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9 편 죄와 희생과 속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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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서

제 89 편

죄와 희생과 속죄

89:0.1 (974.1) 원시인은 자신이 영들에게 빚을 졌다, 죄값을 물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야만인이 이를 보건대, 공평하게 하자면 영들은 훨씬 더 많은 불운을 그들에게 퍼부을 수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이 개념은 죄와 구원의 교리로 발전되었다. 혼은 자격을 빼앗기고―원죄(原罪)를 가지고―세상에 왔다고 간주되었다. 혼은 값을 물고 찾아야 했다. 속죄양이 마련되어야 했다. 머리 사냥꾼은 해골 숭배를 실천하고, 그 위에 자기 목숨의 대용품, 즉 희생자를 마련할 수 있었다.

89:0.2 (974.2) 야만인은 일찍부터 영들이 인간의 빈곤ㆍ고통ㆍ굴욕을 구경함으로 최고의 만족을 얻는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처음에 사람은 오직 저지른 죄에만 아랑곳했으나, 나중에는 빠뜨리는 죄를 걱정하게 되었다. 후일의 희생 제도 전부가 이 두 관념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이 새로운 의식은 영을 달래는 희생 예식을 지키는 것과 상관이 있었다. 원시인은 신들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무슨 특별한 일을 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오직 진보한 문명이 한결같이 차분하고 선의를 가진 하나님을 인정한다. 신을 달래는 것은 앞날의 축복을 얻으려는 투자라기보다 당장의 불운을 막는 보험이었다. 귀신을 피하고 쫓아내고 강제하고 달래는 의식(儀式)은 모두 서로 합병된다.

1. 금기

89:1.1 (974.3) 금기(禁忌)를 지키는 것은 사람이 불운을 피하려는 노력, 무엇인가를 피함으로 영 귀신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금기는 처음에 종교적인 것이 아니었으나 일찍부터 귀신이나 영의 인가를 받았고, 이렇게 강화되었을 때 금기는 법과 제도를 만들게 되었다. 금기는 예식 기준의 근원이요, 원시적 자제(自制)의 조상이었다. 금기는 가장 이른 형태의 사회 규제였고, 오랫동안 유일한 규제였다. 금기는 아직도 사회를 규제하는 구조의 기본 단위이다.

89:1.2 (974.4) 야만인의 머리 속에서 이 금지 사항이 강요하는 존경심은 금기를 집행한다고 생각된 자의 권능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똑같았다. 금기는 처음에 불운을 어쩌다 겪었기 때문에 생겨났다. 나중에는 추장(酋長)과 샤먼―영 귀신, 아니 신의 명령을 받는다고 생각되었던 주물 인간―이 금기를 제안했다. 영의 꾸짖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원시인의 머리 속에서 아주 대단했고, 그래서 금기를 어겼을 때 때때로 원시인은 놀라서 죽기도 하며, 이런 극적인 사건은 금기가 살아남은 자의 생각에 미치는 위력을 엄청나게 강화한다.

89:1.3 (974.5) 아주 일찍부터 있었던 금지 사항은 여자와 기타 재산에 손대지 말라는 제한이었다. 종교가 금기의 진화에서 비로소 더 큰 역할을 하게 되자, 금지된 물건을 더럽다, 나중에는 거룩하지 않다고 여겼다. 히브리인의 기록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가득히 언급하지만, 이 노선을 따른 그들의 관념은 많은 다른 민족의 관념보다 훨씬 덜 성가시고 범위가 좁았다.

89:1.4 (975.1) 히브리인의 열 가지 명령뿐 아니라 달라마시아에덴의 일곱 계명은 분명한 금기였고, 가장 오래 된 금지 조항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똑같이 부정 형태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법규는 앞서 있던 몇천 가지 금기를 대신했으므로, 참으로 사람을 해방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후일의 계명은 복종한 값으로 무엇인가 분명히 약속했다.

89:1.5 (975.2) 먹을 것에 대한 초기의 금기는 주물 숭배와 토템 신앙으로부터 생겨났다. 돼지는 페니키아인에게 신성하고 소는 힌두인에게 신성했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에집트인의 금기는 히브리이슬람 신앙에서 지속되었다. 먹을 것에 대한 금기의 한 변종은 임신한 여자가 어떤 식품을 너무 먹고 싶어해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식품을 닮는다는 믿음이었다. 그러한 고급 식품은 그 아이에게 금기가 되곤 했다.

89:1.6 (975.3) 먹는 방법은 곧 금기가 되었고, 그래서 고대와 현대의 식탁 예절이 생겨났다. 카스트 제도와 사회의 표준은 옛 금지 조항의 흔적을 가리키는 찌꺼기이다. 금기는 사회를 조직하는 데 어지간히 효과가 있었으나, 끔찍하게 부담이 되었다.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 체제는 쓸모 있는 건설적 규칙 뿐 아니라, 고리타분하고 낡고 쓸모 없는 금기도 보존하였다.

89:1.7 (975.4) 그러나 방대하고 잡다한 금기를 제외하고, 원시인을 비평할 처지에 있는 문명화된 사회는 하나도 없을 것이요, 원시 종교의 지지를 받지 않았더라면 금기는 결코 지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진화에서 많은 필수 요소는 무척 비싼 대가를 치렀고, 노력ㆍ희생ㆍ자제 면에서 큰 값을 요구했지만, 이 자제(自制)의 성취는 사람이 딛고 기어올라간 문명의 사다리의 참된 발판이었다.

2. 죄의 개념

89:2.1 (975.5) 우연을 두려워하고 불운을 무서워하는 것은 이러한 재난을 방지하는 보험이라 생각된 원시 종교를 발명하도록 글자 그대로 사람을 족쳤다. 종교는 마술과 귀신으로부터, 영(靈)과 주물을 거쳐서, 금기로 진화했다. 원시 부족마다 금지된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있었고, 이것은 실제로 사과였지만, 온갖 종류의 금기가 무겁게 달린 1천개나 되는 가지를 상징하였다. 그 금지된 나무는 반드시 “너희는 무엇을 하지 말라”하고 말했다.

