서 너희 비난의 잔을 가득 채우라!
175:1.21 (1908.5) “악의 자손들아, 너희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요한은 참으로 너희를 독사의 자식이라 불렀고, 내가 묻노니 요한이 너희에게 내린 심판을 너희가 어찌 피할 수 있느냐?
175:1.22 (1908.6) “그러나 지금도 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자비와 용서를 내밀며, 지금도 영원히 친교하는 사랑의 손을 내미노라. 내 아버지는 너희에게 지혜로운 사람과 선지자들을 보내셨더니, 너희가 더러는 박해하고 더러는 죽였느니라. 그리고 나서 요한이 나타나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을 선포하였고, 많은 사람이 그의 가르침을 믿은 뒤에 너희가 그를 죽였도다. 이제 너희는 무죄한 피를 더 흘리려고 준비하느니라. 끔직한 청산의 날이 올 것을 너희는 깨닫지 못하느냐? 그날에 온 땅의 재판관이 이 민족에게 저희가 어떻게 이 하늘 사자들을 물리치고 박해하고 죽였는가 설명하라 요구하리라. 죽음을 당한 첫 선지자로부터 성소(聖所)와 제단 사이에서 죽음을 당한 스가랴의 시절까지, 이 올바른 피를 다 책임져야 하는 것을 너희는 이해하지 못하느냐? 너희가 악한 길을 계속 가면, 바로 이 세대에게 이 책임을 지라 요구될까 하니라.
175:1.23 (1908.7) “아 예루살렘과 아브라함의 자손이여, 너희에게 보낸 선지자들을 너희는 돌로 치고 선생들을 죽였도다. 암탉이 날개 밑에 병아리를 모으듯 지금도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하거늘, 너희는 모이려 하지 않는구나!
175:1.24 (1908.8) “이제 내가 너희를 떠나노라. 너희는 내가 전하는 말을 들었고 너희는 결심하였도다. 내 복음을 믿은 자들은 이제도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안전하니라. 하나님의 선물을 물리치기로 작정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내가 성전에서 가르침을 이제 더 구경하지 못하리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할 일은 끝났느니라. 보라, 나는 이제 내 아이들과 함께 가고, 너희 집은 황폐한 채로 너희에게 맡겨졌나니라!”
175:1.25 (1908.9) 그리고 나서 주는 추종자들에게 성전을 떠나라고 손짓했다.
175:2.1 (1909.1) 유대 민족의 영적 지도자와 종교 선생들이 한때 예수의 가르침을 물리치고 그가 지독한 죽음을 당하도록 공모(共謀)했다는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개별 유대인의 지위에, 어떤 면에서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 사실 때문에 그리스도의 추종자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동료 필사 유대인을 적대하는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한 민족으로서, 하나의 사회 정치 집단으로서, 유대인들은 평화의 왕을 물리친 끔찍한 값을 충분히 치렀다. 그들은 인류의 여러 종족에게 신성한 진리를 전하는, 영적 횃불을 쥔 자가 되기를 그만둔 지 오래지만, 이것은 이 옛적 유대인들의 후손 하나하나가, 나사렛 예수를 따른다고 공언하는, 참을성 없고 자격 없고 편협한 사람들의 박해를 받아야 할 타당한 이유는 되지 않으며, 바로 예수는 출생으로 따지면 유대인이었다.
175:2.2 (1909.2) 이처럼 불합리하고 그리스도답지 않게 현대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한 것은 죄 없고 예의 바른 어떤 개별 유대인의 고통과 죽음을 초래한 일이 많았는데, 그들의 바로 그 조상은 예수의 시절에 진심으로 그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얼마 있다가 마음을 다하여 믿었던 그 진리를 위하여 물러서지 않고 죽었다. 예수를 따른다고 공언(公言)하는 사람들이, 하늘나라 복음의 첫 순교자로서 그렇게 영화롭게 목숨을 바친 베드로ㆍ빌립ㆍ마태, 그리고 기타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후일의 자손을 박해하고 괴롭히고, 아니 죽이는 데 탐닉하는 것을 볼 때, 구경하는 하늘 존재들은 얼마나 무섭게 몸서리를 치는가!
175:2.3 (1909.3) 죄 없는 아이들이 선조의 죄, 그들이 도무지 알지 못하고 어떤 면에서도 도저히 책임질 수 없는 그릇된 행위 때문에 고통받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얼마나 잔인하고 불합리한가! 그리고 적조차 사랑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친 이의 이름으로 그러한 사악한 일을 하다니! 예수의 일생에 관한 이 이야기에, 어떤 동료 유대인들이 어떤 방법으로 그를 물리치고 수치스럽게 죽게 만들려고 공모했는가 묘사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읽는 모든 사람에게 우리가 경고하려고 하니, 그러한 역사적 이야기의 발표는 어떤 면에서도, 부당한 미움을 정당화하지 않고 정신의 불공평한 태도를 묵인하지도 않는데, 기독교인이라고 공언한 아주 많은 사람이 여러 세기 동안 개별 유대인에게 그런 미움과 태도를 지녀 왔다. 하늘나라를 믿는 사람,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개별 유대인을 예수를 물리치고 십자가에 못박은 죄를 저지른 자로 잘못 대우하기를 그쳐야 한다. 아버지와 그의 창조 아들은 유대인을 그치지 않고 사랑해 왔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요, 구원은 이방인 뿐 아니라 유대인도 위한 것이다.
175:3.1 (1909.4) 이 화요일 저녁 8시에 운명의 산헤드린 회의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이전에 여러 번 유대 민족의 이 최고 법정은 비공식으로 예수의 죽음을 선포했다. 여러 번 이 존엄한 통치 단체는 그의 일을 멈추게 하기로 결의했지만, 전에는 한 번도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그를 체포하고 죽게 만들려고 결의한 적이 없었다. 그때 구성된 대로 산헤드린이 예수와 나사로 모두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기로 공식으로, 만장 일치로 투표한 것은 서기 30년 4월 4일, 이 화요일에 자정이 되기 바로 전이었다. 이것은 성전에서 겨우 몇 시간 전에 유대인 권력자들에게 주가 마지막으로 호소한 데 대한 대답이었고, 바로 이 주사제들과 뉘우치지 않는 사두개인ㆍ바리새인들을 예수가 마지막으로 힘차게 고발한 데 대하여 그들이 지독하게 분개하는 반응을 표시하였다. 사람의 아들에게 (재판도 받기 전에)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은 그러한 유대 민족에게 일찍이 하늘의 자비를 마지막으로 내민 것에 대한 산헤드린의 대답이었다.
175:3.2 (1910.1) 이때부터 계속, 유란시아의 여러 나라 사이에서, 유대인은 다만 순전히 그들의 인간적 지위에 따라서, 덧없고 짧은 민족의 생명을 마치도록 버려졌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약속했던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했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세상에 대하여 진리의 횃불을 쥔 자로 만들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신의 약속은 취소되었고, 히브리 국가의 종말이 빨리 다가왔다.
175:3.3 (1910.2) 산헤드린의 관리들은 이튿날 아침 일찍 예수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거기에는 그를 대중 앞에서 체포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가 함께 있었다. 그들은 몰래, 기왕이면 갑자기, 밤에 그를 붙잡기를 계획하라고 지시받았다. 그날 (수요일에) 성전에서 가르치러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목요일 자정 얼마 전에 유대인의 고등 법정 앞으로 그를 데려오라”고 이 산헤드린 관리들에게 지시했다.
175:4.1 (1910.3) 성전에서 예수의 마지막 강연이 끝났을 때, 사도들은 다시 한 번 어리둥절하고 깜짝 놀랐다. 주가 유대인 권력자들에게 끔찍한 비난을 퍼붓기 시작하기 전에 유다가 성전으로 돌아왔고, 그래서 열두 사도 모두가 성전에서 하신 예수의 마지막 강연의 이 후반을 들었다. 가룟 유다가 이 작별 연설에서 자비를 내미는 처음 절반을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은 유감이다. 그는 이 작별 연설에서 유대인 권력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 마지막 제안을 듣지 못했는데, 이는 점심을 같이 먹던 어떤 무리의 사두개인 친척 및 친구들과 아직도 의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는 예수와 그 동료 사도들로부터 어떻게 떨어져 나가는 것이 가장 적당한가 이들과 함께 의논하고 있었다. 유대인 지도자와 권력자들에 대한 주의 마지막 고발을 듣는 동안에, 유다는 복음 운동을 버리고 그 사업 전체에서 손을 씻으려고 마침내, 완전히 작정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열두 사도의 일행 속에 끼어 성전을 떠나서 그들과 함께 올리브산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동료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대 나라의 종말에 대한 그 운명의 강연을 들었고, 그들과 함께 그 화요일 밤에 겟세마네 가까이 새 캠프에 남아 있었다.
175:4.2 (1910.4)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자비롭게 호소하다가, 무자비한 비난에 가깝게 갑자기 통렬한 꾸짖음으로 예수가 방향을 휙 바꾼 것을 들은 군중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어리둥절했다. 그날 밤에, 산헤드린이 예수에 대하여 사형 재판을 진행하는 동안, 그리고 주가 유대 나라의 패망을 예언하면서, 바깥에 올리브산에서 사도와 어떤 제자들과 함께 앉아 있는 동안, 온 예루살렘은 꼭 한 가지 질문에 대하여 꾹 참고 있던 심각한 논의에 빠졌다: “저희가 예수를 어찌할까?”
175:4.3 (1910.5) 하늘나라를 몰래 믿던 저명한 유대인이 30명 넘게 니고데모의 집에서 만나서, 산헤드린과 드러내놓고 관계를 끊는 경우에 그들이 무슨 길을 밟을 것인가 토론했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예수가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는 바로 그 시각에, 그들이 주께 충성함을 드러내놓고 인정하겠다고 합의를 보았다. 그들은 바로 그대로 했다.
175:4.4 (1911.1) 이제 산헤드린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사두개인들은 다음 이유로 예수를 없애버리고 싶어 하였다:
175:4.5 (1911.2) 1. 대중 사이에 그의 인기(人氣)가 늘어난 것은 아마도 로마 당국이 개입함으로 유대인 국가의 존재를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다고 그들은 걱정했다.
175:4.6 (1911.3) 2. 성전을 개혁하려는 그의 열심은 바로 그들의 소득에 타격을 주었다. 성전을 깨끗이 한 것은 그들의 주머니 사정에 영향을 미쳤다.
175:4.7 (1911.4) 3. 그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책임이 있다고 느꼈고, 사람의 형제 정신을 가르치는 교리, 낯설고 새로운 예수의 교리가 더욱 퍼짐으로 생기는 결과를 걱정했다.
175:4.8 (1911.5)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사형(死刑)되기를 보고 싶어 하는 다른 동기가 있었다. 다음 이유로 그를 두려워했다:
175:4.9 (1911.6) 1. 그는 사람들에 대하여 바리새인이 가진 전통적 위력에 대항해서 말하는 태도를 취했다. 바리새인들은 지나치게 보수적이었고, 종교 선생인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에 대하여 급진적이라 생각되는 이러한 공격을 퍼붓는 것을 뼈에 사무치게 분개했다.
175:4.10 (1911.7) 2. 예수는 율법을 어기는 자요, 안식일과 기타 수많은 율법 및 예식의 요구 사항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175:4.11 (1911.8) 3. 그가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언급했기 때문에 그를 신성 모독죄로 몰았다.
175:4.12 (1911.9) 4. 작별 연설의 결론 부분으로서 성전에서 이날, 지독한 비난이 담긴 마지막 강연을 했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175:4.13 (1911.10) 예수가 죽어야 한다고 공식으로 선포하고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예수가 재판받아야 할 죄목을 작성할 목적으로 대사제 가야바의 집에서 이튿날 아침 10시에 모이기로 결정한 뒤에, 산헤드린은 이 화요일에 거의 자정이 가까워 회의를 마쳤다.
175:4.14 (1911.11) 사두개인들 중에 한 작은 집단이 예수를 암살해서 없애버릴 것을 실제로 제안했지만, 바리새인들은 그런 과정을 전혀 용납하지 않았다.
175:4.15 (1911.12) 이것이 이 파란 많은 날에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상황이었고, 한편 방대한 집합의 하늘 존재들이 땅에서 이 중대한 장면 위에 떠돌고 있었다. 사랑하는 군주를 돕기 위해서 무슨 일인가 하려고 초조했지만, 지휘하는 상관들이 실질적으로 제어했기 때문에, 그들은 행동할 힘이 없었다.
176:0.1 (1912.1) 이 화요일 오후에, 예수와 사도들이 겟세마네 캠프까지 가는 길에 성전 바깥으로 나가면서, 마태는 성전의 건축에 주의를 끌면서 말했다: “주여, 이것들이 어떤 모양의 건물인가 지켜보소서. 육중한 돌과 아름다운 장식을 보소서. 도대체 이 건물들이 파괴되는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그들이 올리브산을 향하여 줄곧 가는 동안, 예수는 말했다: “너희가 이 돌들과 이 육중한 성전을 보는도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날이 곧 닥치리라. 사람들이 이 돌들을 모두 던져 버리리라.” 신성한 성전이 파괴될 것을 묘사하는 이 논평은 주의 뒤를 따라 걷는 동안, 사도들의 호기심을 일으켰다.
176:0.2 (1912.2) 겟세마네를 향하여 기드론 골짜기를 따라서 지나가는 군중을 피하려고 예수와 동료들은 올리브산 서쪽 비탈을 얼마큼 기어오르고, 다음에 공공 캠프장 위로 조금 떨어져, 겟세마네 가까이 있는 그들의 사립 캠프까지 오솔길을 따라갈 생각이 있었다. 베다니로 계속 이끄는 길을 등지고 돌아서자, 그들은 지는 태양의 햇살로 눈부시게 된 성전을 지켜보았다. 산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그들은 도시의 불빛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불이 비추어진 성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았다. 거기서 부드러운 보름달 빛 아래서, 예수와 열두 사도는 앉았다. 주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당장에 나다니엘이 이렇게 물었다: “주여, 말씀하소서. 언제 이 사건들이 일어나려 하는지 우리가 어찌 알 수 있나이까?”
176:1.1 (1912.3) 나다니엘의 물음에 답하여 예수는 말했다: “그래, 이 민족이 불의(不義)의 잔을 가득 채웠을 때, 응보가 우리 조상이 살던 이 도시에 급속히 찾아올 때에 관하여 너희에게 이르리라. 나는 바야흐로 너희를 떠나려 하고, 아버지께로 가노라. 내가 너희를 떠난 뒤에,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구원자를 자칭하며 많은 사람이 길을 잃게 할 것임이라. 너희가 전쟁에 관하여 듣고 전쟁 소문을 들을 때 상관하지 말지니, 이 모든 것이 일어날지라도, 예루살렘의 종말이 아직 가깝지 아니한 까닭이라. 너희는 기근(饑饉)이나 지진에 마음이 흔들리지 말며, 너희가 국가 당국에 끌려가고 복음을 위하여 박해받을 때 근심해서도 안 되느니라. 너희는 나 때문에 회당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갇히겠고, 너희 가운데 더러는 죽음을 당하리라. 너희가 총독과 권력자들 앞에 끌려갈 때, 이는 너희 믿음을 간증하기 위한 것이요, 하늘나라 복음을 너희가 끈질기게 믿음을 보이기 위한 것이라. 너희가 재판관 앞에 설 때,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초조해하지 말지니, 바로 그 시간에 영(靈)이 너희가 너희 적들에게 어찌 대답해야 할까 너희를 가르칠 것임이라. 진통이 있는 이날에 너희 친척들조차, 사람의 아들을 거절한 자들의 지시를 받고서 너희를 감옥과 죽음으로 인도하리라. 한동안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의 미움을 받을 수도 있으나 이 박해 속에서도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겠고, 내 영이 너희를 저버리지 아니하리라. 참으라! 이 하늘나라 복음이 모든 적을 이기고, 궁극에 모든 민족에게 선포될 것을 의심하지 말라.”
176:1.2 (1913.1) 예수는 도시를 내려다보면서 멈추었다. 영적 메시아 개념을 부인하는 것, 곧 기대하는 구원자가 물질적 사명을 가졌다는 생각에 끈질기게 맹목으로 집착하는 결심은 얼마 안 있어 유대인들을 강력한 로마 군대와 직접 충돌하게 만들리라는 것, 그러한 투쟁은 오로지 최종으로 유대 민족의 완전한 파멸을 가져올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주는 깨달았다. 그의 민족이 그의 영적 수여(授與)를 거절하고 그들에게 아주 자비롭게 비친 하늘의 빛을 받아들이기를 물리쳤을 때, 그렇게 함으로 땅에서 그들은 영적 사명을 가진 독립된 민족으로서 패망할 운명을 결정하였다. 궁극에 그들을 멸망시킨 소동을 직접 초래한 것은 이 세속적 메시아 관념이었다고 후일에 유대인 지도자들도 인정하였다.
176:1.3 (1913.2) 예루살렘이 초대 복음 운동의 요람(搖籃)이 될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예루살렘의 파괴와 관련하여 유대 민족의 끔찍한 멸망이 있을 때 복음 선생과 전도자들이 죽기를 원하지 않았고, 따라서 추종자들에게 이 가르침을 주었다. 예수는 제자들 중에 더러가 곧 다가오는 이 항쟁에 말려들어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그렇게 죽지 않을까 많이 걱정했다.
176:1.4 (1913.3) 그리고 나서 안드레가 물었다: “그러나 주여, 거룩한 도시와 성전이 멸망해야 된다면, 그리고 당신이 여기 계시어 우리를 지도하지 않으면, 언제 우리가 예루살렘을 버려야 하나이까?” 예수가 말했다: “너희는 내가 떠난 뒤에, 아니 진통과 모진 박해가 있을 이 시절을 통해서 이 도시에 남아 있어도 좋지만, 거짓 선지자들의 폭동이 있은 뒤에 너희가 예루살렘이 마침내 로마 군대에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때 예루살렘의 황폐가 가까웠음을 너희가 알리라. 그때 너희는 산으로 달아나야 하느니라. 도시 안에, 그리고 그 근처에 있는 자는 누구나 아무것도 구제하려고 머무르지 말고, 바깥에 있는 자들도 그 안으로 감히 들어가지 말지니라. 큰 시련이 있으리니, 이때는 이방인이 복수하는 시절이 될 것임이라. 너희가 이 도시를 버린 뒤에, 순종하지 않는 이 민족은 칼날에 쓰러지고 모든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겠고 그렇게 예루살렘이 이방인에게 짓밟히리라. 그동안에, 내가 너희에게 경고하노니, 속지 말라. 누구라도 너희에게 와서 ‘보라, 여기 구원자가 있다’ 아니면 ‘보라, 저기에 그가 있다’ 하면 믿지 말지니, 많은 거짓 선생이 일어나고 숱한 사람이 길을 잃을 것임이라. 그러나 너희는 속지 말아야 하나니, 내가 이를 모두 미리 너희에게 일렀음이라.”
176:1.5 (1913.4) 주의 이 놀라운 예언들이 어리둥절한 사람들의 머리 속에 박히는 동안, 사도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달빛 속에서 말없이 앉아 있었다. 로마 군대가 처음 나타나자, 바로 이 경고(警告)에 순응하여 신자와 제자 무리의 거의 전부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달아났고, 북쪽에 펠라에서 안전한 피난처를 발견했다.
176:1.6 (1913.5) 이 뚜렷한 경고가 있은 뒤에도 예수의 많은 추종자는 이 예언이, 메시아가 다시 나타나심으로 새 예루살렘이 세워지고, 도시가 커져서 세계의 서울이 될 때 예루살렘에서 분명히 일어날 변화를 언급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머리 속에서 이 유대인들은 성전의 멸망을 “세상의 종말”과 연결하려고 굳게 마음먹었다. 그들은 이 새 예루살렘이 온 팔레스타인을 채우리라, 세상의 종말이 온 뒤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즉시 뒤이어 나타날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여,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날 때 모든 것이 없어질 것을 우리가 아나이다. 그러나 당신이 이 모든 것을 일으키려고 언제 돌아오실까 우리가 어찌 알리이까?”하고 말한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176:1.7 (1914.1) 이 말을 듣자, 예수는 얼마 동안 생각에 잠겼고, 그리고 나서 말했다: “너희가 늘 잘못하는 것은 새 가르침을 옛 가르침과 연결하려고 언제나 애쓰는 까닭이라. 너희는 내 가르침을 모두 오해하려고 결심하였구나. 너희의 굳어진 관념에 따라서 복음 해석하기를 너희가 고집하느니라. 그렇기는 해도 나는 너희를 깨우치려고 애쓰리라.”
176:2.1 (1914.2) 예수는 몇 경우에 어떤 말씀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은 말씀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얼마 안 있어 이 세상을 떠날 뜻이 있지만 하늘나라 일을 마치려고 그가 아주 확실히 돌아오리라 추측하도록 이끌었다. 그가 그들을 떠나리라는 확신이 추종자들 사이에 커짐에 따라서, 그리고 그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 그가 돌아온다는 이 약속을 모든 신자가 단단히 믿은 것은 자연스러웠을 따름이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교리는 이처럼 기독교인의 가르침 속에 일찍 합병되었으며, 거의 모든 후세의 제자들이 경건하게 이 진리를 믿어 왔고, 그가 언젠가 오시기를 확신을 가지고 기대해 왔다.
176:2.2 (1914.3) 그들이 주, 선생과 헤어져야 한다면, 이 초기의 제자와 사도들이 그가 돌아온다는 이 약속에 얼마나 더 굳세게 매달렸는가. 그리고 그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예루살렘이 멸망한다는 예언을 다시 오신다는 이 약속과 연결시켰다. 올리브산에서 가르친 이날 저녁 내내, 주가 바로 그런 잘못을 막으려고 특별히 고심(苦心)했는데도, 그들은 계속 그의 말씀을 이렇게 풀이했다.
176:2.3 (1914.4) 베드로의 물음에 예수는 대답을 이었다: “어찌하여 너희는 아직도 사람의 아들이 다윗의 보좌에 앉기를 찾고, 유대인의 물질적 꿈이 성취될 것을 기대하느냐?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이 여러 해 동안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너희가 이제 내려다보는 것들은 이제 종말(終末)에 이르고 있으되, 이것은 새 시작이 될 것이요, 그로부터 하늘나라 복음이 온 세상으로 가고 이 구원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리라. 어둠의 왕이 되어 버린 자, 다음에 아담, 그를 뒤따라 멜기세덱, 그리고 오늘날 사람의 아들을 이 세상에 이미 수여한 것 같이, 하늘나라가 완전히 달성될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어김없이 진리를 더 크게 드러내고 올바름을 더 높이 나타낼 것을 확신하여라. 그래서 내 아버지는 어둡고 악한 이 세상에도 계속하여 자비를 나타내고 사랑을 보이리라. 내 아버지가 내게 모든 능력과 권한을 투입한 뒤에, 나도 또한 그렇게 너희의 운명을 계속 따르고, 내 영이 함께 함으로 하늘나라의 일을 안내하겠고, 그 영을 머지 않아 모든 육체에 부으리라. 비록 내가 이처럼 너희와 함께 정신적으로 있을지언정, 또한 약속하노니, 내가 이 세상으로 언젠가 다시 돌아오리라. 거기서 내가 육체를 입은 이 생명을 살았고, 하나님을 사람에게 드러내고, 동시에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체험을 얻었노라. 아주 곧 나는 너희를 떠나고 아버지가 내 손에 맡기신 일을 맡아야 하거늘, 기운을 내라, 언젠가 내가 돌아올 것임이라. 그동안에 한 우주에서 내 진리의 영이 너희를 위로하고 안내하리라.
176:2.4 (1915.1) “약하고 육체를 입은 나를 지금 너희가 보아도, 돌아올 때 나는 권능을 가지고 영이 되어 오리라. 육체의 눈은 육체를 입은 사람의 아들을 바라보나, 오직 영의 눈이 아버지가 영화롭게 하고 그의 이름으로 땅에 나타나는 사람의 아들을 바라보리라.
176:2.5 (1915.2)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다시 나타날 그때는 오직 파라다이스 회의에서만 알고 있고, 하늘의 천사들조차 이 일이 언제 일어날까 모르느니라. 그러나 이것을 너희가 이해해야 하나니,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이 하늘나라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었을 때, 그리고 시대가 충만하게 무르익었을 때, 아버지는 너희에게 또 다른 섭리 시대 수여자를 보내거나, 아니면 사람의 아들이 시대를 판결하려고 돌아오리라.
176:2.6 (1915.3)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이 겪을 진통에 관하여 이르자면, 이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말한 적이 있고, 내 말이 이루어지기까지 이 세대조차 사라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오는 때에 관하여 말하자면, 하늘이나 땅에서 아무도 주제넘게 입을 열어서는 안 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시대가 무르익는 것에 관하여 지혜로워야 하고, 시대의 징조(徵兆)를 헤아리기 위하여 경계하고 있어야 하느니라. 무화과 나뭇가지가 부드러운 가지를 보이고 그 이파리를 낼 때 여름이 가까운 줄 너희가 아는도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물질에 마음을 쓰는 긴 겨울을 지내고 나서, 영적으로 새 섭리 시대의 봄철이 오는 것을 너희가 헤아릴 때, 너희는 새로운 방문이 있을 여름철이 가까왔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176:2.7 (1915.4)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이 오는 것과 상관되는 이 가르침의 중요성이 무엇이냐? 너희 각자가 일생의 투쟁을 그만두고 죽음의 문을 지나가라고 부름받을 때, 너희는 즉시 심판대에 서고, 무한한 아버지의 영원한 계획 가운데 봉사하는 새 섭리 시대의 사실에 직면함을 너희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가 끝까지 천수를 누리고, 그렇게 죽어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히 진보하는, 다음 계시에 본래 있는 조건과 요구에 직면할 때, 한 시대의 끝에 글자 그대로의 사실로서 온 세상이 부닥쳐야 할 것을 너희는 각자 개인적 체험으로서 아주 확실히 부닥쳐야 하느니라.”
176:2.8 (1915.5) 주가 사도들에게 하신 모든 강연 가운데 아무것도,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 자신이 다시 온다는 이 두 가지 주제에 관하여 올리브산에서 이 화요일 저녁에 하신 이 강연만큼 그들의 머리 속에서 그렇게 뒤죽박죽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 특별한 기회에 주가 하신 말씀을 기억한 것에 근거를 두고 후일에 쓴 기록들 사이에 일치되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 결과로, 그 화요일 저녁에 말씀한 많은 것에 관하여 기록을 비워두었을 때, 많은 전통이 생겨났다. 그리고 2세기 아주 일찍, 칼리굴라 황제의 궁정에 부속되었던, 어떤 셀타라 하는 사람이 쓴, 메시아에 관한 어느 유대인 묵시록이 마태 복음 속에 통째로 복사되었고, 나중에 (일부가)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 첨가되었다. 셀타의 이 기록에서, 열 처녀의 비유가 나타났다. 복음 기록의 어느 부분도 일찍이 이날 저녁의 가르침처럼 혼동되어 잘못 설명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결코 이렇게 혼동하지 않았다.
176:2.9 (1915.6) 이 열세 사람이 캠프를 향하여 길을 다시 떠났을 때, 그들은 말이 없었고, 크게 감정이 긴장되었다. 이전에 유다는 동료들을 버리려는 결심을 마침내 확인했다. 다윗 세베대, 요한 마가, 그리고 주요 제자 몇 사람이 예수와 열두 사도를 새 캠프로 환영한 것은 늦은 시간이었지만, 사도들은 잠자리에 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멸망, 주가 떠나시는 것, 그리고 세상의 끝에 관하여 더 알고 싶어했다.
176:3.1 (1916.1) 그들이 스무 명쯤 모닥불 주위에 모여 있는 동안, 토마스가 물었다: “당신이 하늘나라의 일을 마치려고 돌아오셔야 하오니, 아버지의 일로 당신이 떠나 있는 동안 우리가 무슨 태도를 가져야 하나이까?” 예수는 불빛에 그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176:3.2 (1916.2) “그리고 토마스야, 너조차 내가 말하고 있던 것을 알아듣지 못하는구나. 너와 하늘나라의 관계는 영적이고 개인적인 것이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음으로 깨달음으로, 개인이 영적으로 체험하는 문제라고, 내가 여태까지 내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더냐? 내가 무엇을 더 말하리오? 나라들의 멸망, 제국들의 붕괴,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멸망, 한 시대의 종말, 아니 세상의 종말조차, 이것들이 이 복음을 믿는 자, 그리고 자기 생명이 영원한 나라에 숨겨져 있다는 보장을 받은 자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나님을 알고 복음을 믿는 너희는 이미 영생을 보장받았느니라. 너희가 영적으로, 그리고 아버지를 위하여, 일생을 살았은즉 아무것도 너희에게 심각한 관심거리가 될 수 없느니라. 하늘나라를 세우는 자, 여러 하늘 세계에서 인가받은 시민들은, 현세의 격변에 흔들리거나 땅에서 생기는 대변동에 마음이 불안해서는 안 되느니라. 너의 생명은 아들의 선물이요, 그 선물이 아버지 안에 영원히 안전함을 네가 아나니, 나라들이 전복되거나, 시대가 끝나거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진다면, 이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너에게 무슨 문제이냐? 믿음으로 현세의 생명을 살고 나서, 동료를 위하여 사랑으로 봉사하기까지 올바른 영의 열매를 맺고 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처음 모험, 땅에서 겪는 모험을 통해서 너희를 지탱했던 바로 그 살아남는 믿음으로, 너희는 자신 있게 영원한 생애의 다음 단계를 기대할 수 있느니라.
176:3.3 (1916.3) “피할 수 없이 늘 다가오는 자연사(自然死)에 비추어 개별 신자 하나하나가 일생의 일을 추진하는 것과 꼭 같이, 각 세대의 신자들은 사람의 아들이 돌아올 가능성에 비추어 자기의 일을 계속 수행해야 하느니라. 한번 너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리를 잡으면, 살아남는 보장에 대해서 다른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느니라. 그러나 오해하지 말지어다! 살아남는 이 믿음은 생생한 믿음이요, 인간의 가슴 속에서 처음으로 생생한 믿음을 불러일으킨 그 신성한 영의 열매를 더욱 명백히 드러내느니라. 하늘나라에서 아들인 것을 너희가 한 번 받아들였다는 것은 육체를 입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진취적으로 영적 열매를 맺는 것과 상관되는 진리를 일부러 끈질기게 거절하는 경우에, 너희를 구원하지는 못하리라. 땅에서 아버지의 일에 나와 함께 하던 너희는 인류를 위하여 아버지께 봉사하는 길이 싫다는 것을 발견하면 이제도 하늘나라를 저버릴 수 있느니라.
176:3.4 (1916.4) “개인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신자 세대로서, 내가 비유를 말하는 동안 내 말을 들으라: 어떤 위대한 사람이 있었더니, 다른 나라로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믿던 종들을 모두 앞에 부르고 저희 손에 그의 재물을 모두 맡겼더라. 한 사람에게 다섯 달란트를 주었고, 한 사람에게 두 달란트,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더라. 이렇게 영예로운 집사(執事) 무리 전체를 거쳐 내려가면서, 각자에게 저희의 몇 가지 능력에 따라서 그의 재물을 맡겼고, 그리고 나서 길을 떠났더라. 주인이 떠나 버렸을 때, 종들은 저희에게 맡긴 재물로 이익을 얻으려고 열심히 일에 달라붙었더라.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는 즉시 그것으로 장사하여, 금방 다섯 달란트의 이익을 얻었고, 마찬가지로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곧 두 달란트를 더 벌었더라. 그래서 이 종들이 모두 저희의 주를 위하여 이익을 얻었는데, 한 달란트만 받은 자는 그렇지 않았더라. 그는 혼자 떠나가서 땅에 구덩이를 파고 주인의 돈을 감추었는지라. 이 종들의 주인이 얼마 안 있어 뜻하지 않게 돌아와서 계산하라고 집사들을 불렀더라. 주인 앞에 모두 부름받았을 때,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그에게 맡긴 돈을 가져왔고 다섯 달란트를 더 가져와서 말하였더라. ‘주여, 당신이 투자하라고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고, 내 이익으로 다섯 달란트를 더 내놓게 되어 기쁘나이다.’ 그리고 나서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아, 너는 몇 가지 일에 충성하였고, 이제 너를 여러 사람 위에 집사로 세우리라. 네 주인과 함께 당장 즐거워할지어다.’ 그리고 나서 두 달란트 받은 자가 앞으로 나와서 말하였느니라: ‘주여, 당신은 내 손에 두 달란트를 주셨나이다. 보소서, 나는 다른 이 두 달란트를 벌었나이다.’ 그리고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아, 너도 몇 가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이제 너를 여러 사람 위에 세우리라. 네 주인과 함께 즐거워하자.’ 그리고 나서 한 달란트를 받았던 자가 계산하러 왔더라. 이 종이 앞으로 나와서 말하되, ‘주여, 내가 당신을 알고, 당신이 몸소 수고하지 않은 데서 이익을 기대하시니 당신이 날카로운 사람인 줄 깨달았나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내게 맡긴 어떤 것도 위태롭게 하기가 두려웠나이다. 나는 당신의 달란트를 땅 속에 안전히 감추었나이다. 여기 있나이다. 당신에게 속한 것을 이제 당신이 받으셨나이다.’ 그러나 주인이 대답하되, ‘너는 게으르고 굼뜬 집사이라. 네 말대로, 오늘 너의 부지런한 동료 종들이 갚은 것 같이, 너에게서 합당한 이익을 남겨 내가 계산을 요구할 것을 알았다고 네가 고백하였느니라. 이를 알았은즉, 따라서 내가 돌아올 때 내 돈과 이자(利子)를 받도록 적어도 내 돈을 은행가의 손에 맡겨야 했느니라.’ 그리고 나서 우두머리 집사에게 이 주인이 말하되, ‘이 한 달란트를 이롭지 않은 이 집사에게서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라’ 하였더라.
176:3.5 (1917.1)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을 것이요 풍성하게 가지려니와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리라. 너희는 영원한 나라의 사무를 보면서 가만히 서 있을 수 없느니라. 내 아버지는 자녀들 모두가 은혜 안에서, 진리를 아는 가운데 성장하기를 요구하시니라. 이 진리를 아는 너희는 영의 열매를 더 맺고, 동료 종들에게 사심 없이 봉사하는 데 더욱 헌신함을 나타내야 하느니라. 내 동포 가운데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너희가 베푸는 만큼, 너희가 이 봉사를 내게 한 것임을 기억하라.
176:3.6 (1917.2) “이제, 그리고 이제부터, 아니 언제까지라도, 너희는 아버지의 일에 몰두해야 하느니라. 내가 올 때까지 계속하라. 너희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행하라, 그리하면 이로서 너희는 청산하라고 죽음이 부를 때 준비가 되리라. 이렇게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아들이 만족하기까지 살고 나서, 즐겁게, 대단히 큰 기쁨을 가지고, 너희는 영구한 나라에서 영원히 봉사하는 일에 들어갈지니라.”
176:3.7 (1917.3) 진리는 살아 있다. 진리의 영은 영적 실체와 신성한 봉사가 있는 새 영역으로 빛의 아이들을 늘 이끌고 있다. 고정되고 안전하고 명예로운 형태로 구체화하라고 너희가 진리를 받는 것이 아니다. 새 아름다움과 실제의 영적 이득(利得)이 너희의 영적 열매를 구경하는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고, 그 결과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데 마음이 이끌리도록, 너희의 진리 계시는 너희 개인의 체험을 겪음으로 향상되어야 한다. 진리를 아는 가운데 이처럼 성장하는 충성스러운 종들과, 이로서 영적 실체들을 신답게 이해하는 능력을 기르는 자라야 “저희의 주와 기쁨을 충분히 나눌 것”을 언제라도 바랄 수 있다. 예수를 따른다고 공언(公言)한 자들의 연속된 세대가 신성한 진리를 돌보는 직분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면 얼마나 딱한 모습인가: “주여, 1백 년이나 1천 년 전에 당신이 우리에게 맡긴 진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는 하나도 잃지 않았고, 당신이 주신 모든 것을 우리가 충실히 간직하였나이다. 당신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에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못하게 하였고, 우리에게 주신 진리가 여기 있나이다.” 그러나 영적 게으름을 피운 것에 대하여 그렇게 탄원하는 것은 주가 계신 앞에서 열매 없는 집사, 진리를 담당한 집사가 옳다고 입증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 손에 진리를 맡긴 만큼, 진리의 주(主)는 어찌했는가 셈하기를 요구할 것이다.
176:3.8 (1918.1) 이 세상에서 받은 자질과 맡은 직분에 대하여 다음 세계에서 설명하라고 너희는 질문을 받을 것이다. 타고난 재능이 많든 적든, 공정하고 자비로운 계산을 직면해야 한다. 자질을 오로지 이기적 추구에만 썼고, 사람들에게 늘 더욱 봉사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서 영의 열매를 더 많이 거두는 높은 의무에 전혀 마음을 쏟지 않는다면, 그러한 이기적 집사는 그들의 신중한 선택으로 생긴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176:3.9 (1918.2) 자신의 게으름을 직접 주인의 탓으로 돌렸으므로, 모든 이기적 필사자는 한 달란트를 받은 이 불충한 종과 얼마나 비슷한가. 사람이 자초(自招)하여 실패를 겪었을 때, 다른 사람의 탓으로, 때때로 가장 탓해서는 안될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가 얼마나 쉬운가!
176:3.10 (1918.3) 그날 밤 그들이 쉬러 갈 때 예수는 말했다: “너희는 거저 받았도다. 그런즉 너희는 거저 하늘의 진리를 주어야 하느니라. 이 진리는 남에게 주면서 불어나고, 너희가 진리를 베푸는 동안에도, 구제하는 은혜의 빛은 더욱 빛나리라.”
176:4.1 (1918.4) 주의 모든 가르침 가운데 어느 단계도 이 세상에 언젠가 그가 친히 돌아온다는 약속처럼 그렇게 오해 받은 것은 없다. 일곱째이자 마지막 자신 수여를 그 영역의 한 필사자로서 체험한 행성으로 언젠가 돌아오는 데 미가엘이 흥미를 가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금은 광대한 우주를 통치하는 군주인 나사렛 예수가, 그렇게 독특한 인생을 살고, 아버지가 제한 없이 수여한, 우주를 다스릴 권능과 권한을 혼자서 마침내 얻어낸 세상으로,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라도, 돌아올 흥미를 가지리라 믿는 것이 당연할 따름이다. 영원히 유란시아는 우주 통치권을 얻는 과정에서 미가엘이 태어난 일곱 구체(球體)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176:4.2 (1918.5) 수많은 기회에,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예수는 그가 이 세상으로 돌아올 뜻을 밝혔다. 추종자들이 주가 현세의 구원자로서 활동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에 눈을 뜨면서, 그리고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유대 나라가 멸망하리라는 그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그들은 그가 돌아온다는 약속을 아주 자연스럽게 이 대격변의 사건들과 연결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의 담을 밀어 버리고, 성전을 무너뜨리고, 유대 땅의 유대인들을 흩어놓았는데도 여전히 주가 권능과 영광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을 때, 추종자들은 마침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것을 그 시대의 끝, 아니 세상의 종말과 연결시킨 관념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76:4.3 (1918.6) 예수는 아버지께로 올라가신 뒤, 하늘과 땅에서 모든 권능이 그의 손에 맡겨진 뒤에, 두 가지 일을 하기로 약속했다. 첫째로, 그는 세상으로 자기 대신에 다른 선생, 진리의 영을 보내겠다고 약속했고, 그는 오순절 날에 그대로 했다. 둘째로, 그는 언젠가 이 세상으로 친히 돌아오리라고 추종자들에게 아주 확실히 약속했다. 그러나 육체를 입고 자신 수여 체험을 가졌던 이 행성을 어떻게, 어디에서 또는 언제 다시 찾아볼 것인가 말하지 않았다. 그가 육체를 입고 여기서 살았을 때 육체의 눈이 그를 보았어도, 그가 돌아올 때 (적어도 가능한 여러 방문 중 하나에서) 오로지 영적 믿음의 눈으로만 그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고 그는 한 경우에 암시하였다.
176:4.4 (1919.1)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여러 번 예수가 유란시아로 돌아오리라고 우리 가운데 다수가 믿고 싶어한다. 그가 이렇게 여러 번 방문한다는 특정한 약속을 우리가 받지 않았지만, 우주의 칭호들 가운데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라는 칭호를 지닌 분이 이 세상을 여러 번 찾아보리라는 것이 아주 가능성 있어 보이며, 이 세상의 정복은 그러한 독특한 칭호를 그에게 수여했다.
176:4.5 (1919.2) 우리는 미가엘이 유란시아로 친히 다시 올 것을 아주 분명히 믿지만, 언제 또는 어떤 방식으로 그가 오기를 택할 것인가 털끝만큼도 짐작할 수 없다. 땅에 그가 두 번째로 오심이, 관련된 심판 아들의 출현과 함께, 아니면 따로, 이 현재 시대의 마지막 심판과 연결하여, 때를 맞추어 일어날 것인가? 후일의 어떤 유란시아 시대의 종결과 연결하여 그가 오실까? 발표하지 않고, 그리고 독립된 사건으로서 오실까? 우리는 모른다. 오직 한 가지만 우리가 확신하는데, 즉 그가 돌아올 때, 아마도 온 세상이 알 듯하다는 것이니, 이는 그가 베들레헴의 이름 없는 아기가 아니라 한 우주의 최고 통치자로서 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눈이 그를 바라보아야 한다면, 그리고 오직 영적 눈이 그의 계심을 헤아릴 것이라면 그의 오심은 오랫동안 뒤로 미루어져야 한다.
176:4.6 (1919.3) 그러므로 너희는 주가 친히 땅에 다시 오시는 것을 어떤 정해진 사건이나 정착된 시대와 분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 그가 돌아오기로 약속했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가 언제 또는 어떤 관계로 이 약속을 지킬 것인지 우리는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한, 그는 땅에 언제라도 나타날지 모르며, 여러 시대가 지나고 그 시대들이 그와 관계된 파라다이스 군단의 아들들에게 정식으로 판결받을 때까지 오지 않을지 모른다.
176:4.7 (1919.4) 땅에 미가엘이 두 번째로 오는 것은 중도자(中道者)와 인간 모두에게 엄청나게 감상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그밖에 이것은 중도자에게 아무런 직접 의미가 없고, 보통 일어나는 자연사의 사건보다 인간에게 아무런 실용적 중요성이 더 없다. 자연사는 아주 갑자기 필사 인간을 바로 이 예수, 우리 우주의 군주 통치자가 계신 앞으로 직접 인도하는, 연속된 우주 사건들의 손아귀에 즉시 떨어뜨린다. 빛의 아이들은 모두 그를 만나볼 운명을 가졌고, 우리가 그에게 가거나 아니면 그가 어쩌다가 먼저 우리에게로 오든지, 조금도 심각하게 아랑곳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늘에서 너희를 반가이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이, 너희는 언제나 땅에서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여라. 우리는 그가 영화롭게 나타나시는 것, 아니 거듭 오시는 것까지도 자신 있게 기대하지만, 어떻게, 언제, 아니면 어떤 관계로 그가 나타나기로 정해졌는지 우리는 전혀 모른다.
177:0.1 (1920.1)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로 시달리지 않을 때, 예수와 사도들은 수요일마다 수고를 그만두고 쉬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들은 특별한 이번 수요일에 여느 때보다 얼마큼 늦게 아침을 먹었고, 캠프는 불길한 고요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아침 식사의 처음 절반 동안 거의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침내 예수가 말했다: “너희가 오늘 쉬기를 내가 원하노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온 뒤에 일어난 모든 일을 천천히 생각해 보고, 바로 앞에 놓여 있는 일을 명상해 보라, 이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일렀노라. 진리가 너희 생활에 거하고 너희가 자비 속에 나날이 자라도록 하여라.”
177:0.2 (1920.2) 아침 식사 뒤에, 주는 그날 하루, 자리를 비울 생각이 있다고 안드레에게 알렸고, 어떤 경우에도 그들이 예루살렘 문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제외하고, 사도들이 각자가 택하는 대로 시간 보내기를 허락할 것을 제안했다.
177:0.3 (1920.3) 예수가 산으로 혼자 가려고 준비했을 때, 다윗 세베대는 그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주여, 바리새인과 권력자들이 당신을 죽이려 하는 줄 당신이 잘 아시며, 그래도 당신은 산으로 혼자 가려고 준비하시나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그러하니 아무런 해가 당신에게 닥치지 않도록 처리하려고 잘 준비된 세 사람을 당신과 함께 보내리이다.” 예수는 잘 무장(武裝)하고 튼튼한 세 갈릴리 사람을 훑어보고 다윗에게 말했다: “너는 좋은 뜻을 가졌으나, 사람의 아들이 자신을 방어할 사람이 하나도 필요하지 않음을 이해하지 못하니, 네가 잘못하는도다. 내 아버지의 뜻에 순응하여 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될 그때까지, 아무도 내게 손대지 아니하리라. 이 사람들이 나를 따라와서는 안 되느니라.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나는 혼자 가기를 바라노라.”
177:0.4 (1920.4) 이 말씀을 듣자, 다윗과 무장한 경비원들은 물러났다. 그러나 예수가 혼자서 발걸음을 떼자, 요한 마가가 먹을 것과 물을 담은 작은 바구니를 가지고 앞으로 나섰고, 그가 하루 종일 떠나 있을 생각이라면, 배가 고프게 될지 모른다고 넌지시 비추었다. 주는 요한에게 빙그레 웃으며, 바구니를 쥐려고 손을 뻗었다.
177:1.1 (1920.5) 예수가 요한의 손에서 점심 바구니를 쥐려 하자, 그 젊은이는 나서서 말했다. “하지만 주여, 바구니를 내려놓고, 몸을 돌이켜 기도하고 바구니 없이 계속해도 되나이다. 게다가, 점심을 가지고 내가 따라간다면, 당신은 예배하기에 더욱 홀가분할 터이고, 분명히 나는 조용히 있겠나이다. 당신에게 아무 말도 묻지 않고 당신 혼자서 기도하러 따로 가실 때, 바구니 옆에 머무르리이다.”
177:1.2 (1920.6) 그 대담성은 가까이서 듣던 사람들 가운데 더러를 놀라게 했는데, 이렇게 말하면서 요한은 대담하게 그 바구니를 계속 붙들고 있었다. 요한과 예수 둘이서 그 바구니를 붙들고 거기에 서 있었다. 이내 주는 손을 놓고, 소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마음을 다하여 나와 함께 몹시 가고 싶어 하니, 너를 거절하지 못하리라. 우리끼리 떠나가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리라. 마음 속에 무슨 질문이 생겨도 내게 물어도 좋고, 우리는 서로 위로하고 위안할 것이라. 너는 점심을 가지고 떠나도 좋으니라. 그리고 네가 지칠 때, 내가 너를 도우리라. 나를 계속 따라오라.”
177:1.3 (1921.1) 예수는 해가 진 뒤까지 그날 저녁에 캠프로 돌아오지 않았다. 진리에 갈급한 이 젊은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파라다이스 아버지와 이야기하면서, 주는 땅에서 마지막으로 조용한 이날을 지냈다. 이 사건은 하늘에서 “한 젊은이가 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낸 날”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경우는 언제까지나 창조자가 사람과 기꺼이 친교하는 태도를 본보기로 보여준다. 소년조차도, 마음의 소망이 정말로 지극할 때, 한 우주의 하나님의 눈길을 끌고 사랑으로 동반하심을 누릴 수 있다. 산에서 하나님과 혼자 지내는 잊을 수 없는 환희를, 그것도 하루 종일, 실제로 누릴 수 있다. 이 수요일에 유대 땅의 산에서 요한 마가가 겪은 독특한 체험이 그러했다.
177:1.4 (1921.2) 예수는 요한과 많이 이야기를 나누고 이 세상과 다음 세상의 일에 대하여 거리낌없이 이야기했다. 요한은 그가 사도들 중에 하나가 될 만큼 나이 들지 않아서 얼마나 서운했는가 예수에게 말했다. 그리고 페니키아로 간 여행을 제외하고, 예리고 가까이 요단강 여울에서 그들이 처음 전도할 때부터 줄곧 따라다니도록 허락받은 것을 대단히 고맙게 여긴다고 말했다. 예수는 다가오는 사건들을 보고 낙심하지 말라 소년에게 경고하고, 그가 살아서 하늘나라의 막강한 사자가 되리라고 그에게 확신을 주었다.
177:1.5 (1921.3) 요한 마가는 산에서 이날 예수와 함께 지냈던 기억으로 기쁨에 떨었지만, 마가는 그들이 겟세마네 캠프로 막 돌아오려 할 때 말씀한 주의 마지막 훈계를 결코 잊지 않았다. 이때 주는 말했다: “자, 요한아, 좋은 이야기를 나누었구나, 정말로 쉬는 날이었도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이른 것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하여라.” 요한 마가는 그가 산에서 예수와 함께 지낸 이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결코 밝히지 않았다.
177:1.6 (1921.4) 예수가 땅에서 보낸 생애의 남은 몇 시간을 통해서, 요한 마가는 주가 눈앞에서 오래 사라지도록 버려두지 않았다. 그 소년은 언제나 가까이서 숨어 있었고, 예수가 잘 때만 눈을 붙였다.
177:2.1 (1921.5) 요한 마가와 이날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예수는 그들의 어린 시절과 그후 소년기의 체험을 비교하느라고 상당히 시간을 보냈다. 요한의 부모가 예수의 부모보다 이 세상의 재물을 더 많이 소유했어도, 그들의 소년기에 아주 비슷한 체험이 많이 있었다. 예수는 여러 가지를 말씀했고, 이것은 요한으로 하여금 부모와 다른 식구들을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가 “하늘나라의 막강한 사자”임이 입증될 것을 주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소년이 물었을 때, 예수는 말했다:
177:2.2 (1921.6) “네가 하늘나라 복음에 충실함이 입증될 것을 내가 아노니, 너의 현재 믿음과 사랑이 집에서 네 몫대로 받은 그러한 초기 훈련에 바탕을 두었을 때, 내가 이러한 자질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라. 너는 부모가 서로에게 진지한 애정을 품은 집에서 생긴 결과이며, 따라서 자신을 중요시하는 개념을 해롭게 높일 만큼 지나치게 사랑을 받지 않았느니라. 너의 자신감과 충성심이 서로 충돌하도록 너희 부모가 사랑 없이 조종한 결과로 네 성격이 비뚤어지지도 않았느니라. 칭찬할 자신감을 보장하고 정상적 안정감을 촉진하는 부모의 사랑을 네가 누려 왔느니라. 그러나 네 부모가 사랑 뿐 아니라 지혜를 가졌으므로, 너는 또한 운이 좋았구나. 돈으로 살 수 있는 대부분의 형태의 방종과 많은 사치품을 허락하지 않도록 부모가 지혜롭게 행하였고, 한편 네 부모는 이웃 놀이 친구들과 함께 너를 회당 학교로 보냈으며, 또한 네가 고유한 체험을 가지도록 허락함으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가 배우라고 너를 북돋았느니라. 너는 요단강으로 왔고, 거기서 젊은 네 친구 아모스와 함께, 우리는 전도하고 요한의 제자들은 세례를 주었느니라. 너희 둘이 우리와 함께 가기를 바랐느니라. 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때, 네 부모는 찬성하고 아모스의 부모는 반대하였느니라. 저희는 아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네가 누려왔던 복된 체험을, 아니 오늘 네가 맛보는 그런 체험조차 그가 못 가지게 하였느니라. 집에서 도망치면 아모스는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했다면 그는 사랑에 상처를 입히고 충성심을 희생하였으리라. 그러한 과정이 지혜롭다 하더라도, 체험과 독립과 자유를 얻기 위하여 끔찍한 값을 치렀으리라. 너희 부모처럼 지혜로운 부모는 아이들이 네 나이까지 자랐을 때 독립심을 기르고 사람을 북돋는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사랑에 상처를 입히거나 충성심을 억누를 필요가 없도록 처리하느니라.
177:2.3 (1922.1) “요한아, 전적으로 지혜로운 존재들이 사랑을 주었을 때 그 사랑은 우주에서 최상의 현실이지만, 필사 부모의 체험에서 나타나다시피, 사랑은 위험하고 때때로 반(半)이기적 버릇이라. 네가 장가들고 네 아이들을 기를 때, 지혜의 훈계를 받고 머리를 써서 아이들을 사랑하도록 하여라.
177:2.4 (1922.2) “젊은 네 친구 아모스는 너와 똑같이 이 하늘나라 복음을 믿지만, 나는 그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고, 앞날에 그가 무슨 일을 할지 확신하지 못하노라. 어릴 때 그의 가정 생활은 온전히 믿을 사람을 길러낼 수 있는 그러한 가정이 아니었느니라. 아모스는 사도들 가운데 정상이고 사랑이 가득하고 지혜로운 가정 훈련을 받지 못한 한 사도와 많이 비슷하니라. 네가 처음 8년을 정상이고 규율이 잘 선 집에서 보냈은즉, 너의 여생(餘生) 전체는 더욱 행복하고 믿을 만하리라. 사랑이 우선하고 지혜가 다스리는 집에서 자랐으므로 너는 튼튼하고 반듯한 인품을 가졌느니라. 그러한 소년기 훈련이 낳는 종류의 충성심은, 네가 일단 시작한 길을 마칠 것이라고 내게 확신을 주느니라.”
177:2.5 (1922.3) 한 시간이 넘도록 예수와 요한은 가정 생활에 대하여 이 토론을 계속하였다. 어린아이가 모든 지적ㆍ사회적ㆍ도덕적인 것, 아니 영적인 것에 대해서도 그 초기 개념을 얻는 데 어떻게 부모에게, 그리고 관련된 가정 생활에 의존하는가, 주는 계속 요한에게 설명했다. 이것은 가족이 인간 관계나 신다운 관계에 대하여 처음에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어린아이에게 대표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머니의 보살핌으로부터 우주에 대한 첫 인상(印象)을 얻어야 한다. 아이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첫 관념을 땅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 뒤에 어린아이의 생활은, 가정의 이 사회적ㆍ영적 관계에 조건을 받고, 어릴 때의 정신 및 감정 생활이 어떠했는가에 따라서 행복하거나 불행하게, 쉽거나 어렵게 된다. 한 인간의 여생 전부가 처음 몇 년 존재하는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엄청나게 영향을 받는다.
177:2.6 (1922.4) 아버지와 자식 관계에 바탕을 둔, 예수가 가르친 복음은, 현대의 문명화된 민족들의 가정 생활이 사랑을 더 품고 지혜를 더 품을 때가 오기까지, 도저히 세계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우리는 진지하게 믿는다. 20세기의 부모는 가정을 개선하고 가정 생활을 고상하게 만들기 위하여 많은 지식과 늘어난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데도, 갈릴리에서 예수의 가정과 유대에서 요한 마가의 집만큼, 소년과 소녀를 기르기에 좋은 장소인 현대 가정이 극히 드문 것이 아직도 사실이다. 하지만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면 즉시 가정 생활의 개선을 가져올 것이다. 지혜로운 가정의 애정 생활, 그리고 참된 종교에 충실히 헌신하는 것, 이 두 가지는 서로 심오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한 가정 생활은 종교를 높이고, 진정한 종교는 반드시 가정을 영화롭게 한다.
177:2.7 (1923.1) 이러한 옛 유대인 가정에서 발육을 저해(沮害)하던 많은 불쾌한 영향, 그리고 사람을 속박하는 기타 특징이, 잘 다스려지는 많은 현대 가정에서 거의 없어진 것이 참말이다. 정말로, 계획하지 않은 자유가 전보다 많고 개인적 자유는 훨씬 더 많지만, 이 자유는 사랑으로 자제되거나 충성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요, 총명하게 지혜로운 훈련으로 지도를 받지도 않는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어린아이에게 기도하기를 가르치는 한, 아버지라는 낱말이 성장하는 모든 어린아이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 가치있게 간직되도록, 살고 가정을 다스릴 엄청난 책임이 땅에 있는 모든 아버지에게 지워진다.
177:3.1 (1923.2) 사도들은 올리브산에서 이리저리 거닐고, 같이 야영한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날의 대부분을 보냈지만, 이른 오후가 되자 예수가 돌아오는 것을 무척 보고 싶어 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가 안전한가 더욱 걱정이 되었다. 그들은 예수가 계시지 않아서 말할 수 없이 외롭게 느꼈다. 주가 산에서, 심부름하는 소년 하나만 데리고, 혼자 훌쩍 떠나게 버려두었어야 하는가, 하루 내내 많은 논란이 있었다. 비록 아무도 터놓고 자기 생각을 표현하지 않았어도, 가룟 유다를 빼고 자기가 요한 마가의 처지에 있었으면 하고 바라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177:3.2 (1923.3) 오후 중반쯤 되어 나다니엘은 “최고의 소망”에 대하여 여섯 명쯤 되는 사도들과 그만큼 되는 제자들에게 연설했는데, 그 연설의 끝은 이러했다: “우리 대부분에게 잘못된 점은 우리가 정성이 부족한 것이라. 주가 우리를 사랑하는 것 같이 우리는 주를 사랑하지 않느니라. 요한 마가만큼 우리 모두가 함께 가기를 바랐더라면, 주는 분명히 우리 모두를 데리고 갔으리라. 우리가 구경하는 동안, 그 소년은 주께 다가가서 바구니를 내밀었지만, 주가 쥐었을 때 그 소년은 놓으려 하지 않았는지라. 그래서 주는 우리를 여기 두고, 바구니도 가지고 소년도 데리고 산으로 훌쩍 떠나가셨느니라.”
177:3.3 (1923.4) 4시쯤에, 주자들이 다윗 세베대에게, 벳세다에 있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그리고 예수의 어머니로부터, 소식을 가지고 왔다. 며칠 전에 다윗은 주사제와 권력자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다는 결론을 이미 내렸다. 다윗은 그들이 주를 죽이기로 결의가 굳은 것을 알았고, 예수가 자신을 구하려고 신으로서 가진 힘을 쓰거나 추종자들이 그를 방어하려고 무력(武力)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했다. 이런 결론에 이르고 나서, 그는 때를 놓치지 않고 사자 하나를 그의 어머니에게 급히 보내서, 어머니가 당장에 예루살렘으로 오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 집안의 식구를 다 데려오라고 재촉했다.
177:3.4 (1923.5) 다윗의 어머니는 아들이 요청한 대로 했고, 이제 주자(走者)들이 그의 어머니와 예수의 가족 전부가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에 있으며, 이튿날 언젠가 늦게, 아니면 그 다음 날 아침 아주 일찍 도착하리라는 소식을 가지고 다윗에게 돌아왔다. 다윗이 자진해서 이렇게 했기 때문에, 그는 그 문제를 혼자 비밀에 붙이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의 가족이 예루살렘으로 오는 도중이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177:3.5 (1924.1) 정오가 조금 지난 뒤에, 아리마대 요셉의 집에서 예수와 열두 사도와 만난 적이 있는 그리스인이 스무 명 넘게 캠프에 도착했고,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과 회담하느라고 몇 시간을 보냈다. 이 그리스인들, 적어도 그들 가운데 더러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단에게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지식 면에 상당히 진보되어 있었다.
177:3.6 (1924.2) 그날 저녁에, 캠프로 돌아온 뒤에, 예수는 그리스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칠십인을 세운 것처럼 이 그리스인 스무 명을 임명하는 것이 사도들과 많은 주요 제자들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았으리라는 사실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177:3.7 (1924.3) 이 모든 것이 캠프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 예루살렘에서 주사제(主司祭)와 장로들은 예수가 군중에게 연설하려고 돌아오지 않은 것에 놀랐다. 그 전날, 그가 성전을 떠날 때, “내가 너희 집을 황폐한 채로 버려두노라” 말한 것이 참말이었다. 그러나 군중이 우호적으로 대하는 가운데 쌓았던 크게 유리한 형편을 그가 어째서 기꺼이 포기하려고 하는가 그들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소동을 일으킬까 두려웠는데, 군중에게 주가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모든 타당한 방법으로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의 권한에 순응하라는 훈계였다. 그러나 그들이 유월절을 준비하고 동시에 예수를 죽이려는 계획을 완성하는 동안, 그 도시에서는 바쁜 날이었다.
177:3.8 (1924.4) 많지 않은 사람이 캠프로 왔는데, 그 캠프를 세운 것은 밤마다 베다니로 나가는 대신에 거기서 예수가 머물기를 기대한다는 것을 안 사람들이 모두 비밀을 잘 지켰기 때문이다.
177:4.1 (1924.5) 예수와 요한 마가가 캠프를 떠난 뒤에 얼마 있다가, 가룟 유다는 형제들 사이에서 사라졌고, 오후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혼란에 빠지고 불평을 품은 이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삼가 들어가지 말라고 주가 특별히 요청했는데도, 대사제[1] [1808]가야바의 집에서 예수의 적들과 약속을 지키려고 서둘러 갔다. 이것은 산헤드린의 비공식 회의였고, 그날 아침에 10시 조금 지나서 하도록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예수를 고발하는 데 쓰일 죄목들의 성질을 의논하고, 그들이 예수에게 이미 내린 사형 선고에 필요한, 국가의 확인을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로마 당국 앞으로 예수를 끌고 오는 데 어떤 과정을 이용할 것인가 결정하려고 이 회의가 소집되었다.
177:4.2 (1924.6) 전날에 유다는 친척들 중 몇 사람에게, 그리고 아버지 가족 중에 어떤 사두개인 친구들에게, 예수가 좋은 의도를 가진 몽상가요 이상주이자이기는 해도, 이스라엘이 기대하던 구원자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털어놓았다. 유다는 그가 그 운동 전체에서 품위 있게 물러나는 어떤 길을 찾아내기를 몹시 바란다고 진술했다. 친구들은 그의 사퇴가 큰 사건으로서 유대 권력자들의 갈채를 받으리라, 무엇을 그에게 해주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고 치켜세우며 확신을 주었다. 그가 산헤드린으로부터 당장에 큰 영예를 받으리라, 그가 뜻은 좋았어도, “배우지 못한 갈릴리 사람들과 유감스러운 관계”를 가졌던 낙인(烙印)을 드디어 지워버릴 처지에 있으리라고 그가 믿게 만들었다.
177:4.3 (1924.7) 유다는 주의 막강한 일들이 악마 왕의 힘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진실로 믿을 수 없었지만, 이제 예수가 자신을 크게 보이려고 그의 권능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충분히 확신했다. 예수가 유대 권력자들이 그를 죽이도록 버려둘 것이라고 마침내 유다는 확신하였고, 그는 실패한 운동과 한편이었다는 창피스러운 생각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주의 든든한 인격과 그 당당하고 자비로운 정신, 날카로운 정신을 속속들이 이해하였다. 그래도, 예수가 좋은 뜻을 가진 광신자이지만 아마도 정말로 멀쩡한 정신이 아니었다, 언제나 이상하고 오해받는 사람으로 보였다고, 친척들 가운데 한 사람이 제안한 것을 얼마큼 생각해 보면서 유다는 마음이 기뻤다.
177:4.4 (1925.1) 이제, 전과 달리, 유다는 예수가 그에게 크게 명예로운 자리를 한번도 배정해 주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자신이 분개하게 되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태까지 사도들의 회계(會計)라는 명예를 고맙게 여겼지만, 이제 그의 진가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고 비로소 느꼈다. 그는 예수와 가까운 관계를 가지는 영예를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이 받은 것에 갑자기 분개심으로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이때 대사제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수를 배반하려는 어떤 생각에 관심이 있기보다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에게 앙갚음을 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로 그때, 새롭고 지배하는 생각이, 의식하는 그의 머리 속에서 앞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명예를 얻는 데 착수했고, 이것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실망을 안겨주었던 자들에게 복수(復讐)하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면, 더군다나 좋다. 혼란ㆍ자만심ㆍ절망ㆍ결심이 끔찍하게 뭉쳐서 그를 꽉 붙들었다. 그래서 그때 유다는 예수를 배반하는 일을 주선하려고 가야바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고, 이는 돈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177:4.5 (1925.2) 가야바의 집으로 다가가면서, 유다는 예수와 동료 사도들을 저버리겠다고 마침내 결심하였다. 이렇게 하늘나라 운동을 저버리기로 마음먹고 나서, 그가 처음에 예수와 하늘나라의 새 복음 편을 들었을 때, 언젠가 자기가 누릴 것이라 생각했던 명예와 영광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자신을 위하여 확보하려고 굳게 결심했다. 사도들이 모두 한때 유다와 함께 이런 포부를 가졌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진리를 찬미하기를 배우고, 적어도 유다보다 더, 예수 사랑하는 것을 배웠다.
177:4.6 (1925.3) 그의 사촌이 배반자를 가야바와 유대 권력자들에게 인사시켰고, 사촌은 유다가 예수의 미묘한 가르침에 자신이 미혹된 잘못을 발견했으므로, 그가 그 갈릴리 사람과 가졌던 관계를 대중 앞에서 정식으로 부인(否認)하기를 바란다고, 동시에 유대 형제들의 신뢰와 친교의 회복을 요청하려고 그 장소에 도착했다고 설명했다. 유다의 이 대변인은 이어서 설명했다: 예수가 체포된다면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하여 최선이라는 것을 유다가 인정한다, 그리고 그러한 그릇된 운동에 참여해 온 것을 후회한다는 증거로서, 또 이제 모세의 가르침으로 진지하게 돌아온다는 증명으로서, 예수를 체포하라는 명을 받은 지휘관과 주선할 수 있는 자로 자청하려고 그가 산헤드린으로 왔다. 이렇게 하면, 예수를 조용히 감금할 수 있고, 이처럼 민중을 소란하게 만드는 어떤 위험이나 또는 유월절이 지나기까지 그의 체포를 연기할 필요를 피한다.
177:4.7 (1925.4) 사촌(四寸)이 말을 마치자, 그는 유다를 인사시켰고, 유다는 앞으로 대사제 가까이 걸어가서 말했다: “내 사촌이 약속한 모든 것을 내가 하리이다. 그러나 이 수고의 대가로 나에게 무엇을 기꺼이 주시겠나이까?” 모질고 자만심이 대단한 가야바의 얼굴에 비쳤던, 경멸하고, 아니 메스꺼워하는 그 얼굴빛을 유다는 헤아리지 못하는 듯했다. 그의 마음은 자기 영광에, 그리고 자찬(自讚)하는 만족감을 몹시 바라는 생각에 너무 팔려 있었다.
177:4.8 (1926.1) 그러자 가야바는 배반자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유다야, 너는 경비대의 지휘관에게 가서, 네 주를 우리에게 오늘 밤이나 내일 밤에 데려오도록 그 장교와 주선하여라. 네가 그를 우리 손에 넘기고 나서, 너는 이렇게 수고한 데 대하여 보상을 받을지니라.” 이 말을 듣자, 유다는 주사제와 권력자들이 있는 앞에서 나가서, 성전 경비원들의 지휘관과 함께 예수를 어떤 방법으로 체포할까 의논했다. 유다는 예수가 그때 캠프에서 자리를 비웠음을 알았고 그날 저녁에 언제 그가 돌아올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날(목요일) 저녁에, 예루살렘의 사람들과 방문하는 순례자들이 모두 밤을 지내려고 물러간 뒤에 예수를 체포하자고 자기들끼리 합의를 보았다.
177:4.9 (1926.2) 유다는 여러 날 동안 맛보지 못했던 위엄과 영광을 누릴 생각에 황홀한 채로 캠프에 있는 동료들에게 돌아왔다. 그는 언젠가 새 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예수 편에 뛰어들었다. 그는 전에 예상했던 것과 같은 새 왕국이 없으리라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새 나라에서 영광을 얻지 못하여 실망한 것을 옛 체제에서 명예와 보상을 즉시 얻는 일과 바꾸도록 그렇게 현명했던 것이 기뻤다. 그는 이제 이 옛 체제가 살아남으리라고 믿었고, 옛 체제가 예수와 그가 대표하는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라 확신했다. 의식(意識)하면서 의도한 마지막 동기를 볼 때, 유다가 예수를 저버린 것은 이기적인 도망자의 비겁한 행위였고, 그가 오로지 생각한 것은 그의 행위가 주와 옛 동료들에게 무슨 결과를 가져오든 상관 없이, 자신의 안전과 영광을 얻는 것이었다.
177:4.10 (1926.3) 그러나 늘 바로 그랬다. 유다는 머리 속에 점점 쌓이는 고의적이고 끈질기고, 이기적이고 복수심 가득한 이 의식에 오랫동안 빠져 있었고, 복수하고 불충하려는 욕망, 사람을 미워하는 이 악한 욕망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다. 다른 사도들을 사랑하고 믿은 것처럼 예수는 유다를 사랑하고 믿었지만, 유다는 그에 보답하여 충실하게 신뢰하는 태도를 기르고 진심으로 사랑함을 체험하지 못했다. 그리고 일단 자아(自我)의 추구에 온통 집착하며, 음침하고 오랫동안 억눌렀던 복수심이 포부를 극도로 자극했을 때, 그 포부는 얼마나 위험하게 될 수 있는가! 어리석은 사람들의 일생에서 실망은 얼마나 사람을 짓밟는가! 이들은 세월 속에 그림자 같고 하루살이 같은 흥미거리에 눈독을 들이면서, 신성한 가치와 참된 영적 실체들이 있는 영원한 세계에서 영구한 업적을 얻는, 더 높고 참다운 성취를, 눈이 멀어 바라보지 못한다. 유다는 머리 속에서 세상의 영예를 몹시 바랐고, 진심으로 차츰 이 욕구에 빠지게 되었다. 다른 사도들도 머리 속에서 마찬가지로 바로 이 세상의 명예를 몹시 바랐지만, 마음으로 예수를 사랑했고, 그가 그들에게 가르친 진리를 사랑하기를 배우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177:4.11 (1926.4) 이때 유다는 깨닫지 못했지만, 헤롯이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벤 뒤로 늘, 유다는 잠재 의식 속에 예수를 비판하는 사람이 되었다. 가슴 속 깊숙이, 유다는 예수가 요한을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늘 분하게 여겼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되기 전에 유다가 요한의 제자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미움이라는 옷을 입혀 자기 혼 속에 유다가 쌓아두었던 인간적 분개심과 가슴 아픈 실망이 쌓이고 쌓여서, 이제 어렴풋이 의식하는 머리 속에서 자리를 잘 잡았으며, 이것은 그가 형제들의 지지하는 영향을 일단 감히 벗어나고, 또한 동시에 예수의 적들의 영리한 암시와 미묘한 비웃음에 노출되었을 때 솟아나와서 그를 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유다가 하늘 높이 희망을 띄우고 예수가 이를 산산조각 내는 무슨 일을 하거나 말을 할 때마다, 유다의 마음 속에 모질게 분개했던 상처가 언제나 남아 있었다. 이 상처들이 늘어나자, 너무나 자주 상처 입은 그 마음은, 좋은 뜻을 가졌어도 비겁하고 자기 중심인 인물에게 이 씁쓸한 체험을 안겨준 사람에 대하여 모든 참 애정을 금방 잃어버렸다. 유다는 깨닫지 못했어도, 그는 비겁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쉽게 손 닿는 곳에 있는 듯 보였을 때, 예수가 비겁하여 아주 흔히 권력이나 영광을 붙잡기를 거절했다고 유다는 언제나 예수를 탓하고 싶어했다. 어떻게 한때는 진정했던 사랑조차, 실망과 질투와 오래 계속된 분개심을 통해서, 결국 실제로 미움으로 바뀔 수 있는가 필사 인간은 누구나 잘 안다.
177:4.12 (1927.1) 마침내 주사제와 장로들은 몇 시간 동안 편안히 숨을 쉴 수 있었다. 예수를 대중 앞에서 잡아들이지 않아도 되었고, 배신하는 동조자로 유다를 확보한 것은 과거에 아주 여러 번 했던 것처럼, 예수가 그들의 관할 구역에서 달아나지 않을 것을 보장했다.
177:5.1 (1927.2) 수요일이었으니까 캠프에서 이날 저녁은 친교 시간이었다. 주는 풀이 죽은 사도들을 북돋아주려고 애썼지만, 거의 불가능했다. 뒤숭숭하고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사건들이 다가오고 있음을 모두가 비로소 깨달았다. 파란 많고 사랑으로 사귀었던 여러 해를 주가 하나하나 이야기했을 때에도 그들은 명랑해질 수 없었다. 예수는 모든 사도의 가족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물었고, 다윗 세베대를 향하여 둘러보며, 누가 자기 어머니나 막내 누이나 또는 자기 집안의 다른 식구로부터 요즈음에 소식을 들었는가 물었다. 다윗은 고개를 떨구고 자기 발을 내려다 보았다. 대답하기가 두려웠다.
177:5.2 (1927.3) 이때는 예수가 추종자들에게 군중의 지지(支持)를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계기였다. 여러 번 큰 무리의 사람들이 열심히 그들을 따라다니다가, 다음에 똑같은 열심으로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자기들이 예전에 믿고 생활하던 길로 돌아갔을 때 갈릴리에서 겪었던 체험을 주는 다시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서 말했다: “그래서 너희는 성전에서 우리의 말을 듣고 우리의 가르침을 믿는 듯이 보이던 큰 군중에게 속아넘어 가서는 안 되느니라. 이 군중은 진리를 듣고 머리 속에서 겉으로만 믿지만, 거의 아무도 진리의 말씀이 살아 있는 뿌리를 박아 가슴 속에 들어가게 두지 않느니라. 오직 머리로만 복음을 알고, 마음 속에서 복음을 맛보지 않은 자는 정말 어려움이 닥칠 때 지지할 것을 기대할 수 없느니라. 유대인 권력자들이 사람의 아들을 죽이겠다고 의견을 모았을 때, 그들이 한 마음으로 공격할 때, 너희는 군중이 절망에 빠져 달아나든지, 아니면 미치고 눈먼 이 권력자들이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들을 사형장으로 끌고 가는 동안 말없이 놀라서 구경만 하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그리고 나서 역경과 박해가 너희에게 닥칠 때, 너희가 보기에 진리를 사랑한다는 또 다른 사람들은 흩어지고, 더러는 복음을 부인하고 너희를 저버릴 것이라. 우리와 아주 가까웠던 어떤 사람들은 이미 저버리기로 작정하였느니라. 우리에게 이제 닥친 시절에 대비하여 너희는 오늘 쉬었느니라. 그러므로 바로 앞에 닥친 며칠을 위하여 너희가 힘을 얻도록 내일은 경계하고 기도하라.”
177:5.3 (1927.4) 캠프의 분위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긴장의 빛이 가득했다. 말 없는 사자들이 오고갔고, 오직 다윗 세베대와 의사(意思)를 통하였다. 그날 저녁이 지나기 전에, 더러는 나사로가 황급히 베다니에서 달아난 것을 알았다. 캠프로 돌아온 뒤에, 주의 곁에서 하루 종일 보냈는데도, 요한 마가는 불길하게 말이 없었다. 그가 말하게끔 설득하려고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예수가 그에게 입을 다물라고 이른 것을 가리켰다.
177:5.4 (1928.1) 명랑하고 보기 드물게 친근한 주의 태도조차 그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끔찍한 고립의 시절이 분명히 다가오고 있음을 모두가 느꼈고, 그런 일이 갑자기 와르르하며 피할 수 없이 무섭게 찾아오려 하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인가 다가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지만, 아무도 그 시험에 부닥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지 않았다. 주는 하루 종일 떠나 있었고, 그들은 주가 계시지 않아 엄청나게 서운했다.
177:5.5 (1928.2) 이 수요일 저녁은 주가 돌아가시는 바로 그 실제 시각까지 그들의 영적 지위에서 밑바닥을 기록했다. 비록 이튿날은 비극의 금요일이 하루가 더 가깝기는 했어도, 그래도 주는 그들과 함께 있었고, 그들은 초조한 시간을 더 품위 있게 견디었다.
177:5.6 (1928.3) 바로 한밤이 되기 전에, 땅에서 그가 택한 가족과 함께 푹 잠잘 마지막 밤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밤 동안 그들을 해산하면서 그는 말했다: “형제들아, 잠자러 가라, 그리고 아침에 우리가 일어날 때까지 평안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우리가 아들인 것을 아는 기쁨을 맛볼 날이 하루 더 있느니라.”
178:0.1 (1929.1) 예수는 이 목요일, 육체를 입고 육신화한 신의 아들로서 땅에서 자유로운 마지막 날을 사도들, 그리고 충성하고 헌신적인 몇 제자들과 함께 보내려고 계획했다. 이 아름다운 날 아침에 식사 때가 지난 뒤에 곧, 주는 캠프 위에, 조금 떨어진 곳에 한적한 장소로 그들을 데리고 갔고, 거기서 많은 새 진리를 가르쳤다. 예수가 그날 초저녁에 사도들에게 다른 강연을 했어도, 이 목요일 아침의 말씀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여, 캠프에 있는 사도들 및 선택된 제자들의 통합 집단에게 주신 작별 연설이었다. 열두 사도는 유다를 제외하고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베드로와 몇 사도는 유다가 자리에 없다고 한마디 했고, 더러는 예수가 어떤 문제를 돌보라고, 아마도 다가오는 유월절 축하의 세부를 주선하려고 그를 도시로 보냈다고 생각했다. 유다는 오후 중반까지, 예수가 마지막 만찬을 나누려고 열두 사도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가기 조금 전까지, 캠프로 돌아오지 않았다.
178:1.1 (1929.2) 거의 두 시간 동안 예수는 신뢰하는 추종자들 약 50명에게 말씀하였고, 하늘나라와 이 세상의 나라들의 관계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 신분과 이 세상의 정부에서 얻는 시민 자격의 관계에 관하여, 스무 가지 질문에 대답했다. 질문에 대한 대답과 함께 이 강연은 현대의 말로 다음과 같이 간추리고 다시 표현해도 좋다:
178:1.2 (1929.3) 이 세상의 나라는 물질적이니까, 그 율법을 집행하는 데, 그리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무력을 쓰는 것이 필요함을 때때로 발견할지 모른다. 하늘나라에서 참 신자들은 무력의 사용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영에게서 태어난 하나님 아들들의 영적 단체이니까, 하늘나라는 오직 영의 힘으로 선포되어도 좋다. 이 과정의 차이는 신자들의 나라와 현세의 정부를 가진 나라들의 관계를 언급하며, 신자들의 사회 집단이 그들의 계층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다루기 힘들고 자격 없는 구성원을 징계하는 권리를 취소하지 않는다.
178:1.3 (1929.4) 영적 하늘나라에서 아들이 되는 것과 현세의 정부나 국가 정부에서 시민이 되는 것 사이에는 아무 모순이 없다. 케자의 것을 케자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신자의 의무이다. 어느 케자가 주제넘게 하나님의 특권을 빼앗고 영적 존경과 최고의 숭배를 그에게 바치라고 요구하는 일이 생기지 않으면, 하나는 물질적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이니까, 이 두 가지 조건 사이에 아무런 충돌이 있을 수 없다. 그러한 경우에 너희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그런 지상의 통치자들을 깨우치기를 추구하고 이 방법으로 그들이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인식하도록 인도하면서 오직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지상의 통치자에게 영적(靈的) 예배를 바치지 말고 땅에 있는 정부의 무력을 이용하지도 말아야 하며, 그러한 통치자들은 언젠가 영적 왕국의 사명을 촉진하는 일을 믿는 사람이 될지 모른다.
178:1.4 (1930.1) 진보하는 문명의 관점에서 볼 때, 하늘나라에서 아들 신분은 이 세상의 나라에서 이상적 시민이 되도록 너희를 도와야 하며, 이는 형제 정신과 봉사가 하늘나라 복음의 주춧돌인 까닭이다. 영적 나라에서 애정으로 부르는 것은 땅의 여러 나라에서, 믿지 않고 전쟁에 머리를 쓰는 시민의 미워하는 충동을 효과적으로 없애는 약이라는 것이 입증될 것이다. 그러나 어둠에 빠져 물질에 머리를 쓰는 이 아들들은 사회에 사심(私心) 없이 봉사를 베풀면서 너희가 그들에게 아주 가까이 가지 않는 한, 결코 너희의 영적 진리의 빛에 대하여 알지 못할 터이고, 그러한 사회 봉사는 개별 신자 각자의 생활 체험에서 영의 열매를 맺는 데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178:1.5 (1930.2) 물질적 필사 인간으로서 너희는 정말로 땅에 있는 나라의 시민이요, 너희는 좋은 시민, 하늘나라의 다시 태어난 영(靈) 아들이 되었으므로, 더군다나 좋은 시민이 되어야 한다. 믿음으로 깨우치고 영이 해방한 하늘나라 아들로서, 너희는 사람에 대한 의무와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두 가지 책임을 맡으며, 한편 너희는 셋째이자 신성한 의무, 즉 하나님을 아는 신자들의 형제 단체에 봉사하는 일을 자청하여 맡는다.
178:1.6 (1930.3) 너희는 현세의 통치자들을 숭배해서는 안 되고, 영적 나라를 진전시키는 일에 세상의 권력을 써서는 안 되지만, 신자와 불신자에게 똑같이 사랑으로 섬기는 올바른 봉사를 베풀어야 한다. 하늘나라 복음 속에는 힘찬 진리의 영이 거하며, 얼마 안 있어 나는 바로 이 영을 모든 육체에 퍼붓겠다. 영의 열매, 너희가 성실하게 사랑으로 베푸는 봉사는 어둠 속에 사는 종족들을 향상시키는 강력한 사회적 지레요, 이 진리의 영은 너희에게 힘을 몇 배 늘이는 지레 받침이 될 것이다.
178:1.7 (1930.4) 너희가 믿지 않는 국가 통치자들을 다룰 때 지혜를 나타내고 슬기로움을 보여라. 신중함으로 사소한 의견 차이를 없애고 하찮은 오해를 조정하는 데 솜씨가 있음을 스스로 보이라.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우주 통치자들에게 너희가 영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일에―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살려고 힘쓰라. 너희는 언제나 뱀처럼 지혜로워도 비둘기처럼 깨끗하라.
178:1.8 (1930.5) 하늘나라의 깨우친 아들이 되는 결과로서 너희는 속세의 정부에서 더욱 훌륭한 시민이 되어야 하며, 땅에 있는 정부의 통치자들도 이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결과로서 국가 사무에 더욱 훌륭한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 사람에게 사심 없이 봉사하고 하나님을 총명하게 예배하는 태도는 어떤 하늘나라 신자도 더욱 훌륭한 세계 시민으로 만들어야 하며, 한편 정직한 시민의 태도와 현세에 자기 사명에 성실하게 헌신하는 것은 그러한 시민이 하늘나라에서 아들이 되라는 영의 요청이 귀에 더 잘 들리게 만들도록 도움이 되어야 한다.
178:1.9 (1930.6) 땅에 있는 정부의 통치자들이 종교적 독재자의 권한을 행사하려고 하는 한, 이 복음을 믿는 너희는 오로지 어려움과 박해, 아니 죽음까지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너희가 지닌, 세상을 비추는 바로 그 빛, 너희가 이 하늘나라 복음을 위하여 고통받고 죽는 바로 그 자세(姿勢)조차도, 그 자체로서 궁극에 온 세상을 깨우치고, 정치와 종교를 차츰 분리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 하늘나라 복음을 그침없이 전파하는 것은 언젠가, 새롭고 믿을 수 없이 놀라운 해방, 지적(知的) 자유, 종교적 해방을 모든 나라에 가져올 것이다.
178:1.10 (1931.1) 이 기쁨과 해방의 복음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박해, 얼마 안 있어 다가오는 박해 밑에서 너희는 번성하고 하늘나라는 번영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늘나라 신자들을 좋게 이야기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많은 사람이 이름으로만 하늘나라 복음을 받아들이는 후세에 너희는 심각한 위험에 빠질 것이다. 평화와 번영이 있는 시절에도 하늘나라에 충성하기를 배우라. 안일(安逸)에 빠져 떠도는 너희 혼을 구하려고 고안된, 사랑으로 징계하는 거친 길로 너희를 인도하도록 너희를 감시하는 천사들을 유혹하지 말라.
178:1.11 (1931.2) 이 하늘나라 복음―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음으로 깨닫는 최상의 기쁨과 함께,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최고의 소망―을 전파하라고 너희가 위임받았음을 기억하라. 어떤 일이 있어도 이 한 가지 의무를 향한 너희의 헌신을 다른 데로 돌리도록 버려두면 안 된다. 사랑이 가득한 너희의 영적 봉사, 깨우침을 주는 지적 친교, 사람을 고결하게 하는 사회 봉사가 넘쳐 흘러, 온 인류가 이익을 얻게 하라. 그러나 이 인도적 수고 중에 아무것도, 어떤 그러한 수고도, 복음 선포(宣布)를 대신하도록 버려두면 안 된다. 이러한 힘찬 직무는 살아 있는 진리의 영으로 인하여, 그리고 영에게서 태어난 사람의 믿음이 영원한 하나님과 생생하게 친교함을 보장하는 것을 몸소 깨달음으로, 하늘나라 신자의 가슴 속에서 일어나는 더욱 힘차고 숭고한 봉사와 변화가 일으키는 사회적 결과이다.
178:1.12 (1931.3) 너희는 국가 정부의 힘으로, 또는 속세의 법률을 제정함으로, 진리의 선포나 정의(正義)의 실현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언제나 사람들의 생각을 설득하려고 수고해도 좋지만, 결코 감히 그들을 강제해서는 안 된다. 내가 긍정 형태로서 너희에게 가르친, 인간을 공평하게 대하는 대법칙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너에게 해야 한다고 바라는 일은 무엇이나 바로 그대로 그들에게 하여라.
178:1.13 (1931.4) 하늘나라를 믿는 자가 국가 정부에서 일하라고 요청받을 때, 그러한 정부에서 현세의 시민으로서 그렇게 봉사하여라. 하지만 그러한 신자는 국가에 봉사하면서, 필사 인간의 지성을 고귀하게 만드는 영원한 하나님의 깃드는 영이 함께 일하여 얻는 영적 깨우침으로 인하여 향상된 모습, 시민의 모든 그러한 보통 모습을 다 나타내야 한다. 불신자가 우수한 공무원으로서 자격을 갖출 수 있다면, 영적 교통과 사회 봉사, 이 두 가지 생명의 물이 모자라서 네 마음 속에 진리의 뿌리가 죽지 않았는가 너희는 심각하게 물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식은, 인격에 본래부터 있는 모든 능력을 북돋는 그러한 힘찬 자극제를 소유하게 된 모든 어른과 아이가 일생 동안 봉사할 때 활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178:1.14 (1931.5) 너희는 수동적 신비주의자나 핏기 없는 금욕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허구의 섭리가 생활 필수품마저 마련해 주기를 반듯이 누워서 기대하는 몽상가와 떠돌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잘못하는 필사자와 거래할 때 정말로 부드럽고, 무지한 사람과 교제할 때 참을성을 보이고, 도발이 있을 때 삼가야 한다. 그러나 너희는 또한 올바른 것을 용감히 방어하고 힘차게 진리를 선포해야 하며, 땅 끝까지라도 이 하늘나라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도해야 한다.
178:1.15 (1931.6) 이 하늘나라 복음은 살아 있는 진리이다. 그 복음은 반죽에 있는 누룩과 같고, 겨자의 씨앗과 같다고 너희에게 일러 왔으며, 이제 내가 선언하건대, 그 복음은 생물의 씨앗과 같으니, 대대로, 바로 그 살아 있는 씨앗으로 남아 있으면서, 새로운 표현으로 어김없이 자신을 펼치고, 뒤잇는 각 세대의 특이한 필요와 조건에 새롭게 적응하는 경로에서 쓸 만하게 자란다. 내가 너희에게 준 계시는 살아 있는 계시요, 그 계시(啓示)가 각 사람 안에, 각 세대에, 영적으로 성장하고 증가하고 적응하여 발전하는 법칙에 따라서, 적당한 열매를 맺기를 나는 바란다. 대대로 이 복음은 늘어나는 활력을 보이고, 더욱 깊은 영적 권능을 드러내야 한다. 그 복음을 기껏해야 신성한 기억, 나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가 지금 사는 시절에 대하여, 단순한 전통이 되도록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178:1.16 (1932.1) 그리고 잊지 말라: 우리는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의 인격이나 권한을 전혀 직접 공격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만 그들에게 새 빛을 내밀었고, 그들은 아주 힘차게 물리쳤다. 우리는 오직 그들이 가르치고 보호한다고 공언(公言)하는 바로 그 진리에 그들이 영적으로 충실하지 않는다는 비난으로 그들을 공격했다. 우리는 이 자리잡은 지도자와 인정받는 권력자들이 하늘나라 복음을 사람의 아들들에게 전파하는 것을 저희가 직접 발 벗고 나서 방해할 때에야 그들과 충돌했다. 지금도 우리가 그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죽이려 한다. 너희는 오로지 좋은 소식을 전하러 떠나라고 임명되었음을 잊지 말라. 너희는 예전의 방식을 공격하지 말고, 너희는 옛 관념 한가운데에 새 진리의 누룩을 솜씨 있게 심어야 한다. 진리의 영이 자신의 일을 하게 하라. 진리를 가벼이 여기는 자가 너희에게 강제할 때에만 논쟁하라. 그러나 외고집인 불신자가 너희를 공격할 때, 너희를 구원하고 거룩하게 만든 진리를 서슴지 말고 힘차게 방어하라.
