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0 편 하늘나라
유란시아서
제 170 편
하늘나라
170:0.1 (1858.1) 3월 11일, 토요일 오후에, 예수는 펠라에서 마지막으로 설교하였다. 이것은 그의 대중 봉사에서 주목할 만한 연설에 속하며, 하늘나라에 대하여 충분하고 완벽한 논설을 담고 있다. 그는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의 뜻과 중요성에 관하여, 사도와 제자들의 머리 속에 혼란이 존재하는 것을 알았고, 이 두 가지를 자신 수여 사명에서 서로 바꿀 수 있는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하늘의 나라라는 바로 그 용어는 그것이 대표하는 의미를 땅의 나라 및 현세의 정부들과 전혀 상관 없이 구분하기에 충분해야 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단 한 세대 안에 없애기에는 현세의 임금 관념이 유대인 머리 속에 너무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육성해 온 이 왕국 개념을 예수는 처음에 드러내놓고 반대하지 않았다.
170:0.2 (1858.2) 이 안식일 오후에 주는 하늘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분명히 밝히려고 애썼다. 그 주제를 모든 관점에서 논의하고, 그 용어가 어떤 많은 다른 의미로 쓰였는가 밝히려고 애썼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전 경우에 예수가 하신 수많은 말씀을 덧붙이고, 바로 이날 저녁 토론 시간에 사도들에게만 주신 논평을 얼마큼 넣어서 그 연설을 확대하겠다. 우리는 또한 하늘나라 관념이 후일에 기독교회에 관계되는 대로, 나중에 결국 어떻게 되어 갔는가 다루는 논평을 더러 하겠다.
1. 하늘나라 개념
170:1.1 (1858.3) 예수의 설교를 발표하는 것과 관련하여, 히브리 성서 전체에 걸쳐서 하늘나라에 관하여 두 가지 개념이 있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70:1.2 (1858.4) 1. 오늘의 현실로서, 그리고
170:1.3 (1858.5) 2. 앞날의 희망으로서―메시아가 출현하고 나서 하늘나라가 충만하게 실현될 때. 이것이 세례자 요한이 가르쳤던 하늘나라 개념이었다.
170:1.4 (1858.6) 맨 처음부터 예수와 사도들은 이 두 개념을 다 가르쳤다. 머리 속에 간직해야 할 두 가지 다른 하늘나라 이념이 있었다.
170:1.5 (1858.7) 3. 후일에 유대인이 가진 개념, 곧 초자연적 기원을 가지고 기적으로 개시되는 세계적 초월 왕국의 개념.
170:1.6 (1858.8) 4. 세상이 끝날 때 선이 악에 승리함으로 신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그리는 페르시아인의 가르침.
170:1.7 (1858.9) 예수가 땅에 오시기 바로 전에 유대인은 이 모든 하늘나라 이념을 유대인이 승리하는 시대를 개시하려고 메시아가 온다는 묵시적 개념으로 통합하고 혼동하였다. 이 시대는 땅에서, 새 세상에서, 하나님이 최상으로 다스리는 영원한 시대, 온 인류가 야웨를 예배할 시대였다. 이 하늘나라 개념을 이용하기로 하면서 예수는 유대 및 페르시아 종교의 가장 중요한 최고의 유산(遺産)을 이용하기로 작정했다.
170:1.8 (1859.1) 기독교 시대의 여러 세기를 통하여 사람들이 이해하고 오해한 바와 같이, 하늘나라는 네 가지 뚜렷이 다른 집단의 관념을 담고 있다:
170:1.9 (1859.2) 1. 유대인의 개념.
170:1.10 (1859.3) 2. 페르시아인의 개념.
170:1.11 (1859.4) 3. 몸소 체험한다는 예수의 개념―”너희 안에 있는 하늘나라.”
170:1.12 (1859.5) 4. 기독교를 창시하고 전파한 자들이 세상에 강조하려고 애쓴, 복합되고 혼동된 개념들.
170:1.13 (1859.6) 다른 때와 달라지는 상황에서, 예수는 대중을 가르칠 때 수많은 “하늘나라” 개념을 제시한 듯하지만, 사도들에게 언제나 하늘나라는 땅에 있는 동료들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가지는 관계에서 사람이 몸소 겪는 체험을 포함하는 것이라 가르쳤다. 하늘나라에 관하여, 그의 마지막 말씀은 언제나 “너희 안에 있는 나라”였다.