89:2.2 (975.6) 야만인의 생각이 좋은 영과 나쁜 영을 상상하는 점까지 진화하는 동안에, 그리고 금기가 진화적 종교의 엄숙한 지지를 받았을 때,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기 위하여 무대가 모두 준비되었다. 계시된 종교가 미처 나타나기도 전에, 세상에서 죄의 개념은 보편적으로 확립되었다. 오로지 죄 개념으로 인하여, 원시인의 머리에 자연사는 이치가 있게 되었다. 죄는 금기를 어기는 것이요, 죽음은 죄에 대한 벌이었다.

89:2.3 (975.7) 죄는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의식(儀式)이었고, 생각이 아니라 행위였다. 이 죄 개념 전부가 딜문, 그리고 땅에 있던 작은 천국의 시절에 관한, 남아 있는 전통 때문에 육성되었다. 아담에덴 동산의 전통은 또한 종족들의 개벽 시절에 한때 “황금 시기”가 있었다는 꿈에 신빙성을 부여했다. 이 모두가 특별 창조가 있을 때 사람이 기원을 가졌고, 사람이 완전한 상태로 생애를 시작했으며, 금기를 어긴 것―죄―가 나중에 그를 불쌍한 곤경에 빠뜨렸다는 신앙에 후일에 표현된 생각을 입증했다.

89:2.4 (976.1) 금기를 버릇처럼 어기는 것은 악덕이 되었고, 원시 율법은 악덕을 범죄로 만들고, 종교는 악덕을 죄로 만들었다. 옛 부족들 사이에서 금기를 어기는 것은 범죄와 죄를 합친 것이 되었다. 공동체의 재난은 반드시 부족의 죄에 대한 벌이라고 간주되었다. 번영과 올바름이 붙어 다닌다고 믿은 자에게는, 악한 자가 번영하는 듯 보이는 것이 너무 걱정 되어서, 금기를 위반하는 자를 벌하려고 지옥을 발명하는 것이 필요했다. 앞날에 벌을 주는 이 장소의 수는 하나에서 다섯까지 달랐다.

89:2.5 (976.2) 죄의 고백과 용서의 관념은 원시 종교에서 일찍부터 나타났다. 사람들은 다음 주(週)에 저지르려고 하는 죄 때문에, 대중 회의에서 용서를 부탁하곤 했다. 고백은 다만 용서하는 의식이었고, 또한 더럽히는 것을 대중에게 통지하는 것이요, “더럽다 더러워!”하고 외치는 의식이었다. 그리고 나서 정화(淨化)하는 모든 의식 절차가 뒤따랐다. 고대의 모든 부족이 의미 없는 이 예식을 따랐다. 위생 관습인 듯한 옛 부족들의 많은 관습은 대체로 예식이었다.

3. 극기와 굴욕

89:3.1 (976.3) 극기가 이 종교의 진화에서 다음 단계로서 다가왔다. 금식은 보통 관습이었다. 곧 여러 가지 형태의 육체적 쾌락, 특히 성적(性的) 성질을 가진 쾌락을 그만두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굶는 의식은 여러 고대 종교에 뿌리 깊이 박혀 있고, 실질적으로 현대의 모든 신학 사상 체계에까지 전해져 내려왔다.

89:3.2 (976.4) 죽은 자와 함께 재산을 태우고 파묻는 낭비적 관습으로부터 야만인이 막 회복할 무렵이 되자, 바야흐로 종족들의 경제 구조가 비로소 모습을 갖추고 있을 때, 극기를 부르짖는 이 새 종교 교리가 나타났고, 수만 명의 진지한 혼이 가난을 친구로 삼기 시작했다. 재산은 영적 장애물로 간주되었다. 물질 소유가 영적으로 위험하다는 이 개념을 빌로바울의 시절에 사람들이 널리 품었고, 그 뒤로 늘 유럽의 철학에 두드러지게 영향을 주었다.

89:3.3 (976.5) 빈곤은 단지 육체를 죽이는 의식의 일부였고, 이것은 불행하게도 많은 종교, 특별히 기독교의 기록과 가르침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행은 억제하는, 흔히 어리석은 이 의식(儀式)이 부정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야만인에게 자제를 가르쳤고, 이는 사회의 진화에서 가치 있는 진보였다. 극기와 자제는 초기의 진화 종교로부터 생긴, 가장 큰 두 가지 사회적 이득이었다. 자제는 사람에게 새로운 생활 철학을 주었고, 이기적 만족이라는 분자(分子)를 늘이려고 늘 애쓰는 대신에, 개인적 요구인 분모(分母)를 낮춤으로 인생의 분수(分數)를 높이는 기술을 사람에게 가르쳤다.

89:3.4 (976.6) 스스로를 단련하는 이 옛 관념은 매질과 온갖 종류의 육체적 고문을 포함했다. 어머니 숭배교의 사제들은 육체적 고통의 미덕을 가르치는 데 특히 적극적이었고, 스스로 거세를 받음으로 본보기를 보였다. 히브리인, 힌두교 신자, 불교 신자는 이 고행(苦行)의 교리를 열심히 따른 자였다.

89:3.5 (976.7) 옛 시절을 통해서 내내, 사람들이 이 방법으로 신들이 적는 극기(克己) 장부에 공적을 더하려고 애썼다. 어떤 감정의 압박을 받고 있을 때 극기와 고행(苦行)을 하겠다고 서약하는 것이 한때는 풍습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이 서약은 신들과 계약하는 형태를 취했고,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고행하고 육체를 억제한 값으로 신들이 무언가 분명히 하기로 생각되었다는 면에서, 진화에서 참된 진보였다. 부정적 서약과 긍정적 서약이 있었다. 오늘날 인도의 어떤 무리들 사이에서, 이렇게 해롭고 극단적 성질을 가진 서약을 가장 잘 준수한다.