178:1.17 (1932.2) 인생의 파란을 통하여 계속, 언제나 서로 사랑하기를 기억하라. 사람들과, 아니 불신자와도 다투지 말라. 심술궂게 너희를 악용하는 자에게도 자비를 보이라. 아버지 나라의 형제 단체에서 바로 너희가 충실한 시민이요, 마음 곧은 예술가, 칭찬할 만한 이웃, 헌신하는 친척, 이해하는 부모, 성실한 신자임을 보이라. 그리고 내 영이 이제, 세상 끝까지도 너희에게 다가오리라.
178:1.18 (1932.3) 예수가 가르침을 마쳤을 때, 거의 1시가 되었고, 그들은 즉시 캠프로 돌아갔는데, 거기서 다윗과 그 동료들이 그들을 위하여 점심을 준비해 두었다.
178:2.1 (1932.4) 주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지 않은 사람이 아침 연설의 일부라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 가운데, 그리스인들이 가장 많이 알아들었다. 열한 사도조차 그가 미래에 생기는 정치적 국가, 그리고 뒤잇는 세대의 하늘나라 신자를 언급하는 데 어리둥절했다. 예수에게 가장 충실한 추종자들은 땅에서 그의 봉사의 끝이 임박한 것과 미래에 복음 활동이 연장됨을 이렇게 언급하는 것을 조화시킬 수 없었다. 이 유대인 신자들 가운데 더러는 땅에서 가장 큰 비극이 바야흐로 일어나려 하는 것을 비로소 감지했지만, 다가오는 그러한 재난에 대하여 밝은 얼굴로 무관심한 주의 개인적 태도나 아침 강연과 조화시킬 수 없었다. 그 강연에서 그는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그리고 땅에서 뒤이어 생기는 현세의 여러 나라에 대한 관계를 포함하여, 하늘나라에서 미래에 일어나는 일을 거듭 언급했다.
178:2.2 (1932.5) 이날 정오가 되자, 나사로가 황급히 베다니를 떠났다는 소식을 모든 사도와 제자가 들었다. 그들은 유대인 권력자들이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뿌리 뽑으려 하는 소름끼치는 결의를 비로소 느꼈다.
178:2.3 (1932.6) 다윗 세베대는 예루살렘에 있는 비밀 첩보원들의 수고를 통해서, 예수를 붙잡아 죽이려는 계획이 어떻게 진전되는가 충분히 정보를 받고 있었다. 이 음모(陰謀)에 유다가 무슨 역할을 했는지 모두 알았지만, 결코 이런 정보를 다른 사도나 어느 제자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점심 뒤에 얼마 있다가 그는 예수를 옆으로 이끌고, 대담하게 그가 알고 있는가 물었다―그러나 결코 물음을 더 잇지 못했다. 그의 손을 붙들고 그를 막으며 말했다: “그래, 다윗아, 나는 그에 대하여 모두 알고, 네가 안다는 것도 알지만, 너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하여라. 오직 하나님의 뜻이 끝에는 지배할 것을 마음 속에 의심하지 말라.”
178:2.4 (1933.1) 다윗과 가진 이 대화는 필라델피아에서 사자가 도착하여 중단되었는데, 그는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아브너가 들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야 하는가 묻는 말을 가지고 왔다. 이 주자는 아브너에게 전하는 이 말을 가지고 필라델피아를 향하여 서둘러 갔다: “네 일을 계속하라. 육체를 입고서 내가 너를 떠나면, 이는 오직 내가 영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라. 나는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나는 끝까지 너와 함께 하리라.”
178:2.5 (1933.2) 이때쯤 빌립이 주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주여, 유월절 시간이 가까워 옴을 아시니, 어디서 유월절 저녁을 먹기 위하여 우리가 준비하기를 바라시나이까?” 빌립의 물음을 듣자 예수는 대답했다: “가서 베드로와 요한을 데리고 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오늘 밤에 저녁 먹을 것에 관하여 너에게 지시하리라. 유월절에 관하여 말하면, 그것은 우리가 먼저 이 일을 마친 뒤에 네가 생각해야 하리라.”
178:2.6 (1933.3) 주가 빌립과 이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을 들었을 때, 유다는 그 대화를 엿들을까 싶어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가까이 서 있던 다윗 세베대는 걸어가서 유다를 대화에 끌어들였고, 한편 빌립ㆍ베드로ㆍ요한은 한쪽으로 가서 주와 이야기하였다.
178:2.7 (1933.4) 예수는 세 사람에게 말했다: “곧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문으로 들어가는 동안에 너희는 물주전자를 들고 있는 사람을 만나리라. 그가 너희에게 말을 걸겠고, 그리하면 그를 따라갈지니라. 그가 너희를 어떤 집으로 이끌 때, 그를 따라 들어가서 그 집의 선한 주인에게 물으라, ‘주가 사도들과 함께 저녁 먹을 손님 방이 어디 있나이까?’ 너희가 이렇게 묻고 나서, 이 집주인은 우리를 위하여 다 꾸며지고 준비된 큰 2층 방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178:2.8 (1933.5) 도시에 이르렀을 때, 사도들은 성문 가까이서 물주전자를 든 사람을 만나서 그를 따라 계속 요한 마가의 집으로 갔고, 거기서 소년의 아버지가 그들을 만나서 만찬을 위하여 준비된 2층 방을 보여주었다.
178:2.9 (1933.6) 그 전날 오후에 주와 요한 마가가 산에서 두 사람만 있을 때, 그들 사이에 합의한 결과로 이 모두가 일어나게 되었다. 예수는 사도들과 방해받지 않고, 이 마지막 식사를 한 번 꼭 함께 들고 싶어했고, 그들이 만나는 장소를 유다가 미리 안다면 유다가 적들과 그를 붙잡으려고 주선할지 모른다고 믿었기 때문에, 요한 마가와 몰래 이렇게 주선하였다. 이 방법으로 나중에 예수와 다른 사도들과 함께 일행이 되어 거기에 다다를 때까지, 유다는 그들이 어느 장소에서 만나는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
178:2.10 (1933.7) 다윗 세베대는 유다와 함께 처리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유다가 베드로와 요한과 빌립을 몹시 따라가고 싶었지만, 이를 쉽게 막았다. 유다가 다윗에게 식량을 구하라고 얼마큼 돈을 주었을 때, 다윗은 말했다: “유다야, 이런 판국에, 내가 실제로 돈이 필요하기 전에, 미리 조금 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잠깐 생각한 뒤에, 유다는 대답했다: “그렇구나, 다윗아, 그것이 현명하리라 생각된다. 사실은, 뒤숭숭한 예루살렘의 상황에 비추어 보건대, 내가 돈을 모두 너에게 넘기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 생각된다. 저희가 주를 적대하여 음모를 꾸미고, 내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경우에, 너는 방해받지 않을 것이라.”
178:2.11 (1934.1) 그래서 다윗은 사도들의 현금 모두와 저축한 모든 돈의 영수증들을 받았다. 다음 날 저녁이 되기까지, 사도들은 이러한 사무 처리에 대하여 전해 듣지 못했다.
178:2.12 (1934.2) 4시 반쯤 되어 세 사도가 돌아와서, 예수에게 만찬을 위하여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고 알렸다. 산길을 넘어 베다니 길까지 그리고 계속 예루살렘으로, 주는 열두 사도를 이끌려고 즉시 준비하였다. 이것이 열두 사도 모두와 함께 그가 마지막으로 길을 떠난 것이었다.
178:3.1 (1934.3) 겟세마네 공원과 예루살렘 사이에 기드론 골짜기를 거쳐 오가는 군중을 다시 피하려고, 예수와 열두 사도는 베다니로부터 도시로 이어지는 길을 만나려고 올리브산 서쪽 꼭대기를 넘어서 걸었다.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하여 말씀하려고 예수가 전날 저녁에 머물렀던 곳에 가까이 오자, 의식하지 못하고 멈추었고, 서서 말없이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조금 일찍 왔고, 해가 지기까지 그 도시를 지나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178:3.2 (1934.4) “앉아서 쉬라, 그동안에 머지 않아 무슨 일이 틀림없이 일어나는가 너희와 이야기하리라. 이 몇 해 동안 나는 형제처럼 너희와 함께 살았고, 하늘나라에 관한 진리를 가르치고 그 비밀을 너희에게 드러내었노라. 내 아버지는 정말로 땅에서 내 사명과 연관하여 많은 놀라운 일을 하셨느니라. 너희는 이 모든 것을 본 증인이었고, 하나님과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는 체험을 겪었느니라. 그리고 아버지가 내게 하라고 주신 일로 내가 머지 않아 돌아가야 한다고, 한동안 너희에게 경고한 것을 너희가 증거하리라. 하늘나라 일을 계속 수행하려고 너희를 세상에 두고 내가 떠나야 한다고 너희에게 분명히 일렀노라. 이 목적으로 가버나움의 산지에서 너희를 따로 세웠노라. 너희가 나와 함께 가졌던 체험을, 이제 너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려고 준비해야 하느니라. 아버지가 나를 이 세상으로 보낸 것 같이, 마찬가지로 나를 대신하고 내가 시작한 일을 마치라고 너희를 떠나보내고자 하노라.
178:3.3 (1934.5) “너희는 슬픔에 잠겨 저 건너 도시를 내려다보나니, 너희가 예루살렘의 종말을 이르는 내 말을 들었음이라. 그 멸망에 휩쓸려 너희가 죽고, 그래서 하늘나라 복음의 선포를 늦추지 않도록 내가 너희에게 미리 경고하였노라. 마찬가지로 저희가 사람의 아들을 붙잡으러 올 때, 너희가 쓸데없이 스스로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희에게 경고하노라. 나는 가야 하지만, 나사로가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알릴 수 있도록 사람들의 진노를 피해 달아나라고 지시한 것 같이, 내가 떠난 뒤에 이 복음을 증거하려고 너희는 남아 있어야 하느니라. 내가 떠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너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신의 계획을 꺾을 수 없느니라. 저희가 또한 너희도 죽이지 않도록 스스로 몸조심하라. 영의 힘으로 복음을 방어하는 데 너희 혼이 용감할지니라. 그러나 잘못된 생각으로 사람의 아들을 방어하려고 어떤 어리석은 짓도 하지 말라. 나는 사람의 손으로 어떤 방어도 필요 없고, 하늘의 군대가 지금도 가까이 있느니라. 그러나 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결심하였고, 따라서 우리에게 바로 금방 닥칠 것에 우리가 복종해야 하느니라.
178:3.4 (1934.6) “이 도시가 파괴되는 것을 너희가 볼 때, 항상 앞으로 나아가는 하늘나라에서, 아니 가장 높은 하늘에서, 끝없이 봉사하는 영원한 생명으로 너희가 이미 들어갔음을 잊지 말라. 너희가 알아야 하나니, 내 아버지의 우주와 내 우주 안에 많은 거처가 있고, 거기서 하나님이 지으신 도시들, 그리고 진리 속에서 올바름과 기쁨을 일생의 버릇으로 삼는 세계들을 드러내 보이려고 빛의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느니라. 나는 하늘나라를 이곳, 땅으로 너희에게 가져왔으나, 내가 선언하노니,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진리를 실제로 행함으로 거기에 남아 있는 너희 모두가 하늘 세계들로 분명히 올라가서 우리 아버지의 영 나라에서 나와 함께 앉을지니라. 그러나 너희는 먼저 몸을 가다듬고, 나와 함께 시작한 일을 마쳐야 하느니라. 너희는 먼저 많은 시련을 거치고 많은 슬픔을 견디어야 하며―이 시련이 이제도 우리에게 닥쳤나니―땅에서 내가 아버지의 일을 마쳤고 바야흐로 그의 품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 같이, 너희가 땅에서 너희 일을 마치고 나서, 나와 함께 기뻐할지니라.”
178:3.5 (1935.1) 말씀을 마치고 나서 주는 일어섰고, 모두 그를 따라 올리브산에서 내려가서 도시로 들어갔다. 어둠이 다가오는 속에서 좁은 거리를 따라 길을 가는 동안, 세 사람을 제외하고, 사도들 중에 아무도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군중이 그들을 밀쳤지만, 아무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가 택한 하늘나라 대사들과 함께, 필사자로 마지막 모임에 가는 길에 사람의 아들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지도 못했다. 사도들도 일행 중의 하나가 주를 적들의 손에 넘기려고 배반하는 음모에 이미 가담한 것을 알지 못했다.
178:3.6 (1935.2) 요한 마가는 그들을 도시 안으로 끝까지 따라갔고, 그들이 성문에 들어선 뒤에, 다른 길로 급히 달려가서, 그들이 도착했을 때 아버지의 집에서 그들을 반기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179:0.1 (1936.1) 이 목요일 오후에, 빌립이 주께 다가오는 유월절을 상기시키고 이를 축하할 계획에 관하여 물었을 때, 주는 이튿날, 금요일 저녁에 먹기로 되어 있는 유월절 저녁을 생각하고 있었다. 유월절 축하를 위한 준비를 전날 정오 이전에 시작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유대인이 해질 때 하루가 시작된다고 계산했으니까, 이것은 토요일의 유월절 저녁을 금요일 밤에, 자정이 되기 전 언젠가 먹을 것을 의미했다.
179:0.2 (1936.2) 그래서 사도들은 그들이 하루 일찍 유월절(逾越節)을 축하할 것이라는 주의 발표를 이해하지 못하고 온통 어리둥절했다. 그들은, 적어도 그들 가운데 더러는, 그가 금요일 밤에 유월절 저녁을 먹을 때가 되기 전에 자신이 체포될 것을 아시고, 따라서 이 목요일 저녁에 특별한 만찬을 하려고 그들을 한데 부른다고 생각했다. 더러는 이것이 단지 정식 유월절 축하에 앞서 있을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했다.
179:0.3 (1936.3) 사도들은 예수가 양이 없이 다른 해에 유월절을 지낸 적이 있음을 알았고, 그가 유대인 체제의 희생물을 바치는 어떤 예배에도 몸소 참석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는 여러 번 유월절 양고기를 손님으로서 먹은 적이 있었지만, 그가 주인일 때는 언제나 아무 양고기도 대접하지 않았다. 유월절 밤에 양고기가 빠진 것을 보았다 하더라도 사도들에게 큰 일이 아니었을 터이고, 이 만찬을 하루 일찍 베풀었으니까 그들은 양고기가 없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179:0.4 (1936.4) 요한 마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환영 인사를 받은 뒤에, 사도들은 즉시 2층 방으로 올라갔고, 그동안에 예수는 뒤에 남아서 마가의 가족과 이야기했다.
179:0.5 (1936.5) 주가 이 계제를 열두 사도하고만 축하하기로 미리 양해를 구했고, 따라서 그들에게 시중들라고 아무 종도 마련되지 않았다.
179:1.1 (1936.6) 요한 마가가 위층으로 안내했을 때, 사도들은 크고 널찍한 방을 보았는데, 이 방은 만찬을 위해 완벽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들은 식탁 한쪽 끝에 빵ㆍ포도주ㆍ물ㆍ약초가 모두 준비된 것을 지켜보았다. 빵과 포도주가 놓인 끝 부분을 빼고, 이 긴 식탁은 열세 개의 눕는 소파에 둘러싸여 있었고, 바로 그러한 것이 살림이 넉넉한 유대인 집에서 유월절을 축하하는 데 마련되었을 것이다.
179:1.2 (1936.7) 열두 사도가 이 2층 방으로 들어가자, 그들은 바로 문 안에, 먼지 묻은 발을 씻기 위한 물주전자ㆍ대야ㆍ수건들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아무 종도 이 시중을 들려고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요한 마가가 떠나자마자 사도들은 서로를 쳐다보기 시작했고, 저마다 마음 속에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누가 우리의 발을 씻을 것인가? 그리고 각자 마찬가지로, 자기는 다른 사람들의 종으로 이렇게 행동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179:1.3 (1937.1) 마음 속에 따지면서 거기 서 있는 동안, 그들은 식탁의 자리 배열을 둘러보았고, 주인이 앉는 높은 소파, 그 바른 쪽에 소파 하나, 그리고 주인의 바른 쪽에 둘째로 명예로운 이 자리의 맞은편까지, 식탁 둘레에 정돈된 소파 열한 개를 주목하였다.
179:1.4 (1937.2) 언제라도 주가 도착하기를 기대했지만, 그들은 자리에 앉아야 할지, 아니면 주가 와서 자리를 정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어찌할 줄 몰랐다. 그들이 망설이는 동안, 유다는 명예의 자리, 즉 주인의 왼편으로 걸어갔고, 거기서 우대받은 손님으로서 소파에 기댈 뜻을 표시하였다. 유다의 이런 행동은 즉시 다른 사도들 사이에 열띤 논쟁을 일으켰다. 유다가 명예의 자리를 덮치자마자, 요한 세베대가 다음으로 좋은 자리, 주인의 바른쪽 자리를 차지했다. 시몬 베드로는 유다와 요한이 좋은 자리들을 이렇게 차지한 것에 너무 화가 치밀어서, 다른 성난 사도들이 구경하는 동안, 식탁을 피해 돌아서 행진하듯 걸어, 가장 낮은 소파에, 자리 순서의 끝, 곧 요한 세베대가 선택한 자리의 바로 맞은 편에, 자리를 차지했다. 다른 사람들이 높은 자리들을 차지했으므로, 베드로는 가장 낮은 자리를 택하려고 생각했다. 형제들의 보기 딱한 자만심에 항의할 뿐 아니라, 예수가 와서 가장 낮은 자리에 그가 있음을 보았을 때, 그를 더 높은 자리로 부르리라, 이렇게 주제넘게 자신에게 명예를 돌리려는 자를 몰아낼 것이라는 희망으로 그렇게 했다.
179:1.5 (1937.3) 이렇게 가장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가 차자, 나머지 사도들은 자리를 골랐고, 모두 자리를 잡을 때까지, 더러는 유다 가까이, 더러는 베드로 가까이 앉았다. 이들은 U자 모양의 식탁 둘레에 다음 순서로 이 기대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주의 바른 편에 요한, 왼쪽에는 유다, 열심당원 시몬, 마태, 야고보 세베대, 안드레, 알패오 쌍둥이, 빌립, 나다니엘, 토마스, 시몬 베드로.
179:1.6 (1937.4) 이들은 한 관례를 축하하려고, 적어도 정신적으로 그렇게 하려고 함께 모였는데, 그 관례는 모세 이전에 시작되었고 조상이 에집트에서 노예였던 시절과 관계되었다. 이 만찬은 예수와 그들의 마지막 모임이요, 그러한 엄숙한 상황에서도 유다의 지휘 하에, 그들은 명예와 우대, 개인적 칭찬을 얻으려는 예전의 성향에 다시 한 번 무릎을 꿇게 되었다.
179:1.7 (1937.5) 주가 복도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아직도 성이 나서 서로 비난하느라고 바빴고, 실망의 빛이 얼굴에 서서히 떠오르는 동안, 주는 복도에서 잠깐 멈추었다. 아무 말 없이 주는 자기 자리로 갔고, 그들의 자리 순서를 고치지 않았다.
179:1.8 (1937.6) 발을 아직 씻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 그들은 이제 만찬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는데, 도저히 즐거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주가 도착했을 때, 충분히 감정을 자제하여 자기 느낌을 사람들 앞에서 삼가 표현하지 않았던 몇 사람이 품었던 생각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은 아직도 서로 가시 돋힌 말을 주고받기에 바빴다.
179:2.1 (1937.7) 주가 그의 자리로 간 뒤에 몇 순간 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예수는 그들을 모두 돌아보고, 빙긋 웃어 긴장을 풀며 말했다: “나는 너희와 이 유월절 저녁을 먹기를 몹시 바랐노라. 내가 고통을 받기 전에 한 번 더 너희와 함께 식사하기를 바랐고, 내 때가 온 줄을 깨닫고 너희와 오늘 밤에 이 저녁을 먹으려고 주선하였으니, 내일에 관해서 말하면 우리가 모두 아버지의 손에 있는 까닭이요, 나는 아버지의 뜻을 집행하려고 왔노라. 이 세상으로 나를 보내며 하라 하신 일을 내가 마치고 나서, 아버지가 내게 주실 나라에서 너희가 나와 함께 앉을 때까지, 나는 너희와 함께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179:2.2 (1938.1) 포도주와 물을 섞은 뒤에, 그들은 잔을 예수에게 가져왔고, 그는 잔을 타대오의 손에서 받고서, 감사를 드리는 동안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감사 기도를 마치고 나서 말했다: “이 잔을 가져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너희가 잔을 들 때,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저녁이매, 내가 포도나무의 열매를 너희와 함께 다시 마시지 아니할 것을 깨달으라. 우리가 이런 식으로 다시 앉을 때, 이것은 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 있을 일이리라.”
179:2.3 (1938.2) 예수는 이렇게 사도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의 때가 왔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고, 땅에서 할 일이 거의 끝났음을 이해했다. 그가 아버지의 사랑을 땅에서 드러냈고 자비를 인류에게 보였다는 것, 그리고 그가 세상으로 온 그 목적을, 아니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능과 권한을 받는 일까지도 이루었다는 것을 주는 알았다. 마찬가지로, 그날 밤에 적들의 손에 그를 넘겨주려고 가룟 유다가 완전히 마음먹은 것을 알았다. 이 배반 행위는 유다가 한 일이었지만, 이는 또한 루시퍼와 사탄, 그리고 어둠의 왕 칼리가스티아를 기쁘게 했다는 것을 충분히 깨달았다. 자기를 육체적으로 죽게 만들려고 애쓴 자들이 두렵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그를 전복시키려던 자들도 두렵지 않았다. 주에게 오직 한 가지 걱정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택한 추종자들의 안전과 구원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모든 일을 그의 권한 밑에 두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서, 주는 이제 형제 사랑의 비유를 연출하려고 준비했다.
179:3.1 (1938.3) 유월절의 첫 잔을 마신 뒤에, 주인이 식탁에서 일어나서 손 씻는 것이 유대인의 관습이었다. 식사하다가 나중에, 둘째 잔을 마신 뒤에, 마찬가지로 모든 손님이 일어나서 손을 씻었다. 주가 손씻는 예식의 절차를 한번도 지킨 적이 없음을 사도들이 알았기 때문에, 그들이 이 첫잔을 마신 뒤에, 그가 식탁에서 일어나서 말없이 물주전자와 대야와 수건이 놓여 있는 문 가까이 걸어갔을 때, 주가 무엇을 하실 생각인지 그들은 알고 싶어 궁금해졌다. 주가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지고 허리를 졸라매고, 발 씻는 대야 하나에 비로소 물을 붓는 것을 보자, 호기심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바로 얼마 전에 서로 발 씻어주기를 거절하고, 식탁에서 명예의 자리를 놓고 그렇게 보기 딱한 다툼에 말려들었던 이 열두 사람이 놀란 것을 상상해 보라. 그때 주가 사람이 앉지 않은 식탁 끝을 돌아서 그 잔치의 가장 낮은 자리, 시몬 베드로가 기대고 있던 자리까지 가서, 종의 태도로서 무릎을 꿇고, 시몬의 발을 씻으려고 준비한 것을 보았다. 주가 무릎을 꿇자, 열두 사람이 모두 하나 같이 벌떡 일어났다. 배반한 유다조차 한 순간 자신의 비행(非行)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경악과 존경과 순전한 놀라움을 이렇게 표현하는 동료 사도들과 함께 일어났다.
179:3.2 (1938.4) 시몬 베드로는 서서, 위로 올려다보는 주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예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태도는 시몬 베드로의 발을 씻을 생각이라는 것을 뚜렷이 나타냈다. 육체는 약했어도 베드로는 주를 사랑했다. 이 갈릴리 어부는 예수의 신성(神性)을 진심으로 믿고, 게다가 그런 믿음을 온전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처음으로 고백한 인간이었다. 그 뒤로 베드로는 주의 신다운 성품을 정말로 의심한 적이 없었다. 베드로가 마음 속에서 예수를 너무나 숭배하고 존중했으므로, 주가 거기에 무릎을 꿇고 자기 앞에서 비천한 종의 태도를 취하고, 노예가 하듯 그의 발을 씻겠다고 제안한다는 생각에 그의 혼이 의분을 느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내 주에게 말을 건넬 만큼 충분히 정신을 가다듬었을 때, 베드로는 동료 사도 모두가 가슴 속에 느끼고 있는 생각을 말했다.
179:3.3 (1939.1) 이렇게 크게 당황한 몇 순간이 지난 뒤에 베드로는 말했다: “주여, 당신은 정말로 내 발을 씻으실 생각이나이까?” 그리고 나서 베드로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예수는 말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네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가 하지만, 이제부터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意味)인가 네가 알게 되리라.” 그리고 나서 길게 숨을 들이쉬며 시몬 베드로는 말했다: “주여, 당신은 결단코 내 발을 씻지 못하나이다!” 그리고 예수가 이렇게 그들 앞에서 자신 낮추기를 허락하지 않겠다고 베드로가 굳게 선언하는 데 동의한다는 뜻으로 사도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179:3.4 (1939.2) 이 진기한 장면의 눈부신 호소력에 처음에는 가룟 유다조차도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허영심 가득한 그의 지능이 그 광경을 판단했을 때, 그는 이 겸손의 몸짓이 단지 예수가 결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하리라, 그리고 주의 운동을 그가 저버리려고 결정한 데 아무 잘못이 없음을 최종으로 증명하는 또 하나의 사건일 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179:3.5 (1939.3) 그들이 모두 숨을 죽이고 놀라서 거기 서 있자, 예수는 말했다: “베드로야, 내가 선언하노니, 내가 네 발을 씻지 아니하면, 내가 행하고자 하는 일에 네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으리라.” 예수가 계속해서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거기 있다는 사실과 함께, 이런 선언을 들었을 때, 베드로는 그가 존경하고 사랑했던 분이 바라는 대로 눈감고 말없이 순응하려고 결심했다. 주가 이렇게 시중들겠다는 제안을 연출한 데는 사람이 주의 일과 미래에 연결되는 것을 좌우하는 어떤 의미가 따라붙는다는 생각이 비로소 떠오르자, 시몬 베드로는 예수에게 그의 발을 씻게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그의 성미대로 성급히 말했다: “그렇다면, 주여, 내 발뿐 아니라 내 손과 머리도 씻어주소서.”
179:3.6 (1939.4) 베드로의 발을 비로소 씻으려고 준비하면서, 주는 말했다: “이미 깨끗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되느니라. 오늘 밤에 나와 함께 앉는 너희는 깨끗하지만―다는 아니라. 그러나 나와 함께 먹으려고 앉기 전에 너희는 발의 먼지를 씻었어야 하느니라. 게다가, 당장에 내가 너희에게 줄 새 계명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보여주려고, 비유로서 너희를 위하여 이 시중을 들고자 하노라.”
179:3.7 (1939.5) 같은 방법으로 주는 식탁을 돌아서 가며, 말없이, 유다도 빼지 않고, 열두 사도의 발을 씻었다. 열두 사도의 발 씻기를 마치고 나서, 예수는 외투를 걸치고, 주인의 자리로 돌아갔고, 어리둥절한 사도들을 돌아본 뒤에 말했다:
179:3.8 (1939.6)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정말로 이해하느냐? 너희는 나를 주라 부르고, 내가 그런 자이니, 너희가 그리 말하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 그렇다면, 주가 너희의 발을 씻었다면, 어찌하여 너희는 서로 발 씻어주기를 꺼려하느냐? 형제가 서로에게 해주기 꺼려하는 그 시중을 주가 아주 기꺼이 베푸는 이 비유에서 너희는 무슨 교훈을 받아야 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은 주인보다 크지 않으며, 파송받은 자는 그를 보낸 자보다 크지도 않으니라. 너희 가운데서 지낸 나의 생활 속에서 너희는 시중드는 길을 보았고, 인자하게 그렇게 시중드는 용기를 가질 너희는 복이 있도다. 그러나 영적인 나라에서 크게 되는 비밀은 물질 세계에서 권력을 얻는 방법과 같지 않음을 너희는 어찌하여 그리 더디게 깨닫느냐?
179:3.9 (1940.1) “내가 오늘 밤 이 방으로 왔을 때, 너희는 거만하여 서로 발 씻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누가 내 식탁에서 영예의 자리를 차지할까 너희끼리 말다툼에 빠져야 하는구나. 그러한 영예는 바리새인과 이 세상의 자녀들이 찾는 것이어늘, 하늘나라 대사들 사이에 그리해서는 안 되느니라. 내 식탁에는 우대받는 자리가 있을 수 없음을 너희가 모르느냐? 내가 남들을 사랑하는 것 같이 내가 너희 하나하나를 사랑함을 이해하지 못하느냐? 나와 가장 가까운 자리는, 사람들이 그런 영예를 간주하는 것처럼 하늘나라에서 너희가 가진 지위와 전혀 상관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느냐? 이방인의 임금은 그 백성 위에 군림하며, 한편 이 권한을 행사하는 자들을 때때로 후원자라고 부르는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을지니라. 너희 가운데 크고자 하는 자는 아래 사람이 될지니라.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는 자는, 시중드는 자처럼 될지니라. 누가 더 크냐, 식탁에 앉는 자이냐, 아니면 시중드는 자이냐? 식탁에 앉는 자를 보통 더 크게 여기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내가 시중드는 자로서 너희 사이에 있음을 너희가 지켜보리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너희가 나와 함께 기꺼이 동료 종이 되면, 미래의 영광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여전히 행하면서, 너희는 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 권력을 가지고 나와 함께 앉을지니라.”
179:3.10 (1940.2) 예수가 말씀을 마쳤을 때, 알패오 쌍둥이는 마지막 만찬의 다음 과정을 위하여, 쓴 나물과 마른 과일 반죽과 함께, 빵과 포도주를 가져왔다.
179:4.1 (1940.3) 몇분 동안 사도들은 말없이 먹었지만, 주의 명랑한 태도에 영향을 받아서 곧 대화에 끌려들었고, 오래지 않아서 이 특별한 계제에 즐거운 기분과 친목하는 분위기를 망칠 아무런 별난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식사가 진행되었다. 얼마큼 시간이 지난 뒤, 식사의 이 둘째 과정의 중간쯤에, 예수는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이 저녁 먹기를 얼마나 바랐는가 너희에게 일렀고, 어둠의 악한 세력이 사람의 아들을 죽이려고 모의(謀議)한 것을 아는 까닭에, 이 은밀한 방에서 유월절 하루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저녁을 먹으려고 결심하였으니, 내일 밤 이때쯤이 되어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할 것임이라.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너희에게 거듭 일렀노라. 이제 내 때가 다가왔으나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저버리고 적들의 손에 넘길 필요가 없었느니라.”
179:4.2 (1940.4) 열두 사도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발 씻는 비유와 뒤이은 주의 강연 때문에, 자기 주장과 자신감을 이미 많이 잃어버렸으므로 당황한 목소리로 망설이며 “내니이까?” 물으면서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모두가 이렇게 묻고 나자, 예수는 말했다: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이 필요해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너희 가운데 하나가 배반자가 될 필요는 없었느니라. 이는 혼을 다하여 진리를 사랑하지 못한 자의 가슴 속에 감추어진 악이 열매를 얻게 되는 것이라. 영적 패망을 앞서 가는 지적 자만(自慢)은 얼마나 거짓이 가득한고! 여러 해 동안 같이 하던 내 친구가, 지금 내 빵을 먹는 자가 지금도 나와 함께 접시에 손을 담그는 것 같이, 기꺼이 나를 저버릴 것이라.”
179:4.3 (1940.5) 예수가 이렇게 말씀하자, 모두 다시 묻기 시작했다: “내니이까?” 그리고 주의 왼편에 앉아 있는 유다가 다시 “내니이까?” 묻자, 나물 담긴 접시에 빵을 찍어 유다에게 주며 예수는 말했다: “네가 말했도다.” 그러나 남들은 예수가 유다에게 이르는 것을 듣지 못했다. 예수의 바른 편 쪽에서 의지하던 요한이 주에게 기대며 물었다: “누구이나이까? 맡긴 책임에 충실치 않은 것이 드러난 자가 누구인지 우리가 알아야 하나이다.” 예수는 대답했다: “이미 내가 너희에게 일렀으니, 적신 빵을 내가 그에게 주었노라.” 그러나 주인이 옆에, 왼쪽에 앉은 자에게 적신 빵 주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주가 아주 분명히 말했어도 아무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유다는 그의 행동과 관련된 주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가 따끔하게 의식했고, 형제들이 그가 배반자임을 이제 마찬가지로 알고 있지 않는가 두려워졌다.
179:4.4 (1941.1) 베드로는 그 말을 듣고 크게 흥분했고, 식탁 위로 몸을 기울이며, 요한에게 물었다. “그가 누구인가 주께 묻든지 또는 주가 네게 일렀으면, 누가 배반자인가 내게 이르라.”
179:4.5 (1941.2) 예수는 그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그치게 하면서 말했다: “이런 나쁜 일이 일어났으니 내가 슬프고, 이 시간까지도 진리의 힘이 악의 속임을 이길까 바랐으나, 진리를 진지하게 사랑하는 믿음이 없이 그런 승리를 얻지 못하느니라. 이번 우리의 마지막 만찬에 이런 일을 너희에게 이르지 않았을 터이나, 나는 이 슬픈 일에 대하여 너희에게 경고하고 그래서 우리에게 이제 닥친 일에 대하여 너희를 준비시키기를 바라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것을 이른 것은 내가 떠난 뒤에, 이 모든 나쁜 음모(陰謀)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었고, 나를 배반하는 일에 대하여 너희에게 미리 경고했음을 너희가 상기하기를 바라는 까닭이라. 그리고 내가 이 모두를 하는 것은 오직 바로 앞에 놓인 유혹과 시련에 대비하여 너희가 힘을 얻기 위함이라.”
179:4.6 (1941.3) 이렇게 말씀하고 나서, 예수는 유다를 향하여 몸을 기울여 말했다: “네가 하려고 마음먹은 것을 빨리 행하라.” 이 말씀을 듣자, 유다는 식탁에서 일어나서 황급히 방을 떠났고, 그가 성취하려고 계획했던 일을 해치우려고 어둠 속으로 나갔다. 예수가 그에게 말씀한 뒤에 유다가 서둘러 떠나는 것을 다른 사도들이 보았을 때, 그가 아직도 돈 자루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유다가 저녁을 위하여 무언가 더 사거나, 주를 위하여 어떤 다른 심부름을 하러 갔다고 생각했다.
179:4.7 (1941.4) 이제 예수는 유다가 배반자가 되는 것을 막으려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음을 알았다. 열두 사도와 함께 시작했는데―이제 열 하나가 남았다. 예수는 이 사도들 가운데 여섯을 골랐다. 그가 처음에 선택한 사도들이 지명한 사람들 가운데 유다가 있었는데, 그래도 주는 그를 받아들였고, 다른 사람들의 평화와 구원을 위하여 일한 것 같이, 바로 이 시간까지, 그를 거룩하게 만들고 구원하려고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일을 했다.
179:4.8 (1941.5) 관련된 다정한 여러 사건과 부드러운 손길과 함께, 이 저녁 식사는 그들을 저버리는 유다에게 예수가 마지막으로 호소한 것이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가장 세련된 방법으로 가장 친절한 정신으로 경고를 전했어도, 일단 사랑이 정말로 죽었을 때, 무릇 미움만 더하고 사람의 이기적 계획을 끝까지 수행하려는 악한 결심에 불을 붙일 뿐이다.
179:5.1 (1941.6) 그들이 예수에게 셋째 포도주 잔, “축복의 잔”을 가져오자,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서 두 손에 잔을 쥐고, 이 말씀으로 축복하였다: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들고 마시라. 이것이 나를 기념하는 잔이 될지니라. 은총과 진리의 새 섭리 시대를 축복하는 잔이라. 이것은 너희에게, 신성한 진리의 영이 수여되고 봉사하는 상징이 될지니라. 아버지의 영원한 나라에서 새 모습을 입고서 너희와 함께 마실 때까지, 나는 너희와 함께 이 잔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179:5.2 (1942.1) 지극히 정중하게, 그리고 완전히 고요한 가운데 이 축복의 잔을 마시는 동안, 사도들은 모두 무엇인가 보통 아닌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옛 유월절은 조상들이 민족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서 개인의 자유를 얻은 것을 기념했다. 새 섭리 시대의 상징으로서, 이제 주는 새로운 기념 만찬을 선례로 만들고 있었는데, 이 섭리 시대에는 예식과 이기심의 사슬에 매였던 개인이 이를 벗어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해방된 믿음의 아들들이 형제로서 친교하는 영적 기쁨을 누린다.
179:5.3 (1942.2) 그들이 주를 기억하는 이 새 잔을 마시고 나서, 주는 빵을 들어, 감사를 드린 뒤에 여러 조각으로 만들어 그들에게 돌리라고 지시하며 말했다: “나를 기억하는 이 빵을 가져다 먹으라. 내가 생명의 빵이라고 내가 너희에게 일렀노라. 그리고 이 생명의 빵은 한 선물 안에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된 생명이라. 아들 안에서 드러난 것 같이, 아버지의 말씀은 정말로 생명의 빵이라.” 기념하는 빵을 먹고 나서 그들은 모두 자리에 앉았는데, 이 빵은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육신화된, 살아 있는 진리의 말씀을 상징하였다.
179:5.4 (1942.3) 이 기념 만찬을 선례로 만들 때, 언제나 버릇이었던 것 같이, 주는 비유와 상징을 이용했다. 후계자들이 그의 말씀에 정밀한 해석과 분명한 의미를 붙이기 어렵게 만드는 그런 방법으로, 어떤 큰 영적 진리를 가르치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는 상징을 이용했다. 이 방법으로 그는 뒤잇는 세대들이 그의 가르침을 형식화하고, 전통과 독단의 죽은 사슬로 영적 의미를 묶어놓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예수는 그의 전 생애의 사명과 관련된 유일한 예식, 즉 성찬(聖餐)을 선례로 만들면서, 몸소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의미를 제시하려고 고심하였다. 정밀한 공식(公式)을 만들어 놓고서 개인이 신과 교통하는 개념을 없애기를 원하지 않았고, 형식으로 그 개념을 단단히 묶어놓아 신자의 영적 상상력을 제한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새롭고 생생한 영적 자유의 날개, 즐거운 날개 위에 사람의 다시 태어난 혼을 해방시키려고 애썼다.
179:5.5 (1942.4) 주를 기억하는 이 새 성찬을 이처럼 제정하려고 주가 애썼는데도, 육체를 입었던 그 마지막 밤의 상징, 간단한 영적 상징이 엄밀한 해석으로 졸아들고 거의 수학처럼 정확히 정해진 공식에 지배되었기 때문에, 지나온 여러 세기 동안 그를 뒤따른 사람들은 그의 뚜렷한 소망이 실질적으로 좌절되도록 처리하였다. 예수의 모든 가르침 가운데, 아무것도 이보다 더 전통으로 표준화되지 않았다.
179:5.6 (1942.5) 이 기념 만찬은, 아들을 믿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먹을 때, 신이 자리에 계시다는 의미에 관한 곡해, 사람의 어떤 유치한 곡해도, 만찬의 상징과 관련지을 필요가 없으니, 이는 어떤 그러한 경우에도 주가 정말로 자리에 계시기 때문이다. 기념 만찬은 신자가 미가엘과 상징적으로 만나는 일이다. 너희가 이렇게 영을 의식할 때, 아들은 실제로 자리에 계시며, 그의 영은 아버지의 깃드는 분신(分身)과 사귄다.
179:5.7 (1942.6) 그들이 몇 순간 명상에 잠긴 뒤에, 예수는 말씀을 이었다: “너희가 이를 행할 때, 땅에서 너희 사이에 내가 살아 왔던 삶을 회상하고, 내가 너희와 함께 계속 땅에서 살고, 너희를 통해서 봉사하리라는 것을 기뻐하라. 개인으로서 누가 가장 클 것인가 너희끼리 다투지 말라. 너희는 다 형제 같이 되라. 하늘나라가 큰 무리의 신자들을 포함하도록 커질 때, 마찬가지로 위대하게 되려고 다투거나 그러한 집단들 사이에서 우대받기를 삼가야 하느니라.”
179:5.8 (1943.1) 그리고 이 위대한 행사는 한 친구의 2층 방에서 일어났다. 그 만찬이나 건물에 대하여 아무런 신성한 모습이나 예식으로 성스러워진 것이 없었다. 주를 기억하는 만찬은 교회의 인가(認可)가 없이 제정되었다.
179:5.9 (1943.2) 이렇게 기억의 만찬을 제정하고 나서, 예수는 사도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너희가 이 만찬을 들 때마다, 나를 생각하며 먹으라. 너희가 나를 기억할 때, 먼저 육체를 입고 산 내 일생을 돌이켜보고, 내가 한때 너희와 함께 있었음을 상기하라. 그리고 나서 믿음으로, 아버지의 영원한 나라에서 언젠가 너희 모두가 나와 함께 저녁 먹을 것을 헤아리라.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두고 가는 새 유월절, 아니 내 수여 생명,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라.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주는 사랑, 모든 육체에 내 진리의 영을 퍼부을 것을 기억하는 것이라.”
179:5.10 (1943.3) 그들은 모두 함께 시편 118편을 노래함으로, 새로운 기념 만찬을 창시하는 것과 연결하여, 오래된 이 유월절 축하를 피 흘리지 않고 마쳤다.
180:0.1 (1944.1) 마지막 만찬 끝에 시편을 노래한 뒤에, 사도들은 예수가 즉시 캠프로 돌아가려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사도들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주는 말했다:
180:0.2 (1944.2) “돈주머니나 지갑이 없이 너희를 떠나보내면서 너희가 아무 여벌 옷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충고까지 해준 때를 너희가 잘 기억하느니라. 그리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았던 것을 너희가 모두 회상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이제 어려운 시절을 만났고, 이제 더 군중의 호의(好意)에 기댈 수 없느니라. 이제부터, 돈주머니를 가진 자는 가지고 가라. 너희가 이 복음을 선포하러 세상으로 나갈 때, 최선으로 보이는 대로 너희를 부양하기 위하여 그런 식량을 준비하라. 나는 평화를 주려고 왔으나 평화는 한동안 나타나지 아니하리라.
180:0.3 (1944.3)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화롭게 될 때가 왔고, 아버지는 내 안에서 영화롭게 되리라. 친구들아, 나는 조금만 더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곧 너희가 나를 찾겠으나 나를 찾아내지 못하리니, 너희가 이때 갈 수 없는 곳으로 내가 갈 것임이라. 그러나 내가 지금 내 일을 마친 것 같이 너희가 너희 일을 땅에서 마치고 나서, 내가 지금 아버지께로 가려고 준비하는 것 같이, 너희가 그때 내게로 올지니라. 조금만 있으면 내가 너희를 떠나려 하고 너희는 땅에서 나를 더 만나지 못할 터이나 아버지가 내게 주신 나라로 너희가 올라갈 때, 다가올 시대에 너희가 다 나를 보리라.”
180:1.1 (1944.4) 격식 차리지 않은 대화가 몇 순간 있은 뒤에, 예수는 일어나서 말했다: “너희가 서로를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섬겨야 하는가 가리키는 비유를 너희에게 연출했을 때,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기를 바란다고 일렀으니, 내가 너희를 떠나려 하므로 이제 이를 하고자 하노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지시하는 계명을 너희가 잘 아느니라. 그러나 내 아이들 편에서 성실히 헌신하는 것에도 나는 온전히 만족하지 않노라. 믿는 형제 단체의 나라에서 너희가 더욱 큰 사랑의 행위를 연출하기를 내가 원하노라. 그래서 너희에게 이 새 계명을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이것으로, 너희가 이렇게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180:1.2 (1944.5) “내가 이 새 계명을 줄 때, 너희 혼에 어떤 새로운 짐도 지우지 아니하노라. 오히려 나는 너희에게 새 기쁨을 가져오고, 동료 인간에게 마음의 애정(愛情)을 주는 기쁨을 아는 데서 너희가 새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하노라. 너희와 너희의 필사 동료들에게 내 애정을 주면서, 비록 겉으로 슬픔을 견디어도 나는 바야흐로 최상의 기쁨을 맛보려 하노라.
180:1.3 (1944.6)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기를 부탁할 때, 너희 앞에 가장 많은 분량의 참된 애정을 제시하노니, 아무도 이보다, 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질 수 없음이라. 너희는 내 친구요, 너희에게 가르친 것을 기꺼이 행하기만 하면, 너희는 계속 내 친구가 되리라. 너희는 나를 주라 불러 왔어도 나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아니하노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 같이 너희가 오직 서로 사랑하고자 하면, 너희는 내 친구가 되겠고 아버지가 내게 드러낸 것에 관하여 내가 늘 너희에게 이르리라.
180:1.4 (1945.1) “너희가 나를 택했을 뿐 아니라 나도 또한 너희를 택했고, 내가 너희 가운데 살고 너희에게 아버지를 드러낸 것 같이, 너희 동료들에게 사랑으로 봉사하는 열매를 맺고자 세상으로 나가라고 너희를 세웠노라. 아버지와 내가 모두 너희와 함께 일하겠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내 명령에 복종하기만 하면, 너희가 신성하게 충만한 기쁨을 맛볼지니라.”
180:1.5 (1945.2) 너희가 주의 기쁨을 함께 하려고 하면, 너희는 그의 사랑을 함께 가져야 한다. 그의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너희가 그의 수고를 함께 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사랑의 체험은 너희를 이 세상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만들지 않는다. 새 세상을 만들어내지 않지만 아주 확실히 옛 세상을 새롭게 만든다.
180:1.6 (1945.3) 기억하여라: 예수가 요구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충성(忠誠)이다. 희생한다는 의식은 그러한 사랑으로 베푸는 봉사를 최고의 기쁨으로 만들었을 애정, 마음을 다한 그 애정이 없음을 뜻한다. 의무라는 관념은 너희가 종으로서 생각하고, 따라서 친구로서 친구를 위하여 너희가 봉사하는 힘찬, 떨리는 기쁨이 빠졌음을 가리킨다. 우정에서 생기는 충동은 의무에 관한 모든 확신을 뛰어넘으며, 친구를 위하여 친구가 베푸는 봉사는 결코 희생이라 부를 수 없다. 주는 사도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가르쳤다. 이들을 형제라 불렀고, 이제 떠나기 전에, 친구라고 부른다.
180:2.1 (1945.4) 그리고 나서 예수는 다시 일어나서 사도들을 계속 가르쳤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며, 아버지는 너희가 오직 많이 열매 맺기를 내게 요구하시니라. 오직 가지가 열매를 더 맺으라고 포도나무의 가지를 치느니라. 내게서 나오고 아무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마다 아버지가 잘라 버리리라. 열매를 맺는 가지마다 아버지는 더 열매 맺도록 깨끗하게 하시리라. 내가 이른 말씀을 통해서 너희가 이미 깨끗하여도 너희는 계속 깨끗해야 하느니라. 너희는 내 안에 살고 나는 너희 안에 살아야 하나니,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오면 죽으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와 같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 같이, 너희가 내 안에 살지 않으면 너희는 사랑의 봉사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기억하라,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살아 있는 가지이라. 내 안에 살고 내가 안에 사는 그런 사람은 영의 열매를 많이 맺고 이 영적 수확을 거두는 최고의 기쁨을 맛보리라. 나와 이렇게 생생한 영적 연결을 유지하면, 너희는 풍성한 열매를 맺으리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씀이 너희 안에 살면, 너희는 나와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나서 내 영이 뜻하는 무엇이나 너희가 요구하도록, 그리고 아버지가 우리의 간구(懇求)를 들어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 모든 일을 하도록, 살아 있는 내 영이 너희를 채울 수 있느니라. 아버지는 이렇게 영화롭게 되나니, 즉 포도나무에 살아 있는 가지가 많고, 가지마다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라. 세상이 열매 맺는 이 가지―내가 저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는 내 친구―들을 볼 때, 모든 사람이 너희가 참으로 내 제자인 줄 알리라.
180:2.2 (1945.5)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 것 같이, 나는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내가 아버지의 사랑 속에 사는 것 같이, 내 사랑 속에서 살라. 내가 가르친 대로 너희가 행하면,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켜 왔고 언제까지나 그의 사랑 속에 거한 것 같이, 너희는 내 사랑 속에 거할지니라.”
180:2.3 (1946.1) 메시아는 “다윗”의 조상들의 “포도나무에서 솟아나는 줄기”일 것이라 유대인은 오래 가르쳤고, 이 옛 가르침을 기념하는 뜻으로 포도와 그에 붙은 덩굴을 그린 큰 상징이 헤롯의 성전 입구를 장식했다. 주가 이날 밤, 2층 방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동안 사도들은 모두 이것들을 회상했다.
180:2.4 (1946.2) 그러나 기도에 관한 주의 결론이 잘못 해석된 뒤에 대단히 슬픈 일이 후일에 뒤이어 생겼다. 그의 말씀 그대로를 기억하고 나중에 충실히 기록했더라면, 이 가르침에 대하여 거의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이 만들어지는 동안에, 신자들이 궁극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일종의 최고의 마술로 여기게 되었고, 그들이 무엇을 구하든지 아버지로부터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여러 세기에 걸쳐 정직한 사람들이 이 걸림돌에 부딪쳐, 믿음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기도(祈禱)는 너희의 뜻을 이루는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순서, 어떻게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고 행하는가 배우는 체험이라는 것을 신자(信者)들의 세계가 깨닫는 데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인가? 이것이 온통 참말이니, 너희의 뜻이 참으로 그의 뜻과 일치되었을 때, 그 일치된 뜻에 따라 무엇을 상상하든지 너희가 요청할 수 있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포도나무의 생명이 살아 있는 가지로 흐르고 그 가지를 통해서 흐르는 것 같이, 그러한 일치된 뜻은 예수로 말미암아, 또 그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180:2.5 (1946.3) 신(神)과 인류 사이를 잇는 이 연결이 살아 있을 때, 인류가 이기적 편안과 허영심에 찬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생각없이 무지하게 기도한다면, 오직 한 가지 신의 응답이 있을 수 있다: 살아 있는 가지의 줄기에서 영의 열매가 더 많이, 더욱 열린다. 포도나무의 가지가 살아 있을 때, 가지가 어떤 간청을 하더라도 오직 하나의 대답이 있을 수 있으니, 포도를 더 맺는 것이다. 사실, 가지는 오로지 열매, 포도를 맺기 위하여 존재하며, 그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참된 신자는 오직 영의 열매를 맺는 목적으로 존재한다: 자신이 하나님에게 사랑받은 것 같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예수가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
180:2.6 (1946.4) 아버지의 징계하는 손을 포도나무에 댈 때, 가지들이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하여, 사랑으로 손을 댄다. 지혜로운 농부는 죽어서 열매 맺지 않는 가지만 쳐버린다.
180:2.7 (1946.5) 기도는 영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영에게서 태어난 신자들의 기능이라는 것을 사도들이 깨닫도록 이끄는 데도 예수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180:3.1 (1946.6)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강연을 놓고 열한 사도가 토론을 그치자마자, 주는 더 말씀하고 싶다는 것을 가리키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니까 말씀하였다: “내가 너희를 떠난 뒤에 세상이 적대하는 것에 낙심(落心)하지 말라. 마음이 약한 신자들이 너희를 적대하고 하늘나라의 적들과 손을 잡을 때에도 실망하지 말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면, 세상이 미처 너희를 미워하기도 전에 나를 미워했음을 회상해야 하느니라. 너희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이 자체에 속한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가 그렇지 않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사랑하려 하지 않느니라. 너희는 이 세상에 있어도 너희의 인생은 세상과 같지 않아야 하느니라. 너희가 선택받은 이 세상에 대하여도, 또 다른 세계의 영을 대표하라고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을 항상 기억하라: 종이 주인보다 크지 아니하니, 저희가 감히 나를 박해하면 또한 너희를 박해하리라. 내 말이 불신자를 성나게 하면, 또한 너희의 말도 사악한 자를 성나게 하리라. 저희가 나도, 나를 보내신 이도 믿지 아니하므로, 저희가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마찬가지로 내 복음을 위하여 너희가 많은 고통을 받으리라. 그러나 너희가 이 시련을 견딜 때, 이 하늘나라 복음을 위하여 너희보다 앞서 내가 또한 고통받았음을 회상해야 하느니라.
180:3.2 (1947.1) “너희를 공격할 많은 사람이 하늘의 빛을 도무지 모르지만, 이제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 가운데 더러는 그렇지 않으니라. 우리가 저희에게 진리를 가르치지 않았다면, 정죄받지 않고서 저희가 이상한 일을 많이 할지 몰라도, 저희가 빛을 알고도 주제넘게 물리쳤은즉, 이제 저희는 그런 태도를 변명할 말이 하나도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내 아버지를 미워하며,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느니라. 받아들이면 너희를 구할 그 빛은 이를 알면서 물리쳤을 때 너희를 정죄(定罪)할 수밖에 없느니라. 이 사람들이 그렇게 끔찍히 나를 미워하다니, 내가 저희에게 무슨 일을 하였느냐? 땅에서 친교하고 하늘에서 구원받는 것을 저희에게 제안한 외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성서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그리고 저희가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였도다.’
180:3.3 (1947.2) “그러나 나는 너희만 세상에 두고 떠나지 아니하리라. 내가 떠난 뒤에 금방, 너희에게 돕는 영을 보내리라. 너희 가운데서 내 자리를 차지할 자, 너희에게 진리의 길을 계속 가르칠 자, 너희를 위로하기도 할 자를 너희가 받으리라.
180:3.4 (1947.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너희는 하나님을 믿으며 또한 계속하여 나를 믿으라. 비록 내가 너희를 떠나야 하더라도, 나는 너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의 우주에는 머무를 장소가 많이 있다고 너희에게 이미 일렀노라. 이것이 참말이 아니라면, 너희에게 이에 대하여 거듭 이르지 아니하였으리라. 이 빛의 세계들로, 아버지의 하늘에 있는 여러 정거장으로 내가 돌아가리니, 너희가 그리로 언젠가 올라가리라. 이 여러 곳으로부터 내가 이 세상으로 왔고, 하늘에 있는 구체들에서 아버지의 일을 하려고 이제 내가 돌아가야 할 때가 가까웠느니라.
180:3.5 (1947.4) “내가 이처럼 너희보다 먼저 아버지의 하늘나라로 가면, 이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필사 아들들을 위하여 준비된 곳에서 너희가 나와 함께 있도록, 내가 확실히 너희를 부르러 보내리라. 비록 내가 너희를 두고 떠나야 하더라도 나는 정신적으로 너희와 함께 있고, 더 큰 우주에 계신 내 아버지께로 내가 막 올라가려 하는 것 같이, 내 우주에서 너희가 내게로 올라왔을 때 궁극에 너희가 나와 함께 몸소 있게 될지니라. 너희가 충분히 알아듣지 못할지라도, 내가 너희에게 이른 것은 참이고 영원하니라. 나는 아버지께로 가고, 비록 너희가 지금 나를 따를 수 없을지언정, 너희는 다가오는 시대에 나를 분명히 따를지니라.”
180:3.6 (1947.5) 예수가 앉았을 때, 토마스가 일어나서 말했다: “주여, 우리는 당신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고, 그래서 물론 우리가 그 길을 알지 못하나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 길을 우리에게 보이신다면, 우리는 바로 오늘 밤에 당신을 따르리이다.”
180:3.7 (1947.6) 토마스의 말을 들었을 때, 예수는 대답했다: “토마스야, 내가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를 거치지 않고 어떤 사람도 아버지께로 가지 못하느니라. 아버지를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먼저 나를 발견하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아느니라. 그리고 너희가 나를 아나니, 너희가 나와 함께 살아 왔고 너희가 지금 나를 보는 까닭이라.”
180:3.8 (1947.7) 그러나 이 가르침은 많은 사도에게, 특히 빌립에게 너무나 깊었다. 나다니엘과 몇 마디 말한 뒤에, 빌립이 일어나서 말했다: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소서, 그리하면 당신이 말씀한 모든 것이 훤해지리이다.”
180:3.9 (1947.8) 빌립이 말을 마치자 예수가 말했다: “빌립아, 내가 너와 함께 그리 오래 있었거늘 그래도 지금도 네가 나를 모르느냐? 다시 내가 선언하노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그러면 어찌하여 네가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이소서 하고 말할 수 있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심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하는 말씀은 내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너희에게 가르치지 않았느냐? 나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말하고, 스스로 말하지 않노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내가 이 세상에 있고, 내가 그렇게 하였노라. 아버지는 내 안에 거하고 나를 통해서 일하시니라.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할 때, 나를 믿으라. 아니면 내가 산 바로 그 일생을 보고―행한 일을 보고―나를 믿으라.”
180:3.10 (1948.1) 물을 마셔 기운을 차리려고 주가 옆으로 가자, 열한 사도는 이 가르침을 놓고 열띤 토론에 들어갔고, 예수가 돌아와서 그들에게 앉으라고 손짓했을 때, 바로 베드로는 긴 연설을 시작하고 있었다.
180:4.1 (1948.2) 예수는 이렇게 계속 가르쳤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나서, 땅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한 일을 아버지가 충분히 승인한 뒤, 내 영토의 마지막 통치권을 받은 뒤에, 아버지께 말씀드리리라: 땅에 내 아이들끼리만 두고 떠났으므로, 다른 선생을 보내는 것이 내 약속을 지키는 것이나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승인하실 때, 내가 모든 육체에게 진리의 영을 퍼부으리라. 이미 내 아버지의 영이 너희 마음 속에 있고, 이날이 다가올 때 너희가 지금 아버지를 지닌 것 같이 또한 나를 지니리라. 이 새 선물은 살아 있는 진리의 영이라. 불신자들이 처음에는 이 영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겠으나 빛의 아들들은 다 기쁘게, 진심으로 그를 받아들이리라. 너희가 나를 안 것 같이 이 영이 올 때 너희가 그를 알겠고, 너희는 마음 속에 이 선물을 받고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리라. 도움과 안내 없이 내가 너희를 두고 떠나려 하지 않음을 너희가 이처럼 깨닫느니라. 나는 너희를 외롭게 두고 떠나지 아니하리라. 오늘 나는 너희와 함께 몸으로만 있을 수 있노라. 다가오는 시절에 너희가 어디 있더라도, 그리고 너희 각자와 동시에, 내가 너희와 함께, 내가 있기를 바라는 모든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리라. 내가 떠나는 것이 더 좋은 것, 너희와 함께 더욱 좋게, 더욱 충만히 영으로 있도록 내가 육신의 모습으로 너희를 떠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180:4.2 (1948.3) “꼭 몇 시간 있으면 세상은 나를 더 바라보지 못하려니와 너희에게 이 새 선생, 진리의 영을 보낼 때까지도 너희는 가슴 속에서 계속 나를 알리라. 내가 몸으로 너희와 함께 살아 온 것 같이, 그때 나는 너희 안에서 살리라. 나는 영 나라에서 너희의 개인 체험과 하나가 되리라. 그리고 이 일이 일어났을 때,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의 생명은 내 안에 계신 아버지와 함께 숨어 있으나, 내가 또한 너희 안에 있음을 너희가 분명히 알리라.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지켰고, 너희는 나를 사랑했고 내 말을 지키리라. 내 아버지가 그의 영을 내게 나누어준 것 같이, 마찬가지로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나누어주리라.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내릴 이 진리의 영은 너희를 안내하고 위로하며, 궁극에 너희를 모든 진리로 이끌리라.
180:4.3 (1948.4) “지금도 우리 눈앞에 바로 닥친 시험을 견디기에 너희가 더 잘 준비될까 하여, 아직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런 일을 너희에게 이르노라. 이 새 날이 올 때, 아버지 뿐 아니라 아들이 너희에게 깃들리라. 아버지와 내가 땅에서, 바로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한 인격으로, 사람의 아들로서 일해 온 것 같이, 이 하늘의 선물들은 늘 하나가 다른 하나와 함께 일하리라. 이 영(靈) 친구는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모든 것을 너희가 기억하게 하리라.”
180:4.4 (1948.5) 주가 잠시 멈추자, 유다 알패오는 대중 앞에서 그나 그의 형제가 예수에게 일찍이 던진 몇 안 되는 질문 가운데 하나를 대담하게 던졌다. 유다가 말했다: “주여, 당신은 친구로서 언제나 우리 사이에 사셨나이다. 이 영으로 드러내는 외에, 당신이 자신을 이제 더 나타내지 않을 때,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알아보리이까? 세상이 당신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가 어떻게 당신에 관하여 확신하리이까? 당신이 어떻게 자신을 우리에게 보이시려 하나이까?”
180:4.5 (1949.1) 예수는 모두를 내려다보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귀여운 아이들아, 나는 떠나고 내 아버지께로 돌아가노라. 조금 있으면 너희가 여기서 보는 것처럼 살과 피로 된 나를 구경하지 못하리라. 얼마 안 있으면, 이 물질인 몸을 빼고, 나와 꼭 같은 내 영을 너희에게 보내리라. 이 새 선생은 너희 각자와 함께, 너희 마음 속에서 살 진리의 영이요, 그렇게 빛의 아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서로에게 이끌릴 것이라. 바로 이 방법으로 내 아버지와 나는 너희 각자의 혼 속에서 살 수 있고, 내가 지금 너희를 사랑하는 것 같이 서로 사랑함으로 체험을 겪으며 그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를 사랑하는 모든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서 또한 살 수 있느니라.”
180:4.6 (1949.2) 유다 알패오는 주가 무슨 말씀을 했는가 충분히 알아듣지 못했지만, 새 선생이 온다는 약속을 깨달았고, 안드레의 얼굴 표정으로부터 자기의 물음에 흡족한 대답을 받았음을 깨달았다.
180:5.1 (1949.3) 신자들의 마음 속으로 예수가 보내겠다, 모든 육체에게 퍼붓겠다고 약속한 새 조력자는 진리의 영이다. 신이 주시는 이 재산은 진리의 글이나 율법이 아니요, 진리의 형태나 표현으로 작용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새 선생은 진리의 확신이요, 진정한 영 수준에서 참된 뜻을 의식하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 새 선생은 생생하고 성장하는 진리, 커지고 펼쳐지고 적응하는, 진리의 영이다.
180:5.2 (1949.4) 신성한 진리는 영이 알아보는 살아 있는 실체이다. 진리는 신성을 깨닫고 하나님과 교통함을 의식하는 높은 영적 수준에서만 존재한다. 너희는 진리를 알 수 있고, 진리를 실천할 수 있다. 너희는 혼 속에서 진리의 성장을 체험하고, 지성 속에서 진리를 깨우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 진리를 공식ㆍ법전ㆍ신조 또는 인간 행위의 지적 본보기 속에 가두어둘 수 없다. 신성한 진리를 인간이 공식(公式) 으로 만들려고 나설 때, 그 진리는 빨리 죽는다. 갇혀 있던 진리를 죽은 뒤에 건지는 것은 궁극에 기껏해야, 지적 분석으로 미화(美化)된 지혜를 특이한 형태로 실현하는 것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가만히 있는 진리는 죽은 진리요, 오직 죽은 진리만, 하나의 이론으로서 붙잡혀 있을 수 있다. 살아 있는 진리는 움직이며, 인간의 지성 속에서 오직 체험으로 존재할 수 있다.
180:5.3 (1949.5) 지능은 우주 지성의 계심으로 빛을 받는 물질 존재로부터 생겨난다. 지혜는 새로운 의미 수준까지 높아진 지식, 그리고 지혜 보조자의 우주 자질이 있음으로 활성화된 지식의 의식(意識)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리는 영을 부여받은 존재들만 맛보는 영적 실체 가치이며, 그런 존재들은 우주 의식의 초물질 수준에서 활동하고, 진리를 깨달은 뒤에, 자기 혼 안에서 활성화하는 그 영이 살고 군림하도록 허락한다.
180:5.4 (1949.6) 우주 통찰력을 가진 참된 사람은 모든 지혜로운 말씀 안에 생생한 진리의 영을 찾는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신에 도달하는 살아 있는 진리의 수준까지 항상 지혜를 높인다. 영적으로 전진하지 않는 혼은 그동안 내내, 살아 있는 진리를 죽은 수준의 지혜로, 단순히 격이 높아진 지식의 영토로 끌고 내려간다.
180:5.5 (1949.7) 진리의 영의 초인간 통찰력을 벗어 버렸을 때, 황금률은 높은 윤리적 행위 규칙에 지나지 않는다. 글자 그대로 풀이했을 때, 황금률은 사람의 동료를 크게 불쾌하게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황금률의 지혜를 영적으로 헤아리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머리 속에 있는 솔직한 진실 전부를 너희에게 털어놓기를 너희가 바라니까, 따라서 너희의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을 전부 솔직하게, 동료 존재들에게 털어놓아야 할 것이라고 너희가 추리할지 모른다. 황금률의 그러한 비영적 해석은 말할 수 없는 불행과 끝없는 슬픔을 가져올지 모른다.
180:5.6 (1950.1) 어떤 사람들은 황금률이 인간이 형제임을 순전히 지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라고 헤아리고 해석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 인간 관계의 표현을 인간 성품의 부드러운 느낌을 감정적으로 만족시키는 것으로 체험한다. 또 다른 필사자는 바로 이 황금률을 모든 사회 관계를 재는 자, 사회적 행위의 기준이라고 인식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황금률이 모든 친교 관계에 대해서, 최고의 도덕적 의무 개념을 이 표현에서 나타낸 선생, 위대한 도덕 선생이 내린 긍정적 명령이라고 본다. 그러한 도덕적 존재들의 일생에서 황금률은 그들의 모든 철학의 지혜로운 핵심이자 그 경계선이 된다.
180:5.7 (1950.2)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사랑하는 신자(信者) 단체의 나라에서, 이 황금률은 상급 수준에서 해석할 때 영적으로 실현하는 생생한 빛깔을 띠며, 그런 해석은 하나님의 필사 아들들로 하여금 주의 이 명령이, 신자가 그들과 접촉하는 결과로서 그 동료들이 가능한 최대의 이득을 얻는 방법으로 동료들과 상관하라고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으로 보게 만든다. 네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참된 종교의 본질이다.
180:5.8 (1950.3) 황금률의 가장 높은 실천과 가장 참된 해석은 그러한 신다운 선언의 실체, 오래가는 생생한 실체에 담긴 진리의 정신을 의식하는 데 있다. 이 우주 관계의 규칙이 가진 참된 우주 의미(意味)는 오로지 그 영적 실천에서, 아들의 영이 필사 인간의 혼에 깃드는 아버지의 영에게 행동 법칙을 풀이할 때 드러난다. 영의 인도를 받는 그러한 필사자는 이 황금률의 참된 의미를 깨달을 때, 친근한 우주에서 사는 시민이라는 확신을 넘치도록 얻는다. 영 실체에 관한 그들의 이상(理想)은, 예수가 우리 모두를 사랑한 것 같이 동료들을 사랑할 때에야 만족되며,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것의 실체이다.
180:5.9 (1950.4) 신성한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마다 그 개인의 요건과 능력에 따라서 때에 맞게 조절하고 우주에 맞게 적응시킬 수 있는 바로 이 철학을 먼저 파악해야,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주의 가르침과 습관을 너희가 적절히 이해하기를 바랄 수 있다. 주의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영적 선언이다. 그의 철학이 물질 면에서 함축하는 것조차 그 영적 상관 관계와 따로 고려하는 것은 유익할 수 없다. 주의 권고에 담긴 정신은 우주에 대하여 온갖 이기적(利己的) 반응으로 저항하지 않는 데 있고, 아울러 하나님을 알고, 갈수록 더 그를 닮기 위하여, 참된 영적 가치―신성한 아름다움, 무한한 선, 영원한 진리―의 올바른 수준에 적극적ㆍ점진적으로 도달하는 것이다.
180:5.10 (1950.5) 사랑, 사심(私心)없는 마음은, 진리의 영이 인도하는 대로, 여러 관계를 항상 때에 맞게 다시 적응하는 해석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 사랑은 사랑받는 개인이 우주에서 얻는 가장 높은 이익에 관하여 항상 변하고 확대되는 개념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사랑은 더 나아가서, 영의 인도를 받는 한 필사자가 우주의 다른 시민들을 사랑하는 관계, 성장하는 생생한 관계에 혹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모든 다른 사람에 관하여, 바로 이 태도를 가진다. 현재의 잘못된 환경, 그리고 신성한 운명, 즉 완전에 이르는 영원한 목표, 이 두 가지에 비추어서, 이렇게 때에 맞게 사랑의 적응 전체가 이루어져야 한다.
180:5.11 (1950.6) 그래서 황금률도 무저항의 가르침도 결코 신조나 교훈으로서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뚜렷이 인식해야 한다. 오직 실천함으로, 진리의 영이 실천으로 해석하는 그 의미를 깨달음으로 이것들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영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사랑으로 접촉하라고 지시한다.
180:5.12 (1951.1) 이 모두가 옛 종교와 새 종교의 차이를 뚜렷이 가리킨다. 옛 종교는 자아의 희생을 가르쳤고, 새 종교는 오로지 사회 봉사와 우주에 대한 이해가 통합되어, 자아 잊어버리기, 곧 향상된 자아 실현을 가르친다. 옛 종교는 두려움을 의식함으로 자극을 받았고, 하늘나라의 새 복음은 진리의 확신, 영원하고 보편적 진리의 정신에 지배된다. 그리고 아무리 경건하거나 교리에 충성함을 보여도, 하늘나라 신자의 생활 체험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영에게서 태어난 아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자연스럽고 너그럽고 진지한 바로 그 친절이 빠진다면 이를 보상할 수 없다. 전통도, 형식으로 예배하는 예식(禮式) 체제도, 사람이 동료에 대하여 진정한 동정심이 모자라는 것을 메울 수 없다.
180:6.1 (1951.2)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과 마태가 주께 수많은 질문을 던진 뒤에, 주는 작별 강연을 계속하여 말씀했다: “너희에게 닥치고 있는 것을 위하여 준비되어 심각한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떠나기 전에 이 모든 것에 관하여 너희에게 이르노라. 권력자들은 단지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경고하노니, 너희를 죽이는 자가 하나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가까워 오느니라. 이 모든 것을 저희가 너희에게, 그리고 너희가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자들에게 행하리니, 저희가 아버지를 모르는 까닭이라. 저희는 나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함으로, 아버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느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나의 새 계명을 너희가 지켜 왔다면, 너희를 물리칠 때 저희는 나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것이라. 내가 모든 것을 알았다는 것을 너희가 알고,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너희가 온갖 고통을 겪는 가운데 내 영이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것을 알고서, 내 때가 지금 온 것 같이 너희의 때가 올 때, 너희가 힘을 얻도록 내가 이런 일에 관하여 너희에게 미리 이르노라. 이 목적을 위하여, 맨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아주 분명히 일렀노라. 사람의 적은 집 안에 있는 적일지 모른다고 너희에게 경고까지 한 적이 있노라. 비록 개별 신자의 혼에 어김없이 큰 평화를 가져왔을지라도, 이 하늘나라 복음은 사람이 기꺼이 내 가르침을 진심으로 믿기까지,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버릇을 기꺼이 필사 일생을 사는 주요 목적으로 만들 때까지, 땅에서 평화를 가져오지 아니하리라.
180:6.2 (1951.3) “내가 아버지께로 가려 할 때가 온 것을 알고서, 내가 너희를 떠나매, 너희 가운데 아무도 어찌하여 우리를 떠나시나이까? 하고 묻지 않아서 내가 놀라노라. 그런데도 너희가 마음 속에 그리 묻는 것을 내가 아노라. 친구로서 친구에게,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이르리라.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정말로 유익하니라. 내가 떠나지 않으면, 새 선생이 너희 마음 속에 올 수 없느니라. 너희 혼 안에서 살고 너희 영을 진리로 이끌 이 영(靈) 선생을 보낼 수 있기 전에, 나는 이 필사의 몸을 벗고 하늘에 내 자리로 되돌아가야 하느니라. 그리고 내 영이 너희에게 깃들려고 올 때, 그는 죄와 올바름의 차이를 비추고, 이것들에 관하여 너희가 마음 속에서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게 하리라.
180:6.3 (1951.4) “나는 너희에게 아직 할 말이 많아도 바로 지금 너희는 더 견딜 수 없느니라. 하지만 그가, 진리의 영이 올 때, 너희가 내 아버지의 우주에서 여러 거처를 지나가는 동안, 궁극에 너희를 모든 진리에 이르기까지 안내하리라.
180:6.4 (1951.5) “이 영은 스스로 말하지 않을 터이나 아버지가 아들에게 드러낸 것을 너희에게 선언하고, 다가올 것들을 너희에게 보이기까지 하리라. 내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 것 같이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이 영은 나에게서 솟아나고, 나의 진리를 너희에게 드러내리라. 아버지가 이 영토에서 가진 모든 것이 이제 내 것이요, 그런즉 이 새 선생이 내 것을 취하여 너희에게 드러내리라 내가 일렀노라.
180:6.5 (1952.1) “조금만 있으면 내가 잠시 동안 너희를 떠나리라. 그 뒤에 너희가 다시 나를 볼 때, 나는 이미 아버지께로 가는 도중이겠고, 그래서 그때에도 너희가 나를 보는 것은 오랫동안이 아니리라.”
180:6.6 (1952.2) 그가 한 순간 멈춘 동안, 사도들은 서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가 우리에게 이르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 ‘조금만 있으면 내가 너희를 떠나리라’ 그리고 ‘너희가 나를 다시 볼 때, 이는 오랫동안이 아니리니,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도중일 것임이라.’ ‘조금 있으면’과 ‘오랫동안이 아니라’는 말로 그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느냐? 그가 우리에게 이르는 것을 알 수 없구나.”
180:6.7 (1952.3) 그들이 이렇게 물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는 말했다: “조금 있으면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너희가 나를 다시 볼 때,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도중일 것이라 하였을 때 내가 무엇을 의미하였는가 너희끼리 묻느냐? 사람의 아들이 죽어야 하나, 다시 살아나리라고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일렀노라. 그러면 내 말의 뜻을 너희가 헤아릴 수 없느냐? 너희는 처음에 슬프게 되겠으나, 나중에 이 일이 일어난 뒤에 이를 이해하는 많은 사람과 함께 너희가 기뻐하리라. 여자는 산고(産苦)를 겪는 시간에 정말로 슬퍼해도 일단 아이를 낳으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알고 기뻐하는 가운데 자기의 고통을 즉시 잊어버리느니라. 마찬가지로 내가 떠나는 것을 너희가 슬퍼하려 하지만 나는 곧 너희를 다시 보리라. 그때 너희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겠고,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는 새 계시가 너희에게 오리라. 죽음을 이기는 바로 이 생명의 계시 속에 모든 세상들이 복을 받으리라. 이제까지 너희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온갖 요청을 드렸느니라. 너희가 나를 다시 본 뒤에, 너희는 또한 내 이름으로 구하여도 좋고, 그리하면 내가 너희 말을 들으리라.
180:6.8 (1952.4) “나는 여기 땅에서 속담(俗談)으로 너희를 가르쳐 왔고 비유로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내가 그리한 것은 너희가 영적으로 겨우 어린아이인 까닭이라. 그러나 아버지와 그의 나라에 관하여 너희에게 분명히 말할 때가 오고 있느니라. 바로 아버지가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에게 더 충만히 계시되기를 바라므로, 내가 이것을 하리라. 필사 인간은 영 아버지를 볼 수 없고, 따라서 아버지를 너희 사람의 눈에 보여주려고 내가 세상으로 왔노라. 그러나 너희의 영이 완전히 성장했을 때, 그때 너희는 바로 아버지를 볼지니라.”
180:6.9 (1952.5) 주의 말씀을 듣고 나서, 열한 사도는 서로 말했다: “보라, 그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는도다. 분명히 주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느니라. 그러나 어째서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하시느냐?” 그들이 아직까지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음을 예수는 알았다. 이 열한 사람은 오래 간직했던 관념, 유대인 메시아의 개념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이 예수가 메시아라고 단단히 믿으면 믿을수록, 땅에 있는 나라가 영화롭게 물질적으로 승리한다는 뿌리 깊은 개념은 갈수록 더욱 문제가 되었다.
181:0.1 (1953.1) 열한 사도에게 작별의 강연을 마치고 나서, 예수는 격식을 차리지 않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집단으로서 또 개인으로서 그들의 관심을 끄는 여러 체험을 이야기했다. 친구인 선생이 그들을 떠나려 한다는 생각이 마침내 이 갈릴리 사람들에게 분명해지기 시작했고, 그들은 조금 있으면 그가 다시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다시 오시는 일이 또한 잠시 동안이라는 것을 쉽게 잊어버렸다. 사도와 주요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잠시 동안 (부활과 승천 사이의 짧은 기간에) 돌아온다는 이 약속이 예수가 아버지를 잠깐 찾아보려고 방금 떠나고 그 뒤에 하늘나라를 세우려고 돌아올 것을 가리킨다고 정말로 생각했다. 그의 가르침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선입관, 그리고 간절히 품었던 희망, 이 두 가지와도 일치했다. 그들이 일생동안 지녔던 관념, 그리고 욕구가 성취되는 희망이 이렇게 들어맞았기 때문에, 그들의 뜨거운 열망(熱望)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주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181:0.2 (1953.2) 작별의 강연을 논의하고 그 말씀이 그들의 머리 속에서 자리잡기 시작한 뒤에, 예수는 사도들을 조용하게 하고 마지막 훈계와 경고를 말씀하기 시작했다.
181:1.1 (1953.3) 열한 사도가 제 자리에 앉고 나서, 예수는 일어나서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육체를 입고 너희와 함께 있는 한, 너희 가운데서나 온 세계에서 나는 오직 한 개인일 수밖에 없노라. 그러나 필사 성질을 지닌 이 옷에서 해방되었을 때, 나는 너희 각자에게, 그리고 이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모든 다른 사람 속에 영으로 깃드는 자로서 돌아올 수 있노라. 이 방법으로 사람의 아들은 모든 참된 신자의 혼 속에서 영적 육신화가 되리라.
181:1.2 (1953.4) “내가 너희 안에 살고 너희를 통하여 일하려고 돌아왔을 때, 내가 이 생명을 통하여 계속 너희를 더욱 잘 인도할 수 있고, 가장 높은 하늘에서 미래에 여러 거처를 통하여 너희를 안내할 수 있노라. 아버지의 영원한 창조에서 사는 것은 끊임없이 게으름 피우는 휴식과 이기적 편안을 즐기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품위와 진리와 영광 속에서 끊임없이 진보하는 것이라. 내 아버지의 집에 많고 많은 정거장 하나하나가 멈추는 장소요, 앞에 있는 다음 생명을 위하여 너희를 준비시키려고 고안된 생명이라. 그래서 빛의 아이들은 줄곧 영광스러운 곳으로 이리저리 가서 신의 토지에 이르리니, 거기서 아버지가 모든 일에 완전한 것 같이 저희가 영적으로 완전하게 되리라.
181:1.3 (1953.5) “내가 너희를 떠날 때 너희가 나를 따르고자 하면, 내 가르침의 정신과 내 일생의 이상에 따라서 살려고―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아주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라. 이를 행하고, 내가 어쩌다가 이 세상에서 살도록 요구된 것과 같은 일생, 육체를 입은 자연스러운 내 일생을 모방하려고 애쓰지 말라.
181:1.4 (1954.1) “아버지는 나를 이 세상으로 보냈지만 겨우 너희 몇 사람이 나를 완전히 받아들이려고 선택하였느니라. 나는 모든 육체에게 내 영을 쏟아 붓겠으나, 모든 사람이 이 새 선생을 혼의 안내자와 조언자로 받아들이기를 택하지는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깨우침을 받고 깨끗해지고 위로를 받으리라. 그리고 이 진리의 영은 저희 안에서 영생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물이 솟는 샘이 되리라.
181:1.5 (1954.2) “이제, 내가 너희를 떠나려 하매, 위로의 말을 하고자 하노라.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노라. 세상이 하는 것처럼―재어서―이 선물을 주지 않고 너희가 받아들일 만큼 모두, 각자에게 주리라. 너희는 마음에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세상을 이겼고, 내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너희 모두가 이기리라. 사람의 아들이 죽음을 당하리라 너희에게 경고했으나 너희에게 보장하노니, 아버지께로 가기 전에, 잠깐이 될지라도 내가 돌아오리라.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간 뒤에, 너희와 함께 있고 바로 너희 마음 속에서 거할 새 선생을 내가 분명히 보내리라. 너희가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절망하지 말라. 그러나 너희가 모든 것을 미리 알았으므로 오히려 믿으라. 내가 큰 애정으로 너희를 사랑했고, 나는 너희를 떠나고 싶지 않으나,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 내 때가 왔노라.
181:1.6 (1954.3) “너희가 박해를 받고서 널리 흩어지고 많은 슬픈 일로 낙심한 뒤에도, 이 진리 가운데 어느 것도 의심하지 말라. 너희가 흩어져 각자 제 자리로 돌아가고 사람의 아들을 적들의 손에 버려둘 때 너희가 내 고독(孤獨)을 알리니, 그와 같이 너희가 세상에서 혼자임을 느낄 때 내가 너희의 고독을 알리라. 그러나 나는 결코 혼자 있지 않고, 언제나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시니라. 그러한 때도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리라. 너희가 평화를 가지고, 평화를 더욱 풍부히 가지도록 이 모든 것을 내가 너희에게 일렀노라. 이 세상에서 너희가 시련을 겪겠으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에서 승리하였고, 영원한 기쁨과 영구한 봉사로 이끄는 길을 너희에게 보였음이라.”
181:1.7 (1954.4)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동료 일꾼들에게 평화를 주지만, 이것은 이 물질 세상에서 얻는 기쁨과 만족 같은 종류의 평화가 아니다. 믿지 않는 유물론자와 운명론자는 오직 두 가지의 평화와 혼의 위로를 얻기를 바랄 수 있다. 그들은 불가피한 것을 부닥치거나 최악을 견디겠다고 굳게 각오한 금욕주의자이든지, 아니면 낙천가가 되어서, 결코 정말로 오지 않는 평화를 헛되이 동경하면서, 인간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솟아오르는 희망을 늘 품어야 한다.
181:1.8 (1954.5) 땅에서 사는 데는 얼마큼의 금욕주의와 낙관주의가 쓸모 있지만, 이 중에 어느 것도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를 입은 형제들에게 주는 숭고한 평화와 아무 상관이 없다. 미가엘이 땅에 있는 자녀들에게 주는 평화는, 자신이 육체를 입고 바로 이 세상에서 필사 생명을 살았을 때 자신의 혼을 채웠던 바로 그 평화이다. 예수의 평화는, 육체를 입고 필사 생명을 살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가 충분히 배우는 데 성공한 개인, 하나님을 아는 개인이 얻는 기쁨과 만족감이다. 예수의 정신이 지녔던 평화는 신성한 아버지가 슬기롭게, 이해하는 마음으로 넘치도록 보살피는 것이 사실임을 절대로 믿는 인간 신앙에 기초를 두었다. 예수는 땅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사람들이 그를 그릇되게 “슬픈 사람”이라고 일컫기까지 했지만, 이 모든 체험 속에서, 이를 통하여, 그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있다고 완전히 확신하는 가운데, 일생의 목적을 가지고 나아가도록 늘 힘을 준, 그러한 자신감으로 위로를 받았다.
181:1.9 (1954.6) 예수는 각오가 굳었고 끈질겼으며, 그의 사명을 이룩하는 데 속속들이 헌신했지만, 감정이 무디고 살갗이 굳어진 금욕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일생의 체험에서 즐거운 모습을 늘 찾으려 했지만, 눈이 멀고 스스로 속는 낙관주의자가 아니었다. 주는 그에게 무슨 일이 쏟아질까 모두 알았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따르는 사람 각자에게 이 평화를 준 뒤에, 그는 변함없이 말할 수 있었다: “너희는 마음에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181:1.10 (1955.1) 그러면 예수의 평화는, 시간 세계와 영원 속에서 자기의 생애가, 전적으로 슬기롭고 만물을 사랑하는 전능한 영 아버지의 보살핌과 보호를 안전히, 온전히 받고 있음을 완전히 믿는 아들이 가지는 평화와 확신이다. 이것은 정말로, 필사인의 머리가 이해할 수 없는 평화이지만, 믿는 인간의 가슴이 충만히 누릴 수 있는 평화이다.
181:2.1 (1955.2) 주는 사도들에게 한 집단으로서 작별의 가르침을 주고 마지막 훈계의 말씀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각 개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작별의 축복과 함께, 각자에게 개인적으로 조언하는 말씀을 주었다. 그들은 마지막 만찬을 들려고 처음에 앉았을 때 그대로 식탁 주위에 아직도 앉아 있었고, 주가 식탁을 돌아가면서 그들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예수가 이야기할 때 각 사람이 일어섰다.
181:2.2 (1955.3) 요한에게 예수는 말했다: “요한아, 너는 형제들 가운데 가장 어리니라. 너는 나와 아주 가까이 있었고,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랑으로 내가 너희 모두를 사랑하지만, 나와 언제나 가까이 있어야 하는 세 사람 중의 하나로 안드레가 너를 지명하였느니라. 이밖에도, 너는 나를 대신하여 행동했고, 땅에서 내 가족에 관한 여러 문제에서 계속 그렇게 행동해야 하느니라. 그리고 요한아, 육체로서 나에게 속하는 자들을 네가 계속 보살필 것이라 충분히 확신을 가지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노라. 내 사명에 대하여 저희가 현재 혼동해도, 내가 육체로 남아 있다면 내가 어찌 하리라 생각되는 대로, 어떤 면에서도 네가 저희에게 계속하여 모든 동정과 조언과 도움을 베풀도록 처리하여라. 저희가 모두 와서 빛을 보고 하늘나라로 온전히 들어갈 때 너희 모두가 저희를 기쁘게 환영하는 동안에, 요한아, 나를 위하여 네가 저희를 환영할 줄을 믿노라.
181:2.3 (1955.4) “이제, 땅에서 내 생애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내 가족에 관하여 너에게 어떤 전할 말이라도 남기도록 옆에 가까이 남아 있으라. 아버지가 내 손에 맡긴 일에 관하여 말하면, 육체를 입고 죽는 것 외에 이제 다 이루었고, 나는 이 마지막 잔을 마실 준비가 되었노라. 그러나 땅에서 내 아버지 요셉이 내게 맡겨준 책임에 관하여, 내 일생 동안에 이것들을 수행하였으나 이제 이 모든 문제에 네가 나 대신에 행동하기를 기대하노라. 내 대신에 이를 하라고 너를 택하였으니, 요한아 네가 가장 나이 어리고, 따라서 이 다른 사도들보다 더 오래 살 것 같기 때문이라.
181:2.4 (1955.5) “한때 나는 너와 네 형을 우뢰의 아들이라 불렀노라. 너는 고집이 세고 참을성 없이 우리와 함께 첫걸음을 내디디었어도, 무지(無知)하고 경솔한 불신자들 머리 위에 내가 불을 퍼붓기를 네가 바란 이후로, 너는 많이 바뀌었느니라. 그리고 아직도 더 바뀌어야 하느니라. 너는 내가 너희에게 오늘 밤에 준 새 계명을 지키는 사도가 되어야 하느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형제들에게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가 가르치는 데 일생을 바치라.”
181:2.5 (1955.6) 눈물 방울이 주르르 뺨으로 굴러 떨어지며 2층 방에서 거기 서 있는 동안, 요한 세베대는 주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내 주여, 그렇게 하리이다. 그러나 어떻게 내 형제들을 더 사랑하기를 배울 수 있나이까?” 그리고 나서 예수가 대답했다: “네가 먼저 하늘에 계신 저희의 아버지를 더욱 사랑하기를 배울 때, 그리고 시간 세계와 영원 속에서 저희의 복지에 네가 참으로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 뒤에, 너는 형제들을 더욱 사랑하기를 배우리라. 살피는 동정심, 사심 없는 봉사, 아낌없는 용서가 그런 모든 인간적 관심을 촉진하느니라. 아무도 젊다고 너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지만, 나이가 때로는 경험을 대표하며 인간사에서 아무것도 실제 체험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땅히 고려하라, 언제나 너에게 타이르노라. 모든 사람과, 더군다나 하늘나라 형제 단체의 네 친구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려고 애쓰라. 요한아, 하늘나라를 위하여 네가 설득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다투지 말라.”
181:2.6 (1956.1) 그리고 나서, 자기 자리를 돌아서 지나가면서, 주는 가룟 유다의 자리 옆에서 한 순간 멈추었다. 사도들은 유다가 이 일이 있기 전에 돌아오지 않은 것에 오히려 놀랐고, 예수가 그 배반자의 빈 자리 옆에 서 있는 동안, 예수의 슬픈 얼굴빛이 무슨 의미인가 매우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마 안드레를 빼고, 예수가 초저녁에, 또 저녁 식사 동안에 그들에게 비춘 바와 같이, 그들 가운데 아무도 회계(會計)가 주를 배반하려고 나간 것을 티끌만큼도 눈치채지 못했다.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어서, 그들 중에 하나가 주를 저버릴 것이라고 주가 이르신 것을 한동안 아주 잊어버렸다.
