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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1 편 조절자와 혼

유란시아서

제 111 편

조절자와 혼

111:0.1 (1215.1) 신다운 조절자가 인간의 지성 속에 계신 것은 과학이나 철학이 인격자의 진화하는 혼을 흡족히 이해하는 것을 언제까지나 불가능하게 만든다. 상물질 혼은 우주의 산물이며, 오직 우주적 통찰력과 영적 발견을 통하여 정말로 혼을 이해할지 모른다.

111:0.2 (1215.2) 혼, 그리고 안에 깃드는 영이 있다는 개념은 유란시아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 개념은 행성에서 다양한 체계의 신앙에서 자주 나타났다. 어떤 서양 신앙 뿐 아니라 동양의 많은 신앙이 사람이 인간적 재산을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신성한 유산을 가졌음을 깨달았다. 이 바깥에 두루 계실 뿐 아니라 마음 속에 계시다는 느낌은 오랫동안 많은 유란시아 종교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인간의 성품 안에서 무언가, 잠시 살다가 가는 현세의 인생을 지나서 견딜 운명을 가진, 대단히 중대한 무엇이 자라고 있다고 사람들은 오랫동안 믿어 왔다.

111:0.3 (1215.3) 신의 영이 사람의 진화하는 혼을 낳았다는 것을 사람이 깨닫기 전에, 혼은 몸의 다른 기관―눈ㆍ간ㆍ콩팥ㆍ심장, 그리고 나중에는 골―에 거한다고 생각되었다. 야만인은 혼을 피ㆍ숨ㆍ그림자, 그리고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연결시켰다.

111:0.4 (1215.4) 아트만[1] 개념으로 힌두교 선생들은 조절자의 성품과 계심을 이해하는 데 정말로 접근했지만, 진화하고 불멸의 잠재성을 가진 혼이 함께 존재함을 구별하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인은 인간 존재의 두 가지 모습, (陽)과 (陰), 혼과 영을 인식하였다. 에집트인과 여러 아프리카 부족도 두 가지 요소, 즉 를 믿었다. 혼은 선재(先在)하지 않고, 오로지 영이 그렇다고 보통 믿었다.

111:0.5 (1215.5) 나일 강 유역의 거주자들은 은총을 얻은 각 사람은, 태어날 때나 바로 그 뒤에, 보호하는 영을 수여받는다고 믿었고, 이것을 카라고 불렀다. 그들은 이 수호 영이 일생을 통해서 그 필사 주체와 함께 남아 있고, 그보다 먼저 미래 상태로 지나간다고 가르쳤다. 룩소에 있는 한 신전(神殿)의 벽에는 아멘호텝 3세의 출생이 그려져 있는데, 그 어린 왕자가 나일 강 신의 팔 위에 그려져 있고, 그 가까이 왕자와 모습이 똑같은 또 다른 아이가 있는데, 그것은 에집트인이 카라고 부른 그 개체의 상징이다. 이 조각은 기원전 15세기에 완성되었다.

111:0.6 (1215.6) 카는 관계된 필사자의 혼을 현세의 인생에서 더 나은 길로 안내하기를 바라지만, 특별히 다음 세상에서 그 인간 주체의 행운에 영향을 미치고 싶어 하는 우수한 천재 영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시기에는 한 에집트인이 죽었을 때 그의 카가 큰 강의 건너편에서 그를 기다릴 것이라 기대했다. 처음에는, 오직 왕들이 카를 가졌다고 생각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올바른 사람은 모두 카를 소유한다고 믿었다. 어느 에집트 통치자는 마음 속에 있는 카에 대하여 말했다: “나는 카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았다. 나는 카의 지침을 어기기를 두려워했다. 나는 카로 인하여 번영하였고, 카가 나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처럼 성공했다. 나는 그의 지침으로 탁월하게 되었다.” 카는 “모든 사람 속에 하나님이 내리신 신탁”이라고 많은 사람이 믿었다. 많은 사람이 “너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즐겁게 영원을 보내리라”고 믿었다.

111:0.7 (1216.1) 진화하는 유란시아 필사자의 민족들은 모두 혼 개념에 해당하는 낱말을 가졌다. 많은 원시 민족은 혼이 인간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내다본다고 믿었다. 따라서 악한 눈이 악의(惡意)를 가진 것에 겁을 먹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사람의 영은 주의 등불이라”고 오랫동안 믿었다. 릭 베다는 말한다, “나의 지성이 나의 마음에게 말하도다.”

1. 지성은 선택하는 무대

111:1.1 (1216.2) 조절자가 하는 일은 비록 영적 성질을 가졌지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지적 기초 위에 할 일을 모두 해야 한다. 지성은 인간의 토양이요, 그로부터 영 훈계자는 그가 깃드는 인격자의 협조를 얻어서 상물질 혼을 진화시켜야 한다.

