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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부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

이 논문집은 멜기세덱 계시 지휘자의 감독 밑에서 행동하는 유란시아의 열두 중도자로 구성된 위원회의 후원을 받았다.


이 이야기의 근거는 한때 사도 안드레를 초인간적으로 보호하는 데 배치된 한 2차 중도자가 제공하였다.

제 120 편 미가엘의 유란시아 수여

유란시아서

제 120 편

미가엘의 유란시아 수여

120:0.1 (1323.1) 나는 미가엘이 유란시아에서, 그리고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산 일생을 다시 진술하는 일을 감독하라고 가브리엘로부터 배치받고서 이 일을 맡은 계시 위원회의 위원장 멜기세덱이며, 창조 아들이 그의 우주에 스스로를 수여하는 체험의 마지막 단계를 개시하려고 유란시아에 도착하기 바로 전에 있었던 어떤 사건들에 관하여 이 이야기를 발표할 허락을 받았다. 자신이 창조한 지적 존재들에게 부여하는 것과 똑같은 삶을 살고 여러 계급의 지음받은 존재의 모습을 입고서 자신을 이렇게 수여하는 것은 자신이 만든 우주, 사물과 존재들이 사는 우주를 다스리는 완전한 최고 권한을 얻기 위하여, 창조 아들은 누구나 치러야 하는 값의 일부이다.

120:0.2 (1323.2) 내가 묘사하려 하는 사건들이 있기 전에, 네바돈의 미가엘은 자신이 다양하게 창조한 지적 존재들 가운데서, 다른 여섯 계급 존재의 모습을 입고서 여섯 번이나 자신을 수여하였다. 그 다음에 필사 육체, 곧 지적(知的) 의지를 가진 생물 중에서 가장 낮은 계급의 모습을 입고서, 물질 영역에서 그런 인간으로서, 유란시아로 내려와서, 온 우주를 다스리는 신성한 파라다이스 통치자들의 명령대로 우주 통치권을 얻는 연극의 마지막 막(幕)을 연출하려고 준비하였다.

120:0.3 (1323.3) 앞서 있었던 이 여러 수여의 각 과정에서, 미가엘은 자신이 창조한 한 집단의 존재들의 유한한 체험을 얻었을 뿐 아니라, 또한 파라다이스와 협동하는 필수 체험을 얻었으며, 이 체험은 그 자체로서 저절로, 그를 자신이 만든 우주의 군주로 만드는 데 더욱 기여한다. 지나간 지역 우주 시간 전체를 통해서 어느 순간에도, 미가엘은 한 창조 아들 자격으로 친히 다스릴 권한을 주장할 수 있었고, 창조 아들로서 자신이 선택하는 대로 자신의 우주를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런 경우에 이마누엘 및 관련된 파라다이스 아들들은 그 우주를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미가엘은 단지 자신의 고립된 권한으로, 창조 아들로서, 네바돈을 다스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게 협조하여 복종하면서, 실제 체험을 통하여, 언젠가 최상 존재의 드높은 통치의 특징이 될 그러한 완전한 통찰력과 집행 지혜를 가지고, 자신의 우주를 다스리고 그 사무를 보살필 자격을 갖출 만큼 우주 지위에서 높은 그 자리까지 올라가기를 바랐다. 창조 아들로서 완전한 통치를 바란 것이 아니라, 최상 존재의 우주 지혜와 신다운 체험을 몸에 담은 자로서 최상으로 관리할 뜻을 품었다.

120:0.4 (1324.1) 따라서 미가엘이 여러 계급의 우주 생물에게 이렇게 일곱 번 자신을 수여하는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로, 그는 지음받은 자를 이해하는 필요한 체험을 마치고 있었고, 이것은 어떤 창조 아들에게도 완전한 통치권을 얻기 전에 요구된다. 어느 때라도 창조 아들은 자신의 권리로 자기 우주를 다스려도 좋지만, 일곱 번 우주에서 생물로서 자신 수여를 거친 뒤에야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최상 대표자로서 다스릴 수 있다. 둘째로, 그는 한 지역 우주를 직접, 친히 관리하는 데 행사할 수 있는 권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최대 권한을 대표하는 특권을 얻을 뜻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우주에서 자신 수여(授與)를 하나하나 체험하는 동안,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성격자들의 다양한 결합에서 다르게 구성된 뜻에, 자원하여 만족스럽게 복종하는 데 성공하였다. 다시 말해서, 첫째 자신 수여에서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통합된 뜻, 그리고 둘째 수여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뜻, 셋째 수여에서 아버지와 영의 뜻, 넷째 수여에서 아들과 영의 뜻, 다섯째 수여에서 무한한 영의 뜻, 여섯째 수여에서 영원한 아들의 뜻, 일곱째이자 마지막 수여에서는 유란시아에서 우주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였다.

120:0.5 (1324.2) 그러므로 미가엘이 친히 다스리는 권한은 우주 창조자들의 일곱 단계의 신의 뜻을 지역 우주 생물을 이해하는 체험과 통합한다. 이처럼 그의 행정은, 전혀 임의로 권한을 취하지 않아도 가능한 최대의 권력과 권한을 대표하게 되었다. 그 권한에 제한이 없는데, 왜냐하면 파라다이스 신들과 숙련된 관계를 통하여 얻었기 때문이다. 그 권한은 의심받지 않는데, 이는 그가 우주 생물의 모습을 입고 실제로 체험을 겪음으로 얻은 권한이기 때문이다. 그 통치권은 최상이니, 파라다이스 신의 일곱 가지 관점과 시공에서 사는 생물의 관점을 함께 동시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120:0.6 (1324.3) 마지막 자신 수여가 있을 시간을 정하고 이 특별한 사건이 벌어질 행성을 선택했기 때문에, 미가엘은 가브리엘과 함께 수여에 앞서 보통 있는 회담을 가졌고, 다음에 형이자 파라다이스 상담자, 이마누엘 앞에 나타났다. 예전에 가브리엘에게 부여되지 않았던 우주 행정의 전권을 이제 미가엘은 이마누엘에게 관리하라고 맡겼다. 유란시아에서 육신화(肉身化)하기 위하여 미가엘이 떠나기 바로 전에, 이마누엘은 유란시아 수여 동안에 우주의 관리를 받아들이면서, 이어서 수여를 위한 조언을 나눠주었는데, 이것은 얼마 안 있어 유란시아에서 그 영역의 한 필사자로서 자랄 때 미가엘을 위하여 육신화 지침으로서 쓰일 것이었다.

120:0.7 (1324.4) 이와 관련하여, 미가엘이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이 수여를 실행하기로 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창조 아들은 우주 통치권을 얻으려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이 육신화를 실행하기 위하여 아무에게도 지시받을 필요가 없었지만, 그는 최상위를 드러내는 계획에 착수했고, 이것은 파라다이스 신들의 다양한 뜻에 협조하여 활동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처럼 그의 통치권을 마침내 친히 얻었을 때, 그것은 최상위 안에서 절정에 이르는, 신의 일곱 가지 뜻을 실제로 모두 포함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여러 파라다이스 신 및 그 결합을 친히 대표하는 자들로부터 전에 여섯 번이나 지시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이제 늘 하나된 이의 지시를 받았는데, 그는 우주의 아버지를 대행하여,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네바돈 지역 우주에 보내는 대사(大使)이다.

120:0.8 (1325.1) 이 막강한 창조 아들이 다시 한 번 파라다이스 신들의 뜻에, 이번에는 우주의 아버지의 뜻에, 자진해서 기꺼이 복종한 결과로 즉석의 이득과 엄청난 보상이 생겼다. 그렇게 조합에 복종하는 일을 해내려는 이 결심으로, 미가엘은 이 육신화에서 필사 인간의 성품 뿐 아니라 또한 만물의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도 체험할 것이었다. 더군다나, 유란시아 수여로 자리를 비운 동안, 우주를 관리하는 일에 이마누엘이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전권(全權)을 행사하겠다는 것 뿐 아니라, 초우주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수여 기간 내내, 그의 영역이 안전할 것을 선포했다는 마음 놓이는 정보를 받고서, 그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이 독특한 수여에 들어갈 수 있었다.

120:0.9 (1325.2) 이것이 이마누엘이 일곱째 수여 사명을 제안했을 때 그 중대한 계제의 배경이었다. 나중에 유란시아에서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 미가엘이) 된 우주 통치자에게, 이마누엘이 수여에 앞서 책임을 지워주는 이 말씀으로부터, 나는 다음에 발췌한 것을 발표할 허락을 받았다:

1. 일곱째 수여 임무

120:1.1 (1325.3) “창조자인 아우여, 일곱째이자 마지막 우주 수여를 내가 바야흐로 구경하려 하는구나. 너는 대단히 충실하고 완벽하게 이전의 임무를 여섯 번 수행하였고, 통치권을 얻는 이 마지막 수여에 똑같이 승리하리라는 것 외에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구나. 이제까지 너는 선택한 계급에서 완전히 발육된 존재로서, 자신을 수여하는 구체에 나타났느니라. 네가 선택한 행성, 질서를 잃고 어지러워진 행성 유란시아에, 이제 너는 완전히 성장한 필사자가 아니라 하나의 무력한 아기로서 나타나려고 하느니라. 친구여, 이것은 너에게 새롭고 해본 적이 없는 체험이리라. 너는 자신을 수여하는 값을 완전히 치르고, 지음받은 자의 모습을 입고서 창조자가 육신화하는 완벽한 깨우침을 얻으려 하느니라.

120:1.2 (1325.4) “이전에 거친 각 수여를 통해서 언제나, 너는 파라다이스 신 세 분과 그 신성한 상호 연합의 뜻에 복종할 것을 자진하여 선택했느니라. 최상위의 뜻의 일곱 단계에서, 이전의 여러 수여 생애에서 네 파라다이스 아버지 혼자의 뜻을 제외하고 모든 것에 복종해 왔느니라. 일곱째 수여를 거치는 동안 내내, 네가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기로 하였은즉, 나는 우리 아버지의 개별 대표로서, 네가 육신화하는 동안에 네 우주의 무제한 관할권을 맡노라.

120:1.3 (1325.5) “유란시아 수여에 들어가면서, 자신이 창조한 어떤 생물이 줄 수도 있는 모든 행성 바깥의 지원과 특별한 도움을 바로 네가 자청해서 마다하였도다. 네가 창조한 네바돈의 아들들이 우주 생애를 통해서 계속, 안전한 경영을 너에게 온통 의존하는 것 같이, 이제 너는 뒤따르는 네 필사 생애에 밝혀지지 않은 풍파를 통해서 내내, 안전한 행동을 파라다이스 아버지께 전적으로 거리낌없이 의존해야 하느니라. 지역 우주의 창조자요 아버지인 너와 가지는 밀접한 관계의 일부로서 너는 모든 생물에게 믿음과 신뢰를 통달하라고 변함없이 요구하는데, 이 수여 체험을 마치고 나서 너는 그러한 믿음과 신뢰의 완전한 의미와 귀중한 뜻을 진실로 알게 될지니라.

120:1.4 (1326.1) “유란시아에서 자신을 수여하는 동안 내내, 오직 한가지, 너는 네 파라다이스 아버지와 끊임없이 교통하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느니라. 그러한 관계가 완전하게 됨으로, 네가 자신을 수여하는 세계는, 아니 네가 지은 우주 전체까지도, 네 아버지이자 내 아버지요, 만물에게 우주의 아버지인 분의 계시, 새롭고 더욱 이해할 수 있는 계시를 보리라. 따라서 네가 아랑곳할 것은 오직 유란시아에서 너의 개인적 생활에만 상관이 있느니라. 네가 자진하여 권한을 포기하는 그 순간부터, 우주 군주로서 파라다이스의 확인을 받고 우리에게 돌아와서, 이제 나에게 넘겨주는 대행 권한이 아니라, 그 대신에 네 우주를 다스리는 최고 권한과 관할권을 내 손에서 돌려받을 때까지, 나는 네 우주의 행정이 안전하고 중단되지 않도록 완전하고도 유능하게 책임을 지겠노라.

120:1.5 (1326.2) “(나의 말대로 내가 충실히 수행한다는 보장, 온 파라다이스의 보장임을 잘 아는즉) 이제 약속하는 모든 것을 행할 권력이 내게 있음을 네가 확실히 알도록, 유버르사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명령이 내게 막 통보되었음을 너에게 알리노라. 이것은 네가 자원해서 자신을 수여하는 기간을 통해서 내내, 네바돈에서 모든 영적 위험을 방지할 것이라. 네가 의식(意識)을 포기하는 순간부터, 필사 육신화가 시작되고 나서, 스스로 만들고 조직한 이 우주에서 최상의 무제한 군주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 때까지, 온 네바돈에서 심각하게 중요한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느니라. 네가 육신화하는 이 막간에 나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명령을 쥐고 있으니, 이것은 이 수여 사명으로 자리를 비운 동안, 네바돈 우주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죄가 있거나 감히 반항을 선동하는 어떤 존재라도 한 순간에 자동으로 소멸될 것을 무조건 명령하느니라. 아우여, 내 자리에 본래 있는 권한, 파라다이스에서 유래하고 유버르사의 사법(司法) 명령으로 확대된 권한으로 보건대, 너의 우주와 거기서 충성하는 모든 생물은 네가 자신을 수여하는 동안 안전할 것이라. 너는 오직 한 가지―네 우주의 지적 존재들에게 우리 아버지를 높이 드러내는―생각만 가지고 사명을 시작하여도 좋으니라.

120:1.6 (1326.3) “앞서 거친 각 수여의 경우와 같이, 형이자 수탁자(受託者)로서 내가 네 우주의 관할권을 받은 자임을 상기시키고자 하노라. 나는 네 이름으로 모든 권한을 행사하고 모든 권력을 사용하노라. 우리의 파라다이스 아버지가 하시는 것 같이, 그리고 너 대신에 이렇게 행하라고 분명히 요구한 데 따라서 내가 활동하노라. 그러함이 사실인즉, 넘겨받은 이 모든 권한은, 돌려달라고 청하기에 적당하다고 보는 어느 순간이라도 네가 다시 행사해도 좋으니라. 네가 자신을 수여하는 것은 내내, 전적으로 자청한 것이라. 그 땅에서 육신화된 필사자로서 너는 하늘 재산이 없으나, 어느 순간이라도 네 몸에 우주 권한을 회복하여, 포기한 모든 권한을 가져도 좋으니라. 만일 자신의 권력과 권한의 회복을 선택한다면, 기억할진대 이는 전적으로 개인적 이유일 터이니, 내가 살아 있는 최고의 서약이요, 나의 존재와 서약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네 우주가 안전히 관리될 것을 보장하는 까닭이라. 네바돈에서 세 번 일어났던 것과 같은 반란은, 이번 수여로 네가 구원자별에서 자리를 비운 동안 일어날 수 없느니라. 유란시아에서 수여하는 기간에, 네바돈에서 생기는 반란에는 자체를 멸망시키는 자동 씨앗을 투입하겠다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선포하였느니라.

120:1.7 (1326.4) “이 마지막 특별 수여로 네가 자리를 비우는 한, 나는 (가브리엘의 협조를 얻어서) 너의 우주를 충실히 관리할 것을 서약하노라. 신의 계시(啓示)를 베푸는 이 사명을 시작하고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는 이 체험을 겪으라고 네게 부탁하는즉, 나는 내 아버지요 네 아버지인 분을 위하여 행동하며, 다음의 조언을 주노니, 이는 육체를 입고 네가 계속 머무르는 동안에 이룰 그 신성한 사명을 네가 차츰차츰 자의식하게 됨에 따라서, 땅에서 일생을 사는 데 너를 안내해야 하느니라.

2. 자신 수여에 주어진 제한

120:2.1 (1327.1) “1. 아들별의 관례를 따라서, 그리고 그 기법을 좇아서―파라다이스에 계신 영원한 아들의 명령에 순응하여―네가 작성하고 가브리엘이 내게 보관하라고 준 계획들과 조화되게, 네가 필사자로 수여하는 이 일을 즉시 시작하도록 나는 모든 면에서 주선하였노라. 너는 유란시아에서 그 영역의 어린아이로서 자라겠고, 사람으로서 교육을 마치고―그동안 내내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면서―네가 결심한 대로 유란시아에서 일생을 살다가 그 행성에서 체류를 마치고, 네 우주의 최고 통치권을 받으려고 아버지께 올라가려고 준비할 것이라.

120:2.2 (1327.2) “2. 네가 지상에서 맡을 임무와 너의 우주에 계시하는 것과 달리, 그러나 이 두 가지에 부수되어 생기는 일로서, 신의 신분을 네가 충분히 자의식한 뒤에, 사타니아 체계에서 루시퍼 반란을 법적으로 종결하는 추가된 과제를 맡고, 이 모든 일을 사람의 아들로서 하라고 조언하노라. 따라서, 약한 가운데 믿음으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함으로 강하게 된 그 땅의 필사 인간으로서, 죄 많고 부당한 이 반란의 초기에 네가 그렇게 부여 받았을 때 가졌던 권력과 힘으로 임의로 달성하기를 거듭 물리쳤던 그 모든 것을 네가 품위 있게 성취하라고 제안하노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 네 우주의 최고 군주일 뿐 아니라, 사람의 아들,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온다면, 나는 이를 너의 필사 수여 생애의 걸맞는 절정으로 여기리라. 한 필사 인간, 네바돈에서 가장 낮은 부류의 지적 생물로서, 신성을 욕되게 하는 칼리가스티아와 루시퍼의 거짓 주장에 맞서고 이를 판결하며, 네가 맡은 낮은 지위에서, 타락한 이 빛의 아이들이 부끄럽게 왜곡한 것을 영원히 매듭지어라. 너는 창조자 특권을 행사함으로 이 반역자들의 체면 손상하기를 완강하게 거절했은즉, 네가 창조한 가장 낮은 생물의 모습을 입고, 이 타락한 아들들의 손에서 지배권을 빼앗는 것이 이제 마땅하리라. 그래서 아주 공정하게 말하자면, 너의 자비심이 임의의 권한으로 달성하지 말라고 훈계했던 그러한 일을 네가 필사 육체의 자격으로 행하는 것이 정당함을 너의 온 지역 우주가 뚜렷이, 영원히 인정하리라. 네가 자신을 수여함으로 이렇게 네바돈에서 최상위의 통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나서, 이 업적을 이루는 데 얼마큼 시간이 지연되기는 했어도, 너는 앞서 있었던 모든 반란 사건에서 미결된 사무를 실제로 매듭지었을 것이라. 이 행위로 말미암아 네 우주에서 처리중인 분쟁들이 실질적으로 정리될 것이라. 너의 우주를 다스릴 최고 통치권을 나중에 부여 받고 나서, 친히 만든 위대한 세상의 어느 구석에도, 너의 권한에 대하여 비슷한 도전이 결코 다시 일어날 수 없느니라.

120:2.3 (1327.3) “3. 조언하건대, 의심할 여지 없이 너는 해내겠지만, 유란시아 탈퇴 사건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나서, 너의 우주가 마지막 자신 수여 체험을 영원히 인정하여, 가브리엘로부터 ‘유란시아 행성 영주’ 칭호가 내리는 것을 받아들이라, 그리고 칼리가스티아의 배반과 그 뒤에 아담의 불이행으로 인하여 유란시아에 쏟아진 슬픔과 혼란을 보상하기 위하여, 자신을 수여하는 목적과 일치되는 대로, 어떤 일이라도 더 하라.

120:2.4 (1328.1) “4. 네 요청에 따라서, 가브리엘 및 관계된 모든 존재는 그 영역의 섭리시대 판결이 선포됨과 함께, 네가 유란시아에서 자신 수여를 마치는 데 너와 협조할 것을 분명히 표현하였고, 그 선포에 뒤이어 한 시대가 종결되고, 잠자는 필사 생존자들이 부활하며 수여된 진리의 영의 섭리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

120:2.5 (1328.2) “5. 네가 자신을 수여하는 행성에, 그리고 네가 필사자로 머무르는 시절에 거기에 사는 바로 그 세대의 사람들에 관해서 말하면, 대체로 네가 선생의 신분으로 활동하라고 조언하노라. 먼저 사람의 영적 성품을 해방하고 북돋아 주는 데 눈을 돌리라. 다음에, 어둠에 빠진 지식층에게 빛을 비추고, 사람들의 혼을 치유하며, 오랜 세월 동안 지녔던 두려움에서 저희의 정신을 해방하라. 다음에, 필사자로서 너의 지혜에 맞게, 육신을 입고 사는 네 형제들의 육체적 복지와 물질적 평안을 보살피라. 너의 우주 전체에게 영감을 주고 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이상적 종교 생활을 하라.

120:2.6 (1328.3) “6. 자신을 수여하는 행성에서, 반란으로 격리된 인간을 영적으로 해방하라. 유란시아에서 최상위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데 더욱 이바지하고, 이처럼 네가 친히 창조한 넓은 영토에 두루 이 통치권이 확대되게 하라. 육신의 모습을 입고 물질로 자신을 수여하는 이 과제에서, 너는 바야흐로 시공 창조자의 마지막 깨우침, 즉 사람의 성품 안에서 네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에 맞게 일하는 이중의 체험을 겪으려 하느니라. 유한한 인간의 뜻과 무한한 창조자의 뜻이 최상 존재의 진화하는 신 안에서 하나가 되고 있는 것 같이, 너의 속세의 일생에서 이 둘은 하나처럼 되어야 하느니라. 자신을 수여하는 행성에 진리의 영을 퍼붓고, 고립된 그 구체에서 모든 정상(正常) 필사자가 우리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격리된 계심, 곧 그 영역에 생각 조절자의 보살핌을 이처럼 즉시, 충분히 이용할 수 있게 만들라.

120:2.7 (1328.4) “7. 수여 세계에서 네가 무슨 일을 행해도, 너의 우주 전체를 가르치고 정신을 고취하려고 일생을 살고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어라. 너는 유란시아에서 필사자로 육신화하는 이 생명을 수여하고 있지만, 너의 행정 영토인 광대한 은하계의 일부를 형성했거나 지금 형성하거나 아직도 형성할 수 있는, 사람이 사는 모든 행성에서, 지금까지 살아왔거나, 지금 존재하거나, 앞으로 살지 모르는 모든 인간 및 초인간 지성 존재에게 영적 감화를 주는 그러한 일생을 살아야 하느니라. 네가 땅에서 머무르는 시절에 사는 유란시아 필사자들을 위해서나, 유란시아나 또는 어떤 다른 세상에서 이후의 인간들에게 모범이 되려고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땅에서 네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되느니라. 그보다 유란시아에서 육체를 입은 일생이, 다가올 어느 시대, 어느 세대에도, 모든 네바돈 세계의 모든 생명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라.

120:2.8 (1328.5) “8. 필사자로 육신화하여 이룩하고 체험해야 하는 큰 사명은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진심으로 자극 받은 일생을 살고, 그래서 육체를 입고서, 특히 육체로 지어진 인간들에게, 네 아버지 하나님을 드러내려는 결심에 포함되어 있느니라. 동시에 너는 또한 온 네바돈의 초인간 존재들에게, 우리 아버지의 의도를 새로이 향상된 방법으로 설명하리라.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인간 및 초인간 부류의 지성에게 새로이 드러내고 확대하여 해석하는 이 봉사와 똑같이, 너는 또한 하나님에게 사람을 새로이 드러내려고 활동하리라. 육체를 입은 짧은 일생에, 온 네바돈에서 전에 본 적이 없다시피, 필사자로 존재하는 짧은 생애 동안 하나님을 아는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초월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사람에 대하여, 또 행성 생애에서 겪는 풍파를 온 네바돈의 모든 초인간 지성 존재에게, 어느 시대를 위해서도, 새롭고 빛나게 설명하라. 너는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유란시아로 내려가야 하고, 너의 시절과 세대의 한 사람으로 살면서, 광대한 우주 사무에 최상으로 종사하는 기법, 완전하게 된 이상적 기법을 너의 우주 전체에게 보여주도록 네가 활동하리라: 그 기법은 사람을 찾다가 찾아내어 하나님이 목적을 이루는 것이요, 사람이 하나님을 찾다가 찾아내는 현상이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서로 흡족하게, 그것도 육체로 사는 짧은 일생 동안에 하는 것이라.

120:2.9 (1329.1) “9. 사실은 네가 그 영역에 보통 인간이 되겠지만, 너의 잠재성은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창조 아들로 남아 있을 것을 늘 명심하라고 주의를 주노라. 이 육신화를 통해서 내내, 비록 너는 사람의 아들로서 살고 행동하겠지만, 신으로서 네 자신의 창조 속성은 구원자별로부터 유란시아까지 너를 따라다닐 것이라. 너의 생각 조절자가 도착하고 나서, 어느 순간이라도 육신화를 끝내는 것은 항상 너의 의지에 달려 있으리라. 조절자가 도착하고 그를 받아들이기 전에 너의 몸이 온전할 것을 내가 보장하겠노라. 그러나 너의 조절자가 도착하고 나서, 너의 수여 사명의 성질과 중요성을 차츰차츰 인식함과 동시에, 창조자 특권을 너 개인의 몸에서 떼어낼 수 없기 때문에, 이 속성이 너의 필사 인격과 붙은 채로 남아 있으리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어떤 초인간적 달성 의지(意志)나 성취나 또는 권력의 표현을 삼가야 하느니라. 그러나 의식하여 신중하게 의도한 행위로서, 전신을 다하여 내린 선택을 끝마치는 단호한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을 제외하고, 네가 땅에서 보낼 생애에서 아무런 초인간적 결과가 뒤따르지 아니하리라.

3. 계속된 상담과 조언

120:3.1 (1329.2) “자, 아우여, 네가 유란시아를 향하여 떠나려고 준비하는 동안에, 네가 자신을 수여하는 동안에 일반적 처신에 관하여 조언한 뒤에, 너를 떠나 보내면서, 가브리엘과 의논하여 얻은 조언을 제시하고자 하노니, 이것은 너의 필사 생애의 사소한 여러 단계에 관계되느니라. 우리는 다음을 더 제안하노라:

120:3.2 (1329.3) “1. 필사자로서 지상 생애의 이상을 추구하면서, 동료 인간에게 실용적이고 즉시 도움되는 일을 실현하고 예를 보이는 데 또한 얼마큼 눈을 돌리라.

120:3.3 (1329.4) “2. 가족 관계에 대하여 말하면, 네가 발견하는 관습, 자신을 수여하는 시절과 세대에 확립된 가족 생활의 관습이 우선함을 인정하여라. 네가 태어나기로 선택한 그 민족의 관습에 따라서 가족 및 공동체 생활을 하여라.

120:3.4 (1329.5) “3. 사회 체제와 너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면, 영적 부흥과 지적(知的) 해방에 너의 노력을 국한하라고 우리는 조언하노라. 네가 사는 시대의 경제 구조와 정치적 헌신에 얽매이는 것은 무엇이나 피하여라. 특히 유란시아에서 이상적 종교 생활을 실천하는 데 몸을 바쳐라.

120:3.5 (1329.6) “4. 어떤 상황에도, 하찮은 세부라도, 유란시아 민족들의 정상적이고 질서 있는 점진적 발달에 간섭해서는 안 되느니라. 그러나 이 금지(禁止) 조치가 유란시아에서 지속되는 개량된 체계의 적극적 종교 윤리를 남겨놓으려는 노력을 제한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느니라. 한 섭리 시대의 아들로서 너에게는 세계 민족들의 영적ㆍ종교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것과 관련하여 어떤 특권이 허락되느니라.

120:3.6 (1330.1) “5. 네가 좋게 여기는 대로 유란시아에서 발견되는 기존의 종교적ㆍ영적 운동과 관계를 가져야 하지만, 조직된 종파, 경직된 종교, 또는 필사 존재들의 분리된 윤리적 집단을 공식으로 세우는 일을 어떤 방법으로든 피하여라. 너의 일생과 가르침은 모든 종교와 민족에게 공통된 유산(遺産)이 되어야 하느니라.

120:3.7 (1330.2) “6. 후일에 판에 박힌 체계의 유란시아 종교 관념이나 또는 다른 종류의 진취성 없는 종교적 충성을 창시하는 데 쓸데없이 기여하지 않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우리는 더 조언하노라: 행성에 아무런 기록을 뒤에 남기지 말라. 영구(永久)한 물질에 기록하는 것을 모두 삼가라. 동료들에게 육체를 입은 너 자신의 형상이나 기타 비슷한 것을 만들지 말라고 명하라. 우상 숭배의 잠재성을 가진 것은 무엇이나, 네가 떠날 때 행성에 남기지 않도록 처리하여라.

120:3.8 (1330.3) “7. 너는 남성 가운데 정상적인 한 사람이 되어 행성에서 정상이고 보통의 사회 생활을 하는 동안 아마도 결혼 생활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요, 결혼 생활은 온전히 명예롭고 너의 자신 수여에 어긋나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는 아들별의 육신화(肉身化) 지침 중에 하나가 파라다이스 기원을 가진 수여 아들이 어떤 행성에서도 인간 자손을 남기지 말라 금하는 것을 너에게 상기시켜야 하노라.

120:3.9 (1330.4) “8. 다가오는 수여의 모든 다른 세부에서, 우리는 깃드는 조절자의 이끄심, 곧 인간을 인도하는 늘 계시는 신다운 영의 가르침에, 그리고 유전으로 부여받는 너의 확대되는 인간 지성의 분별과 판단에 너를 맡기고자 하노라. 인간과 창조자의 속성의 그러한 결합은 우리를 위하여 너로 하여금 행성 구체에서 완전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만들리라. 그런 인생은 어느 세계에서 (유란시아는 물론이고), 어느 시대에 누가 보아도 반드시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라, 방대한 너의 우주에서 더욱 높이 완전하게 된 세계와 완전하게 되고 있는 세계들이 평가하건대, 온전히 최상으로 충만한 생애일 것이라.

120:3.10 (1330.5) “이제, 네가 우리를 떠나고 성격 의식을 포기(抛棄)하는 순간부터, 인간의 형태로 육신화한 신의 신분을 차츰 네가 인식하는 동안 내내, 그리고 나서 계속하여 유란시아에서 수여 체험 전체를 거치고, 육체를 벗어나고 우리 아버지의 바른 편에 통치권 자리로 올라올 때까지, 모든 지난 업적을 통하여 우리를 늘 지탱하신, 너와 나의 아버지가 너를 안내하고 지지하고 너와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라. 내가 너를 구원자별에서 다시 볼 때, 바로 네가 창조하고 봉사하고 완벽히 이해하는 이 우주를 제한 없이 최상으로 다스리는 군주로서 우리에게 돌아오기를 환영할 것이라.

120:3.11 (1330.6) “네 자리에 이제 내가 군림하노라. 유란시아에서 네가 일곱 번째이자 필사자로서 자신을 수여하는 짧은 기간에 군주의 대리로서, 내가 온 네바돈의 관할권을 맡노라.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아들로서 얼마 후에, 권능과 영광을 얻고서 내게로 돌아올 때까지, 앞으로 사람의 아들이 될 자의 보호를 너 가브리엘에게 맡기노라. 미가엘이 그렇게 돌아올 때까지, 가브리엘아, 나는 너의 군주이라.”

* * *

120:3.12 (1330.7) 그리고 나서 즉시, 구원자별의 모든 존재가 있는 자리에서, 미가엘은 우리 가운데서 사라졌고, 유란시아에서 수여 생애를 마치고 나서, 지역 우주에서 최고로 친히 다스리는 통치자로서 돌아올 때까지, 낯익은 그의 자리에서 우리는 그를 더 만나보지 못했다.

4. 육신화―둘을 하나로 만들기

120:4.1 (1331.1) 그래서 아버지인 창조자가 이기심으로 통치권을 추구한다고 비난하고, 비굴한 생물들이 사는 우주, 미혹된 우주가 영문도 모르고 충성한 덕분에 창조 아들이 멋대로의 독재로 권력을 유지했다고 넌지시 비난하는 일에 빠졌던, 미가엘의 어떤 자격 없는 아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내내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면서―사람의 아들로서 이제 시작한 봉사, 자신을 잊고 봉사하는 일생으로 인하여 언제까지나 입을 다물고 어리둥절해하고 잘못된 생각에서 깨어나게 될 것이었다.

120:4.2 (1331.2) 그러나 오해하지 말라. 참으로 이중 기원을 가진 존재이나 그리스도 미가엘은 이중 성격자가 아니었다. 사람과 관련된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 속에 육신이 된 하나님이었다. 그는 언제나, 바로 그 통합된 존재였다. 그러한 이해할 수 없는 관계에서 유일한 점진적 요소는 하나님이자 사람이라는 이 사실을 (인간 지성으로) 점진적으로 자의식하는 깨달음과 인식이었다.

120:4.3 (1331.3) 그리스도 미가엘은 차츰차츰 하나님이 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예수가 땅에서 산 생애의 어떤 중대한 순간에 사람이 되지 않았다. 예수는―언제나, 아니 언제까지나―하나님이자 사람이었다. 세 존재로 구성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실제로 하나의 신인 것 같이, 이 하나님과 이 사람은 하나였고, 지금도 하나이다.

120:4.4 (1331.4)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하는 최고의 영적 목적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방법을 향상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라.

120:4.5 (1331.5) 유란시아 필사자들은 기적(奇蹟)인 것에 대하여 다른 개념들을 지니고 있지만, 지역 우주의 시민으로서 우리에게는 기적이 거의 없고, 기적 중에서 뛰어나게 가장 흥미를 자아내는 것은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육신화 수여이다. 겉보기에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너희 세계 속에서, 거기서 한 신다운 아들이 나타난 것을 우리는 기적으로 여긴다―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우주 법칙의 작용이다. 나사렛 예수는 기적의 인격자였다.

120:4.6 (1331.6) 이 모든 특별한 체험 속에서, 그리고 이를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은 늘 하시는 바와 같이―보통 방법으로―신(神)이 행위하는 방법, 정상이고, 자연스럽고, 믿을 만한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기를 택하셨다.

제 121 편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했던 시대

유란시아서

제 121 편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했던 시대

121:0.1 (1332.1) 나는 우리 계급을 주관하는 우두머리와 기록을 맡은 멜기세덱의 공동 후원을 받고서, 유란시아 중도자 연합회 회원 12명으로 구성된 한 위원회의 감독 하에 활동하며 한때 사도 안드레에게 부속되었던 2차 중도자(中道者)이다. 내 계급의 지구 생물이 지켜본 그대로, 현세에서 나의 보호 대상이었던 사람이 나중에 일부 기록한 대로, 나는 나사렛 예수의 일생에 있었던 사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라고 허락을 받았다. 주가 기록된 글을 뒤에 남기지 않으려고 얼마나 면밀하게 피했는가 알았기 때문에, 안드레는 자신이 쓴 이야기의 사본(寫本)을 여러 부 만드는 것을 완강하게 거절했다. 예수의 다른 사도들 편에서 비슷한 태도를 가진 것은 복음서의 기록을 크게 지연했다.

1. 그리스도 이후 1세기의 서양

121:1.1 (1332.2) 예수는 영적으로 퇴폐한 시대에 이 세상에 오지 않았다. 그가 태어날 때 유란시아는 그 전에 아담 이후 역사 전체를 통하여 들어보지 못하고 그 뒤에 어느 시대에도 겪어보지 못했던 그러한 영적 생각과 종교 생활의 부흥을 겪고 있었다.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육신화했을 때, 세계는 창조 아들의 수여를 위해서, 그때까지 지배했거나 그 뒤에 생긴 가운데 가장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이 시대 바로 앞 여러 세기 동안에,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 언어가 서양과 근동(近東)에 퍼졌으며, 유대인이 레반트 종족이니까 그 성질이 일부 서양이고 일부 동양이었기 때문에, 동양과 서양, 양쪽에 새 종교를 효과적으로 퍼뜨리기 위하여 그러한 문화와 언어의 배경을 이용하기에 뛰어나게 적절하였다. 대단히 유리한 이 상황은 로마인이 지중해 세계를 관대한 정치로 다스림으로 인하여 더욱 좋아졌다.

121:1.2 (1332.3) 세계 영향의 이러한 조합은 전부 바울의 활동에 잘 나타난다. 그는 종교적 교양 면에서 가장 뛰어난 히브리인이었고, 그리스어로 유대인 메시아의 복음을 선포했으며, 한편 그 자신은 로마 시민이었다.

121:1.3 (1332.4) 예수가 살던 시절의 문명과 같은 것은 서양에서 그 시절 이전이나 이후에도 전혀 없었다. 유럽의 문명은 특별한 세 가지 영향 밑에서 통일되고 조정되었다:

121:1.4 (1332.5) 1. 로마의 정치 및 사회 체계.

121:1.5 (1332.6) 2. 그리스 언어와 문화―철학도 어느 정도.

121:1.6 (1332.7) 3. 유대인의 급속히 퍼지는 종교적ㆍ도덕적 가르침의 영향.

121:1.7 (1332.8) 예수가 태어났을 때, 지중해 세계 전부가 통일된 제국이었다. 세계 역사에서 처음으로 좋은 도로가 많은 주요 도시를 서로 연결하였다. 바다에는 해적들이 없어졌고, 무역하고 여행하는 대단한 시대가 급히 다가오고 있었다. 유럽은 그리스도 이후 19세기까지 그렇게 여행하고 무역하는 시대를 또 다시 구경하지 못했다.

121:1.8 (1333.1) 그리스ㆍ로마 세계는 안으로 평화롭고 겉으로 번영하고 있었는데도, 제국 주민의 대다수는 더러움과 빈곤 속에서 시들었다. 소수(小數)의 상류 계급은 부유했으나, 불쌍하고 궁핍한 하층 계급은 인류의 서민들을 포함하였다. 그 시절에는 행복하고 번영하는 중류 계급이 없었다. 중류 계급이 로마의 사회에서 막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21:1.9 (1333.2) 팽창하는 로마 국가와 파르티아 국가 사이의 첫 싸움은, 당시로 보아서 최근에 끝이 났고 시리아를 로마인의 손에 넘겨주었다. 예수의 시절에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는 번영하고 비교적 평화롭고 동서 양쪽의 나라들과 널리 상업 교역(交易)이 있는 시기를 맞이하였다.

2. 유대 민족

121:2.1 (1333.3) 유대인은 이전에 있던 셈 종족의 한 가지였고, 이 셈족은 또한 바빌로니아인, 페니키아인, 그리고 최근에 로마의 적이었던 카르타고인도 포함했다. 그리스도 이후 1세기 전반에, 유대인은 셈 종족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집단이었다. 당시에 그 지역이 통치되고 무역을 위하여 조직된 바와 같이, 그들은 우연히 세계에서 특이하게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리적 위치를 차지했다.

121:2.2 (1333.4) 고대의 나라들을 연결하는 많은 큰 도로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갔고, 이처럼 이 지역은 세 대륙이 만나는 자리, 교차로가 되었다. 여행, 무역, 그리고 바빌로니아ㆍ아씨리아ㆍ에집트ㆍ시리아ㆍ그리스ㆍ파르티아ㆍ로마의 군대가 잇달아 팔레스타인을 휩쓸었다. 기억할 수도 없이 아득한 시절부터, 허다한 카라반 길이 동양으로부터 이 지역의 어느 부분을 거쳐서, 지중해 동쪽 끝에 좋은 몇 항구까지 이르렀고, 거기서부터, 배들은 그 화물을 온 서양의 해안으로 날랐다. 이 카라반 교통의 반 이상이 갈릴리의 작은 마을 나사렛을 거치거나 그 근처를 지나갔다.

121:2.3 (1333.5) 비록 팔레스타인이 유대인의 종교 문화의 고향이요 기독교가 태어난 곳이었지만, 유대인은 세계에서 바깥으로 나가 있었고, 여러 나라에서 살면서 로마 국가와 파르티아 국가의 어느 지방에서나 장사하고 있었다.

121:2.4 (1333.6) 그리스는 언어와 문화를 제공했고, 로마는 길을 만들고 하나의 제국을 통일했다. 그러나 유대인이 분산된 것은 로마 세계에 두루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2백이 넘는 회당과 잘 조직된 종교 공동체와 함께, 문화의 중심들을 마련해 주었다. 그런 곳에서 하늘나라의 새 복음을 초기에 받아들였고, 거기서부터 후일에 복음이 세상의 가장 먼 구석까지 퍼졌다.

121:2.5 (1333.7) 유대인 회당은 각자 소수의 이방인 신도(信徒), “경건한”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였는데, 바로 이 소수의 전향자들 사이에서 바울은 초기에 기독교로 개종한 신자들의 대부분을 얻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도, 화려한 이방인의 마당이 있었다. 예루살렘과 안티옥에서는 문화ㆍ상업ㆍ예배 사이에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안티옥에서 바울의 제자들을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렀다.

121:2.6 (1333.8) 유대인의 성전 예배를 예루살렘에 집중한 것은 그들의 일신교가 살아남게 만든 비결이었고, 마찬가지로 만국의 그 유일한 하나님, 만인의 아버지를 전하는 새롭고 확대된 개념을 육성하고 세계에 전파하는 것을 보장했다.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는 이방 국가의 군주와 종족 박해자들이 잇달아 몰락하는 가운데 종교 문화의 개념이 살아남아 있다는 것을 나타냈다.

121:2.7 (1334.1) 이 시절의 유대 민족은, 로마의 치하에 있었어도 상당한 정도로 자치를 누렸고, 유다 마카비, 그리고 직후에 계승한 자들이 수행한 공적, 당시로 보아서 최근에 영웅답게 나라를 구원한 공적을 기억하면서, 더욱 큰 구원자, 오래도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곧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로 활기에 넘쳐 있었다.

121:2.8 (1334.2) 팔레스타인, 즉 유대인의 왕국이 반 독립된 국가로서 살아남은 것은 로마 정부의 대외 정책에 그 비결이 있었다. 로마는 동양과 서양을 잇는 카라반 길의 서부 종착역 뿐 아니라, 시리아와 에집트 사이에 팔레스타인의 여행 도로를 계속 장악하기를 바랐다. 레반트에서 로마가 미래에 확장하는 것을 억제할 수도 있는 어떤 강대국이라도 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것을 로마는 바라지 않았다. 술책을 쓰는 정책의 목적은 실루시드의 시리아와 프톨레미의 에집트가 서로 맞서서 다투게 하는 것이었고, 그런 정책은 팔레스타인을 하나의 따로 독립된 국가로 양육하는 것을 필요하게 만들었다. 로마의 정책과 에집트의 붕괴, 그리고 파르티아의 강성해지는 힘 앞에 실루시드 왕조가 차츰 쇠약해진 것은, 어째서 몇 세대 동안 작고도 힘없는 유대인 무리가 북으로 실루시드 왕조와 남으로 프톨레미 왕조, 이 두 나라에 대항하여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 설명한다. 둘러싼 강대 민족들의 통치로부터 어쩌다가 얻은 이 자유와 독립을 유대인은 그들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야웨가 직접 간섭한 덕분으로 돌렸다. 자기 민족이 우월하다는 그런 태도는 로마의 압제가 마침내 그들의 땅에 닥쳤을 때, 이를 더욱 견디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슬픈 시점에도, 유대인은 세상에서 그들이 정치적 사명이 아니라 영적 사명을 가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121:2.9 (1334.3) 그때 외부 사람, 이두미아인 헤롯이 유대인을 다스렸기 때문에, 예수가 살던 시절에 유대인은 특별히 조심스럽고 의심이 많았다. 헤롯은 영리하게 로마 통치자들의 비위를 맞춤으로 유대 땅의 통치권을 손에 넣었다. 헤롯은 히브리인의 예식 절차에 충실할 것을 공언했으나, 낯선 신들을 위하여 여러 신전의 건축을 진행했다.

121:2.10 (1334.4) 헤롯과 로마의 지배자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유대인이 세계를 여행하기에 안전하게 만들었고, 따라서 로마 제국 및 조약을 맺은 여러 외국의 먼 구석까지도 하늘나라의 새 복음을 가지고 유대인이 더욱 침투하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헤롯의 통치는 또한 히브리 철학과 헬라파 철학이 더욱 섞이는 방향으로 크게 기여했다.

121:2.11 (1334.5) 헤롯은 케자리아 항구를 지었고, 이것은 팔레스타인을 문명 세계의 교차로로 만드는 데 더욱 도움이 되었다. 헤롯은 기원전 4년에 죽었고, 그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가 어렸을 때와 봉사하던 기간에, 서기 39년까지 갈릴리와 페레아를 다스렸다. 안티파스는 아버지처럼 위대한 건축가였고, 중요한 무역 중심 세포리스를 포함하여, 갈릴리의 많은 도시를 다시 지었다.

121:2.12 (1334.6)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와 율법 선생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갈릴리는 유대인 지역이기보다 이방(異邦)에 더 가까웠다.

3. 이방인의 형편

121:3.1 (1334.7) 로마 국가의 사회 및 경제 조건은 가장 높은 수준은 아니었어도, 안으로 평화와 번영이 널리 퍼진 것은 미가엘의 수여에 적당하였다. 그리스도 이후 1세기에, 지중해 세계의 사회는 분명히 구분이 된 다섯 계층으로 이루어졌다:

121:3.2 (1335.1) 1. 귀족 계급. 돈과 공식 권력을 가진 상류 계급, 특권을 가진 통치 집단.

121:3.3 (1335.2) 2. 상업 집단. 거상(巨商)과 은행가, 무역상―큰 수입ㆍ수출상―국제 상인.

121:3.4 (1335.3) 3. 작은 중류 계급. 이 집단은 정말로 작기는 했어도 아주 영향력이 있었고, 초대 기독교 교회의 정신적 뼈대를 마련해 주었으며, 교회는 이 집단에게 다양한 기술과 상업을 계속할 것을 권장했다. 유대인 가운데 많은 바리새인이 이 계급의 상인에 속했다.

121:3.5 (1335.4) 4. 자유로운 노동자 계급. 이 집단은 거의 또는 아무런 사회적 지위가 없었다. 비록 자유를 자랑스럽게 느꼈지만, 노예 노동과 경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크게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상류 계급은 이들이 “번식하는 목적” 외에 쓸모 없음을 인정하면서 이들을 경멸하였다.

121:3.6 (1335.5) 5. 노예. 로마 국가 인구의 절반은 노예였고, 다수가 우수한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빨리 진출해서 자유 노동자, 그리고 상인(商人)들 틈에도 끼었다. 대다수는 평범하거나 아주 열등했다.

121:3.7 (1335.6) 우수한 민족들이 노예가 되었어도, 노예 제도는 로마의 군사(軍事) 정복의 특징이었다. 노예에 대한 주인의 권한은 무제한이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하층 계급과 이 노예들로 구성되었다.

121:3.8 (1335.7) 우수한 노예들은 흔히 임금을 받았고, 소득을 저축해서 자유를 살 수 있었다. 해방된 많은 그런 노예는 국가ㆍ교회ㆍ상업계에서 높은 자리에 올랐다. 바로 그런 가능성이 초대 기독교 교회가 이 수정된 형태의 노예 제도를 그토록 묵인하게 만들었다.

121:3.9 (1335.8) 서기 1세기에 로마 제국에는 널리 퍼진 사회 문제가 없었다. 민중의 대부분은 그들이 어쩌다 태어난 집단에 자신들이 속한다고 여겼다. 재능 있고 유능한 사람들이 로마 사회의 낮은 계층에서 더 높은 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문이 언제나 열려 있었으나,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의 사회적 지위에 만족했다. 그들은 계급 의식이 없었고, 이 계급의 차별이 부당하거나 그릇되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도 억압받는 계급의 곤경을 개선(改善)하는 목적을 가진 경제 운동이 아니었다.

121:3.10 (1335.9) 여자는 팔레스타인에서 신분에 제한을 받은 것보다 로마 제국 전역에서 더 자유를 누렸지만, 유대인이 가족에게 바치는 헌신과 자연스러운 애정은 이방 세계보다 훨씬 나았다.

4. 이방인의 철학

121:4.1 (1335.10) 도덕적 견지에서, 이방인은 유대인보다 얼마큼 못했지만, 고상한 이방인들의 가슴 속에는 타고난 선한 자질과 잠재하는 인간적 애정을 기를 비옥한 토양이 있었고, 거기서 기독교의 씨앗이 싹트고, 도덕적 인격과 영적 성취의 수확을 풍부히 거두는 것이 가능했다. 그때 이방 세계에는 4대 철학이 유행하였는데, 모두가 전에 있었던 그리스인의 플라톤 사상에서 어느 정도 파생되었다. 이 철학 학파들은 다음과 같다:

121:4.2 (1335.11) 1. 쾌락주의자. 이 사상의 학파는 행복의 추구에 마음을 쏟았다. 상급 쾌락주의자들은 지나친 육욕에 빠지지 않았다. 적어도, 이 교리는 그보다 더 치명적 형태의 숙명론으로부터 로마인을 벗어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데, 사람들이 무엇인가 노력하면 현세에서 지위를 개선할 수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지한 미신(迷信)을 효과적으로 퇴치하였다.

121:4.3 (1336.1) 2. 금욕주의자. 금욕주의는 상류 계층이 지녔던 우수한 철학이었다. 금욕주의자는 통제하는 이성(理性)과 운명이 모든 자연을 지배한다고 믿었다. 이들은 사람의 혼은 신성하며 육체의 성품을 가진 악한 몸 속에 갇혀 있다고 가르쳤다. 사람의 혼은 자연, 곧 하나님과 조화되어 삶으로 해방을 얻으며, 따라서 미덕은 그 자체가 보상이었다. 금욕주의는 숭고한 도덕 수준까지 올라갔고 그 후에 어떤 순전한 인간적 철학 체계도 결코 뛰어넘지 못한 이상이었다. 금욕주의자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손”이라고 공언했으나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하나님을 찾아내지 못했다. 금욕주의는 하나의 철학으로 남았고, 결코 종교가 되지 못했다. 그 추종자들은 그들의 지성을 우주 지성과 조화시키려고 애썼지만, 그들이 사랑의 아버지의 자녀인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어떤 상태에 처해 있든지, 그에 만족하기를 배웠노라”하고 기록했을 때, 바울은 금욕주의에 깊이 젖어 있었다.

121:4.4 (1336.2) 3. 견유학파. 견유학파의 철학은 아테네의 디오게네스까지 유래를 추적할 수 있으나, 교리의 상당 부분은 마키벤타 멜기세덱의 가르침의 잔재로부터 파생되었다. 이전에 견유주의는 철학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였다. 적어도 견유학파는 그들의 종교 철학을 민주화하였다. 들에서 시장에서, 이들은 “사람은 자기가 원하면 자신을 구할 수 있다”는 교리를 줄곧 전파했다. 단순과 미덕을 가르쳤고, 사람들에게 겁 없이 죽음을 맞이하라고 권했다. 이 떠돌이 견유학파(犬儒學派) 전도사들은 영적으로 갈급한 민중을 후일에 기독교 선교사들을 위하여 준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들 사이에 유행한 설교 순서는 바울 서한의 형식과 그 문체를 많이 따랐다.

121:4.5 (1336.3) 4. 회의주의자. 회의주의(懷疑主義)는 지식은 허위요, 확신과 보장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순전히 부정적 태도였고, 결코 널리 퍼지지 않았다.

121:4.6 (1336.4) 이 여러 철학은 종교에 준하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흔히, 활력을 불어넣고 윤리적이고 사람을 고상하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대개는 서민의 수준을 넘었다. 아마도 견유주의를 제외하고, 이것들은 강한 자와 지혜로운 자를 위한 철학이었고,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도 구원을 주는 종교는 아니었다.

5. 이방인의 종교

121:5.1 (1336.5) 이전의 시대 전체를 통해서, 종교는 주로 부족이나 국가의 일이었고, 흔히 개인이 아랑곳할 문제가 아니었다. 신들은 개인이 아니라, 부족이나 민족을 상대하였다. 그러한 종교 체계는 보통 사람이 개인으로서 가진 영적 열망을 거의 채워주지 못했다.

121:5.2 (1336.6) 예수의 시절에 서양의 종교는 다음과 같았다.

121:5.3 (1336.7) 1. 이교도의 종파. 이 종파들은 헬라인과 라틴 족의 신화(神話)ㆍ애국심, 그리고 전통의 조합이었다.

121:5.4 (1336.8) 2. 황제 숭배. 유대인과 초대 기독교인들은 국가의 상징으로서 이렇게 사람을 신격화하는 것을 몹시 분개하였고, 이러한 신격화는 이 두 종파의 교회가 로마 정부의 모진 핍박을 받게 만드는 직접 원인이었다.

121:5.5 (1337.1) 3. 점성술. 바빌론의 이 사이비(似而非) 과학은 그리스와 로마 제국에 두루, 종교로 발전되었다. 20세기에도 사람은 이 미신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121:5.6 (1337.2) 4. 신비 종파. 그토록 영적으로 갈급한 세계에 신비 종파들의 홍수가 밀려 들어왔는데, 레반트에서 온 새롭고 이상한 종교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고 이들에게 개인의 구원을 약속했다. 이 종교들은 급속히 그리스ㆍ로마 세계의 하류 계급이 받아들인 신앙이 되었다. 이 종교들은 훨씬 우수한 기독교의 가르침이 급속히 퍼지도록 길을 예비하는 데 많이 이바지하였다. 지적인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신학, 그리고 그 시절에 무지하지만 영적으로 갈급한 서민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엄청난 제안과 관련하여, 기독교의 가르침은 신에 관하여 탁월한 개념을 제시했다.

121:5.7 (1337.3) 신비 종교들은 민족 신앙의 종말을 가져왔고, 개인을 상대하는 수많은 종파를 탄생하게 하였다. 수가 많았어도 신비교는 모두 다음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121:5.8 (1337.4) 1. 어떤 신화(神話) 같은 전설, 즉 신비―여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미트라교의 가르침이 보여주다시피, 대체로, 이 신비는 어떤 신(神)의 일생ㆍ죽음ㆍ부활 이야기와 상관이 있었다. 이 미트라교는 한동안 바울이 세운, 팽창하는 기독교와 같은 시대에 존재했고, 함께 자리를 다투었다.

121:5.9 (1337.5) 2. 신비교들은 민족 종교가 아니고 종족을 초월하였다. 개인적이고 친교하는 종파였고, 그 결과로 종교적 친목 사회와 수많은 종파 사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121:5.10 (1337.6) 3. 이들의 예배는 정교한 입회 예식, 그리고 예배 드릴 때 인상적인 성찬식의 특징을 가졌다. 이들의 비밀 의식과 예식은 때때로 끔찍스럽고 메스꺼운 것이었다.

121:5.11 (1337.7) 4. 그러나 예식의 성질이나 지나친 정도와 상관 없이, 이 신비교들은 변함없이 신도들에게 구원, “악에서 벗어나고, 사후에 살아남고, 슬픔과 노예 제도가 있는 이 세상을 넘어서 행복한 나라에서 오래오래 살 것”을 약속했다.

121:5.12 (1337.8)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과 신비교를 혼동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이런 신비교들이 유행한 것은 사람이 사후에 살아남기를 추구했다는 것을 보이며, 따라서 개인을 상대하는 종교와 개인의 올바름을 진정하게 갈망하고 목마르게 찾았음을 보여준다. 신비교들은 이런 소망을 적절히 채워주지 못했지만, 후일에 예수가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길을 예비했고, 이 예수는 참으로 이 세상에 생명의 빵과 생명의 물을 가져왔다.

121:5.13 (1337.9) 사람들이 상급의 신비 종교에 널리 집착한 것을 이용하려고, 개종(改宗)할 가망이 있는 큰 집단의 사람들이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려고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얼마큼 고쳤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바울이 절충한 것조차 (기독교) 최선의 신비 종파들보다 다음 이유로 더 우수하다:

121:5.14 (1337.10) 1. 바울은 도덕의 회복, 즉 윤리적 구원을 가르쳤다. 기독교는 새로운 삶을 향하게 하고 새로운 이상을 선포했다. 바울은 요술 의식(儀式)과 예식의 마술적 요소를 버렸다.

121:5.15 (1337.11) 2. 기독교는 인간의 문제에서 궁극의 답을 얻으려고 애쓰는 종교를 제시했는데, 이는 이 종교가 슬픔, 그리고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구원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죄에서 구원받는 것도 약속했고, 이에는 영원히 살아남는 올바른 인품의 부여가 뒤따랐다.

121:5.16 (1338.1) 3. 신비교는 신화(神話)에 기초를 두고 세워졌다. 바울이 전파한 바와 같이, 기독교는 인류에게 미가엘, 즉 하나님의 아들이 수여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를 두었다.

121:5.17 (1338.2) 이방인 사이에서 도덕은 반드시 철학이나 종교와 관련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바깥에서는, 종교의 사제(司祭)가 도덕적 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머리에 반드시 떠오르지는 않았다. 유대인의 종교, 다음에 예수의 가르침, 그리고 그 뒤에 발전하는 바울 판의 기독교는 한 손에 도덕을 다른 손에는 윤리를 쥐고서, 신자들이 이 두 가지에 어느 정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최초로 주장한 유럽의 종교였다.

121:5.18 (1338.3) 그토록 어설픈 철학 체계에 영향을 받고, 그렇게 복잡한 종교의 종파들 때문에 갈피를 못 잡는 그런 세대의 사람들 가운데, 예수는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다. 나중에 그는 개인적 종교―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가르치는―복음을 바로 이 세대에게 주었다.

6. 히브리 종교

121:6.1 (1338.4) 그리스도 이전 1세기가 막을 내릴 때가 되자, 예루살렘의 종교 사상은 그리스 문화의 가르침에, 그리고 그리스 철학에도, 엄청나게 영향을 받고 얼마큼 수정되었다. 히브리 사상의 동부와 서부 학파의 관점 사이에 오랜 싸움이 있다가, 예루살렘, 그리고 나머지 서양(西洋)과 레반트는 대체로 서부 유대인의 관점, 즉 수정된 헬라파 관점을 채택하였다.

121:6.2 (1338.5) 예수의 시절에는 세 가지 말이 팔레스타인에서 통용되었다. 서민들은 아람어의 어떤 방언을 말했고, 사제(司祭)와 랍비들은 히브리어를 썼으며, 교육받은 계급과 상류 계층의 유대인은 대체로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유대 문화와 신학 중에서 그리스파가 나중에 우세하게 된 데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 성서를 그리스어로 일찍 번역한 것이 적지 않은 원인이었다. 기독교 선생들의 기록이 바로 그 언어로 곧 나타나게 되었다. 유대주의의 부흥은 히브리 성서를 그리스어로 옮긴 데서 비롯된다. 이 영향으로 말미암아, 나중에 바울의 기독교 종파가 동양이 아니라 서양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121:6.3 (1338.6) 헬라화된 유대인의 신앙은 쾌락주의자의 가르침에 아주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이들은 플라톤의 철학, 그리고 극기(克己)를 가르치는 금욕주의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마카비 4서는 금욕주의 세력이 크게 신장된 것을 보여준다. 플라톤의 철학과 금욕주의 신조, 이 두 세력의 침투는 솔로몬의 지혜서에 나타난다. 헬라화된 유대인들은 히브리 성서를 그렇게 우화(寓話)로 풀이했기 때문에, 히브리 신학을 그들이 숭상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순응시키는 것을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두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손으로 처리되기까지 비참한 혼란을 낳았는데, 필로는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을 간결하고 상당히 일관성 있는 하나의 종교 관념 및 관습 체계로 조화시키고 체계화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바로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을 통합한 이 후일의 가르침이 예수가 살고 가르치던 때에 팔레스타인에 유행하였는데, 이를 바울은 더욱 진보되고 계몽적인 기독교 종파를 세우는 데 기초로 이용하였다.

121:6.4 (1338.7) 필로는 위대한 선생이었다. 모세 이후로 서양 세계의 윤리 및 종교 사상에 그렇게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었다. 당대의 윤리와 종교적 가르침의 체계 속에 있는 좋은 요소들을 통합하는 문제에 뛰어난 인간 선생이 일곱 사람 있었으니, 곧 세타드ㆍ모세ㆍ조로아스터ㆍ노자ㆍ부다ㆍ필로ㆍ바울이다.

121:6.5 (1339.1) 그리스의 신비주의 철학과 로마의 금욕주의 교리를 히브리인의 율법 신학과 통합하려는 노력에서 생기는 필로의 부조리를 바울은 전부는 아니라도 많이 인식했으며, 현명하게도 그가 지녔던 기독교 이전의 기본 신학에서 이 부조리를 없애버렸다. 필로는 바울이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개념을 더 충실하게 회복하도록 길을 인도했는데, 그 개념은 유대 신학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다. 바울의 오직 한 가지 문제점은 필로와 발걸음을 맞추거나, 부유하고 교육받은 이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의 가르침을 뛰어넘지 못하였으니, 곧 속죄 교리였다. 필로는 오로지 피를 흘려야 용서받는다는 교리를 벗어나라고 가르쳤다. 그는 또한 아마 바울보다 더 맑게 생각 조절자의 실체와 계심을 얼핏 본 듯하다. 그러나 바울의 원죄(原罪) 이론, 곧 물려받은 죄, 타고난 악, 그리고 그로부터 회복한다는 교리는 그 기원의 일부가 미트라교에 있고, 이는 히브리 신학이나 필로의 철학이나 또는 예수의 가르침과 거의 공통점이 없다. 원죄와 속죄(贖罪)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의 어떤 단계는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다.

121:6.6 (1339.2) 예수가 땅에서 산 생애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인 요한 복음은 서양 민족들을 향하여 말한 것이었고, 후일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기독교 신자들의 관점에 많이 비추어서 그 이야기를 엮었는데, 이들은 또한 필로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121:6.7 (1339.3) 그리스도가 살던 무렵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에 대하여 이상하게 감정이 악화되었다. 이 옛 유대인 본거지로부터 지독한 박해의 물결이 퍼져 나갔고, 이것은 로마에까지도 퍼져서 거기서 수천 명이 추방되었다. 그러나 사실을 왜곡하는 그러한 투쟁은 길게 가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서 제국 정부는 제국 전역에 걸쳐 유대인의 축소된 자유를 완전히 회복시켰다.

121:6.8 (1339.4) 넓은 온 세계에 두루, 상업이나 박해로 인하여 유대인이 어디에 흩어져 있든지 상관 없이, 모두가 하나 같이 예루살렘의 거룩한 성전에 마음을 두었다. 유대인의 신학은 어떤 바빌로니아 선생들이 때에 알맞게 개입한 덕택으로 잊혀지지 않고 몇 번이나 구조되었다. 이런 일이 있었어도, 유대인의 신학은 예루살렘에서 해석하고 실천한 대로 살아남았다.

121:6.9 (1339.5) 250만에 이르는 이 흩어진 유대인들은 민족의 종교적 축제를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오곤 했다. 동부(바빌로니아파)와 서부(헬라파) 유대인의 신학이나 철학에 무슨 의견 차이가 있든 상관 없이,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이 그들의 예배의 중심이라는 것, 그리고 메시아가 올 것을 늘 기대하는 의견이 같았다.

7. 유대인과 이방인

121:7.1 (1339.6) 예수가 살던 시절이 되자, 유대인은 그들의 기원ㆍ역사ㆍ운명에 대하여 고정된 개념에 도달하였다. 자신과 이방인 세계를 갈라놓는 굳은 벽을 쌓았고, 이방인의 모든 생활 방식을 속속들이 경멸하는 눈으로 보았다. 율법을 글자 그대로 숭상했고 일종의 독선(獨善)에 빠졌으며, 이것은 거짓된 겸손을 떠는 자만에서 생겨났다. 그들은 메시아가 온다는 약속에 관하여 선입관이 있었고, 대부분은 그들의 국가와 민족 역사의 일부로서 메시아가 온다고 생각하였다. 그 시절의 히브리인에게 유대 신학은 고칠 수 없이 확고하고 영원히 고정된 것이었다.

121:7.2 (1339.7) 관용과 친절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는 유대인이 이교도로 여긴 다른 민족들에 대하여 그들이 오랫동안 지녔던 태도와 상반되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유대인은 바깥 세계에 대하여, 사람이 서로 영적 형제라는 주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불가능하게 만든 그러한 태도를 길러 왔다. 그들은 이방인과 동등한 조건으로 야웨를 기꺼이 함께 섬기려 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새롭고 이상한 교리를 가르친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121:7.3 (1340.1)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은 의식과 율법주의의 무서운 사슬에 유대인을 묶어놓았고, 이것은 로마의 정치적 사슬보다도 더 가까이 있는 현실이었다. 예수의 시절에 유대인은 율법의 지배를 받았을 뿐 아니라, 사람을 종으로 만드는 전통의 요구에 똑같이 묶여 있었고, 이것은 개인 및 사회 생활의 모든 분야에 관계되고 침투했다. 이 자디잔 행동 규칙은 모든 충실한 유대인을 따라다니고 지배했다. 그들의 신성한 전통(傳統)을 주제넘게 무시하고, 오랫동안 지켜 왔던, 사회의 행동 규칙을 감히 조롱한 사람,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단번에 물리친 것은 당연하다. 바로 아버지 아브라함이 예정해 놓았다고 생각된 교리에 서슴지 않고 맞선 자의 가르침을 도저히 좋게 볼 수 없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율법을 준 것이고, 그들은 타협하려 들지 않았다.

121:7.4 (1340.2) 그리스도 이후 1세기가 되자, 이름 있는 선생과 서기관들이 율법을 풀이한 말씀은 기록된 율법 자체보다도 더 높은 권한을 가졌다. 이 모든 이유로, 유대인의 어떤 종교 지도자들은, 새 복음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는 편으로 사람들을 더욱 쉽게 집결시킬 수 있었다.

121:7.5 (1340.3) 이러한 상황은 유대인이 종교의 자유와 영적 해방을 부르짖는 새 복음의 사자(使者)가 되어 신성한 운명을 달성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전통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예레미야는 “사람의 마음 속에 새겨야 할 율법”에 관하여 말한 적이 있고, 에스겔은 “사람의 혼 속에서 살 새 영”에 관하여 말했으며, 시편의 저자(著者)는 하나님이 “사람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고 올바른 영을 다시 새롭게 할 것”을 기도했다. 그러나 선한 일을 하고 율법에 굴종할 것을 부르짖는 유대 종교가 전통적 습성의 수준까지 침체되었을 때, 종교적 발전의 움직임은 서쪽으로, 유럽 민족들에게 넘어가 버렸다.

121:7.6 (1340.4) 그래서 진보하는 신학을 세상에 전하는 데 다른 한 민족이 부름받았다. 이 신학은 그리스인의 철학, 로마인의 법, 히브리인의 도덕과 함께, 인격의 신성함과 영적 해방을 주장하는 복음, 바울이 형성하고 예수의 가르침에 기초를 둔 복음을 담은 체계의 가르침이었다.

121:7.7 (1340.5) 바울이 세운 기독교 종파는, 거기에 담긴 도덕이 유대교에서 태어난 자국을 드러낸다. 유대인은 역사를 하나님―일하는 야웨―의 섭리라고 보았다. 그리스인은 좀더 뚜렷한 영생(永生) 개념을 이 새 가르침에 도입하였다. 바울의 교리에 담긴 신학과 철학은 예수의 가르침 뿐 아니라, 플라톤과 필로의 영향도 받았다. 바울의 윤리는 그리스도 뿐 아니라 금욕주의자로부터도 영감을 받았다.

121:7.8 (1340.6) 예수의 복음은, 바울의 안티옥 기독교 종파에 담겨 있는 바와 같이, 다음의 가르침과 섞이게 되었다:

121:7.9 (1340.7) 1. 유대교로 전향한 그리스인의 철학 논리. 이것은 영생(永生) 개념을 얼마큼 포함한다.

121:7.10 (1340.8) 2. 유행하던 신비주의 종파들의 매력 있는 가르침, 특히 어떤 신이 희생물을 바침으로 사람을 되찾고, 속죄하고 구원한다는 미트라교의 교리.

121:7.11 (1340.9) 3. 자리잡힌 유대 종교의 탄탄한 도덕성.

121:7.12 (1341.1) 예수가 살던 시절에 지중해의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왕국, 그리고 인접한 민족들은 모두, 세계의 지리(地理)ㆍ천문ㆍ건강ㆍ질병에 관하여 투박한 원시 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나사렛 목수의 새롭고 경이로운 발언에 당연히 놀라워했다. 좋은 영과 나쁜 영에게 신들린다는 생각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모든 돌과 나무에도 영이 들어 있다고 보았다. 이때는 마술에 홀린 시대였고, 누구나 기적(奇蹟)이 보통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었다.

8. 이전에 쓴 기록

121:8.1 (1341.2) 받은 지침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가능한 한, 우리는 유란시아에서 예수의 일생과 상관 있는 기존의 기록을 이용하고 어느 정도 조정하려고 애썼다. 우리는 사도 안드레의 잃어버린 기록을 들여다볼 기회를 가졌고,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하던 시절에 땅에 있었던 광대한 무리의 하늘 존재들(특히 지금은 인격이 된 그의 조절자)의 협조를 받았지만, 마태ㆍ마가ㆍ누가ㆍ요한 복음이라 칭하는 복음들을 이용하는 것도 우리의 목적이었다.

121:8.2 (1341.3) 이러한 신약(新約) 기록은 다음 상황에서 그 기원을 가졌다:

121:8.3 (1341.4) 1. 마가가 쓴 복음. 요한 마가는 (안드레의 노트를 제쳐놓고) 예수의 일생에 관하여 가장 일찍, 가장 짧고 간단한 기록을 남겼다. 주를 봉사자로서,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사람으로 제시했다. 마가는 자기가 묘사하는 여러 장면에 얼씬거리던 젊은이였지만, 실제로 그의 기록은 시몬 베드로에 따른 복음이다. 그는 초기에 베드로, 나중에는 바울과 관련을 가졌다. 마가는 베드로의 격려를 받고, 로마에 있던 교회의 간절한 부탁을 받고서 이 글을 썼다. 주가 땅에서 육신을 입었을 때 자신의 가르침을 얼마나 한결같이 기록하지 않으려 했는가 알았기 때문에, 마가는 사도와 기타 유력한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주의 가르침을 기록하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로마 교회가 그러한 기록된 이야기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마가는 이를 준비하는 일을 떠맡기로 찬성했다. 마가는 서기 67년, 베드로가 죽기 전에 짧은 기록을 많이 적어 놓았고, 베드로가 인가한 줄거리에 따라서, 그리고 로마에 있는 교회를 위하여 베드로가 죽고 난 바로 뒤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복음은 서기 68년이 저물 무렵에 완성되었다. 마가는 전적으로 자신의 기억과 베드로의 기억을 살려서 썼다. 이 기록은 그 뒤에 상당히 수정되었고 수많은 구절이 삭제되었으며, 최초의 복음에서 마지막 5분의 1은 처음 원본으로부터 베끼기도 전에 없어졌는데, 이를 대신하기 위하여 후일의 어떤 사건들이 끝에 첨가되었다. 마가가 쓴 기록은, 안드레와 마태의 노트와 함께,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을 그리려고 애쓴 모든 후일의 복음 이야기 기록에 기초가 되었다.

121:8.4 (1341.5) 2. 마태의 복음. 이른바 마태에 따른 복음은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주의 일생에 관하여 적은 기록이다. 이 기록의 저자는 예수의 일생에서, 그가 행한 많은 일이 “선지자들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보이려고 항상 애쓴다. 마태 복음은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 묘사하고 율법과 선지자들을 크게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121:8.5 (1341.6) 사도 마태는 이 복음을 쓰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이사돌이 이 복음을 썼고, 이 일에 도움되는 자료로서, 이 사건들에 관하여 마태가 개인적으로 기억한 것뿐 아니라, 예수의 말씀에 관하여, 주가 십자가에 못박힌 바로 뒤에 마태가 써놓았던 어떤 기록을 또한 가지고 있었다. 마태의 이 기록은 아람어로 썼고, 이사돌은 그리스어로 썼다. 그 저서를 마태의 것으로 돌린 데에는 아무런 속일 뜻이 없었다. 그 시절에는 제자들이 이렇게 스승에게 명예를 돌리는 것이 관습이었다.

121:8.6 (1342.1) 마태가 최초에 쓴 기록은 그가 복음 전도에 들어가려고 예루살렘을 떠나기 바로 전에, 서기 40년에 편집되었고 여기에 다른 것이 첨가되었다. 이것은 사사로운 기록이었고, 그 마지막 사본은 서기 416년에 시리아의 어느 수도원이 불탔을 때 사라졌다.

121:8.7 (1342.2) 이사돌은 서기 70년에 타이투스의 군대가 예루살렘에 투입된 뒤에, 그 도시로부터 피했으며 마태가 적은 기록의 사본(寫本) 하나를 펠라로 가지고 갔다. 71년에, 펠라에서 사는 동안, 이사돌은 마태에 따른 복음을 썼다. 그는 또한 마가의 이야기에서 처음 5분의 4를 가지고 있었다.

121:8.8 (1342.3) 3. 누가가 쓴 복음. 피시디아 지방의 안티옥에서 살던 의사 누가는 바울이 개종시킨 이방인이었고, 주의 일생에 대하여 아주 다른 이야기를 적었다. 그는 서기 47년에 비로소 바울을 따르고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었다. 누가는 바울 및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 여러 사실을 모은 대로, 그의 기록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하여 많은 것을 간직한다. 누가는 주를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내세운다. 그는 바울이 죽을 때까지 이 기록을 복음서로 만들지 않았다. 누가는 아카이아에서 82년에 기록했다.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역사를 다루는 세 권의 책을 쓰려고 계획했으나 이 작업에서 둘째 책, “사도들의 행적”을 마치기 바로 전, 서기 90년에 죽었다.

121:8.9 (1342.4) 누가는 그의 복음을 수집하기 위한 자료로서, 먼저 바울이 그에게 전해 준, 예수의 일생 이야기에 의존했다. 그러니까 누가의 복음은 어떤 면에서, 바울에 따른 복음이다. 그러나 누가는 다른 근원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누가는 예수의 일생에서 기록하는 수많은 사건의 증인을 몇십 명 만나서 물어보았을 뿐 아니라, 또한 마가의 복음, 다시 말해서 처음 5분의 4의 사본, 그리고 이사돌의 이야기, 또 세데스라는 이름을 가진 한 신도가 안티옥에서 서기 78년에 만든 간단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누가는 또한 사도 안드레가 적었다고 주장되는 어떤 기록들의 사본, 절단되고 많이 편집된 사본을 가지고 있었다.

121:8.10 (1342.5) 4. 요한의 복음. 요한에 따른 복음은 다른 기록에 담겨 있지 않은, 유대 땅에서, 그리고 예루살렘 근처에서 예수가 하신 일을 많이 적는다. 이것이 이른바 세베대의 아들 요한에 따른 복음이며, 비록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쓰지 않았어도 그 생각을 불어넣었다. 처음 기록된 뒤에, 바로 요한이 쓴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려고 여러 번 편집을 거쳤다. 이 기록이 만들어졌을 때, 요한은 다른 복음서들을 가지고 있었고, 허다한 것이 빠져 있음을 알았다. 따라서, 서기 101년에 그는 케자리아에서 온 그리스계 유대인 동료 나단에게 글을 쓰기 시작하라고 격려했다. 요한은 기억을 더듬고, 이미 존재하는 세 가지 기록을 참조함으로 자신의 자료를 주었다. 그는 자신이 적은 저서가 하나도 없었다. “요한 1서”라고 알려진 편지는 그의 지도 하에서 나단이 쓴 작품을 소개하는 편지로서, 요한 자신이 썼다.

121:8.11 (1342.6) 이 저자들은 모두 그들이 본 대로 기억한 대로, 또는 들은 대로, 그리고 바울의 기독교 신학을 나중에 옹호함으로 이 아득히 먼 사건들에 대하여 그들의 개념이 영향을 받은 대로, 예수의 모습을 솔직하게 그렸다. 어설프기는 해도, 이 기록들은 거의 2천 년 동안 유란시아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121:8.12 (1343.1) [인정하는 말씀: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을 다시 적고 그의 행적을 다시 이야기하라는 임무를 수행하느라고 나는 모든 근원의 기록과 행성에 있는 정보를 마음대로 이용하였다. 나의 주요한 동기는 지금 살고 있는 세대의 사람들을 깨우칠 뿐 아니라, 앞날의 모든 세대에게도 도움이 될까 싶은 기록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용하도록 제공된 광대한 정보의 저장으로부터, 나는 이 목적을 이루는 데 가장 적당한 것을 골랐다. 가능한 한, 나는 순전히 인간의 근원으로부터 정보를 얻어냈다. 오로지 그러한 근원이 부족했을 때, 초인간 기록에 의존했다.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대한 생각과 개념을 한 인간의 지성이 쓸 만하게 표현했을 때, 변함없이 인간이 생각하는 형태로 보이는 것을 우대하였다. 주의 일생과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와 참 중요성에 관하여 우리의 개념에 더 잘 맞도록 언어 표현을 조정하려고 애썼지만, 가능한 한, 내 이야기 전체에서 실제의 인간적 개념과 생각 방식을 고수하였다. 인간의 머리 속에서 생겨난 개념들이 모든 다른 인간이 이해하기에 더 쓸 만하고 유익함이 입증될 것을 나는 잘 안다. 인간의 기록에서나 인간의 표현에서 필요한 개념을 찾을 수 없을 때, 다음으로 바로 내가 속한 계급의 지구 생물, 즉 중도자(中道者)들의 기억 자료에 의존했다. 그 2차 근원의 정보가 부적당한 것이 드러났을 때, 서슴지 않고 나는 행성 바깥에서 가져온 정보에 의존했다.

121:8.13 (1343.2) 사도 안드레의 기록에 담긴 기억은 별도로 하고―예수의 시절부터 이 계시, 더 정확히 말하면, 다시 진술하는 이 글을 쓸 때까지, 땅에서 산 2천 명이 넘는 인간으로부터 끌어 모은, 예수의 가르침에 관한 보석 같은 생각과 우수한 개념을 담고 있는 메모, 내가 수집해온 여러 메모로부터 나는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관하여 이 이야기를 준비했다. 인간의 기록과 인간의 개념이 적당한 생각 형태를 제공하지 못할 때에야 허락받은 계시를 이용했다. 계시 위원회는, 순전히 인간의 근원으로부터 필요한 개념의 표현을 찾으려는 노력이 실패했다고 증언할 수 있을 때까지, 인간 바깥 근원의 정보나 표현을 사용하지 말라고 금하였다.

121:8.14 (1343.3) 내 동료 중도자 11명과 함께 일하면서, 기록을 책임진 멜기세덱의 감독 하에서, 효과적으로 배열하려는 내 생각대로, 즉시 표현한 선택에 따라서, 이 이야기를 엮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이용한 대다수의 관념과 효과적인 어떤 표현조차, 이 사업을 시작할 때 아직 살아 있었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중간에 존재한 여러 세대에 걸쳐 땅에서 살았던 여러 민족의 사람들 머리 속에서 기원을 가졌다. 여러 면에서, 나는 독창적인 이야기꾼이라기보다 수집하고 편집하는 자로서 일했다. 나로 하여금 예수의 일생을 가장 효과적으로 묘사할 수 있게 만드는 생각과 개념, 그리고 가장 뛰어나게 유익하고 널리 사람을 숭고하게 만드는 표현을 써서, 견줄 데 없는 주의 가르침을 다시 진술하게 만드는, 될 수 있으면 인간다운 생각과 개념을 나는 서슴지 않고 이용했다. 유란시아 연합 중도자들을 대신하여, 땅에서 사신 예수의 일생을 다시 진술하는 자세한 글에서 다음에 이용된 모든 근원의 기록과 개념에 대하여 우리가 빚진 것을 아주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認定)한다.]

제 122 편 예수의 탄생과 아기 시절

유란시아서

제 122 편

예수의 탄생과 아기 시절

122:0.1 (1344.1)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할 나라로서 팔레스타인을 선택하게 만든 많은 이유, 그리고 특히 이 하나님의 아들이 유란시아에 나타나서 즉시 마주칠 환경으로서 도대체 어째서 요셉과 마리아의 가족이 선택되어야 했는가에 대하여 충분히 설명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122:0.2 (1344.2) 격리된 여러 세계의 상황에 관하여 멜기세덱들이 준비한 특별 보고서를 연구한 뒤에, 가브리엘과 의논하고서 미가엘은 최종으로 자신 수여를 연출할 행성으로서 마침내 유란시아를 선택하였다. 이 결정이 내린 뒤에, 가브리엘은 친히 유란시아를 찾아보았으며, 인간 집단들에 관하여 연구하고 세계와 그 민족들의 영적ㆍ지적 특징, 종족과 지리적 특징을 조사한 결과, 히브리인이 비교적 장점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을 수여 종족으로 선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이 미가엘의 인가를 받고 나서, 가브리엘은―상급의 우주 성격자들로부터 뽑은―12자 가족 위원회를 임명하고 이들을 유란시아로 파견했다. 유대인의 가족 생활을 조사하는 일이 이 위원회에 맡겨졌다. 이 위원회가 수고를 마쳤을 때 가브리엘은 유란시아에 있었고, 미가엘이 계획한 육신화를 위하여 이 위원회가 보건대, 수여 가족으로서 똑같이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장차 결혼할 세 쌍의 사람들을 지명하는 보고를 받았다.

122:0.3 (1344.3) 지명된 세 쌍 가운데, 가브리엘은 친히 요셉과 마리아를 골랐고, 그 뒤에 마리아에게 친히 나타났으며, 마리아에게 그 여자가 수여되는 아이에게 땅에서 어머니가 되도록 선택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알려주었다.

1. 요셉과 마리아

122:1.1 (1344.4) 예수(요수아 벤 요셉[1] [1])의 인간 아버지 요셉은, 가장 특출한 히브리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선조 중 여자 쪽 가지에는 조상 계보에 때때로 비유대 종족 혈통이 많이 더해졌다. 예수의 아버지의 족보는 아브라함의 시절까지, 그리고 이 존경받을 시조(始祖)를 통해서, 더 일찍 있던 족보까지 거슬러 올라갔고, 이것은 수메르인과 놋 족속까지, 그리고 옛날 청인(靑人)의 남쪽 부족들을 통해서, 안돈과 폰타에까지 이어졌다. 다윗과 솔로몬은 요셉의 직계 조상에 속하지 않았고, 요셉의 혈통이 아담까지 바로 거슬러 올라가지도 않았다. 요셉의 직계 조상들은 기계공이었다―건설업자ㆍ목수ㆍ석공ㆍ대장장이였다. 바로 요셉은 목수였고 나중에는 계약 공인이었다. 그의 가족은 고귀한 서민의 혈통, 길게 이어진 뛰어난 혈통에 속했으며 이 혈통은 유란시아에서 종교의 발달과 연관하여 두각을 나타냈던 특별한 사람들이 나타남으로 이따금 강화되었다.

122:1.2 (1345.1) 땅에서 예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는 유란시아의 종족 역사에서 아주 놀라운 여자들을 많이 포함한 선조, 길게 이어진 독특한 선조들의 후손이었다. 마리아는 비록 그 시절과 세대에 상당히 정상 기질을 가진 보통 여자였지만, 그 여자는 아논ㆍ타말ㆍ룻ㆍ밧세바ㆍ안지ㆍ클로아ㆍ이브ㆍ엔타ㆍ라타와 같이 이름난 여자들을 선조로 여겼다. 그 시절에 어느 유대 여인도 마리아보다 더 뛰어난 혈통을 가진 공통된 조상이나, 더 상서로운 시작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혈통을 가지지 않았다. 마리아의 족보의 특징은 요셉의 족보와 마찬가지로, 굳세지만 보통 사람이 주류를 이루었고, 이 족보는 문명이 진전되고 종교가 차츰 발달하는 동안에 이따금 수많은 뛰어난 인물이 나타남으로 변화가 생겼다. 종족 면에서 고려하면, 마리아를 유대 여인으로 보는 것은 도저히 마땅치 않다. 교양과 신앙 면에서 마리아는 유대인이었지만, 유전 자질로 보면 오히려 시리아ㆍ힛ㆍ페니키아ㆍ그리스ㆍ에집트인 혈통이 혼합되었고, 마리아의 종족 유산(遺産)은 요셉보다 더 평범하였다.

122:1.3 (1345.2) 미가엘의 수여가 계획될 무렵에 팔레스타인에서 살던 모든 부부 가운데, 요셉과 마리아는 널리 퍼진 종족 친척들의 가장 이상적 조합이었고, 평균보다 높은 인격 자질을 가졌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땅에서 보통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 미가엘의 계획이었고, 따라서 가브리엘은 바로 요셉과 마리아와 같은 사람들을 수여자의 부모로 선택하였다.

2. 가브리엘이 엘리자벳에게 나타나다

122:2.1 (1345.3) 세례자 요한이 유란시아에서 예수가 일생에 할 일의 첫걸음을 정말로 내디디었다. 요한의 아버지 사가리아는 유대인 사제(司祭) 계급에 속했고, 한편 어머니 엘리자벳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속했던 어느 큰 가족 집단에서 부유한 가지의 한 사람이었다. 사가리아와 엘리자벳은 결혼한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아이가 없었다.

122:2.2 (1345.4) 나중에 마리아에게 나타난 것을 알린 것과 똑같이 가브리엘이 어느 날 정오에 엘리자벳에게 나타난 것은 기원전 8년 6월 말, 요셉과 마리아가 결혼한 지 3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가브리엘은 말했다:

122:2.3 (1345.5) “네 남편 사가리아는 예루살렘에서 제단 앞에 서 있고, 모인 사람들이 한 구원자가 오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가운데, 나 가브리엘은 이 신다운 선생의 선구자가 될 아들을 네가 곧 낳으리라는 것을 알리러 왔노니, 너는 아들을 요한이라 부를지니라. 그는 자라서 주 너의 하나님께 헌신하겠고, 나이가 차면 너의 마음을 기쁘게 하리니, 이는 그가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이킬 것이요, 또한 너희 민족의 혼을 치유하는 자, 온 인류의 영을 해방하는 자가 오심을 선포할 것임이라. 너의 친척 마리아는 약속된 이 아이의 어머니가 될지니, 내가 또한 그 여인에게 나타나리라.”

122:2.4 (1345.6) 이 환상은 엘리자벳을 크게 놀라게 했다. 가브리엘이 떠난 뒤에, 엘리자벳은 머리 속에서 이 체험을 다시 살펴보고, 당당한 그 방문자의 말씀을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나중에 다음 해 2월 초순에 마리아를 찾아볼 때까지, 남편 외에 그 계시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입을 열지 않았다.

122:2.5 (1345.7) 그러나 다섯 달 동안 엘리자벳은 비밀을 남편에게도 감추었다. 가브리엘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자, 사가리아는 대단히 의심하였고, 몇 주 동안 그 체험 전체를 믿지 않았다. 그 여자가 잉태한 것을 더 의심할 수 없었을 때에야, 가브리엘이 자기 아내를 찾아온 것을 마지못해 믿을 뿐이었다. 사가리아는 엘리자벳이 장래에 어머니가 될 것인가 대단히 당황스러워 했지만, 자신이 나이가 지긋이 들었는데도 아내의 인격을 의심하지 않았다. 요한이 태어나기 6주 전쯤이 되어 인상 깊은 꿈을 꾼 결과로 엘리자벳이 운명의 아들, 즉 메시아가 오시는 것을 위하여 길을 예비할 자의 어머니가 되리라는 것을 사가리아는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다.

122:2.6 (1346.1) 가브리엘은 기원전 8년 11월 중순 무렵에, 마리아가 나사렛의 집에서 일하는 동안에 그 여자에게 나타났다. 나중에, 마리아가 의심할 여지 없이 어머니가 되리라는 것을 안 뒤에, 예루살렘에서 6.4킬로미터 서쪽으로, 산지(山地)에 있는 유다 시로 엘리자벳을 찾아보도록 다녀오게 해 달라고 마리아는 요셉을 설득했다. 가브리엘은 앞으로 어머니가 될 두 사람에게 각각 그가 다른 쪽에게 나타났음을 알렸다. 당연히, 그들은 같이 모여서 경험을 비교하고, 자기네 아들들의 가능한 장래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 안타까워했다. 마리아는 먼 사촌 집에서 함께 3주 동안 머물렀다. 가브리엘을 본 환상을 마리아가 굳게 믿게 하려고 엘리자벳은 많이 애썼다. 그래서 그 여자는 집에 돌아와서 운명의 아이를 돌보는 직분에 더 충만히 헌신하게 되었고, 마리아는 곧 무력한 아기, 이 땅에서 보통이며 정상인 아기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122:2.7 (1346.2) 요한은 기원전 7년 3월 25일, 유다 시에서 태어났다. 사가리아와 엘리자벳은, 가브리엘이 약속한 대로 한 아들이 그들에게 왔음을 깨닫고 크게 기뻐했다. 여드렛날에 할례를 받도록 아이를 내놓았을 때, 미리 지시받은 대로, 그를 요한이라고 정식으로 이름 지었다. 이미 사가리아의 한 조카가 나사렛을 향해 떠났는데, 그는 엘리자벳이 아들을 낳았고 그 이름은 요한이 되리라 선언하는 엘리자벳의 소식을 마리아에게 전했다.

122:2.8 (1346.3)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요한이 자라서 영적 지도자요 종교 선생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부모는 그에게 주의 깊게 감명을 주었다. 요한의 마음 속의 토양은 그렇게 넌지시 비치는 씨앗들을 뿌리는 것에 늘 반응했다. 그는 어릴 적에도, 아버지가 일하는 기간에 성전에서 자주 눈에 띄었고, 그가 본 모든 것의 의미에 엄청나게 감명을 받았다.

3.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알리다

122:3.1 (1346.4) 어느 날 저녁 해질 무렵, 요셉이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가브리엘은 낮은 돌 식탁 옆에 있는 마리아에게 나타났는데, 그 여자가 침착을 찾은 뒤에, 가브리엘은 말했다. “나는 내 주이자 네가 사랑하고 기를 자의 지시를 받고 오노라. 너 마리아에게, 내가 반가운 소식을 가져오노니, 네 안에 잉태된 자를 하늘에서 예정하셨고, 때가 되면 네가 한 아들의 어머니가 될 것을 내가 알리노라. 너는 그를 요수아라 부를지니, 그가 땅에서, 사람 가운데서 하늘나라 시대를 열리라. 요셉과 너의 친척 엘리자벳을 제외하고 이 일로 입을 열지 말라. 엘리자벳에게도 내가 나타난 적이 있고, 그 여자도 곧 한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 될지며, 너의 아들이 사람들에게 큰 권능과 깊은 확신을 가지고 선포할 구원의 소식을 위하여 길을 예비하리라. 나의 말을 의심하지 말지니, 마리아야, 이 집이 운명(運命)의 아이가 사람으로 거할 곳으로 선택되었음이니라. 나의 축복이 너에게 머무르고, 최고자들의 권능이 너를 굳세게 하겠으며, 온 땅의 주가 너를 덮으리라.”

122:3.2 (1346.5) 마리아는 아이 가진 것을 확실히 알기까지, 이 특별한 사건들을 남편에게 감히 털어놓기 전에, 여러 주 동안 마음 속에서 이 방문을 몰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에 관하여 모든 것을 들었을 때, 요셉은 마리아를 크게 신뢰하기는 했어도 몹시 난처했고 여러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처음에 요셉은 가브리엘이 찾아온 것에 대하여 의심이 들었다. 다음에, 마리아가 정말로 신의 사자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 모습을 보았다는 것을 거의 납득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그러한 일이 생길 수 있는가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그의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인간의 자식이 신성한 운명을 가진 아이가 될 수 있는가? 요셉은 이 상반되는 개념들을 결코 조화시킬 수 없었다. 기대하던 구원자가 신다운 성질을 가지리라는 것은 도저히 유대인의 개념이 아니었지만, 몇 주 동안 생각한 뒤에, 그와 마리아는 자신들이 메시아의 부모가 되도록 선택되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중대한 결론에 이르고 나서, 마리아는 엘리자벳과 이야기하려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122:3.3 (1347.1) 집으로 돌아온 뒤에, 마리아는 자기 부모, 요아킴과 한나를 찾아보러 갔다. 그 여자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두 남동생과 두 여동생은 언제나 예수가 신성한 임무를 가졌는가 대단히 회의를 품었다. 하지만 물론 이때, 그들은 가브리엘이 찾아온 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나 제 아들이 위대한 선생이 될 운명을 가졌다 생각한다고 마리아는 여동생 살로메에게 털어놓았다.

122:3.4 (1347.2) 예수를 잉태한 다음 날에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선언하였고, 이것은 약속의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그 여자의 체험 전부와 연결되어 일어난 유일한 초자연적 사건이었다.

4. 요셉의 꿈

122:4.1 (1347.3) 대단히 인상 깊은 꿈을 꾸기 전까지, 요셉은 마리아가 특별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리라는 생각을 달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꿈 속에, 한 눈부신 하늘 사자가 나타나서, 다른 말씀 가운데 이렇게 말했다. “요셉아, 지금 높은 곳에서 다스리는 이의 명령을 받고서 내가 나타나노라. 마리아가 낳을 아들, 세상에서 큰 빛이 될 아들에 관하여 너에게 이르라고 나는 지시를 받았노라. 그 아들 안에는 생명이 있고, 그의 일생은 인류의 빛이 될지니라. 그는 먼저 자신의 민족에게 올 터이나, 저희는 좀처럼 그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를 받아들이는 많은 사람에게,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밝히리라.” 이 체험을 겪은 뒤에, 가브리엘이 찾아온 것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세상에서 신의 사자(使者)가 되리라는 약속에 대하여 마리아가 한 이야기를 요셉은 결코 다시 송두리째 의심하지는 않았다.

122:4.2 (1347.4) 이 가운데 어떤 방문에서도, 다윗의 집에 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예수가 “유대인의 구원자,” 아니 오랫동안 고대하던 메시아가 되리라는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암시가 없었다. 예수는 유대인이 기대하던 메시아가 아니었지만, 세상의 구원자였다. 그의 사명은 어느 한 집단이 아니라, 모든 종족과 민족을 위한 사명이었다.

122:4.3 (1347.5) 요셉은 다윗 왕의 직계 혈통이 아니었다. 마리아가 요셉보다 더 많이 다윗의 혈통을 가졌다. 로마의 인구 조사를 위하여 등록하려고 요셉이 다윗의 도시, 베들레헴으로 간 것은 참말이지만, 이는 여섯 세대 전에, 요셉 아버지 쪽의 조상이 고아가 되어서, 어떤 사독이라는 사람의 집에 입양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독은 다윗의 직계 후손이었다. 따라서 요셉은 또한 “다윗의 집” 출신으로 간주되었다.

122:4.4 (1347.6) 구약에서 이른바 메시아 예언의 대부분은, 예수가 땅에서 산 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그에게 맞도록 이용되었다. 몇 세기 동안, 히브리 선지자들은 한 구원자가 올 것이라 예언해 왔다. 그리고 뒤이은 세대들은 이 약속이 다윗의 왕좌에 앉을 새 유대인 통치자, 모세가 사용하던 소문난 기적의 방법으로,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들이 어떤 외국의 지배도 받지 않는 그러한 강국으로 세울 사람을 언급하는 것이라 믿도록 해석하였다. 또 히브리 성서에서 두루 발견되는 많은 상징적 구절이 후일에 예수 일생의 사명에 잘못 적용되었다. 구약(舊約)의 많은 구절이 주가 땅에서 사신 일생의 어떤 사건에 맞는 것같이 보이도록 왜곡되었다. 바로 예수는 다윗의 왕가(王家)와 아무 연관이 없다고 대중 앞에서 한때 부인하였다. “한 젊은 여인이 아들을 낳으리라”는 구절조차 “한 처녀가 아들을 낳으리라”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요셉과 마리아, 이 두 사람의 족보도 이처럼 왜곡되었는데, 이 족보들은 미가엘이 땅에서 일생을 보낸 이후에 만들어졌다. 이 계보 가운데 다수는 주의 선조들 가운데 많은 것을 포함하지만, 대체로 이것들은 진정하지 않으며 사실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예수를 초기에 따르던 사람들은 옛날 예언의 말씀이 모두 그들의 주, 선생의 일생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이게 만들려는 유혹에 너무나 자주 빠졌다.

5. 예수의 지상 부모

122:5.1 (1348.1) 요셉은 태도가 부드러운 사람이요, 극히 양심적이고, 모든 면에서 자기 민족의 종교 관습과 관례를 충실히 지켰다. 그는 말이 적었어도 많이 생각하였다. 유대 민족의 딱한 곤경은 요셉에게 많은 슬픔을 주었다. 젊은이로서, 여덟 형제 자매 사이에서 명랑한 편이었지만, 결혼 생활 초기에 (예수가 어린 시절에) 그는 이따금 영적으로 가볍게 낙심하는 때가 있었다. 이런 성향은, 그가 때 이르게 죽기 전에, 목수 신분에서 번창하는 계약자의 지위로 승진하여 집안의 경제 조건이 향상된 뒤에, 훨씬 나아졌다.

122:5.2 (1348.2) 마리아의 기질은 남편과 아주 반대였다. 그 여자는 보통 명랑했고, 풀이 죽는 일이 아주 드물었으며, 항상 밝은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마리아는 자기의 느낌을 마음대로 자주 표현했고, 요셉이 갑자기 죽기까지 슬픔이 가득 찬 표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 이 충격에서 회복하자마자, 맏아들의 특별한 생애 때문에 생긴 걱정과 의문이 그 여자에게 밀어닥쳤고, 아들의 생애는 마리아의 놀라워하는 눈앞에 매우 빠르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특별한 체험을 통해서 내내, 이상하고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맏아들, 그리고 예수의 살아 있는 형제 자매들과 가진 관계에서 마리아는 차분하고 용감하며 썩 지혜로웠다.

122:5.3 (1348.3) 예수는 아버지로부터 특별히 부드러운 기질, 그리고 인간의 성품에 공감하는 놀라운 이해심을 많이 물려받았다. 위대한 선생으로서 그의 재능, 의분(義憤)을 느끼는 엄청난 능력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 생활 환경에 대하여 어른으로서 예수의 감정적 반응을 보면 한때는 아버지처럼 명상에 잠기고 경건하며, 때때로 슬퍼 보이는 특징이 있었다. 그러나 낙관적이고 결단력 있는 어머니의 성향을 따라서 앞으로 돌진하는 일이 더 흔했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그가 자라서 어른의 생애에서 중대한 걸음을 갑자기 내디디면서, 마리아의 기질이 신다운 아들의 생애를 지배하는 경향이 있었다. 어떤 세부에서 예수는 부모의 특징을 섞어 닮았고, 다른 면에서는 한 사람의 특징과 반대되는 다른 사람의 특징을 나타냈다.

122:5.4 (1348.4) 요셉으로부터 예수는 유대인의 의식(儀式) 풍습에 대하여 엄격한 훈련을 받고 히브리 성서에 관하여 특별한 식견을 확보했다. 마리아로부터 그는 종교 생활의 폭 넓은 관점과 개인의 영적 자유에 관하여 더 개방적인 개념을 얻었다.

122:5.5 (1349.1) 요셉과 마리아의 가족들은 모두 그 시절로 보아서 잘 교육받은 편이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그 시절과 신분으로 보면 평균보다 훨씬 넘는 교육을 받았다. 요셉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마리아는 계획하는 사람이었고, 민첩하게 적응하고, 실제적으로 즉시 실행했다. 요셉은 까만 눈을 하고 갈색 머리였고 마리아는 갈색 눈에 머리털이 아주 거의 금발이었다.

122:5.6 (1349.2) 요셉이 살아 있었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맏아들의 신성한 사명을 굳게 믿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마리아는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했고, 다른 자녀들과 친구와 친척들의 견해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가 잉태된 바로 뒤에 가브리엘이 자기에게 나타났던 기억 때문에, 마리아의 마지막 태도는 언제나 차분해졌다.

122:5.7 (1349.3) 마리아는 직물 짜는 솜씨가 좋았고, 그 시절에 하던 대부분의 가정 일에 보통이 넘게 숙련되었다. 마리아는 살림을 잘하는 여인이었고, 우수한 가정 주부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다 유능한 선생이었고, 아이들이 그 시절의 공부를 반드시 통달하게 하였다.

122:5.8 (1349.4) 젊은이였을 때, 요셉은 마리아의 아버지에게, 그 집에 덧붙인 건물을 짓는 일에 고용되었고, 점심 식사 중에 마리아가 요셉에게 물 한 잔을 가져왔을 때 예수의 부모가 될 운명을 가진 그 두 사람의 구애(求愛)가 정말로 시작되었다.

122:5.9 (1349.5) 요셉이 스물 한 살이 되었을 때, 나사렛 근방에 마리아의 집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서 결혼했다. 이 결혼은 거의 2년에 걸쳐 지속된 정상적 구애 끝에 이루어졌다. 그 뒤에 얼마 안 되어, 그들은 나사렛에 있는 새 집으로 옮겼는데, 요셉은 두 형제의 도움을 받아서 이 집을 지었다. 이 집은 근처의 높은 언덕 아래 가까이에 자리잡았고, 그 언덕에서는 마음에 썩 들게 둘레의 시골이 내려다보였다. 특별히 마련된 이 집에서, 아기를 기다리는 이 젊은 부모는 약속된 아이를 환영하려고 생각했고, 우주의 이 중대한 사건이, 그들이 집을 떠나서 유대 지방의 베들레헴에 있는 동안에 벌어질 것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122:5.10 (1349.6) 요셉의 집안에서 반 이상이 예수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이 되었지만, 마리아 의 집안 사람들 중에는 주가 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거의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다. 요셉은 기대하는 메시아가 영적 인물이라는 개념을 더 지지했지만, 마리아와 그 가족, 특히 마리아의 아버지는 메시아가 현세의 구원자요 정치적 통치자라는 관념을 고수했다. 마리아의 조상들은 당시로 보아서 최근에 있었던 마카비 운동을 눈에 띄게 편들었다.

122:5.11 (1349.7) 요셉은 유대 종교의 동부 관점, 즉 바빌로니아의 관점을 굳게 지켰다. 마리아는 율법과 선지자를 더 자유롭게, 폭 넓게 풀이하는 서부(西部), 즉 헬라파 해석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6. 나사렛에 있던 집

122:6.1 (1349.8) 예수의 집은 나사렛 북부에 있는 높은 언덕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마을의 샘물에서 얼마큼 떨어져 있었는데, 이 샘물은 마을 동쪽 구역에 있었다. 예수의 가족은 그 도시의 교외에서 살았고, 이것은 그로 하여금 나중에 시골 길에서 자주 산보를 즐기고 가까이 있는 고지(高地) 꼭대기까지 나들이를 더욱 쉽게 만들었는데, 이곳은 동쪽으로 타볼 산맥, 그리고 거의 같은 높이의 나인 산을 빼고, 갈릴리 남쪽의 모든 산 가운데 가장 높았다. 그들의 집은 이 산의 남쪽 돌출부에서 조금 남동쪽에, 이 고지의 아래와 나사렛에서 가나 방향으로 가는 길 사이의 중간쯤에 자리를 잡았다. 그 산 오르기를 제쳐놓고, 예수가 가장 좋아하는 산책은 동북 방향으로 산밑 둘레를 구불구불 돌아가는 좁은 산길을 따라서, 세포리스로 가는 길과 만나는 곳까지 가는 것이었다.

122:6.2 (1350.1) 요셉과 마리아의 집은 돌로 지은 한 칸 방이었고 지붕이 평평했는데, 인접한 건물에는 가축이 살았다. 가구(家具)는 낮은 돌 식탁 하나, 토기(土器)와 돌 접시와 돌 단지들, 베틀 하나, 등받침 하나, 조그만 의자 몇 개, 돌 마루에서 자는 데 쓰는 깔개들이었다. 뒤뜰에는, 동물이 사는 인접한 우리 가까이에, 아궁이 그리고 곡식 빻는 맷돌을 덮는 오두막이 있었다. 이 종류의 맷돌을 움직이는 데, 한 사람은 갈고 다른 사람은 알곡을 맷돌에 집어넣고, 이렇게 두 사람이 필요했다. 어린 소년이었을 때 예수는 어머니가 가는 돌을 돌리는 동안, 이 맷돌에 알곡 집어넣는 일을 가끔 했다.

122:6.3 (1350.2) 후일에 식구가 늘어나면서, 이들은 음식을 먹으려고, 크게 만든 돌 식탁 둘레에 모두 웅크리고 앉아서, 공동으로 쓰는 접시나 그릇에서 음식을 덜어먹곤 했다. 겨울에는 저녁 식사 때, 진흙으로 만든 작고 납작한 등불이 식탁을 비추었고, 등불은 올리브 기름으로 채웠다. 마르다가 태어난 뒤에, 요셉은 이 집에, 큰 방 하나를 덧붙여 지었는데, 이 방은 낮에 목수 작업장으로 쓰이고, 밤에는 잠자는 방으로 쓰였다.

7. 베들레헴 여행

122:7.1 (1350.3) 기원전 8년 3월 (요셉과 마리아가 결혼한 달), 케자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모든 주민의 수를 세어야 한다, 징세 개선에 사용될 수 있는 인구(人口) 조사를 해야 한다고 칙령을 내렸다. 유대인들은 언제나 “사람들의 수를 세려는” 시도는 무엇이나 반대하는 큰 편견을 가졌고, 이것은 유대 임금 헤롯의 심각한 집안 문제와 관련하여, 유대 왕국에서 1년 동안 인구 조사의 실시를 연기하게 만들었다.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서, 이 인구 조사는 기원전 8년에 기록되었고, 예외로 헤롯의 팔레스타인 왕국에서는 1년 뒤 기원전 7년에 조사가 실시되었다.

122:7.2 (1350.4) 등록을 위해서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가야 할 필요는 없었다―요셉은 가족을 위하여 등록할 권한이 있었다―하지만 마리아는 모험을 좋아하고 적극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따라가겠다고 고집하였다. 요셉이 집을 떠나 있는 동안에 아이가 태어나지 않을까 걱정하여 그 여자는 혼자 남아 있기를 두려워했고, 다시 생각해 보니, 베들레헴은 유다 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므로, 마리아는 자기 친척 엘리자벳과 즐거운 대화를 나눌 가능성을 내다보았다.

122:7.3 (1350.5) 요셉은 마리아가 따라오는 것을 실질적으로 막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나흘 동안의 여행을 위해서 먹을 것을 챙기고 있을 때, 마리아는 분량을 두 배로 마련하고 여행을 위하여 준비했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떠나기 전에, 요셉은 마리아가 따라가는 것을 좋게 여겼고, 날이 밝자 그들은 즐겁게 나사렛을 떠났다.

122:7.4 (1350.6) 요셉과 마리아는 가난했다. 짐 싣는 짐승이 하나만 있었으므로 아이 때문에 배가 부른 마리아가 식량을 실은 동물에 올라탔고, 요셉은 그 짐승을 이끌면서 걸었다. 요셉의 아버지가 최근에 몸을 쓰지 못하게 되어서 부모를 부양하는 데도 돈을 내야 했기 때문에, 집을 짓고 가구를 장만하는 일이 요셉에게 몹시 힘에 겨웠다. 그리고 나서 이 유대인 부부는 기원전 7년 8월 18일에 아침 일찍, 초라한 집을 뒤로 하고 베들레헴으로 여행 길을 떠났다.

122:7.5 (1351.1) 여행의 첫날 그들은 길보아산 기슭의 언덕 둘레에 이르렀고, 거기서 그들은 요단강 가에 그날 밤 텐트를 치고서 어떤 종류의 아들이 태어날 것인가, 여러 가지로 추측을 해보았다. 요셉은 아들이 영적 선생이 될 것이라는 개념에 집착했고, 마리아는 유대인의 메시아, 히브리 국가의 구원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고수하였다.

122:7.6 (1351.2) 8월 19일 밝은 이른 아침에, 요셉과 마리아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사르타바산 밑에서 요단강 유역을 내려다보면서 점심을 먹었고, 걸음을 계속하여 그날 밤 예리고에 다다랐으며, 거기서 그 도시 교외의 도로에 있는 어느 여인숙에서 멈추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로마 통치의 억압, 헤롯, 인구 조사를 위한 등록, 유대인의 배움과 문화의 중심지인 예루살렘과 알렉산드리아의 비교적 영향에 관하여 실컷 토론한 뒤에, 나사렛 나그네들은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다. 8월 20일 아침 일찍 다시 길을 떠났고 한낮이 되기 전에 예루살렘에 다다랐다. 성전을 찾아보고, 목적지를 향해 계속 걸어서, 오후 중반에 베들레헴에 도착했다.

122:7.7 (1351.3) 여인숙은 사람들로 들끓었고, 따라서 요셉은 먼 친척들한테서 잠잘 곳을 찾았지만, 베들레헴에 있는 방마다 넘치도록 사람들이 가득하였다. 요셉은 여인숙의 안뜰로 돌아오면서, 바위 옆을 깎아서 만든 마구간, 그 여인숙(旅人宿) 바로 밑에 카라반 손님을 위한 마구간이 짐승들을 치우고 숙박하는 손님을 받기 위하여 깨끗이 치워졌다는 통지를 받았다. 당나귀를 안마당에 두고 요셉은 옷가지와 먹을 것을 담은 자루들을 어깨에 메고, 마리아와 함께 돌 계단을 내려가서 밑에 있는 숙박소로 갔다. 그들은 마구간과 말구유 앞 쪽에 곡식 저장소로 쓰였던 곳에 자신들이 와 있음을 알았다. 천막 커튼이 쳐져 있었고, 그들은 그렇게 편안한 잠자리를 가지게 되어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122:7.8 (1351.4) 요셉은 당장 나가서 등록할까 생각해 보았지만, 마리아는 지쳐 있었다. 마리아는 상당히 고통스러워했고, 그에게 옆에 남아 있으라고 부탁했으며, 요셉은 그렇게 했다.

8. 예수가 태어나다

122:8.1 (1351.5) 밤새도록 마리아가 뒤척였기 때문에, 둘 중에 아무도 잠을 많이 자지 못했다. 동이 틀 때가 되어서 산통의 증거가 뚜렷해졌고, 기원전 7년 8월 21일 한낮에, 동료 여인 여행자들의 도움과 친절한 보살핌을 받아서 마리아는 사내아이를 낳았다. 나사렛 예수는 세상에 태어났고, 그러한 가능성에 대비하여 마리아가 가져왔던 옷 속에 둘둘 싸여서, 가까이 있는 말구유에 눕혀졌다.

122:8.2 (1351.6) 그날 이전과 이후로 모든 아기가 세상에 온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약속된 아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여드렛날에, 유대인의 풍습에 따라서, 그는 할례를 받았고, 정식으로 요수아(예수)라는 이름을 받았다.

122:8.3 (1351.7) 예수가 태어난 다음 날, 요셉은 등록을 마쳤다. 이틀 전 밤에 예리고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여인숙에서 묵고 있던 어떤 부유한 친구에게 요셉을 데리고 갔고 그 사람은 나사렛 부부와 기꺼이 숙소를 맞바꾸겠다고 말했다. 그날 오후에 그들은 그 여인숙으로 옮겼고, 요셉의 어느 먼 친척 집에서 묵을 곳을 찾을 때까지 거기서 거의 3주 동안 살았다.

122:8.4 (1351.8) 예수가 태어난 뒤 둘째 날, 마리아는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엘리자벳에게 보냈고, 그들의 모든 일을 사가리아와 함께 이야기하려고 예루살렘까지 요셉을 초대한다는 회답을 받았다. 그 다음 주에 요셉은 사가리아와 의논하려고 예루살렘으로 갔다. 사가리아와 엘리자벳은 다 예수가 정말로 유대인의 구원자 메시아가 되고, 아들 요한이 그 부관들의 우두머리, 즉 오른 팔처럼 믿는 운명의 사람이 될 것이라는 진지한 확신에 홀려 있었다. 그리고 마리아가 바로 이런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가 자라서 온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아서 다윗의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다윗의 도시 베들레헴에 남아 있으라고 요셉을 설득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1년이 넘도록 베들레헴에 남아 있었고, 요셉은 그동안에 목수 직업에서 얼마큼 일했다.

122:8.5 (1352.1) 정오에 예수가 태어날 때, 유란시아의 세라핌들은 그들의 지도자들 밑에 모여서 베들레헴의 말구유를 내려다보며 영광의 찬송을 불렀다. 그러나 이러한 찬미 소리는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우르에서 온 어떤 사제들, 사가리아가 예루살렘에서 보낸 사제들이 도착한 날까지 어떤 목동이나 다른 필사 인간도 베들레헴의 아기에게 경의(敬意)를 표하러 오지 않았다.

122:8.6 (1352.2)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이 사제들은, 자기 나라에서 한 이상한 종교 선생으로부터, “생명의 빛”이 땅에서 한 아기로서, 유대인 사이에 바야흐로 나타나려 한다는 말씀을 그가 꿈 속에서 받았다는 이야기를 얼마 전에 들었다. 그곳으로 이 세 선생은 이 “생명의 빛”을 찾으러 갔다. 예루살렘에서 몇 주 동안 헛되이 찾다가 우르로 막 돌아가려 했는데, 그때 사가리아가 그들을 만났고 예수가 그들이 찾는 분이라 믿는다고 밝히고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냈다. 거기서 그들은 아기를 발견하고, 땅에서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가져온 선물들을 전해 드렸다. 그들이 찾아왔을 때, 아기는 태어난 지 거의 3주가 되었다.

122:8.7 (1352.3) 이 현자들은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안내하는 별을 전혀 구경하지 못했다. 베들레헴의 별에 관한 아름다운 전설은 이렇게 비롯되었다. 예수는 기원전 7년, 8월 21일 정오에 태어났다. 기원전 7년 5월 27일에, 물고기 별자리에서 목성과 토성의 보기 드문 합(合)이[2] [2] 일어났다. 비슷한 합이 같은 해, 9월 29일과 12월 5일에 일어난 것은 천문학에서 놀라운 사실이다. 특별하지만 온통 자연스러운 이 사건들에 근거를 두고, 후세에 좋은 의도를 가진 열심있는 신자들은 베들레헴의 별과 찬미하는 점성가들의 전설, 그들이 말구유까지 별의 안내를 받고, 거기서 갓난아이를 보고 경배했다는 흥미 있는 전설을 만들었다. 동양과 근동의 사람들은 옛날 이야기를 좋아하며, 그들의 종교 지도자와 정치적 영웅들의 생애에 관하여 그러한 아름다운 신화(神話)를 계속 지어내고 있다. 인쇄술이 없이, 대부분의 인간 지식이 입에서 입으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해졌을 때, 신화가 전통이 되고, 전통이 궁극에 사실로 인정되기가 아주 쉬웠다.

9. 성전에서 아기를 보이다

122:9.1 (1352.4) 첫아들은 누구나 주에게 속하며, 이방 국가들 사이에 첫아들을 희생물로 바치기가 관습이었다시피 이 희생 대신에, 공인된 어느 제사장에게 부모가 다섯 세겔을 바쳐서 아들을 되찾는다면 그러한 아들은 살아도 좋다고 모세는 유대인에게 가르쳤다. 또한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 어머니가 정화(淨化)를 받으려고 성전에 와서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또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여자 대신 적절한 희생을 바치게 해야 한다고) 지시하는 모세의 규례가 있었다. 이 두 가지 의식을 같은 때에 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요셉과 마리아는 몸소 가서 사제들에게 예수를 보이고 몸값을 치렀고, 또한 출산 때문에 몸이 더러워진다는 주장대로, 이로부터 마리아의 몸이 의식(儀式)으로 정화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하여 적당한 희생물을 바치러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올라갔다.

122:9.2 (1353.1) 성전의 마당 근처에는 놀라운 두 인물, 곧 가수 시미온과 여자 시인 안나가 항상 서성거리고 있었다. 시미온은 유대 지방 사람이지만, 안나는 갈릴리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은 빈번히 같이 다녔고 사가리아 사제와 가까웠는데, 사가리아가 요한과 예수의 비밀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시미온과 안나는 모두 메시아가 오실 것을 몹시 바라고 있었고, 사가리아를 신뢰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가 유대 민족이 기대하는 구원자라고 믿게 되었다.

122:9.3 (1353.2) 사가리아는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어느 날에 나타날 것을 알았고, 손을 올려 인사함으로 처음 낳은 아이들의 행렬에서 어느 아이가 예수인가 가리켜 주기로 시미온과 안나와 미리 약속해 두었다.

122:9.4 (1353.3) 이 경사(慶事)를 위하여 안나는 전에 시(詩)를 써 두었고, 시미온이 그 시를 노래하기 시작했는데, 요셉과 마리아와 성전 마당에 모여든 사람들이 다 깜짝 놀랐다. 다음이 첫아들을 대속하는 그들의 찬송이었다:

122:9.5 (1353.4)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복이 있나니,

122:9.6 (1353.5) 우리를 찾아와 그의 민족을 위하여 값을 치렀음이라.

122:9.7 (1353.6) 그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122:9.8 (1353.7) 그의 종 다윗의 집에서 길렀도다.

122:9.9 (1353.8)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 같이―

122:9.10 (1353.9) 우리의 적과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이라.

122:9.11 (1353.10) 우리 선조들에게 자비를 보이고, 그의 거룩한 약속을 기억하려고―

122:9.12 (1353.11) 적들의 손에서 구원을 받았으니

122:9.13 (1353.12) 우리가 사는 동안 그 앞에서 거룩하고 올바른 가운데

122:9.14 (1353.13) 두려움 없이 그를 섬김을 허락한다고

122:9.15 (1353.14) 우리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하신 서약.

122:9.16 (1353.15) 옳도다, 너 약속(約束)의 아이를 최고자의 선지자라 부를지니,

122:9.17 (1353.16) 주의 나라를 세우려고 주의 얼굴 앞으로 네가 갈 것임이라.

122:9.18 (1353.17) 저희의 죄를 뉘우치는 가운데,

122:9.19 (1353.18) 그의 백성에게 구원의 지식을 주려 함이라.

122:9.20 (1353.19) 어두움 속에, 죽음의 그림자 속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빛을 비추려고 우리의 발길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려고

122:9.21 (1353.20) 하늘에서부터 날의 근원이 이제 우리를 찾았으니,

122:9.22 (1353.21) 우리 하나님의 부드러운 자비를 기뻐하여라.

122:9.23 (1353.22) 아 주여, 이제 주의 종이 당신의 말씀을 좇아서 평안히 떠나게 하소서.

122:9.24 (1353.23) 모든 민족의 얼굴 앞에 주가 예비하신

122:9.25 (1353.24) 구원을 나의 눈이 보았음이니이다.

122:9.26 (1353.25) 이방인(異邦人)의 베일도 벗기는 빛이여,

122:9.27 (1353.26) 주의 민족 이스라엘의 영광이여.

122:9.28 (1353.27)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길에, 요셉과 마리아는 말이 없었다―당황하고 경외감에 넘쳤다. 늙은 여자 시인 안나의 작별 인사 때문에 마리아는 마음이 많이 흔들렸고, 예수를 유대 민족이 기대하는 메시아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는, 때 이른 이 노력이 요셉은 달갑지 않았다.

10. 헤롯의 행동

122:10.1 (1353.28) 그러나 헤롯이 보낸 감시원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르에서 온 사제들이 베들레헴을 찾아갔다고 그들이 헤롯에게 보고했을 때, 헤롯은 자기 앞에 나타나라고 이 갈대아인들을 호출했다. “유대인의 새 임금”에 관하여 열심히 이 현자들에게 물어 보았지만, 그들은 인구 조사에 등록하기 위하여 남편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내려온 어느 여자에게 그 아기가 태어났다고 설명했는데, 이것은 조금도 흡족하지 않았다. 이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고 헤롯은 그들에게 돈 자루를 주어 보내면서, 그 왕의 나라가 영적인 것이고 현세의 나라가 아니리라 그들이 선언했은즉 자기도 가서 그에게 경배드리도록 그 아이를 찾아야 한다고 지시했다. 그러나 현자(賢者)들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 헤롯은 의심이 들었다. 이런 일을 머리 속에서 이모저모 뜯어보고 있을 때, 그의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성전에서 요즘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상세한 보고를 드렸고, 예수를 대속(代贖)하는 의식에서 시미온이 불렀던 노래의 몇 부분의 사본 하나를 가져왔다. 그러나 정탐꾼들이 요셉과 마리아를 따라가지 못했고 그 부부가 아기를 어디로 데려갔는가 일러 주지 못했을 때, 헤롯은 그들에게 몹시 성을 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요셉과 마리아를 찾으라고 탐색대를 보냈다. 헤롯이 나사렛 가족을 추적한다는 것을 알고서, 사가리아와 엘리자벳은 베들레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기 예수는 요셉의 친척들에게 몰래 옮겨졌다.

122:10.2 (1354.1) 요셉은 일거리를 찾기가 두려웠고, 얼마 안 되는 저축은 눈 녹듯 사라지고 있었다. 성전에서 정화(淨化) 예식이 있을 때에도, 모세가 가난한 자에게 어머니의 정화를 위해 지시한대로, 마리아를 위해서 어린 비둘기 두 마리를 바쳐도 괜찮을 만큼, 요셉은 자신을 충분히 가난하게 여겼다.

122:10.3 (1354.2) 1년이 넘도록 수색한 뒤에, 헤롯의 첩자들이 예수를 찾아내지 못했을 때, 그 아기가 아직도 베들레헴에 숨어 있다고 의심했기 때문에, 베들레헴에서 집집마다 샅샅이 수색하라, 그리고 두 살이 안 된 모든 남자 아기를 죽여야 한다는 명령 문서를 준비했다. 이 방법으로 헤롯은, “유대인의 왕”이 될 이 아이가 꼭 죽도록 처리하기를 바랐다. 이처럼 유대 땅의 베들레헴에 있는 남자 아기 열 여섯 명이 하루에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술수(術數)와 살인은 자신의 직계 가족 안에서도, 헤롯의 궁정에서 보통 있는 일이었다.

122:10.4 (1354.3) 이 아기들의 학살은 기원전 6년 10월 중순경에 일어났고, 그때 예수는 한 살이 조금 넘었다. 그러나 헤롯의 궁정 수행원들 가운데도 다가오는 메시아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에 하나가, 베들레헴의 남자 아기들을 도륙하라는 명령을 듣고 나서 사가리아에게 알렸고 그는 다시 요셉에게 사자를 보냈다. 학살(虐殺)이 있기 전날 밤에,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를 안고 베들레헴을 뒤로 하고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향하여 떠났다. 사람의 눈길을 피하려고, 그들만 예수를 데리고 에집트로 길을 떠났다. 사가리아가 마련해 준 자금으로 알렉산드리아로 갔고, 거기서 요셉은 자기 직업에서 일했으며, 한편 마리아와 예수는 요셉 쪽의 부유한 친척들의 집에서 묵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만 2년이 차도록 머무르고 헤롯이 죽기까지 베들레헴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제 123 편 예수의 어린 시절 초기

유란시아서

제 123 편

예수의 어린 시절 초기

123:0.1 (1355.1) 베들레헴에서 머무른 동안에 생긴 위험과 불안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에 안전히 도착하기까지 마리아는 아기에게 젖을 떼지 않았고, 거기서 이 가족은 정착하여 정상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 그들은 친척들과 함께 살았고, 도착한 뒤에 얼마 안 되어 일자리를 잡아놓자 요셉은 가족을 넉넉히 부양할 수 있었다. 그는 몇 달 동안 목수로서 고용되었고, 그때 한 공공 건물을 짓는 데 고용된 큰 노동자 무리의 우두머리 자리로 승진되었다. 이 새로운 경험 때문에 그들이 나사렛으로 돌아온 뒤에, 그는 청부업자이자 건설업자가 될 생각을 품게 되었다.

123:0.2 (1355.2) 예수가 무력한 아기였던 이 처음 몇 해 동안 내내, 마리아는 아이의 복지를 위태롭게 하거나 땅에서 그의 사명을 어떻게라도 방해할 수도 있는 무슨 일이 닥칠까 두려워 오랫동안, 늘 지키고 있었다. 마리아보다 제 아이에게 더 헌신한 어머니는 없었다. 예수가 어쩌다 머무른 집에는 같은 나이 또래의 아이가 둘이 더 있었고, 가까운 이웃에는 바로 그와 나이가 아주 비슷한 다른 아이가 여섯 명 있어서 적당한 놀이 동무가 되었다. 처음에 마리아는 예수를 곁에 가까이 두고 싶어했다. 마리아는 그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뜰에서 놀게 놓아두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했지만, 요셉은 친척들의 도움을 얻어서, 그러한 방식은 예수가 같은 나이 또래 아이들에게 어떻게 적응하는가 배울 유익한 체험을 얻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지나치게 감싸고 특별히 보호하는 그러한 과정은 그에게 자신을 의식하고 얼마큼 자기 중심인 사람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서, 마침내 마리아는 약속의 아이를 어떤 다른 아이와도 똑같이 자라도록 놓아두는 계획에 찬성했다. 비록 이 결정을 따랐어도, 마리아는 작은 꼬마들이 집 근처나 뜰에서 놀고 있는 동안에 언제나 경계하는 것을 일로 삼았다. 그가 유아기와 어린 시절을 거치던 이 여러 해 동안, 아들의 안전을 위하여 마리아가 가슴 속에 지고 있던 짐은 오직 다정한 어머니가 알 수 있을 것이다.

123:0.3 (1355.3)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들이 머물렀던 두 해 동안 내내 예수는 튼튼했고, 줄곧 정상으로 자랐다. 몇 친구와 친척들을 제쳐놓고, 아무도 예수가 “약속의 아이”라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요셉의 친척들 가운데 한 사람이 멤피스에 사는, 아득한 이크나톤의 후손인 몇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밝혔다. 이들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작은 무리의 지지자들과 함께, 요셉의 친척이 되는 후원자의 궁전 저택에서 모였다. 이 모임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기 얼마 전에 나사렛 가족에게 작별을 알리고 아이에게 경의를 표하려는 것이었다. 모여든 친구들은 이 기회에 히브리 성서의 그리스어 번역판의 완전한 사본(寫本) 한 부를 예수에게 바쳤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가 에집트에 남아 있으라고 멤피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친구들이 청하는 것을 마침내 사양할 때까지, 유대인의 성스러운 기록의 이 사본은 요셉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지지자들은 운명의 아이가 팔레스타인에서 선정된 어떤 곳보다도, 알렉산드리아의 주민으로서 훨씬 더 크게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권유는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을 받은 뒤에 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떠나는 것을 얼마 동안 늦추었다.

123:0.4 (1356.1) 요셉과 마리아는 그들의 친구 에즈레욘이 소유하는, 요파로 가는 배를 타고 마침내 알렉산드리아를 떠났고 기원전 4년 8월말에 그 항구에 도착했다. 그들은 바로 베들레헴으로 갔고, 그들이 거기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나사렛으로 돌아갈 것인가, 친구와 친척들과 의논하느라고 거기서 9월 한 달을 꼬박 보냈다.

123:0.5 (1356.2) 마리아는 다윗의 도시,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자라야 한다는 생각을 결코 완전히 버린 적이 없었다. 요셉은 아들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구원자가 될 것이라 정말로 믿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이 정말로 다윗의 후손이 아니요, 그가 다윗의 자손으로 간주되는 것은 선조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윗 혈통의 집에 입양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리아는 물론, 다윗의 도시가 다윗의 왕좌를 이을 새 후보자가 자랄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장소라고 생각했지만, 요셉은 아켈라우스보다 차라리 그의 동생 헤롯 안티파스에게 운명을 걸었다. 그는 유대 땅의 베들레헴이나 어느 다른 도시에서 아이가 안전할까 크게 두려워했고, 갈릴리를 다스리는 안티파스보다, 아켈라우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의 위험한 정책을 추구할 가능성이 더 많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 모든 이유 외에도, 요셉은 아이를 기르고 교육하기에 더 나은 장소인 갈릴리가 더 좋다고 거리낌없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마리아의 반대를 극복하는 데는 3주가 걸렸다.

123:0.6 (1356.3) 10월 1일이 되어서, 그들이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요셉은 마리아와 모든 친구를 설득했다. 따라서, 기원전 4년 10월초에 베들레헴을 떠나서, 나사렛을 향했고, 리다와 스키토폴리스를 거쳐서 갔다. 그들은 어느 일요일 아침 일찍 떠났고, 마리아와 아이는 새로 산, 짐 싣는 짐승에 올라탔으며, 한편 요셉과 따라오는 친척 남자 다섯 명은 걸어갔다. 친척들은 요셉의 가족만 나사렛까지 여행하라고 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요단강 유역을 지나서 갈릴리로 가기가 두려웠고, 서쪽 통로도 외로운 두 나그네와 나이 어린 아이에게 아주 안전하지는 않았다.

1. 나사렛으로 돌아와서

123:1.1 (1356.4) 길 떠난 지 나흘째에, 그 일행은 목적지에 안전히 이르렀다. 그들은 나사렛 집에 아무런 예고 없이 도착했다. 그 집은 3년이 넘도록, 요셉의 결혼한 형제 중에 한 사람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들을 보고 정말로 놀랐다. 아주 조용히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요셉의 가족도 마리아의 가족도 그들이 전에 알렉산드리아를 떠났다는 것조차 몰랐다. 이튿날 요셉의 형제는 가족을 옮겼고, 마리아는 예수가 태어난 뒤에 처음으로, 자기 집에서 생활을 즐기려고 작은 가족과 함께 정착했다. 한 주도 채 되기 전에, 요셉은 목수로서 일자리를 얻었고,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123:1.2 (1356.5) 나사렛으로 돌아왔을 때 예수는 3살, 2개월쯤 되었다. 그는 이 여행을 모두 매우 잘 견디었고 아주 건강했으며, 자기 마당을 가져서 뛰어다니고 즐길 수 있는 것에 아이다운 기쁨과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같이 놀던 알렉산드리아의 친구들을 몹시 그리워하였다.

123:1.3 (1356.6)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길에, 갈릴리 친구와 친척들 사이에 예수가 약속의 아이라는 말을 퍼뜨리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요셉은 마리아를 설득했다. 그들은 이 문제를 아무에게도 전혀 입 밖에 내지 않도록 말을 삼가기로 찬성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 약속을 아주 충실히 지켰다.

123:1.4 (1357.1) 예수가 네 살 되던 해 전체가 몸이 정상으로 자라고 특별한 정신 활동이 있는 기간이었다. 그동안 그는 야곱이라 이름하는 자기 또래의 이웃 소년과 아주 가까워졌다. 예수와 야곱은 같이 놀 때 언제나 행복했고, 자라서 훌륭한 친구요 충실한 동무가 되었다.

123:1.5 (1357.2) 이 나사렛 가족의 생활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사건은, 기원전 3년 4월 2일 이른 아침에, 둘째 아이 야고보가 태어난 것이다. 예수는 아기 동생이 하나 생긴다는 생각에 기뻤고, 아기의 초기 활동을 그저 지켜보려고 계속 둘레에서 서성거리곤 했다.

123:1.6 (1357.3) 바로 이 해 한여름에, 요셉은 마을 샘물에서 가깝고 카라반이 머무르는 마당 가까운 곳에 조그만 작업장을 지었다. 이 뒤에 그는 일당(日當)으로 하는 목수 일이 거의 없었다. 그는 형제 중 두 사람과 다른 몇 직공을 동료로 두었는데, 이들을 일하러 밖으로 내보내고, 한편 그는 멍에와 쟁기를 만들고 다른 목공 일을 하면서 작업장에 남아 있었다. 또한 가죽 일, 그리고 밧줄과 캔바스 일을 얼마큼 하였다. 예수는 자라면서, 학교에 가지 않을 때, 어머니의 집안 일을 돕고, 지구의 사방에서 온 카라반 안내자와 여행자들의 대화와 잡담을 들으면서, 아버지가 작업장에서 일하는 것을 구경하는 데 시간을 대체로 반반씩 보냈다.

123:1.7 (1357.4) 이 해 7월, 예수가 만 네 살 되기 한 달 전, 카라반 여행자들과 접촉함으로 악성 장(腸) 질환이 온 나사렛에 번졌다. 이 유행병에 예수가 노출되는 위험 때문에 너무 놀라서, 마리아는 두 아이를 싸들고 나사렛에서 몇 킬로미터 남쪽에, 사리드 가까이 메기도 길에 있는, 동생의 시골 집으로 달아났다. 두 달이 넘도록 그들은 나사렛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예수는 처음으로 농가(農家)에서 사는 이 경험을 크게 즐겼다.

2. 다섯 살 되던 해 (기원전 2년)

123:2.1 (1357.5) 나사렛으로 돌아온 뒤 1년하고도 얼마큼 더 지나자, 소년 예수는 개인적이고 진심으로 도덕적인 첫 결정을 내릴 나이에 이르렀다.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신성한 선물, 곧 생각 조절자가 함께 거하려고 왔는데, 이 조절자는 전에 마키벤타 멜기세덱과 함께 봉사한 적이 있었고, 따라서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사는 초인간 존재의 육신화와 관련하여 활동하는 체험을 얻었다. 이 사건은 기원전 2년 2월 11일에 일어났다. 예수는 수많은 다른 아이들보다 신다운 훈계자가 오는 것을 더 의식하지 않았고, 그날 이전과 이후에 사람의 지성에 깃들고 궁극에 그 지성을 영적으로 변화시키고 또한 차츰 발달하는 불멸의 혼(魂)이 영구히 살아남게 하려고 일하는 이 생각 조절자를 마찬가지로 받았다.

123:2.2 (1357.6) 2월의 이날, 미가엘이 아이의 모습으로 온전히 육신화되는 것과 관련하여, 우주 통치자들이 직접 친히 감독하는 일은 끝났다. 그때부터 인간으로서 육신이 된 생애가 펼쳐지는 동안 내내, 예수를 지키는 일은 깃드는 이 조절자, 그리고 관련된 수호 천사들의 책임에 맡겨지도록 정해졌고, 이 일은 행성 상관들의 지시에 따라서 어떤 분명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배치된 중도인(中道人)들이 봉사함으로 때때로 보충되었다.

123:2.3 (1357.7) 이 해 8월에, 예수는 만 다섯 살이 되었고[1] [3], 따라서 우리는 이 해를 그의 생애에서 (달력으로) 다섯 살 되는 해라 부르겠다. 이 해, 기원전 2년, 다섯 살 되는 생일이 되기 달포 전에, 예수는 여동생 미리암이 태어나서 몹시 즐거워했고, 여동생은 7월 11일 밤에 태어났다. 이튿날 저녁에, 예수는 여러 집단의 살아 있는 것들이 따로 된 개체로서 세상에 태어나는 방법에 관하여, 아버지와 함께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예수의 초기 교육 중에서 가장 값진 부분은 생각 깊고 탐구하는 물음에 대답하는 부모로부터 얻었다. 요셉은 소년의 수많은 물음에 대답하려고 공을 들이고 시간을 들여 어김없이 임무를 충실히 행하였다. 다섯 살 때부터 열 살이 될 때까지, 예수는 계속 쏘아대는 하나의 질문 덩어리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물음에 반드시 대답할 수 있지는 않았지만, 항상 그가 묻는 것을 충분히 검토하고 또한 그의 빠른 머리가 제시한 문제에 만족스러운 답을 찾으려는 노력을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도와주었다.

123:2.4 (1358.1) 나사렛으로 돌아온 뒤에, 이들의 집은 분주했고, 요셉은 새 작업장을 짓고 사업을 다시 시작하는 데 특별히 골똘해 있었다. 그가 너무 바빠서, 야고보를 위해서 요람을 만들 시간을 낼 수 없었지만, 이 문제는 미리암이 태어나기 오래 전에 시정되었다. 그래서 미리암은 푹 파묻혀 있을 아주 푹신한 아기 침대가 있었고, 가족은 아기를 보고 감탄하였다. 아이 예수는 이 모든 자연스러운 정상 가정의 체험을 실컷 겪었다. 그는 꼬마 동생과 아기 여동생을 몹시 좋아했고, 동생들을 돌보는 일에 마리아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123:2.5 (1358.2) 그 시절의 이방 세계에는, 갈릴리의 유대인 가정(家庭)보다 더 나은 지적ㆍ도덕적ㆍ종교적 훈련을 줄 수 있는 집이 거의 없었다. 이 유대인들은 아이들을 기르고 교육하는, 체계 있는 순서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어린아이의 생활을 일곱 단계로 나누었다:

123:2.6 (1358.3) 1. 갓난아이, 첫날부터 여드렛날까지.

123:2.7 (1358.4) 2. 젖 먹는 아이.

123:2.8 (1358.5) 3. 젖뗀 아이.

123:2.9 (1358.6) 4. 어머니에게 의지하는 기간, 다섯째 해 끝까지 지속된다.

123:2.10 (1358.7) 5. 아이의 자립 정신의 시작. 아들의 경우, 아버지가 그 교육을 책임진다.

123:2.11 (1358.8) 6. 청년기의 소년과 소녀.

123:2.12 (1358.9) 7. 젊은 남녀.

123:2.13 (1358.10) 만 다섯 살 되는 생일까지, 어머니가 아이를 훈련하는 책임을 지고, 다음에 소년이면, 그때부터 아버지가 계속 그 소년의 교육을 책임지게 하는 것이 갈릴리 유대인의 관습이었다. 그러므로 이 해에, 예수는 갈릴리 유대인 아이의 경력에서 다섯째 단계에 들어갔고, 따라서 기원전 2년 8월 21일에, 더 교육을 받으라고 마리아는 그를 정식으로 요셉에게 넘겼다.

123:2.14 (1358.11) 요셉이 이제 예수의 지적ㆍ종교적 교육에 직접 책임을 지지만, 어머니는 아직도 가정 교육에 관심을 가졌다. 어머니는 집터를 완전히 둘러싸는 뜰의 벽 근처에서 자라는 덩굴과 꽃들을 알아보고 돌보는 일을 그에게 가르쳤다. 어머니는 또한 집의 지붕 위에 (여름에는 침실), 모래 놀이하는 낮은 틀을 여러 개 마련해 주었고, 예수는 그 안에서 지도를 그리고, 아람어ㆍ그리스어, 나중에는 히브리어 글자 쓰기의 기초 연습을 상당히 했다. 왜냐하면 때가 되자 그가 모두 세 나라 언어로 술술 읽고, 쓰고, 말하기를 배웠기 때문이다.

123:2.15 (1358.12) 예수는 신체적으로 거의 완벽한 아이인 듯했고, 정신과 감정 면에서 줄곧 정상으로 진보했다. (달력으로) 다섯 살 되던 이 해의 후반에, 배탈이 조금 났는데, 이것은 처음으로 앓은 작은 병이었다.

123:2.16 (1359.1) 요셉과 마리아는 가끔 맏아들의 앞날에 관하여 이야기했지만, 너희가 거기 있었더라면, 그때 그 자리에서 오직 정상이고 튼튼하고, 구김 없지만 지나치게 따져 묻는 아이가 자라고 있음을 보았을 것이다.

3. 여섯 살 되던 해의 사건들 (기원전 1년)

123:3.1 (1359.2)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서, 예수는 이미 아람어의 갈릴리 방언을 통달했고, 이제 아버지는 그에게 그리스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그리스어를 거의 말하지 못했지만 요셉은 아람어와 그리스어를 모두 거침없이 쓰는 사람이었다. 그리스어 공부에 쓰인 교과서는 히브리 성서(聖書)의 사본―시편을 포함하여, 율법과 선지자의 완역판―이었고, 그들이 에집트를 떠날 때 선물로 받은 책이었다. 온 나사렛에 그리스어 성서의 완전한 사본(寫本)이 꼭 두 권 있었다. 목수의 가족이 이 중에 하나를 소유한 것은 요셉의 집을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장소로 만들었고, 예수가 성장함에 따라서, 그에게 거의 끊임없이 이어진 성실한 학생과 진지한 진리 추구자의 무리를 만나게 해 주었다. 이 해가 가기 전에, 예수는 그 신성한 책을 알렉산드리아의 친구와 친척들로부터 선물로 받았다는 이야기를 만 여섯 살 되는 생일에 듣고 나서, 이 귀중한 사본의 관리를 맡았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쉽사리 그 책을 읽을 수 있었다.

123:3.2 (1359.3) 아직 여섯 살이 채 안 되었을 때, 예수가 어릴 때 처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사건이 일어났다. 그 소년에게, 아버지는―적어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함께―모든 것을 아는 듯 보였다. 그러니까 막 일어난 가벼운 지진(地震)의 원인을 아버지에게 물었을 때, “아이야, 나는 정말 모른다”하고 요셉이 말하는 것을 듣고 질문했던 이 아이가 얼마나 놀랐는가 상상해 보라. 이렇게, 오랜 기간에 걸친 불안한 각성이 시작되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예수는 땅에 있는 그의 부모가 완전히 지혜롭지도 않고, 모든 것을 알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123:3.3 (1359.4) 요셉에게 처음 떠오른 생각은, 하나님이 지진을 일으킨다고 예수에게 일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동안 숙고해보니, 그러한 대답이 더 많이, 더욱 난처한 질문을 자극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도, 자연이나 사회 현상에 관하여 예수가 묻는 말에, 하나님이나 악마의 책임이라는 생각 없는 말로 대답하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예수는 선한 영(靈)과 악한 영이 정신 현상과 영적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그럴듯한 설명이라는 신조를 오랫동안 기꺼이 받아들였고, 이것은 유대 민족 사이에 유행하는 믿음과 조화되었으나, 보이지 않는 그러한 영향이 자연 세계의 물리적 사건을 일으킨다는 생각을 그는 아주 일찍부터 의심하게 되었다.

123:3.4 (1359.5) 예수가 여섯 살이 되기 전, 기원전 1년 초여름에, 사가리아와 엘리자벳과 그 아들 요한이 나사렛 가족을 찾아보러 왔다. 그들의 기억으로 처음인 이 방문 기간에 예수와 요한은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비록 방문객들이 며칠만 머무를 수 있었지만, 부모들은 두 아들의 장래 계획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일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이렇게 그들이 열중하고 있는 동안, 아이들은 집 꼭대기에서, 나무토막들을 가지고 모래 속에서 놀았고,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참으로 사내다운 방식으로 즐겁게 지냈다.

123:3.5 (1359.6) 예루살렘 근처에서 온 요한을 만났기 때문에, 예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비상한 관심을 쏟고, 또 안식일 의식(儀式)과 회당의 설교, 되풀이해서 돌아오는 기념 축제의 의미에 관하여 아주 샅샅이 묻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이 모든 계절의 의미에 관하여 설명해 주었다. 첫째는 한겨울 명절에 불을 밝히는 것이었고, 첫날 밤에 촛불 하나로 시작해서, 뒤이은 밤마다 하나씩 더하며, 여드레 동안 이어진다. 이것은 유다 마카비가 모세의 예배를 부활시킨 뒤에 성전을 봉헌한 것을 기념하였다. 다음에는 푸림의 이른 봄 축제, 즉 에스터와 그 여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축제가 다가왔다. 그리고 나서 엄숙한 유월절이 따랐고, 어른들은 될 수 있으면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지내고 아이들은 집에서 한 주일 내내 아무런 누룩 넣은 빵을 먹지 않을 것을 기억하곤 했다. 그 뒤에 첫 열매의 축제, 즉 추수가 다가왔고, 마지막으로, 가장 엄숙한 것은 새해의 축제, 속죄(贖罪)하는 날이었다. 이 가운데 어떤 경축일과 관습은 예수의 어린 머리에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그는 이것들을 깊이 생각하고, 그리고 나서 초막절의 즐거움에 흠뻑 빠졌는데, 이때는 온 유대 민족이 해마다 휴가로 지내는 철, 바깥에서 나뭇잎에 덮인 초막에서 야영하고 즐거움과 쾌락에 빠지는 때였다.

123:3.6 (1360.1) 이 해 동안에,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가 기도를 드리는 것에 관하여 곤경을 치렀다. 땅에서 아버지인 요셉에게 말하는 것과 아주 비슷하게 예수는 하늘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고집했다. 더 엄숙하고 경건한 방식으로 신과 교통하지 않는 것은 부모에게, 특히 어머니에게 조금 불안한 일이었지만, 그의 태도를 바꾸도록 설득할 수 없었다. 그는 가르침받은 대로 기도를 드리곤 했지만, 다음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와 그저 잠깐 이야기하기”를 고집했다.

123:3.7 (1360.2) 이 해 6월에 요셉은 나사렛에 있는 작업장을 형제들에게 넘기고, 건설업자로서 정식으로 일을 시작했다.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가족의 소득은 3배가 넘게 늘어났다. 요셉이 죽기까지 나사렛 가족은 결코 다시 가난의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가족은 점점 더 불어났고 교육과 여행에 추가로 많은 돈을 썼지만, 언제나 요셉의 증가하는 소득이 늘어나는 지출과 보조를 맞추었다.

123:3.8 (1360.3) 다음 몇 해 동안, 요셉은 나사렛과 그 근처에서 많은 건축 공사를 했을 뿐 아니라, 가나ㆍ(갈릴리의)베들레헴ㆍ막달라ㆍ나인ㆍ세포리스ㆍ가버나움, 그리고 엔도르에서 상당히 일을 했다. 야고보가 어머니의 집안 일을 거들고 더 어린아이들을 보살필 만큼 자랐을 때, 예수는 아버지와 함께 주위의 이 여러 도시와 마을까지, 집을 떠나서 자주 여행했다. 예수는 날카롭게 관찰하는 눈이 있었고, 집을 떠나는 이런 여행으로부터 실용적 지식을 많이 얻었다. 사람, 그리고 사람이 땅에서 사는 방법에 관하여 부지런히 지식을 쌓고 있었다.

123:3.9 (1360.4) 이 해에 예수는 가족의 협동과 가정 규율의 요구 사항에 대하여 싫은 감정과 강한 충동을 조절하는 데 크게 나아졌다. 마리아는 사랑이 가득한 어머니였지만, 상당히 엄격한 훈육자였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요셉은 예수에게 더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이는 소년과 함께 앉아서, 가족 전체의 복지와 평안을 고려하여, 개인의 욕구를 통제하는 진정한 근본적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기 때문이다. 형편을 설명해 주었을 때, 예수는 언제나 기꺼이 부모가 바라는 것과 가족의 규칙을 영리하게 지켰다.

123:3.10 (1360.5) 남는 시간의 상당한 부분이―집안에서 어머니가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을 때―낮에는 꽃과 식물(植物), 밤에는 별을 공부하는 데 쓰였다. 질서가 잘 잡힌 이 나사렛 가정에서 보통 잠잘 시간이 훨씬 지난 뒤에, 그는 드러누워서 경이에 찬 눈으로 별이 보이는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걱정스러운 습성을 나타냈다.

4. 일곱 살 되던 해 (서기 1년)

123:4.1 (1361.1) 이 해는 정말로 예수의 일생에서 사건이 많은 해였다. 1월 초에 갈릴리에 큰 눈보라가 닥쳤다. 60센티미터나 깊이 눈이 내렸는데, 예수가 일생 동안 본 중에 가장 큰 폭설이었고, 1백 년 동안에 나사렛에서 가장 많이 눈이 내린 것 중의 하나였다.

123:4.2 (1361.2) 예수의 시절에 유대인 어린이의 오락 생활은 제한된 편이었다. 아이들이 나이 먹은 사람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고 그런 심각한 짓을 하면서 노는 때가 너무 흔했다. 아이들은 결혼식과 장례식에서 많이 놀았는데, 이런 의식을 빈번히 보았고, 이것들은 아주 볼 만했다. 아이들은 춤추고 노래를 불렀지만, 후일의 아이들이 그렇게 많이 즐기는 것과 같은, 조직된 경기(競技)가 거의 없었다.

123:4.3 (1361.3) 예수는 한 이웃 소년과 함께, 그리고 후일에는 동생 야고보를 데리고, 가족의 목수 작업장 먼 구석에서 놀기를 좋아했고, 거기서 대패 밥과 나무토막을 가지고 아주 재미있게 놀았다. 안식일에 금지된 어떤 종류의 놀이가 무슨 해악이 있는지 언제나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예수는 반드시 부모가 바라는 대로 순응했다. 그는 유머와 놀이를 즐길 능력이 있었는데, 그 시절 그 세대가 처한 환경에서 그런 능력을 표현할 기회가 드물었지만, 그는 열네 살까지 거의 항상 명랑하고 밝았다.

123:4.4 (1361.4) 마리아는 집에 인접해 있는 동물 우리 꼭대기에 비둘기장을 두었고, 비둘기를 팔아서 나오는 이익을 특별한 자선 기금으로서 사용했다. 예수는 십일조(十一租)를 떼어내서 회당장에게 넘긴 뒤에, 그 기금을 관리했다.

123:4.5 (1361.5) 이때까지 예수에게 유일하게 일어난 정말 사고(事故)는 천막 지붕이 있는 침실로 통하는 뒤뜰의 돌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것이다. 이것은 7월에 동쪽에서 예상치 않았던 모래 폭풍이 부는 동안에 일어났다. 휘몰아치는 잔 모래를 실은 뜨거운 바람이 보통 비오는 철에, 특히 3월과 4월에 불었다. 그러한 폭풍이 7월에 닥친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 폭풍이 닥쳤을 때, 예수는 하던 버릇대로 집 꼭대기에서 놀고 있었는데, 이는 건조한 철에 흔히 여기가 익숙한 놀이 방이었기 때문이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모래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아 넘어졌다. 이 사고가 있은 뒤에, 요셉은 계단 양쪽에 난간을 만들었다.

123:4.6 (1361.6) 이 사건을 방지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현세에 보호하는 중도자들, 즉 1차 중도자 한 명과 2차 중도자 한 명이 그 아이를 지키는 데 배치되었는데, 이들이 소홀한 탓으로 돌릴 수 없고 수호 세라핌의 책임이라 할 수도 없었다. 다만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요셉이 엔도르에 가서 없는 동안에 일어난 이 하찮은 사고는 마리아의 마음 속에 아주 큰 근심거리가 되었고, 그래서 마리아는 지혜롭지 못하게, 몇 달 동안 예수를 곁에, 아주 가까이 두려고 했다.

123:4.7 (1361.7) 하늘 존재들은 물질적 사고(事故), 물리적 성질을 가진 보통 일에 멋대로 간섭하지 않는다. 보통 상황에는 오로지 중도인(中道人)들이 큰 운명을 가진 남녀의 몸을 지키기 위하여 물질 조건에 간섭할 수 있고, 특별한 상황에도 이 존재들은 오직 상관의 특정한 명령에 따라서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

123:4.8 (1361.8) 이것은 캐묻기 좋아하고 모험을 좋아하는 이 소년에게 나중에 생겼던 그런 사소한 사건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적극적인 소년의 보통 아동기와 소년기를 그려본다면, 너희는 예수의 소년 시절에 관해서 제법 정확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을 터이고, 그가 부모, 특히 어머니에게 얼마나 많이 걱정을 끼쳤는가 대체로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123:4.9 (1362.1) 나사렛 가족의 넷째 식구 요셉이 서기 1년 3월 16일, 수요일 아침에 태어났다.

5. 나사렛에서 보낸 학교 시절

123:5.1 (1362.2) 이제 예수는 일곱 살이었고, 이 나이에 회당(會堂) 학교에서 유대인 아이들은 정식 교육을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해 8월에 나사렛에서 사건이 많았던 학교 생활에 들어갔다. 이미 이 소년은 두 나라 말, 아람어와 그리스어를 거침없이 읽고 쓰고 말했다. 이제 히브리어를 읽고 쓰고 말하기를 배우는 과제를 익혀야 했다. 그는 앞에 부닥친 새 학교 생활에 참으로 열심이었다.

123:5.2 (1362.3) 3년 동안―열 살이 될 때까지―그는 나사렛 회당의 초등 학교를 다녔다. 이 3년 동안 그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율법서의[2] [4] 기초를 공부했다. 다음 3년 동안, 상급 학교에서 공부했고, 신성한 율법의 상급 가르침을 큰 소리로 되풀이하는 방법으로 외웠다. 열세 살 되던 해에 이 회당 학교를 졸업했고, 회당 책임자들은 교육받은 “계명의 아들”이 된 그를 부모에게 돌려보냈다―그때부터 이스라엘 공동체의 책임 있는 시민이었다. 이 모든 것에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에 참석하는 것이 필요했다. 따라서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반하여 그 해에 처음으로 유월절에 참석했다.

123:5.3 (1362.4) 나사렛에서 생도들은 반원을 지어 마루에 앉았고, 한편 선생, 즉 하잔, 그 회당의 교직자는 그들을 마주 보고 앉았다. 레위기에서 시작하여 다른 율법서들까지 공부하였고, 선지자와 시편(詩篇)의 공부가 뒤따랐다. 나사렛 회당은 히브리어로 된 성서의 완본을 한 권 소유하였다. 열두 살이 되기 전까지 성서밖에 아무것도 공부하지 않았다. 여름 몇 달 동안에는 수업 시간이 크게 짧아졌다.

123:5.4 (1362.5) 예수는 일찍 히브리어를 통달했고, 어쩌다가 아무런 유명한 방문객이 나사렛에 머무르고 있지 않을 때, 젊은이로서, 정식 안식일 예배에 회당에서 모인 신앙심 있는 사람들에게 히브리 성서를 읽어달라고 자주 부탁을 받곤 하였다.

123:5.5 (1362.6) 물론, 이 회당 학교에는 아무런 교과서가 없었다. 가르칠 때, 하잔은 한 마디 말하고, 한편 생도들은 한 목소리로 따라서 되풀이하곤 했다. 기록된 율법서가 가까이 있을 때, 학생들은 큰 소리로 읽고, 늘 되풀이함으로 자기의 과목을 배웠다.

123:5.6 (1362.7) 다음에, 정식 학교 공부 외에,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아버지의 수선(修繕) 작업장을 드나드는 동안에, 예수는 지구의 사방에서 온 사람들의 성품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더 나이 들었을 때, 카라반들이 쉬고 음식을 먹으려고 샘물 가까이 머무르는 동안, 그들과 자유로이 섞였다. 그리스어를 거침없이 말했기 때문에, 그는 대다수의 카라반 여행자와 안내자들과 이야기하는 데 거의 어려움이 없었다.

123:5.7 (1362.8) 나사렛은 카라반이 경유하는 지점이요 여행의 교차로였고, 그 주민은 대체로 이방인이었다. 동시에 그 도시는 유대인의 전통 율법을 자유롭게 해석하는 중심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갈릴리에서는 유대 땅의 관습과 달리, 유대인이 좀더 자유롭게 이방인과 섞였다. 이방인과 접촉한 결과로서 오염될까 하는 두려움에 근거를 둔 여러 사회적 제한이 있었는데, 갈릴리에 있는 모든 도시 중에서, 나사렛의 유대인들은 이런 제한을 가장 자유롭게 해석했다. 이러한 조건으로 인하여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속담이 예루살렘에서 생기게 되었다.

123:5.8 (1363.1) 예수는 주로 집에서 도덕 훈련과 영적 교양을 얻었다. 지적 교육과 신학(神學) 교육의 대강은 하잔으로부터 얻었다. 그러나 참 교육, 생활의 어려운 문제들과 씨름하는 실제 시험에 쓰일 머리와 마음의 준비는, 동료 인간들과 섞임으로 얻었다. 동료 인간들, 젊은이와 늙은이, 유대인과 이방인과 이렇게 가까이 관계를 가진 것이 그에게 인류를 알 기회를 주었다. 예수는 사람들을 속속들이 이해했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사랑했다는 의미에서, 그는 많이 교육받은 것이다.

123:5.9 (1363.2) 회당에서 보낸 여러 해 동안 내내 그는 명석한 학생이었고, 세 나라 말에 정통했기 때문에 크게 유리했다. 예수가 학교의 과정을 마치는 행사가 있었을 때, 나사렛의 하잔은 그가 “소년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보다 “예수의 파고드는 질문으로부터 더 배웠다” 생각한다고 요셉에게 소견을 말했다.

123:5.10 (1363.3) 공부 과정 전체를 통해서, 예수는 회당에서 정식 안식일 설교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큰 영감을 얻었다. 안식일에 나사렛에서 멈추는 저명한 방문객들에게 회당에서 연설하라고 요청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자라면서 그는 유대인 세계 전체에서 많은 위대한 사상가, 그리고 정통 유대인이라고 하기 어려운 숱한 사람이 견해를 펼치는 것을 들었는데, 이것은 나사렛 회당이 히브리 사상(思想)과 문화의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123:5.11 (1363.4) 일곱 살에 학교에 들어갔을 때 (이때 유대인은 의무 교육법을 막 시행했다) 생도들이 자기의 “생일 구절,” 즉 학생 시절을 통해서 내내 그들을 안내할 일종의 황금률을 고르는 것이 관례였고, 이에 대하여 그들은 열세 살 때 졸업식에서 흔히 길게 설명하였다. 예수가 고른 구절은 선지자 이사야에 있었다: “주 하나님의 영이 내게 다가오시니, 주가 내게 기름을 부으셨음이라. 그는 온유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가 된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영적으로 갇힌 자를 풀어 놓으라고 나를 보내셨도다.”

123:5.12 (1363.5) 나사렛은 유대 국가에서 24 사제 중심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갈릴리 사제들은 유대 지방의 서기관과 랍비들보다 더 자유롭게 전통적 율법을 풀이하였다. 나사렛에서 그들은 또한 안식일을 더 자유롭게 지켰다. 따라서 요셉이 안식일 오후에, 산보하려고 예수를 데리고 나가는 것이 관습이었고, 가장 좋아하는 산책 중에 하나는 집 가까이 있는 높은 언덕에 올라가는 것이었는데, 거기서 그들은 온 갈릴리를 둘러볼 수 있었다. 북서쪽으로, 맑은 날에, 바다까지 이어지는 갈멜 산의 긴 줄기를 볼 수 있었고, 여러 번 예수는 아버지가 엘리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엘리야는 길게 이어진 초기 히브리 선지자들 중의 하나였으며, 이 선지자들은 아합을 꾸짖고 바알 사제들의 비리를 폭로했다. 북쪽으로 헤르몬산이 웅장한 광채 속에서 눈 덮인 봉우리를 보이며 지평선을 혼자 차지했고, 위쪽 비탈에서 거의 900미터까지는 만년설로 하얗게 빛났다. 동쪽으로 멀리, 요단강 유역을 알아볼 수 있었고, 그 너머 멀리 모압 지방의 험한 산이 놓여 있었다. 남쪽과 동쪽에도, 해가 대리석 벽을 비추었을 때, 원형(圓形) 극장과 웅장하게 지은 성전들과 함께, 데카폴리스 지역에 그리스ㆍ로마 식의 도시들을 볼 수 있었다. 태양이 지는 것을 보느라고 머뭇거릴 때, 그들은 서쪽으로 먼 지중해에서 항해하는 선박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123:5.13 (1364.1) 예수는 사방에서 카라반들이 나사렛을 천천히 들어가고 나가는 동안에 그들의 행렬을 지켜볼 수 있었고, 남쪽으로 길보아산과 사마리아를 향해 뻗어 있는, 넓고 기름진 에스드랠론 평야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123:5.14 (1364.2) 먼 경치를 보려고 고지까지 오르지 않을 때, 그들은 시골 길을 통해서 거닐었고, 철 따라 다채로운 분위기에 젖어 있는 자연을 공부했다. 따뜻한 가정에서 받은 훈련은 별도로 하고, 예수가 아주 어릴 때 했던 공부는 존중하고 이해하는 태도로 자연을 접촉한 것이었다.

123:5.15 (1364.3) 여덟 살이 되기 전에, 예수는 나사렛의 어머니와 젊은 여자들 모두에게 알려졌고, 이들은 샘물 가에서 그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샘물은 집에서 멀지 않았고, 마을 전체에서 사람들이 만나고 잡담하는 사회 중심의 하나였다. 이 해에, 예수는 가족이 기르는 송아지의 젖을 짜고 다른 동물을 돌보는 일을 배웠다. 이 해와 그 이듬해에, 또한 치즈 만들기와 직물 짜기를 배웠다. 열 살이 되었을 때, 그는 베틀을 작동하는 데 전문가가 되었다. 이 무렵에 예수와 이웃 소년 야곱이, 흐르는 샘물 가까이에서 일하던 도공(陶工)과 좋은 친구가 되었다. 나단의 민첩한 손가락이 도공의 바퀴 위에서 진흙으로 모양 만드는 것을 구경했을 때, 여러 번 그 두 사람은 자라서 도공이 되기로 결심했다. 나단은 소년들을 무척 좋아했고, 장난할 진흙을 주어서, 여러 가지 물건과 동물 형태 만들기를 경쟁하라고 제안하여 그들의 창조적 상상력을 자극하려고 했다.

6. 여덟 살 되던 해 (서기 2년)

123:6.1 (1364.4) 이 해는 학교에서 흥미 있는 해였다. 예수는 비범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부지런한 생도였고, 반에서 상급인 3분의 1에 속했다. 공부를 아주 잘 했기 때문에, 달마다 한 주는 출석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 주간을 보통, 어부(漁夫)인 삼촌과 함께 막달라 가까이 갈릴리 바다의 해안가에서 보내거나, 또는 나사렛에서 8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다른 삼촌(어머니의 형제)의 농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123:6.2 (1364.5) 어머니는 그의 건강과 안전에 대해서 지나치게 근심했어도, 집을 떠나는 이 여행에 차츰 마음을 놓게 되었다. 예수의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은 모두 그를 몹시 좋아했고, 이 해와 바로 뒤 몇 해 동안, 달마다 이렇게 그가 방문하는 동안 그와 친교하는 기회를 잡으려고 그들 사이에서 치열한 경쟁이 따랐다. 삼촌의 농장에서 (아기였던 때부터) 처음으로 한 주 동안 머무른 것은 이 해 1월이었다. 5월에 갈릴리 바다에서 처음으로 한 주 동안의 고기잡이 경험을 가졌다.

123:6.3 (1364.6) 이 무렵에, 예수는 다마스커스에서 온 어느 수학 선생을 만났는데, 새로운 계산 기술을 배우고 나서, 몇 해 동안 수학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수ㆍ거리ㆍ비율에 대하여 날카로운 감각을 개발했다.

123:6.4 (1364.7) 예수는 동생 야고보를 아주 좋아하기 시작했고, 이 해가 저물 때가 되어서 그에게 비로소 알파벳을 가르쳤다.

123:6.5 (1364.8) 이 해에 예수는 낙농품을 하프 수업과 바꾸도록 주선했다. 음악에 관한 것은 무엇이나 특별히 좋아했다. 나중에는 어린 동료들 사이에서 노래 부르기에 관심을 불러일으키려고 무척 애썼다. 열한 살이 되었을 때 솜씨 좋은 하프 연주자가 되었고, 특별한 해석과 유능한 즉흥 연주로 가족과 친구들 접대하기를 아주 즐거워했다.

123:6.6 (1365.1) 예수는 학교에서 부러울 만한 진보를 계속했어도, 부모나 선생들에게는 만사가 순조롭지는 않았다. 그는 과학과 종교, 특히 지리학, 천문학에 관해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질문을 계속하여 많이 퍼부었다. 팔레스타인에 어째서 비 오지 않는 철과 비 오는 철이 있는가 찾아내려고 특별히 애썼다. 여러 번, 그는 나사렛과 요단강 유역에 왜 기온 차이가 크게 나는가 해답을 찾으려고 했다. 그는 다만, 총명하지만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그런 질문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123:6.7 (1365.2) 셋째 동생 시몬이 이 해, 서기 2년 4월 14일, 금요일 저녁에 태어났다.

123:6.8 (1365.3) 2월에, 예루살렘의 랍비 학교에서 선생 나호르가 예수를 지켜보려고 나사렛으로 왔는데, 그는 비슷한 임무를 띠고 예루살렘 가까이, 사가리아의 집에 들린 적이 있었다. 그는 요한의 아버지의 부추김을 받아서 나사렛으로 왔다. 처음에는, 예수의 솔직함, 그리고 관습에 매이지 않은 방법으로 종교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데 얼마큼 충격을 받았지만, 이를 갈릴리가 히브리인의 배움과 문화의 중심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예수를 데려가도록 허락해 달라, 예루살렘에는 그가 유대인 문화의 중심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는 이점을 누릴 수 있다고 요셉과 마리아에게 조언했다. 마리아는 찬성하는 쪽으로 마음이 반은 기울었다. 맏아들이 유대인의 구원자, 메시아가 되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요셉은 망설였다. 예수가 자라서 큰 운명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라고 똑같이 확신했지만, 그 운명이 무엇이 될까 깊은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아들이 땅에서 어떤 위대한 사명을 이룰 것을 결코 정말로 의심하지 않았다. 나호르의 조언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는 예수를 예루살렘에서 머무르게 하려는 제안이 지혜로운가 더욱 묻게 되었다.

123:6.9 (1365.4) 요셉과 마리아가 이렇게 의견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나호르는 그 문제 전체를 예수 앞에 펼쳐놓게 해달라고 하였다. 예수는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고,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이웃인 석공(石工) 야곱과 의논했다. 야곱의 아들은 가장 친한 놀이 친구였다. 이틀이 지난 뒤에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부모와 조언자들 사이에 그러한 의견 차이가 있다, 자기가 그러한 결정에 책임질 능력이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자기가 꼭 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전체 상황을 보아서 마침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와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그 대답에 대해서 완전히 확실치 않지만 “내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집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차라리 느낀다. 그리고 그는 덧붙여 말했다. “오직 내 몸을 보고 머리 쓰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고 도저히 나를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사람들보다, 나를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위하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리이다.” 그들은 모두 놀랐다. 그리고 나호르는 예루살렘으로 갈 길을 재촉하였다. 예수가 집을 떠나는 문제를 다시 고려하기까지 여러 해가 흘렀다.

제 124 편 예수의 어린 시절 후기

유란시아서

제 124 편

예수의 어린 시절 후기

124:0.1 (1366.1)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갈릴리보다 학교 공부를 하는 기회가 더 좋았을지 모르지만, 예수가 최소의 교육을 받고서 자신의 생활 문제를 해결하는 그렇게 멋진 환경을 가지면서, 동시에 문명 세계의 모든 구석에서 온 온갖 종류의 남녀, 그렇게 많은 남녀를 항상 접촉하는 큰 장점을 누릴 수 없었다. 알렉산드리아에 남았더라면, 유대인들이 순전히 유대인 방식으로 그의 교육을 지도했을 것이다. 나사렛에서 받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그는 이방인을 이해하는 데 적절히 준비가 되었고, 히브리 신학의 동부, 즉 바빌로니아파의 견지, 그리고 서부, 즉 헬라파 견지의 장단점에 대하여 더 낫고 치우치지 않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1. 예수가 아홉 살 되던 해 (서기 3년)

124:1.1 (1366.2) 예수가 언제라도 몹시 아팠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어도, 남동생들과 아기 여동생과 함께 이 해에 그는 아이들이 걸리는 하찮은 병을 얼마큼 앓았다.

124:1.2 (1366.3) 학교 공부는 계속되었고 그는 아직도 총애를 받는 학생이었으며, 달마다 한 주 동안 자유로웠다. 아버지와 함께 이웃 여러 도시까지 여행하는 데, 그리고 나사렛 남쪽에 있는 삼촌의 농장에서 머무르는 데, 그리고 막달라에서 출발하여 고기잡이하는 나들이에, 시간을 계속 똑같이 나누어 썼다.

124:1.3 (1366.4) 학교에서 지금까지 닥친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늦겨울에 일어났다. 이때 모든 형상ㆍ그림ㆍ펜화가 우상 숭배의 성질이 있다는 가르침에 대하여 예수는 하잔에게 감히 이견을 내밀었다. 예수는 도공의 진흙으로 아주 다채로운 물건들을 빚는 것 뿐 아니라, 풍경화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런 종류는 무엇이나 유대인의 율법에 엄격히 금지되었지만, 이때까지 이런 활동을 계속하도록 부모가 놓아둘 정도로, 예수는 부모의 반대를 적당히 무마하였다.

124:1.4 (1366.5) 그러나 학교에서는 소동이 다시 일고 있었는데, 이때 공부가 부진한 어느 생도가 교실 마루 바닥에 예수가 목탄으로 선생을 그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명백하게 그 그림이 드러났다. 한 위원회가 요셉을 호출하고서 맏아들이 율법을 무시하는 성향을 막으려고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요구하러 가기 전에 여러 장로가 보았다.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재능 있고 적극적인 아이가 한 일에 대하여 그들에게 불평이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것은 지금까지 받은 비난 가운데 가장 심각하였다. 예수는 바로 뒷문 바깥에, 큰 바위 위에 앉아서, 그의 예술적 노력을 비난하는 말에 얼마 동안 귀를 기울였다. 그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주장 때문에 그들이 아버지를 비난하는 것을 분개하였다. 그래서 씩씩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비난하는 사람들과 겁 없이 맞섰다. 장로들은 혼란에 빠졌다. 더러는 그 사건을 우스운 일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지만, 한편 한두 사람은 그 소년이 신성 모독까지는 아니라도 거룩한 것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요셉은 어찌할 바를 몰랐고 마리아는 분개했지만, 예수는 말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을 했고, 용감히 자기의 관점을 변호했다. 지극한 자제력을 가지고, 논쟁이 되는 모든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 문제에서 아버지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장로 위원회는 말없이 떠났다.

124:1.5 (1367.1) 마리아는 예수가 이 의심스러운 활동 가운데 어느 것도 학교에서 계속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는 조건으로, 예수가 집에서 진흙 빚기를 허락하도록 요셉에게 영향을 미치려 애썼지만, 요셉은 둘째 계명에 관한 랍비의 해석이 우선해야 한다고 판정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그날부터 아버지 집에서 사는 동안, 어떤 것의 모습도 더 이상 그리거나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가 한 일이 잘못이라고 확신하지 않았고, 아주 좋아하는 그러한 오락을 포기하는 것은 어린 시절에 큰 시련 중의 하나였다.

124:1.6 (1367.2) 6월 후반에, 예수는 아버지를 따라서 처음으로 타볼산 꼭대기에 올랐다. 이날은 맑았고, 경치는 훌륭했다. 아홉 살 먹은 이 소년에게는 그가 인도ㆍ아프리카ㆍ로마를 제외하고, 온 세계를 정말로 바라본 듯했다.

124:1.7 (1367.3) 예수의 둘째 여동생 마르다가 9월 13일 목요일 밤에 태어났다. 마르다가 태어나고 3주가 지나서, 집에 한동안 있던 요셉은 집에 덧붙인 건물을 짓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작업장이자 침실이었다. 예수를 위해서 작은 작업 벤치가 만들어졌고,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연장을 소유했다. 여러 해 동안, 남는 시간에, 그는 이 벤치에서 일했고, 멍에를 만드는 데 상당히 솜씨가 좋아졌다.

124:1.8 (1367.4) 이 해 겨울과 이듬해 겨울은 나사렛에서 몇십년 만에 가장 추웠다. 예수는 산에서 눈을 본 적이 있었고, 이전에 몇 번이나 나사렛에 눈이 왔는데, 잠시만 땅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번 겨울까지는 얼음을 본 적이 없었다. 물이 고체ㆍ액체ㆍ증기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물을 끓이는 그릇에서 달아나는 수증기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는데―물리적 세계와 그 구성에 대하여 소년으로 하여금 많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자라는 이 소년 속에 들어 있는 성격자는 여태까지, 방대한 한 우주에 두루 있는 이 모든 것을 실제로 창조하고 조직한 분이었다.

124:1.9 (1367.5) 나사렛의 기후는 혹독하지 않았다. 1월이 가장 추운 달이었고, 평균 기온은 화씨로 약 50도였다. 7월과 8월이 가장 더운 달이었고, 그때 기온은 화씨 75도에서 90도까지 변하곤 했다. 산에서부터 요단강과 사해(死海) 계곡까지, 팔레스타인의 기후는 몹시 추운 날씨로부터 바짝 타는 정도에 이른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유대인은 세계의 변화하는 기후 지대에 어디서나 살도록 준비가 되어 있다.

124:1.10 (1367.6) 가장 더운 여름 몇 달 동안에도, 시원한 바닷바람이 보통 아침 10시부터 저녁 10시쯤까지 서쪽으로부터 불었다. 그러나 이따금 끔찍하게 뜨거운 바람이 동쪽 사막으로부터, 온 팔레스타인에 불어오곤 했다. 이 뜨거운 강풍은 보통 2월과 3월, 비 오는 철이 끝날 무렵에 닥쳤다. 그 시절에는 11월부터 4월까지 비는 시원한 소나기로 내렸지만, 비가 꾸준히 오지는 않았다. 팔레스타인에는 단지 두 계절, 여름과 겨울, 즉 건조한 철과 비 오는 철밖에 없었다. 1월에 꽃이 피기 시작했고, 4월말이 되어서는 온 땅이 하나의 광대한 꽃밭이었다.

124:1.11 (1367.7) 이 해 5월에, 예수는 삼촌의 농장에서, 처음으로 곡식 거두는 일을 도왔다. 열세 살이 되기 전에, 그는 대장장이 일 외에는 나사렛 근방에서 남녀들이 일하는 거의 모든 직종에 대해서 그럭저럭 무엇인가 발견했고, 나이가 더 들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대장간에서 몇 달 지냈다.

124:1.12 (1368.1) 일과 카라반의 여행이 뜸할 때, 예수는 아버지와 함께 근처의 가나ㆍ엔도르ㆍ나인으로 구경 삼아 또는 일 때문에 여러 번 여행했다. 소년일 때도 세포리스를 자주 찾아보았는데 이곳은 나사렛으로부터 북서쪽으로 겨우 4.8킬로미터 조금 넘는 거리에 있었고, 기원전 4년부터 서기 약 25년까지 갈릴리의 서울이요 헤롯 안티파스의 거처 중의 하나였다.

124:1.13 (1368.2) 예수는 계속하여 육체와 지능 면에서 자라고 사회적ㆍ영적으로 성장하였다. 집을 떠난 여행은 자신의 가족을 더 낫게 더 큰 아량을 가지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이때가 되자 부모조차 그를 가르칠 뿐 아니라 그에게서 배우기 시작했다. 예수는 소년기에도, 독창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요 솜씨 좋은 선생이었다. 그는 이른바 “구전(口傳) 율법”과 항상 견해가 달랐지만, 언제나 집안 풍습에 적응하려고 애썼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꽤 잘 어울렸으나 그들의 머리가 더디게 돌아가는 것에 가끔 실망했다. 그는 열 살이 되기 전에―신체적ㆍ지적ㆍ종교적으로―어른이 될 인품을 장려하는 모임을 만든 일곱 소년의 무리에서 지도자가 되었다. 이 소년들 가운데서 예수는 여러 가지 새로운 놀이와 신체적으로 오락을 즐기는 개량된 방법을 소개하는 데 성공했다.

2. 열 살 되던 해 (서기 4년)

124:2.1 (1368.3) 7월 5일, 그달의 첫 안식일에 아버지와 함께 시골 길을 걷는 동안에, 예수는 일생의 사명의 특별한 성질을 자각하는 것을 가리키는 느낌과 생각을 처음으로 표현했다. 요셉은 아들의 중대한 말을 주의 깊게 들었지만,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 정보도 자진해서 주지 않았다. 이튿날 예수는 어머니와 함께, 비슷하지만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리아도 마찬가지로 소년이 꺼내는 말을 들었지만, 아무 정보도 자청해서 주지 않았다. 그의 인격의 성품과 땅에서 이루어야 할 사명의 성질에 관하여 자신의 의식 안에서 커지는 이 계시(啓示)에 대하여, 부모에게 예수가 다시 말을 꺼내기까지는 거의 두 해가 흘렀다.

124:2.2 (1368.4) 8월에 그는 회당의 상급 학교에 들어갔다. 학교에서 끈질기게 묻는 질문 때문에 항상 말썽을 일으키고 있었다. 갈수록 더 그는 온 나사렛을 얼마큼 시끄럽게 만들었다. 부모는 소란을 일으키는 이 여러 질문을 그만두라고 하기 싫었고, 주임 교사는 소년이 보인 호기심과 통찰력과 지식 욕구에 크게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24:2.3 (1368.5) 예수의 놀이 친구들은 그의 행동에서 아무런 초자연적인 것을 구경하지 못했고, 대부분의 방법으로 그는 아주 그들과 비슷하였다. 공부에 대한 관심은 평균이 넘었지만, 온통 유별나지는 않았다. 반에서 다른 학생들보다 더 많이 질문을 던지기는 하였다.

124:2.4 (1368.6) 아마도 가장 특별하고 눈에 띄는 특성은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고 싸우기 싫어하는 것이었다. 나이로 보아서 아주 잘 발육된 소년이었기 때문에, 불공평한 처사나 인신 공격을 받을 때에도 자신을 방어하기 싫어한 것이 놀이 친구들에게 이상하게 보였다. 우연하게도, 이 특성 때문에 크게 시달리지는 않았는데, 이는 그가 한 살 더 먹은 이웃 소년 야곱과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요셉의 한 사업 동료인 석공(石工)의 아들이었다. 야곱은 예수를 크게 찬미하는 사람이었고, 예수가 몸으로 싸우기 싫어하는 것 때문에 아무도 예수를 함부로 다루지 않도록 처리하는 것을 자기의 일로 삼았다. 여러 번, 더 나이 많고 촌스러운 소년들이 예수의 소문난 온순함을 믿고 그를 공격했지만, 이들은 그의 보호자로 자처하고 늘 준비된 경호원, 석공의 아들 야곱의 손에 반드시 신속하고 확실한 징벌을 받았다.

124:2.5 (1369.1) 예수는 그 시절과 세대의 드높은 이상을 대표하는 나사렛 소년들에게 널리 인정받는 지도자였다. 정말로 그는 어린 친구들한테서 사랑을 받았는데, 이는 그가 공평했을 뿐 아니라, 애정이 있음을 가리키고 분별 있는 동정심에 가까운, 보기 드물고 이해하는 태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124:2.6 (1369.2) 이 해에 비로소 그는 더 나이 먹은 사람들과 사귀기를 뚜렷이 좋아하는 성향을 보였다. 자기보다 윗 사람들과 문화ㆍ교육ㆍ사회ㆍ경제ㆍ정치ㆍ종교적인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좋아했고, 그의 깊은 논리와 날카로운 관찰력이 어른 친구들의 마음을 끌었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그와 함께 이야기 나누기를 무척 좋아하였다. 집을 부양할 책임을 지게 될 때까지, 예수는 자기보다 나이를 더 먹고 지식이 많은 사람들을 더 좋아하는 성향을 보였는데, 부모는 이런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또래나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과 사귀도록 그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항상 애썼다.

124:2.7 (1369.3) 이 해에 늦게, 갈릴리 바다에서 삼촌과 함께 그는 두 달 동안 고기잡이 경험을 가졌는데, 성과가 아주 좋았다. 그는 어른이 되기 전에, 솜씨 좋은 어부가 되었다.

124:2.8 (1369.4) 신체의 발육은 계속되었고, 그는 학교에서 상급에 속하고 특혜를 받는 생도였다. 그는 집안 아이들 중에서 바로 밑 동생보다 3살 반 더 나이 먹은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어린 남동생ㆍ여동생들과 함께 썩 잘 어울렸다. 예수는 나사렛에서 평판이 좋았고, 다만 좀 우둔한 어떤 아이들의 부모는 예수가 너무 건방지며, 적절히 겸손하지 않고 소년답게 자제함이 없다고 자주 말했다. 예수는 어린 친구들의 놀이 활동을 더욱 심각하고 생각 깊은 방향으로 이끌려는 경향을 차츰 나타냈다. 그는 타고난 선생이었고 놀이에 열중하고 있다고 생각된 때조차, 다만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4:2.9 (1369.5) 요셉은 일찍부터 예수에게 생계를 잇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공업ㆍ상업보다 농업의 장점을 설명했다. 갈릴리는 유대 지방보다도 더 아름답고 번영하는 지역이었고, 거기서 생활하는 데는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 사는 비용의 겨우 4분의 1쯤 들었다. 갈릴리는 농사 짓는 마을과 번성하는 산업 도시들이 있는 지방이었고, 인구가 5천이 넘는 마을이 2백이 넘고, 1만 5천이 넘는 도시가 서른이나 있었다.

124:2.10 (1369.6) 갈릴리 호수에 있는 고기잡이 산업을 살펴보려고 아버지와 처음 여행 갔을 때, 예수는 어부가 되려고 거의 마음먹었다. 그러나 나중에 아버지의 직업과 가까이 한 것이 그에게 목수(木手)가 되도록 영향을 미쳤고, 그 뒤에 여러 가지 영향이 섞여, 마지막에는 새로운 체제의 종교 선생이 되는 선택으로 이끌었다.

3. 열한 살 되던 해 (서기 5년)

124:3.1 (1369.7) 이 한 해 동안 내내,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집을 떠나 여행을 계속했지만, 또한 삼촌의 농장을 자주 찾아보았고, 이따금 막달라로 가서 그 도시 근처에 근거지를 둔 삼촌과 함께 고기잡이에 들어갔다.

124:3.2 (1369.8)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에게 어떤 특별한 편애를 보이거나, 아니면 그가 약속의 아이, 운명의 아들이라는 것을 안다고 털어놓고 싶은 유혹을 가끔 받았다. 그러나 부모는 이 모든 문제에서 특별히 지혜롭고 현명했다. 어떤 방법으로 그에게 어떤 편애를 조금이라도 보인 것이 몇 번 되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소년은 모든 그러한 특별 배려를 재빨리 물리쳤다.

124:3.3 (1370.1) 예수는 카라반에게 소모품을 파는 상점에서 어지간히 시간을 보냈고, 세상의 모든 지방에서 온 여행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눔으로, 그의 나이로 보아서 놀랍게, 세계의 동향에 관하여 정보를 쌓았다. 이 해는 그가 자유롭게 놀고 어린이로서 즐거움을 많이 누린 마지막 해였다. 이때부터 계속, 이 소년의 생활에서 어려움과 책임이 빠르게 늘어났다.

124:3.4 (1370.2) 서기 5년, 6월 24일, 수요일 저녁에 유다가 태어났다. 이 일곱째 아이의 출생에 관련된 병이 뒤따랐다. 마리아가 몇 주 동안 몹시 아파서, 요셉이 집에 남아 있었다. 예수는 아버지의 심부름과 어머니의 심각한 병 때문에 생긴 여러 가지 할 일로 아주 바빴다. 이 소년은 다시 어린 시절, 어린이의 위치로 돌아갈 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어머니가 아플 때부터―그가 열한 살이 막 되기 전에―그는 정상으로 마땅히 그의 어깨에 지워지는 것보다 만 1년이나 2년 앞서 맏아들의 책임을 지고, 이 모든 일을 해낼 수밖에 없었다.

124:3.5 (1370.3) 하잔은 예수가 히브리 성서를 통달하도록 돕느라고 그와 함께 한 주에 하루 저녁을 보냈다. 그는 싹이 보이는 생도(生徒)의 진보에 크게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예수를 여러 면에서 기꺼이 도와주었다. 이 유대인 훈장은 성장하는 이 젊은이의 지성에 큰 영향력을 미쳤지만, 학식 있는 랍비들 밑에서 공부를 계속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전망에 관하여 온갖 제안을 내밀어도, 어째서 예수가 그토록 흥미를 보이지 않았는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124:3.6 (1370.4) 5월 중순경에, 소년은 스키토폴리스까지 아버지가 출장갈 때 따라갔는데, 이곳은 데카폴리스 지방의 주요한 그리스 풍의 도시이며, 또한 베스쉬안 지역의 고대 히브리인 도시였다. 가는 길에 요셉은 사울 왕과 블레셋인의 오랜 역사의 상당한 부분, 그리고 그 뒤에 이스라엘의 파란 많은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일러 주었다. 예수는 이른바 이 이방인 도시의 깨끗한 모습, 가지런한 질서 있는 배열에 엄청나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노천 극장을 보고 감탄하고, “이교도” 신들의 예배에 바쳐진 아름다운 대리석 성전을 찬미했다. 요셉은 그 소년의 열심에 상당히 마음이 흔들렸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성전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찬양하여 이 좋은 인상을 지우려고 애썼다. 예수는 가끔 나사렛의 언덕에서 이 웅장한 그리스 풍의 도시를 호기심 있게 바라보았고, 대규모의 공공(公共) 사업과 화려한 여러 건물에 관하여 여러 번 물은 적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이러한 물음에 대답을 피하려 했다. 이제 그들은 이 이방인 도시의 아름다움과 얼굴을 마주했고, 요셉은 예수가 묻는 말에 점잖게 못 들은 척할 수 없었다.

124:3.7 (1370.5) 마침, 이때 데카폴리스 지역의 그리스 풍의 도시들 사이에 해마다 있는 경기, 그리고 신체의 우수함을 보이는 대중 전시가 스키토폴리스의 원형 경기장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예수는 아버지에게 경기를 보러 데려가 달라고 졸랐고, 너무 졸라서 요셉은 부탁을 물리치기를 망설였다. 소년은 여러 경기를 보고 흥분했고, 사람들이 신체의 발육과 운동 기술을 전시하는 정신에 아주 흠뻑 젖었다. 예수가 이 허영에 찬 “이방인”의 전시를 보는 동안, 요셉은 아들이 열심에 빠진 것을 지켜보고 말할 수 없이 충격을 받았다. 경기가 끝난 뒤에, 예수가 이 여러 경기가 좋다고 인정하면서, 야외에서 건전한 신체 활동을 하여 이렇게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면 나사렛의 젊은이들에게 좋을 것이라고 제안하는 것을 들었을 때, 요셉은 일생 최대의 충격을 받았다. 요셉은 그러한 관습이 어떻게 나쁜가 예수와 함께 오랫동안 열심히 이야기했지만, 소년이 납득하지 않았음을 잘 알았다.

124:3.8 (1371.1) 아버지가 자기에게 성난 것을 예수가 꼭 한 번 본 것은 그날 밤 여인숙에서 그들의 방에서 토론하던 중에, 소년이 유대인 사상(思想)의 경향을 아주 까마득하게 잊고서 집으로 돌아가 나사렛에서 원형 경기장을 짓기 위해 일하자고 제안했을 때였다. 맏아들이 유대인답지 않게 그런 감정을 표시하는 것을 들었을 때, 요셉은 평상시의 차분함을 잊어버리고, 예수의 어깨를 움켜잡고, 성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아들아, 네가 살아 있는 동안, 그런 나쁜 생각을 입 밖에 내는 것을 다시는 듣고 싶지 않다.” 예수는 아버지의 감정 표현에 깜짝 놀랐다. 결코 전에는 아버지가 분개하여 몸소 따끔하게 야단치는 것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 단지 이렇게 대답했다, “좋아요 아버지, 그렇게 하지요.” 아버지가 살아 계신 동안, 소년은 그리스 풍의 경기와 기타 체육 활동을 비치는 말을 조금도 다시 꺼내지 않았다.

124:3.9 (1371.2) 나중에,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그리스 풍의 원형 경기장을 보았고, 유대인의 관점에서 그런 것들이 얼마나 싫은 것인가 알았다. 그런데도, 일생을 통해서 내내, 그는 자신의 계획에, 그리고 유대인의 풍습이 허락하는 한, 열두 사도를 위하여 후일의 정규 활동 계획에, 건전한 오락 관념을 소개하려고 애썼다.

124:3.10 (1371.3) 열한 살 되던 이 해가 저물 때, 예수는 활기 있고 잘 성장하고 적당히 익살이 있고 썩 명랑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이 해부터 계속하여, 깊이 생각에 잠기고 골똘히 생각하는 별다른 시간을 보내는 버릇에 점점 더 빠져 들어갔다. 어떻게 가족에 대하여 책임을 수행하고, 동시에 세상에 사명(使命)을 다하라는 요청에 복종할 것인가 많은 생각에 빠졌다. 그는 사명이 유대 민족의 지위를 향상하는 데 한정된 것이 아님을 이미 깨달았다.

4. 열두 살 되던 해 (서기 6년)

124:4.1 (1371.4) 이 해는 예수의 일생에서 사건이 많은 해였다. 그는 학교 공부에 계속하여 진전이 있었고, 자연을 연구하는 데 지칠 줄 몰랐으며, 한편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 생계를 이어가는가 더욱 공부하였다. 그는 집에 있는 목수 작업장에서 정규적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자신이 번 돈을 관리하라고 허락을 받았는데, 이것은 유대인 가정에서 아주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 해에 그는 또한 그런 일을 가족에게 비밀로 하는 지혜를 배웠다. 마을에서 어떤 방법으로 자기가 문제를 일으켰는가 의식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혹시 동료들과 다르게 여기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점점 더 신중하게 감추었다.

124:4.2 (1371.5) 이 해 내내 그의 사명의 성질이 무엇인가 실제로 의심하지는 않더라도, 확실치 않게 느끼는 기간이 여러 번 있었다.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그의 인간 지성은 자신이 두 성품을 가졌다는 현실을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그가 꼭 하나의 인격을 가졌다는 사실이, 바로 그 인격과 결합된 성품의 구성 요소들이 두 가지 기원을 가진 것을 그가 인식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124:4.3 (1371.6) 이때부터 계속, 그는 동생들과 어울리는 데 더 나아졌다. 갈수록 더 요령 있게 행동하였고, 늘 이해심을 가지고 그들의 복지와 행복을 배려했으며, 대중 봉사를 시작할 때까지 그들과 좋은 관계를 가졌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야고보와 미리암과 사이가 좋았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두 동생, 아모스와 룻과 사이가 아주 뛰어나게 좋았다. 마르다하고는 언제나 사이가 썩 좋았다. 그가 집에서 어려움을 겪은 것은 대체로, 요셉과 유다, 특히 유다와 마찰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났다.

124:4.4 (1372.1) 전례 없이 이렇게 신과 합쳐진 인간을 기르는 일을 떠맡은 것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벅찬 체험이었고, 그들은 부모의 책임을 아주 충실하고 성공적으로 이행한 큰 공로를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예수의 부모는 이 맏아들 안에 초인간적인 무엇이 거함을 갈수록 더 깨달았지만, 이 약속의 아들이 정말로, 진실로, 사물과 존재들이 가득한 이 지역 우주를 실제로 창조한 분이라는 것을 결코 털끝만큼도 꿈꾸지 못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 예수가 정말로, 필사의 몸으로 육신화한 우주 창조자인 것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죽었다.

124:4.5 (1372.2) 이 해에 예수는 여느 때보다 더 음악에 마음을 쏟았고, 동생들을 위해서 집에서 공부를 줄곧 가르쳤다. 자기의 사명의 성질에 관하여 요셉과 마리아의 견해가 다른 것을 소년이 날카롭게 의식하게 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는 부모의 견해 차이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고, 그가 깊이 잠들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가끔 부모가 의논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갈수록 더 아버지의 관점으로 기울었다. 그래서 그의 생애와 상관 되는 문제에서 어머니는 차츰 아들이 자기의 지도를 따르지 않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상하게 되도록 정해져 있었다. 해가 지남에 따라서, 이렇게 견해의 차이가 커졌다. 점점 더 마리아는 예수의 사명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고, 가장 아끼는 아들이 자기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여 이 착한 어머니는 갈수록 더 마음을 상했다.

124:4.6 (1372.3) 요셉은 예수의 사명이 영적 성질을 가졌다는 것을 차츰 더 믿었다. 다른 더 중요한 이유가 아니었다면, 땅에서 예수의 자신 수여에 대한 요셉의 관점이 실현되는 것을 그가 살아서 볼 수 없었던 것은 유감스러운 듯하다.

124:4.7 (1372.4) 학교에서 마지막 해를 보내는 동안에, 그가 12살이 되었을 때 집으로 들어가거나 나갈 때마다 문설주에 못박힌 양피지 조각을 만지고, 다음에 그 양피지를 만진 손가락에 입맞춤하는 유대인의 관습에 대하여 예수는 아버지에게 항의하였다. 이 절차의 일부로서, “우리가 들어가고 나감을 지금부터, 아니 영원까지도 주가 보호하실지라” 말하는 것이 풍습이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형상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리지 말라는 이유에 대해서 거듭하여 가르치고, 그러한 작품들이 우상(偶像) 숭배의 목적으로 쓰일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들이 형상과 그림을 금지한 까닭을 예수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는 높은 일관성 개념을 가졌고, 따라서 문설주의 양피지에 이렇게 경의를 표하는 버릇이 본질적으로 우상 숭배의 성질이 있다고 아버지에게 지적했다. 예수가 이렇게 아버지한테 지적한 뒤에, 요셉은 그 양피지를 없애버렸다.

124:4.8 (1372.5) 시간이 지나자, 예수는 가정 기도(祈禱)와 기타 관례와 같은 그들의 종교 형식의 습관을 고치느라고 많이 애썼다. 나사렛에서는 그러한 일을 많이 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이름난 나사렛 선생 요세의 예를 보다시피, 그 회당이 자유로운 랍비 학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124:4.9 (1372.6) 이 해와 다음 두 해 동안 내내, 종교 관습과 사회 예절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부모의 고정된 관념에 적응시키려고 꾸준히 노력한 결과로서, 예수는 크게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자신의 확신에 충실하려는 욕구, 그리고 부모에게 충실히 복종하라는 양심의 훈계, 이 둘의 갈등으로 마음이 산란하였다. 제일 큰 갈등은 그의 어린 생각에 가장 중요했던 두 가지 큰 계명(誡命) 사이에서 생겼다. 하나는 “진리와 올바름에 대한 너의 최상의 확신이 내리는 명령에 충실하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네 부모를 존경할지니, 저희가 너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길렀음이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개인적 확신, 그리고 가족에 대한 의무, 이 두 가지에 충실하면서 하루하루 필요한 대로 적응하는 책임을 그는 결코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개인의 확신과 가족에 대한 의무, 이 두 가지를 조화되게 섞어서, 충성ㆍ공정ㆍ관용ㆍ사랑에 기초를 둔 개념, 훌륭한 집단 결속의 개념으로 만드는 만족감을 얻었다.

5. 열세 살 되던 해 (서기 7년)

124:5.1 (1373.1) 이 해에 나사렛 소년은 어린 시절을 지나서 청년기의 시초로 들어갔다. 목소리가 바뀌기 시작했고, 그 외에도 정신과 육체의 모습이 곧 어른이 되어간다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124:5.2 (1373.2) 서기 7년, 1월 9일, 일요일 밤에, 아기 남동생 아모스가 태어났다. 유다는 채 두 살이 되지 않았고, 아기 여동생 룻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다음 해에 사고(事故)로 돌아가셨을 때, 예수는 어린아이들이 있는 상당히 큰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24:5.3 (1373.3) 땅에서 사람을 깨우치고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운명을 가진 것을 예수가 인간으로서 확신하게 된 것은 2월 중순 무렵이었다. 원대한 계획과 함께 중대한 결정이 이 소년의 머리 속에서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그는 겉으로 보아서 나사렛의 보통 유대인 소년이었다. 이 모든 것이 이제 청년기에 접어든 목수 아들의 생각과 행동에서 비로소 펼쳐지자, 온 네바돈의 지적 생명이 황홀하고 놀란 가운데 계속 바라보았다.

124:5.4 (1373.4) 서기 7년, 3월 20일, 그 주 첫 날, 나사렛 회당에 부속된 지역 학교에서 예수는 훈련 과정을 졸업했다. 이것은 큰 꿈을 가진 어떤 유대인 가족에서도 생활에 중요한 날, 첫아들이 “계명의 아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의 되찾은 첫아들, “최고자의 아이요” 온 땅의 주의 종으로 선포되는 날이었다.

124:5.5 (1373.5) 요셉은 세포리스에서 새 공공(公共) 건물을 짓는 일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지난 주 금요일에 이 경사에 참석하려고 거기서 왔다. 예수의 선생은 총명하고 부지런한 생도가 어떤 특별한 생애, 어떤 탁월한 사명을 타고났다고 굳게 믿었다. 전통을 따르지 않는 예수의 성향 때문에 온갖 문제가 있었는데도, 장로들은 소년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고, 이름난 히브리 학원에서 교육을 계속할 수 있도록 그를 예루살렘에 보낼 계획을 이미 세우기 시작했다.

124:5.6 (1373.6) 이따금 이 계획이 거론되는 것을 듣는 동안, 예수는 랍비들과 어울려 공부하려고 예루살렘에는 결코 가지 않겠다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일어날 비극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이것은 그로 하여금 어머니와 자신은 물론, 곧 다섯 남동생과 세 여동생으로 구성될 큰 가족을 부양하고 지도하는 책임을 지게 만들었고, 그래서 모든 그런 계획을 단념하도록 보장할 것이었다. 예수는 아버지 요셉에게 주어진 것보다 더 크고 긴 체험, 이 가족을 양육하는 체험을 겪었고 나중에 자신이 부과한 기준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것은 너무 갑자기 슬픔에 빠지고 너무 뜻밖에 아버지를 잃은 이 가족―그의 가족―에게 현명하고, 참을성과 이해심이 있고 유능한 선생이자 큰형이 되는 것이었다.

6.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

124:6.1 (1374.1) 이제 청년기의 문턱에 이르렀고 정식으로 회당 학교를 졸업했으니까, 예수는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서, 같이 그의 첫 유월절 축하에 참석할 자격이 있었다. 이 해에 유월절 축제는 서기 7년 4월 9일, 토요일에 있었다. 상당히 큰 무리가 (103 명) 4월 4일 월요일 아침 일찍,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려고 준비했다. 그들은 남쪽으로 사마리아를 향하여 길을 떠났지만, 예즈릴에 다다르자, 사마리아 지나가는 것을 피하려고 동쪽으로 향했고, 길보아 산을 돌아서 요단강 유역으로 갔다. 요셉과 그 가족은 야곱의 우물과 베델의 길을 거쳐 사마리아를 통해서 내려가는 것을 좋아했을 터이지만,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관하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웃 사람들과 함께 요단강 유역의 길을 거쳐서 가기로 작정하였다.

124:6.2 (1374.2) 무척 두려워했던 아켈라우스는 폐위되었고, 그들은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기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첫째 헤롯이 베들레헴의 아기를 죽이려고 한 지 12년이 지났고, 아무도 이제는 그 사건을 이름 없는 이 나사렛 소년과 연관 지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었다.

124:6.3 (1374.3) 예즈릴 교차점에 이르기 전에, 그들이 계속 여행하자, 오래지 않아서 왼편에 고대의 슈넴 마을을 지났는데, 예수는 거기서 한때 살았던, 온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소녀, 그리고 또한 엘리사가 거기서 행한 놀라운 이적(異蹟)에 관하여 다시 이야기를 들었다. 예즈릴을 지나치면서, 예수의 부모는 아합과 예세벨이 한 일과 예후의 공적을 이야기했다. 길보아 산 둘레를 지나면서, 그들은 이 산의 비탈에서 목숨을 끊은 사울, 그리고 다윗 왕과 이 역사적 장소에 관계된 것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124:6.4 (1374.4) 길보아산 기슭을 돌면서, 순례자들은 바른쪽에 그리스 풍 도시 스키토폴리스를 볼 수 있었다. 멀리서 대리석 구조를 바라보았지만, 몸을 더럽혀서, 예루살렘에서 다가오는 유월절의 엄숙하고 신성한 예식에 참석할 수 없게 될까 두려워, 그들은 이방 도시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 마리아는 어째서 요셉이나 예수가 스키토폴리스에 대해서 입을 열려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리아는 지난 해에 그들에게 불편한 대화가 있었던 것을 몰랐는데, 그들이 이 사건을 마리아에게 털어놓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24:6.5 (1374.5) 길은 이제 열대 지역인 요단강 유역 밑으로 바로 이끌었고, 사해(死海)를 향하여 흘러 내려가고 물결이 반짝이고 찰랑거리는 요단강, 구부러지고 늘 굽이쳐 흐르는 강이 감탄하는 예수의 눈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 열대의 골짜기에서 남쪽으로 여행하면서, 그들은 겉옷을 벗어놓고 화려한 곡식 밭, 그리고 분홍 꽃이 잔뜩 핀 아름다운 올리앤더를 보고 즐겼다. 한편 꼭대기에 눈이 덮인 거대한 헤르몬산이 북쪽에 멀리 서서 웅장한 모습으로 이 역사적인 골짜기를 내려다보았다. 스키토폴리스의 맞은편으로부터 세 시간 남짓 여행하자, 그들은 부글부글 솟아오르는 샘물에 다다랐고, 여기서 그들은 밤에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서 텐트를 쳤다.

124:6.6 (1374.6) 여행하던 이틀째, 그들은 얍복강이 동쪽으로부터 요단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곳을 지났고, 동쪽을 향하여 이 강 유역을 바라보면서, 기드온 시절의 이야기를 했는데, 이때 미디안 족은 그 땅에 퍼지려고 이 지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틀째 여행하던 끝에, 그들은 요단강 유역을 내려다보는 가장 높은 산, 사르타바산 밑 가까이에서 텐트를 쳤다. 이 산 꼭대기는 알렉산드리아의 요새가 차지했고, 거기서 헤롯은 아내들 가운데 하나를 감옥에 가두었고, 목 졸라 죽인 두 아들을 땅에 묻었다.

124:6.7 (1375.1) 셋째 날에 그들은 헤롯이 최근에 지은 두 마을을 지났고, 그 우수한 건축과 아름다운 야자나무 동산을 눈여겨보았다. 밤이 되기까지 예리고에 이르렀고, 거기서 아침까지 머물렀다. 그날 저녁에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는 2.4킬로미터 걸어서 고대의 예리고 터로 갔는데,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거기서 요수아가 공훈을 세웠다는 소문이 있었고, 예수의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124:6.8 (1375.2) 넷째 날이자 여행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 도로에는 이어진 순례자들로 줄을 이루었다. 그들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이끄는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꼭대기에 가까워 오자, 요단강을 건너 그 뒤의 여러 산까지, 그리고 남쪽으로 사해의 느릿한 물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예루살렘까지 이르는 길의 중간쯤에서, 예수는 올리브산을 (그 뒤에 무척 그의 일생의 일부가 될 지역) 처음 구경했고, 요셉은 그 거룩한 도시가 이 산마루 바로 건너에 있다고 그에게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었다. 그 도시와 하늘 아버지의 집을 곧 보게 된다는 즐거운 기대에 소년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124:6.9 (1375.3) 올리브산 동쪽 비탈에서 그들은 베다니라고 부르는 작은 마을의 경계에서 쉬려고 멈추었다. 친절한 마을 사람들은 순례자들을 보살피려고 쏟아져 나왔고, 마침 요셉과 그의 가족은 어느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 가까이서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에게는 예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세 아이―마리아ㆍ마르다ㆍ나사로―가 있었다. 그들은 마실 것을 들자고 나사렛 가족을 안으로 초청하였고, 그 두 가족 사이에는 일생 동안의 우정이 생겼다. 그 뒤에 여러 번, 파란 많은 생애에서 예수는 이 집에 머물렀다.

124:6.10 (1375.4) 그들은 길을 재촉하여 곧 올리브산 가장자리에 섰고, 예수는 (그가 기억하건대) 처음으로 그 거룩한 도시, 허세로 크게 지은 여러 궁전, 그리고 영감을 주는 아버지의 성전을 보았다. 예루살렘의 처음 광경을 황홀히 바라보면서 4월 이날 오후에 거기 올리브산에서 서 있는 동안, 이때 그렇게 온통 마음을 빼앗기면서 가졌던 순전히 인간적 흥분을 예수는 일생에 어느 때에도 느낀 적이 없었다. 후일에 바로 이 자리에 서서, 또 하나의 선지자, 하늘의 선생들 가운데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사람을 물리치려 한 그 도시 때문에 그는 눈물을 흘렸다.

124:6.11 (1375.5) 그러나 그들은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계속 갔다. 이제 목요일 오후였다. 도시에 이르자, 그들은 성전을 지나쳤고, 예수는 그렇게 많은 인간 무리를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이 유대인들이 문명 세계의 가장 먼 곳으로부터 와서 여기에 모였는가 깊이 생각했다.

124:6.12 (1375.6) 그들은 유월절 주간에 숙박하려고 미리 정해놓은 장소에 곧 이르렀다. 이곳은 마리아의 어느 부유한 친척이 사는 큰 집이었고, 그는 사가리아를 통해서 요한과 예수의 초기 내력에 관하여 얼마큼 아는 사람이었다. 이튿날, 준비하는 날에, 그들은 유월절 안식일을 적절히 축하하려고 준비했다.

124:6.13 (1375.7) 유월절을 위해 준비하느라고 온 예루살렘이 떠들썩한 동안에, 요셉은 아들을 데리고 어느 학교를 방문할 틈을 냈고, 거기서 2년 뒤에 예수가 적절한 나이, 열 다섯 살이 되자마자, 교육을 다시 시작하도록 주선이 되어 있었다. 세심하게 짜놓은 이 계획에 예수가 거의 흥미를 보이지 않는 것을 지켜보고 요셉은 참으로 어리둥절했다.

124:6.14 (1375.8) 예수는 성전과 그에 관계된 모든 예배(禮拜)와 기타 활동에 깊이 감명을 받았다. 네 살이 되고 난 뒤에 처음으로, 자신의 명상에 너무 깊히 빠져서, 많이 묻지 않았다. 그러나 (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에게, 어째서 하늘 아버지가 죄 없고 무력한 동물의 도살(屠殺)을 그토록 많이 요구하는가, 몇 가지 난처한 질문을 던졌다. 소년의 얼굴 표정으로부터, 자기의 대답과 설명하려는 노력이 깊이 생각하고 날카롭게 따지는 아들에게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것을 아버지는 잘 알았다.

124:6.15 (1376.1) 유월절 안식일 전날에, 영적 빛의 큰 물결이 예수의 필사 지성을 휩쓸었고, 옛날부터 내려온 유월절을 기념하여 축하하려고 모인, 영적으로 눈멀고 도덕적으로 무지한 군중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느낌이 그의 인간 가슴을 넘치도록 채웠다. 이날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를 입고 보낸 가장 특별한 날 중의 하나였다. 그날 밤에, 땅에서 살던 생애에 처음으로, 이마누엘의 임명을 받고서, 구원자별로부터 배치된 사자(使者)가 그에게 나타났다. 그 사자는 말했다. “때가 왔나이다. 당신의 아버지의 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이다.”

124:6.16 (1376.2) 그래서 나사렛 가족의 무거운 책임이 어린 그의 어깨에 지워지기도 전에, 아직 열세 살이 채 안 된 이 소년에게, 한 우주의 책임을 비로소 다시 질 때가 왔다고 상기시키려고 이제 하늘의 사자가 도착한 것이다. 이것은 유란시아에서 아들의 자신 수여를 마침내 완수하고, “인간이자 신(神)인 그의 어깨 위에 한 우주의 정부”를 되돌려 놓은, 길게 이어지는 여러 사건 중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124:6.17 (1376.3) 시간이 지나자, 육신화의 신비는 우리 모두에게, 갈수록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우리는 이 나사렛 소년이 온 네바돈의 창조자라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오늘날 어떻게 바로 이 창조 아들의 영과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영이 인류의 혼들과 결합되는가도 이해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가 육체를 입고 인생을 살지만, 정신적으로 그의 어깨 위에 한 우주의 책임이 놓여 있음을 그의 인간 지성이 점점 더 깨닫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124:6.18 (1376.4) 이렇게 나사렛 소년의 경력이 끝나고, 청년기에 들어간 그 젊은이―점점 더 자의식하는 신다운 인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확대되는 일생의 목적을 부모의 소망, 그리고 가족과 그가 사는 시대의 사회에 대한 의무와 통합하려고 애쓰면서, 이제 그는 세계적 생애를 비로소 깊이 생각한다.

제 125 편 예루살렘에 가신 예수

유란시아서

제 125 편

예루살렘에 가신 예수

125:0.1 (1377.1) 파란 많았던 예수의 지상 생애에서, 그의 기억으로 처음인 이 예루살렘 방문보다 더 마음을 끌고, 인간적으로 더 가슴 설레게 하는 사건은 없었다. 혼자서 성전 토론에 참석하는 체험에 특별히 자극을 받았고, 이것은 어린 시절 후반과 소년 시절 초기에 있었던 큰 사건으로서 그의 기억에 오랫동안 뚜렷이 남았다. 이 방문은 그가 며칠 동안 독립된 생활, 아무런 금지와 제한이 없이 오가는 기쁨을 누릴 첫 기회였다. 유월절에 뒤이어 한 주 동안 아무런 지시 없이 사는 이 짧은 기간은, 그가 일찍이 누린 바 처음으로 책임에서 완전히 해방된 기간이었다. 잠시라도, 이와 비슷하게 모든 책임감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기간을 다시 가진 것은, 이 다음에 여러 해가 지난 뒤였다.

125:0.2 (1377.2) 여자들은 예루살렘의 유월절 축제에 가는 일이 드물었고, 참석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예수는 어머니가 그들을 따라오지 않는 한, 사실상 가기를 거절하였다. 어머니가 가기로 결심했을 때, 다수의 다른 나사렛 여인들도 여행할 마음이 들었고, 그래서 그 유월절 일행은 나사렛에서 유월절을 지내려고 올라간 중에서, 남자에 비해서 여자의 수가 가장 많았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그들은 이따금 시편 130편을 노래했다.

125:0.3 (1377.3) 나사렛을 떠날 때부터 그들이 올리브 산마루에 이를 때까지, 예수는 기대에 차서 오랫동안 긴장하였다. 즐거웠던 어린 시절 동안 내내,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루살렘과 그 성전에 대하여 소문을 들어 왔는데, 이제 그는 곧 실제로 구경할 것이었다. 올리브산에서부터, 그리고 바깥에서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성전은 예수의 기대를 뛰어넘었다. 그러나 일단 거룩한 입구에 들어서자, 큰 환멸이 시작되었다.

125:0.4 (1377.4) 부모의 일행 속에서, 이스라엘의 시민으로서 성화(聖化)를 막 받으려 하는 새 율법의 아들 집단과 합세하려고 가는 길에 예수는 성전 구역을 지나갔다. 성전에 모인 군중의 일반 태도를 보고 조금 실망했지만, 그날의 가장 큰 충격은 어머니가 여인 구역으로 가는 길에 그들을 떠났을 때였다. 어머니가 성화 예식까지 자신을 따라오면 안 된다는 생각이 결코 예수의 머리에 떠오른 적이 없었고, 그는 어머니가 그렇게 부당한 차별을 받게 된 것에 온통 화가 났다. 몹시 분개했지만, 항의하는 몇 마디를 아버지에게 한 것 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며, 이것은 한 주 뒤에 서기관과 선생들에게 던진 여러 질문에서 드러났다.

125:0.5 (1377.5) 성화 의식을 거쳤지만, 그는 이 의식(儀式)이 형식적이고 일상적인 것에 실망을 느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여 주는 것이 나사렛 회당 의식의 특징이었는데, 여기서는 그런 맛이 없어 서운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어머니에게 인사하려고 돌아갔고, 성전과 그 안에 있는 여러 뜰과 회랑과 복도를 오가는 첫 나들이에 아버지를 따라가려고 준비했다. 성전 구역은 한꺼번에 예배자를 20만 명 넘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이 건물의 방대함은―일찍이 보아 온 어느 것과 비교해도―머리 속에 크게 감명을 주었지만, 그는 성전 의식과 이와 관련된 예배의 영적 중요성을 깊이 생각하는 데 더 골똘해 있었다.

125:0.6 (1378.1) 아름다운 것과 상징적인 것을 느끼는 그의 감각은 성전의 많은 의식에 몹시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파고드는 여러 질문에 답하여 이 의식의 참 중요성이 무엇인가 부모가 제시한 설명에 그는 언제나 실망했다. 하나님이 노여워하거나 전능자가 진노한다는 신앙에 근거하여 예배와 종교적 헌신을 설명하는 말을 예수는 단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성전 방문을 마친 뒤에, 이 질문에 대하여 계속 논의할 때, 예수가 정통파 유대인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인정하라고 아버지가 가볍게 고집했을 때, 예수는 갑자기 부모에게 돌아서서, 하소연하는 얼굴로 아버지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버지, 그럴 리가 없나이다―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땅에서 잘못하는 자녀를 그렇게 대할 수 없나이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늘 아버지가 자신의 자녀를 덜 사랑할 수 없나이다. 내가 아무리 지혜롭지 못한 짓을 하더라도 아버지는 결코 내게 진노를 퍼붓거나 성내지 않으실 줄 내가 잘 아나이다. 땅에서 내 아버지가, 신을 닮은 그런 인간다운 그림자를 가졌다면, 하늘의 아버지는 얼마나 더 선이 가득하고 자비로 넘쳐흐를까. 땅에 있는 내 아버지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나를 덜 사랑한다는 것을 나는 믿지 못하나이다.”

125:0.7 (1378.2) 맏아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요셉과 마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두 번 다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비로움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바꾸려 애쓰지 않았다.

1. 예수가 성전을 구경하다

125:1.1 (1378.3) 성전 마당에 어디를 가도, 경건치 않은 정신에 예수는 충격을 받고 메스꺼워졌다. 그는 성전에 있던 군중의 행동은 그들이 “아버지 집에” 있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를 이방인의 마당으로 데리고 갔을 때, 그는 젊은 나이에 최대의 충격을 받았는데, 거기에는 시끄러운 속어(俗語)와 떠들고 욕하는 소리가 양들이 매― 하고 우는 소리, 그리고 왁자지껄한 잡음과 한데 어울려 섞였고 이것은 환전상(換錢商), 그리고 희생 동물 및 기타 잡동사니 상품을 파는 장사꾼들이 자리에 있음을 드러냈다.

125:1.2 (1378.4)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전의 이 구역 안에서, 이리저리 누비고 다니는 경박한 창녀들을 보고 그의 예절 바른 감정이 분노로 끓어올랐는데, 이들은 세포리스를 방문했을 때 아주 최근에 보았던, 바로 그런 분칠한 여자들이었다. 이러한 성전 훼손은 온통 젊은이의 분개심을 일으켰고, 그는 요셉에게 느낀 대로 자기 생각을 서슴지 않고 표현했다.

125:1.3 (1378.5) 예수는 성전에서 받은 느낌과 성전 예배에 대하여 좋게 말했지만, 그렇게 많은 지각 없는 신자들의 얼굴에 비친 영적 더러움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다.

125:1.4 (1378.6) 그들은 수많은 동물의 도살과 놋 분수대에서 도살을 주관하는 사제들이 손에서 피 씻는 것을 지켜보려고, 이제 성전 앞에 바위 선반 밑으로, 제단이 세워진 사제들의 마당으로 내려갔다. 피로 얼룩진 포장된 길, 사제들의 피투성이 손, 그리고 죽어 가는 짐승들이 지르는 소리를 자연을 사랑하는 이 소년은 견딜 수 없었다. 그 끔찍한 광경은 이 나사렛 소년을 역겨워하게 만들었고, 그는 아버지의 팔을 잡고 다른 데로 가자고 애원했다. 그들은 이방인의 마당으로 도로 돌아갔고, 거기서 들었던 거친 웃음소리와 쌍스러운 농담조차, 막 구경한 광경으로부터 한숨 돌리는 것이었다.

125:1.5 (1379.1) 요셉은 아들이 성전의 의식을 보고 얼마나 메스꺼워하는가 보았고, 현명하게 그를 이끌어 “미문(美門)”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고린도의 놋으로 만들어진 예술적 대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첫 성전 방문으로서 충분히 보았다. 그들은 마리아를 찾으려고 윗 마당으로 돌아갔고, 건물 바깥에서 군중과 떨어져 한 시간 동안 걸으면서, 헤롯의 웅장한 집이었던 아스모니아 궁전과 로마 경비병의 탑을 보았다. 이렇게 걷는 동안, 오직 예루살렘 주민들이 성전에서 날마다 희생물 바치는 의식을 구경하는 것이 허락된다, 갈릴리에 사는 사람들은 성전 예배에 참석하려고 유월절, 오순절 축제 (유월절 뒤 일곱 주가 지나서), 10월의 초막절에, 이렇게 1년에 겨우 세 번 올라온다고 요셉은 예수에게 설명했다. 모세가 이 축제들을 제정하였다. 다음에 그들은 나중에 제정된, 헌당 축제와 푸림 축제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그 뒤에, 묵는 곳으로 가서 유월절 축하를 위하여 준비했다.

2. 예수와 유월절

125:2.1 (1379.2) 베다니의 시몬이 그 일행을 위하여 유월절 양을 샀기 때문에, 나사렛의 다섯 가족이 유월절을 축하하려고 시몬 가족의 손님과 동료가 되었다. 바로 이 양들을 엄청나게 많이 도살한 것이 성전을 방문할 때 예수에게 그토록 영향을 주었다. 마리아의 친척들과 함께 유월절 저녁을 먹을 계획이 있었지만, 예수는 베다니로 가는 초청을 받아들이라고 부모를 설득했다.

125:2.2 (1379.3) 그날 밤 그들은 유월절 의식을 치르려고 모였고, 구운 고기를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과 함께 먹었다. 새 언약의 아들이 되었으니까, 예수는 유월절의 기원을 자세히 이야기하라고 요청을 받았고, 이것을 잘 해냈다. 그러나 그가 얼마 전에 듣고 본 것으로 말미암아, 어려도 생각 깊은 그의 머리에 새겨진 인상을 넌지시 비추는 논평을 많이 덧붙여 예수는 부모의 속을 얼마큼 흔들어 놓았다. 이날은 7일 동안 치르는 유월절 축제 의식(儀式)의 시작이었다.

125:2.3 (1379.4) 이날부터도 벌써, 비록 그러한 문제에 관하여 부모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도살한 양 없이 유월절을 지내도 좋은가, 예수는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머리 속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이 희생 제물 바치는 광경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확신하였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언젠가 피 흘리지 않는 유월절 축하 예식을 만들어야겠다고 더욱 마음을 굳게 먹었다.

125:2.4 (1379.5) 예수는 그날 밤 거의 자지 못했다. 짐승이 도살당하고 고통받는 메스꺼운 꿈 때문에 휴식을 얻기가 힘들었다. 유대인의 예식 체계 전체에 담긴 신학의 모순과 부조리 때문에, 그는 머리가 산란했고 마음이 아팠다. 부모도 마찬가지로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막 지나간 그날의 사건들 때문에 크게 마음이 혼란했다. 그들은 소년의 태도가 이상하고 단호하다고 생각되어서 마음이 온통 언짢았다. 그날 밤 초저녁에 마리아는 불안하여 마음의 평정을 잃었지만, 요셉은 똑같이 당황했어도 침착을 잃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해서 두 사람은 소년과 솔직하게 말하기가 두려웠다. 하지만 그들이 용감히 말을 꺼냈더라면, 예수는 부모와 함께 기쁘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125:2.5 (1379.6) 성전에서 다음 날 예배는 예수에게 비교적 마음에 들었고, 전날의 불쾌한 기억을 많이 지워버렸다. 다음 날 아침, 어린 나사로는 예수의 손을 잡았고, 그들은 예루살렘과 그 둘레를 체계적으로 뒤지기 시작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예수는 성전 가까이에 강의와 질문이 있는 회의가 진행되는 여러 장소를 발견했다. 막아놓은 베일 뒤에 정말로 무엇이 있는가 궁금해서 구경하려고 지성소(至聖所)에 몇 번 들린 것 외에, 예수는 대부분의 시간을 성전 근처에서, 이 강의하는 회의에서 보냈다.

125:2.6 (1380.1) 유월절 주간 내내, 예수는 새 계명의 아들들 사이에서 자기 자리를 지켰고, 이것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시민 자격을 갖추지 않은 모든 사람을 따로 갈라놓는 난간 바깥에 앉아 있어야 했음을 의미했다. 이렇게 나이 어린 것을 의식(意識)하게 되었으니까, 그는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떠오르는 여러 질문을 던지기를 삼갔다. 적어도 유월절 축하가 끝나고, 새로이 성화 예식을 거친 소년들에게 지워진 제한이 풀릴 때까지, 자제하였다.

125:2.7 (1380.2) 유월절 주간의 수요일에, 예수는 나사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서 베다니에서 밤을 지내도록 허락을 받았다. 이날 저녁에, 나사로ㆍ마르다ㆍ마리아는 예수가 현세의 것과 영원한 것, 인간다운 것과 신다운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고, 그날 밤부터 계속 그들 세 사람 모두, 마치 예수가 오빠나 형인 것처럼 그를 좋아했다.

125:2.8 (1380.3) 주말이 되자 예수는 나사로를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 나사로가 성전 토론이 있는 바깥 구역까지도 들어갈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사로는 바깥 마당에서 진행된 공개 담화에 얼마큼 참석했다. 그는 예수와 나이가 같았지만, 예루살렘의 소년들은 만 열세 살이 될 때까지, 계명의 아들의 성화(聖化) 예식에 참석이 허락되는 일이 드물었다.

125:2.9 (1380.4) 유월절 주간에, 예수의 부모는 여러 번 그가 혼자 따로 앉아서, 어린 나이에 머리를 두 손에 괴고 깊이 생각하는 것을 발견하곤 했다. 그들은 예수가 이처럼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겪고 있는 체험 때문에 머리가 얼마나 혼란스럽고 정신적으로 고민하는가 몰랐기 때문에, 몹시 당황했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몰랐다. 유월절 주간의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것이 반가웠고, 이상하게 행동하는 아들을 안전하게 나사렛으로 데리고 돌아가기를 바랐다.

125:2.10 (1380.5) 하루하루 예수는 문제들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 주말까지, 그는 태도를 많이 조정했다. 그러나 나사렛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을 때, 그의 젊은 머리 속은 아직도 착잡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고, 해답을 찾지 못한 수많은 물음과 풀리지 않은 문제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125:2.11 (1380.6)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에, 나사렛의 선생을 동반하여, 예수가 열 다섯 살이 될 때 돌아와서 최고로 이름난 랍비 학교 중 하나에서 오랜 공부 과정을 시작하도록 분명히 주선해 놓았다. 학교를 찾아볼 때 예수는 부모와 선생을 따라갔지만, 그들이 말하고 주선한 모든 것에 그가 얼마나 무관심한가 지켜보고 그들 모두가 걱정하였다. 예루살렘 방문에 대한 그의 반응을 보고 마리아는 마음이 무척 상했고, 요셉은 소년의 이상한 논평과 별다른 행동에 몹시 당황했다.

125:2.12 (1380.7) 어쨌든 유월절 주간은 예수의 생애에서 큰 사건이었다. 그는 제 또래의 소년들, 즉 성화 예식에 참석한 동료 후보자 수십 명을 만나는 기회를 누렸고, 로마의 극서(極西) 지방 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ㆍ투르키스탄ㆍ파르티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 배우려고 그러한 접촉을 이용했다. 그는 에집트에서, 그리고 팔레스타인 근방의 다른 지역에서 소년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이미 상당히 알고 있었다. 이때 예루살렘에는 젊은이가 수천 명 와 있었는데, 나사렛 소년은 150명이 넘는 사람들을 몸소 만나고, 얼마큼 광범위하게 회견하였다. 그는 극동과 아주 먼 서쪽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특별히 관심이 있었다. 이렇게 접촉한 결과로서, 소년은 여러 집단의 동료 인간들이 생계를 잇기 위하여 어떻게 수고하는가 배우려는 목적으로, 세계를 돌아다닐 소망을 품기 시작했다.

3. 요셉과 마리아의 출발

125:3.1 (1381.1) 유월절 축제가 끝난 다음 주, 첫째 날 늦은 아침에, 성전 지역에서 나사렛 일행이 모이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대로 했고,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여행길을 떠났다. 예수는 토론하는 것을 들으려고 성전으로 들어가 있었고, 한편 부모는 동료 여행자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당장에 그 일행은 떠나려고 준비했고, 남자들이 한 무리를 이루고 여자들은 다른 무리를 지어서 갔는데, 이것이 예루살렘 축제에 다녀오는 여행에 그들의 관습이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예수는 어머니와 여자들의 일행에 섞여 있었다. 이제 성화 의식을 마친 젊은이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아버지와 남자들 일행 속에 끼어 나사렛까지 여행길을 간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사렛 무리가 베다니를 향하여 가는 동안에, 예수는 성전에서, 천사들에 관한 토론에 완전히 몰두해 있었고, 부모의 출발 시간이 지난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정오에 성전 회의가 끝날 때까지, 그는 자기가 뒤에 처져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125:3.2 (1381.2) 마리아는 예수가 남자들과 함께 여행한다고 짐작했고, 한편 요셉은 그가 마리아의 당나귀를 이끌고 여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으므로 여자들과 함께 여행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사렛 여행객들은 예수가 없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예리고에 다다라서 그날 밤에 묵으려고 준비할 때까지, 그들은 예수가 자리에 없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예리고에 마지막으로 도착한 일행에게 물어 보고, 아무도 아들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 그들은 잠을 못 이루며 밤을 지샜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머리 속에서 곰곰이 살펴보고, 유월절 주간에 일어났던 여러 사건에 대한 그의 별다른 반응을 돌이켜보며,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에 그 무리에 그가 있도록 처리하지 않은 것을 가볍게 서로의 탓으로 돌렸다.

4. 성전에서 보낸 첫째 날과 둘째 날

125:4.1 (1381.3) 그동안, 오후 내내 예수는 성전에 남아서 토론을 들었고, 유월절 주간의 큰 군중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전보다 조용하고 예의 바른 분위기를 즐겼다. 오후 토론 중 어디에도 예수는 끼지 않았고, 이 토론이 끝났을 때 베다니를 향해 갔으며, 시몬의 가족이 저녁을 먹으려고 준비할 때 막 도착했다. 세 아이는 예수를 만나게 되어 기뻐서 어쩔 줄 몰랐고, 그날 밤에 그는 시몬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날 저녁에 그는 말이 거의 없었고, 명상하느라고 상당한 시간을 혼자 뜰에서 보냈다.

125:4.2 (1381.4) 이튿날 아침 일찍 예수는 일어나서 성전으로 갔다. 올리브 산마루에서 멈추었고, 눈에 들어온 광경―전통에 묶여 있고, 로마 군단의 감시 하에 사는 영적으로 궁핍한 민족―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오전 초반에, 토론에 끼려고 마음먹고 그는 성전에 나타났다. 그동안에, 요셉과 마리아도 또한 예루살렘까지 온 길을 되찾아 갈 생각으로 새벽에 동이 트자 일어났다. 먼저 그들은 유월절 주간에 한 가족으로서 묵었던 그 친척의 집으로 서둘러 갔지만, 물어 본 결과는 아무도 예수를 구경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하루 종일 찾다가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하고, 그들은 그날 밤 그 친척의 집으로 돌아갔다.

125:4.3 (1382.1) 둘째 회의에서 예수는 감히 질문을 던졌는데, 대단히 놀라운 방법으로 성전 토론에 끼었으나 어린 나이에 맞게 반드시 예의를 차렸다. 어떤 때는, 그의 날카로운 물음이 학식 있는 유대 율법 선생들에게 얼마큼 당황스러운 것이었지만, 알려고 하는 분명한 욕구와 함께 그렇게 순수한 공평 정신을 보였기 때문에, 대다수의 성전 선생들은 세심한 배려로 그를 대우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방인의 마당 바깥에서 거닐다가, 신성하다고 소문난 성전 금지 구역에 멋모르고 발을 들인, 술 취한 이방인을 사형(死刑)에 처하는 것이 타당한가 감히 물었을 때, 너그럽지 못한 어느 선생이 소년의 말 속에 담긴 비난에 참을성을 잃고, 그를 노려보면서 나이가 얼마인가 물었다. 예수는 대답했다, “열 세 살에서 넉 달하고 며칠 모자라나이다.” 이제 성난 선생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너는 계명의 아들이 될 나이가 아니 되었은즉, 어찌하여 여기 있는고?” 그가 유월절에 성화 의식을 거쳤고 나사렛 학교를 졸업한 학생이라고 설명했을 때, 선생들은 한 목소리로 비웃으며 대답했다: “짐작할 만하이. 그가 나사렛에서 왔구려.” 그러나 예수가 엄밀하게 말해서 열 세 살이 아니고 열 두 살인데, 나사렛 회당의 책임자들이 그를 졸업시켰다면 예수는 잘못이 없다고 사회자가 주장했다. 그를 훼방한 몇 사람이 일어서서 떠났는데도, 소년이 성전 토론의 생도로서 방해받지 않고 계속해도 좋다는 판결이 내렸다.

125:4.4 (1382.2) 이날 성전에서 둘째 날이 끝났을 때, 그날 밤을 지내려고 그는 다시 베다니로 돌아갔다. 명상하고 기도하려고 다시 뜰로 갔다. 그의 머리가 중대한 문제들을 깊이 생각하는 데 골똘한 것이 분명했다.

5. 성전에서 보낸 셋째 날

125:5.1 (1382.3) 예수가 성전에서 서기관과 선생들과 함께 보낸 셋째 날에는 많은 구경꾼이 모여들었다. 갈릴리로부터 온 이 소년의 소문을 듣고서, 이들은 소년이 율법을 아는 현자들을 혼란에 빠지게 만드는 것을 구경하려고 왔다. 시몬도 그 소년이 무슨 속셈이 있는가 보려고 베다니로부터 내려왔다. 이날 하루 종일 요셉과 마리아는 계속 걱정하며 예수를 찾았는데, 성전으로 몇 번 들어갔어도, 결코 토론하는 몇 집단을 샅샅이 훑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황홀한 그의 목소리를 거의 들을 만한 거리에 한 번 왔다.

125:5.2 (1382.4) 그날이 저물기 전에, 성전의 주요 토론 집단의 눈길은 온통, 예수가 내놓은 여러 질문에 집중되어 있었다. 여러 질문 가운데 다음이 있었다.

125:5.3 (1382.5) 1. 베일 뒤, 지성소(至聖所)에 정말로 무엇이 있는가?

125:5.4 (1382.6) 2. 어째서 이스라엘에서 어머니들이 성전에서 예배하는 남자들과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가?

125:5.5 (1382.7) 3.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신의 은총을 얻으려고 이 모든 동물을 도살하다니 무엇 때문인가―모세의 가르침을 오해하고 있는가?

125:5.6 (1382.8) 4. 성전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예배하는 곳이므로 속세의 물물 교환과 상업(商業)에 종사하는 자들이 자리에 있도록 두는 것이 이에 합당한가?

125:5.7 (1382.9) 5. 올 것이라 기대하는 메시아가 다윗의 왕좌에 앉을 현세의 왕이 될 것인가, 아니면 영적인 나라를 세우는 데 생명의 빛으로서 활동할 것인가?

125:5.8 (1383.1) 그날 하루 종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이 여러 질문에 놀라워했고, 시몬보다 더 크게 놀란 사람은 없었다. 네 시간이 넘도록, 이 나사렛 소년은 생각을 자극하고 마음 속을 살펴보는 질문으로 이 유대인 선생들에게 캐물었다. 그는 연장자들의 말에 거의 논평하지 않았다. 묻고자 하는 물음으로 그는 가르침을 전했다. 질문을 알맞고 미묘하게 표현함으로, 한꺼번에 그들의 가르침에 도전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제시하곤 했다. 질문하는 방법에 슬기와 유머가 매력 있게 섞였으며, 이것은 그의 어린 나이를 얼마큼 못마땅하게 보는 사람들조차 그를 귀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파고드는 이 여러 질문을 던지면서 그는 반드시 더할 나위 없이 공정(公正)하였고 사람을 배려하였다. 성전에서 별일이 많았던 이날 오후에, 그는 상대편의 약점을 부당하게 이용하기를 꺼려함을 보였고, 이것은 후일에 그의 대중 봉사 전체에 나타난 특징이었다. 소년으로서, 그리고 나중에 어른으로서, 그는 단지 동료들에게 논리적 승리를 얻으려고 논쟁에 이기려는, 자기 중심의 욕구에 전혀 매이지 않는 듯하였고, 오직 한 가지에 최고의 관심을 가졌으니, 곧 영구한 진리를 선포하고 그렇게 영원한 하나님을 더욱 충만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125:5.9 (1383.2) 그날이 저물었을 때, 시몬과 예수는 베다니로 되돌아갔다. 길을 가는 동안 대체로 그 어른과 소년은 조용했다. 다시 올리브 산마루에서 멈추었지만, 도시와 성전을 보면서 예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고요히 예배하는 마음으로 머리를 숙였을 뿐이다.

125:5.10 (1383.3) 베다니에서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 그는 즐거운 모임에 끼는 것을 다시 사양했다. 그러나 그 대신 뜰로 나가서, 거기서 밤늦게 남아 있으면서, 일생에 할 일의 문제를 해결하는 어떤 분명한 계획을 생각해내고, 영적으로 눈먼 동포(同胞)에게 하늘 아버지에 대하여 전보다 더 아름다운 개념을 계시하고, 그렇게 함으로 율법과 의식과 예식, 또 곰팡이 냄새 나는 전통의 끔찍한 사슬에서 그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어떻게 수고하는 것이 최선일가 결정하려고 헛되이 노력했다. 그러나 진리를 찾는 소년에게 밝은 빛은 다가오지 않았다.

6. 성전에서 보낸 넷째 날

125:6.1 (1383.4) 예수는 이상하게도 땅에 있는 부모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 때에도, 부모가 그때면 집에 거의 다다랐음이 틀림없다고 나사로의 어머니가 한 마디 던졌을 때에도, 그가 뒤에 처진 것 때문에 부모가 얼마큼 걱정하리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였다.

125:6.2 (1383.5) 다시 그는 성전으로 길을 떠났지만, 올리브 산마루에서 명상하려고 멈추지 않았다. 아침 토론의 과정에서 많은 시간이 율법과 선지자에 할애되었고, 선생들은 그리스어 뿐 아니라 히브리어로도 예수가 성서를 훤히 아는 것에 놀랐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진리를 아는 것보다 나이에 더 놀랐다.

125:6.3 (1383.6) 오후의 회의에서, 기도(祈禱)의 목적이 무엇인가 물은 데 대하여 그들이 대답을 시작하자마자, 사회자가 소년에게 앞으로 나와서, 자기 옆에 앉아서, 기도와 예배에 관하여 자신의 견해를 펴라고 지시했다.

125:6.4 (1383.7) 전날 저녁에, 예수의 부모는 율법 해설자들과 아주 재치 있게 싸운 이 이상한 소년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 소년이 그들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예수가 엘리자벳과 요한을 만나러 거기로 갔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사가리아의 집을 향하여 길을 떠나려고 거의 마음을 먹었다. 사가리아가 혹시 성전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유다 시로 가는 길에 거기에 들렸다. 성전의 마당을 통해서 걷고 있을 때, 잃어버린 소년의 목소리를 알아보고 성전의 선생들 사이에 그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이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을까 상상해 보라.

125:6.5 (1384.1) 요셉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마리아는 놀란 부모에게 이제 인사하려고 서 있는 소년에게 달려가서, 오랫동안 두려움과 걱정에 싸여 참고 있었던 말을 뱉었다. “아들아, 어째서 너는 우리를 이렇게 대하였느냐? 슬픔에 빠져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은 지가 이제 사흘이 넘었느니라. 우리를 버리다니, 너는 무엇에 홀렸느냐?” 긴장된 순간이었다. 예수가 무슨 말을 하려는가 들으려고 모든 눈이 그에게 쏠렸다. 아버지는 나무라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25:6.6 (1384.2) 예수가 젊은이로 생각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이로서 정규 수업을 마쳤고 율법의 아들로서 인정받았으며, 이스라엘의 시민으로서 성화 의식을 거쳤다. 그래도 어머니는 모여든 모든 사람 앞에서, 젊은 나이에 가장 심각하고 숭고한 노력을 기울이는 순간에 가볍지 않게 그를 꾸짖었다. 이렇게 하여 진리의 선생으로서, 올바름을 외치는 자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하는 성품을 드러내는 자로서 활동하라고 그에게 일찍이 주어진 가장 큰 기회 중 하나에 명예롭지 않은 종말을 가져왔다.

125:6.7 (1384.3) 그러나 소년은 그 경우에도 만만치 않았다. 함께 이 상황을 구성한 모든 요소를 마땅히 고려한다면, 너희는 어머니의 뜻하지 않은 꾸지람을 듣고서 소년이 대답한 말이 얼마나 슬기로웠는가 헤아릴 준비가 잘 되었을 것이다. 잠깐 생각한 뒤에, 예수는 어머니에게 대답하였다. “어찌하여 어머니는 나를 그토록 오래 찾으셨나이까? 내가 아버지의 일을 보살필 때가 왔사오니, 어머니는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나를 찾기를 기대하지 않으시나이까?”

125:6.8 (1384.4) 모두가 소년의 말하는 태도에 놀랐다. 그들은 부모와 예수만 세워두고 모두 조용히 물러났다. 젊은이는 즉시 모두 세 사람의 어색한 분위기를 덜어주며 조용히 말했다, “자, 부모님, 아무도 각자가 최선이라고 생각한 일밖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나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이러한 것들을 예비하셨나이다. 집으로 떠납시다.”

125:6.9 (1384.5) 말없이 그들은 떠났고, 그날 밤 예리고에 다다랐다. 꼭 한 번 멈추었는데, 올리브 산마루에서였다. 그때 소년은 지팡이를 높이 쳐들고, 벅찬 감정이 끓어올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거기에 사는 사람들아, 너희는 무슨 노예인가―로마의 멍에에 굴종하고, 자신의 전통에 희생된 자여―그러나 나는 저 멀리 성전을 깨끗이 하고 이 사슬에서 내 민족을 구하러 돌아오리라!”

125:6.10 (1384.6) 나사렛까지 사흘 여행 길에, 예수는 거의 말이 없었다. 부모도 그 앞에서 입을 많이 열지 않았다. 그들은 맏아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서 참으로 어찌할 줄 몰랐다. 그러나 그 뜻을 넉넉히 알아듣지는 못했어도, 그들은 가슴 속에 그의 말을 소중히 간직했다.

125:6.11 (1384.7) 집에 도착하자, 그는 부모에게 간단한 말씀을 드렸고, 이것은 부모를 사랑한다고 그들을 안심시키고, 그의 행동 때문에 부모에게 걱정을 끼쳐 드릴 기회가 다시 올까 근심할 필요가 없음을 암시하였다. 이 중요한 선언을 이렇게 맺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 하지만, 나는 땅에 있는 아버지에게도 또한 복종하리이다. 나는 때를 기다리겠나이다.”

125:6.12 (1384.8) 머리 속에서, 그가 어떤 방향으로 생각하라고 지시하거나 땅에서 그의 할 일을 계획하려는 부모의 노력, 의도는 좋아도 그릇 인도된 노력을 여러 번 거절했지만, 그래도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그의 헌신적 마음과 일치되는 모든 면에서, 그는 땅에 있는 아버지가 바라는 것과 육체를 입은 가족의 관습을 아주 훌륭하게 따랐다. 찬성할 수 없을 때에도 그는 따르려고 최선을 다하려 했다. 가족에게 충실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책임을 다하는 그의 헌신적 태도를 그는 솜씨 있게 조절하였다.

125:6.13 (1385.1) 요셉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체험을 돌이켜보면서 위로를 얻었고, 결국은 올리브산에서 그가 입 밖에 낸 말씀을 아들이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될 메시아의 사명을 예언하는 것으로 보았다. 마리아는 애국과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길로 그의 생각에 틀을 잡아주려고 새로이 힘을 얻어 일하기 시작했고, 자기 동생, 예수가 가장 좋아하는 삼촌의 도움을 청했다. 예수의 어머니는 온갖 다른 방법으로, 다윗의 왕좌를 회복하고, 정치적으로 구속하는 이방인의 멍에를 영원히 떨쳐 버릴 사람들 중에서 맏아들이 지도권을 쥐도록 준비시키는 과업에 팔을 걷어붙였다.

제 126 편 고난의 두 해

유란시아서

제 126 편

고난의 두 해

126:0.1 (1386.1) 예수가 땅에서 일생 동안에 겪은 모든 체험 가운데, 열네 살 때와 열다섯 살 때가 가장 어려웠던 해였다. 자기의 신성과 운명을 비로소 깨달은 뒤에, 그에게 깃드는 조절자와 상당히 많이 교통하기 전에, 이 두 해는 유란시아에서 파란 많았던 일생에서 가장 시련이 많은 해였다. 큰 시험, 참 유혹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은 이 2년 동안이었다. 어떤 젊은이도 청년기의 혼란과 적응하는 문제들을 거치면서, 예수가 어린 시절부터 청년이 되는 과도기에 겪은 것보다 더 결정적인 시험을 겪지는 않았다.

126:0.2 (1386.2) 예수가 젊은이로 성장하는 이 중요한 기간은 예루살렘 방문을 마치고 그가 나사렛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되었다. 아들을 다시 찾아왔다는 것, 예수가 집으로 돌아와서 의무에 충실한 아들이 되었다는 것―언제라도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그의 장래를 위하여 세운 계획에 그가 이제부터 더 반응이 있으리라 생각하고서 마리아는 처음에 행복했다. 그러나 물질적 망상, 그리고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이 가족이 지닌 긍지(矜持)의 밝은 빛을 오래 즐기도록 예정되지는 않았다. 금방 그 여자는 전보다 더 철저하게 미몽에서 깨어나야 했다. 소년은 점점 더 아버지와 함께 다녔고, 문제를 가지고 어머니에게 오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으며, 한편 어째서 이 세상 일, 그리고 그와 아버지 일의 관계를 자주 번갈아서 숙고하는지 부모는 갈수록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참으로 사랑했다.

126:0.3 (1386.3) 나이가 들면서 예수는 유대 민족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졌지만, 해가 지남에 따라서, 머리 속에서 아버지의 성전에 정치적으로 임명된 사제들이 있다는 것에 차츰 의분(義憤)이 커졌다. 예수는 진지한 바리새인과 정직한 서기관들을 크게 존경했지만, 위선적인 바리새인과 정직하지 않은 신학자들을 크게 경멸하였다. 성실하지 않은 모든 종교 지도자를 경시하였다. 이스라엘의 지도층을 자세히 훑어보았을 때, 자기가 유대인이 기대하는 메시아가 되는 가능성을 좋게 보려는 유혹을 가끔 받았지만, 결코 그러한 유혹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126:0.4 (1386.4) 예루살렘에서 성전의 현자(賢者)들 사이에 그가 공훈을 세운 이야기는 온 나사렛, 특히 회당 학교에서 예전에 그를 가르치던 선생들에게 흐뭇한 일이었다. 한동안, 사람마다 그를 칭찬하는 말이 입에서 그치지 않았다. 온 마을이 그가 어릴 때 보인 지혜와 칭찬할 만한 행동을 하나하나 열거하였고, 이스라엘에서 그가 큰 지도자가 될 운명을 가졌다, 마침내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정말로 위대한 선생이 나올 것이라 예언했다. 그리고 그가 열다섯 살이 되어, 안식일에 회당에서 성서를 정기적으로 읽도록 허락될 때를 모두가 기대했다.

1. 열네 살 되던 해 (서기 8년)

126:1.1 (1387.1) 이 해는 달력으로 열네 살이 되는 생일을 맞는 해이다. 그는 멍에를 잘 만드는 사람이 되었고, 캔바스와 가죽 다루는 일을 잘 했다. 급속히, 그는 또한 솜씨 있는 목수이자 가구공(家具工)이 되고 있었다. 이 해 여름에 그는 기도하고 명상하려고 나사렛 북서쪽에 있는 언덕 꼭대기까지 자주 다녔다. 그는 땅에서 자신을 수여하는 일의 성질을 차츰 더욱 자각하게 되었다.

126:1.2 (1387.2) 이 언덕은, 1백 년 조금 더 전에, “바알의 산당”이었고, 이제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성자 시므온의 무덤 자리였다. 이 시므온의 언덕 꼭대기로부터 예수는 나사렛과 둘러싼 시골을 내려다보았다. 메기도를 바라보고, 에집트 군대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큰 승리를 거두고, 후일에 어떻게 또 다른 그런 군대가 유다 왕 요시아를 물리쳤는가 하는 이야기를 회상하곤 했다. 멀지 않은 곳에, 타나크를 바라볼 수 있었고, 거기서 드보라와 바락이 시세라를 물리쳤다. 멀리 도탄산을 볼 수 있었는데, 거기서 요셉의 형제들이 그를 에집트인의 노예로 팔았다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에발과 게리짐으로 눈을 돌리고 아브라함ㆍ야곱ㆍ아비멜렉의 전통을 스스로 열거하곤 했다. 이처럼 머리 속에서 아버지 요셉의 민족 역사와 전통에 있는 사건들을 돌이켜보고 곰곰이 살펴보았다.

126:1.3 (1387.3) 그는 회당 선생들 밑에서 상급 독서 과목을 줄곧 공부해 나갔고, 또한 동생들이 적당한 나이에 이르자 그들의 가정 교육을 계속했다.

126:1.4 (1387.4) 그가 다음 해 8월에 열다섯이 될 때 예루살렘으로 갈 계획이 세워졌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오랜 공부 과정에 드는 학비를 물려고, 이 해 일찍부터 요셉은 나사렛과 가버나움에 있는 재산으로부터 나오는 소득을 따로 떼어 놓도록 주선하였다.

126:1.5 (1387.5) 이 해가 시작되자, 요셉과 마리아는 맏아들의 운명에 관하여 자주 의심을 품었다. 그는 정말로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지만, 몹시 이해하기 힘들고 헤아리기 어려웠고, 게다가 특별하거나 기적 같은 일은 하나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자랑스러운 어머니는 수십 번 숨을 죽이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서서, 아들이 어떤 초인간이나 기적 같은 일을 해내는가 보려고 기대했지만, 언제나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 어머니는 몹시 실망하였다. 이 모두가 어머니를 낙심하게 하고, 아니 마음 아프게 하였다. 선지자, 그리고 약속된 운명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부름받은 사실을 증거하고, 기적을 행하고 놀라운 일을 함으로 신으로부터 받은 권한을 증명한다고 그 시절의 경건한 사람들은 참으로 믿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앞날을 깊이 생각하면서 부모의 혼란이 꾸준히 늘어났다.

126:1.6 (1387.6) 나사렛 가족의 나아진 경제 사정은 집 근처에서 여러 면으로, 특히 반반한 흰 판자들의 수가 늘어난 데서 나타났는데, 이것은 글 쓰는 판자로 쓰였고, 목탄으로 글을 썼다. 예수에게 또한 음악 수업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그는 하프 켜기를 몹시 좋아했다.

126:1.7 (1387.7) 이 해 내내, 예수는 “사람과 하나님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고 참으로 말할 수 있다. 가족의 전망은 좋아 보였고, 앞날은 밝았다.

2. 요셉의 죽음

126:2.1 (1388.1) 9월 25일, 운명의 그 화요일까지 만사가 순조로웠다. 이날 세포리스에서 달려 온 한 사람이, 요셉이 총독의 저택에서 일하다가, 기중기가 떨어져 몹시 다쳤다는 비극의 소식을 이 나사렛 가정으로 가져왔다. 세포리스에서 온 사자는 요셉의 집으로 가던 길에 작업장에 멈추어 예수에게 아버지의 사고를 알렸고, 그들은 함께 집으로 가서 슬픈 소식을 마리아에게 알렸다. 예수는 즉시 아버지에게 가고 싶었지만, 마리아는 자기가 남편 곁에 서둘러 가야 한다는 것 외에 아무 말에도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때 열 살인 야고보가 세포리스까지 자기를 따라가고 한편 예수에게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동생들과 함께 집에 남아 있으라고 지시했는데, 왜냐하면 요셉이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가 도착하기 전에, 부상(負傷) 때문에 죽었다. 그들은 요셉을 나사렛으로 모셔 왔고, 다음 날 그는 선조들과 함께 묻혔다.

126:2.2 (1388.2) 전망이 좋고 앞날이 밝아 보였던 바로 그때, 겉보기에는 모진 손이 나사렛 가족의 머리를 내려쳤다. 이 집안의 일은 쑥밭이 되었으며, 예수와 그의 장래 교육을 위한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 이 소년 목수는 이제 막 만으로 열네 살이 되었고, 땅에서 육체를 입고서 신의 성품을 드러내라는, 하늘 아버지의 명령을 수행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과부가 된 어머니와 일곱 동생과 태어날 아기까지 보살필 책임을 젊은 인간 성품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나사렛 젊은이는 이제, 이렇게 갑자기 아버지를 여읜 가족의 유일한 기둥이자 위로가 되었다. 한 인간 가족의 머리가 되고 동생들에게 가장(家長)이 되고 어머니를 부양하고 보호하며, 아버지의 집, 즉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가 알게 된 유일한 가정의 보호자로서 활동하는 데 따르는 책임은 무겁지만, 상당히 교육이 되고 훈련이 된다. 이렇게 이 책임을 아주 일찍 맡도록 이 운명의 젊은이를 강요할 자연스러운 사건들이 유란시아에서 일어나는 것이 허락되었다.

126:2.3 (1388.3) 예수는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끝까지 충실히 수행해 나갔다. 적어도, 일생에서 한 가지 큰 문제이며 예상했던 곤경이 비극으로 해결되었다―이제는 사람들이 그가 랍비들 밑에서 공부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기대하지 않을 것이었다. 예수가 “누구의 제자도 되지 않았다”하는 것은 언제나 참말이었다. 가장 낮은 어린아이들로부터도 언제나 기꺼이 배우려 했지만, 그는 결코 인간적 근원으로부터 진리를 가르칠 권한을 얻지 않았다.

126:2.4 (1388.4) 아직까지, 태어나기 전에 가브리엘이 어머니를 방문한 사실에 대하여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대중에게 봉사하는 일이 시작될 때, 세례받은 날에, 그는 이 말을 요한으로부터 들었을 뿐이다.

126:2.5 (1388.5) 해가 지남에 따라서, 나사렛의 이 젊은 목수는 갈수록 모든 사회 제도와 종교 관습을 변함없는 이 방법으로 시험하게 되었다: 그것이 인간의 혼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가? 하나님을 사람에게 가까이 오시게 하는가? 사람을 하나님께로 데려오는가? 이 젊은이가 인생에서 오락 및 사회적 면을 온통 소홀히 하지는 않았어도, 가족을 보살피는 것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땅에서 행하려고 준비하는 것, 꼭 이 두 가지 목적에 그는 더욱 시간과 에너지를 바쳤다.

126:2.6 (1389.1) 이 해에는 겨울 저녁에 예수가 하프 켜는 것을 듣고, (소년이 솜씨 좋은 이야기꾼이었으니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그리스 성서 읽는 것을 들으려고 이웃 사람들이 들리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126:2.7 (1389.2) 죽을 때에 요셉이 어지간히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정의 경제적인 일은 계속해서 썩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예수는 일찍부터 날카로운 사업 판단력과 재무의 지혜를 가졌음을 보였다.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썼지만 검소했고, 저축하고 있었지만 관대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현명하고 유능하게 관리하는 사람인 것이 판명되었다.

126:2.8 (1389.3) 예수와 나사렛 이웃들이 이 가정을 즐겁게 만들려고 힘이 자라는 대로 무슨 일이든 했어도 마리아와 아이들까지 슬픔의 그림자로 덮여 있었다. 요셉이 사라진 것이다. 요셉은 특별한 남편이요 아버지였고, 모두 그가 없어 서운해하였다. 그에게 말을 하거나, 마지막 축복의 말씀도 들을 수 있기 전에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니 더군다나 비극인 듯하였다.

3. 열다섯 살 되던 해 (서기 9년)

126:3.1 (1389.4) 열다섯 살 되던 이 해 중반이 되어서―유대인의 해가 아니라, 20세기 달력에 따라 시간을 계산하건대―예수는 가족의 재정을 잘 운영하고 있었다. 이 해가 가기 전에 저축은 거의 사라졌고, 요셉과 이웃 야곱이 공동으로 소유했던 나사렛 집들 중에 하나를 처분해야 할 필요에 부딪쳤다.

126:3.2 (1389.5) 서기 9년, 4월 17일 수요일 저녁에, 그 집안의 아기 룻이 태어났고, 예수는 힘이 자라는 데까지, 벅차고 특별히 슬픈 이 시련 기간에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를 위로하고 돌보느라고 애썼다. 거의 20년 동안 (대중 봉사를 시작할 때까지) 예수가 어린 룻을 돌본 것보다 더 자기 딸을 귀하고 충실하게 사랑하고 기른 아버지는 없었다. 가족의 모든 다른 사람에게 그는 똑같이 훌륭한 아버지가 되었다.

126:3.3 (1389.6) 이 해에, 예수는 나중에 사도들에게 가르친 기도문(祈禱文)을 처음으로 지었는데, 이것은 “주의 기도”로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가족 제단이 진화된 것이었고, 그들은 여러 형태의 찬송과 몇 가지 형식의 기도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자기가 평소 즐겨 기도하는 것처럼―예수는 큰 아이들에게 각자 자신의 표현 방법으로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애썼지만, 그들은 그 생각을 헤아릴 수 없었고, 변함없이 그들이 외운 형식의 기도로 돌아가곤 했다. 나이 든 동생들에게 자기 나름대로 기도하도록 자극하는 노력으로, 제시하는 구절을 가지고 예수는 이들을 인도하려고 애쓰곤 했다. 뜻하지 않았는데, 예수가 기도를 어떻게 하는가 제시하는 이 구절로부터 대체로 만들어진 형태의 기도를 그들이 곧 모두 사용하게 되었다.

126:3.4 (1389.7) 마침내, 예수는 가족의 각 식구가 즉석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리게 하려는 생각을 버렸다. 10월 어느 날 저녁에, 낮은 돌 식탁 위에 있는 작고 납작한 등불 옆에 앉아서, 가로 세로가 45 센티미터쯤 되는 한 조각의 반반한 백향목(柏香木) 판자 위에, 목탄 조각으로 기도문을 적었고, 그때부터 계속 이것은 표준 가족 기도가 되었다.

126:3.5 (1389.8) 이 해에 예수는 혼란스러운 생각으로 많이 고민하였다. 가족에 대한 책임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아버지의 일을 돌보라”는 지시에 응답하여 무슨 계획이라도 즉시 실행하려던 어떤 생각도 사실상 거의 없애버렸다. 땅에서 아버지의 가족을 지키는 것이 모든 다른 의무보다 우선해야 한다,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첫째 의무가 되어야 한다고 예수는 옳게 추리하였다.

126:3.6 (1390.1) 이 해가 지나는 동안에 예수는 이른바 “에녹서”에서 한 구절을 찾아냈는데, 이에 영향을 받아 나중에 유란시아 수여 사명을 위하여 “사람의 아들”이라는 용어를 호칭으로서 채택하게 되었다. 그는 유대인의 메시아 개념을 철저히 생각해 보았고 그런 메시아가 되지 않으리라 굳게 확신했다. 아버지의 민족을 몹시 돕고 싶어했지만, 외국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타도하기 위하여 자신이 유대인 군대(軍隊)를 이끌 것이라고는 결코 예상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결코 예루살렘에서 다윗의 왕좌에 앉지 않을 것을 알았다. 오직 유대 민족에게 영적 구원자나 도덕적 선생이 되는 것이 그의 사명이라 믿지도 않았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도, 일생의 사명은, 히브리 성서에 나타난 강렬한 소망과 메시아가 온다는 예언을 성취하는 것일 수 없었다. 적어도 유대인들이 이 선지자들의 예언을 이해하는 것과 달랐다. 마찬가지로, 그는 결코 선지자 다니엘이 묘사했던 사람의 아들로서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126:3.7 (1390.2) 그러나 세상의 선생으로 나설 때가 되었을 때, 자기를 무엇이라고 부를까? 그의 사명에 대하여 무엇을 주장해야 할까? 그의 가르침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를 무슨 이름으로 부를 것인가?

126:3.8 (1390.3) 이 모든 문제를 머리 속에서 이모저모 살피는 동안, 그는 나사렛의 회당 도서관에서, 그가 공부하고 있던 묵시록들 사이에서 “에녹서”라고 부르는 이 필사본을 찾아냈다. 옛날에 살았던 에녹이 그 책을 쓰지 않았음을 확실히 알았지만, 그 책은 그에게 매우 흥미를 자아낸 것이 드러났고, 그는 여러 번 다시 읽었다. 특별히 감명을 준 한 구절이 있었으니,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 용어가 나타난 구절이다. 이른바 이 에녹서의 저자(著者)는 이 사람의 아들에 대하여 더 이야기하고, 그가 땅에서 할 일을 적었는데, 인류에게 구원을 주려고 이 땅에 내려오기 전에, 이 사람의 아들은 그의 아버지, 만물의 아버지와 함께 하늘의 영광이 가득한 궁정을 거닐었다, 빈곤한 필사자들에게 구원을 선포하러 땅으로 내려오려고, 그가 이 모든 위엄과 영광을 등지었다고 설명했다. 이 구절들을 읽는 동안에 (이 가르침과 섞이게 된 동부 신비주의 가운데 많은 것이 그릇됨을 잘 알았다), 그는 마음 속에서 응답했고, 머리 속에서, 히브리 성서의 모든 메시아 예언 중에, 그리고 유대인 구원자에 대한 모든 이론 가운데 아무것도, 겨우 부분적으로 인정된 이 에녹서에 감춰진 바로 이 이야기처럼 그토록 진리에 가깝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때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하는 칭호로서 “사람의 아들”을 채택하기로 결심했다. 나중에 대중을 위하여 일을 시작했을 때, 그는 그대로 했다. 예수는 어김없이 진리를 알아보는 능력을 가졌고, 겉보기에 무슨 근원에서 쏟아져 나오든지, 조금도 서슴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였다.

126:3.9 (1390.4) 이때가 되어서, 앞으로 세상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많은 의문을 하나하나 정리하였지만, 그는 이 문제들에 관해서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가 유대인 메시아가 된다는 생각에 아직도 끈질기게 집착하였다.

126:3.10 (1390.5) 예수의 소년 시절에 이제 큰 혼란이 생겼다. 땅에서 이룰 사명, “아버지의 일을 돌보는 것,” 온 인류에게 아버지의 사랑하는 성품을 보여주는 것에 대하여 무엇인가 해답을 얻었으므로, 그는 민족의 구원자, 즉 유대인 선생이나 임금이 온다고 언급하는 성서의 여러 구절을 다시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이 예언들이 무슨 사건을 언급했는가? 그는 유대인이 아닌가? 혹은 유대인인가? 다윗의 집 출신인가, 아닌가? 어머니는 그렇다고 단언했고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고 판결을 내렸다. 예수는 자기가 그렇지 않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선지자들이 메시아의 본질과 사명을 혼동했는가?

126:3.11 (1391.1) 결국은, 어머니가 옳을 수도 있을까? 대부분의 문제에서 과거에 의견 차이가 생겼을 때 어머니가 옳았다. 그가 새로운 선생이고 메시아가 아니라면, 땅에서 사명을 수행하는 동안 예루살렘에 그러한 사람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그가 메시아를 알아볼 것인가? 더 나아가서, 이 유대인 메시아와 그는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가? 일생의 사명을 시작한 뒤에, 그는 가족과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 유대인 연방 및 종교와 가지는 관계는? 로마 제국과 그의 관계는? 이방인과 그 종교에 대해서는? 목수의 벤치에서 계속 일하며, 자신과 어머니와 배고픈 다른 여덟 동생의 입에 풀칠하기 위하여 힘들게 생활을 꾸려 나가면서, 이 중대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이 어린 갈릴리 사람은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살피고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126:3.12 (1391.2) 이 해가 저물기 전에, 마리아는 가족의 저축한 돈이 줄어드는 것을 깨달았다. 마리아는 비둘기 장사를 야고보에게 넘겼다. 곧 그들은 둘째 송아지를 샀고, 미리암의 도움을 입어 나사렛 이웃들에게 우유를 팔기 시작했다.

126:3.13 (1391.3) 예수가 깊이 생각에 잠기는 것, 기도하려고 언덕 꼭대기까지 자주 나들이하는 것, 그리고 때때로 예수가 떠올린 여러 가지 이상한 생각은 어머니를 속속들이 놀라게 했다. 어떤 때 어머니는 소년이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가, 결국은 그가 약속의 아이요, 어떤 면에서 다른 소년들과 다르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두려움을 가라앉히곤 했다.

126:3.14 (1391.4) 그러나 예수는 자기 생각을 모두 말하지 않는 것, 모든 생각을 세상에, 아니 자신의 어머니에게조차 내보이지 않는 것을 배웠다. 이 해부터 계속, 예수가 머리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밝히는 일이 꾸준히 줄어들었다. 다시 말해서, 보통 사람이 파악할 수 없는 일, 그로 하여금 특이하거나 보통 사람과 다르게 보이게 만들 것에 관하여 말하는 일이 적었다. 겉모습 어디를 보아도 그는 평범하고 전통적인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누군가가 그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기를 몹시 바랐다. 믿을 수 있고 비밀을 털어놓을 친구를 몹시 바랐지만, 그의 문제들은 너무 복잡하여 인간 친구들이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특별한 상황이 독특하여 그는 짐을 혼자 질 수밖에 없었다.

4. 회당에서 한 첫 설교

126:4.1 (1391.5) 만 열다섯 살이 되는 생일이 다가오자, 예수는 안식일에 회당 설교단에 정식으로 설 수 있었다. 연설할 사람들이 없을 때, 성서(聖書)를 읽어 달라고 전에 여러 번 요청을 받은 적이 있었으나, 이제 율법에 따라서 예배를 인도할 수 있는 날이 왔다. 따라서 열다섯 살 되는 생일이 지난 뒤 첫째 안식일에, 하잔은 회당의 아침 예배를 예수가 인도하도록 주선하였다. 나사렛의 신앙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였을 때, 이미 성서의 구절을 골랐으므로, 이 젊은이는 일어서서 읽기 시작했다:

126:4.2 (1391.6) “주 하나님의 영이 내게 다가오시니, 주가 내게 기름을 부으셨음이라. 그는 온유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싸매고, 포로가 된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영적으로 갇힌 자를 풀어 놓으라고 나를 보내셨도다. 하나님이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이 불공평 시정의 날을 선포하고,[1] [5] 통곡하는 자를 모두 위로하고, 저희에게 재 대신에 아름다움을, 통곡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슬픈 마음 대신에 찬양의 노래를 주어서, 저희가 올바른 나무라, 이것으로 주가 영광을 받도록 주가 심으신 것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126:4.3 (1392.1) “살 수 있도록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으라, 주, 만군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할지며, 성문(城門)에서 판결을 정하라. 어쩌면 주 하나님이 요셉의 남은 자손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126:4.4 (1392.2) “너희 자신을 씻고, 너희 자신을 깨끗이 할지니라. 내 눈앞에서 너희가 행하던 악을 던져 버리고, 악행을 그치고 선행하기를 배우라. 정의(正義)를 구하고 억압받는 자를 놓아 주라. 아비 없는 자를 보호하고 과부를 위해 간구하라.

126:4.5 (1392.3) “무엇을 가지고 내가 주 앞에 나아와서, 온 땅의 주 앞에 경배하리요? 태운 제물을 가지고, 한 살 된 송아지들을 가지고 내가 그 앞에 나아가리요? 산양 수천 마리나 양 1만 마리나 강처럼 많은 기름으로 주가 기뻐하실까? 내 허물 때문에 첫아들을, 내 혼의 죄 때문에 내 몸에서 난 열매를 드리리요? 아니라, 주가 우리에게 보이셨음이라. 아 사람들아, 무엇이 좋은가. 오직 공평하게 대하고 자비를 사랑하며 너희 하나님과 함께 겸손히 걷는 것밖에, 주가 너희에게 무엇을 요구하느냐?

126:4.6 (1392.4) “그러면 땅위의 둥근 하늘에 앉으시는 하나님을 너희가 누구와 견주겠느냐? 너희의 눈을 들어 이 모든 세상을 누가 창조했는가, 누가 그 무리들을 세어서 생기게 하며, 이름으로 저희 모두를 부르는가 보라. 위대한 힘으로 그는 이 모든 것을 행하며, 힘이 강한즉, 한 가지도 실패하지 않느니라. 그는 약한 자에게 힘을 주고, 지친 자에게 힘을 더하시니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음이로다. 절망하지 말지니, 내가 너희의 하나님인 까닭이라. 나는 너희에게 힘을 주겠고, 너희를 도우리라. 옳도다, 내 정의의 바른 손으로 내가 너희를 들어올리리니,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인 까닭이라. 나는 너희의 바른 손을 잡고 너희에게 이르리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를 도울 것임이라.

126:4.7 (1392.5) “그리고 주가 말씀하시되, 너는 나의 증인이요, 모두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영원자임을 알도록 내가 택한 나의 종이라. 나, 내가 주이니, 나 외에 아무 구원자가 없느니라.”

126:4.8 (1392.6) 이렇게 읽고 나서, 그는 앉았다.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렇게 품위 있게 그가 읽은 말씀을 깊이 생각했다. 그렇게 대단히 엄숙한 그의 모습을 마을 사람들이 본 적이 없었다. 그토록 열심이고 그렇게 진지한 그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남자답고 결의가 굳고, 그토록 권위 있는 그의 모습을 지켜본 적이 없었다.

126:4.9 (1392.7) 이 안식일 오후에, 예수는 야고보와 함께 나사렛 언덕으로 올라갔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두 개의 반반한 판자에 목탄으로 십계명을 그리스어로 썼다. 나중에 마르다는 이 판자들을 색칠하고 꾸몄고, 이것들은 오랫동안 야고보의 작은 작업 벤치 위에, 벽에 걸려 있었다.

5. 재정 문제와 싸우다

126:5.1 (1392.8) 차츰차츰 예수와 가족은 몇 년 전의 소박한 생활로 돌아왔다. 옷과 먹을 것조차 더 간소해졌다. 젖과 버터와 치즈는 풍부하게 있었다. 철마다 밭의 소산을 즐겼지만, 달이 지날 때마다 더욱 검소하게 사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아침 식사는 아주 간단했고, 제일 좋은 음식은 저녁 식사를 위해서 남겨 두었다. 하지만 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가난은 사회에서 열등함을 의미하지 않았다.

126:5.2 (1392.9) 이미 이 소년은 그 시절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거의 통달하고 있었다. 집과 들과 작업장에서 얼마나 삶을 잘 이해했는가는 나중에 그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며, 그 가르침은 온갖 단계의 인간 체험을 피부로 겪었음을 아주 넉넉히 드러낸다.

126:5.3 (1392.10) 나사렛 하잔은 예수가 위대한 선생,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이름난 가말리엘의 후계자가 되리라는 믿음을 계속 지녔다.

126:5.4 (1393.1) 겉보기에, 예수의 일생을 위한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된 듯하였다. 지금 펼쳐진 사태를 보건대 앞날은 밝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고 낙심하지 않았다. 현재의 임무를 잘 수행하였고, 생애의 정거장에서 눈앞에 닥친 여러 책임을 충실하게 처리하면서, 하루하루 계속 살았다. 예수의 일생은 낙심한 모든 이상주의자에게 영구한 위로가 된다.

126:5.5 (1393.2) 날품팔이하는 보통 목수의 수입은 천천히 줄어들었다. 이 해의 마지막이 되어서, 예수는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해서 하루에 약 25센트에[2] [6] 해당하는 돈을 벌었다. 다음 해가 되어서, 회당의 부과금과 반 세겔의 성전 세금은커녕, 국민 세금을 물기에도 벅찼다. 이 해에, 세리는 예수한테서 여분의 세금을 짜내려고 애썼고, 하프를 가져가겠다고 을러대기도 하였다.

126:5.6 (1393.3) 그리스어 성서의 사본이 발견되어 세리에게 빼앗길까 두려워서, 예수는 열 다섯 살 되는 생일에, 주께 바치는 성년(成年) 헌물로서 성서를 나사렛 회당 도서관에 바쳤다.

126:5.7 (1393.4) 사고로 죽었을 때 요셉이 받을 돈에 대하여 소송이 있었고, 헤롯에 대하여 취해진 상소에 대하여 헤롯의 판결을 받으려고 세포리스로 갔을 때, 예수는 열다섯 살 되던 해 최고의 충격을 받았다. 전에 세포리스에서 회계원이 하찮은 금액을 제안했을 때, 예수와 마리아는 상당히 큰 돈을 받으리라 희망했다. 요셉의 형제들은 헤롯 본인에게 상소(上訴)했고, 이제 예수는 궁전에서 서서, 아버지는 돌아가셨을 때 한 푼도 받을 것이 없었다고 헤롯이 선포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한 부당한 판결 때문에, 예수는 결코 다시는 헤롯 안티파스를 신뢰하지 않았다. 한때 헤롯을 “그 여우”라고 넌지시 비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26:5.8 (1393.5) 이 해와 그 뒤 몇 년 동안에 목수의 벤치 가까이에서 일했기 때문에 예수는 카라반 여객들과 섞이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가족의 소모품 상점은 이미 삼촌에게 넘어갔고, 예수는 전적으로 집에 있는 작업장에서 일했으며, 거기서 가족을 보살피는 마리아를 도우려고 가까이 있었다. 이 무렵에, 야고보를 낙타 휴식소에 보내서 세계 사정에 관한 정보를 모았고, 이렇게 그날의 소식을 얻으려고 애썼다.

126:5.9 (1393.6) 자라서 어른이 되면서, 그는 그 전과 그 후 시대에 보통 젊은이들이 겪었던 모든 갈등과 혼동을 겪었다. 가족을 부양하는 벅찬 체험은 게으른 명상이나 신비적 경향에 빠질 만큼 지나친 여유를 없애는 확실한 조치였다.

126:5.10 (1393.7) 이 해에 예수는 집 바로 북쪽에, 상당히 큰 땅을 빌려서 가족의 채소밭으로 나누어 주었다. 나이 많은 아이들은 저마다 개인의 밭이 있었고, 농사를 잘 지으려고 열심히 경쟁했다. 맏형은 채소를 가꾸는 철에 밭에서 날마다 함께 얼마큼 시간을 보냈다. 밭에서 동생들과 같이 일하는 동안, 번거로운 생활을 피해서 자유와 해방을 누릴 수 있는 시골에서, 모두가 농장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꿈을 예수는 여러 번 품었다. 하지만 그들은 시골에서 자라고 있지 않았다. 이상주의자일 뿐 아니라 철저히 실용적인 소년이었기 때문에, 문제를 발견하는 대로 영리하고 힘차게 처리해 나갔고, 자신과 가족을 닥친 상황의 현실에 적응시키며, 개별 및 집단의 소망을 가능한 최대로 만족시키도록 그들의 조건을 적응하려고 있는 힘을 다하였다.

126:5.11 (1393.8) 헤롯의 궁전에서 일한 대가로 아버지가 받을 상당한 돈을 그들이 받을 수 있다면, 작은 농장 하나 사는 것을 보장할 만큼 넉넉한 밑천을 모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한때 예수는 실낱 같은 희망을 가졌다. 그는 가족을 시골로 이주시키는 이 계획을 정말로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헤롯이 요셉이 받을 돈을 한 푼도 내주지 않으려 했을 때, 시골에서 집을 소유하는 꿈을 버렸다. 그 형편대로, 농장 생활의 체험을 많이 즐기려고 그럭저럭 애썼고, 이제 비둘기 외에도, 송아지 세 마리, 양 네 마리, 닭 한 떼, 당나귀 한 마리, 개 한 마리가 있었다. 잘 통제된 경영 계획 속에서, 작은 꼬마들까지도 수행해야 될 정규 임무가 있었고, 이것이 이 나사렛 가족의 가정 생활의 특징이었다.

126:5.12 (1394.1) 열 다섯 살이 되던 이 해가 저물 때, 예수는 인간 존재에서 위험하고 어려운 그 기간을 거쳤는데, 이때는 온순한 어린이 시절과 다가오는 성년기를 의식하는 사이의 과도기였고, 성년기에는 고귀한 인품을 기르는 상급 체험을 얻기 위하여 책임과 기회가 늘어난다. 머리와 몸이 자라는 기간은 끝났고, 이제 이 나사렛 젊은이의 진짜 생애가 시작되었다.

제 127 편 청년 시절

유란시아서

제 127 편

청년 시절

127:0.1 (1395.1)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예수는 자신이 큰 가족의 가장(家長)이자 유일한 기둥임을 깨달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몇 년 안에, 재산이 모두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자, 그는 갈수록 자신이 이전에 존재했음을 의식하게 되었다. 동시에,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사람의 자녀들에게 드러내는 명백한 목적을 위하여 그가 땅에서 육체를 입고 있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깨닫기 시작했다.

127:0.2 (1395.2) 이 세상이나 다른 어느 세계에서 살았던 어떤 젊은이도, 예수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까다로운 문제를 풀어야 할 경우를 당하지 않았고, 앞으로 언젠가 살 어떤 젊은이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유란시아의 어떤 젊은이도, 열 다섯에서 스무 살까지 그 벅찬 기간에 바로 예수가 견딘 것보다 사람을 시험하는 갈등이나 쓰라린 형편을 겪으라고 요구되지 않을 것이다.

127:0.3 (1395.3) 악에 시달리고 죄로 인하여 어지러워진 세상에서 이 청년기 시절을 사는 실제 체험을 이렇게 맛보았으니까, 사람의 아들은 네바돈의 모든 영역에 있는 젊은이의 생활 체험에 대하여 넉넉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지역 우주에서 두루, 어느 시대나 어느 세계에서도, 곤궁에 빠지고 어쩔 줄 모르는 청년들에게 영원히, 공감하는 친구가 되었다.

127:0.4 (1395.4) 느리지만 확실하게, 실제로 체험을 겪음으로, 이 신다운 아들은 자기 우주의 군주가 될 권리를 얻고 있다. 그 군주는 지역 우주의 어떤 세계에서 창조된 지성 존재도 도전할 수 없는 최고 통치자요, 어느 시대에 어떤 등급의 성격 자질과 체험을 가진 존재에게도 공감하는 벗이다.

1. 열여섯 살 되던 해 (서기 10년)

127:1.1 (1395.5) 육신화된 아들은 아기 시절을 지났고, 파란이 없는 어린 시절을 겪었다. 다음에 어린 시절과 청년기 사이에 시험을 거치는 벅찬 과도기에서 솟아나왔다. 청년 예수가 되었다.

127:1.2 (1395.6) 이 해에는 몸이 완전히 성장했다. 그는 남자답고 잘 생긴 젊은이였다. 더욱 차분하고 심각해졌어도 친절하고 이해심이 있었다. 눈은 친절하지만 꿰뚫어보는 눈이었고, 빙그레 웃는 웃음은 언제나 사람을 끌어들이고 안심시켰다. 목소리는 아름답지만 위엄이 있었고, 인사는 따듯해도 꾸밈이 없었다. 언제나, 가장 평범한 사람들과 만날 때에도 사람과 신, 이 이중 성질의 분위기를 증거하는 듯했다. 그는 공감하는 친구이자 권위 있는 선생, 이 두 가지를 합친 성품을 언제나 나타냈다. 이런 성격의 특징은 일찍부터 이 청년기 시절에도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127:1.3 (1395.7) 신체가 강하고 튼튼한 이 젊은이의 인간 지능도 또한 완전히 발달하였다. 인간으로서 생각하는 충분한 체험을 겪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지적 성장 능력을 충분히 얻었다. 건강하고 균형이 잘 잡힌 몸, 날카롭고 분석적인 머리, 친절하고 이해심 있는 기질, 얼마큼 변동이 있어도 적극적인 기질을 소유했고, 이 모두가 튼튼하고 놀랍고 매력 있는 인격으로 구성되고 있었다.

127:1.4 (1396.1) 시간이 지나자, 어머니와 동생들은 그를 이해하기가 갈수록 더 어렵게 되었다. 그의 말에 갈피를 잡지 못했고 그의 행동을 오해했다. 모두가 맏형의 생애를 이해할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이는 전에 그가 유대 민족의 구원자가 될 운명을 가졌다고 생각하도록 어머니가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족의 비밀이라고 넌지시 일러주는 말을 마리아에게서 들은 뒤에, 예수가 모든 그러한 생각과 의도를 솔직하게 부인하려 했을 때 그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가 상상해 보라.

127:1.5 (1396.2) 이 해에 시몬은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또 집 한 채를 팔 수밖에 없었다. 야고보는 이제 세 여동생을 가르치는 책임을 맡았고, 그 중에 둘은 어려운 공부를 할 나이가 되었다. 좀 자라자마자, 룻은 미리암과 마르다의 손에 맡겨졌다. 유대인 가정의 여자 아이들은 보통,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예수는 여자가 남자와 똑같이 학교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어머니도 찬성했다), 회당 학교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그들을 위해서 가정 학교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127:1.6 (1396.3) 이 해 내내, 예수는 작업 벤치 가까이에 묶여 일했다. 다행히, 할 일이 풍부했고, 그가 만든 물건은 품질이 아주 우수해서, 그 지역에 일거리가 아무리 뜸해도 그는 결코 놀고 지내지 않았다. 이따금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야고보가 돕곤 했다.

127:1.7 (1396.4) 이 해가 저물 때가 되자, 그는 가족을 양육하고 식구들이 결혼하는 것을 본 뒤에,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그리고 하늘 아버지를 세상에 드러내는 자로서, 일을 공식으로 시작하겠다고 거의 마음먹었다. 자신이 사람들이 기대하는 유대인의 메시아가 되지 않을 것을 알았고, 이 문제를 어머니와 상의해 보아야 거의 쓸데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품든지 그대로 버려두기로 작정했는데, 이는 과거에 그가 무슨 말을 일러주어도 어머니에게 거의 또는 도무지 효과가 없었고, 아버지가 말로 결코 어머니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다는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이 해부터 계속, 그는 어머니나 어떤 다른 사람에게도, 이 문제들에 관하여 말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의 사명은,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땅에서 사는 누구도 충고해줄 수 없는 그렇게 특이한 것이었다.

127:1.8 (1396.5) 젊기는 했어도 그는 가족에게 진정한 아버지 노릇을 하였다. 어린것들과 함께 있는 대로 시간을 보냈고, 그들은 참으로 그를 사랑했다. 어머니는 그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고 슬픔에 잠겼다. 그들이 아주 즐거워하며 계획했던 대로 예루살렘에서 랍비들과 함께 공부하는 대신에, 가족을 위하여 생활비를 벌면서, 목수의 벤치에서 하루하루 수고하고 있는 것이 어머니는 서러웠다. 아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이 있었어도 마리아는 아들을 사랑했고, 가정의 책임을 그가 기꺼이 어깨에 진 것을 대단히 고마워하였다.

2. 열일곱 살 되던 해 (서기 11년)

127:2.1 (1396.6) 이 무렵에, 특히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 로마에 세금 내는 것을 반대하는 반란에 찬성하는 어지간히 큰 소동이 있었다. 머지 않아 열심당이라고 부르게 될, 강력한 민족주의 당파가 생기고 있었다. 열심당원은 바리새인과 달리, 메시아가 오는 것을 기다리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치적 투쟁을 통해서 끝장을 보자고 제안했다.

127:2.2 (1396.7) 예루살렘에서부터 한 집단의 조직자들이 갈릴리에 도착했고, 나사렛에 이르기까지 크게 진전을 보았다. 예수를 만나보려고 왔을 때, 그는 그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질문을 많이 던졌지만, 그 당에 들어가기를 거절했다. 참가하지 않는 까닭을 충분히 밝히려 하지 않았고, 이 거절은 나사렛의 젊은 동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그 운동에 불참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127:2.3 (1397.1) 마리아는 아들의 입당(入黨)을 유인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그를 한 치도 움직이게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자기의 요청에 따라서 민족주의자 운동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불복종이요, 예루살렘에서 돌아오고 나서 부모에게 복종하겠다고 한 서약을 어기는 것이라 비추어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렇게 넌지시 하는 말에 답하여 그는 어머니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고,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어머니, 어찌 그러실 수 있나이까?” 마리아는 자신의 말을 취소하였다.

127:2.4 (1397.2) 예수의 삼촌들 중에 하나가 (마리아의 동생 시몬) 이 무리에 이미 가담했고, 나중에 갈릴리 분과의 장교가 되었다. 몇 년 동안 예수와 그 삼촌 사이에는 무언가 거리가 있었다.

127:2.5 (1397.3) 그러나 나사렛에서 소동이 일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관한 예수의 태도는 그 도시의 유대인 젊은이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켰다. 반쯤은 민족주의자 조직에 가담했고, 나머지 반은 좀더 온건한 애국자로 이루어진 반대 집단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예수가 지도자가 되기를 기대했다. 가족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구실로 탄원하면서 그에게 내민 명예를 물리쳤을 때, 모두가 그 책임을 인정했지만 그들은 놀랐다. 그러나 아직 상황은 더욱 까다로워졌는데, 당장에, 이방인들에게 돈 빌려 주는 사람, 이삭이라는 어느 부자 유대인이 나서서, 예수가 연장을 내려놓고 이 나사렛 애국자들의 지도를 맡는다면, 예수의 가족을 부양하겠다고 나섰다.

127:2.6 (1397.4) 그때 열일곱이 채 되지 않은 예수는 일생의 초기에 가장 아슬아슬하고 어려운 한 상황에 부딪쳤다. 애국 문제는, 특히 세금을 걷는 외국 억압자들 때문에 까다롭게 될 때, 언제나 영적 지도자들이 처신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경우에 로마에 항거하는 이 모든 선동에 유대 종교가 관련되었기 때문에, 두 배나 어려웠다.

127:2.7 (1397.5) 예수의 처지는 더욱 어렵게 되었는데, 어머니와 삼촌, 그리고 동생 야고보조차, 모두 민족주의자 운동에 합세하라고 밀었기 때문이다. 나사렛의 똑똑한 유대인은 모두 가담했고, 아직 그 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청년들은 예수가 생각을 바꾸는 순간에 가담하려고 했다. 온 나사렛에서 현명한 상담자가 겨우 한 사람 있었으니, 나이 든 선생 하잔이었다. 나사렛의 시민 위원회가 전에 대중에게 호소한 것에 대하여 대답을 요구하러 올 때 그들에게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그에게 조언을 주었다. 예수의 젊은 나이를 통해서, 이번이 바로 처음으로 의식해서 대중 전략에 의존한 때였다. 이때까지는 언제나, 상황을 밝히려고 진실을 솔직하게 말하는 방법을 썼지만, 지금은 진실을 있는 그대로 선언할 수 없었다. 자기가 사람보다 더 높은 존재라고 털어놓을 수 없었고, 더 성숙한 나이에 이르기까지 그를 기다리는 사명에 대하여 그의 생각을 밝힐 수 없었다. 이런 제한이 있었는데도, 그의 신앙심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직접 도전을 받고 있었다. 가족은 소동에 말려들었고, 젊은 친구들은 파가 갈라졌으며, 마을의 유대인 무리 전부가 떠들썩했다. 이 모두가 그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다니! 이 종류의 소동은커녕, 어떤 종류의 문제라도 일으킬 의도가 전혀 없지 않았는가.

127:2.8 (1397.6) 무엇인가 해야 했다. 자기의 처지를 설명해야 했고, 용감하게, 외교적으로, 모든 사람은 아니라도 많은 사람의 마음에 흡족하게 이 일을 해냈다. 그는 처음에 탄원했던 구실을 고수했다. 첫째 의무는 가족에 대한 것이요, 과부가 된 어머니와 여덟 동생은 겨우 돈이 살 수 있는 것―물질적 생활 필수품―보다 더한 것이 필요하다, 가장의 보살핌과 지도를 받을 권리가 있다, 맑은 양심에 비추어서, 모진 사고가 그에게 밀어붙인 의무에서 자신을 해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를 기꺼이 놓아주겠다고 하는 어머니와 맨 위 동생에게 감사를 표시했지만, 가족을 물질적으로 부양하기 위해서 앞으로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오든지 상관 없이, “돈은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고 결코 잊어서 안될 말을 하면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가족을 떠날 수 없다고 되풀이하여 말했다. 이 연설을 하는 과정에서, 예수는 “일생의 사명”에 대하여 몇 번 분명치 않게 언급했지만, 그것이 군사적 관념과 일치하든 않든 상관 없이, 가족에 대한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할 수 있도록, 생애의 모든 다른 것과 함께, 일생의 사명도 포기했다고 설명했다. 나사렛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가족에게 좋은 가장이었음을 잘 알았다. 이것은 모든 고귀한 유대인의 마음에 아주 가까이 와 닿는 문제였기 때문에, 예수의 탄원은 말씀을 듣던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그에게 공감하는 반응을 일으켰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 더러는 야고보가 한 연설에 마음이 풀어졌고, 계획에 없었으나 이때 그는 한바탕 연설하였다. 바로 그날, 하잔은 야고보에게 연설을 미리 연습시켰지만 그것은 그들의 비밀이었다.

127:2.9 (1398.1) 야고보는 그가 (야고보) 가족을 위하여 책임을 질 만큼 나이 들었다면, 예수가 민족을 해방하는 일을 도우리라 확신한다, 그들이 예수를 “우리와 함께, 우리의 가장과 선생으로 남아 있도록 허락한다면, 여러분은 요셉의 가족에서 지도자를 하나만 얻는 것이 아니라, 곧 충성스러운 민족주의자 다섯 명을 얻으리이다, 왜냐하면, 우리 가장인 형님의 지도를 받고, 자라서 우리 나라에 봉사하려고 나설 소년이 다섯이나 있지 않나이까?”하고 말했다. 그 소년은 이렇게, 아주 긴장되고 아슬아슬한 형편을 무척 즐거운 종말로 이끌었다.

127:2.10 (1398.2) 위기는 얼마 동안 그쳤지만, 결코 이 사건은 나사렛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선동이 계속되었고, 예수는 다시 널리 총애를 받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감정이 갈라진 것은 결코 충분히 회복되지 않았다. 이것이, 그 뒤의 다른 사건들로 말미암아 확대되어, 예수가 후일에 가버나움으로 이사한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이때부터 나사렛은 사람의 아들에 대해서 대립된 감정을 유지했다.

127:2.11 (1398.3) 야고보는 이 해에 학교를 졸업했고 집에 있는 목수 작업장에서 정식 노동자로 일을 시작했다. 그는 연장을 솜씨 있게 사용하는 노동자가 되었고 이제 멍에와 호미를 만드는 일을 도맡았다. 한편 예수는 건물 마무리 손질과 전문적인 가구(家具) 일을 더 하기 시작했다.

127:2.12 (1398.4) 이 해에 예수는 머리 속에서 생각을 많이 정리하였다. 차츰차츰 신과 인간의 성품을 한데 모았고, 자신의 결심으로, 그리고 그에게 깃드는 훈계자의 도움만 얻어서, 머릿속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이 모든 일을 해냈다. 수여 아들이 오신 어느 세상에 사는 어떤 정상 필사자도 바로 그러한 훈계자를 머리 속에 가지고 있다. 이제까지 한 사자가 방문한 것을 빼고, 아무런 초자연적 일이 이 젊은이의 생애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형 이마누엘이 그의 사자를 파송했는데, 그는 예루살렘에서 밤에 한 번 예수에게 나타났다.

3. 열여덟 살 되던 해 (서기 12년)

127:3.1 (1398.5) 이 해가 지나는 동안, 집과 뜰을 제쳐놓고 모든 가족 재산이 처분되었다. 이미 저당 잡힌 가버나움 재산의 마지막 일부가 (다른 한 재산에 있는 지분을 빼고) 팔렸다. 수익금은 세금을 내기 위해서 쓰였고, 야고보에게 새 연장을 얼마큼 사 주기 위해서, 또 카라반 휴식처 가까이에 있는, 가족의 오래 된 소모품 및 수선 가게의 지불금을 내는 데 쓰였다. 야고보가 집의 작업장에서 일하고 집 근처에서 마리아를 도울 만큼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예수는 이제 이 가게를 다시 사자고 제안했다. 당분간 재정의 압박이 이처럼 줄어들었기 때문에, 예수는 야고보를 유월절 예식에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예루살렘에 하루 일찍 올라갔고 두 사람만 사마리아의 길로 갔다. 그들은 걸어갔고 아버지가 5년 전에 비슷한 여행길을 가면서 가르쳤던 것처럼, 가는 길에 예수는 야고보에게 역사적 장소들에 대하여 일러주었다.

127:3.2 (1399.1) 사마리아를 지나가면서, 그들은 많은 낯선 광경을 보았다. 이 여행길에서 개인ㆍ가족ㆍ국가의 여러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야고보는 대단히 종교적 부류의 소년이었다. 예수가 일생의 할 일에 대하여 무슨 계획이 있는가 거의 알지 못하였고 그에 대하여 어머니와 완전히 같은 생각을 갖지는 않았지만, 예수가 자기의 사명을 시작할 수 있도록 그가 가족을 위해서 책임을 맡을 수 있을 때가 오기를 그는 기대하였다. 예수가 그를 유월절 예식에 데리고 가는 것을 그는 무척 고맙게 여겼다. 그리고 그들은 여느 때보다 더 자세히 앞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127:3.3 (1399.2) 사마리아를 통해서 여행하는 동안에, 특히 베델에서, 그리고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마실 때, 예수는 많이 생각했다. 동생과 함께 그는 아브라함ㆍ이삭ㆍ야곱의 전통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야고보가 바야흐로 구경하려 하는 것을 위해서 그를 준비시키려고 많이 애썼고, 그래서 자신이 성전을 처음 방문했을 때 겪었던 그러한 충격을 줄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야고보는 이 여러 광경 가운데 어떤 것에 그다지 예민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사제들이 건성으로 마음에 없이 임무를 수행하는 태도에 대하여 논평했지만, 대체로 예루살렘 체류를 크게 즐거워했다.

127:3.4 (1399.3) 예수는 유월절 저녁을 먹으려고 야고보를 베다니로 데리고 갔다. 시몬은 이미 선조들과 함께 묻혔다. 성전에서 희생 양을 가져왔기 때문에, 예수는 유월절 가족의 가장으로서 이 가정을 주관하였다.

127:3.5 (1399.4) 유월절 저녁 식사 뒤에, 마리아는 야고보와 함께 이야기하려고 앉았고, 한편 마르다와 나사로와 예수는 밤 늦게까지 함께 이야기했다. 다음 날 그들은 성전 예배에 참석했고, 야고보는 이스라엘 연방에 가입이 허락되었다. 그날 아침, 성전을 보려고 올리브 산마루에서 멈추었을 때, 야고보가 놀라워하며 감탄하는 동안, 예수는 잠자코 예루살렘을 바라보았다. 야고보는 형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다시 베다니로 돌아갔다. 다음 날, 집을 향해 떠났을 터이지만, 야고보는 선생들의 강론을 듣고 싶다고 설명하면서, 성전을 찾아보려고 돌아가기를 고집하였다. 이것은 참말이었지만, 가슴 속에 몰래, 어머니의 말씀을 들은 대로, 그는 예수가 토론에 참여하는 것을 듣고 싶어했다. 따라서 그들은 성전에 가서 토론을 들었지만, 예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인간이자 하나님인 그의 깨어나는 지성에 모두가 시시하고 하찮게 보였다―그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을 뿐이었다. 야고보는 예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실망했다. 그가 묻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내 때가 아직 오지 않았느니라.”

127:3.6 (1399.5) 이튿날, 그들은 예리고와 요단강 유역을 거쳐 집을 향해 길을 떠났고, 그가 열세 살이었을 때 이 길로 전에 여행한 것을 포함해서, 길가에서 여러 가지 일을 이야기했다.

127:3.7 (1399.6) 나사렛으로 돌아와서, 예수는 가족의 낡은 수선 가게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날마다 나라의 모든 지역과 둘러싼 여러 지방에서 온 숱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어 크게 즐거워했다. 예수는 참으로 사람―그저 보통 사람들―을 사랑했다. 매달 그 가게에 대하여 지불금을 냈고, 야고보의 도움을 얻어서, 줄곧 가족을 부양했다.

127:3.8 (1399.7) 1년에 몇 번, 방문객들이 이렇게 성서를 읽으려고 회당에 오지 않았을 때, 예수는 계속 회당에서 안식일 성서를 읽었고, 여러 번 교과에 대하여 논평했지만, 논평이 필요 없는 구절을 보통 골랐다. 그는 재능이 있었고, 한 구절이 다른 구절에 빛을 던지도록, 여러 구절의 읽는 순서를 짜 맞추었다. 날씨가 허락하는 한, 안식일 오후에 자연 속을 걸으려고 동생들을 데리고 나가기를 거른 적이 없었다.

127:3.9 (1400.1) 이 무렵에, 하잔은 철학 토론을 하는 젊은 남자들의 모임을 시작했다. 이것은 다른 회원들의 집에서, 또 가끔 자기 집에서 만났는데, 예수는 이 무리의 특출한 회원이 되었다. 이 방법으로, 최근의 민족주의자 논쟁이 있을 때 지역에서 잃었던 위신의 얼마큼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127:3.10 (1400.2) 그의 사회 생활은 제한되었어도 이를 완전히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그는 나사렛의 젊은 남녀 사이에서 따듯이 대하는 친구와 굳건한 숭배자가 여럿 있었다.

127:3.11 (1400.3) 9월에, 엘리자벳과 요한이 나사렛 가정을 찾아보려고 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요한은 목수 일이나 어떤 다른 직종의 일에 착수하도록 나사렛에 남아 있으라고 예수가 조언하지 않으면, 농사를 짓고 양 기르는 일을 시작하려고 유대의 고지로 돌아갈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나사렛 가정이 실지로 한 푼도 없음을 몰랐다. 마리아와 엘리자벳이 자기네 아들들에 관하여 이야기하면 할수록, 두 젊은이가 같이 일하고 서로를 더 보는 것이 좋겠다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127:3.12 (1400.4) 예수와 요한은 함께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대단히 사사롭고 개인적인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그들이 해야 할 일로 “하늘 아버지가 부르신” 뒤에, 대중에게 봉사하면서 만날 때까지 서로 다시 만나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사렛에서 본 것 때문에 요한은 집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서 수고해야 한다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자기가 예수 일생의 사명에서 한 몫을 하리라고 확신하게 되었지만, 여러 해 동안 예수가 집안을 돌보는 일에 바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네 작은 농장을 돌보고 어머니의 필요를 보살피는 일을 훨씬 더 만족스럽게 여겼다. 사람의 아들이 요단강 물가에서 세례를 받으려고 나선 그날까지 요한과 예수는 다시 서로 만나지 않았다.