89:3.6 (977.1) 극기와 굴욕을 부르짖는 종파가 성의 만족에 눈을 돌린 것은 자연스러울 뿐이다. 전투에 들어가기 전에 군인들 사이에서, 성욕을 절제하는 종파가 의식으로서 생겨났다. 후일에 이것은 “성자(聖者)들”의 관습이 되었다. 이 종파는 결혼을 겨우 간통보다 덜한 악으로서 묵인했다. 세상의 많은 큰 종교가 이 고대의 숭배에 나쁘게 영향을 받았지만, 아무것도 기독교보다 더 두드러지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사도 바울은 이 숭배를 받드는 신자였고, 그의 개인적 관점은 그가 기독교 신학에 묶어놓은 가르침에 반영된다: “남자가 여자에게 손대지 않는 것이 좋으니라.” “모든 사람이 바로 나와 같기를 바라노라.” “그러므로 결혼하지 않은 자와 과부들에게 내가 이르노니, 나처럼 지내는 것이 저희에게 좋으니라.” 바울은 그러한 가르침이 예수의 복음의 일부가 아님을 잘 알았고, 이를 인정했다는 것은 그의 진술에서 나타난다, “계명이 아니라 허락으로서 내가 이것을 이르노라.” 그러나 이러한 열심 때문에 바울은 여자들을 경시하게 되었다. 이 모두가 딱한 것은, 그의 개인적 의견이 위대한 세계 종교의 가르침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천막을 만드는 그 선생의 조언에 글자 그대로 널리 순종한다면, 인류는 갑자기 영화롭지 못한 종말에 다다를 것이다. 더군다나 한 종교가 성욕을 절제하는 옛 종파와 관련된 것은 결혼과 가정, 곧 사회의 진정한 기초이자 인간을 진보시키는 기본 제도에 대항하는 싸움으로 직접 이끈다. 모든 그러한 신앙이 여러 민족의 숱한 종교에서 독신 사제 계급의 형성을 조장했다는 것에 놀래서는 안 된다.

89:3.7 (977.2) 언젠가 사람은 어떻게 방종하지 않고서 자유를, 포식하지 않고서 영양을, 방탕하지 않고 즐거움을 누리는가 배워야 한다. 극단적 극기(克己)보다, 자제가 행동을 규제하는 더 좋은 인간적 정책이다. 예수는 결코 추종자들에게 이런 부당한 관점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4. 희생의 기원

89:4.1 (977.3) 종교적 헌신의 일부로서, 희생은 다른 여러 가지 경건한 의식처럼, 간단한 한 가지 기원을 가지지 않았다. 권력 앞에 절하고, 신비가 있는 가운데 경건히 찬미하는 태도로 엎드러지는 경향의 전조(前兆)는 개가 주인 앞에서 아양부리는 데서 나타난다. 숭배하려는 충동으로부터 희생물 바치는 행동까지는 겨우 한 걸음일 뿐이다. 원시인은 그가 희생하는 값을 그가 받는 고통으로 쟀다. 희생물 바치는 관념이 처음 종교 의식에 달라붙었을 때, 아픔을 낳지 않는 헌물은 하나도 고려되지 않았다. 처음 희생물은 머리카락을 뽑고, 살을 베어내고, 절단하고, 이를 쳐서 뽑고, 손가락을 잘라 버리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 문명이 진보하자, 이 투박한 희생 개념들은 자기 절제, 금욕주의ㆍ금식ㆍ궁핍의 의식(儀式) 수준으로, 나중에는 슬픔과 고통, 정욕(情慾)의 억제를 통해서 성스럽게 바치는 기독교의 교리로 높이 올라갔다.

89:4.2 (977.4) 종교의 진화에서 일찍부터 두 가지 희생 개념이 존재했으며, 선물 바치는 관념은 추수를 감사하는 태도를 암시했고, 빚 갚는 희생은 죄값을 치른다는 관념을 포함하였다. 나중에는 대용품 개념이 발전하였다.

89:4.3 (977.5) 그후에, 사람은 그의 희생물이 무슨 성질을 가졌든지, 희생물은 신들에게 보내는 말씀을 지닌 사자로서 작용할 수도 있다고 상상했다. 희생물은 신의 콧구멍에 달콤한 향기와 같을 수도 있다. 이것은 희생 의식에서 향과 기타 미학적 특성을 낳았고, 그 의식은 희생물 바치는 잔치로 발전되었으며, 시간이 지나자 잔치는 갈수록 더 공들이고 화려하게 되었다.

89:4.4 (978.1) 종교가 진화함에 따라서, 화해하고 달래는 희생 의식은, 회피와 구슬리기와 귀신 쫓기와 같은 더 오래 된 방법을 대신하였다.

89:4.5 (978.2) 최초의 희생 관념은 조상의 영들이 공평한 세금을 부과한다는 관념이었다. 나중에야 속죄 관념이 개발되었다. 종족의 진화적 기원을 가진 개념을 사람이 벗어남에 따라서, 행성 영주 시절의 전통과 아담의 체재가 세월의 흐름을 통해 걸러짐에 따라서, 죄와 원죄의 개념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그래서 어쩌다가 저지른 개인의 죄에 대한 희생은 종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희생물을 바치는 교리로 진화하였다. 희생물을 바쳐 대신 갚는 것은, 알지 못하는 신의 분개심과 질투조차 포함하는 총괄 보험 조치였다.

