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7 편 히브리인 사이에서 진화된 하나님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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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서

제 97 편

히브리인 사이에서 진화된 하나님 개념

97:0.1 (1062.1) 히브리인의 영적 지도자들은 그들 이전에 다른 아무도 성공한 적이 없는 일―오직 철학자만 이해할 수 있는 추상적 관념으로 바꾸지 않고서, 그들의 하나님 개념에서 사람 모습 벗기는 일―을 해냈다. 서민들조차 성숙한 야웨 개념을 개인의 아버지는 아니라도, 적어도 종족의 아버지로 여길 수 있었다.

97:0.2 (1062.2) 멜기세덱 시절에 사람들은 살렘에서 하나님의 성격 개념을 뚜렷하게 가르침 받았지만, 그 개념은 에집트에서 탈주하던 시절에 흐릿하고 안개 같았고, 영적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반응하여 대대로 히브리인의 머리 속에서 겨우 차츰차츰 발달하였다. 야웨의 성격 개념은 의 여러 다른 속성보다 훨씬 더 연속된 점진적 발달이었다. 모세로부터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히브리인의 머리 속에서 하나님의 성격에 관한 개념은 거의 끊임없이 성장하였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이 궁극에 이 개념을 높고 영화롭게 만들었다.

1. 사무엘―처음 히브리 선지자

97:1.1 (1062.3) 팔레스타인에서 둘러싼 민족들의 적대하는 압력은, 곧 히브리인 족장들에게 부족 조직을 중앙 집권적 정부로 연합하지 않으면 살아남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쳤다. 행정 권한이 이렇게 집중된 것은 사무엘이 선생이자 개혁자로서 활동하는 훨씬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97:1.2 (1062.4) 사무엘멜기세덱의 진리를 예배 형태의 일부로 지속시켰던 살렘 선생들의 긴 혈통에서 솟아나왔다. 이 선생은 씩씩하고 결의가 굳은 사람이었다. 모세 시절에 믿었던 최고의 야웨를 예배하도록 그가 온 이스라엘을 돌이키기 시작했을 때 그는 거의 보편적 반대에 부딪쳤고, 특별한 각오와 함께, 오직 크게 헌신하는 마음이 그로 하여금 이 반대를 견딜 수 있게 했다. 그때에도 그는 겨우 얼마큼 성공했다. 히브리인 중에서 절반인 지식층만 상급 야웨 개념을 섬기도록 설득했으며, 나머지 반은 그 나라의 부족 신들을 숭배하고 열등한 야웨 개념을 계속 간직하고 있었다.

97:1.3 (1062.5) 사무엘은 일을 후딱 해치우는 부류의 사람이었고, 하루에 동료들과 함께 나가서 바알 장소를 스물이나 뒤엎을 수 있는 실용적 개혁자였다. 그는 순전한 강요의 힘으로 진전을 보았다. 말로 설교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가르치는 적은 더욱 적었지만, 그는 행동으로 옮겼다. 하루는 바알 사제를 조롱하고 있었고, 다음 날은 사로잡힌 임금을 찍어 죽였다. 그는 열심히 유일한 하나님을 믿었고, 그 유일한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라는 뚜렷한 개념을 가졌다: “지구의 여러 기둥은 주의 것이요, 그 위에 주가 세상을 두셨도다.”[1]

97:1.4 (1063.1) 그러나 사무엘 개념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은 야웨변함이 없다, 어김없이 완전하고 신성함을 언제까지나 똑같이 구현한다는 우렁찬 선언이었다. 이 시절에 야웨는 그가 이러저러하게 행한 것을 언제나 뉘우치고, 질투로 마음이 변하는, 변덕스러운 하나님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제, 히브리인이 에집트를 뛰쳐나온 뒤에 처음으로, 그들은 이런 깜짝 놀랄 말씀을 들었다, “이스라엘의 힘은 거짓말하거나 뉘우치지 아니하리니, 그가 사람처럼 뉘우치지 않음이라.” 과 가지는 거래는 변치 않는다고 외쳤다. 사무엘멜기세덱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되풀이했고,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 모든 진리ㆍ안정ㆍ불변의 근원이라고 선언했다. 히브리인은 언제나 그들의 하나님을 사람으로, 초인간으로, 기원을 알 수 없는 높은 영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듣건대, 옛날에 호렙 산의 신은 창조자의 완전함을 갖춘, 변치않는 하나님으로 높이 올려졌다. 사무엘은 진화하는 하나님 개념이 변덕스러운 사람의 생각과 필사 존재의 부침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도록 돕고 있었다. 그의 가르침을 받고서 히브리인의 하나님은 부족신 서열의 관념에서 전능하고 변함없는 창조자요 모든 창조의 감독자라는 이상의 높이까지 비로소 올라가고 있었다.

97:1.5 (1063.2) 그는 하나님이 성실하며, 계약을 지킬 만큼 믿을 만하다는 이야기를 새롭게 전파했다. 사무엘은 말했다: “주는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그는 우리와 영구한 약속을 하셨고, 이 약속은 모든 면에 체계 있고 확실하니라.” 그래서 온 팔레스타인에 두루, 최고의 야웨를 섬기러 돌아오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활기에 넘친 이 선생은 늘 외쳤다. “아 주 하나님, 주는 위대하시니, 주와 같은 이가 하나도 없고, 주 외에 어떤 다른 하나님도 없음이니이다.”

97:1.6 (1063.3) 그때까지 히브리인은 야웨의 은총을 주로 물질적 번영 면에서 보았다. 이렇게 감히 선포했을 때, 이는 이스라엘에게 큰 충격이었고, 사무엘은 목숨을 거의 잃을 뻔하였다: “주는 사람을 부하게도 만들고 가난하게도 만드시며, 낮추기도 하고 높이기도 하시니라. 그는 티끌 속에서 가난한 자를 높이시고, 거지들을 들어올리사 영광의 보좌를 물려받게 하려고 군주들 사이에 저희를 세우시느니라.” 모세 이후로, 겸손한 자와 복을 적게 받은 자에게 그렇게 마음을 위로하는 약속이 선포된 적이 없었고, 가난한 자들 속에서 절망하던 수많은 사람이 영적 지위를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을 비로소 가지게 되었다.

97:1.7 (1063.4) 그러나 사무엘은 부족 신 개념을 넘어서 그다지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 야웨가 모든 사람을 만들었지만, 주로 히브리인, 그가 택한 민족의 일에 분주하다고 선포하였다. 그렇기는 해도, 모세의 시절처럼, 다시 한 번 하나님 개념은 거룩하고 올바른 을 묘사했다. “주처럼 거룩한 자가 하나도 없느니라. 누가 이 거룩한 주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느냐?”

97:1.8 (1063.5) 세월이 지나가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나이 든 지도자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진보했으니, 이렇게 외쳤기 때문이다: “주는 지식의 하나님이요, 행동을 저울로 재느니라. 주는 땅 끝까지 심판할 것이요, 자비로운 자에게 자비를 보이며, 또한 곧은 사람을 바르게 대하리라.” 자비로운 자에게 국한되지만, 여기서도 자비의 빛이 밝아온다. 나중에 그들이 곤경에 빠져서, 그의 민족에게 이렇게 타일렀을 때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제 주의 손아귀에 빠지자, 그의 자비가 크심이라.” “사람을 많이 구하든 적게 구하든, 주에게 아무 제한이 없느니라.”

97:1.9 (1063.6) 야웨 성품 개념의 이러한 점진적 발전은 사무엘의 후계자들이 일했을 때에도 계속되었다. 야웨가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이라 제시하려고 애썼지만, 그들은 사무엘의 걸음과 도저히 발을 맞추지 못했다. 그들은 사무엘이 나중에 파악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자비롭다는 개념을 개발하지 못했다. 야웨가 누구보다도 높다고 주장하면서도, 다른 신들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꾸준히,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었다. “아 주여, 나라는 주의 것이니이다. 주는 만물 위에 우두머리로서 높이 계시나이다.”