170:1.14 (1859.7) “하늘나라”라는 용어의 뜻에 관하여 여러 세기에 걸쳐 있던 혼동은 다음 세 가지 요인 때문이다:
170:1.15 (1859.8) 1. 예수와 사도들이 “하늘나라” 개념을 다시 진술하는 여러 진보적 단계를 거침에 따라서 그 하늘나라 개념을 지켜보고서 생긴 혼동.
170:1.16 (1859.9) 2. 유대 지방에서 이방의 땅으로 초대(初代) 기독교를 옮겨 심는 것과 불가피하게 연결된 혼동.
170:1.17 (1859.10) 3. 기독교가 그 핵심 관념인 예수의 인물에 관하여 조직된 종교가 되었다는 사실에 처음부터 생긴 혼동. 하늘나라 복음은 갈수록 더 그에 관한 종교가 되었다.
2. 예수의 하늘나라 개념
170:2.1 (1859.11)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진리,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람이 형제라는 사실, 이 두 가지 개념으로 시작되고 거기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는 분명히 밝혔다. 그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랜 세월에 걸친 동물적 공포의 속박으로부터 사람을 해방하고, 동시에 영적으로 자유로운 새 삶이 부여하는 다음 재산으로, 인간의 생활을 풍성하게 할 것이라고 예수는 선언했다:
170:2.2 (1859.12) 1. 새로운 용기와 늘어난 영적 힘을 소유하는 것. 하늘나라 복음은 사람을 해방하고 사람이 영생(永生)을 감히 바라도록 격려할 것이다.
170:2.3 (1859.13) 2. 그 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아니 가난한 사람에게도, 새로운 확신과 참된 위로의 말씀을 담았다.
170:2.4 (1859.14) 3. 복음 자체가 도덕적 가치의 새 표준이요, 인간의 행위를 재는 새 윤리의 자였다. 복음은 그 결과로 생기는 새 체제의 인간 사회의 이상을 묘사했다.
170:2.5 (1859.15) 4. 그 복음은 물질적인 것에 비하여 영적인 것이 우수하다고 가르쳤다. 영적 실체들을 영화롭게 하고 초인간적 이상을 찬미했다.
170:2.6 (1860.1) 5. 이 새 복음은 영적 달성을 인생의 참된 목표로 높였다. 인간의 생명은 도덕적 가치와 신다운 위엄을 띠는 새 자질을 받았다.
170:2.7 (1860.2) 6. 영원한 실체들은 땅에서 올바르게 애쓴 결과라(그에 대한 보상이라)고 예수는 가르쳤다. 고귀한 운명을 깨닫는 결과로서, 땅에서 사람이 필사자로 머무르는 일은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170:2.8 (1860.3) 7. 인간의 구원은 원대한 신의 목적의 계시임을 새 복음이 확인했으며, 신의 목적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아들들이 끝없이 봉사하는 미래 운명에 성취되고 실현될 것이다.
170:2.9 (1860.4) 이 여러 가르침은 예수가 가르쳤던 확대된 하늘나라 이념을 담는다. 이 위대한 개념은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 초보이며 뒤범벅이 된 하늘나라 가르침에 거의 담겨 있지 않다.
170:2.10 (1860.5) 사도들은 하늘나라에 관하여 주가 발표하신 말씀의 참 뜻이 무엇인가 깨우칠 수 없었다. 신약(新約)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의 가르침이 후일에 왜곡된 것은 복음서 기록자들의 개념이 예수가 그때 세상에서 잠시만 자리를 비우고, 권능과 영광을 입고 하늘나라를 세우려고 곧 돌아올 것이라는 관념에―그가 육체를 입고 함께 있는 동안 그들이 지녔던 것과 같은 바로 그런 생각에―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새 시대”의 도래를 가리키는 아무 징조도 없이 여러 세기가 지났다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
170:2.11 (1860.6) 이 설교에 담겨 있는 대단한 노력은 하늘나라 개념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상적 관념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였다. 오랫동안 주는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기를 가르쳤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때 그는 같은 뜻이지만 더 실용적 용어, 하나님의 뜻을 사용하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를 그들이 사용하지 않도록 유인하려고 진지하게 애썼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170:2.12 (1860.7) 예수는 왕국ㆍ임금ㆍ백성 관념 대신에 하늘 가족, 하늘 아버지, 그리고 동료 인간을 위하여 기쁘게 자원하여 봉사하며 아버지 하나님을 숭고하고 총명하게 섬기는 데 몰두하는, 하나님의 해방된 아들들, 이 세 가지 개념으로 갈아치우기를 바랐다.