89:4.6 (978.3) 쉽게 기분 상하는 허다한 영과 욕심 부리는 신들에 둘러싸여서, 원시인이 큰 무리의 빚쟁이 신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영적 빚을 갚는 데 일생 동안 모든 사제ㆍ의식ㆍ희생물이 필요했다. 원죄 교리, 곧 종족이 죄가 있다는 교리는, 사람마다 영 권력자들에게 무거운 빚을 지고서 인생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89:4.7 (978.4) 선물과 뇌물을 사람들에게 준다. 그러나 신들에게 주었을 때 선물과 뇌물은 헌신하든지 거룩하게 된다고 이야기했고, 또는 희생물이라 불렀다. 극기는 소극 형태로 신을 달래는 것이었고, 희생물 바치는 것은 적극 형태가 되었다. 신을 달래는 행위는 찬송하고 신을 영화롭게 하고, 아첨하고 신을 즐겁게 하는 것까지도 포함하였다. 옛날에 신을 달래던 종파의 이 적극적 풍습의 잔재가 현대의 신성한 예배 형태를 이룬다. 오늘날의 예배 형태는 다만 적극적으로 신을 달래는 기술, 희생물 바치는 이 옛 기술을 의식(儀式)으로 만든 것이다.

89:4.8 (978.5) 동물을 바치는 것은 현대 종족들에게 일찍이 의미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원시인에게 중요했다. 이러한 미개인은 동물을 실제 친척, 가까운 친척으로 여겼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은 제물을 바치는 데 약삭빨라졌고, 일하는 동물 바치기를 그쳤다. 처음에는 길들인 동물을 포함하여 어떤 물건을 드리더라도 가장 좋은 것을 바쳤다.

89:4.9 (978.6) 어떤 에집트 통치자가 다음을 바쳤다고 했을 때, 빈 말로 자랑한 것이 아니다: 노예 113,433명, 송아지 493,386마리, 배 88척, 금 우상 2756개, 꿀과 기름 331,702항아리, 포도주 228,380항아리, 거위 680,714마리, 빵 6,744,428덩어리, 동전 5,740,352자루. 이렇게 하려고 그는 땀흘리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무겁게 부과해야 했다.

89:4.10 (978.7) 신들이 희생물의 혼을 즐겼으니까 순전한 필요가 궁극에는 이 반야만인으로 하여금 바친 희생물의 물질 부분을 먹게 만들었다. 옛적에 신성한 식사, 현대의 통례에 따르면 성찬식이라는 구실로, 이 관습은 정당화되었다.

5. 희생물과 식인 풍습

89:5.1 (978.8) 옛적에 사람을 잡아먹던 풍습에 대한 현대의 개념은 통째로 틀리다. 그것은 옛 사회의 도덕 관습의 일부였다. 현대 문명에는 식인(食人) 풍습이 전통으로 끔찍해도, 그것은 원시 사회에서 사회 및 종교 구조의 일부였다. 집단의 이익은 식인 풍습을 강요했다. 그것은 필요의 충동을 통해서 자랐고, 미신과 무지에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지속되었다. 사회ㆍ경제ㆍ종교ㆍ군사적 관습이었다.

89:5.2 (979.1) 원시 인간은 식인자였고, 사람의 고기를 즐겼다. 따라서 영과 그가 섬기는 원시적 신들에게 먹는 선물로서 사람의 고기를 바쳤다. 귀신 영이 단지 모습이 변화된 사람이었고, 먹을 것이 사람에게 가장 큰 필요였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먹을 것은 영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89:5.3 (979.2) 식인 풍습은 진화된 민족들 사이에서 한때 거의 보편적으로 퍼졌다. 산긱 족속은 모두 식인종이었으나, 최초에 안돈 족속은 그렇지 않았고, 족속과 아담 족속도 그렇지 않았다. 진화 종족들과 크게 섞이기까지 안드 족속도 그렇지 않았다.

89:5.4 (979.3) 사람 고기에 맛을 들이면 그 입맛은 자란다. 굶주림이나 우정이나 복수나 종교 의식을 통해서 시작되고 나서, 사람의 살을 먹는 것은 버릇된 식인 풍습으로 계속된다. 사람을 먹는 일은 식량이 모자라서 생겼다. 하지만 이것이 근본적 이유였던 적은 드물다. 그러나 에스키모인과 초기의 안돈 족속은 기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 사람의 고기를 먹은 적이 드물다. 홍인은, 특히 중앙 아메리카에서, 식인종이었다. 한때는 원시의 어머니가 아이를 배느라고 잃어버린 기운을 되찾으려고 제 아이를 잡아먹는 것이 일반 풍습이었고, 퀸즈랜드에서 첫 아이는 아직도 이렇게 죽음을 당하고 잡아먹히는 일이 빈번하다. 근대에는 아프리카의 많은 부족이 하나의 전쟁 조치로서, 자기 이웃들을 무서워 떨게 만드는 일종의 끔찍한 짓으로서, 식인 풍습에 일부러 의존했다.

89:5.5 (979.4) 식인 풍습은 더러 한때 우수했던 핏줄이 퇴화함으로 생겼지만, 대체로 진화 종족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사람 잡아먹는 것은 사람들이 적에게 맹렬하고 모진 감정을 느꼈을 때 비롯되었다. 사람의 고기를 먹는 것은 엄숙한 복수(復讐) 예식의 일부가 되었다. 이 방법으로 적의 귀신이 없어지든지 또는 잡아먹는 사람의 귀신과 융합될 수 있다고 믿었다. 마법사들이 사람 고기를 먹음으로 권능을 얻는다는 관념이 한때 널리 퍼졌다.

89:5.6 (979.5) 사람을 잡아먹는 어떤 집단은 오직 자기네 부족 사람만 먹곤 했다. 일종의 거짓된 영적 근친 교배였는데, 이것은 부족의 단결을 강화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또한 적의 힘을 빼앗는다는 생각으로 앙갚음하려고 적들을 먹어치웠다. 친구나 동료 부족 사람의 몸을 먹는다면 그의 혼에게 명예를 돌리는 것이라 생각되었고, 한편 이처럼 적을 먹어치우는 것은 적에 대한 마땅한 징벌에 지나지 않았다. 야만인의 머리는 아예 일관성을 찾는 허세를 부리지 않았다.