97:1.10 (1064.1) 이 시대의 기본 생각은 신의 권능이었다. 이 시대의 선지자들은 히브리인의 왕좌에 앉을 임금을 기르도록 고안된 종교를 설파했다. “아 주여, 위대함ㆍ권능ㆍ영광ㆍ승리ㆍ웅대함이 주께 속하나이다. 주의 손 안에 권능과 힘이 있고, 주는 만인을 위대하게 만들고 힘을 줄 수 있나이다.” 이것이 사무엘과 그 직계 후계자들이 살던 시절에 하나님 개념의 형편이었다.

2. 엘리야와 엘리사

97:2.1 (1064.2) 그리스도 이전 10세기에 히브리 민족은 두 왕국으로 갈라졌다. 이 두 정치 구역에서 진리를 가르치는 많은 선생이 깊어진 영적 퇴폐의 물결, 반작용의 물결을 막으려고 애썼고, 이 물결은 분단하는 전쟁 이후에 비참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결의가 굳고 무서운 줄 모르는 정의의 투사(鬪士) 엘리야가 가르침을 시작하기까지, 히브리인의 종교를 진전시키려는 이런 노력은 성공하지 않았다. 엘리야사무엘의 시절에 지녔던 것과 비할 만한 하나님 개념을 북쪽 왕국에서 회복했다. 엘리야는 진보된 하나님 개념을 제시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보다 먼저 있던 사무엘처럼 그는 분주해졌고, 바알의 여러 제단을 뒤엎고 거짓 신들의 우상을 깨 버렸다. 우상을 숭배하는 군주(君主)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혁을 실행했다. 그의 과제는 사무엘이 부닥쳤던 것보다 더욱 거창하고 어려웠다.

97:2.2 (1064.3) 엘리야가 부름받아 떠났을 때, 충실한 동료 엘리사는 그의 일을 떠맡았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가야의 귀중한 도움을 받아서, 팔레스타인에서 진리의 빛을 살려 두었다.

97:2.3 (1064.4) 그러나 이때는 의 개념이 전진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아직까지 히브리인은 모세의 이상의 높이까지도 도달하지 못했다. 엘리야엘리사의 시대는 상류 계층이 최고의 야웨 숭배로 돌아옴과 함께 막을 내렸고, 사무엘이 두어 둔 자리쯤까지, 우주의 창조자 관념이 회복된 것을 구경하였다.

3. 야웨와 바알

97:3.1 (1064.5) 야웨 신자와 바알 추종자 사이에 오래 끈 논쟁은 종교 관념의 차이가 아니라 차라리 사회ㆍ경제 이념의 충돌이었다.

97:3.2 (1064.6) 팔레스타인 거주자들은 토지의 사유 재산권에 대하여 태도가 달랐다. 남쪽 부족, 곧 방랑하는 아라비아 부족들(야웨파)은 토지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권리―이 씨족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땅을 팔거나 저당 잡힐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야웨가 ‘땅은 내 것이니 팔지 못할지니라’ 말씀하셨도다.”

97:3.3 (1064.7) 북쪽에 정착한 가나안 족속(바알파)은 자유롭게 땅을 사고팔고 저당 잡혔다. 바알이라는 말은 소유자를 뜻한다. 바알 종파는 두 가지 주요 교리에 기초를 두었다. 첫째는 재산의 교환ㆍ계약ㆍ약속―땅을 사고 파는 권리―를 정당화한 것이다. 둘째로, 바알은 비를 보낸다고 생각되었다―그는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신이었다. 좋은 수확을 거두는 것은 바알의 은혜에 달려 있었다. 그 종파는 대체로 ㆍ소유권ㆍ비옥함에 관심을 가졌다.

97:3.4 (1065.1) 일반적으로 바알파는 집ㆍ땅ㆍ노예를 소유했다. 그들은 귀족인 지주(地主)였고 도시에서 살았다. 각 바알은 신성한 장소와 사제, 그리고 “거룩한 여자,” 곧 의식에 쓰이는 창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97:3.5 (1065.2) 땅을 보는 관점의 이러한 기본적 차이로부터 가나안인과 히브리인의 사회ㆍ경제ㆍ도덕ㆍ종교적 태도에 맹렬한 적대감이 생겼다. 이 사회ㆍ경제적 논쟁은 엘리야의 시절까지 분명한 종교적 쟁점이 되지 않았다. 이 공격적 선지자의 시절부터, 더 엄밀하게 종교적 노선에서―야웨바알―논쟁이 있었고, 이것은 야웨의 승리와 그 뒤에 일신교를 향한 운동으로 끝났다.

97:3.6 (1065.3) 엘리야야웨바알의 논쟁을 토지 문제로부터 히브리인의 이념과 가나안인의 이념의 종교적 측면으로 옮겼다. 아합나봇 일가의 땅을 소유하려는 음모를 꾸며 그들을 죽였을 때, 엘리야는 옛 토지 관습으로부터 도덕적 쟁점을 만들었고, 바알파에 맞서서 힘찬 투쟁을 벌였다. 이것은 또한 도시의 지배에 맞서서 시골 사람들이 벌인 싸움이었다. 주로 엘리야 밑에서 야웨엘로힘이 되었다. 그 선지자는 토지 개혁자로서 시작했고, 을 높임으로 끝을 맺었다. 바알 신은 여럿이었고, 야웨하나였다―일신교가 다신교를 물리쳤다.

4. 아모스와 호세아

97:4.1 (1065.4) 부족 신―희생물과 예식으로 아주 오랫동안 섬김을 받던 신, 초기 히브리인의 야웨―가 자신의 민족 안에서도 범죄와 부도덕을 징계하려 하는 하나님이 되는 과도기에 아모스가 큰 걸음을 내디디었다. 그는 북쪽 부족들의 범죄ㆍ만취ㆍ억압ㆍ부도덕을 비난하려고 남부의 산지에서 나타났다. 모세의 시절 이후로, 그렇게 울려 퍼지는 진리가 팔레스타인에서 선포된 적이 없었다.

97:4.2 (1065.5) 아모스는 단지 회복자나 개혁자가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개념을 발견한 자였다. 그는 이전 사람들이 발표한 하나님에 관하여 많이 선포하였고, 이른바 선민 사이에서 죄를 묵인할 신성한 존재를 믿는 신앙을 용감히 공격했다. 멜기세덱 시절 이후에 처음으로, 민족의 정의와 도덕에 2중 잣대 사용을 비난하는 소리가 사람의 귀에 들렸다. 그들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바로 그들의 하나님 야웨가 그들의 생활에서 생기는 범죄와 죄를 어떤 다른 민족의 경우보다 더 참고 넘어가지 않는다는 소리를 히브리인의 귀가 들었다. 아모스사무엘엘리야의 엄하고 공정한 하나님을 상상했지만, 또한 잘못한 것을 벌줄 때 히브리인과 어느 다른 민족을 조금도 달리 생각하지 않는 하나님을 보았다. 이것은 자기 중심의 “선민” 교리에 대하여 정면 공격이었고, 그 시절에 많은 히브리인이 가슴에 사무치게 이를 분개하였다.

97:4.3 (1065.6) 아모스는 말했다: “산을 빚고 바람을 지으신 이, 일곱 별과 오리온을 형성한 이를 찾을지니, 그는 죽음의 그림자를 아침으로 바꾸고 낮을 밤처럼 어둡게 만드시느니라.” 건성으로 종교를 믿고 기회주의이고 때때로 부도덕한 동료들을 비난하면서, 변치 않는 야웨의 어김 없는 응보를 묘사하려고 애쓰면서 그는 행악자들에게 말했다, “비록 저희가 지옥으로 파고 들어가도 거기서 저희를 잡아내리라, 비록 저희가 하늘로 기어오르더라도, 거기서 저희를 끌어내리리라.” “그리고 적들 앞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도, 거기서 나는 응보의 칼을 지시하겠고 그 칼이 저희를 죽일지니라.” 꾸짖고 비난하는 손가락으로 그들을 가리키면서 “분명컨대, 너희가 한 일을 하나도 결코 잊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밀을 체질하는 것 같이, 나는 이스라엘의 집을 모든 나라 사이에 체질하리라”하고 야웨의 이름으로 선언했을 때, 아모스는 청중을 더욱 놀라게 했다.