111:1.2 (1216.3) 온 우주의 몇 가지 지성 수준에는 우주의 통일성이 있다. 성운들이 우주 공간에 있는 우주 에너지에서 기원을 가지는 것과 비슷하게, 지적(知的) 자아들은 우주 지성에서 기원을 가진다. 지적 자아의 인간 수준에서 (따라서 인격 수준에서), 필사 지성의 찬성을 얻어서, 그러한 인간 자아 속에서 절대 가치를 가진 개체 점(點)의 창조적 계심과 함께 인격자가 받는 영적 재산 때문에, 영의 진화 잠재성이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영이 물질 지성을 지배하는 것은 두 가지 체험에 제약을 받는다. 이 지성이 일곱 보조 지성 영의 봉사를 통해서 진화했어야 하고, 물질 (인격) 자아는 상물질 자아, 즉 진화하고 불사의 가능성이 있는 혼을 창조하고 육성하는 데, 깃드는 조절자와 협동하기를 선택해야 한다.

111:1.3 (1216.4) 물질 지성은, 인격자가 살고 자의식하며, 결정을 내리고 하나님을 택하거나 버리며, 스스로를 영원하게 만들거나 죽이는 무대이다.

111:1.4 (1216.5) 물질적 진화는 너에게 살아 있는 기계, 너의 몸을 마련해 주었다. 아버지 스스로 우주에서 알려진 가장 순수한 영 실체, 너의 생각 조절자를 너에게 부여하셨다. 그러나 네 손 안에, 너 자신의 결정에 지배되는 지성이 수여되었으며, 지성으로 너는 살거나 죽는다. 이 지성 안에서, 너는 이 지성을 가지고 너를 조절자와 같아지게 만들 수 있는 도덕적 결정을 내리며, 조절자와 같아짐은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이다.

111:1.5 (1216.6) 필사자의 지성은 물질적 일생 동안에 쓰기 위하여 인간에게 빌려 준 일시적 지능 체계이며, 인간이 이 지성을 사용함에 따라서 그들은 영원히 존재할 가능성을 받아들이거나 물리친다. 너의 뜻에 지배되는 우주 실체 중에서 지성이 대체로 너의 총재산이며, 혼―상물질 자아―는 필사 자아가 현세에 내리는 결정이 거두는 수확을 충실하게 묘사할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밑으로 전기 화학 작용 위에 살포시 놓여 있고, 위로는 영ㆍ상물질 에너지 체계에 살며시 닿는다. 이 두 체계 중 어느 것도 인간은 그 필사 인생 동안에 결코 완전히 의식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은 자신이 의식하는 지성 속에서 일해야 한다. 지성이 무엇을 이해하는가 하는 것보다 지성이 무엇을 이해하기를 바라는가, 이것이 살아남는 것을 보장한다. 지성이 무엇과 비슷한가가 아니라 지성이 무엇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가, 이것이 영의 신분을 증명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보다 사람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이 우주에서 승천하는 결과를 낳는다. 네가 오늘 무슨 신분인가 하는 것은, 날마다, 영원 속에서, 네가 무슨 신분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보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111:1.6 (1217.1) 지성은 인간의 의지가 죽음의 불협화음을 치거나 아니면 바로 그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을 확인하고 그 결과로 사람을 영원히 살아남게 만드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솟아나게 할 수 있는, 우주의 악기(樂器)이다. 결국, 사람에게 수여된 조절자는 악에 물들 수 없고 죄를 지을 능력이 없지만, 비뚤어지고 자아를 추구하는 인간 의지의 죄 짓는 음모로 인하여 필사자의 지성은 실제로 비틀리고 왜곡될 수 있고, 악하고 더러워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아는 인간의 의지, 영의 빛을 받은 의지에 따라서, 이 지성은 고귀하고, 아름답고, 참되고 선하게―실제로 위대하게―될 수 있다.

111:1.7 (1217.2) 진화된 지성은 우주의 지적 성향의 두 극단―온전히 기계화된 것과 완전히 영답게 변한 것―위에 스스로 명시될 때에야 완전히 안정되고 믿을 만하다. 순수한 기계적 통제와 참된 영 성품, 이 두 가지 지적 극단(極端) 사이에, 거대한 집단의 진화하고 올라 가는 지성들이 개재하며, 이들의 안정성과 차분함은 인격자의 선택, 그리고 영의 신분에 달려 있다.

111:1.8 (1217.3) 그러나 사람은 수동적으로 노예처럼, 의지를 조절자에게 넘겨주지 않는다. 오히려 조절자의 이끄심이 자연스러운 필사 지성의 욕구 및 충동과 다른 것을 의식할 때, 그렇게 의식하면서, 활발하게 적극적으로, 고분고분하게 그의 이끄심을 따르기를 택한다. 조절자는 사람의 지성을 조종하지만, 결코 그의 뜻에 어긋나게 지성을 지배하지 않는다. 조절자에게 인간의 뜻은 가장 중요하다. 진화하는 인간 지능이 활동하는 거의 한없는 무대에서 생각을 조절하고 인품을 변화시키는 영적 목표를 이루려고 애쓰는 동안, 조절자는 인간의 의지를 그렇게 여기고 존중한다.