127:3.13 (1400.5) 이 해의 12월 3일, 토요일 오후에, 두 번째로 죽음이 이 나사렛 가족에게 덥쳤다. 아기 남동생, 꼬마 아모스가 한 주 동안 고열로 앓다가 죽었다. 이 슬픈 때를 유일한 기둥인 맏아들과 함께 보내고 나서, 마리아는 마침내 예수를 가족의 참 가장으로 완전히 인정했다. 그는 참으로 자격 있는 가장이었다.

127:3.14 (1400.6) 4년 동안, 생활 수준은 꾸준히 떨어졌다. 그들은 해마다 깊어지는 가난의 아픔을 느꼈다. 이 해가 저물 때가 되어서, 모든 벅찬 싸움에서 가장 어려운 체험 중 하나에 부닥쳤다. 야고보는 아직도 많은 돈을 벌기 시작하지 않았고, 모든 다른 것 위에 장례비는 집안을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는 초조하고 슬퍼하는 어머니에게 단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어머니, 슬퍼하는 것이 우리를 돕지 아니하리이다.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고, 어머니의 웃음이 어쩌면, 우리가 더 잘 하도록 격려할 수도 있나이다. 우리는 하루하루, 더 좋은 날이 앞에 있다는 희망 때문에 이 일을 할 힘을 얻나이다.” 흔들리지 않고 실용적인 그의 낙천적 태도는 참으로 쉽게 번졌다. 아이들은 모두 더 좋은 때와 좋은 것을 기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살았다. 가난이 사람을 침울하게 만드는데도, 희망에 찬 이러한 용감한 자세는 튼튼하고 고귀한 인격을 개발하는 데 힘차게 기여하였다.

127:3.15 (1400.7) 예수는 바로 눈앞에 닥친 과제에, 머리와 혼과 몸의 온 힘을 효과 있게 동원하는 능력을 소유했다. 풀고 싶어 하는 그 한 가지 문제에, 깊이 생각하는 머리를 집중할 수 있었고, 이것은 지칠 줄 모르는 인내와 더불어, 어렵게 필사자로 존재하며 거치는 시련을 차분히 견딜 수 있게, 마치 “보이지 않는 분을 보고” 있는 것처럼 살 수 있게 만들었다.

4. 열아홉 살 되던 해 (서기 13년)

127:4.1 (1401.1) 이때가 되어서, 예수와 마리아는 사이가 훨씬 더 좋았다. 그를 아들로 여기는 일이 적었다. 마리아의 눈에, 그는 아이들에게 오히려 아버지처럼 되었다. 나날의 생활은 실제적이고 눈앞에 닥친 문제로 가득하였다. 그의 일생의 일에 관하여 말하는 일이 뜸해졌는데,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남자 아이 넷과 여자 아이 셋으로 이루어진 가족을 부양하고 기르는 데 그들이 공통으로 모든 생각을 쏟았기 때문이다.

127:4.2 (1401.2) 이 해가 시작되자, 아이를 훈련하는 그의 방법―즉 악을 행하지 말라고 금하는 옛 유대인 방법 대신에 선을 행하라는 적극적 명령―을 받아들이도록 예수는 어머니를 완전히 설득했다. 집에서, 그리고 대중을 가르치는 생애를 통해서 내내, 예수는 적극 형태의 훈계를 변함없이 이용했다. 언제 어디서나 말했다. “너희는 이를 행하라―저를 행해야 하느니라.” 옛날의 금기로부터 내려오는, 금지 형태의 가르침을 결코 이용하지 않았다. 금지함으로 악을 강조하는 일을 삼가고, 한편 선을 행하라 명령함으로 선한 것을 높이 올렸다. 이 집안에서 기도 시간은 가족의 복지에 관계되는 어떤 것이나, 무엇이든지 토론하는 기회였다.

127:4.3 (1401.3) 그렇게 어릴 때부터 동생들에게 현명한 훈련을 시작했기 때문에, 즉석에, 진심으로 복종을 얻는 데 거의 또는 결코 아무 벌이 필요하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유다였고, 여러 경우에 집안의 규칙을 어긴 것 때문에 벌을 내리는 것이 필요했다. 세 번이나, 가족의 행동 규칙을 일부러 위반했다고 자백했기 때문에 유다를 벌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명되었는데 그때 벌은 그보다 나이 먹은 아이들이 만장 일치로 선포하여 정해졌고, 벌을 주기 전에 바로 유다가 찬성하였다.

127:4.4 (1401.4) 예수는 무슨 일을 행하든지 대단히 규율과 체계가 있었지만, 관리적인 모든 판결은 신선하게 해석하는 신축성이 있었고 개인에 맞게 적용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 가장인 형을 움직이는 정의(正義)의 정신으로 아이들 모두에게 크게 감명을 주었다. 결코 멋대로 동생들을 징계하지 않았고, 그렇게 한결같은 공평함과 개인적 배려로 말미암아 예수는 가족 모두에게 무척 소중하게 되었다.

127:4.5 (1401.5) 야고보와 시몬은, 싸우기 좋아하고 때때로 성내는 놀이 친구들을 설득과 무저항으로 달래는 예수의 계획을 따르려고 애쓰면서 자랐고, 상당히 성공했다. 그러나 요셉과 유다는, 집에서 그런 가르침에 머리를 끄덕였지만, 친구들에게 공격을 받았을 때 자신의 방어를 서둘렀다. 특히, 유다는 이 가르침의 정신을 위반한 잘못이 있었다. 그러나 무저항은 가족의 규칙은 아니었다. 개인에 관한 가르침을 어기는 데는 아무런 벌이 따르지 않았다.

127:4.6 (1401.6) 대체로, 아이들은 모두, 특히 여자아이들은, 애정 있는 아버지의 경우에 하는 것과 똑같이, 예수에게 어린 시절의 어려움을 의논하고 속을 털어놓았다.

127:4.7 (1401.7) 야고보는 안정되고 성질이 차분한 젊은이로 자라고 있었지만, 예수처럼 영적 성향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요셉보다 공부를 훨씬 더 잘하는 학생이었고, 요셉은 충실한 일꾼이긴 했어도 영적 생각이 더욱 부족했다. 요셉은 꾸준히 일하는 사람이었고, 다른 아이들의 지적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시몬은 착한 생각을 가진 소년이었으나 너무나 꿈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살면서 안정된 직업을 쉽게 가지지 못했고 예수와 마리아에게 상당한 걱정거리였다. 그러나 언제나 선하고 좋은 의도를 가진 소년이었다. 유다는 걸핏하면 싸우는 사람이었다. 가장 높은 이상을 가졌지만, 성질이 안정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각오와 공격성 모두를 더 많이 가졌지만, 어머니가 가진 균형 감각과 신중함이 상당히 모자랐다.

127:4.8 (1402.1) 미리암은 고귀한 것과 영적인 것을 날카롭게 이해하는, 안정되고 분별 있는 딸이었다. 마르다는 생각과 행동이 느렸어도 아주 믿을 만하고 유능한 아이였다. 아기 룻은 집안에서 햇빛 같은 사람이었다. 생각 없이 말을 해도 아주 마음이 진지했다. 가장인 큰 오빠를 그 아이는 거의 숭배하듯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룻의 버릇을 잘못 들이지는 않았다. 룻은 예쁜 아이였지만, 미리암처럼 잘생기지는 않았고, 미리암은 그 도시에서 첫째 가는 미인은 아니라도, 그 가족 안에서 미인이었다.

127:4.9 (1402.2)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예수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종교의 다른 여러 단계에 관계된 가족 교육과 관습을 자유화하고 개량하려고 많이 수고했고, 이 모든 변화에 마리아는 진심으로 찬성했다. 이때가 되어서, 예수는 의문의 여지 없이,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127:4.10 (1402.3) 이 해에 유다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이 비용을 치르기 위해서 예수가 하프를 파는 것이 필요했다. 이렇게 마지막 오락의 즐거움이 사라졌다. 머리가 피곤하고 몸이 지쳤을 때 하프 켜기를 무척 좋아했지만, 최소한 세리(稅吏)에게 그 하프를 빼앗기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는 위로를 얻었다.

5. 에즈라의 딸, 레베카

127:5.1 (1402.4) 비록 가난하기는 했어도 나사렛에서 예수의 사회적 지위는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 도시에서 으뜸가는 젊은이들 중의 하나였고, 대부분의 젊은 여자들 사이에서 대단히 평판이 좋았다. 예수가 튼튼하고 지적인 남성의 아주 훌륭한 표본이었으니까, 그리고 영적 지도자로서 그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나사렛의 부유한 상인이자 무역가 에즈라의 맏딸, 레베카가 이 요셉의 아들을 차츰 사랑하게 되었음을 깨달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여자는 예수의 누이동생 미리암에게 먼저 사랑을 고백했고, 미리암은 다시 이 모두를 어머니와 의논했다. 마리아는 크게 마음이 흔들렸다. 이제 그는 가족에게 없어서는 안될 가장이 되었는데, 아들을 잃게 되려는가? 문제가 결코 그치지 않으려는가?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리고 나서 멈춰서, 결혼이 예수의 앞날에 무슨 영향을 미칠 것인가 깊이 생각했다. 자주는 아니라도 적어도 어떤 때는, 예수가 “약속의 아이”였다는 사실을 회상했다. 마리아와 미리암이 이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한 뒤에, 그들은 바로 레베카에게 가서, 그 여자 앞에 사연(事緣)을 모두 털어놓고, 예수가 운명의 아들이다, 그가 위대한 종교 지도자, 아마도 메시아가 될 것이라 믿는다고 그 여자에게 정직하게 일러줌으로, 예수가 미처 알기도 전에 그 일을 그만두게 하려고 노력을 기울이기로 작정하였다.

127:5.2 (1402.5) 레베카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 이야기에 마음이 떨렸고, 그 여자가 선택한 이 남자와 운명을 같이 하고, 지도자의 일생을 함께 하겠다고 갈수록 더 마음이 굳어졌다. (마음 속으로) 그러한 남자는 더군다나 충실하고 유능한 아내가 필요하리라고 주장했다. 그 여자는 마리아가 자기를 말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집안의 가장이자 유일한 기둥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목수의 아들에게 마음 끌리는 것을 아버지가 승인함을 알고서, 예수가 버는 돈을 잃는 손해를 전부 보상하려고 아버지가 그 가족에게 충분한 소득을 기꺼이 주리라 생각했고 그 여자는 옳았다. 아버지가 그러한 계획에 찬성했을 때, 레베카는 마리아와 미리암과 더 의논했고, 지지를 얻지 못하자 그 여자는 대담하게 직접 예수에게 갔다. 그 여자는 아버지의 협조를 얻어 이렇게 했고, 그는 레베카의 열일곱 살 되는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예수를 집으로 초대했다.

127:5.3 (1403.1) 예수는 주의 깊게 이해하는 태도로, 처음에는 레베카의 아버지가, 다음에 레베카 자신이 이 일을 이야기하는 것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리 많은 돈도 자기 아버지의 가족을 몸소 부양하는 의무, “인간의 모든 책임 가운데 가장 신성한 것―사람이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눈 가족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는 취지로 그는 친절히 대답했다. 레베카의 아버지는 가족에게 헌신하는 예수의 말에 마음이 깊이 움직였고 그 회담에서 물러났다. 단지 아내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우리는 그를 아들로 삼을 수 없소. 그는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고귀한 사람이요.”

127:5.4 (1403.2) 그리고 나서 레베카와 중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제까지 그의 생애에서, 소년과 소녀, 젊은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사귀었다. 그의 머리는 실용적인 세상일을 해결하는 다급한 문제들, 그리고 “아버지의 일을 수행하는” 궁극의 생애를 골똘히 생각하는 데 전적으로 너무 빠져 있었다. 그래서 개인적 사랑을 인간의 결혼으로 매듭짓는 것을 언제라도 심각하게 생각해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보통 인간이 부닥치고 결정해야 하는 그런 문제 하나와 마주친 것이다. 정말로, 그는 “너희와 마찬가지로 모든 면에서 시험을 받았다.”

127:5.5 (1403.3) 주의 깊게 말을 듣고 난 뒤에, 찬미의 표현에 대하여 레베카에게 진심으로 감사했고, “이것은 내 일생에 날마다 나를 기쁘게 하고 위로하리라”고 덧붙였다. 그는 단순한 형제 같은 대우와 순수한 친구 관계 외에 어떤 여자와도 관계를 가질 자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첫째 가는 가장 중요한 의무는 아버지의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며,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결혼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나서 덧붙여 말했다: “내가 운명의 아들이라면, 내 운명이 분명히 나타날 때까지 나는 일생 동안 지속되는 책임을 져서는 안 되지요.”

127:5.6 (1403.4) 레베카는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 위로받기를 마다하고, 아버지가 마침내 세포리스로 이사하는 데 찬성할 때까지 아버지에게 나사렛을 떠나자고 졸랐다. 후일에 결혼하려고 찾아 온 숱한 남자들에게, 레베카는 같은 대답을 주었을 뿐이다. 그 여자는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일찍이 살았던 가운데 그 여자에게 가장 위대한 이 사람이 생명의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첫발을 내디딜 때를 기다리며 산다고. 그 여자는 그가 대중을 위해 수고하는 파란 많은 몇 년을 통해서 헌신적으로 그를 따랐으며, 그가 예루살렘으로 승리에 넘쳐 나귀를 타고 들어간 그날, 자리에 있었고 (예수의 눈에 뜨이지 않았다),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렸던 그 비참한 운명의 날 오후에, 마리아의 옆에서 “다른 여자들 속에” 서 있었다. 이 사람의 아들은 하늘에 있는 수많은 세계 뿐 아니라 그 여자에게도 “몹시 사랑스럽고, 만인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자”였다.

6. 스무 살 되던 해 (서기 14년)

127:6.1 (1403.5) 레베카가 예수를 사랑했다는 이야기를 나사렛 근처에서, 나중에는 가버나움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래서 그 뒤 몇 년 동안, 남자들이 그를 아낀 것처럼 많은 여자가 예수를 사랑했지만, 두 번 다시 그는 또 다른 착한 여인의 헌신적 사랑을 물리치지 않아도 되었다. 이때부터 계속, 예수를 향한 인간의 사랑은 존경과 찬미의 성질을 띠게 되었다. 남자와 여자들이 다 그를 헌신적으로 사랑했고, 자아 만족의 성질을 띠거나 애정으로 소유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그의 됨됨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예수의 인품에 대하여 이야기가 나올 때는 언제나, 레베카의 헌신적 사랑이 입에 오르내렸다.

127:6.2 (1404.1) 미리암은 레베카의 사건을 잘 알고, 어떻게 오빠가 아름다운 여인의 사랑조차 버렸는가 알고서 (앞날에 운명의 생애의 요인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를 이상으로 여기고, 감동적인 깊은 애정으로, 오빠일 뿐 아니라 한 가장으로서, 그를 아끼게 되었다.

127:6.3 (1404.2) 돈을 쓸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지만, 예수는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싶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레베카와 최근에 만난 경험을 알고서, 어머니는 지혜롭게 길을 떠나라고 재촉하였다. 뚜렷하게 의식하지 않았지만, 그가 가장 바란 것은 나사로와 이야기하고 마르다ㆍ마리아와 이야기할 기회였다. 그는 자기 가족 다음으로, 이 세 사람을 누구보다도 가장 사랑했다.

127:6.4 (1404.3) 예루살렘으로 이 여행길을 떠나면서, 메기도ㆍ안티파트리스ㆍ리다의 길로 갔고, 부모가 에집트에서 나사렛으로 그를 데리고 돌아오는 길에 지났던 같은 길을 일부 거쳤다. 유월절 예식에 가는 데 나흘을 썼고, 팔레스타인의 국제 전쟁터인 메기도와 그 주위에서 벌어졌던 지난 사건들에 대하여 많이 생각했다.

127:6.5 (1404.4) 예수는 성전과 모여드는 방문자들의 무리를 바라보려고 잠시 멈추고, 예루살렘을 통하여 계속 갔다. 헤롯이 지은 이 성전과 정치적으로 임명된 이 사제들에 대하여 그는 이상한 반감을 더욱 느꼈다. 무엇보다도 나사로ㆍ마르다ㆍ마리아를 보고 싶었다. 나사로는 예수와 같은 나이였고, 이제는 집안의 가장이었다. 이번 방문할 때가 되자 나사로의 어머니도 또한 무덤에 묻혀 있었다. 마르다는 예수보다 한 살 남짓 나이가 위였고, 마리아는 두 살 아래였다. 예수는 세 사람 모두에게 우상처럼 이상적인 사람이었다.

127:6.6 (1404.5) 이번 방문이 있을 때, 전통에 대하여 때때로 일어나는 반항심이 한 번 치솟았다―예수가 판단하건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그릇 대표하는 의식(儀式) 풍습을 분개하는 표현이었다. 예수가 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나사로는 예리고 길에 인접한 마을에서 친구들과 유월절을 축하하려고 주선해 놓았다. 이제 예수는 그들이 있는 곳, 나사로의 집에서, 유월절을 지내자고 제안했다. 나사로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희생 양이 하나도 없소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러한 유치하고 의미 없는 의식에 참으로 관심이 없다는 취지로, 길지만 납득이 가는 설명을 시작했다. 그들은 엄숙하고 뜨겁게 기도를 드린 뒤에 일어섰고 예수는 말했다. “내 민족의 유치하고 어두운 지성들은 모세가 지시한 대로 저희의 하나님을 섬기게 하라. 저희가 그리하는 것이 좋지만, 생명의 빛을 본 우리는 이제 더, 어두운 죽음의 길을 통해서 우리 아버지께 다가가지 말자. 우리 아버지의 사랑이 영원하다는 진리를 알고서 해방되자.”

127:6.7 (1404.6) 그날 저녁 땅거미가 질 무렵에, 네 사람은 앉아서 희생 양 없이 경건한 유대인들이 축하한 첫 유월절 축제의 저녁을 먹었다. 부풀리지 않은 빵과 포도주가 이 유월절을 위하여 준비되었다. 예수는 “생명의 빵”과 “생명의 물”이라 이름 지은 이 상징적 음식을 친구들에게 덜어주었고, 막 나누어 준 가르침을 엄숙히 좇아서 먹었다. 나중에 베다니를 찾았을 때는 언제나, 이 성스러운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 그의 버릇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에게 이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처음에 깜짝 놀랐지만, 차츰 그의 생각을 알아듣기 시작했다. 그랬어도 이 새로운 유월절 개념을 집안에 들여올 생각이 없다고 안심시켰을 때, 어머니는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이들과 함께 집에서 그는 해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계속하여 유월절을 지냈다.

127:6.8 (1404.7) 이 해 동안에 마리아는 결혼에 대하여 예수와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는 그가 가족을 돌보는 책임에서 풀려난다면 결혼할 것인가 터놓고 물었다. 눈앞에 닥친 의무가 결혼을 막았기 때문에 그 문제를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어머니에게 설명했다. 언제라도 결혼 생활에 들어갈 것인가 의심이 든다고 표현했다. 모든 그러한 일은 “나의 때”, 즉 “내 아버지의 일이 시작되어야 할”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육신으로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머리 속에서 이미 작정했기 때문에, 그는 인간적 결혼 문제를 전혀 거들떠보지 않았다.

127:6.9 (1405.1) 이 해에 그는 필사 성품과 신의 성품을 더욱 섞어서 단순하고 효과적인 한 인간 개성으로 만드는 과제를 새롭게 시작했다. 계속하여 그의 도덕적 지위가 높아지고 영적 깨달음이 늘어났다.

127:6.10 (1405.2) (집을 제외하고) 나사렛 재산이 다 사라졌지만, 이 해에 가버나움에 있던 한 부동산의 지분(持分)을 팔아서 조금 재정의 도움을 받았다. 이것은 요셉의 전 재산의 마지막이었다. 이 가버나움 부동산은 세베대라 이름하는 배 만드는 사람과 함께 처분했다.

127:6.11 (1405.3) 요셉은 이 해에 회당 학교를 마쳤고, 집의 목수 작업장에 있는 작은 벤치에서 일을 시작하려고 준비했다. 아버지의 재산은 바닥이 났지만, 세 사람이 이제 정상으로 일하고 있으니 가난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리라는 전망이 보였다.

127:6.12 (1405.4) 예수는 빨리 남자, 그저 젊은이가 아니라 어른이 되고 있다. 책임지는 일을 잘 배웠다. 실망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일을 해나가는가 알고 있다. 계획이 꺾이고 목적이 일시 실패했을 때 태연히 견딘다. 불공평을 당했을 때에도 공정하고 정당하기를 배워왔다. 영적으로 살려는 이상과 땅에서 존재하는 실용적 요구를 어떻게 조절하는가 배우고 있다. 가깝게 눈앞에 닥친 필요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수고하면서, 더 높고 멀리 있는 이상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어떻게 계획하는가 배우고 있다. 큰 뜻을 인간적 상황에서 닥치는 평범한 요구에 적응하는 솜씨를 꾸준히 쌓고 있다. 물질적 성취 작용을 개시하기 위하여 영적 추진 에너지를 이용하는 기술을 아주 거의 통달했다. 땅에서 계속 살면서, 어떻게 하늘의 삶을 사는가 천천히 배우고 있다. 한편으로 땅에 있는 가족의 아이들을 안내하고 지도하는 아버지 노릇을 맡으면서, 갈수록 더 하늘 아버지가 궁극에 인도하시는 데 의존한다. 패배에 빠지려 하는 바로 그 문턱에서 솜씨 있게 승리를 낚아채는 데 숙달되고 있다. 시간 세계에서 닥치는 어려움을 어떻게 영원한 승리로 바꾸는가 배우고 있다.

127:6.13 (1405.5) 그래서 해가 지남에 따라서, 시공 세계에서 필사 육체가 사는 것처럼, 이 나사렛 젊은이는 계속 인생을 체험한다. 유란시아에서 한껏, 대표적이고 충만한 인생을 산다. 그가 만든 인간들이 첫 생애, 즉 육체를 입고 사는 일생에 짧고 벅찬 여러 해 동안에 거치는 체험을 겪으면서 성숙하여, 이 세상을 떠났다. 이 인간 체험 모두가 우주 군주의 영원한 재산이다. 그는 우리를 이해하는 형이자 공감하는 친구요, 경험이 많은 군주이자 자비로운 아버지이다.

127:6.14 (1405.6) 아이로서 방대한 양의 지식을 쌓았고, 젊은이로서 이 정보를 가려내고 분류하고 연결 지었으며, 이제 그 땅에서 어른으로서, 이 세상을 비롯하여 온 네바돈 우주에 두루, 사람이 사는 모든 다른 구체에 있는 동포 필사자의 이익을 위하여 나중에 그의 가르침과 헌신과 봉사에서 이용하려는 준비로 이 정신 재산을 비로소 정리한다.

127:6.15 (1405.7) 그는 이 땅의 아기로서 세상에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연달아 소년기와 청년기 단계를 거쳤다. 이제 성년기의 문턱에 서 있고, 인간 생활의 체험을 풍부히 겪어 왔다. 인간 성품을 충만히 이해하며, 인간 성품의 약점을 알아보는 이해심이 가득하다. 그는 어떤 나이나 어느 단계에 있는 필사 인간에게도,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계시하는 신다운 기술에 숙달되고 있다.

127:6.16 (1406.1) 이제 완전히 자란 남자, 그 땅에 어른으로서, 하나님을 사람에게 드러내고,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최고의 사명을 계속하려고 준비한다.

제 128 편 예수의 어른 시절 초기

유란시아서

제 128 편

예수의 어른 시절 초기

128:0.1 (1407.1) 어른 시절에 접어들면서, 나사렛 예수는 땅에서 정상이며 보통 사람으로 살아 갔고, 계속 그렇게 살았다. 예수는 다른 아이들이 오는 것과 똑같이 이 세상에 왔고, 부모를 선택하는 데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일곱째이자 마지막 자신 수여, 즉 필사 육체의 모습으로 육신화(肉身化)를 실천할 행성으로서 이 특별한 세계를 선택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밖에 그는 세상에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나타났고, 다른 필사자들이 이 세계에서, 또 비슷한 세계에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역의 아이로서 자라고 환경의 변천과 씨름하였다.

128:0.2 (1407.2)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자신을 수여하는 두 가지 목적을 반드시 기억하여라:

128:0.3 (1407.3) 1. 필사 육체를 입고서 한 인간의 일생을 끝까지 사는 체험을 통달하는 것, 즉 네바돈에서 그의 통치권을 완전히 얻는 것.

128:0.4 (1407.4) 2. 우주의 아버지를 시공 세계에서 거주하는 필사자들에게 드러내는 것, 바로 이 필사자들이 우주의 아버지를 더 잘 이해하도록 더 효과 있게 인도하는 것.

128:0.5 (1407.5) 모든 다른 생물의 이익과 우주의 이점은 부수되는 것이요, 필사자로 자신을 수여하는 이 주요 목적에 2차적인 것이었다.

1. 스물하나 되던 해 (서기 15년)

128:1.1 (1407.6) 성년기에 도달하면서, 예수는 가장 낮은 형태로 사는 지적(知的) 인간의 일생에 관하여 지식을 통달하는 체험을 마치는 과제를 열심히, 그리고 완전히 자의식하면서 시작하였고, 이로서 자신이 창조한 우주를 제한 없이 다스리는 권한을 마침내, 완전히 얻었다. 그는 자기의 두 가지 성품을 충분히 깨닫고서 이 엄청난 일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이 두 성품을 하나로, 나사렛 예수로 효과적으로 통합하였다.

128:1.2 (1407.7) 요수아 벤 요셉은 그가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필사 인간임을 잘 알았다. 이것은 첫 칭호, 사람의 아들을 고른 데서 나타난다. 참으로 피와 살로 된 몸을 가진 자였으니, 지금도 군주 권한으로 한 우주의 운명을 주관하면서, 수고를 톡톡히 해서 얻은 수많은 칭호 가운데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아직도 지닌다. 우주의 아버지의 창조하는 말씀, 즉 창조 아들이 “육체가 되어 유란시아에서 이 땅의 사람으로서 거했다”는 말씀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그는 수고하고 지쳤고 쉬고 잠을 잤다. 배고픔을 느끼고 그런 욕구를 먹을 것으로 채웠다. 목이 말랐고, 목마름을 물로 가라앉혔다. 그는 인간의 온갖 느낌과 감정을 체험하였다. “모든 일에 너희처럼 시험을 받았으며” 고통을 받다가 죽었다.

128:1.3 (1407.8) 이 땅의 다른 필사자와 똑같이, 지식을 얻고 경험을 쌓았으며, 이 두 가지를 통합하여 지혜로 만들었다. 세례를 받기까지, 아무런 초자연의 힘을 이용하지 않았다.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서 받은 인간 자질의 일부가 아닌 어떤 수단도 사용하지 않았다.

128:1.4 (1408.1) 인간이 되기 전의 존재로 지녔던 속성에 관하여 언급하면, 이를 자신의 몸에서 비웠다. 대중을 위한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는 사람과 사건들에 관한 지식을 전적으로 스스로 제한하였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참된 사람이었다.

128:1.5 (1408.2) 영원히, 영화롭게 이것은 참말이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느낌으로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 높은 통치자이라. 우리처럼 모든 점에서 단련되고 시험받았으되 죄가 없는 군주를 우리가 가졌느니라.” 자신이 고통받고, 시험받고 단련되었기 때문에, 혼란과 곤궁에 빠진 자들을 넘치게 이해하고 보살필 수 있다.

128:1.6 (1408.3) 나사렛 목수는 자기 앞에 닥친 일을 충분히 이해했지만, 인간 생애가 자연히 흘러가는 경로를 따라서 살기를 택하였다. 이 중에 어떤 문제에서 이처럼 기록되었다시피, 그는 필사 인간에게 정말로 본보기였다: “이 정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던 것 같이, 너희 속에 있도록 하라. 하나님의 성품을 타고났은즉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자기를 조금도 중요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생물의 형태를 취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났느니라. 이렇게 사람으로 모습을 입었은즉, 자기를 낮추어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서 죽기까지도 복종하였느니라.”

128:1.7 (1408.4) 인간 가족에서 모든 다른 사람이 인생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필사자로 살았으며 “그는 육체로 있던 시절에 무척 자주, 모든 악에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분에게, 간절한 느낌으로 눈물을 흘리기까지 기도와 간구를 드렸느니라. 그리고 믿었은즉 그의 기도가 효력이 있었느니라.” 따라서 자비와 이해심으로 형제들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도록, 모든 면에서 그들과 같이 지음받는 것이 당연하다.

128:1.8 (1408.5) 그는 자기가 인간의 성품을 지녔다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그 인간 성품은 자명한 것이었고, 언제나 인간 성품이 그의 의식 속에 있었다. 그러나 신다운 성품에 대해서 말하면, 언제나 의심과 추측의 여지가 있었고, 적어도 세례받는 사건 바로 전까지, 이것이 참말이었다. 신성(神性)의 자각은 느렸고,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스럽게 점진적으로 드러났다. 신성이 이렇게 드러나고 이를 자각한 것은 예루살렘에서, 열세 살이 채 안 되었을 때, 그가 사람으로 살면서 처음으로 초자연적 일이 일어난 것과 함께 시작되었다. 신의 성품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이 체험은, 육체로 있는 동안 두 번째 초자연적 체험을 거칠 때 끝났다. 이 사건은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을 때 따라서 일어났고, 이 사건은 봉사하고 가르치는 공생애(公生涯)의 시작을 표시했다.

128:1.9 (1408.6) 한 번은 열세 살 때, 한 번은 세례받을 때, 이렇게 두 번 하늘의 방문이 있던 사이에 육신화된 이 창조 아들의 생활에서 아무런 초자연이나 초인간의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는 해도, 베들레헴의 아기였고 나사렛의 소년이요 젊은이였던 이 나사렛 사람은 실제로, 한 우주의 육신화된 창조자였다. 그러나 결코 이 힘을 조금도 쓴 적이 없다. 또한 인생을 살면서, 요한에게 세례받은 날까지, 수호 세라핌의 안내를 제외하고, 하늘 존재들의 안내도 받지 않았다. 이처럼 증언하는 우리는 무엇에 관하여 말하는가 사정을 알고 있다.

128:1.10 (1408.7) 그래도 육체를 입고 살았던 이 여러 해 동안, 그는 참으로 신다웠다. 실제로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한 창조 아들이었다. 통치권을 얻는, 순전한 필사자 체험을 절차에 따라 완수하고 나서, 일단 공생애를 채택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대중 앞에서 서슴지 않고 인정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시작이요 끝이라,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서슴지 않고 선언했다. 후일에 사람들이 이렇게 일컬었을 때, 그는 조금도 마다하지 않았다: 영광의 주, 우주의 통치자, 모든 창조의 주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만민의 주, 우리의 주 우리의 하나님, 우리와 함께 있고 어느 세계에 어떤 이름보다도 높은 이름을 가진 하나님, 우주의 전능자, 이 세계를 창조한 우주 지성,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물을 몸에 감춘 이, 만물을 채우는 충만한 이, 영원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을 몸 안에 담고 계신 이, 하늘과 땅의 창조자, 우주의 지지자, 온 땅의 재판관, 영생 수여자, 참 목자, 세상의 구원자, 우리를 구원하는 선장이라고.

128:1.11 (1409.1) 순전히 인간다운 생활로부터, 인간 속에서, 인간을 위하여, 이 세상의 인류에게, 그리고 모든 다른 세계를 위하여 신의 직분을 자의식(自意識)하는 후기에 들어간 뒤에 이 칭호들이 적용되자, 그는 어느 것에도 결코 반대하지 않았다. 예수는 그에게 적용된 오직 한 가지 칭호를 사양했다. 한때 이마누엘이라 일컬음을 받았을 때, 단지 “내가 아니라, 그는 내 형이라”하고 대답했다.

128:1.12 (1409.2) 언제나, 땅에서 생활의 폭이 넓어진 뒤에도, 예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온순하게 복종하였다.

128:1.13 (1409.3) 세례를 받은 뒤에 그는 진지한 신자와 감사하는 추종자들이 숭배하도록 버려두고 개의치 않았다. 가난과 씨름하고, 가족을 위해서 생활에 필요한 것을 마련하려고 두 손으로 수고하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식은 짙어지고 있었다. 하늘을 짓고 인간의 존재로서 지금 살아 가고 있는 바로 이 땅을 지은 이가 자신임을 알았다. 바라보고 있는 큰 우주에 두루, 하늘 존재들의 무리도 마찬가지로, 이 나사렛 사람이 사랑하는 군주요 아버지인 창조자인 것을 알았다. 이 여러 해 동안 내내, 심오한 긴장감이 네바돈 우주를 휩쓸었다. 하늘의 모든 눈이 줄곧 유란시아에, 팔레스타인에 쏠렸다.

128:1.14 (1409.4) 이 해에 예수는 요셉과 함께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성화 예식을 치르려고 야고보를 성전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요셉을 데리고 가는 것이 의무라고 판단했다. 가족을 다루는 데 예수는 결코 조금도 편애를 보인 적이 없었다. 여느 때 다니던 요단강 유역의 길로 요셉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지만, 요단강 동쪽 길로 나사렛으로 돌아왔고, 이 길은 아마투스를 통과했다. 요단강을 내려가면서, 예수는 유대인의 역사를 요셉에게 일러주었고, 돌아오는 길에 강 동쪽의 이 지역에 거주했다는 전통이 있는, 이름난 루벤ㆍ갓ㆍ길르앗 부족들의 경험에 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128:1.15 (1409.5) 요셉은 형의 일생의 사명에 관하여 유도하는 질문을 많이 했으나 이 대부분의 물음에 예수는 다만 “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하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나 이 사사로운 토론에서 여러 말씀이 흘러나왔고, 후일에 세상을 뒤흔드는 사건들 가운데서 요셉은 이를 기억했다. 요셉과 함께, 예수는 베다니에서 세 친구와 더불어 이 유월절을 지냈고, 이 축제 기념 행사에 참석하려고 예루살렘에 있을 때 이렇게 하는 버릇이 있었다.

2. 스물둘 되던 해 (서기 16년)

128:2.1 (1409.6) 이 해는 예수의 동생들이 청년기의 문제와 적응에 따르는 특별한 시련과 고난에 부딪치는 몇 년 중 한 해였다. 예수는 이제 일곱 살에서 열 여덟 살에 이르는 동생들이 있었고, 이들이 새로이 지적 및 감정적 생활을 자각하는 데 적응하도록 도와주느라고 계속 바빴다. 청년기 문제들이 어린 동생들의 생활에서 일어남에 따라서, 그는 이처럼 그러한 문제들과 맞붙어 씨름해야 했다.

128:2.2 (1410.1) 이 해에 시몬은 학교를 졸업했고, 예수의 옛날 소년 시절의 친구이자 항상 대기하여 그를 방어했던 석공(石工) 야곱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몇 차례 가족 회의를 연 결과, 소년들이 모두 목수 일에 손대는 것이 현명치 않다는 결정이 내렸다. 직업을 다양화함으로 그들이 건물 전체를 세우는 계약을 받을 준비가 될 것이라 생각되었다. 또 한편, 세 사람이 전시간 목수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바쁘지는 않았다.

128:2.3 (1410.2) 예수는 이 해에 주택의 끝 손질과 가구 만드는 일을 계속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카라반 수선 작업장에서 보냈다. 야고보가 작업장 지키는 일을 교대하기 시작했다. 이 해의 후반에, 나사렛 근방에서 목수 일이 뜸할 때, 예수는 야고보에게 수선 작업장을 맡기고, 요셉을 집 벤치에 두었고, 한편 그는 대장장이와 함께 일하려고 세포리스로 건너갔다. 금속을 가지고 여섯 달 동안 일했고, 모루 일에 어지간한 기술을 쌓았다.

128:2.4 (1410.3) 세포리스에서 새 일자리를 잡기 전에, 예수는 정기 가족 회의를 열고 그때 열여덟 갓 넘은 야고보를 엄숙하게 임시 가장으로 임명했다. 동생에게 마음을 다하여 지원하고 충분히 협조하기로 약속했고, 가족의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야고보에게 복종하겠다는 정식 약속을 받아냈다. 이날부터 야고보는 가족을 위하여 완전한 재정 책임을 맡았고, 예수는 동생에게 주마다 정해진 돈을 냈다. 예수는 다시 야고보의 손에서 고삐를 빼앗지 않았다. 세포리스에서 일하는 동안, 필요하다면 밤마다 집으로 걸어갈 수 있었지만, 날씨와 다른 이유들을 대면서, 일부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참 동기는 야고보와 요셉에게 가족을 책임지는 훈련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서서히 가족이 혼자 서게 만드는 과정을 시작했다. 새 계획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조언을 주고 도움되는 제안을 하려고, 안식일마다 예수는 나사렛으로 돌아왔고 필요한 경우에는 때때로 주중에 왔다.

128:2.5 (1410.4) 여섯 달 동안이나 세포리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예수에게 이방인의 생활 관점을 더 잘 알게 하는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이방인들과 함께 일하고 함께 살았으며,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들의 사는 습성과 이방인의 생각에 대해서 자세히 공들여 연구하였다.

128:2.6 (1410.5) 헤롯 안티파스의 고향인 이 도시의 도덕 수준은 카라반 도시 나사렛의 수준에도 훨씬 못 미쳤기 때문에, 세포리스에서 여섯 달 머무른 뒤에, 예수는 기꺼이 나사렛으로 돌아오는 구실을 찾았다. 그가 소속되어 일하던 집단은 세포리스와 새 도시 티베리아스, 두 곳에서 공공 사업에 종사하기로 되었고, 그는 헤롯 안티파스의 감독 밑에서는 어떤 종류의 일자리도 상관하기 싫었다. 예수의 견지에서 다른 여러 이유로 그가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것이 현명하였다. 수선 작업장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가족의 일을 몸소 지시하는 일을 다시 맡지 않았다. 그는 작업장에서 야고보와 함께 일했고, 가능한 한 야고보가 집의 감독을 계속하도록 두었다. 그는 야고보가 가족 경비를 관리하고 가정 예산을 처리하는 것을 다치지 않은 채로 두었다.

128:2.7 (1410.6) 예수는 바로 그러한 현명하고 생각 깊은 계획으로, 가족 일에 적극 참여하지 않고 마침내 물러서기 위하여 길을 준비하였다. 가족의 임시 우두머리로서 야고보가 2년 동안 경험을 가졌을 때, 그(야고보)가 결혼하기 꼭 2년 전에, 요셉이 가족 기금을 책임지는 자리에 앉았고, 그가 집의 일반 관리를 맡았다.

3. 스물셋 되던 해 (서기 17년)

128:3.1 (1411.1) 이 해에, 네 사람이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정의 압박이 조금 덜어졌다. 미리암은 우유와 버터를 팔아서 어지간히 벌었고, 마르다는 천 짜는 데 솜씨 있는 사람이 되었다. 수선 작업장의 구입 가격은 3분의 1이 넘게 지불되었다. 형편이 좋아서 유월절을 치르기 위하여, 시몬을 예루살렘으로 데려가려고 예수는 3주 동안 일을 쉴 정도였다. 이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가장 오랫동안 나날의 노동에서 벗어난 기간이었다.

128:3.2 (1411.2) 그들은 데카폴리스의 길로, 펠라ㆍ게라사ㆍ필라델피아ㆍ헤스본ㆍ예리고를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했다. 바닷가 길로 리다ㆍ요파ㆍ케자리아를 지나치고, 다음에 갈멜산을 돌아서 프톨레마이스로, 그리고 나사렛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으로 인하여 예수는 예루살렘 지역 북쪽의 팔레스타인 전체에 익숙하게 되었다.

128:3.3 (1411.3) 필라델피아에서 예수와 시몬은 다마스커스에서 온 한 상인(商人)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나사렛에서 온 형제를 크게 좋아하게 되었고, 그래서 함께 자기의 예루살렘 본부에서 멈추자고 고집하였다. 시몬이 성전 행사에 참석한 동안에, 예수는 잘 교육받고 많이 여행한 사람, 세상일에 훤한 이 사람과 이야기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상인은 카라반 낙타를 4천 마리 넘게 소유했고, 로마 세계 전역에 걸쳐 사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로마로 가는 길이었다. 예수에게 다마스커스로 와서 그의 동양 수입(輸入) 사업에 손을 대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자기 가족을 그렇게 멀리 떠나는 것이 정당하다 느끼지 않는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아득히 먼 도시들, 그리고 극서와 극동의 더욱 먼 나라들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았다. 이 나라들에 대해서 카라반 승객과 안내자들이 말하는 것을 귀가 닳도록 전에 들었다.

128:3.4 (1411.4) 시몬은 예루살렘 방문이 대단히 즐거웠다. 새 계명의 아들들이 유월절에 성화 예식을 치를 때, 시몬은 정식으로 이스라엘 연방에 가입되었다. 시몬이 유월절 예식에 간 동안에, 예수는 방문자들 무리와 섞였고, 수많은 개종한 이방인들과 함께 흥미 있는 시간을 개인적으로 많이 가졌다.

128:3.5 (1411.5) 아마도 이 모든 접촉 가운데 가장 주목할 것은 스테반이라는 이름의 젊은이, 그리스어를 하는 사람과 만난 것이었다. 이 젊은이는 예루살렘을 처음 방문하는 길이었고, 유월절 주간 목요일 오후에 우연히 예수를 만났다. 둘이서 아스모니아 궁전을 구경하며 거니는 동안, 예수는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렇게 그들은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은 생명의 길과 참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관하여 네 시간의 토론으로 이어졌다. 스테반은 예수의 말씀에 엄청나게 감명을 받았고, 결코 그 말씀을 잊지 않았다.

128:3.6 (1411.6) 이 사람이 나중에 예수의 가르침을 믿게 된 바로 그 스테반이었다. 이 초기의 복음을 대담하게 전파한 것 때문에 그는 성난 유대인들에게 돌로 쳐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새 복음에 대하여 스테반이 자기의 견해를 선포하면서 보인 특별한 대담성은 어느 정도, 전에 예수와 가졌던 이 회견에 직접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그러나 스테반은 15년쯤 앞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갈릴리 사람이, 나중에 세상의 구원자라고 자신이 선포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는 것을 결코 털끝 만큼도 짐작하지 못했다. 스테반은 예수를 위해서 오래지 않아 죽게 될 운명이었고, 이처럼 새로이 생성되는 기독교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유대인의 성전과 그 전통적 관습을 공격한 값으로 목숨을 바쳤을 때, 타르수스 시민,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구경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 그리스인이 신앙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가 보았을 때, 사울의 가슴 속에 어떤 감정이 북받쳐 올랐고, 이것은 마침내 그로 하여금 스테반이 목숨을 바쳐 싸운 그 운동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후일에 그는 과감하고 꺾일 줄 모르는 바울, 유일하게 그 기초를 세운 사람은 아니라도, 기독교의 철학자가 되었다.

128:3.7 (1412.1) 유월절 주간이 지나고 첫 일요일에, 시몬과 예수는 나사렛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떠났다. 시몬은 이번 여행에서 예수에게서 받은 가르침을 결코 잊지 않았다. 예수를 언제나 사랑했지만, 이제 그는 가장인 형을 비로소 이해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골을 통해서 여행하고 길가에서 식사를 준비하면서, 그들은 가슴을 털어놓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요일 한낮에 집에 다다랐고, 시몬은 자기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느라고 그날 밤, 가족을 늦게까지 붙들어 두었다.

128:3.8 (1412.2) 예루살렘에 있을 때 “낯선 사람들, 특히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예수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고 시몬이 보고하여 마리아는 상당히 마음이 언짢았다. 예수가 어째서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가졌는가, 어째서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그들의 생활 방식에 대하여 듣고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발견하고 싶어 하는가, 가족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128:3.9 (1412.3) 갈수록 더 나사렛 가족은 눈앞에 닥친 여러 인간적 문제에 정신을 빼앗겼다. 예수의 앞날의 사명을 언급하는 일이 뜸하였고, 그 자신도 앞날의 생애에 대하여 입을 여는 일이 아주 드물었다. 어머니는 그가 약속의 아이라는 생각을 떠올리는 일이 드물었다. 땅에서 예수가 어떤 신성한 사명이라도 이룰 것이라는 생각을 어머니는 천천히 버리고 있었다. 그래도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가브리엘이 방문한 것을 멈추어 돌이켜볼 때, 어머니의 믿음은 이따금 되살아났다.

4. 다마스커스 사건

128:4.1 (1412.4)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필라델피아에서 처음 만났던 상인의 손님이 되어 예수는 다마스커스에서 이 해의 마지막 넉 달을 보냈다. 이 상인의 대표 하나가 나사렛을 지나면서 예수를 수소문하였고 다마스커스까지 그를 동반하였다. 일부 유대인의 피를 받은 이 상인은 다마스커스에 종교 철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하나 세우는 데 엄청난 돈을 바치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능가할 학문의 중심을 세울 계획을 품고 있었다. 이 새 사업에 우두머리가 되는 준비로, 예수가 당장 긴 여행을 떠나서 세계의 여러 교육 중심을 둘러보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것은 순전히 인간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예수가 일찍이 마주친 가장 큰 유혹 가운데 하나였다.

128:4.2 (1412.5) 대번에 이 상인은 새로 계획하는 이 학교를 지원하기로 찬성한 열두 명의 상인 및 은행가의 무리를 예수 앞으로 데려왔다. 예수는 학교를 만드는 제안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그들이 그 조직을 계획하는 데 도왔다. 그러나 언제나 다른 의무, 말하지 못하지만 이전에 지워진 의무 때문에, 그렇게 야심에 찬 사업을 지도하는 책임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를 후원하려는 사람은 집요했고, 집에서 얼마큼 번역하는 일에 예수를 돈을 주고 고용하였다. 한편 그와 아내, 아들과 딸들은 그들이 내민 명예를 예수가 받아들이게 만들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는 찬성하려 하지 않았다. 땅에서 그의 사명이 교육 기관의 지원을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아무리 좋은 뜻을 가졌더라도, 사람에게 빚을 져서 조금이라도 “사람의 심의”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128:4.3 (1412.6) 그가 지도력을 보인 뒤에도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물리쳤는데, 그는 대선생으로서 다마스커스의 사업가와 은행가들의 인정과 환호를 받았으며, 이름 없고 알려지지 않은 나사렛 목수였을 때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128:4.4 (1412.7) 그는 이 제안에 대하여 가족에게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 해가 저물 때, 마치 다마스커스의 친구들이 치켜세워 내민 제안에 전혀 유혹받은 일이 없었던 것처럼 나사렛으로 돌아와서 나날의 책임을 돌보았다. 이 다마스커스 사람들도, 후일에 온 유대인 사회를 뒤집어엎은 가버나움 시민, 그리고 그들의 총 재산으로 샀을지 몰랐던 명예를 감히 물리친 예전의 나사렛 목수, 이 두 사람을 연결짓지 않았다.

128:4.5 (1413.1) 예수는 아주 슬기롭게, 일부러 생애의 여러 사건을 분리시키려고 머리를 썼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것들이 단 한 사람이 행한 일로 연결되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와 경쟁할 학교를 다마스커스에 창립하는 기회를 물리친, 바로 이 이상한 갈릴리 사람의 이야기가 되풀이되는 것을 그는 후일에 여러 번 들었다.

128:4.6 (1413.2) 땅에서 얻는 체험의 어떤 모습들을 분리하려고 애썼을 때 염두에 두었던 한 가지 목적이 있었으니, 다능하고 눈부신 경력 쌓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그러한 경력은 후일의 세대로 하여금 그가 실천하고 가르친 진리에 복종하는 대신에, 그 선생을 숭배하게 만들 것이었다. 예수는 인간으로 이룬 업적의 기록을 쌓음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가르침 대신에 다른 데 한눈 팔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추종자들이 그에 관한 종교를 만들 유혹을 받으리라는 것, 그런 종교가 그가 세상에 선포하려 의도한 하늘나라 복음과 경쟁이 될지 모른다는 것을 아주 일찍부터 깨달았다. 따라서 그의 가르침을 선포하는 대신에, 가르치는 그 선생을 높이는, 자연스러운 이 인간적 성향에 이용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이나 그의 파란 많은 생애에서 억제하려고 한결같이 애썼다.

128:4.7 (1413.3) 바로 이 동기가 또한 땅에서 다채롭게 살았던 일생의 여러 기간에 어째서 그가 다른 칭호로 알려지도록 버려두었는가 설명한다. 또한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부당한 영향이라도 미쳐서 자신들의 정직한 확신을 버리고 그를 믿도록 이끌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지성을 부당하거나 불공평하게 이용하기를 언제나 물리쳤다. 그의 가르침에서 드러나는 영적 실체에 사람들의 마음이 반응하지 않으면, 자기를 신뢰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128:4.8 (1413.4) 이 해가 저물 때가 되자 나사렛 가정은 상당히 순조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자라고 있었고, 마리아는 예수가 집을 떠나 있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는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서, 번 돈을 계속 야고보에게 넘겨주었고, 아주 작은 금액만 당장 개인이 쓸 비용으로 남겨 두었다.

128:4.9 (1413.5) 세월이 지나면서 이 사람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보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이 땅의 사람, 사람들 사이에 그저 평범한 사람과 아주 비슷하게 된 듯하였다. 그 수여가 바로 이런 방법으로 펼쳐지도록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예정하셨다.

5. 스물넷 되던 해 (서기 18년)

128:5.1 (1413.6) 이때가 가족에 대한 책임을 벗고 예수가 비교적 자유를 얻은 첫해였다. 야고보는 예수의 조언과 재정적 도움을 얻어 가정을 아주 훌륭하게 관리하였다.

128:5.2 (1413.7) 이 해의 유월절 다음 주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한 젊은이가, 이 해 얼마 뒤에 팔레스타인의 바닷가에 어떤 지점에서 예수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의 무리가 만나는 것을 주선하려고 나사렛으로 왔다. 이 회담은 6월 중순으로 정해졌고, 예수는 알렉산드리아의 저명한 유대인 다섯 명을 만나려고 케자리아로 갔다. 그들은 자기네 도시에서 한 종교 스승으로서 그에게 자리를 잡으라고 간청했고, 시작하라는 권유로 주요 회당에서 하잔에게 조수(助手)가 되는 자리를 내밀었다.

128:5.3 (1414.1) 이 위원회의 대변자들은 알렉산드리아가 전 세계를 위하여 유대인 문화의 본부가 될 운명을 가졌다, 유대인의 관심사의 헬라파 경향은 바빌로니아 학파를 실질적으로 앞섰다고 예수에게 설명했다.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팔레스타인 전역에 걸쳐 반란이 있으리라는 불길한 소문을 예수에게 상기시켰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이 어떤 폭동을 일으키더라도 이는 민족의 자살 행위와 다름없으리라, 로마의 철권은 석 달 안에 반란을 짓밟으리라, 그리고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성전은 파괴되리라,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으리라고 그에게 장담했다.

128:5.4 (1414.2) 그들이 하고 싶어 했던 말을 전부 듣고서, 예수는 그들이 흉금을 털어놓은 것에 감사를 표했다. 알렉산드리아로 가기를 사양하면서, “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내용의 말을 하였다. 애써서 그들이 부여하려 했던 명예에 그가 관심이 없는 듯이 보여서 그들은 어리둥절했다. 예수와 작별하기 전에, 알렉산드리아 친구들의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과 회담하려고 케자리아로 오는 데 든 시간과 경비를 보상하는 뜻으로 돈 봉투를 예수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마찬가지로 돈을 물리치며 말했다. “요셉의 집은 자선금을 받은 적이 없소. 내 팔이 건강하고 동생들이 일할 수 있는 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빵을 먹을 수 없소이다.”

128:5.5 (1414.3) 에집트에서 온 친구들은 집을 향해 돛을 달았고, 팔레스타인에서 그렇게 큰 소동을 벌인 사람, 배 만드는 가버나움 사람의 소문을 후일에 들었을 때, 그가 장성한 베들레헴 아기요, 알렉산드리아에서 큰 선생이 되라는 초청을 긴 말 없이 그렇게 물리친 사람, 이상하게 행동하던 바로 그 갈릴리 사람이었다는 것을 거의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128:5.6 (1414.4) 예수는 나사렛으로 돌아왔다. 이 해의 나머지는 전생애에서 가장 사건이 없었던 반년이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보통 일과에서 벗어나 잠시 이 휴식을 즐겼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많이 대화를 나누었고, 자신의 인간 정신을 통솔하는 데 크게 진전을 보았다.

128:5.7 (1414.5) 그러나 시공 세계에서 사람의 일은 오랫동안 사건 없이 진행되지 않는다. 12월에 야고보는 예수와 사사롭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가 나사렛의 젊은 여인 에스타와 깊이 사랑에 빠졌다, 주선해 줄 수 있다면 언젠가 결혼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그는 요셉이 곧 열여덟이 될 터이고, 가족의 임시 가장으로서 수고하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좋으리라는 사실에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예수는 야고보가 결혼하기 전에, 요셉이 집안 일의 관리를 맡도록 적절히 훈련시킨다는 조건으로, 2년 뒤에 야고보가 결혼하는 데 찬성하였다.

128:5.8 (1414.6) 이제 일이 터지기 시작했다. 결혼 이야기가 퍼졌다. 야고보가 결혼 일로 예수의 승낙을 얻는 데 성공한 것은 미리암으로 하여금 자기 계획을 가지고 용감히 오빠인 가장에게 다가가게 만들었다. 석공인 아들 야곱은 한때 예수의 보호자로 자처하였고, 지금은 야고보와 요셉의 사업 동료이며, 오랫동안 미리암과 결혼하려고 애썼다. 예수 앞에 미리암이 자기의 계획을 내놓았을 때, 그는 야곱이 찾아와서 여동생을 얻으려고 정식으로 요청해야 한다고 지시하고, 마르다가 제일 나이 먹은 딸로서 임무를 맡을 능력이 있다고 느끼는 때가 오자마자, 미리암이 결혼하도록 축복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28:5.9 (1414.7) 집에 있을 때, 그는 한 주에 세 번 야간 학교에서 줄곧 가르쳤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자주 성서를 낭독하고, 어머니와 이야기하고, 아이들을 가르쳤고, 대체로 이스라엘 연방에서 자격 있고 존경받는 나사렛 시민으로서 처신하였다.

6. 스물다섯 되던 해 (서기 19년)

128:6.1 (1415.1) 나사렛 가족이 모두 건강한 가운데 이 해가 시작되었고, 마르다가 룻을 위해서 해야 되는 어떤 일을 제외하고, 아이들이 모두 정규 학교를 마치게 되었다.

128:6.2 (1415.2) 예수는 아담 시절 이후에, 땅에서 나타난 남성 중에 가장 튼튼하고 세련된 한 표본이었다. 몸은 훌륭하게 성장했다. 머리는 활발히 움직였고, 날카롭고, 사물을 꿰뚫어보았다. 즉 같은 시대 사람들의 평균 정신 수준과 비교해서, 그의 지능은 엄청나게 발달했다. 그의 정신은 정말로 인간으로서 신다웠다.

128:6.3 (1415.3) 요셉의 재산이 없어진 이후로, 가족의 재정은 최상으로 조건이 좋았다. 카라반 수선 작업장에 대한 마지막 지불금을 치렀고,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았으며 몇 년 동안 처음으로 얼마큼의 저축이 남았다. 이것이 참말이고, 다른 동생들을 예루살렘으로 첫 유월절 예식을 위하여 데리고 간 일이 있었으니까, 예수는 (회당 학교에서 막 졸업한) 유다가 처음으로 성전을 방문하는 데 함께 가기로 했다.

128:6.4 (1415.4)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가, 사마리아를 통해서 동생을 데리고 가면 문제가 생길까 염려되어, 요단강 유역으로, 같은 길로 돌아왔다. 급한 기질과 아울러 강한 애국심 때문에, 유다는 이미 나사렛에서 몇 번이나 하찮은 문제에 말려들었다.

128:6.5 (1415.5) 시간이 되자 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했고, 성전을 처음으로 방문하러 갔다. 성전의 바로 그 광경은 혼의 아주 깊숙한 곳까지 유다를 뒤흔들고 짜릿하게 만들었는데, 이때 베다니 사람 나사로를 우연히 만났다. 예수가 나사로와 이야기하고, 합동으로 유월절 저녁을 주선하려 애쓰는 동안, 유다는 모두에게 진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가까이에 로마인 경비병 하나가 서 있었는데, 지나가는 어느 유대인 여자에게 예의에 벗어나는 말을 몇 마디 던졌다. 유다는 불 같이 분개하여 얼굴이 달아올랐고, 그 군인에게 직접, 귀에 들리는 거리 안에서, 예절 없는 것에 대하여 바로 분통을 터뜨렸다. 그런데 로마 군인들은 유대인이 불경에 가까운 어떤 태도를 보여도 이에 무척 민감했다. 그래서 경비병은 당장에 유다를 체포했다. 이것은 젊은 애국자에게 너무 지나쳤다. 예수가 경계하는 눈으로 주의를 줄 수 있기 전에, 그는 이제까지 참았던 반(反)로마 감정을 담은 비난을 거침없이 퍼부었다. 이 모두가 일을 더욱 악화시켰을 뿐이다. 예수를 동반하여, 유다는 당장에 군대의 감옥으로 끌려갔다.

128:6.6 (1415.6) 예수는 유다를 위해서 즉석 재판이나, 아니면 그날 저녁 유월절 축하에 때를 맞추어 석방을 얻어내려고 애썼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에 예루살렘에서 “거룩한 집회”가 있었기 때문에, 로마인들도 감히 한 유대인에 대한 고발을 심의하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다는 체포된 뒤 다음날 아침까지 갇혀 있었고, 예수는 함께 감옥에서 지냈다. 그들은 율법의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완전한 시민으로 받아들이는 예식이 있을 때 성전에 있지 않았다. 그 다음 어느 유월절에, 열심당을 위한 선전 활동과 관련하여 예루살렘에 갔을 때까지, 유다는 이 정식 예식을 몇 년 동안 치르지 못했다. 그가 속한 열심당은 애국 조직이었고, 그는 그 당에서 크게 활약했다.

128:6.7 (1415.7) 감옥에서 보낸 둘째 날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 예수는 유다를 위해서 군대의 판사 앞에 섰다. 예수는 동생이 나이 어린 것을 사과하고, 계속된 설명이었지만 동생의 체포로 이끈 이 사건의 도발적 성질에 관하여 분별 있는 말을 하여 그 경우를 다루었기 때문에, 재판관은 그 유대인 젊은이가 사납게 분을 터뜨린 것에 아마도 어떤 이유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의견을 표현했다. 그러한 경솔한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말라고 유다에게 경고한 뒤에, 그들을 내보내면서 예수에게 말했다. “당신은 그 소년을 지켜보는 것이 좋겠소. 당신들 모두에게 걸핏하면 많은 문제를 일으키리이다.” 그 로마인 판사의 말은 진실이었다. 유다는 예수에게 상당한 문제를 일으켰고, 언제나 그 문제는 바로 이런 성질을 가졌다. 곧 생각 없고 지혜롭지 못한 애국심의 폭발 때문에 국가의 권한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128:6.8 (1416.1) 그날 밤을 지내려고 예수와 유다는 베다니로 걸어갔다. 어째서 유월절 저녁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가 설명하였고 이튿날 나사렛을 향하여 출발했다. 예수는 가족에게 어린 동생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것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지만, 돌아온 뒤 3주쯤 되어, 이 사건에 관하여 유다와 길게 이야기했다. 예수와 이 말을 나눈 뒤에, 유다 스스로가 가족에게 이야기했다. 그는 이 고달픈 체험 전부를 통해서 가장인 형이 참을성을 보이고 관용을 베푼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128:6.9 (1416.2) 이것은 자기 가족의 한 식구와 함께 예수가 마지막으로 참석한 유월절이었다. 사람의 아들은 자신의 피붙이와 가까운 관계가 점점 더 끊어지게 될 것이었다.

128:6.10 (1416.3) 이 해에 깊이 명상에 잠기는 시간은 룻과 그 놀이 친구들 때문에 가끔 중단되었다. 이 꼬마들의 기쁨과 어린이다운 즐거움을 같이 나누려고, 예수는 언제라도 세상과 우주를 위하여 미래에 할 일의 숙고를 다음으로 미룰 준비가 되어 있었다. 꼬마들은 예수가 여러 번 예루살렘으로 여행한 체험담을 듣는 데 지칠 줄 몰랐다. 또한 동물과 자연에 대하여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크게 즐거워했다.

128:6.11 (1416.4) 수선 작업장에서는 아이들을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었다. 예수는 모래와 나무토막과 돌을 작업장 옆에 마련해 놓았고, 아이들은 떼지어 재미를 보려고 모여들었다. 놀다가 지치면, 대담한 아이들은 작업장을 들여다보았고, 주인이 바쁘지 않으면, 용감히 들어가서 말하곤 했다, “요수아 아저씨, 나와서 우리에게 신나는 이야기를 해주세요.” 그리고 나서 아이들은 손을 잡아 끌면서 그를 바깥으로 이끌곤 했다. 작업장의 모퉁이 옆에 가장 좋아하는 바위 위에 예수가 앉고, 아이들은 예수 앞에 반원을 지어 땅 바닥에 앉았다. 작은 꼬마들이 얼마나 요수아 아저씨를 좋아했는지! 꼬마들은 웃는 것, 마음껏 웃는 것을 배우고 있었다. 제일 작은 꼬마들 가운데 하나나 둘이 그의 무릎에 기어오르고 거기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표현하는 모습을 놀라워하면서 올려다보는 것이 버릇이었다. 아이들은 예수를 사랑했고, 예수는 아이들을 사랑했다.

128:6.12 (1416.5) 친구들은 그가 정치나 철학 또는 종교에 관한 깊은 토론을 하다가 어떻게 그가 그렇게 갑자기, 아주 완전히 다르게 다섯 살에서 열 살에 이르는 이 꼬마들과 명랑하고 즐겁게 장난하는 기분에 젖는가, 그의 지적 활동의 범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동생들이 자라고 여가를 더 얻게 됨에 따라서, 그리고 조카들이 생기기 전에, 그는 이 꼬마들에게 크게 주의를 기울였다. 하지만 조카들을 많이 즐길 만큼 땅에서 오래 살지는 않았다.

7. 스물여섯 되던 해 (서기 20년)

128:7.1 (1416.6) 이 해가 시작되자, 나사렛 예수는 그가 폭 넓은 잠재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똑같이, 적어도 때가 올 때까지는 사람의 아들로서 자신의 인격이 이 능력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충분히 확신하였다.

128:7.2 (1417.1) 이때 자신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관계에 대하여, 많이 생각은 했어도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이 모든 생각의 결론이 산 꼭대기에서 드린 기도에 한 번 나타났는데, 그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누구이든, 내가 무슨 능력을 행사하든 하지 않든 상관 없이, 나는 언제나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에 복종해 왔고, 언제나 복종하리이다.” 그래도 광대한 한 우주에 관하여 말하면, 이 사람이 나사렛 근처에서 일터로 오갈 때, “그분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물이 감춰져 있도다”하는 것이 글자 그대로 참말이었다.

128:7.3 (1417.2) 이 해 내내, 가족의 일은 유다를 제쳐놓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몇 년 동안, 야고보는 막내 동생과 문제가 있었는데, 그는 정착해서 일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생계비의 제 몫 내는 것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는 집에서 살고 싶어 했지만, 가족 유지비에서 자기 몫을 버는 데 성실하지 않았다.

128:7.4 (1417.3) 예수는 평화로운 사람이었고, 유다의 호전적 행위와 잦은 애국심의 폭발 때문에 이따금 당황했다. 야고보와 요셉은 그를 집에서 쫓아내는 데 찬성했으나 예수는 찬성하려 하지 않았다. 참을성이 몹시 요구될 때, 예수는 오직 이렇게 조언하곤 했다. “참아라. 어린 동생이 먼저 더 좋은 길을 찾고 그 길 안에서 자제하여 너희를 따르도록, 지혜롭게 조언하고 너희의 삶으로 모범을 보여라.” 예수가 지혜와 사랑으로 주는 조언은 가족의 분열을 막았고 그들은 함께 살았다. 그러나 결혼할 때까지 유다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128:7.5 (1417.4) 마리아는 예수의 앞날의 사명에 대하여 입을 여는 일이 드물었다. 이 화제가 나올 때마다, 예수는 다만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나이다.” 가족이 예수를 가까이 두고 의존하려는 경향을 벗어나게 만드는 어려운 과제를 그는 거의 마쳤다. 사람들을 위하여 실제로 봉사하는 일을 더 활발히 시작하려고, 이 나사렛 집을 때때로 비울 수 있는 날을 위하여 서둘러 준비하고 있었다.

128:7.6 (1417.5) 예수의 일곱 번째 수여에서 첫째가는 사명은 인간의 체험을 얻는 것, 네바돈 통치권의 획득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라. 바로 이 경험을 쌓으면서, 그는 유란시아와 지역 우주 전체에게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최상으로 계시하였다. 이 목적에 우연히 따르는 것으로, 그는 또한 루시퍼 반란에 관련되었던 이 행성의 복잡한 사무를 처리하는 데 착수했다.

128:7.7 (1417.6) 이 해에 예수는 여느 때보다 더 여가가 많았고, 수선 가게의 경영에 야고보를 훈련시키고 또한 집안 일을 지도하도록 요셉을 훈련시키는 데 많은 시간을 썼다. 마리아는 그가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들을 두고 어디로 가려고? 무엇을 하려고? 어머니는 이미 예수가 메시아라는 생각을 거의 버렸다.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단지 맏아들의 심중을 헤아릴 수 없었다.

128:7.8 (1417.7) 예수는 이 해에 식구들과 개인적으로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산으로 오르는 길에, 그리고 시골 길을 통해서, 오랫동안 걸을 때 자주 그들을 데리고 가곤 하였다. 추수하기 전에, 유다를 나사렛 남쪽에서 농사짓는 삼촌에게 데리고 갔으나 유다는 추수가 끝난 뒤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달아났고, 나중에 시몬은 호수에서 유다가 어부들과 함께 있음을 발견했다. 시몬이 그를 집으로 데리고 돌아왔을 때, 예수는 달아난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어부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함께 막달라로 가서, 어부인 어느 친척의 보호 밑에 그를 맡겼다. 유다는 그때부터 죽 결혼할 때까지, 꽤 무던하게 정규적으로 일했고, 결혼한 뒤에 어부로서 계속 일했다.

128:7.9 (1418.1) 마침내 예수의 남동생들이 다 일생의 직업을 고르고, 자리를 잡은 날이 왔다. 예수가 집을 떠나는 것을 위해서 무대가 준비되고 있었다.

128:7.10 (1418.2) 11월에 쌍 결혼이 있었다. 야고보와 에스타, 그리고 미리암과 야곱이 결혼했다. 이때는 참으로 기쁜 때였다. 마리아도 다시 한 번 행복했지만, 이따금 예수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큰 불안의 짐을 지고 고통스러워 했다. 예수가 소년이었을 때 했던 것처럼, 앉아서 어머니와 터놓고 이야기하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는 한결같이 의사(意思) 표시를 하지 않았고, 앞날에 대해서 도무지 입을 열지 않았다.

128:7.11 (1418.3) 야고보와 신부 에스타는 마을 서편에 작고 아담한 집으로 이사했고, 이 집은 시아버지의 선물이었다. 야고보가 어머니의 집을 계속 지원했지만, 결혼했기 때문에 그의 몫은 반으로 줄어들었다. 예수는 요셉을 가장으로 정식으로 임명하였다. 유다는 이제, 달마다 아주 충실하게 자기 몫의 돈을 집으로 보내고 있었다. 야고보와 미리암의 결혼은 유다에게 대단히 유익한 영향을 미쳤고, 쌍 결혼이 있은 다음 날, 고기잡이 터로 떠날 때, 그는 “내 임무를 충실히 하고, 필요하다면 더 할 것”을 믿어도 좋다고 요셉을 안심시켰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128:7.12 (1418.4) 아버지 야곱이 선조들과 함께 묻혔으므로, 미리암은 야곱의 집에서, 마리아의 이웃에서 살았다. 마르다는 집에서 미리암의 자리를 차지했고, 새로운 조직은 이 해가 저물기 전에 순조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128:7.13 (1418.5) 이 쌍 결혼이 있은 다음 날, 예수는 야고보와 중요한 회의를 가졌다. 그가 집을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야고보에게 비밀로 말했다. 야고보에게 수선 가게의 완전한 권리를 주었고, 정식으로 엄숙하게 그가 요셉 가문의 가장인 것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무척 감동스럽게 동생 야고보를 “내 아버지 집의 가장이자 보호자”로 세웠다. 비밀 계약을 작성하고 그들 둘이 서명했다. 수선 가게를 선물로 주는 대신에, 이제부터 야고보가 가족을 위하여 완전히 재정 책임을 맡으며, 이렇게 이 문제에 관해서 예수는 더 이상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고 분명히 적었다. 계약서에 서명한 뒤에, 예수가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아도 가족의 실제 비용을 치르도록 예산을 맞춘 뒤에, 야고보에게 말했다. “그러나, 얘야, 내 때가 올 때까지, 달마다 너에게 얼마큼 계속 보내겠다. 그러나 내가 보내는 돈은 경우에 따라 네가 써야 하느니라. 이 돈은 좋게 여기는 대로, 가족의 필수품이나 즐거움을 위해 쓰거라. 병이 있을 때 쓰거나, 가족의 어느 식구에게 뜻하지 않게 생기는 긴급 사태를 대비하여 쓰도록 하여라.”

128:7.14 (1418.6) 이렇게 아버지의 일을 공식으로 시작하기 전에, 예수는 어른으로서 살면서 집을 떠나 둘째 국면에 들어가려고 준비했다.

제 129 편 예수의 어른 시절 후기

유란시아서

제 129 편

예수의 어른 시절 후기

129:0.1 (1419.1) 예수는 나사렛 가족의 집안 일을 관리하고 식구 각자를 직접 지도하는 일로부터 완전히, 마침내 손을 떼었다. 세례받는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전까지, 그는 가족의 재정에 줄곧 돈을 부었고, 동생들 하나하나의 영적 복지에 몸소 깊은 관심을 가졌다. 과부가 된 어머니의 평안과 행복을 위하여, 언제나 인간으로서 가능한 모든 것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29:0.2 (1419.2) 사람의 아들은 이제 나사렛 집에서 영구히 떨어져 나가려고 모든 준비를 마쳤는데, 이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연히 예수는 민족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했으며, 이 자연스러운 애정은 그들에게 특별히 사랑을 쏟았기 때문에 엄청나게 커졌다. 사람은 동료에게 충만하게 헌신하면 할수록, 그들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 예수는 가족에게 아주 완전히 헌신했기 때문에, 크고 뜨거운 애정으로 가족을 사랑했다.

129:0.3 (1419.3) 예수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온 집안이 천천히 깨달았다. 오로지 예수가 출발할 뜻을 발표하기 위하여 그들을 이렇게 차츰차츰 준비시켰기 때문에, 기대하던 이별의 슬픔이 줄어들었다. 그가 이러한 궁극의 이별을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차리는 데는 4년이 넘게 걸렸다.

1. 스물일곱 되던 해 (서기 21년)

129:1.1 (1419.4) 이 해, 서기 21년 1월, 어느 비 오는 일요일 아침에, 예수는 아무런 절차 없이 가족을 떠났다. 단지 티베리아스에 가서, 다음에 갈릴리 바다 근처의 다른 도시들을 방문하러 간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렇게 떠났고, 결코 다시 그 집의 정규 식구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129:1.2 (1419.5) 티베리아스에서 한 주를 보냈는데, 이곳은 갈릴리의 서울인 세포리스를 곧 이어받을 새 도시였다. 흥미 있는 것을 별로 발견하지 못하자, 계속하여 막달라와 벳세다를 거쳐 가버나움으로 갔고, 거기서 멈춰서 아버지의 친구 세베대를 찾아보았다. 세베대의 아들들은 어부였고, 바로 세베대는 배 만드는 사람이었다. 나사렛 예수는 설계와 건축에 전문가였고, 나무를 다루는 일에 대가였다. 세베대는 나사렛 장인(匠人)의 솜씨를 오랫동안 듣고 있던 터였다. 오랫동안 세베대는 개량된 배를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예수 앞에 계획을 내밀고, 찾아온 목수에게 사업을 함께 하자고 제의했다. 예수는 즉시 찬성하였다.

129:1.3 (1419.6) 예수는 1년 남짓하게 세베대와 함께 일했을 뿐이었지만, 그동안에 새 종류의 배를 만들어냈고, 전혀 새로운 배 건조법을 창안하였다. 우수한 기술로, 그리고 판자를 수증기로 쪼이는 크게 개량된 방법으로, 예수와 세베대는 아주 우수한 종류의 배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 배는 옛날 종류보다 호수에서 돛을 달고 가기에 훨씬 더 안전했다. 몇 년 동안 세베대는 그의 작은 작업장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일이 더 많았고, 이런 새 종류의 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5년 안에, 호수에 있는 거의 모든 배가 가버나움에 있는 세베대의 작업장에서 건조되었다. 예수는 이 새로운 배의 설계자로서 갈릴리의 어부들에게 잘 알려지게 되었다.

129:1.4 (1420.1) 세베대는 얼마큼 부유한 사람이었다. 배 만드는 그의 작업장은 가버나움 남쪽, 호수에 있었으며, 집은 벳세다의 고기잡이 본부 가까이, 호숫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예수는 가버나움에서 머물렀던 이 해와 그 후에, 세베대의 집에서 살았다. 그는 세상에서 오랫동안 혼자, 다시 말해서 아버지 없이 일했고, 아버지의 동업자와 일하는 이 기간을 매우 즐겁게 보냈다.

129:1.5 (1420.2) 세베대의 부인 살로메는 안나스의 친척이었다. 안나스는 한때 예루살렘에서 대사제였는데, 아직도 사두개 집단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고 8년 전에야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살로메는 예수를 크게 칭찬하는 사람이 되었다. 자기의 아들들, 야고보ㆍ요한ㆍ다윗처럼 그를 사랑했고, 한편 네 딸은 예수를 오빠로 대접했다. 예수는 가끔 야고보ㆍ요한ㆍ다윗과 함께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 그들은 예수가 숙달된 조선공일 뿐 아니라 숙련된 어부인 것을 알게 되었다.

129:1.6 (1420.3) 이 해에 계속, 예수는 달마다 야고보에게 돈을 보냈다. 10월에 마르다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나사렛으로 돌아왔고, 시몬과 유다의 쌍 결혼식을 올리기 바로 전에 돌아오기까지, 2년이 넘도록 다시 나사렛에 있지 않았다.

129:1.7 (1420.4) 이 해 내내 예수는 배를 만들었고, 사람들이 어떻게 땅에서 사는가 줄곧 지켜보았다. 가버나움이 다마스커스에서 남쪽으로 가는 직통 여행 길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주 카라반 정거장에 이야기하러 가곤 하였다. 가버나움은 로마의 견고한 군사 기지였고, 수비대의 지휘관은 야웨를 믿는 이방인, 즉 “경건한 사람”이었는데, 유대인은 개종한 사람들을 그렇게 부르는 버릇이 있었다. 이 장교는 부유한 로마인 가족에 속했는데, 가버나움에 아름다운 회당 짓는 일을 자진하여 떠맡았다. 예수가 세베대와 함께 살려고 오기 얼마 전에, 그는 이 회당을 유대인들에게 기증하였다. 예수는 이 해 동안 절반이 넘게 예배를 이 새 회당에서 인도했다. 어쩌다가 예배에 참석한 카라반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그가 나사렛에서 온 목수임을 기억했다.

129:1.8 (1420.5) 세금을 물 때가 되었을 때, 예수는 자신이 “가버나움의 숙련 기술자”라고 등록하였다. 이날부터 계속 땅에서 생명이 끝날 때까지, 그는 가버나움의 거주자로 알려졌다. 결코 어떤 다른 법적 거주지를 주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사람들이 그의 거주지가 다마스커스ㆍ베다니ㆍ나사렛 아니 알렉산드리아라고 지명해도 그대로 버려두었다.

129:1.9 (1420.6) 가버나움 회당의 도서관 서고에서 그는 많은 새 책을 발견했고, 한 주에 다섯 번 저녁 시간을 열심히 공부하는 데 보냈다. 하루 저녁은 나이 든 사람들과 교제하는 데 쓰고, 하루 저녁은 젊은이들과 보냈다. 예수의 인격에는 품위 있고 영감을 주는 무엇이 있었고, 그 인격은 변함없이 젊은 사람들을 끌었다. 언제나 사람들이 그 앞에서 편안하게 느끼도록 해주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비결은 아마도 그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 언제나 관심을 가졌고, 묻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충고하는 일이 드물었다는 이 두 가지 사실에 있었다.

129:1.10 (1420.7) 세베대 가족은 예수를 거의 숭배하듯 했고, 그가 회당에 공부하러 가기 전, 저녁을 먹고 나서 밤마다 그가 진행하는 문답 시간에 거르지 않고 참석했다. 젊은 이웃 사람들도 이 저녁 식사 후 모임에 참석하려고 자주 들어왔다. 이 작은 모임에서 예수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다채로운 상급 과정을 가르쳤다. 이들과 함께 아주 거리낌없이 이야기했고, 정치ㆍ사회학ㆍ과학ㆍ철학에 대해서 그의 생각과 이상을 표현했다. 그러나 종교, 즉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하여 토론할 때를 제외하고, 감히 최종의 권한을 가지고 말하지 않았다.

129:1.11 (1421.1) 한 주에 한 번 예수는 집ㆍ작업장ㆍ호숫가의 조수들 전체와 회의를 가졌는데, 이는 세베대가 일꾼들을 많이 거느렸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일꾼들 사이에서 예수를 처음으로 “주”라고 일컬었다. 그들은 모두 그를 사랑했다. 그는 가버나움에서 세베대와 함께 즐겁게 일했지만, 나사렛 목수 작업장 옆에서 놀던 아이들을 그리워했다.

129:1.12 (1421.2) 세베대의 아들들 가운데, 야고보는 선생이자 철학가인 예수에게 가장 흥미를 가졌다. 요한은 그의 종교적 가르침과 의견에 가장 관심이 있었다. 다윗은 그를 기술공으로서 존경했지만, 종교적 견해와 철학적 가르침은 거의 믿지 않았다.

129:1.13 (1421.3) 유다는 안식일에 예수가 회당에서 말씀하는 것을 들으려고 자주 건너왔고, 남아서 함께 이야기하곤 했다. 맏형을 보면 볼수록, 유다는 예수가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라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129:1.14 (1421.4) 이 해에 예수는 그의 인간 정신을 더욱 통솔하는 데 크게 발전했고, 깃드는 생각 조절자와 의식하여 접촉하는 새로운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129:1.15 (1421.5) 이 해는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마지막 해였다. 두 번 다시, 그는 한 곳이나 한 가지 일에 한 해를 모두 보내지 않았다. 땅에서 순례할 날이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맹렬하게 활동하는 기간이 멀지 않았다. 그러나 단순했지만 맹렬히 활동하던 지난날의 생애와 더욱 격심하고 벅찬 대중(大衆) 봉사 기간 사이에, 널리 여행하고 상당히 다양하게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몇 해가 이제 사이에 끼려고 한다. 유란시아에서 자신을 수여하는 동안, 인간 이후의 신다운 단계에서, 완전하게 된 신이자 인간으로서 가르치고 전도하는 생애에 들어갈 수 있기 전에, 이 땅의 사람으로서 훈련을 마쳐야 했다.

2. 스물여덟 되던 해 (서기 22년)

129:2.1 (1421.6) 서기 22년 3월, 예수는 세베대와 가버나움을 떠났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경비를 치르려고 그는 돈을 조금 요구했다. 세베대와 일하는 동안에 그는 돈을 조금만 인출해서 달마다 나사렛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곤 했다. 한 달은 요셉이 돈을 받으려고 가버나움으로 왔고, 다음 달에는 유다가 가버나움으로 와서 예수에게서 돈을 받아서 나사렛으로 가지고 가곤 했다. 유다의 고기잡이 본부는 가버나움 남쪽에서 몇 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129:2.2 (1421.7) 세베대의 가족을 떠났을 때, 예수는 유월절 때까지 예루살렘에 남아 있기로 찬성했고, 모두가 그 행사에 참석하기로 약속했다. 그들은 유월절 저녁 식사를 같이 축하하도록 주선까지 하였다. 예수가 떠났을 때 모두, 특히 세베대의 딸들이 슬퍼했다.

129:2.3 (1421.8) 가버나움을 떠나기 전에, 예수는 새로 찾아낸 친구이자 가까운 동료, 요한 세베대와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때가 올 때”까지 널리 여행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요한에게 일러 주고, 받을 돈이 없어질 때까지 달마다 나사렛에 있는 가족에게 얼마큼 돈 보내는 일을 대신 해달라고 부탁했다. 요한은 약속했다. “내 선생이여, 할 일을 보시고, 세상에서 당신의 일을 하소서. 이 일이나 어느 다른 일에도 나는 당신을 위하여 행동하리이다. 내가 내 어머니를 보살피고 형제 자매를 돌보는 것 같이, 당신의 가족을 보살피리이다. 아버지가 쥐고 있는 당신의 기금을 지시한 대로, 필요한 대로 보내리이다. 당신의 돈이 떨어지고 나서, 당신한테서 돈을 더 받지 않으면, 그리고 당신의 어머니가 형편이 어렵다면, 바로 내가 번 돈을 당신의 어머니와 나누리이다. 평안히 길을 가소서. 이 모든 일에 나는 당신을 대신하여 행동하리이다.”

129:2.4 (1422.1) 따라서, 예수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난 뒤에, 요한은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예수가 받을 돈에 대하여 의논했고, 그것이 그렇게 큰 돈인 것에 놀랐다. 예수가 이 문제를 송두리째 그들의 손에 맡겼기 때문에, 이 기금을 부동산에 투자해서, 그 소득을 나사렛 가족을 돕는 데 쓰는 것이 상책일 것이라 의견을 모았다. 저당 잡혀 있고 팔려고 내놓은, 가버나움의 한 작은 집을 세베대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세베대는 예수의 돈으로 이 집을 사서, 친구를 위하여 집의 권리를 맡아서 가지고 있으라고 요한에게 지시했다. 요한은 아버지가 조언한 대로 했다. 2년 동안 이 집세는 저당금을 무는데 쓰였고, 이것은 예수가 가족이 필요한 대로 쓰라고 요한에게 당장 보낸 어떤 큰 금액과 합쳐서, 이 부채 금액과 거의 맞먹었다. 세베대는 그 차액을 냈다. 그래서 요한은 저당금 잔액을 물 때가 되었을 때 물었고, 이렇게 해서 이 두 칸 방 집에 대하여 완전한 권리를 확보하였다. 이 방법으로 예수는 가버나움에서 한 집의 소유자가 되었지만, 이에 대하여 통지를 받지 않았다.

129:2.5 (1422.2) 나사렛 가족이 예수가 가버나움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은 재정에 관하여 요한과 이렇게 주선한 것을 몰랐으니까, 이제 더 예수의 도움이 없이 지내야 할 때가 왔다고 믿었다. 야고보는 예수와 한 계약을 기억했고, 동생들의 도움을 얻어서, 당장에 가족을 돌보는 총 책임을 맡았다.

129:2.6 (1422.3)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를 지켜보자. 그는 거의 두 달 동안 성전의 토론을 듣고 랍비들이 있는 여러 학교를 가끔 찾아보느라고 절반이 넘게 시간을 썼다. 안식일이 되면 그날의 대부분은 베다니에서 보냈다.

129:2.7 (1422.4) 예수는 세베대의 아내 살로메의 편지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갔는데, 이 편지는 전직(前職) 대사제 안나스에게 그를 “내 아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안나스는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를 친히 데리고 예루살렘의 종교 선생들이 있는 여러 학원을 방문하였다. 예수는 이 학교들을 샅샅이 들여다보고 그들이 가르치는 방법을 조심스럽게 관찰했지만, 대중 앞에서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안나스는 예수를 위대한 사람으로 여기기는 했어도, 어떻게 조언할까 어리둥절해하였다. 그는 학생으로서 예루살렘의 어느 학교라도 들어가라 제안하는 것이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예수가 이 학교들에서 훈련받은 적이 없었으니까, 결코 예수가 정규 선생의 지위를 받지 못할 것을 잘 알았다.

129:2.8 (1422.5) 곧 유월절이 가까이 다가왔고, 온 사방에서 군중과 함께, 가버나움으로부터 세베대와 그 가족이 모두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들은 모두 안나스의 너른 집에 멈추었고, 거기서 하나의 행복한 가족으로서 유월절을 축하하였다.

129:2.9 (1422.6) 이 유월절 주간이 끝나기 전에, 겉보기에는 우연하게, 예수는 부유한 어느 여행자와 그 아들, 열일곱 살쯤 된 젊은이를 만났다. 이 여행자들은 인도에서 왔다. 로마와 지중해의 여러 다른 도시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도록 주선하였다. 그들은 그 두 사람에게 통역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아들에게 가정 교사로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를 희망했다. 그 아버지는 예수에게 함께 여행하자고 고집하였다. 예수는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또 거의 2년 동안 떠나 있는 것이 도저히 공평하지 않고, 그동안에 가족이 빈궁하게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자 동양에서 온 이 여행자는, 예수에게 1년 동안의 임금을 선불하겠다, 그러면 가족을 빈곤하지 않게 보호하기 위하여 예수가 그러한 기금을 친구들에게 맡길 수 있다고 제안해 왔다. 예수는 그 여행을 하기로 찬성했다.

129:2.10 (1423.1) 예수는 이 큰 돈을 세베대의 아들 요한에게 넘겼다. 너희는 요한이 가버나움 재산의 저당금을 청산하는 데 이 돈을 어떻게 사용했는가 이야기를 들었다. 이 지중해 여행에 관하여 예수는 세베대에게 완전히 속을 털어놓았지만, 아무에게도,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눈 가족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세베대에게 부탁했다. 세베대는 거의 2년에 걸치는 이 긴 세월 동안 예수가 어디 있는지 안다고 결코 밝히지 않았다. 이 여행에서 예수가 돌아오기 전에, 나사렛 가족은 그가 죽은 것으로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였다. 몇 번의 경우에 세베대가 아들 요한과 함께 나사렛까지 갔고 그들을 안심시킨 그의 말이 겨우 마리아의 가슴 속에서 계속 희망이 살아 있게 하였다.

129:2.11 (1423.2) 이 기간에 나사렛 가족은 무척 잘 어울렸다. 유다는 자기의 몫을 상당히 늘였고, 결혼할 때까지 이 여분의 몫을 계속 냈다. 거의 도움이 필요 없었는데도 예수가 지시한대로, 달마다 마리아와 룻에게 선물을 가지고 가는 것이 요한 세베대의 버릇이었다.

3. 스물아홉 되던 해 (서기 23년)

129:3.1 (1423.3) 예수가 스물아홉 되던 해 전부가 지중해 세계의 여행을 마치는 데 쓰였다. 이 체험담을 밝히도록 우리가 허락을 받은 한도까지, 일어난 주요 사건들은 이 글을 바로 뒤잇는 이야기들의 주제가 된다.

129:3.2 (1423.4) 로마 세계를 둘러보는 이번 여행 동안 내내, 여러 가지 이유로 예수는 다마스커스 서기관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돌아오는 여행 길에 고린도와 다른 여러 정박지에서 그는 유대인 가정 교사로 알려졌다.

129:3.3 (1423.5) 이때는 예수의 일생에서 파란 많은 기간이었다. 이번 여행에 그는 동포 인간과 많이 접촉했으나 이 체험은 가족 누구에게도, 사도들 중 아무에게도 결코 밝히지 않은 일생의 한 단계였다. 이렇게 널리 여행했다는 것을 아무도 (벳세다의 세베대를 제외하고) 알지 못한 채, 예수는 육체를 입고 일생을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났다. 친구들 가운데 더러는 그가 다마스커스로 돌아갔다고, 더러는 그가 인도로 갔다고 생각했다. 가족은 그가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다고 믿고 싶어했다. 그가 부(副)하잔이 될 목적으로 거기에 가도록 한 번 초대받은 적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129:3.4 (1423.6)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을 때, 예수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알렉산드리아로 갔다고 믿는 가족의 의견을 조금도 바꾸려 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에서 자리를 비운 동안 내내, 그 학문과 문화의 도시에서 지냈다고 가족이 계속 믿도록 버려두었다. 오로지 벳세다의 조선공 세베대만 이 문제에 관하여 사실을 알았지만, 세베대는 아무에게도 이를 밝히지 않았다.

129:3.5 (1423.7) 유란시아에서 예수의 일생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해독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일 때, 너희는 미가엘이 어떤 동기로 자신을 수여했는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상하게 보이는 여러 행적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너희 세계에서 그가 머무른 그 목적을 헤아려야 한다. 그는 지나치게 흥미를 자아내고 사람들의 눈을 끄는 개인 생애를 살지 않으려고 한결같이 조심했다. 그는 특별하거나 압도적인 방법으로 동포 인간에게 호소하기를 전혀 바라지 않았다.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동료 필사자에게 드러내는 일에 전념하였고, 동시에 바로 그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에 계속 복종하면서, 땅에서 필사 생애를 사는 숭고한 일에 헌신하였다.

129:3.6 (1424.1) 또한 이 신의 수여를 연구하는 모든 필사 학자가, 유란시아에서 육신을 입고 이 일생을 살았지만 예수가 자신의 우주 전체를 위하여 살았음을 기억한다면 땅에서 사신 그의 일생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유익할 것이다. 온 네바돈 우주에 두루, 사람이 사는 모든 개별 세계에, 필사 성질의 육체를 입고서 사신 일생과 관련되어 무언가 특별하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있었다. 유란시아에서 머무르면서 파란 많았던 시절 이후로, 사람이 살 수 있게 된 모든 세계에도 또한 그렇다. 마찬가지로, 이 지역 우주의 모든 미래 역사에서 의지(意志)를 가진 인간이 살게 될지 모르는 어느 세계에도 이것이 똑같이 참말이다.

129:3.7 (1424.2) 사람의 아들은 이번에 로마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그 체험을 통해서, 그 시대와 세대에 세상에서 살았던 다채로운 민족들과 교육적인 접촉을 가지고 훈련하는 일을 실지로 마쳤다. 나사렛으로 돌아올 때가 되자, 그는 이 여행 훈련의 매체를 통해서, 유란시아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고 생계를 이어가는가 거의 배웠다.

129:3.8 (1424.3) 지중해 분지 주위에서 여행하는 참 목적은 사람을 알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여행에서 수백 명의 인간에게 무척 가까이 다가갔다. 부자와 가난한 자, 지위가 높은 자와 낮은 자, 흑인과 백인, 교육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 교양 있는 자와 없는 자, 동물 같은 자와 영적인 자, 종교적인 자와 비종교적인 자, 도덕이 있는 자와 부도덕한 자, 이렇게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했다.

129:3.9 (1424.4) 이 지중해 여행에서, 예수는 물질에 기초를 둔 필사 지성을 통솔하는 자신의 인간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 크게 진전을 보았고, 그에게 깃들어 있는 조절자는 바로 이 인간적 지능을 진보시키고 영적 수준에 이르게 하는 데 크게 나아졌다. 이 여행이 끝날 때가 되자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우주의 아버지의 창조 아들이라는 것을 실질적으로―인간으로서 아주 확실히―알았다. 조절자는 그가 일찍이 이 네바돈 지역 우주를 조직하고 관리하러 오기 전에 신성한 아버지와 관련하여 파라다이스에서 가졌던 체험의 기억, 그림자 같은 기억을 점점 더 사람의 아들의 머리 속에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 조절자는 영원에 가까운 과거의 여러 시기에, 예전에 신다운 존재였던 필요한 그 기억을 조금씩, 예수의 인간 의식(意識)으로 떠올렸다. 사람 이전의 체험 중에서 조절자가 가져와야 할 마지막 사건은 유란시아 육신화를 개시하려고 자신의 의식(意識)을 내놓기 바로 전에 작별하면서 구원자별의 이마누엘과 가졌던 회의였다. 사람 이전의 존재에 대한 이 마지막 기억의 그림은,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받던 바로 그날, 예수의 의식 속에서 뚜렷해졌다.

4. 사람인 예수

129:4.1 (1424.5) 구경하는 지역 우주의 하늘 지성 존재들에게는, 적어도 전 생애에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사람의 죽음을 겪은 사건 바로 전까지, 이 지중해 여행이 예수가 땅에서 겪은 온갖 체험 중에서 가장 마음을 빼앗는 것이었다. 이때는 곧 뒤잇는 대중 봉사 시기와 대조해서, 개인으로서 봉사하는 황홀한 기간이었다. 이 독특한 사건이 더군다나 흥미를 끌었던 것은 이때 그가 아직도 나사렛의 목수요, 가버나움의 조선 기술자요, 다마스커스의 서기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사람의 아들이었다. 그는 아직까지 자신의 인간 정신을 완벽하게 통솔하지 못했다. 조절자는 예수의 필사 신분을 완전히 지휘하고 그와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 아직도 그는 사람들 가운데 있는 사람이었다.

129:4.2 (1425.1) 사람의 아들이 겪은 순전히 인간다운 종교적 체험―즉 개인의 영적 성장―은 스물 아홉 되던 이 해에, 거의 절정에 이르렀다. 영적으로 발전하는 이 체험은 생각 조절자가 도착한 순간부터, 사람의 물질 지성과 영(靈)이 부여한 지성 사이에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고 정상인 관계가 완성되고 확인되는 날까지, 한결같이 차츰차츰 자란 것이었다―이 두 지성을 하나로 만드는 현상은 이 땅에서 육신화한 필사자로서 요단강에서 세례받은 날, 사람의 아들이 완벽하게 최종으로 마친 체험이었다.

129:4.3 (1425.2)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정식으로 교통하는 시간이 많이 없었던 듯 보였지만, 이 여러 해 동안 내내, 그는 영으로 깃들어 계시는 파라다이스 아버지와 몸소 친교하는 더욱 효과 있는 방법을 통달하였다. 그는 육체를 입고서 진정한 인생, 충만한 인생, 그리고 참으로 정상이고 자연스럽고 평범한 인생을 살았다. 시공의 물질 세계에서 인간들이 사는 실제의 인생살이 전부와 본질에 해당하는 것을 그는 피부로 겪어서 안다.

129:4.4 (1425.3) 사람의 아들은 숭고한 기쁨으로부터 깊은 슬픔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인간의 감정을 맛보았다. 그는 기쁨이 넘치는 아이였고, 보기 드물게 좋은 유머가 있는 존재였다. 마찬가지로 “슬픔을 겪은 사람이요 비애를 알았다.” 영적 의미에서, 밑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필사자의 일생을 거쳤다. 물질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존재에서 사회의 두 극단을 거치는 인생을 피한 듯 보일지 모르지만, 그는 인류의 온전한 체험 전부에 지적으로 온통 익숙하게 되었다.

129:4.5 (1425.4) 예수는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여러 영역에서 진화하고 승천하는 필사자의 생각과 느낌, 욕구와 충동을 알고 있다. 신체적ㆍ지적ㆍ영적 자아의 시초로부터 유아기ㆍ아동기ㆍ소년기ㆍ성년기까지―인간의 죽음을 체험하기까지―인생을 살았다. 지적ㆍ영적 진보가 있는 기간, 사람이 보통 겪는 익숙한 기간들을 거쳤을 뿐 아니라, 유란시아 필사자 가운데 거의 아무도 도달해보지 못한 국면, 인간과 조절자가 조화를 이루는 상급의 진보된 국면도 또한 충분히 겪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너희 세상에서 사는 것과 같을 뿐 아니라, 시공의 모든 다른 진화 세계에서, 아니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모든 세계 중 최고로 진보한 세계에서 사는 것과 같이, 필사 인간의 생활을 충만히 체험했다.

129:4.6 (1425.5) 동료 필사자, 즉 땅에서 우연히 같은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살았던 이 완전한 인생을 조건 없이 보편적으로 좋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그래도 육체를 입고 유란시아에서 나사렛 예수가 산 일생은, 바로 그 사람의 일생 동안, 필사 인간에게 영원한 하나님을 충분히 계시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무한한 창조자가 흡족해하기까지 완전하게 된 인격을 제시한 것이라고 우주의 아버지로부터 완벽하고 조건 없는 승인을 받았다.

129:4.7 (1425.6) 바로 이것이 그의 참된 최고의 목표였다. 그가 살던 시대나 다른 시대에, 어느 아이나 어른, 어느 남자나 여자에게 완전하고 자세한 본보기로 유란시아에 살려고 내려오지 않았다. 충만하고 풍부하고 아름답고 고귀한 그의 일생에서 더할 나위 없는 모범이 되고 신성하게 영감을 주는 많은 것을 참으로, 실로, 우리 모두가 발견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참된 일생, 진정하게 인간다운 일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모든 다른 인간이 모방할 본보기를 보여주려고 땅에서 일생을 살지 않았다. 그는 자비를 베풀어 육체를 입고 이 인생을 살았고, 너희 모두가 땅에서 똑같이 자비를 베풀며 인생을 살 수 있다. 그 시절에 그가 당면한 그대로 필사 생애를 산 것 같이, 그는 그렇게 함으로 이 시대에, 또 우리가 처한 대로 일생을 살도록 우리 모두를 위하여 모범이 되었다. 너희는 예수의 일생을 살려는 꿈을 가져서는 안 되지만, 그가 일생을 살았을 때 쓴 것과 같은 방법으로 너희의 일생을 살려고 결심할 수 있다. 예수는 이 지역 우주의 모든 세상에서 온 세월을 통하여, 모든 필사자에게 엄밀하고 자세한 본보기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초기에 올라가는 여러 세계로부터, 온 우주를 거쳐서, 계속하여 하보나를 통하고 파라다이스에 이르기까지, 그는 모든 파라다이스 순례자에게 언제까지나 영감을 주는 사람이요 안내자이다. 예수는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 이르기까지, 부분적인 것으로부터 완전한 것으로, 땅에 있는 것으로부터 하늘에 있는 것으로, 시간 세계에서 영원까지 이르는 새로운 길, 생명의 길이다.

129:4.8 (1426.1) 스물아홉 살 되던 해가 저물 때까지, 나사렛 예수는 육체를 입고 머무르는 자로서 필사자에게 요구되는 인생살이를 거의 마쳤다. 그는 사람에게 완전한 하나님을 명백히 보여주기 위하여 땅에 오셨다. 이제 그는 거의 완전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에게 명백하게 나타날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이 모두를 이루었다.

제 130 편 로마로 가는 길

유란시아서

제 130 편

로마로 가는 길

130:0.1 (1427.1) 로마 세계의 여행은 예수가 땅에서 산 일생에서 스물여덟 되던 해의 대부분과 스물아홉 되던 해 전부를 써버렸다. 예수와 인도에서 온 두 원주민―고노드와 아들 가니드―는 서기 22년 4월 26일, 일요일 아침에 예루살렘을 떠났다. 그들은 일정대로 여행했고, 예수는 페르시아 만에서 이듬해, 서기 23년, 12월 10일, 카락스 시(市)에서 그 아버지와 아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130:0.2 (1427.2) 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요파의 길을 따라 케자리아로 갔다. 케자리아에서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배를 탔다. 알렉산드리아로부터 크레테 섬의 라시아를 향하여 돛을 달았다. 크레테에서부터 키레네에 들리고, 카르타고를 향해서 항해하였다. 카르타고에서 나폴리로 가는 배를 탔고, 말타ㆍ시라큐스ㆍ메시나에서 멈추었다. 나폴리에서 카푸아로 갔고, 거기서 아피아 길을 따라서 로마로 여행하였다.

130:0.3 (1427.3) 로마에서 머무른 뒤에, 육로로 타렌툼까지 갔고, 거기서 그리스의 아테네를 향하여 돛을 달았으며, 니코폴리스와 고린도에서 멈추었다. 아테네에서 트로아 길을 따라서 에베소로 갔다. 에베소에서 키프러스로 항해했고, 가는 길에 로드에 들렸다. 키프러스에서 방문하고 쉬느라고 상당한 시간을 보냈고, 다음에 시리아의 안티옥을 향해 돛을 달았다. 안티옥에서 남쪽에 시돈으로 갔고, 다음에 다마스커스로 건너갔다. 거기서부터 카라반을 이용하여 메소포타미아로 여행했으며, 탑사쿠스와 라리사를 지나쳤다. 바빌론에서 얼마 동안 지내고, 우르와 다른 곳들을 찾아보았고, 다음에 수사로 갔다. 수사에서 카락스로 여행했고, 그 장소에서 고노드와 가니드는 인도를 향해서 출발했다.

130:0.4 (1427.4) 다마스커스에서 넉 달 일하는 동안, 예수는 고노드와 가니드가 사용하는 언어의 기본을 깨우쳤다. 거기서 그는 그리스어를 어느 인도 언어로 번역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보냈고, 고노드의 고향 지역에서 온 본토인의 도움을 받았다.

130:0.5 (1427.5) 이 지중해 여행에서, 예수는 가니드를 가르치고 고노드의 사업 회의와 사교 접촉이 있을 때 통역으로 활동하면서 하루의 절반쯤을 보냈다. 날마다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써도 되었고, 이 시간을 동료 인간들과 몸소 가깝게 접촉하는 데 썼다. 이 땅의 필사자들과 이렇게 친밀한 관계를 가진 것이 대중(大衆)에게 봉사하기 바로 전에 이 몇 해 동안 그의 활동의 특징을 나타냈다.

130:0.6 (1427.6) 눈으로 직접 관찰하고 실제로 접촉함으로 예수는 서양과 레반트 지방의 상급 물질적ㆍ지적 문명을 알게 되었다. 고노드와 똑똑한 그의 아들로부터 인도ㆍ중국의 문명과 문화에 대해서 많이 배웠으니, 바로 고노드가 인도 시민이요, 황인종의 제국을 세 번 널리 여행했기 때문이다.

130:0.7 (1427.7) 젊은이 가니드는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던 이 기간에 예수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들은 서로에게 깊이 정이 들었고, 소년의 아버지는 함께 인도로 돌아가자고 여러 번 예수를 설득하려고 애썼지만, 예수는 언제나 팔레스타인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가야 하는 필요성을 이유로 들어 사양하였다.

1. 요파에서―요나에 대한 강연

130:1.1 (1428.1) 요파에서 머무르는 동안, 예수는 가디아를 만났는데, 이 사람은 어느 시몬이라는 무두장이를 위해서 일하는 필리스티아인 통역이었다.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고노드의 대리인들은 이 시몬과 거래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고노드와 아들은 케자리아로 가는 길에 그를 방문하고 싶어했다. 요파에서 묵는 동안, 예수와 가디아는 따듯한 친구가 되었다. 이 젊은 필리스티아인은 진리를 찾는 사람이었다. 예수는 진리를 주는 사람이었고, 유란시아에서 그 세대의 사람들에게 진리였다. 진리를 찾는 위대한 사람과 진리를 주는 위대한 사람이 만날 때, 그 결과로 새 진리의 체험 속에서 사람을 해방하는 큰 깨우침이 생겨난다.

130:1.2 (1428.2) 어느 날 저녁을 먹고 난 뒤에, 예수와 젊은 필리스티아인은 바닷가를 걸었다. 가디아는 이 “다마스커스 서기관”이 히브리인의 전통에 정통한 줄 모르고서, 예수에게 어느 부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그곳에서 요나가 타르쉬시를 향하여 불운의 항해를 떠났다는 소문이 있었다. 논평을 마치고 나서, 그는 예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당신은 큰 물고기가 정말로 요나를 삼켰다고 생각하시나이까?” 예수는 이 젊은이의 생애가 이 전설에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고, 이를 깊이 생각해 본 결과로 의무를 회피하려 애쓰는 것이 어리석음을 통감했다는 것을 파악했다. 따라서 예수는 가디아가 현재 실용적으로 살려는 동기의 근거를 갑자기 무너뜨릴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물음에 대답하여 예수는 말했다. “친구여,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인생을 살아야 하는 요나와 같으니라. 현재의 생활 의무를 피하여 멀리 유혹하는 것들이 있는 곳으로 달아나려고 할 때는 언제나, 그리함으로 우리는 진리의 힘과 올바른 세력이 지도하지 않는 그런 영향을 직접 받느니라. 의무의 회피는 진실을 희생하는 것이라. 빛과 생명의 봉사를 회피하는 것은, 오로지 다루기 힘든 고래 같은 이기심과 괴로운 갈등만 일으킬 수 있느니라. 아주 깊은 절망의 늪 한가운데 있을 때에도, 하나님을 저버리는 그런 요나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의 선하심을 찾으려고 마음을 돌이키지 않으면 궁극에 이 이기심은 어두움과 죽음으로 이끄느니라. 그러한 낙심한 자들이 진지하게 하나님을―진리를 갈망하고 올바름을 목마르게―찾을 때, 아무것도 저희를 더 이상 포로로 붙잡아둘 수 없느니라. 아무리 깊은 수렁에 저희가 빠졌을지라도, 마음을 다하여 저희가 빛을 구하면,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의 영이 저희를 포로 생활에서 구제하리라. 불운한 생활 형편은 새로이 봉사하고 더 지혜롭게 사는 새 기회가 있는 마른 땅으로 저희를 뱉어낼 것이라.”

130:1.3 (1428.3) 가디아는 예수의 가르침에 마음이 힘차게 움직였다. 그들은 바닷가에서 밤늦게 이야기했고, 숙박소로 가기 전에 함께, 서로를 위하여 기도했다. 이 사람은 나중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 나사렛 예수를 깊이 믿었고, 도르가의 집에서 어느 날 저녁에 베드로와 잊을 수 없는 논쟁을 했던 바로 그 가디아였다. 가디아는 부유한 가죽 상인 시몬이 마침내 기독교를 받아들이려고 결심한 것과 많은 상관이 있었다.

130:1.4 (1428.4) (이 지중해 여행에서 예수가 동료 필사자들과 함께 개인적으로 하신 일에 관한 이 이야기에는 허락을 받은 대로, 이것을 발표할 때 유란시아에서 쓰이는 현대의 표현으로 우리는 그의 말씀을 자유롭게 번역할 것이다.)

130:1.5 (1429.1) 예수가 가디아와 마지막으로 가졌던 담화는 선과 악에 대한 토론이었다. 이 젊은 필리스티아인은 세상에 선과 악이 나란히 존재하기 때문에 불공평하다는 느낌으로 많이 염려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무한히 선하시다면, 어찌하여 우리가 악으로 생긴 슬픔을 당하도록 버려둘 수 있나이까, 결국 누가 악을 창조하나이까?” 그 시절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선과 악을 다 창조한다고 믿었지만, 예수는 결코 그런 잘못을 가르치지 않았다. 이 물음에 대답하여 예수는 말했다. “아우여, 하나님은 사랑이라. 그런즉 선하심이 틀림없도다. 그의 선하심이 너무나 크고 현실이기 때문에, 그의 선은 작고 비현실인 악한 것을 품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은 아주 분명히 선하시므로, 부정적인 악이 절대로 그분 속에 들어설 자리가 없느니라. 선에 대항하고 아름다움을 물리치고 진리에 충성하지 않는 자가 미숙하게 선택하고 생각 없이 발을 헛디디는 것이 악이라. 악(惡)은 다만 미숙하여 형편에 잘못 적응하는 것이거나 또는 사실을 뒤집고 왜곡하는 무지의 영향이라. 악은 현명치 못하게 빛을 물리치는 발꿈치를 따르는 불가피한 어두움이라. 악은 어둡고 참이 아닌 어떤 것이요, 알면서 받아들이고 일부러 지지했을 때, 그 악이 죄가 되느니라.

130:1.6 (1429.2)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진실과 잘못 사이에 선택하는 힘을 너에게 부여함으로, 빛과 생명의 길, 긍정적 길에서 부정적 잠재성을 만드셨느니라. 그러나 총명한 사람이 사는 길을 잘못 택하여 그러한 악한 잘못이 존재하도록 의도(意圖)할 때까지, 그런 잘못은 정말로 존재하지 않느니라. 그러한 고의적이고 반항하는 사람이 알면서 계획하여 선택함으로 그러한 악은 나중에 죄의 자리까지 올라가느니라. 수확할 때까지 자연이 밀과 독보리가 나란히 자라도록 버려두는 것 같이, 이것이 생명이 끝날 때까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선한 것과 악한 것이 나란히 가도록 버려두는 까닭이라.” 그들이 나중에 가진 토론이 머리 속에서 이 중대한 말씀의 참 의미를 뚜렷하게 해준 뒤에, 가디아는 그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에 충분히 만족해하였다.

2. 케자리아에서

130:2.1 (1429.3) 그들이 타려고 생각했던 배에 거대한 방향타 하나가 갈라질 위험이 있는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예수와 친구들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오래 케자리아에 머물렀다. 선장은 새 방향타가 만들어지고 있는 동안, 항구에서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이 일에 나무를 다루는 숙련된 세공인(細工人)들이 부족했고, 그래서 예수는 돕겠다고 자청하였다. 저녁에 예수와 친구들은 항구 둘레에서 산책길로 쓰이는 아름다운 담벽 위에서 걸었다. 도시의 수도(水道) 체계, 그리고 도시의 길거리와 하수도를 씻어내는 데 파도를 이용하는 기법을 예수가 설명하는 것을 듣고 가니드는 크게 좋아했다. 인도에서 온 이 젊은이는 아우구스투스의 성전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것은 고지에 자리를 잡았고 그 위에는 로마 황제의 거대한 조각(彫刻)이 세워져 있었다. 그들이 머무르던 둘째 날 오후에 세 사람은 2만 명을 앉힐 수 있는 거대한 원형 극장에서 벌어지는 공연에 참석했고, 그날 밤 극장으로 그리스 연극을 보러 갔다. 이것은 가니드가 일찍이 구경한 이런 종류의 첫 전시였고, 그는 예수에게 연극에 대하여 많이 물었다. 셋째 날 아침에, 그들은 총독의 궁전을 공식으로 방문했다. 케자리아가 팔레스타인의 서울이었고 로마의 행정 장관의 거처였기 때문이었다.

130:2.2 (1429.4) 여인숙에는 몽골리아에서 온 한 상인이 또한 묵고 있었다. 극동에서 온 이 사람이 그리스어를 썩 잘 했기 때문에, 예수는 몇 차례나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사람은 예수의 생활 철학에 많이 감명을 받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날마다 복종하는 방법으로 땅에 있는 동안 하늘의 삶을 사는 것”에 관한 지혜로운 말씀을 결코 잊지 않았다. 이 상인은 도교 신자였는데, 이 가르침 때문에 우주의 신이 있다는 교리를 굳게 믿는 사람이 되었다. 몽골리아로 돌아갔을 때, 이 상급 진리를 이웃과 사업 친구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러한 활동의 직접 결과로서, 그의 맏아들은 도교의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 젊은이는 일생을 통해서, 상급의 진리를 위하여 큰 영향력을 미쳤고, 그의 아들과 손자는 그를 이어받아, 마찬가지로 하나의 신―즉 하늘의 최고 통치자―를 믿는 교리에 열심으로 충성하였다.

130:2.3 (1430.1) 초대 기독교 교회의 동부 지파는 필라델피아에 본부가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형제들보다 예수의 가르침을 더 충실하게 간직했지만,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아무도 중국에 가거나, 바울과 같은 사람이 아무도 인도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은 유감이었다. 거기에는 그때 새 하늘나라 복음의 씨를 심기에 영적 토양이 아주 좋았다. 필라델피아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었던 바로 이 예수의 가르침은,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가 서양에서 한 것처럼, 영적으로 갈급한 아시아 민족들의 지성에 바로, 즉시 효과 있게 호소했을 것이다.

130:2.4 (1430.2) 어느 날 방향타에서 예수와 같이 일하던 젊은이들 가운데 하나가, 조선소에서 수고하는 동안 예수가 시간마다 들려준 말씀에 무척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땅에 있는 자녀들의 복지에 관심을 가진다고 예수가 넌지시 비쳤을 때, 이 젊은 그리스인 아낙산드는 말했다. “만약에 신들이 내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어찌하여 이 작업장에 있는 모질고 부당한 반장을 없애버리지 않나이까?” 그는 예수의 대답에 놀랐다. “네가 친절을 베푸는 방법을 알고 정의를 존중하는 까닭에, 더 좋은 이 길로 이끌라고 아마도 신들이 잘못하는 이 사람을 가까이 데리고 오신 듯하구나. 아마도 너는 이 형제가 모든 다른 사람에게 더 친절한 사람으로 만들 소금인가 하나니, 다시 말해서 네가 맛을 잃지 않았다면 그러하니라. 지금 상태로 그의 악한 방법이 너에게 불리하게 영향을 미치므로 이 사람이 네 주인이라. 어찌하여 선의 힘으로 악을 지배하기를 주장하지 않느냐? 그리하면 두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에서 네가 주인이 되리라. 네가 이 일에 마땅하고 진정한 기회를 주면, 내가 예측하건대, 네 안의 선이 그 사람 안의 악을 이길 수 있느니라. 잘못과 악을 이기는 하나의 투쟁에서 얻는 영적 에너지와 신성한 진리를 가지고 물질적 생활에서 동료가 되는 흥분을 맛보는 것보다 필사자로 사는 동안에 더 황홀한 모험이 없느니라. 영적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영적 빛의 통로, 생명의 통로가 되는 것은 놀랍고도 사람을 변화시키는 체험이라. 네가 이 사람보다 더 많이 진리를 축복받았다면, 너는 그의 곤궁한 처지에 자극을 받아야 하느니라. 분명컨대 너는 바닷가에서 기다리면서 헤엄칠 수 없는 동료 인간이 죽는 것을 구경할 겁쟁이는 아니라! 물에 빠져 죽는 몸과 비교하건대 어둠 속에 발버둥치는 이 사람의 혼은 얼마나 더 귀중한고!”

130:2.5 (1430.3) 아낙산드는 예수의 말씀에 힘차게 마음이 움직였다. 당장에 그는 예수가 한 말씀을 상관에게 이야기했고, 그날 밤 두 사람은 어떻게 혼이 복을 받는가 예수에게 조언을 구하였다. 나중에 기독교의 소식이 케자리아에 선포된 뒤에, 이 두 사람, 하나는 그리스인이요 다른 하나는 로마인이었는데, 빌립이 전파한 것을 믿었고, 그가 세운 교회에서 뛰어난 신자들이 되었다. 나중에 이 젊은 그리스인은 로마인 백부장 코넬리우스의 집사로 임명되었고, 코넬리우스는 베드로의 봉사를 통해서 신자가 되었다. 바울이 케자리아에서 감옥에 갇혀 있던 시절까지 아낙산드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계속 빛을 비쳐주었다. 그때, 아낙산드는 2만 유대인의 대학살이 일어났을 때 고통받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돌보는 동안, 사고로 죽었다.

130:2.6 (1431.1) 가니드는 이 무렵에 선생이 동료 인간들에게 이렇게 특별히 친히 봉사하는 일에 여가를 어떻게 쓰는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젊은 인도인은 그침 없이 이렇게 활동하는 동기가 무엇인가 찾아내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물었다. “어째서 당신은 낯선 사람들과 이렇게 이야기하는 데 계속하여 몰두하시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가니드야,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는 아무도 낯선 자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내는 체험을 겪으면서 너는 모든 사람이 형제임을 발견하느니라. 새로 발견한 형제를 만나는 기쁨을 즐기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느냐? 사람의 형제 자매와 알게 되고 저희의 문제를 알고 저희를 사랑하기를 배우는 것은 인생에서 최고의 체험이라.”

130:2.7 (1431.2) 이것은 밤늦게까지 이어진 회담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 젊은이는 하나님의 뜻, 그리고 의지라고 부르기도 하는 인간 지성의 선택하는 행위, 이 둘의 차이를 일러 달라고 예수에게 부탁했다. 예수는 다음의 내용으로 말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길이요, 어떤 가능한 대안(代案)에 부딪치더라도, 하나님의 선택과 협동하는 자가 되는 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차츰차츰 하나님처럼 되는 점진적 체험이요, 하나님은 선하고 아름답고 참된 모든 것의 근원이요 운명이다. 사람의 뜻은 사람의 길이요, 필사자가 되고자 하고 행하고자 하는 그 목표의 총합이요 본질이다. 의지(意志)는 스스로 의식하는 존재가 알면서 선택하는 것이요, 이것은 지적 숙고에 근거를 둔 결정과 행위로 이끈다.

130:2.8 (1431.3) 그날 오후에, 예수와 가니드는 아주 영리한, 양 지키는 개와 즐겁게 놀았다. 가니드는 개가 혼(魂)이 있는지 개가 의지를 가졌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 물음에 응답하여 예수는 말했다. “개는 물질 인간, 주인을 알아볼 수 있는 머리가 있으나,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개는 영적 성품을 소유하지 않고, 영적 체험을 겪을 수 없느니라. 개가 성품으로부터 유래하고 훈련으로 확대된 의지를 가졌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머리의 능력은 영적 힘이 아니라. 지난 일을 돌이켜보지 않는 한, 인간의 의지와 비교할 수도 없느니라―그 능력은 상급의 도덕적 의미를 구별하거나 또는 영원한 영적 가치 기준을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영적으로 분별하고 진리를 택하는 그러한 능력을 소유하는 것이 필사 인간을 도덕적 존재, 영적 책임을 느끼는 속성과 영원히 살아남는 가능성을 부여받은 인간으로 만드느니라.” 예수는 이어서, 동물에 그러한 정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동물 세계는 시간이 지나도 언어를 개발하거나 영원 속에서 성격의 생존과 비슷한 무엇이라도 체험하기를 영원히 불가능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이날 가르침을 받은 결과로, 가니드는 사람의 혼이 동물의 몸 속으로 옮겨간다는 관념을 다시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130:2.9 (1431.4) 다음 날 가니드는 이 모두를 아버지와 함께 이야기했다. 고노드의 물음에 답하여 예수는 설명했다. “동물로 존재하는 물질적 문제와 상관되는 현세의 결정을 내리는 데만 완전히 몰두하는 인간의 의지는 시간이 지나면 멸망할 운명을 가졌소이다. 진심으로 도덕적 결정을 내리고 조건 없이 영적으로 선택하는 자는, 이처럼 깃드는 신의 영과 점진적으로 한 편이 되고, 이렇게 함으로 영원히 살아남는 가치로 더욱 변화되오이다―신성한 봉사로 끝없이 진보하오이다.”

130:2.10 (1431.5) 바로 이날 우리는 이 중대한 진리를 처음으로 들었다. 현대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다음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의지는 인간의 지성이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요, 지성은 주관적 의식이 자체를 객관적으로 표현하고 하나님처럼 되기를 열망하는 현상을 체험하게 만든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지난 일을 돌이켜보고 영적 생각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창조성을 가지게 될 수 있다.

3. 알렉산드리아에서

130:3.1 (1432.1) 이번 케자리아 방문에서는 사건이 많았다. 배가 준비되었을 때, 예수와 두 친구는 어느 날 한낮에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향하여 떠났다.

130:3.2 (1432.2) 세 사람은 알렉산드리아까지 아주 유쾌한 여행을 즐겼다. 가니드는 그 항해를 매우 기뻐했고 예수는 질문에 대답하느라고 바빴다. 그 도시의 항구에 다가가자, 젊은이는 어느 섬에 있는 파로스의 큰 등대를 보고 기쁨에 떨었다. 알렉산더는 방파제로 이 섬을 대륙까지 연결하였다. 알렉산더는 이렇게 훌륭한 두 항구를 지었고, 이렇게 함으로 알렉산드리아를 아프리카ㆍ아시아ㆍ유럽의 해상 무역의 교차로로 만들었다. 이 큰 등대는 세계의 칠대 경이의 하나였고, 그 뒤의 모든 등대의 효시가 되었다. 이들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이 눈부신 장치를 구경하려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가니드가 탄성을 지르는 가운데, 예수는 말했다: “자, 얘야 인도로 돌아갈 때, 아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너는 이 등대처럼 될 것이라. 어둠 속에서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처럼 되리니, 그렇게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안전하게 구원이 있는 항구로 이르는 길을 보여주리라.” 예수의 손을 꽉 잡으면서, 가니드는 말했다, “그렇게 하리이다.”

130:3.3 (1432.3) 초기 기독교의 선생들이 오로지 로마 세계의 서양 문명에만 눈을 돌린 것이 큰 잘못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지적한다. 여러 집단의 아시아 종교가들은 1세기에 메소포타미아의 신자들이 지니고 있었던 예수의 가르침을 쉽사리 받아들였을 것이다.

130:3.4 (1432.4) 상륙한 지 세 시간이 지나서, 그들은 넓고도 긴 시가의 동쪽 끝 가까이에 정착했다. 이 거리는 넓이가 30미터요 길이가 8킬로미터였으며, 1백만 인구를 가진 이 도시의 서쪽 경계까지 뻗어 있었다. 그 도시의 주요한 구경거리―대학(박물관), 도서관, 알렉산더의 왕립 대무덤, 궁전, 넵튠 신전, 극장, 체육관―을 처음 살펴본 뒤에, 고노드는 사업을 돌보았다. 한편 예수와 가니드는 도서관으로 갔는데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컸다. 여기에 모든 문명화된 세계, 그리스ㆍ로마ㆍ팔레스타인ㆍ파르티아ㆍ인도ㆍ중국, 그리고 일본으로부터도, 거의 1백만의 원고가 수집되어 있었다. 이 도서관에서 가니드는 온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도 문학 도서의 수집을 보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머무르는 동안 내내, 그들은 날마다 여기서 얼마큼 시간을 보냈다. 예수는 이 장소에서 히브리 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된 것에 관하여 가니드에게 일러주었다. 세계의 모든 종교에 관하여 이야기를 거듭했고, 예수는 각 종교에 담긴 진리를 이 젊은 지성에게 지적하려고 애쓰면서, 언제나 덧붙여 말했다. “그러나 야웨는 멜기세덱의 계시와 아브라함의 약속으로부터 발전된 하나님이라.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멜기세덱이 살고 가르치던 바로 그 땅을 나중에 차지했고, 거기서부터 멜기세덱은 온 세계에 선생들을 보냈느니라. 다른 어느 세계 종교보다 유대인의 종교는 궁극에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우주의 아버지인 것을 더 뚜렷하게 인식했음을 보여주었느니라.”

130:3.5 (1432.5) 예수의 지도를 받으며 가니드는, 비록 하위의 신들을 다소 인정하더라도 우주의 신을 인정하는, 세상의 모든 종교의 가르침을 수집하였다. 많은 토론이 있은 뒤에 예수와 가니드는 로마인의 종교에는 참된 하나님이 없다고, 그 종교는 도저히 황제 숭배를 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그리스인은 철학은 있어도, 성격을 가진 하나님이 있는 종교를 도저히 가지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신비 종파들은 빼버렸는데, 여러 종파가 있어 생기는 혼란 때문이었다. 그들의 다양한 신 개념들이 다른 더 오래 된 종교들로부터 유래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130:3.6 (1433.1) 알렉산드리아에서 이 번역서들이 만들어졌지만, 로마에서 체류가 끝날 때가 가까워서야 가니드는 이 발췌한 기록을 마침내 정리하고 자신의 개인적 결론을 덧붙였다. 세계의 신성한 문헌을 기록한 가장 훌륭한 저자들이 모두 영원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얼마큼 뚜렷이 인정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하나님과 필사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상당히 생각이 같은 것을 발견하고 가니드는 많이 놀랐다.

130:3.7 (1433.2) 예수와 가니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박물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박물관은 보기 드문 물건들을 수집해 놓은 곳이 아니라, 오히려 미술ㆍ과학ㆍ문학을 가르치는 대학이었다. 학식 있는 교수들이 여기서 날마다 강의했고 그 시절에 여기는 서양 세계의 지적 중심이었다. 하루하루 예수는 여러 강의를 가니드에게 통역해 주었다. 둘째 주의 어느 날, 젊은이는 소리를 질렀다. “요수아 선생이여, 당신은 이 교수들보다 더 아시나이다. 당신은 일어서서, 내게 말한 놀라운 것들을 저희에게 일러주어야 하나이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저희는 안개 속에 쌓여 있나이다. 아버지께 말씀 드려 그렇게 주선하도록 하리이다.” 예수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너는 선생을 칭찬하는 생도로구나. 하지만 이 선생들은 너와 내가 저희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지 않느니라. 영적 변화 없이 학문을 배움으로 생기는 자만은 인간의 체험에서 위험한 것이라. 참된 선생은 늘 배우는 사람이 됨으로 지적 성실성을 유지하느니라.”

130:3.8 (1433.3) 알렉산드리아는 서양 문화가 혼합된 도시였고, 로마 다음으로 세계에서 제일 크고 웅장했다. 여기에 세계에서 제일 큰 유대인 회당이 자리를 잡았는데, 알렉산드리아 산헤드린, 즉 통치하는 70 장로의 행정부였다.

130:3.9 (1433.4) 고노드가 사업에서 거래하는 숱한 사람 가운데 어떤 유대인 은행가 알렉산더가 있었는데, 그의 형제 필로는 당시에 이름난 종교 철학가였다. 필로는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을 조화시키는, 칭찬받을 만하지만 아주 어려운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가니드와 예수는 필로의 가르침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하였고, 그의 강의에 더러 참석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머무르는 동안 내내, 이 이름난 헬라파 유대인은 아파서 드러누워 있었다.

130:3.10 (1433.5) 예수는 가니드에게 그리스 철학과 금욕주의 신조들 중 많은 것을 칭찬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민족 중에서 더러가 준 분명치 않은 가르침과 같이, 이 체계의 관념들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영원자를 이해하는 생생한 체험을 즐기도록 사람을 이끄는 의미에서만 종교라는 진실을 젊은이에게 인식시켰다.

4. 실체에 대한 강론

130:4.1 (1433.6) 알렉산드리아를 떠나기 전날 밤, 가니드와 예수는 플라톤의 가르침에 관하여 대학에서 강의하던, 정부 임용 교수들 중의 한 사람과 오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수는 학식 있는 그 그리스인 선생을 위하여 통역해주었지만, 그리스 철학을 반박하는 자신의 가르침을 주입하지는 않았다. 고노드는 그날 저녁에 볼일이 있어 떠나 있었다. 그래서 그 교수가 떠난 뒤에, 선생과 생도는 플라톤의 신조에 관하여, 오랫동안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상에 물질인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더 본질적인 영적 실체들의 그림자라는 이론과 관계된 그리스인의 어떤 가르침을 조건을 달아 인정했지만, 젊은이의 생각을 위하여 더 튼튼한 기초를 놓으려고 애썼다. 그래서 그는 우주에 있는 실체의 성질에 관하여 긴 논설을 시작하였다. 내용으로 보아서, 현대의 표현법을 빌리면, 예수는 가니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130:4.2 (1434.1) 우주 실체의 근원은 무한자이다. 유한한 우주에서 물질인 것들은 파라다이스의 원본과 영원한 하나님의 우주 지성, 이 두 가지가 시공에서 미친 결과이다. 물리적 세계에서 원인, 지적 세계에서 자의식, 영 세계에서 진보하는 자아―즉 우주의 규모로 설계되고, 영원한 관계 속에 통합되고, 완전한 품질과 신다운 가치를 체험한 이 세 가지 실체―는 최상위의 실체를 이룬다. 그러나 늘 변하는 우주에서 원인이자 지능이요 영 체험을 일으키는 최초의 성격자는 변함이 없고 절대적이다. 절대자들, 그리고 물리적 상태나 지적 인식이나 영적 신분에 이른 절대적인 것들을 제외하고, 한없는 가치와 신성한 품질을 지닌 영원한 우주에서도 모든 것은 변할 수 있으며 때때로 변하기도 한다.

130:4.3 (1434.2) 유한한 인간이 진보하여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은 우주의 아버지를 인식하는 것이요 최상위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도 최종에 이른 그런 존재들은 물리적 세계의 움직임에서, 그리고 그 물질 현상에서 줄곧 변화를 체험한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영적 우주를 계속 올라가면서 자아가 진보하는 것, 그리고 지적 우주를 더 깊이 이해하고, 또 그러한 우주에 대한 반응을 차츰차츰 의식하는 것을 알고 있다. 오로지 의지(意志)가 완전해지고, 조화되고, 일치되는 가운데, 인간은 창조자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오직 인간이 유한한 개인 의지를 창조자의 신성한 뜻에 한결같이 맞추어 시간과 영원 속에서 계속 사는 방법으로 그러한 신다운 상태에 도달하고 그 상태를 유지한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욕구가 하늘 가는 하나님의 아들의 혼 속에서 언제나 가장 높고 그 정신을 지배해야 한다.

130:4.4 (1434.3) 눈이 하나인 사람은 결코 원근의 깊이를 선명히 보기를 바랄 수 없다. 한 눈으로 보는 물질 과학자나, 한 눈으로 보는 영적 신비주의자와 우화(寓話) 작가들은 우주 실체의 참 깊이를 정확하게 상상하고 적절히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체험에서 모든 참다운 가치는 인식의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다.

130:4.5 (1434.4) 생각이 없는 인과 작용은, 투박하고 간단한 것으로부터 세련되고 복잡한 것을 진화시킬 수 없고, 영이 없는 체험은 시간 세계 필사자의 물질 지성으로부터 영원히 살아남는 신다운 인품을 진화시킬 수 없다. 무한한 신의 특징을 유일하게 나타내는, 우주의 한 가지 속성은 이렇게 점진적으로 신에 도달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성격을 끝없이 창조적으로 수여하는 것이다.

130:4.6 (1434.5) 인격(人格)은 한없는 변화와 공존할 수 있고, 동시에 모든 그러한 변화가 있는 바로 그 와중에서, 그리고 그 뒤에 언제까지나 신분을 지니는, 바로 그 우주 재산이요, 우주 실체의 바로 그 단계이다.

130:4.7 (1434.6) 생명은 최초의 우주 원인이 우주 상황에서 생기는 요구와 가능성에 대하여 적응하는 것이다. 우주 지성의 작용으로 인하여, 영이신 하나님의 영(靈) 불꽃을 붙임으로 생명이 존재하게 된다. 생명의 의미는 그 적응 능력에 있고, 생명의 가치는 진보할 수 있는― 즉 하나님을 의식하는 높이까지 이르는―그 능력에 있다.

130:4.8 (1434.7) 자의식을 가진 생명이 우주에 잘못 적응하면 우주에 부조화를 일으킨다. 인격 의지가 우주의 경향을 마침내 벗어나는 것은 지적 고립, 인격이 분리됨으로 끝난다. 깃드는 영 안내자를 잃어버리면 존재가 영적으로 중지되는 일이 따른다. 진보하는 지적 생명은 그러면 그 자체로서 저절로, 신성한 창조자의 뜻을 표현하는 우주, 목적 있는 우주가 존재한다는 논쟁할 여지가 없는 증명이다. 이 생명 전체가 더 높은 가치를 향하여 투쟁하며, 그 마지막 목표는 우주의 아버지이다.

130:4.9 (1435.1) 지능이 베푸는 상급의 준(準)영적 보살핌을 제쳐놓고, 사람은 겨우 어느 정도 동물 수준을 넘는 머리를 소유한다. 따라서 (예배하는 정신과 지혜가 없는) 동물은 상의식(上意識), 가장 높은 의식을 체험할 수 없다. 동물의 머리는 오직 객관적 우주를 의식한다.

130:4.10 (1435.2) 지식은 물질적 지성, 즉 사실을 분별하는 지성의 분야이다. 진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의식하는, 영적으로 부여받은 지능이 활동하는 분야이다. 지식은 보여줄 수 있는 것이요, 진리는 체험하는 것이다. 지식은 머리가 가진 재산이요, 진리는 혼, 즉 진보하는 자아의 체험이다. 지식은 비영(非靈) 수준의 작용이며, 진리는 우주들의 지성 영이 활동하는 수준의 한 단계이다. 물질적 지성으로 보는 눈은 실재하는 지식 세계를 파악하지만, 영적으로 변화된 지능의 눈은 참다운 가치가 있는 세계를 헤아린다. 이 두 눈이 보는 관점은 동시에 작용하고 조화되어 실체의 세계를 드러내며, 그 안에서 지혜는 진보하는 개인적 체험의 관점에서 우주의 현상을 풀이한다.

130:4.11 (1435.3) 잘못(악)은 불완전한 것에 대한 벌이다. 불완전의 질이나 잘못 적응하는 사실은 물질 수준에서 비판적 관찰과 과학적 분석으로 드러나고 도덕 수준에서 인간의 체험으로 드러난다. 악이 존재하는 것은 생각이 틀리고 진화하는 자아가 미숙하다는 증명이다. 따라서 잘못은 또 사람이 얼마나 우주를 불완전하게 해석하는가 가리킨다.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은 지혜를 얻는 과정에서, 즉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부터 완전하고 영원한 것으로,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것으로부터 최종이며 완전해진 것으로 나아가는 계획에 본래부터 생긴다. 잘못은 사람이 파라다이스의 완전함까지 올라가는 우주의 길에서 반드시 마주쳐야 하는 상대적 불완전의 그림자이다. 잘못(악)은 실재하는 우주의 질이 아니라, 단지 부족한 유한자의 불완전이 최상위 및 궁극위의 올라가는 수준과 관련하여 상대성이 관찰되는 것이다.

130:4.12 (1435.4) 예수가 비록 이 모두를 가니드가 알아듣기에 가장 적당한 말로 소년에게 이야기했지만, 이야기 끝에 가니드는 눈꺼풀이 무거워졌고 곧 잠에 빠졌다. 이튿날 아침 크레테 섬의 라시아를 향하는 배를 타려고 일찍 일어났다. 그러나 출발하기 전에, 소년은 악에 대하여 아직도 질문이 더 있었고, 이에 대하여 예수는 대답했다:

130:4.13 (1435.5) 악은 하나의 상대적인 것의 개념이다. 사물과 존재들이 가득한 하나의 유한한 우주가 무한한 자의 영원한 실체들이 우주에 표현하는 생명의 빛을 가림에 따라서, 그러한 우주가 던지는 그림자에서 나타나는 결점을 관찰함으로 악이 생긴다.

130:4.14 (1435.6) 악의 잠재성은 무한과 영원이 시간과 공간에 국한되어 표현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계시가 반드시 불완전하게 나타나는 데 본래부터 있다. 완전한 것이 있는 앞에 부분적인 것이 있다는 사실은 상대적 실체이며, 총명하게 선택할 필요를 만들어내고, 영이 인식하고 반응하는 여러 가치 수준을 확립한다. 일시적이고 제한된 인간의 머리가 생각하는, 무한한 자에 대한 불완전하고 유한한 개념은 그 자체로서 저절로 악의 잠재성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본래 있던 이 지적 부조화와 영적 부족을 이치에 맞게 영적으로 수정할 때, 부당하게 결함을 확대하는 잘못은 실재 악을 실천하는 것에 해당한다.

130:4.15 (1436.1) 정적(靜的)이고 죽은 개념은 다 악할 잠재성이 있다. 상대적이고 살아 있는 진리가 던지는 유한한 그림자는 계속 움직인다. 정적 개념은 변함없이 과학ㆍ정치ㆍ사회ㆍ종교의 발달을 지연시킨다. 정적 개념은 어떤 지식을 대표할지 모르지만, 지혜가 모자라고 진리가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상대성 개념에 빠져, 우주 정신의 인도를 받으면서 우주가 조정되고, 최상위의 영과 에너지로 말미암아 우주가 안정되도록 통제되는 것을 간과하지 말라.

5. 크레테 섬에서

130:5.1 (1436.2) 그 여행자들은 크레테에 가는 목적이 꼭 하나 있었는데, 놀고 섬 주위를 걸어 다니고 산을 오르는 것이었다. 그 시절의 크레테 사람들은 주위의 민족들 사이에서 부러워할 평판을 가지지 않았다. 그렇기는 해도 예수와 가니드는 많은 사람을 높은 수준의 생각과 생활로 이끌었고, 예루살렘으로부터 첫 전도자들이 도착했을 때 후일에 복음의 가르침을 빨리 받아들일 기초를 놓았다. 나중에 그 섬에 교회를 다시 조직하려고 타이투스를 보냈을 때 바울은 크레테인에 관하여 지나친 말을 했지만, 예수는 이 크레테인들을 사랑했다.

130:5.2 (1436.3) 크레테의 산허리에서, 예수는 종교에 관하여 고노드와 처음으로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크게 감명을 받고서 말했다, “당신이 일러주는 모든 말씀을 소년이 믿다니 놀라운 일이 아니요, 하지만 다마스커스는커녕, 예루살렘에도 사람들이 그런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을 나는 결코 몰랐소이다.” 바로 이 섬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고노드는 처음으로 예수에게 함께 인도로 돌아가자고 제안하였다. 가니드는 예수가 그러한 주선에 아마 찬성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기뻐하였다.

130:5.3 (1436.4) 어느 날 가니드가 예수가 어째서 대중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지 않았는가 물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아이야, 모든 일은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느니라. 너는 세상에 태어났지만, 아무리 걱정하고 아무리 조바심을 내도 네가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 모든 그러한 문제에 너는 때를 기다려야 하느니라. 오직 때가 되어야 나무에 달린 푸른 과일이 익으리라. 시간이 지나야 계절이 바뀌고, 해가 뜬 뒤에 해가 지는 것도 그러하니라. 나는 지금 너와 네 아버지와 함께 로마로 가는 길이고,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하니라. 내 앞날은 송두리째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느니라.” 그리고 나서, 모세, 그리고 그가 40년 동안 조심스럽게 기다리고 계속 준비했던 이야기를 가니드에게 일러주었다.

130:5.4 (1436.5) 좋은 항구를[1] [7] 방문하던 길에 가니드가 결코 잊지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의 기억은 그가 태어난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바꾸려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언제나 바라게 만들었다. 어느 술 취한 타락한 사람이 공공(公共) 도로에서 한 여자 노예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 소녀의 곤경을 보았을 때, 예수는 앞으로 달려가서 미친 사람에게 공격받던 소녀를 구출하였다. 놀란 아이가 그에게 달라붙어 있는 동안에, 그 딱한 사람이 화가 나서 주먹으로 허공을 치느라고 지칠 때까지, 그는 힘차게 바른 팔을 내밀어 성난 사람을 안전한 거리에 붙들어 두었다. 가니드는 예수가 그 일을 처리하는 것을 돕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아버지가 제지하였다. 모두 세 사람이 그 소녀를 집까지 바래다주었을 때, 그들이 그 소녀가 쓰는 언어로 말하지 못했어도 소녀는 그들의 자비로운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고,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예수가 육체로 있던 일생을 통해서 동포를 만난 중에서 아마도 이처럼 사람들과 몸으로 씨름한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 어째서 술 취한 사람을 주먹으로 치지 않았는가 가니드에게 설명하느라고 어려움을 겪었다. 가니드는 적어도 이 사람은 그 소녀를 때린 것만큼이나 두들겨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6. 두려움에 빠진 젊은이

130:6.1 (1437.1)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예수는 두려움이 많고 풀이 죽은 한 젊은이와 함께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료들과 사귐으로 위로와 용기를 얻지 못하고, 이 젊은이는 산에서 고독을 찾고 있었다. 그는 무력하고 열등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자랐다. 이 타고난 성향은 그 소년이 자라면서 부딪쳤던 수많은 어려운 상황 때문에 악화되었는데, 그 중에 주목할 것은 열두 살이었을 때 아버지를 잃은 것이다. 그들이 만났을 때, 예수는 말했다: “여보게 친구여! 이렇게 좋은 날에 어찌하여 그리 풀이 죽어 있는가? 너에게 무슨 슬픈 일이 일어났다면, 아마도 내가 어떤 방법으로 도울 수 있느니라. 어쨌든 도움을 제공하게 되어 참으로 마음이 기쁘구나.”

130:6.2 (1437.2) 젊은이는 입을 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는 그의 혼에 두 번째 접근하며 말했다. “네가 사람들을 피하려고 이 산에 올라온 것을 내가 아노라. 그래서 물론, 나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겠구나. 그러나 네가 이 산에 익숙한지 어쩐지 알고 싶노라. 산길의 방향을 아느냐? 혹시, 피닉스로 가려면 어느 길이 제일 좋은가 내게 일러줄 수 있느냐?” 자, 이 젊은이는 이 산에 아주 익숙했고, 정말로 예수에게 피닉스로 가는 길을 일러주는 일에 무척 구미가 당겼다. 매우 신이 나서 그는 땅에 산길을 모두 표시하고 모든 세부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나 잘 가라 하고 예수가 마치 떠나려는 것처럼 하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말했을 때 그는 깜짝 놀랐고 호기심이 생겼다. “네가 위로받지 못하고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을 내가 잘 아노라. 하지만 피닉스로 가는 길을 어떻게 찾는 것이 최선인가 너한테 그렇게 관대하게 도움받고 나서, 여기 산허리에 머물러 있는 동안 마음 속에서 찾는 운명의 목표까지 어떻게 가는 것이 최선인가 도움과 안내를 청하는 것을 들으려고 조금도 애쓰지 않고 생각 없이 떠나는 것은 친절하지도 공평하지도 않도다. 여러 번 오르내려 피닉스로 가는 산길을 네가 잘 아는 것 같이, 너의 달성하지 못한 희망과 이루지 못한 포부가 있는 도시로 가는 길을 내가 잘 아노라. 더군다나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니, 실망을 주지 아니하리라.” 젊은이는 거의 목이 메었으나 그럭저럭 더듬거렸다. “하지만― 당신께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았나이다―” 그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으면서 예수는 말했다. “그렇다, 얘야, 말로 하지는 않았어도, 몹시 바라는 눈으로 내 마음에 호소하였느니라. 얘야, 동료를 사랑하는 자가 보기에 낙심과 절망에 가득 찬 네 얼굴에 도움을 하소연하는 웅변이 있느니라. 여기 함께 앉아라. 그러면 봉사하는 산길과 행복의 큰길에 관하여 너에게 이르리니, 이 길은 슬픔에 빠진 자아를 사람들이 형제 정신으로, 애정으로 활동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봉사하는 기쁨으로 이끌리라.”

130:6.3 (1437.3) 이때가 되어서, 젊은이는 예수와 몹시 말하고 싶어 했다.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서 도와달라고, 슬픔과 패배의 세계를 벗어날 길을 보여달라고, 예수에게 간청했다. 예수가 말했다. “친구여, 일어나라! 대장부처럼 일어서라! 조그만 적들에게 둘러싸이고 숱한 장애물 때문에 뒤처졌는지 모르지만, 이 세상과 우주의 큰 일과 진정한 일이 네 편을 드느니라. 땅에서 가장 권세 있고 번영하는 사람과 똑같이 너에게 태양은 아침마다 인사하느니라. 보아라―너는 튼튼한 몸과 힘센 근육을 가졌고 육체의 자질은 보통을 넘는도다. 물론, 여기 산허리에 앉아서 진정한 불운과 상상하는 불운을 슬퍼하는 동안에는 네 몸이 거의 쓸모가 없도다. 하지만 큰 할 일이 기다리는 곳으로 서둘러 간다면, 너는 그 몸으로 큰 일을 할 수 있느니라. 불행한 자신으로부터 달아나려 하지만, 그리할 수는 없는 것. 너와 너의 살아가는 문제는 현실이요, 네가 살아 있는 한, 이 문제를 피할 수 없느니라. 하지만 다시 볼지니, 네 머리는 맑고 능력이 있으며, 튼튼한 몸을 지휘할 총명한 머리가 있느니라. 문제를 푸는 데 머리를 쓰고, 지능이 너를 위하여 일하도록 가르치라. 그리고 이제 그만 생각 없는 짐승처럼 겁을 먹지 말라.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두려움에 빠진 비천한 노예가 되고 우울과 패배에 종이 되기보다, 두뇌는 함께 용감하게 싸우는 친구가 되어 일생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느니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은 진정한 업적을 이룰 잠재성, 네 안에 사는 영이라. 이처럼 두려움의 사슬에서 몸을 해방하고, 이처럼 팔팔한 믿음을 가진 힘찬 존재로 영적 성품이 비로소 너를 무위(無爲)의 잘못에서 벗어나게 만든다면, 그 영은 머리가 스스로 통솔하도록 자극하고 영감을 주고 몸을 움직이게 하리라. 다음에 당장에, 새롭고 모든 것을 지배하는, 동료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존재함으로, 이 믿음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생각을 이기리라. 이 사랑이 곧 너의 혼을 넘치게 채우리니, 네가 하나님의 아이라는 의식이 네 마음 속에 태어났음이라.

130:6.4 (1438.1) “오늘, 얘야, 하나님을 위하여, 너는 믿음과 용기로 사람에게 몸 바쳐 봉사하는 사람으로서 다시 태어나고 다시 세움받아야 하느니라. 네가 마음 속의 생활에 다시 적응하였을 때, 마찬가지로 너는 세상에 다시 적응하느니라. 다시 태어났으니―영에게서 태어났으니―이제부터 전 생애가 승리를 얻는 일생이 되리라. 어려움은 너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실망은 너에게 박차를 가하리라. 어려움은 너에게 도전하고 장애물은 너를 자극하리라. 일어나라, 젊은이여! 두려움에 위축되고 비겁하게 도망치는 생활에 작별을 고하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땅에서 사람에게 고귀하게 봉사하는 데 헌신하고, 영원 속에서 하나님께 훌륭하게 영원히 봉사하도록 예정된 한 사람으로서, 서둘러 임무로 돌아가 육체를 입은 네 인생을 살라.”

130:6.5 (1438.2) 이 젊은이 포춘은 나중에 크레테에서 기독교 신자들의 지도자가 되었고, 타이투스가 크레테 신자들을 일깨우려고 수고할 때 가까운 동료가 되었다.

130:6.6 (1438.3) 참으로 푹 쉬고 기분이 상쾌해진 어느 날 한낮 무렵에, 나그네들은 북 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향하여 돛을 달려고 준비했다. 키레네에서 이틀 동안 멈추었다. 여기서 예수와 가니드는 루푸스라는 한 소년을 응급 치료했는데, 그는 짐을 싫은 송아지 수레가 무너져서 다쳤다. 그를 집으로 어머니한테로 데려갔다. 아버지 시몬은 후일에 한 로마 군인의 명령을 받아서 어느 사람의 십자가를 지었는데, 그 사람이 한때 아들을 보살핀 낯선 사람이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7. 카르타고에서―시간과 공간에 대한 강론

130:7.1 (1438.4) 카르타고로 가는 길에 예수는 사회ㆍ정치ㆍ상업에 관하여 동료 여행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거의 한 마디도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처음으로 고노드와 가니드는 예수가 훌륭한 이야기꾼인 것을 발견했고, 갈릴리에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하도록 그를 바쁘게 만들었다. 그들은 또한 그가 예루살렘이나 다마스커스가 아니라, 갈릴리에서 자랐음을 알게 되었다.

130:7.2 (1438.5) 어쩌다 만난 사람들의 대다수가 예수에게 이끌리는 것을 눈여겨보았기 때문에, 가니드는 사람이 친구를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물었을 때 선생은 말했다. “동료들에게 관심을 가지라. 어떻게 사랑하는가 배우고, 저희가 무슨 일이 처리되기를 바란다고 확신이 들면, 그런 일을 저희에게 해줄 기회를 살펴보라.” 그리고 나서 유대인의 옛 속담을 인용하였다―”친구를 가지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친절을 보여야 한다.”

130:7.3 (1439.1) 카르타고에서 예수는 한 미트라교 사제와 함께 불멸에 대하여, 시간과 영원에 대하여, 길고 기억에 남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페르시아인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을 받았고, 정말로 예수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했다. 그가 던진 여러 질문에 답하여, 오늘날의 말로 표현하면, 예수는 다음 내용으로 이야기했다:

130:7.4 (1439.2)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 인간의 의식이 파악하는 현세의 사건들이 흘러간다. 시간은 사건들이 인식되고 분리되는 연속된 배열에 주어진 이름이다. 공간의 우주는 고정된 파라다이스 거처 바깥에 어떤 내부 위치에서도 보이는, 시간에 관계된 현상이다. 시간의 움직임은 오직, 공간에서 움직이지 않는 어떤 것과 관련하여 시간적 현상으로서만 드러난다. 온 우주에서, 파라다이스와 거기에 있는 신들은 시간과 공간, 모두를 초월한다. 사람이 사는 여러 세계에서,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영이 깃들고 인도하는) 사람의 인격은 현세의 사건들이 진행되는 물질적 순서를 뛰어넘을 수 있는, 물리적으로 관련된 유일한 실체이다.

130:7.5 (1439.3) 동물은 사람처럼 시간을 느끼지 않는다. 사람에게도 부분적이고 제한된 관점 때문에, 시간은 사건들의 연속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람이 위로 올라감에 따라서, 사람이 안쪽으로 진보함에 따라서, 이러한 사건의 행렬을 보는 시야는 넓어져 그 전체의 모습이 점점 더 식별된다. 예전에 사건의 연속으로 보이던 것이, 전체로서, 완벽하게 관련된 집합으로 보일 것이다. 이 방법으로 동그라미처럼 동시에 일어나는 성향은 일직선으로 연속된 사건들로 보던 예전의 의식(意識)을 점점 더 대체할 것이다.

130:7.6 (1439.4) 시간에 제약을 받는 일곱 가지 다른 공간 개념이 있다. 공간은 시간으로 측정하며, 시간을 공간으로 측정하지 않는다. 과학자가 겪는 혼란은 공간의 실체가 무엇인가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다. 공간은 겨우 우주 물체들 사이의 변하는 관계를 보는 지적 개념이 아니다. 공간은 비어 있지 않으며, 사람이 아는 바 어느 정도라도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지성이다. 지성은 물체들이 공간과 관계된 개념과 따로 활동할 수 있다. 공간은 생물의 지위를 가진 모든 존재에게 상대적으로, 비교적 유한하다. 의식이 일곱 가지 우주 차원을 자각함에 가까워질수록, 잠재 공간 개념은 궁극에 더욱 가까워진다. 하지만 공간의 잠재성은 오직 절대 수준에서만 참으로 궁극에 이른다.

130:7.7 (1439.5) 사람이 승천하고 완전하게 되는, 우주의 여러 수준에서 우주의 실체는 확대되는 의미, 언제나 상대적 의미를 가졌음이 명백하다. 궁극에, 살아남는 필사자가 일곱 차원의 우주에서 신분을 얻는다.

130:7.8 (1439.6) 물질에 기원을 가진 지성의 시공(時空) 개념은, 의식하고 상상하는 인격자가 여러 우주 수준까지 올라감에 따라서, 연달아 확대되도록 정해져 있다. 사람이 존재의 물질 수준과 영적 수준 사이에 개재하는 지성에 도달할 때, 그의 시공 관념은 질적 파악과 양적 체험 면에서 엄청나게 확대될 것이다. 진보하는 영(靈) 인격자의 우주 개념이 커지는 것은 통찰력의 깊이와 의식의 규모, 이 두 가지가 확대되기 때문이다. 인격이 위로, 안으로 계속, 신을 닮는 초월 수준까지 지나감에 따라서, 시공 개념은 절대자들의 개념, 시간이 없고 공간이 없는 개념에 점점 더 가까워질 것이다. 상대적으로, 그리고 초월적 달성에 따라서, 궁극의 운명을 가진 자녀들이 이 절대 수준의 개념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8. 나폴리와 로마로 가는 길에서

130:8.1 (1440.1)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 처음으로 멈춘 곳은 말타 섬이었다. 여기서 예수는 클라우두스라 이름하는, 기가 죽고 낙심한 젊은이와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친구는 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했지만, 다마스커스 서기관과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말했다. “나는 대장부처럼 굳세게 살리이다. 겁쟁이 노릇은 끝났나이다. 내 친족에게 돌아가서 모두 다시 시작하리이다.” 얼마 안 되어 그는 견유학파를 열심으로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베드로와 함께 손을 잡고 로마와 나폴리에서 기독교를 선포하였다. 베드로가 죽은 뒤에 그는 계속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도했다. 그러나 말타에서 그를 격려해준 사람이 그가 나중에 세상의 구원자라고 선포했던 예수였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했다.

130:8.2 (1440.2) 시라큐스에서 한 주를 꼬박 보냈다. 여기에 멈춘 동안에 주목할 사건은, 신앙을 버린 유대인 에즈라를 회개시킨 것이었는데, 그는 예수와 동반자들이 묵은 여인숙을 경영했다. 에즈라는 예수의 태도에 반했고 이스라엘의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도와달라고 예수에게 부탁했다. “나는 아브라함의 참된 아들이 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을 찾을 수 없나이다”하고 말하면서 절망을 하소연했다. 예수는 대답했다. “참으로 하나님을 찾고 싶다면, 그 소망 자체가, 네가 이미 그를 찾아냈다는 증거이라. 너의 어려움은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니, 아버지가 이미 너를 찾아냈음이라. 너의 어려움은 단지 하나님을 모르는 데 있느니라. 예레미야의 예언서에서 이런 말을 읽지 못하였느냐? ‘너희는 나를 찾아 다니겠고, 마음을 다하여 나를 찾아 다닐 때, 나를 찾아내리라’ 또 한편, 바로 이 선지자가 이렇게 말하지 않더냐? ‘나는 나를 알아보는 마음, 내가 주(主)임을 아는 마음을 너희에게 주겠고, 너희는 내 백성에 속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너는 성서(聖書)에서[2] [8] 또한 이런 말씀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는 사람을 내려다보며 누구라도, 나는 죄를 범하고 옳은 것을 곡해하였고 그것이 내게 유익하지 못했도다 하면, 그때 하나님이 그 사람의 혼을 어둠 속에서 구원하겠고 그는 빛을 보리라.’” 에즈라는 그의 혼에 넘치게 하나님을 발견했다. 나중에 이 유대인은 어느 개종한 부자 그리스인과 제휴하여 시라큐스에서 첫 기독교 교회를 세웠다.

130:8.3 (1440.3) 그들은 메시나에서 하루만 멈췄지만 과일 행상을 하는 한 어린 소년의 일생을 바꾸기에는 길고도 남았다. 예수는 그에게서 과일을 사는 한편 그에게 생명의 빵을 먹였다. 소년은 예수의 말씀과 함께 그의 친절한 눈빛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때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예수는 말했다. “부디 잘 가라, 아이야, 어른으로 자라기까지 용기를 가져라, 몸이 자란 다음에 또한 어떻게 혼을 키우는가 배우라. 하늘의 내 아버지가 너와 함께 계시고 네 앞에 가리라.” 이 소년은 미트라교의 신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130:8.4 (1440.4) 마침내 그들은 나폴리에 이르렀고, 목적지 로마에서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고 느꼈다. 고노드는 나폴리에서 사업 거래가 많이 있었다. 예수가 통역으로서 필요한 시간을 제외하고 그와 가니드는 도시를 찾아보고 탐구하는 데 여가를 보냈다. 가니드는 곤경에 빠진 듯한 사람들을 찾아내는 데 재빨라졌다. 그들은 이 도시에서 빈곤한 자를 많이 발견했고 자선금을 많이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거리의 한 거지에게 동전을 주고 나서 예수가 멈춰 그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하지 않으려 했을 때, 예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그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는 말했다. “네 말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 자에게 어찌하여 말을 낭비하느냐? 아버지의 영은 아들 될 능력이 전혀 없는 자를 가르치고 구할 수 없느니라.” 예수의 말씀은 그 사람이 정상의 정신을 가지지 않았다, 영의 인도에 반응할 능력이 모자란다는 뜻이었다.

130:8.5 (1441.1) 나폴리에서는 특별한 체험이 없었다. 예수와 그 젊은이는 그 도시를 샅샅이 뒤지면서 수백명의 어른과 아이들에게 따듯한 웃음을 많이 보내어 명랑한 기분을 퍼뜨렸다.

130:8.6 (1441.2) 여기서부터 카푸아를 거쳐서 로마로 갔고, 카푸아에서는 사흘 동안 머물렀다. 아피아 길을 따라서, 짐 실은 짐승들을 거느리고 로마를 향하여 계속 여행했다. 세 사람 모두가 제국의 여왕, 전세계 최대의 도시를 구경하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제 131 편 세계의 종교

유란시아서

제 131 편

세계의 종교

131:0.1 (1442.1) 알렉산드리아에서 예수와 고노드와 가니드가 머무르는 동안에,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과 필사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세계의 여러 종교의 가르침을 수집하느라고 이 젊은이는 많은 시간과 아버지의 돈을 적지 않게 썼다. 신들에 관한 세상의 여러 종교의 교리를 이렇게 요약하면서, 가니드는 학식 있는 통역자를 60명이 넘게 고용하였다. 일신교를 묘사하는 이 모든 가르침은 대체로, 직접 또는 간접으로, 마키벤타 멜기세덱 선교사들의 전도로부터 유래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이 선교사들은 한 분의 하나님―최고자―의 교리를 땅 끝까지 퍼뜨리려고 살렘 본부를 떠나갔다.

131:0.2 (1442.2) 이 글로 가니드가 작성한 원고의 요점을 발표한다. 그는 이것을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에서 준비했으며, 이것은 그가 죽은 뒤에 몇백 년 동안 인도에서 보존되었다. 그는 이 자료를 열 가지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수집했다:

1. 견유주의

131:1.1 (1442.3) 멜기세덱 제자들의 가르침의 잔재는 유대교에서 지속한 것을 제쳐놓고, 견유학파의 교리에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가니드가 고른 것은 다음을 포함한다:

131:1.2 (1442.4) “하나님은 최상이요 하늘과 땅에서 최고자이로다. 하나님은 완전하게 된 영원의 동그라미요, 온 우주를 다스리도다. 하늘과 땅을 혼자 만드신 분이라. 사물이 있으라 그가 선포하면 그것이 존재하느니라. 우리의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요, 이해심이 있고 자비롭도다. 높고 거룩하고 참되고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나 우리 하나님을 닮았도다. 최고자는 하늘과 땅의 빛이요 동서남북에 두루 계시는 하나님이라.

131:1.3 (1442.5) “땅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최상위의 눈부신 얼굴은 위엄과 영광 속에 거하리라. 최고자는 만물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요, 시작이자 끝이라. 오직 한 분, 이 하나님이 계시니 그 이름은 진리이라.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고 분노와 적개심이 전혀 없으며, 불멸하고 무한하시도다. 우리의 하나님은 전능하고 관대하시도다.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시나 오직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예배하노라. 하나님은 만물―곧 우리의 속 생각과 입 밖에 내는 말―을 아시며, 또한 우리 각자가 무엇을 받아야 마땅한지 아시니라. 그의 힘은 만물을 감당하시니라.

131:1.4 (1442.6) “하나님은 평화를 주시는 분이요, 그를 두려워하고 믿는 모든 사람에게 충실한 보호자이라. 섬기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도다. 모든 창조된 세계는 최고자의 권능 안에 존재하느니라. 그의 신다운 사랑은 그의 거룩한 권능에서 솟아나오며 사랑은 그의 위대한 힘으로부터 생겨나느니라. 최고자는 육체와 혼이 연합하라고 선포하였고 사람에게 자신의 영을 부여하였도다. 사람이 하는 일은 틀림없이 끝나지만 창조자가 하는 일은 언제까지나 이어지도다. 우리는 사람의 경험으로부터 지식을 얻으나 최고자를 숙고함으로 지혜를 뽑아내느니라.

131:1.5 (1443.1) “하나님은 땅에 비를 내리고 싹트는 곡식 위에 해가 비치게 만드시며, 이 생애에서 좋은 것을 풍성하게 수확하게 하며, 다가오는 세상에서 영원한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느니라. 우리의 하나님은 큰 권한을 누리시고 그의 이름은 높이 솟아오르며 그의 성품은 깊이를 잴 수 없도다. 아플 때 너희를 고치는 분은 최고자이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향하여 선을 가득히 품으시며, 우리는 최고자와 같은 친구가 없도다. 그의 자비는 모든 곳을 채우며, 그의 선하심은 모든 혼을 품에 안도다. 최고자는 변함이 없고, 우리가 곤경에 빠질 때마다 도우시는 분이라. 기도하려고 너희가 어디를 향해도 최고자의 얼굴이 있고 우리 하나님의 열린 귀가 있도다. 너는 사람을 피하여 숨어도 좋지만, 하나님을 피하여 숨어서는 안 되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멀리 계시지 않고, 어디에나 계시니라. 하나님은 모든 곳을 채우며, 거룩한 이름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사시니라. 창조된 세계는 창조자 안에 있고, 창조자는 그 창조된 세계 안에 계시니라. 우리는 최고자를 찾다가 그분이 마음 속에 계심을 발견하느니라. 귀한 친구를 찾으러 나갔다가 네 혼 속에서 그를 발견하느니라.

131:1.6 (1443.2)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바라보나니, 저희는 형제이라. 이기심이 있는 자, 육체를 입은 형제를 업신여기는 자는 오직 지루함을 상으로 받느니라. 동료를 사랑하는 자와 마음이 깨끗한 자는 하나님을 보리라. 하나님은 결코 사람의 성실함을 잊지 아니하시니라. 마음이 정직한 자를 진리로 인도하시리니, 하나님이 진리인 까닭이라.

131:1.7 (1443.3) “생명의 진리를 사랑함으로, 너의 일생에 잘못을 버리고 악을 이기라. 사람들과 어떤 관계에 있어도 악 대신에 선(善)을 행하라. 주 하나님은 자비롭고 애정이 깊고, 용서하시는 분이라. 하나님을 사랑하자,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리고 그의 자비를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으리라.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는 형제요, 하나님은 저희의 아버지이라. 너희가 받기 싫어하는 악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

131:1.8 (1443.4) “항상 그의 이름을 부르라. 그리하면 그 이름을 믿는 그대로 네 기도를 들으리라. 최고자를 예배하는 것은 얼마나 큰 명예인가! 모든 세상과 우주가 최고자를 예배하도다. 무슨 기도를 하든지 감사를 드리라―예배의 높이까지 올라가라. 기도로 넘치는 예배는 악을 피하고 죄를 막느니라. 항상 최고자의 이름을 찬양하자. 최고자에게 피난하는 사람은 자기의 허물을 우주로부터 숨기느니라.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 천지 만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느니라. 최고자는 애정 깊은 아버지와 어머니 같으니, 우리를, 땅에 있는 자녀를 정말로 사랑하시니라.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고 구원의 길로 발걸음을 인도하시리라. 우리의 손을 잡고 그에게 인도하시리라. 하나님은 믿는 자를 구원하고, 사람에게 그의 이름을 섬기라 강요하지 않느니라.

131:1.9 (1443.5) “최고자의 믿음이 가슴 속에 들어갔으면, 너희는 일생토록 날마다 두려움 없이 거하리라. 불경(不敬)한 자가 번영한다고 안달하지 말고 악행하려고 계획하는 자를 두려워 말라. 혼으로 하여금 죄로부터 돌아서게 하며, 온 믿음을 구원의 하나님께 맡기라. 방랑하는 필사자의 지친 혼은 최고자의 팔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느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신의 품에 안기기를 그리워하며, 땅에서 사는 아이는 우주의 아버지의 팔에 안전히 안기기를 몹시 바라느니라. 고귀한 사람은 필사자의 혼이 최상위의 영과 섞이는 높은 땅을 추구하느니라. 하나님은 공정하시니, 이 세상에서 심고서 받지 못하는 열매를 다음 세상에서 받을지니라.”

2. 유대교

131:2.1 (1444.1) 팔레스타인의 켄 족속은 멜기세덱의 가르침을 많이 건졌고 이러한 기록으로부터 유대인이 보존하고 수정한 대로 예수와 가니드는 다음을 선택하였다:

131:2.2 (1444.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셨더라. 보라, 창조하신 만물이 아주 좋았더라. 주, 그는 하나님이요, 위로 하늘이나 아래에 땅에서도 견줄 이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할지어다. 물이 바다를 덮는 것 같이, 땅은 주의 지식으로 가득하리라.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창공이 그의 솜씨를 보이느니라. 날마다 낮이 입을 열고, 밤마다 밤이 지식을 보여주느니라. 어느 나라 말이나 언어에도 그 목소리가 반드시 들리니라. 주의 하시는 일은 위대하며 주는 지혜롭게 만물을 지으셨도다. 주의 위대함은 헤아릴 수 없도다. 별의 수를 아시며, 별들의 이름을 지으시도다.

131:2.3 (1444.3) “주의 권능은 크고, 그의 이해력은 무한하니라. 주가 이르시되,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 같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은 깊고 비밀스러운 것들을 드러내시니, 빛이 함께 거하심이라. 주는 자비롭고 인자하시며, 오래 참고 선과 진실이 가득하도다. 주는 선하고 올바르며, 온순한 자의 판단을 인도하시리라. 주의 선하심을 맛보고 눈으로 볼지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니, 곤경에 빠졌을 때 분명히 도우시는 분이로다.

131:2.4 (1444.4) “주의 자비는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베풀고, 그의 올바르심은 대대로 우리 자손에게도 미치느니라. 주는 인자하고 동정심이 가득하시니라. 주는 모든 사람에게 선하시며 부드러운 자비는 모든 창조를 덮도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저희의 상처를 동여매시니라. 하나님의 영을 피하여 내가 어디로 갈까? 신성한 계심을 피하여 내가 어디로 달아날까? 영원에 거하시는 높고 거룩한 이가 말씀하시니 그의 이름은 거룩이로다.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서 거하나니, 뉘우치는 마음과 겸손한 영을 가진 자도 함께 있도다!’ 아무도 우리 하나님을 피하여 숨을 수 없으니, 주가 하늘과 땅을 채우심이라. 하늘이여 기뻐하고 땅이여 즐거워하라. 열강이여 외치라. ‘주가 군림하시도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라, 그의 자비가 언제까지나 지속됨이로다.’

131:2.5 (1444.5) “하늘이 하나님의 올바름을 선포하며, 온 민족이 그의 영광을 보았도다. 우리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요, 우리가 스스로를 만들지 않았도다.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목초지에 있는 양이로다. 그의 자비는 영원히 이어지고 진리는 언제까지나 지속하도다. 우리 하나님은 열강의 통치자이라. 땅은 그의 영광으로 가득할지어다! 아, 그가 선하시고 사람의 자녀에게 놀라운 선물을 주셨으니 사람이 주를 찬양하면 좋으리라!

131:2.6 (1444.6) “하나님은 사람을 신다움이 조금 못하게 만들었고 사랑과 자비를 그 머리 위에 씌웠도다. 주는 올바른 자의 길은 알거니와 불경한 자의 길은 멸망할지니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이로다. 최상위를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 전능한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내 앞에서 걷고 완전하라.’ 자만이 패망 앞에 가고 오만한 정신이 몰락보다 앞서 가느니라. 자신의 정신을 다스리는 자는 한 도시를 점령하는 자보다 강하니라. 주 하나님, 거룩하신 분이 말씀하시도다. ‘영적 안식처로 돌아갈 때 네가 구원받으며, 평온과 확신 속에 너의 힘이 있을지니라.’ 주의 시중을 드는 자는 힘을 되찾고, 독수리 같이 날아 올라가리라. 저희가 달려도 지치지 아니하며 걸어도 쓰러지지 아니하리라. 주가 너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주가 말씀하시니, ‘두려워 말라, 내가 함께 있음이라. 절망하지 말지니, 내가 너의 하나님인 까닭이라. 너에게 힘을 주고, 너를 도우리라. 옳도다, 내 정의(正義)의 바른 손으로 너를 지지하리라.’

131:2.7 (1445.1)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주는 구원자이라. 하나님이 우주의 무리들을 지으셨고 저희를 모두 보존하시니라. 그의 올바름은 산 같고 그의 판단은 대양과 같도다. 우리로 하여금 기쁨의 강물을 마시게 하며, 우리가 그의 빛 가운데서 빛을 보리라. 주께 감사를 드리고 최고자에게 찬송을 올리며, 아침에 인자함을 보이고 밤마다 신다운 충실함을 보이는 것이 좋으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영토는 온 세대에 두루 지속되도다. 주는 나의 목자요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는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며,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도다. 그는 내 혼을 회복하시며,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도다. 옳도다, 내가 어두운 죽음의 골짜기를 거닐지라도 전혀 악을 겁내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로다. 선과 자비가 일생토록 분명히 나를 따르겠고, 내가 주의 집에서 영원히 거하리라.

131:2.8 (1445.2) “야웨는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 그러므로 나는 신의 이름을 의지하리라. 나는 마음을 다하여 주를 의지하겠고, 내 자신의 분별에 의존하지 아니하리라. 어떤 길을 걸어도 주를 인정하겠고 주는 나의 길을 인도하리라. 주는 충실하시며, 그를 섬기는 자와 약속을 지키시니, 올바른 자는 믿음으로 살지니라. 네가 성공하지 못하면, 죄가 문에서 기다리고 있는 까닭이라. 사람들은 저희가 땅을 갈아 심은 악을 거두며 뿌린 죄를 거두느니라. 악행하는 자로 인하여 안달하지 말라. 마음 속에 불의를 생각하면 주는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 죄를 지으면, 또한 자신의 혼에게 잘못하느니라. 선하든 악하든 모든 비밀과 함께, 하나님은 누구든지 행한 대로 재판하시니라. 사람이 마음 속에 무엇을 생각하면, 그 사람됨도 마찬가지이라.

131:2.9 (1445.3) “주는 성실하고 진실하게 주께 부탁하는 모든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니라. 울음이 밤새 지속될까 싶어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느니라. 즐거운 마음은 약처럼 좋으니라. 하나님은 올바르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하나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을 지킬지니, 그것이 사람이 할 일의 전부임이라. 하늘을 만드시고 땅을 빚으신 주가 이처럼 말씀하시니라. ‘나 외에 아무 하나님, 공의로운 하나님과 구원자가 없느니라. 땅의 모든 끝이여, 나를 바라보고 구원을 받으라. 나를 추구하고 마음을 다하여 나를 찾으면, 나를 찾아낼지니라.’ 온유한 자는 땅을 물려받겠고, 큰 평화를 기뻐할지니라. 불법을 심는 자는 재난을 거둘지며 풍파의 씨앗을 뿌리는 자는 회오리바람을 거두리라.

131:2.10 (1445.4) “‘이제 오라, 함께 따져보자’하고 주가 말씀하시니라.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 같이 희게 되리라. 죄가 핏빛처럼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그러나 사악한 자에게는 아무 평화가 없느니라. 좋은 것을 네가 받지 못하는 것은 바로 네가 지은 죄 때문이라. 하나님은 나의 얼굴빛을 건강하게 하며, 내 혼에 기쁨이로다. 영원한 하나님은 나의 힘이요, 우리의 거처이니 그 밑에 영원한 팔이 있도다. 주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계시며, 어린아이와 같은 영을 가진 자를 다 구원하시니라. 올바른 사람에게 고난이 많아도 주는 그 모든 고난에서 그를 구원하시니라. 주에게 너의 길을 맡기라―곧 믿을지니―그가 이루시리라. 최고자의 비밀한 곳에 사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라.

131:2.11 (1445.5)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며, 아무에게도 불평을 품지 말라. 네가 싫어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하지 말라. 형제를 사랑할지니, ‘내 아이들을 아낌없이 내가 사랑하리라’ 주가 말씀하셨음이라. 공정한 자의 길은 반짝이는 빛과 같으니, 맑은 날이 될 때까지 더욱 빛나리라. 지혜로운 자는 하늘이 밝은 것처럼 빛나겠고, 많은 사람을 올바름으로 돌이키는 자는 별처럼 영원토록 빛나리라. 사악한 자는 악한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반역하는 생각을 버릴지어다. 주가 말씀하시니라, ‘저희로 하여금 내게로 돌아오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리라. 내가 넘치게 용서하리라.’

131:2.12 (1446.1) “하늘과 땅을 지으신 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내 율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큰 평화가 있느니라. 내 계명(誡命)은 이것이라. 마음을 다하여 나를 사랑할지니라.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내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를 기억하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탐하지 말라.’

131:2.13 (1446.2) “주를 지극히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나는 무덤에서 너를 되찾으리라. 너를 죽음에서 구제하리라. 나는 네 아이들에게 공정할 뿐 아니라 자비를 베풀리라. 땅에 사는 내 사람들에게, 너희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내가 말하지 않더냐? 내가 너희를 영원한 애정으로 사랑하지 않더냐? 나와 같이 되고, 파라다이스에서 나와 함께 영원히 거하자고 너희를 부르지 아니하더냐?’”

3. 불교

131:3.1 (1446.3) 하나님이 없이, 성격을 가진 우주의 신이 없이, 불교가 위대하고 아름다운 종교에 얼마큼 가까이 접근했는가 발견하고서 가니드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어떤 초기 신앙의 기록을 얼마큼 찾아냈고 이것은 부다의 시절에도 인도에서 계속해서 일했던 멜기세덱 선교사들의 가르침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반영하였다. 예수와 가니드는 불교의 문헌으로부터 다음의 말씀을 수집했다:

131:3.2 (1446.4) “깨끗한 마음으로부터 기쁨이 솟아나 무한자에게 이르리라. 나의 존재 전체가 인간을 초월하는 이 기쁨과 조화를 이루리라. 내 혼은 만족하게 채워졌고, 마음은 평온히 확신하는 지극한 행복으로 넘쳐흐르도다. 나는 아무 두려움이 없고 걱정에 매이지 않노라. 나는 안전 속에 거하며, 적들이 나를 놀라게 할 수 없도다. 확신의 열매로 나는 만족하노라. 나는 불멸자에게 다가가는 것이 쉬움을 발견했노라. 긴 나그네 길에 나를 유지할 믿음을 얻고자 기도하노라. 건너 세상에서 온 믿음이 나를 실망케 하지 않음을 아노라. 불멸자를 믿는 믿음, 곧 겸손ㆍ정직ㆍ지혜ㆍ용기ㆍ지식ㆍ인내를 만들어 내는 믿음이라도, 형제가 그런 믿음으로 가득차 있으면 번영할 것을 아노라. 슬픔을 버리고 두려움을 던져 버리자. 믿음으로 참된 올바름과 진정한 남자다움을 지니자. 정의(正義)와 자비에 관하여 명상하기를 배우자. 믿음은 사람의 참 재산이요, 이는 미덕과 영광의 자질이라.

131:3.3 (1446.5) “불의는 경멸할 것, 죄는 멸시할 것이라. 생각으로 가지든 행위로 실천하든, 악은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니라. 먼지가 바람을 따르는 것 같이, 악한 길에는 아픔과 슬픔이 따르느니라. 그림자가 물질인 것의 본질을 따르는 것 같이, 행복과 정신의 평안은 깨끗한 생각과 고결한 생활을 따르느니라. 악은 잘못 생각하여 얻는 열매이라. 죄가 없는 데서 죄를 보는 것과 죄가 있는 데서 죄를 못 보는 것은 악하니라. 악은 거짓된 교리의 길이라. 사물을 그대로 봄으로 악을 피하는 자는 이처럼 진리를 품어서 기쁨을 얻느니라. 죄를 싫어함으로 너의 불쌍한 처지를 벗어날지어다. 고귀한 분을 바라볼 때, 마음을 다하여 죄에서 돌이키라. 악행에 핑계를 대지 말며 죄지은 것을 변명하지 말라. 지난 죄를 갚으려고 노력함으로 너는 앞날에 죄지으려는 성향에 저항하는 힘을 얻느니라. 자제는 뉘우침에서 태어나느니라. 고귀한 분에게 남김없이 잘못을 고백하라.

131:3.4 (1447.1) “명랑함과 즐거움은 잘 한 일에 대한 보상이며 불멸자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 아무도 네 정신의 자유를 빼앗을 수 없느니라. 네 종교를 믿는 신앙이 마음을 해방시켰을 때, 머리 속이 산처럼 안정되고 꼼짝하지 않을 때, 혼의 평화가 강물처럼 고요히 흐르리라. 구원을 확신하는 자는 영원히 육욕ㆍ질투ㆍ미움에서, 그리고 재산을 모으려는 망상에서 벗어나느니라. 믿음이 더 낳은 생활을 하게 만드는 에너지이나, 그런데도 너는 인내함으로 바로 너의 구원을 해결해야 하느니라. 마지막에 구원받는 것을 확신하려면, 모든 올바름을 성취하려고 꼭 성실하게 애쓰도록 하라. 안에서 솟아나오는 마음의 확신을 기르고, 이처럼 영원히 구원받는 큰 기쁨을 즐기러 오라.

131:3.5 (1447.2) “어떤 신자도 태만하고 게으르며 허약하고 빈둥거리며 부끄러움이 없고 이기심을 고집하면, 불멸의 지혜를 깨우치기를 바라지 못하느니라. 누구나 생각이 깊고 신중하고 반성하며 열심 있고 성실하면―아직 땅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도―신의 지혜로 평화와 해방을 얻는 최고의 깨우침에 이를 수 있느니라. 모든 행위에 보상이 따른다는 것을 기억하라. 악은 슬픔을 낳고, 죄는 아픔으로 끝나느니라. 기쁨과 행복은 선한 생활의 결과이라. 악을 행하는 자조차 악행이 무르익기 전에 유예 기간을 즐기나 악행에 대하여 한껏 수확을 거두는 일이 불가피하게 틀림없이 다가오느니라. 아무도 마음 속에 ‘악행에 대한 벌이 가까이 오지 않으리라” 하면서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 지혜로운 심판이 있을 때, 네가 행한 것을 그대로 네가 받을지니라. 동료들에게 불공정하게 행한 것은 너에게 돌아올지니라. 사람은 자기 행위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느니라.

131:3.6 (1447.3) “바보가 마음 속에 ‘악이 나를 따라잡지 못할지라’하였더라. 그러나 오로지 혼이 책망을 몹시 바라고 머리가 지혜를 구할 때에야 안전하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고귀한 혼이니, 적들 한가운데서도 친절하고 난폭한 자 사이에서 차분하며 탐욕스러운 자 사이에서 너그러우니라. 자신을 사랑함은 좋은 밭에 잡초와 같으니라. 이기심은 슬픔을 낳고, 끊임없는 걱정은 사람을 죽이느니라. 유순한 정신은 행복을 낳느니라. 자신을 이기고 복종시키는 자는 가장 큰 용사이라. 모든 일에 삼가는 것이 좋으니라. 오직 미덕을 귀중히 여기고 의무를 이행하는 자가 뛰어난 사람이라. 분노와 미움에 지배되지 말라.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모질게 말하지 말라. 만족이 가장 큰 재산이라. 지혜롭게 준 것은 잘 저축한 것이라. 너에게 행해지기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 선으로 악을 갚으라. 착한 것으로 악을 이기라.

131:3.7 (1447.4) “의로운 혼은 온 땅을 다스리는 왕이 되는 것보다 더 바람직하니라. 성실하면 불멸에 이르며, 죽음은 경솔하게 산 결과이라. 진지한 자는 죽지 않으나 생각없이 사는 자는 이미 죽었느니라. 죽음이 없는 경지를 꿰뚫어보는 자는 복이 있도다. 산 자를 괴롭히는 자는 죽은 뒤에 도저히 복을 얻지 못하리라. 이기심이 없는 자는 하늘로 가며, 거기서 무한히 자유로운 행복을 즐기고 더욱 고귀하게 너그러워지느니라. 올바르게 생각하고 고상하게 말하며 사심 없이 행하는 필사자마다 여기서 이 짧은 일생 동안 덕을 누릴 뿐 아니라, 몸이 썩은 뒤에도 계속 하늘의 기쁨을 누리리라.”

4. 힌두교

131:4.1 (1447.5) 멜기세덱의 선교사들은 어디로 여행하든지 유일신의 가르침을 가지고 갔다. 이 일신교 교리 중에 많은 것은, 다른 이전의 개념들과 함께, 후일에 힌두교의 가르침에 담겨지게 되었다. 예수와 가니드는 다음을 추려냈다:

131:4.2 (1448.1) “그는 크신 하나님이요 모든 면에서 최상이라. 그는 만물을 둘러싸는 주요, 온 우주를 창조하고 통제하는 분이라. 하나님은 유일한 분이요, 홀로, 혼자서 계시며, 오직 한 분이라. 한 분인 이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이요, 혼의 마지막 운명이라. 최상자는 말할 수 없이 빛나며 빛 중의 빛이라. 이 신성한 빛이 모든 마음과 세계를 비추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요―사람들의 곁에 계시며―그를 알려고 배우는 자는 불멸하게 되느니라. 하나님은 큰 에너지 근원이요, 큰 혼이라. 만물 위에 우주의 지배권을 행사하시니라. 이 유일한 하나님은 사랑이 깊고 영화로우며 찬송받을 만하니라. 우리 하나님은 최상의 권능을 가졌고 가장 높은 거처에 계시니라. 이 참된 분은 영원하고 신성하니, 하늘의 첫째 가는 주이라. 모든 선지자가 갈채하여 그를 맞이하였고 그는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냈도다. 우리는 그를 예배하나이다. 아, 최상 성격이여, 존재들의 근원, 창조의 주, 우주의 통치자여, 어디에나 계시는 능력을 당신이 지은 사람들, 우리에게 드러내소서! 하나님은 해와 별을 만드셨고, 밝고 깨끗하며 스스로 계시니라. 그의 영원한 지식은 신답게 지혜로운 것이라. 영원자는 악에 물들지 않았도다. 우주가 하나님으로부터 솟아났은즉, 그는 우주를 적절히 다스리는도다. 그는 창조의 원인이요, 따라서 만물이 그분 안에 자리를 잡느니라.

131:4.3 (1448.2) “하나님은 어떤 선한 사람에게도 곤경에 빠져 있을 때 확실한 피난처이라, 불멸자는 모든 인류를 돌보시니라. 하나님의 구원은 힘차고 그는 품위 있게 친절을 베풀도다. 그는 사랑이 많은 보호자요, 복된 방어자이로다. 주가 말씀하시되, ‘나는 저희의 혼 속에, 지혜의 등불로서 거하노라. 나는 빛나는 것 중에 빛이며, 선한 것 속에 선이라.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내가 또한 있느니라.’ 사람은 창조자가 계신 앞에서 달아날 수 없느니라. 주는 모든 필사자가 끊임없이 눈을 깜빡하는 것까지 세며, 우리는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 이 신다운 존재를 예배하노라. 그는 만물에 스며들고 아낌없이 주시며, 두루 계시고 무한히 친절하시니라. 주는 우리의 통치자, 피난처요 최고의 통제자이니, 그 시원(始原)의 영이 필사의 혼 속에 거하도다. 악과 미덕을 보는 영원한 증인은 사람의 마음 속에 거하시니라. 찬미할 만하고 신다운 생명 수여자를 오랫동안 묵상하자. 그의 영이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지도하게 할지어다. 이 비현실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우리를 이끄소서! 어둠에서 빛으로 우리를 이끄소서! 죽음에서 불멸로 우리를 안내하소서!

131:4.4 (1448.3) “마음 속에 모든 미움을 없애버리고, 영원자를 경배하자! 우리의 하나님은 기도의 주이니, 자녀들의 외치는 소리를 들으시니라. 모든 백성이 뜻을 그에게, 의지가 굳센 이에게 바칠지어다. 기도의 주가 관대하심을 기뻐하자. 기도를 가장 가까운 친구로 삼고 예배가 네 혼의 기둥이 되게 하라. 영원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오직 사랑으로 나를 경배하면 나에게 도달할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나를 경배하는 것이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미덕임이라.’ 하나님은 마음이 암담한 자에게 빛을 밝히시는 분이요 힘없는 자에게 힘이라. 하나님이 우리의 강한 친구이니 우리는 두려움이 없도다. 진 적이 없는 정복자의 이름을 우리가 찬송하노라. 우리가 그를 경배하는 것은 그가 사람에게 충실하고 영원히 도우시는 분인 까닭이라. 하나님은 우리의 확실한 지도자요 어김없는 안내자이라. 하늘과 땅의 위대한 부모요, 한없는 에너지와 무한한 지혜를 가지셨나니라. 그의 광채는 숭고하고 아름다움은 신성하니라. 그는 우주에서 최상의 피난처요, 영구한 법칙을 변함없이 수호하는 분이라. 우리의 하나님은 생명의 주요, 모든 사람에게 위로자이라. 인류를 사랑하는 분이요 곤경에 빠진 자를 돕는 분이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요 인간 무리에게 선한 목자이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형이요 친구이라. 우리의 정신적 존재에서 이 하나님을 몹시 알고 싶어 하노라.

131:4.5 (1448.4) “가슴 속에 동경함으로 우리는 믿음 얻기를 배웠도다. 감각을 자제함으로 지혜를 얻었고 지혜로 최상위 안에서 평화를 얻었도다. 믿음이 가득한 자는 속 사람이 하나님에 몰두할 때 참으로 예배하느니라. 우리 하나님은 하늘을 외투로 입고 또한 널리 펼쳐지는 다른 여섯 우주에 거하시니라. 그는 만물 위에, 만물 안에서 최상이로다. 우리는 동료들에게 지은 모든 죄에 대하여 주께 용서받기를 몹시 바라며, 친구가 우리에게 행한 잘못을 용서하고자 하나이다. 우리의 영은 모든 악을 싫어하오니, 그러므로 아 주여, 죄의 온갖 얼룩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소서. 위로자, 보호자, 구원자, 곧 우리를 사랑하는 분,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하나이다.

131:4.6 (1449.1) “우주 관리자의 영은 단순한 사람의 혼에 들어가느니라. 유일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은 지혜로우니라. 완전하게 되려고 애쓰는 자는 정말로 최상의 주를 알아야 하느니라. 최상위의 지극히 복된 안전을 아는 자는 결코 두려워 아니하니, 최상위가 그를 섬기는 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심이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음이라.’ 섭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다. 하나님은 진리이라. 사람들이 그를 이해하기를―진리를 충분히 알게 되기를―하나님이 소망하시니라. 진리는 영원하고 우주를 떠받치느니라. 우리의 최고의 소망은 최상위와 연합하는 것이라. 위대한 통제자는 만물을 생성케 하는 분이라―모든 것이 그로부터 발생하느니라. 이것이 의무의 전부이라: 누구든지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지어다. 악의(惡意)를 품지 말고 너를 치는 자를 치지 말지며, 자비로 분노를 이기고 너그러움으로 미움을 극복하라. 우리가 이 모두를 행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친절한 친구요 우리가 땅에서 행하는 모든 불법을 용서하는 인자하신 아버지인 까닭이라.

131:4.7 (1449.2)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땅은 어머니요 우주는 우리의 출생지이라. 하나님 없이 혼은 죄수요 하나님을 아는 것이 혼을 해방하느니라. 하나님을 명상함으로, 그와 연합함으로, 악의 망상으로부터 구원을 얻고 모든 물질의 사슬에서 궁극에 벗어나느니라. 사람이 한 조각 가죽처럼 공간을 말아 올릴 때 악이 끝나리니,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냈음이라. 아, 하나님, 지옥의 세 가지 패망―육욕ㆍ분노ㆍ탐욕―으로부터 우리를 살려주소서! 아, 혼이여, 불멸을 얻는 영적 투쟁을 위하여 허리를 졸라매라! 필사 생명이 끝날 때, 더 알맞고 아름다운 모습을 입고 최상위와 불멸자의 나라에서 깨어나기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이 몸을 버릴지니, 거기에는 두려움도 슬픔도, 배고픔도 목마름도, 죽음도 없도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죽음의 끈을 잘라 버리는 것이라. 우유 위에 크림이 나타나듯,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주에서 올라서느니라. 우리는 하나님, 모든 일을 하시는 분, 위대한 혼을 예배하며, 그는 언제나 지으신 사람들의 마음 속에 늘 앉아 계시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 속 보좌에 앉아 계심을 아는 자는 그와 같이―불멸하게―될 운명을 가졌느니라. 악은 이 세상에 남겨두어야 하나 미덕은 하늘까지 혼을 따라가느니라.

131:4.8 (1449.3) “‘우주에는 진리도 다스리는 자도 없고 오로지 우리의 육욕을 위하여 고안되었다’ 말하는 것은 오직 사악한 자 뿐이라. 그러한 사람들은 지능이 왜소하여 속느니라. 그래서 저희는 육욕을 즐기는 데 투신하며, 자기 혼에게서 미덕의 기쁨과 올바름의 즐거움을 빼앗느니라. 죄에서 구원을 받는 체험보다 무엇이 더 클 수 있으랴? 최상위를 본 자는 불멸하느니라. 육체로 사람의 친구인 자들은 죽음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 없으며, 사람이 즐겁고 햇빛 비치는 파라다이스의 들을 향하여 늘 여행하는 동안, 오로지 미덕이 곁에서 동행하느니라.”

5. 조로아스터교

131:5.1 (1449.4) 조로아스터 자신은 초기 멜기세덱 선교사들의 후손들과 직접 접촉하였고 그들의 유일신 교리는 그가 페르시아에서 창시한 종교에서 핵심적 가르침이 되었다. 유대교를 제쳐놓고 그 시절의 어떤 종교도 이 살렘의 가르침을 더 많이 담지 못했다. 이 종교의 문서로부터 가니드는 다음을 추려냈다:

131:5.2 (1450.1) “만물이 유일한 하나님―전적으로 지혜롭고 선하며 올바르고 거룩하며 눈부시고 영화로운 하나님―으로부터 생기고 그에게 속하도다. 우리의 이 하나님은 모든 빛의 근원이로다. 창조자요, 온갖 좋은 의도를 가진 하나님이요 우주 정의의 수호자이라. 일생에서 현명한 길은 진리의 영과 조화되어 행동하는 것이라. 하나님은 만물을 보시고, 사악한 자의 악행과 올바른 자의 선행을 보시니라. 우리의 하나님은 번쩍이는 눈으로 만물을 지켜보시니라. 그의 손길은 치유하는 손길이라. 주는 전능한 후원자이라. 하나님은 인자한 손을 올바른 자와 사악한 자 모두에게 내미시느니라. 하나님은 세계를 세우고 선과 악에 대하여 보상을 예비하셨도다. 전적으로 지혜로운 하나님은 생각이 깨끗하고 행동이 올바른 경건한 혼들에게 불멸을 약속하셨도다. 네가 무엇을 지극하게 바라면 너도 그처럼 될지니라. 햇빛은 우주에서 하나님이 계심을 헤아리는 자에게 지혜와 같으니라.

131:5.3 (1450.2) “지혜자가 기뻐하는 것을 추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가 계시한 종교로 예비한 길을 즐겁게 걸으면서 빛의 하나님을 경배하라. 오직 한 분, 최상의 하나님, 빛의 주가 계시니라. 물ㆍ식물ㆍ동물ㆍ땅ㆍ하늘을 만드신 이를 우리가 경배하나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가장 인자하신 주로다. 우리는 가장 아름답고 풍부한 불멸자, 영원한 빛을 가진 분을 경배하나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아주 멀리 계시며, 동시에 우리 혼 안에 거하시니 우리와 아주 가까이 계시니라. 우리의 하나님은 신답고 가장 거룩한 파라다이스 영이요, 그래도 모든 생물 중에 가장 친절한 자보다 사람에게 더 친절하시도다. 모든 사업 중에 가장 큰 일, 하나님을 아는 일에, 그는 우리에게 대단히 도움이 되도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가장 찬미할 만하고 올바른 친구이라. 그는 우리의 지혜요 생명이요, 혼과 몸의 활기이라. 우리의 선한 생각을 통해서 지혜로운 창조자는 우리가 그의 뜻을 실행하게 하실 것이요, 그렇게 함으로 신성하게 완전한 모든 것을 이루리라.

131:5.4 (1450.3) “주여, 영의 다음 생명을 위하여 준비하는 동안 육체를 입은 이 일생을 어떻게 사는가 우리에게 가르치소서. 주여 우리에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당신이 명하시는 대로 하리이다. 착한 길을 가르치소서, 그리하면 바른 길로 가리이다. 우리가 당신과 하나가 되기를 허락하소서. 올바름과 연합하도록 이끄는 종교가 옳은 줄 우리가 아나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혜로운 성품이요, 가장 좋은 생각, 올바른 행위이로다. 하나님이 신다운 영과 자신 안에 있는 불멸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를!

131:5.5 (1450.4) “이 지혜자의 종교는 믿는 자에게서 악한 생각과 죄짓는 행위를 모조리 깨끗이 없애시느니라. 나는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으로―의도했거나 의도하지 않았거나―잘못하였는가 뉘우치면서 하늘의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자비를 얻고자 기도를 드리고 용서를 얻고자 찬미를 드리나이다. 죄를 고백할 때, 악한 일을 다시 하지 않으려고 뜻하면, 그 죄가 내 혼에서 없어질 것을 아나이다. 용서하면 죄의 사슬을 거두어 감을 아나이다. 악행하는 자는 벌을 받으려니와 진리를 따르는 자는 영원히 구원받는 행복을 누리리라. 은혜를 통해서 우리를 붙잡고 우리 혼에게 구제하는 힘을 베푸소서. 완전에 도달하기를 몹시 바라는 까닭에 우리가 자비를 요청하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사옵나이다.”

6. 수두안교 (자이나교)

131:6.1 (1450.5) 인도에서 유일신의 교리―곧 멜기세덱의 가르침의 잔재―를 간직한 셋째 집단의 종교 신자들은 그 시절에 수두안 교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나중에 이 신자들은 자이나교의 추종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은 이렇게 가르쳤다:

131:6.2 (1450.6) “하늘의 주는 가장 높으니라. 죄를 짓는 자는 하늘에 오르지 못하나 올바른 길을 걷는 자는 하늘에서 자리를 찾으리라. 우리가 진리를 알면 다음 세상에서 생명을 보장받느니라. 사람의 혼은 가장 높은 하늘까지 올라갈 수 있고, 거기서 참다운 영적 성품을 기르고 완전에 이르느니라. 하늘에 있는 재산은 사람을 죄의 사슬에서 구원하고 궁극의 아름다움의 첫걸음을 보여주느니라. 올바른 사람은 이미 죄와 그에 관련된 모든 고난의 종말을 체험하였느니라. 자아는 사람이 이길 수 없는 적이요, 사람의 네 가지 큰 정열로 나타나니, 분노ㆍ자만ㆍ기만ㆍ욕심이라. 사람의 가장 큰 승리는 자신을 정복하는 것이라. 사람이 용서를 얻으려고 하나님을 찾을 때, 그러한 해방을 얻으려고 감히 나설 때, 그렇게 함으로 두려움에서 벗어나느니라. 사람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동료 인간들을 대하면서 일생을 통해서 나그네 길을 가야 하느니라.”

7. 신도

131:7.1 (1451.1) 최근에 와서야 이 극동(極東) 종교의 원고들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맡겨졌다. 신도(神道)는 가니드가 들어 본 적이 없는 세계 종교였다. 다음 요약에서 보다시피, 이 신앙도 초기 멜기세덱의 가르침의 잔재를 담고 있다:

131:7.2 (1451.2) “주가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모두 나의 신성한 권능을 받은 자이니라. 모든 사람은 내가 베푸는 자비를 얻느니라. 땅에 두루, 올바른 사람이 늘어나는 것을 내가 크게 기뻐하노라. 자연의 아름다움과 사람의 미덕에서 하늘의 임금은 스스로를 드러내고, 그의 올바른 성품을 보이기를 구하시니라. 옛 사람들이 내 이름을 몰랐은즉 눈에 보이는 존재로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스스로를 드러냈고, 사람이 내 이름을 잊지 않기까지 굴욕을 견디었노라. 내가 하늘과 땅을 만들었고 해와 달과 모든 별이 내 뜻에 복종하느니라. 나는 육지와 사해(四海)에 있는 모든 생물의 통치자이라. 비록 내가 크고 아주 높아도 아주 가난한 사람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노라. 어떤 사람이라도 나를 예배하고자 하면, 그의 기도를 듣고 가슴 속에 바라는 것을 허락하리라.’

131:7.3 (1451.3) “‘사람이 걱정에 빠질 때마다 마음 속 영의 인도하심에서 한 걸음 멀어지느니라.’ 자만이 하나님을 가리느니라. 하늘의 도움을 받고자 하면 자만을 버리라. 자만의 털 하나하나가, 말하자면 큰 구름처럼 구제하는 빛을 가리느니라. 마음 속이 옳지 않으면, 바깥의 것을 얻으려고 비는 것이 쓸모 없느니라. ‘내가 너희의 기도를 들으면, 네가 깨끗한 마음으로 거짓과 위선이 없이, 거울처럼 진리를 비치는 혼을 가지고 내 앞에 오기 때문이라. 불멸을 얻고 싶으면, 세상을 버리고 내게로 오라.’”

8. 도교

131:8.1 (1451.4) 멜기세덱의 사자들은 중국으로 깊이 침투하였고, 유일한 하나님의 교리는 몇몇 중국 종교에서 초기 가르침의 일부가 되었다. 가장 오랫동안 버티고 일신교의 진리를 대체로 지닌 것은 도교(道敎)였다. 가니드는 그 창시자의 가르침으로부터 다음을 수집하였다:

131:8.2 (1451.5) “최상위는 얼마나 순수하고 조용한지, 그런데도 얼마나 힘있고 막강한지, 얼마나 깊고 헤아릴 수 없는지! 하늘에 계신 이 하나님은 만물의 존경받는 조상이로다. 영원자를 알면, 너는 깨우침을 얻었고 지혜로우니라. 영원자를 모르면 무지는 악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내나니, 이렇게 죄 지을 정열(情熱)이 일어나느니라. 이 놀라운 존재는 하늘과 땅이 있기 전에 계셨느니라. 참으로 영적이고, 홀로 계시며 변치 않느니라. 그는 정말로 세상의 어머니요, 모든 창조가 그의 둘레를 도는도다. 이 위대한 이는 사람에게 자신을 나누어 주시며, 이로서 저희를 뛰어나게 만들고 살아남게 하시느니라. 아는 것이 적더라도 사람은 최상위의 길을 걷고 하늘의 뜻을 따를 수 있느니라.

131:8.3 (1452.1) “참되게 봉사하는 선행은 모두 최상위로부터 나오느니라. 만물이 살려고 위대한 근원에 의존하느니라. 위대한 최상위는 그가 주신 것 때문에 조금도 공로를 찾지 않느니라. 그의 권력은 최상이나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가려져 있도다. 사람들을 완전하게 만들면서 그는 자기의 속성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느니라. 하늘의 도리는 느리고 참을성 있게 계획하여도 확실히 성취하느니라. 최상위는 우주를 펼치고 그 모든 것을 떠받들도다. 그의 넘쳐흐르는 영향과 당기는 힘은 얼마나 크고 막강한지! 참된 선(善)은 물과 같으니 만물에게 복을 주되 아무것도 해치지 않느니라. 참된 선은 물과 같아 가장 낮은 곳, 아니 남들이 피하는 바닥까지도 찾으니, 최상위와 비슷하기 때문이라. 최상위는 만물을 창조하고 사실상 저희를 기르며 영적으로 저희를 완전케 하느니라. 최상위가 강요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기르고 보호하고 완전하게 만드는 방법은 신비로다. 그는 자기 주장 없이 안내하고 지도하며, 지배하지 않고서 진보를 돌보시느니라.

131:8.4 (1452.2) “현명한 사람의 마음은 한 곳에 치우치지 않느니라. 어설프게 아는 것이 위험하니라. 큰 뜻을 품은 자는 자신을 낮추기를 배워야 하느니라. 창조함으로 최상위는 세계의 어머니가 되었도다. 사람이 어머니를 아는 것은 제가 아들임을 깨닫는 것이라. 전체의 관점에서 모든 부분을 보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이라. 누구에게나 네가 그의 처지에 놓여 있는 것 같이 말하라. 모욕을 친절로 갚으라. 사람들을 사랑하면 저희가 네 가까이 오리니, 저희를 설득하기에 아무 어려움이 없으리라.

131:8.5 (1452.3) “위대한 최상위는 만물에 침투하며 왼편에도 바른편에도 있도다. 그는 모든 창조를 지원하고 모든 참다운 존재 안에 깃들도다. 너희는 최상위가 어디 계신가 찾아낼 수 없고 계시지 않은 곳으로 갈 수도 없느니라. 사람이 자기의 길이 악함을 깨닫고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면 용서를 구해도 좋으니라. 그는 벌을 피할 수도 있고 재난을 복으로 바꿀 수도 있느니라. 최상위는 모든 창조에게 안전한 피난처요 인류의 수호자요 구원자이라. 너희가 날마다 그를 찾으면 찾아내리라. 그가 죄를 용서할 수 있은즉, 그는 정말로 모든 사람에게 아주 귀중하니라. 하나님은 행위가 아니라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상(賞) 주심을 늘 기억하라. 그런즉 보상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동료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느니라. 자기의 이익을 생각지 말고 좋은 일을 하라.

131:8.6 (1452.4) “영원자의 율법을 아는 자는 지혜로우니라. 신의 율법을 모름은 고난이요 재난이라.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는 생각이 자유로우니라. 네가 영원자를 알면 네 몸이 죽더라도 혼이 살아남아 영적으로 봉사하리라. 너의 하찮음을 깨달으면 참으로 지혜로우니라. 네가 영원자의 빛에 거하면 최상위가 깨우쳐주는 것을 맛보리라. 최상위에게 봉사하는 데 헌신하는 자는 이렇게 기뻐하면서 영원자를 추구하느니라. 사람이 죽으면 고향으로 가는 큰 여행 길에 그 영이 긴 비행을 시작하느니라.”

9. 유교

131:9.1 (1452.5) 세계의 큰 종교들 중에서 가장 적게 하나님을 인정하는 종교조차도 멜기세덱 선교사와 끈질긴 그 후계자들의 일신교를 인정했다. 가니드가 이렇게 유교(儒敎)를 요약하였다:

131:9.2 (1452.6) “하늘이 예정하는 것은 틀림이 없도다. 진리는 참이며 신성하니라. 만물이 하늘에서 비롯되며 큰 하늘은 실수가 없느니라. 하늘은 열등한 사람을 교육하고 개선하는 일을 도우려고 많은 부하를 임명하였느니라. 하늘 높은 데서 사람을 다스리는 유일한 하나님은 크고도 크시도다. 하나님의 권능은 대단하고 그 판단은 무섭도다. 그러나 이 큰 하나님은 많은 열등한 민족에게도 도덕 감각을 주셨느니라. 하늘의 은혜는 결코 그치지 않느니라. 자비심은 하늘이 사람에게 내리는 최고의 선물이라. 하늘은 사람의 혼에게 기품을 주었고 사람의 미덕은 하늘의 기품을 이렇게 부여함으로 생긴 열매이라. 큰 하늘은 만물을 헤아리고 사람이 행하는 모든 일에 동행하시니라. 큰 하늘을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 좋으니라. 이렇게 우리가 신성한 조상들의 하인이면 하늘에게 비밀로 기도를 드려도 좋으니라. 항상, 무슨 일에나 하늘의 위엄을 경외하자. 아 하나님, 최고자, 통치하는 군주여. 심판이 주께 달려 있고 모든 자비가 신의 마음으로부터 진행하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나이다.

131:9.3 (1453.1)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런즉 우리 마음 속에 아무 두려움이 없도다. 나에게 어떤 미덕이라도 발견되면 이는 나와 함께 거하는 하늘이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그러나 내 안에 있는 이 하늘은 가끔 내 신앙에 어려운 요청을 하도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나는 마음 속에 아무 의심을 갖지 않기로 결심하였노라. 믿음은 사물의 진실에 아주 가까이 있음이 틀림없고, 이 좋은 믿음 없이 사람이 어찌 살 수 있을까 나는 알지 못하노라. 좋은 일과 나쁜 일은 까닭 없이 사람에게 닥치지 아니하느니라. 하늘은 사람의 혼의 의도에 따라서 그 혼을 다루시니라. 네가 잘못했음을 깨달을 때, 망설이지 말고 네 잘못을 고백하고 빨리 배상하라.

131:9.4 (1453.2) “지혜로운 사람은 진리 탐구에 몰두하며, 그저 살아갈 방도만 추구하지 않느니라. 하늘의 완전함에 이르는 것이 사람의 목적이라. 우수한 사람은 자아 조절에 마음을 쓰며, 걱정과 두려움에 매이지 않느니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니 가슴 속에 의심을 품지 말라. 모든 착한 행실은 보상을 받느니라. 군자(君子)는 하늘에 투덜거리지 않으며 사람에게 불평을 품지도 않느니라. 바로 네가 당하기 싫어할 일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 어떤 벌에도 동정심을 섞고 어떻게 해서든 징벌이 축복이 되도록 노력하라. 큰 하늘의 길이 이러하니라. 모든 사람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나 귀인(貴人)의 영은 떠나가서 하늘에서 전시되며, 더할 나위 없이 빛나는 영화로운 빛에 이르기까지 올라가느니라.”

10. “우리의 종교”

131:10.1 (1453.3) 세계 종교들이 파라다이스 아버지에 관하여 가르친 것을 이처럼 수집하느라고 힘들여 수고한 뒤에, 가니드는 예수가 가르친 결과로 하나님에 관하여 얻은 신앙의 요약이라 판단되는 것을 작성하는 과제를 시작했다. 이 젊은이는 그러한 믿음을 “우리의 종교”로 언급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131:10.2 (1453.4) “우리의 주 하나님은 유일한 주이다. 생각과 마음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고, 한편 네 몸을 사랑하는 것 같이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하늘 아버지요, 그분 안에 만물이 존재를 가지며, 그 영으로 말미암아 그는 모든 성실한 인간의 혼 안에 거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성실한 창조자인 그에게 어떻게 우리 혼을 맡기는가 배워야 한다. 우리 하늘 아버지에게 모든 일이 가능하다. 만물과 모든 존재를 창조하셨으니, 그는 창조자요 그렇지 않을 수 없다. 볼 수는 없어도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날마다 실천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동료 인간에게 드러낼 수 있다.

131:10.3 (1453.5) “하나님 성품의 신성한 재산은 무한히 깊고 영원히 지혜롭다. 지식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지만, 마음 속에서 몸소 체험함으로 그를 알 수 있다. 우리는 그의 응보를 깨달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땅에서 가장 비천한 존재도 그의 자비를 얻을 수도 있다. 아버지는 우주를 채우나 또한 우리 마음 속에도 사신다. 사람의 생각은 인간답고 반드시 죽지만 사람의 영은 신성하고 불멸한다. 하나님은 전능할 뿐 아니라 또한 전적으로 지혜롭다. 땅에서 우리 부모가 악한 성향이 있어도 어떻게 자식을 사랑하고 좋은 선물을 주는가 안다면, 하늘에서 선한 아버지는 어떻게 땅에 있는 자녀들을 지혜롭게 사랑하는가, 어떻게 알맞는 축복을 내릴까 얼마나 더 잘 아시겠는가.

131:10.4 (1454.1) “한 아이라도 아버지를 찾아내기를 바라고 참으로 그와 같기를 동경하면 하늘 아버지는 그 아이가 땅에서 죽도록 버려두지 않으시리라. 우리 아버지는 악한 자를 사랑하기까지 하며 고마움을 모르는 자에게 언제나 친절하시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 많은 인간이 알 수만 있다면, 잘못된 길을 뉘우치고 사람이 아는 온갖 죄를 버리도록 저희를 분명히 인도하시리라. 모든 좋은 것은 빛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며, 그분 안에 아무 변동이 없고 변화의 그림자도 없다. 참된 하나님의 영은 사람의 마음 속에 계신다. 그는 모든 사람이 형제가 되기를 뜻하신다.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님을 더듬어 찾으면, 이는 하나님이 저희를 찾아냈고 저희가 그를 알려고 찾고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며,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

131:10.5 (1454.2) “나는 하나님이 내 민족 전체의 아버지임을 믿는 것으로 이제 더 만족하지 못하겠다. 이제부터 또한 내 아버지임을 믿겠다. 진리의 영의 도움을 얻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언제나 애쓰겠다. 그 영은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알게 된 때 나를 돕는 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행하는가 배워서 나는 하나님 예배하기를 연습하려고 한다. 즉, 하나님이 내 동료 필사자 각자가 대접받기 바라는 대로 저희를 대하도록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육신을 입고 이와 같은 일생을 살면,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것을 청구해도 좋다. 더 준비를 잘하여 동료들에게 봉사하도록 그는 우리 마음 속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사랑으로 베푸는 이 봉사는 모두, 하늘의 기쁨을 우리가 받고 체험할 능력을 키워 주며, 이것은 하늘의 영이 베푸는 높은 기쁨이다.

131:10.6 (1454.3)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선물 때문에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겠다. 사람의 자녀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로 그를 찬미하겠다. 그는 나에게 전능자ㆍ창조자요, 권능과 자비이지만, 무엇보다도 나의 영 아버지이다. 땅에 있는 자식으로서, 나는 언젠가 그를 만나러 떠나간다. 하나님을 추구함으로 그와 같이 될 것이라고 내 가정 교사가 말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나는 하나님과 평화롭게 지낸다. 우리의 이 새 종교는 기쁨으로 충만하며, 오래 가는 행복을 낳는다. 내가 죽기까지도 충실할 것이요, 분명히 영생의 영광을 받으리라 나는 확신한다.

131:10.7 (1454.4) “나는 만물을 증명하는 것과 선을 붙잡기를 배운다. 사람들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이나 동료들에게 행하겠다. 이 새로운 믿음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음을 내가 안다. 그러나 멈추어서 모든 사람이 내 형제임을 생각하면 때때로 무서워지지만 이것은 참말임이 틀림없다. 사람이 형제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내가 기뻐할 수 있는지 나는 모른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참이라면, 모든 사람이 내 형제임이 틀림없다.

131:10.8 (1454.5) “이제부터 선행을 남 모르게 하겠다. 또한 홀로 있을 때 기도를 가장 많이 하겠다. 동료들에게 불공평하지 않기 위하여 사람을 판단하지 않겠다. 내 적을 사랑하기를 배우려 한다. 하나님과 같이 되는 이 연습을 나는 아직 참으로 통달하지 못했다. 다른 이 여러 종교에서 하나님을 보기는 해도, 나는 ‘우리의 종교’에서 하나님이 더 아름답고 사랑이 있으며, 자비롭고, 친히 대하시며, 긍정적임을 발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크고 영화로운 이 존재는 나에게 영적 아버지요, 나는 자식이다. 아버지처럼 되려는 정직한 소망이 없으면 나는 어떤 방법으로도 궁극에 그를 발견하고 영원히 그를 섬기지 못할 것이다. 마침내 나는 하나님, 놀라운 하나님이 있는 종교를 가졌으니, 그는 영원한 구원을 주는 하나님이다.”

제 132 편 로마에서 머무르는 동안

유란시아서

제 132 편

로마에서 머무르는 동안

132:0.1 (1455.1) 고노드가 인도의 영주들로부터 인사장을 로마의 통치자 티베리우스에게 가지고 갔기 때문에, 로마에 도착한 뒤 사흘째에 두 인도인과 예수는 그 앞에 나타났다. 시무룩하던 황제는 이날 특별히 명랑했고 세 사람과 오랫동안 잡담을 나누었다. 그들이 앞에서 사라졌을 때, 황제는 예수를 언급하면서 바른 쪽에 서 있던 보좌관에게 한 마디 던졌다: “저 친구의 임금다운 태도와 품위 있는 예절을 가졌다면, 내가 진짜 황제가 될 터인데, 응?”

132:0.2 (1455.2) 로마에 있으면서, 가니드는 공부하고 도시 근처에 흥미 있는 장소들을 찾아보는 데 정기적으로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처리할 업무가 많았다. 아들이 자라서 광대한 상업 이권을 관리하는 훌륭한 후계자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소년에게 사업 세계의 기초를 가르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로마에는 인도 시민이 많이 있었고, 바로 고노드의 고용자 중에서 한 사람이 흔히 통역으로서 따라가곤 해서, 예수는 하루 종일 혼자서 지내곤 하였다. 이것은 2백만 주민이 사는 이 도시를 샅샅이 눈에 익힐 시간을 주었다. 그는 포럼에서 자주 눈에 띄게 되었는데, 여기는 정치와 법률과 사업 생활의 중심이었다. 그는 자주 카피톨리움으로 올라갔고, 주피터ㆍ주노ㆍ미네르바를 모시는 이 웅장한 신전(神殿)을 바라보는 동안, 이 로마 사람들이 무지의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또한 팔라틴 언덕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는데, 거기에는 황제의 저택, 아폴로 신전과 그리스 및 라틴 도서관들이 있었다.

132:0.3 (1455.3) 이때에 로마 제국은 유럽 남부, 소 아시아, 시리아, 에집트, 북서 아프리카를 모두 포함했다. 그 거주민은 동반구의 모든 국가의 시민을 포함했다. 이러한 국제적인 유란시아 필사자 집단에 대하여 공부하고 함께 어울리려는 소망이 예수가 이 여행을 하는 데 찬성한 주요한 이유였다.

132:0.4 (1455.4) 로마에 있는 동안 예수는 사람들에 관하여 많이 배웠지만, 그 도시에서 여섯 달 머무르는 동안에 얻은 다양한 모든 체험 중에 가장 귀중한 것은 제국의 서울에 있던 종교 지도자들과 접촉하고 그들에게 영향을 준 것이었다. 로마에서 첫 주말이 되기 전에, 예수는 견유학파, 금욕주의파, 신비 종파, 특히 미트라 집단에서, 쓸 만한 지도자들을 수소문하고 얼굴을 익혔다. 유대인이 그의 사명을 거부하리라는 것이 명백했든 그렇지 않았든, 하늘나라를 선포하려고 사자(使者)들이 곧 로마로 올 것을 예수는 아주 확실히 내다보았다. 따라서 가장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이 전하는 말씀이 더 낫게, 더 확실히 받아들여지도록 길을 예비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으뜸가는 금욕주의자 다섯 명, 견유학파 열한 명, 신비 종파 지도자 열 여섯 명을 골랐고 거의 여섯 달 동안, 남는 시간의 상당 부분을 이 종교 선생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지냈다. 그는 이렇게 가르쳤다: 한 번도 그들의 잘못을 공격하거나 가르침에 있는 결점을 언급하지도 않았다. 경우마다 그들의 가르침 속에 있는 진리를 고르고 더 나아가서 그들의 머리 속에서 이 진리를 돋보이게 하고 비추어서, 아주 짧은 동안에 이렇게 향상된 진리는 관련된 잘못을 실질적으로 밀어내었다. 예수가 가르친 이 남녀들은 이렇게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의 가르침 속에서 추가된 비슷한 진리를 후일에 깨닫도록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복음 전도자들의 가르침을 바로 이렇게 일찍 받아들인 것은 로마에서, 그리고 거기서부터, 제국 전역에 걸쳐 기독교가 급히 퍼지도록 힘차게 추진력을 주었다.

132:0.5 (1456.1) 로마에서 예수가 가르친 이 종교 지도자 32명의 무리에서 겨우 두 사람이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것을 기록할 때, 이 놀라운 행적의 중요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30인은 로마에서 기독교를 세우는 주축을 이루는 사람이 되었고, 더러는 또한 으뜸가는 미트라 성전을 그 도시의 첫 기독교 교회로 바꾸는 일에 협조하였다. 장면 뒤에서, 그리고 1천 9백 년의 세월에 비추어 인간의 활동을 바라보는 우리는 유럽에 두루 기독교가 급속히 전파되게 만든 무대의 초기 배경에서 최고의 가치가 있는 꼭 세 가지 요인을 인정하며, 이는 다음과 같다:

132:0.6 (1456.2) 1. 시몬 베드로를 사도로 고르고 붙들어 둔 것.

132:0.7 (1456.3) 2. 예루살렘에서 스테반과 이야기한 것. 그의 죽음은 타르수스의 사울의 지지를 얻도록 이끌었다.

132:0.8 (1456.4) 3. 로마에서, 그리고 제국 전역에서 후일에 새로운 종교를 주도하도록 이 로마인 30명을 미리 예비한 것.

132:0.9 (1456.5) 스테반이나 선택된 30인도 그들의 모든 체험을 통해서 그 사람과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고 그의 이름이 그들의 종교적 가르침의 주제가 되었다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했다. 최초의 32인을 위하여 예수가 한 일은 전부 직접 만나서 한 것이다. 이 사람들을 위하여 수고하면서 다마스커스 서기관은 한 번에 세 명을 넘게 만나지 않았고 두 명을 넘게 만나는 일이 드물었으며, 한편 이들을 하나씩 가르친 적이 가장 많았다. 이 남녀들이 전통에 묶이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 훈련을 시키는 이 큰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이들은 모든 앞날의 종교 발전에 관하여 굳어진 선입견에 젖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132:0.10 (1456.6) 곧 뒤잇는 여러 해 동안,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로마에 있던 다른 기독교 선생들은 이 다마스커스 서기관에 관하여 여러 번 소문을 들었는데, 그는 그들보다 먼저였고 (눈치 채지 못하고 상상한 바와 같이) 그들이 새 복음을 가지고 오는 것을 위하여 길을 예비한 것이 아주 분명했다. 바울은 결코 이 다마스커스 서기관의 신분을 정말로 추측하지 못했지만 죽기 조금 전에, 인물 묘사가 비슷했기 때문에, “안티옥의 천막 만드는 사람”은 또한 “다마스커스의 서기관”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어느 때 한 번 로마에서 설교하는 동안, 시몬 베드로는 다마스커스 서기관의 인물 묘사를 들으면서 이 사람이 예수였을지 모른다고 추측했지만 주가 로마에 계신 적이 없었음을 잘 알았으므로 (그렇게 생각했다) 재빨리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1. 참된 가치

132:1.1 (1456.7) 로마에서 머무르던 기간의 초기에, 예수는 금욕주의파의 지도자 앙가몬과 함께 밤이 새도록 이야기했다. 이 사람은 나중에 바울과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로마에서 기독교 교회의 강력한 지지자 중에 하나가 되었다. 현대의 말투로 다시 표현하면, 예수가 앙가몬에게 가르친 내용은 이렇다:

132:1.2 (1457.1) 참된 가치의 기준은 영적 세계에서, 영원한 실체의 신성한 수준에서 찾아야 한다. 하늘 가는 필사자에게 이보다 낮은 물질적 기준은 모두 일시적ㆍ부분적이며 열등한 것을 인식해야 한다. 과학자는 과학자로서 여러 물질적 사실이 관계된 것을 발견하는 데 국한된다. 엄밀하게 말하면, 과학자는 자기가 유물론자나 이상주의자라고 주장할 아무 권리가 없다. 그러한 태도를 가지려는 모든 주장이 철학의 바로 그 핵심이니까, 그렇게 주장하면서 감히 참된 과학자의 태도를 버리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132:1.3 (1457.2) 필사자의 통찰력과 인류의 영적 달성이 비례해서 커지지 않으면, 순전히 물질적 문화가 한없이 진보하는 것은 궁극에 문명에 위협이 된다. 순전히 물질적인 과학은 그 속에 모든 과학적 노력을 파괴하는 잠재 씨앗을 품고 있다. 바로 이 태도가, 도덕적 가치를 느끼는 감각을 포기하고 영적 달성의 목표를 거부한 문명이 궁극에 붕괴한다는 것을 예시하기 때문이다.

132:1.4 (1457.3) 유물론적 과학자와 극단적 이상주의자는 언제나 다투게 되어 있다. 높은 도덕적 가치관과 영적 시험 수준, 공통된 기준을 소유한 과학자와 이상주의자는 그렇지 않다. 각 시대에 과학자와 종교인은 인간의 필요라는 심판대 앞에서 재판을 받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의 진보에 봉사하는 데 더 낫게 헌신함으로 그들의 계속된 생존을 정당화하려고 용감하게 싸우는 한편, 자기들 사이에 어떤 투쟁도 피해야 한다. 어느 시대에도 이른바 과학이나 종교가 거짓되다면, 그들은 그 활동을 정화(淨化)하든지, 아니면 더 참되고 더 가치 있는 체제의 물질 과학이나 영적 종교가 탄생하기 전에 사라져야 한다.

2. 선과 악

132:2.1 (1457.4) 마르두스는 로마의 견유학파에서 인정받은 지도자였고, 다마스커스 서기관과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는 날마다 예수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밤마다 예수의 고귀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마르두스와 가진 비교적 중요한 토론 가운데, 선과 악에 관하여 이 진지한 견유학자의 질문에 대답하려고 고안된 것이 하나 있다. 내용으로 보아서, 20세기의 표현을 쓰자면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132:2.2 (1457.5) 아우여, 선과 악은 다만 관측할 수 있는 우주를 인간이 이해하는 그 상대적 수준을 가리키는 낱말일 뿐이다. 네가 윤리적으로 깨끗하지 않고 사회에 무관심하면, 통용되는 사회 관습을 네 선(善)의 기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영적으로 게으르고 도덕적 진취성이 없으면, 같은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종교적 관습과 전통을 네 선의 기준으로 가져도 좋다. 그러나 시간 세계에서 살아남고 영원으로 태어나는 혼은 그러한 선과 악 사이에 현실적으로 몸소 선택해야 하며, 선과 악은 사람의 마음 속에서 살라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보낸 신다운 영이 세워놓은 영적 기준의 참된 가치관에 따라 결정된다. 사람에게 깃드는 이 영은 인격이 살아남는가를 정하는 기준이다.

132:2.3 (1457.6) 진리와 마찬가지로, 선은 언제나 상대적이고 어김없이 악과 반대가 된다. 선과 진리의 이 성질을 파악하는 것이 사람의 성장하는 혼으로 하여금 영원히 살아남는 데 필수인 결정, 몸소 선택하는 결정을 내리게 한다.

132:2.4 (1458.1) 과학의 명령과 사회의 관습과 종교의 독단(獨斷)을 논리적으로 따르는,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은 도덕적 자유를 희생하고 영적 해방을 잃어버릴 심각한 위험과 마주친다. 그러한 혼은 지적(知的) 앵무새가 되고 사회적 자동 인형이 되며 종교적 권한에 노예가 되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다.

132:2.5 (1458.2) 도덕적으로 자아를 실현하고 영적 인격을 달성하는―깃드는 조절자를 발견하고 그와 한편이 되는―자유가 늘어나는 새 수준을 항하여 선은 언제나 자라고 있다.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감각을 높이고 도덕적 의지를 키우며, 진리를 헤아리는 눈을 높이고, 동료를 사랑하고 섬길 능력을 키우며, 영적 이상을 높이고 시간 세계에서 최고의 인간다운 동기를 깃드는 조절자의 영원한 계획과 하나가 되게 만들 때, 경험은 선하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려는 소망이 커지도록 직접 인도하며,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을 찾아내고 더욱 그와 같이 되려는 신성한 열정을 길러준다.

132:2.6 (1458.3) 우주에서 인간이 발전하는 눈금을 올라감에 따라서, 선을 체험하고 진리를 헤아리는 능력과 완전히 발걸음을 맞추어, 너는 선이 커지고 악이 줄어드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하늘 가는 인간의 혼이 마지막 영 수준에 이르기까지, 잘못을 마음에 품거나 악한 것을 체험하는 능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132:2.7 (1458.4) 선(善)은 생생하고 상대적이고 언제나 진보하는 체험, 변함없이 몸소 겪는 체험이며, 진리와 아름다움을 헤아리는 것과 언제까지나 서로 연결된다. 선은 영적 수준에서 긍정적 진리와 가치를 인식하는 데서 발견되며, 이것은 인간의 체험에서 그 반대에 해당하는 개념―잠재 악의 그림자―와 대조되어야 한다.

132:2.8 (1458.5) 파라다이스 수준에 이를 때까지, 선은 언제나 소유하는 물건이 아니라 정복하는 것이요, 달성하는 체험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目標)일 것이다. 그러나 올바름을 간절히 목마르게 찾더라도, 너는 선을 부분적으로 달성하는 데 더욱 만족을 느낀다. 세상에 선과 악이 있는 것은 그 자체로서 사람의 도덕적 의지, 즉 인격이 존재하고 실재한다는 분명한 증명이며, 인격은 이러한 선악의 가치를 확인하고 또한 그 사이에 선택할 수 있다.

132:2.9 (1458.6) 파라다이스에 이를 때가 되면, 하늘 가는 필사자가 참된 영 가치와 일체가 되는 능력이 아주 커져서 생명의 빛을 완전히 소유하는 결과를 낳는다. 완전해진 그러한 영 인격은 긍정적이고 최상질의 선ㆍ아름다움ㆍ진리와 아주 온전히 신성하게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서, 무한한 파라다이스 통치자들의 빛, 사람을 살피는 신성한 광원의 빛에 노출되었을 때, 그러한 올바른 영은 악의 잠재성을 가진 어떤 부정적 그림자라도 던질 가능성이 전혀 남지 않는다. 모든 그러한 영 인격 안에서 선은 이제 더, 부분적이고 반대되고 상대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 선은 신답게 완성되었고 영적으로 충만하다. 선은 최상위의 순수함과 완전함에 가까이 간다.

132:2.10 (1458.7) 악의 가능성은 도덕적 선택에 필요하지만, 악이 현실이 될 필요는 없다. 그림자는 오직 상대적으로 실재한다. 현실로 나타나는 악은 개인의 체험이 될 필요가 없다. 악의 잠재성은 영적 발전이 낮은 수준에 있을 때, 도덕적으로 진보하는 영역에서 결정을 내리게 하는 자극으로서 똑같이 효력이 있다. 오로지 한 필사 지성이 악한 것을 선택할 때 악은 몸소 체험하는 현실이 된다.

3. 진리와 믿음

132:3.1 (1459.1) 나본은 그리스계 유대인이요, 로마에서 주요 신비 종파 미트라교에서 으뜸가는 지도자였다. 미트라교의 이 대사제는 다마스커스 서기관과 많은 회담을 가졌지만, 어느 날 저녁에 진리와 믿음에 관하여 가졌던 토론에 아주 오랫동안 영향을 받았다. 나본은 예수를 개종시키려고 생각하였고 그에게 미트라교 선생으로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라고 제안까지 하였다. 하늘나라 복음으로 초기에 개종(改宗)한 사람들 축에 속하도록 예수가 그를 준비시키고 있음을 그는 조금도 깨닫지 못했다. 현대의 말투를 빌려서 다시 말하면, 예수의 가르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32:3.2 (1459.2) 진리는 말이 아니라, 오직 실천함으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진리는 반드시 지식보다 더한 것이다. 지식은 지켜본 사물에 관한 것이지만, 진리가 지혜와 사귀고, 인간의 체험, 아니 영적이고 생생한 실체들과 같이 저울질 할 수 없는 것을 담기 때문에, 진리는 그렇게 순전한 물질 수준을 초월한다. 지식은 과학에서 비롯하며, 지혜는 참된 철학에서, 진리는 영적으로 사는 종교적 체험에서 비롯한다. 지식은 사실을 다루고, 지혜는 관계를, 진리는 실체의 가치관을 다룬다.

132:3.3 (1459.3) 사람은 과학을 구체화하고 철학을 형식으로 만들고 진리를 교리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는 사람이 진보적 생활 투쟁에 적응하는 데 정신적으로 게으르고 한편 또한 미지의 것을 끔찍하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자연인은 생각하는 버릇과 생활 기법을 바꾸는 데 느리다.

132:3.4 (1459.4) 계시된 진리, 몸소 발견한 진리는 인간의 혼이 얻는 최고의 기쁨이다. 이는 물질 지성과 깃드는 영이 합동으로 창조한 것이다. 진리를 분별하고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혼이 영원히 구원받는 것은 선을 간절히 바라고 목마르게 찾음으로 보장되며, 이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을 찾아내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오직 한 가지 목적을 개발하도록 이 필사자를 인도한다. 참된 지식과 진리 사이에는 결코 갈등이 없다. 지식, 그리고 인간의 관념, 편견으로 물들고 두려움으로 왜곡되고 물질적 발견이나 영적 진보와 같은 새로운 사실에 직면하는 두려움에 지배된 관념 사이에는 갈등이 있을지 모른다.

132:3.5 (1459.5) 그러나 믿음을 실천하지 않고서 진리는 결코 사람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 이것이 참말이니, 사람의 생각ㆍ지혜ㆍ윤리ㆍ이상은 그의 믿음, 숭고한 소망보다 결코 더 높이 솟아오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그러한 참된 믿음은 깊은 반성(反省), 진지한 자기 비평, 굽히지 않는 도덕 의식에 근거를 둔다. 믿음은 영의 영향을 받은 창조적 상상력이 주는 영감이다.

132:3.6 (1459.6) 믿음은 신성한 불꽃, 곧 불멸하는 씨눈의 초인간적 활동을 해방하도록 작용하고, 그 씨눈은 사람의 지성 속에서 살며 이것이 영원히 살아남을 잠재성이다. 식물과 동물은 한 세대로부터 다른 세대로 자체와 동일한 다른 입자(粒子)들을 전하는 방법으로 시간 세계에서 살아남는다. 사람의 혼(인격)은 깃드는 이 신성의 불꽃과 신분을 연합함으로 필사자의 죽음을 견디고 살아남는다. 그 불꽃은 불멸하며 또 계속되는 상급 수준의 진취적 우주 생활에서 인격을 영속(永續)시키도록 작용한다. 인간의 혼에 감추어진 씨앗은 불사의 영이다. 혼의 둘째 세대는, 진보하는 영적 존재들의 인격이 명시되는 순서에서 처음이요, 이 순서는 오직 이 신다운 개체가 그 존재의 근원, 모든 존재의 성격 근원인 하나님, 우주의 아버지께 이르렀을 때에야 끝난다.

132:3.7 (1459.7) 인간의 생명은 이어진다―살아남는다. 그 생명이 우주 기능, 곧 하나님을 찾아내는 과제를 가졌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활기를 얻은 사람의 혼은 이 운명의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 멈출 수 없다. 이 신성한 목표를 일단 이룩하면, 결코 그칠 수 없으니, 그 혼이 하나님처럼―영원하게―되었기 때문이다.

132:3.8 (1460.1) 영적 진화는 갈수록 더 자진해서 선을 선택하는 체험이며, 여기에는 똑같이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의 점진적 감소(減少)가 뒤따른다. 선을 택하는 결의, 진리를 이해하는 완벽해진 능력을 얻는 것과 함께 완전한 아름다움과 거룩함이 생기게 되며, 이 두 가지의 올바름은 잠재 악의 개념이 솟아날 가능성조차 영원히 억제한다. 하나님을 아는 그러한 혼은 신다운 선의 그러한 높은 영 수준에서 활동할 때, 의심하는 악의 그림자를 조금도 던지지 않는다.

132:3.9 (1460.2) 사람의 지성 속에 파라다이스 영이 계신 것은 우주의 아버지의 불멸하는 이 깃드는 영 조각과 같은 신분이 되려고 애쓰는 모든 혼에게, 신답게 진보함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을 계시하는 약속이요, 믿음의 서약이다.

132:3.10 (1460.3) 사람이 우주에서 진보하는 것은 인격의 자유를 확대시키는 특징이 있으며, 그 진보가 점점 더 높아지는 수준에서 자아를 이해하고 그에 따라 자진하여 자제력을 점진적으로 얻는 것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완전한 영적 자제에 도달하는 것은 우주에서 자유를 얻고 인격의 해방을 성취하는 것과 같다. 그러한 광대한 우주에서 사람이 초기에 적응하는 혼란의 와중에서, 믿음은 사람의 혼을 육성하고 유지한다. 한편 기도(祈禱)는 창조적 상상력으로부터 얻는 다채로운 영감, 그리고 깃드는 관련된 신성한 계심의 영적 이상과 발걸음을 맞추려고 애쓰는 혼의 신앙 욕구, 이 두 가지를 통일하는 좋은 약이 된다.

132:3.11 (1460.4) 예수와 이야기할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나본은 이 말씀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 진리는 가슴 속에서 줄곧 타올랐고, 그는 예수의 복음을 가지고 나중에 도착한 전도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4. 개인적 봉사

132:4.1 (1460.5) 예수는 로마에 있는 동안, 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 앞날에 제자가 되도록 남녀들을 준비시키는 이 일에만 여가를 전부 쓰지는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국제적인 이 도시에 사는 온갖 종족과 계급의 사람들에 관하여 피부로 지식을 얻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수많은 인간과 접촉할 때마다 예수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육체를 입고 사는 인생에 대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배우고 싶어했고 또한 그 인생을 더욱 풍부하고 가치 있게 만들려고 무언가 말씀하거나 행할 생각을 가졌다. 이 몇 주 동안의 종교적 가르침은 열두 사람의 선생으로서, 그리고 군중에게 설교자로서 그의 후기 생애의 특징을 나타냈던 가르침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132:4.2 (1460.6) 언제나 그가 전하는 말씀의 요점은,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사실이요 그의 자비가 진실이라는 것이었고, 아울러 사람은 바로 이 사랑의 하나님에게 믿음의 아들이 된다는 좋은 소식이었다. 예수가 사회적 접촉을 가질 때 쓰는 보통 기술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짐으로 그들을 끌어내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 회견은 보통 그가 질문을 던져 시작되고 그들이 그에게 질문함으로 끝나곤 했다. 그는 묻거나 질문에 대답함으로 가르치는 데 똑같이 솜씨가 있었다. 대체로, 가장 많이 가르친 자에게 말을 매우 적게 하였다. 몸소 베푸는 봉사로 가장 많이 이익을 얻은 자는 무거운 짐을 지고 근심하며 풀이 죽은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큰 위안을 얻은 것은 동정심과 이해심으로, 말을 듣는 사람에게 자기 혼의 짐을 내려놓을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사람이요 그보다 더한 사람이었다.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한 이 인간들이 예수에게 걱정거리를 이야기했을 때, 언제나 그들의 진정한 어려움을 시정하는 방향으로 실용적이고 즉시 도움되는 충고를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는 당장 희망을 주는 말과 즉시 위안이 되는 말씀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어김없이, 곤궁에 빠진 이 필사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일러주고, 다양한 여러 방법으로, 그들이 하늘에 계신 이 인자한 아버지의 자녀라는 소식을 나누어 주곤 했다.

132:4.3 (1461.1) 이 방법으로, 로마에 머무르는 동안, 예수는 이 땅에서 5백 명이 넘는 사람과 함께 친히 애정이 넘치고 기운을 북돋아주는 접촉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인류의 다른 종족들에 대한 지식, 예루살렘에서는 결코, 아니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도저히 얻을 수 없었던 지식을 얻었다. 그는 땅에서 살았던 어떤 비슷한 기간보다도 언제나 이 여섯 달을 가장 값지고 견문을 넓힌 시절 중의 하나로 여겼다.

132:4.4 (1461.2) 아마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다능하고 적극적인 사람은 세계의 대도시에서 수많은 사람과 접근하지 않고 6개월이나 이렇게 활동할 수 없다. 이들은 어떤 사업에 연관되어, 또는 더 흔히 어떤 교육이나 사회 개혁이나 종교 운동 계획을 위하여 그가 봉사하겠다는 보장을 얻으려 했다. 그러한 제안이 열두 번도 더 있었는데, 적절한 말씀을 하거나 어떤 정중한 봉사를 베풀어, 각 제안을 영적으로 고귀한 어떤 생각을 나누어주는 기회로 이용했다. 예수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작은 일까지도―무척 좋아하였다.

132:4.5 (1461.3) 그는 정치와 정치 정신에 대하여 로마의 어느 상원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수와 한 번 이렇게 접촉한 것은 이 입법가에게 무척 감명을 주었고, 그래서 그는 정부가 사람들을 지원하고 부양하는 관념으로부터 사람들이 정부를 지원하는 관념으로 통치 정책 과정을 바꾸려고 동료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헛되이 애쓰면서 여생을 보냈다. 예수는 하루 저녁을 어느 부유한 노예 소유자와 함께 보냈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에 대하여 말씀했다. 이튿날 이 사람, 클라우디우스는 노예 117명에게 자유를 주었다. 정찬에 어느 그리스인 의사와 환담하였다. 환자들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과 혼을 가졌다고 일러주었고, 이렇게 이 유능한 의사가 더욱 원대한 봉사를 동료 인간에게 베풀려고 애쓰게 만들었다. 그는 인생에서 온갖 직업을 가진 모든 종류의 사람들과 이야기했다. 로마에서 그가 찾아보지 않은 유일한 곳은 공동 목욕탕이었다. 거기에는 난잡한 성(性) 관습이 유행했기 때문에 그는 목욕탕에 친구들을 따라가기를 거절했다.

132:4.6 (1461.4) 티버 강을 따라 걸으면서, 그는 어느 로마 군인에게 말했다: “손뿐 아니라 마음도 용감할지어다. 감히 정의(正義)를 행하고, 관대하여 자비를 보이라. 네가 상관에게 복종하는 것 같이 너의 낮은 성품이 높은 성품에 복종하도록 강요하라. 선을 존경하고 진리를 높이라. 더러운 것 대신에 아름다운 것을 선택하라. 동료들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뻗을지니,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임이라.”

132:4.7 (1461.5) 포럼에서 그는 연사(演士)에게 말했다: “너의 웅변은 마음을 즐겁게 하고 논리는 칭찬받을 만하며 목소리는 듣기가 좋구나. 그러나 너의 가르침은 도저히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너의 영적 아버지임을 아는, 힘이 솟게 하는 만족감을 네가 즐길 수만 있다면 어둠의 사슬에서, 그리고 무지의 노예 상태에서 동료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네 말솜씨를 사용해도 좋으리라.” 이 사람은 로마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후계자가 된 마커스였다. 사람들이 시몬 베드로를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 바로 이 사람이 로마의 박해자들에게 대항하고 용감하게 새 복음을 계속 전도하였다.

132:4.8 (1462.1) 억울하게 고발당한 어느 가난한 사람을 만나고서, 예수는 함께 판사 앞으로 갔다. 그를 위하여 변론하도록 특별 허락을 얻고서 훌륭하게 연설했으며, 그 과정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정의(正義)는 나라를 위대하게 만들며, 나라가 위대할수록 가장 비천한 시민도 부당한 판결을 받지 않도록 처리하려고 더욱 애쓸 것이라. 어떤 나라라도 오직 돈과 권력 있는 자가 법정 앞에서 신속하게 정의를 얻을 수 있다면 한탄이 있을진저! 죄 있는 자를 벌하는 것뿐 아니라 무죄한 자를 놓아 주는 것이 판사의 신성한 임무이나이다. 나라가 오래 가는 것은 법정이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고 건전함에 달려 있나이다. 참된 종교가 자비에 기초를 두는 것 같이 국가의 정부는 정의에 기초를 두나이다.” 그 판사는 소송 사례를 다시 열고 증거를 샅샅이 조사한 뒤에, 그 죄수를 풀어주었다. 개인적으로 봉사하는 이 기간에 예수가 한 모든 활동 중에 이것이 대중 앞에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5. 부자에게 조언을 주다

132:5.1 (1462.2) 로마 시민이요 금욕주의자인 어떤 부자가 앙가몬의 소개를 받고서 예수의 가르침에 크게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여러 번 친밀한 회담을 가진 뒤에 이 부유한 시민은 예수가 재산을 가졌다면 무슨 일을 하겠는가 물었고 예수는 대답했다: “지적 생활을 풍성하게 만들고 사회 생활을 고귀하게 만들고 영적 생활의 진보를 위하여 내가 지식과 지혜와 영적 봉사를 베풀고자 하는 것 같이, 나는 물질 생활의 향상을 위하여 물질 재산을 사용하리라. 한 세대의 자원의 지혜롭고 효과 있는 관리자로서 다음에 뒤잇는 세대들의 이익과 품위를 위하여 물질 재산을 관리하겠노라.”

132:5.2 (1462.3) 그러나 그 부자(富者)는 예수의 대답에 마음이 흡족하지 않았다. 다시 대담하게 물었다: “그러나 내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기 재산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이까? 재산을 간직하리이까 아니면 남에게 주어야 하리이까?” 하나님께 충성하고 사람에 대한 의무에 관하여 그가 진리를 정말로 더 알고 싶어하는 것을 파악했을 때, 예수는 이어서 대답했다: “선한 친구여, 네가 진지하게 지혜를 찾고 정직하게 진리를 사랑하는 자임을 내가 알아보노라. 그러므로 재산을 책임지는 데 상관되는 네 문제의 해결에 대하여 내 소견을 펼칠 생각이 있노라.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나에게 조언을 요청했기 때문이라. 이 충고를 주면서 나는 어느 다른 부자의 재산에 아랑곳하지 않노라. 오직 너에게, 너 한 사람을 안내하기 위하여 조언하노라. 정직하게 네 재산을 신탁(信託)으로 여기기를 바라고 쌓은 재산을 지혜롭고 유능하게 관리하는 자가 되기를 정말로 원한다면, 재산의 근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분석할 것을 너에게 조언하고자 하노라. 어디로부터 이 재산이 왔는가 스스로 물어 보고 최선을 다하여 정직한 대답을 찾으라. 너의 큰 재산의 근원을 연구하는 데 도움되는 것으로서 물질 재산을 쌓는 다음 열 가지 다른 방법을 기억할 것을 제안하리라:

132:5.3 (1462.4) “1. 물려받은 재산―부모, 그리고 다른 조상으로부터 얻은 재산.

132:5.4 (1462.5) “2. 발견한 재산―대지(大地)의 개발되지 않은 자원으로부터 얻은 재산.

132:5.5 (1462.6) “3. 상업 재산―물질 상품의 교환과 물물 교역에서 정당한 이익으로 얻은 재산.

132:5.6 (1462.7) “4. 부당한 재산―사람의 동료들을 부당하게 착취하거나 노예로 만들어서 얻은 재산.

132:5.7 (1463.1) “5. 이자(利子)로 얻은 재산―투자한 자본으로부터 공평하고 정당하게 버는 가능성에서 생기는 소득.

132:5.8 (1463.2) “6. 천재(天才)로 얻은 재산―인간 정신의 창조하고 발명하는 자질에 대한 보상으로부터 생기는 재산.

132:5.9 (1463.3) “7. 우연히 얻은 재산―동료의 관대함에서 생기거나 생활 형편에 기원이 있는 재산.

132:5.10 (1463.4) “8. 훔친 재산―불공평ㆍ부정직ㆍ도둑질 또는 사기(詐欺)로 확보한 재산.

132:5.11 (1463.5) “9. 신탁(信託) 기금―현재나 미래에 어떤 특정한 용도를 위하여, 동료들이 네 손에 맡긴 재산.

132:5.12 (1463.6) “10. 벌어들인 재산―스스로 몸소 수고하여 직접 얻은 재산, 바로 너의 정신과 몸이 나날이 노력하여 얻는 공평하고 마땅한 보상.

132:5.13 (1463.7) “그래서 친구여, 하나님 앞에서, 또 사람들에게 봉사하면서 너의 큰 재산을 충실하고 정당하게 관리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거든 재산(財産)을 이 열 가지 큰 부문으로 대강 나누고, 정의ㆍ공평ㆍ공정, 그리고 참된 효율성의 법칙을 지혜롭고 정직하게 해석하고 그에 따라 각 부분을 처분하도록 진행해야 하느니라. 그러나 필사 인생의 불행한 상황에서 고생하는 자의 곤경을 자비롭게 사심 없이 배려하는 방향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따금 실수한다면 하늘의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으리라. 물질적 상황이 공평하고 정당한가 솔직하게 의심이 들 때, 곤궁한 자에게 유리하게, 부당한 시련으로 불행을 당한 자에게 유리하게 결정을 내리라.”

132:5.14 (1463.8) 몇 시간 동안 이 문제들을 토론한 뒤에, 이어서 더욱 자세한 지침을 달라는 부자의 요청에 응답하여, 예수는 계속하여 확대하여 조언하였다. 그 말씀의 내용은 이렇다: “재산을 다루는 태도에 관하여 더 제안하지만, 오직 너에게 주는 것으로서 너 개인을 안내하기 위하여, 내 조언을 받으라고 훈계하고자 하노라. 질문하는 친구인 너에게 오직 내 생각을 이르노라. 다른 부자들이 자기 재산을 어떻게 여겨야 하는가 명령하는 자가 되지 말라 부탁하노라. 나는 이렇게 너에게 조언하겠노라:

132:5.15 (1463.9) “1. 너는 물려받은 재산의 관리자로서 그 근원을 고려해야 하느니라. 지금 세대의 이익을 위하여 공평한 보수를 뺀 뒤에 정당한 재산을 뒤잇는 세대들에게 정직하게 전달할 때, 너는 지난 세대를 대표할 도덕적 책임이 있느니라. 그러나 너는 선조들이 부당하게 재산을 모으면서 생긴 부정직이나 불의를 계속할 의무가 없느니라. 네가 물려받은 중에 사기(詐欺)로 얻거나 불공평하게 얻은 것으로 판명된 재산이 있다면 그 부분을 어떻게 올바르게, 관대하게 배상하는가 확신이 서는 대로 지불해도 좋으니라. 물려받은 나머지 정당한 재산은 공평하게 쓰고 한 세대의 관리자로서, 다른 세대를 위하여 안전히 전달해도 좋으니라. 재산을 후계자들에게 물려줄 때 지혜롭게 구별하고 건전하게 판단함으로 결정을 내려야 하느니라.

132:5.16 (1463.10) “2. 발견의 결과로서 부(富)를 누리는 자는 누구나 사람이 땅에서 잠시만 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고 따라서 가능한 최다수의 동료 인간에게 도움되는 방법으로 이 발견한 재산을 나누기 위하여 적절히 준비해야 하느니라. 발견한 자는 그 노력에 대하여 모든 보상을 빼앗겨서는 안 되지만 자연이 쌓아 둔 자원을 발굴하여 얻을 모든 이익과 축복을 주제넘게 이기적으로 주장해서도 안 되느니라.

132:5.17 (1464.1) “3. 사람들이 상업과 물물 교환으로 세상의 사업을 경영하는 한 저희는 공평하고 정당한 이익을 받을 자격이 있느니라. 장사하는 사람마다 제공한 수고에 대하여 임금을 받아 마땅하고 상인(商人)은 그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느니라. 세상의 조직된 사업에서, 공정하게 장사하고 동료들을 정직하게 대우하는 것은 이익이 남는 많은 다른 종류의 재산을 창조하며, 이 재산의 모든 근원은 가장 높은 정의ㆍ정직ㆍ공평의 원칙에 따라서 판정되어야 하느니라. 정직한 상인은 비슷한 거래에서 그가 동료 상인에게 기꺼이 지불하고자 하는 금액만큼 이익 남기기를 주저해서는 안 되느니라. 이 종류의 재산은 큰 규모로 사업을 운영했을 때 개인이 번 소득과 동일하지 않지만, 정직하게 쌓은 그러한 재산은 동시에 그 재산을 나중에 어떻게 분배하는가에 대하여 상당한 권리를 그 소유자에게 부여하느니라.

132:5.18 (1464.2) “4. 하나님을 알고 신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필사자는 누구나 돈으로 남을 억압함으로 품위를 떨어뜨릴 수 없느니라. 고귀한 사람은 아무도 육체를 입은 형제를 노예로 만들거나 부당하게 착취함으로 재산을 축적하고 재력을 쌓으려고 애쓰지 아니하리라. 억압받는 필사 인간의 피땀을 쥐어짠 결과로 생긴 재산은 도덕적 저주요 영적 낙인이라. 모든 그러한 재산은 이렇게 빼앗긴 자에게, 아니면 저희의 자식과 그 자손에게 돌려주어야 하느니라. 지속하는 문명은 노동자로부터 임금을 속여 빼앗는 관습을 토대로 하여 세워질 수 없느니라.

132:5.19 (1464.3) “5. 정직하게 얻은 재산은 이자를 받아 마땅하니라. 사람들이 빌리고 빌려주는 한, 빌려준 자본이 정당한 재산이라면 정당한 이자를 거두어도 좋으니라. 이자를 청구하기 전에, 먼저 너의 자본을 깨끗이 하여라. 품위를 떨어뜨려 고리로 빌려주는 습관에 빠질 정도로 지나치게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자가 되지 말지니라. 재력을 이용하여, 허덕이는 동료들보다 부당하게 유리한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너무 이기심에 빠지지 말라. 재정적 곤경에 처한 형제로부터 고리(高利)를 받아내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라.

132:5.20 (1464.4) “6. 천재(天才)가 넘쳐흘러 어쩌다가 재산을 확보한다면, 너의 재산이 발명하는 자질의 보상으로 생긴 것이라면 그러한 보상에서 부당한 몫을 주장하지 말라. 천재는 조상과 후손에게 무언가 빚지고 있느니라. 마찬가지로 민족과 나라에게, 그리고 새로운 발명이 생긴 환경에 빚지고 있느니라.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으로서 일하고 발명품을 만들어냈음을 기억해야 하느니라. 재산 증가분 전부를 천재로부터 빼앗는 것은 똑같이 부당하리라. 재산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이 모든 문제에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원칙과 법규를 사람이 정하는 것은 언제라도 불가능하리라. 먼저 사람이 형제임을 깨닫고, 너에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그대로 네가 형제에게 해주기를 정직하게 바라면, 정의ㆍ정직ㆍ공평을 찾으라는 평범한 명령은 모든 되풀이되는 경제적 보상과 사회 정의(正義)의 문제를 정당하게, 그리고 치우치지 않게 해결하도록 너를 안내하리라.

132:5.21 (1464.5) “7. 재산의 관리로부터 정당하고 합법적인 보수를 버는 것을 제외하고, 누구도 때 맞게 행운으로 손에 굴러들어온 재산을 개인적으로 주장해서는 안 되느니라. 우연히 생긴 재산은 사람의 사회 집단이나 경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써야 할 신탁(信託) 재산이라는 관점에서 얼마큼 보아야 하느니라. 그런 재산의 소유자에게 굴러들어온 그러한 자원의 지혜롭고 효과적인 분배를 결정하는 데 큰 발언권을 주어야 하느니라. 문명화된 사람은 그가 관리하는 모든 것을 반드시 개인의 사유(私有) 재산으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132:5.22 (1465.1) “8. 모은 돈의 어느 부분이라도 알면서 사기(詐欺) 행위로 얻었거나, 재산의 어떤 부분이라도 정직하지 않은 업무 처리나 불공평한 방법으로 쌓아 왔거나, 재산이 동료들을 부당하게 대우한 결과라면, 그릇되게 얻은 이 모든 이익을 정당한 주인에게 서둘러 돌려주라. 충분히 손해를 배상하고 이처럼 네 재산 중에서 정직하지 않은 부(富)를 모두 깨끗이 없앨지어다.

132:5.23 (1465.2) “9. 한 사람의 재산을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관리하는 것은 엄숙하고 신성한 책임이라. 그러한 신탁 재산을 위험에 빠지게 하거나 위태롭게 하지 말라. 어떤 신탁 재산 중에서도, 어떤 정직한 사람이라도 허락할 만큼만 네가 가지라.

132:5.24 (1465.3) “10. 너의 재산 중에 자신의 정신과 육체적 노력이 번 것을 대표하는 부분은―네 일이 공평하고 공정하게 실행되었다면―참으로 네 것이라. 아무도 그러한 재산을 네가 소유하고 너의 생각대로 처분할 권리를 부인할 수 없느니라. 하지만 이 권리의 행사(行事)는 동료들에게 해를 미치지 않아야 하느니라.”

132:5.25 (1465.4) 예수가 상담을 마쳤을 때, 이 부유한 로마 사람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날 밤 작별 인사를 하면서 그는 이렇게 약속하였다: “좋은 친구여, 당신은 대단히 지혜롭고 선한 사람인 것을 내가 깨닫나이다. 당신이 조언한 대로 내일 모든 재산의 관리를 시작하리이다.”

6. 사회 봉사

132:6.1 (1465.5) 여기 로마에서 또한 한 우주의 창조자가 길 잃은 아이를 안타까워하는 어머니에게 돌려주느라고 몇 시간을 보낸 감동적 사건이 일어났다. 이 어린 소년은 집을 떠나서 헤매었고, 슬피 울고 있는 것을 예수가 발견했다. 도서관으로 가는 길이었지만, 그와 가니드는 그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에 몰두했다. 가니드는 예수가 하신 말씀을 결코 잊지 않았다: “너도 알다시피, 가니드야, 대부분의 인간은 길을 잃은 아이와 같으니라. 저희는 두려움에 울고 슬픔에 빠져 많은 시간을 보내느니라. 이 아이가 집에서 조금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 같이, 진실로 저희는 안전하고 안정된 곳으로부터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느니라. 진리의 길을 알고 하나님을 안다는 확신을 가진 자는 모두, 생활의 만족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 동료를 안내하는 것을 의무가 아니라 특권(特權)으로 여겨야 하느니라. 그 아이를 어머니에게 되찾아주는 이 수고를 우리가 더할 나위 없이 즐기지 아니하였느냐? 마찬가지로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자는 사람에게 봉사하는 최상의 만족을 맛보느니라.” 그날 이후로, 사는 날까지, 가니드는 집을 찾아줄까 하여 길 잃은 아이들을 줄곧 주의하여 보았다.

132:6.2 (1465.6) 다섯 아이를 가진 과부가 있었는데, 그 남편은 이전에 사고로 죽었다. 예수는 가니드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사고로 잃은 것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들은 이 어머니와 아이들을 위로하려고 여러 번 갔고, 한편 가니드는 먹을 것과 옷가지를 마련하려고 아버지에게 돈을 구하였다. 그들은 맏아들에게 일자리를 찾아주어서 그 가족을 보살피는 일을 도울 수 있을 때까지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132:6.3 (1465.7) 그날 밤 고노드는 이 경험담을 들으면서 예수에게 친절하게 말했다: “나는 아들을 학자나 사업가로 만들려고 궁리하는데 이제 당신은 그를 철학자나 박애가로 만들기 시작하는구려.” 예수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우리는 그를 모두 네 가지 인물로 만들 것이외다. 그러면 인간의 멜로디를 알아듣는 귀가 한 음정이 아니라 네 음정을 들을 수 있으리니, 가니드가 인생에서 네 배나 만족할 수 있으리이다.” 그리고 나서 고노드가 말했다: “당신이 정말로 철학자인 줄 내가 깨닫소. 당신은 미래 세대를 위하여 책을 써야 하오.” 예수는 대답했다: “책이 아니라―내 사명은 이 세대에, 그리고 모든 세대를 위하여 일생을 사는 것이외다. 나는―” 그러나 멈추어서 가니드에게 일렀다, “아이야, 잘 때가 되었구나.”

7. 로마 근처에서 한 여행

132:7.1 (1466.1) 예수와 고노드와 가니드는 로마를 벗어나, 근처의 지역에서 흥미 있는 장소들로 다섯 번 여행하였다. 북부 이탈리아의 호수들을 찾아보는 길에,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지 않으면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치기가 불가능한 것에 관하여, 예수는 가니드와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수로 여행하는 길에 지각(知覺) 없는 한 이방인을 어쩌다가 만났다. 예수가 영적 질문을 하는 토론으로 자연히 이끄는 대화를 하면서 사람을 끌어내는 평상시의 버릇을 따르지 않아서 가니드는 놀랐다. 어째서 선생이 이 이방인에게 조금도 흥미를 나타내지 않는가 가니드가 물었을 때, 예수는 대답했다:

132:7.2 (1466.2) “가니드야, 그 사람은 진리에 갈급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불만이 없었느니라. 도움을 요청할 준비가 되지 않았고, 마음의 눈은 혼을 위하여 빛을 받으려고 열려 있지 않았는지라. 그 사람은 구원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준비가 되지 않았도다. 인생의 시련과 곤경으로 인하여 지혜와 상급의 배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려면 그에게 시간을 더 주어야 하느니라. 그렇지 않고 우리와 함께 살도록 만들 수 있다면, 우리의 생활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그에게 보여줄 수도 있고,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우리의 삶에 무척 이끌려서 어쩔 수 없이, 우리 아버지에 대하여 묻게 되리라.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을 드러낼 수 없느니라. 마음에 내켜 하지 않는 사람을 구원의 기쁨으로 이끌 수 없도다. 사는 체험의 결과로서 사람이 진리에 갈급해야 하느니라.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러한 동료 필사자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수단으로서 활동할 수 있기 전에, 신성한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의 생활과 접촉한 결과로 그가 하나님을 알고 싶어해야 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땅에서 우리가 정말로 할 일은 생활 속에서 아버지가 드러나도록 사는 것이라. 하나님을 찾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아버지를 보고서 우리 생활 속에서 이 방법으로 표현하는 하나님에 관하여 더 많이 알려고 우리에게 도움을 부탁하리라.”

132:7.3 (1466.3) 스위스를 방문하는 길에, 산 속에서, 예수는 하루 종일 불교에 대하여 그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이야기했다. 여러 번 가니드는 예수에게 부다에 대하여 직접 물은 적이 있었지만 언제나 다소 분명치 않은 대답을 받았다. 이제, 아들 앞에서, 아버지는 부다에 관해 솔직하게 물었고 솔직한 대답을 얻었다. 고노드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부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로 알고 싶소이다.”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132:7.4 (1466.4) “당신이 아는 부다는 불교보다 훨씬 나았소이다. 부다는 위대한 사람이었고 그 민족에게 선지자이기도 했지만 고아 선지자였소이다. 그 말은 정말로 영적 아버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일찍부터 눈에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외다. 그의 체험은 비극이었소이다. 하나님의 사자로서 살고 가르치려고 애썼지만, 하나님 없이 그렇게 하였소이다. 부다는 안전한 항구 바로 앞까지, 사람을 구원하는 피난처 입구(入口) 바로 앞까지 구원의 배를 안내하였고 거기서 잘못된 해도(海圖) 때문에, 좋은 배가 땅으로 올라가 버렸소이다. 거기서 배는 이 여러 세대 동안, 움직이지 않고 거의 희망 없이 버려졌소이다. 그 배 위에 당신의 민족 중에 많은 사람이 여태까지 남아 있었소이다. 쉴 수 있는 안전한 바다에서 소리쳐 부를 만큼 가까이 살지만, 선한 부다의 귀중한 배가 항구 바로 바깥에서 좌초하는 불행을 만났기 때문에 저희는 항구로 들어가려 하지 않소이다. 불교를 믿는 민족들은 그 선지자가 만든 철학의 배를 버리고 그의 고귀한 정신을 붙잡지 않으면 이 항구에 결코 들어가지 못하리이다. 당신의 민족이 부다의 정신에 충실한 채로 있었다면, 당신은 영적 평온, 혼의 휴식, 구원의 확신이 있는 피난처로 들어간 지 오래 되었으리이다.

132:7.5 (1467.1) “보시오, 고노드씨여, 부다는 영적으로 하나님을 알았지만, 머리로 하나님을 뚜렷하게 깨닫지 못했소이다. 유대인은 머리로 하나님을 깨달았지만 크게 보아서 영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소이다. 오늘날, 불교도는 하나님 없는 철학 속에서 발버둥치고, 한편 내 민족은 생명과 자유의 철학, 유익한 철학(哲學)이 없이, 불쌍하게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노예가 되었소이다. 당신들은 하나님 없는 철학을 가졌고, 유대인은 하나님을 가졌지만 그와 관련된 생활 철학이, 크게 보아서 없소이다. 하나님이 영이고 아버지인 것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종교가 한 민족을 변화시키고 한 나라를 높이기 위해서 가져야 할 도덕적 에너지와 영적 추진력을 부다는 그의 가르침 속에서 마련하지 못했소이다.”

132:7.6 (1467.2) 그때 가니드가 외쳤다: “선생이여, 당신과 내가 새 종교를, 인도를 위해서 충분히 좋고 로마를 위해서 충분히 큰 종교를 만듭시다. 아마도 우리가 유대인에게 그 종교를 야웨와 바꿀 수 있으리이다.” 예수는 대답했다. “가니드야, 종교는 만들어지지 않느니라. 사람의 종교는 오랜 세월 동안 성장하며, 한편 하나님을 동료에게 드러내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땅에 번쩍 나타나느니라.” 그러나 그들은 이 예언하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알아듣지 못했다.

132:7.7 (1467.3) 그날 밤, 그들이 잠자리에 들어간 뒤에, 가니드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버지와 함께 오랫동안 이야기했고, 마침내 말했다, “아세요, 아버지, 나는 때때로 요수아가 선지자라고 생각하나이다.” 아버지는 잠이 오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아들아, 다른 이도 있느니라―”

132:7.8 (1467.4) 이날부터 남은 수명이 다하기까지, 가니드는 자신의 종교를 계속 발전시켰다. 머리 속에서 그는 예수의 넓은 마음, 공평하고 관대함에 힘차게 감동을 받았다. 철학과 종교에 관하여 그들이 무슨 토론을 하더라도 이 소년은 결코 분개하는 느낌이나 적대하는 반응을 체험하지 않았다.

132:7.9 (1467.5) 천상(天上)의 지적 존재들이 얼마나 대단한 장면을 바라보는가. 인도인 소년이 한 우주의 창조자에게 새 종교를 만들자고 제안하는 이 광경을! 비록 그 젊은이는 알지 못했어도, 바로 그때 거기서 새롭고 영구한 종교―구원의 길, 예수를 통하여, 예수 안에서, 사람에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이 새 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 소년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가 가장 하고 싶었던 바로 그 일을 실제로 하고 있었다. 지난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늘 이와 같다. 영적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받고서, 깨우치고 숙고하는 인간이 상상하여 마음을 다하여 사심 없이 하고 싶은 바로 그 일, 그리고 되고 싶은 바로 그 목표는 아버지의 뜻을 신성하게 행하려는 필사자가 헌신하는 정도에 따라서, 눈에 뜨일 정도로 창조력을 가지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 대단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또 일어난다.

제 133 편 로마에서 돌아오는 여행

유란시아서

제 133 편

로마에서 돌아오는 여행

133:0.1 (1468.1) 로마를 떠나려고 준비할 때 예수는 친구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 다마스커스 서기관은 예고 없이 로마에 나타났고, 같은 방법으로 사라졌다. 만 1년이 지나서야 그를 알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다시 그를 만날 희망을 버렸다. 둘째 해가 저물기 전에, 그를 알던 사람들의 작은 무리가 그의 가르침에 공통으로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와 더불어 즐거운 시간을 가졌던 서로의 기억을 통해서 함께 이끌림을 발견하였다. 금욕주의파, 견유학파, 신비 종파로 이루어진 이 작은 집단은 기독교의 첫 전도자들이 로마에 나타나기 바로 전까지, 불규칙하게 이 비공식 회의를 계속 열었다.

133:0.2 (1468.2) 고노드와 가니드는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에서 물건을 무척 많이 샀기 때문에 소유한 재산을 모두 타렌툼까지 짐 꾸러미 행렬 편으로 미리 보냈고, 한편 세 나그네는 이름난 아피아 길로 이탈리아를 가로질러서 한가히 걸었다. 이 여행에서 그들은 온갖 종류의 인간들과 마주쳤다. 고귀한 로마 시민과 그리스 거류민이 숱하게 이 길을 따라서 살았지만, 이미 열등한 노예들의 자손이 큰 무리를 지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133:0.3 (1468.3) 타렌툼까지 가는 중간쯤에서 어느 날 점심을 먹으면서 쉬는 동안, 가니드는 예수가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솔직하게 물었다. 예수는 말했다: “비록 인간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서로 여러 면에서 다르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또 영적 세계에서 모든 필사자는 똑같은 자리에 서 있느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오직 두 무리의 필사자가 있을 뿐이니, 그의 뜻을 행하기를 바라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이라. 우주가 사람 사는 세계를 바라볼 때, 우주는 마찬가지로 두 큰 계급을 인식하나니, 하나님을 아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이라.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자는 어느 주어진 영역의 동물과 함께 간주되느니라. 인류는 다른 자격에 따라서, 신체ㆍ정신ㆍ사회ㆍ직업, 또는 도덕 면에서 저희를 보는 대로 여러 계급으로 적절히 분류될 수 있지만, 이 다른 등급의 필사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석 앞에 나타날 때 똑같은 자리에 서느니라. 하나님은 참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니라. 비록 너는 지식ㆍ사회ㆍ도덕 문제에서 차별 되는 인간의 능력과 자질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더라도, 하나님이 계신 앞에서 예배하려고 모였을 때 사람의 영적 모임에서 전혀 그러한 차별을 해서는 안 되느니라.”

1. 자비와 응보

133:1.1 (1468.4) 타렌툼에 가까이 갔을 때 길가에서 어느 날 오후에 아주 흥미 있는 사건이 일어났다. 거칠고 약자를 괴롭히는 한 소년이 더 어린 소년을 사정없이 때리는 것을 보았다. 예수는 얻어맞는 소년을 서둘러 도왔고 그 아이를 구조했을 때, 어린 소년이 달아날 때까지 때리던 소년을 단단히 붙들었다. 예수가 작은 깡패를 놓아준 순간 가니드는 소년에게 달려들어 흠씬 두들겨 패기 시작했고 가니드는 예수가 재빨리 간섭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그가 가니드를 제지하고 놀란 소년이 달아나게 만든 뒤에, 젊은이는 숨을 돌리자마자 흥분해서 소리쳤다: “선생이여,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나이다. 자비로운 마음이 그 어린 소년을 구하라고 요구한다면, 응보는 몸집이 더 큰, 폭행하는 젊은이를 벌주라고 요구하지 않나이까?” 예수는 대답하여 말했다:

133:1.2 (1469.1) “가니드야, 네가 알아듣지 못하는 게 참말이라. 자비를 베푸는 것은 반드시 개인의 일이지만, 응보로 벌을 내리는 것은 사회나 정부나 우주 행정 집단의 기능이라. 한 개인으로서 나는 자비를 보여야 하느니라. 나는 얻어맞는 소년을 구하러 가야 하고 때리는 자를 말리려고 충분한 힘을 써도 전혀 모순이 없느니라. 바로 그것이 내가 한 일이라. 나는 얻어맞는 소년을 구했고 그것이 자비를 베푸는 목적이었느니라. 그리고 나서 싸움에서 약한 쪽이 달아나게 할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폭행자를 강제로 붙들어두었고 그 뒤에 그 일에서 물러났노라. 더 나아가서 폭행자를 심판하고 그렇게 그의 동기를 판단하려고―동료를 때리게 만든 모든 것을 심의하려고―하지 않았고, 다음에 또 그의 악행에 대하여 공정한 벌이라 내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벌을 집행하려 들지도 않았느니라. 가니드야, 자비는 아낌없이 베풀어도 좋지만 응보는 정밀한 것이라. 무슨 벌이 응보의 요구 사항을 만족시키는가에 대하여 어떤 두 사람도 찬성할 것 같지 않음을 깨달을 수 없느냐? 한 사람은 40번이나 채찍질을 내리고 싶어 하고, 한 사람은 스무 번, 또 다른 사람은 독방에 가두는 것이 정당한 벌이라 조언하리라. 이 세상에서 그러한 책임은 집단에게 맡겨지거나 그 집단이 선택한 대표자들이 이행하는 것이 더 좋음을 너는 헤아릴 수 없느냐? 우주에서 심판은 동기뿐 아니라 모든 잘못 이전에 생긴 일을 십분 아는 자들에게 맡겨지느니라. 문명화된 사회에서, 그리고 조직된 우주에서, 응보의 시행은 공평한 재판을 연 결과로 공정한 선고를 내리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러한 특권은 여러 세계의 재판하는 집단과 모든 창조의 상급 우주들을 다스리는 전지(全知)한 행정가들에게 맡겨지느니라.”

133:1.3 (1469.2) 그들은 여러 날 동안 자비를 보이고 응보를 시행하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가니드는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 어째서 예수가 몸싸움에 말려들려고 하지 않는가 이해했다. 그러나 가니드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 물었고 결코 충분히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지 못했다. 그 질문은 이러했다: “그러나 선생이여, 더 힘세고 성질 나쁜 사람이 당신을 공격하고 죽이려고 위협한다면, 당신은 어찌하겠나이까? 자신을 방어하려고 아무 노력을 하지 않겠나이까?” 구경하고 있는 우주에게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사랑을 모범으로 보이려고 그(예수)가 땅에서 살고 있다고, 가니드에게 밝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는 비록 소년의 물음에 충분하고 만족스럽게 대답할 수 없었지만, 이만큼 말했다:

133:1.4 (1469.3) “가니드야, 이 문제들 가운데 더러는 너를 얼마나 어리둥절하게 만드는지 내가 잘 알 수 있고 네 물음에 답하려고 애써 보겠노라. 첫째로, 내 몸이 무슨 공격을 받더라도 나는 공격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육체를 입은 내 형제―인가 아닌가 결정하고, 그러한 사람이 도덕적 판단과 영적 분별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공격한 자에게 무슨 결과가 생기든지, 서슴지 않고 저항하는 힘이 자라는 데까지 나를 방어하리라. 그러나 자기 방어의 경우에도, 나는 아들 지위를 가진 동료 인간에게 그렇게 폭력을 쓰지 아니하리라. 다시 말해서, 나에게 폭력을 썼다고 해서 재판도 받기 전에 미리 그를 벌 주지 아니하리라. 모든 가능한 술책을 동원하여 그런 공격을 미리 막고 공격하지 않도록 설득하며, 그만두게 하지 못할 경우에는 완화시키려고 애쓰리라. 가니드야, 내 하늘 아버지가 넘치게 돌보심을 나는 절대로 확신하노라. 나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몸을 바쳤노라. 나는 진정한 해악이 나에게 쏟아질 수 있다고 믿지 않고, 적들이 나에게 무슨 해를 끼치고 싶어 하더라도 그 때문에 일생의 일이 정말로 위태롭게 될 수 있다고 믿지 않으며, 분명히 친구들의 폭력을 두려워할 필요는 전혀 없느니라. 나는 우주 전체가 나에게 친절하다는 것을 절대로 확신하노라―겉모습이 모두 반대로 보인다 하더라도 진심으로 확신을 가지고 나는 이 전능한 진리를 믿기를 주장하노라.”

133:1.5 (1470.1) 그러나 가니드는 완전히 만족해하지 않았다. 여러 번 이 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수는 어린 시절의 체험을 얼마큼, 또한 석공의 아들 야곱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어떻게 야곱이 예수를 방어하는 일을 스스로 맡았는가 듣고 나서 가니드는 말했다: “아하, 비로소 알겠나이다! 첫째로, 어떤 멀쩡한 사람도 당신처럼 그렇게 친절한 사람을 공격하고 싶어 하는 일은 극히 드물고, 생각이 아주 모자라서 누가 그런 일을 하더라도,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면 당신이 언제나 구조하러 가는 것 같이 당신을 도우려고 급히 달려올 어떤 다른 사람이 가까이 있을 것이 아주 확실하나이다. 마음 속으로, 선생이여 나는 찬성하나이다. 그러나 머리 속에는 아직도, 내가 야곱이었더라면, 단지 당신이 자신을 방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당신을 주제넘게 공격하는 버릇없는 친구들을 즐겁게 벌 주었으리라 생각하나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돕고 곤경에 빠진 동료들을 보살피는 데 시간을 많이 쓰시므로, 일생을 통하여 걷는 나그네 길에 당신은 꽤 안전하다 짐작하나이다―참, 언제나 당신을 방어할 누군가가 가까이 있을 것 같사옵나이다.” 예수는 대답하였다: “그 시험은 아직까지 오지 않았느니라, 가니드야. 시험이 다가올 때,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지켜야 하리라.” 자기 방어와 무저항을 다루는 이 어려운 주제에 대하여 소년은 선생에게서 더 말씀을 들을 수 없었다. 또 다른 기회에 그는 예수에게서, 조직된 사회는 자체의 정당한 명령을 집행하는 데 무력(武力)을 사용할 모든 권한이 있다는 의견을 유도해 냈다.

2. 타렌툼에서 배를 타다

133:2.1 (1470.2) 배가 상륙하는 지역에서 머무르며 배가 짐 내리기를 기다리면서 그 나그네들은 자기 아내를 학대하는 어떤 사람을 보았다. 버릇대로 예수는 얻어맞는 사람을 위해서 간섭했다. 성난 남편 뒤에 걸어가서,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툭툭 두드리고 말했다: “친구여, 잠깐 따로 이야기해도 좋으냐?” 성난 사람은 그런 접근에 어리둥절했고 부끄럽게 망설이던 한 순간이 지나자 더듬거렸다―“어― 어째서요― 좋소이다, 나한테서 무엇을 원하시나이까?” 예수가 그를 한쪽으로 이끌고 가서 말했다: “친구여, 보아하니 무언가 끔찍한 일이 너에게 일어났음이 틀림없도다. 내가 무척 바라노니, 그렇게 힘센 남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서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를, 그것도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바로 여기 바깥에서 때리게 만들 수 있는가 내게 이르라. 내가 확신하건대, 이렇게 때리는 어떤 마땅한 이유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 틀림없도다. 남편에게 그러한 대접을 받아 마땅할 만큼 아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를 바라보니, 생각하건대, 네 얼굴에 자비를 베풀 소망은 아니라도 정의를 사랑하는 빛이 있는 것을 헤아리노라. 감히 말하노니, 길 옆에서 내가 강도들에게 공격받은 것을 발견했다면 네가 나를 구하려고 서슴지 않고 달려왔으리라. 감히 말하노니, 네 일생을 살면서 그런 용감한 일을 많이 했으리라. 이제, 친구여, 무슨 일인가 내게 이르라. 여인이 무슨 잘못을 했느냐, 아니면 어리석게 정신을 잃고 생각 없이 아내를 때렸느냐?” 이 사람의 가슴을 움직인 것은 말씀이 아니라 예수가 말을 마쳤을 때 그를 내려다 본 친절한 모습과 인자한 웃음이었다. 그 사람은 말했다: “당신이 견유학파의 사제인 줄 깨닫나이다. 당신이 나를 말리셨사오니 고맙소이다. 내 아내는 아무런 큰 잘못이 없고 아내는 착한 여자이나이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헐뜯는 태도로 나의 성미를 돋우어, 내가 침착을 잃게 되나이다. 삼가지 못하여 죄송하나이다. 약속하오니, 여러 해 전에 더 나은 길을 가르쳐 준 당신의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예전에 서약한 것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애쓰리이다. 약속하나이다.”

133:2.2 (1471.1) 그리고 나서, 작별을 알리면서 예수는 말했다: “여보게, 여자가 기꺼이 자원해서 그러한 권한을 주지 않으면 남자는 여자에게 아무런 정당한 권한이 없음을 늘 기억하라. 네 아내는 함께 일생을 지내고, 네가 투쟁하도록 도우며,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짐을 너보다 훨씬 무겁게 지고 있느니라. 이렇게 특별히 봉사한 대가로, 아이들을 잉태하고 낳고 길러야 하는 동반자로서, 남자가 여자에게 줄 수 있는 특별한 보호를 너에게서 받아야 가까스로 공평할 따름이라. 기꺼이 아내와 자식들을 사랑으로 보살피고 배려하는 것은 남자가 상급 수준의 창조적ㆍ영적 자의식에 도달한 것을 재는 척도이라. 자라서 불멸의 혼 잠재성을 소유할 존재들을 만들려고 협동한다는 의미에서,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과 동업자인 줄 모르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주에 있는 자녀들의 영 어머니를 자신과 동등한 이로서 대우하느니라. 아이들의 생명 속에서 자식 낳는 신성한 체험을 충분히 너와 함께 하는 어머니 동업자와 동등한 조건으로, 네 일생과 그에 관계된 모든 것을 함께 하는 것이 하나님다우니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듯, 네가 아이들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무한한 영, 광대한 우주의 모든 영 자식의 어머니에게 영예를 돌리고 그를 높이는 것 같이, 너는 아내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리라.”

133:2.3 (1471.2) 배에 올랐을 때 그들은 눈물을 글썽이는 부부가 말없이 부둥켜안고 서 있는 장면을 되돌아보았다. 예수가 그 사람에게 준 말씀의 후반(後半)을 귀담아들었기 때문에, 고노드는 하루 종일 그에 대한 명상에 잠겼고 인도로 돌아갔을 때 가정을 개혁하기로 결심하였다.

133:2.4 (1471.3) 니코폴리스로 가는 여행은 즐거웠지만, 바람이 유리하게 불지 않아서 느렸다. 세 사람은 로마에서 체험한 것을 여러 시간 동안 낱낱이 이야기하고, 예루살렘에서 처음 만난 뒤로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회상하였다. 가니드는 몸소 봉사하는 정신에 젖게 되었다. 그는 배에서 접대하는 일을 시작했지만, 둘째 날에 종교적으로 깊은 문제에 빠졌을 때 요수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33:2.5 (1471.4) 그들은 니코폴리스에서 며칠을 보냈다. 이 도시는 아우구스투스가 악티움 전투를 기념하여 “승리의 도시”로 50여 년 전에 세웠고, 악티움은 전투하기 전에 자신의 군대와 함께 텐트를 쳤던 땅이었다. 그들은 어느 예라미라는 사람의 집에서 묵었다. 그는 유대 신앙으로 개종한 그리스인이었는데 갑판에서 그를 만났다. 사도 바울은 세 번째 선교 여행 과정에서 바로 그 집에서 예라미의 아들과 겨울 내내 지냈다. 니코폴리스로부터, 그들은 같은 배로 고린도를 향하여 돛을 달았는데, 여기는 로마의 아카이아 지방의 서울이었다.

3. 고린도에서

133:3.1 (1471.5) 고린도에 다다를 때가 되자 가니드는 유대 종교에 무척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어느 날 회당을 지나칠 때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 예수에게 예배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그날 그들은 학식 있는 어느 랍비가 “이스라엘의 운명”에 관하여 강론하는 것을 들었다. 예배가 끝난 뒤에 그들은 어떤 그리스보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이 회당에서 주 회당장이었다. 여러번 그들은 예배하러 회당에 돌아갔지만, 주로 그리스보를 만나려는 것이었다. 가니드는 그리스보와 그 아내, 그리고 아이들이 다섯인 그 가족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어떻게 유대인이 가족 생활을 하는가 지켜보는 것을 무척 기뻐했다.

133:3.2 (1472.1) 가니드가 가족 생활을 연구하는 동안, 예수는 상급의 종교 생활을 그리스보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예수는 진취적인 이 유대인과 스무 번이 넘게 회담을 가졌다. 여러 해 뒤에 바울은 바로 이 회당에서 설교하고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그가 전하는 말씀을 물리치고 회당에서 그가 더 설교하지 못하게 투표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가 이방인에게 갔을 때, 그리스보는 가족 전부와 함께 새 종교를 받아들였고 바울이 나중에 고린도에서 조직한 기독교 교회에서 주요한 지지자 중에 하나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33:3.3 (1472.2) 바울은 고린도에서 18개월 동안 전도했고 나중에 실라스와 디모데가 함께 하였다. 이 전도 기간에 바울은 “어느 인도인 상인 아들의 유대인 가정 교사”에게 가르침을 받은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133:3.4 (1472.3) 고린도에서 그들은 세 대륙에서 온 모든 종족의 사람들을 만났다. 알렉산드리아와 로마 다음으로 고린도는 지중해 제국에서 가장 국제적인 도시였다. 이 도시에는 사람의 눈을 끄는 것이 많이 있었다. 가니드는 요새를 방문하는 데 지칠 줄 몰랐고, 이것은 바다에서 거의 600미터나 솟아 있었다. 또한 여가 중 상당히 많은 시간을 회당 근처에서, 그리고 그리스보의 집에서 보냈다. 그는 처음에 유대인 가정에서 여자가 누리는 지위에 대하여 충격을 받았고 나중에는 매력을 느꼈다. 이 젊은 인도인에게는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133:3.5 (1472.4) 예수와 가니드는 또 다른 유대인, 유스도의 집에서 가끔 손님이 되었다. 그는 회당 옆에서 살던 경건한 상인이었다. 후일에 여러 번, 사도 바울이 이 집에 머물렀을 때, 인도인 젊은이와 유대인 가정 교사가 이렇게 방문한 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한편 바울과 유스도는 그렇게 지혜롭고 놀라운 히브리인 선생이 어떻게 되었는가 궁금해하였다.

133:3.6 (1472.5) 로마에 있을 때, 가니드는 예수가 공동 목욕탕으로 따라가려 하지 않는 것을 관찰하였다. 몇 번이나 나중에 그 젊은이는 남녀의 관계에 관하여 예수가 의견을 더 말하도록 유인하려고 애썼다. 젊은이의 물음에 대답하려고 했어도 그는 결코 이 주제를 길게 논하고 싶어 하지 않는 듯했다. 어느 날 저녁, 고린도에서 요새의 담이 바다로 이어지는 곳 가까이서 걷고 있을 때, 두 매춘부가 인사를 건네었다. 가니드는 예수가 높은 이상을 가진 사람이요, 더러운 티가 나거나 악한 느낌이 나는 것을 모두 싫어한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고 그는 또한 옳았다. 따라서 그는 이 여자들에게 독하게 쏘아붙였고, 무례하게 손짓해서 보냈다. 이것을 보자 예수는 가니드에게 일렀다: “너는 좋은 의도를 가졌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 비록 어쩌다가 저희가 잘못하는 자녀일지라도, 그렇게 주제넘게 말해서는 안 되느니라.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 여자들을 판단하느냐? 생계를 잇는 그러한 방법에 의존하도록 이끈 모든 상황을 혹시 아느냐? 우리가 이 문제들을 논하는 동안에 나와 함께 멈추라.” 그 말씀에 창부들은 가니드보다 더욱 놀랐다.

133:3.7 (1472.6) 그들이 그곳에 달빛 아래에 서 있는 동안 예수는 말씀을 이었다: “모든 인간 정신 안에 신다운 영이 살고 있으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선물이라. 이 착한 영은 늘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고,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내고 하나님을 알도록 도우려고 애쓰느니라. 그러나 필사자 안에는 또한 자연스러운 육체적 성향이 많이 있고, 이것을 창조자는 개인과 종족의 복지에 쓰이도록 집어넣었느니라. 자, 때때로, 남자와 여자는 자신들을 이해하려고, 그리고 대체로 이기심과 죄에 지배된 세상에서 생계를 잇는 다양한 어려움을 이기려고 노력하면서 헛갈리게 되느니라. 가니드야, 보아하니 이 여자들 가운데 아무도 의도하여 악하지 않으니라. 얼굴을 보아하니, 저희가 많은 슬픔을 겪었음을 알 수 있도다. 잔인한 운명의 손에 저희가 많이 고생한 듯하고, 의도하여 이 종류의 생활을 택하지 않았느니라. 거의 절망에 빠져 낙심하는 가운데 저희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굴복하였고, 희망 없어 보이는 상황을 벗어나는 최선의 길로서, 생계를 잇는 이 불쾌한 수단을 받아들였느니라. 가니드야,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정말로 사악하며 못된 일을 일부러 선택하느니라. 그러나 내게 이르라, 지금 눈물로 얼룩진 이 얼굴을 들여다볼 때, 너는 나쁘거나 사악한 무엇이 보이느냐?” 예수가 대답을 들으려고 멈추자, 가니드는 더듬어 대답하며 목이 메었다: “아니, 선생이여, 보이지 않나이다. 저희에게 내가 무례했던 것을 사과하나이다―나는 저희의 용서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저희를 용서했음을 내가 아버지 대신 말하는 것 같이, 저희가 너를 용서한 것을 저희를 대신하여 말하노라. 이제 모두 나와 함께 한 친구의 집으로 가자. 거기서 마실 것을 들면서 새롭고 더 좋은 앞날의 생활을 위하여 계획하리라.” 이때까지 깜짝 놀란 여인들은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서로를 바라보고, 남자들이 길을 이끄는 대로 조용히 따라갔다.

133:3.8 (1473.1) 이 늦은 시간에 예수가 가니드와 낯선 두 사람을 데리고 나타났을 때 유스도의 아내가 얼마나 놀랐을까 상상해 보라. 예수는 말했다: “이 시간에 우리가 온 것을 네가 용서하겠지만, 가니드와 나는 조금 먹고 싶고, 새로 발견한 이 친구들과 더불어 나누어 먹고자 하니, 이들도 또한 영양이 필요하니라. 이 모든 것 외에도 우리가 온 것은 이 여인들이 인생을 새로 출발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무엇이 최선인가 함께 의논하는 데 네가 관심을 가지리라 생각하였음이라. 저희는 사정 이야기를 해줄 수 있으나, 추측컨대 저희는 많은 곤경을 겪었고, 여기 이 집에 와 있는 바로 그 사실이 저희가 선한 사람들을 얼마나 진지하게 알고 싶어 하는가, 그리고 온 세계에―하늘의 천사들에게도―저희가 어떤 용감하고 고귀한 여자가 될 수 있는가 보여줄 기회를 얼마나 잡고 싶어 하는가 증언하느니라.”

133:3.9 (1473.2) 유스도의 아내, 마르다가 음식을 식탁 위에 펼쳐 놓았을 때, 예수는 뜻밖에 떠나면서 말했다: “때가 늦었고, 젊은이의 아버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너희―세 여인―최고자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함께 여기 두고 떠남을 용서하기 바라노라. 땅에서 새롭고 더 좋은 생활을 하고 다음의 큰 세상에서 영생할 것을 계획하는 동안 너희가 영적 안내를 받도록 기도하리라.”

133:3.10 (1473.3) 이렇게 예수와 가니드는 여인들을 떠났다. 이제까지 두 창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가니드도 말이 없었다. 몇 순간 동안 마르다도 그랬지만, 당장에 그 형편에 대처했고 이 낯선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가 희망했던 대로 모두 처리하였다. 둘 중에 나이 든 여인은 그 뒤에 얼마 있다가 영생을 얻으리라는 밝은 희망을 가지고 죽었고, 나이 어린 여자는 유스도의 사업 장소에서 일하다가, 후일에 고린도의 첫 기독교 교회에서 평생 회원이 되었다.

133:3.11 (1473.4) 그리스보의 집에서 예수와 가니드는 어느 가이우스라는 사람을 몇 번 만났는데, 그는 나중에 바울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들은 고린도에서 이 두 달 동안에 몇십 명의 쓸 만한 사람들과 밀접한 이야기를 가졌다. 우연으로 보이는 이 모든 접촉의 결과로 이렇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의 과반수가 나중에 기독교 공동체의 회원이 되었다.

133:3.12 (1473.5) 처음에 고린도에 갔을 때, 바울은 오랫동안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 가정 교사가 그가 수고하도록 얼마나 길을 잘 예비했는지 알지 못했다. 게다가, 바울은 아퀼라와 프리실라가 이미 큰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아퀼라는 로마에 있을 때 예수가 접촉하게 된 견유학파의 한 사람이었다. 이 부부는 로마에서 온 유대인 피난민이었고 재빨리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바울은 그들과 함께 살고 일했는데, 그들이 또한 천막 만드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편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에서 체류를 연장하였다.

4. 고린도에서 개인적으로 한 일

133:4.1 (1474.1) 예수와 가니드는 고린도에서 흥미 있는 체험을 더 많이 겪었다. 큰 무리의 사람들과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들은 예수로부터 받은 가르침으로 인하여 큰 소득을 얻었다.

133:4.2 (1474.2) 신다운 인생에서 어려운 것들을 동료 인간들 가운데 약하고 힘없는 사람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생활 체험의 방아에서 진리의 알곡을 가루로 만드는 것에 관하여 그는 방앗간 주인에게 가르쳤다. 예수는 말했다: “영적(靈的) 깨달음이 젖먹이 수준에 있는 자에게 진리의 젖을 주라. 생생하게 사랑으로 봉사를 베풀면서, 네게 묻는 자 하나하나의 받아들이는 능력에 맞게 영적 음식을 먹음직스럽게 준비하여라.”

133:4.3 (1474.3) 로마의 백부장에게 말했다: “케자의 것은 케자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리라. 신이 홀로 주장할 수 있는 존경을 케자가 주제넘게 가로채지 않는 한, 하나님께 성실히 봉사하는 것과 케자를 충실히 섬기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느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충성은 네가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자격 있는 황제에게 헌신하는 데 너를 더욱 충성스럽고 충실한 사람으로 만들리라.”

133:4.4 (1474.4) 미트라 종파의 성실한 지도자에게 말했다: “영원한 구원이 있는 종교를 찾으니 너는 잘 하는구나. 하지만 사람이 만든 신비와 인간의 철학 가운데서 그러한 영화로운 진리를 찾으러 다니는 것은 잘못이라. 영원한 구원의 신비(神秘)는 바로 너의 혼 안에 거함을 알지 못하느냐? 하늘의 하나님은 그의 영을 네 안에 살라고 보내셨고, 이 영은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께 봉사하는 모든 사람을 이 생명으로부터 죽음의 입구를 거쳐서, 하나님이 자녀들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영원한 빛의 나라까지 인도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 결코 잊지 말라. 하나님을 아는 너희는 그와 같이 되기를 참으로 동경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133:4.5 (1474.5) 쾌락주의파의 선생에게 말했다: “너는 최선을 고르고 좋은 것을 존중하니 잘 하는구나. 그러나 인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깨달음으로 얻은, 영 분야에 담겨 있는 것, 필사자의 일생에서 더 중요한 것들을 헤아리지 못하니 너는 지혜가 있느냐? 인간의 모든 체험 속에서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깨달음이요, 그의 영은 네 안에 살면서, 우리 모두의 아버지, 모든 세상의 하나님, 우주들의 주(主)가 몸소 계신 앞에 이르는 길, 길고도 거의 끝없는 나그네 길에서, 너를 인도하고자 하느니라.”

133:4.6 (1474.6) 청부업자요 건축가인 그리스인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친구여, 사람들의 물질 건물을 짓는 동안, 네 혼 안에 신성한 영의 모습을 좇아서 영적 인품을 기르라. 하늘나라의 영적 아들로서 세울 업적이 이 세상에서 건축가로서 세우는 업적보다 뒤지지 않게 하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이 시대의 저택을 짓는 동안, 바로 너를 위하여 영원한 저택에서 살 권리 얻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 의로움과 진리에 기초를 두고 하나님이 건축하고 지으신 한 도시가 있음을 늘 기억하라.”

133:4.7 (1474.7) 로마인 재판관에게 말했다: “네가 사람들을 재판하는 것 같이, 바로 네가 언젠가 우주 통치자들의 법정 앞에 재판받으러 올 것을 기억하라. 네가 언젠가 이렇게 최상 중재자의 손에서 자비로운 배려를 몹시 바라리니, 올바르게, 아니 자비롭게 판단하라. 쓰인 글자 그대로만 아니라 이렇게 법률 정신에 안내를 받아, 비슷한 형편에서 네가 재판받고 싶은 대로 재판하라. 네 앞에 끌려 온 사람들의 필요에 비추어 네가 공평한 정신으로 응보를 내리는 것 같이, 언젠가 온 땅의 재판관 앞에 설 때, 너는 자비로 완화된 응보를 기대할 권리가 있으리라.”

133:4.8 (1475.1) 그리스 여인숙의 안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최고자의 자녀들을 대접하는 자로서 친절을 베풀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살려고 내려온 영이 깃드는 사람들 안에 계신 하나님께 네가 봉사함을 더욱 깨닫고서, 날마다 하는 너의 고된 일을 예술의 높은 경지까지 올리라. 이로서 저희의 정신을 변화시키고 혼을 인도하여, 이 모든 선물, 신성한 영을 주신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알게 하라.”

133:4.9 (1475.2) 예수는 어느 중국 상인(商人)과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별 인사를 하면서, 예수는 훈계하였다: “오직 하나님을 예배할지니, 그는 참된 영 조상이라. 아버지의 영이 네 안에 늘 살고, 언제나 네 혼의 방향을 하늘 쪽으로 가리킴을 기억하라. 의식하지 않아도 네가 이 불멸하는 영의 인도하심을 따르면, 하나님을 발견하는 높은 길을 네가 계속 가는 것이 분명하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다다르는 것은 그를 찾으려 함으로 네가 점점 더 그를 닮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자 장씨여, 잘 가거라. 하지만 오직 잠시 동안이니, 영혼의 아버지가 파라다이스를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즐거운 정거장을 많이 마련해 놓은 빛의 세계들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것임이라.”

133:4.10 (1475.3) 브리튼에서 온 나그네에게 말했다: “형제여, 내가 보아하니, 너는 진리를 찾고 있고, 모든 진리의 아버지 영이 어쩌면 네 안에 거할지 모른다고 나는 제시하노라. 자기 혼 안에 계신 영과 이야기하려고 너는 언제라도 진지하게 애썼느냐? 그러한 일은 정말로 어렵고, 성공했다고 의식하는 일이 드무니라. 모든 그러한 멋진 인간 체험의 대다수가 하나님을 아는 그러한 필사자의 혼 속에, 상의식(上意識)에 기록되어 오래 남아 있어야 하느니라, 그렇다 하여도 물질 정신이 그에게 깃드는 영과 교통하려는 정직한 시도는 모두 분명히 성공하느니라.”

133:4.11 (1475.4) 집을 뛰쳐나온 소년에게 예수는 일렀다: “하나님과 바로 너―이 두 가지로부터 네가 달아날 수 없는 것을 기억하여라. 어디로 가든지, 너는 네 몸, 그리고 네 마음 속에서 사는 하늘 아버지의 영, 이 둘을 가지고 가느니라. 아이야, 자신을 속이는 일을 그만두어라. 정착하고서 인생의 사실을 직면하는 용감한 습관을 가져라. 내가 가르친 대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분명히 영생한다는 확신을 굳게 가지라. 오늘부터 계속, 진정한 대장부, 용감하고 총명하게 인생을 직면하려고 각오한 대장부가 될 뜻을 가지라.”