170:2.13 (1860.8) 이때까지 사도들은 하늘나라에 대하여 두 가지 관점을 습득했고, 다음과 같이 보았다:
170:2.14 (1860.9) 1. 그 당시에 참 신자들의 마음 속에 있던, 몸소 체험하는 문제, 그리고
170:2.15 (1860.10) 2. 종족이나 세계 현상의 문제. 하늘나라가 미래에 온다는 것, 기대할 어떤 것.
170:2.16 (1860.11) 사도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하늘나라가 오는 것을, 마치 반죽 속에 있는 누룩과 같거나 겨자씨가 자라는 것 같은, 점진적 발전으로 보았다. 종족의 의미나 세계적 의미에서 하늘나라의 도래는 갑작스럽고 볼 만하리라고 믿었다. 예수는 하늘나라가 상급의 영적 생활을 실천하는 그들의 개인적 체험이라, 영을 체험하는 이 실체들은 신처럼 확실하고 영원히 장대한 새로운 상급 수준까지 점진적으로 변화된다고, 지치지 않고 그들에게 일러주었다.
170:2.17 (1860.12) 이날 오후에 다음 두 단계를 묘사했으므로, 주는 하늘나라의 두 가지 성질에 관한 새로운 개념을 뚜렷이 가르쳤다:
170:2.18 (1860.13) “첫째.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최고의 소망. 사람을 사심없이 사랑하는 것, 이것은 개선(改善)된 윤리적ㆍ도덕적 행위와 같은 좋은 열매를 맺는다.
170:2.19 (1861.1) “둘째.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필사 신자들의 목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완전해지고, 하나님의 뜻이 더욱 신답게 이루어지는 상태.”
170:2.20 (1861.2) 예수는 신자들이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지금 들어간다고 가르쳤다. 여러 강론에서 두 가지가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수라고 가르쳤다:
170:2.21 (1861.3) 1. 믿음, 성실성. 어린아이처럼 와서, 아들 신분의 수여를 선물로 받는 것. 묻지 않고, 아버지의 지혜로움을 완전히 믿고 진심으로 의지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복종하는 것. 전혀 편견과 선입관(先入觀)이 없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것. 버릇이 나빠지지 않은 어린이처럼, 생각이 트여 있고 배울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
170:2.22 (1861.4) 2. 진리를 간절히 찾기. 올바름을 목마르게 찾는 것. 생각의 변화, 하나님과 같이 되고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동기를 얻는 것.
170:2.23 (1861.5) 죄는 결함이 있는 성품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복종하지 않는 의지에 지배된, 고의적 지능의 소산이라고 예수는 가르쳤다. 죄에 관하여 말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셨다, 우리의 동료를 용서하는 행위가 그러한 용서를 개인적으로 소용되게 만든다고 가르쳤다. 육체를 입은 네 형제를 용서할 때, 그렇게 함으로 자신의 혼 속에서 너는 하나님이 바로 너의 잘못을 용서하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만들어낸다.
170:2.24 (1861.6) 사도 요한이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관한 이야기를 비로소 기록할 무렵에, 초대의 기독교인은 박해의 근원인 하나님의 나라 관념 때문에 너무 곤경을 겪어서, 대체로 그 용어(用語)의 사용을 포기하였다. 요한은 “영생”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했다. 예수는 영생을 또한 “생명의 나라”라고 이야기했다. 또한 “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자주 언급했다. 한때 그러한 체험을 “아버지 하나님과 가지는 가족의 친교”라고 말했다. 예수는 많은 용어를 하늘나라 대신에 쓰려고 애썼지만, 언제나 성공하지 못했다. 다른 것 가운데, 다음을 썼다: 하나님의 가족, 아버지의 뜻, 하나님의 친구들, 신자들의 친교, 사람의 형제 정신, 아버지의 양 떼, 하나님의 자녀, 충실한 자들의 친교, 아버지를 섬기는 것, 하나님의 해방된 아들들.