181:2.7 (1956.2) 예수는 이제 열심당원 시몬에게 건너갔고, 그는 일어서서 이 훈계에 귀를 기울였다: “너는 아브라함의 참 아들이지만, 너를 이 하늘나라의 아들로 만들려고 애쓰면서 내가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지.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 형제 모두가 너를 사랑하느니라.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고 네가 또한 하늘나라를 사랑함을 내가 알지만, 너는 아직도 네 취향(趣向)대로 이 하늘나라가 오게 만들려고 마음이 굳었느니라. 네가 궁극에 내 복음의 영적 성질과 의미를 깨닫고, 네가 복음을 선포하려고 용감한 일을 하리라는 것을 잘 알지만, 내가 떠날 때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걱정이 되노라. 네가 넘어지지 않을 것을 알면 내가 기뻐하리라. 내가 아버지께로 간 뒤에, 네가 내 사도가 되기를 그만두지 않고, 하늘나라의 대사(大使)로서 네가 적절히 처신할 것을 내가 알 수 있다면, 내가 기쁘게 되리라.”
181:2.8 (1956.3) 예수가 열심당원 시몬에게 말씀을 마치자마자, 불 같은 애국자는 젖은 눈을 닦으면서 대답했다: “주여, 내가 충성할까 걱정하지 마소서.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는 데 내 일생을 바치도록 내가 모든 일에 등을 돌렸고, 나는 넘어지지 아니하리이다. 나는 이제까지 온갖 실망을 견디었고, 나는 당신을 버리지 아니하리이다.”
181:2.9 (1956.4) 그리고 나서 시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예수는 말했다: “특히 이와 같은 때,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정말로 마음이 시원하구나. 그러나 착한 친구여, 네가 무엇을 말하는지 너는 아직도 모르느니라. 한 순간이라도 나는 너의 충성, 너의 헌신을 의심하고 싶지 않고, 이 모든 다른 사람처럼, 네가 서슴지 않고 싸움터에 나가서 나를 위하여 죽을 것을 내가 아노라” (그들은 모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이 너에게 요구되지 아니하리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내 제자들은 그 나라를 세우려고 싸우지 아니하리라고 내가 거듭 너희에게 일렀노라. 시몬아, 이것을 여러 번 너희에게 일렀으나, 너는 진실을 마주보려 하지 않느니라. 나에 대하여, 또 하늘나라에 대하여, 네가 충성할까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떠날 때, 그리고 네가 내 가르침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것과 하늘나라에서 또 다른 영적 체제 사무를 다루는 현실에 너의 그릇된 생각을 적응해야 한다는 것을 네가 마침내 깨닫게 될 때, 너는 어찌하려느냐?”
181:2.10 (1956.5) 시몬은 더 말하고 싶어했지만, 예수는 손을 들어 그를 막고서, 말을 이었다: “내 사도들 가운데 아무도 마음 속에 너보다 더 성실하고 정직하지 않으나, 내가 떠난 뒤에 아무도 너보다 더 속이 뒤집히고 마음 아파하지 않으리라. 네가 어떤 실망에 빠졌더라도 내 영이 너와 함께 거하겠고, 이들, 너의 형제들은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땅에서 가진 시민권과 아버지의 영적 국가에서 아들 신분, 이 둘의 관계에 대하여 너희에게 가르친 것을 잊지 말라. 케자의 것을 케자에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이른 모든 것을 잘 생각해 보라. 시몬아, 국가 권력에 대한 현세의 의무, 그리고 하늘나라의 형제 단체에서 영적 봉사를 동시에 인식하는 것에 관한 나의 권고를 필사 인간이 어떻게 적절히 따를 수 있는가 보여주는 데 너의 일생을 바치라. 네가 진리의 영의 가르침을 받으면, 현세의 통치자들이 오직 하나님께 속하는 존경과 섬김을 주제넘게 너에게 요구하지 않는 한, 땅에서 시민이 되고 하늘에서 아들이 되는 요건 사이에 결코 아무런 갈등이 없으리라.
181:2.11 (1957.1) “이제 시몬아, 네가 마침내 이 모든 것을 깨달을 때, 그리고 너의 우울함을 떨쳐버리고 큰 권능으로 이 복음을 선포하면서 떠나간 뒤에, 네가 낙심하는 시절을 통해서도 내내, 내가 너와 함께 있었고, 최후까지 너와 함께 계속할 것을 결코 잊지 말라. 너는 언제나 내 사도가 되겠고, 기꺼이 네가 영의 눈으로 보고 너의 뜻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충만히 굴복하게 된 뒤에, 그때 너는 내 대사로서 수고하러 돌아오리라. 내가 너에게 가르친 진리를 더디게 알아듣는다고 해서, 너에게 수여한 권한을 아무도 너에게서 빼앗지 못할지니라. 그래서 시몬아, 한번 더 너에게 경고하노니, 칼로 싸우는 자는 칼로 망해도, 영적으로 수고하는 자는 지금 있는 나라에서 기쁨과 평화를 가질 뿐 아니라 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얻느니라. 네 손에 맡겨진 일이 땅에서 끝났을 때, 시몬아, 너는 저기 내 나라에서 나와 함께 앉을지니라. 몹시 바라던 하늘나라를 네가 정말로 보겠으나, 이 생명에서는 아니라. 줄곧 나를 믿고, 내가 너에게 드러낸 것을 믿으라. 그리하면 너는 영생의 선물을 받으리라.”
181:2.12 (1957.2) 열심당원 시몬에게 말씀을 마치고 나서, 예수는 마태 레위에게 걸어가서 말했다: “사도 집단의 기금(基金)을 마련하는 일이 이제 더 네게 맡겨지지 아니하리라. 당장, 아주 곧 너희는 모두 흩어지겠고, 너희 형제 가운데 겨우 한 사람하고도 위로하고 받들어주는 관계를 가지는 것이 허락되지 아니하리라. 이 하늘나라 복음을 너희가 전파하려고 앞으로 가는 동안에,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새 동료들을 찾아야 하리라. 너희가 훈련받는 동안에 나는 둘씩 너희를 보냈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를 두고 떠나므로, 너희가 충격을 받고 정신을 차린 뒤에, 이 좋은 소식, 믿음으로 활력을 얻은 필사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선포하며, 너는 혼자 밖으로, 땅 끝까지라도 가리라.”
181:2.13 (1957.3) 그러자 마태가 말했다: “그러나 주여, 누가 우리를 보내고, 어디로 갈지 우리가 어찌 알리이까? 안드레가 우리의 길을 보일 것이니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아니라, 레위야, 복음을 선포하는 일로 안드레는 이제 더 너희를 지도하지 않으리라. 새 선생이 오는 그날까지, 정말로 그는 너희의 친구요 조언자로서 계속하리라. 그리고 나서 진리의 영이 하늘나라를 펼치는 일에 수고하라고 너희 하나하나를 바깥으로 이끌리라. 세관에서 처음에 나를 따르려고 나선 그날 이후로, 많은 변화가 너에게 왔느니라. 그러나 친교(親交)하는 관계에서 이방인이 유대인과 나란히 앉는 형제 단체의 환상을 네가 볼 수 있기 전에, 많은 변화가 더 와야 하느니라. 그러나 충분히 만족할 때까지, 네 유대인 형제들을 설득하고 싶은 마음을 따라 일을 계속하고 그 다음에 힘차게 이방인에게 방향을 돌리라. 레위야, 너는 한 가지를 분명히 믿어도 좋으니라: 너는 형제들의 신임과 애정을 얻었고, 저희가 다 너를 사랑하느니라.” (그리고 모두 열 명이 주의 말씀에 말없이, 승인한다는 표시를 하였다.)
181:2.14 (1958.1) “레위야, 금고를 채우느라 네가 걱정하고 희생하고 수고한 것에 대하여, 네 형제들이 모르는 많은 것을 내가 아노라. 돈자루를 가지고 다니는 자가 자리에 없어도, 하늘나라 사자들과 함께 내 작별 모임에 세리(稅吏)인 대사가 여기 있으니 내가 기쁘도다. 영(靈)의 눈으로 내 가르침의 뜻을 네가 헤아리도록 내가 기도하노라. 새 선생이 네 마음 속에 올 때, 그가 인도하는 대로 계속 따르라. 사람의 아들을 대담히 따르고 하늘나라 복음을 믿은, 미움받던 세리에게 아버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네 형제들에게―아니 온 세상에―보이라. 바로 처음부터, 레위야, 내가 이 다른 갈릴리 사람들을 사랑한 것 같이 너를 사랑하였노라. 그러면 아버지도 아들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음을 잘 아는 까닭에, 너의 수고를 통해서 복음을 믿게 된 사람들 사이에서, 네가 그렇게 구별하지 않도록 하여라. 그래서 하나님이 아무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 보시기에, 그리고 하늘나라의 친교에서, 누구에게나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이는 데 너의 여생을 바치라.”
181:2.15 (1958.2) 그리고 나서 예수는 야고보 세베대에게 걸어갔고, 주가 그에게 말씀하실 때 그는 말없이 서 있었다: “야고보야, 너와 네 아우가 언젠가 내게 와서 하늘나라에서 우대받는 명예를 구하였고 내가 그러한 명예는 아버지가 주시는 것이라 너희에게 일렀을 때, 나는 너희가 내 잔을 마실 수 있는가 물었고, 너희 둘은 그렇다고 대답하였느니라. 그때는 네가 할 수 없었더라도, 그리고 지금도 할 수 없다면, 너는 바야흐로 겪을 체험으로 그러한 봉사를 위하여 곧 준비되리라. 그런 행동으로 너희는 그때 형제들을 성나게 하였느니라. 저희가 이미 너희를 충분히 용서하지 않았다면, 네가 내 잔을 마시는 것을 볼 때 저희가 용서하리라. 네 봉사가 길든 짧든, 인내하여 네 목숨을 건지라.[1] [1809] 새 선생이 올 때, 그가 동정하는 자세를 가르치게 하고, 나를 철석같이 믿음으로, 그리고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복종함으로 생겨나는 관용, 사람을 헤아리는 바로 그 관용을 그 선생이 너에게 가르치게 하라. 하나님을 알고 아들을 믿는 제자의 인간적 애정과 함께 신다운 위엄을 보여주는 데 네 일생을 바치라. 그렇게 사는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복음을 드러내리라. 너와 네 아우 요한은 다른 길로 가겠고, 너희 중 하나는 다른 자보다 훨씬 먼저 영원한 나라에서 나와 함께 앉을 수도 있느니라. 참된 지혜는 용기 뿐 아니라 신중(愼重)을 포함한다는 것을 배우고자 하면 너에게 많이 도움이 되리라. 너의 공격적 태도에 어울리게 너는 지혜를 배워야 하느니라. 내 제자들이 이 복음을 위하여 서슴지 않고 목숨을 버릴 최고의 순간이 오리라. 그러나 어떤 보통 경우에도, 네가 살아서 기쁜 소식을 계속 전파하도록 불신자의 진노를 달래는 것이 훨씬 더 좋으리라. 여러 해 사는 것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을 많이 설득하도록, 네 힘이 닿는 한, 땅에서 오래 살라.”
181:2.16 (1958.3) 야고보 세베대에게 말씀을 마치고 나서, 주는 안드레가 앉은 식탁 끝까지 돌아 걸어가서, 충실하게 돕는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안드레야, 너는 하늘나라 대사들의 임시 우두머리로서 나를 충실하게 대표하였도다. 비록 네가 때때로 의심하였고 어떤 때에는 위험하게 두려움을 보였으나, 그래도 네 동료들을 다루는 데 너는 언제나 성실하게 공정하고, 뛰어나게 공평하였느니라. 너와 네 형제들을 하늘나라의 사자로서 세운 뒤로 계속, 너를 이 선택받은 자들의 임시 우두머리로 지명한 것을 제외하고, 너희는 모든 집단 행정 사무를 자치(自治)해 왔느니라. 어떤 다른 현세의 문제도 나는 너의 결정을 지도하거나 그에 영향을 미치려고 행동하지 않았노라. 내가 이렇게 한 것은 나중에 너희의 모든 집단 결정을 지휘하는 데 지도자를 마련해 주기 위한 것이었느니라. 내 우주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온 우주에서, 우리의 형제인 아들들은 어떤 영적 관계에도 개인으로서 대접받지만, 모든 집단 관계에서 우리는 어김없이 분명한 지도자를 마련해 주느니라. 우리 나라는 질서 있는 나라요, 의지를 가진 둘 이상의 인간이 협동하여 활동하는 곳에 반드시 지도하는 권한이 마련되느니라.
181:2.17 (1959.1) “이제, 안드레야, 내가 임명한 권한으로 네가 형제들의 우두머리이고, 네가 이렇게 나의 개인 대표로서 봉사했으매, 그리고 내가 바야흐로 너희를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려고 하는즉, 이 현세의 행정 사무에 관한 모든 책임에서 너를 해방하노라. 이제부터 영적 지도자로서 네 자격으로 네가 얻고, 따라서 네 형제들이 자유로이 인정하는 것을 제외하고, 너는 형제들에게 어떤 권한도 행사하면 안 되느니라. 내가 아버지께로 간 뒤에 저희가 분명한 법적 행위로 너에게 그러한 권한을 회복하지 않으면, 이 시간부터 너는 형제들에게 아무 권한을 행사해서는 안 되느니라. 그러나 이 집단의 행정 우두머리 책임을 이렇게 면제하는 것은 바로 눈앞에 닥친 시련의 시절에, 든든한 사랑의 손으로 네 형제들을 한데 붙들어두도록 네 힘이 닿는 대로 무엇이든지 할 도덕적 책임을 어떤 면에서도 덜지 않나니, 육체를 입고서 내가 떠나고 너희 가슴 속에서 살고 궁극에 너희를 모든 진리로 이끌 그러한 새 선생을 파송하는 사이에 시련의 시절이 틀림없이 있느니라. 내가 너희를 떠나려고 준비하므로, 너희 가운데 있는 한 사람으로서 내가 있을 때 시작되고 그 권한을 부여받았던 모든 행정 책임에서 너를 해방하고자 하노라. 이제부터 너희에 대하여, 그리고 너희 가운데서, 나는 오로지 영적 권한을 행사하리라.
181:2.18 (1959.2) “네 형제들이 너를 조언자로 계속 두기를 바란다면, 내가 지시하노니, 어떤 세상 일과 영적 일에도, 복음을 믿는 성실한 여러 신자 집단 사이에서 너는 최선을 다하여 평화와 조화를 권장해야 하느니라. 너희 형제들 사이에서 형제 사랑의 실용적 모습을 촉진하는 데 너의 여생을 바치라. 육체를 입은 내 형제들이 이 복음을 믿으려고 온전히 올 때 저희에게 친절하라. 서쪽에 그리스인들과 동쪽에 아브너에게, 사랑하고 치우치지 않게 헌신함을 나타내라. 이 내 사도들이, 땅에서 사방으로 흩어지고 거기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구원받는 좋은 소식을 선포하더라도, 바로 앞에 닥친 고달픈 시절에 너는 저희를 한데 붙들어야 하느니라. 그 극심한 시련을 겪는 시절에, 너희는 새 선생, 진리의 영이 오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서, 내가 몸소 함께 있지 않고서 너희는 이 복음 믿기를 배워야 하느니라. 그래서 안드레야, 사람들이 보기에 큰 일 행하는 것이 너에게 맡겨지지 않을지 몰라도 그러한 일을 하는 자들에게 선생과 조언자가 되는 데 만족하여라. 땅에서 끝까지 네 일을 계속하여라. 그리하면 영원한 나라에서 이 봉사를 네가 계속할지니, 왜냐하면 내가 이 무리에 속하지 않는 다른 양들이 있다고 여러 번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더냐?”
181:2.19 (1959.3) 그리고 나서 예수는 알패오 쌍둥이에게 건너가서, 둘 사이에 서서 말했다: “귀여운 아이들아, 너희는 나를 따르기로 작정한 세 형제 집단 중의 하나로다. 너희 여섯이 다 자기 혈육과 함께 평화롭게 일을 잘 했으되, 아무도 너희보다 낫게 하지 않았느니라. 어려운 시절이 바로 우리 앞에 닥쳤느니라. 너희와 형제들에게 닥치는 모든 것을 너희가 이해하지 못할지 모르나, 너희가 한때 하늘나라 일에 부름받았음을 결코 의심하지 말라. 한동안, 아무런 군중을 다룰 일이 없을 터이나, 낙심하지 말라. 너희 일생의 일이 끝났을 때, 내가 높은 곳에서 너희를 받아들이고, 거기서 영화롭게 너희는 천사 무리와 수많은 하나님의 높은 아들들에게 너희가 구원받은 이야기를 일러주리라. 평범한 수고의 질을 높이는 데 너희의 일생을 바치라. 땅에 있는 모든 사람과 하늘의 천사들에게, 하나님을 특별히 섬기는 데 한동안 일하라고 부름 받은 뒤에, 얼마나 즐겁고 용감하게 필사 인간이 예전에 하던 일로 돌아갈 수 있는가 보여주라. 한동안, 겉으로 나타나는 하늘나라 사무에서 너희의 일이 끝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체험을 새롭게 깨우침과 함께,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 시시한 노동이나 세속의 수고와 같은 것이 없다는 높은 깨달음을 가지고, 너희는 예전에 하던 일로 돌아가야 하느니라. 나와 함께 일해 온 너희에게 모든 것이 신성하게 되었고, 땅에서 하는 모든 수고가 아버지 하나님께 드린 봉사가 되기까지 하였느니라. 너희의 옛 사도 동료들이 하는 일에 관하여 소식을 들을 때, 저희와 함께 기뻐하고, 저희가 기다리는 동안에 하나님께 시중들고 섬기는 자로서 나날의 일을 계속하여라. 너희는 내내 나의 사도였고, 언제나 그러할지며, 다가오는 나라에서 내가 너희를 기억하리라.”
181:2.20 (1960.1) 그리고 나서 예수는 빌립에게 건너갔고, 그는 선 채로 주로부터 이 말씀을 받았다: “빌립아, 너는 나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많이 했어도 나는 최선을 다하여 모두 대답하였고, 이제 가장 정직하지만 비영적 정신에서 일어난 그러한 너의 마지막 질문에 내가 대답하리라. 나는 항상 너희에게 돌아왔는데, 너는 ‘주가 떠나가고 세상에서 우리끼리만 남겨놓으면 내가 무엇을 할까?’ 혼잣말을 하고 있었느니라. 아, 너는 믿음이 적구나! 그래도 너는 거의 여러 형제만큼 믿음을 가졌고, 빌립아, 너는 착한 집사였느니라. 너는 오직 몇 번만 우리의 기대에 어긋났고, 그 실패 가운데 하나를 우리는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이용했느니라. 너의 집사(執事) 직책은 거의 끝났고, 곧 네가 하라고 부름 받은 일―이 하늘나라 복음 전하는 일―을 충만히 해야 하느니라. 빌립아, 너는 언제나 사람들이 네게 보여주기를 바랐고, 오래지 않아 너는 큰 일을 보게 될지니라.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네가 보는 것이 훨씬 더 나으리라. 그러나 물질만 보는 눈으로도 네가 성실하였은즉, 너는 살아서 내 말이 이루어짐을 보리라. 그리고 나서 네가 영적 시력을 축복받았을 때, 네 할 일을 하러 떠나가서, 물질 지성의 눈이 아니라 영적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찾고 영원한 현실을 추구하도록 인류를 이끄는 운동에 네 목숨을 바치라. 빌립아, 네가 땅에서 큰 사명을 가졌음을 기억할지니, 세상이 너의 성향과 똑같이 인생을 바라보는 자들로 가득 차 있음이라. 너는 큰 일을 해야 하고, 믿음 속에서 그 일을 마쳤을 때, 내 나라에서 너는 나에게로 올지니라. 그리하면 눈이 구경하지 못하고 귀도 듣지 못하고 필사자의 머리도 생각지 못한 것을 내가 크게 기뻐하며 네게 보여주리라. 그동안에, 영의 나라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고, 내가 새 선생의 영으로서, 영의 나라에서 너를 앞으로 인도하게 하여라. 내가 이 땅의 필사자로서 너와 함께 머물렀을 때 내가 이룰 수 없던 것을 이 방법으로 너를 위하여 많이 행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빌립아, 언제나 기억하여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181:2.21 (1960.2) 그리고 나서 주는 나다니엘에게 건너갔다. 나다니엘이 서자, 예수는 앉으라고 명하고, 옆에 앉으면서 말했다: “나다니엘아, 네가 내 사도가 된 뒤로, 너는 편견 없이 살고 더욱 관대하게 되려고 연습하기를 배웠느니라. 그러나 네가 배울 것이 훨씬 많이 있느니라. 너의 한결같은 성실함에 동료들이 언제나 훈계를 받았으니, 너는 저희에게 축복이었도다. 내가 떠났을 때, 너의 솔직함은 새 형제와 옛 형제들과 함께 어울리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느니라. 좋은 생각을 표현하는 것조차 듣는 사람의 지적(知的) 상태와 영적 성장에 따라서 조절되어야 하는 것을 너는 배워야 하느니라. 분별과 함께할 때 성실은 하늘나라의 일에서 가장 쓸모가 있느니라.
181:2.22 (1961.1) “형제들과 함께 일하기를 배우고자 하면, 네가 더욱 영구한 일을 성취할 수도 있느니라. 그러나 너처럼 생각하는 자들을 찾아서 자신이 떠나버린 것을 발견하면, 그 경우에 하나님을 아는 제자가 세상에서 혼자 있고 동료 신자들로부터 온통 고립되었을 때도 하늘나라를 세우는 자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하는 데 일생을 바치라. 나는 네가 끝까지 충실할 것을 알고, 하늘에 있는 내 나라에서 더 크게 봉사하는 일에 언젠가 너를 환영하리라.”
181:2.23 (1961.2) 그리고 나서 나다니엘이 예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처음에 이 하늘나라에 봉사하도록 나를 부르신 뒤로 늘 당신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왔지만,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나이다. 나는 다음에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 모르고, 내 형제의 대부분도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하지만, 혼란스럽다고 고백하기를 꺼려하나이다. 당신은 나를 도와주실 수 있나이까?” 예수는 손을 나다니엘의 어깨에 얹으면서 말했다: “친구여, 나의 영적 가르침의 뜻을 깨달으려고 애쓰면서 너희가 어리둥절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니, 네가 유대 전통의 선입관으로 인하여 무척 장애를 받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에 따라서 내 복음을 풀이하려는 끈질긴 성향으로 너무나 혼란에 빠졌음이라.
181:2.24 (1961.3) “입으로 전하는 말로 내가 너희에게 많이 가르쳤고, 나는 너희 가운데서 내 일생을 살아 왔노라. 너희의 머리를 깨우치고 너희 혼을 해방하려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내가 행하였고, 너희는 내 가르침과 일생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모든 선생 중에 대선생의 손에서―실제 체험으로―얻으려고 이제 준비해야 하느니라. 이제 너희를 기다리는 이 모든 새 체험을 겪는 가운데, 나는 너희 앞에 가고, 진리의 영이 너희와 함께 할지니라. 두려워 말라. 너희가 이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새 선생이 올 때, 땅에서 너희 여생을 통하여 내내, 그리고 영원한 시대에 계속 너희의 훈련을 통하여, 그가 너희에게 드러내리라.”
181:2.25 (1961.4) 그리고 나서, 주는 모두를 향하여 말했다: “복음의 온전한 뜻을 너희가 깨닫지 못했다고 절망하지 말라. 너희는 유한한 필사 인간일 뿐이요,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것은 무한하고 신성하고 영원하니라. 참을성을 가지고 기운을 내라. 파라다이스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완전하게 되는 체험을 너희가 점진적으로 계속 얻을 영원한 시대가 너희 앞에 있느니라.”
181:2.26 (1961.5) 그리고 나서 예수는 토마스에게로 갔고, 그는 서서 주의 말씀을 들었다: “토마스야, 너는 때때로 믿음이 모자랐지만, 의심하는 시절이 왔을 때, 용기가 모자란 적이 없었느니라. 그릇된 선지자와 거짓된 선생들이 너를 속이지 못할 것을 내가 잘 아노라. 내가 떠난 뒤에, 네 형제들은 새 가르침을 보는 너의 비평 방법을 더욱 고맙게 여기리라. 다가올 시절에 너희가 모두 땅 끝까지 흩어질 때, 네가 여전히 나의 대사(大使)임을 기억하라. 자기 생애에서 영의 열매를 맺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는, 영에게서 태어난 남녀들의 체험 속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일하느니라. 그러한 생생한 진리가 펼쳐지는 것을 만났을 때, 사람의 비평하는 물질적 정신이 어떻게 지적으로 의심하는 타성(惰性)을 이길 수 있는가 보여주는 큰 일에 너의 일생을 바쳐라. 토마스야, 네가 우리와 함께 하여 나는 기쁘도다. 잠시 어리둥절한 때가 지난 뒤에, 너는 하늘나라의 수고를 계속하리라. 너의 의심은 형제들을 당황하게 했어도 나를 괴롭힌 적이 없느니라. 나는 너를 신임하고, 땅에서 가장 먼 구석까지도 네 앞에 가리라.”
181:2.27 (1962.1) 그리고 나서 주는 시몬 베드로에게 갔다. 예수가 말씀하는 동안에 그는 서 있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이 하늘나라 복음을 대중에게 선포하는 데 네 일생을 바칠 것을 아노라. 그러나 나와 함께 가까이 여러 해 동안 지냈어도, 네가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도록 많이 돕지 못하여 걱정이 되는구나. 무슨 체험을 거쳐야 네가 입 조심하기를 배우겠느냐? 네가 생각 없이 입을 열어, 너의 주제넘은 자신감 때문에, 너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문제를 일으켰는지! 그리고 너는 이 약점을 극복하지 않으면 너 자신에게 더욱 많은 문제를 일으킬 운명을 가졌느니라. 이 약점이 있는데도 형제들이 너를 사랑함을 네가 알고, 또한 이 결점이 너에 대한 나의 애정을 조금도 다치지 않음을 이해해야 하지만, 그런 결점은 너의 쓸모를 줄이고, 그침 없이 너에게 문제를 일으키느니라. 그러나 바로 오늘 밤에 겪을 체험으로부터, 의심할 여지 없이 너는 큰 도움을 받으리라. 시몬 베드로야, 내가 너에게 이제 이르는 것을 마찬가지로, 여기 모인 네 형제 모두에게 이르노라: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 때문에 실수하는 큰 위험에 빠지리라. 기록되었으되, ‘목자가 얻어맞고 양들이 널리 흩어지리라’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내가 없을 때, 나에게 닥치는 일 때문에 너희 가운데 더러는 의심에 굴복하고 넘어질 큰 위험이 있느니라. 그러나 내가 이제 너희에게 약속하노니, 잠시 동안 내가 너희에게 돌아오고, 그리고 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181:2.28 (1962.2) 그때 베드로가 손을 예수의 어깨에 얹고 말했다: “내 형제 모두가 당신 때문에 의심에 빠져도 상관 없이, 당신께 약속하오니, 당신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 때문에 내가 걸려 넘어지지 아니하리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가겠고, 필요하다면 당신을 위하여 죽으리이다.”
181:2.29 (1962.3) 베드로가 주 앞에 섰고, 모두가 뜨거운 감정과 그를 향한 진정한 사랑에 넘쳐서 부르르 떨자, 예수는 그의 젖은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베드로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오늘 밤에 수탉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서너 번 부인하리라. 이처럼 나와 평화로운 관계에서 배우지 못한 것을 너는 많은 시련과 슬픔을 통해서 배우리라. 네가 이 필요한 교훈을 정말로 배운 뒤에, 너는 형제들에게 힘을 주고, 이 복음을 전도하는 데 바치는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느니라. 하지만 너는 감옥에 갇히고, 아마도, 나를 따라서 아버지의 나라를 세우는 데 사랑으로 봉사하는, 최상의 값을 치를 수도 있느니라.
181:2.30 (1962.4) “그러나 내 약속을 기억하여라: 내가 살아난 뒤에, 아버지께로 가기 전에 한동안 너희와 함께 머무르리라. 너희가 지금 곧 거쳐야 하는 것을 위하여, 오늘 밤에도 아버지가 너희 하나하나에게 힘 주시기를 내가 간구하리라.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내가 너희를 다 사랑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이제부터 너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느니라.”
181:2.31 (1962.5) 다음에 찬송을 하나 부르고 나서, 그들은 올리브산에 있는 캠프를 향하여 떠났다.
182:0.1 (1963.1) 엘리야와 마리아 마가의 집에서 겟세마네 캠프로 돌아가는 길에 예수가 열한 사도를 이끌었을 때는 이 목요일 밤 10시쯤이었다. 산에서 그날 이후로, 눈을 떼지 않고 예수를 감시하는 것을 요한 마가는 자기 일로 삼았다. 요한은 잠이 모자랐으므로, 주가 2층 방에서 사도들과 함께 있는 동안 몇 시간 쉬었다. 그러나 그들이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소리를 듣자, 그는 일어나서 재빨리 몸에 리넨 외투를 걸쳤고, 그들을 따라서 도시를 지나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공원 옆에 그들의 사립 야영지로 갔다. 이날 밤과 이튿날 내내, 요한 마가는 주에게 아주 가까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계속하여, 십자가에 처형되는 시간까지 모든 것을 구경하고 주가 말씀한 많은 것을 엿들었다.
182:0.2 (1963.2) 예수와 열한 사도가 캠프로 돌아가는 동안, 사도들은 유다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로소 궁금해졌고, 그들 가운데 하나가 예수를 저버릴 것이라는 주의 예언에 관하여 서로 말을 주고받았으며, 가룟 유다에게 만사가 순조롭지 않다는 것을 처음으로 의심했다. 그러나 캠프에 다다르고, 그가 그들을 맞이하려고 기다리며 거기 있지 않은 것을 볼 때까지, 그들은 드러내놓고 유다에 관하여 논평하는 데 말려들지 않았다. 유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알려고 모두가 안드레를 에워쌌을 때, 그들의 우두머리는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나는 유다가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그가 우리를 버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182:1.1 (1963.3) 캠프에 도착하고 몇 순간 지난 뒤에 예수는 그들에게 말했다: “친구와 형제들아, 너희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느니라. 이 시간에, 그리고 우리끼리 따로 떨어져 있고, 그동안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우리가 해야 하는 모든 일에 이제부터 우리를 지탱할 힘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기를 바라노라.”
182:1.2 (1963.4) 이렇게 말씀하고 나서, 예수는 올리브산에서 위쪽에 조금 떨어진 곳으로 길을 인도했고, 예루살렘이 전부 내려다보이는 가운데, 그들을 임명하는 날에 한 것처럼, 그의 둘레에 동그라미를 지어, 납작한 큰 바위 위에 무릎을 꿇으라고 명했다. 그리고 나서, 거기에 부드러운 달빛 아래서 영화롭게 되어 그들 가운데 서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르고 기도했다:
182:1.3 (1963.5) “아버지여, 내 때가 왔사오니,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도록 이제 아들을 영화롭게 하소서. 내 영토에 있는 모든 생물에 대한 전권을 아버지가 내게 주신 줄 알고, 나는 하나님의 믿는 아들이 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리이다. 내가 지은 사람들이 아버지가 유일한 참 하나님이요 만물의 아버지임을 아는 것, 그리고 아버지가 세상으로 보낸 자를 저희가 믿는 것, 이것이 영생이나이다. 아버지여, 땅에서 나는 아버지를 높이었고 아버지가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마쳤나이다. 우리 창조에 있는 자녀들에게 수여하는 과제를 거의 마쳤고, 오직 육체를 입은 내 목숨을 버리는 일이 남았나이다. 이제, 아 아버지여, 이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으로 나를 영화롭게 하시고 아버지의 바른 편에 한번 더 나를 받으소서.
182:1.4 (1964.1) “아버지가 세상에서 선택하고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나는 아버지를 나타냈나이다. 저희는―모든 생명이 아버지 손에 있는 것 같이―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가 저희를 내게 주셨고, 나는 생명의 길을 가르치면서 저희 가운데 살아 왔고 저희는 믿었나이다. 이 사람들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아버지로부터 왔고, 육체를 입은 내 인생이 아버지를 여러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것임을 배우고 있나이다. 아버지가 주신 진리를 나는 저희에게 드러냈나이다. 이 내 친구와 대사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받으려고 진지하게 결의하였나이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나왔고, 아버지가 나를 이 세상으로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려 한다고 저희에게 일렀나이다. 아버지여, 이 택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나이다. 저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요, 육체로 머무른 동안 내가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대표한 것 같이, 내가 아버지의 일로 돌아간 뒤에 나를 세상에 대표하라고 세상에서 택한 자들을 위한 것이나이다. 이 사람들은 내 것이요 아버지가 저희를 내게 주셨으나, 나의 모든 것이 늘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이었던 모두를 아버지가 이제 내 것이 되게 하셨나이다. 아버지는 내 안에서 높임을 받으셨고 이제 이 사람들 안에서 내가 영예 받기를 비나이다. 나는 이제 더 이 세상에 있을 수 없고, 아버지가 내게 하라고 주신 일로 돌아가려 하나이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와 우리 나라를 대표하라고 이 사람들을 두고 떠나야 하나이다. 아버지여, 육체로 목숨을 바치려고 내가 준비하는 동안 이 사람들이 충실하도록 지키소서.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이 내 친구들이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게 도우소서. 저희와 함께 있을 수 있는 한, 내가 저희를 지키고 안내할 수 있었어도, 나는 이제 떠나려 하나이다. 우리가 저희를 위로하고 힘을 줄 새 선생을 우리가 보낼 수 있을 때까지, 아버지여, 저희와 가까이 계시옵소서.
182:1.5 (1964.2) “아버지는 내게 열두 사람을 주셨고 하나만 제외하고 저희를 모두 지켰지만, 복수의 아들은 우리와 더 사귀려 하지 않나이다. 이 사람들은 연약하고 물러도 우리가 저희를 신뢰할 수 있음을 아나이다. 나는 저희를 증명했고, 저희가 아버지를 존경하는 것처럼 저희는 나를 사랑하나이다. 나를 위하여 저희가 많이 고통받아야 하지만 하늘나라에서 아들이 되는 확신을 가지는 기쁨으로 저희가 또한 채워지기를 바라나이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고 진리를 가르쳤나이다. 나를 미워해 온 것처럼 세상이 저희를 미워할 수도 있지만,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지 말고 오직 세상에서 악으로부터 저희를 지켜주시기를 구하나이다. 저희를 진리 속에서 거룩하게 하소서,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이나이다. 아버지가 나를 이 세상으로 보내신 것 같이, 바로 그렇게 이 사람들을 세상으로 보내고자 하나이다. 저희에게 가르친 진리와 드러낸 사랑을 통하여 깨끗하게 되라 저희를 격려하도록 저희를 위하여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아버지를 섬기는 일에 일생을 거룩히 바쳤나이다. 아버지여, 내가 떠난 뒤에 아버지가 이 형제들을 돌보기를 아버지께 부탁할 필요가 없음을 잘 아나이다. 나처럼 아버지가 저희를 사랑함을 아오나, 아들이 그런 것 같이 아버지가 필사 인간을 사랑함을 저희가 더 잘 깨닫도록 내가 이렇게 하나이다.
182:1.6 (1964.3) “이제 아버지여, 이 열한 사람 뿐 아니라, 또한 이제 믿거나, 저희가 미래에 수고할 때 전하는 말씀을 통하여 지금부터 하늘나라 복음을 믿을지도 모르는 모든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자 하나이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같이, 저희가 다 하나 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으며, 이 신자들이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있고, 우리의 영들이 다 저희에게 깃들기를 바라나이다.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내 아이들이 하나이면, 그리고 내가 저희를 사랑한 것 같이 저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을 믿고, 내가 계시한 진리와 영광을 기꺼이 받아들이리이다. 아버지가 내게 준 영화(榮華)를 나는 이 신자들에게 드러냈나이다. 아버지가 영적으로 나와 함께 사신 것 같이, 나는 저희와 함께 육체를 입고 살았나이다. 아버지가 나와 하나였던 것 같이, 나는 저희와 하나가 되었고, 새 선생도 저희와 함께, 그리고 저희 안에서 늘 하나가 되리이다. 그리고 아들이 하는 것처럼 아버지가 저희를 사랑하며, 나를 사랑한 것 같이 아버지가 저희를 사랑하는 것을 육신으로 내 형제들이 알도록, 나는 이 모든 것을 행하였나이다. 아버지여, 머지 않아 저희가 와서 영광 속에 나와 함께 있고, 나아가서 파라다이스 품에서 아버지와 함께 하도록 이 신자(信者)들을 구하기 위하여 나와 함께 일하소서. 필사 육체의 모습으로 시간 세계에서 씨 뿌려 얻는 영원한 수확으로서, 아버지가 내 손에 주신 모든 것을 저희가 볼 수 있도록, 나와 함께 겸손히 섬기는 자들을 나와 함께 영화롭게 두고자 하나이다. 이 세상의 기초(基礎)를 놓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내가 가졌던 영화를 땅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 보여주기를 내가 몹시 바라나이다. 올바른 아버지여, 이 세상은 아버지를 거의 몰라도 나는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를 이 신자들에게 알려주었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이름을 다른 세대들에게 알려주리이다.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셨던 것 같이―정말 그러하니―아버지가 세상에서 저희와 함께 계시리라 이제 내가 저희에게 약속하나이다.”
182:1.7 (1965.1) 열한 사도는 몇분 동안 예수의 둘레에 이렇게 동그라미를 지어 무릎을 끓고 남아 있다가 일어나서 가까이 있는 캠프로 말없이 돌아갔다.
182:1.8 (1965.2) 예수는 추종자들 사이에서 단결이 있기를 기도했지만, 똑같이 행동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죄는 움직이지 않는 수준의 악한 타성(惰性)을 만들어내지만, 올바름은 영원한 진리의 살아 있는 현실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신다운 영들이 점진적으로 교통하는 가운데, 개인이 체험하는 창조 정신에 영양을 준다. 신자인 아들이 신성한 아버지와 가지는 영적 친교에는, 자기들의 교리가 최종이고 그 종파가 우수하다는 집단 의식이 결코 존재할 수 없다.
182:1.9 (1965.3) 사도들과 함께 이 마지막 기도를 드리는 과정에서 주는 그가 아버지의 이름을 세상에 나타냈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이것이 육체를 입고서 완전하게 된 일생을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냄으로써 참으로 그가 한 일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려 했지만, “스스로 계신 이”라고 언급하는 지경보다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자신을 더 드러내라고 재촉받았을 때 오직 “나는 스스로 계신 이”라고 밝혔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가 땅에서 일생을 마치고 나서 아버지의 이 이름이 더욱 드러났고, 그래서 주, 곧 육신화된 아버지는 참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182:1.13 (1965.7) 나는 모든 시대의 소망이라.
182:1.14 (1965.8) 나는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열린 문이라.
182:1.15 (1965.9) 나는 끝없는 생명의 실체이라.
182:1.16 (1965.10) 나는 선한 목자이라.
182:1.17 (1965.11) 나는 무한한 완전에 이르는 길이라.
182:1.18 (1965.12)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182:1.19 (1965.13) 나는 영생의 비밀이라.
182:1.20 (1965.14)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182:1.21 (1965.15) 나는 유한한 내 자녀들의 무한한 아버지이라.
182:1.22 (1965.16)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라.
182:1.23 (1965.17) 나는 살아 있는 진리를 아는 모든 사람의 희망이라.
182:1.26 (1965.20) 이처럼 예수는 모든 세대에게 하나님 이름의 생생한 계시를 확대하였다. 신의 사랑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냄에 따라서, 영원한 진리는 늘 그의 이름을 더욱더 드러낸다.
182:2.1 (1966.1) 캠프로 돌아와서 유다가 자리에 없음을 알았을 때 사도들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열한 사람이 배반한 동료 사도에 관하여 열띤 논의에 말려든 동안, 다윗 세베대와 요한 마가는 예수를 한 옆으로 모시고 가서, 그들이 며칠 동안 유다를 감시하고 있었는데, 그가 주를 적들의 손에 팔아넘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털어놓았다. 예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였으나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친구들아,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어떻게 뜻하시지 않으면 아무 일도 사람의 아들에게 일어날 수 없느니라. 너희는 마음에 걱정하지 말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함께 해결되리라.”
182:2.2 (1966.2) 예수의 명랑한 태도는 사라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는 점점 더 심각해졌고 슬퍼지기까지 했다. 사도들은 마음이 많이 불안해졌기 때문에 주가 텐트로 돌아가라 친히 부탁했을 때조차 돌아가기 싫어 했다. 다윗과 요한과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그는 모두 열한 사도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친구들아, 너희는 가서 쉬라. 내일의 일을 위하여 준비하라. 우리 모두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뜻에 복종해야 함을 기억하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맡기노라.”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들에게 텐트로 가라고 손짓했지만, 그들이 갈 때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을 불러 말했다: “너희가 잠시 나와 함께 남아 있기를 바라노라.”
182:2.3 (1966.3) 사도들은 다만 글자 그대로 지쳤기 때문에, 잠에 곯아떨어졌다. 예루살렘에 온 이후로 죽 잠이 모자라고 있었다. 그들이 따로 자기 잠자리로 가기 전에, 열심당원 시몬은 칼과 다른 무기(武器)들이 저장되어 있는 자기 텐트로 모두를 이끌고 가서, 각자에게 이 싸우는 도구를 나누어주었다. 나다니엘을 제외하고, 모두가 이 무기를 받고 그것으로 무장하였다. 나다니엘은 무장(武裝)을 거절하며 말했다: “형제들아, 주는 그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그 나라를 실현하려고 제자들이 칼로 싸워서는 안 된다고 우리에게 거듭 일렀느니라. 나는 이것을 믿고, 주가 그를 방어하느라고 우리에게 칼을 쓰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지 않노라. 우리는 모두 그의 막강한 힘을 보았고, 그가 적들에 대항하여 자신을 방어하기를 원한다면 그리할 수 있음을 아노라. 그가 적들에게 저항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과정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애쓰는 것을 나타냄이 틀림없도다. 기도는 하여도 나는 칼을 휘두르지 않겠노라.” 나다니엘의 연설을 듣자, 안드레는 자기 칼을 열심당원 시몬에게 돌려주었다. 그래서 밤 동안 흩어질 때 그들 중에 아홉이 무장하였다.
182:2.4 (1966.4) 한동안 유다가 배반자인 것을 분개하는 마음 때문에 사도들은 머리 속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마지막 기도를 드리는 과정에서 유다를 언급하는 주의 말씀 때문에 그가 그들을 버렸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182:2.5 (1966.5) 여덟 사도가 마침내 자기 텐트로 돌아간 뒤에,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이 주의 지시를 받으려고 옆에 서 있는 동안, 예수는 다윗 세베대를 소리쳐 불렀다: “가장 빠르고 믿을 만한 사자를 내게 보내라.” 다윗이 한때 예루살렘과 벳세다 사이에 밤 동안 사자 봉사에서 주자였던 야곱이라는 사람을 주께 데려왔을 때, 예수는 그에게 말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필라델피아에, 아브너에게 가서 말하라: ‘주가 너에게 평화의 문안을 보내며, 그가 자기 적들의 손에 넘겨질 때가 왔다, 저희가 그를 죽게 하겠으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고, 아버지께로 가기 전에 너에게 얼마 안 있어 나타날 것이요, 그때 새 선생이 언제 너희 마음 속에 살려고 오는가 너에게 지침을 주리라.’” 그리고 마음에 들게 야곱이 이 전하는 말을 연습했을 때 예수는 그를 떠나보내며 말했다: “어떤 사람이 너에게 무엇을 할까 두려워 말지니, 야곱아 오늘 밤 보이지 않는 사자가 네 옆에서 달리리라.”
182:2.6 (1967.1) 그리고 나서 그들과 함께 야영하던, 그리스인 방문자들의 우두머리를 향하여 말했다: “내 형제여, 내가 너에게 미리 경고하였은즉, 바야흐로 일어나려 하는 사건에 마음이 흔들리지 말라. 사람의 아들이 적들, 유대인의 주사제와 권력자들의 선동으로 죽음을 당하리라. 그러나 아버지께로 가기 전에, 내가 살아나서 잠시 동안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이 모든 것이 일어남을 네가 보고 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네 형제들에게 힘을 주라.”
182:2.7 (1967.2) 보통 상황에서는 사도들이 주에게 직접 밤 인사를 드렸을 터이지만, 이날 저녁에 그들은 유다가 탈퇴했음을 갑자기 깨닫고 나서 그에 골똘했고, 주의 작별 기도의 특별한 성질에 너무 감동을 받아서, 잘 가라는 인사를 듣고 말없이 떠났다.
182:2.8 (1967.3) 예수는 안드레가 그날 밤에 옆을 떠날 때 이렇게 말하기는 했다: “안드레야, 내가 이 잔을 마신 뒤에, 내가 너희에게 다시 올 때까지 네 형제들을 함께 붙들어두도록 할 수 있는 대로 하여라. 내가 이미 너희 모두에게 일러준 것을 깨달았으니 네 형제들에게 힘을 주라. 평화가 네게 있을지어다.”
182:2.9 (1967.4) 때가 이미 너무 늦었기 때문에, 사도들 가운데 아무도 그날 밤에 보통 아닌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최악에 대비하도록 그들은 잠을 청했다. 유월절을 준비하는 날 오후에는 아무런 속세의 일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주사제들이 아침 일찍 주를 체포하려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직 다윗 세베대와 요한 마가가 바로 그날 밤에 예수의 적들이 유다와 함께 오고 있음을 알았다.
182:2.10 (1967.5) 다윗은 그날 밤에 베다니ㆍ예루살렘 길로 연결하는 위쪽 산길에서 파수를 보려고 준비했고, 한편 요한 마가는 기드론을 거쳐 겟세마네로 올라오는 길에서 지킬 작정이었다. 스스로 짊어진 전초(前哨) 임무를 보려고 떠나기 전에 다윗은 예수에게 작별을 알리며 말했다: “주여, 당신과 함께 봉사하느라고 나는 대단히 즐거웠나이다. 내 형제들은 당신의 사도이지만, 나는 그보다 작은 일을 마땅히 해야 하는 대로 기쁘게 처리하였나이다. 그리고 당신이 가실 때, 나는 마음에 사무치게 당신이 안 계셔 서운하리이다.” 그러자 예수가 다윗에게 말했다: “다윗아, 이 사람아, 남들은 하라고 시킨 일을 했으나 이 봉사는 네가 마음에 우러나서 하였고, 너의 헌신은 내가 잊지 아니하였노라. 너도 언젠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나와 함께 섬길지니라.”
182:2.11 (1967.6) 그리고 나서, 위쪽 산길 옆에서 망을 보려고 갈 준비를 하면서 다윗은 예수에게 말했다: “주여, 당신도 아시다시피, 나는 당신의 가족을 부르러 사람을 보냈고, 저희가 오늘 밤 예리고에 있다고 한 사자가 보낸 소식을 받았나이다. 밤에 그 끔찍한 길을 올라오는 것이 위험할 터이므로, 저희는 내일 아침 일찍 여기에 오리이다.” 다윗을 내려다보며 예수는 다만 말했다: “그리 될지어다, 다윗아.”
182:2.12 (1967.7) 다윗이 올리브산으로 올라가고 나서, 요한 마가는 시내를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길 가까이서 지키고 있었다. 예수 가까이 있고, 무슨 일이 돌아가는지 알고 싶은 큰 욕심이 아니었다면, 요한은 이 자리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다윗이 그를 떠난 뒤에 조금 있다가, 예수가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과 함께 가까운 골짜기로 물러나는 것을 지켜보았을 때, 요한 마가는 한데 엉킨 헌신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서, 파수 자리를 버리고 그들을 뒤따라가서, 수풀 속에 숨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동산에서 마지막 순간에, 유다와 무장한 호위병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나타나기 바로 전에 벌어진 모든 것을 보고 엿들었다.
182:2.13 (1968.1) 이 모든 것이 주의 캠프에서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가룟 유다는 성전 경비원의 지휘관과 의논하고 있었는데, 그 지휘관은 배반자의 지시를 받고 예수를 체포하기 위하여 떠날 준비를 하며 부하들을 소집했다.
182:3.1 (1968.2) 캠프 둘레에서 모든 것이 가라앉고 조용해진 뒤에, 예수는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을 데리고 가까운 골짜기에서 조금 위로, 전에 기도하고 교통하려고 자주 갔던 곳으로 올라갔다. 세 사도는 그가 몹시 침울함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고, 주가 그렇게 마음이 무겁고 슬픔에 잠긴 것을 전에 지켜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그가 기도하는 장소에 다다랐을 때, 그는 세 사람에게 앉아서 함께 지키라고 명했고, 한편 그는 돌 던지면 닿을 곳에 기도하러 가버렸다.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나서 그는 기도했다: “아버지여, 나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이 세상으로 왔고 그대로 하였나이다. 내가 육체로 이 목숨을 버릴 때가 왔음을 알고, 이로부터 움츠러들지 않사오나 이 잔을 마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가 알고 싶나이다. 내가 살아서 아버지를 기쁘게 한 것 같이, 죽어서도 아버지를 기쁘게 하리라는 확신을 내게 보내소서.”
182:3.2 (1968.3) 주는 몇 순간 동안 기도(祈禱)에 잠긴 태도로 남아 있었고, 그리고 나서 세 사도에게 가서, 이들이 잠에 곯아떨어진 것을 발견했는데, 눈꺼풀이 무겁고 깨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깨우면서 예수는 말했다: “저런! 너희는 한 시간도 나와 함께 지킬 수 없느냐? 내 혼이 죽기까지 지극히 슬프고, 내가 너희의 동반을 무척 바라는 것을 너희는 깨달을 수 없느냐?” 세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 뒤에, 주는 다시 혼자서 따로 갔고, 땅에 엎드려 다시 기도했다: “아버지여, 이 잔을 피할 수 있음을 내가 아나이다―모든 것이 아버지께 가능하나이다―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왔고, 이것이 쓴 잔이기는 해도, 아버지의 뜻이라면 마시고자 하나이다.” 그가 이렇게 기도를 마치자, 막강한 천사 하나가 옆에 내려와서, 그에게 말하고 그를 어루만지며 힘을 주었다.
182:3.3 (1968.4) 세 사도와 말하려고 돌아왔을 때, 예수는 이들이 잠에 빠진 것을 다시 발견했다. 이들을 깨우며 말했다: “너희가 지키고 나와 함께 기도하는 것이 필요한 그러한 시간에―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더욱 기도할 필요가 있는데―내가 너희를 떠날 때 어찌하여 잠에 빠지느냐?”
182:3.4 (1968.5) 그리고 나서, 세 번째로 주는 물러가서 기도했다: “아버지여, 잠자는 내 사도들을 보시오니, 저희에게 자비를 보이소서. 정신은 정말 간절하여도 육신이 약하나이다. 이제, 아 아버지여, 이 잔을 지나쳐서 안 된다면, 마시고자 하나이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기도를 마치고 나서, 그는 땅에서 엎드린 채로 한 순간 있었다. 일어서서 사도들에게 돌아갔을 때, 그는 다시 한번 이들이 잠들었음을 발견했다. 이들을 둘러보고, 불쌍히 여기는 손짓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는 계속 자고 쉬라. 결정의 시간이 지났느니라. 사람의 아들이 적들의 손에 팔려 넘어갈 시간이 우리에게 닥쳤느니라.” 깨울까 하여 그들의 몸을 흔들려고 손을 뻗으면서 말했다: “일어나라, 캠프로 돌아가자. 보라 나를 저버리는 자가 가까이 있고, 내 양 떼가 흩어질 때가 왔음이라. 그러나 이런 일에 관하여 내가 이미 너희에게 일렀노라.”
182:3.5 (1968.6) 예수가 추종자들 사이에서 살던 여러 해 동안, 그들은 정말로 그의 신다운 성품에 관하여 많은 증명이 있었지만, 바로 지금 그가 인간이라는 새 증거를 바야흐로 구경하게 되었다. 그의 신성(神性)을 보이는 모든 계시 가운데 가장 큰 계시, 부활이 있기 바로 전에, 그가 필사 성품을 가졌다는 가장 큰 증명, 굴욕과 십자가 처형이 있어야 한다.
182:3.6 (1969.1) 동산에서 기도할 때마다, 그의 인간성은 그의 신성을 더 단단하게, 믿음으로 붙들었다. 그의 인간 의지는 아버지의 신다운 뜻과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다. 막강한 천사가 그에게 일러준 다른 여러 말씀 가운데, 모든 필사 인간이 시간의 존재로부터 영원히 진보하는 길까지 지나가는 데 물질의 분해를 거쳐야 하는 것과 똑같이, 사람의 죽는 체험을 아들이 거침으로 땅에서 수여 생애를 마치기를 아버지가 바란다고 전하는 말씀이 있었다.
182:3.7 (1969.2) 초저녁에는 그 잔을 들이키기가 그다지 어려운 듯 보이지 않았지만, 인간 예수가 사도들에게 작별을 알리고 쉬라고 그들을 보내자, 그 시련은 더욱 소름끼치는 것이 되었다. 예수는 모든 인간 체험에서 흔히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북받침과 가라앉음을 겪었고, 바로 지금 그는 일 때문에 피곤해졌고, 오랜 시간 힘들게 수고하고 사도들의 안전에 관하여 애처롭게 걱정하여 지쳐버렸다.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때에 육신화한 하나님의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느꼈는가 감히 이해할 수 없지만, 뚝뚝 방울지어 땀이 얼굴에서 굴러떨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큰 고뇌를 겪고 말할 수 없는 슬픔을 견디었다는 것을 안다. 자연스러운 사건이 흘러가는 대로 버려두기를 아버지가 뜻하셨다고 그는 드디어 확신했다. 자신을 구하려고, 한 우주의 최고 우두머리로서 자기의 통치권을 전혀 쓰지 않기로 그는 완전히 결심하였다.
182:3.8 (1969.3) 광대한 창조에서 집합된 무리들은, 가브리엘과 인격화된 예수의 조절자, 이 둘의 임시 합동 지휘 하에서, 이 장면 위에 이제 하늘을 떠돌고 있었다. 이 하늘 군대의 사단장(師團長)들은 예수 자신이 그들에게 개입하라고 명령하지 않으면, 땅에서 벌어지는 이 사건에 간섭하지 말라고 거듭하여 경고를 받았다.
182:3.9 (1969.4) 사도들과 헤어지는 체험은 예수의 인간 가슴에 큰 부담이었다. 사랑으로 인한 이 슬픔은 그를 내리눌렀고, 그가 잘 알다시피 그를 기다리던 죽음과 마주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사도들이 얼마나 약하고 얼마나 무지한가 깨달았고, 이들을 두고 떠나기가 두려웠다. 떠날 때가 왔음을 잘 알았지만, 그의 인간 마음은 고통스럽고 슬픈 이 끔찍한 곤경을 피할 어떤 정당한 길이 혹시 없을까 찾아내기를 몹시 바랐다. 이렇게 피할 길을 찾다가 찾아내지 못하자, 그 마음은 잔을 기꺼이 마시려 했다. 미가엘의 신다운 정신은 그가 열두 사도를 위하여 최선을 다한 것을 알았다. 그러나 예수의 인간 마음은 세상에 이들만 버려두고 가기 전에 그들을 위해서 무언가 더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예수의 가슴은 에이는 듯 아팠고, 그는 참으로 형제들을 사랑했다. 그는 육신(肉身)의 가족과 떨어져 있었고, 그가 택한 동료들 가운데 하나는 그를 저버렸다. 아버지 요셉의 민족은 그를 거절하였고, 이로서 땅에서 특별 사명을 가진 민족으로서 그들의 멸망할 운명을 결정하였다. 사랑이 헛수고가 되고 자비가 거절받음으로 그의 혼은 고통을 받았다. 이때는 바로, 마음을 짓밟는 잔인함과 끔찍한 고통으로 모든 것이 압도하는 듯이 보이는, 인간의 두려운 한 순간이었다.
182:3.10 (1969.5) 예수의 인간성은 남모르는 외로움, 대중 앞에서 겪는 치욕, 그의 운동이 실패로 보이는 이 상황에 덤덤하지 않았다. 이 모든 감정은 말할 수 없는 무게로 그를 내리눌렀다. 이 큰 슬픔 가운데 그의 머리는 나사렛에서 어린 시절과 갈릴리에서 그가 초기에 하던 일로 돌아갔다. 이렇게 큰 시련을 거치는 때에, 머리 속에서 땅에서 봉사하던 때에 즐거웠던 많은 장면이 떠올랐다. 나사렛ㆍ가버나움ㆍ헤르몬산, 그리고 반짝이는 갈릴리 바다에서 해가 뜨고 해가 지던 이 옛 기억들을 되살려 그의 인간 마음을 굳게 다지고, 오래지 않아 그를 저버릴 배반자와 마주치려고 준비하면서 자신을 달랬다.
182:3.11 (1970.1) 유다와 군인들이 도착하기 전에, 주는 평상시의 침착을 넉넉히 다시 찾았다. 정신이 육체를 이겼고, 믿음은 두려워하거나 의심을 품는 인간의 모든 성향을 압도하였다. 인간 성품을 한껏 실현하는 것을 재는 최고의 시험에 부닥쳤고 이를 만족스럽게 통과하였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아낌없이 헌신한 필사 인간으로서, 차분히, 그가 절대로 질 수 없음을 충분히 확신하고서, 한번 더 사람의 아들은 적들과 마주칠 준비가 되었다.
183:0.1 (1971.1) 마침내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을 깨운 뒤에, 예수는 그들이 내일의 직무에 대비하여 자기 텐트로 돌아가서 잠을 청하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때가 되자 세 사도는 정신이 초롱초롱해졌고, 잠깐 눈을 붙였기 때문에 기분이 새로와졌다. 게다가 그들은 흥분한 두 사자가 그 장면에 도착하자 자극을 받고 잠이 깨었다. 이 사자들은 다윗 세베대가 어디 있는가 찾았고, 베드로가 그들에게 다윗이 망보는 곳을 가르쳐 주자, 재빨리 그를 찾아 갔다.
183:0.2 (1971.2) 비록 사도들 가운데 여덟이 잠에 곯아떨어졌어도, 그들과 나란히 야영한 그리스인들은 문제가 일어날까 더 두려워했는데, 너무나 두려워서 위험한 일이 생길 경우에 경종을 울리라고 파수 하나를 세워놓았다. 이 두 사자가 캠프로 서둘러 갔을 때, 그리스인 파수는 동료들을 모두 깨우기 시작했고, 그들은 텐트에서 완전히 옷을 차려 입고 완전히 무장하여, 줄지어 나왔다. 여덟 사도를 제외하고 캠프 전체가 이제 잠에서 깨어났다. 베드로는 동료들을 부르고 싶었지만, 예수는 분명히 그를 막았다. 주는 그들에게 모두 자기 텐트로 돌아가라고 부드럽게 타일렀지만, 그들은 그 제안 따르기를 망설였다.
183:0.3 (1971.3) 추종자들을 해산하지 못했으므로, 주는 그들을 버려두고 겟세마네 공원 입구 가까이, 올리브 기름틀을 향해서 걸어 내려갔다. 비록 세 사도와 그리스인들과 캠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그를 바짝 따라가기를 주저했어도, 요한 마가는 올리브 나무들을 거쳐 서둘러 돌아서, 올리브 기름틀 가까이, 작은 오두막에 몰래 숨었다. 체포하는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사도들을 방해하지 않고 그를 붙잡도록 예수는 캠프에서, 친구들로부터 물러났다. 유다가 그를 배반하는 광경이 사도들의 적개심을 너무 건드려서 군인들에게 저항하다가 그와 함께 감금될까 저어하여, 주는 체포될 때 사도들이 깨어 있고 그 자리에 있게 만드는 것이 두려웠다. 함께 붙잡힌다면, 그들도 함께 죽을까 걱정이 되었다.
183:0.4 (1971.4) 그를 죽이려는 계획이 유대인 권력자 회의에서 시작된 것을 알았어도, 예수는 또한 모든 그런 사악한 계획이 루시퍼와 사탄과 칼리가스티아의 충분한 승인을 받았음을 알고 있었다. 또한 영역의 이 모반자들이 사도들 모두가 그와 함께 죽는 것을 보고 싶어 하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183:0.5 (1971.5) 예수는 올리브 기름틀 위에 혼자 앉아서, 거기서 배반자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이때 오직 요한 마가와 셀 수 없이 많은 하늘 관찰자의 무리가 그를 보았다.
183:1.1 (1971.6) 육체를 입고 주가 사신 생애가 종결되는 것과 관련된 수많은 말씀과 많은 사건의 의미를 사람들이 오해할 큰 위험이 있다. 무지한 종과 감각이 무딘 군인들에게 예수가 잔인한 대우를 받은 것, 그 재판의 불공평한 진행, 종교 지도자라고 공언하는 자들의 무딘 태도를, 이 모든 고통과 치욕에 참을성 있게 복종하면서 예수가 파라다이스에 계시는 아버지의 뜻을 참으로 실행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정말로, 진실로, 태어날 때부터 죽기까지, 아들이 필사 체험의 잔을 끝까지 들이켜야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아주 모질게 주를 고문(拷問)하고, 저항하지 않는 몸에 아주 끔찍하게 모욕을 연달아 퍼부은 인간, 문명화되었다고 생각되는 인간들의 미개한 행위를 부추기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예수가 필사 인생의 마지막 몇 시간에 견디도록 강요되었된 비인간적이고 충격적인 이러한 체험은 어떤 의미에서도, 아버지의 신성한 뜻과 상관이 없었다. 지친 사도들이 몸이 피곤해서 잠에 빠진 동안에, 공원(公園)에서 그가 세 차례 드린 기도에 나타난 바와 같이, 사람이 하나님께 마침내 굴복했을 때 그의 인간 성품은 승리에 넘쳐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를 서약했다.
183:1.2 (1972.1)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모든 필사자가 땅에서 육체를 입고 일생을 마쳐야 하는 것과 똑같이, 수여 아들이 땅에서 일생을 자연스럽게 마치기를 바라셨다. 보통 남자와 여자는 땅에서 마지막 몇 시간, 그리고 뒤이어 죽는 사건을 특별한 섭리로 쉽게 만들어주기를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예수는 사건들이 자연스럽게 풀려나가는 것과 보조를 맞추어 육체를 입은 목숨을 버리기로 했다. 끔찍할 정도로 확실히, 믿을 수 없는 굴욕과 치욕스러운 죽음을 향하여 휩쓸어간 비인간적 사건들이 사악하게 겹친 잔인한 손아귀에서, 그는 집요하게 자신을 구출하지 않으려 했다. 이 놀라운 증오의 표시, 그리고 전례 없이 잔인한 표현은 모조리, 나쁜 사람과 사악한 필사자들이 저지른 일이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그렇게 뜻하지 않았고, 예수의 대적들이 그렇게 지시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생각이 모자라는 악한 필사자들이 수여 아들을 이렇게 거절할 것을 보장하려고 많이 일했다. 죄의 아버지조차 십자가에서 처형받는 장면의 끔찍한 공포를 피하여 얼굴을 돌렸다.
183:2.1 (1972.2) 마지막 만찬을 들다가 그렇게 갑자기 식탁을 떠난 뒤에, 유다는 바로 사촌 집으로 갔고,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은 성전 경비원의 지휘관에게 곧장 갔다. 유다는 그 지휘관에게 경비원들을 소집하라 요청하고, 자기가 이들을 예수에게로 이끌 준비가 되었음을 그에게 알렸다. 기대된 것보다 조금 일찍 그 장면에 유다가 나타났기 때문에, 마가의 집을 향하여 떠나는 데 얼마큼 지체되었고, 유다는 그 집에서 아직도 사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예수를 발견하기를 기대했다. 주와 열한 사도는 배반자와 경비원들이 도착하기까지 꼬박 15분 전에 엘리야 마가의 집을 떠났다. 체포하는 사람들이 마가의 집에 이르렀을 때가 되어, 예수와 열한 사람은 도시의 담 바깥으로 한창 나가서, 올리브산 캠프로 가는 도중이었다.
183:2.2 (1972.3) 마가의 주택에서, 열한 사람의 일행 속에, 예수를 이렇게 발견하지 못하여 유다는 마음이 많이 흔들렸는데, 그 중에서 오직 두 사람이 대항하기 위하여 무기를 지녔다. 오후에 그들이 캠프를 떠났을 때 그는 어쩌다가 오직 시몬 베드로와 열심당원 시몬이 칼을 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유다는 도시가 조용할 때, 그리고 저항할 기회가 거의 없을 때 예수를 붙잡기를 희망했다. 그 배반자는 그들이 캠프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면, 60명이 넘는 충실한 제자들과 마주칠까 두려웠고, 그는 또한 열심당원 시몬이 수중에 무기를 수북하게 쌓아놓은 것을 알았다. 충성스러운 열한 사도가 그를 얼마나 미워할까 깊이 생각하자, 유다는 갈수록 더 조바심이 났고, 그들이 모두 그를 죽이려고 할까 두려웠다. 그는 불충했을 뿐 아니라 속으로 정말 겁쟁이였다.
183:2.3 (1973.1) 2층 방에서 그들이 예수를 찾아내지 못했을 때, 유다는 경비대의 지휘관에게 성전으로 돌아가라고 요청했다. 그 배반자와 한 약속이 그날 자정까지 예수를 붙잡아 오라고 요구한 것을 알고서, 이때가 되어 권력자들은 예수를 받아들이는 준비로 대사제(大司祭)의 집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유다는 같이 온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가의 집에서 예수를 놓쳤다, 그를 체포하러 겟세마네로 가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충실히 따르는 사람들이 60명이 넘게 그와 함께 야영하고 있고, 모두 단단히 무장하고 있다고 배반자는 이어서 설명했다. 유대인 권력자들은 예수가 언제나 무저항을 가르쳤다고 유다에게 주의를 주었지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모두가 그런 가르침에 복종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고 유다는 대답했다. 그는 정말로 자기 몸을 걱정했고, 따라서 무장한 군인 40명의 무리를 대담하게 요구했다. 유대 당국은 그런 무장한 군대가 관할 밑에 없었으니까, 대번에 안토니아 요새로 가서 로마인 사령관에게 이 경비대를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를 체포할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사령관은 재빨리 그 요청을 거절했고 그들을 그의 상관에게 보냈다. 무장한 로마 경비원들을 이용할 허락을 얻으려고 마침내 그들이 할 수 없이 바로 빌라도에게 갔을 때까지, 이렇게 한 부서에서 다른 부서로 가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빌라도의 집에 다다랐을 때는 밤이 늦었고, 그는 이미 아내와 함께 침실로 물러가 있었다. 그는 그 계획과 전혀 상관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아내가 그 요청을 허락하지 말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더군다나 꺼려했다. 그러나 유대인 산헤드린의 담당 관리가 자리에 있고 그가 친히 이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에, 이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도 그가 나중에 시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총독은 그 간청을 허락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183:2.4 (1973.2) 따라서, 가룟 유다가 11시 반쯤 되어 성전을 떠났을 때, 그에게는 60명이 넘는 사람―성전 경비원과 로마 군인들, 그리고 주사제와 권력자들의 호기심 있는 하인들―이 따라붙었다.
183:3.1 (1973.3) 횃불과 등불을 들고 이 무장한 군인 및 경비원의 일행(一行)이 동산에 접근했을 때, 누가 예수인가 재빨리 확인할 준비가 되고, 그래서 예수의 동료들이 그를 방어하려고 집결할 수 있기 전에 체포하는 자들이 쉽사리 예수를 잡을 수 있게 하려고, 유다는 일당의 앞에 훨씬 바깥으로 걸어나왔다. 유다가 주의 적들보다 앞서 나와 있기를 택한 데에는 아직도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군인들보다 앞서 그가 그 장면에 도착한 것처럼 보일 것이라, 그래서 예수 주위에 모인 사도들과 다른 사람들이 유다를 그의 뒤꿈치를 바짝 쫓아오는 무장한 경비원들과 직접 관련짓지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다는 체포하는 자들이 오는 것을 그들에게 경고하려고 서둘러 온 것처럼 꾸미려는 생각까지 했지만, 예수가 배반자에게 그런 생각을 방해하는 인사를 함으로 이 계획은 망쳐졌다. 비록 유다에게 친절하게 말했지만, 주는 유다를 배반자로서 맞이했다.
183:3.2 (1973.4) 30명 남짓한 동료 야영자들과 함께 있던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이, 횃불을 들고 무장한 무리가 산꼭대기를 휙 돌아오는 것을 보자마자, 이 군인들이 예수를 붙잡으러 오고 있음을 알았고, 모두 올리브 기름틀 가까이 달려갔는데, 거기에는 주가 달빛이 비치는 가운데 혼자 앉아 있었다. 군인들의 일행이 한쪽으로 다가오자, 세 사도와 그 동료들은 반대 쪽에서 다가왔다. 유다가 주에게 앞으로 걸어나와 인사하자, 주를 사이에 두고, 거기에 두 무리가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고, 유다는 그의 이마에 배반의 입맞춤을 하려고 준비하였다.
183:3.3 (1974.1) 경비원들을 겟세마네로 이끈 뒤에 그 배반자는 단지 군인들에게 예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입맞춤으로 그에게 인사한다는 약속을 이행하고, 다음에 그 장면에서 재빨리 물러날 수 있을까 바라고 있었다. 유다는 사도들이 모두 그 자리에 있고 감히 그가 그들의 사랑하는 선생을 배반한 것을 징계하느라고 자신을 집중하여 공격할까 크게 두려워했다. 그러나 주가 그를 배반자로 인사했을 때, 그는 정신이 너무 혼란하여 달아나려고 애쓰지 않았다.
183:3.4 (1974.2) 배반자가 다가올 수 있기 전에, 예수가 한 옆으로 걸어가서, 왼쪽 맨 앞에 있는 군인, 로마인들의 지휘관을 향하여,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하고 말했으니, 실제로 그를 배반하는 일로부터 유다를 구하려고 예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노력하였다. 그 지휘관은 대답했다, “나사렛 예수라.” 그러자 예수는 그 장교 앞으로 즉시 걸어나가서, 이 모든 세상을 지은 하나님의 차분한 위엄을 갖추고 거기 서서 말했다, “내가 그로다.” 이 무장한 무리 중에서 여러 사람이 예수가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을 들었고, 더러는 그의 대단한 행적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이 그가 이렇게 대담하게 자기 신분을 밝히는 말을 들었을 때, 행렬 앞 몇 줄에 선 자들이 갑자기 뒤로 자빠졌다. 그가 차분하고 품위 있게 신분을 밝히는 것을 듣고서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따라서 유다는 배반하려던 계획을 밀고 나갈 필요가 없었다. 주는 대담하게 적들에게 자신을 드러냈고, 그들은 유다의 도움 없이 그를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배반자는 이 무장한 무리와 함께 그가 거기 있는 것을 설명하려고 무슨 일인가 해야 했다. 게다가 예수를 그들의 손에 넘겨준다는 약속에 대한 보상으로 그가 수북히 받을 것이라 믿었던 큰 상(賞)과 명예를 받을 자격을 갖추기 위하여, 유대인 권력자들과 맺은, 주를 배신하는 거래에서 자기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183:3.5 (1974.3) 예수의 모습을 보고 그의 특별한 목소리를 듣고, 처음에 비틀거렸다가 경비원들이 다시 모이고, 사도와 제자들이 더 가까이 오자, 유다는 예수에게 걸어나가서,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만세― 주여, 선생이여.” 이렇게 유다가 주를 품에 안자, 예수는 말했다. “친구여, 이렇게 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느냐! 너는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배반까지 하려느냐?”
183:3.6 (1974.4) 사도와 제자들은 그 광경을 보고 글자 그대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 순간 아무도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자 예수는 유다의 배반하는 포옹을 풀고, 경비원과 군인들에게 걸어나가서 다시 물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다시 지휘관은 대답했다, “나사렛 예수라.” 예수는 다시 대답했다: “내가 그라고 너희에게 일렀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나를 찾거든, 이 다른 사람들이 가도록 버려두라. 나는 너희와 함께 갈 준비가 되었노라.”
183:3.7 (1974.5) 예수는 경비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었고, 군인들의 지휘관은 세 사도와 그 동료들이 평안히 제 갈 길을 가도록 아주 기꺼이 버려두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떠날 수 있기 전에, 예수가 지휘관의 명령을 기다리며 서 있는 동안, 대사제의 시리아인 경호원 말고라는 사람이 예수 앞에 걸어나와 그의 손을 뒤로 묶으려고 준비했다. 하지만 로마인 지휘관은 예수를 이렇게 묶으라고 지시하지 않았다. 주가 이러한 굴욕을 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베드로와 동료들은 이제 더 자제할 수 없었다. 베드로는 긴 칼을 뽑아 들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말고를 치려고 앞으로 후딱 나섰다. 그러나 미처 군인들이 대사제의 하인을 방어하려고 나올 수 있기 전에, 예수는 손을 들어 베드로를 막으며 엄하게 말했다: “베드로야, 네 칼을 거두라. 칼을 드는 자는 칼로 망할지니라. 내가 이 잔을 마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깨닫지 못하느냐? 게다가, 이 몇 사람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고 싶어 하는 열두 군단(軍團)이 넘는 천사와 그 동료들을 지금도 내가 지휘할 수 있음을 네가 알지 못하느냐?”
183:3.8 (1975.1) 예수가 추종자들의 이러한 육체적 저항의 표시를 이렇게 실질적으로 그만두게 했어도, 이것은 경비대 지휘관의 두려움을 일으키기에 넉넉했다. 그는 이제 군인들의 도움을 얻어서 예수를 꽉 붙들고 재빨리 그를 묶었다. 그들이 그의 손을 굵은 노끈으로 묶는 동안에 예수는 그들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너희가 강도나 붙잡듯 칼과 막대기로 나를 대적하여 오느냐? 나는 날마다 성전에서 너희와 함께 있었고, 대중 앞에서 사람들을 가르쳤거늘, 너희는 나를 잡으려고 조금도 애쓰지 아니하였도다.”
183:3.9 (1975.2) 예수가 묶이고 나서, 지휘관은 주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를 구조하려고 애쓸까 두려워서, 그들을 붙잡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군인들은 그렇게 빠르지 못했다. 그들을 체포하라는 지휘관의 명령을 흘려듣고서 예수의 추종자들이 황급히 골짜기로 달아났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요한 마가는 근처의 오두막에 숨어 있었다. 경비원들이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떠나자, 요한 마가는 달아나는 사도와 제자들을 따라잡기 위해서 오두막에서 살그머니 나오려 했다. 그러나 막 그가 빠져 나올 때, 달아나는 제자들을 쫓다가 돌아오는 마지막 군인들 중 하나가 가까이 지나가고 있었고, 리넨 겉옷을 걸친 이 젊은이를 보고 쫓아가서, 거의 그를 따라잡았다. 사실, 그 군인은 겉옷을 붙잡기에 넉넉히 요한에게 가까이 갔지만, 그 젊은이는 옷을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채로 달아났고, 군인은 헛되이 겉옷만 손에 쥐었다. 요한 마가는 쏜살같이 위쪽 산길에, 다윗 세베대에게 갔다. 그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다윗에게 이야기하고 나서, 그들 둘은 잠자는 사도들의 텐트로 서둘러 돌아가서 주가 배반당하고 체포된 것을 여덟 명 모두에게 알려주었다.
183:3.10 (1975.3) 여덟 사도가 깨어날 무렵에, 위에 있는 골짜기로 달아났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어찌해야 할까 의논하려고 그들은 모두 올리브 기름틀 가까이서 함께 모였다. 그동안에, 올리브 나무들 사이에 숨어 있던 시몬 베드로와 요한 세베대는 군인과 경비원과 하인들의 패거리를 뒤쫓아 이미 가버렸고, 이들은 이제 가망 없는 죄인을 이끌 듯 예루살렘으로 예수를 이끌고 있었다. 요한은 그 패거리 뒤에 바짝 쫓아갔지만 베드로는 멀찌감치 따라갔다. 군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뒤에, 요한 마가는 시몬 베드로와 요한 세베대의 텐트에서 찾아낸 겉옷 하나를 주워 입었다. 그는 경비원들이 예수를 안나스, 은퇴한 대사제의 집으로 데려간다고 추측했다. 그래서 그는 올리브 농원(農園)을 통하여 길을 둘러가서, 그 패거리보다 앞서 갔고, 대사제 저택의 대문 입구 가까이 숨었다.
183:4.1 (1975.4) 야고보 세베대는 시몬 베드로와 자기 아우 요한과 갈라졌고, 그래서 그는 이제 올리브 기름틀이 있는 곳에서 다른 사도와 동료 야영자들과 한데 모여서, 주가 붙잡힌 상황에 비추어서 어찌해야 할까 의논했다.
183:4.2 (1975.5) 안드레는 동료 사도들을 집단으로 관리하는 모든 책임에서 전에 해방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일생에서 가장 큰 이 위기에, 그는 말이 없었다. 잠시 비공식 논의가 있은 뒤에, 열심당원 시몬은 올리브 기름집의 돌담 위에 서서, 주와 하늘나라 운동에 충성해야 한다고 뜨겁게 탄원하면서, 동료 사도와 다른 제자들에게 그 패거리 뒤를 얼른 쫓아가서 예수를 구출하라고 훈계했다. 나다니엘의 충고가 아니었더라면, 그 일행의 대다수는 공격적인 그의 지휘를 따를 생각이 있었다. 시몬이 말을 마친 순간에 나다니엘은 일어서서, 무저항에 관하여 예수가 자주 되풀이하던 가르침에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더 나아가서, 좋은 소식, 곧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면서 세상으로 떠나가야 할 때를 위하여 그들이 목숨을 보존해야 한다고 예수가 바로 그날 밤에 지시했음을 상기시켰다. 야고보 세베대가 나다니엘의 이 주장을 격려했고, 야고보는 이제 어떻게 베드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주가 체포되는 것을 막으려고 칼을 뺐는가, 시몬 베드로와 동료 칼잡이들에게 칼을 칼집에 넣으라고 예수가 명했다고 이야기했다. 마태와 빌립도 또한 연설했지만, 나사로에게 죽음을 자초하지 말라고 예수가 조언한 적이 있다는 사실에 토마스가 주의를 불러일으킬 때까지, 이 논의에서 아무런 뚜렷한 방도가 생기지 않았다. 토마스는 주가 친구들이 그를 방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적대하는 인간들을 좌절시키려고 신의 능력을 계속 삼가 쓰지 않았으니까, 주를 구하기 위하여 그들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토마스는 그들에게 다윗 세베대가 집단을 위하여 정보 교환소와 사자 본부를 유지하려고 캠프에 남아 있을 것을 알고, 각자 자신을 위하여 흩어지라고 설득했다. 그날 새벽 2시 반이 되자, 사람들이 캠프를 버리고 떠났고 오직 다윗이 사자 서넛과 함께 가까이 남아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예수가 어디로 끌려갔는가,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관하여 정보를 얻으려고 파송되었다.
183:4.3 (1976.1) 나다니엘ㆍ마태ㆍ빌립 그리고 쌍둥이, 이 다섯 사도는 벳바게와 베다니에서 숨었다. 토마스ㆍ안드레ㆍ야고보, 그리고 열심당원 시몬은 도시 안에 숨어 있었다. 시몬 베드로와 요한 세베대는 안나스의 집으로 따라갔다.
183:4.4 (1976.2) 동이 튼 뒤에 조금 있다가, 시몬 베드로는 겟세마네 캠프로 헤매면서 돌아갔고, 깊은 절망에 빠져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다윗은 한 사자에게 책임을 지워서 그를 형 안드레와 함께 지내라고 보냈는데, 안드레는 예루살렘에서 니고데모의 집에 있었다.
183:4.5 (1976.3) 십자가 처형이 끝날 때까지, 요한 세베대는 예수가 지시한 대로 남아 있었고, 언제나 가까이 준비되어 있었다. 다윗의 사자들에게 시간마다 정보를 준 사람은 요한이었고, 이 소식을 사자들은 동산 캠프에 있는 다윗에게 전달했으며, 다음에 이것은 숨어 있는 사자들에게, 또 예수의 가족에게 전해졌다.
183:4.6 (1976.4) 분명히, 목자가 얻어맞고 양들이 흩어진다! 바로 이 상황을 예수가 그들에게 미리 경고했다는 것을 모두가 어렴풋이 깨닫지만, 그들은 주가 갑자기 사라진 것에 너무나 심하게 충격을 받아서 정상으로 머리를 쓸 수 없다.
183:4.7 (1976.5) 날이 밝은 뒤에 조금 있다가, 베드로가 형과 함께 있으라고 파송된 바로 뒤에, 육체로 예수의 아우인 유다가 숨이 차서, 예수의 나머지 가족보다 먼저 캠프에 도착했지만, 주가 이미 체포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그는 이 정보를 어머니와 형제와 자매에게 전하려고 예리고 길을 서둘러서 도로 내려갔다. 다윗 세베대는 유다를 통해서, 예수의 가족에게 베다니에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 모이라고, 거기서 그의 사자들이 정기적으로 그들에게 가져올 소식을 기다리라는 말을 보냈다.
183:4.8 (1976.6) 사도와 주요 제자들과 땅에 있는 예수의 가족에 관하여 말하면, 이것이 목요일 밤 후반의 상황이었다. 이 집단과 개인들은 모두 사자(使者)의 봉사로 서로 연결이 유지되었고, 다윗 세베대가 이 봉사를 겟세마네 캠프에 있는 그의 본부에서 계속 운영했다.
183:5.1 (1977.1) 동산에서 예수와 함께 길을 떠나기 전에, 성전 경비대의 유대인 지휘관과 군인 집단의 로마인 지휘관 사이에, 예수를 어디로 데려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다툼이 일어났다. 성전 경비대의 지휘관은 예수를 대사제 대리(代理) 가야바의 집으로 끌고 가야 한다고 명령을 내렸다. 로마 군인들의 지휘관은 예수를 전직(前職) 대사제이자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의 저택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지시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유대 교회 율법의 집행에 상관되는 모든 문제에서 로마인들이 안나스와 직접 상대하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로마인 지휘관의 명령을 따랐고, 그들은 예비 심문을 받도록 예수를 안나스의 집으로 데려갔다.
183:5.2 (1977.2) 유다는 지휘관들 가까이, 따라서 행진하면서 주고받는 말을 모두 들었지만, 그 논쟁에 전혀 끼지 않았는데, 유대인 지휘관이나 로마인 장교가 배반자에게 말도 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렇게 경멸하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183:5.3 (1977.3) 이 무렵에 요한 세베대는, 반드시 가까이 남아 있으라고 주가 지시한 것을 기억했기 때문에, 두 지휘관 사이에, 따라서 행진하는 예수 가까이 서둘러 갔다. 성전 경비대의 사령관은, 요한이 따라서 다가오는 것을 보고서, 조수(助手)에게 말했다: “이 사람을 잡아서 묶어라. 이 친구의 추종자 중에 하나이라.” 그러나 로마인 지휘관이 이 말을 들었을 때, 두리번거리다가 요한을 보고서, 그 사도가 자기 옆에 와야 한다고, 아무도 그를 건드리면 안 된다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나서 로마인 지휘관은 유대인 지휘관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배반자도 겁쟁이도 아니라. 나는 동산에서 그를 보았는데, 그는 우리에게 저항하려고 칼을 빼지 않았느니라. 그는 자기의 주와 함께 있으려고 앞으로 나설 만큼 용기를 가졌고, 아무도 그에게 손대지 말지니라. 로마의 율법은 어떤 죄수도, 재판석 앞에 함께 설 친구를 적어도 하나 가져도 좋다고 허락하느니라. 이 사람이 그의 주, 그 죄수 옆에 서는 것을 막지 말지니라.” 이 말을 들었을 때, 유다는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해서, 행진하는 사람들의 뒤로 물러가버렸고, 안나스의 저택에 혼자 다다랐다.
183:5.4 (1977.4) 이것이 어째서 요한 세베대가 이날 밤과 이튿날, 고된 체험을 통하여 끝까지 예수 가까이 남아 있도록 허락을 받았는가 설명한다. 요한이 유대 교회 법정의 처리를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행동하라고 지명된 로마인 고문 비슷한 지위를 가졌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요한에게 무슨 말을 하거나 그를 건드리기를 두려워했다. 안나스 저택의 대문에서 성전 경비대의 지휘관에게 예수를 넘겨주면서, 그 로마인이 조수에게 이렇게 말했을 때, 특권을 가진 요한의 지위는 더욱 안전해졌다: “이 죄수를 따라가서 이 유대인들이 빌라도의 허락 없이 그를 죽이지 않도록 처리하라. 저들이 그를 암살하지 않도록 경계하고, 그의 친구 갈릴리 사람이 곁에 서서, 일의 진행을 모두 지켜보도록 처리하라.” 다른 열 사도는 할 수 없이 숨어 있어야 했지만, 이렇게 요한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을 바로 그때까지, 줄곧 예수 가까이 있을 수 있었다. 요한은 로마의 보호를 받으며 행동했고, 유대인들은 주가 돌아가실 때까지 감히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183:5.5 (1977.5) 안나스의 저택으로 가는 동안 내내, 예수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체포된 때부터 안나스 앞에 나타날 때까지, 사람의 아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184:0.1 (1978.1) 안나스의 대리인들은 예수가 붙잡힌 뒤에 안나스의 저택으로 그를 즉시 데려오라고 로마 군인들의 지휘관에게 몰래 전에 지시하였다. 전직 대사제는 유대인 교회 권위자들의 우두머리로서 그의 위신(威信)을 유지하기를 바랐다. 또한 예수를 그의 집에 몇 시간 동안 구류하는 데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는데, 곧 산헤드린 법정을 합법적으로 소집하는 시간을 벌려는 것이었다. 성전에서 아침 희생물을 바치는 시간 이전에 산헤드린 법정을 여는 것은 율법에 어긋났는데, 이 희생물은 새벽 3시쯤에 바쳤다.
184:0.2 (1978.2) 산헤드린 회원들의 법정이 그의 사위 가야바의 저택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안나스는 알았다. 산헤드린의 회원 약 30명은 예수가 그들 앞에 혹시 끌려 왔을 때 예수를 재판할 준비가 되도록, 자정까지 대사제의 집에서 모여 있었다. 재판하는 법정을 구성하는 데 23명만 요구되었으니까,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굳세게, 터놓고 반대한 사람들만 모여 있었다.
184:0.3 (1978.3) 올리브산에 있는 안나스의 저택에서 예수는 세 시간쯤 보냈고, 여기는 사람들이 그를 체포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요한은 안나스의 저택에서 자유롭고 안전했는데, 로마인 지휘관이 한 말 뿐 아니라, 또한 그와 형 야고보가 나이 든 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들은 전직(前職) 대사제가 어머니 살로메의 먼 친척이었기 때문에, 그 저택에 여러 번 손님이었다.
184:1.1 (1978.4) 안나스는 성전의 소득으로 부유하게 되었고, 그의 사위가 대사제 대행이고, 자신이 로마 당국과 관련을 가졌기 때문에, 정말로 온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이었다. 그는 태도가 부드럽고 교활한 모사(謀士)요 계교를 꾸미는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를 처치하는 문제를 지휘하고 싶었다. 퉁명스럽고 공격적인 사위에게 그렇게 중요한 과제를 전적으로 맡기기가 두려웠다. 안나스는 주의 재판이 꼭 사두개인들의 손에 맡겨지도록 처리하기를 바랐다. 예수의 운동을 지지한 산헤드린 회원의 거의 전부가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바리새인들이 더러 동정할 가능성을 두려워했다.
184:1.2 (1978.5) 주가 그의 집을 방문하고, 그가 차갑게 경계하면서 주를 맞이하는 것을 보고 나서 즉시 떠난 뒤로, 안나스는 몇 년 동안 예수를 만나보지 못했다. 안나스는 일찍부터 이렇게 안면이 있었던 것을 이용하고, 그렇게 하여 예수가 그의 주장을 버리고 팔레스타인을 떠나라고 설득해 볼 생각이 있었다. 그는 좋은 사람을 죽이는 데 끼어드는 것을 꺼려했고, 예수가 죽음을 당하기보다 차라리 나라를 떠나기를 택할지 모른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튼튼하고 각오가 굳은 갈릴리 사람 앞에 섰을 때, 안나스는 그런 제안이 쓸데없으리라는 것을 당장 깨달았다. 예수는 안나스가 기억했던 것보다 더욱 위엄 있고 매우 차분했다.
184:1.3 (1979.1) 예수가 어렸을 때, 안나스는 그에게 큰 관심을 가졌지만, 환전상 및 다른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몰아내느라고 예수가 최근에 행한 것 때문에 이제 그의 소득이 위협을 받았다. 이 행위는 예수의 가르침보다 전직 대사제의 반감(反感)을 훨씬 더 불러일으켰다.