111:1.9 (1217.4) 지성은 너의 배요, 조절자는 너의 뱃길 안내자, 인간의 의지는 선장(船長)이다. 필사의 배의 주인은, 신다운 안내자가 하늘 가는 혼이 영원히 살아남게 하는 상물질 항구로 안내하는 것을 믿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오로지 이기심과 게으름과 죄 많음으로 사람의 의지는 그러한 충실한 안내자의 지도를 물리치고, 자비를 거절한 나쁜 모래사장 위에, 용납한 죄의 바위들 위에, 필사자의 생애를 궁극에 결딴낸다. 너의 승인을 받아서, 이 충실한 뱃길 안내자는 시간의 장벽과 공간의 장애물을 거쳐서, 신다운 지성의 바로 그 근원까지, 그리고 이를 지나서 계속, 아니 조절자들의 파라다이스 아버지에게 이르기까지, 너를 안전히 데리고 갈 것이다.

2. 혼의 성질

111:2.1 (1217.5) 우주 지능의 지적 기능 전역에 걸쳐서, 총 지성이 지적 활동의 여러 부분을 지배한다. 지성의 본질은 기능적 통일이다. 따라서 그릇되게 안내 받은 자아가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하고 선택함으로 저지되고 방해 받을 때에도, 지성은 어김없이 이 구조적 통일성을 보인다. 의지의 위엄과 승천 특권이 있는 자아들과 가지는 모든 수준의 관계에서, 이 통일된 지성은 영의 조정을 변함없이 찾는다.

111:2.2 (1217.6) 필사인의 물질 지성은 상물질 천을 담은 우주의 베틀이며, 깃드는 생각 조절자는 그 천 위에 지속하는 가치와 신성한 의미를 지닌 한 우주 인품―궁극의 운명과 끝없는 생애를 가진 살아남는 혼, 잠재 최후자―의 영 무늬를 짜 넣는다.

111:2.3 (1218.1) 사람의 인격은 물질 몸에 있는 생명으로 말미암아 기능적 관계에 같이 묶여 있는 지성 및 영과 동일시된다. 그러한 지성과 영이 작용하는 이 관계는 지성과 영, 이 둘의 품질이나 속성의 어떤 조합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히 지속할 잠재성이 있는, 전혀 새롭고 독창적이고 고유한 우주 가치, 즉 을 낳는다.

111:2.4 (1218.2) 그러한 불사의 혼을 진화로 창조하는 데는 둘이 아니라 세 가지 요인이 있다. 인간의 상물질 혼의 이 세 가지 선행 조건은 다음과 같다:

111:2.5 (1218.3) 1. 인간의 지성, 그리고 그에 선행하고 그 지성에 미치는 모든 우주 영향.

111:2.6 (1218.4) 2. 이 인간의 지성에 깃드는 신다운 영, 그리고 인생에서 관계된 모든 영적 영향 및 요인과 함께, 절대적 영 성질을 가진 그러한 분신 속에 본래부터 있는 모든 잠재성.

111:2.7 (1218.5) 3. 물질 지성과 신다운 영 사이의 관계, 이것은 그러한 관계에 기여하는 어느 쪽 요인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가치를 뜻하고 의미를 지닌다. 이 독특한 관계의 실체는 물질도 영도 아니며, 상물질이다. 그것은 혼이다.

111:2.8 (1218.6) 중도인(中道人)들은 사람이 진화시키는 이 혼을, 하급 또는 물질 지성, 그리고 상급 또는 우주 지성과 구별하여, 중간 지성이라고 이름 지은 지 오래다. 이 중간 지성은 정말로 상물질 현상이니, 그것이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상물질로 진화하는 잠재성은 지성의 두 가지 보편적 충동에 본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을 알고 창조자의 신성에 이르려는, 사람의 유한한 지성의 충동이요, 다른 하나는 사람을 알고 인간의 체험을 얻으려는 창조자의 무한한 지성의 충동이다.

111:2.9 (1218.7) 불사의 혼을 진화시키는 이 숭고한 거래가 가능하게 되는 것은 그 필사 지성이 첫째로 인격을 가졌고, 둘째로 동물을 초월하는 실체들과 접촉하기 때문이다. 그 지성은 우주에서 봉사하는 초물질 자질을 소유하며, 이것은 도덕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도덕적 성품이 생겨나는 것을 보장하고, 그렇게 함으로 관련된 영적 봉사, 그리고 깃드는 생각 조절자와 진정한 창조적 접촉을 가지게 한다.