170:2.25 (1861.7) 그러나 그는 하늘나라 관념의 사용을 피할 수 없었다. 50년도 더 지난 뒤에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파괴한 뒤까지 이 하늘나라 개념은 영생(永生) 종파로 바뀌기 시작하지 않았고, 한편 재빨리 커지고 틀이 잡혀가는 기독교회가 하늘나라의 사회적ㆍ제도적 모습을 이어받았다.
3. 하늘나라와 올바름의 관계
170:3.1 (1861.8) 어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세상이 보는 앞에서 아주 허세부리며 과시한, 종처럼 따라 행하는 올바름을 뛰어넘을 그러한 올바름을 사도와 제자들이 신앙으로 얻어야 한다고 예수는 언제나 애써서 강조하였다.
170:3.2 (1861.9) 믿음, 어린애 같이 단순한 믿음이, 하늘나라 문의 열쇠라고 가르쳤지만, 예수는 또한 문으로 들어간 뒤에, 하나님의 건장한 아들의 어른 키까지 자라기 위하여, 모든 믿는 어린아이가 올라가야 하는, 점진적 올바름의 단계가 있다고 가르쳤다.
170:3.3 (1861.10)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기법(技法)을 고려할 때 사람이 하늘나라의 올바름에 도달했는가가 드러난다. 믿음은 하나님의 가족에 들어가는 데 너희가 치르는 값이다. 그러나 용서(容恕)는 너희의 믿음을 입장료로 받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하늘나라를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한 실제 체험을 수반하며, 다음 네 단계로, 마음 속의 올바름을 얻는 하늘나라 단계로 이루어진다:
170:3.4 (1862.1) 1. 하나님의 용서는 사람이 동료를 용서하는 바로 그 한도까지, 실제로 이용할 수 있고 몸소 체험한다.
170:3.5 (1862.2) 2. 사람은 동료를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참으로 동료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170:3.6 (1862.3) 3. 이처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가장 높은 윤리이다.
170:3.7 (1862.4) 4. 그렇다면 도덕적 행위, 참된 올바름은 그러한 사랑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170:3.8 (1862.5) 그러니까 하늘나라의 참된 종교, 마음 속의 종교는, 어김없이 더욱, 사회에 봉사하는 실용적 경로에서 명시(明示)되는 경향이 있음이 분명하다. 예수는 신자들이 어쩔 수 없이 사랑으로 봉사에 종사하게 만드는 그러한 살아 있는 종교를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는 종교를 대신하는 자리에 윤리를 두지 않았다. 종교는 원인이요 윤리는 결과라고 가르쳤다.
170:3.9 (1862.6) 어떤 행위가 올바른가는 동기(動機)에 따라서 재야 한다. 따라서 가장 높은 형태의 선은 의식되지 않는다. 예수는 도덕률이나 윤리 그 자체에 결코 관여하지 않았다.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과 가지는 마음 속의 영적 친교에만 온통 관심을 가졌고, 그런 친교는 사람을 위하여 겉에서 사랑으로 베푸는 봉사로서, 아주 확실히 직접 나타난다. 하늘나라의 종교는 아무도 몸 안에 가둘 수 없는 몸소 겪는 진정한 체험이다, 신자 가족의 한 사람임을 의식(意識)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가족 행위 교훈을 실천하는 것으로, 곧 형제 정신을 높이고 확대하려는 노력으로, 형제와 자매에게 봉사하는 길로 인도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170:3.10 (1862.7) 하늘나라의 종교는 개인적ㆍ개별적 종교이다. 그 열매, 그 결과는 가족과 사회에 나타난다. 예수는 공동체와 대조하여 어김없이 개인의 신성함을 높였다. 그러나 사람은 사심(私心) 없는 봉사로 인품을 기른다는 것, 사람은 동료를 사랑하는 관계에서 도덕적 성품을 펼친다는 것을 그는 또한 인식했다.