184:1.4 (1979.2) 안나스는 널찍한 접견실에 들어가서 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예수를 그 앞으로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말없이 주를 찬찬히 살펴보느라고 몇 순간이 지난 뒤에, 말했다: “네가 우리 나라의 평안과 질서를 깨뜨리는즉슨, 너의 가르침에 대하여 무슨 조처(措處)가 있어야 함을 네가 깨달으렷다.” 안나스가 예수를 캐묻는 듯이 바라보자, 주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시 안나스가 말했다. “선동자인 열심당원 시몬 외에, 네 제자들의 이름이 무엇인고?” 다시 예수는 그를 내려다보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184:1.5 (1979.3) 예수가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 것에 안나스는 어지간히 속이 뒤집혔고, 너무 뒤집혀서 예수에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호의를 가지거나 말거나, 너는 아랑곳하지 않는고? 다가오는 너의 재판 문제를 결정하는 데, 내가 가진 권력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느냐?” 이 말을 듣자 예수는 말했다: “안나스여, 내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면 네가 나에 대하여 아무 권력을 가질 수 없음을 네가 아는도다. 더러는 무지한 까닭에 사람의 아들을 죽이려 하고, 저희는 분별이 그보다 없거니와, 친구여 너는 네가 무엇을 하는지 아느니라. 그런즉 너는 어찌 하나님의 빛을 물리칠 수 있느냐?”
184:1.6 (1979.4) 예수가 친절한 태도로 하신 말씀은 안나스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전에 그는 머리 속에서 예수가 팔레스타인을 떠나든지 아니면 죽어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그는 용기를 불러일으켜 물었다: “도대체 네가 무엇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애쓰느냐? 너는 어떤 사람이라고 주장하느냐?” 예수는 말했다: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놓고 말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나는 회당에서, 또 여러 번 성전에서 가르쳤고, 거기서 모든 유대인과 많은 이방인이 내 말을 들었느니라. 나는 몰래 아무것도 말한 적이 없거늘, 그러면 어찌하여 내 가르침에 대하여 네가 묻느냐? 어찌하여 너는 내 말을 들은 자들을 불러내고 저희에게 묻지 않느냐? 보라, 바로 네가 이 가르침을 들어 본 적이 없다 하더라도, 내가 말한 것을 온 예루살렘이 들었느니라.” 그러나 안나스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가까이 서 있던, 저택의 우두머리 집사가 손으로 예수의 얼굴에 따귀를 붙이고 말했다: “어찌 네가 감히 그런 말로 대사제에게 대꾸하느냐?” 안나스는 그 집사를 꾸짖지 않았지만, 예수는 그에게 말했다: “친구여, 내가 잘못된 말을 하였으면, 그 잘못에 대하여 증언하라. 그러나 내가 진리를 말하였으면, 어찌하여 네가 나를 치느냐?”
184:1.7 (1979.5) 안나스는 집사(執事)가 예수를 때린 것이 유감스러웠어도, 너무 거만해서 그 문제를 거들떠볼 수 없었다. 혼란에 빠져 그는 다른 방으로 갔고, 거의 한 시간 동안 집안의 시중드는 사람과 성전 경비원들과 함께 예수를 버려두었다.
184:1.8 (1979.6) 그가 돌아왔을 때, 주의 옆으로 가서 말했다: “너는 메시아, 이스라엘의 구원자라 주장하느냐?” 예수가 말했다: “안나스여, 너는 나를 어릴 때부터 알았느니라. 내 아버지가 정하신 것을 제외하고 내가 누구라고 주장하지 않았고, 내가 모든 사람,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파송된 것을 네가 아느니라.” 그러자 안나스가 말했다: “네가 메시아라고 주장했다는 소리를 내가 들었노라. 그 말이 진실이냐?” 예수는 안나스를 바라보았지만 이렇게만 대답하였다. “네가 그리 말하였도다.”
184:1.9 (1980.1) 언제 예수가 산헤드린의 법정 앞에 끌려올 것인가 물으려고 사자들이 이때쯤 가야바의 저택으로부터 도착했고, 날이 밝을 때가 가까웠기 때문에, 안나스는 예수를 묶인 채로, 성전 경비원들이 호위하게 하여 가야바에게 보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있다가 그 자신이 그들의 뒤를 따라 갔다.
184:2.1 (1980.2) 경비원과 군인의 일행이 안나스의 저택 입구에 다가가는 동안, 요한 세베대는 로마 군인의 지휘관 옆에서 행진하고 있었다. 유다는 얼마큼 뒤떨어져 있었고, 시몬 베드로는 멀찌감치 떨어져 따라갔다. 요한이 예수와 경비원들과 함께 저택의 안뜰로 들어간 뒤에, 유다는 대문으로 다가왔지만, 예수와 요한을 보고 나서, 가야바의 집으로 계속 갔고, 거기서 주의 진짜 재판이 나중에 열릴 것을 알았다. 유다가 떠난 뒤에 곧 시몬 베드로가 도착했고, 대문 앞에 서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를 저택 안으로 막 데려가려고 할 바로 그때, 요한이 그를 보았다. 대문을 지키던 여자 문지기는 요한을 알았고, 요한이 그 여자에게 베드로를 들여보내라 요청하며 말을 붙였을 때, 그 여자는 즐겁게 찬성했다.
184:2.2 (1980.3) 안뜰에 들어서자, 베드로는 석탄 불 있는 데로 가서 불을 쪼이려고 했는데, 밤이 으슬으슬 추웠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에 예수의 적들 사이에서 무척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고, 정말로 그는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주가 요한에게 훈계한 것처럼 주는 그에게 가까이 있으라고 지시하지 않았다.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에게 속했고, 그들은 주가 재판받고 십자가에 처형되는 시간에 목숨을 위태롭게 하지 말라고 특별히 경고를 받았다.
184:2.3 (1980.4) 저택의 대문으로 다가오기 조금 전에 베드로는 긴 칼을 던져 버렸고 그래서 안나스의 안뜰에 무장하지 않은 채로 들어갔다. 그의 머리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고 그는 예수가 체포된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 상황의 현실―여기 안나스의 안뜰에서 대사제의 하인들 옆에서 불을 쬐고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없었다. 다른 사도들이 무엇을 하는가 궁금했고, 머리 속에서 어떻게 요한이 그 저택에 들어갈 허가를 받게 되었는지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요한이 문지기에게 그를 들여보내라고 청했으니까, 요한이 하인들에게 알려져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184:2.4 (1980.5) 여자 문지기가 베드로를 들여보낸 뒤에 조금 있다가, 그가 불 옆에서 몸을 따듯하게 하는 동안, 그 여자는 베드로에게 다가가서 짓궂게 말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자, 베드로는 이렇게 얼굴이 알려진 것에 놀라지 않았어야 하는데, 그 소녀에게 자기를 저택 대문을 통과시키라고 요청한 것은 요한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나 긴장하고 불안한 상태에 있어서, 이렇게 제자로 신분이 확인되자 그는 침착을 잃었고, 오로지 머리 속에서 제일 처음 떠오르는 생각으로―목숨을 가지고 달아날 생각으로―“나는 아니라”고 말하여 하녀의 물음에 재빨리 대꾸했다.
184:2.5 (1980.6) 금방 또 다른 하인이 베드로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저희가 이 친구를 붙잡을 때, 동산에서 내가 너를 보지 않았느냐? 너도 그의 추종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는 이제 속속들이 놀랐다. 이 고발하는 사람들로부터 안전히 달아날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맹렬히 부인하며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을 모르오. 추종자 중에 하나도 아니라.”
184:2.6 (1980.7) 이때쯤 대문을 지키는 여자 문지기가 베드로를 한쪽으로 끌고 가서 말했다: “네가 이 예수의 제자임이 확실하니라. 추종자들 중에 하나가 내게 너를 뜰 안으로 들여보내라 청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내 언니가 너를 이 사람과 함께 성전에 있는 것을 보았느니라. 어찌하여 네가 이를 아니라 하느냐?” 그 하녀가 그를 고발하는 말을 들었을 때, 베드로는 잔뜩 욕을 퍼붓고 맹세하며 예수를 도무지 모른다고 부인하며 다시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의 추종자가 아니라. 나는 그를 알지도 못하고, 전에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노라.”
184:2.7 (1981.1) 베드로는 한동안 불 곁을 떠나서, 안뜰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달아나고 싶었지만, 자기한테 눈을 끌까 두려웠다. 추워져서, 그는 불 곁으로 돌아갔는데, 그에게 가까이 서 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말했다: “분명히 너는 이 사람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이라. 이 예수는 갈릴리 사람이요, 네 사투리가 너를 드러내니, 네가 또한 갈릴리 사람처럼 말하기 때문이라.” 다시 베드로는 주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부인했다.
184:2.8 (1981.2) 베드로는 너무 속이 뒤집혀서, 불에서 멀리 떨어져서 혼자 현관에 남아서 고발하는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려고 했다. 이렇게 혼자 떨어져 한 시간 넘게 지낸 뒤에, 그 문지기와 그 언니가 어쩌다가 그를 만났고, 그들 둘이 다시 베드로가 예수의 추종자라고 놀리는 투로 비난했다. 다시 그는 그 고발을 부인했다. 그가 한번 더 예수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부인했을 때, 수탉이 울었고, 베드로는 바로 그날 밤 일찍, 주가 그에게 경고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마음이 무겁고 죄책감에 짓눌려 거기 서 있는데, 저택의 문들이 열렸고, 가야바의 집으로 가는 길에 경비원들이 예수를 이끌고 지나갔다. 주가 베드로를 지나는 동안에, 주는 횃불의 빛으로, 예전에 자신 있고 겉으로 용감한 사도의 얼굴에서 절망의 빛을 보았고, 돌이켜 베드로를 바라보았다. 베드로는 살아 있는 한, 결코 그 얼굴빛을 잊지 못했다. 필사 인간이 주의 얼굴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언뜻 보는 눈길, 동정과 사랑이 한데 섞인 그런 눈길이었다.
184:2.9 (1981.3) 예수와 경비원들이 저택의 대문 바깥으로 나간 뒤에, 베드로는 그들을 따라갔지만, 조금 뿐이었다. 더 멀리 갈 수 없었다. 그는 길가에 주저앉아 슬피 울었다. 이 비통한 눈물을 흘리고 나서, 형 안드레를 찾기를 바라면서 캠프를 향하여 되돌아갔다. 캠프에 도착하고 나서 그는 겨우 다윗 세베대만 찾아냈는데,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그의 형이 숨은 곳으로 그를 안내하라고 사자 하나를 보냈다.
184:2.10 (1981.4) 베드로의 체험은 전부 올리브산에 있는 안나스의 저택 안뜰에서 일어났다. 그는 대사제 가야바의 저택으로 예수를 따라가지 않았다. 수탉이 우는 소리에 자기가 주를 거듭 부인했다는 것을 베드로가 깨닫게 된 것은 이 모두가 예루살렘 바깥에서 일어났음을 가리키는데, 도시의 성 안에서 새 종류를 기르는 것이 법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184:2.11 (1981.5) 수탉의 울음소리가 베드로를 제 정신이 들게 할 때까지, 몸을 따듯이 하려고 현관을 오르락내리락 거닐 때, 그는 다만 얼마나 영리하게 하인들의 비난을 피했는가, 그가 예수의 편이라는 것을 확인하려는 그들의 의도를 어떻게 망쳐 버렸는가 생각했다. 한동안, 그는 이 하인들이 이렇게 그를 심문할 아무런 도덕적 권한이나 법적 권한이 없다고만 생각했고, 생각컨대 신분이 확인되고, 아마도 붙잡히고 감옥에 들어갈 것을 피하는 데 얼마나 좋은 방법을 썼는가 정말로 자신을 칭찬했다. 수탉이 울 때까지, 자기가 주를 부인했다는 것이 베드로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예수가 그를 바라볼 때까지, 그는 하늘나라의 대사로서 그의 특권에 부끄럽지 않게 살지 못한 것을 깨닫지 못했다.
184:2.12 (1981.6) 타협하고 최소의 저항이 있는 길을 따라서 첫 걸음을 내디디었으니까, 이미 결정한 행동 과정을 계속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베드로에게 명백하지 않았다. 잘못 시작하고 나서, 돌이켜 바로잡는 것은 위대하고 고귀한 인격을 요구한다. 너무나 흔히, 사람의 머리는, 일단 발길을 들이고 나서, 그릇된 길을 계속하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184:2.13 (1982.1) 부활이 있은 뒤에 그가 주를 만나고, 주를 부인하던 이 비참한 밤의 체험을 겪기 전과 똑같이 그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베드로는 결코 그가 용서받을 수 있다고 완전히 믿지 않았다.
184:3.1 (1982.2) 이 금요일 새벽 3시 반쯤에, 대사제 가야바가 산헤드린의 심문(審問) 법정이 개회되었다고 선언하고, 공식 재판을 받도록 예수를 그들 앞으로 데려오라고 요청했다. 세 차례에 걸쳐 이전에 산헤드린은 대다수의 투표로 예수의 사형을 선포한 적이 있으며, 율법을 어기고, 신성을 모독하고, 이스라엘의 선조들의 전통을 모욕했다는 비공식 죄목으로 그가 죽어 마땅하다고 결정을 내렸다.
184:3.2 (1982.3) 이것은 정식으로 소집한 산헤드린 회의가 아니었고, 보통 장소, 즉 성전에, 깎은 돌로 지은 방에서 열리지 않았다. 이것은 산헤드린 의원 약 30명이 모여서 특별 재판을 하는 법정이었고 대사제의 저택에서 열렸다. 요한 세베대는 이른바 이 재판을 통하여 내내, 예수와 함께 자리에 있었다.
184:3.3 (1982.4) 이 주사제와 서기관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바리새인들 가운데 더러가 그 예수, 그들의 지위를 위협하고 그들의 권한에 도전하는 자가 이제 안전히 손아귀에 있다고 얼마나 뻐기었는지! 복수에 불타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그가 결코 살아서 달아나지 못하리라고 굳게 결심하였다.
184:3.4 (1982.5) 보통은, 사형(死刑) 죄목으로 사람을 재판할 때 유대인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진행하였고, 증인 선택과 재판의 전체 운영에 온갖 공평한 보호 조치를 마련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 가야바는 치우치지 않은 판사이기보다 검사(檢事)였다.
184:3.5 (1982.6) 예수는 평상시의 옷을 입고 손이 뒤에 묶인 채로 이 법정 앞에 나타났다. 그의 위엄 있는 모습에 그 법정 전체가 놀라고 얼마큼 어리둥절했다. 그들은 그러한 죄인을 바라본 적도 없고, 목숨을 건 재판을 받는 사람에게서 그렇게 침착한 태도를 구경한 적도 없었다.
184:3.6 (1982.7) 유대 율법은 죄수에게 한 죄목을 씌울 수 있기 전에, 어떤 항목에도 적어도 증인 두 사람이 찬성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유대 율법이 배반자의 증언을 특별히 금했기 때문에, 유다는 증인으로 쓰일 수 없었다. 스무 명이 넘는 거짓 증인들이 예수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려고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들의 증언이 너무나 모순되고 너무나 명백히 날조(捏造)된 것이어서, 산헤드린 의원들 자체가 그 연출을 무척 부끄러워했다. 예수는 이 거짓 증인들을 인자하게 내려다보면서 거기 서 있었고, 바로 그의 얼굴빛이 거짓말하는 증인들을 쩔쩔매게 하였다. 이 모든 허위 증언이 있는 동안 내내, 주는 입을 열지 않았고, 그들의 많은 거짓 고발에 조금도 대꾸하지 않았다.
184:3.7 (1982.8) 처음으로 그 증인들 가운데 어떤 두 사람이 의견의 일치와 비슷한 것에라도 가까이 간 것은, 한 성전 강연을 하는 과정에서,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부수고, 손을 쓰지 않고 지은 또 다른 성전을 사흘 안에 세우겠다”고 예수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두 사람이 증언했을 때였다. 언급된 그 논평을 했을 때, 그가 자신의 몸을 가리켰다는 사실과 상관 없이, 그것은 예수가 말씀하신 꼭 그대로가 아니었다.
184:3.8 (1982.9) “이 죄목들 가운데 어느 것에도 너는 대답이 없느냐?” 하고 대사제가 예수에게 소리를 질렀어도, 예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이 모든 거짓 증인이 증언하는 동안에 그는 말없이 거기 서 있었다. 증오, 광신, 거리낌없는 과장(誇張)이 이 거짓 증인들이 하는 말의 특징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증언은 그 자체에 얽혀서 실패했다. 그들의 거짓 고발에 대한 최선의 반박(反駁)은 주의 차분하고 품위 있는 침묵이었다.
184:3.9 (1983.1) 거짓 증인들의 증언이 시작된 뒤에 얼마 있다가, 안나스가 도착하고 가야바 옆자리에 앉았다. 안나스는 이제 일어서서, 성전을 부순다고 하는 예수의 이 위협이 그에 대한 세 가지 죄목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184:3.10 (1983.2) 1. 그는 민중을 비웃는 위험한 자이다. 민중에게 불가능한 것들을 가르치고 달리 민중을 속였다.
184:3.11 (1983.3) 2. 신성한 성전에 폭력 쓰기를 주장했으니까, 그는 미친 개혁자이다, 아니면 어떻게 그가 성전을 부술 수 있는가?
184:3.12 (1983.4) 3. 그가 새 성전을 짓겠다, 그것도 손을 쓰지 않고 짓겠다고 약속했으니, 그는 마술을 가르쳤다.
184:3.13 (1983.5) 예수가 유대 율법을 위반하여 죽어 마땅한 죄가 있다고 산헤드린 전체가 전에 찬성한 적이 있지만, 그들은 이제 그의 행위와 가르침에 관하여 빌라도가 그 죄인에게 사형 선고 내리는 것을 정당화할 죄목을 개발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합법적으로 사형에 처할 수 있기 전에, 로마 총독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안나스는 예수가 사람들 사이에 풀어놓기에는 위험한 선생으로 보이게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할 생각이 있었다.
184:3.14 (1983.6) 그러나 완전히 침착하게, 침묵을 깨뜨리지 않고 주가 거기 서 있는 모습을 가야바는 이제 더 견딜 수 없었다. 그 죄수가 말하도록 유인할까 싶은 방법을 적어도 하나 안다고 그는 생각했다. 따라서, 예수의 편으로 부리나케 가서, 주의 얼굴에 고발하는 손가락을 흔들면서 말했다: “내가 명하노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가 구원자인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우리에게 이르라.” 예수는 가야바에게 대답했다: “내가 그니라. 곧 나는 아버지께로 가고, 얼마 안 있어 사람의 아들은 권능을 받고서 하늘 무리들 위에 다시 한번 군림하리라.”
184:3.15 (1983.7) 예수가 이 말을 입 밖에 내는 것을 들었을 때, 대사제는 몹시 성이 났고 겉옷을 와락 찢으며 외쳤다: “우리가 증인이 어찌 더 필요하리요? 보라, 이제 너희는 모두 이 사람이 신성 모독함을 들었도다. 너희는 법을 어기고 신성을 모독한 이 자를 이제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뇨?” 그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죽어 마땅하니라. 십자가에 달리게 하라.”
184:3.16 (1983.8) 자신 수여 임무에 관계된 한 가지 질문을 제외하고, 안나스나 산헤드린 의원들 앞에 있을 때 예수는 무엇을 물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순간에 뚜렷하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184:3.17 (1983.9) 안나스는 그 재판이 더 진행되고, 나중에 빌라도에게 제출하기 위해서, 예수와 로마 율법 및 로마 제도의 관계에 대하여 분명한 성질의 죄목을 작성하기를 바랐다. 의원들은 이 문제를 빨리 매듭지으려고 초조했다. 이것은 그날이 유월절을 준비하는 날이고 오후에는 아무런 세속의 일을 해서는 안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유월절 축하 기간에만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있었으니까, 그가 유대 땅에서 로마인의 수도 케자리아로 언제라도 돌아갈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184:3.18 (1983.10) 그러나 안나스는 법정을 통제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아주 뜻하지 않게 예수가 가야바에게 대답한 뒤에, 대사제는 앞으로 걸어나와서 손으로 예수의 얼굴에 따귀를 올려붙였다. 법정의 다른 의원(議員)들이 그 방을 나가면서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그들 가운데 여럿이 비웃으며 손바닥으로 예수를 찰싹 때리자, 안나스는 참으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렇게 무질서하게, 들어본 적이 없는 그런 혼란 속에, 산헤드린 의원들이 예수를 재판하는 이 첫 회의가 4시 반에 끝났다.
184:3.19 (1984.1) 편협하고 전통에 눈이 먼 거짓 판사 30명은, 거짓 증인들과 함께, 한 우주의 올바른 창조자를 주제넘게 재판하고 있다. 이 열렬한 고발자들은 이 하나님인 사람의 품위 있는 침묵과 지극한 태도에 분통이 터졌다. 그의 침묵은 견디기 두려웠고, 그의 말투는 두려움 없이 무시하는 태도였다. 그는 이들의 위협에 끄떡하지 않았고 공격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사람이 하나님을 재판하지만, 그런 때에도 그는 이들을 사랑하고, 할 수 있으면 구원하려고 한다.
184:4.1 (1984.2) 사형(死刑) 선고를 내리는 문제가 있을 때 유대인의 율법은 법정에서 두 번 심의하기를 요구했다. 이 두 번째 회의는 첫째 회의 다음 날에 열려야 했고, 그 사이의 시간은 법정의 의원들이 금식하고 애도하면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예수가 죽어야 한다는 결정을 확인하려고 다음 날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겨우 한 시간 기다렸다. 그동안에 예수는 성전 경비대의 보호 밑에서 접견실에 남아 있었고, 이들은 대사제의 하인들과 함께, 온갖 종류의 모욕을 사람의 아들에게 퍼부으면서 즐거워했다. 그들은 비웃고, 그에게 침 뱉고, 그를 모질게 쳤다. 막대기로 그의 얼굴을 때리고, 그리고 나서 “너 구원자여, 너를 때린 자가 누군가 우리에게 예언하라” 말하곤 했다. 이렇게 그들은 한 시간 꼭 채워 계속했고, 저항하지 않는 이 갈릴리 사람을 욕하고 학대하였다.
184:4.2 (1984.3) 무지하고 무딘 경비원과 하인들 앞에서 고통당하고 거짓 재판을 받던 이 비극의 시간에, 요한 세베대는 인접한 방에서 혼자 공포 속에 기다렸다. 이 학대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예수는 요한에게, 머리를 끄덕여 그에게 물러나라고 표시했다. 그의 사도가 이 모욕을 구경하라고 방에 남게 둔다면, 요한의 분노가 너무 끓어올라서 저항하다가 의분(義憤)을 터뜨리면 아마도 죽음을 초래했으리라는 것을 주는 잘 알았다.
184:4.3 (1984.4) 이 끔찍한 시간을 통해서 내내, 예수는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 온 우주의 하나님과 인격 관계 속에 결합된 혼(魂), 인류 중에서 부드럽고 민감한 이 혼에게는 그가 들이킨 치욕의 잔(盞) 중에서 무지하고 잔인한 이 경비원과 하인들의 손에 맡겨진 이 끔직한 시간보다 더 쓰라린 부분이 없었다. 이들은 이른바 이 산헤드린 법정의 의원들이 본보기를 보인 것에 자극을 받아서 그를 학대하였다.
184:4.4 (1984.5) 사랑하는 군주가 죄로 어두워진 구체, 불행한 유란시아에서 무지하고 잘못 인도된 사람들의 뜻에 복종하는 이 광경을 하늘의 지성 존재들이 구경하는 동안, 광대한 우주에 몸서리치는 의분이 휩쓴 것을 인간의 마음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184:4.5 (1984.6) 사람이 영적으로 도달하거나 지적으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을 모욕하고 육체적으로 공격하고 싶어하도록 이끄는 특성, 사람 안에 있는 이 동물같은 특성은 무엇인가? 반(半)문명화된 사람에게는 아직도 지혜와 영적 달성 면에서 우수한 사람에게 분통을 터뜨리려고 하는 나쁜 잔인성이 숨어 있다. 문명화되었다고 생각되는 이 사람들이 저항하지 않는 사람의 아들에게 이렇게 몸으로 공격해서 어떤 형태의 동물적 쾌락을 얻는 동안에, 그들의 못된 야비함과 짐승 같은 잔학성을 구경하라. 이 모욕과 비웃음과 주먹이 예수에게 쏟아지는 동안, 그는 방어하지 않았지만, 방어할 수 없는 자는 아니었다. 예수는 지지 않았다. 단지 물질적 의미에서 다투지 않았을 뿐이다.
184:4.6 (1985.1) 이때는 방대하고 널리 퍼진 우주의 창조자ㆍ지원자ㆍ구원자로서 길고도 파란 많은 생애에서 주가 가장 큰 승리를 거둔 순간들이었다. 하나님을 사람에게 드러내는 일생을 마음껏 살았으니까, 예수는 이제, 새롭고 전례 없던 일, 사람을 하나님에게 드러내는 일에 들어간다. 예수는 이제 사람의 인격이 고립되는 온갖 두려움을 최종으로 극복하는 것을 여러 세계에 보여주고 있다. 사람의 아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 신분임을 깨달았다. 예수는 그가 아버지와 하나임을 서슴지 않고 주장한다. 그 하늘같은 최고의 체험이 사실이요 진실인 것에 근거를 두고, 그와 아버지가 하나인 것 같이, 하늘나라를 믿는 모든 사람이 그와 하나가 되라고 훈계한다. 예수의 종교에서 실제 체험은 이처럼, 영적으로 고립되고 우주에서 외로운 이 땅의 필사자들이 인격의 고립, 그리고 아울러 모든 두려움의 결과 및 관련된 무력한 느낌을 피할 수 있게 하는 분명하고 확실한 기법이 된다. 하늘나라의 형제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믿는 아들들은 개인적으로, 또 행성 전체가, 자아의 고립을 최종으로 벗어나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을 아는 신자는 우주 규모에서 영적으로 친교하는―완전을 달성하는 신성한 운명을 영원히 실현하는 것과 관련하여 하늘에서 시민 자격을 얻는―환희와 장엄함을 점점 더 맛본다.
184:5.1 (1985.2) 5시 반에 법정은 다시 모였고, 예수는 요한이 기다리고 있는 인접한 방으로 끌려갔다. 여기서 로마 군인과 성전 경비원들은 예수를 감시했고, 한편 법정은 빌라도에게 제시할 죄목들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안나스는 신성 모독의 죄목은 빌라도에게 아무 중요성이 없으리라고 동료들에게 분명히 말했다. 유다는 법정의 이 2차 회의 동안에 자리에 있었지만, 아무런 증언도 하지 않았다.
184:5.2 (1985.3) 법정의 이 회의는 겨우 반시간 걸렸고, 빌라도 앞으로 가려고 폐회했을 때, 그들은 예수가 사형을 받아 마땅하다는 기소장(起訴狀)을 세 항목 아래 작성했다:
184:5.3 (1985.4) 1. 그는 유대 민족을 타락시키는 자였다. 민중을 속이고 반란을 선동했다.
184:5.4 (1985.5) 2. 케자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184:5.5 (1985.6) 3. 새 종류의 나라의 임금이요 창시자라 주장함으로, 황제에 대항하여 반역을 선동했다.
184:5.6 (1985.7) 이 과정 전부가 변칙이었고 전적으로 유대 율법에 어긋났다. 성전을 부수고 다시 사흘 안에 세운다는 예수의 진술에 관하여 증언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어떤 문제에도 두 증인이 찬성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점에 관해서도, 아무 증인도 피고(被告)를 변호하지 않았고, 예수는 그가 무슨 의도로 말했는가 설명하라고 요청받지도 않았다.
184:5.7 (1985.8) 법정이 일관성을 가지고 그를 재판할 수 있었던 유일한 항목은 신성을 모독했다는 죄목이었고, 이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증언에 달렸을 것이다. 신성 모독죄에 관해서도, 그들은 사형 선고를 하려고 정식(正式)으로 투표하지 않았다.
184:5.8 (1985.9) 빌라도 앞으로 가져가려고, 그들은 이제 주제넘게 세 가지 죄목을 작성했고, 이에 대하여 아무 증언도 청취하지 않았으며, 고발당한 죄인이 자리에 없는 가운데 합의를 보았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바리새인 세 사람이 자리를 떠났다. 그들은 예수가 죽는 것을 보고 싶어 했지만, 증인 없이, 그가 자리에 없는 가운데 그에게 불리한 죄목을 작성하려 하지 않았다.
184:5.9 (1986.1) 예수는 산헤드린의 법정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죄 없는 생애를 심판하는 동안에 그들은 예수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예수는 빌라도가 낭독하는 것을 들을 때까지, 그들이 내놓은 공식 죄목을 (사람으로서) 알지 못했다.
184:5.10 (1986.2) 예수가 요한과 경비원들과 함께 방에 있는 동안, 그리고 법정이 2차 회의에 들어간 동안, 대사제의 저택 근처에 있던 어떤 여인들이 그 친구들과 함께, 이상한 죄인을 보러 왔고, 그들 가운데 하나가 그에게 물었다: “네가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냐?” 예수는 대답했다: “내가 너에게 일러도, 네가 나를 믿지 아니하겠고 내가 물어도 네가 대답하지 않으리라.”
184:5.11 (1986.3) 그날 아침 6시에 예수는 가야바의 집에서 빌라도 앞에 나타나도록 옮겨졌고, 이것은 이 산헤드린 법정이 아주 부당하게 변칙으로 선포한 사형 선고의 확인을 위한 것이었다.
185:0.1 (1987.1) 서기 30년, 4월 7일, 이 금요일 아침 6시가 조금 지난 뒤에, 예수는 로마인 집정관 빌라도 앞으로 끌려왔는데, 그는 시리아 총독의 직접 감독 하에 유대ㆍ사마리아ㆍ이두미아를 다스렸다. 성전 경비원들이 밧줄에 묶인 주를 로마인 총독 앞으로 인도했고, 산헤드린 법정 (주로 사두개인들), 가룟 유다, 대사제 가야바를 포함하여 약 50명의 고발자와 사도 요한이 그를 따랐다. 안나스는 빌라도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185:0.2 (1987.2) 사람의 아들을 체포하는 데 로마 군인들을 동원하려고 전날 저녁에 허가를 얻은 사람들로부터 예수가 일찍 그 앞에 끌려오리라는 통지를 받았기 때문에, 빌라도는 일어나 있었고 이른 아침에 찾아온 이 무리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재판은 집정관 관저 앞에서 진행되도록 주선되었는데, 이것은 안토니아 요새에 덧붙여 지은 건물이었고, 빌라도와 그 아내는 예루살렘에 들렸을 때 이 요새를 그들의 본부로 삼았다.
185:0.3 (1987.3) 비록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하는 일의 상당 부분을 집정관 본부 안에서 했어도, 공개 재판은 바깥에서, 정문으로 이끄는 계단에서 열렸다. 이것은 유대인에 대한 양보 조치였는데, 그들은 유월절을 위하여 준비하는 이날, 누룩이 쓰일지 모르는 어떤 이방인 건물에도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한 행위는 예식 면에서 그들을 더럽게 만들고, 이렇게 함으로 오후에 감사 잔치 음식을 먹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또한 해가 진 뒤에, 유월절 저녁을 먹을 자격을 받기 전에, 정화(淨化) 예식을 거치는 것이 필요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185:0.4 (1987.4) 이 유대인들은 재판으로 예수를 죽이려고 계략을 꾸미는 동안, 양심에 조금도 거리끼지 않았는데, 그렇다 해도 예식에 따른 정결(淨潔)과 전통적 규칙을 지키는 이 모든 문제에 빈틈이 없었다. 시간 세계와 영원 속에서 인간의 복지에 티끌처럼 하찮은 것에 빈틈없이 주의를 기울이면서 신성한 성질을 가진 높고 거룩한 책임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이 유대인들만이 아니었다.
185:1.1 (1987.5) 본디오 빌라도가 작은 여러 지방을 다스리는 어지간히 훌륭한 총독이 아니었다면, 티베리우스는 도저히 빌라도가 10년 동안 유대 지방의 집정관(執政官)으로 남아 있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당히 훌륭한 행정가였어도, 그는 도덕적으로 비겁한 사람이었다. 유대인의 총독으로서 자신이 맡은 과제의 성질을 이해할 만한 큰 인물은 아니었다. 이 히브리인들이 진짜 종교, 기꺼이 목숨을 바칠 믿음을 가졌고, 제국 전역에 걸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수백만이 예루살렘을 신앙의 성지(聖地)로 우러러보며, 산헤드린을 땅에서 가장 높은 법정으로 존중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185:1.2 (1988.1) 빌라도는 유대인을 사랑하지 않았고, 이 뿌리 깊은 미움은 일찍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로마의 모든 지방 가운데, 아무 데도 유대보다 더 다스리기 어렵지 않았다. 빌라도는 결코 유대인을 다루는 데 관련된 문제들을 정말로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총독의 체험을 겪으면서 아주 일찍부터, 거의 치명적이고 자살 같은 일련의 실수를 저질렀다. 바로 이러한 실수가 유대인들에게 그를 압박할 힘을 주었다. 빌라도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를 원했을 때, 그들은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 위협하기만 하면 되었고, 그러면 빌라도는 재빨리 항복하곤 했다. 집정관이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듯 보이는 것, 곧 도덕적 용기가 모자란 것은, 주로 유대인들과 몇 가지 논쟁을 가졌던 기억 때문이었고,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그들이 그를 이겼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빌라도가 그들을 두려워하며, 그가 티베리우스 앞에서 자기 자리가 어찌될까 두려워하는 것을 알았고, 수많은 경우에 총독에게 크게 불리하게 이 지식을 이용했다.
185:1.3 (1988.2) 유대인에게 빌라도의 인기가 떨어진 것은 몇 가지 불행한 대결의 결과로서 생겨났다. 첫째로, 그는 우상 숭배의 상징인 모든 형상에 대하여 그들이 가진 뿌리 깊은 편견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전임자 밑에서 로마 군인들의 관습이었던 것처럼, 자기 군인들이 군기(軍旗)에서 케자의 형상을 떼어내지 않고서 예루살렘에 들어가도록 버려두었다. 유대인의 큰 대표단이 군기에서 이 형상을 제거해달라고 탄원하면서 닷새 동안 빌라도를 기다렸다. 그는 그들의 청원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즉시 죽인다고 그들을 위협했다. 빌라도는 자신이 회의론자였기 때문에, 강렬한 종교적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종교적 확신 때문에 죽기를 서슴지 않을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유대인들이 그의 관저 앞에서, 반항하는 태도로 줄지어 서서, 얼굴이 땅에 닿기까지 엎드리고, 죽을 준비가 되었다는 말을 보내왔을 때, 그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그때 빌라도는 자기가 기꺼이 실행하지 않을 것을 하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굴복했고, 예루살렘에 있는 군인들의 군기에서 그 형상을 떼어내라고 명령했다. 그는 그날부터 계속 그가 대체로 유대인 지도자들의 변덕에 지배되고 있음을 발견했고, 이들은 이 방법으로, 실행하기 꺼려하는 것을 하겠다고 위협하는 빌라도의 약점을 발견했다.
185:1.4 (1988.3) 그후에 빌라도는 땅에 떨어진 이 위신(威身)을 다시 회복하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고, 따라서 케자 숭배에 보통 쓰이는 것과 같은 황제의 방패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 궁전의 담에 걸어 놓았다. 유대인들이 항의했을 때, 그는 끄떡하지 않았다. 그가 항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자, 그들은 즉시 로마에 상소했고, 그러기가 무섭게 황제는 그 거슬리는 방패들을 떼어내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나서 빌라도는 전보다도 더욱 체신이 떨어졌다.
185:1.5 (1988.4) 유대인들이 그를 대단히 싫어하게 만든 또 다른 일은, 큰 종교적 축제가 있을 때 예루살렘으로 오는 수백만의 방문자들을 위하여 물의 공급을 늘이는 새 수도교(水道橋)의 건축 비용을 지불하느라고 성전 금고에서 감히 돈을 가져간 것이다. 오로지 산헤드린이 성전 자금을 지출할 수 있다고 유대인들은 주장했고, 이 주제넘은 결정 때문에 그들은 결코 빌라도 규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 결정의 결과로 스무 번 이상의 폭동이 있었고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다. 심각했던 폭동 가운데 마지막 폭동은 마침 큰 무리의 갈릴리 사람들이 제단에서 예배드리는 동안에 그들을 살인한 것과 상관이 있었다.
185:1.6 (1988.5) 갈팡질팡하는 이 로마인 권력자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들어, 그리고 자기 개인의 지위를 보호하려고 예수를 희생했지만, 사마리아인들을 필요 없이 살육한 결과로 그가 마침내 쫓겨났다는 것이 중대하다. 이것은 군대를 게리짐 산으로 이끈 어느 거짓 메시아의 주장과 관련하여 일어났는데, 이 사람은 거기에 성전의 그릇들이 묻혀 있다고 주장했고, 성스러운 그릇들이 숨겨진 장소를 약속한 대로 밝히지 못하자, 사나운 폭동들이 터졌다. 이 사건의 결과로서, 시리아 총독은 빌라도를 로마로 오라고 명하였다. 빌라도가 로마로 가는 길에 티베리우스가 죽었고, 그는 유대의 집정관으로 다시 임명되지 않았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데 찬성한 판결을 후회했으나 그는 결코 완전히 그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새 황제의 눈에 들지 않게 되자, 로잔 지방으로 은퇴했고, 거기서 후일에 목숨을 끊었다.
185:1.7 (1989.1) 빌라도의 아내 클라우디아 프로큘라는 그 여자에게 시중드는 하녀의 말을 통해서 예수에 대하여 익히 들었고, 이 하녀는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페니키아인 신자였다. 빌라도가 죽은 뒤에, 클라우디아는 새 소식을 전파하는 데 두드러지게 관여했다.
185:1.8 (1989.2) 이 모두가 이 비극의 금요일 오후에 벌어진 많은 것을 설명한다. 어째서 유대인들이 주제넘게 빌라도에게 강요했는가―예수를 재판하라고 6시에 일어나게 했는가―또한 어째서 예수를 사형하라는 요구를 감히 거절한다면 황제 앞에서 그를 반역죄로 고소하겠다고 그들이 서슴지 않고 위협했는가 이해하기 쉽다.
185:1.9 (1989.3) 유대인 권력자들과 불리하게 말려든 적이 없는, 자격 있는 로마인 총독은 결코 피에 굶주린 이 광신자들이, 거짓된 죄목에 대하여 결백하고 잘못이 없다고 그 자신이 선언한 사람의 죽음을 초래하도록 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을 다스리라고 2류인 빌라도를 보냈을 때, 로마는 큰 실수, 세상사에 멀리 영향을 미치는 잘못을 저질렀다. 티베리우스가 제국에서 가장 훌륭한 지방 행정가를 유대인에게 보내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185:2.1 (1989.4) 예수와 고발자들이 빌라도의 재판정 앞에 모였을 때, 로마인 총독이 나와서 모여 있는 일행을 향하여 물었다. “너희가 이 사람을 무슨 죄목으로 고발하느냐?” 예수를 해치우는 일을 떠맡은 사두개인과 의원(議員)들은 빌라도 앞에 가서, 분명한 죄목을 자진해서 말하지 않고서, 예수에게 선언된 사형 선고의 확인을 요구하려고 전에 굳게 결의했다. 그래서 산헤드린 법정의 대변인은 빌라도에게 대답했다: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라면, 우리가 그를 당신에게 넘기지 않았어야 하나이다.”
185:2.2 (1989.5) 그들이 예수의 죄목을 말하기 꺼려하는 것을 지켜보았을 때, 빌라도는 그의 죄에 관하여 그들이 밤새도록 심의하느라고 바빴던 것을 알았지만, 그들에게 대답했다: “너희가 어떤 분명한 죄목에도 합의하지 않았으니, 어찌하여 너희가 이 사람을 데려다가 너희 율법에 따라서 재판하지 않느냐?”
185:2.3 (1989.6) 그때 산헤드린 법정의 서기(書記)가 빌라도에게 말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라도 사형에 처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며, 우리 민족을 선동하는 이자는 그가 말하고 행한 것 때문에 죽어 마땅하나이다. 그러므로 이 선포를 확인하려고 우리가 당신 앞으로 왔나이다.”
185:2.4 (1989.7) 이처럼 어물쩍 넘기려고 애쓰면서 로마인 총독 앞에 온 것은 산헤드린 의원들이 빌라도의 공정성과 명예와 위엄을 그다지 존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예수에 대하여 악의와 험악한 감정을 가졌다는 것을 드러낸다. 지배받는 이 시민들이 지방 총독 앞에 나타나서 한 사람에게 공평한 재판을 허락하기 전에, 분명한 죄목을 채택하지도 않고 그의 집행 선포를 요구하다니, 무슨 뻔뻔스러운 처사인가!
185:2.5 (1990.1) 빌라도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예수가 행한 일을 얼마큼 알았고, 그가 고소당할 수 있는 죄목들은 유대교 율법의 침해와 상관이 되리라 짐작했다. 그래서 그 사례를 그들 자체의 법정으로 회부하려고 애썼다. 또 한편, 빌라도는 그들이 지독하게 몹시 미워하여 경멸하게 된, 자기 민족의 한 사람에 대해서도, 그들이 사형 선고를 선언하고 집행하는 권한이 없다고 대중 앞에서 고백하게 만든 것을 마음 속에 고소해하였다.
185:2.6 (1990.2) 빌라도가 아내 클라우디아로부터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관하여 이야기를 더 들은 것은 몇 시간 전, 자정 조금 전, 그리고 그가 예수를 몰래 체포하는 데 로마 군인들을 쓰도록 허가한 뒤였다. 클라우디아는 얼마큼 유대교를 믿는 사람이었고, 후일에 예수의 복음을 믿는, 충분히 자격 있는 신자가 되었다.
185:2.7 (1990.3) 빌라도는 이 청문회를 미루고 싶었지만, 유대인 지도자들이 그 소송 사건을 밀고 나가기로 굳게 각오한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때가 유월절 준비일의 아침이었을 뿐 아니라 이날이 금요일이었으니까, 또한 쉬고 예배하는 안식일을 위하여 유대인들이 준비하는 날임을 알았다.
185:2.8 (1990.4) 이 유대인들이 불경스러운 태도로 접근하는 것에 무척 민감했기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를 재판 없이 사형에 처하라는 그들의 요구를 기꺼이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들이 죄수에 대하여 죄명을 제시하도록 몇 순간 기다리고 나서, 그들을 향하여 말했다: “나는 이 사람에게 재판 없이 사형을 선고하지 않겠노라. 그에 대하여 죄명을 문서(文書)로 제시하기 전까지, 그를 심문하는 데 찬성하지 않겠노라.”
185:2.9 (1990.5) 빌라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대사제와 다른 사람들은 법정의 서기(書記)에게 신호했고, 그리고 나서 그는 빌라도에게 예수에 대하여 문서로 기록한 죄명을 넘겨주었다. 이 죄목은 다음과 같았다:
185:2.10 (1990.6) “우리 산헤드린 의원의 법정은 이 사람이 다음 죄로 인하여 그가 행악자요 우리 민족을 선동하는 자임을 발견함.
185:2.11 (1990.7) “1. 우리 국민을 타락시키고 반란을 일으키도록 우리 민족을 선동했다.
185:2.14 (1990.10) 예수는 이 중에 어떤 죄목으로도 정식으로 재판을 받거나 법적으로 선고받지 않았다. 이 죄목들이 처음에 낭독되었을 때, 듣지도 못했다. 그러나 예수는 집정관 관저에서 경비원들의 보호 하에 있었는데, 빌라도는 거기서 그를 데려오게 했고, 빌라도는 이 죄목들을 예수가 듣는 가운데 되풀이하라고 고집했다.
185:2.15 (1990.11) 예수가 이 죄목들을 들었을 때, 그는 유대인 법정 앞에서 이 문제들에 관하여 말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음을 잘 알았고, 요한 세베대와 그 고발자들도 알았지만, 예수는 이 거짓 죄목들에 대하여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빌라도가 그를 고발한 자들에게 답변하라고 명했을 때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진행 전체가 불공평한 데 너무 놀라고, 예수의 잠잠하고 훌륭한 태도에 너무 감동해서, 빌라도는 죄수를 본부 안으로 데리고 가서 친히 심문하기로 마음먹었다.
185:2.16 (1990.12) 빌라도는 머리 속이 헛갈렸고, 마음 속에 유대인들이 두려웠으며, 피에 굶주린 고발자들 앞에서, 예수가 거기에 당당하게 서서, 말없이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동정과 슬픔에 찬 애정의 빛을 띠고 그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광경 때문에, 그의 정신은 힘차게 감동을 받았다.
185:3.1 (1991.1) 빌라도는 예수와 요한 세베대를 개인 전용의 방으로 데려갔고, 경비원들을 바깥에 복도에 두었다. 죄수더러 앉으라고 청하면서 그는 예수 옆에 앉아서 몇 마디 물었다. 빌라도는 예수에 대한 첫째 죄목, 그가 국민을 타락시키는 자요 반란을 선동하는 자인 것을 믿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면서 예수와 말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물었다: “너는 케자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가르친 적이 있느냐?” 예수는 요한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이나 내 가르침을 들은 어느 다른 사람에게라도 물으라.” 그리고 나서 빌라도는 요한에게 이 세금 문제에 대하여 물었고, 요한은 주의 가르침에 관하여 증언하고, 예수와 그의 사도들은 케자와 성전, 양쪽에 세금을 물었다고 설명했다. 요한에게 묻고 나서, 빌라도는 말했다. “내가 너와 이야기한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않도록 하라.” 요한은 이 문제를 결코 밝히지 않았다.
185:3.2 (1991.2) 그리고 나서 빌라도는 예수에게 더 물어보려고 몸을 돌이켜 말했다: “그리고 이제 너에 대한 셋째 죄목에 관하여 묻건대, 네가 유대인의 임금이냐?” 빌라도의 목소리에 아마 진정하게 묻는 빛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집정관에게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빌라도여, 네가 이것을 스스로 묻느냐, 아니면 이 다른 사람들, 나를 고발하는 자들로부터 이 질문을 받았느냐?” 그러자 얼마큼 분개하는 어조로, 총독은 대답했다: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주사제들이 너를 잡아 넘기고 너에게 사형을 선고하라 내게 요구하였느니라. 나는 저희가 가져온 죄목들이 정당한가 묻고, 네가 무슨 일을 했는가 나 스스로 찾아내려고 애쓸 따름이라. 내게 말하라. 네가 유대인의 임금이라 말한 적이 있느냐, 그리고 네가 새 나라를 세우려고 애썼느냐?”
185:3.3 (1991.3) 그러자 예수는 빌라도에게 대답했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네가 깨닫지 못하느냐?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였다면, 분명히 내 제자들이 싸워서 내가 유대인들의 손에 넘겨지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내가 네 앞에 이렇게 끈에 묶여 있는 것은 내 나라가 영적 국가요, 아니 믿음을 통하여, 사랑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들의 형제 단체인 것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기에 충분하니라. 이 구원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도 위한 것이라.”
185:3.4 (1991.4) “그러면 결국 네가 임금이냐?”하고 빌라도가 말했다. 예수가 대답했다: “옳도다, 내가 그런 임금이요, 내 나라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믿는 아들들이 모인 가족이라. 이 목적을 위하여, 내 아버지를 모든 사람에게 보이고, 하나님의 진리까지도 증언하려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노라. 지금도 너에게 선언하노니, 진리를 사랑하는 자마다 내 목소리를 듣느니라.”
185:3.5 (1991.5) 그러자 빌라도가 반은 비웃으며 반은 진지하게 말했다. “진리, 무엇이 진리냐―누가 알소냐?”
185:3.6 (1991.6) 빌라도는 예수의 말씀을 헤아릴 수 없었고, 그의 영적 나라의 성질을 알아들을 수도 없었지만, 그 죄수가 죽어 마땅한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고 이제 확신했다. 얼굴을 맞대고 예수를 한 번 본 것은, 부드럽고 지쳤어도 당당하고 곧은 이 사람이 현세에 이스라엘의 보좌에 스스로 앉을 포부를 가진, 사납고 위험한 혁명가가 아닌 것을 빌라도가 확신하기에도 넉넉했다. 자기를 임금이라고 불렀을 때 예수가 무슨 뜻으로 말했는가 빌라도는 얼마큼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금욕주의자의 가르침에 익숙했기 때문이고, 이들은 “지혜로운 사람은 임금이라”고 선언했다. 반란을 선동하는 위험한 인물이 아니라 예수는 해롭지 않은 공상가, 결백한 광신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빌라도는 속속들이 확신했다.
185:3.7 (1991.7) 주를 심문한 뒤에, 빌라도는 주사제들, 그리고 예수를 고소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서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을 심문했는데, 그에게서 아무 잘못을 찾지 못하노라. 나는 너희가 고발한 죄가 그에게 있다고 생각지 않고, 그를 풀어주어야 한다 생각하노라.” 이 말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은 대단히 성이 났고, 너무 성이 나서 예수가 죽어야 한다고 사납게 소리를 질렀다. 산헤드린 의원들 가운데 하나가 대담하게 빌라도의 옆으로 걸어와서 말했다: “이 사람은 민중을 선동하고,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 땅에 두루 계속하였나이다. 그는 해독을 끼치는 자요, 행악자이니, 당신이 이 사악한 사람을 풀어주면 오랫동안 후회하리이다.”
185:3.8 (1992.1) 빌라도는 예수를 어찌할까 몰라서 난처했다. 그래서 예수가 일을 갈릴리에서 시작했다고 이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때 유월절에 참석하려고 도시에 들린 헤롯 앞에 서라고 예수를 보내서 그 소송 사건을 결정하는 책임을 피하려고, 적어도 생각할 시간을 벌려고 생각했다. 또한 이런 표시가 관할권 문제로 생긴 수많은 오해 때문에, 자신과 헤롯 사이에 얼마 동안 있었던 좋지 않은 감정을 얼마큼 푸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185:3.9 (1992.2) 경비원들을 부르면서 빌라도는 말했다: “이 사람은 갈릴리 사람이라. 당장에 헤롯에게 데려가라. 헤롯이 심문한 뒤에, 그가 발견한 것을 내게 보고하라.”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헤롯에게 데리고 갔다.
185:4.1 (1992.3) 예루살렘에 들렸을 때 헤롯 안티파스는 헤롯 대제의 옛 마카비 궁전에서 머물렀는데, 이 옛 임금의 집으로 성전 경비원들이 예수를 끌고 갔고, 고발한 자들과 늘어나는 군중이 그를 뒤따라갔다. 헤롯은 예수에 관하여 소문을 오랫동안 들어 왔고, 예수에 관하여 무척 호기심이 있었다. 이 금요일 아침에 사람의 아들이 앞에 섰을 때, 이 사악한 이두미아인은 한 순간도, 세포리스에서 그 앞에 나타나서, 자기 아버지가 받아야 할 돈에 관하여 공정한 결정을 내리기를 탄원했던 옛 시절의 그 소년을 결코 기억하지 못했는데, 소년의 아버지는 공공(公共) 건물 중 하나에서 일하다가 사고(事故)로 돌아가셨다. 예수의 일이 갈릴리에 집중되었을 때 예수에 대하여 크게 걱정한 적이 있었지만, 헤롯이 아는 한, 그는 예수를 본 적이 없었다. 예수가 빌라도와 유대 지방 사람들의 보호 밑에 있었으므로, 앞으로 예수로부터 어떤 문제가 생겨도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헤롯은 그를 보고 싶어했다. 헤롯은 예수가 행한 기적들에 대하여 익히 들어 왔고, 예수가 무슨 이적(異蹟)을 행하는 것을 정말로 보고 싶어 하였다.
185:4.2 (1992.4) 그들이 예수를 헤롯 앞으로 데려왔을 때, 사분(四分) 군주는 그의 품위 있는 모습과 침착한 얼굴빛에 깜짝 놀랐다. 헤롯은 예수에게 질문을 한 15분쯤 던졌지만, 주는 대꾸하려 하지 않았다. 헤롯은 예수를 비웃고 그에게 기적을 행해 보라고 덤비었어도, 예수는 질문에 대답하거나 비웃음에 대꾸하려 하지 않았다.
185:4.3 (1992.5) 그리고 나서 헤롯은 고개를 돌려 주사제와 사두개인들이 고발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고, 이들이 주장하는 바 사람의 아들의 여러 악행에 관하여 빌라도가 들은 것을 모두, 그리고 덧붙여 많이 들었다. 예수가 입을 열지도 않고 그를 위하여 이적을 행하지도 않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에, 한동안 예수를 놀려댄 뒤에, 드디어 헤롯은 그에게 임금의 헌 자주빛 예복을 차려 입히고 도로 빌라도에게 보냈다. 헤롯은 자신이 유대 지방에 있는 예수에 대하여 아무 관할권이 없음을 알았다. 마침내 예수를 갈릴리에서 몰아냈다고 믿게 되어 즐겁기는 했어도, 빌라도가 예수를 사형에 처하는 책임을 가진 것을 고맙게 여겼다. 헤롯은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결과로 그를 괴롭히던 두려움에서 결코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헤롯은 어떤 때에는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요한인가 두려워하기도 하였다. 이제 그는 그 두려움에서 해방되었다. 예수가 감히 그의 사생활을 들추어내고 비난했던, 입이 거칠고 불 같은 선지자와 아주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185:5.1 (1993.1) 경비원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도로 데리고 왔을 때, 그는 집정관 관저의 앞 계단으로 나갔는데, 거기에는 재판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주사제와 산헤드린 의원들을 한데 부르고 이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이 사람이 민족을 타락시키고, 세금 내는 것을 금하며, 유대인의 임금이라 주장한다는 죄목으로 그를 내 앞에 데려왔느니라. 내가 그를 심문했고, 이러한 죄를 저지른 것을 발견하지 못하노라. 사실은, 그에게서 아무 잘못을 찾지 못하노라. 그리고 나서 그를 헤롯에게 보냈는데, 헤롯이 우리에게 도로 돌려보냈으니, 사분(四分) 군주가 똑같은 결론을 내렸음이 틀림없도다. 이 사람이 죽어 마땅한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음이 분명하니라. 너희가 아직도 그가 징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풀어주기 전에 그를 기꺼이 매질하겠노라.”
185:5.2 (1993.2) 예수를 석방하는 것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항의하는 소리를 막 지르려 할 바로 그때, 유월절 축제를 기념하여 한 죄수를 놓아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할 목적으로 방대한 군중이 집정관 관저로 행진하여 다가왔다. 감옥에 갇힌 어떤 죄수나 사형수를 유월절에 사면(赦免) 받도록 민중이 선택하게 하는 것이 얼마 동안 로마 총독들의 관습이었다. 이 군중이 한 죄수를 놓아달라고 요청하려고 그 앞으로 왔다. 예수가 아주 최근에 군중에게 큰 인기가 있었으므로, 예수가 이제 그의 재판석 앞에 있는 죄인이니까, 유월절에 호의를 보이는 표시로 이 갈릴리 사람을 풀어줄 것을 이 무리에게 제안하여 곤경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빌라도에게 떠올랐다.
185:5.3 (1993.3) 군중이 밀물처럼 건물의 계단으로 올라오자, 빌라도는 그들이 바라바라는 이름을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바라바는 이름난 정치 선동자요, 살인한 강도, 어느 사제의 아들이었고, 최근에 예리고 길에서 강도짓을 하고 살인하던 현장에서 붙잡혔다. 이 사람은 유월절 축제가 끝나자마자 처형되도록 선고를 받았다.
185:5.4 (1993.4) 빌라도는 일어서서, 주사제들이 예수를 그에게 데려왔고, 주사제들은 어떤 죄목으로 예수를 사형에 처하기를 구한다는 것, 그는 그 사람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군중에게 설명했다. 빌라도는 말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를 놓아 주는 것이 너희에게 더 좋으냐, 이 살인자 바라바냐, 아니면 이 갈릴리 사람 예수이냐?” 빌라도가 이렇게 말하자, 주사제와 산헤드린 의원들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바라바, 바라바!” 주사제들이 예수를 사형에 처할 생각이 있음을 사람들이 보았을 때, 그들은 그를 죽이라는 아우성에 재빨리 합세했고, 한편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크게 소리쳤다.
185:5.5 (1993.5) 이보다 며칠 전에 군중은 예수를 경외하는 눈으로 보았지만, 하나님의 아들임을 주장하고 나서, 이제 주사제와 권력자들에게 붙잡혀서 빌라도 앞에서 생사가 걸린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을 폭도들은 우러러보지 않았다. 성전 바깥으로 환전상과 상인들을 몰아낼 때 예수는 민중의 눈에 영웅일 수 있었지만, 적들의 손에서 생사가 걸린 재판을 받는, 저항하지 않는 죄수일 때는 그렇지 않았다.
185:5.6 (1993.6) 주사제들이 예수의 피를 보려고 소리치면서, 악명 높은 살인자를 용서해달라고 악쓰는 광경을 보고서 빌라도는 화가 치밀었다. 그들이 악의(惡意)와 증오에 차 있음을 보았고, 그들의 편견과 질투를 눈치챘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의 가장 큰 죄가 상징적으로 자신을 유대인의 임금이라고 부른 것인데, 너희는 어찌하여 이 사람보다 살인자의 목숨을 살려달라 할 수 있느냐?” 그러나 이것은 빌라도가 할 현명한 말이 아니었다. 유대인은 자부심을 가진 민족이었고, 지금 로마의 정치에 지배되고 있지만, 권력과 영광을 크게 나타내고 이방인의 사슬에서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가 오기를 희망하였다. 이상한 교리를 가르치고, 이제 체포되어, 죽어 마땅한 죄로 고발당한 선생, 온순한 태도를 가진 이 선생이, “유대인의 임금”이라고 언급된다는 암시에 그들은 빌라도가 짐작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분개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논평이 그들 민족의 존재에서 성스럽고 영예롭게 여긴 모든 것을 모욕한다고 보았고, 따라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라고 한껏 목청이 터져라 힘차게 외쳤다.
185:5.7 (1994.1) 고발당한 죄목에 대하여 예수가 결백한 것을 빌라도는 알았고 그가 공정하고 용기 있는 재판관이었다면 예수를 무죄로 하고 풀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성난 유대인들을 무시하기가 두려웠고 자기 임무를 행하기를 망설이는 동안에, 한 사자(使者)가 다가와서 아내 클라우디아가 보낸, 밀봉한 서신을 그에게 내밀었다.
185:5.8 (1994.2) 빌라도는 앞에 놓여 있는 문제를 더 진행하기 전에, 막 받은 서신(書信)을 읽기를 바란다는 뜻을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알렸다. 아내가 보낸 이 편지를 뜯고서 빌라도는 읽었다: “저희가 예수라고 부르는, 이 결백하고 공정한 사람과 당신이 아무 상관도 하지 말기를 내가 비나이다. 그 사람 때문에 지난 밤 꿈 속에서 많이 고생하였나이다.” 클라우디아로부터 온 이 쪽지는 빌라도를 크게 흥분하게 만들고 그렇게 이 문제의 판결을 늦추었을 뿐 아니라, 불행하게도 유대인 권력자들이 군중 사이에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바라바를 놓아주라 요구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치라고 사람들을 재촉할 시간을 상당히 마련해 주었다.
185:5.9 (1994.3) 마침내,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려고 다시 한번 자세를 취하며, 빌라도는 유대 권력자들과 사면(赦免)을 구하는 혼합된 군중에게 물었다. “유대인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자를 내가 어찌하랴?” 그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십자가에 못박아라!” 혼합된 군중한테서 나온 이 만장 일치의 요구는 부당하고 두려움에 질린 재판관 빌라도를 소스라치게 놀라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185:5.10 (1994.4) 그리고 나서 한번 더 빌라도는 말했다: “너희가 어째서 이 사람을 못박으려 하느냐? 무슨 악행을 그가 저질렀느냐? 누가 앞으로 나와서 그를 적대하여 증언하겠느냐?” 그러나 빌라도가 예수를 두둔하여 말하자, 그들은 더욱 외치기만 했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십자가에 못박아라!”
185:5.11 (1994.5) 그러자 빌라도는 유월절 죄수를 사면하는 것에 관하여 그들에게 다시 호소하며 말했다: “다시 한번 너희에게 묻노니, 이 너희 유월절에 이 죄인들 가운데 누구를 너희에게 풀어주랴?” 다시 군중은 외쳤다, “바라바를 달라!”
185:5.12 (1994.6) 그리고 나서 빌라도가 말했다: “내가 살인자 바라바를 풀어주면, 예수를 어떻게 하랴?” 한번 더 군중은 한 목소리로 외쳤다. “십자가에 못박아라! 십자가에 못박아라!”
185:5.13 (1994.7) 빌라도는 주사제와 산헤드린 의원들의 직접 지시를 받고 행동하는 이 폭도의 끈질긴 아우성에 더럭 겁이 났다. 그런데도 군중을 달래고 예수를 구하려고 적어도 한번 더 애쓰려고 마음먹었다.
185:6.1 (1994.8) 이 금요일 아침 일찍, 빌라도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에 오직 예수의 적들만 참가하였다. 그가 밤에 붙잡히고 이른 아침에 재판받는 것을 많은 친구가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믿는다고 해서 또한 붙잡혀서 죽어 마땅하다고 판결을 받을까 두려워서 숨고 있었다. 주를 죽이라고 지금 외치는 군중 속에는 오직 적이라고 맹세한 사람과 줏대 없고 생각 없는 사람들만 있었다.
185:6.2 (1995.1) 빌라도는 그들의 동정심에 마지막으로 한번 호소하려 했다. 예수의 피를 흘리려고 외치는 이 그릇 인도된 폭도(暴徒)의 외침을 무시하기가 두려워서, 그는 유대인 경비원과 로마 군인들에게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라고 명령했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부당하고 불법인 과정이었으니, 로마의 법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도록 선고받은 사람들만 이렇게 채찍을 맞도록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 시련을 주려고 경비원들은 예수를 관저에 딸린 지붕 없는 안뜰로 데리고 갔다. 그의 적들은 이 채찍질을 구경하지 않았어도 빌라도는 보았고, 그들이 이 고약한 학대를 마치기 전에, 그는 채찍질하는 사람들에게 그만두라 지시하고 예수를 자기 앞으로 끌고 오라고 손짓했다. 예수가 채찍질하는 기둥에 묶여 있는 동안, 매질하는 사람들이 그를 때리던 매듭진 채찍을 내려놓기 전에, 그들은 다시 그에게 자주빛 겉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서, 이마 위에 얹었다. 그들은 갈대를 가짜 홀(笏)로서 손에 쥐어주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놀리면서 말했다: “만세, 유대인의 임금이여!” 그들은 그에게 침을 뱉고, 손으로 따귀를 때렸다. 그들 가운데 하나는, 예수를 빌라도 앞으로 돌려보내기 전에, 손에서 갈대를 빼앗아서 그의 머리를 쳤다.
185:6.3 (1995.2) 그리고 나서 빌라도는 피 흘리고 살이 찢긴 이 죄수를 이끌고, 뒤섞인 군중 앞에 그를 내보이면서 말했다: “이 사람을 보라! 다시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를 찾지 못하노라. 그를 채찍질하였으니, 풀어주고자 하노라.”
185:6.4 (1995.3) 낡은 자주빛 임금 옷을 걸치고, 인자하게 생긴 이마를 찌르는 가시관을 쓰고서, 나사렛 예수가 서 있었다. 얼굴은 피로 얼룩지고, 자세는 고통과 슬픔으로 구부정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지독히 미워하는 감정에 빠지고 종교적 편견에 노예가 된 자들의 무딘 가슴에 호소할 수 없었다. 이 광경은 광대한 우주 영역을 통해서, 엄청난 몸서리를 치게 만들었지만, 예수를 죽이려고 결의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185:6.5 (1995.4) 주의 곤경을 보고 처음 충격을 받고나서 정신을 차리자, 그들은 더 크게, 더 길게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십자가에 못박아라, 못박아라, 못박아라!”
185:6.6 (1995.5) 그들에게 동정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빌라도는 그런 느낌에 호소하는 것이 헛일임을 깨달았다. 그는 앞으로 걸어나가서 말했다: “너희가 이 사람을 죽이겠다고 굳게 마음 먹은 것을 내가 깨닫지만, 죽어 마땅하도록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누가 그의 범죄를 선언하겠느냐?”
185:6.7 (1995.6) 그러자 바로 대사제가 앞으로 걸어나와서, 빌라도에게 다가가면서, 성이 나서 선언했다: “우리에게는 신성한 법이 있고, 그 법에 따라서 이 사람은 죽어야 하나니,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체하였음이라.” 이 말을 듣자,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더욱 무서웠을 뿐 아니라, 아내가 준 쪽지, 또 신들이 땅으로 내려온다는 그리스 신화를 회상하면서, 이제 그는 예수가 아마도 신다운 인물일 것이라는 생각에 부들부들 떨었다. 군중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하고, 그동안에 그를 더 조사할까 싶어 예수의 팔을 붙들고 다시 그를 건물 안으로 이끌고 갔다. 빌라도는 이제 두려워 갈피를 잡지 못했고, 미신 때문에 어리둥절하고 폭도의 완고한 태도에 시달렸다.
185:7.1 (1995.7) 두려운 느낌이 들어 떨면서, 빌라도는 예수의 옆에 앉아서 물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정말로, 너는 누구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저희가 말하는데, 이것이 무슨 소리냐?”
185:7.2 (1996.1) 그러나 예수가 아무런 죄가 없다고 선언하고서도, 그리고 정식으로 사형 선고를 받기 전에 그에게 채찍질을 하게 한 그렇게 부당한 재판관, 사람을 두려워하며 약하고 줏대 없는 재판관이 물었을 때, 예수는 그런 물음에 도저히 대답할 수 없었다. 예수는 빌라도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빌라도가 말했다: “너는 나와 말하기 싫으냐? 내가 아직도 너를 풀어놓거나 십자가에 못박게 할 권력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느냐?”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하늘로부터 허락받지 않았다면, 네가 나에게 아무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느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았으면, 너는 사람의 아들에게 아무 권한을 행사할 수 없도다. 그러나 너는 복음을 모르니, 그다지 죄가 없도다. 나를 저버리고 나를 너에게 넘긴 자들, 저희에게 죄가 더 크니라.”
185:7.3 (1996.2) 예수와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이 대화는 빌라도를 속속들이 놀라게 했다. 도덕적으로 겁쟁이요 재판에 약자인 이 사람은 이제 미신에 사로잡혀 예수를 두려워하고 유대인 지도자들을 끔찍히 무서워하는 이중의 압박 밑에서 허덕였다.
185:7.4 (1996.3) 다시 빌라도는 군중 앞에 나타나서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이 오직 종교의 율법을 어긴 자인 것을 확신하노라. 너희는 그를 데리고 가서 너희 법에 따라서 그를 재판해야 하느니라. 그가 너희 전통을 위반했다고 해서 어찌하여 너희가 그를 죽이는 데 내가 찬성할 것을 기대하느냐?”
185:7.5 (1996.4) 빌라도는 예수를 거의 풀어주려 했는데, 그때 대사제 가야바가 비겁한 로마인 재판관에게 다가와서, 빌라도의 얼굴에 징벌하듯 손가락을 흔들며 군중 전체가 들을 수 있게 성나서 말을 뱉었다: “이 사람을 풀어주면, 당신은 케자의 친구가 아니라, 황제가 모든 것을 알도록 내가 처리하겠노라.” 이 공개적 위협은 빌라도에게 너무 지나쳤다. 자기 개인의 장래가 어찌될까 하는 두려움에 이제 모든 다른 고려 사항은 빛을 잃게 되었고, 비겁한 총독은 예수를 재판석 앞으로 끌고 나오라 명령했다. 주가 그들 앞에 거기 서 있는 동안, 그는 예수를 가리키며 비웃는 투로 말했다: “너희 임금을 보라.” 유대인들이 대답했다: “그를 없애라. 십자가에 못박아라!” 그러자 빌라도가 잔뜩 비꼬고 빈정대며 말했다: “내가 너희 임금을 십자가에 못박으랴?” 유대인들이 대답했다, “옳소, 십자가에 못박아라! 우리에게는 케자 외에 아무 임금이 없소이다.” 그러자 유대인들을 무시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를 살려낼 아무 희망이 없음을 깨달았다.
185:8.1 (1996.5) 여기 사람의 아들로서 육신화한 하나님의 아들이 섰다. 고발장 없이 붙잡히고 증거 없이 고발당했으며, 증인 없이 재판받고 선고 없이 징벌을 받았다. 그리고 그에게서 아무 잘못을 찾을 수 없다고 고백한 불공정한 재판관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이제 곧 받을 것이었다. 예수가 “유대인의 임금”이라 언급하여 그들의 애국심에 호소하려고 생각했다면, 빌라도는 철저히 실패했다. 유대인은 그러한 임금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주사제와 사두개인들이 “우리에게는 케자 외에 아무 임금이 없소이다”라는 선언은 생각이 없는 민중에게도 충격이었지만, 그 폭도들이 감히 주의 운동을 지지하려 했더라도 예수를 구하기에는 이제 너무 늦었다.
185:8.2 (1996.6) 빌라도는 소동이나 폭동을 두려워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기간에 그런 소란이 일어나는 위험을 감히 무릅쓰지 않았다. 그는 케자로부터 최근에 질책을 받았고, 또 한 번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가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명령했을 때 그 폭도들은 갈채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대야와 물 얼마큼을 달라 하고서, 거기서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결백하노라. 그를 죽여야 한다고 너희는 굳게 결심하였으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를 찾지 못했노라. 너희가 이를 책임지라. 군인들이 그를 인도하리라.” 그리고 나서 폭도들이 갈채하며 대답했다: “그의 피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쏟아질지어다.”
186:0.1 (1997.1) 예수와 고발자들이 헤롯을 보려고 떠났을 때, 주는 사도 요한을 향하여 말했다: “요한아, 너는 나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 더 없느니라. 내 어머니께로 가서, 내가 죽기 전에 나를 보도록 어머니를 모셔 오라.” 주의 요청을 들었을 때, 요한은 적들 사이에 주를 혼자 두고 떠나기 싫었어도, 베다니로 서둘러 갔다. 거기에는 예수의 가족 전부가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 모여 기다리고 있었고, 이들은 예수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린 나사로의 자매였다.
186:0.2 (1997.2) 아침에 몇 번, 사자들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예수의 재판의 진행에 관하여 소식을 가져왔다. 그러나 예수가 사형되기 전에 어머니를 보고 싶다고 요청하는 말을 가지고 요한이 도착하기 꼭 몇 분 전까지, 예수의 가족은 베다니에 도착하지 않았다. 예수가 자정에 체포된 뒤로 일어난 모든 것을 요한 세베대가 그들에게 일러준 뒤에, 어머니 마리아는 당장에 요한을 따라서 맏아들을 보러 갔다. 마리아와 요한이 도시에 도착할 때가 되어, 예수는 그를 십자가에 못박을 로마 군인들을 동반하고 이미 골고다에 다다랐다.
186:0.3 (1997.3)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한과 함께 아들에게 가려고 떠났을 때, 누이 동생 룻은 나머지 가족과 함께 뒤에 남으려 하지 않았다. 룻이 어머니를 따라가려고 각오가 굳었기 때문에, 오빠 유다가 룻과 함께 갔다. 주의 나머지 가족은 야고보의 지도 하에서 베다니에 남아 있었고, 거의 시간마다 다윗 세베대의 사자들이 그들에게 맏형 나사렛 예수를 사형에 처하는 그 끔찍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가 보고하는 말을 전했다.
186:1.1 (1997.4) 이 금요일 아침 8시 반쯤에 빌라도 앞에서 예수의 청문회가 끝났고, 주는 그를 십자가에 못박을 로마 군인들의 보호에 맡겨졌다. 로마인들이 예수를 맡자마자, 유대인 경비대의 지휘관은 부하들과 함께 성전 본부로 행진하여 돌아갔다. 주사제와 동료 산헤드린 의원들은 경비대의 뒤를 바짝 따라갔고, 성전에, 돌을 깎아 만든 너른 방에, 여느 때 회의하는 장소로 바로 갔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를 어떻게 처리했는가 알려고 기다리는 다른 산헤드린 의원들을 많이 발견했다. 예수의 재판과 사형 선고에 관하여 가야바가 산헤드린에 보고하느라고 바쁜 동안에, 유다는 주를 체포하고 사형 선고를 내리는 데 그가 한 역할에 대하여 보상(報償)을 요구하려고 그들 앞에 나타났다.
186:1.2 (1997.5) 이 유대인들은 모두 유다를 몹시 싫어했다. 그들은 다만 더할 나위 없이 경멸하는 느낌으로 그 배반자를 바라보았다. 가야바 앞에서 예수가 재판받는 동안 내내, 그리고 그가 빌라도 앞에 나타난 동안, 유다는 자신의 배반 행위에 관하여 양심이 찔렸다. 그는 또한 예수를 배반한 사람으로서 수고한 대가로 그가 받기로 된 보상에 대하여 비로소 얼마큼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유대 당국의 차갑고 쌀쌀한 태도가 싫었다. 그런데도 비겁한 행위에 대하여 그는 후하게 보상받기를 기대했다. 산헤드린의 전체 회의 앞에 부름받고, 거기서 자신이 칭송받는 것을 들으며, 한편 그가 나라에 베풀었다고 자처했던 그러한 큰 수고의 표시로서 그들이 자기에게 적당한 명예를 수여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니까 대사제의 하인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바로 방 바깥으로 그를 불러냈을 때, 자기 중심인 이 배반자가 크게 놀란 것을 상상해 보라. 그 하인이 말했다: “유다여, 예수를 배반한 것에 대하여 당신에게 돈을 주라고 나는 지시를 받았소. 여기 당신의 보상이 있소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가야바의 하인은 유다에게 은화(銀貨) 서른 잎을 담은 자루를 주었다―당시에 우수하고 건강한 노예의 값이었다.
186:1.3 (1998.1) 유다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방으로 도로 달려갔지만, 문지기가 막았다. 산헤드린에게 상소(上訴)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그를 들여 놓으려 하지 않았다. 이 유대인 권력자들이 그로 하여금 친구인 주를 배반하게 만들고, 그리고 나서 상금으로 그에게 은화 서른 잎을 주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창피를 당했고 환멸을 느꼈으며, 완전히 마음이 짓밟혔다. 말하자면, 넋을 잃은 듯이, 그는 성전을 떠나서 걸어갔다. 정신없이 돈 자루를 깊은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바로 그 호주머니에 그는 사도들의 자금을 담은 자루를 아주 오랫동안 가지고 다녔다. 그는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러 가고 있던 군중의 뒤를 따라서 도시를 통해 헤매다녔다.
186:1.4 (1998.2) 유다는 사람들이 예수를 못박은 채로 가로대를 올리는 것을 먼 거리에서 보았고, 이것을 보고 나서 성전으로 도로 달려갔다. 문지기를 지나 강제로 들어가서, 아직도 회의 중인 산헤드린 앞에 섰다. 그 배반자는 거의 숨을 쉬지 못했고, 어지간히 어지러웠지만, 그럭저럭 더듬거리며 이런 말을 뱉었다: “내가 죄 없는 자의 피를 팔아넘겼으니 죄를 지었소이다. 당신들은 나를 모욕하였소이다. 내가 수고한 것에 대하여, 보상으로서 내게 돈―노예의 값―을 내밀었소이다. 내가 이렇게 한 것을 뉘우치오이다. 여기 당신들의 돈이 있소이다. 나는 이 행위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소이다.”
186:1.5 (1998.3) 유대인 권력자들은 유다의 말을 듣자, 그에게 코웃음을 쳤다. 그들 중에 유다가 서 있던 곳 가까이 앉아 있던 한 사람은 그에게 방에서 나가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너의 주는 로마인들에게 이미 사형당했고, 네 죄책감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네가 알아서 처리하라―그리고 꺼져라!”
186:1.6 (1998.4) 산헤드린의 방을 떠나면서, 유다는 돈 자루에서 은화 서른 잎을 꺼내서 성전 마루에 동댕이쳤다. 성전을 떠났을 때, 그 배반자는 거의 미쳐 버렸다. 유다는 죄의 참 성질을 깨닫는 체험을 이제 겪고 있었다. 악행의 온갖 매력과 황홀함과 취한 기분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 그 행악자는 혼자 서서, 환멸에 빠지고 실망한 그의 혼을 판결하는 선고(宣告)를 직면하고 있다. 죄는 저지를 때 사람을 매혹하고 모험하는 맛이 나지만, 이제 벌거벗고 낭만적이 아닌 사실을 거두는 일에 직면해야 한다.
186:1.7 (1998.5) 한때 땅에서 하늘나라의 대사였던 이 사람은, 이제 버림받은 채로 외로이 예루살렘의 거리를 지나서 걸었다. 그의 절망은 필사적이고 거의 절대적이었다. 계속 도시를 통해서, 담 바깥으로, 힌놈의 골짜기의 끔찍한 외로움 속으로 쏘다녔다. 거기서 가파른 바위로 기어 올라가서, 외투의 허리띠를 쥐고 한쪽 끝을 어느 작은 나무에 매고 다른 끝을 목 둘레에 묶었고, 절벽 너머로 몸을 내던졌다. 죽기 전에, 불안한 그의 손이 묶었던 매듭이 풀어졌고, 배반자의 몸은 밑에 들쭉날쭉한 바위 위로 떨어지면서 박살이 났다.
186:2.1 (1999.1) 체포되었을 때, 예수는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땅에서 할 일이 끝났음을 알았다. 자기가 어떤 종류의 죽음을 겪을 것인가 잘 알았고, 이른바 그의 재판의 세부에 관하여 거의 아랑곳하지 않았다.
186:2.2 (1999.2) 산헤드린 의원들의 법정 앞에서, 그는 거짓 맹세하는 증인들의 증언에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친구가 묻든, 적이 묻든, 반드시 대답을 끌어낼 오직 한 가지 물음이 있었으니, 곧 땅에서 그의 사명의 성질과 신성(神性)에 관한 물음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인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어김없이 대답했다. 호기심 있고 사악한 헤롯 앞에서, 끝까지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빌라도 앞에서, 그의 말씀 덕분에 빌라도나 어떤 다른 진지한 사람이 진리를 더 잘 알도록 도움이 될까 생각했을 때에야 입을 열었다. 예수는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것이 쓸데없음을 사도들에게 전에 가르쳤고, 그가 가르친 것을 이제 감히 실천했다. 이때 그의 행위는, 신다운 성품의 말없는 위엄과 엄숙한 기품과 함께, 인간의 성품을 참을성 있게 복종시키는 것을 본보기로 보여주었다. 그가 고발당한 정치적 죄목에 관계된 어떤 질문도―총독의 관할에 속한다고 그가 인식한 어떤 문제라도―그는 빌라도와 함께 아주 기꺼이 이야기했다.
186:2.3 (1999.3) 모든 다른 필사 인간이 해야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인간사의 자연스럽고 평범한 과정에 복종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예수는 확신했고, 따라서 사회적으로 근시안이고 영적으로 눈먼 동료 필사자들이 책략을 꾸민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순전히 인간다운 그의 능력, 설득하는 웅변조차 이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비록 예수가 유란시아에서 살다가 죽었어도, 그의 인생 전부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가 창조하고 끊임없이 유지하는 우주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가르침을 주려고 고안된 구경거리였다.
186:2.4 (1999.4) 근시안인 이 유대인들은 보기 사납게 주를 죽이라고 아우성을 쳤고, 한편 그는 무서운 침묵 속에서 한 나라가―땅에서 그의 아버지의 민족이―사멸(死滅)하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거기에 서 있었다.
186:2.5 (1999.5) 예수는 이유 없이 계속 쏟아지는 모욕을 받고서 침착을 유지하고 위엄을 주장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인격을 얻었다. 그는 위협에 끄떡하지 않았다. 안나스의 하인에게 처음에 폭행을 당했을 때, 그에게 대적하여 정식으로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을 요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제안했을 뿐이다.
186:2.6 (1999.6) 처음부터 끝까지, 빌라도 앞에서 그가 이른바 재판이라는 것을 받을 때, 구경하는 하늘의 무리들은 “예수 앞에서 빌라도가 심판받는” 장면의 그림을 우주에 방송하는 것을 자제할 수 없었다.
186:2.7 (1999.7) 가야바 앞에 있을 때, 그리고 모든 거짓 증언이 밝혀지고 나서, 예수는 대사제의 물음에 서슴지 않고 대답했고, 이렇게 자신의 증언 속에서 그를 신성 모독으로 정죄할 근거로 삼고 싶었던 것을 마련해 주었다.
186:2.8 (1999.8) 의도는 좋았어도 그를 석방하려고 빌라도가 건성으로 기울인 노력을 주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정말로 빌라도를 불쌍히 여겼고, 전혀 깨닫지 못하는 그의 정신을 일깨워주려고 진지하게 애썼다. 예수를 고발한 죄목(罪目)을 취소하라고 로마인 총독이 유대인들에게 아무리 호소했어도, 그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슬픈 그 시련 전체를 통하여 내내, 소박한 품위와 허세부리지 않는 위엄을 가지고 처신했다. 그를 죽이려 하는 자들이 그가 “유대인의 임금”인가 물었을 때 그들이 진지하지 않다고 비난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제한하는 설명을 조금 덧붙이고 그 칭호를 받아들였는데, 이는 그들이 그를 거절했지만, 그가 영적 의미에서도 그들에게 민족의 진정한 지도력을 마지막으로 제공한 사람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86:2.9 (2000.1) 이 재판 중에 예수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의 말씀은 하나님과 협동하는 관계에서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인품을 완성할 수 있는가 모든 필사자에게 보여주기에 충분했고, 그러한 사람이 참으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를 택하고 이렇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활동적인 아들이 될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의 생애에서 어떤 방법으로 명백히 나타날 수 있는가 온 우주에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186:2.10 (2000.2) 그가 무지한 필사자들을 사랑한 것은, 거친 군인과 지각없는 하인들의 놀림ㆍ구타(毆打)ㆍ주먹질을 당하고서 그가 보인 참을성과 대단한 침착성에서 넉넉히 드러난다. 그들이 그의 눈을 가리고, 놀리면서 “너를 친 자가 누구인가 우리에게 예언하라” 외치며 얼굴을 쳤을 때, 그는 성을 내지도 않았다.
186:2.11 (2000.3) 예수가 채찍질을 받은 뒤에, 빌라도가 군중 앞에 예수를 내세우고 “이 사람을 보라!” 외쳤을 때, 빌라도는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더 참되게 말했다. 두려움에 질린 로마인 총독은, 정말로, 바로 그 순간에 우주가 귀를 기울이고 멈춰서, 그 우주의 사랑하는 군주가 눈이 멀고 타락한 필사 백성들의 놀림과 주먹질로 이렇게 굴욕당하는 이 독특한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거의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빌라도가 말하자, “하나님인 사람을 보라!”하는 소리가 온 네바돈에 두루 메아리쳤다. 한 우주에 두루,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그 이후로, 그 사람을 계속 보았고, 한편 하보나의 하나님, 온 우주의 최고 통치자는 시공의 이 지역 우주에서 필사 인간의 이상(理想)을 성취한 것으로서 그 나사렛 사람을 받아들인다. 비할 데 없는 일생에서 그는 하나님을 사람에게 드러내지 못한 적이 없다. 이제, 필사 생애의 이 마지막 사건에서, 그리고 나중에 죽을 때, 그는 새롭게 감동적으로 사람을 하나님께 드러내 보였다.
186:3.1 (2000.4) 빌라도 앞에서 청문회가 끝나고 예수가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진 뒤에 조금 있다가, 성전 경비원들의 한 무리가 주의 추종자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거나 체포하려고 겟세마네로 서둘러 갔다. 그러나 이들이 도착하기 오래 전에 이 추종자들은 흩어졌다. 사도들은 지정된 숨는 장소로 물러갔고, 그리스인들은 따로 갈라져 예루살렘에 있는 여러 집으로 가버렸으며,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다윗 세베대는 예수의 적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주가 무척 자주 기도하고 예배하려고 은거했던 곳 가까이, 골짜기 위로 대여섯 텐트를 일찍부터 이동하였다. 여기에 숨고, 동시에 사자(使者) 봉사를 위하여 한 중심, 조정하는 근거지를 유지하려고 생각했다. 다윗이 캠프를 떠나기가 무섭게 성전 경비원들이 도착했다. 거기서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자 그들은 캠프를 불사르는 것으로 만족했고, 그리고 나서 성전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그들의 보고를 받고 나서, 산헤드린은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렇게 철저히 놀라고 뿌리가 뽑히어, 폭동이 일어날 위험이나 또는 집행자들의 손에서 예수를 구하려고 아무런 시도도 없으리라는 것에 만족했다. 그들은 마침내 숨을 편히 쉴 수 있었고, 그래서 폐회(閉會)하고, 저마다 유월절을 위하여 준비하려고 제 갈 길을 갔다.
186:3.2 (2000.5) 십자가 처형을 위하여 빌라도가 예수를 로마 군인들에게 넘기자마자, 한 사자가 다윗에게 알리려고 겟세마네로 서둘러 갔고, 주자(走者)들이 5분 안에 벳세다ㆍ펠라ㆍ필라델피아ㆍ시돈ㆍ세켐ㆍ헤브론ㆍ다마스커스ㆍ알렉산드리아로 달려갔다. 이 사자들은, 유대인 권력자들의 끈질긴 부탁을 받고서 로마인들이 막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려 한다는 소식을 가져갔다.
186:3.3 (2001.1) 이 비극의 날 내내, 주가 무덤에 안치되었다는 소식이 마침내 나갈 때까지, 다윗은 사도와 그리스인들, 그리고 베다니에서 나사로의 집에 모여 있던, 예수의 세상 식구들에게, 사자들을 통해서 거의 반시간마다 보고를 보냈다. 예수가 무덤에 묻혔다는 소식을 가지고 사자들이 떠났을 때, 유월절을 축하하기 위하여, 또 다가오는 안식일에 쉬라고, 다윗은 지역 연락원 집단을 해산하고 그들에게 니고데모의 집에서 일요일 아침에 그에게 조용히 보고하라고 지시했는데, 거기서 그는 안드레와 시몬 베드로와 함께 며칠 동안 숨어 있을 생각이었다.
186:3.4 (2001.2) 생각이 특이한 이 다윗 세베대는 예수의 주요 제자들 가운데서, 그가 죽고 “사흘째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주의 주장을 글자 그대로, 간단히 사무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다윗은 한때 예수가 이렇게 예언하는 것을 들었고, 글자 그대로 믿는 성질의 머리였기 때문에,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경우에 그 소식을 퍼뜨리려고 가까이 있도록, 니고데모의 집에서 일요일 아침 일찍 사자들을 모으려고 이제 일을 꾸몄다. 다윗은 예수의 추종자들 가운데 아무도 예수가 그렇게 빨리 무덤에서 돌아오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믿는 것에 대하여 거의 입을 열지 않았고, 먼 도시와 신자 중심들로 금요일 아침에 파송된 연락원들에게 일러준 것을 제외하고, 일요일 아침 일찍 사자단(使者團)을 총동원하는 것에 대하여 아무 말도 비치지 않았다.
186:3.5 (2001.3) 그래서 예수를 따르던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 전역에 두루, 그리고 그 둘레에 흩어져서, 그날 밤 유월절 저녁을 먹고 이튿날에는 숨어 있었다.
186:4.1 (2001.4) 단지 유대인 권력자들의 아우성에 저항하기가 두려웠기 때문에 결백한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넘겨준 죄책감을 이처럼 피하려 애쓰면서 군중 앞에서 손을 씻은 뒤에, 빌라도는 주를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주라고 명령했고, 그들의 지휘관에게 주를 즉시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말했다. 예수를 떠맡은 뒤에, 군인들은 집정관 관저의 안뜰로 그를 도로 데려갔고, 헤롯이 그에게 입혔던 겉옷을 벗긴 뒤에 그들은 주를 자신의 옷으로 갈아 입혔다. 이 군인들은 그를 비웃고 조롱했지만, 더 이상 육체적 징벌을 가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이제 로마 군인들과 따로 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숨어 있었고, 적들은 제 갈 길을 갔으며, 요한 세베대조차 이제 더 옆에 있지 않았다.
186:4.2 (2001.5) 빌라도가 예수를 군인들에게 넘긴 것은 8시가 조금 지난 뒤였고,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는 장소를 향하여 떠난 것은 9시 조금 전이었다. 반시간이 넘는 이 동안에, 예수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한 큰 우주의 집행 사무는 실지로 정지되었다. 가브리엘과 네바돈의 으뜸 통치자들은 여기 유란시아에 모여 있든지, 아니면 유란시아에서 사람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하여 정보를 계속 받으려는 노력으로, 천사장들의 공간 보고서를 바짝 정신차려 듣고 있었다.
186:4.3 (2001.6) 군인들이 예수와 함께 골고다를 향하여 떠날 준비가 되었을 때, 그들은 보기 드문 그의 침착성과 비상한 품위에, 불평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데 비로소 감명을 받았다.
186:4.4 (2001.7) 십자가에 처형하는 장소로 예수와 함께 떠나는 데 지체된 것은 대체로, 그 지휘관이 사형 선고를 받은 두 도둑을 함께 데리고 가려고 마지막 순간에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날 아침에 십자가에 못박히기로 되었으니까, 로마인 지휘관은 이 두 사람이 유월절 축제 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기보다, 기왕이면 예수와 함께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186:4.5 (2002.1) 도둑들은 준비가 되자마자 안뜰로 끌려 왔고, 거기서 예수를 바라보았다. 하나는 처음으로 보았지만, 다른 하나는 예수가 말씀하는 것을 성전에서, 또 펠라 캠프에서 여러 달 전에, 자주 들은 적이 있었다.