111:2.10 (1218.8) 인간 지성이 접촉함으로 그렇게 영적으로 변화되는 불가피한 결과는 혼이 차츰 태어나는 것이다. 혼은 하나님을 몹시 알고 싶어 하는 인간 의지에 지배되는 보조 지성이 우주의 영적 세력과 함께 연락하여 일함으로 합동으로 지은 산물이며, 그 우주 세력은 만물을 지으신 바로 그 하나님의 실제 분신―신비의 훈계자―의 전반적 통제를 받는다. 이처럼 자아의 물질적 필사 실체는 육체적 생명 기계가 현세의 한계를 뛰어넘고, 자아를 지속하기 위하여 진화하는 수송 수단 속에서 새 표현과 새 신분을 얻으며, 그 수송 수단이 상물질인 불사의 혼이다.

3. 진화하는 혼

111:3.1 (1218.9) 필사 지성의 실수와 인간의 잘못된 행동은 혼의 진화를 두드러지게 늦출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잘못은 인간 의지의 찬성을 얻어서 깃드는 조절자가 혼의 진화를 한 번 시작하면, 그러한 상물질 현상을 억제할 수 없다. 그러나 필사자가 죽기 전에 언제라도, 바로 이 물질적 인간 의지는 그러한 선택을 취소하고 살아남기를 거절할 힘이 있다. 살아남은 뒤에도 하늘 가는 그 필사자는 영생을 거부할 이 특권을 아직도 지닌다. 조절자와 융합하기 전에 어느 때라도, 진화하고 승천하는 인간은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기를 선택할 수 있다. 조절자와 융합하는 것은 하늘 가는 필사자가 영원히, 조건 없이, 아버지의 뜻 행하기를 택했다는 사실을 알린다.

111:3.2 (1219.1)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에, 진화하는 혼은 필사 지성이 내린 초물질적 결정을 강화할 수 있게 된다. 혼은 초물질이니까, 인간이 체험하는 물질 수준에서 저절로 작용하지 않는다. 영 밑에 있는 이 혼은 조절자와 같이, 의 어떤 영이 함께 일하지 않고서는 상물질 수준보다 높이 활동할 수도 없다. 이 물질 지성이, 관계된 기능을 가진 그러한 상물질 혼에게 아낌없이, 기꺼이, 그러한 권한을 넘겨줄 때, 그리고 그렇게 하는 동안을 제외하고, 죽음이나 이동이[2] 필사 지성과 물질적으로 연합된 상태로부터 혼을 분리할 때까지, 그 혼은 마지막 결정을 내리지도 않는다. 사는 동안에 필사자의 의지, 결정하고 선택하는 인격의 힘은 물질 지성 회로에 거한다. 땅에서 필사자의 성장이 진행됨에 따라서, 이 자아는 귀중한 선택하는 힘과 더불어, 태어나는 상물질 혼 개체와 점점 더 동일시된다. 죽고 나서, 저택 세계에서 부활한 다음에, 그 인격은 상물질 자아와 완전히 동일시된다. 이처럼 혼은 인격 신분을 가진, 앞날에 상물질 수송 수단이 되는 새싹이다.

111:3.3 (1219.2) 이 불사의 혼은 처음에 전적으로 상물질 성질이지만, 발달 능력을 소유하기 때문에, 의 영들과 융합할 가치가 있는 참 영 수준까지 반드시 올라가며, 보통은 사람의 머리 속에서 그러한 창조 현상을 시작한 우주의 아버지의 바로 그 영과 융합한다.

111:3.4 (1219.3) 인간의 지성과 신다운 조절자, 이 둘은―조절자는 충분히, 지성은 어느 정도― 진화하는 혼의 풍채 및 차별되는 성질을 의식한다. 그 혼은 자체의 진화적 성장에 비례하여, 갈수록 더 지성과 조절자를 연합된 신분으로서 의식하게 된다. 혼은 인간 지성과 신다운 영, 이 둘의 품질을 함께 가지지만, 지성 기능의 육성을 통해서, 영의 통제와 신의 지배를 늘이는 방향으로 끈질기게 진화하며, 지성 기능이 의미하는 것들은 참된 영 가치와 일치하기를 추구한다.

111:3.5 (1219.4) 필사자의 생애, 즉 혼의 진화는 시험 기간이 아니라 교육이다. 최상의 가치가 살아남는 것을 믿는 것이 종교의 핵심이다. 진정한 종교적 체험은 최상의 가치를 가진 것과 우주적 의미가 있는 것들이 뭉쳐서 하나의 우주 실체로 실현되는 데 있다.

111:3.6 (1219.5) 지성은 양(量), 실체, 의미 있는 것들을 이해한다. 그러나 질―가치―는 느껴진다. 느끼는 그 주체는 사물을 아는 지성, 그리고 실체화시키는, 관계된 그 영이 공동으로 창조한 것이다.