97:4.4 (1066.1) 아모스야웨가 “만국의 하나님”이라고 선포하고, 의식(儀式)으로 올바름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돌로 쳐죽임을 당하기 전에, 이 용감한 선생은 최고의 야웨 교리를 살리기에 넉넉히 진리의 누룩을 퍼뜨렸다. 그는 멜기세덱의 계시가 더욱 진전되는 것을 보장했다.

97:4.5 (1066.2) 호세아모세가 가르친 사랑의 하나님 개념을 부활시킴으로, 아모스, 그리고 우주의 하나님이 응보한다는 아모스의 교리를 따랐다. 호세아는 희생물이 아니라 뉘우침을 통해서 용서받기를 외쳤다. 그는 신이 인자하고 자비롭다는 복음을 선포하며 말했다, “내가 너와 언제까지나 약혼하리라. 옳도다, 올바름과 심판 속에서, 인자하고 자비롭게 너희와 약혼하리라. 나는 충실하게 너희와 약혼까지 하리라,” “나는 저희를 아낌없이 사랑하리니, 내 성이 풀렸음이라.”

97:4.6 (1066.3) 호세아는 충실하게 아모스의 도덕적 경고를 계속했고,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저희를 꾸짖는 것이 내가 바라는 바라.” 그러나 “내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 ‘너희는 내 백성이라’ 이르리라, 그리고 저희는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나이다’하고 말하리라,” 이렇게 말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를 반역죄에 가깝게 잔인한 것으로 여겼다. 그는 계속 회개와 용서를 설교하며 말했다, “나는 저희의 타락을 고치리라, 저희를 아낌없이 사랑하리라, 내 성이 풀렸음이라.” 호세아는 늘 희망과 용서를 선포했다. 그의 말씀의 요점은 늘 이것이었다. “내 백성에게 내가 자비를 베풀리라. 저희는 나 외에 아무 하나님을 알지 못할지니, 나 외에 아무 구원자가 없음이라.”

97:4.7 (1066.4) 아모스는 그들이 선택된 백성이라 생각된다고 해서 야웨가 그들 중에서 범죄와 죄를 묵인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도록 히브리인의 민족 양심을 깨우쳤다. 한편 호세아는 신이 동정심이 가득하고 자애롭다는 자비로운 화음(和音)의 첫 음정을 시작했고, 후일에 이사야와 그 동료들은 이 화음을 아주 아름답게 노래했다.

5. 첫 이사야

97:5.1 (1066.5) 이때는 북부 씨족들 사이에서 더러가 개인의 죄와 민족의 범죄를 징계한다는 위협을 선언하고, 한편 더러가 남쪽 왕국이 죄지은 것에 대하여 징벌로 재난이 있으리라 예언하던 시절이었다. 히브리 국가들에서 양심과 의식(意識)이 일깨워진 것을 뒤이어 첫 이사야가 등장했다.

97:5.2 (1066.6) 이사야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성품, 곧 무한한 지혜, 변함없이 완전히 믿음직한 성질을 설파하였다. 그는 이스라엘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고 묘사했다: “나는 또한 줄자 대로 심판하고 다림추 대로 공의를 펴리라.” “너희의 슬픔과 두려움에서, 너희가 수고하는 고된 속박의 처지에서 벗어나도록 주가 너희에게 휴식을 주리라.” “그리고 너희의 귀는 ‘이것이 길이라, 그 길로 가라’ 하는 말씀을 너희 뒤에서 들을지니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라, 나는 믿고 두려워 아니하리니, 주가 나의 힘이요 내 노래인 까닭이라.” “‘이제 와서 함께 의논하자’ ‘너희의 죄가 진홍 같아도, 눈과 같이 희게 될지라. 심홍처럼 붉어도 양털 같이 될지니라’ 주가 말씀하시니라.”

97:5.3 (1066.7) 두려움에 질리고 혼이 갈급한 히브리인에게 이 선지자는 말했다. “일어나서 빛날지어다. 너희의 빛이 다가왔고, 주의 영광이 너희를 비춤이라.” “주의 영이 내 가까이 오시니, 좋은 소식을 유순한 자에게 전파하라고 그가 내게 기름을 부으셨음이라.” “마음이 상한 자를 동여매고, 포로에게 자유를, 묶인 자에게 감옥 문이 열렸음을 선포하라고 나를 보내셨음이라.” “나는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하리니, 내 혼이 내 하나님 안에서 즐거울지라,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나를 입히고, 올바름의 옷으로 나를 덮으셨음이라.” “저희가 받는 모든 고통 속에 그가 고통을 받았고, 그의 앞에 있던 천사가 저희를 구하였도다.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가 저희를 되찾았도다.”

97:5.4 (1067.1)이사야 뒤를 미가오바디아가 따랐고, 이들은 혼을 적셔 주는 그의 복음을 확인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그리고 용감한 이 두 사자는 사제에게 지배된 히브리인 의식(儀式)을 대담하게 비난하고, 두려움 없이 희생 제도 전체를 공격했다.

97:5.5 (1067.2) 미가는 “보상을 받고 재판하는 통치자, 보수를 받고 가르치는 사제, 돈을 받고 점치는 예언자들”을 꾸짖었다. 그는 미신과 제사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날을 가지라고 가르치며 말했다: “그러나 각 사람이 자기의 넝쿨 아래에 앉을지며, 아무도 그에게 겁을 주지 말지니, 이는 각자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대로 모든 사람이 살 것임이라.”

97:5.6 (1067.3) 미가가 전한 말씀의 요점은 늘 이것이었다: “태운 헌물을 가지고 내가 하나님 앞에 오리이까? 주가 숫양 1천 마리나 1만 강(江)에 가득 찬 기름으로 기뻐하시리이까?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내 첫 아이를, 내 혼이 지은 죄 때문에 내 몸의 열매를 드리리이까? 아, 사람아, 그는 나에게 무엇이 좋은지 보여주셨도다, 공정하게 행하고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너희 하나님과 더불어 걷는 것 말고 주가 너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느냐?” 이때는 위대한 시대였다. 정말로 풍운의 시절이었으니, 이때 2천 5백 년도 더 전에, 필사 인간은 사람을 그렇게 해방하는 소식을 들었고 더러는 이를 믿기도 하였다. 사제들의 끈질긴 저항이 없었다면, 이 선생들은 히브리인의 예배 의식에서 피비린내 나는 예식을 통채로 폐지했을 것이다.

6. 두려움 없는 예레미야

97:6.1 (1067.4) 몇몇 선생이 이사야의 복음을 줄곧 해설했지만, 히브리인의 하나님 야웨를 국제적 신으로 만드는 일에 예레미야가 다음으로 과감한 걸음을 내디디었다.

97:6.2 (1067.5) 예레미야히브리인이 다른 나라와 전쟁할 때 야웨가 그들 편을 들지 않는다고 두려움 없이 선언했다. 그는 야웨가 온 땅,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다. 예레미야의 가르침은 이스라엘하나님을 국제화하는, 올라가는 물결이 최고조에 달한 것이었다. 마침내, 언제까지나, 이 대담한 설교자는 야웨가 만국의 하나님이라, 에집트인에게 오시리스, 바빌로니아인에게 , 아씨리아인에게 아슈르, 또는 필리스티아인에게 다곤이 도무지 없다고 선포했다. 이렇게 히브리인의 종교는 이 무렵에, 그리고 그 이후로 세계에 두루, 일신교의 부흥을 함께 하게 되었다. 마침내 야웨 개념은 행성의 수준으로, 우주의 위엄을 가진 높이까지도 올라갔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동료 중에 많은 사람은 히브리 민족과 따로 있는 야웨를 생각하기가 어려움을 깨달았다.