186:5.1 (2002.2) 예수의 죽음과 유대인의 유월절 사이에는 아무런 직접 관계가 없다. 이날, 유대인의 유월절을 준비하는 날에, 성전에서 유월절 양들을 바칠 때쯤, 주가 육체를 입은 목숨을 버린 것은 참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어쩌다 함께 일어났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도 땅에서 사람의 아들의 죽음이 유대인의 희생 제도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예수는 유대인이었지만, 사람의 아들로서 그는 이 영역에서 한 필사자였다. 이미 열거한 사건, 그리고 얼마 있다가 주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이 시간까지 이끄는 사건들은, 이 무렵에 그의 죽음이 순전히 자연스러운 일, 사람이 처리한 일이었다는 것을 가리키기에 넉넉하다.
186:5.2 (2002.3)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도록 계획하고 사형을 집행한 것은 사람이요, 하나님이 아니었다. 유란시아에서 인간사(人間事)의 진행에 아버지가 간섭을 마다하신 것이 참말이지만,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는 땅에서 실행된 대로 아들의 죽음을 선포하거나 청구하거나 요구하지 않았다. 어떤 방법으로, 머지 않아, 예수가 필사의 몸, 살을 입은 육신화를 벗어야 했으리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두 도둑 사이에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서, 셀 수 없이 많은 방법으로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이 모두가 사람이 한 일이요,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다.
186:5.3 (2002.4) 세례받을 때, 주는 일곱째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을 우주에 수여하는 일을 마치는 데 필요했던 체험, 땅에서 육체를 입고 맛보라고 요구된 체험 기법을 이미 마쳤다. 바로 이때, 땅에서 예수의 임무는 끝났다. 그 뒤에 산 여생은 모두, 그가 죽는 방법조차, 이 세상에서, 그리고 다른 세계들에서 필사 인간들의 복지와 향상을 위하여, 그의 편에서 순전히 몸소 베푸신 수고였다.
186:5.4 (2002.5)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필사 인간이 신앙을 통해서 영적으로 의식할 수 있다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그 복음은 예수의 죽음과 상관이 없다. 정말로, 이 하늘나라 복음 전부가 주의 죽음으로 엄청나게 빛을 받았다는 것이 참말이기는 하지만, 그의 생애로 인하여 더욱 빛을 받았다.
186:5.5 (2002.6) 땅에서 사람의 아들이 말씀하고 행한 모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서로 형제라는 신조를 크게 빛나게 했지만, 하나님과 사람의 이 기본 관계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는 사랑과 신다운 아들들의 타고난 자비, 이 우주 사실에 본래부터 있다.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온 우주에 두루, 모든 다른 세상에서, 사람과 창조주 사이에 감동적이고 신답게 아름다운 이 관계는 영원부터 존재해 왔다. 그리고 이 관계는 어떤 면에서도, 하나님의 창조 아들들이 정기적으로 이처럼 자신을 수여하는 행위와 상관이 없으며, 그들은 이처럼 각자의 지역 우주에서 무제한 통치권을 마지막으로 얻기 위하여 치러야 할 값의 일부로서 자신이 창조한 지적 존재들의 성품과 모습을 입는다.
186:5.6 (2002.7)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사람과 하나님이 함께 협동하는 관계를 이렇게 초월적으로 보여준 이후와 마찬가지로, 유란시아에서 예수가 살다가 죽기 전에도 땅에 있는 필사 인간을 사랑하셨다. 유란시아에서 한 사람으로서 네바돈의 하나님이 육신화한 이 막대한 거래는 영원ㆍ무한하고 우주적인 아버지의 속성을 더 크게 만들 수 없지만, 네바돈 우주의 모든 다른 행정가와 생물을 풍성하게 만들고 일깨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이렇게 미가엘이 수여되었다고 해서 우리를 더 사랑하지는 않아도, 하늘의 모든 다른 지적 존재는 그렇다. 이것은 예수가 하나님을 사람에게 드러냈을 뿐 아니라, 또한 마찬가지로 신들에게, 그리고 온 우주에 있는 하늘의 지적 존재들에게, 사람을 새롭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186:5.7 (2003.1) 예수는 죄를 갚는 희생물로서 죽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류의 타고난 도덕적 죄를 대신 갚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종족으로서 죄가 없다. 죄를 지었다는 느낌은 순전히 개인이 저지르는 죄, 아버지의 뜻과 그 아들들의 행정부에 대하여, 알면서 깊이 생각하여 반항하는 문제이다.
186:5.8 (2003.2) 죄와 반란은 하나님의 파라다이스 아들들을 수여하는 근본 계획과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구제하는 계획은 우리가 보기에 수여 계획의 임시 모습인 듯하다.
186:5.9 (2003.3) 유란시아의 필사자에게 하나님이 베푸는 구원은, 예수가 무지한 필사자들의 잔인한 손에 죽지 않았더라도, 똑같이 효과 있고 어김없이 확실했을 것이다. 땅의 필사자들이 주를 좋게 받아들이고, 주가 육체를 입은 인생을 자진하여 그만두고 유란시아를 떠났더라면, 하나님의 사랑과 아들의 자비, 이 사실―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너희 필사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너의 개인 체험에서 그러한 진리를 사실로 만드는 데는 오직 한 가지가 요구되는데, 영에게서 태어난 너의 믿음이다.
187:0.1 (2004.1) 두 도적이 준비된 뒤에, 한 백부장의 지휘 하에 군인들은 십자가에 처형하는 장면을 향하여 떠났다. 이 군인 12명을 책임진 백부장(百夫長)은 겟세마네에서 예수를 붙잡으려고 전날 밤에 로마 군인들을 이끌었던 바로 그 지휘관이었다. 십자가에 못박힐 각 사람에게 군인 네 명을 배치하는 것이 로마인의 관습이었다. 두 도둑은 십자가에 못박히려고 끌려가기 전에 적절히 채찍을 맞았지만, 예수는 육체의 징벌을 더 받지 않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지휘관은 예수가 선고를 받기도 전에 이미 충분히 채찍질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187:0.2 (2004.2) 예수와 함께 못박힌 두 도둑은 바라바의 동료였고, 바라바가 빌라도의 유월절 사면(赦免)으로 풀려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지도자와 함께 처형되었을 것이다. 예수는 이처럼 바라바 대신에 십자가에 못박혔다.
187:0.3 (2004.3) 예수는 그가 이제 바야흐로 하려는 일, 십자가 처형에 자유의지로 순응한다. 이 체험을 미리 내다보면서 그는 말했다: “내가 목숨을 기꺼이 버리는 까닭에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고 붙드시느니라. 그러나 나는 내 목숨을 다시 찾겠고, 아무도 내 목숨을 내게서 빼앗지 못하느니라―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목숨을 버릴 권한이 있고 붙잡을 권한이 있노라. 나는 아버지로부터 그런 명령을 받았노라.”
187:0.4 (2004.4) 이날 아침 9시 바로 전에, 군인들은 예수를 집정관 관저에서 골고다로 끌고 갔다. 그들 뒤에 예수를 남모르게 동정하던 많은 사람이 따랐지만, 2백 명 이상 되는 이 무리의 대부분은 적이든지, 아니면 호기심 있는 한가한 사람들이었고, 이들은 다만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는 충격을 즐기고 싶어했다. 유대인 지도자들 가운데 겨우 몇 사람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보려고 나갔다. 빌라도가 그를 로마 군인들에게 넘겼고 그가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까, 그들은 성전에서 회의하는 데 바빴고, 거기서 예수의 추종자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토론했다.
187:1.1 (2004.5) 관저의 안뜰을 떠나기 전에, 군인들은 예수의 어깨에 가로대를 올려놓았다. 선고받은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못박힐 장소까지 가로대를 나르라고 강요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렇게 선고받은 사람은 십자가 전체가 아니라, 이 짧은 재목만 날랐다. 세 십자가를 세우기 위한 더 길고 수직(垂直)으로 세우는 재목들은 이미 골고다로 수송되었고, 군인과 죄수들이 도착할 때가 되자, 땅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187:1.2 (2004.6) 관습에 따라서 그 지휘관은 행렬을 이끌었고, 작은 흰 판자들을 가지고 갔는데, 이 위에는 목탄으로 죄수들의 이름과 선고받은 죄목의 성질이 적혀 있었다. 두 도둑을 위해서 백부장은 그들의 이름이 적힌 게시판을 가지고 있었고, 그 밑에는 “도적”이라는 낱말이 하나 적혀 있었다. 희생자를 가로대에 못박고, 수직 재목 위에 제 자리로 들어올린 뒤에, 선고받은 사람이 무슨 죄로 십자가에 못박히는가 모든 증인이 알 수 있도록, 이 게시판을 십자가 꼭대기, 죄수의 머리 바로 위에 못박는 것이 관습이었다. 예수의 십자가에 붙여놓으려고 백부장이 가지고 간 설명문은 바로 빌라도가 라틴어ㆍ그리스어ㆍ아람어로 썼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사렛 예수―유대인의 임금.”
187:1.3 (2005.1) 빌라도가 이 설명문을 썼을 때 아직 자리에 있던 유대 당국의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유대인의 임금”이라 부른 데 맹렬히 항의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러한 고발이 그가 선고를 받게 만든 죄목의 일부였다고 그들에게 상기시켰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생각을 바꾸라고 밀어붙일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적어도 “그가 말하되, ‘나는 유대인의 임금이라’”고 고치라 탄원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완강했고 글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 더 계속된 온갖 간청에 그는 이렇게만 대답했다: “내가 이미 썼으니, 엎질러진 물이라.”
187:1.4 (2005.2) 보통은, 큰 무리의 사람들이 선고받은 죄수를 구경하도록 가장 먼 길로 골고다까지 걸어가는 것이 관습이었지만, 이날 그들은 가장 가까운 길로 다마스커스 대문까지 갔는데, 이 대문은 도시 바깥으로, 북쪽으로 이끌었다. 이 길을 따라가서 금방 골고다에 다다랐으며,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처형하는 공식 장소였다. 골고다를 지나서 부자들의 별장이 있었고, 길 건너편에는 많은 부유한 유대인의 무덤이 있었다.
187:1.5 (2005.3)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유대인의 처형 방법이 아니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이 집행 방법을 페니키아인으로부터 배웠다. 헤롯조차도, 온갖 잔인한 일을 했지만 십자가 처형을 이용하지는 않았다. 로마인들은 결코 로마 시민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고, 오직 노예와 지배받는 민족들이 이 치욕스러운 방법으로 죽음을 당했다. 예루살렘이 포위된 동안,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뒤 꼭 40년이 되어, 온 골고다는 수천의 십자가로 덮였고, 그 십자가에 날이면 날마다 유대 민족의 청춘이 이슬로 사라졌다. 이날 씨 뿌린 것으로부터 정말로 끔찍한 수확이었다.
187:1.6 (2005.4) 죽음의 행렬이 예루살렘의 좁은 거리를 따라서 지나가는 동안, 다정한 많은 유대 여인이 예수가 그런 치욕스러운 죽음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서 눈물을 그칠 수 없었으니, 그들은 격려하고 동정하는 예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고 사랑으로 봉사한 그의 일생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가 지나가는 동안에, 이 숱한 여인들이 슬퍼하고 한탄하였다. 그들 가운데 더러가 감히 옆으로 따라오려고 했을 때, 주는 그들에게 얼굴을 향하고 말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오히려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내 일은 거의 끝났으나―나는 곧 아버지께로 가노라―예루살렘이 끔찍하게 고통받는 시절이 바로 시작되느니라. 보라, 아이 없는 자와 어린것들에게 젖을 먹인 적이 없는 가슴이 복이 있도다 너희가 말할 날이 다가오고 있느니라. 그날에 너희가 끔찍한 고통에서 구원받도록 산에 있는 돌들에게 너희 위로 굴러 떨어지라 기도하리라.”
187:1.7 (2005.5) 십자가에 달리려고 끌려가고 있는 사람에게 친절을 보이는 것이 엄격하게 법에 어긋났기 때문에, 이 예루살렘 여인들이 예수에게 동정심을 보인 것은 정말로 용감한 일이었다. 구경꾼들이 선고(宣告)받은 사람을 놀리고 비웃고 조롱하는 것은 허락되었지만, 조금이라도 동정심을 표현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친구들이 숨어 있는 이 암울한 시간에, 동정의 표현을 고맙게 여기기는 했어도, 예수는 그에게 감히 동정심을 보여서 마음 착한 이 여인들이 당국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를 바랐다. 이와 같은 때에도 예수는 자신을 거의 생각지 않았고, 오직 예루살렘과 온 유대 민족에게 닥쳐올 끔찍한 비극의 날을 생각했다.
187:1.8 (2006.1) 십자가에 못박히려고 가는 길에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주는 몹시 지쳤고, 기운이 거의 다하였다. 엘리야 마가의 집에서 마지막 만찬을 든 뒤로, 먹을 것도 물도 입에 대지 못했고, 한 순간 눈을 붙이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게다가 가혹한 채찍질과 그에 따른 육체적 고통과 피 흘림은 말할 것도 없고, 선고받는 시간까지 연달아 청문회가 있었다. 이 모든 것 위에 극도의 정신적 고통, 날카로운 영적 긴장, 인간적으로 외로운 끔찍한 느낌이 겹쳐졌다.
187:1.9 (2006.2)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길에, 대문을 거친 뒤에 곧, 예수가 가로대를 지고 비틀거리자 육신의 힘이 잠시 빠졌고, 그는 무거운 짐의 무게에 눌려 쓰러졌다. 군인들이 그에게 소리를 지르고 발로 그를 걷어찼지만, 그는 일어날 수 없었다. 이것을 보았을 때, 예수가 무엇을 이미 견디었는가 알았기 때문에, 그 지휘관은 군인들에게 그만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나서 지나가던 어떤 사람, 키레네에서 온 시몬이라는 사람에게, 예수의 어깨에서 가로대를 받아들라고 명령했고, 그에게 골고다까지 가는 남은 길을 가로대를 지고 가라고 강제했다.
187:1.10 (2006.3) 이 시몬이라는 사람은 북 아프리카의 키레네에서 유월절에 참석하려고 먼 길을 왔다. 도시의 담 바로 바깥에서 다른 키레네 사람들과 함께 멈추었고, 로마인 지휘관이 그에게 예수의 가로대를 나르라고 명령했을 때, 그는 도시에 있는 성전 예배에 가는 길이었다. 시몬은 십자가에서 주가 돌아가시는 시간을 통해서 내내 남아 있었고, 주의 친구와 적들 중에 많은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활이 있은 뒤에, 그리고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에, 그는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용감한 신자가 되었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자기 가족을 하늘나라로 인도했다. 두 아들, 알렉산더와 루푸스는 아프리카에서 새 복음을 가르치는 아주 유능한 선생이 되었다. 그러나 시몬은 예수의 짐을 대신 졌는데, 이 예수와 한때 다쳤던 그의 아들과 사귄 유대인 선생이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결코 알지 못했다.
187:1.11 (2006.4) 이 죽음의 행렬이 골고다에 다다랐을 때는 9시가 조금 지났고, 로마 군인들은 두 도둑과 사람의 아들을 각자의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착수했다.
187:2.1 (2006.5) 군인들은 먼저 주의 팔을 노끈으로 가로대에 묵었고, 그리고 나서 두 손을 나무에 못박았다. 이 가로대를 기둥 위에 들어올렸을 때, 군인들은 가로대를 십자가의 수직(垂直) 재목에 단단히 못박은 뒤에, 발을 나무에 묶고 못박았으며, 두 발을 꿰뚫으려고 긴 못 하나를 썼다. 수직 재목은 적당한 높이에 끼워 넣은 큰 나무못이 있었고, 이 못은 몸무게를 떠받들기 위하여 일종의 안장으로 쓰였다. 십자가는 높지 않았고, 주의 발은 땅에서 겨우 90센티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사람들이 비웃으며 그에게 뱉은 말을 다 들을 수 있었고, 아주 생각 없이 그를 놀려댄 모든 사람의 얼굴 표정을 뻔히 볼 수 있었다. 또한 거기 있던 사람들은 오래 지속되는 고통을 겪으며 서서히 죽는 이 시간에, 예수가 하신 모든 말씀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187:2.2 (2007.1) 십자가에 못박힐 사람들의 옷을 모두 벗기는 것이 관례였지만, 유대인들이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을 대중 앞에 노출하는 것을 크게 반대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모든 사람을 위하여 적절한 허리감는 천을 반드시 마련해 주었다. 따라서, 예수의 옷이 벗겨진 뒤에, 십자가에 올려지기 전에 그는 이렇게 걸쳤다.
187:2.3 (2007.2) 잔인하고 오래 지속되는 징벌을 마련하기 위해서 십자가 처형이 이용되었고, 희생자는 때때로 며칠 동안 죽지 않았다. 예루살렘에는 사람들이 십자가 처형을 반대하는 감정을 상당히 가졌고, 유대 여인의 사회가 존재했는데, 이들은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희생자에게 약물 넣은 포도주를 제공할 목적으로 반드시 한 대표를 처형 장소에 보냈다. 그러나 마취제 넣은 포도주를 맛보았을 때, 목이 마르기는 했어도, 예수는 마시려 하지 않았다. 주는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 의식을 지니기를 택했다. 처참하고 보기 어려운 이 모습으로도, 죽음을 마주하고 인간 체험의 끝까지 자진하여 복종함으로 죽음을 이기기를 바랐다.
187:2.4 (2007.3)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두 도둑은 이미 십자가에 올려졌고 그동안 내내 집행자들에게 욕을 퍼붓고 침을 뱉었다. 그들이 그를 가로대에 못박는 동안에 예수는 오직 말했다,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소서, 저희는 무엇을 하는지 모르나이다.” 사랑으로 헌신하는 그런 생각이 사심 없이 봉사하는 전 생애에 주요한 동기가 아니었다면 그토록 자비롭게 사랑으로 집행자들을 위하여 탄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생 동안에 가졌던 관념ㆍ동기ㆍ열망은 위기(危機)에 처했을 때 훤히 드러난다.
187:2.5 (2007.4) 주가 십자가에 들어올려진 뒤에, 지휘관은 죄목을 그의 머리 위에 못박았는데, 이것은 세 나라 말로 적혀 있었다: “나사렛 예수―유대인의 임금.” 유대인들은 이것을 모욕이라 믿었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그러나 빌라도는 공손하지 않은 그들의 태도에 기분이 거슬렸다. 그는 위협과 모욕을 받았다고 느꼈고, 좁은 마음으로 복수하는 이 방법을 이용했다. “모반자 예수”라고 쓸 수도 있었지만, 그는 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바로 나사렛이라는 이름을 얼마나 싫어 하는가 잘 알았고, 이렇게 그들에게 모욕을 주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처형되는 이 갈릴리 사람을 “유대인의 임금”이라 부르는 것을 보면, 또한 그들이 몹시 아픈 곳까지 다치리라는 것을 알았다.
187:2.6 (2007.5) 빌라도가 예수의 십자가에 이 비문(碑文)을 붙여놓고 어떻게 그들을 비웃으려 애쓴 것을 알았을 때, 유대인 지도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골고다로 서둘러 갔지만, 로마 군인들이 서서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감히 비문을 떼어내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 죄목을 없애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그 비문을 심각하게 여길까 두려워, 이 지도자들은 군중과 함께 섞여 조롱과 비웃음을 선동하려고 있는 힘을 다했다.
187:2.7 (2007.6) 예수가 십자가에 제 자리에 들어올려진 바로 뒤에, 그리고 지휘관이 주의 머리 위쪽에 죄목을 못박고 있는 동안에, 사도 요한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룻과 유다와 함께 그 장면에 도착했다. 요한은 열한 사도 가운데 유일하게 십자가 처형을 구경한 사람이었고, 예수의 어머니를 그 장면에 모시고 온 뒤에 곧, 자기 어머니와 그 친구들을 데리러 예루살렘으로 달려갔기 때문에, 요한조차도 그 자리에 내내 있지 않았다.
187:2.8 (2007.7) 예수는 요한과 아우와 누이와 함께 어머니를 보았을 때 빙긋 웃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동안에 주의 십자가 처형에 배치된 군인 네 사람은 관습대로, 그의 옷가지를 자기들끼리 나누었는데, 하나는 가죽 신, 하나는 터반, 하나는 허리띠, 넷째는 외투를 가졌다. 이것으로 튜닉, 다시 말해서 무릎 가까이 내려오는 솔기 없는 옷을 네 조각으로 자르는 일이 남았지만, 군인들이 얼마나 보기 드문 옷인가 보고 나서 튜닉을 가지려고 제비를 뽑기로 작정했다. 그들이 그의 옷가지를 나누고, 지각없는 군중이 그를 놀려대는 동안에, 예수는 내려다보았다.
187:2.9 (2008.1) 로마 군인들이 주의 옷을 가져간 것은 잘된 일이었다. 그렇지 않고, 추종자들이 이 옷가지들을 손에 넣었더라면 그들은 미신에 사로잡혀 유물(遺物) 숭배에 의존할 유혹에 빠졌을 것이다. 주는 추종자들이 땅에서 그의 일생과 연결할 어떤 물질적인 것도 가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거룩하게 바친, 높은 영적 이상에 전념한 인생의 기억만 인류에게 남겨주고 싶어했다.
187:3.1 (2008.2) 이 금요일 아침 9시 반쯤에, 예수는 십자가에 달렸다. 11시가 되기 전까지, 1천 명을 웃도는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 광경을 구경하려고 모여 있었다. 주가 사람의 죽음, 아니 선고받은 범죄자의 가장 치욕스러운 죽음을 겪는 동안에, 창조자의 이 특이한 현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한 우주의 보이지 않는 무리가 이 끔직한 시간 내내, 말없이 서 있었다.
187:3.2 (2008.3)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동안 어느 때인가 마리아ㆍ룻ㆍ유다ㆍ요한ㆍ살로메 (요한의 어머니), 그리고 열심 있는 한 무리의 여인들이 십자가에 가까이 서 있었고, 이 무리는 클로바의 아내 마리아, 예수의 이모,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한때 세포리스에서 살았던 레베카를 포함했다. 그의 큰 참을성과 인내를 구경하고 심한 고통을 바라보는 동안, 이들과 예수의 다른 친구들은 조용히 있었다.
187:3.3 (2008.4) 지나가던 많은 사람이 머리를 흔들고 그에게 욕을 퍼부으며 말했다: “성전을 무너뜨리고 사흘 안에 다시 지으려 하다니, 네 몸이나 구하거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어찌 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느냐.” 마찬가지 방법으로 유대인 권력자들 가운데 더러가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저가 남은 구하였으되 자신은 구할 수 없구나.” 더러는 말했다: “네가 유대인의 임금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너를 믿겠노라.” 나중에 그들은 그를 더욱 놀리며 말했다: “저는 하나님이 저를 구원하리라 믿었는지라. 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기까지 하였더니―이제 저를 보라―두 도둑 사이에 십자가에 못박혀 있구나.” 두 도둑조차 또한 그에게 욕을 퍼붓고, 그를 비난하였다.
187:3.4 (2008.5) 그들이 놀리는 말에 예수가 아무런 대꾸를 하려 하지 않았고, 이 특별한 준비일의 한낮이 가까웠기 때문에, 11시 반이 되어서 시시덕거리고 놀려대던 군중은 제 갈 길을 가버렸으며, 그 장면에는 50명이 채 안 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사형수(死刑囚)를 감시하려고 자리를 잡은 동안에, 군인들은 이제 점심을 먹고 신 싸구려 포도주를 마시려고 준비했다. 포도주를 마시면서 놀리는 말투로 예수에게 축하의 잔을 올리며 말했다, “만세와 행운을! 유대인의 임금에게.” 그들은 놀리고 비웃어도 주가 관대하게 여기는 것에 놀랐다.
187:3.5 (2008.6) 그들이 먹고 마시는 것을 보았을 때, 예수는 내려다보며 말했다: “목이 마르다.” 경비대의 지휘관이 예수가 “목이 마르다” 하는 것을 듣자, 자기 병에서 포도주 얼마큼을 꺼내고 적셔진 해면(海綿) 마개를 창 끝에 꿰어, 타는 입술을 축일 수 있도록 예수에게 올려주었다.
187:3.6 (2008.7) 예수는 그의 초자연 권능에 의존하지 않고 살려고 의도했으며,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보통 필사자로 죽기를 택했다. 사람으로서 살았고―아버지의 뜻을 행하면서―사람으로서 죽고자 한다.
187:4.1 (2008.8) 도둑 하나가 예수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말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어찌하여 너 자신과 우리를 구하지 않느냐?” 그러나 그가 예수를 꾸짖고 나자, 주의 가르침을 여러 번 들었던 다른 도둑이 말했다: “너는 하나님도 무섭지 않느냐? 우리가 저지른 일로 우리는 마땅히 고통받고 있지만, 이 사람은 부당하게 고통받는 것을 너는 깨닫지 못하느냐? 우리 죄를 용서하고 우리 혼을 구원해주기를 청하는 것이 더 좋으니라.” 이 도둑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예수는 그를 향하여 얼굴을 돌리고 맞다는 뜻으로 빙그레 웃었다. 예수의 얼굴이 자기를 향한 것을 보았을 때 그 악인은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꺼질 듯하는 믿음의 불꽃에 부채질하며 말했다: “주여, 당신의 나라로 가실 때 저를 기억하소서.” 그러자 예수는 말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언젠가 나와 함께 파라다이스에 가리라.”
187:4.2 (2009.1) 필사자로 죽는 아픔 한가운데서, 주는 믿음 있는 강도(强盜)의 신앙 고백에 귀를 기울일 겨를이 있었다. 구원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 이 도둑은 구원을 얻었다. 이보다 전에 여러 번 그는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었지만, 오직 의식이 있는 이 마지막 시간에야 주의 가르침을 향하여 진심으로 돌아섰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음을 맞이하는 그 태도를 보았을 때, 이 도둑은 이 사람의 아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이제 더 떨쳐버릴 수 없었다.
187:4.3 (2009.2) 도둑이 예수에게 감화를 받고 하늘나라로 받아들여지는 이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에 사도 요한은 자리에 없었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장면으로 어머니와 그 친구들을 모셔 오려고 도시로 가버렸다. 누가는 경비대의 개종한 로마인 지휘관으로부터 후일에 이 이야기를 들었다.
187:4.4 (2009.3) 사건이 일어나고 1세기의 3분의 2가 지난 뒤에 그 사건을 기억한 대로, 사도 요한은 십자가 처형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다른 기록들은 근무 중이던 로마인 백부장이 한 이야기에 기초를 두었는데, 그는 보고 들은 것 때문에 후일에 예수를 믿었고, 땅에서 하늘나라의 완전한 친교에 가입하였다.
187:4.5 (2009.4) 이 젊은이, 회개한 도둑은, 그러한 강도질하는 생애가 정치적 압력과 사회의 불공평에 대하여 효과적인 애국 항거라고 찬미한 사람들 때문에, 폭력과 악행을 일삼는 생활로 끌려들었다. 이런 종류의 가르침과 모험하려는 충동은, 다른 면에서 좋은 뜻을 가진 많은 젊은이를 이러한 대담한 강도질 파견에 지원하도록 이끌었다. 이 젊은이는 전에 바라바를 영웅으로 우러러보았다. 이제 그는 자기가 잘못했음을 알았다. 그는 옆에 여기 십자가에서 정말로 위대한 사람, 참된 영웅을 보았다. 그의 열심에 불을 붙이고, 도덕적 자존심에 대한 그의 가장 높은 관념을 북돋우고, 용기와 남자다움과 용감한 행위에 대한 그의 모든 이상을 되살린 영웅이 여기에 있었다. 예수를 바라보면서 사랑과 충성심과 진정한 위대함이 넘쳐흐르는 느낌이 그의 가슴 속에서 솟아올랐다.
187:4.6 (2009.5) 놀려 대는 군중 속에 있던 어떤 사람이라도, 혼 속에 믿음이 태어나는 것을 체험하고 예수의 자비에 호소했더라면, 믿음이 있는 그 도적에게 나타난 것과 똑같은 인자한 배려로 영접을 받았을 것이다.
187:4.7 (2009.6) 회개(悔改)한 도둑이 그들이 파라다이스에서 언젠가 만날 것이라는 주의 약속을 듣고 난 바로 뒤에 요한이 도시에서 돌아왔고, 그의 어머니와 거의 열두 여인 신도의 일행을 데리고 왔다. 요한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가까이 자리를 잡고 그 여자를 부축하였다. 그 여자의 아들 유다는 다른 쪽에 섰다. 예수가 이 장면을 내려다볼 때는 한낮이었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여자여, 어머니의 아들을 보소서!” 그리고 요한을 향하여 말했다: “이 사람아, 네 어머니를 보라!” 그리고 나서 두 사람에게 말했다: “나는 두 사람이 이 자리를 떠나기를 바라노라.” 그래서 요한과 유다는 마리아를 모시고 골고다를 떠났다. 요한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묵던 곳으로 예수의 어머니를 모시고 갔고, 그리고 나서 십자가 처형의 장면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유월절이 지난 뒤에 마리아는 벳세다로 돌아갔는데, 거기서 그 여자는 아무 사고 없이 여생을 요한의 집에서 살았다. 마리아는 예수가 죽은 뒤에 1년을 채 살지 못했다.
187:4.8 (2010.1) 마리아가 떠난 뒤에, 다른 여인들은 조금 떨어져 물러났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이 끊어질 때까지 예수에게 시중들며 남아 있었으며, 장사 지내려고 주의 몸을 내려놓았을 때 아직도 옆에 있었다.
187:5.1 (2010.2) 그런 현상이 있기에는 아직 철이 일렀어도, 12시 조금 지나서, 공중에 미세한 모래 때문에 하늘이 어두워졌다.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아라비아 사막으로부터 뜨거운 바람을 실은 모래 폭풍이 온다는 것을 알았다. 1시가 채 못되어 하늘이 너무 어두워져서 해를 가렸고, 나머지 군중은 도시로 서둘러 돌아갔다. 그후 조금 있다가 주가 목숨이 다했을 때, 30명이 안 되는 사람들, 오직 로마 군인 13명과 신자들 약 15명이 자리에 있었다. 이 신자들은 두 사람, 예수의 아우 유다와 요한 세베대를 제외하고 모두 여자였고, 요한은 주가 숨이 끊어지기 바로 전에 그 장면으로 돌아왔다.
187:5.2 (2010.3) 1시 뒤에 얼마 있다가, 사나운 모래 폭풍으로 어둠이 점점 짙어지는 가운데 예수는 인간의 의식을 잃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마지막 말씀, 자비와 용서와 훈계의 말씀을 하셨다. 마지막 소망을―어머니를 돌보는 것에 관하여―이미 표현하였다. 죽음이 가까워 오는 이 시간에 예수의 인간 정신은 히브리 성서, 특히 시편(詩篇)의 여러 구절을 되풀이하는 것에 의지하였다. 인간 예수가 의식하는 마지막 생각은 이제 20편ㆍ21편ㆍ22편으로 알려진, 시편의 한 부분을 머리 속에서 되풀이하는 것과 관계되었다. 입술이 때때로 움직이곤 했어도, 너무나 잘 알던 구절들이 머리 속을 지나가는 동안에 그 구절대로 낱말을 소리내어 말하기에 너무나 약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겨우 몇 번 이와 같은 말소리를 들었다, “주가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하실 줄 내가 아나이다,” “주의 손이 내 적을 모두 발견하리이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는 한 순간이라도 아버지의 뜻대로 살았다는 것을 티끌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대로 육체를 입은 목숨을 이제 버린다는 것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그를 버렸다고 느끼지 않았다. 다만 사라지는 의식 속에서 여러 성서 구절을 외우고 있었는데, 그 구절 가운데 이 시편 22편이 있었고, 이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어쩌다가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충분히 뚜렷하게 말한 세 구절 중에 하나였다.
187:5.3 (2010.4) 필사자 예수가 동료들에게 한 마지막 요청은 1시 반쯤에 있었고, 그때 두 번째로 “목이 마르다”하고 말했는데, 경비대의 바로 그 지휘관이, 그 시절에 보통 식초라고 부른 신 포도주에 적신 똑같은 해면으로 입술을 다시 축여주었다.
187:5.4 (2010.5) 모래 폭풍은 심해졌고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아직도 군인들과 작은 무리의 신자들이 곁에 있었다. 군인들은 십자가 가까이서 웅크리고, 살을 에는 모래로부터 몸을 보호하려고 한데 모여 웅크렸다. 요한의 어머니와 다른 사람들은 떨어진 곳에서 구경했고, 거기서 툭 튀어나온 바위로 얼마큼 보호를 받았다. 주가 드디어 마지막 숨을 내몰았을 때, 그의 십자가 밑에는 요한 세베대와 아우 유다, 누이 룻,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한때 세포리스에서 살던 레베카가 자리에 있었다.
187:5.5 (2011.1) 3시 바로 전에 예수는 큰 소리로 외쳤다, “끝났도다!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고개를 숙였고, 몸부림을 그만두었다. 로마인 백부장이 어떻게 예수가 죽었는가 보았을 때, 그는 가슴을 치며 말했다: “이 사람은 정말로 올바른 사람이었도다. 참으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이 틀림없도다.” 그리고 그때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187:5.6 (2011.2) 예수는―임금답게 산 것처럼―임금답게 죽었다. 그가 임금인 것을 거침없이 인정했고, 그 비극의 날 내내, 그 상황에 주인으로 대처하였다. 그가 택한 사도들의 안전을 보살핀 뒤에, 치욕스러운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말썽을 일으키는 베드로의 폭력에 지혜롭게 고삐를 잡았고, 필사 존재의 바로 끝까지 요한이 그에게 가까이 있도록 주선했다. 살인하려는 산헤드린에게 그의 참 성품을 드러냈고, 그의 군주 권한의 근원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빌라도에게 상기시켰다. 그는 자신의 가로대를 지고 골고다로 떠났고, 파라다이스 아버지께 필사자로서 얻은 그의 영을 넘겨줌으로 사랑으로 자신 수여를 마쳤다. 그러한 일생 뒤에―그러한 죽음을 닥쳐서―“끝났도다”하고 주는 참으로 말할 수 있었다.
187:5.7 (2011.3) 이날이 유월절과 안식일 모두를 준비하는 날이었으니까, 유대인들은 이 시체들이 골고다에서 노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빌라도 앞에 가서, 십자가에서 끌어내리고, 그래서 해지기 전에 범죄자들의 무덤 구덩이에 던질 수 있도록 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그들을 처치하기를 요구했다. 이 요청을 들었을 때, 빌라도는 예수와 두 도둑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이들을 처치하라고 당장에 군인 셋을 보냈다.
187:5.8 (2011.4) 이 군인들이 골고다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두 도둑에게 시킨 대로 따라서 했지만, 놀랍게도 예수가 이미 죽었음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것을 확인하려고 군인들 가운데 하나가 그의 왼쪽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다.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이틀이나 사흘 동안 산 채로 버티는 것이 보통이었어도, 예수의 압도적인 괴로운 감정과 격심한 영적 고통은 5시간 반이 조금 안 되어서, 육신을 입은 필사 생애를 그치게 했다.
187:6.1 (2011.5) 모래 폭풍이 부는 어두움 한가운데서, 3시 반쯤에, 다윗 세베대는 주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는 마지막 사자들을 내보냈다. 마지막 주자들을 베다니에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으로 보냈고, 거기서 예수의 어머니가 나머지 가족과 함께 멈추었다고 생각했다.
187:6.2 (2011.6) 주가 돌아가신 뒤에, 요한은 유다에게 책임을 지워, 여인들을 엘리야 마가의 집으로 보냈고, 거기서 그들은 안식일 동안 머물렀다. 요한 자신은 이때가 되어 로마인 백부장에게 잘 알려졌기 때문에, 빌라도로부터 예수의 몸을 가져가도 된다고 허가하는 명령을 가지고 요셉과 니고데모가 그 장면에 나타날 때까지, 골고다에 남아 있었다.
187:6.3 (2011.7) 이렇게 광대한 한 우주의 비극(悲劇)과 슬픔의 날이 끝났다. 그 우주의 수많은 지적 존재들은 사랑하는 군주가, 인간으로 육신화한 모습이, 십자가에 못박힌 끔찍한 광경에 몸서리를 쳤다. 필사자의 무딘 감정과 인간의 타락이 이렇게 나타난 것에 깜짝 놀랐다.
188:0.1 (2012.1) 예수의 필사 육체가 요셉의 무덤에 놓여 있던 하루 반,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한 사이의 기간은 미가엘이 땅에서 지낸 생애에서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시기이다. 우리는 사람의 아들이 무덤에 묻힌 것을 이야기하고 이 기록에 부활과 연결된 사건들을 적을 수 있지만, 금요일 오후 3시부터 일요일 새벽 3시까지, 약 36시간에 달하는 이 기간에 무슨 일이 정말로 벌어졌는가, 신빙성 있는 정보를 많이 제공할 수 없다. 주의 생애에서 이 기간은 로마 군인들이 그를 십자가에서 끌어내기 조금 전에 시작되었다. 그는 죽은 뒤에 거의 1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려 있었다. 두 도둑을 처치하느라고 지연되지 않았다면, 그를 더 일찍 끌어내렸을 것이다.
188:0.2 (2012.2) 유대인 권력자들은 도시 남쪽, 게헤나의 노천 무덤 구덩이에 예수의 시체를 던지게 하려고 전에 계획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들을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이 계획을 따랐더라면, 주의 몸은 사나운 짐승들에게 노출되었을 것이다.
188:0.3 (2012.3) 그동안에, 아리마대 요셉은 니고데모를 데리고 빌라도에게 가서, 적절히 장사를 지내려고 예수의 시체를 그들에게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의 친구들이 그런 시체를 소유하는 특권을 얻으려고 로마 당국에게 뇌물을 바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요셉은 사립 무덤에 예수의 시체를 옮길 허락을 얻는 데 돈이 필요하게 될 경우에 쓰려고, 큰 돈을 마련하여 빌라도 앞으로 갔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 때문에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 요청을 듣자, 그는 요셉에게 골고다로 가서 주의 몸을 즉시 완전히 소유하도록 인가하는 명령서에 재빨리 서명했다. 그동안에, 모래 폭풍이 어지간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예수의 시체가 노천의 공동 무덤 구덩이까지 도둑들의 시체를 따랐는가 확인할 목적으로 산헤드린을 대표하는 유대인 무리가 골고다를 향해서 이미 떠났다.
188:1.1 (2012.4) 골고다에 다다랐을 때, 요셉과 니고데모는 군인들이 십자가에서 예수를 끌어내리고 있고, 예수의 추종자들 중에서 아무도 그의 시체가 범죄자의 무덤 구덩이로 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처리하려고 산헤드린의 대표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요셉이 주의 시체를 가지려고 빌라도의 명령을 백부장에게 내밀었을 때, 유대인들은 그 시체를 소유하려고 소동을 피우고 아우성쳤다. 고함을 치면서 그들은 시체를 가져가려고 사납게 애썼고, 그들이 이렇게 하자, 백부장은 군인 넷을 자기 옆에 불렀다. 시체가 땅에 놓인 대로, 그들은 칼을 뽑아 들고, 주의 몸 좌우에 버티고 섰다. 성이 머리끝까지 치민, 이 성난 유대인 폭도들을 그들이 밀어내는 동안 백부장은 다른 군인들에게 두 도둑을 버려두라고 명령했다. 질서를 다시 찾고 나서, 백부장은 빌라도로부터 받은 허가증을 유대인들에게 읽고, 옆으로 걸어 나와서 요셉에게 말했다: “이 시체는 네 것이니 좋은 대로 하라. 아무도 간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와 내 군인들은 대기하겠노라.”
188:1.2 (2013.1)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유대인 공동 묘지에 묻힐 수 없었고, 그러한 절차를 금하는 엄격한 법이 있었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이 법을 알았고, 골고다를 향하여 나가는 길에, 단단한 바위에서 깎아 새긴, 요셉의 새 가족 무덤에 예수를 묻기로 전에 작정했고, 이것은 골고다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사마리아로 이어지는 길 건너에 있었다. 아무도 이 무덤에 묻힌 적이 없었고, 그들은 주가 여기에 매장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요셉은 정말로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리라고 믿었지만, 니고데모는 몹시 의심했다. 산헤드린의 이 옛 회원들은 예수 믿는 것을 얼마큼 비밀로 지켰다. 하지만 그들이 공회에서 사퇴하기 전에도, 동료 산헤드린 회원들은 오랫동안 그들을 의심해 왔다. 이제부터 계속, 그들은 온 예루살렘에서 가장 과감하게 말하는 예수의 제자들이었다.
188:1.3 (2013.2) 4시 반쯤에 나사렛 예수의 장례 행렬이 골고다에서 길 건너 요셉의 무덤을 향하여 떠났다. 네 사람이 나르는 동안 그 시체는 리넨 시트에 둘둘 싸여 있었고, 갈릴리에서 온 충실한 여인 구경꾼들이 뒤따랐다. 무덤까지 예수의 물질 몸을 지고 간 사람들은 요셉ㆍ니고데모ㆍ요한, 그리고 로마인 백부장이었다.
188:1.4 (2013.3) 그들은 시체를 무덤 속으로 날랐다. 이것은 가로ㆍ세로가 약 3미터 되는 방이었고, 거기서 장사 지내려고 서둘러 시체를 준비했다. 유대인은 죽은 사람을 정말로 묻지는 않았고, 실제로 방부(防腐) 처리를 하였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몰약(沒藥)과 앨로를 잔뜩 가져왔고, 이제 이 용액으로 적신 붕대로 시체를 감았다. 방부 처리가 끝났을 때, 얼굴 둘레를 냅킨으로 동였고, 시체를 리넨 시트로 둘둘 감고, 엄숙하게 시체를 무덤의 선반에 두었다.
188:1.5 (2013.4) 시체를 무덤에 둔 뒤에, 백부장은 군인들에게 돌 문을 무덤 입구 앞으로 굴리는 일을 도우라고 신호했다. 그리고 나서 군인들은 도둑들의 시체를 가지고 게헤나를 향하여 떠났고, 한편 다른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유월절 축제를 지내려고 슬피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188:1.6 (2013.5) 이날이 준비일이고 안식일이 막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장례는 어지간히 서두르고 성급하게 처리되었다. 남자들은 도시로 서둘러 돌아갔지만 여인들은 아주 어두울 때까지 무덤 가까이 남아 있었다.
188:1.7 (2013.6) 이 모든 것이 진행되는 동안, 여인들은 가까이 숨어 있었고, 그래서 이 모두를 보고 주가 어디에 누웠는가 지켜보았다. 이처럼 몰래 온 것은 여인들이 그런 때에 남자들과 상관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여인들은 예수가 매장을 위해서 적절히 준비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요셉의 집으로 돌아가서, 안식일 동안 쉬었다가, 향료와 연고(軟膏)를 준비하고, 시체를 안치하기 위하여 주의 몸을 적절히 준비하려고 일요일 아침에 돌아오기로 자기들끼리 합의를 보았다. 이 금요일에 무덤가에서 이렇게 머문 여인들은 막달라 마리아, 클로바의 아내 마리아, 예수의 또 다른 이모 마르다, 세포리스의 레베카였다.
188:1.8 (2013.7) 다윗 세베대와 아리마대의 요셉을 제외하고,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거의 아무도 그가 사흘째에 무덤에서 일어나도록 예정되었다는 것을 정말로 믿거나 알아듣지 못했다.
188:2.1 (2014.1)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가 사흘째에 무덤에서 일어나리라는 약속을 무심코 흘려들었다면, 적들은 그렇지 않았다. 주사제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리라는 그의 말에 관하여 보고받은 것을 기억했다.
188:2.2 (2014.2) 이 금요일 밤, 유월절 저녁 식사 뒤에, 자정쯤에 유대인 지도자들의 한 무리가 가야바의 집에 모였고, 사흘째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리라는 주의 주장에 관하여 걱정되는 것을 의논했다. 예수의 친구들이 무덤에 손대지 못하도록 그의 무덤 앞에 로마인 경비원 한 명을 배치하라는 산헤드린의 공식 요청(要請)을 지니고, 이튿날 일찍 빌라도를 방문할 산헤드린 위원회 하나를 지명하고서 이 모임이 끝났다. 이 위원회의 대변인은 빌라도에게 말했다: “주여, 이 사기꾼 나사렛 예수가 아직도 살아 있는 동안에 ‘내가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나리라’하고 말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나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사흘이 지난 뒤까지, 그 무덤을 그 추종자들로부터 안전히 지키게 할 명령을 내려달라 요청하고자 우리가 당신 앞에 왔나이다. 우리는 그의 제자들이 와서 밤에 그를 훔치고 나서,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사람들에게 선포하지 않을까 크게 걱정되나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우리가 버려둔다면, 이 잘못은 그를 살려둔 것보다 훨씬 더 나쁘리이다.”
188:2.3 (2014.3) 산헤드린 의원들이 이렇게 요청하는 것을 들었을 때, 빌라도는 말했다: “너희에게 군인 10명의 경비대를 주겠노라. 너희는 가서 무덤을 안전히 지키라.” 그들은 성전으로 돌아갔고, 자체 경비대에서 10명을 확보하고 나서, 이 유대인 경비원 10명과 로마 군인 10명과 함께, 이 안식일 새벽에도 이들을 무덤 앞에서 보초(步哨)로 세워놓으려고 요셉의 무덤으로 행진했다. 이 사람들은 무덤 앞에 또 다른 돌을 굴려놓고서,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방해받을까 걱정하여, 빌라도의 봉인(封印)을 이 돌들 위에, 그리고 그 둘레에 눌러놓았다. 이 스무 명은 부활의 시간까지 경계하며 남아 있었고,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날라다 주었다.
188:3.1 (2014.4) 이 안식일 내내, 제자와 사도들은 숨어 있었고, 한편 온 예루살렘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이때 로마 제국의 온 구석과 메소포타미아에서 거의 150만의 유대인이 예루살렘에 와 있었다. 이때는 유월절 주간의 시작이었고, 이 모든 순례자가 예수가 부활했다는 말을 듣고 그 보고를 집으로 가지고 갈 것이다.
188:3.2 (2014.5) 토요일 밤 늦게, 요한 마가는 열한 사도를 몰래 아버지의 집으로 오시라고 호출했는데, 그들은 거기서 자정 바로 전에, 모두 주와 함께 이틀 밤 전에 마지막 만찬을 들던 바로 그 위층 방에서 모였다.
188:3.3 (2014.6)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룻과 유다와 함께, 해가 지기 바로 전, 이 토요일 저녁에 가족과 합치려고 베다니로 돌아갔다. 다윗 세베대는 니고데모의 집에서 남아 있었고, 거기서 일요일 아침 일찍 그의 사자들이 모이도록 전에 주선해 두었다. 예수의 몸에 방부 처리를 계속하려고 향료를 준비했던 갈릴리 여인들은 아리마대 요셉의 집에서 머물렀다.
188:3.4 (2014.7) 나사렛 예수가 요셉의 새 무덤에서 쉬고 있다고 생각된 이 하루 반의 기간에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어떤 다른 필사자가 같은 상황에서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십자가에서 똑같이 자연사한 듯하다.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하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들었다. 그의 생각 조절자는 인격을 갖춘 지 오래 되었고, 예수의 필사의 몸과 따로 존재를 유지했으니까, 그러한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넉넉히 이해하지 못한다. 인격이 된 주의 조절자는 어떤 의미에서도 그가 십자가에서 육체로 죽은 것에 영향을 받을 수 없다. 예수가 한동안 아버지의 손에 맡긴 것은, 인간 체험의 기록부를 저택 세계들로 옮기기 위하여 필사 지성을 영으로 만드는 과제에서, 조절자의 초기 행적의 영 사본(寫本)이었음이 틀림없다. 예수의 체험 속에는 구체(球體)에서 믿음이 성장하는 필사자의 영 본질, 또는 혼과 비슷한 어떤 영적 실체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의견일 따름이다―우리는 예수가 아버지께 무엇을 맡겼는지 모른다.
188:3.5 (2015.1) 우리는 주의 육체 형태가 일요일 새벽 3시쯤까지, 요셉의 무덤 속에, 거기에 안치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이 36시간 동안 예수 인격의 지위에 관하여 전적으로 분명치 않다. 얼마큼 다음과 비슷하게, 때때로 이것들을 우리끼리 감히 설명하려 해보았다:
188:3.6 (2015.2) 1. 미가엘의 창조자 의식은 풀려난 채로 있고, 몸으로 육신화한 데 들어 있던, 관계된 그 필사 지성을 완전히 벗어났음이 틀림없다.
188:3.7 (2015.3) 2. 우리가 알건대, 예수의 옛 생각 조절자는 이 기간에 땅에 계셨고, 집합한 하늘 무리들을 몸소 지시했다.
188:3.8 (2015.4) 3. 처음에는 그의 생각 조절자가 직접 기울인 노력으로,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끊임없이 그가 선택하여 조정된 대로, 나중에는 육체적 필요와 이상적 필사 존재의 영적 요구를 자신이 완전히 조정함으로, 나사렛 사람이 육체를 입은 일생에 쌓아 얻은 영 신분이,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보호에 맡겨진 것이 틀림없다. 이 영 실체가 부활한 인격의 일부가 되려고 돌아왔는지 그렇지 않은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랬다고 믿는다. 그러나 바깥 우주의 조직되지 않은 영역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우주들과 관련하여, 밝혀지지 않은 운명을 가진 네바돈 최후 군단을 지휘하기 위하여 나중에 해방되려고, 예수의 이 혼 신분(身分)이 “아버지의 품” 속에서 지금 쉬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우주에 있다.
188:3.9 (2015.5) 4. 우리는 예수의 인간 의식, 곧 필사자로서 가졌던 의식은, 이 36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기간에 우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인간 예수가 하나도 몰랐다고 믿을 근거를 가졌다. 필사자가 의식하기에 아무 시간의 경과가 없는 듯하였다. 즉 생명(生命)의 부활은, 똑같은 순간에, 죽음의 잠을 따라 일어난 것이다.
188:3.10 (2015.6) 이것이 무덤에서 이 기간에 예수의 지위에 관하여 우리가 기록할 수 있는 거의 전부이다. 우리가 암시할 수 있는 서로 관계된 여러 가지 사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도저히 이것들을 해석할 능력이 없다.
188:3.11 (2015.7) 사타니아의 첫째 저택 세계의 여러 부활실에 있는 광대한 안뜰에는, “미가엘 기념관”이라고 알려진 구조, 지금은 가브리엘의 봉인을 지니고 있는, 물질 및 상물질로 이루어진 웅대한 구조를 지금 볼 수 있다. 이 기념관은 미가엘이 이 세상을 떠난 뒤 얼마 있다가 지어졌는데, 이 비문을 지닌다: “유란시아에서 나사렛 예수가 필사자로서 이동한 것을 기념하여.”
188:3.12 (2016.1) 1백 명으로 이루어진 구원자별 최고 회의가 이 기간에, 유란시아에서 가브리엘이 사회(司會)를 보는 가운데 행정 회의를 열었다는 것을 보이는 기록들이 존재한다. 또한 유버르사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이 시간에, 네바돈 우주의 상태에 관하여 미가엘과 교통했다는 것을 보이는 기록들도 있다.
188:3.13 (2016.2) 우리는 주의 몸이 무덤에 누워 있는 동안에, 미가엘과 구원자별에 계시는 이마누엘 사이에 적어도 한 통신문이 지나갔다는 것을 알고 있다.
188:3.14 (2016.3) 예수의 몸이 무덤에 쉬고 있는 동안에 열린 회의, 예루셈에서 있었던 행성 영주들의 체계 회의에서 어떤 성격자가 칼리가스티아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을 믿을 만한 좋은 이유가 있다.
188:3.15 (2016.4) 에덴시아의 기록들은 놀라시아덱의 별자리 아버지가 유란시아에 있었고, 무덤에 있던 이 시간에 미가엘로부터 지침을 받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188:3.16 (2016.5) 그리고 겉보기에 육체적으로 죽은 이 시간에, 예수의 인격 전부가 잠들어 무의식에 빠져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가리키는 많은 다른 증거가 있다.
188:4.1 (2016.6) 예수는 필사 인간으로서 민족의 죄를 대속하거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기분을 상하고 용서 없는 하나님에게 다가가는 일종의 효과적 접근법을 마련하려고 십자가에서 이렇게 죽지 않았다.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죄 많은 인간이 구원받는 길을 열기 위한 희생물로서 자신을 바치지 않았다. 대속(代贖)하고 신을 달랜다는 이 관념들이 그릇되기는 하지만, 그런데도 십자가에서 예수가 이렇게 돌아가신 데 부여된 중요성, 지나쳐서는 안될 의미가 있다. 유란시아가 사람이 사는 다른 이웃 행성들 사이에서 “십자가의 세계”라고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188:4.2 (2016.7) 예수는 유란시아에서 육체를 입고 필사자의 일생을 한껏 살기를 바랐다. 죽음은 보통, 삶의 일부이다. 죽음은 필사자의 연극에서 마지막 막(幕)이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의미를 거짓되게 풀이하는 미신 같은 잘못을 피하려고 좋은 뜻으로 노력을 기울이면서, 너희는 주의 죽음의 참된 의미와 진정한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188:4.3 (2016.8) 필사 인간은 결코 대사기꾼들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예수는 여러 구체의 배반한 통치자와 타락한 영주들의 손아귀에서 몸값을 치르고 사람을 되찾으려고 죽지 않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조상의 악행 때문에 한 필사자의 혼을 벌하는 것처럼 상스러운 불의(不義)를 결코 생각해내지 않았다. 주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인간 종족이 하나님에게 지게 된 빚을 하나님께 갚으려는 노력으로 바친 희생물도 아니었다.
188:4.4 (2016.9) 예수가 땅에서 살기 전에는 너희가 그러한 하나님을 믿어도 아마도 정당화되었을지 모르지만, 주가 너희 동료 필사자들 사이에서 살다가 돌아가신 뒤에는 그렇지 않다. 모세는 창조자 하나님의 위엄과 응보를 가르쳤지만, 예수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었다.
188:4.5 (2016.10) 동물적 성질―악행을 하려는 성향―은 물려받을지 모르지만, 죄는 부모로부터 아이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죄는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법을 거슬러서, 의지를 가진 개별 생물이 의식하여, 깊이 생각한 끝에 반항하는 것이다.
188:4.6 (2017.1) 예수는 꼭 이 한 세계의 종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우주 전체를 위하여 살다가 돌아가셨다. 여러 영역의 필사자들은 예수가 유란시아에서 살다가 죽기 전에도 구원이 있었지만, 그런데도 이 세상에 그가 자신을 수여한 것은 구원의 길을 밝게 보여준 것이 사실이다. 그의 죽음은, 육체를 입고 죽은 뒤에 필사자가 확실히 살아남는다는 것을 언제까지나 분명히 밝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188:4.7 (2017.2) 예수를 희생하는 자, 몸값 치르는 자, 또는 죄값 치르는 자라 하는 것은 도저히 적당하지 않아도, 구원자라 언급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그는 언제까지나 구원받는 (살아남는) 길을 더욱 뚜렷하고 확실하게 만들었다. 네바돈 우주의 모든 세상에서 모든 필사자를 위하여 구원의 길을 더욱 낫게, 더욱 확실히 보여주었다.
188:4.8 (2017.3) 하나님이 참되고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관념, 예수가 일찍이 가르친 유일한 개념을 너희가 일단 깨달으면, 일관성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이 기분을 상한 군주요, 첫째 가는 즐거움이 잘못하는 백성들을 찾아내고, 자신과 거의 비슷한 어떤 존재가 그들을 위하여 고통받고, 대리자로서 그들 대신에 죽으려고 자청하지 않으면 그들이 알맞게 벌받도록 처리하는, 엄하고 전능한 통치자라는 온갖 원시적 하나님 개념을 너희는 당장에 깨끗이 버려야 한다. 몸값을 내고 죄를 대신 갚는다는 관념 전부가, 나사렛 예수가 가르치고 본보기를 보인 그 하나님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은 신다운 성품 가운데 어느 것보다 못하지 않다.
188:4.9 (2017.4) 죄를 대신 갚고 희생물을 바쳐야 구원을 받는다는 이 모든 개념은 이기심에 뿌리를 박고 근거를 두었다. 예수는 사람이 동료들에게 봉사를 베푸는 것이 영적 신자들의 가장 높은 형제 개념이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 신자(信者)의 으뜸가는 관심은 개인이 구원받고자 하는 이기적 소망이 아니라, 예수가 필사 인간을 사랑하고 섬긴 것 같이, 사람의 동료들을 사랑하고, 따라서, 섬기려는 사심 없는 욕구이어야 한다.
188:4.10 (2017.5) 진정한 신자는 죄로 인하여 앞날에 벌 받는 것을 그다지 걱정하지도 않는다. 진정한 신자는 오늘 하나님으로부터 지금 떨어져 있는 것에만 아랑곳한다. 지혜로운 아버지가 아들들을 꾸짖을 수 있다는 것은 참말이지만, 사랑으로, 고치는 목적으로 이 모든 것을 행한다. 아버지들은 성이 나서 벌을 내리지 않으며, 징벌하느라고 꾸짖지도 않는다.
188:4.11 (2017.6) 응보가 최고로 지배하는 우주에서 하나님이 엄격하고 정당한 군주라 하더라도, 죄 지은 자 대신에 결백한 희생자를 바꿔치는 어리석은 계획에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188:4.12 (2017.7) 예수의 죽음에 관하여 대단한 것은, 인간의 체험을 부유하게 하고 구원의 길을 넓히는 데 관계되다시피,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죽음을 마주한 더할 나위 없는 태도와 견줄 데 없는 그 정신이다.
188:4.13 (2017.8) 죄를 대신 갚는다는 이 몸값 관념 전체가 구원을 비현실 수준에 놓으며, 그러한 개념은 순전히 철학적이다. 인간의 구원은 실재하며, 사람의 믿음으로 구원을 붙잡을 수 있고, 이렇게 함으로 개별 인간의 체험 속으로 통합할 수 있는 두 가지 현실에 근거를 둔다. 즉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 그리고 그와 관계되어, 사람이 형제라는 진실이다. 결국은 “너희에게 빚진 자를 너희가 용서하는 것 같이, 너희의 빚도 용서를 받으리라”는 것이 참말이다.
188:5.1 (2017.9) 예수의 십자가는 참 목자가 그의 양떼 중에서 자격 없는 양에게도 최상으로 헌신하는 것을 한껏 보여준다. 그 십자가는 언제까지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를 가족의 기초 위에 둔다. 하나님은 아버지요 사람은 아들이다. 사랑, 즉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그 사랑은, 창조자와 인간 사이의 우주 관계에서 핵심 진리가 된다―악을 행하는 백성이 고통과 벌을 받는 데서 만족을 얻으려 하는 임금의 응보는 그렇지 않다.
188:5.2 (2018.1) 죄인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정죄(定罪)도 묵인도 아니지만, 오히려 영원한 구원, 사랑의 구원이라는 것을 십자가는 언제까지나 보여준다. 예수의 일생과 죽음이 사람들을 선하고 올바르게 살아남도록 설득한다는 의미에서, 그는 참으로 구원자이다. 예수는 사람들을 너무 사랑해서 그의 사랑은 인간의 가슴 속에서 사랑의 반응을 일깨운다. 사랑은 참으로 전염성이 있고 영원히 창조성이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죄를 용서하고 모든 악행을 삼킬 만큼, 충분히 힘차고 신다운 사랑을 본보기로 보여준다. 예수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정의보다―단지 엄밀한 의미에서 옳고 그른 것보다―더 상급의 올바름을 드러냈다. 신의 사랑은 다만 잘못을 용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잘못을 흡수하고 실제로 없애버린다. 사랑에서 나오는 용서는 자비로 베푸는 용서를 완전히 초월한다. 자비는 나쁜 일을 행한 죄를 한쪽으로 제쳐놓지만, 사랑은 죄와 그로부터 생기는 모든 약점을 언제까지나 없애버린다. 예수는 새로운 처세 방법을 유란시아에 가져왔다. 악에 저항하지 말고 악을 효과적으로 없애버리는 선을 그를 통해서 찾으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예수의 용서는 묵인이 아니라 정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이다. 구원은 잘못을 무시하지 않으며, 잘못된 것을 옳게 고친다. 참된 사랑은 미움과 타협하거나 미움을 묵인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을 없애버린다. 예수의 사랑은 결코 단지 용서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주의 사랑은 회복, 영원히 살아남는 것을 뜻한다. 너희가 이 영원한 회복을 의미한다면, 구원을 값을 치르고 되찾는 것으로 언급해도 전적으로 적절하다.
188:5.3 (2018.2) 사람들을 몸소 사랑하는 힘으로, 예수는 죄와 악의 위력을 깨뜨릴 수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 더 나은 처세 방법을 택하라고 사람들을 해방하였다. 예수는 과거로부터 구원받음을 묘사했고, 그러한 구원은 그 자체로 앞날의 승리를 약속했다. 이처럼 용서는 구원을 마련해주었다. 신의 사랑의 아름다움은, 일단 인간의 가슴 속에 완전히 받아들이면, 언제까지나 죄의 매력과 악의 힘을 없애버린다.
188:5.4 (2018.3) 예수의 고통은 십자가 처형에 국한되지 않는다. 실제로, 나사렛 예수는 정말로 벅차게 필사자로 존재하는 십자가에서 25년을 넘게 보냈다. 십자가의 참된 가치는 십자가가 그의 사랑의 최고이자 마지막 표현이요, 그의 자비의 완벽한 계시라는 사실에 있다.
188:5.5 (2018.4) 사람이 사는 수백만의 세계에서, 도덕적 투쟁을 그만두고 훌륭한 믿음의 싸움을 그만두라고 유혹받았을지 모르는 수십조에 이르는 진화하는 인간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다시 한 번 보고 나서, 다음에 하나님이 사심(私心) 없이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 바친 그의 육신화된 목숨을 버리는 광경에 영감을 받고서 착실히 전진하였다.
188:5.6 (2018.5) 십자가에서 죽음이 가져온 승리는 예수를 공격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에 나타난 정신에 모두 요약된다.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소서, 저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나이다”하고 기도했을 때, 그는 십자가를 사랑이 미움을 이기고 진리가 잘못과 싸워 승리하는 영원한 상징으로 만들었다. 사랑으로 헌신하는 그 태도는 광대한 한 우주에 두루 전염되었다. 제자들은 주로부터 그 헌신을 전염받았다. 이러한 봉사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라고 요청받은 최초의 선생, 주의 복음을 가르친 선생은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 때 말했다, “이 죄를 저희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소서.”
188:5.7 (2018.6) 십자가가 사람의 최선의 성품에 최대로 호소하는 것은 동료 인간에게 봉사하는 데 목숨을 기꺼이 버린 사람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기쁘게 버리려 하는 것, 사람은 이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질 수 없다―예수는 적을 위하여 목숨을 기쁘게 버릴 그런 사랑을 가졌고, 이것은 땅에서 그때까지 알려진 어떤 것보다 더 큰 사랑이었다.
188:5.8 (2019.1) 유란시아와 마찬가지로 다른 여러 세상에서,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인간 예수가 죽는 이 숭고한 광경은 필사자들의 감정을 휘저었고, 한편 최상으로 헌신하도록 천사들을 일깨웠다.
188:5.9 (2019.2) 십자가는 신성한 봉사, 사람이 동료의 복지와 구원에 목숨 바치는 것을 나타내는 높은 상징이다. 십자가는 죄지은 사람 대신에, 기분을 상한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 결백한 하나님의 아들을 희생함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그리고 광대한 우주를 통해서 두루, 선한 자가 자신을 악한 자에게 바치고, 그렇게 함으로 바로 이 사랑으로 헌신하는 태도로 그들을 구원하는 신성한 상징으로서 언제까지나 서 있다. 십자가는 가장 높은 형태의 사심 없는 봉사를 나타내는 표시로서, 죽어도, 십자가에서 죽어도, 마음을 다하여 봉사하면서 올바른 생명을 완전히 바치는 최고의 헌신(獻身)의 표시로서 서 있다. 예수가 수여한 생명의 상징, 이 큰 상징이 된 바로 그 광경은, 우리 모두에게 가서 마찬가지로 봉사하고 싶어하도록 참으로 영감을 준다.
188:5.10 (2019.3)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는 예수를 바라볼 때, 생각 있는 남녀는 하찮은 골칫거리와 순전히 거짓으로 꾸며낸 많은 불만은커녕, 인생의 가장 혹독한 어려움에 닥쳐도 도저히 다시는 불평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의 삶은 너무 영화롭고 죽음은 아주 승리에 넘쳐서, 우리 모두가 이 두 가지를 기꺼이 함께 하도록 마음이 이끌린다. 소년 시절부터, 십자가에서 죽는 이 감동적인 광경에 이르기까지, 미가엘의 자신 수여 전체에는 마음을 끄는 참된 힘이 있다.
188:5.11 (2019.4) 그러면 너희가 십자가를 하나님의 계시(啓示)로 바라볼 때, 원시인의 눈이나 후일의 야만인의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도록 하여라. 이들은 모두 하나님이 엄격하게 응징하고 엄밀하게 법을 집행하는 무자비한 군주라고 여겼다. 오히려 너희는 그의 광대한 우주의 필사 종족들에게 바치는 일생의 사명에 예수가 쏟은 사랑과 헌신의 최종 표현을 십자가에서 꼭 보도록 하여라. 사람의 아들의 죽음 속에서, 필사자 구체에 사는 아들들에게 쏟는 아버지의 신다운 사랑이 펼쳐지는 그 절정을 보아라. 이처럼 십자가는 그러한 선물과 헌신을 기쁘게 받는 사람에게 기꺼이 애정을 바치고 자진해서 구원을 주는 것을 묘사한다. 십자가에는 아버지가 요구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오로지 예수가 아주 기쁘게 준 것, 피하려 하지 않은 것만 있었다.
188:5.12 (2019.5) 사람이 달리 예수를 고맙게 여기고 땅에서 그가 자신을 수여한 뜻을 이해할 수 없다면, 적어도 예수가 필사자의 고통을 함께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이 현세에서 얼마나, 어떤 고통을 받는가 창조자가 모른다고 결코 아무도 걱정할 수 없다.
188:5.13 (2019.6) 우리가 알건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사람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과 아들의 끝없는 자비를 사람이 깨닫도록 자극하고, 이 보편적 진리를 한 우주 전체에 퍼뜨리기 위한 것이다.
189:0.1 (2020.1) 금요일 오후에 예수가 묻힌 뒤에 곧, 그때 유란시아에 있던 네바돈 천사장의 우두머리는, 의지(意志)를 가진 잠자는 인간들의 부활을 담당한 회의를 소집했고, 예수를 부활시키는 가능한 기법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집결한 이 지역 우주 아들들, 곧 미가엘이 창조한 존재들은 자신들의 책임 하에 이렇게 했고, 가브리엘이 그들을 소집하지 않았다. 한밤이 되어서 지음받은 존재들은 창조자의 부활을 쉽게 만들기 위해서 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들은 가브리엘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싶어 했는데, 가브리엘은 미가엘이 “자신의 자유 의지로 생명을 버렸으니까, 또한 자신의 결심에 따라서 생명을 다시 집어 올릴 힘이 있다”고 그들에게 가르쳤다. 천사장과 생명 운반자들, 그리고 인간을 회복하고 상물질(上物質)을 창조하는 일에 종사하는 동료들로 구성된 회의가 끝난 뒤에 얼마 있다가, 그때 유란시아에서 모인 하늘 집단들을 몸소 지휘하는, 예수의 인격화된 조절자가 초조하게 기다리는 구경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189:0.2 (2020.2) “너희 가운데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인 창조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거들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그 영역의 한 필사자로서, 그는 필사자의 죽음을 겪었으나, 한 우주의 군주로서 아직도 살아 있느니라. 너희가 지켜보는 것은 나사렛 예수가 육체를 입은 생명으로부터 상물질 생명까지 필사자로서 이동하는 것이라. 이 예수의 영(靈) 이동은 바로 내가 그의 인격으로부터 분리되고 너희의 임시 지도자가 되었을 때 끝났으며, 너희의 아버지인 창조자는, 물질 세계에서 출생하고 나서 자연사(自然死)하고 상물질 세계에서 부활을 겪고 참된 영 존재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필사 인간의 체험을 전부 거치기를 택하였느니라. 이 체험의 어떤 단계를 너희가 바야흐로 지켜보려 하지만 너희는 거기에 참여해서는 안 되느니라. 지음받은 존재를 위하여 보통 하는 것을 너희는 창조자를 위하여 해서는 안 되느니라. 창조 아들은 자신 안에 그가 창조한 아들들 가운데 누구의 모습을 입고도 자신을 수여할 힘을 가졌고, 관찰할 수 있는 그의 생명을 버리고 그 생명을 다시 집어올릴 힘이 몸 안에 있느니라. 그리고 그는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직접 명령으로 이 힘을 가졌으며, 나는 무엇에 관하여 말하는지 사정을 아노라.”
189:0.3 (2020.3) 인격이 된 조절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가브리엘로부터 가장 낮은 케루빔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초조하게 기대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들은 무덤에서 예수의 필사 육체를 보았고, 사랑하는 군주의 우주 활동이 있다는 증거를 탐지했다. 그러한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일이 되어 가는 것을 보려고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189:1.1 (2020.4) 일요일 새벽 2시 45분에, 신분이 알려지지 않은 파라다이스 성격자 일곱 명으로 이루어진 파라다이스 육신화 위원회가 그 장면에 나타났고, 즉시 무덤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3시 10분 전에, 물질 및 상물질(上物質)이 한데 섞인 활동의 강렬한 진동이 요셉의 새 무덤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서기 30년 4월 9일, 이 일요일 새벽 3시 2분에 상물질 모습으로 부활한 나사렛 예수의 인격이 무덤에서 나왔다.
189:1.2 (2021.1) 부활한 예수가 무덤에서 솟아나온 뒤에, 거의 36년 동안 땅에서 살고 일하던, 살로 이루어진 그 몸은 무덤 벽감(壁龕)에, 다치지 않고 리넨 시트에 감긴 채로, 요셉과 그 동료들이 금요일 오후에 안치한 바로 그대로, 거기에 아직도 누워 있었다. 무덤 입구 앞에 있던 돌도 조금도 건드리지 않았고, 빌라도의 봉인도 아직 깨뜨리지 않은 채였고, 군인들이 아직도 지키고 있었다. 성전 경비원들이 계속 근무하고 있었고, 로마인 경비대는 자정(子正)에 이미 교대했다. 이 파수들 가운데 아무도 밤새워 지키던 물건이 새로운 더 높은 형태의 존재로 살아난 것, 그들이 지키고 있던 몸은 지금, 벗어나서 부활한 예수의 상물질 인격과 이제 더 아무 관계가 없는, 버려진 껍데기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189:1.3 (2021.2) 모든 개인적 면에서 물질은 상물질의 뼈대이며, 이 두 가지는 지속하는 영 실체가 비친 그림자라는 것을 인류는 더디게 깨닫는다. 얼마나 있어야 너희가 시간은 영원이 움직이는 모습이요, 공간은 파라다이스 실체들의 휙 지나가는 그림자라고 여기겠는가?
189:1.4 (2021.3)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한, 이 우주의 어느 생물이나 다른 우주에서 온 어떤 성격자도 나사렛 예수가 이렇게 상물질로 부활한 것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금요일에 그는 이 땅의 한 필사자로서 생명을 버렸고, 일요일 아침에 놀라시아덱의 사타니아 체계의 한 상물질 존재로서 생명을 다시 계속하였다. 예수의 부활에 관하여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한 그대로, 그리고 언제라고 지적한 그 무렵에 부활이 일어난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이 필사자의 이동, 즉 상물질 부활과 관계된 모든 알려진 현상은 요셉의 새 무덤에서, 바로 거기서 일어났고, 거기에 예수의 필사 물질의 유물(遺物)은 시체 싸는 천에 감겨서 누워 있었다고 또한 기록할 수 있다.
189:1.5 (2021.4) 우리가 알건대, 지역 우주의 어떤 창조된 존재도 이렇게 상물질로 깨어나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우리는 파라다이스의 일곱 성격자가 무덤을 둘러싼 것을 깨달았지만, 주가 깨어나는 것과 관련하여 그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구경하지 못했다. 예수가 가브리엘 옆에, 무덤 바로 위에 나타나자마자, 파라다이스에서 온 일곱 성격자는 유버르사로 즉시 떠나겠다는 뜻을 알렸다.
189:1.6 (2021.5) 다음의 진술로 예수의 부활에 관한 개념을 언제까지나 분명히 해두자:
189:1.7 (2021.6) 1. 그의 물질 몸, 즉 육체는 부활한 인격의 일부가 아니었다. 예수가 무덤에서 나왔을 때, 살로 이루어진 그의 몸은 다치지 않은 채로 무덤에 남아 있었다. 그는 입구 앞에 있는 돌들을 움직이지 않고, 빌라도의 봉인들을 다치지 않고, 무덤에서 솟아나왔다.
189:1.8 (2021.7) 2. 그는 영이나 네바돈의 미가엘로서 무덤에서 솟아나오지 않았다. 그는 유란시아에서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육신화하기 전에 가졌던 것과 같은, 창조자 군주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189:1.9 (2021.8) 3. 부활한 하늘가는 상물질 존재로서, 이 사타니아 지역 체계, 첫째 저택 세계 부활실에서 솟아나오는 자들의 상물질 인격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서 그는 이 요셉의 무덤에서 나왔다. 저택 나라 1번의 부활실들이 있는 광대한 안뜰의 중심에 미가엘 기념관이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방법으로 체계의 이 첫째 저택 세계에서 유란시아에서 주가 부활하는 것을 돌보았다고 짐작하게 한다.
189:1.10 (2022.1) 무덤에서 일어나서 예수가 처음으로 한 일은 가브리엘을 맞이하고, 그에게 이마누엘 밑에서 우주 사무를 집행하는 책임을 계속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멜기세덱의 우두머리에게, 형제의 인사를 이마누엘에게 전하라고 지시했다. 다음에 그는 에덴시아의 최고자에게 그가 필사자로서 이동한 것에 관하여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인가를 요청했다. 그리고 자기 계급의 생물이 된 창조자에게 인사하고 그를 환영하려고 여기 함께 모인 무리, 일곱 저택 세계에서 집합한 상물질 무리를 향하여, 예수는 죽은 후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상물질 예수는 말했다: “육체를 입고 내 일생을 마쳤으므로, 하늘가는 내 사람들의 생활을 더 잘 알고 파라다이스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더욱 드러내도록, 과도기 형태를 입고서 잠시 내가 여기에 머무르고자 하노라.”
189:1.11 (2022.2) 말씀을 마친 뒤에, 예수는 인격이 된 조절자에게 신호했고, 부활을 구경하려고 유란시아에 모였던 모든 우주 지성 존재는 각자의 우주 직책으로 즉시 파송되었다.
189:1.12 (2022.3) 예수는 이제 상물질 수준에서 접촉을 시작했고, 하나의 생물로서, 유란시아에서 잠시 동안 그가 살려고 선택한 삶의 요구 조건을 배우는 첫걸음에 들어갔다. 상물질 세계의 이 입문 절차는 지구 시간으로 한 시간이 더 걸렸는데, 육체를 입은 옛 동료들이 예루살렘에서 나와서, 그가 부활한 증거라고 여기는 것을 발견하려고 빈 무덤을 놀라서 엿보는 동안에 예수가 그들과 교통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두 번 중단되었다.
189:1.13 (2022.4) 이제 예수가 필사자로서 이동하는 것―사람의 아들이 상물질로 부활하는 것―을 마쳤다.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의 중간에 있는 인격자로서 주의 일시적 체험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는 몸 안에 본래부터 있는 힘을 통해서 이 모두를 해냈고, 어떤 성격자도 그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는 이제 상물질 예수로서 살고, 이 상물질 생활을 시작하는 동안에, 살로 이루어진 그의 물질 몸은 무덤에서 다치지 않은 채로 거기 누워 있다. 군인들은 아직도 지키고 있고, 바위들 근처에 있는 총독의 봉인은 아직 다치지 않은 채로 있다.
189:2.1 (2022.5) 3시 10분에, 부활한 예수가 사타니아의 일곱 저택 세계로부터 모인 상물질 성격자들과 친교하는 동안에, 천사장―부활 천사―의 우두머리는 가브리엘에게 다가가서 예수의 물질 몸을 요구했다. 천사장의 우두머리는 말했다: “군주 미가엘의 수여 체험에 생긴 상물질 부활에 우리가 참여해서는 안 되지만, 즉시 분해하도록 그의 필사 시체를 우리가 책임지게 해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우리의 비물질화 기법을 쓰려고 제안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시간을 가속하는 과정을 이용하고자 하나이다. 군주가 유란시아에서 살다가 돌아가신 것을 우리는 충분히 보았나이다. 하늘의 무리들은 한 우주의 창조자요 지지자의 인간 모습이 천천히 썩는 광경을 기억하고 싶지 않나이다. 온 네바돈의 하늘 지성 존재들의 이름으로, 나사렛 예수의 필사 육체의 관리를 내게 맡기고, 우리가 즉시 분해를 진행하도록 인가하는 명을 내리시기를 요청하나이다.”
189:2.2 (2023.1) 가브리엘이 에덴시아의 선임 최고자와 의논하고 나서, 하늘 무리들의 천사장 대변인은 그가 결정하는 대로 예수의 물질 시체를 그렇게 처분하라고 허락을 받았다.
189:2.3 (2023.2) 이 요청을 허락받은 뒤에, 천사장의 우두머리는 모든 계급의 하늘 성격자 대표들의 수많은 무리를 비롯하여 많은 동료의 도움을 요청했고, 그리고 나서 유란시아 중도자들의 도움을 얻어, 예수의 육체를 소유하려고 나섰다. 이 죽은 몸은 순전히 물질로 지은 것이었고, 육체요 글자 그대로 죽은 몸이었다. 그 몸은 부활한 상물질 형태가 봉인한 무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 무덤에서 옮겨질 수 없었다. 어떤 상물질 보조 성격자들의 도움을 얻어서, 상물질 형태는 한때 영으로 이루어지게 만들어질 수 있고, 그래서 보통 물질과 상관 없이 될 수 있으며, 한편 다른 때에는 그 영역의 필사자와 같은 물질 존재들이 알아보고 접촉하게 될 수 있다.
189:2.4 (2023.3) 거의 한 순간에 분해하여 위엄 있게 공손히 시체를 처분하는 준비로서, 그들이 무덤에서 예수의 몸을 옮기려고 준비하는 동안에, 무덤 입구(入口)에서 돌들을 굴려서 옮기는 일은 유란시아의 2차 중도자들에게 맡겨졌다. 이 두 돌 가운데 큰 것은 맷돌과 아주 비슷한 커다란 둥근 물건이었고, 바위에서 깎아 낸 홈 안에서 움직였으며, 그래서 무덤을 열거나 닫으려고 그 돌을 좌우로 굴릴 수 있었다. 구경하던 유대인 경비원과 로마 군인들이, 새벽의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이 커다란 돌이 무덤 입구로부터, 겉보기에는 저절로―그러한 움직임을 설명할 수단이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굴러가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그 장면에서 황급히 달아났다. 유대인들은 집으로 달아났고, 나중에 이 일을 성전(聖殿)에 있는 지휘관에게 돌아가서 보고했다. 로마인들은 안토니아 요새까지 달아났고, 백부장이 임무를 맡고 도착하자마자, 그들이 본 것을 그에게 보고했다.
189:2.5 (2023.4) 유대인 지도자들은 배반자 유다에게 뇌물을 제공함으로, 예수를 제거한다고 생각된 더러운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이 곤란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초소를 버리고 달아난 경비원들에게 벌을 줄 생각은 하지 않고, 이 경비원과 로마인 군인들에게 뇌물 주는 수단을 썼다. 그들은 이 스무 명, 각자에게 얼마큼의 돈을 주었고,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지시했다: “우리가 밤에 자는 동안, 그의 제자들이 우리에게 들이닥쳐 시체를 가져갔더라.” 그리고 유대인 지도자들은 군인들에게, 그들이 뇌물을 받았다는 것을 총독이 언제라도 알게 될 경우에 빌라도 앞에서 그들을 변호하겠다고 엄숙히 약속했다.
189:2.6 (2023.5)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을 믿는 기독교의 믿음은 “빈 무덤”의 사실에 근거를 두었다. 무덤이 비었다는 것은 정말로 사실이었지만, 이것은 부활의 진실이 아니다. 첫 신자들이 도착했을 때 무덤은 참으로 비어 있었고, 이 사실은 주가 의심할 여지 없이 부활한 사실과 아울러, 참되지 않은 믿음, 곧 예수의 물질적 필사 육체가 무덤에서 살아났다는 가르침을 형성하도록 이끌었다. 사실로 보이는 것들을 조합한다고 해서 영적 실체 및 영원한 가치와 상관되는 진리를 반드시 만들 수 있지는 않다. 개별 사실이 물질적으로 참말이라도, 한 집단의 사실을 연결한다고 틀림없이 참된 영적 결론으로 이끈다고 할 수 없다.
189:2.7 (2023.6) 예수의 무덤은 비어 있었지만, 예수의 몸이 회복되거나 부활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체를 특별히 독특한 방법으로 분해하려는 하늘 무리들의 요청이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시간 지연이 중간에 개재(介在)하지 않고서, 그리고 필사자가 썩고 물질이 부패하는, 평범하고 눈에 보이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티끌이 티끌로” 돌아가는 것이다.
189:2.8 (2024.1) 예수의 필사 시체는, 시간적으로 자연스러운 이 분해 방법이 크게 가속되고, 거의 한 순간에 일어나는 점까지 급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제외하고, 땅에서 모든 인간의 육체에 그 특징이 나타나다시피, 성분이 분해되는 바로 그 자연스러운 과정을 겪었다.
189:2.9 (2024.2) 미가엘이 부활했음을 가리키는 참된 증거는 영적 성질을 가졌다. 하지만 부활한 상물질의 주를 만나고 알아보고 그와 이야기를 나눈, 이 영역의 많은 필사자의 증언이 이 가르침을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유란시아를 떠나기 전에 주는 거의 1천 명의 인간이 몸소 겪은 체험의 일부가 되었다.
189:3.1 (2024.3) 이 일요일 새벽 4시 반이 조금 지난 뒤에, 가브리엘은 천사장들을 옆으로 호출하고 유란시아에서 아담의 섭리 시대를 끝내는 일반 부활을 개시하려고 준비했다. 이 큰 사건과 관계된 광대한 무리의 세라핌과 케루빔이 적절한 진형(陣形)을 이루어 정렬되었을 때, 상물질 미가엘이 가브리엘 앞에 나타나서 말했다: “내 아버지가 몸 속에 생명을 가진 것 같이, 그는 아들에게 몸 속에 지니라고 생명을 주셨느니라. 비록 내가 우주 관할권 행사를 완전히 다시 시작하지는 않았어도, 스스로 짊어진 이 한계는 어떤 방법으로도 잠자는 내 아들들에게 생명을 수여하는 것을 제한하지 않느니라. 행성 부활의 점호를 시작하여라.”
189:3.2 (2024.4) 천사장의 회로는 유란시아에서 그때 처음으로 가동했다. 가브리엘과 천사장 무리들은 행성의 영적 극점이 있는 자리로 옮겨 갔고, 가브리엘이 신호를 내렸을 때, 첫째 체계의 저택 세계로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번쩍 날아갔다: “미가엘의 명령에 따라서, 유란시아 섭리 시대에 죽은 자는 일어날지어다!” 그러자 아담 시절 이후로 잠들고 이미 심판받으러 가지 않은 유란시아 인류의 모든 생존자가, 상물질을 입을 준비가 되어, 저택 나라의 여러 부활실에 나타났다. 그리고 한 순간에 세라핌과 그 동료들은 저택 세계들을 향하여 떠나려고 준비했다. 살아남는 이 필사자들을 집단으로 관리하는 데 한때 배치되었던 이 수호 세라핌들이 보통은 저택 나라의 부활실에서 그들이 깨어나는 순간에 자리에 있었을 터이지만, 예수의 상물질 부활과 관련하여 가브리엘이 여기에 있어야 할 필요 때문에 이때, 바로 이 세상에 있었다.
189:3.3 (2024.5) 개인 수호 천사를 가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 그리고 영적 인격의 진보에 요구된 수준을 마친 사람들이 아담과 이브 시절 이후에 저택 나라로 가버렸는데도, 또 비록 유란시아 아들들의 특별 부활과 천년(千年) 부활이 여러 번 있었어도, 이것은 행성 점호의 셋째 부활, 곧 완벽한 섭리 시대의 부활이었다. 첫째는 행성 영주가 도착했을 때, 둘째는 아담 시절에 일어났다. 그리고 이 셋째는 나사렛 예수의 상물질 부활, 곧 필사자로서 이동한 것을 신호했다.
189:3.4 (2024.6) 천사장의 우두머리가 행성의 부활을 개시하는 신호를 받고 나서, 사람의 아들의 인격화된 조절자는 유란시아에 집합한 하늘 무리들을 지휘하는 권한을 양도했고, 지역 우주의 이 아들들 모두를 각자의 사령관 관할로 넘겼다. 이렇게 하고 나서, 그는 미가엘이 필사자로서 이동하는 일이 끝났음을 이마누엘에게 등록하려고 구원자별을 향하여 떠났다. 유란시아에서 근무하라고 요구되지 않은 모든 하늘 무리가 즉시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상물질 예수와 함께 유란시아에 남았다.
189:3.5 (2025.1) 이것이 예수가 부활한 사건을, 정말로 일어난 그대로, 부분적이고 제한된 인간의 시력(視力) 한계를 벗어나서 구경한 자들이 본 그대로 이야기한 것이다.
189:4.1 (2025.2) 이 일요일 이른 새벽에 예수가 부활하던 때를 접근하면서, 우리는 열 사도가 엘리야와 마리아 마가의 집에서 묵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거기서 주와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드는 동안에 기댔던 바로 그 소파에서 쉬면서, 그들은 위층 방에서 잠자고 있었다. 이 일요일 아침에 토마스를 제외하고, 그들 모두가 거기에 모여 있었다. 처음에 모였던 토요일 밤 늦게, 토마스는 그들과 함께 몇 분 동안 있었지만, 예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사도들의 모습이 그에게 너무나 보기 딱했다. 그는 동료들을 둘러보고 즉시 방을 떠났고, 벳바게에 있는 시몬의 집으로 갔는데, 거기서 외로이 어려움을 삭이려고 생각했다. 사도들은 모두, 의심과 절망이 아니라, 두려움과 슬픔과 창피를 겪었다.
189:4.2 (2025.3) 니고데모의 집에서, 다윗 세베대와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특출한 자가 12에서 15명 정도 모였다. 아리마대 요셉의 집에는 중요한 여인 신도(信徒)가 15에서 20명 정도 있었다. 오로지 이 여인들이 요셉의 집에서 지냈는데, 안식일 동안과 안식일이 끝난 날 저녁에 집안에 숨어 있었고, 그래서 무덤에서 지키고 있는 군인 경비대에 관하여 몰랐다. 둘째 돌이 무덤 앞에서 굴려 치워졌고, 이 두 개의 돌에 빌라도의 봉인(封印)이 찍혀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189:4.3 (2025.4) 이 일요일 새벽 3시 조금 전에, 날이 밝는 첫 표시가 동쪽에서 비로소 나타나자, 다섯 여인은 예수의 무덤을 향해서 떠났다. 특별한 방부(防腐) 처리 로션을 충분히 준비했고, 리넨 붕대를 많이 가지고 갔다. 예수의 몸에 더 꼼꼼하게 장례를 위하여 기름을 바르고, 더 깔끔히 몸을 새 붕대로 감으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189:4.4 (2025.5) 예수의 몸에 기름 바르는 이 임무를 띠고 간 여인들은 막달라 마리아, 알패오 쌍둥이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 형제의 어머니 살로메, 추자의 아내 요안나,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에즈라의 딸 수잔나였다.
189:4.5 (2025.6) 다섯 여인이 연고를 지고서, 빈 무덤 앞에 다다른 것은 3시 반쯤이었다. 다마스커스 대문 바깥으로 나가면서, 얼마큼 공포에 질려서 도시(都市) 안으로 달아나는 한 무리의 군인들과 마주쳤고, 이 때문에 그들은 몇분 동안 멈추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더 일어나지 않자, 그들은 다시 갈 길을 재촉하였다.
189:4.6 (2025.7) 나가는 길에 자기들끼리 “돌을 굴려 치우는 것을 누가 도와줄까?”하고 말했기 때문에, 그들은 무덤의 입구에 그 돌이 굴려 치워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짐을 내려놓고, 두렵고 크게 놀라서 비로소 서로를 보았다. 그들이 두려움에 떨며 거기에 서 있는 동안, 막달라 마리아가 대담하게 둘 중에 작은 돌을 돌아서, 열려 있는 무덤으로 감히 들어갔다. 이 요셉의 무덤은 길의 동쪽 편, 언덕 위 동산에 있었고, 또한 동쪽을 향하였다. 이때가 되자, 마리아가 주의 몸이 놓여 있던 자리까지 무덤 속을 들여다보고, 시체가 사라진 것을 겨우 알아볼 만큼 날이 밝았다. 마리아는 사람들이 예수를 안치했던, 돌의 우묵한 곳에, 예수의 머리가 놓여 있던 곳에 접힌 수건과 그를 감았던 붕대가 다치지 않은 채로, 하늘 무리들이 시체를 옮기기 전에 돌에 놓여 있던 그대로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덮는 시트는 무덤의 벽감 밑부분에 놓여 있었다.