133:4.12 (1475.5) 그는 선고받은 죄수에게 마지막 시간에 말했다: “형제여, 너는 불운을 당하였구나. 길을 잃어버렸고 범죄의 그물 속에 걸려들었구나. 너와 말한 것으로 보아, 계획하고서 현세의 목숨을 바야흐로 잃게 만들 일을 하지 않은 줄 내가 잘 아노라. 그러나 너는 이 해악을 저질렀고, 동료들은 네가 죄 있다, 죽어야 한다고 판결하였구나. 너나 나나 국가가 선택하는 방법에 따라서, 국가가 자체를 방어할 이 권리를 부인해서는 안 되느니라. 네 잘못에 대한 벌을 인간적으로 피할 길이 전혀 없는 듯하구나. 동료들은 네가 저지른 죄에 따라서 너를 판단해야 하지만, 용서를 얻으려고 상소를 드려도 좋은 재판관이 있으니, 그는 너의 진정한 동기와 더 좋은 의도에 따라서 너를 판단하리라. 네가 진지하게 뉘우치고 성실하게 믿으면, 너는 하나님의 심판받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느니라. 너의 실수에 사람이 부과한 사형(死刑)의 벌이 따른다는 사실은, 하늘 법정 앞에서 네 혼이 응보를 받고 자비를 얻을 기회를 줄이지 않느니라.”

133:4.13 (1476.1) 예수는 큰 무리의 갈급한 사람들과 친밀한 이야기를 많이 가졌고, 이 기록에서 자리를 할애하기에는 너무나 많다. 세 나그네는 고린도에서 체류한 동안 즐겁게 지냈다. 교육 중심으로서 더 이름난 아테네를 제쳐놓고, 고린도는 이 로마 시대에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이 번성하는 상업 중심에서 두 달 동안 머무른 것은 세 사람 모두에게 값진 체험을 많이 얻을 기회를 주었다. 이 도시에서 묵은 것은 로마에서부터 돌아가는 길에 가장 흥미 있는 체류 중의 하나였다.

133:4.14 (1476.2) 고노드는 고린도에서 많은 사업이 있었지만, 마침내 사업을 마쳤고 아테네를 향하여 출범하려고 준비했다. 작은 배를 타고 여행했는데, 그 배는 고린도의 한 항구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항구로, 육지에 있는 길을 따라서 땅 위로 운반할 수 있었다.

5. 아테네에서―과학에 대한 말씀

133:5.1 (1476.3) 그들은 그리스의 과학과 배움의 옛 중심에 곧 다다랐고, 가니드는 아테네에, 그리스에 와 있다는 생각으로 기쁨에 떨었다. 그리스는 한때 알렉산더 제국의 문화 중심이었고 그 제국의 경계는 자기 나라 인도에까지도 뻗었다. 거래할 일이 거의 없어서 고노드는 대부분의 시간을 예수와 가니드와 함께 보냈고, 흥미 있는 여러 장소를 찾아보고 젊은이와 다능한 선생의 흥미 있는 토론에 귀를 기울였다.

133:5.2 (1476.4) 한 큰 대학이 아직도 아테네에서 번성하였고, 세 사람은 아테네에 있는 배움의 학당을 자주 방문했다. 알렉산드리아의 박물관에서 열렸던 여러 강의에 참석했을 때, 예수와 가니드는 플라톤의 가르침을 샅샅이 토론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의 예술을 즐겼고 그 예술의 표본을 아직도 여기저기 도시 근방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133:5.3 (1476.5) 아버지와 아들 모두가 어느 날 저녁에 여인숙에서 예수가 어느 그리스 철학자와 과학에 대하여 토론하는 것을 즐겁게 들었다. 이 학자가 거의 세 시간 동안 이야기한 뒤에, 강연을 마쳤을 때, 예수는 현대의 생각으로 보면, 이렇게 말했다:

133:5.4 (1476.6) 과학자는 언젠가 인력ㆍ빛ㆍ전기(電氣)가 에너지나 물력으로 명시되는 것을 측량할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이 과학자들은 결코 (과학적으로) 이 우주 현상이 무엇인가 말할 수 없다. 과학은 물리적 에너지 활동을 다루고, 종교는 영원한 가치를 다룬다. 참된 철학은 지혜로부터 생기며, 지혜는 이 양적ㆍ질적 관찰 결과를 서로 관련 지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순전히 자연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영적으로 눈이 먼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수학적 자만과 자기 중심의 통계만 믿는 병에 걸릴 위험이 언제나 존재한다.

133:5.5 (1476.7) 논리는 물질 세계에서 효력이 있고 수학은 물리적 사물에 국한되었을 때 믿을 만하다. 하지만 생활 문제에 적용되었을 때, 논리나 수학 중에 어느 것도 완전히 믿을 만하거나 절대로 확실하다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생명은 온전히 물질이 아닌 현상을 포함한다. 한 사람이 10분에 양 한 마리의 털을 깎는다면, 수학은 10 사람이 그 양털을 1분에 깎을 수 있다고 한다. 수학적으로 맞지만 참말이 아니니, 왜냐하면 10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로 아주 몹시 방해가 되어서 일은 크게 지연될 것이다.

133:5.6 (1477.1) 한 사람이 지적ㆍ도덕적 가치의 어떤 한 단위를 나타낸다면, 10 사람이 이 가치의 10배를 나타낼 것이라 수학은 주장한다. 그러나 인격자를 다룰 때, 그러한 인격의 결합은 단순한 산술 합계이기보다 등식(等式)에서 관련된 사람의 수를 제곱한 것과 같은 양이라 말하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조정되어 어느 정도 서로 조화된 인간들의 사회 집단은 그 부분들의 단순 합계보다 훨씬 더 큰 세력을 대표한다.

133:5.7 (1477.2) 수량은 하나의 사실로 확인될 수 있고 이처럼 과학적 균일성이 된다. 질(質)은 머리가 해석하는 물건이므로 가치의 어림 값을 대표하며, 따라서 개인의 체험으로 남아야 한다. 과학과 종교 모두가 독단을 줄이고 비판을 더 너그럽게 대할 때, 철학은 비로소 통일되어 우주를 지적으로 이해할 것이다.

133:5.8 (1477.3) 네가 실제로 우주의 작용을 헤아려볼 수만 있다면, 우주에는 통일성이 있다. 실재하는 우주는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 누구에게나 친절하다. 진정한 문제는, 사람의 유한한 정신이 어떻게 논리적이고 참되고 부합되는 통일된 생각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오로지 양적 사실과 질적 가치의 공통된 원인이 파라다이스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우주를 파악하는 이 정신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한 실체의 파악은 우주 현상에서 목적 있는 통일성을 보도록 시야가 넓은 통찰력을 낳으며, 인격이 점진적으로 성취하는 영적 목표까지도 드러낸다. 이것은 계속 변하는 비인격 관계와 발전하는 인격 관계로 이루어진, 생생한 우주의 변하지 않는 배경을 감지할 수 있는 통일성 개념이다.

133:5.9 (1477.4) 물질과 영(靈)과 그 사이의 상태는, 실재하는 우주가 참으로 통일되는 수준, 서로 관계되고 서로 얽혀 있는 세 수준이다. 사실과 가치가 있는 우주 현상이 얼마나 서로 갈라지는 듯 보이는가 상관 없이, 이것들은 결국 최상위 안에서 하나가 된다.

133:5.10 (1477.5) 물질로 존재하는 실체는 눈에 보이는 물질뿐 아니라 인식되지 않는 에너지에도 달라붙는다. 우주의 에너지가 필요한 운동의 정도까지 늦춰질 때, 그때 적당한 조건 밑에서 바로 이 에너지는 질량이 된다. 오직 지성이 명백한 실체들이 앞에 있음을 혼자 파악할 수 있는데, 그 자체가 또한 실체임을 잊지 말라. 이 에너지 및 질량, 지성ㆍ영으로 이루어진 이 우주의 근본 원인은 영원하다―우주의 아버지 그리고 그와 절대로 동등한 자들의 성질 및 반응 안에서 존재하고, 또 그러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133:5.11 (1477.6) 예수의 말씀에 그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도 남았다. 그리스인이 그들을 떠나면서 말했다: “민족이 우수하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고 종교 외에 무언가 이야기하는 유대인을 마침내 만나게 되었소이다.” 그들은 잠을 자려고 물러갔다.

133:5.12 (1477.7) 아테네에서 체류한 것은 즐겁고 유익했지만, 사람들과 접촉한 성과가 특별히 좋지는 않았다. 그 시절에는 허다한 아테네 사람이, 지난 시절의 명성에 관하여 지적 자만심을 가졌든지 아니면 머리가 어리석고 무지했고, 그들은 그리스에 영화(榮華)가 있고 그 민족의 지성인들이 지혜가 있던 초기 시절의 열등한 노예들의 자손이었다. 그때에도 아테네 시민 가운데 아직도 명석한 지성인이 많이 있었다.

6. 에베소에서―혼에 대한 강론

133:6.1 (1477.8) 아테네를 떠나면서 그 나그네들은 트로아스 길로 에베소로 갔는데 여기는 로마의 아시아 지방의 서울이었다. 에베소 사람들의 이름난 아르테미스 신전(神殿)까지 여러 번 찾아갔는데, 이곳은 그 도시에서 3.2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아르테미스는 온 소 아시아에서 가장 이름난 여신이었고, 이것은 훨씬 전에 고대 아나톨리아 시절의 어머니 여신이 지속되어 내려온 것이다. 그 여신을 숭배하는 엄청난 신전에 전시된 투박한 우상은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소문이 있었다. 가니드는 일찍부터 우상을 신(神)의 상징으로 존중하는 훈련을 받았고 이것이 모두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는 소 아시아 지방에서 모시는 이 다산(多産)의 여신을 기념하는 작은 은(銀) 제단을 사는 것이 아주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그들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물건을 숭배하는 것에 관하여 길게 이야기했다.

133:6.2 (1478.1) 머무른 지 사흘이 되어 그들은 항구 입구의 바닥을 훑어내는 것을 구경하려고 강가를 내려갔다. 한낮에 어느 젊은 페니키아인과 이야기했는데, 그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많이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제쳐놓고 진급한 어떤 젊은이를 질투하였다. 예수는 위로하는 말씀을 주고 옛 히브리 속담을 인용하였다: “재능은 사람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고, 그를 위대한 사람 앞으로 데려간다.”

133:6.3 (1478.2) 이 지중해 여행에서 방문한 모든 큰 도시 중에서 그들이 이곳에서 얻은 성과는 후일에 기독교 선교사들의 일에 가장 가치가 적었다. 기독교가 에베소에서 뿌리를 내린 것은 대체로 바울의 노력을 통한 것이었다. 바울은 여기서 2년이 넘도록 거주했고, 생계를 위하여 텐트를 만들면서 티라누스의 학교 주요 강당에서 밤마다 종교와 철학에 대하여 강의하였다.

133:6.4 (1478.3) 이 지역의 철학 학교와 관련된 어느 진취적 사상가가 있었고 예수는 그와 더불어 몇 차례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이 담화를 가지는 과정에서 예수는 되풀이하여 “혼”이라는 낱말을 썼다. 이 학식 있는 그리스인은 마침내 “혼”이 무엇을 뜻하는가 물었고, 대답은 이러했다:

133:6.5 (1478.4) “혼(魂)은 사람이 자아를 비추어 보고, 진리를 헤아리고 영을 파악하는 그 부분이며, 이것은 언제까지나 인간을 동물 세계의 수준보다 높이 올려놓느니라. 자의식 그 자체는 저절로 혼이 아니라. 도덕적 자의식은 인간의 참된 자아가 실현된 것이요 인간 혼의 기초를 이루며, 혼은 인간의 체험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가치를 나타내는, 사람의 그 부분이라. 도덕적 선택과 영적 달성, 하나님을 알고 그와 같이 되려는 충동은 혼의 특징이라. 사람의 혼은 도덕적 생각과 영적 활동과 동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느니라. 침체한 혼은 죽어 가는 혼이라. 하지만 사람의 혼은 그 지성에 거하는 신다운 영과 뚜렷이 다르니라. 신다운 영(靈)은 인간 지성의 첫 도덕적 활동이 일어남과 동시에 도착하며 그때가 혼이 태어나는 기회이라.

133:6.6 (1478.5) “혼을 구하거나 잃어버리는 것은 도덕적 의식이 그와 관련된 불멸의 영 재산과 영원히 연합하여 살아남는 지위를 얻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상관이 되느니라. 구원은 도덕적 의식의 자각(自覺)이 영적으로 변화되는 것이요, 그렇게 함으로 살아남는 가치를 소유하게 되느니라. 혼이 겪는 온갖 형태의 갈등은 도덕적 또는 영적 자의식과 순전한 지적(知的) 자의식, 이 둘 사이에 조화가 모자라서 생기느니라.

133:6.7 (1478.6) “성숙하고 고상해지고 영적으로 변화되었을 때 인간의 혼은,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 물질 자아와 신다운 영 사이에 개재하는 개체에 가까워진다는 의미에서 하늘의 지위에 다가가느니라. 물질을 조사하거나 영적 증명 방법으로 인간의 진화하는 혼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혼이 어떻게 생겼는가 묘사하기 힘들고 보여주기는 더욱 어려우니라. 물질 과학은 혼이 존재하는 것을 보여줄 수 없고 순전한 영의 시험도 그럴 수 없느니라. 물질 과학과 영적 기준이 인간의 혼이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데도, 도덕 의식을 가진 필사자는 누구나 실재하고 실제로 몸소 겪는 하나의 체험, 즉 자신의 혼이 존재하는 것을 아느니라.”

7. 키프러스에서 머무르면서―지성에 대한 말씀

133:7.1 (1479.1) 얼마 안 있어 나그네들은 키프러스를 향해 돛을 달았고, 로드에서 멈추었다. 긴 항해는 즐거웠고, 몸을 푹 쉬고 맑은 정신으로 그들은 목적지인 섬에 다다랐다.

133:7.2 (1479.2) 지중해 여행 길의 끝이 가까워지고 있으므로 이번 키프러스 방문에 정말로 쉬고 노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들은 바보스에 상륙해서 가까이 있는 산에서 몇 주 동안 머물려고 당장에 식량을 모으기 시작했다. 도착한 뒤 사흘째에 짐을 단단히 실은 짐승들과 함께 산을 향하여 떠났다.

133:7.3 (1479.3) 두 주 동안 세 사람은 무척 즐겁게 지냈는데, 그리고 나서 아무 예고 없이 젊은 가니드가 갑자기 몹시 아팠다. 두 주 동안 끓어오르는 열병을 앓았고, 때때로 헛소리를 했다. 예수와 고노드는 아픈 소년을 보살피느라고 바빴다. 예수는 능숙하고 부드럽게 소년을 돌보았다. 아버지는 아픈 젊은이를 정성으로 보살필 때마다 나타난 예수의 부드러움과 재빠름에 놀랐다. 그들은 사람이 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소년이 너무 아파서 옮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최선을 다하여 거기 산 속에서 소년이 건강을 되찾도록 보살피려고 준비하였다.

133:7.4 (1479.4) 가니드가 건강을 회복하는 3주 동안, 예수는 그에게 자연과 그 여러 변화에 대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그들이 산을 거닐면서, 소년은 묻고 예수는 대답하며, 아버지는 그 구경거리 전체를 감탄하면서, 얼마나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는지.

133:7.5 (1479.5) 산에서 머무르던 마지막 주에, 예수와 가니드는 인간 지성의 작용에 대하여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시간 동안 토론한 뒤에, 소년은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선생이여, 고등 생물보다 사람이 더 높은 형태의 자의식을 체험한다고 하시니,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나이까?” 현대의 말투를 빌려서 다시 표현하면,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133:7.6 (1479.6) 아이야, 사람의 지성과 그 안에 사는 신의 영에 관하여 이미 너에게 많이 일러 주었다. 그러나 이제 자의식이 하나의 실체임을 강조해야겠다. 어느 동물이라도 자의식을 가질 때 원시인이 된다. 그러한 달성은 비성격 에너지, 그리고 영을 파악하는 지성, 이 둘 사이의 작용을 조정함으로 생긴다. 바로 이 현상이 한 절대 초점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영을, 인간의 성격에게 내려주는 것을 정당화한다.

133:7.7 (1479.7) 관념은 그저 감각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관념은 감각에 인격 자아의 돌이켜보는 해석을 더한 것이다. 자아는 사람이 가진 감각의 합보다 더 큰 것이다. 성장하는 자아 속에는 통일에 접근하는 무엇이 비로소 생긴다. 그 하나는 절대적 하나의 일부분이 깃든 계심에서 파생되며, 동물 기원을 가진 그러한 자의식하는 지성을 영적으로 활성화시킨다.

133:7.8 (1479.8) 어떤 단순한 동물도 시간적 자의식을 소유할 수 없다. 동물은 관련된 감각 및 인식과 그 기억을 생리적으로 조정하는 능력이 있지만, 인간이 지적으로 돌이켜보고 해석하여 얻은 결론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어떤 동물도 감지한 것의 중요성을 인식(認識)하거나, 이 통합된 육체적 체험을 의도하여 연결 짓는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의식을 가지고 존재하는 이 사실은, 나중에 영적 체험의 실체와 연합하여, 사람이 우주에서 아들이 되는 잠재성을 이루며, 궁극에는 사람이 우주를 다스리는 최상의 하나에 도달한다는 것을 미리 예시한다.

133:7.9 (1480.1) 인간의 자아는 단지 연속된 의식 상태의 총합도 아니다. 의식을 분류하고 연결 짓는 기능이 효율적으로 작용하지 않으면, 하나의 자아(自我)라고 부르는 것을 정당화할 만큼 충분한 통일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통일되지 않은 그러한 머리는 인간의 지위를 가진 의식 수준에 도저히 이를 수 없다. 의식한 것들을 연결시키는 작용이 그저 우연(偶然)으로 생긴다면, 모든 사람의 지성은 정신병의 어떤 단계들이 질서 없이 닥치는 대로 연결된 것을 드러낼 것이다.

133:7.10 (1480.2) 오로지 육체적 감각의 의식으로부터 만들어진 인간 지성은, 결코 영적 수준에 이를 수 없다. 이 종류의 물질 지성은 도덕적 가치를 깨닫는 감각(感覺)이 전혀 모자라고, 사람을 영적으로 지배하는 안내 감각이 결여될 것이다. 안내하는 감각은 이 세상에서 조화된 통일된 인격을 얻는 데 필수이며, 이것은 영원 속에 인격이 살아남는 것과 따로 분리할 수 없다.

133:7.11 (1480.3) 인간의 지성은 일찍부터 물질을 초월하는 성질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참으로 돌이켜보는 인간 지능은 전적으로 시간의 한계에 묶이지는 않는다. 개인들이 일생에 이룩한 업적이 무척 다르다는 것은 서로 다른 유전(遺傳) 자질과 상이한 환경의 영향뿐 아니라, 자아가 성취한 바 아버지의 깃드는 영과 어느 정도 통일되었는가를 가리키며, 이것은 자아가 얼마나 아버지의 영과 일치되었는가를 재는 척도이다.

133:7.12 (1480.4) 인간의 지성은 두 가지에 충성하는 갈등을 잘 견디지 못한다. 선과 악, 이 두 가지를 섬기려고 애쓰는 체험은 그 혼에게 벅찬 부담이 된다. 최상으로 행복하고 효과 있게 통일된 지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데 전적으로 몸을 바친 지성이다. 해결되지 않은 갈등은 통일을 해치며, 지성의 분열로 끝날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값을 치르든 지성의 평화를 얻으려고 애쓰고, 고귀한 포부를 내던지고, 영적 이상(理想)을 타협한다고 해서 혼의 살아남는 인품이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평화는 참된 것의 승리를 꿋꿋하게 주장함으로 얻으며, 선의 강한 힘으로 악을 이겨서 이러한 승리를 달성한다.

133:7.13 (1480.5) 이튿날 그들은 살라미스를 향해서 떠났고, 거기서 시리아의 바닷가에 있는 안티옥을 향하여 출발했다.

8. 안티옥에서

133:8.1 (1480.6) 안티옥은 로마의 시리아 지방의 서울이었고, 제국의 총독은 여기에 거처를 두었다. 안티옥은 50만의 주민을 가졌는데, 제국에서 셋째로 큰 도시요, 사악함과 지독한 부도덕 면에서는 첫째였다. 고노드는 처리할 업무가 어지간히 있었다. 그래서 예수와 가니드는 둘이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다프니의 숲만 제외하고, 그들은 여러 나라 말을 쓰는 이 도시 근처를 모조리 찾아 다녔다. 고노드와 가니드는 악명 높은 이 치욕의 사당(祠堂)을 찾아갔지만 예수는 따라가기를 거절했다. 그러한 장면은 인도인에게 그다지 충격이 아니었지만 이상을 추구하는 히브리인에게는 불쾌하였다.

133:8.2 (1480.7) 팔레스타인에 다가가고 여행의 끝이 가까워짐에 따라서, 예수는 여행 기분에서 깨어나 회상에 젖었다. 안티옥에서는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고, 도시에서 돌아다니는 일이 드물었다. 안티옥에 관하여 선생이 어째서 별로 흥미를 나타내지 않는가 여러 번 물은 뒤에, 가니드는 예수가 마침내 입을 열게 하였다: “이 도시는 팔레스타인에서 그다지 멀지 않으니라. 아마도 나는 언젠가 여기에 돌아올 것이라.”

133:8.3 (1481.1) 가니드는 안티옥에서 무척 흥미 있는 체험을 겪었다. 이 젊은이는 자신이 영리한 생도임을 입증했고, 이미 예수의 가르침을 얼마큼 실천하기 시작했다. 안티옥에는 아버지의 사업과 관련된 어떤 인도인이 살았는데, 그는 아주 불쾌하고 불평을 많이 해서, 그를 해고하는 것이 고려되었다. 가니드가 이 말을 듣자 아버지의 사업 장소로 가서 동료 인도인과 함께 길게 의논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적당하지 않는 자리에 배치되었다고 느꼈다. 가니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관하여 일러주었고, 여러 모로 그의 종교적 시야를 넓혀 주었다. 그러나 가니드가 말한 모든 것 중에, 히브리 속담을 인용한 것이 가장 효력이 있었다. 그 지혜의 말씀은 이러했다: “네 손에 무슨 일이 맡겨지든지, 힘을 다하여 일하라.”

133:8.4 (1481.2) 낙타 카라반에 실을 짐을 준비한 뒤에 시돈으로, 그리고 거기서부터 다마스커스로 계속 내려갔고, 사흘 뒤에 모래 사막을 횡단하는 먼 길을 위하여 준비하였다.

9. 메소포타미아에서

133:9.1 (1481.3) 사막(沙漠)을 횡단하는 카라반 여행은, 여행에 이력이 난 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험이 아니었다. 선생이 낙타 스무 마리에 짐 싣는 일 돕는 것을 구경하고, 동물을 몰려고 자원하는 것을 지켜본 뒤에, 가니드는 외쳤다: “선생이여, 당신이 할 수 없는 일도 있나이까?” “부지런한 생도의 눈에는 분명히, 선생에게 훌륭한 점이 없지는 않는가 보다” 하면서, 예수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이렇게 옛 도시 우르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133:9.2 (1481.4) 예수는 우르의 초기 역사에 무척 관심이 있었고, 여기는 아브라함의 출생지였다. 그는 수사의 옛터와 전통에 똑같이 마음이 끌렸다. 너무나 마음이 끌려서, 예수에게 조사(調査)할 시간을 더 주고 또한 함께 인도로 돌아가자고 설득할 더 좋은 기회를 잡으려고, 고노드와 가니드는 이 지역에서 3주 동안 체류를 연장했다.

133:9.3 (1481.5) 가니드는 우르에서 지식ㆍ지혜ㆍ진리의 차이에 관하여 예수와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히브리인 현자의 말에 크게 반하였다: “지혜가 첫째 가는 것이라. 그러므로 지혜를 얻으라. 지식을 얻으려는 온갖 노력으로 사물을 이해하라. 지혜를 높이라, 그리하면 지혜가 너를 높이리라. 오로지 지혜를 품고자 하면 지혜가 너에게 명예를 가져오리라.”

133:9.4 (1481.6) 마침내 이별의 날이 왔다. 모두가, 특히 소년이 용감했지만, 이것은 어려운 시련이었다. 그들은 눈물을 글썽였어도 마음을 굳게 먹었다. 선생에게 작별을 알리면서 가니드는 말했다: “잘 가소서, 선생이여, 하지만 영원히 가는 것은 아니요. 다마스커스로 다시 돌아올 때, 당신을 찾아보리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틀림없이 무언가 당신과 같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나이다. 적어도 아버지에 관하여 당신이 내게 일러준 것과 당신이 무척 비슷한 줄 내가 아나이다. 나는 당신의 가르침을 기억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결코 당신을 잊지 않으리이다.” 아버지는 말했다: “위대한 선생이여, 우리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고 하나님을 알도록 도와주신 분에게 작별이오.” 예수는 대답했다. “당신에게 평화가 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축복이 늘 당신과 함께 있기를.” 작은 배가 바다로 그들을 정박한 배까지 나르는 동안 예수는 바닷가에 서서 구경했다. 이렇게 주는 인도에서 온 친구들을 카락스에서 떠나 보냈고 세상에서 다시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 이 세상에서, 그들도 나중에 나사렛 예수로 나타난 그 사람이 막 떠나 보낸 바로 이 친구―그들의 선생 요수아―인 줄 결코 알지 못했다.

133:9.5 (1481.7) 인도에서 가니드는 자라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 탁월한 아버지의 마땅한 후계자가 되었고 사랑하는 선생 예수에게서 배운 고귀한 많은 진리를 널리 퍼뜨렸다. 가니드는 십자가에서 생애를 마친, 이상한 선생이 팔레스타인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만년에 들었을 때, 이 사람의 아들이 전한 복음과 유대인 가정 교사의 가르침 사이에 비슷한 점이 있음을 깨닫기는 했어도, 이 둘이 실제로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결코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133:9.6 (1482.1) 이렇게 사람의 아들의 일생에서 요수아 선생의 사명이라고 불러도 좋은 장(章)이 끝났다.

제 134 편 과도기

유란시아서

제 134 편

과도기

134:0.1 (1483.1) 지중해를 여행하는 동안에 예수는 만난 사람과 거쳐 간 나라들을 신중하게 연구했고, 이 무렵에 땅에서 보낼 여생(餘生)에 관하여 마지막 결정에 이르렀다.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부모에게 태어나도록 마련한 계획을 전에 충분히 검토해보았고, 이제 마침내 승인하였다. 따라서 대중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일생의 일이 시작되는 것을 기다리려고, 의도하여 갈릴리로 돌아갔다. 아버지 요셉의 민족이 사는 땅에서 공적(公的) 생애를 살려고 비로소 계획을 세웠고, 자신의 자유 의지로 이렇게 하였다.

134:0.2 (1483.2) 예수는 몸소 겪은 인간적 체험을 통해서 온 로마 세계에서 팔레스타인이, 땅에서 생애의 마지막 장(章)을 꾸미고, 마지막 장면을 연출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임을 발견했다. 그가 태어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서, 그의 참된 성품을 숨김없이 나타내고 신다운 신분을 드러내는 계획에 처음으로 충분히 만족하게 되었다. 무력한 아기로서 인간의 체험을 시작한 바로 그 땅에서, 지상의 일생을 끝내고 필사자로 존재하는 생애를 마치기로 분명히 결심하였다. 그의 유란시아 생애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사이에서 비롯하였고 그는 일생을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사이에서 마치기로 하였다.

1. 서른 살 되던 해 (서기 24년)

134:1.1 (1483.3) 카락스에서 (서기 23년 12월) 고노드와 가니드와 작별한 뒤에, 예수는 우르의 길로 바빌론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있던 어느 사막의 카라반과 합세하였다. 다마스커스에서 나사렛으로 갔고, 가버나움에서 겨우 몇 시간 멈추었으며, 그곳에서 잠시 쉬고 세베대의 가족을 찾아보았다. 거기서 동생 야고보를 만났는데 그는 얼마 전에 세베대의 배 작업장에서 예수를 대신하여 일하러 왔다. 야고보와 (또한 가버나움에 어쩌다 들린) 유다와 이야기하고 나서, 그리고 요한 세베대가 그럭저럭 샀던 작은 집을 아우 야고보한테 넘겨준 뒤에, 예수는 계속하여 나사렛으로 갔다.

134:1.2 (1483.4) 지중해 여행이 끝났을 때, 예수는 대중 봉사를 시작할 때가 거의 되기까지 드는 생활비를 치르기에 넉넉한 돈을 받았다. 그러나 가버나움의 세베대와 이 특별한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을 제쳐놓고, 세상 사람들은 그가 이렇게 여행한 것을 결코 알지 못했다. 가족은 그가 이 시간을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하면서 보냈다고 언제나 믿었다. 예수는 이 생각이 결코 옳다 하지 않았고 그러한 오해를 드러내놓고 부인하지도 않았다.

134:1.3 (1483.5) 나사렛에서 몇 주 머무르는 동안, 예수는 가족과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아우 요셉과 함께 수선소에서 얼마큼 시간을 보냈지만, 대체로 마리아와 룻에게 주의를 쏟았다. 룻은 그때 거의 열다섯 살이었고, 이때가 룻이 젊은 여인이 된 뒤에 처음으로 누이와 길게 이야기한 기회였다.

134:1.4 (1484.1) 시몬과 유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지만, 예수의 찬성이 없이 그렇게 하기 싫어했다. 따라서 이 일을 미루었고 맏형이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비록 모두가 대부분의 일에 야고보를 가장(家長)으로 여겼어도 결혼에 관한 문제에서는 예수의 축복을 바랐다. 그래서 시몬과 유다는 이 해, 서기 24년 3월초에 쌍 결혼식을 올렸다. 나이 든 아이들은 이제 다 결혼했고 오직 막내 룻이 마리아와 함께 집에 남았다.

134:1.5 (1484.2) 예수는 가족의 개별 식구들과 함께 아주 정상으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모두 함께 모였을 때 그는 너무 할 말이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끼리 그에 대하여 한마디 논평하였다. 마리아는 맏아들의 특별히 이상한 이 행동에 특히 불안해하였다.

134:1.6 (1484.3) 예수가 나사렛을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을 무렵에 그 도시를 지나치고 있던 어느 큰 카라반의 안내자가 극심하게 앓게 되었다. 예수는 언어에 능통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고 자청했다. 이 여행이 1년 동안 자리를 비우는 것을 필요하게 만들 터이고, 아우들이 모두 결혼했고 어머니가 집에서 룻과 함께 살고 있었으므로 예수는 가족 회의를 열고 그 자리에서 바로 얼마 전에 야고보에게 준 집에서 살도록 어머니와 룻이 가버나움으로 갈 것을 제안하였다. 따라서 예수가 카라반과 함께 떠난 며칠 뒤에 마리아와 룻은 가버나움으로 이사했고 거기서 그들은 예수가 마련해 준 집에서 마리아의 여생 동안 살았다. 요셉과 그 가족은 옛 나사렛 집으로 이사했다.

134:1.7 (1484.4) 이 해는 사람의 아들의 정신적 체험에서 특별한 몇 해 중에 하나였다. 인간 지성과 깃드는 조절자 사이에 기본적 조화를 이룩하는 데 큰 진전이 있었다. 조절자는 멀지 않은 앞날에 닥칠 큰 사건들을 위하여 생각을 다시 정리하고 머리를 연습시키는 일에 활발하게 들어갔다. 예수의 인격은 세계를 향한 그의 태도에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을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는 막간의 시절이었고, 사람으로 보이는 하나님으로서 일생을 시작하고 하나님으로 보이는 사람으로서 땅에서 생애를 마치려고 이제 준비하는 그 존재가 거치는 과도기였다.

2. 카스피까지 가는 카라반 여행

134:2.1 (1484.5) 카스피 바다 지역까지 가는 카라반 여행 길에 예수가 나사렛을 떠난 것은 서기 24년 4월 1일이었다. 예수가 안내자로서 함께했던 그 카라반은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커스와 우르미아 호수의 길로, 아씨리아ㆍ메디아ㆍ파르티아를 거쳐서, 카스피 바다의 남동 지역까지 가고 있었다. 이 여행에서 돌아오는 데 만 1년이 걸렸다.

134:2.2 (1484.6) 예수에게 이 카라반 여행은 탐구하고 몸소 봉사하는 또 다른 모험이었다. 카라반 일행―승객, 보초, 낙타 운전수―와 그는 흥미 있는 체험을 겪었다. 카라반이 지나간 길을 따라서 수십 명의 어른과 아이들이 예수와 접촉한 결과로 더욱 값진 인생을 살았고, 이들에게 그는 평범한 카라반의 비범한 안내자였다. 그가 몸소 수고한 이 기회를 즐긴 사람들이 모두 이 때문에 이익을 얻지는 않았지만 그를 만나고 그와 이야기를 나눈 자들의 대다수는 자연스러운 여생에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

134:2.3 (1484.7) 모든 세계 여행 가운데 이 카스피 바다 여행은 예수를 동양에 가장 가깝게 데려갔고, 극동 민족들에 대한 이해를 높여 주었다. 그는 홍인종을 제외하고, 유란시아에 남아 있는 각 종족과 가깝게, 친히 접촉했다. 이 다양한 종족과 혼합 민족 각자에게 몸소 봉사하는 것을 그는 똑같이 기뻐했고, 이들은 모두 그가 가져온 생명의 진리를 쉽게 받아들였다. 극서로부터 온 유럽 사람과 극동에서 온 아시아 사람들은 똑같이, 희망과 영생을 전하는 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였고 그들 가운데 무척 인자하게 실천한 일생, 사랑으로 섬기고 영적 봉사를 베푸는 일생에 똑같이 영향을 받았다.

134:2.4 (1485.1) 모든 면에서 그 카라반 여행은 성공이었다. 이것은 예수의 인간 생활에서 아주 흥미 있는 사건이었는데, 그가 이 해에 경영자 자격으로서 활동했고 그에게 맡겨진 물질에 대하여, 그리고 카라반 일행을 구성하는 여행자들의 안전한 인도를 책임졌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충실하게, 능률 있게, 지혜롭게, 여러 가지 임무를 이행하였다.

134:2.5 (1485.2) 카스피 지방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예수는 우르미아 호수에서 카라반의 지휘를 그만두었고, 거기서 2주 조금 넘게 머물렀다. 나중에 어느 카라반과 함께 승객으로서 다마스커스로 돌아갔는데, 거기서 낙타의 주인들은 그에게 남아서 수고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제안을 물리치고 그 카라반 행렬과 함께 가버나움까지 줄곧 여행했고, 서기 25년 4월 1일에 도착했다. 그는 이제 더 나사렛을 집으로 여기지 않았다. 가버나움이 예수와 야고보ㆍ마리아ㆍ룻의 집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결코 다시 가족과 함께 살지 않았다. 가버나움에 있을 때 그는 세베대의 집에 거처를 정하였다.

3. 우르미아 강의

134:3.1 (1485.3) 카스피해로 가는 길에, 예수는 우르미아 호수의 서쪽 물가에 있는 옛 페르시아 도시 우르미아에서, 쉬고 기운을 되찾으려고 며칠 동안 멈추었다. 우르미아 가까이 호숫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여러 섬 중에서 가장 큰 섬에는 큰 건물―강의용 원형 극장―이 자리잡았고 이것은 “종교의 정신”에 바쳐진 것이었다. 이 건물은 정말로 종교 철학의 전당(殿堂)이었다.

134:3.2 (1485.4) 우르미아의 시민인 어느 부유한 상인과 세 아들이 이 종교의 전당을 세웠다. 이 사람은 심보이톤이었고 그 선조들 가운데는 많은 다른 민족이 있었다.

134:3.3 (1485.5) 이 종교 학교에서 강의와 토론은 주중에 아침마다 10시에 시작되었다. 오후 수업 시간은 3시에 시작했고 저녁 토론은 8시에 열렸다. 심보이톤이나 세 아들 중의 하나가 이 강의ㆍ논의ㆍ토론 시간에 언제나 사회(司會)를 보았다. 이 독특한 종교 학교의 창시자는 자신의 종교 관념을 밝히지 않고서 살다가 죽었다.

134:3.4 (1485.6) 여러 기회에 예수는 이 토론에 참가했다. 심보이톤은 그가 우르미아를 떠나기 전에, 예수가 돌아오는 여행 길에 그들과 함께 2주 동안 머무르고, “사람이 형제”인 것에 대하여 스물네 번 강의하고, 특히 그 강의에 대하여,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람이 형제인 것에 대하여 질문하고 토론하고 논쟁하는 저녁 시간을 열두 차례 진행하도록 주선했다.

134:3.5 (1485.7) 이러한 주선에 따라서, 예수는 돌아오는 여행 길에 멈추어서 이 여러 강연을 베풀었다. 이것은 유란시아에서 주의 모든 가르침 가운데 가장 체계 있고 공식적인 것이었다. 사람이 형제인 것에 관한 이 강의와 토론에 담겨 있는 것만큼, 이전이나 이후에 결코 한 주제에 대하여 그렇게 많이 말씀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 여러 강연은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의 나라”에 대한 것이었다.

134:3.6 (1486.1) 이 종교 철학의 전당에서 교사진은 서른이 넘는 종교와 종파를 대표하였다. 각 종교 집단이 이 선생들을 선택하고 지원하고 전적으로 인가하였다. 이 시절에 그 교직원에 선생이 75명쯤 있었는데, 그들은 여러 오두막에서 살았으며, 각 오두막은 약 열두 사람에게 숙소를 제공하였다. 초승달이 뜰 때마다 이 집단은 제비를 뽑아서 교체되었다. 아량 없는 태도, 싸우기 좋아하는 정신, 또는 공동체의 순조로운 운영에 간섭하는 어떤 다른 경향을 보여도 그 위반하는 선생은 재빨리, 즉결로 해임되곤 하였다. 그는 예식도 없이 쫓겨났고 교대하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바로 그 자리에 임명되곤 하였다.

134:3.7 (1486.2) 이 여러 종교의 선생들은 이 생명과 다음 생명의 근본적인 것에 관하여 그들의 종교가 얼마나 비슷한가를 보여주려고 크게 노력했다. 이 교사진에 자리를 얻기 위하여 인정해야 하는 신조(信條)가 꼭 하나 있었는데, 선생은 누구나 하나님―어떤 종류의 최고의 신―을 인정하는 한 종교를 대표해야 했다. 직원 가운데 조직을 가진 어떤 종교도 대표하지 않는 독립된 선생이 다섯 명 있었고, 그러한 독립된 선생으로서 예수는 그들 앞에 나타났다.

134:3.8 (1486.3) [우리 중도자들이 우르미아에서 예수가 하신 강연의 요약을 처음에 준비했을 때, 이 가르침을 유란시아 계시에 넣는 것이 지혜로운가에 대하여 교회 세라핌과 진보 세라핌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생겼다. 20세기에 종교와 인간의 정부를 지배하는 조건은 예수 시절의 조건과 너무 달라서, 우르미아에서 주가 강연한 것을, 이 여러 세상 직무가 20세기에 존재하는 대로,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의 나라 문제들에 적응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이 행성 정부를 담당하는 두 세라핌 집단이 만족하기까지 우리는 결코 주의 가르침에 대한 진술문을 작성할 수 없었다. 마침내, 유란시아에서 20세기 종교 및 정치 조건에 맞게 적응한 주의 우르미아 가르침에 대하여 우리의 견해를 준비하라고 계시 위원회의 멜기세덱 의장이 우리 가운데 세 명으로 된 위원회를 임명했다. 따라서 우리 2차 중도자(中道者) 세 명은 예수의 가르침을 그렇게 조정하는 일을 마쳤고, 오늘날의 세계 조건에 우리가 적용하고 싶은 대로 그가 발표한 말씀을 다시 진술하고, 계시 위원회의 멜기세덱 의장이 편집한 뒤에 그대로 이제 이 진술문을 발표한다.]

4. 통치권―신과 인간의 통치권

134:4.1 (1486.4) 사람이 형제인 것은 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에 기초를 둔다. 하나님의 가족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유래한다―하나님은 사랑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신답게 자녀들 모두를 사랑한다.

134:4.2 (1486.5) 하늘나라, 곧 신의 정부(政府)는 신이 통치권을 가진 사실에 기초를 둔다―하나님은 영이다. 하나님이 영이니까 이 나라는 영적인 나라이다. 하늘나라는 물질이 아니요 단지 지적인 것도 아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영적 관계이다.

134:4.3 (1486.6) 다른 종교들이 아버지 하나님이 영적 통치권을 가졌음을 인정하면 모든 그러한 종교는 평화롭게 남아 있을 것이다. 한 종교가 자체가 어떤 면에서 모든 다른 종교보다 우수하다, 그리고 다른 종교들을 다스릴 독점 권한을 소유한다고 가정할 때에야 그러한 종교는 주제넘게 다른 종교들에게 관용을 보이지 않거나, 감히 다른 종교의 신자들을 박해할 것이다.

134:4.4 (1487.1) 모든 종교가 기꺼이 모든 교회 권한을 온전히 벗어버리고, 그들이 영적 통치권을 가졌다는 모든 개념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한, 종교적 평화―형제 정신―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 홀로 영 군주이다.

134:4.5 (1487.2) 모든 종교가 모든 종교적 통치권을 어떤 초인간 수준에, 바로 하나님에게 넘겨 주는 데 찬성하지 않는 한, 종교 전쟁을 치르지 않고서 종교들 사이에 평등을 (종교적 자유를) 얻을 수 없다.

134:4.6 (1487.3)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하늘나라는 (반드시 획일성이 아니라) 종교의 화합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한 종교적 신자들로 이루어진 모든 종교 집단이, 어떤 개념의 교회 권한―종교적 통치권―에도 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34:4.7 (1487.4) 하나님은 영이요 하나님은 그의 영 자아의 분신(分身)을 사람의 마음 속에 거주하라고 주신다. 영적으로, 만민은 평등하다. 하늘나라에는 카스트와 계급, 사회 계층과 경제 집단이 전혀 없다. 너희는 모두 형제이다.

134:4.8 (1487.5)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영 통치권을 너희가 간과하는 순간에, 어느 한 종교가 그것이 다른 종교들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할 것이다. 다음에 땅에서 평화와 사람들 사이에 선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의견 차이와 반박, 아니 종교 전쟁까지도, 적어도 신자들 사이에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134:4.9 (1487.6) 자신들이 동등하다고 여기는 자유 의지 존재들은, 어떤 초월 통치권, 그들 위에 있는 어떤 권한의 지배를 받는다고 서로 인정하지 않는 한, 머지 않아 다른 개인과 집단을 다스릴 권력과 권한을 얻으려고 자기 능력을 시험해볼 유혹을 받는다. 위에서 지배하는 초월 통치권의 어떤 영향력을 서로 인정할 경우를 제외하고, 평등 개념은 결코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134:4.10 (1487.7) 우르미아 종교가들은 비교적 평화롭고 조용한 가운데 함께 살았는데, 어떤 개념의 종교적 통치권도 완전히 포기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모두가 군주인 하나님을 믿었다. 사회적으로, 충분하고 도전할 수 없는 권한은 주관하는 우두머리―심보이톤―에게 있었다. 어떤 선생이 동료 선생들에게 주인 행세를 하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들은 잘 알았다. 각 종교 집단이 신의 총애를 받는다, 선택받은 민족이다, 종교적 통치권을 가졌다는 개념을 모두 아낌없이 던져 버리기까지, 유란시아에서 오래 가는 종교적 평화는 전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아버지 하나님이 가장 높을 때,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형제가 되고, 땅에서 종교적 평화를 누리면서 함께 살 것이다.

5. 정치적 통치권

134:5.1 (1487.8) [하나님이 통치권을 가졌다는 주의 가르침이 진리이지만―세계 종교들 사이에서 주에 관한 종교가 나중에 나타남으로 단지 까다롭게 되었을 뿐이다―정치적 통치권에 관하여 그가 발표한 말씀은 지난 1천9백여 년 동안에 국가 생활의 정치적 진화로 인하여 대단히 복잡해졌다. 예수의 시절에 세계적 강대국이 오로지 둘―서양에 로마 제국과 동양에 한(漢) 제국―이 있었다. 이 나라들은 파르티아 왕국, 그리고 중간에 카스피와 투르키스탄 지역의 다른 국가들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발표에서 정치적 통치권에 관하여 우르미아에서 주가 가르친 내용으로부터 더욱 널리 벗어나며, 동시에 그러한 가르침이 그리스도 이후 20세기에 정치적 통치권이 어떻게 진화할지 모르는 특히 위급한 단계에 적용되는 대로, 그러한 가르침의 취지를 그리려고 시도한다.]

134:5.2 (1487.9) 국가가 무제한 통치권을 가졌다는 허망한 개념에 국가들이 집착하는 한, 유란시아에서 전쟁은 결코 그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사는 세계에는 오직 두 수준의 상대적 통치권이 있으니, 즉 개별 필사자의 영적 자유 의지, 그리고 인류 전체의 집합 통치권이다. 개별 인간 수준과 인류 전체 수준 사이에 있는 어떤 집합과 연합도 상대적ㆍ일시적이며, 개인과 행성의 대합계―사람과 온 인류―의 행복ㆍ복지ㆍ진보의 질을 높이는 한, 가치가 있다.

134:5.3 (1488.1) 종교 선생들은 하나님의 영적 통치권이, 사이에 개재하는 중간 단계의 모든 영적 충성 행위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언젠가 국가 통치자들은 최고자들이 사람의 나라에서 다스린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134:5.4 (1488.2) 사람의 나라에서 최고자들의 이러한 통치는 특별 혜택을 받는 어느 필사자 집단의 특별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선택된 민족”과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최고자, 즉 위에서 정치적 진화를 다스리는 자들의 통치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최다수에게, 최장(最長) 기간에, 최대의 이익을 도모하도록 고안된 통치이다.

134:5.5 (1488.3) 통치권은 권력이요, 권력은 조직함으로 자란다. 정치 권력을 가진 조직이 이렇게 성장하는 것은 좋고 적당하며, 그런 조직이 인류 전체의 늘 확대되는 부분들을 포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정치 조직들의 성장은 정치 권력의 자연스러운 초기 조직―가족―그리고 정치적 성장의 마지막 성취―온 인류의 정부, 온 인류가 다스리고 온 인류를 위한 정부―사이의 어떤 단계에도 문제를 만들어낸다.

134:5.6 (1488.4) 가족 집단에 있는 부모의 권력을 비롯하여, 가족들이 합쳐 같은 피를 가진 씨족을 이룸에 따라서, 정치적 통치권은 조직함으로 발달하며, 이 씨족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부족 단위로―핏줄을 뛰어넘은 정치 집단으로―뭉치게 된다. 다음에 무역ㆍ상업ㆍ정복을 통해서 부족들은 한 나라로서 연합되며, 한편 때때로 제국이 여러 나라를 통일한다.

134:5.7 (1488.5) 작은 집단에서 더 큰 집단으로 통치권이 넘어감에 따라서, 전쟁이 줄어든다. 다시 말해서, 작은 나라들 사이에 사소한 전쟁이 줄어든다. 그러나 통치권을 행사하는 나라들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 큰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진다. 당장에, 온 세계를 탐험하고 차지했을 때, 나라들의 수가 적고 힘세고 강력할 때, 통치권을 가졌다고 생각되는 이 큰 나라들이 경계선에서 닿게 될 때, 오직 대양(大洋)이 나라들을 분리할 때, 무대는 대전, 세계 전쟁을 위하여 준비될 것이다. 싸움을 일으키고 궁극에 전쟁하지 않고는 이른바 통치권을 가진 나라들이 교제할 수 없다.

134:5.8 (1488.6) 가족으로부터 인류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통치권의 진화에서 생기는 어려움은 사이에 개재하는 모든 수준에서 나타나는 타성이자 저항에 있다. 때때로 가족들은 씨족에 항거했고, 한편 씨족과 부족들은 가끔 그 영토를 가진 국가의 통치권을 뒤엎으려 하였다. 정치 조직에서 이전에 개발된 “임시 발판 단계”는 정치적 통치권에서 새롭고 전진하는 진화를 하나하나 저지하고 방해한다 (그리고 언제나 방해해 왔다). 그리고 이것이 참말이니, 일단 일으키면, 인간의 충성심은 바꾸기 힘들기 때문이다. 부족의 진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바로 그 충성심은 초월 부족―영토가 있는 국가―의 형성을 어렵게 만든다. 영토가 있는 국가의 진화를 가능하게 하는 바로 그 충성심(애국심)은 온 인류의 정부가 진화로 생성되는 것을 엄청나게 까다롭게 만든다.

134:5.9 (1488.7) 처음에 가족 안에서 개인이, 다음에 부족 및 더 큰 집합과 가지는 관계에서 가족과 씨족들이, 자결주의를 포기함으로 정치적 통치권이 생긴다. 작은 데서부터 항상 더 큰 정치 조직으로 자결(自決)을 이렇게 점진적으로 이양하는 것은 명(明) 나라와 모굴 왕조가 세워진 뒤로, 동양에서 대체로 줄어들지 않고 진행되어 왔다. 서양에서 이것은 1천 년이 넘도록, 바로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진행되었고, 이때 유럽에서 수많은 작은 집단이 사라졌던 정치적 통치권을 다시 확립함으로 유감스러운 역행(逆行) 운동이 이 정상 경향을 일시 거꾸로 돌이켰다.

134:5.10 (1489.1) 이른바 통치권을 가진 국가들이 그 통치권을 사람의 형제 단체―즉 인류의 정부―의 손에 총명하게 완전히 내어주기까지, 유란시아는 오래 가는 평화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 국제주의―국제 연맹―은 결코 인류에게 영구한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나라들의 세계적 연방들이 작은 전쟁을 효과적으로 막고 작은 나라들을 만족스럽게 통제할 것이다. 그러나 그 연방들은 세계 전쟁을 방지하거나, 가장 강력한 정부 셋이나 넷, 다섯을 통제하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충돌이 일어날 때, 이 강대국들 가운데 하나가 그 연맹에서 탈퇴하고 전쟁을 선포할 것이다. 국가가 통치권을 가졌다는 망상(妄想) 바이러스에 전염되어 있는 한, 나라들이 전쟁터에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국제주의는 올바른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디딘 것이다. 국제 경찰단은 많은 작은 전쟁을 방지하겠지만, 대전쟁, 땅에서 큰 군사 정부들 사이에 생기는 충돌을 방지하는 데 효력이 없을 것이다.

134:5.11 (1489.2) 참으로 통치권을 가진 국가(강대국)의 수가 줄어드는 데 따라서, 인류 정부의 기회와 필요가 늘어난다. 정말로 통치권을 가진 (큰) 강국들이 겨우 몇 있을 때, 민족(제국)의 우위를 얻으려고 생사를 건 싸움을 시작하든지, 아니면 통치하는 어떤 특권을 자진해서 포기함으로, 온 인류를 다스리는 참된 통치권의 시작으로서 쓰일 핵심, 국가를 초월하는 권력의 필수 핵심을 창조해야 한다.

134:5.12 (1489.3) 이른바 통치권을 가진 모든 국가가 전쟁을 수행하는 권한을 온 인류의 대표 정부에게 양보할 때까지, 평화는 유란시아에 오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통치권은 세계의 여러 민족이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것이다. 유란시아의 모든 민족이 한 세계 정부를 창조할 때, 그들은 그러한 정부를 통치자로 만들 권한과 힘이 있다. 그러한 대표적 또는 민주적 세계 권력이 지구에서 세계의 육군ㆍ해군ㆍ공군을 통제할 때, 땅에 평화가 있고 사람들 사이에서 선의가 지배할 것이다―그러나 그때까지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134:5.13 (1489.4) 19세기와 20세기의 중요한 예를 들자: 아메리카 연방의 48주는 오랫동안 평화를 누려왔다. 자기들끼리 이제 더 전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통치권을 연방 정부에게 넘겨주었고 투쟁의 판결을 통해서, 자결의 망상에 대한 주장을 모두 버렸다. 각 주가 그 내부 사무를 규제하지만, 외교 관계, 관세, 이민, 군사(軍事) 또는 주 사이의 상업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개별 주(州)도 시민권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 48주는 오직 연방 정부의 통치권이 어떤 면에서 위협을 받을 때에야 전쟁의 상처를 입는다.

134:5.14 (1489.5) 이 48주는 통치권과 자결(自決), 이 두 가지 궤변을 버렸고, 주 사이에 평화와 평안을 누린다. 마찬가지로 유란시아의 나라들은 각자의 통치권을 세계 정부의 손에―즉 사람의 형제 단체의 통치권에―자유롭게 양보할 때 비로소 평화를 누릴 것이다. 인구가 많은 뉴욕주나 큰 텍사스주와 똑같이, 작은 로드 아이랜드주가 미국 국회에 상원(上院) 의원 두 명을 가진 것처럼, 이 세계 국가에서 작은 나라들은 큰 나라만큼 강력해질 것이다.

134:5.15 (1490.1) 이 48주(州)의 제한된 (주) 통치권은 사람들이, 사람들을 위하여 만들었다. 아메리카 연방이 가진, 주를 초월하는 (국가) 통치권은 이 여러 주 가운데 최초의 13주가 자체의 이익을 위하여,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창조하였다. 언젠가 행성의 인류 정부의 초국가 통치권을 여러 나라가 비슷하게, 자체의 이익을 위하여,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창조할 것이다.

134:5.16 (1490.2) 시민들은 정부의 이익을 위하여 태어나지 않는다. 정부는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창조되고 고안되는 조직이다. 온 인류에게 통치권을 주는 정부가 나타나지 못하면, 정치적 통치권의 진화에 끝이 있을 수 없다. 모든 다른 통치권은 상대적 가치가 있고, 중간 단계의 의미가 있으며, 하등 지위를 가진다.

134:5.17 (1490.3) 과학의 진보와 함께, 거의 종족 자살이 될 때까지 전쟁은 갈수록 더 세상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사람들이 인류의 정부를 기꺼이 세우고, 영구한 평화의 복을 비로소 누리고, 사람들 사이에 선의―세계적 선의―로 얻은 평안 속에서 번성하기까지, 몇 차례나 세계 전쟁을 치러야 하고, 얼마나 많은 국가 연맹이 실패해야 하는가?

6. 법과 자유와 통치권

134:6.1 (1490.4) 한 사람이 자유―해방―을 몹시 바라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자유를 동경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자유를 사랑하는 그러한 필사자 집단은 각 사람에게 같은 정도의 자유를 주고, 동시에 모든 동료 인간에게 똑같은 정도의 자유를 보호할 그러한 법ㆍ규칙ㆍ규제에 복종하지 않고는 평화롭게 함께 살 수 없다. 한 사람이 절대로 자유롭게 되려면 또 한 사람이 절대로 노예가 되어야 한다. 자유는 사회ㆍ경제ㆍ정치 면에서 상대적 성질을 가진 것이 참말이다. 자유는 법을 집행함으로 가능하게 된 문명의 선물이다.

134:6.2 (1490.5) 종교는 사람이 형제임을 깨닫는 것을 영적으로 가능하게 하지만, 인류의 정부로 하여금 인간의 행복 및 효율성과 같은 목표와 관련하여 사회ㆍ경제ㆍ정치 문제를 단속하기를 요구할 것이다.

134:6.3 (1490.6) 세계의 정치적 통치권을 한 집단의 민족 국가들이 나누어 가지고 부당하게 차지하는 한, 전쟁이 있고, 전쟁의 소문이 있을 것이다―나라와 나라가 대항하여 일어날 것이다. 잉글랜드ㆍ스콧트랜드ㆍ웨일즈는 각자의 통치권을 버리고 연합 왕국에 맡겨둘 때까지 언제나 서로 싸우고 있었다.

134:6.4 (1490.7) 또 하나의 세계 전쟁은 이른바 통치권을 가진 국가들에게 어떤 종류의 연방을 형성하고, 이처럼 작은 전쟁, 작은 나라들 사이에 전쟁을 막는 장치를 창조하는 것을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정부가 창조되기까지 세계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세계적 통치권이 세계 전쟁을 막을 것이다―그 외에 아무것도 그렇게 할 수 없다.

134:6.5 (1490.8) 아메리카의 자유로운 48주는 평화로이 함께 산다. 늘 전쟁하는 유럽 국가들에서 사는 여러 국민과 종족 모두가 이 48주의 시민들 사이에 끼어 있다. 이 미국 사람들은 넓은 전 세계에서 거의 모든 종교ㆍ교파ㆍ종파들을 대표하며 그래도 여기 북 아메리카에서 평화로이 함께 산다. 이 48주가 통치권을 포기하고, 자결 권리라고 생각된 모든 개념을 버렸기 때문에 이 모두가 가능하게 되었다.

134:6.6 (1490.9) 무장이나 비무장의 문제가 아니다. 징병 또는 자원 군대 복무를 채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이 문제와 상관이 없다. 모든 형태의 기계적 현대 무기와 모든 종류의 폭발물을 강대국으로부터 빼앗는다면 국가의 통치권이 신(神)이 준 권리라는 망상에 달라붙는 한, 주먹과 돌과 곤봉을 가지고 싸울 것이다.

134:6.7 (1491.1) 전쟁은 크고 끔직한, 인간의 병이 아니다. 전쟁은 증상이요 결과이다. 진짜 병은 국가의 통치권이라는 바이러스이다.

134:6.8 (1491.2) 유란시아 국가들은 진정한 통치권을 소유한 적이 없다. 결코 세계 전쟁의 참화와 황폐를 겪지 않도록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통치권을 가진 적이 없다. 인류의 세계 정부를 창조하는 것은 국가들이 통치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고 진정하고 오래 가는 세계 통치권을 실제로 창조하는 것이며, 그때부터 그들을 온갖 전쟁으로부터 충분히 보호할 수 있다. 지역 사무는 지역 정부가, 나라의 사무는 국가 정부가, 국제 사무는 세계 정부가 관리할 수 있다.

134:6.9 (1491.3) 세계의 평화는 조약, 외교, 대외 정책, 연합군, 힘의 균형으로 또는 민족주의를 부르짖는 독립 국가들을 어떤 다른 종류의 임시 손재주로 조종하여 유지될 수 없다. 세계 법이 생기고 이를 세계 정부가―온 인류의 통치권이―집행해야 한다.

134:6.10 (1491.4) 세계 정부 밑에서 개인은 훨씬 더 많은 자유를 누릴 것이다. 오늘날 강대국 시민들은 거의 강제로 세금을 물고 규제와 통제를 받는다. 국가의 정부들이 국제 사무에 관한 그들의 통치권을 기꺼이 세계 정부의 손에 넘길 때, 현재 이처럼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는 일이 많이 사라질 것이다.

134:6.11 (1491.5) 세계 정부 밑에서 국가 집단들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부르짖는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고 누릴 진정한 기회를 얻을 것이다. 자결의 허위는 그칠 것이다. 돈과 무역의 세계적 규제와 더불어 새로운 세계적 평화 시대가 다가올 것이다. 곧 세계적 언어가 진화될지 모르고, 적어도 언젠가 세계적 종교를―아니면 세계적 관점을 가진 종교들을―가질 희망이 얼마큼 생길 것이다.

134:6.12 (1491.6) 집단의 안전은 그 집단이 온 인류를 포함할 때까지, 결코 평화를 가져올 수 없을 것이다.

134:6.13 (1491.7) 대표로 다스리는 인류 정부의 정치적 통치권은 땅에서 오래 가는 평화를 가져 오고, 사람의 영적 형제 정신은 언제까지나 모든 사람 사이에 선의를 보장할 것이다. 땅에서 평화,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선의를 실현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하나도 없다.

* * *

134:6.15 (1491.8) 심보이톤이 죽은 뒤에, 그 아들들은 평화로운 교사진을 유지하는 데 큰 어려움에 부닥쳤다. 우르미아 교사진에 들어간 후일의 기독교 선생들이 더 지혜를 보이고 더 관대했더라면, 예수의 가르침의 영향은 훨씬 더 컸을 것이다.

134:6.16 (1491.9) 심보이톤의 맏아들은 필라델피아에 있던 아브너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브너가 선택한 선생들은 무척 유감스럽게도 완고하고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 선생들은 그들의 종교가 다른 신앙을 지배하게 만들려고 애썼다. 그들은 바로 예수가, 자주 입에 오르내리던 카라반 안내자의 강연을 하셨다는 것을 결코 짐작하지 못했다.

134:6.17 (1491.10) 교사진에서 혼란이 커지자 세 형제는 재정 지원을 그만두었고, 5년 뒤에 학교는 문을 닫았다. 나중에 그 학교는 미트라 신전으로서 다시 열렸고, 결국에는 그들의 질탕한 한 잔치와 연관하여 불에 타버렸다.

7. 서른하나 되던 해 (서기 25년)

134:7.1 (1492.1) 카스피 바다로 가는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예수는 그의 세계 여행이 거의 끝났음을 알았다. 팔레스타인 바깥으로 겨우 한 번 더 여행했는데, 시리아 여행이었다. 가버나움에 잠깐 들린 뒤에 나사렛으로 갔고, 방문하려고 며칠 동안 멈추었다. 4월 중순에 나사렛을 떠나서 티레를 향하였다. 거기서부터 계속 북쪽으로 여행하고 며칠 동안 시돈에서 묵었지만 목적지는 안티옥이었다.

134:7.2 (1492.2) 이 해는 예수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통하여 혼자서 돌아다니던 해였다. 여행하던 이 해 내내, 그 나라의 다른 지역에서, 나사렛 목수, 가버나움의 조선공, 다마스커스 서기관, 알렉산드리아의 선생, 그는 이렇게 여러 이름으로 알려졌다.

134:7.3 (1492.3) 안티옥에서 사람의 아들은 일하고, 관찰하고, 공부하고, 방문하고, 봉사하면서 두 달이 넘도록 살았다. 그동안 계속, 사람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인간으로 존재하는 환경에 반응하는가 배웠다. 이 기간의 3주 동안, 그는 텐트 만드는 사람으로서 일했다. 이 여행에서 방문한 어느 다른 곳보다, 그는 안티옥에서 더 오래 남아 있었다. 10년 뒤에, 사도 바울이 안티옥에서 전도하면서, 추종자들이 다마스커스 서기관의 교훈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의 제자들이 바로 주의 목소리를 듣고 그 가르침을 귀담아들었음을 조금도 몰랐다.

134:7.4 (1492.4) 안티옥에서부터 예수는 남쪽으로 바닷가를 따라서 케자리아로 갔고 거기서 몇 주 동안 묵었으며, 계속해서 바닷가를 따라 요파로 내려갔다. 요파로부터 내륙으로 잠니아ㆍ아쉬돗ㆍ가자까지 여행하였다. 가자로부터 내륙의 길을 타고 비엘세바까지 가서, 거기서 한 주 동안 남아 있었다.

134:7.5 (1492.5) 그리고 나서 남모르게 혼자서 예수는 마지막 여행을 떠났고, 팔레스타인의 심장부를 거쳐서 남쪽에 비엘세바로부터 북쪽으로 단까지 갔다. 북쪽으로 가는 이 여행에서 헤브론, 베들레헴 (여기서 그가 태어난 곳을 보았다), 예루살렘 (베다니에 들리지 않았다), 비어롯ㆍ레보나ㆍ시카, 세켐ㆍ사마리아ㆍ게바, 엔가님ㆍ엔도르ㆍ마돈에서 멈추었다. 막달라와 가버나움을 거쳐서 북쪽으로 줄곧 여행했다. 메롬의 물 동쪽을 지나서, 가라타의 길로 단, 곧 케자리아 빌립비로 갔다.

134:7.6 (1492.6) 깃드는 생각 조절자는 이제 사람들의 거처를 버리고 헤르몬산으로 가라고 예수를 이끌었다. 여기서 인간 지성을 통달하는 일을 끝내고 땅에서 여생의 일에 충만히 헌신하는 과제를 마치려는 것이었다.

134:7.7 (1492.7) 이때는 주가 유란시아에서, 땅에서 지낸 일생에서 진기하고 특별한 기간이었다. 또 다른 아주 비슷한 기간은 세례를 받고 난 바로 뒤에, 펠라 가까이 산에서 혼자 있을 때 거친 체험이었다. 헤르몬산에서 혼자 있던 이 기간은 순전히 인간적 생애의 종결, 다시 말해서 그가 필사자로 자신을 수여하는 일이 절차상 종결되었음을 표시한다. 한편 후일에 혼자 지낸 것은 자신 수여의 더욱 신다운 단계가 시작된 것을 표시했다. 예수는 헤르몬산의 비탈에서 여섯 주 동안 하나님과 함께 혼자서 살았다.

8. 헤르몬산에서 머무르다

134:8.1 (1492.8) 케자리아 빌립비 근처에서 얼마 동안 시간을 보낸 뒤에, 예수는 식량을 준비하였다. 짐 나르는 짐승과 티글라스라는 이름의 소년을 구하고 나서, 다마스커스 길을 따라서 가다가, 헤르몬산 기슭의 언덕에, 언젠가 베이트젠이라고 알려진 마을로 들어갔다. 서기 25년 8월 중순 가까이 되어 그는 여기에 본부를 정했다. 식량을 티글라스에게 맡기고 나서 외딴 산비탈을 올라갔다. 티글라스는 산을 향하여, 이 첫날에 해수면 위로 1800미터쯤에 지정된 곳까지 예수를 따라서 올라갔다. 거기서 그들은 돌 무더기 상자를 지었고 그 속에 티글라스는 한 주에 두 번, 먹을 것을 집어넣어야 했다.

134:8.2 (1493.1) 티글라스를 떠난 뒤에, 첫째 날에 예수는 산을 조금만 올라갔고 기도하려고 멈추었다. 다른 일 가운데 아버지에게 수호 세라핌을 “티글라스와 함께 있도록” 돌려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필사자로 존재하는 현실과 싸우는 마지막 투쟁까지 그가 혼자 진행하도록 허락해주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이 요청은 허락되었다. 그를 안내하고 버티게 할 깃드는 조절자만 함께 하고 그는 큰 시험에 들어갔다.

134:8.3 (1493.2) 예수는 산에 있는 동안 아껴서 먹었다. 한 번에 하루나 이틀 동안만 전혀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이 산에서 그가 만난 초인간 존재들, 정신적으로 씨름하고 능력으로 물리친 자들은 실재했다. 그들은 사타니아 체계에서 그의 큰 적이었다. 병든 정신에서 생겨난 환상(幻想)과 현실을 구별할 수 없는 필사자, 허약해지고 굶은 필사자의 지적 변덕에서 생긴 상상의 착각이 아니었다.

134:8.4 (1493.3) 예수는 8월의 마지막 3주와 9월의 첫 3주를 헤르몬산에서 보냈다. 이 몇 주 동안, 정신을 이해하고 인격을 통제하는 여러 수준에 도달하는 필사자의 과제를 마쳤다. 하늘 아버지와 교통하는 이 기간 내내, 깃드는 조절자도 또한 주어진 임무를 마쳤다. 거기서 이 지상의 사람으로서 인간의 목표를 성취했다. 오로지 정신을 조절자와 조율하는 마지막 단계를 마치는 일이 남았다.

134:8.5 (1493.4) 5주가 넘도록 파라다이스 아버지와 끊임없이 친교한 뒤에, 예수는 자신의 성품 뿐 아니라 시공에서 인격이 표현되는 물질 수준을 확실히 뛰어넘었다는 것을 절대로 확신하게 되었다. 그의 신다운 성품이 인간 성품을 지배하는 것을 충분히 믿고, 이를 서슴지 않고 주장하였다.

134:8.6 (1493.5) 산에서 체류가 끝날 때가 가까이 되어, 예수는 사람의 아들로서, 요수아 벤 요셉으로서 사타니아에 있는 적들과 회담을 가지도록 허락해주실 것을 아버지께 요청하였다. 이 요구는 허락되었다. 헤르몬산에서 마지막 주에, 큰 유혹, 즉 우주의 재판이 일어났다. (루시퍼를 대표하는) 사탄, 그리고 반역한 행성 영주 칼리가스티아가 예수와 함께 자리에 있었고 그의 눈에 완전히 보이게 나타났다. 이 “유혹,” 모반한 성격자들의 곡해를 직면하여 인간적 충성심을 재는 이 마지막 시련은 먹을 것이나 성전 뾰족탑이나 주제넘은 행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세상의 나라들이 아니라 막강하고 영화로운 우주의 통치권과 상관이 있었다. 너희의 기록에 나타나는 상징은 세상이 유치하게 생각하던 뒤떨어진 시대를 위하여 의도한 것이었다. 후일의 세대들은 헤르몬산에서 그 중대한 날에 사람의 아들이 얼마나 큰 투쟁을 겪었는가 이해해야 한다.

134:8.7 (1493.6) 루시퍼의 밀사들이 내민 여러 제안과 반대 제안에 대하여 예수는 이렇게만 대답하였다: “나의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그리고 너, 반역한 아들아,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너를 신답게 재판하기를! 나는 너의 창조자인 아버지이라. 나는 너를 도저히 공정하게 판단할 수 없고 너는 내 자비를 이미 걷어찼느니라. 나는 너를 더 큰 우주의 재판관들이 판결하도록 넘기노라.”

134:8.8 (1494.1) 루시퍼가 제시한 모든 절충안과 임시 방편에 대하여, 육신화로 자신을 수여함에 관하여 내놓은 모든 그러한 허울 좋은 제안에 대하여,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을 뿐이다, “파라다이스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벅찬 시련이 끝났을 때, 떨어져 있던 수호 세라핌이 예수의 옆으로 돌아와서 그를 보살폈다.

134:8.9 (1494.2) 늦은 여름 어느 날 오후, 나무들 사이에 고요한 자연 속에서, 네바돈의 미가엘은 그의 우주를 다스리는, 아무도 도전하지 못하는 통치권을 얻었다. 그날에 시공의 진화 세계에서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육신화된 생명을 한껏 살라고 창조 아들들에게 주어진 과제를 마쳤다. 몇 달 뒤에 세례를 받는 날까지, 이 중대한 업적은 우주에서 발표되지 않았으나 이 모두가 그날, 산에서 정말로 일어났다. 헤르몬산에서 머무르다가 예수가 내려왔을 때, 사타니아에 일어났던 루시퍼 반란과 유란시아에서 칼리가스티아가 탈퇴한 일은 실질적으로 해결되었다. 자신이 지은 우주의 통치권을 얻는 데 요구되는 마지막 대가를 예수는 치렀다. 이 통치권은 그 자체로서 모든 반역자의 지위를 규제하고 앞날의 모든 그러한 봉기를 (언제라도 일어난다면) 단숨에 효과적으로 처리해도 좋다고 확정한다. 따라서 이른바 예수의 “큰 시험”은 그가 세례받기 얼마 전에 일어났고 그 사건 바로 뒤에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34:8.10 (1494.3) 산에서 이 체류를 마쳤을 때, 산을 내려가는 동안에 예수는 먹을 것을 가지고 만날 장소로 올라오는 티글라스를 만났다. 그를 돌려보내며 예수는 다만 이렇게 말했다: “쉬는 시간이 지났느니라. 나는 아버지의 일로 돌아가야 하노라.” 단으로 돌아가는 동안 그는 말이 없었고, 많이 변화된 사람이었다. 단에서 예수는 소년을 보내고 당나귀를 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가 왔던 똑같은 길로, 남쪽으로 가버나움까지 나아갔다.

9. 기다리는 시간

134:9.1 (1494.4) 이제는 여름의 끝이 가까웠고 속죄의 날과 초막 축제가 있을 무렵이었다. 예수는 가버나움에서 안식일 동안에 가족 회의를 열었다. 다음 날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났고, 호수의 동쪽으로 가서, 게라사를 지나서 요단강 유역으로 내려갔다. 가는 길에 동반자와 얼마큼 이야기하는 동안 요한은 예수에게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을 눈치챘다.

134:9.2 (1494.5) 예수와 요한은 베다니에서 나사로와 그 자매들과 함께 그날 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 일찍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들은 그 도시 안과 주위에서 거의 3주를 보냈다. 적어도 요한은 그랬다. 여러 날 동안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혼자 갔고, 한편 예수는 근처에 있는 언덕 위를 걸어 다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영적으로 친교하는 시간을 여러 번 가졌다.

134:9.3 (1494.6) 두 사람은 속죄의 날에 진행되는 엄숙한 예배에 참석했다. 요한은 유대인의 종교 의식 중 어느 날보다 이날의 의식(儀式)에 크게 감명을 받았지만 예수는 생각에 잠긴, 말 없는 구경꾼이었다. 사람의 아들에게 이 연출은 불쌍하고 보기에 딱했다. 모두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과 속성을 잘못 나타낸다고 보았다. 이날의 행사는 신이 재판하는 사실과 무한히 자비를 베푼다는 진리의 엉터리 시늉으로 보았다. 아버지의 사랑하는 성품과 우주에서 자비롭게 안내하심에 관하여 참된 진리를 선포하고 싶어 속이 탔지만 충실한 훈계자는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타일렀다. 그러나 그날 밤 베다니에서 예수는 수많은 논평을 하였고, 이것은 요한의 마음을 크게 뒤흔들었다. 요한은 그날 저녁에 그들이 듣는 앞에서 예수가 하신 말씀의 참 중요성을 결코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134:9.4 (1495.1) 예수는 요한과 함께 초막 축제가 있던 주간 내내 남아 있으려고 계획하였다. 이 축제는 온 팔레스타인에서 해마다 있는 휴일이었고 유대인의 휴가철이었다. 비록 예수는 그 절기의 흥겨움에 끼지 않았어도 젊은이와 늙은이들이 태평하고 기쁘게 마음껏 노는 것을 구경하는 동안 그가 기뻐하고 만족해하는 것이 분명하였다.

134:9.5 (1495.2) 축하하는 주간의 한가운데 축제 행사가 끝나기 전에, 예수는 파라다이스 아버지와 교통하기에 더 좋을 듯한 산으로 가서 쉬고 싶다고 말하고 요한을 떠났다. 요한은 함께 갔을 터이지만, 예수는 그가 축제 행사 끝까지 남아 있으라 고집하며 말했다: “네가 사람의 아들의 짐을 질 필요는 없느니라. 도시가 평화롭게 자는 동안 파수꾼만 밤새 지켜야 하느니라.”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베다니 가까이, 산에서 거의 한 주 동안 혼자 지낸 뒤에 그는 가버나움을 향하여 떠났다. 집으로 가는 길에 길보아의 비탈에서 하루 낮과 밤을 혼자 보냈다. 거기는 사울 왕이 목숨을 끊은 곳에서 가까웠다. 가버나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예루살렘에서 요한을 떠났을 때보다 더욱 명랑한 듯하였다.

134:9.6 (1495.3) 다음 날 아침 예수는 소지품이 들어 있는 상자가 있는 곳으로 갔고, 이것은 세베대의 작업장에 남아 있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일하러 나서면서 말했다.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바쁘게 일하는 것이 내게 마땅하도다.” 이듬해 1월까지, 배 작업장에서, 아우 야고보 옆에서 여러 달 동안 일했다. 예수와 함께 일하는 이 기간이 지난 뒤에, 무슨 의심이 떠올라 사람의 아들이 일생에 할 과업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든 상관 없이, 야고보는 예수의 사명에 대한 믿음을 다시는 정말로 송두리째 버리지 않았다.

134:9.7 (1495.4) 배 작업장에서 일하던 이 마지막 기간에, 예수는 몇몇 큰 배의 내부 끝손질을 하느라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손으로 하는 어떤 일에도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칭찬할 만한 작품을 마쳤을 때 인간적 성취에 만족감을 느끼는 듯하였다. 그는 비록 하찮은 일에 거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어도 어떤 주어진 과업에 필수인 것이 닥치면 공들여 일하는 노동자였다.

134:9.8 (1495.5) 시간이 지나자, 요단강에서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며 설교하는 어떤 요한이라는 사람의 소문이 가버나움에 도착했다. 요한은 이렇게 설교하였다: “하늘나라가 가까웠도다. 뉘우치고 세례를 받으라.” 예루살렘에서 가장 가까운 강 여울에서부터 요한이 요단강 유역을 거슬러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 예수는 이 여러 보고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다음 해, 서기 26년 1월에 펠라에 가까운 점까지 요한이 강을 거슬러 올라올 때까지 예수는 배 만드는 일을 계속하였고, 이때 연장을 내려놓고 외쳤다, “때가 왔도다.” 당장에 그는 세례를 받으려고 요한 앞에 나섰다.

134:9.9 (1495.6) 그러나 예수에게 큰 변화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땅에서 이리저리 다니는 동안 그가 방문하고 보살폈던 사람들 중에 거의 아무도, 대중을 가르치는 그 선생이 예전에 한 사사로운 개인으로서 알고 사랑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는 것을 후일에 알아보지 못했다. 초기에 은혜를 입은 자들이 그가 나중에 대중을 가르치는 권위 있는 선생의 역할로 나타난 그를 이렇게 알아보지 못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여러 해 동안 이 정신과 영(靈)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이것은 헤르몬산에서 그 중대한 체류 동안에 끝났다.

제 135 편 세례자 요한

유란시아서

제 135 편

세례자 요한

135:0.1 (1496.1) 세례자 요한은 가브리엘이 엘리자벳에게 그 전년 6월에 약속한 대로, 기원전 7년 3월 25일에 태어났다. 다섯 달 동안 엘리자벳은 가브리엘이 찾아온 것을 비밀로 지켰다. 엘리자벳이 남편 사가리아에게 이야기했을 때 그는 크게 불안해하였다. 요한이 태어나기 약 6주 전에 특별한 꿈을 꾼 뒤에야 아내의 이야기를 완전히 믿었다. 가브리엘이 엘리자벳을 방문한 것과 사가리아의 꿈을 제외하고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연결되어 아무런 특별하거나 초자연적 사건이 없었다.

135:0.2 (1496.2) 여드렛날에 유대인의 풍습에 따라서 요한은 할례를 받았다. 예루살렘에서 6.4킬로미터쯤 서쪽에, 그 시절에 유다 시로 알려진 작은 마을에서 날마다, 해마다 보통 아이로서 자랐다.

135:0.3 (1496.3) 요한의 어린 시절 초기에 일어난 가장 중대한 사건은 부모와 함께 예수와 나사렛 가족을 찾아본 것이었다. 이 방문은 기원전 1년 6월에 있었고 이때 그는 여섯 살이 조금 넘었다.

135:0.4 (1496.4) 나사렛에서 돌아온 뒤에 요한의 부모는 소년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기 시작했다. 이 작은 마을에는 아무런 회당 학교가 없었다. 그러나 사가리아는 사제였기 때문에 교육을 썩 잘 받았고 엘리자벳은 보통 유대 여인보다 훨씬 낫게 교육을 받았다. “아론의 딸들”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그 여자 또한 사제 집안이었다. 요한이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에게 정신적ㆍ영적 훈련을 시키는 데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사가리아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잠시만 근무했고 그래서 아들을 가르치는 데 시간을 많이 들였다.

135:0.5 (1496.5) 사가리아와 엘리자벳은 작은 농장이 있었고 거기서 양을 길렀다. 이 토지에서 도저히 생계를 이을 수 없었지만, 사가리아는 사람들이 사제들에게 바친 성전 기금으로부터 정기 수당을 받았다.

1. 요한이 나지르인이 되다

135:1.1 (1496.6) 요한은 열네 살에 졸업하는 어떤 학교에도 다니지 않았지만, 부모는 이 해가 정식으로 나지르인의 서약을 하기에 적당한 해라고 정했다. 따라서 사가리아와 엘리자벳은 아들을 아래로, 사해(死海) 옆에 있는 엥게디로 데려갔다. 여기는 나지르인 단체의 남쪽 본부였고 거기서 그 아이는 일생토록 이 계급에 정식으로 엄숙하게 가입하였다. 이 예식이 있고 나서, 그리고 어떤 취하는 음료도 삼가고, 머리를 기르고, 죽은 사람 만지기를 삼가겠다는 서약이 있은 뒤에, 그 가족은 예루살렘으로 나아갔다. 거기서 성전 앞에서 요한은 나지르인 서약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헌물 바치는 일을 마쳤다.

135:1.2 (1496.7) 요한은 뛰어난 선구자들, 곧 삼손과 선지자 사무엘에게 행했던 바로 그 일생의 서약을 하였다. 종신 나지르인은 몸을 성스럽게 바친 거룩한 인물이라고 간주되었다. 유대인들은 대사제와 거의 가까운 정도로 존경심과 공경하는 태도로 나지르인을 보았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 대사제들을 제외하고, 오직 일생토록 몸을 바친 나지르인만 성전에서 지성소(至聖所)에 들어가도록 허락받았기 때문이다.

135:1.3 (1497.1)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의 양을 쳤고, 자라서 고귀한 인격을 가진 튼튼한 사람이 되었다.

135:1.4 (1497.2)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엘리야에 관하여 글을 읽은 결과로 요한은 갈멜산의 선지자에게 크게 감명을 받았고 그의 옷 스타일을 채택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날부터 요한은 언제나 털 있는 옷을 입고 가죽 허리띠를 띠었다. 열여섯에 키가 1.8미터 넘었고 거의 완전히 자랐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과 특이한 옷 모습 때문에 그는 정말로 그림 같은 소년이었다. 부모는 이 외아들, 약속의 아이이자 종신 나지르인에게 대단한 것을 기대했다.

2. 사가리아의 죽음

135:2.1 (1497.3) 몇 달 동안 앓고 난 뒤에, 사가리아는 서기 12년 6월에 죽었다. 이때 요한은 열 여덟을 갓 넘었다. 나지르인 서약이 자신의 집안에서도 죽은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이때는 크게 난처한 때였다. 비록 죽은 사람에게 오염되는 것에 관하여 서약한 조건을 따르려고 애쓰기는 했어도 요한은 자기가 나지르인 계급의 요구 조건에 온전히 복종했는가 의심하였다. 따라서, 아버지가 묻힌 뒤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거기에 여인들 마당의 나지르인 구역에서 정화(淨化)에 요구된 희생물을 바쳤다.

135:2.2 (1497.4) 이 해 9월에 엘리자벳과 요한은 마리아와 예수를 찾아보려고 나사렛으로 여행하였다. 요한은 일생의 일을 시작하려고 거의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뿐 아니라 그의 모범을 보고서 요한은 집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를 돌보고 “아버지의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즐거운 방문이 끝났을 때, 예수와 마리아에게 작별을 알린 뒤, 요단강에서 예수에게 세례 주는 사건이 있기까지 요한은 예수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135:2.3 (1497.5) 요한과 엘리자벳은 집으로 돌아가서 앞날을 위하여 비로소 계획을 세웠다. 요한이 성전 기금으로부터 받을 사제의 수당을 거절했으므로 2년이 지나자 그들은 거의 집을 잃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양 떼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작정하였다. 따라서 요한이 스무 살이 되던 해 여름에, 그들은 헤브론으로 옮겨 갔다. 이른바 “유대의 황무지”에서, 엥게디로부터 사해로 들어가는 큰 물줄기의 가지인 어느 시냇물을 따라서, 요한은 양을 쳤다. 엥게디 촌은 종신 및 시한부로 헌신하는 나지르인뿐 아니라, 금욕하는 수많은 다른 목축자를 포함했다. 이들은 이 지역에서 가축 떼와 함께 모여서 나지르인 단체와 사귀었다. 그들은 양을 길러서, 그리고 부유한 유대인들이 그 계급에게 준 물품으로 생계를 이었다.

135:2.4 (1497.6) 시간이 지나자 요한은 헤브론으로 돌아가는 일이 뜸해졌고, 한편 엥게디로 빈번히 찾아갔다. 그는 대다수의 나지르인과 아주 온통 달랐기 때문에 그 단체와 친밀하게 사귀기가 어려움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엥게디 촌이 인정하는 지도자요 우두머리인 아브너를 무척 좋아했다.

3. 목자의 생활

135:3.1 (1497.7) 이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따라서 요한은 돌 오두막과 밤에 쓰는 울타리를 열둘 이상 지었고, 이것은 쌓아 놓은 돌로 이루어졌다. 그 안에서 그는 양과 염소 떼를 지키고 보호할 수 있었다. 목동으로 지내는 요한의 생활은 생각할 시간을 상당히 주었다. 그는 베스주르의 고아 소년 에즈다와 많이 이야기했다. 어떤 면에서 이 아이를 양자로 삼았다. 안식일 예배를 위하여 엥게디로 내려갔을 때 뿐 아니라 어머니를 만나고 양을 팔려고 헤브론으로 여행 갔을 때, 에즈다는 양 떼를 돌보았다. 요한과 그 소년은 무척 검소하게 살았고 양고기, 염소 젖, 야생 꿀, 그리고 그 지역에서 먹을 수 있는 메뚜기를 먹고 살았다. 때때로 헤브론과 엥게디에서 가져온 식량으로 이 정규 식사를 보충하였다.

135:3.2 (1498.1) 엘리자벳은 요한에게 팔레스타인과 세상일에 대하여 소식을 알려주었다. 옛 체제가 막을 내리는 때가 급히 다가오고 있다, 그가 새 시대, 곧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사자가 되리라는 그의 확신은 더욱 더 깊어졌다. 이 거친 목자는 다니엘 선지(先知)가 쓴 글을 무척 좋아했다. 다니엘이 큰 우상을 묘사한 것을 1천 번 읽었다. 사가리아는 이것이 바빌론으로부터 시작하여,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마침내 로마까지 세계의 열강의 역사를 대표한다고 일러주었다. 이미 로마가 다국어를 쓰는 그런 민족과 종족들로 구성되어서, 요한은 로마가 결코 강하게 결속되고 굳게 단결된 제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시절에도 그는 로마가 시리아ㆍ에집트ㆍ팔레스타인 그리고 기타 여러 지방으로 갈라져 있다고 믿었다. 다음에 그는 더 읽었다: “이 왕들의 시절에 하늘의 하나님이 결코 멸망하지 아니할 나라를 세우리라. 이 나라는 다른 민족에게 맡겨지지 않겠으나 이 모든 나라를 산산조각 부수고 삼켜 버릴지며 그 나라는 영원토록 서리라,” “그에게 영토와 영화(榮華)와 나라를 주었고 모든 민족과 나라와 언어가 그를 섬길지니라. 그의 영토는 영원한 영토요 사라지지 아니하며 그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아니하리라.” “나라와 영토, 그리고 온 하늘 아래에서 나라의 위세를 최고자의 성자(聖者) 민족에게 주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모든 영토가 그를 섬기고 복종할지니라.”

135:3.3 (1498.2) 요한은 예수에 관하여 부모한테서 들은 것, 그리고 성서에서 읽은 이 구절들이 일으킨 혼란에서 결코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다니엘서에서 그는 읽었다: “내가 밤에 환상을 보았으니, 보라, 사람의 아들과 같은 자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왔고 그에게 통치권과 영화와 나라가 주어졌느니라.” 그러나 선지자의 이 말씀은 부모가 가르쳐 준 것과 조화되지 않았다. 열여덟 살에 방문했을 때 예수와 나눈 이야기도 성서의 이 말씀과 맞지 않았다. 이런 혼란이 있었는데도 온갖 혼란을 통해서 내내, 먼 사촌 나사렛 예수가 참 메시아이다, 다윗의 왕좌에 앉으려고 왔다, 그리고 자기(요한)는 그가 미리 보낸 사자(使者)요 으뜸가는 지지자가 되리라고 어머니는 확신을 주었다.

135:3.4 (1498.3) 로마의 악덕과 사악함, 제국의 방탕하고 부도덕함에 대하여 그가 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헤롯 안티파스와 유대 총독들의 악행에 관하여 아는 것으로부터 요한은 시대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거칠고 고귀한 이 자연의 아이에게는 사람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신성한 시대―하늘나라―가 밝아오는 것을 위하여 세상이 무르익은 듯하였다. 자기가 옛 선지자들의 마지막이요, 새 선지자들의 처음이 되리라는 느낌이 요한의 가슴 속에서 자랐다. 박차고 나가서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외치고 싶은 끓어오르는 충동으로 무척 마음이 설렜다. “회개하라! 하나님께 바르게 행하라! 마지막 날을 위하여 준비하라. 세상일의 새롭고 영원한 체제, 하늘나라가 오는 것을 위하여 너희 스스로 준비하라.”

4. 엘리자벳의 죽음

135:4.1 (1499.1) 서기 22년 8월 17일, 요한이 스물 여덟이었을 때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엘리자벳의 친구들은 자신의 가족 안에서도 죽은 사람과 접촉하지 말라는 나지르인의 제한을 알고서, 요한을 부르기 전에 엘리자벳의 장례를 위하여 모든 주선을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에즈다에게 양 떼를 엥게디로 몰라고 지시하고 헤브론을 향하여 떠났다.

135:4.2 (1499.2) 어머니의 장례식을 지내고 엥게디로 돌아와서 그는 양 떼를 그 단체에게 내어주었다. 그리고 금식하고 기도하는 동안에 바깥 세계로부터 한동안 따로 떨어져 있었다. 요한은 신에게 접근하는 옛 방법들만 알았다. 오직 엘리야ㆍ사무엘ㆍ다니엘서와 같은 기록들만 알고 있었다. 엘리야는 그에게 선지자의 이상(理想)이었다. 엘리야는 선지자로 여겨지게 된, 이스라엘 최초의 선생이었다. 요한은 자기가 길고도 뛰어난 이 계열의 하늘 사자 중에서 마지막이 되리라고 참으로 믿었다.

135:4.3 (1499.3) 2년 반 동안 요한은 엥게디에서 살았다. “시대의 끝이 가까웠다,” “하늘나라가 바야흐로 나타나려 한다”고 그 단체의 대부분을 설득하였다. 그의 초기 가르침은 모두, 메시아가 유대 국가를 이방(異邦) 통치자의 지배에서 구원하리라 약속된 사람이라는 당대 유대인의 생각과 개념에 바탕을 두었다.

135:4.4 (1499.4) 이 기간 내내, 요한은 엥게디에 있는 나지르인들의 집에서 발견한 신성한 기록을 많이 읽었다. 특히 이사야서, 그리고 그 시대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선지자였던 말라기의 기록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 그는 이사야서의 마지막 5장을 읽고 또 읽고 이러한 예언을 믿었다. 다음에 말라기서를 읽곤 하였다: “보아라, 주의 크고 무서운 날이 오기 전에 너희에게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리라. 내가 와서 저주로 땅을 칠까 하여,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이들에게 돌이키게 하고 아이들의 마음을 저희 아버지에게 돌이키게 하리라.” 엘리야가 돌아오리라는 이 말라기의 약속이 가까스로 요한이 나가서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전도하고 동료 유대인들에게 다가올 진노를 피하라고 훈계하는 것을 막았다. 요한은 다가오는 하늘나라의 소식을 선포할 준비가 되고도 남았지만, 엘리야가 오리라는 이 기대(企待)는 2년이 넘도록 그를 붙들어 두었다. 그는 자신이 엘리야가 아님을 알았다. 말라기가 무슨 뜻으로 말했는가? 그 예언이 글자 그대로인가 아니면 상징인가? 어떻게 진실을 알 수 있을까? 마침내, 첫 선지자가 엘리야라는 이름이었으니까, 마지막 선지자도 궁극에는 똑같은 이름으로 알려질 것이라고 감히 생각했다. 그런데도 의심이 들었고 이 의심은 언제라도 자신을 엘리야라고 일컫지 못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135:4.5 (1499.5) 엘리야의 영향 때문에, 요한은 같은 시대에 살던 사람들의 죄와 악덕을 직접 퉁명스럽게 공격하는 방법을 채택하게 되었다. 그는 엘리야처럼 옷을 입고 엘리야처럼 말하려고 애썼다.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 그는 옛 선지와 꼭 같았다. 바로 그렇게 튼튼하고 그림 같은 자연의 사람이요, 바로 그러한 겁 없고 담대한, 정의(正義)를 부르짖는 전도자였다. 요한은 글을 모르지 않았고 유대인의 성스러운 기록을 익히 알았지만, 그가 교양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는 생각이 뚜렷한 사람이요, 힘차게 외치는 연설가요, 불 같이 비난하는 자였다. 도저히 그 시대에 본보기라 할 수 없었지만, 그는 거침없이 꾸짖는 소리였다.

135:4.6 (1499.6) 마침내 그는 새 시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메시아가 오는 것을 알리는 사자가 되리라고 작정했다. 서기 25년 3월 어느 날, 그는 모든 의심을 떨쳐 버리고 엥게디를 떠나서, 대중 전도자로서 짧기는 했지만 찬란한 경력을 시작했다.

5. 하나님의 나라

135:5.1 (1500.1) 요한이 전한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활동 무대에 나타났던 당시에 유대 민족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를 고려해야 한다. 거의 1백 년 동안, 온 이스라엘은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들이 어찌하여 이방의 군주들에게 줄곧 예속되었는가 설명하기가 난처했다. 의로움은 언제나 번영과 권력으로 보상을 받는다고 모세가 가르치지 않았는가? 그들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아니었는가? 어째서 다윗의 왕좌가 황폐하고 비어 있는가? 모세의 신조와 선지자들의 훈계에 비추어볼 때, 유대인들은 그들의 나라가 어째서 오랫동안 황폐해졌는가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깨달았다.

135:5.2 (1500.2) 예수와 요한의 시절보다 1백 년쯤 앞서, 팔레스타인에서 새로운 학파의 종교 선생, 곧 묵시론자들이 일어났다. 이 새 선생들은 민족의 죄 때문에 유대인이 벌을 받고 있다고 주장함으로 그들이 고통과 치욕을 당한다고 설명하는 한 신앙 체계를 개발했다. 그들은 예전에 바빌로니아 및 기타 포로 생활을 설명하는 데 적용된 잘 알려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묵시론자들은 이렇게 가르쳤다: 이스라엘은 기운을 내야 한다, 고통받는 날이 거의 끝났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단련이 거의 끝났다, 하나님은 이방의 외국인들에 대하여 참을성이 거의 없어졌다. 로마 통치의 끝은 그 시대의 끝,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의 종말과 비슷한 말이었다. 이 새 선생들은 다니엘의 예언에 무척 의존하였고, 창조는 마지막 단계에 막 들어가려 한다, 이 세상의 나라들은 바야흐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려 한다고 한결같이 가르쳤다. 그 시절에 유대인의 머리에는 이것이 요한과 예수의 가르침에 두루 이어지는 구절―하늘나라―의 뜻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에게, “하늘나라”라는 구절은 오직 한 가지 뜻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다스리는 것처럼 하나님이 (메시아가) 완전한 권력을 가지고 땅의 나라들을 다스리는 상태―“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절대로 올바른 국가를 의미했다.

135:5.3 (1500.3) 요한의 시절에 유대인은 모두 기대하며 물었다, “얼마나 빨리 그 나라가 올 것인가?” 이방 국가들의 통치가 종말에 가까웠다는 느낌이 일반적으로 퍼져 있었다. 온 유대인 사회에서 오랜 시대에 걸쳐 품었던 소망이 그 세대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팔팔한 희망과 강렬한 기대가 퍼져 있었다.

135:5.4 (1500.4) 다가오는 나라가 어떤 성질을 가졌는가 추정하는 데 크게 의견이 달랐어도, 유대인들은 그 사건이 가까이, 아니 바로 문 앞에 다가왔다는 믿음을 똑같이 가졌다. 구약을 읽는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눈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새 임금이 나타나기를 찾고 있었다. 적들의 손에서 구원받은 나라, 다윗 왕의 후계자, 곧 마땅하고 올바른 전 세계 통치자로서 빨리 인정받을 그러한 메시아가 주재하는, 다시 태어난 유대인의 나라를 글자 그대로 기대하고 있었다. 이보다 작지만 또 다른 집단의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엄청나게 다른 견해를 가졌다. 다가오는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세상은 확실한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나님 나라가 서도록 안내하리라, 이 나라는 영원한 영토가 되리라, 죄는 그치게 될 것이요, 새 나라의 시민들은 이 끝없는 행복을 누리면서 불멸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135:5.5 (1500.5) 깨끗이 하거나 정화(淨化)하는 어떤 철저한 훈련이 땅에서 새 나라가 서기 전에 반드시 앞설 것이라고 모두가 의견을 모았다. 글자대로 풀이하는 사람들은 모든 불신자를 죽이는 세계적 전쟁이 따를 것이요, 한편 충실한 자는 계속하여 보편적이고 영원한 승리로 밀고 갈 것이라고 가르쳤다. 영적 해석자들은 하나님의 큰 심판이 그 나라의 도래를 알리리라, 그 심판은 불의한 자를 벌 주고 최종으로 소멸하는 마땅한 판결을 받도록 넘길 것이라, 동시에 선택된 백성 가운데 믿는 성자(聖者)들을 사람의 아들과 함께 높은 영예와 권한의 자리로 높일 것이요, 이 사람의 아들은 되찾은 나라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스릴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 후자 집단은 새 나라에 많은 경건한 이방인이 가입하는 것이 허락될 수 있다고 믿기도 하였다.

135:5.6 (1501.1) 유대인 가운데 더러는 하나님이 어쩌면 직접 신의 간섭으로 이 새 나라를 세울지 모른다는 의견을 지녔지만, 대다수는 하나님이 어떤 대표하는 중재자, 메시아를 사이에 둘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이 예수와 요한의 세대에 살던 유대인들의 머리 속에서 메시아라는 낱말이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하게 가능한 의미였다. 메시아는 도저히, 그저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거나 올바르게 살 필요성을 외치는 사람을 언급할 수 없었다. 그러한 모든 거룩한 사람에게 유대인들은 선지자라는 칭호를 주었다. 메시아는 선지자보다 더한 사람이어야 했다. 메시아는 새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것이었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유대인의 전통적 의미에서 메시아일 수 없었다.

135:5.7 (1501.2) 누가 이 메시아일까? 또 다시 유대인 선생들의 의견은 달랐다. 옛 선생들은 다윗의 아들이라는 신조에 집착했다. 새 선생들은, 새 나라가 하늘나라이니까, 새 통치자는 또한 신다운 인물, 하늘에서 하나님의 바른 편에서 오래 앉아 있던 자일지 모른다고 가르쳤다.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새 나라의 통치자를 이렇게 상상했던 사람들은 그가 인간 메시아가 아니요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하나님의 아들―로서 새롭게 된 땅의 통치를 이렇게 맡으려고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하늘의 왕자라고 보았다. “뉘우치라, 하늘나라가 가까웠음이라!” 하고 요한이 외치면서 떠나갔을 때 유대인 세계의 종교적 배경이 이러했다.

135:5.8 (1501.3) 그러니까 하늘나라가 다가온다는 요한의 선포는 그의 정열적 전도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적어도 여섯 가지 다른 뜻이 있었음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요한이 사용한 구절에 그들이 어떤 의미를 부여했든지 상관 없이, 이 유대 왕국을 기다리는 여러 집단은 각자, 성실하고 열심 있고 올바름과 뉘우침을 부르짖는 이 투박한 전도자의 외침에 흥미를 느꼈고, 그는 청중에게 “다가올 진노를 피하여 달아나라”고 매우 엄숙하게 훈계하였다.

6. 요한이 전도를 시작하다

135:6.1 (1501.4) 서기 25년 3월에 일찍, 요한은 사해의 서쪽 해안을 돌아서, 요단강을 거슬러 올라가 예리고의 맞은 편으로 여행했는데, 이 고대의 여울을 지나서 요수아와 이스라엘의 자손이 약속된 땅으로 처음 들어갔다. 강 저편으로 건너가서 여울의 입구 가까이에 자리잡고 그는 강을 건너 오가는 길에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요단강을 건너는 모든 길목 중에서 왕래가 가장 빈번한 곳이었다.

135:6.2 (1501.5)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에게 요한은 설교자보다 더한 사람인 것이 분명했다. 유대의 황야에서 올라온 이 이상한 사람에게 귀를 기울인 사람들의 대다수는 선지자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믿으며 떠나갔다. 지치고 누구인가 기대하던 이 유대인들의 혼이 그런 현상에 깊이 마음이 흔들린 것은 당연하다. 온 유대인 역사에서 아브라함의 경건한 자손들이 “이스라엘이 위로받기”를 그토록 고대하거나 더 열심히 “나라가 회복되기”를 목마르게 기다린 적이 없었다. 유대인 역사 전체에서 “하늘나라가 가까웠다”는 요한의 말이 요단강의 이 남쪽 길목의 둑에서 그렇게 신비스럽게 나타난 바로 그때처럼 그렇게 깊이, 널리 호소한 적도 없었다.

135:6.3 (1502.1) 그는 아모스처럼 목자 출신이었다. 옛날의 엘리야처럼 옷차림을 했고 “엘리야의 기백과 권능”으로 우렁차게 훈계하고 경고를 퍼부었다. 요단강 가를 따라서 그가 전도한다는 소식을 여행자들이 널리 퍼뜨리자, 온 팔레스타인에 두루 이 이상한 전도자가 대단한 소동을 일으킨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35:6.4 (1502.2) 이 나지르인 전도자가 하는 일에는 아직도 또 다른 새로운 모습이 있었다. 요단강에서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그는 신자들에게 모조리 세례를 주었다. 비록 세례가 유대인 사이에 새로운 예식은 아니었어도 그들은 지금 요한이 사용하는 것처럼 세례가 쓰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성전 바깥 마당에서 친교하도록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이렇게 세례를 주는 것이 오랫동안 관례였지만, 바로 유대인들은 회개하는 뜻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요구된 적이 없었다. 요한이 전도하고 세례를 주기 시작한 때부터 헤롯 안티파스의 부추김으로 체포되고 갇힐 때까지 겨우 열다섯 달이 사이에 끼었지만, 그는 이 짧은 기간에 10만 명이 훨씬 넘는 회개자에게 세례를 주었다.

135:6.5 (1502.3) 요단강을 거슬러 북쪽으로 떠나기 전에 요한은 베다니 여울에서 넉 달 동안 전도했다. 수만 명의 청중, 더러는 호기심이 있었지만 열심 있고 심각한 많은 사람이 유대ㆍ페레아ㆍ사마리아의 모든 지역으로부터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왔다. 몇 사람이 갈릴리에서 오기도 했다.

135:6.6 (1502.4) 이 해 5월에, 아직도 베다니 여울에 남아 있을 때, 사제와 레위인들은 그가 메시아임을 주장하는가, 누구의 권한으로 설교하는가 요한에게 물으려고 대표단을 보냈다. 요한은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가서 너희 주인들에게 ‘황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를 들었다고 이르라. 선지자가 이렇게 말씀한 바와 같으니라: ‘주의 길을 예비하라, 우리 하나님을 위하여 큰길을 곧게 하라. 골짜기가 모두 채워지겠고 산과 언덕이 모조리 낮아지리라. 고르지 않은 땅이 평지가 되고 거친 곳이 매끄러운 골이 되리라.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135:6.7 (1502.5) 용감하기는 했어도 요한은 입이 거친 설교자였다. 어느 날 요단강 서쪽 둑에서 설교하며 세례를 주고 있을 때, 바리새인 한 무리와 사두개인 여럿이 앞으로 나와 세례를 받으려고 나섰다. 물 속으로 이끌기 전에, 요한은 그 무리에게 일렀다: “불 앞에 있는 독사들처럼, 누가 너희에게 다가올 진노를 피하라고 경고하더냐? 나는 너희에게 세례를 주겠거니와 너희 죄를 용서받고 싶으면 진지한 회개에 마땅한 열매를 맺으라 경고하노라. 아브라함이 너희 선조라 내게 이르지 말라. 내가 선언하노니 하나님은 여기 너희 앞에 있는 돌 열두 개를 아브라함에게 합당한 자손으로 세울 수 있느니라. 지금도 도끼가 나무의 바로 그 뿌리에 놓여 있느니라.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자르고 불에 던지도록 정해졌느니라.” (그가 언급한 돌 열두 개는 “열두 부족”이 약속된 땅에 처음 들어갔을 때 바로 이 자리에서 그들이 건너간 것을 기념하려고 요수아가 세운 이름난 기념비였다.)

135:6.8 (1502.6) 요한은 제자들을 위하여 학급을 인도했고 그렇게 인도하면서 새로운 생활의 세부를 가르치고 많은 질문에 대답하려고 애썼다. 율법의 글자 뿐 아니라 정신을 가르치라고 선생들에게 충고하였다. 부유한 자에게 가난한 자를 먹이라고 가르쳤고 세금 걷는 자에게 일렀다: “너희에게 배당된 것보다 더 빼앗지 말라.” 군인들에게 그는 일렀다: “폭력을 쓰지 말고 그릇되게 아무것도 빼앗지 말라―봉급에 만족하라.” 한편 모든 사람에게 충고하였다: “시대의 끝을 위하여 준비하라―하늘나라가 가까웠느니라.”

7. 요한이 북으로 가다

135:7.1 (1503.1) 요한은 다가오는 나라와 그 임금에 대하여 아직도 뒤범벅이 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오래 전도할수록 더욱 헛갈렸지만 다가오는 나라의 성질에 관한 이 지적(知的) 불확실성은 그 나라가 즉시 나타나는 것이 확실하다는 신념을 조금도 줄이지 않았다. 머리 속에서 요한은 헛갈렸을지 모르지만 영적으로 결코 그렇지 않았다. 다가오는 나라에 관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예수가 그 나라의 통치자가 될 것인가 아닌가, 도저히 확신이 없었다. 요한이 다윗의 왕좌가 회복되리라는 관념에 매달리는 한, 다윗의 도시에서 태어난 예수가 오랫동안 고대하던 구원자라는 부모의 가르침은 일관성이 있는 듯하였다. 그러나 영적 국가, 땅에서 현세의 시대가 끝난다는 교리 쪽으로 마음이 더 기울었을 때, 그러한 사건이 생길 때 예수가 무슨 역할을 할 것인가 못 견디게 의심이 들었다. 어떤 때는 모든 것을 의심했으나 의심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사촌과 이야기할까 정말로 바랐지만 이것은 그들이 명시한 협정에 어긋났다.

135:7.2 (1503.2) 북으로 여행하면서 요한은 예수에 대하여 많이 생각해 보았다. 요단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멈춘 데는 열두 곳이 넘었다. 아담에서 제자들이 “당신이 메시아니이까?” 다짜고짜 던진 질문에 답하여 “내 뒤에 오실 다른 분”이라고 처음으로 언급했다. 그는 덧붙여 말했다: “나보다 더 큰 분이 내 뒤에 오시리라,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 끈을 풀 만한 자격이 없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리라. 도리깨질하는 마당을 샅샅이 깨끗이 하려고 그의 손에 삽이 있느니라. 그는 곡창으로 밀을 모으겠으나 쭉정이는 심판의 불에 태우리라.”

135:7.3 (1503.3) 제자들의 물음에 답하여 요한은 가르침을 계속 확대하였다. “뉘우치고 세례를 받으라”는 수수께끼 같은 초기의 말과 비교해서 유익하고 위로하는 말을 나날이 더하였다. 이때가 되자, 갈릴리와 데카폴리스로부터 군중이 도착하고 있었다. 날마다 열심 있는 신자 몇십 명이 우러러보는 선생과 함께 남아 있었다.

8. 예수와 요한이 만나다

135:8.1 (1503.4) 서기 25년 12월에 요단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요한이 펠라 근처에 이르렀는데 이때가 되자 그의 이름은 온 팔레스타인에 두루 퍼졌고, 그가 한 일은 갈릴리 호수 둘레의 모든 마을 사람이 대화할 때 주요한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예수는 요한이 전하는 말씀에 대하여 좋게 말했고, 이것은 가버나움으로부터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세례받는, 요한의 종파에 합세하게 만들었다. 요한이 펠라 가까이 전도할 자리를 잡은 뒤에 곧, 12월에 어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내려갔고, 나서서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한 주에 한 번씩 요한을 보러 가서, 그 복음 전도자가 하는 일에 관하여 새롭고 눈으로 보고 들은 것을 예수에게 보고하였다.

135:8.2 (1503.5) 예수의 동생 야고보와 유다는 세례를 받으러 요한에게 내려가는 것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었다. 유다가 안식일 예배를 보려고 가버나움으로 건너왔기 때문에 그와 야고보는 회당에서 예수의 강론을 들은 뒤에, 그들의 계획에 대하여 그와 함께 의논하기로 작정하였다. 때는 서기 26년 1월 12일, 토요일 밤이었다. 예수는 이튿날까지 의논을 미룰 것을 요청했고, 그때 그들에게 대답을 줄 것이었다. 그는 그날 밤에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가까이 교통하고 있었다. 동생들과 한낮에 점심을 먹고 요한에게 세례받는 것에 관하여 조언하도록 주선이 되어 있었다. 그 일요일 아침에 예수는 여느 때처럼 배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야고보와 유다는 점심을 가지고 도착했다. 아직 쉬는 정오 시간이 되지 않았다. 예수가 그런 일에 무척 규칙적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목재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35:8.3 (1504.1) 쉬는 정오 시간 바로 전에, 예수는 연장을 내려놓고 작업용 앞치마를 벗고 나서 방에 함께 있던 세 일꾼에게 그저 발표했다, “내 때가 왔도다.” 그는 나가서 동생 야고보와 유다에게 되풀이해서 말했다. “내 때가 왔도다―요한을 만나러 가자.” 그들은 바로 펠라를 향해서 떠났고 여행하면서 점심을 먹었다. 때는 1월 13일, 일요일이었다. 요단강 유역에서 밤을 지냈고, 다음 날 한낮 무렵에 요한이 세례를 주는 장면에 다다랐다.

135:8.4 (1504.2) 요한은 그날 후보자들에게 막 세례를 주기 시작했다. 회개하는 사람 몇십 명이 줄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예수와 두 동생이 열심 있는 남녀들의 줄에서 자리를 잡았고, 이들은 다가오는 나라에 관한 요한의 설교를 믿게 된 사람들이었다. 요한은 세베대의 아들들에게 예수의 소식을 묻고 있었다. 자기의 설교에 대하여 예수가 논평한 것을 들은 적이 있었고 요한은 날마다 그가 그 장면에 도착하는 것을 보기를 기대했지만, 예수가 세례받는 후보자들의 줄에서 인사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135:8.5 (1504.3) 그렇게 큰 무리의 전향자들에게 빠르게 세례를 주는 세부에 열중해서, 요한은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앞에 설 때까지 예수를 올려다보지 못했다. 요한이 예수를 알아보았을 때, 예식(禮式)은 잠시 중지되었고 그동안에 그는 육체의 사촌에게 인사하며 물었다. “어째서 당신은 내게 인사하려고 물 속으로 내려오시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너에게 세례를 받기 위함이라.” 요한이 응답했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나이다. 어째서 당신이 내게 오시나이까?” 예수는 요한에게 속삭였다. “이제 참고 내 말을 들으라. 나와 함께 여기 서 있는 동생들에게 이 모범을 보이는 것이 우리에게 어울리고, 사람들이 내 때가 왔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135:8.6 (1504.4) 예수의 목소리에는 단호하고 권위 있는 빛이 서려 있었다. 서기 26년 1월 14일, 월요일 한낮에, 요단강에서 나사렛 예수에게 세례를 주려고 준비하면서 요한은 감동하여 부르르 떨었다. 이처럼 요한은 예수와 두 동생, 야고보와 유다에게 세례를 주었다. 세 사람에게 세례를 주고 나서, 요한은 그날 이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해산하면서 다음 날 정오에 다시 세례를 시작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사람들이 떠나는 동안, 네 사람은 아직도 물 속에 서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당장에 예수의 머리 바로 위에 한 순간 환영(幻影)이 나타났고 그들은 한 목소리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아주 기뻐하는 자이라.” 큰 변화가 예수의 얼굴에 왔다. 물 속에서 나오자 그는 말없이 그들을 떠나서, 동쪽으로 산을 향하여 갔다. 그리고 아무도 예수를 40일 동안 다시 구경하지 못했다.

135:8.7 (1504.5) 요한은 멀찌감치 떨어져 따라가면서, 어머니의 입으로부터 여러 번 들은 대로, 둘 중에 어느 쪽도 태어나기 전에 가브리엘이 예수의 어머니를 방문했다는 이야기를 그에게 일러주었다. “이제 나는 당신이 구원자임을 확실히 아나이다” 하고 말한 뒤에 예수가 길을 계속 가게 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9. 사십일 동안의 전도

135:9.1 (1505.1) 요한이 제자들에게 돌아갔을 때 (이제 함께 항상 거하는 사람이 스물 다섯이나 서른 명 정도 있었다), 예수의 세례와 연결되어 무슨 일이 막 일어났는가 토론하면서 그들이 열심히 의논하는 것을 발견했다. 예수가 태어나기 전에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방문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또 그가 이 이야기를 해준 뒤에도 예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요한이 이제 일러주었을 때, 그들은 더군다나 놀라워했다. 그날 저녁에 비가 내리지 않았고, 30명 남짓한 이 무리는 별이 빛나는 밤에 늦게까지 이야기하였다. 예수가 어디로 가버렸는가, 언제 그를 다시 볼 것인가 궁금해하였다.

135:9.2 (1505.2) 이날의 체험이 있은 뒤로 요한의 설교는 다가오는 나라와 기대하는 메시아에 관하여 선포하는, 새롭고 확실한 음정이 있었다. 예수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머무르던 이 40일 동안은 긴장된 때였다. 그러나 요한은 큰 힘을 가지고 계속 전도했고, 그의 제자들은 요단강에서 요한의 주위에 넘쳐흐르게 모인 군중에게 이 무렵에 설교하기 시작했다.

135:9.3 (1505.3) 기다리는 이 40일 동안에 많은 소문이 시골에, 티베리아스와 예루살렘에도 퍼졌다. 수천 명이 요한의 야영지에서 새 구경거리, 소문난 메시아를 보려고 왔지만, 예수는 눈에 띄지 않았다. 요한의 제자들이 그 이상한, 하나님의 사람이 산으로 가 버렸다고 주장했을 때, 많은 사람이 그 이야기 전체를 의심했다.

135:9.4 (1505.4) 예수가 떠난 지 3주쯤 되었을 때, 예루살렘에서 사제(司祭)와 바리새인들로부터 새 대표단이 펠라에, 그 장면에 도착했다. 요한에게 다짜고짜 그가 엘리야인가, 아니면 모세가 약속한 선지자인가 물었다. 요한이 “나는 아니라”하고 말했을 때, 그들은 대담하게 물었다 “네가 메시아이냐?” 요한은 “나는 아니라” 대답했다. 그러자 예루살렘에서 온 이 사람들은 말했다. “네가 엘리야가 아니요 선지자도 메시아도 아니어든, 어찌하여 너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이 모든 소란을 피우느냐?” 요한은 대답하였다: “내 말을 듣고 나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 내가 누구인가 말해야 할 것이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돌아와서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 줄 사람이 우리 가운데 있었느니라.”

135:9.5 (1505.5) 이 40일은 요한과 그 제자들에게 어려운 기간이었다. 요한과 예수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토론할 질문이 백 가지나 생겼다. 정치와 이기적 자리싸움이 비로소 모습을 나타냈다. 메시아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과 개념에 대하여 맹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그가 군사 지도자요 다윗 같은 왕이 될 것인가? 요수아가 가나안 사람들을 친 것 같이, 그가 로마 군대를 칠 것인가? 아니면 그가 영적인 나라를 세우러 올 것인가? 하늘나라를 세우는 이 사명 안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갈 것인가, 비록 자신의 머리 속에서 아주 뚜렷하지는 않았어도, 요한은 차라리 소수파와 함께 예수가 하늘나라를 세우러 왔다고 결정했다.

135:9.6 (1505.6) 이때는 요한의 체험 중에서 어려운 시절이었고 그는 예수가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요한의 제자 중에 더러는 예수를 찾으러 가려고 수색대를 조직했지만, 요한은 막으며 말했다: “우리의 때는 하늘의 하나님 손에 있나니, 그가 택한 아들을 인도하시리라.”

135:9.7 (1505.7) 2월 23일, 토요일 아침 일찍, 요한의 일행이 아침 식사를 들며 북쪽을 향하여 올려보다가 예수가 그들에게 오는 것을 보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요한은 큰 바위 위에 올라서서, 우렁차게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원자를 보라!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말하였으되, ‘내 뒤에 나보다 더 나은 자가 오리니, 그가 나보다 먼저 있었음이라.’ 이 일로 인하여 내가 광야에서 나와, 회개하라 외치고 물로 세례를 주었고, 하늘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하였노라. 이제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 줄 이가 오느니라. 이 사람 위에 신의 영(靈)이 내려오는 것을 내가 보았고 ‘이 사람은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요 내가 아주 기뻐하는 자라’하고 외치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내가 들었노라.”

135:9.8 (1506.1) 예수는 그들에게 식사를 계속하라고 이르고, 한편 동생 야고보와 유다가 가버나움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요한과 함께 먹으려고 앉았다.

135:9.9 (1506.2) 이튿날 아침 일찍 그는 요한과 그 제자들을 떠나서 갈릴리로 돌아갔다. 언제 다시 그들이 그를 볼 것인가 아무 말도 일러주지 않았다. 자신의 전도와 사명에 대하여 요한이 묻자 예수는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내 아버지가 지난날에 하신 것 같이, 이제와 앞날에도 너를 안내하시리라.” 위대한 이 두 사람은 그날 아침, 요단강 둑에서 헤어졌고, 육체를 입고 다시는 서로 인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10. 요한이 남쪽으로 가다

135:10.1 (1506.3) 예수가 북쪽으로 갈릴리에 갔으므로, 요한은 왔던 길로 남쪽으로 되돌아갈 마음이 생겼다. 따라서, 3월 3일 일요일 아침에, 요한과 남은 제자들은 남쪽으로 여행 길을 떠났다. 요한의 가까운 추종자 중에 4분의 1쯤이 그동안에 예수를 찾아서 갈릴리를 향하여 떠났다. 요한에게는 혼란에 빠진 슬픈 빛이 보였다. 결코 예수에게 세례 주기 전에 했던 것처럼, 다시 전도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다가오는 나라에 대한 책임이 자기 어깨에 더 지워지지 않았다고 느꼈다. 그는 할 일이 거의 끝났다고 느꼈고, 쓸쓸하고 외로웠다. 그러나 그는 전도하고 세례를 주며 남쪽으로 계속 여행하였다.

135:10.2 (1506.4) 아담이라는 마을 가까이에서, 요한은 몇 주 동안 머물렀다. 여기서 헤롯 안티파스가 다른 남자의 아내를 불법으로 빼앗은 것 때문에, 기억에 남을 공격을 그에게 퍼부었다. 이 해 (서기 26년) 6월이 되자, 요한은 요단강의 베다니 여울로 돌아갔다. 거기는 1년도 더 전에, 다가오는 나라에 대하여 전도를 시작한 곳이었다. 예수가 세례받은 뒤에 몇 주 동안, 요한의 설교의 특징은 차츰 서민들에게 자비를 선포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한편 그는 되살아난 열정으로 썩은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들을 비난하였다.

135:10.3 (1506.5)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의 영토에서 전도하고 있었는데, 안티파스는 요한과 그 제자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놀라게 되었다. 헤롯은 또한 요한이 자기 집안 일을 드러내놓고 비난하는 것을 분개하였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헤롯은 요한을 잡아 가두기로 작정하였다. 따라서, 6월 12일 아침 아주 일찍, 설교를 듣고 세례 주는 것을 구경하러 군중이 도착하기 전에, 헤롯의 관리들이 요한을 체포했다. 몇 주가 지나도 석방되지 않자 제자들은 온 팔레스타인에 흩어졌고, 그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의 추종자들과 합세하려고 갈릴리로 갔다.

11. 요한이 갇히다

135:11.1 (1506.6) 요한은 감옥에서 외롭고 얼마큼 쓰라린 체험을 가졌다. 추종자 가운데 거의 아무도 그를 면회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예수를 보고 싶어했지만, 추종자 중에 사람의 아들을 믿게 된 사람들을 통해서 그가 하는 일에 관하여 소식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요한은 때때로 예수와 그의 신성한 사명을 의심할 유혹을 받았다. 예수가 메시아라면, 어째서 참을 수 없는 이 감옥 생활에서 그를 구원하려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가? 1년 반이 넘도록, 하나님의 광야에서 살던 이 거친 사람은 끔찍한 감옥에서 시들었다. 그리고 이 체험은 예수를 믿는 믿음과 그에게 바치는 충성심을 크게 시험하였다. 정말로 이 체험 전체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해서도 큰 시험이었다. 여러 번 그는 자신의 사명과 체험이 진정한 것이었는가도 의심할 유혹을 받았다.

135:11.2 (1507.1) 몇 달 동안 감옥에 갇혀 있은 뒤에, 제자들의 한 무리가 그에게 와서, 예수의 대중 활동에 관하여 보고한 뒤에 말했다: “선생이여, 이런즉 요단강 상류에서 당신과 함께 있던 자는 번영하고 그에게 오는 자를 모두 받나이다. 그는 세리와 죄인들과 잔치까지 하나이다. 당신은 그에 대하여 용감하게 증언했는데, 그래도 그는 당신을 구원하려고 아무 일도 하지 않나이다.” 그러나 요한은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가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나는 메시아가 아니라, 그러나 그를 위하여 길을 예비하려고 미리 앞에 파송된 자라’ 말한 것을 너희가 기억하느니라. 그리고 그 일을 내가 하였노라. 신부(新婦)를 가진 자는 신랑이지만, 가까이 서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 신랑의 친구는 그 신랑의 목소리 때문에 크게 기뻐하느니라. 그러므로 나의 이 기쁨이 이루어졌도다. 그는 번창해야 하지만 나는 쇠퇴해야 하느니라. 나는 이 땅에서 왔고 내가 전할 말씀을 선포하였노라. 나사렛 예수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고 우리 모두 위에 계시느니라.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왔고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외치리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분량을 재지 않고 영을 주시기 때문이라. 아버지는 그 아들을 사랑하사, 당장에 이 아들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시리라. 그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지느니라. 내가 말하는 이 말씀은 참이요 지속하느니라.”

135:11.3 (1507.2) 이 제자들은 요한의 선언에 놀랐고 너무 놀라서 말없이 떠났다. 요한도 또한 마음이 많이 착잡해졌는데, 예언을 입 밖에 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시는 예수의 사명과 신성에 대하여 송두리째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가 그에게 아무 말도 보내오지 않은 것, 자기를 보러 오지 않은 것, 자기를 감옥에서 구원하려고 큰 권능을 전혀 쓰지 않은 것이, 요한에게는 마음 아프게 실망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것을 모두 알았다. 요한을 크게 사랑했지만, 자기의 신다운 성품을 이제 깨달았다. 요한이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를 위하여 큰 일이 준비되어 있음을 잘 알고 또한 땅에서 요한의 일이 끝났음을 알았기 때문에, 위대한 전도자이자 선지자의 생애가 자연스럽게 풀려나가는 데 간섭하지 않으려고 자제하였다.

135:11.4 (1507.3) 감옥에서 오랫동안 겪은 이 불안감은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었다. 죽기 겨우 며칠 전에 요한은 신뢰하는 사자들을 다시 예수에게 보내어 물었다: “나의 일이 끝났나이까? 어째서 나는 감옥에서 시드나이까? 당신은 참으로 메시아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하리이까?” 이 두 제자가 이 전하는 말씀을 예수에게 주었을 때, 사람의 아들은 대답했다: “요한에게 돌아가서, 내가 잊지 않았으나 내게 또한 이것을 용납하라고 이를지니, 올바른 것을 모두 이루는 것이 우리에게 어울리는 까닭이라.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전하라―가난한 자들이 좋은 소식을 듣느니라―그리고 마지막으로, 땅에서 내 사명을 전한 사랑하는 사자에게, 의심하고 나 때문에 넘어지지 않으면, 그가 다가올 시대에 넘치게 복을 받으리라 전하라.” 이것이 예수로부터 요한이 받은 마지막 말씀이었다. 이 말씀은 그를 크게 위로하고 믿음을 안정시켰고, 육체를 입은 생애에 비극의 종말을 위하여 준비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 죽음은 기억할 만한 이 사건 바로 뒤에 곧 다가왔다.

12. 세례자 요한의 죽음

135:12.1 (1508.1) 붙잡혔을 때 남부 페레아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한은 즉시 마캐루스 요새의 감옥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집행될 때까지 갇혀 있었다. 헤롯은 갈릴리 뿐 아니라 페레아도 다스렸고 이때 페레아의 줄리아스와 마캐루스, 두 곳에서 거주를 유지했다. 갈릴리에서 관저는 세포리스로부터 새 서울 티베리아스로 이전에 옮겼다.

135:12.2 (1508.2) 헤롯은 요한이 반란을 선동하지 않을까 하여 그를 석방하기를 두려워했다. 수천 명의 페레아 사람들이 요한이 거룩한 사람, 선지자라고 믿었기 때문에 수도에서 군중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여 헤롯은 그를 죽이기가 두려웠다. 그래서 헤롯은 나지르 전도자를 감옥에 가두었고 달리 어떻게 할 줄 몰랐다. 몇 번 요한은 헤롯 앞에 섰지만, 풀려난다면 헤롯의 영토를 떠나거나 모든 대중 활동을 삼가겠다고 결코 동의하려 하지 않았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이 새 소동이 꾸준히 커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헤롯에게 요한을 석방할 때가 아니라고 훈계하였다. 게다가 요한은 헤롯이 불법으로 취한 아내 헤로디아스를 맹렬하고 극심하게 미워했다.

135:12.3 (1508.3) 여러 차례 헤롯은 하늘나라에 대하여 요한과 이야기했고 때때로 그의 말씀에 심각하게 감명을 받기는 했어도 요한을 감옥에서 석방하기가 두려웠다.

135:12.4 (1508.4) 티베리아스에서 많은 건축 공사가 아직도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헤롯은 페레아 저택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고 마캐루스 요새를 무척 좋아했다. 티베리아스에 있는 모든 공공 건물과 관저가 완성되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135:12.5 (1508.5) 생일을 축하하느라고 헤롯은 마캐루스 궁정에서, 갈릴리와 페레아 지방의 정부 의회에서 주요한 관리들과 기타 고위층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다. 헤로디아스는 헤롯에게 직접 호소하여 요한을 죽게 만드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이제 교활한 계획으로 요한을 죽이는 일에 착수했다.

135:12.6 (1508.6) 그날 저녁에 잔치하고 접대하는 과정에서, 헤로디아스는 딸을 잔치에 온 손님들 앞에 춤을 추도록 내놓았다. 헤롯은 그 계집아이의 연기를 매우 기뻐하였고, 딸을 앞으로 부르면서 말했다. “너는 예쁘구나. 썩 마음에 든다. 내 생일에 무엇을 바라든지 요구하여라. 그러면 그것을, 아니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헤롯은 포도주를 많이 마신 기운에 이 모든 일을 저질렀다. 소녀는 옆으로 가서 어머니에게 자기가 헤롯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할까 물었다. 헤로디아스는 말했다. “헤롯한테 가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소녀는 잔치하는 식탁으로 돌아오면서 헤롯에게 말했다. “당장에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 위에 담아 주시기를 요청하나이다.”

135:12.7 (1508.7) 헤롯은 두려움과 슬픔에 휩싸였지만 그 서약 때문에 그리고 같이 회식하던 모든 사람 때문에 그 요구를 물리치려 하지 않았다. 헤롯 안티파스는 한 병사를 보내서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했다. 이렇게 요한은 그날 밤에 감옥에서 목이 잘렸다. 그 병사는 선지자의 머리를 쟁반 위에 가지고 와서, 연회실의 뒷줄에 있는 그 소녀에게 내밀었다. 계집아이는 쟁반을 어머니에게 올렸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서, 요한의 시체를 얻으려고 감옥으로 갔고 무덤에 시체를 내려놓은 뒤에 예수에게 가서 소식을 전했다.

제 136 편 세례와 사십일

유란시아서

제 136 편

세례와 사십일

136:0.1 (1509.1) 요한의 전도에 대하여 대중의 관심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유대 민족이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열심히 찾고 있을 때, 예수는 대중 활동을 시작했다. 요한과 예수는 크게 대조가 되었다. 요한은 열심이 있고 성실한 일꾼이었지만 예수는 차분하고 행복한 노동자였다. 일생을 통해서 겨우 몇 번 서두른 일이 있었다. 예수는 세상에 따듯한 위안이요 얼마큼 모범이었고 요한은 도저히 위로가 되거나 모범은 아니었다. 그는 하늘나라를 전파했지만 도저히 그 나라의 행복을 맛보았다고 할 수 없다. 비록 예수가 옛 서열의 선지자 중에서 요한이 가장 크다고 말했어도, 또한 새 길의 큰 빛을 보고 이렇게 하늘나라로 들어간 자 중에 가장 적은 사람도 요한보다 정말로 크다고 말했다.

136:0.2 (1509.2) 요한이 다가오는 나라를 전파했을 때 그의 말씀의 요점은, 뉘우치라! 다가올 진노를 피하여 달아나라는 것이었다. 예수가 전도하기 시작했을 때, 회개하라는 훈계가 여전히 있었지만 그런 말씀에는 언제나 복음, 새 나라의 기쁨과 해방을 알리는 좋은 소식이 뒤따랐다.

1. 사람들이 기대하던 메시아 개념

136:1.1 (1509.3) 유대인은 기대하던 구원자에 대하여 여러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메시아가 온다고 가르치는 이 다른 학파들은 각자 히브리 성서의 여러 구절이 자기들의 주장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지적할 수 있었다. 대체로 유대인은 그 민족의 역사가 아브라함과 함께 시작되고, 끝에는 메시아가 오고 새 시대인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고 보았다. 초기에는 이 구원자가 “주의 종”이라, 다음에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상상했으며, 한편 후일에 더러는 메시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씨”나 “다윗의 아들”이라 부르든 상관 없이 모두가 그는 메시아,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되리라고 의견을 모았다. 이렇게 그 개념은 “주의 종”으로부터 “다윗의 아들,” “사람의 아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에 이르기까지 발전하였다.

136:1.2 (1509.4) 요한과 예수가 살던 시절에, 학식 있는 유대인들은 오실 메시아가 완전하게 된 대표적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관념을 개발했다. 이 인물 속에 선지자ㆍ사제ㆍ임금, 이 세 가지 직분을 “주의 종”으로 통합하였다.

136:1.3 (1509.5) 모세가 놀라운 기적으로 그들의 선조를 에집트인에게 속박된 상태에서 구원한 것 같이, 오시는 메시아는 더 큰 강력한 기적을 행하고, 민족의 승리로 이끄는 이적(異蹟)을 행함으로써 유대 민족을 로마의 지배로부터 구원할 것이라고 유대인들은 진지하게 믿었다. 랍비들은 성서로부터 거의 5백 구절을 한데 모았는데, 이것들은 서로 명백히 모순이 있는데도 이 구절들이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한다고 단언했다. 오시는 시간과 그 기법과 직분에 관하여 사소한 것까지 자세히 설명하면서도 그들은 약속된 메시아의 인격을 거의 통째로 못보고 놓쳤다. 세상의 구원보다 유대 민족의 영광이 회복되기를―이 세상에서 이스라엘 높이기를―기대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사렛 예수가 유대인이 머리에 지녔던 이 물질적 메시아 개념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소문난 많은 메시아 예언은 그들이 이 예언의 말씀을 다른 빛에 비춰보기만 했다면, 예수가 한 시대를 끝내는 자요, 새롭고 더 좋은 섭리 시대, 모든 나라에게 자비와 구원의 섭리 시대를 여는 자임을 인식하도록 그들의 사고방식을 아주 자연스럽게 준비하였을 것이다.

136:1.4 (1510.1) 유대인은 신의 모습이[1] [9] 나타난다는 신조를 믿도록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러나 신의 계심을 가리키는 이 이름난 상징은 성전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면 이 상징을 회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종족의 죄, 악하다고 생각된 인간 성품에 대하여 뒤범벅이 된 생각을 가졌다. 더러는 아담의 죄가 인류를 저주했다, 메시아는 이 저주를 없애고, 사람이 신의 은총을 다시 받게 만들 것이라고 가르쳤다. 더러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면서 좋은 성품과 나쁜 성품을 모두 그 존재 속에 넣었다, 이런 배합이 전개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을 때 하나님은 크게 실망했다, “그는 이렇게 사람을 지은 것을 뉘우쳤다”고 가르쳤다. 이렇게 가르친 사람들은 메시아가 본래부터 악한 이 성품으로부터 사람을 구출하려고 오실 것이라고 믿었다.

136:1.5 (1510.2) 유대인의 대다수는, 민족의 죄 때문에, 그리고 개종한 이방인들이 성실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계속하여 로마의 통치 밑에서 시든다고 믿었다. 유대 민족은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았다, 따라서 메시아는 오기를 지체한다. 회개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이 때문에 “뉘우치고 세례를 받으라, 하늘나라가 가까웠음이라”하는 요한의 설교가 힘차고 즉시 호소력이 있었다. 하늘나라는 어떤 경건한 유대인에게도 오직 한 가지를 뜻하였으니, 메시아의 오심이었다.

136:1.6 (1510.3) 미가엘의 자신 수여에는 유대인의 메시아 개념과 도무지 관계 없는 한 가지 모습이 있었으니, 인간다운 성품과 신다운 성품, 이 둘의 연합이었다. 유대인은 메시아가 완전하게 된 인간이라, 초인간이라, 아니 신다운 자라고 여러 가지로 상상하기도 했지만, 결코 인간의 성품과 신의 성품의 연합이라는 개념을 도무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의 초기 제자들에게 큰 장애물이었다. 그들은 초기의 선지자들이 발표한 바와 같이 메시아가 다윗의 아들이라는 인간적 개념을 파악했다. 사람의 아들, 즉 다니엘과 어떤 후일의 선지자들이 가졌던 초인간 관념을 파악했고, 에녹서의 저자(著者) 및 같은 시대에 살던 어떤 사람들이 묘사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까지 이해하였다. 그러나 한 순간이라도, 인간의 성품과 신의 성품, 이 두 가지를 땅에서 하나의 인격 안에 뭉친다는 참 개념이 떠오르지 않았다. 창조자가 인간의 모습을 입고 육신이 되는 것은 이전에 계시된 적이 없었다. 오로지 예수 안에서 계시되었고, 창조 아들이 육체가 되어서 이 땅의 필사자 가운데 거하기까지, 세상은 그런 일을 까맣게 몰랐다.

2. 예수가 받은 세례

136:2.1 (1510.4)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 요한이 전한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팔레스타인이 불이 붙었을 때, 온 유대인 사회가 심각하고 엄숙하게 자기 반성에 들어갔을 때, 요한의 전도가 바로 그 절정에 이른 때에, 예수는 세례를 받았다. 유대인은 민족의 단결에 대하여 대단히 깊은 감각이 있었다. 유대인은 아버지의 죄로 인하여 아이들이 고통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죄가 나라를 저주할 수도 있다고 굳게 믿었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려고 나선 자들이 모두 요한이 비난한 특정한 죄를 자신이 저질렀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경건한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의 이익을 위하여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들 편에서 모르고 지은 어떤 죄가 메시아의 오심을 늦추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죄가 있고 죄로 저주받은 나라에 자신들이 속한다고 느꼈고 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 민족 회개의 열매를 보일까 하여 세례를 받으러 나섰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도, 회개하는 의식(儀式)으로서 또는 죄를 용서받으려고 예수가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요한의 손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예수는 다만 많은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의 모범을 따른 것이다.

136:2.2 (1511.1) 요단강으로 세례받으려고 내려갔을 때, 나사렛 예수는 정신을 정복하고 자아를 영과 일체로 만드는 데 관계된 모든 문제에서, 이 땅에서 인간으로서 진화적 승천의 절정에 도달한 필사자였다. 그날 시공(時空)의 여러 진화 세계에서 그는 완전하게 된 한 필사자로서 요단강에서 섰다. 예수의 인간 지성과 깃드는 영 조절자 사이에 완전한 동시화와 충만한 교통이 이루어졌으며, 조절자는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의 신성한 선물이다. 미가엘이 우주의 우두머리 자리로 올라간 뒤에, 바로 그러한 조절자가 유란시아에 사는 모든 정상 인간에게 깃든다. 예수의 조절자는 예외이며, 그는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육신화하여 다른 초인간, 곧 마키벤타 멜기세덱에게 이와 비슷하게 깃들어 이 특별 사명을 위하여 전에 준비되었다.

136:2.3 (1511.2) 세상의 한 필사자가 그런 높은 수준의 완전한 인격을 달성할 때, 보통은 영적으로 높아지는 예비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그 필사자의 성숙한 혼이 그와 관계된 신다운 조절자와 궁극에 융합함으로 종결된다. 그런 변화는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두 동생과 함께 요단강으로 내려간 바로 그날, 나사렛 예수의 인격 체험에서 일어나기로 예정되었던 듯하다. 이 예식은 유란시아에서 순전히 인간적 일생에서 마지막 행위였고, 많은 초인간 관찰자는 조절자가 그 깃든 정신과 융합하는 것을 구경할까 기대했지만 모두 실망하도록 예정되었다. 무언가 새롭고 더 큰 일이 일어났다.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주려고 손을 얹었을 때, 깃들던 조절자는 요수아 벤 요셉의 완전하게 된 인간 혼(魂)을 마지막으로 떠났다. 몇 순간이 지나자 이 신성한 개체는 신별로부터 인격화된 하나의 조절자로, 네바돈 지역 우주 전체에 걸쳐서 그 종류의 우두머리가 되어 돌아왔다. 이렇게 예수는 자신이 전에 지녔던 그 신성한 영이 돌아올 때, 인격이 된 모습을 입고 내려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파라다이스 기원을 가진 바로 이 영이 이제 말씀하는 것을 들었다: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아주 기뻐하는 자라.” 또한 요한도 예수의 두 동생과 함께 이 말씀을 들었다. 요한의 제자들은 물가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지 못했고, 인격이 된 조절자의 환영(幻影)도 구경하지 못했다. 오직 예수의 눈이 인격이 된 조절자를 보았다.

136:2.4 (1511.3) 돌아와서 이제 신분이 높아진, 인격화된 조절자가 이렇게 말씀했을 때, 모두가 말이 없었다. 네 사람이 물 속에서 기다리는 동안, 예수는 가까이 있는 조절자를 우러러보면서 기도했다: “하늘에서 군림하시는 내 아버지여, 주의 이름이 거룩하옵소서. 주의 나라가 오소서!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기도하고 나자 “하늘이 열렸고” 사람의 아들은 이제, 인격이 된 조절자가 제시한 환상을 보았다.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땅으로 내려오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육신화된 생명이 끝났을 때 같은 신분이 될 자신의 환상이었다. 이 하늘의 환상은 예수의 눈에만 보였다.

136:2.5 (1512.1) 요한과 예수가 들은 것은 우주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말씀하는, 인격이 된 조절자의 목소리였고, 이는 조절자가 파라다이스 아버지로부터, 아버지로서 왔기 때문이다. 예수가 땅에서 살던 여생 동안 내내, 인격이 된 이 조절자는 그가 어떤 노력을 했어도 그와 관련되어 있었다. 예수는 신분이 높아진 이 조절자와 항상 교통하고 있었다.

136:2.6 (1512.2) 세례를 받았을 때, 예수는 아무런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고, 아무 죄도 고백하지 않았다. 그의 세례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거룩하게 바쳐진 세례였다. 그는 세례를 받을 때 아버지의 분명한 부르심, 아버지의 일을 돌보라는 마지막 호출을 들었고, 이 여러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40일 동안 혼자서 은둔하려고 떠나갔다. 땅에 있는 동료들과 활발한 개인적 접촉을 하지 않고 한동안 이렇게 물러나면서, 예수는 한 승천하는 필사자가 마음 속에서 우주의 아버지의 계심과 융합할 때는 언제나 상물질 세계에서 일어나는 바로 그 과정을 그의 신분으로서 유란시아에서 밟고 있었다.

136:2.7 (1512.3) 이 세례받은 날은 예수의 순전히 인간다운 인생을 종결하였다. 신다운 아들은 아버지를 발견했고 우주의 아버지는 육신화한 아들을 발견했으며, 서로 말을 건다.

136:2.8 (1512.4) (세례받을 때, 예수는 거의 서른한 살 반이었다. 누가는 예수가 티베리우스 케자가 통치하던 15년째 해에 세례받았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투스가 서기 14년에 죽었으니까, 이 해는 서기 29년일 것이다. 한편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전에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2년 반 동안 공동으로 황제였고, 후자를 기념하려고 서기 11년 10월에 주화(鑄貨)를 찍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실제로 통치하던 15년째는 바로 서기 26년, 예수가 세례를 받은 해이다. 이 해는 또한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서 통치를 시작한 해였다.)

3. 사십일

136:3.1 (1512.5) 여섯 주 동안 헤르몬산에서 이슬에 젖어 있을 때, 예수는 세례받기 전에 필사자로 자신을 수여하는 생애에서 큰 시험을 견디었다. 거기 헤르몬산에서, 이 땅에서 도움받지 않은 필사자로서, 유란시아의 허세부리는 자, 칼리가스티아, 곧 이 세상의 임금을 만나서 물리쳤다. 그 중대한 날에, 우주의 기록에 따르면 나사렛 예수는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가 되었다. 이내 네바돈의 최고 군주라 선포되기로 예정된 이 유란시아의 영주는 이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새 나라를 선포할 계획을 세우고 그 기법을 결정하려고 40일 동안 은둔에 들어갔다.

136:3.2 (1512.6) 세례를 받은 뒤에, 그는 조절자가 인격화함으로 말미암아 달라진 세상 및 우주 관계에 40일 동안 자신을 적응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페레아 언덕에서 혼자 있던 이 기간에, 그는 바야흐로 개시하려고 하는 지상 생활의 새로운 변화된 단계에서 어떤 정책을 추구하고 어떤 방법을 사용할 것인가 결정했다.

136:3.3 (1512.7) 예수는 금식할 목적으로, 혼에 고통을 주려고 은둔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금욕주의자가 아니었고, 하나님께 접근하는 데 관한 모든 그러한 개념을 영원히 깨뜨리려고 왔다. 이렇게 은둔하기를 구하는 이유는 모세와 엘리야, 아니 세례자 요한을 움직인 이유들과 전혀 달랐다. 예수는 그와 자신이 만든 우주의 관계, 또한 온 우주와 그의 관계를 온통 자의식하고 있었고, 파라다이스 아버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감독을 받았다. 유란시아에서 육신화에 들어가기 전에, 형 이마누엘이 그에게 수여 임무를 맡긴 것과 그 지침을 이제 충분히 기억했다. 이제 방대한 이 모든 관계를 뚜렷하고 완전하게 이해했다. 그리고 이 세상과 지역 우주에 있는 모든 다른 세계를 위하여, 대중을 위하여 수고하는 계획을 생각해 보고 그 과정을 결정할 수 있도록, 그는 한동안 조용히 명상하려고 떠나 있기를 바랐다.

136:3.4 (1513.1) 산에서 적당한 피난처를 찾아서 헤매 다니면서, 예수는 그의 우주의 최고 집행자, 네바돈의 밝은 아침별, 곧 가브리엘을 만났다. 가브리엘은 이제 우주의 창조 아들과 친히 교통하는 경로를 다시 열었다. 유란시아 수여에 들어가는 준비로 에덴시아에 갔을 때 미가엘이 구원자별에서 동료들을 떠난 뒤에 처음으로, 직접 만났다. 이마누엘의 지시에 따라서, 그리고 유버르사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권한으로, 가브리엘은 이제, 그의 우주를 다스리는 완벽하게 된 통치권의 획득, 그리고 루시퍼 반란의 종결, 이 두 가지와 관련된 한, 유란시아에서 예수의 자신 수여 체험이 실지로 종결되었음을 가리키는 정보를 예수 앞에 제시하였다. 전자(前者)는 세례받는 날에 이루어졌고, 그때 그의 조절자가 인격화된 것은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행한 자신 수여(授與)가 완전하고 완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후자는 기다리는 소년 티글라스와 함께 하려고 헤르몬산에서 내려온 그날, 역사적 사실이 되어버렸다. 예수는 지역 우주와 초우주의 가장 높은 권한에 근거하여, 그의 개인 지위가 통치권 및 반란에 영향을 받는 부분에 한하여 그의 수여 과업은 끝났다는 통지를 받았다. 세례를 받으며 본 환상에서, 그리고 깃드는 생각 조절자가 인격이 된 현상에서 그는 이미 이 확신을 파라다이스로부터 직접 받았다.

136:3.5 (1513.2) 가브리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에서 머무르는 동안, 에덴시아의 별자리 아버지가 예수와 가브리엘에게 친히 나타나서 말했다: “기록이 완성되었나이다. 미가엘 611,121번이 네바돈 우주를 다스리는 통치권은, 완전히 얻은 상태로 우주의 아버지의 바른 편에 보존되어 있나이다. 유란시아에서 육신화하는 일에 당신의 후원자였던 형 이마누엘이 당신을 수여에서 해방한다는 것을 내가 알리나이다. 지금이나 나중 어느 때라도 자신이 택하는 방법으로 육신화 수여를 끝내고 아버지의 바른 편으로 올라가서 통치권을 받고, 톡톡히 피땀 흘려 얻은 권리, 온 네바돈을 조건 없이 통치하는 권리를 자유롭게 맡아도 좋사옵나이다. 또한 당신의 우주에서 일어난 모든 죄와 반란을 종결하는 데 상관되는 기록, 그리고 앞날에 어떤 그러한 가능한 반란이 일어나더라도 이를 처리할 완전하고 제한 없는 권리를 당신에게 부여하는 것과 관계된 초우주의 기록이 끝났다는 것을,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권한으로 또한 증언하나이다. 절차로 볼 때, 유란시아에서 필사 인간의 육체를 입고 당신이 하실 일은 끝났사옵나이다. 이제부터 당신이 걷는 길은 당신이 선택할 문제이나이다.”

136:3.6 (1513.3) 에덴시아의 최고 아버지가 떠났을 때, 예수는 우주의 복지(福祉)에 대하여 가브리엘과 오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마누엘에게 안부를 전하면서, 유란시아에서 바야흐로 착수하려는 일로 구원자별에서 자신 수여 이전에 부여된 책임과 관련하여 그가 받았던 충고를 늘 염두에 두겠다고 확언을 주었다.

136:3.7 (1514.1) 혼자 있던 이 40일 동안 내내,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를 찾는 일에 열중했다. 여러 번 그가 거하는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왔지만 결코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4. 대중 사업을 위한 계획

136:4.1 (1514.2) 산 위에서 날마다, 예수는 남은 유란시아 수여 생애를 위하여 계획을 세웠다. 그는 먼저 요한과 같은 시기에 가르치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요한의 일이 목적을 이룰 때까지, 아니면 감옥에 갇혀서 요한이 갑자기 멈출 때까지, 그는 비교적 은둔 상태에 남아 있기로 계획하였다. 예수는 요한의 두려움 없고 분별 없는 설교가 곧 집권자들의 두려움과 적의를 일으킬 것을 잘 알았다. 요한의 불안한 상황에 비추어서, 예수는 민족과 세계의 이익을 위하여, 그의 광대한 우주에 두루, 사람 사는 모든 세계를 위하여, 대중에게 봉사하는 계획을 분명히 세우기 시작했다. 필사자로 미가엘이 자신을 유란시아에 수여했지만 이는 네바돈의 모든 세계를 위한 것이었다.

136:4.2 (1514.3) 자기의 계획을 요한의 동향과 조정하는 대체적 계획을 살펴본 뒤에, 예수가 먼저 한 일은 머리 속에서 이마누엘의 지시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수고하는 방법에 관하여 받은 충고, 그리고 행성에 영구한 기록을 하나도 남기면 안 된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았다. 모래 위가 아니고 예수는 결코 다시 어떤 것에도 글을 쓰지 않았다. 다음에 나사렛을 방문했을 때 동생 요셉이 아주 서운해하였지만, 예수는 목수 작업장 근처의 여러 판자에 보존되어 있고 옛 집의 벽에 걸려 있던 그의 글을 모조리 없애버렸다. 그가 본 세상에 대하여 그가 어떤 경제ㆍ사회ㆍ정치적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관하여 이마누엘이 준 충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136:4.3 (1514.4) 예수는 혼자 있던 이 40일 동안에 금식하지 않았다. 먹을 것이 없이 지낸 가장 오랜 기간은 산 속에서 처음 이틀이었고, 그때 너무 골똘히 생각에 빠져서 먹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나 사흘째에 그는 먹을 것을 찾아 갔다. 이 기간에 그는 이 세상에 주둔하거나 어느 다른 세상에서 온, 어떤 악한 영이나 반란에 가담했던 성격자들의 시험을 받지도 않았다.

136:4.4 (1514.5) 이 40일은 인간의 지성과 신(神)의 지성 사이에 마지막 회의가 있은 기회, 아니 오히려 이 두 지성이 이제 하나가 되어 처음으로 정말로 활동하는 때였다. 이 중대한 명상 시간으로부터 생긴 결과는, 신의 지성이 인간의 지능을 이기고 영적으로 지배했음을 확고히 보여주었다. 이때부터 계속, 사람의 지성은 하나님의 지성이 되었다. 비록 인간 지성의 자아(自我)가 늘 자리에 있었어도, 영적으로 변화된 이 인간 지성은 언제나 말한다. “내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136:4.5 (1514.6) 이 중대한 시간에 처리한 것들은 굶고 허약해진 정신에 황홀한 환상을 본 것이 아니다. “황야에서 받은 예수의 시험”이라고 나중에 기록에 남은, 뒤범벅이 된 유치한 상징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 기간은 유란시아에 자신을 수여하던 동안에 파란 많고 다채로웠던 생애 전체에 대하여 생각하고, 한편 또한 반란으로 고립된 모든 다른 구체를 개선하는 데 무언가 이바지하면서, 최선으로 이 세상에 소용이 되도록 계속 봉사하는 계획을 조심스럽게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안돈과 폰타의 시절부터 아담의 직무 불이행을 거쳐서, 또 살렘에 있던 멜기세덱의 봉사에 이르기까지, 예수는 유란시아에서 인간 생활의 폭 전체를 생각해 보았다.

136:4.6 (1514.7) 유란시아에 한동안 머무르기로 작정할 경우에, 자신을 세상에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 있다고 가브리엘은 예수에게 상기시켰다. 이 문제에서 그가 무엇을 선택하든지 우주 통치권이나 루시퍼 반란의 종결과 아무 상관이 없으리라는 것이 예수에게 뚜렷이 전달되었다. 세계에 봉사하는 두 가지 길은 다음과 같다:

136:4.7 (1515.1) 1. 자신의 길―이 세상에서 당면한 필요의 관점, 그리고 당장 자신의 우주를 교육시키는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쾌적하고 유익하게 보일 수도 있는 길.

136:4.8 (1515.2) 2. 아버지의 길―온 우주의 파라다이스 행정부에 있는 높은 성격자들이 상상한 대로, 사람의 일생의 이상, 멀리 내다보는 이상을 모범으로 보이는 것.

136:4.9 (1515.3) 땅에서 여생을 정리할 수 있는 두 가지 길이 있다는 것이 이처럼 예수에게 뚜렷해졌다. 이 두 길은 각기, 눈앞의 상황에 비추어서 볼 때, 좋다고 볼 수 있는 무엇이 있었다. 이 두 가지 행동 방법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도 우주 통치권을 받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으리라는 것을 사람의 아들은 분명히 깨달았다. 그것은 이미 결정되었고 온 우주의 기록에서 봉인된 문제요, 친히 나타나서 청구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렇게 고귀하게 시작한 것 같이, 예수가 언제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땅에서 육신화 생애를 끝마치는 것을 좋다고 본다면, 파라다이스 형 이마누엘이 크게 만족할 것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이렇게 혼자 있는 가운데 사흘째, 예수는 땅에서 생애를 마치기 위하여 세상으로 돌아가겠다고, 두 가지 길이 있는 상황에서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택하리라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그 결심에 언제나 충실하게 그는 땅에서 여생을 끝까지 살았다. 쓰디쓴 마지막 날까지 최고의 뜻을 하늘 아버지의 뜻에 변함없이 복종시켰다.

136:4.10 (1515.4) 산의 불모지에서 지낸 40일은 큰 시험을 받는 기간이 아니라 오히려 주가 큰 결정을 내린 기간이었다. 자신과 외롭게, 그리고 아버지의 가까운 계심과―인격이 된 조절자와―교통하던 이 기간에 (개인 수호 천사가 이제 더 없었다) 하나하나 큰 결정에 도달했고 이것은 땅에서 여생 동안 그의 정책과 행위를 규제하게 되었다. 헤르몬산에서 투쟁했던 토막 이야기들과 뒤섞여, 그리고 더 나아가서 모든 위대한 선지자와 인간 지도자가 금식하고 기도했다고 생각되었고, 이렇게 함으로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하게 만드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에, 큰 시험이 있었다는 전통이 후일에 이 고립된 기간에 따라붙게 되었다. 새롭거나 심각한 어떤 결정에 부닥쳤을 때,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애쓰도록 자신의 영과 교통하려고 은둔하는 것이 언제나 예수의 버릇이었다.

136:4.11 (1515.5) 땅에서 여생을 보내는 이 모든 계획에서, 예수는 두 가지 상반되는 행동 과정 때문에 언제나 그의 인간 마음 속에 갈등이 있었다:

136:4.12 (1515.6) 1. 민족이―그리고 전 세계가―그를 믿고 영적인 새 하늘나라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려는 강력한 소망을 품었다. 오시는 메시아에 관하여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136:4.13 (1515.7) 2. 아버지가 승인할 것이라고 생각한 대로 살고 일하며, 곤경에 빠진 다른 세계들의 이익을 위하여 일을 처리하고 하늘나라를 세우는 일을 하면서 계속 아버지를 드러내고 아버지의 신다운, 사랑하는 성품을 보여주는 것.

136:4.14 (1515.8) 이 중대한 기간 내내, 예수는 오래 된 어느 바위 동굴 안에서 살았고 이곳은 언젠가 바이트 아디스라고 부른 마을 가까이, 산 옆에 있는 피난처였다. 그는 바위로 된 이 피난처 가까이 있는 산 옆에서 나오는 작은 샘물에서 물을 마셨다.

5. 처음 내린 큰 결정

136:5.1 (1516.1) 자신, 그리고 인격이 된 조절자와 함께 이 회의를 시작한 지 사흘째에, 집합한 네바돈 하늘 무리의 환상(幻想)이 예수에게 제시되었는데 그 지휘관들이 사랑하는 군주의 뜻을 보살피라고 이들을 파송하였다. 이 막강한 무리는 12 군단의 세라핌, 그리고 비례대로 모든 계급의 지적 우주 존재를 포함하였다. 예수가 고립되어 있는 동안에 처음으로 내린 큰 결정은, 뒤이어 유란시아에서 대중 사업을 벌이는 계획과 연결하여 이 막강한 성격자들을 이용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과 상관이 있었다.

136:5.2 (1516.2)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이 명백해지지 않는 한, 그는 이 광대한 집합 중에 한 성격자도 이용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 일반적 결정을 내렸는데도, 이 광대한 무리는 땅에서 여생 동안 내내 함께 남아 있었고, 군주의 뜻이 실오라기만큼 표현되어도 언제나 이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예수는 따라다니는 이 성격자들을 항상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았어도 그와 관련된, 인격이 된 조절자는 그들을 항상 보았고 모두와 교통할 수 있었다.

136:5.3 (1516.3) 산에서 40일 동안 은둔하다가 내려오기 전에, 예수는 이 시중드는 우주 성격자 집단의 통솔권을 인격이 된 조절자에게 최근에 주었다. 그리고 모든 부서의 우주 지성 존재들로부터 선택된 이 성격자들은 유란시아 시간으로 4년이 넘는 동안, 높고 노련하고 인격이 된 이 신비의 훈계자의 지혜로운 인도를 받으며 온순하고 공손하게 활동하였다. 이 강력한 집회의 지휘를 맡으면서, 그 조절자는 한때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일부였고 본질이었으니까, 아버지가 간섭을 뜻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어떤 경우에도 이 초인간 관리들이 땅에서 그의 생애와 연결하여, 또는 그의 생애를 위하여 봉사하거나 자신들을 드러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예수에게 다짐하였다. 이렇게 한 가지 큰 결정으로, 아들이 땅에서 수고하는 동안 어떤 분명한 행위나 사건에 아버지가 따로 참여하려고 하지 않으면, 그의 필사 여생과 상관되는 어떤 문제에도, 어떤 초인간적 협조도 받지 않겠다고 예수는 자진해서 포기하였다.

136:5.4 (1516.4) 그리스도 미가엘에게 시중드는 이 우주 집단의 지휘권을 받아들이면서, 인격이 된 조절자는 그러한 집합의 우주 생물은 창조자가 이양한 권한으로 인하여 그 공간 활동에 제약을 받을 수 있지만 그들의 시간 활동과 관련된 경우에 그런 제한은 효력이 없다고 힘들여 지적하였다. 이 제한은, 일단 인격이 되었을 때 조절자는 비시간 존재라는 사실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그의 지휘를 받는 살아 있는 지성들을 조절자가 통제하는 것은, 공간을 다루는 어떤 문제에 관해서도 완벽하고 완전할 터이지만, 시간에 관하여 그런 완전한 제한을 부과할 수 없다고 예수는 훈계를 받았다. 조절자는 말했다: “너의 지상(地上) 생애와 관련하여 어떤 면에서도 네가 지시한 대로, 시중드는 이 집단의 우주 지성들이 이용되는 것을 내가 금하겠노라. 그러나 네가 택한 대로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신성한 뜻이 성취되도록 아버지가 그런 관리들을 해방하라고 지시하는 경우는 예외요, 그리고 너의 신 및 인간 의지로 말미암아 오직 시간에 관해서 네가 자연스러운 땅의 질서를 벗어나게 만들 어떤 선택을 내리거나 행위할 경우는 예외이라. 모든 그러한 경우에 나는 무력(無力)하며, 통일된 권력 밑에 여기 완벽하게 모인 너의 생물은 마찬가지로 무력하니라. 너의 연합된 두 성품이 일단 그러한 소망을 품는다면, 네가 선택하여 내린 이 명령은 대번에 집행될 것이라. 모든 그러한 문제에서 너의 소망은 시간의 단축일 터이고, 계획한 물건은 이미 존재하느니라. 나의 지휘 밑에서 이것은 너의 잠재 통치권에 부과될 수 있는 가능한 최대의 제한이라. 내 자의식(自意識) 안에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시간에 관련된 어떤 일에도 나는 네가 지은 생물을 제한할 수 없노라.”

136:5.5 (1517.1) 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에서 한 사람으로서 계속 살겠다는 결정이 처리되는 것에 대하여 예수는 통지를 받았다. 오직 시간에 관련된 그런 문제를 제쳐놓고, 한 가지 결정으로, 그는 시중드는 모든 우주 집단의 다채로운 지성 존재들이 뒤따르는 대중 봉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막았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특정하게 달리 판결하지 않으면, 예수의 봉사에서 어떤 가능한 초자연의 일이나 초인간적이라 생각되는 일이 생기는 것은 온전히 시간의 제거에 관계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렇게 분명히 말한 시간 문제를 제외하고 그가 유란시아에서 사는 동안에, 예수가 땅에서 앞으로 할 수고와 관련하여 어떤 기적이나 자비로운 봉사나 어떤 다른 가능한 사건도, 인간사에서 확립되고 정상으로 작용하는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행위임을 가리키는 성질이나 특징이 전혀 있을 수 없다. 물론, “아버지의 뜻”이 나타나는 데는 아무런 제한을 둘 수 없다. 한 우주의 이 잠재 군주가 분명히 나타낸 소망과 관련하여, 이 하나님인 사람의 뜻을 직접, 분명히 표현한 행위로만 시간의 제거를 피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의지 행위는 문제가 된 행위나 사건에 관계되는 대로 시간이 단축되거나 제거되어서는 안 된다는 효과를 가진다. 명백한 시간 기적이 나타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예수는 항상 시간을 의식(意識)하는 것이 필요했다. 분명한 소망을 품는 것과 관련하여, 그의 편에서 어떤 시간 의식의 착오가 생기면, 이 창조 아들의 머리 속에서 생각한 일이 집행되며, 게다가 시간의 간섭이 없이 그렇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136:5.6 (1517.2) 인격이 된, 관계된 조절자의 감독과 통제를 통해서, 미가엘은 공간에 대하여 땅에서 친히 하는 활동을 완전히 제한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시간에 관해서는, 네바돈의 잠재 군주로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그의 새로운 지위를 이렇게 제한하기가 불가능했다. 나사렛 예수가 유란시아에서 대중에게 봉사를 시작하려고 나섰을 때 이것이 그의 실제 지위였다.

6. 둘째 결정

136:6.1 (1517.3) 신이라는 그의 새로운 지위에 본래 있는 잠재성에 비추어서 결정될 수 있는 한, 지음받은 지성 존재의 모든 등급, 모든 성격자에 관하여 정책을 결정하고 나서, 예수는 이제 생각을 자신에게 돌렸다.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사물과 존재를 창조한 자, 이제 충분히 자의식하는 그가 사람들 사이에서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갈릴리로 돌아갔을 때 즉시 부닥칠 되풀이되는 생활 형편에서, 그가 이 창조자 특권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사실은, 이미 이 외로운 산 속에, 바로 그가 있던 자리에서, 이 문제는 먹을 것을 얻는 일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난 적이 있다. 혼자 명상에 잠긴 사흘째가 되어서 인간의 몸은 배가 고파졌다. 어떤 보통 사람이 하는 것처럼 먹을 것을 찾아서 나설 것인가, 아니면 단지 정상의 창조 능력을 써서 적당한 육체의 영양을 손 닿는 곳에 창조할 것인가? 너희에게 주의 이 큰 결심은 하나의 시험으로서―가상(假想)의 적들이 “이 돌로 하여금 빵 덩어리가 되라 명령하라고” 도전했다고―묘사되었다.

136:6.2 (1518.1) 따라서 예수는 땅에서 남은 수고를 베푸는 것에 대하여 또 하나의 일관성 있는 정책에 이르렀다. 개인의 필요가 관련된 한, 그리고 대체로 다른 인물과 가지는 관계에서도 이제 의도하여 땅에서 정상으로 존재하는 길을 추구하기로 하였다. 자신이 확립한 자연 법칙을 뛰어넘거나 위반하거나 짓밟을 정책을 쓰지 않기로 분명히 작정하였다. 그러나 인격이 된 조절자로부터 이미 경고를 받았다시피, 어떤 상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 자연 법칙이 크게 가속될 수 없다고 스스로 다짐할 수 없었다. 예수는 일생의 일이 자연 법칙에 따라서, 그리고 기존의 사회 조직과 조화되게 구성되고 실행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결정했다. 이로서 주는 기적과 이적을 행하지 않는다는 결정이나 마찬가지인 생활 계획을 선택하였다. 다시 “아버지의 뜻”에 찬성하는 쪽으로 결정했다. 다시 그는 만사를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손에 맡기었다.

136:6.3 (1518.2) 예수의 인간 성품은 첫째 의무가 자아 보존이라고 명령했다. 그것이 시간과 공간의 여러 세계에서 자연인(自然人)의 정상 태도요, 따라서 유란시아 필사자의 정당한 반응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 세상과 거기에 사는 인간에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방대한 우주의 다양한 생물을 가르치고 영감을 주도록 고안된 인생을 살고 있었다.

136:6.4 (1518.3) 세례로 깨우침을 받기 전에, 그는 하늘 아버지의 뜻과 인도하심에 완전히 복종하면서 살았다. 그는 필사자로서 아버지의 뜻에 절대로 의존하는 그런 태도를 계속하겠다고 힘차게 결정하였다. 그는 자연스럽지 않은 과정을 밟으리라 마음을 정했다―자아 보존을 추구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 정책을 계속 추구하기로 했다. 그의 인간 머리에 익숙한 성서의 말씀 속에서 결론을 내렸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지니라.” 배고픔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육체의 성질을 가진 식욕에 관하여 이러한 결론을 내리면서, 사람의 아들은 육체의 모든 다른 욕구, 인간의 성질을 가진 자연스러운 충동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선언하였다.

136:6.5 (1518.4) 초인간 능력을 남을 위하여 아마 쓸지 모르지만, 자신을 위하여는 결코 그렇지 않다. “저가 남은 구하였으되, 스스로를 구할 수 없도다”하고 사람들이 놀리는 말을 했을 때―그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종말까지 이 정책을 한결같이 따랐다.

136:6.6 (1518.5) 유대인은 모세보다 더욱 큰 이적을 행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세는 사막에서 바위로부터 물이 솟아나게 하고 황무지에서 만나로 조상들을 먹였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예수는 동포가 어떤 종류의 메시아를 기대하는가 알았고 가장 낙천적인 기대에 맞게 행할 모든 능력과 특권이 있었지만, 그러한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는 대단한 계획에 반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예수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기적을 행하는 그러한 과정은 야만인 주술사들이 무지한 마술을 쓰고, 퇴화된 관습을 가졌던 옛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아마도 자기가 지은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연 법칙을 가속할지 몰랐지만, 자기 이익을 위해서나 동료 인간을 위압하기 위해서, 자신의 법칙을 뛰어넘는 일은 하려 하지 않았다. 주는 최종의 결정을 내렸다.

136:6.7 (1518.6) 예수는 자기 민족의 처지를 슬퍼했다. 그들이 오시는 메시아를 기대하고, “땅이 열매를 1만 배 맺고 한 포도나무에는 1천 가지가 있으며, 가지마다 1천 송이를 생산하고 송이마다 포도 알 1천 개를 맺으며 포도 알마다 포도주 1갤론을 생산할” 그때를 기대하도록 어떻게 유도되어 왔는가 잘 알았다. 유대인은 메시아가 기적 같이 풍성한 시대를 개시할 것이라 믿었다. 히브리인은 기적의 전통과 이적(異蹟)의 전설에 오랫동안 젖어 있었다.

136:6.8 (1519.1) 그는 빵과 포도주를 몇 배로 불리려고 오는 메시아가 아니었다. 겨우 이 세상의 필요를 보살피려고 오지 않았다. 땅에 있는 자녀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드러내려고 왔고, 한편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살려는 진지한 노력을 그와 함께 하라고 땅에 있는 자녀들을 이끌려고 애썼다.

136:6.9 (1519.2) 이 결정을 내리면서 개인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나 순전히 이기적 이익과 영광을 얻기 위하여, 신성한 재능과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팔아넘기는 것이 어리석고 죄가 된다는 것을 나사렛 예수는 구경하는 우주에게 보여주었다. 바로 그것이 루시퍼와 칼리가스티아의 죄였다.

136:6.10 (1519.3) 예수의 이 큰 결정은 이기심을 채우고 오감을 충족하는 것은, 그것만으로 그 자체로, 진화하는 인간에게 행복을 줄 수 없다는 진리를 눈부시게 보여준다. 필사자로 사는 데에는 더 높은 가치―지적(知的) 통달과 영적 성취―가 있고 이것은 사람의 순전히 육체적 욕구 및 충동의 충족, 필요한 충족을 훨씬 초월한다. 사람이 천성으로 부여받은 재능과 능력은 더 높은 정신 및 영 능력을 개발하고 높이는 데 주로 바쳐야 한다.

136:6.11 (1519.4) 이렇게 예수는 새롭고 더 낫게 사는 방법, 즉 인생에서 상급의 도덕적 가치, 그리고 공간 세계에서 진화하는 인간으로 존재하면서 심오한 영적 만족을 얻는 방법을 우주의 인간들에게 드러냈다.

7. 셋째 결정

136:7.1 (1519.5) 먹을 것, 그리고 물질인 몸의 필요를 육체적으로 보살피는 것, 자신과 동료들의 건강을 돌보는 일과 같은 문제에 관하여 결정을 내리고 나서, 해결해야 할 다른 문제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신변의 위험에 부닥쳤을 때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가? 인간으로서 그의 안전에 대하여 정상으로 경계하고, 육체를 입은 생애가 때 이르게 끝나지 않도록 적당히 조심하지만, 육체를 입은 일생에 위기가 닥칠 경우에, 그는 어떤 초인간적 간섭도 삼가기로 결심하였다. 이 결정을 내리고 있을 때, 예수는 앞에 벼랑이 있는 바로 거기에 툭 튀어나온 바위 선반 위에, 어느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 선반에서 훌쩍 몸을 던져서 공중으로 나갈 수 있고, 유란시아에서 일생의 일을 집행하는 데 하늘 지성 존재들이 개입하라고 부르지 않겠다는 처음 큰 결정을 취소하고, 자아를 보존하는 태도와 관계되는 둘째 결정을 돌이킨다면, 몸을 다치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깨달았다.

136:7.2 (1519.6) 예수는 같은 민족의 사람들이 자연 법칙을 초월할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 구절을 잘 배웠다: “아무런 악한 것도 너에게 닥치지 아니하리라, 아무 전염병이 네 거처에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라. 네가 어떤 길을 가더라도 그가 천사들에게 너를 맡아서 지키라 할 것임이라.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손 안에 너를 붙들리라.” 이 따위의 주제넘은 태도, 아버지의 인력(引力) 법칙을 이렇게 무시하는 것이, 가능한 해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또는 혹시나 잘못 가르침받고 혼란에 빠진 민족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러나 그런 과정은, 표징을 구하는 유대인들이 아무리 흡족해 하더라도, 아버지를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확립된 법칙을 집적거리는 의심스러운 일이리라.

136:7.3 (1519.7)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서, 개인적 처신에 관계된 한, 주가 확정된 자연 법칙을 무시(無視)하면서 일하기를 물리쳤음을 아니까, 그가 결코 물 위로 걷거나 세계를 다스리는 물질적 질서를 짓밟는 어떤 다른 일도 하지 않았음을 너희가 분명히 안다. 물론, 인격이 된 조절자의 관할에 맡겨진 문제들과 관련하여, 시간 요소를 통제하는 힘이 없는 것으로부터 그를 온전히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아직까지 전혀 발견되지 않았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136:7.4 (1520.1) 땅에서 전 생애를 통하여, 예수는 이 결정에 한결같이 충실했다. 바리새인들이 표징을 보이라고 비웃든지, 아니면 갈보리에서 구경꾼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감히 덤비든지, 그는 산허리에서 이때 내린 결정을 변치 않고 고수하였다.

8. 넷째 결정

136:8.1 (1520.2) 이 하나님인 사람이 씨름하던 문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즉시 결정한, 다음으로 큰 문제는 동료 인간들의 눈길을 끌고 지지를 얻을 목적으로 그의 초인간 능력을 얼마큼이라도 사용해야 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었다. 굉장하고 놀라운 것을 갈망하는 유대인들을 만족시키려고 어떤 방법으로든 우주 권능을 써야 할 것인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결심하였다. 사람들이 그의 사명을 주목하게 만드는 방법과 같은 모든 그러한 습관을 없애는 과정을 따르겠다고 방침을 결정하였다. 그는 이 큰 결정에 한결같이 충실히 살았다. 시간 단축으로 수많은 자비 행위가 명백히 나타나는 것을 허락했을 때에도, 치료받은 자에게 받은 이익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입을 열지 말라고 거의 변함없이 타일렀다. 신성을 증명하고 나타내라고 “우리에게 징조를 보이라” 적들이 비웃으며 도전하는 것을 언제나 물리쳤다.

136:8.2 (1520.3) 기적을 행하고 놀라운 일을 하는 것은 물질 지성을 위압함으로 기껏해야 겉으로 나타나는 충성을 요구하리라는 것을 예수는 아주 지혜롭게 내다보았다. 그런 연출은 하나님을 계시하지도 사람을 구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순히 이적(異蹟)을 행하는 자가 되지 않으려 하였다. 오직 한 가지 일에―하늘나라를 세우는 데―전념하기로 결의하였다.

136:8.3 (1520.4) 예수가 자신과 교통하는 이 중대한 대화 전체를 통해서, 따져 보며 의심하는 듯한 인간적 요소가 있었으니, 이는 예수가 하나님일 뿐 아니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유대인들이 그를 메시아로서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이 뻔했다. 게다가 그가 꼭 한 가지 초자연적 일을 하기로 한다면, 그의 인간 지성은 그것이 참으로 신의 지성에 복종해서 된 것임을 확실히 알 것이다. 의심하는 성질을 가진 인간 지성에게 신의 지성이 이렇게 양보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과 일치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결정했고, 인격이 된 조절자가 자리에 계신 것이 신성이 인간과 협동하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라고 지적하였다.

136:8.4 (1520.5) 예수는 발이 닳도록 여행하였고, 로마ㆍ알렉산드리아ㆍ다마스커스를 회상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법을―정치와 상업에서 사람들이 타협과 외교로 어떻게 목적을 이루는가―알았다. 땅에서 사명을 촉진하는 데 이 지식을 이용할 것인가? 아니라! 마찬가지로, 하늘나라를 세우는 데 세상의 지혜와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고 재력의 영향도 받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다시 그는 아버지의 뜻에 순전히 의존하기로 작정하였다.

136:8.5 (1520.6) 예수는 자신의 권능 중 하나를 행사하는 여러 지름길을 잘 알았다. 나라와 온 세상의 눈길을 자신에게 즉시 집중시킬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알았다. 얼마 안 있어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유월절을 축하할 터이고 그 도시는 방문자들로 들끓을 것이었다. 그는 성전의 꼭대기에서 내려와서 놀란 군중 앞에서 공중에서 걸을 수 있었다. 이것이 그들이 찾고 있던 종류의 메시아였다. 그러나 그가 다윗의 왕좌를 다시 세우려고 오지 않았으므로 나중에 그들에게 실망을 줄 것이었다. 신의 목적을 이루는 길, 자연스럽고 느리고 확실한 길보다 더 앞서 가려고 애쓰는, 칼리가스티아의 방법이 쓸모 없음을 알았다. 다시, 사람의 아들은 아버지의 길, 아버지의 뜻에 온순하게 머리를 숙였다.

136:8.6 (1521.1) 예수는 자연스럽고 평범하고 어렵고 시련을 견디는 방법으로, 인류의 마음 속에서 하늘나라를 세우기로 했다. 후일에 하늘나라를 확장하고 그 세력을 키우는 일을 하면서 땅에 있는 자녀들은 바로 그런 과정을 따라야 한다. “숱한 시련을 통해서 대대로 많은 자손이 하늘나라로 들어가리라”는 것을 사람의 아들이 잘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문명인의 가장 큰 시험, 권력을 가지고 이를 순전히 이기적이거나 사사로운 목적에 쓰기를 굳건히 물리치는 큰 시험을 지금 거치고 있었다.

136:8.7 (1521.2) 사람의 아들의 일생과 체험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아들은 20세기나 다른 세기에 살던 필사자의 지성이 아니라, 1세기 인간의 지성 속에서 육신화되었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의 인간 자질을 자연스럽게 얻었다는 생각을 전하려는 것이다. 그는 그가 살던 시대의 유전(遺傳) 및 환경 요소, 그리고 그가 받은 훈련과 교육의 영향으로 얻은 결과였다. 그의 인간성은 진정하고 자연스러웠고, 그 시절과 그 세대에 선행(先行)하던 실제의 지적 상태와 사회 및 경제 조건으로부터 얻어졌고, 이로 인하여 육성되었다. 이 하나님인 사람의 체험 속에서 신(神)의 지성이 인간의 지능을 초월할 가능성이 언제나 있었다. 그렇기는 해도 그의 인간 지성이 활동할 때, 그리고 그렇게 하는 동안, 그의 인간 지성은 그 시절에 살던 인간의 환경 조건 밑에서 참된 필사자의 지성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했다.

136:8.8 (1521.3) 내키는 대로 권한을 보여줄 목적으로 인위적 상황을 만들어 내거나, 또는 도덕적 가치를 향상시키거나 영적 진보를 가속할 목적으로 특별한 권능을 헤프게 휘두르는 것이 어리석음을 예수는 광대한 우주의 모든 세계에 보여주었다. 땅에서 이룰 그의 사명이 마카비 통치가 가져온 실망의 되풀이가 되지 않게 하려고 결심하였다. 피땀 흘리지 않고 인기(人氣)를 얻으려는 목적이나 정치적 위신을 얻기 위하여 신의 속성을 팔아버리려 하지 않았다. 그는 신성하고 창조적인 에너지를 국가 권력이나 국제적 위신으로 변질시키는 것을 묵인하려 하지 않았다. 나사렛 예수는 죄와 동행하기는커녕 악과 타협하기를 거절하였다. 주는 땅에서 현세에 중요시할 모든 다른 것 위에, 승리의 기분으로 아버지의 뜻에 충성하는 일을 올려놓았다.

9. 다섯째 결정

136:9.1 (1521.4) 자신과 자연 법칙 및 영적 능력의 관계에 대하여 그러한 원칙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세우는 데 어떤 방법을 선택할 것인가에 주의를 기울였다. 요한은 이미 이 일을 시작했다. 전하는 말씀을 그가 어떻게 계속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요한의 사명을 이어받아야 하는가? 효과적 노력과 총명한 협동을 위하여 요한의 추종자들을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가? 예수는 더 이상 자신을 유대인의 메시아로, 적어도 그 시절에 대중이 상상한 메시아로 보는 것을 금할 최종의 결정에 지금 이르고 있었다.

136:9.2 (1522.1) 기적 같은 권력을 입고 이스라엘의 적들을 동댕이치고 빈곤과 억압에서 해방된 유대인을 세계의 통치자로서 세울 구원자를 유대인들은 마음 속에 상상하고 있었다. 예수는 이런 희망이 결코 실현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늘나라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악을 내쫓는 것과 상관이 있고 순전히 영적 관심거리임을 알았다. 눈부시게 번쩍 권력을 전시함으로 영적인 나라를 개시하는 것이 현명한가 생각해 보았지만―그러한 과정은 허락될 수 있고, 온전히 미가엘의 관할권에 속했다―그러한 계획을 반대하기로 완전히 결심하였다. 칼리가스티아의 혁명적 기법과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에 복종함으로 잠재적으로 세상을 이겼고, 그가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로서 할 일을 마치기로 계획하였다.

136:9.3 (1522.2) 이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력을 소유할 가능성을 지니면서, 하나님인 이 사람이 통치권의 깃발을 펄럭이겠다, 기적을 행하는 대군을 전투 대열로 정렬하겠다고 일단 결심하면 유란시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인가 너희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타협하려 들지 않았다. 짐작컨대 이렇게 함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숭배하게 만들 것이라 하더라도 그는 그러한 악을 섬기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을 지키려 하였다.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을 예배하고 오로지 그를 섬길지니라”하고 바라보는 우주에게 선포하고 싶었다.

136:9.4 (1522.3) 여러 날이 지나자, 점점 더 또렷하게 예수는 어떤 종류의 진리 계시자가 될 것인가 깨달았다. 하나님의 길이 쉬운 길이 되지 않을 것을 그는 헤아렸다. 그의 인간 체험에서 마실 남은 잔이 아마 씁쓸할지 모른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지만, 그는 이를 들이키기로 결심했다.

136:9.5 (1522.4) 그의 인간 지능조차 다윗의 왕좌에 작별을 알리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이 인간의 지성은 신의 지성이 가는 길을 따라간다. 인간의 지성은 아직도 질문하지만 아버지의 영원하고 신성한 뜻을 행하는 데 조건 없이 항상 복종하면서, 세상에서 사람으로 사는 이 통합된 일생에서 신이 준 대답을 마지막 판결로 어김없이 받아들인다.

136:9.6 (1522.5) 로마는 서양 세계의 여왕이었다. 혼자 있는 가운데 이 중대한 여러 결정에 이르렀으므로, 지금 하늘 무리들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의 아들은 유대인이 세계 정복을 성취할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그렇게 엄청난 지혜와 권력을 소유했는데, 땅에서 태어난 이 유대인은 자기 지위를 높이거나 그의 민족을 왕좌에 올려놓기 위하여 자신의 우주 재산을 쓰기를 거부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이 세상의 나라들”을 보았고 이를 점령할 능력을 소유했다.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은 이 모든 권력을 그의 손에 맡기었지만 그는 원하지 않았다. 땅의 나라들은 한 우주의 창조자인 통치자의 흥미를 끌기에 하찮은 것이었다. 그에게 오직 한 가지 목적이 있었으니, 즉 하나님을 더욱 사람에게 드러내는 것, 하늘나라를 세우는 것, 인류의 마음 속에서 하늘 아버지가 다스리는 것이었다.

136:9.7 (1522.6) 전투ㆍ싸움ㆍ학살의 관념은 예수에게 싫은 것이었고, 그는 이를 거들떠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의 하나님을 드러내는 평화의 왕으로서 땅에서 나타나고 싶었다. 세례받기 전에 그는 로마의 억압자들에 항거하여 일으키는 반란에서 열심당원들을 이끌라는 제안을 다시 물리친 적이 있었다. “주가 내게 말씀하셨으니,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면 너의 유산으로서 이교도를, 땅에서 가장 먼 나라들을 네 소유물로 주리라. 너는 쇠막대기로 저희를 부숴버리고 도공(陶工)의 그릇처럼 산산조각 부술지니라’” 이렇게 어머니가 가르쳐 준 그 성서 구절에 관하여 그는 최후의 결정을 내렸다.

136:9.8 (1522.7) 나사렛 예수는 그러한 발언이 자신을 언급하는 말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드디어 사람의 아들의 인간 지능은 이 모든 메시아의 문제점과 모순―히브리 성서, 부모의 훈련, 하잔의 가르침, 유대인의 기대, 인간적 야망―을 싹 쓸어버렸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그는 갈 길을 결정했다. 갈릴리로 돌아가서 조용히 하늘나라의 선포를 시작하고 그의 아버지(인격이 된 조절자)를 의지하고서 하루하루 과정의 세부를 해결해 나가려 하였다.

136:9.9 (1523.1) 예수가 영적 문제의 증명을 위해서 물질적 분석을 이용하지 않으려 했을 때, 자연 법칙을 주제넘게 무시하려 하지 않았을 때, 그는 광대한 우주에 두루, 모든 세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여러 가지 결정으로 훌륭한 본보기를 보였다. 영적 영광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 이 세상의 권력 붙잡기를 마다했을 때, 그는 우주에 충성하고 도덕적으로 고귀한 모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모범을 보였다.

136:9.10 (1523.2) 세례를 받고 나서 산으로 올라갔을 때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사명과 그 성질에 대하여 혹시 어떤 의심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혼자 있으면서 결심하던 40일 뒤에 동료들에게 돌아왔을 때는 전혀 의심이 없었다.

136:9.11 (1523.3) 아버지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예수는 한 계획을 세웠다. 사람들에게 육체적 만족을 제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로마에서 아주 최근에 행해지는 것을 본 것처럼 군중에게 빵을 나누어주지 않을 것이다. 비록 유대인이 바로 그런 종류의 구원자를 기대하고 있더라도, 이적을 행하여 자신에게 눈을 끌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권한이나 현세의 권능을 보여서 세상이 그가 전하는 영적 말씀을 받아들이게 만들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136:9.12 (1523.4) 기대하는 유대인들의 눈에, 다가오는 나라를 돋보이게 하는 이 여러 방법을 물리치면서 예수는 바로 이 유대인들이 그에게 권한이 있고 그가 신(神)이라는 주장을 분명히, 마침내 모두 물리칠 것을 확신하였다. 이 모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는 초기의 추종자들이 그를 메시아로 언급하는 것을 막으려고 오랫동안 애썼다.

136:9.13 (1523.5) 대중에게 봉사하는 동안 내내, 그는 항상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세 가지 상황을 처리할 필요성에 부딪쳤다. 먹여 달라 소리치며, 기적을 행하라고 고집하며, 마지막으로 추종자들이 그를 임금으로 만들게 해달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예수는 페레아 산 속에서 혼자 지내던 이 여러 날 동안 내린 결정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10. 여섯째 결정

136:10.1 (1523.6) 혼자 있던, 기억에 남을 이 기간의 마지막 날에, 요한과 그 제자들과 함께 하려고 산을 내려가기 전에 사람의 아들은 마지막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을 인격이 된 조절자에게 다음의 말씀으로 전했다: “그리고 이제 결정되고 기록된 이 문제들과 같이, 모든 다른 문제에서도 내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겠다고 나는 당신께 서약하나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산을 내려갔다. 그의 얼굴은 영적 승리를 얻고 도덕적으로 성취한 영광으로 빛났다.

제 137 편 갈릴리에서 기다리는 때

유란시아서

제 137 편

갈릴리에서 기다리는 때

137:0.1 (1524.1) 서기 26년 2월 23일 토요일 아침 일찍, 예수는 산에서 내려와서, 펠라에서 야영하던 요한의 일행과 다시 합세하였다. 그날 하루 종일 예수는 군중과 섞였다. 쓰러져서 몸을 다친 한 소년을 보살폈고, 안전하게 부모의 품에 데려다 주려고 가까운 펠라 마을까지 여행하였다.

1. 처음 네 사도를 고르다

137:1.1 (1524.2) 이 안식일에 요한의 수제자 둘이 예수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요한의 모든 추종자 가운데 안드레라 이름하는 사람이 예수에게 가장 깊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다친 소년과 함께 펠라로 여행 갈 때 예수를 따라갔다. 요한의 회합 장소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예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목적지에 이르기 바로 전에 두 사람이 잠깐 이야기하려고 멈추었는데, 그동안에 안드레가 말했다: “당신이 가버나움에 온 뒤에 당신을 지켜보았나이다. 나는 당신이 새 선생이라 믿고, 비록 당신의 가르침을 내가 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당신을 따르려고 완전히 결심하였나이다. 당신 밑에서 가르침받으며 새 나라에 대한 진리를 모두 배우고자 하나이다.” 예수는 진심으로 확신을 주면서 사도들 중에 첫 사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 열두 명의 무리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새 나라를 세우는 일에 함께 수고할 것이었다.

137:1.2 (1524.3) 안드레는 요한이 하는 일을 말없이 지켜보고 이를 진지하게 믿은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아주 유능하고 열심 있는 시몬이라는 이름의 아우가 있었는데, 그는 요한의 으뜸가는 제자들 중의 하나였다. 시몬이 요한의 주요한 지지자 중에 하나였다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137:1.3 (1524.4) 예수와 안드레가 캠프로 돌아온 뒤에 곧, 안드레는 아우 시몬을 찾아 다녔다. 옆으로 그를 불러서, 자기 생각에 예수가 위대한 선생이라고 결정했다, 자신이 제자가 되겠다 서약했다고 일러주었다. 더 나아가서 자기가 섬기겠다는 제안을 예수가 받아들였다고 말하고, (시몬이) 마찬가지로 예수한테 가서 새 나라에서 봉사하는 친교 모임에 자청해서 들어가라고 제안하였다. 시몬이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이 세베대의 작업장으로 일하러 온 뒤에 하나님이 그를 보내셨다고 믿었지만, 요한을 어떻게 할까? 우리가 그를 버려야 하느냐? 그것이 옳은 일이냐?” 이렇게 되자 그들은 당장에 요한에게 의논하러 가기로 하였다. 유능한 조언자요, 가장 장래가 있는 제자 가운데 둘이나 잃는다는 생각에 요한은 슬퍼졌지만, 용감하게 물음에 대답했다: “이것은 겨우 시작이라. 당장에 내 일은 끝날 터이고 우리 모두가 그의 제자가 될 것이라.” 그리고 나서 안드레는 예수에게 옆으로 오라고 손짓하였고 한편 아우가 새 나라에 봉사하는 데 가입하기를 바란다고 선언하였다. 시몬을 둘째 사도로 반가이 맞으면서, 예수는 말했다: “시몬아, 너의 열심은 칭찬할 만해도 하늘나라의 일에는 위험하니라. 너에게 훈계하노니, 말할 때 더욱 조심하라. 나는 네 이름을 베드로로 바꾸고자 하노라.”

137:1.4 (1525.1) 다친 소년은 펠라에서 살았는데 그의 부모는 예수가 함께 그날 밤을 지내라고, 자기 집을 거처로 쓰라고 이전에 간청하였고 예수는 약속했다. 안드레와 그 동생을 떠나 보내기 전에, 예수는 말했다: “아침 일찍, 우리는 갈릴리로 가느니라.”

137:1.5 (1525.2) 예수가 밤을 지내려고 펠라로 돌아온 뒤에, 안드레와 시몬이 다가오는 하늘나라를 세우는 데 그들이 어떤 성질의 봉사를 할 것인가 아직 의논하고 있는 동안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산에서 예수를 오랫동안 헛되이 찾다가 막 돌아와서 그 장면에 도착하였다. 시몬 베드로가 어떻게 자기와 형 안드레가 새 나라에서 처음으로 받아들인 조언자가 되었는가, 그리고 아침에 그들이 새 주(主)와 함께 갈릴리를 향하여 떠나기로 예정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야고보와 요한 두 사람은 슬펐다. 그들은 예수를 얼마 동안 알고 있었고 예수를 아끼었다. 산에서 여러 날 동안 그를 찾아다녔는데, 이제 돌아와서 남들이 우대받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예수가 어디로 갔는가 묻고 그를 찾으려고 서둘렀다.

137:1.6 (1525.3) 그의 거처에 다다랐을 때 예수는 잠들어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를 깨우고 말했다: “그토록 오래 같이 살던 우리가 산에서 당신을 찾는 동안에, 우리보다 먼저 남들을 우대하여, 새 나라에서 첫 동료로서 안드레와 시몬을 고르시다니, 어찌 된 일이니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행할 때, 그를 찾아야 한다고 누가 지시하였는가’ 스스로 물어 보라.” 그들이 산에서 오랫동안 찾던 이야기를 자세히 늘어놓은 뒤에, 예수는 그들을 더 가르쳤다: “산이 아니라 너희 마음 속에서 새 나라의 비밀 찾기를 배워야 하느니라. 찾고 있던 것은 이미 너희 혼 속에 있었느니라. 너희는 정말로 내 형제요―내가 너희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느니라―이미 너희는 그 나라에 속했고 명랑해야 하며, 또한 내일 갈릴리로 함께 갈 준비를 하여라.” 그러자 요한은 감히 물었다. “하지만 주여, 안드레와 시몬처럼 야고보와 나도 새 나라에서 당신과 동료가 되겠나이까?” 각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예수는 말했다: “내 형제여, 다른 이 사람들이 받아달라고 청하기도 전에 너희는 이미 하늘나라 정신 속에 나와 함께 있었느니라. 내 형제인 너희는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할 필요가 없느니라. 처음부터 그 나라에서 나와 함께 있었느니라. 사람들 앞에서는 남들이 너희 앞에 먼저 갈지 모르지만, 너희가 내게 이렇게 청할 생각을 가지기도 전에, 내 마음 속에서 너희를 하늘나라 회원으로 또한 셈하여 두었노라. 그렇다 해도, 좋은 뜻을 가지기는 했어도, 잃어버리지 않은 자를 찾으려고 스스로 나선 일에 분주하여 자리를 비우지 않았더라면 사람 앞에서도 너희가 처음이 되었을까 하니라. 다가오는 나라에서, 걱정을 일으키는 일에 머리를 쓰지 말고 오히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만 항상 아랑곳할지니라.”

137:1.7 (1525.4) 야고보와 요한은 꾸지람을 달게 받아들였다. 결코 안드레와 시몬을 더 질투하지 않았다. 그들은 두 동료 사도와 함께 다음 날 아침에 갈릴리로 떠나려고 준비하였다. 예수가 선택한 조언자 일행과 나중에 그를 따른 광대한 무리의 믿는 제자들을 구별하려고 이날 이후부터 사도(使徒)라는 칭호가 쓰였다.

137:1.8 (1525.5) 그날 밤 늦게, 야고보ㆍ요한ㆍ안드레ㆍ시몬은 세례자 요한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물을 글썽였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강직한 유대인 선지자는 수제자 가운데 두 사람이나 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 갈릴리 영주의 사도가 되라고 내놓았다.

2. 빌립과 나다니엘을 고르다

137:2.1 (1526.1) 서기 26년 2월 24일 일요일 아침, 예수는 펠라 가까이 강가에서 세례자 요한과 헤어졌고 육체를 입고서 결코 그를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137:2.2 (1526.2) 그날 예수와 네 제자 사도가 갈릴리를 향하여 떠나자, 요한을 따르던 사람들의 야영지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처음으로 큰 분열이 막 일어나고 있었다. 그 전날 요한은 예수가 구원자라고 안드레와 에즈라에게 분명히 선언하였다. 안드레는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했지만, 에즈라는 태도가 부드러운 나사렛 목수를 물리치며 동료들에게 외쳤다: “다니엘 선지는 사람의 아들이 권력과 큰 영광을 입고서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리라 선언하느니라. 이 갈릴리 목수, 가버나움의 이 조선공은 구원자일 수 없느니라. 그런 하나님의 선물이 나사렛에서 나올 수 있느냐? 이 예수는 요한의 친척이요, 우리 선생은 마음이 몹시 선하여 속았도다. 우리는 이 거짓 메시아를 가까이 하지 말자.” 이 발언 때문에 요한이 꾸짖자 에즈라는 많은 제자를 이끌고 남쪽으로 서둘러 갔다. 이 무리는 요한의 이름으로 계속 세례를 주었다. 결국 그들은 요한을 믿지만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종파를 세웠다. 이 무리의 잔재가 오늘날까지도 메소포타미아에 남아 있다.

137:2.3 (1526.3) 요한의 추종자 사이에서 이 소동이 일고 있는 동안, 예수와 네 제자 사도는 갈릴리를 향하여 한창 가고 있었다. 나인의 길로 나사렛으로 가려고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예수는 앞으로 길을 올려다보다가, 벳세다의 어느 빌립이라는 사람이 한 친구와 함께 그들을 향해 오는 것을 보았다. 예수는 예전부터 빌립을 알았고 그는 또한 새 사도 네 사람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다가올 것이라 소문이 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더 배우기 위하여 펠라에 있는 요한을 찾아보려고 그는 친구 나다니엘과 함께 길을 가고 있었는데 예수를 만나게 되어 기뻤다. 예수가 처음 가버나움에 온 뒤로 그는 예수를 칭찬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다니엘은 갈릴리의 가나에서 살았고 예수를 알지 못했다. 나다니엘이 길 옆에 나무 그늘 아래서 쉬는 동안 빌립은 앞으로 나서서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137:2.4 (1526.4) 베드로는 빌립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자기와 안드레ㆍ야고보ㆍ요한을 언급하며 모두가 새 나라에서 예수의 동료가 되었다고 설명하기 시작했고, 빌립에게 봉사를 자청하라고 세게 재촉하였다. 빌립은 난처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한 순간의 경고도 없이, 여기서―요단강 가까이 길 옆에서―즉시 결정하라는 일생의 가장 중대한 문제가 닥쳤다. 이때가 되어 그는 베드로ㆍ안드레ㆍ요한과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었고, 한편 예수는 갈릴리를 거쳐 계속 가버나움까지 가는 여행의 대강을 야고보에게 일러주었다. 마침내 안드레는 빌립에게 제안했다. “선생한테 물어보는 것이 어떠냐?”

137:2.5 (1526.5) 갑자기 빌립에게 예수는 정말로 위대한 사람, 아마도 메시아라는 생각이 떠올랐고 이 문제는 예수의 결정을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곧장 예수에게로 가서 물었다: “선생이여, 내가 요한에게로 가리이까 아니면 당신을 따르는 친구들과 함께 하리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나를 따르라.” 빌립은 구원자를 찾았다는 확신에 마음이 떨렸다.

137:2.6 (1526.6) 빌립은 이제 그 일행에게 그 자리에 남아 있으라고 손짓하였고, 한편 그가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을 알리려고 친구 나다니엘에게 서둘러 돌아갔다. 나다니엘은 뽕나무 밑에서 아직도 뒤에 남아 있었고, 세례자 요한, 다가오는 나라, 기대된 메시아에 관하여 들은 많은 것을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뜯어보고 있었다. 이 명상을 깨뜨리고 빌립이 외쳤다, “구원자, 그 사람을 찾았노라. 모세와 선지자들이 그에 관하여 기록했는데 요한이 그를 선포하였느니라.” 나다니엘은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이 선생이 어디 출신이냐?” 빌립은 대답했다. “그는 나사렛 예수요, 요셉의 아들이자 목수이고, 요즈음에는 가버나움에 거하니라.” 그러자 얼마큼 충격을 받고 나다니엘은 물었다, “나사렛에서 무슨 그런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느냐?” 하지만 빌립은 그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와서 보라.”

137:2.7 (1527.1) 빌립은 나다니엘을 예수에게로 데리고 갔다. 그는 진지하게 의심하는 사람의 얼굴을 인자하게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을 보라, 속에 아무 거짓이 없도다. 나를 따르라.” 나다니엘은 빌립을 향하여 말했다. “네 말이 맞도다. 그는 정말로 사람들의 선생이라. 자격이 있다면, 나도 따르겠노라.” 예수는 나다니엘에게 머리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나를 따르라.”

137:2.8 (1527.2) 예수는 이제 미래에 절친하게 지낼 동료 무리의 절반을 모았다. 다섯은 얼마 동안 그를 알았고 하나는 낯선 사람 나다니엘이었다.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그들은 요단강을 건넜고 나인 마을 옆을 지나며, 그날 저녁 늦게 나사렛에 다다랐다.

137:2.9 (1527.3) 예수가 소년 시절에 살던 집에서 그들 모두가 요셉과 함께 그날 밤을 묵었다. 예수의 동료들은 새로 찾아낸 선생이 어째서 십계명과 기타 여러 금언과 말씀 형태로 집 근처에 남아 있는 그의 기록의 흔적을 모두, 샅샅이 없애느라고 그렇게 마음을 쓰는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처사는―흙 위나 모래에 쓴 것을 빼고―나중에 그가 글 쓰는 것을 결코 구경하지 못한 사실과 함께, 그들의 머리 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었다.

3. 가버나움 방문

137:3.1 (1527.4) 그들 모두가 마을에서 유명한 젊은 여인의 결혼식에 초대받았기 때문에, 이튿날 예수는 사도들을 가나로 먼저 보냈다. 한편 가버나움에 계신 어머니를 급히 찾아보려고 준비했고, 막달라에서 동생 유다를 보려고 멈추었다.

137:3.2 (1527.5) 나사렛을 떠나기 전에, 예수의 새 동료들은 그때로 보아서 최근에 일어났던 놀라운 사건들에 대하여 요셉에게, 그리고 예수 집안의 다른 식구들에게 이야기하고, 예수가 오래 기대하던 구원자라는 그들의 신념을 아낌없이 표현하였다. 예수의 이 집안 식구들은 이 모든 것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고, 요셉은 말했다: “어쩌면 결국은 어머니가 옳았는가 보다―아마도 이상한 형님이, 오실 임금인가 보다.”

137:3.3 (1527.6) 유다는 예수가 세례받을 때 자리에 있었고, 형 야고보와 함께 땅에서 예수의 사명을 굳게 믿는 사람이 되었다. 야고보와 유다 두 사람은 비록 형의 사명이 무슨 성질을 가졌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어머니는 예수가 메시아요, 다윗의 아들이라는 옛 희망을 모두 다시 살려냈고, 형이 이스라엘의 구원자라는 믿음을 가지도록 아들들을 북돋았다.

137:3.4 (1527.7) 예수는 월요일 밤 가버나움에 도착했으나 야고보와 어머니가 사는 자기 집으로 가지 않고 바로 세베대의 집으로 갔다. 가버나움에 있는 친구들 모두가 그에게 크고 즐거운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보았다. 다시 한 번 그는 비교적 명랑한 듯하고 나사렛에서 어렸던 시절에 그의 모습과 더 비슷한 듯하였다. 세례받기 전 여러 해 동안, 그리고 바로 전에 혼자 있던 기간과 그 직후에, 그는 갈수록 더 심각해졌고 말이 없었다. 이제 이들 모두에게 그는 옛날의 모습과 아주 비슷해 보였다. 그에게 무언가 무게 있는 기품과 고상한 모습이 있었지만, 그는 다시 한 번 마음이 가벼웠고 기쁨에 넘쳐 있었다.

137:3.5 (1528.1) 마리아는 기대에 부풀어 마음이 떨렸다. 가브리엘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가 가까왔다고 예상하였다. 얼마 안 있어, 아들이 초자연 능력을 가진, 유대인의 임금이라는 기적 같은 계시에 온 팔레스타인이 소스라치게 놀라고 어리둥절할 것이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와 야고보ㆍ유다ㆍ세베대가 무엇을 물어도 예수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내가 여기서 얼마 동안 머무르는 것이 더 좋으니라. 나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 하노라.”

137:3.6 (1528.2) 이튿날 화요일에, 나오미의 결혼식 때문에 모두 가나로 여행했다. 결혼식은 다음 날에 거행될 예정이었다. “아버지의 때가 올 때까지” 아무에게도 자기에 관하여 말하지 말라고 예수가 거듭 경고했는데도, 그들은 고집하여 구원자를 찾았다는 소식을 조용히 널리 퍼뜨렸다. 가나에서 있을 결혼식에서 예수가 메시아의 권한을 맡는 일을 시작하리라, 큰 능력과 당당한 위엄을 갖추고 그렇게 하리라, 각자가 자신 있게 기대하였다. 그들은 세례에 뒤따라 일어난 현상에 대하여 들은 것을 기억하였고, 땅에서 그의 앞길에 초자연적 이적과 기적 같은 전시가 더욱 나타날 것이라 믿었다. 따라서 시골 전체가 나오미와 요압, 곧 나단의 아들의 결혼 잔치를 위하여 가나에서 함께 모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137:3.7 (1528.3) 마리아는 몇 년 동안 이렇게 즐거운 적이 없었다. 아들의 즉위식을 구경하려고 행차하는 황태후의 기분으로 가나로 여행하였다. 그가 열세 살이 된 뒤로, 예수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가 그렇게 태평하고 행복하며, 동료들의 소원과 소망을 그렇게 헤아리고 이해하며, 그렇게 마음에 들게 공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작은 무리를 지어 모두 속삭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 하였다. 이 이상한 사람이 다음에 무슨 일을 할까? 어떻게 그가 다가오는 나라의 영광을 열어 보일까? 그들이 있는 앞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힘과 권능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생각에 모두가 마음이 떨렸다.

4. 가나에서 있은 결혼식

137:4.1 (1528.4) 수요일 한낮이 되어서, 거의 1천 명의 손님들이 가나에 도착했는데 결혼 잔치에 부른 수보다 4배가 넘었다. 수요일에 결혼을 축하하는 것이 유대인의 풍습이었고, 결혼식을 위하여 초청장이 한 달 전에 나갔다. 오전과 이른 오후에, 형편은 결혼식이라기보다 예수를 위한 대중 환영회처럼 보였다. 유명 인사에 가까운 이 갈릴리 사람에게 누구나 인사하기를 바랐고, 그는 젊은이와 늙은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아주 정중하였다. 예수가 예비 결혼 행렬을 이끌기로 동의했을 때 모두가 기뻐했다.

137:4.2 (1528.5) 예수는 이제 그의 인간 존재, 신으로서 선재(先在)했던 것, 그의 인간 성품과 신다운 성품이 통합되거나 융합된 상태를 속속들이 자각하고 있었다. 완전한 몸가짐으로 한 순간에 사람의 역할을 해내거나 즉시 신다운 성품에 따르는 인격의 특권을 취할 수 있었다.

137:4.3 (1528.6) 시간이 지나자, 예수는 사람들이 그가 무슨 놀라운 일을 할까 기대하고 있음을 더욱 의식하게 되었다. 특히, 가족과 제자인 여섯 사도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어떤 초자연적 일을 보여줌으로 하늘나라가 다가온 것을 적절히 선포하기를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37:4.4 (1529.1) 오후에 일찍 마리아는 야고보를 불러냈다. 결혼 예식(禮式)과 관련하여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초자연적인 자”로서 자신을 드러내려고 계획했는가 그들을 믿고 비밀을 알려 주겠는가 물으려고 두 사람이 함께 예수에게 감히 다가왔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에게 말문을 떼자마자 그의 특유한 분개심을 일으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렇게만 말했다: “당신들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보살피는 동안에, 기꺼이 함께 기다리라.” 그러나 그의 꾸짖는 웅변은 얼굴빛에 나타나 있었다.

137:4.5 (1529.2) 어머니의 이 행동은 인간 예수에게 큰 실망이었다. 겉으로 그의 신성(神性)을 어떤 방법으로 전시하는 즐거움에 빠지라는 어머니의 은근한 제안에 자신이 반응한 것을 깨닫고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것은 바로 얼마 전에 산 속에서 혼자 있을 때,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바로 그런 일 중에 하나였다. 몇 시간 동안 마리아는 많이 우울하였다. 어머니는 야고보에게 말했다: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노라. 이 모두가 무엇을 뜻할 수 있느냐? 그의 이상한 행동은 언제 끝나느냐?” 야고보와 유다는 어머니를 위로하려고 애썼고, 한편 예수는 한 시간 동안 혼자 지내려고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돌아왔고 다시 한 번 명랑하고 즐거워하였다.

137:4.6 (1529.3) 기대하는 마음으로 침묵 가운데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예식 전부가 끝났는데 그 귀빈으로부터 아무 움직임도, 말 한마디도 없었다. 그리고 나서 요한이 “구원자”라고 선포한 그 목수요, 조선공이 저녁 잔치에, 아마도 결혼식 저녁 식사에 솜씨를 보일 것이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러나 결혼식 저녁 식사가 있기 바로 전, 제자인 사도 여섯을 불러모으고 그가 아주 진지하게 말했을 때, 그렇게 솜씨 보이기를 바라는 모든 기대가 머리에서 싹 사라졌다. “호기심 있는 자를 만족시키거나 의심하는 자에게 확신을 주기 위하여 무슨 놀라운 일을 하려고 내가 여기 왔다 생각지 말라. 오히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을 받들려고 여기에 있느니라.” 그러나 그가 동료들과 의논하는 것을 보았을 때, 마리아와 다른 사람들은 무슨 특별한 일이 바야흐로 일어나려 한다고 머리 속에서 충분히 납득하였다. 결혼식 저녁 식사와 잔치 기분으로 친교하는 저녁을 즐겁게 보내려고 모두가 앉았다.

137:4.7 (1529.4) 신랑의 아버지는 결혼 잔치에 초청한 모든 손님을 위하여 포도주를 넘치게 마련했다. 그러나 아들의 결혼식이, 예수가 메시아인 구원자라는 것을 기대한 대로 보여주는 일과 아주 밀접히 연결된 사건이 될 줄을 그가 어떻게 알 것인가? 그는 이름난 갈릴리 사람을 손님으로 대접하는 영광을 얻어서 기뻐했다. 그러나 결혼 저녁 식사가 끝나기 전에, 포도주가 동이 나고 있다는 불안한 소식을 하인들이 가져왔다. 정식 저녁 식사가 끝나고 손님들이 뜰에서 이리저리 거닐고 있을 때가 되어서, 신랑(新郞)의 어머니는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마리아에게 털어놓았다. 마리아는 자신 있게 말했다: “아무 걱정 마시게―우리 아들에게 이르겠노라. 그가 우리를 도울 것이야.” 겨우 몇 시간 전에 꾸지람을 들었는데도, 이렇게 어머니는 주제넘게 말했다.

137:4.8 (1529.5) 여러 해 동안 내내,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가정 생활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언제나 도움을 받으려고 예수에게 호소했다. 그래서 이때 그를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포부가 큰 어머니는 이 기회에 맏아들에게 하소연할 또 다른 동기가 있었다. 예수가 뜰 한 구석에서 혼자 서 있는데, 어머니가 다가와서 말했다: “아들아, 저희는 포도주가 떨어졌느니라.” 예수는 대답했다: “착한 여인이여,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마리아가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때가 왔다고 믿노라. 네가 우리를 도와줄 수 없느냐?” 예수는 대답했다: “내가 이런 식으로 일하러 오지 않았다고 다시 선언하나이다. 이 문제로 어찌하여 어머니는 나를 다시 괴롭히나이까?” 그러자 마리아는 눈물을 흘리며 쓰러지면서 그에게 탄원하였다: “하지만 아들아, 네가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 저희에게 약속했느니라. 제발 나를 위해서 무엇인가 하지 않겠느냐?” 그러자 예수는 말했다: “여인이여, 어머니가 무슨 상관이 있어 그렇게 약속하였나이까?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하소서. 모든 일에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야 하나이다.”

137:4.9 (1530.1)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풀이 꺾였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눈물이 얼굴에서 주르르 흘러내리면서, 어머니가 거기 앞에 꼼짝 않고 서 있자, 예수의 인간 가슴에는 육체로 그를 낳은 여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앞으로 몸을 굽히면서, 어머니의 머리에 손을 부드럽게 얹으며 말했다. “자, 자, 어머니 마리아여, 냉정하게 들리는 내 말에 슬퍼 마소서. 오로지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내가 어머니에게 여러 번 이르지 아니하더이까? 아버지의 뜻의 일부라면, 어머니가 내게 부탁하는 것을 아주 기쁘게 할 터인데―” 예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였다. 마리아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챈 듯하였다. 벌떡 뛰어오르면서 마리아는 예수의 목에 팔을 감고 그에게 입맞추고, 하인들 구역으로 쏜살같이 달려가서 말했다. “내 아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행하라.” 그러나 예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다―아니, 차라리 바라는 마음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다.

137:4.10 (1530.2) 마리아는 기뻐서 덩실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포도주가 만들어질까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권한을 주장하라고, 감히 앞으로 나서서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메시아의 권력을 드러내라고 마침내 맏아들을 설득했다고 자신 있게 믿었다.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이 전혀 모르는 어떤 우주 동력자와 성격자들이 자리에 있고 결합했기 때문에, 그 여자는 실망하지 않게 되어 있었다. 마리아가 바라고, 예수, 하나님인 사람이 인간적으로, 동정심에서 바랐던 포도주가 막 생기고 있었다.

137:4.11 (1530.3) 물로 채워진, 여섯 돌 항아리가 가까이 있었고, 하나에 20갤론쯤 들어 있었다. 이 물은 결혼식의 마지막 정화(淨化) 예식에 나중에 쓰려던 것이었다. 어머니가 바쁘게 지휘하는 가운데, 이 커다란 돌 그릇들 둘레에서 하인들이 법석을 떠는 모습이 예수의 눈길을 끌었다. 거기로 가면서, 그는 사람들이 포도주를 항아리에서 주전자로 가득 쏟아 붓는 것을 지켜보았다.

137:4.12 (1530.4) 예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차츰 생각이 떠올랐다. 가나의 결혼 잔치에 온 모든 사람 가운데 예수가 가장 놀랐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놀라운 일 하기를 기대했으나 그것은 바로 그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사람의 아들은 산에서, 인격화된 조절자가 훈계한 말씀을 기억하였다. 어떤 권력자나 권한도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창조자 특권을 그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고 전에 조절자가 어떻게 경고했는가 회상했다. 이 경우에는 동력 변화자, 중도자, 그리고 다른 모든 필요한 성격자가 물과 기타 필요한 요소 가까이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우주의 창조 군주가 소망을 표현한 앞에서, 포도주가 순간에 나타나는 것을 피할 길이 없었다. 인격이 된 조절자가 아들의 소망대로 집행하는 것이 전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뜻을 알렸기 때문에, 이 일은 이중으로 확실해졌다.

137:4.13 (1530.5) 그러나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기적은 아니었다. 아무런 자연 법칙을 수정하거나 취소하거나 초월하지도 않았다. 포도주를 공들여 만드는 데 필요한 화학 요소들을 하늘에서 조합하는 것과 관련하여 시간이 제거된 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나에서 이 기회에 창조자의 관리들은, 필요한 화학 구성 요소들을 공간에서 조립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초인간 관리들이 개입하여 이 일을 했다는 것 외에, 보통 자연 과정에 따라서 사람들이 하는 그대로 포도주를 만들었다.

137:4.14 (1531.1) 게다가 이른바 이 기적을 행하는 것은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든 일에 아버지의 뜻에 예수가 이미 복종했으니까,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137:4.15 (1531.2) 하인들이 이 새 포도주를 부어서 신랑 들러리, 즉 “잔치의 사회자”에게 들고 갔을 때, 포도주를 맛본 뒤에 그는 신랑을 부르며 말했다: “처음에는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잔뜩 마신 뒤에는 포도나무의 못한 소산을 가져오는 것이 풍습이어늘, 그대는 잔치의 마지막까지 가장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었도다.”

137:4.16 (1531.3) 마리아와 예수의 제자들은 기적이라고 생각된 일이 일어나서 크게 기뻐했고, 예수가 의도해서 기적을 행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예수는 뜰의 아늑한 구석으로 물러가서 짧은 몇 순간 심각한 생각에 잠겼다. 그 상황 아래에서 이 사건은 그가 친히 고삐를 쥘 수 없었다, 아버지의 뜻에 반대되지 않았은즉 불가피했다고 마침내 결정하였다. 사람들에게 돌아왔을 때, 그들은 그를 두렵게 여겼다. 그가 메시아라고 모두 믿었다. 그러나 예수는 몹시 당황하였고, 오직 뜻하지 않게 막 구경한 특별한 일 때문에 그들이 그를 믿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 모두를 돌이켜볼까 하여 예수는 다시 한동안 집 꼭대기로 물러갔다.

137:4.17 (1531.4)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느낌에 빠지는 것이 이 종류의 사건을 거듭 낳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예수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런데도 사람의 아들이 육체를 입은 필사 인생을 마침내 떠나기 전에, 많은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5. 가버나움으로 돌아와서

137:5.1 (1531.5) 많은 손님이 결혼 잔치하는 한 주 동안 남아 있었지만, 예수는 새로 뽑은 제자 사도들―야고보ㆍ요한ㆍ안드레ㆍ베드로ㆍ빌립ㆍ나다니엘―과 함께, 이튿날 아침 아주 일찍 가버나움을 향하여 출발했고 아무에게도 작별을 알리지 않고 떠났다. 예수의 가족과 가나에 있는 친구들 모두가, 그가 그렇게 갑자기 떠나서 아주 걱정하였다. 예수의 막내 동생 유다는 그를 찾아서 나섰다. 예수와 사도들은 벳세다에 세베대의 집으로 바로 갔다. 이번 여행에서 예수는 새로 뽑은 동료들과 함께 다가오는 하늘나라에 중요한 많은 일에 관하여 이야기했고, 물을 포도주로 만든 것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특별히 타일렀다. 또한 그들이 앞으로 일할 때 도시 세포리스와 티베리아스를 피하라고 조언하였다.

137:5.2 (1531.6) 그날 저녁에 식사가 끝난 뒤에 이 세베대와 살로메의 집에서, 예수의 지상 생애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회의 중 하나가 열렸다. 오직 여섯 사도가 이 모임에 참석하였다. 막 헤어지려 할 때 유다가 도착했다. 선택된 이 여섯 사람은 가나에서 벳세다까지 예수와 함께 여행했고, 말하자면 공중에 붕 떠서 걸었다. 이들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생기가 넘쳐 있었고, 사람의 아들의 가까운 친구로 선택되었다는 생각으로 짜릿하였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 그리고 땅에서 그의 사명이 무엇이고 그 사명이 과연 어떻게 끝날 것인가, 예수가 분명히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들은 예수가 일러주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들은 말이 없었다. 베드로까지 말할 수 없이 움츠러들었다. 깊이 생각하는 안드레만 예수의 조언하는 말씀에 감히 대답했다. 하신 말씀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함을 깨달았을 때, 유대인 메시아에 대한 생각이 아주 완전히 굳어져 있음을 보았을 때, 예수는 그들을 쉬라고 보냈고, 한편 아우 유다와 함께 걸으면서 이야기했다. 예수를 떠나기 전에, 유다는 많이 감동하여 말했다: “우리의 가장인 형이여, 나는 형을 이해한 적이 없나이다. 나는 형이 어머니가 우리에게 이야기해 준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지 못하고 다가오는 나라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형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인 줄 아나이다. 나는 요단강에서 그 목소리를 들었고, 형이 어떤 분이든지 형을 믿는 사람이나이다.” 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떠났고 막달라에 있는 자기 집으로 갔다.

137:5.3 (1532.1) 그날 밤 예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저녁에 두르는 천을 몸에 걸치고서, 생각에 잠겨, 이튿날 새벽까지 생각에 잠겨 호숫가에 앉아 있었다. 그날 밤에 오래 명상하는 동안, 결코 추종자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닌 어떤 다른 각도에서 그를 보게 만들 수 없으리라는 것을 뚜렷이 이해하게 되었다. 하늘나라를 전하는 말씀이 요한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유대인들이 찾고 있던 자로서 전하지 않으면 이를 도무지 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다. 비록 다윗과 같은 종류의 메시아는 아니었어도, 결국, 그는 옛 예언자들 가운데 좀더 영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예언이 참으로 이루어진 그런 사람이었다. 결코 다시 그는 자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온통 부인하지는 않았다. 이 까다로운 형편의 최종 해결을 아버지의 뜻이 풀려나가는 대로 맡기기로 결심하였다.

137:5.4 (1532.2) 이튿날 아침 예수는 아침 식사에 친구들과 함께 하였지만 그들은 김 빠진 무리였다.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식사가 끝났을 때, 그는 둘레에 그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한동안 이 근처에 우리가 묵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라. 요한이 그가 하늘나라를 위하여 길을 예비하려고 왔다고 이르는 것을 너희가 들었느니라. 따라서 요한의 전도가 끝나기를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람의 아들의 선구자가 자기 일을 마쳤을 때, 우리가 비로소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을 선포할 것이라.” 그는 사도들에게 그물 던지는 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였다. 한편 세베대와 함께 배 작업장으로 가려고 준비하고 다음 날 회당에서 그들을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거기서 그는 설교하기로 예정되었고, 그들과 그 안식일 오후에 회의를 가지기로 약속하였다.

6. 안식일의 사건

137:6.1 (1532.3) 서기 26년 3월 2일,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는 세례받은 뒤에 처음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다. 회당에는 사람들이 넘치게 몰렸다. 요단강에서 세례받은 이야기는 이제 가나에서 도착한 소식, 물과 포도주에 관한 새로운 소식으로 인하여 불어났다. 예수는 여섯 사도를 귀빈석에 앉히었고, 육체로 동생인 야고보와 유다가 그들과 함께 앉았다. 어머니도 전날 저녁에 야고보와 함께 가버나움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참석하였고 회당의 여인들 구역에서 자리에 앉았다. 청중 모두가 바짝 긴장하였다. 그날 그들에게 말씀하기로 예정된 사람의 성품과 권한에 걸맞는 증언이 될 초자연 능력이 더러 특별히 나타나는 것을 구경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하도록 정해졌다.

137:6.2 (1532.4) 예수가 일어섰을 때, 회당장은 그에게 성서 두루말이를 건네주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로부터 읽었다: “이처럼 주가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라. 너희가 나를 위하여 지은 집이 어디 있느냐? 그리고 내가 거할 장소가 어디 있느냐? 이 모두를 내 손이 지었도다’ 하시니라. ‘그러나 가난하고, 뉘우치는 정신이 있고, 내 말에 떠는 이 사람을 내가 보살피리라.’ 떨고 두려워하는 너희는 주의 말씀을 들으라: ‘너희의 형제는 너를 미워하였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내쫓았도다.’ 그러나 주가 영광을 받을지어다. 그는 기쁨 속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겠고 모든 다른 자가 부끄럽게 될지니라. 도시로부터 들리는 목소리, 성전에서 오는 목소리, 주로부터 오는 목소리가 말하느니라. ‘그 여자가 산고에 시달리기 전에 낳았도다. 아픔이 오기 전에 사내아이를 낳았도다.’ 누가 그런 일을 들은 적이 있느냐? 땅이 하루에 생겨나겠느냐? 아니면 한 민족이 순간에 태어날 수 있느냐? 그러나 이렇게 주가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강물처럼 평화를 펼치겠고, 이방인의 영광도 흐르는 냇물과 같을지니라. 사람이 어머니에게 위로받는 것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는 예루살렘에서도 위로받을지니라. 너희가 이것들을 볼 때, 너희의 가슴이 기뻐할지니라.’”

137:6.3 (1533.1) 이 낭독을 마치고 나서, 예수는 두루마리를 관리자에게 돌려주었다. 앉기 전에 다만 이렇게 말했다: “참으라, 그리하면 너희는 아버지의 영광을 볼지니라. 나와 함께 머물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 행하기를 이처럼 배우는 자에게도 그렇게 될지니라.” 사람들은 이 모든 말씀이 무슨 뜻인가 궁금해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137:6.4 (1533.2) 그날 오후에 예수와 사도들은 야고보와 유다와 함께 배를 타고 물가를 따라 얼마큼 내려갔다. 거기서 닻을 내리고, 한편 그는 다가오는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들은 목요일 밤보다 말씀을 더 많이 알아들었다.

137:6.5 (1533.3) 예수는 “하늘나라가 오는 그 시간”까지 그들에게 일상 임무에 몰두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들을 권장하기 위하여 배 작업장에서 정상으로 일하려고 돌아감으로 모범을 보였다. 앞날의 일을 위한 공부와 준비로 저녁마다 세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예수는 덧붙였다: “너희를 부르라고 아버지가 명하실 때까지 우리 모두가 이 근처에서 남아 있으리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너희는 각자가 익숙한 일로 이제 돌아가야 하느니라. 아무에게도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말라. 내 나라는 시끄럽고 화려하게 오지 않을 것이요, 오히려 너희의 마음 속에서, 그리고 하늘나라 회의에 너희와 함께 하라고 부름받을 자들의 마음 속에서 내 아버지가 이루실 큰 변화를 통해서 그 나라가 와야 함을 기억하여라. 너희는 이제 나의 친구요, 나는 너희를 믿고 사랑하노라. 너희는 얼마 안 있어 나의 가까운 동료가 되리라. 참고 관대하라. 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라. 하늘나라의 부름을 받기 위하여 스스로 준비하라. 내 아버지를 섬기면서 너희가 큰 기쁨을 얻겠으나 또한 어려움에 대비해야 하느니라. 너희에게 훈계하노니, 많은 시련을 겪어야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임이라. 그러나 하늘나라를 찾은 자에게는 기쁨이 가득하겠고 저희는 온 땅에서 복받은 자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그러나 거짓된 희망을 품지 말라. 세상은 내 말을 듣고 넘어지리라. 너희, 내 친구들도 혼란스러운 머리에 내가 펼쳐 보이는 것을 완전히 깨닫지 못하느니라. 잘 알아들으라, 우리는 표징을 구하는 세대를 위하여 수고하러 나가느니라. 저희는 내 아버지가 나를 보내셨다는 증거로서 이적 행하기를 요구할 것이요, 저희는 내 아버지의 사랑이 계시될 때 내 사명의 신임장을 더디게 알아보리라.”

137:6.6 (1533.4) 그날 밤 육지로 돌아갔을 때, 그들이 길을 떠나기 전에 예수는 물가에서 서서 기도하였다: “내 아버지여, 이 어린 사람들을 주시니 감사하나이다. 저희는 의심이 드는데도 이제는 믿나이다. 그리고 저희를 위하여,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내 자신을 따로 두었나이다.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이제 저희가 하나 되는 것을 배우기를.”

7. 넉 달 동안의 훈련

137:7.1 (1533.5) 길게 넉 달 동안―3월ㆍ4월ㆍ5월ㆍ6월―기다리는 이 시간이 계속되었다. 예수는 이 여섯 동료와 아우 야고보와 함께, 1백 번이 넘도록 즐겁고 기쁘지만 길고도 진지한 수업을 가졌다. 집안에 질병이 있어서, 유다는 이 수업에 다닐 수 있는 적이 드물었다. 예수의 아우 야고보는 믿음을 잃지 않았지만, 지연되고 활동이 없는 이 몇 달 동안 마리아는 아들을 거의 단념하였다. 어머니의 믿음은 가나에서 그렇게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가, 이제 새로운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어머니는 너무나 자주 되풀이하던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를 이해할 수 없구나. 이 모두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낼 수 없구나.” 그러나 야고보의 아내는 마리아의 용기를 북돋아 주느라고 많이 애썼다.

137:7.2 (1534.1) 이 넉 달 동안 내내, 이 일곱 신자는 예수와 함께 서로 알게 되었고, 이 중에 한 사람은 육체로 아우였다. 그들은 이 하나님인 사람과 함께 산다는 생각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비록 그를 랍비라고 부르기는 했어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배우고 있었다. 예수는 비할 데 없이 품위 있는 인격을 소유했고, 이것은 그들이 그의 신성에 기가 죽지 않고서 그가 그들 사이에 살 수 있게 만들었다. 그들은 하나님,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육신화한 이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것이 정말로 쉬운 것을 알아차렸다. 이 기다리는 시간은 신자들 무리 전체를 몹시 시험했다. 기적 같은 일은 아무것도, 절대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날마다 그들은 보통 일을 하고 다녔고 밤마다 예수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견줄 데 없는 그의 인품이, 그리고 저녁마다 하신 그의 인자한 말씀이 그들을 함께 뭉치게 하였다.

137:7.3 (1534.2) 기다리고 가르침을 받던 이 기간은 특히 시몬 베드로에게 힘들었다. 그는 요한이 유대 지방에서 전도를 계속하는 동안, 갈릴리에서 하늘나라의 전도를 시작하라고 예수를 설득하려고 거듭 애썼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예수가 대답한 말은 늘 같았다: “참아라 시몬아. 진전을 보이라. 아버지가 부르실 때 우리는 조금도 지나치게 준비되어 있지 않으리라.” 노련하고 철학이 담긴 조언으로 안드레는 때때로 베드로를 가라앉히곤 했다. 안드레는 예수의 자연스러운 인간성에 엄청나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과 그렇게 가까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어찌 그리 친근하고 사려 깊을 수 있는가 자주 생각해보았다.

137:7.4 (1534.3) 이 기간 전체를 통해서 예수는 회당에서 겨우 두 번 말씀하였다. 기다리던 이 여러 주가 끝날 때가 되자 그의 세례와 가나의 포도주에 대한 보고가 비로소 조용해졌다. 예수는 기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이 기간에 더 일어나지 않도록 처리하였다. 그러나 벳세다에서 그렇게 조용히 살았어도 예수의 이상한 행적에 대한 보고가 헤롯 안티파스에게 전해졌다. 다음에 그는 예수가 무슨 일을 하려는가 확인하려고 첩자들을 보냈다. 그러나 헤롯은 요한의 설교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예수를 괴롭히지 않기로 작정했고, 예수는 가버나움에서 아주 조용히 일을 계속하였다.

137:7.5 (1534.4) 기다리는 이 시간에, 예수는 동료들에게 여러 종교 집단과 팔레스타인의 여러 정당에 대하여 그들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가르치려고 애썼다. 예수의 말씀은 언제나 같았다: “우리는 저희 모두를 설득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저희 가운데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느니라.”

137:7.6 (1534.5) 서기관과 랍비들을 한데 모아서, 바리새인이라 불렀다. 그들은 자기네끼리 “동료”라고 언급했다. 이들은 여러 면에서 유대인 사이에서 진취적인 무리였고 히브리 성서에 뚜렷하게 발견되지 않는 많은 가르침을 채택했는데,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관념과 같은 것이요, 이것은 오직 후기 선지자 다니엘이 언급한 신조였다.

137:7.7 (1534.6) 사두개인은 사제 계급과 어떤 부유한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율법 시행의 세부를 까다롭게 따지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정말로 종파라기보다 종교적 정당이었다.

137:7.8 (1534.7) 에센인은 참으로 한 종파였고 마카비의 봉기가 일어날 때 시작되었다. 그 요구 사항은 어떤 면에서 바리새인보다 더 힘들었다. 그들은 페르시아인의 많은 관념과 관습을 받아들였고, 수도원에서 단체를 이루어 살며 결혼을 삼가고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가졌다. 그들은 천사에 대한 가르침을 전문으로 다루었다.

137:7.9 (1535.1) 열심당원은 맹렬한 유대인 애국자 집단이었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의 사슬에서 벗어나려는 투쟁에는 어떤 방법도 정당화된다고 주장하였다.

137:7.10 (1535.2) 헤롯당원은 순전한 정당이었다. 헤롯 왕조를 회복함으로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받는 처지에서 해방될 것을 주장하였다.

137:7.11 (1535.3) 팔레스타인 한가운데에는 사마리아인이 살았다. 유대인의 가르침과 비슷한 많은 관점을 가졌는데도 이들과 “유대인은 전혀 교류가 없었다.”

137:7.12 (1535.4) 이보다 작은 나지르인 단체를 포함하여, 이 정당과 종파들은 모두, 메시아가 언젠가 오신다는 것을 믿었다. 이들 모두가 민족의 구원자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와 제자들이 이 사상이나 관습을 가진 학파들 중에 어느 쪽과도 연합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주 단호하게 밝혀주었다. 사람의 아들은 나지르인도 에센인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137:7.13 (1535.5) 예수는 후일에, 요한이 한 것처럼, 사도들이 떠나서 복음을 전파하고 신자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지시했지만, 그는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동료들에게 “사랑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동정심을 보여야” 한다는 것을 어김없이 인식시켰다. 하늘나라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시는 것과 상관되는 영적 체험이라고 추종자들에게 일찍부터 가르쳤다.

137:7.14 (1535.6) 활발하게 대중 전도에 들어가기 전에 이렇게 머무르는 동안, 예수와 일곱 사람은 히브리 성서를 공부하느라고 회당에서 한 주에 이틀 저녁을 보냈다. 열심히 대중 활동을 하던 시절이 지난 뒤 후일에, 사도들은 주와 관계를 가졌던 중에서 이 넉 달이 가장 값지고 유익했다고 회상했다. 예수는 이 사람들에게 소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쳤다. 그는 지나치게 가르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들이 이해할 능력을 너무 뛰어넘어 진리를 제시하여 혼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8. 하늘나라에 대한 설교

137:8.1 (1535.7) 6월 22일 안식일에, 첫 전도 여행을 나가기 얼마 전에, 그리고 요한이 갇힌 뒤 열흘쯤 되어서, 예수는 사도들을 가버나움으로 데려온 뒤에 두 번째로 회당의 설교단을 차지하였다.

137:8.2 (1535.8) “하늘나라”에 대하여 이 설교를 하기 며칠 전에, 예수가 배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 베드로는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예수는 연장을 다시 한 번 내려놓고, 앞치마를 벗고서 베드로에게 말했다: “아버지의 때가 왔도다.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준비하자.”

137:8.3 (1535.9) 예수는 서기 26년 6월 18일, 이 화요일에 목수 벤치에서 마지막으로 일했다. 베드로는 작업장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오후 중반이 되자 동료들을 모두 몰아왔고 물가의 숲에 그들을 남겨 두고서, 예수를 찾으러 갔다. 그러나 예수를 찾아낼 수 없었으니 주가 다른 숲으로 기도하러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그날 저녁 늦게 세베대의 집으로 돌아와서 먹을 것을 청할 때까지 그들은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 다음 날 그는 다가오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할 기회를 부탁하려고 동생 야고보를 보냈다. 회당장은 예수가 다시 예배를 기꺼이 인도한다고 크게 기뻐하였다.

137:8.4 (1536.1)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억에 남을 이 설교는 대중을 위한 생애에서 처음으로 당당해 보이는 노력이었는데, 설교하기 전에, 예수는 성서로부터 이 몇 구절을 읽었다: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 곧 거룩한 민족이 될지니라. 야웨는 우리의 재판관이요, 우리에게 율법을 주는 이요, 야웨는 우리의 임금이라. 그가 우리를 구하리라. 야웨는 나의 임금, 나의 하나님이라. 온 땅 위에 큰 임금이라. 자애가 이 나라 안에서 이스라엘에게 다가오도다. 그는 우리의 임금이니 주의 영광은 복되도다.”

137:8.5 (1536.2) 읽기를 마치고 나서 예수는 말씀하였다:

137:8.6 (1536.3) “나는 아버지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선포하려고 왔노라. 이 나라는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자유로운 자와 매여 있는 자의 예배하는 혼을 포함하리니, 내 아버지가 사람을 차별하는 분이 아닌 까닭이라. 그의 사랑과 자비는 만민에게 베풀어지느니라.

137:8.7 (1536.4)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사람의 정신 속에 깃들라고 그의 영을 보내시며, 땅에서 내가 일을 마치고 나서 마찬가지로 진리의 영이 모든 육체에 부어지리라. 내 아버지의 영과 진리의 영은 다가오는 하늘나라, 영적 이해와 신의 올바름이 있는 나라에서 너희를 세우리라. 내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은 권력의 보좌나 현세에 영화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전투에서 군대를 이끌지 아니하리라. 내 나라가 다가오면 사람의 아들이 평화의 왕이요, 영원한 아버지의 계시인 것을 너희가 알지니라. 이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나라들을 세우고 크게 만들려고 다투거니와 내 제자들은 도덕적 결정과 영적 승리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리라. 일단 거기에 들어가면, 저희가 기쁨과 올바름과 영생을 얻으리라.

137:8.8 (1536.5)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며 이처럼 내 아버지와 같이 고귀한 인격을 얻으려고 비로소 애쓰는 자는 필요한 모든 다른 것을 얼마 안 있어 소유하리라. 그러나 아주 진지하게 너희에게 이르노니, 어린아이의 믿음과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구하지 않으면 너희는 도무지 들어가지 못할지니라.

137:8.9 (1536.6) “와서 여기 하늘나라가 있다, 저기 하늘나라가 있다 하고 이르는 자에게 속지 말지니 내 아버지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에 아랑곳하지 않음이라. 그리고 이 나라는 이제도 너희 사이에 있으니,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혼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곳에 실제로 하늘나라가 있는 까닭이라. 이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 있는 올바름이요, 평화와 기쁨이라.

137:8.10 (1536.7) “요한은 회개의 표시로, 그리고 너희의 죄를 용서하려고 정말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137:8.11 (1536.8) “내 아버지의 나라에는 유대인도 이방인도 없고, 오직 봉사를 통해서 완전하게 되기를 구하는 자들만 있으리라. 내가 선언하노니,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먼저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이라. 사람의 모습을 입고 섬김으로 내가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와 함께 곧 앉으리니, 이와 같이 너희가 동료들을 기꺼이 섬기면 내 나라에서 나와 함께 앉을지니라.

137:8.12 (1536.9) “이 새 나라는 밭에 있는 좋은 흙 속에 자라는 씨앗과 같으니라. 씨앗은 하루 아침에 익은 열매를 맺지 않느니라. 사람의 혼 속에서 하늘나라가 세워지고 나서 그 나라가 성숙하여 익은 열매, 영구히 올바르고 영원히 구원받는 완전한 열매를 맺기까지 시간이 걸리느니라.

137:8.13 (1536.10)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외치는 이 나라는 권력과 풍요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 온전히 봉사하는 가운데 차츰 올바르게 되고 기쁨이 커지는 생활이라. 아버지가 세상의 자녀들에 관하여 말씀하지 아니하더냐? ‘내가 완전한 것 같이 저희가 궁극에 완전하게 되는 것이 나의 뜻이라.’

137:8.14 (1537.1) “나는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려고 왔노라. 이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의 무거운 짐을 더 무겁게 만들려고 온 것이 아니라. 새롭고 더 좋은 길을 선포하노니, 다가오는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신성한 휴식을 즐기리라. 세상의 물건으로 비용이 얼마큼 들든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고 무슨 값을 치르든지 상관없이, 너희는 이 세상에서 기쁨과 영적 진보를 여러 배나 얻고, 다가오는 시대에 영생을 얻을지니라.

137:8.15 (1537.2)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군대의 행진이나, 이 세상의 나라가 뒤엎어지거나, 포로의 멍에가 부서진 뒤에 생기는 일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가까웠으니 거기에 들어가는 자는 모두 풍부한 자유와 기쁨에 넘치는 구원을 얻으리라.

137:8.16 (1537.3) “이 나라는 영구한 영토이라. 그 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내 아버지께로 올라갈지며 파라다이스에서 그의 영광 바른 편에 확실히 이르리라.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 되겠고, 다가오는 시대에 아버지께로 그렇게 올라가리라. 의로운 체하는 자가 아니라, 죄인, 그리고 신답게 완전한 올바름을 간절히 바라고 목마르게 찾는 모든 사람을 부르려고 내가 왔노라.

137:8.17 (1537.4) “요한은 와서 너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도록 준비시키려고 회개를 부르짖었느니라. 나는 이제 와서 믿음, 곧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데 치를 값이라 선포하노라. 무한한 사랑으로 내 아버지가 너희를 사랑함을 믿기만 하면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느니라.”

137:8.18 (1537.5) 이렇게 말씀하고 나서 그는 앉았다.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말씀에 놀랐다. 제자들은 감탄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하나님인 사람의 입으로부터 좋은 소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말씀을 들은 자의 약 3분의 1은 충분히 알아듣지 못했어도 그 말씀을 믿었다. 약 3분의 1은 기대하는 나라에 관한 그러한 순전한 영적 개념을 거부하려고 마음 속에서 준비하였다. 한편 나머지 3분의 1은 그 가르침을 깨달을 수 없었고, 많은 사람은 그가 “돌았다”고 참으로 믿었다.

제 138 편 하늘나라 사자의 훈련

유란시아서

제 138 편

하늘나라 사자의 훈련

138:0.1 (1538.1) “하늘나라”를 주제로 설교한 뒤에, 예수는 그날 오후에 여섯 사도를 불러모으고 갈릴리 바다 둘레와 그 근처의 여러 도시를 방문하는 계획을 비로소 알려주었다. 동생 야고보와 유다는 이 회의에 부름받지 않아서 몹시 마음이 상하였다. 이때까지 그들은 예수의 핵심 동료의 모임에 자신들이 속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예수는 가까운 친척을 아무도 하늘나라의 이 사도 지도자 집단의 구성원으로 넣지 않으려고 계획하였다. 선택된 몇 사람 중에 야고보와 유다를 이렇게 넣지 못한 것은 가나의 체험 이후로 어머니를 멀리하는 듯한 태도와 함께, 예수와 그 집안 사이에 나날이 틈이 벌어지는 시초가 되었다. 이 상황은 대중 봉사를 통해서 내내 계속되었고―그들은 아주 그를 버리다시피 하였다―이 거리는 그가 죽고 다시 살아나기까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오르내리는 믿음과 희망, 더욱 커지는 실망과 창피와 절망의 감정 사이에 항상 이리저리 흔들렸다. 오로지 막내 룻이 가장인 오라버니에게 흔들리지 않고 충성한 채로 남아 있었다.

138:0.2 (1538.2) 부활이 있을 때까지, 예수의 가족 모두가 그의 봉사와 거의 아무 상관이 없었다. 선지자가 자기 나라 바깥에서만 존경받는다면, 자기 가족 바깥에서 사람들은 그를 고맙게 여기었다.

1. 마지막 지시

138:1.1 (1538.3) 이튿날, 서기 26년 6월 23일 일요일에 예수는 마지막 지침을 여섯 사람에게 주었다. 둘씩 나가서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을 가르치라고 지시했다. 사람들에게 세례 주는 것을 금하였고 대중 전도를 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조언하였다. 나중에 그들이 대중 앞에서 전도하는 것을 허락하겠지만, 한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동포를 몸소 상대하는 실용적 체험을 얻기 바란다고 이어서 설명하였다. 예수는 첫 여행을 전적으로 몸소 일하는 여행으로 만들 생각을 품었다. 비록 이 발표가 사도들에게 얼마큼 실망이 되었으나 그래도, 적어도 어느 정도, 그들은 예수가 하늘나라의 선포를 이렇게 시작하는 이유를 깨달았고, 기운차게 대담한 열심으로 일을 시작했다. 이들을 둘씩 보냈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게레사로, 안드레와 베드로는 가버나움으로, 한편 빌립과 나다니엘은 타리케아로 갔다.

138:1.2 (1538.4) 이 처음 2주 동안에 봉사를 시작하기 전에, 예수는 그가 떠난 뒤에 하늘나라 일을 계속하도록 열두 사도를 세우기 바란다고 발표했다. 각자에게 일찍 전도받은 사람들 중에서 계획한 사도 단체에 들어가는 자격을 얻는 사람을 하나 선택하는 권한을 주었다. 요한이 입을 열어 물었다. “하지만 주여, 이 여섯 사람이 우리 사이에 들어와서 함께 모든 것을 똑같이 나눌 것이니이까? 우리는 요단강의 일이 있은 뒤로 당신과 함께 있어 왔고, 이 수고, 하늘나라를 위한 우리의 첫 수고를 하는 준비로서 당신의 가르침을 모두 들어 왔나이다.” 예수는 대답하였다 “그렇다 요한아. 너희가 고르는 사람들은 우리와 하나가 되겠고, 내가 너희를 가르친 것 같이 너희는 하늘나라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저희에게 가르치리라.” 이렇게 말한 뒤에, 예수는 그들을 떠났다.

138:1.3 (1539.1) 각자 새 사도를 골라야 한다는 예수의 지시를 논의하면서 많은 의견을 나누었을 때까지 그들은 흩어져서 일하러 가지 않았다. 안드레의 조언이 마침내 지지를 얻었고 그들은 일하러 떠나갔다. 안드레는 이런 내용으로 말했다. “주가 옳도다. 우리는 이 일을 성취하기에 수가 너무 적으니라. 더 많은 선생이 필요하고, 새로운 이 여섯 사도를 선택하는 일을 우리에게 맡겼으니, 주는 우리를 크게 신뢰함을 보이셨느니라.” 이날 아침 흩어져서 일하러 갈 때, 각자의 가슴 속에는 얼마큼 침울한 느낌이 감추어져 있었다. 그들은 예수가 없어 서운하리라는 것을 알았고, 두렵고 겁이 나기도 했지만 이런 식으로 하늘나라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전에 상상하지 않았다.

138:1.4 (1539.2) 여섯 명이 2주 동안 수고하도록 예정되었고 그 뒤에 회의하려고 세베대의 집으로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예수는 그동안에 요셉과 시몬, 그리고 근처에 사는 다른 식구들과 이야기하려고 나사렛으로 갔다. 가족의 신임과 애정을 유지하려고, 헌신하여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과 어긋나지 않는 한, 예수는 인간으로서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 그는 이 문제에서 책임을 다하고도 남았다.

138:1.5 (1539.3) 사도들이 이 임무를 띠고 떠난 동안 예수는 지금 감옥에 있는 요한에 대하여 많이 생각했다. 요한을 석방하려고 그의 잠재 권력을 쓰는 것은 큰 유혹이었지만, 다시 한 번 그는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데” 몸을 맡겼다.

2. 여섯을 고르다

138:2.1 (1539.4) 여섯 사람의 이 첫 선교 여행은 대단한 성공이었다. 모두가 사람들과 직접, 몸소 접촉하는 것이 크게 가치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종교가 결국 순전히 전적으로 몸소 체험하는 문제임을 더욱 충만히 깨닫고 예수에게 돌아왔다. 종교적으로 위로가 되고 영적으로 격려하는 말씀을 서민들이 얼마나 듣고 싶어 하는가 비로소 알아차렸다. 예수의 주위에 모였을 때 그들은 모두 한꺼번에 이야기하고 싶어했지만, 안드레가 지휘를 맡았다. 그가 한 사람 한 사람 부르자 각자 주께 정식 보고를 드렸고, 새로 여섯 사도가 될 사람을 지명하였다.

138:2.2 (1539.5) 각 사람이 새 사도가 되도록 선택한 사람을 제시한 뒤에 예수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그 지명에 대하여 투표하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새 여섯 사도 모두가 여섯 명의 고참 모두에게 정식으로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그들이 다 이 후보자들을 만나보고 봉사를 요청할 것이라 발표했다.

138:2.3 (1539.6) 새로 뽑힌 사도들은 다음과 같았다:

138:2.4 (1539.7) 1. 마태 레위는 가버나움의 세리요, 도시의 바로 동쪽에 바타니아 경계 가까이에 사무소가 있었다. 안드레가 그를 선택했다.

138:2.5 (1539.8) 2. 토마스 디디머스는 타리케아의 어부요, 가다라에서 한때 목수이자 석공이었다. 빌립이 선택했다.

138:2.6 (1539.9) 3. 야고보 알패오는 게레사의 어부이자 농부였고 야고보 세베대가 그를 선택했다.

138:2.7 (1539.10) 4. 유다 알패오는 야고보 알패오의 쌍둥이 형제요, 또한 어부이며, 요한 세베대가 선택했다.

138:2.8 (1540.1) 5. 열심당원 시몬은 열심당이라는 애국 조직에서 높은 직위에 있었다. 그는 예수의 사도들과 함께 하려고 이 자리를 버렸다. 열심당에 들어가기 전에, 시몬은 상인이었다. 베드로가 그를 선택했다.

138:2.9 (1540.2) 6. 가룟 유다는 예리고에서 사는 어느 부유한 유대인 부모의 외아들이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따라다니게 되었고 사두개인 부모는 그와 인연을 끊었다. 예수의 사도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 그는 이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주로 재무에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나다니엘은 그들의 대열에 끼라고 그를 초청하였다. 가룟 유다는 열두 사도 가운데 유일한 유대 지방 사람이었다.

138:2.10 (1540.3) 예수는 여섯 사도의 물음에 대답하고 그들이 드린 보고의 세부를 들으면서 함께 꼬박 하루를 썼다. 그들이 이야기하고 싶은 흥미 있고 유익한 체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당당해 보이는 대중 사업을 벌이기 전에, 조용하고 개인적인 방법으로 수고하라고 그들을 내보낸 주의 계획이 지혜로웠음을 이제 깨달았다.

3. 마태와 시몬을 부르다

138:3.1 (1540.4) 이튿날 예수와 여섯 사람은 세리 마태를 찾아보러 갔다. 마태는 장부를 맞추어 놓고 사무소의 일을 형제에게 넘길 준비를 해놓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세금 징수소에 가까이 가자, 안드레가 예수와 함께 앞으로 나섰다. 예수는 마태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말했다, “나를 따르라.” 그는 일어서서 예수와 사도들과 함께 자기 집으로 갔다.

138:3.2 (1540.5) 마태는 그날 저녁을 위하여 마련한 연회에 관하여 예수에게 말씀 드렸다. 예수가 귀빈으로 참석하는 것을 승인하고 찬성한다면 가족과 친구들에게 그런 만찬을 차리기 바란다는 것까지는 적어도 말했다. 예수는 찬성하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마태를 옆으로 데리고 가서, 그가 어떤 시몬이라는 사람을 사도들 틈에 끼라고 초청했다고 설명하고 시몬이 이 잔치에 또한 초청을 받도록 허락을 얻었다.

138:3.3 (1540.6) 마태의 집에서 한낮에 점심을 먹은 뒤에, 모두 베드로와 함께 열심당원 시몬을 찾아보러 갔다. 그들은 시몬이 전에 사업하던 장소에서 그를 찾았다. 그 사업은 이제 그의 조카가 운영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예수를 시몬에게 모시고 갔을 때, 주는 그 불 같은 애국자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를 따르라”고 말했을 뿐이다.

138:3.4 (1540.7) 모두 마태의 집으로 돌아갔고 거기서 저녁 식사 때까지 정치와 종교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했다. 레위 집안은 오랫동안 장사와 세금 걷는 일에 종사하였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이 연회에 마태에게 초대받은 많은 손님을 “세리와 죄인”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138:3.5 (1540.8) 그 시절에 유명한 사람을 위하여 이런 종류의 환영회나 연회가 열렸을 때, 손님들이 음식 먹는 것을 구경하고 귀빈들이 말씀하고 연설하는 것을 들으려고 관심 있는 모든 사람이 연회실 주위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관습이었다. 따라서 가버나움 바리새인의 대부분이 이 보기 드문 사교(社交) 모임에서 예수의 행동을 구경하려고 이 기회에 와 있었다.

138:3.6 (1540.9) 저녁 식사가 진행되자, 저녁 먹는 사람들의 흥겨움이 썩 좋은 정도로 무르익었다. 사람마다 무척 흥겨운 시간을 가졌고 그래서 그렇게 분위기가 즐겁고 태평한 행사에 예수가 참석한 것 때문에 구경하는 바리새인들은 마음 속에서 그를 헐뜯기 시작했다. 저녁이 얼마큼 지나서 사람들이 연설하고 있을 때 심술궂은 바리새인들 중에 한 사람이 베드로에게 예수의 행동을 비난하기에 이르렀고, 이렇게 말했다 “어찌 감히 너는 이 사람이 의롭다고 가르치느냐? 그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이처럼 경솔하게 즐거워하는 장면에 얼굴을 보이는도다.” 예수가 모인 사람들에게 작별하면서 축복의 말씀을 하기 전에, 베드로는 이런 비판을 예수에게 속삭여 일러 주었다. 예수는 비로소 입을 열고 이렇게 말씀하였다: “마태와 시몬을 우리 모임으로 환영하려고 오늘 밤 여기에 와서 너희가 즐겁고 서로 흥겨워하는 것을 구경하니 내가 기쁘도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이 다가오는 영(靈)의 나라에 들어가리니, 더욱 기뻐해야 하느니라. 거기서 너희는 하늘나라의 좋은 것을 더 풍성하게 즐기리라. 이 친구들과 즐거이 지내려고 내가 여기 왔다고 해서, 둘러 서서 마음 속에 나를 비난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회에서 천대받는 자에게 기쁨을, 그리고 도덕적으로 포로가 된 자에게 영적 해방을 선포하려고 내가 왔노라.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병든 사람이 의사(醫師)가 필요함을 너희에게 상기시킬 필요가 있느냐? 의인(義人)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고 내가 왔노라.”

138:3.7 (1541.1) 참으로 이것은 온 유대 민족이 보기에 이상한 광경이었다. 올바른 인품과 고상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 서민들, 아니 종교심이 없고 쾌락을 찾는 무리, 세리와 소문난 죄인의 무리와 함께 자유롭고 즐겁게 어울리는 것을 보다니! 마태의 집에서 있었던 이 모임에서 열심당원 시몬도 한 바탕 연설하고 싶어했으나 다가오는 하늘나라가 열심당의 운동과 혼동되는 것을 예수가 원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에, 안드레는 그에게 어떤 공식 논평도 하지 말라고 말렸다.

138:3.8 (1541.2) 예수와 사도들은 그날 밤에 마태의 집에서 묵었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자, 그들은 예수가 선하고 친절한 것, 오직 이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4. 쌍둥이를 부르다

138:4.1 (1541.3) 이튿날 아침, 아홉 사람 모두가 다음 두 사도, 야고보와 유다, 즉 알패오의 쌍둥이 아들들을 정식으로 부르려고 배를 타고 게레사로 갔다. 야고보 세베대와 요한 세베대가 이들을 지명하였다. 어부인 쌍둥이는 예수와 사도들이 오기를 기대하였고 따라서 호숫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야고보 세베대는 주를 게레사 어부들에게 소개하였다. 예수는 그들을 지켜보고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를 따르라.”

138:4.2 (1541.4) 함께 지낸 그날 오후에, 예수는 잔치하던 모임에 다녀온 것에 관하여 그들에게 충분히 가르쳤다. 예수는 이렇게 말씀을 맺었다: “모든 사람이 내 형제이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는 우리가 만든 어떤 사람도 업신여기지 않느니라. 하늘나라는 모든 남녀에게 열려 있느니라. 그곳에 들어가려고 애쓸지 모르는 어떤 갈급한 혼 앞에서 아무도 자비(慈悲)의 문을 닫아서는 안되느니라. 우리는 하늘나라에 관하여 듣고자 하는 모든 사람과 함께 식탁에 앉으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사람들을 내려다보실 때, 저희는 모두 비슷하니라. 그러므로 바리새인이나 죄인, 사두개인이나 세리, 로마인이나 유대인, 부자(富者)나 가난한 자, 자유로운 자나 매인 자, 이들과 함께 먹기를 거절하지 말라. 하늘나라의 문은 진리를 알고 하나님을 찾아내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려 있느니라.”

138:4.3 (1541.5) 그날 밤 알패오의 집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을 때, 쌍둥이 형제는 사도의 일행에 가입했다. 저녁에 얼마 있다가 예수는 깨끗하지 않은 영들의 기원ㆍ성질ㆍ운명을 다루는 첫 수업을 사도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가 일러준 말씀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없었다. 예수를 사랑하고 찬미하기는 매우 쉽지만, 그의 가르침 가운데 많은 것이 알아듣기가 아주 어려움을 깨달았다.

138:4.4 (1542.1) 밤에 쉬고 난 뒤에, 이제 열한 명이 된 일행 전체는 배를 타고 타리케아로 건너갔다.

5. 토마스와 유다를 부르다

138:5.1 (1542.2) 어부 토마스와 방랑자 유다는 타리케아에서 고기잡이 배를 대는 곳에서 예수와 사도들을 만났다. 토마스는 그 일행을 근처에 자기 집으로 인도하였다. 빌립은 토마스를 이제 사도로 지명한 사람이라고 소개하였고 나다니엘은 유대 출신 가룟 유다를 비슷한 예절을 갖추어 소개하였다. 예수는 토마스를 보고 말했다: “토마스야, 너는 믿음이 부족하구나. 그렇기는 하여도 너를 받아들이노라. 나를 따르라.” 가룟 유다에게 주는 말했다: “유다야, 우리는 모두 한 몸에서 생겨났느니라. 내가 너를 우리 가운데 받아들이는 것 같이, 갈릴리 형제들에게 네가 언제나 충실하기를 기도하노라. 나를 따르라.”

138:5.2 (1542.3) 그들이 원기를 되찾고 나서 예수는 열두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서 한동안 함께 기도하고 성령의 성질과 성령이 하는 일을 가르쳤다. 그러나 가르치려고 애쓴 그 놀라운 진리의 의미를 그들은 또 다시 대체로 알아듣지 못했다. 이 사람은 이것을 알아듣고 저 사람은 저것을 알아듣곤 했지만, 아무도 가르친 것을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언제나 그들은 예수의 새 복음을 옛 형태의 종교 관념에 끼워 맞추려고 애쓰는 잘못을 저지르곤 했다. 구원을 부르짖는 새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을 찾아내는 새 길을 열려고 예수가 왔다는 관념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그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새로운 계시임을 깨닫지 못했다.

138:5.3 (1542.4) 이튿날 예수는 열두 제자를 자기들끼리 있게 두었다. 그들이 얼굴 익히기를 원했고 가르친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라고 그들끼리만 있기를 바랐다. 주는 저녁 식사에 돌아왔다. 저녁을 들고난 뒤에 그는 세라핌이 베푸는 봉사에 관하여 일러주었는데, 사도들 가운데 몇은 가르침을 알아들었다. 그들은 밤에 쉬고 이튿날 배로 가버나움을 향하여 떠났다.

138:5.4 (1542.5) 세베대와 살로메는 아들 다윗과 함께 살려고 가버렸다. 그래서 큰 집을 예수와 열두 사도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 여기서 예수는 선택한 사자들과 함께 조용한 안식일을 보냈다.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계획의 윤곽을 주의 깊게 설명하였고, “집권자들을 꾸짖어야 한다면, 그 일을 내게 맡기라. 케자나 그 신하들을 너희가 아예 비난하지 않도록 하여라”하고 말해서 정부 당국과 어떤 충돌이라도 피하는 것이 중요함을 충분히 설명했다. 바로 이날 저녁에 가룟 유다는 예수를 옆으로 이끌고 어째서 요한을 감옥에서 구출하려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가 물었다. 유다는 예수의 태도에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았다.

6. 맹렬히 훈련받는 주간

138:6.1 (1542.6) 다음 주간은 맹렬히 훈련받는 과정에 시간을 썼다. 하늘나라의 일을 위한 준비로, 배우고 체험한 모든 것을 샅샅이 복습하려고 날마다 새 사도 여섯이 각자 자기를 지명한 사람의 손에 맡겨졌다. 먼저 된 사도들은 새 여섯 사도의 이익을 위하여 그 시각까지 받은 예수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복습하였다. 저녁에 예수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모두 세베대의 집 뜰에서 모였다.

138:6.2 (1542.7) 바로 이때에 예수는 휴식과 기분 전환을 위하여 주중에 노는 날을 정했다. 육체로 여생 동안 내내, 예수는 주마다 하루 동안 쉬는 이 계획을 좇았다. 대체로, 수요일에는 결코 정규 활동을 하지 않았다. 주마다 이 휴일에, 예수는 보통 그들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아, 하루 동안 놀러 나가라. 하늘나라의 벅찬 수고를 그만두고 휴식을 취하고, 예전에 하던 직업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새 종류의 오락 활동을 발견하여 새로운 기분을 즐기라.” 땅에서 사신 이 기간에, 예수는 이렇게 노는 날이 실제로 필요하지 않았지만, 이것이 인간 동료들에게 최선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이 계획을 좇았다. 예수는 선생―주―였고 동료들은 생도―제자―였다.

138:6.3 (1543.1) 예수는 그의 가르침 및 그들 가운데서 사신 일생, 그리고 나중에 그에 관하여 생겨날지 모르는 가르침, 이 둘의 차이를 사도들에게 분명히 밝히려고 애썼다. 예수는 말했다: “내 나라와 이에 관계된 복음은 너희가 전하는 말의 요점이 될지니라. 옆길로 빠져, 나에 관하여 그리고 내 가르침에 관하여 전도하지 말라.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하늘 아버지를 내가 계시한 것을 보여주라. 그러나 샛길로 잘못 빠져서, 나의 신앙과 가르침에 관한 신앙과 가르침에 관련하여 전설을 만들고 종파를 세우지 말라.” 그러나 또 다시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지 알아듣지 못했고 아무도 어째서 그가 그렇게 가르치는가 감히 묻지 않았다.

138:6.4 (1543.2)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그릇된 개념에 관계되는 것을 제외하고, 예수는 이 초기의 가르침에서 가능한 한 사도들과 논쟁을 피하려고 애썼다. 모든 그러한 문제에서 그는 결코 서슴지 않고 그릇된 관념을 고쳐주었다. 유란시아에서 세례받은 이후에 예수의 생애에서 꼭 한 가지 동기가 있었으니,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더 낫게, 참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에게 이르는 새롭고 더 좋은 길, 믿음과 사랑의 길을 여는 개척자였다. 이것이 사도들에게 늘 준 훈계였다, “가서 죄인을 찾으라. 낙심한 자를 찾아내고 근심하는 자를 위로하라.”

138:6.5 (1543.3) 예수는 상황을 완전히 파악했다. 임무를 진척시키는 데 이용될 수 있는 한없는 능력을 소유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적당하다고 여기고 중요치 않다고 보았을 그러한 수단과 인물에 온전히 만족하였다. 엄청난 극적 가능성이 있는 사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가장 조용하고 평범한 방법으로 아버지의 일을 해 나가기를 고집했다. 그는 어떤 권력의 전시도 애써서 피하였다. 이제 적어도 몇 달 동안, 갈릴리 바다 근처에서 둘러싼 열두 사도와 함께 조용히 일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7. 또 한 번 실망하다

138:7.1 (1543.4) 예수는 다섯 달 동안 개인적으로 일하는 조용한 선교 운동을 전에 계획하였다. 이것이 얼마나 오래 갈지 사도들에게 일러주지 않았다. 그들은 한 주 한 주 일했다. 그 주간의 이 첫째 날 일찍부터 이것을 열두 사도에게 막 발표하려 했을 때, 시몬 베드로, 야고보 세베대, 가룟 유다가 함께 개인적으로 대화하려고 왔다. 예수를 옆으로 이끌고 베드로는 감히 말했다: “주여,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가 이제 무르익지 않았는가 물어보라고, 동료들이 부추겨서 우리가 오나이다. 당신은 가버나움에서 하늘나라를 선포할 것이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계속하여 예루살렘으로 옮길 것이니이까? 하늘나라를 세우는 데 우리 각자가 당신과 함께 무슨 자리를 차지하는지 우리가 언제 알게 되리이까―” 베드로는 이어서 더 물으려 했겠지만, 예수는 꾸짖는 듯 손을 올려 그를 막았다. 가까이 대기하던 다른 사도들에게 한데 모이라고 손짓하면서 예수는 말했다: “어린것들아, 얼마나 오랫동안 너희를 참으랴!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너희에게 분명히 이르지 않았더냐? 내가 다윗의 왕좌에 앉으려고 오지 않았다고 여러 번 일렀는데, 아버지의 나라에서 각자 무슨 자리를 차지할까 묻고 있으니, 자 어인 일이냐? 영적 왕국의 대사(大使)로서 너희를 부른 것을 깨달을 수 없느냐? 내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지금 대표하는 것 같이, 곧, 오래지 않아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일에 너희가 나를 대표할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내가 너희를 선택하고 하늘나라의 사자로서 너희를 가르쳤어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신이 높이 계시는 이 다가오는 하늘나라의 성질과 중요성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다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친구들아, 한 번 더 내 말을 듣거라. 내 나라가 권력으로 다스리거나 영화로운 통치라는 이 생각을 머리에서 없애버리라. 정말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력이 곧 내 손에 쥐어질 터이나, 이 시대에 신이 준 이 재산을 바로 우리를 영화롭게 하는 데 쓰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다른 시대에 너희는 정말로 권력과 영광을 가지고 나와 함께 앉으려니와 우리가 이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고 땅에서 그가 명하는 일을 집행하도록 겸손히 복종하여 앞으로 가는 것이 마땅하니라.”

138:7.2 (1544.1) 다시 한 번 동료들은 충격을 받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예수는 둘씩 기도하러 보내고 정오에 그에게 돌아오라고 하였다. 이 중대한 아침 나절에, 각자 하나님을 찾으려고 애썼다. 서로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힘을 주려고 수고하였으며 지시한 대로 예수에게 돌아왔다.

138:7.3 (1544.2) 예수는 이제 그들을 위하여, 요한이 온 것, 요단강에서 세례받은 것, 가나에서 있었던 결혼 잔치, 여섯 사람을 최근에 선택한 것, 육체로 자신의 형제들이 그들로부터 물러난 것을 이야기했고, 하늘나라의 적(敵)은 또한 그들을 빼앗아 가려고 애쓸 것이라 경고했다. 짧지만 진지했던 이 말씀이 있은 뒤에, 사도들은 모두 일어나서, 주께 변치 않고 헌신할 것을 선언하고, 하늘나라에 대하여, 베드로의 지휘 밑에서, 토마스가 표현한 바와 같이, “다가오는 이 하늘나라에,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리고 내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충성을 바칠 것을 서약했다. 비록 예수의 가르침을 충분히 알아듣지 못했어도 그들 모두가 참으로 예수를 믿었다.

138:7.4 (1544.3) 예수는 이제 돈이 얼마나 그들 사이에 있는가 물었다. 또한 그들의 가족을 위하여 무슨 생활 대책이 마련되었는가 물었다. 2주 동안 끼니를 잇는 데 도저히 충분하지 않은 기금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 말했다: “이런 식으로 일을 시작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여기 바닷가에서 2주 동안 남아서 물고기를 잡든지, 아니면 손이 닿는 대로 무슨 일이라도 하리라. 그러는 동안에, 처음 뽑힌 사도 안드레의 지도 하에서, 현재 개인적 봉사를 위하여, 그리고 또한 복음을 전파하고 믿는 자들을 가르치려고 나중에 너희를 세울 때를 위하여, 너희 앞날의 일에 무엇이 필요하든지 이를 마련하도록 너희 스스로를 조직하여라.” 모두가 이 말씀에 크게 기운을 얻었다. 이것이 예수가 나중에 더 적극적이고 당당해 보이는 대중 사업에 들어가려고 계획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뚜렷하고 분명하게 알려준 것이었다.

138:7.5 (1544.4) 모두가 고기잡이에 전념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사도들은 조직을 마무리하고, 이튿날 고기잡이를 시작하려고 배와 그물을 얻으려는 주선을 마치면서 그날의 나머지를 보냈다. 예수가 숙련된 뱃사공이요 어부인 것처럼, 이들의 대부분은 어부였다. 다음 몇 년 동안 그들이 이용한 많은 배가 바로 예수의 손으로 전에 만든 배였다. 그 배들은 좋고 안심할 수 있었다.

138:7.6 (1544.5) 예수는 2주 동안 고기잡이에 전념하라고 타이르며 덧붙였다: “그리고 나서 너희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려고 떠나리라.” 그들은 세 무리를 지어서 고기를 잡았고 예수는 밤마다 다른 무리와 함께 나갔다. 그들은 모두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을 무척 즐거워하였다! 그는 솜씨 있는 어부요, 명랑한 동반자, 영감을 주는 친구였다. 함께 일하면 할수록 그들은 예수를 더욱 사랑했다. 마태는 어느 날 말했다: “우리가 알면 알수록 덜 찬미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사람의 경우에는 갈수록 그를 이해하기가 어려워지는데도, 나는 더욱 그를 사랑하노라.”

138:7.7 (1545.1) 2주 동안 고기를 잡고 2주 동안 하늘나라를 위하여 개인적으로 일하러 나가는 이 계획은 다섯 달이 넘도록, 아니 이 해 서기 26년 말까지, 요한이 감옥에 갇히고 나서 그 제자들에 대하여 특별한 박해가 그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8. 열두 사도의 처음 활동

138:8.1 (1545.2) 2주 동안 물고기 잡은 것을 처분한 뒤에 가룟 유다, 곧 열두 사람의 회계로 일하기로 선택된 사람은, 부양 가족들을 돌볼 기금이 이미 마련되어 있으므로 사도의 기금을 여섯 등분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나서 서기 26년 8월 중순 가까이, 안드레에게 배치를 받은 일터로 그들은 둘씩 떠나갔다. 처음 2주 동안 예수는 안드레와 베드로와 함께, 다음 2주 동안은 야고보와 요한, 이런 식으로 그들이 선택한 순서대로 다른 쌍과 함께 나갔다. 이런 방법으로 대중 봉사를 시작하려고 그들을 한데 부르기 전에, 예수는 각 쌍과 함께 적어도 한 번 나갈 수 있었다.

138:8.2 (1545.3) 예수는 그들에게 고행(苦行)하거나 희생물을 바치지 않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똑같이 영원한 사랑으로 자녀를 모두 사랑한다는 것을 전파하라고 가르쳤다. 다음을 논하기를 삼가라고 사도들에게 타일렀다:

138:8.3 (1545.4) 1. 세례자 요한이 한 일과 그가 감옥에 갇힌 것.

138:8.4 (1545.5) 2. 세례받을 때 들린 목소리. 예수는 말했다: “오직 그 목소리를 들은 자들이 이를 언급해도 좋으니라. 나에게서 들은 것만 말하라. 소문을 말하지 말라.”

138:8.5 (1545.6) 3.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것. “아무에게도 물과 포도주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말라” 이르면서 예수는 그들에게 심각하게 당부하였다.

138:8.6 (1545.7) 이들은 이 대여섯 달 동안 내내 신나는 시간을 가졌고, 그동안에 번갈아 두 주 마다 어부로서 일했다. 이렇게 해서 하늘나라를 위해 선교하는 다음 두 주 동안에 일터에서 자신들을 부양하기에 넉넉한 돈을 벌었다.

138:8.7 (1545.8) 서민들은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과 봉사에 놀라워했다. 랍비들은 무지한 자는 경건하거나 올바를 수 없다고 유대인들에게 오랫동안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의 사도들은 경건하고도 올바른 사람이었다. 그래도, 랍비의 지식과 세상 지혜를 많이 모르고서 즐거웠다.

138:8.8 (1545.9) 예수는 유대인들이 가르쳤던 바와 같이 이른바 선행으로 회개하는 것, 그리고 믿음으로 얻는 정신의 변화―새로 태어나는 것―의 차이를 분명히 말했다. 그리고 새로 태어나는 것을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값으로 요구하였다. 예수는 믿음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유일한 필요 조건이라고 사도들에게 가르쳤다. 요한은 그들에게 전에 “회개―다가올 진노를 피해 달아날 것”을 가르쳤다. 예수는 “믿음이 지금 하나님의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으로 들어가는 데 열려 있는 문이라”고 가르쳤다. 예수는 선지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러 오는 자처럼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권한을 가진 자로 언급하는 듯하였다. 예수는 기적을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사랑과 유익한 은총을 베푸는 하나님의 영이 안에 깃들어 만족감과 확신을 몸소 얻는 진정한 체험을 발견하도록 그들의 생각을 돌리려고 애썼다.

138:8.9 (1545.10) 주가 만난 인간 하나하나를 깊이 존경하고 이해한다는 것을 제자들은 일찍부터 배웠다. 이렇게 한결같이, 변함없이 온갖 종류의 어른과 아이들을 아주 일관성 있게 배려하는 것에 엄청나게 감동을 받았다. 길에 나가서, 몸과 혼의 짐을 무겁게 지고 지나가는 여인에게 격려하는 말을 일러주려고, 심오한 강연 한가운데서 멈추곤 했다. 사이에 뛰어드는 아이와 사귀려고 사도들과 심각한 회의를 중단하곤 했다. 예수에게는 항상 아무것도 눈앞에 어쩌다가 나타난 개인보다도 중요한 듯이 보이지 않았다. 선생이요 교육자였지만, 그보다 더한 분이었다―또한 친구요 이웃이요 이해하는 벗이었다.

138:8.10 (1546.1) 대중을 가르친 말씀은 주로 비유와 짧은 강론으로 이루어졌어도, 예수는 질문과 답변으로 변함없이 사도들을 가르쳤다. 후일에는 공개 강연에서 진지한 물음에 대답하려고 언제나 멈추곤 하였다.

138:8.11 (1546.2) 사도들은 처음에 예수가 여인들을 대하는 태도에 깜짝 놀랐지만, 일찍부터 익숙해졌다. 그는 하늘나라에서 여자에게 남자와 똑같은 권리를 주리라는 것을 아주 분명히 밝혔다.

9. 다섯 달 동안의 시험

138:9.1 (1546.3) 번갈아서 물고기를 잡고 개인적으로 일하던 기간, 얼마큼 단조로웠던 이 기간은 열두 사도에게 몹시 지치는 체험이었으나 그들은 그 시험을 견디었다. 온갖 불평과 의심, 그리고 일시적 불만이 있었는데도, 그들은 주께 헌신하고 충성하겠다는 서약을 지켰다. 시험하는 이 여러 달 동안 예수와 개인적 관계를 가진 것이 사도들로 하여금 그를 소중히 여기게 만들었다. 그래서 재판받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 절망의 시간에도 (가룟 유다를 빼고) 모두가 그에게 충성하고 진실했다. 사람다운 사람들은 다만 예수처럼 그렇게 그들과 가까이 살고 그렇게 그들에게 헌신했던 존경받는 선생을 실제로 버릴 수 없었다. 주가 돌아가시던 암담한 시간을 통해서, 이 사도들은 가슴 속에서, 꼭 하나의 특별한 인간적 감정―우정과 충성의 감정, 최고의 감정―을 좇아서 모든 이유와 판단과 논리를 제쳐놓았다. 예수와 일하던 이 다섯 달은 이 사도들 하나하나에게, 그를 온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로 여기게 만들었다. 그의 훌륭한 가르침이나 놀라운 행적이 아니라 이 인간다운 감정이, 부활이 있고 하늘나라 복음을 다시 선포할 때까지 그들을 한데 붙들어 두었다.

138:9.2 (1546.4) 조용히 일하던 이 여러 달이 사도들에게 큰 시험이었고 그들은 이 시험을 견디었지만, 대중 활동이 없던 이 기간은 예수의 가족에게도 큰 시련이었다. 예수가 대중을 위한 일을 개시할 준비가 되었을 때가 되자 (룻을 빼고) 집안 전부가 예수를 실질적으로 저버렸다. 겨우 몇 번 기회가 닿았을 때 그들은 나중에 그와 접촉하려고 했고 그것도 함께 집으로 돌아오라고 설득하려는 것이었는데, 예수가 미쳤다고 거의 믿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단지 그의 철학을 헤아리거나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눈 자들에게 너무 지나쳤기 때문이다.

138:9.3 (1546.5) 사도들은 가버나움, 벳세다-줄리아스, 코라진, 게라사, 히포, 막달라, 가나, 갈릴리의 베들레헴, 요타파타, 라마, 사펫, 기스칼라, 가다라, 아빌라에서 개인을 상대로 일을 계속 해나갔다. 이 여러 도시 외에도 시골 뿐 아니라 여러 마을에서 수고했다. 이 기간이 끝날 때가 되자, 열두 사도는 각자의 가족을 돌보는 썩 만족스러운 계획을 세웠다. 대부분의 사도들은 결혼했고 더러는 아이가 여럿 있었지만, 그들은 집안 식구들을 부양하도록 주선하였고 그래서 사도들의 기금에서 얼마큼 조금 도움을 받아서, 가족의 재정적 복지를 걱정할 필요 없이, 모든 에너지를 선생이 하는 일에 바칠 수 있었다.

10. 열두 사도의 조직

138:10.1 (1547.1) 사도들은 일찍부터 다음 방법으로 자체를 조직했다:

138:10.2 (1547.2) 1. 안드레, 처음 선택된 사도는 열두 사람의 의장(議長)이요 총재로 임명되었다.

138:10.3 (1547.3) 2.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은 예수를 몸소 시중드는 동반자로 임명되었다. 밤낮 그에게 시중들고 육체적 필요 및 다양한 필요를 보살피며, 밤을 새워 기도할 때,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신비스러운 교통을 가질 때, 따라가야 했다.

138:10.4 (1547.4) 3. 빌립은 그 집단의 식사 담당자가 되었다. 먹을 것을 마련하고, 방문객들이, 때때로 말씀 들으러 온 군중까지도, 먹을 것이 있도록 처리하는 것이 임무였다.

138:10.5 (1547.5) 4. 나다니엘은 열두 사도 가족들의 필요를 돌보았다. 각 사도 집안의 필요 사항에 대하여 정규적으로 보고를 받았고, 그는 회계인 유다에게 청구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마다 돈을 보내곤 했다.

138:10.6 (1547.6) 5. 마태는 사도단의 재무 담당자였다. 예산을 맞추고 금고가 채워지도록 처리하는 것이 의무였다. 공동으로 지원할 기금이 들어오지 않고 일행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기부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마태는 열두 사도가 한동안 물고기 그물로 돌아가라고 명령할 권한을 가졌다. 그러나 대중을 위한 일을 시작한 뒤로 결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활동에 돈을 대도록 충분한 기금이 언제나 회계의 손에 있었다.

138:10.7 (1547.7) 6. 토마스는 여행 일정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숙소를 주선하고, 가르치고 전도할 장소를 대체로 골랐고, 이렇게 순조롭고 신속한 여행 계획을 보장하는 일이 그에게 맡겨졌다.

138:10.8 (1547.8) 7. 알패오의 쌍둥이 두 아들, 야고보와 유다는 군중 관리에 배치되었다. 설교 시간에 안내원들이 군중 사이에서 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충분한 수의 보조 안내원을 임명하는 것이 그들의 과제였다.

138:10.9 (1547.9) 8. 열심당원 시몬은 오락과 놀이의 책임을 맡았다. 수요일의 계획을 담당했고 또한 날마다 몇 시간 동안 휴식과 기분 전환을 마련하려고 애썼다.

138:10.10 (1547.10) 9. 가룟 유다는 회계로 임명되었다. 돈 자루를 들고 다녔다. 그는 모든 비용을 지출하고 장부를 적었다. 마태를 위해서 한 주 한 주, 예산을 어림하고 또한 안드레에게 주마다 보고했다. 유다는 안드레의 인가를 받아서 돈을 지출했다.

138:10.11 (1547.11) 초기에 조직될 때부터 배반자 유다가 이탈하여 다시 조직할 필요가 있을 때까지 열두 사람은 이 방법으로 활동했다. 주와 제자인 사도들은 서기 27년 1월 12일 일요일까지 이 간단한 방법으로 계속했다. 이날 예수는 그들을 한데 불러 모으고 하늘나라의 대사로서, 그리고 정식으로 즐거운 소식을 전파하는 사람으로 세웠다. 그 뒤에 곧, 처음으로 대중 전도 여행을 가는 길에 예루살렘과 유대 땅을 향하여 떠나려고 준비하였다.

제 139 편 열두 사도

유란시아서

제 139 편

열두 사도

139:0.1 (1548.1) 비록 예수가 거듭하여 사도들의 희망을 산산이 부서뜨리고 개인적으로 높아지려는 모든 포부를 산산 조각내었어도 한 사람만 예수를 저버렸다는 것은 예수가 땅에서 아름답고 올바른 일생을 살았다는 것을 웅변으로 증언한다.

139:0.2 (1548.2) 사도들은 예수로부터 하늘나라에 관하여 배웠다. 예수는 그들로부터 사람의 나라에 대하여, 유란시아에서, 그리고 시공에서 진화하는 다른 세계들에 사는 인간의 성품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이 열두 사람은 많은 다른 종류의 인간 기질을 대표했고 교육을 받아서 비슷하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1백 년 전에 갈릴리의 이방 인구를 강제로 개종시킨 결과로서 이 갈릴리 어부들의 다수가 이방인의 핏줄을 상당히 지녔다.

139:0.3 (1548.3) 사도들이 전부 무지하고 배우지 못했다고 여기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알패오 쌍둥이를 제외하고, 이들은 모두 회당 학교의 졸업생이었고 히브리 성서로, 그리고 그 시절에 소용되는 많은 지식을 얻느라고 철저히 교육받았다. 일곱 사람이 가버나움 회당 학교의 졸업생이었고, 온 갈릴리에 그보다 더 좋은 유대인 학교가 없었다.

139:0.4 (1548.4) 이 하늘나라 사자들이 “무지하고 배우지 못했다”고 너희의 기록들이 언급할 때, 그들이 평범한 사람이라, 랍비의 학문을 배우지 않고 랍비의 성서 해석 방법으로 훈련받지 않았다는 생각을 전하려 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른 바 대학 교육이 모자랐다. 현대에 그들은 분명히 교육받지 못했다 생각되고, 어떤 사회 집단에서는 교양이 없다고까지 생각될 것이다. 한 가지는 분명하니, 모두가 똑같이 경직되고 판에 박힌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사춘기부터 계속 그들은 어떻게 사는가를 배우는 체험을 따로 가졌다.

1. 안드레, 처음 선택된 사도

139:1.1 (1548.5) 하늘나라 사도단의 단장 안드레는 가버나움에서 태어났다. 가족이 다섯―자신, 아우 시몬, 세 누이―인 집안에서 그는 맏아들이었다. 이미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는 가버나움의 고기잡이 항구 벳세다에서, 물고기를 말리는 사업에서 전에 세베대와 동업자였다. 사도가 되었을 때 안드레는 미혼이었지만, 결혼한 아우 시몬 베드로와 함께 거처를 정했다. 두 사람은 어부였고, 세베대의 아들들,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동업자였다.

139:1.2 (1548.6) 서기 26년 사도로 뽑힌 해에 안드레는 33살이었다. 예수보다 만 1살이 많았으며 사도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들었다. 뛰어난 혈통의 선조들로부터 내려왔고 열두 사도 중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이었다. 웅변을 제외하고,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면에서 능력이 동료들과 같은 수준이었다. 예수는 안드레에게 별명, 친근한 호칭을 준 적이 없다. 그러나 사도들이 금방 예수를 주(主)라 부른 것처럼, 또한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명칭으로 안드레를 불렀다.

139:1.3 (1549.1) 안드레는 조직에 능했지만, 행정에 더욱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핵심 집단인 네 사도 중에 한 사람이었으나, 예수가 그를 사도 집단의 우두머리로 세운 것은 동료들과 함께 계속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게 만들었고, 한편 나머지 세 사람은 주와 아주 가깝게 친교하였다. 바로 마지막까지 안드레는 사도단의 감독으로 남아 있었다.

139:1.4 (1549.2) 결코 효과 있는 설교자는 아니었어도, 안드레는 개인을 상대로 일하는 유능한 일꾼이었다. 먼저 선택된 사도로서 즉시 아우 시몬을 예수에게 데려왔으니까, 하늘나라의 개척 선교사였고, 시몬은 나중에 가장 위대한 하늘나라 전도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안드레는 하늘나라의 사자로서 열두 사도를 훈련시키는 수단으로, 개인적으로 일하는 계획을 이용하는 예수의 정책의 주요한 지지자였다.

139:1.5 (1549.3) 예수가 사도들을 개인적으로 가르치든 군중에게 설교하든, 안드레는 무슨 일이 있는지 보통 알고 있었다. 이해심 있는 집행자요 유능한 행정가였다. 눈앞에 닥친 모든 문제를 신속히 결정하였고, 권한 바깥 분야의 문제라고 판단될 경우에는 곧장 예수에게로 가져가곤 하였다.

139:1.6 (1549.4) 안드레와 베드로는 인품과 기질이 무척 달랐지만, 더할 나위 없이 서로 사이가 좋았다는 것은 칭찬받을 일로 영원히 기록되어야 한다. 안드레는 베드로의 웅변 능력을 질투한 적이 없었다. 나이가 위인 안드레 부류의 사람이 어리고 재주 있는 동생에게 그렇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를 보기는 흔치 않을 것이다. 안드레와 베드로는 서로의 능력이나 업적을 조금이라도 시샘하는 듯하지 않았다. 오순절 날 저녁 늦게, 대체로 힘차고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2천 명이나 하늘나라에 더해졌을 때, 안드레는 아우에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지만 그럴 수 있는 동생이 있어서 기쁘구나.” 이에 베드로는 대답했다: “하지만 형이 나를 주께 데리고 가고 끈질기게 나를 그에게 붙들어두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런 일을 하려고 여기에 있지 않았겠지.” 안드레와 베드로는 통례에서 벗어난 예외였고, 형제들도 평화롭게 살고 효과적으로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139:1.7 (1549.5) 오순절 뒤에 베드로는 이름이 났다. 그러나 나이가 위인 안드레는 “시몬 베드로의 형”이라고 소개를 받으며 여생을 보내는 것을 언짢아한 적이 없다.

139:1.8 (1549.6) 모든 사도 가운데, 안드레는 사람을 판단하는 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다른 아무도 회계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의심하지 않았을 때에도 그는 가룟 유다의 마음 속에서 문제가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것을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안드레가 하늘나라에 크게 봉사한 것은 복음을 선포하려고 파송된 첫 선교사들을 선택하는 문제로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을 조언한 것, 또한 하늘나라 행정 사무를 조직하는 일에 관하여 이 초기 지도자들과 상담한 것이다. 안드레는 젊은 사람들에게서 감춰진 자원과 잠자는 재능을 발견하는 큰 재주를 가졌다.

139:1.9 (1549.7) 예수가 하늘에 올라간 뒤에 곧, 안드레는 떠나신 주의 말씀과 하신 일 가운데 많은 것을 손수 기록하기 시작했다. 안드레가 죽은 뒤에 이 개인 기록의 다른 복사판들이 만들어지고 이것은 기독교 교회의 초기 선생들 사이에서 자유로이 돌려가며 읽혔다. 안드레가 쓴 이 비공식 노트는 땅에서 주의 일생을 어지간히 연속된 이야기로 만들어질 때까지, 후일에 편집되고 수정되고 바뀌었고 또 다른 것이 추가되었다. 변경되고 고쳐진 이 몇 권의 마지막 복사판은 열두 사도 중에 처음 선택된 사람이 그 원본을 기록한 지 1백 년쯤 되어 알렉산드리아에서 불에 타버렸다.

139:1.10 (1550.1) 안드레는 맑은 통찰력, 논리적 생각, 굳은 각오를 가진 사람이었고 그의 인격의 큰 장점은 뛰어나게 차분한 성질이었다. 그의 기질의 문제점은 열심이 모자라는 것이었다. 분별 있게 칭찬하여 동료들을 북돋아주지 못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친구들의 훌륭한 업적을 칭찬하지 않고 입을 다무는 성향은 그가 아첨과 불성실을 싫어하기 때문에 생겨났다. 안드레는 무던하고 차분하고, 스스로 일어서고 수수한 정도로 실무에 성공한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139:1.11 (1550.2) 사도들은 누구나 예수를 사랑했지만, 개별 사도에게 특별히 마음을 끄는 어떤 몇 가지 성격 특성 때문에 열두 사람은 각자 예수에게 이끌렸다. 한결같은 진실성, 꾸밈 없는 기품 때문에 안드레는 예수를 찬미하였다. 사람들이 일단 예수를 알면, 친구들에게 그를 알리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 사람들은 정말로 온 세상이 예수를 알기를 바랐다.

139:1.12 (1550.3) 후일의 박해로 인하여 마침내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흩어졌을 때, 안드레는 아르메니아, 소 아시아, 마케도니아를 거쳐서 여행했다. 수천 명을 하늘나라로 인도한 뒤에 마침내 붙잡혀서 아카이아 지방의 파트라스에서 십자가에 못박혔다. 이 튼튼한 사람이 십자가에서 숨이 끊어지기까지 꼬박 이틀이 걸렸고, 이 비극의 시간 내내 하늘나라의 구원을 알리는 기쁜 소식을 계속 효과 있게 선포했다.

2. 시몬 베드로

139:2.1 (1550.4) 사도들과 합세했을 때 시몬은 서른 살이었다. 결혼했고 아이가 셋 있었으며 가버나움 가까이 벳세다에서 살았다. 형 안드레와 장모(丈母)가 함께 살았다. 베드로와 안드레, 이 두 사람은 세베대의 아들들과 함께 고기잡이하는 동업자였다.

139:2.2 (1550.5) 안드레가 시몬을 둘째 사도로 소개하기 전에, 주는 얼마 동안 그를 알았다. 예수가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었을 때 빙그레 웃으며 그렇게 했고, 그것은 일종의 별명이 될 것이었다. 시몬은 모든 친구에게 변덕스럽고 충동에 움직이는 사람으로서 잘 알려져 있었다. 나중에, 가볍게 준 이 별명에 새롭고 중요한 뜻을 예수가 붙인 것은 참말이다.

139:2.3 (1550.6) 시몬 베드로는 충동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요 낙천가였다. 격한 감정에 마음대로 빠지면서 자랐다. 생각 없이 말을 계속 뱉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곤경에 빠졌다. 이런 종류의 무분별은 모든 친구와 동료에게 끊임없는 문제를 안겨주었고 이것은 주로부터 여러 번 가볍게 꾸지람을 받은 원인이었다. 베드로가 생각 없는 말로 더 곤란에 빠지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과감히 대중에게 제안을 내놓기 전에, 많은 계획과 설계에 대하여 아주 일찍부터 형 안드레와 상의하기를 배웠기 때문이다.

139:2.4 (1550.7) 베드로는 말을 잘하고 극적이고 유창한 연설가였다. 또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타고난 지도자요, 머리가 빨리 도는 사람이요, 깊이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질문을 많이 했고 모든 사도가 합쳐서 질문한 것보다 더 많이 물었다. 대부분의 질문은 좋았고 그 상황에 적절했지만, 허다한 질문이 생각 없고 어리석었다. 베드로는 깊이 따지는 머리를 가지지 않았지만, 자기의 머리를 무척 잘 헤아렸다. 따라서 빨리 결심하고 갑자기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남들은 바닷가에서 예수를 보고 놀라서 떠들었지만, 베드로는 물 속에 첨벙 뛰어들어 주를 맞이하러 물가로 헤엄쳤다.

139:2.5 (1551.1) 베드로가 가장 찬미한 예수의 한 가지 특성은 더할 나위 없는 부드러움이었다. 베드로는 예수의 참을성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잘못한 사람을 겨우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이나 용서한다는 교훈을 결코 잊지 않았다. 대사제의 안뜰에서 생각 없이, 뜻하지 않게 예수를 부인한 직후에, 캄캄하고 비참했던 며칠 동안 주의 용서하는 인격으로부터 받은 이 인상(印象)을 많이 생각해 보았다.

139:2.6 (1551.2) 시몬 베드로는 딱할 정도로 변덕스러웠다. 갑자기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행동이 달라지곤 했다. 처음에는 예수가 발 씻는 것을 물리쳤고, 다음에 주의 대답을 듣고 나서 온 몸을 씻어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결국 예수는 베드로의 결점이 머리에 있고 마음에 있지 않음을 알았다. 땅에서 일찍이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서 용기와 비겁을 아주 설명하기 힘들게 섞어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인품의 큰 장점은 충성심과 우정이었다. 베드로는 정말로, 참으로 예수를 사랑했다. 헌신하는 기백이 하늘을 찌를 듯해도, 아주 불안했고 차분하지 못해서, 주(主)인 선생을 부인하기까지 여종이 그를 놀려대도록 버려두었다. 베드로는 박해와 어떤 다른 형태의 직접 공격도 견딜 수 있었지만, 그는 비웃음 앞에서 시들고 오그라들었다. 정면 공격에 부딪쳤을 때 용감한 군인이었으나 뒤에서 공격받아 놀랐을 때는 두려워서 움츠러드는 겁쟁이였다.

139:2.7 (1551.3) 베드로는 빌립이 사마리아인 사이에서, 그리고 바울이 이방인 사이에서 하는 일을 예수의 사도 중에서 처음으로 앞에 나서서 변호하였다. 그래도 나중에 안티옥에서 비웃는 유대주의자들과 마주쳤을 때, 그는 태도를 바꾸고 일시 이방인들로부터 물러났고, 이렇게 하여 바울의 두려움 없는 비난을 받게 만들었다.

139:2.8 (1551.4) 그는 사도들 가운데 처음으로 예수가 사람과 신의 성품을 한 몸에 가졌음을 진심으로 고백하였고 또 처음으로―유다를 빼고―예수를 부인한 사람이었다. 대단한 몽상가는 아니었지만, 베드로는 환희의 구름 속에 싸이고 극적인 열심에 빠졌다가 평범하고 사무적인 현실 세계로 내려오기를 싫어했다.

139:2.9 (1551.5) 예수를 따르면서, 글자 그대로, 그리고 비유로 말하자면, 그는 행렬을 이끌든지 아니면 뒤에서 처졌다―“멀찌감치 뒤에서 따랐다.” 그러나 그는 열두 사도 가운데서 뛰어난 전도사였다. 하늘나라를 세우고 사자들을 한 세대 동안에 사방으로 보내기 위해서, 바울을 제쳐놓고 다른 어느 한 사람보다도 더 공헌이 많았다.

139:2.10 (1551.6) 경솔하게 주를 부인한 뒤에 그는 자아를 발견했고, 안드레의 동정과 이해심 있는 안내를 받아서 다시 고기잡이 그물로 돌아갔다. 한편 사도들은 십자가 처형이 있은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살피려고 기다렸다. 예수가 용서했다는 것을 완전히 확신했을 때, 주의 양 떼 속에 다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하늘나라의 불꽃은 그의 혼 안에서 아주 밝게 타올라서, 그는 어둠 속에 앉아 있던 수천 명에게 구제하는 큰 빛이 되었다.

139:2.11 (1551.7) 예루살렘을 떠난 뒤에, 그리고 바울이 이방 기독교 교회 사이에서 으뜸가는 인물이 되기 전에, 베드로는 두루 여행하면서 바빌론으로부터 고린도까지 모든 교회를 찾아보았다. 바울이 세운 많은 교회를 찾아보고 돌보기까지 하였다. 베드로와 바울은 성질과 교육, 신학조차 많이 달랐지만 나이가 지긋했을 때 교회를 강화하기 위하여 잘 어울려 일했다.

139:2.12 (1552.1) 베드로의 말투와 가르침의 얼마큼은 누가가 부분적으로 기록한 설교와 마가 복음에 나타난다. 그의 힘찬 말투는 베드로 전서라고 알려진 서한에 더 잘 나타나며, 그 편지를 나중에 바울의 제자가 고치기 전까지는 적어도 이것이 참말이었다.

139:2.13 (1552.2)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가 결국, 정말로 참으로 유대인 메시아라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확신시키려고 애쓰는 잘못을 계속하였다. 죽는 바로 그날까지, 시몬 베드로는 머리 속에서 예수가 유대인의 메시아라는 개념,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원자라는 개념,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 즉 온 인류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계시라는 개념, 이 세 가지 사이에서 계속하여 갈팡질팡하였다.

139:2.14 (1552.3) 베드로의 아내는 대단히 유능한 여인이었다. 여러 해 동안 그 여자는 여인단의 회원으로서 쓸모 있게 수고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을 때 베드로의 모든 선교 여행 뿐 아니라 여러 교회로 가는 모든 여행에 그를 따라다녔다. 훌륭한 남편이 목숨을 바친 날, 이 여인은 로마의 경기장에서 사나운 짐승들에게 던져졌다.

139:2.15 (1552.4) 이렇게 예수와 가까웠던 사람, 핵심 집단의 하나인 이 사람 베드로는 직무가 충만하게 성취될 때까지, 힘차고 영화롭게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외치면서 예루살렘을 떠나갔다. 주가 돌아가신 것처럼―십자가에서―죽어야 한다고 그를 체포한 사람들이 그에게 귀띔해 주었을 때, 자신을 높은 명예를 받은 자라고 여겼다. 이렇게 시몬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못박혔다.

3. 야고보 세베대

139:3.1 (1552.5) 세베대의 두 아들인 사도들에게 예수는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둘 중에 형인 야고보는 사도가 되었을 때 서른이었다. 결혼하고 아이가 넷 있었고, 가버나움의 교외, 벳세다에서 부모 집 가까이 살았다. 그는 어부였고, 아우 요한과 일행이 되어 안드레와 시몬과 손잡고 직분에 힘썼다. 야고보와 아우 요한은 사도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예수를 더 오래 알았던 장점이 있었다.

139:3.2 (1552.6) 이 유능한 사도의 기질은 모순 덩어리였다. 그는 정말로 두 가지 성품을 가진 듯하였고 그 두 가지가 격한 감정에 자극되었다. 분개심을 일단 충분히 건드렸을 때 그는 특히 격렬했다. 일단 적당히 도발되었을 때 그는 불 같은 성미를 가졌고, 폭풍이 가신 뒤에 그것이 전적으로 올바른 분개심의 표현이었다는 핑계를 대어 성낸 것을 언제나 정당화하고 변명하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이렇게 이따금 분노를 터뜨리는 것을 제쳐놓고, 야고보의 성격은 안드레의 성격과 무척 비슷했다. 안드레의 신중함이나 인간의 성품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없었지만, 그는 훨씬 뛰어난 대중 연설가였다. 베드로 다음으로, 마태가 아니라면 야고보가 열두 사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연설가였다.