111:3.7 (1219.6)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은 하나님을 의식(意識)하는 가치의 실현이며, 사람의 진화하는 상물질 혼이 진리ㆍ아름다움ㆍ선에 젖어 있는 한, 그 결과로 생긴 그러한 존재는 파괴될 수 없다. 사람의 진화하는 혼 속에 영원한 가치가 조금도 살아남지 않으면, 필사의 존재는 의미가 없고, 생명 그 자체가 비극의 망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까지나 참말이다: 시간 세계에서 너희가 시작하는 것을―마칠 가치가 있다면―너희는 영원 속에서 확실히 마칠 것이다.

4. 정신 생활

111:4.1 (1219.7) 인식하는 것은 바깥 세계로부터 받은 감각 인상을 개인의 기억 형태 속으로 맞춰 넣는 지적 과정이다. 이해하는 것은 이 인식된 감각의 인상(印象)과 그에 관계된 기억 형태가 동태적 원칙들의 망으로 통합되거나 조직되었음을 뜻한다.

111:4.2 (1220.1) 의미는 인식과 이해의 조합에서 파생된다. 의미는 완전한 감각 세계나 물질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의미와 가치는 오직 인간 체험의 정신, 즉 초물질 분야에서 파악된다.

111:4.3 (1220.2) 참된 문명의 진보는 모두, 인류의 이 정신 세계에서 태어난다. 참으로 창조적인 것은 오직 정신적 생활이다. 어느 세대라도 젊은이의 대다수가 흥미와 에너지를 감각 세계, 곧 바깥 세계의 추구, 물질만 중시하는 추구에 쏟을 때 문명은 도저히 진보할 수 없다.

111:4.4 (1220.3) 정신 세계와 바깥 세계는 다른 집합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젊은이의 4분의 3이 물질만 중시하는 직업에 들어가서 바깥 세계의 감각 활동을 추구하는 데 전념할 때 어떤 문명이라도 위태롭다. 젊은이가 소홀히 하여 윤리ㆍ사회학ㆍ우생학ㆍ철학ㆍ예술ㆍ종교ㆍ우주론에 흥미를 갖지 않을 때, 문명은 위험에 빠져 있다.

111:4.5 (1220.4) 오로지 인간이 체험하는 영(靈) 영역에 상의식 지성이 부딪침에 따라서 상의식 지성의 상급 수준에서, 더 낫고 더 오래 가는 문명을 세우는 데 이바지할 효과적 기본 모형들과 관련하여 너희는 상급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인격은 본래부터 창조성이 있지만, 이처럼 개인의 정신 생활에서만 활동한다.

111:4.6 (1220.5) 눈의 결정(結晶)은 반드시 육각형의 형태이지만, 결코 어느 두 결정도 같지 않다. 아이들은 종류를 따르지만, 어느 두 아이도, 아니 쌍둥이의 경우에도, 결코 똑같지 않다. 인격은 종류를 따라가지만 반드시 독특하다.

111:4.7 (1220.6) 행복과 기쁨은 정신 생활에서 기원을 가진다. 너는 진짜 기쁨을 아주 혼자서는 맛볼 수 없다. 혼자 사는 생활은 행복에 치명적이다. 가족과 나라조차도, 남과 나누면, 생활을 더욱 즐길 것이다.

111:4.8 (1220.7) 너희는 바깥 세계―환경―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너의 지시에 가장 많이 지배되는 것은 정신 세계의 창조성이니, 거기서 너의 인격은 선행(先行)하는 원인 법칙의 사슬로부터 대체로 해방되기 때문이다. 인격에는 의지의 제한된 주권이 관련되어 있다.

111:4.9 (1220.8) 사람의 이 정신 생활이 참으로 창조성이 있으니까, 이 창조성이 자발적이고 온통 함부로 일어날 것인가, 아니면 통제되고, 지휘되고, 긍정적일 것인가를 선택하는 책임이 각 사람에게 지워진다. 창조적 상상력이 활동하는 그 무대가 이미 편견ㆍ미움ㆍ두려움ㆍ분개심ㆍ앙갚음ㆍ편협으로 차 있을 때, 어떻게 그 상상력이 훌륭한 열매를 맺을 것인가?

111:4.10 (1220.9) 생각은 바깥 세계의 자극에서 기원을 가질지 모르지만, 이상은 오직 사람의 정신 세계의 창조 영역에서 태어난다. 오늘날 좋은 생각이 넘쳐흐르는 사람들이 세계의 여러 나라를 지도하지만, 그들의 이상은 빈곤하다. 이것이 어째서 빈곤ㆍ이혼ㆍ전쟁, 그리고 민족 사이의 반목이 일어나는가 설명한다.