89:5.7 (979.6) 어떤 부족들 사이에서 늙은 부모는 자기 자식들에게 먹히려고 애썼고, 다른 부족들 사이에서는 가까운 친척 잡아먹기를 삼가는 것이 풍습이었다. 그들의 몸은 팔거나 낯선 사람의 것과 바꾸었다. 도살하려고 살찌운 여자와 아이들을 파는 상당한 상업이 있었다. 병이나 전쟁이 인구를 통제하지 못할 때, 남는 사람은 예식도 차리지 않고 잡아먹혔다.

89:5.8 (979.7) 식인 풍습은 다음 영향 때문에 차츰 사라지고 있었다:

89:5.9 (979.8) 1. 때때로 식인 풍습이 공동체의 예식, 곧 동료 부족 사람에게 사형(死刑)의 벌을 내리기 위하여 집단으로 책임 맡는 것이 되었다. 피 흘린 죄는 모두가, 사회가 참여했을 때 범죄가 되지 않는다. 아시아에서 마지막 식인 풍습은 집행이 끝난 범죄자들을 이렇게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89:5.10 (979.9) 2. 식인 풍습은 아주 일찍부터 종교 의식이 되었지만, 귀신 공포증의 성장이 반드시 사람을 먹는 수준으로 내려가도록 작용하지는 않았다.

89:5.11 (979.10) 3. 결국 식인 풍습은 몸에서 겨우 어떤 부분이나 내장을 먹는 데까지 진보했고, 이것들은 혼을 담거나 영 부분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었다. 피를 마시는 것은 흔했고, 몸에서 “먹을 수 있는” 부분을 약과 함께 섞는 것이 관습이었다.

89:5.12 (980.1) 4. 남자에게 국한되었고, 여자는 사람 고기를 먹는 것이 금지되었다.

89:5.13 (980.2) 5. 다음에는 추장ㆍ사제ㆍ주술사에게 국한되었다.

89:5.14 (980.3) 6. 다음에 식인 풍습은 상급 부족 사이에서 금기가 되었다. 사람을 먹지 말라는 금기는 달라마시아에서 시작되었고, 천천히 세계에 퍼졌다. 한때 파묻은 시체를 파내서 먹는 것이 흔한 관습이었기 때문에, 족속은 식인 풍습을 퇴치하는 수단으로서 화장(火葬)을 권장했다.

89:5.15 (980.4) 7.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식인 풍습에 마지막 종을 울렸다. 사람의 고기가 우수한 사람, 추장들의 먹을 것이 되었으니까, 그것은 결국 더욱 우수한 영들을 위하여 예비되었다. 그리고 가장 낮은 부족들을 제외하고, 이처럼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효과적으로 식인 풍습을 그치게 하였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가 충분히 자리잡았을 때, 사람 잡아먹는 것은 금기가 되었고, 인간의 살은 오직 신들의 먹을 거리였다. 사람은 겨우 예식에서 작은 부스러기, 성찬(聖餐)을 먹을 수 있었다.

89:5.16 (980.5) 마침내, 희생물 바치는 목적으로 동물 대용품이 널리 쓰이게 되었고, 더 뒤떨어진 부족들 사이에서도 개 잡아먹기는 사람 잡아먹기를 크게 줄였다. 개는 처음에 길들인 동물이었고, 그 자체로서, 그리고 먹을거리로서 높이 쳐주었다.

6. 사람 바치기의 진화

89:6.1 (980.6) 사람 제물은 식인 풍습을 고치는 처방일 뿐 아니라, 그 간접 결과였다. 영 세계까지 호송하는 영을 마련하는 것은 또한 사람 잡아먹기를 줄어들게 했는데, 죽여서 바친 이 희생물을 먹는 것은 풍습이 된 적이 없다. 어떤 형태로 어느 때인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관습에 전혀 빠지지 않은 민족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안돈아담 족속은 식인 풍습에 가장 적게 물들었다.

89:6.2 (980.7)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거의 보편적이었다. 이 풍습은 중국인ㆍ힌두인ㆍ에집트인ㆍ히브리인ㆍ메소포타미아인ㆍ그리스인ㆍ로마인의 종교 관습에서 지속하였고, 많은 다른 민족, 뒤떨어진 아프리카오스트랄리아 부족들 사이에서 요즘까지도 지속되었다. 후일에 아메리카 인디안은 식인(食人) 풍습에서 태어난 문명을 가졌고, 따라서 특히 중앙 및 남 아메리카에서 사람을 잡아 바치는 풍습에 흠뻑 젖어 있었다. 갈대아인은 보통 계제에 사람 바치기를 처음으로 버린 사람들에 속했고, 동물로 대신하였다. 약 2천 년 전에 일본에 마음씨 고운 어느 황제는 사람 잡아 바치는 것을 대신하려고 진흙 형상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 바치기가 북 유럽에서 사라진 것은 1천 년이 채 안 된다. 어떤 뒤떨어진 부족들 사이에서는 자원하는 자들이 사람 바치기를 아직도 행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종교적 자살이나 의식(儀式)으로 하는 자살이었다. 한때 어느 샤먼이 어떤 부족에서 크게 존경받는 한 노인을 바치라고 시켰다. 사람들이 반항했고, 복종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그 노인은 아들로 하여금 자신을 보내게 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정말로 이 관습을 믿었다.