139:3.3 (1552.7) 야고보는 어떤 의미에서도 변덕스럽지 않았어도, 하루는 조용하고 말이 없다가 다음 날에는 아주 훌륭한 연사요 이야기꾼이었다. 보통 예수와 함께 거리낌없이 이야기했지만, 열두 사도 가운데, 한 번에 며칠씩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한 가지 큰 약점은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게, 조용한 이 시기가 가끔 찾아오는 것이었다.

139:3.4 (1552.8) 야고보의 인격에서 뛰어난 모습은 한 가지 제안의 모든 면을 볼 수 있는 능력이었다. 모두 열두 사도 가운데서 예수의 가르침의 참 뜻과 중요성을 가장 가깝게 깨달았다. 처음에는 그도 주의 뜻을 알아차리는 데 더디었지만, 훈련을 마치기 전에 예수가 하신 말씀에 담긴 우수한 개념을 알아들었다. 야고보는 광범위한 인간 성품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능한 안드레와 성급한 베드로, 그리고 말이 적은 아우 요한과 잘 어울렸다.

139:3.5 (1553.1) 야고보와 요한이 함께 일하려고 애쓰면서 비록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그들이 얼마나 잘 어울렸는가 지켜보면 감동이 된다. 안드레와 베드로처럼 아주 잘 하지는 못했어도, 두 형제, 특히 그렇게 고집 세고 결의가 굳은 형제에게 보통 기대하는 것보다 이들은 훨씬 잘 어울렸다. 그러나 이상하게 보일 듯하지만, 세베대의 이 두 아들은 낯선 사람들을 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서로에게 관대했다. 서로에게 무척 다정했고 언제나 행복한 놀이 친구였다. 주께 주제넘게 무례한 태도를 보였던 사마리아인들을 죽이라고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리고 싶어 한 것은 이 “우뢰의 아들”들이었다. 그러나 야고보가 때 이르게 죽은 것은 동생 요한의 격렬한 성질을 크게 고쳤다.

139:3.6 (1553.2) 예수의 인품에서 야고보가 가장 감탄한 것은 주가 이해심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예수가 성공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를 이해하고 관심을 보인 것은 그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139:3.7 (1553.3) 야고보 세베대는 안정된 사색가요 계획하는 사람이었다. 안드레와 함께, 사도단에서 냉정한 축에 들었다. 활기가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베드로를 안정시키는 뛰어난 평형 바퀴와 같은 사람이었다.

139:3.8 (1553.4) 그는 겸손하고 꾸밈 없이 나날이 섬기는 사람이요, 허세부리지 않는 일꾼이었다. 하늘나라의 참 뜻에 관하여 무언가 일단 깨닫자 아무런 특별한 보상을 찾지 않았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그 여자는 자기 아들들에게 예수의 바른 편과 오른 편 자리를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는데, 이렇게 요청한 사람은 어머니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한 책임을 맡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의사를 밝혔을 때, 그들은 주가 로마의 권력에 대하여 항거한다고 추측했고 그에 따르는 위험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그 값을 기꺼이 치르려 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 잔을 마실 준비가 되어 있는가 예수가 물었을 때 그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야고보에 관해서 이 대답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었다―그는 주와 함께 그 잔을 마셨고 순교를 체험하는 첫 사도가 되도록 처신하였으며, 헤롯 아그립바의 칼에 일찍 이슬로 사라졌다. 이렇게 야고보는 열두 사도 중에서 맨 처음으로 하늘나라의 새 싸움터에서 목숨을 바쳤다. 헤롯 아그립바는 어느 다른 사도보다도 야고보를 두려워했다. 정말로 그는 흔히 조용하고 말이 없었지만, 그의 확신을 누가 건드리고 도전했을 때, 용감하고 각오가 굳었다.

139:3.9 (1553.5) 야고보는 일생을 충만히 살았다. 종말이 다가왔을 때 얼마나 은혜롭고 꿋꿋하게 견디었는지, 그를 고발하고 밀고한 사람이 그의 재판과 집행에 참석했는데 그 사람조차 너무 감동을 받아서 야고보가 사형받는 장소로부터 뛰쳐나가서 자신이 예수의 제자들과 합세하였다.

4. 요한 세베대

139:4.1 (1553.6) 사도가 되었을 때 요한은 스물 네 살이었고, 열두 사도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다. 그는 미혼이었고 부모와 함께 벳세다에서 살았다. 어부였고, 안드레와 베드로와 동업하여, 형 야고보와 함께 일했다. 사도가 되기 전과 후에 요한은 주의 가족을 상대하는 일을 맡아서 예수의 개인 대리자로서 활동했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살아 있는 한, 이 책임을 계속해서 맡았다.

139:4.2 (1553.7) 요한이 열두 사도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고, 예수의 집안 일을 담당하여 주와 가까이 관련되었기 때문에 주께 무척 소중하기는 했지만, 그가 “예수가 사랑한 제자”였다고 진실로 말할 수는 없다. 예수처럼 그러한 관대한 인물이 사도들 중에 한 사람을 남보다 더 사랑해서, 편애를 보인 죄가 있다고 너희는 도저히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형 야고보와 함께, 다른 사람들보다 예수를 더 오래 알았음은 말할 것도 없고, 요한이 예수의 개인 조수 세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은 이 그릇된 생각을 더욱 그럴듯하게 만들었다.

139:4.3 (1554.1)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사도가 된 뒤에 곧, 예수에게 개인 조수로서 배치되었다. 열두 사도가 선택된 뒤에 얼마 안 있어, 안드레를 그 집단의 우두머리로 행동하도록 임명했을 때, 예수는 그에게 말했다: “나와 함께 있고 내 옆에 남아 있으며, 나를 위로하고 날마다 나의 필요를 보살피기 위하여, 동료들 가운데 두셋을 배치하기를 이제 내가 바라노라.” 안드레는 처음에 뽑힌 다음 세 사도를 이 특별 임무를 맡도록 고르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축복받은 근무에 자신이 자원하고 싶어했을 터이나 주는 이미 그에게 임무를 주었다. 그래서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에게 예수와 함께 붙어 다니라고 즉시 지시했다.

139:4.4 (1554.2) 요한 세베대의 인격은 사랑스러운 특성을 많이 가졌지만, 그리 사랑스럽지 못한 점은, 지나치지만 보통은 잘 감추어진 자만심이었다. 예수와 오랫동안 교제한 것은 그의 인품에 크고 많은 변화를 주었다. 이 자만심은 크게 줄어들었으나 늙고 얼마큼 아이 같아진 뒤에 이 자존심은 어느 정도 다시 나타났다. 그래서 지금 그의 이름을 지닌 복음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면서 나단에게 지시할 때, 나이 지긋한 사도는 서슴지 않고 자신을 “예수가 사랑한 제자”라고 거듭 언급했다. 땅에서 다른 어느 필사자보다 요한은 예수의 절친한 친구에 가까웠고, 허다한 문제에서 예수가 선택한 개인 대표자라는 사실에 비추어서, 자기가 “예수가 사랑한 제자”라고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으니, 자신이 예수가 빈번히 일을 맡긴 제자였음을 아주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다.

139:4.5 (1554.3) 요한의 인격에서 가장 좋은 특징은 신뢰할 수 있는 성품이었다. 즉시 행동하고 용감하며 충실하고 헌신적이었다. 가장 큰 약점은 그의 특징인 이 자만심이었다. 자기 집안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이요 사도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다. 아마도 그저 조금 버릇이 없었을 뿐이다. 어쩌면 조금 지나치게 그를 얼러서 길렀는지 모른다. 그러나 늙었을 때 요한은, 스물네 살이 되었을 때 예수의 사도들 축에 끼어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 멋대로 행동하던 젊은이와 무척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139:4.6 (1554.4) 요한이 가장 고맙게 여긴 예수의 특성은 주의 사랑, 그리고 이기심이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의 특성은 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그래서 그 뒤에 사랑과 형제에게 헌신하는 감정이 후일에 그의 인생 전체를 지배하였다.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사랑에 대하여 글을 썼다. 이 “우뢰의 아들”은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 에베소에서 나이가 지긋한 이 주교가 강단에 서서 설교할 수 없어 그를 의자에 앉혀 교회로 날라야 했을 때, 그리고 예배가 끝난 뒤에 신자들에게 몇 마디 말씀하라고 부탁받았을 때, 몇 년 동안 오직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아, 서로 사랑하라.”

139:4.7 (1554.5) 요한은 그의 성미를 건드렸을 때를 제외하고, 말이 많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도 말이 적었다. 늙어감에 따라서 성질은 더욱 누그러졌고 더 자제되었지만, 입을 열기 싫어하는 성향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다. 말을 별로 하지 않는 이 성질을 결코 충분히 이겨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놀라운 창조적 상상력을 타고 났다.

139:4.8 (1555.1) 요한에게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이 부류에게 기대하지 못할 또 다른 면이 있었다. 얼마큼 편협하고 지나치게 참을성이 없었다. 이런 점에서 그와 야고보는 무척 비슷했다―두 사람 다 무례한 사마리아인들 머리 위에 쏟아지도록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고 싶어했다.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는 어떤 낯선 사람들을 요한이 만났을 때, 그는 당장 그들을 제지하였다. 그러나 열두 사도 중에서 이 종류의 자만심과 우월 의식으로 물든 사람은 요한뿐이 아니었다.

139:4.9 (1555.2) 예수가 얼마나 충실하게 자신의 어머니와 가족을 돌보려고 준비했는가 알았기 때문에, 예수가 집 없이 지내는 것을 보고서 요한의 생애는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다. 요한은 또한 예수의 가족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깊이 동정하였고 그들이 차츰 그를 멀리하고 있음을 알았다. 예수가 아주 작은 소망까지도 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맡기고, 절대로 의지하며 날마다 생활하는 것과 함께, 이 상황 전체가 요한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이것은 그 뒤에 여생 전체에 걸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그의 인격에 뚜렷하고 영구한 변화를 일으켰다.

139:4.10 (1555.3) 요한은 다른 사도들 가운데 거의 아무도 가지지 않은 차분하고 대담한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가 붙잡힌 날 밤에 즉시 그를 따라갔고, 감히 바로 죽음의 문턱까지 주와 함께 간 유일한 사도였다. 땅에서 바로 그 마지막 시간까지 그는 자리에, 가까이 있었다. 예수의 어머니에 관하여 그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 그리고 주가 사람으로 존재하는 마지막 순간에 줄까 싶은 그러한 추가 지시를 받을 준비가 된 것이 눈에 띄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니, 요한은 철저히 믿을 만하였다. 열두 사도가 식사할 때 요한은 보통 예수의 바른 편에 앉았다. 열두 사도 중에서 처음으로 정말로, 완전히 부활을 믿은 자였다. 그리고 주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 바닷가에서 그들에게 왔을 때, 먼저 주를 알아본 사람이었다.

139:4.11 (1555.4) 세베대의 이 아들은 초기 기독교 운동이 전개될 때 베드로와 아주 밀접히 관계되었고, 예루살렘 교회의 주요한 지지자 중의 하나가 되었다. 오순절 날에 베드로의 오른팔과 같은 지지자였다.

139:4.12 (1555.5) 야고보가 순교한 뒤 몇 년이 지나자, 요한은 형의 부인과 결혼했다. 여생에 마지막 20년 동안 그는 사랑스러운 손녀의 보살핌을 받았다.

139:4.13 (1555.6) 요한은 몇 차례 감옥에 갇혔고, 다른 황제가 로마에서 권력을 잡을 때까지 4년 동안 팟모 섬으로 추방되었다. 요한이 눈치와 지혜가 없었더라면, 말을 거침없이 뱉는 형 야고보처럼 의심할 여지 없이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자, 주의 동생 야고보와 함께, 요한은 민사(民事) 재판관들 앞에 나타났을 때 지혜롭게 사람들을 어루만지기를 배웠다. 그들은 “부드러운 대답이 노여움을 거둔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교회가 “하늘나라”이기보다 차라리 “인류에게 사회적으로 봉사하는 데 헌신하는 영적 모임”이라고 설명하기를 배웠다. 통치하는 권력―나라와 임금―이 아니라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을 가르쳤다.

139:4.14 (1555.7) 팟모 섬에 잠시 추방되었을 때 요한은 계시록을 썼고, 너희는 그것을 이제 대단히 축소되고 왜곡된 형태로 가지고 있다. 이 계시록은 큰 계시 중에 살아남은 조각들을 담고 있다. 요한이 쓴 뒤에, 계시의 큰 부분들이 없어졌고 다른 부분들은 제거되었다. 조각나고 불순물이 섞인 형태로만 간직되었다.

139:4.15 (1555.8) 요한은 많이 여행하고 끊임없이 수고했으며, 아시아 교회들의 주교가 된 뒤에, 에베소에서 주저앉았다. 99살이 되었을 때 에베소에서 이른바 “요한에 따른 복음”을 쓰는 작업을 하면서 동료 나단을 지도했다. 모두 열두 사도 가운데, 요한 세베대는 결국 뛰어난 신학자가 되었다. 에베소에서 서기 103년에 자연사했고, 그때 나이는 101살이었다.

5. 호기심 많은 빌립

139:5.1 (1556.1) 빌립은 다섯째로 뽑힌 사도였고, 예수와 처음 네 사도가 요단강에 있던 요한의 회합 장소로부터 갈릴리의 가나로 가는 길에 부름을 받았다. 벳세다에서 살았으므로 빌립은 한동안 예수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요단강 유역에서 예수가 “나를 따르라”하고 이른 그날까지, 예수가 정말로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빌립은 또한 안드레ㆍ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이 예수를 구원자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얼마큼 영향을 받았다.

139:5.2 (1556.2) 빌립은 사도들과 합세했을 때 27살이었다. 최근에 결혼했지만, 이때 아이가 하나도 없었다. 사도들이 그에게 준 별명은 “호기심”을 가리켰다. 빌립은 언제나 눈으로 보기를 바랐다. 결코 어떤 제안이라도 그리 깊숙이 들여다보지 못하는 듯했다. 꼭 둔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상상력이 모자랐다. 이 상상력의 부족은 그의 인품에 큰 약점이었다. 그는 평범하고 사무적인 사람이었다.

139:5.3 (1556.3) 사도들이 봉사하려고 조직되었을 때 빌립은 식사 담당이었다. 그들에게 항상 식량을 조달하도록 처리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리고 그는 훌륭한 식사 담당자였다. 가장 좋은 특징은 철저하게 일을 처리하는 성향이었다. 수학(數學) 머리가 있고 체계 있게 일을 처리했다.

139:5.4 (1556.4) 빌립은 세 소년과 네 소녀, 이렇게 일곱 사람으로 이루어진 가족의 출신이었다. 위에서 둘째로 나이가 많았고, 주가 부활하신 뒤에 가족 전체를 하늘나라에 들어가도록 세례를 주었다. 빌립의 친척들은 어부였다. 아버지는 대단히 유능한 사람이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나 어머니는 아주 평범한 가족 출신이었다. 빌립은 큰 일 하기를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작은 일을 대단한 방법으로, 잘 처리하고 쓸 만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4년 동안 오직 몇 번,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먹을 것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들의 일생을 따라 생겼던 많은 긴급시의 필요에도 그가 준비되지 않은 적이 드물었다. 사도 일행의 식당 부서는 총명하고 유능하게 관리되었다.

139:5.5 (1556.5) 빌립의 장점은 꼼꼼하게 일을 확실히 처리하는 것이었다. 그의 체질에서 약점은 전혀 상상력이 없는 것, 둘에 둘을 더해서 넷을 얻는 능력이 없는 것이었다. 추상적으로 수학을 알았지만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지 못했다. 그는 어떤 종류의 상상력이 거의 통째로 모자랐다. 그는 날마다 보는, 평범한 보통 사람의 전형이었다. 예수가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을 들으려고 온 군중 속에는 그러한 남녀가 허다하게 있었고, 그들은 주의 자문(諮問) 위원회에 자기들과 같은 사람이 명예로운 자리에 올라 있는 것을 지켜보고 큰 위로를 얻었다. 그들은 자기들과 같은 사람이 이미 하늘나라 일에 높은 자리를 찾았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었다. 빌립의 어리석은 물음을 아주 참을성 있게 듣고, 그렇게 여러 번 식사 담당자가 “보여 달라”는 요청을 따르면서, 예수는 어떤 인간의 머리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가 많이 배웠다.

139:5.6 (1556.6) 빌립이 그렇게 끊임없이 찬미한 예수의 한 가지 성질은 한없는 너그러움이었다. 빌립은 예수에게서 잘아 보이거나 아까워하거나 구두쇠 같은 성향을 결코 찾을 수 없었고, 그는 언제나 어김없이 아끼지 않고 베푸는 이 태도를 존경했다.

139:5.7 (1557.1) 빌립의 성격에는 인상적인 것이 거의 없었다. 때때로 “안드레와 베드로가 사는 마을 벳세다의 빌립”으로 언급되었다. 그는 앞을 헤아리는 선견이 거의 없었다. 주어진 상황에서 극적 가능성을 깨달을 수 없었다. 비관적인 것이 아니라 그는 다만 평범했다. 또한 영적 통찰력이 크게 모자랐다. 주의 가장 심오한 어느 강론 한가운데서 어리석게 보이는 질문을 하려고 서슴지 않고 예수를 멈추게 하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이 모자라는 것 때문에 예수는 한 번도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예수는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들었고, 그에게 가르침의 더 깊은 의미를 깨닫는 능력이 없음을 헤아렸다. 이런 답답한 질문을 하는 것 때문에 한 번 꾸짖으면, 이 정직한 사람을 다칠 뿐 아니라 그러한 꾸지람은 빌립의 마음을 너무 상하게 하여 다시는 마음 놓고 묻지 않을 것을 예수는 잘 알았다. 공간에 그가 만든 세계들에는 더디게 생각하는 비슷한 필사자가 셀 수도 없이 많이 있음을 예수는 알았고, 그는 모두가 그를 의지하고 언제나 마음 놓고 질문과 문제들을 가지고 그에게 오도록 격려하기를 바랐다. 결국, 예수는 설교하던 말씀보다 빌립의 어리석은 질문에 정말로 더욱 흥미를 느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온갖 종류의 사람들에게 최고로 관심을 가졌다.

139:5.8 (1557.2) 식사를 담당하던 이 사도는 훌륭한 대중 연설가가 아니었지만, 개인을 상대로 매우 설득력 있고 성공적인 일꾼이었다. 그는 쉽게 낙심하지 않았다. 꾸준히 일하는 사람이었고 어떤 일에 손을 대도 아주 끈질겼다. “오라”하고 말하는 크고도 드문 재주를 가졌다. 그가 처음으로 전향시킨 나다니엘이 예수와 나사렛의 장단점에 대하여 따지고 싶어했을 때 빌립의 효과적인 대답은 “와서 보라”는 것이었다.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가라”―이리하고 저리하라―하고 훈계하는 독단적 설교자가 아니었다. 그가 하는 일에 “오라”―”나를 따라 오라, 내가 길을 보여주리라” 하면서 모든 상황이 일어나는 대로 부딪쳤다. 그것이 어떤 형태와 단계의 가르침에서도 언제나 효과 있는 기법이다. 부모들도 아이들에게 “가서 이리 하고 저리 하라”하지 않고, “우리를 따라 오라, 우리가 더 좋은 방법을 너희에게 보여주고 가르쳐주리라” 말하는 것을 빌립으로부터 배워도 좋다.

139:5.9 (1557.3) 빌립이 새로운 형편에 적응하는 능력이 없는 것은 그리스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그를 찾아왔을 때 잘 나타났는데,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선생이여 우리는 예수를 만나고 싶소이다.” 자, 빌립은 어떤 유대인이 그러한 질문을 하더라도 “오라”하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외국인이었고 그는 그런 문제에 관하여 윗사람들로부터 아무런 지시를 받은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우두머리 안드레와 의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은 수소문하는 그리스인들을 예수에게 데리고 갔다. 마찬가지로, 사마리아로 들어가서, 주한테서 지시를 받은 대로 신자들에게 설교하고 세례를 주었을 때, 그는 이들이 진리의 영을 받았다는 표시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손 얹기를 삼갔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 일을 했고, 이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어머니 교회를 위하여 빌립이 하는 일을 구경하려고 당장 내려왔다.

139:5.10 (1557.4) 주가 돌아가신 어려운 시절을 거치면서 빌립은 계속 일하였다. 열두 사도를 다시 조직하는 데 참여했고, 가까운 유대인 사회를 넘어서 하늘나라를 위하여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처음으로 떠나갔다. 그가 사마리아인을 위하여 한 일, 그리고 복음을 위하여 나중에 한 모든 수고는 대단히 성공했다.

139:5.11 (1557.5) 빌립의 아내는 여인단에서 유능한 회원이었고, 그들이 예루살렘의 박해를 피하여 급히 달아난 뒤에, 남편의 복음 사업과 관련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빌립의 아내는 담대한 여자였다. 그 여자는 빌립의 십자가 밑에 서서 그를 죽이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소식을 선포하라고 그를 북돋아 주었다. 그의 기운이 다했을 때, 그 여자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성난 유대인들이 그 여자에게 달려가서 돌로 쳐죽였을 때에야 조용해졌다. 맏딸 레아는 부모의 일을 계속하였고, 나중에는 히에라폴리스의 이름난 선지자가 되었다.

139:5.12 (1558.1) 한 때 열두 사도의 식사 담당이었던 빌립은 하늘나라에서 대단한 사람이었고, 어디에 가든지 영혼을 구했다. 믿음 때문에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혔고 히에라폴리스에서 묻혔다.

6. 정직한 나다니엘

139:6.1 (1558.2) 나다니엘은 주가 스스로 고른 여섯째이자 마지막 사도였고, 친구 빌립이 그를 예수에게 데리고 갔다. 그는 빌립과 몇 가지 사업에 관련되었고 그들이 예수와 마주쳤을 때, 빌립과 함께 세례자 요한을 보려고 내려가는 길이었다.

139:6.2 (1558.3) 나다니엘은 사도들 틈에 끼었을 때 25살이었고 그 무리에서 둘째로 나이가 어렸다. 그는 식구가 일곱인 집안에서 가장 어리고 미혼이었다. 그는 늙고 허약한 부모의 유일한 기둥이었고 부모와 함께 가나에서 살았다. 형제와 누이들은 결혼했거나 죽었고 아무도 거기서 살지 않았다. 열두 사도 가운데 나다니엘과 가룟 유다가 가장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었다. 나다니엘은 전에 상인이 되려고 생각했다.

139:6.3 (1558.4) 예수 자신은 나다니엘에게 별명을 주지 않았으나, 열두 사도는 곧 정직과 성실을 나타내는 명칭으로 그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는 “속임수가 없었다.” 이것은 그의 큰 미덕이었고 그는 정직하고도 성실했다. 그 인격의 약점은 자부심이었다. 그의 집안, 그가 살던 도시, 그의 명성과 민족을 아주 자랑스러워하였고, 너무 지나치지 않으면 이 모두가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다니엘의 개인적 편견은 극단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었다. 자신의 개인 의견에 따라서 사람들을 미리 판단하는 성향이 있었다. 예수를 만나기도 전에, “나사렛에서 어떤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느냐?”하고 서슴지 않고 물었다. 그러나 자만심이 있어도 나다니엘은 완고하지 않았다. 한 번 예수의 얼굴을 보자 그는 얼른 생각을 바꾸었다.

139:6.4 (1558.5) 여러 면에서 나다니엘은 열두 사도 가운데 이상한 천재였다. 사도 중에 철학자요 몽상가였지만, 무척 실용적 종류의 몽상가였다. 한 때는 깊은 철학에 잠기었다가 다음에는 보기 드문 우스운 농담을 하곤 하였다. 적당히 기분이 내키었을 때 그는 아마도 열두 사도 가운데 최고의 이야기꾼이었다. 예수는 심각한 것과 쓸데없는 것에 대하여 나다니엘이 길게 연설하는 것을 듣기를 대단히 좋아했다. 나다니엘은 차츰차츰 예수와 하늘나라를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지만, 결코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139:6.5 (1558.6) 사도들은 모두 나다니엘을 사랑하고 존경했다. 그는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사도들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유다는 나다니엘이 사도 직분을 충분히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한 번은 분별도 없이 몰래 예수에게 가서 그에 대하여 불평하였다. 예수는 말했다: “유다야, 네 걸음을 조심하여라, 네 직분을 너무 크게 여기지 말라. 우리 가운데 누가 형제를 판단할 능력이 있느냐? 자녀들이 인생의 심각한 일만 함께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내가 되풀이하노니, 육체를 입은 내 동포가 기쁨과 즐거움과 생명을 더욱 풍성히 가지도록 내가 왔노라. 그러면 유다야, 가서 너에게 맡겨진 일을 잘 하고 형제 나다니엘로 하여금 하나님께 자신을 변명하도록 버려두라.” 많은 비슷한 체험의 기억과 함께, 이 기억은 자신을 속이는 가룟 유다의 가슴 속에 오래 남아 있었다.

139:6.6 (1559.1) 여러 번, 예수가 떠나서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과 함께 산에 있고 사도들이 긴장하고 일이 얽혔을 때, 안드레조차 위로받지 못한 형제들에게 무슨 말을 할까 불안해할 때, 나다니엘은 얼마큼의 철학이나 번쩍이는 유머, 그것도 고상한 유머로 긴장을 풀어주곤 했다.

139:6.7 (1559.2) 나다니엘의 의무는 열두 사도의 가족을 돌보는 일이었다. 그는 때때로 사도 회의에서 자리를 비웠다. 병이나 심상치 않은 어떤 일이라도 그가 책임지고 있는 한 사람에게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한시가 급하게 그 집으로 갔기 때문이다. 열두 사도는 자기 집안의 복지가 나다니엘의 손에서 안전히 지켜진다는 것을 알고서 안심하고 쉬었다.

139:6.8 (1559.3) 나다니엘은 예수의 너그러움 때문에 그를 아주 존경했다. 그는 사람의 아들이 얼마나 마음이 넓고 관대한가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았다.

139:6.9 (1559.4) 나다니엘의 아버지(바돌로뮤)는 오순절 뒤에 곧 돌아가셨다. 그 뒤에 이 사도는 메소포타미아와 인도로 가서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외치고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동료들은 한때 그들의 철학자요, 시인(詩人)이요, 우스운 이야기꾼이 어떻게 되었는가 결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비록 후일에 기독교 교회를 조직하는 데 참가하지 않았어도, 그는 또한 하늘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이었고 주의 가르침을 퍼뜨리느라고 많은 공헌을 세웠다. 나다니엘은 인도에서 죽었다.

7. 마태 레위

139:7.1 (1559.5) 안드레가 일곱째 사도 마태를 뽑았다. 마태는 징세원, 즉 세리의 가족에 속했지만, 자신은 그가 살던 가버나움에서 세금 걷는 사람이었다. 그는 서른한 살이었고, 결혼하고 네 아이가 있었다. 어느 정도 재물이 있는 사람이었고 사도단에 속하면서 얼마큼이라도 재산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훌륭한 사업가요, 사회에서 잘 교제하는 사람이었고, 친구를 만들고 매우 다양한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재주를 가졌다.

139:7.2 (1559.6) 안드레는 마태를 사도들의 재무 담당자로 세웠다. 어떤 면에서 그는 사도 조직에서 회계 담당자요 홍보 대변인이었다. 인간의 성품을 날카롭게 판단하는 자요 무척 유능한 전도자였다. 그의 인격은 상상하기 힘든 인격이었지만, 매우 진지한 제자요, 날이 갈수록 예수의 사명을 믿고 하늘나라를 확실히 믿은 사람이었다. 예수는 레위에게 별명을 준 적이 없었지만, 동료 사도들은 보통 그를 “돈줄”이라 불렀다.

139:7.3 (1559.7) 레위의 장점은 마음을 다하여 사도들의 운동에 헌신한 것이다. 세리인 그를 예수와 사도들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지난날에 세금을 걷었던 사람 편에서 넘치게 감사할 원인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사도들이, 특히 열심당원 시몬과 가룟 유다가 그들 중에 세리가 있다는 것을 납득하는 데는 얼마큼 시간이 좀 걸렸다. 마태의 약점은 인생을 근시안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보는 관점이었다. 그러나 여러 달이 지나는 동안에 그는 이 모든 면에서 크게 나아졌다. 물론, 금고를 채우는 것이 임무였으므로 교육이 있던 가장 귀중한 기간에 그는 자주 자리를 비워야 했다.

139:7.4 (1559.8) 마태가 가장 고맙게 여긴 것은 주의 용서하는 성품이었다. 오직 믿음이 하나님을 발견하는 사업에 필요하다는 것을 지치지 않고 되풀이하곤 했다. 언제나 하늘나라를 “하나님을 발견하는 이 사업”이라 말하기를 좋아했다.

139:7.5 (1560.1) 비록 과거가 있는 사람이었어도 마태는 훌륭하게 처신했고, 시간이 지나자 동료들은 세리의 성과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그는 예수의 말씀에 대하여 광범위하게 노트를 적은 사도들 중의 하나였다. 이 노트는 나중에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적은 이사돌의 이야기에 기초로 쓰였으며, 그 이야기는 마태에 따른 복음이라 알려지게 되었다.

139:7.6 (1560.2) 가버나움의 실업가요 세금 걷는 사람이었던 마태의 위대하고 쓸모 있었던 생애는 후세를 통해서 수천의 다른 실업가ㆍ관리ㆍ정치가도 “나를 따르라” 이르는 주의 매력 있는 목소리를 듣도록 인도하는 수단이 되었다. 마태는 정말로 날카로운 정치가였지만, 예수에게 뜨겁게 충성했고, 다가오는 하늘나라 사자들에게 적절히 자금이 조달되도록 처리하는 일에 더할 나위 없이 헌신했다.

139:7.7 (1560.3) 마태가 열두 사도 사이에 있는 것은, 자신이 종교적 위안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빠진 지 오래다고 여긴, 낙심하고 버림받은 큰 무리의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놓는 수단이었다. 버림받고 절망하는 남녀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였고, 그는 결코 한 사람도 돌려보내지 않았다.

139:7.8 (1560.4) 마태는 믿는 제자들과 주의 가르침을 직접 듣는 사람들로부터 자유롭게 내는 헌금을 받았으나 결코 드러내놓고 군중에게 돈을 요청하지 않았다. 조용하고 개인적인 방법으로 모든 재무를 돌보았고, 관심 있는 신자들 중 재력이 있는 부류로부터 대부분의 돈을 걷었다. 그리 많지 않은 자기 재산의 거의 전부를 주와 사도들의 일에 바쳤지만, 이것을 전부 알고 있던 예수를 제외하고 그들은 이렇게 돈 낸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예수와 동료들이 그의 돈을 더럽게 여길까 두려워서 마태는 공개적으로 사도의 기금에 기부하기를 망설였다. 그래서 그는 다른 신자들의 이름으로 많이 냈다. 초기에 몇 달 동안 그들 사이에 그가 끼어있는 것이 얼마큼 시련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마태는 그가 낸 헌금이 날마다 먹는 빵을 그들에게 자주 공급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유혹을 크게 받았지만 항복하지 않았다. 세리를 천시하는 증거가 나타났을 때, 레위는 그가 후하게 기부했음을 그들에게 드러내고 싶어 속이 끓어올랐지만, 언제나 그럭저럭 잠자코 견디었다.

139:7.9 (1560.5) 한 주의 헌금이 필요하다고 예상한 금액에 미치지 못했을 때, 레위는 자주 자기 개인 재산을 많이 꺼내 쓰곤 하였다. 때때로 예수의 가르침에 크게 흥미가 생겼을 때, 필요한 헌금을 간청하지 못한 것 때문에 자신이 충당해야 하는 것을 알았어도 그는 남아서 가르침 듣기를 더 좋아하였다. 그러나 레위는 많은 돈이 그의 주머니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예수가 알았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는지! 주가 이것을 다 알고 있음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박해가 시작된 뒤에 그가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러 떠났을 때 실질적으로 무일푼이 되었을 정도까지 마태가 그들에게 기부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어느 사도도 모르고 죽었다.

139:7.10 (1560.6) 이 박해 때문에 신자들이 예루살렘을 버렸을 때, 마태는 북쪽으로 여행하면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도하고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옛 사도 동료들에게 그의 소식이 끊어졌지만, 그는 전도하고 세례를 주면서, 계속하여 시리아ㆍ카파도치아ㆍ갈라시아ㆍ비티니아ㆍ트레스를 거쳐 갔다. 트레스 지방의 리시마키아에서, 어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로마 군인들과 짜고 그를 죽음으로 몰았다. 얼마 전에 주가 땅에 머물렀을 때 그의 가르침으로부터 아주 확실히 배운 구원을 믿으면서, 다시 태어난 이 세리는 승리를 거두고 죽었다.

8. 토마스 디디머스

139:8.1 (1561.1) 토마스는 여덟째 사도였고, 빌립이 그를 선택하였다. 후일에 그는 “의심하는 토마스”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도저히 동료 사도들이 그를 늘 의심하는 사람으로 보았다고 할 수 없다. 그의 머리는 논리적이고 회의하는 종류였던 것이 참말이지만, 그는 일종의 대담한 충성심을 가졌고, 이것은 절친한 사람들이 그를 하찮은 회의론자로 여기지 않게 만들었다.

139:8.2 (1561.2) 토마스가 사도들과 함께했을 때 그는 29살이었다. 결혼했고 네 아이가 있었다. 전에는 목수요 석공이었지만, 나중에 어부가 되었고 타리케아에서 거주했다. 이 마을은 갈릴리 바다로부터 흘러나오는 요단강의 서쪽 둑에 자리잡았다. 이 작은 마을에서는 그를 유지(有志)로 여겼다.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날카롭고 추리하는 머리를 가졌다. 그는 우수한 부모의 아들이었으며 부모는 티베리아스에서 살았다. 토마스는 열두 사도 중에서 참으로 분석하는 머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사도 집단에서 참된 과학자였다.

139:8.3 (1561.3) 토마스가 어렸을 때의 가정 생활은 불행했다. 부모의 결혼 생활은 대체로 행복하지 않았고, 이것은 토마스의 어른 시절의 체험에 나타났다. 그는 자라서 무척 까다롭고 다투기 좋아하는 성질을 가졌다. 아내조차도 그가 사도들과 합세하는 것을 보고 반가워했다. 비관적인 남편이 대체로 집을 떠나 있으리라는 생각에 그 여자는 마음이 놓였다. 토마스는 또한 의심하는 버릇을 가졌고, 이것은 그와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베드로는 처음에 토마스 때문에 아주 속이 뒤집혔고, 토마스가 “모질고 못생겼고 언제나 의심한다”고 형 안드레에게 불평을 털어 놓았다. 그러나 토마스를 알면 알수록, 동료들은 그를 더욱 좋아했다. 그들은 그가 더할 나위 없이 정직하고 굽힘없이 충성스러운 것을 발견했다. 완전히 성실하고 의심할 수 없이 진실했지만, 그는 날 때부터 헐뜯는 사람이었고 자라서 참으로 비관론자가 되었다. 분석적인 머리는 의심에 시달렸다. 열두 사도와 관계를 가지게 되었을 때, 그는 동료 인간에 대한 믿음을 빨리 잃고 있었고, 이처럼 예수의 고귀한 인격과 접촉하게 되었다. 주와 이렇게 관계를 가진 것은 당장에 토마스의 성향 전체를 바꾸기 시작했고, 동료 인간에 대한 그의 정신적 반응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139:8.4 (1561.4) 토마스의 큰 장점은―그가 일단 마음을 먹었을 때―움츠러들지 않는 용기와 함께, 뛰어난 분석하는 머리였다. 큰 약점은 의심하는 성향이었고, 육체를 입은 일생 동안 내내 이것을 완전히 이기지 못했다.

139:8.5 (1561.5) 열두 사도의 조직에서 토마스는 여행 일정을 주선하고 관리하는 데 배치되었고, 그는 사도단의 일과 움직임을 유능하게 지도하였다. 훌륭한 집행자요, 뛰어난 사업가였지만, 그의 변덕스러움은 장애가 되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고 다음 날에는 또 다른 사람이었다. 사도들 틈에 들어갔을 때, 그는 우울한 생각에 잠기는 성향이 있었지만, 예수와 사도들과 접촉한 것이 이 더러운 내향성을 대체로 고쳐주었다.

139:8.6 (1561.6) 예수는 토마스를 매우 좋아했고, 여러 번 함께 길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도들 가운데 그가 있다는 것은 정직하게 의심하는 모든 사람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문제가 있는 허다한 인물이 예수의 가르침의 영적ㆍ철학적 단계에 대하여 모든 것을 온전히 알아듣지 못했어도 그들을 하늘나라로 들어가도록 북돋아주었다. 열두 사도 사이에 토마스가 낀 것은 예수가 정직하게 의심하는 사람들도 사랑했다는 변치 않는 선언이었다.

139:8.7 (1562.1) 다른 사도들은 예수의 충만한 인격에서 어떤 특별하고 뛰어난 특성 때문에 예수를 존경하는 눈으로 보았지만, 토마스는 예수가 더할 나위 없이 안정된 인품을 가졌기 때문에 주를 존경했다. 아주 사랑이 넘치게 자비로워도 전혀 굽힘없이 정당하고 공평하며, 단호하지만 결코 완고하지 않으며, 아주 차분해도 결코 무관심하지 않으며, 무척 도움이 되고 이해심이 있어도 결코 간섭하거나 독재하지 않으며, 아주 강해도 동시에 무척 부드러우며, 아주 분명하지만 결코 거칠거나 무례하지 않으며, 매우 부드러워도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아주 순수하고 티 없어도 동시에 남자답고 적극적이고 힘차며, 그렇게 참으로 용감하지만 결코 성급하거나 무턱대고 덤비지 않으며, 그렇게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자연을 숭배하는 성향이 도무지 없고, 무척 유머와 익살이 있어도 들뜨거나 경박하지 않은 사람을 토마스는 갈수록 더 찬미하고 존경했다. 이렇게 비할 수 없이 안정된 인격은 토마스의 마음을 무척 끌었다. 아마도 그는 열두 사도 가운데 누구보다도, 예수를 가장 높이 지적으로 이해하고 그의 인격을 파악했다.

139:8.8 (1562.2) 열두 사도로 이루어진 자문 회의에서 토마스는 언제나 조심스럽고 안전 제일 정책을 주장했지만, 그의 보수주의가 투표에서 지거나 거부되었을 때, 결정된 계획을 실행하는 데 언제나 먼저 두려움 없이 나섰다. 거듭하여 그는 어떤 계획이 어리석고 주제넘다고 반대하고 나서곤 했다. 끝까지 논쟁하곤 했지만, 안드레가 그 제안을 투표에 붙이고, 그가 무척 애써서 반대한 것을 열두 사람이 하기로 정한 뒤에, 토마스는 “합시다!”하고 먼저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지는 것을 잘 견디는 사람이었다. 투덜거리거나 상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예수가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거듭 반대했지만, 주가 그런 위험을 택하기로 결정하려 했을 때 “친구들아, 움직여라. 같이 가서 함께 죽자꾸나!”하는 용감한 말로 사도들을 일깨웠다.

139:8.9 (1562.3) 토마스는 어떤 점에서 빌립과 같았다. 그도 또한 “보여주기”를 바랐지만 겉으로 나타나는 의심의 표현은 도무지 다른 지적 작용에 근거를 두었다. 토마스는 분석하는 성질이었고 단순히 회의하지는 않았다. 개인의 육체적 용기에 관한 한, 그는 열두 사도 가운데 가장 용감한 축에 속했다.

139:8.10 (1562.4) 토마스는 아주 마음이 언짢은 날이 더러 있었고, 때때로 우울하고 시무룩했다. 아홉 살 때 쌍둥이 누이를 잃은 것이 어릴 때 슬픔을 많이 주었고, 만년에 그의 기질 문제를 악화시켰다. 토마스가 기운이 빠졌을 때, 회복하도록 도와준 사람은 때때로 나다니엘이었고 때때로 베드로였으며 알패오 쌍둥이 중 하나도 자주 그렇게 하였다. 아주 침울해졌을 때 그는 불행하게도 예수와 직접 만나기를 언제나 피했다. 그러나 주는 이것을 모두 알았고 그가 이렇게 우울증으로 시달리고 의심으로 고생할 때 그의 사도를 이해하는 마음을 가졌다.

139:8.11 (1562.5) 때때로 토마스는 혼자 하루나 이틀 떠나 있도록 안드레에게 허락받곤 했다. 그러나 그러한 길이 지혜롭지 않음을 곧 깨달았다. 풀이 죽었을 때 할 일에 아주 충실하고 동료들 가까이 남아 있는 것이 최선임을 일찍 발견했다. 감정의 변화가 있는 생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 없이, 계속 사도의 노릇을 하였다. 앞으로 나갈 때가 실제로 다가왔을 때, “갑시다!”하고 말한 것은 언제나 토마스였다.

139:8.12 (1562.6) 토마스는 의심을 품고 부닥치고 이기는 인간의 위대한 본보기이다. 그는 위대한 지성을 가졌고, 헐뜯는 비평가는 아니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예수와 동료 사도들에게 산성(酸性) 시험이었다. 예수와 그의 일이 진정하지 않았더라면 토마스와 같은 사람을 처음부터 끝까지 붙들어둘 수 없었다. 그는 사실에 대하여 날카롭고 확실한 감각을 가졌다. 사기(詐欺)나 속임수가 처음 나타나는 순간에 토마스는 그들 모두를 버렸을 것이다. 과학자들은 예수와 그가 땅에서 한 일에 관하여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주와 그 인간 동료들과 함께 한 사람이 살고 일했으니 그의 머리는 참된 과학자―토마스 디디머스―의 머리였고, 그는 나사렛 예수를 믿었다.

139:8.13 (1563.1) 토마스는 재판과 십자가 처형이 있던 시절에 시련을 견디었다. 한동안 절망의 늪에 빠졌지만,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사도들에게 충실했고,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를 환영하려고 함께 있었다. 한동안 의심하는 우울증에 굴복했으나 결국 믿음과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오순절 뒤에 그는 사도들에게 지혜롭게 조언하였고 박해가 신자들을 흩어 버렸을 때, 키프러스, 크레테, 북 아프리카 해안, 시실리로 가서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도하고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로마 정부의 관리들에게 체포되고 말타에서 처형될 때까지 토마스는 줄곧 전도하고 세례를 주었다. 죽기 바로 몇 주 전에, 그는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관하여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9 - 10. 야고보와 유다 알패오

139:10.1 (1563.2) 알패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유다는 케레사 가까이서 살던 쌍둥이 어부였고, 아홉째와 열째 사도였다. 야고보와 요한 세베대가 이들을 선택하였다. 이들은 26살이었고 결혼했다. 야고보는 아이가 셋, 유다는 둘이 있었다.

139:10.2 (1563.3) 이 평범한 두 어부에 대하여 할 말이 별로 없다. 그들은 주를 사랑했고 예수는 그들을 사랑했지만 그들은 한 번도 질문으로 예수의 강연을 멈추지 않았다. 동료 사도들의 철학 토론이나 신학(神學) 논쟁을 아주 거의 알아듣지 못했으나 그러한 무리의 막강한 사람들 사이에 자기들이 낀 것을 알고 기뻐했다. 이 두 사람은 용모, 정신의 특성, 영적 이해의 범위가 거의 동일했다. 한 사람에 관하여 이렇다고 말해도 좋다면 다른 사람에 관하여도 그렇다고 적어야 한다.

139:10.3 (1563.4) 안드레는 이들을 군중을 정리하는 일에 배치했다. 그들은 설교 시간에 주요 안내자였다. 사실은 열두 사도 중에서 보통 일을 하는 하인이요 심부름꾼이었다. 소모품 다루는 일에 빌립을 도왔고 나다니엘을 위하여 돈을 가족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리고 어느 사도에게도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뻗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139:10.4 (1563.5) 서민들의 무리는 자기들과 같은 두 사람이 사도들 틈에 자리를 얻어 존경받는 것을 알고 크게 용기를 얻었다. 그들을 사도로 받아들였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이 평범한 쌍둥이는 소심한 신자들의 무리를 하늘나라로 데려오는 수단이었다. 서민들도 자기들과 무척 비슷한 공식 안내원들이 그들을 인도하고 관리한다는 생각을 더 친절하게 받아들였다.

139:10.5 (1563.6) 야고보와 유다는 또한 타대오와 레베오라고도 불렀고, 장점도 단점도 없었다. 사도들이 그들에게 준 별명은 평범을 부드럽게 가리키는 호칭들이었다. 그들은 “모든 사도 가운데 가장 작은 자”들이었다. 이를 알고 기뻐하였다.

139:10.6 (1563.7) 야고보 알패오는 주의 단순한 성향 때문에 예수를 특별히 사랑했다. 이 쌍둥이들은 예수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기들과 주의 마음 사이에 동정의 끈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의 머리는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공손한 의미에서 우둔하다고 할까 싶지만, 그들의 영적 성품은 진정한 체험을 겪었다. 그들은 예수를 믿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하늘나라의 동료였다.

139:10.7 (1564.1) 유다 알패오는 주가 티 내지 않고 겸손했기 때문에 예수에게 마음이 이끌렸다. 그러한 인격의 위엄과 연결된 그러한 겸손이 유다의 마음을 크게 끌었다. 언제나 예수가 특별히 행한 일에 관하여 침묵을 지키라고 분부한 사실은 이 단순한 자연의 아이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139:10.8 (1564.2) 쌍둥이는 성품이 좋고 생각이 단순한 일꾼이었고, 누구나 그들을 좋아했다. 예수는 한 가지 재능을 가진 이 젊은이들을 하늘나라에서 그의 개인 참모진의 영예로운 자리로 환영했다. 공간의 세계들에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사람, 그렇게 단순하고 겁에 질린 사람들이 있으며, 마찬가지로 자신과 함께 그리고 그가 쏟아 부은 진리의 영과 함께, 적극적이고 믿는 모임에 이들을 환영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찮은 신분을 업신여기지 않고 오직 죄와 악을 업신여긴다. 야고보와 유다는 하찮은 사람이었지만 또한 충실했다. 단순하고 무지했어도 또한 마음이 넓었고 친절하고 너그러웠다.

139:10.9 (1564.3) 어떤 부자가 재산을 팔아 치우고 가난한 자를 돕지 않으면, 주가 전도사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거절한 그날, 이 겸손한 사람들은 얼마나 고마운 마음으로 자랑스러워했는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그 쌍둥이가 조언자들 사이에 있음을 보았을 때, 예수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분임을 분명히 알았다. 그러나 오직 신(神)의 제도―하늘나라―가 그러한 평범한 인간의 기초 위에 언제라도 세워질 수 있었다.

139:10.10 (1564.4) 예수와 가졌던 모든 관계에서 겨우 한두 번 쌍둥이는 대중 앞에서 감히 물었다. 주가 터놓고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했을 때 유다는 예수에게 물어볼 흥미를 한 번 가졌다. 열두 사도 사이에 아무런 비밀이 이제 더 없으리라는 것에 조금 실망을 느끼고, 그는 감히 물었다: “그러나 주여, 이렇게 당신이 세상에 자신을 선포하시면, 어떻게 당신의 선함을 특별히 나타내시어 우리를 우대하시겠나이까?”

139:10.11 (1564.5) 쌍둥이는 끝까지, 심판과 십자가 처형과 절망이 있던 그 어두운 날까지 충실하게 섬겼다. 예수를 믿는 중심 신앙을 결코 잃지 않았고 (요한을 빼고) 그의 부활을 처음으로 믿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늘나라가 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주가 십자가에 못박힌 뒤에 곧, 가족에게 그리고 고기잡이 그물로 돌아갔고 그들의 일은 끝났다. 그들은 하늘나라의 더욱 까다로운 싸움에서 버틸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한 우주를 지으신 군주와 함께 4년 동안 가깝고 개인적 관계를 가지는 영예와 복을 받았음을 의식하면서 살다가 죽었다.

11. 열심당원 시몬

139:11.1 (1564.6) 시몬 베드로가 열한째 사도, 열심당원 시몬을 선택하였다. 그는 좋은 가문을 가진 유능한 사람이었고 가족과 함께 가버나움에서 살았다. 사도들 틈에 끼었을 때 28살이었다. 그는 불 같은 선동자요 또한 생각지 않고 떠벌리는 사람이었다. 열심당이라는 애국 조직에 온통 열중하기 전에 그는 가버나움에서 상인이었다.

139:11.2 (1564.7) 열심당원 시몬에게는 사도 무리의 오락과 휴식을 맡는 책임이 주어졌다. 그는 열두 사도의 노는 생활과 오락 활동을 매우 효과 있게 조직한 사람이었다.

139:11.3 (1564.8) 시몬의 장점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충성심이었다.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일을 결심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남자나 여자를 만났을 때 사도들은 시몬을 찾으러 보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라 부르짖는 이 열렬한 사람이, 모든 의심을 치워버리고 망설이는 태도를 일소하고 새 사람이 “믿음의 자유와 구원의 기쁨” 속으로 태어나는 것을 보는 데는 보통 겨우 15분 정도 걸렸다.

139:11.4 (1565.1) 시몬의 큰 약점은 물질적인 머리였다. 유대인 민족주의자로부터 영적 생각을 가진 국제주의자로 빨리 바뀔 수 없었다. 그러한 지적 변화와 감정의 변화를 이룩하는 데 4년은 너무 짧았지만, 예수는 언제나 그에게 참을성을 보였다.

139:11.5 (1565.2) 시몬이 예수에 대하여 무척 찬미한 한 가지는 주의 침착성, 곧 확신, 차분한 태도, 설명할 수 없는 평온함이었다.

139:11.6 (1565.3) 시몬은 과격한 혁명가요 두려움 없이 사람을 부추기는 선동자였어도 “땅에는 평화요 사람들 사이에 선의”를 힘차고 유능하게 전도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불 같은 성품을 차츰차츰 다졌다. 시몬은 토론에 뛰어난 사람이었고 논쟁하기를 좋아했다. 교육받은 유대인 중에서 율법을 따지는 지적 인물이나 그리스인의 지적 논쟁을 다루는 일이 닥치면 그 과제가 언제나 시몬에게 배당되었다.

139:11.7 (1565.4) 그는 타고난 반항아였고 전통을 깨뜨리는 사람으로 훈련을 받았지만 예수는 하늘나라라는 상급 개념을 받아들이도록 시몬을 설득했다. 그는 언제나 저항하는 당의 편을 들었지만, 이제 영과 진리의 한없고 영원한 진보를 부르짖는 진보 당파에 들어갔다. 시몬은 뜨거운 충성심을 가졌고 열심으로 몸소 헌신하는 사람이었으며 예수를 깊이 사랑했다.

139:11.8 (1565.5) 예수는 사업가와 노동자, 낙천주의자와 비관주의자, 철학자와 회의론자, 세리와 정치가와 애국자와 같은 편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139:11.9 (1565.6) 주는 시몬과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는 이 열렬한 유대인 민족주의자를 국제주의자로 만드는 데 결코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다. 예수는 사회ㆍ경제ㆍ정치 질서의 개선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시몬에게 자주 이야기했다. 그러나 예수는 늘 이렇게 덧붙이곤 했다: “그것은 하늘나라의 사업이 아니라.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몸을 바쳐야 하느니라. 우리의 할 일은 하늘에 있는 영적 나라의 대사가 되는 것이요, 신성한 아버지의 뜻과 성품을 대표하는 외에 아무것도 우리가 당장 관여해서는 안 되느니라. 아버지는 그 나라의 꼭대기에 계시고 우리는 그의 신임장을 지니고 있느니라.” 모든 것이 시몬이 알아듣기에 어려웠지만 차츰 그는 주의 가르침이 무슨 뜻인가 얼마큼 깨닫기 시작했다.

139:11.10 (1565.7) 예루살렘의 박해 때문에 흩어진 뒤에 시몬은 잠시 물러나 있었다. 글자 그대로 마음이 짓밟혔다. 민족주의 애국자로서, 예수의 가르침을 좇아 항복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그는 절망에 빠졌지만 몇 년 안에 희망을 불러일으켰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러 떠나갔다.

139:11.11 (1565.8) 그는 알렉산드리아로 갔고, 나일강 상류에서 일한 뒤에 아프리카의 심장부로 파고 들어갔다. 그는 어디서나 예수의 복음을 전도하고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처럼 그는 늙고 허약해지기까지 수고했다. 그리고 죽어서 아프리카의 심장부에 묻혔다.

12. 가룟 유다

139:12.1 (1565.9) 나다니엘이 열두째 사도 가룟 유다를 골랐다. 그는 유대 땅 남부의 작은 마을 케리옷에서 태어났다. 소년이었을 때 부모는 예리고로 이사했고 그곳에 살면서 세례자 요한의 설교와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될 때까지, 아버지의 여러 사업에서 고용되었다. 유다의 부모는 사두개인이었고, 아들이 요한의 제자들과 합류했을 때 그와 인연을 끊었다.

139:12.2 (1566.1) 나다니엘이 타리케아에서 유다를 만났을 때, 그는 갈릴리 바다의 남쪽 끝에서 물고기 말리는 사업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사도들과 합세했을 때 서른이었고 미혼이었다. 열둘 가운데 아마도 교육을 가장 많이 받았고, 주의 사도 집단에서 유일하게 유대 지방 사람이었다. 유다에게는 인격의 장점인 두드러진 특징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 교양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습관과 훈련받은 버릇을 가졌다. 머리가 잘 도는 사람이었으나 언제나 참으로 정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유다는 정말로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정말로 성실하지 않았다.

139:12.3 (1566.2) 안드레는 유다를 열두 사도의 회계로 임명했고, 이것은 그가 맡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직책이었다. 주를 배신하기 직전까지, 그는 정직하고 충실하고 아주 유능하게, 맡은 직무를 수행했다.

139:12.4 (1566.3) 대체로 매력 있고 지극하게 호감이 가는 주의 인격 외에, 유다가 찬미한 예수의 특성은 하나도 없었다. 유다는 갈릴리 동료들을 차별하는 유대 지방의 편견을 결코 버릴 수 없었다. 그는 머리 속에서 예수에 대하여 많은 것을 비판하고 싶어 하기도 하였다. 열한 사도가 완전한 사람, “온통 사랑스럽고 만인 중에 가장 으뜸가는 분”으로 우러러본 그 사람을 자기 만족에 빠진 이 유대 지방 사람은 마음 속에서 주제넘게 자주 비판했다. 그는 예수가 두려움이 많고 자신의 권력과 권한을 주장하기를 더러 두려워한다는 생각을 정말로 품었다.

139:12.5 (1566.4) 유다는 유능한 사업가였다. 어떤 사도들이 허둥지둥 처리한 사무를 수습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와 같은 이상주의자의 재무를 관리하기에는 고된 헌신 뿐 아니라 재치와 능력과 참을성이 요구되었다. 유다는 정말로 뛰어난 경영자요 멀리 내다보는 유능한 재정가였다. 그리고 조직에 빈틈없는 사람이었다. 열둘 가운데 아무도 유다를 비판한 적이 없다. 그들이 보기에 가룟 유다는 비할 데 없는 회계요, 배운 사람이요, (때때로 비판적이긴 했어도) 충성스러운 사도였고, 어떤 의미로 보아도 잘 선택한 사람이었다. 사도들은 유다를 아꼈고 그는 정말로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예수를 믿었음이 틀림없지만 우리는 그가 정말로 진심으로 주를 사랑했는지 의심이 든다. 유다의 경우는 이 속담의 진실을 보여준다: “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듯해도 그 마지막은 죽음으로 이끄는 길이 있다.” 죄와 죽음에 이르는 길로 즐겁게 적응하는 평화로운 속임수에 희생되는 것이 온통 가능하다. 유다는 주와 동료 사도들에게 언제나 재정적으로 충실했다는 것을 안심하고 믿으라. 돈은 결코 그가 주를 저버린 동기가 될 수 없었다.

139:12.6 (1566.5) 유다는 지혜롭지 못한 부모의 외아들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 부모가 애지중지해서 길렀고 귀여워했다. 그는 버릇없는 아이였다. 자라는 동안에 자신을 지나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지는 것을 못 견디는 사람이었다. 공평에 대하여 흐릿하고 비뚤어진 생각을 가졌고 미움과 의심에 잘 빠졌다. 친구들의 말과 행동을 오해하는 재주가 있었다. 전 생애를 통해서, 그를 잘못 대접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앙갚음하는 버릇을 길렀다. 가치와 충성의 감각에 결함이 있었다.

139:12.7 (1566.6) 예수에게, 유다는 믿음의 모험이었다. 처음부터 주는 이 사도의 약점을 충분히 이해했고 그를 사도 모임에 들어오게 하는 위험을 잘 알았다. 그러나 모든 지음받은 존재에게 구원받고 살아남도록 충분하고 똑같은 기회를 주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성품이다. 예수는 한 사람이 하늘나라에 성실하고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가 의심이 들 때, 사람의 재판관들이 의심스러운 후보자를 온전한 자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변치 않는 관습이라는 것을, 이 세상의 필사자 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다른 세계에서 구경하는 자들도 알기를 바랐다. 영생의 문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다; “오고 싶은 자는 누구나 와도 좋다.” 오는 사람의 믿음 외에 아무런 제한이나 자격 조건이 없다.

139:12.8 (1567.1) 이것이 어째서 예수가 유다로 하여금 맨 끝까지 계속하도록 버려두고, 약하고 혼란에 빠진 이 사도를 변화시키고 구원하려고 항상 가능한 모든 일을 했는가 하는 바로 그 이유이다. 그러나 빛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충실하게 살지 않을 때 빛은 그 혼 안에서 어두움이 되는 경향이 있다. 예수의 하늘나라 가르침에 대하여 유다는 지적으로 자랐지만, 다른 사도들처럼 영적 인격을 얻는 데 진전이 없었다. 그의 개인적 영적 체험은 만족스럽게 진보하지 못했다.

139:12.9 (1567.2) 유다는 개인적으로 겪은 실망에 갈수록 더 속을 끓이는 사람이 되었고, 드디어 그는 분개심에 희생이 되었다. 기분을 여러 번 상했고, 가장 좋은 친구들, 아니 주까지도 비정상으로 의심하게 되었다. 얼마 안 되어, 복수하려고 무엇이든지, 그렇다, 동료들과 주를 저버리기까지, 앙갚음하려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139:12.10 (1567.3) 그러나 사악하고 위험한 이러한 생각은 고마워하는 어떤 여인이 비싼 향(香)이 든 상자를 예수의 발 앞에 깨뜨린 그날까지 분명한 모습을 갖추지 않았다. 유다에게 이것은 낭비인 듯하였다. 그의 공개적 항의가 모든 사람이 듣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에게 싹 묵살되었을 때 그것은 너무했다. 그 사건은 쌓이고 쌓였던 모든 미움ㆍ상처ㆍ악의ㆍ편견ㆍ질투, 그리고 일생 최대의 원한을 가지도록 결정하였고, 그는 누구에게 할까 몰랐던 앙갚음을 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그 사건에서 어쩌다 예수가 주요한 인물이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의 불행한 생애의 모든 더러운 연극에서 죄 없는 한 사람에게 자기 성품에 담긴 모든 악을 뚜렷하게 쏟아 부었고, 그 사건은 진보하는 빛의 나라로부터 그가 스스로 택한 어두움의 땅으로 건너간 것을 표시하였다.

139:12.11 (1567.4) 주는 여러 번 개인적으로, 그리고 대중 앞에서 그가 그르치고 있다고 유다에게 경고했지만, 신의 경고는 마음이 상한 인간의 성품을 다루는 데 보통 쓸모가 없다. 예수는 사람의 도덕적 자유를 다치지 않으면서 유다가 나쁜 길로 가려 하는 것을 막으려고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 원한이 쌓인 아들은 실패했고, 지나치게 자기를 중요시하는 정신, 거만하고 앙갚음하는 정신에 빠져 졸렬하고 더러운 명령에 굴복했으며 혼란과 절망과 타락으로 재빨리 굴러 떨어졌다.

139:12.12 (1567.5) 그리고 나서 유다는 그의 주, 선생을 배반하는 천하고 치욕스러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고 극악한 계획을 재빨리 행동으로 옮겼다. 분노로 싹이 튼 배반 계획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뉘우침과 부끄러움을 몇 순간 겪었다. 정신이 맑은 이 기간에 마음이 약해져서, 자신의 머리 속에 하나의 변명으로서 예수가 아마도 권능을 행사하여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구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품었다.

139:12.13 (1567.6) 더럽고 죄 많은 일이 모두 끝났을 때, 오랫동안 품었던 복수 욕구를 채우려고 은화 서른 잎에 친구 팔기를 가벼이 여긴 이 변절한 필사자는, 달려나가서 필사 존재의 현실을 도피하는 연극에서 마지막 행위를 저질렀다―목숨을 끊었다.

139:12.14 (1567.7) 열한 사도는 소름이 끼쳤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예수는 배반자를 불쌍히 여길 뿐이었다. 세계들은 유다를 용서하기 어려움을 깨달았고 방대한 우주에서 두루 그의 이름을 피하게 되었다.

제 140 편 열두 사도를 세우다

유란시아서

제 140 편

열두 사도를 세우다

140:0.1 (1568.1) 서기 27년 1월 12일 일요일 정오 바로 전에, 예수는 하늘나라 복음을 대중에게 전하는 자로 세우려고 사도들을 불러 모았다. 열두 사도는 이제나저제나 하고 부름받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날 아침에 고기를 잡으러 물가에서 그리 멀리 나가지 않았다. 몇몇은 그물을 고치고 고기잡이 도구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물가 가까이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140:0.2 (1568.2) 사도들을 부르려고 바닷가로 나가면서, 예수는 먼저 안드레와 베드로를 소리쳐 불렀는데, 이들은 물가 가까이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다. 다음에 야고보와 요한에게 손짓했다. 이들은 가까이 배 안에 있었고 아버지 세베대와 이야기하며 그물을 고치고 있었다. 예수는 둘씩 다른 사도들을 모았다. 모두 열두 사도를 모으고 나서 함께 가버나움 북쪽의 고지로 여행했다. 거기서 정식 임명을 준비하려고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40:0.3 (1568.3) 한 번, 모두 열두 사도가 조용했다. 베드로조차도 회상하는 기분에 젖어 있었다. 마침내 오랫동안 기다리던 때가 다가왔다! 아버지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는 주를 대표하는 신성한 일에 몸소 일생을 바치고 집단으로 헌신하는, 일종의 엄숙한 예식에 참여하려고 주와 따로 가는 것이다.

1. 예비 교육

140:1.1 (1568.4) 정식 임명 예배가 있기 전에, 열두 사람이 주위에 자리에 앉는 동안 예수는 말했다. “형제들아, 이 하늘나라의 때가 왔느니라. 하늘나라의 대사(大使)로서 아버지께 너희를 내보이려고 따로 여기에 데리고 왔노라. 너희 가운데 더러는 처음에 부름받았을 때, 내가 회당에서 이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느니라. 갈릴리 바다 근처의 여러 도시에서 나와 함께 일하였은즉, 너희 각자가 아버지의 나라에 대하여 더 배웠도다. 그러나 바로 이제 이 하늘나라에 관하여 너희에게 무언가 더 가르치고자 하노라.

140:1.2 (1568.5) “내 아버지가 땅에서 사는 자녀들의 마음 속에 세우고자 하는 새 나라는 영구한 나라이라. 그의 신성한 뜻을 행하기를 바라는 자의 마음 속에서 내 아버지는 이렇게 끝없이 다스릴 것이라.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내 아버지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하나님이 아니라. 허다한 사람이 동에서 오고 서(西)에서 와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우리와 함께 자리에 앉겠고, 아브라함 자손 중에 많은 사람이 인간 자녀의 마음 속에서 아버지 영(靈)이 다스리는, 이 새 형제 단체에 들어가고자 하지 않으리라.

140:1.3 (1568.6) “이 나라의 권력은 군대의 세력이나 재산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다운 영의 영광에 있으리니, 그 영이 이 하늘나라의 다시 태어난 시민, 하나님 아들들의 정신을 가르치고 마음을 다스리러 올지니라. 이것은 사랑의 단체요 그 안에는 정의가 다스리며, 부르짖는 표어는, 땅에서 평화요 모든 사람에게 선의(善意)가 될지니라. 너희가 이 나라를 선포하러 곧 떠나가리니, 이 나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선한 사람들이 바라던 것이요, 온 땅의 희망, 모든 선지자가 받은 지혜로운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라.

140:1.4 (1569.1) “그러나 아이들아, 너희에게, 그리고 너희를 따라 이 나라로 들어오고자 하는 모든 다른 사람에게 어려운 시험이 기다리고 있느니라. 오직 믿음이 너희를 이 문으로 들어가게 하겠으나, 신과 친교하는 진취적 일생을 살면서 계속 올라가고자 하면 내 아버지 영(靈)의 열매를 맺어야 하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나라로 들어가지는 못하려니와 오히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들어갈지니라.

140:1.5 (1569.2) “너희는 이 소식을 세상에 전하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올바름을 얻고자 애쓰라. 이를 얻으면 영원히 살아남는 데 필수인 모든 다른 것이 함께 보장되리라. 내 아버지의 나라는 권력을 겉으로 나타내거나 보기 싫게 전시(展示)함으로 오지 않을 것을 이제 분명히 이르고자 하노라.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면서 하늘나라를 선포하며 떠나가지 말지니 너희가 전파하는 이 나라가 너희 안에 계신 하나님인 까닭이라.

140:1.6 (1569.3)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모두를 섬기는 자가 될지니라. 너희 사이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형제에게 시중드는 자가 될지어다. 그러나 일단 하늘나라에서 시민으로 받아들이면, 너희는 이제 더 종이 아니라, 아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래서 이 나라가 모든 장벽을 허물고 모든 사람에게 내 아버지를 알게 하고 구제하는 진리를 믿게 할 때까지 그 나라는 세상에서 진보하리라. 나는 그러한 진리를 선포하고자 왔노라. 지금도 하늘나라가 가까웠고, 너희 중에 더러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큰 권능으로 오는 것을 보기까지 죽지 아니하리라.

140:1.7 (1569.4) “너희 눈이 지금 보는 이것, 평범한 열두 사람이 작게 시작한 것이, 궁극에 온 땅이 내 아버지를 찬미하는 노래로 가득하기까지 커지고 성장하리라. 너희의 말이 아니라 오히려 인생을 보고서, 너희가 나와 함께 있었고 하늘나라의 현실을 배웠음을 사람들이 알리라. 너희 정신에 아무런 무거운 짐을 얹지는 않겠으나 육체를 입고 사는 이 생명으로 내가 지금 아버지를 대표하는 것 같이, 곧 너희를 떠날 때 세상에서 나를 대표하는 엄숙한 책임을 너희 혼에게 지우고자 하노라.” 이렇게 말씀을 마치고 나서 그는 일어섰다.

2. 임명식

140:2.1 (1569.5) 예수는 하늘나라에 관하여 선포하는 말씀을 막 들은 열두 사람에게, 이제 그의 둘레에 동그라미를 지어 무릎을 꿇으라고 지시했다. 다음에 주는 가룟 유다로부터 시작하여 안드레에게 이르기까지, 각 사도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었다.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그는 두 손을 뻗어 기도했다:

140:2.2 (1569.6) “아버지여, 이제 나는 이 사람들, 내 사자들을 아버지께 데려오나이다. 아버지를 대표하려고 내가 온 것 같이, 땅에서 사는 자녀들 가운데서 나를 대표하려고 떠나갈 이 열두 사람을 선택하였나이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고 함께 계신 것 같이 저희를 사랑하고 함께 하소서. 이제, 내 아버지여, 다가오는 하늘나라의 모든 일을 이 사람들 손에 맡기오니 저희에게 지혜를 주소서. 아버지의 뜻이라면, 저희가 하늘나라를 위하여 수고할 때 나는 저희를 도우려고 땅에서 한동안 머무르고자 하나이다. 다시, 내 아버지여, 이 사람들로 인하여 감사하나이다. 아버지가 내게 주신 일을 마치려고 계속하는 동안, 저희를 아버지의 보호에 맡기나이다.”

140:2.3 (1570.1) 예수가 기도를 마쳤을 때, 사도들은 저마다 자리에서 고개를 숙인 채로 남아 있었다. 베드로조차 감히 눈을 들어 주를 바라보기까지 몇 분이 흘렀다.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를 끌어안았지만 아무도 말이 없었다. 한 무리의 하늘 존재들이 엄숙하고 거룩한 이 장면―우주의 창조자가 사람의 신성한 단체의 일을 인간 지성이 지휘하도록 맡기는 것―을 내려다보는 동안, 큰 고요함이 그 장소를 덮었다.

3. 임명 설교

140:3.1 (1570.2) 다음에 예수는 말씀했다: “너희는 내 아버지 나라의 대사(大使)이니 이로써 땅에 있는 모든 다른 사람과 따로, 다른 계급의 사람이 되었느니라. 너희는 이제 사람들 사이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 어두운 세계의 무지한 사람들 가운데서 또 다른 나라, 하늘나라의 깨우친 시민으로서 있느니라. 이 시간 이전에 하던 대로 사는 것은 충분하지 않으니라. 그러나 너희는 더 좋은 생활의 영화로움을 맛보고, 새롭고 더 좋은 그 세상을 다스리는 군주의 대사로 땅에 파송된 자로서 이제부터 살아야 하느니라. 생도(生徒)보다 선생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기대하느니라. 종보다 주인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내느니라. 땅의 통치를 받는 시민보다 하늘나라의 시민한테서 더 많이 요구하느니라. 너희에게 이르고자 하는 것 가운데 더러는 어렵게 보일지 모르나, 내가 이제 아버지를 대표하는 것 같이 너희는 세상에서 나를 대표하기를 택하였도다. 땅에서 나의 대리자로서, 너희는 공간의 세계들에서 필사자 생활에 대한 나의 이상(理想)을 반영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드러내느라고 땅에서 사는 동안 내가 본보기로 보이는 가르침과 관습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으리라.

140:3.2 (1570.3) “영적으로 포로 된 자에게 해방을, 두려움에 빠져 있는 자에게 기쁨을 선포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좇아서 병든 자를 고치라고 너희를 보내노라. 슬픔에 잠긴 내 아이들을 발견할 때 이렇게 말하여 저희를 북돋우라:

140:3.3 (1570.4) “마음이 낮아져 있는 자, 겸손한 자는 행복하나니 하늘나라의 보물이 저희의 것임이라.

140:3.4 (1570.5) “올바름을 간절히 바라고 목마르게 찾는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채워질 것임이라.

140:3.5 (1570.6) “온유한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땅을 물려받을 것임이라.

140:3.6 (1570.7) “마음이 깨끗한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

140:3.7 (1570.8) “그렇다 해도 영적으로 위로하고 약속하는 이 말씀을 내 아이들에게 더 일러주어라:

140:3.8 (1570.9) “슬퍼하는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위로받을 것임이라. 눈물을 흘리는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기뻐하는 영(靈)을 받을 것임이라.

140:3.9 (1570.10) “자비를 베푸는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자비를 얻을 것임이라.

140:3.10 (1570.11) “화해시키는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

140:3.11 (1570.12) “올바른 일을 위하여 박해받는 자는 행복하나니, 하늘나라가 저희 것임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대적하여 온갖 모습의 악한 것을 거짓되게 말할 때, 너희는 행복하니라.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할지니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140:3.12 (1570.13) “형제들이여, 내가 너희를 보내기는 하여도, 너희는 세상의 소금, 맛을 내는 소금이라. 그러나 이 소금이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소금을 짜게 하리요? 이제부터 버려지고 사람들의 발에 짓밟힐 뿐, 아무 쓸모가 없느니라.

140:3.13 (1570.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세워진 도시는 감출 수 없느니라. 촛불도 사람들이 켜서 됫박 밑에 두지 않고 촛대 위에 두느니라. 촛불이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느니라.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에 아주 빛나서, 너희의 착한 일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이끌라.

140:3.14 (1571.1) “나를 대표하고 내 아버지 나라의 대사로서 행하라고 너희를 세상으로 보내노라. 기쁜 소식을 선포하러 떠날 때 아버지를 신뢰하라, 너희는 그의 사자이라. 부당한 처사에 힘으로 저항하지 말라. 육체의 힘을 신뢰하지 말라. 이웃이 오른 뺨을 치면, 왼 편도 내밀라. 너희 가운데서 법대로 처리하기보다 공평치 않은 처사를 기꺼이 견디라. 슬퍼하고 곤궁에 처한 자는 누구에게나 친절과 자비로 베풀라.

140:3.15 (1571.2) “너희에게 이르노니,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며,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심술궂게 이용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내가 사람들에게 해주리라 믿는 것은 무엇이나 또한 저희에게 행하라.

140:3.16 (1571.3)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는 착한 자 뿐 아니라 악한 자에게도 햇빛이 비치게 하시며, 마찬가지로 옳은 자와 그른 자에게 비를 내리시느니라.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한층 더하여 이제 아버지 나라의 대사이라. 하나님이 자비로운 것 같이 너희는 자비로우라. 너희의 하늘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하늘 나라의 영원한 앞날에 너희가 완전할지니라.

140:3.17 (1571.4) “너희는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구하라고 임명받느니라. 땅에서 일생이 끝나면 너희는 모두 자비를 기대하리라. 그러므로 필사 생애에 육체를 입은 모든 형제에게 자비를 보이라고 너희에게 요구하노라. 너희 눈에 대들보가 있으면서 형제의 눈에서 티를 뽑아내려 애쓰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너희 눈에서 먼저 대들보를 뽑고 나서, 눈이 더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뽑아버릴 수 있으리라.

140:3.18 (1571.5) “진리를 맑게 헤아리라. 두려움 없이 올바르게 살라. 그렇게 너희는 내 사도, 내 아버지의 대사가 될지니라. ‘소경이 소경을 이끌면 모두가 구렁에 빠지리라’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느니라. 다른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인도하고자 하면, 너희 스스로 살아 있는 진리의 맑은 빛 가운데서 걸어야 하느니라. 어떤 하늘나라 일을 하더라도 너희가 올바른 판단과 날카로운 지혜를 보이라고 훈계하노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내밀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지니, 저희가 보물을 발로 짓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을까 두려우니라.

140:3.19 (1571.6) “속으로는 굶주린 늑대 같으면서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올 거짓 선지자들에 대하여 내가 경고하노라.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저희를 알지니라.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거두거나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더냐? 그렇다 하더라도,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으나 썩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느니라.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썩은 나무도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없느니라. 좋은 열매를 얻지 않는 나무마다 얼마 안 있어 찍혀 불 속에 던져지리라.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데 중요한 것은 동기이라. 내 아버지는 사람들의 마음 속을 꿰뚫어보시며 저희 마음 속의 소망과 진지한 의도로 판단하시니라.

140:3.20 (1571.7) “하늘나라 심판이 있는 큰 날에 많은 사람이 내게 말하리라,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당신의 이름을 힘입어 놀라운 일을 많이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나는 너희를 안 적이 없었노라. 거짓 선생인 너희는 나를 떠나라’ 내가 이렇게 이를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아버지를 대표한 것 같이 이 부탁을 듣고 사람들 앞에서 나를 대표하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자마다 나의 봉사하는 길로, 하늘 아버지의 나라로 넘치게 들어가리라.”

140:3.21 (1571.8) 사도들은 한 번도 이전에 예수가 이처럼 말씀하심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그가 최고의 권한을 가진 자로서 그들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해질 무렵에 산에서 내려왔으나 아무도 예수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4.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140:4.1 (1572.1) 이른바 “산상(山上) 설교”는 예수의 복음이 아니다. 유익한 가르침을 많이 담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열두 사도를 임명하는 훈시였다. 예수가 그렇게 힘찬 소리로 완전하게 아버지를 대표한 것 같이, 사람들의 세계에서 계속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그를 대표할 뜻을 품을 사람들에게 주가 친히 임무를 지우는 것이었다.

140:4.2 (1572.2) “너희는 세상의 소금, 맛을 내는 소금이라. 그러나 이 소금이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소금을 짜게 하리요? 이제부터 버려지고 사람들의 발에 짓밟힐 뿐, 아무 쓸모 없느니라.”

140:4.3 (1572.3) 예수의 시절에 소금은 값진 것이었다. 돈으로도 쓰였다. 현대의 말 “샐러리”는 소금으로부터 유래한다. 소금은 먹을 것을 맛있게 만들 뿐 아니라 또한 보존제이다. 소금은 다른 것들을 더욱 맛있게 만들며 이처럼 소모됨으로 일한다.

140:4.4 (1572.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세워진 도시(都市)는 감출 수 없느니라. 촛불도 사람들이 켜서 됫박 밑에 두지 않고 촛대 위에 두느니라. 촛불이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느니라.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에 아주 빛나서, 너희의 착한 일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이끌라.

140:4.5 (1572.5) 빛은 어두움을 떨쳐 버리지만, “눈을 멀게 할 만큼 밝아서”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고 좌절시킬 수도 있다. 동료들을 더 낫게 사는 새롭고 거룩한 길로 안내하도록 우리의 빛을 밝게 하라고 훈계를 받는다. 우리의 빛은 자신에게 눈을 끌지 않도록 밝아야 한다. 사람의 직업조차 이 생명의 빛을 퍼뜨리기 위하여 효과적인 “반사경”으로서 이용될 수 있다.

140:4.6 (1572.6) 강건한 인격은 나쁜 일을 하지 않음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제로 옳은 일을 함으로부터 얻는다. 이기심이 없음은 사람의 위대함을 가리키는 표시이다. 신을 예배하고 봉사함으로 가장 높은 수준의 자아 실현이 이루어진다. 행복하고 유능한 사람은 악한 짓이 두려워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옳은 일 하기가 좋아서 마음이 움직인다.

140:4.7 (1572.7) “너희는 열매를 보고 사람을 알지니라.” 인격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자라는―것은 도덕적 인품이다. 현대 종교의 큰 잘못은 부정적 사고이다. 아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히고 불 속에 던져지리라.” 도덕적 가치는 단순한 억압으로―”하지 말라”는 금지령에 복종한다고―얻을 수 없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은 종교 생활을 하는 동기로서 가치가 없다. 오직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드러내고 사람이 형제인 것을 존중할 때에야 종교가 타당하다.

140:4.8 (1572.8) 효과적인 생활 철학은 우주를 보는 통찰력, 그리고 사회 및 경제 환경에 대한 사람의 감정적 반응의 총합, 이 두 가지를 합침으로 형성된다. 기억하라: 타고난 욕구는 근본적으로 수정될 수 없지만, 그러한 욕구에 대한 감정의 반응은 바뀔 수 있다. 따라서 도덕적 성품은 수정될 수 있고, 인품은 개선될 수 있다. 튼튼한 인품 안에서는 여러 가지 감정의 반응이 통합되고 조정되며 이처럼 통일된 인격이 만들어진다. 통일성의 부족은 도덕적 성품을 약화시키고 불행을 일으킨다.

140:4.9 (1572.9) 가치 있는 목표가 없으면 인생은 목적이 없고 무익하며 많은 불행이 일어난다. 열두 사도를 세울 때 예수가 하신 말씀은 뛰어난 생활 철학이다.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체험으로 믿음을 연습하라고 훈계하였다. 그는 단순히 머리로 찬성하는 태도, 쉽사리 믿는 성향, 확립된 권한에 의존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140:4.10 (1573.1) 교육은 자연스럽고 물려받은 욕구를 채우는 좋은 방법을 배우는 (발견하는) 기술이 되어야 한다. 행복은 감정을 만족시키는 이 개선된 기법으로 얻는 결과의 총합이다. 행복은 환경과 거의 상관이 없다. 하지만 쾌적한 환경은 행복에 크게 이바지할 수도 있다.

140:4.11 (1573.2) 필사자는 누구나 완성된 인간이 되기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완전하기를 정말로 갈망한다. 결국 “우주는 참으로 아버지 같기” 때문에 그러한 달성이 가능하다.

5. 아버지 사랑과 형제 사랑

140:5.1 (1573.3) 산상(山上) 설교로부터 마지막 만찬에서 하신 강론에 이르기까지,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형제 사랑보다 아버지 사랑을 나타내라고 가르쳤다. 형제 사랑이라면 네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할 것이요, 이것은 “황금률”을 충분히 지키는 것이리라.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은 예수가 너를 사랑하는 것 같이 동료 필사자를 사랑해야 한다고 요구할 것이다.

140:5.2 (1573.4) 예수는 인류를 두 가지 애정으로 사랑한다. 그는 땅에서 두 가지 성격으로―인간과 신으로서―살았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한다―그는 사람의 창조자요, 우주에서 사람의 아버지이다. 사람의 아들로서 예수는 형제로서 필사자들을 사랑한다―참으로 사람들 사이에 있던 사람이었다.

140:5.3 (1573.5)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불가능할 정도로 형제 사랑을 나타내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바라보는 것처럼 사람을 바라보고,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 같이 비로소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아버지 사랑의 첫걸음을 보여주도록―예수는 추종자들이 하나님을 닮으려고―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완전하려고―애쓰기를 기대하였다. 열두 사도에게 이렇게 훈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이 아버지 사랑 개념을 드러내려고 애썼고, 아버지 사랑은 수많은 사회적 환경에 적응하는 데 관한 어떤 감정적 태도에 관계된다.

140:5.4 (1573.6) 단순한 형제 사랑의 한계와 비교해서, 후일에 초월적인 아버지 사랑의 네 가지 최고의 반응을 묘사하는 준비로서 네 가지 신앙 태도에 주의를 불러일으키면서 주는 이 중대한 강론을 소개하였다.

140:5.5 (1573.7) 그는 먼저, 마음이 낮아져 있는 사람, 올바름을 갈급히 찾고, 온유함으로 견디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하였다. 영을 헤아리는 그러한 필사자는 아버지 사랑을 놀랍게 연습해 보려고 애쓸 수 있는, 신성한 비이기적 수준에 도달하기를 기대할 수 있다. 그래서 통곡을 하면서도 그들은 자비를 보이고 평화를 촉진하며, 박해를 견디고, 이 모든 쓰라린 상황을 거치면서 내내, 사랑스럽지 못한 인류조차도 아버지 사랑으로 사랑할 힘을 얻을 것이다. 아버지 사랑은 형제 사랑을 측량할 수 없이 한참 뛰어넘도록 헌신하는 수준에 이를 수 있다.

140:5.6 (1573.8) 이 지극한 축복에 나타난 믿음과 사랑은 도덕적 인품을 강화하고 기쁨을 창조한다. 두려움과 노여움은 인품을 약화시키고 행복을 파괴한다. 이 중대한 설교는 행복의 음정으로 시작되었다.

140:5.7 (1573.9) 1. “마음이 낮아져 있는 자―겸손한 자―는 행복하나니.” 어린아이에게 기쁨은 당장에 즐거움을 찾는 욕구를 채우는 것이다. 어른은 나중에 큰 행복을 거두기 위하여 자제의 씨를 기꺼이 뿌린다. 예수의 시절과 그 이후로, 행복은 재산의 소유에 있다는 관념과 너무 흔히 연결되어 왔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에 한 사람은 마음이 높아져 있었고―자기 중심이었고―다른 사람은 “마음이 낮아져 있었다”―겸손했다. 한 사람은 부족함이 없었고 다른 한 사람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고 진리를 찾았다. 마음이 낮아져 있는 사람은 영적 재산을 얻는 목표―하나님―을 찾는다. 진리를 찾는 그런 사람은 먼 앞날에 받을 보상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지금 보상을 받는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 하늘나라를 발견하며 그런 행복을 지금 체험한다.

140:5.8 (1574.1) 2. “올바름을 간절히 바라고 목마르게 찾는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채워질 것임이라.” 자신이 보잘것없다고 느끼는 사람이라야 언제라도 올바름을 간절히 찾을 것이다. 오직 겸손한 자가 신의 힘을 찾고 영적 권능을 갈망한다. 그러나 영적 자질을 얻고 싶은 욕구를 강화하려고, 영적으로 일부러 금식에 들어가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육체의 금식은 나흘이나 닷새 뒤에 위험해진다. 모든 식욕을 잃어버리기 쉽다. 지속된 금식은 육체의 배고픔이나 영적 갈망을 없애는 경향이 있다.

140:5.9 (1574.2) 체험으로 얻는 올바름은 기쁨이요 의무가 아니다. 예수의 올바름은 힘찬 사랑이다―아버지와 형제의 사랑이다. 부정적이거나 무엇을 하지 말라 하는 종류의 올바름이 아니다. 어떻게 사람이 언제라도 부정적인 것―무엇을 “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수 있는가?

140:5.10 (1574.3) 어린아이의 머리에 이 지극한 축복(祝福)의 처음 두 가지를 가르치기는 그리 쉽지 않지만, 성숙한 지성은 그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140:5.11 (1574.4) 3. “온유한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땅을 물려받을 것임이라.” 진정한 온유함은 두려움과 아무 관계가 없다.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의 태도이다―“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온유함은 참을성과 인내심을 담으며, 질서 있고 친절한 우주를 믿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 자극을 받는다. 온유함은 신의 이끄심에 반항하려는 모든 유혹을 이긴다. 예수는 유란시아에서 이상적인 온유한 사람이었고 방대한 우주를 물려받았다.

140:5.12 (1574.5) 4. “마음이 깨끗한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 영적 순수성은 의심과 복수심이 없는 것을 제외하고 부정적 성질이 아니다. 순수성을 논할 때, 예수는 순전히 인간의 성생활 태도만 다룰 의도는 없었다. 그보다 사람이 동료 인간에 대하여 가져야 할 믿음, 부모가 어린아이를 믿는 것, 아버지가 사랑하는 것 같이 동료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믿음을 언급하였다. 아버지의 사랑은 응석을 받아줄 필요가 없고 악을 묵인하지 않지만, 언제라도 비웃는 일이 없다. 아버지의 사랑은 한 가지 목적을 가졌고, 반드시 사람 안에서 최선을 찾는다. 그것이 참 부모의 태도이다.

140:5.13 (1574.6) 하나님을―믿음으로―보는 것은 참된 영적 통찰력을 얻음을 의미한다. 영적 통찰력은 조절자가 잘 인도할 수 있게 하며 결국에는 하나님 의식을 키워준다. 너희가 아버지를 알 때, 너희가 신의 아들이라는 보장이 확인되며, 육체를 입은 형제들을 하나하나, 형제로서―형제 사랑으로―사랑할 뿐 아니라 또한 아버지로서―아버지 사랑으로―더욱 사랑할 수 있다.

140:5.14 (1574.7) 이 훈계를 어린아이에게도 가르치기 쉽다. 어린아이들은 자연히 사람을 쉽게 믿으며, 부모는 아이들이 이 단순한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을 다룰 때, 어떤 속임수도 피하고 의심을 넌지시 비추기를 삼가라. 자기가 우러러보는 사람을 선택하고 자기 일생에 할 일을 고르도록 지혜롭게 도와주라.

140:5.15 (1574.8) 다음에 예수는 더 나아가서, 인간의 모든 투쟁의 주요한 목적―완전―의 실현을, 아니 신성에 이르는 것까지도, 추종자들에게 가르쳤다. 언제나 예수는 타일렀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열두 사도에게 훈계하지 않았다. 그것은 쓸모 있는 성취였을 터이고 형제 사랑의 실천을 가리켰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그들을 사랑한 것 같이 사도들에게 사람들을 사랑하라고―형제의 애정 뿐 아니라 아버지의 애정으로―사랑하라고 타일렀다. 그는 아버지 사랑의 네 가지 최고의 반응을 지적함으로 이를 보여주었다:

140:5.16 (1575.1) 1. “슬퍼하는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위로받을 것임이라.” 이른바 상식이나 최선의 논리로 따져도 슬퍼함으로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겉으로 또는 꾸며서 슬퍼함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부드러운 마음으로 감동하는 태도를 가리켰다. 부드러움을 보이거나 아니면 감정이나 육체가 고통받는 증거를 보이는 것이 남자답지 않다고 소년과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동정심은 여자 뿐 아니라 남자에게도 귀중한 속성이다. 남자답기 위하여 냉담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용감한 사람을 만드는 잘못된 방법이다.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들은 슬퍼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세는 슬퍼하는 사람이요 삼손이나 골리앗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었다. 모세는 훌륭한 지도자였으나 또한 온유한 사람이었다. 인간의 필요를 헤아리고 그에 민감한 것은 진정하고 오래 가는 행복을 창조하며, 한편 그런 친절한 태도는 노여움ㆍ미움ㆍ의심의 파괴적 영향으로부터 혼을 보호한다.

140:5.17 (1575.2) 2. “자비를 베푸는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자비를 얻을 것임이라.” 여기서 자비는 절정에 이르고 가장 깊고 넓은, 정말로 참된 우정―자애로움―을 가리킨다. 자비는 때때로 수동적일지 모르지만 여기서 자비는 능동적이고 힘차다―지극히 아버지답다. 사랑이 있는 부모는 아이를 용서하는 것을 여러 번이라도, 조금도 어렵게 느끼지 않는다. 버릇이 나쁘지 않은 아이의 경우에 고통을 벗어나려는 욕구는 자연스럽다. 실제 형편을 이해할 만큼 나이가 들 때, 아이들은 보통 친절하고 동정심이 있다.

140:5.18 (1575.3) 3. “화해시키는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 예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화해시키는 자를 바란 것이 아니라 군사적 구원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평화는 유순하고 소극적 종류가 아니다. 시련과 박해와 마주쳐 그는 말했다. “나의 평화를 너희에게 두고 가노라.” “너희는 마음에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것은 파괴하는 투쟁을 방지하는 평화이다. 개인의 평화는 인격을 통합한다. 사회의 평화는 두려움ㆍ욕심ㆍ분노를 막는다. 정치적 평화는 종족 사이의 적대 감정, 국가적 의심, 전쟁을 방지한다. 화해하는 것은 불신과 의심을 고치는 약이다.

140:5.19 (1575.4) 화해시키는 자로 활동하라고 아이들을 가르치기는 쉽다. 이들은 집단 활동을 즐기고 함께 놀기를 좋아한다. 또 다른 때에 주는 말했다: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자마다 목숨을 잃겠으나 자기 목숨을 버리고자 하는 자마다 목숨을 찾으리라.”

140:5.20 (1575.5) 4. “올바른 일을 위하여 박해받는 자는 행복하나니, 하늘나라가 저희 것임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대적하여 온갖 모습의 악한 것을 거짓되게 말할 때, 너희는 행복하니라.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할지니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140:5.21 (1575.6) 평화가 있은 후에 흔히 박해가 따른다. 그러나 젊은이와 용감한 어른들은 결코 어려움이나 위험을 피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아버지의 사랑은 이 모두를―형제 사랑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것을―아낌없이 할 수 있다. 진보는 언제나 박해로부터 마지막에 얻은 수확이었다.

140:5.22 (1575.7) 아이들은 용기를 보일 기회가 올 때 반드시 반응한다. 젊은이는 언제라도 기꺼이 “용감하게 도전한다.” 아이들은 모두 일찍부터 희생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140:5.23 (1575.8) 그래서 산상 설교의 지극한 축복은 믿음과 사랑에 기초를 두었고 율법에―윤리와 의무에―두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140:5.24 (1575.9) 아버지의 사랑은 악을 선으로―불의를 선행으로―갚기를 기뻐한다.

6. 임명식이 있던 날 저녁

140:6.1 (1576.1) 일요일 저녁에, 가버나움의 북쪽 산지를 떠나서 세베대의 집에 도착하고 나서, 예수와 열두 사도는 조촐한 저녁을 들었다. 그 뒤에 예수가 물가를 따라 걸으려고 나간 동안, 열두 사도는 자기들끼리 이야기했다. 짧은 회의가 있은 뒤에, 쌍둥이가 불을 쪼이고 빛을 더 밝히려고 모닥불을 지피는 동안, 안드레는 예수를 찾으러 나갔고, 따라잡았을 때 말했다: “주여, 내 형제들은 하늘나라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나이다. 우리에게 더 가르쳐 주시기까지, 우리는 이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이다. 뜰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신 말씀의 뜻을 저희가 이해하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하러 왔나이다.” 예수는 사도들을 만나려고 안드레와 함께 갔다.

140:6.2 (1576.2) 뜰로 들어갔을 때 예수는 사도들을 둘레에 모으고 이렇게 말하며 더 가르쳤다: “너희는 옛 가르침 바로 위에 새 가르침을 세우려 하는 까닭에, 내가 하는 말을 깨닫기가 어려움을 발견하지만, 내가 선언하노니 너희는 다시 태어나야 하느니라. 어린아이처럼 새로 시작하고 기꺼이 내 가르침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어야 하느니라. 하늘나라의 새 복음을 예부터 내려온 것에 끼워 맞출 수 없느니라. 너희는 사람의 아들과 땅에서 그가 이룰 사명에 관하여 그릇된 생각을 가졌느니라. 그러나 내가 율법과 선지자들을 제쳐놓으려고 왔다고 잘못 생각하지 말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이루고 개선하고 밝게 비추려고 내가 왔노라. 율법을 어기려는 것이 아니라, 이 새 계명을 너희 마음 속 서판에 새겨주려고 내가 왔노라.

140:6.3 (1576.3) “자선하고 기도하고 금식함으로 아버지의 은혜를 얻고자 하는 자를 뛰어 넘을 그러한 올바름을 너희에게 요구하노라.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거든, 사랑ㆍ자비ㆍ진리로 이루어진 올바름―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진지한 욕구―를 가져야 하느니라.”

140:6.4 (1576.4)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말했다: “주여, 당신이 새로운 계명을 가졌으면, 듣고 싶나이다. 새 길을 우리에게 보이소서.” 예수가 베드로에게 대답하였다. “너희는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이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지니라’함을 들었느니라. 그러나 나는 행위 외에 동기를 밝히려고 보노라.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형제에게 성내는 자마다 죄 있다고 판결받을 위험이 있느니라. 마음 속에 미움을 품고 머리 속에 앙갚음하려고 궁리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을 위험이 있도다. 너희는 행위로 동료들을 판단해야 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의도를 보고 판단하시느니라.

140:6.5 (1576.5) “‘간음하지 말라’ 율법 선생들이 이르는 것을 너희가 들었느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란한 생각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마다 이미, 그 여자와 마음 속에서 간음하였느니라. 너희는 오직 행위로 사람들을 판단할 수 있으나 내 아버지는 자녀들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그 의도(意圖)와 진정한 욕구에 따라서 자비롭게 판단하시니라.

140:6.6 (1576.6) 예수는 다른 계명들에 대하여 계속 논의할 생각이 있었지만 이때 야고보 세베대가 끼어들어 물었다: “주여, 이혼(離婚)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가르쳐야 하리이까? 모세가 지시한 대로 남자가 아내와 이혼하도록 버려두어야 하리이까?” 이 질문을 듣자 예수는 말했다: “나는 율법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깨우치게 하려고 왔노라. 이 세상의 나라들을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하늘나라를 세우려 왔노라. 정부나 무역이나 또는 사회 행동에 관한 규칙을 너희에게 가르칠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 이것들은 오늘날 좋을지 모르나 다른 시대의 사회에 도무지 맞지 아니하리라. 나는 오로지 정신을 위로하고 영을 해방하고 사람의 혼을 구원하려고 이 땅에 왔노라. 그러나 이 이혼 문제에 관하여 내가 이르리니, 모세는 그러한 일을 승인했어도 아담 시절에 동산에서는 그렇지 않았도다.”

140:6.7 (1577.1) 사도들끼리 잠시 동안 이야기한 뒤에, 예수는 말씀을 이었다: “너희는 사람의 모든 행위에 두 가지 관점―인간의 관점과 신의 관점, 육체의 길과 영의 길, 시간적 평가와 영원의 관점―이 있음을 언제나 인식해야 하느니라.” 비록 열두 사도는 그가 가르친 것을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어도 이 가르침은 참으로 도움이 되었다.

140:6.8 (1577.2) 다음에 예수는 말했다: “그러나 너희는 내 교훈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는 버릇이 있는 까닭에 내 가르침에 걸려 넘어지며, 내 가르침의 정신을 깨닫는 데 더디구나. 너희는 내 사자임을 다시 기억해야 하며, 내가 영적으로 내 삶을 살아온 것 같이 너희 생애를 살아야 하느니라. 너희는 나를 개인적으로 대표하지만 모든 사람이 세세히 너희가 하는 대로 살기를 그릇되이 기대하지 말라. 나는 이 무리에 속하지 않는 양들을 가졌고, 내가 저희에게도 필사 성품으로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모범을 마련할 의무가 있음을 너희가 또한 기억해야 하느니라.”

140:6.9 (1577.3) 그러자 나다니엘이 물었다: “주여, 우리는 응보를 인정하지 말아야 하나이까?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 모세의 율법이 이르나이다. 우리는 무어라고 말하리이까?” 예수의 대답은 이러했다: “너희는 악을 선으로 갚을지니라. 내 사자(使者)들은 사람들과 다투지 말고, 누구에게나 관대해야 하느니라. 받은 만큼 그대로 갚는 것을 너희의 규칙으로 만들지 말라. 사람을 다스리는 자는 그러한 율법을 가질지 몰라도 하늘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으니라. 언제나 자비가 너희의 판단을 결정하고 사랑이 행위를 결정할지니라. 이러한 말이 지키기 어려우면, 너희는 이제라도 돌아갈 수 있느니라. 사도직의 요구 조건이 너무 어렵거든, 그보다 힘들지 않은 제자의 길로 돌아가도 좋으니라.”

140:6.10 (1577.4) 깜짝 놀랄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사도들끼리 한동안 물러났지만 곧 돌아왔고, 베드로가 말했다: “주여, 우리는 계속하여 당신과 함께하고자 하나이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사오이다. 덤을 치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고 그 잔을 마시겠나이다. 그저 제자가 아니라 사도가 되고 싶사오이다.”

140:6.11 (1577.5) 이 말을 듣자 예수는 말했다: “그러면 기꺼이 너희의 책임을 지고 나를 따르라. 착한 일을 몰래 하라. 자선금 낼 때 바른 손이 무엇을 하는지 왼 손이 모르게 하라. 기도할 때, 너희끼리 따로 가라, 말을 헛되이 되풀이하고 뜻 없는 구절을 쓰지 말라. 아버지는 구하기도 전에 너희가 무엇이 필요한 줄 아심을 언제나 기억하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슬픈 얼굴로 금식(禁食)에 빠지지 말라. 하늘나라의 봉사를 하려고 이제 따로 구별하여 내가 택한 사도로서, 자신을 위하여 땅에서 보물을 쌓지 말고, 사심 없이 봉사함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을지니, 보물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또한 있음이라.

140:6.12 (1577.6) “육체의 등불은 눈이라. 그런즉 너그럽게 헤아리는 눈이 있으면 온 몸이 빛으로 가득 차리라. 그러나 욕심에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두움에 싸이리라. 네 안에 있는 바로 그 빛이 어두워지면 그 어두움이 오죽하겠느냐!”

140:6.13 (1577.7) 그리고 나서 토마스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계속 가져야” 하는가 물었고, 주의 대답은 이러했다: “옳도다, 형제들아, 내가 바라건대, 이해심 있는 한 가족으로서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하느니라. 너희에게 큰 일이 맡겨졌고, 한눈 팔지 않고 봉사하기를 몹시 바라노라.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좋은 말씀을 너희가 아느니라. 너희는 하나님을 성실하게 예배하고 동시에 진심으로 재물을 섬길 수 없느니라. 이제 하늘나라 일을 하려고 아낌없이 지원하였은즉 너희의 생활을 걱정하지 말라.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너희 몸을 위해서도 무슨 옷을 입을까 더군다나 걱정하지 말라. 기쁘게 일하는 손과 진지한 마음을 가진 자는 배고프게 지내지 않을 것을 너희가 이미 배웠느니라. 이제, 너희가 온 에너지를 하늘나라 일에 바치려고 준비할 때, 아버지가 너희의 필요를 모른 체하지 않으실 것을 확실히 믿으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찾으라. 너희가 거기에 들어가는 문을 찾아냈을 때, 무엇이 필요하든지 너희가 더 받으리라. 그러므로 내일을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라. 하루의 어려움은 그날로 충분하니라.”

140:6.14 (1578.1) 그들이 밤새도록 질문하면서 늦게 있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 예수는 말했다: “형제들아, 너희는 흙으로 만든 그릇이라. 내일 일을 준비하도록 잠자러 가는 것이 최선이라.” 그러나 그들의 눈에서 이미 잠이 달아났다. 베드로는 나서서 주에게 요청했다: “나는 당신과 개인적으로 그저 조금 의논할 것이 있나이다. 형제들과 따로 무슨 비밀을 가지고 싶은 것이 아니라, 마음이 괴롭고, 혹시라도 주로부터 꾸지람을 받아야 한다면, 당신하고만 따로 있으면 더 쉽게 견딜 수 있나이다.” 집안으로 길을 인도하며 예수는 말했다 “베드로야, 따라 오라.” 주가 계신 곳으로부터 베드로가 무척 명랑해지고 크게 격려받고 돌아왔을 때, 야고보는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러 들어가려고 마음먹었다. 이런 식으로 날이 샐 때까지, 다른 사도들은 하나씩 주와 함께 이야기하러 갔다. 잠든 쌍둥이를 제쳐놓고 모두가 예수와 개인적으로 상담을 마쳤을 때, 안드레는 예수가 계신 데로 들어가서 말했다: “주여, 쌍둥이는 뜰에서 불 옆에 잠들었나이다. 당신과 또한 이야기하고 싶은지 저희를 깨워서 물어 보리이까?” 예수는 빙그레 웃으며 안드레에게 말했다. “저희는 잘 하는구나―그냥 두어라.” 이제 밤이 지나갔고, 새 날의 빛이 밝아오고 있었다.

7. 임명식 다음 주

140:7.1 (1578.2) 몇 시간 동안 잠자고 난 뒤에, 열둘이 함께 늦은 아침을 먹으려고 모였을 때, 예수는 말했다: “이제 너희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신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해야 하느니라. 예루살렘으로 갈 준비를 하여라.” 예수가 말한 뒤에, 토마스는 용기를 불러 일으키고 말했다: “주여 그 일을 시작하려고 우리가 준비되어야 함을 아나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직 이 큰 사업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드나이다. 우리가 하늘나라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며칠만 더 이 근처에 우리가 남아 있도록 허락하시겠나이까?” 사도들이 모두 똑같이 이 두려움에 빠져 있음을 보고서 예수는 말했다: “너희가 요청한 대로 되리라. 우리는 안식일 동안 여기에 남아 있으리라.”

140:7.2 (1578.3) 몇 주 동안,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작은 무리의 사람들이 호기심에 이끌린 구경꾼들과 함께 예수를 보려고 벳세다로 오고 있었다. 이미 그에 관한 소식이 시골에 퍼졌다. 티레ㆍ시돈ㆍ다마스커스ㆍ케자리아ㆍ예루살렘과 같이 먼 도시로부터 수소문하는 무리가 왔다. 여태까지 예수는 이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하늘나라에 관하여 가르쳤으나 이제 주는 이 일을 열둘에게 넘겼다. 안드레는 사도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한 집단의 방문자들에게 배치했고 때로는 열둘이 다 그렇게 바빴다.

140:7.3 (1578.4) 낮에는 가르치고 밤이 늦도록 사사로운 모임을 가지면서, 그들은 이틀 동안 일했다. 사흘째에, “고기를 잡으러 가거나, 홀가분하게 변화를 찾거나, 아니면 혹시 너희 가족을 찾아보라”하고 사도들을 보낸 동안, 예수는 세베대와 살로메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흘 동안 더 가르침을 받으려고 그들은 목요일에 돌아왔다.

140:7.4 (1578.5) 연습하는 이 주간에, 예수는 세례받은 뒤에 그가 땅에서 이루어야 할 사명의 두 가지 큰 동기(動機)를 여러 번 사도들에게 되풀이했다:

140:7.5 (1578.6) 1. 아버지를 사람에게 드러내는 것.

140:7.6 (1578.7) 2. 사람들이 아들 의식을 갖도록―최고자의 자녀임을 믿음으로 깨닫도록―이끄는 것.

140:7.7 (1579.1) 한 주 동안 이렇게 다양한 체험을 겪은 것은 열두 사도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다. 더러는 지나치게 자신감이 생기기도 하였다. 마지막 회의에서, 안식일이 끝난 그날 밤에 베드로와 야고보가 예수에게 와서 말했다, “우리는 준비가 되었나이다―이제 하늘나라를 치러 갑시다.” 이에 예수는 대답하였다. “너희가 열심인 만큼 지혜롭고, 너희의 용기가 무지(無知)를 보충하기를―.”

140:7.8 (1579.2) 비록 가르침을 많이 알아듣지 못했어도, 사도들은 예수가 그들과 함께 지낸 기막히게 아름다운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 놓치지 않고 깨달았다.

8. 목요일 오후 호수에서

140:8.1 (1579.3) 예수는 사도들이 그의 가르침을 완전히 새겨듣지 못했음을 잘 알았다.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에게 얼마큼 특별 교육을 주기로 작정하였고, 그들이 동료들에게 그 개념을 뚜렷하게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랐다. 열두 사도가 영적 하늘나라 관념의 어떤 모습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들이 다윗의 왕좌를 회복하고 땅에서 현세의 권력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시 세운다는, 글자 그대로의 나라 개념, 오래 되고 뿌리 깊은 개념 바로 위에, 이 새 영적 가르침을 붙이려고 끈질기게 고집하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목요일 오후에 하늘나라의 일을 의논하려고 예수는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과 함께 배를 타고 물가를 떠나갔다. 이것은 네 시간 동안 가르치는 회의였고 수십 가지 질문과 대답을 포함하였다. 시몬 베드로가 형 안드레에게 다음 날 아침에 준 대로, 이 중대한 오후의 요점을 다시 정리하여 이 기록에 넣는 것이 가장 유익할까 한다:

140:8.2 (1579.4) 1.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 하늘 아버지가 넉넉히 돌보심을 믿으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맹목적ㆍ수동적 운명론이 아니었다. 이날 오후에 어느 옛 히브리 속담이 옳다고 인용했다: “일하려 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지니라.” 그의 체험이 그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충분한 논평이라고 지적하였다. 아버지를 신뢰하라는 교훈을 현대나 어느 다른 시대의 사회 또는 경제 조건에 비추어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의 가르침은 어느 시대나 어느 세계에도, 하나님과 가까이 사는 이상적 원칙을 담고 있다.

140:8.3 (1579.5) 예수는 사도(使徒)와 제자가 되는 요건의 차이를 세 사람에게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나서도 열두 사도에게 신중하게 움직이고 조심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 앞일에 대한 생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근심 걱정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였다.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정신차리고 복종하기를 가르쳤다. 검소와 절약에 관한 많은 질문에 답하여, 다만 목수와 조선공과 어부로서 살았던 그의 생활, 그리고 열두 사도를 신중하게 조직한 것을 주목하라고 했다. 세상을 적(敵)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생활 환경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작용하는 신의 섭리라는 것을 분명히 설명하려고 애썼다.

140:8.4 (1579.6) 몸으로 저항하지 않는 자신의 습관을 이해시키는 데 예수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아예 자신을 방어하려 하지 않았다. 사도들의 눈에는 그들이 똑같은 원칙을 따른다면 주가 기뻐할 듯이 보였다. 악에 대항하지 말라고, 부당한 처사나 권리 침해에 맞서 싸우지 말라고 가르쳤으나 악행을 수동적으로 묵인하기를 가르치지는 않았다. 행악자와 범죄자를 사회가 처벌하는 것을 승인한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리고 법을 집행하느라고 국가의 정부가 때때로 무력(武力)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이날 오후에 예수는 분명히 밝혔다.

140:8.5 (1579.7) 예수는 앙갚음하는 악습을 주의하라고 제자들에게 자주 경고하였다. 그는 복수, 앙갚음하는 관념을 어떤 경우에도 인정하지 않았다. 불평 품는 것을 슬프게 여겼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는 관념을 금하였다. 그는 사사로이 개인적으로 앙갚음하는 개념 전체를 찬성하지 않았고, 이러한 문제를 한편으로 국가 정부에, 또 한편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맡겼다. 그의 가르침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세 사람에게 뚜렷이 말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그때까지 가르친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140:8.6 (1580.1) 너희의 적을 사랑하라―인간이 형제라는 도덕적 주장을 기억하라.

140:8.7 (1580.2) 악(惡)은 무익하다: 복수한다고 잘못이 고쳐지지 않는다. 악한 수단으로 악에 대항하여 싸우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140:8.8 (1580.3) 믿음―신의 응보와 영원한 선이 궁극에 이긴다는 확신―을 가지라.

140:8.9 (1580.4) 2. 정치적 태도. 당시에 유대 민족과 로마 정부 사이에 존재하던 긴장된 관계에 대하여 논평을 삼가라고 사도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어떤 면에서도 그들이 이 난국에 말려드는 것을 금했다. 그는 적들이 놓은 정치적 덫을 피하려고 늘 조심스러웠고 “케자의 것을 케자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늘 대답했다. 구원받는 새 길을 만드는 사명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다른 것에 관여하도록 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사생활에서 언제나 국가의 모든 법과 규칙을 마땅히 준수했다. 어떤 대중 교육에서도 그는 시민ㆍ사회ㆍ경제 분야에 관여하지 않았다. 오직 사람의 정신적 생활, 개인의 영적 생활의 원칙에만 관심을 가진다고 세 사도에게 일러주었다.

140:8.10 (1580.5) 따라서 예수는 정치적 개혁가가 아니었다. 그는 세상을 다시 조직하려고 오지 않았다. 그런 일을 했어도 그것은 그 시대와 세대에만 적용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최선으로 사는 길을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어떤 세대도 예수의 생애를 어떻게 자체의 문제에 최선으로 적용하는가 발견하는 수고를 아끼면 안 된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어떤 정치 이론이나 경제 이론, 어떤 사회 체제나 산업 체제와 동일시하는 잘못을 결코 저지르지 말라.

140:8.11 (1580.6) 3. 사회적 태도. 유대인 랍비들은 이 문제를 오랫동안 논의해 왔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예수가 와서 적극적이고 저절로 우러나오는 친절 관념을 제시하였다.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진지하였고, 그 사랑이 전 세계를 포함하고 그래서 모든 사람을 자기 이웃으로 만들기까지 이웃을 확대했다. 그러나 이 모두와 함께, 예수는 대중이 아니라 오직 개인에 관심을 가졌다. 예수는 사회학자가 아니었지만, 온갖 형태의 이기적 고립을 깨뜨리려고 수고했다. 순전한 동정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르쳤다. 네바돈의 미가엘은 자비에 지배를 받는 아들이다. 동정심이 바로 그의 성품이다.

140:8.12 (1580.7) 사람들이 결코 친구에게 식사를 대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주는 추종자들에게 가난한 자와 불행한 자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예수는 확고한 응보 감각을 가졌지만 그 감각은 반드시 자비로 부드럽게 되었다. 예수는 사도들에게 사회의 기생충이나 또는 전문(專門)으로 자선금을 얻어내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사회학적 선언에 아주 가깝게 간 말씀은 “판단을 받지 않도록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한 것이다.

140:8.13 (1580.8) 그는 가리지 않고 베푸는 친절이 여러 가지 사회악에 책임이 있을지 모른다고 분명히 말했다. 다음 날, 그가 요청하거나 두 사도가 공동으로 간청할 때를 제쳐놓고, 사도의 기금을 조금도 자선금으로 써서는 안 된다고 유다에게 분명히 지시했다. 이 모든 문제에서 “뱀 같이 지혜로우나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늘 말하는 것이 예수의 버릇이었다. 어떤 사회적 상황에도 참을성ㆍ관용ㆍ용서를 가르치는 것이 목적인 듯하였다.

140:8.14 (1581.1) 가족은―여기서 그리고 다음 세상에서―예수의 생활 철학의 바로 그 핵심을 차지했다. 하나님에 관한 그의 가르침은 가족에 기초를 두었고, 한편 그는 조상을 지나치게 존경하는 유대인의 성향을 고치려고 애썼다. 가족 생활을 인간의 가장 높은 임무로 높였지만, 가족 관계가 종교적 의무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가족은 이 세상의 제도요, 죽음 뒤에 살아남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가족이 아버지의 뜻에 어긋날 때 예수는 가족을 서슴지 않고 버렸다. 사람이 형제라는 새롭고 더 큰 정신―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예수의 시절에 팔레스타인에서, 그리고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이혼 관습은 엄하지 않았다. 그는 결혼과 이혼에 관하여 율법 만들기를 거듭 물리쳤지만, 초기에 예수를 따르던 많은 사람은 이혼에 관하여 뚜렷한 의견을 가졌고 그런 의견을 서슴지 않고 예수의 덕분으로 돌렸다. 요한 마가를 제외하고, 신약(新約)의 저자들은 모두 결혼에 대하여 이렇게 좀더 엄격하고 진보된 관념을 지켰다.

140:8.15 (1581.2) 4. 경제적 태도. 예수는 그가 당면한 세상에서 일하고 살고 물건을 교환했다. 경제 개혁가가 아니었지만 그는 재산의 불평등한 분배가 부당한 것에 빈번히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그는 아무런 대안(代案)을 내놓지 않았다. 사도들이 재산을 차지해서는 안 되지만, 부와 재산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평등하지 않고 공평하지 않은 재산 분배에 반대함을 설파했다고 세 사람에게 분명히 일러주었다. 그는 사회 정의(正義)와 산업의 공평이 필요함을 인정했지만,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아무런 원칙을 내놓지 않았다.

140:8.16 (1581.3) 그는 추종자들에게 세상의 소유물을 피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었고 다만 열두 사도에게 그렇게 했다. 의사(醫師)인 누가는 평등한 사회를 굳세게 주장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개인적 관점과 어울리게 예수의 말씀을 해석하려고 많이 애썼다.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공동체 형태의 생활을 채택하라고 친히 지시한 적이 없었고 그러한 문제에 관하여 어떤 종류의 선언도 하지 않았다.

140:8.17 (1581.4) 예수는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탐욕을 피하라고 자주 경고했고, “사람의 행복은 물질 재산의 풍부함에 있지 않느니라” 선언하였다. 그는 항상 되풀이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혼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으리요?” 그는 재산 소유를 직접 공격하지 않았지만, 영적 가치의 우선이 영원히 필수라고 주장했다. 후기의 가르침에는, 대중에게 봉사하는 과정에서 제시한 수많은 비유를 들어 유란시아의 그릇된 여러 생활 관점을 고치려고 애썼다. 예수는 결코 경제 이론을 만들려고 의도하지 않았다. 각 시대는 기존의 문제에 대하여 자체의 처방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았다. 오늘날 육체를 입고 살면서 땅에 계시다면 예수는 대다수의 선한 남녀의 기대에 크게 어긋날 터이니, 오늘날의 정치나 사회나 경제에 대한 논쟁이 있을 때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리라는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순전히 인간적인 너희 문제들을 풀려고 너희를 몇 배나 더 유능하게 만들기 위하여 마음의 영적 생활을 어떻게 완전하게 하는가 가르치면서 그는 아주 초연(超然)할 것이다.

140:8.18 (1581.5) 예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처럼 만들고, 다음에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신의 정치ㆍ사회ㆍ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이해심을 가지고 구경하려 할 것이다. 그가 비난한 것은 재산이 아니라, 재산에 굴종하는 대다수의 사람에게 재산이 미치는 영향이었다. 이 목요일 오후에 예수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처음으로 동료들에게 말했다.

140:8.19 (1581.6) 5. 개인적 종교. 너희는 예수의 사도들처럼, 예수의 생애를 보고 그 가르침을 더욱 이해해야 한다. 그는 완전하게 된 일생을 유란시아에서 살았고 오직 그가 당면한 배경을 두고서 그 일생을 상상할 때에야 그의 독특한 가르침을 겨우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의 신다운 성품과 사랑하는 성격을 드러내는 데 가장 도움이 될 것은 그의 일생이요, 열두 사도에게 준 가르침이나 군중에게 한 설교가 아니다.

140:8.20 (1582.1) 예수는 히브리인 선지자나 그리스인 도덕가들의 가르침을 공격하지 않았다. 주는 이 위대한 선생들이 부르짖는 많은 좋은 것을 인식했으나 무언가 더 큰 것, “사람의 뜻이 자진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땅에 내려왔다. 예수는 다만 종교인, 온통 종교적 느낌에 싸여 있고 오직 영적 충동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사람을 만들기를 원하지 않았다. 너희가 한 번 얼핏 그를 볼 수 있었다면, 예수가 이 세상일에 큰 경험을 가진 실재한 사람이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점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기독교 시대의 여러 세기를 통해서 계속, 터무니없이 왜곡되고 많이 와전(訛傳)되었다. 너희는 또한 주의 온유함과 겸손함에 대하여 비뚤어진 생각을 지녀 왔다. 그가 일생에서 목표로 한 것은 당당한 자존심이었던 듯하다. 사람이 참으로 높아질 수 있도록 자신을 낮추라고 충고했다. 그가 정말로 목표로 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겸손이었다. 그는 성실함―깨끗한 마음―을 높이 평가했다. 인품을 평가할 때 충실은 으뜸가는 미덕이었고, 한편 용기는 그의 가르침의 바로 그 핵심이었다. “두려워 말라”가 표어요, 참을성 있게 견디는 태도는 강건한 인품의 이상(理想)이었다. 예수의 가르침은 용맹과 용기와 용감한 정신의 종교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보통 사람 열두 명을 개인 대표로서 선택한 이유이며, 이들의 대다수는 거칠고 튼튼하고 남자다운 어부였다.

140:8.21 (1582.2) 예수는 그 시대의 사회악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이 거의 없었다. 도덕적 방탕을 언급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는 참된 미덕을 가르치는 적극적인 선생이었다. 무엇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방법을 세심하게 피했고 악을 선전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도덕을 개혁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인류의 육욕(肉慾)은 종교적 꾸지람이나 율법으로 금지한다고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고 그렇게 사도들에게 가르쳤다. 얼마 안 되는 비난은 대체로 자만ㆍ잔인ㆍ억압ㆍ위선에 대한 것이었다.

140:8.22 (1582.3) 예수는 요한처럼, 바리새인조차 맹렬히 비난하지 않았다. 많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마음은 정직함을 알았고, 종교적 전통에 노예처럼 매여 있는 것을 이해했다. 예수는 “먼저 나무를 좋게 만드는 일”을 크게 강조했다. 그가 어떤 몇 가지 특별한 미덕 뿐 아니라, 생애 전체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세 사람에게 강조하였다.

140:8.23 (1582.4) 요한이 이날의 가르침으로부터 한 가지 얻은 것은 예수가 믿는 종교의 핵심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동기를 가진 인품, 그리고 이와 더불어 자비로운 인격을 얻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140:8.24 (1582.5) 베드로는 그들이 바야흐로 선포하려는 복음은 온 인류를 위하여 정말로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을 깨달았다. 그는 이 인상을 나중에 바울에게 전했고, 바울은 이로부터 그리스도가 “둘째 아담”이라는 교리를 지어냈다.

140:8.25 (1582.6) 야고보는 땅에서 자녀들이 마치 완성된 하늘나라 시민이 이미 된 것처럼 살기를 예수가 바란다는 감격스러운 진리를 깨달았다.

140:8.26 (1582.7) 예수는 사람들이 다른 것을 알았고 사도들에게 그렇다고 가르쳤다. 제자와 신자들을 어떤 정해진 형태에 맞추어 한 모양으로 만들려고 애쓰기를 삼가라고 사도들에게 항상 훈계하였다. 각 사람이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 앞에서 완전해지고 있는 독립된 개인을 개발하도록 버려두려고 애썼다. 베드로의 여러 질문 중 하나에 대답하여, 주는 말씀했다: “어린아이로서 새롭고 더 나은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해방하기를 내가 원하노라.” 예수는 참된 선함은 의식(意識)하지 않고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자선을 베풀 때 바른 손이 무엇을 하는지 왼손이 모르게 하기를 언제나 주장하였다.

140:8.27 (1583.1) 이날 오후에 세 사도는 주의 종교가 영적 자기 반성에 대하여 아무런 제한이 없음을 깨닫고 놀랐다. 예수의 시절 이전과 이후에 있던 모든 종교는, 기독교조차 양심적으로 자기를 반성하라고 조심스럽게 지시한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의 종교는 그렇지 않았다. 예수의 생활 철학에는 아예 종교적 자아 반성이 없다. 목수의 아들은 결코 인품을 만들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인품의 성장을 가르쳤고,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외쳤다. 그러나 예수는 오만한 자기 본위를 막는 수단으로 자아 분석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전혀 하지 않았다.

140:8.28 (1583.2) 하늘나라에 들어갈 권리는 신앙, 곧 개인의 믿음에 달려 있다. 하늘나라로 진보하여 계속 올라가느라고 치르는 값은 진주, 사람이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얻고자 하는 값비싼 진주와 같다.

140:8.29 (1583.3) 예수의 가르침은 약자와 노예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종교이다. 그의 종교는 (당대에) 결코 신조와 신학 법칙으로 구체화되지 않았다. 그는 한 줄의 글도 뒤에 남기지 않았다. 그의 일생과 가르침은 어느 시대나 어느 세계에도, 영적 안내와 도덕적인 가르침이 되기에 적당한 유산(遺産), 영감을 주는 이상적 유산으로, 우주에 남겼다. 오늘날도 예수의 가르침은 각 종교에게 살아 있는 희망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서, 모든 종교와 따로 구별된다.

140:8.30 (1583.4) 예수는 종교가 땅에서 사람이 유일하게 추구할 일이라고 사도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관한 유대인의 관념이었다. 그러나 종교가 열두 사도가 전념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예수가 신자들의 진정한 교양 추구를 막으려고 가르친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그는 전통에 묶인 예루살렘의 종교 학당들을 비난하였다. 그는 생각이 자유롭고 마음이 넓었고, 박식하고 너그러웠다. 올바르게 사는 그의 철학에는 자의식하는 경건한 언행이 설 자리가 없다.

140:8.31 (1583.5) 주는 자신이 살던 시대나 후일에 어느 시대에도 비종교적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해결책을 내놓지 않았다. 예수는 영원한 실체들을 꿰뚫어보는 영적 통찰력을 개발하고 독창적으로 사는 주도권을 자극하고 싶어했고 인류의 기초에 있는 영구한 영적 필요에만 순전히 관심을 가졌다. 그는 하나님과 같은 정도의 선(善)을 드러냈다. 사랑―진리ㆍ아름다움ㆍ선―이 신의 이상이요 영원한 실체라고 찬양하였다.

140:8.32 (1583.6) 주는 사람 속에서 새로운 정신, 새로운 의지를 창조하려고―진리를 알고, 동정심을 체험하고 선을 택하는 새 능력을 전하려고―오셨으니, 이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완전하게 되려는 영원한 욕구와 아울러,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려 하는 의지이다.

9. 성직에 임명하는 날

140:9.1 (1583.7) 예수는 다음 안식일에 사도들에게 몰두했고 사도들을 세웠던 산지로 돌아갔다. 길고도 더할 나위 없이 감동적인 격려의 말씀을 친히 주신 뒤에, 열두 사도를 성직에 임명하는 엄숙한 행위에 들어갔다. 이 안식일 오후에 예수는 산허리에서 둘레에 사도들을 모으고, 세상에 그들만 두고 떠나야 하는 날에 대비하여 그들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손에 맡기었다. 이 계제에 아무런 새로운 가르침이 없었고 다만 이야기와 친교에 시간을 보냈다.

140:9.2 (1584.1) 예수는 바로 이 자리에서 했던 사도 임명 설교의 여러 모습을 돌아보았고, 다음에 하나씩 앞으로 부르고 그의 대표로서 세상으로 떠나가도록 임명했다. 성직 임명식에서 주의 명령은 이것이었다, “온 세계로 가서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라. 영적으로 포로 된 자를 해방하고 억압받는 자를 위로하며, 고통받는 자를 돌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140:9.3 (1584.2) 예수는 돈이나 여벌 옷을 가지고 가지 말라 타이르며 말했다 “일꾼은 임금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마침내 그는 말했다. “보라, 내가 이리들 한가운데 양처럼 너희를 보내노라. 그런즉 너희는 뱀과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그러나 살필지니, 너희의 적이 너희를 공회(公會) 앞으로 끌고 갈 것이요 회당에서 너희를 징계할 것임이라. 이 복음을 믿는다고 너희는 총독과 권력자들 앞에 넘겨지겠고 너희의 바로 그 간증이 저희에게 나를 위한 증언이 될지니라. 그리고 너희를 재판으로 이끌 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 내 아버지의 영이 너희 안에 깃들고 그런 때에 너희를 통해서 말씀하시리라. 너희 중에 더러는 죽음을 당하겠고 땅에서 하늘나라를 세우기 전에 이 복음 때문에 숱한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러나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고, 내 영이 온 세상으로 너희 앞에 가리라. 그리고 너희가 먼저 유대인에게, 그리고 나서 이방인에게 가는 동안, 내 아버지가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140:9.4 (1584.3) 그리고 산에서 내려와서 그들은 세베대 집의 거처로 돌아갔다.

10. 성직 임명식이 있던 날 저녁

140:10.1 (1584.4) 비가 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날 저녁에 집에서 가르치는 동안 예수는 오랫동안 말씀했다.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열둘에게 보여주려 했다. 그들은 올바름―구원―에 이르는 수단으로서 어떤 일을 하라고 짐을 지우는 종교만 알았다. 그러나 예수는 되풀이하곤 했다. “하늘나라에서는 너희가 일하기 위하여 의로워야 하느니라.” 여러 번 되풀이했다. “그런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는 완전하라.” 그는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려고 왔고 오직 믿음으로, 단순하고 성실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그동안 내내 주는 놀란 사도들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예수는 말했다: “요한은 회개하는 세례, 옛 생활 방식을 뉘우치라는 세례를 외쳤느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친교하는 세례를 선포해야 하느니라. 회개하라는 가르침이 필요한 자에게 회개를 외치라. 그러나 하늘나라로 들어가기를 이미 진지하게 추구하는 자에게는, 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즐거이 친교하는 곳으로 들어오라 청하라.” 그러나 이 갈릴리 어부들에게, 하늘나라에서 믿음으로 올바르게 되는 것이 땅에서 필사자가 하루하루 사는 동안 바르게 행하는 것보다 앞서야 한다고 설득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140:10.2 (1584.5) 열두 사도를 가르치는 이 일에 또 다른 큰 장애물은, 상당히 이상적이고 영적인 원칙, 종교적 진리의 원칙을 구체적인, 개인의 행동 규칙으로 다시 만드는 경향이었다. 예수는 사람의 태도에 담긴 아름다운 정신을 제시하곤 했지만, 그들은 그러한 가르침을 개인의 행동 규칙으로 풀이하기를 고집했다. 주가 하신 말씀을 분명히 기억했을 때, 그들은 예수가 무슨 말씀을 하지 않았는가 거의 확실히 잊어버린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가르친 그대로 사신 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천천히 그 가르침을 소화했다. 말씀으로 가르쳐서 얻을 수 없는 것은 그와 함께 살면서 차츰차츰 얻었다.

140:10.3 (1585.1) 주가 방대한 우주의 어느 세계에, 어느 시대의 어떤 사람에게도, 영감을 주는 인생을 사는 데 전념했다는 것이 사도들의 눈에 명백하지 않았다. 이따금 예수가 말씀했는데도 사도들은 그가 이 세상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광대한 창조에 존재하는 모든 다른 세계를 위하여 일한다는 생각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는 이 세상의 남녀를 위하여 필사자로 사는 본보기를 친히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세계의 모든 필사 존재를 위하여 영적이며 영감을 주는 높은 이상을 만들려고 유란시아에서 지상의 인생을 살았다.

140:10.4 (1585.2) 바로 이날 저녁에 토마스는 예수께 물었다: “주여,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전에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당신이 말씀하시고, 그래도 거짓 선지자에게 속지도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잘못도 저지르지 말라 당신이 경고하였나이다. 이제,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어찌할까 모르겠나이다. 당신의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없나이다.” 예수는 토마스에게 대답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너희를 참으리요! 너희는 나의 모든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 듣기를 늘 고집하는도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값으로 어린아이 같이 되라 요구했을 때, 쉽게 속거나 단지 기꺼이 믿으라거나 호감이 가는 낯선 사람을 얼른 신뢰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느니라. 그 예로부터 너희가 얻기를 내가 바란 것은 아이와 아버지의 관계였느니라. 너는 어린아이요 네가 들어가고자 하는 곳은 네 아버지의 나라이라. 모든 보통의 아이와 아버지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애정이 있으니, 이것은 이해하고 사랑하는 관계를 보장하며 또한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얻으려고 협상하는 어떤 성향도 영원히 미리 제외하느니라. 너희가 나가서 전하려는 그 복음은 바로 이 영원한, 아이와 아버지의 관계를 믿음으로 깨달아서 얻는 구원과 상관되느니라.”

140:10.5 (1585.3) 예수의 가르침의 한 가지 특징은 그의 철학에 담긴 도덕이 개인과 하나님의 개인적 관계에서―바로 이 아이와 아버지의 관계에서―생겨난다는 것이다. 예수는 종족이나 나라가 아니라 개인에 중점을 두었다. 저녁을 들면서 예수는 마태와 이야기했고 그 말씀 가운데 어떤 행동의 도덕성도 개인의 동기에 따라 좌우된다고 설명하였다. 예수의 도덕은 언제나 긍정적이었다. 예수가 고쳐서 말씀한 황금률은 적극적 사회 접촉을 요구한다. 무엇을 하지 말하는 오래 된 규칙은 고립된 가운데 지킬 수 있다. 예수는 도덕에 붙어 있는 모든 법칙과 예식을 벗기고 도덕을 영적으로 생각하고 참으로 올바르게 사는 훌륭한 수준으로 높이 올려 놓았다.

140:10.6 (1585.4) 예수의 이 새 종교는 실용적으로 암시하는 것이 없지 않았지만 그 가르침에서 실용적인 정치적ㆍ사회적, 또는 경제적 가치를 가진 무엇이 발견되든지 그것은 혼이 마음 속에서 얻는 이 체험이 자연히 풀려나가는 작용이며, 그 혼은 진정한 개인적 종교 체험을 겪으면서 날마다 자진하여 봉사함으로 영의 열매를 보여준다.

140:10.7 (1585.5) 예수와 마태가 이야기를 마친 뒤에, 열심당원 시몬이 물었다. “그러나 주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니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옳도다 시몬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것이 너희가 선포할 좋은 소식이라.” 그러나 사도들은 그러한 교리를 깨달을 수 없었다. 새롭고 이상하고 깜짝 놀랄 발언이었다. 이 진리를 그들의 마음에 깊이 새기게 하려는 소망 때문에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모든 사람을 형제로 대우하라고 가르쳤다.

140:10.8 (1585.6) 안드레의 물음에 답하여, 주는 그의 가르침에 담긴 도덕은 그가 실천하는 종교와 따로 구별할 수 없다고 분명히 일러주었다. 사람의 성품으로부터 도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로부터 도덕을 가르쳤다.

140:10.9 (1585.7) 요한이 예수에게 물었다: “주여, 하늘나라는 무엇이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하늘나라는 이 세 가지 요건으로 이루어지느니라. 첫째는 하나님이 그 나라를 다스리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를 믿는 것이요, 셋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하나님을 닮으려는―인간 최고의 소망이 효력이 있음을 믿는 것이라. 믿음으로 어떤 필사자도 이 구원의 조건을 모두 갖출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복음이 주는 좋은 소식이라.”

140:10.10 (1586.1) 그리고 이제 기다리는 주간이 지났다. 그들은 이튿날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려고 준비하였다.

제 141 편 대중 전도의 시작

유란시아서

제 141 편

대중 전도의 시작

141:0.1 (1587.1) 서기 27년 1월 19일, 그 주 첫째 날에 예수와 열두 사도는 벳세다의 본부를 떠나려고 준비했다. 4월에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려고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 그리고 요단강 유역의 길로 여행할 생각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열두 사도는 주의 계획에 대하여 전혀 몰랐다. 사도의 가족들과 다른 제자들이 작별 인사를 하고 바야흐로 시작하려는 새 일의 성공을 빌려고 왔기 때문에, 그들은 한낮 가까이 되기까지 세베대의 집을 벗어나지 못했다.

141:0.2 (1587.2) 떠나기 바로 전에, 사도들은 주를 만나지 못했으며 안드레가 그를 찾으러 나갔다. 잠깐 찾다가 안드레는 물가에서 예수가 배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열둘은 주가 슬퍼하는 듯한 때를 자주 보았고 잠시 동안 심각하게 생각에 몰두한 것을 보았지만, 아무도 주가 눈물 흘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기 바로 전에 주가 이렇게 감동한 것을 보고 안드레는 얼마큼 놀랐다. 그는 예수에게 감히 다가가서 물었다: “이렇게 좋은 날에, 주여, 아버지의 나라를 선포하려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야 하는데, 눈물을 흘리시니 어인 일이니이까? 우리 가운데 누가 당신께 무례하였나이까?” 안드레와 함께, 열두 사도와 합세하려고 가면서 예수는 대답했다. “너희 가운데 아무도 나를 슬프게 하지 않았느니라. 내가 슬퍼하는 것은 내 아버지 요셉의 집안에서 아무도 기억하여 성공을 빌러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 이때 룻은 나사렛에 있는 오빠 요셉을 방문하고 있었다. 가족 중에 다른 사람들은 감정이 상한 결과로 자만심ㆍ실망ㆍ오해, 사소한 분개심에 빠져 그를 멀리하였다.

1. 갈릴리를 떠나다

141:1.1 (1587.3) 가버나움은 티베리아스에서 멀지 않았고, 예수의 명성(名聲)은 온 갈릴리에, 그리고 거기를 지나서 여러 곳에도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헤롯이 그가 하는 일을 곧 주목하기 시작하리라는 것을 예수는 알았다. 그래서 남쪽으로, 유대 땅으로 사도들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1백 명이 넘는 신자들 일행이 함께 가고 싶어했으나 예수는 그들에게 말씀하며, 요단강으로 내려가는 길에 사도 집단을 따라오지 말라고 부탁했다. 뒤에 남아 있기로 찬성했어도 그들 가운데 여럿이 며칠 안에 주의 뒤를 따라 갔다.

141:1.2 (1587.4) 첫날에 예수와 사도들은 겨우 타리케아까지 여행했고, 거기서 그날 밤에 쉬었다. 이튿날 펠라 가까이 요단강의 한 지점, 요한이 1년 전쯤에 전도하고 예수가 세례를 받은 곳까지 여행했다. 여기서 2주가 넘도록 머무르며 가르치고 전도하였다. 첫째 주말이 되어서 몇백 명이 예수와 열두 사도가 거하는 곳 가까이 야영지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갈릴리ㆍ페니키아ㆍ시리아ㆍ데카폴리스ㆍ페레아, 그리고 유대에서 왔다.

141:1.3 (1588.1) 예수는 아무런 대중 설교를 하지 않았다. 안드레는 군중을 나누고 오전과 오후 집회에 설교할 사람들을 배치했다. 저녁 식사 뒤에 예수는 열두 사도와 함께 이야기하였다. 아무런 새 가르침을 주지 않았지만, 앞서 가르친 것을 다시 검토하고 여러 질문에 답하였다. 이렇게 하던 어느 날 저녁, 이 장소 가까이, 산에서 40일 보낸 것에 대하여 열둘에게 무언가 일러주었다.

141:1.4 (1588.2) 페레아와 유대 지방에서 온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적이 있었고 예수의 가르침에 관하여 더 알아보는 데 관심이 있었다. 사도들은 어떤 면에서도 요한의 설교를 깎아내리지 않았고 이때 새 제자들에게 세례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요한의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많이 진전을 보았다. 요한이 예수에 대하여 선포한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예수가 그를 감옥에서 구해내려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요한의 추종자들에게 언제나 걸림돌이었다. 요한의 제자들은 어째서 그들이 아끼는 지도자가 모진 죽음을 당하는 것을 예수가 막지 않았는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141:1.5 (1588.3) 밤마다 안드레는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들과 원만하게 어울리는 일, 까다롭고 어려운 일을 동료 사도들에게 조심스럽게 가르쳤다. 예수가 대중에게 봉사하던 첫해 동안, 추종자의 4분의 3이 넘는 수가 이전에 요한을 따랐고 그에게 세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이해, 서기 27년 전부가 페레아와 유대에서 요한이 하던 일을 조용히 이어받는 데 쓰였다.

2. 하나님의 율법과 아버지의 뜻

141:2.1 (1588.4) 펠라를 떠나기 전날 밤에 예수는 새 나라에 관하여 얼마큼 더 가르쳤다. 주는 말했다: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오는 것을 기대하라고 가르침 받았으며, 내가 와서, 이제 오래 기대하던 이 나라가 가까이 왔고 이미 여기에 우리 가운데 있음을 선포하노라. 어느 나라에도 보좌에 앉아서 나라의 율법을 선포하는 임금이 있어야 하느니라. 그래서 유대 민족이 땅의 모든 민족을 영화롭게 다스린다는 개념, 메시아가 다윗의 보좌에 앉아서 이 기적의 권능을 가진 자리에서 온 세상의 율법을 선포한다는 하늘나라 개념을 너희가 개발하였느니라. 그러나 아이들아, 너희는 보아도 믿음의 눈이 없고, 들어도 영이 이해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선포하노니, 하늘나라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이 다스림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라. 참으로 이 나라에는 임금이 있고, 그 임금은 내 아버지요 너희 아버지이라. 정말로 우리는 그에게 충성하는 백성이나 그 사실을 훨씬 초월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아들이라는 진리, 사람을 변화시키는 진리이라. 나의 일생이 이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리라. 우리 아버지는 또한 보좌에 앉으시나 손으로 만든 보좌가 아니라. 무한자의 보좌는 가장 높은 하늘에 아버지가 거하시는 영원한 자리이라. 그는 만물을 채우고 온 우주에 율법을 선포하시니라. 아버지는 필사 인간의 혼 속에서 살라고 보내신 영으로, 땅에 있는 자녀들의 마음 속에서 또한 다스리시니라.

141:2.2 (1588.5) “너희가 이 나라의 백성일 때, 정말로 우주 통치자의 율법을 듣게 되느니라. 그러나 내가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러 왔는데 그 복음으로 인하여 너희가 아들임을 믿음으로 발견할 때, 너희는 이제부터 전능한 임금의 율법에 지배 받는 백성이 아니라, 사랑이 많은 신성한 아버지의 아들, 특권을 가진 아들로서 자신을 바라보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버지의 뜻이 너희의 율법이 될 때 너희는 도저히 하늘나라에 있다 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 참으로 너희의 뜻이 될 때, 너희는 참으로 하늘나라 안에 있으니, 그리함으로 하늘나라가 너희 안에서 확고한 체험이 되었음이라. 하나님의 뜻이 너희의 율법일 때, 너희는 고귀한 노예 백성이라. 그러나 신의 아들이라는 이 새 복음을 믿을 때, 내 아버지의 뜻은 너희의 뜻이 되고 너희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녀, 하늘나라의 해방된 아들의 높은 자리로 올라가느니라.”

141:2.3 (1589.1) 어떤 사도들은 이 가르침에서 무언가 깨달았지만, 혹시 야고보 세베대를 제외하고, 아무도 이 엄청난 선언의 중요성을 완전히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았고 봉사하는 후일에 떠올라서 그들의 직분을 기쁘게 해주었다.

3. 아마투스에서 머무르다

141:3.1 (1589.2) 주와 사도들은 거의 3주 동안 아마투스 가까이 남아 있었다. 사도들은 날마다 두 차례 군중에게 계속하여 설교했고, 예수는 안식일 오후마다 설교했다. 수요일의 노는 시간을 계속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안드레는 한 주에 6일 동안 매일 두 사도가 쉬어야 한다고 정했고 한편 모두가 안식일 예배에 근무했다.

141:3.2 (1589.3)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이 대중 설교의 대부분을 맡았다. 빌립과 나다니엘, 토마스와 시몬은 개인을 상대로 상당히 일했고, 특별히 질문자들을 위하여 학급을 운영했다. 쌍둥이는 일반 치안 감독을 계속하였고, 한편 안드레ㆍ마태ㆍ유다는 세 사람으로 구성된 일반 관리 위원회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은 또한 각자 종교적인 일을 상당히 하였다.

141:3.3 (1589.4) 안드레는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새 제자들 사이에, 항상 되풀이해서 생기는 오해와 의견 차이를 조정하는 일을 맡아서 많이 분주했다. 며칠마다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곤 했지만, 안드레는 동료 사도들의 도움을 받아서 다투는 편들을 그럭저럭, 적어도 일시나마, 어느 정도 합의를 보도록 유도했다. 예수는 이 회담 중 어디에도 참여하려 하지 않았고, 이 난관을 적절히 조정하는 데 아무 조언도 주려 하지 않았다. 사도들이 이 난처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제안한 적도 없었다. 안드레가 이 문제들을 가지고 왔을 때, 예수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주인이 손님들의 집안 문제에 끼어드는 것이 지혜롭지 않느니라. 슬기로운 부모는 아이들의 사소한 싸움에서 결코 편을 들지 않느니라.”

141:3.4 (1589.5) 주는 사도들, 그리고 모든 제자를 다루는 온갖 일에 큰 지혜를 보이고 완전히 공평함을 보였다. 예수는 참으로 사람들을 통달한 분이었다. 그의 인격의 매력과 힘 때문에 그는 동료 인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거칠고 방랑하며 집 없이 사는 그의 일생에는 존경심을 일으키는 미묘한 힘이 있었다. 권위 있게 가르치는 자세, 맑은 논리, 추리하는 힘, 지혜로운 통찰력, 날카로운 지성, 비할 데 없이 차분한 태도, 더할 나위 없는 너그러운 태도에는 지적 매력, 그리고 영적으로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그는 단순하고 남자답고 정직하며 두려움이 없었다. 주의 인품에 나타난 이 모든 신체적ㆍ지적 영향과 함께, 그의 인격과 관련되었던, 존재의 모든 영적 매력이 있었다―참을성 있고 싹싹하고 온유하고 부드럽고 겸허했다.

141:3.5 (1589.6) 나사렛 예수는 정말로 강인하고 힘찬 인격자였다. 지적 세력이요 영적 요새였다. 그의 인격은 추종자들 가운데 영적 생각을 가진 여인들 뿐 아니라 교육받고 지적인 니고데모, 그리고 강인한 로마 군인의 마음도 움직였으니, 십자가를 지키며 머물렀던 지휘관은 주가 돌아가시는 것을 끝까지 보고 나서 말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그리고 기운차고 거친 갈릴리 어부들은 그를 주라고 불렀다.

141:3.6 (1590.1) 이제까지 예수의 초상화들은 아주 보기 민망하였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그림들은 청년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쳐 왔다. 그가 너희 미술가들이 보통 묘사해 왔던 그런 사람이었다면, 성전의 상인들은 예수 앞에서 도저히 달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품위 있는 남성이었다. 선하지만 자연스러웠다. 예수는 연약하고 다정하고 부드럽고 상냥한 신비주의자의 자세를 가지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은 가슴이 떨리도록 힘에 넘쳤다. 그는 좋은 의도를 가졌을 뿐 아니라 실제로 좋은 일을 하며 다녔다.

141:3.7 (1590.2) 주는 결코 “게으르고 꿈꾸는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말씀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번 일렀다: “수고하는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휴식―영적 힘―을 주리라.” 주의 멍에는 정말로 가볍지만, 그렇다 해도 결코 그 멍에를 강제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자기의 자유 의지대로 이 멍에를 메어야 한다.

141:3.8 (1590.3) 예수는 희생함으로, 자만과 이기심을 희생함으로 승리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비를 보임으로 온갖 불만ㆍ불평ㆍ노여움으로부터, 그리고 이기적 권력과 복수를 갈망함으로부터 영적으로 벗어남을 보여주려고 뜻하였다. “악에 저항하지 말라” 했을 때 죄를 묵인하거나 불의를 가까이 하라고 조언함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나중에 설명하였다. 용서를 더욱 가르치고 “사람의 인격을 악하게 대하는 것, 인격의 위엄을 가진 사람의 감정에 사악하게 상처를 주는 것에 저항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4. 아버지에 대한 가르침

141:4.1 (1590.4) 아마투스에 머무르는 동안, 예수는 사도들에게 새로운 하나님 개념을 가르치면서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하나님은 아버지요 땅에서 잘못하는 아이들에게 손해되는 기록, 나중에 온 창조의 공정한 재판관으로서 판결을 내릴 때 불리하게 쓰일 죄와 잘못을 장부에 적느라고 주로 바쁜, 크고 높은 기록관이 아니라고 사도들에게 거듭 강조했다. 유대인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모든 사람 위에 있는 임금으로, 아니 민족의 아버지라고까지 상상했지만, 이전에는 필사 인간의 큰 집단이 하나님이 개인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생각을 품은 적이 없었다.

141:4.2 (1590.5) “하늘나라를 다스리는 이 하나님은 누구시나이까?” 하는 토마스의 물음에 예수는 대답했다. “하나님은 너의 아버지요, 종교―내 가르침―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를 믿고 인정(認定)하는 것, 이보다 더도 아니요 덜도 아니라. 내 일생과 가르침에서 이 두 개념을 분명히 해주려고 나는 육체를 입고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

141:4.3 (1590.6) 예수는 또한 동물을 잡아 바치는 것이 종교적 의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도록 사도들의 생각을 해방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날마다 희생물을 바치는 종교에서 훈련 받은 이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더디었다. 그렇기는 해도, 주는 가르치는 데 지치지 않았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모든 사도의 생각에 미치지 못할 때, 그는 교훈을 고쳐 말씀하고, 해명할 목적으로 또 다른 종류의 비유를 이용하곤 했다.

141:4.4 (1590.7) 이때 예수는 “고통 받는 자를 위로하고 병자를 돌보는” 임무에 관하여 더 자세히 열둘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주는 온전한 인간―남자나 여자 개인을 구성하는 육체ㆍ지성ㆍ영의 연합―에 대하여 많이 가르쳤다. 예수는 동료들에게 그들이 마주칠 세 가지 형태의 고통에 대하여 이야기했고, 더 나아가서 인간의 질병의 슬픔을 겪는 모든 사람을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가 설명했다. 다음을 헤아리라고 가르쳤다:

141:4.5 (1591.1) 1. 육체의 병―몸의 병으로 보통 간주되는 질병.

141:4.6 (1591.2) 2. 불안한 정신―후일에 감정 및 정신의 고생과 장애로 여긴 비육체적 질병.

141:4.7 (1591.3) 3. 악한 귀신에 들리는 것.

141:4.8 (1591.4) 예수는 그 시절에 흔히 더러운 귀신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이 악한 영들의 성질, 그리고 그 기원에 관하여 몇 번 사도들에게 얼마큼 설명했다. 주는 악한 귀신에 들린 것과 미친 것의 차이를 잘 알았지만 사도들은 그렇지 않았다. 유란시아의 초기 역사에 관한 그들의 제한된 지식에 비추어 볼 때 예수가 이 문제를 그들이 충분히 알아듣도록 시도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 악한 영들을 언급하면서, 여러 번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올라가고 나서, 하늘나라가 큰 권능과 영적 영화로움을 입고 오는 그 시절에, 모든 육체에게 내 영을 퍼붓고 난 뒤에, 저희는 사람들을 더 괴롭히지 아니하리라.”

141:4.9 (1591.5) 주마다, 달마다, 이 해 내내, 사도들은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에 갈수록 더 주의를 기울였다.

5. 영적으로 하나됨

141:5.1 (1591.6) 아마투스에서 있었던 모든 저녁 회의 중에서 아주 중대한 한 회의는 영적으로 하나되는 것에 관한 토론과 관련된 회의였다. 야고보 세베대가 물었다, “주여, 어떻게 우리가 같은 눈으로 보기를 배우고, 그렇게 함으로 우리끼리 더 조화를 이루겠나이까?” 예수는 이 질문을 듣고 정신이 흥분하였다. 너무나 흥분하여 대답했다. “야고보야 야고보야, 너희가 모두 같은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 언제 너희에게 가르치더냐? 필사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고유하고 각자의 자유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할 목적으로 영적 해방을 선포하려고 내가 세상으로 왔노라. 사회에서 조화(調和)되고 형제 사이의 평화를 얻는 대가로 자유로운 인격과 영적 독창성을 희생하기를 바라지 않노라. 너희 내 사도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영이 하나되는 것이요―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진심으로 행하려고 너희가 뭉쳐 헌신하는 기쁨 속에서 너희가 이를 체험할 수 있느니라. 영적으로 같아지기 위하여 같은 눈으로 보거나 같은 느낌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한 같은 생각을 가질 필요조차 없느니라. 영적으로 하나되는 것은 너희 각자에게 하늘 아버지의 영 선물이 깃들고, 그에 점점 더 지배된다는 의식으로부터 얻느니라. 너희 사도들의 조화는 각자가 가진 영적 희망의 기원ㆍ성품ㆍ운명이 동일하다는 사실로부터 생겨나야 하느니라.

141:5.2 (1591.7) “이 방법으로 영의 목적과 영적 이해가 완전히 통일되는 것을 체험할까 하나니, 이것은 너희 각자에게 깃드는 파라다이스 영의 신분을 서로 의식함으로부터 생겨나느니라. 지적 사고(思考), 기질의 감정, 사회적 행동 면에서 개인의 태도가 최대한으로 다양해도, 너희는 이 모든 심오한 영적 조화를 누릴 수 있느니라. 너희의 인격은 신선하게 다채롭고 뚜렷이 다를지 모르지만, 한편 신을 예배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영적 성품과 영의 열매가 아주 통일되어, 너희의 생애를 누가 보아도 이렇게 너희가 영적으로 통일되고 혼(魂)이 하나가 된 것을 분명히 인식하리라. 너희가 나와 함께 있었고 이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어떻게 적절히 행하는가 배웠음을 저희가 인식하리라. 바로 너희가 고유하게 받은 정신ㆍ육체ㆍ혼의 재산을 쓰는 솜씨에 따라서 그런 봉사를 베푸는 동안에도, 너희는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봉사하는 일을 해낼 수 있느니라.

141:5.3 (1592.1) “너희의 영이 하나가 되는 것은 두 가지를 암시하며, 개별 신자의 생활에서 두 가지가 조화됨을 언제나 발견하리라. 첫째로, 너희는 일생 동안 봉사하려는 공통된 동기에 지배되느니라. 무엇보다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를 너희 모두가 바라느니라. 둘째로, 너희 모두가 공통된 존재 목표를 가지고 있느니라. 너희는 모두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찾으려 하고, 이렇게 함으로 너희가 그와 같이 되었음을 우주에게 증명하느니라.”

141:5.4 (1592.2) 예수는 열두 사도가 훈련 받는 동안 여러 번 이 주제를 되풀이하였다. 선한 사람들의 종교적 해석이라도, 주를 믿는 자들이 그런 해석에 따라서 독단이 되고 표준화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거듭하여 말했다.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안내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서 신조(信條)를 작성하고 전통 세우는 것을 막으려고 주는 사도들에게 여러 번 경고하였다.

6. 아마투스에서 보낸 마지막 주

141:6.1 (1592.3) 아마투스에서 마지막 주말이 가까워 오자 열심당원 시몬은 예수에게 어느 테헤르마라는 사람을 데려왔다. 그는 다마스커스에서 사업하는 페르시아인이었다. 테헤르마는 예수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고 그를 만나려고 가버나움으로 왔다. 거기서 예수가 사도들과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요단강으로 가셨다는 말을 듣고 주를 찾으러 나섰다. 안드레는 테헤르마를 시몬에게 교육 받으라고 소개하였다. 불은 다만 눈에 보이는 깨끗하고 거룩한 이의 상징일 뿐이라고 테헤르마가 힘들여 설명했지만 시몬은 그 페르시아인을 “불을 숭배하는 자”로 여겼다. 예수와 이야기한 뒤에, 페르시아인은 가르침을 듣고 설교를 들으려고 며칠 남아 있겠다는 뜻을 표시했다.

141:6.2 (1592.4) 열심당원 시몬과 예수만 따로 있을 때, 시몬은 주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나는 그를 설득할 수 없었나이까? 어찌하여 그는 나에게 그렇게 저항하고 당신의 말씀은 그토록 쉽사리 들으려 하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시몬아 시몬아, 구원을 찾는 자들의 마음 속에서 무엇을 없애려는 노력을 전혀 삼가라고 몇 번이나 가르쳤느냐? 다만 갈급한 이 혼들 속으로 무언가 집어넣으려고 수고하라, 얼마나 자주 일렀느냐?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인도하라. 그러면 크고도 생생한 진리, 하늘나라의 진리가 금방 모든 심각한 잘못을 몰아내리라. 너희가 필사 인간에게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좋은 소식을 제시했을 때, 그가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더욱 쉽게 납득시킬 수 있느니라. 그렇게 했은즉, 너희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자에게 구원의 빛을 가져온 것이라. 시몬아, 사람의 아들이 처음에 너희에게 왔을 때, 모세와 선지자들을 비난하고 새롭고 더 좋은 생명의 길을 선포하더냐? 아니라. 너희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요, 너희 조상이 겨우 일부만 본 어떤 것의 완전하게 된 모습을 보여주려고 내가 왔노라. 그러니 시몬아, 가서 하늘나라를 가르치고 전하라. 네가 하늘나라 안에 한 사람을 안전히, 확실히 들여보냈을 때, 그런 사람이 질문을 가지고 오면 그때가 신의 나라 안에서 그 혼이 차츰 앞으로 나아가는 데 상관되는 가르침을 나누어줄 때이니라.”

141:6.3 (1592.5) 이 말씀에 깜짝 놀랐지만 시몬은 예수가 가르친 대로 하였고 페르시아인 테헤르마는 하늘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의 무리 가운데 끼었다.

141:6.4 (1592.6) 그날 밤, 예수는 하늘나라의 새 생활에 관하여 사도들에게 강론하였다. 하신 말씀의 일부는 이렇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 너희는 다시 태어나느니라. 오직 육체로부터 난 자에게 영의 깊은 일을 가르칠 수 없느니라. 영의 높은 길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애쓰기 전에, 먼저 저희가 영에게서 태어났는가 보라. 너희가 먼저 성전으로 사람들을 데려가기까지, 성전의 아름다움을 보이는 일에 손대지 말라.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사람이 아들이라는 교리를 너희가 강론하기에 앞서, 사람들을 하나님께,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소개하라. 사람들과 다투지 말라―언제나 참으라. 그것은 너희의 나라가 아니요 너희는 대사일 뿐이라. 다만 가서 외치라: 이것이 하늘나라이니―하나님은 너희 아버지요 너희는 그의 아들이라, 너희가 진심으로 믿으면 이 좋은 소식이 너희의 영원한 구원이라.”

141:6.5 (1593.1) 사도들은 아마투스에서 머무르는 동안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요한의 제자들을 다루는 문제에 대하여 예수가 아무 제안도 하려 하지 않아서 무척 실망했다. 중요한 세례 문제에서도 예수는 겨우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요한은 정말로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하늘나라로 들어갈 때 너희는 영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7. 요단강 건너 베다니에서

141:7.1 (1593.2) 2월 26일에 예수와 사도들, 그리고 따르는 큰 무리가 페레아 지방의 베다니에 가까운 여울까지 요단강으로 내려왔다. 여기는 요한이 처음으로 다가오는 하늘나라를 선포한 곳이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4주 동안, 예수는 사도들과 함께 여기에 남아서 가르치고 전도하였다.

141:7.2 (1593.3) 요단강 건너 베다니에서 머무르던 둘째 주에, 예수는 사흘 동안 쉬려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강 건너 산에, 예리고 남쪽으로 데리고 갔다. 주는 하늘나라에 대하여 많은 새로운 상급 진리를 이 세 사람에게 가르쳤다. 여기에 기록할 목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 가르침을 다시 정리하고 분류하고자 한다:

141:7.3 (1593.4) 제자들이 하늘나라의 좋은 영 실체를 맛보았은즉, 사람들이 그들의 생애를 봄으로 하늘나라를 의식하게 되고 따라서 신자들에게 하늘나라의 길에 관하여 묻고 싶은 생각이 나도록 제자들이 세상에서 살기를 바란다는 것을 예수는 분명히 밝히려고 애썼다. 진리를 진지하게 찾는 모든 그러한 사람은 영원하고 신성한 영 실체가 있는 하늘나라로 들어가기를 보장하는 믿음의 선물, 그 기쁜 소식을, 언제나 반갑게 듣는다.

141:7.4 (1593.5) 하늘나라 복음을 가르치는 모든 선생의 유일한 일거리는 각 사람에게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드러내는 것―이 각 사람이 아들임을 의식하도록 인도하는 것, 다음에 바로 그 사람을 하나님께 믿음의 아들로 소개하는 것임을 인식시키려고 애썼다. 이 두 가지 필수 계시(啓示)는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정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었다. 예수의 종교는 땅에서 자신을 수여하는 일생을 사는 데 전적으로 기초를 두었다. 예수는 이 세상을 떠났을 때, 개인의 종교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아무런 책이나 율법이나 다른 형태의 인간 조직을 남겨놓지 않았다.

141:7.5 (1593.6) 예수는 그가 사람들과 개인적이고 영원한 관계를 세우려고 왔고, 이것이 언제까지나 모든 다른 인간 관계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분명히 설명했다. 가까운 이 영적 친교는 어느 시대, 어떤 사람에게도, 어느 민족 사이에 어떤 사회 조건 하에서도, 확대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이들에게 내민 유일한 보상은, 이 세상에서―영적 기쁨, 그리고 신(神)과 교통하는 것이요, 다음 세상에서―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신성한 영 실체들이 있는 곳까지 진보하는 영원한 생명이었다.

141:7.6 (1593.7) 예수는 하늘나라를 가르치는 데 제일 중요한 두 가지 진리라 부른 것을 크게 강조하였다. 곧 믿음으로, 그리고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요, 이와 아울러 진리를 진지하게 인식함으로 인간의 해방을 얻는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는 혁신적 가르침이었다. 예수는 육체를 입고 나타난 바로 그 진리였다.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돌아간 뒤에 모든 자녀의 마음 속에 진리의 영을 보내리라 약속했다.

141:7.7 (1594.1) 주는 땅에서 한 시대 전체를 위하여 진리의 본질을 이 사도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그들은 흔히 가르침을 귀담아들었지만, 그 말씀은 실제로 다른 세계들에게 영감을 주고 교화하려고 의도(意圖)한 것이었다. 그는 인생을 사는 새롭고 독창적인 계획을 본보기로 보였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정말로 유대인이었지만, 이 땅의 한 필사자로서 온 세상을 위하여 일생을 살았다.

141:7.8 (1594.2) 하늘나라의 계획을 펼치면서 아버지를 반드시 인식하게 하려고 예수는 “지상의 위대한 사람들”을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일을 시작했고, 이들은 이전 시대에 대부분의 진화 종교가 아주 소홀히 해왔던 바로 그 계급이었다. 그는 아무도 업신여기지 않았다. 그의 계획은 세계적인 것, 아니 우주를 위한 것이었다. 이런 말씀을 아주 용감하고 힘차게 했기 때문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조차 예수가 아마도 제 정신이 아니라 생각할 유혹을 받았다.

141:7.9 (1594.3) 땅에 있는 몇 사람을 위하여 모범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우주 전체에 두루, 어떤 세계의 어떤 민족을 위해서도 인생의 표준을 세우고 또 보이려고 이 수여 사명을 띠고 왔다는 진실을 주는 이 사도들에게 가볍게 전하려 하였다. 이 표준은 가장 높은 완전, 아니 우주의 아버지의 최종 선(善)의 경지에까지 접근하였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뜻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141:7.10 (1594.4) 그는 선생으로서, 물질적 지성에게 영적 진리를 제시하려고, 하늘에서 파송된 선생으로서 활동하려고 왔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그렇게 했다. 그는 선생이요 설교자가 아니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베드로는 예수보다 훨씬 더 유능한 설교자였다. 예수의 설교는 마음을 끄는 웅변이나 감정에 호소하기 때문이 아니라, 독특한 인품 때문에 무척 힘이 있었다. 예수는 사람의 혼에게 직접 말씀하였다. 사람의 영을 가르치는 선생이었지만, 지성을 통해서 가르쳤다. 그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다.

141:7.11 (1594.5) 이 기회에 예수는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에게 땅에서 그가 하는 일은 어떤 면에서 “하늘에 있는 동료”가 당부한 것에 제한을 받는다고 털어놓았다. 이것은 자신 수여에 앞서 파라다이스 형 이마누엘이 준 지침을 언급한다. 그는 아버지의 뜻,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왔다고 일러주었다. 진심으로 한 가지 목적에 이렇게 자극받았기 때문에, 그는 세상에 있는 악을 언짢아하지 않았다.

141:7.12 (1594.6) 사도들은 예수의 꾸밈없는 친절을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비록 그를 가까이하기 쉬웠어도, 주는 언제나 어떤 인간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어떤 인간보다 높이 살았다. 한 순간이라도 어떤 순전히 인간적 영향에 지배를 받거나 허약한 인간적 판단에 지배된 적이 없었다. 그는 대중의 의견(意見)을 거들떠보지 않았고 칭찬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멈추어서 오해를 밝히거나 왜곡을 분개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는 결코 아무에게도 조언을 구하지 않았고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다.

141:7.13 (1594.7) 예수가 처음부터 끝까지 사물을 꿰뚫어보는 듯한 것에 야고보는 놀랐다. 주는 놀란 듯이 보이는 적이 드물었다. 결코 흥분하거나 답답해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에게도 사과한 적이 없었다. 때때로 슬퍼했지만, 결코 낙심하지 않았다.

141:7.14 (1594.8) 모든 신다운 자질이 있었는데도 결국은 그가 사람이라는 것을 요한은 더욱 뚜렷이 인식했다. 예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사람으로서 살았고,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였으며 사람들을 상대할 줄 알았다. 그의 사생활은 아주 인간다웠고 그래도 아무 잘못이 없었다. 언제나 이기심이 없었다.

141:7.15 (1595.1)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비록 예수가 이 기회에 하신 말씀을 그다지 많이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품위 있는 말씀은 그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었고 십자가 처형과 부활이 있은 뒤에 솟아나와서 후일에 베푼 봉사를 보람있고 기쁘게 하였다. 이 사도들이 주의 말씀을 완전히 알아듣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니, 그가 새 시대의 계획을 그들에게 미리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8. 예리고에서 일하다

141:8.1 (1595.2) 요단강 건너 베다니에서 4주 머무르는 동안 내내, 주마다 몇 번 안드레는 쌍으로 사도들에게 하루나 이틀 동안 예리고로 올라가라고 배치하곤 하였다. 요한은 전에 예리고에 많은 신자를 거느리고 있었고 그 대다수가 예수와 사도들의 더 진보된 가르침을 환영하였다. 이번 예리고 방문에서, 사도들은 아픈 사람들을 보살피라는 예수의 지시를 비로소 더 구체적으로 수행하였다. 그 도시에서 그들은 집집마다 방문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모두 위로하려고 애썼다.

141:8.2 (1595.3) 사도들은 예리고에서 대중을 상대로 얼마큼 일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대체로 전보다 조용하고 개인적인 성질의 것이었다.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은 아픈 사람들에게 매우 위로가 된다, 전하는 말씀이 고통받는 사람을 치유(治癒)하는 힘을 지녔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리고에서 열두 사도에게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고 병자들을 보살피라는 예수의 지시가 처음으로 충분히 수행되었다.

141:8.3 (1595.4)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그들은 예리고에서 멈추었다. 예수와 회담하려고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온 어느 대표단이 그들을 따라잡았다. 사도들은 여기서 하루만 보내려고 계획했지만, 동부에서 진리를 찾는 이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예수는 그들과 함께 사흘을 보냈다. 그들은 하늘나라의 새 진리를 알고서, 흐뭇한 마음으로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서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9.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다

141:9.1 (1595.5) 3월의 마지막 날 월요일에, 예수와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파른 여행 길에 올랐다. 베다니의 나사로는 예수를 만나려고 요단강에 두 번 내려온 적이 있었고,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머무르기를 바라는 한,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와 그 누이들의 집에서, 주와 사도들이 본부를 차리도록 만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141:9.2 (1595.6) 요한의 제자들은 요단강 건너의 베다니에 남아서 군중을 가르치고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예수가 나사로의 집에 다다랐을 때 오직 열두 사도가 그를 동반하였다.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여기서 예수와 사도들은 닷새 동안 머물러서 쉬고 원기를 회복했다. 주와 사도들을 나사로의 집에 모시는 것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생애에 큰 사건이었고 두 여인은 이들의 시중을 들 수 있었다.

141:9.3 (1595.7) 4월 6일 일요일 아침에, 예수와 사도들은 예루살렘으로 내려갔다. 이번에 처음으로 주와 열두 사도 모두가 함께 거기에 있었다.

제 142 편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보내다

유란시아서

제 142 편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보내다

142:0.1 (1596.1) 4월에 예수와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일했고, 저녁마다 도시 바깥으로 나가서 베다니에서 밤을 지냈다. 예수 자신은 예루살렘에 플라비우스의 집에서 주마다 하루나 이틀 밤을 보냈다. 그는 그리스계 유대인이었고 그의 집으로 많은 저명한 유대인이 몰래 예수를 만나보려고 왔다.

142:0.2 (1596.2) 예루살렘에서 첫째 날에 예수는 예전에 그의 친구였던 안나스를 찾아보았는데, 그는 한때 대사제였고 세베대의 부인 살로메의 친척이었다. 안나스는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전에 소문을 들었고, 예수가 대사제의 집을 찾았을 때 안나스는 대단히 거리끼며 접대하였다. 안나스가 냉담한 것을 알아차렸을 때 예수는 즉시 떠났는데, 가면서 말했다: “두려움은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 중에 으뜸이요 자만은 사람의 큰 약점이라. 당신은 본심을 드러내어 기쁨과 자유를 없애는 이 두 가지에 노예가 되려는가?” 그러나 안나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안나스가 사위와 함께 사람의 아들을 재판하는 자리에 앉을 때까지 주는 다시 그를 만나지 않았다.

1. 성전에서 가르치다

142:1.1 (1596.3) 이 달 내내 예수나 사도들 중에 하나가 성전에서 날마다 가르쳤다. 유월절 군중이 너무 많아서 성전에서 가르치는 곳에 들어갈 수 없을 때, 사도들은 신성한 구역 바깥에서 가르치는 여러 집단을 운영했다. 그들이 전한 말씀의 요점은 이와 같았다:

142:1.2 (1596.4) 1.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142:1.3 (1596.5) 2.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믿음으로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도 좋으며,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142:1.4 (1596.6) 3. 하늘나라 안에서는 사랑이 생활 규칙이다―하나님께 더할 나위 없이 헌신하고 한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142:1.5 (1596.7) 4.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는 것, 곧 사람의 사생활에서 영의 열매 맺는 것이 하늘나라 율법이다.

142:1.6 (1596.8) 유월절을 축하하려고 온 군중은 예수의 이 가르침을 들었고, 수백 명이 좋은 소식을 듣고 기뻐하였다. 주사제와 유대인 권력자들은 예수와 사도들에 대하여 많이 염려하고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자기들끼리 의논했다.

142:1.7 (1596.9) 성전 안과 그 근처에서 가르치는 것 외에, 사도와 기타 신자들은 유월절 군중 사이에서 개인을 상대로 많은 일을 하느라고 바빴다. 관심을 가진 이 남녀들은 이 유월절 경축 행사(行事)에 예수가 전한 말씀의 소식을 로마 제국의 가장 먼 곳까지, 그리고 또한 동부까지 가지고 갔다. 이때부터 하늘나라의 복음이 바깥 세계로 비로소 퍼졌다. 예수의 일은 이제 더 팔레스타인에 국한될 것이 아니었다.

2. 하나님의 진노

142:2.1 (1597.1) 예루살렘에는 유월절 축제에 어떤 야곱이라는 사람이 참석하였다. 그는 크레테에서 온 부유한 유대인 상인이었고 안드레에게 다가가서 예수를 사사롭게 만나기를 요청했다. 안드레는 이튿날 저녁에 플라비우스의 집에서 예수와 이 비밀 회담을 마련했다. 이 사람은 주의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그가 온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묻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야곱이 예수에게 말했다: “하지만 랍비여, 모세와 옛 선지자들은 야웨가 질투하는 하나님, 크게 노여워하고 불 같이 성내는 하나님이라고 우리에게 이르나이다. 선지자들은 야웨가 행악자를 미워하고 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복수한다고 말씀하나이다. 당신과 제자들은 하나님이 친절하고 동정심 있는 아버지요, 모든 사람을 무척 사랑하사, 당신은 이 새 하늘나라가 아주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고, 이 새 하늘나라로 저희를 반가이 맞이하리라 우리에게 가르치나이다.”

142:2.2 (1597.2) 야곱이 말을 마쳤을 때 예수는 대답했다: “야곱아, 너는 옛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잘도 말하였도다. 저희는 그 시절의 빛에 따라서 저희 세대의 아이들을 가르쳤느니라. 파라다이스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변함이 없느니라. 그러나 그의 성품에 대한 개념은 모세의 시절부터 아모스의 시절을 거쳐 선지자 이사야의 세대에 이르기까지도 확대되고 성장하였느니라. 이제, 새로이 영화로운 아버지를 드러내고 그의 사랑과 자비를 모든 세계의 만민에게 보이려고 내가 육체를 입고 왔노라. 모든 사람을 격려하고 선의(善意)를 전하는 말씀과 함께, 이 하늘나라 복음이 세상에 퍼짐에 따라서, 모든 국가 집단 사이의 관계가 개선되고 나아질 것이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아버지와 아이들은 더욱 서로 사랑하고 이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땅에서 사는 자녀들을 사랑하심을 더욱 낫게 이해하게 되리라. 야곱아, 착하고 참된 아버지는 집안 전체를―한 가족으로서―사랑할 뿐 아니라 또한 개별 식구 하나하나를 참으로 사랑하고 애정으로 보살피시느니라.”

142:2.3 (1597.3) 하늘 아버지의 성품에 대하여 상당히 토론이 있은 뒤에, 예수는 멈추어 말했다: “야곱아, 너는 여러 아이의 아버지인즉, 내 말이 진실함을 잘 아느니라.” 야곱이 말했다: “하지만 주여, 내가 여섯 아이의 아버지라고 누가 당신께 일렀나이까? 나에 관하여 이를 어찌 아셨나이까?” 주는 대답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만사를 안다 하면 충분하나니, 정말로 저희가 만물을 보는 까닭이라. 땅에서 아버지로서 네 아이들을 사랑하므로 하늘 아버지가 너를 사랑함을―아브라함의 모든 자손 뿐 아니라 너를, 너 개인의 혼을 사랑하는 것을 이제 너는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느니라.”

142:2.4 (1597.4) 그리고 나서 예수는 말씀을 이었다: “네 아이들이 아주 어리고 미숙할 때, 아이들을 꾸짖어야 할 때 아이들은 아버지가 성이 나서 격노하고 있다고 돌이켜볼지 모르느니라. 아이들이 미숙하여, 멀리 내다보고 바로잡는 아버지의 사랑을 헤아리기까지, 벌받는 것을 넘어서 앞을 볼 수 없느니라. 그러나 바로 이 아이들이 성장한 남녀가 될 때 아버지에 대하여 옛날에 가졌던 그릇된 개념에 집착하는 것이 어리석지 않겠느냐? 어른으로서 저희는 옛날에 이 모든 징계를 받은 데서 아버지의 사랑을 이제 헤아려야 하느니라. 여러 세기가 지남에 따라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참된 성질과 사랑하는 성품을 인류가 더 잘 이해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모세와 선지자들이 본 대로 하나님을 보기를 고집한다면, 영적으로 빛을 받는 연속된 세대로부터 너희가 무슨 이득을 얻느냐? 너에게 이르노니, 야곱아 너는 이 시간의 밝은 빛 아래서 앞에 간 자들이 본 것과 전혀 다르게 아버지를 보아야 하느니라. 이렇게 아버지를 보는즉 그러한 자비로운 아버지가 다스리는 하늘나라로 들어감을 기뻐하고 아버지의 사랑하려는 뜻이 이제부터 너의 일생을 지배하기를 구해야 하느니라.”

142:2.5 (1598.1) 야곱은 대답했다: “랍비여 내가 믿나이다. 나를 아버지의 나라로 인도해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3. 하나님에 대한 개념

142:3.1 (1598.2) 사도들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이 토론을 귀담아 들었고, 열두 사도는 그날 밤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하여 예수에게 많이 물었다. 이 여러 질문에 대한 주의 대답은 현대의 표현으로 다음과 같은 요약으로 제시하는 것이 최선이다:

142:3.2 (1598.3) 예수는 열두 사도를 가볍게 꾸짖었는데 그 말씀의 내용은 이렇다: 너희는 야웨 개념의 성장에 관계되는 이스라엘의 전통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교리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느냐? 다음에, 주는 더 나아가서, 유대 민족이 발전하는 과정에 걸쳐서 신 개념이 어떻게 발전했는가 사도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하나님 개념이 성장하는 다음 단계에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142:3.3 (1598.4) 1. 야웨―시나이 씨족의 신. 이것은 원시 개념의 신이었고 모세가 더 높이,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의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신 개념이 아무리 투박하든지 또는 무슨 이름으로 그의 신다운 성품을 상징하든지 상관 없이 땅에 있는 자녀들의 진정한 예배를 반드시 받아들인다.

142:3.4 (1598.5) 2. 최고자. 멜기세덱이 하늘에 계신 이 아버지 개념을 아브라함에게 선포했다. 커지고 확대된 이 신 관념을 후일에 믿은 사람들이 이것을 살렘으로부터 멀리 가지고 갔다. 태양 숭배가[1] [10]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그 동생은 우르를 떠났으며 그들은 멜기세덱이 가르친 엘 엘리욘―최고자―를 믿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들이 가진 것은 복합된 하나님 개념이었고, 이는 옛 메소포타미아 관념들과 최고자의 교리가 혼합되어 생겼다.

142:3.5 (1598.6) 3. 엘 샤다이. 이 초기 시절에 많은 히브리인이 엘 샤다이를 숭배했다. 에집트인이 가졌던 하늘의 하나님 개념이며, 히브리인은 나일강이 흐르는 땅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에 이것을 배웠다. 멜기세덱의 시절이 오래 지난 뒤에, 이 세 가지 하나님 개념은 모두 한데 합쳐서 창조자인 신,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의 교리를 이루었다.

142:3.6 (1598.7) 4. 엘로힘. 아담의 시절부터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이 지속되었다. “태초에 하나님들이[2] [11] 하늘과 땅을 지으시니라” 주장함으로 성서가 어떻게 시작되는가 생각나지 않느냐? 이는 그 기록이 만들어졌을 때, 한 분 속에 계신 세 하나님이라는 삼위일체 개념이 우리 선조의 종교에 들어갔음을 가리킨다.

142:3.7 (1598.8) 5. 최고의 야웨. 이사야의 시절이 되자 하나님에 대한 이 관념들은, 전능하고 동시에 온통 자비로운 우주의 창조자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진화하고 확대되는 이 하나님 개념은 우리 선조의 종교에서 모든 이전의 신 개념을 거의 갈아치웠다.

142:3.8 (1598.9) 6.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임을 안다. 우리의 가르침이 마련하는 종교에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것이 하늘나라 복음(福音)이 전하는 좋은 소식이다. 아들과 영은 아버지와 함께 공존한다. 하늘가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원히 영적으로 진보하는 끝없는 시대를 통해서, 이 파라다이스 신들의 성품과 봉사를 계시(啓示)하는 일은 줄곧 확대되고 밝게 보일 것이다. 항상 어느 시대에 어떤 인간이 참으로 예배하더라도―개인의 영적 진보에 관계되는 대로―참된 예배는 그에게 깃드는 영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리는 경배로서 인식된다.

142:3.9 (1599.1) 사도들은 이전 세대 유대인의 머리 속에서 하나님의 개념이 성장해 온 것을 하나하나 이야기하는 이 말씀을 듣고서 받은 것보다 더한 충격을 받은 적이 없었다. 너무나 어리둥절하여 질문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예수 앞에서 말없이 앉아 있는 동안 주는 말씀을 이었다: “너희가 성서를 읽었다면 이 진리를 알았으리라.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적하여 주의 노여움이 타올랐고 너무 심하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人口)를 세라 이르면서 저희를 대적하려고 다윗을 움직였더라’ 하고 기록된 것을 너희는 사무엘에서 읽지 아니하였느냐? 이것은 이상하지 않았으니, 사무엘의 시절에 아브라함의 자손은 야웨가 선과 악을 모두 만든다고 정말로 믿었음이라.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유대인의 개념이 확대된 뒤에, 후일에 어느 기록자가 이 사건들을 이야기했을 때 감히 악을 야웨의 탓으로 돌리지 못하였고, 그러므로 ‘그리고 사탄이 이스라엘에 대적하여 일어나서 다윗을 움직여 이스라엘의 인구를 세게 하였더라’하고 말하였느니라. 너희는 성서(聖書)에 그러한 기록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개념이 어떻게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계속하여 성장하였는가 뚜렷이 보여주는 것을 헤아릴 수 없느냐?

142:3.10 (1599.2) “이 확대되는 신(神) 개념들과 완전히 발걸음을 맞추어 신의 율법을 더욱 이해하게 된 것을 너희는 또한 헤아렸어야 하느니라. 야웨의 개념이 확대되어 계시되기 전 시절에, 에집트에서 나왔을 때 이스라엘의 자손은 십계명이 있었고 이것은 바로 시나이 산 앞에서 야영하던 시절 바로 전까지 저희의 율법으로 쓰였느니라. 이 십계명은 다음과 같았는지라:

142:3.11 (1599.3) “1. 주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니, 너희는 아무런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142:3.12 (1599.4) “2. 녹여 부은 신들을 만들지 말라.

142:3.13 (1599.5) “3. 효소 없는 빵의 축제를 지키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

142:3.14 (1599.6) “4. 사람이나 가축의 모든 수컷 가운데 처음 난 것은 내 것이라, 주가 말씀하시니라.

142:3.15 (1599.7) “5. 너희는 엿새 동안 일해도 좋으나 이렛날에 쉴지니라.

142:3.16 (1599.8) “6. 첫 열매의 축제와 연말에 거두는 축제 지키기를 거르지 말라.

142:3.17 (1599.9) “7. 어떤 희생물의 피도 효소 넣은 빵과 함께 드리지 말라.

142:3.18 (1599.10) “8. 유월절 축제에 바친 희생물을 아침까지 남겨놓지 말라.

142:3.19 (1599.11) “9. 땅에서 얻은 첫 열매 중 처음 것을 주 너희 하나님의 집으로 가져올지니라.

142:3.20 (1599.12) “10. 새끼를 어미의 젖 속에 삶지 말라.

142:3.21 (1599.13) “그리고 나서 시나이 산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는 가운데, 모세는 저희에게 새 십계명을 주었고, 너희는 모두 이것이, 야웨라는 확대되는 신 개념에 어울리게 더 가치 있는 말씀이라 인정하리라. 너희는 이 계명(誡命)들이 성서에 두 번 기록된 것을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아니하였느냐? 처음 경우에는 에집트로부터 구원받은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까닭이라고 지정되었고, 한편 후일의 기록에 우리 선조의 진보하는 종교 관념은 창조라는 사실이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라 인정하는 것이라고 이를 시정하기를 요구하였느니라.

142:3.22 (1599.14) “다음에―이사야의 시절에 더 크게 영적 깨우침을 받아―이 부정적 십계명이 크고 긍정적인 사랑의 율법으로, 하나님을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바뀌었음을 너희가 다시 한 번 기억하리라. 나도 또한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이 최상의 율법이 사람의 총 의무이니라.”

142:3.23 (1600.1) 말씀을 마쳤을 때,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저마다 잠자러 갔다.

4. 플라비우스와 그리스 문화

142:4.1 (1600.2) 플라비우스는 그리스계 유대인이요, 할례도 세례도 받지 않고서 문전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예술품과 조각(彫刻)을 크게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머무를 때 그가 차지한 집은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이 집은 세계를 여행할 때 여기저기서 수집했던 귀중한 보물로 절묘하게 꾸며져 있었다. 처음에 예수를 집으로 초대하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이른바 이 우상(偶像)들을 보고서 주가 언짢아할까 두려웠다. 하지만 예수가 집에 들어섰을 때, 집에 여기저기 흩어 놓은, 우상이라고 생각되는 물건들 때문에 그를 꾸짖는 대신에 예수는 수집품 전체에 크게 흥미를 나타냈다. 이 방 저 방 예수를 안내하고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조각들을 모두 보여드리는 동안에 예수가 각 작품에 대하여 식견이 있는 질문을 많이 던져서 플라비우스는 놀랍고 기뻤다.

142:4.2 (1600.3) 주는 호감(好感)을 가지고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 주인이 어리둥절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므로 수집품 전부를 둘러보기를 마치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내 아버지가 지으신 것과 사람의 예술적인 손이 빚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네가 이해한다고 해서, 너는 어찌하여 꾸지람을 기대하느냐? 모세가 한때 우상 숭배와 거짓 신 섬기는 일을 퇴치하려고 애썼다고 해서, 어찌하여 품위와 아름다움을 재생한 작품에 모든 사람이 눈살을 찌푸려야 하느냐? 너 플라비우스에게 이르노니, 모세의 자손들은 그를 오해하였고 이제는 하늘과 땅에 있는 것들의 우상과 형상(形象)에 관한 그의 금지 조치도 저희가 거짓 신으로 만드느니라. 그러나 그 시절의 무지한 자들에게 모세가 그러한 제한 조치를 가르쳤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만물을 다스리는, 우주의 영 통치자임이 드러난 오늘날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플라비우스야 내가 선언하노니, 다가오는 하늘나라에는 사람들이 ‘이를 섬기지 말라, 저를 섬기지 말라’ 더 가르치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이 이제는 더 이것을 삼가고 저것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명령에 아랑곳하지 아니하리라. 오히려 모두가 한 가지 최고의 임무에 마음을 쓰리라. 사람의 이 임무는 두 가지 큰 특권에 나타나 있으니, 무한한 창조주,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진지하게 섬기는 것과 동료 인간에게 사랑으로 봉사를 베푸는 것이라. 네 몸을 사랑하는 것 같이 네가 이웃을 사랑하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너는 정말로 아느니라.

142:4.3 (1600.4) “내 아버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던 시대에, 모세가 우상을 물리치려 했던 시도는 옳다고 생각되었으나 다가오는 시대에 아버지는 아들의 일생에서 드러나리라. 하나님의 이 새로운 계시는 영원히, 창조주 아버지를 돌로 만든 우상이나 금은으로 만든 형상과 혼동할 필요가 언제까지나 없게 하리라. 이제부터, 총명한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그렇게 물질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 만물과 모든 존재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을 혼동하지 않고서 소중한 예술품을 즐겨도 좋으니라.”

142:4.4 (1600.5) 플라비우스는 예수가 가르친 것을 다 믿었다. 이튿날 요단강 건너에 베다니로 가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한 것은 예수의 사도들이 믿는 사람들에게 아직 세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플라비우스는 예수를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고 친구 60명을 불렀다. 이 손님들 가운데 다수가 또한 다가오는 하늘나라를 전하는 말씀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

5. 확신에 대한 강연

142:5.1 (1601.1) 이 유월절 주간에 성전에서 예수가 하신 큰 설교 중의 하나는 말씀을 듣던 사람, 다마스커스에서 온 한 남자의 물음에 답하여 한 설교이다. 이 사람은 예수에게 물었다: “하지만 랍비여, 하나님이 당신을 보냈는지, 그리고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치는데 거기에 우리가 참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나이까?” 그리고 예수는 대답했다:

142:5.2 (1601.2) “나의 말과 내 제자들의 가르침에 관하여 말하면, 너희는 이를 그 열매로 판단해야 하느니라. 우리가 영의 진리를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 영이 너희 마음 속에서 우리가 전하는 말이 진정함을 증언하리라. 하늘나라에 관하여, 그리고 하늘의 아버지가 받아들인다는 너의 확신에 관하여 말하노니, 내가 묻건대 너희 가운데 훌륭하고 마음이 친절한 어떤 아버지가, 집안에서 아들이 어떤 지위에 있는가 또는 아버지의 마음 속에서 사랑받는 안전한 처지에 있는가 아들을 걱정시키거나 불안(不安)에 떨도록 버려두겠느냐? 너희는 땅에서 아버지이면서, 자식들이 인간적인 너희 마음 속에서 변치 않는 사랑을 받는 자리에 있는가 불안하게 의심하도록 자녀 괴롭히기를 좋아하느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믿는 자녀, 영의 자녀들이 하늘나라에서 저희가 어떤 자리에 있는가 불안하게 의심하도록 버려두지 않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면, 정말로 그리고 진실로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가 아들이어든, 영원하고 신다운 아들에 관계되는 어떤 일에도 너희의 위치와 신분은 안전하니라. 너희가 내 말을 믿으면, 믿음으로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요, 이렇게 아버지를 믿음으로 하늘 시민의 지위를 확실하게 만들었느니라.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면 신의 나라에서 진보(進步)하는 영생을 얻는 데 결코 그르치지 아니하리라.

142:5.3 (1601.3) “최상의 영은 너희가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너희 영에게 증언하리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너희는 하나님의 영에게서 태어났느니라. 영에게서 태어난 자는 누구나 몸 안에 어떤 의심도 이길 힘을 가졌고, 이것이 의심스러운 모든 것, 아니 너희의 믿음조차 이기는 승리이라.

142:5.4 (1601.4) “선지자 이사야가 이 시절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더라: ‘영이 위에서부터 우리에게 쏟아질 때, 올바름의 결과는 영원히 평화ㆍ고요함ㆍ확신이 되리라.’ 이 복음을 참으로 믿는 모든 사람에게, 나는 영원한 자비와 영생이 있는 내 아버지의 나라로 저희를 받아들인다는 보장이 되리라. 그러면 이 소식을 듣고 이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영원한 생명을 가지느니라. 온 세계에 너희가 영에게서 태어났다는 증명은 너희가 진지하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

142:5.5 (1601.5) 듣고 있던 군중은 오랜 시간 예수와 함께 남아 있었고, 말씀을 묻고 위로가 되는 그의 대답을 주의 깊게 들었다. 예수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사도들도 대담해져서 더 큰 힘과 확신을 가지고 하늘나라 복음을 전파하였다. 예루살렘에서 가진 이 체험은 열두 사도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이렇게 엄청난 군중과 접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들은 많은 귀중한 교훈을 얻었고 이것이 후일에 일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6. 니고데모와 이야기하다

142:6.1 (1601.6) 플라비우스의 집에서 어느 날 저녁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예수를 만나러 왔다. 그는 부유하고 나이가 지긋한, 유대인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다. 그는 이 갈릴리 사람의 가르침에 관하여 많은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어느 날 오후 예수가 성전 마당에서 가르치는 동안 말씀을 들으러 갔다. 예수가 가르치는 것을 자주 들으러 갔을 터이지만 그는 가르침에 참석한 사람들의 눈에 뜨일까 두려워했다. 유대인 권력자들이 예수와 너무나 사이가 틀어져 있어서, 어떤 산헤드린 회원도 드러내놓고 한편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고데모는 바로 이날 저녁에, 밤이 된 뒤에 은밀하게 예수와 만나려고 안드레와 주선하였다. 회견이 시작되었을 때,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은 플라비우스의 집 뜰에 있었지만 나중에 모두 강론이 진행되고 있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142:6.2 (1602.1) 니고데모를 맞이하면서 예수는 아무런 특별한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함께 이야기하는 동안 아무런 타협이나 지나친 설득이 없었다. 주는 남몰래 찾아온 사람을 내쫓으려 하지 않았고 빈정거리지도 않았다. 탁월한 방문자를 다루는 모든 면에 예수는 차분하고 진지하고 위엄이 있었다. 니고데모는 산헤드린이 보낸 공식(公式) 대표가 아니었다. 예수를 만나려고 온 것은 전적으로 주의 가르침에 개인적으로 진지하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142:6.3 (1602.2) 플라비우스가 인사를 시키고 나자, 니고데모는 말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생인 줄을 우리가 아오니,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고 보통 사람이기만 하다면 그리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나이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다가올 나라에 관한 당신의 가르침을 더욱 알고 싶나이다.”

142:6.4 (1602.3)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대답했다. “진실로 진실로 너 니고데모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하늘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러자 니고데모가 대답했다: “그러나 나이 든 사람이 어찌 다시 태어날 수 있나이까? 사람은 태어나려고 또 다시 어머니 자궁 속으로 들어갈 수 없나이다.”

142:6.5 (1602.4) 예수는 말했다: “그렇다 하여도 내가 선언하노니, 사람이 영에게서 태어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체에게서 태어난 것은 육체요 영에게서 태어난 것은 영이라. 그러나 네가 하늘로부터 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에 놀라지 말아야 하느니라. 바람이 불 때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나―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바람은 보이지 않으며, 영에게서 태어난 자는 누구나 또한 그러하니라. 육체의 눈으로 사람은 영이 나타나는 표현을 볼 수 있어도 그 영을 실제로 헤아려 볼 수 없느니라.”

142:6.6 (1602.5) 니고데모는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알아듣지 못하나이다―어찌 그럴 수 있나이까?” 예수가 말했다: “네가 이스라엘에서 선생이면서도 이 모든 것을 모르다니 그럴 수 있느냐? 그러면 물질 세계에서 눈에 보이는 현상만 알아보는 자에게 이를 드러내는 것이 영의 실체들을 아는 자의 의무가 되느니라. 그러나 우리가 하늘의 진리를 너에게 이르면 네가 우리를 믿겠느냐? 니고데모야, 하늘에서 내려온 자를, 아니 사람의 아들까지도 네가 믿을 용기가 있느냐?”

142:6.7 (1602.6) 니고데모는 말했다: “그러나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준비로서 나를 다시 만들 이 영을 어떻게 내가 비로소 붙잡을 수 있나이까?” 예수가 대답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영이 이미 네 안에 깃드시느니라. 네가 하늘로부터 온 이 영의 인도함을 받고자 하면, 오래지 않아 너는 비로소 영의 눈으로 보리라. 그리고 나서 네가 사는 유일한 목적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리니, 영의 안내를 받은 진지한 선택으로 인하여 네가 영에게서 태어나리라. 네 몸이 영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에서 행복하게 태어났음을 그렇게 발견하고 나서, 일상 생활에서 너는 영의 풍부한 열매를 비로소 맺으리라.”

142:6.8 (1602.7) 니고데모는 속속들이 진지했다. 깊이 감명을 받았으나 어리둥절해서 가버렸다. 니고데모는 자아의 개발, 자제, 그리고 높은 도덕적 성품 면에서 성숙한 사람이었다. 그는 세련되었고 자기 본위요 이타심이 있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지혜롭고 인자한, 세상의 아버지의 안내와 인도함에 기꺼이 복종하는 것 같이, 어떻게 그의 뜻을 신성한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키는가, 이렇게 함으로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 영원한 나라를 물려받는 진보하는 상속자가 되는가 알지 못했다.

142:6.9 (1603.1) 그러나 니고데모는 하늘나라를 붙잡기에 충분한 믿음을 불러일으켰다. 산헤드린의 동료들이 심문하지도 않고 예수를 정죄하려 했을 때 그는 미약하게 항의(抗議)했다. 나중에 대부분의 제자들이 주가 마지막으로 고통받고 죽는 장면에서 무서워 달아났을 때에도,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신앙을 용감하게 인정하고 예수의 시체를 요청했다.

7. 가족에 대한 교훈

142:7.1 (1603.2)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주간에 가르치고 개인을 상대로 일하던 바쁜 기간이 지난 뒤에, 예수는 다음 수요일에 베다니에서 사도들과 함께 쉬면서 지냈다. 그날 오후에 토마스는 한 말씀을 물었고 이것은 길고도 교육이 되는 대답을 끌어냈다. 토마스가 말했다: “주여, 우리가 하늘나라의 대사로서 따로 세움받은 날에, 당신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르시고 우리의 개인적 생활 형태에 관하여 가르쳤나이다. 그러나 우리가 군중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리이까? 하늘나라가 더 분명히 온 뒤에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리이까? 당신의 제자들은 종을 가져야 하리이까? 당신을 믿는 자들은 가난과 벗하고 재산을 멀리 해야 하리이까? 자비만 우선하고, 그래서 이제 우리에게 아무런 율법과 응보가 없어야 하리이까?” 예수와 열두 사도는 오후 내내, 또 식사가 있은 뒤에 그날 저녁 내내, 토마스의 질문을 논의하면서 보냈다. 여기에 기록할 목적으로 우리는 주의 가르침의 다음 요약(要約)을 제시한다:

142:7.2 (1603.3) 예수는 사도들에게 먼저 다음을 분명히 일러주려고 애썼다. 자신은 땅에서 육체를 입고 독특한 일생을 살고 있다, 그들 열두 사람은 사람의 아들의 수여 체험에 참여하라고 부름받았다, 그렇게 같이 일하는 사람으로 그들도 수여 체험 전체에서 많은 특별한 제한과 의무를 같이 져야 한다고.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깊은 중심과 사람의 혼의 가장 깊은 곳을 동시에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 땅에서 일찍이 산 유일한 사람인 것을 넌지시 비치는 말씀이 있었다.

142:7.3 (1603.4) 예수는 하늘나라가 여기 땅에서 시작하여, 연달아 생명의 여러 정거장을 거쳐 파라다이스까지 진보하는, 점진적 체험이라고 아주 뚜렷이 설명했다. 저녁이 지나는 동안, 하늘나라가 발전하는 어떤 미래 단계에 그가 영적 권력과 신의 영광을 입고서 이 세계를 다시 찾아보리라고 분명히 말했다.

142:7.4 (1603.5) 다음에 “하늘나라 관념”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런 비유법을 쓴 것은 유대 민족이 하늘나라를 기대했고 요한이 다가올 나라라는 표현으로 전도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수는 말했다: “또 다른 시대의 사람들은 하늘나라 복음이 가족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제시되었을 때―종교는 하나님이 아버지이며 사람들이 형제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사람이 이해할 때―그 복음을 더욱 잘 알아들으리라.” 다음에 주는 하늘 가족을 보여주는 예로서 이 세상의 가족에 관하여 얼마큼 길게 강론(講論)하고, 두 가지 근본 생활 법칙을 다시 표현하였다: 아버지, 곧 집안의 우두머리를 사랑하는 첫째 계명, 그리고 아이들끼리 서로 사랑하라, 형제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이다. 그리고 나서 그러한 성질의 형제 사랑은 항상, 사심없이 사랑으로 사회에 봉사함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하였다.

142:7.5 (1603.6) 이 뒤에, 가족 생활의 근본적 특징에 관하여, 그리고 이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대하여 기억에 남을 토론이 뒤따랐다. 예수는 참된 가족이 다음 일곱 가지 사실에 바탕을 둔다고 말했다:

142:7.6 (1604.1) 1. 존재에 관한 사실. 성품이 관계된 것과 사람이 서로 비슷한 현상은 가족 안에서 연결된다: 아이들은 부모의 어떤 특성을 물려받는다.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생겨난다. 인격자의 존재는 부모의 행위에 달려 있다. 아버지와 아이의 관계는 모든 자연에 본래부터 있고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 퍼져 있다.

142:7.7 (1604.2) 2. 안전과 쾌락. 참된 아버지는 아이들이 필요한 것을 마련해주기를 크게 기뻐한다. 아버지들 중에 다수는 아이들의 단순한 필요만 충족시키는 데 만족하지 않으며, 쾌락도 즐겁게 마련해준다.

142:7.8 (1604.3) 3. 교육과 훈련. 지혜로운 아버지는 아들딸의 교육과 적당한 훈련을 주의 깊게 계획한다. 아이들은 어릴 때 후일의 생애에 더 큰 책임을 맡으려고 준비된다.

142:7.9 (1604.4) 4. 규율과 자제. 멀리 내다보는 아버지는 또한 어리고 미숙한 자식의 필요한 징계ㆍ안내ㆍ교정, 그리고 때로는 금지 조치를 마련한다.

142:7.10 (1604.5) 5. 교제와 충성. 인정 많은 아버지는 아이들과 가깝고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한다. 언제나 귀는 간청을 들으려고 열려 있으며, 그들의 어려움을 나누고 어려운 문제에 닥쳐 늘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아버지는 자식의 진보하는 복지에 더할 나위 없이 흥미를 가진다.

142:7.11 (1604.6) 6. 사랑과 자비.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는 아낌없이 용서하며,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앙갚음하려는 기억을 간직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재판관이나 적이나 채권자와 같지 않다. 진정한 가족은 너그러움ㆍ참을성ㆍ용서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

142:7.12 (1604.7) 7. 미래를 위한 준비. 현세의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유산(遺産)을 남겨주고 싶어한다. 가족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죽음은 오직 한 세대를 끝내고 다른 세대가 시작됨을 표시한다. 죽음은 개인의 생명을 그치게 하지만 반드시 가족의 생명을 그치게 하지 않는다.

142:7.13 (1604.8) 몇 시간 동안 주는 가족 생활의 이 모습이 땅에서 아이인 사람과 파라다이스 아버지인 하나님의 관계에 적용되는 것을 논의했다. 이것이 결론이었다: “아들과 아버지의 모든 관계를 내가 완벽하게 아노니, 영원한 미래에 너희가 아들로서 도달해야 하는 모든 것을 내가 지금 이미 도달하였음이라. 사람의 아들은 아버지의 바른 편으로 올라갈 준비가 되어 있고, 그래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가 완전하게 되는 영화로운 진보를 마치기 전에 너희 모두가 하나님을 보라고 내 안에 길이 더욱 활짝 열려 있느니라.”

142:7.14 (1604.9) 이 놀라운 말씀을 들었을 때, 사도들은 예수가 세례받을 때 요한이 선언한 말씀을 상기했다. 주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뒤에, 그들이 전도하고 가르친 것과 연관하여 이 체험을 또한 눈에 선하게 기억했다.

142:7.15 (1604.10) 예수는 신다운 아들, 우주의 아버지가 완전히 신임하는 아들이다.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 아버지를 완전히 이해한다. 이제 아버지의 마음에 흡족하기까지 땅에서 일생을 살았다. 육체를 입은 이 육신화는 그로 하여금 사람을 충분히 이해하게 만들었다. 예수는 완전한 사람이었다. 모든 참 신자가 그 안에서, 그를 통하여, 달성할 운명을 가진 바로 그러한 완전에 그는 이미 도달했다.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을 사람에게 계시하였고, 자신의 몸 속에 이 땅에서 완전하게 된 아들을 하나님께 내놓았다.

142:7.16 (1605.1) 예수는 몇 시간 동안 말씀했지만, 토마스는 아직 만족해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여, 우리가 보아하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를 언제나 친절하고 자비롭게 다루시지는 아니하나이다. 여러 번 우리는 땅에서 가혹하게 고생하고, 우리의 기도가 언제나 응답받지는 못하나이다. 어느 부분에서 우리가 당신의 가르침의 뜻을 깨닫지 못하나이까?”

142:7.17 (1605.2) 예수는 대답하였다: “토마스야 토마스야, 얼마나 있어야 네가 영의 귀로 듣는 능력을 얻겠느냐? 이 나라는 영적인 나라요, 내 아버지 또한 영적 존재인 것을 헤아리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리겠느냐? 하늘의 영 가족의 우두머리인 아버지는 무한하고 영원한 영이며, 너희를 그 가족의 영적 자식으로서 내가 가르치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내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 물질적 일에 적용하지 않고서 내가 땅의 가족을 신성한 관계의 예로 사용하는 것을 너희가 막겠느냐? 머리 속에서 하늘나라의 영적 실체들과 당대의 물질ㆍ사회ㆍ경제ㆍ정치 문제를 분리할 수 없느냐? 내가 영의 언어(言語)로 말할 때, 예를 들 목적으로 평범하고 글자 그대로의 관계를 감히 쓴다고 해서, 어찌하여 내가 의미한 것을 육체의 언어로 풀이하기를 고집하느냐? 아이들아 부탁하건대, 너희는 영의 나라의 가르침을 노예 제도, 빈곤, 집, 토지와 같은 더러운 일에, 그리고 인간의 공평과 응보라는 물질적 문제에 적용하기를 그만두어라. 이 현세의 문제들은 이 세상 사람들의 걱정거리요, 어떤 면에서 그 문제들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는 하여도, 내가 내 아버지를 대표하는 것 같이 너희는 세상에서 나를 대표하라고 부름받았느니라. 너희는 영의 나라를 대표하는 영적 대사(大使)요, 영 아버지의 특별한 대표이라. 이때가 되어서, 영의 나라에서 완전히 성장한 어른으로서 너희를 가르칠 수 있어야 하리라. 내가 늘 너희를 겨우 어린아이로 대해야 하느냐? 언제 너희의 영적 이해가 자라겠느냐? 그렇다 하여도, 육체를 입은 우리의 관계가 끝나는 바로 그날까지도 나는 너희를 사랑하고 참으리라. 그때에도 내 영이 너희보다 먼저, 온 세상으로 가리라.”

8. 남쪽 유대 땅에서

142:8.1 (1605.3) 4월 말이 되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사이에서 예수에 대한 반대가 너무 두드러져서 주와 사도들은 한동안 예루살렘을 떠나기로 작정했고, 베들레헴과 헤브론에서 일하려고 남쪽으로 갔다. 5월 한 달 전체가 이 두 도시에서, 그리고 둘러싼 마을의 사람들 사이에서, 개인을 상대로 하는 일에 쓰였다. 이 여행에는 아무런 대중 전도가 없었고 그들은 다만 집집마다 사람들을 방문하였다. 사도들이 복음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보살피는 동안, 예수와 아브너는 이 기간의 일부를 엥게디에서 지내면서 나지르인의 거류지를 찾아보았다. 세례자 요한은 전에 이 자리에서 길을 나섰고 아브너는 이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나지르인 단체의 여러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이 이상한 고행자들의 대다수는 예수를 하늘이 보낸 선생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가 금식 및 다른 형태의 금욕(禁慾)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142:8.2 (1605.4)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을 몰랐다. 대다수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언제나 주가 나사렛에서 태어났으리라 짐작했지만, 열두 사도는 사실을 알았다.

142:8.3 (1605.5) 유대 지방의 남부에서 머무른 이 기간은 편안하고 수고의 열매가 풍부히 열린 때였다. 하늘나라에 많은 사람이 늘어났다. 6월초가 되자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반대하는 소동이 아주 잠잠해졌고, 그래서 주와 사도들은 신자들을 가르치고 위로하는 일로 돌아갔다.

142:8.4 (1606.1) 예수와 사도들이 6월 전체를 예루살렘 안이나 근처에서 보냈어도 이 기간에는 조금도 대중을 가르치지 않았다. 대체로 텐트 안에서 살았고 그 시절에 겟세마네라고 알려진 그늘진 공원(公園), 즉 동산에 텐트를 세웠다. 이 공원은 올리브산의 서쪽 비탈에 있었고 기드론 시냇물에서 멀지 않았다. 그들은 안식일 주말에 보통 베다니에서 나사로와 그 자매들과 함께 보냈다. 예수는 겨우 몇 번 예루살렘의 담 안으로 들어갔으나 관심이 있어 묻는 사람들의 큰 무리가 그와 이야기하려고 겟세마네로 나왔다. 어느 금요일 저녁 니고데모와 어떤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를 보러 왔지만, 주의 텐트 입구 앞에서 서 있기까지 했는데 그 뒤에 두려워서 돌아갔다. 물론, 예수가 그들이 무슨 일을 했는가 모두 알고 있음을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142:8.5 (1606.2)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을 알았을 때, 유대인 권력자들은 예수를 붙잡으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그가 전혀 대중을 가르치지 않는 것을 지켜보고, 그들이 이전에 소동을 벌인 것에 그가 겁을 먹었는가 보다고 결론을 내렸고 그를 더 다치지 않고 이렇게 사사로운 방법으로 계속 가르치는 것을 버려두기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6월 마지막 날까지 일은 조용히 진행되었다. 이때 어떤 시몬이라는 산헤드린 회원이 예수의 가르침을 드러내놓고 지지하였고, 이미 유대인 권력자들 앞에서 그렇게 선언하였다. 당장에 예수를 체포하려는 새로운 소란이 벌어졌고, 너무나 시끄러워서 주는 사마리아와 데카폴리스 지방의 여러 도시로 물러가기로 결정했다.

제 143 편 사마리아를 거쳐서

유란시아서

제 143 편

사마리아를 거쳐서

143:0.1 (1607.1) 서기 27년 6월말에,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의 반대가 커졌기 때문에, 예수와 열두 사도는 텐트와 자질구레한 개인 소지품을 베다니의 나사로 집에 저장하려고 보낸 뒤에 예루살렘을 떠났다. 북쪽으로 사마리아로 들어가면서 그들은 안식일 동안 베델에서 머물렀다. 여기서 그들은 고프나와 에브라임에서 온 사람들에게 며칠 동안 전도했다. 아리마대와 탐나에서 온 시민들의 무리가 와서 자기네 마을을 방문해달라고 예수를 초청하였다. 주와 사도들은 이 지역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을 가르치면서 2주가 넘게 시간을 보냈다. 여러 사람이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을 들으려고 멀리 안티파트리스에서도 왔다.

143:0.2 (1607.2) 남부 사마리아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사도들은 사마리아인에 대하여 많은 편견을 버리는 데 성공했다. 유다가 이 사마리아인들을 사랑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7월 마지막 주에 예수와 동료들은 요단강 가까이, 새 그리스 풍의 도시 파사엘리스와 아켈라이스를 향하여 떠나려고 준비했다.

1. 아켈라이스에서 전도하다

143:1.1 (1607.3) 8월의 처음 절반 동안 사도 일행은 그리스 풍의 도시 아켈라이스와 파사엘리스에서 본부를 차렸다. 거기서 거의 순전히 이방인― 그리스인ㆍ로마인ㆍ시리아인―들의 모임에게 전도하는 첫 경험을 얻었는데, 거의 아무 유대인도 이 두 그리스 풍의 마을에서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로마 시민들과 접촉하면서 사도들은 다가오는 하늘나라 소식을 선포하는 데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直面)하고 예수의 가르침에 대하여 새로운 반대에 부닥쳤다. 사도들과 가진 많은 저녁 회의 중 하나에서, 열두 사도가 개인적으로 수고하여 얻은 사람들과 겪은 체험을 되풀이하는 동안, 예수는 이들이 하늘나라 복음에 반대하는 이유를 주의 깊게 들었다.

143:1.2 (1607.4) 빌립의 질문은 사도들이 겪는 대표적인 어려움이었다. 빌립은 말했다: “주여, 이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우리가 전하는 소식을 가벼이 여기고 그러한 가르침은 오직 허약자와 노예에게 어울린다 하나이다. 이방인의 종교는 힘세고 튼튼하고 공격적 인품을 얻으라고 북돋아주므로 우리의 가르침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하나이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고분고분한 무저항자의 허약한 표본으로 바꾸려 하고 그런 자들은 지상에서 곧 멸망하리라 주장하나이다. 주여, 저희는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의 가르침이 하늘같고 이상적이라고 아낌없이 인정하지만 우리를 진지하게 상대하려 하지 않나이다. 당신의 종교는 이 세상에 맞지 않고 사람들은 당신이 가르치는 대로 살 수 없다고 주장하나이다. 이제 주여, 이 이방인들에게 우리가 무어라고 이르리이까?”

143:1.3 (1607.5) 토마스, 나다니엘, 열심당원 시몬, 마태가 내놓은 이유, 하늘나라 복음을 반대하는 비슷한 이유를 듣고 난 뒤에, 예수는 열두 사도에게 말했다:

143:1.4 (1608.1)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의 사랑하는 성품을 온 인류에게 드러내려고 내가 이 세상으로 왔노라. 형제들아, 그것이 내 사명이라. 오늘날이나 또 다른 세대에 유대인이나 이방인(異邦人)이 내 가르침을 오해하는 것과 상관 없이 나는 이것 하나를 해내리라. 그러나 너희는 신의 사랑에도 엄한 징계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라.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생각이 모자라는 자식의 지혜롭지 못한 행위를 억제하도록 아버지를 때때로 재촉하느니라. 지혜롭게 사랑으로 아버지가 징계하는 그 동기를 자식이 반드시 이해하지는 못하느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파라다이스에 계시는 내 아버지는 저항할 수 없는 사랑의 힘으로 온 우주를 다스리느니라. 사랑은 모든 영 실체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라. 진리는 사람을 해방하는 계시이지만, 사랑은 최상의 관계이라. 너희 동료 인간들이 오늘날의 세계를 관리하면서 무슨 잘못을 저지르든 상관 없이,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에는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는 복음이 바로 이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 인간의 진보가 이룰 궁극의 목표는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경건하게 인식하는 것과 사람이 형제임을 사랑으로 실현하는 것이라.

143:1.5 (1608.2) “그러나 내 복음이 겨우 노예나 허약자에게 주려고 의도한 것이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렀느냐? 너희, 내가 뽑은 사도들이 허약자를 닮았느냐? 요한이 허약자 같더냐? 너희는 내가 두려움에 노예가 된 것을 보느냐? 이 세대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이 복음을 전도받은 것이 참말이라. 이 세상의 종교들은 가난한 자를 소홀히 여겼으나, 내 아버지는 사람을 차별하는 분이 아니라. 게다가 오늘날의 가난한 자는, 뉘우치고 아들인 것을 받아들이라는 부름을 먼저 주목하는 자이니라. 하늘나라의 복음은 모든 사람―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인과 로마인, 부자와 가난한 자, 자유로운 자와 매인 자―에게, 그리고 젊은이와 늙은이, 남자와 여자에게 똑같이 전파되어야 하느니라.

143:1.6 (1608.3) “내 아버지가 사랑의 하나님이요 자비 베풀기를 기뻐한다고 해서, 하늘나라의 봉사가 지루하게 편한 일이라는 생각에 젖지 말라.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것은 영원히 최고의 모험이요 영원을 향하는 험난한 성취이라. 땅에서 하늘나라에 봉사하는 것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일하는 자들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용감한 남성(男性) 자질을 모두 요구하리라. 너희 가운데 여럿은 이 하늘나라 복음에 충성한 까닭에 죽음을 당하리라. 함께 싸우는 친구들이 있어 너희의 용기가 강화될 때는 육체의 싸움터에서 죽기가 쉽거니와, 인간의 가슴 속에 소중히 여기는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차분하게, 온전히 혼자서 목숨을 버리는 데는 더 높고 깊은 형태의 인간다운 용기와 헌신이 요구되느니라.

143:1.7 (1608.4) “오늘날, 믿지 않는 자는 무저항의 복음을 전도하고 폭력을 쓰지 않고 일생을 사는 너희를 비웃을지 모르나, 너희는 이 하늘나라 복음을 진지하게 믿는 자의 긴 대열에서 처음으로 나선 자요, 이 가르침에 영웅답게 헌신함으로 온 인류를 놀라게 하리라. 너희와 충성스러운 너희의 후계자들은 좋은 소식―하나님이 아버지요 사람들이 형제임―을 외치며 온 세계로 떠나가리니, 저희가 장래에 보일 것보다 세계의 어느 군대도 더 큰 용기와 용감을 보인 적이 없느니라. 육체의 용기는 가장 낮은 형태의 용감이라. 정신의 용기는 더 높은 종류의 인간다운 용기이나, 가장 높고 지극한 용기는 깊은 영적 실체들을 깨우친 확신에 굳세게 충성하는 것이라. 그러한 용기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영웅다운 정신이라. 너희는 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요, 진실로 개인적으로 사람의 아들을 아는 동료이라.”

143:1.8 (1608.5) 이것은 그 기회에 예수가 하신 말씀의 전부가 아니라 그 연설의 서론이다. 예수는 이 선언을 확대하고 예를 들면서 아주 자세히 말씀을 이었다. 이 말씀은 예수가 일찍이 열두 사도에게 가장 열심히 하신 연설 중에 하나였다. 주는 뜨거운 감정이 눈에 뜨일 정도로 사도들에게 말씀한 적이 드물었다. 그러나 이것은 뚜렷한 감정과 더불어, 열심히 말씀하신 드문 기회 중의 하나였다.

143:1.9 (1609.1) 사도들이 대중에게 전도하고 개인을 상대로 봉사한 결과는 즉시 나타났다. 바로 그날부터 그들이 전파하는 소식에는 용기가 솟아오르는 새로운 음성이 담겨 있었다. 열두 사도는 하늘나라의 새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하는 정신을 계속 몸에 익혔다. 이날 이후로 계속하여 그들은 다채로운 주의 가르침 중에 소극적 미덕과[1] [12] 수동적 명령을 전파하는 데 분주하지 않았다.

2. 자제에 대한 교훈

143:2.1 (1609.2) 주는 인간의 자제(自制)를 완전히 통달한 표본이었다. 욕설을 듣고서 욕하지 않았다. 고통받을 때, 괴롭히는 사람에게 위협하는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적들에게 비난을 받았을 때,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올바른 판결에 자신을 맡겼다.

143:2.2 (1609.3) 어느 날 저녁 회의에서, 안드레는 예수께 물었다: “주여, 요한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처럼 우리가 금욕(禁慾)을 실천해야 하나이까, 아니면 당신이 가르치는 자제를 얻고자 애써야 하리이까? 당신의 가르침과 요한의 가르침이 어떤 점에서 다르니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요한은 정말로 조상들의 빛과 율법에 따라서 올바른 길을 너희에게 가르쳤고, 그 길은 자기 반성과 금욕의 종교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자기를 잊고 자제하라는 새 소식을 가지고 오노라. 나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나에게 드러내신 생명의 길을 너희에게 보이노라.

143:2.3 (1609.4)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자아를 다스리는 자는 한 도시를 점령하는 자보다 크니라. 자제는 사람의 도덕적 성품을 재는 척도요, 영적 성장의 정도를 가리키는 지표이라. 옛 체제 밑에서 너희는 금식하고 기도하였느니라. 영에게서 다시 태어난 새 사람으로서 너희는 믿고 기뻐하라는 가르침을 받느니라.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는 새 사람이 되어야 하고 옛 것은 사라져야 하느니라. 보라, 어떻게 모든 것이 새롭게 될 것인가 내가 보이노라. 너희가 서로 사랑함으로 속박된 처지를 벗어나 해방된 신분을 얻고, 죽음을 벗어나 영생(永生)을 얻었다는 확신을 너희가 세상에 주어야 하느니라.

143:2.4 (1609.5) “옛 길을 따르면 너희는 참고 복종하고 생활 규칙에 순응하기를 구하느니라. 새 길을 따르면 먼저 진리의 영이 너희를 변화시키고, 이렇게 함으로 네 정신을 항상 영적으로 새롭게 하여 네 마음 속 혼이 강하게 되며, 너희는 그렇게 하나님의 인자하고 적절하고 완전한 뜻을 확실히 기쁘게 행하는 힘을 부여받느니라. 잊지 말라―하나님의 지극히 크고 값진 약속을 개인적으로 믿는 것이 네가 신다운 성품을 받는 자가 되는 것을 보장하느니라. 이처럼 너희의 믿음으로, 영이 변화됨으로 너희는 실제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며 그의 영이 사실로 네 안에 거하느니라. 그런즉 그 영이 네 안에 거하면, 너희는 이제 더 육체에 매인 노예가 아니라 자유롭고 해방된 영의 아들이라. 자아를 구속하는 두려움과 금욕에 노예가 되는 옛 율법 대신에, 영의 새 율법은 자제로 생기는 해방을 너희에게 부여하느니라.

143:2.5 (1609.6) “너희가 나쁜 일을 했을 때, 여러 번, 너희 행위를 악한 자의 탓으로 돌리려고 생각했으나, 실제는 자신의 자연스러운 성향에 따라서 그릇된 길에 빠졌을 뿐이라. 오래 전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인간의 마음은 무엇보다도 속이는 성향이 있고, 때로는 지독하게 사악(邪惡)하기까지 하다고 너희에게 이르지 않더냐? 너희가 스스로 속고, 그리하여 어리석은 두려움, 약간의 탐욕, 비굴한 쾌락, 악의, 질투, 아니 복수하려는 증오심에 빠지기가 얼마나 쉬운 것이냐!

143:2.6 (1610.1) “육체의 독선적 행위가 아니라 영이 재생함으로 구원을 얻느니라. 너희는 믿음으로 정당하게 되고, 두려움과 육체의 금욕이 아니라 은혜로 친교를 얻느니라. 하지만 영에게서 태어난 아버지의 자녀들은 늘, 언제나 자아, 그리고 육체의 욕구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주인이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알 때, 너희는 하나님과 더불어 진정한 평화를 가지느니라. 이 하늘의 평화에 이르는 길을 따르는 자는 누구나 영원한 하나님의 늘 진보하는 아들로서 영원히 봉사하는 일에 헌신하도록 예정되느니라. 이제부터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너희가 완전을 추구하는 동안, 스스로 정신과 육체에서 모든 악을 깨끗이 없애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오히려 높은 특권이라.

143:2.7 (1610.2) “너희의 아들 신분은 믿음에 바탕을 두며, 너희는 두려움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하니라. 너희의 기쁨은 신의 말씀을 신뢰함에서 생기며, 따라서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가 현실임을 의심할 유혹을 받지 말라. 하나님의 바로 그 선이 사람들을 참되고 진정한 뉘우침으로 인도하느니라. 자아를 통달하는 비밀은 깃드는 영을 너희가 믿는 것과 밀접히 관계되고 그 영은 늘 사랑으로 일하느니라. 구원하는 이 믿음조차 너희는 저절로 가지지 않으니, 그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라. 너희가 이 살아 있는 믿음의 자녀라면, 이제 더 자아의 노예가 아니라 오히려 자아를 다스리는 승리한 주인이요, 하나님의 해방된 아들이라.

143:2.8 (1610.3) “그러면 아이들아, 너희가 영에게서 태어났다면, 금욕하고 육체의 욕구를 경계하는 생활에 자의식하여 매인 처지에서 벗어나 너희는 언제까지나 구원받으며, 너희는 즐거운 영의 나라로 옮겨지느니라. 거기서부터 너희는 나날의 생활에서 영의 열매를 저절로 맺느니라. 영의 열매는 사람을 고상하게 만드는 즐거운 자제, 아니 땅에서 필사자가 도달하는―참된 자아 통달의―높이까지 이르는, 가장 높은 종류의 자제의 본질이라.”

3. 오락과 휴식

143:3.1 (1610.4) 이 무렵에 사도와 그 직계 제자인 동료들 사이에서 크게 신경이 곤두서고 감정이 날카로워진 사태가 벌어졌다. 그들은 함께 살고 일하는 데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요한의 제자들과 순탄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골칫거리가 늘어나고 있었다. 이방인과 사마리아인들과 접촉하는 것은 이 유대인들에게 큰 시련이었다. 이 모든 것 외에도, 예수가 요즘에 하신 말씀은 그들의 정신 상태를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안드레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까 몰랐고, 그래서 문제와 복잡한 일을 가지고 주에게 갔다. 사도의 우두머리가 걱정거리 설명하는 것을 듣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안드레야, 사람들이 그렇게 몰두한 단계에 이를 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격한 감정을 가지고 관여할 때, 말로 그 곤경에서 사람들을 구해낼 수 없느니라. 네 요청을 들어줄 수 없노라―나는 개인의 사회적 문제에 끼어 들지 아니하리라―그러나 사흘 동안 쉬고 긴장을 풀면서 너희와 함께 즐기리라. 너희 형제들에게 가서, 모두가 나와 함께 사르타바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알리라, 거기서 내가 하루나 이틀 동안 쉬기를 바라노라.

143:3.2 (1610.5) “이제 열한 형제 각자에게 가서, 남이 보지 않는 데서 이렇게 말해야 하느니라: ‘주가 한동안 쉬고 긴장을 풀려고, 우리만 그와 함께 가기를 바라시느니라. 우리 모두가 요즈음 정신이 많이 시달리고 긴장하였으니, 이 휴일 동안에 우리가 겪은 시련과 곤경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내가 제안하노라. 이 문제에 네가 협조할 것을 내가 기대할 수 있느냐?’ 이 방법으로 형제 각자에게 사사롭게 친히 접근하여라.” 그리고 안드레는 지시받은 대로 하였다.

143:3.3 (1611.1) 이것은 각자의 체험 중에서 놀라운 기회였고 그들은 산에 올라갔던 그날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 여행 동안 내내, 그들의 골칫거리에 대하여 거의 한 마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산 꼭대기에 다다르자 예수는 둘레에 그들을 앉히면서 말했다: “형제들아, 너희는 모두 휴식의 가치와 긴장 풀기의 효능을 배워야 하느니라. 어떤 뒤얽힌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은 이를 한동안 버려두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느니라. 그리고 나서 너희가 휴식이나 예배를 마치고 새롭게 돌아갈 때, 더욱 굳은 각오는 말할 것도 없고 더 맑은 정신과 더 믿음직한 손으로 너희 문제와 씨름할 수 있느니라. 게다가 머리와 육체가 쉬는 동안, 문제의 크기와 비중이 줄어든 것을 여러 번 발견하느니라.”

143:3.4 (1611.2) 이튿날 예수는 열두 사도 각자에게 토론할 주제를 나누어 주었다. 지난 일을 돌이켜 보고 그들의 종교적 일과 관계 없는 문제를 이야기하는 데 그날 전부를 썼다. 한낮의 점심으로 빵을 먹을 때, 예수가 감사를―입으로―드리는 것조차 소홀히 했을 때, 그들은 한 순간 충격을 받았다. 이때에 주가 그런 형식을 소홀히 함을 처음 보았다.

143:3.5 (1611.3) 산으로 올라갔을 때, 안드레의 머리는 문제들로 꽉 차 있었다. 요한은 마음 속에서 지나치게 혼란에 빠져 있었다. 야고보의 혼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이방인들 사이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마태는 기금이 모자라 가슴을 태우고 있었다. 베드로는 과로했고 최근에는 여느 때보다 변덕이 심했다. 유다는 때때로 찾아오는 과민과 이기심에 시달렸다. 시몬은 애국심과 형제 사랑을 절충하려는 노력으로 특별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빌립은 일이 되어 가는 형편을 보고 갈수록 어리둥절하였다. 이방(異邦) 인구와 접촉한 뒤로 나다니엘은 유머가 줄어들었고 토마스는 심한 우울증에 깊이 빠져 있었다. 오직 쌍둥이가 정상이었고 흔들리지 않았다. 요한의 제자들과 어떻게 사이좋게 지낼 것인가 모두가 갈피를 잡지 못했다.

143:3.6 (1611.4) 사흘째에 산 밑에 있는 야영지로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그들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인간의 숱한 골칫거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급박한 문제들은 과장된 두려움의 산물이요 불안이 확대되어 생겨난 것이라는 중요한 발견을 했다. 그러한 모든 골칫거리는 버려두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훌쩍 떠남으로 그런 문제들이 저절로 풀리도록 버려두었다.

143:3.7 (1611.5) 이 휴일이 끝나고 돌아온 것은 요한의 추종자들과 사이가 크게 개선된 기간이 시작되었음을 가리켰다. 생활의 일상적 임무에서 떠나 사흘 동안 휴가를 보낸 결과로, 그들이 모든 사람의 정신 상태가 달라진 것을 눈치채고 신경 과민에서 해방된 것을 바라보았을 때 열두 사도 중 다수가 정말로 기뻐하였다. 인간의 접촉이 단조로우면 골칫거리가 크게 불어나고 문제가 확대할 위험이 언제나 있다.

143:3.8 (1611.6) 두 그리스 풍의 도시, 아켈라이스와 파사엘리스에서, 많지 않은 이방인이 복음을 믿었지만, 처음으로 열두 사도는 순전한 이방 인구와 이번에 널리 일하면서 값진 체험을 얻었다. 그 달 중순쯤, 어느 월요일 아침에 예수는 안드레에게 말했다: “사마리아로 들어가자.” 그들은 야곱의 우물 가까이 시카 시(市)를 향하여 당장에 길을 떠났다.

4.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143:4.1 (1612.1) 6백 년이 넘도록 유대 지방의 유대인, 그리고 나중에는 갈릴리의 유대인도 사마리아인과 적대 관계에 있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이 반감은 이런 식으로 생겼다: 기원전 7백 년 무렵에, 아씨리아의 임금 사르곤은 팔레스타인 중부에서 일어난 폭동을 진압하면서,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유대인을 2만 5천 명이 넘게 포로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거의 같은 수의 큣ㆍ세파르브ㆍ하마트 족속의 후손들을 정착하게 하였다. 나중에 아슈바니팔은 또 다른 여러 이민단을 사마리아에 거주하라고 보냈다.

143:4.2 (1612.2)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종교적 불화는 바빌로니아 포로 생활이 끝나고 유대인이 돌아올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의 재건을 방해하는 일을 하였다. 그들은 나중에 알렉산더의 군대를 친절히 도와줌으로 유대인들의 기분을 건드렸다. 이 친절에 대한 보답으로 알렉산더는 사마리아인들이 게리짐 산에 한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야웨 및 부족 신들을 섬기고,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 체제를 비슷하게 좇아서 희생물을 바쳤다. 적어도 마카비의 시절까지 이 예배를 계속했고, 그때 요한 히르카누스는 게리짐 산에 있는 그들의 성전을 파괴했다. 예수가 돌아가신 뒤에, 사마리아인들을 위하여 수고하면서, 사도 빌립은 이 옛 사마리아 성전 터에서 많은 모임을 가졌다.

143:4.3 (1612.3)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불화는 전통이 오래고 역사(歷史)가 깊다. 알렉산더 시절 이후로 그들은 갈수록 더 서로 상관하지 않았다. 열두 사도는 데카폴리스 지방과 시리아에 있는 그리스 및 기타 이방인 도시들에서 전도하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마리아로 들어가자”고 예수가 말했을 때 그것은 주에게 바치는 충성심을 재는 어려운 시험이었다. 그러나 한 해 남짓 예수와 함께 지내는 동안에 그들은 일종의 개인적 충성심을 길렀고 이것은 그의 가르침을 믿는 신앙과 사마리아인에 대한 편견도 뛰어넘었다.

5. 시카의 여인

143:5.1 (1612.4) 주와 열두 사도가 야곱의 우물에 다다랐을 때, 여행에 지쳤기 때문에 예수는 우물가에서 기다렸다. 그동안에 빌립은 시카에서 먹을 것과 텐트 가져오는 것을 도우려고 사도들을 데리고 갔는데, 사도들이 한동안 이 근처에서 머무를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들은 예수와 함께 남아 있었을 터이지만, 예수는 형제들과 함께 가라고 이들에게 부탁하며 말했다: “조금도 내 걱정을 하지 말라, 이 사마리아인들은 친절할 것이라. 오직 우리의 형제, 유대인들이 우리를 해치려 하느니라.” 예수가 우물가에서 앉아서 사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을 때는 이 여름 날 저녁, 거의 6시가 되었다.

143:5.2 (1612.5) 야곱의 우물 물은 시카의 우물에서 나오는 물보다 광물(鑛物)이 적었고, 따라서 마시는 물로 훨씬 높게 쳤다. 예수는 목이 말랐지만 우물에서 물을 길을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시카의 어느 여인이 물그릇을 가지고 와서 우물에서 물을 길으려고 준비했을 때 예수는 말했다. “내게 물을 다오.” 이 사마리아 여인은 모습과 옷차림으로 예수가 유대인인 줄 알았고 말씨로 보아 갈릴리 유대인이라 짐작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날다였고 잘 생긴 인물이었다. 유대인 남자가 이렇게 우물가에서 말을 걸고 물을 달라 하여 많이 놀랐다. 자존심 있는 남자가 버젓이 여자에게 말 거는 것, 더군다나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이야기하는 것을 그 시절에 마땅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다는 예수께 물었다: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마실 물을 달라 하시니 어인 일이니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내가 정말로 너에게 마실 물을 달라 하였으나, 네가 알 수만 있다면 생명의 물 한 모금을 달라 내게 청하리라.” 그러자 날다가 말했다: “하지만 주여, 당신은 물을 길어 올릴 그릇이 없고 우물은 깊사오이다. 그러니 어디에서 이 생명(生命)의 물을 얻으시나이까? 당신은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하시나이까? 그는 우리에게 이 우물을 주었고 자기와 아들들과 가축도 그 물을 마셨나이다.”

143:5.3 (1613.1) 예수는 대답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목이 다시 마르려니와 살아 있는 영(靈)의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생명의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솟아올라 바로 영생(永生)에 이르는 시원한 샘물이 되리라.” 그러자 날다가 말했다. “내게 이 물을 주시사 나로 하여금 목도 마르지 않고 물 길으러 여기까지 멀리 오지도 않게 하소서. 게다가 사마리아 여인이 그런 훌륭한 유대인에게 받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기쁨이 되리이다.”

143:5.4 (1613.2) 날다는 예수가 자기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 여자는 주의 얼굴에서 올바르고 거룩한 사람의 빛을 보았다. 그러나 친절을 흔히 있는 친숙함으로 잘못 생각했고 그 비유를 자기에게 일종의 추파를 던지는 것으로 잘못 해석했다. 품행이 단정치 않은 여인이었으므로 그 여자는 드러내놓고 희롱할 생각이 있었는데, 그때 그 여자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예수는 명령하는 음성으로 말했다: “여자여, 가서 네 남편을 찾아 여기로 데려오라.” 이 명령에 날다는 정신이 들었다. 주의 친절함을 그릇 판단했음을 깨달았고 자기가 그의 말투를 오해한 것을 알아차렸다. 놀라서 자기가 특별한 사람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고 머리 속에서 적당한 대답을 더듬으며, 크게 산만하여 말했다. “그러나 주여, 남편을 부를 수 없사오니 남편이 없음이니이다.” 그러자 예수는 말했다: “네가 진실을 말하였으니, 네가 한때는 남편이 있었는가 싶으나 네가 이제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은 네 남편이 아님이라. 내 말을 가지고 장난하지 말고 내가 오늘 너에게 내민 생명의 물을 구하는 것이 더 좋으리라.”

143:5.5 (1613.3) 이때가 되어서 날다는 정신이 맑아졌고 제 정신이 들었다. 그 여자는 전적으로 선택해서 부도덕한 여자는 아니었다. 남편에게 모질게 또 부당하게 버림받았고 막다른 골목에서 어떤 그리스인의 아내로서, 하지만 결혼도 하지 않고 같이 살기로 하였다. 날다는 이제 예수에게 생각 없이 말한 것을 크게 부끄럽게 느꼈고, 몹시 뉘우치는 마음으로 주를 향하여 말했다: “내 주여, 당신께 버릇없이 말씀드린 것을 뉘우치오니, 당신은 거룩한 사람이든지 아마도 선지자인 것을 깨닫기 때문이나이다.” 주께 직접 개인적으로 도움을 막 구하려고 할 때, 그 여자는 허다한 사람이 그전에도 그후에도 한 것과 같이 행하였다―신학과 철학 토론에 주의를 돌림으로 개인이 구원받는 문제를 피했다. 그 여자는 재빨리 자신의 필요로부터 신학(神學) 논쟁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게리짐 산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의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그래도 당신은 예루살렘이 사람들이 예배해야 할 곳이라고 말씀하리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하나님을 예배할 바른 장소이나이까?”

143:5.6 (1613.4) 예수는 그 여자의 혼이 직접 조물주와 면밀한 접촉을 피하려고 애쓰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또한 더 좋은 생명의 길을 알려는 소망이 그 혼 속에 있음을 보았다. 결국, 날다의 가슴 속에 생명의 물을 바라는 참된 목마름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참을성 있게 다루며 말했다: “여자여, 네게 이르노니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너희가 아버지를 예배하지 않을 날이 곧 다가오리라. 그러나 너는 알지 못하는 것을 지금 예배하나니 여러 이교도 신(神)들의 종교와 이방의 철학이 섞인 것이라. 유대인들은 적어도 누구를 예배하는지 알며, 예배를 한 분의 하나님, 야웨에 집중하여 모든 혼란을 없애버렸느니라. 그러나 진지하게 예배하는 사람이 모두 정신적으로, 진실로 아버지를 예배할 때가 곧 오리라―바로 지금이 그런 때라―고 말할 때 나를 믿어야 하나니, 이는 아버지가 바로 그러한 예배자를 찾으시기 때문이라. 하나님은 영이요, 그를 예배하는 자는 정신적으로 진실하게 예배해야 하느니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또는 어디서 예배해야 하는가 안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바로 지금 내미는 이 생명의 물을 네 마음 속에 받아들임으로 너의 구원이 오느니라.”

143:5.7 (1614.1) 그러나 날다는 땅에서 자기의 개인 생활과 하나님 앞에서 자기 혼의 처지에 관한 거북한 질문에 대한 논의를 피하려고 다시 한 번 애썼다. 한 번 더 일반 종교에 관한 질문을 택하고 말했다: “예 주여, 요한은 교화자(敎化者)가 오신다고 설교했는데, 그를 구원자라 부를 것이요 그가 오실 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선언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날다의 말을 막으며, 예수는 놀라운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너에게 말하는 내가 그니라.”

143:5.8 (1614.2) 이것은 예수가 땅에서 자신이 신의 성품을 지닌 아들임을 처음으로 바로, 분명히 감추지 않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것도 한 여자에게,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순간까지 남자들 눈에 의심스러운 인격을 가진 여자에게 선언하였다. 그러나 신의 눈은, 자신이 원해서 죄를 짓기보다 남이 그 여자에게 죄를 저질렀다고, 그 여자는 지금 구원을 바라는, 성실하게 마음을 다하여 구원을 바라는 인간 혼이라고 보았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143:5.9 (1614.3) 날다가 더 보람있고 고귀한 생활 방법을 찾으려는 진정한 개인적 소망을 막 말하려 했을 때, 마음 속의 진정한 소망을 말할 준비가 되었을 때, 열두 사도가 시카에서 돌아왔다. 예수가 이 여자와 함께―이 사마리아 여자와, 그것도 두 사람만―아주 친밀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에 들이닥쳤을 때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랐다. 소모품을 재빨리 저장하고 옆으로 비켰고 아무도 감히 비난하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한편 예수는 날다에게 말했다: “여자여, 길을 가라. 하나님이 너를 용서하였느니라. 이제부터 너는 새 인생을 살리라. 생명의 물을 받았으니, 새 기쁨이 네 혼 속에서 솟아나겠고 너는 최고자의 딸이 될지니라.” 그 여자는 사도들이 싫어하는 눈치를 채고서, 물동이를 버리고 도시로 달아났다.

143:5.10 (1614.4) 도시로 들어가면서, 만난 모든 사람에게 외쳤다: “야곱의 우물로 가라, 빨리 가라, 왜냐하면 거기서 내가 일찍이 한 일을 모두 내게 일러준 사람을 너희가 볼 것이기 때문이라. 이 사람이 교화자일 수 있느냐?” 해가 지기 전에, 큰 무리가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야곱의 우물에서 모였다. 그리고 주는 생명의 물, 깃드는 영이 주는 선물에 대하여 그들에게 더 말씀했다.

143:5.11 (1614.5) 사도들은 예수가 여자, 그것도 의심스러운 인격을 가진 여자, 아니 부도덕한 여자와도 기꺼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서 받은 충격을 결코 떨쳐 버리지 못했다. 여자, 아니 이른바 부도덕한 여자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택할 수 있는 혼을 가졌고, 이로써 하나님의 딸이요 영생을 받을 후보자가 된다는 것을 예수가 사도들에게 가르치기는 무척 어려웠다. 19세기가 지난 뒤에도 많은 사람이 주의 가르침을 깨닫기를 꺼려하는 똑같은 태도를 보인다. 기독교조차 그리스도의 일생의 진리가 아니라 그가 죽은 사실을 중심으로 끈질기게 쌓아 올렸다. 세상은 예수의 비극적이고 슬픈 죽음보다 행복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그의 삶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143:5.12 (1614.6) 날다는 이튿날 이 이야기를 전부 사도 요한에게 일러주었지만 그는 다른 사도들에게 다 밝히지 않았고 예수는 열두 사도에게 이 일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하지 않았다.

143:5.13 (1615.1) 날다는 예수가 “내가 일찍이 행한 모든 것”을 자기에게 일러주었다고 요한에게 말했다. 여러 번 요한은 날다와 이렇게 이야기하신 것에 관하여 예수께 묻고 싶었지만,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예수는 그 여자에 관하여 오직 한 가지를 일러주었지만, 눈을 들여다보고 그 여자를 다룬 태도는 한 순간에 날다의 머리 속에 얼룩진 생활 전부를 파노라마처럼 머리 속에서 다시 보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여자는 과거의 생활을 이렇게 자신이 밝힌 것을 모두 주의 눈길과 말씀과 연결하였다. 예수는 그 여자에게 다섯 남편이 있다고 이르지 않았다. 그 여자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뒤에 다른 네 남자와 살았다. 이것은 모든 과거와 함께, 예수가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을 깨달은 순간, 머리 속에 아주 선하게 살아났고, 그래서 예수가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정말로 자기에게 일러주었다고 나중에 요한에게 되풀이하였다.

6. 사마리아의 부흥

143:6.1 (1615.2) 날다가 시카에서 예수를 보라고 군중을 이끌어낸 날 저녁에, 열두 사도는 먹을 것을 가지고 막 돌아왔다. 사람들에게 말씀하기 전에 예수에게 함께 드시라고 청했는데, 그들이 하루 종일 끼니를 걸러서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어둠이 곧 다가올 것을 알았고, 그래서 사람들을 돌려보내기 전에 말씀할 결심을 버리지 않았다. 군중에게 말씀하기 전에 예수에게 한 입 잡수시라고 안드레가 설득하려고 했을 때 예수는 말했다 “나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고기가 있노라.” 이 말을 듣자 사도들끼리 말했다: “누군가 그에게 무슨 잡수실 것을 가져왔느냐? 도대체 그 여자가 예수께 마실 것 뿐 아니라 잡수실 것도 드렸느냐?”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듣자, 사람들에게 말씀하기 전에 예수는 옆으로 머리를 돌려 열두 사도에게 말했다: “내가 먹을 고기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이루는 것이라. 너희는 이제 더 추수할 때까지 시간이 어느만큼 있다고 말하지 말라. 사마리아의 한 도시에서 이 사람들이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들으려고 나오는 것을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판이 추수하도록 이미 허옇게 되었느니라. 거두는 자는 삯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이 열매를 거두느니라. 그 결과로 씨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이는 ‘한 사람이 씨 뿌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하는 말씀이 여기서 참인 까닭이라.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곳에서 거두라고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 남들이 수고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하던 일을 막 시작하려 하느니라.”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전도한 것을 언급한 것이다.

143:6.2 (1615.3) 예수와 사도들은 시카로 들어갔고 게리짐 산에서 캠프를 세우기 전에 이틀 동안 전도했다. 시카에서 많은 주민이 복음을 믿고 세례받기를 청했지만 예수의 사도들은 아직 세례를 주지 않았다.

143:6.3 (1615.4) 게리짐 산에서 야영하던 첫날 밤에 사도들은 야곱의 우물에서 그 여자에게 보인 태도 때문에 예수가 꾸짖으리라 기대했으나 그 문제에 대하여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대신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중심인 실체들”에 관하여 기억에 남을 이야기를 그들에게 해주었다. 어떤 종교에서도 가치가 한 쪽으로 치우치도록 버려두고, 사람의 신학에서 진리 대신에 사실이 자리를 차지하도록 버려두기가 너무나 쉽다. 십자가의 사실은 후일에 기독교의 바로 그 핵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렛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종교의 핵심 진리가 아니다.

143:6.4 (1615.5) 게리짐 산에서 예수가 가르친 말씀의 주제는, 그가 (예수가) 형제요 친구인 것 같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이자 친구로서 보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진리가 이 신성한 두 관계를 관찰한 것에 대하여 가장 큰 선언인 것같이, 사랑은 세상에서―우주에서―가장 큰 관계라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143:6.5 (1616.1) 예수가 사마리아인들에게 그렇게 자신을 한껏 선언한 것은 그가 안전하게 그렇게 할 수 있었고, 하늘나라 복음을 전도하려고 사마리아의 심장부로 그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143:6.6 (1616.2) 예수와 열두 사도는 8월말까지 게리짐 산에서 야영했다. 여러 도시에서 낮에는 사마리아인들에게 좋은 하늘나라 소식―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을 전도하고 밤에는 야영지에서 지냈다. 사마리아의 이 여러 도시에서 예수와 열두 사도가 한 일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많은 사람을 얻었고, 예수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뒤에, 예루살렘에서 신자들을 모질게 박해함으로 사도들이 땅 끝까지 흩어지고 나서, 이 지역에서 빌립이 놀라운 일을 하도록 길을 예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7. 기도와 예배에 관한 가르침

143:7.1 (1616.3) 게리짐 산에서 저녁 회의가 있을 때, 예수는 큰 진리를 많이 가르쳤고 특히 다음을 강조했다:

143:7.2 (1616.4) 참된 종교는 창조자와 자의식하는 관계를 가지면서 생기는 개별 혼의 행위이다. 조직된 종교는, 사람이 개별 신자의 예배를 사회 활동으로 만드는 시도이다.

143:7.3 (1616.5) 예배는―영적인 것을 숙고하는 것―봉사, 즉 물질적 현실과 접촉하는 것과 번갈아 있어야 한다. 일하고 노는 것을 번갈아 해야 하며, 종교는 유머로 균형을 얻어야 한다. 깊은 철학은 리듬 있는 시(詩)로 긴장을 풀어야 한다. 생활의 긴장은―인격이 시간 속에서 받는 긴장―예배가 주는 휴식으로 풀어야 한다. 우주에서 인격이 고립되는 두려움에서 생기는 불안한 느낌은 아버지를 믿고 숙고함으로, 그리고 최상위를 깨달으려고 애씀으로 중화(中和)되어야 한다.

143:7.4 (1616.6) 기도는 사람에게 머리를 덜 쓰고 깨달음을 더 얻게 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기도는 지식을 늘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통찰력을 키우도록 고안되어 있다.

143:7.5 (1616.7) 예배를 드리는 의도는 앞으로 개선된 생활을 예상하고 다음에 이 새로운 영적 의미를 현재 닥친 생활에 다시 비쳐 보는 것이다. 기도는 영적 자양분을 주지만 예배는 신성하게 창조하는 성향이 있다.

143:7.6 (1616.8) 예배는 여러 사람에게 봉사하려는 영감을 불러일으키려고 하나인 분을 바라보는 기술이다. 예배는 혼이 물질 우주로부터 얼마큼 떨어져 있는가를 재고, 또한 혼이 동시에 모든 창조의 영적 실체들에 얼마나 안전하게 붙어 있는가 재는 척도이다.

143:7.7 (1616.9) 기도는 자아를 생각하게 한다―숭고한 사고(思考)이다. 예배는 자아를 잊는 것이다―초월 사고이다. 예배는 힘 안드는 집중이요, 혼의 참되고 이상적인 휴식, 일종의 편안한 영적 노력이다.

143:7.8 (1616.10) 예배는 한 부분이 전체와, 그리고 유한자가 무한자와, 아들이 아버지와 일체가 되는 행위요, 시간이 영원과 발걸음을 맞추는 행위이다. 예배는 아들이 신다운 아버지와 몸소 친교하는 행위요, 인간의 혼과 영이 신선하고 창조적인 태도, 친근하고 열렬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143:7.9 (1616.11) 사도들은 야영지에서 그가 가르친 것 중에서 몇 가지밖에 깨닫지 못했지만 다른 세상들은 그 가르침을 깨달았고 땅에서 다른 세대들도 그럴 것이다.

제 144 편 길보아와 데카폴리스에서

유란시아서

제 144 편

길보아와 데카폴리스에서

144:0.1 (1617.1) 9월과 10월은 길보아 산의 비탈에 자리 잡은 한적한 캠프에서 은둔한 가운데 보냈다. 9월 한 달을 예수는 여기서 사도들하고만 지냈고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진리를 가르치고 교훈을 주었다.

144:0.2 (1617.2) 사마리아와 데카폴리스 지방의 경계에서 이때 예수와 사도들이 은둔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대단히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헤롯 안티파스는 아직도 요한을 감옥에 가두어 놓고 석방하거나 처형하기를 두려워했고, 한편 요한과 예수가 어떤 면에서 관련되었다는 의심을 계속 품었다. 이러한 형편 때문에 유대나 갈릴리에서 적극적 활동을 계획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았다. 셋째 이유가 있었는데, 요한의 수석 제자들과 예수의 사도들 사이에 서서히 긴장이 팽팽해지고 있었고, 이것은 신자들의 무리가 늘어나면서 악화되었다.

144:0.3 (1617.3) 예수는 가르치고 전도하는 예비 작업 시절이 거의 끝났고 다음의 행동은 땅에서 그의 일생에 한껏 마지막 노력을 시작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도 세례자 요한을 괴롭히거나 난처하게 만들지 않기를 바랐다. 따라서 예수는 사도들을 연습시키면서 은둔하여 얼마 동안 시간을 보내고, 다음에 요한이 집행되든지 아니면 석방되어서 단결된 노력을 기울이려고 그들과 합세할 때까지,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에서 조용히 얼마큼 일하기로 결심하였다.

1. 길보아에서 야영하다

144:1.1 (1617.4)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열두 사도는 예수에게 더욱 헌신하고 하늘나라 일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그들의 헌신은 대체로 개인적으로 충성하는 문제였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의 여러 모습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의 성품이나 땅에서 그의 수여의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144:1.2 (1617.5) 그들이 세 가지 이유로 은둔하고 있다고 예수는 사도들에게 분명히 설명했다:

144:1.3 (1617.6) 1. 하늘나라의 복음을 그들이 이해하고 믿는 것을 확인하려고.

144:1.4 (1617.7) 2. 유대와 갈릴리에서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한 반대가 가라앉게 하려고.

144:1.5 (1617.8) 3. 세례자 요한의 운명을 기다리려고.

144:1.6 (1617.9) 길보아 산에서 머무르면서, 예수는 어린 시절의 생활과 헤르몬산에서 겪은 체험에 대하여 많은 것을 열두 사도에게 일러주었다. 또한 세례를 받은 바로 뒤 40일 동안에 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얼마큼 밝혔다.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가기까지 이 여러 체험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직접 당부했다.

144:1.7 (1618.1) 그들은 이 9월 몇 주 동안 쉬면서 예수가 그들을 봉사하는 일로 처음 부른 뒤에 겪은 체험을 이야기하고 되새겼으며, 주가 이때까지 가르친 것을 조정하려고 진지하게 노력을 기울였다. 어느 정도 모두가 이것이 길게 쉬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라 느꼈다. 그들은 유대나 갈릴리에서 다음에 대중에게 기울일 노력이 다가오는 하늘나라의 마지막 선포의 시작을 가리키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하늘나라가 다가왔을 때 그 나라가 어떠할까에 대하여 거의 또는 아무런 정해진 관념이 없었다. 요한과 안드레는 하늘나라가 이미 왔다고 생각했고, 베드로와 야고보는 하늘나라가 앞으로 올 것이라고 믿었다. 나다니엘과 토마스는 영문을 모른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마태와 빌립과 열심당원 시몬은 확신이 없었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 쌍둥이는 다행히도 그 논쟁을 눈치채지 못했다. 가룟 유다는 말이 없고 무어라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144:1.8 (1618.2) 이때에 예수는 야영지 가까이, 산에서 혼자 지내는 적이 많았다. 때때로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을 데리고 갔지만, 기도하거나 혼자서 교통하느라고 훌쩍 떠나는 일이 더 흔했다. 예수가 세례를 받고 페레아의 산지에서 40일 보낸 뒤에, 아버지와 이때 교통한 시절에 기도했다고 하기는 도저히 적당하지 않으며, 예수가 예배했다고 말하는 것도 조리가 없다. 그러나 이 기간을 아버지와 친히 교통한 기간이라 하는 것이 아주 정확하다.

144:1.9 (1618.3) 9월 한달 내내, 토론의 중심 주제는 기도와 예배였다. 며칠 동안 예배에 대하여 논의한 뒤에 “주여,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하는가 가르쳐주소서”하고 토마스가 요청한 데 답하여, 예수는 마침내 기억에 남을 가르침을 주었다.

144:1.10 (1618.4) 요한은 전에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는데, 다가오는 나라에서 구원을 얻기 위한 기도였다.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요한의 기도 형식을 쓰지 말라고 금한 적이 없다. 그러나 고정되고 판에 박힌 기도문을 외우는 습관을 주가 충분히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도들은 아주 일찍 알아차렸다. 그렇기는 해도 신자들은 어떻게 기도하는가 가르쳐달라고 항상 요청하였다. 열두 사도는 예수가 어떤 형식의 간구를 승인할 것인가 몹시 알고 싶어했다. 주로, 서민들을 위하여 어떤 간단한 기도가 이렇게 필요했기 때문에, 예수는 이때 토마스의 요청에 답하여, 방법을 제시하는 형식의 기도를 가르치는 데 찬성하였다. 길보아 산에서 그들이 머무르던 셋째 주, 어느 날 오후에 예수는 이 교훈을 주었다.

2. 기도에 대한 강연

144:2.1 (1618.5) “요한은 정말로 너희에게 간단한 형태의 기도를 가르쳤느니라: ‘아 아버지여, 우리에게서 죄를 없애시고, 아버지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이고 사랑을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영이 우리의 마음을 영원히 거룩하게 하소서, 아멘!’ 그는 너희가 군중에게 무언가 가르칠 것을 가지도록 이 기도를 가르쳤느니라. 기도하는 자신의 혼의 표현으로서 너희가 그렇게 고정되고 판에 박힌 간청을 드려야 한다고 의도한 것이 아니라.

144:2.2 (1618.6) “기도는 영에 대하여 혼이 어떤 태도를 가졌는가 보이는 표현, 온전히 개인적으로 저절로 나오는 표현이라. 기도는 아들 신분으로 하는 교통, 친교의 표현이어야 하느니라. 기도는 영이 표현했을 때, 협동하는 영적 진보의 길로 인도하느니라. 이상적인 기도는 지적 예배로 이끄는 일종의 영적 교통이라. 참된 기도는 너희의 이상을 이루려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뻗는 성실한 태도이라.

144:2.3 (1619.1) “기도는 혼의 숨결이요,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려는 끈질긴 시도로 너희를 이끌어야 하느니라. 너희 가운데 누가 이웃이 있어, 한밤에 그에게 가서 ‘친구여, 빵 세 덩이를 꾸어달라, 내 친구가 여행하는 길에 나를 보러 왔는데 친구 앞에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노라’ 말하니, 네 이웃이 대답하되 ‘나를 성가시게 굴지 말라, 이제 문이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들었음이라, 그러니 일어나서 빵을 줄 수 없노라’하면, 너는 친구가 배고프다, 그에게 먹을 것을 하나도 줄 수 없다고 설명하며 고집하리라. 너희에게 이르노니, 네 친구라고 해서 이웃이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을 터이나 그래도 끈질기게 조르는 까닭에, 일어나서 네가 필요한 대로 너에게 빵을 주리라. 그래서 끈질긴 요청이 필사 인간에게서도 특혜(特惠)를 얻는다면, 너희가 영적으로 끈질기게 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낌없는 손에서 생명의 빵을 얼마나 더 얻겠느냐.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내리라, 두드리라 그리하면 문이 열리리라. 누구든지 구하는 자는 받으며, 찾는 자는 찾아내며, 구원의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는 문이 열리리라.

144:2.4 (1619.2) “너희 가운데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지혜롭지 못하게 간청하면, 아들이 잘못 간구하는 그대로가 아니라 부모의 지혜에 따라서 주기를 망설이겠느냐? 빵이 필요하면, 아이가 지혜롭지 못하게 돌을 달라 한다고 해서 아이에게 돌을 주겠느냐? 네 아들이 물고기가 필요하면, 그물 속에 물뱀이 어쩌다가 물고기와 함께 올라오고 단지 아이가 어리석게 뱀을 달라 요구한다고 해서 그에게 물뱀을 주겠느냐? 그러면 죽을 수밖에 없으며, 유한한 너희가 기도(祈禱)에 응답하고 아이들에게 좋고 적당한 선물 줄 것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는 구하는 자에게 영을 비롯하여 많은 다른 복을 얼마나 더 부어주시겠느냐? 사람들은 언제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144:2.5 (1619.3) “어느 사악한 도시에 살았던 어떤 재판관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이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존경하지도 않았느니라. 자, 그 도시에 어떤 빈궁한 과부가 있었더니, 이 부당한 판사에게 거듭 찾아와서 ‘내 원수로부터 나를 보호해주소서’ 말하였는지라. 얼마 동안 그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으나, 곧 그가 혼잣말을 하였더라.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아도 이 과부가 나를 때 없이 번거롭게 하니, 계속 찾아와서 나를 지치게 하지 않도록 그 여자를 변호하리라.’ 너희가 끈질기게 기도하라 격려하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요, 너희의 간구가 하늘에 계신 공평하고 올바른 아버지의 마음을 바꾸리라 비추려 함이 아니라. 그러나 너희의 끈질긴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너희의 태도를 바꾸고 혼이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키우려는 것이라.

144:2.6 (1619.4) “그러나 기도할 때 너희는 거의 믿음이 없느니라. 진정한 믿음은 혼이 성장하고 영적으로 진보하는 길에 어쩌다 놓인 산더미 같은 물질적 어려움을 없애리라.”

3. 믿는 자의 기도

144:3.1 (1619.5) 그러나 사도들은 아직 마음이 흡족하지 않았다. 그들이 새 제자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기도의 본보기를 예수가 주시기를 바랐다. 기도에 대한 이 강론을 들은 뒤에 야고보 세베대가 말했다: “아주 좋소이다, 주여,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어떻게 적절히 기도하는가 우리에게 가르치소서’하고 우리에게 무척 자주 부탁하는 새 신자들을 위하여, 한 모형의 기도를 원하나이다.”

144:3.2 (1619.6) 야고보가 말을 마치자 예수는 말했다: “그래, 너희가 아직도 그런 기도를 바란다면, 내 아우와 누이들에게 나사렛에서 가르친 것을 하나 제시하고자 하노라.”:

144:3.3 (1620.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144:3.4 (1620.2) 그 이름이 거룩하옵소서.

144:3.5 (1620.3)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144:3.6 (1620.4)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44:3.7 (1620.5) 내일을 위하여 오늘 우리에게 빵을 주시고

144:3.8 (1620.6) 생명의 물로 우리의 혼을 새롭게 하소서.

144:3.9 (1620.7)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한 것 같이

144:3.10 (1620.8) 또한 우리의 빚을 모두 용서하소서.

144:3.11 (1620.9) 시험받을 때 우리를 구하시고, 악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며,

144:3.12 (1620.10) 아버지처럼 더욱 우리를 완전하게 만드소서.

144:3.13 (1620.11) 사도들이 신자들을 위하여 예수가 기도의 본보기를 가르쳐주기를 바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세례자 요한은 따르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기도를 가르쳤다. 위대한 선생들은 모두 생도들을 위하여 기도를 지었다. 유대인의 종교 선생들은 스물다섯이나 서른 가지 정도의 고정된 기도가 있었고 이것을 회당에서, 길거리 구석에서도 외웠다. 예수는 대중 앞에서 기도하기를 특별히 꺼렸다. 이때까지 열두 사도는 그가 기도하는 것을 겨우 몇 번 들었다. 예수가 밤새도록 기도하거나 예배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그가 어떻게, 어떤 형식으로 간청하는가 매우 알고 싶어했다.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처럼 어떻게 기도하는가 가르쳐 달라고 요청을 받았을 때, 그들은 대중에게 무어라고 대답할지 몰라서 정말로 궁지에 빠졌다.

144:3.14 (1620.12) 예수는 열두 사도에게 언제나 남모르게 기도하라, 기도에 들어갈 때 훌쩍 떠나 혼자서 조용한 자연 환경 가운데로 가거나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으라고 가르쳤다.

144:3.15 (1620.13) 예수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께로 올라간 뒤에, 많은 신자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를 덧붙여, 이른바 이 주의 기도문을 끝내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그 뒤에, 두 줄이 베끼다가 없어졌고 이 기도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임이나이다” 하는 여분의 구절이 더해졌다.

144:3.16 (1620.14) 예수는 나사렛 집에서 사람들이 기도한 그대로, 공동(共同) 형태의 기도를 사도들에게 주었다.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문구를 가르친 적이 없었고, 오직 집단, 가족 또는 사회가 드리는 간청을 가르쳤다. 그리고 예수는 결코 그런 기도를 가르치겠다고 자청(自請)하지 않았다.

144:3.17 (1620.15) 예수는 효력이 있는 기도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144:3.18 (1620.16) 1. 이기심 없이―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144:3.19 (1620.17) 2. 믿으면서―믿음에 따라서.

144:3.20 (1620.18) 3. 성실하게―마음이 정직하게.

144:3.21 (1620.19) 4. 총명하게―빛에 따라서.

144:3.22 (1620.20) 5. 신뢰하면서―아버지의 전적으로 지혜로운 뜻에 복종해서.

144:3.23 (1620.21) 예수가 기도하느라고 산에서 밤새도록 있을 때, 그것은 주로 제자들, 특히 열두 사도를 위한 것이었다. 주는 자신을 위하여 거의 기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라다이스 아버지와 함께, 이해하며 교통하는 성질을 가진 예배에 많이 잠겨 있었다.

4. 기도에 대하여 더 하신 말씀

144:4.1 (1620.22) 기도에 대한 강론이 있은 뒤에 여러 날, 사도들은 전적으로 중요하고 경건한 이 습관에 대하여 주께 계속하여 물었다. 예수가 이 기간에 사도들에게 기도와 예배에 관하여 교육한 것은 다음과 같이 현대의 말투로 요약하고 다시 정리할 수 있다:

144:4.2 (1621.1) 어떤 간구라도 진지하게 간절히 되풀이하는 것은, 그런 기도가 하나님의 자녀의 진지한 표현이고 믿음으로 입에서 나왔을 때, 직접 응답하는 것이 아무리 현명치 못하거나 불가능하더라도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혼의 능력을 어김없이 키워 준다.

144:4.3 (1621.2) 어떤 기도를 드리더라도 아들 신분이 선물인 것을 기억하라. 어떤 아이도 아들이나 딸의 신분을 얻으려고 무엇인가 해야 되는 것이 아니다. 땅에 있는 아이는 부모의 의지에 따라서 생겨나게 된다. 과연 그러하니, 하나님의 아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은총을 얻고 영(靈)의 새 생명에 들어간다. 따라서 하늘나라를―신의 아들 신분을―어린아이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너희는 올바름―점진적 인품의 성장―을 노력으로 얻지만, 은총으로, 믿음을 통해서 아들 신분을 받는다.

144:4.4 (1621.3) 기도는 혼이 온 우주의 최상 통치자들과 초월적 교통을 가지는 경지까지 예수를 이끌었다. 기도는 세상의 필사자를 참된 예배 정신으로 교통하는 경지까지 이끌 것이다.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혼의 능력은 하늘이 내리는 축복의 양(量)을 좌우한다. 이 축복은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고, 그 축복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을 의식하여 깨달을 수 있다.

144:4.5 (1621.4) 기도, 그리고 그에 결부된 예배는 생활의 일상적인 것, 물질 존재의 단조로운 고역(苦役)을 벗어나는 기법이다. 기도는 영적으로 변화된 자아 실현, 그리고 지적ㆍ종교적으로 성취하는 개성에 접근하는 길이다.

144:4.6 (1621.5) 기도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해로운 버릇에 해독제이다. 적어도, 주가 가르친 것과 같은 기도는 혼에 매우 유익한 보살핌이다. 예수는 사람이 동료들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의 유익한 영향력을 한결같이 이용했다. 주는 보통 때, 자신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생각하여 기도했다. 오직 땅에서 보낸 일생의 큰 위기에 부닥쳤을 때 예수는 자신을 위하여 기도한 적이 있다.

144:4.7 (1621.6) 기도는 인류의 여러 종족이 세운 물질 문명의 와중에서 영적 생명이 숨을 내쉬는 소리이다. 예배는 쾌락을 추구하는 필사자 세대를 구원하는 줄이다.

144:4.8 (1621.7) 기도가 혼의 영적 전지(電池)를 다시 충전하는 것과 비유해도 좋은 것 같이, 예배는 우주의 아버지의 무한하신 영이 보내는 우주 방송을 들으려고 혼을 조절하는 행위와 비교해도 좋다.

144:4.9 (1621.8) 기도는 아이가 영 아버지를 진지하게 갈급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요, 기도는 인간의 뜻을 버리고 신의 뜻을 얻는 심리학 과정이다. 기도는 현재의 상태를 고쳐서 앞으로 되어야 할 상태로 만드는 신의 계획의 일부이다.

144:4.10 (1621.9) 예수가 오래 밤늦게 깨어 있을 때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이 그를 무척 자주 동반했는데 이들이 예수가 기도하는 것을 듣지 못한 이유 중에 하나는, 주가 소리나게 기도를 입 밖에 내서 드린 적이 아주 드물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드린 거의 모든 기도는 정신으로, 마음 속에서―말없이―하였다.

144:4.11 (1621.10) 모든 사도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가 기도와 예배에 대한 주의 가르침을 알아들었다고 볼 수 있다.

5. 다른 형태의 기도

144:5.1 (1621.11) 땅에서 머무르던 나머지 기간에, 때때로 예수는 사도들에게 몇 가지 추가된 기도 형식을 주목하게 했으나 다만 다른 문제들을 설명하느라고 그렇게 했다. 이 여러 가지 “비유의 기도”를 군중에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다. 이 기도문 가운데 여럿은 사람이 사는 다른 행성들에서 온 것이지만 이 사실을 예수는 열두 사도에게 밝히지 않았다. 이 기도문 가운데 다음이 있었다:

144:5.2 (1622.1) 우주 영토가 우리 아버지 안에 있으니

144:5.3 (1622.2) 그 이름과 온통 영화로운 성품이 높임을 받으소서.

144:5.4 (1622.3) 아버지의 계심은 우리를 둘러싸고, 그 영광이 하늘에서 완전히

144:5.5 (1622.4) 보이는 것 같이 우리를 통해서 불완전하게 나타나나이다.

144:5.6 (1622.5) 오늘날 우리에게 빛의 활력을 주시고,

144:5.7 (1622.6) 우리가 상상하는 악한 옆길로 우리가 빠지지 않게 하소서.

144:5.8 (1622.7) 영화로운 깃드심, 영구한 권세는 아버지의 것이요,

144:5.9 (1622.8) 아들의 무한한 사랑은 우리에게 영원한 선물인 까닭이나이다.

144:5.10 (1622.9) 바로 그러하니, 언제까지나 참이나이다.

* * *

144:5.12 (1622.10) 우주의 중심에 계시고 창조하시는 우리 아버지여

144:5.13 (1622.11) 우리에게 아버지의 성품을 주시고 그 됨됨이를 주소서.

144:5.14 (1622.12) 은총으로 우리를 아들딸로 만드시고,

144:5.15 (1622.13) 우리의 영원한 성취를 통해서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

144:5.16 (1622.14) 천사들이 빛 가운데 아버지의 명령을 듣는 것 같이, 우리가 이 구체에서

144:5.17 (1622.15) 아버지의 뜻을 행하도록, 조절하고 통제하는 영이 우리 안에 살고 거하게 하소서.

144:5.18 (1622.16) 오늘 진리의 길을 따라 나아가는 동안 우리를 버티게 하시고

144:5.19 (1622.17) 타성과 악과 온갖 죄짓는 행위에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144:5.20 (1622.18) 우리가 동료에게 친절을 보이는 것 같이 우리를 참으소서.

144:5.21 (1622.19) 자비의 정신을 우리 인간 마음 속에 널리 펼치소서.

144:5.22 (1622.20) 불안한 인생의 미로를 통해서 걸음걸음 아버지의 손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144:5.23 (1622.21) 우리의 끝날이 다가올 때, 우리의 충실한 영을 아버지 품 안에 받으소서.

144:5.24 (1622.22) 그렇다 해도, 우리의 소망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 * *

144:5.26 (1622.23) 완전하고 올바른 우리 하늘 아버지여,

144:5.27 (1622.24) 오늘 우리의 여행길을 안내하고 지도하소서.

144:5.28 (1622.25) 우리의 발걸음을 거룩히 하고 우리의 생각을 조절하소서.

144:5.29 (1622.26) 영원히 진보하는 길에서 우리를 늘 이끄소서.

144:5.30 (1622.27) 권능이 충만하기까지 우리를 지혜로 채우시고

144:5.31 (1622.28) 무한한 에너지로 우리에게 활력을 주소서.

144:5.32 (1622.29) 우리를 북돋아 천사 무리의 계심과 안내를

144:5.33 (1622.30) 신성하게 의식하게 하소서.

144:5.34 (1622.31) 빛의 길에서 위를 향하여 항상 우리를 안내하소서.

144:5.35 (1622.32) 큰 심판의 날에 우리를 충분히 정당하게 만드소서

144:5.36 (1622.33) 우리를 영원한 영광 속에 계신 아버지처럼 만드시고

144:5.37 (1622.34) 하늘에서 끝없이 봉사하는 길로 우리를 받으소서.

* * *

144:5.39 (1622.35) 신비 속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144:5.40 (1622.36) 주의 거룩한 성품을 우리에게 드러내소서.

144:5.41 (1622.37) 땅에 있는 자녀들에게, 오늘을 주시사

144:5.42 (1622.38) 길과 빛과 진리를 보게 하소서.

144:5.43 (1622.39) 영원히 진보하는 길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144:5.441 (1622.40) 그 안에서 걸을 의지를 주소서.

144:5.45 (1622.41) 우리 안에서 아버지가 신성한 임금이 되시고

144:5.46 (1622.42) 그리하여 우리가 자아를 완전히 통달하게 하소서.

144:5.47 (1622.43) 어둠과 죽음의 길로 빗나가지 않게 하시고

144:5.48 (1622.44) 생명의 물가로 영원히 우리를 이끄소서.

144:5.49 (1622.45) 바로 아버지를 위하여 우리의 기도를 들으소서.

144:5.50 (1622.46) 우리를 더욱 아버지처럼 만들기를 기뻐하소서.

144:5.51 (1623.1) 마지막에는 신다운 아들을 위하여,

144:5.52 (1623.2) 영원한 팔 안에 우리를 받으소서.

144:5.53 (1623.3) 그렇다 해도, 우리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 * *

144:5.55 (1623.4) 한 부모로 하나된 영화로운 아버지와 어머니여,

144:5.56 (1623.5) 그 신다운 성품에 우리가 충성하리이다.

144:5.57 (1623.6) 신의 영을 선물로 주심으로

144:5.58 (1623.7) 바로 주가 우리 안에, 우리를 통해 다시 살도록

144:5.59 (1623.8) 주가 하늘에서 완전하고 당당하게 보이는 것 같이

144:5.60 (1623.9) 이 구체에서 이렇게 주를 불완전하게 흉내를 내나이다.

144:5.61 (1623.10) 날마다 형제 되어 달갑게 봉사할 일을 주시고

144:5.62 (1623.11) 사랑으로 봉사하는 길에서 순간마다 우리를 이끄소서.

144:5.63 (1623.12) 주의 참을성을 우리가 아이들에게 보이는 것 같이

144:5.64 (1623.13) 늘 어김없이 우리를 참으소서.

144:5.65 (1623.14) 모든 일을 잘 처리하는 신의 지혜와 모든 생물에게 자비로운,

144:5.66 (1623.15) 그 무한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144:5.67 (1623.16) 우리의 자선이 이 땅의 약한 자를 품어 안도록

144:5.68 (1623.17) 주의 참을성과 인자함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144:5.69 (1623.18) 우리의 생애가 끝날 때, 그것이 주의 이름에 명예요,

144:5.70 (1623.19) 주의 착한 영에게 기쁨이요, 우리 혼을 돕는 이에게 만족이 되게 하소서.

144:5.71 (1623.20)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여, 우리가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144:5.72 (1623.21) 필사 자녀들에게 영원히 좋은 것을 주가 바라시는 대로, 바로 그렇게 되어지이다

* * *

144:5.74 (1623.22) 모든 것에 충실한 우리의 근원이여 모든 것에 능한 중심이여,

144:5.75 (1623.23) 모두에게 인자한 아들의 이름을 경건하고 거룩하게 하옵소서.

144:5.76 (1623.24) 아버지의 은혜와 복이 우리에게 내려와서

144:5.77 (1623.25)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명령을 수행하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나이다.

144:5.78 (1623.26) 순간마다 생명나무의 자양분을 우리에게 주시고,

144:5.79 (1623.27) 날마다 거기 있는 강의 생명의 물로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

144:5.80 (1623.28) 한 걸음 한 걸음 어둠에서 신성한 빛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144:5.81 (1623.29) 깃드는 영이 우리를 변화시킴으로 우리의 정신을 새롭게 하소서.

144:5.82 (1623.30) 마침내 죽는 날이 우리에게 닥칠 때

144:5.83 (1623.31) 바로 아버지가 우리를 받으시고 우리를 영원으로 보내소서.

144:5.84 (1623.32) 열매 많은 봉사로 얻는 하늘 왕관을 우리에게 얹으소서,

144:5.85 (1623.33)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거룩한 영향에게 영광을 돌리리니,

144:5.86 (1623.34) 끝없는 우주에 두루 바로 그러하리이다.

* * *

144:5.88 (1623.35) 우주의 은밀한 곳에 거하시는 우리 아버지여

144:5.89 (1623.36) 주의 이름이 영예롭고, 자비가 존경받고, 판단이 존중받으옵소서.

144:5.90 (1623.37) 한낮에 태양처럼 올바름이 우리를 비추게 하소서

144:5.91 (1623.38) 또한 땅거미 질 때 길을 벗어난 우리의 걸음을 안내하시기 바라나이다.

144:5.92 (1623.39) 아버지가 택하는 길에서 우리를 손잡아 이끄시고

144:5.93 (1623.40) 길이 험하고 날이 어두울 때 우리를 버리지 마소서.

144:5.94 (1623.41) 우리가 아버지를 무척 자주 소홀히 하고 잊는 것처럼 우리를 잊지 마시고

144:5.95 (1623.42) 우리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자비를 베풀고 우리를 사랑하소서.

144:5.96 (1623.43) 우리를 괴롭히고 해치는 자를 우리가 공평하게 용서하는 것 같이

144:5.97 (1623.44) 친절히 우리를 내려다보시고 자비롭게 우리를 용서하소서.

144:5.98 (1624.1) 훌륭한 아들의 사랑과 헌신과 수여가

144:5.99 (1624.2)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와 더불어 영생을 베푸소서.

144:5.100 (1624.3) 우주의 하나님이 그 영을 충분히 우리에게 내려주시기를.

144:5.101 (1624.4) 우리에게 이 영의 인도하심을 받아들일 은혜를 내리소서.

144:5.102 (1624.5) 헌신하는 천사 무리가 사랑으로 베푸는 봉사로 인하여

144:5.103 (1624.6) 아들이 시대의 끝까지 우리를 안내하고 인도하기를.

144:5.104 (1624.7) 갈수록 더 우리를 늘 아버지처럼 만드시고

144:5.105 (1624.8) 우리의 마지막 날에 영원한 파라다이스 품으로 우리를 받으소서.

144:5.106 (1624.9) 바로 그러하니, 수여하신 아들의 이름으로

144:5.107 (1624.10) 또 최상의 아버지의 영예와 영광을 위하여.

144:5.108 (1624.11) 사도들은 대중을 교육할 때 마음대로 이 기도들을 수업 시간에 가르칠 수 없었지만, 개인의 종교적 체험으로 보아서 이 모든 계시로부터 많은 소득을 얻었다. 예수는 열두 사도를 가까이 두고 교육하는 과정에서 이 여러 기도와 다른 기도 모형(模型)을 이용했으며, 이 일곱 가지 표본 기도를 이 기록에 옮겨 적도록 특별 허가가 내렸다.

6. 요한의 사도들과 가진 회의

144:6.1 (1624.12) 10월 초하루 무렵에 빌립과 동료 사도 몇 사람이 가까운 마을에서 먹을 것을 사고 있었는데, 그때 세례자 요한의 사도 몇 사람을 만났다. 시장에서 우연히 이렇게 만난 결과로 길보아 야영지에서 예수의 사도와 요한의 사도들 사이에 3주 동안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예수의 선례를 따라서, 요한이 유력(有力)한 제자들 가운데 열두 사람을 사도로 얼마 전에 임명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충성스러운 지지자들의 우두머리, 아브너의 재촉을 받아서 요한은 그렇게 했다. 이 합동 회의가 있던 첫째 주간 내내, 예수는 길보아 야영지에 있었지만, 마지막 두 주 동안에 자리를 비웠다.

144:6.2 (1624.13) 이 달의 둘째 주가 시작되자 아브너는 동료들을 모두 길보아 야영지에 모았고, 예수의 사도들과 함께 회의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 3주 동안 이 스물네 사람은 하루에 세 번, 한 주에 6일 동안 회의를 가졌다. 첫째 주에 예수는 오전ㆍ오후ㆍ저녁 회의 사이에 그들과 함께 섞였다. 그들은 주가 함께 만나서 합동 회의를 주관하기를 바랐지만, 그는 토론에 참여하기를 굳게 물리쳤다. 하지만 세 번 그들에게 말씀하는 데 찬성했다. 예수가 스물네 사람에게 한 이 연설은 동정심ㆍ협동ㆍ관용에 대한 것이었다.

144:6.3 (1624.14) 안드레와 아브너는 두 사도 집단의 이 합동 회의를 번갈아 주관하였다. 이 사람들은 토론할 어려운 일이 많았고, 수많은 문제를 풀어야 했다. 거듭하여 그들은 문제를 예수에게 가져가곤 했지만, 오직 이런 말씀을 들었다: “나는 오직 너희의 개인적이고 순전히 종교적 문제에만 아랑곳하노라. 나는 개인에게 아버지의 대표요, 집단에게는 아니라. 너희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개인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다면, 내게로 오라. 그러면 너희 말에 귀를 기울이고, 너희 문제를 푸는 데 조언하리라. 그러나 너희가 종교 문제에서 서로 다른 인간적 해석을 조정하고 종교를 사회 조직으로 만드는 일을 시작할 때, 너희는 자신들의 결정에 따라서 모든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도록 운명이 정해졌느니라. 그래도 나는 늘 공감하고 언제나 관심을 가지며, 너희가 모두 찬성한다면, 영적 중요성이 없는 이러한 문제들에 관하여 결론을 내릴 때, 완전히 승인하고 한껏 협동할 것을 내가 미리 서약하노라. 그리고 이제, 너희가 심의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나는 2주 동안 떠나겠노라. 내 걱정을 하지 말지니, 내가 돌아올 것임이라.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으리니 우리가 이 세상 외에 다른 나라들을 가지고 있음이라.”

144:6.4 (1625.1) 이렇게 말한 뒤에, 예수는 산허리로 내려갔다. 그들은 꼬박 2주 동안 그를 더 구경하지 못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이 동안에 무엇을 했는지 결코 알지 못했다. 스물네 사람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들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할 수 있기까지 얼마큼 시간이 걸렸고, 그들은 주가 자리에 계시지 않아서 당황하였다. 그러나 한 주 안에 다시 토론에 열중하였고, 그들은 도움을 청하러 예수에게 갈 수 없었다.

144:6.5 (1625.2) 그 집단이 찬성한 첫째 항목은 예수가 아주 최근에 그들에게 가르친 기도를 채택한 것이다. 이 기도를 두 사도 집단이 신자들에게 가르칠 기도로 받아들일 것을 만장 일치로 투표하였다.

144:6.6 (1625.3) 다음에, 감옥에 있든 풀려나든, 요한이 살아 있는 한, 두 사도 집단이 자체의 할 일을 계속할 것, 그리고 때때로 합의(合意)할 장소에서 석 달마다 한 주 동안 합동 회의를 열기로 결정했다.

144:6.7 (1625.4) 그러나 모든 어려움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세례 문제였다. 예수가 그 주제에 대하여 전에 전혀 발언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어려움은 더군다나 악화되었다. 요한이 살아 있는 한, 아니면 이 결정을 합동으로 수정할 때까지, 오직 요한의 사도들이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오직 예수의 사도들이 마지막에 새 제자들을 가르치기로 마침내 찬성했다. 따라서 그때부터 요한이 죽기까지, 요한의 두 사도가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려고 예수와 그의 사도들을 따라다녔다. 이는 세례가 하늘나라 일과 동맹하는 것을 겉으로 표시하는 첫 걸음이라고 합동 회의가 만장(滿場) 일치로 가결했기 때문이다.

144:6.8 (1625.5) 다음에, 요한이 죽을 경우에 요한의 사도들은 예수 앞에 나타나서 그의 지시에 복종하고 예수나 그의 사도들이 인가하지 않는 한, 더 세례를 주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

144:6.9 (1625.6) 다음에, 요한이 죽을 경우에 예수의 사도들은 신성한 영이 세례를 준다는 표시로, 비로소 물로 세례를 주기로 가결했다. 세례를 외치는 데 회개가 붙어야 하는가 아닌가는 선택이 되도록 두었고 그 집단을 제한하는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요한의 사도들은 “뉘우치고 세례받으라”하고 전도했고, 예수의 사도들은 “믿고 세례받으라”하고 외쳤다.

144:6.10 (1625.7) 이것이 예수의 추종자들이 다양한 노력을 조정하고 의견 차이를 조절하며, 집단의 사업을 조직하고 외관상 관습을 정하며, 개인의 종교적 습관을 사회에 적용시키려고 처음으로 시도한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144:6.11 (1625.8) 다른 사소한 문제들이 많이 고려되었고 그 해결은 만장 일치로 합의를 보았다. 예수가 없이 문제들에 부닥치고 어려움을 수습하도록 강요되었을 때, 이 스물네 사람은 이 2주 동안 참으로 놀라운 체험을 가졌다. 그들은 의견을 달리하고, 토론하고 다투고 기도하고 타협하기를 배웠고, 그동안 내내 다른 사람의 관점에 공감하며, 적어도 정직한 의견에 어느 정도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기를 배웠다.

144:6.12 (1625.9) 재정 문제를 마지막으로 토론하던 날 오후에 예수가 돌아왔다. 그는 심의한 결과를 듣고 결정에 귀를 기울이고 나서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 너희가 결정하였구나. 너희가 합동으로 결정한 그 정신대로 각자 수행하도록 내가 너희를 도우리라.”

144:6.13 (1626.1) 이때부터 2달 반이 되어 요한은 처형되었다. 이 기간 내내 요한의 사도들은 예수와 열두 사도와 함께 남아 있었다.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에서 수고하는 이 기간에, 모두 함께 일하고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길보아 야영은 서기 27년 11월 2일에 걷어치웠다.

7.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에서

144:7.1 (1626.2) 11월과 12월 내내, 예수와 스물네 사람은 데카폴리스의 여러 그리스 풍의 도시에서, 주로 스키토폴리스ㆍ게라사ㆍ아빌라ㆍ가다라에서 조용히 일했다. 이때는 정말로 요한의 일과 조직을 이어받는 예비 기간의 끝이었다. 새로운 계시를 사회에 퍼뜨린 종교는 그것이 구원하고자 하는 기존 종교의 확립된 형식 및 관습과 절충하는 값을 반드시 치른다. 세례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사회에 퍼진 한 종교 집단으로서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들을 흡수하려고 치른 값이었다. 요한의 추종자들은 예수의 추종자들과 합세하면서, 물 세례 외에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144:7.2 (1626.3)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로 가는 이 전도 사업에서 예수는 거의 대중에게 설교하지 않았다. 스물네 사람을 가르치는 데 어지간히 시간을 썼고, 요한의 열두 사도와 함께 많은 특별 회의를 가졌다.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예수가 어째서 감옥에 있는 요한을 찾아보러 가지 않는가, 어째서 그의 석방을 위하여 예수가 아무 노력을 하지 않는가 더욱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째서 예수가 아무런 놀라운 일을 하지 않는가, 어째서 신의 권한을 바깥에 나타내는 표징(標徵)을 보이려 하지 않는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길보아 야영지에 오기 전에 대체로 요한의 증언 때문에 예수를 믿었지만, 자신들이 주와 그 가르침과 접촉한 결과로 곧 믿기 시작했다.

144:7.3 (1626.4) 이 두 달 동안 그 집단은 대체로 짝을 지어 일했다. 예수의 사도들 중에 하나가 요한의 사도 하나와 함께 나갔다. 요한의 사도들은 세례를 주고 예수의 사도들은 가르쳤으며, 한편 알아들은 대로 모두가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했다. 이 이방인들과 신앙을 버린 유대인들 사이에서 많은 사람을 설득했다.

144:7.4 (1626.5) 요한의 사도들 중에 우두머리 아브너는 예수를 열심히 믿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나중에 복음을 전파하라고 주가 임명한 70인 선생의 집단에서 우두머리로 임명되었다.

8. 펠라 근처의 캠프에서

144:8.1 (1626.6) 12월 후반에 그들 모두가 펠라 가까이 요단강 근처로 가서, 거기서 다시 가르치고 전도하기 시작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복음을 들으려고 이 캠프로 왔다. 예수가 어느 날 오후 군중을 가르치고 있는 동안, 요한의 특별한 친구 몇 사람이 세례자로부터 마지막 소식을 가져왔다.

144:8.2 (1626.7) 요한은 이제 1년 반 동안 감옥에 있었다. 이 기간의 대부분에 예수는 아주 조용히 일했다. 그래서 요한이 하늘나라에 대하여 궁금히 여기게 된 것은 당연하다. 요한의 친구들은 예수가 가르치는 중간에 말씀을 막고 말했다. “당신이 참으로 구원자인가,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찾아야 하는가―세례자 요한이 물어보라고 우리를 보냈나이다.”

144:8.3 (1626.8) 예수는 말씀을 멈추고 요한의 친구들에게 말했다: “돌아가서 요한에게 그를 잊지 않았다고 이르라. 너희가 보고 들은 것, 가난한 자에게 좋은 소식이 전파된다고 이르라.” 요한의 사자들에게 말씀을 더하고 나서, 예수는 다시 군중을 향하여 말했다: “요한이 하늘나라의 복음을 의심한다고 생각지 말라. 오로지 내 제자이기도 한 그의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려고 묻느니라. 요한은 약자가 아니라. 내가 묻노니, 헤롯이 그를 감옥에 가두기 전에 요한이 설교한 것을 누가 들어보았느냐. 요한에게서 너희가 무엇을 보았느냐―바람에 흔들린 갈대이더냐? 변덕스럽고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더냐? 무릇 화려한 옷을 입고 세련되게 사는 자들은 임금의 궁정과 부자들의 저택에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요한을 바라보았을 때 무엇을 보았더냐? 선지자냐? 옳도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훨씬 더 큰 사람이라. 요한에 관하여 기록되었으되, ‘보라, 네 얼굴 앞에 내가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네 앞에서 길을 예비하리라’ 하였느니라.

144:8.4 (1627.1)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일어나지 않았느니라. 그래도 하늘나라에서는 작은 사람도 요한보다 더 크나니, 그가 영에게서 태어났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아는 까닭이라.”

144:8.5 (1627.2) 그날 예수의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려고 나아왔고, 이렇게 하여 하늘나라로 들어간다는 것을 대중 앞에서 공언했다. 요한의 사도들은 그날 이후로 예수와 단단히 결속되었다. 이 일은 요한과 예수의 추종자들이 정말로 뭉쳤음을 표시했다.

144:8.6 (1627.3) 사자들은 아브너와 이야기를 나눈 뒤에, 이 모든 소식을 요한에게 전하려고 마캐루스를 항하여 떠났다. 그는 크게 위로를 받았고, 그의 믿음은 예수의 말씀과 아브너가 준 소식을 받고서 더욱 굳건하게 되었다.

144:8.7 (1627.4) 이날 오후에 예수는 이렇게 말하며 계속 가르쳤다: “그러나 이 세대를 내가 무엇에 견주랴? 너희 중 많은 사람이 요한이 전하는 말도 내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장터에서 노는 어린아이들 같으니 동무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소리쳐 울어도 너희는 슬퍼하지 않았더라.’ 너희 가운데 더러도 마찬가지이라. 요한이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더니, 저희는 그가 악마에 들렸다 하였더라.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니, 바로 이 사람들이 말하되 ‘보라 게걸스레 먹는 자요 술꾼이로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이라!’ 진실로, 지혜가 옳은 것은 결과가 입증하느니라.

144:8.8 (1627.5)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이 진리 중에 얼마큼을 박식하고 거만한 자로부터 감추고 아기들에게는 드러낸 듯 보이리라. 그러나 아버지는 모든 일을 잘 하시니라. 아버지는 스스로 택하신 방법으로 우주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니라. 그러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는 다 오라, 그리하면 너희의 혼이 휴식을 얻으리라. 신이 주는 멍에를 너희가 지라, 그리하면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평안을 너희가 맛보리라.”

9. 세례자 요한의 죽음

144:9.1 (1627.6) 세례자 요한은 서기 28년 1월 10일 저녁에, 헤롯 안티파스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다. 이튿날 마캐루스에 갔던 요한의 제자들 몇이 그가 집행되었다는 말을 듣고 헤롯에게 가서 그의 시체를 요구했으며, 어느 무덤에 두었다가 나중에 세바스티에서, 아브너의 집에서 장례를 치렀다. 이튿날 1월 12일 그들은 북쪽으로 펠라 가까이에 있던 요한과 예수의 사도들의 캠프로 떠났고 예수에게 요한의 죽음에 관하여 일러주었다. 그 보고를 듣자 예수는 군중을 해산하고 스물네 사람을 함께 불러서 말했다: “요한이 죽었도다. 헤롯이 그의 목을 베었더라. 오늘밤 합동 회의를 열고 그에 따라 너희의 일을 정리하여라. 더 지체하지 말라. 하늘나라를 드러내놓고 힘차게 선포할 때가 왔느니라. 내일 우리는 갈릴리로 떠나리라.”

144:9.2 (1627.7) 따라서, 서기 28년 1월 13일 아침 일찍 예수와 사도들은 25명쯤 되는 제자들을 동반하여 가버나움으로 진행했고, 그날 밤 세베대의 집에서 묵었다.

제 145 편 가버나움에서 사건이 많았던 나흘

유란시아서

제 145 편

가버나움에서 사건이 많았던 나흘

145:0.1 (1628.1) 예수와 사도들은 1월 13일 화요일 저녁에 가버나움에 다다랐다. 여느 때처럼 그들은 벳세다에서 세베대의 집에 본부를 차렸다. 세례자 요한이 처형되었으므로 예수는 갈릴리에서 처음인 공개 대중 전도 여행을 시작하려고 준비했다. 예수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도시에 두루 빨리 퍼졌다. 이튿날 일찍,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서둘러서 나사렛으로 아들 요셉을 찾아보러 떠났다.

145:0.2 (1628.2) 광범위한 첫 대중 전도 여행을 준비하느라고 예수는 수요일ㆍ목요일ㆍ금요일을 세베대의 집에서 사도들을 가르치면서 보냈다. 또한 진지하게 묻는 많은 사람을 하나씩, 그리고 집단으로 받아들이고 가르쳤다. 안드레를 통해서, 다가오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연설하도록 주선해 두었다.

145:0.3 (1628.3) 금요일 저녁 늦게, 예수의 막내 누이 룻이 몰래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물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정박한 배 안에서, 함께 거의 한 시간을 보냈다. 요한 세베대를 제외하고 아무도 이번의 방문을 알지 못했고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부탁을 받았다. 룻은 아주 일찍 영적 의식이 들었을 때부터, 예수의 집안에서, 파란이 많았던 봉사, 그리고 죽음ㆍ부활ㆍ승천을 바로 거치기까지, 땅에서 그의 사명이 신성함을 한결같이 흔들리지 않고 믿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가장인 오라버니가 육체를 입고 행하는 임무의 초자연적 성질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마침내 저 세상으로 갔다. 땅에 있던 그의 가족에 대하여 말하면, 그가 재판받고 버림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벅찬 시련을 통해서 내내, 막내 룻은 예수에게 최고의 위안이 되었다.

1. 물고기를 잡아올리다

145:1.1 (1628.4) 바로 이 주 금요일 아침에 예수가 바닷가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사람들이 물가에 너무 가까이 그를 에워싸서 그는 가까이 있는 배에 타고 있던 어떤 어부들에게 구조(救助)하러 오라고 손짓했다. 배에 들어서서, 그는 모인 군중에게 두 시간이 넘도록 줄곧 가르쳤다. 이 배는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시몬 베드로가 예전에 고기잡이하던 배였고 예수가 손수 이 배를 만들었다. 이 특별한 날 아침에 다윗 세베대와 두 동료가 그 배를 쓰고 있었고, 호수에서 고기잡이하느라고 헛되이 밤을 새다가 물가 가까이로 막 들어왔다. 예수가 도움을 청했을 때, 그들은 그물을 깨끗이 하고 고치고 있었다.

145:1.2 (1628.5)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마친 뒤에 예수는 다윗에게 말했다: “나를 도우려고 와서 너희가 지체되었으니, 내가 너희와 함께 일하리라. 고기를 잡으러 가자. 저쪽 깊은 데로 배를 띄워 그물을 내려서 한 번 끌어당기라.” 그러나 다윗의 조수들 중의 한 사람, 시몬이 대답했다: “주여, 소용 없나이다.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했고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나이다. 그러나 당신이 명령하시니, 우리가 배를 띄워 그물을 내리리이다.” 시몬은 주인 다윗이 손짓했기 때문에 예수의 지시를 따르는 데 찬성하였다. 예수가 가리킨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렸고, 물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서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까 두려웠다. 하도 많아서 물가에 있는 동료들에게 도와달라고 손짓했다. 배 세 척 모두를 거의 가라앉기까지 물고기로 채웠을 때, 이 시몬은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서 말했다. “나를 떠나소서 주여, 나는 죄 많은 사람인 까닭이니이다.” 시몬과 이 사건에 관계된 모든 사람이 얼마나 많이 물고기가 잡혔는가 보고 놀랐다. 그날부터 다윗 세베대와 이 시몬과 그 동료들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145:1.3 (1629.1) 그러나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기적으로 물고기를 잡아올린 것이 아니다. 예수는 자연을 자세히 살피는 연구자였다. 그는 경험 있는 어부였고 갈릴리 바다 물고기의 습성을 알았다. 이 경우에 다만 하루 중 이때에 물고기가 보통 발견되는 곳으로 이 사람들에게 가라고 지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것을 기적으로 여겼다.

2. 오후에 회당에서

145:2.1 (1629.2) 다음 안식일, 회당에서 오후 예배에, 예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관하여 설교했다. 아침에는 시몬 베드로가 “하늘나라”에 대하여 설교했다. 그전에 회당의 목요일 저녁 모임에서는 안드레가 가르쳤고, 그의 주제는 “새 길”이었다. 이 특별한 시기에, 땅에서 다른 어느 도시보다 가버나움에서 더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

145:2.2 (1629.3) 이 안식일 오후에 회당에서 가르치면서, 예수는 관습대로 처음 구절을 율법에서 골라서, 출애굽기로부터 읽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을 섬기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의 빵과 물에 복을 내리겠고, 모든 병이 너희에게서 물러가리라.” 예언서에서 둘째 구절을 골라서, 이사야에서부터 읽었다: “일어나서 빛을 내라, 이는 네 빛이 다가왔고 주의 영광이 네 위에 이르렀음이라. 어둠이 땅을 덮고 큰 어둠이 사람들을 덮을지 모르나, 주의 영이 네 위에 이르겠고 신의 영광이 너와 함께 하심이 보이리라. 이방인들조차 이 빛으로 다가오고, 많은 위대한 사람이 이 빛이 밝은 것에 항복할지니라.”

145:2.3 (1629.4) 이 설교는 예수 편에서 종교가 개인적 체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려는 노력이었다. 다른 여러 가지 가운데 주는 말씀했다:

145:2.4 (1629.5) “너희가 잘 알다시피, 마음이 친절한 아버지는 가족 전체를 사랑하며, 한 무리로서 그렇게 여기는 것은 그 가족의 식구 하나하나를 깊이 사랑하는 까닭이라. 너희는 이제 더 이스라엘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가까이 가야 하느니라. 한 무리로서 너희는 정말로 이스라엘의 자손이지만, 개인으로서 너희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자식이라. 아버지를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을 가져오고, 개인적으로 겪는 진정한 체험으로서 개별 신자에게 그의 사랑과 자비를 계시하려고, 내가 왔노라. 야웨가 그의 민족을 보살피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한다고 선지자들이 다 너희를 가르쳤느니라. 그러나 더욱 큰 진리를 선포하려고 내가 너희 사이에 왔나니 하나님이 너―너희 하나하나―를 개인으로서 사랑한다는 이 진리를 많은 후기 선지자가 또한 깨달았느니라. 이 모든 세대에 걸쳐서 너희는 민족이나 종족의 종교가 있었으나 이제 너희에게 개인적 종교를 주려고 내가 왔노라.

145:2.5 (1630.1) “그러나 이것조차도 새로운 생각이 아니라. 선지자들 중에 더러가 그렇게 너희에게 가르쳤은즉, 너희 사이에 영적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이 이 진리를 알았느니라. 성서에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렇게 이르는 것을 너희가 읽지 아니하였느냐? ‘그 시절에 저희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되 아이들의 이가 시다고 사람들이 더 말하지 않으리라. 사람마다 자신의 불의(不義) 때문에 죽을 것이요, 신 포도를 먹는 사람은 누구나 이가 시리라. 보라, 내가 내 민족과 새 언약을 맺는 날이 이르리니, 내가 에집트 땅에서 저희의 조상을 데리고 나올 때 저희와 약속한 대로가 아니라 새 방법을 따르리라. 나는 내 율법을 저희의 가슴 속에 쓰기까지 하리라. 나는 저희의 하나님이 되겠고 저희는 내 민족이 될지니라. 그날에 한 사람이 이웃에게, 네가 주를 아느냐? 하고 말하지 않으리라. 아니라! 이는 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저희가 모두 나를 개인적으로 알게 될 것임이라.’