111:4.11 (1220.10) 이것이 문제이다: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이 속 사람의 창조하는 힘을 받으면, 자유 의지 창조성은 자유 의지로 파괴하는 잠재성을 포함한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창조성이 파괴성으로 바뀔 때, 너희는 죄와 악의 황폐한 결과―억압ㆍ전쟁ㆍ파괴―와 얼굴을 마주한다. 악은 창조성이 치우친 것이요, 그것은 붕괴와 궁극의 파괴로 향한다. 모든 대립은 정신 생활의 창조 기능을 억제하므로 악하다―대립은 인격 안에서 내란을 일으키는 종자(種子)이다.

111:4.12 (1221.1) 정신적 창조성은 인격을 통합하고 자아를 통일함으로 인품을 고귀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한다. 이것이 언제까지나 참말이다: 지난날은 바꿀 수 없고, 오로지 속 자아의 현재 창조성이 수고함으로 앞날을 바꿀 수 있다.

5. 선택을 거룩하게 바치는 것

111:5.1 (1221.2)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더도 덜도 아니고, 하나님―정신적 의미와 가치가 있는 그러한 인생을 가능하게 만든 바로 그 하나님―과 정신 생활을 사람이 기꺼이 나누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나누는 것은 하나님 같다―신답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영원한 아들무한한 영과 나누어 가지며, 한편 그들은 다시 여러 우주의 신다운 아들과 영 들과 함께 모든 것을 나누어 가진다.

111:5.2 (1221.3) 하나님을 본받는 것은 완전에 이르는 열쇠이다. 그의 뜻을 행하는 것은 살아남는 비결이요, 살아남아서 완전에 이르는 비결이다.

111:5.3 (1221.4) 필사자는 하나님 안에서 살며, 그래서 하나님은 필사자 속에서 살기를 뜻하셨다.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 같이, 그도―그리고 먼저―그렇게 자신의 일부를 사람과 같이 있으라고 맡겼다. 그는 인간의 의지에 복종하여 사람 안에 살고, 사람에게 깃들기로 찬성하였다.

111:5.4 (1221.5) 사람의 인격이 인간의 의지를 아버지의 뜻에 굴복하겠다고 찬성할 때―선택할 때―이 인생에서 평화를 얻고, 죽고 나서 살아남으며, 다음 인생에서 완전하게 되고, 영원까지 봉사하는 것―이 모두가 이제 (정신적으로) 이루어진다. 아버지는 자신의 한 조각을 사람의 인격 의지에 복종하게 만들기를 선택하셨다.

111:5.5 (1221.6) 그러한 인간의 선택은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의지를 거룩하게 바침이요, 의지의 확대, 의지를 영화롭게 함이요, 의지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선택은 사람의 의지를 현세의 중요성을 가진 수준에서 더 높은 지위로 들어올리며, 거기서 인간 아들의 인격은 영 아버지의 성격과 친교한다.

111:5.6 (1221.7) 인간 아들이 파라다이스하나님이 사실로 계신 앞에 실제로 서기 전에 한 시대가 지나가야 하더라도, 아버지의 뜻을 이처럼 택하는 것은 필사 인간이 영 아버지를 영적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이 선택은 사람의 의지를 부인하는 데―“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에 있기보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나의 뜻이나이다”하고 사람이 분명히 확인하는 데 있다. 이렇게 선택하면, 머지 않아 하나님을 택하는 아들은 깃드는 하나님의 분신과 마음 속에서 뭉친(융합한) 것을 발견할 터이고, 한편 완전하게 되는 바로 이 아들은 사람의 인격이 조물주의 성격과 경건한 친교를 가지면서 지극한 인격의 만족을 발견할 것이다. 이 두 성격의 창조 속성은 스스로 의지(意志)한 공통된 표현에서 영원히 합쳐졌다―사람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 사이에 또 하나의 영원한 협동 관계가 태어난 것이다.

6. 인간의 역설

111:6.1 (1221.8) 필사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겪는 많은 문제는 우주에 대하여 그가 두 가지 관계를 가진 데서 생겨난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다―자연 속에서 존재하는데―그래도 자연을 초월할 수 있다. 사람은 유한하지만 그에게 무한의 불꽃이 깃들고 있다. 그러한 이중 상황은 잘못이 일어날 잠재성을 마련할 뿐 아니라, 또한 작은 걱정이 아니라 많은 불확실성을 안고 있는 숱한 사회적ㆍ도덕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111:6.2 (1222.1) 천성을 이기고 사람의 자아를 초월하는 데 요구되는 용기는 자만의 유혹에 굴복할지도 모르는 용기이다. 자아를 초월할 수 있는 필사자는 자신의 자의식을 신격화하는 유혹에 무릎을 꿇을지도 모른다. 필사자가 당면하는 궁지는 사람이 자연에 묶여 있고, 한편 동시에 독특한 자유―영적 선택을 내리고 행동하는 자유―를 가졌다는 두 가지 사실에 있다. 물질 수준에서 사람은 자기가 자연에 종속되며, 한편 영적 수준에서 그는 자연을, 그리고 현세의 유한한 모든 것을 이기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한 역설(逆說)은 유혹, 잘못의 가능성, 잘못된 결정과 떼어낼 수 없으며, 자아가 뻐기고 거만하게 될 때, 죄가 생겨날지 모른다.