189:4.7 (2026.1) 몇 순간 무덤의 출입구에서 머무른 뒤에 (무덤으로 처음에 들어갔을 때는 뚜렷이 보이지 않았다), 마리아는 예수의 몸이 사라진 것과 그 자리에 시체를 싸는 이 천만 보고서, 놀라고 괴로워하는 비명을 질렀다. 여인들 모두가 몹시 불안해 하였다. 도시의 대문에서 공포에 질린 군인들을 만난 뒤로 그들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마리아가 이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자, 공포에 질려서 황급히 달아났다. 그리고 다마스커스 대문까지 내리 달려갔을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이때가 되어서, 요안나는 그들이 마리아를 버린 것에 양심이 찔렸다. 그 여자는 동무들을 다시 집결했고 그들은 무덤을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189:4.8 (2026.2) 무덤에서 나오면서 기다리는 자매들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놀란 막달라는 더군다나 무서웠는데, 그들이 무덤에 가까이 가자, 이제 그들에게 달려가서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는 거기 없느니라―저희가 그를 데려갔느니라!” 그 여자는 그들을 무덤으로 도로 이끌고 갔고, 모두 들어가서 무덤이 빈 것을 보았다.
189:4.9 (2026.3) 그리고 나서 다섯 여인 모두가 입구 가까이 있는 돌 위에 앉아서 그 상황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생각이 아직 그들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은 안식일 동안 자기들끼리 있었고, 시체가 다른 안치될 장소에 옮겨졌다고 짐작했다. 그러나 그 곤경(困境)에 대한 그러한 해명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을 때, 시체를 쌌던 천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없어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시체를 감았던 바로 그 붕대가 무덤 선반에, 제 자리에, 겉보기에는 다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니, 어떻게 시체가 옮겨질 수 있었는가?
189:4.10 (2026.4) 이 새 날의 동이 트는 이른 시간에 이 여인들이 거기 앉아 있다가 한쪽을 보고서 말없이 꼼짝하지 않는 낯선 사람을 지켜보았다. 한 순간 그들은 다시 놀랐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그에게 달려가서, 그가 마치 동산 관리자인가 생각한 듯이 그를 향해 물었다: “당신이 주를 어디로 옮겨 갔나이까? 저희가 그를 어디에 두었나이까? 우리가 가서 그를 보도록 우리에게 이르소서.” 낯선 사람이 마리아에게 대꾸하지 않자, 마리아는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가 말했다: “우리는 요셉의 무덤에 안치된 예수를 찾사오나, 그가 사라졌나이다. 당신은 저희가 그를 어디로 옮겨 갔는지 아시나이까?”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이 예수가 갈릴리에 있을 때에도, 그가 죽을 터이나 다시 살아나리라 너희에게 이르지 않더냐?” 이 말씀은 여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지만, 주는 모습이 너무 바뀌어서, 그들은 아직도 어둑어둑한 빛을 등지고 있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이 그의 말씀을 골똘히 생각하는 동안, 그는 막달라 사람을 향해 귀에 익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아야.” 익숙한 인자함으로, 정답게 인사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그 여자는 주의 목소리인 줄 알았고, 달려가서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외쳤다: “내 주여, 내 선생이여!” 영화로운 모습을 입고 그들 앞에 선 이가 주인 것을 다른 여인들이 모두 알아보았고, 재빨리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189:4.11 (2027.1) 이 인간들의 눈은 그때 예수를 동반한 어떤 상물질 성격자들과 제휴한 변압자와 중도자들의 특별 수고 덕분에 상물질 모습의 예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189:4.12 (2027.2) 마리아가 그의 발을 품에 안으려고 하자, 예수는 말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마리아야, 나는 네가 알던, 육체를 입은 나와 같지 않으니라. 아버지께로 올라가기 전에, 이 모습을 입고, 한동안 내가 너희와 함께 머무르리라. 그러나 너희는 모두 이제 가서, 내 사도들―그리고 베드로―에게, 내가 살아났다고, 너희가 나와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이르라.”
189:4.13 (2027.3) 놀라운 충격을 받고 나서 정신을 차린 뒤, 이 여인들은 서둘러 도시로, 엘리야 마가의 집으로 돌아갔고, 거기서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모두 열 사도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 말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은 처음에 여인들이 환상을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예수가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막달라 마리아가 되풀이했을 때, 그리고 베드로가 자기 이름을 들었을 때, 그는 무덤으로 황급히 가서 이 일을 제 눈으로 확인하려고 위층 방에서 달려나갔고, 그 뒤에 요한이 바짝 쫓아갔다.
189:4.14 (2027.4) 여인들은 예수와 함께 말씀을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도들에게 되풀이했지만, 그들은 믿고 싶어하지 않았고, 베드로와 요한처럼 스스로 가서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189:5.1 (2027.5) 두 사도가 골고다와 요셉의 무덤을 향하여 뛰어가는 동안, 베드로의 생각은 두려움과 희망 사이에 오락가락했다. 그는 주를 만나기가 두려웠지만, 예수가 그에게 특별한 말씀을 보냈다는 이야기에 희망이 솟아났다. 예수가 정말로 살아 있다고 반은 설득이 되었고, 사흘째에 살아난다는 약속을 회상했다. 이야기하기는 이상하지만, 십자가 처형이 있은 뒤로, 북쪽으로 예루살렘을 통해서 허둥지둥 가는 이 순간까지, 이 약속은 그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도시 바깥으로 서둘러 나가는 동안, 기쁨과 희망이 섞인 이상한 환희가 요한의 혼 속에서 샘처럼 솟아났다. 그는 여인들이 살아나신 주를 정말로 보았다고 절반은 확신이 들었다.
189:5.2 (2027.6) 요한은 베드로보다 젊었으니까 그보다 빨리 달려서 먼저 무덤에 다다랐다. 요한이 문에서 머물러 무덤을 들여다보았고, 무덤은 마리아가 묘사한 바로 그대로였다. 금방 시몬 베드로가 달려왔고, 들어가서, 바로 그 빈 무덤과 함께 아주 특이하게 정돈된 시체 싸는 천을 보았다. 베드로가 나오자, 요한도 들어가서 스스로 모두 보았고, 그리고 나서 돌 위에 앉아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거기 앉아 있으면서 그들은 예수에 관하여 들은 것을 낱낱이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살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분명히 파악할 수 없었다.
189:5.3 (2027.7) 베드로는 누가 무덤을 뒤졌구나, 적들이 시체를 훔쳐갔구나, 아마도 경비원들에게 뇌물을 주었나 보다 하고 처음에 상상했다. 그러나 요한은 시체가 도둑 맞았다면, 무덤은 도저히 그렇게 정돈된 채로 남아 있을 수 없을 것이라 추측했고, 또한 붕대가 어떻게 남아 있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렇게 겉보기에 다치지 않은 채로 있는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시체 쌌던 천을 더 자세히 훑어보려고 무덤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두 번째로 무덤에서 나왔을 때,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돌아와서 입구에서 눈물 흘리는 것을 보았다. 마리아는 예수가 무덤에서 살아났다고 믿으면서 사도들에게 갔지만, 모두 그 여자의 보고를 믿으려 하지 않자, 풀이 죽고 절망에 빠졌다. 그 여자는 무덤 가까이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고, 거기서 귀에 익은 예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189:5.4 (2027.8) 베드로와 요한이 가버리고 나서 마리아가 서성거리는 동안에, 주는 다시 그 여자 앞에 나타나서 말했다: “의심하지 말라. 네가 보고 들은 것을 믿을 용기를 가지라. 내 사도들에게 돌아가서, 내가 살아났다, 내가 저희에게 나타나리라, 그리고 약속한 대로, 저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다시 이르라.”
189:5.5 (2028.1) 마리아는 마가의 집으로 서둘러 돌아갔고, 다시 예수와 함께 이야기했다고 사도들에게 말했지만, 그들은 마리아를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놀려 대기를 그쳤고,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 찼다.
190:0.1 (2029.1) 부활한 예수는 그 영역에서 필사자의 올라가는 상물질 생애를 체험할 목적으로, 이제 유란시아에서 짧은 기간을 보내려고 준비한다. 상물질로 사는 이 시간을 필사자로 육신화한 세상에서 보내도록 정해지기는 했어도, 이 기간은 예루셈의 일곱 저택 세계에서 진보하는 상물질 생명을 거치는 사타니아 필사자들의 체험과 모든 면에서 대등한 것이다.
190:0.2 (2029.2) 예수 안에 본래부터 있고, 그로 하여금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게 만든 이 모든 힘―생명 자질―은 그가 하늘나라 신자에게 수여하는 영생이라는 바로 그 선물이요, 이것은 지금도 자연사의 사슬을 벗어나 신자들이 부활하는 것을 확실하게 만든다.
190:0.3 (2029.3) 이 영역의 필사자들은, 예수가 이 일요일 아침에 무덤에서 살아났을 때 가졌던 것과 똑같은 종류의 과도기 몸, 곧 상물질(上物質) 몸으로, 부활의 아침에 살아날 것이다. 이 몸은 속에 도는 피가 없고, 그러한 존재는 평범한 물질 식품을 먹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상물질 형태는 실재한다. 예수가 부활한 뒤에 여러 신자가 그를 보았을 때, 그들은 정말로 그를 보았고, 환상이나 환각에 스스로 속은 자가 아니었다.
190:0.4 (2029.4) 예수의 부활에 관한 지속된 믿음은 초대 복음을 가르치던 모든 분파의 신앙에서 으뜸가는 특징이었다. 예루살렘ㆍ알렉산드리아ㆍ안티옥ㆍ필라델피아에서 복음 선생들은 모두 주가 부활한 것을 절대로 믿는 신앙으로 뭉쳤다.
190:0.5 (2029.5) 주의 부활을 선포하는 데 막달라 마리아가 맡은 특출한 역할을 볼 때, 베드로가 사도들의 대변자였던 것처럼, 마리아는 여인단(女人團)의 우두머리 대변자였다는 것을 적어야 한다. 마리아는 여인 일꾼들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그들의 우두머리 선생이요 알려진 대변자였다. 마리아는 대단히 신중한 여인이 되었고, 그래서 요셉의 동산 관리인이라고 생각했던 남자에게 말을 거는 대담성은 다만 그 여자가 무덤이 빈 것을 발견하고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는가를 가리킬 뿐이다. 유대 여인이 낯선 남자에게 가까이 가지 않는 전통적 자제(自制)를 한 순간 잊게 한 것은 그 여자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고통스러웠는가, 그 여자가 얼마나 온전히 헌신했는가를 가리킨다.
190:1.1 (2029.6) 사도들은 예수가 그들을 두고 떠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살아난다는 약속과 함께, 죽는다는 그의 말씀을 모두 흘려들었다. 그들은 부활이 다가온 그대로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고, 문제삼을 수 없는 증거를 어쩔 수 없이 발견하고 바로 그들이 겪은 절대적 증명이 눈앞에 펼쳐질 때까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190:1.2 (2030.1) 다섯 여인이 예수를 보았고 그와 함께 이야기했다고 말한 보고를 사도들이 믿으려 하지 않았을 때,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으로 돌아갔고 다른 여인들은 요셉의 집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요셉의 딸과 다른 여자들에게 자신들의 체험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여자들은 그들이 보고한 것을 믿었다. 6시가 조금 지난 뒤에 아리마대 요셉의 딸, 그리고 예수를 본 네 여인이 니고데모의 집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이 모든 사건을 요셉, 니고데모, 다윗 세베대, 그리고 그곳에 모인 다른 사람들에게 늘어놓았다. 니고데모와 다른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의심했고,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것을 의심했으며, 유대인들이 시체를 옮겼다고 추측했다. 요셉과 다윗은 그 보고를 믿고 싶어했다. 너무 간절해서 그 무덤을 조사해 보려고 서둘러 나갔고, 모든 것이 여인들이 설명한 바로 그대로였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들은 무덤을 그렇게 마지막으로 구경한 사람들이었는데, 왜냐하면 대사제가 시체 쌌던 천을 없애버리라고 7시 반에 성전 경비대의 지휘관을 무덤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그 지휘관은 리넨 시트 속에 모든 것을 말아서, 근처의 벼랑 너머로 던져 버렸다.
190:1.3 (2030.2) 무덤에서 다윗과 요셉은 즉시 엘리야 마가의 집으로 갔고, 위층 방에서 그들은 열 사도와 함께 회의를 열었다. 오직 요한 세베대만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것을, 어렴풋이라도 믿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베드로는 처음에 믿었지만, 주를 찾지 못하자, 깊은 의심에 빠졌다. 그들은 다 유대인들이 시체를 옮겼다고 믿고 싶어했다. 다윗은 이들과 다투려 하지 않았지만, 떠날 때 말했다: “너희는 사도요, 이 일을 이해해야 하느니라. 나는 너희와 다투지 않겠노라. 그렇다 해도, 나는 이제 니고데모의 집으로 돌아가는데, 거기서 오늘 아침에 모이자고 사자들과 약속하였노라. 그리고 저희가 모였을 때, 나는 저희의 마지막 임무로, 주가 부활하신 것을 알리는 전령으로서 저희를 보내겠노라. 주가 돌아가신 뒤에 사흘째에 살아날 것이라고 주가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었고, 나는 그를 믿노라.” 그리고 풀이 죽고 비참한 하늘나라 대사들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자청해서 통신과 정보를 담당한 이 우두머리는 사도들을 두고 떠났다. 위층 방에서 나가는 길에, 그는 사도의 자금이 모두 들어 있는 유다의 돈 자루를 마태 레위의 무릎에 내려놓았다.
190:1.4 (2030.3) 다윗의 사자 26명 중에서 마지막 사람이 니고데모의 집에 다다른 것은 9시 반쯤이었다. 다윗은 재빨리 널찍한 안뜰에 그들을 모으고 연설했다:
190:1.5 (2030.4) “여러분, 그리고 형제들이여, 나에게, 또 서로에게 서약한 대로 지금까지 내내 너희는 나를 섬겨 왔고, 내가 아직까지 너희 손에 거짓 정보를 한 번도 보낸 적이 없음을 증언하라 내가 요청하노라. 하늘나라의 자원하는 사자로서 마지막 사명으로 너희를 보내고자 하노라. 그리고 그리하면서 나는 너희를 선서로부터 해방하고, 이렇게 사자단(使者團)을 해체하노라. 여러분,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우리는 할 일을 마쳤느니라. 주는 이제 더 필사 사자가 필요 없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도다. 저희가 그를 체포하기 전에, 그가 죽었다가 사흘째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우리에게 일렀느니라. 내가 그 무덤을 보았는데―무덤이 비어 있더라. 나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네 여인과 함께 이야기했고, 저희는 예수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라. 이제 나는 너희를 해체하고, 너희에게 작별을 알리며, 각자의 임무로 너희를 보내노라. 그리고 믿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가지고 갈 소식은 이것이라: ‘예수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그 무덤은 비었도다.’”
190:1.6 (2030.5)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대다수는 다윗에게 이렇게 하지 말라 설득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나서 사자들을 말리려고 애썼지만, 그들은 의심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일요일 아침 10시 조금 전에, 이 주자(走者) 26명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힘찬 진실과 사실을 전하는 첫 통보자로서 떠나갔다. 허다한 다른 경우에 했던 것처럼, 그들은 다윗 세베대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한 선서를 지키기 위하여 이 임무를 띠고 떠나갔다. 이 사람들은 다윗을 크게 신임했다. 머물러서 예수를 본 사람들과 이야기하지도 않고서, 이 배치를 받고 떠났다. 대다수는 다윗이 일러준 것을 믿었고, 얼마큼 의심한 자들도, 똑같이 확실하고 똑같이 빠르게 그 소식을 가지고 갔다.
190:1.7 (2031.1) 사도들, 하늘나라의 영적 단체는 이날 위층 방에서 모여 있고, 거기서 두려움을 보이고 의심을 표현했는데, 한편 사람들이 형제임을 가르치는 주의 복음을 사회에 퍼뜨리는 첫 시도를 대표하는 이 보통 사람들은, 두려움 없는 유능한 지도자의 명령을 받고서 한 세상과 한 우주의 부활하신 구세주를 선포하려고 떠나간다. 그가 선택한 대표들은 그의 말씀을 기꺼이 믿거나 증인들의 증거를 받아들이기 전에, 이 중대한 봉사에 종사한다.
190:1.8 (2031.2) 이 26명은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으로, 남쪽에 비엘세바로부터 북쪽에는 다마스커스와 시돈까지, 동쪽에 필라델피아로부터 서쪽에 알렉산드리아까지, 신자들의 모든 중심으로 파송되었다.
190:1.9 (2031.3) 동료들을 두고 떠났을 때, 다윗은 어머니를 보려고 요셉의 집으로 갔고, 다음에 그들은 기다리는 예수의 가족과 합류하려고 베다니로 갔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속세의 재산을 처분하기까지 다윗은 그들과 함께 베다니에서 거했고, 필라델피아에 있는 오라비 나사로와 함께하려고 가는 여행 길에 그들을 동반했다.
190:1.10 (2031.4) 이때부터 한 주쯤 안에 요한 세베대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벳세다에 있는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갔다. 예수의 바로 밑 아우 야고보는 가족과 함께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다. 룻은 베다니에서 나사로의 자매들과 함께 남았다. 예수의 나머지 가족은 갈릴리로 돌아갔다. 다윗 세베대는 6월초에 예수의 막내 누이 룻과 결혼한 다음 날에, 마르다와 마리아와 함께, 베다니를 등지고 필라델피아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190:2.1 (2031.5) 상물질로 부활한 때부터 예수의 영이 하늘로 올라가는 시각까지, 그는 땅에서 신자들에게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19번 따로 나타났다. 적이나, 또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 그가 나타나는 것을 영적으로 이용할 수 없는 자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무덤에서 다섯 여인에게 처음으로 나타났고, 두 번째도 무덤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났다.
190:2.2 (2031.6) 세 번째 나타난 것은 베다니에서 이 일요일 정오쯤이었다. 한낮이 조금 지나서, 예수의 바로 밑 아우 야고보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부활한 오라비의 빈 무덤 앞에 서서, 나사로의 동산에서, 머리 속에서 다윗의 사자가 한 시간쯤 전에 그들에게 가져온 소식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었다. 야고보는 언제나 맏형이 땅에서 이룰 사명을 믿고 싶어했지만, 예수의 일과 상관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고, 예수가 메시아라고 사도들이 나중에 주장한 것을 깊이 의심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온 가족이 그 사자가 가져온 소식에 깜짝 놀라 혼란에 빠지다시피 했다. 마침 야고보가 나사로의 빈 무덤 앞에 서 있는 동안에, 막달라 마리아가 그 장면에 나타났고 요셉의 무덤에서 이른 새벽 시간에 겪은 체험을 그 가족에게 흥분해서 늘어놓았다. 그 여자가 말을 마치기 전에, 다윗 세베대와 그의 어머니가 도착했다. 말할 것도 없이 룻은 그 보고를 믿었고, 다윗과 살로메와 이야기를 나눈 뒤에 유다도 믿었다.
190:2.3 (2032.1) 그동안에, 그들이 야고보를 찾고 있었는데 미처 찾아내기 전에, 그가 거기에 동산에서 무덤 근처에 서 있는 동안, 야고보는 마치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만진 것 같이, 근처에 누가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고, 보려고 몸을 돌이켰을 때, 자기 옆에서 이상한 모습이 차츰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너무나 놀라서 입을 열 수 없었고, 너무 무서워 달아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서 그 이상한 모습은 말했다: “야고보야, 나는 하늘나라의 봉사에 너를 부르려고 왔노라. 네 형제들과 진지하게 손잡고 내 뒤를 따르라.” 야고보는 자기 이름을 들었을 때, 그에게 말을 건 사람이 맏형 예수임을 알았다. 사람들은 모두 주의 상물질 모습을 알아보는 데 얼마큼 어려움을 겪었지만, 일단 그들과 대화를 시작했을 때 거의 아무도 그 목소리를 알아보거나, 아니면 매력 있는 그의 인품을 확인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190:2.4 (2032.2) 예수가 말을 건네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야고보는 “내 아버지여, 형이여” 하고 외치면서 예수의 발 앞에 비로소 쓰러졌다. 그러나 그와 이야기하면서 예수는 그에게 일어서라고 명했다. 그들은 거의 3분 동안 동산을 지나서 걸으며 이야기했다. 옛 시절의 체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가까운 앞날의 사건들을 예측했다. 그들이 집으로 가까이 가자, 예수는 말했다: “내가 너희 모두에게 함께 인사할 때까지, 야고보야, 잘 있거라.”
190:2.5 (2032.3) 바로 그들이 벳바게에서 그를 찾는 동안에, 야고보는 외치면서 집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나는 이제 막 예수를 보았고 그와 이야기하고 말을 나누었노라.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났더라! ‘내가 너희 모두에게 함께 인사할 때까지, 잘 있거라’ 하며 내 앞에서 사라졌느니라.” 말을 마치자마자 유다가 돌아왔고, 그는 유다를 위하여 동산에서 예수를 만난 체험을 다시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비로소 예수가 부활한 것을 믿었다. 야고보는 이제 갈릴리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다윗은 외쳤다: “흥분한 여인들만 본 것이 아니라. 용감한 남자들도 그를 비로소 보았구나. 나도 직접 그를 만나기를 기대하노라.”
190:2.6 (2032.4) 다윗은 오래 기다리지 않았는데, 바로 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 2시 조금 전에 예수가 네 번째로 필사자가 인식하도록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땅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 모두 합쳐서 스무 명 앞에 눈에 보이게 나타났다. 주는 열린 뒷문에 나타나서 말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육체를 입었던 나와 한때 가까웠던 사람들에게 안녕, 그리고 하늘나라의 내 형제와 자매들에게 친교가 있기를. 너희가 어찌 의심할 수 있느냐? 마음을 다하여 진리의 빛을 따르겠다고 선택하기 전에, 어찌하여 너희는 그렇게 오래 머뭇거렸느냐? 그런즉 너희는 모두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와서 진리의 영과 친교하여라.” 그들이 놀라서 처음에 충격을 받았다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마치 그를 품에 안으려는 듯이 그를 향하여 움직이자, 그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190:2.7 (2032.5) 그들은 모두 도시로 달려가서 의심하는 사도(使徒)들에게,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 일러주고 싶었지만, 야고보가 그들을 막았다. 오직 막달라 마리아만 요셉의 집으로 돌아가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들이 동산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예수가 그에게 말한 어떤 것들 때문에, 야고보는 이 상물질 모습으로 방문한 사실을 널리 퍼뜨리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서 부활하신 주와 함께 이날 이야기 나눈 것을 야고보는 결코 더 이상 밝히지 않았다.
190:3.1 (2033.1) 사람의 눈이 알아보도록 예수가 다섯 번째로 상물질로 나타난 것은 아리마대 요셉의 집에서 모인 25명쯤 되는 여신도들이 있는 가운데 바로 이 일요일 오후, 4시 15분쯤이었다. 주가 이렇게 나타나기 바로 몇 분 전에 막달라 마리아는 요셉의 집으로 돌아갔다. 예수의 아우 야고보는 베다니에서 주가 나타나신 것에 관하여 사도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전에 부탁했다. 그는 마리아에게 그 사건을 여신도들에게 삼가 보고하지 말라고 요청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여인들이 다 비밀을 지키라고 서약하게 한 뒤에, 마리아는 나서서 베다니에서 예수의 가족과 함께 있는 동안에 아주 최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야기했다. 마리아가 가슴 떨리는 이 이야기를 한창 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고 엄숙한 침묵이 그들을 덮었다. 바로 그들 한가운데 완전히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살아나신 예수를 그들은 바라보았다. 그는 그들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하늘나라의 친교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異邦人)도, 부자나 가난한 자도, 자유로운 자나 매인 자도, 남자나 여자도 없을지니라. 너희는 또한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복음을 통해서 인류가 해방된다는 좋은 소식을 널리 전파하라고 부름받았느니라. 온 세상으로 가서, 이 복음을 선포하고 신자들이 복음 믿는 것을 확인하여라. 너희가 이렇게 하는 동안, 병자에게 봉사를 베풀고, 마음이 약하고 두려움에 질린 자를 북돋아주기를 잊지 말라. 그리고 나는 언제나, 땅 끝까지라도 너희와 함께 하리라.”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고, 한편 여인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말없이 경배했다.
190:3.2 (2033.2) 이때까지 예수가 상물질 모습으로 다섯 번 나타난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는 네 번 증인으로 보았다.
190:3.3 (2033.3) 늦은 아침에 사자들을 내보낸 결과로서, 그리고 요셉의 집에서 예수가 이렇게 출현한 것에 관한 암시(暗示)가 무의식 중에 흘러나가서, 예수가 살아났다, 많은 사람이 그를 보았다고 주장한다는 보고가 도시 근처에서 떠돈다는 말이 초저녁에 유대인 권력자들의 귀에 비로소 들어갔다. 산헤드린 의원들은 이 소문에 속속들이 흥분했다. 안나스와 급히 의논한 뒤에, 가야바는 그날 저녁 8시에 열도록 산헤드린 회의를 소집했다. 이 모임에서 예수의 부활을 입 밖에 내는 사람은 누구나 회당에서 내쫓는다는 조치를 취했다. 그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나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제안까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공포에 가까운 혼란 속에서 그 회의가 해산되었기 때문에, 이 제안이 투표에 붙여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전에 예수의 문제가 끝났다고 감히 생각했다. 그들은 나사렛 사람과 정말 골칫거리가 막 시작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190:4.1 (2033.4) 4시 반쯤에, 플라비우스라는 사람의 집에서, 주는 거기에 모인 그리스인 신자 약 40명에게 여섯 번째로 상물질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들이 주가 부활하셨다는 보고를 토론하느라고 몰두해 있는 동안, 문들이 단단히 잠겨 있었는데도, 그는 그들 한가운데에 모습을 나타내고, 말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유대인들 사이에 나타났으나, 그는 모든 사람을 보살피려고 왔느니라. 내 아버지의 나라에는 유대인도 이방인도 없을지니라, 너희는 모두 형제―하나님의 아들―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가 하늘나라의 대사들로부터 받은 것 같이, 너희는 온 세상으로 가서 이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라. 그리하면 아버지의 아들들, 믿음과 진리의 아들들이 형제로서 사랑하는 가운데 내가 너희와 사귀리라.” 그리고 이렇게 책임을 지워주고 나서 그는 떠났고, 그들은 그를 더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저녁 내내 집안에 남아 있었고, 너무나 경외감과 두려움에 휩싸여,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지 못했다. 이 그리스인들 중에 아무도 그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은 이 일을 의논하고, 주가 그들을 다시 찾아올까 희망하며 깨어 있었다. 이 무리 가운데, 군인들이 예수를 체포하고 유다가 입맞추어 그를 배반했을 때 겟세마네에 있었던 그리스인이 여러 명 있었다.
190:4.2 (2034.1) 예수가 부활(復活)했다는 소문과 추종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난 것에 관한 보고가 빨리 퍼지고 있고, 도시 전체가 흥분이 고조되어 들떠 있었다. 이미 주는 그의 가족에게, 여인들에게, 그리고 그리스인들에게 나타난 적이 있었고, 얼마 안 있어 사도들 한가운데 나타난다. 산헤드린은 유대인 권력자들에게 아주 갑자기 밀어닥친 이 새로운 문제들을 곧 고려하기 시작할 것이다. 예수는 사도들에 관하여 많이 생각하지만, 그들을 찾아보기 전에, 엄숙하게 돌이켜보고 깊이 생각하는 몇 시간 동안 더 그들을 버려두기를 바란다.
190:5.1 (2034.2) 예루살렘에서 11킬로미터쯤 서쪽에 엠마오에는 두 목자 형제가 살았는데, 이들은 제사ㆍ예식ㆍ축제에 참석하느라고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주간을 보냈다. 형 클레오파스는 예수를 얼마큼 믿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는 회당에서 쫓겨났다. 그 아우 야곱은 믿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주의 가르침과 행하신 일에 관하여 들은 것에 많이 흥미를 느꼈다.
190:5.2 (2034.3) 이 일요일 오후에, 예루살렘에서 5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5시 몇분 전에, 이 두 형제가 엠마오로 가는 길을 따라서 터벅터벅 걷는 동안에, 그들은 예수와 그의 가르침과 행적에 관하여, 특히 그의 무덤이 비었고, 어떤 여인들이 그와 이야기했다는 소문에 관하여, 아주 열심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클레오파스는 이러한 보고를 믿을 생각이 반쯤 있었지만, 야곱은 그 사건 전부가 아마도 사기(詐欺)라고 주장하였다. 집을 향하여 길을 가면서 이렇게 다투고 토론하는데, 그들이 계속 길을 가는 동안, 예수의 상물질 모습이 그들을 따라가면서 나타났고, 이것은 일곱째 출현이었다. 클레오파스는 예수가 가르치는 것을 전에 자주 들었고, 예루살렘 신자들의 집에서 몇 번 그와 함께 음식을 먹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주가 그들과 함께 거리낌없이 이야기했을 때도, 그는 주를 알아보지 못했다.
190:5.3 (2034.4) 얼마큼 그들과 함께 걸은 뒤에 예수는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다가올 때 너희는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진지하게 나누었느냐?” 예수가 말씀을 마치자, 그들은 가만히 서서, 슬픈 빛을 띠고 놀라워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클레오파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요즘에 일어난 일들을 모르다니, 그럴 수가 있느뇨?” 그리고 나서 주는 물었다. “무슨 일이냐?” 클레오파스가 대답했다: “이 일에 대하여 모른다면, 예루살렘에서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이 소문을 듣지 못한 사람은 당신 뿐이라. 그는 하나님과 모든 사람 앞에서 힘차게 말씀하고 행동했던 선지자였는지라. 주사제(主司祭)와 우리 권력자들이 그를 로마인들에게 넘기고 저희에게 그를 십자가에 달라고 요구하였더라. 자,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방인의 지배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할 자가 그 사람이기를 바랐는지라.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가 십자가에 못박힌 지 이제 사흘째요, 어떤 여인들이 오늘 아침 아주 일찍 그의 무덤으로 갔다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선언하여 오늘 우리를 놀라게 하였는지라. 그리고 바로 이 여인들은 저희가 이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우기며, 저희는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주장하는지라. 그 여인들이 이 일을 남자들에게 보고했을 때, 두 사도가 무덤으로 달려가서 마찬가지로 무덤이 빈 것을 발견하였더라”―그리고 이 대목에서 “하지만 저희는 예수를 구경하지 못했는지라”하고 야곱은 형이 말하는 데 불쑥 끼어들었다.
190:5.4 (2035.1) 그들이 나란히 걷는 동안, 예수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진리를 이해하는 데 정말로 느리구나! 너희가 토론하는 것이 이 사람의 가르침과 일에 대해서라고 내게 이르니, 내가 이 가르침에 익숙하고도 남은즉 너희를 깨우쳐줄까 하노라.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그의 하늘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저희가 이 진리의 나라,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가르치는 이 새 나라에서, 사랑으로 봉사하는 형제로서 친교하는 영적 즐거움을 누리면서 해방과 자유를 찾으리라, 이렇게 이 예수가 늘 가르쳤느니라. 이 사람의 아들이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했는가, 병자와 고통받는 자를 보살피고, 두려움에 빠지고 악에 노예가 된 자를 해방하였는가 너희는 회상하지 못하느냐? 이 나사렛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고, 그를 사형에 처하려는 적들에게 넘겨지고, 사흘째에 살아나리라고 제자들에게 이른 것을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이 모든 것을 듣지 못하였느냐?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원받는 이날에 관하여 성서에서 읽은 적이 없느냐? 그 사람 안에서 땅에 있는 모든 가족이 복을 받으리라, 그는 빈곤한 자의 외침을 듣고, 그를 찾는 가난한 자의 혼을 구하리라, 모든 나라가 그를 복되다 하리라고 거기에 적혀 있느니라. 그러한 구원자는 메마른 땅에 큰 바위의 그림자와 같으리라. 그는 두 팔에 양들을 모으고, 부드럽게 양들을 가슴에 안아 나르면서, 참 목자와 같이 양떼를 먹이리라. 영적으로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고 절망에 빠진 죄수들을 완전한 해방과 빛 가운데로 끌어내리리라.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이 영원히 구원하는 큰 빛을 보리라. 마음이 상한 자를 동여매고, 죄에 포로 된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두려움에 노예가 되고 악에 매인 자에게 감옥 문을 열어주리라. 슬피 우는 자를 위로하고, 슬픔과 억압 대신에 구원의 기쁨을 저희에게 주리라. 그는 모든 나라의 소망이요, 올바름을 찾는 자에게 영원한 기쁨이 되리라. 이 진리와 올바름의 아들은 병을 고치는 빛과 구원하는 힘으로 세상에서 일어나겠고, 그의 민족을 죄에서 구원하기까지 하며, 잃어버린 자를 정말로 찾고 구원하리라. 약한 자를 멸하지 않고, 올바름을 간절히 목마르게 찾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베풀리라. 그를 믿는 자는 영생(永生)을 얻으리라. 그가 그의 영을 모든 육체에 퍼붓고, 이 진리의 영은 각 신자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솟아오르는 샘물이 되리라, 이렇게 적혀 있느니라. 이 사람이 너희에게 가져다 준 하늘나라 복음이 얼마나 큰지 너희는 알아듣지 못하였느냐? 얼마나 큰 구원이 너희에게 다가왔는지 너희는 깨닫지 못하느냐?”
190:5.5 (2035.2) 이때가 되어서 그들은 이 형제가 사는 마을에 가까이 왔다. 길을 따라 걷는 동안에 예수가 이 두 사람을 가르치기 시작한 뒤로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곧 그들의 초라한 거처 앞에 멈추었고, 예수는 길을 계속 내려가면서 그들을 막 떠나려 했지만, 그들은 예수에게 들어와서 함께 머물라고 강청(强請)하였다. 그들은 해질녘이 가까웠고, 주가 함께 머물라고 떼를 썼다. 마침내 예수는 찬성하였고, 집으로 들어간 뒤에 금방, 그들은 먹으려고 앉았다. 그들은 예수에게 축복할 빵을 드렸고, 그가 비로소 빵을 뜯어서 그들에게 넘겨주는 동안에, 그들의 눈이 열렸고, 클레오파스는 손님이 바로 주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가 “주로구나―”하고 말하자, 상물질 모습의 예수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190:5.6 (2036.1) 그리고 나서 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우리가 길을 따라 걸으면서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동안, 우리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른 것이 당연하니라! 그동안에 그는 성서의 가르침을 풀이하여 우리가 깨닫게 하였는지라!”
190:5.7 (2036.2) 그들은 멈추어 먹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은 상물질 모습의 주를 보았고, 집 밖으로 달려나가서, 주가 살아나셨다는 좋은 소식을 퍼뜨리려고 예루살렘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190:5.8 (2036.3) 이날 저녁 9시쯤에, 주가 열 사람에게 나타나기 바로 전에, 달아오른 이 두 형제는 위층 방에 있는 사도들에게 들이닥쳤다. 그들이 예수를 보았고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선언했다. 예수가 그들에게 일러준 모든 것, 그리고 빵을 뜯을 때가 되기까지 그가 누구인지 어떻게 그들이 알아보지 못했는가 일러주었다.
191:0.1 (2037.1) 부활이 있었던 일요일은 사도들의 생애에서 끔찍한 날이었고, 열 사람은 문에 빗장을 지르고 그 위층 방에서 그날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달아날 수도 있었지만, 바깥에 나다니는 것이 발견되면 산헤드린 관리에게 체포되는 것이 두려웠다. 토마스는 벳바게에서 혼자서 그의 곤경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었다. 동료 사도들과 함께 남아 있었더라면 그는 더 잘 버티었을 터이고, 더 유익한 길을 따라서 그들의 토론을 이끄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91:0.2 (2037.2) 하루 종일 요한은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생각을 지지하였다. 그는 예수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주가 확언한 것을 적어도 다섯 번, 사흘째를 언급한 것을 적어도 세 번 열거했다. 요한의 태도는 그들에게, 특히 형 야고보, 그리고 나다니엘에게 어지간히 영향을 주었다. 요한이 그 집단에서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들에게 더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91:0.3 (2037.3) 고립된 처지는 그들이 고생하는 큰 원인이었다. 요한 마가는 그들이 성전 근처에서 되어 가는 일과 연락을 유지하게 해주었고, 도시에서 생기는 여러 소문에 관하여 그들에게 정보를 주었지만, 예수가 이미 나타난 것을 본 다른 무리의 신자들로부터 소식을 모을 생각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은 다윗의 사자들이 이제까지 베풀었던 종류의 봉사였지만, 이 사자들은 모두,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신자 무리에게 부활을 알리는 사자로서 마지막 임무를 띠고 자리를 비웠다. 이 여러 해 동안 처음으로 사도들은 하늘나라 일에 관하여 나날의 정보를 얻는 데 그들이 얼마나 다윗의 사자들에게 의존했는가 깨달았다.
191:0.4 (2037.4) 이날 하루 종일, 베드로는 그답게, 주가 부활한 것을 믿기도 하고 의심도 하면서 감정이 오락가락하였다. 베드로는 마치 예수의 몸이 안에서 그저 증발한 것처럼, 무덤에서 시체를 쌌던 천이 거기에 놓인 광경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베드로는 궁리하였다. “그러나 그가 살아서 자신을 여인들에게 보일 수 있다면, 어째서 자신을 우리에게, 사도들에게 보이지 않는가?” 그가 그날 밤 안나스의 안마당에서 예수를 부인했기 때문에, 아마도 자기가 사도들 가운데 있기 때문에, 예수가 그들에게 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베드로는 슬퍼지곤 했다. 그리고 나서 “내 사도들에게―그리고 베드로에게―가서 이르라” 하는 여인들이 가져온 말씀에 기운을 얻곤 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듣고 격려를 받는다는 것은 여인들이 살아나신 주를 정말로 보고 주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을 믿어야 함을 의미했다. 이처럼 베드로는 하루 종일, 믿었다가 의심하며 갈팡질팡했고, 8시가 조금 지나서 안마당으로 나갔다. 그가 주를 부인(否認)한 것 때문에 예수가 그들에게 오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베드로는 사도들 사이에서 자리를 비우려고 생각했다.
191:0.5 (2037.5) 처음에 야고보 세베대는 그들에게 모두 무덤으로 가자고 주장했다. 그는 신비의 진상을 알아보려고 무언가 하는 데 크게 찬성했다. 야고보의 재촉에 반응해서 그들이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막은 사람은 나다니엘이었는데, 그는 이때 목숨을 부당하게 위태롭게 하지 말라는 예수의 경고를 그들에게 상기시킴으로 이렇게 했다. 한낮이 되자 야고보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차분해져서 경계하며 기다렸다. 그는 말이 없었다. 예수가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아서 엄청나게 실망했고, 다른 무리와 개인들에게 주가 여러 번 나타난 것을 몰랐다.
191:0.6 (2038.1) 안드레는 이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많이 기울였다. 그 상황에 몹시 어리둥절하였고, 보통 이상으로 의심이 들었지만, 적어도 동료 사도들을 지도하는 책임에서 벗어난 어떤 홀가분한 느낌을 맛보았다. 그들이 정신 헛갈리는 이때가 닥치기 전에 주가 지도하는 짐을 내려준 것을 그는 정말로 고맙게 여겼다.
191:0.7 (2038.2) 이 비극의 날, 길고 피곤한 몇 시간 동안, 한 번이 넘게, 그 무리에서 유일하게 지탱하는 영향을 미친 것은, 나다니엘이 그답게 자주 기여한 철학적 조언이었다. 그는 하루 종일, 열 명 사이에서 정말로 고삐를 쥐는 세력이었다. 한 번도 그는 주가 부활하신 것을 믿거나 불신한다고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이 지남에 따라서, 그는 점점 더 예수가 다시 살아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고 믿고 싶어졌다.
191:0.8 (2038.3) 열심당원 시몬은 너무나 움츠러들어서 그 토론에 끼지 못했다. 시간의 대부분을 그는 방 한 구석에서 벽을 바라보며 소파에 기대고 있었고, 하루 종일 여섯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하늘나라 개념은 무너졌고, 주의 부활이 그 상황을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의 실망은 무척 개인적이었고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부활과 같은 엄청난 사실이 닥쳐도 갑자기 통지받은 순간에 회복하지 못했다.
191:0.9 (2038.4) 기록하기 이상하지만, 여느 때 말이 없던 빌립은 이날 오후 내내, 말을 많이 했다. 아침 나절에는 할 말이 거의 없었지만, 오후 내내 다른 사도들에 관하여 물었다. 베드로는 빌립의 질문에 자주 귀찮아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의 물음을 마음씨 좋게 받아들였다. 빌립은 예수가 정말로 무덤에서 살아났다면, 그의 몸이 십자가에 못박힌 자국이 눈에 보이게 있을 것인가 특별히 알고 싶어했다.
191:0.10 (2038.5) 마태는 상당히 정신이 헛갈렸고, 동료들의 토론에 귀를 기울였지만, 머리 속에서 앞으로 그들의 재정 문제를 곰곰이 살피면서 시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예수가 부활했다고 생각된 것과 상관 없이 유다는 사라졌고, 다윗은 격식 차리지 않고 자금을 마태에게 넘겼으며, 그들에게 권위 있는 지도자가 없었다. 부활에 관한 그들의 논쟁을 마태가 깊이 고려하는 데 생각이 미치기 전에, 그는 이미 주와 얼굴을 마주하고 보게 되었다.
191:0.11 (2038.6) 알패오 쌍둥이는 이 심각한 토론에 거의 끼어들지 않았고, 늘 하던 시중을 드느라고 꽤 바빴다. 빌립의 질문에 대답하여 그들 가운데 하나가 한 말은 그들의 태도를 표현했다: “우리는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 어머니가 주와 함께 이야기했다고 말씀하시고, 우리는 어머니를 믿노라.”
191:0.12 (2038.7) 토마스는 그가 흔히 겪는, 절망적으로 우울한 시기에 한창 빠져 있었다. 그날 얼마 동안 잠잤고, 나머지 시간에는 산에서 걸어다녔다. 그는 동료 사도들과 다시 함께 있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혼자서 있고 싶은 바람이 더 강했다.
191:0.13 (2038.8) 주는 여러 가지 이유로, 사도들에게 처음으로 상물질(上物質)로 나타나는 것을 미루었다. 첫째로, 그들이 그가 부활했다는 말을 들은 뒤에, 육체를 입고 아직 그들과 함께 있을 때 그의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그들에게 일러준 것을 잘 생각해 볼 겨를을 가지기를 바랐다. 주는 그들 모두에게 모습을 나타내기 전에, 베드로가 그의 특이한 어떤 문제와 씨름하기를 바랐다. 둘째로, 그가 처음으로 나타날 때 토마스가 그들과 함께 있기를 바랐다. 요한 마가는 이 일요일 아침 일찍, 벳바게에 있는 시몬의 집에서 토마스를 찾아냈고, 그렇다는 말을 사도들에게 11시쯤에 전해 왔다. 나다니엘이나 어떤 다른 두 사도가 그를 찾아갔다면, 이날 어느 때라도 토마스는 사도들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그는 정말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전날 밤에 사실 그대로 떠났기 때문에, 너무 마음이 거만해서 그렇게 빨리 제 발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튿날이 되자 그는 너무나 우울해졌고, 그래서 그가 돌아갈 마음을 먹기까지 거의 한 주가 걸렸다. 사도들은 그를 기다렸고, 그는 형제들이 그를 찾고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요청하기를 기다렸다. 토마스는 이처럼 다음 토요일 저녁까지 동료들과 떨어져 있었고, 그때 어둠이 찾아온 뒤에, 베드로와 요한은 벳바게로 가서 그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예수가 처음으로 그들에게 나타난 뒤에, 그들이 대번에 갈릴리로 가지 않았는가 하는 까닭이다. 그들은 토마스 없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191:1.1 (2039.1) 예수가 마가의 집 뜰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난 것은 이 일요일 저녁에, 8시 반이 가까운 때였다. 이것은 여덟 번째로 상물질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주를 부인한 이후로, 베드로는 의심과 죄책감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다. 토요일 내내, 또 이 일요일에, 그는 아마도 이제 더 사도가 아닌가 하는 두려움과 싸웠다. 그는 유다의 운명에 소스라치게 놀랐고, 자기도 주를 배반했다고까지 생각했다. 물론 주가 죽은 자 가운데서 정말로 살아났다면, 그가 사도들과 함께 있는 것이 예수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못하게 방해할지 모른다고, 이날 오후 내내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의 틀 속에서, 그러한 혼의 상태에서, 풀 죽은 사도가 꽃과 풀숲 사이로 거니는 동안에 예수는 베드로에게 나타났다.
191:1.2 (2039.2) 안나스의 집 현관에서 주가 지나가면서 보낸 인자한 눈길을 베드로가 생각했을 때, 그리고 빈 무덤에서 돌아온 여인들이 그날 아침 일찍 그에게 가져온 소식, “내 사도들에게―그리고 베드로에게―가서 이르라”하는 그 놀라운 소식을 머리 속에서 살펴보는 동안, 이 자비(慈悲)의 표시를 생각하는 동안, 믿음은 비로소 의심을 이겼고, 그는 가만히 서서 주먹을 불끈 쥐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음을 믿노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이르리라.” 그리고 이렇게 말하자, 그 앞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갑자기 나타나서, 귀에 익은 목소리로 베드로에게 말을 걸었다: “베드로야, 적은 너를 가지고 싶어했어도 나는 너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네가 나를 부인한 것은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 아님을 알았노라. 그런즉 네가 미처 부탁하기도 전에 너를 용서하였노라. 그러나 너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자에게 좋은 복음(福音) 소식을 전하려고 준비하면서, 이제 너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당면한 골칫거리를 그만 생각해야 하느니라. 이제 더 하늘나라로부터 네가 무엇을 얻을까 아랑곳하지 말고, 오히려 비참한 영적 가난 속에 사는 자에게 네가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걱정해야 하느니라. 시몬아, 새 날의 전투를 위하여, 사람의 자연 지성에 생기는 영적 어둠과 악한 의심과 투쟁하기 위하여, 자세를 갖추어라.”
191:1.3 (2039.3) 베드로와 상물질 예수는 뜰을 통해서 걸었고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일에 대하여 거의 5분 동안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서 그가 물끄러미 보는 가운데 주는 사라지며 말했다: “내가 너희 형제들과 함께 너를 볼 때까지, 베드로야 잘 있거라.”
191:1.4 (2039.4) 한 순간, 베드로는 그가 살아나신 주와 함께 이야기했고, 아직도 하늘나라의 대사(大使)인 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깨달음에 휩싸였다. 그는 영화롭게 된 주가 복음을 계속 전파하라고 그에게 타이르심을 막 들었다. 그리고 가슴 속에서 이 모든 것이 넘쳐흐르자, 위층 방으로, 동료 사도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숨이 차게 흥분하여 외쳤다: “나는 주를 보았노라. 그가 뜰에 계셨느니라.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그는 나를 용서하셨더라.”
191:1.5 (2040.1) 베드로가 뜰에서 예수를 보았다는 선언은 동료 사도들에게 깊이 감명을 주었고 그들은 의심을 거의 버릴 준비가 되었는데, 그때 안드레가 일어나서 동생의 보고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지 말라고 경고했다. 베드로가 전에 헛것을 본 적이 있다고 안드레는 넌지시 비추었다. 환상 속에서 주가 물 위로 그들에게 걸어오는 것을 베드로가 보았다고 주장한 것, 갈릴리 바다에서 밤에 본 그 환상을 안드레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어도, 그는 이 사건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내비치기에 넉넉히 이야기했다. 형이 빗대어 한 말에 시몬 베드로는 무척 마음이 상했고, 즉시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쌍둥이는 베드로를 무척 딱하게 여겼으며, 두 사람이 그에게 건너가서 동정심을 보이고 그들이 그를 믿는다고 말하며, 그들의 어머니도 또한 주를 보았다고 다시 주장했다.
191:2.1 (2040.2) 그날 저녁 9시가 조금 지난 뒤에, 그리고 클레오파스와 야곱이 떠난 뒤에, 알패오 쌍둥이는 베드로를 위로했고 한편 나다니엘은 안드레를 꾸짖었다. 열 사도가 붙잡힐까 두려워서 문을 다 빗장으로 잠그고서 위층 방에서 모여 있는 동안, 상물질 모습으로 주가 그들 한가운데 갑자기 나타나서 말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내가 나타날 때 어찌하여 너희는 마치 유령을 본 듯 그리 놀라느냐? 육체를 입고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내가 이 일에 관하여 이르지 아니하더냐? 주사제와 권력자들이 내가 죽음을 당하도록 넘겨주리라, 너희 무리 가운데 하나가 나를 저버릴 것이라, 사흘째에 내가 살아나리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더냐? 여인들, 클레오파스와 야곱, 하다 못해 베드로의 보고에 대하여 너희가 온갖 의심을 하고 이 모든 토론을 하다니 무엇 때문이냐? 얼마나 오랫동안 너희가 내 말을 의심하고 내 약속을 믿지 않겠느냐? 그리고 실제로 나를 보았으매 너희가 믿겠느냐? 이제도 너희 가운데 하나가 자리에 없느니라. 너희가 다시 한 번 모였을 때,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무덤에서 살아난 것을 너희 모두가 확실히 안 뒤에, 여기서 갈릴리로 떠나라. 하나님을 믿고, 서로를 믿으라. 그렇게 너희는 하늘나라의 새 수고를 시작할지니라. 너희가 갈릴리로 갈 준비가 되기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예루살렘에 머물리라. 나의 평화를 너희에게 두고 떠나노라.”
191:2.2 (2040.3) 그들에게 말을 마치고 나서, 상물질 예수는 눈앞에서 한 순간에 사라졌다. 모두 엎어져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라진 주를 경배했다. 이것은 주가 아홉 번째로 상물질로 나타난 것이다.
191:3.1 (2040.4) 이튿날 월요일은 전부, 그때 유란시아에 있던 상물질 인간들과 함께 있는 데 쓰였다. 주의 상물질 과도기 체험에 참여하는 자로서, 사타니아의 일곱 저택 세계로부터 다양한 계급의 과도기 필사자들과 더불어, 1백만이 넘는 상물질 지도자와 동료들이 유란시아로 왔다. 상물질 모습의 예수는 이 눈부신 지성 존재들과 함께 40일 동안 머물렀다. 그는 그들을 가르쳤고, 그 지도자들로부터, 사타니아의 사람 사는 여러 세계에서 온 필사자들이 체계의 상물질 구체들을 통과하면서 거치는 상물질 과도기의 생명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191:3.2 (2041.1) 이 월요일 자정 무렵에 주의 상물질 모습은 상물질 진보의 둘째 단계로 넘어가기 위하여 조절되었다. 다음에 지상의 필사 아이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는 둘째 단계의 상물질 존재였다. 상물질 생애에서 주가 나아가는 동안, 상물질 지성 존재와 변화시키는 그 동료들이, 주를 필사자의 물질 눈에 보이게 만들기가 기술적으로 점점 더 어려워졌다.
191:3.3 (2041.2) 예수는 4월 14일, 금요일에, 상물질의 셋째 단계로, 17일 월요일에 넷째 단계로, 22일 토요일에 다섯째 단계로, 27일 목요일에 여섯째 단계로, 5월 2일 화요일에 일곱째 단계로, 7일 일요일에 예루셈 시민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14일 일요일에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의 품에 들어갔다.
191:3.4 (2041.3) 이전의 여러 자신 수여(授與)와 연관하여, 그가 별자리 본부에서 거주한 것으로부터, 아니 계속 초우주 본부 봉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를 거쳐서, 시공에서 올라가는 필사자의 생애를 이미 충만히 체험했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네바돈의 미가엘은 우주에서 체험하는 봉사를 마쳤다. 바로 이 상물질 체험으로 네바돈의 창조 아들은 일곱째이자 마지막 우주 수여를 정말로 마치고 만족스럽게 끝맺었다.
191:4.1 (2041.4) 필사자가 알아보도록 예수가 상물질 모습으로 열 번째 나타난 것은 필라델피아에서 4월 11일, 화요일, 8시가 조금 지난 뒤였고, 거기서 아브너와 나사로, 그리고 그 동료 150명쯤에게 나타났는데, 이들은 70인 전도단 가운데 50명이 넘는 사람들을 포함한다. 이렇게 나타난 것은 회당(會堂)에서 특별 회의가 열린 바로 뒤였는데,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 그리고 다윗의 사자가 가져왔던, 부활에 관한 최근의 보고를 논의하려고 아브너가 이 회의를 소집하였다. 부활한 나사로가 이제 이 신자 집단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보고를 그들이 믿기는 어렵지 않았다.
191:4.2 (2041.5) 회당에서 아브너와 나사로가 그 모임을 막 시작하였고, 이들이 강단에서 함께 서 있었는데, 그때 주의 모습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을 신자인 청중 전부가 보았다. 그는 아브너와 나사로 사이에 나타났던 곳에서 앞으로 걸어 나왔고, 둘 중에 아무도 그를 지켜보지 못했는데, 예수는 무리에게 인사하면서 말했다:
191:4.3 (2041.6)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우리가 하늘에 아버지 한 분이 계시고, 오직 하나의 하늘나라 복음이―사람이 믿음으로 영생(永生)의 선물을 받는다는 좋은 소식이―있음을 너희가 다 아느니라. 너희가 복음에 충성하기를 기뻐하는 것 같이, 너희 가슴 속에서 형제를 위하는 새롭고 더 큰 사랑을 바깥에 퍼뜨리기를 진리의 아버지께 기도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내가 너희에게 봉사한 것 같이 너희는 모든 사람에게 봉사해야 하느니라. 사람을 이해하는 동정심과 형제의 애정으로, 저희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로마인이든, 페르시아인이든 에티오피아인이든, 좋은 소식의 선포에 헌신하는 너희의 모든 형제와 사귀라. 요한은 하늘나라를 미리 선포하였고, 너희는 권능으로 복음을 전도했으며, 그리스인들은 이미 좋은 소식을 가르치느니라. 그리고 나는 곧 진리의 영을 이 내 형제들 모두의 혼 속으로 보낼 것이요, 저희는 영적 어두움 속에 앉아 있는 동료들을 깨우치려고 일생을 아주 사심 없이 바쳤느니라. 너희는 모두 빛의 자녀이라, 그런즉 사람의 의심과 인간의 불관용을 보여 오해에 빠지지 말라. 너희가 믿음의 은혜로 불신자(不信者)를 사랑하도록 고상하게 되면, 널리 확대되는 믿는 가정에서 동료 신자를 너희가 또한 똑같이 사랑해야 하지 않느냐? 기억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대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191:4.4 (2042.1) “그러면 온 세상으로 가서, 하나님이 아버지요 사람들이 형제라는 이 복음을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 선포하라, 그리고 인류의 다른 종족과 부족들에게 좋은 소식을 제시하는 방법을 늘 지혜롭게 선택하라. 너희는 이 하늘나라 복음을 거저 받았고, 좋은 소식을 모든 나라에 거저 주리라. 악의 저항을 두려워 말지니, 내가 언제나, 아니 시대의 끝날까지도 너희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그리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두고 떠나노라.”
191:4.5 (2042.2) “내 평화를 너희에게 두고 떠나노라” 말했을 때, 그는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갈릴리에서 나타났을 때 한 번, 5백 명쯤의 신자들이 한 때 그를 보았는데, 이것을 제외하면, 필라델피아에서 이 무리는 한 번에 그를 본 무리들 중에서 가장 컸다.
191:4.6 (2042.3) 이튿날 아침 일찍, 토마스의 기분이 풀어지기를 기다리면서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머무르는 동안에도, 필라델피아에 있는 이 신자들은 나사렛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선포하며 다녔다.
191:4.7 (2042.4) 다음날 수요일에 예수는 상물질 동료 사회에서 간섭받지 않고 지냈으며, 오후 중간에 놀라시아덱 별자리 전역에 걸쳐, 사람 사는 구체들에 있는 모든 지역 체계의 저택(邸宅) 세계로부터 방문하는 상물질 대표단들을 영접했다. 그리고 그들은 창조자가 우주 지성 존재에서 자기 계급 중의 하나임을 알고 모두 기뻐했다.
191:5.1 (2042.5) 토마스는 올리브산 근처, 언덕 둘레에서 혼자서 외로이 한 주를 보냈다. 그동안에 그는 오직 시몬의 집에 있던 사람들과 요한 마가를 보았다. 두 사도가 그를 찾아내고, 마가의 집에 있는 회합 장소로 그를 데리고 돌아간 것은 4월 15일, 토요일 9시쯤이었다. 이튿날 토마스는 주가 여러 번 나타났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지만, 완강하게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이 주를 보았다고 생각하도록 베드로가 그들에게 열심을 불어넣었다고 주장했다. 나다니엘은 그와 이치를 따졌지만 아무 쓸모가 없었다. 버릇인 의심증과 관련하여 그의 감정은 고집스러웠고, 이 정신 상태는 그들을 피하여 달아났다는 창피스러운 느낌과 함께, 토마스 자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고립된 상황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그는 동료들로부터 물러나서 제 길을 갔는데, 지금 이들 사이에 돌아왔을 때도, 의식하지 못하면서 찬성하지 않는 태도를 가지는 편이었다. 그는 항복하는 데 더디었고, 지기를 싫어했다. 뜻하지 않게, 그에게 집중된 눈길을 정말로 즐거워했다. 동료들 모두가 그의 태도를 바꾸고 확신을 주려고 기울인 노력으로부터 의식하지 못하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꼬박 한 주 동안 그들을 만나지 못해 서운했는데, 그들이 끈질기게 주의를 기울인 것이 어지간히 즐거웠다.
191:5.2 (2042.6) 6시가 조금 지난 뒤에 그들은 저녁을 먹고 있었고, 베드로는 토마스의 한쪽에 앉고 나다니엘은 다른 쪽에 앉아 있었는데, 그때 의심하는 사도가 말했다: “내 눈으로 주를 보고,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기까지 나는 믿지 않겠노라.” 그들이 이렇게 저녁을 먹고 있는데, 또 문이 단단히 닫히고 잠겨 있는 동안에, 상물질 모습의 주가 갑자기 식탁의 둥근 곳 안에 나타났고, 토마스 바로 앞에 서서 말했다:
191:5.3 (2043.1)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온 세상으로 가서 이 하늘나라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다시 한 번 듣도록 너희가 모두 자리에 있을 때 다시 나타날까 하여, 내가 꼬박 한 주를 머물렀노라.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버지가 나를 세상으로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그렇게 보내노라. 내가 아버지를 드러낸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나날의 생활 속에서, 신의 사랑을 드러낼지니라. 사람의 혼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사랑하라고 너희를 보내노라. 너희는 다만 하늘의 기쁨만 선포할 뿐 아니라, 또한 나날의 체험 속에서 신다운 인생의 이 영적 현실을 보여야 하나니, 너희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물로서 이미 영생을 가졌음이라. 믿음을 가졌을 때, 하늘에서 권능이, 진리의 영이, 너희에게 다가왔을 때 너희는 문을 닫고 여기서 너희 빛을 감추지 아니하겠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온 인류에게 알리리라. 두려워서, 너희는 불쾌한 체험을 겪는 사실로부터 지금 달아나지만, 진리의 영으로 세례를 받고 나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얻는다는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새 체험을 얻으려고 너희는 용감히, 기쁘게 떠나가리라. 전통을 부르짖는 권한이 주는 헛된 안정감으로부터, 생생하게 체험하는 최상의 실체의 사실과 진실, 그리고 이를 믿음에 근거한 새 체제의 권한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충격에서 회복하는 동안, 너희는 여기서, 그리고 갈릴리에서 잠시 머물러도 좋으니라. 세상에 대한 너희의 사명은 내가 너희 사이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생을 살았다는 사실에, 너희와 모든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실에, 기초를 두느니라. 그리고 그 사명은 너희가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그 인생으로―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에게 봉사한 것 같이, 사람을 사랑하고 저희에게 봉사하는 실제의 산 체험으로―이루어질지니라. 믿음으로 세상에게 너희의 빛을 드러내라. 진리를 드러내어 전통에 멀어버린 눈을 뜨게 하라. 너희가 사랑으로 봉사를 베풀어서, 무지로 인한 편견(偏見)을 효과적으로 없애라. 사람을 이해하는 동정심과 사심 없는 헌신으로 그렇게 동료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감으로, 너희는 아버지 사랑을 유익하게 깨닫도록 저희를 이끌리라. 유대인은 선을 찬미하고 그리스인은 아름다움을 높였으며, 힌두인은 헌신을 설교하였고, 먼 나라의 금욕주의자는 존경을 가르치고 로마인은 충성을 요구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제자들에게 일생을, 아니 육체를 입은 형제에게 사랑으로 봉사하는 일생을 요구하노라.”
191:5.4 (2043.2) 이렇게 말씀하고 나서, 주는 고개를 숙여 토마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너 토마스야, 나를 보고 내 손의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을 수 없다면 믿지 않겠다고 하였거늘, 너는 이제 나를 보았고 내 말을 귀로 들었느니라. 비록 네가 내 손에서 아무 못 자국을 구경하지 못해도, 네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또한 입을 모습을 입고 내가 살아났으니, 네가 형제들에게 무어라고 말하겠느냐? 너는 진실을 인정하리니, 믿지 않는다고 아주 굳세게 주장할 때에도, 이미 마음 속에서 네가 믿기 시작했음이라. 토마스야, 막 무너지려 할 바로 그때, 네 의심은 언제나 아주 굳세게 주장하느니라. 토마스야, 너에게 명하노니, 의심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라―그리고 네가 마음을 다해서도 믿을 줄을 내가 아노라.”
191:5.5 (2043.3) 이 말씀을 듣자, 토마스는 상물질 모습의 주 앞에서 무릎을 꿇고 외쳤다: “내가 믿나이다! 내 주여, 선생이여!” 그리고 나서 주는 토마스에게 말했다: “토마스야, 정말로 나를 보고 내 말을 들었은즉 네가 믿었느니라. 다가올 시대에 육체의 눈으로 보지 않고 사람의 귀로 듣지 않았어도 믿을 자는 복되도다.”
191:5.6 (2043.4) 그리고 나서, 주의 모습이 식탁의 상석 가까이로 움직이면서, 그는 모두에게 말했다: “그리고 이제 너희는 모두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내가 얼마 안 있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 이 말씀을 하신 뒤에,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191:5.7 (2044.1)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을 열한 사도는 이제 넉넉히 확신했고, 이튿날 아침 아주 일찍, 동이 트기 전에, 갈릴리로 떠났다.
191:6.1 (2044.2) 열한 사도가 갈릴리로 가는 길에, 4월 18일, 화요일 저녁, 8시 반쯤에 여행 목적지에 가까이 가는 동안에, 예수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단과 약 80명의 다른 신자들에게 나타났다. 이것은 주가 상물질 모습으로 열두 번째로 나타난 것이다. 다윗의 사자가 십자가 처형에 관하여 보고를 끝냈을 때, 예수는 이 그리스인과 유대인들 앞에 나타났다. 예루살렘과 알렉산드리아 사이를 교대해서 달리는 사람들 중에서 다섯째인 이 사자(使者)는 그날 오후 늦게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는데, 그가 소식을 로단에게 전하고 나서, 사자로부터 직접 이 비극의 말을 듣기 위하여 신자들을 불러 모으기로 결정이 내렸다. 8시쯤에, 그 사자, 부시리스의 나단은 이 무리 앞에 와서, 앞의 주자(走者)가 이른 모든 것을 낱낱이 그들에게 일러주었다. 나단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이 말로 끝맺었다: “그러나 이 말을 우리에게 보내는 다윗은, 주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언하면서, 다시 살아나리라 선언했다고 전하나이다.” 마침 나단이 말하는 동안에, 상물질 예수가 거기에 모두가 환히 보도록 나타났다. 나단이 앉자, 예수는 말했다:
191:6.2 (2044.3)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내 아버지가 세상으로 나를 보내며 세우라고 한 것은 한 종족이나 한 나라, 어느 특별 집단의 선생이나 설교자에게 속하지 않느니라. 이 하늘나라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자유로운 자와 매인 자, 남자와 여자, 아니 어린아이에게도 속하느니라. 그리고 육체를 입고 사는 인생으로 너희는 다 이 사랑과 진리의 복음을 선포해야 하느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는 새롭고 놀라운 애정으로 서로 사랑할지니라. 내가 너희에게 봉사한 것 같이, 너희는 새롭고 놀랍게 헌신하는 마음으로 인류에게 봉사하리라. 사람들이 너희가 저희를 그렇게 사랑함을 볼 때, 그리고 얼마나 열심히 저희에게 봉사하는가 볼 때, 너희가 하늘나라의 신앙 동료가 되었음을 깨달을 것이요, 너희의 인생에서 보는 진리의 영을 따라 영원한 구원을 찾으리라.
191:6.3 (2044.4) “아버지가 나를 이 세상으로 보내신 것 같이, 바로 그대로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라고 너희 모두가 부름받았도다. 이 하늘나라 복음은 이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속하느니라. 그 복음을 겨우 사제(司祭)인 자들에게 보관하라고 맡기지 말라. 곧 진리의 영이 너희에게 다가오겠고,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로 이끌리라. 그러므로 이 복음을 전하면서 너희는 온 세상으로 가라. 그리고 보라, 나는 언제나, 아니 시대의 끝까지도, 너희와 함께 있노라.”
191:6.4 (2044.5) 이렇게 말씀하고 나서, 주는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밤새 이 신자들은 거기에 함께 남아서, 하늘나라를 믿는 자로서 그들의 체험을 되새기고, 로단과 그 동료들이 한 여러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음을 믿었다. 이 뒤 둘째 날에 부활을 알리는 다윗의 사자가 도착했는데, 그의 발표에 답하여, “옳도다, 우리가 아노니, 우리가 그를 보았음이라. 그는 그저께 우리에게 나타나셨느니라”하고 그들이 말했을 때, 그 사자가 놀란 것을 상상해 보라.
192:0.1 (2045.1) 사도들이 갈릴리를 향하여 예루살렘을 떠날 때가 되자, 유대인 지도자들은 상당히 조용해졌다. 예수가 하늘나라 신자 집단에게만 나타났으니까, 그리고 사도들이 숨어 있고 아무런 대중 전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 권력자들은 복음 운동이 결국, 효과적으로 분쇄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소문이 더욱 퍼지는 것이 불안했지만, 추종자의 무리가 시체를 옮겼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함으로, 뇌물 받은 경비원들이 모든 그러한 보고를 실질적으로 상쇄하기를 기대하였다.
192:0.2 (2045.2) 이때부터 계속하여 박해의 물결이 일어 사도들이 흩어지기까지, 베드로는 대체로 사도단(使徒團)의 우두머리로 인정되었다. 예수는 결코 어떤 그러한 권한도 주지 않았고, 동료 사도들도 결코 정식으로 그를 그런 책임 있는 자리에 선출하지 않았다. 보편적 찬성을 얻어서, 또한 그들의 으뜸가는 설교자였기 때문에, 그는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맡고 지켰다. 이제부터 계속 대중 전도가 사도들의 주요한 일거리였다. 그들이 갈릴리에서 돌아온 뒤에, 유다의 자리를 대신하여 뽑은 맛디아가 그들의 회계가 되었다.
192:0.3 (2045.3)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머무른 주간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리마대 요셉의 집에서 묵고 있던 여신도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2:0.4 (2045.4) 이 월요일 아침 일찍, 사도들이 갈릴리를 향해 떠났을 때, 요한 마가가 따라갔다. 그는 도시 바깥으로 그들을 따라 나갔는데, 베다니를 한참 지나고 나서, 그들이 그를 돌려보내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 생겨서, 대담하게 그들 사이에 다가갔다.
192:0.5 (2045.5) 살아나신 주의 이야기를 하느라고 갈릴리로 가는 길에 사도들은 몇 번이나 멈추었고, 따라서 수요일 밤 아주 늦게까지 벳세다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들이 다 잠이 깨어 아침 먹을 준비가 되기도 전에, 벌써 목요일 정오가 되었다.
192:1.1 (2045.6) 4월 21일, 금요일 아침 6시쯤에, 상물질 모습의 주는 열 사도에게, 그들의 배가 벳세다에서 여느 때 배를 대는 곳 가까이 물가에 접근하는 동안에, 열세 번째로, 갈릴리에서는 처음으로 나타났다.
192:1.2 (2045.7) 사도들이 세베대의 집에서 기다리면서, 목요일 오후와 초저녁을 보낸 뒤에, 시몬 베드로는 그들에게 고기를 잡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베드로가 고기잡이 나들이를 제안했을 때, 사도들은 모두 따라가기로 작정했다. 밤새 그들은 그물을 가지고 수고했지만 아무 고기도 잡지 못했다. 고기를 잡지 못한 것에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이야기할 많은 흥미 있는 체험, 예루살렘에서 그들에게 아주 최근에 일어난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날이 밝자, 그들은 벳세다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물가로 가까이 가자, 그들은 누군가 호숫가에, 배를 대는 곳 가까이, 모닥불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 그들은 그가 물고기를 잡은 것을 맞이하려고 내려온 요한 마가라고 생각했지만, 물가로 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은 잘못 보았음을 깨달았다―그 사람은 요한이기에는 너무 키가 컸다. 물가에 있는 사람이 주라는 것이 그들 중 아무에게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째서 두려움, 배반, 죽음과 비극적으로 연결된 예루살렘의 꽉 막힌 환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예전에 같이 어울리던 장면 한가운데서, 그리고 탁 트인 자연 속에서, 예수가 그들을 만나고 싶어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갈릴리로 가면, 그가 거기서 그들을 만나리라고 일러주었고, 그는 바야흐로 그 약속을 지키려 했다.
192:1.3 (2046.1) 닻을 내리고, 물가로 가기 위해서 작은 배로 들어가려고 준비했을 때, 물가에 있던 사람이 소리쳐 불렀다, “얘들아, 너희는 무엇이라도 잡았느냐?” 그들이 “아니요”하고 대답했을 때, 그는 다시 말했다. “배의 바른 쪽에 그물을 던지라, 그리하면 너희가 물고기를 잡으리라.” 지시한 사람이 예수인 줄 몰랐어도, 그들은 지시받은 대로 함께 그물을 던졌고, 즉시 그물이 가득 찼다. 너무나 가득해서 도저히 끌어당길 수 없었다. 자, 요한 세베대는 눈치가 빨랐고, 무겁게 실린 그물을 보았을 때, 말을 건넨 사람이 주인 것을 알아차렸다. 이 생각이 머리 속에 떠오르자, 몸을 기울여 베드로에게 속삭였다: “주이라.” 베드로는 늘 생각 없이 행동하고 성급하게 헌신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요한이 이렇게 귀에 대고 속삭이자, 그는 주의 옆으로 더 빨리 갈까 하여 벌떡 일어나서 물 속으로 첨벙 몸을 던졌다. 형제들이 그 뒤에 바짝 따라갔고, 작은 배를 타고 물가로 왔기 때문에, 물고기 그물을 끌고 갔다.
192:1.4 (2046.2) 이때가 되자 요한 마가는 일어나 있었고, 무겁게 실은 그물을 가지고 사도들이 물가로 오는 것을 보고, 그들을 맞이하려고 물가로 달려 내려갔다. 그리고 열 명이 아니라 열한 사람을 보았을 때, 그는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이 살아나신 예수라고 짐작했고, 놀란 열 사람이 말없이 곁에 서 있는 동안에, 소년은 주께 달려가서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내 주여, 내 선생이여.” 그리고 나서 예수는 “평화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하고 인사했을 때 예루살렘에서 한 것과 달리, 보통 목소리로 요한 마가에게 말을 건넸다: “자, 요한아, 너를 다시, 걱정 없는 갈릴리에서 보니 반갑구나. 여기서 우리는 실컷 이야기할 수 있느니라. 요한아, 우리와 함께 머물러 아침을 먹으라.”
192:1.5 (2046.3) 예수가 그 젊은이와 이야기하는 동안, 열 명은 너무나 충격을 받고 깜짝 놀라서, 물고기가 담긴 그물을 물가로 당기기를 소홀히 했다. 이제 예수가 말했다: “너희가 잡은 물고기를 가져다가 얼마큼을 아침 식사를 위하여 준비하여라. 이미 우리는 모닥불과 빵이 많이 있느니라.”
192:1.6 (2046.4) 요한 마가가 주께 경의를 표하는 동안, 베드로는 한 순간 물가에, 거기서 숯불이 이글거리는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그 장면은 그가 주를 부인했던 안나스의 집 안뜰에서 자정에 본 숯불을 너무나 눈에 선하게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었지만, 머리를 흔들고, 주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외쳤다, “내 주여, 내 선생이여!”
192:1.7 (2046.5) 그리고 나서 그들이 그물을 끌어당기는 동안에 베드로는 친구들과 함께 거들었다. 그들이 물고기 잡은 것을 내려놓았을 때, 물고기를 세었는데, 큰 물고기가 153마리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이것을 또 하나의 기적으로 물고기를 잡았다고 여기는 잘못이 일어났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다만 주의 선견(先見)을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는 물고기가 거기 있는 것을 알았고, 따라서 사도들에게 어디에 그물을 던지라고 지시하였다.
192:1.8 (2047.1) 예수는 그들에게 말했다: “이제 모두 와서 아침을 먹으라. 내가 너희와 이야기하는 동안, 쌍둥이도 앉아야 하느니라. 요한 마가가 물고기를 다듬으리라.” 요한 마가는 큼직한 물고기를 일곱 마리 가져왔고, 이것을 주가 불 위에 놓았는데, 물고기가 익자, 소년은 물고기를 열 사람에게 드렸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빵을 떼어 요한에게 건네주었고, 그는 다시 빵을 배고픈 사도들에게 주었다. 그들 모두가 먹을 것을 받고 나서, 예수는 요한 마가에게 앉으라 했고, 손수 소년에게 물고기와 빵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먹는 동안에, 예수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갈릴리에서, 그리고 바로 이 호숫가에서 겪은 여러 체험을 되새겼다.
192:1.9 (2047.2) 이때 사도 집단에게 예수는 세 번째로 나타났다. 어부들이 물가에 왔을 때, 갈릴리 바다에서 타리케아의 생선 장수들이 이렇게 말을 거는 것이 이 어부들에게 흔한 체험이었기 때문에, 예수가 처음에 그들을 향하여 무슨 물고기라도 잡았는가 물었을 때 그들은 그가 누군지 의심하지 않았고, 이 장사꾼들은 물고기 말리는 영업을 위하여 싱싱한 물고기를 사려고 보통 가까이 있었다.
192:1.10 (2047.3) 예수는 한 시간이 넘게 열 사도와 요한 마가와 함께 이야기했고, 그리고 나서 물가를 왔다갔다 거닐며, 둘씩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러나 그가 함께 가르치라고 처음에 보냈던 똑같은 쌍들이 아니었다. 열한 사도가 전에 모두 예루살렘에서 함께 왔지만, 갈릴리에 가까이 가면서 열심당원 시몬은 점점 더 낙심하였고, 그래서 그들이 벳세다에 이르자 형제들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192:1.11 (2047.4) 이날 아침에 이들을 떠나기 전에, 예수는 자원하는 두 사도에게 열심당원 시몬에게 가서, 바로 그날 그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렇게 했다.
192:2.1 (2047.5) 아침 식사를 마쳤을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불 옆에 앉아 있는 동안, 예수는 베드로에게, 또 요한에게, 와서 물가에서 함께 걷자고 손짓했다. 그들이 나란히 걷자, 예수는 요한에게 말했다. “요한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이 “주여,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나이다”하고 대답하자, 주는 말했다: “그러면 요한아, 너그럽지 못한 태도를 버리고, 내가 너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람들 사랑하기를 배우라.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임을 증명하는 데 너의 일생을 바치라.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을 찾도록 재촉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 사랑은 모든 영적 선(善)의 근원이요, 참되고 아름다운 것의 알맹이라.”
192:2.2 (2047.6) 다음에 예수는 베드로를 향하고 물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대답했다. “주여, 내가 혼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함을 아시나이다.”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 양들을 먹이라. 약한 자, 가난한 자, 어린 자 돌보기를 소홀히 말라. 두려움이나 편애가 없이 복음을 전하라.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음을 늘 기억하라. 내가 너에게 봉사한 것 같이, 동료 인간에게 봉사하며, 내가 너를 용서한 것 같이 필사 동료를 용서하라. 경험을 통해서 명상의 가치와 총명하게 숙고하는 힘을 네가 배우도록 하여라.”
192:2.3 (2047.7) 길을 따라 조금 더 걸은 뒤에, 주는 베드로에게 돌이켜 물었다. “베드로야, 너는 정말로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자 시몬이 대답했다, “예, 주여, 내가 당신을 사랑함을 당신이 아시나이다.” 다시 예수는 말했다: “그러면 내 양들을 잘 보살피라. 양 떼에게 착하고 참된 목자가 되라. 저희의 신뢰를 저버리지 말라. 적의 손에 사로잡혀 놀라지 말라. 항상 경계하라―지키고 기도하라.”
192:2.4 (2047.8) 그들이 몇 걸음 더 갔을 때, 예수는 베드로를 향하여 세 번째로 물었다. “베드로야, 네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자 주가 그를 불신하는 듯한 것에 조금 슬퍼서, 베드로는 어지간히 감정이 섞인 소리로 말했다: “주여,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시고, 따라서 내가 정말로 참으로 당신을 사랑함을 아시나이다.”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내 양들을 먹이라. 양떼를 버리지 말라. 동료 목자 모두에게 본보기와 영감이 되라. 내가 너를 사랑해 온 것 같이 양떼를 사랑하고 내가 생명을 너희의 복지에 바쳐 온 것 같이 저희의 복지에 몸을 바치라. 그리고 끝까지 내 뒤를 따르라.”
192:2.5 (2048.1) 베드로는 이 마지막 말씀―그가 주의 뒤를 계속 따라야 한다는 것―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고, 예수를 향하여, 요한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당신의 뒤를 계속 따르면, 이 사람은 무엇을 하리이까?” 그러자 베드로가 말씀을 오해한 것을 깨닫고 예수는 말했다: “베드로야, 네 형제가 무엇을 할까 아랑곳하지 말라. 네가 떠난 뒤에, 아니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요한이 남기를 내가 뜻할지언정,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오직 네가 꼭 나를 따르도록 하여라.”
192:2.6 (2048.2) 이 논평은 형제들 사이에 퍼졌고, 많은 사람이 그리 생각하고 희망한 대로, 권능과 영광 속에 하늘나라를 세우려고 주가 돌아오기까지 요한이 죽지 않으리라는 뜻으로 예수가 말씀했다고 사람들은 받아들였다. 예수의 말씀의 이러한 해석은 열심당원 시몬을 봉사하러 돌아오게 하고 계속 일하게 한 것과 많이 상관이 있다.
192:2.7 (2048.3)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돌아가자, 예수는 안드레와 야고보와 함께 거닐며 이야기하러 갔다. 조금 걷고 나서 예수는 안드레에게 말했다. “안드레야, 너는 나를 신뢰하느냐?” 예수가 그렇게 묻는 것을 듣자, 사도들의 옛 우두머리는 가만히 서서 대답했다. “예, 주여, 분명히 당신을 신뢰하고, 내가 그런 줄 당신이 아시나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안드레야, 나를 신뢰하면, 너희 형제들을―베드로까지도―더욱 신뢰하라. 나는 한때 네 형제들의 지도를 너에게 맡겼노라. 내가 너를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처럼, 이제 너는 다른 사람들을 신뢰해야 하느니라. 모진 박해 때문에 네 형제들이 비로소 널리 흩어질 때, 육체로 내 아우인 야고보가 경험이 부족하여 질 수 없는 무거운 짐을 형제들이 지워줄 때, 야고보에게 생각 깊고 지혜로운 조언자가 되라. 그리고 나서 계속 신뢰할지니, 내가 너를 저버리지 않을 것임이라. 네가 땅에서 일을 마칠 때, 너는 내게로 올지니라.”
192:2.8 (2048.4) 다음에 예수는 야고보를 향하여 말했다: “야고보야, 너는 나를 신뢰하느냐?” 그리고 물론, 야고보는 대답했다: “예, 주여,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그러자 예수는 말했다: “야고보야, 나를 더욱 신뢰하면, 너는 형제들을 참지 못하는 일이 줄어들리라. 네가 나를 신뢰하겠다면, 신자들의 형제 단체에게 친절히 하는 것이 너에게 도움이 되리라. 네 말과 행위로 생기는 결과의 무게를 재는 것을 배우라. 씨 뿌리는 대로 거둠을 기억하라. 정신이 차분해지기를 기도하고 참을성을 기르라. 산 믿음과 함께, 이러한 미덕은 희생의 잔을 마실 때가 올 때 너를 붙들리라. 그러나 결코 절망하지 말라. 네가 땅에서 일을 마칠 때, 너도 와서 나와 함께 지낼지니라.”
192:2.9 (2048.5) 다음에 예수는 토마스와 나다니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토마스에게 말했다. “토마스야, 너는 나를 위해 수고하느냐?” 토마스는 대답했다. “예, 주여, 나는 지금, 그리고 언제나 당신을 위해 일하나이다.” 그러자 예수는 말했다: “나를 위해 수고하고자 하면, 내가 너를 위해 수고한 것 같이, 육체를 입은 내 형제들을 위하여 수고하라. 그리고 이 선행(善行)에 지치지 말고, 이 사랑의 수고를 위하여 하나님이 세운 자로서 견디라. 네가 땅에서 나와 함께 봉사를 마치고 나서, 영광 속에서 나와 함께 수고하리라. 토마스야, 의심을 버리고 믿고 진리를 아는 가운데 성장해야 하느니라.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믿을진대, 아주 유치한 행동을 그치라. 용기를 가지라. 굳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라.”
192:2.10 (2049.1) 그리고 나서 주는 나다니엘에게 말했다. “나다니엘아, 너는 나를 위하여 수고하느냐?” 그 사도가 대답하였다. “예, 주여, 애정을 다 쏟아 그리하나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그런즉 마음을 다하여 나를 위하여 수고한다면, 지치지 않는 애정으로 땅에 있는 내 형제들의 복지에 꼭 헌신하도록 하여라. 조언할 때 우정을 섞고, 철학을 논할 때 사랑을 더하라. 내가 너를 위하여 수고한 것 같이, 동료들을 위하여 수고하라. 내가 너를 보살핀 것 같이, 사람들에게 충실하라. 비판을 줄일지니, 어떤 사람들에게는 많이 기대하지 말고, 그렇게 실망의 정도를 줄이라. 그리고 여기 땅에서 일을 마쳤을 때 너는 하늘에서 나와 함께 수고할지니라.”
192:2.11 (2049.2) 이 뒤에 주는 마태와 빌립과 이야기했다. 빌립에게 그는 말했다: “빌립아, 너는 나에게 복종하느냐?” 빌립은 대답했다, “예 주여, 목숨까지 바쳐서 당신께 복종하리이다.” 그러자 예수는 말했다: “네가 복종하고자 하면, 이방인의 땅으로 가서 이 복음을 선포하라. 복종하는 것이 희생물 바치는 것보다 낫다고 선지자들이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믿음으로 너희는 하나님을 아는 하늘나라 아들이 되었느니라. 오직 한 가지 복종할 율법이 있으니―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러 떠나라는 계명이라.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어둠 속에서 시들고 진리의 빛을 간절히 찾는 네 동료들에게 영생을 얻는다는 좋은 소식을 두려움 없이 전파하라. 빌립아, 이제는 더 돈과 물건을 위하여 바삐 일하지 말라. 이제 너는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좋은 소식을 전하라. 그리고 나는 네 앞에 가고, 끝까지라도 너와 함께 하리라.”
192:2.12 (2049.3) 다음에 주는 마태를 향해서 물었다: “마태야, 마음 속에 내게 복종할 생각이 있느냐?” 마태는 대답했다: “예, 주여, 나는 당신의 뜻을 행하는 데 온전히 헌신하고 있나이다.” 그러자 주는 말했다: “마태야, 내게 복종하고자 하면, 떠나서 이 하늘나라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가르치라. 이제는 더 네가 형제들에게 인생의 물질적인 것을 나누어주지 아니하리라. 이제부터 너도 영적 구원을 얻는다는 좋은 소식을 선포해야 하느니라. 이제부터 계속, 오로지 아버지 나라의 이 복음을 전하는 너의 직책에 복종하는 데만 마음을 쏟으라. 내가 땅에서 아버지의 뜻을 행한 것 같이, 마찬가지로 너는 신이 준 직책을 다할지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네 형제임을 기억하라. 아무도 두려워 말고 너는 하늘나라 복음의 유익한 진리를 선포하라. 그리고 내가 가는 곳으로, 너는 얼마 있지 않아 올지니라.”
192:2.13 (2049.4) 그리고 나서 그는 알패오 쌍둥이, 야고보와 유다와 함께 걸으며 이야기했고, 둘에게 물었다: “야고보와 유다야, 너희는 나를 믿느냐?” 그리고 “예, 주여, 우리가 믿나이다”하고 둘이 대답하자, 그는 말했다: “나는 너희를 곧 떠나리라. 내가 이미 육체로 너희를 떠났음을 너희가 아느니라.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전에 이 모습으로 잠깐 동안만 머무르노라. 너희는 나를 믿나니―너희는 내 사도요, 언제나 그러하리라. 내가 떠났을 때, 또 나와 함께 살려고 오기 전에 하던 일로 아마 너희가 돌아간 뒤에, 나와 교제한 것을 계속 믿고 기억하라. 눈에 보이게 너희가 하는 일에 변화가 생긴다고 하여 너희의 충성심이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여라. 땅에서 너희 끝날까지 하나님을 믿으라. 너희가 하나님의 믿음의 아들일 때, 이 땅의 모든 올바른 일이 거룩함을 결코 잊지 말라. 하나님의 아들이 하는 어떤 일도 평범할 수 없느니라. 그런즉 이제부터 계속, 마치 하나님을 위하여 하듯 너희 일을 하라. 그리고 이 세상에서 너희가 일을 마쳤을 때, 다른 더 좋은 세계들이 있으니, 거기서 너희가 마찬가지로 나를 위하여 일하리라. 이 모든 일에, 이 세상에서, 그리고 다른 세계들에서 나는 너희와 함께 일하겠고, 내 영이 너희 안에 거하리라.”
192:2.14 (2049.5) 알패오 쌍둥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을 때는 거의 10시가 되었고, 예수는 사도들을 떠나면서 말했다: “내일 한낮에 너희를 세운 산에서 모두 만날 때까지, 잘 있거라!”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192:3.1 (2050.1) 4월 22일 토요일 정오에, 열한 사도는 가버나움에서 가까운 산에서 약속대로 모였고, 예수는 그들 사이에 나타났다. 이 모임은 주가 그들을 사도로서, 땅에서 아버지 나라의 대사(大使)로서 그들을 구별했던 바로 그 산에서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주가 열네 번째로 상물질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192:3.2 (2050.2) 이때 열한 사도는 주의 둘레에 동그라미를 지어 무릎을 꿇고서, 주가 책임 지우는 말씀을 되풀이하는 것을 들었고, 그들이 하늘나라의 특별한 일을 위하여 처음에 구별되었을 때처럼, 주가 임명하는 장면을 다시 연출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주의 기도를 빼고, 이 모두가 그들에게는 아버지께 봉사하는 데 그들을 예전에 거룩히 헌신한 것을 생각나게 하였다. 주가―상물질 예수가―이제 기도했을 때, 그것은 사도들이 한 번도 전에 들어 본 적이 없는 당당한 목소리와 권능 있는 말씀이었다. 그들의 주는 이제 자신의 우주에서, 손에 모든 권능과 권한을 넘겨받은 자로서 여러 우주의 통치자들과 말씀하였다. 그리고 이 열한 사람은 예전에 대사가 되는 서약(誓約)에 상물질적으로 다시 헌신하는 이 체험을 결코 잊지 않았다. 주는 이 산에서 그의 대사들과 함께 꼭 한 시간을 보냈고, 그들에게 사랑 어린 작별을 알리고 나서, 눈앞에서 사라졌다.
192:3.3 (2050.3) 그리고 꼭 한 주 동안 아무도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 주가 아버지께로 가버렸는지 알지 못했으니까, 사도들은 무슨 일을 할까 정말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그들은 벳세다에서 머물렀다. 주가 찾아오고 그들이 주를 만나지 못할까 저어하여 그들은 고기 잡으러 가기를 두려워했다. 이 한 주 동안 내내, 예수는 땅에서 상물질 인간들과 함께, 또 이 세상에서 겪고 있는 상물질 과도기의 일로 바빴다.
192:4.1 (2050.4) 예수가 나타났다는 말이 갈릴리에 두루 퍼지고 있었고, 주가 부활한 것에 관하여 묻고, 이 소문난 출현에 대하여 진실을 알아보려고 날마다 세베대의 집에 도착하는 신자(信者)들의 수가 늘어났다. 이번 주 초에 베드로는 다음 안식일, 오후 3시에 바닷가에서 대중 집회가 열릴 것이라는 말을 퍼뜨렸다.