145:2.6 (1630.2) “이 약속을 너희가 읽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성서(聖書)를 믿지 아니하느냐? 선지자의 말씀이 바로 오늘날 너희가 바라보는 것 중에 이루어졌음을 깨닫지 못하느냐? 종교를 마음의 일로 만들고, 바로 너희가 하나님께 개인으로서 이야기하라고 예레미야가 너희에게 훈계하지 않더냐? 하늘의 하나님은 너희 개인의 마음을 훑어보리라고 그 선지가 너희에게 이르지 않더냐? 인간의 타고난 마음은 무엇보다도 속이는 성향이 있고, 때때로 지독하게 사악하다고 너희가 경고를 받지 아니하였느냐?

145:2.7 (1630.3) “종교가 너희 개인의 체험에서 현실이 되어야 한다고 에스겔이 바로 너희 조상에게 가르친 구절을 또한 읽지 아니하였느냐?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더니 아이들의 이가 시더라’하는 속담을 너희가 이제 더 사용하지 아니하리라. 주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내가 살아 있다시피, 보라 모든 혼이 내 것이로다, 아버지의 혼처럼 아들의 혼도 마찬가지라. 오직 죄짓는 혼이 죽을지니라.’ 그리고 나서 에스겔은 오늘날까지도 내다보았으니, 그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했더라: ‘내가 또한 새로운 마음을 너희에게 줄 것이요, 새 영을 너희 안에 두리라.’

145:2.8 (1630.4) “한 사람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한 민족을 벌하리라고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한 민족이 지은 죄 때문에 믿는 자녀들 중에 한 사람을 벌하지도 아니하리라. 하지만 어떤 가족의 개별 식구도 가족의 잘못과 집단의 범죄로 생기는 물질적 결과를 흔히 겪어야 하느니라. 더 좋은 나라가―더 좋은 세상이―올 희망은 개인의 진보와 깨우침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지 못하느냐?”

145:2.9 (1630.5) 그 다음에 사람이 이 영적 자유를 깨달은 뒤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뜻하는 것은 땅에 있는 자녀들이 파라다이스로 영원히 올라가는 생애를 시작하는 것이라고 주는 묘사했다. 이 생애는 창조자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알고 그와 같이 되려고 애쓰라는, 깃드는 영의 신성한 재촉에 사람이 의식하여 반응하는 것이다.

145:2.10 (1630.6) 사도들에게 이 설교는 크게 도움이 되었다. 모두가 하늘나라의 복음이 민족이 아니라 개인에게 전하는 소식임을 아주 충분히 깨달았다.

145:2.11 (1630.7)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익숙하기는 했어도, 이 안식일에 하신 설교를 듣고 놀라워했다. 그는 정말로, 서기관이 아니라 권한을 가진 자로서 가르쳤다.

145:2.12 (1630.8) 예수가 말씀을 막 마쳤을 때, 회중 가운데 말씀에 아주 흥분한 어느 젊은이가 사나운 간질병으로 발작이 일어나 크게 소리쳤다. 발작이 끝났을 때, 정신을 차리면서 꿈 같은 상태에서 말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요, 당신은 우리를 죽이러 왔나이까?” 예수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 명하고, 젊은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 “정신을 차려라”―그리고 그는 즉시 깨어났다.

145:2.13 (1631.1) 이 젊은이는 더러운 귀신이나 악마에 들려 있지 않았다. 평범한 간질로 고생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기의 질병이 악한 귀신에 들렸기 때문이라고 가르침을 받아왔다. 그는 이 가르침을 믿었고, 자기 병에 관하여 생각하고 말한 모든 것을 믿었던 대로 행동하였다. 사람들은 더러운 귀신들이 들어가 그런 현상을 직접 일으킨다고 모두 믿었다. 따라서 예수가 이 사람한테서 악마를 내쫓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때 예수는 그 간질을 고치지 않았다. 이 사람은 그날 조금 뒤에 해가 질 때까지 정말로 고침을 받지 않았다. 오순절(五旬節) 날이 오래 지난 뒤에, 예수의 행적을 마지막으로 기록한 사도 요한은 이른 바 “악마를 내쫓는” 이 행적에 대하여 전혀 언급을 피했고, 악마에 들린 그런 경우가 오순절 뒤에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사실에 비추어 그렇게 했다.

145:2.14 (1631.2) 이 평범한 사건의 결과로, 회당에서 오후 설교를 마쳤을 때 예수가 한 사람에게서 악마를 쫓아냈고 기적으로 그를 고쳤다는 보고가 가버나움을 통해서 빨리 퍼졌다. 안식일은 그런 깜짝 놀랄 헛소문이 빠르게 효과적으로 퍼지기에 꼭 맞는 때였다. 이 보고는 또한 가버나움 둘레의 모든 작은 촌락까지 전해졌고, 많은 사람이 이를 믿었다.

145:2.15 (1631.3) 예수와 열두 사도가 본부를 두었던 세베대의 큰 집에서, 음식 만드는 일과 집안 일은 대체로 시몬 베드로의 아내와 장모가 맡아서 하였다. 베드로의 집은 세베대의 집 가까이에 있었다. 예수와 친구들은 회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집에 들렸는데, 베드로의 장모가 몸이 떨리고 열이 나서 며칠 동안 아팠기 때문이었다. 예수가 서서 이 아픈 여인을 내려다보고, 손을 만지고 이마를 쓰다듬으며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씀을 할 때쯤에, 어쩌다가 열이 떨어졌다. 예수는 회당에서 아무런 기적(奇蹟)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사도들에게 설명할 겨를이 아직 없었다. 이 사건이 머리 속에 아주 새롭고 눈에 선하였고, 가나에서 있었던 물과 포도주를 상기하면서 그들은 이 우연을 또 하나의 기적이라고 잡아챘고 몇 사람은 달려나가서 도시 전역에 널리 그 소식을 퍼뜨렸다.

145:2.16 (1631.4) 베드로의 장모 아마타는 말라리아 열병을 앓고 있었다. 이때 예수에게 기적으로 치유받지 않았다. 세베대의 집 앞뜰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과 관련하여, 그 여자가 고침받은 것은 해가 지고 나서 몇시간 더 지난 뒤였다.

145:2.17 (1631.5) 이 사례들은, 이적을 찾는 세대와 기적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모든 그런 우연의 일치를 예수가 또 하나의 기적을 행했다고 선포하는 구실로 어김없이 이용하는 방식의 전형(典型)이다.

3. 해질 때의 병 고침

145:3.1 (1631.6) 예수와 사도들이 사건이 많았던 이 안식일이 저물 무렵에, 저녁을 먹으려고 준비할 때가 되자 온 가버나움과 그 주위는 기적으로 병을 고쳤다는 이 소문으로 시끌벅적했다. 바로 해가 지자마자, 아프거나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 예수에게 가거나, 친구들에게 몸을 실어 나르게 하려고 준비를 시작했다. 유대인의 가르침에 따르면, 거룩한 안식일 동안에는 병 고침을 추구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145:3.2 (1632.1) 따라서 해가 지평선 밑으로 가라앉자마자, 병든 남녀와 아이들 수십명이 벳세다의 세베대 집을 향하여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해가 이웃 집 뒤로 지자마자, 중풍이 든 딸과 함께 길을 떠났다.

145:3.3 (1632.2) 그날 하루 종일 있었던 사건들이 이 놀라운 해질녘의 장면을 위하여 무대를 마련했다. 오후의 설교에 예수가 이용한 구절조차 질병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했다. 그는 그러한 전례 없는 힘과 권한을 가지고 말씀했다! 그의 말씀은 사람을 사로잡았다! 아무런 인간적 권위로 호소하지 않았어도 사람들의 양심과 혼에게 직접 말했다. 논리나 율법의 말씨름이나 재치 있는 말을 이용하지 않았어도 듣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힘차게 직접, 뚜렷하게 개인적으로 호소했다.

145:3.4 (1632.3) 그 안식일은 예수가 땅에서 산 생애에서, 옳거니, 한 우주의 역사에서 대단한 날이었다. 지역 우주의 모든 계획과 목적으로 볼 때, 작은 유대 도시 가버나움은 네바돈의 참 서울이었다. “미움은 두려움의 그림자요 복수는 비겁을 감추는 가면이라”는 말씀, 예수의 설교에서 중대한 끝맺는 말씀을 들은 존재들은 가버나움 회당에 있었던 유대인 몇 사람만이 아니었다. 청중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악마의 자녀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복된 말씀을 잊을 수도 없었다.

145:3.5 (1632.4) 해가 진 뒤에 곧, 예수와 사도들이 아직 저녁상 근처에 남아 있었는데, 베드로의 아내가 앞뜰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를 들었다. 문까지 가면서 큰 무리의 아픈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 가버나움에서부터 예수의 손에서 병 고침을 받으려고 오고 있는 사람들로 길이 메어진 것을 보았다. 이 광경을 보고 나서 그 여자는 대번에 남편에게 가서 일렀고 남편은 예수에게 알렸다.

145:3.6 (1632.5) 세베대의 집 앞문에서 한 걸음 내디디었을 때, 주는 줄지어 선 사람들, 병들고 고통받는 인류를 보았다.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 거의 1천 명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그만큼의 사람들이 주 앞에 모여들었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몸이 아프지는 않았다. 더러는 그들이 아끼는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으려고 이렇게 애쓰는 것을 도우려고 왔다.

145:3.7 (1632.6) 대체로, 자신이 신뢰했던, 우주 행정을 담당한 아들들의 잘못과 그릇된 행동의 결과로서 고통받는 이 사람들, 어른과 아이들의 모습은, 특별히 예수의 인간 마음을 움직였고 이 인자한 창조 아들의 신다운 자비로움에 도전했다. 하지만 예수는 순전히 물질적 기적(奇蹟)에 기초를 두고 오래 가는 영적 운동을 결코 추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창조자 특권 드러내기를 삼가는 것이 그의 일관적 정책이었다. 가나 이후에 초자연적인 일이나 기적 같은 일이 그의 가르침을 따라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고통받는 이 군중은 그의 동정심을 움직였고 이해심을 가진 그의 사랑에 힘차게 호소했다.

145:3.8 (1632.7) 앞뜰에서 한 사람이 외쳤다: “주여, 말씀을 하시고 우리의 건강을 되찾아주소서, 우리의 병을 고치고 우리의 혼을 구원하소서!”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육신이 된 이 우주 창조자를 항상 따라다니던 세라핌, 물력 통제자, 생명 운반자, 중도자들로 이루어진 방대한 수행원들이, 군주가 신호(信號)를 내릴 경우에 창조 능력으로 행동하려고 준비했다. 예수의 지상 생애에서, 신의 지혜와 인간의 동정심이 사람의 아들의 판단 속에 서로 얽혀서, 아버지의 뜻에 호소함으로 피난처를 찾은 순간이었다.

145:3.9 (1632.8) 도와달라고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베드로가 주께 애원했을 때, 예수는 병든 무리를 내려다보고 대답했다. “나는 아버지를 드러내고 그의 나라를 세우려고 세상에 왔고, 이 목적을 위하여 내가 이 시간까지 생애를 살아 왔노라. 그러므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이라면, 그리고 하늘나라 복음의 선포에 헌신하는 것과 어긋나지 않는다면 내 아이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을 보고 싶노라― 그리고―” 그러나 더 하신 말씀은 떠들썩한 가운데 파묻혔다.

145:3.10 (1633.1) 예수는 병 고치는 이 결정의 책임을 아버지의 판결에 넘겼다. 분명하건대, 아버지는 아무런 반대할 뜻을 보이지 않았으니, 주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인격이 된 예수의 조절자의 지휘 하에서 수고하는 하늘 성격자 집단이 힘차게 술렁거렸기 때문이다. 병든 필사자들이 뒤섞인 이 무리 사이에 방대한 수행원들이 내려왔으며, 한 순간에 어른과 아이들 683명이 온전하게 되었고 모든 육체의 병과 기타 물질적 질환을 완전히 고침받았다. 그날 이전이나 이후에, 결코 그런 장면을 땅에서 구경한 적이 없었다. 병을 고치는 이 창조적 물결을 구경하려고 자리에 있던 우리에게, 이것은 정말로 가슴 떨리는 광경이었다.

145:3.11 (1633.2) 그러나 갑작스럽고 기대하지 않았던 초자연적 치유가 이렇게 일어난 데 놀란 모든 존재 가운데 예수가 가장 놀랐다. 인간적 관심과 동정심이 그 앞에 펼쳐진 고통과 질병의 장면에 집중된 순간에, 어떤 조건과 어떤 상황 아래서, 창조 아들의 창조 특권에서 시간 요소를 제한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인격화된 조절자가 타일러 경고한 것을 그의 인간 정신은 미처 기억하지 못했다. 예수는 이렇게 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어기지 않는다면 이 고통받는 필사자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인격이 된 예수의 조절자는 그때 그런 창조적 에너지 행위는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을 어기지 않으리라고 순식간에 판결했다. 그런 결정에 따라서―병 고치려는 소망을 예수가 앞서 표현한 데 비추어―그 창조 행위는 이미 일어났다. 창조 아들이 바라고 아버지가 뜻하시는 것은 이미 존재한다. 그 뒤에 예수가 땅에서 산 여생 동안 내내, 그렇게 집단으로 필사자의 육체를 치유한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145:3.12 (1633.3) 너희가 혹시 기대할까 싶지만, 가버나움의 벳세다에서 해질 때 이렇게 사람들을 고쳤다는 소문은 온 갈릴리와 유대에 두루, 그리고 그 지역을 지나서 퍼졌다. 다시 한 번 헤롯은 두려워졌고,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에 대하여 보고하고 그가 이전의 나사렛 목수인가 아니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세례자 요한인가 확인하라고 감시자들을 보냈다.

145:3.13 (1633.4) 육체의 치유를 뜻하지 않게 이렇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주로, 이때부터 땅에서 여생 동안 내내, 예수는 설교자일 뿐 아니라 의사가 되었다. 계속 가르친 것이 참말이지만, 몸소 한 일은 대체로 병자와 쇠약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이었고, 한편 사도들은 대중에게 설교하고 신자들에게 세례 주는 일을 했다.

145:3.14 (1633.5) 그러나 해질 때 신의 에너지가 전시되었을 때 초자연이나 창조의 힘으로 육체의 병을 고침받은 사람들의 대다수는, 특별한 자비가 이렇게 나타난 것에 영구하게 영적 소득을 얻지 못했다.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이 육체적 보살핌으로부터 참으로 교훈을 받았지만, 시간을 초월한 창조적 치유가 이렇게 놀랍게 일어난 것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영적인 나라가 진보하지는 않았다.

145:3.15 (1633.6) 땅에서 예수의 사명에 이따금 따랐던 병 고치는 이적(異蹟)들은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그의 계획의 일부가 아니었다. 전례 없이 신의 자비와 인간의 동정심이 결합되는 것과 관련하여, 거의 한없는 창조자 특권을 가진 신다운 존재를 땅에 계시게 할 때 본래부터 이러한 이적들이 우연히 따르게 된다. 그러나 편견을 일으키는 명성과 구하지 않던 나쁜 평판을 많이 안겨주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이른바 기적들은 예수에게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4. 그날 저녁

145:4.1 (1634.1) 이 병 고치는 사건이 크게 터지고 나서 저녁 내내, 기쁘고 즐거운 군중이 세베대의 집에 밀어닥쳤고, 예수의 사도들은 흥분의 절정에 이르렀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이날은 아마도 예수와 함께 지냈던 동안에 모든 좋은 날 중에서도 가장 좋은 날이었다. 그전이나 그후 어느 때에도 사도들의 희망이 자신 있게 기대하는 그런 경지(境地)까지 솟아오르지 않았다. 겨우 며칠 전에, 그리고 아직 사마리아 경계 안에 있을 때, 예수는 그들에게 하늘나라가 권능으로 선포될 때가 다가왔다고 일렀고, 그 약속의 성취라고 생각되는 것을 이제 눈으로 보았다. 치유하는 힘이 이렇게 놀랍게 나타난 것이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하는 환상으로 그들은 몸이 부르르 떨렸다. 예수가 신인가에 대하여 남았던 의심은 사라졌다. 그들은 글자 그대로, 어리둥절한 가운데 황홀한 기쁨에 취했다.

145:4.2 (1634.2) 그러나 그들이 예수를 찾았을 때, 그는 눈에 띄지 않았다. 주는 벌어진 일 때문에 마음이 많이 언짢았다. 여러 가지 병을 고침받은 이 어른과 아이들은 저녁 늦게까지 남아 있었고 감사의 말씀을 드릴까 하여 예수가 돌아오기를 바랐다. 시간이 지나고 예수가 은둔해 있자 사도들은 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계속 자리를 비우지만 않았다면, 그들의 기쁨은 충만하고 완벽했을 것이다. 예수가 돌아왔을 때, 시간이 늦었고 병 고치는 사건으로 혜택받은 거의 모든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예수는 열두 사도, 그리고 그에게 인사하려고 남아 있던 다른 사람들의 축하와 찬미를 물리치고, 오직 말했다: “내 아버지가 몸을 고칠 힘이 있다고 기뻐하지 말고, 오히려 혼을 구원할 힘이 있음을 기뻐하여라. 쉬러 가자, 내일 우리는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함이라.”

145:4.3 (1634.3) 또 다시, 실망하고 당황하고 슬픈 열두 사람은 쉬러 갔다. 쌍둥이를 빼고, 거의 아무도 그날 밤에 별로 눈을 붙이지 못했다. 사도들의 기운을 북돋우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무슨 일을 하자마자, 주는 즉시 그들의 희망을 박살내고 용기와 열심의 근거를 샅샅이 파괴하는 듯하였다. 어리둥절한 이 어부들이 서로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 오직 한 가지 생각 뿐이었다: “그를 이해할 수 없구나. 이 모두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5. 일요일 이른 아침에

145:5.1 (1634.4) 예수도 그 토요일 밤에 잠을 많이 자지 못했다. 세상이 육체의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물질적 어려움이 넘쳐흐르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영적 나라를 세우는 사명이, 육체적인 것을 보살피는 데 방해받거나, 아니면 적어도 예속되기까지 병자와 고통받는 자를 돌보는 일에 시간을 아주 많이 바치도록 강요 당하는 큰 위험을 숙고해보았다. 그날 밤에 예수의 인간 정신을 차지한 이 생각, 그리고 비슷한 생각들 때문에, 그는 날이 새기 오래 전,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아버지와 교통하려고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한 곳으로 혼자서 갔다. 이 이른 아침에 예수가 기도한 주제(主題)는, 필사자의 고통을 직면하여 영적인 것을 소홀히 하면서 육체적으로 봉사하는 일이 그의 시간을 모두 차지하도록 그렇게 신의 자비와 인간적 동정심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지혜와 판단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비록 병자 돌보는 일을 완전히 피하기를 바라지는 않았어도, 그는 또한 영적 가르침과 종교 훈련과 같은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145:5.2 (1635.1) 개인적으로 예배하기에 적당한 혼자 쓸 방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는 아주 여러 번 산으로 기도하러 나갔다.

145:5.3 (1635.2) 베드로는 그날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가 기도하러 나간 뒤에 즉시, 야고보와 요한을 깨웠고 세 사람은 주를 찾으러 갔다. 한 시간이 넘도록 찾다가 예수를 찾아냈고 그가 이상하게 행동하는 까닭을 설명해달라고 청하였다. 모든 사람이 기쁨에 넘쳐 있고 사도들이 대단히 기뻐하며, 치유하는 영이 힘차게 퍼부어진 것이 그를 불편하게 만든 듯이 보이는데 어째서 그런가 알고 싶어 했다.

145:5.4 (1635.3) 네 시간이 넘도록 예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 세 사도에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가르치고 그러한 전시의 위험을 설명했다. 그는 기도하러 나온 까닭을 그들에게 털어놓았다. 어째서 아버지의 나라가 이적을 행하고 육체를 치유하는 데 기초를 두고 세워질 수 없는가 하는 참 이유를 동료들에게 분명히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었다.

145:5.5 (1635.4) 그동안, 일요일 아침 일찍, 병을 앓는 다른 사람들의 무리와 호기심으로 찾아오는 많은 사람이 세베대의 집 근처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수를 만나려고 떠들썩했다. 안드레와 사도들은 너무 당황해서, 열심당원 시몬이 모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안드레는 몇몇 동료와 함께 예수를 찾으러 갔다. 세 사람과 함께 있는 예수를 찾아냈을 때, 안드레는 말했다: “주여, 당신은 어째서 우리만 군중과 함께 있도록 두시나이까? 보소서, 모든 사람이 당신을 찾나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당신의 가르침을 찾은 적이 전에 없었나이다. 지금도 당신이 하신 막강한 일 때문에, 가까이서 멀리서 온 사람들로 집이 둘러싸였나이다. 우리와 함께 저희를 보살피러 돌아가지 않겠나이까?”

145:5.6 (1635.5) 이 말을 듣자 예수는 대답했다: “안드레야, 땅에서 내 사명은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이요, 내가 전할 말은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너와 이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가르치지 않더냐? 그렇다면, 호기심 있는 자를 충족시키고, 징조와 이적 찾는 자를 만족시키려고 네가 나로 하여금 내 일을 제쳐놓게 하고 싶어 하다니 어인 일이냐? 이 몇 달 동안 내내 이 사람들 사이에 우리가 있지 않았더냐,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을 들으려고 저희가 무리를 지어 모였느냐? 어찌하여 저희가 와서 지금 우리를 둘러싸느냐? 저희가 혼의 구원을 받으려고 영적 진리를 받아들인 결과가 아니라 육체의 치유 때문이 아니냐? 특별한 전시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에게 끌릴 때, 저희 가운데 많은 사람은 진리와 구원을 찾으러 오지 않고, 오히려 육체의 병을 고침받고 물질적 문제에서 구원을 받으려고 오는 것이라.

145:5.7 (1635.6) “여태까지 내가 가버나움에 있었고, 회당에서, 바닷가에서, 들을 귀가 있고 진리를 받을 마음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였노라. 호기심 있는 이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영적인 것을 제쳐놓고 육체의 일을 보살피는 데 바빠지려고 너와 함께 돌아가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아픈 자를 보살피라고 내가 너희를 세웠으나, 내 가르침을 제쳐놓기까지 병 고치는 일에 내가 파묻혀서는 안 되느니라. 안드레야, 아니라 나는 너와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에게 가서, 우리가 저희에게 가르친 것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 됨으로 얻은 자유를 기뻐하라 이르라. 그리고 갈릴리의 다른 여러 도시를 향하여 우리가 떠날 준비를 하여라. 거기에는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길이 준비되어 있느니라. 이 목적을 위하여 내가 아버지로부터 왔노라. 그러면 여기서 네가 돌아오기를 내가 기다리는 동안, 가서 즉시 떠날 준비를 하여라.”

145:5.8 (1636.1) 예수가 말씀하고 나자, 안드레와 동료 사도들은 슬픔에 잠겨 세베대의 집으로 돌아가서 모인 군중을 해산하였고, 예수가 지시한 대로 여행을 위하여 재빨리 준비했다. 그래서, 서기 28년 1월 18일 일요일 오후에, 예수와 사도들은 갈릴리의 여러 도시에서 처음으로 정말로 공개된 대중 전도 여행을 떠났다. 이 첫번째 여행을 하면서 여러 도시에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도했지만 나사렛에 들리지는 않았다.

145:5.9 (1636.2) 그 일요일 오후에, 예수와 사도들이 림몬을 향하여 떠난 뒤에 조금 있다가, 아우 야고보와 유다가 그를 만나러 왔고 세베대의 집에 들렸다. 그날 한낮 무렵에 유다는 형 야고보를 찾아다녔고 같이 예수한테로 가자고 졸랐다. 야고보가 유다와 함께 가기로 찬성했을 때가 되자 예수는 이미 떠나버렸다.

145:5.10 (1636.3) 사도들은 가버나움에서 크게 관심을 휘저어 놓고 떠나기가 싫었다. 베드로는 1천 명 이상의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어 하늘나라로 들여보낼 수 있었다고 계산했다. 예수는 참을성 있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지만, 돌아가는 데 찬성하려 하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나서 토마스가 동료 사도들에게 말했다. “가자! 주가 말씀하셨느니라. 하늘나라의 신비(神秘)를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없어도 상관 없으니, 우리가 한 가지는 확실하니라.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아무 영광을 찾지 않는 선생을 따르노라.” 마지못해서 그들은 갈릴리의 여러 도시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떠났다.

제 146 편 첫 번째 갈릴리 전도 여행

유란시아서

제 146 편

첫 번째 갈릴리 전도 여행

146:0.1 (1637.1) 갈릴리 지방을 도는 첫 대중 전도 여행은 서기 28년 1월 18일 일요일에 시작되어 약 두 달 동안 이어졌고, 3월 17일에 가버나움으로 돌아와서 끝을 맺었다. 이 여행에서 예수와 열두 사도는 요한의 옛 사도들의 도움을 받아서, 림몬ㆍ요타파타ㆍ라마ㆍ스불론ㆍ이론ㆍ기스칼라ㆍ코라진ㆍ마돈ㆍ가나ㆍ나인ㆍ엔도르에서 복음을 전하고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여러 도시에서 묵고 가르쳤으며, 한편 많은 다른 작은 마을을 지나면서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였다.

146:0.2 (1637.2) 이번에 처음으로 예수는 동료들에게 자유롭게 전도하라고 허락하였다. 이 여행에서 오직 세 가지 경우에만 주의를 주었다. 나사렛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가버나움과 티베리아스를 지나갈 때 조심하라고 타일렀다. 마침내 제한 없이 마음대로 전도하고 가르친다고 느낀 것은 사도들에게 큰 만족의 근원이었다. 그들은 복음 전하는 일에 투신했고, 대단한 열심과 기쁨으로 아픈 자를 보살피고 믿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

1. 림몬에서 전도하다

146:1.1 (1637.3) 작은 도시 림몬은 한때 바빌로니아의 공기(空氣)의 신 람만을 모시었다. 옛 바빌로니아와 후일 조로아스터의 가르침 가운데 많은 것이 아직도 림몬 사람들의 관념에 담겨 있었다. 따라서 예수와 스물네 사람은 이 옛 신앙과 새로운 하늘나라 복음의 차이를 설명하는 과제에 시간을 많이 썼다. “아론과 금 송아지”에 대하여, 베드로는 초기 경력 중에서 큰 설교 하나를 여기서 했다.

146:1.2 (1637.4) 림몬의 많은 시민이 예수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이 되었으나 후일에 신자들에게 큰 문제를 일으켰다. 짧은 일생 동안에 자연 숭배자들을 영적 이상을 찬미하는 완전한 단체로 바꾸기는 어렵다.

146:1.3 (1637.5)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에 있던 빛과 어둠, 선과 악, 시간과 영원에 관한 많은 상급 관념은 나중에 이른바 기독교 교리 안에 흡수되었고 이를 포함한 것은 근동의 민족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더 쉽사리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나중에 필로가 히브리 신학에 맞게 조정한 바와 같이, 이상적 정신, 즉 눈에 보이고 물질적인 만물의 보이지 않는 원본에 대한 플라톤의 이론(理論)을 집어넣은 것은 바울의 기독교 가르침을 서쪽의 그리스인이 더 받아들이기 쉽게 만들었다.

146:1.4 (1637.6) 림몬에서 토단이 처음으로 하늘나라의 복음을 들었다. 그는 나중에 메소포타미아로, 또 거기를 훨씬 지나서 이 소식을 가져갔다. 그는 유프라테스를 지나서 사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처음으로 전한 사람들에 속했다.

2. 요타파타에서

146:2.1 (1638.1) 요타파타의 서민들은 예수와 사도들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고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요타파타 전도 임무에서 특별한 것은 이 작은 마을에서 머무른 둘째 날 저녁에, 예수가 스물네 사람에게 강론하신 것이었다. 나다니엘은 기도ㆍ감사ㆍ예배에 관한 주의 가르침에 머리가 헛갈렸다. 그의 물음에 대답하여 예수는 가르침을 연장하여 설명하느라고 길게 말씀하였다. 현대의 표현으로 요약하면 이 강론은 다음 몇 가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발표할 수 있다:

146:2.2 (1638.2) 1.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의식하며 불의(不義)를 끈질기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과 창조주 사이에, 인간의 혼이 영적 통신 회로와 기도(祈禱)로 연락하는 길을 차츰차츰 파괴한다. 하나님은 자연히 자식의 간청을 듣지만, 인간의 마음이 일부러 끈질기게 불의한 생각들을 품고 있을 때, 땅에 있는 아이와 하늘 아버지 사이에 개인적 교통이 차츰차츰 줄어든다.

146:2.3 (1638.3) 2. 알려지고 확정된 하나님의 법칙에 어긋나는 기도는 파라다이스 신들에게 지긋지긋한 것이다. 신들이 영ㆍ정신ㆍ물질의 여러 법칙에 따른 창조에게 말씀하실 때, 사람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으면, 지음받은 자가 그렇게 일부러 의식하여 멸시하는 바로 그 행위는, 법을 무시하고 복종하지 않는 그런 필사자의 개인적 간청을 영 성격자들이 듣지 않고 멀리하게 만든다. 예수는 사도들에게 선지자 스가랴를 인용했다. “저희가 듣기 싫어하여 등을 돌리고,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더라. 옳도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내 영이 보낸 내 율법과 말씀을 들을까 저어하여 저희는 돌처럼 마음을 굳게 하였더라. 그러므로 악한 생각의 결과가 저희의 죄 지은 머리 위에 큰 진노로 내렸더라. 그래서 저희가 자비를 외쳤어도 들을 귀가 하나도 없게 되었느니라.” 그리고 나서 예수는 이렇게 말한 현자의 잠언을 인용했다: “신의 율법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돌리는 자에게는, 그 기도조차 지긋지긋한 것이 될지니라.”

146:2.4 (1638.4) 3. 하나님과 사람이 교통하는 경로에서 인간 쪽을 열어놓으면 여러 세계의 사람들에게 베푸는, 항상 쏟아지는 신의 봉사의 흐름을 필사자는 즉시 이용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영이 말씀하는 것을 들을 때, 그런 체험에는 하나님이 동시에 그 사람의 기도에 귀를 기울인다는 사실이 저절로 생긴다. 죄의 용서조차도 어김없이 바로 이 모습으로 작용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네가 구하려고 생각하기도 전에 너를 용서했다. 그러나 동료 인간을 용서할 때까지 그런 용서는 너 개인의 종교적 체험에서 소용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용서(容恕)가 네가 동료를 용서하는 데 달려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용서를 체험하는 것은 꼭 그렇게 조건을 받는다. 이처럼 신과 인간의 용서가 동시에 일어나는 이 사실은 예수가 사도들에게 가르친 기도에서 인식되고 서로 연결되었다.

146:2.5 (1638.5) 4. 우주에는 자비가 피해 갈 힘이 없는 기본적 응보의 법칙이 있다. 시간과 공간의 영역에서 철저히 이기적인 사람은 파라다이스의 사심(私心) 없는 영광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조차, 살아남기를 선택하지 않는 어떤 필사 인간에게도 영원히 살아남는 구원을 강제로 줄 수 없다. 자비를 베푸는 범위는 넓지만, 결국 자비가 섞인 사랑조차 실질로 취소할 수 없는 응보의 명령이 있다. 다시 예수는 히브리 성서를 인용했다: “내가 불렀어도 너희는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뻗었어도 거들떠보는 자가 없었도다. 너희는 나의 조언을 모두 무시하고 내 책망을 물리쳤으며 이런 모반하는 태도로 인하여 피할 수 없이, 너희가 나를 불러도 대답을 얻지 못하느니라. 생명의 길을 물리쳤으매, 너희가 고통받을 때 나를 부지런히 찾을까 싶으나 나를 찾아내지 못하리라.”

146:2.6 (1639.1) 5. 자비를 받고자 하는 자는 자비를 보여야 한다. 판단을 받지 않도록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그 정신으로 너희가 또한 판단을 받을지니라. 자비는 우주의 공평(公平)을 완전히 지워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마지막에는 참인 것이 판명되리라, “가난한 자가 외치는 소리에 귀를 막는 자는 누구나, 또한 언젠가 도움을 외치겠으나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리라.” 진지한 기도는 하나님이 귀를 기울임을 보장한다. 어떤 간구라도 거기에 담긴 영적 지혜와 우주적 일관성이 그 대답이 언제, 어떻게, 어느 만큼 오는가 결정하는 요인이다. 지혜로운 아버지는 무지하고 경험 없는 자녀들의 어리석은 기도를 글자 그대로 들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터무니없는 간청을 드림으로 아이들은 많은 기쁨과 혼의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도 있다.

146:2.7 (1639.2) 6.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온전히 몸을 바쳤을 때, 너희의 모든 간구에 대하여 응답이 다가오리니, 너희의 기도가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따른 것이요 아버지의 뜻은 광대한 우주에 두루, 늘 명백하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아들이 바라고 무한한 아버지가 뜻하는 것은 실재한다. 그런 기도는 응답받지 않을 수 없으며 다른 어떤 종류의 간구도 도저히 충분히 응답받을 수 없다.

146:2.8 (1639.3) 7. 올바른 자의 외침은 하나님의 자녀가 보이는 믿음의 행위이다. 이 믿음의 행위는 선ㆍ진리ㆍ자비로 가득 찬 아버지의 창고 문을 열며, 이 좋은 선물은 아들이 다가와서 손수 쓰라고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기도는 사람을 대하는 신의 태도를 바꾸지 않지만, 변함없는 아버지를 향하는 사람의 태도를 바꾼다. 기도하는 사람의 사회ㆍ경제적 지위나 또는 외관상의 종교적 지위가 아니라, 동기가 그 기도로 하여금 신의 귀에 이르는 통행권을 준다.

146:2.9 (1639.4) 8. 시간의 지연을 피하거나 공간의 장애를 뛰어넘으려고 기도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 기도는 자신을 확대하거나 동료보다 부당하게 유리한 자리를 얻는 기법으로 고안되지 않았다. 철저히 이기적인 사람은 낱말의 참 뜻으로 볼 때, 기도할 수 없다. 예수는 말했다: “너는 하나님의 성품을 최고로 기뻐하라. 그리하면 네 마음이 진지하게 바라는 것을 분명히 주시리라.” “너의 길을 주께 맡기라. 그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그가 행하리라.” “주가 빈궁한 자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빈곤한 자의 기도를 눈여겨볼 것임이라.”

146:2.10 (1639.5) 9. “나는 아버지로부터 왔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아버지께 무엇을 구할까 언제라도 의심이 들면,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리하면 너의 진정한 필요와 소망에 따라서, 그리고 내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내가 너의 간구(懇求)를 내놓으리라.” 기도할 때 자기 중심이 되는 큰 위험을 조심하라. 자신을 위하여 많이 기도하기를 피하라. 너희 형제의 영적 진보를 위하여 더욱 기도하라. 물질적인 기도를 피하라. 영적으로 기도하고 영의 선물이 풍부하기를 기도하라.

146:2.11 (1639.6) 10. 너희가 아픈 자와 고통받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 이 고통받는 자들의 필요에 따라서 사랑으로 총명하게 보살피는 일을 너희의 간구가 대신할 것이라 기대하지 말라. 너희의 가족ㆍ친구ㆍ동료의 복지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러나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사랑으로 간구를 드리라. “그러나 언제 기도할까 나는 이르지 아니하리라. 오직 너희 안에 깃드는 영이 너희에게 감동을 주어 영들의 아버지와 너희가 마음 속에서 가지는 관계를 나타내는 간구를 입에 올릴까 하니라.”

146:2.12 (1640.1) 11. 많은 사람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에야 기도에 매달린다. 그런 관습은 경솔하며 잘못으로 이끈다. 괴로울 때 기도가 상책인 것이 참말이지만, 네 혼 속에 만사가 순조로울 때에도 아버지께 아들로서 말씀을 드리도록 머리를 써야 한다. 진정한 간구를 언제나 남모르게 드리라. 사람들이 네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기도를 듣지 못하게 하라. 예배하는 자들의 무리가 감사드리는 기도는 적절하지만, 혼이 드리는 기도는 개인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자녀 모두에게 적절한 오직 한 가지 형태의 기도가 있으니, 이와 같다: “하오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146:2.13 (1640.2) 12. 이 복음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늘나라가 펼쳐지기를 진지하게 기도해야 한다. 그는 히브리 성서의 모든 기도 중에서 시편(詩篇) 작가의 간구를 가장 좋게 보아 논평했다. “내 안에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아 하나님, 내 안에서 옳은 정신을 새롭게 하소서. 비밀스러운 죄를 내게서 없애고 거만하게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이 종을 붙드소서.” 기도와 경솔하고 거슬리는 말의 관계에 대하여 예수는 길게 논평하며 이렇게 인용하였다: “아 주여, 내 입 앞에 파수를 두소서.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예수는 말했다: “인간의 혀는 거의 아무도 길들일 수 없는 부분이나, 마음 속에 있는 영은 다스리기 힘든 이 부분을 친절한 관용의 목소리로, 그리고 영감을 주는 자비로운 봉사자로 변화시킬 수 있느니라.”

146:2.14 (1640.3) 13. 땅에서 살며 걷는 길에 신이 안내하시기를 구하는 기도는 아버지의 뜻을 알려고 드리는 기도 다음으로 중요하다. 실제로 이것은 신의 지혜를 얻으려는 기도를 뜻한다. 예수는 결코 인간의 지식과 특별한 기술을 기도로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기도는 사람이 신다운 영의 계심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키우는 한 요인이라고 가르쳤다. 예수가 정신적으로 진실하게 기도하라고 가르쳤을 때, 성실하게, 자기의 깨우침에 따라서 기도하는 것, 진심으로, 총명하게,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기도하는 것을 언급한다고 동료들에게 설명하였다.

146:2.15 (1640.4) 14. 화려한 말을 되풀이하거나 웅변의 문구를 쓰거나, 금식(禁食)하거나 고행하거나 또는 희생물을 바친다고 기도가 더욱 효력 있게 되리라는 생각을 품지 말라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감사를 통하여 참된 예배에 이르는 수단으로서, 기도를 이용하라고 신자들을 타일렀다. 그는 추종자들의 기도와 예배에 감사의 정신이 너무 적게 보인다고 한탄했다. 그는 이 기회에 성서를 이렇게 인용하였다. “주께 감사드리고 최고자의 이름을 찬송하며, 아침마다 그의 인자함을 인정하고 밤마다 그의 충실함을 인정하는 것은 좋은 일이니, 그가 하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를 기쁘게 하였음이라.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나는 감사를 드리리라.”

146:2.16 (1640.5) 15. 다음에 예수는 말했다: “너희의 평범한 필요에 대하여 항상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라. 땅에서 너희가 살면서 생기는 문제들에 관하여 불안해하지 말 것이나, 이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진지하게 감사의 정신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 너희가 필요한 것을 펼쳐놓으라.” 그리고 나서 성서를 인용했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겠고, 감사로 그의 이름을 높이리라. 이것이 뿔과 발굽 있는 수소나 송아지를 바치는 것보다 주를 더 기쁘게 하리라.”

146:2.17 (1641.1) 16. 아버지께 기도드리고 나서, 깃드는 영이 귀를 기울이는 혼에게 말할 좋은 기회를 주도록 고요히 받는 자세로 한동안 남아 있어야 한다고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가르쳤다. 인간의 정신이 참으로 예배하는 태도로 있을 때, 아버지의 영이 사람에게 말하기가 가장 좋다. 깃드는 아버지 영의 도움을 얻어서, 그리고 진리의 수단을 통하여 인간의 정신이 빛을 비춤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예배는 사람으로 하여금 예배받는 존재와 점점 더 같게 만든다고 예수는 가르쳤다. 예배는 유한자가 무한자의 계심 앞에 차츰 가까이 가고, 궁극에 그에게 이르게 하는 체험, 사람을 변화시키는 체험이다.

146:2.18 (1641.2) 예수는 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에 대하여 많은 다른 진리를 사도들에게 일러주었다. 그러나 많지 않은 사람이 그의 가르침을 충분히 깨우칠 수 있었다.

3. 라마에서 멈추다

146:3.1 (1641.3) 라마에서 예수는 나이 든 그리스인 철학자와 기억에 남을 토론을 가졌는데, 이 사람은 과학과 철학이 인간의 체험에서 생기는 필요를 채우는 데 충분하다고 가르쳤다. 인내와 동정심으로 예수는 이 그리스인 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말한 많은 것이 진리임을 인정했으나 말을 마쳤을 때, 그가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논할 때 “어디로부터 와서, 어째서,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를 설명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덧붙였다. “네가 그만둔 곳에서 우리가 시작하느니라. 종교는 사람의 혼에게 주는 계시(啓示)요, 이것은 정신만으로 결코 발견하거나 충분히 헤아릴 수 없는 영적 실체를 다루느니라. 지적 노력은 생명에 관한 사실을 드러낼지 모르나, 하늘나라 복음은 존재에 관한 진리를 펼쳐보이느니라. 너는 진리의 물질적 그림자를 논하였는데, 영원한 영적 실체들에 관하여 이르는 동안 너는 듣겠느냐? 그러한 실체들은 필사 존재에서 보는 물질적 사실의 그림자, 일시적으로 시간에 이 그림자를 던지느니라.” 한 시간이 넘도록 예수는 하늘나라 복음의 유익한 진리를 이 그리스인에게 가르쳤다. 늙은 철학자는 주의 접근 방법에 민감했고, 마음이 정말로 정직했기 때문에 이 구원의 복음을 즉시 믿었다.

146:3.2 (1641.4) 사도들은 그리스인의 여러 주장(主張)에 예수가 드러내놓고 동의하는 태도에 얼마큼 당황했으나 나중에 예수는 사사로운 자리에서 말했다: “아이들아, 내가 그 그리스인의 철학을 너그럽게 대했다고 해서 놀라지 말라. 속으로 참되고 진정한 확신은 바깥에서 분석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 아니하고, 진리는 정직한 비판을 분개하지도 않느니라. 너그럽지 못한 것은 자기의 믿음이 참된가 하고 남몰래 의심 품는 것을 덮는 가면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느니라. 진심으로 믿는 것이 진리라고 완전한 확신을 가졌을 때, 사람은 어느 때라도 이웃의 태도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느니라. 용기는 사람이 믿는다고 공언하는 것에 대한 확신, 철저히 정직한 확신이라. 성실한 사람은 자기의 참된 확신과 고귀한 이상을 비판적인 눈으로 검토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느니라.”

146:3.3 (1641.5) 라마에서 둘째 날 저녁에, 토마스는 예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주여, 당신의 가르침을 새로 믿는 자가, 이 하늘나라 복음이 진리인가 어떻게 정말로 알고, 정말로 확신할 수 있나이까?”

146:3.4 (1641.6) 예수는 토마스에게 말했다: “너희가 아버지의 하늘나라 집안으로 들어갔고, 너희가 하늘나라의 자녀들과 함께 영원히 살아남으리라는 확신은 전적으로 개인적 체험―진리의 말씀을 믿는 신앙―의 문제이라. 영적 확신은 신성한 진리의 영원한 실체들을 너희가 몸소 종교적으로 체험하는 것과 동등하며, 달리 말하면 진리인 실체들을 너희가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영적 믿음을 더하고 정직하게 의심하는 것을 뺀 것과 같으니라.

146:3.5 (1642.1) “아들은 아버지의 생명을 날 때부터 부여받느니라. 아버지의 살아 있는 영을 받았은즉, 따라서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아버지의 살아 있는 영, 곧 영생의 선물을 가진 신분이라고 보기 때문에, 너희는 육체로 사는 물질 세계에서 인생이 끝난 뒤에 살아남느니라. 정말로 내가 아버지로부터 오기 전에, 많은 사람이 이 생명을 가졌고, 더욱 많은 사람이 내 말을 믿었으므로 이 영을 받았느니라. 그러나 내가 선언하노니,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 아버지는 그의 영을 모든 사람의 마음 속으로 보내리라.

146:3.6 (1642.2) “너희는 머리 속에서 신의 영이 일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으나, 혼의 능력을 통제하는 것을 얼마큼 하늘 아버지의 영, 깃드는 이 영의 가르침과 안내에 맡겼는가 그 정도를 발견하는 실용적 방법이 있으니, 곧 너희가 동료 인간을 사랑하는 정도이라. 아버지의 이 영은 아버지의 사랑을 함께 가지느니라. 이 영이 사람을 지배함에 따라서, 신을 예배하는 방향으로, 그리고 동료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방향으로 어김없이 인도하느니라. 처음에는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으니, 나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우리 아버지가 안에 계시면서 마음 속에서 인도하는 것을 너희가 더욱 의식하게 된 까닭이라.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진리의 영이 모든 육체에게 퍼부어지겠고, 내가 지금 너희 가운데 살고 진리의 말씀을 일러주는 것 같이, 이 영은 사람들 사이에 살고 모든 사람을 가르치리라. 이 진리의 영은 너희 혼의 영적 재산을 대변하면서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도록 도우리라. 이 영은 아버지의 깃드는 계심을 어김없이 증언하겠고, 너희의 영은, 몇 사람 안에 지금 살고 있는 것 같이, 모든 사람 안에 살면서 너희가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르느니라.

146:3.7 (1642.3) “이 영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땅에서 난 자녀는 누구나 궁극에 하나님의 뜻을 알며, 내 아버지의 뜻에 굴복하는 자는 언제까지나 살리라. 땅의 생명으로부터 영원한 영토로 가는 길은 너희에게 쉽게 설명되지 않았으나, 한 길이 있고 언제나 있었느니라. 그 길을 새 생명의 길로 만들려고 내가 왔노라.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이미 영생(永生)을 가졌느니라―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고 나서 이 말씀 중에 많은 것을 너희가 더욱 잘 알아듣겠고, 너희는 지금의 체험을 돌이켜볼 수 있느니라.”

146:3.8 (1642.4) 이 복된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크게 즐거워하였다. 의로운 자가 살아남는 지 어쩐지에 대하여 유대인의 가르침은 뒤죽박죽이고 분명치 않았다. 모든 참된 신자(信者)가 영원히 살아남는다고 확신을 주는 아주 뚜렷하고 분명한 말씀을 듣고서 예수의 추종자들은 새 힘을 얻고 영감을 받았다.

146:3.9 (1642.5) 사도들은 계속하여 전도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한편 집집마다 방문하는 습관을 계속 지키며 낙심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환자와 고통받는 자를 보살피었다. 예수의 사도들 각자가 이제 요한의 사도 하나를 동료로 가졌으므로 사도의 조직은 확대되었다. 아브너는 안드레의 동료였다. 이 계획은 다음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내려갈 때까지 지속되었다.

146:3.10 (1642.6) 스불론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있었던 예수의 특별 교육은 하늘나라에서 서로의 의무에 관하여 계속된 토론을 주로 다루었고, 개인의 종교적 체험과 사회적ㆍ종교적 의무를 가진 친교 관계, 이 둘의 차이를 밝히려고 고안된 가르침이 담겨 있었다. 이것은 종교의 사회적 모습에 대하여 주가 일찍이 말씀하신 몇 번 안 되는 기회 중의 하나였다. 땅에서 사신 생애 전체를 통하여 예수는 종교를 사회 조직으로 만드는 것에 대하여 추종자들에게 가르침을 거의 주지 않았다.

146:3.11 (1643.1) 스불론 사람들은 혼합된 종족이었고 도저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라 할 수 없었다. 가버나움에서 병자들을 고쳤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거의 아무도 정말로 예수를 믿지 않았다.

4. 이론에서 복음을 전하다

146:4.1 (1643.2) 갈릴리와 유대 지방에서 작은 축에 속하는 많은 도시와 마찬가지로, 이론에는 회당이 하나 있었다. 예수는 그가 봉사하던 초기 시절에 안식일에 이런 회당에서 말씀하는 것이 버릇이었다. 때때로 아침 예배에 그가 말씀하고,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오후 시간에 설교하곤 하였다. 예수와 사도들은 또한 아주 흔히, 회당에서 주중에 저녁 집회에서 가르치고 설교하곤 하였다.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은 갈수록 예수를 적대하게 되었지만, 다른 도시에 있는 회당들에 대하여 직접 아무런 통제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예수의 대중 봉사 후기까지, 그가 가르치지 못하게 거의 보편적으로 회당(會堂) 문을 닫도록 널리 그에 반대하는 감정을 일으킬 수 없었다. 이때 갈릴리와 유대의 모든 회당은 그에게 문을 열고 있었다.

146:4.2 (1643.3) 그 시절에 이론은 광범위한 광산이 있던 장소였고, 광부(鑛夫)의 생애를 함께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는 이론에 머무르는 동안 광산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사도들이 집을 방문하고 공공 장소에서 전도하는 동안, 예수는 이 지하 노동자들과 함께 광산에서 일했다. 병 고치는 사람으로서 예수의 이름이 이 구석진 마을에까지 퍼져 있었다. 많은 병자와 고통받는 자가 도움을 구했고 많은 사람이 병 고치는 봉사로부터 크게 소득을 얻었다. 그러나 문둥병자의 경우를 제쳐놓고, 어떤 경우에도 주는 이른바 병 고치는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146:4.3 (1643.4) 이론에서 사흘째 오후 늦게, 광산에서 돌아오면서 예수는 투숙하는 장소로 가는 길에 어쩌다가 좁은 샛길을 지나가게 되었다. 문둥병에 걸린 어떤 남자의 더러운 오두막 가까이 다가갔을 때, 치유자라는 그의 명성을 들었으므로 그 병자는 예수가 문 앞을 지나갈 때,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대담하게 인사를 드리며 말했다. “주여, 당신이 원하시기만 하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당신이 거느리는 선생들이 전하는 말씀을 내가 들었사온데 깨끗하게 될 수 있다면 나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나이다.” 그 문둥병자가 이렇게 말한 것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문둥병자는 회당에 가거나, 달리 대중 예배에 참석하는 것조차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문둥병을 치유받지 못하면 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정말로 믿었다. 그가 질병이 걸렸음을 보고 매달리는 믿음의 말을 들었을 때, 예수의 사람 마음은 감동했고 신의 마음은 동정하여 움직였다. 예수가 바라보자, 그 사람은 엎드려서 경배하였다. 그러자 주는 손을 뻗어 그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내가 바라노니―깨끗하여라.” 그는 즉시 고침을 받았다. 문둥병이 이제 더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146:4.4 (1643.5) 발 앞에 꿇어 엎드린 사람을 일으켰을 때 예수는 당부했다: “아무에게도 네가 병 고침받은 것을 말하지 말고, 오히려 조용히 네 일을 보도록 처리하여라. 사제에게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증언으로 모세가 명한 희생물을 바치라.”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가 지시한 대로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마을에 두루, 예수가 그의 문둥병을 고쳤다고 떠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온 마을에 알려져 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병이 깨끗이 나은 것을 뻔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예수가 충고한 대로 사제들에게 가지 않았다. 예수가 병을 고쳐주었다는 소식을 그가 널리 퍼뜨린 결과로 주는 병자들에게 너무나 둘러싸여서,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마을로 들어가지 않았어도, 예수는 광산 가까운 교외에서 이틀 동안 남아 있었고, 믿는 광부들에게 하늘나라 복음에 관하여 계속하여 더 가르쳤다.

146:4.5 (1644.1) 문둥병자를 이렇게 고친 것은 이때까지 예수가 마음먹고 계획하여 행한, 이른바 첫 기적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진짜 문둥병의 경우였다.

146:4.6 (1644.2) 그들은 이론으로부터 기스칼라로 가서 이틀 동안 복음을 선포하며 지냈다. 다음에 코라진을 향하여 떠났고, 거기서 좋은 소식을 전하면서 거의 한 주를 보냈다. 그러나 코라진에서는 하늘나라로 들어오는 신자를 많이 얻을 수 없었다. 예수가 가르친 어느 곳에서도, 사람들이 말씀을 그렇게 일반적으로 거부하는 일에 부닥친 적이 없었다. 코라진에서 머문 것은 대부분의 사도들에게 아주 침울하였다. 안드레와 아브너는 동료들의 사기를 지탱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가버나움을 조용히 지나치면서, 줄곧 마돈 마을로 갔는데 거기서도 운이 좋지 않았다. 아주 최근에 방문한 이 여러 마을에서 그들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가르치고 전도하면서 예수가 치유자라는 언급을 삼가라고 예수가 고집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대부분 사도들의 머리 속에 자리잡았다. 예수가 또 다른 문둥병자를 고치든지, 아니면 어떤 다른 방법으로 권능을 드러내서 사람들의 눈을 끌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그러나 주는 그들이 열심히 재촉해도 꼼짝하지 않았다.

5. 가나로 돌아와서

146:5.1 (1644.3) “내일 우리는 가나로 가느니라” 예수가 발표했을 때, 사도 일행은 크게 기운이 났다. 가나에서 알아듣는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으니, 예수가 거기에서 대단히 이름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데려오는 일을 잘 해 나가고 있었는데, 사흘째에 가버나움의 어떤 특출한 시민, 타이투스가 가나에 도착했다. 그는 얼마큼 믿는 사람이었고 그의 아들이 위독했다. 그는 예수가 가나에 계시다는 말을 들었고, 그래서 서둘러 예수를 만나러 갔다. 가버나움에 있는 신자들은 예수가 어떤 병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46:5.2 (1644.4) 가나에서 예수를 찾아냈을 때, 이 귀인(貴人)은 예수에게 가버나움으로 서둘러 가서 앓는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청했다. 사도들이 숨을 죽이고 기대하며 서 있는 동안, 예수는 아픈 소년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너희를 얼마나 오래 참으랴? 하나님의 권능이 너희 사이에 있거늘 너희는 징조(徵兆)를 보고 이적을 구경하지 않으면, 믿으려 하지 않는도다.” 그러나 그 귀인은 예수에게 간청하며 말했다: “내 주여, 나는 믿나이다. 그러나 내 아이가 죽기 전에 오소서. 내가 떠날 때도 그가 죽을 지경에 있었던 까닭이나이다.” 예수가 한 순간 머리를 숙이고 명상에 잠겼다가 갑자기 말했다: “네 집으로 돌아가라, 네 아들이 살리라.” 타이투스는 예수의 말씀을 믿었고 가버나움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돌아가는 동안에, 종들이 만나려고 나와서 말했다: “기뻐하소서, 당신의 아들이 낫고 있기 때문이나이다―그가 살았나이다.” 그러자 타이투스는 어느 시간에 그 소년이 낫기 시작했는가 물었다. “어제 오후 1시쯤에 아이가 열이 내렸더이다” 종들이 대답했을 때, 그는 그때가 “네 아들이 살리라”하고 예수가 말씀하신 그 시간쯤이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타이투스는 이때부터 마음을 다하여 믿었고 또한 온 집안이 믿었다. 이 아들은 하늘나라의 힘찬 봉사자가 되었고, 나중에 로마에서 처형받은 자들과 함께 목숨을 바쳤다. 타이투스의 집안 전체와 그 친구들, 그리고 사도들까지 이 사건을 기적이라고 여겼어도 기적은 아니었다. 적어도 육체의 병을 고치는 기적은 아니었다. 다만 자연 법칙의 과정에 관하여 선견(先見)이 있었던 경우였을 뿐이고, 세례받은 뒤에 예수는 자주 그런 지식을 이용하였다.

146:5.3 (1645.1) 이 마을에서 베푼 봉사에 뒤따라 이런 종류의 둘째 사건으로 지나치게 눈을 끌었기 때문에, 예수는 다시 가나로부터 서둘러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물과 포도주를 기억하였고, 그가 아주 먼 거리에서 귀인의 아들을 고쳤다고 생각했으므로, 사람들은 병자와 고통받는 사람들만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병자들을 먼 거리에서 고치라고 요청하는 사자들을 보냈다. 온 시골이 떠들썩함을 보자, 예수는 말했다, “나인으로 가자.”

6. 나인과 과부의 아들

146:6.1 (1645.2) 이 사람들은 징조를 믿었고 이들은 이적을 찾는 세대였다. 이때가 되어서 갈릴리의 중부 및 남부의 사람들은 예수에 대하여, 그리고 개인적 봉사를 베푸신 것에 대하여, 기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순전한 신경(神經) 질환으로 고생하고 감정의 장애로 고통받는 몇십ㆍ몇백의 정직한 사람들이 예수 앞으로 왔고, 그리고 나서 친구들에게 예수가 그들을 고쳤다고 외치면서 친구들에게, 집으로 돌아갔다. 무지하고 생각이 단순한 이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치유된 그런 사례를 육체적 치유라, 기적으로 고친 것이라고 생각했다.

146:6.2 (1645.3) 예수가 가나를 떠나서 나인으로 가려 했을 때, 큰 무리의 신자들과 호기심 있는 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다. 그들은 기적과 이적을 구경하려고 단단히 별렀고 실망하지 않게 되어 있었다. 예수와 사도들이 도시의 대문 가까이 다가가자, 근처의 공동 묘지로 가는 길에 있던 장례 행렬을 만났는데, 이들은 나인에서 과부가 된 어머니의 외아들을 나르고 있었다. 이 여인은 많이 존경받는 사람이었고 마을 사람들의 절반이, 죽었다고 생각된 이 소년을 실은 들것을 나르는 자들을 따라갔다. 장례 행렬이 예수와 추종자들에게 다가왔을 때, 과부와 그 친구들은 주를 알아보고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기적을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지, 그들은 예수가 어떤 인간의 병도 고칠 수 있고 그런 치유자가 죽은 자도 살릴 수 없는가 생각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성가시게 졸라대는데, 예수는 앞으로 나서서, 들것의 덮개를 열고 소년을 들여다보았다. 젊은이가 정말로 죽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그가 그 자리에 있음으로 비극을 막을 수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 어머니를 향하여 말했다: “울지 말라. 네 아들이 죽지 않았고 잠자느니라. 네 품에 그를 돌려받으리라.” 그리고 나서 소년의 손을 잡고 말했다, “깨어서 일어나라.” 죽었다고 생각된 소년이 당장에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 시작했다. 예수는 그들을 집으로 보냈다.

146:6.3 (1645.4) 예수는 군중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아이가 정말로 죽지 않았다, 자기가 그를 무덤에서 살려낸 것이 아니라 설명하려고 헛되이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따라오던 군중, 그리고 나인 마을 전체가 열광의 극치에 이르기까지 자극을 받았다. 두려움이 많은 사람을 휩쓸었고 더러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더러는 기도를 시작하고 그들의 죄 때문에 슬피 울었다. 밤이 다가오고 오래 지나서야 시끄럽던 군중이 흩어질 수 있었다. 물론, 소년이 죽지 않았다고 예수가 말했는데도, 사람마다, 기적이 일어났다, 죽은 자조차 살아났다고 주장하였다. 소년이 다만 깊이 잠들어 있었다고 예수가 일렀어도, 그들은 그것이 예수의 말버릇이라고 설명했고 예수가 언제나 대단히 겸손하게 기적을 감추려 했다는 사실에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146:6.4 (1646.1) 그래서 갈릴리에 두루, 그리고 유대까지, 예수가 과부의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냈다는 말이 퍼졌고 이 보고를 들은 많은 사람이 믿었다. 예수가 과부의 아들에게 깨어서 일어나라고 명했을 때, 그 소년이 정말로 죽지 않았다는 것을 예수는 모든 사도에게도 결코 충분히 납득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을 제쳐놓고, 후일의 모든 기록에 들어가지 않을 만큼 예수는 충분히 그들에게 강조했다. 누가는 이 사건을 전해 들은 그대로 이야기를 기록했다. 또 다시 예수는 치료자로서 너무나 사람들에게 에워싸여서, 이튿날 일찍 엔도르를 향하여 떠났다.

7. 엔도르에서

146:7.1 (1646.2) 엔도르에서 예수는 육체의 병 고침을 얻으려고 아우성치는 군중을 며칠 동안 피했다. 이곳에서 머무르는 동안, 예수는 사도들을 가르치려고 사울 임금과 엔도르의 마녀 이야기를 해주었다. 죽은 자의 영이라고 생각된 것을 때때로 흉내내던 중도자, 그릇된 길에 빠진 모반한 중도자들이 곧 통제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이상한 짓을 계속할 수 없으리라 예수는 사도들에게 알기 쉽게 일러주었다.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간 뒤에,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영을 모든 육체에게 퍼부어 준 뒤에, 그러한 준영(準靈) 존재―이른바 더러운 귀신―이 필사자들 중에서 정신이 박약하고 악한 생각을 가진 자에게 더 들어갈 수 없으리라고 일러주었다.

146:7.2 (1646.3) 예수는 더 나아가서, 세상을 떠난 인간의 영은 살아 있는 친구들과 교통하려고 기원이 있던 세계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사도들에게 설명했다. 오직 한 섭리 시대가 지난 뒤에야 필사 인간의 진보하는 영이, 그것도 특별한 경우에 그 행성의 영적 행정부의 일부로서, 땅으로 돌아오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146:7.3 (1646.4) 이틀 동안 쉬고 나자, 예수는 사도들에게 말했다: “시골이 조용해지는 동안, 내일 아침에 가버나움으로 돌아가서 머무르고 가르치자. 고향에서 이때가 되어서는 사람들이 이 종류의 흥분에서 얼마큼 회복되었으리라.”

제 147 편 막간의 예루살렘 방문

유란시아서

제 147 편

막간의 예루살렘 방문

147:0.1 (1647.1) 예수와 사도들은 3월 17일 수요일에 가버나움에 이르렀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떠나기 전에 벳세다 본부에서 2주를 보냈다. 이 2주 동안 사도들은 바닷가에서 사람들을 가르쳤고, 한편 예수는 산에서 혼자 아버지의 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기간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예수는 두 차례 티베리아스로 몰래 여행했으며 거기서 신자들을 만나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가르쳤다.

147:0.2 (1647.2) 헤롯 집안의 여러 사람이 예수를 믿었고, 이 모임에 참석했다. 헤롯의 정식 가족 중에서 이 신자(信者)들의 영향이 예수에 대하여 권력자의 적대감을 줄이도록 도왔다. 티베리아스에 있는 이 신자들은 예수가 선포한 그 “나라”는 영적 성질을 가졌고 정치적 사업이 아니라고 충분히 헤롯에게 설명했다. 헤롯은 자기 집안에 있는 이 사람들을 오히려 믿었고, 따라서 예수의 가르침과 병 고침에 관한 여러 보고가 널리 퍼지는 것에 지나치게 놀라지 않았다. 그는 병 고치는 자나 종교 선생으로서 예수가 일하는 것에 아무런 반대가 없었다. 헤롯의 많은 조언자와 바로 헤롯조차 호의적 태도를 가졌는데도, 한 무리의 부하들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의 영향을 너무 받아서 예수와 사도들에게 몹시 미워하고 위협하는 적으로 남았고 후일에 그들의 대중 활동을 많이 방해했다. 예수에게 가장 큰 위험은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었고 헤롯에게 있지 않았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와 사도들은 예루살렘과 유대보다, 갈릴리에서 무척 많은 시간을 보내고 대부분의 대중 전도를 거기서 하였다.

1. 백부장의 종

147:1.1 (1647.3) 유월절 축제를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려고 준비하기 전날, 가버나움에 주둔하던 로마인 수비대의 백부장(百夫長), 지휘관 망구스가 회당장들에게 가서 말했다: “나의 충실한 전령이 아프고 죽을 지경에 있나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나를 대변하여 예수에게 가서 내 종을 고쳐달라고 그에게 부탁드리겠나이까?” 로마인 지휘관이 이렇게 한 것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에게 더 영향력을 미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장로들이 예수를 만나러 갔고 그 대변자가 말했다: “선생이여, 당신이 가버나움으로 가서 로마인 백부장이 가장 아끼는 종을 구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하나이다. 당신이 그를 눈여겨볼 가치가 있는 것은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당신이 회당에서 여러 번 말씀하셨사온데 바로 그 회당을 우리에게 지어주기까지 한 까닭이나이다.”

147:1.2 (1647.4) 그들의 말을 듣고 나서 예수가 말했다: “내가 너희와 함께 가겠노라.” 그가 그들과 함께 백부장의 집으로 갔는데, 그 집 뜰로 들어가기 전에, 로마 군인은 예수를 맞이하러 친구들을 보내서, “주여, 내 집으로 들어오는 수고를 그만두소서, 당신이 내 지붕 밑으로 들어오실 만큼 나는 자격이 없음이니이다. 당신에게 갈 자격이 있다 생각지도 않나이다. 그러므로 당신 민족의 장로들을 보냈나이다. 그러나 당신이 서신 자리에서 말씀할 수 있고 그리하면 내 종이 나을 것을 아나이다. 이는 바로 내가 다른 사람의 지휘 밑에 있고 내 아래에 병사들이 있으며,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다른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오며, 내 종들에게 이리 하라, 저리 하라 하면 저희가 그대로 하나이다.”

147:1.3 (1648.1) 예수가 이 말을 들었을 때, 돌이켜 사도들, 그리고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 이방인의 믿음이 놀랍도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그렇게 큰 믿음을 본 적이 없노라, 아니라, 이스라엘에서는 아니라.” 돌아서면서 예수는 말했다. “여기서 가자.” 백부장의 친구들이 그 집으로 들어가서 예수가 말씀한 것을 망구스에게 일렀다. 그 시간부터 그 종은 낫기 시작했고, 결국은 정상의 건강과 쓸모를 회복하였다.

147:1.4 (1648.2) 그러나 이 경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결코 몰랐다. 단지 이렇게 기록할 뿐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백부장의 종에게 병을 고쳐주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예수를 따라다니던 존재들에게 드러나지 않았다. 우리는 오직 그 종이 완전히 회복했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 뿐이다.

2.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다

147:2.1 (1648.3) 3월 30일 화요일 아침 일찍, 예수와 사도 일행은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났고, 요단강 유역의 길로 갔다. 4월 2일 금요일 오후에 도착했고, 여느 때처럼 베다니에서 본부를 두었다. 예리고를 통과하면서 그들은 쉬려고 멈추었으며 그동안에 유다는 가족의 한 친구가 경영하는 은행에 공동 자금의 얼마를 저축했다. 이때 처음으로 유다는 여분의 돈을 지녔다. 이 저축은 예수가 재판받고 죽기 바로 전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마지막 중대한 여행에서 예리고를 다시 지날 때까지 다치지 않고 두었다.

147:2.2 (1648.4) 예루살렘까지 가는 동안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베다니에서 자리를 잡자마자, 가까이서 멀리서, 육체의 병을 고침받고 시달린 정신에 위로를 얻고 혼의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너무 많이 모여서 예수는 쉴 겨를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겟세마네에서 텐트를 치고, 항상 그에게 몰려드는 군중을 피하려고 주는 베다니로부터 겟세마네까지 오가곤 하였다. 사도의 일행은 예루살렘에서 거의 3주 동안 지냈지만, 예수는 그들에게 아무런 대중 전도를 하지 말고 오직 사사로운 자리에서 가르치고 개인을 상대로 일하라고 타일렀다.

147:2.3 (1648.5) 베다니에서 그들은 조용히 유월절을 축하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예수와 열두 사도 모두가 피 흘리지 않고서 유월절 잔치 음식을 함께 먹었다. 요한의 사도들은 예수와 그의 사도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들은 아브너, 그리고 요한의 설교를 초기에 믿은 사람들과 함께 축제를 보냈다. 이것은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함께 지킨 두 번째 유월절이었다.

147:2.4 (1648.6) 예수와 열두 사도가 가버나움을 향하여 떠났을 때, 요한의 사도들은 함께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아브너의 지휘 하에서 예루살렘과 그 주위의 시골에 남아서, 하늘나라를 널리 펴려고 조용히 수고했다. 그동안에 예수와 열두 사도는 갈릴리에서 일하려고 돌아갔다. 전도사 70인을 임명하고 떠나보내기 얼마 전까지, 스물네 사람 모두가 다시 함께 모이지 않았다. 그러나 두 집단은 협조하였고, 의견을 달리 했는데도 최선의 감정을 유지했다.

3. 벳세다 물웅덩이에서

147:3.1 (1649.1) 예루살렘에서 둘째 안식일 오후에, 주와 사도들이 성전 예배에 참석하려 할 때 요한이 예수에게 말했다. “나를 따라 오소서. 당신에게 무엇인가 보여드리고자 하나이다.” 요한은 예루살렘의 한 성문을 거쳐서 밖으로 벳세다라고 부르는 물 웅덩이까지 안내했다. 이 웅덩이 둘레에는 다섯 현관으로 된 구조가 있었고 그 밑에 병을 고치려는 큰 무리의 병자들이 얼씬거렸다. 여기는 온천이었고 붉은 빛이 도는 물이 웅덩이 밑에 바위 동굴에서 가스가 모이기 때문에 불규칙한 간격을 두고 끓어올랐다. 따듯한 물이 이따금 이렇게 끓어오르는 것을 많은 사람이 초자연의 영향 때문이라 믿었다. 그렇게 부글거린 뒤에 그 물에 처음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을 가졌든지 고침을 받으리라는 믿음이 유행하였다.

147:3.2 (1649.2) 사도들은 예수가 부과한 금지 조치 하에서 얼마큼 조바심을 냈고, 열둘 가운데 가장 어린 요한은 이런 제한 밑에서 특별히 마음이 들떠 있었다. 모여든 병자들의 광경이 주의 동정심에 크게 호소하여 병 고치는 기적을 행하도록 마음이 움직이리라, 이리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라고 당장에 하늘나라 복음을 믿도록 설득되리라 생각하면서 예수를 웅덩이로 모시고 왔다. 요한이 예수에게 말했다: “주여, 이 고통받는 자들을 다 보소서, 우리가 저희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요한아, 어찌하여 내가 택한 길로부터 돌이키라고 나를 유혹하느냐? 영원한 진리의 복음을 선포하는 대신에 어찌하여 이적을 행하고 병자 고치기를 네가 계속 바라느냐? 이 사람아, 네가 원하는 것을 내가 해서는 안 되지만, 이 병자와 고통받는 자들에게 힘을 주고 영원히 위로하는 말을 하도록 저희를 함께 모으라.”

147:3.3 (1649.3)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는 말했다: “여러 해 동안 그릇되게 살아온 까닭에 너희 가운데 다수가 아프고 병들어 여기에 왔느니라. 더러는 뜻밖의 사고로, 더러는 조상이 잘못한 결과로 고생하며, 한편 더러는 현세에 존재하는 불완전한 조건의 방해로 허덕이느니라. 그러나 땅에서 너희 상태를 개선하려고, 하지만 특히 영원한 신분을 보장하려고 내 아버지가 일하시며, 나도 일하고자 하노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원하심을 발견하지 않으면 우리 중에 아무도 생활의 곤경을 바꾸기 위하여 많이 일할 수 없느니라. 결국 우리는 모두 영원한 이의 뜻을 행하도록 은혜를 입었도다. 너희가 다 육체의 질병을 고침받을 수 있다면, 너희가 정말로 놀라리라. 그러나 모든 영적 병이 깨끗해지고 모든 도덕적 허약을 고침받는 것이 더욱 좋은 일이라. 너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요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라. 시간의 속박은 너희를 괴롭히는 듯하나 영원의 하나님은 너희를 사랑하시니라. 심판의 때가 다가올 때, 두려워 말라, 너희 모두가 응보 뿐 아니라 넘치는 자비를 발견할지니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나라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이 가르침을 믿는 자는 영생(永生)을 가졌느니라. 그러한 신자들은 이미 심판과 죽음으로부터 빛과 생명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느니라. 무덤에 있는 사람들조차 부활의 목소리를 들을 때가 다가오는도다.”

147:3.4 (1649.4)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의 복음을 믿었다. 병자들 가운데 더러는 무척 감명을 받고 영적으로 다시 생기를 얻어서, 그들이 또한 육체의 병을 고침받았다고 선포하며 다녔다.

147:3.5 (1649.5) 혼란한 정신 질환 때문에 여러 해 동안 풀이 죽고 심하게 앓던 어느 사람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다. 그날이 안식일이었는데도 제 자리를 들고 집으로 가 버렸다. 고통받던 이 남자는 누군가가 그를 도와주기를 여러 해 동안 기다렸다. 자신이 무력하다는 느낌의 피해자였기 때문에, 결코 한 번도 자신을 도울 생각을 품은 적이 없었다.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돕는 것이 해야 했던 유일한 일―자리를 들고 걷는 것―임이 드러났다.

147:3.6 (1650.1) 다음에 예수는 요한에게 말했다: “주사제(主司祭)와 서기관들이 들이닥쳐 이 병자들에게 우리가 생명의 말씀을 일러주었다고 성을 내기 전에 떠나자.” 그들은 동반자들과 합치려고 성전으로 돌아갔고, 당장에 모두 베다니에서 밤을 지내려고 떠났다. 그러나 요한은 다른 사도들에게 이 안식일 오후에 벳세다의 웅덩이까지 자신과 예수가 이렇게 방문한 사실을 결코 일러주지 않았다.

4. 인생을 사는 법칙

147:4.1 (1650.2) 바로 이 안식일 저녁에 베다니에서 예수와 열두 사도, 그리고 한 무리의 신자들이 나사로의 집 뜰에서 불 근처에 모여 있는 동안에, 나다니엘은 예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주여, 남들이 우리에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대로 우리가 저희에게 해야 한다고 당신이 가르치며 인생을 사는 옛 법칙의 긍정 형식을 가르쳤어도, 나는 어떻게 그런 명령을 언제나 지킬 수 있는가 충분히 헤아리지 못하나이다. 교제하려 하는 사람을 이처럼 죄 속에서 사악하게 바라보는 음탕한 사람의 예를 들어서, 내 주장을 보이게 하소서. 남들이 자기에게 하기를 바라는 대로, 나쁜 생각을 품은 사람이 저희에게 행해야 한다고 어찌 우리가 가르칠 수 있나이까?”

147:4.2 (1650.3) 나다니엘의 물음을 듣자, 예수는 벌떡 일어나서 손가락으로 그 사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다니엘아 나다니엘아! 너는 마음 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너는 영에게서 태어난 자로서 내 가르침을 받지 않느냐? 너희는 지혜롭고 영적 이해를 가진 사람으로서 진리를 듣지 않느냐? 남들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저희에게 행하라 훈계하였을 때, 나는 이상이 높은 사람들에게 이른 것이요, 악행을 권하기 위하여 내 가르침을 방종으로 왜곡할 시험을 받을 자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노라.”

147:4.3 (1650.4) 말씀을 마치자 나다니엘이 일어나서 말했다: “하지만 주여, 당신의 가르침을 그리 해석하는 것을 내가 승인하리라 생각하시면 안 되나이다. 허다한 그런 사람이 그렇게 당신의 훈계를 잘못 판단하리라 추측하고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에게 더 가르치시리라 희망한 까닭에 여쭈었나이다.” 그리고 나서 나다니엘이 앉자 예수는 말씀을 이었다: “나다니엘아, 네 머리 속에 그렇게 악한 생각을 승인하지 않음을 잘 아노라. 그러나 너희 모두가 너무나 자주 나의 평범한 가르침에 대하여 진정한 영적 해석을 내리지 못하므로 실망하노니, 그 가르침은 인간의 언어로, 틀림없이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너희에게 주어야 하느니라. ‘남들이 너희에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대로 저희에게 하라,’ 인생을 사는 이 법칙, 이 훈계의 해석에 붙는 다른 수준의 의미에 관하여 너희를 가르치마:

147:4.4 (1650.5) “1. 육체의 수준. 네 질문에서 가정한 것이 그러한 순전히 이기적이고 음탕하게 해석한 예를 잘 보여주리라.

147:4.5 (1650.6) “2. 느낌의 수준. 이 수준은 육체의 수준보다 한 단계 높으며,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이 인생을 사는 법칙을 사람이 높게 해석할 것을 의미하느니라.

147:4.6 (1650.7) “3. 머리의 수준. 이제 머리의 논리와 체험의 지능이 활동하게 되느니라. 고귀한 깊은 자존심에 담겨 있는 최고의 이상(理想)에 어울리게 그런 인생의 원칙을 해석해야 한다고 바른 판단이 지시하느니라.

147:4.7 (1651.1) “4. 형제 사랑의 수준. 한층 높은 경지에서 동료의 복지에 사심 없이 헌신하는 수준을 발견하느니라. 더 높은 이 수준,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의식하고 그 결과로 사람이 형제임을 인식함으로 생기는 수준, 진심으로 사회에 봉사하는 수준에서, 이 기본적 생활 원칙의 새롭고 훨씬 아름다운 해석이 발견되느니라.

147:4.8 (1651.2) “5. 도덕 수준. 다음에, 참된 철학적 수준에서 해석할 때, 사물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진정한 통찰력을 가질 때, 너희가 영원히 건전한 인간 관계를 깨달을 때, 생활 형편에 적응하는 너희 개인의 문제에 적용되는 대로, 고상한 생각과 이상을 가진 제삼자, 지혜롭고 치우치지 않은 자가 그런 명령을 보고 해석하리라 생각되는 대로, 너희가 그러한 해석 문제를 비로소 바라보리라.

147:4.9 (1651.3) “6. 영적 수준. 다음에 마지막이지만 가장 중대한 수준, 영적 통찰력과 영적 해석의 수준에 이르나니, 이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어떻게 대우하리라 생각되는 대로 저희를 대우하라는 신의 명령을 우리가 이 인생을 사는 법칙 속에서 인식할 것을 강요하느니라. 이것이 우주에서 인간 관계의 이상(理想)이라. 너희 최고의 소망이 언제라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일 때, 이것이 모든 그런 문제에 대하여 너희가 가질 태도이라. 그러므로 비슷한 상황에서, 모든 사람에게 내가 하리라 생각되는 대로 너희가 저희에게 행하기를 바라노라.”

147:4.10 (1651.4) 이때까지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중에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이 없었다. 그들은 주가 물러나신 뒤에 오랫동안 그 말씀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나다니엘은 자기가 한 질문의 정신을 예수가 오해했다는 생각에서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다른 사람들은 철학적인 동료 사도가, 사람의 생각을 자극하는 그런 질문을 던질 용기를 보인 것을 고맙게 여기고도 남았다.

5. 바리새인 시몬을 찾아보다

147:5.1 (1651.5) 시몬은 유대인의 산헤드린 회원이 아니었어도 예루살렘에서 영향력 있는 바리새인이었다. 건성으로 믿는 사람이었는데, 심하게 비난을 받을까 싶은데도 예수와 개인 동료들,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을 집으로, 연회에 감히 초대하였다. 시몬은 주를 오랫동안 지켜보았고, 그의 가르침에, 그리고 그 인격에 더욱 깊이 감명을 받았다.

147:5.2 (1651.6) 부유한 바리새인들은 자선에 마음을 쏟았고, 그들의 자선 행위가 알려지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때때로 어떤 거지에게 자선(慈善)을 베풀려 할 때 나팔까지 불곤 하였다. 이 바리새인들은 귀빈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 때 대문을 열어놓는 것이 관습이었고, 그래서 길거리의 거지들도 들어와서 저녁 먹는 사람들의 소파 뒤에서 벽 앞에 늘어서서, 잔치하는 사람들이 던져줄까 싶은 먹을 것을 받을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147:5.3 (1651.7) 시몬의 집에서 이 특별한 기회에, 길거리에서 들어온 사람들 중에 평판이 좋지 않은 어느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자는 최근에 좋은 소식인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 이 여인은 이방인의 성전 마당 바로 옆에 자리잡은 이른바 고급 창녀 집 중에 하나를 예전에 운영하던 사람으로서 온 예루살렘에 두루 잘 알려져 있었다. 그 여자는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나서, 못된 장사를 하던 자리를 걷어치웠고 관련을 가졌던 대다수의 여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사는 방식을 바꾸도록 유도했다. 이렇게 했는데도 아직도 바리새인들에게 크게 업신여김을 받았고―매춘의 표시로―머리털을 내리도록 강요받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여자는 머리에 붓는 향기로운 로션이 든 큰 병을 가져왔고, 예수가 음식을 들며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동안, 뒤에 서서 그의 발에 로션을 바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서 또한 감사의 눈물로 그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발을 닦고 있었다. 이렇게 바르기를 마치고 나서, 그 여자는 줄곧 눈물을 흘리며 그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147:5.4 (1652.1) 이 모든 것을 보자 시몬은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 선지자라면, 이렇게 그를 만지는 이 사람이 누구이고 어떤 종류의 여자인가, 악명 높은 죄인임을 알아차렸으리라.” 시몬이 머리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예수는 입을 열어 말씀했다. “시몬아, 너에게 이르고 싶은 것이 있노라.” 시몬이 대답했다, “선생이여, 말씀을 계속하소서.”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돈 빌려주는 어떤 부자에게 빚진 자가 둘 있었는지라. 하나는 그에게 5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다른 하나는 오십을 빚졌더라. 자, 둘 가운데 아무도 갚을 돈이 없어서, 그는 두 사람을 용서해주었더라. 시몬아, 네 생각에는 둘 가운데 누가 그를 가장 많이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했다. “제 생각에는 빚을 가장 많이 용서해 준 자니이다.” 그리고 예수는 말했다: “네가 옳게 판단하였도다.” 그 여인을 가리키면서, 예수는 말을 이었다: “시몬아, 이 여인을 잘 들여다보라. 초청받은 손님으로 내가 집에 들어왔는데, 그래도 너는 내게 발 씻을 물을 주지 않았고, 감사하게 여기는 이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씻고 자기의 머리털로 내 발을 닦았느니라. 너는 친절한 인사로 내게 입맞추지 않았으되 이 여인은 들어온 뒤로 죽,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내 머리에 기름 붓기를 소홀히 하였으되 그 여인은 비싼 로션을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다만, 이 여인은 많은 죄를 용서받았고, 이것이 그 여자로 하여금 많이 사랑하게 하였느니라. 그러나 조금만 용서받은 자는 때때로 조금만 사랑하느니라.” 그 여인을 돌아보고, 여인의 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말했다: “너는 정말로 네 죄를 뉘우쳤고 용서를 받았느니라. 동포의 생각 없고 불친절한 태도에 낙심하지 말라. 하늘나라의 기쁨과 자유 속에 계속하여라.”

147:5.5 (1652.2)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시몬, 그리고 함께 저녁을 먹던 친구들은 더욱 놀랐고, 자기들끼리 속삭이기 시작했다. “감히 죄도 용서하다니 이 사람이 누구이냐?”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예수는 돌이켜서 여자를 보내며 말했다: “여자여, 평안히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147:5.6 (1652.3) 친구들과 함께 떠나려고 일어나면서, 예수는 시몬을 돌아보고 말했다: “시몬아, 네가 믿음과 의심 사이에 얼마나 갈팡질팡하는가, 얼마나 두려움 때문에 난처하고 자존심 때문에 괴로운가, 네 마음을 아노라. 그러나 네가 빛에 굴복하도록 너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며, 청하지 않고 반가이 맞지 않은 손님의 마음 속에서 하늘나라 복음이 이미 일으킨 엄청난 변화와 비교할 만하게, 바로 그런 정신과 영의 힘찬 변화를 인생의 네 위치에서 맛보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노라. 너희 모두에게 선언하노니, 들어갈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누구나 아버지가 하늘나라 문을 열어놓았고, 땅에서 가장 비천한 사람이나 가장 극악하다 생각되는 죄인조차도 진지하게 들어가기를 구하면, 그러한 자에게 어떤 사람이나 집단도 문을 닫을 수 없느니라.”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과 함께 예수는 청한 주인에게 작별을 알리고, 겟세마네 동산의 야영지에 있는 나머지 사도들과 합치려고 떠났다.

147:5.7 (1653.1) 바로 그날 저녁에 예수는 하나님과 관계된 지위의 상대적 가치, 그리고 파라다이스로 영원히 올라가는 진보에 관하여 사도들에게 오래 기억해야 할 연설을 하였다. 예수는 말했다: “아이들아, 아이와 아버지 사이에 참되고 살아 있는 연결이 존재한다면, 아이는 아버지의 이상을 향하여 계속 나아가는 것이 확실하니라. 아이가 처음에는 느리게 나아갈지 모르는 것이 참말이나 그래도 진보는 확실하니라. 중요한 것은 나아가는 속도(速度)가 아니라, 오히려 확실성이라. 너희가 실제로 거두는 성과는 너희의 나아가는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는 사실처럼 중요하지 않으니라. 날마다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오늘 너희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보다 무한히 중요하니라.

147:5.8 (1653.2) “너희 중에 몇이 오늘 시몬의 집에서 본 이 변화된 여인은 이 순간에, 시몬, 그리고 선의를 가진 그 친구들의 수준보다 훨씬 밑에서 살고 있느니라. 그러나 이 바리새인들은 의미 없는 예식으로 예배하는 수준, 사람을 속이는 수준을 거친다고 착각하면서 거짓된 진보에 골몰하지만, 이 여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길고도 파란 많은 탐험을 하느라고 아주 열심히 길을 떠났고, 하늘을 향한 그 여인의 길은 영적 자만과 도덕적 자기 만족으로 막혀 있지 않느니라. 인간적으로 볼 때 이 여인은 시몬보다 하나님으로부터 훨씬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 혼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느니라. 앞으로 이 여인에게 엄청난 영적 가능성이 있느니라. 너희 가운데 더러는 영과 혼의 실제 수준으로 볼 때 높은 자리에 서 있지 않을지 몰라도 너희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이르기까지 열려 있는 생명의 길에서 날마다 나아가고 있느니라. 너희 각자에게 미래에 엄청난 가능성이 있으며, 세상의 지혜와 영적 불신(不信)이 활기 없이 쌓인 위대한 지능을 소유하는 것보다, 작더라도 팔팔하고 성장하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훨씬 좋으니라.”

147:5.9 (1653.3)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자녀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예수는 사도들에게 진지하게 경고했다. 하늘 아버지가 늘 쉽게 죄를 묵인(黙認)하고 무자비함을 용서하는 부모, 물렁하거나 미지근하거나 어리석게 눈감아주는 부모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땅에서 어리석은 자들과 공모하여 생각이 모자라는 아이들의 도덕적 몰락을 초래하고, 그리하여 자식이 비행(非行)을 저지르고 일찍부터 타락에 빠지게 만드는 데 확실하게, 직접 기여하는 부모, 지나치게 무르고 지혜롭지 못한 어떤 부모처럼 하나님이 보이게 만들기까지 아버지와 아들의 예를 그릇 적용하지 말라고 듣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였다. 예수는 말했다: “내 아버지는 아이들이 도덕적으로 성장하고 영적으로 나아가는 모든 발걸음에서 자폭ㆍ자살하는 자녀들의 행위와 버릇을 응석받듯 묵인하지 않느니라. 그러한 죄 많은 버릇은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것이라.”

147:5.10 (1653.4) 예수와 사도들이 드디어 가버나움을 향해 떠나기 전에,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지위가 높은 자와 낮은 자, 부자와 가난한 자들과 함께, 반쯤 사사로운 다른 여러 모임과 잔치에 참석했다. 많은 사람이 정말로 하늘나라 복음의 신자가 되었고 나중에 아브너와 그 동료들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들은 예루살렘과 그 근처에서 하늘나라에 대하여 관심을 일으키려고 뒤에 남았다.

6. 가버나움으로 돌아가다

147:6.1 (1653.5) 4월의 마지막 주에, 예수와 열두 사도는 예루살렘 가까이 있는 베다니 본부를 떠났고, 예리고와 요단강의 길을 거쳐 가버나움으로 돌아가는 여행 길을 떠났다.

147:6.2 (1654.1) 주사제들 및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결정할 목적으로 비밀 회의를 많이 열었다. 모두가 예수의 가르침을 그만두게 하려고 무슨 일인가 해야 한다고 찬성했으나 그 방법에는 찬성할 수 없었다. 헤롯이 요한을 끝장낸 것 같이, 전에는 국가 당국이 그를 처분하기 바랐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인 관리들이 그의 전도(傳道)에 그다지 놀라지 않도록 예수가 일을 처리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따라서 예수가 가버나움을 향해서 떠나기 전날 열린 회의에서, 예수가 종교적 죄목으로 체포되고 산헤드린의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결정이 내렸다. 그러므로 비밀 첩자(諜者) 6인 위원회가 예수의 언행을 지켜보려고 따라다니라고 임명되었다. 이들은 율법을 어기고 신성을 모독하는 충분한 증거를 쌓았을 때 보고서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 여섯 유대인은 예리고에서 약 30명에 이르는 사도의 일행을 따라잡았다. 이들은 제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핑계로, 예수의 추종자 일행에 따라붙었으며 갈릴리에서 둘째 전도 여행이 시작될 때까지 그 무리와 함께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 가운데 세 사람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주사제들과 산헤드린에게 보고하였다.

147:6.3 (1654.2) 베드로는 요단강 건널목에서 모인 군중에게 설교했다. 이튿날 아침 그들은 아마투스 쪽으로 강을 따라 올라갔다. 가버나움까지 곧바로 진행하기를 바랐지만, 어찌나 큰 무리가 모였는지 여기서 전도하고 가르치고 세례를 주면서 사흘을 묵었다. 5월 초하루, 그들은 안식일 이른 아침까지 집을 향하여 발을 내딛지 않았다. 안식일에 예수가 주제넘게 여행을 떠나려 했으니, 예루살렘 첩자들은 예수에 대하여 첫 죄목―안식일을 어겼다는 죄목―을 이제 확보하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하도록 정해졌는데, 떠나기 바로 전에 예수가 안드레를 앞으로 불러서 모든 사람 앞에서 안드레에게 오직 9백 미터까지만 진행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대인이 합법적으로 안식일에 여행하는 거리였다.

147:6.4 (1654.3) 그러나 첩자들은 예수와 동료들이 안식일을 어겼다고 고발할 기회를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일행이 좁은 길을 따라서 지나가는 동안, 그때 막 익고 있던 밀, 바람에 넘실거리는 밀이, 길 어느 편에도 가까이 있었다. 사도들 가운데 몇이 배가 고파서 익은 이삭을 따서 먹었다. 나그네들이 길을 지나면서 이삭 따먹는 것이 관습이었고, 따라서 그런 행위가 잘못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첩자들은 예수를 공격하기 위한 핑계로서 이것을 붙잡았다. 안드레가 이삭을 손에 비비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다가가서 말했다: “안식일에 이삭을 따서 비비는 것이 율법에 어긋남을 너는 모르느냐?” 안드레가 대답했다. “그러나 우리는 배가 고프고, 겨우 필요를 채울 만큼만 비비노라. 그리고 언제부터 안식일에 이삭 먹는 것이 죄가 되었느냐?”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대답했다: “먹는 것은 아무 잘못이 없지만, 이삭을 따서 두 손 사이에 비비면서 너는 율법(律法)을 어기느니라. 분명히 너의 주는 그런 행위를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 그리고 나서 안드레가 말했다: “그러나 이삭 먹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면, 분명컨대 우리 손에 비비는 것은 네가 허락하는 이삭 씹기보다 도저히 더 큰 일이 아니라. 어째서 그런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느냐?” 안드레가 그들이 트집꾼이라고 비추자 그들은 분개했고, 예수가 마태에게 말씀하면서 따라 걷는 데로 달려가서, 항의하며 말했다: “보소서, 선생이여, 당신의 사도들이 안식일에 율법에 어긋나는 일을 하나이다. 저희가 이삭을 따서 비벼서 먹나이다. 우리는 당신이 저희에게 그만두라고 명하시리라 확신하나이다.” 그러자 예수는 고발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정말로 율법에 열심이로다. 너희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를 잘도 기억하였구나. 그러나 너희는 성서에서 읽은 적이 없느냐? 어느 날 다윗이 배가 고파서, 다윗과 그와 함께 있던 자들이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서 제사 빵을 먹었는데, 사제들을 제외하고 누구라도 이를 먹는 것이 율법에 어긋나느니라. 게다가 다윗은 그와 함께 있던 자들에게 또한 이 빵을 주었느니라. 안식일에 많은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함을 우리 율법에서 읽지 아니하였느냐?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오늘의 허기를 채우려고 가져온 것을 너희가 먹는 것을 내가 구경하지 아니하겠느냐? 착한 사람들아, 안식일을 위하여 열심을 가진 것이 잘하는 일이어도 동료의 건강과 안녕을 지키는 것이 더욱 좋으리라. 내가 선언하노니,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졌고 사람이 안식일(安息日)을 위하여 만들어지지 않았느니라. 너희가 내 말을 감시하려고 우리와 함께 있다면 나는 드러내놓고 선언하리니,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도 다스리는 주인이라.”

147:6.5 (1655.1) 바리새인들은 분별 있고 지혜로운 그의 말씀에 깜짝 놀라고 당황했다. 남은 그날 동안 자기들끼리 있었고, 감히 아무 질문도 더 하지 않았다.

147:6.6 (1655.2) 유대인의 전통, 그리고 종처럼 예식 따르기를 반대하는 예수의 태도에는 언제나 적극성이 있었다. 그는 반대를 행동으로 옮겼고 확신대로 하였다. 주는 부정적으로 비난하는 데 시간을 거의 쓰지 않았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멋대로 죄를 지어 자신을 속이지 않고 사는 자유를 즐길 수 있다고 가르쳤다. 예수는 사도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아, 너희가 진리로 깨우침을 받고 무슨 일을 하는지 정말로 안다면, 너희는 복을 받았느니라. 그러나 신다운 길을 모른다면, 너희는 불행하고 이미 율법을 어기는 자이라.”

7. 가버나움에 돌아와서

147:7.1 (1655.3) 예수와 열두 사도가 타리케아에서 배를 타고 벳세다로 온 것은 5월 3일 월요일 한낮 무렵이었다. 함께 여행하던 사람들을 피하려고, 그들은 배를 타고 여행했다. 그러나 이튿날이 되자,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공식(公式) 첩자들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은 다시 예수를 찾아냈다.

147:7.2 (1655.4) 화요일 저녁에 묻고 대답하는 관례적 수업 하나를 예수가 진행하고 있을 때, 여섯 첩자의 두목이 그에게 말했다: “나는 여기 당신의 가르침에 참석하고 있는 요한의 제자 한 사람과 오늘 이야기하고 있었나이다. 우리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것 같이, 그리고 요한이 그 추종자들에게 명하는 것처럼, 어찌하여 당신은 한 번도 제자들에게 금식하고 기도하라 명하지 않는가 우리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나이다.” 요한이 한 말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질문한 사람에게 예수는 대답했다: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 혼인집의 손님들이 금식하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한, 저희는 도저히 굶을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리니, 그때 혼인집의 손님들이 물론 금식하고 기도하리라. 기도하는 것은 빛의 아이들에게 자연스러우나 금식하는 것은 하늘나라 복음의 일부가 아니라. 지혜로운 재단사(裁斷師)는 줄어들지 않은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꿰매어 붙이지 않음을 기억하라, 젖었을 때 줄어들어 더 나쁘게 찢어질까 두려움이라. 사람은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넣지도 않으니, 새 포도주가 가죽을 터뜨려 포도주와 가죽이 다 못 쓰게 될까 두려움이라. 지혜로운 사람은 새 포도주를 새 가죽 부대에 넣느니라. 그런즉 내 제자들이 옛 질서를 새로운 하늘나라 복음의 가르침 속에 지나치게 집어넣지 아니하는즉 저희가 지혜를 보이느니라. 선생을 잃은 너희는 한동안 금식(禁食)할 명분이 있을까 하니라. 금식은 모세 율법에서 타당한 부분일지 모르지만, 다가오는 하늘나라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신성한 정신으로 기쁨을 누리리라.”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요한의 제자들은 위로를 받았고, 한편 바리새인들은 더욱 어리둥절하였다.

147:7.3 (1656.1) 다음에 주는 더 나아가서, 모든 옛 가르침을 전적으로 새로운 신조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품지 않도록 청중에게 경고했다. 예수는 말했다: “오래 되고 또한 참된 것은 지속되어야 하며, 마찬가지로, 새로워도 거짓인 것은 물리쳐야 하느니라. 그러나 새롭고도 참된 것을 받아들일 믿음과 용기를 가지라. 이렇게 기록된 것을 기억하라: ‘오래 된 친구를 버리지 말지니, 새 친구가 저와 견줄 만하지 못함이라. 새 친구는 새 포도주와 같으니, 포도주가 오래 되면 너희가 즐겁게 마시리라.’”

8. 영적 선의 잔치

147:8.1 (1656.2) 그날 밤에, 보통 있던 청중이 물러간 뒤에 오랫동안, 예수는 사도들을 계속 가르쳤다. 선지자 이사야를 인용함으로 이 특별 강의를 시작했다:

147:8.2 (1656.3) “‘너희가 어째서 금식하였느냐? 너희가 계속하여 남을 압박하는 기쁨을 맛보고 불법을 기뻐하면서, 무슨 까닭으로 너희 혼을 괴롭히느냐? 보라, 너희는 싸우고 다투기 위하여, 그리고 사악한 주먹으로 사람을 치려고 금식하는구나. 그러나 너희 목소리가 하늘에 들리게 하려면 이런 식으로 금식하지 말라.

147:8.3 (1656.4) “‘내가 택한 것이 그러한 금식일이냐―사람이 제 혼을 괴롭히는 날이냐? 파피루스 갈대와 같이 머리를 수그리는 것, 베옷과 재 속에서 기는 것이겠느냐? 너희가 감히 이것을 금식일이라 부르고, 주가 보시기에 마음에 드는 날이라 하겠느냐? 내가 선택할 금식은 사악한 쇠사슬을 풀어주고 무거운 짐을 묶은 매듭을 풀어주며, 억압받는 자를 풀어주고 멍에를 모조리 꺾어버리는 것이 아니겠느냐? 내 빵을 배고픈 자와 나누며 집 없고 가난한 자를 내 집으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냐? 헐벗은 자를 보면, 내가 저희에게 옷을 입히리라.

147:8.4 (1656.5) “‘그리하면 아침 같이 네 빛이 퍼질 것이요, 한편 네 건강이 빨리 좋아지리라. 너의 올바름이 네 앞에 가며 주의 영광이 네 뒤를 지키리라. 그리고 나서 네가 주를 부르면 그가 대답하리라. 네가 부르짖을 때―내가 여기 있다―주가 말하리라. 네가 억압과 정죄와 허영을 삼가면 주가 이 모든 것을 행하리라. 네가 마음 속에 귀중한 것을 배고픈 자에게 베풀고 고통받는 자를 보살피기를 아버지가 오히려 바라시느니라. 그리하면 네 빛이 컴컴한 데서 빛나며, 너의 어둠조차 대낮처럼 밝으리라. 그리하면 주가 너를 줄곧 안내하며, 너의 혼을 채워주고 네 힘을 새롭게 하리라. 너는 물을 준 동산 같이, 그침없이 솟아나는 샘 같이 되리라. 이 일을 하는 자는 지나간 영광을 회복하리라. 저희는 여러 세대의 기초를 세우겠고, 저희를 무너진 담을 새로 세운 자라, 안전하게 다닐 길을 회복한 자라 부르리라.’”

147:8.5 (1656.6) 그리고 나서, 현재와 미래의 하늘나라에 그들이 있도록 보장하는 것은 믿음이요, 혼을 괴롭히거나 육체로 굶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예수는 밤이 늦도록 사도들에게 제시했다. 적어도 옛 선지자의 이상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사도들을 훈계하였고, 이사야와 옛 선지자들의 이상도 훨씬 뛰어넘어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리라는 희망을 표현했다. 그날 밤에 마지막 말씀은 이러하였다: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동시에 모든 사람이 형제임을 인정하는 사실을 깨닫는 생생한 믿음으로, 은혜 속에서 성장하여라.”

147:8.6 (1656.7) 새벽 2시가 지나서야 예수는 말씀을 그쳤고 사람마다 잠을 자러 자리에 들어갔다.

제 148 편 전도사 훈련을 벳세다에서

유란시아서

제 148 편

전도사 훈련을 벳세다에서

148:0.1 (1657.1) 서기 28년 5월 3일부터 10월 3일까지, 예수와 사도 일행은 벳세다에서 세베대의 집에 거하고 있었다. 이 다섯 달 동안의 건조기에 내내, 세베대의 주택 가까이 바닷가에서 거대한 캠프가 유지되었고, 늘어나는 예수의 일행에게 잠자리를 마련해 주려고 크게 확장되었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 병 고침을 받으려 하는 자, 호기심 있는 신자들의 항상 변동하는 인구가 이 바닷가 캠프를 차지했고, 이들의 수는 5백에서 1천 5백 명에 이르렀다. 다윗 세베대가 이 텐트 도시의 일반 감독을 맡았고 알패오 쌍둥이의 도움을 받았다. 야영지는 일반 행정 뿐 아니라, 질서와 위생 면에서도 본보기였다. 서로 다른 종류의 병자들은 분리되었고 신자인 어느 의사, 엘만이라 이름하는 시리아인의 감독을 받았다.

148:0.2 (1657.2) 이 기간을 통하여 내내, 사도들은 한 주에 적어도 하루, 물고기를 잡으러 가곤 하였다. 그들은 잡은 것을 바닷가 야영지에서 소비하도록 다윗에게 팔았다. 이렇게 받은 돈은 집단 금고에 넘겼다. 열두 사도는 달마다 한 주,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허락되었다.

148:0.3 (1657.3) 안드레는 사도 활동의 전반적 책임을 계속 맡았고, 베드로는 전도사 학교를 완전히 책임졌다. 사도들은 모두 매일 오전에 전도사 무리를 가르치는 일을 나누었고, 선생과 생도들이 모두 오후에 사람들을 가르쳤다. 저녁 식사 뒤, 한 주에 닷새 저녁에 사도들은 전도사들을 위하여 질문하는 학급을 운영했다. 한 주에 한 번, 예수는 이 질문 시간을 주관하였고 이전 수업에서 넘어온 질문에 대답했다.

148:0.4 (1657.4) 다섯 달 동안 수천 명이 이 야영지를 다녀갔다. 흔히 로마 제국의 곳곳으로부터, 그리고 유프라테스 강 동쪽 지역으로부터,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참석했다. 이때는 주가 가르친 가운데 가장 오래 정착되고 잘 조직된 기간이었다. 예수의 직계 가족은 이 시간의 대부분을 나사렛이나 가나에서 보냈다.

148:0.5 (1657.5) 야영지는 사도의 일행처럼, 공동 관심거리를 가진 공동체로서 운영되지 않았다. 아무도 거절해서 돌려보내지 않았는데도, 다윗 세베대는 자급하는 기업(企業)이 되도록 이 큰 텐트 도시를 운영했다. 항상 변하는 이 캠프는 베드로의 전도사 훈련 학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었다.

1. 새 선지자 학교

148:1.1 (1657.6) 베드로ㆍ야고보ㆍ안드레는 전도사 학교에 입학하려고 지원하는 자들을 심사하라고 예수가 임명한 위원회였다. 이 새 선지자 학교의 학생들은 로마 세계, 그리고 멀리 인도까지, 동부의 모든 종족과 국민을 대표하였다. 이 학교는 배우고 실천하는 계획에 바탕을 두고 운영되었다. 학생들이 아침 시간에 배운 것을 오후에 바닷가에서 회중(會衆)에게 가르쳤다. 저녁을 먹은 뒤에, 오전에 배운 것과 오후에 가르친 것을 다 격식 차리지 않고 토론했다.

148:1.2 (1658.1) 사도인 선생들은 각자 하늘나라 복음에 대하여 자기의 견해를 가르쳤다. 똑같이 가르치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다. 신학 교리를 표준화하거나 신조의 형식으로 만들지 않았다. 비록 모두가 같은 진리를 가르쳤어도 각 사도는 주의 가르침에 대하여 자기 개인의 해석을 제시하였다. 예수는 하늘나라의 일을 하면서 얻는 다양한 개인 체험을 이렇게 발표하는 것을 지지했고, 주마다 있는 질문 시간에 복음에 대하여 많고 다양한 이 여러 관점을 어김없이 조화하고 조정하였다. 가르치는 문제에서 이렇게 크게 개인적 자유가 있었는데도, 시몬 베드로는 전도사 학교의 신학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었다. 베드로 다음에는, 야고보 세베대가[1] [13] 가장 크게 개인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148:1.3 (1658.2) 바닷가에서 이 다섯 달 동안 훈련받은 1백 명이 넘는 전도사들이 바탕이 되어, 이들로부터 (아브너를 비롯한 요한의 사도들을 제쳐놓고) 나중에 70인의 복음 선생과 설교자가 뽑혔다. 전도사 학교는 열두 사도가 한 것과 같은 정도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지 않았다.

148:1.4 (1658.3) 이 전도사들은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기는 했어도, 70인의 하늘나라 사자로서 나중에 예수가 그들을 세우고 임명할 때까지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지 않았다. 해지는 장면에서 병 고침받은 큰 무리 가운데 겨우 일곱 사람이 이 학생 전도사들 사이에 있는 것이 눈에 띄게 되었다. 가버나움 귀인(貴人)의 아들은 베드로의 학교에서 복음 봉사를 위하여 훈련받은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2. 벳세다 병원

148:2.1 (1658.4) 바닷가 야영지와 관련하여 시리아인 의사 엘만은 젊은 여자 25명과 남자 12명으로 된 집단의 도움을 얻어서, 하늘나라의 첫 병원이라고 여겨야 할 것을 조직하고 넉 달 동안 운영했다. 주요 텐트 도시의 남쪽에서 짧은 거리에 자리잡은 이 병원에서, 그들은 기도하고 믿음으로 격려하는 영적 관습 뿐 아니라 모든 알려진 물질적 방법으로 병자들을 치료했다. 예수는 한 주에 적어도 세 번, 이 야영지의 병자들을 찾아보고 각 병자와 친히 접촉했다. 우리가 아는 한, 좋아지거나 치유되어서 이 병원을 떠난, 고통받고 앓던 사람 1천 명 가운데, 이른바 초자연적으로 치유받은 기적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덕을 본 사람들의 대다수가 예수가 그들을 고쳤다고 그침 없이 선포하였다.

148:2.2 (1658.5) 예수가 엘만의 환자들을 위하여 베푼 봉사와 관련하여 일어난 많은 치유는 정말로 기적의 작용과 비슷한 듯했다. 그러나 그 병 고침은 믿음에 지배되고 기대하는 사람들의 체험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정신과 영의 변화일 뿐이라고 우리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은 힘차고 적극적이고 인자한 인격자로부터 직접 격려하는 영향을 받았고 그런 인격자의 보살핌은 두려움과 걱정을 없앤다.

148:2.3 (1658.6) 엘만과 그 동료들은 “악령에 들리는 것”에 관하여 이 환자들에게 진실을 가르치려고 애썼지만, 조금도 성공하지 못했다. 환자의 머리나 몸에 이른바 더러운 귀신이 거함으로 육체의 병과 정신의 혼란이 생길 수 있다는 관념은 거의 보편적이었다.

148:2.4 (1659.1) 병자와 고통받는 자와 어떤 접촉을 가져도, 치료하는 기법이나 또는 병의 알려지지 않은 원인을 밝히는 문제에 부닥쳤을 때, 예수는 유란시아에서 육신화 모험을 시작하기 전에 파라다이스 형 이마누엘이 준 지침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러긴 했어도 병자를 보살핀 사람들은 예수가 어떻게 아프고 고통받는 자의 믿음과 확신을 불러 일으키는가 지켜보고서 많은 유익한 교훈을 얻었다.

148:2.5 (1659.2) 말라리아가 늘어나는 철이 다가오기 얼마 전에 그 야영지는 해산되었다.

3. 아버지의 일

148:3.1 (1659.3) 이 기간을 통하여 내내 예수는 열두 번이 안 되게 야영지에서 대중 예배를 인도했다. 그리고 새로 훈련받은 전도사들과 함께 갈릴리로 두 번째 전도 여행을 떠나기 전 둘째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오직 한 번 말씀했다.

148:3.2 (1659.4) 세례받은 뒤로, 주는 벳세다에서 전도사들을 훈련하는 이 야영 기간처럼 많이 혼자 지낸 적이 없었다. 사도들 가운데 누구라도 예수에게 어째서 그들 사이에서 그렇게 자주 자리를 비우는가 감히 물을 때마다, “아버지의 일을 돌보고” 있다고 변함없이 대답하곤 하였다.

148:3.3 (1659.5) 자리를 비운 이 기간에, 예수는 오직 두 사도를 데리고 다녔다. 1백 명이 넘는 새 전도사 후보들을 훈련하는 일에 참석할 수 있도록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도 그를 몸소 동반하는 임무로부터 일시 풀어주었다. 아버지의 일과 관련하여 산으로 가고 싶었을 때, 그는 시간이 있을까 싶은 사도들 중에 아무나 두 사람을 따라오라고 불러내곤 했다. 이 방법으로 열두 사람은 각자, 예수와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친밀하게 접촉할 기회를 누렸다.

148:3.4 (1659.6) 이 기록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에게 계시되지는 않았으나, 산에서 혼자 있는 이 여러 기간에 우리는 주가 우주 사무를 담당하는 주요 지도자들에게 직접, 지시를 내리는 접촉을 하고 있었다고 짐작하게 되었다. 세례받은 무렵 이후로 내내, 우리 우주의 육신화된 이 군주는 우주 행정의 어떤 국면을 지휘하는 데 더욱 의식하여 활동적이 되었다. 가까운 동료들에게 드러나지 않은 어떤 방법으로, 지상의 사무에 참여하는 일이 줄어든 이 몇 주 동안, 그는 광대한 우주를 운영하는 책임을 맡은 높은 영 지성 존재들의 지휘에 몰두하였고, 인간 예수가 그런 활동을 그의 편에서 “아버지의 일을 돌본다”고 말하기로 작정하였다는 의견을 우리는 언제나 유지해 왔다.

148:3.5 (1659.7) 여러 번, 예수가 몇시간 동안 혼자 계실 때, 그러나 사도들 가운데 둘이 가까이 있을 때 예수가 아무 말씀을 하는 것을 듣지는 못했어도 그들은 예수의 모습이 빠르고 다채로운 변화를 겪는 것을 지켜보았다. 더러가 나중 기회에 구경한 것처럼, 그들은 주와 교통하고 있었을까 싶은 하늘 존재들이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것도 도무지 관찰하지 못했다.

4. 악과 죄와 불의

148:4.1 (1659.8) 한 주에 이틀 저녁은 세베대의 집 뜰에서, 떨어지고 아늑한 어느 구석에서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개인들과 특별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예수의 버릇이었다. 이러한 어느 저녁 대화에서 토마스가 개인적으로 이렇게 물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찌하여 사람들이 영에게서 태어나야 하나이까?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악마의 손아귀를 벗어나는 데 필요하나이까? 주여, 무엇이 악이나이까?” 이 물음을 듣자, 예수는 토마스에게 말했다:

148:4.2 (1660.1) “악과 악마, 더 분명히 말하면 불의한 자,[2] [14] 이 두 가지를 혼동하지 말라. 네가 악마라고 부르는 자는 이기심의 아들이요, 내 아버지와 그에 충성하는 아들들의 통치에 대항하여, 일부러 계획하여 반란을 일으킨 높은 행정가이라. 그러나 나는 이 죄 많은 반역자들을 이미 이겼노라. 아버지와 우주에 대하여 다른 이 여러 가지 태도를 네 머리 속에서 분명히 해두어라. 아버지의 뜻에 관계되는 이 법칙을 결코 잊지 말라:

148:4.3 (1660.2) “악은[3] [15] 신의 율법, 즉 의식하지 못하거나 뜻하지 않게, 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 마찬가지로 악은 아버지의 뜻에 얼마나 불완전하게 복종하는가를 재는 척도이라.

148:4.4 (1660.3) “죄는 의식하고 알면서 일부러, 신의 율법, 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 죄는 신의 이끄심을 받고 영적으로 지도받기를 얼마나 꺼려하는가를 재는 척도이라.

148:4.5 (1660.4) “불의(不義)는 의지하여, 굳게 결의하고, 끈질기게 신의 율법, 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 불의는 사랑으로 인격자를 살아남게 하는 아버지의 계획, 그리고 아들들이 베푸는 자비로운 구원을 얼마나 계속 물리치는가를 재는 척도이라.

148:4.6 (1660.5) “영이 다시 태어나기 전에 필사 인간은 본래부터 못된 성향에 자연히 지배를 받으나 그러한 자연스러운 행동이 불완전한 것은 죄도 불의도 아니라. 필사 인간은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의 완전함에 이르는 긴 오르막길을 막 내딛고 있느니라. 타고난 자질이 불완전하고 치우친 것은 죄가 없느니라. 사람은 정말로 잘못에 지배되어도, 죄의 길과 불의한 생활을 알면서 일부러 택하지 않으면 어떤 의미에서도 악마의 자식이 아니라. 잘못은 이 세상의 자연 질서 안에 본래부터 있으나, 죄는 영적 빛으로부터 짙은 어둠 속에 빠진 자들이 이 세상으로 가져온 태도, 의식하여 반역하는 태도이라.

148:4.7 (1660.6) “토마스야, 너는 그리스인의 신조와 페르시아인의 오류로 인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느니라. 인류가 완전한 아담과 함께 땅에서 시작했다가 죄를 통하여 사람의 불쌍한 현재의 처지로 빨리 타락했다고 보는 까닭에 너는 악과 죄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느니라. 어떻게 아담의 아들 가인이 놋의 땅으로 건너가서 아내를 얻었는가 드러내는 기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찌하여 너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느냐? 어찌하여 너는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내를 찾는다고 묘사하는 기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석하려 하지 않느냐?

148:4.8 (1660.7) “사람은 정말로 성품이 나빠도 반드시 죄가 있지는 않느니라. 새로 태어나는 것―영의 세례를 받는 것―은 악에서 벗어나는 데 필수이고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데 필요하지만, 이 중에 아무것도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손상치 않느니라. 이러한 나쁠 잠재성이 본래부터 있는 것은 사람이 어떤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멀어져서, 외래인이나 외국인이나 의붓아들로서 어떤 방법으로 아버지의 합법적 양아들이 되기를 추구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느니라. 모든 그러한 개념은 첫째로, 네가 아버지를 오해한 데서, 둘째로 사람의 기원ㆍ성품ㆍ운명을 몰라서 생기느니라.

148:4.9 (1660.8) “그리스인 및 다른 사람들은 사람이 신 같이 완전한 처지에서 망각이나 파멸로 꾸준히 떨어지고 있다고 가르쳐 왔느니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하늘나라로 들어감으로 하나님과 신의 완전함에 이르기까지 확실하고 분명하게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 어떤 면에서도 영원한 아버지가 뜻하는 신성한 영적 이상에 미치지 못하는 존재는 누구나 나쁠 잠재성이 있으나 그러한 존재는 어떤 의미에서도 불의는커녕 죄도 없느니라.

148:4.10 (1661.1) “토마스야, 이것을 성서에서 읽지 않았느냐, 거기에 쓰여 있으되,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자녀이라.’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겠고 그는 내 아들이 될지니라.’ ‘내 아들이 되라고 내가 그를 선택하였도다―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리라.’ ‘내 아들들을 멀리서, 내 딸들을 땅 끝으로부터 데려 오라.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마다 데려올지니,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저희를 지었음이라.’ ‘너희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영을 가진 자는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친자식 안에는 인간 아버지를 닮은 물질 부분이 있으나, 하늘나라에는 모든 믿음의 아들에게 하늘 아버지를 닮은 영적 부분이 있느니라.”

148:4.11 (1661.2) 이 모든 것과 더 많은 것을 예수는 토마스에게 일러주었고 그 사도는 많이 알아들었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까지 이 문제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 하고 예수는 당부했다. 주가 이 세상을 떠난 뒤까지 토마스는 이 회견을 언급하지 않았다.

5. 질병의 의미

148:5.1 (1661.3) 뜰에서 또 다른 개인적 회견이 있었는데 나다니엘이 예수에게 물었다: “주여, 당신이 어찌하여 가리지 않고 병 치료하기를 거절하는가 비로소 이해가 가오나, 하늘에 계신 사랑의 아버지가 어찌하여 땅에서 허다한 자녀들이 그렇게 많은 병을 앓도록 놓아두는가 아직도 알 수 없나이다.” 주는 나다니엘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148:5.2 (1661.4) “나다니엘아, 너와 많은 다른 사람이 그렇게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한 어떤 반역자들이 죄 많은 모험을 한 까닭에 어떻게 이 세상의 자연 질서가 여러 번 뒤집혔는가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이라. 이것들을 비로소 정리하려고 내가 왔노라. 그러나 우주의 이 부분을 옛 길로 돌이키고 사람의 아이들을 그렇게 더 얹은 죄와 반란의 짐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리리라. 악의 존재만으로도 사람이 승천(昇天)하기 위하여 충분한 시험이라―죄는 살아남는 데 필수인 것이 아니라.

148:5.3 (1661.5) “그러나 이 사람아, 너는 아버지가 일부러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사람은 신의 뜻을 따르는 더 좋은 길을 걷지 않으려고 끈질기게 거절하는 결과로 필요 없는 고통을 초래하며, 고통은 잘못 속에 잠재하지만 고통의 상당 부분은 죄와 불의로 인하여 생겼느니라. 많은 특별한 사건이 이 세상에서 벌어졌고, 분별 있는 모든 사람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장면을 구경하고서 당황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으나 너는 한 가지를 확신해도 좋으니라: 아버지는 잘못을 임의로 벌하려고 질병을 보내지 않느니라. 잘못을 저지르는 불완전함과 장애는 본래부터 있는 것이요, 죄에 대한 벌은 불가피하고, 불의(不義)의 파괴적 결과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 사람은 자신이 선택하는 생활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얻는 질병 때문에 하나님을 탓해서는 안 되며, 이 세상에서 사는 그러한 생활의 일부로 겪는 체험을 불평해서도 안 되느니라. 땅에서 지위의 개선을 위하여 끈질기게, 한결같이 필사 인간이 일해야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 머리를 총명하게 쓰면 사람이 땅에서 겪는 많은 불행을 이겨낼 수 있게 하리라.

148:5.4 (1662.1) “나다니엘아, 사람들이 저희의 영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돕는 것, 그리고 다양한 물질적 문제를 열심히 해결하기 위하여 저희가 더 낫게 준비되고 영감을 받도록 이렇게 정신을 자극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 네가 성서를 읽으면서 어떤 혼란을 겪는지 내가 아노라. 무지한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려 하는 경향이 너무나 흔히 지배하였느니라.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아버지는 몸소 책임이 없느니라. 그가 예비하신 어떤 바르고 지혜로운 법칙이 네가 몰라서 또는 일부러 그러한 신의 법령을 어긴 까닭에 어쩌다가 너를 괴롭힌다고 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

148:5.5 (1662.2) “그러나 나다니엘아, 헤아리면서 읽기만 했다면 성서에서 많은 것을 네가 배웠으리라. 이렇게 기록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 아들아, 주의 징벌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그의 징계를 싫어하지도 말라, 이는 아버지가 기뻐하는 아들을 꾸짖는 것 같이, 주가 꾸짓는 자를 사랑함이라.’ ‘주는 괴롭히기를 달가워하지 않느니라.’ ‘고통을 받기 전에 내가 길을 잃었으나 이제 내가 율법을 지키노라. 고통이 내게 약이 되었으니, 이리하여 내가 신의 계명을 배울까 함이라.’ ‘나는 너희의 슬픔을 아노라. 영원한 하나님은 너희의 피난처요 그 밑에 영원한 팔이 있느니라.’ ‘주는 또한 억눌린 자에게 피난처요 어려운 시절에 쉴 안식처이라.’ ‘주는 병상에 누워 있는 자에게 힘을 주실 것이요 병자를 잊지 아니하리라.’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동정심을 보이는 것 같이, 주는 그를 두려워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니라. 그는 너의 몸을 알고 네가 티끌임을 기억하시니라.’ ‘그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저희의 상처를 동여매시니라.’ ‘그는 가난한 자의 소망이요, 슬픔에 빠진 곤궁한 자에게 힘이요, 폭풍을 피하는 항구요, 불같은 더위를 피하는 그늘이라.’ ‘그는 기력 없는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아무 힘도 없는 자에게 힘을 키워 주시니라.’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리라.’ ‘고통의 물결을 지나갈 때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역경의 강물이 넘쳐 너를 덮을 때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마음이 상한 자를 싸매고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통곡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라고 그가 나를 보내셨도다.’ ‘고통 속에 꾸지람이 있고 질병은 티끌에서 솟아나지 않느니라.’”

6. 고통에 대한 오해―
욥에 대한 강론

148:6.1 (1662.3) 바로 이날 저녁에 벳세다에서 요한이 또한 예수에게 어째서 겉보기에 결백한 수많은 사람이 많은 병으로 고생하고 그렇게 많이 고통을 받는가 물었다. 요한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다른 여러 가지 가운데, 주는 말했다:

148:6.2 (1662.4) “이 사람아, 너는 역경의 뜻이나 고통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하는도다. 너는 셈족 문학의 걸작―성서에 욥이 고통받는 이야기―를 읽지 아니하였느냐? 이 놀라운 비유가 주의 종의 물질적 번영을 읊으면서 시작되는 것을 기억하지 않느냐? 욥은 자식ㆍ재산ㆍ위엄ㆍ지위ㆍ건강, 그리고 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이 귀중히 여기는 모든 다른 것으로 복을 받았음을 네가 잘 기억하느니라. 아브라함 자손들의 전통으로 내려오는 가르침에 따르면, 그러한 물질적 번영은 신의 은총을 받았다는 온통 충분한 증거였도다. 그러나 그러한 물질 재산과 현세의 번영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키지 않느니라. 하늘에 계시는 내 아버지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똑같이 사랑하시니 그가 사람을 차별하는 분이 아님이라.

148:6.3 (1663.1) “신의 율법을 어기면 머지 않아 벌을 거두는 일이 따르고 분명히 사람들은 궁극에 저희가 뿌린 것을 거두느니라. 그래도 인간의 고통은 반드시 앞서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욥과 그의 친구들은 저희의 당황스러운 처지에 대하여 참된 답을 찾아내지 못하였더라. 네가 지금 가진 깨달음에 비추어, 이 독특한 비유에서 사탄이나 하나님이 행하는 일을 너는 도저히 하나님과 사탄에게 돌리지 아니하리라. 욥은 고통을 통해서 지적(知的) 문제를 해결하거나 철학적 곤경에 해답을 찾지는 못했어도, 큰 승리를 거두었느니라. 신학적 방어가 무너지는 바로 그 마당에서도 ‘나는 내가 몹시 싫도다’하고 진지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영적 높이까지 올라갔고, 그리고 나서 그는 하나님의 환상을 보는 구원을 받았느니라. 그래서 어찌하여 고통받는가 오해했어도 욥은 도덕적 이해와 영적 통찰력을 얻는 초인간 수준에 올라갔느니라. 고통받는 종이 하나님의 환상을 볼 때,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혼의 평화가 따르느니라.

148:6.4 (1663.2) “욥의 첫째 친구 엘리바스는, 그 고통받는 자가 번영하던 시절에 다른 사람들에게 처방한 것과 똑같은 인내심을 욥이 고난받는 가운데 보이라고 훈계하였더라. 이 거짓 위로자가 가로되 ‘욥아 네 종교를 신뢰하라. 고통받는 것은 사악한 자요 올바른 자가 아님을 기억하라. 너는 이 벌을 받아 마땅함이 틀림없으니, 마땅하지 않다면 네가 고통받지 아니하리라. 아무도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를 수 없음을 네가 잘 아는도다. 사악한 자가 결코 정말로 번영하지 않음을 네가 아는지라. 어쨌든 사람은 고생하라고 미리 운명을 타고난 듯하고, 아마도 주는 너에게 좋으라고 너를 꾸짖을 뿐이라’ 하였더라. 인간이 고통받는 문제를 그렇게 해석함으로 불쌍한 욥이 크게 위로받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

148:6.5 (1663.3) “그러나 둘째 친구 빌닷의 충고는 그때 인정된 신학(神學)의 관점에서 볼 때 건전하였어도 마음을 더욱 답답하게 하였더라. 빌닷이 말하되, ‘하나님은 부당하실 수 없도다. 네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으니 죄인임이 틀림없느니라. 네가 잘못했음이 틀림없으니, 잘못하지 않았다면 네가 그리 고통받지 아니하리라. 네가 정말로 올바르다면 하나님이 확실히 너를 고통에서 건지리라. 하나님이 사람을 상대한 역사로부터 너는 전능자가 오직 사악한 자를 멸망시킴을 배워야 하느니라.’

148:6.6 (1663.4) “다음에 욥이 친구들에게 어떤 말로 대답했는가 네가 기억하느니라: ‘하나님은 내가 도와달라 외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심을 내가 잘 아노라. 어찌 하나님이 옳으면서 동시에 나의 결백을 철저히 무시할 수 있느냐? 전능자에게 호소하여 내가 아무 만족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노라. 선한 자가 사악한 자에게 박해받는 것을 하나님이 참는 것을 너는 헤아릴 수 없느냐? 그리고 사람이 아주 약한즉, 전능한 하나님 손에서 사람이 무슨 배려를 받을 기회가 있느냐? 하나님은 내 모습대로 나를 지으셨고 이렇게 나를 치실 때 나는 막을 수 없노라. 도대체 어찌하여 하나님이 이 비참한 모양으로 그저 고통을 받으라고 나를 지으셨더냐?’

148:6.7 (1663.5) “친구들의 조언, 그리고 머리를 차지했던 하나님에 관한 그릇된 관념에 비추어 볼 때, 누가 욥의 태도에 도전할 수 있느냐? 욥이 사람다운 하나님을 몹시 바란 것, 사람의 죽어야 할 지위를 알고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긴 여행에 이 첫 생명의 일부로서 올바른 자가 결백하면서도 때때로 고통받아야 함을 이해하는 그런 신다운 존재와 욥이 몹시 교통하고 싶어한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그런즉 이제부터 욥이 견딘 고통을 견디라고 요청받을 모든 사람을 위로하고 구원할 수 있도록 사람의 아들이 육체를 입고 인생을 살려고 아버지로부터 왔느니라.

148:6.8 (1663.6) “그리고 나서 욥의 셋째 친구 소팔이 더군다나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을 이렇게 뱉었더라: ‘네가 이렇게 고통받는 것을 보아하니, 네가 올바르다고 주장하는 것이 어리석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을 이해하기 불가능함을 내가 인정하노라. 아마도 너의 모든 불쌍한 처지에 어떤 목적이 감추어져 있는가 보다.’ 모두 세 친구의 말을 듣고 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목숨이 길지 않고 고생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내세우면서 욥은 도와달라고 바로 하나님께 하소연하였더라.

148:6.9 (1664.1) “다음에 친구들과 둘째 회견이 시작되었는데, 엘리바스는 더욱 준엄해졌고 그를 헐뜻고 빈정거렸더라. 빌닷은 욥이 친구들을 경멸하는 것을 분개하게 되었고 소팔은 우울한 조언을 되풀이하였더라. 이때가 되자 욥은 친구들에게 진절머리가 나서 다시 하나님께 호소하였고, 친구들의 철학에 모습이 나타나고 자신의 종교적 태도에도 소중히 간직했던 불공평한 하나님에 맞서서 공정한 하나님에게 이제 하소연하였더라. 다음에 욥은 필사 존재에서 생기는 불평등이 좀더 공정하게 시정될까 싶은 미래 생명에서 위안을 얻으려 하였더라. 사람한테서 도움을 받지 못하자 욥은 하나님께로 향하느니라. 그리고 나서 마음 속에서 믿음과 의심의 큰 싸움이 따르느니라. 마침내, 고통받던 인간이 비로소 생명의 빛을 보고 시달리던 혼(魂)이 희망과 용기를 얻는 새로운 경지까지 올라가느니라. 계속 고생할지 몰라도, 아니 죽을지 몰라도, 깨우침받은 그의 혼은 이제 승리의 탄성을 부르짖느니라, ‘내 옹호자가 살아 계시도다!’

148:6.10 (1664.2) “하나님이 부모를 벌하려고 아이들을 괴롭힌다는 신조가 타당한가 의심했을 때 욥은 아주 옳았느니라. 언제라도 하나님이 올바름을 쉽사리 인정했으나 욥은 영원자의 성품에 대하여 혼을 만족시키는 어떤 계시를 몹시 바랐더라. 그리고 이것이 땅에서 우리의 사명이라. 고통받는 필사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비를 이해함으로 위로받는 것을 이제 더 막지 말지니라. 회오리바람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말씀한 시절에 훌륭한 개념이었으나, 아버지는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아니하며 ‘이것이 길이라, 그 안에서 걸으라’하고 조용히 작은 목소리로서 인간의 마음 속에서 이르심을 너는 이미 배웠느니라. 하나님이 네 안에 거하고 너를 그처럼 만들려고 그가 너와 같이 되었음을 너는 알아듣지 못하느냐!”

148:6.11 (1664.3) 그리고 나서 끝으로 이렇게 말씀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사람의 자녀 괴롭히기를 기뻐하지 않으시니라. 사람은 첫째로 뜻밖의 사고(事故)로, 그리고 미숙한 육체적 존재의 잘못으로 생기는 불완전으로부터 고통을 받느니라. 다음에 사람은 죄의 결과―생명과 빛의 법을 어긴―냉혹한 결과로 괴로움을 받느니라. 마지막으로, 사람은 땅에서 하늘의 올바른 통치에 맞서 불의한 저항을 계속함으로 그 수확을 거두느니라. 그러나 사람의 곤경은 신의 심판이 개인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현세의 고통을 줄이려고 많이 일할 수 있고 그렇게 하리라. 그러나 이번을 마지막으로, 악마가 부추기는 바람에 하나님이 사람을 괴롭힌다는 미신을 벗어나라. 욥기를 공부하고서, 착한 사람들조차 솔직하게 하나님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그릇된 생각을 품을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을 발견하라. 다음에 모질게 고통받던 욥조차 그런 그릇된 가르침을 받았는데도 위로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찾아냈는가 주목하라. 마침내 그의 믿음은 고통의 구름을 꿰뚫었고, 아버지로부터 쏟아지는 생명의 빛이 사람을 치유하는 자비요 영원한 올바름인 것을 헤아렸더라.”

148:6.12 (1664.4) 요한은 여러 날 동안 마음 속에 이 말씀을 숙고하였다. 뜰에서 주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 결과로 그후에 요한의 전생애가 뚜렷하게 바뀌었다. 후일에 그는 인간의 평범한 고통의 근원ㆍ성질ㆍ목적에 관하여 다른 사도들의 관점을 바꾸려고 많이 애썼다. 그러나 요한은 주가 떠나실 때까지 이 회견에 대하여 입을 열지 않았다.

7. 손이 마른 사람

148:7.1 (1664.5) 사도들과 새 전도단이 두 번째 갈릴리 전도 여행을 떠나기 전 둘째 안식일에, 예수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올바른 삶의 기쁨”에 대하여 말씀했다. 예수가 말씀을 마치자, 큰 무리의 불구자ㆍ절름발이ㆍ병자,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둘레에 몰려들어서 병 고침을 받으려 하였다. 또한 이 무리에는 사도들과 많은 새 전도사,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 첩자들이 있었다. 예수가 가신 데는 어디나 (아버지의 일을 보살피느라고 산에 있을 때를 제쳐놓고) 예루살렘 첩자 여섯 명이 꼭 따라왔다.

148:7.2 (1665.1) 정탐하는 바리새인들의 두목은 예수가 서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마른 손을 가진 사람에게, 예수에게 다가가서 안식일에 고침받는 것이 합당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날 도움을 구해야 할까 물으라고 유도했다. 그 사람을 보고, 할 말을 듣고 나서, 바리새인들이 그를 보냈음을 알아차리고 예수는 말했다: “너에게 한 마디 묻고자 하니 앞으로 나아오라. 너에게 양 한 마리가 있어,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다면 손을 뻗어 양을 붙잡아 들어올리겠느냐?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그 사람은 대답했다: “예 주여, 안식일에 그처럼 좋은 일 하는 것이 합당하리이다.” 그러자 예수가 모두에게 말했다. “무엇 때문에 너희가 이 사람을 내 앞으로 보냈는가 내가 아노라. 내가 안식일에 자비를 보이도록 유혹할 수 있으면 너희는 나에게서 안식일 어긴 근거를 찾으리라. 안식일에도 불행한 양을 구덩이에서 들어올리는 것이 합당하다고 너희는 모두 말없이 찬성하였느니라. 안식일에 동물 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자애심을 보이는 것이 합당함을 너희가 증거하라고 내가 청하노라. 사람은 양보다 얼마나 더 소중한지고! 내가 선포하노니, 안식일에 사람들에게 좋은 일 하는 것이 합당하니라.” 그 앞에서 다 조용히 서 있자, 예수는 손이 마른 남자에게 일렀다. “모두가 너를 보도록 여기 내 옆에 일어서라. 그리고 이제 너희가 안식일에 좋은 일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줄 너희가 알까 하나니 네가 고침받을 믿음이 있으면, 너에게 명하노니 손을 펴라.”

148:7.3 (1665.2) 이 사람이 마른 손을 폈을 때, 손이 온전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에게 달려들 생각이 있었지만 예수는 차분히 있으라 명하며 말했다: “안식일에 착한 일 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이 합당(合當)하다고 너희에게 막 일렀으나 사람을 해치고 죽이고 싶은 욕심에 굴복하라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였도다.” 성난 바리새인들은 사라졌고, 안식일이었는데도 당장에 허둥지둥 티베리아스로 가서 헤롯과 의논했다. 헤롯당원들을 예수를 적대하는,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그들은 헤롯이 편견을 갖도록 힘이 자라는 데까지 무슨 일이든지 했다. 그러나 헤롯은 예수를 적대하여 행동하려 하지 않았고 예루살렘에 가서 불평(不平)하라고 조언하였다.

148:7.4 (1665.3) 이것은 적들의 도전에 반응하여 처음으로 기적을 일으킨 경우이다. 병 고치는 능력을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종교적 휴식을 온 인류에게 의미 없이 제한하는 진정한 속박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강력한 항의로서 이른바 이 기적을 행하였다. 이 사람은 석공으로서 자기 일로 돌아갔다. 병 고침을 받고 나서 그는 감사하고 올바르게 산 사람이었음을 입증하였다.

8. 벳세다에서 보낸 마지막 주

148:8.1 (1665.4) 벳세다에서 머무르던 마지막 주에, 예루살렘에서 온 첩자(諜者)들은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의견이 크게 달랐다. 이 바리새인들 가운데 세 사람은 듣고 본 것에 엄청나게 감명을 받았다. 한편, 예루살렘에서 산헤드린 법정의 젊고 영향력 있는 회원 아브라함은 예수의 가르침을 드러내놓고 지지하였고 실로암 못에서 아브너에게 세례를 받았다. 온 예루살렘이 이 사건을 놓고 떠들썩하였고 바리새인 첩자 여섯 명을 불러들이려고 사자들이 벳세다로 즉시 파송되었다.

148:8.2 (1666.1) 이전의 갈릴리 여행에서 하늘나라를 믿도록 설득된 그리스인 철학자가 알렉산드리아의 어떤 부자 유대인들과 함께 돌아왔다. 그들은 병자를 위한 병원 뿐 아니라, 철학과 종교를 가르치는 합동 학교를 세울 목적으로 자기네 도시로 오라고 한 번 더 예수를 초청했다. 그러나 예수는 정중하게 그 초청을 물리쳤다.

148:8.3 (1666.2) 이 무렵에 벳세다 야영지에 박다드로부터 어떤 키르메스라 하는, 최면에 빠지는 선지자가 도착했다. 선지자라고 생각된 이 사람은 최면 상태에 있을 때 특이한 환상들을 보았고 잠이 방해를 받았을 때 환상적인 꿈을 꾸었다. 그는 야영지에서 어지간히 소동을 일으켰다. 열심당원 시몬은 스스로 속는 그 시늉꾼을 오히려 거칠게 다루기를 지지했지만 예수가 간섭하였고 며칠 동안 그에게 완전한 행동의 자유를 주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은 모두, 하늘나라 복음으로 판단하건대 그의 가르침이 건전하지 않음을 금방 깨달았다. 얼마 있다가 그는 박다드로 돌아갔고 불안정하고 이상한 사람 여섯 명만 데리고 갔다. 그러나 박다드 선지자를 위하여 예수가 중재하기 전에, 다윗 세베대는 한 자청한 위원회의 도움을 받아서 키르메스를 호수로 데리고 가서 물 속에 그를 연거푸 처박은 뒤에, 거기서 떠나라―자신의 캠프를 조직하고 세우라―고 조언했다.

148:8.4 (1666.3) 바로 그날, 어느 페니키아 여인 베스마리온이 너무 미쳐서 정신이 나갔고 물 위에서 걸으려고 애쓰다가 거의 물에 빠져 죽게 된 뒤에, 친구들이 그 여자를 떠나게 하였다.

148:8.5 (1666.4) 예루살렘에서 온 새로 전향한 바리새인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서 가진 재산 모두를 사도의 금고에 기부하였다. 이 기부금은 새로 훈련받은 전도사 1백 명을 즉시 보낼 수 있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안드레는 야영지를 걷어치운다고 이미 발표했고, 모두가 집으로 가든지 아니면 전도사들을 따라서 갈릴리로 가려고 준비했다.

9. 중풍병자를 고치다

148:9.1 (1666.5) 10월 1일 금요일 오후에 세베대의 집에, 널찍하고 확장한 앞쪽 방에서 예수가 사도와 전도사들, 흩어지는 야영지의 다른 지도자들, 그리고 이 모임에서 앞줄에 앉아 있던, 예루살렘에서 온 여섯 바리새인과 마지막 회의를 하고 있을 때, 예수가 땅에서 사신 전 생애에서 가장 이상하고 독특한 여러 사건 중의 하나가 벌어졌다. 이때 주는 이 큰 방에서 서서 말씀하고 있었다. 이 방은 비오는 철 동안에 이러한 모임에 편리를 주려고 지었다. 그 집은 예수의 강론 중에 얼마큼 얻어들으려고 귀를 쫑긋 기울이는 방대한 무리의 사람들로 온통 둘러싸여 있었다.

148:9.2 (1666.6) 집이 이렇게 사람들로 들끓고 열심 있는 청중에게 온통 둘러싸여 있는 동안, 중풍으로 오래 앓고 있던 어떤 사람을 가버나움에서 친구들이 작은 침상에 실어 내려보냈다. 이 중풍병자는 예수가 벳세다를 막 떠나려한다는 말을 들었고, 아주 최근에 몸이 온전하게 된 석공 아론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므로, 병을 고침받을 수 있도록 예수 앞으로 들려 가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친구들이 앞문과 뒷문으로 세베대의 집으로 들어가려고 애썼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이 붐비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풍병자는 그만두려고 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사다리를 얻어 오라고 지시했고, 사다리로 친구들은 예수가 말씀하고 있는 방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타일을 벗겨 놓은 뒤에, 친구들은 아픈 사람이 바로 주 앞에 마루에 놓일 때까지 밧줄로 침상에 들린 병자를 대담하게 내려보냈다. 그들이 한 일을 보자 예수는 말씀을 그쳤고, 한편 방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아픈 사람과 그 친구들의 끈질김에 감탄했다. 중풍병자가 말했다: “주여, 나는 당신의 가르침을 방해하고 싶지 않사옵나이다. 하오나 나는 온전히 되고자 결심하였나이다. 나는 고침을 받는 즉시 당신의 가르침을 잊어버린 자들과 같지 않사옵나이다. 하늘나라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나는 온전히 되고자 하나이다.” 자, 스스로 생애를 잘못 보내서 이 사람이 병을 얻었는데도, 예수는 그 믿음을 보고 중풍병자에게 말했다: “얘야 무서워 말라, 너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할지니라.”

148:9.3 (1667.1) 예루살렘에서 왔던 바리새인들이, 같이 앉아 있던 다른 서기관과 율법사들과 더불어 예수의 이런 선언을 들었을 때, 속으로 비로소 혼잣말을 했다: “이 사람이 어찌 감히 이리 말하는가? 그런 말이 신성 모독임을 저가 알지 못하는가? 하나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이렇게 머리 속에서 자기들끼리 따지는 것을 영적으로 알아차리고 주는 그들에게 말씀했다: “어찌하여 너희가 마음 속에서 그리 따지느냐? 나를 판단하다니 너희는 누구이냐? 이 중풍병자에게, 너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든지 아니면 일어나서 네 침구(寢具)를 들고 걸으라 하든지 무슨 차이가 있느냐?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구경하는 너희가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할 권한과 능력이 있음을 마침내 알도록 이 병자에게 이르리라. 일어나서 네 침구를 들고 집으로 가라.” 예수가 이렇게 말씀하시자 중풍병자는 일어났고, 사람들이 길을 비키는 대로 모두 앞에서 걸어 나갔다. 이를 구경한 사람들은 놀랐다. 베드로는 집회를 해산했고, 한편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그렇게 이상한 일을 한 번도 전에는 본 적이 없다고 털어놓았다.

148:9.4 (1667.2) 이 무렵에 산헤드린의 사자들이 여섯 첩자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 명하려고 도착했다. 이 소식을 듣자 자기들끼리 진지하게 토론에 빠졌다. 의논을 마치고 난 뒤에 두목과 두 동료가 사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한편 정탐하던 세 바리새인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였고 바로 호수(湖水)로 가서 베드로에게 세례받고 하늘나라의 식구가 되어 사도들과 사귀었다.

제 149 편 두 번째 전도 여행

유란시아서

제 149 편

두 번째 전도 여행

149:0.1 (1668.1) 갈릴리에서 두 번째 대중 전도 여행은 서기 28년 10월 3일 일요일에 시작되었고 거의 석 달 동안 계속되어 12월 30일에 끝났다. 이 노력에는 예수와 열두 사도가 참여했고 새로 모집한 117명의 전도사 집단, 그리고 관심 있는 수많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이 여행에서 가다라ㆍ프톨레마이스ㆍ야피아, 다바리타ㆍ메기도ㆍ예즈릴, 스키토폴리스ㆍ타리케아ㆍ히포, 가말라ㆍ벳세다 줄리아스, 그리고 기타 여러 도시와 마을을 방문했다.

149:0.2 (1668.2) 이 일요일 아침에 떠나기 전에 안드레와 베드로는 예수에게 새 전도사들에게 마지막 책임을 맡기는 말씀을 부탁했으나 예수는 남들이 적절히 수행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그의 직분이 아니라 하면서 물리쳤다. 마땅한 검토를 거친 뒤에, 야고보 세배대가 책임 지우는 선서를 시행하기로 결정이 내렸다. 야고보의 논평이 끝났을 때 예수는 전도사들에게 말했다: “이제 떠나서 너희가 책임을 맡은 대로 일하러 떠나라, 나중에 너희가 능력과 충성심이 있음을 보였을 때, 하늘나라 복음을 전도하도록 너희를 세우리라.”

149:0.3 (1668.3) 이 여행에는 오직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와 함께 길을 떠났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저마다 전도사를 열두 명쯤 데리고 갔으며 전도하고 가르치는 일을 해나가는 동안 그들과 밀접하게 연락을 유지했다. 신자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되자마자 사도들이 세례를 주곤 하였다. 예수와 두 동반자는 이 석 달 동안 널리 여행했다. 전도사들의 일을 지켜보고 하늘나라를 세우려는 노력을 격려하느라고 때때로 하루에 두 도시를 방문했다. 이 둘째 전도 여행 전부가 주로, 새로 훈련받은 이 전도사 117명의 무리를 위하여 실용적 경험을 마련해 주려는 노력이었다.

149:0.4 (1668.4) 이 기간 내내, 그리고 그 뒤에 예수와 열두 사도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마침내 떠날 때까지, 다윗 세베대는 벳세다에 있는 아버지 집에서 하늘나라 일을 위하여 영구 본부를 유지했다. 여기가 땅에서 예수의 일을 위한 정보 교환소였고 사자들의 봉사를 위하여 연결하는 역(驛)이었으며, 다윗은 팔레스타인의 여러 곳과 인접 지역에 있는 일꾼들 사이에서 이 봉사를 계속하였다. 그는 이것을 모두 솔선해서, 그러나 안드레의 승인을 얻어서 했다. 다윗은 급히 커지고 뻗어나가는 하늘나라 사무의 정보 분과에서 40에서 50명의 사자(使者)를 고용했다. 이렇게 일하는 동안 다윗은 예전의 고기잡이 일에 얼마큼 시간을 써서 어느 정도 자신을 부양했다.

1. 널리 알려진 예수의 이름

149:1.1 (1668.5) 벳세다의 캠프가 해산될 때가 되자, 예수의 이름은 특히 병 고치는 자로서, 팔레스타인의 구석구석, 그리고 시리아와 그 주위의 여러 지역 전체를 통해서 알려졌다. 그들이 벳세다를 떠난 뒤에 몇 주 동안, 병자들이 계속 도착했다. 주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다윗으로부터 그가 어디에 계신가 알아내고서 예수를 찾으러 가곤 하였다. 이 여행에서 예수는 병 고치는 기적이라 부르는 일을 일부러 전혀 행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병자 몇십 명이 병 고침을 찾게 한 맹렬한 믿음의 치유 능력의 결과로서 건강과 행복을 되찾았다.

149:1.2 (1669.1) 이 사명을 수행하던 무렵에―그리고 땅에서 예수의 여생 동안 내내―특이하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치유 현상이 계속하여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석 달 동안 여행하는 과정에서 유대ㆍ이두미아ㆍ갈릴리ㆍ시리아ㆍ티레ㆍ시돈으로부터, 또 요단강 건너로부터, 1백 명이 넘는 어른과 아이들이 예수의 이러한 무의식 치유의 수혜자였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예수의 이름을 더욱 퍼뜨렸다. 뜻밖에 고침받은 이 경우를 지켜볼 때마다, 예수가 “아무에게 말하지 말라”고 수혜자들에게 직접 당부하곤 했는데도 그리하였다.

149:1.3 (1669.2) 뜻밖에, 즉 의식하지 않으면서 고치는 이 여러 경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는 계시받은 적이 없다. 몇몇 경우에 단지 “권능이 내게서 나갔음을 내가 깨닫노라” 말한 것 외에 주는 사도들에게 어떻게 이 치유가 일어났는가 설명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 어느 아픈 아이가 그를 만졌을 때 말씀하였다: “생명이 내게서 나갔음을 내가 깨닫노라.”

149:1.4 (1669.3) 이러한 의식하지 않고 치유하는 사례들의 성질에 관하여 주로부터 직접 말씀이 없는 마당에 우리 편에서 어떻게 이 일이 이루어졌는가 설명하려는 시도는 주제넘을 터이지만, 모든 그런 치유 현상에 대하여 우리의 의견을 기록하는 것은 괜찮을 것이다. 병 고치는 기적으로 보이는 이 일들은, 땅에서 예수가 봉사를 베푸는 과정에서 일어난 바와 같이, 강력하고 유효하고 관련된 다음 세 가지 영향이 공존한 결과였다고 우리는 믿는다:

149:1.5 (1669.4) 1. 끈질기게 치유를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 속에, 강하고 지배적이고 생생한 믿음이 있는 것. 아울러 순전히 육체의 회복보다 오히려 그 영적 이익 때문에 그러한 치유가 바람직하다는 사실.

149:1.6 (1669.5) 2. 그러한 인간의 믿음과 동시에, 육신화되고 자비에 지배된, 하나님의 창조 아들의 큰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존재하는 것. 그는 몸 안에 거의 한없고 시간을 초월하는 창조적 치유 권능과 특권을 실제로 소유했다.

149:1.7 (1669.6) 3. 인간의 믿음과 창조자의 생명과 함께, 하나님인 이 사람이 아버지의 뜻이 인격으로 표현된 것임을 또한 주목해야 한다. 인간의 필요와 이를 채우는 신의 권능이 접촉할 때 아버지가 달리 뜻하지 않으면, 그 둘이 하나가 되고 인간 예수가 의식하지 않고서 치유가 일어났지만, 즉시 신다운 성품이 이를 인식했다. 그러면 병을 고친 이 많은 사례(事例)의 설명은 우리에게 오랫동안 알려진 큰 법칙에서 찾아야 하는데, 이렇다: 창조 아들이 바라고 영원한 아버지가 뜻하시는 것은 동시에 존재한다.

149:1.8 (1669.7) 그러면 예수가 친히 계신 앞에서, 어떤 형태의 심오한 인간의 믿음은 우주의 어떤 창조 세력, 그리고 당시에 사람의 아들과 아주 밀접히 연결된 성격자들로 말미암아 치유가 나타나는 것을 글자 그대로, 참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의견이다. 따라서 예수는 그가 계신 앞에서 사람들이 힘찬 개인적 믿음으로 스스로 고치도록 흔히 버려두었다는 것이 기록된 사실이 된다.

149:1.9 (1670.1) 다른 여러 사람은 온전히 이기적 목적으로 치유받기를 추구했다. 티레의 어느 부유한 과부는 수행원들과 함께 질병을 고침받으려고 왔는데, 여러 가지 병이 있었다. 갈릴리를 통해서 여기저기 예수를 따라다니는 동안, 마치 하나님의 권능이 돈을 가장 많이 내는 사람이 살 물건인 듯, 점점 더 많은 돈을 계속 내밀었다. 그러나 한 번도 하늘나라의 복음을 거들떠보려 하지 않았다. 얻고자 한 것은 오직 육체의 병의 치유였다.

2. 사람들의 태도

149:2.1 (1670.2) 예수는 사람들의 정신을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가 알았다. 그의 가르침이 그가 제시한 대로 간직되었더라면, 그에 관한 유일한 해설(解說)이 땅에서 사신 그의 생애가 허락하는 해석, 영감을 주는 해석이므로, 세상의 모든 민족과 종교가 빨리 하늘나라 복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초기 추종자들이 특정한 민족ㆍ종족ㆍ종교가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쉽게 만들려고 노력을 기울인 것은 의도는 좋았지만, 다만 그러한 가르침을 모든 다른 민족ㆍ종족ㆍ종교가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149:2.2 (1670.3) 사도 바울은 당대에 예수의 가르침을 특정한 집단들이 호감을 가지고 주목하게 만들려는 노력으로, 교육하고 훈계하는 편지를 많이 썼다. 예수의 복음을 가르치는 다른 선생들도 똑같이 하였다. 그러나 이런 기록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담은 것이라고 발표하려는 자들이 후일에 이 중에 더러를 수집하리라는 것을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이른바 기독교가 다른 어떤 종교보다 주의 복음을 더 담고 있지만, 거기에는 또한 예수가 가르치지 않은 것이 허다하다. 페르시아의 신비교로부터 온 많은 가르침과 그리스 철학의 많은 것을 기독교로 끌어들인 외에도 두 가지 큰 잘못을 저질렀다:

149:2.3 (1670.4) 1. 기독교의 속죄(贖罪) 교리가―예수가 아버지의 엄격한 응보를 만족시키고 신의 진노를 달래려고 하는 희생된 아들이라는 가르침이―보여주다시피, 복음의 가르침을 유대인의 신학(神學)과 직결시키려 하는 노력. 이 가르침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하늘나라 복음을 받아들이기 쉽게 만들려고 하는 칭찬할 노력에서 생겼다. 유대인을 설득하려는 이 노력은 실패했어도, 모든 이후 세대에 많은 정직한 사람을 헛갈리게 하고 따돌리는 데 실패하지는 않았다.

149:2.4 (1670.5) 2. 주의 초기 추종자들이 저지른 둘째로 큰 잘못, 모든 후일의 세대가 영구하게 지속한 큰 잘못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아주 온통 예수라는 인물에 관하여 체계화한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의 인격을 이렇게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그의 가르침을 가리도록 작용했고, 이 모두가 유대인ㆍ이슬람교인ㆍ힌두교인, 그리고 기타 동방(東方)의 종교인이 예수의 가르침을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예수의 이름을 지닐까 싶은 종교에서 예수 본인이 차지하는 자리를 깎아내리고 싶지 않지만, 우리는 그러한 배려가 영감을 받은 그의 생애가 빛을 잃게 만들거나 구원하는 그의 말씀―하나님이 아버지요 사람이 형제임―을 대신하도록 버려두고 싶지 않다.

149:2.5 (1670.6) 예수의 종교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공통으로 지니는 진리를 인정하고서 (이 중에 많은 것이 직접ㆍ간접으로 예수의 말씀으로부터 온다) 다른 종교들에 접근해야 하며, 한편 지나치게 차이를 강조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149:2.6 (1671.1) 바로 그 시절에, 예수의 이름은 주로 병 고치는 자로서 얻은 평판에 달려 있었지만 계속 그랬다고 할 수는 없다. 시간이 지나자, 갈수록 더욱 사람들이 영적 도움을 받으려고 그를 찾았다. 그러나 서민들에게 아주 직접, 즉시 호소한 것은 육체의 치유였다. 도덕적으로 종살이하고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예수를 더욱 찾았고 그는 변함없이 구원의 길을 가르쳤다. 아버지들은 아들을 다루는 것에 관하여 조언(助言)을 구했고, 어머니들은 딸을 지도하는 데 도움을 얻으려고 왔다. 어둠 속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그를 찾아 왔고 그는 생명의 빛을 드러냈다. 귀는 언제라도 인류의 슬픔을 들으려고 열려 있었고, 그는 언제나 보살핌을 찾는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149:2.7 (1671.2) 바로 창조자가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육신화하여 땅에 계실 때,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너희는 결코 이른바 이 기적이 일어난 것을 통해서 예수를 접근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통해서 기적(奇蹟)에 접근하기를 배우고, 기적을 통해서 예수한테 다가가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나사렛 예수가 땅에서 초물질 행위를 연출했던 유일한 종교 창시자였는데도 이 훈계는 틀림없다.

149:2.8 (1671.3) 땅에서 미가엘의 사명 중에 가장 놀라운 혁신적 특징은 여자에 대한 태도였다. 공적인 자리에서 남자가 자기 아내에게도 인사를 건네지 않기로 되어 있던 시절과 세대에, 예수는 셋째 갈릴리 여행과 관련하여 감히 여자들을 복음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데리고 갔다. “율법의 말씀을 여자에게 전하는 것보다 불에 태우는 것이 낫다”하고 선포했던 율법학자들의 가르침 앞에서 이렇게 행하는 최고의 용기를 가졌다.

149:2.9 (1671.4) 오랜 세월에 걸쳐 무시되어 잊혀지고 노예처럼 고된 일을 하는 상태로부터, 한 세대 안에 예수는 여자들을 구조했다. 후일에 여자에 대한 태도에 이 고귀한 모범을 따를 도덕적 용기가 모자란 것은 예수의 이름을 주제넘게 가져간 종교에 한 가지 부끄러운 일이다.

149:2.10 (1671.5) 예수가 사람들과 섞이는 동안, 사람들은 예수가 도무지 그 시절의 미신에 매어 있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는 종교적 편견이 조금도 없었고, 결코 관대함이 모자라지 않았다. 사회에 대하여 적대감과 비슷한 아무것도 마음 속에 지니지 않았다. 조상의 종교에 있는 좋은 것에 순응했으나 미신과 속박과 같은, 사람이 만든 전통을 서슴지 않고 무시했다. 자연의 재난, 뜻밖의 사고, 기타 재앙은 신이 내리는 심판이나 섭리의 신비로운 작용이 아니라고 감히 가르쳤다. 의미 없는 예식에 종처럼 헌신하는 것을 비난했고, 물질적 예배의 잘못됨을 밝혔다. 그는 대담하게 사람의 영적 자유를 선포했고, 육체를 가진 필사자가 정말로, 진실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감히 가르쳤다.

149:2.11 (1671.6) 깨끗한 손이 아니라 깨끗한 마음이 참된 종교의 표시(表示)라고 했을 때, 예수는 조상의 모든 가르침을 초월했다. 전통 대신에 현실을 존중하였고 허영과 위선이 가득한 모든 허식을 치워버렸다. 그래도 두려움 없는 이 하나님의 사람은 파괴적인 비난을 퍼붓거나 그 시대의 종교ㆍ사회ㆍ경제ㆍ정치 관습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싸우기 좋아하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는 점진적 진화를 부르짖는 이였다. 동료들에게 있어야 할 우수한 것을 동시에 제공할 때에야 그는 지금 있는 것을 없애는 일에 들어갔다.

149:2.12 (1672.1) 예수는 강요하지 않고서 추종자들로부터 복종을 얻었다. 그가 친히 부른 사람들 중에서 세 사람만 제자가 되라는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 대하여 특별히 마음을 끄는 힘을 가졌지만 독재자처럼 행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고, 아무도 그의 지시를 분개하지 않았다. 제자들에 대하여 절대 권한을 가졌지만, 아무도 항의한 적이 없었다. 추종자들이 그를 주라고 부르도록 두었다.

149:2.13 (1672.2) 뿌리 깊은 종교적 편견을 품은 사람이나 그의 가르침에 정치적 위험이 있음을 식별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을 제쳐놓고 그를 만난 모든 사람이 주를 찬미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의 독창성과 권위에 놀랐다. 뒤처지고 성가시게 구는 질문자들을 다루면서 참을성을 보인 것에 사람들은 감탄했다. 그의 봉사 활동 밑에 들어온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희망과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오직 그를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마음 속에 꼭 붙들고 있으려고 작정했던 해악과 잘못을 뒤집어엎도록 정해진 진리를 예수가 옹호한다고 생각한 사람들만 그를 미워했다.

149:2.14 (1672.3) 그는 친구와 적, 모두에게 강하고 특이하게 매혹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군중은 그저 품위 있는 말씀을 듣고 소박한 생활을 구경하려고 몇 주 동안 따라다니곤 하였다. 헌신하는 남녀들이 거의 초인간적 애정으로 예수를 사랑했다. 그를 알면 알수록, 예수를 더욱 사랑했다. 이 모두가 아직도 참말이다. 오늘날도, 그리고 모든 미래 시대에, 하나님인 이 사람을 알면 알수록 사람들은 더욱 예수를 사랑하고 그의 뒤를 따를 것이다.

3. 종교 지도자들의 적개심

149:3.1 (1672.4) 서민들이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호의로 받아들였는데도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더욱 놀라고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체계 있는 독단적 신학을 형성하였다. 예수는 경우가 닿는 대로 가르친 선생이었다.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었다. 예수는 율법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생활에서 비유를 들어 가르쳤다. (그의 말씀의 의미를 예를 들어 설명하려고 비유를 썼을 때 그 목적을 위하여 이야기의 꼭 한 모습을 이용하려고 머리를 썼다. 그의 비유로부터 우화를 지어내려고 애씀으로 예수의 가르침에 관하여 많은 그릇된 관념이 생길 수 있다.)

149:3.2 (1672.5)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젊은 아브라함이 최근에 전향한 결과로, 그리고 베드로에게 세례받은 세 첩자가 도망한 것 때문에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이 되었으며, 이들은 이제 이 둘째 갈릴리 전도(傳道) 여행에 전도사들과 함께 나다녔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두려움과 편견에 더욱 눈이 멀었고, 한편 하늘나라 복음의 매력 있는 진리를 계속 물리침으로 마음이 굳어졌다. 사람들이 안에 깃드는 영의 호소에 귀를 막을 때, 그 태도를 고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149:3.3 (1672.6) 벳세다 캠프에서 전도사들을 처음 만났을 때 예수는 연설을 마치면서 말했다: “너희는 몸과 머리 속에서―감정으로―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반응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느니라. 사람들에게 오직 한 가지 한결같은 것은 깃드는 영이라. 신다운 영들이 어느 정도 체험의 성질과 범위가 다를지라도, 저희는 어떤 영적 호소에도 한결같이 반응하느니라. 오직 이 영을 통해서, 그리고 그 영에게 호소함으로 인류는 언제라도 하나가 되고 형제가 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느니라.” 그러나 유대인의 많은 지도자가 복음의 영적 호소에 마음 문을 닫았다. 이날부터 계속, 주의 파멸을 계획하고 일을 꾸미기를 그치지 않았다. 종교범으로서, 유대인의 신성한 율법의 으뜸가는 가르침을 어긴 자로서, 그들은 예수를 잡아들이고, 선고(宣告)하고 처형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4. 전도 여행의 진행

149:4.1 (1673.1) 이 전도 여행에서 예수는 대중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어쩌다가 머무른 대부분의 도시와 마을에서, 신자들과 함께 저녁 수업을 많이 열었다. 어느 날 이 저녁 시간에, 새로 된 어느 전도사가 예수에게 성내는 것에 대하여 물었고, 주는 다른 것들과 함께 이런 말씀으로 대답하였다:

149:4.2 (1673.2) “성내는 것은 무릇, 영적 성품이 지능과 육체의 두 성품을 제어하지 못한 척도를 가리키는 물질적 현상이라. 성내는 것은 너그러운 형제다운 사랑이 모자라고 자존심과 자제가 모자람을 가리키느니라. 성내는 것은 건강을 소모하고, 지능의 질을 떨어뜨리며 인간의 혼을 가르치는 영 선생을 방해하느니라. ‘분노가 어리석은 사람을 죽이느니라,’ 사람은 ‘성이 나서 스스로를 상하느니라’ 함을 너희가 성서에서 읽지 아니하였느냐? ‘더디게 성내는 자는 큰 이해심을 가졌고’ 한편 ‘급히 성내는 자는 어리석음을 찬양하느니라’ 하는 것을? ‘부드러운 대답이 진노를 거두느니라’ 그리고 어떻게 ‘모진 말이 진노를 불러일으키는가’ ‘신중함은 진노를 늦추며’ 한편 ‘자신을 제어할 줄 모르는 자는 담이 없어 방어할 수 없는 도시와 같다’ 함을 너희가 아느니라. ‘진노하는 것은 잔인하며 성내는 것은 터무니 없느니라.’ ‘성난 자는 싸움을 부채질하고 격노한 자는 계율을 많이 어기느니라.’ ‘서두르는 마음을 갖지 말지니, 분노가 바보들의 가슴 속에서 쉬는 까닭이라.’” 말씀을 그치기 전에, 예수는 이어서 말했다: “사랑이 너희 마음을 다스려서, 신의 아들인 지위와 어울리지 않게 동물처럼 분노를 터뜨리는 경향으로부터 영 안내자가 너희를 구원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도록 하라.”

149:4.3 (1673.3) 바로 이 기회에 주는 그 무리에게 차분한 인격의 소유가 바람직하다는 것을 말씀하였다.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 직업을 통달하기까지 그에 헌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예수는 인정했다. 하지만 지나친 전문화를 향하고 일생의 활동에 생각이 좁아지고 제한하는 모든 경향을 한탄했다. 어떤 미덕이라도 지나치게 실행하면 악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예수는 늘 절제를 외치고 일관성―생활 문제를 균형 있게 조정하는 것―을 가르쳤다. 지나치게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태도는 심각한 불안감으로 변할 수 있다, 열심이 계속되면 광신(狂信)으로 발전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예수는 옛 동료들 중 한 사람에 관하여 논의했는데, 그의 공상은 환상적이고 쓸모 없는 사업을 하도록 이끌었다. 동시에 예수는 지나친 보수적 평범은 지루해질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였다.

149:4.4 (1673.4) 그리고 나서 예수는 용기와 믿음의 위험에 대하여, 어떻게 때때로 이것들이 생각 없는 사람들을 무모(無謀)와 과신(過信)으로 이끄는가 강론하였다. 또한 어떻게 조심과 신중함이 너무 지나치면 비겁과 태만으로 이끄는가 보여주었다. 말씀 듣는 자들에게 비정상으로 가는 온갖 성향을 피하면서, 독창적이 되려고 애쓰라고 훈계하였다. 감상적이 되지 않으면서 동정심을 보이며, 신성한 체하지 않으면서 경건하라고 타일렀다. 두려움과 미신에 매이지 않고 공손하기를 가르쳤다.

149:4.5 (1674.1) 동료들을 감동시킨 것은 예수가 차분한 인품에 대하여 말씀으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의 일생 자체가 그 가르침의 본보기였다는 사실이다. 긴장과 폭풍 한가운데서 살았지만 그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적들은 그를 잡으려고 계속 덫을 놓았지만, 결코 그를 옭아매지 못했다. 지혜롭고 학식 있는 자들이 그를 넘어지게 하려고 애썼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그를 토론에 말려들게 하려 했지만, 그의 대답은 언제나 사람을 깨우치고 위엄이 있고 단호하였다. 강론하다가 가지가지의 물음으로 중단되었을 때, 그의 대답은 언제나 의미가 깊었고 확실하였다. 적들의 계속된 압력과 맞서면서, 한 번도 비열한 술수를 쓰지 않았고, 그들은 서슴지 않고 온갖 종류의 거짓되고 부당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149:4.6 (1674.2) 많은 남녀가 생계를 잇는 직업으로 어떤 분명한 업무에 부지런히 힘써야 하는 것이 참말이지만, 그런데도 땅에서 사는 대로, 인생에 대하여 두루 문화적 지식을 개발하는 것이 전적으로 바람직하다. 참으로 교육받은 사람들은 동료의 생활과 행적을 모르고 지내면서 만족하지 않는다.

5. 만족에 관한 교훈

149:5.1 (1674.3) 열심당원 시몬의 감독 하에서 일하는 전도사 무리를 예수가 찾아보았을 때, 저녁 회의 동안에 시몬이 주께 물었다: “어째서 어떤 사람들은 남보다 훨씬 더 행복하고 만족하나이까? 만족은 종교적 체험의 문제이나이까?” 다른 것들 가운데, 시몬의 물음에 대답하여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149:5.2 (1674.4) “시몬아, 어떤 사람들은 남보다 자연히 더 행복하니라. 많은 것, 허다한 것이 사람이 자신 안에 사는 아버지의 영이 이끌고 지도하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데 달려 있느니라. 성서에서 너는 현자의 말씀을 읽지 아니하였느냐?, ‘사람의 영은 주의 촛불이니, 마음 속의 모든 구석을 훑어보느니라.’ 또한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필사자들이 말하느니라. ‘경계선이 내가 기뻐하는 곳에 떨어졌구나. 옳거니, 나는 값진 유산을 물려받았구나.’ ‘올바른 자의 작은 재산이 악한 자 여럿의 재산보다 나으니’ 왜냐하면 ‘착한 사람은 마음 속에서 만족할 것임이라.’ ‘즐거운 마음은 얼굴빛을 밝게 하며 또한 계속되는 잔치이라. 주를 경외하고 조금 가진 것이 큰 보물과 아울러 골칫거리를 가진 것보다 좋으니라. 사랑이 있는 곳에서 쓴 나물로 저녁 먹는 것이 미워하면서 살찐 송아지 고기를 먹는 것보다 낫도다. 올바르게 조금 가진 것이 옳지 않게 큰 돈을 버는 것보다 낫도다.’ ‘즐거운 마음은 약처럼 좋으니라.’ ‘평온하게 한 줌 가진 것은 슬퍼하며 영이 괴로운 가운데 넘치게 풍부한 것보다 나으니라.’

149:5.3 (1674.5) “사람의 많은 슬픔은 포부를 이루지 못하여 실망함으로, 그리고 자존심을 다침으로 생기느니라. 땅에서 일생을 최선으로 이용하는 것이 자신에게 의무일지라도, 이렇게 성실하게 힘쓴 뒤에 사람들은 즐겁게 제 운명을 받아들이고 저희 손에 들어온 것을 최선으로 이용하는 머리를 써야 하느니라. 사람의 허다한 문제가 모두 자신의 평상시의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의 흙에서 생기느니라. ‘사악한 자는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데 달아나느니라.’ ‘사악한 자는 사나운 바다와 같으니, 쉴 수 없지만 그 물이 더러운 것과 쓰레기를 던져 올리는 까닭이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사악한 자에게는 평화가 없느니라.’

149:5.4 (1674.6) “그러면 거짓된 평화와 일시의 기쁨을 찾지 말고, 오히려 믿음의 확신과 신의 아들이라는 보장을 찾을지니, 이것들은 정신적 안정과 만족과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낳느니라.”

149:5.5 (1675.1) 예수는 도저히 이 세상을 “눈물의 골짜기”로 여겼다고 할 수 없다. 그는 이 세상이 오히려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영원한 불멸의 영들이 태어나는 구체, “혼을 만드는 골짜기”로 보았다.

6. “주를 두려워하는 것”

149:6.1 (1675.2) 가말라에서 저녁 회의 동안에, 빌립이 예수에게 말했다: “주여, 어찌하여 성서는 우리에게 ‘주를 두려워하라’ 가르치며, 한편 당신은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바라보기를 원하시나이까? 우리가 어떻게 이 두 가르침을 조화시켜야 하리이까?” 예수는 빌립에게 대답했다:

149:6.2 (1675.3) “아이들아, 네가 그렇게 묻는 것에 나는 놀라지 아니하노라. 시초에는 오직 두려움을 통해서 사람이 신을 공경하는 것을 배울 수 있었느니라. 그러나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려고 온 것은 아버지의 깊고 완전한 사랑을 아들이 애정으로 인식하고 그에 보답하도록 당기는 힘으로 너희가 영원자를 예배하려는 마음이 생기게 하고자 함이라. 노예처럼 두려워서, 질투하고 진노하는 임금이자 하나님을 지겹게 섬기라고 너희를 족치는 속박에서 너희를 벗어나게 하고자 하노라. 다정하고 공정하고 자비로운 아버지 하나님을 숭고하게,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롭게 예배하는 길로 즐겁게 마음이 이끌리도록,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너희에게 가르치고자 하노라.

149:6.3 (1675.4)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움에서 시작하여 고민하고 불안해 하는 단계를 거쳐서 경외하고 공경하는 높이까지 올라오면서, 연속된 여러 시대에 다른 뜻을 가졌느니라. 이제 공경함에서 시작하여 인식(認識)하고 깨닫고 이해함을 거쳐서 사랑하는 높이에 이르기까지 너희를 이끌고자 하노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만 인식할 때, 사람은 최상위를 두려워하게 되느니라.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격과 성품을 비로소 이해하고 체험할 때, 사람은 그렇게 좋고 완전한, 우주의 영원한 아버지를 더욱 사랑하도록 마음이 끌리느니라. 바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이렇게 변화시키는 것이 땅에서 사람의 아들이 이룰 사명이라.

149:6.4 (1675.5) “총명한 아이들은 아버지의 손에서 좋은 선물을 받을까 하여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느니라. 그러나 아들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가 주신 좋은 것들을 이미 풍부히 받았은즉 사랑을 많이 받은 이 아이들은 아낌없이 베푸는 그런 은혜를 민감하게 인식하고 이해함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느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은 사람을 뉘우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봉사로, 하나님의 자비는 구원으로 이끌며, 한편 하나님의 사랑은 지적으로, 자유로운 마음으로 그를 예배하게 하느니라.

149:6.5 (1675.6) “너희의 선조(先祖)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니, 그가 막강하고 신비스러웠음이라. 너희는 그를 찬미할지니 그의 사랑이 견줄 데 없고 자비가 넘치며 그의 진리가 영화로움이라. 하나님의 권능은 사람의 마음 속에 두려움을 일으켜도 그 성격의 고귀함과 올바름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얻고 즐거이 그를 예배하게 하느니라. 의무에 충실하고 애정을 가진 아들은 막강하고 고귀한 아버지라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느니라. 내가 온 것은 신을 두려워하는 대신에 사랑하고, 슬퍼하는 대신에 기뻐하며, 두려워하지 말고 믿으며, 노예처럼 속박되어 의미 없는 예식을 치르지 말고 사랑으로 봉사하고 감사함으로 신을 예배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자에게는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하는 것이 아직도 참말이라. 그러나 빛이 더욱 충만히 다가왔을 때, 하나님의 아들들은 무한자가 하시는 일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그 성품 때문에 찬미할 마음이 생기느니라.

149:6.6 (1675.7) “아이들이 어리고 생각이 없을 때는 부모를 존경하라고 반드시 훈계를 받아야 하지만 아이들이 나이가 들고 부모의 보살핌과 보호가 유익함을 얼마큼 더 이해하게 될 때, 저희는 공경하는 마음과 늘어나는 애정을 통해서 부모가 한 일보다 부모이기 때문에 부모를 실제로 사랑하는 체험 수준까지 올라가게 되느니라. 아버지는 자연히 자식을 사랑하지만, 아이는 무슨 일을 아버지가 할 수 있는가 두려워하다가 경외하고 무서워하고 의존하고 존경하는 수준을 거쳐서, 사랑을 이해하고 깊이 존중하기까지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야 하느니라.

149:6.7 (1676.1)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지니, 그것이 사람의 온전한 의무임이라’하고 너희는 가르침을 받았도다. 그러나 내가 온 것은 너희에게 새롭고 더 높은 계명을 주고자 함이라. 이렇게 너희에게 가르치고자 하노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을 행하기를 배울지니, 이것이 하나님의 해방된 아들들의 최고 특권인 까닭이라.’ 너희의 조상은 ‘하나님―전능한 임금―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침을 받았느니라. 나는 너희에게 가르치노니, ‘하나님―온통 자비로운 아버지―를 사랑하라.’

149:6.8 (1676.2) “나는 하늘나라를 선포하러 왔나니 거기에는 높고 강력한 임금이 없느니라. 이 나라는 신의 가족이라. 방대한 이 지적(知的) 존재인 형제들의 중심,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아낌없이 섬김받는 중심이자 우두머리는 내 아버지요 너희 아버지라. 나는 그의 아들이요 너희도 또한 아들이라. 그러므로 하늘의 지위로 보면 너희와 내가 형제인 것이 영원히 진리요, 땅에서 사는 인생에서 육체를 입고 우리가 형제가 되었은즉 더욱 그러하니라. 그러면 하나님을 임금으로 두려워하거나 주인으로 섬기지 말라. 창조자인 그를 존경하기를 배우고 너희 어린 영의 아버지로 공경하며 자비로운 변호자인 그를 사랑하라. 궁극에는 너희가 더 성숙하게 영적으로 깨닫고 이해하는 아버지, 사랑이 깊고 전적으로 지혜로운 아버지로 예배하라.

149:6.9 (1676.3)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너희의 그릇된 개념들로부터 거짓된 겸손 개념이 자라고 많은 위선(僞善)이 솟아나느니라. 사람의 성품과 기원은 흙 속의 벌레일지 모르지만, 내 아버지의 영이 깃들 때 그 사람의 운명이 신성하게 되느니라. 내 아버지가 수여하는 영은 분명히 그 신성한 근원으로, 기원이 있던 우주 수준까지 돌아가겠고, 필사자의 인간 혼은 이 깃드는 영으로부터 다시 태어난 아이가 되었을 것이요, 그 혼은 신다운 영과 더불어 영원한 아버지가 계신 바로 그 앞까지 확실히 올라가리라.

149:6.10 (1676.4) “하늘나라의 영원으로 올라가는 모든 그러한 믿음의 후보자에게 비록 신다운 위엄이 붙을지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이 모든 선물을 받는 필사 인간에게 겸손이 정말로 어울리느니라. 의미 없이 비천하게, 보아란 듯 거짓 겸손을 떠는 것은 구원의 근원을 이해하고 영에게서 태어난 너희 혼의 운명을 인식하는 것과 모순되느니라. 마음 속 깊이, 하나님 앞에 겸손함은 아주 적절하니라. 사람들 앞에서 온유함은 칭찬할 만하여도, 자의식하면서 몹시 눈을 끌고 싶어 겸손을 떠는 위선은 유치하며, 하늘나라의 깨우친 아들들에게 어울리지 않느니라.

149:6.11 (1676.5)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온유하고 사람들 앞에서 자제하는 것이 좋으니라. 그러나 온유함이 영적 기원으로부터 나오게 하고, 혼자만 옳다는 우월감을 자각하는, 스스로 속이는 표현이 되게 하지 말라. 선지자가 ‘하나님과 함께 겸손히 걸으라’하였을 때 지혜롭게 말하였으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무한자요 영원자이기는 하여도 또한 ‘뉘우치는 정신과 겸손한 영과 더불어’ 거하심이라. 내 아버지는 자만을 멸시하고 위선을 몹시 싫어하며 불의를 언짢아하시니라. 성실의 가치를 강조하고 하늘 아버지가 사랑으로 지원하고 충실히 안내함을 완전히 의지할 것을 강조하려고, 생각하는 태도와 영의 반응을 보여주는 예로서 어린아이를 내가 무척 자주 언급하였으니, 그런 태도와 반응이 필사 인간이 하늘나라의 영적 실체로 들어가는 데 아주 필요하니라.

149:6.12 (1677.1) “‘너희가 입으로는 하나님께 가까이 있어도 마음 속에서는 멀도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했을 때 숱한 사람을 잘도 묘사하였느니라. ‘거기 있는 사제들은 보수를 받고 가르치며, 거기 있는 선지자들은 돈을 받고 점을 치는도다. 동시에 저희는 경건함을 고백하고, 주가 저희와 함께 있다고 선포하는도다’ 하고 이른 선지자의 끔찍한 경고를 너희는 또한 읽지 아니하였느냐. ‘마음 속에 해악이 있으면서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는’ 자, ‘입으로는 칭찬하나 마음에 두 생각을 품는’ 자에 대하여 너희는 좋이 경고를 받지 아니하였느냐? 사람을 믿는 자의 모든 슬픔 가운데, ‘믿었던 친구의 집에서 상처를 받는’ 것만큼 끔찍한 일이 없느니라.”

7. 벳세다로 돌아가다

149:7.1 (1677.2) 시몬 베드로와 상의하고 예수의 승인을 얻어서, 안드레는 벳세다에 있는 다윗에게, 여행을 마치고 12월 30일 목요일 아무 때나 벳세다로 돌아오라는 지시를 주어 사자들을 여러 전도 집단에게 보내라고 지시했다. 비가 오는 그날 저녁때가 되자, 사도 일행을 비롯하여 가르치는 전도사들은 모두 세베대의 집에 도착했다.

149:7.2 (1677.3) 그 일행은 안식일에 함께 남아 있었고, 벳세다의 여러 집과 근처 가버나움에서 묵었다. 그 뒤에 일행 전부가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거나, 친구들을 찾아보거나, 물고기를 잡으러 가도록 2주 동안 휴가를 얻었다. 함께 벳세다에서 지낸 이삼일은 정말로 상쾌하고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고참(古參) 선생들조차 새 전도사들이 자기 체험을 이야기할 때 교훈을 얻었다.

149:7.3 (1677.4) 이 둘째 갈릴리 전도 여행에 참여한 전도사 117명 가운데 오직 약 75명이 실제로 체험하는 시험을 견디었고, 2주 동안의 휴가를 마치고 봉사에 배치되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안드레ㆍ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과 함께, 예수는 세베대의 집에 남아 있었고, 하늘나라의 복지와 확장에 관하여 회의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제 150 편 세 번째 전도 여행

유란시아서

제 150 편

세 번째 전도 여행

150:0.1 (1678.1) 서기 29년 1월 16일 일요일에, 아브너는 요한의 사도들과 함께 벳세다에 이르렀고, 이튿날 안드레, 그리고 예수의 사도들과 함께 합동 회의에 들어갔다. 아브너와 그 동료들은 본부를 헤브론에 두었고, 이 회의에 참석하려고 정기적으로 벳세다로 올라오는 버릇이 있었다.

150:0.2 (1678.2) 이 합동 회의에서 여러 문제 중에, 병 고치기 위한 기도와 관련하여 어떤 형태의 기름을 병자들에게 바르는 관습을 고려하였다. 다시 예수는 토론에 참여하거나 그들의 결론에 관하여 자기 의사(意思)를 밝히려 하지 않았다. 요한의 사도들은 병자와 고통받는 자를 보살피면서 바르는 기름을 언제나 썼고 이것을 두 집단의 통일된 관습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예수의 사도들은 그러한 규칙에 묶이려 하지 않았다.

150:0.3 (1678.3) 1월 18일 화요일에, 세 번째 갈릴리 전도 여행에 파송되기 위한 준비로, 벳세다의 세베대 집에서 스물네 사람과 단련된 전도사 약 75명이 합세하였다. 이 셋째 사명은 7주 동안 이어졌다.

150:0.4 (1678.4) 전도사들은 다섯 명씩 무리를 지어 파송되었고, 한편 예수와 열두 사도는 거의 항상 함께 여행하였다. 사도들은 경우가 닿는 대로 둘씩 짝지어 나가서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거의 3주 동안 아브너와 그 동료들도 전도사 집단과 함께 일했고, 그들에게 조언하고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들은 막달라ㆍ티베리아스ㆍ나사렛, 그리고 갈릴리 중부와 남부의 모든 주요한 도시와 마을, 즉 이전에 방문했던 모든 곳과 다른 여러 군데를 찾아보았다. 이것은 북쪽 지역을 빼고, 갈릴리에서 마지막 전도였다.

1. 여전도단

150:1.1 (1678.5) 땅에서 산 생애와 관련하여 예수가 행한 대담한 모든 일 가운데, 1월 16일 저녁에 갑작스런 선언이 가장 놀라운 일이었다: “내일 우리는 하늘나라에 봉사하는 일을 위하여 여인 열 명을 따로 세우리라.” 사도와 전도사들이 휴가를 얻어 벳세다에서 자리를 비울 2주 기간이 시작되자, 다윗에게 예수는 자신의 부모를 집으로 부르라, 그리고 이전에 야영지와 텐트 병원에서 행정 사무에 수고했던 경건한 여인 10명을 벳세다로 부르려고 사자들을 보내라고 요청했다. 젊은 전도사들에게 준 지침을 이 여인들 모두가 들었지만, 그들이나 그 선생들에게나, 예수가 하늘나라 복음을 가르치고 아픈 사람들을 보살피라고 감히 여자들을 세우리라는 생각이 결코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예수가 선택하고 임명한 이 여자 10명은 다음과 같다: 수잔나는 나사렛 회당의 옛 하잔의 딸이요, 요안나는 헤롯 안티파스의 집사 추자의 아내요, 엘리자벳은 티베리아스와 세포리스의 어느 부유한 유대인의 딸이며, 마르다는 안드레와 베드로의 누나요, 라헬은 육체로 주의 아우 유다의 처제요, 나산타는 시리아인 의사 엘만의 딸이요, 밀가는 사도 토마스의 사촌이요, 룻은 마태 레위의 맏딸이며, 켈타는 로마인 백부장의 딸이요, 아가만은 다마스커스의 과부였다. 나중에 예수는 이 무리에 다른 두 여자―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의 딸 레베카―를 더했다.

150:1.2 (1679.1) 예수는 이 여인들에게 자체 조직을 만들라고 인가하고서, 장비와 짐 싣는 짐승을 살 돈을 마련해 주라고 유다에게 지시했다. 열 사람은 수잔나를 단장(團長)으로, 요안나를 회계로 뽑았다. 이때부터 계속 그들은 자체의 기금을 마련하였고 결코 다시 지원을 받으려고 유다로부터 돈을 인출하지 않았다.

150:1.3 (1679.2) 여자들이 (여인의 회랑에 국한되어) 회당 1층에도 허락되지 않던 그 시절에, 하늘나라의 새 복음을 가르치도록 허가받은 선생으로 인정됨을 보는 것은 무척 놀라운 일이었다. 예수가 열 여인을 복음을 가르치고 봉사하라고 따로 구별했을 때, 그가 이 여인들에게 책임지는 선서(宣誓)를 시킨 것은 모든 여자를 앞으로 영원히 자유롭게 만든 해방 선언이었다. 남자는 이제 더 여자를 영적으로 열등한 사람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되었다. 이것은 열두 사도에게도 명백한 충격이었다. “하늘나라에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고 자유로운 자도 매인 자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도 없고 모두가 똑같이 하나님의 아들딸이라” 주가 말씀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는데도, 예수가 이 열 여인을 종교 선생으로 임명하고 그들과 함께 여기저기 여행하라고 허락하는 것까지 정식(正式)으로 제안했을 때, 그들은 글자 그대로 깜짝 놀랐다. 전국이 이 조치에 떠들썩하였고 예수의 적들은 이 움직임을 크게 이용했다. 그러나 어디서나 좋은 소식을 믿는 여자들은 선택받은 누이들을 굳게 지지했고, 종교적인 일에서 여자의 자리를 이렇게 늦게나마 인정한 것에 대하여 분명한 지지(支持)를 표현했다. 주가 떠난 바로 뒤에는 여자를 마땅히 인정하면서 사도들이 이렇게 여자의 해방을 실천하였다. 하지만 그 뒤 세대에 사람들은 옛 관습으로 돌아갔다. 기독교 교회의 초기를 통해서 내내, 여자 선생과 봉사자들을 여집사로 불렀고 이들은 널리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바울이 이론으로는 이 모두를 인정한 것이 사실인데도, 결코 자신의 태도에 정말로 이를 적용하지 않았고, 이를 실천하기가 어려움을 몸소 발견했다.

2. 막달라에서 멈추어

150:2.1 (1679.3) 사도 일행이 벳세다로부터 길을 떠나자, 여자들은 뒤에서 여행했다. 회의 시간에 그들은 언제나 앞자리에, 연사(演士)의 바른쪽에 무리를 지어 앉았다. 갈수록 더 여자들이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 그들이 예수나 사도들 중 하나와 개인적으로 이야기하기를 바랐을 때, 이것은 많은 어려움의 근원이었고 난처한 일이 그치지 않았다. 이제 이 모두가 달라졌다. 여신도 가운데 누구라도 주를 만나거나 사도들과 의논하고 싶었을 때는 수잔나에게 갔고, 열두 여전도사 가운데 한 사람을 동반하여, 당장에 주나 사도들 중 한 사람 앞으로 가곤 하였다.

150:2.2 (1680.1) 막달라에서 여자들이 처음으로 쓸모 있음을 보여주었고 그들을 택한 것이 지혜로웠음을 입증했다. 안드레는 전에 여자들, 특히 인품이 의심스러운 사람들과 함께 개인적으로 일하는 것에 대하여 동료들에게 오히려 엄격한 규칙을 부과했다. 그 일행이 막달라에 들어갔을 때, 이 여전도사 열 명은 나쁜 유흥지로 마음대로 들어가서 기쁜 소식을 모든 동료에게 직접 전파했다. 병자들을 찾아볼 때, 이 여자들은 봉사를 베풀면서 병든 형제들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이곳에서 이 여인 열 명이 봉사를 베푼 결과로, 막달라 마리아가 하늘나라에 들어오도록 설득되었다. (이들은 나중에 열두 여자로 알려졌다.) 연달아 불행이 겹치고, 그렇게 판단을 잘못 내린 여자들에 대하여 존경받는 사회가 취한 태도의 결과로, 이 여자는 막달라의 못된 유흥지 가운데 하나에 굴러떨어졌다. 마르다와 라헬이 마리아에게, 그 여자 같은 사람에게도 하늘나라의 문이 열려 있다고 설명했다. 마리아는 좋은 소식을 믿었고 이튿날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150:2.3 (1680.2) 막달라 마리아는 이 열두 전도사 무리에서 가장 유능한 복음 선생이 되었다. 새로 전향하고 나서 약 4주 뒤에 요타파타에서 레베카와 함께, 그렇게 봉사하도록 따로 구별되었다. 마리아와 레베카는 이 집단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수가 땅에서 사신 여생을 통해서 일을 계속했고, 짓밟힌 형제들을 깨우치고 격려하기 위하여 충실하고 유능하게 수고했다. 예수 일생의 드라마에서 마지막 비극의 사건이 연출되고 있을 때, 한 사람만 제외하고 사도들이 모두 달아났는데도 이 여인들은 모두 자리에 있었고 한 사람도 그를 부인(否認)하거나 저버리지 않았다.

3. 티베리아스에서 지낸 안식일

150:3.1 (1680.3) 사도 일행의 안식일 예배는 예수의 지시를 받고 나서 안드레가 여자들의 손에 맡겼다. 물론, 이것은 예배가 새 회당에서 진행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여자들은 이 행사의 책임을 맡으라고 요안나를 뽑았다. 그 모임은 헤롯의 새 궁전 연회실에서 열렸는데, 헤롯은 페레아의 줄리아에서 거주하느라고 떠나 있었다. 요안나는 이스라엘의 종교 생활에서 여자가 한 일에 관하여 성서를 읽었고 미리암과 데보라와 에스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언급했다.

150:3.2 (1680.4) 그날 저녁 늦게 예수는 그 연합된 집단에게 “마술과 미신”에 관하여 기억에 남을 말씀을 하였다. 그 시절에, 새 별이라고 생각되는 밝은 별이 나타나는 것은 위대한 사람이 땅에 태어난 것을 가리키는 징조로 여겼다. 그러한 별이 그때 최근에 관측되었기 때문에, 안드레는 예수에게 이러한 믿음에 타당한 근거가 있는가 물었다. 안드레의 물음에 길게 대답하면서, 주는 인간의 미신(迷信)이라는 주제 전체에 관하여 철저한 논의에 들어갔다. 이때 예수가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이 현대의 표현으로 간추려도 좋다:

150:3.3 (1680.5) 1. 하늘에서 별들의 운행은 땅에서 인간 생활의 사건과 아무 관계가 없다. 천문학은 적절한 과학적 연구이지만, 점성술은 하늘나라 복음에서 아무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미신의 오류 덩어리이다.

150:3.4 (1680.6) 2. 갓 죽인 동물의 내장(內臟)을 살피는 것은 날씨나 앞날의 사건이나 인간사의 결과에 관하여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다.

150:3.5 (1680.7) 3. 죽은 자의 영은 살아 있는 자 사이에, 가족이나 한 때 친구였던 자와 교통하려고 돌아오지 않는다.

150:3.6 (1681.1) 4. 부적과 유물(遺物)은 병을 고치거나 재난을 막거나 악령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영적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그러한 물질적 방법을 믿는 것은 터무니없는 미신일 뿐이다.

150:3.7 (1681.2) 5. 제비 뽑기는 많은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는 편리한 방법일지 모르지만, 신의 뜻을 드러내도록 고안된 방법이 아니다. 그러한 결과는 순전히 물질적으로 우연히 일어나는 문제이다. 영적 세계와 교통하는 유일한 수단은, 아들이 쏟아 부은 영과 무한한 영의 두루 계시는 영향과 더불어, 인류의 영 재산, 곧 아버지의 깃드는 영 속에 담겨 있다.

150:3.8 (1681.3) 6. 점치기ㆍ요술ㆍ마법은, 마술의 미혹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자들이 믿는 미신이다. 마술 숫자, 행운의 전조(前兆), 불운을 알리는 전령을 믿는 것은 순전하고 근거 없는 미신이다.

150:3.9 (1681.4) 7. 꿈의 풀이는 대체로 미신이고 근거 없는 방식, 무지하고 환상적 추측 방식이다. 하늘나라의 복음은 원시 종교의 점치는 사제들과 아무 공통점이 없다.

150:3.10 (1681.5) 8. 착한 영이나 악한 영은 진흙이나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물질적 상징 안에 거할 수 없다. 우상은 그 자체를 만든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150:3.11 (1681.6) 9. 주문 외는 자, 요술사ㆍ마술사ㆍ마법사의 관습은 에집트인과 아씨리아인, 바빌로니아인과 고대 가나안 사람들의 미신으로부터 유래되었다. 부적과 온갖 종류의 주문(呪文)은 착한 영들의 보호를 얻거나 악한 영이라고 생각된 것들을 막는 데 쓸모가 없다.

150:3.12 (1681.7) 10. 그는 주문, 죄를 시험하는 단련, 마술 걸기, 저주, 상징, 만드레이크[1] [16], 매듭진 끈, 그리고 무지하고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온갖 다른 형태의 미신을 믿는 신앙을 폭로하고 비난했다.

4. 사도들을 둘씩 보내다

150:4.1 (1681.8) 다음 날 저녁, 열두 사도, 요한의 사도들, 그리고 새로 임명한 여인 집단을 한데 모으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수확이 풍부하나 일꾼이 적은 것을 바로 너희가 보느니라. 그러므로 수확하시는 주께 들로 더욱 많은 일꾼을 보내달라고 우리 모두 기도하자. 내가 남아서 새로 된 선생들을 위로하고 가르치는 동안, 아직 형편이 좋고 평화로운 동안에 하늘나라 복음을 전도하면서 온 갈릴리를 빨리 지나가도록, 먼저 된 자들을 둘씩 보내고자 하노라.” 그리고 나서 그가 떠나 보내기를 원한 대로 사도들의 쌍을 정해 주었는데, 다음과 같다: 안드레와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 세베대, 빌립과 나다니엘, 토마스와 마태, 야고보와 유다 알패오, 열심당원 시몬과 가룟 유다였다.

150:4.2 (1681.9) 예수는 나사렛에서 열두 사도를 만나는 날을 정했고, 떠나면서 말했다: “이 임무에는 어떤 이방인 도시에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에도 가지 말라. 그러나 대신에 이스라엘의 집에서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하늘나라 복음을 전도하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유익한 진리를 선포하라. 제자는 도저히 선생보다 낫지 않고, 종이 주인보다 크지 않음을 기억하라. 제자가 선생과 대등하고 종이 주인과 같이 되는 것으로 넉넉하니라. 어떤 사람들이 집주인을 비엘세붑의 친구라고 감히 불렀다면, 그 집안 사람들을 그보다 얼마나 더 나쁘게 여기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이 믿지 않는 적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밝히 드러내지 않으려고 감춘 것이 하나도 없고, 알리지 않으려고 숨긴 것이 하나도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몸소 가르친 것을 터놓고 지혜롭게 전도하라. 안방에서 너희에게 드러낸 것을 때가 되면 너희가 집 꼭대기에서 선포해야 하느니라. 친구와 제자들아, 너희에게 이르노니, 몸을 죽일 수 있어도 혼을 죽일 수 없는 자를 두려워 말라. 차라리 몸을 지탱하고 혼을 구할 수 있는 분을 너희가 신뢰하라.

150:4.3 (1682.1) “참새 두 마리가 동전 한 잎에 팔리지 아니하느냐? 그래도 내가 선언하노니,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눈앞에서 잊혀지지 않느니라. 너희 머리에 바로 그 털조차 센 것을 모르느냐? 그러므로 두려워 말라, 너희는 허다한 참새보다 더 귀중하니라. 내 가르침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 가서 평화와 선의를 선포하라, 그러나 속지 말라―평화가 반드시 너희의 전도(傳道)를 따르지는 아니하리라. 나는 땅에 평화를 주려고 왔어도 사람들이 내 선물을 물리칠 때, 분열과 소동이 따르느니라. 한 집안에서 모두가 하늘나라 복음을 받아들일 때 참으로 평화가 그 집에 머물러도, 집안에서 더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더러는 복음을 물리칠 때 그러한 분열은 오직 슬픔과 불행을 낳을 수 있느니라. 사람의 적이 집안에 있는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집안 전체를 구하려고 열심히 수고하라. 그러나 각 집안의 모든 사람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나서, 너희에게 선포하노니, 이 복음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느니라.”

150:4.4 (1682.2) 열두 사도는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떠나려고 준비했다. 그들은 주가 주선한 대로 예수와 다른 제자들과 만나려고 나사렛에서 모일 때까지 다시 함께 모이지 않았다.

5. 구원을 받으려고 무엇을 해야 하나이까?

150:5.1 (1682.3) 요한의 사도들이 헤브론으로 돌아간 뒤, 그리고 예수의 사도들이 둘씩 파송된 뒤에, 슈넴에서 어느 날 저녁, 주가 야곱의 지휘 하에서 수고하고 있던 새 전도사 열두 명의 무리를 가르치느라고 몰두해 있을 때, 라헬은 열두 여인과 함께, 예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주여, ‘구원을 받으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리이까’ 하고 여자들이 물으면 우리가 어떻게 대답하리이까?” 이 물음을 듣자, 예수는 대답했다:

150:5.2 (1682.4) “남자와 여자들이 구원받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물을 때, 너희는 대답할지어다. 이 하늘나라 복음을 믿고, 신의 용서를 받아들이라. 하나님의 영이 깃드심을 믿음으로 인식할지니, 그 영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느니라. 너희는 성서를 읽지 아니하였느냐. 거기에는 쓰였으되, ‘주 안에서 내가 올바름과 힘을 가졌노라.’ 거기에 또한 아버지가 이르시되 ‘나의 올바름이 가까웠도다, 나의 구원이 떠나갔고 내 팔이 내 민족을 감싸리라.’ ‘내 혼이 하나님의 사랑 속에 기뻐하리니,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나를 입히고 올바름의 예복으로 나를 덮으셨음이라.’ 너희는 또한 아버지에 관하여, 그의 이름을 ‘우리의 올바른 주라 부를지니라’ ‘독선(獨善)의 더러운 누더기를 버리고 신다운 올바름과 영원한 구원의 예복으로 내 아들을 입히라’한 것을 읽지 아니하였느냐. 이것이 언제까지나 참이라, ‘옳은 자는 믿음으로 살리라.’ 아버지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은 모두 거저이나, 그 안에서 계속하는 데는 진보가―은혜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필수이라.

150:5.3 (1682.5) “구원은 아버지의 선물이요, 아들들이 구원을 드러내느니라. 네 편에서 믿음으로 받아들임은 너를 신다운 성품을 같이 하는 자, 하나님의 아들이나 딸로 만드느니라. 너희는 믿음으로 옳게 되고 믿음으로 구원받으며 바로 이 믿음으로 진보하고 신다운 완전에 이르는 길로 영원히 올라가느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옳게 여김을 받았고, 멜기세덱의 가르침으로 구원받았음을 깨달았더라. 오랜 세월을 통해서 내내, 바로 이 믿음이 사람의 아들들을 구하였으나 구원을 더욱 현실로, 받아들이기 쉽게 만들려고 이제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다가왔느니라.”

150:5.4 (1683.1) 예수가 말씀을 멈추었을 때, 이 은혜로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고, 뒤이은 여러 날 동안 모두가 새 힘과 되찾은 에너지와 열심을 가지고 하늘나라 복음을 줄곧 선포하였다. 여자들은 땅에서 하늘나라를 세우는 이 계획에 여자들이 포함되었음을 알고 더군다나 기뻐했다.

150:5.5 (1683.2) 마지막 말씀을 요약하면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없느니라. 수고한다고 올바름을 벌어들일 수 없느니라.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올바름은 하늘나라에서 아들 신분의 생명, 영에게서 태어난 생명이 맺는 자연스러운 열매이라. 너희가 올바른 인생을 산다고 해서 구원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아들 신분을 하나님의 선물로,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봉사함을 땅에서 일생에 최고의 기쁨으로 여겼으므로 너희가 올바른 인생을 사는 것이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이 복음을 믿을 때, 저희는 사람이 아는 모든 죄를 스스로 뉘우치게 되리라. 아들임을 깨닫는 것은 죄를 저지르려는 욕구와 모순되며, 하늘나라를 믿는 자는 올바름을 간절히 바라고 신의 완전함을 목마르게 찾느니라.”

6. 저녁 수업

150:6.1 (1683.3) 저녁 토론 시간에 예수는 많은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이 남은 여행을 마치는 동안에―모두 나사렛에서 다시 모이기 전에―“하나님의 사랑,” “꿈과 환상,” “악의,” “겸손과 온유,” “용기와 충성,” “음악과 예배,” “봉사와 복종,” “자만과 주제넘기,” “용서와 뉘우침의 관계,” “평화와 완전,” “악하게 말하기와 질투,” “악과 죄와 유혹,” “의심과 불신,” “지혜와 예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고참 사도들이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이 새 집단의 남녀들은 주와 함께 더 거리낌없이 이 토론에 들어갔다.

150:6.2 (1683.4) 한 무리의 열두 전도사와 이삼일 보낸 뒤에 예수는 자리를 떠서 또 다른 무리에 합세하곤 하였고, 다윗의 사자들로부터 이 모든 일꾼이 있는 곳과 그 움직임에 대하여 통지를 받았다. 이것이 처음 여행이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예수와 함께 남아서 보냈다. 사자의 봉사를 통해서 이 집단들은 저마다 여행의 진전에 관하여 충분히 통지받았고, 다른 집단으로부터 소식을 듣는 것은 흩어지고 따로 떨어진 이 일꾼들에게 언제나 용기를 북돋아주는 근원이었다.

150:6.3 (1683.5) 흩어지기 전에, 열두 사도는 전도사들과 여인단과 더불어, 3월 4일 금요일에 주를 만나려고 나사렛에서 모이기로 미리 주선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무렵에, 중부 및 남부 갈릴리의 모든 지방으로부터 이 여러 집단의 사도와 전도사들이 나사렛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후 중반이 되어서, 마지막으로 온 안드레와 베드로는 그 도시의 북쪽, 고지(高地)에 자리잡은 야영지에 이르렀고, 일찍 도착한 사람들이 야영지를 준비하였다. 대중 봉사를 시작한 뒤로 이번에 처음으로 예수는 나사렛을 방문했다.

7. 나사렛에서 머무르다

150:7.1 (1683.6) 이 금요일 오후에 예수는 사람들 눈에 아주 띄지 않고 전혀 알아보지 못하게 나사렛 주위를 걸어다녔다. 어릴 때 살던 집과 목수 작업장을 지나쳤고, 소년이었을때 무척 즐기던 언덕에서 반 시간을 보냈다.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받은 날 이후로, 사람의 아들은 혼 속에서 그러한 인간적 감정의 큰 물결이 이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나사렛에서 자라는 소년이었을 때 아주 여러 번 들은 것과 똑같이, 귀에 익은 소리, 해가 지는 것을 알리는 트럼펫 부는 소리를 들었다. 야영지로 돌아가기 전에, 공부하러 다니던 회당 옆으로 걸어서 내려갔고, 머리 속에서 소년 시절의 여러 가지를 회상하는 데 빠졌다. 그날 일찍, 안식일 아침 예배에 그가 설교하도록 회당장과 주선하라고 토마스를 미리 보냈다.

150:7.2 (1684.1) 나사렛 사람들은 경건하고 올바르게 사는 것으로 소문난 적이 없었다. 세월이 지나자, 이 마을은 근처 세포리스의 낮은 도덕 수준에 더욱 오염되었다. 예수의 어릴 때와 청년기를 통해서, 나사렛에서는 그에 대하여 의견이 갈라져 있었다. 가버나움으로 이사갔을 때, 사람들은 무척 분개했다. 나사렛의 주민들은 옛 목수가 한 일에 관하여 익히 소문을 듣기는 했어도, 초기 전도 여행 중 어디에도 그의 잔뼈가 굵었던 마을을 넣지 않은 것에 감정이 상했다. 정말로 그들은 예수의 명성을 들었지만, 대다수의 시민은 그가 어릴 때 자란 도시에서 대단한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 나 있었다. 여러 달 동안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에 대하여 많이 떠들었지만 그에 대한 의견은 대체로 좋지 않았다.

150:7.3 (1684.2) 이렇게 사람들이 반가이 맞아주는 귀향이 아니라 뚜렷이 적대시하고 지나치게 비판하는 분위기 한가운데에 주는 자신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나사렛에서 이 안식일을 보낼 것을 알고 회당에서 그가 말씀할 것을 짐작하고서, 적들은 그를 괴롭히고 가능한 모든 면에 소동을 일으키려고 거칠고 천한 수많은 사람을 고용했다.

150:7.4 (1684.3) 예수의 옛 친구들의 대부분은, 어릴 때 그에게 쏙 빠졌던 하잔[2] [17] 선생을 포함하여 죽었거나 이미 나사렛을 떠났고, 젊은 세대는 심한 질투로 그의 명성을 분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그가 예전에 아버지의 가족에게 헌신했던 것을 기억하지 못했고, 나사렛에서 살고 있는 동생과 시집간 누이들 찾아보기를 소홀히 하였다고 지독하게 비난하였다. 예수의 집안이 그에게 취하는 태도도 또한 시민의 불친절한 느낌을 부채질하는 경향이 있었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예수가 이 안식일 아침에 회당으로 가는 길에 너무 빨리 걸었다고 해서 주제넘게 헐뜯기까지 했다.

8. 안식일 예배

150:8.1 (1684.4) 이 안식일은 화창한 날이었고, 온 나사렛, 친구와 적들이 마을의 이 옛 시민이 회당에서 하는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사도 수행원들 가운데 여럿이 회당 바깥에 남아 있어야 했다. 말씀을 들으려고 온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리가 없었다. 젊은이로서 예수는 이 예배 장소에서 가끔 말씀하였고, 이날 아침에 회당장이 성서 교훈을 읽으라고 신성한 기록이 적힌 두루마리를 넘겨주었을 때, 이것이 이 회당에 그가 드린 바로 그 사본(寫本)이라는 것을 거기 있던 사람들 중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였다.

150:8.2 (1684.5) 이날의 예배는 예수가 소년으로 참석했을 때와 똑같이 진행되었다. 그는 회당장과 함께 연단에 올라갔고, 예배는 두 기도문을 낭독함으로 시작되었다: “주는 복되시니 그는 세상의 임금이요, 빛을 짓고 어둠을 창조하며 평화를 주고 만물을 지으시도다. 그는 자비롭게 땅과 거기에 사는 자들에게 빛을 주시며, 선하여 하루하루, 날마다 창조하신 작품을 새롭게 하시도다. 그의 영화로운 솜씨 때문에, 그리고 그를 찬미하라고 만드신 빛, 밝게 비치는 그 빛 때문에 주, 우리의 하나님은 복되도다. 셀라. 주, 우리 하나님은 복되시니, 빛을 지으셨도다.”

150:8.3 (1685.1) 한 순간 멈춘 뒤에 그들은 다시 기도했다: “큰 사랑으로 주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 아버지여, 우리 임금이여, 그를 신뢰한 우리 조상을 위하여, 넘쳐흐르는 동정심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도다. 주는 저희에게 생명의 규율을 가르치셨으니,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고 우리를 가르치소서. 우리의 눈을 밝혀 율법을 보게 하소서. 우리의 마음이 주의 계명에 충실하게 하소서. 주의 이름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만드소서. 그리하면 영원토록 우리가 부끄럽게 되지 아니하리이다. 주는 구원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요, 모든 민족과 국민 가운데서 우리를 고르셨고, 주가 하나임을 우리가 사랑으로 찬미하도록 주의 크신 이름―셀라―가까이에 진실로 우리를 데려오셨나이다. 주는 복되시며 사랑으로 그의 민족 이스라엘을 택하셨도다.”

150:8.4 (1685.2) 그리고 나서 회중은 쉬마, 즉 유대인의 신조를 낭독했다. 이 의식은 율법의 수많은 구절을 되풀이하는 것이요, 예배하는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멍에, 또한 밤과 낮에 적용되는 여러 계명의 멍에를 스스로 지는 것을 가리켰다.

150:8.5 (1685.3) 다음에 셋째 기도가 이어졌다: “주는 야웨, 우리의 하나님이요 조상의 하나님인 것이 참이나이다. 우리의 임금, 우리 조상의 임금이며, 우리의 구원자 우리 조상의 구원자요, 우리의 창조자, 우리를 구원하는 바위요, 우리의 도움, 우리의 구원자이로다. 주의 이름은 영원부터 계시고 주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도다. 구원받은 자들이 바닷가에서 주의 이름에 맞춰 새 노래를 부르나이다. 모두가 함께 찬미하고 주를 임금으로 인정하며 말하도다, 야웨가 영원토록 군림하리라. 이스라엘을 구하시는 주는 복되도다.”

150:8.6 (1685.4) 그리고 나서 회당장은 신성한 기록들이 들은 궤, 곧 상자 앞에 자리를 차지했고, 열 아홉 가지 축복의 기도, 곧 축도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귀빈에게 강론할 시간을 더 주도록 예배를 짧게 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따라서 축복의 처음과 마지막 구절만 낭독하였다. 이것이 처음 구절이었다: “주 우리의 하나님이여, 우리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ㆍ이삭ㆍ야곱의 하나님은 복되도다. 크고 막강하고 두려운 하나님, 자비와 친절을 보이고 만물을 지으시며, 조상에게 하신 은혜로운 약속을 기억하고,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사랑으로 저희 후손의 후손에게 구원자를 불러오시도다. 아 임금, 도와 주는 자, 구원자여, 방패여! 아 주 야웨여, 아브라함의 방패는 복되도다!”

150:8.7 (1685.5) 다음에 마지막 축복이 따랐다. “주는 임금이요 모든 평화의 주인이니, 아 주의 민족 이스라엘에게 큰 평화를 언제까지나 내리소서. 항상 어느 때라도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내리심이 주의 눈에 보기 좋사옵나이다. 주 야웨는 복되시니, 그의 민족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내리시나이다.” 회당장이 축도를 낭독할 때 회중은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축도가 끝난 뒤에 그 경우에 적당한 비공식 기도를 드렸고 이것이 끝나자 모든 회중이 합쳐서 아멘 하였다.

150:8.8 (1685.6) 그리고 나서 하잔은 궤로 다가가서 한 두루마리를 꺼냈고, 성서 교훈을 읽으라고 예수에게 내밀었다. 일곱 사람을 불러서 율법(律法)에서 적어도 세 구절을 읽게 하는 것이 관습이었지만, 방문객이 자신이 선택한 교훈을 읽도록 이 경우에 이 관습이 보류되었다. 예수는 두루마리를 받고서, 일어서서 신명기에서 읽기 시작했다: “오늘날 내가 너희에게 주는 이 계명을 너희에게 감추지 않았고 이것이 멀리 있지도 않음이라. 그 계명이 하늘에 있어,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행하도록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서 가져올까? 하고 너희가 말하지 못하느니라. 계명이 바다 건너에 있어,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실천하도록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서 그 계명을 가져올까? 하고 너희가 말하지도 못하느니라. 아니라, 네가 생명의 말씀을 알고 그에 복종하도록 그 말씀은 너에게 무척 가까이, 아니 네가 있는 앞과 네 마음 속에도 있느니라.”

150:8.9 (1686.1) 그리고 율법에서 읽기를 그쳤을 때, 그는 이사야로 눈을 돌려 읽기 시작했다: “주의 영이 내게 가까이 오시니, 가난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라고 내게 기름을 부으셨음이라. 포로가 된 자에게 해방을, 눈먼 자에게 눈이 다시 보임을 선포하며, 다친 자를 놓아 주고, 주의 마음에 들 해를 선포하라고 나를 보내셨도다.”

150:8.10 (1686.2) 책을 덮고, 회당장에게 책을 넘겨 준 뒤에, 예수는 앉아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했다: “오늘 이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졌도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거의 15분 동안 “하나님의 아들딸”에 대하여 말씀하였다. 많은 사람이 그 말씀을 기뻐했고 그의 품위와 지혜에 감탄했다.

150:8.11 (1686.3) 정식 예배가 끝난 뒤에, 관심이 있을까 싶은 사람들이 질문할 수 있도록 연사가 남아 있는 것이 회당의 관습이었다. 따라서 이 안식일 아침에 예수는 질문을 던지려고 앞으로 밀어닥치는 군중 속으로 걸어 내려왔다. 이 무리에는 그를 해치려고 굳게 작정한 사나운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한편 이 군중의 가장자리 근처에는 예수에게 문제를 일으키려고 고용된 저질의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바깥에서 남아 있던 많은 제자와 전도사가 이제 회당으로 밀고 들어갔고, 문제가 터지려 하는 것을 눈치 채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주를 멀리 이끌려고 애썼지만, 주는 함께 가려 하지 않았다.

9. 나사렛의 거부

150:9.1 (1686.4) 예수는 회당에서 큰 무리의 적들과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둘러싸여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무례한 물음과 심술궂은 농담에 응답하여 반은 유머로 대답했다: “옳도다, 나는 요셉의 아들이라. 나는 목수요, 너희가 나로 하여금 ‘의사여, 자신을 고치라’하는 속담을 생각나게 하느니라. 너희가 듣던 바와 같이 내가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나사렛에서 하라고 도전하는 데 놀라지 않노라. 그러나 ‘선지자가 제 나라와 제 민족 바깥에서는 명예가 없지 않도다’ 성서도 선언하는 것을 너희가 증언하라고 요청하노라.”

150:9.2 (1686.5)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떠밀고 비난하는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너는 나사렛의 사람들보다 네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구나. 너는 우리를 떠났어도 네 동생은 평범한 일꾼이요, 네 누이들은 아직도 우리 사이에 사느니라. 우리는 네 어머니 마리아를 아노라. 오늘날 저희가 어디 있느냐? 너에 관하여 우리는 큰 소문을 들으나 우리가 보아하니, 네가 돌아와서 아무 기적도 행하지 않는구나.” 예수는 대답했다: “내가 자랐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내가 사랑하고 너희가 모두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것 보기를 내가 기뻐하겠으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라. 은혜로 생기는 변화는 받는 자의 살아 있는 믿음에 반응하여 일어나느니라.”

150:9.3 (1686.6) 자신의 사도들 중 한 사람, 열심당원 시몬이 전략의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예수는 군중을 기분 좋게 다루고 사나운 적들도 효과적으로 가라앉혔을 것이다. 시몬은 새로 된 전도사들 가운데 한 사람 나홀의 도움을 얻어서, 군중 가운데서 예수의 친구들 한 집단을 그동안에 모았고, 호전적 자세를 취하면서 주의 적들에게 떠나라고 주의를 주었다. 부드러운 대답이 진노를 거둔다고 예수가 사도들에게 오래 가르쳤지만, 추종자들은 사랑하는 선생, 마음에 우러나서 주라고 부르는 분이, 그렇게 무례하고 멸시하는 대접을 받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이것은 너무 지나쳤다. 그들은 뜨겁고 맹렬하게 분개하는 말을 하게 되었다. 이 모두가 사악하고 거친 회중 가운데서 폭도의 분위기를 건드리는 방향으로 가기만 했다. 그래서 돈 받은 건달들의 지휘 하에, 이 깡패들은 예수를 붙잡고 회당 바깥으로, 근처의 가파른 산 벼랑까지 몰아세웠고, 거기서 벼랑 끝을 지나 밑으로 떨어져 죽으라고 밀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바야흐로 벼랑 끝으로 밀려고 했을 때, 예수는 붙잡은 자들에게 갑자기 돌아서서, 마주보고 조용히 팔짱을 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앞으로 걷기 시작하자, 폭도들은 갈라졌고 손대지 않고 지나가도록 버려두었을 때, 친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50:9.4 (1687.1) 제자들의 수행을 받으며 예수는 야영지로 진행했다. 거기서 사람들이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예수가 지시한 대로, 이튿날 일찍 가버나움으로 돌아가려고 그날 저녁에 준비했다. 셋째 대중 전도가 이렇게 시끄럽게 끝난 것은 예수의 모든 추종자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효과를 가졌다. 주의 어떤 가르침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많은 슬픔과 쓰라린 실망을 통해야 하늘나라가 오리라는 사실에 눈을 뜨고 있었다.

150:9.5 (1687.2) 그들은 이 일요일 아침에 나사렛을 떠났고, 다른 길로 여행하면서, 3월 10일 목요일 한낮이 되어서, 모두가 마침내 벳세다에 모였다. 열심이 있고 만사를 정복하는 한 떼의 승리한 십자군이 아니라, 제 정신이 들고 심각한 무리, 꿈에서 깨어난 진리 복음의 전도사로서, 함께 왔다.

제 151 편 바닷가에서 머무르며 가르치다

유란시아서

제 151 편

바닷가에서 머무르며 가르치다

151:0.1 (1688.1) 3월 10일이 되자, 전도하고 가르치는 모든 집단이 벳세다에 모여들었다. 목요일 밤과 금요일에 그들 중에 여럿이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다. 한편 안식일에 다마스커스에서 온, 어느 나이 든 유대인이 조상 아브라함의 영광에 대하여 강연하는 것을 들으려고 그들은 회당에 참석했다. 예수는 이 안식일의 대부분을 혼자서 산에서 지냈다. 그 토요일 밤에 주는 모여든 무리에게 “역경의 역할과 실망의 영적 가치”에 대하여 한 시간이 넘도록 이야기했다. 이것은 기억할 만한 경우였고,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누어준 교훈을 결코 잊지 않았다.

151:0.2 (1688.2) 예수는 나사렛에서 최근에 거절당한 슬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사도들은 여느 때처럼 즐거운 태도에 섞인 그의 특이한 슬픔을 알아차렸다. 야고보와 요한은 대부분의 시간을 그와 함께 있었고, 베드로는 새 전도단의 복지와 지도에 관계되는 여러 책임에 몰두하여 여념이 없었다. 여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내려고 떠나기 전에 이 기다리는 시간을 이집 저집 찾아다니며, 가버나움과 그 주위의 여러 도시와 마을의 병자들을 돌보면서 보냈다.

1. 씨 뿌리는 자의 비유

151:1.1 (1688.3) 이 무렵에 예수는 주위에 무척 자주 모여드는 군중을 비유로 가르치는 방법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예수가 사도 및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밤이 늦도록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 일요일 아침에 그 무리 중에 거의 아무도 아침을 먹으려고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바닷가로 나가서, 안드레와 베드로가 예전에 고기잡이하던 배, 언제나 그가 뜻대로 쓰도록 둔 배 안에서 예수는 혼자 앉아 있었고, 하늘나라를 펼치는 일을 하는 데 다음에 취해야 할 행동에 관하여 명상했다. 그러나 주는 오래도록 혼자 있게 되지 않았다. 금방 사람들이 가버나움과 이웃의 여러 마을에서 도착하기 시작했고, 아침 10시가 되자 거의 1천 명이 물가에, 예수의 배 가까이 모여들었고 주의를 끌려고 아우성을 쳤다. 베드로는 이제 일어나서, 배 있는 데로 가면서 말했다. “주여, 내가 저희에게 이야기하리이까?” 그러나 예수가 대답했다. “아니라 베드로야, 내가 저희에게 이야기를 해주리라.” 그리고 나서 예수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비로소 말씀했고, 이것은 따라다닌 군중에게 가르친 비유, 길게 연속된 그런 초기 비유 중의 하나였다. 이 배에는 높이 세워진 자리가 있었고 물가에 모인 군중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가르칠 때 앉는 것이 버릇이었으므로) 예수는 거기에 앉았다. 베드로가 몇 마디 한 뒤에 예수는 입을 열었다:

151:1.2 (1688.4) “어느 씨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갔는데, 씨를 뿌리자, 더러는 길가에 떨어져 발에 짓밟히고 하늘의 새들이 삼키게 되었더라. 다른 씨는 흙이 거의 없는 돌밭에 떨어졌고, 흙이 깊지 않으매 즉시 싹이 났으나 해가 비치자마자 물기를 빨아들일 뿌리가 없어 말라버렸더라. 다른 씨는 가시나무 사이에 떨어져서 가시나무가 자라자 그 씨가 숨이 막혀 전혀 결실하지 못하였더라. 또 다른 씨는 좋은 땅에 떨어졌고 자라서 더러는 30배, 더러는 60배, 더러는 100배 결실하였더라.” 이 비유 말씀을 마치고 나서 군중에게 말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51:1.3 (1689.1) 사도들, 그리고 함께 있던 자들은, 예수가 이 방법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을 듣고서 크게 어리둥절하였다: 자기들끼리 많이 이야기를 나눈 뒤에, 그날 저녁 세베대의 집 뜰에서 마태가 예수에게 말했다: “주여, 군중에게 당신이 제시하는 아리송한 말씀의 뜻이 무엇이나이까? 진리를 찾는 자들에게 어찌하여 당신은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151:1.4 (1689.2) “내가 이제까지 참으며 너희를 가르쳤노라.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깨닫지 못하는 군중과 우리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자에게는 이제부터, 하늘나라의 신비를 비유로 제시하리라. 우리가 이렇게 하리니, 정말로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자는 그 가르침의 뜻을 헤아리고 따라서 구원을 얻으며, 한편 다만 우리를 옭아매려고 귀를 기울이는 자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까닭에 저희가 더욱 어리둥절하게 될까 함이라. 아이들아, 너희는 영의 법칙을 깨닫지 못하느냐. 가진 자는 받아서 풍부하게 되겠으나 없는 자는 가진 것조차 빼앗기리라, 그 법칙이 선포하느니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많은 것을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리니, 우리의 친구와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자는 찾는 것을 찾아내겠으나 한편 우리의 적과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이 사람들 가운데 여럿이 진리의 길을 따르지 않느니라. 선지자가 ‘이 민족의 마음은 둔해졌고 귀는 어두워 듣지 못하며, 진리를 헤아리고 마음 속에서 이해할까 두려워 눈을 가렸음이라’ 하였을 때, 정말로 그렇게 깨닫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묘사하였느니라.”

151:1.5 (1689.3) 사도들은 주가 무슨 의미로 말씀하시는가 완전히 알아듣지 못했다. 안드레와 토마스가 예수와 함께 더 이야기하는 동안,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뜰의 다른 구석으로 물러가서, 거기서 진지하고 길어진 토론에 들어갔다.

2. 비유의 풀이

151:2.1 (1689.4) 베드로와 그 주위에 있던 무리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우화(寓話)이다, 각 모습에 어떤 감추어진 의미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에게 가서 설명해달라 청하려고 작정하였다. 따라서 베드로는 주께 다가가서 말했다. “우리는 이 비유의 뜻을 깨우칠 수 없고,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허락되었다고 말씀하시오니 우리에게 풀이해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이 말을 듣고, 예수는 베드로에게 말했다: “이 사람아, 나는 너희에게 주지 않고자 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나 먼저 너희가 무엇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는가 내게 이르면 어떠하겠느냐, 그 비유를 너는 어찌 풀이하느냐?”

151:2.2 (1689.5) 한 순간 침묵이 흐른 뒤에 베드로는 말했다: “주여, 우리는 그 비유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했고, 나는 이렇게 풀이하려고 마음 먹었나이다. 씨 뿌리는 자는 복음을 전하는 자요,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이나이다. 길 옆에 떨어진 씨앗은 복음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를 가리키나이다. 굳은 땅에 떨어진 씨앗을 빼앗아 간 새들은 사탄 곧 악마를 대표하고, 그는 이 무지(無知)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뿌려진 것을 훔쳐 가나이다. 돌밭에 떨어졌다가 아주 갑자기 솟아나온 씨앗은 겉치레하고 생각이 모자라는 자를 대표하니, 저희가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 기쁨으로 전하는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깊이 이해하기까지 진리가 아무런 참된 뿌리를 내리지 못한 까닭에 저희의 헌신은 시련과 박해에 부닥쳐서 잠시 있다가 없어지나이다. 시련이 닥쳐올 때 이 신자들은 넘어지고 유혹을 받을 때 저버리나이다. 가시나무 사이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세상의 걱정거리와 사람을 속이는 재산으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에 숨통을 막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버려두는 자를 가리키나이다. 자, 좋은 땅에 떨어지고 싹이 나서, 더러는 30배, 더러는 60배, 더러는 100배 열매 맺은 씨앗은 진리를 들었을 때―저희의 다른 지적(知的) 자질 때문에―다른 정도로 이해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따라서 다른 정도로 이 종교적 체험을 드러내는 자들을 대표하나이다.”

151:2.3 (1690.1) 베드로가 비유를 풀이한 것을 들은 뒤에, 예수는 다른 사도들도 제안이 없는가 물었다. 이 초청에 오직 나다니엘이 응답하여 말했다: “주여, 시몬 베드로가 그 비유를 풀이한 것에 좋은 점이 많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와 의견이 완전히 같지는 않사오이다. 이 비유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사오이다: 씨앗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대표하며, 씨 뿌리는 자는 하늘나라의 사자를 나타내오이다. 길가에 굳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전하는 말씀에 관심 없는 자와 마음이 굳어진 자와 더불어, 복음을 조금만 들은 자를 대표하오이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을 채어간 하늘의 새들은 사람의 생활 버릇, 악의 유혹, 육체의 욕구를 나타내오이다. 돌 틈에 떨어진 씨앗은 새로운 가르침을 재빨리 받고, 이 진리에 부끄럽지 않게 사는 데 생기는 어려움과 그 현실에 부닥쳤을 때 진리를 마찬가지로 재빨리 버리는 감정적인 사람들을 나타내며 저희는 영적 이해가 모자라오이다. 가시나무 사이에 떨어진 씨앗은 복음의 진리에 마음이 끌리는 자를 대표하며, 가르침을 따를 생각이 있어도, 인생의 자부심ㆍ질투ㆍ시샘, 그리고 인간으로 살면서 생기는 걱정으로 방해를 받사오이다. 좋은 땅에 떨어지고 싹이 나서 더러는 30배, 더러는 60배, 더러는 100배 열매를 맺는 씨앗은 다른 자질의 영적 빛을 소유한 남녀들이 진리를 알아듣고 그 영적 가르침에 반응하는 능력, 자연스럽고 정도가 다른 능력을 대표하오이다.”

151:2.4 (1690.2) 나다니엘이 말을 마치자, 사도들과 그 동료들은 심각한 토론에 빠졌고 진지한 논쟁에 들어갔다. 더러는 베드로의 해석이 옳다고 우기고 한편 거의 같은 수가 나다니엘의 해석을 옹호하려 했다. 그동안에 베드로와 나다니엘은 물러나 집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납득시키고 생각을 바꾸게 하려고 힘차고 굳세게 애썼다.

151:2.5 (1690.3) 주는 이 혼란이 가장 심하게 표현될 때가 지나기까지 버려두었고, 그리고 나서 손바닥을 치고서 그들을 주위에 불렀다. 다시 한 번 모두가 주위에 모이자 말했다: “내가 이 비유에 대하여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누구라도 할 말이 있느냐?” 한 순간 침묵이 흐른 뒤에, 토마스가 입을 열었다: “예 주여, 내가 몇 마디 하고자 하나이다. 한 번 당신이 바로 이것을 조심하라고 우리에게 이르신 것을 나는 기억하나이다. 우리가 설교를 위한 예를 들 때, 우리는 우화(寓話)가 아니라 참 이야기를 써야 하며,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바라는, 핵심이 되고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진리를 보여주기에 가장 적당한 이야기를 골라야 한다는 것, 그 이야기를 그렇게 이용하고 나서, 그 이야기에 들어간 모든 자질구레한 세부를 영적으로 적용하려고 애써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나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 비유를 풀이하려는 베드로와 나다니엘의 시도는 다 틀렸나이다. 이렇게 하는 저희의 능력을 나는 칭찬하지만, 자연 비유의 모든 세부(細部)가 영적으로 비슷한 의미를 갖게 만들려는 그러한 시도는 무엇이나 혼란을 일으키고 그런 비유의 참 목적을 심각하게 오해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이라고 나는 똑같이 확신하나이다. 한 시간 전에 우리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으나 이제는 우리가 따로 두 집단으로 나누어진 사실이 내가 옳음을 넉넉히 증명하나이다. 두 집단이 이 비유에 관하여 다른 의견을 가졌고, 너무나 열심히 그런 의견을 가져서, 내 생각에는 당신이 이 비유를 군중에게 발표할 때, 그리고 나중에 우리에게 논평하라고 요청했을 때 당신이 생각하고 있던 큰 진리를 우리가 충분히 깨달을 수 없게 지장을 주나이다.”

151:2.6 (1691.1) 토마스가 한 말은 모두에게 찬물 끼얹는 효과를 가졌다. 그는 예수가 이전에 여러 경우에 가르친 것을 생각나게 했다. 예수가 다시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안드레가 일어나서 말했다: “내 생각에는 토마스가 옳다고 보노라.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그가 무슨 의미를 붙이는지 그가 일러주기를 바라노라.” 예수가 토마스에게 말하라고 손짓한 뒤에 그는 말했다: “형제들아, 나는 이 토론을 길게 끌기를 바라지 않지만, 너희가 바란다면 말하리니, 내 생각에는 한 가지 큰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주가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지라. 우리가 아무리 충실하고 효과적으로 신성한 임무를 집행한다고 하여도 하늘나라 복음을 가르치는 데에는 성공의 정도가 다르리라는 것, 모든 그런 결과의 차이는 직접적으로, 봉사를 베푸는 상황에 본래부터 있는 조건 때문이요, 우리는 그러한 조건을 거의 또는 도무지 좌우할 수 없느니라.”

151:2.7 (1691.2) 토마스가 말을 마치고 나서 동료 설교자들의 대다수는 쉽게 동의하려 했다. 베드로와 나다니엘조차 그와 이야기하려고 가고 있었는데 그때 예수가 일어나서 말했다: “잘했도다 토마스야, 너는 비유의 참 의미를 헤아렸도다. 그러나 베드로와 나다니엘이 내 비유로부터 우화를 만들려고 애쓰는 위험을 아주 넉넉히 보여주었으니, 저희는 똑같이 잘했느니라. 마음 속에서 너희가 그렇게 추측하는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 것이 때때로 유익할까 하지만, 대중을 가르치는 일의 일부로서 그런 결론을 제공하려고 애쓸 때 너희는 잘못하느니라.”

151:2.8 (1691.3) 긴장이 풀렸기 때문에, 베드로와 나다니엘은 서로의 해석을 축하했다. 알패오 쌍둥이를 빼고 사도들은 각자 그날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대담하게 풀이해보려고 했다. 가룟 유다조차도 매우 그럴듯한 해석을 내놓았다. 열두 사도는 때때로 자기들끼리, 우화를 풀이하듯 주가 말씀하신 여러 비유를 이해하려고 애쓰곤 했지만, 다시는 결코 그런 추측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것은 사도와 그 동료들에게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고, 계속 대중을 가르치는 것과 관련하여 이때부터 예수가 비유를 점점 더 이용했기 때문에 더군다나 그랬다.

3. 비유에 대하여 더 하신 말씀

151:3.1 (1691.4) 사도들의 머리는 비유에 파묻혀 있었고 너무 지나쳐서 다음 날 저녁 전체가 비유를 더 토론하는 데 쓰였다. 예수는 저녁 회의를 이 말씀으로 서두(序頭)를 꺼냈다: “사랑하는 자들아, 진리의 발표가 너희 앞에 있는 사람들의 지능과 마음에 맞도록 너희는 반드시 가르침을 다르게 해야 하느니라. 다른 지능과 성질을 가진 대중 앞에 설 때, 각 등급의 듣는 사람들을 위하여 다른 말씀을 할 수 없으나, 가르침을 전하는 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느니라. 무리마다 아니 각 개인조차, 자신의 지적ㆍ영적 자질에 따라서 너희의 비유를 제 나름대로 풀이할 수 있느니라. 너희의 빛이 비치게 해야 하지만 지혜롭고 신중하게 그렇게 하여라. 아무도 등불을 켤 때, 그릇으로 덮거나 침대 밑에 두지 않고 등불을 받침 위에 두나니, 그곳에서 모두가 그 빛을 볼 수 있느니라.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나라에는 밝히지 말라고 감춘 것이 하나도 없고 궁극에 알려서는 안될 비밀이 하나도 없느니라. 궁극에는 이 모든 것이 빛에 드러나리라. 군중, 그리고 군중이 어떻게 진리를 듣는가 하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또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자신에게 눈을 돌리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일렀음을 기억하라: 가진 자는 더욱 받겠고 가지지 않은 자는 자신이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마저 빼앗기리라.”

151:3.2 (1692.1) 비유에 대한 이어진 토론, 그리고 그 해석에 관한 계속된 가르침은 현대의 말투로 다음과 같이 간추리고 표현해도 좋다:

151:3.3 (1692.2) 1. 예수는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는 데 꾸며낸 이야기나 우화(寓話)를 쓰지 말라고 조언하였다. 그는 비유, 특히 자연을 소재로 한 비유를 아낌없이 쓰기를 권고했다. 진리를 가르치는 수단으로 자연 세계와 영적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이용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강조했다. 자연에 있는 것이 “영 실체의 그림자, 휙 지나가는 비현실적 그림자”라고 자주 언급했다.

151:3.4 (1692.3) 2. 예수는 히브리 성서로부터 서너 가지 비유를 말씀했고, 이 교육 방법이 온통 새롭지는 않다는 사실에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때부터 계속 이용한 바와 같이, 비유는 거의 새로운 교육 방법이 되었다.

151:3.5 (1692.4) 3. 사도들에게 비유의 가치를 가르치면서, 예수는 다음 몇 가지에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151:3.6 (1692.5) 비유는 방대하게 다른 수준의 지성과 영에게 동시에 호소할 수 있게 한다. 비유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분별력을 요구하며 비판하는 생각을 촉진시킨다. 비유는 적대 감정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이해를 촉진시킨다.

151:3.7 (1692.6) 비유는 아는 것으로부터 알지 못하는 것을 깨우치는 경지까지 나아간다. 비유는 영적이고 초물질인 것을 소개하는 수단으로서, 물질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을 이용한다.

151:3.8 (1692.7) 비유는 치우치지 않은 도덕적 결정을 내리기 쉽게 만든다. 비유는 많은 편견을 피하고 새로운 진리를 품위 있게 머리 속에 받아들이게 하며, 개인적으로 분개하는 자기 방어를 최소로 줄이면서 이 모든 것을 이룬다.

151:3.9 (1692.8) 비유의 유사한 점에 담긴 진리를 물리치는 것은 의식하여 머리 쓰는 것이 요구되며, 이것은 사람의 정직한 판단과 정당한 결정을 직접 무시한다. 비유는 듣는 감각을 통해서, 사람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151:3.10 (1692.9) 비유 형태의 가르침을 쓰는 것은 그 선생으로 하여금 새로운, 아니 놀랍기도 한 진리를 내놓게 만들며, 한편 동시에 어떤 논쟁도, 그리고 전통과 확립된 권한과 겉으로 부딪치는 것을 대체로 피한다.

151:3.11 (1693.1) 비유는 또한 나중에 똑같은 익숙한 장면과 마주칠 때, 가르친 진리를 기억하도록 자극하는 이점을 가진다.

151:3.12 (1693.2) 이 방법으로 예수는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대중을 가르칠 때 어째서 점점 더 비유를 쓰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는가 알게 하려고 애썼다.

151:3.13 (1693.3) 저녁 수업이 끝날 무렵에, 예수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하여 처음으로 논평했다. 그 비유가 두 가지를 언급한다고 했다: 첫째로, 그 비유는 그때까지 자신의 사명에 대한 평가였고, 땅에서 여생 동안에 자기 앞에 놓인 일을 예측한 것이었다. 둘째로,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사도들, 그리고 다른 하늘나라 사자들이 대대로 봉사하면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넌지시 암시한 것이었다.

151:3.14 (1693.4) 예수는 또한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의 세심한 노력에 대하여 가능한 최선의 반박으로서 비유를 쓰는 데 의존했는데, 이들은 그가 한 일이 모두 악령과 악마 임금의 도움을 얻어서 행해졌다고 가르쳤다. 모든 자연 현상이 영적 존재들과 초자연 물력의 직접 행위로 생긴 산물이라고 그 시절의 사람들이 여겼기 때문에, 자연에 호소하는 것은 그러한 가르침에 대한 반박이었다. 이 교육 방법을 택한 것은 또한 그로 하여금 더 나은 길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중대한 진리를 선포할 수 있게 하였고, 동시에 적들이 기분 상하여 그를 고발할 구실을 찾을 기회를 줄이기 때문이었다.

151:3.15 (1693.5) 밤 동안에 그 무리를 해산하기 전에, 예수는 말했다: “이제 내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마지막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너희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알려고 너희를 시험하고자 하노라: 하늘나라는 또한 땅에 좋은 씨앗을 던지는 사람과 같으니라. 밤에는 자고 낮에 일에 몰두하는 동안 그 씨가 싹트고 자랐고, 비록 어찌 그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으나 그 식물이 열매를 맺게 되었더라. 처음에 잎이 나고 다음에 이삭이, 다음에 이삭에서 익은 알곡이 생겼더라. 그리고 나서 곡식이 익었을 때 낫을 휘둘렀고 추수가 끝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51:3.16 (1693.6) 여러 번 사도들은 머리 속에서 이 말씀을 숙고해보았지만, 주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덧붙인 이 말씀을 더 언급하지 않았다.

4. 바닷가에서 말씀한 다른 여러 비유

151:4.1 (1693.7) 이튿날 예수는 다시 배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며 말했다: “하늘나라는 밭에 좋은 씨앗을 뿌린 사람과 같으니라. 그러나 그가 자는 동안, 적이 와서 밀 사이에 잡초를 뿌리고 서둘러 사라졌고, 그래서 어린 잎이 솟아나고 나중에 열매를 맺으려 했을 때 잡초들도 또한 생겼더라. 그러자 이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당신이 좋은 씨앗을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어디서부터 이 잡초들이 생기나이까?’ 그가 종들에게 대답하되, ‘적이 이 일을 하였도다.’ 그러자 종들이 주인에게 묻되, ‘우리가 나가서 이 잡초들을 뽑아 버리기를 원하시나이까?’ 그러나 그가 대답하였더라. ‘아니라, 잡초들을 모으면서 너희가 밀까지 뿌리를 뽑을까 두려우니라. 차라리 거둘 때까지 모두 자라게 버려두라. 그때 거두는 사람들에게 이르리니, 가서 먼저 잡초들을 모으고 다발로 묶어 불태우고, 그리고 나서 밀을 거두어 내 창고에 저장하라.’”

151:4.2 (1693.8) 사람들이 몇 마디 묻고 난 뒤에 예수는 또 다른 비유를 말했다: “하늘나라는 사람이 자기 밭에 뿌린 겨자 씨앗 같으니라. 자, 겨자씨는 씨들 가운데 가장 적으나, 제대로 자라면, 모든 풀 가운데 가장 크게 되고 나무 같아서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서 쉴 수 있느니라.”

151:4.3 (1694.1) “하늘나라는 또한 누룩과 같으니, 한 여인이 누룩을 가져다가 가루로 세 그릇 속에 감추어 두었고 이 방법으로 가루 전부가 부풀려졌느니라.”

151:4.4 (1694.2) “하늘나라는 또한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으니라. 한 사람이 보물을 발견하였더니, 기뻐하면서 그 밭 살 돈을 마련하려고 전 재산을 팔러 갔더라.”

151:4.5 (1694.3) “하늘나라는 또한 참한 진주를 찾고 있는 상인과 같으니, 큰 값어치가 있는 진주를 찾고 나서, 그 특별한 진주를 살 수 있도록 가진 것을 모두 팔려고 나갔더라.”

151:4.6 (1694.4) “또, 하늘나라는 바다 속에 던진 후릿그물 같으니, 온갖 종류의 물고기를 거두었더라. 이제, 그물이 찼을 때 어부들이 바닷가에 당겨놓고, 거기에 앉아서 물고기를 추려내며, 좋은 물고기는 그릇에 모으고 나쁜 물고기는 던져 버렸더라.”

151:4.7 (1694.5) 예수는 많은 다른 비유를 군중에게 이야기하였다. 사실은, 이때 이후로, 이 수단 외에 대중을 가르치는 일이 드물었다. 비유로 공석에서 청중에게 말씀한 뒤에, 저녁 수업 동안에, 그는 사도와 전도사들에게 가르침을 더욱 자세하고 분명하게 풀이하곤 했다.

5. 케레사를 방문하다

151:5.1 (1694.6) 군중이 그 주 내내 계속 불어났다. 안식일에 예수는 서둘러 산으로 갔지만, 일요일 아침이 다가왔을 때, 군중이 돌아왔다. 베드로가 설교한 뒤에 예수는 오후에 일찍 말씀했고, 말씀을 마치자 사도들에게 말했다: “내가 군중에 지쳤으니, 우리가 하루를 쉬도록 저편으로 건너가자.”

151:5.2 (1694.7) 호수를 건너가는 길에 그들은 사납고 갑작스러운 폭풍을 만났는데, 이것은 특히 해마다 이 계절에 갈릴리 바다의 특징이었다. 이 수역(水域)은 해면 밑으로 거의 210미터이고, 특히 서쪽은 높은 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호수로부터 산으로 이르는 가파른 골짜기들이 있었다. 낮 동안에 호수 위에서 수직(垂直) 기류를 타고 뜨거워진 공기가 올라옴에 따라서, 해가 진 뒤에 골짜기의 식어가는 공기가 호수 위로 급히 쏟아져 내려오는 경향이 있었다. 이 강풍은 재빨리 오고 때로는 똑같이 갑자기 사라졌다.

151:5.3 (1694.8) 바로 그러한 저녁 강풍이 이 일요일 저녁에 예수를 맞은편으로 실어 나르는 배를 낚아채었다. 새 전도사 몇 사람을 실은 다른 배 세 척이 뒤에서 쫓아오고 있었다. 서쪽 물가에는 폭풍의 증거가 도무지 없었고, 이 폭풍우는 호수의 이 지역에 국한되었는데도 심했다. 바람이 너무 세서 물결이 배 위를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사도들이 돛을 말 수 있기 전에, 센 바람이 돛을 찢어 버렸고, 2.4킬로미터가 조금 넘게 떨어진 해안으로 힘들여 저어가는 동안, 그들은 이제 노에만 전적으로 매달렸다.

151:5.4 (1694.9) 그동안에 예수는 머리 위의 작은 해 가리개 밑에서, 배의 고물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벳세다를 떠났을 때 주는 지쳐 있었고, 쉬려고 그들에게 배를 띄워 건너편으로 그를 싣고 가라고 지시하였다. 이 왕년의 어부들은 힘이 세고 노 젓기에 노련했지만, 이것은 그들이 일찍이 만난 가장 사나운 강풍 중의 하나였다. 바람과 물결이 배를 마치 장난감 배처럼 이리저리 던졌어도, 예수는 꼼짝 않고 계속 자고 있었다. 베드로는 고물 가까이 바른편 노를 저었다. 배가 비로소 물로 차자, 베드로는 노를 놓고 예수에게 달려가서 깨우려고 세차게 흔들었다. 그가 깨어나자 베드로가 말했다: “주여, 우리가 사나운 폭풍 속에 있는 줄 모르시나이까? 우리를 구하지 않으면 우리가 모두 죽으리이다.”

151:5.5 (1695.1) 빗속으로 나왔을 때 예수는 먼저 베드로를 보았다. 다음에 애써서 노 젓는 사람들을 어둠 속으로 들여다보면서, 흥분하여 아직 자기 노로 돌아가지 않은 시몬 베드로를 얼른 돌아보고 예수는 말했다: “어찌하여 모두가 그리 두려움에 가득 차 있느냐? 너희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조용히. 조용히 하라.”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 꾸지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베드로에게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도록 평안을 찾으라 명하자마자, 그때 휘저어진 공기가 균형을 찾고 나서 가라앉아 크게 고요해졌다. 성난 물결은 거의 즉시 가라앉았다. 한편 검은 구름은 짧은 소나기에 힘을 소모했으므로 사라지고 하늘의 별들이 머리 위로 빛났다.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한, 이 모두가 순전히 우연히 일어났다. 그러나 사도들, 더군다나 베드로는 결코 이 사건을 자연의 기적으로 여기지 않은 적이 없다. 모든 자연이 영 세력과 초자연 존재들이 직접 지배하는 현상이라고 굳게 믿었으므로, 그 시절의 사람들이 특히 자연의 기적을 믿기가 쉬웠다.

151:5.6 (1695.2) 예수는 그들의 불안한 정신을 향하여 말했고, 두려움에 질린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자연에게 그의 말에 복종하라 명하지 않았다고 열두 사도에게 분명히 설명했지만, 아무 쓸모가 없었다. 주를 따르는 자들은 언제나 그렇게 우연히 일어난 모든 일에 자기 해석을 붙이기를 고집했다. 이날부터 계속, 그들은 고집하여 주가 자연력에 대하여 절대 권력을 가졌다고 생각하였다. 베드로는 어떻게 “바람과 물결조차 그에게 복종하는가” 이야기를 늘어놓는 데 결코 지치지 않았다.

151:5.7 (1695.3) 예수와 동료들이 호숫가에 닿았을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밤이었기 때문에, 모두 배에서 쉬었다. 이튿날 아침 해가 뜨고 조금 지났을 때까지 물가로 가지 않았다. 거의 40명이 함께 모였을 때 예수는 말했다: “아버지 나라의 문제들을 우리가 숙고하는 동안, 저쪽 산으로 올라가서, 며칠 동안 머무르자.”

6. 케레사의 미치광이

151:6.1 (1695.4) 호수의 가까운 동쪽 물가의 대부분이 건너의 산지까지 밋밋하게 비탈졌어도, 이 특별한 장소에는 가파른 산허리가 있었고, 호숫가의 어떤 곳은 호수로 깎아질러 내려갔다. 근처의 산허리를 가리키면서 예수는 말했다: “아침을 먹으러 이 산허리로 올라가서 어느 아늑한 곳에서 쉬고 이야기하자.”

151:6.2 (1695.5) 이 산허리 전부가 동굴로 덮였고, 이것들은 바위에서 파여진 곳이었다. 이 많은 구멍이 고대의 무덤이었다. 산허리로 중간쯤 올라가서 비교적 평평한 작은 장소에 작은 마을 케레사의 공동 묘지가 있었다. 예수와 동료들이 이 무덤 터 가까이 지나가는 동안에, 이 산허리의 동굴에서 살고 있던 어느 미치광이가 그들에게 달려왔다. 머리가 돈 이 사람은 이 근방에서 잘 알려져 있었고, 한때 쇠사슬과 쇠고랑에 묶여서 어느 석굴에 갇혀 있었다. 그는 쇠고랑을 부순 지 오래 되었고 이제 무덤과 버려진 묘들 사이로 멋대로 돌아다녔다.

151:6.3 (1696.1) 이 사람은 이름이 아모스였는데, 정기적으로 미치는 증세가 있었다. 옷을 더러 찾아 입고 동료들 가운데서 제법 처신을 잘하는 기간이 어지간히 있었다. 생각이 멀쩡했던 이 여러 기간 중 하나에 그는 벳세다로 갔고 거기서 예수와 사도들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때 하늘나라 복음을 반쯤 믿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곧 병세가 심한 국면이 나타났고 그는 무덤으로 달아났다. 거기서 신음하고 크게 울부짖었고, 그래서 어쩌다 만난 사람들을 다 두려움에 질리게 만들었다.

151:6.4 (1696.2) 예수를 알아보자 아모스는 털썩 주저앉아서 외쳤다: “나는 당신, 예수를 아오나 나는 여러 귀신이 들렸고 당신이 나를 괴롭히지 말기를 부탁하나이다.” 정기적으로 겪는 정신적 고통은 그런 때에 악하거나 더러운 귀신들이 그에게 들어가서 머리와 몸을 지배하는 사실 때문이라고 이 사람은 참으로 믿었다. 그의 병은 대체로 감정의 병이었다―머리는 크게 병들지 않았다.

151:6.5 (1696.3) 동물처럼 그의 발 밑에 웅크리고 있는 그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예수는 손을 뻗어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말했다: “아모스야, 너는 악귀가 들리지 아니하였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좋은 소식을 이미 들었느니라. 내가 너에게 명하노니, 이 발작에서 깨어나라.” 예수가 이렇게 말씀하심을 들었을 때, 아모스의 지능에 큰 변화가 일어나서, 그는 금방 제 정신이 들었고 정상으로 감정을 자제하였다. 이때가 되자 근처의 마을로부터 어지간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위의 산지로부터 온 돼지 치는 자들 때문에 수가 불어난 이 사람들은 그 미치광이가 예수와 그 추종자들과 함께 앉아서, 멀쩡한 정신으로 자유롭게 함께 이야기하고 있음을 보고 깜짝 놀랐다.

151:6.6 (1696.4) 미치광이를 길들였다는 소식을 퍼뜨리려고 그 돼지 치는 사람들이 마을로 부리나케 달려가자, 서른 마리쯤 되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작은 돼지 떼에 개들이 돌진하여, 벼랑을 넘어 바다로 대부분의 돼지들을 몰았다. 이 우연한 일이, 예수가 계신 것과 그 미치광이가 기적으로 고침을 받았다고 생각된 것과 관련하여, 아모스로부터 한 군대의 악귀들을 몰아냄으로 예수가 그의 병을 고쳤다, 그리고 이 악귀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서 돼지들이 당장 밑에 있는 바다로 곤두박질쳐서 죽게 만들었다는 전설을 낳았다. 그날이 저물기 전에, 돼지 치는 사람들이 이 사건을 널리 퍼뜨렸고 그 마을 전체가 이를 믿었다. 아모스는 아주 확실히 이 이야기를 믿었다. 불안한 정신이 가라앉은 뒤에 곧 그는 언덕의 벼랑을 넘어서 돼지들이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히고 병들게 한 바로 그 악령들을 돼지들이 데리고 갔다고 언제나 믿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병이 영구히 나은 것과 크게 상관이 있었다. (토마스를 제쳐놓고) 예수의 사도들 모두가, 그 돼지 사건이 아모스의 병이 고쳐진 것과 직접 관련되었다고 믿은 것이 똑같이 참말이다.

151:6.7 (1696.5) 예수는 찾고 있던 휴식을 얻지 못했다. 그날의 대부분, 아모스가 병 고침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온 사람들, 악귀들이 그 미치광이한테서 나와서 돼지 떼에게 들어갔다는 이야기에 이끌린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래서 겨우 하루 밤 쉬고 난 뒤에, 화요일 아침 일찍, 예수와 친구들은 돼지를 기르는 이 이방인 대표단 때문에 잠이 깨었다. 그들은 예수가 그들 가운데서 떠나라고 요구하러 왔다. 그들의 대변인이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말했다: “갈릴리의 어부들이여, 우리한테서 떠나시고 당신의 선지자를 모시고 가소서. 우리는 그가 거룩한 분인 줄 알지만, 우리 시골의 신들은 그를 모르고 우리는 돼지를 많이 잃을 위험에 처해 있나이다. 당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닥쳤고 그래서 당신이 여기를 떠나시기를 비나이다.” 예수가 이들의 말을 듣고 나서 안드레에게 말했다. “우리 장소로 돌아가자.”

151:6.8 (1697.1) 막 떠나려 하는데, 아모스가 예수에게 그들과 함께 돌아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지만 주는 찬성하려 하지 않았다. 예수는 아모스에게 말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잊지 말라. 친족에게 돌아가서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얼마나 큰 일을 하셨는가 보이라.” 아모스는 예수가 그의 불안한 혼으로부터 한 군대의 악귀들을 몰아냈다, 이 악령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서 돼지들을 빨리 죽게 몰았다고 말을 퍼뜨리고 다녔다. 데카폴리스의 모든 도시로 가기까지 예수가 그를 위하여 얼마나 큰 일을 했는가 외치면서 그는 멈추지 않았다.

제 152 편 가버나움 위기까지 이끈 사건들

유란시아서

제 152 편

가버나움의 위기까지 이끈 사건들

152:0.1 (1698.1) 케레사의 미치광이 아모스가 고침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벳세다와 가버나움에 다다랐다. 그래서 그 화요일 아침 나절에 예수의 배가 상륙했을 때 큰 무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군중 속에는 예루살렘 산헤드린으로부터 온 새 감시인들이 있었고, 그들은 주를 체포하고 유죄 판결을 내릴 구실을 찾으려고 가버나움으로 왔다. 그를 맞이하려고 모인 사람들과 예수가 말씀하는 동안, 회당장들 중에서 한 사람 야이루스가 군중을 헤치고 다가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면서 그의 손을 잡고, 함께 예수가 서둘러 가기를 청하며 말했다: “주여, 내 어린 딸, 외동딸이 죽을 지경이 되어 집에 누워 있나이다. 비옵나니 오셔서 딸을 고쳐주옵소서.” 이 아버지의 요청을 듣자 예수는 말했다: “너와 함께 가겠노라.”

152:0.2 (1698.2) 예수가 야이루스와 함께 가자, 아버지의 요청을 들은 큰 무리가 무슨 일이 일어날까 보려고 계속 따라왔다. 회당장의 집에 이르기 얼마 전에, 좁은 길을 통해서 서둘러 가다가, 그리고 군중이 밀치자 예수는 갑자기 멈추어 외쳤다: “누군가가 나를 만졌도다.” 그에게 가까이 있던 자들이 예수를 만지지 않았다고 부인했을 때, 베드로가 입을 열었다: “주여, 이 군중이 당신을 밀고 우리를 깔아뭉개려고 위협하는 것을 보실 수 있사온데, 그래도 당신은 ‘누군가가 나를 만졌도다’ 말씀하시나이다. 어인 말씀이오이까?”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누가 나를 만졌는가 물었으니, 생명의 에너지가 내게서 나갔음을 깨달았음이라.” 예수가 주위를 둘러보자, 그의 눈은 가까이 있는 어느 여인에게 미쳤다. 그 여인은 앞으로 다가오면서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말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몹시 괴로운 출혈로 고생하고 있었나이다. 여러 의사에게서 많은 것을 겪었고, 내 재산을 다 써버렸지만 아무도 나를 고칠 수 없었나이다. 그러자 당신의 소문을 들었고 그 옷자락만이라도 만질 수 있다면 확실히 내가 온전히 되리라 생각이 들었나이다. 그래서 당신 가까이 설 때까지 군중이 움직이는 데 따라서 군중과 함께 밀어 제치며 나아왔나이다. 주여, 당신의 옷자락을 만졌더니, 온전하게 되었고 내 병이 고쳐졌음을 아나이다.”

152:0.3 (1698.3) 이 말을 들었을 때, 예수는 여자의 손을 붙들어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온전하게 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그 여자를 낫게 만든 것은 그 믿음이요 만진 것이 아니었다. 이 경우는 예수가 땅에서 사신 생애에 따른 치유, 겉보기에 기적 같으나 어떤 의미에서도 예수가 의식하여 뜻하지 않고서 일어난 많은 치유의 좋은 본보기이다. 시간이 경과하자 이 여자의 병이 정말로 치유된 것이 분명했다. 그 여자의 믿음은 주의 몸에 거하는 창조적인 힘을 직접 붙잡은 그러한 종류였다. 그 여자가 가진 믿음으로는 오직 주의 몸에 가까이 가는 것이 필요했다. 그의 옷을 만지는 것은 도무지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그 여자의 믿음에서 미신 같은 부분이었다. 그 여자의 머리 속에 남아 있거나 이 병 고침을 구경한 자들의 머리 속에 지속했을지 모르는 두 가지 잘못을 시정하려고 예수는 이 여인, 케자리아 빌립비의 베로니카를 앞으로 불러들였다. 두려워하며 치유를 훔치려 한 시도를 허락했다거나 또는 옷 만진 것과 병의 치유를 관련짓는 미신(迷信)이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베로니카가 떠나기를 예수는 바라지 않았다. 병을 낫게 한 것은 그 여자의 순수하고 살아 있는 믿음이었다는 것을 모두가 알기를 원했다.

1. 야이루스의 집에서

152:1.1 (1699.1) 물론, 야이루스는 집에 도착하는 데 이렇게 늦어져서 무척 초조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종종걸음으로 줄곧 서둘러 갔다. 회당장의 뜰로 미처 들어가기도 전에, 종들 가운데 하나가 나와서 말했다: “주를 번거롭게 하지 마소서,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 종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듯하였으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면서 예수가 돌이켜 슬픔에 휩쓸린 아버지에게 “두려워 말라, 믿기만 하라” 하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집에 들어갔을 때, 예수는 피리 부는 사람들이 애도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미 거기에 있음을 발견했다. 이들은 보기 딱하게 떠들썩했고 친척들은 이미 눈물을 흘리고 소리쳐 울고 있었다. 애도하는 사람들을 다 방 바깥으로 내보내고 나서 예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세 사도와 함께 들어갔다. 애도하는 사람들에게 그 처녀가 죽지 않았다고 일러주었지만 그들은 코웃음쳤다. 예수는 이제 어머니에게 돌이켜 말했다: “네 딸이 죽지 않았도다. 잠자고 있을 뿐이라.” 집이 조용해지자, 예수는 아이가 누워 있는 곳으로 가서 아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 “딸아, 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깨어서 일어나라!”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그 여자 아이는 즉시 일어나서 방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멍한 상태에서 아이가 정신이 든 뒤에, 아이가 오랫동안 먹지 않고 지냈으므로 예수는 아이에게 무언가 먹을 것을 주라고 당장 지시하였다.

152:1.2 (1699.2) 가버나움에서 그를 적대하여 상당한 소동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그 가족을 불러모으고 소녀가 오랫동안 열병을 앓고 나서 혼수 상태에 있었다, 그는 아이를 깨웠을 뿐이다, 죽음에서 아이를 살려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이 모두를 사도들에게 설명했지만 쓸모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예수가 여자아이를 죽음에서 살렸다고 믿었다. 기적으로 보이는 이 일을 설명하려고 예수가 말한 것은 추종자들에게 조금도 효과가 없었다. 그들은 머리 속에 기적 생각만 하고 있었고, 또 하나의 이적을 예수의 공으로 돌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모두에게 특별히 타이른 뒤에, 예수와 사도들은 벳세다로 돌아왔다.

152:1.3 (1699.3) 야이루스의 집에서 나올 때, 귀머거리 소년이 이끄는 두 소경이 그를 따라와서 고쳐달라고 소리쳤다. 이 무렵에 병 고치는 자로서 예수의 이름은 절정에 이르렀다. 어디로 가든지 아픈 자와 병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는 이제 무척 고달파 보였고 그가 실제로 쓰러지기까지 가르치고 병 고치는 일을 계속하지 않을까 친구들 모두가 걱정스러웠다.

152:1.4 (1699.4) 서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의 사도들은 이 하나님인 사람의 성품과 속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후일의 어느 세대도 땅에서 나사렛 예수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평가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이나 네바돈의 어느 다른 세계에서도 그러한 특별한 상황이 다시 일어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과학이나 종교가 이 놀라운 사건들을 검토할 기회가 결코 생길 수 없다. 이 우주 전체의 어느 세계에서도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동시에 시간과 대부분의 다른 물질적 한계를 초월하는 영적 자질을 갖추고 창조 에너지의 모든 속성을 몸에 지니는 한 존재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152:1.5 (1700.1) 예수가 땅에서 계시기 이전이나 이후에, 필사 인간들의 힘찬 살아 있는 믿음에 따르는 결과를 그렇게 직접, 그림을 보듯 얻는 것이 결코 가능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을 되풀이하려면, 창조자 미가엘이 바로 계신 앞까지 우리가 가서, 그 시절에 신분―사람의 아들―그대로 그를 발견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가 자리에 계시지 않은 것은 그러한 물질적 명시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지만, 너희는 그의 영적 능력의 가능한 전시에 어떤 종류의 제한이라도 부과하기를 삼가야 한다. 한 물질 존재로서 계시지 않더라도, 주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한 영적 영향으로서 계신다. 이 세상에서 떠나심으로, 예수는 모든 인류의 정신에 깃드는 아버지의 영과 나란히 그의 영이 살 수 있게 만들었다.

2. 5천 명을 먹이다

152:2.1 (1700.2) 예수는 계속하여 낮에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사도와 전도사들을 교육했다.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기 전에, 그는 추종자들이 모두 며칠 동안 집이나 친구들에게 가도록 금요일에 한 주 동안 휴가를 선언했다. 그러나 제자들의 과반수가 그를 떠나려 하지 않았고 군중은 나날이 불어나고 있었다. 너무나 불어나서 다윗 세베대는 새 야영지를 세우고 싶었지만, 예수는 찬성하지 않았다. 안식일 동안에 거의 쉬지 못해서, 3월 27일 일요일 아침에 그는 사람들을 떠나려고 애썼다. 전도사들이 더러 대중에게 이야기하도록 두고, 한편 예수와 열두 사도는 들키지 않고 호수의 맞은 편 물가로 달아나려고 계획했다. 거기서 그들은 벳세다 줄리아스 남쪽의 아름다운 공원에서 많이 필요했던 휴식을 가지려고 생각하였다. 이 지역은 가버나움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휴양지였다. 그들 모두가 동쪽 해안에 있는 이 여러 공원에 익숙하였다.

152:2.2 (1700.3)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버려두려 하지 않았다. 예수의 배가 가는 방향을 보고서 그들은 닥치는 대로 배를 모조리 고용하여 추적하기 시작했다. 배를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은 호수의 위쪽 끝을 둘러서, 걸어서 길을 재촉하였다.

152:2.3 (1700.4) 오후 느지막하게 되자,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어느 공원에 계신 주를 찾아냈다. 그는 잠깐 말씀하였고 베드로가 뒤를 이었다. 이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먹을 것을 가져왔다. 저녁을 먹은 뒤에 그들은 작은 무리를 지어 여기저기 모였고, 예수의 사도와 제자들이 그들을 가르쳤다.

152:2.4 (1700.5) 월요일 오후에 군중은 3천 명이 넘게 늘어났다. 아직도―저녁이 훨씬 지나서―온갖 종류의 병자들을 데리고 사람들이 계속하여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관심 있는 사람 수백 명이 유월절 예식에 가는 길에 가버나움에 멈추어서 예수를 보고 말씀을 들으려고 계획을 세웠고, 그들은 단지 단념하려 하지 않았다. 수요일 한낮이 되기까지, 어른과 아이가 거의 5천 명이 벳세다 줄리아스 남쪽, 여기 이 공원에 모였다. 이 지역에서 비 오는 철의 끝이 가까웠으니까, 날씨는 좋았다.

152:2.5 (1700.6) 예수와 열두 사도를 위하여 빌립은 사흘어치의 먹을 것을 마련했는데, 이것을 소년 마가가 보관하고 있었다. 마가는 모든 자질구레한 일을 맡은 소년이었다. 이 셋째 날 오후가 되자, 이 군중의 거의 절반에게는 가져온 음식이 거의 없어졌다. 다윗 세베대는 그 군중을 먹이고 재울 만한 텐트 친 도시가 여기에 없었다. 빌립은 그런 군중을 위해서 식량을 준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배가 고프기는 해도 사람들은 떠나려 하지 않았다. 헤롯을 비롯하여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충돌을 피하고 싶어서, 임금으로 즉위할 적당한 장소로 쓰려고 모든 적의 관할 바깥에 이 조용한 장소를 예수가 선택했다고 사람들이 조용히 속삭였다. 사람들의 흥분은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아무도 예수에게 한 마디 말씀을 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물론, 그는 되어 가는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 열두 사도조차, 특히 새로 된 전도사들이, 아직도 그런 개념에 물들어 있었다. 예수를 임금으로 선포하려는 이 시도에 찬성한 사도들은 베드로, 요한, 열심당원 시몬, 가룟 유다였다. 그 계획에 반대한 사람들은 안드레ㆍ야고보ㆍ나다니엘ㆍ토마스였다. 마태와 빌립과 알패오 쌍둥이는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예수를 임금으로 만들려는 이 계획의 주모자는 새로 된 전도사 중의 한 사람, 요압이었다.

152:2.6 (1701.1) 이것이 수요일 오후 5시쯤에 예수가 야고보 알패오에게 안드레와 빌립을 부르라고 부탁했을 때 무대의 배경이었다. 예수는 말했다: “우리가 군중을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저희가 이제 사흘 동안 우리와 함께 있었고, 저희 가운데 많은 사람이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없느니라.” 빌립과 안드레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서 빌립이 대답했다: “주여, 당신은 사람들을 보내서, 저희가 근처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사게 해야 하나이다.” 안드레는 임금을 만들려는 계획이 실현될까 두려워서, 재빨리 빌립과 합세하여 말했다: “예 주여, 군중을 해산하여, 당신이 얼마큼 쉬는 동안 저희가 떠나서 먹을 것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나이다.” 이때가 되어서 열둘 가운데 다른 사람들도 의논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나서 예수가 말했다: “그러나 나는 저희를 배고픈 채로 보내고 싶지 않도다. 너희는 저희를 먹일 수 없느냐?” 이 말씀은 빌립에게 지나쳤고 그는 이내 입을 열었다: “주여, 이 촌구석에 어디서 이 군중을 위하여 우리가 빵을 살 수 있나이까? 2백 데나리온어치가 점심 먹기에도 넉넉하지 않으리이다.”

152:2.7 (1701.2) 사도들이 한 마디씩 할 기회를 가지기 전에 예수는 안드레와 빌립을 향하여 말했다: “이 사람들을 보내고 싶지 않노라. 저희는 목자 없는 양 같이 여기 있느니라. 나는 저희를 먹이고 싶도다. 무슨 먹을 것이 우리에게 있느냐?” 빌립이 마태와 유다와 함께 이야기하는 동안, 안드레는 저장한 식량이 얼마큼 남았는가 확인하려고 마가를 찾았다. 그는 예수에게 돌아와서 말했다: “이 소년에게 겨우 보리 빵 다섯 덩이와 말린 물고기 두 마리가 있나이다”―베드로는 재빨리 덧붙였다, “우리는 아직 오늘 저녁도 먹어야 하나이다.”

152:2.8 (1701.3) 한 순간 예수는 말없이 서 있었다. 그의 눈에는 아득히 멀리 바라보는 눈빛이 있었다. 사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수는 갑자기 안드레를 향하여 말했다. “빵과 물고기를 가져오라.” 안드레가 광주리를 예수에게 가져오자 주는 말했다: “네가 전도사들을 모두 여기 우리한테로 데려오는 동안에 사람들에게 1백 명씩 무리를 지어 풀 위에 앉고 각 무리마다 한 대표를 세우라 지시하여라.”

152:2.9 (1701.4) 빵 덩이들을 손에 쥐고 감사(感謝) 기도를 드린 뒤에, 예수는 빵을 떼어서 사도들에게 주었다. 사도들은 빵을 동료들에게 넘겨주었고 이들은 다시 빵을 군중에게 날랐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예수는 물고기를 떼어서 나눠주었다. 이 군중은 먹고 배가 불렀다. 그들이 먹기를 마치자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아무것도 없어지지 않도록 남은 조각들을 모으라.” 빵 조각 거두기를 마치고 나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하였다. 이 특별 잔치에 먹은 사람들은 어른과 아이가 약 5천 명이었다.

152:2.10 (1702.1) 이것은 의식하여 미리 계획한 결과로서 예수가 행한 처음이자 유일한 자연의 기적이다. 제자들이 기적 아닌 많은 것을 기적이라 부르고 싶어 한 것이 참말이지만, 이것은 진정한 초자연적 보살핌이었다. 이 경우에 시간 요소와 눈에 보이는 생명의 통로를 제거한 것을 빼고, 늘 하시다시피 미가엘이 식량의 요소를 늘였다고 우리는 가르침을 받았다.

3. 임금으로 세우려는 사건

152:3.1 (1702.2) 5천 명을 초자연 에너지로 먹인 것은 인간의 동정심과 창조 능력을 더한 결과가 바로 일어난 또 하나의 경우였다. 군중을 배가 부르도록 먹였기 때문에, 또 이 엄청난 이적으로 예수의 명성이 그때 거기서 높아졌으니까, 주를 붙들어 임금이라 선포하는 계획은 더 개인의 지휘가 필요 없었다. 이 생각은 군중을 통해서 유행병처럼 퍼지는 듯했다. 육체의 필요를 이렇게 갑자기 눈부시게 채워준 데 대하여 군중의 반응은 깊고 압도적이었다. 다윗의 아들, 메시아가 온다면, 땅이 다시금 젖과 꿀로 흐르게 만들리라, 생각컨대 마치 만나가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조상들에게 떨어졌던 것 같이 그들에게 생명의 빵이 수여되리라고 오랫동안 유대인들은 가르침을 받아 왔다. 이렇게 기대했던 것이 모두, 바로 눈앞에서 이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배고프고 영양이 모자라는 이 군중이 이 놀라운 먹을 것으로 배를 채우고 나서, 오직 한 가지 만장 일치의 반응이 있었다: “여기에 우리 임금이 있구나.” 기적을 행하는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오셨다. 생각이 단순한 이 사람들이 보기에, 사람을 먹이는 권능에는 다스리는 권리가 따랐다. 그러면 군중이 실컷 먹기를 마치고 나서, 한 사람처럼 일어나서 “그를 임금으로 세우라!” 외친 것은 당연하다.

152:3.2 (1702.3) 이 우렁찬 외침은 베드로, 그리고 사도들 가운데 예수가 다스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보는 희망을 아직도 품은 자들의 열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거짓된 희망은 오래 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군중의 이 우렁찬 외침이 근처의 바위에서 메아리치는 소리가 그치기 무섭게, 예수는 거대한 바위에 올라서서 바른 손을 들어올리고 주의를 모으고 말했다: “아이들아, 좋은 뜻을 가졌으나 너희는 근시안이요 물질에 머리를 쓰는도다.” 잠시 멈추었다가 이 튼튼한 갈릴리 사람은 황혼이 황홀하게 타오르는 그 동쪽 빛을 받으며 거기에 당당하게 몸을 가다듬었다. 숨을 죽이고 듣는 이 군중에게 계속 말씀하시는 동안 그는 어디를 보아도 임금으로 보였다: “너희의 혼이 위대한 진리로 빛을 받아서가 아니라, 배가 빵으로 채워졌다고 하여 너희가 나를 임금으로 세우고 싶어 하는도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너희에게 일렀더냐? 우리가 선포하는 이 하늘나라는 영적 형제의 모임이요, 아무도 물질로 된 보좌에 앉아서 이를 다스리지 않느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는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이 영적 형제 모임을 다스리는, 온통 지혜롭고 전능한 통치자이라. 육체를 입은 아들을 너희가 임금으로 만들고 싶어 하기까지, 너희에게 영들의 아버지를 드러내는 일을 내가 아주 그르쳤느냐! 이제 모두 자기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임금을 가져야 한다면, 빛의 아버지로 하여금 너희 각자의 마음 속에서 만물의 영 통치자로서 보좌에 앉으시게 하여라.”

152:3.3 (1702.4) 예수의 이 말씀은 군중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실망을 주어 보냈다. 그를 믿었던 많은 사람이 돌아섰고 그날부터 그를 더 따르지 않았다. 사도들은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은 먹다 남은 부스러기 열두 광주리 둘레에 말없이 모여 섰다. 오로지 잡일하는 아이, 소년 마가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임금 되기를 마다하였나이다.” 혼자서 산에 있으려고 훌쩍 떠나기 전에 예수는 안드레를 향하여 말했다: “너희 형제들을 세베대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저희와 함께, 특히 네 아우 시몬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

4. 시몬 베드로가 밤에 본 환상

152:4.1 (1703.1) 주를 동반하지 않고―자기들끼리 가라고 보냈으므로―사도들은 배에 타고 말없이 호수의 서쪽 물가에 벳세다를 향하여 배를 젓기 시작했다. 열둘 가운데 아무도 시몬 베드로처럼 움츠러들고 풀이 죽지 않았다. 거의 한 마디 말도 없었다. 모두가 산에서 혼자 계신 주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을 버렸는가? 전에는 그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그가 함께 가기를 마다하신 적이 없었다. 이 모두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152:4.2 (1703.2) 어둠이 그들에게 다가왔고, 센 역풍(逆風)이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가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힘들게 몇 시간 동안 노를 저은 뒤에, 베드로는 지쳤고 피곤해서 깊은 잠에 빠졌다. 안드레와 야고보는 그를 배의 고물에, 방석 있는 자리에 쉬게 두었다. 다른 사도들이 바람과 물결과 싸우는 동안, 베드로는 꿈을 꾸었다. 바다에서 예수가 걸어서 그들에게 오는 환상을 보았다. 배 옆으로 주가 계속 걸어가는 듯했을 때 베드로는 소리를 질렀다, “우리를 구하소서, 주여 우리를 구하소서.” 배의 뒤쪽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얼마큼 들었다. 베드로의 머리 속에서, 밤에 나타난 이 유령이 계속되는 동안, 꿈 속에서 그는 예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기운을 내라, 내로라, 두려워 말라.” 이것은 베드로의 불안한 혼에 길르앗의 발삼과[1] [18] 같았다. 이것은 그의 불안한 정신을 어루만져 주었고 그래서 (꿈 속에서) 주께 외쳤다: “주여, 정말로 당신이면 와서 당신과 함께 물 위에서 걸으라 내게 명하소서.” 베드로가 물 위에서 걷기 시작했을 때, 철썩거리는 물결이 그를 놀라게 하였고, 막 가라앉으려 하자 그는 소리를 질렀다, “주여, 나를 구하소서!” 열둘 가운데 여럿이 그가 이렇게 외침을 들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예수가 구하러 와서 손을 뻗어서 그를 붙잡아 들어올리며, “아, 믿음이 적은 자여, 어찌하여 네가 의심하였느냐?”하고 말하는 꿈을 꾸었다.

152:4.3 (1703.3) 꿈의 끝 부분과 관련하여 베드로는 자던 자리에서 일어나, 배 바깥으로, 물 속으로 실제로 발을 내디디었다.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이 손을 뻗어서 바다에서 그를 끌어내자 그는 꿈에서 깨어났다.

152:4.4 (1703.4) 베드로에게 이 체험은 언제나 현실이었다. 예수가 그날 밤에 그들에게 왔다고 진지하게 믿었다. 그는 요한 마가를 겨우 어느 정도 확신시켰고, 이것이 어째서 마가가 자기 기록에서 그 이야기의 한 부분을 빼놓았는가 설명한다. 의사인 누가는 이 문제를 샅샅이 조사하고 그 사건이 베드로의 환상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그의 기록을 준비하면서 이 이야기에 자리를 할애하려 하지 않았다.

5. 벳세다에 돌아가서

152:5.1 (1703.5) 목요일 아침, 날이 새기 전에, 그들은 세베대의 집 가까이 앞바다에서 닻을 내리고 한낮 무렵까지 잠을 청했다. 안드레가 먼저 일어났고, 바닷가에 걸으러 갔다가, 잡일하는 소년과 더불어 물가에서 돌 위에 앉아 계신 예수를 찾아냈다. 군중 가운데 여러 사람과 젊은 전도사들이 밤새, 그리고 이튿날 상당한 시간을 동쪽 산 근처에서 예수를 찾는 데 썼는데도, 어쨋든 한밤이 지난 뒤 얼마 안 되어, 예수와 소년 마가는 호수를 돌아서, 그리고 강을 건너서, 벳세다로 돌아가려고 걷기 시작했다.

152:5.2 (1704.1) 기적으로 먹을 것을 얻어먹고, 배가 차고 마음이 텅 비어 있을 때 그를 임금으로 세우려 했던 5천 명 가운데 겨우 약 5백 명이 끈덕지게 그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벳세다로 돌아왔다는 말을 이들이 받기 전에, 예수는 열두 사도, 그리고 여자들까지 포함해서, 동료들을 모으라고 안드레에게 부탁하며 말했다: “나는 저희와 말하기를 바라노라.” 모두가 준비되었을 때, 예수는 말했다:

152:5.3 (1704.2) “얼마나 오래 내가 너희를 참으랴? 너희는 모두 영적 깨우침이 더디고 살아 있는 믿음이 모자라느냐? 이 여러 달 동안 줄곧 하늘나라의 진리를 가르쳤더니, 그래도 너희는 영적 배려보다 물질적 동기에 지배되고 있느니라. ‘두려워 말라, 가만히 서서 주의 구원을 보라’ 말하며 모세가 믿음 없는 이스라엘 자손을 훈계하는 것을 너희는 성서에서 읽지도 못하였느냐? 그 찬미자가 말하되, ‘너희의 주를 신뢰하라.’ ‘참으라, 주를 기다리고 용기를 내라. 그가 너희의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리라.’ ‘너희의 짐을 주께 던지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 힘을 북돋아주리라. 항상 그를 신뢰하고 너희의 마음을 그에게 토하라, 하나님이 너의 안식처임이라.’ ‘최고자의 비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살리라.’ ‘인간 임금을 신임하는 것보다 주를 신뢰하는 것이 나으니라.’

152:5.4 (1704.3) “그리고 기적을 행하고 물질적 이적을 연출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영적 나라에 들어가라고 설득하지 못할 것을 이제 너희가 모두 깨닫느냐? 우리는 군중을 먹였으나, 이들로 하여금 생명의 빵을 갈급히 찾거나 영적으로 올바른 물을 목마르게 찾도록 이끌지 아니하였도다. 배를 채웠을 때, 저희는 하늘나라로 들어가기를 찾지 아니하였어도 다만 수고할 필요 없이 계속 빵을 먹을까 하여, 오히려 이 세상 임금들의 방식을 좇아서 사람의 아들을 임금으로 선포하려 애썼느니라. 이 모든 것에 너희 가운데 여럿이 얼마큼 참여하였는데, 그것은 하늘의 아버지를 드러내거나 땅에서 그의 나라를 진전시키는 데 아무 효과가 없느니라. 또한 집권자들에게 찬물 끼얹을 듯한 일을 하지 않고도 우리는 나라의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적들이 충분히 있지 아니하냐? 내가 가르친 복음을 너희가 충분히 믿게 하려는 목적으로, 아버지가 눈에 기름을 발라 너희가 보고 귀를 열어 너희가 듣을 수 있게 해주시기를 내가 기도하노라.”

152:5.5 (1704.4) 그리고 나서, 예수는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기 전에 사도들과 함께 며칠 동안 쉬려고 물러나기 바란다고 발표했다. 어떤 제자나 군중도 따라오지 말라고 명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이삼일 쉬고 잠자려고 게네사렛 지역으로 배를 타고 갔다. 예수는 땅에서 일생의 큰 위기를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고, 따라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교통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

152:5.6 (1704.5) 5천 명을 먹였고 예수를 임금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소식은 널리 사람들의 호기심을 일으켰고, 온 갈릴리와 유대에 두루, 종교 지도자와 집권자들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이 큰 기적은 물질에 머리를 쓰고 건성으로 믿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늘나라 복음을 진전시키는 데 아무 효과가 없었으나 예수의 직계 일행, 즉 사도와 가까운 제자들이 가졌던 성향, 기적을 추구하고 임금을 몹시 바라는 성향을 막바지로 이끄는 효과를 낳았다. 이 볼 만한 사건은 가르치고 훈련하고 치유하는 초기 시대의 막을 내렸고, 이로써 하늘나라의 새 복음―신의 아들, 영적 해방, 영원한 구원―의 상급 단계, 더 영적인 단계를 선포하는 이 마지막 해를 개시하기 위하여 길을 예비하였다.

6. 게네사렛에서

152:6.1 (1705.1) 게네사렛 지역에 어느 부유한 신자의 집에서 쉬면서, 예수는 열두 사도와 함께 오후마다 비공식 회의를 가졌다. 하늘나라의 대사들은 심각하고 제 정신이 들고 꾸지람을 받은, 꿈에서 깨어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벌어진 뒤에도, 또 나중의 사건들이 드러낸 바와 같이, 이 열두 사람은 유대인 메시아가 오신다는 개념, 날 때부터 오래 간직했던 개념을 아직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 몇 주 동안의 사건들이 너무나 빠르게 움직여서, 놀란 이 어부들이 사건들의 의미를 충분히 깨달을 수 없었다. 남자와 여자들이 사회적 행위, 철학적 태도, 종교적 확신의 기초와 근본이 되는 개념들을 철저히 널리 바꾸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152:6.2 (1705.2) 예수와 열두 사도가 게네사렛에서 쉬는 동안, 군중은 흩어졌다. 더러는 집으로 더러는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계속 갔다. 열심히 드러내놓고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갈릴리에서만 5만 명이 넘었는데, 한 달이 채 안 되는 동안에 5백 명도 안 되게 줄어들었다. 예수는 사도들에게 대중(大衆)의 환호가 변덕스러움을 그렇게 맛보게 하여, 그들끼리 하늘나라 일을 하도록 버려두고 자신이 떠난 뒤에 그들이 잠시 종교적 히스테리가 그렇게 나타나는 데 의존할 유혹을 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 노력은 어느 정도만 성공했다.

152:6.3 (1705.3) 게네사렛에서 머무르던 둘째 날 밤에, 주는 다시 사도들에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일러주고, 이 말씀을 덧붙였다: “아이들아 보라, 인간의 느낌에 호소하는 것은 잠시요 철저히 실망이 되며, 순전히 사람의 지능에 호소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속이 비고 보람이 없느니라. 오직 인간의 지성 속에 사는 영에게 호소함으로 오래 가는 성공을 얻고 인품의 놀라운 변화를 이룩하기를 바랄 수 있느니라. 그런 변화는 영이 믿음의 빛 속으로―하늘나라로―태어남으로, 어두운 의심을 이처럼 벗어나는 모든 사람의 일상 생활에서 진정한 영의 열매를 풍부하게 맺음으로 당장 나타나느니라.”

152:6.4 (1705.4) 예수는 지적으로 사람들의 주의(注意)를 끌고 집중하는 수법으로서 감정에 호소하는 것을 가르쳤다. 그는 이처럼 자극받고 예민해진 정신이 혼에 이르는 통로라고 하였는데, 혼 속에는 참된 인품을 변화시키는 영구한 결과를 낳기 위하여, 진리를 인식하고 복음의 영적 매력에 반응하는, 사람의 영적 성품이 거한다.

152:6.5 (1705.5) 이렇게 예수는 사도들을 다가오는 충격에 대비하게 하려고 애썼다―겨우 며칠만 있으면 대중이 그를 대하는 태도에 닥칠 위기였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을 없애려고 헤롯 안티파스와 공모할 것이라고 열둘에게 설명했다. 열두 사도는 예수가 다윗의 왕좌에 앉지 않으리라는 것을 (마침내 깨닫지는 못했어도) 비로소 좀더 깨달았다. 영적 진리는 물질의 기적으로 진전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더 잘 깨달았다. 5천 명을 먹인 것과 예수를 임금으로 세우려는 대중의 움직임은 사람들이 기적을 찾고 이적 행하기를 기대하는 태도의 정점이요, 대중이 예수에게 최대의 갈채를 보낸 것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들은 영적 시련과 쓰라린 역경(逆境)의 시절이 다가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희미하게 내다보았다. 이 열두 사람은 하늘나라의 대사로서 맡은 과제의 참 성질이 무엇인가 천천히 깨닫게 되었고, 땅에서 주가 수고하신 마지막 해의 벅차고 힘드는 시련에 대비하여 비로소 단단히 몸을 가다듬었다.

152:6.6 (1706.1) 게네사렛을 떠나기 전에, 예수는 5천 명을 기적으로 먹인 것에 관하여 가르쳤다. 어째서 그가 창조 능력을 이렇게 특별히 나타냈는가 일러주었고 또한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임을 확인할 때까지, 군중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그렇게 굴복한 것이 아니라고 그들을 안심시켰다.

7. 예루살렘에서

152:7.1 (1706.2) 4월 3일 일요일에 예수는 열두 사도만 데리고서, 벳세다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여행길을 떠났다. 군중을 피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의 눈을 끌지 않으려고, 게라사와 필라델피아의 길로 여행했다. 이 여행에서 대중을 가르치는 어떤 일도 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예루살렘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그들이 가르치거나 전도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4월 6일 수요일 저녁 늦게, 예루살렘 가까이 베다니에 도착했다. 이 하루 밤을 나사로ㆍ마르다ㆍ마리아의 집에서 쉬었지만, 이튿날 흩어졌다. 예수는 요한과 함께, 베다니의 나사로 집 가까이, 시몬이라 이름하는 어느 신자의 집에서 묵었다. 가룟 유다와 열심당원 시몬은 예루살렘에서 친구들과 함께 묵었고, 한편 나머지 사도들은 둘씩 다른 집에서 머물렀다.

152:7.2 (1706.3) 예수는 이 유월절 동안에 겨우 한 번 예루살렘에 들어갔고, 축제의 큰 날에 그렇게 했다. 아브너가 예수를 베다니에서 만나려고 예루살렘의 많은 신자들을 데리고 나왔다. 예루살렘에서 이번에 머무르는 동안, 열두 사람은 주에 대한 감정이 얼마나 지독하게 나빠지고 있는가 알게 되었다. 위기(危機)가 다가온다고 모두 믿으면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났다.

152:7.3 (1706.4) 4월 24일 일요일에 예수와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서 벳세다를 향했고, 해안 도시 요파ㆍ케자리아ㆍ프톨레마이스를 거쳐서 갔다. 거기서부터 육로로 라마와 코라진을 지나서 벳세다로 갔고 4월 29일 금요일에 도착하였다. 집에 다다르자 즉시, 예수는 이튿날,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오후 예배에 말씀하도록 회당장에게 허락을 요청하라고 안드레를 보냈다. 이번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설교하라고 허락할 마지막 기회가 되리라는 것을 예수는 잘 알았다.

제 153 편 가버나움에서 위기가

유란시아서

제 153 편

가버나움에서 위기가

153:0.1 (1707.1) 벳세다에 도착한 날, 금요일 저녁에 그리고 안식일 아침에, 사도들은 예수가 어떤 중대한 문제에 심각하게 골똘해 있음을 눈치챘다. 주가 어떤 중요한 문제에 특별히 머리를 쓰고 있음을 알아챘다. 아침을 전혀 들지 않았고, 점심때도 거의 잡숫지 않았다. 안식일 아침 내내, 또 전날 저녁에 열두 사람과 그 동료들은 작은 무리를 지어 집 근처에, 뜰에, 바닷가를 따라서 모여 있었다. 어찌될까 하는 긴장감과 불안한 느낌이 그들 모두에게 덮쳤다. 예루살렘을 떠난 뒤로 예수는 그들에게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53:0.2 (1707.2) 주가 그렇게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고 말이 없는 것을 그들은 몇 달 동안 본 적이 없었다. 시몬 베드로조차 풀이 죽지는 않았어도 우울했다. 안드레는 기운 빠진 동료들을 위하여 무엇을 할지 몰라서 쩔쩔매고 있었다. 나다니엘은 그들이 “폭풍 전의 고요” 한가운데에 있다고 말했다. 토마스는 “보통 아닌 무슨 일이 바야흐로 일어나려 한다”는 의견을 표현했다. 빌립은 다윗 세베대에게 “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알기까지, 군중을 먹이고 재우는 계획을 잊어버리라”고 조언했다. 마태는 금고를 다시 채우려고 다시 새롭게 노력을 기울였다. 야고보와 요한은 회당에서 있을 설교에 대하여 이야기했고, 그 설교의 성질과 규모가 어떨 것인가 많이 추측해 보았다. 열심당원 시몬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아들이 옳음을 입증하고 지지하려고 어떤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개입하려 할지 모른다”는 생각, 실제로는 희망을 입 밖에 냈다. 한편 가룟 유다는 주제넘게 “예수가 5천 명이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선포하는 것을 허락할 용기가 없었고 대담하지 못했음”을 뉘우치면서 아마 마음이 답답하리라고 생각하였다.

153:0.3 (1707.3) 날씨가 아름다운 이 안식일 오후에, 우울하고 위로받지 못한 그런 추종자들의 무리 사이에서 예수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획기적인 설교를 하려고 나섰다. 직계 추종자들 가운데서 영문을 모르는 알패오 쌍둥이 중 하나가 유일하게 즐거운 인사, 행운을 비는 말을 하였다. 그는 예수가 회당으로 가려고 집을 떠날 때, 명랑하게 인사를 드리며 말했다: “아버지가 당신을 돕고, 언제보다도 더욱 큰 군중이 오기를 우리가 기도하나이다.”

1. 무대의 배경

153:1.1 (1707.4)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이 안식일 오후, 3시에 새 가버나움 회당에서, 저명한 신도들이 예수를 맞이했다. 야이루스가 사회를 보았고 예수에게 읽으라고 성서를 건네주었다. 그 전날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53명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도착하였다. 이웃 여러 회당에서 30명이 넘는 지도자와 회당장들이 또한 자리에 있었다. 이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고서 행동했고, 예수와 제자들을 적대하여 공개 투쟁을 개시하려고 온 정통파의 선봉이었다. 이 유대인 지도자들 옆에, 회당의 귀빈 자리에는 헤롯 안티파스의 공식 감시인들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건너 그 형제 빌립의 영토에서 대중이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선포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불안한 보고에 관하여 진상(眞相)을 확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53:1.2 (1708.1) 예수는 불어나는 적들이 공언하던 공개 투쟁이 바로 선포되는 것을 눈앞에 두고 있음을 깨달았고, 대담하게 공격 자세를 취하기로 하였다. 5천 명을 먹였을 때 그는 이들의 물질적 메시아 관념에 도전했다. 이제 다시 이들의 유대인 구원자 개념을 드러내놓고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5천 명을 먹임으로 시작되고 이 안식일 오후 설교로 끝난 이 위기는, 대중의 평판과 갈채의 파도를 겉보기에 가라앉혔다. 이제부터 하늘나라의 일은, 인류의 참된 종교적 형제 정신을 위하여, 오래 지속하는 영적 전향자(轉向者)를 얻는 더 중요한 일에 더욱 관여하게 되었다. 이 설교는 토론하고 논쟁하고 결심하는 기간으로부터, 드러내놓고 투쟁하고 마침내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기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위기를 표시한다.

153:1.3 (1708.2) 주는 많은 추종자가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마침내 그를 버리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잘 알았다. 마찬가지로, 많은 제자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어떤 정신 훈련과 혼의 단련을 거치고 있으며,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의심을 이기게 하고,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완전히 성장한 신앙을 용감하게 주장할 수 있게 만들리라는 것을 알았다. 선과 악이 되풀이되는 여러 상황 사이에 반복하여 선택하는 느린 과정을 통해서 위기에 결정을 내리고 용감히 선택한 것을 갑자기 실천하려고 사람들이 어떻게 준비하는가 예수는 충분히 알았다. 택한 사자들에게 거듭하여 실망을 연습시켰고, 영적 시련에 부닥치는 올바른 길과 그릇된 길 사이에 선택하는 빈번한 시험 기회를 마련하였다. 추종자들이 마지막 시험에 부딪쳤을 때, 이전에 버릇이 된 정신 태도와 영적 반응에 따라서, 생사를 가르는 결정을 내릴 것이라 믿을 수 있음을 알았다.

153:1.4 (1708.3) 땅에서 사신 예수의 일생에서 이 위기는 5천 명을 먹임으로 시작되고 회당에서 이 설교와 함께 끝났다. 사도들의 생애에서 위기(危機)는 회당에서 이 설교로 비롯하여 온전히 한 해 동안 계속되었고, 주가 재판받고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겨우 끝났다.

153:1.5 (1708.4) 예수가 말씀을 시작하기 전, 그날 오후에 그들이 회당에 앉아 있는 동안, 모든 사람의 머리 속에는 꼭 한 가지 큰 신비, 꼭 한 가지 최고의 질문이 있었다. 친구와 적 모두가 꼭 한 가지 일을 깊이 생각하였으니, 이것이었다: “어째서 그가 사람들의 열광이 고조에 달한 것을 그렇게 일부러, 그리고 실질적으로 가라앉혔는가?” 이 설교가 있기 직전과 직후에, 투덜거리는 지지자들의 의심과 실망은 의식하지 못하면서 반대로 커졌고, 궁극에 실제로 미워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가룟 유다가 처음으로 의식하여 저버릴 생각을 품은 것은 회당에서 이 설교가 있은 뒤였다. 그러나 그는 한동안, 그리하고 싶은 온갖 생각에 효과적으로 고삐를 쥐었다.

153:1.6 (1708.5) 누구나 다 어리둥절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예수는 그들을 어이없게 하고 혼란에 빠뜨렸다. 그는 요즈음 전 생애의 특징을 가리키는 초자연 능력을 최대한으로 나타내는 일에 분주하였다. 5천 명을 먹인 것은 땅에서 그의 일생에 유대인이 기대하던 메시아 개념에 가장 크게 호소한 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즉시,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가 신속하고 뚜렷하게, 왕이 되기를 거절함으로 이 특별한 이점(利點)이 사라졌다.

153:1.7 (1709.1) 금요일 저녁에, 그리고 안식일 아침에 다시, 예수가 회당에서 말씀하는 것을 막으려고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야이루스를 설득하려고 열심히 수고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 모든 간청에 야이루스는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나는 이 요청을 허락했고 내 말을 어기지 않겠소이다.”

2. 획기적인 설교

153:2.1 (1709.2) 신명기에서 보는 대로, 율법에서부터 읽으면서 예수는 이 설교의 서두를 꺼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 이 민족이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자 하면, 죄지어 생긴 저주가 확실히 저희를 따라잡으리라. 주는 너희가 적들에게 얻어맞게 만들겠고, 너희는 땅에 있는 모든 나라로 옮겨질지니라. 주는 너희, 그리고 너희 위에 세운 왕을 이상한 민족의 손에 넘기리라. 너희는 모든 나라 사이에서 놀라운 일, 속담, 웃음거리가 될지니라. 너희의 아들딸은 포로 생활을 할지니라. 너희는 아주 낮아지는 반면에 너희 중에 낯선 사람들이 높은 권한에 오를지니라. 이런 일이 너희와 너희 자손에게 영원히 다가오리니, 너희가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음이라. 그러므로 너희를 대항하여 올 적들을 너희가 섬길지니라. 너희는 배고픔과 목마름을 견디고, 이 이방의 쇠 멍에를 질지니라. 주는 멀리서, 땅 끝으로부터, 너희를 대적하여 한 민족을 데려오리니, 너희는 그 민족의 말을 알지 못하며 저희는 얼굴이 사나운 민족이요 너희를 하찮게 여길 민족이라. 너희가 믿고 있던 담, 높은 강화된 담이 무너질 때까지 저희가 너희의 마을 모두를 둘러싸겠고, 온 땅이 저희의 손에 넘어가리라. 이런 일이 일어나리니, 너희가 포위된 이 시절에, 적들이 철저히 너희를 압박하기 때문에, 너희 몸이 낳은 자식, 너희 아들딸의 고기를 먹기까지 몰리는 일이 생기리라.”