170:3.11 (1862.8) 하늘나라가 마음 속에 있다고 가르치고 개인을 높임으로 사회의 참된 올바름을 실현하는 새 섭리 시대를 열었으니까, 예수는 옛 사회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 세상이 이 새 체제의 사회를 거의 알지 못한 것은 세상이 하늘나라 복음의 원칙을 실행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우수한 이 하늘나라가 땅에 다가올 때, 단지 개량된 사회적ㆍ물질적 조건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향상되고 강화된 영적 가치의 영화로움에서 나타날 것이요, 그러한 가치는 다가오는 시대의 특징, 개선된 인간 관계와 진보하는 영적 성취의 특징을 나타낸다.
4. 하늘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170:4.1 (1862.9) 예수는 하늘나라를 결코 엄밀하게 정의하지 않았다. 한때 하늘나라의 한 국면에 대하여 강론하고, 또 다른 때에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런 형제들의 다른 모습을 이야기하곤 했다. 이 안식일 오후에 설교하는 과정에서, 예수는 적어도 하늘나라의 다섯 단계나 시대를 주목하였으니, 다음과 같다:
170:4.2 (1862.10) 1. 개별 신자가 아버지 하나님과 친교하는 영적 생활을 개인적으로 마음 속에서 겪는 체험.
170:4.3 (1863.1) 2. 복음을 믿는 사람들의 확대되는 형제 단체, 곧 개별 신자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영이 다스리는 결과로 도덕률이 향상되고 윤리가 자극되는 사회적 모습.
170:4.4 (1863.2) 3. 땅과 하늘에 널리 퍼져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의 초월 필사 형제 단체. 인간을 초월하는 자들의 하나님의 나라.
170:4.5 (1863.3) 4. 하나님의 뜻이 더욱 완벽하게 이루어진다는 기대, 개선된 영적 생활과 관련하여 새 사회 체제―사람의 다음 시대―의 여명을 향한 전진.
170:4.6 (1863.4) 5. 완전해진 하늘나라, 땅에서 미래의 영적 시대, 빛과 생명의 시대.
170:4.7 (1863.5) 그러므로 주가 하늘나라라는 용어를 쓸 때, 이 다섯 단계 가운데 어느 것을 언급하는가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주의 가르침을 검토해야 한다. 사람의 뜻을 차츰차츰 바꾸는 이 과정으로, 이렇게 인간의 결정에 영향을 미침으로, 미가엘과 그 동료들은 마찬가지로, 사회적 및 기타 형태의 과정, 인간의 진화 과정 전체를 차츰차츰, 하지만 확실히 바꾸고 있다.
170:4.8 (1863.6) 주는 이 기회에 하늘나라 복음의 가장 중요한 모습을 대표하는 다음 다섯 항목을 강조했다:
170:4.9 (1863.7) 1. 개인이 첫째로 중요하다.
170:4.10 (1863.8) 2. 사람의 체험에서 결정 요소인 의지.
170:4.11 (1863.9) 3. 아버지 하나님과 영적 친교를 가지는 것.
170:4.12 (1863.10) 4. 사람에게 사랑으로 봉사함으로 얻는 최고의 만족.
170:4.13 (1863.11) 5. 사람의 인격에서 영적인 것이 물질인 것을 초월한다.
170:4.14 (1863.12) 이 세상은 예수가 가르친 하늘나라 교리의 힘찬 관념과 신다운 이상을 한번도 심각하게, 진지하게, 또는 정직하게 시험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너희는 유란시아에서 하늘나라 관념이 겉보기에 느리게 진보한다고 낙심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 나아가는 진화(進化)의 순서는 물질과 영, 이 두 세계에서 갑작스럽고 예상하지 못하게 주기적 변화를 거친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육신화된 아들로서 예수가 수여된 것은 세상의 영적 생활에서 바로 그러한 이상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하늘나라가 오는가 시대적 증표를 찾느라고 자신의 혼 속에서 하늘나라를 세우지 못하는 치명적 잘못을 저지르지도 말라.