192:4.2 (2050.5) 따라서, 4월 29일 토요일 3시에, 가버나움 근처에서 5백 명이 넘는 신자들이, 부활이 있은 뒤에 처음으로 베드로의 대중 설교를 들으려고 벳세다에 모였다. 그 사도는 최선을 다하였고, 호소력 있는 강연을 마친 뒤에, 그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서 거의 아무도 주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192:4.3 (2050.6) 베드로는 설교를 이렇게 마쳤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가 죽지 않았음을 증언하노라. 그가 무덤에서 살아났음을 선언하노라. 우리는 그를 보았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음을 선포하노라.” 이 믿음의 선언을 막 마치자, 그의 옆에, 이 모든 사람이 환히 보도록, 주는 상물질 모습으로 나타났고, 익숙한 어조로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그리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두고 떠나노라.” 이렇게 나타나고 그들에게 그리 말씀하고 나서, 그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것은 살아나신 예수가 열 다섯 번째로 상물질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192:4.4 (2051.1) 그들이 사도로 세움받은 산에서 주와 함께 회의를 가지는 동안에 열한 사도에게 말한 어떤 것 때문에, 사도들은 주가 갈릴리 신자들 무리 앞에서 주가 곧 대중 앞에 나타나리라, 그리고 주가 그렇게 하신 뒤에,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따라서 이튿날 4월 30일 일요일에 일찍, 열한 사람은 벳세다를 떠나서 예루살렘을 향하였다. 그들은 요단강으로 내려가는 길에 상당히 가르치고 전도했고, 그래서 5월 3일, 수요일 늦게까지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가족의 집에 도착하지 못했다.
192:4.5 (2051.2) 이것은 요한 마가에게 슬픈 귀가(歸家)였다. 그가 집에 도착하기 꼭 몇 시간 전에, 아버지 엘리야 마가는 뇌에 출혈이 생겨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죽은 자가 확실히 부활한다는 생각이 슬픔에 잠긴 사도들을 많이 위로했지만, 동시에 그들은 좋은 친구를 잃어서 참으로 슬퍼했고, 그는 큰 어려움과 실망이 닥쳤을 때에도 그들을 굳건하게 지지해 온 사람이었다. 요한 마가는 어머니를 위로하려고 할 수 있는 데까지 다했고, 어머니를 대신하여, 사도들이 그 집에서 자기들의 집처럼 계속 묵으라고 초청했다. 그리고 열한 사람은 이 위층 방을 오순절 날이 지나기까지 본부로 삼았다.
192:4.6 (2051.3) 사도들은 계획하여 유대인 당국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해가 떨어진 뒤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엘리야 마가의 장례와 관련하여 대중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이튿날 하루 종일 그들은 사건이 많았던 이 위층 방에서 조용히 숨어서 지냈다.
192:4.7 (2051.4) 목요일 밤에 사도들은 이 위층 방에서 대단한 모임을 가졌고, 토마스와 열심당원 시몬과 알패오 쌍둥이를 제외하고, 모두 주가 살아나셨다는 새 복음을 대중에게 전도하려고 떠날 것을 서약했다. 하늘나라 복음을―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사람이 형제인 것을―예수가 부활했다는 선포로 바꾸는 첫 걸음이 이미 시작되었다. 나다니엘은 대중에게 전하는 말씀의 요점이 이렇게 바뀐 데 반대했지만, 그는 베드로의 열변을 견딜 수 없었고, 제자들, 특히 여신도(女信徒)들의 열심을 이길 수도 없었다.
192:4.8 (2051.5) 그래서 베드로의 힘찬 지도를 받으면서, 미처 주가 아버지께로 올라가기 전에, 좋은 뜻을 가진 그의 대표자들은 예수의 종교를 새롭고 수정된 형태로, 예수에 관한 종교로, 차츰차츰 확실히 갈아치우는 미묘한 과정을 시작하였다.
193:0.1 (2052.1) 예수가 열여섯 번째, 상물질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5월 5일 금요일에 니고데모의 집 안뜰에서, 밤 9시쯤이었다. 이날 저녁에 예루살렘 신자들은 부활이 있은 뒤에 처음으로 한데 모이려고 시도했다. 이때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열한 사도, 여인단과 그 동료들, 그리고 주의 다른 주요 제자 약 50명이었는데, 이들은 그리스인 여러 명을 포함하였다. 이 신자 일행은 반시간이 넘도록 격식 차리지 않고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상물질 모습의 예수가 환히 보이도록 나타나서, 즉시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예수는 말했다:
193:0.2 (2052.2)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내가 육체를 벗어난 이후로 내가 나타났던 가운데, 이것이 가장 대표적 신자―사도와 제자들, 남자와 여자 모두―의 무리이라. 청컨대, 내가 너희 가운데 머무르는 것이 끝나야 한다고 미리 너희에게 일렀고, 내가 얼마 안 있어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너희에게 이른 것을 너희가 증언하라. 그리고 나서 어떻게 주사제와 유대인 권력자들이 나를 사형(死刑)에 처하도록 넘겨 주려 하겠고, 또 내가 무덤에서 살아나리라고 너희에게 분명히 일렀노라. 그러면 이 일이 일어났을 때 어찌하여 이 모든 것에 너희가 그리 당황하였느냐? 내가 사흘째에 무덤에서 살아났을 때 어찌하여 너희는 그리 놀랐느냐? 너희는 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들었으므로, 나를 믿지 못하였느니라.
193:0.3 (2052.3) “그리고 마음 속에서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머리로 내 가르침을 듣는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않도록, 이제 너희는 내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느니라. 너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내가 머무르기 시작한 때부터, 나의 한 가지 목적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땅에 있는 자녀들에게 드러내는 것이라 너희에게 가르쳤노라. 너희가 하나님을 아는 생애를 체험하도록, 나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수여 생애를 살았노라. 나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임을 드러냈고, 너희가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냈노라. 하나님이 너희를, 아들들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요, 내 말을 믿음으로 이 사실은 너희 가슴 속에서 영원하고 살아 있는 진리가 되느니라. 산 믿음으로 너희가 신성하게 하나님을 의식하게 될 때, 그때 너희는 빛과 생명의 자녀로서 영에게서 태어나나니, 그 영생으로 너희는 온 우주에 올라가고 파라다이스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찾는 체험을 얻을지니라.
193:0.4 (2052.4) “너희에게 훈계하노니, 사람들 사이에서 너희의 사명은 하늘나라 복음―하나님이 아버지라는 현실과 사람이 아들이라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임을 늘 기억하라. 유익한 복음의 일부만 아니라, 좋은 소식인 진리 전부를 선포하라. 너희가 전하는 말은 나의 부활 체험으로 인하여 바뀌지 않았느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여전히 하늘나라 복음의 유익한 진리이라. 너희는 떠나가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봉사할 것을 전파해야 하느니라. 세상이 가장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것이라: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믿음을 통하여 저희가 사람을 고귀하게 만드는 이 진리를 실제로 깨닫고 나날이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라. 나의 수여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하는 데 도움이 될 터이나, 저희가 영원한 아버지의 살아 있는 영 아들이라는 유익한 진리를 믿음으로 몸소 붙잡지 못하면, 그러한 지식이 충분치 않으니라. 하늘나라 복음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땅에서 그의 자녀들에게 봉사하는 데 관계되는 것이라.
193:0.5 (2053.1) “너희끼리 여기서, 내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지식을 함께 나누지만, 살아난 것은 이상하지 않으니라. 나는 내 목숨을 버리고 목숨을 다시 손에 잡을 힘이 있고, 아버지는 그러한 힘을 파라다이스 아들들에게 주시느니라. 내가 요셉의 무덤을 떠난 뒤에 곧, 한 시대의 죽은 자들이 영원한 승천을 시작한 것을 알고서 너희는 오히려 마음 속에서 기운을 얻어야 하느니라.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에게 봉사함으로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을 드러낸 것 같이, 너희가 어떻게 사랑의 봉사를 통해서 동료 인간에게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는가 보이려고 내가 육체를 입고 일생을 살았노라. 너희와 모든 다른 사람이, 너희가 다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도록 나는 사람의 아들로서 너희 가운데서 살아 왔노라. 그런즉 너희는 이제 온 세상으로 가서, 모든 사람에게 이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 것 같이 동료 필사자를 위하여 수고하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동안,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진리의 영을 보낼 때까지, 여기 예루살렘에서 머무르기만 하라. 그는 더욱 큰 진리로 너희를 이끌겠고 나는 너희와 함께 온 세상으로 가리라. 나는 너희와 함께 늘 있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두고 떠나노라.”
193:0.6 (2053.2) 그들에게 말씀을 마치고 나서, 주는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 신자들이 흩어지기 전에, 날이 거의 밝아 왔다. 밤새도록 그들은 함께 남아서, 주의 훈계를 열심히 토론하고, 그들에게 닥친 모든 일을 생각해 보았다. 야고보 세베대와 다른 사도들은 또한 갈릴리에서 상물질 모습의 주와 함께 겪은 체험에 대하여 그들에게 일러주었고, 그가 어떻게 세 번 그들에게 나타났는가 이야기하였다.
193:1.1 (2053.3) 5월 13일 안식일 오후 4시쯤, 주는 시카에서 야곱의 우물 가까이, 날다와 약 75명 되는 사마리아 신자들에게 나타났다. 그 신자들은 생명의 물에 관하여 예수가 날다에게 말씀했던 곳 가까이, 이 장소에서 만나는 버릇이 있었다. 이날 부활의 보고에 관하여 그들이 토론을 막 마치자, 예수는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나서 말씀했다:
193:1.2 (2053.4)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내가 부활이요 생명임을 알고 너희가 기뻐하여도, 이것은 먼저 너희가 영원한 영에게서 태어나고 이로써 믿음으로 영생의 선물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면 너희에게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너희가 내 아버지의 믿음의 아들이어든 너희는 결코 죽지 않고 썩어 없어지지 아니할지니라. 하늘나라 복음은 너희에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가르쳤느니라. 하늘 아버지가 땅에 있는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이 좋은 소식은 온 세상에 전해져야 하느니라. 게리짐이나 예루살렘이 아니라, 너희가 있는 곳에서, 너희 그대로, 정신적으로, 진실하게 하나님을 예배할 때가 왔느니라. 너희의 혼을 구하는 것은 너희의 믿음이요, 구원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 그러나 속지 말지니, 구원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요,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수여되나, 육체를 입고 사는 이 영(靈) 생명의 열매를 맺는 체험이 따르느니라.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너희가 또한 사람이 형제라는, 관계된 진리를 자유로이 받아들임을 뜻하느니라. 그리고 사람이 네 형제이어든 그는 네 이웃보다 더 크며, 아버지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요구하시니라. 너의 형이나 동생은 네 가족에서 났은즉 너는 가족 사랑으로 사랑할 뿐 아니라, 또한 네가 네 몸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 같이 그를 위하여 수고하리라. 그리고 너희는 내 동포이매, 이처럼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를 위하여 수고하였으니, 너는 이처럼 네 형제를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수고하리라. 그러면 온 세상으로 가서, 이 좋은 소식을 모든 종족과 부족과 나라의 모든 인간에게 이르라. 내 영이 너희 앞에 갈지니, 내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193:1.3 (2054.1) 이 사마리아인들은 주가 이렇게 나타나신 것에 크게 놀랐고, 이웃 촌락과 마을로 서둘러 가서, 거기서 그들이 예수를 만났고 그가 그들에게 말씀했다는 소식을 널리 퍼뜨렸다. 그리고 이때 주는 상물질 모습으로 열 일곱 번째 나타나셨다.
193:2.1 (2054.2) 티레에서 5월 16일, 화요일, 저녁 9시 조금 전에 주는 열여덟 번째로 상물질 모습으로 나타났다. 신자들의 모임이 끝나고, 막 흩어지려 할 때, 다시 나타나서 말씀했다:
193:2.2 (2054.3)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너희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사람의 아들이 살아난 것을 알고 기뻐하나니, 기뻐함으로 너희와 네 형제들이 또한 사람의 죽음을 거치고 살아날 줄을 너희가 아는 까닭이라. 그러나 그렇게 살아남는 것은 너희가 죽기 전에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찾는 영에게서 태어나는가에 달려 있느니라. 생명의 빵과 생명의 물은 오로지, 진리를 간절히 찾고 의로움―하나님―을 목마르게 찾는 자라야 받느니라. 죽은 자가 살아나는 사실은 하늘나라의 복음이 아니라. 이 큰 진리와 이 우주 사실이 모두 이 복음에 관계되나니, 그것들이 좋은 소식을 믿어서 생기는 결과의 일부요, 신앙으로 인하여, 행위로, 진실로, 영원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되는 자가 나중에 겪는 체험 속에 담겨 있는 까닭이라. 내 아버지는 모든 사람에게 이처럼 아들이 구원받음을 선포하라고 세상으로 나를 보내셨나니라. 그리고 마찬가지로 나는 아들이 이처럼 구원받음을 전파하라고 너희를 사방으로 보내노라. 구원은 하나님이 거저 주는 선물이지만, 영에게서 태어난 자는 즉시 동료 인간에게 사랑으로 봉사를 베푸는 데서 영의 열매를 즉시 내보이기 시작하리라. 그리고 영에게서 태어나고 하나님을 아는 필사자의 일생에서 열리는 신다운 영의 열매는, 사랑으로 베푸는 봉사, 사심 없는 헌신, 용감한 충성심, 성실하게 공정한 태도, 깨우친 정직함, 꺼지지 않는 희망, 맡기는 신뢰, 자비로운 봉사, 어김없는 선함, 용서하는 인내심, 오래 가는 평화이라. 신자라고 공언(公言)하는 자가 저희의 인생에서 이 신다운 영의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저희는 죽었고 진리의 영이 저희 안에 없나니라. 저희는 살아 있는 포도나무에 쓸모 없이 붙어 있는 가지요, 곧 제거되리라. 내 아버지는 믿음의 자녀들에게 영의 열매를 많이 맺으라 요구하시니라. 그런즉 너희가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너희 뿌리의 둘레를 파고, 열매 맺지 아니하는 가지를 쳐버리시리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늘을 향하여 나아가는 동안, 영의 열매를 갈수록 더 맺어야 하느니라. 너희는 어린아이로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도 좋지만, 아버지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영적(靈的) 어른만큼 키가 자라기를 요구하시니라. 그리고 이 복음에 담긴 좋은 소식을 모든 나라에 전하려고 너희가 바깥으로 갈 때, 나는 너희 앞에 가겠고, 내 진리의 영이 너희 마음 속에 거하리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두고 떠나노라.”
193:2.3 (2054.4) 그리고 나서 주는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튿날 이 이야기를 가지고 간 사람들이 티레를 떠나서 시돈, 그리고 안티옥과 다마스커스에도 갔다. 예수는 육체를 입었을 때 이 신자들과 함께 있었고, 그가 가르치기 시작하자 그들은 재빨리 그를 알아보았다. 친구들은 그의 상물질 모습이 눈에 보이게 되었을 때 쉽게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 말했을 때 결코 그의 인격을 알아보는 데 더디지 않았다.
193:3.1 (2055.1) 5월 18일 목요일 아침 일찍, 예수는 상물질 성격자로서 땅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났다. 열한 사도가 마리아 마가의 집 위층 방에서 아침을 먹으려고 막 앉으려 할 때, 예수는 그들에게 나타나서 말했다:
193:3.2 (2055.2)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갈 때까지, 아니 내가 진리의 영을 보낼 때까지도, 나는 너희에게 여기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부탁하였노라. 진리의 영이 모든 육체에 곧 퍼부어지고, 그는 하늘로부터 권능을 너희에게 부어 주리라.” 열심당원 시몬은 예수를 가로막고 물었다: “그러면 주여, 당신은 하늘나라를 회복하시겠나이까,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서 나타나는 것을 우리가 보리이까?” 시몬의 물음을 듣고 나서 예수는 대답했다: “시몬아, 너는 아직도 유대인 메시아와 물질적 왕국에 관한 옛 관념에 달라붙느니라. 그러나 영이 너희에게 내린 뒤에 너희는 영적 권능을 받을 것이요, 얼마 안 있어 온 세상으로 가서 이 하늘나라 복음을 전파하리라. 아버지가 나를 세상으로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마찬가지로 너희를 보내노라. 그리고 너희가 서로 사랑하고 믿기를 바라노라. 유다는 사랑이 식었기 때문에, 너희 충실한 형제들을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더 함께 있지 않느니라.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고, 아무도 혼자서만 살지 않느니라’ 이렇게 적힌 곳을 성서에서 너희는 읽지 아니하였느냐? 그리고 또한 쓰였으되: ‘친구를 가지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친절을 보여야 하느니라.’ 너희가 외롭게 되고 고립되는 재난과 불쌍한 처지에 빠지지 않도록 내가 너희를 가르치라고 둘씩 보내기까지 하지 않았더냐? 내가 육체를 입고 있을 때, 바로 내가 오랫동안 혼자 있도록 내가 버려두지 않은 것을 너희가 또한 잘 아느니라. 우리가 사귀던 바로 그 시초부터, 내가 아버지와 교통할 때에도, 나는 언제나 너희 가운데 두셋을 변함없이 곁이나 아주 가까이 두었노라. 그러므로 서로 신뢰하고 마음을 털어놓으라. 그리고 내가 너희를 세상에 외로이 두고 오늘 떠나려 하므로, 이것이 더군다나 필요하니라. 때가 왔느니라. 나는 아버지께 가려 하노라.”
193:3.3 (2055.3) 말씀을 마치고 나서, 그는 함께 오라고 손짓했고, 그들을 올리브산으로 이끌고 나갔다. 거기서 유란시아를 떠나는 준비로서 그들에게 작별을 알렸다. 이것은 올리브산까지 가는 엄숙한 여행이었다. 그들이 위층 방을 떠날 때부터 예수가 올리브산에서 함께 멈추었을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193:4.1 (2055.4) 주가 사도들에게 작별하면서 주신 말씀의 첫 부분에서, 유다를 잃은 것을 언급했고, 사회 및 친교에서 고립되는 위험에 대한 엄숙한 경고로서 배반한 동료 일꾼의 비극적 운명을 예로 들었다. 주의 논평에 비추어, 또 뒤이은 여러 세기 동안 누적된 깨우침에 비추어 보건대, 유다가 패망한 원인을 간단히 다시 살펴보는 것이 이 시대와 미래의 신자들에게 도움이 될까 한다.
193:4.2 (2055.5) 우리가 이 비극을 돌이켜보건대, 주로 유다가 아주 두드러지게 고립된 성격, 보통 있는 사회적 접촉에서 마음 문을 닫고 떨어져 있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잘못에 빠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동료 사도들에게 마음을 털어놓거나 자유로이 사귀기를 끈질기게 거절하였다. 그러나 고립된 종류의 성격인 것은, 그 자체로서 저절로, 그가 또한 사랑이 커지고 영적 은혜 속에서 성장하지 못한 일이 아니었다면, 유다에게 그런 해를 끼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엎친 데 덮쳐서, 그는 끈질지게 불평을 품었고, 복수심, 그리고 온갖 실망 때문에 버릇처럼 누군가에게 “받은 대로 갚기”를 몹시 바라는 마음, 이와 같은 정신적 적을 길렀다.
193:4.3 (2056.1) 개인의 습성과 정신적 성향의 이러한 유감스러운 조합은 사랑ㆍ믿음ㆍ신뢰로 이런 잘못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 선의를 가졌던 사람을 파멸로 이끌었다. 유다가 잘못된 길로 갈 필요가 없었다는 것은 토마스와 나다니엘의 경우에 잘 증명된다. 이 두 사람은 바로 이런 종류의 의심, 그리고 개별적 성향이 지나치게 두드러졌다. 안드레와 마태조차도 이러한 성향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이 사람들은 모두 예수와 동료 사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그들은 은혜 속에서, 진리를 아는 가운데서 성장했다. 형제들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동료들에게 속을 털어놓는 능력을 천천히 길렀다. 유다는 끈질지게 형제들과 마음을 털어놓으려 하지 않았다. 감정의 갈등이 쌓임으로 할 수 없이 자아 표현의 분출구를 찾았을 때, 항상 그는 비영적인 친척이나 어쩌다 알게 된 자의 조언을 찾고 지혜롭지 못한 위로를 받았는데, 그들은 하늘나라의 영적 현실의 복지와 진보에 관심이 없거나 이에 대하여 실제로 적의를 가졌고, 그는 땅에서 거룩하게 헌신한 대사, 그 하늘나라의 열두 대사 가운데 하나였다.
193:4.4 (2056.2) 다음의 개인적 성향과 인격의 약점이 원인이 되어 유다는 땅에서 투쟁에 실패하였다:
193:4.5 (2056.3) 1. 그는 고립된 부류의 인간이었다. 상당히 개인주의였고, 자라서 “문을 닫고” 사람과 사귈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된 종류의 사람이 되기를 선택했다.
193:4.6 (2056.4) 2. 어릴 때, 인생이 너무나 쉽게 풀려 나갔다. 좌절되는 것을 몹시 분개하였다.
193:4.7 (2056.5) 3. 실망에 부닥치는 철학적 기법을 결코 터득하지 못했다. 실망을 인간의 존재에서 정상(正常)으로 흔히 일어나는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대신에, 모든 개인적 문제와 실망 때문에 특별히 어떤 사람이나 동료 집단을 탓하는 버릇을 어김없이 따랐다.
193:4.8 (2056.6) 4. 불평 품기를 좋아했다. 언제나 복수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193:4.9 (2056.7) 5. 솔직하게 사실을 인정하기를 싫어 했다. 인생의 상황에 대하여 태도가 정직하지 않았다.
193:4.10 (2056.8) 6. 가까운 동료들과 개인적 문제를 의논하기 싫어 했고, 진짜 친구와 그를 참으로 사랑한 자들과 함께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과 관계를 가진 여러 해를 통틀어서, 결코 한 번도 순전히 개인적 문제로 주께 가지 않았다.
193:4.11 (2056.9) 7. 고귀한 인생에 대한 진정한 보상(報償)이 결국 영적 상(償)이라는 것을 그는 결코 배우지 못했는데, 영적 상은 육체를 입은 이 짧은 일생 동안에 반드시 분배되지는 않는다.
193:4.12 (2056.10) 인격의 고립이 지속되는 결과로서, 비통이 증가하고 슬픔이 늘어났으며, 걱정이 커지고 절망은 거의 견딜 수 없이 깊어졌다.
193:4.13 (2057.1) 자기 중심이고 극도로 개인주의인 이 사도가 정신ㆍ감정ㆍ영의 문제가 많이 있었지만, 다음이 주요한 문제였다: 그의 인격이 고립되었다. 그의 머리 속에 의심이 많았고 앙갚음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의 기질은 무뚝뚝하고 원한이 깊었다. 그의 감정에는 사랑도 용서도 없었다. 사회적으로 그는 속을 털어놓지 않고, 거의 온통 말이 없었다. 정신적으로 거만하고 이기적 포부를 가지게 되었다. 살아서 그는 자기를 사랑한 자를 무시(無視)하였고, 죽어서 친구가 없었다.
193:4.14 (2057.2) 그러면 이러한 것이 지적 요인이요 악의 영향이니, 한데 합쳐서, 어째서 선의를 가졌고 그밖에 한때 예수를 진지하게 믿었던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예수의 인격과 가까운 관계를 몇 년 동안 가진 뒤에도, 동료들을 버리고, 성스러운 운동을 거부하고, 그의 거룩한 직무를 저버리고, 신다운 주를 저버렸는가 설명한다.
193:5.1 (2057.3) 5월 18일, 이 목요일 아침, 거의 7시 반이 되자, 예수는 말이 없고 얼마큼 어리둥절한 열한 사도와 함께, 올리브산 서쪽 비탈에 다다랐다. 이 위치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길 3분의 2쯤에, 그들은 예루살렘을 둘러보고 겟세마네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예수는 유란시아를 떠나기 전에, 이제 사도들에게 마지막 작별을 알리려고 준비했다. 그들 앞에 서자, 아무런 지시도 없이 그들은 둘레에 동그라미를 지어 무릎을 꿇었고, 주는 말씀했다:
193:5.2 (2057.4) “하늘로부터 너희가 권능을 부여받기까지 너희에게 예루살렘에서 머물라고 명하였고, 나는 이제 막 너희를 떠나려 하노라. 나는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려 하고, 곧, 금방 우리는 내가 머물렀던 이 세상에 진리의 영을 보내리라. 그가 온 뒤에, 너희는 먼저 예루살렘에서, 다음에 세상의 가장 먼 구석까지, 하늘나라 복음을 비로소 새로이 선포(宣布)할지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해 온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 같이 동료 필사자를 위하여 수고하라. 너희의 인생에서 열리는 영의 열매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모든 사람이 형제라는 진리를 사람들이 믿지 않을 수 없게 하여라. 너희에게 가르친 모든 것, 그리고 내가 너희 가운데서 살아 온 삶을 기억하여라. 내 사랑이 너희를 덮고, 내 영이 너희와 함께 살 것이요, 내 평화가 너희에게 거하리라. 잘 있거라.”
193:5.3 (2057.5) 이렇게 말씀을 마치자, 상물질(上物質) 주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른바 예수의 이 승천은 유란시아에서 40일 동안의 상물질 생애에 사람이 보는 앞에서 사라진 다른 경우와 아무 차이가 없었다.
193:5.4 (2057.6) 주는 예루셈을 거쳐 에덴시아로 갔고, 거기서 최고자들은 파라다이스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사렛 예수를 상물질 상태에서 해방하고, 영이 승천하는 경로를 거쳐서 그를 파라다이스 아들 지위와 구원자별의 최고 통치자 자리로 돌려보냈다.[1] [1810]
193:5.5 (2057.7) 상물질 모습의 예수가, 완성된 네바돈 우주 통치권을 정식으로 확인받기 위하여 아버지의 바른 편으로 비로소 올라가려고, 열한 사도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사라진 것은 이날 아침 7시 45분쯤이었다.
193:6.1 (2057.8) 베드로의 지시에 응하여, 요한 마가와 다른 사람들은 주요 제자들을 마리아 마가의 집으로 함께 부르려고 떠났다. 10시 30분이 되자, 예루살렘에서 살고 있는, 예수의 으뜸가는 제자 120명이 주의 작별의 말씀에 관한 보고를 듣고 승천 소식을 들으려고 모였다. 이 무리 가운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었다. 사도들이 최근에 갈릴리에 머물렀다가 돌아올 때 마리아는 요한 세베대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오순절이 지난 뒤에 마리아는 곧, 벳세다에 있는 살로메의 집으로 돌아갔다. 예수의 아우 야고보도 또한 이 모임에 와 있었는데, 이것은 주의 행성 생애가 끝난 뒤에 주의 제자들을 처음으로 소집한 회의(會議)였다.
193:6.2 (2058.1) 시몬 베드로는 동료 사도들을 대변하는 일을 나서서 맡았으며, 주와 열한 사도의 마지막 모임에 관하여 흥미 있는 보고를 드렸고, 주가 마지막으로 작별하고 승천하며 사라진 것을 아주 감동적으로 묘사했다. 그와 같은 모임은 일찍이 이 세상에서 일어난 적이 없었다. 그 모임의 이 부분은 한 시간이 채 안 걸렸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그들이 가룟 유다의 후계자를 고르기로 정했다, 이 자리에 제안된 두 사람, 맛디아와 유스도 사이에, 사도들이 결정할 수 있게 하려고 휴식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193:6.3 (2058.2) 그리고 나서 열한 사도는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거기서 이 사람들 가운데 누가 유다 대신에 수고할 사도가 될 것인가 결정하려고 제비를 뽑기로 찬성했다. 제비는 맛디아에게 떨어졌고, 그가 새 사도라는 선언이 있었다. 그는 그 직책에 정식으로 취임했고, 다음에 회계(會計)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후 사도들의 활동에서 맛디아는 거의 역할이 없었다.
193:6.4 (2058.3) 오순절 뒤에 곧, 쌍둥이는 갈릴리에 있는 자기 집들로 돌아갔다. 열심당원 시몬은 복음을 전도하러 떠나기 전에 얼마 동안 은둔했다. 토마스는 그보다 짧게 근심하다가 다시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다니엘은 예전의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는 대신에 예수에 관하여 전도하는 것에 대하여, 베드로와 갈수록 더 의견을 달리 했다. 다음 달 중순이 되어 이 의견(意見) 차이는 너무나 심해져서, 나다니엘은 물러났고, 아브너와 나사로를 찾아보려고 필라델피아로 갔다. 거기서 1년이 넘도록 머무른 뒤에, 메소포타미아 건너 땅으로 계속 가서, 그가 이해한 대로 복음을 전도했다.
193:6.5 (2058.4) 이것은 최초의 열두 명 가운데, 베드로ㆍ안드레ㆍ야고보ㆍ요한ㆍ빌립ㆍ마태, 이렇게 겨우 여섯 사도를 예루살렘에서 초기에 복음을 선포하는 무대에 배우(俳優)가 되도록 남겨놓았다.
193:6.6 (2058.5) 바로 정오 무렵에 사도들은 위층 방에 있는 형제들에게로 돌아갔고, 맛디아가 새 사도로 뽑혔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기도에 들어가라고 모든 신자를 불렀는데, 이 기도는 주가 보내기로 약속하신 영의 선물을 받으려고 준비되기 위한 것이었다.
194:0.1 (2059.1) 1시쯤에 신자 120명이 기도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모두가 이상한 것이 방에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동시에 이 제자들은 모두 새롭고 깊은 느낌, 곧 영적 기쁨ㆍ안전ㆍ자신감을 의식하게 되었다. 영적 힘을 이렇게 새롭게 의식하고 나서, 나가서 하늘나라 복음, 그리고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좋은 소식을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려는 강한 욕구가 뒤따랐다.
194:0.2 (2059.2) 베드로가 일어나서, 주가 그들에게 약속했던 진리의 영(靈)이 오신 것이 틀림없다고 선언하고, 그들이 성전으로 가서 그들의 손에 맡겨진 좋은 소식의 선포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베드로가 제안한 그대로 하였다.
194:0.3 (2059.3) 이 사람들은 그들이 전해야 하는 복음이 하나님이 아버지요 사람이 아들이라는 것을 훈련받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영적 환희와 개인적 승리를 느낀 바로 이 순간에, 이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식, 가장 큰 뉴스는 주가 부활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에서 권능을 받고, 떠나가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예수를 통하여 구원받는 것까지도―전파했지만, 뜻하지 않게, 복음 말씀 그 자체를 복음과 연결된 얼마큼의 사실로 바꿔치우는 잘못에 빠졌다. 베드로는 생각지 않고 이 실수에 앞장섰고, 다른 사람들은 계속 바울에 이르기까지 그의 뒤를 따랐으며, 바울은 좋은 소식의 신판(新版)으로부터 새 종교를 만들어냈다.
194:0.4 (2059.4) 하늘나라의 복음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 그리고 이와 함께 그 결과로 사람들이 아들이요 형제라는 진리이다. 그날부터 발전된 바와 같이 기독교는, 살아나고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와 함께, 신자의 친교 체험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194:0.5 (2059.5) 주를 죽이고 그의 가르침의 영향을 말소하려고 애썼던 세력을 이겼다는 느낌을 표현하려고 영을 받은 이 사람들이 이 기회를 낚아챈 것은 당연하다. 이와 같은 때에, 예수와 함께 가졌던 개인적 관계를 기억하고, 주가 아직도 살아 계시다, 그들의 우정은 끝나지 않았다, 주가 약속하신 대로 그 영이 정말로 그들에게 왔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쁨에 떨기가 더 쉬웠다.
194:0.6 (2059.6) 이 신자들은 갑자기 자신들이 다른 세상으로 옮겨갔다, 기쁨ㆍ권능ㆍ영광에 싸인 새로운 존재로 변했다고 느꼈다. 주는 그들에게 하늘나라가 권능을 가지고 오리라 일렀고, 더러는 그가 무슨 의미로 말씀했는가 비로소 깨닫는다고 생각했다.
194:0.7 (2059.7) 이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어떻게 이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버지요 사람이 형제라는, 예전에 전한 말씀 대신에 예수에 관한 새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는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194:1.1 (2060.1) 사도들은 40일 동안 숨어 있었다. 이날은 마침 유대인의 오순절(五旬節) 축제일이었고, 세계의 온 구석으로부터 수천의 방문자들이 예루살렘에 와 있었다. 많은 사람이 이 축제 때문에 도착했지만, 대다수는 유월절 뒤에 도시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겁이 난 이 사도들이 몇 주 동안의 은둔 생활에서 솟아나서 이제 대담하게 성전에 나타났고, 거기서 메시아가 살아났다는 새로운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사도가 마찬가지로 얼마큼 새롭게 통찰력과 힘을 영적으로 받았다는 것을 의식했다.
194:1.2 (2060.2) 2시쯤에, 베드로는 주가 이 성전에서 마지막으로 가르쳤던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열렬하게 연설하였고, 그 결과로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설득했다. 주는 가셨지만, 그들은 주에 관한 이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큰 힘을 가졌다는 것을 갑자기 발견했다. 그들이 전에 예수에게 헌신한 것이 옳았음을 입증하고, 동시에 사람들이 그를 믿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이야기를 더욱 선포하도록 계속 마음이 이끌린 것은 당연하다. 사도들 가운데 여섯 명, 베드로ㆍ안드레ㆍ야고보ㆍ요한ㆍ빌립ㆍ마태가 이 모임에 참석했다. 그들은 한 시간 반이 넘도록 이야기했고, 말씀을 그리스어ㆍ히브리어ㆍ아람어로 전했으며, 또한 말할 만큼 익숙한 다른 언어로도 몇 마디 하였다.
194:1.3 (2060.3) 유대인 지도자들은 사도들이 대담해진 것에 놀랐지만, 사도들의 이야기를 믿는 큰 무리 때문에 그들을 건드리기를 두려워했다.
194:1.4 (2060.4) 4시 반이 되어서, 2천 명이 넘는 새 신자들이 사도들을 따라서 실로암의 못으로 내려갔고, 거기서 베드로ㆍ안드레ㆍ야고보ㆍ요한은 주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군중에게 세례 주기를 마친 것은 어두워졌을 때였다.
194:1.5 (2060.5) 오순절은 세례받는 큰 축제요, 대문에서 전향자(轉向者), 즉 야웨 섬기기를 소망하는 이방인과 사귀는 때였다. 따라서 큰 무리의 유대인과 이방(異邦) 신자들이 이날에 세례받는 것이 더 수월했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어떤 면에서도 유대 신앙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이 뒤에도 얼마 동안, 예수 믿는 자들은 유대교 안에 있는 한 종파였다. 사도들을 포함해서 그들 모두가 유대인 예식 체계의 기본 요건에 아직도 충성했다.
194:2.1 (2060.6) 예수는 땅에서 살았고, 사람이 악마의 자식이라는 미신으로부터 사람을 되찾고 하나님의 아들, 믿음의 아들의 위엄까지 올려놓은 복음을 가르쳤다. 예수가 전한 말씀은 당대에 그가 전도하고 실천한 바와 같이, 말씀했던 시절에 사람의 영적 문제에 대한 효과적 해결책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세상을 떠났으니까, 그는 자기 대신에 진리의 영을 보낸다. 이 영은 사람 속에서 살고, 새로운 각 세대를 위하여 예수의 말씀을 다시 진술(陳述)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그래서 땅의 표면에서 나타날 새 집단의 필사자마다 새로운 최신판 복음을 가지게 될 것이요, 바로 그러한 개인적 깨우침과 집단을 위한 지침은 사람의 늘 새롭고 다채로운 영적 문제에 효과적 해결책인 것이 입증될 것이다.
194:2.2 (2060.7) 물론, 이 영의 첫 사명은 진리를 육성하고 개인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니, 이는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높은 형태의 인간의 해방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이 영의 목적은 신자에게서 고아라는 느낌을 없애는 것이다. 예수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았으니까, 진리의 영이 사람의 마음 속에서 거하려고 오지 않았다면, 모든 신자가 외로운 느낌을 맛볼 것이다.
194:2.3 (2061.1) 아들의 영을 이렇게 수여한 것은 온 인류에게 나중에 아버지 영(조절자)의 보편적 수여를 위하여 모든 정상(正常) 인간의 지성을 효과적으로 준비시켰다. 어떤 의미에서, 이 진리의 영은 우주의 아버지와 창조 아들, 이 두 분의 영이다.
194:2.4 (2061.2) 퍼부어진 진리의 영을 뚜렷이 지적으로 의식하게 되기를 기대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그 영은 결코 영 자신을 의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미가엘, 곧 아들을 의식하게 만든다. 처음부터 예수는 진리의 영이 스스로 말하지 않으리라 가르쳤다. 그러므로 네가 진리의 영과 친교한다는 증명은 이 영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가엘과 향상된 친교(親交)를 가지는 체험에서 발견된다.
194:2.5 (2061.3) 그 영은 또한 땅에서 사신 주의 일생을 비추고 다시 풀이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도와서 주의 말씀을 회상하고 알아듣게 하려고 왔다.
194:2.6 (2061.4) 다음에, 예수가 육체를 입고 살았던 것 같이, 또 영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세대, 지나가는 각 세대의 신자 한 사람 한 사람 속에서 지금 다시 새로이, 거듭하여 사는 것 같이, 진리의 영은 신자가 예수의 가르침과 일생이 현실이었다고 증언하는 것을 도우려고 왔다.
194:2.7 (2061.5) 그래서 진리의 영은 정말로, 모든 신자를 모든 진리로, 하나님의 아들, 하늘 가는 영원한 아들이라는 현실을 생생하게, 그리고 차츰차츰 영적으로 의식하는 체험을 더욱 알도록 이끌려고 오는 것처럼 보인다.
194:2.8 (2061.6) 예수는, 누구라도 글자 그대로 따르려고 애쓸 본보기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복종한 사람을 드러내는 일생을 살았다. 육체로 산 이 일생은, 십자가에서 죽고 나중에 부활한 것과 함께, 당장에 사람을 악마의 손아귀로부터―기분 상한 하나님으로부터 죄가 있다고 판결받지 않도록―사람을 도로 사려고 이처럼 몸값을 치렀다는 새 복음이 되었다. 그러나 비록 그 복음이 크게 왜곡되었어도, 예수에 대한 이 새 소식이 초기의 하늘나라 복음의 근본 진리와 가르침을 많이 지녔다는 것이 사실이다. 머지 않아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사람이 형제라는 이 감추어진 진리가 솟아나서 온 인류의 문명을 효과적으로 바꿀 것이다.
194:2.9 (2061.7) 그러나 지능의 이러한 잘못은 어떤 면에서도 신자(信者)가 영적으로 크게 진보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진리의 영이 내린 뒤 한달이 채 안 되어, 주와 함께 몸소 사랑에 넘친 관계를 가졌던 거의 4년 동안보다, 사도들 하나하나가 영적으로 더 진보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유익한 복음의 진실을 예수가 부활한 사실로 이렇게 갈아치운 것도, 그들의 가르침이 빠르게 전파되는 것을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의 인물과 부활에 관한 새로운 가르침 때문에 예수의 말씀이 빛을 잃은 것은 좋은 소식의 전파를 크게 용이하게 만든 듯하였다.
194:2.10 (2061.8) “영의 세례”라는 용어는 이 무렵에 아주 널리 쓰이게 되었는데, 다만 이렇게 진리의 영이 수여된 것을 의식하여 받아들이고, 이 새로운 영적 능력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이전에 겪은 모든 영적 영향이 확대된 것임을 개인적으로 인정함을 의미한다.
194:2.11 (2061.9) 진리의 영이 수여된 이후로 사람은 아버지의 영, 즉 생각 조절자, 아들의 영, 즉 진리의 영, 영의 영, 즉 성령, 이렇게 세 가지 영의 가르침과 안내에 지배된다.
194:2.12 (2062.1) 어떤 면에서, 인류는 우주 영(靈)의 일곱 가지 영향력이 미치는 이중 세력에 지배된다. 초기의 진화 종족의 필사자는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의 일곱 보조 지성 영의 점진적 접촉에 지배를 받는다. 지능과 영적 인식의 눈금에서 사람이 위로 올라감에 따라서, 궁극에 일곱 가지 상급 영적 세력이 사람 위에 떠돌고, 사람 안에 거하게 된다. 그리고 진보하는 여러 세계에 있는 이 일곱 영은 다음과 같다:
194:2.13 (2062.2) 1. 우주의 아버지가 내리신 영―생각 조절자.
194:2.14 (2062.3) 2. 영원한 아들의 영적 계심―온 우주의 영 인력(引力), 모든 영의 교통에 쓰이는 확실한 경로.
194:2.15 (2062.4) 3. 무한한 영의 영적 계심―모든 창조에 널리 있는 영 지성, 모든 진보하는 지성 존재가 가진 지적(知的) 인척 관계의 영적 근원.
194:2.16 (2062.5) 4. 우주의 아버지와 창조 아들의 영―진리의 영, 이것은 대체로 우주 아들의 영으로 여겨진다.
194:2.17 (2062.6) 5. 무한한 영과 우주 어머니 영의 영―성령(聖靈), 이것은 대체로 우주 영의 영으로 여겨진다.
194:2.18 (2062.7) 6. 우주 어머니 영의 지성 영―지역 우주의 일곱 보조 지성 영(靈).
194:2.19 (2062.8) 7. 아버지와 아들들과 영들의 영―영에게서 태어난 필사자의 혼이 파라다이스의 생각 조절자와 융합한 뒤에, 그리고 나중에 파라다이스 최후 군단에서 신답고 영화로운 지위에 이른 뒤에, 그 영역에서 하늘 가는 필사자가 가지는 새로운 이름의 영.
194:2.20 (2062.9) 그래서 진리의 영이 내린 것은 하나님을 찾아서 승천하는 탐구를 도우려고 고안된 최종의 영 재산을 세상으로, 또 거기 있는 민족들에게 가져왔다.
194:3.1 (2062.10) 야릇하고 이상한 많은 가르침이 오순절 날에 대한 초기의 이야기와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 진리의 영, 즉 새 선생이 인류와 함께 거하려고 온 이날에 일어난 사건들은 후세에, 어리석게도 감정 중시 주의가 갑자기 확산되는 것과 혼동되었다. 쏟아진 이 아버지와 아들의 영의 주요한 사명은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자비로움에 관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신다운 모든 다른 신격 특성보다 사람들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신성(神性)의 진실이다. 진리의 영은 1차적으로 아버지의 영 성품과 아들의 도덕적 품위를 드러내는 데 관심을 가진다. 창조 아들은 육체를 입고서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드러냈다. 진리의 영은 마음 속에서 창조 아들을 사람들에게 드러낸다. 일생에 “영의 열매”를 맺을 때, 사람은 다만 땅에서 산 자신의 일생에서 주가 나타낸 특성을 내보이는 것이다. 땅에 살았을 때, 예수는 하나의 인격자로서―나사렛 예수로서―일생을 살았다. 사람에게 깃드는 “새 선생”의 영으로서, 오순절 뒤로, 주는 진리를 가르침 받은 각 신자의 체험 속에서 일생을 새로이 살 수 있었다.
194:3.2 (2062.11) 인생을 사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이 이해하기 힘들고, 이 우주에서 진리가 지배하고 그 속에서 올바름이 승리한다는 관념과 조화시키기가 어렵다. 너무나 흔히 중상(中傷)ㆍ거짓말ㆍ부정직(不正直)ㆍ불의―죄―가 이기는 것처럼 보인다. 궁극에 믿음이 악ㆍ죄ㆍ불의를 이기는가? 이긴다. 예수의 일생과 죽음은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의 선이 진실하고 그의 믿음이 언제나 정당화되리라는 영원한 증명이다. “하나님이 와서 구원할 것인가 보자” 하면서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비웃었다. 십자가에 처형되는 그날은 어둡게 보였지만, 부활의 아침은 영화롭게 밝았다. 오순절 날은 더욱 밝고 더욱 즐거웠다. 비관적으로 절망하는 종교들은 인생의 짐에서 벗어나기를 찾으며, 끝없이 잠자고 쉬는 가운데 멸종되기를 바란다. 이것들은 원시의 두려움과 공포에서 생긴 종교이다. 예수의 종교는 허덕이는 인류에게 선포해야 할 새로운, 믿음의 복음이다. 이 새 종교는 믿음ㆍ희망ㆍ사랑에 바탕을 둔다.
194:3.3 (2063.1) 필사의 일생은 예수에게 아주 힘들고, 아주 모질고, 아주 심한 타격을 입혔다. 이 사람은 믿음과 용기,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흔들리지 않는 결심으로 이 절망스러운 직무에 대응하였다. 예수는 모든 끔찍한 현실 가운데서 인생을 살고―죽을 때에도―인생을 통달하였다. 인생에서 해방되려고 종교를 사용하지 않았다. 예수의 종교는 또 다른 존재에서 기다리는 더없는 기쁨을 누리려고 이 생명에서 벗어나기를 추구하지 않는다. 예수의 종교는 사람이 육체를 입고 지금 사는 인생을 높이고 고상하게 만들기 위하여 또 다른 영적 존재의 기쁨과 평화를 마련해 준다.
194:3.4 (2063.2) 종교가 사람들에게 아편이라면, 그것은 예수의 종교가 아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감각을 마비시키는 약을 마시기를 물리쳤고, 모든 육체에 쏟아진 그의 영은 사람을 위로 이끌고 앞으로 재촉하는, 힘찬 세계적 영향이다. 앞을 향하는 영적 욕구는 이 세상에 있는 가장 힘센 추진력이다. 진리를 배우는 신자는 땅에서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다.
194:3.5 (2063.3) 오순절 날에 예수의 종교는 민족의 제한과 종족의 사슬을 모두 깨뜨렸다. 이것은 언제까지나 진리이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해방이 있다.” 이날에 진리의 영은 주가 모든 필사자에게 친히 주신 선물이 되었다. 이 영은 하늘나라 복음을 더욱 효과 있게 전파하라고 신자들에게 자격을 주는 목적으로 내렸지만, 그들은 쏟아진 영을 받는 체험이,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면서 형성하는 새 복음의 일부라고 잘못 생각했다.
194:3.6 (2063.4) 진리의 영이 모든 성실한 신자에게 수여되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라. 이 영 선물은 사도들에게만 내린 것이 아니다. 위층 방에 모인 남녀 120명은 모두, 온 세상에 두루, 마음이 정직한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새 선생을 받았다. 이 새 선생은 인류에게 수여되었고, 진리를 사랑하는 데 따라서, 그리고 영적 실체를 깨닫고 이해하는 능력에 따라서, 모든 사람이 받았다. 마침내, 참 종교는 사제(司祭)들과 모든 신성한 계급의 보호를 받던 처지에서 벗어나 한 사람 한 사람의 혼 속에서 그 진정한 표현을 발견한다.
194:3.7 (2063.5) 예수의 종교는 가장 높은 부류의 영적 인격을 만들어내고 그 사람의 신성함을 선포하므로, 가장 높은 종류의 인간 문명을 육성한다.
194:3.8 (2063.6) 오순절에 진리의 영이 온 것은 과격하지도 보수적이지도 않은 종교를 가능하게 만들며, 그런 종교는 낡은 것도 새로운 것도 아니다. 늙은이나 젊은이에게 지배되어서도 안 된다. 예수가 땅에서 살았다는 사실은 시간을 표시하는 닻을 내리기 위하여 고정된 점을 마련해 주며, 한편 진리의 영을 수여한 것은 그가 실천한 종교와 선포한 복음을 영구히 확장하고 끝없이 성장하게 만든다. 그 영은 모든 진리로 안내하며, 영은 끝없이 진보하고 신성하게 펼쳐지는 종교, 확대되고 늘 성장하는 종교를 가르치는 선생이다. 이 새 선생은 진리를 찾는 신자에게 사람의 아들의 인격과 성품 안에 아주 거룩하게 접혀 있던 것을 언제까지나 펼쳐줄 것이다.
194:3.9 (2064.1) “새 선생”을 주신 것과 관련되어 나타난 현상,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함께 모였던 여러 종족과 민족의 사람들이 사도들의 전도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예수의 종교가 보편성이 있음을 가리킨다. 하늘나라 복음은 어떤 특별한 민족이나 문화나 언어와도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이 오순절 날은 예수의 종교를 자체가 물려받은 유대인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려고 영이 크게 노력했음을 입증했다. 모든 육체에 영이 쏟아지는 이 전시가 있은 뒤에도, 처음에 사도들은 개종한 사람들에게 유대교의 요구 조건을 부과하려고 애썼다. 바울조차도 이방인을 이 유대 관습에 복종시키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형제들과 다툼이 있었다. 어떤 계시(啓示)된 종교도 어떤 민족 문화에 젖게 되거나, 아니면 기존의 종족ㆍ사회 또는 경제 관습과 연결되는 심각한 잘못을 저지를 때에는 온 세상에 퍼질 수 없다.
194:3.10 (2064.2) 진리의 영의 수여는 어떤 형태와 예식과 신성한 장소에도, 그 영이 충분히 나타난 것을 맛본 자의 특별한 행위에도, 달려 있지 않다. 그 영이 위층 방에 모인 사람들에게 닥쳤을 때, 그들은 말없이 기도에 막 들어갔으니까, 그저 거기에 앉아 있기만 했다. 그 영은 도시 뿐 아니라 시골에도 내렸다. 사도들이 그 영을 받기 위하여, 몇년 동안 혼자서 명상하려고 외로운 곳으로 따로 갈 필요가 없었다. 언제까지나 오순절은 영적 체험의 관념과 특별히 유리한 환경에서 얻는다는 개념을 별개의 것으로 만든다.
194:3.11 (2064.3) 오순절은, 그날 영적으로 부여된 것과 함께, 언제까지나 주의 종교를 물리적 세력에 전혀 의존하지 않도록 해방하려고 고안되었다. 이 새 종교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이제 영적 무기를 갖추었다. 그들은 어김없는 용서, 견줄 데 없는 선의(善意), 풍부한 사랑으로, 나가서 세상을 정복해야 한다. 그들은 선으로 악을 이기고, 사랑으로 미움을 정복하고, 진리 속에서 용감하고 팔팔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길 장비를 갖추었다. 예수는 그의 종교가 결코 소극적이 아니라고 이미 추종자들에게 가르쳤다. 제자들은 봉사를 베푸는 데, 사랑을 드러내는 데, 언제나 활발하고 적극성이 있어야 했다. 이 신자들은 이제 더 야웨를 “만군의 주”로 바라보지 않았다. 이제 영원한 신을 “하나님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여겼다. 하나님이 또한 누구에게도 영적 아버지라는 진리를 충분히 깨닫는 데 어느 정도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적어도 거기까지 진보했다.
194:3.12 (2064.4) 개인적으로 상처받은 것을 용서하고, 가장 지독한 불의(不義) 한가운데서도 부드러움을 유지하며, 끔찍한 위험이 앞에 닥쳐도 차분히 있으며, 두려움 없이 사랑과 인내의 행위로 미움과 진노의 악에 도전하는 힘을 오순절은 필사 인간에게 주었다. 유란시아는 그 역사 속에서 파괴적인 여러 대전쟁의 상처를 겪었다. 이러한 끔찍한 투쟁에 참여한 모든 편이 패배했다. 승자는 오직 하나 있었다. 이 모진 투쟁에서 평판이 높아져 솟아난 유일한 승자가 있었으니―곧 나사렛 예수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그의 복음이었다. 더 좋은 문명을 세우는 비결은 인간이 형제라는 주의 가르침, 사랑하고 서로 신뢰하는 선의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194:3.13 (2065.1) 오순절이 닥칠 때까지, 종교는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을 드러냈을 뿐이다. 오순절 이후에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을 찾고 있지만, 하나님이 또한 사람을 찾고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내고 나서 그 사람 안에서 거하라고 자신의 영을 보내는 광경이 온 세상을 비추고 있다.
194:3.14 (2065.2) 오순절에 절정에 이른 예수의 가르침이 있기 전에, 더 오래 된 여러 종교의 교리에는 여자에게 거의 또는 아무런 영적 지위가 없었다. 오순절 이후에, 하늘나라의 형제 단체에서 여자와 남자는 동등하게 하나님 앞에 섰다. 이렇게 영의 특별한 방문을 받은 120명 가운데 여인 제자가 많이 있었고, 그들은 이 축복을 남자 신도와 똑같이 나누어 가졌다. 예배 의식을 주관하는 성직을 이제 더 남자가 감히 독점할 수 없다. 바리새인은 “여자나 문둥병자나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계속 감사드릴지 모르지만, 예수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여자는 성에 근거를 둔 온갖 종교적 차별에서 언제까지나 해방되었다. 오순절은 종족의 특징, 문화의 차이, 사회 계급, 또는 성(性) 편견에 근거를 둔, 모든 종교적 차별을 없애버렸다. 새 종교를 믿는 이 신자들이 “주의 영이 있는 곳에 해방이 있다”하고 늘 외쳤던 것이 당연하다.
194:3.15 (2065.3) 예수의 어머니와 아우가 120명의 신자들 사이에 있었고, 이 보통 제자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또한 쏟아부은 영을 받았다. 이들은 좋은 선물을 동료들보다 더 많이 받지 않았다. 아무런 특별한 선물이 땅에서 예수의 집안 사람들에게 내려지지 않았다. 오순절은 특별한 사제 계급과 신성한 가족에 대한 온갖 관념의 종말을 고했다.
194:3.16 (2065.4) 오순절 이전에, 사도들은 예수를 위하여 많은 것을 버렸다. 집과 가족과 친구, 속세의 물건과 지위를 바쳤다. 그들은 오순절에 하나님께 헌신하였고, 아버지와 아들은 자신들을 사람에게 줌으로―사람 안에서 살라고 그들의 영을 보내어―응답했다. 자아(自我)를 버리고 영을 얻는 이 체험은 감정적 체험이 아니었다. 총명하게 자아를 포기하고, 아낌없이 거룩하게 바치는 행동이었다.
194:3.17 (2065.5) 오순절은 복음을 믿는 자들 사이에 영적 단결의 부름이었다. 그 영이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에게 내려왔을 때, 똑같은 일이 필라델피아와 알렉산드리아에, 참 신자들이 거하는 모든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신자 무리 가운데 오로지 한 마음과 혼이 있었다”는 것이 글자 그대로 참말이었다. 예수의 종교는 세상이 일찍이 본 가운데, 가장 강력한 통일하는 영향력이다.
194:3.18 (2065.6) 오순절은 개인ㆍ집단ㆍ나라ㆍ종족들의 자기 주장을 줄이려고 예정된 것이다. 긴장이 너무 고조되어 이따금 파괴하는 전쟁으로 터져나오는 것은 이 자기 주장의 정신이다. 인류는 오직 영적 접근으로 통일될 수 있고, 진리의 영은 세계에 보편적 영향력이다.
194:3.19 (2065.7) 진리의 영이 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받는 자를 오직 하나님의 뜻과 사람들의 복지에 마음을 다하는, 일생의 목적을 표현하도록 인도한다. 이기심(利己心)이라는 물질적 정신은 영적으로 새로이 내려준 이 사심없는 정신에 먹혀 사라졌다. 그때에도 지금도, 오순절은 역사 속의 예수가 실제로 체험하는 신의 아들이 되었음을 가리킨다. 쏟아진 이 영을 받는 기쁨을 인간 생활에서 의식하며 맛보았을 때, 이는 건강에 좋은 강장제요, 지성에 자극이요, 혼에 한없는 에너지이다.
194:3.20 (2065.8) 기도가 오순절 날에 영을 데려오지 않았지만, 기도는 각 신자의 특징을 나타내는, 영을 받는 능력을 결정하는 데 많이 상관되었다. 기도는 아낌없이 영을 내리도록 신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지만, 아주 흔히 더 크고 더 깊은 길을 파며, 그래서 그 길로, 성실한 기도와 참된 예배를 통해서, 잊지 않고 창조주와 끊임없는 교통을 유지하는 사람의 가슴과 혼으로, 신이 내려주시는 것이 흘러갈 수도 있다.
194:4.1 (2066.1) 예수가 그렇게 갑자기 적들에게 붙잡히고, 그렇게 빨리 두 도둑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사도와 제자들은 완전히 사기(士氣)가 꺾였다. 주가 체포되고 묶이고 채찍 맞고 십자가에 달렸다는 생각은 사도들에게도 너무 지나쳤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과 경고를 잊어버렸다. 그는 정말로 “하나님과 모든 사람 앞에서 행위와 말씀이 힘찬 선지자”였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희망했던 대로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할 메시아는 도저히 될 수 없었다.
194:4.2 (2066.2) 다음에 부활과 함께 절망에서 벗어나고, 그들이 주의 신성을 믿는 신앙이 회복된다. 거듭해서 주를 만나고 주와 함께 이야기하며, 그는 그들을 올리브산으로 데리고 나가서, 거기서 작별(作別)을 알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간다고 일러준다. 그들이 권능을 부여받을 때까지―진리의 영이 올 때까지―예루살렘에서 머물라고 이른다. 그리고 오순절 날에 이 새 선생이 오고, 그들은 당장에 새 힘을 얻어 복음을 전파하러 나간다. 죽어서 패배한 지도자가 아니라, 살아 계신 주를 대담하고 용감하게 따르는 사람들이다. 주는 이 전도자들의 가슴 속에 살아 계신다. 하나님은 이들의 머리 속에 있는 교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혼 속에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
194:4.3 (2066.3) “날마다 저희는 굳세게 마음을 합하여 성전에서 계속 모였고 집에서 빵을 나누었더라. 먹을 것을 기쁨으로, 한 마음으로 받았고, 저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모든 사람의 지지를 얻었더라. 저희 모두가 영으로 충만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으며, 믿은 군중은 한 마음과 한 뜻을 가졌고, 저희 가운데 한 사람도 무엇을 가졌든지 제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함께 썼더라.”
194:4.4 (2066.4)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사람이 서로 형제라는 하늘나라 복음을 나가서 전도하라고 예수가 세웠던 이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들은 새 복음을 가졌고, 새 체험으로 불이 붙었으며, 새로운 영적 에너지로 가득 찼다. 그들이 전하는 말씀은 살아나신 주를 선포하는 것으로 갑자기 바뀌었다: “나사렛 예수, 막강한 행적과 이적으로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 하나님이 미리 아신 것 같이, 굳게 결의한 법정이 넘겨준 주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죽였도다. 그는 모든 선지자의 입으로 하나님이 미리 알려준 것들을 이처럼 이루셨느니라. 하나님이 이 예수를 살렸고, 하나님은 그를 주, 그리스도로 만들었느니라. 하나님의 바른 손으로 높임을 받고, 아버지로부터 영의 약속을 받았으므로, 그는 너희가 보고 듣는 영을 퍼부었도다. 너희의 죄가 지워지고, 아버지가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그리스도를 보내도록 회개하라. 모든 것이 회복되는 시절까지 하늘은 그 예수를 받아들여야 하느니라.”
194:4.5 (2066.5) 하늘나라 복음, 예수가 가르친 말씀은, 갑자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질되었다. 그들은 이제 예수가 살다가 죽고 부활한 사실을 선포했고, 그가 시작한 일을 마치려고 이 세상으로 빨리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전파했다. 그래서 초기 신자들이 전한 소식은 그가 처음에 오셨던 사실에 관하여 전도하는 것, 그리고 그가 다시 오신다는 희망을 가르치는 것과 상관되었고, 그들은 그의 두 번째 오심이 아주 가까이 다가올 사건이라고 생각하였다.
194:4.6 (2067.1) 그리스도는 바야흐로 급속히 형성되는 교회의 신조가 되려고 했다. 그는 살아 있고, 사람들을 위해 죽었으며, 영을 주었고, 다시 오신다. 예수는 신자들의 모든 생각을 채웠고, 하나님과 그밖에 모든 다른 것에 대하여 모든 새로운 개념을 좌우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 예수의 아버지”라는 새 교리에 너무 열중해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아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랑의 아버지이라”는 예전에 전하던 말씀에 아랑곳할 수 없었다. 형제 사랑과 전례 없는 선의가 신자들의 이 초기 공동체에서 놀랍게 표현된 것은 참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를 믿는 신자들의 친교였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가족 국가에 속하는 형제들의 친교가 아니었다. 그들의 선의(善意)는 예수가 수여되었다는 개념에서 태어난 사랑에서 솟아났고, 필사 인간이 형제임을 인식한 데서 생겨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쁨으로 충만하였고, 모든 사람이 예수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에 이끌리는 그러한 새롭고 독특한 인생을 살았다. 하늘나라 복음 대신에, 그 복음에 관한 활기있고 해설적 논평을 사용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것조차도 인류가 일찍이 알게 된 가장 위대한 종교였다.
194:4.7 (2067.2) 새로운 친교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믿은 군중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친교, 빵을 같이 먹고 기도하기를 꾸준히 계속하였더라.” 그들은 서로 형제와 자매라고 불렀다.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인사했고, 가난한 자를 보살폈다. 그것은 예배할 때뿐 아니라 살면서 가지는 친교였다. 그들은 법령 때문에 공동체인 것이 아니라, 재물을 동료 신자와 함께 나누려는 소망 때문에 공동체였다. 자기 세대 안에 아버지의 나라를 세우는 일을 마치려고 예수가 돌아올 것이라 자신 있게 기대했다. 땅에 있는 소유물을 자진하여 이렇게 나누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직접 나타난 특징이 아니었다. 할 일을 마치고 하늘나라를 완성하려고 그가 언제라도 돌아오리라고, 이 남녀들이 아주 진지하고 자신 있게 믿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생각이 모자라는 이 형제 사랑을 좋은 의도로 이렇게 실험한 마지막 결과는 비참했고 불행을 낳고 있었다. 수천의 성실한 신자들이 재산을 팔고 그들의 자본재(資本財)와 기타 생산적 자산을 처분해버렸다. 시간이 지나자, 기독교인들의 “똑같이 나누는” 재산은 줄어들어 종말에 이르렀다―그러나 세상은 종말에 이르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안티옥의 신자들은 예루살렘의 동료 신자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돈을 걷고 있었다.
194:4.8 (2067.3) 이 시절에 그들은 주의 만찬(晩餐)을 제정된 방식에 따라서 축하했다. 다시 말해서, 사이 좋게 친교하는 회식을 위하여 모였고 식사가 끝날 때 성찬을 들었다.
194:4.9 (2067.4) 처음에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거의 20년이 지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기 시작했다. 세례가 신자의 친교에 가입하는 데 유일한 조건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아무런 조직이 없었고, 단지 예수를 믿는 형제 단체였다.
194:4.10 (2067.5) 이 예수 종파는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고, 다시 한 번 사두개인들이 그들을 주목했다. 그 가르침 가운데 아무것도 전혀 유대 율법의 준수를 방해하지 않는 것을 알고서, 바리새인들은 그 상황을 꺼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예수 종파의 지도자들을 감옥에 넣기 시작했고, 이것은 유력한 랍비들 중의 한 사람, 가말리엘의 조언을 받아들이라고 설득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가말리엘은 이들에게 조언하였다, “이 사람들을 멀리하고 버려두라. 이 회의나 이 일이 사람에게서 생겨났다면 뒤집히려니와 하나님에게서 생겨났다면, 너희가 뒤집어엎을 수 없을 것임이라. 아마도 너희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는 것까지 발견될까 두려우니라.” 그들은 가말리엘의 조언을 따르기로 결정했고, 예루살렘에서 평화롭고 조용한 시간이 뒤따랐으며, 이 동안에 예수에 관한 새 복음은 빨리 퍼졌다.
194:4.11 (2068.1)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인들이 큰 무리를 지어 올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만사가 순조로웠다. 로단의 생도 두 명이 예루살렘에 도착했고, 헬라파 사이에서 사람을 많이 개종(改宗)시켰다. 그들이 초기에 개종한 사람들 가운데 스테반과 바나바가 있었다. 이 유능한 그리스인들은 그다지 유대인의 관점을 가지지 않았고, 유대인 형태의 예배와 기타 예식 절차를 잘 따르지 않았다. 이 그리스인 신자들의 행위 때문에, 예수 단체와 바리새인 및 사두개인들 사이에 평화로운 관계가 종결되었다. 스테반과 그리스인 동료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더 가깝게 전도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유대인 권력자들과 직접 충돌하게 만들었다. 스테반의 한 대중 설교에서, 그가 강연의 못마땅한 부분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모든 재판 형식을 걷어치우고, 나서서 그 자리에서 그를 돌로 쳐 죽였다.
194:4.12 (2068.2) 스테반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믿는 자들 중에서 그리스 거류민의 지도자였고, 이렇게 새 신앙의 첫 순교자요, 초기 기독교회를 정식으로 조직하는 구체적 원인이 되었다. 이 새로운 위기로 인하여 신자들은 이제 더 유대 신앙 안에 있는 한 종파로서 계속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불신자들과 따로 독립해야 한다고 모두 찬성했다. 스테반이 죽은 지 한 달 안에,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의 지도 하에서 조직되었고, 예수의 아우 야고보가 그 교회에서 이름으로는 우두머리로 임명되었다.
194:4.13 (2068.3) 그리고 나서 유대인들의 새롭고 무자비한 박해가 터졌으며, 예수에 관한 이 새 종교를 안티옥에서 나중에 기독교라고 불렀는데, 그래서 이 종교를 활발하게 가르치는 선생들은 떠나서 예수를 선포하면서 제국의 끝까지 갔다. 바울의 시절 이전에, 이 소식을 가지고 가는 주도권은 그리스인의 손에 있었다. 이 첫 선교사들은 후일의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옛날에 알렉산더가 행진한 길을 따라서, 가자와 티레를 거쳐, 안티옥, 다음에 소 아시아를 지나서 마케도니아까지, 그런 뒤에 계속 로마까지, 그리고 제국의 가장 먼 구석까지 갔다.
195:0.1 (2069.1) 오순절에 베드로가 설교한 결과는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려고 노력하는 데 사도들 대다수의 미래 정책을 결정하고 계획을 확정할 만큼 대단했다. 베드로는 기독교회의 진정한 창시자였다. 바울은 기독교의 소식을 이방인에게 가져갔고, 그리스인 신자들은 이를 온 로마 제국으로 가져갔다.
195:0.2 (2069.2) 전통에 묶여 있고 사제에게 억눌려 있던 히브리인은 한 민족으로서, 하나님은 아버지요 사람은 서로 형제라는 예수의 복음이나, 또는 그리스도가 부활하고 승천했다고 베드로와 바울이 선포한 것을 (후일에 기독교) 믿지 않았어도, 로마 제국의 나머지는 생성되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좋게 받아들인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서양 문명은 이 시절에 지적(知的) 문명이었고, 전쟁에 지쳐 있고, 모든 기존 종교와 우주 철학에 대하여 철저히 회의를 품었다. 그리스 문화의 수혜자인 서양 세계의 민족들은 존경받는 전통, 위대한 과거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철학ㆍ예술ㆍ문학 면에, 그리고 정치의 발전에서 물려받은 큰 업적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업적이 있었어도 마음에 흡족한 종교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몹시 바라던 영적 소망은 채워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195:0.3 (2069.3) 그러한 인간 사회의 무대에, 기독교가 전파한 말씀에 담겨 있는 예수의 가르침이 갑자기 밀어닥쳤다. 이 서양 민족들의 간절한 마음에 이렇게 새 체제의 생활이 제시되었다. 이 상황은 더 오래 된 종교 관습, 그리고 세상에 준 예수의 말씀의 새로운 기독교화된 해석, 이 둘 사이에 즉시 갈등이 생김을 의미했다. 그러한 갈등은 틀림없이 새 것이나 옛 것의 결정적 승리이든지, 아니면 어느 정도의 타협을 낳는다. 역사는 그 투쟁이 타협으로 끝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독교는 너무 많은 것을 주제넘게 포섭하려 했기 때문에 어느 민족이라도 한두 세대 안에 동화(同化)할 수 없었다. 기독교는 예수가 사람의 혼에 제시한 것처럼 단순한 영적 호소가 아니었다. 종교 예식, 교육, 마술, 의술, 예술, 문학, 법률, 정부, 도덕, 성(性) 규제, 일부다처제, 그리고 어느 정도로 노예 제도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분명한 태도를 취했다. 기독교는 새 종교가 아니라―온 로마 제국과 동양 전체가 기다리고 있던 어떤 것이 아니라―새 체제의 인간 사회로서 나타났다. 그러한 허세로서, 기독교는 오랜 세월에 걸친 사회적ㆍ도덕적 충돌을 급히 재촉하였다. 예수의 이상은 그리스 철학이 다시 풀이하고 기독교 안에서 사회에 퍼진 바와 같이, 이제 서양 문명의 윤리ㆍ도덕ㆍ종교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인류의 전통에 대담하게 도전하였다.
195:0.4 (2069.4) 처음에, 기독교는 오직 낮은 사회ㆍ경제 계층만 개종시켰다. 그러나 2세기 초가 되자, 그리스ㆍ로마 문화의 최상 부분은 이 새 체제의 기독교 신앙, 사는 목적과 존재 목표에 대한 이 새로운 개념에 갈수록 더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195:0.5 (2070.1) 유대인의 기원을 가진 이 새로운 말씀이 자체가 태어난 땅에서 거의 실패했는데, 어떻게 그리 급속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로마 제국에서 일류 지성인들을 사로잡았는가? 기독교가 철학적 종교와 신비 종파들에게 승리한 것은 다음 이유 때문이었다:
195:0.6 (2070.2) 1. 조직. 바울은 위대한 조직가였고 그 후계자들은 그가 시작한 속도를 유지했다.
195:0.7 (2070.3) 2. 기독교는 철저히 헬라화되었다. 히브리 신학의 정수(精髓) 뿐 아니라 그리스 철학의 최선을 담았다.
195:0.8 (2070.4) 3.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새롭고 위대한 이상을 담았고, 이것은 예수가 수여한 일생에 대한 반향이요, 온 인류를 구원하는 그의 말씀이 반영된 것이다.
195:0.9 (2070.5) 4.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미트라교와 기꺼이 타협해서, 미트라교 추종자 가운데 상급인 절반이 안티옥 종파에 설득되었다.
195:0.10 (2070.6) 5. 마찬가지로, 다음 세대와 후일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교도와 그렇게 더 타협했고, 그래서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까지도 새 종교에 설득되었다.
195:0.11 (2070.7) 그러나 기독교인은 이교도의 예식 행사를 받아들이고, 한편 이교도가 바울 기독교의 헬라화 판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했으니까 이교도와 수지맞는 장사를 했다. 미트라 종파와 거래한 것보다 그들은 이교도와 더 이익이 남는 협상을 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타협에서도, 기독교인은 페르시아 신비교의 상스러운 부도덕과 또한 비난받을 수많은 다른 풍습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정복자가 되고도 남았다.
195:0.12 (2070.8) 지혜로웠든 그렇지 않았든, 기독교의 이 초기 지도자들은 예수의 많은 개념을 구하고 촉진하려는 노력으로 계획하여 예수의 이상에 상처를 냈고, 그들은 뛰어나게 성공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라! 이렇게 상처입은 주(主)의 이상은 아직도 복음 속에 잠자고 있으며, 궁극에 세상에 대하여 온전한 권능을 주장할 것이다.
195:0.13 (2070.9) 이렇게 기독교가 이교화(異敎化)됨으로 옛 체제는 예식 성질을 지닌 많은 하찮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기독교는 다음 이유로 주도권을 얻었다:
195:0.14 (2070.10) 1. 인간의 도덕 면에서 새롭고 엄청나게 높은 기준을 부르짖었다.
195:0.15 (2070.11) 2. 새롭고 크게 확대된 하나님 개념을 세상에 주었다.
195:0.18 (2070.14) 예수가 가르친 큰 진리 중에서 많은 것이 이 초기의 타협에서 거의 분실되었지만, 이교화된 이 기독교의 종교 안에 아직도 잠자고 있으며, 그 기독교도 또한 사람의 아들의 일생과 가르침의 바울판 해석이었다. 그리고 미처 이교화되기 전에도 기독교는 먼저 철저히 헬라화되었다. 기독교는 그리스인에게 많이, 듬뿍 빚을 졌다. 에집트에서 온 어느 그리스인이 니케아에서 그렇게 용감하게 일어서서, 그렇게 두려움 없이 이 집회에 도전했고, 그래서 그 집회는 예수의 수여에 관한 참 진실이 세상에서 사라질 위험에 빠지도록 예수의 성품에 관한 개념을 감히 흐릿하게 만들지 못했다. 이 그리스인의 이름은 아다나시우스였고, 이 신자의 웅변과 논리가 아니었다면, 아리우스의 신조가 승리했을 것이다.
195:1.1 (2071.1) 기독교의 헬라화는 사도 바울이 아데네에서 아레오파구스[1] [1811] 회의 앞에 서서, 아데네 사람들에게 “알지 못하는 신”에 관하여 이야기한 그 중대한 날에 진지하게 시작되었다. 거기서 아크로폴리스의 그늘 아래서, 이 로마 시민은 유대인의 땅 갈릴리에서 기원을 가졌던 새 종교의 자기 해석을 선포했다. 그리스인의 철학과 예수의 가르침 사이에는 이상하게 비슷한 무엇이 있었다. 공통된 목표가 있었다―이 두 가지가 개인의 등장을 겨냥했다. 그리스인은 사회적ㆍ정치적 등장, 예수는 도덕적ㆍ영적 등장이 목표였다. 그리스인은 정치적 자유로 이끄는 지적 자유주의를 가르쳤고, 예수는 종교적 해방으로 인도하는 영적 자유주의를 가르쳤다. 이 두 관념이 한데 모여 인간의 자유를 위한 새롭고 강력한 헌장이 되었고, 사람의 사회ㆍ정치ㆍ영적 해방을 알리는 전조(前兆)가 되었다.
195:1.2 (2071.2) 기독교는 주로 두 가지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고, 경쟁하는 모든 다른 종교를 이겼다:
195:1.3 (2071.3) 1. 그리스의 지성인은 유대인한테서도 새롭고 좋은 관념을 기꺼이 빌렸다.
195:1.4 (2071.4) 2. 바울과 그 후계자들은 기꺼이, 하지만 날카롭고 현명하게, 타협하는 사람이었다. 신학(神學)을 파는 기민한 상인이었다.
195:1.5 (2071.5) 아데네에서 바울이 일어서서 “그리스도이자 십자가에 못박힌 분”을 전했을 때, 그리스인은 영적으로 갈급했다. 궁금하여 묻고, 관심을 가졌고, 실제로 영적 진리를 찾고 있었다. 로마인이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항하여 싸웠고, 한편 그리스인은 받아들였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 문화의 일부로서 당시에 수정된 이 새 종교를 후일에 받아들이도록 로마인을 글자 그대로 강제한 것은 그리스인이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라.
195:1.6 (2071.6) 그리스인은 아름다움, 유대인은 거룩함을 존중했지만, 두 민족이 진리를 사랑하였다.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인은 종교를 제외하고, 모든 인간 문제―사회ㆍ경제ㆍ정치ㆍ철학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토론했다. 거의 아무 그리스인도 종교에 그다지 눈길을 돌리지 않았고, 그들의 종교조차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러 세기 동안 유대인은 이 다른 분야의 사상을 소홀히 해왔고, 한편 머리를 종교에 쏟았다. 그들의 종교를 아주 심각하게, 너무나 심각하게 다루었다. 예수가 전한 말씀의 내용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여러 세기 동안 이 두 민족의 사상(思想)이 뭉쳐서 생긴 산물은 이제 새 체제의 인간 사회에, 그리고 어느 정도 새 체제의, 인간의 종교 관념 및 관습에 추진력이 되었다.
195:1.7 (2071.7) 알렉산더가 근동 세계에 헬라 문명을 퍼뜨렸을 때, 그리스 문화의 영향은 이미 서부 지중해의 땅에 침투하였다. 작은 도시 국가에서 사는 한, 그리스인은 종교와 정치를 잘 처리했으나, 마케도니아의 왕이 아드리아 해로부터 뻗어서 인더스 강까지 그리스를 감히 하나의 제국으로 키웠을 때, 문제가 시작되었다. 그리스의 예술과 철학은 제국을 확장하는 과제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지만, 정치적 행정이나 종교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이 커져 제국이 된 뒤에, 오히려 촌티 나는 신들은 조금 이상하게 보였다. 오래된 유대 종교의 기독교 판이 다가왔을 때, 그리스인은 정말로 유일한 하나님, 더 위대하고 더 훌륭한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
195:1.8 (2072.1) 헬라 문화의 제국은 그런 상태로 오래 갈 수 없었다. 제국의 문화적 지배가 계속되었지만, 서방으로부터 제국의 행정을 위하여 로마의 정치적 수완을 얻은 뒤에, 그리고 동방으로부터 한 종교를 얻은 뒤에야 오래 견디었고, 그 종교의 유일한 하나님은 제국의 품위를 갖추었다.
195:1.9 (2072.2) 그리스도 이후 1세기에, 헬라 문화는 이미 절정에 이르렀고, 쇠퇴가 시작되었다. 학문이 진보되고 있었지만, 천재(天才)가 줄어들고 있었다. 바로 이때, 기독교에 얼마큼 담겨 있었던, 예수의 관념과 이상이 구출된 그리스 문화와 학문의 일부가 되었다.
195:1.10 (2072.3) 알렉산더는 그리스 문명의 문화적 선물을 가지고 동방으로 진격했다. 바울은 예수 복음의 기독교판을 가지고 서방을 공략했다. 그리고 서방 전역에 걸쳐 그리스 문화가 지배한 곳에, 헬라화된 기독교가 뿌리를 내렸다.
195:1.11 (2072.4) 예수의 말씀의 동방판은, 그의 가르침에 더 충실하게 남기는 했어도, 타협하지 않는 아브너의 태도를 계속 따랐다. 결코 헬라화된 해석판처럼 진보하지 못했고, 궁극에 이슬람 운동 속에 파묻혀 사라졌다.
195:2.1 (2072.5) 로마인은 그리스 문화를 통째로 이어받았고, 제비로 뽑는 정치 대신에 대의정치(代議政治)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로마가 이상한 언어와 민족에 대하여, 아니 종교에 대해서도, 새로이 관대한 태도를 온 서양 세계로 가져왔으므로, 이 변화는 당장에 기독교에 유리하게 되었다.
195:2.2 (2072.6) 로마에서 초기의 기독교인 박해 중에 많은 것은 오로지 전도할 때 불행하게도 “나라”라는 용어를 썼기 때문이다. 로마인은 어떤 종교에도 관대했지만, 정치적으로 경쟁하는 티가 나는 것은 무엇이나 대단히 분개했다. 그래서 대체로 오해 때문에 생긴 이 초기의 박해가 사라졌을 때, 종교의 선전을 위하여 무대가 활짝 열렸다. 로마인은 정치적 통치에 관심을 가졌고, 예술이나 종교에 거의 아랑곳하지 않았어도 이 두 가지에 특별히 관대하였다.
195:2.3 (2072.7) 동방의 율법은 엄격하고 원칙이 없었다. 그리스의 율법은 유연하고 예술적이었다. 로마의 법은 기품이 있고 존경심을 일으켰다. 로마의 교육은 전례 없는 무딘 충성심을 낳았다. 초기의 로마인은 정치적으로 헌신하고 숭고하게 몸을 바친 사람들이었다. 정직하고 열심이 있고 이상에 헌신했지만, 그 이름에 마땅한 종교가 없었다. 그들이 바울의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그리스인 선생들이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5:2.4 (2072.8) 이 로마인은 위대한 민족이었다. 자신을 다스렸기 때문에 서양을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러한 견줄 데 없는 정직, 헌신, 굳센 자제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성장시키는 데 이상적 토양이었다.
195:2.5 (2072.9) 정치적으로 국가에 헌신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그리스 및 로마인이 제도화된 교회에 영적으로 충성하는 것은 수월했다. 로마인은 오직 교회가 국가와 경쟁하는 존재라고 두려워했을 때, 교회에 대항하여 싸웠다. 민족의 철학이나 토착 문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로마는 그리스 문화를 자기 것으로 이어받았고, 용감하게 그리스도를 자체의 도덕 철학으로 채용했다. 기독교는 로마의 도덕적 문화가 되었지만, 그렇게 대규모로 새 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개인적 체험이라는 의미로 볼 때, 그것이 도저히 로마의 종교가 되었다고 할 수 없다. 많은 개인이 정말로 이 모든 국가 종교의 표면 밑으로 파고들었고, 혼을 살리는 영양을 얻으려고, 헬라화되고 이교화된 기독교에 잠재하는 진리 속에, 숨은 의미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한 것은 참말이다.
195:2.6 (2073.1) 금욕주의자, 그리고 금욕주의자의 호소, “자연과 양심”에 대한 건전한 호소는 적어도 지적 의미에서, 로마 전체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더 낫게 준비시켰을 뿐이다. 로마인은 성품과 훈련으로 보면 법률가였고, 자연 법칙까지도 존경했다. 이제, 기독교 안에서, 로마인은 자연 법칙에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헤아렸다. 시세로와 버질을 낳을 수 있는 민족은 바울의 헬라화된 기독교를 받아들일 만큼 성숙했다.
195:2.7 (2073.2) 그래서 이 로마화된 그리스인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자기들의 종교를 철학화하고, 그 관념을 조정하고 그 이상을 체계화하며, 종교 관습을 생활의 기존 흐름에 적응하기를 강요하였다. 이 모두가 히브리 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고, 후일에 신약이 그리스어로 기록됨으로 엄청나게 도움을 받았다.
195:2.8 (2073.3) 유대인과 많은 다른 민족과 반대로, 그리스인은 오랫동안 불멸(不滅), 죽은 뒤에 어떤 식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을 약간이나마 믿어 왔고,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의 바로 그 핵심이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그들에게 강하게 호소할 것이 확실했다.
195:2.9 (2073.4) 그리스 문화와 로마의 정치적 승리가 연속된 것은 지중해의 땅을 한 언어와 한 문화를 가진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하였고, 서양 세계가 유일한 하나님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켰다. 유대교는 이 하나님을 마련해 주었지만, 유대교는 로마화된 이 그리스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빌로는 그들의 반대를 줄이려고 얼마큼 거들었지만, 기독교는 그들에게 더 좋은 유일한 하나님 개념을 드러냈고, 그들은 이를 쉽사리 받아들였다.
195:3.1 (2073.5) 로마의 정치적 지배가 확립된 뒤에, 그리고 기독교가 널리 퍼진 뒤에, 기독교인은 그들이 유일한 하나님, 위대한 종교 개념을 가졌지만 제국이 없음을 발견했다. 그리스 및 로마인은 그들이 큰 제국을 가졌어도, 제국 숭배와 영적 통일에 적당한 종교 개념으로 쓰일 하나님이 없음을 발견했다. 기독교 신자들은 제국을 받아들였고, 제국은 기독교를 채택했다. 로마인은 통일된 정치적 통치, 그리스인은 통일된 문화와 학문, 기독교는 통일된 종교 사상과 관습을 마련해 주었다.
195:3.2 (2073.6) 로마는 제국을 보편화함으로 민족주의 전통을 극복하였고, 역사에서 처음으로 다른 종족과 나라들이, 적어도 명칭으로는 하나의 종교를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195:3.3 (2073.7) 금욕주의자의 활기 있는 가르침과 구원을 준다는 신비(神秘) 종파의 약속 사이에 큰 싸움이 있었을 때, 기독교는 로마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다. “사심(私心) 없다”는 낱말이 없는 언어를 가진 민족, 영적으로 갈급한 민족에게, 기독교는 신선하게 위로하는 말씀과 사람을 해방하는 힘을 가지고 다가왔다.
195:3.4 (2073.8) 신자들이 봉사하는 생애를 산 태도, 아니 맹렬한 박해가 있던 초기에 믿음을 위하여 신자들이 죽을 때 취한 그 태도조차, 기독교에게 대단히 큰 힘을 주었다.
195:3.5 (2073.9) 그리스도가 아이들을 사랑한 것에 관한 가르침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원하지 않았을 때, 아기, 특히 여자 아이를, 내버려 죽게 하는 널리 퍼졌던 관습을 곧 그치게 만들었다.
195:3.6 (2074.1) 기독교 예배의 초기 방식은 대체로 유대인 회당에서 이어받고, 미트라교 의식(儀式)에 따라서 고치고, 거기에 후일에 많은 이교도의 허식(虛飾)을 더했다. 초대 기독교 교회의 뼈대는 유대교로 전향하고 기독교인이 된 그리스인들로 구성되었다.
195:3.7 (2074.2) 그리스도 이후 2세기는 전 세계 역사에서 좋은 종교가 서양 세계에서 발전하기에 가장 좋은 때였다. 1세기에 기독교는 투쟁과 타협으로 뿌리를 내리고 빨리 퍼지려고 자체를 준비했다. 기독교는 황제를 받아들였다. 나중에 황제는 기독교를 채택했다. 이때는 새 종교가 퍼지기에 좋은 시대였다. 종교의 자유가 있었고, 여행이 보편화되었고, 사상은 어디에 매이지 않았다.
195:3.8 (2074.3) 헬라화된 기독교를 이름으로만 채택하여 생긴 영적 추진력은 로마에 너무 늦게 왔고, 그래서 한창 시작된 도덕의 쇠퇴를 막거나, 이미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퍼지는, 종족의 쇠퇴를 보상하지 못했다. 이 새 종교는 제국 로마에게 문화적 필수품이었고, 더 큰 의미에서 영적 구원을 얻는 수단이 되지 못한 것은 지극히 불행한 일이다.
195:3.9 (2074.4) 정부의 일에 개인 참여의 부족으로 생기는 확실한 결과, 지나친 온정(溫情) 주의, 무거운 세금과 극심한 징세의 폐단, 무역 적자(赤字)로 인하여 레반트로 금(金)이 유출된 것, 유흥의 광란, 로마식 표준화, 여자 지위의 격하, 노예 제도와 종족의 타락, 육체의 전염병, 영적으로 싹이 없는 지경에 가까이 가기까지 제도화된 국가 교회로부터는 좋은 종교조차 큰 제국을 구원할 수 없었다.
195:3.10 (2074.5)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조건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초기의 학교들은 전혀 오염되지 않은 예수의 가르침을 많이 계속 유지했다. 판타에누스는 클레멘트를 가르쳤고, 다음에 계속하여 나다니엘을 따라가서 인도에서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예수의 이상의 얼마큼은 기독교를 세우는 데 희생되었어도, 공정하게 말하면, 2세기 끝이 되자 그리스ㆍ로마 세계의 거의 모든 위대한 지성인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을 기록해야 한다. 거의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195:3.11 (2074.6) 제국이 무너진 뒤에도 기독교가 살아남는 것을 보장하도록 이 로마 제국은 충분히 오래 지속하였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기독교 대신에 하늘나라 복음을 받아들였더라면, 로마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는 때때로 생각해 보았다.
195:4.1 (2074.7) 교회는 사회에 부속된 것이요 정치와 같은 편이니까, 교회는 이른바 유럽의 “암흑 시대”의 지적ㆍ영적 쇠퇴를 함께 할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대에, 종교는 더욱 수도원 중심이 되고, 금욕주의화되고 합법적인 것이 되었다. 영적 의미에서 기독교는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이 기간을 통해서 내내, 잠자고 세속화된 이 종교와 나란히, 연속되는 신비주의의 흐름이 있었고 이것은 비현실에 가깝고 철학적으로 범신(汎神)주의와 비슷한, 환상 같은 영적 체험이었다.
195:4.2 (2074.8) 어둡고 절망에 빠진 이 여러 세기 동안, 종교는 실질적으로, 다시 남의 손을 빌리는 것이 되었다. 개인은 교회의 압도적 권한ㆍ전통ㆍ명령 앞에서 거의 길을 잃어버렸다. 신의 법정에서 특별한 영향력을 미친다고 생각되고, 따라서 효력이 있게 하소연하면 신들 앞에서 사람을 위하여 좋게 말해줄 수 있는 화려한 “성자(聖者)” 집단이 창조되어 새로운 영적 위험이 생겼다.
195:4.3 (2075.1) 그러나 기독교는 충분히 사회에 퍼지고 이교화되어서, 다가오는 암흑 시대를 막을 힘은 없었지만, 도덕적으로 어둡고 영적으로 침체된 이 오랜 기간에 살아남기 위하여 더 준비가 잘 되었다. 기독교는 서양 문명의 긴 밤을 통해서 줄곧 버티었고, 르네상스가 밝아왔을 때 아직도 도덕적 세력으로서 세상에서 작용하고 있었다. 암흑 시대가 지난 뒤에, 기독교의 회복은 그 가르침의 수많은 종파를 낳았고, 이 종파들은 특별한 지성ㆍ감정ㆍ영적 부류의 인간에게 적당한 신앙이었다. 그리고 이 특별한 여러 기독교 집단, 즉 종교 집단 중에서, 다수가 이 발표문을 작성할 때 아직도 지속한다.
195:4.4 (2075.2)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를 예수에 관한 종교로 뜻하지 않게 변질시킴으로 생겨난 역사를 드러낸다. 더 나아가서 헬라화, 이교화(異敎化), 세속화, 제도화, 지적 쇠퇴, 영적 타락을 겪고, 도덕적 겨울잠을 자고, 절멸의 위협을 겪으며, 그 뒤에 회생(回生)하고 분열되며, 최근에 비교적 회복되는 역사를 제시한다. 그러한 족보는 본래부터 활력이 있고 광대한 회복하는 자원을 소유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바로 이 기독교가 문명을 깨우친 서양 민족들의 세계에 지금 존재하고, 살아남기 위한 투쟁에 직면하고 있으며, 이 싸움은 지배권을 얻으려 했던 지난날의 투쟁의 특징이었던 그 중대한 여러 위기보다 훨씬 더 불길(不吉)하다.