153:2.2 (1709.3) 예수가 이렇게 읽기를 마쳤을 때, 예언서로 넘어가서 예레미야로부터 읽었다: “‘내 종, 내가 너희에게 보낸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자 하면, 나는 이 집을 실로처럼 만들겠고, 이 도시를 땅의 온 민족에게 저주가 되게 만들리라.’ 사제와 선생들이 예레미야가 주의 집에서 이렇게 말씀하심을 들었느니라. 그리고 이런 일이 생겼더라. 주가 모든 사람에게 이르라 명령하신 모든 것을 예레미야가 말하기를 그쳤을 때, 사제와 선생들이 그를 붙잡고 ‘네가 반드시 죽을지니라’ 하였더라. 모든 사람이 주의 집에서 예레미야를 둘러쌌더라. 유다의 제후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저희는 예레미야를 재판하였더라. 그리고 나서 사제와 선생들이 제후들과 모든 사람에게 이르되 ‘이 사람은 죽어 마땅하니, 우리 도시에 못되게 예언하였고 그가 말한 것을 바로 여러분의 귀로 들었나이다.’ 다음에 예레미야가 모든 제후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더라, ‘네가 들은 모든 말로 이 집을 적대하여, 그리고 이 도시를 적대하여 예언하라고 주가 나를 보내셨느니라. 그런즉 너희에게 선포된 악을 너희가 피하도록, 자 너희의 행실을 고치고 너희가 하는 일을 개혁하며, 주 너희 하나님의 목소리에 복종하라. 나에 대해서 말하면, 보라 내가 너희 손 안에 있느니라. 너희 눈에 좋게, 옳게 보이는 대로 나를 처분하라. 그러나 분명히 알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너희가 죄 없는 피를 너희 몸에, 그리고 이 민족에게 퍼부으리니, 이는 참으로 주가 이 모든 말씀을 너희 귀에 이르라고 나를 보내셨음이라.’

153:2.3 (1710.1) “그 시절의 사제와 선생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애썼으나, 판관(判官)들이 찬성하려 하지 않았는지라. 그래도 그가 경고한 말씀 때문에, 더러운 지하 감옥에서 예레미야의 겨드랑이가 진창에 빠질 때까지 밧줄로 저희가 그를 내려보냈더라. 예레미야 선지가 다가오는 정치적 몰락(沒落)을 동포에게 경고하라는 주의 명령에 복종했을 때, 이 사람들이 그에게 이렇게 하였더라. 오늘날, 너희에게 묻고자 하니, 이 민족이 영적으로 멸망하는 날을 감히 경고하는 사람을 저희의 주사제와 종교 지도자들이 어찌하겠느냐? 주의 말씀을 감히 선포하는 선생, 하늘나라의 입구로 이끄는 빛의 길을 걷기를 너희가 거절한다고 겁 없이 지적하는 선생을, 너희도 또한 죽이려 애쓰겠느냐?

153:2.4 (1710.2) “땅에서 내 사명의 증거로 너희가 무엇을 찾느냐? 가난한 자와 버림받은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동안, 우리는 권세와 권력의 자리에 있는 너희를 다치지 않고 두었노라. 우리는 너희가 존중하는 것을 조금도 공격하지 않았거니와 오히려 겁에 질린, 사람의 혼에게 새 자유를 선포하였노라. 나는 내 아버지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적 형제 단체, 곧 하늘나라를 땅에서 세우려고 세상으로 왔노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여러 번 너희에게 상기시켰는데도, 그래도 증거로서 영적 변화와 새롭게 만드는 일을 더욱 하신 것 외에도 너희에게 물질적 이적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내 아버지가 허락하였느니라.

153:2.5 (1710.3) “너희가 내 손에서 무슨 새로운 표징을 구하느냐? 내가 선언하노니, 너희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이미 넉넉한 증거를 가졌도다. 진실로 진실로, 오늘 내 앞에 앉은 여러 사람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어느 길로 갈 것인가 택할 필요가 생겼느니라. 요수아가 너희 선조에게 이른 것 같이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누구를 섬길까 오늘 택하라.’ 오늘,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이 갈림길에 서 있도다.

153:2.6 (1710.4) “저 건너편에서 군중이 배불리 먹고 난 뒤에 나를 찾을 수 없었을 때, 너희 중에 더러는 나를 추적하려고, 한 주 전 폭풍우가 있을 때 근처에서 대피했던 티베리아스의 고기잡이 배들을 고용하였으니, 무엇 때문이냐? 진리와 올바름을 찾거나, 동료 인간을 어떻게 섬기고 보살피는가 더 잘 알고자 한 것이 아니라! 아니라, 너희가 수고하지 않고 얻은 빵을 더 많이 가지려 함이라. 생명의 말씀으로 혼을 채우려 함이 아니요, 오직 쉬이 얻는 빵으로 너희 배를 채울까 하였음이라. 메시아가 온다면, 택한 백성 모두를 위하여 생활을 즐겁고 안일하게 만들 이적을 행하리라고 너희가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았느니라. 그러면 이렇게 가르침받은 너희가 빵과 물고기를 몹시 바라는 것이 이상하지 않도다. 그러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그런 것은 사람의 아들의 사명이 아니라. 나는 영적 자유를 선포하고 영원한 진리를 가르치고 살아 있는 믿음을 길러주려고 왔노라.

153:2.7 (1710.5) “형제들아, 썩어 버리는 고기를 그리워 말고 차라리 영생(永生)에 이르기까지 양분을 주는 영적 양식을 찾으라. 이것이 받아서 먹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아들이 주는 생명의 빵이니, 아버지가 이 생명을 한없이 아들에게 주셨음이라.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이까’ 너희가 물었을 때, 나는 알기 쉽게 일렀노라: ‘하나님이 보낸 자를 너희가 믿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153:2.8 (1710.6) 그리고 나서, 이 새 회당 문의 가로대를 장식하던 항아리, 포도송이로 치장된 만나 항아리의 무늬를 가리키면서 예수는 말했다: “너희 선조가 황야에서 만나―하늘의 빵―을 먹었다고 너희가 생각해 왔으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은 세상의 빵이었도다. 모세는 너희 조상에게 하늘에서 온 빵을 주지 않았거니와 이제 내 아버지는 너희에게 참 생명의 빵을 주려고 준비가 되었느니라. 하늘의 빵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이요, 세상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느니라. 우리에게 이 생명의 빵을 달라 너희가 말하면, 나는 대답하리라: 내가 이 생명의 빵이라. 내게로 오는 자는 배고프지 않겠고,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이 마르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나를 보고 나와 함께 살며 내가 한 일을 보아 왔거늘, 아직도 내가 아버지로부터 온 것을 믿지 않느니라.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두려워 말라. 아버지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다 내게로 오겠고, 내게로 오는 자는 결코 쫓겨나지 아니하리라.

153:2.9 (1711.1) “이제, 이번을 마지막으로 너희에게 선언하고자 하니, 내가 땅에 내려온 것은 나 자신의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자 함이라. 그가 나에게 주신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는 것, 이것이 나를 보내신 이의 마지막 뜻이라. 그리고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생을 얻으리라. 바로 어제 내가 너희 몸을 위하여 너희에게 빵을 먹였고, 오늘 나는 너희의 주린 혼을 위하여 너희에게 생명의 빵을 내미노라. 그때 이 세상의 빵을 그리 달갑게 먹었던 것 같이, 이제 너희는 영의 빵을 받겠느냐?”

153:2.10 (1711.2) 회중을 둘러보려고 예수가 한 순간 멈추자, 예루살렘에서 온 한 선생(산헤드린의 회원)이 일어서서 물었다: “너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요, 모세가 황야에서 우리 조상에게 준 만나는 그렇지 않다 하니, 내가 너의 말을 알아들었느냐?” 그리고 예수는 그 바리새인에게 대답했다: “네가 똑바로 알아들었느니라.” 그러자 바리새인이 말했다: “그러나 너는 나사렛 예수,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네 남동생과 누이들 뿐 아니라 네 아비와 어미도 우리 중 여럿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느냐? 그러면 어째서 네가 여기 하나님의 집에 나타나서, 네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선언하느냐?”

153:2.11 (1711.3) 이때가 되자 회당에는 사람들이 많이 수군거렸고, 큰 소동이 일어날 듯하여 예수는 일어나서 말했다: “우리가 참자, 정직하게 살펴보아도 진리는 결코 상하지 않느니라. 나는 네 말대로이나, 그보다 더한 사람이라. 아버지와 나는 하나요, 아들은 오직 아버지가 가르치는 것을 행하며,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시는 모든 사람을 아들은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느니라. ‘너희는 모두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을지니라,’ 그리고 ‘아버지가 가르치는 자는 또한 아들의 말을 들으리라’하고 예언서에 쓰인 것을 너희가 읽었느니라. 깃드는 아버지 영의 가르침에 무릎을 꿇는 자마다 궁극에 나에게 오리라. 누구라도 아버지를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 사람 안에 사는 까닭이라. 하늘에서 내려온 아들은 분명히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이 아들을 참으로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느니라.

153:2.12 (1711.4) “내가 이 생명의 빵이라. 너희 조상은 황야에서 만나를 먹었고 이제 죽었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이 빵을 사람이 먹으면 그 영이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내가 되풀이하노니, 내가 이 생명의 빵이요, 하나님과 사람의 이 통일된 성품을 실현하는 사람마다 언제까지나 살리라. 받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는 이 생명의 빵은 바로 나의 살아 있는 통합된 성품이라. 아들 속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와 하나가 된 아들―이것이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나의 계시요, 모든 나라에게 내가 주는 구원의 선물이라.”

153:2.13 (1711.5) 예수가 말씀을 마치자 회당 지도자가 회중을 해산했지만 그들은 떠나려 하지 않았다. 예수 둘레에 밀어닥쳐 더 물으려 하였고, 한편 다른 사람들은 중얼거리고 자기들끼리 말다툼을 하였다. 이 상태가 세 시간이 넘어 계속되었다. 청중이 마침내 흩어지기까지는 7시가 훨씬 넘었다.

3. 예배 후의 모임

153:3.1 (1712.1) 이 예배 후의 모임에서 예수에게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더러는 어리둥절한 제자들이 물은 것이었다. 그러나 트집잡는 불신자들이 더욱 많이 물었고 이들은 오로지 예수를 난처하게 만들고 옭아매려고 했다.

153:3.2 (1712.2) 방문하는 바리새인들 가운데 하나가 등불 받침에 올라서면서 이렇게 소리쳐 물었다: “당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우리에게 이르시오이다. 어찌 당신이 우리에게 당신의 살을 먹으라거나 피를 마시라고 줄 수 있소이까? 당신의 가르침을 실행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소이까?” 예수는 이 질문에 대답하여 말했다: “내 살이 생명의 빵이라거나 내 피가 생명의 물이라고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였노라. 그러나 육체를 입은 내 일생이 하늘의 빵을 주는 것이라 일렀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육체로 내려준 사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현상은 신의 영양분과 대등한 체험의 현실이니라. 너희는 내 살을 먹거나 내 피를 마실 수 없으나 내가 아버지와 영적으로 하나인 것 같이, 너희는 영적으로 나와 하나가 될 수 있도다. 너희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으로 영양을 받을 수 있으니, 그 말씀은 정말로 생명의 빵이요 이 빵을 필사 육체의 모습으로 내려주셨느니라. 너희의 혼은 신다운 영에게서 물을 받을 수 있고 그 영은 참으로 생명의 물이라. 아버지가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깃들고 지도하기를 바라는가 보여주려고 아버지가 나를 세상으로 보내셨고,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로, 깃드는 하늘 아버지를 알고 그의 뜻을 행하기를 늘 구하도록 격려하고자 육체를 입은 이 생명을 내가 살아 왔노라.”

153:3.3 (1712.3) 그리고 나서 예수와 사도들을 지켜보고 있던 예루살렘 첩자들 가운데 하나가 말했다: “우리가 보아하니, 빵을 먹기 전에 당신이나 사도들이 적절히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더러워지고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그런 관습은 장로들의 율법을 어기는 것인 줄 잘 아심이 틀림없나이다. 마시는 잔과 먹는 그릇도 당신은 제대로 씻지 않나이다. 어째서 조상의 전통과 장로들의 율법을 그렇게 경시함을 보이시나이까?” 그의 말을 듣자, 예수는 대답했다: “어찌하여 전통의 율법으로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계명은 이르되,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그리고 필요하면 너희의 물질을 부모와 나누라고 지시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전통의 율법을 세우니, 이것이 의무를 지키지 않는 아이들로 하여금 부모를 도왔을지 모르는 돈을 ‘하나님께 바쳤다’ 말하는 것을 허락하느니라. 아이들이 나중에 모든 그런 돈을 자기의 안락을 위하여 쓰는데도, 이처럼 장로들의 율법은 그러한 교활한 아이들의 책임을 덜어주느니라. 무슨 까닭에, 너희가 이 방법으로 자신의 전통으로 계명을 무효로 만드느냐?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에 대하여 잘도 예언하여 말하였더라: ‘이 민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여도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헛되이 저희가 나를 숭상하고, 사람들의 교훈을 저희의 교리로 가르치는도다.’

153:3.4 (1712.4) “어떻게 너희가 사람들의 전통을 굳게 붙들고 계명을 버리는가 너희가 잘 알 수 있느니라. 자신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즐거이 물리치는도다. 많은 다른 방법으로 너희는 감히 너희의 가르침을 율법과 선지자 위에 올려놓느니라.”

153:3.5 (1712.5) 그리고 나서 예수는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논평하였다. 그는 말했다: “그러나 너희는 다 내 말을 귀담아들으라. 사람을 영적으로 더럽히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입에서,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 그러나 사도들조차도 그 말씀의 뜻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으니, 시몬 베드로도 또한 물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말씀을 듣는 자들 가운데 더러가 필요 없이 기분 상하지 않도록, 당신이 이 말씀의 뜻을 우리에게 풀이해 주시겠나이까?” 그리고 나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말했다: “너도 알아듣기가 어려우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심지 않은 초목마다 뿌리가 뽑힐 것을 네가 모르느냐? 진리를 알고자 하는 자에게 이제 눈길을 돌리라. 사람들에게 진리를 사랑하라고 강요할 수 없느니라. 이 선생들 가운데 다수가 눈먼 안내자이라. 소경이 소경을 이끌면, 모두가 구렁에 빠질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덕적으로 사람을 더럽히고 영적으로 오염시키는 것에 관하여 너희에게 진리를 일러주는 동안, 귀담아들으라. 내가 선언하노니,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입으로 몸에 들어가거나, 눈과 귀를 통해서 정신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 속에서 생길 수 있는 잘못과, 그러한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의 언행에서 표현되는 그 잘못으로 사람이 더러워지느니라. 질투ㆍ자만심ㆍ분노ㆍ복수ㆍ욕설, 거짓 증거와 함께, 악한 생각, 살인ㆍ도둑질ㆍ간음과 같은 사악한 계획이 마음 속에서 솟아나오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요, 저희가 예식 면에서 더러운 손으로 빵을 먹는 것이 아니라.”

153:3.6 (1713.1)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바리새인 위원들은 신성을 모독한 죄목이나 유대인의 신성한 율법을 우롱한 죄목으로 예수를 체포해야 한다고 이제 거의 확신했다. 그러므로 장로들의 전통, 즉 이른바 민족의 구전(口傳) 율법을 더러 토론하고, 가능하면 공격하도록 그를 말려들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물이 아무리 귀하더라도, 전통에 노예가 된 이 유대인들은 식사할 때마다 먹기 전에 예식에서 요구하는 손 씻기를 결코 거르려 하지 않았다. “장로들의 계명을 어기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이 그들의 관념이었다. 첩자들이 이렇게 물은 것은 예수가 “구원은 깨끗한 손이 아니라 깨끗한 마음의 문제이라”고 말했다는 보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관념은 일단 사람의 종교의 일부가 되었을 때, 벗어나기 어렵다. 이날 이후에 여러 해가 지났어도 사도 베드로는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에 대한 이러한 전통을 아직도 두려워하는 압박감에 빠져 있었고 특별하고 눈에 선한 꿈을 꾼 뒤에야 마침내 벗어났다. 이 유대인들은 손 씻지 않고 먹는 것을 창녀와 거래하는 것과 같은 각도에서 보았고, 두 가지 다 똑같이 추방되는 벌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때, 이 모든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153:3.7 (1713.2) 주는 이처럼 구전 율법―장로들의 전통―이 대표하는 랍비 체계의 규칙, 규제 전체가 어리석은 것을 논의하고 폭로하기로 결심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성서의 가르침보다도 유대인에게 더 거룩하고 속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종교 지도자들과 이제 더 터놓고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막으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가 왔음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는 거리낌없이 말했다.

4. 회당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

153:4.1 (1713.3) 이 예배 후 모임에서 한창 토론하는 가운데, 예루살렘에서 온 한 바리새인이, 다루기 힘들고 반항하는 귀신에 들린 한 미친 소년을 예수께 데리고 왔다. 이 미친 아이를 예수 앞으로 이끌면서 그는 말했다: “이와 같은 병에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나이까? 당신은 악귀들을 내쫓을 수 있나이까?” 소년을 보았을 때, 주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들었다. 소년에게 오라고 손짓하고 나서,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니, 그에게서 나오라. 네가 돌아오지 않도록 처리하라고 너의 충실한 동료들 중 하나에게 내가 명하노라.” 즉시 그 소년은 정상이 되고 제 정신이 들었다. 이것은 예수가 한 인간에게서 처음으로 “악령”을 정말로 쫓아낸 경우이다. 전에 있었던 모든 경우는 다만 악귀에 들렸다고 생각된 경우였지만 이것은 그 시절에 오순절 직전까지 때때로 일어났다시피, 정말로 악마에 들린 경우였다. 오순절에 주의 영(靈)이 모든 육체 위에 부어졌고, 이 하늘의 몇몇 반역자가 어떤 불안정한 부류의 인간들을 속여 이용하는 것을 언제까지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153:4.2 (1714.1) 사람들이 놀라워하자, 바리새인 가운데 하나가 일어서서, 악마들과 결탁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이 악마를 내쫓으면서 사용한 표현에 그들이 서로 아는 처지임을 예수가 인정했다고 비난하였다. 더 나아가서, 예수가 악마의 두목인 비엘세붑의 권능을 입어서 이른바 그의 모든 기적을 일으켰다고 예루살렘의 종교 선생과 지도자들이 전에 결정하였다고 말했다. 그 바리새인은 말했다: “이 사람과 상관하지 말라. 그는 사탄과 함께 일하느니라.”

153:4.3 (1714.2) 그리고 나서 예수가 말했다: “어찌 사탄이 사탄을 내쫓을 수 있느냐? 자기들끼리 갈라져 싸우는 나라는 설 수 없느니라. 한 집에서 서로 갈라져 싸우면, 곧 황폐해지느니라. 뭉치지 않으면 한 도시가 포위 공격을 견딜 수 있느냐? 사탄이 사탄을 내쫓으면, 그는 자신에 대항하여 싸우느니라. 그러면 어찌 그 나라가 서겠느냐? 그러나 너희가 모두 알아야 할지니, 아무도 힘센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서 먼저 그 사람을 힘으로 이기고 묶어놓지 않으면, 그의 물건을 빼앗을 수 없느니라. 그래서 내가 비엘세붑의 힘을 입어 악마들을 내쫓으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으로 악마들을 내쫓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의 재판관이 될지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내가 악마들을 내쫓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참으로 너희에게 다가왔느니라. 너희가 편견으로 눈이 멀고 두려움과 자만 때문에 잘못 인도받지 않으면, 악마들보다 더 큰 사람이 너희 사이에 서 있음을 쉽게 깨달으리라. 너희로 인하여 이렇게 선포할 수밖에 없나니, 나와 함께 있지 않은 자는 나를 적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이지 않는 자는 사방으로 흩어지느니라. 두 눈을 뜨고, 미리 계획한 악의(惡意)로, 알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악마의 일로 주제넘게 돌리고자 하는 너희에게 내가 엄숙히 경고하고자 하노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의 모든 죄, 아니 너희의 신성 모독조차 모두 용서를 받으리라. 그러나 깊이 생각한 끝에 사악한 뜻으로 하나님을 거슬러 모독하는 자는 누구든지 결코 용서를 얻지 못하리라. 그렇게 끈질기게 불의를 저지르는 자는 결코 용서를 구하지도 받지도 않으리니, 저희는 신의 용서를 영원히 물리치는 죄가 있느니라.

153:4.4 (1714.3) “너희 가운데 여럿이 오늘 갈림길에 다다랐고, 너희는 아버지의 뜻과 자신이 고른 어두운 길 사이에 처음으로 불가피한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렀느니라. 이제 택하는 그대로, 너희는 궁극에 그렇게 될지니라. 너희는 나무를 좋게 만들고 그 열매를 좋게 만들어야 하나니, 그렇지 않으면 나무가 썩고 그 열매가 썩으리라. 내가 선언하노니, 내 아버지의 영원한 나라에서는 열매로 그 나무를 알아보느니라. 그러나 너희 가운데 더러는 독사와 같고, 이미 악을 택하였으매, 어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느냐? 결국 너희 마음 속에 가득한 악을 너희의 입으로 뱉아내느니라.”

153:4.5 (1714.4) 그리고 나서 또 다른 바리새인이 일어나서 말했다: “선생이여, 당신이 가르칠 권한과 권리를 확증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찬성할 표징, 미리 정해진 표징(標徵)을 우리에게 주시기 바라나이다. 당신이 그렇게 주선하는 데 찬성하시겠나이까?” 그리고 이 말을 듣자, 예수는 말했다: “믿음이 없고 표징을 찾는 이 세대가 표시를 찾는도다. 그러나 너희가 이미 받은 것, 그리고 너희 가운데서 사람의 아들이 떠날 때 너희가 볼 것 외에, 아무런 표징을 받지 못할지니라.”

153:4.6 (1714.5) 말씀을 마치고 나서 사도들은 그를 둘러쌌고, 회당 바깥으로 인도했다. 말없이 그들은 벳세다까지 함께 집으로 길을 떠났다. 주의 가르치는 전술이 갑자기 바뀐 것에 모두가 놀랐고 얼마큼 두려워졌다. 그들은 주가 그렇게 투쟁하는 태도로 행동하는 것을 보는 데 도무지 익숙하지 않았다.

5. 토요일 저녁

153:5.1 (1715.1) 여러번 예수는 사도들의 희망을 산산이 조각냈고, 가장 좋아하는 소망을 거듭하여 짓밟았다. 그러나 어떤 실망스러운 시간이나 슬픈 기간도 지금 그들을 휩쓴 것과 같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 그들의 신변의 안전에 관한 진짜 두려움이 우울한 느낌과 함께 섞였다. 민중이 갑자기, 철저히 그들을 저버린 데 그들 모두가 너무나 소스라치게 놀랐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바리새인들이 뜻밖에 대담해지고 단호한 결의를 나타낸 것에 그들은 또한 얼마큼 놀라고 당황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가 갑자기 전술을 바꾼 것에 어리둥절했다. 보통 상황에서는 이렇게 더 투쟁하는 태도가 나타난 것을 반가워했을 터이지만, 실제로 일어난 바와 같이, 이것은 기대하지 않았던 많은 것과 함께,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

153:5.2 (1715.2) 이제, 이 모든 걱정 위에, 그들이 집에 도착했을 때 예수는 잡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몇 시간 동안 한 2층 방에서 혼자 계셨다. 거의 한밤이 되어서야, 전도사들의 지도자 요압이 돌아와서, 동료들 가운데 약 3분의 1이 그 운동을 버리고 갔다고 보고했다. 저녁 내내 충성스러운 제자들이 오갔고, 주에 대한 감정의 돌변이 가버나움에 널리 퍼졌다고 보고했다. 예루살렘에서 온 지도자들은 재빨리 이 불만스러운 감정에 부채질하고,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멀리하는 운동을 조장하려고 애썼다. 이 시련의 시간에, 열두 여인은 베드로의 집에서 회의를 열었다. 대단히 당황하였지만, 아무도 버리고 떠나지 않았다.

153:5.3 (1715.3) 자정이 조금 지났을 때 예수가 2층 방에서 내려와서 열두 사도와 그 동료들 가운데 섰는데, 이들은 모두 30명쯤 되었다. 그는 말했다: “하늘나라가 이렇게 체질하여 가려내는 것이 너희를 괴롭힘을 헤아리나 이는 피할 수 없느니라. 아직도, 모든 훈련을 받은 뒤에도 너희는 내 말을 듣고 실수할 무슨 좋은 까닭이 있었느냐? 하늘나라가 이 미지근한 군중과 마지못해 믿는 제자들을 떨어버린 것을 보고서, 너희는 어찌하여 두려움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느냐? 하늘나라의 영적 가르침이 새 영광 속에 빛나려고 새 날이 밝아오는 데, 어찌하여 너희는 슬퍼하느냐? 이 시험을 견디기 어려워한다면,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때, 너희가 무슨 일을 하겠느냐? 내가 이 세상으로 오기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갈 때를 위하여 너희가 언제, 어찌 준비하겠느냐?

153:5.4 (1715.4) “사랑하는 자들아, 되살아나는 것은 영(靈)임을 너희가 기억해야 하고, 살과 그에 관계된 모든 것은 전혀 유익하지 않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준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라. 기운을 내라!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았노라. 이 며칠 동안 분명히 한 말에 많은 사람이 기분을 상하리라. 내 제자들 가운데 여럿이 돌아갔다는 말을 너희가 이미 들었고 저희는 이제 더 나와 함께 다니지 않느니라. 건성으로 믿는 이 사람들이 길가에서 떨어져 나갈 것을 처음부터 알았노라. 내가 너희 열두 사람을 골라서 하늘나라의 대사로 따로 세우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이와 같은 때에 너희도 또한 저버리고자 하느냐? 너희 하나하나가 자기 믿음을 들여다볼지니, 너희 가운데 하나가 크게 위험한 까닭이라.” 예수가 말씀을 마치고 나서 시몬 베드로가 말했다: “예, 주여, 우리는 슬프고 어리둥절하지만 당신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리이다. 당신은 우리에게 영생(永生)의 말씀을 가르쳤나이다. 우리는 당신을 믿어 왔고 지금까지 당신을 따라왔나이다. 우리는 돌아가지 않겠사오니, 하나님이 당신을 보내셨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니이다.” 베드로가 말을 마치자, 그의 충성 서약을 승인한다는 뜻으로 모두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153:5.5 (1716.1) 그리고 나서 예수가 말했다: “너희는 가서 쉬라, 바쁜 때가 우리에게 다가왔음이라. 바삐 움직일 시절이 바로 앞에 다가왔느니라.”

제 154 편 가버나움에서 보낸 마지막 삼주

유란시아서

제 154 편

가버나움에서 보낸 마지막 삼주

154:0.1 (1717.1) 4월 30일, 중대한 그 토요일 밤에 풀이 죽고 어리둥절한 제자들에게 예수가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말씀을 하는 동안, 티베리아스에서 헤롯 안티파스, 그리고 예루살렘 산헤드린을 대표하는 특별 위원 집단 사이에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헤롯에게 예수를 체포하라고 재촉했고, 예수가 민중에게 분쟁을, 아니 반란까지도 선동하고 있음을 납득시키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헤롯은 예수를 정치범으로 다루어 행동을 취하기를 거절하였다. 사람들이 예수를 임금으로 선포하려고 했을 때 호수 건너편에서 일어난 사건과 어떻게 그가 그 제안을 물리쳤는가 헤롯의 조언자들이 이미 정확하게 보고했다.

154:0.2 (1717.2) 헤롯의 정식 가족의 한 사람인 추자의 아내는 여인 봉사 집단에 속했는데 추자는 예수가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간섭하기를 제안하지 않았다, 오직 신자(信者)들의 영적 형제 정신을 정착시키는 데만 아랑곳한다, 그 정신을 하늘나라라 부른다는 것을 헤롯에게 알려주었다. 헤롯은 추자의 보고를 신뢰했고, 너무 믿어서 예수의 활동에 간섭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이때, 예수에 대한 헤롯의 태도는 세례자 요한을 미신으로 두려워하는 영향을 받았다. 헤롯은 아무것도 믿지 않지만 만사를 두려워한, 종교를 버린 유대인이었다. 요한을 사형에 처한 것 때문에 양심이 거리꼈고, 그는 예수를 해치려는 이 음모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그는 예수가 치유한 것으로 보이는 많은 병의 사례를 알고 있었고, 그는 예수가 선지자가 아니면 비교적 해롭지 않은 광신자라고 여겼다.

154:0.3 (1717.3) 반역하는 시민을 그가 두둔한다고 케자에게 보고하겠다고 유대인들이 위협했을 때 헤롯은 그들을 회의실에서 쫓아내라 명령했다. 이처럼 문제는 한 주 동안 잠잠했고, 그동안에 예수는 곧 흩어지기 위하여 추종자들을 준비시켰다.

1. 한 주 동안의 회의

154:1.1 (1717.4) 5월 1일부터 5월 7일까지 세베대의 집에서 추종자들과 함께 예수는 사사로운 회의를 가졌다. 오직 단련받고 신뢰를 얻은 제자들만 이 회의에 입장이 허락되었다. 이때 바리새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수를 지지한다고 드러내놓고 선언할 정신적 용기를 가진 제자들이 겨우 약 1백 명 있었다. 이 무리와 함께 그는 아침ㆍ오후ㆍ저녁에 회의를 열었다. 작은 일행의 질문자들이 오후마다 바닷가에서 모였고, 여기서 전도사나 사도들이 더러 그들에게 강연하였다. 이 무리는 50명이 넘는 적이 드물었다.

154:1.2 (1717.5) 이 주 금요일에 가버나움 회당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집을 예수와 모든 추종자에게 닫는다고 공식(公式) 결정을 내렸다. 이 조처는 예루살렘 바리새인들의 선동을 받아서 취해졌다. 야이루스는 우두머리 회당장 자리에서 물러났고, 드러내놓고 예수와 한 편이 되었다.

154:1.3 (1718.1) 마지막 바닷가 회의는 5월 7일 안식일 오후에 열렸다. 예수는 그때 모인, 150명이 채 안 되는 사람들에게 말씀했다. 이 토요일 밤은 예수와 그의 가르침의 인기가 가장 낮은 수준까지 내려간 때를 표시하였다. 그때부터 계속, 우호적인 감정이 꾸준하고 느리기는 해도, 더 건전하고 믿을 만하게 퍼졌다. 새 추종자들은 영적 믿음과 참된 종교적 체험의 기초, 전보다 더 튼튼한 기초 위에 뿌리를 두었다. 주를 따르던 사람들이 지녔던 물질적 하늘나라 개념, 그리고 그보다 더 이상적이고 영적인, 예수가 가르친 개념, 이 두 가지가 얼마큼 섞이고 절충하는 과도기 단계가 이제 분명히 끝났다. 이제부터 계속하여 규모가 더욱 크게, 원대한 영적 함축성을 가지고 하늘나라 복음은 더욱 드러내놓고 선포되었다.

2. 한 주의 휴식

154:2.1 (1718.2) 서기 29년, 5월 8일, 일요일, 예루살렘에서 산헤드린은 팔레스타인의 모든 회당을 예수와 그 추종자들에게 닫는다는 법령을 통과했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이 새로이, 전례 없이 권한을 침해한 것이었다. 이때까지 각 회당은 예배자들의 독립된 회중으로 존재하고 활동했으며, 자체 이사회의 지배를 받고 그 지시를 받았다. 오직 예루살렘의 회당들이 산헤드린의 권한에 지배를 받고 있었다. 산헤드린의 이 즉결 행위에 뒤이어, 그 회원 다섯 명이 사퇴했다. 사자 1백 명이 이 법령을 전하고 집행하려고 즉시 파송되었다. 2주의 짧은 기간에 헤브론의 회당을 제외하고, 팔레스타인의 모든 회당(會堂)이 이 산헤드린 성명서에 순응했다. 헤브론의 회당 지도자들은 산헤드린이 자기들의 집회에 대하여 그런 관할권을 행사하는 권리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예루살렘의 포고에 이렇게 찬성하지 않은 것은 예수의 운동에 동정하기보다는 회중(會衆)이 자치한다는 주장에 근거를 두었다. 그 뒤에 얼마 있다가 헤브론 회당은 불에 타버렸다.

154:2.2 (1718.3) 바로 이 일요일 아침에 예수는 한 주의 휴가를 선언했다. 제자들 모두가 집이나 친구들에게 가서 시달린 혼을 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격려하는 말을 하라고 재촉했다. 그는 말했다: “너희는 하늘나라가 진전되기를 기도하면서, 사방으로 가서 놀거나 물고기를 잡으라.”

154:2.3 (1718.4) 쉬는 이 한 주간은 예수에게 바닷가 근처에 있는 여러 가족과 무리를 찾아볼 수 있게 하였다. 그는 또한 다윗 세베대와 함께 몇 번 물고기를 잡으러 갔고, 그동안 대체로 혼자서 다녔지만, 다윗이 가장 신뢰하는 사자 두셋이 언제나 근처에서 얼씬거리고 있었다. 이들은 예수의 신변 보호에 관하여 그 우두머리로부터 분명한 명령을 받았다. 쉬는 이 한 주 동안 어떤 모양으로도 대중을 가르치는 일이 없었다.

154:2.4 (1718.5) 이 주에는 나다니엘과 야고보 세베대가 가볍지 않은 병을 앓았다. 사흘 낮과 밤 동안 고통스러운 소화기 질병으로 격심하게 앓았다. 셋째 날 밤에 예수는 야고보의 어머니 살로메를 쉬라고 보냈고 한편 그는 앓고 있는 사도들을 보살폈다. 물론, 예수는 한 순간에 이 두 사람을 고칠 수 있었지만, 이것은 시공(時空)의 진화 세계들에서 사람의 아이들이 겪는 이런 보통의 곤경과 질병을 다루는 데 아들이나 아버지가 쓰는 방법이 아니다. 한 번도, 육체를 입은 파란 많은 일생을 통해서 내내, 예수는 땅에 있는 가족의 어떤 식구에게나 또는 직계 추종자 중에 누구를 위해서도, 어떤 종류의 초자연적 보살핌도 베풀지 않았다.

154:2.5 (1719.1) 필사 인간은 그 진화하는 혼이 성장하고 발전하며, 점진적으로 완전해지도록 마련된 체험 훈련의 일부로서, 우주의 어려움과 마주쳐야 하고 행성의 장애물에 부닥쳐야 한다. 인간의 혼을 영답게 변화시키는 것은 광범위한 실제의 우주 문제를 교육으로 해결하는 체험을 피부로 겪기를 요구한다. 동물의 천성, 그리고 의지(意志)를 가진 하등 형태의 생물은 환경이 편안하면 순조롭게 진보하지 않는다. 힘든 일이 주는 자극과 더불어, 문제가 되는 상황은 필사자를 진보시키는 귀중한 목표를 성취하는 데, 그리고 상급 수준의 영적 운명을 달성하는 데, 힘차게 이바지하는 그 정신ㆍ혼ㆍ영의 활동을 함께 낳는다.

3. 둘째 티베리아스 회의

154:3.1 (1719.2) 5월 16일에 티베리아스에서 예루살렘 당국과 헤롯 안티파스 사이에 2차 회의가 열렸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종교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갈릴리와 유대에 있는 거의 모든 회당이 예수가 가르치지 못하도록 문을 닫았다고 헤롯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헤롯으로 하여금 예수를 체포하게 하려는 새로운 노력이 있었지만, 그는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5월 18일에 헤롯은, 유대의 로마 통치자가 동의하는 조건으로, 산헤드린 당국이 예수를 체포하고 종교적 죄목으로 재판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데려가는 것을 허락하는 계획에 찬성했다. 그러는 동안에, 예수의 적들은 헤롯이 예수를 적대하게 되었다, 그의 가르침을 믿는 모든 사람의 뿌리를 뽑을 생각이 있다고 갈릴리에 두루, 뜬소문을 부지런히 퍼뜨리고 있었다.

154:3.2 (1719.3) 유대 민족의 신성한 율법을 조롱했다는 죄목으로 산헤드린 앞에서 재판을 받기 위하여 예수를 체포해서 예루살렘으로 이송(移送)해야 한다고 헤롯과 바리새인들이 맺은 협정에 대하여 예루살렘에서 국가 당국이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5월 21일 토요일 밤에 티베리아스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날 자정이 되기 바로 전에, 헤롯은 한 포고문에 서명했는데, 이것은 산헤드린의 관리들이 헤롯의 영토 안에서 예수를 체포하고, 재판을 받게 하기 위하여 강제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허가했다. 헤롯이 이렇게 허가하는 데 찬성하기 전에, 여러 편에서 센 압력이 헤롯에게 쏟아졌고, 그는 예루살렘에서 한을 품은 적들 앞에서 예수가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4. 토요일 밤에 가버나움에서

154:4.1 (1719.4) 바로 이 토요일 밤에 가버나움에서 유지(有志) 시민 50명의 무리가 회당에서 “우리가 예수를 어찌할 것인가?”하는 중대한 문제를 의논하려고 만났다. 자정이 지나기까지 이야기하고 토론했어도 의견을 모을 아무런 공통된 근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 예수가 메시아, 적어도 거룩한 사람이 아니면 아마 선지자일지 모른다고 믿는 쪽으로 기우는 몇 사람을 제쳐놓고, 그 회의는 거의 대등한 네 집단으로 갈라졌는데, 각자 예수를 다음 견지에서 보았다:

154:4.2 (1719.5) 1. 망상에 빠져 있는, 해롭지 않은 광신자이다.

154:4.3 (1719.6) 2.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위험하고 음모를 꾸미는 선동자이다.

154:4.4 (1720.1) 3. 그는 악마들과 동맹하고 있다, 아니 악마들의 군주일지도 모른다.

154:4.5 (1720.2) 4. 제 정신이 아니다, 미쳤다, 정신이 안정되지 않았다.

154:4.6 (1720.3) 서민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교리를 예수가 전파하는 데 대하여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의 가르침은 실용적이 아니다, 그의 생각에 따라서 살려고 사람마다 정직하게 노력한다면 모든 것이 박살이 나리라고 적들은 주장했다. 뒤를 이어 여러 세대의 사람들이 똑같이 말했다. 이 계시를 받은 비교적 깨우친 시대에도 총명하고 좋은 뜻을 가진 많은 사람이, 현대 문명은 예수의 가르침 위에 세워질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그리고 이들은 어느 정도 옳다. 그러나 그런 의혹을 품는 사람들은 모두, 훨씬 더 좋은 문명이 그의 가르침 위에 세워질 수 있었고 언젠가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잊어버린다. 이른바 기독교의 교리를 따르려는 미지근한 시도가 가끔 있기는 했어도 이 세상은 결코 예수의 가르침을 대규모로 실행하려고 심각하게 애써본 적이 없다.

5. 사건이 많았던 일요일 아침

154:5.1 (1720.4) 5월 22일은 예수의 일생에서 사건이 많았던 날이었다. 이 일요일 아침에 동이 트기 전에, 다윗의 사자들 가운데 하나가 티베리아스로부터 허겁지겁 도착했다. 그는 산헤드린의 관리들이 예수를 체포하는 것을 헤롯이 이미 허락했든지 아니면 막 허가하려 한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다가오는 이 위험을 알리는 소식을 받은 것은 다윗 세베대로 하여금 사자(使者)들을 깨우고 그날 아침 7시에 비상 회의를 위하여 호출하려고 모든 지역의 제자 집단에게 이들을 보내게 하였다. 깜짝 놀랄 이 보고를 들었을 때, 유다(예수의 아우)의 처제는 근처에 살던 예수의 가족 모두에게 세베대의 집에서 모이라고 당장에 호출하는 말을 황급히 전했다. 이 급한 호출에 반응하여, 당장에 마리아ㆍ야고보ㆍ요셉ㆍ유다ㆍ룻이 모였다.

154:5.2 (1720.5) 이 이른 아침 회의에서 예수는 모인 제자들에게 작별의 지시를 내렸다. 다시 말해서, 가버나움으로부터 그들이 곧 흩어질 것을 잘 아니까, 당분간 그들에게 작별을 알렸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안내를 간구하고, 결과와 상관 없이 하늘나라 일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전도사들은 부름받을 때까지 그들이 좋게 생각하는대로 수고해야 했다. 그는 전도사들 가운데 따라오라고 열두 사람을 택했다. 열두 사도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와 함께 남아 있으라고 지시했다. 열두 여인에게는 오라고 부를 때까지 세베대의 집과 베드로의 집에 남아 있으라고 지시를 내렸다.

154:5.3 (1720.6) 예수는 다윗 세베대가 전국에 보내는 사자의 봉사를 계속하는 데 찬성했다. 금방 주께 작별을 알리면서 다윗은 말했다: “주여, 당신의 일을 하러 떠나소서. 그 편협한 자들이 당신을 붙잡지 못하게 하시고 사자들이 당신의 뒤를 따를 것을 결코 의심하지 마소서. 내 일꾼들은 결코 당신과 접촉을 잃지 않겠고, 저희를 통해서 당신은 다른 지방에서 생기는 하늘나라 일에 관하여 알고 저희로 인하여 우리 모두가 당신에 관하여 소식을 들으리이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 봉사가 방해받지 않으리니, 내가 첫째와 둘째 지도자를, 아니 셋째까지도 세웠음이니이다. 나는 선생도 전도자도 아니지만, 내 마음 속에 이 일을 꼭 하고 싶사오니, 아무도 나를 그만두게 할 수 없나이다.”

154:5.4 (1720.7) 이날 아침 7시 반쯤에, 예수는 말씀을 들으려고 집안으로 밀어닥친 신자들, 거의 1백 명에게 작별의 말씀을 시작했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엄숙한 때였지만, 예수는 특별히 명랑하게 보였다. 다시 한 번 정상적인 자신과 같았다. 심각했던 몇 주가 지나갔고, 그는 믿음과 희망과 용기의 말씀으로 그들 모두를 북돋아 주었다.

6. 예수의 가족이 도착하다

154:6.1 (1721.1) 유다의 처제(妻弟)가 급히 호출한 데 반응하여 땅에서 예수 집안의 다섯 식구가 그 장면에 도착한 것은 이 일요일 아침 8시쯤이었다. 육체의 가족 전체에서 오직 한 사람, 룻이 땅에서 그의 사명이 신성함을 진심으로, 그리고 계속 믿었다. 유다와 야고보, 그리고 요셉조차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아직도 많이 유지했지만, 그들의 좋은 판단과 진정한 영적 성향은 자만 때문에 방해를 받았다. 마찬가지로 마리아는 사랑과 두려움 사이에, 모성애와 가족의 긍지 사이에 오락가락하였다. 어머니는 의심에 빠지기는 했어도 예수가 태어나기 전에 가브리엘이 방문한 것을 결코 아주 잊어버릴 수 없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제 정신이 아니다, 미쳤다고 마리아를 설득하려고 수고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리아에게 아들들과 함께 가서, 예수가 대중을 더 가르치는 노력을 그만두도록 힘써 말리라고 재촉했다. 곧 예수의 건강이 나빠질 것이다, 그가 계속하도록 버려두면 그 결과로 오직 불명예와 창피가 온 가족에게 쏟아질 수 있을 뿐이라고 마리아에게 장담했다. 그래서 유다의 처제한테서 소식이 왔을 때, 마리아의 집에서 그 전날 저녁에 바리새인들을 만났기 때문에, 다섯 사람 모두가 함께 거기에 있었고, 그들은 즉시 세베대의 집을 향하여 떠났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지도자들과 밤이 늦도록 이야기했다. 예수가 이상하게 행동하고 있으며, 얼마 동안 이상하게 행동하였다고 모두가 얼마큼 확신했다. 룻은 그의 행동을 다 설명할 수 없지만, 그가 언제나 가족을 공정하게 대하였다고 주장하고, 일을 그만두라고 그를 설득하려는 계획에 찬성하려 하지 않았다.

154:6.2 (1721.2) 세베대의 집으로 가는 길에 그들은 이 일에 대해 의논하였다. 그리고 함께 집으로 오라고 예수를 설득해 보기로 자기들끼리 찬성했는데, 마리아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가 집으로 와서 내 말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아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을 내가 아노라.” 야고보와 유다는 예수를 체포해서 재판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는 계획에 관하여 소문을 전에 듣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안전을 두려워했다. 대중의 눈에 예수가 인기 있는 인물인 한, 그의 가족은 사태가 흘러가는 대로 구경만 하고 있었지만, 가버나움 사람들과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갑자기 그에게 반감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곤란한 처지에 놓여서 그들이 받을 것이라 생각했던 치욕의 압박감을 비로소 따갑게 느꼈다.

154:6.3 (1721.3) 그들은 예수를 만나서 옆으로 데리고 가서, 함께 집으로 가자고 그를 재촉할 것을 전에 기대했다. 오로지 자신에게 문제만 일으키고 가족에게 불명예만 가져올 수 있는 새 종교를 전파하려고 애쓰는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기만 하겠다면, 예수가 자기들을 박대한 것을 잊어버리겠다―용서하고 잊겠다―고 그를 안심시키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룻은 다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오빠에게 이렇게 말하리라. 나는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 생각하고, 이 사악한 바리새인들이 그의 전도를 멈추게 하기 전에 기꺼이 죽을 생각이 있기를 바란다고.” 요셉은 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동안에 룻의 입을 막겠다고 약속했다.

154:6.4 (1721.4) 그들이 세베대의 집에 이르렀을 때, 예수는 제자들에게 한창 작별 연설을 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집으로 들어가려고 애썼으나 집에는 군중이 넘쳐흘렀다. 그들은 마침내 뒷문 현관에서 자리를 잡고, 입에서 입으로 말을 예수에게 전하게 했다. 그래서 마침내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귓속말로 속삭여 이를 전했는데, 베드로는 그 때문에 예수의 말씀을 가로막고 말했다: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아우들이 바깥에 있고, 저희가 몹시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어 하나이다.” 자, 어머니는 이 작별의 말씀을 주는 것이 추종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고, 그를 체포할 사람들이 도착해서 어느 순간이라도 연설이 중단될 것 같은지도 알지 못했다. 겉보기에 그리 오랫동안 멀어진 뒤에 어머니와 예수의 아우들이 실제로 그에게 오기까지 아량을 보인 사실에 비추어서, 그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예수가 말씀을 중단하고 그들에게 오리라고 어머니는 정말로 생각했다.

154:6.5 (1722.1) 이것이 바로, 땅에 있는 가족이 예수가 아버지의 일을 돌보아야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던 경우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전하는 말을 받으려고 연설을 잠깐 멈추었는데도,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은 몹시 마음이 상했다. 그들에게 인사하려고 그가 달려나오는 대신에, 그들은 노래처럼 아름다운 목소리가 더 크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내 어머니와 아우들에게, 나 때문에 아무 걱정을 하지 말라 이르라. 세상으로 나를 보내신 아버지는 나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요, 아무런 피해도 내 가족에게 닥치지 아니하리라. 저희에게 용기를 내고 하늘나라의 아버지를 신뢰하라고 이르라. 그러나 결국, 누가 내 어머니요 누가 내 아우들이냐?” 방에 모인 모든 제자에게 두 손을 쭉 뻗으면서 말했다: “나는 어머니가 없고 아우들이 없노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을 보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는 누구나 내 어머니요, 아우요, 누이임이라.”

154:6.6 (1722.2)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마리아는 유다의 팔에 힘없이 쓰러졌다. 예수가 작별의 말씀을 끝맺는 동안, 그들은 마리아를 정신 차리게 하려고 뜰로 날랐다. 그때 그는 어머니와 아우들과 함께 의논하러 나갔을 터이나, 한 사자가 티베리아스로부터 급히 도착했고, 산헤드린의 관리들이 예수를 체포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갈 권한을 가지고 오는 길이라는 소식을 가져왔다. 안드레는 이 소식을 받고서, 예수의 말씀을 중단하고 이를 알렸다.

154:6.7 (1722.3) 다윗이 25명쯤 되는 파수들을 세베대의 집 근처에 세워 놓은 것, 그리고 아무도 갑작기 들이닥칠 수 없다는 것을 안드레는 상기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찌 해야 할까 예수에게 물었다. “나는 어머니가 없고” 하는 말을 듣고 나서 어머니가 뜰에서 충격에서 회복하고 있는 동안, 주는 말없이 거기 서 있었다. 바로 이때, 방에서 한 여자가 일어서서 외쳤다: “당신을 밴 자궁이 복이 있고, 당신을 젖먹인 가슴이 복이 있도다.” 안드레와 이야기하다가 예수는 이 여자에게 대답하려고 한 순간 돌이켜서 말했다: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에 감히 복종하는 자가 오히려 복이 있도다.”

154:6.8 (1722.4)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은, 예수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관심을 잃었다고 생각했고, 바로 그들이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음을 조금도 깨닫지 못했다. 사람들이 자기의 과거를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예수는 충분히 이해했다. 인간들이 어떻게 설교자의 웅변에 좌우되고, 머리가 논리와 이성에 반응하듯, 양심이 어떻게 감정에 호소하는 데 반응하는가 알았다. 그러나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와 관계를 끊으라고 설득하기가 얼마나 더욱 어려운가 알았다.

154:6.9 (1722.5) 오해받거나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 안에 공감하는 친구요 이해하는 조언자를 가졌다는 것이 언제까지나 참말이다. 사람의 적은 제 집안에 있는 사람일 수 있다고 사도들에게 전에 경고(警告)했지만, 그는 이 예언이 자신의 체험에 얼마나 가깝게 적용될 뻔했는가 도저히 깨닫지 못했다. 예수는 아버지의 일을 하느라고 땅에 있는 가족을 버리지 않았다―가족이 그를 버렸다. 나중에, 주가 죽고 부활한 뒤에, 야고보가 초기 기독교 운동에 연결되었을 때, 그는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더 일찍 교제를 가지지 못한 결과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고생했다.

154:6.10 (1723.1) 이 사건들을 겪으면서, 예수는 지식이 제한된 그의 인간 지성의 안내를 받기를 선택하였다. 단순한 사람으로서 동료들과 체험을 겪기를 바랐다. 떠나기 전에 가족을 볼 생각이 예수의 인간 머리 속에 있었다. 그는 강론 한가운데서 멈추고 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은 뒤에 처음 만나는 것을 그런 대중 행사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연설을 마치고, 그리고 나서 떠나기 전에 가족들과 이야기할 뜻이 있었지만, 즉시 뒤따라 생긴 사건들이 한꺼번에 어울려 이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154:6.11 (1723.2) 세베대의 집 뒷문에 다윗의 사자 일행이 도착한 것이 그들을 더욱 황급히 달아나게 만들었다. 이 사람들이 일으킨 소동은 사도들을 놀라게 해서, 새로 도착한 이 사람들이 그들을 체포하는 사람들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당장 잡히는 것이 두려워 그들은 앞문을 통해서 대기하고 있던 배까지 서둘러 나갔다. 이 모두가 어째서 예수가 뒤쪽 현관에서 기다리던 가족을 만나지 못했는가 설명한다.

154:6.12 (1723.3) 그러나 황급히 달아나서 배를 탈 때, 그는 다윗 세베대에게 말했다: “내 어머니와 아우들에게 저희가 온 것을 내가 고맙게 여긴다고, 또 저희를 만나려고 했다고 이르라. 나에게 마음 상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구하고 그 뜻을 행할 은혜와 용기를 구하라고 저희에게 타이르라.”

7. 서두른 탈출

154:7.1 (1723.4) 그래서 서기 29년 5월 22일, 이 일요일 아침에 예수는 이렇게 열두 사도와 열두 전도사와 함께 산헤드린의 관리들을 피해서 서둘러 달아났다. 신성을 모독하였다, 그리고 유대인의 신성한 율법을 달리 어겼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하려고 그 관리들은 헤롯 안티파스로부터 예수를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갈 권한을 가지고 벳세다로 오는 도중이었다. 날씨가 아름다운 이날 아침, 거의 8시 반에 이 일행 스물 다섯 명은 노에 사람을 배치하고 갈릴리 바다 동쪽 해안을 향하여 배를 저었다.

154:7.2 (1723.5) 주의 배 뒤에 다른 더 작은 배가 따랐는데, 다윗의 사자 여섯 명을 태웠다. 이들은 예수와 그 동료들과 접촉을 유지하고 그들의 거처와 안전에 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벳세다에 있는 세베대의 집으로 전달하도록 처리하라고 지시를 받았으며, 그 집은 전에 한동안 하늘나라 일을 위한 본부로서 쓰였다. 그러나 예수는 다시 세베대의 집에서 편안히 지내게 되지 못했다. 이제부터 계속하여, 땅에서 사신 여생을 통해서, 주는 참으로 “머리를 둘 곳이 없었다.” 정착된 거처 비슷한 것조차 이제 더 없었다.

154:7.3 (1723.6) 그들은 게레사 마을 가까이까지 저어 갔고, 친구들이 관리하라고 배를 맡기었다. 땅에서 보낸 주의 일생에서 파란 많은 이 마지막 해 동안의 떠돌이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한동안 빌립의 영토에 남아 있었고, 게레사로부터 케자리아 빌립비까지 올라가서, 거기서부터 페니키아의 바닷가로 나아갔다.

154:7.4 (1723.7) 군중은 세베대의 집 근처에 남아 있었고 이 배 두 척이 동쪽 물가를 향하여 호수를 건너가는 것을 구경했다. 예루살렘의 관리들이 서둘러 와서 예수를 수색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한창 떠난 뒤였다. 이들은 예수가 이미 그들을 피해서 달아났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와 일행이 바타니아를 거쳐서 북쪽으로 여행하는 동안, 바리새인들과 그 조수들은 가버나움 이웃에서 헛되이 그를 수색하느라고 거의 한 주를 꼬박 보냈다.

154:7.5 (1724.1) 예수의 가족은 가버나움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고,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기도하면서 거의 한 주를 보냈다. 그들은 혼란과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목요일 오후에, 룻이 세베대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까지, 조금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 집에서 룻은 가장인 오빠가 안전하고 건강히 있으며, 페니키아 해안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소식을 다윗으로부터 들었다.

제 155 편 갈릴리 북부를 거쳐서 달아나다

유란시아서

제 155 편

갈릴리 북부를 거쳐서 달아나다

155:0.1 (1725.1) 사건이 많았던 이 일요일에 게레사 근처에 배를 댄 뒤에 곧, 예수와 스물네 사람은 북쪽으로 얼마큼 갔다. 거기서 벳세다 줄리아스 남쪽에 있는 어느 아름다운 공원에서 밤을 지냈다. 지난 날에 거기서 멈춘 적이 있으니까, 그들은 이 야영지가 눈에 익었다.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주는 추종자들을 주위에 부르고 바타니아와 갈릴리 북부를 거쳐서 페니키아 해안까지 가려고 예정한 여행을 위하여 계획을 함께 의논했다.

1. 어째서 이교도가 격분하느냐?

155:1.1 (1725.2) 예수가 말했다: “시편의 저자(著者)가 이 시절에 대하여 어떻게 말했는가 너희는 모두 기억을 살려야 하느니라, ‘어째서 이교도가 격분하고 민족들이 헛되이 음모를 꾸미는가? 자비의 사슬을 잘라 버리고 사랑의 끈을 던져 버리자 말하면서, 땅의 임금들이 주에 대항하여, 그리고 그가 기름 부은 자에 대항하여, 관원들이 함께 의논하는도다.’

155:1.2 (1725.3) “오늘날 너희는 이 말씀이 너희 눈앞에서 이루어짐을 보느니라. 그러나 시편 저자의 나머지 예언이 이루어짐을 구경하지 못할지니, 그가 사람의 아들에 대하여, 그리고 땅에서 이룰 그의 사명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품었음이라. 내 나라는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자비롭게 선포되며 사심(私心) 없는 봉사로 세워지느니라. 내 아버지는 이교도를 비웃으면서 하늘에 앉아 있지 않으며, 크게 불쾌하여 진노하지 않느니라. 아들이 이른바 이 이교도(실제는 무지하고 가르침 받지 못한 형제)를 유산으로 받으리라는 약속은 참말이요, 나는 자비와 사랑의 팔을 펼쳐 이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리라. 승리한 아들이 ‘저희를 쇠막대기로 부수고 도공의 그릇처럼 산산조각 내리라’고 암시하는 기록이 유감스러운 선언을 했어도, 이 모든 친절이 이른바 이교도에게 베풀어지리라. 시편의 저자는 ‘두려움으로 주를 섬기라’고 너희에게 훈계하였느니라―나는 너희가 믿음으로 신의 아들이 되는 높은 특권을 받으라 이르노라. 그 저자는 너희가 떨면서 기뻐하라고 명령하나, 나는 너희가 확신을 가지고 기뻐하라 명하노라. 그는 말하되 ‘아들이 성내지 않도록 그에게 입맞추라, 그의 진노가 불이 붙으면 너희가 멸망할까 하니라.’ 그러나 너희는 나와 함께 살아 왔은즉 진노와 격노가 사람의 마음 속에서 하늘나라를 세우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음을 잘 아느니라. 그러나 이 훈계를 마치면서, ‘이 아들을 신뢰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말했을 때, 그 시편 저자는 참 빛을 어렴풋이 보았느니라.”

155:1.3 (1725.4) 예수는 스물네 사람에게 계속 가르치며 말했다: “이교도가 우리에게 격분할 때 저희는 구실이 없지 않으니라. 저희는 시야(視野)가 작고 좁으므로 에너지를 열심히 집중할 수 있느니라. 저희의 목표는 가깝고 다소 눈에 보이는 것이니, 그러므로 용감하고 유능하게 처리하려고 애쓰느니라. 하늘나라로 들어간다고 고백한 너희의 가르치는 행동은 너무 오락가락하며 분명치 않구나. 이교도는 저희의 목표를 얻으려고 정면으로 공격하지만, 너희는 너무 오랫동안 동경하는 죄가 있도다. 너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다면, 이교도가 포위한 도시를 점령하는 것 같이, 어찌하여 영적 공격으로 하늘나라를 차지하지 않느냐? 대체로 지난날을 뉘우치고 오늘을 불평하며 헛되이 앞날을 희망하는 태도로 너희가 봉사할 때, 너희는 도저히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느니라. 어째서 이교도가 격분하느냐? 저희가 진리를 모르는 까닭이라. 어찌하여 너희는 쓸데없이 꿈을 꾸며 시드느냐? 너희가 진리에 복종하지 않는 까닭이라. 쓸데없이 꿈꾸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서 하늘나라를 세우는 데 관계되는 일을 용감히 하라.

155:1.4 (1726.1) “너희가 무슨 일을 하여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지나치게 전문화하지 말라. 우리의 멸망을 추구하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섬기는 일을 한다고 진실로 생각하며, 저희는 전통 때문에 아주 좁아져서, 편견으로 눈이 멀고 두려움으로 마음이 굳어졌느니라. 그리스인을 생각해 보라, 저희는 종교 없이 과학을 가졌으나 유대인은 과학이 없이 종교를 가졌도다. 이처럼 좁고 혼잡스럽게 부서진 진리 조각을 받아들이도록 잘못 인도될 때, 사람들이 구원받을 유일한 희망은 진리와 조화되는 것―전향하는 것이라.

155:1.5 (1726.2) “이 영원한 진리를 강조해 보자: 진리와 조화됨으로 너희의 인생에서 올바름의 이 아름다운 순수함을 모범으로 보여주기를 배우면 동료들이 너희를 찾으리니, 너희가 그렇게 얻은 것을 저희가 얻을까 함이라. 진리를 추구하는 자가 너희에게 마음이 끌리는 만큼, 너희는 진리 재산, 올바름을 가진 것을 가리키느니라. 너희가 전하는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얼마나 멀리 가야 하는가, 이것은 어떤 면에서 온전하거나 올바른 생애, 진리와 조화된 생애를 얼마나 너희가 살지 못하였는가를 재는 척도이라.”

155:1.6 (1726.3) 사도와 전도사들이 밤 인사를 드리고 베개 위에 잠을 청하기 전에, 주는 다른 여러 가지를 가르쳤다.

2. 전도사들이 코라진에서

155:2.1 (1726.4) 5월 23일 월요일 아침에, 예수는 베드로에게 열두 전도사와 함께 코라진으로 가라 지시했고, 그동안에 열한 사도와 함께 케자리아 빌립비를 항하여 떠났다. 요단강 길을 거쳐 다마스커스-가버나움 길로 갔다. 거기서부터 북동쪽으로 케자리아 빌립비에 이르는 길과 만나는 점까지 갔고, 그리고 나서 그 도시로 들어가서, 거기서 2주 동안 머무르고 가르쳤다. 5월 24일 화요일 오후에 도착했다.

155:2.2 (1726.5) 베드로와 전도사들은 코라진에서 2주 동안 머물렀고, 작지만 열심 있는 무리의 신자들에게 하늘나라 복음을 전도했다. 그러나 새로운 전향자를 많이 얻을 수 없었다. 하늘나라를 위하여, 온 갈릴리의 어느 도시에서도 코라진만큼 사람들을 적게 설득한 곳이 없었다. 베드로의 지시에 따라서, 열두 전도사는 치유―육체적인 것―에 대하여 할 말이 적었고, 한편 하늘나라의 영적 진리를 더욱 활기 있게 전도하고 가르쳤다. 코라진에서 보낸 이 2주는, 여태까지 생애에서 가장 어렵고 보람없는 기간이었으므로 열두 전도사에게 진정한 역경(逆境)의 세례였다. 하늘나라로 사람들을 들어가라고 설득하는 만족감을 이렇게 빼앗겼기 때문에, 그들은 각자 자신의 혼을, 그리고 새 생활의 영적 길에서 혼이 얼마나 진보하였는가 더욱 진지하고 정직하게 돌이켜보았다.

155:2.3 (1726.6) 아무도 더 하늘나라에 들어갈 생각이 없는 듯 보였을 때, 6월 7일 화요일에 베드로는 동료들을 한데 부르고 예수와 사도들과 합세하려고 케자리아 빌립비를 향하여 떠났다. 수요일 한낮 무렵에 도착하였고 코라진의 불신자들 가운데서 겪은 체험을 저녁 내내 되돌아보면서 보냈다. 이날 저녁 토론하는 동안에 예수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더 언급했고, 일생의 사업에서 실패로 보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많이 가르쳤다.

3. 케자리아 빌립비에서

155:3.1 (1727.1) 케자리아 빌립비 가까이에서 이렇게 2주 머무르는 동안에 예수는 대중을 위해서 일하지 않았어도 사도들은 그 도시에서 조용한 저녁 모임을 수없이 열었고 많은 신자가 주와 이야기하려고 야영지로 나왔다. 이 방문의 결과로 신자들의 무리는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예수는 사도들과 날마다 이야기했고 그들은 하늘나라를 전파하는 일의 새 국면이 이제 시작되고 있음을 더욱 뚜렷하게 깨달았다.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신의 아들임을 받아들이는 영적 기쁨을 깨닫는 것”임을 알아듣기 시작했다.

155:3.2 (1727.2) 케자리아 빌립비에서 머무른 것은 열한 사도에게 진정한 시험이었고 견디기 어려운 2주였다. 그들은 거의 우울증에 빠졌고 열심인 베드로의 인격이 이따금 주는 자극이 없어서 서운했다. 이 시절에 예수를 믿고, 나가서 그를 따르는 것은 참으로 크고 벅찬 모험이었다. 이 2주 동안 전향자를 거의 얻지 못했어도 주와 날마다 가진 회의로부터 그들은 무척 유익한 것을 많이 배웠다.

155:3.3 (1727.3) 진리를 구체적 신조(信條)로 만들었기 때문에, 유대인이 영적으로 침체되고 죽어 가고 있으며, 진리가 영적 안내와 진보의 길 표시로 쓰이는 대신에, 혼자만 옳다는 배타적 경계선으로 모습을 갖출 때 그런 가르침은 창조력과 생명력을 잃고 궁극에는 단지 보존제가 되고 화석(化石)이 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사도들은 깨달았다.

155:3.4 (1727.4) 그들은 시간과 영원 속에서, 가능성 면에서 사람의 인격을 바라보는 것을 예수에게서 더욱 배웠다.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제를 사랑하기를 먼저 배움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많은 사람을 최선(最善)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바로 이와 관련하여, 동료들에게 사심 없이 봉사하는 것에 대하여, “내 형제 가운데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만큼 너희는 그렇게 나에게 행한 것이니라” 하는 주의 선언에 새로운 의미가 붙게 되었다.

155:3.5 (1727.5) 케자리아에서 이번에 머무른 동안에 얻은 가장 큰 교훈의 하나는 종교적 전통의 기원에 관계되었다, 즉 신성하지 않은 것이나 보통 생각이나 일상적인 사건에 신성한 느낌이 붙도록 버려두는 심각한 위험에 관계되었다. 그들은 한 회의에서 참된 종교는 사람이 가장 높고 참된 확신에 진심으로 충성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얻고 나왔다.

155:3.6 (1727.6) 종교적 열망(熱望)이 겨우 물질적이라면, 늘어나는 과학 지식은 사물의 초자연적 기원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점진적으로 갈아치움으로 궁극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빼앗으리라, 하지만 종교가 영적이라면, 자연 과학의 진보는 영원한 실체와 신다운 가치들을 믿는 신앙을 결코 흔들 수 없다고 예수는 신자들에게 훈계하였다.

155:3.7 (1727.7) 종교가 온전히 영적 동기를 가졌을 때, 종교는 모든 인생을 갈수록 더 가치 있게 만들며, 높은 목적으로 인생을 채우고 초월적 가치로 인생에 위엄을 주며, 훌륭한 동기로 인생을 북돋우고, 그렇게 하면서 숭고하고 북돋아주는 희망으로 인간의 혼을 위로한다는 것을 그들은 배웠다. 참된 종교는 존재의 긴장을 줄이도록 고안되어 있으며, 나날이 살아가고 사심 없이 봉사하도록 믿음과 용기를 방출한다. 믿음은 영적 활력을 갖게 하고 올바른 열매를 맺도록 촉진한다.

155:3.8 (1727.8) 어떤 문명도 종교의 최선을 잃고는 오래 지속할 수 없다고 예수는 거듭해서 사도들에게 가르쳤다. 종교적 체험 대신에 종교적 상징과 예식을 받아들이는 큰 위험을 지칠 줄 모르고 열두 사람에게 지적했다. 얼어붙은 형태의 종교를 녹여서, 깨우친 아들의 자유, 물처럼 흐르는 자유로 만드는 사명에 그는 지상 생애 전부를 한결같이 바쳤다.

4. 페니키아로 가는 길

155:4.1 (1728.1) 6월 9일 목요일 아침에 벳세다에서 다윗의 사자들이 가져온 소식, 하늘나라가 어떻게 진전되는가 소식을 받은 뒤에, 진리를 가르치는 이 스물다섯 선생의 무리는 케자리아 빌립비를 떠나서 페니키아 해안을 향하여 여행을 시작했다. 늪 지대를 돌아서 룻츠의 길로 지나갔고, 막달라에서 레바논산에 이르는 오솔길과 만나는 교차점까지,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돈으로 이어지는 길과 만나는 점까지 갔으며, 금요일 오후에 시돈에 다다랐다.

155:4.2 (1728.2) 룻츠 가까이서, 튀어나온 바위 선반 그림자 밑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멈추는 동안, 예수는 그와 함께 했던 여러 해를 통하여 사도들이 들은 중에 가장 놀라운 말씀을 하였다. 빵을 먹으려고 자리를 잡자마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에게 물었다: “주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모든 것을 아시고, 그의 영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세우는 일에 우리를 지원하시는데, 어찌하여 우리가 적들의 위협을 받고 도망치나이까? 어찌하여 진리의 적들과 대결하려 하지 않나이까?” 그러나 베드로의 물음에 예수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토마스가 끼어들어 물었다: “주여, 예루살렘에 있는 우리 적들의 종교에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는가 나는 정말로 알고 싶나이다. 저희의 종교와 우리의 종교는 무엇이 정말 다르니이까? 우리 모두가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어찌하여 우리의 믿음이 그렇게 차이가 있나이까?” 토마스가 말을 마치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베드로의 물음을 내가 무시하고 싶지 않으나, 바로 이때에 유대인 권력자들과 드러내놓고 충돌하기를 내가 피하는 까닭을 오해하기 얼마나 쉬울 것인가 잘 아는 까닭에, 차라리 토마스의 물음에 대답하기를 택한다면, 그래도 너희 모두에게 더욱 도움이 되리라. 너희가 점심을 마치고 나서 대답을 시작하겠노라.”

5. 참 종교에 대한 말씀

155:5.1 (1728.3) 종교에 대한 잊지 못할 이 강론은 현대의 말투로 간추리고 다시 진술하면, 다음의 진리를 표현하였다:

155:5.2 (1728.4) 세계의 종교들은 두 가지 기원―자연의 기원과 계시적 기원―이 있지만, 어느 시대, 어떤 한 민족 사이에서도, 세 가지 분명히 다른 형태의 종교적 헌신이 발견되도록 정해졌다. 종교적 욕구는 다음 세 가지로 형태로 나타난다:

155:5.3 (1728.5) 1. 원시 종교. 신비스러운 에너지를 두려워하고 자기보다 큰 물리적 힘을 섬기려는 반 자연스러운 본능적 욕구, 주로 물리적 자연을 믿는 종교, 두려움의 종교.

155:5.4 (1728.6) 2. 문명의 종교. 진보하는 종교적 개념과 문명화하는 민족들의 관습―머리를 쓰는 종교―확립된 종교적 전통의 권위를 가진 지적(知的) 신학.

155:5.5 (1728.7) 3. 참된 종교―계시 종교. 초자연적 가치가 있는 계시, 영원한 실체들을 꿰뚫어보는 부분적 통찰력,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무한한 성품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한 번 보는 것―인간의 체험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영의 종교.

155:5.6 (1729.1) 자연인의 육체적 느낌과 미신을 믿는 두려움에서 생겨난 종교를 주는 비난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원시 형태의 예배가 인류에서 총명한 축에 속하는 종족들의 종교 형태에서 너무 많이 지속한다는 사실을 한탄하였다. 지적 종교와 영적 종교의 큰 차이점은, 전자(前者)가 교회의 권위로 지탱하는 데 반하여, 후자는 온전히 인간의 체험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155:5.7 (1729.2) 그리고 나서, 가르치는 시간에 주는 계속하여 이러한 진리를 뚜렷하게 설명했다:

155:5.8 (1729.3) 민족들이 상당히 지적이고 충분히 문명화될 때까지 유치하고 미신을 믿는 많은 예식이 지속할 터이고, 이것은 원시적이고 뒤떨어진 민족들의 진화적 종교 관습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인류가 영적 체험의 현실을 더 높이 더 널리 인정하는 수준으로 진보할 때까지, 큰 집단의 남녀가 지적 동의(同意)만 요구하는 권위적 종교를 개인적으로 더 좋아하는 성향을 계속 보일 것이다. 이와 반대로 영의 종교에는 진취적 인간 체험을 겪는 벅찬 현실과 씨름하는 신앙의 모험에 지성과 혼의 적극적 참여가 따른다.

155:5.9 (1729.4) 권위를 내세우는 전통적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영적 성품의 간절한 소망을 채우려는 사람의 충동에 대하여 쉬운 해결책을 제시한다. 정착되고 굳어지고 확립된, 권위의 종교는 어지럽고 산란해진 사람의 혼이 두려움에 떨고 불안에 시달릴 때, 도피해도 되는 즉석의 안식처를 마련해 준다. 그런 종교는 만족과 확신을 얻는 값으로 신자들에게 오직 시키는 대로, 순전히 지적(知的) 동의를 요구한다.

155:5.10 (1729.5) 이런 방법으로 종교적 위로를 얻는 것을 더 좋아할 사람, 겁먹고 두려워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이 땅에서 오랫동안 살 것이다. 권위를 내세우는 종교와 그렇게 운명을 같이 함으로, 그들은 인격의 주권을 더럽히고 자아의 존엄성을 떨어뜨리며, 가능한 모든 인간 체험 가운데 가장 가슴 떨리고 영감을 주는 다음과 같은 체험에 참여하는 권리를 모조리 넘겨준다 하더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즉 진리의 개인적 추구, 지적 발견의 위험에 부딪치는 흥분, 개인의 종교적 체험의 실체를 탐구하려는 결심, 그리고 인간의 존재에서 최대의 모험―사람이 혼자 힘으로, 또 스스로 하나님을 찾다가 찾아내는 모험―에서 정직하게 얻는 승리, 영적 믿음이 지적 의심을 이기는 것을 실제로 깨닫는 만족, 개인적으로 승리하는 최고의 만족을 얻는 체험이다.

155:5.11 (1729.6) 영의 종교는 노력ㆍ투쟁ㆍ싸움ㆍ신앙ㆍ결심ㆍ사랑ㆍ충성ㆍ진보를 의미한다. 지성의 종교―권위를 내세우는 신학(神學)―은 형식을 따르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있는 힘을 다하라고 거의 또는 조금도 요구하지 않는다. 두려워하고 건성으로 믿는 혼에게 전통은 안전한 피난처요 쉬운 길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진취적 인간 지성이 발견하고 진화하는 인간 혼이 체험할 수도 있는, 먼 바닷가의 영적 현실을 찾아서, 탐구되지 않은 진리의 거센 파도를 무릅쓰고 모험하는 믿음의 항해에서 겪는, 그러한 영적 투쟁과 정신적 불안을 본능적으로 피한다.

155:5.12 (1729.7) 예수는 말씀을 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전통적 선생과 지난 시대 선지자들의 여러 신조를 확립된 체계의 지적 관념으로, 즉 권위의 종교로 만들었느니라. 모든 그러한 종교는 대체로 지성에 호소하느니라. 우리가 얼마 안 있어 비로소 새 종교를 용감하게 선언할 것이므로, 이제 우리는 바야흐로 그러한 종교와 목숨을 건 싸움에 들어가려 하느니라―이 새 종교는 그 말이 오늘날 뜻하는 종교가 아니라, 사람의 정신에 거하는 내 아버지의 신성한 영에게 주로 호소하는 종교이라. 그 종교는 이를 받아들여 생기는 열매로부터 권위를 얻어내리니, 그 열매는 이렇게 더 높은 영적 교통이 있다는 진실을 정말로, 참으로 믿는 모든 사람이 몸소 겪는 체험에서 아주 확실히 나타날 것이라.”

155:5.13 (1730.1) 스물네 사람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이름을 부르면서 예수는 말했다: “그리고 자, 하늘나라의 영원한 진리와 최고의 장려함을 생생하게 몸소 체험하는 아름다운 현실을 스스로 발견하는 만족을 느끼면서, 너희 중에 누가 사람들을 구원하는 더 좋은 길을 선포하는 사명에 따르는 어려움과 박해를 견디겠느냐? 아니면 예루살렘에 있는 바리새인들이 방어하는 길, 확립되고 굳어진 종교에 순응하는 이 쉬운 길을 택하는 것이 더 좋으냐? 너희는 무섭고 연약하고 안일을 찾느냐? 너희는 앞날을 진리의 하나님 손에 맡기기가 두려우냐, 너희는 누구의 아들이냐? 너희는 아들이어든 아버지를 믿지 못하느냐? 너희는 전통적 권위의 종교가 주는 확신과 지적 안정으로 이끄는 쉬운 길로 돌아가겠느냐, 아니면 몸을 가다듬고서, 영의 종교의 새로운 진리,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미래, 확실치 않고 어지러운 미래를 향하여 나와 함께 가겠느냐?”

155:5.14 (1730.2) 이것은 예수가 일찍이 하신 몇 번 안 되는 이러한 감정적 호소 중 하나였고, 말씀을 듣던 스물네 사람이 모두 일어나서, 이에 뭉쳐서 충성한다는 반응을 표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는 손을 올려서 그들을 멈추고 말했다: “이제 너희는 따로 가라, 각 사람이 혼자서 하나님과 함께, 거기서 내 질문에 대하여 냉철한 대답을 찾아내고 그러한 참되고 진지한 혼의 태도를 찾고 나서, 그 대답을 내 아버지요 너희 아버지께 거리낌 없이 용감히 대답하라. 사랑을 주는 그의 무한한 생명은 우리가 선포하는 종교의 바로 그 정신이라.”

155:5.15 (1730.3) 전도사와 사도들은 잠시 동안 자기들끼리 따로 갔다. 그들의 정신은 격려를 받고 지성은 영감을 받았으며, 감정은 예수의 말씀에 힘차게 움직였다. 그러나 안드레가 그들을 함께 불러 모았을 때, 주는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여행을 다시 떠나자. 우리는 페니키아로 가서 한동안 머무르고 너희는 모두, 너희의 육체와 지성의 감동을 더 높은 지적 충성으로, 그리고 더욱 만족스러운 영의 체험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해야 하느니라.”

155:5.16 (1730.4) 길을 따라 여행하면서 스물네 사람은 말이 없었지만, 금방 서로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날 오후 세 시가 되자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그들은 멈추었고 베드로는 예수에게 가서 말했다: “주여, 당신은 우리에게 생명과 진리의 말씀을 주셨나이다. 우리는 더 듣고자 하나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더 말씀해 주시기를 간청하나이다.”

6. 종교에 대한 둘째 강론

155:6.1 (1730.5) 그래서, 산허리의 그늘에서 멈춘 동안, 예수는 영의 종교에 관하여 계속 가르쳤는데, 이런 내용으로 말씀하였다:

155:6.2 (1730.6) 너희는 지성의 종교에 만족한 채로 있기로 작정한 너희 동료들 사이에서 뛰쳐나왔고, 저희는 안전(安全)을 몹시 바라고 전통에 순응하기를 더 좋아하느니라. 너희는 권위적 확신의 느낌을 버리고, 모험적이고 진취적 믿음을 주는 영의 보장을 선택하였도다. 너희는 제도적 종교의 모진 속박에 감히 저항하고,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기는, 기록된 전통의 권위를 물리쳤느니라. 우리의 아버지는 정말로 모세ㆍ엘리야ㆍ아모스ㆍ호세아를 통하여 말씀하였으나, 이 옛 선지자들은 말씀을 그쳤어도 그는 세상에 진리의 말씀을 그치지 않고 주셨도다. 내 아버지는 진리의 말씀을 한 시대에 허용하고 다른 시대에 허락하지 않으면서 민족이나 세대를 차별하는 분이 아니라. 온전히 인간다운 것을 신답다고 부르는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지 말며,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전통적 신탁(神託)을 통하지 않고서 오는 진리의 말씀을 놓치지 말고 헤아리라.

155:6.3 (1731.1) 나는 너희에게 다시 태어나라, 영에게서 태어나라 요구하였노라. 나는 권위의 어두움과 무기력한 전통으로부터 너희를 끌어내어, 인간의 혼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발견―혼자 힘으로, 자신 속에서,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내며, 자기 개인 체험에서 하나의 사실로서 이 모두를 행하는 천상의 체험―가능성을 실현하는 초월적 빛 속으로 인도하였노라. 그렇게 너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전통의 권위에서 하나님을 아는 체험으로 건너가기 위한 것이라. 이처럼 너희는 어둠에서 빛으로, 물려받은 민족의 신앙으로부터 실제 체험을 거친 개인적 신앙으로 옮겨갈 것이요, 그렇게 함으로 너희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지성의 신학으로부터, 영원한 재산으로서 너희 혼 안에서 세워질, 참된 영의 종교에 이르기까지 진보하리라.

155:6.4 (1731.2) 너희의 종교는 전통적 권위를 믿는 단순한 지적 관념으로부터, 하나님의 실체 그리고 아버지의 신다운 영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붙잡을 수 있는, 생생한 믿음을 얻는 실제 체험으로 바뀌리라. 지성의 종교는 너희를 희망 없이 지난날에 묶어 놓지만, 영의 종교는 점진적 계시에 있고, 영적 이상과 영원한 실체 면에서 더욱 높고 거룩한 것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계속 가도록 늘 너희에게 손짓하느니라.

155:6.5 (1731.3) 권위의 종교는 즉시 자리잡힌 안전한 느낌을 줄지 모르지만, 그러한 일시적 만족을 위하여 너희는 영적 자유와 종교적 해방을 잃음으로 대가(代價)를 치르느니라.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대가로, 내 아버지는 너희에게 영적으로 불쾌하고 거룩하지 않고 진실하지 않은 것을 믿는 신앙을 강제로 지지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느니라. 낡아빠진 체계의 종교적 형태와 예식에 굴복함으로 바로 너의 자비ㆍ정의ㆍ진리의 감각을 짓밟으라고 요구하지 않느니라. 영의 종교는 영의 인도하심이 어디로 데려가든지, 언제까지나 진리를 따르도록 너희를 자유롭게 두느니라. 누가 판단할 수 있느냐?―아마도 이 영은 다른 세대가 듣기 싫어한 무엇인가를 이 세대에게 나누어줄 수도 있느니라.

155:6.6 (1731.4) 거짓 종교 선생들에게 치욕이 있을진저! 저희는 갈급한 사람들을 어둠침침하고 먼 과거로 도로 끌어다가 거기에 버려두려 하는도다. 그래서 이 불행한 사람들은 새로운 발견이 있을 때마다 그렇게 깜짝 놀랄 운명을 가졌고, 한편 진리가 새롭게 계시될 때마다 저희는 당황하느니라. “생각이 하나님께 머물러 있는 자는 완전한 평화 속에 있으리라”고 말한 선지자는[1] [19] 단지 권위의 신학을 지적으로 믿기만 한 자가 아니었도다. 진리를 아는 이 사람은 하나님을 찾아냈고 하나님에 대하여 입으로 말만 하지 않았느니라.

155:6.7 (1731.5) 너희에게 훈계하노니, 항상 옛 선지자들을 인용하고 이스라엘의 영웅들을 찬양하는 관습을 버리라, 그 대신에 최고자의 살아 있는 선지자가 되고 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 영적 영웅이 될 포부를 가지라. 지난날에 하나님을 아는 지도자들에게 명예를 돌리는 것이 정말로 가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면서 어찌하여 인간의 존재에서 최대의 체험, 하나님을 너희 혼자서 찾아내고 자신의 혼 속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체험을 너희가 버려야 하느냐?

155:6.8 (1732.1) 인류의 어떤 종족이든지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자체의 지적 견해를 가지며, 따라서 지성의 종교는 종족의 이 여러 가지 관점에 늘 충실해야 하느니라. 권위의 종교는 결코 통일에 이를 수 없고, 인류의 통일과 필사자의 형제 정신은 오로지, 영의 종교를 위에서 부여함으로, 그리고 이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느니라. 종족의 지성은 서로 다를지 모르나 온 인류에게 똑같이 신답고 영원한 영이 깃드느니라. 권위를 내세우는 갈라지는 지성의 종교들 속에, 사람을 하나가 되게 하고 고귀하게 만드는 영의 종교―개인이 영적 체험을 얻는 종교―가 침투하고 압도할 때에야, 그리고 그렇게 됨에 따라서, 인간이 형제가 되는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느니라.

155:6.9 (1732.2) 권위의 종교는 오직 사람들을 갈라놓고 양심적으로 서로 맞서는 대열에 서게 하며, 영의 종교는 점진적으로 사람들을 함께 모으고, 서로 이해하는 태도로 공감하게 하느니라. 권위의 종교는 사람들에게 신조(信條)가 한결같기를 요구하지만, 이것은 현재의 세계 상태에서 실현이 불가능하니라. 영의 종교는 오직 체험이 하나되기―운명이 한결같기―를 요구하고, 신조의 다양성을 충분히 허락하느니라. 영의 종교는 관점과 전망이 한결같은 것이 아니라 오직 통찰력이 한결같기를 요구하느니라. 영의 종교는 지적 관점이 한결같기를 요구하지 않고, 오직 영의 느낌이 하나되기를 요구하느니라. 권위의 종교는 굳어져서 생명이 없는 신조들로 변하며, 한편 영의 종교는 성장해서, 사랑으로 봉사하고 자비를 베푸는 행위, 사람을 고귀하게 만드는 일을 하는, 늘어나는 기쁨과 자유로 이끄느니라.

155:6.10 (1732.3)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이 전통적으로 무력한 이러한 불운을 만났다고 해서 너희 중 누구도 저희를 가벼이 여기지 않도록 경계하라. 우리의 조상은 하나님을 집요하게 열심히 찾느라고 헌신했고, 아담 시절 이후로 어떤 다른 민족도 저희가 찾아낸 만큼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나, 아담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므로 이를 많이 알았느니라. 내 아버지는 모세의 시절 이후로,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투쟁, 길고도 지칠 줄 모르는 이스라엘의 투쟁을 놓치지 않고 주목해 왔느니라. 지친 여러 세대 동안에, 유대인은 그침없이 수고하고 땀 흘리고 신음하고 진통을 겪었고, 오해받고 경시(輕視)당한 민족의 고통을 견디고 서러움을 겪었으며, 이 모두가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발견하는 데 조금 더 가까이 가기 위한 것이었느니라. 이스라엘이 온갖 실패와 실수를 겪었어도, 점진적으로 모세로부터 아모스와 호세아 시절까지, 우리의 조상은 온 세계에 영원한 하나님의 그림, 갈수록 더 맑고 참된 그림을 늘 드러냈느니라. 그리하여 아버지의 더 큰 계시를 받기 위하여 길이 준비되었으며, 너희는 그 계시를 함께 가지라고 부름받았느니라.

155:6.11 (1732.4) 살아 계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더 만족스럽고 떨리는 모험이 오직 하나 있음을 잊지 말지니, 곧 신의 뜻을 행하려고 정직하게 애쓰는 최상의 체험이라. 땅에서 어떤 직업을 가져도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음을 반드시 기억하라. 어떤 직업은 거룩하지 않고 어떤 것은 세속적이라. 영에게 인도받는 자, 다시 말해서, 진리에 복종하고 사랑으로 고귀하게 되며, 자비에 지배되고 공정으로―정의로―몸을 삼가는 자의 생활에는 모든 것이 거룩하니라. 내 아버지와 내가 세상으로 보낼 영은 진리의 영일 뿐 아니라 또한 이상과 같이 아름다운 영이라.

155:6.12 (1732.5) 너희는 신학적 권위가 있는, 오래 된 기록의 페이지에서만 하나님의 말씀 찾기를 그쳐야 하느니라. 하나님의 영에게서 태어난 자는, 어디에 기원이 있는 듯 보이는가에 상관 없이,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헤아릴지니라. 말씀을 주신 경로가 인간을 통한 듯 보인다고 해서 그 신성한 진리를 깎아내려서는 안 되느니라. 너희 형제 중에 다수가 하나님에 관한 이론(理論)을 받아들이는 머리를 가졌어도, 영적으로 하나님의 계심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진지한 어린아이의 영적 태도를 얻어야 하늘나라를 최선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너희에게 그리 자주 가르친 까닭이라. 너희에게 권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정신적 미숙함이 아니라, 오히려 쉽게 믿고 완전히 의지하는 어린아이의 그러한 영적 단순성이라. 하나님의 사실에 관하여 너희가 알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심을 느끼는 능력이 더욱 자라야 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으니라.

155:6.13 (1733.1) 일단 너희의 혼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기 시작하면, 너희는 당장에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의 혼에서 비로소 발견하고 궁극에는 막대한 우주의 모든 인간과 창조에서 발견하리라. 그러나 그런 영원한 실체를 깊이 생각하는 데 거의 또는 도무지 시간을 쓰지 않는 사람들의 혼 속에서 아버지가 최상으로 충실하고 신다운 이상적 하나님으로서 나타날 무슨 가망이 있느냐? 지성은 영적 성품이 거할 자리는 아니어도, 지성은 정말로 거기에 이르는 출입구이라.

155:6.14 (1733.2)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을 찾아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려고 애쓰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너희는 의식하여 그런 정당한 증명을 내놓을 수 없느니라. 하지만 너희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고 힘차게 보여주는 두 가지 증거가 있으니 다음과 같으니라:

155:6.15 (1733.3) 1. 날마다 너의 일상 생활에서 나타나는, 하나님 영(靈)의 열매.

155:6.16 (1733.4) 2. 너의 전 생애의 계획이 영원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희망을 추구하면서, 죽은 뒤에 살아남는 모험에 너 자신 모두, 그리고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걸었다는 분명한 증명을 마련해준다는 사실. 그 하나님의 계심을, 때에 맞게 너는 미리 맛보았느니라.

155:6.17 (1733.5) 자, 잘못 알아듣지 말지니, 내 아버지는 꺼질 듯 가물거리는 아주 가냘픈 믿음에도 늘 반응하시리라. 그는 원시인의 육체적인 미신(迷信) 감정도 주목하시니라. 믿음이 아주 약하여 권위의 종교에 수동적으로 찬성하는 태도, 지적 순응에 지나지 않는 그러한 믿음을 가진 자, 정직해도 두려워하는 자의 경우에, 아버지를 향하여 손을 뻗으려는 어떤 그러한 미약한 시도까지도 허락하고 길러주려고 아버지는 늘 깨어 계시니라. 그러나 어둠에서 빛으로 부름받은 너희에게는 마음을 다하여 믿는 것이 기대되느니라. 너희의 믿음이 육체ㆍ지성ㆍ영, 이 셋의 통합된 태도를 지배할지니라.

155:6.18 (1733.6) 너희는 내 사도요, 너희에게 종교는 영적 진보와 이상적 모험이 있는 험난한 현실에 부딪치는 것이 두려워, 너희가 달아나서 지내도 좋은 그러한 신학적 피난처가 되지 말지니라. 그러나 차라리 너희의 종교는 진정한 체험하는 사실이 될지니, 그런 사실이 하나님이 너희를 발견하고, 이상으로 만들고, 고귀하게 하고, 영답게 변화시켰음을 증거하며, 이렇게 너희를 발견하고 아들 삼은 하나님을 발견하는 영원한 모험을 하려고 너희가 지원하였음을 증거하느니라.

155:6.19 (1733.7) 말씀을 마치고 나서, 예수는 안드레에게 손짓하고 페니키아를 향하여 서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갈 길을 재촉하자.”

제 156 편 티레와 시돈에서 머무르다

유란시아서

제 156 편

티레와 시돈에서 머무르다

156:0.1 (1734.1) 6월 10일 금요일 오후에, 예수와 동료들은 시돈의 근방에 다다랐고, 거기서 어느 부유한 여인의 집에서 멈추었는데, 그 여자는 예수의 인기가 절정에 있던 시절에, 벳세다 병원에서 환자였던 적이 있었다. 전도사와 사도들은 바로 근처에, 그 여자의 친구들 집에 투숙했고, 그들은 이 신선한 환경 속에서 안식일 동안 쉬었다. 북쪽으로 해안가 도시들을 방문하려고 준비하기 전에, 시돈과 근처에서 거의 2주 반을 지냈다.

156:0.2 (1734.2) 이 6월의 안식일은 대단히 조용한 날이었다. 전도사와 사도들은 시돈으로 가는 길에 들은 강론, 종교에 대한 주의 강론에 관하여 명상하느라고 아주 몰두해 있었다. 모두 예수가 일러준 것을 얼마큼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아무도 그 가르침의 의미를 완전히 깨닫지 못했다.

1. 시리아 여인

156:1.1 (1734.3) 주가 묵고 있던, 카루스카의 집 근처에, 한 시리아 여인이 살았는데, 예수가 큰 치유자요 선생이라는 소문을 많이 들었고, 이 안식일 오후에 어린 딸을 데리고 건너왔다. 열두 살쯤 된 이 아이는 발작과 기타 비참한 증세의 특징이 있는, 심한 신경 질환으로 앓고 있었다.

156:1.2 (1734.4) 예수는 쉬고 싶다고 설명하면서, 동료들에게 그가 카루스카의 집에 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들은 주의 명령에 복종했지만, 카루스카의 종은 이 시리아 여인 노라나의 집으로 건너가서, 예수가 자기 여주인의 집에 묵고 있다고 알려주었고, 안달하는 이 어머니가 병든 딸을 데려와서 치료받으라고 재촉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어머니는 딸이 악마, 더러운 귀신에 들렸다고 믿었다.

156:1.3 (1734.5) 노라나가 딸과 도착했을 때, 알패오 쌍둥이는 어느 통역을 통해서 주가 쉬고 있으며 방해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노라나는 주가 휴식을 마칠 때까지 아이와 함께 바로 거기서 남아 있겠다고 대답했다. 베드로도 알아듣도록 설명하고 집으로 가라고 설복하려고 애썼다. 많이 가르치고 병 고친 것 때문에 예수가 지쳤다, 한동안 조용히 있고 쉬려고 페니키아로 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쓸데없었다. 노라나는 떠나려 하지 않았다. 베드로의 간청에 그 여자는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당신의 주를 만날 때까지 떠나지 않겠소이다. 그가 내 아이에게서 악귀를 내쫓을 수 있음을 알고 치유자가 내 딸을 보기까지 가지 않겠소이다.”

156:1.4 (1734.6) 다음에 토마스가 그 여자를 보내려고 애썼지만 실패를 겪었을 뿐이다. 토마스에게 그 여자는 말했다: “내 아이를 괴롭히는 이 악귀를 당신의 주가 내쫓을 수 있다고 믿나이다. 그가 갈릴리에서 위대한 일을 하셨다고 소문을 들어 왔고, 나는 그를 믿나이다. 제자인 당신들한테 무슨 일이 생겼기에, 당신 선생의 도움을 얻으려고 오는 자들을 당신들이 돌려보내려 하나이까?” 그 여자가 이렇게 말하고 나자 토마스는 물러났다.

156:1.5 (1735.1) 그리고 나서 노라나를 타이르려고 열심당원 시몬이 앞으로 나섰다. “여자여, 너는 그리스 말을 하는 이방인이라. 은혜 받은 집의 아이들에게 주려고 생각한 빵을 가져다 주가 개들에게 던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라.” 그러나 시몬의 공격에 노라나는 기분 상하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예 선생이여,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나이다. 유대인의 눈에 나는 개밖에 안 되어도 당신의 주에 관해서 말하면, 나는 믿는 개이나이다. 그가 내 딸을 보도록 하겠다고 작정했사오니, 내 딸을 보시기만 하면 딸을 고치리라 내가 믿음이니이다. 당신조차도, 선한 사람이여, 아이들의 식탁에서 어쩌다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는 특권을 개한테서 감히 빼앗으려 하지 않으리이다.”

156:1.6 (1735.2) 바로 이때 그 어린 여자아이는 모두 앞에서 사나운 경련을 일으켰고, 그 어머니는 외쳤다: “저런, 여러분은 내 아이가 악귀에 들린 것을 볼 수 있나이다. 우리의 필요가 여러분에게 감명을 주지 않으면 당신들의 주께는 호소하리이다. 그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이방인조차도 믿을 때는 감히 고친다는 말을 내가 들어왔나이다. 당신들은 그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나이다. 내 아이가 고침을 받을 때까지 가지 않겠나이다.”

156:1.7 (1735.3) 열린 창문을 통해서 이 대화를 모두 들은 예수는 그들이 깜짝 놀라도록 이제 바깥으로 나와서 말했다: “아 여자여, 네 믿음이 크니라. 너무 큰즉 네가 바라는 것을 주지 않을 수 없도다. 평안히 네 길을 가라. 너의 딸은 이미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 어린 여자아이는 그 시각부터 나았다. 노라나와 아이가 떠나자, 예수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동료들은 이 요청을 따랐지만, 그 어머니와 아이는 온 시골에 두루, 또 시돈에서도, 어린 여자아이가 병이 나은 사실을 그치지 않고 외쳤다. 너무 지나쳐서 예수는 며칠 안에 숙소를 바꾸는 것이 상책임을 깨달았다.

156:1.8 (1735.4) 이튿날 사도들을 가르칠 때, 예수가 시리아 여인의 딸을 치유한 것을 논평하면서 말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계속 그래 왔느니라. 이방인들이 하늘나라 복음의 가르침에 담긴 유익한 믿음을 어떻게 쓸 수 있는가 너희 스스로 보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이르노니,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충분한 믿음을 보일 생각이 없으면 이방인이 그 나라를 차지할지니라.”

2. 시돈에서 가르치다

156:2.1 (1735.5) 시돈으로 들어가면서, 예수와 동료들은 다리를 건너갔다. 그들 중 여럿이 처음 본 다리였다. 이 다리 위를 걸으면서, 예수는 다른 말씀 중에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은 오직 다리이라. 너희는 다리를 지나가도 좋지만 그 위에 거처를 지을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느니라.”

156:2.2 (1735.6) 스물네 사람이 시돈에서 수고를 시작하자, 예수는 도시의 바로 북쪽에 있는 어느 집, 주스타와 그 어머니 버니스의 집에 묵으려고 갔다. 아침마다 주스타의 집에서 예수는 스물네 사람을 가르쳤고, 그들은 오후와 저녁에 시돈에서 가르치고 전도하러 바깥으로 나갔다.

156:2.3 (1735.7) 사도와 전도사들은 전하는 말씀을 시돈의 이방인이 받아들이는 태도에 크게 기운을 얻었다. 짧게 머무르는 동안,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에 더해졌다. 페니키아에서 보낸 약 6주 동안의 이 기간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에 대단히 수확이 많았지만, 후일에 복음서를 쓴 유대인 저자들은, 바로 예수의 민족 가운데 그렇게 큰 무리가 적대하는 대열에 선 바로 그때, 이 이방인들이 그의 가르침을 이렇게 따듯하게 받아들였다는 기록을 가볍게 지나치는 버릇이 있었다.

156:2.4 (1736.1) 여러 면에서 이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보다 예수의 가르침을 더 잘 알아들었다. 그리스어를 하는 많은 이 시리아ㆍ페니키아인들은 예수가 하나님 같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예수 같음을 알게 되었다. 이른바 이 이교도(異敎徒)는 이 세상과 전체 우주의 법칙이 한결같다는 주의 가르침을 잘 알아들었다. 하나님은 사람이나 민족이나 나라를 차별하는 분이 아니다, 우주의 아버지는 조금도 편애하지 않는다, 우주는 전적으로 항상 법을 지키고 어김없이 믿을 만하다는 가르침을 깨달았다. 이 이방인들은 예수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전하는 말씀을 감히 받아들였다. 오랜 세월을 통해서 계속, 사람들은 예수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156:2.5 (1736.2) 예수는 적과 대결할 용기가 모자라서 갈릴리에서 달아나지 않았다는 것을 스물네 사람에게 분명히 설명했다. 그가 기존의 종교와 드러내놓고 충돌할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다, 순교자가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이해했다. 주스타의 집에 있었던 이 회의 중 하나에서 주는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말했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지라도, 내 진리의 말은 사라지지 아니할지니라.”

156:2.6 (1736.3) 시돈에서 머무르는 동안 예수의 가르침의 주제는 영적 진보였다. 그들이 가만히 서 있을 수 없다, 의로운 가운데 전진하든지, 죄와 악의 길로 후퇴하든지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날에 있었던 것들을 잊어버리고, 한편 너희는 하늘나라의 더 큰 현실을 붙잡기 위하여 앞으로 나가라”고 훈계했다. 복음을 배우는 어린아이 시절에 만족하지 말고, 영과 교통이 있는 가운데, 그리고 신자들과 친교하는 가운데, 신의 아들이 되는 어른 높이에 도달하기까지 애쓰라고 타일렀다.

156:2.7 (1736.4) 예수는 말했다: “내 제자들은 악한 일을 그칠 뿐 아니라, 좋은 일 하기를 배워야 하느니라. 의식해서 저지르는 모든 죄로부터 깨끗하게 될 뿐 아니라, 죄를 지었다는 느낌조차 마음에 품지 말아야 하느니라. 죄를 고백하면 그 죄가 용서되나니, 그런즉 너희는 죄짓지 않는 양심을 지켜야 하느니라.”

156:2.8 (1736.5) 예수는 이 이방인들이 나타낸 날카로운 유머 감각을 크게 기뻐했다. 시리아 여인 노라나의 크고 집요한 믿음 뿐 아니라 그 여자가 드러낸 유머 감각이 주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의 자비에 호소했다. 그의 민족―유대인―이 유머가 아주 모자라서 주는 크게 서운해 하였다. 한때 토마스에게 말했다: “내 민족은 자신들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고 유머를 거의 알아듣지 못하느니라. 바리새인의 짐스러운 종교는 유머 감각을 가진 민족 사이에서 생길 수 없었느니라. 저희는 또한 일관성이 모자라니,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3.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

156:3.1 (1736.6) 6월 28일 화요일에 주와 동료들은 시돈을 떠나서 포르피리온과 헬두아까지 해안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방인들은 그들을 후하게 접대하였고, 가르치고 전도하는 이 주간에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에 더해졌다. 사도들은 포르피리온에서 전도하고 전도사들은 헬두아에서 가르쳤다. 스물네 사람이 이렇게 일에 분주한 동안, 예수는 사나흘 동안 그들을 떠나서 해안 도시 베이룻을 방문했는데, 거기서 말락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리아인과 이야기했으며, 그는 믿는 사람이었고 지난해에 벳세다에 있었다.

156:3.2 (1737.1) 7월 6일 수요일에 그들 모두 시돈으로 돌아왔고 일요일 아침까지 주스타의 집에서 머물렀으며, 이때 티레를 향하여 떠나, 사렙타의 길로 해안을 따라서 남으로 내려갔고, 7월 11일 월요일에 티레에 도착했다. 이때가 되자 사도와 전도사들은 이른바 이 이방인(異邦人) 사이에서 일하는 데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들은 실제로, 더 거슬러 올라가 셈족 기원을 가졌던 초기 가나안 부족들로부터 주로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이 민족들은 모두 그리스어를 썼다. 이 이방인들이 복음을 열심히 듣는 것을 지켜보고, 다수가 쉽게 믿음을 주목한 것은 사도와 전도사들에게 크게 놀라운 일이었다.

4. 티레에서

156:4.1 (1737.2) 7월 11일부터 7월 24일까지 그들은 티레에서 가르쳤다. 사도들은 각자 전도사 한 명을 데리고 갔고, 이렇게 둘씩 티레의 온 구석과 그 주위에서 가르치고 전도했다. 이 바쁜 항구 도시에서 여러 나라 말을 쓰는 주민은 말씀을 기쁘게 들었고,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고 공개적으로 하늘나라의 친교에 들어갔다. 예수는 요셉이라는 유대인 집에서 본부를 유지했다. 이 신자는 티레에서 남쪽에 5, 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거기는 다윗과 솔로몬의 시절에, 도시 국가 티레의 임금이었던 히람의 무덤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156:4.2 (1737.3) 이 2주 동안, 날마다 사도와 전도사들은 조그만 모임을 열기 위하여 알렉산더의 방파제의 길을 거쳐 티레로 들어갔고, 밤마다 대부분은 도시의 남쪽, 요셉의 집에 있는 야영지로 돌아오곤 했다. 날마다 신자들이 예수가 쉬는 곳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도시에서 나왔다. 주는 겨우 한 번 티레에서 7월 20일 오후에 말씀했다. 그때 온 인류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에 관하여, 또 모든 종족의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드러내는 아들의 사명에 관하여 신자들에게 가르쳤다. 이 이방인들 사이에서 하늘나라 복음에 너무 관심이 많아서, 멜카트 성전의 문이 그에게 개방되었다. 이 고대의 성전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기독교 교회 하나가 후일에 세워졌음을 기록하는 것이 흥미 있다.

156:4.3 (1737.4) 티레의 자주 물감 제조업의 많은 유지(有志)가 하늘나라를 믿었다. 자주는 티레와 시돈을 세계에서 유명하게 만들고 그들의 세계적 상업과 그에 따른 부강(富强)에 아주 크게 이바지한 물감이었다. 그 뒤에 얼마 안 있어, 이 물감의 근원이었던 바다 동물의 공급이 줄어들기 시작했을 때, 물감 만드는 이 사람들은 이 조개의 새로운 서식처를 찾아서 떠났다. 이처럼 땅 끝까지 옮겨 다니면서, 하나님은 아버지요 사람은 형제라는 소식을―하늘나라의 복음을―가지고 갔다.

5. 티레에서 예수가 가르침

156:5.1 (1737.5) 이 수요일 오후에 연설하는 과정에서, 예수는 따르는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백합 이야기를 했다. 백합은 밑에 있는 검은 흙 속에 썩은 물질과 거름 속에 뿌리를 내리지만, 순수하고 눈 같이 흰 꽃 송이를 햇빛 속에 높이 드러낸다. 그는 말했다: “마찬가지로, 필사자는 인간 성품의 동물같은 토양 속에 기원의 뿌리와 존재가 있지만, 믿음으로 영적 성품을 위로, 하늘 진리가 담긴 햇빛 속으로 올리고, 실제로 영의 고귀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느니라.”

156:5.2 (1738.1) 바로 이 설교를 하는 동안, 예수는 자기 직업―목수일―과 상관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비유를 썼다. “영적 자질을 가진 고귀한 인격의 성장을 위하여 기초를 튼튼히 세우라”고 훈계하는 과정에서 말했다: “영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너희는 영에게서 태어나야 하느니라. 친구들 사이에 영으로 채워진 인생을 살고자 하면, 영에게 가르침을 받고 영의 인도를 받아야 하느니라. 그러나 어리석은 목수의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벌레 먹고 안으로 썩고 있는 재목을 반듯하게 만들고, 재고, 반들반들하게 손질하느라고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나서, 튼튼하지 않은 들보에 이처럼 모든 수고를 퍼붓고 나서, 그 나무를 세월과 폭풍우의 공격을 견디기 위하여 지을 건물의 기초로 쓰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퇴짜놓아야 하느니라. 사람마다 인격의 지적ㆍ도덕적 기초가 그 상부(上部) 구조, 사람을 키우고 고상하게 하는 영적 성품을 적절히 떠받치는가 확인하여라. 영적 성품은 이처럼 필사 지성을 변화시키고, 다시 만들어진 그 지성과 결합하여, 불멸의 운명을 가진 혼을 생성하리라. 너희의 영적 성품―합동으로 창조된 혼―은 살아 있고 자라는 것이지만, 개인의 지성과 도덕률은 그 토양이요, 그로부터 인간을 발전시키고 신다운 운명을 가진 이러한 상급 명시가 솟아나야 하느니라. 진화하는 혼이 담긴 그 토양은 인간답고 물질이지만, 지성과 영을 통합한 이 사람의 운명은 영답고 신다운 것이라.”

156:5.3 (1738.2) 바로 이날 저녁에 나다니엘은 예수에게 물었다: “주여, 어찌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으로 이끌지 말라고 우리가 기도하나이까? 우리는 당신이 아버지를 계시하는 것을 보고서 아버지가 그런 일을 결코 하지 않는 줄 잘 아나이다.” 예수는 나다니엘에게 대답했다:

156:5.4 (1738.3) “초기에 히브리 선지자들이 아버지를 아주 어렴풋이 본 것과 달리,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이 네가 비로소 아버지를 아는 것을 보니, 그리 묻는 것이 이상하지 않도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거의 모든 일 중에 우리 조상이 어떻게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였는가 너희가 잘 아느니라. 우리 조상은 모든 자연 현상에, 또 인간 체험의 모든 특별한 사건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는가 찾았느니라. 저희는 하나님을 선과 악, 양쪽에 연결지었느니라. 하나님이 모세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파라오의 마음을 굳어지게 했다고 생각하였느니라. 좋든 나쁘든, 무슨 일을 몹시 하고 싶은 욕구를 가졌을 때, 사람은 ‘주가 이리저리 하라, 아니면 어디어디로 가라 내게 말씀하였도다’하고 논평하면서 이 특별한 감정을 설명하는 버릇이 있었느니라. 따라서 사람들이 아주 빈번히, 아주 맹렬히 유혹에 빠졌으므로, 우리 조상은 하나님이 시험하거나 벌주거나 힘을 북돋우려고 하나님이 그 방향으로 이끈다고 믿는 것이 버릇이 되었으나, 정말로 이제 너희가 더 잘 아느니라. 자신의 이기심의 재촉에 따라서, 동물 성질의 충동에 따라서, 사람들이 너무나 자주 유혹(誘惑)에 빠지는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이런 방법으로 유혹을 받을 때, 내가 너희에게 훈계하노니, 그 유혹이 도대체 무엇인가 정직하게 진지하게 인식하는 한편, 어떻게 표현할까 찾고 있는 영ㆍ지성ㆍ육체의 에너지를 한층 더 높은 경로로, 더 이상적 목표로 총명하게 다시 방향을 돌리라. 이 방법으로 동물 성품과 영 성품 사이에, 쓸데없고 사람을 약화시키는 투쟁을 거의 온전히 피하면서, 유혹을 필사자의 가장 높은 종류의 봉사, 격려하는 봉사로 변화시킬 수도 있느니라.

156:5.5 (1738.4) “그러나 단순히 인간 의지의 힘을 통해서, 한 가지 욕구를 더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다른 욕구로 대체하려는 노력으로 유혹을 이기려고 시도하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너희에게 경고하노라. 못되고 낮은 성질의 유혹을 참으로 이기고 싶으면, 너희가 유혹이라고 인식하는 행동, 낮고 이상적이지 못한 이 행동 버릇을 버리고 너희의 정신이 대신 얻고 싶어 하는, 높고 더 이상적인 행위 형태에 실제 관심을 정말로 참으로 개발하고, 또 이를 사랑하게 된 영적으로 유리(有利)한 장소로 너희가 와야 하느니라. 필사자의 욕구를 속여 억압하는 짐에 너희가 더욱 눌려 지내기보다 오히려, 이 방법으로 영적 변화를 통해서 너희는 구원을 받으리라. 낡고 열등한 것은 새롭고 우수한 것을 사랑하는 가운데 잊혀지리라. 진리를 사랑함으로 빛을 받는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서 아름다움은 언제나 더러움을 이기느니라. 새롭고 진지한 영적 애정의 분출하는 에너지에 막대한 힘이 있느니라.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에 지지 말고,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라.”

156:5.6 (1739.1) 밤이 늦도록 사도와 전도사들은 계속 질문했고, 많은 대답으로부터 우리는 현대의 표현법으로 다시 말하여, 다음 여러 생각을 제시하려 한다:

156:5.7 (1739.2) 강력한 포부, 총명한 판단, 경험을 쌓아 얻은 지혜는 물질적 성공에 필수이다. 지도력은 타고난 능력과 신중함, 의지력과 결심에 달려 있다. 영적 운명은 믿음ㆍ사랑ㆍ진리에 바치는 헌신에―올바름을 갈급히 목마르게 찾는 데―하나님을 찾아내고 그와 같이 되려 하는, 마음을 다한 소망에 달려 있다.

156:5.8 (1739.3) 너희가 인간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낙심하지 말라. 인간 성품은 잘못하는 경향이 있을지 모르지만 본래부터 죄로 차 있지 않다. 유감스러운 체험을 더러 잊으려는 데 온전히 실패한다고 낙심하지 말라. 세월이 지나도 네가 잊지 못하는 잘못은 영원 속에서 잊혀지리라. 네 운명에 대하여, 네 생애가 우주에서 펼쳐지는 장거리 관점을 빨리 얻음으로 네 혼의 짐을 가볍게 하라.

156:5.9 (1739.4) 정신의 불완전이나 육체의 욕구에 따라서 혼의 가치를 평가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단 하나의 불행한 인간적 사건의 기준으로 혼을 판단하거나 그 운명을 평가하지 말라. 영적 운명은 네가 영적으로 동경(憧憬)하는 것과 그 목적에 따라서 좌우된다.

156:5.10 (1739.5) 종교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진화하는 불멸의 혼이 겪는 순전히 영적 체험이지만, 도덕적 힘과 영적 에너지는 어려운 사회 상황에 대처하고, 까다로운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용될 수 있는 힘찬 세력이다. 이 도덕적ㆍ영적 자질은 어떤 수준의 인간 생활도 더욱 부유하고 의미 있게 만든다.

156:5.11 (1739.6)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기를 배우면, 너희는 옹졸하고 초라한 인생을 살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다. 인간의 사랑은 정말로 서로 주고받는 것일까 싶지만, 신의 사랑은 어떤 만족을 추구하더라도 바깥을 향한다. 어떤 사람의 성품에 사랑이 적을수록 사랑의 필요는 더욱 커지고, 신의 사랑은 그러한 필요를 채우려고 더욱 애쓴다. 사랑은 결코 자아를 찾지 않으며, 자신에게 줄 수 없다. 신의 사랑은 스스로 억제할 수 없으며, 그 사랑은 사심(私心) 없이 남에게 주어야 한다.

156:5.12 (1739.7) 하늘나라를 믿는 자는 올바름이 확실히 승리한다는 절대적 믿음, 혼을 다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하늘나라를 세우는 자는 영원한 구원의 복음이 진리인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신자들은 경건한 교통을 가짐으로 혼을 새롭게 하고, 지성을 북돋우고 영을 새롭게 하면서, 생활의 급류(急流)로부터 어떻게 훌쩍 물러나는가―물질적 존재에서 사람을 성가시게 하는 것들을 피하는가―를 더욱 배워야 한다.

156:5.13 (1739.8)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불행에 닥쳐 낙심하거나 실망으로 기가 꺾이지 않는다. 믿는 자는 순전히 물질적 격변의 결과로서 생기는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 영적 인생을 사는 자는 물질 세계의 사건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다. 영생(永生)을 얻고자 하는 자는 필사자의 생활에서 온갖 변천과 골칫거리에 대처하는 기법, 활력을 불어넣는 건설적 기법을 실천하는 자이다. 참 신자는 날마다 살면서, 바른 일 하기가 더욱 수월해짐을 발견한다.

156:5.14 (1740.1) 영적 생활은 참된 자존심을 힘차게 키운다. 그러나 자존심은 자아를 찬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존심은 사람의 동료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봉사하는 것과 언제나 나란히 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너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하나가 다른 하나의 능력을 재는 척도이다.

156:5.15 (1740.2)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모든 참된 신자는 동료들이 영원한 진리를 사랑하도록 유혹하는 데 더욱 솜씨가 늘어난다. 너는 어제보다 오늘, 인류에게 선(善)을 드러내는 일에 더 주변이 좋은가? 너는 지난해보다 올해에 올바름을 권장하는 데 더 나아지고 있는가? 갈급한 혼을 영의 나라로 인도하는 너의 솜씨가 갈수록 더 예술적이 되는가?

156:5.16 (1740.3) 필사 동료들과 제휴하여 땅에서 너를 쓸모 있는 시민으로 활동하도록 너의 생각이 실용적이고, 한편 너의 영원한 구원을 보장하도록 너의 이상(理想)이 충분히 높은가? 영적으로 너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지만, 육체를 입고서 너희는 아직도 땅의 나라의 시민이다. 물질인 것을 케자에게 돌리고, 영적인 것을 하나님께 돌리라.

156:5.17 (1740.4) 진화하는 혼의 영적 능력을 재는 척도는 진리를 믿는 너의 믿음과 사람에게 주는 너의 사랑이지만, 인격의 인간적 힘을 재는 척도는 불평을 품지 않으려는 능력이요, 깊은 슬픔을 닥쳐서 속을 끓이지 않고 견디는 능력이다. 패배는 너의 진정한 자아를 정직하게 볼 수 있는 참된 거울이다.

156:5.18 (1740.5) 너희가 더 나이 들고 하늘나라 일에 숙련됨에 따라서, 너희는 문제 있는 필사자를 다루는 데 더 요령이 생기고 완고한 동료들과 함께 사는 데 더욱 관대해지는가? 요령(要領)은 사회적 지렛대에 받침이요, 관용은 위대한 사람을 가리키는 표시이다. 드물고 매력 있는 이 두 선물을 가지면,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온갖 필요 없는 사회적 오해를 피하는 귀중한 노력을 기울이면서 너희는 더욱 민첩하고 숙달될 것이다. 그러한 지혜로운 사람은 많은 어려움을 피할 수 있고, 감정 조절이 모자라는 자, 성장하려고 하지 않는 자, 품위 있게 늙으려 하지 않는 자는 모두 분명히 그런 어려움을 상당히 배당받을 것이다.

156:5.19 (1740.6) 진리를 전파하고 복음을 선포하려고 너희가 온갖 노력을 기울이면서, 거짓과 불공정을 피하라. 땀 흘리지 않고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마땅치 않은 동정을 바라지 말라. 사랑하라, 너희의 공적과 상관 없이, 신과 인간의 자원으로부터 거리낌없이 받고, 그 보답으로 아낌없이 사랑하라. 그러나 명예와 칭찬에 관계된 모든 다른 일에는 정직하게 오직 너희에게 속하는 것만 구하라.

156:5.20 (1740.7) 하나님을 의식하는 필사자는 구원받음을 확신한다. 그는 인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정직하고 한결같다. 피할 수 없는 괴로움을 어떻게 용감히 견디는가 알고, 어쩔 수 없는 어려움이 닥칠 때 투덜거리지 않는다.

156:5.21 (1740.8) 참된 신자는 벽에 부딪친다고 해서 좋은 일 하는 데 지치지 않는다. 어려움은 진리를 사랑하는 자의 열심을 돋우며, 한편 장애물은 겁 없는 하늘나라를 세우는 자의 노력을 자극할 뿐이다.

156:5.22 (1740.9) 그리고 티레를 떠나려고 준비하기 전에 예수는 다른 여러 가지를 가르쳤다.

156:5.23 (1740.10) 갈릴리 바다 지역으로 돌아오려고 티레를 떠나기 전날에, 예수는 동료들을 불러모으고, 그와 열두 사도가 가기로 한 길과 다른 길로 돌아가라고 열두 전도사에게 지시했다. 여기서 예수를 떠난 뒤에 전도사들은 결코 다시 그렇게 가까이 주와 함께 지내지 못했다.

6. 페니키아에서 돌아오다

156:6.1 (1741.1) 7월 24일 일요일 정오 무렵에 예수와 열두 사람은 티레의 남쪽에 요셉의 집을 떠나서, 해안가를 따라 프톨레마이스로 내려갔다. 여기서 하루 묵었고, 거기에 사는 신자들 일행에게 위로하는 말씀을 주었다. 베드로는 7월 25일 저녁에 그들에게 설교했다.

156:6.2 (1741.2) 화요일에 프톨레마이스를 떠나서, 티베리아스 길을 경유하여 요타파타 가까운 곳까지 내륙으로 동쪽으로 갔다. 수요일에 요타파타에서 멈추었고, 신자들에게 하늘나라 일에 대하여 더 가르쳤다. 목요일에 요타파타를 떠나서, 스불론 마을까지 나사렛-레바논산을 잇는 길에서 북쪽으로 라마의 길로 갔다. 금요일에 라마에서 모임을 가졌고 안식일 동안 남아 있었다. 31일 일요일에 스불론에 이르렀고, 그날 저녁에 모임을 열었으며, 이튿날 아침에 떠났다.

156:6.3 (1741.3) 스불론을 떠나면서, 기스칼라 가까이 막달라-시돈 길과 만나는 교차점까지 여행했고, 거기서부터 갈릴리 호수의 서쪽 해안에 가버나움 남쪽에 있는 게네사렛으로 갔다. 거기서 다윗 세베대와 만나기로 전에 약속했는데, 거기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과제에서 다음에 취해야 할 행동에 관하여 의논할 생각이었다.

156:6.4 (1741.4) 다윗과 잠깐 회의하는 동안에, 그들은 케레사 가까이 호수의 맞은편에 그때 많은 유지(有志)가 함께 모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바로 그날 저녁에 배 한 척이 그들을 건너편으로 날랐다. 그들은 하루 동안 고지에서 조용히 쉬었고, 이튿날 가까이 있는 공원으로 갔으며 여기는 주가 한때 5천 명을 먹인 곳이다. 여기서 사흘 동안 쉬고, 날마다 회의를 열었으며, 여기에 남녀가 약 50 명 참석했다. 이들은 가버나움과 그 부근에서 살던, 한때 허다했던 신자 무리의 나머지였다.

156:6.5 (1741.5) 예수가 가버나움과 갈릴리에서 자리를 비운 동안, 페니키아에서 머무른 동안에, 적들은 그 운동 전체가 소탕되었다고 보았고, 예수가 급히 물러난 것은 그가 너무 소스라치게 놀라서 언제라도 돌아와서 그들을 성가시게 굴 듯하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의 가르침에 대한 어떤 적극적 반대도 거의 가라앉았다. 신자들은 다시 한 번 공개 모임을 열기 시작했고, 복음 신자들이 막 거친 큰 시련을 통해서 단련받고 정말로 견딘 자들 사이에서 차츰차츰, 그러나 효과적 단결이 생기고 있었다.

156:6.6 (1741.6) 헤롯의 형제 빌립은 건성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고, 주가 그의 영토 안에서 자유롭게 살고 일해도 된다는 말을 보내 왔다.

156:6.7 (1741.7) 예수와 모든 추종자가 가르침을 전하지 못하도록 온 유대 민족의 회당 문을 닫으라는 명령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논쟁의 대상인 예수가 스스로 자리를 비우고 나서 즉시, 유대 민족 전체에서 반작용이 일어났다. 예루살렘의 바리새인과 산헤드린 지도자들에 대하여 분개심이 널리 퍼졌다. 많은 회당 지도자가 아브너와 그 동료들에게 몰래 회당(會堂)을 열기 시작했고, 그들은 이 선생들이 요한의 추종자요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156:6.8 (1741.8) 헤롯 안티파스조차 마음이 움직였다. 예수가 그의 형제 빌립의 영토에서 호수 건너편에 체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가 갈릴리에서 예수를 잡아들일 영장(令狀)에 서명한 적이 있지만, 페레아에서 그를 잡으라고 그렇게 허가하지는 않았다는 말을 보내 왔으며, 따라서 갈릴리 바깥에 남아 있으면 예수를 괴롭히지 않으리라는 것을 가리켰다. 그는 바로 이 판결을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알렸다.

156:6.9 (1742.1) 이것이 서기 29년 8월 1일 무렵의 형편이었다. 이때 주는 페니키아 전도에서 돌아와서, 땅에서 그의 사명에서 마지막이자 파란 많았던 이 한 해 동안에, 흩어지고 시험받고 고갈된 전도단을 다시 조직하기 시작했다.

156:6.10 (1742.2) 주와 동료들이 새 종교를 비로소 선포하려고 준비하는 동안, 투쟁의 논점에 뚜렷하게 선이 그어졌다. 이 종교는 사람들의 정신 속에 거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을 가르치는 종교였다.

제 157 편 케자리아 빌립비에서

유란시아서

제 157 편

케자리아 빌립비에서

157:0.1 (1743.1) 케자리아 빌립비 근처에서 잠시 머무르려고 열두 사도를 데리고 가기 전에, 예수는 다윗의 사자들을 통해서 8월 7일 일요일에 자기 가족을 만나려는 목적으로, 가버나움으로 가려고 주선했다. 미리 주선하여 이번에는 세베대의 배 작업장에서 만나기로 되었다. 다윗 세베대는 나사렛 가족 전부―마리아, 그리고 예수의 아우와 누이들 모두―가 오도록 동생 유다와 전에 약속했고, 이 약속을 지키려고 예수는 안드레와 베드로와 함께 갔다. 마리아와 아이들은 이 약속을 분명히 지킬 의도가 있었지만, 바리새인의 한 무리가 예수가 빌립의 영토에 호수 맞은편에 있음을 알고서, 할 수 있으면 예수가 어디에 있는가 알아내려고 어쩌다가 마리아를 방문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예루살렘 밀사들이 도착한 것은 마리아를 크게 언짢게 만들었다. 그들은 가족 전체의 긴장과 불안을 눈치채고서 예수가 그들을 찾아올 것을 기대하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밀사들은 마리아의 집에서 진을 치고, 증원 부대를 부른 뒤에, 예수가 도착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실질적으로 가족 중에 누구도 예수와 약속을 지키려는 시도를 못하게 만들었다. 몇 번이나 낮에 유다와 룻은 예수에게 소식을 전하려는 노력으로, 바리새인들의 경계를 피하려고 애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157:0.2 (1743.2) 오후에 일찍, 다윗의 사자들은 바리새인들이 어머니 집 문앞 계단에서 야영하고 있다는 말을 가져왔고, 따라서 예수는 가족을 찾아보려고 전혀 애쓰지 않았다. 그래서 또 다시, 어느 누구의 잘못도 없이, 예수와 땅에 있는 가족은 만나지 못했다.

1. 성전의 세리

157:1.1 (1743.3) 안드레와 베드로와 더불어, 예수가 배 작업장 가까이 호숫가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성전의 세리가 다가와서 예수를 알아보고서, 베드로를 옆으로 끌고 가서 말했다: “너의 주는 성전 세금을 물지 않느냐?” 적이라 선언한 자들의 종교 활동을 유지하는 데 예수가 돈 내기를 기대해야 한다는 제안에, 베드로는 분통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세리(稅吏)의 얼굴에서 야릇한 표정을 눈치챘고,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를 지원하는 데, 관례대로 반 세겔 내는 것을 거절하는 행위로 그들을 옭아매는 것이 목적임을 똑바로 짐작했다. 따라서 베드로는 대답했다: “뭐라고, 물론 주는 성전 세금을 내시느니라. 너는 문 옆에서 기다리라. 그러면 세금을 가지고 당장 돌아오겠노라.”

157:1.2 (1743.4) 자, 베드로는 말을 서둘러 뱉어 버렸다. 유다가 자금을 가지고 다녔고 그는 호수 건너편에 있었다. 베드로나 그의 형이나 예수도 돈 한 푼을 가져오지 않았다. 바리새인들이 그들을 찾고 있음을 아니까, 돈을 얻으러 벳세다로 쉽게 갈 수 없었다. 세리에 관하여, 그리고 그에게 자기가 돈을 내기로 약속했다고 베드로가 예수께 말씀드리자, 예수는 말했다: “약속했으면, 돈을 내야 하느니라. 그러나 네가 무슨 돈으로 약속을 지키겠느냐? 약속을 지키고자 다시 어부가 되려느냐? 그래도 베드로야, 우리가 세금 내는 것이 그 상황에 좋으니라. 이 사람들이 우리 태도에 성낼 핑계를 하나도 주지 말자. 우리는 여기서 기다릴 터이니, 그동안에 너는 배를 타고 가서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으라. 물고기를 저 건너 시장에 팔고 나서, 우리 셋 모두를 위하여 세리에게 돈을 내라.”

157:1.3 (1744.1) 가까이 서 있던 다윗의 비밀 사자가 이 모든 것을 엿들었고, 다음에 물가 가까이 고기잡고 있던 한 동료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려고 배를 타고 나가려고 준비했을 때, 이 사자(使者)와 친구 어부는 물고기가 든 큰 광주리 몇 개를 베드로에게 내밀었고, 베드로가 물고기를 근처의 생선 장수에게 나르는 것을 도왔다. 그 상인은 잡은 물고기를 샀고, 다윗의 사자가 보탠 것과 함께 세 사람의 성전 세금을 물기에 넉넉할 만큼 돈을 치렀다. 세리는 세금을 받았고 그들이 얼마 동안 갈릴리에서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늦게 낸 것에 대하여 벌금을 받지는 않았다.

157:1.4 (1744.2) 베드로가 입에 한 세겔을 물고 있는 한 물고기를 잡았다는 기록을 너희가 가진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 시절에 물고기 입에서 보물을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떠돌았다. 거의 기적 같은 그런 이야기는 보통이었다. 그래서, 베드로가 배를 향하여 떠나자, 예수는 반은 유머로 한마디 말씀하였다: “임금의 아들들이 세금을 내야 하다니 이상한지고. 보통은 궁정을 유지하려고 낯선 자가 세금을 물되, 우리가 전혀 당국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니라. 떠나라! 아마도 세겔을 입에 문 물고기를 네가 잡으리라.” 예수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베드로가 어느 틈에 세금을 가지고 나타났으니까, 마태 복음 저자가 기록한 바와 같이, 이 사건이 나중에 하나의 기적으로 불어난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157:1.5 (1744.3) 안드레와 베드로와 함께, 예수는 거의 해질 때까지 바닷가에서 기다렸다. 사자들은 마리아의 집이 아직도 감시받고 있다는 말을 가져왔다. 따라서, 어두워지자 기다리던 세 사람은 배를 타고 천천히 갈릴리 바다의 동쪽 해안을 향하여 저어갔다.

2. 벳세다 줄리아스에서

157:2.1 (1744.4) 8월 8일 월요일에, 예수와 열두 사도가 벳세다 줄리아스 가까이 마가단 공원에서 야영(野營)하는 동안에, 하늘나라를 세우는 데 관심을 가진, 1백 명이 넘는 신자와 전도사, 여인단,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회의에 참여하려고 가버나움에서 건너 왔다. 예수가 여기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또한 많은 바리새인이 왔다. 이때가 되자, 사두개인들 중에 더러는 바리새인들과 연합하여 예수를 옭아매려고 노력했다. 신자들과 비공개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예수는 공개 회의를 열었다. 거기에는 바리새인도 있었는데, 주에게 빈정대는 말을 던지고, 다른 방법으로 그 모임을 방해하려고 애썼다. 방해꾼들의 우두머리가 말했다: “선생이여, 당신이 가르칠 권한이 있다는 표징을 우리에게 주시기 바라나이다. 그리고 나서 그 표징이 일어나면, 하나님이 당신을 보내신 줄 모든 사람이 알겠나이다.” 예수는 대답했다: “저녁에는 하늘이 붉은즉 날씨가 좋으리라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찌푸리므로 날씨가 나쁘리라 너희가 말하느니라. 서쪽에서 구름이 올라오는 것을 볼 때, 너희는 소나기가 쏟아지리라, 바람이 남쪽에서 불 때, 너희는 타는 듯한 더위가 오리라 말하느니라. 너희가 하늘의 표정을 살필 줄 그리 잘 알면서 어찌하여 세월의 징조(徵兆)를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느냐? 진리를 알고자 하는 자에게는 표징을 이미 주었느니라. 그러나 나쁜 생각을 가진 위선(僞善)의 세대는 아무 표징을 받지 못하리라.”

157:2.2 (1745.1)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예수는 물러가서 추종자들과 가지는 저녁 회의를 위하여 준비했다. 이 모임에서, 그들이 제안한 대로 예수와 열두 사도가 케자리아 빌립비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데카폴리스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연합 전도를 개시하기로 결정이 내렸다. 주는 데카폴리스 전도 사업을 계획하는 데 참여했고, 그 무리를 해산하면서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저희가 많이 배웠음을 나타내는 데, 그리고 저희가 종교 형식에 깊이 충성하는 데 속지 말라. 살아 있는 진리의 영과 참된 종교의 힘에만 아랑곳하라. 죽은 종교의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나라의 영적 실체들을 맛보는 산 체험을 믿는 것이 너희를 구하리라. 바로 너희가 편견에 눈이 멀고 두려움에 몸이 마비되도록 버려두지 말라. 전통을 존중하는 것이 너희의 시력을 나쁘게 함으로 너희의 눈이 보지 못하고 귀가 듣지 못하게 만들지 말라. 참된 종교의 목적은 단지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진보를 보장하는 것이라. 너희가 마음을 다하여 진리를, 영원한 실체들의 이상(理想)을 사랑하는 데 빠지지 아니하면, 마음 속에 아무 평화도 없고 머리 속에 아무 진보도 없으리라. 삶과 죽음의 문제가―세월 속에 죄 많은 쾌락이 영원의 올바른 실체들과 대조가 되어―너희 앞에 놓여 있느니라. 믿음과 희망을 가진 새 인생을 살기 시작하면서, 지금도 너희는 두려움과 의심의 사슬을 비로소 벗어나야 하느니라. 동료 인간들을 위하여 봉사할 느낌이 혼 속에서 일어날 때, 그 숨통을 막지 말라. 이웃을 사랑하는 감정이 마음 속에서 솟구칠 때, 동료들의 진정한 필요에 총명하게 봉사함으로 그러한 애정의 욕구를 표현하라.”

3. 베드로의 고백

157:3.1 (1745.2) 화요일 아침 일찍 예수와 열두 사도는 마가단 공원을 떠나서 케자리아 빌립비를 향했는데, 그 도시는 사분(四分) 영주 빌립의 영토의 서울이었다. 케자리아 빌립비는 놀랍게 아름다운 지역에 있었다. 이 도시는 요단강이 지하 동굴로부터 솟아나오는 경치 좋은 언덕 사이에, 황홀한 골짜기에 자리잡았다. 헤르몬산 꼭대기가 북쪽에 완전히 모습이 드러났고, 한편 언덕으로부터 바로 남쪽에 요단강 상류와 갈릴리 바다의 장대한 경치가 보였다.

157:3.2 (1745.3) 하늘나라의 일을 초기에 경험하면서 예수는 헤르몬산으로 간 적이 있었다. 그의 사명의 마지막 시기에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시련과 승리가 있었던 이 산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거기서 사도들이 책임에 관하여 새로운 선견을 얻고, 바로 눈앞에 닥친 시련의 때를 위하여 새 힘을 얻기를 바랐다. 길을 따라 여행하는 동안, 메롬의 물 남쪽을 지나칠 무렵에 사도들은 페니키아와 다른 곳에서 요즈음에 겪은 체험에 대하여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그리고 다른 민족들이 주를 어떻게 여기는가 하나하나 열거하게 되었다.

157:3.3 (1745.4) 점심을 먹으려고 멈추었을 때, 예수는 갑자기 열두 사람에게 자신에 관하여, 그들에게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는 질문을 처음으로 던졌다. 이 놀라운 질문은 이러했다: “사람들은 내가 누구라고 하느냐?”

157:3.4 (1746.1) 하늘나라의 성질과 특징에 관하여 이 사도들을 훈련시키느라고 예수는 전에 여러 달을 보냈고, 그 자신의 성품, 하늘나라와 그의 개인적 관계에 대하여 더 가르치기 시작해야 할 때가 왔음을 잘 알았다. 그리고 이제, 뽕나무 밑에 앉아 있는 동안에 주는 선택한 사도들과 오랫동안 관계를 가졌던 중에서 아주 중대한 한 모임을 가지려고 준비했다.

157:3.5 (1746.2) 사도들의 과반수가 예수의 물음에 대답하는 데 거들었다. 예수를 아는 모든 사람이 그를 선지자로, 또는 특별한 사람으로 여긴다, 예수가 악마들의 왕과 연합하고 있다고 고발함으로 그의 권능을 설명하면서, 적들조차 그를 크게 두려워한다고 그들은 말했다.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를 친히 만나본 적이 없는 어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세례자 요한이라 믿는다고 예수에게 말했다. 여러 번, 그리고 가지가지의 사람들이 예수를 모세ㆍ엘리야ㆍ이사야ㆍ예레미야와 견주었다고 베드로는 설명했다. 이 보고에 귀를 기울이고 나서, 예수는 똑바로 일어서서, 둘레에 반원을 이루어 앉아 있는 열두 사도를 내려다보면서, 깜짝 놀라게 힘을 주어, 손을 한 번 휘둘러 그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누구라 하느냐?” 긴장하고 고요한 순간이 있었다. 열두 사람은 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시몬 베드로가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당신은 구원자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나이다.” 그리고 앉아 있던 열한 사도가 하나같이 일어나서, 이렇게 그들 모두의 의견을 베드로가 대신하여 말했음을 가리켰다.

157:3.6 (1746.3) 다시 앉으라고 손짓하고 나서, 아직 그들 앞에 서서, 예수는 말했다: “내 아버지가 이를 너희에게 드러냈느니라. 나에 관하여 너희가 진실을 알아야 할 때가 왔도다. 그러나 한동안 너희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노라. 길을 떠나자.”

157:3.7 (1746.4) 그래서 케자리아 빌립비로 걸음을 다시 재촉했고, 그날 저녁 늦게 도착해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셀수스의 집에서 멈추었다. 사도들은 그날 밤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의 생애에서, 그리고 하늘나라 일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을 느끼는 듯했다.

4.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

157:4.1 (1746.5)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경사가 있은 뒤에, 여러 차례 사도들은 실질적으로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였다. 잠시 동안, 그들 중에 더러는 예수가 기대하던 메시아라고 참으로 믿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이 가슴 속에서 솟아나자마자, 어떤 호된 말씀이나 실망을 안겨주는 행위로 주는 그 희망을 산산조각냈다. 머리 속에 지녔던 기대하던 메시아 개념, 그리고 가슴 속에 지녔던, 이 특별한 사람과 각별한 관계를 가졌던 체험, 이 둘 사이의 갈등 때문에, 그들은 오랫동안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157:4.2 (1746.6) 사도들이 셀수스의 집 뜰에서 점심 식사를 하려고 모인 것은 이 수요일 늦은 아침이었다. 밤 동안 대체로, 그리고 그날 아침에 일어난 뒤로, 시몬 베드로와 열심당원 시몬은 주가 메시아일 뿐 아니라 또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신다운 아들이라고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수준까지 모두가 이르게 하려고 형제들과 함께 열심히 수고하고 있었다. 두 시몬은 예수를 평가하는 의견이 거의 같았고, 그들의 관점을 형제들이 완전히 받아들이게 만드느라고 부지런히 수고하였다. 안드레는 사도단의 단장으로 계속 일했지만, 동생 시몬 베드로가 갈수록 더, 모두의 지지를 받아서 열두 사도의 대변인이 되고 있었다.

157:4.3 (1747.1) 거의 한낮 무렵에 주가 나타났을 때 그들은 모두 뜰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품위 있는 엄숙한 표정을 지었고, 예수가 다가가자 모두 일어섰다. 예수는 상냥하고 친숙한 빙그레 웃음으로 그들의 긴장을 풀어주었는데, 추종자들이 자신이나 그들에게 관계된 무슨 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때 이렇게 하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다. 위엄 있는 손짓으로 그들에게 앉으라고 하였다. 열두 사도는 주가 그들 앞에 왔을 때, 결코 다시는 일어서서 인사를 드리지 않았다. 그렇게 겉으로 존경심을 보이는 것을 그가 허락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157:4.4 (1747.2)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다가오는 데카폴리스 여행을 위한 계획을 의논하기 시작한 뒤에, 예수는 갑자기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고 말했다. “사람의 아들의 신분에 관하여 시몬 베드로가 선언한 것에 너희가 찬성한 지 꼭 하루가 지났으니, 아직도 너희의 결심을 지키려는가 내가 묻고자 하노라.” 이 말을 듣자, 열두 사도는 일어섰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를 향하여 몇 발자국 나서서 말했다: “예 주여, 그러하나이다. 당신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우리가 믿나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형제들과 함께 앉았다.

157:4.5 (1747.3) 그리고 나서 아직도 서서 예수는 열두 사람에게 말했다: “너희는 내가 선택한 대사(大使)이나 이 상황에 그냥 인간적 지식의 결과로 너희가 이 믿음을 품을 수 없음을 내가 아노라. 이것은 너희 혼 아주 깊숙이 내 아버지의 영이 주신 계시이라. 그런즉 너희 안에 거하는 내 아버지 영의 통찰력으로 이렇게 고백할 때, 나는 이 기초 위에 하늘나라의 형제 정신을 세우리라 선언할 생각이 드노라. 이 영적 현실의 반석 위에, 내 아버지 나라의 영원한 실체 속에서 영적으로 친교하는, 살아 있는 성전을 세우겠노라. 어떤 악한 세력과 죄의 무리도 신다운 영이 이처럼 인간과 교제하는 것에 맞서서 이기지 못하리라. 내 아버지의 영은 이 영적 친교로 유대 관계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에게 늘 신다운 안내자요 스승이 되려니와 너희와 너희 후계자들에게 겉에서 보이는 하늘나라의 열쇠를―현세의 것에 대한 권력을―주리니, 그것이 하늘나라의 동료로서 이 남녀들의 교제가 가지는 사회ㆍ경제적 특징이라.” 다시,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한동안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157:4.6 (1747.4) 예수는 사도들의 충성과 인품을 비로소 신뢰하게 되었다. 그가 선택한 대표들이 최근에 겪은 것을 견딜 수 있는 믿음은 의심할 여지 없이 바로 눈앞에 닥친 불 같은 시련을 견디리라는 것, 그리고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고 나서 그 믿음이 새 섭리 시대의 새 빛 속으로 솟아나고, 그렇게 함으로 나가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세상을 깨우칠 수 있을 것을 주는 깨달았다. 이날 주는, 한 사람을 빼고 사도들이 가진 신앙을 비로소 믿었다.

157:4.7 (1747.5) 그 이후로 바로 이 예수는 신다운 아들이 되는 바로 그 영원한 기초 위에 살아 있는 성전을 짓고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 자의식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는 인간 돌이요, 이 돌들은 영들의 영원한 아버지의 지혜와 사랑에 영광과 명예를 돌리는, 아들들의 살아 있는 이 성전이 된다.

157:4.8 (1747.6) 이렇게 말씀하고 나서, 예수는 열두 사도에게 저녁 식사 때까지 지혜와 힘과 영적 안내를 구하기 위하여 산으로 자기들끼리 따로 가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주가 훈계한 대로 했다.

5. 새로운 개념

157:5.1 (1748.1) 베드로의 고백에서 새롭고 중대한 특징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 의심할 수 없는 그의 신성(神性)을 뚜렷이 인식한 것이다. 그가 세례를 받고 가나에서 결혼식이 있은 뒤로 이 사도들은 여러 면에서 그를 메시아로 여겼지만, 유대인은 그 민족의 구원자가 신다워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유대인은 메시아가 신으로부터 솟아나올 것이라고 가르친 적이 없었다. 그는 “기름 부음받은 자”로 예정되었지만 그들은 도저히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두 번째 고백에서는 통합된 성품, 곧 사람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숭고한 사실이 더욱 강조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성품과 신의 성품이 통합된다는 이 위대한 진리 위에 예수는 하늘나라를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157:5.2 (1748.2) 예수는 전에 사람의 아들로서 땅에서 일생을 살고 수여 임무를 마치려고 애썼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를 기대하던 메시아로 여기고 싶어했다. 그들이 메시아에게 걸었던 기대를 결코 채워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그 기대를 어느 정도 채워줄 수 있도록 그들의 메시아 개념을 수정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러한 계획을 실행하는 데 도저히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다. 따라서 대담하게 셋째 계획을 드러내기로 했다―그의 신성을 드러내놓고 선포하고, 베드로의 고백이 참된 것을 인정하고 열두 사도에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직접 선포하기로 작정했다.

157:5.3 (1748.3) 3년 동안 예수는 그가 “사람의 아들”이라 선포하고 있었고 바로 이 3년 동안 사도들은 그가 기대하던 유대인의 메시아라고 더욱 고집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냈고,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의 통합된 성품 개념 위에 하늘나라를 세우기로 작정했다. 메시아가 아니라고 그들을 확신시키려는 노력을 이제 삼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이제 그가 누구인가 대담하게 드러내고 다음에 그를 메시아로 여기려고 고집하는 그들의 결심을 무시하기로 했다.

6. 이튿날 오후

157:6.1 (1748.4) 예수와 사도들은 셀수스의 집에서 하루 더 남아 있었고, 다윗 세베대로부터 사자들이 자금을 가지고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대중에게 예수의 인기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나서 소득이 크게 줄었다. 케자리아 빌립비에 이르렀을 때 금고는 텅 비었다. 마태는 그런 때에 예수와 형제들을 두고 떠나기가 아주 싫었고, 과거에 아주 여러 번 그랬던 것처럼 유다에게 즉시 건네줄 자신의 자금이 수중에 없었다. 그러나 다윗 세베대는 수입(收入)이 아마 이렇게 줄어들 것이라 미리 내다보았다. 따라서 사자들이 유대ㆍ사마리아ㆍ갈릴리를 거쳐 가는 동안, 추방된 사도들과 주에게 전해 줄 돈을 거두는 사람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전에 그들에게 지시했다. 그래서 이날 저녁이 되자 이 사자들이 자금을 가지고 벳세다에서 돌아왔는데, 이것은 사도들이 데카폴리스 여행을 개시하려고 돌아올 때까지 그들을 부양하기에 넉넉했다. 마태는 그때까지 가버나움에 있는 그의 마지막 부동산을 처분해서 돈을 손에 쥐기를 기대했고, 이 자금이 무명(無名)으로 유다에게 넘겨지도록 주선했다.

157:6.2 (1749.1)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도 예수의 신성(神性)에 대하여 아주 적당한 개념을 가지지 않았다. 이때가 땅에서 주의 생애에서 새 시대의 시작이라는 것을 조금도 깨닫지 못했다. 이때는 선생이요 병 고치는 자가 새로 생각한 메시아―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때였다. 이때부터 계속, 주의 말씀에 새로운 음정이 나타났다. 이때부터 그의 생활에서 한 가지 이상은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이요, 한편 그의 가르침에서 한 가지 개념은 오직 실천해야만 깨달을 수 있는 그 최고의 지혜가 인격화된 모습을 그의 우주에게 제시하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가 생명을 가지고,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가질 수 있기 위하여 그가 오셨다.

157:6.3 (1749.2) 예수는 이제 육체를 입은 인간 생활에서 넷째이자 마지막 단계에 들어갔다. 첫째 단계는 어린이 단계, 한 인간 존재로서 그의 기원ㆍ성품ㆍ운명을 겨우 어렴풋이 의식했던 시절이다. 둘째 단계는 젊은이이자 성장하는 청년으로서 더욱 자의식하는 시절이었다. 이때 그는 자기의 신다운 성품과 인간적 사명을 더욱 뚜렷하게 깨닫게 되었다. 이 둘째 단계는 세례와 관련되었던 체험 및 계시와 함께 끝났다. 주가 땅에서 겪은 체험의 셋째 단계는, 세례 받은 때부터 선생이자 병 고치는 자로서 봉사하던 시절을 거쳐서, 케자리아 빌립비에서 베드로가 고백하던 이 중대한 시간까지 이어졌다. 지상의 인생에서 이 셋째 기간은 사도와 직계 추종자들이 그가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그를 메시아로 여긴 때를 포함했다. 지상 생애에서 넷째이자 마지막 기간은 여기 케자리아 빌립비에서 시작되고 십자가 처형까지 이어졌다. 그의 봉사에서 이 단계의 특징은 신성을 인정한 것이고 육체를 입고 사신 마지막 해의 수고를 포함했다. 넷째 기간에, 추종자들의 대다수는 아직도 그를 메시아로 여겼지만 사도들에게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베드로의 고백은 유란시아에서, 하나의 전체 우주를 위하여 수여 아들로서 그가 최상으로 봉사하는 그 진리를 더욱 철저히 실현하는 새 기간이 시작된 것, 선택된 대사(大使)들이 적어도 어렴풋이나마 그 사실을 인식한 것을 표시하였다.

157:6.4 (1749.3) 예수는 힘차게 진보하는 기법으로 영적 성품이 성장함을 가르쳤고, 이처럼 그의 종교에서 가르친 것을 일생 동안에 모범으로 보였다. 후일에 추종자들이 한 것처럼, 혼과 육체 사이의 끊임없는 싸움을 강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이 이 두 가지를 쉽게 이기며, 이 지적ㆍ본능적 투쟁의 상당 부분을 유익하게 절충하는 데 유능하다고 가르쳤다.

157:6.5 (1749.4) 이때부터 계속하여, 예수의 모든 가르침에 새로운 의미가 붙는다. 케자리아 빌립비 이전에 그는 하늘나라의 대선생으로서 하늘나라 복음을 제시했다. 케자리아 빌립비 이후에 그는 단지 선생일 뿐 아니라 이 영적 세계의 중심이자 둘레인 영원한 아버지의 신성한 대표로서 나타났고, 한 인간, 사람의 아들로서, 이 모두를 행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157:6.6 (1749.5) 예수는 한 선생으로서, 다음에는 선생이자 병 고치는 자로서, 추종자들을 영적 세계로 진지하게 이끌려고 전에 애썼지만 그들은 그렇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땅에서 그의 사명은 유대 민족이 메시아에게 건 기대를 도저히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았다. 그는 결코 옛 선지자들이 묘사한 메시아가 될 수 없었다. 사람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나라를 세우려고 애썼지만, 추종자들은 그 모험에서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이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다음에 예수는 신자들과 중간에서 절충하기로 했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수여 아들의 역할을 드러내놓고 맡으려고 준비했다.

157:6.7 (1750.1) 따라서, 뜰에서 이날 예수가 이야기하는 동안에, 사도들은 많은 새로운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이 선언들 중에 더러는 그들에게도 이상하게 들렸다. 깜짝 놀라게 하는 다른 여러 선언 중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다:

157:6.8 (1750.2) “이때부터 계속, 어떤 사람이라도 우리와 친교하고자 하거든 아들의 책임을 맡고 나를 따를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더 있지 않을 때, 세상이 너희의 주를 대접한 것보다 너희가 더 나은 대접을 받으리라 생각지 말라. 나를 사랑한다면, 너희가 최상의 희생을 기꺼이 바쳐서 이 애정을 증명하기 위하여 준비하여라.”

157:6.9 (1750.3) “내 말을 잘 주의하여라. 올바른 자가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고 내가 왔노라. 사람의 아들은 시중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봉사를 베풀고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려고 왔도다.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잃어버린 자를 찾고 구원하려고 내가 왔노라.”

157:6.10 (1750.4) “아버지로부터 나온 아들 외에 이 세상에서 아무도 지금 아버지를 바라보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들려 올라가면 아들은 모든 사람을 끌어당길 것이요, 이 진리, 아들의 통합된 성품을 믿는 자는 누구나 오랜 세월보다 더 긴 생명을 받을지니라.”

157:6.11 (1750.5)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아직도 드러내놓고 선포해서는 안 되지만 너희에게는 계시되었느니라. 그런즉 이 신비에 관하여 너희에게 내가 담대히 말하노라. 이 육체의 모습을 입고 너희 앞에 서 있어도, 나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왔노라.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내가 있었노라. 너희가 나를 이해한 바와 같이, 나는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으로 왔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얼마 안 있어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의 일로 돌아가야 하노라.”

157:6.12 (1750.6) “너희 조상이 메시아를 상상했던 대로 사람의 아들이 그 기대를 채우지 못하리라는 내 경고를 받고서, 이 선언이 진실임을 너희의 믿음이 이제 이해할 수 있느냐?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느니라. 여우는 굴이 있고 하늘의 새는 보금자리가 있어도,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는 것이 사실인데도, 너희가 나에 관한 진실을 믿을 수 있느냐?”

157:6.13 (1750.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이 모든 일에 내 아버지는 나와 함께 일하시며 아버지는 내 사명을 혼자 이루라고 버려두지 아니하시리라. 마찬가지로 너희가 세상에 두루 이 복음을 선포하려고 곧 떠나갈 때 나는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157:6.14 (1750.8) “이러한 일생을 살라고 너희를 불렀으니, 그 일생의 영광을 이해하고 그 장엄함을 깨닫도록 내가 너희를 따로, 너희들만 잠시 동안 데려왔노라: 곧 인류의 가슴 속에서 내 아버지의 나라를 세우는 모험, 이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의 혼과 생생한 관련을 가지며 나와 친교를 도모하는 믿음의 모험이라.”

157:6.15 (1750.9) 사도들은 대담하고 놀라운 이 말씀을 조용히 들었고, 깜짝 놀랐다. 주의 말씀을 토론하고 생각해 보려고 작은 무리들을 지어 흩어졌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에 고백한 적이 있었지만, 그들은 무엇을 하라고 주가 이끌었는가 그 의미를 완전히 깨달을 수 없었다.

7. 안드레의 회담

157:7.1 (1750.10) 그날 저녁에 안드레는 형제들 각자와 개인적이고 심중을 살피는 회담을 가지는 일을 떠맡았다. 가룟 유다를 빼고, 그는 동료들 모두와 유익하고 기운을 북돋아주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드레는 다른 사도들과 한 것처럼, 유다와 그런 가깝고 개인적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따라서 유다가 사도단의 우두머리와 자유롭게 속을 터놓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던 것을 전에 심각한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드레는 이제 유다의 태도에 너무 걱정이 되어서, 그날 밤 늦게 모든 사도가 잠에 곯아떨어진 뒤에, 예수를 찾았고 걱정의 원인을 주께 말씀드렸다. 예수는 말했다: “네가 이 문제로 내게 온 것은 잘못이 아니라, 안드레야,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더 없느니라. 계속하여 이 사도를 최고로 신뢰하기만 하여라. 형제들에게 나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 것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하지 말라.”

157:7.2 (1751.1) 안드레는 이것밖에 아무것도 예수로부터 얻어낼 수 없었다. 언제나 이 유대 지방 사람과 갈릴리 형제들 사이에 얼마큼 서먹함이 있었다. 유다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몇몇 경우에 주의 꾸지람에 몹시 마음이 상했고, 예수가 임금이 되기를 마다했을 때 실망했다. 바리새인들을 피해 도망했을 때 창피를 느꼈고, 표징(標徵)을 달라는 바리새인들의 도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 때 분하게 여겼다. 주가 권능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것에 어리둥절했고, 이제 요즈음에 금고가 텅 빈 때문에 우울하고 때때로 낙심이 되었다. 그리고 유다는 군중의 자극이 없어 서운했다.

157:7.3 (1751.2) 다른 사도들은 저마다 얼마큼 다른 정도로 바로 이 시험과 시련에 마찬가지로 영향을 받았지만 예수를 사랑했다. 적어도 유다보다 더 주를 사랑했음이 틀림없으니, 그들이 쓰라린 종말까지 함께 고난을 거쳤기 때문이다.

157:7.4 (1751.3) 유대 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유다는 사도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최근에 예수가 경고한 것을 개인적으로 불쾌하게 여겼다. 이 말을 빗대어 그를 가리킨 말로 여기고 싶어했다. 그러나 유다의 큰 잘못은 이것이었다: 여러 번 예수가 사도들을 혼자서 기도하라고 떠나보냈을 때, 우주의 영적 세력과 진지한 교통을 하는 대신에, 유다는 인간적으로 두려운 생각에 빠졌고 한편 앙갚음하려는 느낌을 품는 유감스러운 성향에 굴복할 뿐 아니라, 예수의 사명에 대하여 미묘한 의심을 계속 가졌다.

157:7.5 (1751.4) 이제 예수는 헤르몬산으로 사도들을 데려가려고 했고, 거기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땅에서 그가 넷째 단계의 봉사를 시작하려고 전에 예정하였다. 그들 가운데 몇은 그가 요단강에서 세례받을 때 자리에 있었고 사람의 아들로서 그의 생애가 시작되는 것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새로운 대중 임무를 맡을 권한에 관하여 듣도록 그들 중에 몇 사람이 또한 자리에 있기를 바랐다. 따라서 8월 12일 금요일 아침에, 예수는 열두 사도에게 말했다: “건너의 산으로 여행하기 위하여 식량을 저장하고 준비하여라. 거기서 땅에서 내 일을 마치도록 자질을 받으라고 영이 나에게 명하느니라. 이 체험을 통하여 나와 함께 가는 벅찬 시절 동안 내 형제들도 또한 힘을 얻도록 내가 저희를 데리고 가고자 하노라.”

제 158 편 변모의 산

유란시아서

제 158 편

변모의 산

158:0.1 (1752.1) 서기 29년 8월 12일 금요일 오후, 거의 해질녘이 되어, 예수와 동료들은 헤르몬산의 기슭에 이르렀다. 여기는 유란시아의 영적 운명을 결정하고 루시퍼 반란을 절차에 따라 마무리하느라고 주가 혼자 산으로 올라간 동안에 소년 티글라스가 한때 기다렸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가까웠다. 오래지 않아 닥칠 사건들을 위하여 영적 준비를 갖추면서, 그들은 여기서 이틀 동안 머물렀다.

158:0.2 (1752.2) 대체로, 예수는 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미리 알았고, 사도들 모두가 이 체험을 함께하기를 몹시 바랐다. 자신을 이렇게 계시하기 위하여 그들을 준비시키려고 산기슭에서 함께 머물렀다. 그러나 그들은 땅에 머지않아 나타나기로 된 하늘 존재들의 방문을 완전히 체험하는 것을 정당화할 영적 수준에 도달할 수 없었다. 동료들을 모두 거느리고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는 그러한 특별한 철야 기도에 따라가는 버릇이 든 세 사람만 데리고 가기로 작정하였다. 따라서 오직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이 이 독특한 체험의 일부만이라도 주와 함께 가졌다.

1. 모습의 변화

158:1.1 (1752.3) 8월 15일 월요일 아침 일찍, 예수와 세 사도는 헤르몬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때는 뽕나무 밑에 길가에서 베드로가 대낮에 기억에 남을 고백을 한 지 6일이 되었다.

158:1.2 (1752.4) 육체를 입은 수여 체험이 자기가 창조한 우주에 관계되다시피, 수여의 진전에 상관되는 중요한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하여, 예수는 산으로 혼자 올라가라고 이전에 부름받았다. 예수와 사도들이 이방인의 땅에 있는 동안에 때를 맞추어 이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 이것이 이방인의 산에서 실제로 벌어졌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158:1.3 (1752.5) 한낮이 되기 얼마 전에 그들은 산으로 오르는 중턱쯤에, 목적지까지 이르렀고, 점심을 먹는 동안 예수는 세례받고 얼마 뒤에 요단강 동쪽의 산에서 겪은 체험에 대하여 무언가, 그리고 이 쓸쓸한 피서지를 그가 예전에 방문한 것과 연관하여 헤르몬산에서 겪은 체험을 얼마큼 더 이야기했다.

158:1.4 (1752.6) 소년이었을 때, 예수는 집 가까이 있는 산으로 올라가서, 에스드랠론 평야에서 제국(帝國)들의 군대가 벌였던 전투를 꿈꾸곤 하였다. 유란시아에서 자신 수여 연극의 마지막 장면을 연출하기 위하여 요단 평야로 내려가도록 그를 준비시킬 자질을 받으려고 이제 헤르몬산으로 올라갔다. 주는 이날 헤르몬산에서 투쟁을 그만두고 우주 영토를 통치하는 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파라다이스에 계신 영원한 아들의 명령에 담겨 있는 신다운 아들 계급의 필요 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선택했을 뿐 아니라, 또한 당면한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을 마지막까지 충분히 만족시키려고 결심하였다. 8월의 이날, 세 사도는 그가 완전한 우주 권한의 부여를 물리치는 것을 보았다. 그가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로서 땅에서 생애를 혼자서 마치도록 버려두고 하늘 사자들이 떠나는 동안에 그들은 놀라서 구경하고 있었다.

158:1.5 (1753.1) 사도들의 믿음은 5천 명을 먹였을 때 꼭대기까지 올라갔고, 그리고 나서 거의 밑바닥까지 빨리 내려갔다. 이제, 주가 자기의 신성(神性)을 인정한 결과로서, 열두 사도의 처지는 믿음은 다음 몇 주 동안 가장 높은 음까지 올라갔고, 다만 차츰차츰 갈수록 떨어지게 될 것이었다. 주가 부활하기까지, 세 번째 믿음의 회복은 일어나지 않았다.

158:1.6 (1753.2) 날씨가 아름다운 이날 오후 3시쯤에, 예수는 세 사도를 떠나며 말했다: “아버지와 그의 사자들과 한동안 교통하려고 나는 혼자서 따로 가노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여기서 머무르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사람의 아들의 계속된 수여 임무와 관련하여 너희가 온갖 체험을 겪으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여라.” 이렇게 말한 뒤에, 예수는 가브리엘과 아버지 멜기세덱과 함께 오랫동안 회의하려고 물러났고, 6시쯤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서 그들이 걱정함을 보았을 때 예수는 말했다: “어찌하여 너희가 두려워하였느냐? 내가 아버지 일을 보아야 함을 너희가 잘 아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않을 때 무엇 때문에 의심하느냐? 이제 내가 선언하노니, 사람의 아들이 너희 한가운데서, 너희 중 하나로서 일생을 끝까지 거치기로 하였느니라. 기운을 내어라. 내 일이 끝나기까지 나는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158:1.7 (1753.3) 조촐한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동안에, 베드로는 주에게 물었다. “이 산에서 형제들과 떨어져서 우리가 얼마나 오래 남아 있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영광을 보고, 내가 너희에게 선언한 것은 무엇이나 참이라는 것을 너희가 알 때까지라.” 그들은 피운 불의 이글거리는 잉걸덩이 둘레에 앉아 있으면서, 루시퍼 반란 사건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이것은 어둠이 다가오고 사도들의 눈꺼풀이 무거워지기까지 계속되었는데, 그들이 그날 아침 아주 일찍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158:1.8 (1753.4) 세 사람은 거의 반시간 동안 잠에 곯아떨어져 있다가 가까이 불 튀는 소리에 갑자기 깨어났다. 너무 놀라고 어리둥절한 가운데, 주위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예수가 하늘 세계의 빛나는 옷을 걸친 눈부신 두 존재와 함께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음을 보았다. 예수의 얼굴과 모습은 하늘 빛으로 밝게 빛났다. 이 셋은 낯선 말로 이야기했지만, 그들이 말한 어떤 것을 듣고서 베드로는 예수와 함께 있는 존재들이 모세와 엘리야라고 잘못 짐작했다. 실제로 그들은 가브리엘과 아버지 멜기세덱이었다. 물리 통제자들은 예수의 요청 때문에 사도들이 이 장면을 구경하도록 미리 주선하였다.

158:1.9 (1753.5) 세 사도는 너무 지나치게 놀라서 정신을 차리는 데 느렸지만, 눈부신 환상이 그들 앞에서 흐려지고 예수가 혼자 서 있는 것을 보자, 먼저 정신이 든 베드로가 말했다: “예수여, 주여, 여기에 와 본 것이 좋사옵고, 이 영광을 보아서 우리가 기쁘오이다. 우리는 영화롭지 않은 세상으로 돌아가기가 싫사옵나이다. 당신이 기꺼이 바라신다면 우리가 여기서 살게 하소서. 그러면 우리가 텐트 셋을 세우리니, 하나는 당신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세우리이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 것은 머리가 헛갈렸기 때문에,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아무런 다른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58:1.10 (1753.6) 베드로가 아직 말하는 동안, 은빛 구름이 가까이 와서 그들 넷을 가렸다. 사도들은 이제 크게 놀랐다. 예배하려고 엎드리자 한 목소리를 들었는데, 예수가 세례받을 때 말했던 바로 그 목소리가 말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구름이 사라지자, 다시 예수는 셋하고만 자리에 있었고 이들에게 손을 뻗어 어루만지며 말했다: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너희는 이보다 더 큰 것들을 볼지니라.” 그러나 사도들은 참으로 두려웠다. 자정 조금 전에 산을 내려가려고 준비하는 동안, 그들 세 사람은 말이 없고 생각이 깊었다.

2. 산에서 내려오다

158:2.1 (1754.1) 산을 반쯤 내려가는 동안 한 마디 말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대화를 시작하며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아무에게도, 너희 형제들에게도, 사람의 아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까지, 이 산에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도록 하여라.” 세 사도는 “사람의 아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까지”라는 주의 말씀에 충격을 받고 어리둥절했다. 예수가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들의 믿음을 아주 최근에 다시 다짐한 적이 있었고 바로 눈앞에서 영화롭게 그의 모습이 바뀐 것을 보았는데, 이제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내다니!

158:2.2 (1754.2) 베드로는 주가 죽는다는 생각에 몸서리쳤고―생각해 보기에 너무나 언짢았다―야고보나 요한이 이 말씀과 관련하여 무슨 말씀이라도 물을까 두려워, 다른 데로 돌리는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무슨 다른 말을 할까 몰랐기 때문에, 머리 속에 처음 떠오르는 생각을 이렇게 표현했다: “주여, 어째서 메시아가 나타나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서기관들이 말하나이까?” 예수는 베드로가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언급을 피하려는 것을 알고서 대답했다: “엘리야는 사람의 아들을 위하여 길을 예비하려고 정말로 먼저 오고, 사람의 아들은 많이 고통받고 마침내 거절당해야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고, 저희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이나 그에게 행하였도다.” 그리고 나서 세 사도는 예수가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언급한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여기기를 고집한다면, 요한은 예언에 나오는 엘리야임이 틀림없다는 것을 예수는 알았다.

158:2.3 (1754.3) 예수는 그가 부활 이후에 누릴 영광을 맛보기로 구경한 것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라고 당부했다. 이제 그들이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였으니까, 그가 이적을 행하는 구원자라는 그릇된 개념을 조금이라도 정당화할 것이라는 생각을 키워주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은 이 모든 것을 머리 속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주가 부활할 때까지 아무에게도 이에 대하여 입을 열지 않았다.

158:2.4 (1754.4) 그들이 산을 계속 내려가는 동안 예수는 말했다: “너희는 나를 사람의 아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도다. 그러므로 너희의 굳은 결심대로 나를 받아들이는 데 내가 찬성하였노라. 그러나 잘못 생각하지 말지니, 내 아버지의 뜻이 이겨야 하느니라. 이처럼 자신이 뜻하는 경향을 따르기로 하면, 너희는 많은 실망을 견디고 많은 시련을 겪을 준비를 해야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를 훈련시킨 것은 스스로 택한 이 슬픔조차 거치고 너희를 승리로 이끌기에 충분하니라.”

158:2.5 (1754.5) 베드로와 야곱과 요한이, 벌어진 일을 구경하기에 다른 사도들보다 어떤 의미에서도 준비가 더 잘 되었거나 그런 보기 드문 특권을 누리기에 영적으로 더 적합했기 때문에 예수가 이들을 변모(變貌)의 산으로 함께 데리고 올라가지는 않았다. 조금도 그렇지 않다. 이 체험을 하기에 열두 사도 가운데 아무도 영적으로 자격이 없음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홀로 교통하려고 혼자 있기 바랐을 때 그를 따라다니라고 배치된 세 사도만 함께 데리고 갔다.

3. 변모의 의미

158:3.1 (1755.1) 변모의 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본 것은 그 중대한 날에 헤르몬산에서 벌어진 하늘 야외극을 순식간에 구경한 것이었다. 그 변모는 다음의 계제였다:

158:3.2 (1755.2) 1. 유란시아에서 미가엘이 육신화하여 사는 수여 생애를 마친 것을 파라다이스에 계신 어머니, 영원한 아들이[1] [20] 받아들인 것. 영원한 아들의 요구 조건에 관계된 한, 예수는 이제 조건을 만족시켰다는 확언을 받았다. 가브리엘이 예수에게 그런 확신의 말씀을 가져왔다.

158:3.3 (1755.3) 2.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유란시아에서 수여를 충실히 행한 것에 무한한 영이 만족해 한다는 증언. 무한한 영의 우주 대표, 곧 구원자별에서 미가엘의 가까운 동료이자 항상 계시며 함께 일하는 분이, 이 경우에 아버지 멜기세덱을 통해서 말했다.

158:3.4 (1755.4) 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의 사자들이 땅에서 그의 사명이 성공한 것에 대하여 제시한 이 증언을 반갑게 받아들였지만, 예수는 아버지가 유란시아에서 수여가 끝났다고 지적하지 않은 것을 주목했다. 인격화된 예수의 조절자를 통하여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말함으로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계심이 증거했을 뿐이다. 이것은 세 사도에게도 들리는 말로 말씀하였다.

158:3.5 (1755.5) 하늘에서 이 방문이 있은 뒤에 예수는 아버지의 뜻을 알려고 애썼고, 자연스럽게 끝날 때까지 필사 수여를 추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이 예수에게 변모의 의미였다. 세 사도에게, 변모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로서 땅에서 주가 일생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갔음을 표시하는 사건이었다.

158:3.6 (1755.6) 가브리엘과 아버지 멜기세덱의 공식 방문이 있고 나서, 예수는 이들, 봉사하는 그의 아들들과 비공식 회의를 가졌고 함께 우주 사무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4. 간질병 있는 소년

158:4.1 (1755.7) 예수와 동반자들이 사도들의 야영지에 다다른 것은 이 화요일 아침, 식사 조금 전이었다. 가까이 오자, 그들은 사도들 주위에 상당한 군중이 모여 있음을 헤아렸고, 곧 약 50명으로 된 이 집단이 다투고 논쟁하는 큰 소리를 비로소 들었다. 이들은 아홉 사도와 한 무리를 포함했는데, 이 무리는 마가단으로부터 여행하면서 예수와 그 동료들을 추적하던 예루살렘 서기관들과 믿는 제자들로 반씩 갈라져 있었다.

158:4.2 (1755.8) 군중은 수많은 말다툼에 빠져 있었지만, 으뜸가는 논쟁은 예수를 찾아서 그 전 날에 도착한 어떤 티베리아스 시민에 관한 것이었다. 이 사람, 사펫에서 온 야고보는 14살쯤 되는 아들, 외아들이 있었는데, 간질로 몹시 앓고 있었다. 이 신경 질환 외에도 이 소년에게 그때 땅에 있으면서 감독받지 않던 중도자, 떠돌아 다니는 짓궂고 반항하는 중도자들 중에 하나가 들어가 있었고, 그래서 그 소년은 간질병자이면서 악귀에 들려 있었다.

158:4.3 (1755.9) 속이 타는 이 아버지는 헤롯 안티파스의 하급 관리였고 예수에게 이 병든 아들을 고쳐달라고 부탁할까 하여, 예수를 찾아서 빌립의 영토 서쪽 경계지를 거쳐서 거의 2주 동안 이리저리 헤매 다녔다. 이날 정오 무렵까지 그는 사도 일행을 따라잡지 못했고 그때 예수는 세 사도와 함께 산에 있었다.

158:4.4 (1756.1) 이 사람이 예수를 찾고 있던 다른 사람들, 거의 40명을 동반하고서, 갑자기 들이닥쳤을 때, 아홉 사도는 많이 놀랐고 상당히 동요되었다. 이 무리가 도착했을 때, 아홉 사도는, 적어도 그들 가운데 대다수는 오래 된 유혹―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 누가 가장 높을 것인가 논의하는 유혹―에 이미 굴복하였다. 그들은 개별 사도들에게 배치될 그럴 듯한 자리를 놓고 다투느라고 바빴다. 그들은 다만 오래 간직했던, 물질적 사명을 가진 메시아 관념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구원자라는 그들의 고백을 바로 예수가 받아들였으므로―적어도 그의 신성(神性)이 사실임을 인정했으니까―주와 떨어져 있는 이 기간에, 마음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희망과 포부에 관하여 떠드는 일에 빠지는 것보다 무엇이 더 자연스러운가. 예수를 찾는, 사펫에서 온 야고보, 그리고 같이 찾던 동료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들은 이런 토론을 하느라고 바빴다.

158:4.5 (1756.2) 안드레는 이 아버지와 아들에게 인사하려고 다가가서 말했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야고보가 말했다: “선한 사람이여, 당신의 주를 찾나이다. 병든 내 아들을 고쳐주시기를 구하나이다. 내 아이에게 들린 이 악마를 예수가 쫓아주시기를 바라나이다.” 그리고 나서 그 아버지는 아들의 병이 너무 깊어서, 어떻게 여러 번 이 악성 발작의 결과로 그가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는가 사도들에게 계속 이야기했다.

158:4.6 (1756.3) 사도들이 듣고 있는 동안, 열심당원 시몬과 가룟 유다가 그 아버지 앞으로 걸어가서 말했다: “우리는 그를 고칠 수 있고, 당신은 주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느니라. 우리는 하늘나라의 대사요, 이런 일을 더 비밀로 하지 않느니라. 예수는 구원자요, 우리는 하늘나라 열쇠를 받았노라.” 이때가 되자 안드레와 토마스는 한쪽에서 의논하고 있었다. 나다니엘과 다른 사람들은 놀라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시몬과 유다가 주제넘지는 않더라도 갑자기 대담해진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다: “이런 일을 하는 권한을 받았다면 당신들이 내 아이를 이 사슬에서 벗어나게 할 말씀을 주시기를 비나이다.” 그리고 나서 시몬은 앞으로 나서서, 손을 아이의 머리 위에 얹고,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명령했다: “그에게서 나오라, 너 더러운 귀신아. 예수의 이름으로 내 말에 복종하라.” 그러나 소년은 더욱 사나운 발작을 일으켰고, 한편 서기관들은 사도들을 비웃으면서 조롱했으며, 그 실망한 신자들은 이 불친절한 비평가들의 비웃음을 당했다.

158:4.7 (1756.4) 안드레는 이 분별 없는 노력과 그 비참한 실패에 마음이 몹시 분했다. 상의하고 기도하려고 그는 사도들을 옆으로 불렀다. 이 명상의 시간이 지난 뒤에, 그들의 실패의 따끔한 맛을 통렬하게 느끼고 모두에게 덮친 부끄러움을 감지하면서, 안드레는 두 번째 시도로 그 악귀를 내쫓으려고 했다. 그 노력은 실패로 끝났을 뿐이었다. 안드레는 솔직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그 아버지가 밤 동안 아니면 예수가 돌아오기까지 함께 남아 있기를 청하며 말했다: “아마도 이 종류는 주가 몸소 명령하지 않으면 나가지 않는 듯하구나.”

158:4.8 (1756.5) 그래서 기운이 넘쳐흐르고 날아갈 듯한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과 함께 예수가 산에서 내려오고 있는 동안에, 아홉 형제는 혼란에 빠지고 풀이 꺾여 부끄러운 가운데 마찬가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은 기가 죽고 수그러진 무리였다. 그러나 사펫의 야고보는 단념하려 하지 않았다. 언제 예수가 돌아올지 그들이 전혀 일러줄 수 없었지만, 그는 주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 머무르기로 작정하였다.

5. 예수가 소년을 고치다

158:5.1 (1757.1) 예수가 가까이 오자, 아홉 사도는 안심이 되어 그를 환영하였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얼굴에 나타난 명랑한 빛과 드문 열심을 보고 크게 기운을 얻었다. 모두 앞으로 달려나가서 예수와 세 형제를 맞이했다. 인사를 나누는 동안에, 군중이 다가왔고 예수는 물었다: “우리가 가까이 오는 동안 너희가 무엇을 가지고 다투었느냐?” 그러나 당황하고 창피를 겪은 사도들이 주의 물음에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병든 소년의 안달하는 아버지가 앞으로 나서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말했다: “주여, 저는 아들, 외아들이 있사온데 악귀에 들렸나이다. 무서워서 소리지르고 입에 거품을 물고, 발작할 때 죽은 사람처럼 쓰러질 뿐 아니라, 그에게 들어간 이 악귀가 때때로 그를 찢고, 때때로 물 속에, 아니 불 속에도 그를 던졌나이다. 이를 많이 갈았고, 타박상을 많이 입은 결과로 내 아이가 시드나이다. 그가 사는 것은 죽는 것보다 못하나이다. 아이 어머니와 나는 마음이 슬프고 낙심이 되나이다. 어제 한낮 무렵에, 당신을 찾아다니다가 당신의 제자들을 따라잡았고,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 당신의 사도들이 이 악마를 쫓으려고 애썼사오나 저희는 할 수 없었나이다. 그리고 이제 주여,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하시겠나이까, 내 아들을 고쳐주시겠나이까?”

158:5.2 (1757.2)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예수는 무릎 꿇고 있는 아버지를 만지고 일어나라고 명했고, 한편 가까이 있는 사도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그 앞에 서 있던 모든 사람에게 말했다: “아, 믿음이 없고 타락한 세대여, 얼마나 오래 너희를 참으리오? 얼마나 오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오? 믿음의 효과는, 의심하면서 내리는 명령에 반응하여 나타나지 않는 것을 배우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리겠느냐?” 그리고 나서, 어리둥절한 아버지를 가리키며 예수는 말했다: “여기로 네 아들을 데려오라.” 그리고 야고보가 소년을 예수 앞으로 데려 오자 물었다, “얼마나 오래 소년이 이렇게 앓아 왔느냐?” 아버지는 대답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랬나이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그 소년은 사나운 발작이 일어나서 그들 한가운데 쓰러졌고 이를 갈면서 입에 거품을 물었다. 사나운 발작이 한 바탕 연속된 뒤에 그는 죽은 사람처럼 그들 앞에 누웠다. 이제 아버지는 다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서 주께 애원하며 말했다: “탄원하오니, 당신이 고칠 수 있으면, 우리에게 동정을 보이사 우리를 이 고통에서 구원하소서.” 이 말을 들었을 때, 예수는 그 아버지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아버지의 사랑의 힘을 의심말고 오직 네 믿음의 진실함과 그 한계를 의심하라. 정말로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 그리고 나서 사펫의 야고보는 믿음과 의심이 섞인, 오래 기억에 남을 말을 남겼다, “주여, 나는 믿나이다. 비오니, 나의 믿지 못함을 도와주소서.”

158:5.3 (1757.3) 이 말을 들었을 때, 예수는 앞으로 걸어가서 그 소년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살아 있는 믿음의 명예를 위하여 내가 이 일을 하노라. 얘야, 일어나라! 복종하지 않는 영아, 그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소년의 손을 아버지의 손에 쥐어 주며, 예수는 말했다: “네 갈 길을 가라. 아버지가 네 혼의 소망을 허락하셨느니라.”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은, 아니 예수의 적들조차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158:5.4 (1757.4) 동료 사도들이 실패하고 좌절된 이 장면으로 그렇게 곧 돌아온 것은, 아주 최근에 변모하는 그 장면과 체험의 영적 환희를 맛본 세 사도에게는 정말로 꿈에서 깨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이 열두 대사에게는 늘 이러했다. 그들의 생활 체험에서 번갈아 환희에 올랐다가 창피에 빠지는 일을 거듭하였다.

158:5.5 (1758.1) 이것은 두 가지 병, 육체의 질병과 영의 병을 참으로 고친 것이다. 소년은 그 시각부터 영구하게 고침을 받았다. 야고보가 회복한 아들을 데리고 떠나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우리는 이제 케자리아 빌립비로 가느니라. 당장에 준비하여라.” 남쪽으로 여행하는 동안에 그들은 말이 없는 무리였고, 한편 군중은 뒤에서 계속 따라갔다.

6. 셀수스의 집 뜰에서

158:6.1 (1758.2) 그들은 셀수스와 함께 밤을 지냈다. 그날 저녁에 뜰에서 저녁을 먹고 휴식을 가진 뒤에, 열두 사도가 예수의 둘레에 모이자 토마스가 말했다: “주여, 뒤에 남아 있던 우리는 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도 모르고, 그 일로 당신과 함께 있던 우리 형제들은 크게 기운을 얻었사오나, 산에서 일어난 것들을 이때 밝힐 수 없음을 아는 까닭에, 당신이 우리의 실패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하고 이 문제에 대하여 가르치시기를 원하나이다.”

158:6.2 (1758.3) 예수는 토마스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너희 형제들이 산에서 들은 것은 모두, 때가 되면 너희에게 드러내겠노라. 그러나 아주 지혜롭지 못하게 시도한 것을 너희가 어찌하여 실패하였는가 이제 너희에게 보여주리라. 너희의 주와 동반자, 곧 너희 형제들이 아버지의 뜻을 더 알기를 구하려고, 그리고 그 신성한 뜻을 효과적으로 행할 지혜를 더 풍부히 받으려고 어제 건너편 산으로 올라간 동안에, 여기 남아서 지키던 너희는 정신이 영적 통찰력을 가지도록 애쓰고 아버지의 뜻을 더욱 충만히 계시받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기도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신앙을 뜻대로 연습하지 못하였도다. 그러나 그 대신, 유혹에 무릎을 꿇고 자신을 위하여 하늘나라에서 좋은 자리―너희가 고집해서 생각하는 물질적인 현세의 나라―를 찾는 잘못된 옛 버릇에 빠졌느니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내가 거듭 선언하였는데도, 너희는 이 그릇된 개념에 매달리는도다.

158:6.3 (1758.4) “너희의 믿음이 사람의 아들의 신분을 파악하기 무섭게, 현세의 높은 자리를 바라는 이기적 욕심이 몰래 돌아와서, 하늘나라에서 누가 가장 클 것인가 너희끼리 논의에 빠지느니라. 너희가 고집하여 생각하는 그런 하늘나라는 없고, 언제라도 존재하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의 영적 형제들이 사는 나라에서 제일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자신의 눈에 작게 되어야 하고, 그처럼 형제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더냐? 영적 위대함은 하나님 같이 이해하는 사랑에 있고, 자기를 높이려고 물질적 힘을 즐겨 쓰는 데 있지 않느니라. 너희는 시도한 것에 철저히 실패했고 그 목적이 순수하지 않았느니라. 신성한 동기가 없었고 영적 이상(理想)이 없었으며 이타적 포부가 없었느니라. 너희의 과정은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았고 달성하려는 너희의 목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도다.

158:6.4 (1758.5) “아버지의 뜻을 따를 때를 제외하고, 확립된 자연 현상의 과정에서 시간을 단축할 수 없다는 것을 너희가 깨닫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리리오? 영적 능력이 없는 마당에 너희는 영적 일을 할 수도 없느니라. 이 중에 어느 것도, 그 잠재성이 있을 때에도, 셋째이자 필수인 그 인간 요소, 팔팔한 믿음을 가지는 개인적 체험이 존재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느니라. 너희는 하늘나라의 영적 실체들을 얻기 위한 유혹으로서 물질적 표현이 반드시 있어야 하느냐? 특별한 일이 눈에 보이게 전시되지 않으면 너희는 내 사명의 영적 중요성을 깨달을 수 없느냐? 모든 물질적 표현이 겉으로 나타나는 것과 상관 없이, 너희가 하늘나라의 높은 영적 실체들에 집착하기를 언제 내가 기대할 수 있느냐?”

158:6.5 (1759.1) 예수는 이렇게 열두 사람에게 말씀하고 나서, 덧붙였다: “그리고 이제 너희는 가서 쉬라, 내일 우리는 마가단으로 돌아가서,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와 마을로 가는 전도 사업에 관하여 의논할 것임이라. 오늘 얻은 체험의 결론으로, 내가 너희 형제들에게 산에서 말한 것을 너희 하나하나에게 선언하노라, 그리고 이 말씀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도록 하여라: 사람의 아들은 이제 수여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가느니라. 우리가 바야흐로 어떤 수고를 시작하고자 하나니, 나를 죽이려 애쓰는 사람들의 손에 내가 넘겨질 때, 이 수고가 너희의 믿음과 헌신의 마지막 큰 시험으로 곧 이끌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것을 기억하여라: 사람의 아들은 죽음에 던져지겠으나 다시 살아나리라.”

158:6.6 (1759.2) 그들은 그날 밤, 슬프게 물러났다. 어리둥절했고 이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가 말씀하신 것에 관하여 아무것도 묻기 두려웠지만, 그가 부활하신 뒤에 이 모두를 상기했다.

7. 베드로의 항의

158:7.1 (1759.3) 이 수요일 아침 일찍, 예수와 열두 사도는 케자리아 빌립비를 떠나서 벳세다 줄리아스 가까이 마가단 공원을 향했다. 사도들은 그날 밤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고, 그래서 일찍 일어나서 갈 준비가 되었다. 무딘 알패오 쌍둥이조차 예수의 죽음에 관한 이 말씀에 충격을 받았다. 남쪽으로 내려가자, 메롬의 물 바로 건너서, 다마스커스 길에 이르렀다. 예수는 서기관과 다른 사람들이 뒤에 금방 따라올 것을 알았고, 이들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갈릴리를 거치는 다마스커스 길로 가버나움까지 계속 가라고 그들에게 지시했다. 예수가 이렇게 한 것은 뒤를 따라오는 자들이 예수와 사도들이 헤롯 안티파스의 영토 지나기를 두려워할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들이 요단강 동쪽으로 갈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이날 사도들하고만 있을까 하여 따라오는 비난자들과 군중을 피하려고 애썼다.

158:7.2 (1759.4) 그들은 점심 먹을 때가 훨씬 지나기까지 갈릴리를 통하여 계속 여행했고, 그때 기운을 차리려고 그늘에서 멈추었다. 음식을 먹고 난 뒤에, 안드레는 예수에게 말했다: “주여, 내 형제들은 당신의 깊은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나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완전히 믿게 되었사온데, 이제 우리를 떠나는 것, 죽는 것에 대하여 이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나이다. 우리는 당신의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없나이다. 당신은 비유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니이까? 당신이 우리에게 직접, 숨김없이 그대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간청하나이다.”

158:7.3 (1759.5) 안드레의 말에 대답하여 예수는 말했다: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너희가 고백한 까닭에, 땅에서 사람의 아들의 수여의 종말에 관하여 진실을 너희에게 비로소 펼쳐 보일 수밖에 없노라. 너희는 내가 메시아라는 믿음에 집착하기를 고집하고, 메시아가 예루살렘에서 보좌에 앉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려 하지 않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고집하여 이르노니, 사람의 아들이 얼마 안 있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많은 고난을 견디고, 서기관과 장로와 주사제들에게 거절당하며, 이 모든 일이 있은 뒤에 죽음을 당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리라. 나는 너희에게 비유를 이르지 않노라. 이 사건들이 우리에게 갑자기 닥칠 때 이를 위하여 너희가 준비될까 하여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이르노라.” 그가 아직도 말씀하는 동안, 시몬 베드로가 성급하게 다가와서, 손을 주의 어깨에 얹고 말했다: “주여, 우리가 당신과 다투지 않게 하소서, 하오나 내가 선언하오니, 이런 일이 결코 우리에게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이다.”

158:7.4 (1760.1) 베드로는 예수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주의 인간 성품은 좋은 뜻을 가진 이 사랑의 말 속에,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대로 땅에서 수여 생애를 끝까지 추구하는 정책을 바꾸라고 유혹하는 미묘한 제안이 있음을 깨달았다. 사랑에 넘치고 충성스러운 친구들이지만 그를 말리려는 제안을 수락하는 위험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 너에게는 적, 유혹자의 기운이 도는구나. 이런 식으로 말할 때, 너는 내 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적 편에 있도다. 이런 식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장애물이 되느니라. 사람의 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살피어라.”

158:7.5 (1760.2) 예수의 따끔한 꾸지람에 처음에 충격을 받고 나서 그들이 정신을 차린 뒤에, 여행을 다시 시작하기 전에 주는 더 말씀했다: “누구라도 내 뒤를 좇으려 하거든, 자기를 돌보지 말고 날마다 자기 책임을 지고 내 뒤를 따를지어다. 누구든지 이기심으로 자기 목숨을 건지려 하는 자는 목숨을 잃을진대,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그리고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을지니라.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 자기 혼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느냐? 영생을 얻기 위하여 사람이 무엇을 대신 바치리요? 이 죄 많은 위선의 세대에 나와 내 말씀을 부끄러워 말라. 마찬가지로, 내가 모든 하늘 무리가 있는 가운데 내 아버지 앞에 영화롭게 나타날 때, 내가 부끄러워 하지 않고 너희를 인정하리라. 그런데도 이제 내 앞에 서 있는 너희 중에 여럿은 이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오는 것을 보기까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할지니라.”

158:7.6 (1760.3) 예수는 그를 따르려면 걸어야 할 고통스럽고 충돌하는 길을 이렇게 열두 사도에게 분명히 밝혔다. 이 말씀은 자신들이 명예의 자리에 오르는 세상의 나라를 꿈꾸기를 고집하던 이 갈릴리 어부들에게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그러나 그들의 충성스러운 마음은 이 용감한 호소에 움직였고, 한 사람도 그를 버리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는 싸움터로 그들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오직 용감히 따르기를 요구했다.

158:7.7 (1760.4) 열두 사도는 예수가 죽는 가능성에 대하여 그가 그들에게 무언가 일러주고 있다는 생각을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말한 것을 겨우 어렴풋이 알아들었고, 한편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에 관한 말씀은 도무지 그들의 머리 속에 기록되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자,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은 변모의 산에서 겪은 체험을 돌이켜보고 이 문제들 중 어떤 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158:7.8 (1760.5) 주와 가진 모든 관계에서, 열두 사도는 겨우 몇 번만, 그 성난 눈을 보았고 이 경우에 베드로와 나머지에게 쏟아진 것처럼, 금방 꾸짖는 말씀을 들었다. 예수는 언제나 인간적으로 부족한 것에 참을성을 보였지만, 땅에서 그의 여생(餘生)에 대하여 아버지의 뜻을 절대로 수행하는 계획에 상반되는 절박한 위협에 부딪쳤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사도들은 글자 그대로 깜짝 놀랐다. 놀라고 무서워졌다. 슬픔을 표현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주가 무엇을 견디어야 하는가, 그들이 함께 이 체험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천천히 깨닫기 시작했으나, 그의 말년에 임박한 비극을 가리키는 이 초기의 힌트가 있고서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까지 그들은 다가오는 이 사건들의 현실을 깨닫지 못했다.

158:7.9 (1761.1) 말없이 예수와 열두 사람은 마가단 공원에 있는 그들의 야영지를 향하여 떠났고, 가버나움 길로 갔다. 오후가 얼마 지나자, 예수와 이야기하지 않았어도 자기들끼리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한편 안드레는 주와 함께 이야기했다.

8. 베드로의 집에서

158:8.1 (1761.2) 땅거미가 질 때 가버나움으로 들어가면서, 그들은 저녁을 먹으려고,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바로 통하는, 잘 다니지 않는 통로로 갔다. 다윗 세베대가 그들을 호수 건너편으로 나르려고 준비하는 동안에 그들은 시몬의 집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예수는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올려다 보면서 물었다: “너희가 오늘 오후에 함께 걸으면서, 너희끼리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이야기하였느냐?” 사도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 가운데 여럿이, 다가오는 나라에서 그들이 무슨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누가 가장 클 것인가 따위에 관하여, 헤르몬산에서 시작한 토론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날 무엇이 그들의 생각을 차지했는가 알았기 때문에, 베드로의 어린아이들 중에서 하나를 손짓하여 부르고 그 아이를 그들 사이에 앉히고 말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서 이 아이와 더욱 같아지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서 조금도 진보하지 못하리라. 자기를 낮추고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자는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자가 되리라. 그런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나를 받아들이며,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이를 또한 받아들이느니라. 너희가 하늘나라에서 첫째가 되고자 하면, 이 좋은 진리를 육체를 입은 형제들에게 베풀기를 구하라. 그러나 이 어린아이를 하나라도 넘어지게 하는 자는 누구나,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더 좋으리라. 손으로 행하는 일이나 눈으로 보는 물건이 하늘나라로 진보하는 길에 죄를 짓게 하면, 간직한 이 우상들을 희생할지니, 인생에서 아끼는 많은 것을 버리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이 우상들에 집착하고 바로 네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함을 깨닫는 것보다 좋으니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너희가 이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도 가벼이 여기지 아니하도록 처리할지니, 저희의 천사들이 언제나 하늘 무리의 얼굴을 바라보는 까닭이라.”

158:8.2 (1761.3) 예수가 말씀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배에 들어가서 맞은 편에 마가단으로 저어갔다.

제 159 편 데카폴리스 여행

유란시아서

제 159 편

데카폴리스 여행

159:0.1 (1762.1) 예수와 열두 사람이 마가단 공원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여인단까지 포함하여 거의 1백 명의 전도사와 제자들의 무리가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에서 가르치고 전도(傳道)하는 여행을 시작하려고 즉시 준비가 되었다.

159:0.2 (1762.2) 8월 18일, 이 목요일 아침에, 주는 추종자들을 한데 불러 모으고, 사도들은 각자 열두 전도사 가운데 하나와 함께 협동해야 한다, 나머지 전도사들과 함께 열두 무리를 지어, 나가서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와 마을에서 수고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여인단과 다른 제자들은 그와 함께 남아 있으라고 지시했다. 예수는 이 여행에 4주를 배당하였고, 추종자들에게 9월 16일 금요일을 넘기지 않고 마가단으로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그는 이 기간에 그들을 자주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이 달이 지나는 동안에 이 열두 무리는 게라사ㆍ가말라ㆍ히포, 자폰ㆍ가다라ㆍ아빌라, 에드레이ㆍ필라델피아ㆍ헤스본, 디움ㆍ스키토폴리스, 그리고 많은 다른 도시에서 수고했다. 이 여행을 통해서 내내, 병 고치는 기적이나 다른 특별한 사건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1. 용서에 관한 설교

159:1.1 (1762.3) 히포에서 어느 날 저녁에 한 제자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예수는 용서에 관하여 교훈을 가르쳤다. 주는 말했다:

159:1.2 (1762.4) “마음이 친절한 어느 사람이 양 1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으면, 즉시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길 잃은 양을 찾아서 나가지 않느냐? 그가 좋은 목자이면, 잃은 양을 찾아낼 때까지 계속 찾지 않겠느냐? 그리고 나서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내면, 그 양을 어깨에 메고 기뻐하면서 집으로 가서 친구와 이웃들에게 소리치리라, ‘함께 즐거워하자, 내가 잃어버린 내 양을 찾아냈음이라.’ 내가 선언하노니, 회개할 필요 없는 올바른 아흔아홉 사람보다 뉘우치는 죄인 하나를 놓고서 하늘에서 더욱 크게 기뻐하느니라. 그렇다 해도, 이 어린아이들 가운데 하나가 죽기는커녕 길을 잃는 것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너희의 종교에는 하나님이 뉘우치는 죄인들을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하늘나라의 복음에서 아버지는 저희가 뉘우치기를 심각하게 생각하기도 전에 저희를 찾으러 나가시느니라.

159:1.3 (1762.5)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며, 따라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기를 배워야 하느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너희의 죄를 용서하시며, 따라서 너희는 서로 용서하기를 배워야 하느니라.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그에게 가서 요령 있고 참을성 있게 잘못을 보여주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너와 그 사람 둘이서만 하라. 그가 네 말을 듣거든 너는 형제를 설득하였느니라. 그러나 형제가 네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그가 자기의 잘못된 길을 고집하거든, 그에게 다시 가라. 서로 친구인 사람 한두 명을 데리고 가서, 이처럼 둘 아니 세 증인이라도 너의 증언을 확인하고, 죄를 저지르는 형제를 네가 공정하고 자비롭게 다루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라. 이제 그가 형제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거든 너는 회중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도 좋고, 다음에 그가 단체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거든 저희가 현명하다고 판단하는 행동을 택하게 하라. 다루기 힘든 그런 회원이 하늘나라에서 추방자가 되게 하라. 너희는 동료들의 혼을 심판하는 시늉을 할 수 없고 너희가 죄를 용서해 주거나 다른 방법으로 하늘 무리의 감독자들의 특권을 주제넘게 빼앗을 수 없지만, 동시에 세상의 나라에서 현세의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일이 너희 손에 맡겨졌느니라. 영생에 대한 신의 선포에 너희가 개입해서는 안될지라도, 땅에서 너희는 형제들이 현세에 누리는 복지에 관계되는 행동 문제들을 결정할지니라. 그래서 형제들을 훈련시키는 데 관련된 이 모든 문제에서 땅에서 너희가 무엇을 선포하든지 하늘에서 인정받을지니라. 비록 너희가 개인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수 없어도 집단 행위에 관하여 너희는 법을 제정해도 좋으니, 이는 이 일 중에 어떤 것에 관해서도 너희 가운데 두셋이 찬성하고 내게 요청하면, 그 간청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지 않으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 이 모든 것이 언제라도 참말이니, 믿는 사람 두셋이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 가운데 있느니라.”

159:1.4 (1763.1) 시몬 베드로는 히포에 있는 일꾼들을 책임진 사도였다. 예수가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듣자 그는 말했다: “주여, 얼마나 자주 내 형제가 내게 죄를 지어도 그를 용서하나이까? 일곱 번까지이나이까?” 예수는 베드로에게 대답했다: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여라.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집사들과 함께 회계(會計)를 명한 어떤 임금과 견주어도 좋으니라. 저희가 이 장부(帳簿) 검사를 시작하고 나서, 우두머리 고용자들 중에서 하나가 앞에 끌려 와서 그가 임금에게 1만 달란트를 빚졌다고 고백하였더라. 임금의 궁정에 있는 이 관리는 어려운 시절이 그에게 닥쳤고 이 빚을 갚을 물건이 없다고 간청하였더라. 그래서 그 임금은 재산을 몰수하고 그 빚을 갚도록 그의 자식들을 팔라고 명령하였는지라. 이 엄한 선포를 듣자 이 우두머리 집사는 임금 앞에서 쓰러져 머리를 조아리며, 자비를 베풀고 그에게 시간을 더 달라고 임금에게 탄원하며 말하였더라, ‘주여, 나를 조금 더 참아 주소서, 그리하면 내가 모두 갚으리이다.’ 이 나태한 종과 가족을 바라보았을 때 임금은 동정하여 마음이 움직였더라. 임금은 그를 풀어주라, 빚을 전부 용서하라 명하였더라.

159:1.5 (1763.2) “이 우두머리 집사가 임금의 손에서 이렇게 자비와 용서를 받고 나서 일에 골몰하였는데, 그에게 겨우 1백 데나리온 빚진 그의 하급 집사(執事) 하나를 발견하고서 그를 붙잡아 멱살을 잡고 말하였더라, ‘네가 빚진 것을 모두 내라.’ 그리고 나서 이 동료 집사는 우두머리 집사 앞에 쓰러져서 탄원하며 말하였더라, ‘나를 참아 주소서. 그렇게만 하시면 내가 곧 당신께 갚을 수 있으리이다.’ 그러나 우두머리 집사는 동료 집사에게 자비를 보이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빚을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던졌더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보았을 때 동료 종들은 아주 마음이 아파서 저희의 주, 상전인 임금에게 가서 말하였는지라. 우두머리 집사가 한 일을 들었을 때, 그 임금은 고마움을 모르고 용서하지 않는 이 사람을 앞에 부르고 일렀더라: ‘너는 악하고 자격이 없는 집사이라. 네가 동정을 구했을 때 나는 너의 빚을 다 아낌없이 용서하였느니라. 내가 너에게 자비를 보인 것 같이, 어찌하여 너도 동료 집사에게 자비를 보이지 아니하였느냐?’ 그 임금은 아주 몹시 성이 나서, 고마움을 모르는 우두머리 집사가 빚진 것을 모두 갚을 때까지 붙들어 두도록 간수에게 그를 넘겨주었더라. 그렇다 해도 동료에게 자비를 아낌없이 보이는 자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는 더욱 풍부하게 자비를 보이리라. 똑같은 이 인간의 약점을 가진 죄 때문에 너희가 형제를 꾸짖는 버릇이 있는데 어찌 너희의 부족함을 배려해 달라고 하나님께 올 수 있느냐? 내가 너희 모두에게 이르노니, 하늘나라의 좋은 것들을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땅에 있는 동료들에게 거저 주라.”

159:1.6 (1764.1) 이렇게 예수는 사람이 동료를 개인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위험함을 가르치고 그 불공평함을 보여주었다. 훈련을 유지하고 응보를 베풀어야 하지만, 이 모든 문제에서 형제 정신의 지혜가 앞서야 한다. 예수는 입법과 사법 권한을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게 맡겼다. 이렇게 권한을 집단에 맡기는 것조차 개인의 권한으로서 행사해서는 안 된다. 한 개인의 판결이 편견 때문에 치우치거나 정열 때문에 왜곡될 위험이 언제나 있다. 집단의 판결은 개인적 편견에 따르는 위험을 없애고 불공평을 제거할 가능성이 더 많다. 예수는 언제나 불공평ㆍ앙갚음ㆍ복수(復讐)의 요소를 최소로 줄이려고 애썼다.

159:1.7 (1764.2) [자비와 참을성의 예로 일흔일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라멕이 몹시 기뻐함을 언급하는 성서로부터 유래되었다. 라멕은 그의 아들 두발 가인이 가진 금속 무기 때문에, 적들의 무기(武器)와 이 우수한 도구를 비교하면서 “아무 무기도 손에 쥐지 않고 가인이 일곱 배 원수를 갚았다면, 나는 이제 일흔일곱 배 원수를 갚겠다”하고 외쳤다.]

2. 이상한 설교자

159:2.1 (1764.3) 예수는 가말라로, 거기서 요한과 그와 함께 일하던 사람들을 찾아보러 갔다. 그 날 저녁에 질문 대답 시간이 있은 뒤에, 요한은 예수에게 말했다: “주여, 나는 어제 아스타롯에 가서, 당신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있던 사람, 아니 악귀들을 내쫓을 수 있다고도 주장하는 사람을 보았나이다. 자, 이 친구는 우리와 한 번도 함께 있은 적이 없었고 우리를 따르지도 않나이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일을 하지 말라 명하였나이다.” 그러자 예수가 대답했다: “그를 막지 말라. 이 하늘나라 복음이 곧 온 세상에 선포될 것을 너는 깨닫지 못하느냐? 복음을 믿을 모든 사람이 너의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고 어찌 기대할 수 있느냐? 우리의 가르침이 이미 우리의 개인적 영향의 테두리를 넘어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기뻐하라. 요한아, 내 이름으로 큰 일을 한다고 고백하는 자들이 궁극에는 우리 운동을 지지해야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분명히 저희는 서둘러 나를 나쁘게 평하지 않으리라. 이 사람아, 이런 종류의 문제에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지지(支持)한다고 여기는 것이 더 나으리라. 후세에는 온전히 자격 있지 않은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이상한 일을 많이 할 터이나 나는 저희를 막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게 이르노니, 찬물 한 잔을 목마른 사람에게 주었을 때에도 아버지의 사자들은 그런 사랑의 봉사를 늘 기록하리라.”

159:2.2 (1764.4) 이 지시는 요한을 크게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나와 함께 있지 않은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라”하는 주의 말씀을 그가 듣지 않았는가? 이 경우에는 사람과 하늘나라의 영적 가르침 사이의 개인적 관계를 언급했고, 한편 다른 경우에는 한 집단의 신자들이, 앞으로 생길 세계적 형제 단체를 궁극에 구성할 기타 집단의 일을 행정적으로 통제하고 관할하는 권리에 관하여, 겉으로 나타나는 광범위한 관계, 신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언급했음을 요한은 깨닫지 못했다.

159:2.3 (1765.1) 그러나 하늘나라를 위하여 그가 나중에 수고한 것과 연관하여 요한은 때때로 이 체험을 돌이켜보았다. 그런데도 사도들은 감히 주의 이름으로 가르친 자들에게 여러 번 화를 냈다. 예수 밑에서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이 감히 그의 이름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언제나 그들에게 마땅치 않아 보였다.

159:2.4 (1765.2)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일하지 말라고 요한이 막은 이 사람은 사도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노력을 계속하였고, 메소포타미아로 계속 가기 전에 카나타에서 상당한 무리의 일행을 모았다. 이 사람 아덴은 케레사 가까이에서 예수가 고쳐 준 미친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주가 그에게서 내쫓았다고 생각한 그 악령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서, 돼지들을 몰아 벼랑을 넘어 거꾸로 떨어져 죽게 만들었다고 아주 확신했던 사람이었다.

3. 선생과 신자를 위한 가르침

159:3.1 (1765.3) 토마스와 그 동료들이 수고했던 에드레이에서 예수는 낮과 밤을 보냈다. 저녁에 토론하는 과정에서, 그는 진리를 전도하는 자들을 안내하고 하늘나라 복음을 가르치는 모든 사람을 활성화해야 할 원칙을 표현했다. 현대의 말투로 간추리고 다시 진술하면, 예수는 이렇게 가르쳤다:

159:3.2 (1765.4) 언제나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라. 올바른 운동을 결코 무력(武力)으로 권장해서는 안 된다. 영적 승리는 오직 영적 힘으로 얻을 수 있다. 물질적 영향을 이용하지 말라는 이 명령은 물리적 힘 뿐 아니라 정신의 힘도 언급한다. 압도하는 논리와 우수한 정신력이 남녀들을 하늘나라로 들어가라고 강요하는 데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의 지성을 단순히 논리의 무게로 짓밟거나, 재빠른 웅변으로 겁을 주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결정을 내리는 데 한 요소인 감정을 전부 없앨 수 없지만, 하늘나라의 운동을 진전시키려 하는 자들을 가르칠 때, 감정에 직접 호소해서는 안 된다. 두려움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나 단순한 감상(感傷)에 호소하지 말라. 사람들에게 호소할 때 공정하게 하라. 자제하고 마땅한 절제를 보이라. 생도들의 인격을 적절히 존중하라. 내가 이렇게 이른 것을 기억하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리라.”

159:3.3 (1765.5)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데려오면서 자존심을 상하거나 꺾지 말라. 지나친 자존심은 적절한 겸손을 잃게 만들며 자만과 우쭐함과 거만(倨慢)에 이를지 모르지만, 자존심을 잃는 것은 때때로 의지(意志)의 마비를 낳는다. 자존심을 잃은 자에게 자존심을 회복하고 가진 자에게 삼가게 하는 것이 이 복음의 목적이라. 너희 생도들의 생활에서 오직 실수만 꾸짖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그들의 생활에서 가장 칭찬할 것들을 너그럽게 인정하기를 또한 기억하라. 자존심을 잃고서 정말로 다시 찾고 싶어 하는 자에게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하여 나는 어떤 일도 서슴지 아니할 것을 잊지 말라.

159:3.4 (1765.6) 겁이 많고 두려움이 가득한 사람들의 자존심을 너희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라. 생각이 단순한 내 형제들을 희생하면서 빈정거리는 일에 빠지지 말라. 두려움에 빠진 내 자녀들을 비웃지 말라. 게으름은 자존심을 파괴한다. 따라서 너희 형제들이 자기가 택한 일을 하는 데 늘 바쁘게 지내라 타이르고, 직업을 찾지 못한 자를 위하여 일자리를 확보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라.

159:3.5 (1766.1) 겁을 주어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몰려고 애쓰는 것처럼 비열한 술책 쓰는 죄를 저지르지 말라. 애정을 가진 아버지는 겁을 주어 아이들에게 정당한 요구에 복종하게 만들지 않는다.

159:3.6 (1766.2) 뜨거운 감정을 느끼는 것은 신다운 영의 인도하심과 같지 않음을 하늘나라의 자녀들은 언젠가 깨달을 것이다.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곳으로 가도록 깊이 이상하게 감명을 받는 것은 안에 깃드는 영이 그런 충동을 이끈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159:3.7 (1766.3) 육신을 입고 사는 인생으로부터 영적으로 사는 상급 생활로 옮겨가는 사람이 다 거쳐야 하는 갈등의 범위에 관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리 경고하라. 아주 전적으로 어느 한쪽 영역 안에서 사는 자에게는 거의 갈등이나 혼란이 없으나, 모든 사람이 인생의 두 수준 사이를 거치는 과도기에 얼마큼 불안을 겪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다. 하늘나라로 들어가면서, 너희는 그 나라의 책임을 벗거나 그 의무를 피할 수 없지만, 기억하라: 복음의 멍에는 쉽고 진리의 짐은 가볍다.

159:3.8 (1766.4) 세상은 생명의 빵을 바로 눈앞에 두고 굶는 갈급한 혼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자신 안에 사는 바로 그 하나님을 찾다가 죽는다. 팔팔한 믿음이 바로 붙잡는 거리에 하늘나라의 보물이 모두 있는데, 사람들은 동경(憧憬)하는 마음과 지친 발로 이 보물을 찾는다. 믿음과 종교의 관계는 돛과 배의 관계와 같다. 믿음은 능력이 늘어나는 것이요, 생명의 짐이 무거워지는 것이 아니다.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자에게 오직 하나의 투쟁이 있으니, 즉 신앙의 싸움을 잘 싸우는 것이다. 믿는 사람은 오직 한 가지 투쟁이 있으니, 즉 의심―불신―을 이기는 것이다.

159:3.9 (1766.5) 하늘나라 복음을 전파할 때 너희는 다만 하나님과 친구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 친교는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똑같이 호소할 것이요, 그들의 특징인 열망과 이상을 아주 참되게 채워주는 무엇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아이들에게 이르라. 나는 그들의 느낌을 다치지 않으려 애쓰고 약점을 참을 뿐 아니라, 또한 죄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불의를 참지 못한다. 나는 아버지가 계신 앞에서 정말로 온유하고 겸손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일부러 저지르는 악행과 사악한 반란의 와중에서 나는 똑같이, 사정없이 용서하지 않는다.

159:3.10 (1766.6) 너희의 선생을 슬픈 사람으로 묘사하지 말라. 앞날의 세대는 또한 우리의 빛나는 기쁨, 우리의 선의가 주는 부력(浮力), 우리의 좋은 유머가 주는 영감을 식별하리라. 우리는 좋은 소식이 담긴 말씀을 선포하고, 변화시키는 그 힘은 사람들에게 퍼진다. 우리의 종교는 새 생명과 새 의미로 고동친다.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자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고, 가슴 속에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다. 늘어나는 행복은 하나님을 확신하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겪는 체험이다.

159:3.11 (1766.7) 거짓 동정심이라는 불안한 버팀목에 기대는 것을 피하라고 모든 신자에게 가르치라. 너희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데 빠져서는 튼튼한 인품을 기를 수 없다. 불쌍한 처지를 단지 같이 슬퍼하는 거짓된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정직하게 애쓰라. 생활의 시련 앞에서 겨우 마지못해 버티는 비겁한 사람에게 지나친 동정을 삼가며, 담대하고 용감한 자에게 동정(同情)을 베풀라. 한 번 싸우지도 않고 자기 문제 앞에 드러눕는 자를 위로하지 말라. 단지 친구들이 보답으로 너희를 불쌍히 여길까 하여 친구들을 동정하지 말라.

159:3.12 (1766.8) 내 자녀들이 일단 신이 앞에 계시다는 확신을 스스로 의식하게 될 때, 그러한 믿음은 시야를 넓히고, 혼을 고귀하게 만들고, 인격을 단련하며, 행복을 키우고, 영적 이해를 깊이 하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능력을 키워준다.

159:3.13 (1767.1)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그렇게 한다고, 어쩌다 생기는 사고나 자연에 일어나는 보통 재앙에서 면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든 신자에게 가르치라. 복음을 믿는 것은 곤경에 빠지지 않게 만들지 않을 터이나, 너희에게 고난이 덮칠 때 너희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을 보장하리라. 너희가 감히 나를 믿고 마음을 다하여 나서서 나를 따르고자 하면, 그리함으로 분명한 고난의 길로 아주 확실히 들어설 것이다. 나는 역경(逆境)의 바다에서 너희를 구하리라 약속하지 않지만, 그 모든 역경을 통해서 너희와 함께 갈 것을 약속한다.

159:3.14 (1767.2) 그리고 이 무리의 신자들이 밤에 자려고 준비하기 전에 예수는 그들에게 훨씬 더 가르쳤다. 그리고 듣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했고, 이 말씀이 있을 때 자리에 없던 사도와 제자들의 수련을 위하여 이 말씀을 자주 되풀이했다.

4. 나다니엘과 한 이야기

159:4.1 (1767.3) 그리고 나서 예수는 아빌라로 갔는데, 거기에는 나다니엘과 그 동료들이 수고하였다. 예수의 선언 중에 더러가 인정된 히브리 성서(聖書)의 권한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나다니엘은 상당히 마음에 걸렸다. 따라서 이날 밤에, 여느 때처럼 질문 대답 시간이 지난 뒤에, 나다니엘은 다른 사람들과 떨어진 데로 예수를 모시고 가서 물었다: “주여, 당신은 성서에 관하여 내가 진실을 안다고 생각할 수 있나이까? 내가 지켜보기에, 당신은 우리에게 신성한 기록의 일부만―내가 보건대 최선을―가르치고, 아브라함과 모세의 시절 이전에도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사오니, 내가 추측하건대 율법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취지로 랍비들이 가르치는 것을 당신은 거절하시나이다. 성서에 관하여 무엇이 진실이나이까?”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도의 물음을 듣고서 예수는 대답했다:

159:4.2 (1767.4) “나다니엘아, 네가 옳게 판단하였으니, 나는 랍비들과 같은 견지에서 성서를 바라보지 않노라. 너의 형제들이 모두 이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지는 않았으니 저희에게 이 일을 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 문제에 대하여 너와 함께 이야기하리라. 모세의 율법에 담긴 말씀과 성서의 가르침은 아브라함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겨우 요즈음에 와서 성서가 우리가 가진 대로 수집되었느니라. 유대 민족의 상급 사상과 최선의 소망을 담고 있어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과 가르침을 대표하기에는 아득히 먼 것을 또한 많이 담고 있느니라. 그런즉 나는 상급의 가르침 중에서 하늘나라 복음을 위하여 이삭을 줍듯 진리를 골라야 하노라.

159:4.3 (1767.5) “이 여러 기록은 사람들이 쓴 것이요, 저희 가운데 더러는 거룩한 사람이었고, 더러는 그다지 거룩하지 않았느니라. 이 책들의 가르침은 그 기원이 있던 시절에 깨우친 관점과 정도를 나타내느니라. 진리의 계시(啓示)로서, 마지막 것은 처음 것보다 더 믿을 만하니라. 성서는 결함이 있고 그 기원이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지만, 그릇 생각하지 말라, 성서는 이때에 온 세상에서 발견되는 종교적 지혜와 영적 진리 가운데 최선의 수집(收集)이라.

159:4.4 (1767.6) “이 책들 가운데 여럿은 그 책들이 지닌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쓰지 않았으나 이는 그 책에 담긴 진리의 가치를 조금도 떨어뜨리지 않느니라. 요나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도, 요나가 결코 세상을 산 적이 없다 하더라도, 이 이야기의 깊은 진리, 곧 하나님이 니느베와 이른바 이교도를 사랑하는 것은 그래도 역시 동료 인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눈에 여전히 귀중하니라. 성서가 거룩한 것은 성서가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위를 제시하는 까닭이요, 저희는 이 여러 글에서 올바름과 진리와 거룩함에 대하여 가장 높은 개념을 기록으로 남겼느니라. 성서는 참인 것을 많이, 허다하게 담고 있으나, 너희의 현재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이 기록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그릇 대표하는 많은 것을 또한 담고 있음을 네가 알며, 나는 그 사랑의 하나님을 온 세상에 드러내려고 왔노라.

159:4.5 (1768.1) “나다니엘아, 사랑의 하나님이 너의 조상에게 싸움터에 나가서, 적을 모두―어른과 아이들을―도륙하라 지시했다고 이르는 성서의 기록을 한 순간이라도 믿으려 하지 말라. 그러한 기록은 사람들, 그다지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이 한 말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성서는 성서를 쓴 사람들의 지적ㆍ도덕적ㆍ영적 상태를 언제나 비쳐 왔고, 언제나 그러하리라. 선지자들이 사무엘부터 이사야까지 기록을 만드는 동안, 야웨 개념이 더 아름답고 영화롭게 성장하는 것을 너는 눈치채지 못하였느냐? 그리고 성서의 의도(意圖)는 종교적 교육과 영적 안내를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하느니라. 성서는 역사가나 철학자의 작품이 아니라.

159:4.6 (1768.2) “가장 한탄할 것은 단지 성서 기록이 절대 완전하고 그 가르침에 오류가 없다는 이 그릇된 생각 뿐 아니라, 오히려 전통에 노예가 된, 예루살렘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 신성한 기록을 혼동하여 그릇 해석하는 것이라. 저희가 하늘나라 복음, 이 새로운 가르침에 저항하려고 굳게 각오하고, 이제 성서가 영감을 받았다는 교리와 그에 관한 저희의 그릇된 해석을 이용하리라. 나다니엘아, 결코 잊지 말라, 아버지는 진리의 계시를 어느 한 세대나 어느 한 민족에게만 주지 않느니라. 진지하게 진리를 찾는 많은 사람이 성서가 완벽하다는 이 교리(敎理)에 헛갈리고 낙심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하리라.

159:4.7 (1768.3) “진리의 권위는 진리의 생생한 명시에 깃드는 바로 그 정신이요, 다른 세대에 깨우침이 덜한 사람들,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죽은 말이 아니라. 이 거룩한 옛 사람들이 영감을 받고 영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저희의 말씀이 마찬가지로 영감을 받았음을 의미하지 않느니라. 내가 떠났을 때, 내 가르침을 다양하게 풀이하는 결과로 너희가 진리를 놓고 다투는 자들의 잡다한 집단으로 급속히 갈라질까 저어하여, 오늘날 이 하늘나라 복음의 가르침을 우리가 하나도 기록하지 않느니라. 기록 만들기를 피하면서 우리가 이 진리를 행하는 것이 이 세대에게 최선이라.

159:4.8 (1768.4) “내 말을 잘 주목하여라, 나다니엘아, 인간의 성품이 만진 것은 무엇이나 전혀 오류가 없다고 여길 수 없느니라. 사람의 머리를 통해서 신성한 진리는 정말로 빛을 낼지 모르지만 언제나 그것은 비교적 순수하고 부분적으로 신성한 진리이라. 사람은 전혀 잘못이 없기를 몹시 바랄지 몰라도 오직 창조자들이 절대로 잘못이 없는 속성을 가지느니라.

159:4.9 (1768.5) “그러나 성서에 관한 가르침에 가장 큰 착오는 성서가 오로지 그 민족의 지혜로운 지성인만 감히 풀이하는 봉인된 책, 신비와 지혜의 책이라는 교리이라. 신성한 진리의 계시는 인간의 무지, 편견, 좁게 생각하는 불관용이 아니면 봉인되지 않느니라. 성서의 빛을 오직 편견이 가리고 미신이 어둡게 만드느니라. 신성한 것을 헛되이 두려워하는 것은 종교가 상식(常識)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막아왔느니라. 지난날의 신성한 기록의 권한을 무서워하는 것은 오늘날 정직한 사람들이 복음의 새로운 빛, 지난 세대에 하나님을 아는 바로 이 사람들이 지극히 보고 싶어했던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실질적으로 막느니라.

159:4.10 (1769.1) “그러나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슬픈 특징은 이 전통이 신성하다고 가르치는 선생들 중에 더러가 바로 이 진실을 안다는 사실이라. 저희는 성서의 이 한계를 대체로 충분히 알지만, 도덕적으로 겁쟁이요, 지적으로 정직하지 않으니라. 저희는 신성한 기록에 관하여 진실을 알아도 사람들에게 그런 불안한 사실을 알리지 않기를 더 좋아하느니라. 이렇게 저희는 성서를 달리 해석하고 왜곡하며, 그 신성한 기록이 다른 세대에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도덕적 지혜, 종교적 영감, 영적 가르침의 저장소라고 호소하는 대신에, 성서를 일상 생활의 깨알 같은 세부를 담은 안내서요, 비영적인 것에 관한 권위 있는 책으로 만드느니라.”

159:4.11 (1769.2) 나다니엘은 주의 선언에 깨우침과 충격을 받았다. 마음 속 깊이 이 이야기를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예수가 승천하기까지 이 회담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그때도 주가 가르친 이야기를 전부 전하기를 두려워했다.

5. 예수의 종교의 적극적 성질

159:5.1 (1769.3) 필라델피아에는 야고보가 일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예수는 하늘나라 복음의 적극적 성질에 관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논평을 하는 과정에서, 성서의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진리를 더 담고 있음을 넌지시 비추었고, 듣는 사람들에게 영적 양식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자기 혼에게 먹이라고 훈계했을 때, 야고보는 주의 말씀을 가로막고 물었다: “주여, 우리 개인의 수양을 위하여 성서로부터 좀더 나은 구절을 어떻게 선택하는가, 당신이 친절을 베풀어 우리에게 제안하시겠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그렇다 야고보야, 너희가 성서를 읽을 때, 다음과 같이 영원히 참되고 신성하게 아름다운 가르침을 찾아보라:

159:5.2 (1769.4) “아 주여,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이 생기게 하옵소서.”

159:5.3 (1769.5) “주는 나의 목자요, 나에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59:5.4 (1769.6) “너희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느니라.”

159:5.5 (1769.7) “나, 주 너희 하나님이 너의 바른 팔을 붙들고,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이를 것임이라.”

159:5.6 (1769.8) “민족들이 이제 더 전쟁을 배우지도 아니하리라.”

159:5.7 (1769.9) 이것은 예수가 어떻게 히브리 성서의 노른자를 추종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그리고 하늘나라의 새 복음의 가르침에 넣으려고 날마다 이용했는가 예를 든 것이다. 다른 종교들은 하나님이 사람과 가까이 있다는 생각을 제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이 사람을 보살피는 것을 다정한 아버지가 의존하는 자녀들의 복지를 위하여 걱정하는 것으로 비유했고, 다음에 이 가르침을 그의 종교의 주춧돌로 만들었다. 이처럼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신조는 사람이 형제 정신을 실천하라고 명령한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은 그의 종교의 총합이요 요점이 되었다. 예수는 유대 종교의 최선을 가져다가 하늘나라 복음의 새 가르침에서 쓸 만한 배경으로 바꿔놓았다.

159:5.8 (1769.10) 예수는 유대 종교의 소극적 교리 속에 적극적 행동 정신을 집어넣었다. 예식의 요구 조건에 소극적으로 순응하는 대신에, 예수는 새 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새 종교가 요구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행하라고 명령했다. 예수의 종교는 그 복음이 요구한 것을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하는 데 있다. 그의 종교의 핵심이 사회 봉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 봉사는 참된 종교 정신을 가져서 생기는 한 가지 확실한 결과라고 가르쳤다.

159:5.9 (1770.1) 예수는 서슴지 않고 성서에서 더 좋은 반쪽을 이용했고, 한편 못한 부분을 거부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의 큰 훈계는 “너희는 네 민족의 아이들에게 원수를 갚지 말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할지니라”하고 기록한 성서로부터 고른 것이다. 예수는 부정적 부분을 물리치면서 이 성서의 적극적 부분을 이용했다. 부정적이거나 순전히 소극적 무저항도 반대하였다. 그는 말했다: “적이 네 한쪽 뺨을 치거든, 잠자코 소극적으로 서 있지 말고, 적극적 태도로 다른 뺨을 돌려 대라. 다시 말해서, 잘못에 빠진 네 형제를 잘못된 길로부터 올바르게 사는 더 나은 길로 이끌도록 가능한 최선의 것을 적극적으로 행하라.”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어떤 생활 상황에 대해서도 긍정적ㆍ적극적 반응을 요구했다. 다른 뺨을 돌려 대는 것이나 또는 그것이 무슨 행위를 상징하든지, 주도권을 요구하고 그 신자의 인격이 활기 있고 능동적이고 용기 있게 표현하기를 요구한다.

159:5.10 (1770.2) 예수는 악에 대하여 무저항을 실천하는 자를 일부러 악용할 자가 모욕을 주는 데 소극적 굴복을 실천하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종자들이 선으로 악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목적으로, 지혜롭고 민첩하게 악에 대하여 선으로 빨리 적극 반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된 선은 가장 지독한 악보다 변함없이 훨씬 더 힘이 있음을 잊지 말라. 주는 올바름의 적극적 표준을 가르쳤다: “내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나 자신을 거들떠보지 말고 나를 따르기 위하여 날마다 책임을 한껏 지라.” 그리고 “그가 선한 일을 하며 다녔으므로” 자신이 그렇게 살았다. 복음의 이 모습은 나중에 추종자들에게 말씀한 여러 비유에 그 예가 잘 나타났다. 결코 추종자들에게 자기 책임을 참을성 있게 지라고 훈계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인간적 책임과 신성한 특권을 한껏 수행하기 위하여 에너지와 열심을 가지고 책임을 지라고 하였다.

159:5.11 (1770.3) 사람이 겉옷을 부당하게 빼앗을 때 다른 옷도 내밀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쳤을 때, 예수는 글자 그대로 또 다른 겉옷이 아니라, 앙갚음하라는 옛 충고―”눈에는 눈으로” 따위―대신에 행악자를 구원하려고 긍정적인 무슨 일을 하는 생각을 언급했다. 예수는 복수하거나 그저 불공평을 소극적으로 참거나 그에 희생되는 자가 되는 관념을 몹시 싫어했다. 이 경우에 그는 악에 맞서 싸우고 저항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음을 가르쳤다:

159:5.12 (1770.4) 1. 악을 악으로 갚는 것―적극적이지만 올바르지 않은 방법.

159:5.13 (1770.5) 2. 불평 없이 저항하지 않고 악을 견디는 것―순전히 부정적인 방법.

159:5.14 (1770.6) 3. 악을 선으로 갚는 것, 그 상황의 주인이 되도록 의지(意志)를 주장하는 것,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적극적이고 올바른 방법.

159:5.15 (1770.7)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한때 물었다: “주여, 어느 낯선 자가 짐을 지고 십리를 가라 강제하면 어찌해야 하나이까?” 예수는 대답하였다: “소리를 죽여 그 낯선 자를 헐뜯으면서, 앉아서 위안을 얻으려 한숨을 쉬지 말라. 올바름은 그러한 수동적 태도에서 솟아나오지 않느니라. 더 효과 있게 적극적인 일을 전혀 생각할 수 없거든, 적어도 그 짐을 십리 더 나를 수 있느니라. 이것은 부당하고 사악한 낯선 사람에게 분명히 도전이 되리라.”

159:5.16 (1770.8) 유대인은 뉘우치는 죄인을 용서하고 그릇된 행위를 잊으려고 애쓰는 하나님에 관하여 들은 적이 있었지만, 예수가 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고, 먼저 죄인을 찾아 나서며, 그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기꺼이 돌아오려고 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기뻐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듣지 못했다. 종교에서 이 적극적 음성을 예수는 기도(祈禱)에도 연장하였다. 무엇을 하지 말라는 황금률을 사람이 공정해야 한다는 적극적 훈계로 바꾸었다.

159:5.17 (1771.1) 어떤 가르침에도 예수는 어수선한 세부를 어김없이 피했다. 화려한 언어를 피하고 말장난인 단순한 시(詩)같은 묘사를 피했다. 그는 작은 표현 속에 큰 의미를 넣는 버릇이 있었다. 예를 들어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소금ㆍ누룩ㆍ고기잡이ㆍ어린아이와 같은 여러 낱말의 현재 통용되는 뜻을 뒤집었다. 정반대를 가장 효과 있게 이용했고, 티끌과 무한, 그리고 그런 따위를 비교했다. “소경을 이끄는 소경”처럼 그의 그림은 놀라웠다. 그러나 예를 보이는 가르침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힘은 그 자연스러움이었다. 예수는 종교의 철학을 하늘로부터 땅까지 가져왔다. 그는 새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사랑을 새로이 줌으로 혼의 근원적 필요를 묘사했다.

6. 마가단으로 돌아오다

159:6.1 (1771.2) 데카폴리스에서 4주 동안의 임무는 어지간히 성공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을 하늘나라에 받아들였고, 사도와 전도사들은 예수가 친히 가까이 계심으로 격려받지 않고서 할 일을 수행하는 값진 체험을 가졌다.

159:6.2 (1771.3) 9월 16일 금요일에, 일꾼들의 일행 전부가 마가단 공원에서 미리 주선하여 모였다. 안식일에 1백 명이 넘는 신자들의 회의가 열렸고, 거기서 하늘나라의 일을 확장하기 위하여 앞날의 계획이 충분히 고려되었다. 다윗의 사자들이 자리에 있었고, 유대ㆍ사마리아ㆍ갈릴리, 그리고 인접한 구역에 두루, 신자들의 복지에 관하여 보고가 있었다.

159:6.3 (1771.4) 이때 예수의 추종자들 가운데 거의 아무도 사자단이 얼마나 값진 수고를 했는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사자(使者)들은 팔레스타인에 두루, 신자들이 서로, 그리고 예수와 사도들과 연락을 유지하게 했을 뿐 아니라, 이 어두운 시절에 또한 자금을 모으는 자로서 예수와 그 동료들을 부양할 뿐 아니라, 또한 열두 사도와 열두 전도사의 가족들을 원조하기 위하여 일했다.

159:6.4 (1771.5) 이 무렵에 아브너는 활동의 근거지를 헤브론에서 베들레헴으로 옮겼는데, 여기는 또한 유대 지방에서 다윗의 사자들의 본부였다. 다윗은 예루살렘과 벳세다 사이에 주자를 바꾸어 밤 동안에 사자 봉사를 유지했다. 이 주자(走者)들은 저녁마다 예루살렘을 떠나서 시카와 스키토폴리스에서 교체되었고, 이튿날 아침 식사 때에 벳세다에 도착했다.

159:6.5 (1771.6) 예수와 동료들은 이제 하늘나라를 위하여 수고하는 마지막 시기를 개시할 준비가 되기 전에, 한 주 동안 휴식을 취하려고 준비했다. 이것은 마지막 휴식이었는데, 페레아 사명이 전도하고 가르치는 운동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예루살렘에 그들이 도착하고 예수의 지상 생애를 마무리하는 사건들을 연출할 때까지 바로 이어졌다.

제 160 편 알렉산드리아의 로단

유란시아서

제 160 편

알렉산드리아의 로단

160:0.1 (1772.1) 9월 18일, 일요일 아침에, 안드레는 다음 주에 아무 일도 계획하지 않으리라고 발표했다. 나다니엘과 토마스를 제쳐놓고, 사도들은 다 가족을 찾아보거나 친구들과 함께 머물려고 집으로 갔다. 이 주에 예수는 거의 완벽하게 휴식하는 기간을 가졌지만, 나다니엘과 토마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로단이라는 어떤 그리스인 철학자와 토론하느라고 무척 바빴다. 이 그리스인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임무를 수행했던 아브너의 동료인 한 사람의 가르침을 통해서, 요즘에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로단은 이제 자기의 생활 철학과 예수의 새로운 종교적 가르침을 조화시키는 일에 진지하게 몰두해 있었고, 주가 이 문제들을 함께 이야기하기를 희망하면서 마가단으로 왔다. 그는 또한 예수나 사도들 중의 한 사람으로부터 직접 들은, 복음의 권위 있는 해석을 손에 쥐기를 바랐다. 로단과 그런 회담을 가지기를 거절했어도, 예수는 그를 정중하게 받아들였고, 나다니엘과 토마스에게 그가 하고 싶어했던 말을 모두 듣고 그 보답으로 복음에 관하여 일러주라고 즉시 지시했다.

1. 로단의 그리스 철학

160:1.1 (1772.2) 월요일 아침 일찍, 로단은 나다니엘과 토마스, 그리고 어쩌다가 마가단에 들렸던 스무댓 명 남짓한 신자 집단에게 열 번 연속된 강연을 시작했다. 현대의 어법으로 요약하고 통합하고 다시 말하면, 이 여러 연설은 다음의 여러 생각을 고려할 것을 제시한다:

160:1.2 (1772.3) 인생은 세 가지 큰 욕구―충동ㆍ욕망ㆍ유혹―에 담겨 있다. 강인한 인격, 위엄 있는 인격은 오직 인생의 자연스러운 충동을 사회에서 살아가는 기술로 바꿈으로, 현재의 욕망을 지속된 성취가 가능한 상급 욕망으로 변화시킴으로 얻는다. 한편 존재에서 평범한 유혹은 사람의 전통적이고 확립된 관념으로부터 아직 탐구되지 않은 관념과 발견되지 않은 이상(理想)의 상급 분야로 옮겨져야 한다.

160:1.3 (1772.4) 문명이 복잡하게 되면 될수록, 살아가는 기술은 더욱 어렵게 될 것이다. 사회 관습의 변화가 빠를수록, 인격을 개발하는 과제는 더욱 까다로워질 것이다. 진보가 계속되려면, 열 세대마다 인류는 살아가는 기술을 새로 배워야 한다. 사람이 아주 영리해서 더욱 빨리 사회를 복잡하게 만든다면, 살아가는 기술을 더 짧은 시간 안에, 아마도 한 세대마다, 다시 통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살아가는 기술의 진화가 존재하는 기법과 발걸음을 맞추지 못하면, 인류는 생활의 단순한 충동―현재 욕망의 만족―으로 재빨리 돌아갈 것이다. 따라서 인류는 미숙한 채로 남아 있고, 사회는 완전히 성숙하기까지 자라지 못할 것이다.

160:1.4 (1773.1) 사회는 사람이 단지 일시적이고 눈앞에 닥친 욕망의 만족을 기꺼이 버리고 더 우수한 열망을 품는 정도까지 성숙해지며, 그런 열망을 성취하려는 노력은 영구한 목표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더욱 풍부한 만족을 낳는다. 그러나 사회가 성숙했는가를 가리키는 참된 지표는 기존 관념 및 전통적 생각이 가진 유혹의 기준, 안일을 권장하는 기준 아래서 한 민족이 평화롭게 만족하여 사는 권리를 기꺼이 버리고, 아직 찾지 못한 목표, 이상적 영적 실체들을 달성하는, 아직 살펴보지 않은 가능성을 추구하는 유혹, 불안하고 에너지를 소모하는 유혹을 택하는 것이다.

160:1.5 (1773.2) 동물은 생명의 충동에 훌륭하게 반응하지만, 오직 사람이 살아가는 기술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인류의 대다수는 겨우 살려고 하는 동물의 충동만 느낀다. 동물은 오직 이 맹목이고 본능적인 충동만 알며, 사람은 자연스럽게 작용하는 이 충동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 사람은 지적 예술의 높은 수준에서, 아니 하늘의 기쁨과 영적 환희가 있는 수준에서, 살기를 택해도 좋다. 동물은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 묻지 않는다. 따라서 결코 걱정하지 않고 자살하지도 않는다. 자살(自殺)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러한 사람이 순전한 동물 단계의 존재에서 솟아나왔고, 더 나아가서 그러한 인간의 탐구 노력이 필사 체험의 예술적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동물은 생명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다. 사람은 가치 기준을 인식하고 의미 있는 것을 이해하는 능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또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깨닫는다―통찰력을 가졌음을 스스로 의식한다.

160:1.6 (1773.3)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욕구대로 사는 인생을 감히 버리고, 모험하는 기술과 확실치 않은 논리로 가득한 인생을 살 때, 적어도 어느 정도 지능과 감정이 성숙할 때까지, 감정의 피해―갈등ㆍ불행ㆍ불확실―의 결과로 생기는 위험에 부딪칠 것을 기대해야 한다. 낙심ㆍ걱정ㆍ게으름은 사람이 도덕적으로 미숙함을 가리키는 분명한 증거이다. 인간 사회는 두 가지 문제, 곧 개인의 성숙과 종족의 성숙에 이르는 문제에 부닥친다. 성숙한 인간은 이내 모든 다른 필사자를 부드러운 느낌과 너그러운 감정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성숙한 인간은 부모가 자식에게 품는 것과 같은 사랑과 배려로 미숙한 사람을 바라본다.

160:1.7 (1773.4) 인생에 성공하는 것은 평범한 문제를 해결하는 믿을 만한 기법을 통달하는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문제라도 그 해결의 첫 걸음은 어려움을 찾아내고 그 문제를 분리하고 솔직하게 그 성질과 중대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큰 잘못은 생활 문제가 우리의 깊은 두려움을 일으킬 때, 우리가 그런 문제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데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어려움을 인정하는 것이 오래 간직한 자부심을 깎아내리거나 질투를 인정하거나 뿌리 깊은 편견 버리기를 수반할 때, 보통 사람은 안전한 옛 망상(妄想), 그리고 오래도록 간직했던 거짓된 안정감에 달라붙기를 더 좋아한다. 오직 용감한 사람이, 성실하고 논리적인 머리가 발견하는 것을 기꺼이 솔직하게 인정하고 두려움 없이 그에 부닥친다.

160:1.8 (1773.5) 어떤 문제라도 지혜로운 효과적 해결은, 해결하도록 나타나는 문제를 구성하는 실제 요인의 냉정한 조사를 방해할 수 있는 편견과 정열, 그리고 순전히 개인적인 어떤 다른 선입관에도, 지성이 매이지 않기를 요구한다. 인생에서 생기는 문제의 해결은 용기와 성실성을 요구한다. 오직 정직하고 용감한 사람들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인생의 미로(迷路)를 거쳐서, 두려움 없는 지성의 논리가 어디로 이끌더라도 대담하게 따라갈 수 있다. 이러한 지성과 혼의 해방은, 종교적 정열에 가까이 가는, 지적인 열심의 추진력 없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어려운 물질적 문제와 다양한 지적(知的) 위험이 가득한 목표를 추구하도록 사람을 움직이는 데는 위대한 이상의 유혹이 필요하다.

160:1.9 (1774.1) 너희가 인생의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려고 유능하게 준비되었다 하더라도, 너희로 하여금 동료들로부터 진심으로 지지와 협동을 얻게 만들 수 있는, 지성의 그 지혜와 인격의 매력을 갖추지 않으면, 도저히 성공을 기대할 수 없다. 어떻게 동료들을 설득하는가, 사람들을 설복하는가 너희가 배울 수 없다면, 세속의 일이나 종교적 일에 너희는 대단히 성공하기를 바랄 수 없다. 너희는 다만 요령(要領)과 관대함을 지녀야 한다.

160:1.10 (1774.2)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는 모든 방법 중에서 가장 중대한 것을 나는 너희의 주, 예수로부터 배웠다. 그가 아주 한결같이 실천하는 것, 그리고 아주 충실히 너희에게 가르친 것, 곧 예배하는 정신으로 따로 명상에 잠겨 있는 것을 언급한다. 예수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교통하려고 아주 빈번히 혼자 훌쩍 떠나가는 이 버릇에서, 생활의 보통 갈등을 다룰 힘과 지혜를 모을 뿐 아니라, 또한 도덕적ㆍ영적 성질을 가진 상급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에너지를 이용하는 기법이 발견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는 올바른 방법조차도 인격의 타고난 결함을 보상하거나, 참된 올바름을 간절히 바라고 목마르게 찾는 욕구의 부재를 보상하지 못할 것이다.

160:1.11 (1774.3) 예수가 혼자서 따로 가는 버릇에 나는 깊이 감명을 받는다. 이것은 사는 문제를 이렇게 고독하게 살펴보는 시간에 잠겨 있으려는 것이요, 사회에 봉사하는 다채로운 요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새로 저장된 지혜와 에너지를 찾으려는 것이다. 신성(神性)에 닿는 의식에 인격 전부를 실제로 맡김으로 인생 최고의 목적을 자극하고 강화하려는 것이요, 살아 있는 존재가 마주치는 늘 변하는 상황에 자신을 적응하는 새롭고 더 좋은 방법을 강구하려는 것이다. 사람의 개인적 태도를 다시 갖추고 조정하려는 지극히 중대한 일을 성취하는 것이요, 그런 태도는 가치 있고 실재하는 만물을 꿰뚫어보는 향상된 통찰력을 얻는 데 아주 필수이다. 다른 뜻을 품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하려는 것―“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고 너희의 선생이 가장 좋아하는 기도를 진지하게 조용히 드리기 위한 것이다.

160:1.12 (1774.4) 너희 선생이 예배에 잠기는 이 버릇은 정신을 새롭게 하는 휴식을 가져온다. 사람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빛, 그리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문제에 용감하게 부딪치게 하는 용기, 사람을 무력(無力)하게 만드는 두려움을 없애는 자아 이해,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하나님을 닮게 만드는 확신을 사람에게 주는, 신성과 연합되는 그 의식을 가져온다. 주가 실천한 바와 같이, 예배하는 휴식, 곧 영적 교통은 긴장을 해소하고 갈등을 없애며, 인격의 총 재산을 힘차게 늘인다. 이 모든 철학과 하늘나라 복음을 더하면, 내가 알기에, 새 종교가 된다.

160:1.13 (1774.5) 편견(偏見)은 혼이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눈이 멀게 만든다. 오직 동료 인간을 모두 에워싸고 모든 것을 포함하는 운동을 찬미하는 데 혼을 진지하게 바침으로 편견을 없앨 수 있다. 편견은 이기심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오직 자아의 추구를 버리고, 자아보다 더 클 뿐 아니라 모든 인류보다도 훨씬 더 큰 운동에 봉사하는 만족을 추구함으로―하나님 찾기, 신성의 달성으로―그 자리를 채워야 편견을 없앨 수 있다. 인격이 성숙하다는 증거는, 가장 높고 가장 신성하게 실재하는 가치의 실현을 항상 추구하도록 인간의 소망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

160:1.14 (1774.6) 계속 변하는 세상에서, 진화하는 사회 체제의 와중에서 안정되고 확립된, 운명의 목표를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무한히 달성하는 영원한 목표로서, 오직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받아들인 자가 안정된 인격을 얻을 수 있다. 이처럼 사람의 목표를 시간에서 영원으로, 땅에서 파라다이스로, 인간다운 것으로부터 신다운 것으로 바꾸는 것은, 사람이 재생하고 변화되고 다시 태어날 것, 신다운 영이 다시 만든 아이가 될 것, 사람이 하늘나라의 형제 단체에 들어갈 것을 요구한다. 이 이상(理想)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철학과 종교도 미숙하다. 내가 가르치는 철학은 너희가 전파하는 복음과 연결되어 있고 성숙한 새 종교, 모든 미래 세대의 이상을 대표한다. 또 이것이 참말이니, 우리의 이상은 최종이요 결코 틀릴 수 없고 영원하며, 보편ㆍ절대적이고 무한하기 때문이다.

160:1.15 (1775.1) 나의 철학(哲學)은 나에게 참으로 달성할 실체, 성숙의 목표를 추구하려는 충동을 주었다. 그러나 나의 충동은 무력했고 나의 탐구는 추진력이 모자랐다. 나의 추구는 지향할 확신이 없어 타격을 받았다. 예수의 이 새 복음이, 통찰력을 향상하고 이상을 높이고 목표를 안정시킴과 함께, 이 부족함을 풍성하게 채워주었다. 의심과 불안이 없이, 나는 이제 진심으로 영원한 모험에 들어갈 수 있다.

2. 살아가는 기술

160:2.1 (1775.2) 사람들은 꼭 두 가지 방법으로 함께 살아도 좋으니, 물질의 길, 곧 동물의 길, 그리고 영적 길, 곧 인간다운 길이다. 신호(信號)와 소리로 동물은 제한된 방법이나마 서로 교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형태의 교통은 의미 있는 것이나 가치 기준이나 생각을 전하지 못한다. 사람과 동물 사이에 하나의 차이점은 사람이 상징의 수단으로 동료들과 의사를 전할 수 있는 것이며, 상징은 의미ㆍ가치ㆍ개념, 아니 이상까지도 아주 확실히 표시하고 확인한다.

160:2.2 (1775.3) 서로 생각을 전달할 수 없으니까, 동물은 인격을 개발할 수 없다. 사람은 생각과 이상에 관하여 이렇게 동료들과 교통할 수 있기 때문에 인격을 개발한다.

160:2.3 (1775.4) 인간의 문화의 바탕을 이루고 사람으로 하여금 사회 관계를 통하여 문명을 세우게 하는 것은 뜻을 전달하고 공유하는 이 능력이다. 지식과 지혜가 쌓이는 것은 사람이 이 재산을 뒤잇는 세대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종족의 문화 활동, 즉 예술ㆍ과학ㆍ종교ㆍ철학이 일어난다.

160:2.4 (1775.5) 인간들 사이에 상징으로 교통하는 것은 사회 집단이 생성될 것을 예정한다. 모든 사회 집단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가족, 더 자세히 말하면 부모이다. 개인적 애정은 이 물질적 관계를 함께 붙들어 두는 영적 끈이다. 그러한 효과적 관계는 또한, 진정한 우정을 쏟는 데서 아주 풍부하게 나타나다시피, 동성(同性)의 두 사람 사이에도 가능하다.

160:2.5 (1775.6) 이러한 우정 관계와 서로 사랑하는 관계는 사람 사이에 교제하고 사람을 훌륭하게 만들며, 이는 그러한 관계가 살아가는 기술의 상급 수준에서 다음의 필수 요소를 권장하고 수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160:2.6 (1775.7) 1. 서로 자아를 표현하고 자아를 이해하는 것. 인간의 많은 고귀한 충동은 그 표현을 들어줄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죽어 버린다. 참으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다. 어느 정도 인정받고 얼마큼 평가를 받는 것은 사람의 인품이 성장하는 데 필수이다. 가정에서 진정한 사랑이 없이, 어떤 아이도 정상 인품을 제대로 기를 수 없다. 인품은 단순한 지성과 도덕률보다 더 큰 무엇이다. 인품을 길러준다고 평가된 모든 사회 관계 가운데 가장 효율적이고 이상적인 것은 총명한 결혼 생활에서 서로의 품속에서 남녀가 사랑하고 이해하는 우정(友情)이다. 결혼은 그 다양한 관계와 함께, 튼튼한 인품을 기르는 데 불가결한 값진 충동과 상급의 동기를 이끌어 내도록 최선으로 고안되어 있다. 이처럼 나는 서슴지 않고 가족 생활을 찬미하는데, 너희의 선생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 새 하늘나라 복음의 바로 그 주춧돌로 지혜롭게 골랐기 때문이다. 그러한 견줄 데 없는 관계의 공동체, 세월을 통해서 가장 높은 이상, 즉 남녀가 다정한 품에 안겨 있는 것은 아주 값지고 흐뭇한 체험이니까, 이를 얻기 위해 필요한 어떤 값,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가치가 있다.

160:2.7 (1776.1) 2. 사람들의 연합―지혜의 동원. 모든 인간은 얼마 있으면 이 세상에 대하여 어떤 개념을 얻고 다음 세상에 대하여 어떤 선견을 얻는다. 인격의 교제를 통해서, 현세의 존재와 영원한 전망, 이 두 관점을 통일하는 것이 이제 가능하다. 이처럼 한 사람의 지성은 다른 사람의 통찰력을 많이 얻음으로 자체의 영적 가치를 크게 만든다. 이 방법으로 사람들은 각자의 영적 재산을 한데 합침으로 그 혼을 부유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바로 이 방법으로 사람은 왜곡된 시력(視力), 치우친 관점, 좁은 판단에 피해자가 되는, 상존하는 그 성향을 피할 수 있게 된다. 두려움ㆍ질투ㆍ자만은 오로지 다른 지성들과 가까이 접촉해야 막을 수 있다. 하늘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수고하라고 주가 결코 너희를 혼자 내보내지 않는 사실을 너희가 주목하기를 바란다. 그는 언제나 너희를 둘씩 내보낸다. 지혜는 초월 지식이니까, 지혜를 통합할 때, 사회 집단은 작건 크건, 서로 모든 지식을 함께 가진다.

160:2.8 (1776.2) 3. 살려는 열심. 고립되는 것은 혼의 충전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이 친구들과 관계를 가지는 것은 살려는 열심을 새롭게 하는 데 필수이며, 인간 생활의 상급 수준으로 올라가는 결과로 생기는 투쟁에서 싸울 용기를 유지하는 데 필수이다. 우정은 기쁨을 더하고 인생의 승리를 영화롭게 한다. 서로 사랑하는 가까운 인간 관계는 인생의 슬픔과 어려움을 맛볼 때 고통의 쓴 맛을 많이 가시게 한다. 친구가 곁에 있으면 어떤 아름다움도 어떤 좋은 일도 돋보인다. 지능적 상징으로 사람은 친구들의 이해하는 능력을 자극하고 키워준다. 인간의 우정에서 더할나위 없는 한 가지 영광은 이렇게 서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힘과 가능성이다. 큰 영적 힘은 공통되는 명분에 진심으로 헌신하는 것, 곧 우주의 신에게 공동으로 충성하는 것을 의식하는 데 본래부터 생긴다.

160:2.9 (1776.3) 4. 모든 악에 대하여 강화된 방어. 인격의 교제를 가지고 서로 사랑하는 것은 악에 저항하는 효과적 보장이다. 어려움ㆍ슬픔ㆍ실망ㆍ실패는 혼자 겪을 때 더 고통스럽고 마음 아프다. 사람과 사귀는 것은 잘못을 올바름으로 변화시키지 않지만, 쏘는 아픔을 크게 더는 데 도움이 된다. 너희의 선생은 말했다: “슬퍼하는 자는 행복하나니”―친구가 위로하려고 가까이 있으면 그렇다. 너희가 다른 사람의 복지(福祉)를 위하여 산다는 것, 그리고 이 다른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너희의 복지와 발전을 위하여 산다는 것을 아는 데 긍정적인 힘이 있다. 사람은 고립된 가운데 시든다. 세월의 일시적 거래만 볼 때, 인간은 어김없이 낙심하게 된다. 지난날과 앞날로부터 분리된 오늘은 어이없을 정도로 하찮다. 오직 영원의 동그라미를 한 번 보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도록 북돋아주며, 사람 속에 있는 최선의 자질이 최대로 일하도록 도전할 수 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할 때, 사람은 다른 사람들, 시간과 영원 속에서 함께 사는 동료들의 이익을 위하여 가장 사심 없이 산다.

160:2.10 (1777.1) 되풀이하건대, 영감을 주고 사람을 고귀하게 만드는 그러한 교제는 인간의 결혼 관계에서 그 이상적 가능성을 발견한다. 결혼 바깥에서 많은 것이 성취되고, 허다한 결혼이 이 도덕적ㆍ영적 열매를 도무지 맺지 못하는 것이 참말이다. 너무나 자주, 인간을 성숙하게 만드는 이 우수한 성취보다 낮은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자들이 결혼에 들어간다. 이상적 결혼은 감정의 변동과 단순한 성적 매력의 변덕스러움보다 더 안정된 무엇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그러한 결혼은 진정하게 서로 몸소 헌신하는 데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래서 그렇게 믿을 만하고 효과적인 단위, 인간적 교제의 작은 단위들을 너희가 세울 수 있다면, 이 단위들이 총합으로 모였을 때, 세계는 크고 영화롭게 된 사회 구조, 도덕적으로 성숙한 문명을 바라볼 것이다. 그러한 종족은 너희 선생의 이상, “땅에는 평화요, 사람들 사이에 선의”와 같은 무엇을 비로소 실현할지 모른다. 그러한 사회가 완전하거나 악이 전혀 없지는 않을 터이나, 적어도 안정된 성숙에 가까이 갈 것이다.

3. 성숙으로 이끄는 유혹

160:3.1 (1777.2) 성숙을 향한 노력은 일을 필요하게 만들며, 일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어디서부터 이 모두를 성취할 힘이 나오는가? 물리적인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지만, 주가 좋은 말씀을 하셨으니,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도다.” 정상의 몸과 썩 좋은 건강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다음에 우리는 사람의 잠자는 영적 힘을 불러일으킬 자극제로서 작용할 유혹물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 안에 산다고 예수는 우리에게 가르쳤다. 그러면 혼에 묶여 있는 이 신답고 무한한 힘을 방출하기 위하여 사람을 어떻게 유도할 수 있는가? 바로 우리의 혼이 바깥을 향하여 이동하는 동안, 그 혼을 새롭게 하려고 하나님이 솟아나오고, 그리고 나서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사람을 깨우치고 격려하고 복을 주는 목적에 쓰이도록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해방하도록 유인할 것인가? 너희 혼 속에 잠자는, 선을 행하는 이 잠재 능력을 내가 어떻게 최선으로 일깨울 수 있는가? 내가 확신하는 한 가지는 이것이다: 감정의 흥분은 이상적인 영적 자극이 아니다. 흥분은 에너지를 증가시키지 않는다. 흥분은 오히려 머리와 몸의 힘을 써버린다. 그러면 어디서 이 큰 일을 할 에너지가 오는가? 너희의 선생에게 눈을 돌리라. 우리가 여기서 에너지를 쓰고 있는 동안에, 지금도 그는 산에서 힘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모든 문제의 신비는 영적 교통에, 예배에 감추어져 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명상과 휴식을 합친 문제이다. 명상은 지성이 영과 접촉하게 만든다. 긴장이 풀린 정도에 따라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좌우된다. 그리고 허약함을 버리고 힘을, 두려움을 버리고 용기를,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가지는 것이, 예배의 본질을 이룬다. 적어도 철학자는 이 교환을 이렇게 본다.

160:3.2 (1777.3) 이 여러 체험이 자주 되풀이될 때, 체험은 버릇으로, 힘을 주는 경건한 버릇으로 굳어지며, 그러한 버릇은 궁극에 자체를 영적 인품으로 형성하고 그러한 인품은 마침내 사람의 동료들에게 성숙한 인격으로 인식된다. 이 관습은 처음에 어렵고 시간이 걸리지만, 버릇이 되면 즉시 휴식을 주고 시간을 절약한다. 사회가 더욱 복잡해지고 문명에서 유혹물이 증가할수록,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자기의 영적 에너지를 보존하고 증대하기 위하여 고안된 관습, 그러한 보호하는 버릇된 관습을 기를 필요성이 더욱 급해진다.

160:3.3 (1778.1) 성숙에 이르는 데 또 다른 요건은 늘 변화하는 환경에 사회 집단들이 협동으로 적응하는 것이다. 미숙(未熟)한 사람은 동료의 반감을 일으킨다. 성숙한 사람은 동료한테서 마음에서 우러난 협동을 얻으며, 그렇게 함으로 일생의 노력에서 얻는 열매를 여러 배로 늘인다.

160:3.4 (1778.2) 필요하다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개념을 방어하기 위하여 싸워야 할 때가 있다고 나의 철학은 내게 이른다. 그러나 더 성숙한 종류의 인격을 가진 주는, 우수하고 매력 있는 기술, 수완과 관용의 기술로, 똑같은 승리를 쉽고도 품위 있게 얻을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너무나 자주, 우리가 권리를 위하여 투쟁할 때, 승자와 패자(敗者), 모두가 진 것이 판명된다. “잠긴 문을 통해서 들어가려고 할 때, 지혜로운 사람은 문을 부수기보다 오히려 문을 열기 위하여 열쇠를 찾으려 하리라” 하는 주의 말씀을 바로 어제 들었다. 단지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우리 스스로 확신하려고 싸움에 빠지는 일이 너무 흔하다.

160:3.5 (1778.3) 이 새로운 하늘나라 복음은, 더 질 높은 생활을 위하여 새롭고 더 값진 동기를 주므로, 살아가는 기술에 크게 쓸모가 있다. 그 복음은 새롭고 높은 운명의 목표, 최상의 사는 목적을 제시한다. 이 새로운 개념, 존재의 영원하고 신성한 목표는 그 자체로 초월 자극이요, 사람의 상급 성품에 거하는 최선이 반응하기를 요구한다. 지적(知的) 생각이 산꼭대기에 이를 때마다 정신에게 휴식, 혼에게 힘, 영을 위한 교통이 발견될 것이다. 상급 생활의 그러한 유리한 지점으로부터, 사람은 더 낮은 수준의 생각―걱정ㆍ질투ㆍ시샘ㆍ앙갚음, 그리고 미숙한 인격의 자만심―의 물질적 염증을 초월할 수 있다. 높이 올라가는 이 사람들은 인생의 하찮은 것 중에 역행(逆行)하는 수많은 갈등에서 자신을 구원하고, 이처럼 영 개념과 하늘 교통이 있는 상류의 흐름을 의식하도록 자유롭게 된다. 그러나 쉬운 일시적 달성을 추구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인생의 목적을 부지런히 보호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목적은 비참한 광신주의 위협에 면역이 되도록 육성되어야 한다.

4. 균형을 이룬 성숙

160:4.1 (1778.4) 영원한 실체들을 달성하는 데 마음을 다하면서, 너희는 또한 이 세상의 생활에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야 한다. 영은 우리의 목표이지만 육체는 사실이다. 때때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우연히 우리 손에 굴러 떨어질지 모르지만, 무릇 우리는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영리하게 일해야 한다. 인생의 두 가지 주요한 문제는, 현세의 생활을 꾸려 나가고 영원히 살아남기를 성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계를 잇는 문제조차도 그 이상적 해결에는 종교가 필요하다. 이 두 가지 다 상당히 개인적인 문제이다. 사실, 참된 종교는 개인과 따로 떨어져서 작용하지 않는다.

160:4.2 (1778.5) 현세의 생활에 필수인 것들은, 내가 보건대 다음과 같다:

160:4.3 (1778.6) 1. 육체의 건강.

160:4.4 (1778.7) 2. 맑고 깨끗한 생각.

160:4.5 (1778.8) 3. 능력과 기술.

160:4.6 (1778.9) 4. 재산―생활에 쓰이는 물품.

160:4.7 (1778.10) 5. 실패를 견디는 능력.

160:4.8 (1778.11) 6. 문화―교육과 지혜

160:4.9 (1779.1) 몸의 건강과 능률에 관계되는 신체의 문제조차도, 이를 주의 가르침의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최선으로 해결된다: 사람의 육체와 지성은 신들의 선물이 거하는 자리요,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영이 된다. 이처럼 사람의 지성은 물질인 것과 영적 실체 사이에 중재자가 된다.

160:4.10 (1779.2) 사람이 인생에서 바람직한 것을 한 몫 확보하는 데는 지능이 필요하다. 사람이 날마다 할 일에 충실하면 꼭 재산으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그릇되다. 때때로 어쩌다가 생기는 재산이 아니면, 현세의 생활에서 물질적 보상은 잘 조직된 어떤 경로에서 흐르는 것이 발견되며, 오직 이 경로에 가까이 가는 자가 현세에 기울인 노력에 대하여 충분히 보상 받을 것을 기대해도 좋다. 가난은 언제나, 동떨어진 개별 경로에서 부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의 운명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계획은 이 세상에서 번영하는 데 한 가지 꼭 필요한 것이다. 성공하려면 자기 일에 헌신할 뿐 아니라 또한 사람이 물질적 부(富)가 흐르는 어떤 경로의 일부가 되어 활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이 지혜롭지 못하면 자기 세대에 인생을 바치고도 물질적 보상을 받지 못할 수 있다. 사람이 어쩌다가 재산의 흐름의 혜택을 받는 자가 되면, 동료 인간들을 위하여 가치 있는 일을 전혀 하지 않았더라도 사치(奢侈)에 파묻혀 살지 모른다.

160:4.11 (1779.3) 능력은 사람이 물려받는 것이요, 기술은 얻는 것이다. 인생은 어느 한 가지 일을 잘, 솜씨 있게 처리할 수 없는 자에게는 현실이 아니다. 기술은 생활에서 만족을 가져오는 하나의 진정한 근원이다. 능력은 선견(先見), 멀리 내다보는 눈을 선물로 받았음을 뜻한다. 정직하지 않은 성취가 유혹하는 보상에 속지 말라. 정직한 노력에 본래부터 있는, 후일의 보상을 위하여 기꺼이 수고하라. 지혜로운 사람은 수단과 목적을 구별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앞날을 위한 지나친 계획은 때때로 그 자체의 높은 목적을 망친다. 기쁨을 추구하는 자로서, 사람은 소비자일 뿐 아니라 생산자가 되려고 언제나 노력해야 한다.

160:4.12 (1779.4) 인생에서 힘을 주는 가치 있는 사건들을 신성하게 간직하도록 기억(記憶)을 훈련하라. 그런 사건들을 너희는 기쁨과 수련을 위하여 뜻대로 회상할 수 있다. 이처럼 아름답고 선하고 예술적으로 웅대한 예비 미술관을 자신을 위하여 네 몸 속에 지어라. 그러나 모든 기억 가운데 가장 고귀한 것은 훌륭한 우정을 나누는 위대한 순간을 소중히 회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힘을 방출하는 영적 예배의 손길 밑에서, 보물 같은 이 모든 기억은 가장 귀중하고 정신을 높여주는 영향력을 방출한다.

160:4.13 (1779.5) 그러나 사람이 실패를 품위 있게 받아들이기를 배우지 않으면, 목숨은 존재에서 짐이 될 것이다. 실패에는 훌륭한 사람들이 반드시 얻는 한 예술이 있다. 너희는 어떻게 즐겁게 지는가 알아야 한다. 너희는 실망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실패를 인정하기를 결코 망설이지 말라. 속이는 웃음과 활짝 웃는 낙천주의 밑에 실패를 감추려 하지 말라. 성공했다고 우기는 말은 언제나 듣기 좋지만, 마지막 결과는 끔찍하다. 그러한 수법은 비현실 세계를 지어내고 궁극에는 미몽(迷夢)에서 깨어나는 불가피한 파멸로 바로 이끈다.

160:4.14 (1779.6) 성공은 용기를 내게 하고 자신감을 촉진할지 모르지만, 지혜는 오직 사람이 실패한 결과에 적응하는 체험에서 생긴다. 낙관적 망상을 현실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지혜롭게 될 수 없다. 오직 사실을 직면하고 사실을 이상에 조절하는 자가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지혜는 사실과 이상, 이 두 가지를 포함하며, 따라서 지혜의 신봉자가 철학에서 열매 없는 두 극단을 벗어나게 한다―하나는 사실을 제쳐놓는 이상주의를 가진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영적 안목(眼目)이 결여된 물질주의자이다. 성공한다는 계속된 거짓 망상의 도움으로 인생의 투쟁을 겨우 유지할 수 있는 비겁한 사람은, 궁극에 자신이 상상하는 꿈의 세계에서 깨어날 때, 실패를 겪고 패배를 맛보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다.

160:4.15 (1780.1) 이렇게 실패에 부딪치고 패배에 적응하는 데는 종교의 원대한 환상이 최고의 영향을 미친다. 우주를 탐험하는 영원한 모험을 시작한 사람,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의 체험에서, 실패는 다만 교육이 되는 사건이다―지혜를 얻는 데 교양이 되는 실험이다. 그러한 사람에게 실패는 다만 더 높은 수준의 우주 실체를 성취하는 데 쓰이는 새 연장일 뿐이다.

160:4.16 (1780.2) 비록 현세의 인생 사업 전체가 사람을 압도하는 실패로 보인다 하더라도, 인생의 실패 하나하나가 지혜로운 교양과 영적 성취를 낳는다면,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의 생애는 영원의 빛으로 비추어 볼 때 큰 성공임이 드러날지 모른다. 지식과 교양과 지혜를 혼동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이것들은 인생에서 관계되지만, 대단히 다른 영적 가치를 대표한다. 지혜는 언제라도 지식을 이기고, 언제나 교양을 영화롭게 만든다.

5. 이상적인 자의 종교

160:5.1 (1780.3) 너희의 선생은 인간의 진정한 종교가 개인이 영적 현실을 체험하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너희가 내게 일러주었다. 종교는 사람이 온 인류의 경의(敬意)와 헌신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어떤 것에 반응하는 인간의 체험으로 나는 간주해 왔다. 이런 뜻으로 종교는, 실체의 이상에 대한 우리의 가장 높은 개념, 그리고 영원한 영적 달성 가능성을 향하여 우리의 지성이 미치는 가장 먼 한계, 이 두 가지를 대표하는 것에 우리가 최고로 헌신함을 상징한다.

160:5.2 (1780.4) 사람들이 종교에 관하여 부족ㆍ민족, 또는 종족의 의미에서 반응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 집단 바깥에 있는 자를 참으로 인간이 아니라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종교적 충성을 받는 대상(對象)이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종교는 결코 단순한 지적 관념이나 철학 논리의 문제일 수 없다. 종교는 언제나, 언제까지나 생활의 상황에 반응하는 방식이요, 종교는 일종의 행위이다. 종교는 보편적으로 찬미를 받아 마땅하다고 우리가 판단하는 어떤 실체를 향하여 경건하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을 포함한다.

160:5.3 (1780.5) 무엇이 너의 체험에서 종교가 되었으면, 너는 이미 그 종교의 활발한 전도사가 된 것이 자명하니, 이는 네 종교에서 최고의 개념이 온 인류, 모든 우주의 지성 존재들의 숭배를 받아 마땅하다고 네가 판단하기 때문이다. 네가 네 종교를 적극적으로 퍼뜨리고 선교(宣敎)하는 전도사가 아니라면, 네가 종교라 부르는 것은 겨우 전통적 관념이나 단순히 지적 철학 체계이니까, 너는 스스로 속는다. 너의 종교가 영적 체험이라면, 너의 예배 대상은 보편적 영 현실이요, 영적으로 변화된 너의 모든 개념의 이상(理想)이어야 한다. 두려움ㆍ감정ㆍ전통ㆍ철학에 근거를 둔 모든 종교를 나는 지적 종교라 부르고, 한편 참된 영 체험에 기초를 둔 것을 참된 종교라 부르겠다. 종교적 헌신의 대상은 물질이거나 영적이거나, 거짓되거나 참되거나, 현실이거나 비현실이거나, 인간답거나 신성할지 모른다. 따라서 종교는 선하거나 악할 수 있다.

160:5.4 (1780.6) 도덕과 종교는 반드시 같지는 않다. 한 체계의 도덕률은 예배의 대상(對象)을 붙잡아서 종교가 될지도 모른다. 한 종교는 충성과 최고의 헌신을 요구하는 보편적 호소력을 잃어버림으로, 철학 체계나 도덕률의 법전(法典)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종교적 충성을 받을 최고의 이상을 구성하고, 섬기는 자의 종교적 헌신을 받는 이것, 이 분, 이 상태 또는 서열의 존재, 또는 달성 가능성이 하나님이다. 영 실체의 이 이상에 무슨 이름이 적용되든지 상관 없이, 그것은 하나님이다.

160:5.5 (1781.1) 참된 종교의 사회적 특징은 그것이 변함없이 개인의 생각을 바꾸고 세계를 변화시키기를 추구한다는 사실에 있다. 종교는 발견되지 않은 이상이 존재함을 암시하며, 이것은 문명에서 가장 성숙한 제도의 가장 높은 사회 관습에도 담겨 있는, 그런 윤리 및 도덕의 알려진 표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종교는 발견되지 않은 이상, 탐구되지 않은 실체, 초인간적 가치, 신다운 지혜, 참된 영적 달성을 향하여 손을 뻗는다. 참된 종교는 이 모든 것을 실행하며, 모든 다른 신앙은 그 이름으로 부를 가치가 없다. 영원한 하나님이라는 가장 높고 하늘같은 이상(理想)이 없이, 사람은 진정한 영적 종교를 가질 수 없다. 하나님 없는 이러한 종교는 사람이 발명한 것이요, 생명 없는 지적 관념과 의미 없는 감정적 예식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제도이다. 종교는 하나의 큰 이상이 숭배받을 대상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비현실의 이상들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한 개념은 착각이다. 인간의 달성을 허용하는 유일한 이상은 영원한 하나님이 계신 영적 사실에 거하는, 무한히 가치 있는 신성한 현실이다.

160:5.6 (1781.2) 하나님이라는 낱말, 하나님이라는 이상과 대조하여 하나님이라는 관념은 어쩌다가 아무리 유치하고 거짓된 종교라도, 그런 종교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이 하나님 관념은 신봉자들이 선택하는대로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 하등 종교는 인간의 마음의 자연스러운 상태에 대처하려고 그 자체의 하나님 관념을 형성한다. 상급 종교는 참된 종교의 이상이 요구하는 것을 만족시키려고 인간의 마음이 바뀌기를 요구한다.

160:5.7 (1781.3) 예수의 종교는 우리가 예배라는 생각에 대하여 예전에 가졌던 모든 개념을 초월한다. 이는 예수가 그의 아버지를 무한한 실체의 이상으로 묘사할 뿐 아니라, 땅에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택하고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사람과 형제임을 받아들이는 것을 인정하는 모든 필사 인간이, 가치의 이 신다운 근원과 우주의 영원한 중심에 참으로 몸소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실히 선언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건대, 이것은 세상이 일찍이 본 가운데 가장 높은 종교 개념이다. 내가 선언하건대, 이 복음이 무한한 현실, 신성한 가치, 영원한 보편적 달성을 포함하니까, 이보다 더 높은 개념이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러한 개념은 최상이고 궁극인 것의 이상적 모습을 체험하는 것이다.

160:5.8 (1781.4) 나는 너희의 선생이 가진 이 종교의 더할 나위 없는 이상에 흥미가 당길 뿐 아니라 또한 영적 현실의 이 이상(理想)을 사람이 달성할 수 있다는 그의 선언을 믿는다, 파라다이스의 입구에 우리가 궁극에 확실히 도달한다는 그의 보장을 받아들이고 너와 내가 길고 영원한 이 모험에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고백하도록 나는 힘차게 마음이 움직인다. 형제들아, 나는 믿는 사람이요, 배를 타 버렸다. 이 영원한 모험으로 너희와 함께 가는 길이다. 주는 그가 아버지로부터 왔고, 그가 우리에게 길을 보이리라 하신다. 그가 진실을 말한다고 나는 충분히 확신한다. 영원한 우주의 아버지와 동떨어져서, 달성할 수 있는 현실의 이상이나 완전한 가치가 하나도 없다고 나는 마침내 확신한다.

160:5.9 (1781.5) 그러면 단지 존재하고 있는 것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미래에 존재가 가능한 모든 것의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내가 온다. 그러므로 최고의 이상이 실재한다면, 그 이상에 바치는 너희의 헌신은 이 하나님께, 사물과 존재들이 거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우주의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아무런 다른 하나님이 없으니, 도저히 어떤 다른 하나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다른 신은 상상으로 지어낸 헛것이요, 필사 지성의 환상이요, 거짓 논리로 왜곡(歪曲)한 것이요, 그것을 빚어낸 자들의 우상(偶像), 스스로 속이는 우상이다. 그렇다, 너희는 이 하나님 없이 종교를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이 이상의 실체 대신에 하나님이라는 낱말을 갈아치우고자 하면, 너는 한 이상, 신다운 실체가 있는 자리에 한 개념을 집어넣음으로 오직 자신을 속였을 뿐이다. 그런 관념은 몹시 바라는 공상(空想)의 종교에 지나지 않는다.

160:5.10 (1782.1) 예수의 가르침에서 나는 최선에 이른 종교를 본다. 이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찾아낼 수 있게 만든다. 그러나 하늘나라로 이렇게 들어가는 값을 우리가 기꺼이 치르겠는가? 우리는 기꺼이 다시 태어나고, 다시 지음받겠는가? 자아를 죽이고 혼을 다시 만드는 엄청나고 벅찬 이 과정을 우리가 기꺼이 거치겠는가? 주가 말씀하지 않았는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목숨을 잃어야 하느니라. 내가 평화를 가져오려고 왔다고 생각지 말라, 오히려 혼의 투쟁을 가져오려는 것이라.” 아버지의 뜻에 헌신하는 값을 치른 뒤에, 거룩히 헌신하여 사는 이 영적 길을 줄곧 걷는다면, 우리가 큰 평화를 맛본다는 것이 참말이다.

160:5.11 (1782.2) 이제 우리는 알려진 종류의 유혹물을 참으로 내버리고 있으며, 한편 상급의 이상, 신다운 실체를 추구하는 영 세계들에서 미래에 모험하는 생활, 알려지지 않고 탐구해 보지 않은 서열의 존재로 이끄는 유혹물을 찾는 데 아낌없이 몸을 바친다. 우리는 예수의 종교에 담긴 이러한 이상주의적 실체의 개념들을 동료 인간에게 전하는 데 사용할 의미 있는 상징을 찾고 있다. 온 인류가 이 최고의 진리를 담은 공동체의 환상으로 인하여 기쁨에 떨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그치지 않고 기도할 것이다. 바로 이제, 우리 마음 속에 간직된 바와 같이, 초점을 맞춘 우리의 하나님 개념은 하나님이 영이요, 우리의 동료에게 전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160:5.12 (1782.3) 예수의 종교는 생생한 영적 체험을 요구한다. 다른 종교는 전통적 관념, 감정적 느낌, 철학적 의식(意識)에 있고, 또 이 모든 것에 있을지 모르지만, 주의 가르침은 진정하게 영이 진보하는 실제 수준에 이르기를 요구한다.

160:5.13 (1782.4) 하나님처럼 되려는 충동을 의식하는 것은 참 종교가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감정을 느끼는 것은 참 종교가 아니다. 자아를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려는 확신을 아는 것은 참 종교가 아니다. 이 종교가 모든 것 가운데 최선이라고 조리 있게 따지는 지혜는 몸소 영적 체험을 겪는 종교는 아니다. 참된 종교는 진심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의 실체와 이상주의 뿐 아니라, 달성할 운명과 그 실체와도 관련이 있다. 진리의 영이 계시(啓示)함으로 이 모두가 우리에게 몸소 겪는 것이 되어야 한다.

160:5.14 (1782.5) 이처럼 예수의 복음을 믿는 사람이 된 그리스인 철학자, 그의 종족에서 가장 위대한 자 중 한 사람의 논설이 끝났다.

제 161 편 로단과 계속한 토론

유란시아서

제 161 편

로단과 계속한 토론

161:0.1 (1783.1) 서기 29년 9월 25일 일요일에, 사도와 전도사들은 마가단에 모였다. 그날 저녁에 동료들과 함께 긴 회의가 있은 뒤에, 예수는 이튿날 아침 일찍 그와 열두 사도가 천막 축제에 참석하려고 예루살렘으로 떠나겠다고 발표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는 전도사들에게 갈릴리에 있는 신자들을 찾아보라, 여인단은 한동안 벳세다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161:0.2 (1783.2)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날 시각이 되었을 때, 나다니엘과 토마스는 아직도 알렉산드리아의 로단과 한창 토론 중이었고, 며칠 동안 마가단에 남아 있도록 주로부터 허락을 얻었다. 그래서 예수와 열 사도가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난 동안, 나다니엘과 토마스는 로단과 진지한 토론에 들어갔다. 그 전주에 로단은 자기의 철학을 해설했고, 토마스와 나다니엘은 하늘나라 복음을 그리스인 철학자에게 번갈아서 발표했다. 로단은 예전에 세례자 요한의 옛 사도들 중 한 사람으로부터 예수의 가르침에 관하여 자신이 잘 교육받았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그의 선생이었다.

1. 하나님의 성격

161:1.1 (1783.3) 로단과 두 사도가 다르게 보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곧 하나님의 성격이었다. 로단은 하나님의 속성에 관하여 그에게 제시된 모든 것을 쉽사리 받아들였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사람이 인격을 상상하는 것과 같은 성격자가 아니고 그럴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도들은 하나님이 성격을 가진 분인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면서 자신들이 곤경에 빠진 것을 발견했고, 한편 로단은 하나님이 성격자가 아님을 증명하기가 한층 더 어려움을 깨달았다.

161:1.2 (1783.4) 성격이라는 사실은 동등한 존재들, 공감하여 이해할 능력이 있는 존재들이 충분히 서로 교통한다는, 공존하는 사실에 달려 있다고 로단은 주장했다. 로단이 말했다: “성격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와 접촉하는 자들이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영이 교통하는 상징을 가져야 하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ㆍ영원하며, 모든 다른 존재의 창조자이니까, 따라서 동등한 존재에 관하여 말하면, 하나님은 우주에서 혼자이라. 그와 동등한 이가 아무도 없고, 동등한 이로서 그가 함께 교통할 분이 하나도 없느니라. 하나님은 정말로 모든 성격의 근원일지 모르지만, 그런 분으로서 창조자가 지음받은 자 위에 초월하여 계시는 것 같이, 하나님은 성격을 초월하느니라.”

161:1.3 (1783.5) 이 주장은 토마스와 나다니엘을 크게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예수에게 구조하러 와달라고 요청했지만, 주는 그 토론에 끼어들려 하지 않았다. 그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귀띔해 주기는 하였다: “너희가 아버지의 이상적인 무한ㆍ영원한 성품을 영적으로 숙지하는 한, 아버지에 대하여 너희가 무슨 개념을 품는가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느니라.”

161:1.4 (1784.1) 하나님은 사람과 교통하며, 따라서 로단의 정의(定義)를 쓰더라도 아버지는 성격자라고 토마스는 주장했다. 이것을 그리스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몸소 드러내지 않는다, 하나님은 아직도 신비라는 이유로 물리쳤다. 그리고 나서 나다니엘은 자기가 몸소 하나님을 체험한 것을 예를 들어 호소했다. 로단은 그가 요즈음에 비슷한 체험을 가진 적이 있다고 증언하면서 이를 인정했지만, 이런 체험은 오직 하나님이 실체임을 증명할 뿐이고 성격임을 증명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161:1.5 (1784.2) 월요일 밤이 되자 토마스는 두 손을 들었다. 그러나 화요일 밤이 되어서, 나다니엘은 로단이 아버지가 성격을 가진 분임을 믿도록 설득했고, 다음 단계의 논리로 그리스인의 관점을 바꾸게 하였다:

161:1.6 (1784.3) 1.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는 적어도 다른 두 존재와 동등하게 교통하며, 이들―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은 자신과 완전히 대등하고 자신과 온전히 비슷하다. 삼위일체 교리에 비추어서, 그리스인은 우주의 아버지가 성격자일 가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토론을 후일에 고려한 것은 열두 사도의 머리 속에, 확대된 삼위일체 개념으로 이끌었다. 말할 것도 없이, 예수가 영원한 아들이라고 일반적으로 믿었다).

161:1.7 (1784.4) 2. 예수가 아버지와 대등하니까, 그리고 이 아들이 땅에 있는 자녀들에게 인격을 드러내 보이는 일을 해냈으므로, 그러한 현상은 세 신격(神格)이 모두 성격을 소유한다는 사실과 또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명이 되며, 하나님이 사람과 교통하는 능력이 있는가,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에 영원한 해답을 준다.

161:1.8 (1784.5) 3. 예수가 사람과 서로 교제하고 완전히 교통하는 사이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동등하게 교통하고 같은 감정으로 서로 이해하는 것을 전제(前提)로 한다, 예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예수는 동시에 하나님과 사람, 양쪽과 이해하면서 교통을 유지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양자가 예수가 교통하는 상징의 뜻을 이해하니까, 서로 교통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필요 조건이 관계되는 한, 하나님과 사람이 모두 성격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예수의 인격은 하나님의 성격을 보여주며, 한편 사람 속에 하나님이 계심을 확고하게 증명한다. 똑같은 것에 관련된 두 가지는 서로 관계된다.

161:1.9 (1784.6) 4. 인격은 인간적 실체와 신다운 가치에 대하여 사람이 가진 최고의 개념을 대표한다, 하나님은 또한 신다운 실체와 무한한 가치에 대하여 사람이 가진 최고의 개념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답고 무한한 성격임이 틀림없다, 실제로 비록 사람의 인격 개념 및 정의(定義)를 무한히, 영원히 뛰어넘는 성격이지만, 그런데도 언제나 보편적으로 성격이다.

161:1.10 (1784.7) 5. 하나님이 모든 성격의 창조자요 모든 성격의 운명이니까, 하나님은 성격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하는 예수의 가르침에 로단은 이전에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다.

161:1.11 (1784.8) 이 여러 논점을 듣자, 로단이 말했다: “확신이 드는구나. 초인간ㆍ초월ㆍ최상, 무한ㆍ영원ㆍ최종, 그리고 보편성과 같은 연장된 가치들을 성격의 의미에 붙여서, 그런 믿음에 대하여 나의 고백을 제한해도 된다면, 하나님이 성격자임을 나는 고백하겠노라. 하나님이 성격보다는 무한히 크심이 틀림없지만, 성격보다 작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 확신하노라. 논쟁을 그만두고, 예수가 아버지가 몸소 계시된 것이요, 예수가 논리ㆍ이성ㆍ철학에서 충족되지 않은 모든 요소를 충족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나는 만족하노라.”

2. 예수의 신다운 성품

161:2.1 (1785.1) 로단이 하늘나라 복음에 대하여 가진 견해를 나다니엘과 토마스가 아주 충분히 인정했으므로, 더 고려할 것이 오직 하나 남았는데, 즉 예수의 신다운 성품을 다루는 가르침, 겨우 최근에야 터놓고 선언한 신조이다. 나다니엘과 토마스는 주의 신다운 성품에 관하여 견해를 공동으로 발표했고, 다음 이야기는 그들의 가르침을 요약하고 다시 정리하고 다시 적어 발표하는 것이다:

161:2.2 (1785.2) 1. 예수는 그의 신성(神性)을 이미 인정했고, 우리는 그를 믿는다. 사람의 아들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어야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일이 그의 사명과 관련하여 일어났다.

161:2.3 (1785.3) 2. 일생동안 그와 우리의 관계는 인간 우정의 이상(理想)을 본보기로 보여준다. 오직 신다운 존재가 아마도 그러한 인간 친구일 수 있다. 그는 우리가 일찍이 알게 된 가운데 참으로 가장 이기심 없는 사람이다. 죄인에게도 친구이고, 감히 적을 사랑한다. 그는 우리에게 무척 충실하다. 서슴지 않고 우리를 꾸짖지만, 그가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 모두에게 명백하다. 사람이 그를 잘 알수록, 더욱 그를 사랑할 것이다.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 그의 헌신적 태도에 마음이 끌릴 것이다. 우리가 그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 여러 해 동안 내내, 그는 충실한 친구였다. 비위 맞추는 말을 전혀 하지 않지만, 우리 모두를 똑같이 친절하게 다루며, 변함없이 부드럽고 동정심이 있다. 그의 인생과 모든 다른 것을 우리와 함께 나누었다. 우리는 행복한 공동체요, 무엇이나 공동으로 함께 쓴다. 우리는 그렇게 벅찬 상황 밑에서 한낱 인간이 그런 티없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161:2.4 (1785.4) 3. 예수가 결코 그릇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신성하다고 생각한다. 아무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는 놀랍게 지혜롭고, 더할 나위 없이 경건하다. 날마다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맞추어 산다. 아버지의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으니까 결코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와 함께 기도하지만, 결코 우리에게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요청하지 않는다. 그는 변함 없이 죄를 짓지 않는다고 우리는 믿는다. 겨우 인간인 자가 일찍이 그러한 삶을 산다고 공언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완전한 삶을 산다고 주장하고, 그가 그렇게 한다고 우리는 인정한다. 우리의 경건함은 뉘우침에서 생기지만 그의 경건함은 올바름에서 솟아나온다. 그는 죄를 용서한다고 공언하기도 하며 병을 고친다. 한낱 인간이 멀쩡한 정신에 죄를 용서한다고 공언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신의 특권이다. 우리가 그와 처음 접촉했을 때부터 그는 올바름 속에 이렇게 완전한 듯하였다. 우리는 은혜 속에서, 그리고 진리를 아는 가운데 자라지만, 우리의 주는 처음부터 성숙한 올바름을 나타낸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모두가 예수 안에서 이 선한 요소를 알아본다. 그래도 그의 경건함은 결코 눈에 거슬리거나 꾸미는 듯하지 않다. 그는 온유하고도 두려움이 없다. 우리가 그의 신성을 믿는 것을 승인하는 듯하다. 그는 공언하는 대로 그런 분이든지, 아니면 세상에 일찍이 알려진 가운데 최대의 위선자요 사기꾼이다. 그는 자기가 주장하는 대로 바로 그런 분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161:2.5 (1785.5) 4. 그의 독특한 성품, 그리고 감정의 완전한 자제는 그가 인간과 신(神)의 결합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준다. 그는 인간적 필요가 있는 장면에 어김없이 반응하며, 사람의 고통이 그의 마음에 호소하지 않는 적이 없다. 그의 동정심은 육체의 고통, 정신의 고뇌, 또는 영적 슬픔에 똑같이 반응한다. 동료 인간에게 믿음이나 어떤 다른 장점이 있음을 재빨리 알아보고 너그럽게 인정한다. 아주 공정하고 공평하며, 동시에 무척 자비롭고 배려가 깊다. 사람들의 영적 완고함을 슬퍼하고, 사람들이 진리의 빛을 보는 것에 찬성할 때 기뻐한다.

161:2.6 (1786.1) 5. 그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을 알고 마음 속의 소망을 이해하는 듯하다. 그리고 우리의 영이 불안한 것에 반드시 공감한다. 우리 인간의 감정을 모두 가진 듯하지만, 그 감정은 훌륭하게 영화롭게 되었다. 선을 뚜렷이 사랑하고 죄를 똑같이 미워한다. 신이 앞에 계심을 초인간적으로 의식하고 있다. 사람처럼 기도하지만 하나님처럼 행동한다. 사물을 미리 아는 듯하다. 지금도 감히 그의 죽음에 대하여 말하고, 앞날에 그가 영화롭게 된다고 어떤 신비스러운 말씀을 한다. 친절하지만, 또한 대담하고 용감하다. 의무를 다하는 데 결코 그르치지 않는다.

161:2.7 (1786.2) 6. 우리는 그가 초인간적 지식을 가진 현상에 항상 감명을 받는다. 미처 하루가 지나기 전에, 바로 그가 계신 데서 떨어진 곳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주가 아는 것을 드러내는 무슨 일이 벌어진다. 그는 동료들의 생각을 또한 아는 듯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는 하늘 성격자들과 교통하며, 질문의 여지 없이 나머지 우리보다 훨씬 높은 영적 수준에서 산다. 독특하게 알아보는 그의 눈앞에 모든 것이 펼쳐진 듯하다. 그는 우리와 대화하려고 묻는 것이지, 정보를 캐내려고 묻지 않는다.

161:2.8 (1786.3) 7. 요즘에 주는 자기의 초인간성을 서슴지 않고 주장한다. 우리가 사도로서 세움받은 날부터 바로 최근에 이르기까지, 결코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부인한 적이 없다. 그는 신다운 선생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한다. 주는 서슴지 않고 오늘날 종교 선생들의 종교적 가르침을 논박하고, 분명한 권위를 가지고 새 복음을 선포한다. 그는 주장을 내세우며, 적극적이고 권위가 있다. 세례자 요한조차 예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마음 속에 아주 부족함이 없는 듯하다. 군중의 지지(支持)를 갈망하지 않으며, 사람들의 의견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용감해도 도무지 자만이 없다.

161:2.9 (1786.4) 8. 무슨 일을 행하든 그는 늘 계시는 동료인 하나님에 대하여 항상 이야기한다. 좋은 일 하는 데 몰두하며, 이는 하나님이 안에 계신 듯하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땅에서 그의 사명에 대하여 대단히 놀라운 주장을 하며, 그런 주장은 그가 신이 아니라면 터무니없다. 그는 한때 선언했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었노라.” 분명히 신성을 주장해 왔고 하나님과 동업자라고 공언한다. 하늘 아버지와 가까운 관계를 가졌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느라고 가능한 언어를 거의 다 동원한다. 감히 자기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누구라도 그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한다. 아이처럼 자연스럽게 이 엄청난 일을 모두 말하고 행한다. 그와 우리의 관계를 언급하는 바로 그런 식으로 그와 아버지의 관계를 비쳐 말한다.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아주 확신하는 듯하고, 그런 사무적인 방법으로 이 관계들에 대하여 말한다.

161:2.10 (1786.5) 9. 기도(祈禱)하는 생활을 보면 그는 아버지와 바로 교통하는 듯하다. 우리는 그가 드리는 기도를 조금 밖에 듣지 못했지만 몇 번 안 되는 이 기도는, 말하자면 그가 얼굴을 마주하고 하나님과 이야기함을 가리킬 것이다. 지난날 뿐 아니라 앞날을 아는 듯하다. 그가 인간을 넘는 무엇이 아니라면, 그는 단지 이 모든 것일 수 없고 이 모든 놀라운 일을 할 수 없다. 우리는 그가 사람임을 알고 그렇다고 확신하지만, 또한 신이라고 거의 똑같이 확신한다. 우리는 그가 신이라고 믿는다. 그가 사람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신한다.

161:2.11 (1787.1) 로단과 회의를 마치고 나서, 나다니엘과 토마스는 동료 사도들과 함께 하려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서둘러 갔고 그 주 금요일에 도착했다. 이 세 신자 모두의 생애에서 이것은 큰 체험이었다. 다른 사도들은 나다니엘과 토마스가 겪은 이 체험을 돌이켜보고 많은 것을 배웠다.

161:2.12 (1787.2) 로단은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갔고, 거기서 오랫동안 메간타 학교에서 그의 철학을 가르쳤다. 그는 후일의 하늘나라 업무에서 막강한 사람이 되었다. 땅에서 마지막 날까지 충실한 신자였고 박해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리스에서 목숨을 바쳤다.

3. 예수의 인간 지성과 신 지성

161:3.1 (1787.3) 신(神)이라는 의식은 예수가 세례 받을 때까지 머리 속에서 차츰차츰 자랐다. 자신의 신다운 성품, 인간이 되기 전의 존재, 우주 특권을 충분히 자의식하게 된 뒤에, 자신의 신성을 인간으로서 의식하는 것을 그는 여러 가지로 제한하는 능력을 가졌던 듯하다. 우리에게는, 그가 세례받은 때부터 십자가에 처형되기까지 오직 인간 지성에만 의존하든지 아니면 인간 및 신의 지성, 이 두 가지 지식을 이용하든지, 전적으로 예수의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때로 그는 오직 인간 지능에 거하는 정보만 이용하는 듯했다. 다른 경우에는 신의 의식에 있는 초인간적 내용을 이용해야만 얻을 수 있는 그러한 충만한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그가 행동하는 듯했다.

161:3.2 (1787.4) 그가 신이라는 의식을 뜻대로 스스로 제한할 수 있다는 이론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그의 독특한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여러 사건에 대한 선견을 동료들에게 주지 않는 일이 흔했고, 동료들의 생각과 계획의 성질을 그가 알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인식한다. 우리가 이해하건대, 예수가 그들의 생각을 헤아리고 계획을 꿰뚫어볼 수 있다는 것을 추종자들이 너무 잘 알기를 그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사도와 제자들이 머리 속에 지녔던, 인간의 개념을 너무 멀리 초월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161:3.3 (1787.5) 신으로서 자기의 의식(意識)을 스스로 제한하는 습관, 그리고 미리 알고 생각을 꿰뚫어보는 것을 인간 동료들로부터 감추는 기술, 이 둘의 차이를 우리는 도무지 구별하지 못한다. 그가 이 두 가지 기술을 쓴다고 확신하지만, 우리는 어느 주어진 경우에 그가 어느 방법을 이용했는가 반드시 잘라서 말할 수 없다. 인간 의식에 들어 있는 내용만으로 그가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관찰했으며, 우주의 하늘 집단의 지도자들과 그가 회의하는 것을 보고, 의심할 여지 없이 신의 지성이 활동함을 헤아리곤 했다. 그리고 나서 거의 수없이 많은 경우에, 인간 및 신의 지성이 겉보기에 완전히 통일된 가운데 활성화되어, 이러한 사람과 하나님의 통합된 성격이 일하는 것을 우리는 구경했다. 이것이 그러한 현상에 대하여 우리가 가진 지식의 한계이다. 우리는 정말로 이 신비에 관하여 완전한 진실을 실제로 알지 못한다.

제 162 편 천막 축제에서

유란시아서

제 162 편

천막 축제에서

162:0.1 (1788.1) 열 사도와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났을 때, 예수는 사마리아를 거쳐서 가기로 계획했고 이것이 지름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호수의 동쪽 물가를 따라 내려갔고, 스키토폴리스를 거쳐서 사마리아의 경계지에 들어섰다. 밤이 가까워 오자, 예수는 일행을 위해서 투숙할 곳을 잡으려고 길보아산 동쪽 비탈에 있는 마을로 빌립과 마태를 보냈다. 어쩌다가 이 마을 사람들은 유대인에게 크게 반감(反感)을 가지고 있었고, 보통 사마리아인보다 더욱 그러했는데, 아주 많은 사람이 천막 축제에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특히 이 시기에 이런 감정이 악화되었다. 이 사람들은 예수에 대하여 거의 아무것도 몰랐고, 그와 동료들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예수에게 묵을 장소를 거절하였다. 마태와 빌립이 분개하는 태도를 보이고 이 사마리아인들에게 그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를 접대하기를 거부하고 있다고 일러주자, 머리끝까지 화가 난 마을 사람들은 막대기와 돌을 가지고 작은 마을 바깥으로 그들을 쫓아냈다.

162:0.2 (1788.2) 빌립과 마태가 동료들에게 돌아와서 어떻게 그들이 마을 바깥으로 쫓겨났는가 보고한 뒤에,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 앞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주여,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게으르고 뉘우치지 않는 이 사마리아인들을 삼키라고 우리가 명하는 것을 허락하시기를 비나이다.” 그러나 이 앙갚음하려는 말을 듣자, 예수는 세베대의 아들들과 맞서서 따끔하게 꾸짖었다: “너희가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너희는 모르는도다. 복수심은 하늘나라를 바라본다는 느낌을 주지 않느니라. 다투기보다 길을 떠나 요단강 여울목 옆에 있는 작은 마을까지 가자.” 종파적 편견 때문에, 이처럼 이 사마리아인들은 한 우주의 창조 아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놓쳐버렸다.

162:0.3 (1788.3) 예수와 열 사람은 요단강 여울목 가까이 있는 마을에서 그날 밤을 지내려고 멈추었다. 이튿날 일찍 그들은 강을 건넜고, 요단강 동쪽의 대로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계속 가서, 수요일 저녁 늦게 베다니에 다다랐다. 토마스와 나다니엘은 금요일에 도착했고, 로단과 회의하느라고 늦어졌다.

162:0.4 (1788.4) 다음 달 (10월) 끝까지 약 4주 반 동안, 예수와 열두 사도는 예루살렘 근처에 남아 있었다. 예수 자신은 몇 번만 그 도시로 들어갔고, 천막 축제의 며칠 동안에 이런 짧은 방문이 있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아브너와 그 동료들과 함께 10월의 상당한 부분을 지냈다.

1. 예루살렘 방문의 위험

162:1.1 (1788.5) 갈릴리에서 달아나기 오래 전에, 추종자들은 예수의 말씀이 유대인의 문화와 학문의 중심에서 전파되었다는 평판을 가지도록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고 예수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가르치려고 그가 예루살렘으로 실제로 오자 그들은 예수가 목숨을 잃을까 두려웠다. 재판을 하려고 산헤드린이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했다는 것을 알고, 주가 사형당해야 한다는 선언을 최근에 되풀이한 것을 상기하면서, 예수가 천막 축제에 참석하겠다고 갑자기 결정한 것에 사도들은 글자 그대로 깜짝 놀랐다.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그들이 이전에 부탁할 때마다, 그는 전에 이렇게 대답했다, “때가 아직 오지 않았도다.” 이제, 두려워서 그들이 반대하는 데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하지만 때가 왔느니라.”

162:1.2 (1789.1) 천막 축제 동안에 예수는 몇 번이나 예루살렘으로 대담하게 들어가서 성전에서 대중 앞에서 가르쳤다. 사도들이 말리려고 노력했는데도 이렇게 했다. 비록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말씀을 선포하라고 전에 오랫동안 그를 재촉했어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죽게 만들려고 단단히 결심한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이때 예수가 도시에 들어가는 것을 보기가 두려웠다.

162:1.3 (1789.2) 예수가 예루살렘에 대담하게 나타난 것은 어느 때보다 더욱 추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많은 제자가, 아니 가룟 유다조차, 유대인 지도자들과 헤롯 안티파스가 두려워서 예수가 페니키아로 황급히 달아났다고 전에 감히 생각했다. 그들은 주가 움직이는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추종자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그가 천막 축제 동안에 예루살렘에 계신 것은, 그가 겁을 먹었다든가 비겁하다든가 하는 온갖 수군거리는 소리를 그치게 하기에 언제까지나 충분했다.

162:1.4 (1789.3) 천막 축제 동안에, 로마 제국의 모든 지방에서 온 수천의 신자들은 예수를 보고 그의 가르침을 들었으며, 그들의 고향 지역에서 하늘나라가 진전되는 것에 관하여 그와 회담하려고 많은 사람이 베다니로 여행하기도 하였다.