97:6.3 (1067.6) 예레미야는 또한 이렇게 선언하면서, 이사야가 묘사한, 공정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을 전파했다: “옳도다, 나는 영원한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그러므로 인자함으로 내가 너희를 당기었노라.” “이는 그가 사람의 아들딸에게 고통 주기를 기뻐하지 않으심이라.”

97:6.4 (1067.7) 두려움 없는 이 예언자는 말했다: “우리의 주는 올바르고, 너그럽게 충고하며, 힘차게 일하시느니라. 사람마다 가는 길에 따라서, 사람이 한 일의 열매에 따라서 주려고, 사람의 모든 자손이 가는 길을 다 눈 뜨고 보시니라.” 그러나 예루살렘이 포위된 동안, “그리고 이제 내가 이 땅을 바빌론의 임금 느부갓네살, 내 종의 손에 주었노라”하고 말했을 때 그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반역죄로 생각되었다. 예레미야가 그 도시의 항복을 조언했을 때, 사제와 국가 통치자들은 그를 컴컴한 지하 감방의 더러운 구덩이 속으로 처박았다.

7. 둘째 이사야

97:7.1 (1068.1) 히브리인의 국가가 멸망하고 메소포타미아에서 포로 생활을 한 것은 그 사제들의 굳게 결의한 행동이 아니었더라면, 그들의 확대되는 신학에 크게 유익함이 입증되었을 것이다. 나라는 바빌론의 군대 앞에서 패했고, 그들 민족을 두둔하던 야웨는 영적 지도자들의 국제적 설교로 고난을 받았다. 그들의 민족 신을 잃어버린 것을 분개했기 때문에, 새롭고 확대된 개념의 하나님이어도, 유대인을 국제화된 만국의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으로 회복시키려는 노력으로, 유대인 사제들은 히브리인의 역사에서 여러 우화(寓話)를 만들어내고 기적으로 보이는 사건들을 불렸다.

97:7.2 (1068.2) 포로 생활 기간에 유대인은 바빌로니아의 전통과 전설에 많이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조상ㆍ역사에 명예와 영광을 돌리려고 이러한 전설을 항상 왜곡했는데도, 그들은 채택한 갈대아인 이야기의 도덕적 바탕과 영적 의미를 어김없이 개선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97:7.3 (1068.3)히브리인 사제와 서기관들은 머리 속에 단 하나의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이는 유대 나라를 복구하고, 히브리인의 전통을 영화롭게 하고, 종족의 역사를 높이는 것이었다. 이 사제들이 그들의 그릇된 생각을 서양 세계의 큰 부분에 부착시켰다는 사실에 분개심이 일어난다면, 그들이 일부러 이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영감을 받아서 썼다고 우기지 않았고 신성한 책을 쓴다고 공언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다만 포로 생활을 하던 동포의 오그라드는 용기를 북돋아 주려고 고안된 교과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민족 정신과 겨레의 사기(士氣) 높이는 것을 겨냥하고 있었다. 후일의 사람들이 이것과 기타 기록들을 모아서,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된 가르침을 적은 안내서로 만들게 되었다.

97:7.4 (1068.4) 유대인 사제들은 포로 생활이 끝난 뒤에 이 기록들을 아낌없이 이용해 먹었지만, 그들은 기를 꺾을 수 없는 젊은 선지자, 둘째 이사야가 있었기 때문에 동료 포로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데 크게 방해를 받았다. 둘째 이사야는 첫 이사야가 외친, 응보ㆍ사랑ㆍ올바름ㆍ자비의 하나님을 완전히 믿는 신자가 되었다. 그는 또한 예레미야와 함께, 야웨가 만국의 하나님이 되었음을 믿었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이 이론들을 아주 효과 있게 설파했고, 그가 유대인과 정복자들을 똑같이 개종시켰다는 것이 이를 나타낸다. 이 젊은 전도자는 그의 가르침을 기록에 남겨 놓았고, 적대하고 용서 없는 사제들은 그 가르침이 그와 전혀 상관없게 만들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과 웅대함을 순전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 기록을 예전의 이사야가 쓴 기록 사이에 집어넣게 되었다. 이처럼 이 둘째 이사야의 기록은 그 이름을 지닌 책에서 발견될 수도 있고, 40장에서 55장 끝까지 포함한다.

97:7.5 (1068.5) 마키벤타로부터 예수의 시절까지, 어떤 선지자나 종교 스승도 이 포로 생활 시절에 둘째 이사야가 선포했던 높은 하나님 개념에 이르지 못했다. 이 영적 지도자가 선포한 것은 작고, 사람 모습을 하고 사람이 만든 하나님은 전혀 아니었다. “보라, 그는 섬들을 티끌처럼 들어올리시느니라.” “그리고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 같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고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97:7.6 (1069.1) 마침내 마키벤타 멜기세덱은 진짜 하나님을 필사 인간에게 선포하는 인간 선생들을 바라보았다. 첫 이사야처럼, 이 지도자는 우주를 창조하고 떠받드는 하나님을 전파하였다. “나는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두었노라. 나는 땅을 헛되이 만들지 아니하였고, 사람이 살라고 땅을 빚었노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나 외에 아무 하나님이 없느니라.”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새 선지자는 말했다. “하늘이 사라지고 땅이 고갈될지라도 나의 올바름은 언제까지나 버티고, 나의 구원은 대대로 버틸지니라.” “너희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음이라, 절망하지 말지니, 내가 너희의 하나님인 까닭이라.” “나 외에 아무 하나님이―공정한 하나님구원자가―없느니라.”

97:7.7 (1069.2) 이와 같은 말씀을 듣는 것은 포로가 된 유대인에게 위로가 되었고, 마찬가지로 그 뒤로 늘 허다한 사람들을 위로했다: “주가 이렇게 말씀하시니라, ‘나는 너를 만들었고, 너를 되찾고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노라, 너는 내 것이라.’” “너희가 바다를 지나갈 때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니, 너희가 내 눈앞에 귀중함이라.” “여자가 제 아들을 동정하는 마음이 없다고 해서, 젖 먹는 제 아이를 잊을 수 있느냐? 옳도다, 여자는 잊을지 몰라도, 나는 내 아이들을 잊지 아니하리니, 보라, 내가 저희를 내 손바닥에 새겼음이라. 나는 내 손의 그림자로 저희를 가리기까지 하였노라.” “악한 자는 자기의 길을 버릴지며, 불의한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게 하라. 그러면 주는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리라, 우리 하나님한테 돌아오게 하라, 그가 넘치게 용서할 것임이라.”

97:7.8 (1069.3) 살렘하나님을 이렇게 새로 드러내는 복음을 다시 들어 보아라: “그는 제 양 떼를 목자처럼 먹이리라, 양들을 팔 안에 모으고 가슴에 품어 저희를 나르리라. 그는 약한 자에게 힘을 주고, 힘이 없는 자에게 힘을 키워 주도다. 주를 섬기는 자는 힘을 다시 찾겠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가리라. 저희가 달리고서 지치지 아니하겠고, 걸어도 쓰러지지 아니하리라.”