195:4.5 (2075.3) 종교는 과학적 지성과 유물론적 경향을 가진 새 시대의 도전에 이제 직면하고 있다. 세속의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벌어지는 이 거대한 싸움에서, 예수의 종교는 궁극에 승리할 것이다.
195:5.1 (2075.4) 20세기는 기독교와 모든 다른 종교가 풀어야 할 새로운 문제를 가져왔다. 문명이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사회를 안정시키고 그 물질적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고 사람이 온갖 노력을 기울이면서, “먼저 하늘에 있는 실체들을 찾는” 의무가 더욱 필요하게 된다.
195:5.2 (2075.5) 토막토막 자르고, 격리하고, 고립시키고, 지나치게 분석했을 때, 진리는 때때로 사람을 헛갈리게 하고 잘못 인도하기도 한다. 살아 있는 진리는, 물질 과학의 사실로서 또는 중간에 있는 예술의 영감(靈感)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영적 현실로서, 통째로 받아들일 때에야 진리 추구자를 바르게 가르친다.
195:5.3 (2075.6) 종교는 사람에게 그의 신다운 영원한 운명을 계시하는 것이다. 종교는 순전히 몸소 겪는 영적 체험이며, 다음과 같이, 언제까지나 사람이 가진 다른 높은 형태의 생각과 구별되어야 한다:
195:5.4 (2075.7) 1. 물질적 현실인 사물에 대한 사람의 논리적 태도.
195:5.5 (2075.8) 2. 추한 것과 반대되는 아름다움을 사람이 미학적으로 이해하는 것.
195:5.6 (2075.9) 3. 사람이 사회에 대한 책임과 정치적 의무를 윤리적으로 인식하는 것.
195:5.7 (2075.10) 4. 인간의 도덕성을 느끼는, 사람의 감각조차 그 자체로서 그것만으로, 종교는 아니다.
195:5.8 (2075.11) 종교는 우주에서 믿음ㆍ신뢰ㆍ확신을 요구하는 가치를 찾아내도록 고안되어 있고, 종교는 결국 예배(禮拜)가 된다. 지성이 발견한 상대적 가치와 반대로, 종교는 혼을 위해서 최고의 가치를 찾아낸다. 그러한 초인간적 통찰력은 오로지 진정한 종교적 체험을 통해야 얻을 수 있다.
195:5.9 (2075.12) 중력(重力)이 없는 태양계처럼, 영적 실체에 근거를 둔 도덕이 없이 사회의 체계는 오래도록 유지될 수 없다.
195:5.10 (2076.1) 육체를 입고서 잠시 사는 일생에, 호기심을 채우거나 혼 속에서 솟아오르는 잠재 모험심을 모두 만족시키려고 애쓰지 말라. 참아라! 값싸고 더러운 모험으로 멋대로 돌진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말라. 너의 에너지를 활용하고 정열에 고삐를 쥐라. 차분히 있고, 진보하는 모험과 가슴 떨리는 발견이 가득한 생애, 끝없는 생애가 장엄하게 펼쳐지기를 기다리라.
195:5.11 (2076.2) 사람의 기원(起源)이 어디 있는가 혼란에 빠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못보고 놓치지 말라. 예수가 어린아이들조차 사랑했다는 것, 인격이 큰 가치가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는 것을 언제까지나 잊지 말라.
195:5.12 (2076.3) 세상을 볼 때, 너희가 보는 악한 검은 조각들은 궁극에 선한 하얀 배경과 대조해서 나타나는 것을 기억하라. 너희는 단지, 까만 악의 배경에 초라하게 보이는, 하얀 선(善)의 조각들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다.
195:5.13 (2076.4) 널리 퍼뜨리고 선포할 좋은 진리가 그렇게 많이 있는데, 어째서 세상에 악이 사실로 보인다고 해서 사람들은 악(惡)에 골몰해야 하는가? 진리의 아름다운 영적 가치는 악의 현상보다도 더욱 유쾌하고 사람의 정신을 높여준다.
195:5.14 (2076.5) 현대 과학이 실험 기법을 추구하는 것과 같이, 종교에서 예수는 체험의 방법을 주장하고 따랐다. 우리는 영적 통찰력의 인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지만,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의무에 충성하고, 신의 선함을 예배함으로 이 혼의 통찰력에 가까이 간다. 그러나 이 모든 가치 있는 것 중에서 사랑은 진정한 통찰력으로 이끄는 참된 안내자이다.
195:6.1 (2076.6) 과학자는 뜻하지 않게 인류를 유물론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영원한 도덕 은행(銀行)에서 경솔하게 지불 청구를 시작했지만, 이 인간 체험의 은행은 광대한 영적 재산을 가졌고, 그 은행에 대한 지불 청구를 들어줄 수 있다. 오로지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들이 인류의 영적 자산이 충분히 있는가 공포에 빠진다. 유물론적이고 세속적인 공포가 끝날 때, 예수의 종교가 파산되지 않은 것이 드러날 것이다. 하늘나라의 영적 은행은 “예수의 이름으로” 꺼내 쓰는 모든 사람에게 믿음과 소망을 주고, 도덕적 보장을 줄 것이다.
195:6.2 (2076.7) 유물론과 예수의 가르침 사이에 어떤 명백한 갈등이 있든지 상관 없이, 너희는 다가오는 시대에, 주의 가르침이 완전히 승리할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실제로, 참 종교는 과학과 어떤 논쟁에도 말려들 수 없고, 어떤 면에서도 물질적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종교는 다만 과학에 개의하지 않지만, 과학과 공감하며, 한편 그 과학자에게 최대의 관심을 기울인다.
195:6.3 (2076.8) 지식만 추구하는 것은 그에 따른 지혜로운 해석이 없이, 그리고 종교적 체험을 보는 영적 통찰력 없이, 궁극에 비관(悲觀)과 인간의 절망으로 이끈다. 얄팍한 지식은 참으로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195:6.4 (2076.9) 이 책을 기록할 때, 유물론 시대의 최악의 고비는 지나갔다. 사물을 더 이해하는 시절이 이미 밝아오고 있다. 과학 세계의 상급 지성인은 철학 면에서 이제 더 전적으로 유물론을 지지하지 않지만, 하층 계급의 사람들은 옛 가르침의 결과로서 아직도 그 방향으로 쏠린다. 그러나 이 물리적 현실주의 시대는 땅에서 사람의 일생에 지나가는 사건일 뿐이다. 현대 과학은 참 종교를―예수를 믿는 사람의 인생에서 풀이된 예수의 가르침을―다치지 않고 두었다. 과학이 이룩한 업적은, 인생을 그릇되게 풀이한 유치한 환상을 깨뜨렸을 뿐이다.
195:6.5 (2077.1) 땅에서 사는 인생에 관하여 말하면, 과학은 양적(量的) 체험이요, 종교는 질적 체험이다. 과학은 현상을 다루고 종교는 기원ㆍ가치ㆍ목표를 다룬다. 물리적 현상을 설명하려고 원인을 어디에 돌리는 것은 궁극의 것을 모른다는 고백이요, 끝에는 과학자를 시초의 큰 원인―파라다이스에 계신 우주의 아버지―까지 곧장 거슬러 올라가도록 인도할 뿐이다.
195:6.6 (2077.2) 기적이 일어나던 시대로부터 기계 시대로 맹렬히 방향을 바꾼 것은 사람을 온통 불안하게 만든 것이 드러났다. 우주를 기계로 보는 거짓 철학의 영리함과 교묘함은 바로 그들의 기계론적 주장이 거짓임을 나타낸다. 한 유물론자의 지성이 보인 숙명론(宿命論)의 영리함은 우주가 눈이 보이지 않고 목적이 없는 에너지 현상이라는 주장이 그릇됨을 언제까지나 증명한다.
195:6.7 (2077.3) 교육받았다고 생각되는 어떤 사람들의 기계론적 자연주의,[2] [1812] 거리에 있는 보통 사람의 지각없는 세속주의, 이 두 가지는 순전히 사물에 흥미를 가진다. 이런 사상은 영적 성질을 가진 어떤 진정한 가치도, 인정(認定)도, 만족감도 낳지 못할 뿐 아니라, 믿음과 희망과 영원한 보장이 빠져 있다. 현대 생활에서 하나의 큰 문제는 사람이 너무 바빠서 영적 명상과 종교적 예배를 위하여 틈을 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95:6.8 (2077.4) 유물론은 사람을 혼이 없는 자동 인형(人形)으로 격하시키고, 단지 낭만이 없는 기계론적 우주의 수학 공식에서 무력한 자리를 찾는 산술 기호로 만든다. 그러나 큰 수학자가 없이 이 모든 광대한 수학적 우주가 어디에서 오는가? 과학은 물질의 보존에 관하여 상세히 논할지 모르지만, 종교는 사람의 혼이 보존되는 것을 입증한다―종교는 사람이 영적 실체와 영원한 가치를 체험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
195:6.9 (2077.5) 오늘날 유물론을 믿는 사회학자는 한 공동체를 조사하고, 이에 대하여 보고서를 쓰고, 발견한 그대로 사람들을 버려둔다. 1천 9백 년 전에, 배우지 못한 갈릴리 사람들은 사람의 정신 체험에 영적으로 기여한 일생을 바친 예수를 살펴보았고, 다음에 나가서 로마 제국 전체를 뒤집어엎었다.
195:6.10 (2077.6) 그러나 중세(中世)의 나팔 소리에 맞추어 영적 전투에 나서라고 현대인을 부르려고 애쓸 때, 종교 지도자들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종교는 새로운 최신 표어를 마련해야 한다. 민주주의나 어떤 다른 정치적 만병 통치약도 영적 진보를 대신할 수 없다. 거짓 종교는 현실로부터 도피를 의미할지 모르지만, 예수의 복음은 영적 진보가 있는 영원한 현실의 바로 그 문앞까지 필사 인간을 데려갔다.
195:6.11 (2077.7) 지성이 물질로부터 “솟아났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우주가 단지 기계 작용이고 지성이 물질에 같이 붙어 있다면, 우리는 어떤 관측된 현상에 대하여 결코 두 가지 다른 해석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진리ㆍ아름다움ㆍ선 개념은 물리학이나 화학에 본래부터 있지 않다. 기계는 진리를 알기는커녕, 아는 능력도 없고, 올바름을 간절히 찾고 선을 소중히 간직할 능력이 없다.
195:6.12 (2077.8) 과학은 물리적일 수도 있지만, 진리를 헤아리는 과학자의 지성은 당장에 물질을 초월한다. 물질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물질은 자비를 사랑하거나 영적 실체를 기뻐할 수도 없다. 영적 깨우침에 기초를 두고 인간의 체험에 뿌리를 둔 도덕적 확신은 물리적 관측에 기초를 둔 수학적 추론과 똑같이 실재하고 확실하지만, 한층 높은, 다른 수준에서 그렇다.
195:6.13 (2077.9) 사람이 겨우 기계라면, 물질 우주에 대하여 얼마큼 획일적으로 반응할 것이다. 인격은커녕, 개성(個性)이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195:6.14 (2077.10) 온 우주의 중심에서 파라다이스의 절대적 기계 작용이 있는 사실은, 둘째 근원 중심의 조건 없는 의지가 계신 앞에서, 결정 요인이 우주에서 혼자만 정하는 법칙이 되지 않도록 영원히 처리한다. 물질 작용이 있기는 해도, 그것만 작용하지는 않는다. 기계 작용이 있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결정(決定)하는 작용이 있어도, 그것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195:6.15 (2078.1) 지성과 영, 이 둘이 함께 존재하지 않는다면, 물질로 이루어진 유한한 우주는 궁극에 획일적이고 결정론(決定論)대로 될 것이다. 우주 지성의 영향은 물질 세계 속에도 항상 자발성을 주입한다.
195:6.16 (2078.2) 어떤 존재 영역에서도 자유, 곧 독창성은 영적 영향과 우주 지성이 통제하는 정도에, 다시 말해서, 인간의 체험에서 “아버지의 뜻”을 실제로 행하는 정도에, 정비례하여 커진다. 그래서 일단 너희가 하나님을 찾으려고 길을 떠나면, 이는 하나님이 너희를 이미 찾았다는 확고한 증명이다.
195:6.17 (2078.3)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것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모든 과학적 발견은 우주에 자유와 획일성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발견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발견할 수 있었다. 발견된 물건은 실재하며, 획일적인 듯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의 사물로서 규명될 수 없었다.
195:7.1 (2078.4) 물질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기계론적 우주론처럼 그렇게 허약한 이론이 참된 종교를 몸소 체험하는 광대한 영적 자원을 그에게서 빼앗도록 버려두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결코 사실은 진정한 영적 믿음과 언쟁하지 않지만, 이론은 그럴 수도 있다. 과학은 종교적 신앙―영적 실체와 신성한 가치를 믿는 인간의 신앙―을 없애려고 애쓰기보다, 미신(迷信)의 말소에 전념하는 것이 좋다.
195:7.2 (2078.5) 종교가 사람에게 영적 면에서 해주는 것을, 과학은 사람에게 물질 면에서 해야 한다: 인생을 보는 시야를 늘이고 인격을 키우는 일이다. 참된 과학은 참된 종교와 오래 다툴 일이 없다. “과학적 방법”은 다만 물질적 모험과 물리적 성취를 재는 지적 척도일 뿐이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온통 지적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과학적 방법은 영적 실체와 종교적 체험의 평가에 도무지 쓸모가 없다.
195:7.3 (2078.6) 현대 기계론자의 모순은 이렇다: 이것이 단지 물질적 우주이고 사람이 겨우 기계라면, 그런 사람은 자신이 그런 기계인 것을 전혀 알아볼 수 없고, 마찬가지로 그런 기계 인간은 그러한 물질 우주가 존재하는 사실을 도무지 의식(意識)하지 못할 것이다. 기계론적 과학이 낳은 유물론적 낙심과 절망은 과학자의 지성에 영이 깃드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그런 과학자의 바로 그 초물질 통찰력이 잘못되고 스스로 모순되는 유물론적 우주 개념들을 만들어냈다.
195:7.4 (2078.7) 영원하고 무한한 파라다이스 가치, 곧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의 가치는 여러 시공 우주에서 현상이 일어나는 사실 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이 영적 가치를 찾아내고 헤아리는 데는 영에게서 태어난 필사자가 믿음의 눈으로 보기를 요구한다.
195:7.5 (2078.8) 영적으로 진보하는 실체와 가치는 “심리적 예상”―단지 물질 지성의 미화된 몽상―이 아니다. 그러한 실체와 가치는 깃드는 조절자, 사람의 지성 속에 사는 하나님 영의 영적 예측이다. 희미하게 얼핏 본 “상대성”의 발견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 하나님이 영원ㆍ무한하다는 너희의 개념이 흔들리게 하지 말지어다. 자아 표현의 필요에 관하여 너희가 온갖 간청을 드릴 때, 조절자의 표현, 진정하고 더 나은 자아 표현을 못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라.
195:7.6 (2079.1) 이것이 겨우 물질적 우주라면, 물질 인간은 결코 그렇게 순전한 물질적 존재를 가지는 기계적 인품 개념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우주에 대한 바로 이 기계론 개념은 그 자체로서 지성의 비물질 현상이며, 아무리 철저히 물질에 조건을 받고 기계적으로 통제되는 듯 보여도, 모든 지성은 비물질 기원을 가진다.
195:7.7 (2079.2) 필사 인간이 가진 얼마큼 진화된 정신 작용은 일관성이나 지혜를 지나치게 부여받지 않는다. 사람의 자만은 가끔 이성(理性)을 뛰어넘고 자신의 논리를 벗어난다.
195:7.8 (2079.3) 가장 비관적인 유물론자의 바로 그 비관주의는, 그 자체로서 저절로, 비관주의자가 보는 우주가 전적으로 물질이 아닌 것을 충분히 증명한다.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이 두 가지가 사실 뿐 아니라 가치를 의식하는 지성 속에 생기는 개념적 반응이다. 우주가 참으로 유물론자가 보는 바와 같은 우주라면, 다음에 인간 기계인 사람은 바로 그 사실을 도무지 의식하여 깨닫지 못할 것이다. 영에게서 태어난 지성 안에서 가치의 개념을 의식하지 않고는, 우주가 오직 물질이라는 사실과 우주 작용이 기계론에 따른 현상인 것을 사람이 도무지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의 기계는 다른 기계의 성질이나 가치를 의식할 수 없다.
195:7.9 (2079.4) 생명과 우주에 대한 기계론적 철학은 과학적일 수 없으니, 이는 과학이 오로지 물질과 사실만 인식하고 다루기 때문이다. 철학은 불가피하게 과학을 초월한다. 사람은 자연 속에 있는 물질적 사실이지만, 사람의 생명은 지성의 통제 속성과 영의 창조 성질을 나타내니까, 자연의 물질 수준을 뛰어넘는다.
195:7.10 (2079.5) 사람이 기계론자가 되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것은 그 사람이 지능과 도덕 면에서 자살하려고 쓸데없이 노력하는 비참한 현상을 나타낸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
195:7.11 (2079.6) 우주가 단지 물질이고 사람이 겨우 기계라면, 이런 우주의 기계 작용을 가정하는 과학자에게 용기를 줄 아무런 과학이 없을 것이다. 기계는 자체를 재거나 분류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 오로지 기계를 초월하는 지위를 가진 어떤 개체가 그러한 과학적 작품을 만들 수 있다.
195:7.12 (2079.7) 우주 실체가 겨우 하나의 광대한 기계라면, 다음에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그런 평가로부터 통찰력을 의식하기 위해서, 우주 바깥에, 우주와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
195:7.13 (2079.8) 사람이 겨우 기계라면, 무슨 기법(技法)으로 이 사람이 자기가 겨우 기계라는 것을 믿게 되거나 아니면 안다고 주장하는가? 사람이 스스로 의식하여 자신을 평가하는 체험은 결코 단순한 기계의 속성이 아니다. 자의식(自意識)하고 기계론자로 자처하는 사람은 기계론에 대한 가능한 최선의 대답이다. 유물론이 사실이라면, 자의식하는 기계론자가 결코 있을 수 없다. 사람이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기 전에, 먼저 도덕을 아는 인격자이어야 한다는 것이 또한 참말이다.
195:7.14 (2079.9) 유물론의 바로 그 주장은 그러한 독단을 주제넘게 부르짖는 지성이 초물질 의식을 가졌음을 암시한다. 기계 작용은 나빠질지 모르지만, 결코 진보할 수 없다. 기계는 생각하거나 창조하거나 꿈을 꾸거나, 뜻을 품거나 무엇을 이상으로 만들거나, 진리를 간절히 찾거나, 올바름을 목마르게 찾지 않는다. 기계는 다른 기계들에게 봉사하고, 영원히 진보할 목표로서 하나님을 찾아내고 그와 같이 되려고 애쓰는 숭고한 과제를 택하려고 정열을 가지고 자기의 일생을 자극하지 않는다. 기계는 결코 지능도 감정도, 미학도 윤리도, 도덕도 영적 성향도 없다.
195:7.15 (2079.10) 예술은 사람이 기계론적 존재가 아닌 것을 증명하지만, 사람이 영적으로 불멸함을 증명하지 않는다. 예술은 필사자의 상물질이요, 물질 인간과 영적 인간 사이에 있는 분야이다. 시(詩)는 물질적 현실을 벗어나 영적 가치들을 향하려는 노력이다.
195:7.16 (2080.1) 높은 문명에서는 예술이 과학을 인간답게 만들고, 한편 다음에 참 종교가―영적 가치와 영원한 가치를 보는 통찰력이―예술을 영적으로 변화시킨다. 예술은 실체에 대한 인간의 시공 평가를 나타낸다. 종교는 우주의 가치를 신성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요, 영적으로 올라가고 커지면서 영원히 진보함을 의미한다. 오직 시간 속에 실체의 그림자로서 영원이 비쳐주는 신다운 본보기, 영의 표준을 예술이 못볼 때에야 시간 세계의 예술이 위험하다. 참된 예술은 인생에서 물질인 것을 효과 있게 조종한다. 종교는 인생에서 물질적 사실을 고상하게 변화시키고, 예술의 영적 평가를 그치지 않는다.
195:7.17 (2080.2) 자동 인형(人形)이 자동 기계론이라는 철학을 상상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다른 동료 자동 인형에 대하여 그런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고 주제넘게 생각하다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가!
195:7.18 (2080.3) 과학자를 마땅히 인식하지 않으면 물질 우주에 대한 어떤 과학적 해석도 가치가 없다. 예술가를 인식하지 않으면 예술에 대한 어떤 평가도 진정하지 않다. 도덕가를 제외하면 도덕률에 대한 어떤 평가도 가치가 없다. 철학자를 무시하면 어떤 철학의 인식도 교훈이 되지 않고, 신자의 실제 체험이 없이는 종교가 존재할 수 없으며, 신자는 바로 이 체험 속에서, 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아내고 알려고 애쓴다. 마찬가지로, 온 우주는 스스로 계시는 이, 그 우주를 만들고 쉬지 않고 관리하는 무한한 하나님과 동떨어져서는 의미가 없다.
195:7.19 (2080.4) 기계론자―인본주의자―는 물질의 흐름과 함께 떠내려가는 성향이 있다. 유심론자(唯心論者)와 심령주의자는 에너지 흐름의 과정, 겉보기에 순전히 물질적 과정을 수정하려고 지능과 활력을 가지고 감히 노를 젓는다.
195:7.20 (2080.5) 과학은 머리의 계산으로 살며, 음악은 감정의 박자를 표현한다. 종교는 무한자의 영원한 상급 멜로디를 측정한 것과 시공에서 조화를 이룬, 혼의 영적 리듬이다. 종교적 체험은 인생에서 참으로 수학을 초월하는 무엇이다.
195:7.21 (2080.6) 언어에서 알파벳은 유물론의 기계 장치를 대표하며, 한편 천 가지 생각, 위대한 관념, 그리고―사랑과 미움, 비겁과 용기에 관한―고귀한 이상의 의미를 표현하는 낱말들은, 물질 법칙과 영적 법칙이 정의한 규모 안에서 정신이 연출한 것을 묘사하며, 그 연출은 인격 의지의 주장의 안내를 받고, 본래부터 주어진 상황에 제약을 받는다.
195:7.22 (2080.7) 우주는 과학자가 발견하고 과학으로 여기게 되는 법칙, 기계 작용, 불변성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주는 이렇게 우주 현상을 지켜보고, 우주에서 물질 측면의 기계적 단계에 본래 있는 수학적 사실을 분류하는 과학자, 호기심 있고 생각에 잠기고, 선택하고 창조하며 통합하고 구별하는 과학자와 같다. 우주는 예술가의 작품과 비슷하지도 않지만, 오히려 영적 목표를 달성하려는 노력으로 물질적 사물의 세계를 초월하려고 애쓰는 예술가, 힘을 기울이고, 꿈을 꾸고, 큰 뜻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는 예술가와 같다.
195:7.23 (2080.8) 과학이 아니라 과학자가 에너지와 물질로 이루어진, 진화하고 진보하는 우주의 현실을 깨닫는다. 예술 작품이 아니라 예술가가 물질 존재와 영적 해방 사이에 일시적 상물질 세계가 존재하는 것을 보여준다. 종교가 아니라 종교를 실천하는 자가 영원히 진보하면서 마주치게 될 영 현실과 신성한 가치가 존재함을 입증한다.
195:8.1 (2081.1) 그러나 사람이 유물론과 기계론을 대체로 정복한 뒤에도, 20세기 세속주의의[3] [1813] 지독한 영향은 영문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의 영적 체험을 여전히 망칠 것이다.
195:8.2 (2081.2) 두 가지 세계적 영향이 현대의 세속주의를 조장하였다. 세속주의의 아버지는 19세기와 20세기에 이른바 과학―무신론적 과학―의 태도, 편협하고 신을 믿지 않는 태도였다. 현대 세속주의의 어머니는 중세의 전체주의적 기독교회였다. 세속주의는 제도화된 기독교회가 서양 문명을 거의 완전히 지배한 것에 대한 반항이 커짐으로 비롯되었다.
195:8.3 (2081.3) 이 계시(啓示)가 있을 때, 유럽과 아메리카의 생활에서 지배하는 지적ㆍ철학적 풍토는 명백히 세속적이다―인본주의이다. 3백 년 동안 서양 사상은 차츰차츰 세속화되었다. 종교는 갈수록 더 이름뿐인 영향이 되었고, 대체로 예식을 치르는 행사였다. 서양 문명에서 기독교인이라 공언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눈치채지 못하면서 실제로 세속주의자이다.
195:8.4 (2081.4) 전체주의적 교회의 지배, 사람을 시들게 하는 손아귀로부터, 서양 민족의 생각과 생활을 해방하는 데는 큰 힘, 막강한 영향력이 필요했다. 세속주의는 교회의 통제하는 사슬을 깨뜨려버렸고, 이제 다음 차례에 현대인의 마음과 정신 위에 새롭고 신을 모르는 종류의 지배력을 굳히려고 위협한다. 전제 및 독재 정치를 행하는 국가는 과학적 유물론과 철학적 세속주의에서 직접 생긴 산물이다. 제도화된 교회의 압제에서 사람을 해방하자마자, 세속주의는 사람을 전체주의 국가에게 사슬에 묶인 노예로 팔아버린다. 세속주의는 사람을 교회에 예속된 처지에서 풀어주고서, 정치ㆍ경제적 노예가 되는 처지로 팔아넘길 뿐이다.
195:8.5 (2081.5) 유물론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세속주의는 아예 하나님을 무시(無視)한다. 적어도 이것이 초기의 태도였다. 한때는 종교의 전체주의 속박에 항거했던 세속주의가 최근에 더욱 호전적 태도를 갖추었고 그런 종교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20세기의 세속주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조심하여라! 인간 사회에서 신이 없는 이 철학은 오로지 불안, 적의(敵意), 불행, 전쟁, 세계적 재난으로 이끌 뿐이다.
195:8.6 (2081.6) 세속주의는 결코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인간 사회에서 아무것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귀담아 듣거라! 교회의 전체주의에 대하여, 세속적 반항을 통해서 얻은 유익한 이점을 빨리 던져버리지 말라. 서양 문명은 오늘날 세속주의로 저항한 결과로서 많은 자유와 만족을 누린다. 세속주의가 저지른 큰 잘못은 이것이다: 종교적 권한이 거의 통째로 생활을 통제하는 데 항거하면서, 그러한 교회의 폭정으로부터 해방을 얻은 뒤에, 세속주의자들은 더 나아가서 바로 하나님에게, 때때로 말없이, 때때로 드러내놓고, 반란을 시작하였다.
195:8.7 (2081.7) 아메리카의 산업주의에 나타난 놀라운 창조성, 그리고 서양 문명에서 전례 없던 물질적 진보는 세속주의의 반란(反亂) 덕분이다. 그리고 세속주의의 반란이 너무 지나치고 하나님과 참 종교를 못보고 놓쳤기 때문에, 뒤이어 또한 기대하지 않던 세계 전쟁과 국제적 불안이라는 수확을 거두었다.
195:8.8 (2081.8) 현대의 세속주의 반란이 가져온 축복, 곧 관용, 사회 봉사, 민주 정치, 시민의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희생할 필요는 없다. 세속주의자는 과학을 촉진하고 교육을 향상하기 위하여 참 종교를 적대할 필요가 없었다.
195:8.9 (2082.1) 그러나 세속주의는 생활 규모가 확대되면서 최근에 얻은 이 모든 이익을 낳은 유일한 부모는 아니다. 20세기에 얻은 이익 뒤에는 과학과 세속주의 뿐 아니라, 또한 인식되지 않고 인정받지 않은, 나사렛 예수의 일생(一生)과 가르침의 영적 작용이 있다.
195:8.10 (2082.2) 하나님 없이, 종교가 없이, 과학적 세속주의는 결코 그 세력들을 조정하고, 서로 다른 경쟁하는 이권(利權) ㆍ 종족ㆍ 민족주의를 조화시킬 수 없다. 이 세속주의적 인간 사회는 비할 데 없는 물질적 업적을 이루었어도, 천천히 무너지고 있다. 하나님 적대주의가 이렇게 붕괴하는 데 저항하는 주요 응집 세력은 민족주의이다. 그리고 민족주의는 세계 평화에 으뜸가는 장벽이다.
195:8.11 (2082.3) 세속주의가 본래부터 가진 약점은 세속주의가 정치와 권력을 위하여 윤리와 종교를 버리는 것이다. 너희는 단지, 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면서 사람의 형제 정신을 이룩할 수 없다.
195:8.12 (2082.4) 세속주의 방향의 사회적ㆍ정치적 낙관은 망상(妄想)이다. 하나님 없이는 자유와 해방도, 재산과 재물도, 평화로 인도하지 않을 것이다.
195:8.13 (2082.5) 과학ㆍ교육ㆍ산업ㆍ사회의 완벽한 세속화는 오직 재난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20세기의 처음 3분의 1 동안에 유란시아인들은 그때까지 기독교 시대를 통틀어서 죽은 것보다 더 많은 인간을 죽였다. 이것은 겨우 유물론과 세속주의로부터 얻는 끔찍한 수확의 시작일 뿐이다. 아직도 더 끔찍한 파괴가 다가올 것이다.
195:9.1 (2082.6) 너희의 영적 유산(遺産)의 가치, 여러 세기를 통해서 유물론과 세속 시대의 황폐한 시절에 이르기까지 흘러 내려온 진리의 흐름을 간과하지 말라. 지난 시절의 미신 같은 교리들을 떨어버리려고 온갖 값진 노력을 기울이면서, 너희는 영원한 진리를 단단히 붙들도록 하여라. 그러나 참을성을 가져라! 미신에 저항하는 현재의 반란이 끝났을 때, 예수의 복음에 담긴 진리는 새롭고 더 나은 길을 비추려고 영화롭게 지속할 것이다.
195:9.2 (2082.7) 그러나 이교(異敎)처럼 변하고 사회화된 기독교는 때묻지 않은 예수의 가르침과 새로이 접촉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는 땅에서 사신 주의 일생을 보는 새로운 통찰력이 모자라서 시들고 있다. 예수의 종교를 새로이 더 충만히 계시하는 것은 유물론적 세속주의 제국을 정복하고, 기계론적 자연주의의 세계 지배를 뒤엎을 운명을 가지고 있다. 유란시아는 사회를 다시 조정하고, 도덕적 각성과 영적 깨우침이 있는 가장 놀랍고 황홀한 한 시대에 이르는 고비에서 지금 부르르 떨고 있다.
195:9.3 (2082.8) 예수의 가르침은, 크게 수정되기는 했어도, 태어날 때의 신비 종파, 암흑 시대의 무지와 미신(迷信)을 겪고 살아남았고, 지금도 20세기의 유물론ㆍ기계론ㆍ세속주의를 천천히 이기고 있다. 큰 시험이 있고 패배할 위협을 받는 그러한 시절은 언제나 큰 계시가 내리는 시절이다.
195:9.4 (2082.9) 종교는 새로운 지도자, 오로지 예수와 그의 견줄 데 없는 가르침에만 감히 의존할 영적인 남녀가 필요하다. 기독교가 사회 및 물질 문제에 계속 바쁘면서 영적 사명을 오랫동안 소홀히 하면, 영적(靈的) 부활은 사람을 영적으로 회복시키는 데 순전히 몸을 바칠 선생, 예수의 종교를 가르치는 새 선생들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나서 영에게서 태어난 이 사람들은 사회ㆍ도덕ㆍ경제ㆍ정치 면에서 세계를 다시 조직하는 데 필요한 지도력과 영감을 재빨리 공급할 것이다.
195:9.5 (2083.1) 사실과 모순되고, 가장 높은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의 개념과 어울리지 않는 종교를 현대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왜곡되고 때묻은 현대 기독교의 참된 최초의 기초(基礎)를―예수의 참 일생과 가르침을―다시 발견할 때가 왔다.
195:9.6 (2083.2) 원시인은 미신으로 종교적 두려움에 매인 인생을 살았다. 현대의 개화된 사람들은 강한 종교적 확신에 지배되는 생각을 두려워한다. 생각하는 사람은 종교에 붙들려 있기를 언제나 두려워했다. 힘세고 감동시키는 종교가 지배하려고 위협할 때, 그는 변함없이 이를 합리화하고 전통으로 만들고 제도화하려고 애쓰며, 이렇게 종교를 통제하고 싶어 한다. 계시된 종교조차도 그러한 과정으로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지배하는 것이 된다. 현대의 총명한 남녀는 예수의 종교가 그들에게―또 그들을 가지고―무슨 변화를 일으킬까 두려워서 피한다. 모든 그러한 두려움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 예수의 종교는, 정말로, 그 신자를 지배하고 변화시키며, 사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알려고 애쓰는 데 일생을 바치라고 요청하고, 사는 에너지를 사람의 형제 정신을 위하여 사심 없이 봉사하는 데 거룩히 바칠 것을 요구한다.
195:9.7 (2083.3) 이기적인 남녀는, 필사 인간에게 일찍이 제공된 가장 큰 영적 보물을 위해서도, 단지 그런 값을 치르려 하지 않는다. 어리석고 사람을 속이는 이기심(利己心)의 추구에 뒤따르는 슬픈 실망에 사람이 충분히 환멸을 느꼈을 때, 형식이 된 종교가 열매 없는 것을 알아차리고 난 다음에야, 하늘나라 복음으로, 나사렛 예수의 종교로 향할 생각을 진심으로 가질 것이다.
195:9.8 (2083.4) 세상은 직접 체험하는 종교가 더욱 필요하다. 기독교―20세기에 최선의 종교―조차 예수에 관한 종교일 뿐 아니라, 대체로 사람이 남의 손을 빌려서 맛보는 종교이다. 사람들은 인정된 종교 선생들로부터 물려받은 그대로, 그 종교를 통째로 삼킨다. 땅에서 정말로 산 그대로 예수를 보고, 생명을 주는 그의 가르침을 사람이 손대지 않은 채로 알 수만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큰 깨우침을 맛볼 것인가! 아름다운 것을 묘사하는 말씀은, 이를 구경하는 것처럼 기쁨에 떨게 만들 수 없고, 교리(敎理)의 말씀도 하나님이 앞에 계심을 아는 체험처럼 사람의 혼에 영감을 줄 수 없다. 그러나 기대하는 믿음은, 저 건너 여러 세상에 신성한 가치를 가진 영원한 영적 현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도록, 사람의 혼 속에 희망의 문을 늘 열어 놓고 있을 것이다.
195:9.9 (2083.5) 기독교는 인간의 욕심, 전쟁의 미친 짓, 권력을 향한 욕심이 도전하는 앞에서 감히 이상(理想)을 낮춰 버렸다. 그러나 예수의 종교는 때묻지 않고 초월적인 영적 권유로 서 있으며, 사람의 힘이 자라기까지, 동물로서 진화한 이 모든 유물을 딛고 일어서라고, 은혜로 참된 인간 운명의 도덕적 높이까지 이르라고 소리친다.
195:9.10 (2083.6) 기독교는 형식 치중, 지나친 조직, 지성의 중시, 그리고 다른 비영적 경향 때문에 천천히 죽을 위협을 받는다. 현대의 기독교회는 예수가 인류의 뒤잇는 세대를 계속 영적으로 변화시키라고 임명한 것과 같은, 그러한 박력 있는 신자들의 단체가 아니다.
195:9.11 (2083.7) 이른바 기독교는 종교적 관념과 관습 뿐 아니라 사회 및 문화 운동이 되어 버렸다. 현대 기독교의 흐름은 여러 고대(古代) 이교도의 늪과 많은 야만인의 수렁에서 물을 받고 있다. 순전히 그 근원이라고 생각되는 높은 갈릴리 고원 뿐 아니라, 많은 옛 문화의 분수령이 이 현대 문화의 흐름에 물을 주고 있다.
195:10.1 (2084.1) 기독교는 정말로 이 세상에 크게 기여했지만, 이제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이다. 세상은 주를 모든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필사자, 영에게서 태어난 필사자의 체험 속에서, 다시 땅에서 사는 예수를 구경하는 것이 필요하다. 원시 기독교의 부흥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익하다. 너희가 있는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현대 문화는 예수의 일생의 새로운 계시(啓示)로 영적 세례를 받고, 영원한 구원을 주는 복음을 새로 이해함으로 빛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높이 들어올려질 때, 예수는 모든 사람을 끌어당길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정복자보다 더한 것, 아니 모든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낫게 살아가는, 넘쳐 흐르는 근원까지 되어야 한다. 몸소 체험하면서 하나님이 계시는 현실을 발견함으로 종교가 신성하게 될 때까지, 종교는 상급의 인본주의일 뿐이다.
195:10.2 (2084.2) 땅에서 예수가 산 일생의 아름다움과 숭고함, 그 인간성과 신성(神性), 단순함과 독특함은 사람을 구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놀랍고 마음을 끄는 그림을 제시한다. 그래서 어느 시대의 신학자와 철학자라도, 사람 모습을 입은 하나님의 그러한 초월적 자신 수여로부터, 감히 영적으로 사람을 묶어놓는 신조(信條)를 만들거나 신학 체계를 지어내지 못하게 효과적으로 제지해야 한다. 예수 안에서 우주는 한 필사 인간을 만들어냈고, 그 사람 안에서 사랑의 정신은 시간의 물질적 장애를 이기고, 물리적 기원을 가진 사실을 극복했다.
195:10.3 (2084.3) 항상 기억하라―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필요하다. 우주의 최종에 이르는 신성한 운명을 얻는 체험, 영원한 성격 체험을 완전히 마침내 성취하는 데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필요하다.
195:10.4 (2084.4) “네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은 아마도, 아버지가 살아 계신, 사랑의 영이라는 선언 다음으로, 예수가 일찍이 말씀한 가장 위대한 선언이었다.
195:10.5 (2084.5) 주를 믿으라고 사람들을 설득할 때,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강제로 또는 의무나 관습으로 처음 십리를 가는 것이 아니라,[4] [1814] 오히려 아낌없이 봉사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헌신적 태도로 십리를 더 가는 것이며, 이것은 사랑으로 형제를 붙잡고 필사 존재에서 상급의 신성한 목표를 향하여 영적 안내를 받도록 형제를 계속 설득하려고, 예수처럼 손 뻗는 것을 나타낸다. 기독교는 지금도 기꺼이 처음 십리를 가지만, 진정하게 십리를 더 가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인류는 시들고, 도덕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넘어진다―예수를 따른다고 공언(公言)하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가 제자들에게 살고 사랑하고 봉사하라고 가르친 대로 정말로 살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
195:10.6 (2084.6) 예수의 하늘나라 단체를 영적으로 부활시키는 방법으로, 새롭고 변화된 인간 사회를 건설하는 모험으로 부르는 소리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기쁨에 떨게 할 것이요, 사람들은 육체를 입은 예수의 친구로서 땅에서 돌아다니던 시절 이후로 이처럼 감동받은 적이 없다.
195:10.7 (2084.7) 하나님이 실제로 계심을 부인(否認)하는 어떤 사회 체계나 정치 체제도, 건설적이고 지속하는 어떤 방법으로 인간 문명이 진보하는 데 이바지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세분되고 세속화된 바와 같이, 기독교는 자체가 더욱 진보하는 데 가장 큰 단일 장애물이 된다. 이것은 특히 동양의 경우에 참말이다.
195:10.8 (2084.8) 교회 중심주의는 당장에, 그리고 언제까지나, 하늘나라의 영적 관계에서, 사람의 형제 정신에 담긴, 예수의 신앙 친구들의 생생한 믿음, 성장하는 정신, 직접 겪는 체험과 공존할 수 없다. 지난날에 이룬 업적의 전통을 간직하려는 칭찬할 만한 소망은 때때로, 낡아버린 예배 체계의 방어로 이끈다. 고대(古代)의 사상 체계를 돌보려는 좋은 뜻을 가진 소망은, 현대인의 확대되고 진보하는 지성의 영적 갈망을 채우도록 고안된, 새롭고 적절한 수단과 방법의 후원을 효과적으로 막는다. 마찬가지로, 20세기의 기독교회는 진정한 복음―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을 즉시 진전시키는 길에 큰 장애가 되지만, 이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195:10.9 (2085.1) 복음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에게 기쁘게 충성하려는 열심 있는 많은 사람은, 그의 일생과 가르침의 정신을 너무나 조금 나타내는 교회를 열심히 지지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을 깨달으며, 그들은 그리스도가 그런 교회를 세웠다고 그릇된 가르침을 받아 왔다. 예수는 이른바 기독교회를 세우지 않았지만, 그의 성품과 일치되는 모든 면에서, 땅에서 일생에 그가 한 일의 대변자, 현존하는 최선의 대변자로서 교회를 육성해 왔다.
195:10.10 (2085.2) 기독교회가 오직 주의 계획을 감히 지지하려고 한다면, 무관심한 듯이 보이는 수많은 젊은이가 그러한 영적 사업에 지원하려고 앞으로 달려나오고, 이 큰 모험을 서슴지 않고 끝까지 마칠 것이다.
195:10.11 (2085.3) 기독교는 자체의 표어(標語) 하나에 담겨 있는 운명과 심각하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갈라져 서로 싸우는 집은 버틸 수 없다.” 비기독교 세계는 종파로 갈라진 기독교 세계에 도저히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 있는 예수는 가능한 기독교의 통일에 유일한 희망이다. 참된 교회―예수의 형제 정신―은 눈에 보이지 않고, 영적이며, 꼭 한결같은 것이 아니라, 조화의 특징을 가졌다. 획일성은 기계 성질을 가진 물리적 세계의 표시이다. 영적 조화는 살아 있는 예수와 믿음으로 연합하여 생기는 열매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형제 단체를 진전시키는 데 이제 더 장애물이 되지 말아야 한다. 이 형제 단체는 제도가 되어버린 사회 조직과 반대로, 살아 있는 유기체가 될 운명을 가졌다. 이 단체는 그러한 사회 조직을 잘 이용해도 좋지만, 그것에 밀려나서는 안 된다.
195:10.12 (2085.4) 그러나 20세기의 기독교조차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종족에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도덕적 천재가 통합되어 생긴 산물이요, 참으로 땅에서 선(善)을 지지하는 가장 큰 세력 중에 하나였고, 따라서 타고난 결함과 얻은 결함이 있어도, 아무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힘찬 도덕적 감정을 가진, 생각하는 사람들의 지성을 움직이려고 아직도 궁리한다.
195:10.13 (2085.5) 그러나 교회가 상업(商業)과 정치에 말려드는 데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한 거룩하지 않은 연합은 주를 지독하게 팔아넘기는 것이다. 진심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제도화된 강력한 교회가 새로 태어난 종파의 숨통을 때때로 감히 틀어막고 어쩌다 정통 아닌 옷을 걸친 듯이 보이는 진리의 사자(使者)들을 박해하려고 한 것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195:10.14 (2085.6) 그런 방식의 예배를 더 좋아한 사람들이 세상에 없었다면 그러한 교회가 살아남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참말이다. 영적으로 게으른 많은 사람이 의식과 신성한 전통으로 이루어진 고대의 권위적 종교를 몹시 바란다. 모든 사람이 종교적 권위 없이 지낼 수 있도록 만들기에는 인간의 진화와 영적 진보가 도저히 충분하지 않다. 하늘나라의 보이지 않는 형제 단체는, 이 여러 가지 사회 및 기질 등급의 가족 집단이 참으로 영에게 인도받는 하나님의 아들이 기꺼이 된다면, 그들을 포함해도 괜찮다. 그러나 이 예수의 형제 단체에는 종파의 경쟁도, 집단의 원한도, 도덕적으로 상위에 있고 영적으로 틀릴 수 없다는 주장(主張)도, 설 자리가 없다.
195:10.15 (2086.1) 기독교인의 이 여러 집단은 서양 문명의 민족들 사이에서 수많은 다른 종류의 사람, 신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을 수용하는 데 소용될지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의 그러한 분열은 예수의 복음을 동양(東洋) 민족들에게 가지고 가려고 시도할 때, 심각한 약점을 제시한다. 이 민족들은 따로, 기독교와 얼마큼 떨어져서, 예수의 종교가 있다는 것을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하며, 기독교는 갈수록 더 예수에 관한 종교가 되었다.
195:10.16 (2086.2) 유란시아의 큰 희망은 예수의 유익한 말씀을 새로 확대하여 발표함으로 예수를 새로이 드러내는 가능성에 있으며, 그 말씀은 오늘날 예수를 따른다고 공언하는 자들의 수많은 집단을 사랑의 봉사로 영적 연합을 이룰 것이다.
195:10.17 (2086.3) 세속의 교육조차도, 그 교육이 어떻게 인생의 계획과 인격의 향상을 시작하는가 젊은이를 가르치는 일에 더 주의를 기울이려 한다면, 이 큰 영적 부흥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모든 교육의 목적은 인생 최대의 목적, 즉 훌륭하고 잘 균형된 인격의 발달을 촉진하고 육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너무 지나친 자아 만족 대신에 도덕적 훈련을 가르치는 것이 대단히 필요하다. 그러한 기초 위에 종교는 필사인의 일생을 더 충만하고 보람있게 만드는 데, 아니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고 향상하는 데도 영적 자극을 줄지 모른다.
195:10.18 (2086.4) 기독교는 즉석에서 만들어진 종교이며, 따라서 저속(低速) 기어에서 작용해야 한다. 고속 기어의 영적 성과는 예수의 참 종교가 새로 드러나고 더욱 널리 받아들여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렸던 한 목수의 평범한 제자들이 어떤 가르침을 시작하여, 이것이 3백 년 안에 로마 제국을 정복하였고, 다음에 계속하여, 로마를 멸망시킨 야만인들을 설득한 것을 보니, 기독교는 막강한 종교이다. 바로 이 기독교는 히브리 신학과 그리스 철학의 흐름 전체를 정복했다―흡수하고 향상시켰다. 다음에 신비교와 이교(異敎) 사상에 지나치게 젖은 결과로서, 1천 년이 넘도록 혼수 상태에 빠졌을 때, 이 기독교는 스스로 살아나서 서양 세계 전체를 실질적으로 다시 정복했다. 기독교는 충분히 예수의 가르침을 담고 있어 자체의 불멸을 얻을 수 있다.
195:10.19 (2086.5) 기독교가 예수의 가르침을 더 깨달을 수 있기만 하다면, 현대인이 새롭고 더욱 복잡해지는 문제의 해결을 돕는 데 훨씬 더 이바지할 수 있다.
195:10.20 (2086.6) 기독교가 큰 장애를 겪는 것은 온 세상의 지성인들이 보기에 기독교가 서양 문명의 사회 체계, 산업 생활, 도덕 기준의 일부라고 신분이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뜻하지 않게 이상이 결여된 과학, 원칙 없는 정치, 일하지 않고 얻은 재산, 자제 없는 쾌락, 인격 없는 지식, 양심(良心) 없는 권력, 도덕을 모르는 산업을 묵인한 죄책감 밑에서 비틀거리는 사회를 후원하는 듯이 보였다.
195:10.21 (2086.7) 현대 기독교의 희망은, 서양 문명의 사회 체계와 산업 정책의 후원을 그만두어야 하며, 한편 아주 용감히 찬양하는 그 십자가 앞에서 겸손히 머리를 숙이고, 거기서 나사렛 예수로부터, 필사 인간이 일찍이 들을 수 있던 가장 큰 진리―하나님은 아버지요 사람은 형제라는 산 복음―을 다시 배우는 데 있다.
196:0.1 (2087.1) 예수는 숭고하고 성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지녔다. 필사 존재에서 생기는 평범한 부침(浮沈)을 겪었지만, 하나님이 확실히 보살피고 안내하심을 결코 종교적으로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믿음은 신성한 존재, 그에게 깃든 조절자의 활동에서 생겨난 통찰력의 결과였다. 그의 믿음은 전통적이거나 단순히 지적 믿음이 아니었고, 온전히 개인적이고 순수한 영적 믿음이었다.
196:0.2 (2087.2) 인간 예수는 하나님이 참되고 아름답고 선할 뿐 아니라, 거룩하고 공정(公正)하고 위대하다고 보았다. 신의 이 모든 속성을 머리 속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으로 한데 집중하였다. 예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요, 동시에 “하늘에 계신, 생명과 사랑의 아버지”였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개념을 예수가 창시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새로이 계시(啓示)함으로, 그리고 모든 필사 인간이 이 사랑의 아버지의 자식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포함으로 그 생각을 숭고한 체험으로 높이고 들어올렸다.
196:0.3 (2087.3) 예수는 우주와 투쟁하느라고 허덕이는 사람, 적대하는 죄 많은 세상과 결사적으로 씨름하는 사람처럼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매달리지 않았다. 어려움의 한가운데서 단지 위안으로서, 또는 절망의 위협 속에서 위로로서 믿음에 의존하지 않았다. 믿음은 그저 불쾌한 현실과 생활의 슬픔을 보상(報償)해 주는 망상이 아니었다. 필사 존재에서 생기는 모든 자연스러운 곤경과 이 세상의 모순에 직면하여 최고로,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평안함을 맛보고, 하늘 아버지의 바로 그 계심 가운데서, 믿음으로 엄청난 생활의 기쁨을 느꼈다. 이 승리한 믿음은 실제로 영적으로 얻은 생생한 체험이었다. 인간적 체험의 가치에 예수가 크게 기여한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관하여 대단히 많은 새 관념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팔팔한 믿음, 새로운 상급 종류의 믿음을 아주 훌륭하게, 인간답게 보여준 것이다. 이 우주의 어떤 세상에서도, 어느 한 필사자의 일생에서, 나사렛 예수의 인간 체험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생생한 실체가 된 적이 없었다.
196:0.4 (2087.4) 지역 우주의 이 세계와 어느 다른 세계에서도 유란시아에서 사신 주의 일생에서 새로운 상급의 종교를 발견하는데, 이것은 우주의 아버지와 개인적으로 영적 관계를 가지는 데 기초를 두고, 진정한 개인적 체험을 거친 최고의 권한으로 온전히 인정받은 종교이다. 예수의 이 살아 있는 믿음은 지적(知的) 숙고보다 더한 것이요, 신비스러운 명상이 아니었다.
196:0.5 (2087.5) 신학(神學)은 신앙을 고정시키고 형성하고 정의하고 교리로 만들지 모르지만, 예수의 인생에서 신앙은 개인적이고, 살아 있고, 독창성 있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순전히 영적 믿음이었다. 이 믿음은 전통을 존경하는 마음도, 신성한 신조로 지녔던 한낱 지적 관념도 아니었지만, 오히려 숭고한 체험이요 그를 단단히 붙든 깊은 확신이었다. 그의 믿음은 너무 참되고 모든 것을 포함했기 때문에, 어떤 영적 의심도 절대로 쓸어버리고, 어떤 상반되는 욕구도 효과적으로 없애버렸다. 아무것도 뜨겁고 숭고한 믿음, 기가 꺾이지 않는 이 믿음의 영적 정박지에서 그를 몰아낼 수 없었다. 명백한 패배를 당하거나 실망과 끔찍한 절망이 한창일 때도, 그는 전혀 두려움 없이, 영적 불굴(不屈)을 가득히 의식하면서 신이 계신 앞에서 차분하게 섰다. 예수는 확고한 믿음을 소유한다는 힘찬 확신을 지녔고, 인생의 벅찬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아버지의 뜻에 의심하지 않고 충성함을 어김없이 보였다. 더할 나위 없는 이 믿음은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는, 잔인하고 정신을 짓밟는 위협에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196:0.6 (2088.1) 종교적 천재(天才)의 경우에, 강한 영적 믿음은 비참한 광신으로, 종교적 자부심의 과장으로 이끄는 일이 허다하지만, 예수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실지 생활에서 그는 자신의 특별한 믿음과 영적 달성으로 인하여 불리한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영적 승진이 하나님과 친히 겪는 체험의 표현, 온전히 무의식이자 저절로 일어나는, 혼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196:0.7 (2088.2) 모든 것을 다 바치고 굽힐 줄 모르는 예수의 영적 믿음은 결코 광신이 되지 않았는데, 이 믿음이 실제적이고 보통 일어나는 사회ㆍ경제ㆍ도덕적 생활 상황의 조화된 가치에 대하여 공정한 지적 판단을 부인하려고 결코 애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눈부시게 조화된 인격이었다. 완전하게 갖춘 신다운 존재였다. 그는 또한 땅에서 하나의 인격으로서 활동하는 존재, 인간답고 신다운 하나의 통합된 존재로서, 훌륭하게 조정되었다. 주는 언제나 혼의 믿음을 성숙한 경험으로 얻은 지혜 및 평가와 조정했다. 인간적으로 충성하는 모든 일―개인의 명예, 가족 사랑, 종교적 의무, 사회적 임무, 경제적 필요―의 현실과 신성함을 날카롭게 깨닫는 것과 조화된 관계에서, 개인적 믿음, 영적 희망, 도덕적 헌신은 언제나 비할 데 없이 종교적으로 통일되어 서로 관련되었다.
196:0.8 (2088.3) 예수의 믿음은 모든 영적 가치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발견된다고 상상했고, 따라서 “먼저 하늘나라를 찾으라”고 하였다. 예수는 진보된 이상적 하늘나라 친교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완성되는 것을 보았다.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의 바로 그 핵심은 이것이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그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처럼 하늘나라가 하나님의 뜻을 구성한다고 상상했기 때문에, 놀랍게 자기를 잊고 한없는 열심으로 이를 실현하는 운동에 몸을 바쳤다. 하지만 열심히 일했던 어떤 임무에도, 그리고 특별한 그의 일생 전체를 통해서, 광신자의 격분이나 자기 본위 종교인의 피상적 천박성이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196:0.9 (2088.4) 주의 일생 전부가 이 살아 있는 믿음, 이 숭고한 종교적 체험으로 인하여 한결같이 조절되었다. 이 영적 태도가 완전히 그의 생각과 느낌, 믿음과 기도, 가르침과 설교를 지배했다. 한 아들이 하늘 아버지의 안내와 보호가 확실하고 분명한 것을 믿는 이 개인적 믿음은 그의 독특한 인생에 영적 실체의 심오한 자질을 부어주었다. 그래도, 신과 가까운 관계를 이렇게 아주 깊이 의식했는데도, 이 갈릴리 사람, 하나님의 갈릴리 사람은, 누가 그를 “선한 선생”이라 일컬었을 때, 그 순간에 대답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자아를 잊어버리는 그러한 눈부신 태도를 구경할 때, 어떻게 우주의 아버지가 자신을 그에게 충만히 나타내고, 그를 통해서 자신을 그 영역의 필사자들에게 드러낼 수 있었는가 우리는 비로소 이해한다.
196:0.10 (2088.5) 예수는 그 영역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모든 헌물 가운데 가장 큰 것을 가져왔으니, 즉 신(神)의 뜻을 행하는 훌륭한 봉사에 자신의 뜻을 거룩히 드리고 바친 것이다. 예수는 언제나, 한결같이,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견지에서 종교를 풀이했다. 기도나 종교 생활에서 어떤 다른 모습에 관하여 주의 생애를 연구할 때, 그가 무엇을 가르쳤는가가 아니라 무슨 일을 했는가 보라. 그에게 기도(祈禱)는 영적 태도의 성실한 표현이요, 혼의 충성 선언, 개인적 헌신의 낭독, 감사의 표시, 긴장된 감정의 방지이다. 갈등의 예방이요, 지적 사고(思考)의 승화요, 소망을 고귀하게 만들고, 도덕적 결심을 확신하고, 값진 생각을 하며, 상급 성향에 활력을 붓고, 충동을 거룩히 바치는 것이다. 관점의 해명이요, 믿음의 선언, 의지의 초월적 항복, 확신의 숭고한 주장, 용기의 전시, 발견의 선언이요, 최고의 헌신을 고백하는 것이다. 거룩히 헌신함을 확인하는 것, 어려움을 조정하는 기법이요, 이기심ㆍ악ㆍ죄를 향한 인간의 모든 성향을 물리치려고 혼의 통합된 능력을 힘차게 동원하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헌신적으로 거룩히 바친 바로 그러한 인생을 살았고, 바로 그러한 기도로 일생을 승리로 마쳤다. 견줄 데 없는 그의 종교 생활의 비결은 하나님의 계심을 이렇게 의식하는 것이었다. 계몽이나 목소리나 환상이나 특별한 종교적 버릇이 아니라, 총명한 기도와 성실한 예배로―하나님과 끊임없이 교통함으로―그 비결을 얻었다.
196:0.11 (2089.1) 땅에서 사신 예수의 일생에서 종교는 생생한 체험, 즉 영적인 것의 존중을 비롯하여 올바름을 실행하기까지, 직접 몸소 행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믿음은 신성한 영의 열매, 초월적 열매를 맺었다. 그 믿음은 어린아이의 믿음처럼 미숙하고 쉽사리 믿는 태도가 아니라, 여러 면에서 어린아이의 생각처럼 의심하지 않는 믿음과 비슷하였다. 아이가 부모를 믿는 것과 비슷하게 예수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우주를 깊이 신뢰했다―어린아이가 부모의 환경을 믿는 것 같이, 바로 그렇게 믿었다. 우주가 근본적으로 선함을 예수가 진심으로 믿은 것은 어린아이가 지상의 환경이 안전함을 믿는 것과 대단히 비슷하였다. 어린아이가 땅에 있는 부모에게 기대듯 하늘 아버지를 의지하였고, 뜨거운 믿음은 결코 하늘 아버지가 확실히 보살핌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두려움이나 의심이나 회의(懷疑)에 심각하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불신(不信)이 그의 일생에서 자유로운 독창적 표현을 막지는 않았다. 성장한 어른의 굳건하고 총명한 용기, 그리고 의지하는 어린아이의 성실하고 신뢰하는 낙관, 이 두 가지를 가졌다. 그의 믿음은 전혀 두려움 없는 그러한 신뢰의 높이까지 다다랐다.
196:0.12 (2089.2) 예수의 믿음은 어린아이가 부모를 의지하는 것과 같이 순수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절대로 의심없이 믿었고, 그래서 그 믿음은 동료 존재들과 접촉하는 매력에, 그리고 우주의 경이에 반응했다. 신다운 것에 기대는 감각이 아주 완벽하고 대단히 자신이 넘쳐서, 자기가 절대로 안전하다는 기쁨과 확신을 낳았다. 그의 종교적 체험에는 망설이는 겉치레가 전혀 없었다. 성장한 어른의 이 위대한 지능 속에서 어린아이의 믿음이 종교적 의식(意識)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를 최고로 다스렸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고서 너희는 하늘나라로 들어가지 못할지니라”하고 한때 말한 것은 당연하다. 예수의 믿음이 어린아이 같기는 했어도, 어떤 의미에서도 유치하지는 않았다.
196:0.13 (2089.3)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를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함께 믿으라, 하나님의 사랑이 현실인 것을 믿고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보장이 확실한 것을 완전히 믿고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주는 모든 추종자가 그의 초월적 믿음을 충분히 함께 가지기를 바란다. 그가 믿은 것을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가 믿은 것처럼 믿으라고, 예수는 대단히 감동스럽게 추종자들을 자극했다. 이것이 “나를 따르라”하는 한 가지 최상의 요구 조건의 온전한 의미이다.
196:0.14 (2090.1) 땅에서 예수의 일생은 한 가지 큰 목적에 바쳤다―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 종교적으로 그리고 신앙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예수의 믿음은 어린아이의 믿음처럼 의지했지만, 전혀 주제넘지 않았다. 그는 건전하고 당당한 결정을 내리고, 다양한 실망을 용감히 겪고, 특별한 어려움을 굳게 이겨냈으며, 의무의 엄격한 요구 조건을 주춤하지 않고 따랐다. 예수가 믿은 것을 믿고 그가 믿은 것처럼 믿는 데는 힘찬 의지와 틀림없는 확신이 필요했다.
196:1.1 (2090.2) 아버지의 뜻에 그리고 사람에게 봉사하는 데 바친 예수의 열정은 사람의 결심과 인간적 결의보다 더한 것이었다. 그렇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데 진심으로 바친 거룩한 열정이었다. 미가엘이 군주라는 사실이 아무리 대단해도 상관 없이, 너희는 사람들로부터 인간 예수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 주는 하나님일 뿐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는 사람들에게 속하고, 사람들은 그에게 속한다. 인간 예수를 투쟁하는 필사자로부터 빼앗으려고 종교 자체를 잘못 해석하는 것은 얼마나 딱한 일인가! 그리스도가 인간인가 신인가 토론하면서 나사렛 예수가 신앙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한 종교적 인간이었다는 예외적 진리를 놓치지 말라. 그는 유란시아에서 일찍이 살았던 가운데 참으로 가장 종교적 인간이었다.
196:1.2 (2090.3) 열아홉 세기 동안 신학의 전통과 종교적 독단(獨斷) 한가운데 묻혔던 그의 무덤으로부터 인간 예수의 상징적 부활을 증언할 때가 무르익었다. 나사렛 예수는,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라는 빛나는 개념에도 이제 더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이 계시를 통해서, 사람의 아들이 전통적 신학(神學)의 무덤으로부터 회복되고, 그 이름을 지니는 교회와 모든 다른 종교에게 살아 있는 예수로서 제시된다면, 얼마나 초월적 수고가 될 것인가! 기독교 신자들의 친교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종교적으로 헌신하고, 사람에게 사심 없이 봉사하는 데 거룩히 바친 그의 참 일생을 보여주면서, 그 친교가 주를 “따를” 수 있도록, 서슴지 않고 그러한 믿음과 생활 관습을 조정할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인이라고 공언(公言)한 자들은,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경제적으로 잘못 적응된 이기적 친교, 거만하며 신성하게 되지 않은 친교가 노출될까 두려워하는가? 갈릴리의 예수가 필사 인간의 지성과 혼 속에서 개인적 종교 생활의 이상으로서 다시 자리를 찾는다면, 제도화된 기독교는 전통적 교회 권한이 위협받는 가능성을, 아니 교회 권한이 전복될까 두려워하는가? 정말로, 예수의 살아 있는 종교가 예수에 관한 신학적 종교를 갑자기 갈아치운다면, 기독교 문명에서 일어날 사회적 재조정, 경제적 변화, 도덕의 회복, 종교적 수정은 철저하고 혁신이 될 것이다.
196:1.3 (2090.4) “예수를 따르는” 것은 그의 종교적 믿음을 몸소 함께 가지고, 사람에게 사심 없이 봉사한 주의 일생의 그 정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예수가 무엇을 믿었는가를 찾아내고, 그 이상(理想)을 발견하며, 그의 드높은 인생의 목적을 성취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지식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은 예수의 종교적 일생과 그가 어떻게 그런 일생을 살았는가를 아는 것이다.
196:1.4 (2090.5) 서민들은 예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진실이 세상에 다시 선포된다면, 종교적 동기에 거룩히 바친 그의 성실한 인생을 발표하는 것에 서민들은 다시 반응할 것이다.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기쁘게 들은 것은 그가 그들 가운데 하나요, 꾸밈없는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적 스승은 정말로 보통 사람이었다.
196:1.5 (2091.1) 육체를 입은 예수의 일생, 겉에서 보이는 일생을 글자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믿음을 함께 가지는 것이 하늘나라를 믿는 사람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가 하나님을 의지한 것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가 사람들을 믿은 것 같이 사람들을 믿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이나 사람들이 형제인 것을 놓고 한 번도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는 하나를 생생하게 보여준 예이었고, 다른 하나의 심오한 시범이었다.
196:1.6 (2091.2) 인간인 것을 의식한 때부터 신다운 것을 깨닫기까지 사람이 진보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사람의 성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의식하는 데까지 올라갔다. 주는 필사 지능의 믿음, 그리고 깃드는 조절자의 행위가 함께 성취하여, 인간다운 것으로부터 신다운 것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높이 올라갔다. (그가 인간이라는 현실을 내내 충분히 의식하면서) 신성(神性)의 총체에 도달한 것을 사실로 깨닫는 데는, 차츰차츰 신답게 되는 것을 믿음으로 의식하는 일곱 단계가 따랐다. 점진적으로 자아를 각성하는 이 여러 단계는 주의 자신 수여 체험에서 다음의 특별한 여러 사건으로 구별된다:
196:1.7 (2091.3) 1. 생각 조절자의 도착.
196:1.8 (2091.4) 2. 열두 살쯤 되었을 때,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나타났던 이마누엘의 사자.
196:1.9 (2091.5) 3. 세례에 뒤따른 여러 표시.
196:1.10 (2091.6) 4. 변모산에서 겪은 체험.
196:1.13 (2091.9) 7. 마침내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품에 안긴 것. 이것은 그의 우주를 다스리는 무제한 통치권을 부여하였다.
196:2.1 (2091.10) 언젠가 기독교회의 개혁(改革)은 충분히 깊이 파고들어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인 예수의 가르침, 변질되지 않은 종교적 가르침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너희는 예수에 관한 종교를 전파해도 좋지만, 예수의 종교를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오순절의 열심에 빠져, 베드로는 뜻하지 않게 새 종교, 부활하고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종교를 창시했다. 사도 바울은 나중에 이 새 복음을 기독교로 변화시켰는데, 이것은 그의 신학 견해를 담고 다마스커스 길에서 그가 예수를 개인적으로 체험한 것을 그리는 종교였다. 하늘나라 복음은 갈릴리의 예수가 몸소 겪은 종교적 체험에 기초를 두었으며, 기독교는 거의 순전히 사도 바울이 개인적으로 겪은 종교적 체험에 기초를 두었다. 신약(新約)의 거의 전부가, 의미 있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예수의 종교 생활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종교적 체험을 토론하고 그 자신의 종교적 확신을 그리는 데 바쳐진다. 마태ㆍ마가ㆍ누가의 어떤 부분은 별도로 하고, 이 진술에 주목할 예외는 히브리서와 야고보 서한 뿐이다. 베드로도 그가 쓴 글에서, 주의 개인적 종교 생활로 겨우 한 번 되돌아갔을 뿐이다. 신약은 훌륭한 기독교 문헌이지만, 예수다운 모습이 빈약할 따름이다.
196:2.2 (2091.11) 육체를 입은 예수의 일생은, 원시적 경외감과 인간적 존경이 나타나는 초기의 관념으로부터, 몸소 영적 교통을 가지는 여러 해를 거쳐서, 마침내 그가 아버지와 하나임을 의식하는 높은 상급 지위에 이를 때까지 거쳐간, 뛰어난 종교적 성장을 묘사한다. 그러므로 짧은 일생 안에 예수는 사람이 땅에서 시작하고, 연속된 파라다이스 이전 생애 수준의 여러 영 훈련 학교에서[1] [1815] 오래 머무른 뒤에야 보통 이룩하는, 종교적ㆍ영적 진보 체험을 거쳤다. 예수는 개인의 종교적 체험에서 확실히 믿는 것들을 순전히 인간으로서 의식(意識)하는 경지로부터, 자기의 신 성품을 분명히 깨닫는 숭고한 영적 높이까지, 그리고 한 우주의 경영에서 우주의 아버지와 그가 가까운 관계를 가졌음을 의식하기까지, 나아갔다. 그를 선한 선생이라고 부른 사람에게 자기도 모르게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외에 아무도 선하지 않으니라” 말하도록 자극한 상태, 필사자로서 의존하는 겸손한 지위로부터 진보하였고 그에게 “너희 가운데 누가 나를 정죄하느냐?” 외치도록 이끈 신성(神性)의 성취를 숭고하게 의식하기까지 이르렀다. 인간인 것으로부터 신다운 것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점진적으로 올라간 것은 순전히 필사자의 성취였다. 이렇게 신성에 이르고 나서, 하나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여전히 똑같은 인간 예수, 사람의 아들이었다.
196:2.3 (2092.1) 마가ㆍ마태ㆍ누가는 신의 뜻을 확인하고 그 뜻을 행하려는 숭고한 투쟁에 몰두한 인간 예수의 그림을 얼마큼 간직한다. 요한은 신성을 완전히 의식하면서 땅에서 걸어다닌 승리한 예수의 그림을 제시한다. 주의 일생을 연구한 자들이 저지른 큰 잘못은, 더러가 그를 전적으로 인간이라 생각했고 더러는 오직 신(神)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의 체험 전부를 통해서 내내, 아니 아직도 그렇다시피, 그는 참으로 인간이자 신이었다.
196:2.4 (2092.2) 그러나 인간 예수가 종교를 가졌다고 인식되기는 했어도 신다운 예수(그리스도)가 거의 하룻밤 사이에 종교가 되었기 때문에 가장 큰 잘못이 일어났다. 바울의 기독교는 사람들이 신다운 그리스도를 틀림없이 경배하도록 만들었지만, 갈릴리의 예수, 투쟁하는 용감한 인간 예수를 거의 전적으로 못보고 놓쳤다. 인간 예수는 개인의 종교적 믿음의 용기와 그에 깃드는 조절자의 영웅다운 행위로 인하여, 낮은 인간 수준에서 신과 하나가 되기까지 올라갔으며, 이처럼 모든 필사자가 그렇게 인간으로부터 신성에 이르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그러한 새 생명의 길이 되었다. 어떤 영적 단계, 어떤 세계에 있는 필사자라도 예수 개인의 일생에서, 가장 낮은 영 수준에서 가장 높은 신다운 가치에 이르기까지, 몸소 겪는 모든 영적 체험의 시초부터 끝까지 올라가는 동안에, 그들에게 힘을 주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을 발견할지 모른다.
196:2.5 (2092.3) 신약을 기록하던 당시의 저자(著者)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을 아주 깊이 믿었을 뿐 아니라, 하늘나라를 완성하려고 그가 즉시 땅으로 돌아오리라고 열심히, 진지하게 믿었다. 주가 즉시 돌아온다는 이 굳센 믿음은 순전히 인간다운 주의 체험과 속성을 묘사하는 언급을 기록에서 빼버리는 경향을 많이 부추겼다. 기독교 운동 전체가 나사렛 예수의 인간다운 그림으로부터 멀리, 부활한 그리스도, 영화롭게 되었고 곧 돌아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쪽으로 가는 경향이 있었다.
196:2.6 (2092.4)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인간 형제들을 위하여 수고하면서 몸소 체험한 종교를 세웠다. 바울은 영화롭게 된 예수가 예배의 대상이 되고, 그 형제 단체가 신다운 그리스도를 믿는 동료 신자들로 이루어진 그러한 종교를 세웠다. 예수의 자신 수여에서 이 두 개념은 신이자 인간인 일생에 잠재했다. 땅에서 사신 일생에서 주의 인간 성품과 신다운 성품이 뗄 수 없이 붙어 있고 최초의 하늘나라 복음에서 아주 영화롭게 발표된 바와 같이, 이 두 성품을 적절히 인정하는 통일된 종교를 추종자들이 만들지 못한 것은 정말로 유감스럽다.
196:2.7 (2093.1) 예수가 세상에서 아주 진심으로 헌신한 종교가였다는 것을 기억하기만 한다면, 너희는 그의 어떤 강경한 발언에 충격을 받거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아낌없이 몸을 바친, 온통 거룩하게 헌신한 필사자였다. 어렵게 보이는 말씀 가운데 많은 것은 추종자에게 내리는 명령이라기보다 믿음을 친히 고백한 것이요 헌신(獻身)의 서약이었다. 바로 이러한 한결같은 목적과 사심 없는 헌신으로 인하여 그는 짧은 일생에 인간의 지성을 정복하는 데 그렇게 특별히 진보할 수 있었다. 그의 선언 가운데 많은 것은 모든 추종자에게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부과한 요구를 고백한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하늘나라 운동에 헌신하면서, 예수는 지나간 다리를 모두 불살랐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있는 모든 장애물을 희생했다.
196:2.8 (2093.2) 예수가 가난한 자를 축복한 것은 그들이 보통 성실하고 경건했기 때문이다. 부유한 자가 보통 바람을 피우고 신앙심이 없기 때문에 그들을 비난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종교가 없는 빈민을 비난하고, 거룩하게 헌신하는 경건한 부자를 칭찬할 것이다.
196:2.9 (2093.3) 예수는 세상에서 사람이 마음을 편안히 가지도록 이끌었다. 금기(禁忌)에 노예가 된 처지로부터 사람들을 구했고, 세상이 근본적으로 악하지 않다고 가르쳤다. 그는 땅의 생활을 벗어나기를 동경(憧憬)하지 않았다.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 아버지의 뜻을 만족스럽게 행하는 기법을 통달했다. 현실인 세상의 바로 한가운데서 이상적 종교 생활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바울과 달리, 예수는 인류에 대하여 비관적 견해를 가지지 않았다. 주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바라보았고, 살아남기를 택한 자에게 장대하고 영원한 앞날이 있음을 미리 알았다. 도덕 면에서 회의론자가 아니었고,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 눈으로 사람을 보았다. 모든 사람이 사악하기보다 약하다고, 타락하기보다 갈팡질팡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지위가 어떻든 상관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의 형제였다.
196:2.10 (2093.4) 그는 사람들에게 시간 세계와 영원 속에서 자신을 높이 평가하라고 가르쳤다. 사람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예수는 기꺼이 인류에게 끊임없이 봉사하는 데 몸을 바쳤다. 그의 종교에서 황금률을 필수 요인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이 유한자(有限者)의 무한한 가치였다. 어떤 필사자가 예수의 특별한 신임을 얻고서도 격려를 받지 않을 수 있는가?
196:2.11 (2093.5) 예수는 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아무런 규칙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의 사명은 종교에 관한 것이었고, 종교는 순전히 개인의 체험이다. 사회가 성취할 가장 높은 궁극의 목적은 결코 사람들이 형제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뛰어넘기를 바랄 수 없고, 이것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인식에 기초를 둔다. 사회가 성취할 모든 이상은 오직 이 신의 나라가 올 때 이루어질 수 있다.
196:3.1 (2093.6) 개인의 영적 종교적 체험은 필사자가 겪는 대부분의 문제에 효과적 해결책이며, 인간의 모든 문제를 효과 있게 분류하고 평가하고 조정한다. 종교는 인간의 걱정거리를 없애거나 사라지게 만들지 않지만, 이를 분해하고 흡수하고 밝게 비춰주고 초월한다. 참된 종교는 필사자의 모든 요구 조건에 효과적으로 순응하기 위하여 인격을 통일한다. 종교적 믿음―깃드는 신의 계심이 분명히 이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우주의 첫째 근원을 그것으로 인식하는 지적 논리, 이 첫째 근원을 그분이라고 확언하는 혼의 분명한 주장,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을 어김없이 좁힐 수 있게 만들며, 예수의 복음에서 그분은 하늘 아버지요, 인간을 구원하는, 성격을 가진 하나님이다.
196:3.2 (2094.1) 우주 실체에는 꼭 세 가지 원소(元素)가 있으니, 사실ㆍ관념ㆍ관계이다. 종교적 의식은 이 실체들을 과학ㆍ철학ㆍ진리로서 식별한다. 철학은 이 활동을 이성ㆍ지혜ㆍ믿음―물리적 실체, 지적 실체, 영적 실체―로 보고 싶어한다. 우리는 이 실체들을 사물ㆍ의미ㆍ가치로 부르는 버릇이 있다.
196:3.3 (2094.2) 실체를 점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과 대등하다. 하나님을 찾아내는 것, 실체와 동일함을 의식하는 것은 자아 완성―자아 전체, 자아 총체―의 체험과 맞먹는다. 총 실체의 체험은 하나님을 충만히 깨닫는 것이요, 하나님을 아는 최종 체험이다.
196:3.4 (2094.3) 인생의 총합은 사람이 사실로 교육받고, 지혜로 고귀하게 되며, 종교적 믿음으로 구원되는―정당하게 되는―것을 아는 것이다.
196:3.5 (2094.4) 물리적 확실성은 과학의 논리(論理)에 있고, 도덕적 확실성은 철학의 지혜에, 영적 확실성은 진정한 종교적 체험의 진실함에 있다.
196:3.6 (2094.5) 지성이 전적으로 물질은 아니기 때문에, 사람의 지성은 높은 수준의 영적 통찰력과 그에 상당하는 신성한 가치 분야에 이를 수 있다. 사람의 지성 속에 영 알맹이가―신의 계심인 조절자가―있다. 인간의 지성에 이 영(靈)이 깃든다는 세 가지 증거가 따로 있다:
196:3.7 (2094.6) 1. 인도주의적 교제―사랑. 순전한 동물 지성은 자아를 보호하려고 함께 살지 모르지만, 오직 영이 깃든 지능이 사심 없이 이타적(利他的)이고 조건 없이 사랑하는 성질이 있다.
196:3.8 (2094.7) 2. 우주의 해석―지혜. 영이 깃든 지성만이 우주가 개인에게 친절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196:3.9 (2094.8) 3. 인생의 영적 평가―예배. 영이 깃든 사람만이 신의 계심을 깨닫고, 이처럼 신성(神性)을 미리 맛보는 가운데, 그리고 그와 함께 더욱 충만한 체험을 얻기를 추구할 수 있다.
196:3.10 (2094.9) 인간의 지성은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지 않으며, 인간의 체험은 우주를 보는 통찰력을 낳지 않는다. 통찰력, 곧 도덕적 가치를 인식하고 영적 의미를 헤아리는 것에 관하여 말하면, 인간의 지성이 할 수 있는 것은 발견ㆍ인식(認識)ㆍ해석, 그리고 선택밖에 없다.
196:3.11 (2094.10) 우주의 도덕적 가치는 필사 지성이 세 가지 기본적 판단을 내림으로, 곧 선택함으로, 지적 소유물이 된다:
196:3.12 (2094.11) 1. 자아의 판단―도덕적 선택.
196:3.15 (2094.14) 따라서 인간의 모든 진보는 계시와 진화의 공동 기법으로 실현되는 듯하다.
196:3.16 (2094.15) 사랑을 주는 신다운 자가 사람 속에 살지 않으면, 사람은 사심 없이 영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 해석하는 자가 지성 속에 살지 않으면, 우주의 통일성을 참으로 깨달을 수 없다. 평가하는 자가 사람과 함께 거하지 않으면, 사람은 도저히 도덕적 가치를 평가하고 영적 의미를 헤아릴 수 없다. 이 사랑하는 자는 무한한 사랑의 바로 그 근원으로부터 온다. 이 해석자는 우주의 통일의 일부이며, 이 평가자는 신성하고 영원한 실체에 담긴 모든 절대 가치의 중심 근원의 자식이다.
196:3.17 (2095.1) 종교적 의미를―영적 통찰력을―가진 도덕적 평가는 선과 악, 진실과 잘못,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 인간다운 것과 신다운 것, 시간과 영원 사이에 개인이 선택함을 가리킨다. 인간이 살아남는 것은 상당히 많이 이 영적 가치 분류자가―깃드는 해석자이자 통일자가―골라놓은 가치를 선택하려고 인간의 의지(意志)를 거룩하게 바치는 데 달려 있다. 개인의 종교적 체험은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으니, 하나는 인간의 지성 속에서 발견하는 단계요, 하나는 깃드는 신다운 영이 계시하는 단계이다. 지나치게 세상에 익숙하거나 또는 종교가라고 공언하는 자들의 경건치 못한 행위의 결과로서, 한 사람 또는 한 세대의 사람들조차 안에 깃드는 하나님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그만둘 수 있다. 신의 계시(啓示)를 받으면서 진보하지 못하거나 그 계시에 도달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영적으로 부진한 그러한 태도는 깃드는 생각 조절자의 계심과 영향 때문에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다.
196:3.18 (2095.2) 신이 깃드는 현실을 깨닫는 이 심오한 체험은 언제까지나 자연 과학의 투박한 유물론 기법을 초월한다. 너희는 영적 기쁨을 현미경 밑에 놓을 수 없고, 사랑을 저울에 달 수 없고, 도덕적 가치를 자로 잴 수 없다. 영적 예배의 질(質)을 수치로 어림잡을 수도 없다.
196:3.19 (2095.3) 히브리인은 도덕적으로 숭고한 종교를 가졌고, 그리스인은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종교를 발전시켰으며, 바울, 그리고 함께 의논한 자들은 믿음ㆍ소망ㆍ자선의 종교를 창시했다. 예수는 사랑의 종교, 즉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는 보장과 함께, 인간의 형제 정신에 봉사하면서, 이 사랑을 나누는 결과로 기쁨과 만족을 얻는 종교를 계시하고 본보기로 보였다.
196:3.20 (2095.4) 깊이 생각하여 도덕적 결정을 내릴 때마다, 사람은 즉시 혼(魂)에 새로이 신(神)이 쳐들어오는 것을 체험한다. 도덕적 선택은 외부 조건에 대하여 안에서 반응하는 동기로서 종교가 된다. 그러나 그러한 진정한 종교는 순전히 주관적 체험이 아니다. 그런 종교는 객관적 총체―우주와 그 창조주―에 대하여 의미 깊게, 총명하게 반응하는 개인의 주관성 전체를 의미한다.
196:3.21 (2095.5) 사랑하고 사랑받는, 아름답고 초월적인 체험은 순전히 주관적이라고 해서 단순히 정신의 환상은 아니다. 필사 존재와 관련되고 참으로 신다운, 하나의 객관적 실체, 생각 조절자는 인간이 지켜보기에 순전히 주관적 현상으로서 작용하는 듯이 보인다. 사람이 가장 높은 객관적 실체,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은 오직 그를 알고 예배하고 그의 아들임을 깨닫는, 순전히 주관적 체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196:3.22 (2095.6) 참된 종교적 예배는 자아를 속이는, 쓸데없는 혼잣말이 아니다. 예배는 신답게 실재하는 것, 실체의 바로 그 근원인 것과 몸소 교제하는 것이다. 사람은 예배로 인하여 더 나아질 생각을 품고, 그렇게 함으로 궁극에는 최선에 이른다.
196:3.23 (2095.7)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 이상으로 삼고 이를 위하여 봉사하려는 시도는 진정한 종교적 체험을―영적 실체를―대신하는 물건이 아니다. 심리학과 유심론(唯心論)은 종교적 실체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 지능이 추정하는 것은 정말로 거짓 신―사람 모습을 입은 신―을 창시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참으로 의식하는 상태는 그런 기원을 가지지 않는다. 하나님 의식(意識)은 깃드는 영 안에 거한다. 사람이 만든 많은 종교적 체계는 인간 지능이 빚은 것으로부터 생겨나지만, 하나님 의식이 반드시, 괴상한 이 종교적 노예 체계의 일부는 아니다.
196:3.24 (2095.8) 하나님은 단지 사람의 유심론(唯心論)이 발명한 물건이 아니라, 동물을 뛰어넘는 모든 그러한 통찰력과 가치의 바로 그 근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진리ㆍ아름다움ㆍ선 개념을 통일하려고 지어낸 가설(假說)이 아니다. 사랑의 성격자이며, 그로부터 이 모든 우주 명시가 파생된다. 사람의 세계에 있는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은 파라다이스 실체들을 향하여 올라가는 필사자 체험의 영적 성향이 높아짐으로 통일된다.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의 통일은 오로지 하나님을 아는 인격의 영적 체험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196:3.25 (2096.1) 도덕성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의식하는 데, 조절자가 안에 계심을 몸소 깨닫는 데 필수인 선재(先在)하는 토양이지만, 그러한 도덕성은 종교적 체험과 그 결과로 생기는 영적 통찰력의 근원이 아니다. 도덕적 성품은 동물을 뛰어넘지만 영 밑에 있다. 도덕성은 의무를 인식하는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존재함을 깨닫는 것과 같다. 인격이 달성하는 물질 분야와 영적 분야 사이에 상물질이 작용하는 것 같이, 도덕의 구역은 동물 지성과 인간 종류의 지성 사이에 끼어 있다.
196:3.26 (2096.2) 진화하는 지성(知性)은 법칙ㆍ도덕률ㆍ윤리를 발견할 수 있지만, 수여된 영, 깃드는 조절자는 점진하는 인간 지성에게 입법자,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모든 것의 아버지 근원을 드러낸다. 그렇게 빛을 받은 사람은 종교를 소유하며, 하나님을 찾으려는, 길고 모험이 가득한 탐구를 시작하기 위하여 영적 장비가 갖추어져 있다.
196:3.27 (2096.3) 도덕성은 반드시 영적인 것이 아니지만, 전적으로, 순전히 인간다울지 모른다. 하지만 참된 종교는 모든 도덕적 가치를 높이고 더욱 뜻있게 만든다. 종교가 없는 도덕은 궁극의 선을 드러내지 못하며, 또한 그 자체의 도덕적 가치조차 살아남지 못하게 한다. 종교는 도덕이 인식하고 승인하는 모든 것을 강화하고 영화롭게 만들고, 확실히 살아남게 만든다.
196:3.28 (2096.4) 종교는 과학ㆍ예술ㆍ철학ㆍ윤리ㆍ도덕률 위에 서 있지만, 이로부터 독립되지 않는다. 이것들은 모두 개인 및 사회적인, 인간의 체험 속에 떼어낼 수 없이 서로 얽혀 있다. 종교는 필사 성품을 입고서 사람이 맛보는 최고의 체험이지만, 언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영원히 신학(神學)이 진정한 종교적 체험을 언제라도 적절히 묘사할 수 없게 만든다.
196:3.29 (2096.5) 종교적 통찰력은 패배한 사람에게 더 높은 소망과 새 결심을 가지게 하는 힘을 소유한다. 사랑은 사람이 우주에서 올라가면서 이용해도 좋은 가장 높은 동기이다. 그러나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이 빠져 버린 사랑은 기껏해야 감정, 철학적 왜곡, 정신의 환상, 영적 속임수일 뿐이다. 사랑은 반드시 상물질 및 영으로 진보하는 연속된 수준에서 다시 정의(定義)되어야 한다.
196:3.30 (2096.6) 예술은 사람이 물질 환경에서 아름다움이 없는 상태를 벗어나려고 애쓰는 결과로 생기며, 예술은 상물질 수준을 향하는 손짓이다. 과학은 사람이 물질 우주에서 수수께끼로 보이는 것을 풀려는 노력이다. 철학은 사람이 인간의 체험을 조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종교는 사람의 최고의 손짓이요, 최종의 실체를 향하여 장엄하게 손을 뻗는 것, 하나님을 찾아내고 그와 같이 되려는 결심이다.
196:3.31 (2096.7) 종교적 체험 분야에서, 영적 가능성은 잠재하는 현실이다. 앞을 향한 사람의 영적 욕구는 정신의 환상이 아니다. 사람이 우주에서 꿈꾸는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닐지 모르지만, 많은 것, 허다한 것이 진리이다.
196:3.32 (2096.8) 어떤 사람들의 인생(人生)은 너무 위대하고 고귀해서, 단지 성공적인 낮은 수준으로 내려올 수 없다. 동물은 환경에 적응해야 하지만, 종교적인 사람은 환경을 뛰어넘고, 이 방법으로 이 신의 사랑을 보는 통찰력을 통해서, 현재 물질 세계의 한계를 벗어난다. 이 사랑 개념은 사람의 혼 속에서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을 발견하려는, 동물을 뛰어넘는 노력이 생기게 만든다.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을 찾아낼 때, 사람은 그 품에 안겨 영화롭게 된다. 사람은 이를 실천하고, 정의(正義)를 실행하려는 소망으로 불탄다.
196:3.33 (2097.1) 낙심하지 말지니, 인간의 진화는 아직도 진행되고 있고, 예수 안에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주는 계시(啓示)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196:3.34 (2097.2) 현대인이 당면한 큰 도전은 인간의 지성 안에 거하는 신다운 훈계자와 의사 소통을 개선하는 것이다. 육체를 입고서 사람이 겪는 가장 큰 모험은 영 의식의 경계지에 이르려고―신성한 계심과 접촉하려고―마음을 다하여 노력을 기울이면서, 혼 의식이 태어나는 어둑한 영역을 거쳐서, 자의식(自意識) 테두리를 확장하려고, 치우치지 않고 정신 차려 노력하는 데 있다. 그러한 체험은 하나님 의식이요, 앞서 존재하는 진실, 곧 하나님을 이해하는 종교적 체험을 힘차게 확인하는 체험이다. 그러한 영 의식은 하나님의 아들임이 사실인 것을 아는 것과 대등하다. 그렇지 않으면, 아들이라는 확신은 믿음의 체험이다.
196:3.35 (2097.3)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은 자아(自我)를 우주와 함께, 그리고 우주의 가장 높은 수준의 영적 실체와 통합되는 것과 대등하다. 어떤 가치라도 오직 그 영적 알맹이만 썩지 않는다.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도 인간의 체험에서 썩지 않을지 모른다. 사람이 살아남기를 택하지 않는다면, 그때 뒤에 남는 조절자는 사랑으로 태어나고 봉사하면서 양육된 그 실체들을 보존한다. 이 모두가 우주의 아버지의 일부이다. 아버지는 살아 있는 사랑이요, 아버지의 이 생명은 그 아들들 안에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영은 아들들의 아들―필사 인간―안에 계신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보건대, 아버지 관념은 여전히 인간의 가장 높은 하나님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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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https://www.urantia.org/ko/yuransia-seo/je-108-pyeonsaenggag-jojeoljayi-samyeonggwa-bong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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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https://www.urantia.org/ko/yuransia-seo/je-190-pyeonyesuga-sangmuljil-moseubeuro-natana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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