162:1.5 (1789.4) 축제가 있는 여러 날 동안 내내, 성전의 안마당에서 예수가 대중 앞에서 전도할 수 있은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이 중에 주요한 것은 자체의 계급 안에서 은밀하게 의견이 서로 달라진 결과로, 산헤드린의 관리들이 겁을 먹은 것이다. 산헤드린의 많은 회원이 몰래 예수를 믿거나, 아니면 그렇게 큰 집단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축제 동안에 예수가 체포되는 것을 확실히 싫어한 것이 사실이었고, 그 무리 가운데 많은 사람은 예수를 믿거나 적어도 그가 후원하는 영적 운동에 호감을 가졌다.

162:1.6 (1789.5) 아브너와 그 동료들이 유대 지방에 두루 노력을 펼친 것은 또한 하늘나라에 대한 호감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그래서 예수의 적들은 감히 크게 반대를 부르짖지 못했다. 이것이 어째서 예수가 대중 앞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살아서 돌아갈 수 있었는가 하는 이유 중에 하나였다. 이보다 한두 달 전에, 그는 분명히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162:1.7 (1789.6) 그러나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대중 앞에 나타나는 대담한 용기를 보인 것은 적들을 두려움에 질리게 만들었다. 그들은 그러한 대담한 도전에 맞설 준비가 되지 않았다. 여러 번 이 달에 산헤드린이 주를 체포하려는 미약한 시도가 있었지만, 이런 노력으로부터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적들은 예수가 뜻하지 않게 예루살렘에서 대중 앞에 나타난 것 때문에 깜짝 놀라서, 예수가 로마 당국의 보호를 약속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추측했다. 빌립이 (헤롯 안티파스의 형제) 거의 예수의 추종자임을 알았으므로, 빌립이 예수를 위하여 적들로부터 그가 보호받는다는 약속을 얻어냈을 것이라고 산헤드린 회원들은 추측했다. 예수가 갑자기 대담하게 예루살렘에 나타난 것은 로마인 관리들과 비밀 협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잘못 믿은 것을 그들이 깨닫기 전에, 예수는 그들의 관할 구역을 떠나버렸다.

162:1.8 (1789.7) 그들이 마가단을 떠났을 때, 열두 사도만 예수가 천막 축제에 참석할 생각이 있는 것을 알았다. 다른 추종자들은 주가 성전 안마당에 나타나서 대중 앞에서 비로소 가르칠 때 크게 놀랐고, 유대인 당국은 그가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이루 말할 수 없이 놀랐다.

162:1.9 (1790.1) 제자들은 예수가 축제에 참석하기를 기대하지 않았어도, 예수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멀리서 온 순례자의 대다수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볼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망하지 않았는데, 몇 차례 그는 솔로몬 회랑에서, 그리고 성전 마당의 다른 곳에서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은 유대 민족과 온 세계에 예수의 신성을 공식(公式)으로, 즉 정식으로 선언한 것이다.

162:1.10 (1790.2) 주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 군중은 의견이 갈라졌다. 더러는 그가 좋은 사람이라, 더러는 선지자이라, 더러는 그가 참으로 메시아라고 했다. 더러는 그가 짓궂은 장난꾼이라, 이상한 교리로 사람들이 길을 잃게 만든다고 말했다. 적들은 그를 편드는 신자들이 두려워서 드러내놓고 예수를 비난하기를 망설였다. 한편 친구들은 산헤드린이 그를 사형(死刑)에 처하려고 결심한 것을 알고서, 유대인 지도자들이 무서워서, 드러내놓고 예수를 인정하기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예수가 랍비 학교에서 교육받은 적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적들도 그의 가르침에 감탄하였다.

162:1.11 (1790.3)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갈 때마다 사도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땅에서 이룰 그의 사명의 성질에 관하여 예수가 갈수록 더 대담하게 선언하는 것을 들으면서, 하루하루 더욱 두려워졌다. 친구들 사이에서 전도할 때조차, 그들은 예수의 그런 적극적 선언과 놀라운 주장을 듣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2. 성전에서 처음 하신 말씀

162:2.1 (1790.4) 예수가 성전에서 가르친 첫날 오후에, 상당히 큰 일행이 새 복음에서 얻는 자유, 그리고 좋은 소식을 믿는 사람들의 기쁨을 묘사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앉아 있었다. 그때 말씀을 듣던 호기심 있는 한 사람이 예수의 말을 막고 물었다: “선생이여, 당신은 랍비의 학문을 배우지 않았다고 제가 들었사온데, 어찌하여 당신은 성서를 인용하고 아주 거침없이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나이까?” 예수가 대답했다: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는 진리를 아무도 나에게 가르치지 않았느니라. 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 누구라도 정말로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바라면, 내 가르침에 대하여, 이 가르침이 하나님의 것인지, 아니면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말하는지, 분명히 알리라. 자기를 위하여 말하는 자는 자기의 영광을 구하거니와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선언할 때, 나는 이렇게 함으로 나를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새 빛으로 들어가려 애쓰기 전에, 오히려 너희가 이미 가진 빛을 따라야 하지 않느냐? 모세는 너희에게 율법을 주었으나 그래도 너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요구대로 정직하게 행하고자 하느냐? 이 율법에 ‘너희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하고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느니라. 이 명령이 있는데도, 너희 가운데 더러는 사람의 아들을 죽이려 하느니라.”

162:2.2 (1790.5) 이 말을 듣자, 군중은 자기들끼리 말다툼에 빠졌다. 더러는 그가 미쳤다, 더러는 그가 악마에 들렸다고 말했다. 더러는 이 사람이 정말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오랫동안 죽이려고 했던 갈릴리 선지자라 했다. 더러는 종교 당국이 그를 다치기를 두려워한다 했고, 더러는 그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손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지간히 논쟁이 있은 뒤에,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앞으로 걸어나와서 예수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권력자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나이까?” 그는 대답했다: “하늘나라의 좋은 소식에 대하여 내가 가르치는 것을 분개하는 까닭에 권력자들이 나를 죽이고자 하느니라. 이 복음은 이 선생들이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지지하려고 각오한 종교, 예식을 중시하는 형식적 종교의 무거운 전통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하는 복음이라. 저희는 안식일에 율법에 따라서 할례를 행하나,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던 어떤 사람을 한때 내가 안식일에 해방했다 하여, 나를 죽이고자 하느니라. 저희는 나를 감시하려고 안식일에 내 뒤를 따르나, 또 다른 기회에, 몹시 앓는 사람을 내가 안식일에 온전히 낫게 하였으므로 나를 죽이고자 하느니라. 너희가 내 가르침을 정직하게 믿고 감히 받아들이면, 저희의 전통적 종교 체계가 뒤집어지고 영구히 붕괴될 것을 잘 아는 까닭에 저희가 나를 죽이고자 하느니라. 하나님 나라의 새롭고 더욱 영화로운 이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저희가 집요하게 물리치므로, 일생을 바쳐 얻은 것에 대한 권한을 저희가 이처럼 빼앗기리라. 그리고 이제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호소하노니,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에 따라서 판단하지 말고, 오히려 이 가르침의 참된 정신으로 판단하라. 올바르게 판단하라.”

162:2.3 (1791.1) 다음에 다른 사람이 물었다: “옳소이다, 선생이여, 우리는 메시아를 찾고 있으나, 그가 오실 때 그 모습이 신비 속에 가려 있을 줄 아나이다. 우리는 당신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아나이다. 당신은 처음부터 당신의 형제들 사이에 있었나이다. 구원자는 다윗 왕국의 보좌를 회복하려고 권능을 입고 오시리이다. 당신은 정말로 메시아라고 주장하나이까?” 그리고 예수는 대답했다: “너는 나를 알고 내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안다고 주장하는구나. 너의 주장이 참이기를 내가 원하노니, 그렇다면 정말로 이를 알고서 네가 풍부한 생명을 찾을 것임이라. 그러나 내가 선언하노니, 나는 나를 위하여 너희에게 오지 아니하였노라. 아버지가 나를 보내셨고,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고 충실하시니라. 내 말 듣기를 거부함으로 너희는 나를 보내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도다.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자 하면, 너희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게 될지니라. 나는 아버지를 아노니, 아버지를 너희에게 선언하고 드러내려고 내가 아버지로부터 왔음이라.”

162:2.4 (1791.2) 서기관의 관리들이 예수를 체포하고 싶어 했지만 군중을 두려워했으니, 많은 사람이 그를 믿었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가 한 일은 모든 유대인에게 잘 알려졌고,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면서 자기들끼리 말했다: “비록 이 선생이 갈릴리에서 왔어도, 비록 우리가 메시아에게 기대하는 것을 그가 모두 채우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구원자가 올 때 이 나사렛 예수가 이미 행한 것보다 더 놀라운 무슨 일을 정말로 할 것인가 궁금하구나.”

162:2.5 (1791.3)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듣자, 바리새인과 그 관리들은 자기의 지도자들과 함께 의논했고, 성전 마당에서 예수가 이렇게 대중 앞에 나타나는 것을 중지하려고 당장에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대체로, 로마 당국이 예수에게 면제권을 약속했다고 믿고서, 예수와 충돌하기를 피하고 싶어 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이때 예루살렘으로 대담하게 온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산헤드린의 관리들은 이 소문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다. 로마의 통치자들이 몰래, 유대 나라의 최고 통치 기구에 알리지 않고 그런 일을 하지 않으리라고 추리했다.

162:2.6 (1791.4) 따라서, 산헤드린의 정식 관리 이버가 두 조수와 함께, 예수를 잡으려고 파송되었다. 이버가 예수를 향하여 다가가자, 주는 말했다: “두려워 말고 나에게 가까이 오라. 내 가르침을 들으면서 가까이 오라. 나를 잡으라고 너희가 파송된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나 때가 오기까지 아무 일도 사람의 아들에게 닥칠 수 없음을 너희가 알아야 하느니라. 너희는 나를 적대하여 여기에 서 있지 않느니라. 단지 주인의 명령을 행하려고 너희가 오는 것이요, 이 유대인 권력자들조차 남몰래 나를 죽이려고 할 때, 저희는 하나님 섬기는 일을 하고 있다고 진실로 생각하느니라.

162:2.7 (1792.1) “나는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않노라. 아버지는 너희를 사랑하고, 따라서 편견의 사슬과 어두운 전통에서 너희가 벗어나기를 내가 몹시 바라노라. 나는 너희에게 생명의 자유와 구원의 기쁨을 내미노라. 새 생명의 길, 곧 악에서 구원하고 죄의 사슬을 깨버릴 것을 선포하노라. 너희가 생명을 가지고, 영원히 가지도록 하려고 내가 왔노라. 너희는 나를 없애고 또한 너희를 불안하게 만드는 내 가르침을 없애려고 애쓰느니라. 내가 잠시 동안만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을 너희가 깨달을 수만 있다면! 조금만 있으면, 나를 이 세상으로 보내신 이에게로 내가 가노라. 그리고 나서 너희 중 여럿이 나를 부지런히 찾겠으나 너희는 내 모습을 찾지 못하리니, 내가 가고자 하는 곳에 너희가 올 수 없음이라. 그러나 나를 찾고자 참으로 애쓰는 자는 모두 내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인도하는 생명을 언젠가 얻으리라.”

162:2.8 (1792.2) 비웃는 몇 사람이 자기들끼리 말했다: “우리가 찾지 못하도록 이 사람이 가면 어디로 가겠느냐? 저가 그리스인 가운데 살려고 가겠느냐? 저가 스스로 죽겠느냐? 곧 저가 우리를 떠나고 저가 가는 곳으로 우리가 갈 수 없다고 선언하니, 도대체 무슨 소리이냐?”

162:2.9 (1792.3) 이버와 조수들은 예수를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 그를 잡지 않고 그들이 만나는 장소로 돌아갔다. 그래서 주사제와 바리새인들이 이버와 그 조수들이 예수를 잡아오지 않았다고 하여 힐책하자, 이버는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를 믿기 때문에, 우리는 군중 한가운데서 그를 체포하기가 두려웠나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 사람처럼 말하는 사람을 한 번도 구경하지 못했나이다. 이 선생에 대하여 특별한 무엇이 있나이다. 여러분은 모두 그의 말을 들으러 가보는 것이 좋으리이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으뜸 권력자들은 놀랐고, 조롱하며 이버에게 말했다: “너도 미혹되었느냐? 너는 이 사기꾼을 믿으려 하느냐? 우리 학식 있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라도, 아니면 권력자들 가운데 누구라도 그를 믿었다는 말을 네가 들은 적이 있느냐?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 가운데 누구라도 그의 교묘한 가르침에 속았느냐? 율법도 선지자도 모르는 이 무지(無知)한 군중의 행동에 네가 영향을 받다니 어인 일이냐? 그런 교육받지 않은 사람들은 저주받은 줄 네가 모르느냐?” 그리고 나서 이버가 대답했다: “그렇다 해도, 내 주인들이여, 하지만 이 사람은 군중에게 자비와 희망에 넘친 말씀을 하나이다. 그는 풀이 죽은 자를 격려하며, 그의 말씀은 우리 혼에게도 위로가 되나이다. 그가 비록 성서의 메시아가 아닐지라도 이 가르침에 무슨 잘못이 있을 수 있나이까? 그리고 그럴 때에도 우리의 율법은 공평(公平)을 요구하지 않나이까? 우리는 사람의 말을 듣기도 전에 정죄하나이까?” 산헤드린의 우두머리는 이버에게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그에게 대들어 말했다: “너는 미쳤느냐? 너도 혹시 갈릴리 출신이냐? 성서를 훑어보라, 그러면 갈릴리에서 메시아는커녕, 선지자가 하나도 나오지 않음을 네가 발견하리라.”

162:2.10 (1792.4) 산헤드린은 혼란 속에 해산되었고, 예수는 그날 밤을 지내려고 베다니로 물러갔다.

3. 간통 중에 잡힌 여자

162:3.1 (1792.5) 이번 예루살렘 방문 중에, 예수는 평판이 나쁜 어떤 여자를 다루었는데, 그 여자를 고발하는 사람들과 예수의 적들이 그 여자를 앞으로 데리고 왔다. 이 사건에 대한 너희의 왜곡된 기록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자를 예수 앞으로 끌고 왔으며, 예수가 그들을 어떻게 다루어서 이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 자체가 부도덕한 죄가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지적한다고 암시할 것이다.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전통에 충성함으로 영적으로 눈이 멀고 지적 편견을 가졌지만, 그 시대와 세대에 가장 철저히 도덕적인 사람들로 간주되어야 함을 예수는 잘 알았다.

162:3.2 (1793.1)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축제의 셋째 날 아침 일찍, 성전에 가까이 가자 예수는 산헤드린이 고용한 관리들의 무리를 만났는데, 그들은 한 여자를 끌고 오고 있었다. 그들이 가까이 오자, 그 대변인이 말했다: “주여, 이 여자가 간통하다가―바로 그 현장에서―잡혔나이다. 자, 모세의 율법은 우리가 그런 여자를 돌로 쳐죽여야 한다고 명하나이다. 당신은 이 여자를 어찌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나이까?”

162:3.3 (1793.2) 자백한 위법자를 돌로 쳐죽여야 한다고 요구하는 모세의 율법을 예수가 지지한다면, 그가 로마 당국과 시비에 말려들게 만들려는 것이 예수의 적들의 계획이었다. 로마 당국은 유대인이 로마 법정의 승인 없이 사람을 사형(死刑)에 처하는 권한을 허락하지 않았다. 예수가 그 여자를 돌로 치지 말라 하면, 자신을 모세와 유대인의 율법 위에 올려놓는다고 산헤드린 법정 앞에서 예수를 고발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잠자코 있으면, 그들은 예수가 비겁하다고 비난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는 그 상황에 잘 대처하여, 그 계략 모두가 그 자체의 지독한 부도덕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

162:3.4 (1793.3) 한때는 참하게 생겼던 이 여인은 나사렛의 열등한 시민, 예수가 소년이었던 시절 내내, 예수를 성가시게 굴었던 사람의 아내였다. 이 사람은 이 여자와 결혼하고 나서, 이 여자에게 몸을 팔아서 생계를 이으라고 아주 창피스럽게 강요했다. 아내가 재정적 이득을 보려고 이렇게 육체의 매력을 팔 수 있을까 하여 그는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축제에 올라왔다. 이렇게 자기 아내를 상업화된 악행에 팔려고 그는 유대인 권력자들이 고용한 사람들과 계약을 맺었다. 그래서 예수가 잡힐 경우에 예수로 하여금 자신에게 불리하게 이용될 수 있는 어떤 진술을 하도록 옭아맬 목적으로 그들은 그 여자, 그리고 함께 죄지은 동반자를 끌고 왔다.

162:3.5 (1793.4) 예수는 군중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들 뒤에 서 있는 그 여자의 남편을 보았다. 예수는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 줄 알았고 그가 비열한 거래의 당사자임을 깨달았다. 예수는 먼저 이 타락한 남편이 서 있는 곳 가까이로 돌아서 걸어가 모래 위에 몇 마디를 적었고, 이것은 그가 황급히 자리를 뜨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 여자 앞으로 돌아와 그 여자를 고발하려고 하는 자들이 보라고 땅 위에 다시 글을 썼다. 그 말씀을 읽자, 그들도 하나씩 떠나버렸다. 그리고 주가 모래에 세 번째 썼을 때, 그 여자와 함께 나쁜 일을 하던 자가 떠났고, 그래서 이 글을 쓰고 나서 주가 몸을 일으켰을 때 그는 앞에 혼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예수는 말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는 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돌로 치려고 아무도 남지 아니하였느냐?” 그리고 그 여자는 눈을 들어 대답했다: “주여, 아무도 없나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나는 너에 관하여 알고, 나도 너를 책망하지 않노라. 평안히 네 길을 가라.” 그리고 이 여자, 힐다나는 사악한 남편을 버리고 하늘나라의 제자들 속에 가입하였다.

4. 천막 축제

162:4.1 (1793.5) 스페인으로부터 인도까지, 알려진 모든 세계로부터 온 사람들이 자리에 있는 것은 천막 축제를 예수가 그의 복음 전부를 예루살렘에서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선언하는 이상적인 기회로 만들었다. 이 축제가 있을 때 사람들은 대체로 노천에서, 잎으로 덮은 초막에서 살았다. 이것은 곡식을 거두는 축제였고, 실제로 그렇다시피, 축제가 가을철에 서늘할 때 다가왔기 때문에, 겨울이 끝날 때의 유월절이나 여름이 시작될 때의 오순절보다, 세계의 유대인들이 더 널리 참석했다. 사도들은 말하자면,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주가 땅에서 그의 사명을 대담하게 선언하는 것을 마침내 구경했다.

162:4.2 (1794.1) 이것은 축제 중의 축제였는데, 다른 축제에 드리지 못한 어떤 희생물도 이때 바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는 성전에 드리는 헌물을 받는 기회였다. 이것은 휴가의 즐거움과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엄숙한 예식이 합쳐진 것이었다. 여기에 민족이 즐거워하는 때가 있었고, 이것은 희생물과 레위의 노래, 그리고 사제들의 은빛 트럼펫을 엄숙히 부는 일과 섞였다. 밤에는 성전과 그 순례자 무리의 인상적인 광경이, 성전 안마당 근처에 세워진 수십 횃불의 번뜩이는 빛 뿐 아니라, 여인들의 마당에서 밝게 타오르는 큰 촛불로 눈부시게 비춰졌다. 차갑게 대조가 되어, 축제 기분이 드는 이 경건한 장면을 내려다보는 성, 로마인의 안토니아 성(城)을 제쳐놓고, 온 도시가 명랑하게 꾸며졌다. 그리고 항상 로마의 지배를 상기시키는 이 성을 유대인들이 얼마나 미워했는지!

162:4.3 (1794.2) 황소 70마리를 축제 동안에 잡아바쳤는데 이것은 이교도의 70 국가를 상징했다. 물을 쏟아붓는 예식은 신성한 영이 쏟아 부어지는 것을 상징했다. 이 물 예식은 해 돋을 때 사제와 레위들의 행진 뒤를 따라 있었다. 예배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마당에서 여인의 마당으로 이끄는 계단을 지나서 내려갔고, 한편 사람들이 은빛 트럼펫을 연속으로 불었다. 그리고 나서 충실한 신자들은 아름다운 문을 향하여 줄곧 행진했고, 이 문은 이방인의 마당 쪽으로 열려 있었다. 여기서 그들은 서쪽을 향해서 돌았고, 찬송을 되풀이하고 상징의 물을 향하여 계속 행진했다.

162:4.4 (1794.3) 축제의 마지막 날에, 거의 450명의 사제와 그와 비슷한 수의 레위인이 행사를 주관했다. 해가 뜰 때 순례자들은 도시의 모든 구석으로부터 모였고, 각자 바른손에 도금양ㆍ버드나무ㆍ종려 가지를 한 다발 쥐고, 왼손에는 사람마다 천국의 사과―시트론, 즉 “금지된 열매”―를 쥐었다. 이 순례자들은 이 이른 아침 예식을 위해서 세 무리로 나누어졌다. 한 무리는 아침 희생 예식에 참석하려고 성전에 남았고, 또 한 무리는 희생 제단을 장식하기 위하여 버드나무 가지를 자르려고 마자 가까이까지, 예루살렘 밑으로 행진해서 내려갔으며, 한편 셋째 무리는 물 사제 뒤에 성전으로부터 행진할 행렬을 이루었다. 물 사제는 은빛 트럼펫 소리에 맞추어, 상징의 물을 담을 금 주전자를 지고서 오펠을 통하여 나가서 실로암 가까이 갔는데, 거기에는 샘물 문이 있었다. 금 주전자를 실로암의 샘에서 가득 채운 뒤에, 그 행렬은 성전으로 행진하여 되돌아갔고, 물 문을 거쳐서 들어가 바로 사제들의 마당으로 갔는데, 거기서 물 주전자를 들고 있던 사제는 마시는 헌물을 위하여 포도주를 들고 있는 사제와 합쳤다. 그리고 나서 이 두 사제는, 제단의 기초로 이끄는 은 깔때기들이 있는 곳까지 서둘러 가서 그 속에 주전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쏟아부었다. 포도주와 물을 붓는 이 의식(儀式)의 집행은 모여든 순례자들이 시편 113편부터 118편 끝까지, 레위인들과 번갈아서 노래를 시작하라는 신호였다. 이 여러 구절을 되풀이하는 동안 그들은 가진 다발을 제단에서 흔들곤 했다. 그리고 나서, 그날의 시편(詩篇)을 되풀이하는 것과 관련하여 그날의 희생 예식이 따랐고, 축제 마지막 날의 시편은 82편이고 5절부터 시작되었다.

5. 세상의 빛에 관한 설교

162:5.1 (1794.4) 축제 마지막 날의 전날 저녁에, 무대의 배경이 큰 촛대와 횃불들의 빛으로 밝게 비춰졌을 때, 예수는 모인 군중 한가운데서 일어서서 말했다:

162:5.2 (1795.1)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에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주제넘게 나를 재판에 넘기고 나의 재판관이 되려고 가정하면서, 너희는 내가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이 참일 수 없다고 선언하는도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창조자를 재판할 수 없느니라. 나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더라도 내 증언은 언제까지나 참이니, 내가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내가 아는 까닭이라. 사람의 아들을 죽이고자 하는 너희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 또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오직 육체의 모습으로 판단하고 영의 현실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나는 아무도, 아니 나의 큰 적조차 판단하지 않노라. 그러나 내가 판단하기를 택한다면 나의 판단은 참되고 올바르리니, 나는 혼자가 아니라 내 아버지와 손잡고 판단할 것임이라. 아버지는 나를 세상으로 보냈고 그는 모든 참된 판단의 근원이라. 너희는 믿을 만한 두 사람의 증언은 받아도 좋다고 허락하기도 하는도다―자, 그러면 나는 이 진리를 증언하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도 또한 그렇게 하시니라. 내가 이를 어제 너희에게 일렀을 때, 너희의 어둠 가운데서 ‘어디에 너의 아버지가 계시냐?’하고 너희가 내게 물었도다. 참으로 너희는 나도 내 아버지도 모르나니, 나를 알았다면 너희는 또한 아버지를 알았을 것임이라.

162:5.3 (1795.2) “내가 떠난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나를 찾아내지 못하리니,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올 수 없는 까닭이라, 나는 이미 너희에게 일렀노라. 이 빛을 물리치고자 하는 너희는 밑에서 왔거니와 나는 위에서 왔노라. 어둠 속에 앉아 있기를 더 좋아하는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며,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빛의 아버지의 영원한 빛 속에 사노라. 너희는 모두 내가 누구인지 알 기회를 넉넉히 가졌으나 사람의 아들 신분을 확인하는 또 다른 증거를 너희가 받으리라. 나는 생명의 빛이요, 알고서 또 이해하면서 이 구원의 빛을 물리치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 속에서 죽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너희는 내 말을 받아들일 수 없느니라. 그러나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고 충실하며, 내 아버지는 잘못하는 아이들조차 사랑하시니라. 그리고 내 아버지가 말씀하신 모든 것을 나도 또한 세상에 선포하노라.

162:5.4 (1795.3) “사람의 아들이 들려 올라갈 때, 그때 너희는 모두 내가 그인 것, 그리고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나 오직 아버지가 내게 가르친 대로 행한 것을 너희 모두가 알리라. 나는 이 말씀을 너희와 너희 자손에게 하노라. 나를 보내신 이는 이제도 나와 함께 계시니라. 그는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았으니, 그의 눈에 보기 좋은 것을 내가 언제나 행하는 까닭이라.”

162:5.5 (1795.4) 예수가 이렇게 성전 안마당에서 순례자들을 가르쳤을 때, 많은 사람이 믿었다. 그리고 아무도 감히 그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6. 생명의 물에 대한 강연

162:6.1 (1795.5) 마지막 날, 축제의 중대한 날에, 실로암 못에서 온 행렬이 성전 마당을 통해 지나가는 동안, 사제들이 물과 포도주를 제단 위에 붓고 난 직후에 예수는 순례자들 사이에 서서 말했다: “누구든지 목이 마르면, 내게로 와서 마시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나는 이 세상에 생명의 물을 가져오노라. 나를 믿는 자는 이 물이 대표하는 영으로 가득 채워지리니, ‘그에게서 생명수의 강이 흐르리라’ 성서도 말하였음이라.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일을 마치고 나서, 모든 육체 위에 살아 있는 진리의 영이 부어지리라. 이 영을 받는 자는 결코 영적으로 목마른 줄 모르리라.”

162:6.2 (1795.6) 예수는 이 말씀을 하려고 예배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는 할렐의 찬송이 있은 뒤 즉시 예배자들에게 연설했는데, 할렐은 시편을 화답하여 읽는 것이며 그 뒤에 제단 앞에서 나무 가지들을 흔드는 일이 뒤따른다. 희생물이 준비되는 동안, 바로 여기서 휴식이 있었고, 이때에 순례자들은 그가 영적으로 갈급한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물을 주는 자라고 주가 선언하는 황홀한 목소리를 들었다.

162:6.3 (1796.1) 이 이른 아침 예배의 끝에 예수는 군중을 계속 가르치며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성서에서 읽지 아니하였느냐? ‘보라, 마른 땅에 물이 쏟아지고 바짝 탄 흙 위에 흩어지는 것 같이, 너희 자녀의 자녀에게도 축복을 주기 위하여 너희의 자녀에게 쏟아붓도록 너희에게 거룩한 영을 주리라.’ 예식에 쓰이는 깨진 주전자로부터 부어 사람들의 전통(傳統)으로 너희가 혼에 물을 주려고 하는 마당에, 어찌하여 너희가 영의 봉사를 목마르게 찾겠느냐? 너희가 이 성전 근처에서 행해지는 것을 본 것과 같은 방법으로, 너희의 조상은 믿음의 자녀에게 신의 영이 수여되는 것을 상징하려고 하였느니라. 그리고 너희는 오늘날까지도 이 상징을 지속한 것이 좋았도다. 그러나 이제 아들의 수여를 통해서, 영들의 아버지의 계시가 이 세대에 다가왔고, 이 모든 것에 뒤이어 사람의 자녀에게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 분명히 내리리라.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수여하는 이 영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땅에 있는 하늘나라에서, 그리고 저 건너 아버지의 파라다이스에서, 참된 생명의 물로 인도하는 길에 참 선생이 되리라.”

162:6.4 (1796.2) 예수는 군중과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계속 대답했다. 더러는 그가 선지자라 생각했고, 더러는 그가 메시아라고 믿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갈릴리로부터 왔고, 메시아가 다윗의 보좌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예수가 그리스도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이들은 감히 예수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7. 영적 자유에 대한 강연

162:7.1 (1796.3) 축제의 마지막 날 오후에, 예수에게 예루살렘에서 달아나라고 설득하려는 사도들의 노력이 실패한 뒤에, 예수는 다시 성전으로 가르치려고 갔다. 큰 무리의 신자들이 솔로몬 회랑에 모인 것을 보고서, 그들에게 말했다:

162:7.2 (1796.4) “내 말이 너희 속에 거하고 너희가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할 생각이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내 제자이라.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되겠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너희가 나에게 어찌 대답할까 내가 아노라: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우리는 아무에게도 매여 있지 않노라.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자유롭게 되겠느냐? 그렇다 하여도, 나는 겉보기에 다른 사람의 통치에 지배됨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혼이 해방됨을 말하노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짓는 자마다 죄에 노예가 된 종이라. 너희는 종이 언제까지나 주인의 집에서 머무르지 않을 것 같음을 아느니라. 또한 아들은 제 아버지의 집에 남아 있는 것을 아느니라.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해방하고 너희를 아들로 삼으면, 너희가 정말로 자유로울지니라.

162:7.3 (1796.5) “너희가 아브라함의 씨인 것을 내가 아노라, 그래도 너희 지도자들이 저희의 마음 속에서 변화시키는 내 말에 영향을 받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저희가 나를 죽이려 하느니라. 저희의 혼은 편견(偏見)으로 인하여 닫혀 있고, 복수할 자만심으로 눈이 멀었도다. 나는 영원한 아버지가 내게 보여주는 진리를 너희에게 선언하거늘, 이 현혹된 선생들은 오직 현세의 조상한테서 배운 것만 행하려고 하느니라. 아브라함이 너희 조상이라고 대답할 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아브라함의 일을 하고자 하리라. 너희 가운데 더러는 내 가르침을 믿으나 더러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른 까닭에 나를 죽이려고 하는도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진리를 그렇게 대접하지 않았느니라. 너희 가운데 더러는 악마의 일을 하려고 굳게 마음먹은 것을 내가 깨닫노라. 하나님이 너희의 아버지라면 너희는 나를 알고 내가 드러내는 진리를 사랑하리라. 너희는 내가 아버지로부터 왔고, 하나님이 나를 보냈으며, 내가 이 일을 혼자서만 하고 있지 않음을 깨닫지 못하겠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너희가 악의 자식이 되기로 작정한 까닭이냐? 너희가 어둠의 자식이라면, 도저히 내가 드러내는 진리의 빛 가운데서 걷지 아니하리라. 악의 자식들은 저희 조상의 길을 따를 뿐이니, 그는 속이는 자였고 자신 안에 아무 진리가 없게 되었으매, 진리를 대표하지 않았더라. 그러나 진리를 말하고 실천하는 사람의 아들이 이제 오거늘, 너희 가운데 많은 자가 믿으려 하지 않는도다.

162:7.4 (1797.1) “너희 가운데 누가 나를 죄 있다 하느냐? 그래서 아버지가 내게 보여준 진리를 내가 선포하고 실천하면, 어찌하여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느냐?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듣느니라. 이 때문에 너희 중 많은 사람이 내 말을 듣지 않으니,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음이라. 너희 선생들은 악마 왕의 힘을 입어 내가 일을 한다고 주제넘게 말하기까지 하였도다. 가까이 있는 한 사람이 내가 악마를 가졌다, 내가 악마의 자식이라 금방 말하였도다. 그러나 너희 중에 자신의 혼을 정직하게 대하는 자는 모두, 내가 악마가 아님을 잘 아느니라. 너희가 나를 모욕하려 하는 동안에도 나는 아버지께 명예를 돌림을 너희가 아느니라. 나는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오로지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노라. 그리고 나는 너희를 심판하지 않으니, 나 대신에 심판하는 이가 계심이라.

162:7.5 (1797.2) “진실로 진실로, 복음을 믿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이 진리의 말씀을 마음 속에 살려두면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이제 바로 내 곁에 서기관이, 아브라함이 죽었고 선지자들도 그런 줄 알고서, 이 말씀이 내 안에 악마가 있음을 증명한다 말하는구나. 그가 묻되, ‘너는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보다 훨씬 더 위대해서, 네가 여기 서서, 네 말을 지키는 자는 누구나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감히 말하느냐? 신성을 모독하는 그런 말을 네가 감히 배앝으니 너는 누구라 주장하느냐?’ 모든 그런 말에 대답하노니, 내가 자신을 영화롭게 하면, 나의 영화가 헛일이라. 그러나 나를 영화롭게 하실 이는 아버지이라, 아니 너희가 하나님이라 부르는 바로 그 아버지이라. 그러나 이 너희 하나님인 내 아버지를 너희는 알지 못하였고 너희를 한데 모으려고, 어떻게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가 보여주려고 내가 왔노라. 비록 너희가 아버지를 알지 못해도, 나는 참으로 아노라. 아브라함조차 내 시절이 올 것을 보고 기뻐하였고, 믿음으로 이를 보고 즐거워하였더라.”

162:7.6 (1797.3) 이때가 되어 근처에 모여든 믿지 않는 유대인과 산헤드린 관리들이 이 말을 듣자, 소동을 일으키며 소리를 질렀다: “너는 오십이 되지 않았는데, 그래도 아브라함을 만나보았다고 말하는구나. 너는 악마의 자식이라!” 예수는 강론을 계속할 수 없었다. 떠나면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노라.” 믿지 않는 많은 사람이 그를 치려고 돌을 찾아 달려 나갔다. 산헤드린의 관리들이 그를 체포하려 했지만, 주는 재빨리 성전 복도를 통해서 빠져 나가서, 베다니 가까이에 비밀 회합 장소로 피했는데, 거기에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8. 마르다와 마리아와 가진 담화

162:8.1 (1797.4) 예수는 나사로와 누이들과 함께 어느 친구의 집에서 투숙하도록 주선이 되어 있었고, 한편 사도들은 작은 무리를 지어 여기저기 흩어졌다. 유대 당국이 다시 예수를 잡으려는 계획을 대담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경계 조치가 취해졌다.

162:8.2 (1797.5) 예수가 어쩌다가 찾아올 때마다, 몇 년 동안 이 세 사람은 만사를 제쳐놓고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것이 관례였다. 부모를 잃고 나서, 마르다는 집안 살림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이 기회에, 나사로와 마리아가 예수 밑에서 신선한 가르침에 흠뻑 빠져 있는 동안에, 마르다는 저녁 식사를 대접하려고 준비했다. 마르다는 수많은 쓸데없는 일에 필요 없이 마음을 빼앗겼고, 많은 하찮은 걱정거리에 싸여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이것이 그 여자의 성향이었다.

162:8.3 (1798.1) 마르다는 자기가 할일이라고 생각한 이 모든 일을 바삐 처리하는 동안에 마리아가 아무 일도 도와주지 않아서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에게 가서 말씀드렸다: “주여, 내 동생이 접대하는 일을 나 혼자 모두 하라고 둔 것을 당신은 살피지 않으시나이까? 와서 나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명하시지 않겠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어찌하여 언제나 그리 많은 일을 걱정하고, 그리 많은 하찮은 일에 마음을 쓰느냐? 오직 한 가지가 정말로 가치 있고, 마리아가 이미 좋고 필요한 이 부분을 택하였으니, 내가 이를 빼앗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대로 살기를, 둘이 협조하여 섬기고 한 목소리로 너희 혼을 새롭게 하는 것을 너희 둘이 언제 배우려느냐? 모든 것에 때가 있는 것―하늘 나라의 중요한 일 앞에, 인생의 사소한 일은 양보해야 하는 것―을 너는 깨달을 수 없느냐?”

9. 베들레헴에서 아브너와

162:9.1 (1798.2) 천막 축제가 있고 나서 다음 주간 내내, 신자 수십 명이 베다니에 모여서 열두 사도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예수가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산헤드린은 이러한 모임을 방해하려고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기간 내내, 아브너와 그 동료들과 함께 베들레헴에서 일하고 있었다. 축제가 끝난 다음 날, 예수는 베다니를 향하여 떠났고, 이번의 예루살렘 방문 동안에 다시 성전에서 가르치지 않았다.

162:9.2 (1798.3) 이때 아브너는 베들레헴에서 본부를 두고 있었고, 그 중심으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 남부에 있는 여러 도시에,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도 많은 일꾼이 전에 파송되었다. 그가 도착하고 며칠 안에, 예수와 아브너는 두 사도 집단의 일을 통합하기 위하여 준비를 마쳤다.

162:9.3 (1798.4) 천막 축제를 방문한 기간 내내, 예수는 베다니와 베들레헴에 시간을 거의 똑같이 나누었다. 베다니에서 상당한 시간을 그의 사도들과 함께 보냈고, 베들레헴에서 아브너, 그리고 요한의 다른 옛 사도들을 많이 가르쳤다. 그리고 이 친밀한 접촉이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도록 이끌었다. 세례자 요한의 이 옛 사도들은 베들레헴에서 그가 사사롭게 가르칠 때 주의 공감하는 마음을 느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대중을 가르치면서 주가 용기를 보인 것에 영향을 받았다. 이 영향은 마침내 그리고 충분히, 아브너의 동료들 하나하나가 하늘나라, 그리고 그러한 걸음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다.

162:9.4 (1798.5) 베들레헴을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에, 주는 그들 모두가 그와 연합하여 노력하는 데 함께 하도록 주선했고, 육체를 입고 땅에서 사는 생애가 끝나기 전에 이러한 노력이 있어야 했다. 아브너와 그 동료들은 마가단 공원에서 가까운 장래에 예수와 열두 사도와 함께 합세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162:9.5 (1798.6) 이 협정에 따라서, 11월초에 아브너와 열한 친구는 예수 및 열두 사도와 운명을 같이 했고, 십자가 처형이 있기 직전까지 하나의 조직으로서 함께 수고했다.

162:9.6 (1798.7) 10월 후반에 예수와 열두 사도는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곳으로부터 물러갔다. 10월 30일 일요일에, 예수와 동료들은 에브라임 시를 떠났는데, 여기서 그는 며칠 동안 은둔하면서 쉬고 있었다. 그리고 요단강 서쪽 큰길로 바로 마가단 공원까지 가서 11월 2일 수요일 오후에 늦게 도착했다.

162:9.7 (1799.1) 사도들은 우방의 땅으로 주가 돌아와서 크게 마음이 놓였다.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예수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더 재촉하지 않았다.

제 163 편 마가단에서 칠십인을 세우다

유란시아서

제 163 편

마가단에서 칠십인을 세우다

163:0.1 (1800.1) 예루살렘에서 예수와 열두 사도가 마가단으로 돌아오고 나서 며칠 뒤에, 아브너와 50명쯤 되는 제자 무리가 베들레헴으로부터 도착했다. 이때 마가단 캠프에는 또한 전도단과 여인단이 있었고, 팔레스타인의 모든 지방으로부터 온, 진실하고 고난을 견딘 다른 제자들이 150명쯤 모여 있었다. 캠프를 방문하고 다시 조직하는 데 며칠을 보낸 뒤에, 예수와 열두 사람은 이 특별 집단의 신자들을 집중 훈련시키는 과정을 시작했다. 잘 훈련받고 경험 있는 이 집단의 제자들로부터 주는 나중에 70명의 선생을 고르고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라고 내보냈다. 이 정규 교육은 11월 4일 금요일에 시작되었고 11월 19일 안식일까지 계속되었다.

163:0.2 (1800.2) 예수는 이 일행에게 아침마다 말씀했다. 베드로는 대중에게 설교하는 법을 가르쳤고, 나다니엘은 가르치는 기술을 가르쳤다. 토마스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가 설명했고, 한편 마태는 그들 집단의 재정을 어떻게 체계화하는가 지도했다. 다른 사도들도 특별한 체험과 타고난 재능에 따라서 이 훈련에 참가하였다.

1. 칠십인을 세움

163:1.1 (1800.3) 마가단 캠프에서 11월 19일 안식일 오후에 예수는 70인을 사자로 세웠고, 아브너는 이 복음 전도자와 선생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 70명의 무리는 아브너, 그리고 요한의 옛 사도 10명, 초기의 전도사들 중에서 51명, 그리고 하늘나라의 봉사에서 이름을 떨친 다른 제자 8명으로 이루어졌다.

163:1.2 (1800.4) 이 안식일 오후에 2시쯤, 소나기가 그친 사이에 다윗과 사자단(使者團)의 대다수가 도착하여 수가 늘어났고, 4백 명이 넘는 신자의 일행이 70인이 임명받는 것을 구경하려고 갈릴리 호숫가에 모였다.

163:1.3 (1800.5) 복음 사자로서 따로 구별하려고 70인의 머리 위에 손을 얹기 전에 예수는 그들에게 말씀했다: “수확은 정말로 풍성하나 일꾼이 적으니라. 그런즉 너희 모두에게 훈계하노니, 추수하실 주(主)가 이 거두는 일에 또 다른 일꾼들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하라. 나는 너희를 하늘나라의 사자로서 구별하려고 하며,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늑대 사이에 양처럼 너희를 보내고자 하노라. 둘씩 길을 가는 동안, 돈주머니나 여분의 옷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 명하노니, 너희가 이 처음 사명에 잠깐 동안만 떠나감이라.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를 건네지 말며, 오직 할 일을 보살피라. 너희가 한 집에 묵으러 갈 때마다, 먼저 말하라: 평화가 이 집에 있을지어다. 평화를 사랑하는 자들이 거기에 살면 너희는 거기에 묵고, 그렇지 않으면 떠날지니라. 이 집을 택하고 나서 네 앞에 차려진 대로 무엇이나 먹고 마시며 그 도시에서 너희가 묵는 동안 거기에 남아 있으라. 그리고 너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아 마땅함이라. 더 좋은 잠자리를 누가 제공한다고 해서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라. 떠나가서 땅에는 평화와 사람들 사이에 선의가 있기를 선포할 때, 너희는 모질고 자신을 속이는 적들과 다투어야 함을 기억하라. 그런즉 너희는 비둘기 같이 순진하면서 한편 뱀 같이 지혜로우라.

163:1.4 (1801.1) “너희가 어디로 가든지 ‘하늘나라가 가까웠도다’하고 전파하고, 정신이나 몸이 아픈 사람은 누구든지 보살피라. 하늘나라의 좋은 것을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어느 도시에서도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면, 저희는 아버지의 나라로 많이 들어감을 발견하리라. 그러나 어느 도시에서도 사람들이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자 하면, 그래도 믿지 않는 그 공동체를 떠나면서 너희의 소식을 선포할지니라. 너희의 가르침을 물리치는 자에게 떠나면서 말하라, ‘너희가 진리를 물리친다 하여도,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느니라.’ 너희의 말을 듣는 자는 내 말을 들으며, 내 말을 듣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의 말을 듣느니라. 너희가 전하는 복음 소식을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물리치느니라.”

163:1.5 (1801.2) 이렇게 70인에게 말씀하고 나서 그들이 둘레에 동그라미를 지어 무릎을 꿇자, 예수는 아브너에서 시작하여 각 사람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163:1.6 (1801.3) 이튿날 아침 일찍, 아브너는 70명의 사자를 갈릴리ㆍ사마리아ㆍ유대의 모든 도시로 보냈다. 이 35쌍은 약 6주 동안 떠나가서 전도하고 가르쳤으며, 모두 12월 30일 금요일에 페레아 지방의 펠라 가까이, 새 캠프로 돌아왔다.

2. 부유한 젊은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

163:2.1 (1801.4) 성직을 받고 70인 중에 한 사람으로 임명받으려고 시도한 50명이 넘는 제자들은, 이 후보자들을 뽑으라고 예수가 임명한 위원회에게 퇴짜를 맞았다. 이 위원회는 안드레와 아브너와 전도단의 임시 우두머리로 구성되었다. 이 3인 위원회가 만장 일치로 찬성하지 않는 모든 경우에, 그들은 후보자를 예수에게 데리고 왔고, 예수는 복음 사자로서 세움받기를 몹시 바란 사람을 하나도 물리치지 않았지만, 열둘이 넘는 사람이 예수와 말씀을 나누고 나서, 더 복음 사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163:2.2 (1801.5) 열심 있는 한 제자가 예수에게 와서 말했다: “주여, 나는 당신의 새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되고 싶지만, 내 아버지가 무척 나이 드셨고 돌아가실 때가 가까웠나이다. 그를 장사(葬事) 지내려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될 수 있나이까?” 이 사람에게 예수는 말했다: “이 사람아, 여우는 굴이 있고 하늘의 새는 보금자리가 있으되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둘 데가 없느니라. 너는 충실한 제자요, 네가 사랑하던 사람들을 보살피러 집으로 돌아가고 제자로 남아 있을 수 있어도 내 복음 사자는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는 나를 따르고 하늘나라를 선포하려고 모든 것을 버렸느니라. 네가 세움받은 선생이 되고자 하면, 네가 좋은 소식을 널리 알리러 나간 동안 다른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묻게 해야 하느니라.” 이 사람은 크게 실망하여 떠나갔다.

163:2.3 (1801.6) 또 다른 제자가 주께 와서 말했다: “나는 세움받은 사자가 되고 싶지만, 내 가족을 위로하러 잠시 동안 집으로 돌아가고 싶나이다.” 예수는 대답했다: “세움받으려거든, 너는 기꺼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느니라. 복음(福音) 사자들은 두 군데 마음을 빼앗길 수 없느니라. 아무도 손에 쟁기를 잡고 나서, 몸을 돌이키면 하늘나라 사자가 될 자격이 없느니라.”

163:2.4 (1801.7) 다음에 안드레는 예수에게 어떤 부유한 젊은이를 데리고 왔는데, 그는 경건한 신자였고 세움받기를 희망하였다. 이 젊은이 마타돌무스는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다. 예수가 가르치는 것을 들었고, 그후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서 하늘나라 복음을 가르침받았다. 예수는 제자 임명의 요건에 관하여 마타돌무스와 이야기했고 그 문제에 관하여 더 자세히 생각해 볼 때까지 결정을 미루라고 요구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예수가 산책하러 가는 동안에, 이 젊은이는 예수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주여, 나는 당신으로부터 영생(永生)을 어떻게 보장하는가 듣고 싶나이다. 어릴 때부터 모든 계명을 지켜 왔음을 아는 까닭에,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 알고 싶나이다.” 이 물음에 대답해서 예수는 말했다: “간통하지 말라, 사람을 죽이지 말라, 훔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이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네가 이 모든 계명을 지키면, 너는 잘 하느니라. 그러나 구원은 믿음에 대한 보상이요, 단지 한 일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너는 이 하늘나라 복음을 믿느냐?” 마타돌무스는 대답했다: “예 주여, 당신과 당신의 사도들이 내게 가르친 것을 모두 믿나이다.” 예수는 말했다. “그러면 너는 정말로 내 제자요, 하늘나라의 아이니라.”

163:2.5 (1802.1) 그리고 나서 그 젊은이는 말했다: “그러나 주여, 나는 당신의 제자가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나이다. 나는 당신의 새 사자들 중에 하나가 되고자 하나이다.” 이 말을 듣자, 예수는 그 젊은이를 큰 사랑으로 내려다보고 말했다: “네가 기꺼이 값을 치르고자 하면, 네가 모자라는 한 가지를 내고자 하면, 내 사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게 하리라.” 마타돌무스는 대답했다: “주여, 내가 당신을 따르도록 허락을 받는다면 무엇이든지 하겠나이다.” 예수는 무릎 꿇은 젊은이의 이마에 입맞추며 말했다: “내 사자가 되고자 하면, 가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라, 그리고 네가 그 돈을 가난한 자와 너희 형제들에게 주었을 때, 와서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너는 하늘나라에서 보물을 받으리라.”

163:2.6 (1802.2) 마타돌무스는 이 말씀을 듣자,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일어서서 슬프게 떠나갔는데 그가 큰 재산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 부유한 젊은 바리새인은 재산이 하나님의 은총의 표시라고 믿도록 교육을 받아 왔다. 예수는 그가 제 몸과 재산을 사랑하는 데 매인 것을 알았다. 주는 반드시 재산으로부터 구원이 아니라, 재산 사랑으로부터 그를 구원하기를 바랐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이 가진 모든 속세의 물건을 버리지 않았지만, 사도들과 70인은 그렇게 했다. 마타돌무스는 70인의 새 사자들 중에 하나가 되기를 바랐고, 이것이 예수가 그에게 속세의 재산을 모두 버리라고 요구한 까닭이었다.

163:2.7 (1802.3) 거의 모든 인간은 아끼는 나쁜 버릇으로 붙들고 있는 무엇이 한 가지 있고,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데 입장료의 일부로 이를 요구한다. 마타돌무스가 재산을 내어놓았더라면, 아마도 70인의 회계로서 관리하라고 바로 그의 손에 도로 넘겨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세워진 뒤에, 그는 주의 명령에 복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70인의 회원 자격을 누리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회계가 되었는데, 육체로 주의 아우인 야고보가 그 교회의 우두머리였다.

163:2.8 (1802.4) 그래서 언제나 이와 같았고 언제까지나 이럴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필사자가 누려도 좋은 선택의 자유에는 어떤 테두리가 있다. 영적 세계의 세력은 사람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는 길을 가라고 버려둔다.

163:2.9 (1802.5) 마타돌무스가 재산을 가지고는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에게, 같이 세움받은 동료가 도저히 될 수 없다는 것을 예수는 내다보았고, 동시에 재산이 없으면 그가 그들 전체에서 궁극의 지도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바로 예수의 형제들처럼, 그는 하늘나라에서 결코 크게 되지 못했다. 주와 더불어 가깝고도 개인적인 바로 그 친교를 빼앗겼기 때문이고, 예수가 요청한 바로 그 일을 이때 기꺼이 행했더라면 그러한 친교를 누렸을지 몰랐다. 몇 년이 지나서 그는 예수가 요구한 대로 실제로 하였다.

163:2.10 (1803.1) 재산은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것과 직접 아무 상관이 없지만, 재산 사랑은 상관이 있다. 하늘나라에 영적으로 충성하는 것과 물질적 부(富)에 굴종하는 것은 양립할 수 없다. 사람은 최고의 충성심을 영적 이상과 물질적 열심에 나누어 바쳐서는 안 된다.

163:2.11 (1803.2) 예수는 결코 재산을 가지는 것이 그릇되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오직 열두 사도와 70인에게 속세의 재산을 모두 공동 목적에 바치기를 요구했다. 그리고 나서도 사도 마태의 경우처럼, 그들이 재산을 유익하게 처분하도록 마련했다. 예수는 살림이 넉넉한 제자들에게 로마의 부자(富者)를 가르친 것처럼 여러 번 조언을 주었다. 주는 남는 소득을 지혜롭게 투자하는 것을 앞날의 피할 수 없는 역경(逆境)에 대비한 정당한 형태의 보험으로 여겼다. 사도의 금고가 넘쳐흐를 때, 유다는 수입이 줄어들어서 그들이 크게 고생할지 모르는 후일에 쓰려고 자금을 저축해 놓았다. 유다는 안드레와 의논한 뒤에 이렇게 했다. 예수는 자선금을 지출할 때를 제외하고, 결코 사도의 재정과 조금도 친히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여러 번 비난한 경제적 악습이 하나 있었는데, 즉 약하고 배우지 못하고 운이 나쁜 사람들을 힘세고 날카롭고 더 지능적인 동료들이 부당하게 착취하는 것이었다. 어른과 아이들을 그렇게 인간답지 않게 대우하는 것은 하늘나라 형제의 이상과 양립하지 않는다고 예수는 선언했다.

3. 재산에 관한 토론

163:3.1 (1803.3) 예수가 마타돌무스와 이야기를 마칠 때가 되자, 베드로와 사도 몇 명이 둘레에 모여 있었고, 그 부유한 젊은이가 떠나는 동안에 예수는 몸을 돌이켜 사도들을 마주보며 말했다: “재산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완전히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너희가 보는도다! 물질을 숭배하면서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없고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느니라. ‘이교도가 영생을 물려받기보다 낙타가 바늘 구멍을 지나가기가 더 쉽다’하는 속담이 너희에게 있느니라. 내가 선언하노니, 낙타가 바늘 구멍을 지나가는 것이 스스로 만족한 이 부자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만큼 쉬우니라.”

163:3.2 (1803.4) 베드로와 사도들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대단히 놀랐고, 너무 놀라서 베드로가 말했다: “그러면 주여,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나이까? 재산을 가진 자가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아니라 베드로야, 그러나 재산을 의지하는 자는 모두 영원한 진보로 이끄는 영적 생명에 도저히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나 그 경우에도 사람에게 불가능한 많은 일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손이 미치는 곳에 있으며,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에게 모든 것이 가능함을 깨달아야 하느니라.”

163:3.3 (1803.5) 자기들끼리 가버리자, 예수는 마타돌무스가 그들과 함께 남아 있지 않아서 슬퍼했는데, 예수가 그를 크게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호수 가까이 걸어 내려가서 거기서 물가에 앉았고, 베드로는 (이때가 되어서 거기에 모두 있던) 열두 사도를 대신하여 말했다: “그 부유한 젊은이에게 당신이 하신 말씀을 듣고 우리는 걱정이 되나이다.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속세(俗世)의 물건을 다 버리라 우리가 요구하리이까?” 예수는 말했다: “아니라 베드로야, 오직 사도가 되고자 하는 자와 너희가 하듯이 한 가족으로서 나와 함께 살기를 바라는 자들 뿐이라. 그러나 아버지는 아이들의 애정이 순수하고 나누어지지 않기를 요구하며, 너희와 하늘나라 진리를 사랑하는 것 사이에 끼는 어떤 물건이나 사람도 내던져야 하느니라. 사람의 재산이 혼의 구역을 침범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의 영적 생활에 아무 영향이 없느니라.”

163:3.4 (1804.1) 그리고 나서 베드로가 말했다, “그러나 주여, 우리는 당신을 따르려고 모든 것을 버렸나이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가지리이까?” 예수는 열두 사도 모두에게 말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위하여, 그리고 하늘나라를 위하여 재산이나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아이들을 버리고서, 아마도 얼마큼 박해와 함께 이 세상에서 몇 배나 받고 다가올 세상에서 영생을 받지 아니할 사람이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인 많은 사람이 마지막이 되겠고, 마지막인 자가 흔히 처음이 되리라. 아버지는 사람의 필요에 따라서, 자비롭게 사랑으로 우주의 복지를 고려하는 공정한 율법에 복종하여, 사람을 다루시니라.”

163:3.5 (1804.2) “하늘나라는 사람들을 많이 고용한 집 주인,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사려고 아침 일찍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라. 일꾼들에게 하루에 한 데나리온을 내기로 약속하고 나서, 저희를 포도원으로 보냈더라. 그리고 나서 9시쯤에 나가서, 더러가 시장에서 빈둥거리고 서 있음을 보고 저희에게 일렀더라: ‘너희도 가서 내 포도원에서 일하라, 그리하면 무엇이든지 마땅한 대로 너희에게 값을 치르리라.’ 저희는 대번에 일하러 갔더라. 다시 그는 12시쯤에, 그리고 3시쯤에 나갔고 마찬가지로 하였더라. 그리고 오후 5시쯤에 시장에 나가서, 아직도 더러가 빈둥거리고 서 있음을 발견하고, 저희에게 물었더라. ‘어찌하여 너희는 여기서 하루 종일 빈둥거리고 서 있느냐?’ 그리고 사람들이 대답하되 ‘아무도 우리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나이다.’ 그러자 그 집 주인이 말하되 ‘너희도 가서 내 포도원에서 일하라, 그리하면 무엇이든지 마땅한 대로 내가 너희에게 값을 치르리라.’

163:3.6 (1804.3) “저녁이 와서, 이 포도원 주인이 집사에게 말하되 ‘일꾼들을 불러서, 저희에게, 마지막에 고용한 자들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들에 이르기까지, 저희의 품삯을 주라.’ 5시쯤에 고용된 자들이 왔을 때, 저희는 한 데나리온씩 받았고, 다른 일꾼들도 각각 그리하였더라. 그날 아침에 고용된 사람들이 나중에 온 자들이 얼마나 받았는가 보았을 때, 정한 금액보다 더 받을 줄 기대하였더라. 그러나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마다 오직 한 데나리온을 받았더라. 그리고 사람마다 제 품삯을 받고 나서, 저희가 집주인에게 불평하되 ‘마지막에 고용된 이 사람들은 겨우 한 시간 일하였고, 그래도 타는 볕에서 하루의 짐을 진 우리와 똑같이 당신은 저희에게 돈을 주었나이다.’

163:3.7 (1804.4) “그러자 그 집주인이 일렀더라: ‘친구들이여, 나는 너희에게 아무 잘못이 없노라. 너희 각자가 하루 한 데나리온에 일하기로 찬성하지 않았느냐? 이제 네 것을 가지고 길을 떠나라, 너희에게 준 것만큼 마지막에 온 자들에게 주기를 내가 바라기 때문이라. 내 것을 내 뜻대로 하는 것이 법에 어긋나느냐? 아니면 내가 선하고 자비를 보이기를 원한다고 해서, 너희가 나의 관대함에 불평을 품느냐?’”

4. 칠십인과 작별하다

163:4.1 (1804.5) 70인이 첫 임무를 띠고 떠나간 날은 마가단 캠프 근처에서 가슴 설레는 때였다. 그날 아침 일찍, 70인과 마지막 말씀을 하며 예수는 다음을 강조했다:

163:4.2 (1804.6) 1. 하늘나라 복음은 온 세상에,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선포되어야 한다.

163:4.3 (1804.7) 2. 병자들을 보살피면서, 기적을 기대하는 가르침을 삼가라.

163:4.4 (1805.1) 3. 속세의 권력과 물질적 영화가 있는, 겉으로 보이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적으로 형제인 것을 선포하라.

163:4.5 (1805.2) 4. 지나친 사교적 방문과 다른 사소한 일로 시간 낭비를 피하라, 이것이 너희가 한눈을 팔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지 못하게 할까 하니라.

163:4.6 (1805.3) 5. 본부로 선택할 첫 집이 마땅한 가정인 것이 판명되면, 그 도시에서 머무르는 동안 내내 거기서 지내라.

163:4.7 (1805.4) 6. 예루살렘의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과 드러내놓고 갈라질 때가 이제 왔음을 충실한 신자들 모두에게 분명히 이르라.

163:4.8 (1805.5) 7. 사람의 온전한 의무는 이 한 계명에 요약되었음을 가르치라: 정신과 혼을 다 하여 너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을 바리새인들이 해설한 613개 생활 규칙 대신에 사람의 온전한 임무라고 그들이 가르쳐야 했다.)

163:4.9 (1805.6) 사도와 제자들이 모두 있는 가운데 예수가 이렇게 70인에게 말씀하고 나서, 시몬 베드로는 이들을 따로 데리고 가서 임명하는 훈시를 주었다. 이 설교는 예수가 그들에게 손을 얹고 하늘나라의 사자로서 구별할 때 예수가 주신 지침을 공들여 다듬은 것이다. 베드로는 70인에게 그들의 체험에서 다음의 미덕을 간직하라고 타일렀다:

163:4.10 (1805.7) 1. 거룩하게 헌신할 것. 복음의 수확을 거두는 일에 더 많은 일꾼이 파송되기를 언제나 기도할 것. 사람이 그렇게 기도할 때 “여기 내가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말하기가 더 쉬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매일의 예배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163:4.11 (1805.8) 2. 참된 용기. 그들이 적대 행위에 직면하고 분명히 박해를 만나리라고 그는 경고했다. 베드로는 그들의 사명이 겁쟁이가 맡을 사업은 아니라고 일러주었고 두려운 사람들은 시작하기 전에 물러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아무도 물러서지 않았다.

163:4.12 (1805.9) 3. 믿음과 신뢰. 그들은 이 짧은 임무에 전혀 지원받지 않고 떠나야 한다. 먹을 것과 잠자리와 모든 다른 필요한 것을 아버지에게 의존해야 한다.

163:4.13 (1805.10) 4. 열심과 창의력. 그들은 열의가 있고 현명하게 열심이 있어야 한다. 엄밀하게 주의 일을 보살펴야 한다. 동방의 인사는 길고 공들인 예식이다. 그러므로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고 전에 지시를 받았는데, 이것은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사람이 제 일에 몰두하라고 보통 훈계하는 방법이었다. 친절하게 인사하는 문제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163:4.14 (1805.11) 5. 친절과 예의. 주는 그들에게 사회적 예식에 필요 없는 시간 낭비를 피하라고 지시했지만, 그들이 접촉하게 되는 모든 사람에게 예의 바를 것을 명했다. 그들을 집으로 접대할 수도 있는 자에게 모든 친절을 보여야 했다. 더 편안하거나 영향력 있는 가정에서 접대받으려고 소박한 집을 떠나지 말라고 엄하게 경고를 받았다.

163:4.15 (1805.12) 6. 병자를 보살피기. 70인은 정신과 몸이 병든 자를 찾아내고, 질병을 덜거나 고치려고 그들이 능력이 닿는 데까지 무엇이든 하라고 베드로가 당부하였다.

163:4.16 (1805.13) 그리고 이렇게 책임과 지시를 받고 나서, 그들은 갈릴리ㆍ사마리아ㆍ유대에서 사명을 다하려고 둘씩 떠나갔다.

163:4.17 (1806.1) 비록 이교도 국가들의 수가 70이라는 것을 때때로 생각하면서 유대인들은 70이라는 수를 특별하게 여겼고, 비록 이 사자(使者) 70인이 복음을 가지고 모든 민족에게 가기로 정해지기는 했어도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한, 이 무리가 어쩌다가 꼭 70인이었다는 것은 단지 우연일 뿐이다. 여섯 이상의 다른 사람들을 예수가 받아들였을 것이 분명했지만, 그들은 재산과 가족을 버리라는 대가를 기꺼이 치르지 않았다.

5. 캠프를 펠라로 옮기다

163:5.1 (1806.2) 예수와 열두 사도는 이제 페레아 지역의 마지막 본부를 펠라 가까이서 세우려고 준비했는데, 여기서 주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11월의 마지막 열흘은 마가단에서 회의하느라고 보냈고, 12월 6일 화요일에 거의 3백 명 되는 일행 전부가, 그날 밤 펠라 가까이 강가에서 묵으려고 소지품을 모두 가지고 새벽에 떠났다. 여기는 샘물가에, 세례자 요한이 몇년 전에 천막을 가지고 차지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163:5.2 (1806.3) 마가단 캠프가 해산된 뒤에, 다윗 세베대는 벳세다로 돌아가서 사자 봉사를 즉시 축소하기 시작했다. 하늘나라는 새로운 국면의 성질을 띠고 있었다. 날마다 팔레스타인의 모든 구역으로부터, 아니 로마 제국의 먼 지역에서도 순례자들이 도착했다. 신자들은 때때로 메소포타미아에서, 그리고 티그리스 동쪽 땅으로부터 왔다. 따라서 12월 18일 일요일에, 다윗은 사자단의 도움을 얻어서, 캠프 장비를 짐 싣는 짐승들 위에 실었고, 그리고 나서 아버지의 집에 저장했는데, 이것으로 그는 예전에 호숫가에서 벳세다 캠프를 운영하였다. 벳세다를 한동안 작별하고, 그는 호숫가에 밑으로 요단강을 따라서, 사도의 캠프에서 북쪽으로 8백 미터쯤 되는 지점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한 주도 채 되지 않아서 거의 1천 5백 명의 순례하는 방문자들을 접대할 준비가 되었다. 사도의 캠프는 거의 5백 명에게 잠자리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이때는 팔레스타인에서 비가 오는 철이었고, 이 숙박 시설은 항상 수가 늘어나는 질문자, 예수를 보고 가르침을 들으려고 페레아 지역으로 들어온, 대체로 열심 있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데 필요했다.

163:5.3 (1806.4) 마가단에서 빌립과 마태와 의논한 적이 있었지만, 다윗은 이 모든 것을 솔선해서 했다. 그는 예전의 사자단의 과반수를 이 캠프를 운영하는 데 조수로서 고용했다. 이제 정규 사자 임무에 고용된 사람은 20명이 채 되지 않았다. 12월 말 가까이, 그리고 70인이 돌아오기 전에, 거의 8백 명의 방문객이 주의 둘레에 모여들었고 이들은 다윗의 캠프에서 잠자리를 얻었다.

6. 칠십인이 돌아오다

163:6.1 (1806.5) 12월 30일 금요일에, 예수가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과 함께 근처의 산으로 떠난 동안, 70인의 사자들은 둘씩, 수많은 신자를 동반하고 펠라 본부에 도착하고 있었다. 예수가 캠프로 돌아왔을 때, 5시쯤에 가르치는 장소에서 70인이 모두 모였다. 하늘나라 복음에 열심인 이 사람들이 자기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동안 저녁 식사는 한 시간이 넘게 늦어졌다. 다윗의 사자들이 지난 몇 주 동안 사도들에게 이 소식의 상당 부분을 가져왔지만, 새로 세움받은 이 복음 선생들이 갈급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참으로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마침내 예수는 그가 몸소 있지 않아도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퍼뜨리러 나가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 주는 하늘나라의 진보를 심각하게 방해하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163:6.2 (1807.1) 70인이 어떻게 그들에게 “악귀들조차 굴복하는가”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신경 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놀랍게 그들이 병 고친 것을 언급하였다. 그런데도, 이 봉사자들이 구제한, 정말로 귀신 들린 몇 경우가 있었고, 이를 언급하며 예수는 말했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짐을 본 것을 생각하니, 복종하지 않던 이 작은 영들이 너희에게 굴복한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그러나 이것으로 지나치게 기뻐하지 말라,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자마자 길 잃은 이 몇 귀신이 불행한 필사자의 지성 속에 이제 더 들어갈 수 없도록 우리의 영을 사람들의 바로 그 지성 속에 보낼 것임이라. 너희가 사람들에 대하여 능력을 가진 것을 너희와 함께 내가 기뻐하여도, 이 체험 때문에 용기를 얻지 말고 오히려 너희의 이름이 하늘의 두루마리에 적힌 것, 그리고 너희가 영적으로 정복하는 끝없는 생애에서 이처럼 앞으로 나아갈 것을 기뻐하라.”

163:6.3 (1807.2) 바로 이때, 저녁 식사를 나누기 바로 전에, 예수는 추종자들이 때때로 목격한 바와 같이, 감정의 환희를 맛보는 드문 한 순간을 체험했다. 그는 말했다: “내 아버지여, 하늘과 땅의 주여, 이 놀라운 복음이 지혜롭고 스스로 옳게 여기는 자에게 감추어졌어도, 영은 이 영적 영광을 이 하늘나라 아이들에게 드러냈음을 감사드리나이다. 그러하나이다 아버지여, 이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 보시기에 기뻤음이 틀림없나이다. 내가 아버지께로, 그리고 내게 행하라고 주신 일로 돌아간 뒤에도, 좋은 소식이 온 세상에 퍼질 것을 알고 나는 기뻐하나이다. 아버지가 내 손에 모든 권한을 주려 하심을 깨달으면서, 내가 누구인 줄 오직 아버지가 정말로 아시며, 내가 저희에게 아버지를 드러냈으므로, 오직 나와 저희가 아버지를 정말로 아는 것에 힘차게 감동이 되나이다. 그리고 육체를 입은 내 형제들에게 이 계시를 마쳤을 때, 나는 하늘 높이 있는 당신의 여러 생물에게 계시를 계속하리이다.”

163:6.4 (1807.3) 이렇게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나서, 예수는 얼굴을 돌려 사도와 봉사자들에게 말했다: “이 일을 보는 눈과 듣는 귀는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지난 시대의 숱한 선지자와 많은 위대한 사람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고 싶어했으되 저희에게 허락되지 아니하였느니라. 앞으로 생길 많은 세대에 빛의 아이들이 이 소식을 들을 때, 이를 듣고 본 너희를 부러워하리라.”

163:6.5 (1807.4) 그리고 나서, 모든 사도에게 말했다: “너희는 얼마나 많은 도시와 마을이 하늘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였는가, 어떻게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내 봉사자와 선생들을 받아들였는가 들었느니라. 하늘나라의 복음을 믿기로 작정한 이 여러 공동체는 정말로 복이 있도다. 그러나 코라진, 벳세다 줄리아스, 가버나움, 이 사자들을 좋게 받아들이지 않은 도시에서 빛을 물리치는 주민들은 아― 한탄이 있을진저. 내가 선언하노니, 이 여러 곳에서 행해진 막강한 일을 티레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이른바 이 이교도 도시의 사람들은 삼베와 재 속에서 뉘우친 지 오래되었으리라. 심판하는 날에 티레와 시돈이 정말로 더 견딜 만하리라.”

163:6.6 (1807.5) 다음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70인과 함께 따로 가서 그들에게 말했다: “갈릴리와 사마리아와 유대에 두루 흩어진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너희가 돌아왔을 때 나는 정말로 너희와 함께 기뻐하였노라. 그러나 어째서 너희는 그렇게 놀랍게 기운을 얻었느냐? 너희가 전하는 소식이 전달될 때 힘을 나타낼 것이라고 너희가 기대하지 않았더냐? 이 복음을 거의 믿지 않고 떠나갔으므로 너희가 그 효력에 놀라서 돌아왔느냐? 그리고 이제, 너희의 기뻐하는 정신에 물을 끼얹지 않겠으나, 미묘한 자만, 영적 자만에 대하여 너희에게 엄하게 경고하고자 하노라. 루시퍼, 불의한 자의 몰락을 이해할 수 있다면, 너희는 온갖 형태의 영적 자만심을 엄숙하게 피하리라.

163:6.7 (1808.1) “너희는 필사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그에게 가르치는 이 큰 일을 시작하였도다. 나는 너희에게 길을 보여주었으니, 가서 너희 사명을 다하고 일을 잘 처리하는 데 지치지 말라. 너희에게, 그리고 오랜 세월을 통해서 너희의 걸음을 따를 모든 사람에게 내가 이르노라: 내가 언제나 가까이 서 있고, 나의 초청하는 부름은 이것이요 언제나 그러하리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휴식을 주리라. 나의 멍에를 너희가 지고 나에게서 배우라, 이는 내가 참되고 충실하며, 너희의 혼이 영적 휴식을 찾을 것임이라.”

163:6.8 (1808.2) 예수의 약속을 시험해 보았을 때, 그들은 주의 말씀이 참말인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셀 수없이 많은 사람이 또한 바로 이 약속을 시험해 보았고 그 약속이 확실함을 입증했다.

7. 마지막 전도를 위한 준비

163:7.1 (1808.3) 다음 며칠은 펠라 캠프에서 바쁜 나날이었다. 페레아 전도를 위한 준비가 끝나고 있었다. 예수와 그 동료들은 마지막 전도 사명, 온 페레아 지방에서 석 달 여행을 막 시작하려 했고, 이것은 땅에서 마지막 수고를 위하여 주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끝났다. 이 기간 내내, 예수와 열두 사도의 본부는 여기 펠라 캠프에서 유지되었다.

163:7.2 (1808.4) 이제는 더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예수가 외국으로 갈 필요가 없었다. 주마다 모든 지방으로부터, 팔레스타인 뿐 아니라 온 로마 세계와 근동(近東)으로부터,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수가 더욱 늘어났다. 비록 페레아 여행에 70인과 함께 참여했어도 주는 군중을 가르치고 열두 사도를 교육하면서 많은 시간을 펠라 캠프에서 보냈다. 이 석 달 동안 내내, 적어도 열 사도가 예수와 함께 남아 있었다.

163:7.3 (1808.5) 70인이 페레아의 여러 큰 도시에서 수고하는 동안, 여인단도 둘씩 나가려고 준비했다. 열두 여인으로 이루어진 이 최초의 집단은 가정을 방문하는 일과 병든 자와 고통 받는 자를 돌보는 기술을 여인 50명으로 된 더 큰 집단에게 최근에 훈련시켰다. 시몬 베드로의 아내, 퍼페투아가 여인단의 이 새 부서에 회원이 되었고 아브너 밑에서 여인들의 확대된 일의 지도를 맡았다. 오순절 뒤에 이 여인은 뛰어난 남편과 함께 있었고, 모든 선교 여행에 남편을 따라다녔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날, 그 여자는 경기장에서 사나운 짐승들에게 먹혔다. 이 새 여인단에는 또한 빌립과 마태의 아내들과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회원이었다.

163:7.4 (1808.6) 하늘나라의 일은 이제 예수가 친히 지휘하는 밑에서 최종 단계에 들어가려고 준비했다. 그리고 이 현재 단계는, 갈릴리에서 인기가 있던 옛 시절에 주를 따라다니던 군중, 기적을 기대하고 이적을 찾던 군중과 반대로, 영적 깊이가 있는 단계였다. 그러나 물질적 생각을 가진 추종자, 그리고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우주의 아버지라는 영원한 사실에 기초를 둔, 사람의 영적 형제 단체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추종자들이 아직도 얼마든지 있었다.

제 164 편 헌당 축제에서

유란시아서

제 164 편

헌당 축제에서

164:0.1 (1809.1) 펠라에서 캠프가 세워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는 나다니엘과 토마스를 데리고서 헌당 축제에[1] [21] 참석하려고 예루살렘으로 몰래 올라갔다. 베다니 여울목에서 요단강을 건널 때까지, 두 사도는 주가 예루살렘으로 계속 가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정말로 헌당 축제에 참석할 뜻이 있음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무척 진지하게 항의하고, 온갖 종류의 논리로 예수를 말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고, 예수는 예루살렘을 방문하기로 각오가 굳어 있었다. 자신이 산헤드린의 손아귀에 빠지는 어리석음과 위험을 강조하면서 그들이 온갖 간청과 경고를 드린 데 대하여 그는 이렇게만 대답하곤 하였다, “내 때가 오기 전에, 나는 이스라엘의 이 선생들에게 빛을 볼 기회를 또 한 번 주고자 하노라.”

164:0.2 (1809.2)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계속 갔고, 두 사도는 두려운 느낌을 줄곧 표현하고, 겉보기에 대담한 그러한 시도가 지혜로운가 의심한다고 투덜거리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예리고에 4시 반쯤에 이르렀고, 거기서 밤 동안 지내려고 준비했다.

1.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164:1.1 (1809.3) 그날 저녁에 상당히 큰 일행이 예수와 두 사도의 둘레에 말씀을 물으려고 모였다. 질문 중 많은 것을 사도들이 대답하였고 나머지는 주가 논의하였다. 저녁에, 어떤 율법사가 체신을 떨어뜨리는 논쟁에 예수를 옭아매려 애쓰면서 말했다: “선생이여, 영생(永生)을 얻기 위하여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당신께 묻고자 하나이다.” 예수는 대답했다: “율법과 선지자에 무엇이 쓰여 있느냐, 너는 성서를 어찌 해석하느냐?” 예수와 바리새인, 양쪽의 가르침을 알기 때문에 율법사는 대답했다: “마음과 혼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니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네가 옳게 대답하였도다. 네가 정말로 행하면, 이것이 영생으로 이끌리라.”

164:1.2 (1809.4) 그러나 이렇게 물으면서 율법사는 온전히 성실하지는 않았다. 자신을 정당화하기를 바라고 또한 예수를 난처하게 만들기를 희망하면서 과감하게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주께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는 말했다. “그러나 선생이여, 도대체 누가 내 이웃인지 당신이 나에게 일러주셨으면 하나이다.” 그 율법사는 예수가 사람의 이웃을 “자기 민족의 자녀들”로 정의한 유대인 율법에 어긋나는 어떤 진술을 하도록 예수를 덫에 걸리게 만들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물었다. 유대인은 모든 다른 사람을 “이방의 개”로 여겼다. 이 율법사는 예수의 가르침에 얼마큼 익숙했고, 따라서 주가 다르게 생각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주를 유도하여 신성한 율법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할 수 있는 무슨 말씀을 예수가 하게 만들기를 바랐다.

164:1.3 (1810.1) 그러나 예수는 그 율법사의 동기를 헤아렸고, 덫에 빠지는 대신에, 나아가서 듣는 사람들에게 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예리고의 어떤 청중도 넉넉히 알아들을 이야기였다. 예수가 말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다가 사나운 도적들의 손에 걸렸더니, 저희가 그의 물건을 약탈하고 옷을 벗기고 그를 매질하고 떠나면서 반 죽은 채로 두었더라. 금방 어떤 사제(司祭)가 어쩌다가 그 길을 내려가다가, 다친 사람을 발견하고 그 불쌍한 모습을 보고서, 길 건너편으로 지나갔더라. 그리고 한 레위인도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같은 방법으로 건너편으로 지나갔더라. 자, 이 무렵에 어떤 사마리아인이 예리고로 길을 가다가, 이 다친 사람과 마주쳤더니, 그 사람이 어떻게 강도에게 빼앗기고 얻어맞았는가 보고서 불쌍한 느낌이 들었고, 그에게 다가가서 상처를 싸매고,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그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우고서, 여기서 여인숙까지 데리고 가서 그를 돌보았더라. 이튿날 아침에, 그가 돈을 얼마큼 꺼내어 주인에게 주면서 말하되, ‘내 친구를 잘 보살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다시 돌아올 때 갚으리라’ 하였더라. 자 이제 내가 너에게 묻노니,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를 만난 자의 이웃인 것이 드러났느냐?” 그 율법사는 자신이 놓은 덫에 빠졌음을 깨달았을 때 대답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리고 예수는 말했다, “가서 이와 같이 하라.”

164:1.4 (1810.2) 그 율법사는 싫은 말, 사마리아인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삼갈까 하여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했다. “누가 내 이웃인가?” 하는 질문에 율법사는 예수가 주고 싶은 바로 그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고, 만일 예수가 그렇게 말했다면, 이단(異端)이라는 죄목으로 그를 직접 말려들게 했을 것이다. 예수는 정직하지 않은 그 율법사를 쩔쩔매게 했을 뿐 아니라 청중에게 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이야기는 동시에 모든 추종자에게 아름다운 훈계요, 사마리아인에 대한 태도에 관하여 모든 유대인을 깜짝 놀라게 하는 꾸지람이었다. 이 이야기는 그후에 예수의 복음을 믿은 모든 사람 사이에서 형제 사랑을 줄곧 촉진했다.

2. 예루살렘에서

164:2.1 (1810.3) 예수는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온 순례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할까 하여 전에 천막 축제에 참석했다. 이제 그는 꼭 한 가지 목적으로 헌당 축제에 올라갔는데, 곧 산헤드린과 유대 지도자들에게 다시 한 번 빛을 볼 기회를 주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이 며칠 동안의 주요한 사건은 니고데모의 집에서 금요일 밤에 일어났다. 예수의 가르침을 믿은 유대 지도자들이 25명 정도 함께 여기에 모였다. 이 무리 가운데 당시에, 아니면 최근에 산헤드린 회원이었던 사람이 열네 명 있었다. 이 모임에는 이버, 마타돌무스, 아리마대 요셉이 참석했다.

164:2.2 (1810.4) 이 기회에 예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모두 학식 있는 사람이었고, 이들과 두 사도는 이 탁월한 집단에게 주가 논평하신 말씀이 얼마나 넓고 깊은가 놀랐다. 예수가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에서, 그리고 지중해 섬들에서 가르친 시절 이후로, 그렇게 박식함을 나타내고, 세속인과 종교인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일을 그렇게 이해하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164:2.3 (1810.5) 이 작은 모임이 해산되었을 때, 모두가 주의 인품에 신비를 느꼈고 품위 있는 예절에 매혹되고 그 인품에 반하여 돌아갔다. 산헤드린의 나머지 회원들을 설득하려는 그의 소망에 관하여 그들은 예수에게 조언하려고 애썼다. 주의 깊게, 그러나 말없이, 주는 모든 제안(提案)을 들었다. 그들의 계획 중에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할 것을 잘 알았다. 그는 유대 지도자들의 대다수가 하늘나라 복음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으리라고 추측했다. 그래도 그들 모두에게 이번에 선택할 기회를 다시 한 번 주었다. 그러나 나다니엘과 토마스와 함께 올리브산에서 묵으려고 그날 밤에 나갔을 때, 한 번 더 산헤드린이 그의 일을 주목하게 만들기 위하여 어떤 방법을 추구할 것인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164:2.4 (1811.1) 그날 밤에 나다니엘과 토마스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니고데모의 집에서 들은 것에 너무 많이 놀랐다. 그와 함께 70인[2] [22] 앞으로 가자고 하는, 산헤드린의 과거 및 현직 회원들의 제안에 대하여 예수가 마지막으로 논평한 것을 두고 그들은 많이 생각해 보았다. 주는 말했다: “아니라 형제들아, 아무 소용이 없느니라. 너희 머리 위에 쏟아질 진노를 너희가 더할 뿐이나 나를 미워하는 마음을 저희가 조금도 줄이지 못하리라. 내 아버지가 지시하는 방법으로 다시 한 번 하늘나라를 저희가 주목하게 하는 동안, 너희는 각자 가서 영이 인도하는 대로 아버지의 일에 힘쓰라.”

3. 눈먼 거지를 고치다

164:3.1 (1811.2) 이튿날 아침 세 사람은 아침을 먹으러 베다니에 마르다의 집으로 갔고, 다음에 즉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이 안식일 아침에, 예수와 두 사도가 성전에 가까이 다가가자, 어느 이름난 거지와 마주쳤는데, 날 때부터 눈먼 이 사람은 늘 있던 장소에 앉아 있었다. 이 거지들은 안식일에 구걸하거나 자선금을 받지 않았어도, 이렇게 자기의 보통 장소에서 앉아 있는 것이 허락되었다. 예수는 멈추어서 그 거지를 바라보았다. 날 때부터 눈먼 이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어떻게 한 번 더, 땅에서 그의 사명을 산헤드린과 기타 유대 지도자와 종교 선생들이 주목하게 만들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164:3.2 (1811.3) 주가 깊이 생각에 빠져서, 눈먼 사람 앞에 거기 서 있는 동안, 이 사람이 눈이 멀게 된 가능한 원인을 생각하며 나다니엘이 물었다: “주여, 그가 날 때부터 눈이 멀었으니 누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지었나이까?”

164:3.3 (1811.4) 랍비들은 날 때부터 소경인 모든 그러한 경우는 죄가 원인이라고 가르쳤다. 아이들이 죄 속에서 잉태되고 태어날 뿐 아니라, 아이는 아버지가 저지른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벌로서 소경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 그들은 바로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죄를 지을 수 있다고까지 가르쳤다. 또한 그 아이를 밴 동안에 어머니의 어떤 죄나 다른 방탕함이 그러한 결함이 생기게 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164:3.4 (1811.5) 이 모든 지역에 두루, 윤회(輪廻)를 믿는 관념이 남아 있었다. 플라톤과 필로와 많은 에센인과 함께, 옛 유대인 선생들은 사람들이 하나의 생애에서 전생(前生)에 씨 뿌린 것을 거둘지 모른다는 이론을 용납했다. 이처럼 한 인생 동안에, 여러 전생에서 지은 죄를 보상하고 있다고 믿었다. 주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혼이 전에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을 믿게 만들기가 어려움을 깨달았다.

164:3.5 (1811.6) 모순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런 소경이 죄의 결과라고 생각되었어도 이 눈먼 거지들에게 자선금 주는 것은 높이 칭찬할 일이라고 유대인들은 주장했다. “아, 마음이 부드러운 이여, 소경을 도우사 공을 쌓으소서”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항상 되풀이하는 것이 이 눈먼 사람들의 관습이었다.

164:3.6 (1811.7) 예수는 나다니엘과 토마스와 함께 이 경우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날 한 번 더 뚜렷하게 유대 지도자들이 그의 사명을 주목하게 하는 수단으로, 이 눈먼 사람을 쓰기로 이미 마음먹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연 현상이든 영적 현상이든, 모든 현상의 참된 원인을 사도들이 추구하도록 언제나 격려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있는 물리적 사건을 영적 원인의 탓으로 돌리는 흔한 경향을 피하라고 예수는 자주 전에 그들에게 경고했다.

164:3.7 (1812.1) 예수는 그날의 일을 위한 계획에 이 거지를 쓰기로 작정했지만, 이름이 요시아인 그 소경을 위하여 어떤 일도 미처 해주기 전에, 나다니엘의 물음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주는 말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 사람에게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그도, 부모도 죄를 짓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렇게 눈먼 것은 자연스러운 사건의 과정으로 그에게 일어났으나, 아직 낮인 동안에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이제 해야 하나니, 밤이 확실히 올 것임이라. 그때에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가 불가능하리라. 내가 세상에 있을 때 나는 세상의 빛이지만, 조금만 있으면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64:3.8 (1812.2) 말씀을 마치고 나서 예수는 나다니엘과 토마스에게 일렀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사람의 아들을 고발하려고 찾는 충분한 근거를 주도록 이 안식일에 이 소경이 눈을 뜨게 만들자.” 그리고 나서 몸을 굽히면서 땅에 침을 뱉고 진흙을 침과 섞었다. 그리고 소경이 들을 수 있게 이 모든 것을 말하면서, 요시아에게 다가가서, 앞이 보이지 않는 두 눈 위에 진흙을 얹고 말했다: “이 사람아, 가서 이 진흙을 실로암 못에서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네 눈이 즉시 보게 될지니라.” 그리고 실로암의 못에서 그렇게 씻고 나자, 요시아는 눈이 보게 되었고 친구들과 가족한테로 돌아갔다.

164:3.9 (1812.3) 언제나 거지였으니까, 그는 다른 일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눈이 보게 되어 처음 흥분이 사라졌을 때, 여느 때에 자선(慈善)을 구하던 장소로 돌아갔다. 친구와 이웃들, 그리고 그를 전에 알았던 모든 사람이, 그가 눈이 멀쩡한 것을 지켜보자 모두 말했다: “이 사람은 눈먼 거지 요시아가 아니냐?” 더러는 그라 하고, 더러는 말했다, “아니라, 그와 비슷한 자이나 이 사람은 볼 수 있구나.” 그러나 그들이 본인에게 물었을 때, 그는 대답했다, “내가 그 사람이요.”

164:3.10 (1812.4) 어떻게 그가 볼 수 있는가 그들이 비로소 묻자, 그는 대답했다: “예수라 하는 사람이 이 길로 와서, 친구들과 함께 내 이야기를 하면서, 침으로 진흙을 만들어 내 두 눈에 바르고, 내가 가서 실로암 못에서 씻어야 한다고 지시하였나이다. 나는 이 사람이 내게 이른 대로 했고, 즉시 내 시력을 얻었나이다. 그리고 이 일은 겨우 몇 시간 전에 일어났나이다. 내가 보는 많은 것이 무슨 의미(意味)인가 아직 모르나이다.” 주위에 모이기 시작한 사람들이, 그를 고쳐준 이상한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물었을 때, 요시아는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164:3.11 (1812.5) 이것은 주가 행한 모든 기적(奇蹟) 가운데 하나의 아주 이상한 일이다. 이 사람은 고쳐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그에게 실로암에서 씻으라고 지시하고 그에게 눈을 뜨게 해준다고 약속한 그 예수가 천막 축제 동안에 예루살렘에서 설교했던 갈릴리 선지자인 것을 그는 몰랐다. 이 사람은 그가 시력을 얻을 것이라고 거의 믿지 않았지만, 그 시절의 사람들은 위대하거나 거룩한 사람의 침이 효력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나다니엘과 토마스가 예수와 나눈 말씀으로 미루어, 요시아는 자청해서 은혜를 베푼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나 또는 학식 있는 선생이나 거룩한 선지자라고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그는 예수가 지시한 대로 했다.

164:3.12 (1812.6) 다음 세 가지 이유로 예수는 진흙과 침을 썼고, 그에게 상징인 실로암 못에서 씻으라고 지시했다:

164:3.13 (1812.7) 1. 이것은 개인의 믿음에 반응하여 일어난 기적이 아니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예수가 행하기로 한 이적이었지만, 이 일로 이 사람이 오랫동안 혜택을 받도록 마련한 이적이었다.

164:3.14 (1813.1) 2. 그 소경이 고쳐달라 부탁하지 않았고 그의 믿음이 적었기 때문에, 이 물질적 행위는 그를 격려하려는 목적으로 제안한 것이다. 그는 침이 효력이 있다는 미신을 믿었고, 실로암 못이 반 거룩한 장소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에게 발라준 진흙을 씻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도저히 거기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 대화에는 그를 움직이도록 유인하기에 가까스로 넉넉한 절차가 있었다.

164:3.15 (1813.2) 3. 그러나 이 독특한 대화와 관련하여 예수는 이 물질적 수단에 의존한 셋째 이유가 있었다. 이것은 순전히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일으킨 기적이었고, 그렇게 함으로 그 시절과 이후 시대에 계속, 추종자들이 병자를 고치면서 물질적 수단을 가벼이 보거나 소홀히 하지 않도록 가르치기를 바랐다. 기적이 인간의 질병을 고치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고 싶었다.

164:3.16 (1813.3) 예수는 이 안식일 아침에, 성전에서 가까이 예루살렘에서, 기적을 일으켜 이 사람의 눈을 뜨게 만들었고, 이 행위를 산헤드린과 모든 유대 선생 및 종교 지도자에게 공개(公開) 도전으로 만드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었다. 이것은 그가 바리새인들과 드러내놓고 갈라지는 것을 선언하는 방법이었다. 행하는 모든 일에 그는 언제나 적극적이었다. 산헤드린 앞에 이 문제를 제기할 목적으로, 이 안식일 오후에 일찍 예수는 두 사도를 이 사람에게 데리고 와서 일부러 논쟁을 일으켰고,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어쩔 수 없이 그 기적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4. 산헤드린 앞에 선 요시아

164:4.1 (1813.4) 오후 중반이 되어, 요시아를 치유한 것이 성전 주위에서 얼마나 큰 이야기거리를 만들었는지, 산헤드린의 지도자들은 평상시의 성전 회의 장소에서 회의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안식일에 산헤드린의 집회를 금하는 오래 된 규칙을 어기고 이렇게 했다. 예수는 마지막 시험이 다가왔을 때, 안식일 어기는 것이 그를 고발하는 주요한 죄목 중의 하나일 것을 알았다. 그는 안식일에 눈먼 사람을 고쳤다는 죄목으로 판결을 받으려고 산헤드린 앞으로 끌려가기를 바랐으며, 이 자비로운 행위 때문에 그를 재판하는 높은 유대 법정(法廷)의 바로 그 회의가 안식일에, 스스로 부과한 율법을 직접 어기고 이 문제를 심의할 것이었다.

164:4.2 (1813.5)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앞으로 부르지 않았고, 그렇게 하기가 두려웠다. 그 대신에 당장에 요시아를 부르러 보냈다. 얼마큼 예비 질문이 있은 뒤에, (약 50명의 회원이 자리에 있었다) 산헤드린의 대변인이 요시아에게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르라고 지시했다. 그날 아침에 고침을 받은 뒤에, 요시아는 토마스와 나다니엘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바리새인들이 그가 안식일에 고침 받았다고 하여 화가 났다는 것, 그리고 관계된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문제를 일으킬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예수가 사람들이 구원자라고 부르는 바로 그 사람인 것을 요시아는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물었을 때 말했다: “이 사람이 나타나서, 내 두 눈에 진흙을 얹고, 가서 실로암에서 씻으라고 내게 일렀는데, 이제 내가 보나이다.”

164:4.3 (1813.6) 나이 든 바리새인들 중의 하나가, 한바탕 연설한 뒤에 말했다: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을 수 없으니, 너희가 보다시피 그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까닭이라. 첫째, 진흙을 빚고, 다음에 이 거지를 안식일에 실로암에서 씻으라 보내면서, 그는 율법을 어기는도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생일 수 없느니라.”

164:4.4 (1813.7) 그러자 예수를 몰래 믿던 젊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말했다: “이 사람을 하나님이 보내지 않았다면, 어찌 그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소이까? 우리가 알기에는, 보통 죄인인 사람은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없소이다. 우리는 다 이 거지를 알고, 그가 날 때부터 눈이 먼 것을 아온데, 이제 그가 보오이다. 당신들은 이 선지자가 악마 왕의 힘으로 이 모든 기적을 행한다고 아직도 말하고자 하오이까?” 바리새인 하나가 예수를 감히 고발하고 비난하면, 또 한 사람이 일어나서 복잡하고 당황스런 질문을 던지곤 하였고, 그래서 그들 사이에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다. 주관하는 관리는 그들이 어느 쪽으로 흘러가는가 보았고, 논쟁을 가라앉히려고 자신이 그 사람을 더 심문하려고 준비했다. 요시아를 향하여 그는 말했다: “너는 이 사람, 네가 주장하건대 네 눈을 뜨게 한 이 예수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그리고 요시아는 대답했다. “나는 그가 선지자라 생각하나이다.”

164:4.5 (1814.1) 지도자들은 크게 난처했다. 달리 어떻게 할 줄 몰라서, 요시아가 실제로 날 때부터 눈이 멀었는가 알려고 요시아의 부모를 찾으러 사람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거지가 고침받은 것을 믿기가 몹시 싫었다.

164:4.6 (1814.2) 예수가 어떤 회당에도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로 회당에서 쫓겨났다, 이스라엘의 회중에서 추방되었다는 것이 예루살렘 근처에서 잘 알려졌다. 그리고 이것은 생활 필수품을 사는 권리 외에 유대인 사회에서 두루, 모든 권리와 온갖 종류의 특권을 잃는다는 것을 뜻했다.

164:4.7 (1814.3) 그래서 요시아의 부모, 가난하고 겁에 질린 사람들이 존엄한 산헤드린 앞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자유로이 말하기가 무서웠다. 법정 대변인이 말했다: “이 사람이 네 아들이냐? 그가 소경으로 태어났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데 맞느냐? 이것이 정말이면 어찌하여 이제 그가 볼 수 있느냐?” 그리고 나서 요시아의 아버지가 대답하였고 어머니도 찬성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이고 그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을 아오나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또는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하였는지 모르오이다. 그에게 물으소서. 그가 나이를 먹었으니 자신이 변호하게 하소서.”

164:4.8 (1814.4) 그들은 이제 요시아를 두 번째로 불러들였다. 정식 재판을 여는 계획을 순조로이 진행하지 못했고, 더러는 안식일에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하여 비로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따라서 요시아를 불렀을 때, 그들은 다른 공격 방법으로 그를 옭아매려고 시도했다. 법정의 관리는 예전에 눈이 멀었던 사람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너는 이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느냐? 너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진실을 전부 우리에게 이르지 않느냐?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우리 모두가 아노라. 어찌하여 너는 진실을 깨달으려 하지 않느냐? 너와 이 사람은 안식일 어기는 것 때문에 정죄받음을 네가 아느니라. 오늘 네가 눈을 떴다고 아직도 주장한다면, 하나님이 너를 고친 분이라고 인정함으로 네 죄를 대속(代贖)하지 않겠느냐?”

164:4.9 (1814.5) 그러나 요시아는 어리석지도 유머가 모자라지도 않았다. 그래서 법정 관리에게 대답했다: “이 사람이 죄인인지 나는 모르오이다. 그러나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내가 전에 눈이 멀었지만, 이제 나는 보오이다.” 요시아를 덫에 걸리게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에게 더 물어 보려고 애썼다: “도대체 어떻게 그가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그가 실제로 너에게 무슨 일을 하였느냐? 그가 무어라고 너에게 이르더냐? 그가 너에게 그를 믿으라고 요구하더냐?”

164:4.10 (1814.6) 요시아는 얼마큼 성급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모든 것이 일어났는지 그대로 나는 여러분에게 일렀는데 내 증언을 믿지 않았다면, 왜 다시 듣고자 하시오이까? 혹시 여러분도 그의 제자가 되고 싶사오이까?” 이렇게 요시아가 말하자, 산헤드린은 혼란 속에 거의 난폭하게 해산되었는데, 지도자들이 요시아 앞에 달려와서 성나서 소리쳤기 때문이다: “너는 이 사람의 제자인 것에 관하여 떠들어도 좋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이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신 줄 알지만, 이 사람 예수에 대해서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우리는 모르노라.”

164:4.11 (1814.7) 그러자 의자 위에 올라서서 요시아는 들을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널리 외쳤다: “들으소서, 온 이스라엘의 선생이라 주장하는 여러분, 내가 선언하오니, 여러분은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고백하면서, 그래도 여러분이 들은 증언으로부터 그가 내 눈을 뜨게 한 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아시오니, 여기에 큰 놀라운 일이 있소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그런 일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은 오직 참된 예배자―거룩하고 올바른 사람―의 요청을 받고서야 그런 일을 하리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아오이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세상이 비롯된 뒤로, 날 때부터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했다는 소리를 여러분이 들어본 적이 없소이다. 그러면 여러분 모두가 나를 보시고, 예루살렘에서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깨달으소서! 여러분께 말씀드리오니, 이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이 일을 할 수 없소이다.” 그리고 산헤드린 회원들은 진노하고 뒤죽박죽이 되어 떠나면서 그에게 소리질렀다: “너는 온전히 죄 속에 태어났는데, 이제 네가 주제넘게 우리를 가르치느냐? 어쩌면 너는 날 때부터 소경이 아니었는가 보다. 그리고 네 두 눈이 이 안식일에 뜨게 되었어도, 이것은 악마 왕의 힘으로 되었느니라.” 그들은 요시아를 추방하려고 당장에 회당으로 갔다.

164:4.12 (1815.1) 요시아는 예수와 치유의 성질에 대하여 어렴풋한 생각을 가지고 이 재판에 들어갔다. 온 이스라엘의 이 최고 법정 앞에서 그가 아주 영리하고 용감하게 말한 대담한 증언의 대부분은 재판이 그렇게 불공정하고 부당한 길로 진행됨에 따라서, 그의 머리 속에서 발전되었다.

5. 솔로몬의 회랑에서 가르치다

164:5.1 (1815.2) 안식일을 어기는 이 산헤드린 회의가 성전의 한 방에서 진행되는 동안 내내, 예수는 가까이서 걷고 있다가 솔로몬의 회랑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산헤드린 앞으로 호출받고 거기서 좋은 소식, 곧 하나님의 나라에서 신의 아들이 되는 자유와 기쁨을 그들에게 일러줄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부르러 사람을 보내기가 두려웠다.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이처럼 갑자기 대중 앞에 나타날 때 그들은 언제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무척 열심히 찾던 바로 그 기회를 예수가 이제 주었지만, 산헤드린 앞에 증인으로도 그를 불러오기가 두려웠고, 체포하기는 더군다나 두려웠다.

164:5.2 (1815.3) 이때는 예루살렘에서 한겨울이었고, 사람들은 솔로몬의 회랑에서 반 피난처를 찾았다. 예수가 남아 있는 동안에, 군중은 그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고, 그는 두 시간이 넘도록 이들을 가르쳤다. 유대인 선생들 가운데 더러는 대중 앞에서 그에게 질문하여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은 우리를 궁금한 채로 두려 하나이까? 당신이 메시아라면, 어째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이르지 아니하나이까?” 예수는 말했다: “바로 나와 내 아버지에 대하여 여러 번 너희에게 일렀으나 너희는 나를 믿으려 하지 않는도다.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위하여 증언함을 깨달을 수 없느냐? 너희 중에 많은 사람이 나를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떼에 속하지 않는 까닭이라.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은 오직 진리를 간절히 찾고 올바름을 목마르게 찾는 자만 끌어당기느니라. 내 양은 내 목소리를 듣고,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나는 영생을 주노라. 저희는 결코 멸망하지 않고 아무도 저희를 내 손에서 잡아채지 못하리라. 이 아이들을 내게 주신 아버지는 모든 사람보다 크시고, 그래서 아무도 저희를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더러 예수에게 던질 돌을 주우려고 성전을 아직 짓고 있는 데로 달려나왔으나, 믿는 사람들이 막았다.

164:5.3 (1815.4) 예수는 가르침을 계속했다: “아버지로부터 나는 사랑의 일을 많이 너희에게 보여주었더니, 그래서 이 좋은 일 가운데 어느 것 때문에 너희가 나를 돌로 칠 생각을 하는가 이제 묻고자 하노라.” 그리고 나서 바리새인들 가운데 하나가 대답했다: “아무런 선한 일 때문이 아니라, 네가 사람이면서 감히 너 자신을 하나님과 같게 만드는 까닭에, 신성 모독으로 우리가 너를 돌로 치고자 하노라.” 그리고 예수는 대답했다: “하나님이 나를 보냈다고 내가 너희에게 선언할 때 너희가 나를 믿지 않으려 한 까닭에,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신성 모독으로 고발하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나를 믿지 말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 너희가 나를 믿지 않더라도, 너희는 그 일을 믿으리라 생각하노라. 그러나 내가 선포하는 것을 너희가 확신하도록 내가 다시 주장하노니, 아버지는 내 안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거하시는 것 같이, 이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 안에 나도 마찬가지로 거하리라.”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자, 그들 중 여럿이 그에게 던지려고 돌을 집으려고 달려 나왔으나 예수는 성전 구역을 통해서 나갔다. 산헤드린 회의에 참석했던 나다니엘과 토마스를 만나고서, 그들과 함께 요시아가 회의실로부터 나올 때까지 성전 가까이에서 기다렸다.

164:5.4 (1816.1) 예수와 두 사도는 요시아가 회당에서 추방되었다는 말을 듣기까지 집에 있는 요시아를 찾으러 가지 않았다. 그들이 이 집으로 왔을 때, 토마스는 뜰에서 그를 불러냈고 예수는 그에게 말했다: “요시아야, 너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느냐?” 요시아는 대답했다, “내가 그를 믿을 수 있도록 그가 누구인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고 예수는 말했다: “너는 그를 보았고 그의 말도 들었으며, 그는 이제 너에게 말하는 자이라.” 요시아가 말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그리고 엎드리며 요시아는 경배했다.

164:5.5 (1816.2) 요시아는 그가 회당에서 추방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에 크게 낙심했지만, 펠라의 캠프로 그들과 함께 가려고 즉시 준비해야 한다고 예수가 지시했을 때 크게 기운을 얻었다. 생각이 단순한 이 예루살렘 사람은 정말로 유대인 회당에서 추방되었지만, 그 시절과 세대의 영적 귀족들과 사귀도록 한 우주의 창조자가 그를 인도하는 것을 보라.

164:5.6 (1816.3) 이제 예수는 예루살렘을 떠났고, 이 세상을 떠나려고 준비할 때가 가깝기까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두 사도와 요시아와 함께, 주는 펠라로 돌아갔다. 요시아는 주가 베푸신 기적의 보살핌을 받고서 열매를 많이 맺게 된 한 사람인 것이 입증되었는데, 왜냐하면 그가 하늘나라 복음을 일생토록 전파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 165 편 페레아 선교가 시작되다

유란시아서

제 165 편

페레아 선교가 시작되다

165:0.1 (1817.1) 세례자 요한은 나지르인이요 한때 엥게디에서 나지르인 학교의 우두머리였다. 아브너는 그의 열두 사도 중에서 예전에 우두머리였고, 지금은 하늘나라 사자 70인의 우두머리이다. 그는 서기 30년 1월 3일 화요일에 동료들을 불러 모으고, 페레아의 모든 도시와 마을로 선교 사명을 주어 보내기 전에 그들에게 마지막 지침을 주었다. 이 페레아 선교는 거의 석 달 동안 이어졌고 주의 마지막 사명이었다. 이 일을 하다가 예수는 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육체를 입고서 마지막 체험을 거쳤다. 70인은 예수와 열두 사도의 정기적 수고로 지원을 받으며, 다음 도시와 마을에서, 또 그 밖에 50여개 되는 다른 마을에서 일했다: 자폰ㆍ가다라ㆍ마캇ㆍ아르벨라ㆍ라마트ㆍ에드레이ㆍ보소라ㆍ카스핀ㆍ미스페ㆍ게라사ㆍ라가바ㆍ수콧ㆍ아마투스ㆍ아담ㆍ페누엘ㆍ카피톨리아ㆍ디온ㆍ하티타ㆍ가다ㆍ필라델피아ㆍ욕베하ㆍ길르앗ㆍ베드님라ㆍ티루스ㆍ엘레알라ㆍ리비아스ㆍ헤스본ㆍ칼릴호ㆍ베스포ㆍ시팀ㆍ시브마ㆍ메데바ㆍ베스메온ㆍ아레오폴리스ㆍ아로어.

165:0.2 (1817.2) 이 페레아 여행을 통해서 계속, 이제 62명이 되는 여인단은 병자 보살피는 일을 대부분 인계받았다. 이때는 하늘나라 복음에서 상급의 영적 모습이 발달하는 마지막 기간이었고, 따라서 기적을 행하는 일이 없었다. 팔레스타인의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예수의 사도와 제자들이 이렇게 철저히 일하지 않았고, 어느 다른 지역에서도 상류 시민 계급이 이렇게 널리 주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65:0.3 (1817.3) 유대인이 유다 마카비 시절에 대체로 이 지역에서 이주해 나갔으므로, 이 시절에 페레아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거의 똑같이 반반이었다. 페레아는 온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아름답고 그림 같은 지방이었다. 유대인은 여기를 일반적으로 “요단강 건너 땅”이라 언급하였다.

165:0.4 (1817.4) 이 기간 내내, 예수는 펠라의 캠프에서, 그리고 70인이 가르치고 전도했던 여러 도시에서 그들을 도우려고 열두 사도와 같이 여행하는 데 시간을 나누어 썼다. 예수가 그렇게 지시하지 않았지만, 아브너의 지휘 하에서 70인은 모든 신자에게 세례를 주었다.

1. 펠라 캠프에서

165:1.1 (1817.5) 1월 중순이 되어, 1천 2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펠라에 모였다. 예수는 그 캠프에 거할 때 하루에 적어도 한 번 이 군중을 가르쳤고, 비가 내려 방해받지 않으면 보통 아침 9시에 말씀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날마다 오후에 가르쳤다. 예수는 열두 사도와 다른 상급 제자들과 함께, 질문하고 응답하는 보통 시간을 위하여 저녁때를 예정해 놓았다. 저녁 집단은 평균 50명쯤 되었다.

165:1.2 (1817.6) 3월 중순에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행을 시작했고, 이때가 되자 4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아침마다 예수나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큰 무리를 이루었다. 주는 그가 전하는 말씀에 대한 관심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땅에서 일을 마치기로 작정했고, 그 절정은 하늘나라의 진보에서 이 둘째 단계, 곧 기적이 없는 단계에서 가장 높이 도달한 정점이었다. 군중의 4분의 3은 진리를 찾는 사람이었으나, 의심하고 헐뜯는 많은 사람과 함께, 예루살렘과 다른 곳에서 온 큰 무리의 바리새인이 또한 자리에 있었다.

165:1.3 (1818.1) 예수와 열두 사도는 펠라 캠프에 모인 군중에게 시간을 많이 썼다. 열두 사도는 현장 작업에 거의 또는 아예 눈을 돌리지 않았고, 겨우 아브너의 동료들을 가끔 찾아보려고 예수와 함께 나갔을 뿐이다. 아브너는 페레아 구역에 아주 익숙했는데, 여기가 그의 옛 선생, 세례자 요한이 하던 일의 대부분을 했던 현장이었다. 페레아 선교가 시작된 뒤에, 아브너와 70인은 결코 펠라 캠프로 돌아오지 않았다.

2. 선한 목자에 대한 설교

165:2.1 (1818.2) 헌당 축제가 끝나고 유대인 권력자들의 관할 구역에서 예수가 서둘러 떠났을 때, 3백 명이 넘는 예루살렘 사람, 곧 바리새인과 다른 사람들의 일행이 북쪽으로, 펠라까지 예수를 따라갔다. 열두 사도가 듣는 가운데, 그리고 이러한 유대인 선생과 지도자들이 있는 앞에서, 예수는 “선한 목자”에 대하여 설교했다. 반시간 동안 비공식 토론이 있은 뒤에, 1백 명쯤 되는 무리에게 예수는 말했다:

165:2.2 (1818.3) “오늘밤에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도다. 너희 가운데 여럿이 내 제자요, 더러는 나를 몹시 미워하는 적인 까닭에, 너희 각자가 마음 속에 와 닿는 것을 스스로 가지도록 내가 비유로 가르치리라.

165:2.3 (1818.4) “오늘 밤 여기 내 앞에는, 나를 위하여, 그리고 이 하늘나라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죽을 사람들이 있고, 이들 가운데 더러는 다가오는 앞날에 그렇게 몸을 바치리라. 여기에 또한 너희 중에 더러, 전통의 노예가 있으니, 예루살렘에서부터 나를 따라와서 어둠과 거짓에 빠진 너희 지도자들과 함께 사람의 아들을 죽이려 하는도다. 육체를 입고 내가 지금 사는 인생은 너희 참된 목자와 거짓 목자들 모두를 판단하리라. 거짓 목자가 눈이 멀었으면 아무 죄가 없을 터이나 너희는 본다고 우기느니라. 너희는 이스라엘에서 선생이라고 고백하니, 그런즉 너희의 죄가 너희에게 남아 있느니라.

165:2.4 (1818.5) “참 목자는 위험할 때 양떼를 밤에 우리 안으로 모으느니라. 아침이 왔을 때 문으로 우리 속에 들어가며, 그가 부를 때 양들은 그 목소리를 알아듣느니라. 문이 아니라 다른 수단으로 양 우리에 들어가는 목자(牧者)는 모두 도둑이요 강도이라. 참 목자는 문지기가 문을 열어준 뒤에 우리로 들어가며, 양들이 그 목소리를 알아보므로 그의 말을 듣고 나오느니라. 그의 양들이 이렇게 나왔을 때, 참 목자는 양들 앞에 가며, 그는 길을 인도하고 양들은 따르느니라. 양들이 따르는 것은 그의 목소리를 아는 까닭이요 낯선 자를 따르지 아니하리라. 양들은 낯선 자를 피하여 달아나리니, 그의 목소리를 알지 못함이라. 여기 우리 주위에 모인 이 군중은 목자 없는 양 같으나, 우리가 저희에게 말할 때 저희는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우리 뒤를 따라오며, 적어도 진리를 간절히 찾고 올바름을 목마르게 찾는 자는 그렇게 하느니라. 너희 가운데 더러는 내 양떼에 속하지 않으니, 너희는 내 목소리를 알지 못하고 나를 따르지 않느니라. 너희가 거짓 목자이매, 양들이 너희 목소리를 알지 못하고 너희를 따르지 아니하리라.”

165:2.5 (1819.1) 예수가 이 비유를 마쳤을 때, 아무도 그에게 묻지 않았다. 얼마 시간이 지난 뒤에, 그는 다시 말씀을 시작하고 그 비유를 논하기 시작했다:

165:2.6 (1819.2) “내 아버지의 양떼에게 조수(助手) 목자가 되고자 하는 너희는 자격 있는 지도자이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좋은 먹이로 양떼를 먹여야 하느니라. 양떼를 푸른 풀밭으로, 고요한 물가로 이끌지 아니하면 너희는 참 목자가 아니라.

165:2.7 (1819.3) “이제, 너희 중에 더러 이 비유를 너무 쉽게 알아들을까 저어하여 내가 선언하리니, 나는 아버지의 우리까지 이끄는 문이요, 동시에 아버지의 양떼에게 참 목자이라. 내가 없이 우리로 들어가고자 하는 목자는 누구나 실패하겠고, 양들은 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리라. 나와 함께 봉사하는 자들과 더불어, 나는 문이라. 내가 만들고 예비한 방법으로 영원한 길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고 계속하여 파라다이스의 영원한 풀밭에 이를 수 있으리라.

165:2.8 (1819.4) “그러나 나는 또한 양들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까지도 버리는 참 목자이라. 도둑은 오로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우리로 침입하지만, 내가 온 것은 너희가 모두 생명을 얻고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고자 함이라. 삯꾼은 위험이 생길 때 달아나고 양들이 흩어져 죽게 버려두리라. 그러나 참 목자는 늑대가 올 때 달아나지 아니하리라. 참 목자는 제 양떼를 지키고, 필요하다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 친구와 적들에게 이르노니, 나는 참 목자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알며, 위험에 부닥쳐서 나는 달아나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이 봉사를 내가 마치겠고, 아버지가 내게 지키라고 맡긴 양떼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165:2.9 (1819.5)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많은 다른 양이 있나니, 이 말씀은 이 세상에서만 참인 것이 아니라. 이 다른 양들도 내 목소리를 듣고 알고, 저희가 모두 한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들의 한 형제 단체로 모이게 하리라고 나는 아버지께 약속하였노라. 그리고 나서 너희 모두가 한 목자, 참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모두가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인정할지니라.

165:2.10 (1819.6) “그래서 어찌하여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고 그의 양떼를 모두 이 땅에서 내 손에 지키라고 맡기셨는지 너희가 알지니라. 내가 양의 우리를 지키는 일을 그르치지 않고 내 양들을 버리지 않으며, 필요하다면 다양한 양떼에게 봉사하는 데 서슴지 않고 목숨 버릴 것을 아버지가 아시는 까닭이라. 그러나 잘 들으라, 내가 목숨을 버리면 다시 목숨을 찾으리라. 어떤 사람이나 어떤 다른 지음받은 존재도 내 목숨을 가져갈 수 없느니라. 나는 내 목숨을 버릴 권리와 능력이 있고 다시 찾을 능력과 권리가 있노라. 너희는 이것을 알 수 없어도, 이 세상이 있기도 전에 나는 아버지로부터 그런 권한을 받았느니라.”

165:2.11 (1819.7)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예수의 사도들은 헛갈리고 제자들은 놀랐으며, 한편 예루살렘과 그 근처에서 온 바리새인들은 밤에 나가서 말했다. “저 자는 미쳤든지 아니면 악마가 들렸구나.” 그러나 어떤 예루살렘 선생들조차 말했다: “저는 권한을 가진 사람처럼 말씀하시니라. 게다가 악마에 들린 자가 날 때부터 소경인 자의 눈을 뜨게 하고, 이 사람이 행한 모든 놀라운 일을 하는 것을 누가 언제라도 보았더냐?”

165:2.12 (1819.8) 이튿날 아침에 이 유대 선생들 가운데 반쯤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고, 나머지 반은 절망에 빠져 예루살렘과 집으로 돌아갔다.

3. 펠라에서 하신 안식일 설교

165:3.1 (1819.9) 1월말이 되어서, 안식일 오후의 군중은 거의 3천 명을 헤아렸다. 1월 28일 토요일에, “신뢰와 영적 준비”에 대하여 예수는 기억에 남을 설교를 했다. 시몬 베드로가 서언을 마친 뒤에, 주는 말씀했다:

165:3.2 (1820.1) “여러 번 내 사도와 제자들에게 이른 것을 이제 이 군중에게 선언하노라.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할지니, 그 누룩은 위선이요 편견 속에 태어나고 전통의 사슬에 묶여 육성되었느니라. 하지만 이 바리새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마음이 정직하고, 저희 가운데 더러는 내 제자로서 여기에 머무르고 있느니라. 얼마 안 있어 너희 모두가 내 가르침을 알아들으리니, 드러내지 말라고 감춘 것이 이제 하나도 없는 까닭이라. 너희에게 이제 감추어진 것은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육체를 입은 사명을 마쳤을 때, 다 알게 되리라.

165:3.3 (1820.2) “우리의 적들이 이제 몰래 어둠 속에서 계획하는 것들이 곧, 금방, 빛 속에 드러나고 집 꼭대기에서 선포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친구들이여, 저희가 사람의 아들을 죽이려고 애쓸 때, 저희를 두려워 말라. 비록 몸을 죽일 수 있더라도 그 뒤에 너희에게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에게 타이르노니,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아무도 두려워 말고, 모든 불의(不義)로부터 너희를 구원하고 한 우주의 심판석 앞에 너를 티없이 내놓을 힘을 가진 그를 아는 것을 기뻐하라.

165:3.4 (1820.3) “참새 다섯 마리가 동전 두 잎에 팔리지 아니하느냐? 그래도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푸르르 날 때 그 새들 가운데 하나도 모든 생명의 근원인 아버지가 모르고서 존재하지 않느니라. 수호 천사들은 너희 머리의 바로 그 털도 다 세었느니라. 이 모두가 참말이면, 어찌하여 너희가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많은 하찮은 일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두려워 말라, 너희는 참새 여럿보다 훨씬 더 값이 있느니라.

165:3.5 (1820.4) “사람들 앞에서 내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할 용기를 가졌던 너희 모두를 머지 않아 내가 하늘의 천사들 앞에서 인정하리라.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내 가르침의 진리를 일부러 부인하는 자는 하늘의 천사들 앞에 서기도 전에, 운명의 천사들이 부인하리라.

165:3.6 (1820.5) “사람의 아들에 대하여 너희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용서받으리라. 그러나 하나님을 주제넘게 모독하는 자는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지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면서 악의 힘으로 돌리는 데까지 갈 때, 그렇게 고의로 모반하는 자는 도저히 죄의 용서를 얻지 못하리라.

165:3.7 (1820.6) “우리의 적들이 여러 회당장과 다른 높은 권력자들 앞에 너희를 끌고 올 때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 말고, 저희의 물음에 어찌 대답할까 걱정하지 말지니, 너희 안에 거하는 영이 하늘나라 복음의 명예를 위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바로 그 시각에 너희를 분명히 가르치리라.

165:3.8 (1820.7) “너희는 결심의 골짜기에서 얼마나 오래 머무르겠느냐? 너희는 어찌하여 두 의견 사이에서 멈추느냐? 어찌하여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그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좋은 소식을 망설이고 받아들이지 못하느냐? 우리가 너희의 영적 유산을 기쁘게 받아들이라고 너희를 설득하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리겠느냐? 아버지를 너희에게 드러내고 너희를 아버지께 인도하려고 내가 이 세상으로 왔노라. 처음 일은 내가 하였으나 다음 일은 너희의 찬성 없이 하면 안 되느니라. 아버지는 어떤 사람도 하늘나라로 들어가라 결코 강요하지 않느니라. 초청은 늘 이러했고 언제나 그러하리라: 누구든지 마시고 싶은 자는 와서 생명의 물을 아낌없이 마시라.”

165:3.9 (1820.8) 예수가 말씀을 마쳤을 때, 많은 사람이 요단강에서 사도들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나섰고, 그동안에 예수는 남아 있는 사람들의 질문에 귀를 기울였다.

4. 유산을 나누기

165:4.1 (1821.1) 사도들이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동안에, 주는 남아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했다. 어떤 젊은이가 말했다: “주여, 내 아버지는 많은 재산을 나와 내 형제에게 남겨놓고 돌아가셨지만, 내 형제는 내 몫을 주려 하지 않나이다. 그러면 당신이 내 형제에게 이 유산(遺産)을 나와 함께 나누라고 명하시겠나이까?” 물질에 머리를 쓰는 이 젊은이가 그러한 사무에 관한 문제를 의논하려고 가져온 것을 주는 가볍게 분개했지만, 나아가서 연장된 가르침을 주려고 그 기회를 이용했다. 예수는 말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에게 분배하는 자로 삼았느냐? 이 세상의 물질적 일에 내가 관심을 가진다는 생각을 네가 어디서 얻었느냐?” 그리고 나서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말했다: “조심하여 너희는 탐욕에 매이지 말라. 사람의 생명은 소유물의 풍부함에 있지 않느니라. 행복은 재산의 힘에서 생기지 않고 기쁨은 부(富)에서 솟아나지 않느니라. 재산 자체는 저주가 아니나 재산을 사랑함은 흔히 이 세상의 물건에 그토록 마음을 쏟도록 이끌며, 그래서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적 실체의 아름다운 매력과 하늘에서 영생하는 기쁨을 혼이 깨닫지 못하게 되느니라.

165:4.2 (1821.2) “풍성하게 거두는 땅을 가진 어떤 부자(富者)의 이야기를 너희에게 일러주리라. 그가 대단히 부유하게 되고 나서, 비로소 스스로 따지며 말하였더라: ‘내가 모든 재산으로 무엇을 할꼬? 이제 나는 너무 많이 가져서 재산을 쌓아둘 곳이 없구나.’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나서, 그가 말하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창고들을 허물고 더 큰 것들을 지으리라. 그러면 나는 이렇게 내 과일과 물건을 쌓을 자리가 풍부히 있으리라. 그리고 나서 내 혼에게 말할 수 있노라, 혼이여, 너는 여러 해 동안 많은 재산을 쌓았구나. 이제 편안히 쉬라, 먹고 마시고 즐기라. 네가 부자요 물건이 많아졌음이라.’

165:4.3 (1821.3) “그러나 이 부자는 또한 어리석었으니, 그의 정신과 몸의 물질적 필요를 마련하면서, 영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지 못하였더라. 그리고 나서도 쌓아 놓은 재산을 소비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도록 정해졌으니, 바로 그날 밤에 그의 혼이 요구되었음이라. 그날 밤에 집에 강도들이 들어 그를 죽였고, 저희가 창고를 노략하고 나서 남은 것을 불태웠더라. 그리고 강도들이 놓친 재산을 놓고 상속자들끼리 싸움에 빠졌더라. 이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땅에서 보물을 쌓았어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부자가 아니었도다.”

165:4.4 (1821.4) 이렇게 예수는 그 젊은이, 그리고 상속 문제를 다루었는데, 예수는 그 젊은이의 문제가 탐욕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주는 간섭하지 않았을 터이니, 제자는커녕 사도들의 세상 문제에도 결코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65:4.5 (1821.5) 예수가 이 이야기를 마치자, 다른 사람이 일어서서 물었다: “주여, 제가 알기에, 당신의 사도들은 당신을 따르려고 이 세상의 재산을 모두 팔았고, 저희는 에센인처럼 모든 것을 공동(共同)으로 가지지만, 당신은 제자인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로 하기를 바라시나이까? 정직한 재산을 소유하는 것이 죄니이까?” 예수는 이 물음에 대답했다: “친구여, 정당하게 번 재산을 가지는 것은 죄가 아니라. 그러나 물질적으로 소유한 재산을 보물로 다루면 죄이니, 그것이 너희의 마음을 빼앗고 하늘나라의 영적 추구에 마음을 쏟지 못하도록 애정을 다른 데로 돌릴 수도 있느니라. 너희의 보물이 하늘에 있다면, 땅에서 정직한 재산을 가져도 아무 죄가 없으니, 아끼는 물건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을 것임이라. 사람을 탐욕과 이기심으로 이끄는 재산, 그리고 이 세상의 재물을 풍부히 소유하면서, 하늘나라 일에 온 정성을 바치는 자를 지원하는 데 아주 넉넉히 기부하는 자가 청지기 정신으로 지키고 처분하는 재산,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느니라. 너희 가운데 여기 돈 없이 지내는 많은 사람을 저 건너 텐트 도시에서 먹이고 잠을 재우나니, 이는 재산 있는 관대한 남녀들이 너희의 주인 다윗 세베대에게 그런 목적으로 자금을 주었기 때문이라.

165:4.6 (1822.1) “그러나 결국은 재산이 오래 가지 않음을 결코 잊지 말라. 부를 사랑하는 마음은 영적 눈을 흐리게 하고 멀게 만드는 일이 너무 흔하니라. 재산이 너희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되는 위험을 간과하지 말라.”

165:4.7 (1822.2) 예수는 낭비, 게으름, 사람의 가족에게 물리적 필수품을 마련하지 않는 무관심, 또는 자선금에 의존하기를 가르치거나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물질적인 현세의 일보다 혼의 복지와 하늘나라에서 영적 성품의 진보가 우선이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165:4.8 (1822.3) 그리고 나서 세례 주는 것을 구경하려고 사람들이 강가로 내려가는 동안에, 처음 사람이 예수가 그를 거칠게 다루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유산에 대하여 물으려고 예수에게 개인적으로 왔다. 다시 그의 말을 듣고 나서 주는 대답했다: “이 사람아, 너의 탐욕스러운 성향에 빠지려고 어찌하여 오늘 같은 날에 생명의 빵 먹을 기회를 놓치느냐? 너의 불평을 회당의 법정에 가서 호소하면 유대인의 상속법이 공정하게 시행될 것을 모르느냐? 내가 할 일은 너의 하늘 유산에 대하여 네가 꼭 알도록 하는 것과 상관 있음을 깨달을 수 없느냐? 너는 성서를 읽지 못하였느냐? ‘걱정하고 많이 아낌으로 부유하게 된 자가 있나니, 이것이 그가 보상받는 몫이라: 내가 휴식을 찾았고 이제 내 물건을 계속 먹을 수 있으리라 하고 말하되, 그래도 그는 시간이 지나면 무슨 일이 닥칠지, 또한 그가 죽을 때 이 모든 것을 남에게 두고 가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하더라.’ 너는 계명을 읽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탐내지 말라.’ 또 ‘저희가 먹고 배를 채우고 살이 쪘으며, 그리고 나서 저희가 다른 신들에게로 돌이켰더라.’ 시편(詩篇)에서 ‘주는 탐욕 있는 자를 싫어하시니라,’ 그리고 ‘올바른 사람이 조금 가진 것이 허다한 악한 자의 재산보다 나으니라’하는 것을 너는 읽지 아니하였느냐? ‘재산이 늘어나면, 거기에 너희 마음을 돌리지 말라.’ ‘부자는 제 재산을 자랑하지 말지니라’ 예레미야가 말한 곳을 읽었느냐? 그리고 ‘입으로 저희는 사랑을 표시해도, 마음은 자신의 이익에 가 있느니라’ 했을 때 에스겔은 진실을 말하였도다.”

165:4.9 (1822.4) 예수는 그 젊은이를 떠나보내면서 말했다: “이 사람아, 네가 온 세상을 얻고 바로 너의 혼을 잃으면 너에게 무슨 소득이 되겠느냐?”

165:4.10 (1822.5) 가까이 서 있던 다른 사람이 부자들이 심판의 날에 어떻게 견딜까 묻자, 예수는 대답했다: “나는 부자나 가난한 자를 재판하러 오지 않았으나 사람들이 사는 그 인생이 모든 것을 판결하리라. 심판할 때 다른 무슨 일이 부자들과 상관되든지, 큰 재산을 얻는 사람은 모두, 적어도 세 가지 물음에 대답하여야 하나니, 이러하니라:

165:4.11 (1822.6) “1. 얼마나 많은 재산을 쌓았느냐?

165:4.12 (1822.7) “2. 이 재산을 어떻게 얻었느냐?

165:4.13 (1822.8) “3. 네 재산을 어떻게 썼느냐?

165:4.14 (1822.9) 그리고 나서 예수는 저녁 식사 전에 한동안 쉬려고 자기 텐트로 들어갔다. 사도들이 세례 주기를 마쳤을 때 그들도 왔고, 땅에 있는 재산과 하늘에 있는 보물에 관하여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예수는 잠들어 있었다.

5. 재산에 관하여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

165:5.1 (1823.1) 그날 저녁 식사 뒤에, 예수와 열두 사도가 날마다 있는 회의를 하려고 모였을 때 안드레가 물었다: “주여, 우리가 신자들에게 세례 주는 동안에, 남아 있는 군중에게 여러 말씀을 하셨고 우리는 듣지 못했나이다.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같은 말씀을 기꺼이 되풀이하시겠나이까?” 안드레의 요청에 따라 예수는 말했다:

165:5.2 (1823.2) “그래, 안드레야, 재산, 그리고 자신을 부양하는 이 문제에 관하여 너희에게 이르겠으나 너희 사도들에게 이르는 말은 제자들과 군중에게 주는 말과 얼마큼 달라야 하니, 나를 따르는 것 뿐 아니라, 하늘나라 대사로 세움받으려고 너희가 모든 것을 버렸음이라. 이미 너희는 몇 년의 체험을 가졌고, 아버지가 너희를 버리지 않을 것을 알며, 너희는 그의 나라를 선포하느니라. 너희는 하늘나라에 봉사하는 데 인생을 바쳤느니라. 그러므로 현세에 생활에 쓰이는 물건에 대하여 무엇을 먹을까, 너희 몸을 위해서도 무엇을 입을까 안달하거나 걱정하지 말라. 혼의 복지는 먹고 마시는 것보다 더 귀중하며, 영적 진보는 걸치는 것의 필요보다 훨씬 중요하니라. 너희의 먹을 것이 확실히 있는가 의심이 들 때, 까마귀를 생각하라. 까마귀는 씨 뿌리지도 거두지도 않고 창고나 헛간도 없거늘, 그래도 먹이를 구하는 까마귀마다 아버지가 먹이를 마련해 주시느니라. 너희는 허다한 새보다 얼마나 더 귀중한고! 게다가, 너희가 아무리 걱정하거나 근심해도 물질적 필요를 채우는 데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느니라.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키를 한 뼘이라도 더하거나 너희 목숨을 하루 연장할 수 있느냐? 그러한 문제들은 너희 손에 달려 있지 않거늘, 어찌하여 너희가 이런 문제들을 하나라도 걱정하느냐?

165:5.3 (1823.3) “백합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라. 백합은 수고하지 않고 실을 잣지도 않느니라. 그래도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든 영화(榮華)를 누리던 솔로몬조차 이 꽃들 가운데 하나처럼 입지 못하였도다. 오늘 살아 있어도 내일 꺾여 불 속에 던져질 들풀을 하나님이 그렇게 입히시거든, 하늘나라 대사(大使)인 너희를 얼마나 더욱 잘 입히시겠느냐. 아, 너희는 믿음이 적구나! 마음을 다하여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는 데 너희 몸을 바칠 때, 자신이나 너희가 버린 가족들을 어찌 먹여 살릴 수 있는가 의심하는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되느니라. 너희가 참으로 복음에 일생을 바치면, 너희는 복음에 따라 살지니라. 너희가 기껏해야 믿는 제자라면 너희는 자신의 먹을 것을 벌어야 하며, 또한 가르치고 전도하고 병 고치는 모든 사람을 부양하는 데 기여해야 하느니라. 먹을 것과 마실 것이 걱정이 되면, 너희는 그러한 필수품을 아주 부지런히 찾는 세상의 나라들과 어디가 다른지고? 이 모든 것이 필요한 줄을 아버지와 내가 아는 것을 믿으면서, 너희 일에 마음을 쏟으라. 이번을 마지막으로 내가 분명히 말하노니, 너희가 하늘나라 일에 일생을 바치면, 너희의 참 필요가 다 채워지리라. 더 큰 것을 구하라. 그리하면 그보다 작은 것들이 그 속에 있음을 발견하리라. 하늘의 것을 구하라. 그러면 땅의 것이 그 안에 들어 있으리라. 그림자는 분명히 알맹이를 따르느니라.

165:5.4 (1823.4) “너희는 작은 무리일 뿐이나, 믿음을 가지고, 두려움에 빠져 실수하지 않으면, 내가 선언하노니, 너희에게 이 하늘나라를 주는 것이 내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이라. 너희는 돈 주머니가 낡아지지 않는 곳, 아무 도둑이 들 수 없는 곳, 아무 좀이 먹을 수 없는 곳에 너희의 보물을 쌓았느니라. 내가 사람들에게 이른 것 같이,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으리라.

165:5.5 (1824.1) “그러나 너희 바로 앞에 놓인 일,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로 간 뒤에 너희에게 남겨준 일을 하면서, 너희는 뼈아프게 시련을 받으리라. 너희는 다 두려움과 의심을 경계해야 하느니라. 너희 하나하나가, 단단히 정신을 차리고 등불을 계속 밝히라. 너희는 결혼 잔치로부터 주인이 돌아오기를 지키는 사람들처럼 지키라. 그리하여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릴 때, 그에게 빨리 문을 열어줄 수 있으리라. 정신 차리고 지키는 그러한 종들이 그렇게 중대한 순간에 충성스러운 것을 알고 주인이 저희를 축복하느니라. 그리고 나서 주인은 저희를 앉게 하면서, 바로 주인이 종들에게 시중들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일생의 위기가 바로 눈앞에 닥쳤고, 경계하고 준비하는 것이 너희에게 마땅하니라.

165:5.6 (1824.2)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지 안다면 아무도 누가 제 집에 침입하도록 버려두지 않을 것을 너희가 잘 아느니라. 너희는 또한 자신을 위하여 지키라. 너희가 가장 의심하지 않는 시간에, 생각지 않는 방법으로 사람의 아들이 떠날 것임이라.”

165:5.7 (1824.3) 몇분 동안 열두 사도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 경고 가운데 더러는 전에 들은 적이 있지만, 이때 그들에게 닥친 배경에서 듣지는 않았다.

6. 베드로의 물음에 대한 대답

165:6.1 (1824.4) 그들이 앉아서 생각에 잠긴 동안, 시몬 베드로가 물었다: “당신은 이 비유를 우리에게, 당신의 사도들에게 하시나이까? 아니면 모든 제자를 위한 것이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165:6.2 (1824.5) “시험이 있을 때, 사람의 혼이 드러나느니라. 시련은 정말로 가슴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느니라. 종이 시험받고 충실함이 입증되었을 때, 집 주인은 그러한 종으로 하여금 집을 감독하라 세우고, 이 충실한 집사가 그의 자녀들을 먹이고 양육하도록 일을 처리할 것을 안심하고 믿느니라. 마찬가지로,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갔을 때 누구에게 내 아이들의 복지를 맡길 수 있는가 내가 곧 알게 되리라. 집의 주인이 참되고 단련받은 종으로 하여금 집안 사무를 감독하게 하는 것 같이, 나도 내 나라의 일을 집행하면서 이 시대의 시련을 견디는 자를 높이 세우리라.

165:6.3 (1824.6) “그러나 종이 게으르고, 마음 속에서 ‘내 주가 오는 것이 지연되는구나’ 비로소 말하고, 동료 종들을 잘못 다루고 술 취한 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 시작하면, 종이 그 주인을 기대하지 않는 시간에 주인이 와서 그가 충실하지 않음을 보고, 부끄럽게 내쫓으리라. 그런즉 갑자기, 뜻하지 않은 방법으로 방문할 그날을 위하여 너희가 준비하는 것이 좋으니라. 너희에게 많은 것을 주었음을 기억하라. 그런즉 너희에게 많은 것이 요구되리라. 불 같은 시련이 너희에게 가까이 다가오느니라.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고, 이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경계하노라. 너희는 땅에서 평화를 외쳐도 나의 사명은 사람의 물질적인 일에―적어도 한동안―평화를 가져오지 아니하리라. 한 집안에서 두 사람이 나를 믿고 세 사람이 이 복음을 저버리는 곳에 오직 분열이 생길 뿐이라. 친구와 친척과 사랑하는 자들이 너희가 외치는 복음 때문에 서로 대적할 운명을 가졌느니라. 이 신자들 하나하나가 마음 속에 크고 오래 가는 평화를 가질 것이 참말이기는 하여도, 모두가 기꺼이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영화로운 유산을 받을 때까지 땅에서 평화는 오지 아니하리라. 그래도 온 세상으로 가서, 모든 민족에게, 어른과 아이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라.”

165:6.4 (1824.7) 이것이 충만하고 바쁜 안식일의 끝이었다. 이튿날 아침, 예수와 열두 사도는 70인을 찾아보려고 북부 페레아의 여러 도시로 들어갔는데, 이들은 아브너의 감독 밑에서 이 지역에서 일하고 있었다.

제 166 편 마지막 북 페레아 방문

유란시아서

제 166 편

마지막 북 페레아 방문

166:0.1 (1825.1) 2월 11일부터 20일까지, 예수와 열두 사도는 북 페레아 지방의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둘러보았는데, 거기에는 아브너의 동료와 여인단의 단원들이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복음 사자들이 잘 해나가는 것을 발견했고, 예수는 기적과 이적이 따르지 않고 하늘나라의 복음이 퍼질 수 있다는 사실에 거듭 사도들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166:0.2 (1825.2) 페레아에서 석 달 동안의 이 전도 사업 전체가 열두 사도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진행되었고, 이때부터 계속하여, 복음은 예수의 인격보다 그의 가르침을 반영하였다. 그러나 추종자들은 그의 지침을 오래 따르지 않았는데, 예수가 죽고 다시 살아나신 뒤에 곧 그의 가르침에서 벗어났고, 예수의 신이자 사람의 인격이 베푼 기적의 개념과 영화로운 기억을 중심으로 초대(初代)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 라가바의 바리새인들

166:1.1 (1825.3) 2월 18일 토요일에 예수는 라가바에 있었고, 거기에는 나다니엘이라는 부유한 바리새인이 살았다. 전국에서 상당히 많은 동료 바리새인들이 예수와 열두 사도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안식일 아침에 그들 모두, 약 20명을 위하여 아침 식사를 차렸고 예수를 귀빈으로 초청했다.

166:1.2 (1825.4) 예수가 이 아침 식사에 도착할 때가 되자, 두세 율법사와 함께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이미 거기 있었고 식탁에 앉았다. 주는 손을 씻으러 물 대야에 가지 않고, 즉시 나다니엘의 왼쪽에, 자리에 앉았다. 많은 바리새인, 특히 예수의 가르침을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가 오직 깨끗이 할 목적으로 손을 씻으며, 순전히 예식인 이 행위를 몹시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손을 두 번 씻지 않고 그가 식탁으로 바로 온 것에 그들은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나다니엘은 바리새인 관습의 엄격한 요건을 주가 따르지 않은 것에 충격을 받았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이 하는 것처럼, 음식의 각 과정 뒤에나 식사가 끝난 뒤에도, 손을 씻지 않았다.

166:1.3 (1825.5) 나다니엘과 그의 바른 쪽에 어느 쌀쌀한 바리새인 사이에 상당히 수군거림이 있은 뒤, 그리고 주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이 여러 번 눈썹을 치켜올리고 비웃는 입을 삐죽거리고 난 뒤에, 예수는 마침내 말했다: “너희와 함께 빵을 나누고 아마도 하나님 나라의 새 복음을 선포하는 것에 관하여 물으려고 너희가 나를 이 집으로 초대했다고 생각하였노라. 그러나 너희가 독선적으로 예식을 충실히 지킴을 보이는 것을 구경하라고 나를 여기에 불렀음을 내가 깨닫노라. 너희가 이제 나에게 그 수고 베풀기를 마쳤으니, 다음으로 이 기회에 너희의 손님인 나에게 무엇으로 경의를 표하려느냐?”

166:1.4 (1826.1) 주가 이렇게 말씀을 마치자, 그들은 식탁을 내려다보며 말없이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는 말씀을 이었다: “너희 바리새인의 다수가 친구로서 나와 함께 여기 있고 더러는 내 제자이기도 하나, 바리새인의 대다수는 복음의 일이 막강하게 눈앞에 닥쳤어도 빛을 보고 진리를 인정하기를 끈덕지게 거절하는도다. 영적 음식 그릇이 지저분하고 더럽거늘, 얼마나 면밀하게 너희는 컵과 접시의 겉을 씻느냐! 너희는 경건하고 거룩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어김없이 보이지만, 마음 속의 혼은 독선과 탐욕과 착취, 그리고 온갖 모양의 영적 사악함이 가득하니라. 너희의 지도자들은 감히 사람의 아들을 죽이려고 모의(謀議)하고 계획까지 하느니라. 너희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겉치레 허식과 경건한 고백 뿐 아니라, 혼 속에 동기를 보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자선금을 내고 십일조 내는 것이 너희의 불의를 씻어주고 모든 사람의 재판관이 계신 앞에 너희가 깨끗이 설 수 있게 하리라 생각지 말라. 생명의 빛을 끈질기게 물리친 너희 바리새인은 아 ― 한탄이 있을진저! 꼼꼼히 십일조를 내고 보아란 듯 자선해도, 너희는 알면서 하나님의 벌을 비웃고 사랑의 계시를 저버리느니라. 너희가 이 하찮은 의무에 마음 쓰는 것은 괜찮아도, 더 중대한 이 요구 조건을 행하지 않은 채로 버려두지 않았어야 하느니라. 정의를 피하고, 자비를 가벼이 여기고, 진리를 저버리는 모든 사람은 아 ― 한탄이 있을진저! 아버지의 계시를 깔보면서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찾고 시장에서 아첨하는 인사를 몹시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166:1.5 (1826.2) 예수가 떠나려고 일어서려 했을 때, 식탁에 앉았던 율법사들 가운데 하나가 예수에게 말했다: “그러나 주여, 당신의 말씀 가운데 더러는 우리도 꾸짖나이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이나 율법사에게 좋은 것이 하나도 없나이까?” 예수는 서서 그 율법사에게 대답했다: “너희는 바리새인과 같이 무거운 짐, 지기에 괴로운 짐을 사람들의 어깨에 지우면서, 잔치에서 상석(上席)에 앉는 것과 긴 옷 입기를 즐기느니라. 사람들의 혼이 이 무거운 짐 밑에서 비틀거릴 때, 너희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 하지 않느니라. 조상(祖上)이 죽인 선지자들을 위하여 무덤 짓기를 크게 기뻐하는 너희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그리고 선지자들이 저희 시절에 한 일―하나님의 올바름을 선포하고 하늘 아버지의 자비로움을 드러내는 일―을 오늘날에 와서 하는 자들을 이제 너희가 죽이려 계획할 때, 조상이 한 일에 너희가 찬성함을 분명히 나타내느니라. 그러나 지난 모든 세대 가운데서, 선지자와 사도들이 흘린 피를 비뚤어지고 독선적인 이 세대에게 요구하리라. 서민들로부터 지식의 열쇠를 빼앗은 너희 율법사 모두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바로 너희가 진리의 길로 들어가기 싫어하면서, 동시에 너희는 거기로 들어가고자 하는 모든 다른 사람을 방해하고자 하는도다. 그러나 너희는 이렇게 하늘나라의 문을 닫을 수 없느니라. 들어갈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우리는 이 문을 열었고, 거짓 선생과 참되지 않은 목자의 편견과 거만이 이 자비의 입구를 닫지 못하리니, 저희는 흰 칠한 무덤 같아서, 겉으로 아름답게 보여도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모양의 영적 더러움이 가득하니라.”

166:1.6 (1826.3) 나다니엘의 식탁에서 말씀을 마쳤을 때, 예수는 음식을 들지 않고 집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 가운데 더러는 그의 가르침을 믿고 하늘나라에 가입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이 어둠의 길에서 버티었고, 예루살렘에서 산헤드린 앞에 그를 재판하고 판결하는 데 쓰일 수 있는 말씀을 얼마큼 주울까 하여, 그를 두고 보려고 더욱 굳게 마음먹었다.

166:1.7 (1827.1) 바리새인들이 각별히 주의한 것이 꼭 세 가지가 있었다:

166:1.8 (1827.2) 1. 엄격히 십일조를 바치는 관습.

166:1.9 (1827.3) 2. 정화(淨化) 율법을 빈틈없이 지킨다.

166:1.10 (1827.4) 3. 바리새인이 아닌 모든 사람과 상관하기를 피한다.

166:1.11 (1827.5) 이때 예수는 처음 두 관습이 영적으로 무익함을 밝히려고 애썼고, 한편 바리새인이 바리새인 아닌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교제하지 않으려 하는 태도를 꾸짖으려고 고안된 논평을 나중에 바로 이 사람들 중 여럿과 다시 정찬(正餐)을 드는 또 다른 기회를 위하여 남겨 두었다.

2. 열 명의 문둥병자

166:2.1 (1827.6) 이튿날 예수는 열두 사도와 사마리아의 경계 가까이 아마투스로 갔는데, 그 도시에 가까이 가자 이 근처에 머무르던 문둥병자 열 명의 무리와 마주쳤다. 이 무리 가운데 아홉은 유대인이요 하나는 사마리아인이었다. 대체로 이 유대인들은 이 사마리아인과 어떤 관계나 접촉도 삼갔을 터이지만, 같은 병을 앓는 것은 모든 종교적 편견을 극복하기에 넉넉하고도 남았다. 그들은 예수와 그가 전에 병을 고친 기적에 대하여 익히 들어 왔고, 이 여행에 열두 사도와 함께 주가 나들이할 때 예수가 도착하기로 예정된 시간을 70인이 발표하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에, 문둥병자 열 명은 이 무렵에 예수가 이 근처에서 나타날 것이라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곳, 도시의 교외에서 지키고 있었고, 거기서 예수의 눈을 끌고 고쳐달라고 부탁할 희망을 품었다. 예수가 그들 가까이 오는 것을 보았을 때, 문둥병자들은 감히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서서 그에게 소리쳤다: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보이소서, 우리의 병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고친 것 같이 우리를 고쳐주소서.”

166:2.2 (1827.7) 예수는 어째서 페레아의 이방인, 그리고 정통성이 떨어지는 유대인이 정통성이 높고 전통에 묶여 있는, 유대 지방의 유대인보다 70인이 전파한 복음을 더 기꺼이 믿으려 하는가 열두 사도에게 방금 설명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갈릴리 사람이, 그리고 사마리아인조차, 그들이 전한 말씀을 더욱 쉽사리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예수는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열두 사도는 오랫동안 업신여기던 사마리아인에 대하여 아직도 좀처럼 친근한 느낌을 기꺼이 품지 않았다.

166:2.3 (1827.8) 따라서, 열심당원 시몬이 문둥병자들 가운데서 사마리아인을 지켜보았을 때, 그는 이들에게 인사하려고 멈추지도 말고 지나쳐서 도시로 들어가도록 주를 유인하려고 애썼다. 예수가 시몬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 사마리아인이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면 어찌하겠느냐? 동료 인간을 우리가 판단해야 하느냐? 누가 알 수 있느냐? 우리가 이 열 사람을 온전히 만들면, 아마도 그 사마리아인이 유대인들보다 더욱 고마워하는 것이 드러나리라. 시몬아, 네 의견이 확실하다고 느끼느냐?” 시몬은 재빨리 대답했다: “당신이 저희를 깨끗케 하시면, 곧 알게 되리이다.” 그리고 예수는 대답했다: “그렇게 될지어다 시몬아, 그리하면 네가 사람들의 고마워하는 태도와 하나님이 사랑으로 베푸는 자비에 관하여 진실을 곧 알게 되리라.”

166:2.4 (1827.9) 문둥병자들에게 가까이 가면서 예수가 말했다: “너희가 온전히 되고 싶으면, 당장에 가서 모세의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가는 동안에 그들은 온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기가 치유되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사마리아인은 몸을 돌이켜 예수를 찾으러 가면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시작했다. 주를 찾아냈을 때, 그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서 그를 깨끗하게 해준 것에 감사를 드렸다. 다른 아홉 유대인도 그들이 치유되었음을 깨달았고, 그들이 깨끗하게 된 것을 고맙게 여겼어도, 사제들에게 몸을 보이려고 계속하여 길을 갔다.

166:2.5 (1828.1) 사마리아인이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린 채로 있으므로, 주는 열두 사도를 돌아보고, 특히 열심당원 시몬을 보고 말했다: “열 명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면 다른 아홉, 유대인들은 어디 있느냐? 오직 한 사람, 이 외국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돌아왔느니라.” 그리고 나서 그 사마리아인에게 말했다. “일어나서 네 길을 가라. 너의 믿음이 너를 온전히 만들었느니라.”

166:2.6 (1828.2) 낯선 사람이 떠나자 예수는 다시 사도들을 바라보았다. 눈을 땅에 떨군 열심당원 시몬 외에, 사도들은 모두 예수를 바라보았다. 열두 사람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예수도 말이 없었고, 그럴 필요가 없었다.

166:2.7 (1828.3) 비록 이 열 사람 모두가 그들이 문둥병이 있다고 정말로 믿었어도, 오직 네 사람이 그런 병을 앓았다. 나머지 여섯은 문둥병으로 잘못 생각했던 피부병을 치료받았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정말로 문둥병이 있었다.

166:2.8 (1828.4) 예수는 열두 사도에게 문둥병자들을 깨끗이 고친 것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명했고, 그들이 계속 아마투스로 들어가는 동안에 논평했다: “주인집의 아이들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지 않을 때에도, 어찌하여 저희가 받는 축복을 당연하게 여기는가 너희가 보는도다. 아버지가 저희의 병을 고쳐줄 때, 저희는 감사드리기를 게을리하는 것을 하찮게 여기느니라. 그러나 낯선 자들은 집주인한테서 선물을 받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저희에게 준 좋은 것들을 알아보고 감사드릴 수밖에 없느니라.” 아직도 사도들은 주의 말씀에 대꾸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3. 게라사에서 하신 설교

166:3.1 (1828.5) 예수와 열두 사람이 게라사에서 하늘나라 사자들과 이야기하는 동안에, 믿는 바리새인들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물었다: “주여, 적은 사람이, 아니면 많은 사람이 정말로 구원을 받으리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166:3.2 (1828.6) “너희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이 구원받으리라, 오직 입양된 이방인이 구원을 얻을 희망이 있다고 가르침을 받았느니라. 에집트를 떠난 모든 무리 가운데서 오직 갈렙과 요수아가 약속된 땅으로 살아서 들어갔다고 성서가 기록하므로, 너희 중에 더러는, 하늘나라를 추구하는 자 가운데 비교적 적은 수만 거기로 들어가는 문을 찾으리라 추리하였느니라.

166:3.3 (1828.7) “또한 너희 사이에 다른 속담이 있으니, 이것은 많은 진실을 담고 있느니라: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은 곧고 좁으며 거기로 인도하는 문은 마찬가지로 좁아서, 구원을 찾는 자 가운데 거의 아무도 이 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없도다. 너희는 또한,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고 거기로 들어가는 문은 너르며, 이 길을 가기를 택하는 사람이 많다 하는 가르침이 있느니라. 이 속담은 의미가 없지 않느니라. 그러나 내가 선언하노니, 구원은 먼저 너희 개인이 선택하는 문제이라. 생명의 길로 이끄는 문이 좁더라도, 들어가기를 진심으로 구하는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기에 넉넉히 넓으니, 내가 그 문임이라. 아들을 통해서 믿음으로 아버지를 찾고자 애쓰는 아이, 우주의 어떤 아이가 들어오는 것도 아들은 결코 막지 아니하리라.

166:3.4 (1829.1) “그러나 미숙하여 쾌락을 계속 추구하고 이기적 만족에 빠지면서 하늘나라로 들어가기를 미루려고 하는 모든 사람에게 여기에 위험이 있느니라: 영적 체험인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거절하였으므로, 다가올 시대에 더 좋은 길의 영화로움이 드러나게 될 때, 저희는 나중에 하늘나라로 들어가려고 애쓸 수도 있느니라. 그런즉 들어가는 문이 신성한 모습으로 드러났을 때, 인간의 모습을 입고 내가 왔을 때 하늘나라를 비웃던 자가 그리로 들어가기를 구하면, 그때 그러한 이기적인 모든 사람에게 내가 이르리라: 나는 너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노라. 이 하늘 시민권을 얻으려고 준비할 기회가 있었으나 너희는 모든 그러한 자비로운 제안을 물리쳤고, 문이 열린 동안에 오라는 초청을 다 물리쳤느니라. 구원을 거절한 너희에게 이제 문이 닫혔도다. 이기적 영광을 얻으려고 하늘나라로 들어가고자 하는 자에게 이 문은 열려 있지 않느니라. 구원은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값을 기꺼이 치르지 않는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마음 속 깊이, 너희가 아버지의 나라에 등을 돌렸을 때, ‘주여, 우리에게 문을 여소서, 우리도 하늘나라에서 크게 되고자 하나이다’하며 이 문 앞에 서서 두드리는 것은 지성과 몸에 소용이 없느니라. 그러면 내가 선언하리니, 너희는 내 양떼에 속하지 않느니라. 훌륭한 믿음으로 싸우고 땅에 있는 하늘나라에서 사심(私心) 없이 봉사한 값으로 상을 얻은 자 사이에 끼라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당신과 어울려 먹고 마시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리고 당신은 우리의 거리에서 가르치지 아니하였나이까?’하고 너희가 말할 때, 나는 다시 선언하리니, 영적으로 너희는 낯선 자이라, 우리는 땅에서 아버지의 자비를 베푸는 일에 함께 일하던 종이 아니었도다, 나는 너희를 모르노라. 그리고 온 땅의 재판관이 너희에게 이르리라: ‘불의의 일을 기뻐한 너희는 모두 우리를 떠나라.’

166:3.5 (1829.2) “그러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으로 영생(永生)을 찾으려고 성실하게 바라는 자는 누구나 분명히 그런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나 이 구원을 물리치는 너희는 아브라함 자손의 선지자들이, 영화롭게 된 이 나라에서 생명의 빵을 먹고 거기 있는 물로 원기를 찾으려고 이방 나라의 신자들과 함께 앉아 있는 것을 언젠가 보리라. 이처럼 영적 권능으로, 그리고 생생한 신앙으로 집요하게 공격하여 하늘나라를 차지할 자는 남에서 북에서, 동에서 서에서 오리라. 그리고 보라, 첫째인 많은 사람이 마지막이 되겠고, 마지막인 자가 여러 번 첫째가 되리라.”

166:3.6 (1829.3) 이것은 오래 되고 귀에 익은, 곧고 좁은 길의 속담을 정말로 이상하게 새로 해석한 말씀이었다.

166:3.7 (1829.4) 사도들과 많은 제자가 예수가 초기에 선언하신 말씀의 뜻을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너희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영에게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런데도 마음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이것이 영원히 참말이다: “보라, 사람들의 마음 문 앞에 서서 내가 두드리니,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서 저녁을 같이 들고 그에게 생명의 빵을 먹이리라. 우리는 한 가지 정신과 목적을 가지겠고, 마찬가지로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찾는, 길고도 열매가 풍성한 봉사를 하면서 늘 형제가 되리라.” 그래서 적은 사람이 구원받는가 또는 많은 사람이 구원받는가 하는 것은 이 초청을 적은 사람이, 또는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가에 온전히 달려 있다: “나는 문이요 새로운, 생명의 길이니 누구든지 바라는 자는 영생을 찾아서 끝없이 진리 탐구하는 일을 시작해도 좋으니라.”

166:3.8 (1829.5) 정신적으로, 전적으로 중요한, 새 생명의 영적 가치를 붙잡는 길에 어쩌다 가로막는 지상의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하여 영적 힘을 써야 하며, 모든 물질적 저항을 헤치고 나아갈 목적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해방된 아들로서, 이렇게 영적 힘을 쓰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의 가르침을 사도들조차 충분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4. 사고에 대한 가르침

166:4.1 (1830.1)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사람이 하루에 두 끼만 먹었지만, 여행할 때 쉬고 기운을 차리려고 한낮에 멈추는 것이 예수와 사도들의 버릇이었다. 필라델피아로 가는 길에 그렇게 정오에 멈추었을 때, 토마스가 예수에게 물었다: “주여, 오늘 아침에 우리가 여행하는 동안에 당신이 하신 말씀을 듣고서, 나는 영적 존재들이 물질 세계에서 이상하고 특별한 사건을 일으키는 데 관여하는가 묻고, 더 나아가서 천사와 다른 영 존재들이 사고(事故)를 막을 수 있는지 묻고 싶사옵나이다.”

166:4.2 (1830.2) 토마스의 물음에 답하여 예수는 말했다: “내가 너와 함께 무척 오래 있었거늘 그래도 나에게 그런 질문을 계속하느냐? 사람의 아들이 어떻게 너희와 하나가 되어 사는가, 몸소 먹을 것을 얻으려고 하늘 세력을 이용하기를 한결같이 물리치는 것을 너희는 지켜보지 못하였느냐? 모든 사람이 존재하는 바로 그 수단으로 우리 모두가 살지 않느냐? 아버지를 계시하는 것과 병든 자녀들을 언젠가 고친 것을 제쳐놓고, 너희는 이 세상의 물질 생활에서 영적 세계의 힘이 나타난 것을 보느냐?

166:4.3 (1830.3) “번영은 신이 인정하는 표시요 역경은 하나님이 언짢아하심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너무 오랫동안 너희 조상들이 믿어 왔느니라. 내가 선언하노니, 그러한 관념은 미신이라. 훨씬 많은 가난한 자들이 기쁘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즉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너희가 지켜보지 아니하느냐? 재산이 신의 은혜를 증거한다면, 어찌하여 부자(富者)들이 여러 번 하늘로부터 온 이 좋은 소식을 믿고자 하지 않느냐?

166:4.4 (1830.4) “아버지는 의로운 자와 의롭지 못한 자에게 비를 내리시며, 마찬가지로 햇빛은 올바른 자와 올바르지 못한 자에게 비치느니라. 너희는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과 섞은 일에 관하여 알지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바로 이런 일이 저희에게 일어났다고 하여, 이 갈릴리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도 저희의 모든 동료보다 더한 죄인이 아니었도다. 너희는 또한 실로암의 탑이 무너져 열여덟 사람을 죽인 것에 관하여 아느니라. 이렇게 죽음을 당한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형제보다 더한 범죄자라 생각지 말라. 이 사람들은 다만 우연히 일어난 사고(事故)에 죄 없이 희생되었느니라.

166:4.5 (1830.5) “너희의 생활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세 종류의 사건들이 있느니라:

166:4.6 (1830.6) “1. 너희는 땅 위에서 너희와 동료들이 사는 인생의 일부로서 정상의 사고를 함께 당할지 모르느니라.

166:4.7 (1830.7) “2. 너희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사고에, 사람들이 겪는 불운 중 하나에 어쩌다가 희생될지 모르며, 그러한 일은 어떤 면에서도 미리 정해지거나, 달리 이 땅의 영적 세력들이 일으키지 않음을 잘 아느니라.

166:4.8 (1830.8) “3. 너희는 세상을 지배하는 자연 법칙에 순응하기 위하여 직접 기울인 노력의 결과를 받을지 모르느니라.

166:4.9 (1830.9) “어떤 사람이 있어 뜰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더니, 나무에서 열매를 여러 번 찾았으나 하나도 얻지 못하자, 포도원 일꾼들을 앞에 불러서 일렀더라: ‘내가 여기에 지난 3년 동안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았으나 하나도 얻지 못하였도다. 열매 없는 이 나무를 자르라. 어찌 그것이 땅을 번거롭게 해야 하느냐?’ 그러나 우두머리 정원사가 주인에게 대답하였더라: ‘한 해를 더 버려두소서.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줄까 하나이다. 그리고 나서 이듬해에 아무 열매도 맺지 않으면, 자르겠나이다.’ 저희가 이렇게 열매 맺는 법칙을 따랐을 때, 그 나무가 살아 있고 좋았으므로, 풍부한 수확을 얻어 보상을 받았더라.”

166:4.10 (1831.1) “질병과 건강의 문제에서, 이러한 몸의 상태는 물질적 원인에서 생겨난 결과임을 너희가 알아야 하느니라. 건강은 하늘이 빙긋 웃는 것이 아니요, 질병도 하나님이 이맛살 찌푸리는 것이 아니라.

166:4.11 (1831.2) “아버지의 인간 자손은 물질적 축복을 받는 능력을 똑같이 가졌느니라. 그러므로 그는 차별하지 않고 사람의 자녀에게 물질인 것을 주시니라. 영적 선물을 내릴 때, 신이 준 이 재산을 사람이 받아들이는 능력에 따라 아버지는 제한을 받느니라. 비록 아버지는 사람을 차별하는 분이 아니어도, 영적 선물을 수여할 때, 아버지는 사람이 얼마큼 믿는가, 그리고 사람이 언제나 기꺼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행동할 생각이 있는가에 제한을 받느니라.”

166:4.12 (1831.3) 그들이 필라델피아를 향해서 줄곧 여행하는 동안, 예수는 계속해서 가르치고 사고ㆍ질병ㆍ기적에 상관되는 여러 물음에 대답했지만, 그들은 이 가르침을 완전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 시간의 가르침은 일생토록 지녔던 관념을 통째로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전하는 말씀을 되풀이하는 것, 그들이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을 여러 번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서도 예수가 죽고 다시 살아난 뒤까지 그들은 땅에서 그의 사명이 무슨 의미를 가졌는가 깨닫지 못했다.

5. 필라델피아의 회중

166:5.1 (1831.4) 예수와 열두 사도는 아브너와 그 동료들을 찾아보러 가는 길이었는데, 이들은 필라델피아에서 전도하고 가르치고 있었다. 페레아 지방의 모든 도시 가운데, 필라델피아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의 큰 무리가 70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이렇게 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갔다. 필라델피아 회당은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감독 하에 있은 적이 없고, 따라서 예수와 그 동료들이 가르치지 못하게 문을 닫은 적이 없었다. 바로 이때, 아브너는 필라델피아 회당에서 하루에 세 번 가르치고 있었다.

166:5.2 (1831.5) 바로 이 회당은 나중에 기독교 교회가 되었고, 동쪽에 있는 그 지역에 두루 복음을 퍼뜨리기 위한 선교 본부였다. 오랫동안 주의 가르침의 요새였고, 이 지역에서 몇 세기 동안 기독교에서 배움의 중심으로서 혼자 우뚝 서 있었다.

166:5.3 (1831.6)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언제나 필라델피아의 유대인들과 다투고 있었다. 예수가 죽고 다시 살아나신 뒤에, 주의 동생 야고보가 우두머리였던 예루살렘 교회는 필라델피아 신자 회중과 심각한 불화(不和)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브너는 필라델피아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죽을 때까지 그런 자격으로 계속했다. 예루살렘과 이렇게 거리가 멀어진 것은 어째서 아브너와 그가 한 일에 대하여 신약의 복음서 기록에 아무 언급이 없었는가 설명한다. 예루살렘과 필라델피아 사이에 있던 이 다툼은 야고보와 아브너의 일생을 통하여 지속되었고, 예루살렘이 멸망한 뒤에 얼마 동안 이어졌다. 안티옥이 북쪽과 서쪽에서 그랬던 것처럼, 필라델피아는 남쪽과 동쪽에서 정말로 초대 교회의 본부였다.

166:5.4 (1831.7) 초대 기독교 교회의 모든 지도자와 사이가 틀어진 것은 아브너의 불운으로 보였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행정과 관할권에 대한 문제로 베드로와 야고보(예수의 아우)와 사이가 틀어졌다. 철학과 신학(神學)의 차이점에 대하여 그는 바울과 갈라졌다. 아브너는 철학 면에서 헬라파이기보다 바빌로니아파였고, 먼저 유대인에게, 그리고 나서 여러 신비교를 믿는 그리스 및 로마인 신자들에게, 불쾌한 것을 적게 제시하기 위하여 예수의 가르침을 개조하려는 바울의 온갖 시도를 끈질기게 저항했다.

166:5.5 (1832.1) 이처럼 아브너는 고립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한 교회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주의 아우 야고보에게 감히 도전한 적이 있었고, 야고보는 나중에 베드로의 지지를 받았다. 그런 행위는 모든 옛 동료로부터 그를 실질적으로 고립시켰다. 그리고 나서 그는 감히 바울에게 대항했다. 비록 이방인에게 전도하는 바울의 사명을 전적으로 동정했고,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와 논쟁할 때 그를 지지하기는 했어도, 그가 전도하기로 선택한, 예수의 가르침의 바울 판(版)을 통렬하게 반대했다. 마지막 몇 해에, 아브너는 바울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가 일생에 가르친 것을 교묘하게 부패시킨 자” 라고 비난했다.

166:5.6 (1832.2) 아브너의 나이가 지긋했을 때, 그리고 그 뒤 얼마 동안, 필라델피아의 신자들은 예수의 종교를 예수가 실천하고 가르친 그대로, 땅에서 어느 다른 집단보다도 더 엄격하게 고수했다.

166:5.7 (1832.3) 아브너는 89세가 되기까지 살았고, 필라델피아에서 서기 74년, 11월 21일에 죽었다. 죽는 바로 그날까지, 그는 하늘나라 복음을 충실히 믿는 신자요 가르친 선생이었다.

제 167 편 필라델피아 방문

유란시아서

제 167 편

필라델피아 방문

167:0.1 (1833.1) 이 페레아 전도 기간을 통해서 내내, 70인이 일하고 있던 여러 지역을 방문하는 예수와 사도들을 언급할 때, 대체로 열 명만 그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군중을 가르치기 위하여 펠라에 적어도 두 사도를 남겨 두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필라델피아로 계속 가려고 준비하자, 시몬 베드로와 형 안드레는 펠라 야영지로, 거기에 모인 군중을 가르치려고 돌아왔다. 주가 페레아 근처를 찾아보려고 펠라에 있는 캠프를 떠났을 때, 3백에서 5백 명의 야영자들이 그를 따라가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필라델피아에 다다랐을 때, 6백 명이 넘는 추종자들이 그를 따라갔다.

167:0.2 (1833.2) 데카폴리스 지방을 거쳐 간 최근의 전도 여행에는 아무런 기적이 따르지 않았다. 문둥병자 열 명을 깨끗하게 한 것을 제쳐놓고, 이때까지 이 페레아 전도 사명에 아무런 기적이 없었다. 이때는 기적이 없이, 대부분의 시간에 예수나 사도들조차 친히 자리에 없는 가운데, 복음이 힘차게 선포된 기간이었다.

167:0.3 (1833.3) 예수와 열 사도는 2월 22일 수요일에 필라델피아에 도착했고, 최근의 여행과 수고를 그치고, 쉬면서 목요일과 금요일을 보냈다. 그 금요일 밤에 야고보는 회당에서 말씀했고, 이튿날 저녁에 일반 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들은 필라델피아에서, 또 근처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이 진전된 것을 무척 기뻐했다. 다윗의 사자들은 알렉산드리아와 다마스커스로부터 좋은 소식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전역에 걸쳐 하늘나라가 더욱 진척된다는 소식을 또한 가져왔다.

1. 바리새인들과 아침을 먹다

167:1.1 (1833.4) 필라델피아에는 아주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바리새인이 살았는데, 그는 전에 아브너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안식일 아침에 식사를 대접하려고 예수를 집으로 초청했다. 이때에 예수가 필라델피아로 오실 것이라 사람들이 기대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많은 바리새인을 포함하여 큰 무리의 방문자들이,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다른 곳으로부터 와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유지(有志) 약 40명과 율법사 몇 명이 이 아침 식사에 초대받았고, 아침 식사는 주께 명예를 돌리기 위하여 미리 주선되어 있었다.

167:1.2 (1833.5) 아브너와 이야기하면서 예수가 문 옆에서 남아 있는 동안, 주인이 자리에 앉은 뒤에, 예루살렘의 바리새인 유지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산헤드린의 회원이었고, 버릇대로 주인의 왼편, 귀빈의 자리를 향하여 곧장 갔다. 그러나 이 자리가 주를 위하여, 그리고 바른 쪽 자리는 아브너를 위하여 미리 예정되었기 때문에, 주인은 예루살렘의 바리새인에게 네 자리 왼쪽으로 앉으라고 손짓했고, 이 고관(高官)은 귀빈의 자리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무척 기분을 상했다.

167:1.3 (1834.1) 곧 그들은 모두 자리에 앉았고, 자리에 참석한 대다수가 예수의 제자이거나 아니면 복음을 좋게 여겼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즐기고 있었다. 오직 예수의 적들이 그가 식사하려고 앉기 전에 손 씻는 예식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았다. 아브너는 식사가 시작될 때 손을 씻었지만, 음식을 대접하는 동안에는 씻지 않았다.

167:1.4 (1834.2) 식사가 끝날 때가 가까워 오자, 고질병으로 오래 앓다가 이제 수종(水腫)의 증세가 있는 사람이 거리에서 들어왔다. 이 사람은 신자였고, 아브너의 동료들에게서 최근에 세례를 받았다. 예수에게 고쳐달라고 아무런 요청을 하지 않았지만, 이 병자가 예수를 에워싼 군중을 피하기 바라면서, 그래서 예수의 눈길을 더 끌 것 같아서 이 아침 식사에 왔다는 것을 주는 잘 알았다. 이 사람은 그때 주가 거의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불쌍한 처지가 아마도 주의 동정심에 호소할지 모른다고 마음 속에서 궁리하였다. 그리고 그는 틀리지 않았으니, 그가 방으로 들어갔을 때, 예수와 예루살렘에서 온 독선적인 바리새인이 그를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 바리새인은 그런 사람을 방으로 들어오라고 허락한 것을 분개하는 말을 재빨리 뱉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 아픈 사람을 바라보고 아주 인자하게 빙그레 웃었기 때문에, 그는 가까이 다가와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식사가 끝나고 있었기 때문에, 주는 동료 손님들을 둘러보았고, 다음에 수종 걸린 사람을 뜻있게 들여다본 뒤에, 말했다: “친구들이여, 이스라엘의 선생과 학식 있는 율법사들이여, 나는 너희에게 하나 묻고자 하노라. 아프고 병든 자를 안식일에 고치는 것이 율법에 합당하냐 아니면 어긋나느냐?” 그러나 거기 있던 사람들은 예수를 너무나 잘 알았다. 잠자코 있었고,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167:1.5 (1834.3) 그리고 나서 예수는 병자가 앉은 데로 가서, 손을 붙들고 말했다: “일어나서 네 길을 가라. 너는 고쳐달라 부탁하지 않았어도 나는 네 마음 속의 소망과 네 혼의 믿음을 아노라.” 그 사람이 방을 떠나기 전에, 예수는 자리에 돌아가서, 아침 드는 자들을 향하여 말했다: “너희를 하늘나라로 유혹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이미 들어간 자에게 자신을 드러내려고 내 아버지가 그러한 일을 하시니라. 바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버지 같으리라는 것을 너희가 깨달을 수 있느니라. 왜냐하면, 너희 가운데 누가 안식일에 아주 아끼는 동물이 우물에 빠졌는데, 즉시 나가서 그 동물을 끌어당기지 아니하겠느냐?” 아무도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려 했고, 주인이 일이 되어 가는 것을 승인함이 분명했기 때문에, 예수는 일어서서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했다: “형제들이여, 결혼 잔치에 부름받을 때 너희는 상석(上席)에 앉지 말라. 혹시나 너보다 더 명예로운 사람이 초대받고 주인이 너에게 와서 네 자리를 다른 귀빈에게 주라 요청할까 두려우니라. 이 경우에 부끄럽게 네가 식탁에서 더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잔치에 부름 받을 때, 너희는 잔치 식탁에 도착하여 가장 낮은 자리를 찾고 거기에 네 자리를 잡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리라. 그래서 주인이 손님들을 둘러보고, 너에게 이를 수도 있느니라: ‘친구여, 어찌하여 가장 낮은 자리에 앉느냐? 더 높이 올라오라.’ 이렇게 그런 사람이 동료 손님들이 있는 가운데 영광을 받으리라. 잊지 말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누구나 낮아지겠고, 참으로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러므로 너희가 정찬을 베풀거나 저녁을 대접할 때, 언제나 너희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만 초대하지 말라. 저희가 보답하여 잔치에 너희를 부르고, 그렇게 너희가 보상을 받을 수도 있느니라. 너희가 축연을 베풀 때, 때때로 가난한 자와 불구(不具)인 자와 눈먼 자를 청하라. 이런 방법으로 너희는 마음 속에서 복을 받을지니, 절름발이와 다리를 저는 자는 너희가 사랑으로 베푼 것을 갚을 수 없음을 너희가 잘 아는 까닭이라.”

2. 큰 만찬의 비유

167:2.1 (1835.1) 예수가 바리새인의 아침 식탁에서 말씀을 마치자, 자리에 있던 율법사들 가운데 하나가 침묵을 깨뜨리기 바라며 생각 없이 말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빵을 먹을 자는 복이 있도다”―이것은 그 시절에 보통 하는 말이었다. 그러자 예수는 한 비유를 말씀했고, 친절한 주인도 이것을 가슴 속에 새길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말했다:

167:2.2 (1835.2) “어떤 통치자가 큰 만찬을 베풀었더니, 많은 손님을 불렀으매 저녁 때, 초대받은 자들에게 가서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되었사오니, 오소서’ 이르라고 종들을 보냈더라. 그리고 저희는 다 한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더라. 첫 사람이 이르되 ‘나는 막 농장(農場)을 샀고, 어떻게든 이를 증명하러 가야 하니, 나를 용서하기를 바라노라.’ 또 한 사람이 말하되 ‘나는 황소 다섯 쌍을 샀는데, 소들을 받으러 가야 하니, 나를 용서하기를 바라노라,’ 또 하나가 ‘나는 막 장가를 들었고, 따라서 갈 수 없노라’ 하는지라. 그래서 종들이 돌아가서 이를 주인에게 보고하였더라. 이 말을 듣자 집주인은 대단히 성이 났고 종들에게 돌이켜 일렀더라: ‘나는 이 결혼 잔치를 준비하였노라. 살진 소를 잡고, 손님들을 위하여 만사가 준비되었거늘 저희가 내 초청을 가벼이 여겼도다. 저희가 각자 자기 땅과 물건을 쫓아갔고, 내 잔치에 오라 저희를 부르는 내 종들에게 무례하게 굴기까지 하는도다. 그러므로 결혼 잔치에 손님이 차도록, 빨리 도시의 큰 거리와 골목 길, 큰 길과 샛길로 가서 가난한 자와 쫓겨난 자, 눈먼 자와 다리 저는 자를 여기로 데려오라.’ 종들이 주인이 명령한 대로 하였는데, 그리고 나서도 더 많은 손님을 위하여 자리가 있었더라. 그때 주인이 종들에게 말하되 ‘내 집이 차도록, 이제 여러 길과 시골로 가서, 거기 있는 자들을 강제하여 불러 오라. 내가 선언하노니, 먼저 부름 받은 자들은 하나도 내 만찬을 맛보지 못할지니라.’ 종들은 주인이 명한 그대로 했고, 그 집이 찼더라.”

167:2.3 (1835.3) 이 말씀을 듣고서 그들은 떠났다. 각자 자기의 곳으로 갔다. 적어도 그날 아침에 자리에 있어 비웃던 바리새인들 가운데 하나는 이 비유의 뜻을 알아들었으니, 그가 그날로 세례를 받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믿는다고 대중 앞에서 고백했기 때문이다. 아브너는 그날 밤에 신자들의 일반 회의에서 이 비유에 대하여 설교했다.

167:2.4 (1835.4) 이튿날 모든 사도는 이 큰 만찬의 비유의 의미가 무엇인가 풀이하려 애쓰는 철학 연습에 몰두했다. 예수는 서로 다른 이 해석을 모두 관심을 가지고 듣기는 했어도, 사도들이 그 비유를 이해하도록 더 돕는 것을 완강하게 물리쳤다. 다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각자 혼자서, 자기 혼 속에서 그 의미를 찾을지어다.”

3. 정신이 허약한 여자

167:3.1 (1835.5) 아브너는 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주가 가르치도록 미리 주선했는데, 모든 회당이 산헤드린의 명령으로 그의 가르침을 금지한 뒤로, 이번이 주가 회당에 처음으로 나타난 때였다. 예배가 끝났을 때, 예수는 그 앞에 풀이 죽은 얼굴을 하고 몸이 몹시 굽어진 나이 많은 한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이 여자는 오랫동안 겁에 질려 있었고 모든 기쁨이 생애에서 사라졌다. 단상(壇上)에서 걸어 내려오자, 예수는 그 여자에게 가서, 그 여자의 굽어진 어깨를 만지며 말했다: “여자여, 네가 오직 믿고자 하면, 허약한 정신에서 온전히 풀려날 수 있느니라.” 그리고 18년이 넘도록 몸을 굽히고 두려워하는 우울증에 빠져 있던 이 여자는 주의 말씀을 믿었고, 믿음으로 즉시 몸을 곧게 세웠다. 자기가 곧게 되었음을 보았을 때, 그 여인은 소리를 높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167:3.2 (1836.1) 이 여자의 굽은 형태는 우울한 정신의 결과였으므로, 여자의 병이 전적으로 정신에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예수가 진정한 신체의 병을 고쳤다고 생각했다. 필라델피아 회당의 회중이 예수의 가르침에 대하여 호의를 가졌어도, 그 으뜸 회당장은 쌀쌀한 바리새인이었다. 예수가 신체의 병을 고쳤다는 회중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예수가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주제넘게 했다고 분개했기 때문에, 회중(會衆) 앞에 일어서서 말했다: “사람들이 자기의 모든 일을 할 날이 엿새가 있지 아니하냐? 그러므로 이 일하는 날에 와서 고침을 받으라,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러지 말라.”

167:3.3 (1836.2) 냉정한 그 회당장이 이렇게 말을 마치자, 예수는 연사(演士)의 단상으로 돌아가서 말했다: “어찌하여 위선자 노릇을 하느냐? 너희 가운데 누구나 안식일에 마구간에서 황소를 풀고 물을 마시게 하려고 소를 끌어내지 아니하느냐? 그러한 수고가 안식일에 허락된다면, 이 여인, 지난 18년 동안 잘못에 묶여 있던 아브라함의 딸이, 이 안식일에도 이 사슬에서 풀려나고 해방과 생명의 물을 마시도록 앞으로 인도해야 하지 않느냐?” 그 여인이 하나님을 계속 찬양하는 동안, 그 비판자는 창피를 당했고 회중은 그 여인이 고침받은 것을 함께 기뻐했다.

167:3.4 (1836.3) 이 안식일에 예수를 대중 앞에서 비판한 결과로, 그 으뜸 회당장은 쫓겨났고 예수의 한 추종자가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167:3.5 (1836.4) 예수는 두려움에 빠진 그런 자들을 허약한 정신, 정신의 우울증, 그리고 두려움의 사슬로부터 자주 구원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든 그러한 질병이 신체의 질병이든지, 아니면 악령에 들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167:3.6 (1836.5) 예수는 일요일에 다시 회당에서 가르쳤고, 많은 사람이 그날 정오에 강에서 아브너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이 강은 도시의 남쪽으로 흘렀다. 이튿날 예수와 열 사도는 다윗의 한 사자가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펠라 야영지로 돌아가려고 떠났을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 가까이 베다니에 있는 친구들로부터 예수에게 급한 소식을 가져왔다.

4. 베다니에서 온 소식

167:4.1 (1836.6) 2월 26일 일요일 밤 아주 늦게, 베다니로부터 달려온 사람이 필라델피아에 도착했고, 마르다와 마리아로부터 “주여, 당신이 사랑하는 자가 대단히 아프오이다” 하는 소식을 가져왔다. 이 소식은 저녁 회의가 끝날 때, 밤 동안 사도들을 막 떠나고 있을 때 예수에게 도착했다. 처음에 예수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상한 막간의 일이 하나 일어났는데, 이것은 그가 몸 바깥에, 몸 건너에 있는 무엇과 교통하는 듯 보이는 때였다. 그리고 나서 위를 우러러보면서, 사도들이 듣는 가운데 그 사자에게 말했다: “이 병은 정말로 죽음에 이르지 않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아들을 높이는 데 쓰일 것을 의심하지 말라.”

167:4.2 (1837.1) 예수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그 오라비 나사로를 아주 좋아했다. 이들을 뜨겁게 사랑했다. 처음에 가졌던 인간적 생각은 당장에 그들을 도우러 가는 것이었지만 다른 생각이 그의 통합된 지성에 떠올랐다. 예루살렘의 유대인 지도자들이 언제라도 하늘나라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희망을 거의 버렸지만 그는 아직도 그 민족을 사랑했고, 예루살렘에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기회를 한 번 더 줄 수 있는 계획이 이제 머리에 떠올랐다. 아버지가 원하시면, 그는 예루살렘에게 하는 이 마지막 호소가 땅에서 살던 전 생애에서 가장 깊고 엄청난, 바깥에 드러나는 일이 되게 만들려고 결심하였다. 유대인은 구원자가 이적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관념에 매달렸다. 물질적 기적을 행하거나 정치적 힘을 현세에 나타내는 행위를 하기까지 품위를 떨어뜨리려 하지는 않았어도, 여태까지 드러나지 않은, 생사(生死)를 주관하는 힘을 나타내려고 이제 그는 아버지의 찬성을 구했다.

167:4.3 (1837.2) 유대인은 죽은 사람을 죽은 그날에 묻는 관습이 있었다. 이것은 그렇게 따듯한 기후에서 필요한 관습이었다. 그들이 단지 혼수 상태에 빠진 사람을 무덤에 넣어서, 둘째, 아니 셋째 날에도 그런 사람이 무덤에서 일어나곤 하는 일이 때때로 생겼다. 그러나 영이나 혼이 이삼일 동안 몸 가까이 꾸물거릴지 모르지만, 셋째 날 뒤에는 결코 남아 있지 않는다, 넷째 날이 되어서는 부패가 한창 진행된다, 그러한 기간이 지난 뒤에 아무도 무덤에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유대인의 관념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는 베다니를 향해서 떠나려고 준비하기 전에 필라델피아에서 아직도 꼬박 이틀을 머물렀다.

167:4.4 (1837.3) 따라서 수요일 아침 일찍 그는 사도들에게 말했다: “당장에 다시 유대 땅으로 갈 준비를 하자.” 주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사도들은 한동안 서로 의논하려고 자기들끼리 물러났다. 야고보는 그 회의의 지도를 맡았고, 그들은 예수를 다시 유대 땅으로 가도록 허락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뿐이라고 모두가 의견을 모았고, 하나같이 돌아와서 그렇게 예수께 말씀드렸다. 야고보가 말했다: “주여, 당신은 몇 주 전에 예루살렘에 계셨고 지도자들은 당신을 죽이고자 하였으며, 한편 사람들은 당신을 돌로 칠 생각이 있었나이다. 그때 당신은 이 사람들에게 진리를 받을 기회를 주었고, 우리는 당신이 유대로 다시 가시는 것을 허락하지 못하겠나이다.”

167:4.5 (1837.4)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그러나 일을 안전히 해도 좋은 때가 하루에 열두 시간 있음을 너희는 깨닫지 못하느냐? 사람이 낮에 걸으면, 빛이 있으매 넘어지지 않느니라. 사람이 밤에 걸으면, 빛이 없으매 넘어지기 쉬우니라. 내 날이 지속하는 한, 나는 유대에 들어가기가 두렵지 않고, 이 유대인들을 위하여 한 번 더 대단한 일을 하고자 하노라. 나는 저희의 조건―겉으로 영광이 드러나고 아버지의 힘과 아들의 사랑을 눈에 보이게 나타내라는 조건―을 따르더라도 저희에게 한 번 더 믿을 기회를 주고자 하노라. 게다가 너희는 우리의 친구 나사로가 잠든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나는 가서 그를 이 잠에서 깨우려 하노라!”

167:4.6 (1837.5) 그리고 나서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말했다: “주여, 나사로가 잠이 들었으면, 더욱 확실히 회복하리이다.” 이 시절에 죽음을 일종의 잠으로 말하는 것이 유대인의 관습이었지만, 나사로가 이 세상을 떠났음을 예수가 의미한다는 것을 사도들이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 분명히 말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다른 자들이 이것으로 구원받지 않더라도, 너희가 새로운 이유로 나를 믿을까 하여, 내가 거기 있지 않은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라. 그리고 너희가 목격할 것으로 인하여, 내가 너희를 떠나고 아버지께로 가는 날을 위하여 준비하면서, 너희 모두가 힘을 얻어야 하느니라.”

167:4.7 (1838.1) 예수가 유대로 가는 것을 그만두라고 설득할 수 없었을 때, 그리고 사도들 중 더러가 그를 따라가는 것조차 싫어했을 때, 토마스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주께 우리의 걱정을 말씀드렸지만, 주는 베다니로 가기로 마음이 굳어졌느니라. 나는 그것이 끝장을 의미한다는 것에 만족하고, 저희는 분명히 그를 죽이겠지만, 주가 그리 선택하신다면, 용감한 사나이답게 처신하자.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 그리고 언제나 이랬다. 신중하고 지속되는 용기를 요구하는 문제가 닥쳤을 때, 토마스는 언제나 열두 사도의 기둥이었다.

5. 베다니로 가는 길

167:5.1 (1838.2) 유대 땅으로 가는 길에, 예수에게 거의 50명이 되는 친구와 적들이 따랐다. 수요일 한낮, 점심 시간에 그는 사도들과 이 무리의 추종자들에게 “구원의 조건”에 관하여 말씀했고, 이 수업의 끝에 바리새인과 세리(세금 걷는 자)의 비유를 이야기했다. 예수는 말했다: “그러면 너희가 보나니, 아버지는 사람의 자녀들에게 구원을 주시며, 이 구원은 신의 가족 안에서 아들 신분을 받을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거저 주는 선물이라. 이 구원을 벌기 위하여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느니라. 자신을 옳게 여겨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살 수 없고, 대중 앞에서 많이 기도하는 것도 가슴 속에 생생한 믿음이 모자람을 메울 수 없느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수고로 너희는 사람을 속일지 모르나, 하나님은 너희 혼을 꿰뚫어보시니라. 기도하러 성전에 간 두 사람이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것을 예로 잘 보여주나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이라. 바리새인은 일어서서 속으로 기도하되 ‘아 하나님, 나는 나머지 사람들, 착취하는 자나 배우지 못한 자, 부당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지 않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당신께 감사드리나이다. 나는 한 주에 두 번 금식하며, 내가 버는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러나 세리는 멀찌감치 떨어져 서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더라. ‘하나님이여, 죄인인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집에 돌아갔으니, 자신을 높이는 자는 누구나 낮아지겠거니와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여질 것임이라.”

167:5.2 (1838.3) 그날 밤에 예리고에서, 적대하는 바리새인들이, 한때 그의 동료들이 갈릴리에서 했던 것처럼, 결혼과 이혼에 관하여 주가 말씀하도록 유인하여 주를 덫에 걸리게 만들려고 애썼지만, 주는 그에게 이혼에 관한 율법과 충돌하게 만들려는 그들의 노력을 솜씨 있게 피했다. 세리와 바리새인이 좋은 종교와 나쁜 종교를 실례로 보여주다시피, 그들의 이혼(離婚) 관습은 유대 율법의 좋은 결혼법을 이 모세의 이혼 조항의 해석, 창피할 정도로 미지근한 바리새인의 해석과 대조하여 보여준다. 바리새인은 가장 낮은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했고, 세리는 가장 높은 이상에 따라 올바른 자세를 취했다. 바리새인에게 예배는 자신을 옳게 여김으로 무위(無爲)로 유도하는 수단이요, 영적 안전을 헛되게 보장하는 것이었다. 세리에게 예배는 사람이 회개와 고백의 필요를 깨닫고, 믿음으로 자비로운 용서를 받아들이도록 자기 혼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이었다. 바리새인은 응보를 구했고, 세리는 자비를 구했다. 우주의 법칙은 이것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라, 찾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아내리라.

167:5.3 (1838.4) 비록 이혼에 관하여 바리새인들과 논쟁에 말려들기를 거절했어도, 예수는 결혼에 관하여 가장 높은 이상(理想)을 담은 긍정적 가르침을 선포했다. 결혼을 모든 인간 관계에서 가장 이상적이고 높은 것으로 올려놓았다.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느슨하고 불공평한 이혼 관습을 뚜렷이 반대하는 것을 넌지시 비쳤다. 이 유대인들은 그 시절에, 요리 솜씨 없는 사람, 알뜰하지 못한 살림꾼과 같이 아주 하찮은 이유로, 아니면 더 예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보다 낫지 않은 이유로 남자가 아내와 이혼하는 것을 허락했다.

167:5.4 (1839.1)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쉬운 종류의 이혼은 유대 민족, 특히 바리새인에게 내린 특별한 섭리라고 가르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결혼과 이혼을 다루는 발표를 하지 않으려 했어도, 그는 결혼 관계를 이렇게 부끄럽게 조롱하는 처사를 아주 따끔하게 비난했고 그것이 여자와 아이들에게 부당함을 지적했다. 여자보다 남자에게 무슨 이점이라도 주는 어떤 이혼 관습도 그는 결코 묵인하지 않았다. 주는 오로지 여자에게 남자와 동등한 자격을 부여하는 가르침만 인정하였다.

167:5.5 (1839.2) 비록 결혼과 이혼을 다스리는 새 지침을 권하지 않았어도, 예수는 유대인에게 바로 그들의 율법과 높은 가르침에 부끄럽지 않게 살기를 촉구했다. 이 사회적 기준에 따라서 관습을 개선하려는 노력으로 그는 항상 기록된 성서에 호소했다. 예수는 높은 이상적 결혼 개념을 이렇게 지지하면서, 문서화된 율법이나 그들이 소중하게 간직한 이혼 특권이 가리키는 사회 관습에 대하여 질문하는 자들과 충돌하기를 솜씨 있게 피했다.

167:5.6 (1839.3) 사도들은 주가 과학ㆍ사회ㆍ경제ㆍ정치 문제와 관련하여 분명한 발언을 꺼려하는 것을 아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땅에서 예수의 사명이 영적ㆍ종교적 진리를 계시하는 데 순전히 관여한다는 것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다.

167:5.7 (1839.4) 예수가 결혼과 이혼에 대하여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그날 저녁에 시간이 더 지난 뒤 사도들이 추가된 질문을 개인적으로 많이 던졌고, 이 여러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들의 머리 속에 여러 가지 오해를 풀어주었다. 이 회의의 끝에 예수는 말했다: “결혼은 명예로운 것이요, 모든 남자가 소망할 대상이라.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사명을 혼자서 추구하는 사실은 어떤 면에서도 결혼이 바람직한가 어떤가를 반영하지 않느니라. 내가 그리 일해야 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나 바로 이 아버지는 남자와 여자의 창조를 지시했고, 아이들을 받아들이고 훈련시키기 위하여 가정을 세움으로 남녀가 가장 높은 사명, 그리고 그에 따른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 이 자녀를 창조하는 일에 이 부모는 하늘과 땅의 창조자와 협동자가 되느니라. 이 때문에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아내와 결합하며, 저희 둘이 하나와 같이 될지니라.”

167:5.8 (1839.5) 이 방법으로 예수는 결혼에 관하여 사도들의 머리에서 많은 걱정을 덜어주었고, 이혼에 관한 여러 가지 오해를 풀어주었다. 동시에 사회적 연합에 관한 그들의 이상을 높이고,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가정을 존중하는 마음을 더욱 가지게 하려고 많이 기여했다.

6.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심

167:6.1 (1839.6) 그날 저녁에 결혼, 그리고 아이들이 복된 것에 관한 예수의 말씀은 온 예리고에 퍼졌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 예수와 사도들이 떠나려고 준비하기 오래 전에, 아침 먹을 때가 되기도 전에, 어머니들 수십 명이 아이들을 팔에 안고, 손에 이끌고, 예수가 투숙(投宿)하는 곳으로 와서 주가 어린것들을 축복해주기를 바랐다. 아이를 데려온 어머니들이 이렇게 군집한 것을 보려고 나갔을 때, 사도들은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 여자들은 주가 아이들에게 손을 얹고 축복하기까지 떠나려 하지 않았다. 사도들이 큰 소리로 이 어머니들을 나무라자, 예수는 그 떠들썩한 소리를 듣고 나와서, 분개하여 사도들을 꾸짖어 말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도록 버려두라. 저희를 금하지 말지니, 하늘나라가 그러한 자에게 속함이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누구나 도저히 거기에 들어가서 완전한 영적 어른 수준까지 자라지 못하리라.”

167:6.2 (1840.1)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나서, 주는 아이들을 다 받았으며 아이들에게 손을 얹었고, 그동안에 어머니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씀을 하였다.

167:6.3 (1840.2) 예수는 자주 사도들에게 하늘의 저택에 대해서 이야기하였고, 마치 아이들이 육체적으로 이 세상에서 자라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급하는 자녀들은 거기서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네바돈의 구경하는 지성 존재들이 한 우주의 창조자와 함께 놀고 있는 예리고의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을 이날 이 아이들과 그 어머니들이 조금도 깨닫지 못한 것 같이, 성스러운 것은 때때로 평범(平凡)한 것으로 보인다.

167:6.4 (1840.3) 팔레스타인에서 여자의 지위는 예수의 가르침 때문에 많이 나아졌다. 그의 추종자들이 예수가 힘들여 가르친 것으로부터 그다지 멀리 벗어나지 않았던들, 여자의 지위는 온 세상에 두루 그렇게 나아졌을 것이다.

167:6.5 (1840.4) 또한 예리고에서, 예수는 신을 예배하는 버릇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초기의 종교적 훈련의 토론과 연관하여, 예배하고 싶은 충동으로 이끄는 영향으로서, 특히 아이들의 경우에 아름다움이 귀중하다는 것을 사도들에게 강조했다. 교훈과 예를 통하여, 주는 창조의 자연스러운 배경 한가운데서 창조자를 예배하는 것이 가치 있음을 가르쳤다. 그는 나무들 사이에서, 자연 세계의 비천한 생물 가운데서, 하늘의 아버지와 교통하기를 더 좋아했다. 그는 별이 반짝이는 창조 아들들의 영역의 광경, 영감을 일으키는 광경을 통해서, 아버지를 생각해 보기를 즐거워했다.

167:6.6 (1840.5) 자연의 예배처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때, 하나님과 영적 교통을 가지는 지적 접근법과 관련하여, 인간의 가장 높은 감정이 일어나도록 사람들은 아름다운 집, 마음을 끄는 단순하고 예술적으로 꾸민 성소(聖所)를 마련하려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진리ㆍ아름다움ㆍ거룩함은 참된 예배를 힘차게 효과 있게 돕는다. 그러나 공들이고 허세부리는, 인간의 예술로 단지 거대하게 치장하고 지나치게 장식한다고 영의 교통을 촉진할 수는 없다. 아름다움은 아주 단순하고 자연스러울 때 가장 종교성을 가진다. 아름다운 매력이 아주 결여되고, 명랑한 기분과 영감을 주는 성스러움을 전혀 연상시키지 않는, 차갑고 메마른 방에서 어린아이들에게 대중 예배를 보는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것은 얼마나 딱한 일인가! 아이는 자연이 있는 바깥에서 처음 예배에 들어가고, 나중에는 적어도 날마다 거하는 집만큼 물질적으로 매력 있고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건물, 종교 집회가 있는 공공 건물로 부모를 따라가야 한다.

7. 천사에 대한 이야기

167:7.1 (1840.6) 그들이 예리고로부터 베다니까지 언덕을 올라가는 길을 가는 동안, 나다니엘은 그 길의 대부분에서 예수 곁에서 걸었고, 하늘나라와 관련하여 아이들에 대하여 토론한 것은 간접으로 천사들의 봉사의 고려로 이어졌다. 마침내 나다니엘은 주께 이렇게 물었다: “대사제가 사두개인임을 아는 까닭에,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천사를 믿지 않으므로, 하늘 봉사자들에 관하여 우리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리이까?” 그러자 다른 것 중에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167:7.2 (1841.1) “천사 무리는 따로 된 계급의 창조된 존재이라. 저희는 물질 서열의 필사 인간과 전혀 다르며, 뚜렷이 다른 무리의 우주 지성 존재로서 활동하느니라. 천사는 성서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생물 집단에 속하지 않으며, 하늘의 저택들을 거쳐서 계속 올라간 필사 인간이 영화롭게 변화된 영도 아니라. 천사들은 직접 지음받은 생물이요 자식을 낳지 않으며, 천사 무리는 인류와 오직 영적 친척 관계가 있느니라.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께로 여행하며 올라가는 동안에 사람은 한때 천사 상태와 비슷한 존재 상태를 거치지만, 사람은 결코 천사가 되지 않느니라.

167:7.3 (1841.2) “천사는 사람이 죽는 것처럼 결코 죽지 않으며, 루시퍼의 속임수에 말려든 어떤 천사들처럼 어쩌다가 죄에 말려들지 않으면, 천사는 불멸하느니라. 천사는 하늘에서 종으로 일하는 영이요, 저희는 전적으로 지혜롭지도 전능하지도 않으니라. 그러나 충성스러운 천사들은 모두 참으로 깨끗하고 거룩하니라.

167:7.4 (1841.3) “너희의 영적 눈이 기름 부음을 받으면, 너희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리라고 내가 한 번 전에 이른 것을 기억하지 않느냐? 천사들이 베푸는 봉사로 인하여 한 세계는 다른 세계들과 연결이 유지되나니, 왜냐하면 이 양떼에 속하지 않는 다른 양들이 내게 있다고 내가 너희에게 거듭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이 천사들은 너희를 감시하고 나서, 나가서 네 마음 속의 생각을 아버지께 일러바치고 육체가 행한 일을 보고하는, 영 세계의 첩자(諜者)가 아니라. 아버지는 자신의 영이 너희 안에 사시므로 그러한 수고가 필요 없느니라. 그러나 이 천사 영들은 하늘 창조의 한 부분에게 우주의 다른 먼 구석에서 행하는 일에 관하여 알려주려고 활동하느니라. 아버지의 정부와 아들들의 우주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천사가 인류에게 봉사하는 데 배치되느니라. 이들 가운데 많은 세라핌이 봉사하는 영이라고 너희에게 가르쳤을 때 나는 비유하는 말이나 시(詩) 구절로 말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을 너희가 알아듣기 어려워도 상관 없이, 이 모두가 참이라.

167:7.5 (1841.4) “이 천사들 가운데 다수는 사람들을 구하는 일에 바쁘니, 왜냐하면 한 사람이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비로소 추구할 때 천사가 기뻐한다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더냐? 뉘우치는 한 죄인을 놓고 하늘의 천사들 앞에서 기쁨이 있다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도 하였고, 이로서 필사 인간의 영적 복지(福祉)와 신성한 진보에 마찬가지로 관심을 가지는, 다른 더 높은 계급의 하늘 존재들이 있음을 가리켰노라.

167:7.6 (1841.5) “또한 이 천사들은 사람의 영이 육체의 거처로부터 해방되고 그 혼이 하늘에 있는 저택까지 호송되는 그 수단에 상당히 관여하느니라. 천사들은 육체가 죽고 영의 거처에서 새로이 사는 사이에 끼는 기간, 지도에 그려지지 않고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기간에, 사람의 혼을 인도하는 확실한 하늘 안내자이라.”

167:7.7 (1841.6) 그는 천사들이 베푸는 봉사에 관하여 나다니엘과 더욱 말씀했을 터이지만 마르다가 가까이 와서 중단되었는데, 그 여자는 동쪽으로 예수가 올라오는 것을 지켜본 친구들한테서 주가 베다니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고 통지받았다. 그 여자는 이제 서둘러 예수에게 인사를 드렸다.

제 168 편 나사로의 부활

유란시아서

제 168 편

나사로의 부활

168:0.1 (1842.1) 예수가 베다니 가까이 언덕의 꼭대기로 오는 동안, 마르다가 그를 만나려고 떠난 것은 한낮이 조금 지나서였다. 동생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고, 일요일 오후 늦게, 동산의 먼 끝에 있는 사립(私立) 무덤에 안치되어 있었다. 무덤 입구에 있는 돌은 이날, 목요일 아침에 굴려서, 자리에 놓여 있었다.

168:0.2 (1842.2) 마르다와 마리아가 나사로의 병에 관하여 예수에게 소식을 보냈을 때, 그들은 주가 이에 대하여 무슨 일인가 하리라고 확신했다. 나사로가 가망(可望) 없이 아픈 줄 알았고, 비록 예수가 가르치고 전도하는 일을 제쳐놓고 그들을 도우러 오리라고 감히 꿈을 꾸지 않았어도, 그들은 예수가 병을 고칠 힘이 있는 것을 너무 확신하여, 예수가 그냥 고치라고 말씀하리라, 그러면 나사로는 즉시 온전히 되리라고 생각했다. 사자가 필라델피아를 향하여 베다니를 떠나고 몇 시간 뒤에 나사로가 죽었을 때, 이리 된 것은 너무 늦을 때까지,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몇 시간 되었을 때까지,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주가 듣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판단했다.

168:0.3 (1842.3) 그러나 달리는 사람이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화요일 오전에 그가 가지고 온 소식을 듣고서 그들은 믿는 친구들 모두와 함께 대단히 어리둥절했다. 그 사자는 “...이 병은 정말로 죽음에 이르지 않느니라”하고 예수가 말씀하심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어째서 예수가 아무 말도 전하지 않고, 달리 도우려고 제안하지 않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168:0.4 (1842.4) 근처의 여러 촌락에서 온 많은 친구와 예루살렘에서 온 다른 사람들은 슬픔에 빠진 자매를 위로하려고 왔다. 나사로와 두 자매는, 작은 마을 베다니에서 유지였던, 살림이 넉넉하고 존경받을 유대인의 자녀들이었다. 그리고 모두 세 사람이 오랫동안 예수를 열심히 따른 사람이었는데도, 아는 모든 사람이 그들을 높이 존경하였다. 그들은 이 근처에서 광범위한 포도원과 올리브 밭들을 물려받았고, 그들이 부유했다는 것은 자기네 터에 사립 무덤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증명한다. 부모 두 분은 이미 이 무덤에 안치되어 있었다.

168:0.5 (1842.5) 마리아는 예수가 오리라는 생각을 이미 버렸고 슬픔에 잠겨 있었지만, 바로 그날 아침 무덤 앞에 그들이 돌을 굴려서 입구를 틀어막던 바로 그때까지도, 마르다는 예수가 오리라는 희망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나서도 마르다는 어느 이웃 소년에게 언덕 꼭대기에서 베다니 동쪽까지 이르는 예리고 길을 지켜보라고 지시했다. 바로 이 소년이 예수와 그 친구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마르다에게 가져왔다.

168:0.6 (1842.6) 예수를 만나자 마르다는 그의 발 앞에 털썩 쓰러지면서 외쳤다. “주여, 당신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으리이다!” 여러 가지 걱정이 머리를 스쳐가고 있었지만 마르다는 아무런 의심을 비치지 않았고, 나사로의 죽음과 관련하여 주의 행위를 비난하거나 따지려고 나서지도 않았다. 그 말이 끝나자, 예수는 손을 뻗어, 여자를 일으켜 세우고 말했다: “오직 믿음을 가지라 마르다야, 그리하면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러자 마르다가 말했다: “마지막 날에 부활이 있을 때 그가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그리고 이제도 당신이 하나님께 무엇을 청하든지, 우리 아버지가 당신에게 주실 것을 믿나이다.”

168:0.7 (1843.1) 그리고 나서 예수는 마르다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지니라. 참으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누구나 결코 정말로 죽지 아니하리라. 마르다야, 네가 이를 믿느냐?” 마르다는 주께 대답했다: “예, 나는 당신이 구원자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아니 이 세상에 오셔야 할 분인 것까지도 믿은 지 오래 되나이다.”

168:0.8 (1843.2) 마리아에 관하여 예수가 물었기 때문에, 마르다는 바로 집으로 들어가서, 동생에게 속삭이며 말했다: “주가 여기 계신데, 너를 찾았느니라.” 마리아가 이 말을 들었을 때, 그 여자는 벌떡 일어나서 서둘러 예수를 만나려고 나갔다. 예수는 집에서 좀 떨어져, 마르다가 처음에 그를 만났던 곳에 아직 머물러 있었다. 마리아를 위로하려 애쓰면서 같이 있던 친구들은 그 여자가 벌떡 일어나서 나가는 것을 보자, 울려고 무덤에 간다고 생각하면서 따라갔다.

168:0.9 (1843.3)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다수가 예수를 지독히 미워하는 적이었다. 이것이 어째서 마르다가 그를 혼자서 만나려고 나왔는가, 또한 예수가 찾고 있다고 마리아에게 알려주려고 마르다가 몰래 갔는가 하는 까닭이었다. 예수를 몹시 보고 싶었지만, 마르다는 예수가 큰 무리의 예루살렘 적들 한가운데로 갑자기 들어와서 일어날 수도 있는 어떤 가능한 불상사가 일어나는 것도 피하기를 바랐다. 마리아가 예수를 맞이하러 나간 동안에 친구들과 함께 집에 남아 있으려는 것이 마르다의 속셈이었지만 그 여자는 실패했는데, 모두 마리아를 따라가서 이렇게 주가 계신 앞에 그들이 뜻하지 않게 들이닥친 것을 깨달았다.

168:0.10 (1843.4) 마르다는 마리아를 예수께로 이끌었고, 예수를 보자 마리아는 그의 발 앞에 쓰러지며 외쳤다. “당신이 여기 계시기만 했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으리이다!” 그들이 나사로의 죽음을 얼마나 슬퍼하는가 보았을 때, 예수의 혼은 동정심으로 움직였다.

168:0.11 (1843.5) 마리아가 예수를 맞이하려고 나간 것을 보고서, 애도하는 사람들은 조금 떨어진 곳으로 물러났다. 그동안에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와 이야기하고, 아버지를 굳게 믿는 믿음과 신의 뜻에 완전히 맡기는 태도를 유지하라는, 위로와 훈계의 말씀을 더 들었다.

168:0.12 (1843.6) 한편 나사로와 그를 잃은 자매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있고, 또 한편 믿지 않고 사람을 죽이려고 생각하는 이 유대인들 중에 몇 사람이 겉으로 나타낸 애정 표시를 경멸하고 경시(輕視)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인간 정신은 힘차게 움직였다. 그러한 거짓된 슬픔이 그들의 가슴 속에 자신에 대한 아주 사무친 적의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친구라고 자칭하는 이들 중에 더러가 억지로, 겉으로 애도(哀悼)함을 보이는 것을 예수는 몹시 분개하였다. 그러나 이 유대인들 가운데 몇몇은 진지하게 애도했으니, 그들이 그 가족의 참 친구였기 때문이다.

1. 나사로의 무덤에서

168:1.1 (1843.7) 애도하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져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면서 몇 순간을 보낸 뒤에 예수는 그들에게 물었다: “어디에 그를 놓아두었느냐?” 그러자 마르다가 대답했다, “와서 보소서.” 슬퍼하는 두 자매를 계속 말없이 따라가면서 그는 눈물을 흘렸다. 뒤따라간 친근한 유대인들이 그의 눈물을 보자 하나가 말했다: “그가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하였는가 보라.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자가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이때가 되어서, 그들은 가족 무덤 앞에 서 있었고, 이것은 동산 터의 먼 끝에 9미터쯤 우뚝 솟은 바위 선반에 있는 작은 천연 동굴, 즉 내리막 경사(傾斜)였다.

168:1.2 (1844.1) 도대체 어째서 예수가 눈물을 흘렸는가 인간의 지성에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인간의 감정, 인격화된 조절자의 지성에 기록된 신다운 생각, 이 두 가지의 통합된 기록을 이용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이 감정이 나타난 진정한 원인에 대하여 온전히 확실하지는 않다. 우리는 이때 그의 머리를 거쳐 가고 있던 다음의 몇 가지 생각과 느낌 때문에 예수가 눈물을 흘렸다고 믿고 싶다:

168:1.3 (1844.2) 1. 그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진정하고 슬픔에 찬 느낌을 가졌다. 오라비를 잃은 이 두 자매에게 진정하고 깊은 인간 애정을 느꼈다.

168:1.4 (1844.3) 2. 애도하는 군중, 더러는 진지한 애도자이고 더러는 다만 애도하는 체하는 자들이 자리에 있어서 마음이 어지러웠다. 겉으로 애도하는 이런 표시를 그는 언제나 분개했다. 그 두 자매가 오라비를 사랑했고 신자들이 살아난다는 믿음을 가진 것을 알았다. 이 감정의 갈등이 그들이 무덤에 가까이 가는 동안 어째서 그가 신음 소리를 냈는가 아마도 설명할지 모른다.

168:1.5 (1844.4) 3. 그는 나사로를 필사의 생명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을 참으로 망설였다. 두 자매는 정말로 그가 필요했지만, 예수는 모진 박해를 받도록 친구를 불러내야 했던 것을 뉘우쳤고, 사람의 아들의 신성한 능력을 가장 크게 나타내는 대상자가 되는 결과로서, 나사로가 이러한 박해를 견디어야 하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168:1.6 (1844.5) 이제 우리는 흥미 있고 교훈이 되는 한 사실을 이야기해도 좋다: 이 이야기는 인간사에서 겉보기에 자연스러운 정상 사건으로 펼쳐져도, 측면에서 매우 흥미 있는 빛을 얼마큼 던진다. 일요일에 사자(使者)가 예수에게 가서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말씀드렸고, 예수는 그것이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는 말을 보냈어도, 동시에 베다니로 몸소 가서 그 자매에게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하고 묻기까지 했다. 이 모두가 이 일생의 방식을 좇아서, 인간 지성의 제한된 지식에 따라서 주가 진행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듯하지만, 그런데도 나사로가 죽은 뒤에 나사로의 생각 조절자를 무기한으로 붙들어두도록 인격화된 예수의 조절자가 명령을 내렸고 이 명령은 나사로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기 꼭 15분 전에 기록된 것을 우주의 기록이 드러낸다.

168:1.7 (1844.6) 나사로가 미처 죽기도 전에 그가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킬 것을 예수의 신다운 지성이 알았는가? 우리는 모른다. 다만 여기에 우리가 기록하는 것을 알 따름이다.

168:1.8 (1844.7) 예수의 적들 가운데 다수는 그의 애정 표시를 비웃고 싶어 했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그가 이 사람을 그리 소중히 여겼다면, 베다니로 오기 전에 어찌하여 그리 오래 머물렀는가? 그가 사람들이 주장하는 그런 인물이라면, 어찌하여 아까운 친구를 구하지 않았던가? 사랑하는 자를 구할 수 없다면, 갈릴리에서 낯선 자를 고치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많은 다른 방법으로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한 일을 빈정거리고 비웃었다.

168:1.9 (1844.8) 그래서 이 목요일 오후 2시 반쯤에, 네바돈의 미가엘이 땅에서 베푼 봉사와 관련된 모든 일 중에 가장 큰 일을 연출하려고 이 조그만 베다니 마을에 무대가 모두 마련되었고, 필사 거처(居處)의 사슬로부터 주가 해방된 뒤에 자신의 부활이 일어났으므로, 이것은 육체를 입고 육신화한 동안에 신의 능력을 가장 크게 나타낸 것이었다.

168:1.10 (1845.1) 가브리엘의 지휘 하에 온갖 계급의 하늘 존재들의 광대한 집단이 가까이 옆에 있고, 인격화된 예수의 조절자의 지휘에 따라서 기대에 차 부르르 떨면서 사랑하는 군주의 명령을 집행하려고 준비된 채로 지금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나사로의 무덤 앞에 모인 그 작은 무리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168:1.11 (1845.2) 예수가 “그 돌을 치우라”고 명하는 말씀을 내렸을 때, 모인 하늘 무리들은 필사 육체의 모습대로 나사로를 부활시키는 극을 연출하려고 준비했다. 그러한 형태의 부활을 집행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며, 이것은 상물질 형태로 필사 인간을 다시 살리는 보통 기법을 훨씬 뛰어넘고, 훨씬 더 많은 하늘 성격자와 훨씬 더 큰 체계의 우주 시설이 필요하다.

168:1.12 (1845.3) 마르다와 마리아가 무덤 앞에 있는 돌을 굴려서 치우라고 예수가 이렇게 지시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들은 엇갈리는 감정에 젖어 있었다. 마리아는 나사로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를 희망했지만, 마르다는 동생의 믿음을 어느 정도까지 같이 가졌어도, 나사로가 예수와 사도들과 친구들 앞에 나설 수 없는 모습일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더 걱정이 되었다. 마르다가 말했다: “우리가 돌을 굴려 치워야 하나이까? 내 오라비는 이제 죽은 지 나흘이 되었고, 그래서 이때가 되어 몸이 썩기 시작하였나이다.” 마르다는 어째서 주가 돌을 옮기라고 요청했는가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또한 이렇게 말했고, 아마도 예수가 다만 나사로를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싶어 했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는 태도가 차분하거나 평온하지 않았다. 그들이 돌을 굴려 움직이기를 망설이자 예수는 말했다: “처음에 이 병이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고 너희에게 이르지 않았느냐? 약속을 이루려고 내가 오지 않았느냐?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온 뒤로, 오직 믿기만 하면 너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이르지 않았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의심하느냐? 얼마나 있어야 너희가 믿고 복종하겠느냐?”

168:1.13 (1845.4) 예수가 말씀을 마치고 나서, 기꺼이 일하는 이웃들의 도움을 얻어, 사도들은 그 돌을 붙들고 무덤의 입구에서 굴려서 치웠다.

168:1.14 (1845.5) 사망의 천사의 칼 끝에서 쓸개 즙의 방울이 셋째 날 끝이 되어야 비로소 작용하고, 그래서 넷째 날에 완전 효력(效力)이 생긴다는 것이 유대인이 공통으로 가진 믿음이었다. 그들은 사흘째 끝까지 사람의 혼이 무덤 근처에서 얼쩡거리며, 죽은 몸을 다시 살리려고 애쓴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러한 혼이 넷째 날이 동트기 전에, 떠난 영들의 거처로 가버린다고 굳게 믿었다.

168:1.15 (1845.6) 죽은 자, 그리고 죽은 자의 영이 떠난다는 이 관념과 견해는, 이제 나사로의 무덤에 있던 모든 사람의 머리 속에, 그리고 바야흐로 벌어지려고 하는 일에 관하여 소문을 들을 수도 있는 모든 사람에게 후일에, 자기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한 이가 친히 일함으로, 이것이 정말로, 참으로, 죽은 자를 일으킨 경우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소용되었다.

2. 나사로의 부활

168:2.1 (1845.7) 45명쯤 되는 이 필사자의 일행이 무덤 앞에 서 있는 동안, 그들은 리넨 붕대에 쌓여서 무덤 동굴의 바른쪽 아래 틈에 놓여 있는 나사로의 형태를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땅에 있는 이 인간들이 거기서 거의 숨을 죽이고 말없이 서 있는 동안, 광대한 무리의 하늘 존재들은, 사령관 가브리엘이 행동하라는 신호를 줄 때 응답하기 위한 준비로 자기 자리를 휙 찾아갔다.

168:2.2 (1846.1) 예수는 눈을 들어 말했다: “아버지여, 나의 청을 듣고 허락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아버지가 언제나 내 말을 들으시는 줄 알지만, 여기 나와 함께 서 있는 자들 때문에, 아버지가 세상으로 나를 보내셨음을 저희가 믿고, 우리가 바야흐로 하려는 일에 아버지가 나와 함께 일하심을 저희가 알도록, 내가 이렇게 아버지와 말씀하나이다.” 기도(祈禱)를 마치고서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나사로야, 앞으로 나오라.”

168:2.3 (1846.2) 구경하는 이 인간들은 꼼짝하지 않고 있었어도, 광대한 하늘 무리는 모두 창조자의 말씀에 복종하여 하나같은 행동으로 술렁거렸다. 땅의 시간으로 꼭 12초 안에, 여태까지 핏기 없던 나사로의 모습은 비로소 움직였고, 누워 있던 돌 선반의 모서리에 당장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의 몸은 시신(屍身)을 싸는 천으로 둘둘 말려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덮여 있었다. 그들 앞에―살아서―그가 일어서자 예수는 말했다.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라.”

168:2.4 (1846.3) 마르다와 마리아와 사도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집으로 달아났다. 그들은 두려움에 질려 얼굴이 하얗게 되었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더러는 기다렸지만, 많은 사람은 황급히 자기 집으로 갔다.

168:2.5 (1846.4) 나사로는 예수와 사도들에게 인사하고, 시신을 감는 천이 웬일인가, 어째서 그가 동산에서 깨어났는가 물었다. 예수와 사도들은 옆으로 옮겨 갔고, 한편 마르다는 나사로에게 그가 죽어서 묻혔다가 부활했다고 일러주었다. 잠들어 죽은 뒤로 시간 의식이 없었으니까, 그가 일요일에 죽었다가 이제 목요일에 살아났다고 마르다는 나사로에게 설명해야 했다.

168:2.6 (1846.5)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자, 이제 이 지역 우주에서 조절자 부류의 우두머리가 된, 인격화된 예수의 조절자는 이제 기다리고 있는 나사로의 옛 조절자에게 다시 살아난 그 사람의 정신과 혼 속에서 다시 거주를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168:2.7 (1846.6) 그리고 나서 나사로는 예수에게로 다가가서, 두 자매와 함께 주의 발 아래에 무릎을 꿇고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 예수는 나사로의 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말했다: “이 사람아, 너에게 일어난 것을 이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이 또한 겪을 것이요, 다만 저희는 더 영화로운 형태로 부활하리라. 너는 내가 말하는―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는―진리의 산 증인이 될지니라. 그러나 이제 모두 집으로 들어가서 이 육체들을 위하여 음식을 먹자.”

168:2.8 (1846.7) 그들이 집을 향하여 걸어가자, 가브리엘은 모인 하늘 무리의 여분의 집단을 해산했고, 한편 한 필사 인간이 죽은 육체의 모습을 입고 부활한, 유란시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를 기록했다.

168:2.9 (1846.8) 나사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대단히 아팠던 것을 알았지만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난 것만 기억할 수 있었다. 온전히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무덤에서 지낸 이 나흘에 대하여 그는 아무것도 결코 이야기할 수 없었다. 죽음의 잠을 자는 자에게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168:2.10 (1846.9) 이 막대한 일의 결과로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어도, 다른 사람들은 그를 거부하는 마음이 더욱 굳어졌을 뿐이다. 이튿날 한낮이 되어서, 이 이야기는 온 예루살렘에 퍼졌다. 수십 명의 남녀가 나사로를 보고 그와 이야기하려고 베다니로 갔고, 깜짝 놀라고 뒤숭숭해진 바리새인들은 이 새로운 사태에 관하여 무슨 조치가 있어야 하는가 결정할까 하여 서둘러 산헤드린 회의를 소집했다.

3. 산헤드린 회의

168:3.1 (1847.1)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이 사람의 증언이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대중(大衆)의 믿음을 강화하는 데 많이 기여했어도,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 지도자와 권력자들의 태도에는 거의 또는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예수를 죽이고 그의 일을 멈추게 하려는 그들의 결정을 재촉했을 뿐이다.

168:3.2 (1847.2) 이튿날 금요일 1시에, “나사렛 예수를 우리가 어찌할까?”하는 문제에 대하여 더 심의하려고 산헤드린이 회의를 열었다. 두 시간이 넘도록 논의하고 매서운 토론이 있은 뒤에, 어떤 바리새인이 예수를 즉시 사형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내놓았는데, 이 결의안은 예수가 온 이스라엘에 위협이라고 선포하고, 재판 없이, 모든 선례(先例)를 무시하고 정식으로 산헤드린이 사형을 결정하도록 태도를 정하는 것이었다.

168:3.3 (1847.3) 이 존귀한 유대인 지도자 단체는 신성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그리고 유대인의 신성한 율법을 조롱했다는 수많은 다른 비난으로 예수를 체포해서 재판하라고 몇 번이나 거듭 선포했다. 그들은 전에 그가 죽어야 한다고 한 번 선언하는 지경까지 간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재판하기 전에 예수의 죽음을 선포하기를 원했다고 산헤드린은 기록했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표결에 붙여지지 않았다. 들어 본 적이 없는 그런 행동을 제안했을 때 산헤드린 회원 14명이 무더기로 사퇴했기 때문이다. 이 사퇴에 대하여 거의 2주 동안 아무런 공식 조치가 없었어도, 이 14명의 무리는 그날부터 산헤드린에서 물러났고 다시는 회의석에 앉지 않았다. 나중에 이 사퇴를 받아들였을 때 다른 다섯 명이 쫓겨났는데, 이들이 예수에 대하여 친근한 감정을 품었다고 그 동료들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 19명이 빠진 뒤에, 산헤드린은 만장 일치에 가깝게 단결하여 예수를 재판하고 정죄할 위치에 있었다.

168:3.4 (1847.4) 다음 주에 나사로와 두 자매는 산헤드린 앞에 나타나라고 호출 받았다. 그들의 증언을 청취하고 나서, 나사로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에 대하여 아무런 의심이 있을 수 없었다. 산헤드린의 처리는 나사로가 부활한 것을 실질적으로 인정했어도, 그 기록은 이 기적과 예수가 행한 모든 다른 이적을 악마 왕의 힘으로 돌리고 예수가 그와 결탁하고 있다고 선포하는 결의안을 포함했다.

168:3.5 (1847.5) 이적(異蹟)을 행하는 그의 힘의 근원이 무엇이든지 상관 없이, 이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를 즉시 멈추게 하지 않으면, 오래지 않아 서민들이 다 그를 믿을 것이라, 더 나아가서 그를 믿은 허다한 사람이 그를 메시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여기므로, 로마 당국과 심각한 분규가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168:3.6 (1847.6) 바로 이 산헤드린 회의에서 대사제 가야바는 유대인의 옛 격언을 처음으로 표현했고, 그는 이 말을 아주 여러 번 되풀이했다: “공동체가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나으니라.”

168:3.7 (1847.7) 예수는 이 어두운 금요일 오후에 산헤드린이 한 일에 관하여 경고를 받기는 했어도 조금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고, 베다니에서 가까운 마을 벳바게에서 친구들과 함께 안식일 동안 계속 쉬었다. 미리 약정하여, 예수와 사도들은 나사로의 집에서 일요일 아침에 일찍 모였고, 베다니 가족에게 작별을 알리고 펠라 야영지로 돌아가는 여행 길을 재촉하였다.

4. 기도에 대한 응답

168:4.1 (1848.1) 베다니에서 펠라로 가는 길에 사도들은 예수에게 여러 말씀을 물었고, 주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세부에 관계되는 것을 제외하고, 이 모든 것에 서슴지 않고 대답하였다. 제외된 문제들은 사도들의 이해하는 한계를 벗어났고 따라서 이런 질문에 대하여 그들과 이야기하기를 거절했다. 그들이 베다니에서 몰래 떠났으니까, 그들끼리만 자리에 있었다. 따라서 예수는 열 사도에게 여러 가지를 일러줄 기회를 가졌고, 이것이 바로 눈앞에 닥친 시련의 나날을 위하여 그들을 준비시킬 것이라 생각했다.

168:4.2 (1848.2) 사도들은 많이 흥분했고, 최근에 겪은 체험이 기도와 그 응답에 관계되었기 때문에, 그 체험을 논의하느라고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모두가 필라델피아에서 베다니 사자에게 예수가 하신 말씀을 상기했고, 그때 그는 분명히 말했다, “이 병은 정말로 죽음에 이르지 않느니라.” 그래도, 이렇게 장담했는데도, 나사로는 실제로 죽었다. 하루 내내, 그들은 기도의 응답에 관한 이 문제를 토론하는 일로 여러 번 되돌아갔다.

168:4.3 (1848.3) 여러 질문에 대하여 예수가 대답한 말씀을 다음과 같이 간추려도 좋다:

168:4.4 (1848.4) 1. 기도는 무한자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으로 유한한 지성이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드리는 것은 유한자의 지식ㆍ지혜ㆍ속성에 제한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그 응답은 무한자의 선견ㆍ목표ㆍ이상ㆍ특권에 제약을 받는다. 기도를 드리고 그에 대하여 충분한 영적 응답을 받는 사이에, 물질 현상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관찰할 수 없다.

168:4.5 (1848.5) 2. 하나의 기도에 응답이 없는 듯이 보일 때, 그 지연은 가끔, 더 좋은 대답을 가리킨다. 하지만 어떤 좋은 까닭이 있어서 크게 늦어지는 응답이다. 나사로의 병이 정말로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고 예수가 말했을 때, 그는 이미 죽은 지 11시간이 되었다. 영적 세계의 우수한 관점이 더 나은 응답을 고안했을 때를 제외하고, 어떤 진지한 기도도 응답을 받으며, 그것은 사람의 단순한 지성이 드리는 기도와 대조하여, 사람의 영이 드리는 간구(懇求)를 들어주는 응답이다.

168:4.6 (1848.6) 3. 영이 묘사하고 믿음으로 표현되었을 때, 시간 세계에서 드리는 기도는 흔히 너무나 광대하고 모든 것을 에워싸기 때문에 오직 영원 속에서만 응답을 받을 수 있다. 유한한 간구는 때때로 무한자의 통제가 너무 많기 때문에, 그 응답은 받아들일 적절한 능력의 창조를 기다리기까지 오래 미루어야 한다.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아주 모든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오직 파라다이스에서 그 응답을 받을 수 있다.

168:4.7 (1848.7) 4. 필사자의 지성이 드리는 기도에 대한 응답은 바로 그 기도하는 지성이 불멸의 상태에 다다른 뒤에야 받아들이고 인식할 수 있는 그러한 성질인 경우가 자주 있다. 물질 존재의 기도는 흔히 그런 개인이 영 수준으로 나아갔을 때에야 응답이 있을 수 있다.

168:4.8 (1848.8) 5. 하나님을 아는 개인의 기도는 무지로 인하여 너무 왜곡되고 미신(迷信)으로 일그러져서, 그에 대한 응답은 대단히 바람직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면 사이에 있는 영 존재들이 그런 기도를 다르게 해석해서, 그 응답이 올 때, 간구하던 사람은 그것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을 까맣게 깨닫지 못한다.

168:4.9 (1848.9) 6. 참된 기도는 모두 영적 존재들에게 드리는 것이요, 그런 간구는 다 영적 방법으로 응답이 있어야 하고, 그러한 응답은 다 영적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 물질 존재들이 드리는 영적 간구에도 영 존재들은 물질적 대답을 줄 수 없다. 물질 존재들은 “영적으로 기도할” 때에야 효과 있게 기도할 수 있다.

168:4.10 (1849.1) 7. 어떤 기도도 영에게서 태어나고 믿음으로 이를 육성하지 않으면 응답을 바랄 수 없다. 너의 신앙은 최고의 지혜와 신의 사랑이 너의 기도를 받는 존재들을 언제나 움직인다고 보며, 너의 진지한 신앙은 그런 지혜와 사랑에 따라서, 기도를 듣는 이들에게 네 간구에 응답할 완전한 권한을 네가 미리 실질적으로 주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168:4.11 (1849.2) 8. 아이가 감히 부모에게 간청을 드릴 때, 아이는 언제나 그럴 권리가 있다. 그리고 아이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늦추거나 수정하거나 분리하거나 초월하거나, 또는 영적으로 올라가는 다른 단계까지 미룰 것을 부모의 뛰어난 지혜가 명령할 때, 부모는 미숙한 아이에 대하여 언제나 부모로서 그렇게 할 책임이 있다.

168:4.12 (1849.3) 9. 망설이지 말고 영적으로 갈망하는 것을 위하여 기도하라. 네 간구에 응답받을 것을 의심하지 말라. 이 응답은 실제로 우주에서 달성하는 미래의 여러 영적 수준에 네가 도달하기를 기다리면서, 이 세계 아니면 다른 세계에서 저장되어 있을 것이요, 거기서 네가 예전에, 그러나 때 이르게 간청한 것들에 대하여, 오래 기다렸던 응답을 네가 인식하고 이용하기가 가능할 것이다.

168:4.13 (1849.4) 10. 영에게서 생겨난 모든 진정한 간구는 분명히 응답을 받는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라. 그러나 너희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 진보하는 사람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의 다양한 기도와 간구에 대하여 몸소 충분한 응답을 받는 체험을 겪으면서, 너희는 항상 시공 요인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5. 나사로는 어떻게 되었는가

168:5.1 (1849.5) 나사로는 진정한 많은 신자와 호기심 있는 수많은 사람에게 큰 관심의 초점이었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주간까지 베다니 집에 남아 있었는데, 그때 산헤드린이 그에게 사형(死刑)을 선포했다는 경고를 받았다. 유대인 권력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더 이상 퍼지는 것을 중지하기로 결의했고, 예수의 기적 행위의 바로 그 절정을 대표하는 나사로를 살려두고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려냈다는 사실을 증언하라고 버려둔다면, 예수를 사형에 처하는 것이 쓸모 없으리라고 똑바로 판단했다. 이미 나사로는 그들로부터 모진 박해를 받고 있었다.

168:5.2 (1849.6) 그래서 나사로는 두 자매를 베다니에 두고 서둘러 떠났고, 예리고를 거쳐 요단강을 건너 달아났으며, 필라델피아에 이를 때까지 결코 길게 쉬지 않았다. 나사로는 아브너를 잘 알았고, 여기서 그는 사악한 산헤드린의 살인 음모(陰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느꼈다.

168:5.3 (1849.7) 이 뒤에 곧, 마르다와 마리아는 베다니에 있던 토지를 처분해 버리고 페레아에서 나사로와 합세했다. 그동안에 나사로는 필라델피아 교회에서 회계(會計)가 되었다. 나사로는 아브너가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와 논쟁할 때 그를 굳게 지지하는 사람이 되었고, 67세가 되었을 때, 베다니에서 젊은이였을 때 그를 죽게 했던 똑같은 병으로 결국 죽었다.

제 169 편 펠라에서 주신 마지막 가르침

유란시아서

제 169 편

펠라에서 주신 마지막 가르침

169:0.1 (1850.1) 3월 6일 월요일 저녁 늦게, 예수와 열 사도는 펠라 캠프에 다다랐다. 이때는 거기서 예수가 머무르는 마지막 주간이었고, 그는 군중을 가르치고 사도들을 교육하는 데 매우 분주했다. 군중에게 매일 오후에 설교했고, 밤마다 사도들, 그리고 캠프에서 거하는 어떤 상급 제자들을 위하여 질문에 대답했다.

169:0.2 (1850.2) 주가 도착하기 이틀 전에 나사로가 부활했다는 소문이 야영지에 이르렀고, 집회 전체가 흥분에 들떠 있었다. 5천 명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후로, 사람들의 상상력을 이렇게 자극한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하늘나라의 대중 봉사에서 둘째 단계의 바로 그 절정에 이르러, 예수는 짧은 이 한 주 동안 펠라에서 가르치고 다음에 페레아 남부의 여행을 시작하기로 계획했으며, 이것은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주에 마지막 비극(悲劇)의 체험까지 바로 이끌었다.

169:0.3 (1850.3) 바리새인과 주사제들은 여러 죄목을 작성하고 고발 사항을 구체화하는 일을 이미 시작했다. 그들은 다음 이유로 주의 가르침을 비난하였다:

169:0.4 (1850.4) 1. 그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다. 불경한 자들을 받아들이고, 아니 그들과 함께 먹기까지 한다.

169:0.5 (1850.5) 2. 그는 신성을 모독하는 자요,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라고 말하고 자신이 하나님과 대등하다고 생각한다.

169:0.6 (1850.6) 3. 그는 율법을 어기는 자이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다른 여러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신성한 율법을 우롱한다.

169:0.7 (1850.7) 4. 그는 악마들과 결탁하고 있다. 악마의 왕, 비엘세붑의 힘으로 놀라운 일을 행하고 겉보기에 기적으로 보이는 일을 행한다.

1.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169:1.1 (1850.8) 목요일 오후에 예수는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군중에게 말씀했다. 이 설교를 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동전 이야기를 다시 했고, 그리고 나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비유, 방탕한 아들의 비유를 덧붙였다. 예수는 말했다:

169:1.2 (1850.9) “사무엘로부터 요한에 이르기까지 선지자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진리를 추구하라고―훈계를 받았느니라. 언제나 저희는 말하되 ‘찾아낼 수 있는 동안 주를 찾으라’ 하였고, 모든 그러한 가르침을 마음 속에 간직해야 하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동안에,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너희를 찾고 있음을 보이려고 내가 왔노라. 우리에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서, 잃어버린 양 하나를 찾으러 떠난 선한 목자, 그리고 길 잃은 양을 찾아낸 뒤에, 그가 어떻게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부드럽게 우리로 지고 갔는가 하는 이야기를 내가 너희에게 여러 번 일렀느니라. 그리고 길 잃은 양을 우리에 되돌린 뒤에 선한 목자가 친구들을 부르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낸 것에 대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기를 청했음을 너희가 기억하느니라. 다시 내가 이르노니, 뉘우침이 필요 없는 올바른 사람 아흔 아홉보다 뉘우치는 죄인 하나를 놓고 하늘에서 더 크게 기뻐하느니라. 사람들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은 하늘 아버지의 관심을 더욱 돋울 뿐이라. 나는 내 아버지의 명령을 행하고자 이 세상으로 왔고, 사람의 아들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사람들이 언급한 것이 참말이라.

169:1.3 (1851.1) “너희가 뉘우친 뒤에, 너희가 희생물을 바치고 회개하는 모든 일의 결과로서, 그 뒤에 신이 너희를 받아들인다고 가르침을 받았으나 내가 너희에게 보장하노니, 아버지는 너희가 미처 뉘우치기도 전에 너희를 받아들이며, 너희를 찾아내고 다시 우리로, 아들이 되고 영적으로 진보하는 하늘나라로, 기뻐하며 너희를 데려오라고 아들과 그 동료를 보내시느니라.

169:1.4 (1851.2) “한 여인이 은화 열 잎을 장식 목거리로 만들고서 한 잎을 잃어버렸다가, 어떻게 등불을 켜고 그 집을 샅샅이 쓸고 잃어버린 은화를 찾아낼 때까지 계속 뒤졌는가 하는 이야기를 너희는 또한 기억해야 하느니라. 잃어버린 은전을 찾아내자마자 그 여자는 친구와 이웃들을 함께 부르고 말하였더라, ‘나와 함께 기뻐하자. 내가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냈음이라.’ 다시 내가 이르노니, 뉘우치고 아버지의 우리로 돌아오는 한 죄인을 놓고 하늘의 천사들 앞에서 언제나 기쁨이 있느니라. 아버지와 아들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나간다는 것을 너희에게 강조하려고 내가 이 이야기를 하노라. 이 탐색에서 길 잃은 자, 구원이 필요한 자를 찾아내려고 부지런히 노력할 때 우리는 도움이 될 수 있는 모든 영향력을 이용하느니라. 그래서 사람의 아들은 길 잃은 양을 찾으러 황무지로 나가며 또한 집에서 잃어버린 은전을 뒤지느니라. 양은 뜻하지 않게 길을 헤매며, 은전은 시간이 지나면서 먼지에 덮이고 사람들의 물건이 쌓임으로 감춰지느니라.

169:1.5 (1851.3) “그리고 이제 살림이 넉넉한 어느 농부의 아들, 생각이 모자라는 아들의 이야기를 너희에게 하고자 하노니, 그는 깊이 생각한 끝에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낯선 땅으로 가버렸고, 거기서 많은 시련(試鍊)에 부닥쳤더라. 너희는 뜻하지 않게 양이 길 잃은 것을 상기하지만, 이 젊은이는 미리 깊이 생각하고서 집을 떠났더라. 그 이야기는 이러하니라:

169:1.6 (1851.4)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더니, 나이 어린 아들은 명랑하고 구김이 없고, 언제나 즐거운 시간을 찾고 책임을 피하였으며, 한편 그 형은 심각하고 침착하고 열심히 일하며 기꺼이 책임을 졌더라. 자, 이 두 형제는 서로 잘 어울리지 않았고, 언제나 다투고 헐뜯었는지라. 어린 소년은 밝고 활발하였으나 게으르고 믿음직하지 않았으며, 나이 든 형은 꾸준하고 부지런하며 동시에 자기 중심이고 무뚝뚝하고 자만심이 있었더라. 동생은 놀기를 즐겼으나 일을 피하였고, 형은 일에 몰두하였어도 노는 일이 드물었더라. 이 관계가 아주 불쾌해져서 동생은 아버지께 가서 말하였더라: ‘아버지여, 아버지 재산 가운데 3분의 1, 내게 돌아올 몫을 주시고, 나로 하여금 출세 길을 찾으러 세상으로 나가게 하소서.’ 아버지가 이 요청을 들었을 때, 그 젊은이가 얼마나 집에서, 그리고 형과 지내기가 얼마나 불행한가 알았은즉, 재산을 나누어서 젊은이에게 그의 몫을 주었더라.

169:1.7 (1851.5) “몇 주 안에 그 젊은이는 자금을 모두 모아서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났고, 즐겁고도 이익 되는 일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였으므로, 곧 유산(遺産)을 모두 방탕한 생활에 낭비하였더라. 재산을 다 써버리고 나서, 그 나라에 오래 이어진 기근이 생겼고, 그는 궁핍에 빠졌더라. 그래서 배가 고프고 고생이 심했을 때, 그 나라의 한 시민에게서 일자리를 얻었는데, 이 사람은 돼지를 먹이라고 그를 들로 보냈더라. 그 젊은이가 돼지가 먹는 겨로 기꺼이 배를 채우고 싶었어도 누구 하나 그에게 아무것도 주려 하지 않았더라.

169:1.8 (1852.1) “어느 날, 몹시 배가 고팠을 때, 그가 제 정신이 들어 말하되, ‘내 아버지에게는 얼마나 많은 품꾼이 고용되어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빵이 있는가, 그런데 나는 여기 낯선 나라에서, 돼지를 먹이며 배가 고파서 죽는구나! 일어서서 아버지께로 가서, 내가 아버지께 이르리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나이다. 이제 더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 부름받기에 마땅치 아니하나이다. 다만 기꺼이 나를 아버지의 품꾼의 하나로 만들어 주소서.’ 이 결심이 서자, 젊은이는 일어서서 아버지의 집을 향하여 떠났더라.

169:1.9 (1852.2) “자, 이 아버지는 아들 때문에 크게 슬퍼하였는데, 생각은 없어도 명랑한 젊은이가 없어 서운했는지라. 이 아버지는 이 아들을 사랑하였고, 그가 돌아올까 늘 지키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가 자기 집으로 가까이 오는 날,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달려나가서 맞이하였고 반가운 인사로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더라. 그리고 이렇게 저희가 만난 뒤에, 아들이 아버지의 눈물 어린 얼굴을 올려다보고 말하되, ‘아버지여, 나는 하늘에, 또 아버지 보시기에 죄를 지었나이다. 나는 이제 아들이라 부름받을 자격이 없나이다’―그러나 그 젊은이는 고백을 마칠 겨를을 얻지 못하였으니,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아버지가 이때가 되자 달려오는 종들에게 이렇게 말했음이라: ‘그의 가장 좋은 옷, 내가 간직했던 옷을 얼른 가져와서 그에게 입히고, 아들의 반지를 손에 끼우고 신을 샌달을 가져오라.’

169:1.10 (1852.3) “그리고 나서, 기뻐하는 아버지가 발 아프고 지친 젊은이를 집으로 데리고 온 뒤에, 종들을 불렀더라: ‘살진 송아지를 가져다 잡으라.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았음이라. 그를 잃었다가 찾아냈느니라.’ 저희가 다 아버지 둘레에 모여서, 아들을 되찾은 것 때문에 그와 함께 기뻐하였더라.

169:1.11 (1852.4) “이 무렵에, 저희가 축하하고 있는 동안 맏아들이 들에서 하루 일을 마치고 들어왔고 집으로 가까이 오는 동안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를 들었는지라. 뒷문으로 다가와서 종들 가운데 하나를 불러내어 이 모든 잔치가 무슨 영문인가 물었더라. 그러자 그 종이 말하되 ‘오랫동안 잃어 버렸던 당신의 아우가 돌아왔고, 당신의 아버지가 아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기뻐하려고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들어와서 당신도 또한 아우를 맞이하고 당신 아버지의 집으로 그를 받아들이소서.’

169:1.12 (1852.5) “그러나 이 말을 들었을 때, 맏아들은 아주 마음이 상하고 성이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더라. 맏아들이 제 아우의 환영식을 분개한다는 말을 아버지가 듣고 그에게 간청하러 나왔더라. 그러나 맏아들은 아버지의 설득에 굽히려 하지 않았고 아버지께 이렇게 대답하였더라: ‘여기서 이 여러 해 동안 나는 아버지를 섬기었고, 아버지의 계명 중 가장 작은 것조차 한 번도 어기지 않았사온데 그래도 아버지는 내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새끼 염소 한 마리도 주지 아니하셨나이다. 이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보살피려고 여기 남아 있었어도 아버지는 나의 충실한 봉사를 결코 기뻐하지 않으셨사오나, 이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들과 탕진하고 돌아오는데,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서둘러 잡고 그 때문에 기뻐하시나이다.’

169:1.13 (1852.6) “두 아들을 참으로 사랑하였으므로 이 아버지는 이 맏아들을 설득하려고 애썼느니라: ‘그러나 아들아, 너는 나와 함께 죽 있었고, 내가 가진 이 모든 것이 네 것이라. 네가 함께 즐겁게 지내려고 친구들을 만들었다면 어느 때라도 네가 새끼 염소를 잡을 수 있었느니라. 그러나 네 아우가 돌아왔으니, 이제 네가 나와 함께 기뻐하고 즐기는 것이 마땅할 뿐이라. 아들아, 생각해 보라, 네 아우를 잃었다가 찾았고 그가 살아서 우리에게 돌아왔느니라!”

169:1.14 (1853.1) 이것은 청중에게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들어가기를 구하는 모든 사람을 기꺼이 받아들임을 강조하려고 예수가 일찍이 발표한 비유, 가장 감동적이고 효과적인 모든 비유 가운데 하나였다.

169:1.15 (1853.2) 예수는 이 세 이야기를 같은 때에 하기를 무척 좋아했다. 길 잃은 양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사람들이 뜻하지 않게 생명의 길로부터 벗어났을 때, 아버지가 그러한 길 잃은 사람을 염려하고, 양떼의 참 목자인 아들들과 함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간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물질적 걱정과 생활에서 쌓인 것 때문에 혼동하거나 어리둥절하거나 아니면 영적으로 눈먼 모든 사람을 얼마나 샅샅이 신이 찾고 있는가 보여주려고, 집에서 잃어버린 은전 이야기를 들려 주곤 했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의 집에서, 그리고 마음 속에서 잃어버린 아들의 지위가 얼마나 완벽하게 회복되는가 보여주려고, 이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돌아오는 탕자(蕩子)를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다.

169:1.16 (1853.3) 가르치던 여러 해 동안 아주 여러 번, 예수는 이 방탕한 아들의 이야기를 거듭 되풀이하였다. 이 비유와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아버지의 사랑과 사람의 이웃 정신을 가르치는 데 그가 가장 좋아한 수단이었다.

2. 기민한 집사의 비유

169:2.1 (1853.4) 어느 날 저녁 열심당원 시몬은 예수의 말씀 중 하나를 논평하며 말했다: “주여, 세상의 자녀들 가운데 다수가 불의의 재물을 써서 친구를 만드는 데 솜씨 있으므로 저희가 그 세대의 하늘나라 자녀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당신이 오늘 말씀하셨사온데 무슨 의미이나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169:2.2 (1853.5) “너희 가운데 더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무척 기민(機敏)하게 사업 동료를 다루었느니라. 너희가 부당하고 때때로 불공평했다면, 그래도 너희가 오늘의 이익과 앞날의 안전에 열중하여 너희의 사업을 처리하였으므로, 너희는 신중하고 멀리 내다보는 눈이 있었느니라. 마찬가지로 현재의 즐거움을 마련하고 한편 또한 하늘에 쌓은 보물을 너희가 미래에 꼭 즐기도록, 너희는 이제 하늘나라 안에서 인생을 정리해야 하느니라. 자신을 위하여 일할 때 자기 이익을 얻느라고 너희가 아주 부지런하였거든, 너희가 이제 사람의 형제 단체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집사인즉, 어찌하여 하늘나라를 위하여 너희는 그리 부지런히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하느냐?

169:2.3 (1853.6) “재빠르지만 불의(不義)한 집사를 둔 어떤 부자의 이야기에서 너희는 모두 교훈을 얻을 수도 있느니라. 이 집사는 이기심으로 자기 이익을 위하여 주인의 손님들을 억압했을 뿐 아니라 또한 주인의 자금도 직접 낭비하고 탕진하였더라. 이 모두가 마침내 주인의 귀에 들어갔을 때, 그는 그 집사(執事)를 앞에 부르고 이 소문이 무슨 의미인가 물으며, 당장에 그 집사 직분에 관하여 보고하고 주인의 사무를 다른 자에게 넘겨줄 준비를 하라고 요구하였더라.

169:2.4 (1853.7) “이제 불충한 이 집사가 비로소 혼잣말을 하되, ‘내가 이 집사 자리를 잃으려 하니, 어찌하리요?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구걸하자니 부끄럽구나. 이 집사 자리에서 쫓겨났을 때, 내 주인과 거래하는 모든 사람의 집에서 내가 분명히 환영받도록 무슨 일을 할지 아노라.’ 그리고 나서, 주인에게 빚진 자를 하나씩 부르면서 첫 사람에게 묻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하니 그가 대답하되 ‘기름 1백 되라’ 하였더라. 그리고 나서 그 집사가 이르되 ‘너의 밀랍판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서 50이라 고치라.’ 그리고 나서 또 다른 빚진 자에게 ‘네가 얼마나 빚졌느냐?’ 물으니 그가 대답하되 ‘밀 1백 되라’하였고, 다음에 그 집사가 말하되 ‘네 계약서를 가지고 80이라 적으라’ 하였으며, 수많은 다른 빚진 자들에게 이렇게 하였더라. 그래서 정직하지 않은 이 집사는 제 직분에서 쫓겨난 뒤에 자신을 위하여 친구를 만들려고 애썼더라. 그의 주, 주인조차 나중에 이를 발견한 뒤에, 앞날의 궁핍과 역경에 대비하여 마련하려고 쓴 방법으로 그 불충한 집사가 적어도 현명함을 보였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더라.

169:2.5 (1854.1) “그리고 이런 방법으로 이 세상의 아들들은 빛의 자녀들보다 앞날을 위하여 준비하면서 더 지혜를 보이느니라. 하늘의 보물을 얻고 있다고 공언하는 너희에게 내가 이르노라: 불의의 재물과 사귀는 자들에게서 교훈을 얻고, 마찬가지로 너희 인생에 처신하여, 땅의 일이 모두 실패할 때 너희가 영원한 거처에서 기쁘게 환영받도록 올바른 세력과 영원한 우정(友情)을 맺으라.

169:2.6 (1854.2) “내가 단언하노니, 작은 일에 충실한 자는 큰 일에도 충실하며, 한편 작은 일에 불의한 자는 또한 큰 일에도 불의하리라. 너희가 이 세상 일에 선견과 인품을 보이지 않았으면, 너희에게 하늘나라의 참된 재산의 관리를 맡겼을 때 어찌 너희가 충실하고 신중하기를 바랄 수 있느냐? 너희가 선한 집사요 충실한 은행가가 아니고 너희가 다른 사람의 재산을 충실히 다루지 않았다면, 누가 그리 어리석어 너희 이름으로 너희에게 큰 보물을 주겠느냐?

169:2.7 (1854.3) “그리고 다시 내가 주장하노니,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느니라. 사람이 하나를 미워하고 다른 하나를 사랑하든지, 아니면 하나에 매달리면서 다른 하나를 경멸하리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느니라.”

169:2.8 (1854.4)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재산을 모으는 데 탐닉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웃고 코웃음치기 시작했다. 적의(敵意)를 가진 이 사람들은 예수를 무익한 논쟁에 말려들게 하려고 애썼지만, 그는 적들과 토론하려 하지 않았다. 바리새인들끼리 말다툼에 빠졌을 때, 그 시끄러운 말소리가 근처에서 야영하는 큰 군중의 눈을 끌었고 그들이 서로 다투기 시작했을 때, 예수는 물러나서 밤을 지내려고 자기 텐트로 갔다.

3. 부자와 거지

169:3.1 (1854.5) 모임이 너무 시끄러워졌을 때, 시몬 베드로가 일어나서 지휘하며 말했다: “여러분, 형제들아, 이렇게 너희 사이에 다투는 것이 보기가 딱하구나. 주는 말씀을 마쳤고, 너희는 그의 말씀을 숙고하는 것이 좋으니라. 이것은 주가 너희에게 새로 선포한 교리가 아니라. 부자와 거지에 관한 나지르인의 우화(寓話)를 너희가 또한 들은 적이 없느냐? 우리 가운데 더러는 재물을 사랑하고 부당한 재산을 탐내는 자에게 경고하는 이 비유를 세례자 요한이 천둥처럼 외치는 것을 들었느니라. 이 옛 비유는 우리가 설파하는 복음과 일치하지 않아도, 하늘나라의 새 빛을 이해하는 때가 오기까지 너희는 다 그 교훈을 주목하는 것이 좋으리라. 요한이 일러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으니라:

169:3.2 (1854.6) “디베스라 이름하는 어떤 부자(富者)가 있었는데, 자주 옷과 고운 리넨을 입고 날마다 명랑하고 찬란하게 살았는지라. 그리고 나사로라 이름하는 어떤 거지가 있었는데, 그는 헌데가 가득한 채로 이 부자 집 대문에 누워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싶어 하였더라. 그렇다, 개들까지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더라. 그러다가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쉬었더라. 그리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이 부자도 죽고, 크게 화려하고 임금처럼 찬란하게 매장되었느니라. 이 세상을 떠나자, 그 부자는 지옥에서 깨어났고 자신이 고통스러움을 발견하고서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안긴 나사로를 보았는지라. 그러자 디베스가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게 자비를 베푸시고, 나사로를 이리로 보내사 손가락 끝을 물에 담가 내 혀를 식히게 하소서, 내 벌 때문에 내가 크게 괴로움이니이다.’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이 대답하되 ‘이 사람아, 너는 일생 동안 좋은 것을 누렸고, 나사로는 마찬가지로 나쁜 것을 견디었음을 네가 기억해야 하느니라. 그러나 나사로는 위로를 받는데 네가 고통 받는 것을 보니, 이제 이 모두가 바뀌었구나. 게다가 우리와 너 사이에 큰 심해(深海)가 있어, 우리가 너한테 갈 수 없고 너도 우리에게 건너올 수 없느니라.’ 그리고 나서 디베스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더라, ‘내게 다섯 형제가 있으니, 내 형제들이 이 고통스러운 곳으로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나사로가 증언하도록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려보내시기를 내가 비나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 사람아,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저희의 말을 듣게 하여라.’ 그리고 나서 디베스가 대답하되, ‘아니, 아니,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그러나 한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서 저희에게 가면, 저희가 뉘우치리이다.’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이 말하였더라, ‘저희가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한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지언정 저희가 알아듣지 못하리라.’”

169:3.3 (1855.1) 베드로가 나지르인 단체의 이 옛 비유를 이야기한 뒤에, 그리고 군중이 조용해졌기 때문에 안드레가 일어나서 밤 동안에 자라고 해산했다. 사도와 제자들이 예수에게 디베스와 나사로의 비유에 대하여 자꾸 물었어도, 예수는 거기에 대하여 아무런 논평을 하지 않았다.

4. 아버지와 그의 나라

169:4.1 (1855.2) 사도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선포했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임금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에게 설명하려고 애쓰는 데 예수는 언제나 애를 먹었다. 예수가 땅에서 살고 육체를 입고 가르쳤을 때, 유란시아의 사람들은 대체로 여러 나라 정부에 있는 임금과 황제들에 대하여 알았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을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다. 이것과 기타 이유 때문에, 주는 사람의 영적 단체를 하늘나라라고, 이 단체의 영적 우두머리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결코 아버지를 임금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사도들과 친밀하게 나눈 이야기에서 그는 언제나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서, 그들의 형으로 언급했다.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을 인류의 하인으로, 하늘나라 복음의 사자로 묘사했다.

169:4.2 (1855.3) 예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격과 속성에 관하여 사도들에게 체계적 수업을 준 적이 없었다. 그는 결코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았고, 그들이 믿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예수는 아버지가 실재함을 증명하는 논리를 내놓음으로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아버지에 관한 그의 가르침은 모두, 그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아들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아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안다, 오로지 아들, 그리고 아들로부터 아버지를 계시받을 자가 정말로 아버지를 안다, 아들을 아는 자는 또한 아버지를 안다, 그리고 그들의 통합된 성질을 드러내고 그들이 결합하여 하는 일을 보이려고 아버지가 그를 세상으로 보냈다는 선언에 집중된다. 야곱의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은 영이라”고 선포했을 때를 제쳐놓고, 아버지에 대하여, 주는 결코 다른 선언을 한 적이 없다.

169:4.3 (1856.1) 예수의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 그의 일생이 신다운 것을 관찰함으로 너희는 그로부터 하나님에 관하여 배운다. 주의 일생으로부터 너희는 각자 하나님 개념을 소화할지 모르며, 이 개념은 영적이고 신성한 실체, 실재하는 영원한 진리를 깨닫는 너희 능력의 정도를 가리킨다. 나사렛 예수의 인생에서, 유한한 체험을 겪은 그 시공 인격 안에 무한자가 집중된 경우를 제외하고, 유한자는 결코 무한자를 이해하기를 바랄 수 없다.

169:4.4 (1856.2) 오직 체험을 실제로 겪어야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결코 지적 가르침만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예수는 잘 알았다. 사도들이 결코 하나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어도, 그들이 사람의 아들을 알고 지내온 것 같이, 아주 확실히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고 예수는 사도들을 가르쳤다. 예수가 말씀한 것을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어떤 분이었는가를 깨닫고서 너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였다.

169:4.5 (1856.3) 히브리 성서를 인용(引用)할 때를 제외하고, 예수는 하나님과 아버지, 오직 이 두 이름으로 신을 언급했다. 그의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주가 언급했을 때, 유대인의 부족 신의 진보된 개념을 대표한 야웨라는 낱말이 아니라, 여럿인 하나님(삼위일체)를 가리키는 히브리 단어를 보통 사용했다.

169:4.6 (1856.4) 예수는 결코 아버지를 임금이라 부르지 않았고, 유대인들이 왕국의 회복을 희망하고 요한이 한 왕국이 다가온다고 선포했기 때문에, 자신이 제안한 영적 형제 정신을 하늘나라라 이름 붙이는 것이 필요했음을 무척 유감으로 생각했다. 한 가지 예외―”하나님은 영이라”는 선언―을 제외하고, 예수는 결코 파라다이스의 첫째 근원 중심과 자신의 개인적 관계를 설명하는 조건이 아닌 어떤 다른 방법으로 신을 언급하지 않았다.

169:4.7 (1856.5) 예수는 신 개념을 가리키려고 하나님이라는 낱말을 쓰고, 하나님을 아는 체험을 가리키려고 아버지라는 낱말을 썼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데 아버지라는 낱말이 쓰일 때, 가능한 가장 큰 뜻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하나님이라는 낱말은 정의를 내릴 수 없고, 따라서 아버지의 무한한 개념을 대표하며, 한편 아버지라는 용어는 부분적으로 정의(定義)를 내릴 수 있으니까, 필사자로 존재하는 과정에서 사람과 상관되는 대로, 신다운 아버지에 대하여 인간이 가진 개념을 대표하는 데 써도 좋다.

169:4.8 (1856.6) 유대인에게 엘로힘은 신 중의 신이었고, 한편 야웨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다. 예수는 엘로힘 개념을 받아들였고, 이 최고 집단의 존재들을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종족의 신 야웨 개념 대신에, 하나님이 아버지요 사람은 세상에 두루 형제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그는 신화(神化)된, 종족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야웨 개념을 사람의 모든 자손의 아버지라, 개별 신자의 신다운 아버지라는 관념으로 높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주의 이 하나님과 모든 사람의 이 아버지는 하나요, 동일한 파라다이스 신이라고 가르쳤다.

169:4.9 (1856.7) 예수는 결코 그가 엘로힘(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나타난 것이라 주장하지 않았다. 그가 여러 세상에 대하여 엘로힘(하나님)를 계시하는 자라고 결코 선언하지 않았다. 그를 본 사람이 엘로힘(하나님)을 보았다고 결코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아버지가 육체의 모습으로 계시(啓示)된 것이라고 선언했고, 그를 본 자는 누구나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했다. 신다운 아들로서 그는 오로지 아버지를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169:4.10 (1857.1) 정말로 주는 엘로힘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하나님의 필사 아들들에게, 그런 계시를 필사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한, 일생의 계시를 아버지 성품의 묘사에 국한하기로 하였다.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다른 성격자들의 성품에 관하여 말하면, 우리는 그들이 전적으로 아버지와 같다는 가르침에 만족해야 할 것이고, 아버지는 육신화한 아들, 나사렛 예수의 일생에 담긴 인품 묘사에 드러났다.

169:4.11 (1857.2) 땅에서 일생을 살면서 하늘 아버지의 참 성품을 드러내기는 했어도, 예수는 아버지에 대하여 거의 가르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오직 두 가지만 가르쳤다: 하나님 자신은 영이며, 지음받은 존재들과 가지는 관계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에서 아버지라는 것이다. 이날 저녁에 “나는 아버지로부터 왔고 나는 이 세상으로 왔노라. 또 나는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리라” 선언했을 때, 예수는 자기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하여 최종 선언을 했다.

169:4.12 (1857.3) 그러나 너희는 잘 들어라! 예수는 결코 “내 말을 들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하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였다.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대등하지 않지만, 예수를 보는 것은 그 자체로서 아버지를 그 사람에게 계시하는 그런 체험이다. 우주들의 하나님은 방대한 창조를 다스려도, 자기의 영을 너희 지성 안에 거하라고 보내는 분은 하늘에 계신 그 아버지이다.

169:4.13 (1857.4) 예수는 인간의 모습을 가진 영적 렌즈요, 이 렌즈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분을 물질 인간이 볼 수 있게 만든다. 그는 너희의 형이요, 육체를 입고서, 하늘의 무리들조차도 감히 넉넉히 이해할 수 없는 무한한 속성을 가진 한 존재를 너희가 이해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개별 신자가 몸소 겪는 체험에 있음이 틀림없다. 하나님은 영이고, 오직 영적 체험으로서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영적 영역을 다스리는 신다운 아들들은 하나님을 오직 아버지로서 물질 세계의 유한한 아들들에게 드러낼 수 있다. 너희는 영원자가 아버지인 것을 알 수 있고, 그를 우주의 하나님, 모든 존재의 무한한 창조자로 예배할 수 있다.

제 170 편 하늘나라

유란시아서

제 170 편

하늘나라

170:0.1 (1858.1) 3월 11일, 토요일 오후에, 예수는 펠라에서 마지막으로 설교하였다. 이것은 그의 대중 봉사에서 주목할 만한 연설에 속하며, 하늘나라에 대하여 충분하고 완벽한 논설을 담고 있다. 그는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의 뜻과 중요성에 관하여, 사도와 제자들의 머리 속에 혼란이 존재하는 것을 알았고, 이 두 가지를 자신 수여 사명에서 서로 바꿀 수 있는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하늘의 나라라는 바로 그 용어는 그것이 대표하는 의미를 땅의 나라 및 현세의 정부들과 전혀 상관 없이 구분하기에 충분해야 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단 한 세대 안에 없애기에는 현세의 임금 관념이 유대인 머리 속에 너무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육성해 온 이 왕국 개념을 예수는 처음에 드러내놓고 반대하지 않았다.

170:0.2 (1858.2) 이 안식일 오후에 주는 하늘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분명히 밝히려고 애썼다. 그 주제를 모든 관점에서 논의하고, 그 용어가 어떤 많은 다른 의미로 쓰였는가 밝히려고 애썼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전 경우에 예수가 하신 수많은 말씀을 덧붙이고, 바로 이날 저녁 토론 시간에 사도들에게만 주신 논평을 얼마큼 넣어서 그 연설을 확대하겠다. 우리는 또한 하늘나라 관념이 후일에 기독교회에 관계되는 대로, 나중에 결국 어떻게 되어 갔는가 다루는 논평을 더러 하겠다.

1. 하늘나라 개념

170:1.1 (1858.3) 예수의 설교를 발표하는 것과 관련하여, 히브리 성서 전체에 걸쳐서 하늘나라에 관하여 두 가지 개념이 있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70:1.2 (1858.4) 1. 오늘의 현실로서, 그리고

170:1.3 (1858.5) 2. 앞날의 희망으로서―메시아가 출현하고 나서 하늘나라가 충만하게 실현될 때. 이것이 세례자 요한이 가르쳤던 하늘나라 개념이었다.

170:1.4 (1858.6) 맨 처음부터 예수와 사도들은 이 두 개념을 다 가르쳤다. 머리 속에 간직해야 할 두 가지 다른 하늘나라 이념이 있었다.

170:1.5 (1858.7) 3. 후일에 유대인이 가진 개념, 곧 초자연적 기원을 가지고 기적으로 개시되는 세계적 초월 왕국의 개념.

170:1.6 (1858.8) 4. 세상이 끝날 때 선이 악에 승리함으로 신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그리는 페르시아인의 가르침.

170:1.7 (1858.9) 예수가 땅에 오시기 바로 전에 유대인은 이 모든 하늘나라 이념을 유대인이 승리하는 시대를 개시하려고 메시아가 온다는 묵시적 개념으로 통합하고 혼동하였다. 이 시대는 땅에서, 새 세상에서, 하나님이 최상으로 다스리는 영원한 시대, 온 인류가 야웨를 예배할 시대였다. 이 하늘나라 개념을 이용하기로 하면서 예수는 유대 및 페르시아 종교의 가장 중요한 최고의 유산(遺産)을 이용하기로 작정했다.

170:1.8 (1859.1) 기독교 시대의 여러 세기를 통하여 사람들이 이해하고 오해한 바와 같이, 하늘나라는 네 가지 뚜렷이 다른 집단의 관념을 담고 있다:

170:1.9 (1859.2) 1. 유대인의 개념.

170:1.10 (1859.3) 2. 페르시아인의 개념.

170:1.11 (1859.4) 3. 몸소 체험한다는 예수의 개념―”너희 안에 있는 하늘나라.”

170:1.12 (1859.5) 4. 기독교를 창시하고 전파한 자들이 세상에 강조하려고 애쓴, 복합되고 혼동된 개념들.

170:1.13 (1859.6) 다른 때와 달라지는 상황에서, 예수는 대중을 가르칠 때 수많은 “하늘나라” 개념을 제시한 듯하지만, 사도들에게 언제나 하늘나라는 땅에 있는 동료들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가지는 관계에서 사람이 몸소 겪는 체험을 포함하는 것이라 가르쳤다. 하늘나라에 관하여, 그의 마지막 말씀은 언제나 “너희 안에 있는 나라”였다.

170:1.14 (1859.7) “하늘나라”라는 용어의 뜻에 관하여 여러 세기에 걸쳐 있던 혼동은 다음 세 가지 요인 때문이다:

170:1.15 (1859.8) 1. 예수와 사도들이 “하늘나라” 개념을 다시 진술하는 여러 진보적 단계를 거침에 따라서 그 하늘나라 개념을 지켜보고서 생긴 혼동.

170:1.16 (1859.9) 2. 유대 지방에서 이방의 땅으로 초대(初代) 기독교를 옮겨 심는 것과 불가피하게 연결된 혼동.

170:1.17 (1859.10) 3. 기독교가 그 핵심 관념인 예수의 인물에 관하여 조직된 종교가 되었다는 사실에 처음부터 생긴 혼동. 하늘나라 복음은 갈수록 더 그에 관한 종교가 되었다.

2. 예수의 하늘나라 개념

170:2.1 (1859.11)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진리,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람이 형제라는 사실, 이 두 가지 개념으로 시작되고 거기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는 분명히 밝혔다. 그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랜 세월에 걸친 동물적 공포의 속박으로부터 사람을 해방하고, 동시에 영적으로 자유로운 새 삶이 부여하는 다음 재산으로, 인간의 생활을 풍성하게 할 것이라고 예수는 선언했다:

170:2.2 (1859.12) 1. 새로운 용기와 늘어난 영적 힘을 소유하는 것. 하늘나라 복음은 사람을 해방하고 사람이 영생(永生)을 감히 바라도록 격려할 것이다.

170:2.3 (1859.13) 2. 그 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아니 가난한 사람에게도, 새로운 확신과 참된 위로의 말씀을 담았다.

170:2.4 (1859.14) 3. 복음 자체가 도덕적 가치의 새 표준이요, 인간의 행위를 재는 새 윤리의 자였다. 복음은 그 결과로 생기는 새 체제의 인간 사회의 이상을 묘사했다.

170:2.5 (1859.15) 4. 그 복음은 물질적인 것에 비하여 영적인 것이 우수하다고 가르쳤다. 영적 실체들을 영화롭게 하고 초인간적 이상을 찬미했다.

170:2.6 (1860.1) 5. 이 새 복음은 영적 달성을 인생의 참된 목표로 높였다. 인간의 생명은 도덕적 가치와 신다운 위엄을 띠는 새 자질을 받았다.

170:2.7 (1860.2) 6. 영원한 실체들은 땅에서 올바르게 애쓴 결과라(그에 대한 보상이라)고 예수는 가르쳤다. 고귀한 운명을 깨닫는 결과로서, 땅에서 사람이 필사자로 머무르는 일은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170:2.8 (1860.3) 7. 인간의 구원은 원대한 신의 목적의 계시임을 새 복음이 확인했으며, 신의 목적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아들들이 끝없이 봉사하는 미래 운명에 성취되고 실현될 것이다.

170:2.9 (1860.4) 이 여러 가르침은 예수가 가르쳤던 확대된 하늘나라 이념을 담는다. 이 위대한 개념은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 초보이며 뒤범벅이 된 하늘나라 가르침에 거의 담겨 있지 않다.

170:2.10 (1860.5) 사도들은 하늘나라에 관하여 주가 발표하신 말씀의 참 뜻이 무엇인가 깨우칠 수 없었다. 신약(新約)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의 가르침이 후일에 왜곡된 것은 복음서 기록자들의 개념이 예수가 그때 세상에서 잠시만 자리를 비우고, 권능과 영광을 입고 하늘나라를 세우려고 곧 돌아올 것이라는 관념에―그가 육체를 입고 함께 있는 동안 그들이 지녔던 것과 같은 바로 그런 생각에―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새 시대”의 도래를 가리키는 아무 징조도 없이 여러 세기가 지났다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

170:2.11 (1860.6) 이 설교에 담겨 있는 대단한 노력은 하늘나라 개념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상적 관념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였다. 오랫동안 주는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기를 가르쳤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때 그는 같은 뜻이지만 더 실용적 용어, 하나님의 뜻을 사용하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를 그들이 사용하지 않도록 유인하려고 진지하게 애썼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170:2.12 (1860.7) 예수는 왕국ㆍ임금ㆍ백성 관념 대신에 하늘 가족, 하늘 아버지, 그리고 동료 인간을 위하여 기쁘게 자원하여 봉사하며 아버지 하나님을 숭고하고 총명하게 섬기는 데 몰두하는, 하나님의 해방된 아들들, 이 세 가지 개념으로 갈아치우기를 바랐다.

170:2.13 (1860.8) 이때까지 사도들은 하늘나라에 대하여 두 가지 관점을 습득했고, 다음과 같이 보았다:

170:2.14 (1860.9) 1. 그 당시에 참 신자들의 마음 속에 있던, 몸소 체험하는 문제, 그리고

170:2.15 (1860.10) 2. 종족이나 세계 현상의 문제. 하늘나라가 미래에 온다는 것, 기대할 어떤 것.

170:2.16 (1860.11) 사도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하늘나라가 오는 것을, 마치 반죽 속에 있는 누룩과 같거나 겨자씨가 자라는 것 같은, 점진적 발전으로 보았다. 종족의 의미나 세계적 의미에서 하늘나라의 도래는 갑작스럽고 볼 만하리라고 믿었다. 예수는 하늘나라가 상급의 영적 생활을 실천하는 그들의 개인적 체험이라, 영을 체험하는 이 실체들은 신처럼 확실하고 영원히 장대한 새로운 상급 수준까지 점진적으로 변화된다고, 지치지 않고 그들에게 일러주었다.

170:2.17 (1860.12) 이날 오후에 다음 두 단계를 묘사했으므로, 주는 하늘나라의 두 가지 성질에 관한 새로운 개념을 뚜렷이 가르쳤다:

170:2.18 (1860.13) “첫째.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최고의 소망. 사람을 사심없이 사랑하는 것, 이것은 개선(改善)된 윤리적ㆍ도덕적 행위와 같은 좋은 열매를 맺는다.

170:2.19 (1861.1) “둘째.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필사 신자들의 목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완전해지고, 하나님의 뜻이 더욱 신답게 이루어지는 상태.”

170:2.20 (1861.2) 예수는 신자들이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지금 들어간다고 가르쳤다. 여러 강론에서 두 가지가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수라고 가르쳤다:

170:2.21 (1861.3) 1. 믿음, 성실성. 어린아이처럼 와서, 아들 신분의 수여를 선물로 받는 것. 묻지 않고, 아버지의 지혜로움을 완전히 믿고 진심으로 의지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복종하는 것. 전혀 편견과 선입관(先入觀)이 없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것. 버릇이 나빠지지 않은 어린이처럼, 생각이 트여 있고 배울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

170:2.22 (1861.4) 2. 진리를 간절히 찾기. 올바름을 목마르게 찾는 것. 생각의 변화, 하나님과 같이 되고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동기를 얻는 것.

170:2.23 (1861.5) 죄는 결함이 있는 성품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복종하지 않는 의지에 지배된, 고의적 지능의 소산이라고 예수는 가르쳤다. 죄에 관하여 말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셨다, 우리의 동료를 용서하는 행위가 그러한 용서를 개인적으로 소용되게 만든다고 가르쳤다. 육체를 입은 네 형제를 용서할 때, 그렇게 함으로 자신의 혼 속에서 너는 하나님이 바로 너의 잘못을 용서하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만들어낸다.

170:2.24 (1861.6) 사도 요한이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관한 이야기를 비로소 기록할 무렵에, 초대의 기독교인은 박해의 근원인 하나님의 나라 관념 때문에 너무 곤경을 겪어서, 대체로 그 용어(用語)의 사용을 포기하였다. 요한은 “영생”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했다. 예수는 영생을 또한 “생명의 나라”라고 이야기했다. 또한 “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자주 언급했다. 한때 그러한 체험을 “아버지 하나님과 가지는 가족의 친교”라고 말했다. 예수는 많은 용어를 하늘나라 대신에 쓰려고 애썼지만, 언제나 성공하지 못했다. 다른 것 가운데, 다음을 썼다: 하나님의 가족, 아버지의 뜻, 하나님의 친구들, 신자들의 친교, 사람의 형제 정신, 아버지의 양 떼, 하나님의 자녀, 충실한 자들의 친교, 아버지를 섬기는 것, 하나님의 해방된 아들들.

170:2.25 (1861.7) 그러나 그는 하늘나라 관념의 사용을 피할 수 없었다. 50년도 더 지난 뒤에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파괴한 뒤까지 이 하늘나라 개념은 영생(永生) 종파로 바뀌기 시작하지 않았고, 한편 재빨리 커지고 틀이 잡혀가는 기독교회가 하늘나라의 사회적ㆍ제도적 모습을 이어받았다.

3. 하늘나라와 올바름의 관계

170:3.1 (1861.8) 어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세상이 보는 앞에서 아주 허세부리며 과시한, 종처럼 따라 행하는 올바름을 뛰어넘을 그러한 올바름을 사도와 제자들이 신앙으로 얻어야 한다고 예수는 언제나 애써서 강조하였다.

170:3.2 (1861.9) 믿음, 어린애 같이 단순한 믿음이, 하늘나라 문의 열쇠라고 가르쳤지만, 예수는 또한 문으로 들어간 뒤에, 하나님의 건장한 아들의 어른 키까지 자라기 위하여, 모든 믿는 어린아이가 올라가야 하는, 점진적 올바름의 단계가 있다고 가르쳤다.

170:3.3 (1861.10)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기법(技法)을 고려할 때 사람이 하늘나라의 올바름에 도달했는가가 드러난다. 믿음은 하나님의 가족에 들어가는 데 너희가 치르는 값이다. 그러나 용서(容恕)는 너희의 믿음을 입장료로 받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하늘나라를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한 실제 체험을 수반하며, 다음 네 단계로, 마음 속의 올바름을 얻는 하늘나라 단계로 이루어진다:

170:3.4 (1862.1) 1. 하나님의 용서는 사람이 동료를 용서하는 바로 그 한도까지, 실제로 이용할 수 있고 몸소 체험한다.

170:3.5 (1862.2) 2. 사람은 동료를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참으로 동료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170:3.6 (1862.3) 3. 이처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가장 높은 윤리이다.

170:3.7 (1862.4) 4. 그렇다면 도덕적 행위, 참된 올바름은 그러한 사랑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170:3.8 (1862.5) 그러니까 하늘나라의 참된 종교, 마음 속의 종교는, 어김없이 더욱, 사회에 봉사하는 실용적 경로에서 명시(明示)되는 경향이 있음이 분명하다. 예수는 신자들이 어쩔 수 없이 사랑으로 봉사에 종사하게 만드는 그러한 살아 있는 종교를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는 종교를 대신하는 자리에 윤리를 두지 않았다. 종교는 원인이요 윤리는 결과라고 가르쳤다.

170:3.9 (1862.6) 어떤 행위가 올바른가는 동기(動機)에 따라서 재야 한다. 따라서 가장 높은 형태의 선은 의식되지 않는다. 예수는 도덕률이나 윤리 그 자체에 결코 관여하지 않았다.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과 가지는 마음 속의 영적 친교에만 온통 관심을 가졌고, 그런 친교는 사람을 위하여 겉에서 사랑으로 베푸는 봉사로서, 아주 확실히 직접 나타난다. 하늘나라의 종교는 아무도 몸 안에 가둘 수 없는 몸소 겪는 진정한 체험이다, 신자 가족의 한 사람임을 의식(意識)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가족 행위 교훈을 실천하는 것으로, 곧 형제 정신을 높이고 확대하려는 노력으로, 형제와 자매에게 봉사하는 길로 인도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170:3.10 (1862.7) 하늘나라의 종교는 개인적ㆍ개별적 종교이다. 그 열매, 그 결과는 가족과 사회에 나타난다. 예수는 공동체와 대조하여 어김없이 개인의 신성함을 높였다. 그러나 사람은 사심(私心) 없는 봉사로 인품을 기른다는 것, 사람은 동료를 사랑하는 관계에서 도덕적 성품을 펼친다는 것을 그는 또한 인식했다.

170:3.11 (1862.8) 하늘나라가 마음 속에 있다고 가르치고 개인을 높임으로 사회의 참된 올바름을 실현하는 새 섭리 시대를 열었으니까, 예수는 옛 사회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 세상이 이 새 체제의 사회를 거의 알지 못한 것은 세상이 하늘나라 복음의 원칙을 실행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우수한 이 하늘나라가 땅에 다가올 때, 단지 개량된 사회적ㆍ물질적 조건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향상되고 강화된 영적 가치의 영화로움에서 나타날 것이요, 그러한 가치는 다가오는 시대의 특징, 개선된 인간 관계와 진보하는 영적 성취의 특징을 나타낸다.

4. 하늘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170:4.1 (1862.9) 예수는 하늘나라를 결코 엄밀하게 정의하지 않았다. 한때 하늘나라의 한 국면에 대하여 강론하고, 또 다른 때에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런 형제들의 다른 모습을 이야기하곤 했다. 이 안식일 오후에 설교하는 과정에서, 예수는 적어도 하늘나라의 다섯 단계나 시대를 주목하였으니, 다음과 같다:

170:4.2 (1862.10) 1. 개별 신자가 아버지 하나님과 친교하는 영적 생활을 개인적으로 마음 속에서 겪는 체험.

170:4.3 (1863.1) 2. 복음을 믿는 사람들의 확대되는 형제 단체, 곧 개별 신자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영이 다스리는 결과로 도덕률이 향상되고 윤리가 자극되는 사회적 모습.

170:4.4 (1863.2) 3. 땅과 하늘에 널리 퍼져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의 초월 필사 형제 단체. 인간을 초월하는 자들의 하나님의 나라.

170:4.5 (1863.3) 4. 하나님의 뜻이 더욱 완벽하게 이루어진다는 기대, 개선된 영적 생활과 관련하여 새 사회 체제―사람의 다음 시대―의 여명을 향한 전진.

170:4.6 (1863.4) 5. 완전해진 하늘나라, 땅에서 미래의 영적 시대, 빛과 생명의 시대.

170:4.7 (1863.5) 그러므로 주가 하늘나라라는 용어를 쓸 때, 이 다섯 단계 가운데 어느 것을 언급하는가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주의 가르침을 검토해야 한다. 사람의 뜻을 차츰차츰 바꾸는 이 과정으로, 이렇게 인간의 결정에 영향을 미침으로, 미가엘과 그 동료들은 마찬가지로, 사회적 및 기타 형태의 과정, 인간의 진화 과정 전체를 차츰차츰, 하지만 확실히 바꾸고 있다.

170:4.8 (1863.6) 주는 이 기회에 하늘나라 복음의 가장 중요한 모습을 대표하는 다음 다섯 항목을 강조했다:

170:4.9 (1863.7) 1. 개인이 첫째로 중요하다.

170:4.10 (1863.8) 2. 사람의 체험에서 결정 요소인 의지.

170:4.11 (1863.9) 3. 아버지 하나님과 영적 친교를 가지는 것.

170:4.12 (1863.10) 4. 사람에게 사랑으로 봉사함으로 얻는 최고의 만족.

170:4.13 (1863.11) 5. 사람의 인격에서 영적인 것이 물질인 것을 초월한다.

170:4.14 (1863.12) 이 세상은 예수가 가르친 하늘나라 교리의 힘찬 관념과 신다운 이상을 한번도 심각하게, 진지하게, 또는 정직하게 시험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너희는 유란시아에서 하늘나라 관념이 겉보기에 느리게 진보한다고 낙심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 나아가는 진화(進化)의 순서는 물질과 영, 이 두 세계에서 갑작스럽고 예상하지 못하게 주기적 변화를 거친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육신화된 아들로서 예수가 수여된 것은 세상의 영적 생활에서 바로 그러한 이상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하늘나라가 오는가 시대적 증표를 찾느라고 자신의 혼 속에서 하늘나라를 세우지 못하는 치명적 잘못을 저지르지도 말라.

170:4.15 (1863.13) 예수가 하늘나라의 한 단계를 미래로 넘겼고, 수많은 경우에 그러한 사건이 세계적 위기의 일부로서 나타날 수도 있다고 넌지시 비추기는 했어도,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가 아주 확실히, 몇 번이나 유란시아로 언젠가 돌아올 것을 분명히 약속했더라도, 결코 이 두 개념을 확실히 한데 연결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적어야 한다. 그는 땅에서, 어느 미래에 하늘나라를 새로이 계시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언젠가 이 세상으로 친히 돌아오리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이 같은 의미를 가졌다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모든 지식을 종합해 보건대, 이 두 약속은 같은 사건을 언급할지도,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170:4.16 (1863.14) 사도와 제자들은 이 두 가르침을 함께 연결지은 것이 아주 확실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이 기대했던 대로 구체화되지 않았을 때, 앞날의 나라에 관한 주의 가르침을 상기하고 그가 다시 오리라는 약속을 기억하면서, 그들은 이 두 약속이 동일 사건을 언급한다고 서둘러 단정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완벽하게, 권능과 영광으로 하늘나라를 세우려고 예수가 즉시 다시 오기를 희망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뒤이은 신자 세대들은 영감을 주지만 헛된 바로 그 희망을 품고서 땅에서 계속 살았다.

5. 후일의 하늘나라 관념

170:5.1 (1864.1) 하늘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요약했으므로, 우리는 하늘나라 관념에 붙게 된 어떤 후일의 관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하늘나라가 미래 시대에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가, 하늘나라를 미리 예측하도록 허락받았다.

170:5.2 (1864.2) 기독교가 전파되는 처음 몇 세기를 통해서 내내, 하늘나라 관념은 그때 재빨리 퍼지는 그리스인의 이상주의 개념, 자연의 것은 영적인 것의 그림자―현세의 것은 영원한 것이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그림자―라는 관념에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다.

170:5.3 (1864.3) 그러나 유대인의 땅에서 이방인의 땅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옮겨심은 것을 표시한 큰 걸음은 하늘나라의 메시아가 교회에서 구원자가 되었을 때였는데, 교회는 바울과 그 후계자들의 활동으로부터 생겨나고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를 둔 종교적ㆍ사회적 조직이었으며, 그 가르침은 필로의 여러 개념과 페르시아인의 선악 교리로 보충되었다.

170:5.4 (1864.4) 하늘나라 복음의 가르침에 담긴 예수의 관념과 이상은 그 추종자들이 그의 선언을 점진적으로 왜곡했기 때문에 거의 실현되지 못할 뻔했다. 주의 하늘나라 개념은 두 가지 큰 경향으로 인하여 눈에 띄게 수정되었다:

170:5.5 (1864.5) 1. 유대인 신자들은 계속 예수를 메시아로 여겼다. 세계적이고 대체로 물질적인 나라를 세우려고 예수가 오래지 않아 실제로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170:5.6 (1864.6) 2. 이방(異邦)의 기독교인들은 아주 일찍부터 바울의 교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예수가 교회 신도들의 구원자라는[1] [23] 일반적 관념으로 더욱 이끌었는데, 구원자는 초기 개념, 곧 하늘나라의 순전한 영적 형제 정신을 새로이 제도적으로 이어받은 개념이었다.

170:5.7 (1864.7) 하늘나라의 사회적 결과로서 생긴 교회는 온전히 자연스럽고 바람직하기도 했을 것이다. 교회의 잘못은 교회가 존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예수의 하늘나라 개념을 거의 완벽하게 갈아치웠다는 것이다. 바울이 만든 제도화된 교회는 예수가 선포했던 하늘나라를 사실상 대체하는 조직이었다.

170:5.8 (1864.8) 그러나 의심하지 말라. 주가 가르친 바로 이 하늘나라는 신자의 가슴 속에서 존재하며, 땅에서 모든 다른 종교ㆍ종족ㆍ나라에게―아니 각 사람에게―선포되는 것 같이, 언젠가 이 기독교회에 선포될 것이다.

170:5.9 (1864.9) 예수가 가르친 하늘나라, 개인의 올바름을 추구하는 영적 이상과 사람이 하나님과 신성한 친교를 가진다는 개념은, 예수의 인격이 구원자, 창조자요, 사회 조직이 된 종교 공동체의 영적 우두머리라는 신비스러운 개념 속으로 차츰 가라앉게 되었다. 이 방법으로 형식적이고 제도화된 교회는 개별로 영의 인도를 받는 하늘나라 형제 단체의 대용품이 되었다.

170:5.10 (1864.10) 교회는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서 생겨난 불가피하고 유익한 사회적 결과였다. 하늘나라의 가르침에 대한 이 사회적 반응이, 예수가 가르치고 실천했던 진정한 하늘나라의 영적 개념을 아주 완전히 갈아치웠다는 사실에 비극이 있다.

170:5.11 (1865.1) 유대인에게, 하늘나라는 이스라엘 족속의 공동체였고, 이방인에게 하늘나라는 기독교회가 되었다. 예수에게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믿음을 고백하고,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마음을 다하여 헌신함을 선언하고, 따라서 사람의 영적 형제 단체의 구성원이 되는 개인들의 집합이었다.

170:5.12 (1865.2) 하늘나라 복음이 퍼지는 결과로서 어떤 사회적 결실이 세상에 나타날 것을 주는 충분히 깨달았다. 그러나 모든 그러한 바람직한 사회적 겉 모습이 개별 신자가 마음 속에서 겪는 이 개인적 체험, 모든 그러한 신자에게 깃들고 그들을 움직이는 신다운 영과 이렇게 순전히 영적으로 친교하고 교통함으로 의식하지 않고 불가피하게 생기는 결과로서, 또는 자연스러운 열매로서 나타나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170:5.13 (1865.3) 예수는 한 사회 조직, 곧 교회가 참된 영적 국가의 진보에 뒤따라 생길 것을 미리 예측하였고, 이것이 어째서 사도들이 요한의 세례 의식을 행하는 것을 결코 반대하지 않았는가 하는 까닭이다. 그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 올바름 곧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고 목마르게 찾는 사람은, 믿음으로 영적인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된다고 가르쳤다. 동시에 사도들은 그러한 신자는 겉으로 나타나는 세례 의식(儀式)으로 제자들의 사회 조직에 가입이 허락된다고 가르쳤다.

170:5.14 (1865.4) 영이 개별 신자를 지배하고 안내함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하늘나라를 세우는 예수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부분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을 예수의 직계 추종자들이 깨달았을 때 그들은 주의 하늘나라 이상 대신에, 눈에 보이는 사회 조직, 기독교회를 차츰 세움으로 예수의 가르침이 완전히 잊혀지지 않도록 구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대체 계획을 성취하고 나서, 일관성을 유지하고 하늘나라의 사실에 관한 주의 가르침을 인정하려고, 더 나아가서 하늘나라를 미래에 생길 일로 분리해 놓았다. 교회의 지위가 안정되자마자 교회는 기독교 시대가 절정에 이를 때,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하늘나라가 실제로 나타날 것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170:5.15 (1865.5) 이 방법으로 하늘나라는 한 시대의 개념, 미래에 찾아온다는 관념이요, 최고자의 성자(聖者)들이 마지막으로 구출된다는 이상이 되었다. 초대 기독교인들(그리고 후일에 허다한 교인들)은 예수의 하늘나라 가르침에 담겨 있는 아버지와 아들 관념을 대체로 간과했으며, 한편 이를 교회의 잘 조직된 사회적 교제로 대체하였다. 이처럼 교회는 크게 보아서 사회적 형제 단체가 되었고, 이것은 예수의 영적 형제 단체라는 개념과 이상을 실질적으로 갈아치웠다.

170:5.16 (1865.6) 예수의 이상적 개념은 대체로 실패했지만, 주의 개인적 생애와 가르침의 기초 위에 바울은 나서서 유란시아에서 일찍이 존재한 바, 대단히 진취적인 한 인간 사회를 세웠으며, 이것은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의 영생 개념으로 보충되고, 영적인 것과 현세의 것을 대조하는 필로의 교리로 인하여 확대되었다.

170:5.17 (1865.7) 예수의 개념은 세계의 진보된 종교들 속에 아직도 살아 있다. 바울의 기독교회는 예수가 만들려 의도했던 하늘나라―그리고 아주 확실히 하늘나라가 다다를 그 미래―의 사회화되고 인간화된 그림자이다. 바울과 그 후계자들은 영생의 문제를 개인으로부터 교회로 일부 옮겨 버렸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아버지의 하늘나라 가족 안에서 개별 신자 하나하나에게 형이 되기보다,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바울, 그리고 같은 시대의 사람들은, 예수가 자신과 개별 신자에 관하여 영적으로 암시한 모든 것을 신자의 집단인 교회에 적용했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예수의 개념, 개별 신자의 마음 속에 있는 신의 나라 개념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

170:5.18 (1866.1) 그래서, 여러 세기 동안 기독교 교회는 큰 창피를 겪으며 수고했는데, 왜냐하면 교회가 하늘나라의 신비스러운 권능과 특권, 오직 예수와 영적 신자 형제들 사이에만 행사하고 체험할 수 있는 권능과 특권을 감히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에서 회원 자격을 얻는 것은 반드시 하늘나라에서 친교함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하나는 영적인 것이요, 다른 하나는 주로 사회적이다.

170:5.19 (1866.2) 머지 않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도다”하고 외치는 다른 더 큰 세례자 요한이 나타날 예정이고―이것은 하늘나라가 신자의 마음 속에서 하늘 아버지의 뜻이 지배하고 초월하는 것이라 선포한 예수의 높은 영적 개념으로 돌아감을 뜻한다―그는 땅에서 눈에 보이는 교회나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을 어떤 방법으로도 언급하지 않고서, 이 모두를 이룰 것이다. 예수의 실제 가르침이 부활되어야 하며, 그렇게 다시 적은 이야기는 미가엘이 땅에서 머무른 사실에 관하여 사회ㆍ철학적 신앙 체계를 만드는 데 분주했던 초기 추종자들의 실수를 돌이킬 것이다. 짧은 시일 안에 예수에 관한 이 이야기의 가르침은 예수의 하늘나라 복음 설교를 거의 대체해 버렸다. 이 방법으로 역사적 종교가 예수의 가르침을 바꿔치웠으며, 예수의 가르침은 사람의 가장 높은 도덕적 관념과 영적 이상을 미래에 대한 사람의 가장 숭고한 희망―영생―과 섞었다. 그것이 하늘나라 복음이었다.

170:5.20 (1866.3) 예수의 복음이 아주 여러 모습을 가졌다는 바로 그 이유로, 몇 세기 안에 그의 가르침의 기록을 연구한 학자들은 그렇게 많은 종파와 분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기독교 신자들의 이 딱한 분열은 주의 다양한 가르침 속에서, 신과 하나가 된 일생, 비할 데 없는 그의 일생을 헤아리지 못함으로 생겨난다. 그러나 언젠가 예수를 참되게 믿는 사람들의 태도는 불신자 앞에서 이처럼 영적으로 분열되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우리의 지적 이해와 해석은 다양해도 좋고, 사회적 친교가 어느 정도 달라져도 좋지만, 영적 형제 정신의 부족(不足)은 용서할 수 없고 꾸짖어 마땅하다.

170:5.21 (1866.4) 오해하지 말라! 예수의 가르침 속에는 생각하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언제까지나 열매 맺지 않은 채로 가만 두지 않을 영원한 성질이 있다. 예수가 상상했던 하늘나라는 대체로 땅에서 실패했고, 한동안 겉으로 나타나는 교회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 교회는 다만 좌절된 영적 하늘나라의 애벌레 단계요, 이 물질 시대를 거쳐서 하늘나라를 더 영적인 섭리 시대로 실어 나를 터이고, 그때 주의 가르침은 성장할 기회를 더 충만히 누릴지 모른다. 이처럼 이른바 기독교 교회는 고치가 되며, 그 속에서 예수의 개념인 하늘나라는 지금 잠을 잔다. 신다운 형제들의 하늘나라는 아직도 살아 있으며, 모습을 바꾸어 성장하는, 매력이 떨어지는 생물이 아름답게 펼쳐져 궁극에 나비가 솟아나는 것과 똑같이 확실하게, 이 오랜 침체로부터 궁극에 확실히 솟아날 것이다.

제 171 편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유란시아서

제 171 편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171:0.1 (1867.1) “하늘나라”에 대하여 잊지 못할 설교를 하신 다음 날, 예수는 그와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내려고 그 이튿날 떠나리라, 가는 길에 페레아 남부의 수많은 도시를 찾아보리라고 발표했다.

171:0.2 (1867.2) 하늘나라에 관한 연설과 그가 유월절에 가려고 한다는 발표는, 모든 추종자로 하여금 유대인이 최고로 다스리는 현세의 왕국을 개시하려고 그가 예루살렘에 간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늘나라의 비물질적 성질에 관하여 무슨 말씀을 하든지, 예수는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의 머리 속에서, 예루살렘에 본부를 가진 어떤 종류의 민족주의 정부(政府)를 메시아가 세울 것이라는 관념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 없었다.

171:0.3 (1867.3) 안식일 설교에서 예수가 하신 말씀은 추종자의 대다수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경향만 있었고, 거의 아무도 주의 강론에 깨우침을 받지 못했다. 주요 선생들은 마음 속의 나라, “너희 안에 있는 하늘나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얼마큼 알아들었지만, 그들은 또한 예수가 또 다른 미래의 나라에 대하여 전에 말씀한 것을 알았고, 바로 이런 나라를 세우려고 그가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기대가 어긋났을 때, 유대인들이 그를 저버렸을 때, 그리고 후일에 예루살렘이 글자 그대로 파괴되었을 때, 그들은 아직도 이 희망에 매달렸고, 주가 큰 권능과 대단한 영화로움을 입고서 약속했던 나라를 세우려고 세상으로 곧 돌아오리라고 진지하게 믿었다.

171:0.4 (1867.4) 이 일요일 오후에 야고보와 요한 세베대의 어머니 살로메는 사도인 두 아들과 함께 예수에게 와서, 동양(東洋)의 권력자에게 접근하는 방식으로, 그 여자가 무엇을 요청하든지 예수가 미리 허락할 것을 약속하게 만들려고 애썼다. 그러나 주는 약속하려 하지 않았고, 그 대신에 그 여자에게 물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하기를 바라느냐?” 그러자 살로메가 대답했다: “주여, 당신이 예루살렘으로 나라를 세우러 가시오니, 이 내 아들들이 당신과 함께, 당신의 나라에서 하나는 당신 바른편에 앉고 하나는 왼편에 앉을 영광을 얻으리라고 당신이 내게 약속하시기를 미리 청하고 싶사옵나이다.”

171:0.5 (1867.5) 살로메의 요청을 듣자 예수는 말했다: “여자여, 너는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그리고 나서 영예를 추구하는 두 사도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그는 말했다: “내가 오랫동안 너희를 알고 사랑했기 때문에, 내가 네 어머니 집에서 살기까지 했기 때문에, 그래서 너희 어머니가 몰래 와서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요청을 하도록 너희가 버려두는도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내가 마시려 하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야고보와 요한은 대답했다. “예, 주여, 우리는 할 수 있나이다.” 예수가 말했다: “어찌하여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지 너희가 모르니 내가 슬프고, 내 나라의 성질을 너희가 알아차리지 못하니 마음이 아프도다. 내게 이 부탁을 하라고 너희 어머니를 불러왔으니 내가 실망이 되지만 너희가 마음 속에는 나를 사랑함을 내가 아노라. 그런즉 내가 선언하노니, 너희는 정말로 나의 쓴 잔을 마시고 나의 치욕을 함께 하리라만, 내 바른편과 내 왼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그러한 영예는 내 아버지가 지명하신 자들을 위하여 예비되었느니라.”

171:0.6 (1868.1) 이때가 되자 어떤 사람이 이 회담에 대한 말을 베드로를 비롯하여 다른 사도들에게 전했고, 그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그들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으려고 애쓴 것과 둘이 몰래 어머니와 함께 가서 그런 요청을 드리려 한 것에 크게 분개하였다. 그들끼리 다툼에 빠지자, 예수는 모두를 불러모으고 말했다: “너희는 이방인의 권력자들이 저희 백성을 부리고 위대한 자들이 어떻게 권한을 행사하는가 잘 아느니라.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그렇지 아니하리라. 너희 가운데 크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먼저 너희의 종이 될지어다. 하늘나라에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에게 봉사하는 자가 될지어다.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사람의 아들은 보살핌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려고 왔느니라. 나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 그리고 내 형제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내 목숨을 버리려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라.” 이 말씀을 듣자 사도들은 자기들끼리 기도하러 물러났다. 그날 저녁에, 베드로가 수고한 데 응답하여, 야고보와 요한은 열 사도에게 적절히 사과했고, 형제들의 호의를 되찾았다.