97:7.9 (1069.4)이사야는 확대되는 최고의 야웨 개념을 담은 복음을 멀리 미치도록 선전했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우주의 창조자로 묘사함으로 그는 모세와 웅변으로 경쟁하였다. 우주의 아버지의 무한한 속성을 그린 그의 글은 시(詩)와 같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관하여 이보다 더 아름다운 말이 입에서 나온 적이 없다. 시편처럼, 이사야의 글은 미가엘유란시아에 오시기 전에 필사 인간의 귀가 들은 바, 영적 하나님 개념을 가장 숭고하고 참되게 발표한 것에 속한다. 그가 을 묘사한 것을 들어 보아라: “나는 영원에서 거하는 높고 높은 자이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나 외에 아무 다른 하나님이 없느니라.” “그리고 주의 손이 짧아져서 사람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이 아니요, 귀가 어두워서 들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워도 위엄 있는 이 선지자가 신이 변치 않고 하나님이 충실함을 끈질기게 전파한 것은 유대 민족 사이에 새로운 교리였다. “하나님은 잊지 않고, 버리지 않고자 하시리라”하고 그는 외쳤다.

97:7.10 (1069.5) 이 대담한 선생은 사람이 하나님과 무척 가까운 사이라고 선포했고, 이렇게 말했다. “내 이름으로 부르는 자마다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했고, 저희는 나를 찬양함을 보일지니라. 나, 나조차도, 스스로를 위하여 저희가 지은 죄를 지워버리는 자이라, 나는 저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

97:7.11 (1069.6) 이 위대한 히브리인이 민족의 하나님 개념을 때려부수고, 한편 영화롭게 우주의 아버지의 신성을 선포하는 것을 들어 보아라. 그는 우주의 아버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발판이라.” 그런데도 이사야하나님은 거룩하고, 훌륭하고, 공정하며, 사람은 그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사막의 베두인 족속이 가졌던 개념, 성이 나 있고 복수심이 가득하고 질투하는 야웨 개념은 거의 사라졌다. 최고이며 보편적인 새 야웨 개념이 필사 인간의 머리 속에 나타났고, 인간의 눈앞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 신의 응보를 깨닫는 것은 원시적 마술과 생물학적 두려움을 없애기 시작했다. 마침내, 사람은 법과 질서가 있는 우주에 대하여 듣고, 믿을 수 있고 확고한 속성을 가진 우주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97:7.12 (1070.1) 숭고한 하나님을 외치는 이 전도자는 그칠 줄 모르고 이 사랑의 하나님을 선포하였다.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뉘우치고 겸손한 정신을 가진 자와 함께 하노라.” 이 위대한 선생은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 위로하는 말씀을 더 주었다: “그리고 주가 너를 줄곧 안내하고 너의 혼을 채워 주시리라. 너는 물을 준 동산 같고 그침 없이 흐르는 샘물과 같을지니라. 그리고 적이 홍수(洪水)처럼 온다면, 주의 영이 그에 맞서서 방어물을 세우리라.” 두려움을 없애는 멜기세덱의 복음과 신뢰를 낳는 살렘의 종교가 인류에게 축복을 내리려고 다시 한 번 앞을 비추었다.

97:7.13 (1070.2) 선견이 있고 용감한 이사야는 최고의 야웨, 사랑의 하나님, 우주의 통치자, 애정을 가진, 온 인류의 아버지의 위엄과 보편적 전능을 숭고하게 그림으로써 민족주의적 야웨가 실제로 빛을 잃게 하였다. 그 중대한 시절 이후로, 서양에서 가장 높은 하나님 개념은 보편적 응보, 신의 자비, 영원한 올바름을 포함했다. 훌륭한 언어로, 비할 데 없는 품위를 갖추고 이 위대한 선생은 전능한 창조자를 만인을 사랑하는 아버지로 그렸다.

97:7.14 (1070.3) 포로로 잡혀 있던 이 선지자는 바빌론의 강가에서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을 때 그의 민족에게, 그리고 뭇 나라의 민족들에게 설파하였다. 그리고 이 둘째 이사야는 약속된 메시아의 임무에 대하여, 종족 면에서 자기 중심인 그릇된 많은 개념을 없애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이 노력에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사제들이 그릇된 생각으로 민족주의를 키우는 일에 헌신하지 않았더라면, 두 이사야의 가르침은 약속된 메시아를 알아보고 받아들이기 위하여 길을 예비했을 것이다.

8. 신성한 역사와 세속의 역사

97:8.1 (1070.4) 히브리인의 체험 기록을 신성한 역사로 바라보고, 나머지 세상의 사무를 세속의 역사로 바라보는 관습은, 역사의 해석에 관하여 사람의 머리 속에 존재하는 많은 혼란에 책임이 있다. 이 문제는 유대인에게 세속의 역사가 없기 때문에 생긴다. 바빌로니아에 추방된 시절에 사제들이, 하나님히브리인과 가졌던, 기적이라고 생각된 거래의 기록, 구약에 묘사된 이스라엘의 신성한 역사의 새 기록을 준비한 뒤에, 그들은 히브리인의 나랏일에 관한 기존 기록―히브리 역사에서 얼마큼 정확한 몇 가지 다른 기록과 함께, “이스라엘 왕들의 업적” 과 “유다 왕들의 업적”―을 조심스럽게, 샅샅이 없애버렸다.

97:8.2 (1070.5) 세속의 역사의 통렬한 압력에 눌리고 피할 수 없이 강요당한 것이 어떻게, 포로가 되고 외국인에게 지배받는 유대인을 아주 공포에 빠지게 만들었는가, 그래서 그들이 자기네 역사를 완전히 새로 쓰고 개작하려고 애썼는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복잡한 그들 민족 체험의 기록을 간단히 살펴보아야 한다. 유대인은 신학을 떠나서 인생에 대하여 적당한 철학을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끔찍한 벌을 받고, 아울러 올바르면 신이 보상한다는 개념, 최초의 에집트인의 개념과 씨름했다. 의 연극은 이 그릇된 철학에 맞선 일종의 항거였다. 전도서에 담긴 솔직한 비관론은 섭리를 믿는 지나친 이 낙관적 신앙에 대한 반응, 처세에 현명한 반응이었다.

97:8.3 (1071.1) 그러나 외래 통치자의 압제 밑에서 지낸 5백 년은 참을성 있고 오래 견디는 유대인에게도 너무 지나쳤다. 선지자와 사제들은 외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아 주여, 언제까지니이까?” 성서를 탐구하는 동안에, 정직한 유대인의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어느 옛 예언자는 하나님이 그가 “택한 백성”을 보호하고 구원하리라고 약속했다. 아모스는 그들이 민족의 올바름의 기준을 다시 세우지 않으면, 하나님이스라엘을 버릴 것이라 전에 위협했다. 신명기의 서기관은―선과 악, 축복과 저주와 같이―큰 선택이 있음을 묘사하였다. 첫 이사야는 인자한 임금이자 구원자에 대하여 설파하였다. 예레미야는 올바른 마음을 가지는―가슴 속 서판에 약속을 적는―시대를 선포하였다. 둘째 이사야는 희생물을 바치고 대속함으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말했다. 에스겔은 헌신적 봉사를 통하여 구원받음을 선포했고, 에즈라는 율법을 지킴으로 번영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있었는데도, 그들은 속박된 채로 남아 있고, 구원은 뒤로 미루어졌다. 그리고 나서 다니엘은 다가오는 “위기”―큰 형상을 깨뜨리고 영원한 올바른 통치, 즉 메시아의 왕국이 즉시 세워지는 것―을 묘사하는 각본을 제시했다.

97:8.4 (1071.2) 이 모든 거짓된 소망이 그 민족이 실망하고 좌절하는 지경까지 이끌었으므로, 유대인 지도자들은 너무 헛갈려서 신다운 파라다이스 아들이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사람의 아들로 육신화되어―금방 그들에게 왔을 때, 그를 알아보고 그의 사명과 봉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97:8.5 (1071.3) 모든 현대 종교는 인간의 역사의 어떤 시대를 기적으로 해석하려고 애씀으로 심각한 실수를 저질러 왔다. 하나님이 섭리로 아버지의 간섭하는 손을 여러 번 인간사의 흐름 속에 밀어넣은 것이 참말이지만, 신학의 독단(獨斷)과 종교적 미신을 이 인간의 역사의 흐름 속에서 기적 행위로 인하여 나타나는 초자연적 침전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최고자들이 사람의 나라에서 다스린다”는 사실은 세속의 역사를 이른바 신성한 역사로 바꾸지 않는다.