111:6.3 (1222.2) 죄의 문제는 유한한 세계에서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유한의 사실은 악하지도 않고 죄가 되지도 않는다. 유한한 세계는 한 무한한 창조자에게 지음을 받았고―그의 신다운 아들들의 작품이며―따라서 좋음이 틀림없다. 유한한 것을 악용하고, 왜곡하고, 곡해하는 것이 죄와 악을 낳는다.

111:6.4 (1222.3) 영은 지성을 지배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지성은 에너지를 통제한다. 그러나 물리적 영토에서 지성은 원인과 결과의 수학(數學) 수준에 본래 있는 변화 가능성을 지성 자체가 머리를 써서 조종해야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다. 사람의 지성은 본래부터 에너지를 통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의 특권이다. 그러나 사람의 지성은 물리적 우주의 에너지 비결을 통달한 주인이 된 바로 그 한도 안에서,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한다.

111:6.5 (1222.4) 사람이 물리적 실체를 뜯어고치고 싶을 때, 그것이 자신이든 환경이든, 물질을 통제하고 에너지를 지휘하는 수단과 방법을 발견한 그 범위까지 사람은 성공한다. 도움을 받지 않은 지성은 불가피하게 연결된 자신의 신체 작용을 제외하고, 물질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미칠 힘이 없다. 그러나 육체 작용을 총명하게 사용함으로 지성은 다른 기계 작용, 아니 에너지 관계와 살아 있는 관계까지도 창조할 수 있고, 이것들을 이용해서 이 지성은 우주에서 그 물리적 수준을 더욱 통제하고, 아니 지배할 수도 있다.

111:6.6 (1222.5) 과학은 사실의 근원이요, 지성은 사실을 모르고 작용할 수 없다. 사실은 지혜를 만드는 데 쓰이는 건축 자재이며, 이것은 생활 체험으로 인하여 함께 단단히 붙는다. 사람은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고, 사람은 사랑이 없어도 하나님의 법칙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신의 법칙과 신의 사랑을 발견하고 자신의 진화하는 우주 철학 안에서 이것들을 체험으로 조화하기까지, 사람은 결코 첫째 근원 중심의 성품, 만물을 둘러싸는 그 성품의 무한한 균형미, 숭고한 조화, 지극한 충만함을 이해할 엄두도 낼 수 없다.

111:6.7 (1222.6) 물질적 지식이 늘어나는 것은 생각의 의미와 이상의 가치를 더욱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인간은 정신적 체험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지만, 그가 손수 발견한 진리를 일상 생활에서 생기는 무자비한 실용적 요구에 적용하기 위해서, 사실을 훤하게 알 필요가 있다.

111:6.8 (1222.7) 자신이 헤어날 수 없이 자연에 묶여 있고, 한편 현세의 유한한 모든 것을 완전히 뛰어넘는 영적 힘을 지닌 것을 보면서, 필사 인간이 불안한 느낌에 시달리는 것은 자연스러울 뿐이다. 그러한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 한가운데서, 오직 종교적 자신감―팔팔한 믿음―이 사람을 지탱해 줄 수 있다.

111:6.9 (1223.1) 사람의 필사 성품에 성가시게 붙어 다니고 그의 영적 인품을 위태롭게 하는 모든 위험 중에서 자만심이 가장 위험하다. 용기가 있으면 용감하지만 자기 본위는 허영심이요 자살에 이른다. 적당한 자신감을 슬퍼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스스로를 초월하는 능력은 사람과 동물 왕국을 구별하는 한 가지이다.

111:6.10 (1223.2) 한 개인에게서 발견되든 집단이나 민족이나 국가에서 발견되든, 자만은 사람을 속이고 취하게 하고 죄를 낳는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자만은 몰락을 앞질러 간다.”

7. 조절자가 부딪치는 문제

111:7.1 (1223.3) 안전에 대한 불확실성―시간 세계와 머리 속에서 불확실성,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면서 펼쳐지는 길에서 무슨 사건들이 생길 것인가에 관한 불확실성―은 파라다이스로 가는 모험의 본질이며, 영적 안전, 그리고 영원한 안전, 우주의 아버지의 신다운 동정심과 무한한 사랑을 아들인 사람이 무조건 신뢰함으로 얻는 안전을 말한다. 우주에서 경험 없는 시민으로서 겪는 불확실성과 전능하고 온통 지혜롭고 만물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여러 우주 저택에서, 하늘 가는 아들로서 얻는 안전을 말한다.