170:4.15 (1863.13) 예수가 하늘나라의 한 단계를 미래로 넘겼고, 수많은 경우에 그러한 사건이 세계적 위기의 일부로서 나타날 수도 있다고 넌지시 비추기는 했어도,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가 아주 확실히, 몇 번이나 유란시아로 언젠가 돌아올 것을 분명히 약속했더라도, 결코 이 두 개념을 확실히 한데 연결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적어야 한다. 그는 땅에서, 어느 미래에 하늘나라를 새로이 계시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언젠가 이 세상으로 친히 돌아오리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이 같은 의미를 가졌다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모든 지식을 종합해 보건대, 이 두 약속은 같은 사건을 언급할지도,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170:4.16 (1863.14) 사도와 제자들은 이 두 가르침을 함께 연결지은 것이 아주 확실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이 기대했던 대로 구체화되지 않았을 때, 앞날의 나라에 관한 주의 가르침을 상기하고 그가 다시 오리라는 약속을 기억하면서, 그들은 이 두 약속이 동일 사건을 언급한다고 서둘러 단정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완벽하게, 권능과 영광으로 하늘나라를 세우려고 예수가 즉시 다시 오기를 희망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뒤이은 신자 세대들은 영감을 주지만 헛된 바로 그 희망을 품고서 땅에서 계속 살았다.
5. 후일의 하늘나라 관념
170:5.1 (1864.1) 하늘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요약했으므로, 우리는 하늘나라 관념에 붙게 된 어떤 후일의 관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하늘나라가 미래 시대에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가, 하늘나라를 미리 예측하도록 허락받았다.
170:5.2 (1864.2) 기독교가 전파되는 처음 몇 세기를 통해서 내내, 하늘나라 관념은 그때 재빨리 퍼지는 그리스인의 이상주의 개념, 자연의 것은 영적인 것의 그림자―현세의 것은 영원한 것이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그림자―라는 관념에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다.
170:5.3 (1864.3) 그러나 유대인의 땅에서 이방인의 땅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옮겨심은 것을 표시한 큰 걸음은 하늘나라의 메시아가 교회에서 구원자가 되었을 때였는데, 교회는 바울과 그 후계자들의 활동으로부터 생겨나고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를 둔 종교적ㆍ사회적 조직이었으며, 그 가르침은 필로의 여러 개념과 페르시아인의 선악 교리로 보충되었다.
170:5.4 (1864.4) 하늘나라 복음의 가르침에 담긴 예수의 관념과 이상은 그 추종자들이 그의 선언을 점진적으로 왜곡했기 때문에 거의 실현되지 못할 뻔했다. 주의 하늘나라 개념은 두 가지 큰 경향으로 인하여 눈에 띄게 수정되었다:
170:5.5 (1864.5) 1. 유대인 신자들은 계속 예수를 메시아로 여겼다. 세계적이고 대체로 물질적인 나라를 세우려고 예수가 오래지 않아 실제로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170:5.6 (1864.6) 2. 이방(異邦)의 기독교인들은 아주 일찍부터 바울의 교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예수가 교회 신도들의 구원자라는[1] 일반적 관념으로 더욱 이끌었는데, 구원자는 초기 개념, 곧 하늘나라의 순전한 영적 형제 정신을 새로이 제도적으로 이어받은 개념이었다.
170:5.7 (1864.7) 하늘나라의 사회적 결과로서 생긴 교회는 온전히 자연스럽고 바람직하기도 했을 것이다. 교회의 잘못은 교회가 존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예수의 하늘나라 개념을 거의 완벽하게 갈아치웠다는 것이다. 바울이 만든 제도화된 교회는 예수가 선포했던 하늘나라를 사실상 대체하는 조직이었다.
170:5.8 (1864.8) 그러나 의심하지 말라. 주가 가르친 바로 이 하늘나라는 신자의 가슴 속에서 존재하며, 땅에서 모든 다른 종교ㆍ종족ㆍ나라에게―아니 각 사람에게―선포되는 것 같이, 언젠가 이 기독교회에 선포될 것이다.