97:8.6 (1071.4) 신약의 저자와 후일에 기독교 작가들은 유대인 선지자들을 초월적 존재로 만들려는 시도로, 뜻은 좋았지만 히브리인 역사의 왜곡(歪曲)을 더욱 까다롭게 만들었다. 이처럼 히브리인의 역사는 유대인 저자와 기독교 저자들에게 비참하게 이용되었다. 현세의 히브리인 역사는 철저히 교리화되었다. 신성한 역사라는 허구로 바뀌었고, 이른바 기독교 국가들의 도덕 개념과 종교적 가르침과 헤어날 수 없이 한데 묶이게 되었다.

97:8.7 (1071.5) 히브리인의 역사에서 중대한 시점을 간단히 되새기는 것은 그 민족의 일상적인 현세의 역사를 꾸며낸 신성한 역사로 바꾸려고 유대인 사제들이 어떻게 기록된 사실을 바빌론에서 뜯어 고쳤는가 보여줄 것이다.

9. 히브리인의 역사

97:9.1 (1071.6) 이스라엘 족속에게 결코 12 부족이 없었다―겨우 서너 부족이 팔레스타인에서 정착했다. 히브리인의 국가는 이른바 이스라엘 족속과 가나안 족속이 연합한 결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딸은 가나안 족속 사이에서 살았더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희의 딸들을 아내로 삼고, 자기 딸들을 가나안 족속의 아들들에게 주었더라.” 히브리인이 가나안 족속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냈다고 이에 관한 사제들의 기록이 서슴지 않고 선포했는데도, 그들을 결코 몰아내지 않았다.

97:9.2 (1071.7) 이스라엘 사람 비슷한 의식(意識)은 에브라임의 산지에서 뿌리를 내렸다. 후일의 유대인 의식은 남쪽 유다의 씨족에서 생겼다. 유대인(유다 사람)은 언제나 북쪽 이스라엘 (에브라임) 사람들의 이름을 더럽히고 그 기록에 먹칠하려고 애썼다.

97:9.3 (1072.1) 과장된 히브리인의 역사는 암몬 족속이 요단 강 동쪽에 사는 동포 부족 사람들―길르앗 족속―을 공격하는 데 저항하려고 사울이 북부의 씨족들을 불러모음으로 비롯된다. 그는 3천 명 남짓한 군대로 적을 무찔렀고, 이 공훈이 산지의 부족들에게 그를 임금으로 만들도록 이끌었다. 추방된 사제들이 이 이야기를 다시 썼을 때, 그들은 사울의 군대를 330,000명으로 늘였고, 그 싸움에 참여한 부족들의 명단에 “유다”를 보탰다.

97:9.4 (1072.2) 암몬 족속을 무찌른 직후에, 사울은 그 군대의 인기를 얻어서 임금이 되었다. 이 사건에 아무 사제나 선지자가 끼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사제들은 신의 지시에 따라서 사무엘 선지가 사울을 임금으로 세웠다고 기록에 넣었다. 그들은 다윗유다 왕권을 위하여 “신에게서 내려온 후계”를 세우기 위해서 이렇게 했다.

97:9.5 (1072.3) 유대인 역사에서 가장 큰 왜곡은 다윗과 상관이 있었다. 사울암몬 족속을 무찌른 뒤에 (이 공을 그는 야웨에게 돌렸지만), 필리스티아 족속이 놀라서 북쪽 씨족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윗사울은 결코 뜻을 한데 모을 수 없었다. 6백 명을 거느린 다윗필리스티아 연맹에 들어갔고, 바닷가를 따라서 에스드랠론까지 행진했다. 가스에서 필리스티아 족속이 다윗에게 들을 떠나라고 명령했고, 그들은 그가 사울에게로 넘어갈까 두려워했다. 다윗은 물러났고, 필리스티아 족속은 사울을 공격해서 물리쳤다. 다윗이스라엘에 충성했더라면, 그들은 이런 짓을 할 수 없었다. 다윗의 군대는 여러 나라 말을 하는 불평꾼의 집합이었고, 대체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와 법을 피한 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97:9.6 (1072.4) 사울길보아에서 필리스티아 족속에게 패배한 비극은 둘러싼 가나안 족속이 보기에, 야웨를 신들 사이에서 낮은 자리로 떨어뜨렸다. 보통은 사울의 패배를 야웨를 배반한 탓으로 돌렸겠지만, 이번에 유다의 편집자들은 의식(儀式)을 잘못 치른 탓으로 돌렸다. 이 편집자들은 다윗의 왕권을 세우기 위한 배경으로 사울사무엘의 전통이 필요했다.

97:9.7 (1072.5) 다윗은 그의 작은 군대와 함께 히브리인의 도시가 아닌 헤브론에서 본부를 차렸다. 이내 그의 동료들은 그를 새 유다 왕국의 임금으로 선포했다. 유다는 대체로 히브리인이 아닌 요소―갈렙예부스 및 기타 가나안 족속―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유목민―양 치는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히브리인의 토지 소유 관념에 충실했다. 그들은 사막에 사는 씨족들의 이념을 지니고 있었다.

97:9.8 (1072.6) 신성한 역사와 세속의 역사의 차이점은 다윗 임금을 만드는 것에 관하여 구약에서 발견되는 두 가지 다른 이야기가 잘 설명해 준다. 그의 직계 추종자들이 (그의 군대가) 어떻게 그를 임금으로 만들었는가 하는 세속 이야기의 일부가 사제들이 만든 기록에 뜻하지 않게 남게 되었다. 이들은 나중에 신성한 역사에 관하여 길고도 지루한 설명을 준비했고, 거기에는 사무엘 선지가 신의 지시로 어떻게 다윗을 그의 형제들 사이에서 골랐는가, 공식으로 진행하여 정교하고 엄숙한 예식에 따라서 히브리인의 임금이 되도록 그에게 기름을 부었고, 그리고 나서 그를 사울의 후계자로 선포했는가 그려져 있다.

97:9.9 (1072.7) 아주 여러 번 사제들은, 하나님이스라엘과 가진 기적같은 거래에 관하여 지어낸 이야기를 준비한 뒤에, 그 기록에 이미 남아 있던 평범하고 사실에 관계되는 언급을 완전히 없애지 못했다.

97:9.10 (1072.8) 다윗은 처음에 사울의 딸, 다음에는 부유한 에돔 사람 나발의 과부, 그 다음에는 게수르의 임금 탈마이의 딸과 결혼함으로, 정치적으로 자신을 키우려고 애썼다. 그는 족속인 아내 밧세바는 말할 것도 없고, 예부스의 여인들로부터 여섯 아내를 골랐다.

97:9.11 (1073.1) 그런 방법으로 그런 민족으로부터, 다윗에브라임 족속의 이스라엘 왕국, 사라지는 북쪽 왕국의 유산과 전통을 이어받은 신성한 유다 왕국이라는 허구를 만들었다. 다윗이 거느린 유다의 국제적 부족은 유대인이기보다 오히려 이방인이었다. 그런데도 에브라임의 억압받은 장로들이 내려와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을 만들었다.” 군사적 위협이 있은 뒤에, 다윗은 그때 예부스 족속과 조약을 맺었고, 연합 왕국의 서울을 예부스(예루살렘)에 세웠는데, 이곳은 유다이스라엘의 중간 지점에 튼튼히 담을 쌓은 도시였다. 필리스티아 족속이 흥분했고 곧 다윗을 공격했다. 치열한 전투가 있은 뒤에 그들을 물리쳤고, 다시 한 번 야웨는 “만군의 주 하나님”으로 자리를 잡았다.