111:7.2 (1223.4) 조절자가 충실하게 네 혼을 부르는 소리가 멀리서 울리는 것을 주의하라고 너에게 훈계해도 좋은가? 깃드는 조절자는 시간 세계에서 네 생애의 투쟁을 중지하거나, 아니 물질적으로 변경할 수도 없다. 이 고난의 세상을 통해서 네가 나그네 길을 가는 동안, 조절자는 인생의 어려움을 덜어줄 수 없다. 신다운 내재자는 너희 행성에서 사는 대로 네가 인생의 투쟁을 벌이는 동안, 오직 참을성 있게 견딜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네가 하려고만 한다면―네가 일하고 걱정하는 동안, 싸우고 수고하는 동안―용감한 조절자가 너와 함께, 너를 위해서, 싸우도록 허락할 수 있다. 너의 현재 물질 세계의 평범한 문제들과 어렵고 벅찬 이 모든 씨름을 하는 참된 동기, 마지막 목표, 영원한 목적을 나타내는 그림을 조절자가 항상 떠올리게 버려두기만 한다면, 너는 무척 위로와 영감을 받고, 아주 황홀해지고 흥미가 생길 수 있다.

111:7.3 (1223.5) 조절자는 이 모든 힘드는 물질적 수고에 필적하여 기울이는 영적 노력을 너에게 보여주는 과제를 수행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조절자를 돕지 않는가? 인간으로 존재하면서 이 세상의 어려움과 씨름하는 동안, 너는 어찌하여 조절자가 우주의 힘을 가진 영적 진리로 너를 강화하도록 허락하지 않는가? 네가 어쩔 줄 몰라서 지나가는 시절의 문제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 어째서 우주 생활의 영원한 전망을 뚜렷이 그린 환상으로 하늘 조수가 너를 응원하도록 격려하지 않는가? 네가 시간 세계의 장애물 한가운데서 수고하고 너의 필사 인생의 나그네 길에 성가신 불확실한 미로에서 갈팡질팡하는 동안, 어째서 너는 우주 관점으로 깨우침과 영감을 받으려 하지 않는가? 비록 너의 발이 땅에서 수고하는, 물질의 길을 밟아야 하더라도, 어째서 너는 조절자가 네 생각에 영적 변화를 일으키도록 허락하지 않는가?

111:7.4 (1223.6) 유란시아의 상급 인종들은 복잡하게 섞였다. 그들은 다른 기원을 가진 여러 종족과 핏줄의 혼합이다. 이 복합 성품은 일생에 조절자가 효과 있게 일하는 것을 극히 어렵게 만들며, 죽은 뒤에 조절자와 수호 세라핌이 닥치는 문제를 분명히 불린다. 내가 구원자별로 갔다가, 한 운명 보호자가 그 필사 주체에게 수고하는 어려움을 참작하는 공식(公式) 진술문을 발표한 것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는다. 이 세라핌은 이렇게 말했다:

111:7.5 (1223.7) “내가 겪는 문제의 상당 부분은 나의 주체의 두 성품 사이에 그치지 않는 싸움 때문이었다. 큰 포부를 가진 욕구가 동물 같은 게으름에 부딪치고, 우수한 민족의 이상이 열등한 종족의 본능과 섞이며, 위대한 지성의 높은 목적이 물려받은 원시적 유산(遺産)의 충동으로 반대에 부딪친다. 멀리 내다보는 훈계자의 장거리 관점이 시간 세계의 인간적 근시안으로 무효가 되고, 하늘 가는 존재의 진취적 계획이 물질적 성질의 욕구와 갈망으로 인하여 수정되며, 우주 지능이 번쩍 떠올린 것은 진화하는 종족의 화학 에너지 명령으로 취소된다. 천사들의 권고가 동물의 감정으로 인하여 반대에 부딪치고, 지능이 받은 훈련이 본능의 성향 때문에 물거품이 되며, 개인의 체험은 종족의 쌓인 성향으로 반대에 부딪친다. 최선의 목적이 최악의 흐름에 빛을 잃고, 천재의 날아오르는 힘이 평범의 인력(引力) 때문에 가라앉으며, 착한 것의 진보는 나쁜 것의 타성에 젖어 늦어진다. 아름다운 자의 예술은 악의 존재로 인하여 더러워지고, 건강한 부력(浮力)은 질병의 무력함에 중화되며, 믿음의 샘물은 두려움의 독에 오염된다. 기쁨의 샘물이 슬픔의 강물로 말미암아 쓰디쓰게 되고, 기대하는 즐거움이 쓰라린 현실로 인하여 사라지며, 삶의 기쁨이 죽음의 슬픔에 늘 위협을 받는다. 그러한 행성에 그러한 인생이라니! 그래도 생각 조절자가 늘 도움을 주고 재촉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상당한 정도의 행복과 성공을 얻었고, 바로 지금 저택 나라의 심판실까지 올라갔다.”

111:7.6 (1224.1) [오르본톤의 한 외톨 사자가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