89:6.3 (980.8) 예붓다와 그의 외딸에 관한, 히브리인의 이야기보다 더 비극이고 애처로운 체험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이것은 오래 되고 옛날부터 지켜 온 종교 관습과 진보하는 문명의 상반되는 요구 사이에 생긴, 가슴 아픈 싸움을 잘 나타낸다. 보통 관습이었다시피, 좋은 의도를 가진 이 사람은 어리석은 맹세를 하였고, 적들을 이기는 것에 대하여 어떤 값을 치르겠다고 찬성하면서 “전쟁의 신”과 협상했다. 이 값은 집으로 돌아올 때 그를 맞이하려고 집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자를 바치는 것이었다. 예붓다는 충실한 종들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그를 맞이하려고 가까이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알고 보니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 그를 집으로 맞아들이려고 나왔다. 그래서 그렇게 근래의 시절에도, 문명화되었다고 생각된 민족 사이에서, 두 달 동안 제 운명을 슬퍼한 뒤에 아버지가 이 아름다운 소녀를, 그 동포 부족 사람들의 찬성을 얻고서, 사람 제물로 실제로 바쳤다. 그리고 사람을 제물로 바치지 말라고 모세가 엄하게 명령한 마당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바보 같고 쓸데없는 맹세를 하는 데 빠지며, 옛날 사람들은 그러한 모든 서약을 무척 거룩하게 여겼다.

89:6.4 (981.1) 옛 시절에는 얼마큼 중요한 새 건물을 짓기 시작할 때, “기초에 넣는 제물”로서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풍습이었다. 이것은 그 구조물을 감시하고 보호하는 한 귀신 영을 마련해 주었다. 중국인이 쇳물을 부어 종을 만들려고 준비했을 때, 풍습은 종 소리를 좋게 만들려는 목적으로 적어도 소녀 하나를 바쳐야 한다고 명했다. 뽑힌 소녀는 산 채로 녹은 쇳물 속으로 던져졌다.

89:6.5 (981.2) 노예를 산 채로 넣고 중요한 담을 세우는 것은 많은 무리가 오랫동안 가졌던 관습이었다. 후일에 북 유럽 부족들은 새 건물의 담 속에 산 사람을 파묻는 이 관습 대신에,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를 담 속에 넣는 것으로 바꿔치웠다. 중국인은 담을 쌓는 동안에 죽은 일꾼들을 담 속에 묻었다.

89:6.6 (981.3) 팔레스타인의 어느 대단치 않은 임금은 예리고 담을 세우면서 “그의 맏아들 아비람을 잃고 그 기초를 세웠고, 막내아들 세굽을 잃고 그 대문들을 세웠다.”[1] 그런 근래의 시절에, 이 아버지는 그 도시의 대문의 기초 구멍에 두 아들을 산 채로 넣었을 뿐 아니라, 그의 행동은 또한 “주의 말씀을 따른” 것이라고 기록되었다. 모세는 기초에 이 제물 바치는 것을 금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가 죽고 나서 곧 이 풍습으로 돌아갔다. 장신구와 기념품을 새 건물의 초석 속에 집어넣는 20세기 예식은 원시의 기초 제물을 생각나게 한다.

89:6.7 (981.4) 첫 열매를 영들에게 바치는 것은 오랫동안 여러 민족의 관습이었다. 이제는 이를 지키는 것이 얼마큼 상징이지만, 모두가 사람을 잡아바치는 옛날 예식의 잔재이다. 첫 아이를 제물로 바친다는 생각은 옛 사람들, 특히 페니키아인 사이에서 널리 퍼졌고, 이들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버린 자들이었다. 제물을 바치면서 “목숨 대신에 목숨을”하고 말하곤 했다. 이제는 사람이 죽었을 때 너희가 “티끌에서 티끌로”하고 말한다.

89:6.8 (981.5) 아브라함이 마지못해 아들 이삭을 바치는 광경은, 문명화된 감수성에 충격이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 새롭거나 이상한 관념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큰 감정의 압박을 받을 때, 첫 아들을 바치는 것은 오랫동안 유행한 풍습이었다. 여러 민족이 이 이야기와 비슷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무슨 드물거나 특별한 일이 생겼을 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필요하다는, 세계에 널리 퍼진 깊은 관념이 한때 존재했기 때문이다.

7. 사람 제물의 수정

89:7.1 (981.6) 모세는 사람을 대신하는 몸값을 개시함으로 사람 바치는 풍습을 끝내려고 애썼다. 그는 그 민족으로 하여금 그들의 성급하고 어리석은 맹세의 최악의 결과를 피할 수 있게 만든 체계적 계획을 세웠다. 확정된 요금에 따라서, 땅과 재산과 아이들을 구제할 수 있었고, 이 요금을 사제들에게 낼 수 있었다. 첫 아이를 잡아 바치기를 그만둔 무리들은, 이 끔찍한 행위를 계속한 뒤처진 이웃보다 큰 이점을 곧 가졌다. 그러한 뒤떨어진 많은 부족은 아들들을 이렇게 잃었기 때문에 크게 약화되었을 뿐 아니라, 지도층의 계승조차도 가끔 끊어졌다.

89:7.2 (982.1) 일시적인 아이 바치기의 부산물은 첫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집 문설주에 피를 문지르는 풍습이었다. 이것을 한 해의 신성한 축제의 하나와 연결하여 자주 행했고, 이 예식은 한때 멕시코에서 에집트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대부분에서 유행했다.

89:7.3 (982.2) 대부분의 집단이 의식으로 아이들을 잡아죽이기를 그만둔 뒤에도, 갓난아기를, 떨어진 광야나 강물에 작은 배 속에 홀로 두는 것이 풍습이었다. 사르곤모세싸이러스로물루스의 경우와 같이, 아이가 살아남으면, 신들이 그를 살리려고 간섭했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나서 첫 아들을 신성하게 또는 희생물로서 드리는 관습, 즉 아이들이 자라도록 내버려 두고, 다음에 죽이는 것에 준하여 그들을 추방하는 관습이 따랐다. 이것이 식민지가 생긴 기원이었다. 로마인의 식민화 계획은 이 관습을 지켰다.