97:9.12 (1073.2) 그러나 야웨는 어쩔 수 없이 가나안의 신들과 이 영광을 얼마큼 나누어야 했는데, 다윗 군대의 대부분이 히브리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 기록에 (유다의 편집자들이 놓쳐서) 내막을 드러내는 이 말이 나타난다: “야웨가 내 앞에서 내 적들을 부수었도다. 그런즉 그는 그곳의 이름을 바알 페라짐이라 불렀더라.”[2] 다윗의 병사들 가운데 80퍼센트가 바알의 신도였기 때문에 그들은 이렇게 했다.

97:9.13 (1073.3) 기브온 족속은 에브라임 족속과 평화 조약을 맺었는데, 사울가나안 도시 기브온을 쳤다, 이 때문에 야웨가 그를 버렸다고 지적함으로 사울길보아에서 졌다고 다윗은 설명했다. 사울의 시절에도 다윗필리스티아 족속에 대항하여 가나안 도시 케일라를 방어했고, 다음에 자기 서울을 한 가나안 도시에 정했다. 가나안 족속과 화해하는 정책과 걸음을 맞추어, 다윗사울의 후손 일곱 명을 교수대에 달리도록 기브온 족속에게 넘겨주었다.

97:9.14 (1073.4) 필리스티아 족속을 물리친 뒤에 다윗은 “야웨의 상자”를 손에 넣었고, 예루살렘으로 가져 와서, 그의 왕국에서 공식으로 야웨를 숭배하게 하였다. 다음에 그는 이웃 부족들―에돔 족속, 모압 족속, 암몬 족속, 시리아인―에게 무거운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97:9.15 (1073.5) 다윗의 부패한 정치 조직은, 히브리인의 도덕 관습에 어긋나게, 북쪽에서 땅의 개인 소유를 시작했고, 필리스티아 족속이 이전에 거두었던 카라반 관세를 대번에 장악했다. 그리고 나서 유리아를 결국 죽인 일련의 끔찍한 일들이 생겼다. 모든 사법(司法) 상소는 예루살렘에서 판결되었고, “장로”들은 이제 더 판결을 내릴 수 없었다. 반란이 터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압살롬을 선동자로 부를지 모른다. 그의 어머니는 가나안 사람이었다. 밧세바의 아들―솔로몬―외에도 왕좌를 얻으려고 다투는 자가 여섯이나 있었다.

97:9.16 (1073.6) 다윗이 죽은 뒤에 솔로몬은 모든 북쪽 세력의 정치 조직을 없애버렸지만, 아버지의 체제에 있던 모든 폭정과 세금을 계속하였다. 솔로몬은 사치스런 왕궁과 공들인 건축 사업으로 나라를 파산시켰는데, 레바논의 집, 파라오 딸의 궁전, 야웨의 성전, 임금의 궁전, 그리고 많은 도시의 담을 개축하는 공사가 있었다. 솔로몬은 거창한 히브리인의 해군을 만들었고, 시리아인 뱃사람들이 이를 운영하고 온 세계와 무역하였다. 그의 후궁들은 거의 1천 명에 이르렀다.

97:9.17 (1073.7) 이때가 되자 실로에 있던 야웨의 성전은 신용을 잃었고, 나라의 모든 숭배는 예부스에, 화려한 왕실 예배당에 집중되었다. 북쪽 왕국은 엘로힘을 숭배하는 쪽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파라오의 은혜를 누렸고, 파라오들은 나중에 유다를 노예로 만들고 남쪽 왕국이 조공을 바치게 했다.

97:9.18 (1073.8) 이스라엘유다 사이에는 풍파가―여러 번 전쟁이―있었다. 4년 동안 내란이 있고 세 왕조(王朝)가 지난 뒤에, 이스라엘은 땅을 사고 팔기 시작한, 도시의 전제 군주의 통치를 받았다. 오므리 왕조차 세메르의 토지를 사려고 했다. 그러나 샬마니저 3세가 지중해 바닷가를 장악하려고 작정했을 때, 종말이 다가왔다. 에브라임아합 임금은 다른 열 집단을 모아서 카르카르에서 저항했고, 그 싸움은 무승부였다. 아씨리아인은 제지되었지만, 연합군은 많은 사람을 잃었다. 이 큰 싸움은 구약에 언급되지도 않았다.

97:9.19 (1074.1) 아합 임금이 나봇한테서 땅을 사려고 했을 때 새로이 문제가 터졌다. 그의 페니키아인 아내는 나봇이 “엘로힘과 임금”의 이름을 모독했다는 죄명으로 나봇의 땅을 몰수할 것을 지시하는 서류에, 아합의 이름을 위조했다. 나봇과 그의 아들들은 재빨리 집행되었다. 활기에 찬 엘리야가 그 장면에 나타나서 아합나봇 가족을 죽인 것을 비난하였다. 가장 큰 선지자들 가운데 하나인 엘리야는, 땅을 파는 바알파의 태도에 대항하여, 시골을 정복하려는 도시의 시도에 맞서, 옛 토지 관습의 수호자로서 이처럼 그의 가르침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마리아에 있던 바알 선지자(부동산 대리인)들을 죽이려고 시골의 지주 예후가 집시의 족장 예호나답과 합세하기까지 그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

97:9.20 (1074.2) 예호아하스와 그 아들 예로보암이스라엘을 적들로부터 구원하자, 새 생활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때가 되자 어느 악당 귀족이 사마리아에서 다스렸고, 그의 약탈 행위는 옛 시절의 다윗 왕조에 필적했다. 국가와 교회는 손을 잡고 따라갔다. 언론의 자유를 누르려는 시도는 엘리야아모스호세아로 하여금 비밀 기록을 시작하게 만들었고, 이것이 유대교와 기독교 성경의 진짜 시작이었다.

97:9.21 (1074.3) 그러나 이스라엘 왕이 에집트 왕과 계교를 꾸미고 아씨리아에 더 조공 바치기를 거절할 때까지, 북쪽 왕국은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3년 동안 포위가 시작되었고, 뒤이어 북쪽 왕국이 온통 분산되었다. 이렇게 에브라임(이스라엘)은 사라졌다.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더한다”고 이사야가 말한 것 같이, 유다유대인, “이스라엘의 자투리”―는 몇 사람의 손에 토지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내, 야웨의 성전과 나란히, 바알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생겼다. 이 공포의 통치는 소년 임금 요아스가 이끈 일신교 폭동으로 인하여 막을 내렸고, 그는 35년 동안 야웨를 위한 투쟁을 벌였다.

97:9.22 (1074.4) 다음 임금 아마시아는 세금을 내고 항거하는 에돔 족속 및 그 이웃들과 문제가 있었다. 큰 승리를 거둔 뒤에 그는 북쪽에 있는 이웃들을 치려고 등을 돌렸고, 똑같이 큰 패배를 맛보았다. 그리고 나서 시골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임금을 살해하고 그의 열여섯 살 난 아들을 왕좌에 앉혔다. 이 사람이 아자리아였고, 이사야는 그를 웃시야라 불렀다. 웃시야 이후에, 형편은 더욱 나빠졌고, 유다아씨리아 임금들에게 조공을 바침으로 1백 년 동안 존재했다. 첫 이사야예루살렘야웨의 도시이니까,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서슴지 않고 예루살렘이 망하리라고 선포했다.

97:9.23 (1074.5) 소년 임금 마낫세의 통치 밑에서 활동하던, 썩고 부유한 정치가 일당이 유다의 진짜 파멸을 가져왔다. 변화하는 경제는 바알 숭배가 돌아오는 것을 유리하게 만들었고, 바알의 개인 토지 거래는 야웨의 이념에 어긋났다. 아씨리아의 멸망과 에집트의 우세는 한동안 유다에게 구원을 가져왔고, 시골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았다. 요시아 밑에서 그들은 예루살렘의 썩어빠진 정치가 일당을 격퇴하였다.