170:5.9 (1864.9) 예수가 가르친 하늘나라, 개인의 올바름을 추구하는 영적 이상과 사람이 하나님과 신성한 친교를 가진다는 개념은, 예수의 인격이 구원자, 창조자요, 사회 조직이 된 종교 공동체의 영적 우두머리라는 신비스러운 개념 속으로 차츰 가라앉게 되었다. 이 방법으로 형식적이고 제도화된 교회는 개별로 영의 인도를 받는 하늘나라 형제 단체의 대용품이 되었다.
170:5.10 (1864.10) 교회는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서 생겨난 불가피하고 유익한 사회적 결과였다. 하늘나라의 가르침에 대한 이 사회적 반응이, 예수가 가르치고 실천했던 진정한 하늘나라의 영적 개념을 아주 완전히 갈아치웠다는 사실에 비극이 있다.
170:5.11 (1865.1) 유대인에게, 하늘나라는 이스라엘 족속의 공동체였고, 이방인에게 하늘나라는 기독교회가 되었다. 예수에게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믿음을 고백하고,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마음을 다하여 헌신함을 선언하고, 따라서 사람의 영적 형제 단체의 구성원이 되는 개인들의 집합이었다.
170:5.12 (1865.2) 하늘나라 복음이 퍼지는 결과로서 어떤 사회적 결실이 세상에 나타날 것을 주는 충분히 깨달았다. 그러나 모든 그러한 바람직한 사회적 겉 모습이 개별 신자가 마음 속에서 겪는 이 개인적 체험, 모든 그러한 신자에게 깃들고 그들을 움직이는 신다운 영과 이렇게 순전히 영적으로 친교하고 교통함으로 의식하지 않고 불가피하게 생기는 결과로서, 또는 자연스러운 열매로서 나타나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170:5.13 (1865.3) 예수는 한 사회 조직, 곧 교회가 참된 영적 국가의 진보에 뒤따라 생길 것을 미리 예측하였고, 이것이 어째서 사도들이 요한의 세례 의식을 행하는 것을 결코 반대하지 않았는가 하는 까닭이다. 그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 올바름 곧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고 목마르게 찾는 사람은, 믿음으로 영적인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된다고 가르쳤다. 동시에 사도들은 그러한 신자는 겉으로 나타나는 세례 의식(儀式)으로 제자들의 사회 조직에 가입이 허락된다고 가르쳤다.
170:5.14 (1865.4) 영이 개별 신자를 지배하고 안내함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하늘나라를 세우는 예수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부분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을 예수의 직계 추종자들이 깨달았을 때 그들은 주의 하늘나라 이상 대신에, 눈에 보이는 사회 조직, 기독교회를 차츰 세움으로 예수의 가르침이 완전히 잊혀지지 않도록 구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대체 계획을 성취하고 나서, 일관성을 유지하고 하늘나라의 사실에 관한 주의 가르침을 인정하려고, 더 나아가서 하늘나라를 미래에 생길 일로 분리해 놓았다. 교회의 지위가 안정되자마자 교회는 기독교 시대가 절정에 이를 때,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하늘나라가 실제로 나타날 것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170:5.15 (1865.5) 이 방법으로 하늘나라는 한 시대의 개념, 미래에 찾아온다는 관념이요, 최고자의 성자(聖者)들이 마지막으로 구출된다는 이상이 되었다. 초대 기독교인들(그리고 후일에 허다한 교인들)은 예수의 하늘나라 가르침에 담겨 있는 아버지와 아들 관념을 대체로 간과했으며, 한편 이를 교회의 잘 조직된 사회적 교제로 대체하였다. 이처럼 교회는 크게 보아서 사회적 형제 단체가 되었고, 이것은 예수의 영적 형제 단체라는 개념과 이상을 실질적으로 갈아치웠다.
170:5.16 (1865.6) 예수의 이상적 개념은 대체로 실패했지만, 주의 개인적 생애와 가르침의 기초 위에 바울은 나서서 유란시아에서 일찍이 존재한 바, 대단히 진취적인 한 인간 사회를 세웠으며, 이것은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의 영생 개념으로 보충되고, 영적인 것과 현세의 것을 대조하는 필로의 교리로 인하여 확대되었다.