89:7.4 (982.3) 원시적 숭배와 관련되어, 성(性)의 문란으로 생긴 많은 특이한 관계는 사람을 바치는 것과 관련하여 기원이 생겼다. 옛날에는, 여자가 머리 사냥꾼을 만났을 때, 몸을 제공함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나중에는 신들에게 희생물로서 성스럽게 바친 소녀는 몸을 일생 동안 성전에서 신성한 성교 서비스에 바침으로 제 목숨 찾기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이 방법으로 그 여자는 몸 찾는 돈을 벌 수 있었다. 이렇게 몸값을 치르는 데 종사하는 여인과 성관계를 가지는 것은 사람을 무척 고상하게 만드는 일로 여겼다. 이 신성한 소녀들과 사귀는 것은 종교 예식이었고, 게다가 이 의식 전부가 평범한 성욕 만족을 얻기 위하여 그럴듯한 구실을 주었다. 이것은 소녀와 그 짝들이 스스로 기쁘게 실행한, 야릇한 종류의 자기 속임이었다. 문명이 진화로 진보할 때 도덕 관습은 언제나 뒤에서 끌려 가고, 이처럼 진화하는 종족들의 관습, 더 오래 되고 더 야만스러운 성 관습을 인가해 주었다.

89:7.5 (982.4) 성전의 매춘은 결국 남부 유럽아시아에 두루 퍼졌다. 성전의 창녀들이 번 돈은 모든 민족 사이에서 거룩하게―신들에게 드리는 고급 선물로―여겼다. 가장 높은 부류의 여인들이 성전의 매춘 시장에 들끓었고, 번 돈을 온갖 종류의 신성한 서비스와 공익 사업에 바쳤다. 상급 여인들의 상당수가 성전에서 임시로 몸 파는 서비스로 지참금을 모았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런 여자를 아내로 가지기를 더 좋아했다.

8. 되찾기와 약속

89:8.1 (982.5) 희생물로 죄값 치르기와 성전 매춘은 실제로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의 변종이었다. 다음에는 딸들을 거짓으로 바치는 일이 따랐다. 이 예식은 일생 동안 처녀성을 지키는 데 헌신하는 것과 더불어 방혈(防血)하는 것이었고, 이보다 오래 된 성전 매춘에 대한 도덕적 반작용이었다. 후일에는 처녀들이 신성한 성전 불을 지키는 봉사에 헌신하였다.

89:8.2 (982.6) 사람들은 결국 몸의 어떤 부분을 드리는 것이 사람을 완전히 제물로 바치는 더 오래 된 관습을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신체를 잘라내는 것도 또한 괜찮은 대용품이라고 생각되었다. 머리카락ㆍ손발톱ㆍ피, 그리고 손가락과 발가락조차 바쳤다. 후일에 거의 보편적이었던 옛 할례 의식은 부분을 희생하는 의식(儀式)의 산물이었다. 순전한 희생이었고, 거기에 위생을 지키려는 아무런 생각이 따라붙지 않았다. 남자들은 할례를 받았고, 여자들은 귀에 구멍을 뚫었다.

89:8.3 (983.1) 나중에는 손가락을 잘라내는 대신에 함께 묶는 것이 풍습이 되었다. 머리를 밀고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도 마찬가지로 종교적 헌신의 형태였다. 내시(內侍)를 만드는 것은 처음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생각을 고친 것이었다. 코와 입술 뚫기는 아직도 아프리카에서 실행되고 있고, 문신(文身)은 예전에, 상스럽게 몸에 상처를 입히는 풍습이 예술답게 진화한 것이다.

89:8.4 (983.2) 희생물 바치는 관습은, 진보하는 가르침의 결과로서, 결국 약속의 관념과 연결되었다. 마침내 신들이 사람과 진짜 협정을 맺는다고 생각되었고, 이것은 종교를 안정시키는 데 내디딘 큰 걸음이었다. 율법, 곧 계약이, 운ㆍ두려움ㆍ미신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89:8.5 (983.3) 사람은 그의 하나님 개념이 우주 통치자들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수준으로 나아갔을 때까지, 과 계약하는 것을 결코 꿈에도 그릴 수 없었다. 사람이 초기에 가졌던 하나님 관념은 너무 인간을 닮아서, 자신이 비교적 믿을 만하고, 도덕과 윤리가 있게 될 때까지, 사람은 의지할 수 있는 을 상상할 수 없었다.

89:8.6 (983.4) 그러나 신들과 계약을 맺는다는 생각이 마침내 도래하였다. 진화하는 인간은 결국 그의 신들과 주제넘게 협상할 정도의 도덕적 위엄을 얻었다. 그래서 희생물을 바치는 사업은 사람이 철학적으로 하나님과 협상하는 노름으로 차츰 발전했다. 이 모두가 불운에 대비해서 보험에 드는 새로운 조치, 아니 오히려 번영을 더 분명히 사들이는 향상된 기술이었다. 이 옛날의 제물이 신들에게 거저 드리는 선물, 고마움이나 추수 감사의 표시로 자진해서 드리는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품지 말라. 이런 제물은 참된 예배의 표현이 아니었다.

89:8.7 (983.5) 원시 형태의 기도는 영들과 협상하는 것, 신들과 따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탄원과 설득으로 무언가 더 형태가 있는 비싼 것을 대신하는 일종의 물물 교환이었다. 종족들의 발전하는 상업은 무역하는 정신을 불러일으켰고, 물물 교환하는 눈치를 개발하였다. 이제 이 특성은 사람이 신을 숭배하는 방법에도 비로소 나타났다. 어떤 사람이 남보다 장사를 더 잘하는 상인인 것처럼,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낫게 기도하는 자로 생각되었다. 올바른 사람의 기도는 높이 여김을 받았다. 올바른 사람은 영들에게 셈을 다 치른 자, 신들에게 모든 의식(儀式) 의무를 충분히 끝낸 사람이었다.