97:9.24 (1074.6) 그러나 바빌론에 대항하여 아씨리아를 도우려고 네코의 막강한 군대가 에집트에서부터 바닷가를 따라 올라오자, 요시아가 나가서 감히 그 군대를 가로막으려고 했을 때, 이 시대는 비극의 막을 내렸다. 그는 소탕되어 버렸고, 유다에집트에 조공을 바치는 처지로 떨어졌다. 바알의 정당이 예루살렘에서 다시 권력을 잡았고, 이처럼 진짜 에집트 종살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서 바알 정치가들이 궁전과 사제를 모두 장악한 시기가 뒤따랐다. 바알 숭배는 토지의 비옥함과 상관될 뿐 아니라, 재산권을 다루는 경제 및 사회 제도였다.

97:9.25 (1075.1) 느부갓네살네코를 타도한 뒤에, 유다바빌론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10년의 유예 기간을 주었으나 곧 반란을 일으켰다. 느부갓네살이 그들을 치려고 왔을 때, 유다 족속은 야웨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노예 해방과 같은 사회 개혁을 시작했다. 바빌로니아 군대가 잠시 물러났을 때, 히브리인은 개혁의 마술이 그들을 구원했다고 기뻐했다. 이 기간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멸망이 다가오는 것을 일러 주었고, 대번에 느부갓네살이 돌아왔다.

97:9.26 (1075.2) 그래서 유다의 종말은 갑자기 다가왔다. 도시는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야웨바알의 싸움은 포로 생활로 끝이 났다. 포로 생활은 이스라엘의 자투리에게 충격을 주어 일신교로 몰았다.

97:9.27 (1075.3) 바빌론에서 유대인은 그들이 특별한 사회 및 경제 관습을 가졌으니까 팔레스타인에서 작은 집단으로서 존재할 수 없고, 그들의 이념이 이기려면 이방인을 개종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처럼 운명에 관한 새로운 개념―유대인은 야웨가 선택한 종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싹텄다. 구약의 유대 종교는 정말로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에 생성되었다.

97:9.28 (1075.4) 불멸의 교리도 또한 바빌론에서 모습을 갖추었다. 유대인은 미래 생활의 개념이 그들이 사회 정의의 복음을 강조하는 것을 깎아 내린다고 생각했다. 이제 처음으로 신학이 사회학과 경제학을 밀어냈다. 종교가 정치ㆍ사회학ㆍ경제학으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어야 하는, 인간의 생각 및 행동 체계로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97:9.29 (1075.5) 그래서 유대 민족에 관한 진실은 신성한 역사로 여겨 왔던 많은 것이 평범한 세속 역사를 적은 연대기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낸다. 유대교의 토양으로부터 기독교가 자라났지만, 유대인은 기적의 민족이 아니었다.

10. 히브리 종교

97:10.1 (1075.6) 이스라엘 족속의 지도자들은, 특별히 관대한 대우를 받고 신의 은총을 독점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에 만물을 지배하는 유일한 하나님의 진리를 들고 가는 특별한 수고를 하라고 선택된 백성이라고 그들을 가르쳤다. 그들이 이 운명을 성취하고자 하면, 모든 민족에게 영적 지도자가 되리라, 오시는 메시아는 그들과 온 세계 위에 평화의 왕으로서 군림하리라고 이 지도자들은 전에 유대인들에게 약속했다.

97:10.2 (1075.7) 페르시아인이 유대인을 해방했을 때, 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서 오직 사제(司祭)가 지배하는 율법ㆍ희생물ㆍ의식의 규율에 묶이게 되었을 뿐이다. 희생물을 바치고 속죄하는 의식을 지지하느라고 히브리 씨족들이 모세가 작별 웅변에서 제시한 놀라운 하나님 이야기를 물리친 것 같이, 이 히브리 민족의 잔재는 성장하는 사제층의 규율ㆍ규칙ㆍ의식을 지지하여 둘째 이사야의 훌륭한 개념을 물리쳤다.

97:10.3 (1075.8) 민족의 자기 본위, 메시아의 오심을 오해한 거짓 믿음, 사제층의 늘어나는 속박과 폭정은 (다니엘에스겔학개말라기를 제외하고) 영적 지도자들로 하여금 언제까지나 입을 다물게 하였다. 그날부터 세례자 요한의 시절까지, 온 이스라엘은 영적 후퇴가 심해지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러나 유대인은 우주의 아버지 개념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리스도 뒤 20세기에 이르기까지도, 그들은 이 개념을 줄곧 따랐다.

97:10.4 (1076.1)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까지 일신교의 횃불을 넘겨 준 충실한 선생들이 끊이지 않고 모세로부터 세례자 요한까지 이어졌고, 한편 그들은 절제 없는 통치자들을 그침 없이 꾸짖고, 종교를 상업화하는 사제들을 비난하고, 최고의 야웨,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의 숭배를 고수하라고 사람들에게 늘 타일렀다.

97:10.5 (1076.2) 한 국가로서, 결국 유대인은 정치적 신분을 잃었지만, 하나인 우주의 하나님을 성실하게 믿는 히브리 종교는 흩어진 유랑자들의 가슴 속에 줄곧 살아 있다. 이 종교가 살아남은 것은 그것이 추종자들의 가장 높은 가치 기준을 보존하도록 효과 있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유대 종교는 한 민족의 이상을 보존했지만, 진리의 영역에서 진보를 육성하고 철학으로 창조적 발견을 북돋지 못했다. 유대 종교는 많은 결함이 있었다―철학이 모자랐고 미학적 성질이 거의 빠져 있었다―하지만 도덕적 가치를 보존했고, 따라서 지속하였다. 다른 개념들과 비교해서, 최고의 야웨는 뚜렷하고, 선명하고, 개인적이고 도덕이 있었다.

97:10.6 (1076.3) 유대인은 거의 아무 민족도 따른 적이 없을 정도로, 정의ㆍ지혜ㆍ진리ㆍ올바름을 사랑했지만, 신의 이러한 성질을 지적으로 파악하고 영적으로 이해하는 데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적게 기여하였다. 히브리 신학은 성장하고 싶어 하지 않았어도, 다른 두 세계 종교, 기독교와 모하메드교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7:10.7 (1076.4) 유대 종교는 또한 그 제도 때문에 버티었다. 고립된 개인들의 사사로운 관습으로서 종교가 살아남기는 어렵다. 이것은 늘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이었다. 제도화된 종교의 잘못을 보고서, 그들은 집단 활동의 기법을 없애려 한다. 모든 의식을 없애는 대신에, 의식(儀式)을 개혁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이 점에서 에스겔은 같은 시대의 사람들보다 더 지혜가 있었다.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주장하는 데 그들과 합세했지만, 그는 또한 우수하고 정화(淨化)된 의식을 충실히 지키는 관행을 확립하는 데 손을 댔다.

97:10.8 (1076.5) 이처럼 연달아 이스라엘의 선생들은, 일찍이 유란시아에서 있었던 종교의 진화에서 가장 큰 공적을 이루었다: 폭발하는 시나이 화산의 신령, 시샘하는 잔인한 신령, 야만스러운 악귀 야웨라는 미개한 개념으로부터, 나중에 고상하고 하늘 같은 최고의 야웨 개념, 만물의 창조자요, 사랑이 가득하고 자비로운, 온 인류의 아버지 개념이 되기까지 점진적이지만 계속된 변화가 있었다. 히브리인의 이 하나님 개념은 그의 아들, 네바돈 미가엘이 친히 주신 가르침과 일생의 본보기로 인하여 더욱 커지고 아주 아름답게 확대될 때까지, 우주의 아버지를 인간이 가장 높게 상상한 것이었다.

97:10.9 (1076.6)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이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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