170:5.17 (1865.7) 예수의 개념은 세계의 진보된 종교들 속에 아직도 살아 있다. 바울의 기독교회는 예수가 만들려 의도했던 하늘나라―그리고 아주 확실히 하늘나라가 다다를 그 미래―의 사회화되고 인간화된 그림자이다. 바울과 그 후계자들은 영생의 문제를 개인으로부터 교회로 일부 옮겨 버렸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아버지의 하늘나라 가족 안에서 개별 신자 하나하나에게 형이 되기보다,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바울, 그리고 같은 시대의 사람들은, 예수가 자신과 개별 신자에 관하여 영적으로 암시한 모든 것을 신자의 집단인 교회에 적용했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예수의 개념, 개별 신자의 마음 속에 있는 신의 나라 개념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
170:5.18 (1866.1) 그래서, 여러 세기 동안 기독교 교회는 큰 창피를 겪으며 수고했는데, 왜냐하면 교회가 하늘나라의 신비스러운 권능과 특권, 오직 예수와 영적 신자 형제들 사이에만 행사하고 체험할 수 있는 권능과 특권을 감히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에서 회원 자격을 얻는 것은 반드시 하늘나라에서 친교함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하나는 영적인 것이요, 다른 하나는 주로 사회적이다.
170:5.19 (1866.2) 머지 않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도다”하고 외치는 다른 더 큰 세례자 요한이 나타날 예정이고―이것은 하늘나라가 신자의 마음 속에서 하늘 아버지의 뜻이 지배하고 초월하는 것이라 선포한 예수의 높은 영적 개념으로 돌아감을 뜻한다―그는 땅에서 눈에 보이는 교회나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을 어떤 방법으로도 언급하지 않고서, 이 모두를 이룰 것이다. 예수의 실제 가르침이 부활되어야 하며, 그렇게 다시 적은 이야기는 미가엘이 땅에서 머무른 사실에 관하여 사회ㆍ철학적 신앙 체계를 만드는 데 분주했던 초기 추종자들의 실수를 돌이킬 것이다. 짧은 시일 안에 예수에 관한 이 이야기의 가르침은 예수의 하늘나라 복음 설교를 거의 대체해 버렸다. 이 방법으로 역사적 종교가 예수의 가르침을 바꿔치웠으며, 예수의 가르침은 사람의 가장 높은 도덕적 관념과 영적 이상을 미래에 대한 사람의 가장 숭고한 희망―영생―과 섞었다. 그것이 하늘나라 복음이었다.
170:5.20 (1866.3) 예수의 복음이 아주 여러 모습을 가졌다는 바로 그 이유로, 몇 세기 안에 그의 가르침의 기록을 연구한 학자들은 그렇게 많은 종파와 분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기독교 신자들의 이 딱한 분열은 주의 다양한 가르침 속에서, 신과 하나가 된 일생, 비할 데 없는 그의 일생을 헤아리지 못함으로 생겨난다. 그러나 언젠가 예수를 참되게 믿는 사람들의 태도는 불신자 앞에서 이처럼 영적으로 분열되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우리의 지적 이해와 해석은 다양해도 좋고, 사회적 친교가 어느 정도 달라져도 좋지만, 영적 형제 정신의 부족(不足)은 용서할 수 없고 꾸짖어 마땅하다.
170:5.21 (1866.4) 오해하지 말라! 예수의 가르침 속에는 생각하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언제까지나 열매 맺지 않은 채로 가만 두지 않을 영원한 성질이 있다. 예수가 상상했던 하늘나라는 대체로 땅에서 실패했고, 한동안 겉으로 나타나는 교회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 교회는 다만 좌절된 영적 하늘나라의 애벌레 단계요, 이 물질 시대를 거쳐서 하늘나라를 더 영적인 섭리 시대로 실어 나를 터이고, 그때 주의 가르침은 성장할 기회를 더 충만히 누릴지 모른다. 이처럼 이른바 기독교 교회는 고치가 되며, 그 속에서 예수의 개념인 하늘나라는 지금 잠을 잔다. 신다운 형제들의 하늘나라는 아직도 살아 있으며, 모습을 바꾸어 성장하는, 매력이 떨어지는 생물이 아름답게 펼쳐져 궁극에 나비가 솟아나는 것과 똑같이 확실하게, 이 오랜 침체로부터 궁극에 확실히 솟아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