89:8.8 (983.6) 초기의 기도는 도저히 예배라 할 수 없었다. 기도는 건강ㆍ재산ㆍ목숨을 위하여 협상하는 탄원이었다. 여러 면에서, 기도는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별로 바뀌지 않았다. 기도를 아직도 책에서 읽어치우고, 형식으로 외우고, 바퀴에 붙이고 나무에 걸어 놓으려고 적으며, 거기서 지나가는 바람은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후― 하고 부는 수고를 덜어 줄 것이다.

9. 제물과 성찬

89:9.1 (983.7)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는 유란시아 의식(儀式)이 진화하는 과정에 걸쳐서 내내, 사람을 잡아먹는, 피 흘리는 장사로부터 더 높고 상징적 수준으로 나아갔다. 희생물을 바치는 초기의 의식은 후일에 성찬 예식을 낳았다. 그후에는 사제가 혼자서 사람 희생물의 작은 조각이나 사람의 피 한 방울을 취하고, 그리고 나서 모두가 동물 대용품을 먹곤 했다. 몸값, 돈으로 되찾기, 계약과 같은 이 옛 관념은 후일에 성찬 예배로 진화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예식의 진화는 사람들과 교제하게 하는 막강한 영향을 미쳤다.

89:9.2 (984.1) 하나님의 어머니 숭배와 연결되어, 멕시코와 기타 장소에서, 케이크와 포도주를 드는 성찬이 더 오래 된, 사람을 바치는 관습에 있는 살과 피에 준하여 결국 이용되었다. 히브리인은 유월절 예식의 일부로서 이 의식을 오랫동안 지켰고, 이 예식으로부터 나중에 기독교식의 성찬식이 생겼다.

89:9.3 (984.2) 고대 사회의 형제 정신은 피를 마시는 의식에 기초를 두었다. 옛날 유대인의 친교는 희생물의 피를 흘리는 일이었다. 바울은 “영구한 약속의 피” 위에 새 기독교 종파를 세우기 시작했다. 바울이 피와 희생물에 관한 가르침으로 기독교를 쓸데없이 성가시게 만들기는 했어도, 인간이나 동물을 바쳐서 속죄하는 교리를 한 숨에 끝내버렸다. 그의 신학적 절충은, 계시조차도 진화의 점진적 통제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마지막이자 온통 충분한 사람 제물이 되었다. 신성한 재판관은 이제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만족한 것이다.

89:9.4 (984.3) 그래서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희생물 바치는 예식은 성찬 예식으로 진화했다. 따라서 현대 종교의 성찬은 사람을 잡아서 바치는 예식, 충격을 주는 옛날 예식과 그보다 이전에 있었던 사람 잡아먹는 의식, 이 두 가지를 정통으로 이어받은 예식이다. 많은 사람이 아직도 구원을 받으려고 피에 의존하지만, 적어도 그것은 비유요 상징이요 신비가 되었다.

10. 죄의 용서

89:10.1 (984.4) 옛날 사람은 희생물을 바침으로 겨우 하나님의 은혜를 의식하기에 이르렀다. 현대인은 구원받음을 스스로 의식하는 새로운 기법을 개발해야 한다. 죄의식은 필사자의 머리 속에 버티고 있지만, 거기에서 나온 구원의 생각 형태는 낡아빠지고 케케묵었다. 영적 필요라는 현실은 지속되지만, 지적 진보는 지성과 혼을 위하여 평안과 위로를 얻는 옛 방법을 없애버렸다.

89:10.2 (984.5) 죄는 의도하여 에게 불충하는 것이라고 다시 정의를 내려야 한다. 불충에는 정도 차이가 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부분적 불충, 갈등으로 갈라진 충성, 무관심이라는 죽어가는 충성, 신이 없는 이상에 헌신하는 데서 나타나는 죽은 충성이 있다.

89:10.3 (984.6) 죄를 지었다는 감각이나 느낌은 도덕 관습을 어겼음을 의식하는 것이요, 그것이 반드시 죄는 아니다. 의식하면서 에게 불충함이 없을 때 진짜 죄는 없다.

89:10.4 (984.7) 죄책감을 깨닫는 가능성은 인류에게 초월적 탁월성이 있다는 표시이다. 죄책감은 사람이 비열함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대하게 될 잠재성이 있고 언제나 올라가는 영광을 가진 생물로서 사람을 구별한다. 그러한 모자란다는 느낌은 시초의 자극이며, 이것은 믿음으로 필사자의 지성을 도덕적으로 고귀한 수준, 우주 통찰력과 영적 생활의 훌륭한 수준으로 변화시키는 그러한 믿음의 승리로, 빠르게 확실히 이끌어야 한다. 이처럼 인간의 존재에서 모든 의미 있는 것이 현세의 것으로부터 영원한 것으로 바뀌고, 모든 가치가 인간다운 것으로부터 신다운 것으로 높아진다.

89:10.5 (984.8) 죄의 고백은 불충을 씩씩하게 물리치는 것이지만, 그러한 불충이 시공에서 낳는 결과를 조금도 줄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백―죄의 성질을 진지하게 인정하는 것―은 종교적 성장과 영적 진보에 필수이다.

89:10.6 (985.1) 이 죄를 용서하는 것은, 충성 관계의 단절이 의식하여 반항한 결과임을 한동안 인간이 의식한 뒤에, 충성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용서를 찾을 필요는 없으며, 오직 사람과 창조자 사이에 충성 관계가 다시 세워짐을 의식함으로 용서를 얻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충성하는 아들들은 모두 행복하고 봉사를 사랑하며,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길에서 늘 앞으로 나아간다.

89:10.7 (985.2) [네바돈의 한 찬란한 저녁별이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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