171:0.7 (1868.2)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바른 편과 왼 편 자리를 요청하면서, 세베대의 아들들은 한 달이 채 못 되어, 사랑하는 선생이 한 편에 죽어 가는 도둑과 다른 편에 또 다른 범죄자와 더불어, 로마인의 십자가에 달릴 것을 조금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의 어머니는 십자가 처형 때 자리에 있었고, 펠라에서 사도인 아들들을 위하여 아주 지혜롭지 못하게 추구한 명예에 관하여 예수에게 어리석은 부탁을 드린 것을 잘 기억했다.

1. 펠라를 떠나다

171:1.1 (1868.3) 3월 13일, 월요일 아침 나절에, 예수와 열두 사도는 드디어 펠라 야영지를 떠났고, 아브너의 동료들이 일하고 있는 페레아 남부의 도시들을 둘러보려고 남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70인 사이에 방문하면서 2주가 넘도록 보냈고, 그리고 나서 유월절을 지내려고 바로 예루살렘으로 갔다.

171:1.2 (1868.4) 주가 펠라를 떠났을 때, 제자들은 사도들과 함께 야영했고, 이들 약 1천 명이 주를 뒤따라갔다. 예수가 헤스본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리고 그가 “비용 계산”에 대하여 설교한 뒤에, 이 무리의 약 절반이 예리고로 가는 길에 요단강 여울에서 그를 떠나보냈다. 그들은 예루살렘까지 줄곧 올라갔고, 한편 나머지 반은 2주 동안 예수를 따라서 페레아 남부에서 여러 마을을 방문했다.

171:1.3 (1868.5) 펠라의 캠프를 떠났다는 것을 예수의 직계 추종자들의 대부분이 대체로 이해했지만, 그들은 이것이 주가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다윗의 왕좌를 주장할 의도를 가리킨다고 정말로 생각했다. 추종자들의 대다수는 어떤 다른 하늘나라 개념도 결코 깨우칠 수 없었다. 예수가 무엇을 가르치든지, 그들은 이 유대인 왕국 개념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171:1.4 (1868.6) 사도 안드레의 지시에 따라서, 다윗 세베대는 3월 15일 수요일에, 펠라에 있던 방문자 캠프를 걷어치웠다. 이때 거의 4천 명의 방문자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것은 선생들의 캠프라고 알려진 곳에서 사도들과 함께 머무르고 예수와 열두 사도와 더불어 남쪽으로 간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넣지 않는다. 무척 하기 싫었어도, 다윗은 수많은 구매자에게 장비 전체를 팔아치우고 예루살렘으로 자금을 가지고 갔고, 나중에 그 돈을 가룟 유다에게 넘겨주었다.

171:1.5 (1869.1) 비극의 마지막 주에 다윗은 예루살렘에 있었고, 십자가 처형이 있은 뒤에 자신의 어머니를 벳세다로 모시고 갔다. 예수와 사도들을 기다리면서, 다윗은 베다니에 나사로의 집에서 멈추었고, 그가 부활한 뒤로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그를 박해하고 괴롭히는가 보고 몹시 흥분하였다. 안드레는 다윗에게 사자(使者) 서비스를 중단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에서 하늘나라가 일찍 세워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모두가 풀이했다. 다윗은 할 일이 없음을 깨달았고, 그가 분개한 근심의 대상(對象)이 당장에 서둘러 필라델피아로 달아났을 때, 그는 자청해서 나사로의 방어자가 되려고 거의 마음먹었다. 따라서, 부활이 있은 뒤, 또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얼마 있다가, 먼저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들의 부동산 처분하는 것을 돕고 나서, 다윗은 필라델피아로 옮겨 갔다. 그리고 거기서 아브너와 나사로와 관계를 가지면서 여생을 보냈고, 아브너의 일생 동안에 필라델피아에 집중되었던 하늘나라의 모든 큰 거점들의 재정 감독자가 되었다.

171:1.6 (1869.2) 예루살렘이 파괴된 뒤에 얼마 안 되어 안티옥이 바울파 기독교의 본부가 되었고, 한편 필라델피아는 아브너파 하늘나라의 중심으로 남았다. 안티옥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에 관한 가르침의 바울 판(版)이 온 서양 세계로 퍼졌다. 예수의 가르침을 외치는, 타협하지 않는 이 밀사들이 후일에 이슬람이 갑자기 흥성함으로 압도될 때까지, 필라델피아로부터 아브너 판의 하늘나라를 외치는 선교사들이 메소포타미아와 아라비아에 두루 퍼졌다.

2. 비용 계산에 대하여

171:2.1 (1869.3) 예수와 거의 1천 명의 추종자 일행이, 때때로 베다바라로 부르는, 요단강의 베다니 여울목에 다다랐을 때, 제자들은 그가 예루살렘으로 바로 가지 않는 것을 비로소 눈치챘다. 그들이 망설이고 자기들끼리 토론하는 동안에, 예수는 거대한 바위 위로 올라가서 강론하였고, 이것은 “비용 계산”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주는 말씀했다:

171:2.2 (1869.4) “이때부터 계속 내 뒤를 따르고자 하는 너희는,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값을 기꺼이 치러야 하느니라. 너희가 내 제자가 되고자 하면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식들, 형제와 자매를 기꺼이 버려야 하느니라. 너희 가운데 누구라도 이제 내 제자가 되고자 하면,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육체를 입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명을 마치기 위하여 목숨을 바야흐로 내놓으려 하는 것과 똑같이, 너희 목숨조차 기꺼이 버려야 하느니라.

171:2.3 (1869.5) “충분한 값을 기꺼이 치르지 않겠다면, 너희는 도저히 내 제자일 수 없도다. 더 나아가기 전에, 너희는 각자 앉아서 내 제자가 되는 데 얼마나 비용이 드는가 계산해야 하느니라. 망루를 완성할 돈이 충분히 있는가 보려고 먼저 앉아서 비용을 계산하지 않고서, 너희 중에 누가 땅에서 망대 짓는 일에 손을 대겠느냐? 너희가 기초를 놓은 뒤에 이렇게 비용을 계산하지 않으면, 시작한 것을 마칠 수 없음을 너희가 알게 될지 모르느니라. 그런즉 이웃이 다 너희를 비웃으리라, ‘보라, 이 사람이 건물을 짓기 시작했으나 하던 일을 마칠 수 없구나.’ 다시 이르노니,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전쟁하려고 준비할 때, 병사(兵士) 1만을 가지고서 그를 대적하여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항할 수 있는가 먼저 앉아서 의논하지 않겠느냐? 준비되지 않아서 적을 대항할 여유가 없으면, 그 임금은 이 다른 임금에게, 아직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사절단을 보내어 평화 조건을 묻느니라.

171:2.4 (1870.1) “자, 그러면 이제 너희는 각자 앉아서, 내 제자가 되는 비용을 계산해야 하느니라. 이제부터 계속 너희는 우리 뒤를 따르면서, 가르침을 듣고, 하는 일을 구경할 수 없으리라. 너희에게 모진 박해에 부딪치는 것이 요구되고, 사람을 압도하는 실망에 직면하여 이 복음을 증언하는 것이 요구되리라. 기꺼이 네 신분을 모두 포기하고 가진 것을 모두 바칠 뜻이 없다면, 너는 내 제자가 될 자격이 없느니라. 마음 속에서 네 자신을 이미 정복했거든, 사람의 아들이 주사제와 사두개인들에게 거절당하고 비웃는 불신자(不信者)들의 손에 넘겨질 때, 너는 당장에 틀림없이 구경할 그 외관상의 승리를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느니라.

171:2.5 (1870.2) “이제 너는 스스로를 살펴서, 내 제자가 되는 동기를 찾아내야 하느니라. 너희가 명예와 영광을 추구하고 세상에 생각이 있다면, 너희는 맛을 잃은 소금과 같으니라. 그리고 짠맛 때문에 소중히 여김받는 것이 그 맛을 잃으면, 소금이 무엇으로 맛을 내리요? 그러한 양념은 쓸모가 없고, 오직 쓰레기 사이에 던지기에 적당하니라. 준비되고 있는 잔을 나와 함께 기꺼이 마시고 싶지 않거든, 너희 집으로 평안히 돌아가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경고하였노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너희에게 거듭 일렀거늘 너희가 나를 믿으려 하지 않는도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내가 이르는 것을 들으라.”

171:2.6 (1870.3) 이 말씀을 하고 나서 바로, 예수는 열두 사람을 이끌고, 헤스본으로 길을 떠났고, 약 5백 명이 뒤를 따랐다. 잠깐 동안 지체한 뒤에, 군중의 나머지 반은 계속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사도들은 주요한 제자들과 함께, 이 말씀에 대하여 많이 생각했지만, 이 역경과 시련이 잠시 있은 뒤에, 오래 간직했던 희망에 얼마큼 따라서 하늘나라가 확실히 세워질 것이라는 관념에 여전히 매달렸다.

3. 페레아 여행

171:3.1 (1870.4) 2주가 넘도록 예수와 열두 사도는 뒤따르는 수백 제자의 군중과 더불어, 페레아 남부에서 이리저리 여행했고, 70인이 수고하던 마을들을 모두 찾아보았다. 많은 이방인이 이 지역에서 살았고, 예루살렘의 유월절 축제에 올라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하늘나라 사자들은 가르치고 전도하는 일에 즉시 착수했다.

171:3.2 (1870.5) 예수는 헤스본에서 아브너를 만났고, 안드레는 70인의 수고가 유월절 축제로 중단되지 않아야 한다고 지시했다. 예루살렘에서 바야흐로 일어나려 하는 것을 완전히 무시(無視)하고 사자들이 할 일을 진행해야 한다고 예수는 조언했다. 또한 아브너에게 여인단이, 적어도 원하는 사람들이,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가도록 허락하라고 조언하였다. 이때가 아브너가 육체를 입은 예수를 마지막으로 본 때였다. 이렇게 아브너에게 그는 작별의 말씀을 하였다: “이 사람아, 네가 하늘나라에 충실할 것을 내가 알고, 형제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도록 너에게 지혜 주시기를 내가 아버지께 기도하노라.”

171:3.3 (1870.6) 이 도시 저 도시로 다니는 동안,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큰 무리가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줄곧 갔고, 그래서 예수가 유월절을 지내려고 떠날 때가 되자, 주를 함께 따라온 사람들의 수는 날마다 줄어들어 2백 명이 채 되지 않았다.

171:3.4 (1871.1) 사도들은 예수가 유월절을 지내려고 예루살렘에 간다고 알아들었다. 그들은 예수가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산헤드린에게 통지해야 한다고 전하는 말을 산헤드린이 온 이스라엘에 퍼뜨린 것을 알았다. 이 모든 일이 있었는데도, 여전히, 그들은 그가 나사로를 보려고 베다니로 간다고 필라델피아에서 발표했을 때만큼 놀라지는 않았다. 몹시 두려워하는 태도를 가졌다가 입다물고 기대하는 상태로 이렇게 태도가 바뀐 것은 대체로 나사로의 부활(復活) 때문이었다. 그들은 비상시에, 예수가 신의 권능을 주장하고 적들에게 창피를 줄지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희망은 주가 영적 지배권을 가졌다는 더 깊고 성숙한 믿음과 함께, 직계 추종자들이 겉으로 용기를 보인 것을 설명하며, 이들은 그가 죽어야 한다는 산헤드린의 공개 선포가 있는 바로 그 마당에, 이제 예루살렘으로 그를 따라가려고 준비했다.

171:3.5 (1871.2) 사도들의 대다수와 여러 핵심 제자들은 예수가 죽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다. 그가 “부활이요 생명”임을 믿었으니까, 그들은 예수가 불사(不死)이며 이미 죽음을 이겼다고 보았다.

4. 리비아에서 가르침

171:4.1 (1871.3) 3월 29일 수요일 저녁에, 예수와 추종자들은 페레아 남부의 여러 도시를 둘러보는 여행을 마친 뒤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리비아에서 야영했다. 열심당원 시몬과 시몬 베드로는 1백 자루가 넘는 검(劍)을 이 자리에서 그들 손에 배달되도록 함께 일을 꾸몄기 때문에, 이날 밤에 리비아에서 이 무기들을 받았고, 칼을 받고 외투 속에 감추어 칼을 차려는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 시몬 베드로는 뜰에서 주를 저버리는 날 밤에 아직도 칼을 차고 있었다.

171:4.2 (1871.4) 목요일 아침 일찍, 다른 사람들이 깨어나기 전에, 예수는 안드레를 불러서 말했다: “네 형제들을 깨우라! 내가 저희에게 할 말이 있느니라.” 예수는 검에 대하여, 또 사도들 가운데 누가 이 무기를 받고 휴대하고 있는가 알았지만, 그런 일을 안다는 것을 그들에게 결코 알리지 않았다. 안드레가 동료들을 일으켰고, 그들끼리 모였을 때, 예수는 말했다: “아이들아, 너희는 나와 함께 오랫동안 지냈고, 이때를 위하여 필요한 것을 많이 너희에게 가르쳤느니라. 그러나 이제 너희에게 경고하노니, 육체의 불확실한 것이나 또는 너희 앞에 놓인 시련과 시험에 대한 인간의 허약한 방비를 의지하지 말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음을 한번 더 분명히 이르려고 내가 따로 너희끼리만 불러모았으니, 예루살렘에서 사람의 아들이 이미 사형 선고를 받았음을 너희가 아느니라.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아들이 주사제와 종교 지도자들의 손에 넘겨지겠고, 저희가 그를 정죄하고 다음에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주리라. 그래서 저희가 사람의 아들을 조롱하고, 아니 그에게 침 뱉고 때리기까지 하겠고, 그를 죽음으로 인도하리라. 그리고 저희가 사람의 아들을 죽일 때, 절망하지 말라. 내가 선언하노니, 사흘째에 그가 일어날 것임이라. 너희끼리 조심하고 내가 너희에게 미리 경고한 것을 기억하라.”

171:4.3 (1871.5) 또 다시, 사도들은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주의 뜻이 말씀하신 바로 그대로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루살렘에 본부를 둔, 땅에 있는 현세의 나라를 믿는 집요한 믿음에 너무 눈이 멀어서, 그들은 단지 예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런 이상한 발표로 주가 무엇을 의도할 수 있는가 그들은 하루 종일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나 이 말씀에 대하여 아무도 감히 그에게 물으려 하지 않았다. 이 어리둥절한 사도들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힐 것을 예상하고서 주가 그들에게 분명히, 직접 말씀했다는 것을 주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깨닫지 못했다.

171:4.4 (1872.1) 여기 리비아에서, 아침 식사 바로 뒤에, 어떤 친절한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와서 말했다: “이 지역에서 어서 달아나소서, 요한을 잡으려 애쓴 것과 마찬가지로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다. 그는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킬까 두려워하고 당신을 죽이기로 작정하였나이다. 당신이 피하도록 우리가 당신에게 이렇게 경고하나이다.”

171:4.5 (1872.2) 이것은 어느 정도 참말이었다. 나사로의 부활은 헤롯을 두렵고 놀라게 했고, 재판이 있기도 전에 산헤드린이 감히 예수를 정죄(定罪)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헤롯은 예수를 죽이든지 아니면 자기 영토 바깥으로 몰아내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정말로 뒤의 경우를 바랐는데, 헤롯이 예수를 너무나 두려워하여 어쩔 수 없이 예수를 처형하게 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171:4.6 (1872.3) 바리새인들이 하고 싶어 했던 말을 듣고서 예수는 대답했다: “헤롯에 대하여, 또 그가 이 하늘나라 복음을 두려워함을 내가 잘 아노라. 그러나 잘못 생각지 말라, 그는 사람의 아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주사제들의 손에 고통받고 죽기를 더욱 좋아하리라. 제 손을 요한의 피로 더럽혔으므로, 사람의 아들의 죽음을 책임지고 싶어 안달하지는 않느니라. 너희는 가서 그 여우에게 이르라. 사람의 아들이 페레아에서 오늘 전도하고, 내일은 유대로 가고, 며칠 지난 뒤에, 땅에서 사명을 마치고 아버지께로 올라가려고 준비되리라.”

171:4.7 (1872.4) 그리고 나서 사도들을 향하여 예수는 말했다: “옛적부터 선지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이슬로 사라졌고,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집이 있는 도시로 올라가서 인간의 편협에 대한 값으로, 그리고 종교적 편견과 영적 무분별의 결과로 희생되는 것이 어울릴 따름이라. 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선지자들을 죽이고 진리의 선생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밑에 모으는 것 같이, 얼마나 자주 내가 네 자손을 모으고 싶어 하였느냐, 그러나 너는 내가 그리하도록 가만두려 하지 않는구나! 보라 네 집은 바야흐로 황폐한 채로 너에게 맡겨지려 하는구나! 너는 여러 번 나를 보고 싶어 하리라만 보지 못할지니라! 그때 네가 나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할지니라!” 말씀을 마치고 나서, 둘레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였다: “그렇기는 해도, 유월절에 참석하기 위하여,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우리에게 어울리는 일을 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

171:4.8 (1872.5) 이날 예리고로 예수를 따라간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고 어리둥절한 신자 무리였다. 사도들은 하늘나라에 관한 예수의 선언에서 마지막으로 승리한다는 확실한 목소리만 헤아릴 수 있었다. 다가오는 좌절에 관한 경고를 파악하는 경지까지 도저히 이를 수 없었다. 예수가 “사흘째에 일어난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이 말씀을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불쾌한 예비 충돌이 있은 직후에, 하늘나라가 분명히 승리함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였다. “사흘째”는 “당장에” 아니면 “얼마 있다가”를 뜻하는 표현, 유대인이 보통 쓰는 표현이었다. 예수가 “일어난다”고 말했을 때, 그가 “하늘나라가 일어남”을 언급한다고 생각했다.

171:4.9 (1872.6) 이 신자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였고, 유대인들은 고통받는 메시아에 대하여 거의, 또는 전혀 몰랐다. 그들은 예수가 살아서 결코 성취할 수 없던 많은 것을 죽어서 성취하리라는 것을 알아듣지 못했다. 사도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도록 용기를 준 것은 나사로의 부활이었지만, 주의 수여 생애에서 이 시련 기간에 주를 버티게 한 것은 변모(變貌)의 기억이었다.

5. 예리고에 있던 소경

171:5.1 (1873.1) 3월 30일, 목요일 오후 늦게, 예수와 사도들은, 약 2백 명이 되는 추종자 일행에 앞서서, 예리고의 성벽으로 다가갔다. 도시의 대문에 가까이 가자, 그들은 한 떼의 거지들과 마주쳤다. 그 중에 바티메우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눈이 멀었던 늙은이였다. 이 눈먼 거지는 예수에 대하여 소문을 많이 들었고, 예루살렘에서 그가 눈먼 요시아를 고친 것에 대하여 모두 알았다. 베다니로 계속 갔을 때까지, 그는 예수가 예리고를 요즘에 방문했다는 것을 몰랐다. 바티메우스는 예수가 예리고를 방문하기만 하면 시력(視力)을 되찾게 해달라고 예수에게 꼭 호소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171:5.2 (1873.2) 예수가 다가온다는 소식이 이미 예리고에 두루 알려졌고, 거민 수백 명이 그를 만나려고 바깥으로 나와 떼를 지었다. 이 큰 무리가 주를 도시 안으로 호송해서 돌아왔을 때, 군중이 시끄럽게 쿵쿵거리며 걷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서, 바티메우스는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았고, 그래서 가까이 서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가 물었다. 거지들 가운데 하나가 대답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네.” 예수가 가까이 있다는 말을 듣자, 바티메우스는 목청을 높여서 비로소 크게 외쳤다: “예수여 예수여,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가 계속 더욱 크게 소리치자, 예수에게 가까이 있던 사람들 중에서 몇 사람이 그에게 다가가서 꾸짖으며, 조용히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는 더욱, 더 큰 소리로 외칠 뿐이었다.

171:5.3 (1873.3) 그 소경이 소리치는 것을 들었을 때, 예수는 가만히 멈추었다. 그를 보았을 때, 예수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 사람을 내게로 데려오라.” 그리고 나서 그들이 바티메우스에게 가서 말했다: “기운을 차리라, 우리를 따라 오라. 주가 너를 부르심이라.” 이 말씀을 듣자 바티메우스는 외투를 옆에 던져 버리고, 길 가운데를 향하여 앞으로 뛰쳐나갔고, 한편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그를 예수에게로 안내했다. 바티메우스를 향하여 예수가 말했다: “무엇을 해주기 원하느냐?” 그리고 나서 눈먼 사람이 대답했다. “제 시력을 되찾고 싶나이다.” 이 요청을 듣고 그의 믿음을 보았을 때, 예수는 말했다: “네가 시력을 받으리라. 길을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느니라.” 즉시 그는 시력을 되찾았고, 주가 이튿날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날 때까지 예수 가까이 남아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나서 대중 앞으로 가서 예리고에서 어떻게 그가 시력을 되찾았는가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말했다.

6. 삭개오를 찾아보다

171:6.1 (1873.4) 주의 행렬이 예리고로 들어갔을 때는 해질 무렵이었고, 그는 거기서 밤을 지낼 생각이 들었다. 예수가 세관을 지나갔을 때, 세무장, 다시 말해서 세리(稅吏) 삭개오가 어쩌다가 자리에 있었는데, 예수를 몹시 보고 싶어했다. 이 세무장은 아주 부자였고 이 갈릴리 선지자에 대하여 익히 들어 왔다. 다음에 예수가 어쩌다 예리고를 찾을 때 예수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보겠다고 전에 결심하였다. 따라서 삭개오는 군중 속을 밀고 나가려 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그는 키가 작아서 군중의 머리 위로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세무장은 도시의 중심 가까이, 그가 사는 데서 멀지 않은 곳에 올 때까지 군중과 함께 계속 따라갔다. 군중을 뚫고 들어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예수가 멈추지 않고 도시를 바로 통과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앞으로 계속 달려가서 어느 무화과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는데, 그 나무의 퍼진 가지들은 길 쪽으로 늘어져 있었다. 이 방법으로 그는 주가 지나가실 때 주를 잘 볼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실망하지 않았으니, 왜냐하면 예수가 지나갈 때, 멈추어서 삭개오를 올려다보고 말했기 때문이다: “삭개오야 서둘러 내려오라, 오늘 밤 내가 너의 집에서 묵어야 하니라.” 이 놀라운 말씀을 들었을 때, 허겁지겁 내려오면서 삭개오는 나무에서 하마터면 떨어질 뻔하였고, 예수에게로 다가가면서, 주가 그의 집에서 기꺼이 머무르겠다는 말씀에 크게 기뻐하였다.

171:6.2 (1874.1) 그들은 당장 삭개오의 집으로 갔고, 예리고에서 살던 사람들은 예수가 세무장과 함께 묵기로 하겠다는 데 많이 놀랐다. 주와 사도들이 집 문 앞에서 삭개오와 함께 서성거리는 동안에도 가까이 서 있던 예리고의 바리새인들 가운데 하나가 말했다: “어떻게 죄인, 제 민족을 강탈하는 자요 강도, 아브라함의 배신(背信)한 아들의 집에 이 사람이 묵으려고 갔는가 너희가 보느니라.” 이 말을 들었을 때, 예수는 삭개오를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그러자 삭개오는 등 없는 의자 위에 올라서서 말했다: “예리고의 여러분, 내 말 을 들 으소서 내가 세리요 죄인일지 모르나, 큰 선생이 내 집에 머무르려고 오셨는지라. 그가 안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여러분에게 이르오니, 내가 온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고, 내일부터 시작하여, 누구에게도 내가 무엇이든지 그릇되게 빼앗았다면, 4배로 갚으리이다. 나는 마음을 다하여 구원을 찾고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르게 행하기를 배우고자 하나이다.”

171:6.3 (1874.2) 삭개오가 말을 마치자 예수가 말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고, 너는 정말로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었도다.” 주위에 모인 군중을 향하여 예수는 말했다: “내가 한 말에 놀라지 말고, 우리가 하는 일에 성내지도 말지니,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자를 찾고 구원하러 왔다고 내가 지금까지 선언하였음이라.”

171:6.4 (1874.3) 그들은 그날 밤 삭개오와 함께 머물렀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서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내려고 가는 길에, 베다니까지 “강도의 길”을[1] [24] 올라갔다.

7. “예수가 지나가는 동안”

171:7.1 (1874.4) 예수는 어디를 가든지 즐거운 기분을 퍼뜨렸다. 그는 인자함과 진실이 가득하였다. 동료들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인자한 말씀에 끊임없이 놀랐다. 사람은 품위를 기를 수 있어도 인자함은 사랑에 흠뻑 젖은 혼에서 솟아나오는 친절의 향기이다.

171:7.2 (1874.5) 선은 반드시, 어쩔 수 없이 존경심을 일으키지만, 선에 인자함이 결여되면 사랑을 밀어내는 일이 흔하다. 선은 오직 인자할 때 보편적으로 마음을 끈다. 선은 오직 마음을 끌 때 효과가 있다.

171:7.3 (1874.6) 예수는 정말로 사람들을 이해하였다. 그래서 진정한 동정심을 나타내고 진지한 인정(人情)을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불쌍히 여기는 느낌에 깊이 빠지는 일이 드물었다. 이해심은 한이 없었지만, 동정심은 실용적이요, 개인적이고 건설적이었다. 고통에 익숙했어도 결코 무관심해지지 않았고, 비탄에 빠진 사람들에게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느낌을 더하지 않으면서 봉사를 베풀 수 있었다.

171:7.4 (1874.7) 예수가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도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람들을 아주 진지하게 사랑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 하나하나를 사랑했다. 놀라운 통찰력 때문에 그토록 참된 친구가 될 수 있었다―그는 사람의 마음 속에, 그리고 머리 속에 무엇이 있는가 아주 충분히 알았다. 그는 관심이 있고 날카롭게 지켜보는 사람이었다. 인간의 필요를 이해하는 데 통달한 사람이었고, 인간의 소망을 기민하게 탐지하였다.

171:7.5 (1874.8) 예수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지나는 동안”에 동료 인간을 위로할 시간을 가졌다. 그는 언제나 친구들이 편안한 마음을 가지게 해주었다. 남의 말을 귀담아듣는, 매력 있는 사람이었다. 동료들의 마음을 떠보려고 시시콜콜히 캐묻는 일이 결코 없었다. 진리에 굶주린 정신을 위로하고 갈급한 사람에게 봉사하는 동안, 그의 자비를 받은 사람들은 그에게 고백한다기보다 그와 함께 의논한다고 느꼈다. 그가 그들을 아주 깊이 신임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한없이 신뢰했다.

171:7.6 (1875.1) 그는 결코 사람들에 대하여 캐묻는 듯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지시하거나 관리하거나 추적하려는 욕구를 보이지 않았다. 그와 관계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깊은 자신감과 확고한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그가 사람에게 빙그레 웃을 때, 그 사람은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커졌다.

171:7.7 (1875.2) 예수는 사람들을 아주 많이, 무척 지혜롭게 사랑했기 때문에, 단련을 요구하는 경우가 생길 때 그는 결코 서슴지 않고 심하게 대했다. 흔히, 도움을 요청함으로 사람을 돕는 데 착수했다. 이 방법으로 그는 흥미를 불러일으켰고, 인간의 좋은 성품에 호소했다.

171:7.8 (1875.3) 그의 옷자락을 만져서 치유받기를 구한 여인의 천한 미신(迷信) 속에 그는 예외적인 믿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언제나 설교를 멈추거나 군중을 기다리게 할 자세가 되었고, 기꺼이 그렇게 했으며, 한편 한 사람, 아니 한 어린아이의 경우에도 그 필요를 돌보았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을 뿐 아니라, 또한 예수가 그들을 아주 많이 믿었기 때문에 큰 일들이 일어났다.

171:7.9 (1875.4) 예수가 말씀하거나 실행한 정말로 중요한 일의 대부분은 생각지 않게 “그가 지나가는 동안에” 일어나는 듯했다. 땅에서 주가 베푼 봉사에는 전문적이거나 잘 계획하거나 미리 생각해 놓은 것이 거의 없었다. 일생을 통해서 여행하는 동안, 그는 자연스럽고 품위 있게 건강을 베풀고 행복을 나누어주었다. “그는 좋은 일을 하며 다녔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171:7.10 (1875.5) 어떤 시대에도, 주의 추종자들이 “지나가는 동안에” 봉사하기를 배우는 것―나날의 임무에 몰두하는 동안 사심 없이 좋은 일 하는 것―이 마땅하다.

8. 파운드의 비유

171:8.1 (1875.6) 그 전날 밤에 예수가 삭개오와 그 가족에게 하늘나라 복음을 가르치는 동안 늦게까지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거의 한낮까지 예리고를 떠나지 못했다. 베다니로 올라가는 길의 중턱 부근에서, 그 일행은 점심을 먹으려고 멈추었고, 한편 군중은 예수와 사도들이 그날 밤에 올리브산에서 묵으리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계속하여 예루살렘으로 갔다.

171:8.2 (1875.7) 파운드의 비유는, 모든 제자에게 주려고 뜻한 달란트 비유와 달리, 각별히 사도들에게 말씀한 것이고, 대체로 아켈라우스의 체험과 유대 왕국의 통치권을 얻으려고 그가 헛되이 시도한 데에 근거를 둔다. 이것은 실제로 역사적 인물에 근거를 둔, 몇 안 되는 주의 비유 가운데 하나이다. 예리고에서 삭개오의 집이 아켈라우스의 화려한 궁전에서 아주 가까이 있었고, 그의 수로(水路)가 그들이 예리고를 떠나면서 걸었던 길을 따라서 이어졌으니까, 그들이 아켈라우스를 염두에 두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171:8.3 (1875.8) 예수는 말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한 나라를 받으려고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선언하노니, 너희는 실망할 운명을 가졌도다. 너희는 어떤 임금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혼자서 한 나라를 받으려고 먼 나라로 갔으나 그가 미처 돌아올 수 있기도 전에, 그 지방의 시민들이 마음 속에서 이미 그를 저버렸으므로 그의 뒤를 좇아 사신(使臣)을 보내어 말하였더라.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겠노라.’ 현세에 이 임금의 통치가 거절당한 것 같이,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의 영적 통치도 거절당하리라. 다시 내가 선언하노니,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느니라. 그러나 사람의 아들에게 자기 백성을 영적으로 통치하는 권리가 주어졌다면, 그러한 인간 혼을 다스리는 나라를 받고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그러한 영토에서 군림하였으리라. 내가 영적으로 저희를 다스리는 것을 저희가 물리쳐도, 지금 거절당한 그러한 영의 나라를 다른 이들로부터 받으러 내가 다시 돌아오리라. 사람의 아들이 이제 거절당하는 것을 너희가 볼 터이나, 다른 시대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지금 물리치는 것을 받아들이고 높이리라.

171:8.4 (1876.1) “그리고 이제, 이 비유에서 거절당한 귀족으로서, 내 앞에 열두 종, 특별 집사들을 부르고, 너희의 손 하나하나에 돈 한 파운드를 주면서, 내 지시를 잘 주목하라고 각자에게 훈계하고자 하노라. 즉 내가 돌아올 때, 너희에게 계산을 요구할 때, 그 자금으로 너희의 집사 노릇을 정당화하도록 내가 떠나 있는 동안에 너희에게 맡긴 자금(資金)으로 부지런히 장사하여라.

171:8.5 (1876.2) “그리고 거절당한 이 아들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또 다른 아들이 이 나라를 받으려고 파송되리니, 이 아들은 그때 너희의 관리 보고를 받고 너희가 남긴 이익을 기뻐하려고 너희 모두를 부르러 사람을 보내리라.

171:8.6 (1876.3) “이 집사들이 나중에 회계하려고 한데 부름받았을 때, 첫째 사람이 앞으로 나와서, ‘주여, 당신의 파운드로 나는 열 파운드를 더 만들었나이다’ 하였더라. 그리고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잘 하였도다. 너는 착한 종이요, 네가 이 문제에 충실하였음이 입증되었으매, 너에게 열 도시를 다스릴 권한을 주리라’ 하였더라. 둘째 사람이 와서 ‘주여, 당신이 내게 맡긴 파운드가 다섯 파운드를 벌었나이다’하였는지라. 주가 가로되 ‘따라서 내가 너를 다섯 도시의 통치자로 만들리라’하였더라. 그리고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거쳐서 마지막 종까지 내려갔더니, 설명하라고 부름받자 그는 이렇게 보고하였더라: ‘주여, 보소서, 여기 당신의 파운드가 있나이다. 이 수건에 싸서 안전히 두었나이다. 내가 이렇게 한 것은 당신이 두려웠음이니이다. 당신은 놓아두지 않은 데서 가져가고, 씨 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려 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나는 당신이 분별이 없다고 믿었나이다.’ 그리고 나서 주인이 말하였더라: ‘너 게으르고 불충한 종아, 네 입에서 나오는 말로 내가 너를 판단하리라. 겉보기에 내가 씨 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는 것을 네가 아느니라. 그러므로 이 계산을 하라 요구할 것을 네가 알았느니라. 알았은즉, 내가 올 때 본전과 적당한 이자(利子)를 받도록 적어도 내 돈을 은행에 주었어야 하느니라.’

171:8.7 (1876.4) “그리고 나서 이 통치자는 대기하던 자들에게 말하였더라: ‘이 게으른 종에게서 돈을 가져다가 열 파운드 가진 자에게 주라.’ 그런 사람이 이미 열 파운드를 가졌다고 저희가 주에게 상기시키자, 그가 말하였더라: ‘가진 자마다 더 받겠거니와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조차 빼앗기리라.’”

171:8.8 (1876.5) 그리고 나서 사도들은 이 비유의 뜻과 앞서 달란트 비유의 뜻의 차이를 알려고 했으나, 예수는 여러 질문에 대답하여 다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희 각자가 그 참 뜻을 찾아내면서, 마음 속에서 이 말씀을 잘 생각해 보아라.”

171:8.9 (1876.6) 후일에 이 두 비유의 뜻을 아주 잘 가르친 사람은 나다니엘이었고, 그는 다음 결론에서 그의 가르침을 간추렸다:

171:8.10 (1876.7) 1. 능력은 인생의 기회를 재는 실용적 척도이다. 너희는 능력 바깥에 있는 것을 성취하라는 책임을 결코 지게 되지 않을 것이다.

171:8.11 (1876.8) 2. 충실함은 인간의 믿을 만함을 재는 어김없는 척도이다. 작은 일에 충실한 자는 또한 그의 자질에 맞는 모든 일에 충실함을 나타내기 쉽다.

171:8.12 (1876.9) 3. 비슷한 기회가 있을 때, 주는 적게 충실한 것에 대하여 적게 보상을 내린다.

171:8.13 (1877.1) 4. 기회가 적을 때, 충실한 만큼 보상을 내린다.

171:8.14 (1877.2) 그들이 점심을 마쳤을 때, 그리고 따르던 군중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계속 간 뒤에, 예수는 길가에 튀어나온 어느 바위의 그늘에서 사도들 앞에 서서, 명랑한 기품과 인자한 위풍으로 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오라, 형제들아, 계속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을 받자. 이처럼 모든 일에 하늘 아버지의 뜻을 우리가 이루리라.”

171:8.15 (1877.3) 그래서 예수와 사도들은, 필사 인간 육체의 모습을 입은 주의 이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에 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제 172 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다

유란시아서

제 172 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다

172:0.1 (1878.1) 예수와 사도들은 서기 30년 3월 31일, 금요일 오후에 4시가 조금 지나서 베다니에 다다랐다. 나사로와 두 자매와 친구들은 그들을 기대하고 있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나사로가 부활한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려고 날마다 왔기 때문에, 예수는 이웃에 어느 시몬이라는 신자의 집에 머무르도록 주선이 되었다는 통지를 받았는데, 이 사람은 나사로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그 작은 마을의 촌장이었다.

172:0.2 (1878.2) 그날 저녁에, 예수는 많은 방문객을 받았고, 베다니와 벳바게의 서민들은 그를 환영하는 느낌이 들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산헤드린의 사형 선포를 철저히 무시하고, 자신이 유대인의 임금이라 선포하려고 예수가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고 숱한 사람이 생각했어도, 베다니 가족―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는―주가 그런 종류의 임금이 아니라는 것을 더 잘 깨달았다. 그들은 이것이 그가 예루살렘과 베다니를 마지막으로 찾아보는 것일지 모른다고 어렴풋이 느꼈다.

172:0.3 (1878.3) 주사제들은 예수가 베다니에서 묵는다는 정보를 받았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그를 체포하려 시도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예수가 계속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예수는 이 모든 것을 알았지만 차분하게 품위를 지켰다. 친구들은 그가 이보다 더 침착하고 유쾌한 것을 결코 본 적이 없었다. 산헤드린이 온 유대인에게 그를 자기들의 손에 넘기라고 요구했을 때 그가 그다지 아랑곳하지 않은 것에 사도들조차 놀랐다. 주가 그날 밤에 주무시는 동안, 사도들은 둘씩 그를 지켰고, 여럿이 칼을 차고 있었다. 그들은 이튿날 아침 일찍 수백 명의 순례자 때문에 잠이 깨었는데, 이들은 안식일에도 예수와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켰던 나사로를 보려고 예루살렘에서 나왔다.

1. 베다니에서 안식일을

172:1.1 (1878.4) 유대 당국 뿐 아니라 유대 바깥에서 온 순례자들은 모두 이렇게 물었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예수가 축제에 올라오겠느냐?” 그러므로 예수가 베다니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기뻐했지만, 주사제와 바리새인들은 얼마큼 어리둥절했다. 그들은 예수를 관할 하에 두어서 기뻤지만, 예수의 대담성에 조금 불안하였다. 그가 이전에 베다니를 방문했을 때 나사로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던 것, 또 나사로가 예수의 적들에게 큰 문제가 되고 있음을 기억했다.

172:1.2 (1878.5) 유월절 엿새 전, 안식일 다음 날 저녁에, 온 베다니와 벳바게는 시몬의 집에서 대중 연회(宴會)를 열어 예수가 도착한 것을 축하하는 데 참석하였다. 이 만찬은 예수와 나사로 두 사람에게 영예를 돌리려는 것이었고 산헤드린을 무시하고 베풀어졌다. 마르다는 식사 대접을 지시했고, 동생 마리아는 여자가 대중 연회에 앉아 있는 것이 유대인 관습에 어긋났기 때문에 여자 구경꾼들 사이에 있었다. 산헤드린의 관리들이 자리에 있었지만 예수의 친구들 한가운데서 그를 체포하기를 두려워했다.

172:1.3 (1879.1) 예수의 이름은 옛날의 여호수아를 따서 지었는데, 그는 이 여호수아에 대하여 시몬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떻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리고를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가 이야기했다. 예리고의 담이 무너졌다는 전설에 대하여 논평하면서 예수는 말했다: “나는 벽돌과 돌로 만든 그러한 담에 관심이 없지만, 아버지가 모든 사람을 사랑함이 이렇게 전파되는 앞에서, 편견ㆍ독선ㆍ미움의 담을 무너뜨리고자 하노라.”

172:1.4 (1879.2) 사도들이 모두 드물게 차분한 것을 제외하고, 연회는 아주 명랑하고 정상으로 무르익었다. 예수는 눈에 띄게 명랑했고, 식탁에 다가올 때까지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

172:1.5 (1879.3) 잔치가 끝날 때가 가까워지기까지 보통 아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때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여자 구경꾼들 무리 가운데서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 귀빈인 예수가 기댄 곳까지 가서, 아주 드물고 비싼 기름이 든, 큰 알라바스터 항아리를 열었다. 주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뒤에, 마리아는 머리털을 풀어 헤치고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문지르면서 그 발에 향유를 붓기 시작했다. 온 집이 그 향유의 냄새로 가득하였고,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마리아가 한 일에 놀랐다. 나사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중얼거리고, 그렇게 비싼 향유를 이렇게 사용한다고 분개하는 빛을 보이자, 가룟 유다는 안드레가 기대어 있는 곳으로 걸어와서 말했다: “어째서 이 향유를 팔고, 그 돈이 가난한 자들을 먹이는 데 기부되지 않았느냐? 그러한 낭비를 꾸짖으라고 너는 주께 말씀드려야 하느니라.”

172:1.6 (1879.4)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가 알고 무어라고 말했는가 들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곁에서 무릎을 꿇은 동안 예수는 마리아의 머리에 손을 얹고, 다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희는 모두, 이 여자를 가만두라. 이 여자가 마음 속에 좋은 일을 한 줄 알면서, 어찌 이 일로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 투덜거리며 이 향유를 팔아서 돈을 가난한 자에게 주었어야 한다 하는 너희에게 내가 이르노라. 너희에게 언제나 가난한 자들이 함께 있으니, 너희가 좋게 여기는 대로 아무 때나 저희에게 봉사를 베풀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항상 있지 아니하리니, 내가 곧 아버지께로 감이라. 이 여인은 장례할 때 내 몸에 바르려고 이 향유를 오랫동안 저축해 왔고, 내 죽음을 예상하여 이렇게 기름 붓는 것을 좋게 여겼은즉, 이 여인이 그리하고 싶어 하는 일을 막지 못할지니라. 이 일을 하면서, 내가 죽는 것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것에 대하여 내가 일러 온 것을 믿음을 마리아가 이 행동으로 나타냈으니, 이 여인은 너희 모두를 꾸짖었도다. 오늘 밤에 행한 일로 이 여인을 나무라지 말지니라. 오히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다가오는 시대에, 온 세상에 두루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은 어디에나 이 여인이 행한 일을 말하여 이 여인을 기억하리라.”

172:1.7 (1879.5) 가룟 유다는 이것을 친히 책망을 받았다고 생각했고, 이 책망 때문에, 감정이 상한 것을 앙갚음하려고 마침내 마음먹었다. 여러 번 그러한 생각을 전에 의식하지 않고 품었지만, 이제 머리 속에서 솔직하게 의식하여 감히 그런 사악한 생각을 품었다. 이 향유 값이 한 사람이 1년 동안 버는 것에 해당하는 금액이었기 때문에―5천 명에게 빵을 마련하기에 넉넉했으므로―많은 다른 사람이 이런 그의 태도를 북돋아 주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를 사랑했고, 돌아가신 뒤에 그의 몸을 보존하려고 이 비싼 향유를 전에 마련했는데, 이는 그가 죽어야 한다고 그들에게 미리 경고했을 때 그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이 달라져서, 아직 살아 계시는 동안 주께 이 헌물을 드리기로 했다면, 그 여자가 그리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172:1.8 (1879.6) 나사로와 마르다는 마리아가 백송향(白松香)이 담긴 이 항아리를 사려고 돈을 오랫동안 저축해 온 것을 알았고, 그런 문제에서 마음에 원하는 대로, 마리아가 하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했는데, 그들은 살림이 넉넉했고, 그런 헌물을 쉽사리 장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72:1.9 (1880.1) 주사제들이 예수와 나사로를 위하여 베다니에서 이 만찬을 베풀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은 나사로를 어떻게 처분할까 자기들끼리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번에 나사로도 또한 죽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 낸 나사로를 살려둔다면, 예수를 사형에 처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고 똑바로 결론을 내렸다.

2. 일요일 아침 사도들과 함께

172:2.1 (1880.2) 이 일요일 아침에, 시몬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주는 열두 사도를 주위에 부르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준비로서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아버지께 돌아가기 전에 그가 아마도 많은 연설을 하고 많은 교훈을 가르칠 것이라고 일렀지만, 예루살렘에서 이 유월절에 머무르는 동안, 대중(大衆)을 상대로 어떤 일도 삼가라고 사도들에게 훈시했다. 가까이 남아 있고 “경계하고 기도하라”고 지시했다. 사도와 직계 추종자들의 다수가 그때도 몸에 칼을 감추고 다니는 것을 알았지만, 이 사실에 대하여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172:2.2 (1880.3) 이날 아침의 가르침에는 가버나움 근처에서 사도로 세움받은 날부터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고 준비하는 이날까지 그들이 베푼 봉사에 대한 간단한 검토가 포함되었다. 사도들은 잠자코 귀를 기울였고,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172:2.3 (1880.4) 그날 아침 일찍, 다윗 세베대는 펠라 야영지의 장비를 팔아서 얻은 자금을 유다에게 넘겨주었고, 유다는 다시 이 돈의 반 이상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비상시를 예상하여 보관하려고 그들을 청한 주인 시몬의 손에 맡겼다.

172:2.4 (1880.5) 사도들과 회의를 가진 뒤에 예수는 나사로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복수심에 불탄 산헤드린에게 목숨 희생하는 일을 피하라고 그에게 지시했다. 이 훈계에 복종하여, 며칠 뒤에 나사로는 필라델피아로 피신했는데, 그때 산헤드린의 관리들이 그를 잡으려고 사람들을 보냈다.

172:2.5 (1880.6) 어떤 면에서, 예수의 추종자들은 모두 닥쳐오는 위기를 느꼈지만, 주가 드물게 명랑하고 뛰어나게 좋은 유머를 보였기 때문에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충분히 깨닫지 못하게 되었다.

3.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다

172:3.1 (1880.7) 베다니는 성전으로부터 약 3.2킬로미터 되었고, 예수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나려고 준비가 된 것은 그 일요일 오후 1시 반이었다. 그는 베다니와 거기 있는 소박한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는 감정을 간직했다. 나사렛과 가버나움과 예루살렘은 그를 물리쳤지만, 베다니는 그를 받아들이고 그의 인품을 믿었다. 그리고 이 작은 마을에는 거의 모든 어른과 아이가 믿는 사람이었고, 그는 땅에서 자신 수여에서 가장 막강한 일, 나사로 살리는 일을 여기서 행하기를 택했다. 나사로를 살린 것은 마을 사람들이 믿을까 싶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이미 믿었기 때문이다.

172:3.2 (1880.8) 아침 내내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하여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가 메시아라는 대중의 모든 주장을 억제하려고 언제나 애써 왔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랐다. 그는 육체를 입은 생애의 끝에 다가가고 있었고, 산헤드린은 이미 그가 죽어야 한다고 선포했다. 제자들이 자유롭게 느낌을 표현하도록 놓아둔다고 해서 아무런 해로운 일이 생길 수 없었고, 그가 정식으로 대중 앞에 떳떳이 도시로 들어가기를 택한다면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172:3.3 (1881.1) 그는 사람들의 인기를 얻으려는 마지막 노력으로서, 또는 권력의 마지막 쟁취로서 예루살렘으로 대중이 보는 가운데 들어가려고 결심하지 않았다. 전적으로 제자와 사도들의 인간적 열망을 채우려고 이렇게 하지도 않았다. 환상에 빠진 몽상가의 헛된 꿈을 예수는 전혀 품지 않았다. 그는 이 방문의 결과가 어떠할 것인가 잘 알았다.

172:3.4 (1881.2) 예루살렘으로 대중이 보는 가운데 들어가기로 작정하고 나서, 주는 그러한 결심을 실행할 적당한 방법을 선택할 필요성에 부딪쳤다. 얼마큼 모순되는 숱한 예언, 이른바 메시아 예언을 모두 생각해 보았지만, 그가 따르기가 조금이라도 적당한 것이 꼭 하나 있는 듯했다. 이 예언하는 말씀의 대부분은 임금, 다윗의 아들이자 후계자, 온 이스라엘을 외국인의 지배를 받는 멍에로부터 현세에 구원할 자, 용감하고 공격적인 사람을 묘사했다. 그러나 메시아 사명의 영적 개념을 더 지지했던 사람들이 때때로 메시아와 연결했던 성서 구절이 하나 있었는데,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계획을 위한 지침으로 같은 맥락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구절은 스가랴에서 발견되는데 이렇게 적혀 있다: “크게 기뻐하라, 아 시온의 딸아. 외치라, 아 예루살렘의 딸아. 보라, 네 임금이 너에게 오도다. 그는 공정하고 구원을 가져오도다. 비천한 자로서 나귀를 타고 오시니, 새끼, 곧 나귀의 새끼라.”

172:3.5 (1881.3) 전쟁하는 임금은 반드시 말을 타고 도시에 들어갔다. 평화와 우정의 사명으로 가는 임금은 반드시 나귀를 타고 들어갔다. 예수는 말 탄 사람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나귀를 탄 사람의 아들로서 평화롭게, 좋은 뜻을 가지고 기꺼이 들어갈 생각이 있었다.

172:3.6 (1881.4) 예수는 그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 나라는 순수하게 영적 문제라는 것을 직접 가르침으로 사도들에게 강조하려고 오랫동안 애썼지만, 이 노력에 성공하지 못했다. 쉽게 친히 가르쳐 실패한 것을 이제 상징에 호소하여 성취하기를 시도하려고 한다. 따라서, 점심 식사 바로 뒤에, 예수는 베드로와 요한을 불렀고, 큰길에서 조금 떨어져 있고 베다니의 북서쪽에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웃 마을 벳바게로 가라고 지시한 뒤에, 말씀을 이었다: “벳바게로 가서, 십자로에 이르면, 너희는 거기 묶여 있는 나귀 새끼를 발견하리라. 그 나귀를 풀어서 이리로 가져오라. 어째서 너희가 이렇게 하느냐 누구라도 묻거든, 다만 ‘주께서 나귀가 필요하니라’ 말하라.” 주가 지시한 대로 두 사도가 벳바게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트인 거리에, 구석에 있는 어느 집 근처에, 어미 가까이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발견했다. 베드로가 그 나귀 새끼를 풀기 시작하자, 주인이 다가와서 어째서 그가 이렇게 하는가 물었고, 예수가 지시한 대로 베드로가 대답하자 그 사람은 말했다: “너희의 주가 갈릴리에서 온 예수라면, 그에게 나귀 새끼를 가지고 가라.” 그래서 그들은 그 나귀 새끼를 끌고 돌아왔다.

172:3.7 (1881.5) 이때가 되자 순례자 수백 명이 예수와 사도들의 둘레에 모여 있었다. 늦은 아침부터 유월절에 가는 길에 지나는 방문자들이 머물러 있었다. 그동안에, 다윗 세베대와 옛 사자였던 동료들 가운데 몇 사람은 자청하여 예루살렘으로 서둘러 내려갔고, 거기서 나사렛 예수가 개선(凱旋) 행진으로 도시에 들어간다는 보고를 성전 주위에 방문하던 순례자 무리 사이에 효과 있게 퍼뜨렸다. 따라서 이 방문자 수천 명이, 입에 오르내리던 이 선지자요 이적을 행하는 이, 더러는 메시아라고 믿은 사람을 맞이하려고 떼를 지어 나왔다. 예루살렘에서 바깥으로 나왔기 때문에 이 군중은, 도시로 들어가는 예수와 군중이 올리브산 꼭대기를 넘어서 도시로 내려가기 시작한 바로 뒤에 그들을 만났다.

172:3.8 (1882.1) 행렬이 베다니를 출발하자, 축제에 들뜬 제자, 신자, 방문하는 순례자로 이루어진 군중이 크게 흥분하였고, 순례자들 가운데 다수가 갈릴리와 페레아에서 왔다. 그들이 출발하기 바로 전에, 최초의 여인단의 열두 여인이 동료들을 더러 데리고 그 장면에 이르렀고, 그 진기한 행렬이 도시를 향하여 즐거워하며 계속 움직이자 거기에 합세했다.

172:3.9 (1882.2) 출발하기 전에, 알패오 쌍둥이는 자신들의 외투를 나귀 위에 올려놓고 주가 올라타는 동안 주를 붙들었다. 그 행렬이 올리브산 꼭대기를 향하여 움직이자, 임금의 아들, 약속된 메시아를 태운 나귀를 위하여 영예로운 깔개를 만들려고, 축제 기분에 싸인 군중이 땅에 옷을 벗어 던지고 가까이 있는 나무에서 가지들을 꺾어 왔다. 즐거운 군중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계속 움직이는 동안, 그들은 시편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아니 차라리 한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다윗의 아들에게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는 자는 복이 있도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나라는 복이 있을지어다.”

172:3.10 (1882.3) 그들이 따라 움직이자 예수는 명랑하고 즐거웠으며, 올리브산 꼭대기에 이르자, 거기서 도시와 성전의 탑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거기서 주는 행렬을 멈추었고, 그들이 예수가 눈물 흘리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큰 침묵이 모두를 덮었다. 도시에서 그를 환영하려고 쏟아져 나오는 방대한 군중을 내려다보며, 주는 크게 감동하고 눈물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예루살렘아, 너라도, 적어도 너의 한창 때, 무엇이 너의 평화시에 속하고 무엇을 아주 거저 가질 수 있었는가 네가 알기만 했더라면! 그러나 이제 이 영광이 바야흐로 네 눈에 보이지 않게 감춰지려 하는구나. 너는 이제 평화의 아들을 물리치고 구원의 복음에 등을 돌리려 하는구나. 네 둘레에 도랑을 파고 사방(四方)에서 너를 포위할 시절이 곧 네게 닥치리라.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기까지 저희가 너를 남김없이 파괴할지니라. 신이 방문하는 시절을 네가 알지 못하였으니 이 모든 것이 너에게 닥칠지니라. 너는 바야흐로 하나님의 선물을 거절하려 해도, 모든 사람이 너를 거절하리라.”

172:3.11 (1882.4) 그가 말씀을 마치고 나자, 그들은 올리브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종려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를 외치며, 달리 한껏 기뻐하고 즐거운 기분을 나누는 무리, 예루살렘에서 나온 방문자들의 무리와 금방 합세하였다. 주는 이 군중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와서 그들을 맞이하도록 계획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한 일이었다. 극적인 아무 일도 그는 결코 미리 꾸미지 않았다.

172:3.12 (1882.5) 주를 환영하려고 쏟아져 나온 군중과 아울러, 또한 숱한 바리새인과 다른 적들이 왔다. 민중의 환호가 갑자기 생각지 않게 터진 것에 너무나 불안해져서, 그들은 체포하는 행동이 민중이 터놓고 폭동을 터뜨리게 만들지 않을까 저어하여 예수를 체포하기가 두려웠다. 그들은 큰 방문자 무리가 어떤 태도를 가질까 크게 두려워했는데, 이들은 전에 예수에 대하여 많이 소문을 들었고, 이들 가운데 다수가 예수를 믿었다.

172:3.13 (1882.6)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자, 군중은 점점 더 시위하는 모습이었고, 너무 지나쳐서 바리새인들 가운데 더러는 예수 옆에 다가와서 말했다, “선생이여, 당신은 제자들을 꾸짖고 저희에게 더 점잖게 행동하라고 타일러야 하나이다.” 예수는 대답했다: “주사제들이 거절한 평화의 아들을 이 아이들이 환영하는 것이 마땅할 따름이라. 길가에 있는 이 돌들이 저희 대신에 외치지 않을까 하나니, 저희를 멈추는 것이 소용 없으리라.”

172:3.14 (1882.7) 바리새인들은 황급히 행렬을 앞질러 가서 산헤드린으로 다시 돌아갔다. 산헤드린은 그때 성전에서 심의하는 중이었고 그들은 동료들에게 보고했다: “보라,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 아무 소용이 없도다. 우리는 이 갈릴리 사람 때문에 엉망진창이 되었도다. 사람들은 저에게 미쳤는지라. 우리가 이 무지한 자들을 멈추지 아니하면, 온 세상이 저를 뒤쫓아 가리라.”

172:3.15 (1883.1) 이렇게 겉으로 자연스럽게 군중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지게 된 것에 붙여야 할 아무런 깊은 의미가 정말로 없었다. 이러한 환영은 비록 즐겁고 진지하기는 했어도 흥겨운 이 군중의 마음 속에 진정하거나 뿌리 깊은 어떤 확신이 있음을 가리키지 않았다. 바로 이 군중은 이 주의 후반(後半)에, 산헤드린이 일단 예수를 적대하여 굳고 단호한 태도를 취하자, 그리고 그들이 환상에서 깨어났을 때―오랫동안 간직했던 기대에 따라서 예수가 하늘나라를 세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똑같이 기쁘게 예수를 재빨리 거부했다.

172:3.16 (1883.2) 그러나 온 도시가 힘차게 술렁거렸고, 그래서 사람마다 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구뇨?” 군중은 응답했다, “갈릴리 선지자, 나사렛 예수라.”

4. 성전 둘레를 방문하다

172:4.1 (1883.3) 알패오 쌍둥이가 나귀를 주인에게 돌려주는 동안에, 예수와 열 사도는 가까운 동료들과 따로 떨어져, 성전 둘레를 거닐며, 유월절을 위한 준비를 구경하였다. 산헤드린이 사람들을 크게 두려워했기 때문에, 예수에게 손대려는 아무런 시도도 없었고, 이것이 결국은 예수가 군중으로 하여금 이렇게 그를 환호하도록 버려둔 이유 중에 하나였다. 이것이 도시에 들어가고 나서 예수가 즉시 붙잡히는 것을 막는 데 효과적일 수 있었던 유일한 인간적 과정이었다는 것을 사도들은 조금도 깨닫지 못했다. 주는 유월절에 온 수만의 방문자 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높고 낮은 주민에게 복음을 들을 기회, 그들이 원한다면 평화의 아들을 받아드릴 이 마지막 기회를 한번 더 주고 싶었다.

172:4.2 (1883.4) 이제, 저녁이 다가오자, 군중은 먹을 것을 찾으러 갔고, 예수와 직계 추종자들만 남았다. 얼마나 이상한 날이었는가! 사도들은 생각이 깊었지만 말이 없었다. 예수와 관계를 가졌던 여러 해 동안, 그런 날을 구경한 적이 없었다. 한 순간 그들은 성전 금고 옆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 떨어뜨리는 것을 구경했다: 부자들은 돈 받는 상자 속에 많이 넣었고, 모두가 가진 재산의 한도에 따라서 무엇인가 냈다. 마침내, 제대로 옷을 걸치지 못한 어느 가난한 과부가 왔고, 그 여자가 (작은 동전) 두 잎을 나팔 속으로 넣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서 사도들이 과부를 주목하게 하며 예수는 말했다: “너희가 방금 본 것을 잘 주목하여라. 이 가난한 과부는 모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던졌으니, 이 모든 다른 사람은 남는 데서 하찮은 것을 얼마큼 헌금으로 던졌거니와 이 가난한 여인은 비록 빈궁한데도 가진 것을 모두, 아니 생활에 쓸 것까지도 내놓았느니라.”

172:4.3 (1883.5) 저녁이 가까워지자, 그들은 말없이 성전 마당 근처에 이리저리 걸었고, 이 낯익은 장면들을 다시 한번 둘러본 뒤에, 더 일찍 있었던 방문도 제외하지 않고 이전의 여러 방문과 관련된 느낌을 회상하며, 예수는 말했다: “베다니로 올라가서 쉬자.”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예수는 시몬의 집으로 갔고, 한편 다른 사도들은 베다니와 벳바게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묵었다.

5. 사도들의 태도

172:5.1 (1883.6) 이 일요일 저녁에, 그들이 베다니로 돌아가는 동안 예수는 사도들 앞에서 걸었다. 그들이 시몬의 집에 이른 뒤에 헤어질 때까지, 말 한 마디도 떨어지지 않았다. 어떤 열두 사람도, 이 하늘나라 대사(大使)들의 정신과 혼을 통하여 지금 솟구치고 있는 것처럼 다양하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일찍이 느낀 적이 없었다. 이 억센 갈릴리 사람들은 어리둥절하고 당황하였다. 다음에 무엇을 기대할지 몰랐다. 너무 놀라서 그다지 두려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주가 다음 날 무엇을 계획하는가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들은 숙소로 돌아갔지만, 쌍둥이를 제외하고, 별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시몬의 집에서, 무기(武器)를 가지고 예수를 지키지는 않았다.

172:5.2 (1884.1) 안드레는 완전히 어리둥절했고 거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는 대중의 환호가 터진 것을 평가하려고 진지하게 애쓰지 않은 유일한 사도였다. 사도단의 우두머리로서 자기 책임을 생각하는 데 너무 몰두해서, 군중이 크게 호산나를 외친 것에 무슨 의미나 중요성이 있는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안드레는 동료들 가운데 몇 사람을 지켜보느라고 바빴고, 그들이, 특히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과 열심당원 시몬이, 흥분한 동안에 감정을 못 이길까 두려워했다. 이날 하루 종일, 그리고 뒤이은 며칠 동안, 안드레는 심각한 의심이 들었지만, 사도 동료들에게 이러한 걱정거리를 전혀 털어놓지 않았다. 그는 열둘 가운데 몇 사람이 칼로 무장한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의 태도가 걱정되었지만, 바로 아우 베드로가 그런 무기를 지니고 있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행렬은 안드레에게 비교적 깊지 않은 인상을 주었다. 자기 책임에 너무 바빠서, 그는 달리 영향을 받을 수 없었다.

172:5.3 (1884.2) 시몬 베드로는 민중이 이처럼 열광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거의 날 듯한 기분이었지만, 그들이 그날 밤 베다니로 돌아올 때가 되자, 그는 어지간히 정신이 들었다. 베드로는 다만 주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열광의 파도에 뒤이어, 예수가 어떤 종류의 발표를 하지 않아서 몹시 실망했다. 베드로는 그들이 성전에 도착했을 때, 어째서 예수가 군중에게 말씀을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적어도 사도들 중 한 사람에게 군중에게 연설하라고 허락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베드로는 위대한 설교자였고, 그렇게 술술 받아들이고 열광하는 큰 청중을 헛되이 보내는 것을 보고 아까워했다. 군중에게 성전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하늘나라 복음을 무척 전파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는 이 유월절 주간에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전혀 가르치거나 설교해서는 안 된다고 그들에게 특별히 당부했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이 볼 만한 행렬이 보인 반응은 시몬 베드로에게 비참했다. 밤이 되자 그는 제 정신이 들었고 말할 수 없이 슬펐다.

172:5.4 (1884.3) 야고보 세베대에게, 이 일요일은 어리둥절하고 깊은 혼란에 빠진 날이었다. 그는 진행되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알아차릴 수 없었다. 주가 무슨 목적으로 사람들이 이렇게 사납게 환호하도록 버려두고 나서, 그들이 성전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에게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행렬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리브산을 내려가는 동안에, 특히 그들이 주를 환영하려고 쏟아져 나온 수천의 순례자와 마주쳤을 때, 야고보는 구경한 것에 대하여 가슴 뿌듯함과 만족이 엇갈리는 감정 때문에, 또 그들이 성전에 다다랐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깊은 두려운 느낌 때문에, 마음이 몹시 산란하였다. 그리고 나서 예수가 나귀에서 내려서, 느긋하게 성전 마당 둘레를 계속 거닐었을 때, 그는 풀이 죽었고 실망에 빠졌다. 하늘나라를 선포할 그러한 대단한 기회를 던져 버리는 이유를 야고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밤이 되자 그의 정신은 슬프고 끔찍한 불안 속에 빠져 있었다.

172:5.5 (1884.4) 요한 세베대는 어째서 예수가 이렇게 했는가 얼마큼 가깝게 이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적어도 이렇게 이른바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이 무슨 영적 의미가 있는가 얼마큼 깨달았다. 군중이 성전을 향하여 계속 움직임에 따라서, 그리고 거기 주가 나귀 새끼에 걸터앉아 있는 것을 보는 동안, 요한은 예수가 한때 성서의 구절, 스가랴의 말씀을 인용한 것을 기억했는데, 이것은 메시아가 평화의 사람으로 오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을 묘사했다. 이 구절을 머리 속에서 이모저모 따져보자, 요한은 이 일요일 오후의 구경거리가 무슨 의미를 상징하는가 비로소 알아차렸다. 적어도 그는 이 구절의 뜻을 넉넉히 깨달았고, 이것은 그로 하여금 그 사건을 얼마큼 즐기고, 겉보기에 목적 없이 승리의 행진이 끝난 것을 보고 지나치게 우울해지지 않게 하였다.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상징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성향이 있는 종류의 머리를 가졌다.

172:5.6 (1885.1) 빌립은 갑자기, 저절로 군중이 열광한 것에 온통 들떠 있었다. 올리브산에서 내려가는 길에, 이 모든 시위가 도대체 무슨 일인가 어떤 정돈된 개념에 도달할 만큼 충분히 생각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주가 영예를 받았기 때문에, 그는 어떤 면에서 그 연출을 기쁘게 보았다. 그들이 성전에 이를 때가 되자, 그는 예수가 아마도 그에게 군중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요청할까 하는 생각에 움찔했고, 그래서 군중으로부터 여유 있게 돌아서는 예수의 행동이 대다수의 사도들에게 그토록 쓰라린 실망을 주었지만, 빌립에게는 크게 안심이 되었다. 군중은 때때로 열두 사도의 집사에게 큰 시련이었다. 군중의 물질적 필요에 관하여 이런 개인적 걱정을 덜고 난 뒤에, 빌립은 군중을 가르치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베드로와 함께 실망을 표현했다. 그날 밤에 빌립은 이 체험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고, 하늘나라 관념 전부를 의심하는 유혹이 들었다. 이 모든 일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솔직하게 궁금했지만, 의심을 아무에게도 나타내지 않았는데, 예수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주를 크게 신뢰하였다.

172:5.7 (1885.2) 상징과 예언 같은 모습을 제쳐놓고, 나다니엘은 주가 어째서 유월절의 순례자들로부터 일반적 지지를 구했는가 가장 가깝게 이해하였다. 그들이 성전에 이르기 전에, 예루살렘으로 그렇게 시위(示威)하며 들어가지 않고는 주제넘게 도시로 들어가는 순간, 예수가 산헤드린의 관리들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던져졌으리라는 것을 생각해서 알아냈다. 그러므로 예수가 도시의 담 안으로 일단 들어가고,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를 즉시 체포하는 일을 삼가도록 이렇게 그들에게 강력하게 감명을 주고 나서, 주가 즐거워하는 군중을 더 이상 이용하지 않은 것을 보고 나다니엘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이런 방법으로 주가 도시에 들어간 참 이유를 알았기 때문에, 나다니엘은 자연히 더 차분히 따라갔고, 다른 사도들보다 예수의 나중 행동에 그다지 마음이 흔들리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나다니엘은 까다로운 상황을 다루는 데 예수가 지혜롭고 영리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을 크게 신뢰했다.

172:5.8 (1885.3) 마태는 처음에 이 구경거리의 진행을 보고 어쩔 줄을 몰랐다. 예루살렘의 임금이 구원을 가져오고 나귀 새끼를 타고서 왔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기뻐하는 것을 선지자가 언급하는 스가랴의 구절을 또한 상기할 때까지, 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깨닫지 못했다. 그 행렬이 도시 방향으로 움직이고, 그리고 나서 성전에 가까워지자, 마태는 환희에 빠졌다. 소리지르는 이 군중의 선두에 서서 주가 성전에 도착했을 때, 무슨 놀라운 일이 일어나리라고 확신했다. 바리새인들 가운데 하나가, “모두 보라, 누가 여기에 오는가, 유대인의 임금이 나귀를 탔구나!”하며 예수를 비웃었을 때, 마태는 겨우 크게 자제하여 가까스로 그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날 저녁에 베다니로 돌아가는 길에 열두 사도 중에서 아무도 그보다 더 우울하지 않았다. 시몬 베드로와 열심당원 시몬 다음으로, 그는 신경이 아주 날카롭게 곤두섰고, 밤이 되자 지친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마태는 훨씬 즐거워졌다. 결국 그는 지고도 즐거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172:5.9 (1886.1) 토마스는 모두 열두 사도 가운데서 가장 어리둥절하고 당황한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에 그냥 따라다녔고, 그 광경을 보면서 주가 그러한 특이한 시위에 참가한 동기가 도대체 무엇일까 정직하게 의문을 품었다. 가슴 속 깊이 그 연출 전체가, 명백히 어리석지는 않더라도, 조금 유치하다고 여겼다. 이와 같은 어떤 일도 예수가 하신 것을 본 적이 없었고, 이 일요일 오후에 예수의 이상한 행동을 설명하지 못하여 그는 어리둥절했다. 그들이 성전에 이를 때가 되어서, 토마스는 이 민중 시위의 목적은 산헤드린을 깜짝 놀라게 해서, 그들이 감히 주를 즉시 체포하려 하지 않도록 하는 것임을 추측했다. 베다니로 돌아가는 길에, 토마스는 생각이 많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잘 때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시끌벅적한 입성을 연출한 예수의 영리함이 얼마큼 유머 있게 호소하기 시작했고, 그는 이 반응 때문에 기분이 많이 즐거워졌다.

172:5.10 (1886.2) 열심당원 시몬에게 이 일요일은 멋진 날로 시작되었다. 다음 며칠 동안 예루살렘에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환상을 보았고, 그 점에서 그는 옳았다. 그러나 이 시몬은 예수가 다윗의 왕좌에 앉고, 유대인들이 새로이 나라를 통치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꿈꾸었다. 하늘나라가 선포되자마자 민족주의자들이 행동에 나서고, 바로 그는 새 나라에서 모이는 군대의 최고 지휘를 맡는 것을 보았다. 올리브산으로 내려가는 길에, 그날 해가 지기 전에 산헤드린과 그 동조자들이 다 죽는 것을 환상으로 보기까지 했다. 무슨 큰 일이 일어나려 한다고 정말로 믿었다. 그는 군중 전체에서 가장 시끄러운 사람이었다. 그날 오후 5시가 되자, 그는 말이 없고 움츠러들고 환상에서 깨어난 사도였다. 적어도 주가 부활하고 시간이 오래 지나기까지, 그는 이날의 충격을 받은 결과로 그에게 덮친 우울함에서 결코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172:5.11 (1886.3) 알패오 쌍둥이에게 이날은 완벽한 날이었다. 끝까지 하루를 정말로 즐겼고, 성전 근처에서 주가 조용히 둘러보는 동안에 옆에 없었기 때문에, 민중 봉기의 시시한 끝을 상당히 피했다. 그날 저녁에 베다니로 돌아왔을 때, 풀이 죽은 사도들의 행동을 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쌍둥이가 기억하기로, 이날이 언제나 땅에서 하늘에 가장 가까운 날이었다. 이날은 사도로서 그들의 생애 전체에서 흐뭇한 절정이었다. 이 일요일 오후의 가슴 뿌듯했던 기억은 파란 많은 이 주간의 비극 모두를 치르고, 십자가 처형이 있던 바로 그 시간까지 그들을 버티게 했다. 그것은 쌍둥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어울리는, 임금의 입성(入城)이었고, 그들은 구경거리 전부를 순간마다 즐겼다. 그들은 본 것을 모두 완전히 좋게 여겼고, 오랫동안 그 기억을 간직했다.

172:5.12 (1886.4) 모든 사도 가운데, 가룟 유다는 이 행렬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것에 가장 나쁘게 영향을 받았다. 시몬의 집에서 잔치할 때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것과 관련하여 그 전날 주의 꾸지람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머리는 불만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유다는 그 광경 전부에 속이 메스꺼웠다. 그에게 이것은 정말로 우스꽝스럽지는 않더라도 유치하게 보였다. 복수심에 찬 이 사도가 이 일요일 오후의 행렬을 보았을 때, 그에게 예수는 임금이라기보다 어릿광대와 비슷하게 보였다. 그는 마음 속에서 그 연출 전체를 분개하였다. 그는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관점을 가졌고, 이들은 나귀나 나귀 새끼를 타겠다고 찬성할 사람은 누구든지 깔보았다. 승리의 행렬이 도시로 들어갔을 무렵에, 유다는 그러한 하늘나라 관념 전부를 버리기로 거의 작정하였다. 하늘나라를 세우려는 모든 그러한 어처구니없는 시도를 그만두기로 거의 결심하였다. 그리고 나서 나사로의 부활과 많은 다른 일을 생각했고, 적어도 하루 더, 열둘과 함께 계속 남아 있기로 마음먹었다. 게다가 그는 돈 가방을 지녔고 사도의 자금을 몸에 지니고서, 버리고 달아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날 밤에 베다니로 돌아가는 길에 그의 행동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는데, 사도들이 다 똑같이 풀이 죽었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172:5.13 (1887.1) 유다는 사두개인 친구들의 조롱에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다. 예수가 도시의 대문에 막 이르자 일어난 어떤 작은 사건만큼, 어떤 한 가지 다른 요인도 그에게 그렇게 강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어떤 저명한 사두개인이 (유다 집안의 한 친구) 즐겁게 비웃는 생각으로 그에게 달려가서 등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내 좋은 친구여, 어찌하여 그리 근심하는 얼굴인가. 이 나사렛 예수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대문들을 지날 때 우리가 그를 유대인의 임금이라 갈채하는 동안, 기운을 내고 우리 모두와 합세하게나.” 유다는 박해를 받는다고 움츠러든 적이 없었지만, 이 따위의 비웃음은 견딜 수 없었다. 오래 간직했던 복수의 감정과 함께, 웃음거리가 될까 하는 이 치명적 두려움, 주와 동료 사도들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이 끔찍하고 두려운 느낌이 이제 섞였다. 마음 속에서, 사도로 세움받은 이 하늘나라 대사는 이미 배반자였다. 주와 드러내놓고 갈라지는 어떤 그럴듯한 핑계를 찾는 일이 남았을 뿐이다.

제 173 편 월요일에 예루살렘에서

유란시아서

제 173 편

월요일에 예루살렘에서

173:0.1 (1888.1) 이 월요일 아침 일찍, 미리 주선하여, 예수와 사도들은 베다니에, 시몬의 집에서 모였고, 간단한 회의를 가진 뒤에 예루살렘으로 떠났다. 성전을 향하여 길을 가는 동안 열두 사도는 이상하게 말이 없었고, 전날의 체험을 겪고 나서 아직 회복하지 못했다. 그들은 기대에 차 있고 두려웠으며, 이 유월절 주간 내내, 아무 대중 교육도 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와 함께, 주가 갑작스럽게 전술을 바꿔서 생긴 느낌, 어떤 거리감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

173:0.2 (1888.2) 이 무리가 올리브산을 내려가는 동안, 예수는 앞장섰고 사도들은 생각에 잠겨 말없이 바짝 뒤에 따라갔다.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의 머리 속에서 맨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꼭 하나 있었는데, 이것이었다: 오늘 주가 무슨 일을 하실까? 유다가 열중한 한 가지 생각은 이것이었다: 어찌할까? 예수와 동료들과 함께 계속 갈까, 아니면 물러날까? 그리고 내가 그만두려면, 어떻게 사이를 끊을까?

173:0.3 (1888.3) 이 사람들이 성전에 도착했을 때는 날씨가 산뜻한 이날 아침, 9시쯤이었다. 그들은 대번에 예수가 아주 흔히 가르치던 큰 마당으로 갔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신자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에, 예수는 가르치는 연단(演壇) 가운데 하나에 올라가서, 모여드는 군중에게 연설하기 시작했다. 사도들은 좀 떨어진 곳으로 물러나서 형편이 어찌 되어 가는가 보려고 기다렸다.

1. 성전을 깨끗이 치우다

173:1.1 (1888.4)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 및 예식과 관련하여 거대한 상업이 발달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제물을 바치는 데 적당한 동물을 마련해주는 장사가 있었다. 예배하는 사람이 자신의 제물을 마련하는 것이 허락되기는 했어도, 레위 율법의 뜻으로 보아서, 그리고 성전의 공식 검열자들이 판단하건대 전혀 “흠”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완전하다고 생각된 자기의 짐승을 성전 검사원에게 퇴짜맞는 창피를 많은 예배자가 겪었다. 따라서 희생에 바치는 짐승을 성전에서 사는 것이 더 널리 퍼진 관습이 되었다. 가까운 올리브산에 몇 군데에서 짐승을 살 수 있었지만, 이런 짐승을 성전의 우리에서 직접 사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차츰, 성전 마당에서 온갖 종류의 희생 짐승을 파는 이 관습이 생겨났다. 엄청난 이익을 남기는 대규모 장사가 이렇게 생겨나게 되었다. 이 이익의 일부는 성전 금고에 들어가도록 예정되었지만, 반 이상이 현임(現任) 대사제 가족들의 손에 간접으로 넘어갔다.

173:1.2 (1888.5) 성전에서 이렇게 짐승 파는 일이 번영한 것은 예배자가 그러한 짐승을 샀을 때 값이 얼마큼 높을지 몰라도, 더 이상 요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고, 의도한 제물이 진짜 흠이나 율법상 흠이 있다는 이유로 퇴짜맞지 않을 것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인가, 특히 나라의 큰 축제 동안에, 서민들에게 터무니없이 지나친 값을 요구하는 제도가 실행되었다. 한때 탐욕스러운 사제들은 가난한 사람에게 동전 몇 잎에 팔았어야 할 비둘기 한 쌍에 한 주 동안의 노동에 해당하는 값을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안나스의 아들들”은 성전 구역 안에서 그들의 상점가를[1] [25] 이미 정착시키기 시작했고, 바로 이 상품 시장은 성전 자체가 멸망하기 3년 전에, 군중이 마지막으로 뒤집어엎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173:1.3 (1889.1) 그러나 희생 짐승과 잡동사니 상품의 거래만이 성전 마당을 더럽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었다. 이 시절에, 바로 성전 구역 안에서 행해진 광범위한 체계의 금융 및 상업 거래가 조장되었다. 이는 모두 다음 방식으로 생겼다. 아스모니아 왕조 시절에 유대인들은 자체의 은화(銀貨)를 찍었고, 이 유대의 은전으로 반 세겔의 성전 세금과 모든 기타 성전 요금을 내라고 요구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이 규정은 팔레스타인과 로마 제국의 다른 지방에서 두루 유통되는 많은 종류의 화폐를 유대인이 찍은 이 정통 세겔로 바꾸는 허가를 환전상들이 받는 것을 필요하게 만들었다. 여자ㆍ노예ㆍ미성년을 제외하고 모두가 내야 하는 성전 인두세(人頭稅)는 반 세겔이었고, 다임과[2] [26] 같은 크기였지만, 두 배나 두꺼웠다. 예수의 시절이 되자, 사제들은 또한 성전 세금을 내는 것이 면제되었다. 따라서, 유월절 전달 15일부터 25일까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에 그들에게 성전 세금을 물 적당한 돈을 마련해주는 목적으로, 인가받은 환전상들이 팔레스타인의 주요 도시에서 노점을 세웠다. 이 열흘 기간이 지난 뒤에, 이 환전상들은 예루살렘으로 계속 옮겨갔고, 나아가서 성전의 여러 마당에서 돈을 바꾸어주는 탁자를 세웠다. 그들은 약 10전의 가치가 있는 은전을 바꾸는 데, 3전에서 4전에 해당하는 수수료를 받는 것이 허락되었고, 더 큰 가치가 있는 은화를 바꾸려고 내놓을 경우에, 두 배를 걷는 것이 허락되었다. 마찬가지로 이 성전 은행가들은 희생 짐승을 사고, 서약한 것을 지불하고 헌물 바치려고 뜻한 모든 돈을 바꿔주면서 이익을 챙겼다.

173:1.4 (1889.2) 성전에 있는 이 환전상들은 방문하는 순례자들이 정기적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스무 종류가 넘는 돈을 교환하면서 이익을 얻으려고 정규 은행 사업을 운영했을 뿐 아니라, 또한 은행 사업에 관계되는 모든 다른 종류의 거래에 종사했다. 성전의 금고와 성전의 권력자들은 이 상업 활동에서 엄청나게 이익을 남겼다. 서민들이 가난에 시들고 이 부당한 세금을 계속 내는 동안, 성전 금고가 1천만 달라 넘게 보유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173:1.5 (1889.3) 이 시끄러운 환전상, 장사꾼, 가축 상인들이 모여 있는 한 가운데서, 이 월요일 아침에 예수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가르치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성전 모독에 대하여 예수 혼자 분개하지는 않았다. 서민들, 특히 외국 지방에서 온 유대인 방문자들도 이렇게 폭리를 남기면서 민족의 예배 장소를 훼손하는 것을 진심으로 분개하였다. 이때 바로 산헤드린은 장사하고 물물 교환하는 이 모든 왁자지껄하는 소리와 혼란에 둘러싸인 어느 방에서 정기(定期) 회의를 열었다.

173:1.6 (1890.1) 예수가 막 연설을 시작하려 하자, 어쩌다가 두 가지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가까이 있던 환전상의 돈 바꾸는 탁자에서,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어느 유대인에게 바가지를 씌웠다는 주장에 대하여 사납고 맹렬한 말다툼이 일어났고, 한편 동시에 짐승 우리의 한 구역에서 다른 구역으로 몰려가는 1백여 마리 황소 떼의 울음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잠시 멈춰서 말은 없어도, 이러한 장사와 혼란의 장면을 깊이 생각하는 동안에, 예수는 가까이서 순진한 갈릴리 사람, 한때 이론에서 함께 이야기한 적이 있는 사람이, 거드름피고 잘난 체하는 유대 지방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어 이리저리 떠밀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한데 모여, 예수의 혼 속에서 이상하게 이따금 생기는 분한 감정이 한번 북받쳐 올랐다.

173:1.7 (1890.2) 가까이 서 있던 사도들은 금방 뒤따라 생긴 일에 참여하기를 삼갔고, 이들이 놀란 가운데 예수는 가르치는 연단에서 걸어 내려가서, 마당을 통해서 가축을 몰고 가던 젊은이에게로 가서, 노끈으로 된 채찍을 빼앗아 재빨리 짐승들을 성전으로부터 몰아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성전 마당에 모인 수천 명이 놀라서 구경하는 앞에서, 가장 먼 가축 우리까지 당당히 걸어가서, 다음에 외양간마다 문을 열고 갇혀 있는 짐승들을 몰아냈다. 이때가 되자, 모인 순례자들은 그 충격에 흥분하였다. 아우성치면서 그들은 저잣거리를 향하여 움직였고, 환전상들의 탁자를 뒤집어엎기 시작했다. 5분도 채 안 되어 모든 장사가 성전으로부터 치워져 버렸다. 가까이 있던 로마 호위병들이 그 장면에 나타났을 때가 되자, 모두가 조용해졌고, 군중은 질서를 찾았다. 예수는 연단으로 돌아와서 군중에게 말씀했다: “오늘 너희는 성서에 기록된 것을 목격하였느니라: ‘내 집은 모든 민족이 기도하는 집이라 부를지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를 강도의 굴로 만들었느니라.’”

173:1.8 (1890.3) 그러나 그가 다른 말을 입 밖에 내기도 전에, 큰 회중이 찬송하는 호산나를 외쳤고, 당장에 젊은이의 무리가 군중으로부터 걸어나와서, 신성을 모독하고 폭리를 취하는 상인들이 신성한 성전에서 쫓겨난 것을 고맙게 여기는 감사 찬송을 불렀다. 이때가 되자 어떤 사제들이 그 장면에 나타났고, 그들 가운데 하나가 예수에게 말했다: “너는 레위의 자손들이 말하는 것을 듣지 않느냐?” 주는 대답했다: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으로부터 찬송이 완전하게 되었도다’함을 너는 읽어본 적이 없느냐?” 예수가 가르치는 동안, 나머지 하루 종일, 사람들이 세워놓은 파수들이 아치 길마다 망을 보았고, 누가 빈 그릇을 들고 성전 마당을 통과하는 것조차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173:1.9 (1890.4) 이 일에 관하여 소식을 들었을 때, 주사제와 서기관들은 어이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주를 두려워했고, 더군다나 주를 죽이려고 결의(決意)가 굳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쩔 줄 몰랐다. 어떻게 그를 죽게 만들까 알지 못했으니, 군중을 크게 두려워했기 때문이고, 이들은 주가 신성을 모독하는 모리배를 타도한 것을 이제 거리낌없이 지지했다. 그리고 이날 내내, 성전 마당에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날에,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글자 그대로 그 말씀에 매달렸다.

173:1.10 (1890.5) 사도들은 예수의 이 놀라운 행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작스럽고 뜻하지 않게 주가 이렇게 행동한 데 너무 놀라서, 그 사건 전체를 통해서 그들은 연사(演士)의 강단 가까이 떼를 지어 함께 남아 있었다. 그들은 결코 이 성전 치우는 일을 도우려고 손을 까딱하지 않았다. 이 볼 만한 사건이 그 전날, 군중이 큰 소리로 즐겁게 소리지르는 동안 내내, 도시의 대문을 거쳐 가는 떠들썩한 그의 행렬이 끝났을 때, 예수가 성전에 승리하여 도착했을 때 일어났더라면, 그 사건을 위하여 준비되었을 터이지만, 일이 벌어진 바와 같이, 그들은 전혀 참여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173:1.11 (1891.1) 성전을 이렇게 깨끗이 치운 것은 가난한 자와 배우지 못한 자를 희생하면서 생기는 온갖 형태의 불공평한 처사와 폭리를 그가 싫어한 것 뿐 아니라, 종교 관습을 상업화하는 것에 대한 주의 태도를 드러낸다. 이 사건은 또한 정치ㆍ재정, 또는 교회의 권력 뒤에 자리를 굳힐 수 있는 부당한 소수의 관습, 불공평하고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관습에 대항해서, 어떤 주어진 인간 집단의 대다수를 보호하기 위하여 무력(武力) 쓰기 싫어하는 것을 예수가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또한 보여준다. 자기 보호를 위해서나 칭찬할 만한 일생의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서, 이상주의 때문에 무력에 의존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누르려고, 눈치 빠르고 사악하고 술책을 꾸미는 사람들이 자체를 조직하도록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2. 주의 권한에 대한 도전

173:2.1 (1891.2) 일요일에 개선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은 유대 지도자들을 너무나 두렵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들은 삼가 예수를 체포하지 않았다. 오늘, 이 볼 만한 성전 치우기는 마찬가지로 주의 체포를 미루는 효과를 가졌다. 날마다 유대인 권력자들은 그를 죽이겠다는 결심이 점점 더 굳어졌지만, 두 가지 두려움 때문에 난처했고, 그 두려움 때문에 공격 시간이 늦어졌다. 주사제와 서기관들은 군중이 분개하여 날뛰며 그들을 공격할까 두려워서 대중 앞에서 예수 체포하기를 망설였다. 그들은 또한 로마 파수병들이 민중의 봉기(蜂起)를 진압하려고 소집되는 가능성을 두려워했다.

173:2.2 (1891.3) 산헤드린의 정오 회의에서, 주의 친구들이 하나도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를 신속히 없애버려야 한다고 만장 일치로 가결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 어떻게 그를 잡아 가두어야 하는가 찬성할 수 없었다. 사람들 사이로 나가서, 예수의 가르침에서 그를 옭아매거나, 아니면 그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체면을 깎아내리려고 애쓸 다섯 무리를 임명하는 데 마침내 찬성하였다. 따라서, 두 시쯤에, 예수가 “아들의 자유”에 대하여 말씀을 막 시작하자, 이 이스라엘 장로들의 한 무리가 헤치고 예수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보통 관습대로 말씀을 가로막고 이렇게 물었다: “어떤 권한으로 네가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너에게 이 권한을 주었느냐?”

173:2.3 (1891.4) 예수의 특징이었던 특별한 방법으로, 특히 성전에서 모든 상업(商業)을 치워버린 최근의 행동과 상관되다시피, 감히 가르치고 행동하는 어떤 사람에게도 성전 권력자와 유대인 산헤드린의 관리들이 이렇게 묻는 것은 아주 당연했다. 이 장사꾼과 환전상들은 모두 최고 책임자들로부터 직접 면허를 얻어서 운영했고, 그들이 얻는 이익의 일부가 성전 금고로 곧장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다. 권한이 온 유대인의 금언(金言)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 선지자들은 언제나 문제를 일으켰는데, 이는 그들이 권한이 없이, 랍비 학원에서 정식으로 가르침을 받고 나중에 산헤드린의 공식 임명을 받지 않고서, 아주 용감히 주제넘게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버젓이 대중을 가르치면서 이 권한이 없는 것은 무식하게 주제넘거나 드러내놓고 반항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시절에 오직 산헤드린이 장로(長老)나 선생을 세울 수 있었고, 그런 예식은 이전에 그렇게 세움받은 사람들이 적어도 세 명 있는 자리에서 행해져야 했다. 그러한 임명은 그 선생에게 “랍비”라는 칭호를 수여했고, 또한 그에게 “판결을 하라고 그 앞에 가져올지 모르는 그런 문제들을 매듭짖고 푸는” 재판관으로서 행위할 자격을 주었다.

173:2.4 (1892.1) 성전 권력자들은 이날 오후 시간에 예수 앞에 와서, 그의 가르침 뿐 아니라 행위에 도전하였다. 예수는 바로 이 사람들이 그의 가르치는 권한은 사탄의 것이요, 그의 모든 대단한 이적(異蹟)은 악마의 왕의 권한으로 행해졌다고 오랫동안 공개적으로 가르친 것을 알고도 남았다. 따라서 도리어 질문을 던짐으로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예수는 말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고자 하노니, 너희가 내게 대답하겠다면, 나도 마찬가지로 무슨 권한으로 내가 이런 일을 하는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왔느냐? 요한이 그의 권한을 하늘로부터 받았느냐, 아니면 사람들로부터 받았느냐?”

173:2.5 (1892.2) 그에게 질문한 사람들이 이 말을 듣자, 어떻게 대답할까 의논하려고 자기들끼리 한쪽으로 물러갔다. 군중 앞에서 예수에게 창피를 주려고 전에 생각했지만, 그때 성전 마당에서 모인 모든 사람 앞에서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큰 혼란 속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예수에게 돌아와서 “요한의 세례에 관하여 우리는 대답할 수 없노라, 우리는 모르노라” 말했을 때, 그들의 패배는 더군다나 분명하였다. 그들이 주께 그렇게 대답한 것은 이렇게 자기들끼리 이치를 따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권한이 하늘로부터 왔다고 말하면, 그가 말하리라. 어째서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느냐, 아마도 그가 권한을 요한으로부터 받았다고 덧붙이리라. 그리고 우리가 권한이 사람들로부터 왔다 하면, 군중이 우리에게 대들까 싶으니라. 왜냐하면 군중의 대부분이 요한이 선지자였다 여기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없이 예수와 사람들 앞으로 와서 그들이, 이스라엘의 종교 선생과 지도자들이, 요한의 사명에 대하여 의견을 밝힐 수 없다고 (아니면 밝히지 않겠다고) 고백했다. 그들이 말을 마치자, 예수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173:2.6 (1892.3) 예수는 결코 그의 권한을 요한으로부터 받았다고 호소할 뜻이 없었다. 요한은 산헤드린으로부터 세움받은 적이 없었다. 예수의 권한은 그 자신과 아버지의 영원한 지고(至高)함에 있었다.

173:2.7 (1892.4) 적들을 이런 방법으로 다루면서 예수는 질문을 피할 생각이 아니었다. 언뜻 보면 그가 교묘하게 회피한 죄가 있는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예수는 결코 적이라도 부당하게 이용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렇게 회피하는 듯 보이면서, 그의 사명을 뒷받침하는 권한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듣는 사람 모두에게 정말로 주었다. 그들은 그가 악마 임금의 권한으로 행동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예수는 모든 그의 가르침과 행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힘과 권한에 따른 것이라고 거듭하여 주장했다. 이것을 유대 지도자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그가 결코 산헤드린의 인가(認可)를 받은 적이 없으니까, 그가 비공식 선생임을 인정하는 궁지에 그를 몰려고 애썼다. 그가 실제로 한 바와 같이 그들에게 대답하고, 한편 요한으로부터 권한을 받았다 주장하지 않으면서, 그를 옭아매려는 적들의 노력은 바로 그들을 공격하였고,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보기에 그들의 체신이 많이 떨어졌다는 추측으로 사람들을 아주 만족하게 해주었다.

173:2.8 (1892.5) 적들을 다루는 주의 이 재능은 그들로 하여금 주를 그토록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그날 아무것도 더 물으려 하지 않았고, 자기들끼리 더 의논하려고 물러났다. 그러나 사람들은 유대인 권력자들이 던진 이 물음에 담긴, 정직하지 못하고 불성실한 태도를 헤아리는 데 더디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도 주의 도덕적 당당함과 술수를 쓰는 적들의 위선(僞善)의 차이를 놓칠 수 없었다. 그러나 성전을 깨끗이 치운 일은 예수를 죽이려는 계획을 완성하도록 사두개인들을 바리새인 편으로 몰았다. 그리고 지금 사두개인은 산헤드린의 대다수를 대표했다.

3. 두 아들의 비유

173:3.1 (1893.1) 트집 잡는 바리새인들이 말없이 앞에 서 있는 동안, 예수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희가 요한의 사명에 관하여 의심을 가졌고, 사람의 아들의 가르침과 행적을 적대하여 진을 치고 있으니, 귀를 기울이라, 내가 너희에게 한 비유를 이르리라: 위대하고 존경받는 어떤 지주(地主)에게 두 아들이 있었더니, 큰 토지를 관리하는 데 아들들의 도움을 바라면서, 그가 한 아들에게 와서 일렀더라. ‘아들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오늘 일하라.’ 생각이 모자라는 이 아들은 아버지께 대답하여 말하되, ‘나는 가지 않겠나이다.’ 그러나 나중에 뉘우치고서 갔더라. 아버지가 맏아들을 발견하자, 마찬가지로 그에게 일렀더라. ‘아들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그리고 위선적이고 성실하지 않은 이 아들이 대답하되, ‘예,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였더라. 그러나 아버지가 떠나자, 그는 가지 않았더라. 내가 너희에게 묻건대, 이 두 아들 가운데 누가 정말로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173:3.2 (1893.2)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말했다. “첫 번째 아들이니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가 말했다: “바로 그러하니라. 이제 내가 선언하노니, 세리와 창기들은, 저희가 뉘우치라는 부름을 마다하는 듯하여도, 자기들이 가는 길이 잘못됨을 보고, 계속하여 너희보다 앞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리라. 너희는 아버지의 일을 행하려 하지 않으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섬기는 티를 크게 내느니라. 요한을 믿은 사람은 너희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아니라, 오히려 세리와 죄인이었도다. 너희도 내 가르침을 믿지 않으나 서민들은 내 말을 기쁘게 듣느니라.”

173:3.3 (1893.3) 예수는 개인적으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경멸하지 않았다. 그가 깎아내리려 한 것은 그들의 교육 및 관습 체계였다. 그는 아무에 대해서도 적의를 가지지 않았지만, 여기에 새롭고 살아 있는 영의 종교, 그리고 예식ㆍ전통ㆍ권한에 바탕을 둔 오래 된 종교, 이 둘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173:3.4 (1893.4) 여태까지 열두 사도는 주께 가까이 서 있었지만,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도 일이 이렇게 진행되는 데 끼어들지 않았다. 육체를 입고 예수가 봉사하는 이 마지막 며칠 동안의 사건에 열두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특이한 방법으로 반응하고 있었고, 각자 마찬가지로 이 유월절 주간에 어떤 대중 교육과 전도도 삼가라는 주의 명령에 계속 복종했다.

4. 부재한 지주의 비유

173:4.1 (1893.5) 질문으로 예수를 옭아매려고 했던 우두머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두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더 의논하려고 물러났고, 주는 귀를 기울이는 군중에게 눈길을 돌리면서 또 다른 비유를 말씀했다:

173:4.2 (1893.6) “집 주인이 되는 어떤 좋은 사람이 있었는데, 포도원에 나무를 심었더라. 그가 그 둘레에 울타리를 두르고, 포도즙 짜는 틀을 지으려고 구덩이를 파고, 파수꾼들을 위하여 망대를 지었더라. 그리고 나서 다른 나라로 멀리 길을 떠난 동안, 소작인들에게 이 포도원을 빌려주었더라. 열매가 열리는 계절이 가까워지자, 그는 소작인들에게 임대료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는지라. 그러나 저희는 자기들끼리 의논하고 주인이 받아야 할 소산을 이 종들에게 주려 하지 않았고, 대신에 그 종들에게 달려들어, 하나는 때리고, 하나는 돌로 치고, 나머지 사람들을 빈손으로 보냈더라. 그리고 집주인이 이 모든 것에 관하여 소식을 듣고서, 이 사악한 소작인(小作人)들을 다루라고 다른 더 신임하는 종들을 보냈더니, 저희가 이 종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한 창피하게 다루었더라. 그리고 나서 그 집 주인이 가장 아끼는 종, 그의 집사를 보냈더니, 저희가 그를 죽였는지라. 그래도 참을성과 인내를 가지고, 많은 다른 종을 파송하였는데, 저희는 아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더라. 저희가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였고, 집 주인이 이렇게 대접받고 나서, ‘저희가 내 종들을 푸대접할지 몰라도 나의 사랑하는 아들에게는 분명히 존경심을 보이리라’ 혼잣말을 하며, 은혜를 모르는 이 소작인들을 다루려고 제 아들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더라. 그러나 뉘우치지 않는 사악한 소작인들이 그 아들을 보았을 때, 저희끼리 판단하되, ‘이 사람은 상속자라. 자, 그를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遺産)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였더라. 그래서 저희가 그를 붙잡아서, 포도원에서 쫓아낸 뒤에 그를 죽였더라. 그 포도원의 주인이 저희가 제 아들을 어떻게 물리치고 죽였는가 소식을 들을 때, 은혜를 모르는 이 사악한 소작인들에게 어떻게 하겠느냐?”

173:4.3 (1894.1) 사람들이 이 비유, 그리고 예수가 던진 질문을 들었을 때, 그들은 대답했다: “그가 이 염치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제 철에 과일을 그에게 바칠 농부, 다른 정직한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빌려주리이다.” 그들 중에 이 말을 들은 몇 사람이 이 비유(比喩)가 유대 민족, 그 민족이 선지자들을 대접한 것, 예수와 하늘나라의 복음을 앞으로 거절할 것을 언급함을 알아차렸을 때, 그들은 슬픔에 잠겨 말했다: “우리가 계속 이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막으소서.”

173:4.4 (1894.2) 군중을 헤치고 한 무리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서 예수는 잠깐 멈추었고, 그들이 가까이 오자 말했다: “너희의 조상이 어떻게 선지자들을 거부하였는가 너희가 알며, 사람의 아들을 거절하려고 너희가 마음에 작정했음을 너희가 잘 아느니라.” 그리고 나서, 가까이 서 있는 사제와 장로들을 꿰뚫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예수는 말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 사람들이 발견하고 나서 주춧돌로 만든 돌에 관하여 너희는 성서에서 읽은 적이 없느냐? 그래서 한 번 더 내가 너희에게 경고하노니, 너희가 이 복음을 계속 물리치면, 머지 않아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에게서 빼앗아, 기꺼이 좋은 소식을 받아들이고 영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에게 주리라. 그리고 이 돌에 대하여 신비가 있으니, 누가 그 돌에 떨어지든지 그렇게 조각이 나더라도 구원을 받으리라. 그러나 이 돌이 누구에게 떨어지든지, 그는 가루가 되고, 그 재는 사방으로 흩어지리라.”

173:4.5 (1894.3) 이 말을 듣자,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자기들과 기타 유대 지도자들을 언급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그때 거기서 그를 몹시 붙잡고 싶었지만, 군중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주의 말씀에 아주 성이 나서, 자기들끼리 물러나서 어떻게 그를 죽게 할까 더 의논했다. 그리고 그날 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이튿날 그를 옭아매는 계획을 세우느라고 손을 잡았다.

5. 결혼 잔치의 비유

173:5.1 (1894.4) 서기관과 성전 권력자들이 물러간 뒤에, 예수는 모인 군중에게 다시 연설했고, 결혼 잔치의 비유를 말씀했다. 그는 말했다:

173:5.2 (1894.5) “하늘나라는 아들을 위하여 결혼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 비유해도 좋으니, ‘임금의 궁전에서 결혼 잔치를 위하여 만사가 준비되었도다’ 말하며 잔치에 오라고 앞서 초청한 자들을 찾아보라고 그가 사자들을 보내었더라. 자, 오겠다고 한때 약속했던 많은 사람이 이때에 오려 하지 않았는지라. 초청이 거절당했다는 말을 그 임금이 듣자 다른 종과 사자들을 보내면서 말하였더라, ‘부름 받은 모든 사람에게 오라고 이르라, 보라 내 만찬이 준비되었음이라. 황소와 살찐 송아지들을 잡았고, 내 아들의 임박한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모든 것이 준비되었도다.’ 그러나 생각이 모자라는 자들은 다시 저희 임금의 부름을 가벼이 여겼고, 하나는 농장으로, 하나는 도기 굽는 곳으로, 더러는 상업으로, 저희가 갈 길을 갔는지라. 더러는 이렇게 그 임금의 초청을 가벼이 여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드러내놓고 반항하여 저희가 임금의 사자들을 붙잡아서 모욕을 주었고, 그 중에 몇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더라. 그리고 그가 택한 손님들, 예비 초청을 받아들이고 결혼 잔치에 오겠다고 약속한 자들까지도 그의 초청을 마침내 물리치고, 반항하여 그가 택한 사자들을 공격하고 죽인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몹시 성이 났느니라. 그리고 나서 모욕을 당한 이 임금은 자기 군대와 연합군의 군대를 내보내고, 이 항거하는 살인자들을 죽이고 저희의 도시를 불태우라고 지시하였더라.

173:5.3 (1895.1) “그의 초청에 코웃음치던 자들을 벌하고 나서, 그는 결혼 잔치를 하려고 또 다른 날을 잡아서 사자들에게 말하였더라: ‘처음에 결혼식에 부름받은 자들은 자격이 없도다. 그러니 이제 갈림길로, 큰길로, 도시의 경계를 넘어서도 가라, 그리고 너희가 찾아낼 수 있는 만큼, 이 낯선 자들까지도 와서 이 결혼 잔치에 참석하라고 청하라.’ 그리고 나서 이 종들은 여러 큰길과 외딴 곳으로 갔고, 찾아낼 수 있는 만큼, 선한 자와 악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를 모았고, 그래서 마침내 결혼식장이 기쁘게 온 손님들로 가득 찼더라. 만사가 준비되었을 때, 임금이 손님들을 보려고 나왔더니, 놀랍게도 거기에 결혼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았는지라. 그가 모든 손님에게 결혼 예복을 거저 주었으므로, 임금이 이 사람에게 말하되, ‘친구여, 결혼 예복(禮服)을 입지 않고 이 경사에 내 접대실로 들어오다니 어인 일인고?’ 준비되지 않은 이 사람은 말이 없었더니, 다음에 임금이 종들에게 일렀더라: ‘내 친절을 가벼이 여기고 내 초청을 물리친 모든 다른 사람과 운명을 함께 하도록, 지각없는 이 손님을 내 집에서 쫓아내라. 내 초청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모든 사람에게 거저 마련해 준 손님 예복을 입어, 내게 예를 표하는 자들 외에 아무도 여기에 있게 하지 않으리라.’”

173:5.4 (1895.2) 이 비유를 말씀한 뒤에, 예수는 대중을 막 해산하려 했는데, 그때 공감(共感)하는 어느 신자가 그를 향하여 군중을 헤치고 와서 물었다: “그러나 주여, 우리가 이런 일을 어찌 알리이까? 어떻게 임금의 초청을 위하여 우리가 준비하리이까? 당신이 무슨 표징(標徵)을 우리에게 주시어, 우리가 그것으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리이까?” 이 말을 듣자, 주는 말했다. “오직 한 표징을 너희에게 주리라.” 그리고 나서 자기 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성전을 부수라, 그리하면 사흘 안에 내가 다시 일으키리라.” 그러나 그들은 그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고, 흩어지면서 자기들끼리 말했다. “거의 50년 동안 이 성전을 짓고 있었거늘, 그래도 그가 성전을 헐고 사흘 안에 다시 일으키리라 말하는구나.” 자신의 사도들조차 이 말씀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중에 그가 부활한 뒤에, 그가 하신 말씀을 회상했다.

173:5.5 (1895.3) 이날 오후 4시쯤에, 예수는 사도들에게 손짓하여, 그가 성전을 떠나서 저녁 식사를 하고 하루 밤 쉬려고, 베다니로 가기를 바란다는 뜻을 표시하였다. 올리브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는 안드레ㆍ빌립ㆍ토마스에게 이튿날, 유월절 주간의 나머지 동안 그들이 차지할 수 있는 캠프를 도시에서 더 가까운 곳에 세우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서 이튿날 아침 그들은 겟세마네의 야영 공원을 내려다보는 언덕 옆 골짜기에서, 베다니의 시몬에 속하는 땅뙈기에 텐트를 쳤다.

173:5.6 (1896.1) 이 월요일 밤에, 또다시 말없는 유대인 일행이 올리브산의 서쪽 비탈로 길을 올라갔다. 이 열두 사람은, 전과 달리, 비극적인 무슨 일이 바야흐로 일어나려 하는 것을 비로소 감지(感知)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성전을 눈부시게 깨끗이 치운 것은 주가 자신을 주장하고 막강한 힘을 나타내는 것을 보리라는 희망을 불러일으켰지만, 오후 전체의 사건들이 유대인 당국이 예수의 가르침을 확실히 거부할 것을 가리켰기 때문에, 그 모두가 씁쓸한 실망으로 작용했을 뿐이다. 사도들은 긴장에 휩싸여 있었고, 심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다. 막 지나간 그날의 사건들과 다가오는 파멸의 충격이 오기까지, 짧게 겨우 며칠 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가 엄청난 무슨 일이 바야흐로 일어나리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무엇을 기대할지 몰랐다. 그들은 여러 군데로 쉬러 갔어도 거의 눈을 붙이지 못했다. 알패오 쌍둥이조차 주의 일생의 사건들이 마지막 고비를 향하여 바람 같이 움직이고 있음을 마침내 깨달았다.

제 174 편 화요일 아침 성전에서

유란시아서

제 174 편

화요일 아침 성전에서

174:0.1 (1897.1) 이 화요일 아침 7시쯤에, 예수는 사도들, 여인단, 그리고 스물네 명 남짓한 다른 특출한 제자들을 시몬의 집에서 만났다. 이 모임에서 주는 나사로에게 작별을 알리고 무슨 지시를 주었는데, 이것은 나사로로 하여금 페레아 지역의 필라델피아로 대번에 피신하게 만들었다. 거기서 그는 나중에 그 도시에 본부를 가진 선교 운동과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 예수는 또한 나이 든 시몬에게 작별하고, 여인단을 보내면서 충고의 말씀을 주었고, 다시는 결코 공식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았다.

174:0.2 (1897.2) 이날 아침에 그는 열두 사도 각자에게 친히 인사했다. 안드레에게 말했다: “바로 앞에 다가오는 사건들을 보고 절망하지 말라. 너희 형제들을 꼭 붙들고, 네가 낙심하는 것을 저희에게 보이지 않도록 처리하여라.” 베드로에게 그는 말했다: “육체의 무기나 철로 만든 무기(武器)를 신뢰하지 말라. 영원한 바위로 된 영적 기초 위에 자리를 잡으라.” 야고보에게 말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 때문에 넘어지지 말라. 너의 믿음을 굳게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믿는 것이 현실임을 곧 알게 되리라.” 요한에게 말했다: “부드러운 태도를 가지라. 네 적들조차 사랑하고, 너그럽게 되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겼음을 기억하라.” 나다니엘에게 말했다: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고, 모든 것이 사라지는 듯이 보일 때 너의 믿음을 굳게 지키라. 하늘나라의 대사(大使)로서 네 직책에 충실하라.” 빌립에게 말했다: “이제 다가오는 사건들에 마음이 흔들리지 말라. 네가 갈 길을 볼 수 없을 때에도, 차분히 있으라. 성스럽게 네가 서약한 것에 충성하라.” 마태에게 말했다: “너를 하늘나라로 받아들인 자비를 잊지 말라. 아무도 너를 속여 너의 영원한 보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필사 성품의 성향을 네가 견딘 것 같이, 기꺼이 버티라.” 토마스에게 말했다: “아무리 어려울지언정, 바로 지금, 보는 것을 의지하지 말고 믿음으로 네가 걸어야 하느니라. 내가 시작한 일을 마칠 수 있고, 궁극에 저 건너 나라에서 내가 충실한 대사들을 모두 볼 것을 의심하지 말라.” 알패오 쌍둥이에게 말했다: “너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기가 꺾이지 말라. 가슴 속의 애정에 충실하고, 너희는 위대한 사람도 민중의 변하는 태도도 믿지 말라. 너희 형제들을 지원하라.” 그리고 열심당원 시몬에게 말했다: “시몬아, 너는 실망으로 가슴이 무너지듯 할지 모르지만, 너의 영은 너에게 닥칠 모든 것을 이겨내리라. 네가 나에게 배우지 못한 것을 내 영이 가르치리라. 영의 참다운 현실을 추구하고, 비현실이고 물질인 그림자에 이제 더 유혹받지 말라.” 그리고 가룟 유다에게 말했다: “유다야, 내가 너를 사랑했고, 네가 형제들을 사랑하도록 내가 기도하였노라. 일을 잘 처리하는 데 지치지 말라. 내가 너에게 경고하고자 하니, 미끄러운 아첨의 길과 비웃는 독화살을 조심하라.”

174:0.3 (1897.3) 이 인사를 마치고 나서, 그는 안드레ㆍ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났다. 그동안에 다른 사도들이 겟세마네 캠프를 세우는 일에 착수했고, 거기로 그들은 그날 밤에 가기로 되었는데, 거기서 육체를 입은 주의 여생(餘生) 동안 본부를 만들었다. 올리브산의 비탈을 반쯤 내려가서, 예수는 멈추어서 네 사도와 함께 한 시간이 넘도록 이야기했다.

1. 신의 용서

174:1.1 (1898.1) 며칠 동안 베드로와 야고보는 죄의 용서에 관한 주의 가르침에 대하여 그들의 견해 차이를 논하는 데 들어갔다. 그들은 그 문제를 예수 앞에 펼쳐놓기로 하였고, 베드로는 주의 조언을 얻는 적당한 기회로 이때를 붙잡았다. 따라서 시몬 베드로는 찬송과 예배의 차이를 다루는 대화에 뛰어들어 물었다: “주여, 야고보와 나는 죄의 용서와 상관 되는 당신의 가르침에 대하여 의견이 같지 않나이다.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우리를 용서한다고, 당신이 가르친다 야고보가 주장하며, 나는 뉘우침과 고백이 용서에 앞서야 한다고 주장하나이다. 우리 가운데 누가 맞사옵나이까? 당신은 무어라 말씀하시나이까?”

174:1.2 (1898.2) 잠깐 침묵이 흐른 뒤에, 예수는 네 사람 모두를 의미 있게 바라보고 대답했다: “형제들아, 너희의 의견이 잘못되었으니, 이는 인간과 창조자 사이에,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가깝고도 사랑하는 관계의 성질을 너희가 헤아리지 못하는 까닭이라. 지혜로운 부모가 미숙하고 때때로 잘못하는 아이의 형편을 헤아리는 이해심을 가진 것을 너희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총명하고 애정이 있는 부모가 언제라도 보통이고 정상인 아이를 용서하라고 부탁을 받는가 정말로 의심스러우니라. 사이가 서먹해지면 아이의 뉘우침과 부모의 용서를 나중에 다시 조정하는 것을 필요하게 만들며, 사랑하는 태도와 연결된 이해하는 관계는 그렇게 사이가 서먹해지는 것을 실질적으로 막느니라.

174:1.3 (1898.3) “어떤 아버지도 그 일부가 아이 속에 살며, 부모와 자식 사이에 관련된 모든 문제에서, 아버지는 먼저 있은 자의 권리와 우수한 이해력을 가지느니라. 부모는 더 진보된 어버이의 성숙함, 나이 든 편의 노련한 경험에 비추어 아이의 미숙함을 볼 수 있느니라. 땅에 있는 아이와 하늘 아버지의 경우에, 신성한 어버이는 무한하고 신다운 동정심, 그리고 사랑으로 헤아리는 능력을 소유하시니라. 신의 용서는 필연이요, 하나님이 무한히 이해하는 가운데, 아이의 그릇된 판단과 잘못된 선택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완전히 아는 가운데, 용서는 본래부터 있고 사람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이라. 신의 정의(正義)는 아주 영원히 공평하나니, 헤아림으로 자비 베푸는 것을 어김없이 포함하느니라.

174:1.4 (1898.4) “지혜로운 사람은 동료의 마음 속 충동을 이해할 때 저희를 사랑하리라. 형제를 사랑할 때, 너희는 이미 그를 용서하였느니라. 사람의 성품을 이해하고 사람의 잘못으로 보이는 것을 용서하는 능력은 하나님다운 것이라. 너희가 지혜로운 부모이어든, 이 방법으로 너희가 아이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일시적 오해가 너희를 갈라놓은 듯 보일 때 저희를 용서하기도 하느니라. 아이는 미숙하고, 아버지와 아이 관계의 깊이를 헤아림이 모자라매, 아버지의 충분한 승인을 받지 못하고 죄를 지어 소원해지는 느낌을 자주 느끼지만 참된 아버지는 결코 그러한 거리를 조금도 의식하지 못하느니라. 죄는 사람이 의식하는 체험이요, 하나님의 의식에 조금도 남아 있지 않느니라.

174:1.5 (1898.5) “동료를 용서할 수 없거나 기쁘게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너희의 미숙함, 너희가 어른 수준의 동정심ㆍ이해ㆍ사랑에 이르지 못함을 재는 척도이라. 너희의 자식과 동료 존재들의 마음 속 성품과 참된 소망을 알지 못하는 만큼 그에 비례하여, 너희는 불만을 품고 앙갚음할 생각을 품느니라. 사랑은 생명의 충동, 마음 속에 있는 신다운 충동이 일하여 이루는 것이라. 사랑은 이해심에 기초를 두며, 사심 없는 봉사로 육성되고 지혜 속에서 완전하게 되느니라.”

2. 유대인 권력자들이 던진 질문

174:2.1 (1899.1) 월요일 저녁에 산헤드린, 그리고 서기관ㆍ바리새인ㆍ사두개인들로부터 뽑은 50명쯤 되는 추가된 지도자들 사이에 회의가 열렸다. 예수가 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으므로, 그를 대중 앞에서 체포하는 것은 위험하리라는 것이 이 모임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그를 붙잡아서 재판에 넘기기 전에, 군중이 보는 앞에서 그의 체면을 깎아내리려고 굳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또한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따라서 어려운 질문으로 그를 옭아매는 일에 착수하고, 사람들 앞에서 달리 그에게 창피 주기를 도모하려고 이튿날 아침 성전에서 몇 집단의 학식 있는 사람들이 대기하라고 임명되었다. 마침내, 바리새인ㆍ사두개인, 아니 헤롯 당원들까지 유월절 군중이 보는 앞에서 예수의 체면을 깎아내리려는 이 노력에 모두 뜻을 같이 하였다.

174:2.2 (1899.2) 화요일 아침, 예수가 성전 마당에 도착하고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겨우 몇 마디 말씀하자, 여러 학원으로부터 한 무리의 젊은 학생들이 앞으로 왔다. 이들은 이 목적을 위하여 미리 연습했는데, 그 대변인이 예수에게 말했다: “주여, 우리는 당신이 올바른 선생인 줄 알며, 당신이 진리의 길을 선포하고, 아무 사람을 두려워 아니하므로 오직 하나님을 섬기며,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아나이다. 우리는 학생일 뿐이요,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에 관하여 진실을 알고자 하나이다. 우리의 문제는 이러하나이다: 우리가 세금을 케자에게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우리가 세금을 바쳐야 하리이까, 아니면 바치지 말아야 하리이까?” 예수는 그들의 위선(僞善)과 교활함을 알아차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너희가 이렇게 나를 시험하려고 오느냐? 세금 내는 돈을 내게 보이라. 그리하면 내가 대답하리라.” 그들이 그에게 한 데나리온을 내밀었을 때, 이를 보고서 물었다. “이 은전(銀錢)에 누구의 모습과 새긴 글이 있느냐?” 그리고 “케자의 것이니이다”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는 말했다: “케자의 것은 케자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174:2.3 (1899.3) 그가 이처럼 이 젊은 서기관들과 그 헤롯당의 공모자들에게 대답하고 나자, 그들은 앞에서 물러났고 사람들, 아니 사두개인들까지 그들의 패배를 고소해하였다. 그를 옭아매려고 애썼던 젊은이들까지 주의 대답이 뜻밖에 슬기로움에 크게 감탄하였다.

174:2.4 (1899.4) 전날에 권력자들은 교회 권한의 문제로 군중 앞에서 그를 걸고 넘어지려 했고, 실패하고 나서 이제 국가 권한에 관하여 손해되는 토론에 그를 말려들게 하려 했다. 빌라도와 헤롯은 이때 예루살렘에 있었고, 그가 감히 케자에게 세금 내는 것에 반대하여 조언한다면, 예수의 적들은 당장에 로마 당국 앞으로 가서 그를 선동죄로 고발할 수 있다고 추측했다. 또 한편, 그가 여러 말로 세금 내라고 조언한다면, 그러한 발언이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의 민족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히고, 이렇게 함으로 군중의 호의와 사랑을 잃으리라고 그들은 옳게 계산했다.

174:2.5 (1899.5) 이 모든 일에 예수의 적들이 패배했는데, 이는 “돈을 찍는 권한에는 세금을 부과하는 권한이 따른다”는 것이 이방 국가들 사이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지도하려고 산헤드린이 내린, 잘 알려진 판결이었기 때문이다. 이 방법으로 예수는 그들의 올가미를 피했다. 그들의 물음에 “바치지 말라”는 대답은 반란을 선동하는 것과 같았고, “바치라”는 대답은 그 시절에 뿌리 깊은 민족주의 감정에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주는 그 질문을 피하지 않았고, 다만 이중으로 대답하는 지혜를 이용했을 뿐이다. 예수는 결코 회피하지 않았지만 그를 괴롭히고 죽이려 하는 사람들을 언제나 슬기롭게 다루었다.

3. 사두개인과 부활

174:3.1 (1900.1) 예수가 가르침을 시작할 수 있기 전에, 또 다른 무리가 그에게 질문하러 앞으로 나왔는데, 이번에는 학식 있고 교활한 사두개인 일행이었다. 그들의 대변인이 그에게 다가오면서 말했다: “주여, 결혼한 남자가 아이를 남기지 않고 죽는다면, 그의 아우가 그 아내를 데려가고 죽은 형을 위하여 씨를 길러야 한다고 모세가 일렀나이다. 자, 어떤 사람이 여섯 아우가 있었는데 아이가 없이 죽은 일이 생겼나이다. 첫째 아우가 그의 아내를 데려갔지만 아이가 없이 또한 곧 죽었나이다. 마찬가지로 둘째 아우가 그 아내를 데려갔으나, 그도 또한 자손을 남기지 않고 죽었나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모두 여섯 아우가 그 여자를 데려갔다가 모두 여섯이 아이들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나이다. 그리고 나서, 모두를 따라서, 그 여인도 죽었나이다. 이제, 당신에게 이것을 묻고자 하나이다: 이 일곱 형제 모두가 그 여자를 데려갔으니, 부활하면 그 여인이 뉘 아내가 되리이까?”

174:3.2 (1900.2) 이렇게 물으면서 이 사두개인들이 진지하지 않았음을 예수가 알았고 사람들도 알았으니,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고, 게다가 죽은 남자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자식을 낳아주려 하는 이 관습은 이 시절에 유대인 사이에서 실질적으로 사문(死文)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예수는 그들의 짓궂은 질문에 지체를 낮추어 대답하였다. 그는 말했다: “너희가 성서도, 하나님의 살아 계신 권능도 알지 못하므로, 너희가 다 그렇게 묻는 잘못을 저지르는도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장가들고 시집갈 수 있음을 너희가 알지만, 다가오는 세상에 도달할 자격이 있다고 간주되는 자는 올바른 자의 부활을 통해서,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 것을 너희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도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겪는 자는 하늘의 천사와 더 비슷하니, 저희는 결코 죽지 아니하느니라. 이 부활한 자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 저희는 영생을 얻어 진보하는 길로 부활한, 빛의 아이들이라. 너희 조상(祖上) 모세조차도 이를 알았으니, 떨기나무에서 그가 겪은 체험과 연관하여, 아버지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말씀하심을 들었느니라. 그래서 모세를 따라서 내가 선언하노니, 내 아버지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 하나님 안에서 너희 모두가 살고, 자식을 낳고, 너희의 필사 존재를 가지느니라.”

174:3.3 (1900.3) 예수가 이 질문에 대답을 마치고 나서 사두개인들은 물러났고, 어떤 바리새인들은 까맣게 자기를 잊어버리고 이렇게 외쳤다, “옳소이다, 옳소이다, 주여, 당신은 믿지 않는 이 사두개인들에게 잘도 대답하셨나이다.” 사두개인들은 그에게 아무 질문도 더 하지 않았고, 서민들은 그의 가르침이 지혜로운 데 감탄하였다.

174:3.4 (1900.4) 사두개인들과 대결했을 때 예수는 모세만 언급하였는데, 이 종교 당파는 오직 이른바 모세의 책 다섯 권만 정당하다고 인정했고,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교리의 정설을 위한 근거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대답 중에 주는 부활의 기법으로 필사 인간이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긍정했어도, 어떤 의미에서도 글자 그대로 인간의 몸이 부활한다는 바리새인의 관념을 인정하는 뜻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예수가 강조하고 싶어한 점은 이것이었다: 아버지가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말씀했고, 내가 예전에 그들의 하나님이었다 하지 않은 것이다.

174:3.5 (1900.5) 대중 앞에서 박해하는 것은 아주 확실히 대중의 머리 속에서 더욱 그를 동정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할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사두개인들은 예수를 조롱함으로 움츠러들게 만들려고 생각했다.

4. 큰 계명

174:4.1 (1901.1) 또 다른 무리의 사두개인들이 천사들에 관하여 말려들게 하는 질문을 예수에게 하라고 지시를 받았지만, 부활에 관한 질문으로 그를 덫에 걸리게 만들려고 했던 동료의 운명을 보자, 아주 현명하게 잠자코 있기로 작정했고, 묻지 않고 물러났다. 사람을 말려들게 하는 이 여러 질문으로 하루를 전부 채우고,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예수의 체면을 깎아내리면서 동시에 민심을 어지럽히는 가르침을 선포할 겨를이 없도록 효과적으로 막으려는 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 사두개인과 헤롯당원들이 한데 뭉쳐 미리 주선한 계획이었다.

174:4.2 (1901.2) 그리고 나서 바리새인 무리 가운데 하나가 성가신 질문을 하려고 앞으로 나왔는데, 그 대변인은 예수에게 신호를 주면서 말했다: “주여, 나는 율법사요, 당신의 의견에 무엇이 가장 큰 계명(誡命)인가 당신께 묻고자 하나이다.” 예수가 대답했다: “오직 한 계명이 있나니, 이것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이요, 그 계명은 이러하니라: ‘아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의 하나님, 주는 한 분이요, 너희는 마음을 다하여, 혼을 다하여, 정신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할지니라.’ 이것이 첫째이자 큰 계명이라. 그리고 둘째 계명은 이 첫째와 같고, 정말로 거기서 바로 솟아나오니, 이것이라: ‘너희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할지니라.’ 이것들보다 더 큰 다른 계명이 없느니라.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이 두 계명에 매달리느니라.”

174:4.3 (1901.3) 예수가 유대교의 가장 높은 개념과 일치하는 대답을 했을 뿐 아니라, 또한 모인 군중이 보는 앞에서 지혜롭게 대답했음을 알아차렸을 때, 그 율법사는 주의 대답을 드러내놓고 칭찬하는 것이 훌륭한 용기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말했다: “주여, 진리에 관하여, 하나님이 한 분이요, 그 외에 아무도 없으며, 마음과 이해와 힘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첫째이며 큰 계명이라고 말씀을 잘 하셨나이다. 그리고 이 큰 계명을 모든 태운 제물과 희생물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리라 우리는 찬성하나이다.” 그 율법사가 이렇게 신중하게 대답했을 때, 예수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친구여, 보아하니,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않도다.”

174:4.4 (1901.4) 이 율법사가 “나라에서 멀리 않도다”하고 언급했을 때 예수는 진실을 말했는데, 바로 그날 밤에 그는 겟세마네 가까이 주의 캠프로 가서,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하였고, 아브너의 제자들 중 하나인 요시아에게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174:4.5 (1901.5) 다른 두세 집단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리에 있었고 질문할 생각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 율법사에게 예수가 대답한 것에 마음이 풀어졌거나 아니면 그를 덫에 걸리게 만들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의 패배를 보고서 단념하였다. 이 뒤에 아무도 대중 앞에서 그에게 감히 또 다른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174:4.6 (1901.6) 아무런 질문이 더 나오지 않았을 때, 그리고 정오(正午)가 가까웠기 때문에, 예수는 가르침을 다시 시작하지 않고 바리새인과 그 동료들에게 한 마디 묻는 것으로 만족했다. 예수는 말했다: “너희가 아무 질문도 더 하지 않으니, 너희에게 하나 묻고자 하노라. 너희는 구원자를 어찌 생각하느냐? 다시 말해서 그는 누구의 아들이냐?” 잠깐 멈춘 뒤에, 서기관들 가운데 하나가 대답하였다. “메시아는 다윗의 아들이니이다.” 그리고 자기 제자들 사이에서도, 그가 다윗의 아들인가 아닌가, 많은 논쟁이 있은 줄 알았기 때문에, 예수는 이어서 이렇게 물었다: “구원자가 정말로 다윗의 아들이라면, 너희가 다윗이 지었다고 인정하는 시편(詩篇)에, 어찌하여 바로 다윗이 영으로 ‘주가 내 주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의 적들을 네 발판으로 만들 때까지 내 바른 편에 앉으라’ 말하였느냐. 다윗이 그를 주라고 부른다면, 어찌 그가 다윗의 아들일 수 있느냐?” 권력자ㆍ서기관ㆍ주사제들이 이 물음에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어도, 그들은 마찬가지로 그를 옭아매려는 노력으로 더 질문하기를 삼갔다. 그들은 예수가 그들에게 던진 물음에 결코 대답하지 않았지만, 주가 돌아가신 뒤에, 그것이 메시아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언급하도록 이 시편의 해석을 바꾸어 그 곤경을 피하려고 했다. 더러는 다윗이 이른바 이 메시아 시편의 저자라는 것을 부인하여 그 곤경(困境)을 벗어나려 했다.

174:4.7 (1902.1) 얼마 전에 바리새인들은 주가 사두개인들의 입을 다물게 했던 그 형편을 고소해하였고 이제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이 패배한 것을 기뻐하였지만, 그런 경쟁심은 잠시였을 뿐이다. 그들은 예수가 가르치고 행하는 것을 못하게 만들려는 통일된 노력으로 그들이 오랫동안 지녀왔던 견해 차이를 재빨리 잊어버렸다. 그러나 이 모든 체험을 통해서 내내, 서민들은 예수의 말씀을 즐겁게 들었다.

5. 수소문하는 그리스인들

174:5.1 (1902.2) 정오 무렵에, 빌립이 그날 겟세마네 가까이에 세워지고 있는 새 캠프에서 쓸 소모품을 사는 동안, 낯선 사람들, 알렉산드리아ㆍ아테네ㆍ로마에서 온 그리스인 신자들의 무리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고, 이들의 대변인은 그 사도에게 말했다: “당신을 아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당신이 어디 있는가 가리켜 주었나이다. 그래서 선생이여, 당신에게 우리는 당신의 주, 예수를 만날 요청을 드리나이다.” 수소문하는 이 탁월한 이방 그리스인들을 이렇게 시장에서 만나서 그는 움찔 놀랐고, 유월절 주간에 대중을 가르치는 어떤 일에도 말려들지 말라고 예수가 열두 사도 모두에게 아주 분명히 부탁했기 때문에, 그는 이 문제를 어찌 다루어야 좋을까 조금 당황했다. 이 사람들이 외국에서 온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또한 마음이 산란했다. 그들이 유대인이나 근처의 익숙한 이방인이었다면, 그렇게 눈에 띄게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했다: 이 그리스인들에게 바로 그 자리에 남아 있으라고 부탁했다. 그가 서둘러 떠나자, 그들은 그가 예수를 찾으러 갔다고 상상했지만, 실제로 요셉의 집으로 황급히 갔고, 그는 거기에 안드레와 다른 사도들이 점심을 먹고 있음을 알았다. 안드레를 불러내서 그가 온 목적을 설명했고, 다음에 안드레를 데리고, 그는 기다리던 그리스인들에게 돌아갔다.

174:5.2 (1902.3) 빌립이 소모품 사는 일을 거의 마쳤기 때문에, 그와 안드레는 그리스인들과 함께 요셉의 집으로 돌아갔고, 거기서 예수는 그들을 응접하였다. 이 점심 식사에 모인 사도들과 한 무리의 주요 제자들에게 그가 말씀하는 동안, 그들은 가까이 앉아 있었다. 예수가 말했다:

174:5.3 (1902.4) “내 아버지가 그의 자애심을 사람의 아이들에게 드러내라고 이 세상으로 나를 보내셨거늘 내가 먼저 찾아간 자들은 나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였도다. 정말로,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이 내 복음을 스스로 믿은 것이 참말이나, 아브라함의 자손과 저희의 지도자들은 나를 물리치려 하고, 그렇게 함으로 나를 보내신 이를 물리치느니라. 나는 구원의 복음을 이 민족에게 아낌없이 선포하였고, 영적으로 기쁨과 해방과 생명을 더욱 풍부하게 가지는 아들 신분에 대하여 저희에게 일렀느니라. 두려움에 빠진, 이 사람의 아들들 사이에서 내 아버지는 놀라운 일을 많이 하셨느니라. 그러나 ‘주여, 누가 우리의 가르침을 믿었나이까? 그리고 주가 누구에게 드러나셨나이까?’하고 적었을 때 선지자 이사야는 참으로 이 민족을 두고 말하였느니라. 참으로 내 민족의 지도자들은 보지 못하도록 일부러 저희 눈을 가렸고, 믿고 구원을 받을까 저어하여 저희 마음을 굳게 다졌느니라. 이 여러 해 동안 저희가 아버지의 영원한 구원을 받는 자가 될까 하여 나는 저희의 불신을 고치고자 하였노라. 모두가 나를 저버리지는 않은 줄 내가 알고, 너희 중에 더러는 정말로 내가 전하는 말을 믿었느니라. 한때 산헤드린의 회원이었거나 나라의 회의에서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이 방에 지금 꼭 스무 명 있도다. 하지만 너희 가운데 더러도 회당에서 쫓겨날까 저어하여 아직도 진실을 드러내놓고 고백하지 못하고 움츠러드느니라. 너희 가운데 더러는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는 유혹을 받는도다.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내 가까이 있었고, 내 옆에서 아주 가까이 살던 자들 가운데 몇 사람까지 그 안전과 충성이 걱정되므로, 내가 용서할 수밖에 없노라.

174:5.4 (1903.1) “보아하니, 이 연회실에 거의 같은 수의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였는데,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전에, 내가 하늘나라의 일을 가르치도록 그러한 집단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너희에게 말하고자 하노라.”

174:5.5 (1903.2) 이 그리스인들은 성전에서 예수가 가르칠 때 충실히 참석하고 있었다. 지난 월요일 저녁에 그들은 니고데모의 집에서 회의를 열었는데, 회의는 날이 새기까지 계속되었고, 그들 가운데 서른 명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174:5.6 (1903.3) 이때 그들 앞에 서 있는 동안, 예수는 한 섭리 시대가 끝나고 다른 섭리 시대가 비롯되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인들을 주목하면서, 주는 말했다:

174:5.7 (1903.4) “이 복음을 믿는 자는, 나 뿐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느니라. 나를 바라볼 때, 너희는 사람의 아들 뿐 아니라 또한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느니라. 나는 세상의 빛이요, 내 가르침을 믿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이제 더 어둠 속에서 거하지 않으리라. 너희 이방인들이 내 말을 들으면,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받고, 즐거운 해방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진리를, 당장에 얻으리라. 내 동포 유대인들이 나를 버리고 내 가르침을 물리치기를 택하면 나는 저희를 판단하지 않으리니, 이는 내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 구원을 내밀려고 왔음이라. 그런데도 나를 거부하고 내 가르침 받기를 거절하는 자는 때가 되면, 내 아버지에게, 그리고 자비의 선물과 구원의 진리를 물리친 것을 심판하라고 그가 임명한 자들의 심판을 받을지니라. 너희는 모두 기억하라,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사람의 아이들에게 드러내라고 아버지가 명령하신 것을 너희에게 충실하게 선언하였노라. 아버지가 세상에 주라고 지시하신 이 말씀은 신성한 진리, 영구한 자비,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라.

174:5.8 (1903.5)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선언하노니, 사람의 아들이 영화로움을 받을 때가 거의 다가왔도다. 밀 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것이 혼자 있음을 너희가 잘 알거니와, 그 밀 알이 좋은 땅에서 죽으면 다시 생명으로 솟아나서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기심으로 제 목숨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위험이 있으나 나와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기꺼이 버리는 자는 땅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더욱 풍부한 존재, 영원한 생명을 누리리라.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간 뒤에도 너희가 참으로 나를 따르고자 하면, 너희는 내 제자가 되고 필사 동료들에게 성실한 종이 될지니라.

174:5.9 (1903.6) “내 때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내가 알고, 마음이 답답하니라. 내 민족은 하늘나라를 걷어차기로 뜻이 굳은 줄 깨닫지만 빛의 길을 찾아 물으며 오늘 여기 온, 진리를 찾는 이 이방인(異邦人)들을 받아서 내가 기쁘도다. 그런데도, 내 민족을 위하여 내 가슴이 에이는 듯 아프고, 바로 앞에 닥친 것으로 인하여 내 혼이 괴로우니라. 내가 앞을 내다보고, 내게 막 쏟아지려 하는 것을 헤아리면서 무엇을 이르리오? 아버지가 이 끔찍한 때에 나를 구해달라고 말하리오? 아니라! 바로 이 목적으로 내가 세상으로, 아니 이 시간까지도 왔노라.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너희가 나와 함께 하기를 기도하리라: 아버지여,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174:5.10 (1904.1) 예수가 이렇게 말씀을 마치자, 세례받기 전 시절에 그에게 깃들던, 인격화된 조절자가 그 앞에 나타났고, 예수가 확실히 멈추자, 아버지를 대표하는, 이제는 막강한 이 영이 나사렛 예수에게 말했다: “너의 수여 생애에서 여러 번 나는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였고, 한 번 더 내가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리라.”

174:5.11 (1904.2) 여기 모인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아무 목소리도 못 들었지만, 어떤 초인간 근원으로부터 그에게 전하는 말씀이 오는 동안에 주가 말씀을 멈춘 것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각자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구나.”

174:5.12 (1904.3) 그리고 나서 예수는 말씀을 이었다: “이 모두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일어났느니라. 아버지가 나를 받아들이고 너희를 위하여 내 사명을 받아들일 줄 내가 확실히 알지만, 너희가 격려를 받고, 바로 앞에 놓인 불 같은 시련을 위하여 준비가 필요하니라. 너희에게 보장하노니, 세상을 깨우치고 인류를 해방하려는 우리의 뭉친 노력은 궁극에 승리로 보답을 얻으리라. 옛 체제는 재판을 받으러 다가오며, 내가 이 세상의 임금을 내던졌노라. 내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로 올라간 뒤에, 내가 모든 육체에 퍼부을 영의 빛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되리라.

174:5.13 (1904.4) “그리고 이제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내가 땅에서, 너희의 생활에서 높이 올려지면, 내가 모든 사람을 내게로, 내 아버지와 친교하도록 끌어당기리라. 구원자가 언제까지나 땅에서 거하리라고 너희가 믿어 왔으나, 내가 선언하노니, 사람의 아들이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 잠시만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고, 잠시만 살아 있는 빛이 이 어두운 세대 사이에 있으리라. 다가오는 어둠과 혼란이 너희를 따라잡기 전에, 이 빛이 있는 동안 너희가 걸으라. 어둠 속에서 걷는 자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빛 속에서 걷기를 택하면, 너희는 모두 정말로 하나님의 해방된 아들이 될지니라. 우리가 성전으로 돌아가서 주사제와 서기관, 바리새인ㆍ사두개인ㆍ헤롯당원, 그리고 이스라엘의 미개한 권력자들에게 작별의 말을 하리니, 이제 너희는 다 나를 따라오라.”

174:5.14 (1904.5) 이렇게 말하고 나서, 예수는 예루살렘의 좁은 거리를 지나 성전으로 돌아가는 길을 인도하였다. 이것이 성전에서 작별 강연이 되리라고 주가 말씀하는 것을 방금 들었고, 그들은 말없이 깊이 생각에 잠겨 그를 따라갔다.

제 175 편 마지막 성전 강연

유란시아서

제 175 편

마지막 성전 강연

175:0.1 (1905.1) 이 화요일에 오후 2시가 조금 지나서, 예수는 열한 사도, 아리마대 요셉, 그리스인 30명, 그리고 어떤 다른 제자들을 데리고 성전에 도착했고, 신성한 건물의 마당 안에서 마지막 연설을 시작했다. 이 강연은 유대 민족에 대한 그의 마지막 호소요, 맹렬히 반대하는 적과 그를 죽이려 하는 자―서기관ㆍ바리새인ㆍ사두개인, 그리고 이스라엘의 으뜸 권력자―들을 마지막으로 고발하는 말씀이 되도록 의도한 것이다. 아침 나절 내내, 여러 집단이 예수에게 질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날 오후에는 아무도 그에게 묻지 않았다.

175:0.2 (1905.2) 주가 말씀을 시작하자, 성전 마당은 조용하고 질서가 있었다. 환전상과 상인들은 예수와 흥분한 군중이 그 전날 그들을 몰아냈기 때문에, 감히 다시 성전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다.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예수는 부드러운 눈길로 이 청중을 내려다보았는데, 이들은 거짓 선생과 유대인의 편협한 권력자들에 대한 그의 마지막 비난과 아울러, 인류에게 작별을 알리는 대중 연설, 자비의 연설을 곧 들을 것이었다.

1. 강연

175:1.1 (1905.3) “아버지가 사람의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선포하면서, 땅에서 여기저기 다니며 이렇게 오랫동안 나는 너희와 함께 있었고, 많은 사람이 빛을 보고서,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갔느니라. 이 가르침과 전도와 연관하여, 아버지는 많은 놀라운 일을 하셨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기까지 하였도다. 허다한 아픈 자와 병자들이 믿었기 때문에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그러나 이 모든 진리의 선포와 병의 치유는 빛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자, 이 하늘나라 복음을 거부하기로 작정한 자들의 눈을 뜨게 하지 못하였도다.

175:1.2 (1905.4)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과 일치되는 모든 방법으로, 나와 내 사도들은 우리 동포와 평화롭게 살려고, 모세의 율법과 이스라엘의 전통이 요구하는 온당한 조건을 따르려고 최선을 다하였느니라. 우리는 끈질기게 평화를 찾았어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평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느니라. 하나님의 진리와 하늘의 빛을 물리침으로 저희는 잘못과 어두움의 편을 드느니라. 빛과 어두움 사이, 삶과 죽음 사이, 진리와 잘못 사이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도다.

175:1.3 (1905.5) “너희 가운데 여럿이 감히 내 가르침을 믿었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의식하는 기쁨과 해방을 이미 얻었느니라. 그리고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격을 온 유대 민족에게, 아니 이제 나의 파멸을 추구하는 바로 이 사람들에게도 내밀었음을 너희가 증언하리라. 지금도 내 아버지는 이 눈먼 선생과 이 위선하는 지도자들이 그에게 호소하고 자비를 받고자 한다면, 저희를 받아들이려 하시느니라. 이 민족이 하늘의 말씀을 받고 사람의 아들을 환영하는 것이 지금도 너무 늦지 아니하니라.

175:1.4 (1906.1) “내 아버지는 오랫동안 이 민족을 자비롭게 대하셨느니라. 대대로 우리는 저희를 가르치고 경고하라고 선지자들을 보내었거늘, 대대로 저희는 하늘이 보낸 이 선생들을 죽였느니라. 그리고 이제 외고집인 너희의 높은 사제(司祭)와 완고한 권력자들이 바로 이 일을 계속 하느니라. 헤롯이 요한을 죽게 만든 것처럼, 마찬가지로 너희는 이제 사람의 아들을 죽이려고 준비하는도다.

175:1.5 (1906.2) “유대인들이 내 아버지께 호소하고 구원을 추구할 기회가 있는 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너희를 향하여 자비의 손을 뻗은 채로 계시리라. 그러나 너희가 회개하지 않는 잔을 일단 채웠을 때, 그리고 한 번 너희가 마침내 내 아버지의 자비를 물리치고 나서, 이 나라는 스스로 의논하도록 버려지겠고 급속히 치욕스러운 종말에 이르리라. 이 민족은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나님을 아는 종족의 영적 영광을 보여주라고 부름받았거늘, 너희는 신성한 특권을 실현하는 것과 너무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느니라. 그래서 너희 지도자들이 온 인류에게, 어느 시대에도 주는 하나님의 선물―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계시―를 마침내 물리칠 지경에 있으므로, 저희는 만세에 걸쳐 최대의 어리석은 짓을 바야흐로 저지르려 하는도다.

175:1.6 (1906.3)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리 계시하는 것을 일단 물리치고 나서, 하늘나라는 다른 민족들에게, 계시를 기뻐하고 즐거이 받을 사람들에게 주리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엄숙히 너희에게 경고하노니, 영원한 진리의 기수(旗手)이자 신의 율법을 맡은 자로서, 너희는 세상에서 너희의 자리를 바야흐로 잃으려 하느니라. 앞으로 나와서 뉘우치고, 너희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고, 어린아이처럼, 그리고 성실한 믿음으로, 하늘나라의 안전과 구원을 얻으려는 뜻을 알릴 마지막 기회를 내가 바로 지금 너희에게 내밀고 있노라.

175:1.7 (1906.4) “내 아버지는 너희를 구원하려고 오랫동안 일하셨고, 너희 사이에 살고 몸소 너희에게 길을 보이려고 내가 내려왔노라. 많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아니 이방인까지도 하늘나라 복음을 믿었으되, 먼저 앞으로 나서서 하늘의 빛을 받아야 할 자들은 하나님의 진리가 계시되는 것을―하나님이 사람 속에 드러나고 사람이 하나님께로 들어올려진 것을―완고하게 믿기를 거절해 왔느니라.

175:1.8 (1906.5) “오늘 오후에는 내 사도들이 여기 너희 앞에 말없이 서 있으나, 구원을 받으라 부르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나라와 연합하라 재촉하는 사도들의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너희가 곧 들으리라. 그리고 내가 한 번 더 이스라엘과 그 권력자들에게 구출과 구원을 내밀었다는 것을 증언하라고, 이들, 내 제자와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자, 그리고 저희 옆에 보이지 않는 사자(使者)들을 내가 이제 부르노라. 그러나 저희가 어떻게 아버지의 자비를 소홀히 하고, 어떻게 진리의 사자들을 물리치는가 너희 모두가 보느니라. 그런데도 내가 너희에게 타이르노니,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아직도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으며, 따라서 사람의 나라에서 다스리는 최고자들이 마침내 이 나라를 뒤집어엎고 이 권력자들의 자리를 파괴할 때까지, 너희가 이스라엘에서 이 장로들과 협조하라고 내가 명하노라.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죽이려는 저희의 계획에 함께 단결하라고 요구되지는 않으나 이스라엘의 평화와 관계된 모든 일에 너희는 저희에게 복종해야 하느니라. 이 모든 일에 저희가 너희에게 무엇을 명하든지 행하고 율법의 기본을 지키되, 저희의 악한 일을 본따지 말라. 이것이 이 권력자들의 죄임을 기억하라: 저희는 좋은 것을 말해도 행하지는 않느니라. 이 지도자들이 무거운 짐, 지기에 괴로운 짐을 너희 어깨에 얹으며, 너희가 이 무거운 짐 지는 것을 도우려고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고자 하지 않음을 너희가 잘 아는도다. 저희는 너희를 예식으로 억압하였고, 전통으로 너희를 종으로 만들었도다.

175:1.9 (1907.1) “그 위에, 자기 중심인 이 권력자들은 사람들 눈에 보이도록 좋은 일 하기를 기뻐하느니라. 저희는 성구함(聖句函)을 넓히고 공식 예복의 테두리를 크게 만드느니라. 저희는 잔치에서 상석에 앉기를 몹시 좋아하고 회당에서 중요한 자리를 요구하며, 시장에서 칭찬하는 인사 듣기를 탐내고 모든 사람이 저희를 랍비라 부르기를 원하느니라. 사람들로부터 이 온갖 존경을 받으려고 하면서, 저희는 몰래 과부의 집들을 붙잡고, 신성한 성전의 예배로부터 이득을 챙기느니라. 이 위선자들은 대중 앞에서 겉치레로 길게 기도하고 동료들의 눈을 끌려고 자선금을 내는도다.

175:1.10 (1907.2) “너희의 권력자들을 공경하고 너희의 선생들을 존경해야 하되, 너희는 어떤 사람도 영적 의미에서 아버지라 부르지 말지니, 너희의 아버지인 분, 아니 하나님이 계심이라. 하늘나라에서 너희는 동포를 부리려 해도 안 되느니라.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크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너희를 가르쳤음을 기억하라. 주제넘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높이면 너희가 분명히 낮아지려니와, 참으로 자기를 낮추는 자는 누구나 분명히 높임을 받으리라. 날마다 너희 생활에서, 자기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라. 총명하게 너희의 뜻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키라.

175:1.11 (1907.3)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지금도 나를 죽이기를 구하는 이 주사제와 권력자들에게 나는 아무런 적의(敵意)를 품지 아니하고, 내 가르침을 거절하는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아무런 악의를 품지 않노라.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이 몰래 믿음을 내가 알고, 내 때가 올 때 하늘나라에 충성함을 너희가 드러내놓고 고백할 줄을 아노라. 그러나 너희의 랍비들이 하나님과 이야기한다고 공언하면서, 아버지를 세상에 드러내려고 오는 자를 주제넘게 물리치고 죽이려 하거늘, 어찌 저희가 자신을 정당화하리오?

175:1.12 (1907.4) “너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위선자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성실한 사람들이 어쩌다 너희가 가르치는 길에서 학문을 배우지 않았다고 하여 너희는 저희에게 하늘나라의 문을 닫으려 하는도다.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않으려 하면서 동시에 모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으려고 있는 힘을 다하는구나. 너희는 구원의 문 앞에 등지고 서서, 안으로 들어가려는 모든 사람과 싸우는도다.

175:1.13 (1907.5)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너희는 위선자로다! 개종한 사람 하나를 얻으려고 정말로 땅과 바다를 둘러싸면서, 성공하고 나서 그가 이방인의 자식으로 있던 형편보다 두 배나 나빠지게 만들 때까지 너희가 만족하지 않음이라.”

175:1.14 (1907.6) “너희 주사제와 권력자들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너희는 가난한 자의 재산을 붙잡고, 하나님을 섬기려는 자에게 모세가 예정했다고 생각하는 무거운 세금을 요구하는도다. 자비를 베풀려 하지 않으면서 너희가 다가오는 세상에서 자비를 바랄 수 있느뇨?

175:1.15 (1907.7) “너희의 거짓 선생, 눈먼 안내자들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소경이 소경을 이끌 때 한 나라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느냐? 저희 둘이 파멸의 구덩이로 빠지리라.

175:1.16 (1907.8) “서약할 때 모른 체하는 너희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성전으로 서약하면 그 서약을 깨도 좋거니와 성전에 있는 금(金)으로 서약하는 자는 누구나 묶인 채로 남아야 한다고 가르치니 너희는 사기꾼이라. 너희는 모두 바보요 소경이라. 정직하지 못하면서 너희는 일관성도 없으니, 왜냐하면 금과 그 금을 성스럽게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성전, 이 둘 사이에 어느 것이 더 크냐? 사람이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것도 아니라 하되, 사람이 제단에 놓여 있는 헌물로 맹세하면 그를 빚진 자로 붙잡을지라 너희가 또한 가르치는구나. 다시 너희는 눈이 멀어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니, 헌물과 그 헌물을 성스럽게 만든 제단, 이 둘 사이에 어느 것이 더 크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너희가 어찌 그런 위선과 속임을 정당화할 수 있느뇨?

175:1.17 (1908.1) “너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박하ㆍ아니스ㆍ쿠민을 십일조로 드리면서, 율법에서 더 무거운 문제를―믿음과 자비와 심판을―무시하는 모든 다른 위선자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한, 너희는 하나를 해야 하고 다른 하나를 하지 않은 채로 두어서는 안 되느니라. 너희는 참으로 눈먼 안내자요, 벙어리 선생이라.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175:1.18 (1908.2) “너희 서기관ㆍ바리새인ㆍ위선자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왜냐하면 너희는 잔과 큰 접시의 겉을 빈틈없이 깨끗이 하되, 속에는 강제로 빼앗고 낭비하고 속이는 더러움이 남아 있음이라. 너희는 영적으로 눈이 멀었구나.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는 것이 얼마나 더 좋은가 깨닫지 못하느냐? 그리하면 다음에 넘치는 것이 저절로 겉을 깨끗이 하리라. 버림받은 너희 사악한 자들아! 너희의 혼은 불의(不義)에 깊이 젖어 있고 살인으로 가득하면서, 모세의 율법을 너희가 풀이하여 글자대로 따르려고 너희의 종교를 겉으로 연출하느니라.

175:1.19 (1908.3) “진리를 물리치고 자비를 걷어차는 너희 모두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이 흰 칠한 무덤과 같으니, 겉으로 아름답게 보이나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움이 가득하니라. 과연 그러하니, 하나님의 충고를 알면서 물리치는 너희가 겉으로 사람들에게 거룩하고 올바르게 보이되, 속으로 너희 마음은 위선과 불의로 가득하니라.

175:1.20 (1908.4) “민족의 거짓 안내자, 너희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너희는 옛날에 순교한 선지자들에게 저 건너 기념비를 세웠고 한편 저희가 언급한 자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도다. 너희는 올바른 자의 무덤을 꾸미고 너희가 조상 시절에 살았던들 그 선지자들을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 자신을 칭찬하는구나. 그리고 나서 그렇게 스스로를 옳게 생각하는 가운데 너희는 그 선지자들이 언급한 자, 사람의 아들을 죽이려고 준비하는구나. 이런 일을 하는 까닭에, 너희는 선지자들을 죽인 자의 사악한 아들임을 자신에게 증언하느니라. 그러면 가서 너희 비난의 잔을 가득 채우라!

175:1.21 (1908.5) “악의 자손들아, 너희에게 한탄이 있을진저! 요한은 참으로 너희를 독사의 자식이라 불렀고, 내가 묻노니 요한이 너희에게 내린 심판을 너희가 어찌 피할 수 있느냐?

175:1.22 (1908.6) “그러나 지금도 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자비와 용서를 내밀며, 지금도 영원히 친교하는 사랑의 손을 내미노라. 내 아버지는 너희에게 지혜로운 사람과 선지자들을 보내셨더니, 너희가 더러는 박해하고 더러는 죽였느니라. 그리고 나서 요한이 나타나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을 선포하였고, 많은 사람이 그의 가르침을 믿은 뒤에 너희가 그를 죽였도다. 이제 너희는 무죄한 피를 더 흘리려고 준비하느니라. 끔직한 청산의 날이 올 것을 너희는 깨닫지 못하느냐? 그날에 온 땅의 재판관이 이 민족에게 저희가 어떻게 이 하늘 사자들을 물리치고 박해하고 죽였는가 설명하라 요구하리라. 죽음을 당한 첫 선지자로부터 성소(聖所)와 제단 사이에서 죽음을 당한 스가랴의 시절까지, 이 올바른 피를 다 책임져야 하는 것을 너희는 이해하지 못하느냐? 너희가 악한 길을 계속 가면, 바로 이 세대에게 이 책임을 지라 요구될까 하니라.

175:1.23 (1908.7) “아 예루살렘과 아브라함의 자손이여, 너희에게 보낸 선지자들을 너희는 돌로 치고 선생들을 죽였도다. 암탉이 날개 밑에 병아리를 모으듯 지금도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하거늘, 너희는 모이려 하지 않는구나!

175:1.24 (1908.8) “이제 내가 너희를 떠나노라. 너희는 내가 전하는 말을 들었고 너희는 결심하였도다. 내 복음을 믿은 자들은 이제도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안전하니라. 하나님의 선물을 물리치기로 작정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내가 성전에서 가르침을 이제 더 구경하지 못하리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할 일은 끝났느니라. 보라, 나는 이제 내 아이들과 함께 가고, 너희 집은 황폐한 채로 너희에게 맡겨졌나니라!”

175:1.25 (1908.9) 그리고 나서 주는 추종자들에게 성전을 떠나라고 손짓했다.

2. 개별 유대인의 지위

175:2.1 (1909.1) 유대 민족의 영적 지도자와 종교 선생들이 한때 예수의 가르침을 물리치고 그가 지독한 죽음을 당하도록 공모(共謀)했다는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개별 유대인의 지위에, 어떤 면에서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 사실 때문에 그리스도의 추종자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동료 필사 유대인을 적대하는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한 민족으로서, 하나의 사회 정치 집단으로서, 유대인들은 평화의 왕을 물리친 끔찍한 값을 충분히 치렀다. 그들은 인류의 여러 종족에게 신성한 진리를 전하는, 영적 횃불을 쥔 자가 되기를 그만둔 지 오래지만, 이것은 이 옛적 유대인들의 후손 하나하나가, 나사렛 예수를 따른다고 공언하는, 참을성 없고 자격 없고 편협한 사람들의 박해를 받아야 할 타당한 이유는 되지 않으며, 바로 예수는 출생으로 따지면 유대인이었다.

175:2.2 (1909.2) 이처럼 불합리하고 그리스도답지 않게 현대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한 것은 죄 없고 예의 바른 어떤 개별 유대인의 고통과 죽음을 초래한 일이 많았는데, 그들의 바로 그 조상은 예수의 시절에 진심으로 그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얼마 있다가 마음을 다하여 믿었던 그 진리를 위하여 물러서지 않고 죽었다. 예수를 따른다고 공언(公言)하는 사람들이, 하늘나라 복음의 첫 순교자로서 그렇게 영화롭게 목숨을 바친 베드로ㆍ빌립ㆍ마태, 그리고 기타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후일의 자손을 박해하고 괴롭히고, 아니 죽이는 데 탐닉하는 것을 볼 때, 구경하는 하늘 존재들은 얼마나 무섭게 몸서리를 치는가!

175:2.3 (1909.3) 죄 없는 아이들이 선조의 죄, 그들이 도무지 알지 못하고 어떤 면에서도 도저히 책임질 수 없는 그릇된 행위 때문에 고통받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얼마나 잔인하고 불합리한가! 그리고 적조차 사랑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친 이의 이름으로 그러한 사악한 일을 하다니! 예수의 일생에 관한 이 이야기에, 어떤 동료 유대인들이 어떤 방법으로 그를 물리치고 수치스럽게 죽게 만들려고 공모했는가 묘사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읽는 모든 사람에게 우리가 경고하려고 하니, 그러한 역사적 이야기의 발표는 어떤 면에서도, 부당한 미움을 정당화하지 않고 정신의 불공평한 태도를 묵인하지도 않는데, 기독교인이라고 공언한 아주 많은 사람이 여러 세기 동안 개별 유대인에게 그런 미움과 태도를 지녀 왔다. 하늘나라를 믿는 사람,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개별 유대인을 예수를 물리치고 십자가에 못박은 죄를 저지른 자로 잘못 대우하기를 그쳐야 한다. 아버지와 그의 창조 아들은 유대인을 그치지 않고 사랑해 왔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요, 구원은 이방인 뿐 아니라 유대인도 위한 것이다.

3. 운명의 산헤드린 회의

175:3.1 (1909.4) 이 화요일 저녁 8시에 운명의 산헤드린 회의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이전에 여러 번 유대 민족의 이 최고 법정은 비공식으로 예수의 죽음을 선포했다. 여러 번 이 존엄한 통치 단체는 그의 일을 멈추게 하기로 결의했지만, 전에는 한 번도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그를 체포하고 죽게 만들려고 결의한 적이 없었다. 그때 구성된 대로 산헤드린이 예수와 나사로 모두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기로 공식으로, 만장 일치로 투표한 것은 서기 30년 4월 4일, 이 화요일에 자정이 되기 바로 전이었다. 이것은 성전에서 겨우 몇 시간 전에 유대인 권력자들에게 주가 마지막으로 호소한 데 대한 대답이었고, 바로 이 주사제들과 뉘우치지 않는 사두개인ㆍ바리새인들을 예수가 마지막으로 힘차게 고발한 데 대하여 그들이 지독하게 분개하는 반응을 표시하였다. 사람의 아들에게 (재판도 받기 전에)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은 그러한 유대 민족에게 일찍이 하늘의 자비를 마지막으로 내민 것에 대한 산헤드린의 대답이었다.

175:3.2 (1910.1) 이때부터 계속, 유란시아의 여러 나라 사이에서, 유대인은 다만 순전히 그들의 인간적 지위에 따라서, 덧없고 짧은 민족의 생명을 마치도록 버려졌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약속했던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했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세상에 대하여 진리의 횃불을 쥔 자로 만들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신의 약속은 취소되었고, 히브리 국가의 종말이 빨리 다가왔다.

175:3.3 (1910.2) 산헤드린의 관리들은 이튿날 아침 일찍 예수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거기에는 그를 대중 앞에서 체포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가 함께 있었다. 그들은 몰래, 기왕이면 갑자기, 밤에 그를 붙잡기를 계획하라고 지시받았다. 그날 (수요일에) 성전에서 가르치러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목요일 자정 얼마 전에 유대인의 고등 법정 앞으로 그를 데려오라”고 이 산헤드린 관리들에게 지시했다.

4. 예루살렘의 상황

175:4.1 (1910.3) 성전에서 예수의 마지막 강연이 끝났을 때, 사도들은 다시 한 번 어리둥절하고 깜짝 놀랐다. 주가 유대인 권력자들에게 끔찍한 비난을 퍼붓기 시작하기 전에 유다가 성전으로 돌아왔고, 그래서 열두 사도 모두가 성전에서 하신 예수의 마지막 강연의 이 후반을 들었다. 가룟 유다가 이 작별 연설에서 자비를 내미는 처음 절반을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은 유감이다. 그는 이 작별 연설에서 유대인 권력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 마지막 제안을 듣지 못했는데, 이는 점심을 같이 먹던 어떤 무리의 사두개인 친척 및 친구들과 아직도 의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는 예수와 그 동료 사도들로부터 어떻게 떨어져 나가는 것이 가장 적당한가 이들과 함께 의논하고 있었다. 유대인 지도자와 권력자들에 대한 주의 마지막 고발을 듣는 동안에, 유다는 복음 운동을 버리고 그 사업 전체에서 손을 씻으려고 마침내, 완전히 작정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열두 사도의 일행 속에 끼어 성전을 떠나서 그들과 함께 올리브산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동료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대 나라의 종말에 대한 그 운명의 강연을 들었고, 그들과 함께 그 화요일 밤에 겟세마네 가까이 새 캠프에 남아 있었다.

175:4.2 (1910.4)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자비롭게 호소하다가, 무자비한 비난에 가깝게 갑자기 통렬한 꾸짖음으로 예수가 방향을 휙 바꾼 것을 들은 군중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어리둥절했다. 그날 밤에, 산헤드린이 예수에 대하여 사형 재판을 진행하는 동안, 그리고 주가 유대 나라의 패망을 예언하면서, 바깥에 올리브산에서 사도와 어떤 제자들과 함께 앉아 있는 동안, 온 예루살렘은 꼭 한 가지 질문에 대하여 꾹 참고 있던 심각한 논의에 빠졌다: “저희가 예수를 어찌할까?”

175:4.3 (1910.5) 하늘나라를 몰래 믿던 저명한 유대인이 30명 넘게 니고데모의 집에서 만나서, 산헤드린과 드러내놓고 관계를 끊는 경우에 그들이 무슨 길을 밟을 것인가 토론했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예수가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는 바로 그 시각에, 그들이 주께 충성함을 드러내놓고 인정하겠다고 합의를 보았다. 그들은 바로 그대로 했다.

175:4.4 (1911.1) 이제 산헤드린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사두개인들은 다음 이유로 예수를 없애버리고 싶어 하였다:

175:4.5 (1911.2) 1. 대중 사이에 그의 인기(人氣)가 늘어난 것은 아마도 로마 당국이 개입함으로 유대인 국가의 존재를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다고 그들은 걱정했다.

175:4.6 (1911.3) 2. 성전을 개혁하려는 그의 열심은 바로 그들의 소득에 타격을 주었다. 성전을 깨끗이 한 것은 그들의 주머니 사정에 영향을 미쳤다.

175:4.7 (1911.4) 3. 그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책임이 있다고 느꼈고, 사람의 형제 정신을 가르치는 교리, 낯설고 새로운 예수의 교리가 더욱 퍼짐으로 생기는 결과를 걱정했다.

175:4.8 (1911.5)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사형(死刑)되기를 보고 싶어 하는 다른 동기가 있었다. 다음 이유로 그를 두려워했다:

175:4.9 (1911.6) 1. 그는 사람들에 대하여 바리새인이 가진 전통적 위력에 대항해서 말하는 태도를 취했다. 바리새인들은 지나치게 보수적이었고, 종교 선생인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에 대하여 급진적이라 생각되는 이러한 공격을 퍼붓는 것을 뼈에 사무치게 분개했다.

175:4.10 (1911.7) 2. 예수는 율법을 어기는 자요, 안식일과 기타 수많은 율법 및 예식의 요구 사항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175:4.11 (1911.8) 3. 그가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언급했기 때문에 그를 신성 모독죄로 몰았다.

175:4.12 (1911.9) 4. 작별 연설의 결론 부분으로서 성전에서 이날, 지독한 비난이 담긴 마지막 강연을 했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175:4.13 (1911.10) 예수가 죽어야 한다고 공식으로 선포하고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예수가 재판받아야 할 죄목을 작성할 목적으로 대사제 가야바의 집에서 이튿날 아침 10시에 모이기로 결정한 뒤에, 산헤드린은 이 화요일에 거의 자정이 가까워 회의를 마쳤다.

175:4.14 (1911.11) 사두개인들 중에 한 작은 집단이 예수를 암살해서 없애버릴 것을 실제로 제안했지만, 바리새인들은 그런 과정을 전혀 용납하지 않았다.

175:4.15 (1911.12) 이것이 이 파란 많은 날에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상황이었고, 한편 방대한 집합의 하늘 존재들이 땅에서 이 중대한 장면 위에 떠돌고 있었다. 사랑하는 군주를 돕기 위해서 무슨 일인가 하려고 초조했지만, 지휘하는 상관들이 실질적으로 제어했기 때문에, 그들은 행동할 힘이 없었다.

제 176 편 화요일 저녁 올리브 산에서

유란시아서

제 176 편

화요일 저녁 올리브산에서

176:0.1 (1912.1) 이 화요일 오후에, 예수와 사도들이 겟세마네 캠프까지 가는 길에 성전 바깥으로 나가면서, 마태는 성전의 건축에 주의를 끌면서 말했다: “주여, 이것들이 어떤 모양의 건물인가 지켜보소서. 육중한 돌과 아름다운 장식을 보소서. 도대체 이 건물들이 파괴되는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그들이 올리브산을 향하여 줄곧 가는 동안, 예수는 말했다: “너희가 이 돌들과 이 육중한 성전을 보는도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날이 곧 닥치리라. 사람들이 이 돌들을 모두 던져 버리리라.” 신성한 성전이 파괴될 것을 묘사하는 이 논평은 주의 뒤를 따라 걷는 동안, 사도들의 호기심을 일으켰다.

176:0.2 (1912.2) 겟세마네를 향하여 기드론 골짜기를 따라서 지나가는 군중을 피하려고 예수와 동료들은 올리브산 서쪽 비탈을 얼마큼 기어오르고, 다음에 공공 캠프장 위로 조금 떨어져, 겟세마네 가까이 있는 그들의 사립 캠프까지 오솔길을 따라갈 생각이 있었다. 베다니로 계속 이끄는 길을 등지고 돌아서자, 그들은 지는 태양의 햇살로 눈부시게 된 성전을 지켜보았다. 산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그들은 도시의 불빛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불이 비추어진 성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았다. 거기서 부드러운 보름달 빛 아래서, 예수와 열두 사도는 앉았다. 주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당장에 나다니엘이 이렇게 물었다: “주여, 말씀하소서. 언제 이 사건들이 일어나려 하는지 우리가 어찌 알 수 있나이까?”

1. 예루살렘의 멸망

176:1.1 (1912.3) 나다니엘의 물음에 답하여 예수는 말했다: “그래, 이 민족이 불의(不義)의 잔을 가득 채웠을 때, 응보가 우리 조상이 살던 이 도시에 급속히 찾아올 때에 관하여 너희에게 이르리라. 나는 바야흐로 너희를 떠나려 하고, 아버지께로 가노라. 내가 너희를 떠난 뒤에,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구원자를 자칭하며 많은 사람이 길을 잃게 할 것임이라. 너희가 전쟁에 관하여 듣고 전쟁 소문을 들을 때 상관하지 말지니, 이 모든 것이 일어날지라도, 예루살렘의 종말이 아직 가깝지 아니한 까닭이라. 너희는 기근(饑饉)이나 지진에 마음이 흔들리지 말며, 너희가 국가 당국에 끌려가고 복음을 위하여 박해받을 때 근심해서도 안 되느니라. 너희는 나 때문에 회당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갇히겠고, 너희 가운데 더러는 죽음을 당하리라. 너희가 총독과 권력자들 앞에 끌려갈 때, 이는 너희 믿음을 간증하기 위한 것이요, 하늘나라 복음을 너희가 끈질기게 믿음을 보이기 위한 것이라. 너희가 재판관 앞에 설 때,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초조해하지 말지니, 바로 그 시간에 영(靈)이 너희가 너희 적들에게 어찌 대답해야 할까 너희를 가르칠 것임이라. 진통이 있는 이날에 너희 친척들조차, 사람의 아들을 거절한 자들의 지시를 받고서 너희를 감옥과 죽음으로 인도하리라. 한동안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의 미움을 받을 수도 있으나 이 박해 속에서도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겠고, 내 영이 너희를 저버리지 아니하리라. 참으라! 이 하늘나라 복음이 모든 적을 이기고, 궁극에 모든 민족에게 선포될 것을 의심하지 말라.”

176:1.2 (1913.1) 예수는 도시를 내려다보면서 멈추었다. 영적 메시아 개념을 부인하는 것, 곧 기대하는 구원자가 물질적 사명을 가졌다는 생각에 끈질기게 맹목으로 집착하는 결심은 얼마 안 있어 유대인들을 강력한 로마 군대와 직접 충돌하게 만들리라는 것, 그러한 투쟁은 오로지 최종으로 유대 민족의 완전한 파멸을 가져올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주는 깨달았다. 그의 민족이 그의 영적 수여(授與)를 거절하고 그들에게 아주 자비롭게 비친 하늘의 빛을 받아들이기를 물리쳤을 때, 그렇게 함으로 땅에서 그들은 영적 사명을 가진 독립된 민족으로서 패망할 운명을 결정하였다. 궁극에 그들을 멸망시킨 소동을 직접 초래한 것은 이 세속적 메시아 관념이었다고 후일에 유대인 지도자들도 인정하였다.

176:1.3 (1913.2) 예루살렘이 초대 복음 운동의 요람(搖籃)이 될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예루살렘의 파괴와 관련하여 유대 민족의 끔찍한 멸망이 있을 때 복음 선생과 전도자들이 죽기를 원하지 않았고, 따라서 추종자들에게 이 가르침을 주었다. 예수는 제자들 중에 더러가 곧 다가오는 이 항쟁에 말려들어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그렇게 죽지 않을까 많이 걱정했다.

176:1.4 (1913.3) 그리고 나서 안드레가 물었다: “그러나 주여, 거룩한 도시와 성전이 멸망해야 된다면, 그리고 당신이 여기 계시어 우리를 지도하지 않으면, 언제 우리가 예루살렘을 버려야 하나이까?” 예수가 말했다: “너희는 내가 떠난 뒤에, 아니 진통과 모진 박해가 있을 이 시절을 통해서 이 도시에 남아 있어도 좋지만, 거짓 선지자들의 폭동이 있은 뒤에 너희가 예루살렘이 마침내 로마 군대에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때 예루살렘의 황폐가 가까웠음을 너희가 알리라. 그때 너희는 산으로 달아나야 하느니라. 도시 안에, 그리고 그 근처에 있는 자는 누구나 아무것도 구제하려고 머무르지 말고, 바깥에 있는 자들도 그 안으로 감히 들어가지 말지니라. 큰 시련이 있으리니, 이때는 이방인이 복수하는 시절이 될 것임이라. 너희가 이 도시를 버린 뒤에, 순종하지 않는 이 민족은 칼날에 쓰러지고 모든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겠고 그렇게 예루살렘이 이방인에게 짓밟히리라. 그동안에, 내가 너희에게 경고하노니, 속지 말라. 누구라도 너희에게 와서 ‘보라, 여기 구원자가 있다’ 아니면 ‘보라, 저기에 그가 있다’ 하면 믿지 말지니, 많은 거짓 선생이 일어나고 숱한 사람이 길을 잃을 것임이라. 그러나 너희는 속지 말아야 하나니, 내가 이를 모두 미리 너희에게 일렀음이라.”

176:1.5 (1913.4) 주의 이 놀라운 예언들이 어리둥절한 사람들의 머리 속에 박히는 동안, 사도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달빛 속에서 말없이 앉아 있었다. 로마 군대가 처음 나타나자, 바로 이 경고(警告)에 순응하여 신자와 제자 무리의 거의 전부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달아났고, 북쪽에 펠라에서 안전한 피난처를 발견했다.

176:1.6 (1913.5) 이 뚜렷한 경고가 있은 뒤에도 예수의 많은 추종자는 이 예언이, 메시아가 다시 나타나심으로 새 예루살렘이 세워지고, 도시가 커져서 세계의 서울이 될 때 예루살렘에서 분명히 일어날 변화를 언급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머리 속에서 이 유대인들은 성전의 멸망을 “세상의 종말”과 연결하려고 굳게 마음먹었다. 그들은 이 새 예루살렘이 온 팔레스타인을 채우리라, 세상의 종말이 온 뒤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즉시 뒤이어 나타날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여,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날 때 모든 것이 없어질 것을 우리가 아나이다. 그러나 당신이 이 모든 것을 일으키려고 언제 돌아오실까 우리가 어찌 알리이까?”하고 말한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176:1.7 (1914.1) 이 말을 듣자, 예수는 얼마 동안 생각에 잠겼고, 그리고 나서 말했다: “너희가 늘 잘못하는 것은 새 가르침을 옛 가르침과 연결하려고 언제나 애쓰는 까닭이라. 너희는 내 가르침을 모두 오해하려고 결심하였구나. 너희의 굳어진 관념에 따라서 복음 해석하기를 너희가 고집하느니라. 그렇기는 해도 나는 너희를 깨우치려고 애쓰리라.”

2. 주의 재림

176:2.1 (1914.2) 예수는 몇 경우에 어떤 말씀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은 말씀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얼마 안 있어 이 세상을 떠날 뜻이 있지만 하늘나라 일을 마치려고 그가 아주 확실히 돌아오리라 추측하도록 이끌었다. 그가 그들을 떠나리라는 확신이 추종자들 사이에 커짐에 따라서, 그리고 그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 그가 돌아온다는 이 약속을 모든 신자가 단단히 믿은 것은 자연스러웠을 따름이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교리는 이처럼 기독교인의 가르침 속에 일찍 합병되었으며, 거의 모든 후세의 제자들이 경건하게 이 진리를 믿어 왔고, 그가 언젠가 오시기를 확신을 가지고 기대해 왔다.

176:2.2 (1914.3) 그들이 주, 선생과 헤어져야 한다면, 이 초기의 제자와 사도들이 그가 돌아온다는 이 약속에 얼마나 더 굳세게 매달렸는가. 그리고 그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예루살렘이 멸망한다는 예언을 다시 오신다는 이 약속과 연결시켰다. 올리브산에서 가르친 이날 저녁 내내, 주가 바로 그런 잘못을 막으려고 특별히 고심(苦心)했는데도, 그들은 계속 그의 말씀을 이렇게 풀이했다.

176:2.3 (1914.4) 베드로의 물음에 예수는 대답을 이었다: “어찌하여 너희는 아직도 사람의 아들이 다윗의 보좌에 앉기를 찾고, 유대인의 물질적 꿈이 성취될 것을 기대하느냐?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이 여러 해 동안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너희가 이제 내려다보는 것들은 이제 종말(終末)에 이르고 있으되, 이것은 새 시작이 될 것이요, 그로부터 하늘나라 복음이 온 세상으로 가고 이 구원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리라. 어둠의 왕이 되어 버린 자, 다음에 아담, 그를 뒤따라 멜기세덱, 그리고 오늘날 사람의 아들을 이 세상에 이미 수여한 것 같이, 하늘나라가 완전히 달성될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어김없이 진리를 더 크게 드러내고 올바름을 더 높이 나타낼 것을 확신하여라. 그래서 내 아버지는 어둡고 악한 이 세상에도 계속하여 자비를 나타내고 사랑을 보이리라. 내 아버지가 내게 모든 능력과 권한을 투입한 뒤에, 나도 또한 그렇게 너희의 운명을 계속 따르고, 내 영이 함께 함으로 하늘나라의 일을 안내하겠고, 그 영을 머지 않아 모든 육체에 부으리라. 비록 내가 이처럼 너희와 함께 정신적으로 있을지언정, 또한 약속하노니, 내가 이 세상으로 언젠가 다시 돌아오리라. 거기서 내가 육체를 입은 이 생명을 살았고, 하나님을 사람에게 드러내고, 동시에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체험을 얻었노라. 아주 곧 나는 너희를 떠나고 아버지가 내 손에 맡기신 일을 맡아야 하거늘, 기운을 내라, 언젠가 내가 돌아올 것임이라. 그동안에 한 우주에서 내 진리의 영이 너희를 위로하고 안내하리라.

176:2.4 (1915.1) “약하고 육체를 입은 나를 지금 너희가 보아도, 돌아올 때 나는 권능을 가지고 영이 되어 오리라. 육체의 눈은 육체를 입은 사람의 아들을 바라보나, 오직 영의 눈이 아버지가 영화롭게 하고 그의 이름으로 땅에 나타나는 사람의 아들을 바라보리라.

176:2.5 (1915.2)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다시 나타날 그때는 오직 파라다이스 회의에서만 알고 있고, 하늘의 천사들조차 이 일이 언제 일어날까 모르느니라. 그러나 이것을 너희가 이해해야 하나니,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이 하늘나라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었을 때, 그리고 시대가 충만하게 무르익었을 때, 아버지는 너희에게 또 다른 섭리 시대 수여자를 보내거나, 아니면 사람의 아들이 시대를 판결하려고 돌아오리라.

176:2.6 (1915.3)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이 겪을 진통에 관하여 이르자면, 이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말한 적이 있고, 내 말이 이루어지기까지 이 세대조차 사라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오는 때에 관하여 말하자면, 하늘이나 땅에서 아무도 주제넘게 입을 열어서는 안 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시대가 무르익는 것에 관하여 지혜로워야 하고, 시대의 징조(徵兆)를 헤아리기 위하여 경계하고 있어야 하느니라. 무화과 나뭇가지가 부드러운 가지를 보이고 그 이파리를 낼 때 여름이 가까운 줄 너희가 아는도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물질에 마음을 쓰는 긴 겨울을 지내고 나서, 영적으로 새 섭리 시대의 봄철이 오는 것을 너희가 헤아릴 때, 너희는 새로운 방문이 있을 여름철이 가까왔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176:2.7 (1915.4)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이 오는 것과 상관되는 이 가르침의 중요성이 무엇이냐? 너희 각자가 일생의 투쟁을 그만두고 죽음의 문을 지나가라고 부름받을 때, 너희는 즉시 심판대에 서고, 무한한 아버지의 영원한 계획 가운데 봉사하는 새 섭리 시대의 사실에 직면함을 너희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가 끝까지 천수를 누리고, 그렇게 죽어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히 진보하는, 다음 계시에 본래 있는 조건과 요구에 직면할 때, 한 시대의 끝에 글자 그대로의 사실로서 온 세상이 부닥쳐야 할 것을 너희는 각자 개인적 체험으로서 아주 확실히 부닥쳐야 하느니라.”

176:2.8 (1915.5) 주가 사도들에게 하신 모든 강연 가운데 아무것도,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 자신이 다시 온다는 이 두 가지 주제에 관하여 올리브산에서 이 화요일 저녁에 하신 이 강연만큼 그들의 머리 속에서 그렇게 뒤죽박죽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 특별한 기회에 주가 하신 말씀을 기억한 것에 근거를 두고 후일에 쓴 기록들 사이에 일치되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 결과로, 그 화요일 저녁에 말씀한 많은 것에 관하여 기록을 비워두었을 때, 많은 전통이 생겨났다. 그리고 2세기 아주 일찍, 칼리굴라 황제의 궁정에 부속되었던, 어떤 셀타라 하는 사람이 쓴, 메시아에 관한 어느 유대인 묵시록이 마태 복음 속에 통째로 복사되었고, 나중에 (일부가)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 첨가되었다. 셀타의 이 기록에서, 열 처녀의 비유가 나타났다. 복음 기록의 어느 부분도 일찍이 이날 저녁의 가르침처럼 혼동되어 잘못 설명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결코 이렇게 혼동하지 않았다.

176:2.9 (1915.6) 이 열세 사람이 캠프를 향하여 길을 다시 떠났을 때, 그들은 말이 없었고, 크게 감정이 긴장되었다. 이전에 유다는 동료들을 버리려는 결심을 마침내 확인했다. 다윗 세베대, 요한 마가, 그리고 주요 제자 몇 사람이 예수와 열두 사도를 새 캠프로 환영한 것은 늦은 시간이었지만, 사도들은 잠자리에 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멸망, 주가 떠나시는 것, 그리고 세상의 끝에 관하여 더 알고 싶어했다.

3. 캠프에서 나중에 있은 토론

176:3.1 (1916.1) 그들이 스무 명쯤 모닥불 주위에 모여 있는 동안, 토마스가 물었다: “당신이 하늘나라의 일을 마치려고 돌아오셔야 하오니, 아버지의 일로 당신이 떠나 있는 동안 우리가 무슨 태도를 가져야 하나이까?” 예수는 불빛에 그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176:3.2 (1916.2) “그리고 토마스야, 너조차 내가 말하고 있던 것을 알아듣지 못하는구나. 너와 하늘나라의 관계는 영적이고 개인적인 것이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음으로 깨달음으로, 개인이 영적으로 체험하는 문제라고, 내가 여태까지 내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더냐? 내가 무엇을 더 말하리오? 나라들의 멸망, 제국들의 붕괴,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멸망, 한 시대의 종말, 아니 세상의 종말조차, 이것들이 이 복음을 믿는 자, 그리고 자기 생명이 영원한 나라에 숨겨져 있다는 보장을 받은 자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나님을 알고 복음을 믿는 너희는 이미 영생을 보장받았느니라. 너희가 영적으로, 그리고 아버지를 위하여, 일생을 살았은즉 아무것도 너희에게 심각한 관심거리가 될 수 없느니라. 하늘나라를 세우는 자, 여러 하늘 세계에서 인가받은 시민들은, 현세의 격변에 흔들리거나 땅에서 생기는 대변동에 마음이 불안해서는 안 되느니라. 너의 생명은 아들의 선물이요, 그 선물이 아버지 안에 영원히 안전함을 네가 아나니, 나라들이 전복되거나, 시대가 끝나거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진다면, 이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너에게 무슨 문제이냐? 믿음으로 현세의 생명을 살고 나서, 동료를 위하여 사랑으로 봉사하기까지 올바른 영의 열매를 맺고 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처음 모험, 땅에서 겪는 모험을 통해서 너희를 지탱했던 바로 그 살아남는 믿음으로, 너희는 자신 있게 영원한 생애의 다음 단계를 기대할 수 있느니라.

176:3.3 (1916.3) “피할 수 없이 늘 다가오는 자연사(自然死)에 비추어 개별 신자 하나하나가 일생의 일을 추진하는 것과 꼭 같이, 각 세대의 신자들은 사람의 아들이 돌아올 가능성에 비추어 자기의 일을 계속 수행해야 하느니라. 한번 너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리를 잡으면, 살아남는 보장에 대해서 다른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느니라. 그러나 오해하지 말지어다! 살아남는 이 믿음은 생생한 믿음이요, 인간의 가슴 속에서 처음으로 생생한 믿음을 불러일으킨 그 신성한 영의 열매를 더욱 명백히 드러내느니라. 하늘나라에서 아들인 것을 너희가 한 번 받아들였다는 것은 육체를 입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진취적으로 영적 열매를 맺는 것과 상관되는 진리를 일부러 끈질기게 거절하는 경우에, 너희를 구원하지는 못하리라. 땅에서 아버지의 일에 나와 함께 하던 너희는 인류를 위하여 아버지께 봉사하는 길이 싫다는 것을 발견하면 이제도 하늘나라를 저버릴 수 있느니라.

176:3.4 (1916.4) “개인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신자 세대로서, 내가 비유를 말하는 동안 내 말을 들으라: 어떤 위대한 사람이 있었더니, 다른 나라로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믿던 종들을 모두 앞에 부르고 저희 손에 그의 재물을 모두 맡겼더라. 한 사람에게 다섯 달란트를 주었고, 한 사람에게 두 달란트,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더라. 이렇게 영예로운 집사(執事) 무리 전체를 거쳐 내려가면서, 각자에게 저희의 몇 가지 능력에 따라서 그의 재물을 맡겼고, 그리고 나서 길을 떠났더라. 주인이 떠나 버렸을 때, 종들은 저희에게 맡긴 재물로 이익을 얻으려고 열심히 일에 달라붙었더라.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는 즉시 그것으로 장사하여, 금방 다섯 달란트의 이익을 얻었고, 마찬가지로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곧 두 달란트를 더 벌었더라. 그래서 이 종들이 모두 저희의 주를 위하여 이익을 얻었는데, 한 달란트만 받은 자는 그렇지 않았더라. 그는 혼자 떠나가서 땅에 구덩이를 파고 주인의 돈을 감추었는지라. 이 종들의 주인이 얼마 안 있어 뜻하지 않게 돌아와서 계산하라고 집사들을 불렀더라. 주인 앞에 모두 부름받았을 때,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그에게 맡긴 돈을 가져왔고 다섯 달란트를 더 가져와서 말하였더라. ‘주여, 당신이 투자하라고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고, 내 이익으로 다섯 달란트를 더 내놓게 되어 기쁘나이다.’ 그리고 나서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아, 너는 몇 가지 일에 충성하였고, 이제 너를 여러 사람 위에 집사로 세우리라. 네 주인과 함께 당장 즐거워할지어다.’ 그리고 나서 두 달란트 받은 자가 앞으로 나와서 말하였느니라: ‘주여, 당신은 내 손에 두 달란트를 주셨나이다. 보소서, 나는 다른 이 두 달란트를 벌었나이다.’ 그리고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아, 너도 몇 가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이제 너를 여러 사람 위에 세우리라. 네 주인과 함께 즐거워하자.’ 그리고 나서 한 달란트를 받았던 자가 계산하러 왔더라. 이 종이 앞으로 나와서 말하되, ‘주여, 내가 당신을 알고, 당신이 몸소 수고하지 않은 데서 이익을 기대하시니 당신이 날카로운 사람인 줄 깨달았나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내게 맡긴 어떤 것도 위태롭게 하기가 두려웠나이다. 나는 당신의 달란트를 땅 속에 안전히 감추었나이다. 여기 있나이다. 당신에게 속한 것을 이제 당신이 받으셨나이다.’ 그러나 주인이 대답하되, ‘너는 게으르고 굼뜬 집사이라. 네 말대로, 오늘 너의 부지런한 동료 종들이 갚은 것 같이, 너에게서 합당한 이익을 남겨 내가 계산을 요구할 것을 알았다고 네가 고백하였느니라. 이를 알았은즉, 따라서 내가 돌아올 때 내 돈과 이자(利子)를 받도록 적어도 내 돈을 은행가의 손에 맡겨야 했느니라.’ 그리고 나서 우두머리 집사에게 이 주인이 말하되, ‘이 한 달란트를 이롭지 않은 이 집사에게서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라’ 하였더라.

176:3.5 (1917.1)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을 것이요 풍성하게 가지려니와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리라. 너희는 영원한 나라의 사무를 보면서 가만히 서 있을 수 없느니라. 내 아버지는 자녀들 모두가 은혜 안에서, 진리를 아는 가운데 성장하기를 요구하시니라. 이 진리를 아는 너희는 영의 열매를 더 맺고, 동료 종들에게 사심 없이 봉사하는 데 더욱 헌신함을 나타내야 하느니라. 내 동포 가운데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너희가 베푸는 만큼, 너희가 이 봉사를 내게 한 것임을 기억하라.

176:3.6 (1917.2) “이제, 그리고 이제부터, 아니 언제까지라도, 너희는 아버지의 일에 몰두해야 하느니라. 내가 올 때까지 계속하라. 너희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행하라, 그리하면 이로서 너희는 청산하라고 죽음이 부를 때 준비가 되리라. 이렇게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아들이 만족하기까지 살고 나서, 즐겁게, 대단히 큰 기쁨을 가지고, 너희는 영구한 나라에서 영원히 봉사하는 일에 들어갈지니라.”

176:3.7 (1917.3) 진리는 살아 있다. 진리의 영은 영적 실체와 신성한 봉사가 있는 새 영역으로 빛의 아이들을 늘 이끌고 있다. 고정되고 안전하고 명예로운 형태로 구체화하라고 너희가 진리를 받는 것이 아니다. 새 아름다움과 실제의 영적 이득(利得)이 너희의 영적 열매를 구경하는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고, 그 결과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데 마음이 이끌리도록, 너희의 진리 계시는 너희 개인의 체험을 겪음으로 향상되어야 한다. 진리를 아는 가운데 이처럼 성장하는 충성스러운 종들과, 이로서 영적 실체들을 신답게 이해하는 능력을 기르는 자라야 “저희의 주와 기쁨을 충분히 나눌 것”을 언제라도 바랄 수 있다. 예수를 따른다고 공언(公言)한 자들의 연속된 세대가 신성한 진리를 돌보는 직분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면 얼마나 딱한 모습인가: “주여, 1백 년이나 1천 년 전에 당신이 우리에게 맡긴 진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는 하나도 잃지 않았고, 당신이 주신 모든 것을 우리가 충실히 간직하였나이다. 당신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에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못하게 하였고, 우리에게 주신 진리가 여기 있나이다.” 그러나 영적 게으름을 피운 것에 대하여 그렇게 탄원하는 것은 주가 계신 앞에서 열매 없는 집사, 진리를 담당한 집사가 옳다고 입증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 손에 진리를 맡긴 만큼, 진리의 주(主)는 어찌했는가 셈하기를 요구할 것이다.

176:3.8 (1918.1) 이 세상에서 받은 자질과 맡은 직분에 대하여 다음 세계에서 설명하라고 너희는 질문을 받을 것이다. 타고난 재능이 많든 적든, 공정하고 자비로운 계산을 직면해야 한다. 자질을 오로지 이기적 추구에만 썼고, 사람들에게 늘 더욱 봉사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서 영의 열매를 더 많이 거두는 높은 의무에 전혀 마음을 쏟지 않는다면, 그러한 이기적 집사는 그들의 신중한 선택으로 생긴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176:3.9 (1918.2) 자신의 게으름을 직접 주인의 탓으로 돌렸으므로, 모든 이기적 필사자는 한 달란트를 받은 이 불충한 종과 얼마나 비슷한가. 사람이 자초(自招)하여 실패를 겪었을 때, 다른 사람의 탓으로, 때때로 가장 탓해서는 안될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가 얼마나 쉬운가!

176:3.10 (1918.3) 그날 밤 그들이 쉬러 갈 때 예수는 말했다: “너희는 거저 받았도다. 그런즉 너희는 거저 하늘의 진리를 주어야 하느니라. 이 진리는 남에게 주면서 불어나고, 너희가 진리를 베푸는 동안에도, 구제하는 은혜의 빛은 더욱 빛나리라.”

4. 미가엘의 돌아오심

176:4.1 (1918.4) 주의 모든 가르침 가운데 어느 단계도 이 세상에 언젠가 그가 친히 돌아온다는 약속처럼 그렇게 오해 받은 것은 없다. 일곱째이자 마지막 자신 수여를 그 영역의 한 필사자로서 체험한 행성으로 언젠가 돌아오는 데 미가엘이 흥미를 가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금은 광대한 우주를 통치하는 군주인 나사렛 예수가, 그렇게 독특한 인생을 살고, 아버지가 제한 없이 수여한, 우주를 다스릴 권능과 권한을 혼자서 마침내 얻어낸 세상으로,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라도, 돌아올 흥미를 가지리라 믿는 것이 당연할 따름이다. 영원히 유란시아는 우주 통치권을 얻는 과정에서 미가엘이 태어난 일곱 구체(球體)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176:4.2 (1918.5) 수많은 기회에,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예수는 그가 이 세상으로 돌아올 뜻을 밝혔다. 추종자들이 주가 현세의 구원자로서 활동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에 눈을 뜨면서, 그리고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유대 나라가 멸망하리라는 그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그들은 그가 돌아온다는 약속을 아주 자연스럽게 이 대격변의 사건들과 연결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의 담을 밀어 버리고, 성전을 무너뜨리고, 유대 땅의 유대인들을 흩어놓았는데도 여전히 주가 권능과 영광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을 때, 추종자들은 마침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것을 그 시대의 끝, 아니 세상의 종말과 연결시킨 관념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76:4.3 (1918.6) 예수는 아버지께로 올라가신 뒤, 하늘과 땅에서 모든 권능이 그의 손에 맡겨진 뒤에, 두 가지 일을 하기로 약속했다. 첫째로, 그는 세상으로 자기 대신에 다른 선생, 진리의 영을 보내겠다고 약속했고, 그는 오순절 날에 그대로 했다. 둘째로, 그는 언젠가 이 세상으로 친히 돌아오리라고 추종자들에게 아주 확실히 약속했다. 그러나 육체를 입고 자신 수여 체험을 가졌던 이 행성을 어떻게, 어디에서 또는 언제 다시 찾아볼 것인가 말하지 않았다. 그가 육체를 입고 여기서 살았을 때 육체의 눈이 그를 보았어도, 그가 돌아올 때 (적어도 가능한 여러 방문 중 하나에서) 오로지 영적 믿음의 눈으로만 그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고 그는 한 경우에 암시하였다.

176:4.4 (1919.1)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여러 번 예수가 유란시아로 돌아오리라고 우리 가운데 다수가 믿고 싶어한다. 그가 이렇게 여러 번 방문한다는 특정한 약속을 우리가 받지 않았지만, 우주의 칭호들 가운데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라는 칭호를 지닌 분이 이 세상을 여러 번 찾아보리라는 것이 아주 가능성 있어 보이며, 이 세상의 정복은 그러한 독특한 칭호를 그에게 수여했다.

176:4.5 (1919.2) 우리는 미가엘이 유란시아로 친히 다시 올 것을 아주 분명히 믿지만, 언제 또는 어떤 방식으로 그가 오기를 택할 것인가 털끝만큼도 짐작할 수 없다. 땅에 그가 두 번째로 오심이, 관련된 심판 아들의 출현과 함께, 아니면 따로, 이 현재 시대의 마지막 심판과 연결하여, 때를 맞추어 일어날 것인가? 후일의 어떤 유란시아 시대의 종결과 연결하여 그가 오실까? 발표하지 않고, 그리고 독립된 사건으로서 오실까? 우리는 모른다. 오직 한 가지만 우리가 확신하는데, 즉 그가 돌아올 때, 아마도 온 세상이 알 듯하다는 것이니, 이는 그가 베들레헴의 이름 없는 아기가 아니라 한 우주의 최고 통치자로서 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눈이 그를 바라보아야 한다면, 그리고 오직 영적 눈이 그의 계심을 헤아릴 것이라면 그의 오심은 오랫동안 뒤로 미루어져야 한다.

176:4.6 (1919.3) 그러므로 너희는 주가 친히 땅에 다시 오시는 것을 어떤 정해진 사건이나 정착된 시대와 분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 그가 돌아오기로 약속했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가 언제 또는 어떤 관계로 이 약속을 지킬 것인지 우리는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한, 그는 땅에 언제라도 나타날지 모르며, 여러 시대가 지나고 그 시대들이 그와 관계된 파라다이스 군단의 아들들에게 정식으로 판결받을 때까지 오지 않을지 모른다.

176:4.7 (1919.4) 땅에 미가엘이 두 번째로 오는 것은 중도자(中道者)와 인간 모두에게 엄청나게 감상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그밖에 이것은 중도자에게 아무런 직접 의미가 없고, 보통 일어나는 자연사의 사건보다 인간에게 아무런 실용적 중요성이 더 없다. 자연사는 아주 갑자기 필사 인간을 바로 이 예수, 우리 우주의 군주 통치자가 계신 앞으로 직접 인도하는, 연속된 우주 사건들의 손아귀에 즉시 떨어뜨린다. 빛의 아이들은 모두 그를 만나볼 운명을 가졌고, 우리가 그에게 가거나 아니면 그가 어쩌다가 먼저 우리에게로 오든지, 조금도 심각하게 아랑곳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늘에서 너희를 반가이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이, 너희는 언제나 땅에서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여라. 우리는 그가 영화롭게 나타나시는 것, 아니 거듭 오시는 것까지도 자신 있게 기대하지만, 어떻게, 언제, 아니면 어떤 관계로 그가 나타나기로 정해졌는지 우리는 전혀 모른다.

제 177 편 수요일, 쉬는 날

유란시아서

제 177 편

수요일, 쉬는 날

177:0.1 (1920.1)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로 시달리지 않을 때, 예수와 사도들은 수요일마다 수고를 그만두고 쉬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들은 특별한 이번 수요일에 여느 때보다 얼마큼 늦게 아침을 먹었고, 캠프는 불길한 고요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아침 식사의 처음 절반 동안 거의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침내 예수가 말했다: “너희가 오늘 쉬기를 내가 원하노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온 뒤에 일어난 모든 일을 천천히 생각해 보고, 바로 앞에 놓여 있는 일을 명상해 보라, 이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일렀노라. 진리가 너희 생활에 거하고 너희가 자비 속에 나날이 자라도록 하여라.”

177:0.2 (1920.2) 아침 식사 뒤에, 주는 그날 하루, 자리를 비울 생각이 있다고 안드레에게 알렸고, 어떤 경우에도 그들이 예루살렘 문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제외하고, 사도들이 각자가 택하는 대로 시간 보내기를 허락할 것을 제안했다.

177:0.3 (1920.3) 예수가 산으로 혼자 가려고 준비했을 때, 다윗 세베대는 그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주여, 바리새인과 권력자들이 당신을 죽이려 하는 줄 당신이 잘 아시며, 그래도 당신은 산으로 혼자 가려고 준비하시나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그러하니 아무런 해가 당신에게 닥치지 않도록 처리하려고 잘 준비된 세 사람을 당신과 함께 보내리이다.” 예수는 잘 무장(武裝)하고 튼튼한 세 갈릴리 사람을 훑어보고 다윗에게 말했다: “너는 좋은 뜻을 가졌으나, 사람의 아들이 자신을 방어할 사람이 하나도 필요하지 않음을 이해하지 못하니, 네가 잘못하는도다. 내 아버지의 뜻에 순응하여 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될 그때까지, 아무도 내게 손대지 아니하리라. 이 사람들이 나를 따라와서는 안 되느니라.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나는 혼자 가기를 바라노라.”

177:0.4 (1920.4) 이 말씀을 듣자, 다윗과 무장한 경비원들은 물러났다. 그러나 예수가 혼자서 발걸음을 떼자, 요한 마가가 먹을 것과 물을 담은 작은 바구니를 가지고 앞으로 나섰고, 그가 하루 종일 떠나 있을 생각이라면, 배가 고프게 될지 모른다고 넌지시 비추었다. 주는 요한에게 빙그레 웃으며, 바구니를 쥐려고 손을 뻗었다.

1. 하루를 혼자 하나님과

177:1.1 (1920.5) 예수가 요한의 손에서 점심 바구니를 쥐려 하자, 그 젊은이는 나서서 말했다. “하지만 주여, 바구니를 내려놓고, 몸을 돌이켜 기도하고 바구니 없이 계속해도 되나이다. 게다가, 점심을 가지고 내가 따라간다면, 당신은 예배하기에 더욱 홀가분할 터이고, 분명히 나는 조용히 있겠나이다. 당신에게 아무 말도 묻지 않고 당신 혼자서 기도하러 따로 가실 때, 바구니 옆에 머무르리이다.”

177:1.2 (1920.6) 그 대담성은 가까이서 듣던 사람들 가운데 더러를 놀라게 했는데, 이렇게 말하면서 요한은 대담하게 그 바구니를 계속 붙들고 있었다. 요한과 예수 둘이서 그 바구니를 붙들고 거기에 서 있었다. 이내 주는 손을 놓고, 소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마음을 다하여 나와 함께 몹시 가고 싶어 하니, 너를 거절하지 못하리라. 우리끼리 떠나가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리라. 마음 속에 무슨 질문이 생겨도 내게 물어도 좋고, 우리는 서로 위로하고 위안할 것이라. 너는 점심을 가지고 떠나도 좋으니라. 그리고 네가 지칠 때, 내가 너를 도우리라. 나를 계속 따라오라.”

177:1.3 (1921.1) 예수는 해가 진 뒤까지 그날 저녁에 캠프로 돌아오지 않았다. 진리에 갈급한 이 젊은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파라다이스 아버지와 이야기하면서, 주는 땅에서 마지막으로 조용한 이날을 지냈다. 이 사건은 하늘에서 “한 젊은이가 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낸 날”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경우는 언제까지나 창조자가 사람과 기꺼이 친교하는 태도를 본보기로 보여준다. 소년조차도, 마음의 소망이 정말로 지극할 때, 한 우주의 하나님의 눈길을 끌고 사랑으로 동반하심을 누릴 수 있다. 산에서 하나님과 혼자 지내는 잊을 수 없는 환희를, 그것도 하루 종일, 실제로 누릴 수 있다. 이 수요일에 유대 땅의 산에서 요한 마가가 겪은 독특한 체험이 그러했다.

177:1.4 (1921.2) 예수는 요한과 많이 이야기를 나누고 이 세상과 다음 세상의 일에 대하여 거리낌없이 이야기했다. 요한은 그가 사도들 중에 하나가 될 만큼 나이 들지 않아서 얼마나 서운했는가 예수에게 말했다. 그리고 페니키아로 간 여행을 제외하고, 예리고 가까이 요단강 여울에서 그들이 처음 전도할 때부터 줄곧 따라다니도록 허락받은 것을 대단히 고맙게 여긴다고 말했다. 예수는 다가오는 사건들을 보고 낙심하지 말라 소년에게 경고하고, 그가 살아서 하늘나라의 막강한 사자가 되리라고 그에게 확신을 주었다.

177:1.5 (1921.3) 요한 마가는 산에서 이날 예수와 함께 지냈던 기억으로 기쁨에 떨었지만, 마가는 그들이 겟세마네 캠프로 막 돌아오려 할 때 말씀한 주의 마지막 훈계를 결코 잊지 않았다. 이때 주는 말했다: “자, 요한아, 좋은 이야기를 나누었구나, 정말로 쉬는 날이었도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이른 것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하여라.” 요한 마가는 그가 산에서 예수와 함께 지낸 이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결코 밝히지 않았다.

177:1.6 (1921.4) 예수가 땅에서 보낸 생애의 남은 몇 시간을 통해서, 요한 마가는 주가 눈앞에서 오래 사라지도록 버려두지 않았다. 그 소년은 언제나 가까이서 숨어 있었고, 예수가 잘 때만 눈을 붙였다.

2. 어릴 때의 가정 생활

177:2.1 (1921.5) 요한 마가와 이날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예수는 그들의 어린 시절과 그후 소년기의 체험을 비교하느라고 상당히 시간을 보냈다. 요한의 부모가 예수의 부모보다 이 세상의 재물을 더 많이 소유했어도, 그들의 소년기에 아주 비슷한 체험이 많이 있었다. 예수는 여러 가지를 말씀했고, 이것은 요한으로 하여금 부모와 다른 식구들을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가 “하늘나라의 막강한 사자”임이 입증될 것을 주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소년이 물었을 때, 예수는 말했다:

177:2.2 (1921.6) “네가 하늘나라 복음에 충실함이 입증될 것을 내가 아노니, 너의 현재 믿음과 사랑이 집에서 네 몫대로 받은 그러한 초기 훈련에 바탕을 두었을 때, 내가 이러한 자질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라. 너는 부모가 서로에게 진지한 애정을 품은 집에서 생긴 결과이며, 따라서 자신을 중요시하는 개념을 해롭게 높일 만큼 지나치게 사랑을 받지 않았느니라. 너의 자신감과 충성심이 서로 충돌하도록 너희 부모가 사랑 없이 조종한 결과로 네 성격이 비뚤어지지도 않았느니라. 칭찬할 자신감을 보장하고 정상적 안정감을 촉진하는 부모의 사랑을 네가 누려 왔느니라. 그러나 네 부모가 사랑 뿐 아니라 지혜를 가졌으므로, 너는 또한 운이 좋았구나. 돈으로 살 수 있는 대부분의 형태의 방종과 많은 사치품을 허락하지 않도록 부모가 지혜롭게 행하였고, 한편 네 부모는 이웃 놀이 친구들과 함께 너를 회당 학교로 보냈으며, 또한 네가 고유한 체험을 가지도록 허락함으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가 배우라고 너를 북돋았느니라. 너는 요단강으로 왔고, 거기서 젊은 네 친구 아모스와 함께, 우리는 전도하고 요한의 제자들은 세례를 주었느니라. 너희 둘이 우리와 함께 가기를 바랐느니라. 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때, 네 부모는 찬성하고 아모스의 부모는 반대하였느니라. 저희는 아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네가 누려왔던 복된 체험을, 아니 오늘 네가 맛보는 그런 체험조차 그가 못 가지게 하였느니라. 집에서 도망치면 아모스는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했다면 그는 사랑에 상처를 입히고 충성심을 희생하였으리라. 그러한 과정이 지혜롭다 하더라도, 체험과 독립과 자유를 얻기 위하여 끔찍한 값을 치렀으리라. 너희 부모처럼 지혜로운 부모는 아이들이 네 나이까지 자랐을 때 독립심을 기르고 사람을 북돋는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사랑에 상처를 입히거나 충성심을 억누를 필요가 없도록 처리하느니라.

177:2.3 (1922.1) “요한아, 전적으로 지혜로운 존재들이 사랑을 주었을 때 그 사랑은 우주에서 최상의 현실이지만, 필사 부모의 체험에서 나타나다시피, 사랑은 위험하고 때때로 반(半)이기적 버릇이라. 네가 장가들고 네 아이들을 기를 때, 지혜의 훈계를 받고 머리를 써서 아이들을 사랑하도록 하여라.

177:2.4 (1922.2) “젊은 네 친구 아모스는 너와 똑같이 이 하늘나라 복음을 믿지만, 나는 그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고, 앞날에 그가 무슨 일을 할지 확신하지 못하노라. 어릴 때 그의 가정 생활은 온전히 믿을 사람을 길러낼 수 있는 그러한 가정이 아니었느니라. 아모스는 사도들 가운데 정상이고 사랑이 가득하고 지혜로운 가정 훈련을 받지 못한 한 사도와 많이 비슷하니라. 네가 처음 8년을 정상이고 규율이 잘 선 집에서 보냈은즉, 너의 여생(餘生) 전체는 더욱 행복하고 믿을 만하리라. 사랑이 우선하고 지혜가 다스리는 집에서 자랐으므로 너는 튼튼하고 반듯한 인품을 가졌느니라. 그러한 소년기 훈련이 낳는 종류의 충성심은, 네가 일단 시작한 길을 마칠 것이라고 내게 확신을 주느니라.”

177:2.5 (1922.3) 한 시간이 넘도록 예수와 요한은 가정 생활에 대하여 이 토론을 계속하였다. 어린아이가 모든 지적ㆍ사회적ㆍ도덕적인 것, 아니 영적인 것에 대해서도 그 초기 개념을 얻는 데 어떻게 부모에게, 그리고 관련된 가정 생활에 의존하는가, 주는 계속 요한에게 설명했다. 이것은 가족이 인간 관계나 신다운 관계에 대하여 처음에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어린아이에게 대표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머니의 보살핌으로부터 우주에 대한 첫 인상(印象)을 얻어야 한다. 아이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첫 관념을 땅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 뒤에 어린아이의 생활은, 가정의 이 사회적ㆍ영적 관계에 조건을 받고, 어릴 때의 정신 및 감정 생활이 어떠했는가에 따라서 행복하거나 불행하게, 쉽거나 어렵게 된다. 한 인간의 여생 전부가 처음 몇 년 존재하는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엄청나게 영향을 받는다.

177:2.6 (1922.4) 아버지와 자식 관계에 바탕을 둔, 예수가 가르친 복음은, 현대의 문명화된 민족들의 가정 생활이 사랑을 더 품고 지혜를 더 품을 때가 오기까지, 도저히 세계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우리는 진지하게 믿는다. 20세기의 부모는 가정을 개선하고 가정 생활을 고상하게 만들기 위하여 많은 지식과 늘어난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데도, 갈릴리에서 예수의 가정과 유대에서 요한 마가의 집만큼, 소년과 소녀를 기르기에 좋은 장소인 현대 가정이 극히 드문 것이 아직도 사실이다. 하지만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면 즉시 가정 생활의 개선을 가져올 것이다. 지혜로운 가정의 애정 생활, 그리고 참된 종교에 충실히 헌신하는 것, 이 두 가지는 서로 심오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한 가정 생활은 종교를 높이고, 진정한 종교는 반드시 가정을 영화롭게 한다.

177:2.7 (1923.1) 이러한 옛 유대인 가정에서 발육을 저해(沮害)하던 많은 불쾌한 영향, 그리고 사람을 속박하는 기타 특징이, 잘 다스려지는 많은 현대 가정에서 거의 없어진 것이 참말이다. 정말로, 계획하지 않은 자유가 전보다 많고 개인적 자유는 훨씬 더 많지만, 이 자유는 사랑으로 자제되거나 충성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요, 총명하게 지혜로운 훈련으로 지도를 받지도 않는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어린아이에게 기도하기를 가르치는 한, 아버지라는 낱말이 성장하는 모든 어린아이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 가치있게 간직되도록, 살고 가정을 다스릴 엄청난 책임이 땅에 있는 모든 아버지에게 지워진다.

3. 캠프에서 하루

177:3.1 (1923.2) 사도들은 올리브산에서 이리저리 거닐고, 같이 야영한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날의 대부분을 보냈지만, 이른 오후가 되자 예수가 돌아오는 것을 무척 보고 싶어 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가 안전한가 더욱 걱정이 되었다. 그들은 예수가 계시지 않아서 말할 수 없이 외롭게 느꼈다. 주가 산에서, 심부름하는 소년 하나만 데리고, 혼자 훌쩍 떠나게 버려두었어야 하는가, 하루 내내 많은 논란이 있었다. 비록 아무도 터놓고 자기 생각을 표현하지 않았어도, 가룟 유다를 빼고 자기가 요한 마가의 처지에 있었으면 하고 바라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177:3.2 (1923.3) 오후 중반쯤 되어 나다니엘은 “최고의 소망”에 대하여 여섯 명쯤 되는 사도들과 그만큼 되는 제자들에게 연설했는데, 그 연설의 끝은 이러했다: “우리 대부분에게 잘못된 점은 우리가 정성이 부족한 것이라. 주가 우리를 사랑하는 것 같이 우리는 주를 사랑하지 않느니라. 요한 마가만큼 우리 모두가 함께 가기를 바랐더라면, 주는 분명히 우리 모두를 데리고 갔으리라. 우리가 구경하는 동안, 그 소년은 주께 다가가서 바구니를 내밀었지만, 주가 쥐었을 때 그 소년은 놓으려 하지 않았는지라. 그래서 주는 우리를 여기 두고, 바구니도 가지고 소년도 데리고 산으로 훌쩍 떠나가셨느니라.”

177:3.3 (1923.4) 4시쯤에, 주자들이 다윗 세베대에게, 벳세다에 있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그리고 예수의 어머니로부터, 소식을 가지고 왔다. 며칠 전에 다윗은 주사제와 권력자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다는 결론을 이미 내렸다. 다윗은 그들이 주를 죽이기로 결의가 굳은 것을 알았고, 예수가 자신을 구하려고 신으로서 가진 힘을 쓰거나 추종자들이 그를 방어하려고 무력(武力)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했다. 이런 결론에 이르고 나서, 그는 때를 놓치지 않고 사자 하나를 그의 어머니에게 급히 보내서, 어머니가 당장에 예루살렘으로 오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 집안의 식구를 다 데려오라고 재촉했다.

177:3.4 (1923.5) 다윗의 어머니는 아들이 요청한 대로 했고, 이제 주자(走者)들이 그의 어머니와 예수의 가족 전부가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에 있으며, 이튿날 언젠가 늦게, 아니면 그 다음 날 아침 아주 일찍 도착하리라는 소식을 가지고 다윗에게 돌아왔다. 다윗이 자진해서 이렇게 했기 때문에, 그는 그 문제를 혼자 비밀에 붙이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의 가족이 예루살렘으로 오는 도중이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177:3.5 (1924.1) 정오가 조금 지난 뒤에, 아리마대 요셉의 집에서 예수와 열두 사도와 만난 적이 있는 그리스인이 스무 명 넘게 캠프에 도착했고,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과 회담하느라고 몇 시간을 보냈다. 이 그리스인들, 적어도 그들 가운데 더러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단에게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지식 면에 상당히 진보되어 있었다.

177:3.6 (1924.2) 그날 저녁에, 캠프로 돌아온 뒤에, 예수는 그리스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칠십인을 세운 것처럼 이 그리스인 스무 명을 임명하는 것이 사도들과 많은 주요 제자들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았으리라는 사실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177:3.7 (1924.3) 이 모든 것이 캠프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 예루살렘에서 주사제(主司祭)와 장로들은 예수가 군중에게 연설하려고 돌아오지 않은 것에 놀랐다. 그 전날, 그가 성전을 떠날 때, “내가 너희 집을 황폐한 채로 버려두노라” 말한 것이 참말이었다. 그러나 군중이 우호적으로 대하는 가운데 쌓았던 크게 유리한 형편을 그가 어째서 기꺼이 포기하려고 하는가 그들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소동을 일으킬까 두려웠는데, 군중에게 주가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모든 타당한 방법으로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의 권한에 순응하라는 훈계였다. 그러나 그들이 유월절을 준비하고 동시에 예수를 죽이려는 계획을 완성하는 동안, 그 도시에서는 바쁜 날이었다.

177:3.8 (1924.4) 많지 않은 사람이 캠프로 왔는데, 그 캠프를 세운 것은 밤마다 베다니로 나가는 대신에 거기서 예수가 머물기를 기대한다는 것을 안 사람들이 모두 비밀을 잘 지켰기 때문이다.

4. 유다와 주사제들

177:4.1 (1924.5) 예수와 요한 마가가 캠프를 떠난 뒤에 얼마 있다가, 가룟 유다는 형제들 사이에서 사라졌고, 오후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혼란에 빠지고 불평을 품은 이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삼가 들어가지 말라고 주가 특별히 요청했는데도, 대사제[1] [27]가야바의 집에서 예수의 적들과 약속을 지키려고 서둘러 갔다. 이것은 산헤드린의 비공식 회의였고, 그날 아침에 10시 조금 지나서 하도록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예수를 고발하는 데 쓰일 죄목들의 성질을 의논하고, 그들이 예수에게 이미 내린 사형 선고에 필요한, 국가의 확인을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로마 당국 앞으로 예수를 끌고 오는 데 어떤 과정을 이용할 것인가 결정하려고 이 회의가 소집되었다.

177:4.2 (1924.6) 전날에 유다는 친척들 중 몇 사람에게, 그리고 아버지 가족 중에 어떤 사두개인 친구들에게, 예수가 좋은 의도를 가진 몽상가요 이상주이자이기는 해도, 이스라엘이 기대하던 구원자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털어놓았다. 유다는 그가 그 운동 전체에서 품위 있게 물러나는 어떤 길을 찾아내기를 몹시 바란다고 진술했다. 친구들은 그의 사퇴가 큰 사건으로서 유대 권력자들의 갈채를 받으리라, 무엇을 그에게 해주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고 치켜세우며 확신을 주었다. 그가 산헤드린으로부터 당장에 큰 영예를 받으리라, 그가 뜻은 좋았어도, “배우지 못한 갈릴리 사람들과 유감스러운 관계”를 가졌던 낙인(烙印)을 드디어 지워버릴 처지에 있으리라고 그가 믿게 만들었다.

177:4.3 (1924.7) 유다는 주의 막강한 일들이 악마 왕의 힘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진실로 믿을 수 없었지만, 이제 예수가 자신을 크게 보이려고 그의 권능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충분히 확신했다. 예수가 유대 권력자들이 그를 죽이도록 버려둘 것이라고 마침내 유다는 확신하였고, 그는 실패한 운동과 한편이었다는 창피스러운 생각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주의 든든한 인격과 그 당당하고 자비로운 정신, 날카로운 정신을 속속들이 이해하였다. 그래도, 예수가 좋은 뜻을 가진 광신자이지만 아마도 정말로 멀쩡한 정신이 아니었다, 언제나 이상하고 오해받는 사람으로 보였다고, 친척들 가운데 한 사람이 제안한 것을 얼마큼 생각해 보면서 유다는 마음이 기뻤다.

177:4.4 (1925.1) 이제, 전과 달리, 유다는 예수가 그에게 크게 명예로운 자리를 한번도 배정해 주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자신이 분개하게 되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태까지 사도들의 회계(會計)라는 명예를 고맙게 여겼지만, 이제 그의 진가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고 비로소 느꼈다. 그는 예수와 가까운 관계를 가지는 영예를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이 받은 것에 갑자기 분개심으로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이때 대사제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수를 배반하려는 어떤 생각에 관심이 있기보다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에게 앙갚음을 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로 그때, 새롭고 지배하는 생각이, 의식하는 그의 머리 속에서 앞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명예를 얻는 데 착수했고, 이것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실망을 안겨주었던 자들에게 복수(復讐)하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면, 더군다나 좋다. 혼란ㆍ자만심ㆍ절망ㆍ결심이 끔찍하게 뭉쳐서 그를 꽉 붙들었다. 그래서 그때 유다는 예수를 배반하는 일을 주선하려고 가야바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고, 이는 돈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177:4.5 (1925.2) 가야바의 집으로 다가가면서, 유다는 예수와 동료 사도들을 저버리겠다고 마침내 결심하였다. 이렇게 하늘나라 운동을 저버리기로 마음먹고 나서, 그가 처음에 예수와 하늘나라의 새 복음 편을 들었을 때, 언젠가 자기가 누릴 것이라 생각했던 명예와 영광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자신을 위하여 확보하려고 굳게 결심했다. 사도들이 모두 한때 유다와 함께 이런 포부를 가졌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진리를 찬미하기를 배우고, 적어도 유다보다 더, 예수 사랑하는 것을 배웠다.

177:4.6 (1925.3) 그의 사촌이 배반자를 가야바와 유대 권력자들에게 인사시켰고, 사촌은 유다가 예수의 미묘한 가르침에 자신이 미혹된 잘못을 발견했으므로, 그가 그 갈릴리 사람과 가졌던 관계를 대중 앞에서 정식으로 부인(否認)하기를 바란다고, 동시에 유대 형제들의 신뢰와 친교의 회복을 요청하려고 그 장소에 도착했다고 설명했다. 유다의 이 대변인은 이어서 설명했다: 예수가 체포된다면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하여 최선이라는 것을 유다가 인정한다, 그리고 그러한 그릇된 운동에 참여해 온 것을 후회한다는 증거로서, 또 이제 모세의 가르침으로 진지하게 돌아온다는 증명으로서, 예수를 체포하라는 명을 받은 지휘관과 주선할 수 있는 자로 자청하려고 그가 산헤드린으로 왔다. 이렇게 하면, 예수를 조용히 감금할 수 있고, 이처럼 민중을 소란하게 만드는 어떤 위험이나 또는 유월절이 지나기까지 그의 체포를 연기할 필요를 피한다.

177:4.7 (1925.4) 사촌(四寸)이 말을 마치자, 그는 유다를 인사시켰고, 유다는 앞으로 대사제 가까이 걸어가서 말했다: “내 사촌이 약속한 모든 것을 내가 하리이다. 그러나 이 수고의 대가로 나에게 무엇을 기꺼이 주시겠나이까?” 모질고 자만심이 대단한 가야바의 얼굴에 비쳤던, 경멸하고, 아니 메스꺼워하는 그 얼굴빛을 유다는 헤아리지 못하는 듯했다. 그의 마음은 자기 영광에, 그리고 자찬(自讚)하는 만족감을 몹시 바라는 생각에 너무 팔려 있었다.

177:4.8 (1926.1) 그러자 가야바는 배반자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유다야, 너는 경비대의 지휘관에게 가서, 네 주를 우리에게 오늘 밤이나 내일 밤에 데려오도록 그 장교와 주선하여라. 네가 그를 우리 손에 넘기고 나서, 너는 이렇게 수고한 데 대하여 보상을 받을지니라.” 이 말을 듣자, 유다는 주사제와 권력자들이 있는 앞에서 나가서, 성전 경비원들의 지휘관과 함께 예수를 어떤 방법으로 체포할까 의논했다. 유다는 예수가 그때 캠프에서 자리를 비웠음을 알았고 그날 저녁에 언제 그가 돌아올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날(목요일) 저녁에, 예루살렘의 사람들과 방문하는 순례자들이 모두 밤을 지내려고 물러간 뒤에 예수를 체포하자고 자기들끼리 합의를 보았다.

177:4.9 (1926.2) 유다는 여러 날 동안 맛보지 못했던 위엄과 영광을 누릴 생각에 황홀한 채로 캠프에 있는 동료들에게 돌아왔다. 그는 언젠가 새 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예수 편에 뛰어들었다. 그는 전에 예상했던 것과 같은 새 왕국이 없으리라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새 나라에서 영광을 얻지 못하여 실망한 것을 옛 체제에서 명예와 보상을 즉시 얻는 일과 바꾸도록 그렇게 현명했던 것이 기뻤다. 그는 이제 이 옛 체제가 살아남으리라고 믿었고, 옛 체제가 예수와 그가 대표하는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라 확신했다. 의식(意識)하면서 의도한 마지막 동기를 볼 때, 유다가 예수를 저버린 것은 이기적인 도망자의 비겁한 행위였고, 그가 오로지 생각한 것은 그의 행위가 주와 옛 동료들에게 무슨 결과를 가져오든 상관 없이, 자신의 안전과 영광을 얻는 것이었다.

177:4.10 (1926.3) 그러나 늘 바로 그랬다. 유다는 머리 속에 점점 쌓이는 고의적이고 끈질기고, 이기적이고 복수심 가득한 이 의식에 오랫동안 빠져 있었고, 복수하고 불충하려는 욕망, 사람을 미워하는 이 악한 욕망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다. 다른 사도들을 사랑하고 믿은 것처럼 예수는 유다를 사랑하고 믿었지만, 유다는 그에 보답하여 충실하게 신뢰하는 태도를 기르고 진심으로 사랑함을 체험하지 못했다. 그리고 일단 자아(自我)의 추구에 온통 집착하며, 음침하고 오랫동안 억눌렀던 복수심이 포부를 극도로 자극했을 때, 그 포부는 얼마나 위험하게 될 수 있는가! 어리석은 사람들의 일생에서 실망은 얼마나 사람을 짓밟는가! 이들은 세월 속에 그림자 같고 하루살이 같은 흥미거리에 눈독을 들이면서, 신성한 가치와 참된 영적 실체들이 있는 영원한 세계에서 영구한 업적을 얻는, 더 높고 참다운 성취를, 눈이 멀어 바라보지 못한다. 유다는 머리 속에서 세상의 영예를 몹시 바랐고, 진심으로 차츰 이 욕구에 빠지게 되었다. 다른 사도들도 머리 속에서 마찬가지로 바로 이 세상의 명예를 몹시 바랐지만, 마음으로 예수를 사랑했고, 그가 그들에게 가르친 진리를 사랑하기를 배우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177:4.11 (1926.4) 이때 유다는 깨닫지 못했지만, 헤롯이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벤 뒤로 늘, 유다는 잠재 의식 속에 예수를 비판하는 사람이 되었다. 가슴 속 깊숙이, 유다는 예수가 요한을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늘 분하게 여겼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되기 전에 유다가 요한의 제자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미움이라는 옷을 입혀 자기 혼 속에 유다가 쌓아두었던 인간적 분개심과 가슴 아픈 실망이 쌓이고 쌓여서, 이제 어렴풋이 의식하는 머리 속에서 자리를 잘 잡았으며, 이것은 그가 형제들의 지지하는 영향을 일단 감히 벗어나고, 또한 동시에 예수의 적들의 영리한 암시와 미묘한 비웃음에 노출되었을 때 솟아나와서 그를 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유다가 하늘 높이 희망을 띄우고 예수가 이를 산산조각 내는 무슨 일을 하거나 말을 할 때마다, 유다의 마음 속에 모질게 분개했던 상처가 언제나 남아 있었다. 이 상처들이 늘어나자, 너무나 자주 상처 입은 그 마음은, 좋은 뜻을 가졌어도 비겁하고 자기 중심인 인물에게 이 씁쓸한 체험을 안겨준 사람에 대하여 모든 참 애정을 금방 잃어버렸다. 유다는 깨닫지 못했어도, 그는 비겁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쉽게 손 닿는 곳에 있는 듯 보였을 때, 예수가 비겁하여 아주 흔히 권력이나 영광을 붙잡기를 거절했다고 유다는 언제나 예수를 탓하고 싶어했다. 어떻게 한때는 진정했던 사랑조차, 실망과 질투와 오래 계속된 분개심을 통해서, 결국 실제로 미움으로 바뀔 수 있는가 필사 인간은 누구나 잘 안다.

177:4.12 (1927.1) 마침내 주사제와 장로들은 몇 시간 동안 편안히 숨을 쉴 수 있었다. 예수를 대중 앞에서 잡아들이지 않아도 되었고, 배신하는 동조자로 유다를 확보한 것은 과거에 아주 여러 번 했던 것처럼, 예수가 그들의 관할 구역에서 달아나지 않을 것을 보장했다.

5. 마지막 친교 시간

177:5.1 (1927.2) 수요일이었으니까 캠프에서 이날 저녁은 친교 시간이었다. 주는 풀이 죽은 사도들을 북돋아주려고 애썼지만, 거의 불가능했다. 뒤숭숭하고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사건들이 다가오고 있음을 모두가 비로소 깨달았다. 파란 많고 사랑으로 사귀었던 여러 해를 주가 하나하나 이야기했을 때에도 그들은 명랑해질 수 없었다. 예수는 모든 사도의 가족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물었고, 다윗 세베대를 향하여 둘러보며, 누가 자기 어머니나 막내 누이나 또는 자기 집안의 다른 식구로부터 요즈음에 소식을 들었는가 물었다. 다윗은 고개를 떨구고 자기 발을 내려다 보았다. 대답하기가 두려웠다.

177:5.2 (1927.3) 이때는 예수가 추종자들에게 군중의 지지(支持)를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계기였다. 여러 번 큰 무리의 사람들이 열심히 그들을 따라다니다가, 다음에 똑같은 열심으로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자기들이 예전에 믿고 생활하던 길로 돌아갔을 때 갈릴리에서 겪었던 체험을 주는 다시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서 말했다: “그래서 너희는 성전에서 우리의 말을 듣고 우리의 가르침을 믿는 듯이 보이던 큰 군중에게 속아넘어 가서는 안 되느니라. 이 군중은 진리를 듣고 머리 속에서 겉으로만 믿지만, 거의 아무도 진리의 말씀이 살아 있는 뿌리를 박아 가슴 속에 들어가게 두지 않느니라. 오직 머리로만 복음을 알고, 마음 속에서 복음을 맛보지 않은 자는 정말 어려움이 닥칠 때 지지할 것을 기대할 수 없느니라. 유대인 권력자들이 사람의 아들을 죽이겠다고 의견을 모았을 때, 그들이 한 마음으로 공격할 때, 너희는 군중이 절망에 빠져 달아나든지, 아니면 미치고 눈먼 이 권력자들이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들을 사형장으로 끌고 가는 동안 말없이 놀라서 구경만 하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그리고 나서 역경과 박해가 너희에게 닥칠 때, 너희가 보기에 진리를 사랑한다는 또 다른 사람들은 흩어지고, 더러는 복음을 부인하고 너희를 저버릴 것이라. 우리와 아주 가까웠던 어떤 사람들은 이미 저버리기로 작정하였느니라. 우리에게 이제 닥친 시절에 대비하여 너희는 오늘 쉬었느니라. 그러므로 바로 앞에 닥친 며칠을 위하여 너희가 힘을 얻도록 내일은 경계하고 기도하라.”

177:5.3 (1927.4) 캠프의 분위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긴장의 빛이 가득했다. 말 없는 사자들이 오고갔고, 오직 다윗 세베대와 의사(意思)를 통하였다. 그날 저녁이 지나기 전에, 더러는 나사로가 황급히 베다니에서 달아난 것을 알았다. 캠프로 돌아온 뒤에, 주의 곁에서 하루 종일 보냈는데도, 요한 마가는 불길하게 말이 없었다. 그가 말하게끔 설득하려고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예수가 그에게 입을 다물라고 이른 것을 가리켰다.

177:5.4 (1928.1) 명랑하고 보기 드물게 친근한 주의 태도조차 그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끔찍한 고립의 시절이 분명히 다가오고 있음을 모두가 느꼈고, 그런 일이 갑자기 와르르하며 피할 수 없이 무섭게 찾아오려 하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인가 다가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지만, 아무도 그 시험에 부닥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지 않았다. 주는 하루 종일 떠나 있었고, 그들은 주가 계시지 않아 엄청나게 서운했다.

177:5.5 (1928.2) 이 수요일 저녁은 주가 돌아가시는 바로 그 실제 시각까지 그들의 영적 지위에서 밑바닥을 기록했다. 비록 이튿날은 비극의 금요일이 하루가 더 가깝기는 했어도, 그래도 주는 그들과 함께 있었고, 그들은 초조한 시간을 더 품위 있게 견디었다.

177:5.6 (1928.3) 바로 한밤이 되기 전에, 땅에서 그가 택한 가족과 함께 푹 잠잘 마지막 밤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밤 동안 그들을 해산하면서 그는 말했다: “형제들아, 잠자러 가라, 그리고 아침에 우리가 일어날 때까지 평안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우리가 아들인 것을 아는 기쁨을 맛볼 날이 하루 더 있느니라.”

제 178 편 캠프에서 마지막 날

유란시아서

제 178 편

캠프에서 마지막 날

178:0.1 (1929.1) 예수는 이 목요일, 육체를 입고 육신화한 신의 아들로서 땅에서 자유로운 마지막 날을 사도들, 그리고 충성하고 헌신적인 몇 제자들과 함께 보내려고 계획했다. 이 아름다운 날 아침에 식사 때가 지난 뒤에 곧, 주는 캠프 위에, 조금 떨어진 곳에 한적한 장소로 그들을 데리고 갔고, 거기서 많은 새 진리를 가르쳤다. 예수가 그날 초저녁에 사도들에게 다른 강연을 했어도, 이 목요일 아침의 말씀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여, 캠프에 있는 사도들 및 선택된 제자들의 통합 집단에게 주신 작별 연설이었다. 열두 사도는 유다를 제외하고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베드로와 몇 사도는 유다가 자리에 없다고 한마디 했고, 더러는 예수가 어떤 문제를 돌보라고, 아마도 다가오는 유월절 축하의 세부를 주선하려고 그를 도시로 보냈다고 생각했다. 유다는 오후 중반까지, 예수가 마지막 만찬을 나누려고 열두 사도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가기 조금 전까지, 캠프로 돌아오지 않았다.

1. 아들 신분과 시민 자격에 대한 강연

178:1.1 (1929.2) 거의 두 시간 동안 예수는 신뢰하는 추종자들 약 50명에게 말씀하였고, 하늘나라와 이 세상의 나라들의 관계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 신분과 이 세상의 정부에서 얻는 시민 자격의 관계에 관하여, 스무 가지 질문에 대답했다. 질문에 대한 대답과 함께 이 강연은 현대의 말로 다음과 같이 간추리고 다시 표현해도 좋다:

178:1.2 (1929.3) 이 세상의 나라는 물질적이니까, 그 율법을 집행하는 데, 그리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무력을 쓰는 것이 필요함을 때때로 발견할지 모른다. 하늘나라에서 참 신자들은 무력의 사용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영에게서 태어난 하나님 아들들의 영적 단체이니까, 하늘나라는 오직 영의 힘으로 선포되어도 좋다. 이 과정의 차이는 신자들의 나라와 현세의 정부를 가진 나라들의 관계를 언급하며, 신자들의 사회 집단이 그들의 계층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다루기 힘들고 자격 없는 구성원을 징계하는 권리를 취소하지 않는다.

178:1.3 (1929.4) 영적 하늘나라에서 아들이 되는 것과 현세의 정부나 국가 정부에서 시민이 되는 것 사이에는 아무 모순이 없다. 케자의 것을 케자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신자의 의무이다. 어느 케자가 주제넘게 하나님의 특권을 빼앗고 영적 존경과 최고의 숭배를 그에게 바치라고 요구하는 일이 생기지 않으면, 하나는 물질적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이니까, 이 두 가지 조건 사이에 아무런 충돌이 있을 수 없다. 그러한 경우에 너희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그런 지상의 통치자들을 깨우치기를 추구하고 이 방법으로 그들이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인식하도록 인도하면서 오직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지상의 통치자에게 영적(靈的) 예배를 바치지 말고 땅에 있는 정부의 무력을 이용하지도 말아야 하며, 그러한 통치자들은 언젠가 영적 왕국의 사명을 촉진하는 일을 믿는 사람이 될지 모른다.

178:1.4 (1930.1) 진보하는 문명의 관점에서 볼 때, 하늘나라에서 아들 신분은 이 세상의 나라에서 이상적 시민이 되도록 너희를 도와야 하며, 이는 형제 정신과 봉사가 하늘나라 복음의 주춧돌인 까닭이다. 영적 나라에서 애정으로 부르는 것은 땅의 여러 나라에서, 믿지 않고 전쟁에 머리를 쓰는 시민의 미워하는 충동을 효과적으로 없애는 약이라는 것이 입증될 것이다. 그러나 어둠에 빠져 물질에 머리를 쓰는 이 아들들은 사회에 사심(私心) 없이 봉사를 베풀면서 너희가 그들에게 아주 가까이 가지 않는 한, 결코 너희의 영적 진리의 빛에 대하여 알지 못할 터이고, 그러한 사회 봉사는 개별 신자 각자의 생활 체험에서 영의 열매를 맺는 데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178:1.5 (1930.2) 물질적 필사 인간으로서 너희는 정말로 땅에 있는 나라의 시민이요, 너희는 좋은 시민, 하늘나라의 다시 태어난 영(靈) 아들이 되었으므로, 더군다나 좋은 시민이 되어야 한다. 믿음으로 깨우치고 영이 해방한 하늘나라 아들로서, 너희는 사람에 대한 의무와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두 가지 책임을 맡으며, 한편 너희는 셋째이자 신성한 의무, 즉 하나님을 아는 신자들의 형제 단체에 봉사하는 일을 자청하여 맡는다.

178:1.6 (1930.3) 너희는 현세의 통치자들을 숭배해서는 안 되고, 영적 나라를 진전시키는 일에 세상의 권력을 써서는 안 되지만, 신자와 불신자에게 똑같이 사랑으로 섬기는 올바른 봉사를 베풀어야 한다. 하늘나라 복음 속에는 힘찬 진리의 영이 거하며, 얼마 안 있어 나는 바로 이 영을 모든 육체에 퍼붓겠다. 영의 열매, 너희가 성실하게 사랑으로 베푸는 봉사는 어둠 속에 사는 종족들을 향상시키는 강력한 사회적 지레요, 이 진리의 영은 너희에게 힘을 몇 배 늘이는 지레 받침이 될 것이다.

178:1.7 (1930.4) 너희가 믿지 않는 국가 통치자들을 다룰 때 지혜를 나타내고 슬기로움을 보여라. 신중함으로 사소한 의견 차이를 없애고 하찮은 오해를 조정하는 데 솜씨가 있음을 스스로 보이라.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우주 통치자들에게 너희가 영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일에―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살려고 힘쓰라. 너희는 언제나 뱀처럼 지혜로워도 비둘기처럼 깨끗하라.

178:1.8 (1930.5) 하늘나라의 깨우친 아들이 되는 결과로서 너희는 속세의 정부에서 더욱 훌륭한 시민이 되어야 하며, 땅에 있는 정부의 통치자들도 이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결과로서 국가 사무에 더욱 훌륭한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 사람에게 사심 없이 봉사하고 하나님을 총명하게 예배하는 태도는 어떤 하늘나라 신자도 더욱 훌륭한 세계 시민으로 만들어야 하며, 한편 정직한 시민의 태도와 현세에 자기 사명에 성실하게 헌신하는 것은 그러한 시민이 하늘나라에서 아들이 되라는 영의 요청이 귀에 더 잘 들리게 만들도록 도움이 되어야 한다.

178:1.9 (1930.6) 땅에 있는 정부의 통치자들이 종교적 독재자의 권한을 행사하려고 하는 한, 이 복음을 믿는 너희는 오로지 어려움과 박해, 아니 죽음까지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너희가 지닌, 세상을 비추는 바로 그 빛, 너희가 이 하늘나라 복음을 위하여 고통받고 죽는 바로 그 자세(姿勢)조차도, 그 자체로서 궁극에 온 세상을 깨우치고, 정치와 종교를 차츰 분리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 하늘나라 복음을 그침없이 전파하는 것은 언젠가, 새롭고 믿을 수 없이 놀라운 해방, 지적(知的) 자유, 종교적 해방을 모든 나라에 가져올 것이다.

178:1.10 (1931.1) 이 기쁨과 해방의 복음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박해, 얼마 안 있어 다가오는 박해 밑에서 너희는 번성하고 하늘나라는 번영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늘나라 신자들을 좋게 이야기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많은 사람이 이름으로만 하늘나라 복음을 받아들이는 후세에 너희는 심각한 위험에 빠질 것이다. 평화와 번영이 있는 시절에도 하늘나라에 충성하기를 배우라. 안일(安逸)에 빠져 떠도는 너희 혼을 구하려고 고안된, 사랑으로 징계하는 거친 길로 너희를 인도하도록 너희를 감시하는 천사들을 유혹하지 말라.

178:1.11 (1931.2) 이 하늘나라 복음―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음으로 깨닫는 최상의 기쁨과 함께,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최고의 소망―을 전파하라고 너희가 위임받았음을 기억하라. 어떤 일이 있어도 이 한 가지 의무를 향한 너희의 헌신을 다른 데로 돌리도록 버려두면 안 된다. 사랑이 가득한 너희의 영적 봉사, 깨우침을 주는 지적 친교, 사람을 고결하게 하는 사회 봉사가 넘쳐 흘러, 온 인류가 이익을 얻게 하라. 그러나 이 인도적 수고 중에 아무것도, 어떤 그러한 수고도, 복음 선포(宣布)를 대신하도록 버려두면 안 된다. 이러한 힘찬 직무는 살아 있는 진리의 영으로 인하여, 그리고 영에게서 태어난 사람의 믿음이 영원한 하나님과 생생하게 친교함을 보장하는 것을 몸소 깨달음으로, 하늘나라 신자의 가슴 속에서 일어나는 더욱 힘차고 숭고한 봉사와 변화가 일으키는 사회적 결과이다.

178:1.12 (1931.3) 너희는 국가 정부의 힘으로, 또는 속세의 법률을 제정함으로, 진리의 선포나 정의(正義)의 실현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언제나 사람들의 생각을 설득하려고 수고해도 좋지만, 결코 감히 그들을 강제해서는 안 된다. 내가 긍정 형태로서 너희에게 가르친, 인간을 공평하게 대하는 대법칙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너에게 해야 한다고 바라는 일은 무엇이나 바로 그대로 그들에게 하여라.

178:1.13 (1931.4) 하늘나라를 믿는 자가 국가 정부에서 일하라고 요청받을 때, 그러한 정부에서 현세의 시민으로서 그렇게 봉사하여라. 하지만 그러한 신자는 국가에 봉사하면서, 필사 인간의 지성을 고귀하게 만드는 영원한 하나님의 깃드는 영이 함께 일하여 얻는 영적 깨우침으로 인하여 향상된 모습, 시민의 모든 그러한 보통 모습을 다 나타내야 한다. 불신자가 우수한 공무원으로서 자격을 갖출 수 있다면, 영적 교통과 사회 봉사, 이 두 가지 생명의 물이 모자라서 네 마음 속에 진리의 뿌리가 죽지 않았는가 너희는 심각하게 물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식은, 인격에 본래부터 있는 모든 능력을 북돋는 그러한 힘찬 자극제를 소유하게 된 모든 어른과 아이가 일생 동안 봉사할 때 활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178:1.14 (1931.5) 너희는 수동적 신비주의자나 핏기 없는 금욕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허구의 섭리가 생활 필수품마저 마련해 주기를 반듯이 누워서 기대하는 몽상가와 떠돌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잘못하는 필사자와 거래할 때 정말로 부드럽고, 무지한 사람과 교제할 때 참을성을 보이고, 도발이 있을 때 삼가야 한다. 그러나 너희는 또한 올바른 것을 용감히 방어하고 힘차게 진리를 선포해야 하며, 땅 끝까지라도 이 하늘나라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도해야 한다.

178:1.15 (1931.6) 이 하늘나라 복음은 살아 있는 진리이다. 그 복음은 반죽에 있는 누룩과 같고, 겨자의 씨앗과 같다고 너희에게 일러 왔으며, 이제 내가 선언하건대, 그 복음은 생물의 씨앗과 같으니, 대대로, 바로 그 살아 있는 씨앗으로 남아 있으면서, 새로운 표현으로 어김없이 자신을 펼치고, 뒤잇는 각 세대의 특이한 필요와 조건에 새롭게 적응하는 경로에서 쓸 만하게 자란다. 내가 너희에게 준 계시는 살아 있는 계시요, 그 계시(啓示)가 각 사람 안에, 각 세대에, 영적으로 성장하고 증가하고 적응하여 발전하는 법칙에 따라서, 적당한 열매를 맺기를 나는 바란다. 대대로 이 복음은 늘어나는 활력을 보이고, 더욱 깊은 영적 권능을 드러내야 한다. 그 복음을 기껏해야 신성한 기억, 나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가 지금 사는 시절에 대하여, 단순한 전통이 되도록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178:1.16 (1932.1) 그리고 잊지 말라: 우리는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의 인격이나 권한을 전혀 직접 공격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만 그들에게 새 빛을 내밀었고, 그들은 아주 힘차게 물리쳤다. 우리는 오직 그들이 가르치고 보호한다고 공언(公言)하는 바로 그 진리에 그들이 영적으로 충실하지 않는다는 비난으로 그들을 공격했다. 우리는 이 자리잡은 지도자와 인정받는 권력자들이 하늘나라 복음을 사람의 아들들에게 전파하는 것을 저희가 직접 발 벗고 나서 방해할 때에야 그들과 충돌했다. 지금도 우리가 그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죽이려 한다. 너희는 오로지 좋은 소식을 전하러 떠나라고 임명되었음을 잊지 말라. 너희는 예전의 방식을 공격하지 말고, 너희는 옛 관념 한가운데에 새 진리의 누룩을 솜씨 있게 심어야 한다. 진리의 영이 자신의 일을 하게 하라. 진리를 가벼이 여기는 자가 너희에게 강제할 때에만 논쟁하라. 그러나 외고집인 불신자가 너희를 공격할 때, 너희를 구원하고 거룩하게 만든 진리를 서슴지 말고 힘차게 방어하라.

178:1.17 (1932.2) 인생의 파란을 통하여 계속, 언제나 서로 사랑하기를 기억하라. 사람들과, 아니 불신자와도 다투지 말라. 심술궂게 너희를 악용하는 자에게도 자비를 보이라. 아버지 나라의 형제 단체에서 바로 너희가 충실한 시민이요, 마음 곧은 예술가, 칭찬할 만한 이웃, 헌신하는 친척, 이해하는 부모, 성실한 신자임을 보이라. 그리고 내 영이 이제, 세상 끝까지도 너희에게 다가오리라.

178:1.18 (1932.3) 예수가 가르침을 마쳤을 때, 거의 1시가 되었고, 그들은 즉시 캠프로 돌아갔는데, 거기서 다윗과 그 동료들이 그들을 위하여 점심을 준비해 두었다.

2. 점심 뒤에

178:2.1 (1932.4) 주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지 않은 사람이 아침 연설의 일부라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 가운데, 그리스인들이 가장 많이 알아들었다. 열한 사도조차 그가 미래에 생기는 정치적 국가, 그리고 뒤잇는 세대의 하늘나라 신자를 언급하는 데 어리둥절했다. 예수에게 가장 충실한 추종자들은 땅에서 그의 봉사의 끝이 임박한 것과 미래에 복음 활동이 연장됨을 이렇게 언급하는 것을 조화시킬 수 없었다. 이 유대인 신자들 가운데 더러는 땅에서 가장 큰 비극이 바야흐로 일어나려 하는 것을 비로소 감지했지만, 다가오는 그러한 재난에 대하여 밝은 얼굴로 무관심한 주의 개인적 태도나 아침 강연과 조화시킬 수 없었다. 그 강연에서 그는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그리고 땅에서 뒤이어 생기는 현세의 여러 나라에 대한 관계를 포함하여, 하늘나라에서 미래에 일어나는 일을 거듭 언급했다.

178:2.2 (1932.5) 이날 정오가 되자, 나사로가 황급히 베다니를 떠났다는 소식을 모든 사도와 제자가 들었다. 그들은 유대인 권력자들이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뿌리 뽑으려 하는 소름끼치는 결의를 비로소 느꼈다.

178:2.3 (1932.6) 다윗 세베대는 예루살렘에 있는 비밀 첩보원들의 수고를 통해서, 예수를 붙잡아 죽이려는 계획이 어떻게 진전되는가 충분히 정보를 받고 있었다. 이 음모(陰謀)에 유다가 무슨 역할을 했는지 모두 알았지만, 결코 이런 정보를 다른 사도나 어느 제자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점심 뒤에 얼마 있다가 그는 예수를 옆으로 이끌고, 대담하게 그가 알고 있는가 물었다―그러나 결코 물음을 더 잇지 못했다. 그의 손을 붙들고 그를 막으며 말했다: “그래, 다윗아, 나는 그에 대하여 모두 알고, 네가 안다는 것도 알지만, 너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하여라. 오직 하나님의 뜻이 끝에는 지배할 것을 마음 속에 의심하지 말라.”

178:2.4 (1933.1) 다윗과 가진 이 대화는 필라델피아에서 사자가 도착하여 중단되었는데, 그는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아브너가 들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야 하는가 묻는 말을 가지고 왔다. 이 주자는 아브너에게 전하는 이 말을 가지고 필라델피아를 향하여 서둘러 갔다: “네 일을 계속하라. 육체를 입고서 내가 너를 떠나면, 이는 오직 내가 영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라. 나는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나는 끝까지 너와 함께 하리라.”

178:2.5 (1933.2) 이때쯤 빌립이 주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주여, 유월절 시간이 가까워 옴을 아시니, 어디서 유월절 저녁을 먹기 위하여 우리가 준비하기를 바라시나이까?” 빌립의 물음을 듣자 예수는 대답했다: “가서 베드로와 요한을 데리고 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오늘 밤에 저녁 먹을 것에 관하여 너에게 지시하리라. 유월절에 관하여 말하면, 그것은 우리가 먼저 이 일을 마친 뒤에 네가 생각해야 하리라.”

178:2.6 (1933.3) 주가 빌립과 이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을 들었을 때, 유다는 그 대화를 엿들을까 싶어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가까이 서 있던 다윗 세베대는 걸어가서 유다를 대화에 끌어들였고, 한편 빌립ㆍ베드로ㆍ요한은 한쪽으로 가서 주와 이야기하였다.

178:2.7 (1933.4) 예수는 세 사람에게 말했다: “곧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문으로 들어가는 동안에 너희는 물주전자를 들고 있는 사람을 만나리라. 그가 너희에게 말을 걸겠고, 그리하면 그를 따라갈지니라. 그가 너희를 어떤 집으로 이끌 때, 그를 따라 들어가서 그 집의 선한 주인에게 물으라, ‘주가 사도들과 함께 저녁 먹을 손님 방이 어디 있나이까?’ 너희가 이렇게 묻고 나서, 이 집주인은 우리를 위하여 다 꾸며지고 준비된 큰 2층 방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178:2.8 (1933.5) 도시에 이르렀을 때, 사도들은 성문 가까이서 물주전자를 든 사람을 만나서 그를 따라 계속 요한 마가의 집으로 갔고, 거기서 소년의 아버지가 그들을 만나서 만찬을 위하여 준비된 2층 방을 보여주었다.

178:2.9 (1933.6) 그 전날 오후에 주와 요한 마가가 산에서 두 사람만 있을 때, 그들 사이에 합의한 결과로 이 모두가 일어나게 되었다. 예수는 사도들과 방해받지 않고, 이 마지막 식사를 한 번 꼭 함께 들고 싶어했고, 그들이 만나는 장소를 유다가 미리 안다면 유다가 적들과 그를 붙잡으려고 주선할지 모른다고 믿었기 때문에, 요한 마가와 몰래 이렇게 주선하였다. 이 방법으로 나중에 예수와 다른 사도들과 함께 일행이 되어 거기에 다다를 때까지, 유다는 그들이 어느 장소에서 만나는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

178:2.10 (1933.7) 다윗 세베대는 유다와 함께 처리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유다가 베드로와 요한과 빌립을 몹시 따라가고 싶었지만, 이를 쉽게 막았다. 유다가 다윗에게 식량을 구하라고 얼마큼 돈을 주었을 때, 다윗은 말했다: “유다야, 이런 판국에, 내가 실제로 돈이 필요하기 전에, 미리 조금 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잠깐 생각한 뒤에, 유다는 대답했다: “그렇구나, 다윗아, 그것이 현명하리라 생각된다. 사실은, 뒤숭숭한 예루살렘의 상황에 비추어 보건대, 내가 돈을 모두 너에게 넘기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 생각된다. 저희가 주를 적대하여 음모를 꾸미고, 내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경우에, 너는 방해받지 않을 것이라.”

178:2.11 (1934.1) 그래서 다윗은 사도들의 현금 모두와 저축한 모든 돈의 영수증들을 받았다. 다음 날 저녁이 되기까지, 사도들은 이러한 사무 처리에 대하여 전해 듣지 못했다.

178:2.12 (1934.2) 4시 반쯤 되어 세 사도가 돌아와서, 예수에게 만찬을 위하여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고 알렸다. 산길을 넘어 베다니 길까지 그리고 계속 예루살렘으로, 주는 열두 사도를 이끌려고 즉시 준비하였다. 이것이 열두 사도 모두와 함께 그가 마지막으로 길을 떠난 것이었다.

3.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

178:3.1 (1934.3) 겟세마네 공원과 예루살렘 사이에 기드론 골짜기를 거쳐 오가는 군중을 다시 피하려고, 예수와 열두 사도는 베다니로부터 도시로 이어지는 길을 만나려고 올리브산 서쪽 꼭대기를 넘어서 걸었다.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하여 말씀하려고 예수가 전날 저녁에 머물렀던 곳에 가까이 오자, 의식하지 못하고 멈추었고, 서서 말없이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조금 일찍 왔고, 해가 지기까지 그 도시를 지나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178:3.2 (1934.4) “앉아서 쉬라, 그동안에 머지 않아 무슨 일이 틀림없이 일어나는가 너희와 이야기하리라. 이 몇 해 동안 나는 형제처럼 너희와 함께 살았고, 하늘나라에 관한 진리를 가르치고 그 비밀을 너희에게 드러내었노라. 내 아버지는 정말로 땅에서 내 사명과 연관하여 많은 놀라운 일을 하셨느니라. 너희는 이 모든 것을 본 증인이었고, 하나님과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는 체험을 겪었느니라. 그리고 아버지가 내게 하라고 주신 일로 내가 머지 않아 돌아가야 한다고, 한동안 너희에게 경고한 것을 너희가 증거하리라. 하늘나라 일을 계속 수행하려고 너희를 세상에 두고 내가 떠나야 한다고 너희에게 분명히 일렀노라. 이 목적으로 가버나움의 산지에서 너희를 따로 세웠노라. 너희가 나와 함께 가졌던 체험을, 이제 너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려고 준비해야 하느니라. 아버지가 나를 이 세상으로 보낸 것 같이, 마찬가지로 나를 대신하고 내가 시작한 일을 마치라고 너희를 떠나보내고자 하노라.

178:3.3 (1934.5) “너희는 슬픔에 잠겨 저 건너 도시를 내려다보나니, 너희가 예루살렘의 종말을 이르는 내 말을 들었음이라. 그 멸망에 휩쓸려 너희가 죽고, 그래서 하늘나라 복음의 선포를 늦추지 않도록 내가 너희에게 미리 경고하였노라. 마찬가지로 저희가 사람의 아들을 붙잡으러 올 때, 너희가 쓸데없이 스스로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희에게 경고하노라. 나는 가야 하지만, 나사로가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알릴 수 있도록 사람들의 진노를 피해 달아나라고 지시한 것 같이, 내가 떠난 뒤에 이 복음을 증거하려고 너희는 남아 있어야 하느니라. 내가 떠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너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신의 계획을 꺾을 수 없느니라. 저희가 또한 너희도 죽이지 않도록 스스로 몸조심하라. 영의 힘으로 복음을 방어하는 데 너희 혼이 용감할지니라. 그러나 잘못된 생각으로 사람의 아들을 방어하려고 어떤 어리석은 짓도 하지 말라. 나는 사람의 손으로 어떤 방어도 필요 없고, 하늘의 군대가 지금도 가까이 있느니라. 그러나 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결심하였고, 따라서 우리에게 바로 금방 닥칠 것에 우리가 복종해야 하느니라.

178:3.4 (1934.6) “이 도시가 파괴되는 것을 너희가 볼 때, 항상 앞으로 나아가는 하늘나라에서, 아니 가장 높은 하늘에서, 끝없이 봉사하는 영원한 생명으로 너희가 이미 들어갔음을 잊지 말라. 너희가 알아야 하나니, 내 아버지의 우주와 내 우주 안에 많은 거처가 있고, 거기서 하나님이 지으신 도시들, 그리고 진리 속에서 올바름과 기쁨을 일생의 버릇으로 삼는 세계들을 드러내 보이려고 빛의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느니라. 나는 하늘나라를 이곳, 땅으로 너희에게 가져왔으나, 내가 선언하노니,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진리를 실제로 행함으로 거기에 남아 있는 너희 모두가 하늘 세계들로 분명히 올라가서 우리 아버지의 영 나라에서 나와 함께 앉을지니라. 그러나 너희는 먼저 몸을 가다듬고, 나와 함께 시작한 일을 마쳐야 하느니라. 너희는 먼저 많은 시련을 거치고 많은 슬픔을 견디어야 하며―이 시련이 이제도 우리에게 닥쳤나니―땅에서 내가 아버지의 일을 마쳤고 바야흐로 그의 품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 같이, 너희가 땅에서 너희 일을 마치고 나서, 나와 함께 기뻐할지니라.”

178:3.5 (1935.1) 말씀을 마치고 나서 주는 일어섰고, 모두 그를 따라 올리브산에서 내려가서 도시로 들어갔다. 어둠이 다가오는 속에서 좁은 거리를 따라 길을 가는 동안, 세 사람을 제외하고, 사도들 중에 아무도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군중이 그들을 밀쳤지만, 아무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가 택한 하늘나라 대사들과 함께, 필사자로 마지막 모임에 가는 길에 사람의 아들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지도 못했다. 사도들도 일행 중의 하나가 주를 적들의 손에 넘기려고 배반하는 음모에 이미 가담한 것을 알지 못했다.

178:3.6 (1935.2) 요한 마가는 그들을 도시 안으로 끝까지 따라갔고, 그들이 성문에 들어선 뒤에, 다른 길로 급히 달려가서, 그들이 도착했을 때 아버지의 집에서 그들을 반기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제 179 편 마지막 만찬

유란시아서

제 179 편

마지막 만찬

179:0.1 (1936.1) 이 목요일 오후에, 빌립이 주께 다가오는 유월절을 상기시키고 이를 축하할 계획에 관하여 물었을 때, 주는 이튿날, 금요일 저녁에 먹기로 되어 있는 유월절 저녁을 생각하고 있었다. 유월절 축하를 위한 준비를 전날 정오 이전에 시작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유대인이 해질 때 하루가 시작된다고 계산했으니까, 이것은 토요일의 유월절 저녁을 금요일 밤에, 자정이 되기 전 언젠가 먹을 것을 의미했다.

179:0.2 (1936.2) 그래서 사도들은 그들이 하루 일찍 유월절(逾越節)을 축하할 것이라는 주의 발표를 이해하지 못하고 온통 어리둥절했다. 그들은, 적어도 그들 가운데 더러는, 그가 금요일 밤에 유월절 저녁을 먹을 때가 되기 전에 자신이 체포될 것을 아시고, 따라서 이 목요일 저녁에 특별한 만찬을 하려고 그들을 한데 부른다고 생각했다. 더러는 이것이 단지 정식 유월절 축하에 앞서 있을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했다.

179:0.3 (1936.3) 사도들은 예수가 양이 없이 다른 해에 유월절을 지낸 적이 있음을 알았고, 그가 유대인 체제의 희생물을 바치는 어떤 예배에도 몸소 참석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는 여러 번 유월절 양고기를 손님으로서 먹은 적이 있었지만, 그가 주인일 때는 언제나 아무 양고기도 대접하지 않았다. 유월절 밤에 양고기가 빠진 것을 보았다 하더라도 사도들에게 큰 일이 아니었을 터이고, 이 만찬을 하루 일찍 베풀었으니까 그들은 양고기가 없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179:0.4 (1936.4) 요한 마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환영 인사를 받은 뒤에, 사도들은 즉시 2층 방으로 올라갔고, 그동안에 예수는 뒤에 남아서 마가의 가족과 이야기했다.

179:0.5 (1936.5) 주가 이 계제를 열두 사도하고만 축하하기로 미리 양해를 구했고, 따라서 그들에게 시중들라고 아무 종도 마련되지 않았다.

1. 우대를 받으려는 욕망

179:1.1 (1936.6) 요한 마가가 위층으로 안내했을 때, 사도들은 크고 널찍한 방을 보았는데, 이 방은 만찬을 위해 완벽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들은 식탁 한쪽 끝에 빵ㆍ포도주ㆍ물ㆍ약초가 모두 준비된 것을 지켜보았다. 빵과 포도주가 놓인 끝 부분을 빼고, 이 긴 식탁은 열세 개의 눕는 소파에 둘러싸여 있었고, 바로 그러한 것이 살림이 넉넉한 유대인 집에서 유월절을 축하하는 데 마련되었을 것이다.

179:1.2 (1936.7) 열두 사도가 이 2층 방으로 들어가자, 그들은 바로 문 안에, 먼지 묻은 발을 씻기 위한 물주전자ㆍ대야ㆍ수건들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아무 종도 이 시중을 들려고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요한 마가가 떠나자마자 사도들은 서로를 쳐다보기 시작했고, 저마다 마음 속에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누가 우리의 발을 씻을 것인가? 그리고 각자 마찬가지로, 자기는 다른 사람들의 종으로 이렇게 행동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179:1.3 (1937.1) 마음 속에 따지면서 거기 서 있는 동안, 그들은 식탁의 자리 배열을 둘러보았고, 주인이 앉는 높은 소파, 그 바른 쪽에 소파 하나, 그리고 주인의 바른 쪽에 둘째로 명예로운 이 자리의 맞은편까지, 식탁 둘레에 정돈된 소파 열한 개를 주목하였다.

179:1.4 (1937.2) 언제라도 주가 도착하기를 기대했지만, 그들은 자리에 앉아야 할지, 아니면 주가 와서 자리를 정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어찌할 줄 몰랐다. 그들이 망설이는 동안, 유다는 명예의 자리, 즉 주인의 왼편으로 걸어갔고, 거기서 우대받은 손님으로서 소파에 기댈 뜻을 표시하였다. 유다의 이런 행동은 즉시 다른 사도들 사이에 열띤 논쟁을 일으켰다. 유다가 명예의 자리를 덮치자마자, 요한 세베대가 다음으로 좋은 자리, 주인의 바른쪽 자리를 차지했다. 시몬 베드로는 유다와 요한이 좋은 자리들을 이렇게 차지한 것에 너무 화가 치밀어서, 다른 성난 사도들이 구경하는 동안, 식탁을 피해 돌아서 행진하듯 걸어, 가장 낮은 소파에, 자리 순서의 끝, 곧 요한 세베대가 선택한 자리의 바로 맞은 편에, 자리를 차지했다. 다른 사람들이 높은 자리들을 차지했으므로, 베드로는 가장 낮은 자리를 택하려고 생각했다. 형제들의 보기 딱한 자만심에 항의할 뿐 아니라, 예수가 와서 가장 낮은 자리에 그가 있음을 보았을 때, 그를 더 높은 자리로 부르리라, 이렇게 주제넘게 자신에게 명예를 돌리려는 자를 몰아낼 것이라는 희망으로 그렇게 했다.

179:1.5 (1937.3) 이렇게 가장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가 차자, 나머지 사도들은 자리를 골랐고, 모두 자리를 잡을 때까지, 더러는 유다 가까이, 더러는 베드로 가까이 앉았다. 이들은 U자 모양의 식탁 둘레에 다음 순서로 이 기대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주의 바른 편에 요한, 왼쪽에는 유다, 열심당원 시몬, 마태, 야고보 세베대, 안드레, 알패오 쌍둥이, 빌립, 나다니엘, 토마스, 시몬 베드로.

179:1.6 (1937.4) 이들은 한 관례를 축하하려고, 적어도 정신적으로 그렇게 하려고 함께 모였는데, 그 관례는 모세 이전에 시작되었고 조상이 에집트에서 노예였던 시절과 관계되었다. 이 만찬은 예수와 그들의 마지막 모임이요, 그러한 엄숙한 상황에서도 유다의 지휘 하에, 그들은 명예와 우대, 개인적 칭찬을 얻으려는 예전의 성향에 다시 한 번 무릎을 꿇게 되었다.

179:1.7 (1937.5) 주가 복도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아직도 성이 나서 서로 비난하느라고 바빴고, 실망의 빛이 얼굴에 서서히 떠오르는 동안, 주는 복도에서 잠깐 멈추었다. 아무 말 없이 주는 자기 자리로 갔고, 그들의 자리 순서를 고치지 않았다.

179:1.8 (1937.6) 발을 아직 씻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 그들은 이제 만찬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는데, 도저히 즐거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주가 도착했을 때, 충분히 감정을 자제하여 자기 느낌을 사람들 앞에서 삼가 표현하지 않았던 몇 사람이 품었던 생각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은 아직도 서로 가시 돋힌 말을 주고받기에 바빴다.

2. 만찬을 시작하다

179:2.1 (1937.7) 주가 그의 자리로 간 뒤에 몇 순간 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예수는 그들을 모두 돌아보고, 빙긋 웃어 긴장을 풀며 말했다: “나는 너희와 이 유월절 저녁을 먹기를 몹시 바랐노라. 내가 고통을 받기 전에 한 번 더 너희와 함께 식사하기를 바랐고, 내 때가 온 줄을 깨닫고 너희와 오늘 밤에 이 저녁을 먹으려고 주선하였으니, 내일에 관해서 말하면 우리가 모두 아버지의 손에 있는 까닭이요, 나는 아버지의 뜻을 집행하려고 왔노라. 이 세상으로 나를 보내며 하라 하신 일을 내가 마치고 나서, 아버지가 내게 주실 나라에서 너희가 나와 함께 앉을 때까지, 나는 너희와 함께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179:2.2 (1938.1) 포도주와 물을 섞은 뒤에, 그들은 잔을 예수에게 가져왔고, 그는 잔을 타대오의 손에서 받고서, 감사를 드리는 동안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감사 기도를 마치고 나서 말했다: “이 잔을 가져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너희가 잔을 들 때,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저녁이매, 내가 포도나무의 열매를 너희와 함께 다시 마시지 아니할 것을 깨달으라. 우리가 이런 식으로 다시 앉을 때, 이것은 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 있을 일이리라.”

179:2.3 (1938.2) 예수는 이렇게 사도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의 때가 왔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고, 땅에서 할 일이 거의 끝났음을 이해했다. 그가 아버지의 사랑을 땅에서 드러냈고 자비를 인류에게 보였다는 것, 그리고 그가 세상으로 온 그 목적을, 아니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능과 권한을 받는 일까지도 이루었다는 것을 주는 알았다. 마찬가지로, 그날 밤에 적들의 손에 그를 넘겨주려고 가룟 유다가 완전히 마음먹은 것을 알았다. 이 배반 행위는 유다가 한 일이었지만, 이는 또한 루시퍼와 사탄, 그리고 어둠의 왕 칼리가스티아를 기쁘게 했다는 것을 충분히 깨달았다. 자기를 육체적으로 죽게 만들려고 애쓴 자들이 두렵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그를 전복시키려던 자들도 두렵지 않았다. 주에게 오직 한 가지 걱정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택한 추종자들의 안전과 구원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모든 일을 그의 권한 밑에 두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서, 주는 이제 형제 사랑의 비유를 연출하려고 준비했다.

3. 사도들의 발을 씻다

179:3.1 (1938.3) 유월절의 첫 잔을 마신 뒤에, 주인이 식탁에서 일어나서 손 씻는 것이 유대인의 관습이었다. 식사하다가 나중에, 둘째 잔을 마신 뒤에, 마찬가지로 모든 손님이 일어나서 손을 씻었다. 주가 손씻는 예식의 절차를 한번도 지킨 적이 없음을 사도들이 알았기 때문에, 그들이 이 첫잔을 마신 뒤에, 그가 식탁에서 일어나서 말없이 물주전자와 대야와 수건이 놓여 있는 문 가까이 걸어갔을 때, 주가 무엇을 하실 생각인지 그들은 알고 싶어 궁금해졌다. 주가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지고 허리를 졸라매고, 발 씻는 대야 하나에 비로소 물을 붓는 것을 보자, 호기심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바로 얼마 전에 서로 발 씻어주기를 거절하고, 식탁에서 명예의 자리를 놓고 그렇게 보기 딱한 다툼에 말려들었던 이 열두 사람이 놀란 것을 상상해 보라. 그때 주가 사람이 앉지 않은 식탁 끝을 돌아서 그 잔치의 가장 낮은 자리, 시몬 베드로가 기대고 있던 자리까지 가서, 종의 태도로서 무릎을 꿇고, 시몬의 발을 씻으려고 준비한 것을 보았다. 주가 무릎을 꿇자, 열두 사람이 모두 하나 같이 벌떡 일어났다. 배반한 유다조차 한 순간 자신의 비행(非行)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경악과 존경과 순전한 놀라움을 이렇게 표현하는 동료 사도들과 함께 일어났다.

179:3.2 (1938.4) 시몬 베드로는 서서, 위로 올려다보는 주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예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태도는 시몬 베드로의 발을 씻을 생각이라는 것을 뚜렷이 나타냈다. 육체는 약했어도 베드로는 주를 사랑했다. 이 갈릴리 어부는 예수의 신성(神性)을 진심으로 믿고, 게다가 그런 믿음을 온전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처음으로 고백한 인간이었다. 그 뒤로 베드로는 주의 신다운 성품을 정말로 의심한 적이 없었다. 베드로가 마음 속에서 예수를 너무나 숭배하고 존중했으므로, 주가 거기에 무릎을 꿇고 자기 앞에서 비천한 종의 태도를 취하고, 노예가 하듯 그의 발을 씻겠다고 제안한다는 생각에 그의 혼이 의분을 느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내 주에게 말을 건넬 만큼 충분히 정신을 가다듬었을 때, 베드로는 동료 사도 모두가 가슴 속에 느끼고 있는 생각을 말했다.

179:3.3 (1939.1) 이렇게 크게 당황한 몇 순간이 지난 뒤에 베드로는 말했다: “주여, 당신은 정말로 내 발을 씻으실 생각이나이까?” 그리고 나서 베드로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예수는 말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네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가 하지만, 이제부터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意味)인가 네가 알게 되리라.” 그리고 나서 길게 숨을 들이쉬며 시몬 베드로는 말했다: “주여, 당신은 결단코 내 발을 씻지 못하나이다!” 그리고 예수가 이렇게 그들 앞에서 자신 낮추기를 허락하지 않겠다고 베드로가 굳게 선언하는 데 동의한다는 뜻으로 사도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179:3.4 (1939.2) 이 진기한 장면의 눈부신 호소력에 처음에는 가룟 유다조차도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허영심 가득한 그의 지능이 그 광경을 판단했을 때, 그는 이 겸손의 몸짓이 단지 예수가 결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하리라, 그리고 주의 운동을 그가 저버리려고 결정한 데 아무 잘못이 없음을 최종으로 증명하는 또 하나의 사건일 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179:3.5 (1939.3) 그들이 모두 숨을 죽이고 놀라서 거기 서 있자, 예수는 말했다: “베드로야, 내가 선언하노니, 내가 네 발을 씻지 아니하면, 내가 행하고자 하는 일에 네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으리라.” 예수가 계속해서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거기 있다는 사실과 함께, 이런 선언을 들었을 때, 베드로는 그가 존경하고 사랑했던 분이 바라는 대로 눈감고 말없이 순응하려고 결심했다. 주가 이렇게 시중들겠다는 제안을 연출한 데는 사람이 주의 일과 미래에 연결되는 것을 좌우하는 어떤 의미가 따라붙는다는 생각이 비로소 떠오르자, 시몬 베드로는 예수에게 그의 발을 씻게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그의 성미대로 성급히 말했다: “그렇다면, 주여, 내 발뿐 아니라 내 손과 머리도 씻어주소서.”

179:3.6 (1939.4) 베드로의 발을 비로소 씻으려고 준비하면서, 주는 말했다: “이미 깨끗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되느니라. 오늘 밤에 나와 함께 앉는 너희는 깨끗하지만―다는 아니라. 그러나 나와 함께 먹으려고 앉기 전에 너희는 발의 먼지를 씻었어야 하느니라. 게다가, 당장에 내가 너희에게 줄 새 계명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보여주려고, 비유로서 너희를 위하여 이 시중을 들고자 하노라.”

179:3.7 (1939.5) 같은 방법으로 주는 식탁을 돌아서 가며, 말없이, 유다도 빼지 않고, 열두 사도의 발을 씻었다. 열두 사도의 발 씻기를 마치고 나서, 예수는 외투를 걸치고, 주인의 자리로 돌아갔고, 어리둥절한 사도들을 돌아본 뒤에 말했다:

179:3.8 (1939.6)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정말로 이해하느냐? 너희는 나를 주라 부르고, 내가 그런 자이니, 너희가 그리 말하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 그렇다면, 주가 너희의 발을 씻었다면, 어찌하여 너희는 서로 발 씻어주기를 꺼려하느냐? 형제가 서로에게 해주기 꺼려하는 그 시중을 주가 아주 기꺼이 베푸는 이 비유에서 너희는 무슨 교훈을 받아야 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은 주인보다 크지 않으며, 파송받은 자는 그를 보낸 자보다 크지도 않으니라. 너희 가운데서 지낸 나의 생활 속에서 너희는 시중드는 길을 보았고, 인자하게 그렇게 시중드는 용기를 가질 너희는 복이 있도다. 그러나 영적인 나라에서 크게 되는 비밀은 물질 세계에서 권력을 얻는 방법과 같지 않음을 너희는 어찌하여 그리 더디게 깨닫느냐?

179:3.9 (1940.1) “내가 오늘 밤 이 방으로 왔을 때, 너희는 거만하여 서로 발 씻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누가 내 식탁에서 영예의 자리를 차지할까 너희끼리 말다툼에 빠져야 하는구나. 그러한 영예는 바리새인과 이 세상의 자녀들이 찾는 것이어늘, 하늘나라 대사들 사이에 그리해서는 안 되느니라. 내 식탁에는 우대받는 자리가 있을 수 없음을 너희가 모르느냐? 내가 남들을 사랑하는 것 같이 내가 너희 하나하나를 사랑함을 이해하지 못하느냐? 나와 가장 가까운 자리는, 사람들이 그런 영예를 간주하는 것처럼 하늘나라에서 너희가 가진 지위와 전혀 상관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느냐? 이방인의 임금은 그 백성 위에 군림하며, 한편 이 권한을 행사하는 자들을 때때로 후원자라고 부르는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을지니라. 너희 가운데 크고자 하는 자는 아래 사람이 될지니라.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는 자는, 시중드는 자처럼 될지니라. 누가 더 크냐, 식탁에 앉는 자이냐, 아니면 시중드는 자이냐? 식탁에 앉는 자를 보통 더 크게 여기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내가 시중드는 자로서 너희 사이에 있음을 너희가 지켜보리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너희가 나와 함께 기꺼이 동료 종이 되면, 미래의 영광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여전히 행하면서, 너희는 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 권력을 가지고 나와 함께 앉을지니라.”

179:3.10 (1940.2) 예수가 말씀을 마쳤을 때, 알패오 쌍둥이는 마지막 만찬의 다음 과정을 위하여, 쓴 나물과 마른 과일 반죽과 함께, 빵과 포도주를 가져왔다.

4. 배반자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

179:4.1 (1940.3) 몇분 동안 사도들은 말없이 먹었지만, 주의 명랑한 태도에 영향을 받아서 곧 대화에 끌려들었고, 오래지 않아서 이 특별한 계제에 즐거운 기분과 친목하는 분위기를 망칠 아무런 별난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식사가 진행되었다. 얼마큼 시간이 지난 뒤, 식사의 이 둘째 과정의 중간쯤에, 예수는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이 저녁 먹기를 얼마나 바랐는가 너희에게 일렀고, 어둠의 악한 세력이 사람의 아들을 죽이려고 모의(謀議)한 것을 아는 까닭에, 이 은밀한 방에서 유월절 하루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저녁을 먹으려고 결심하였으니, 내일 밤 이때쯤이 되어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할 것임이라.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너희에게 거듭 일렀노라. 이제 내 때가 다가왔으나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저버리고 적들의 손에 넘길 필요가 없었느니라.”

179:4.2 (1940.4) 열두 사도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발 씻는 비유와 뒤이은 주의 강연 때문에, 자기 주장과 자신감을 이미 많이 잃어버렸으므로 당황한 목소리로 망설이며 “내니이까?” 물으면서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모두가 이렇게 묻고 나자, 예수는 말했다: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이 필요해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너희 가운데 하나가 배반자가 될 필요는 없었느니라. 이는 혼을 다하여 진리를 사랑하지 못한 자의 가슴 속에 감추어진 악이 열매를 얻게 되는 것이라. 영적 패망을 앞서 가는 지적 자만(自慢)은 얼마나 거짓이 가득한고! 여러 해 동안 같이 하던 내 친구가, 지금 내 빵을 먹는 자가 지금도 나와 함께 접시에 손을 담그는 것 같이, 기꺼이 나를 저버릴 것이라.”

179:4.3 (1940.5) 예수가 이렇게 말씀하자, 모두 다시 묻기 시작했다: “내니이까?” 그리고 주의 왼편에 앉아 있는 유다가 다시 “내니이까?” 묻자, 나물 담긴 접시에 빵을 찍어 유다에게 주며 예수는 말했다: “네가 말했도다.” 그러나 남들은 예수가 유다에게 이르는 것을 듣지 못했다. 예수의 바른 편 쪽에서 의지하던 요한이 주에게 기대며 물었다: “누구이나이까? 맡긴 책임에 충실치 않은 것이 드러난 자가 누구인지 우리가 알아야 하나이다.” 예수는 대답했다: “이미 내가 너희에게 일렀으니, 적신 빵을 내가 그에게 주었노라.” 그러나 주인이 옆에, 왼쪽에 앉은 자에게 적신 빵 주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주가 아주 분명히 말했어도 아무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유다는 그의 행동과 관련된 주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가 따끔하게 의식했고, 형제들이 그가 배반자임을 이제 마찬가지로 알고 있지 않는가 두려워졌다.

179:4.4 (1941.1) 베드로는 그 말을 듣고 크게 흥분했고, 식탁 위로 몸을 기울이며, 요한에게 물었다. “그가 누구인가 주께 묻든지 또는 주가 네게 일렀으면, 누가 배반자인가 내게 이르라.”

179:4.5 (1941.2) 예수는 그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그치게 하면서 말했다: “이런 나쁜 일이 일어났으니 내가 슬프고, 이 시간까지도 진리의 힘이 악의 속임을 이길까 바랐으나, 진리를 진지하게 사랑하는 믿음이 없이 그런 승리를 얻지 못하느니라. 이번 우리의 마지막 만찬에 이런 일을 너희에게 이르지 않았을 터이나, 나는 이 슬픈 일에 대하여 너희에게 경고하고 그래서 우리에게 이제 닥친 일에 대하여 너희를 준비시키기를 바라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것을 이른 것은 내가 떠난 뒤에, 이 모든 나쁜 음모(陰謀)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었고, 나를 배반하는 일에 대하여 너희에게 미리 경고했음을 너희가 상기하기를 바라는 까닭이라. 그리고 내가 이 모두를 하는 것은 오직 바로 앞에 놓인 유혹과 시련에 대비하여 너희가 힘을 얻기 위함이라.”

179:4.6 (1941.3) 이렇게 말씀하고 나서, 예수는 유다를 향하여 몸을 기울여 말했다: “네가 하려고 마음먹은 것을 빨리 행하라.” 이 말씀을 듣자, 유다는 식탁에서 일어나서 황급히 방을 떠났고, 그가 성취하려고 계획했던 일을 해치우려고 어둠 속으로 나갔다. 예수가 그에게 말씀한 뒤에 유다가 서둘러 떠나는 것을 다른 사도들이 보았을 때, 그가 아직도 돈 자루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유다가 저녁을 위하여 무언가 더 사거나, 주를 위하여 어떤 다른 심부름을 하러 갔다고 생각했다.

179:4.7 (1941.4) 이제 예수는 유다가 배반자가 되는 것을 막으려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음을 알았다. 열두 사도와 함께 시작했는데―이제 열 하나가 남았다. 예수는 이 사도들 가운데 여섯을 골랐다. 그가 처음에 선택한 사도들이 지명한 사람들 가운데 유다가 있었는데, 그래도 주는 그를 받아들였고, 다른 사람들의 평화와 구원을 위하여 일한 것 같이, 바로 이 시간까지, 그를 거룩하게 만들고 구원하려고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일을 했다.

179:4.8 (1941.5) 관련된 다정한 여러 사건과 부드러운 손길과 함께, 이 저녁 식사는 그들을 저버리는 유다에게 예수가 마지막으로 호소한 것이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가장 세련된 방법으로 가장 친절한 정신으로 경고를 전했어도, 일단 사랑이 정말로 죽었을 때, 무릇 미움만 더하고 사람의 이기적 계획을 끝까지 수행하려는 악한 결심에 불을 붙일 뿐이다.

5. 기념 만찬을 선례로 만들다

179:5.1 (1941.6) 그들이 예수에게 셋째 포도주 잔, “축복의 잔”을 가져오자,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서 두 손에 잔을 쥐고, 이 말씀으로 축복하였다: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들고 마시라. 이것이 나를 기념하는 잔이 될지니라. 은총과 진리의 새 섭리 시대를 축복하는 잔이라. 이것은 너희에게, 신성한 진리의 영이 수여되고 봉사하는 상징이 될지니라. 아버지의 영원한 나라에서 새 모습을 입고서 너희와 함께 마실 때까지, 나는 너희와 함께 이 잔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179:5.2 (1942.1) 지극히 정중하게, 그리고 완전히 고요한 가운데 이 축복의 잔을 마시는 동안, 사도들은 모두 무엇인가 보통 아닌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옛 유월절은 조상들이 민족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서 개인의 자유를 얻은 것을 기념했다. 새 섭리 시대의 상징으로서, 이제 주는 새로운 기념 만찬을 선례로 만들고 있었는데, 이 섭리 시대에는 예식과 이기심의 사슬에 매였던 개인이 이를 벗어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해방된 믿음의 아들들이 형제로서 친교하는 영적 기쁨을 누린다.

179:5.3 (1942.2) 그들이 주를 기억하는 이 새 잔을 마시고 나서, 주는 빵을 들어, 감사를 드린 뒤에 여러 조각으로 만들어 그들에게 돌리라고 지시하며 말했다: “나를 기억하는 이 빵을 가져다 먹으라. 내가 생명의 빵이라고 내가 너희에게 일렀노라. 그리고 이 생명의 빵은 한 선물 안에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된 생명이라. 아들 안에서 드러난 것 같이, 아버지의 말씀은 정말로 생명의 빵이라.” 기념하는 빵을 먹고 나서 그들은 모두 자리에 앉았는데, 이 빵은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육신화된, 살아 있는 진리의 말씀을 상징하였다.

179:5.4 (1942.3) 이 기념 만찬을 선례로 만들 때, 언제나 버릇이었던 것 같이, 주는 비유와 상징을 이용했다. 후계자들이 그의 말씀에 정밀한 해석과 분명한 의미를 붙이기 어렵게 만드는 그런 방법으로, 어떤 큰 영적 진리를 가르치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는 상징을 이용했다. 이 방법으로 그는 뒤잇는 세대들이 그의 가르침을 형식화하고, 전통과 독단의 죽은 사슬로 영적 의미를 묶어놓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예수는 그의 전 생애의 사명과 관련된 유일한 예식, 즉 성찬(聖餐)을 선례로 만들면서, 몸소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의미를 제시하려고 고심하였다. 정밀한 공식(公式)을 만들어 놓고서 개인이 신과 교통하는 개념을 없애기를 원하지 않았고, 형식으로 그 개념을 단단히 묶어놓아 신자의 영적 상상력을 제한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새롭고 생생한 영적 자유의 날개, 즐거운 날개 위에 사람의 다시 태어난 혼을 해방시키려고 애썼다.

179:5.5 (1942.4) 주를 기억하는 이 새 성찬을 이처럼 제정하려고 주가 애썼는데도, 육체를 입었던 그 마지막 밤의 상징, 간단한 영적 상징이 엄밀한 해석으로 졸아들고 거의 수학처럼 정확히 정해진 공식에 지배되었기 때문에, 지나온 여러 세기 동안 그를 뒤따른 사람들은 그의 뚜렷한 소망이 실질적으로 좌절되도록 처리하였다. 예수의 모든 가르침 가운데, 아무것도 이보다 더 전통으로 표준화되지 않았다.

179:5.6 (1942.5) 이 기념 만찬은, 아들을 믿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먹을 때, 신이 자리에 계시다는 의미에 관한 곡해, 사람의 어떤 유치한 곡해도, 만찬의 상징과 관련지을 필요가 없으니, 이는 어떤 그러한 경우에도 주가 정말로 자리에 계시기 때문이다. 기념 만찬은 신자가 미가엘과 상징적으로 만나는 일이다. 너희가 이렇게 영을 의식할 때, 아들은 실제로 자리에 계시며, 그의 영은 아버지의 깃드는 분신(分身)과 사귄다.

179:5.7 (1942.6) 그들이 몇 순간 명상에 잠긴 뒤에, 예수는 말씀을 이었다: “너희가 이를 행할 때, 땅에서 너희 사이에 내가 살아 왔던 삶을 회상하고, 내가 너희와 함께 계속 땅에서 살고, 너희를 통해서 봉사하리라는 것을 기뻐하라. 개인으로서 누가 가장 클 것인가 너희끼리 다투지 말라. 너희는 다 형제 같이 되라. 하늘나라가 큰 무리의 신자들을 포함하도록 커질 때, 마찬가지로 위대하게 되려고 다투거나 그러한 집단들 사이에서 우대받기를 삼가야 하느니라.”

179:5.8 (1943.1) 그리고 이 위대한 행사는 한 친구의 2층 방에서 일어났다. 그 만찬이나 건물에 대하여 아무런 신성한 모습이나 예식으로 성스러워진 것이 없었다. 주를 기억하는 만찬은 교회의 인가(認可)가 없이 제정되었다.

179:5.9 (1943.2) 이렇게 기억의 만찬을 제정하고 나서, 예수는 사도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너희가 이 만찬을 들 때마다, 나를 생각하며 먹으라. 너희가 나를 기억할 때, 먼저 육체를 입고 산 내 일생을 돌이켜보고, 내가 한때 너희와 함께 있었음을 상기하라. 그리고 나서 믿음으로, 아버지의 영원한 나라에서 언젠가 너희 모두가 나와 함께 저녁 먹을 것을 헤아리라.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두고 가는 새 유월절, 아니 내 수여 생명,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라.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주는 사랑, 모든 육체에 내 진리의 영을 퍼부을 것을 기억하는 것이라.”

179:5.10 (1943.3) 그들은 모두 함께 시편 118편을 노래함으로, 새로운 기념 만찬을 창시하는 것과 연결하여, 오래된 이 유월절 축하를 피 흘리지 않고 마쳤다.

제 180 편 작별의 말씀

유란시아서

제 180 편

작별의 말씀

180:0.1 (1944.1) 마지막 만찬 끝에 시편을 노래한 뒤에, 사도들은 예수가 즉시 캠프로 돌아가려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사도들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주는 말했다:

180:0.2 (1944.2) “돈주머니나 지갑이 없이 너희를 떠나보내면서 너희가 아무 여벌 옷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충고까지 해준 때를 너희가 잘 기억하느니라. 그리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았던 것을 너희가 모두 회상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이제 어려운 시절을 만났고, 이제 더 군중의 호의(好意)에 기댈 수 없느니라. 이제부터, 돈주머니를 가진 자는 가지고 가라. 너희가 이 복음을 선포하러 세상으로 나갈 때, 최선으로 보이는 대로 너희를 부양하기 위하여 그런 식량을 준비하라. 나는 평화를 주려고 왔으나 평화는 한동안 나타나지 아니하리라.

180:0.3 (1944.3)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화롭게 될 때가 왔고, 아버지는 내 안에서 영화롭게 되리라. 친구들아, 나는 조금만 더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곧 너희가 나를 찾겠으나 나를 찾아내지 못하리니, 너희가 이때 갈 수 없는 곳으로 내가 갈 것임이라. 그러나 내가 지금 내 일을 마친 것 같이 너희가 너희 일을 땅에서 마치고 나서, 내가 지금 아버지께로 가려고 준비하는 것 같이, 너희가 그때 내게로 올지니라. 조금만 있으면 내가 너희를 떠나려 하고 너희는 땅에서 나를 더 만나지 못할 터이나 아버지가 내게 주신 나라로 너희가 올라갈 때, 다가올 시대에 너희가 다 나를 보리라.”

1. 새 계명

180:1.1 (1944.4) 격식 차리지 않은 대화가 몇 순간 있은 뒤에, 예수는 일어나서 말했다: “너희가 서로를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섬겨야 하는가 가리키는 비유를 너희에게 연출했을 때,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기를 바란다고 일렀으니, 내가 너희를 떠나려 하므로 이제 이를 하고자 하노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지시하는 계명을 너희가 잘 아느니라. 그러나 내 아이들 편에서 성실히 헌신하는 것에도 나는 온전히 만족하지 않노라. 믿는 형제 단체의 나라에서 너희가 더욱 큰 사랑의 행위를 연출하기를 내가 원하노라. 그래서 너희에게 이 새 계명을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이것으로, 너희가 이렇게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180:1.2 (1944.5) “내가 이 새 계명을 줄 때, 너희 혼에 어떤 새로운 짐도 지우지 아니하노라. 오히려 나는 너희에게 새 기쁨을 가져오고, 동료 인간에게 마음의 애정(愛情)을 주는 기쁨을 아는 데서 너희가 새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하노라. 너희와 너희의 필사 동료들에게 내 애정을 주면서, 비록 겉으로 슬픔을 견디어도 나는 바야흐로 최상의 기쁨을 맛보려 하노라.

180:1.3 (1944.6)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기를 부탁할 때, 너희 앞에 가장 많은 분량의 참된 애정을 제시하노니, 아무도 이보다, 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질 수 없음이라. 너희는 내 친구요, 너희에게 가르친 것을 기꺼이 행하기만 하면, 너희는 계속 내 친구가 되리라. 너희는 나를 주라 불러 왔어도 나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아니하노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 같이 너희가 오직 서로 사랑하고자 하면, 너희는 내 친구가 되겠고 아버지가 내게 드러낸 것에 관하여 내가 늘 너희에게 이르리라.

180:1.4 (1945.1) “너희가 나를 택했을 뿐 아니라 나도 또한 너희를 택했고, 내가 너희 가운데 살고 너희에게 아버지를 드러낸 것 같이, 너희 동료들에게 사랑으로 봉사하는 열매를 맺고자 세상으로 나가라고 너희를 세웠노라. 아버지와 내가 모두 너희와 함께 일하겠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내 명령에 복종하기만 하면, 너희가 신성하게 충만한 기쁨을 맛볼지니라.”

180:1.5 (1945.2) 너희가 주의 기쁨을 함께 하려고 하면, 너희는 그의 사랑을 함께 가져야 한다. 그의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너희가 그의 수고를 함께 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사랑의 체험은 너희를 이 세상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만들지 않는다. 새 세상을 만들어내지 않지만 아주 확실히 옛 세상을 새롭게 만든다.

180:1.6 (1945.3) 기억하여라: 예수가 요구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충성(忠誠)이다. 희생한다는 의식은 그러한 사랑으로 베푸는 봉사를 최고의 기쁨으로 만들었을 애정, 마음을 다한 그 애정이 없음을 뜻한다. 의무라는 관념은 너희가 종으로서 생각하고, 따라서 친구로서 친구를 위하여 너희가 봉사하는 힘찬, 떨리는 기쁨이 빠졌음을 가리킨다. 우정에서 생기는 충동은 의무에 관한 모든 확신을 뛰어넘으며, 친구를 위하여 친구가 베푸는 봉사는 결코 희생이라 부를 수 없다. 주는 사도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가르쳤다. 이들을 형제라 불렀고, 이제 떠나기 전에, 친구라고 부른다.

2. 포도나무와 가지

180:2.1 (1945.4) 그리고 나서 예수는 다시 일어나서 사도들을 계속 가르쳤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며, 아버지는 너희가 오직 많이 열매 맺기를 내게 요구하시니라. 오직 가지가 열매를 더 맺으라고 포도나무의 가지를 치느니라. 내게서 나오고 아무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마다 아버지가 잘라 버리리라. 열매를 맺는 가지마다 아버지는 더 열매 맺도록 깨끗하게 하시리라. 내가 이른 말씀을 통해서 너희가 이미 깨끗하여도 너희는 계속 깨끗해야 하느니라. 너희는 내 안에 살고 나는 너희 안에 살아야 하나니,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오면 죽으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와 같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 같이, 너희가 내 안에 살지 않으면 너희는 사랑의 봉사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기억하라,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살아 있는 가지이라. 내 안에 살고 내가 안에 사는 그런 사람은 영의 열매를 많이 맺고 이 영적 수확을 거두는 최고의 기쁨을 맛보리라. 나와 이렇게 생생한 영적 연결을 유지하면, 너희는 풍성한 열매를 맺으리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씀이 너희 안에 살면, 너희는 나와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나서 내 영이 뜻하는 무엇이나 너희가 요구하도록, 그리고 아버지가 우리의 간구(懇求)를 들어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 모든 일을 하도록, 살아 있는 내 영이 너희를 채울 수 있느니라. 아버지는 이렇게 영화롭게 되나니, 즉 포도나무에 살아 있는 가지가 많고, 가지마다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라. 세상이 열매 맺는 이 가지―내가 저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는 내 친구―들을 볼 때, 모든 사람이 너희가 참으로 내 제자인 줄 알리라.

180:2.2 (1945.5)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 것 같이, 나는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내가 아버지의 사랑 속에 사는 것 같이, 내 사랑 속에서 살라. 내가 가르친 대로 너희가 행하면,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켜 왔고 언제까지나 그의 사랑 속에 거한 것 같이, 너희는 내 사랑 속에 거할지니라.”

180:2.3 (1946.1) 메시아는 “다윗”의 조상들의 “포도나무에서 솟아나는 줄기”일 것이라 유대인은 오래 가르쳤고, 이 옛 가르침을 기념하는 뜻으로 포도와 그에 붙은 덩굴을 그린 큰 상징이 헤롯의 성전 입구를 장식했다. 주가 이날 밤, 2층 방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동안 사도들은 모두 이것들을 회상했다.

180:2.4 (1946.2) 그러나 기도에 관한 주의 결론이 잘못 해석된 뒤에 대단히 슬픈 일이 후일에 뒤이어 생겼다. 그의 말씀 그대로를 기억하고 나중에 충실히 기록했더라면, 이 가르침에 대하여 거의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이 만들어지는 동안에, 신자들이 궁극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일종의 최고의 마술로 여기게 되었고, 그들이 무엇을 구하든지 아버지로부터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여러 세기에 걸쳐 정직한 사람들이 이 걸림돌에 부딪쳐, 믿음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기도(祈禱)는 너희의 뜻을 이루는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순서, 어떻게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고 행하는가 배우는 체험이라는 것을 신자(信者)들의 세계가 깨닫는 데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인가? 이것이 온통 참말이니, 너희의 뜻이 참으로 그의 뜻과 일치되었을 때, 그 일치된 뜻에 따라 무엇을 상상하든지 너희가 요청할 수 있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포도나무의 생명이 살아 있는 가지로 흐르고 그 가지를 통해서 흐르는 것 같이, 그러한 일치된 뜻은 예수로 말미암아, 또 그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180:2.5 (1946.3) 신(神)과 인류 사이를 잇는 이 연결이 살아 있을 때, 인류가 이기적 편안과 허영심에 찬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생각없이 무지하게 기도한다면, 오직 한 가지 신의 응답이 있을 수 있다: 살아 있는 가지의 줄기에서 영의 열매가 더 많이, 더욱 열린다. 포도나무의 가지가 살아 있을 때, 가지가 어떤 간청을 하더라도 오직 하나의 대답이 있을 수 있으니, 포도를 더 맺는 것이다. 사실, 가지는 오로지 열매, 포도를 맺기 위하여 존재하며, 그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참된 신자는 오직 영의 열매를 맺는 목적으로 존재한다: 자신이 하나님에게 사랑받은 것 같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예수가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

180:2.6 (1946.4) 아버지의 징계하는 손을 포도나무에 댈 때, 가지들이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하여, 사랑으로 손을 댄다. 지혜로운 농부는 죽어서 열매 맺지 않는 가지만 쳐버린다.

180:2.7 (1946.5) 기도는 영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영에게서 태어난 신자들의 기능이라는 것을 사도들이 깨닫도록 이끄는 데도 예수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3. 세상이 적대함

180:3.1 (1946.6)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강연을 놓고 열한 사도가 토론을 그치자마자, 주는 더 말씀하고 싶다는 것을 가리키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니까 말씀하였다: “내가 너희를 떠난 뒤에 세상이 적대하는 것에 낙심(落心)하지 말라. 마음이 약한 신자들이 너희를 적대하고 하늘나라의 적들과 손을 잡을 때에도 실망하지 말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면, 세상이 미처 너희를 미워하기도 전에 나를 미워했음을 회상해야 하느니라. 너희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이 자체에 속한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가 그렇지 않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사랑하려 하지 않느니라. 너희는 이 세상에 있어도 너희의 인생은 세상과 같지 않아야 하느니라. 너희가 선택받은 이 세상에 대하여도, 또 다른 세계의 영을 대표하라고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을 항상 기억하라: 종이 주인보다 크지 아니하니, 저희가 감히 나를 박해하면 또한 너희를 박해하리라. 내 말이 불신자를 성나게 하면, 또한 너희의 말도 사악한 자를 성나게 하리라. 저희가 나도, 나를 보내신 이도 믿지 아니하므로, 저희가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마찬가지로 내 복음을 위하여 너희가 많은 고통을 받으리라. 그러나 너희가 이 시련을 견딜 때, 이 하늘나라 복음을 위하여 너희보다 앞서 내가 또한 고통받았음을 회상해야 하느니라.

180:3.2 (1947.1) “너희를 공격할 많은 사람이 하늘의 빛을 도무지 모르지만, 이제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 가운데 더러는 그렇지 않으니라. 우리가 저희에게 진리를 가르치지 않았다면, 정죄받지 않고서 저희가 이상한 일을 많이 할지 몰라도, 저희가 빛을 알고도 주제넘게 물리쳤은즉, 이제 저희는 그런 태도를 변명할 말이 하나도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내 아버지를 미워하며,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느니라. 받아들이면 너희를 구할 그 빛은 이를 알면서 물리쳤을 때 너희를 정죄(定罪)할 수밖에 없느니라. 이 사람들이 그렇게 끔찍히 나를 미워하다니, 내가 저희에게 무슨 일을 하였느냐? 땅에서 친교하고 하늘에서 구원받는 것을 저희에게 제안한 외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성서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그리고 저희가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였도다.’

180:3.3 (1947.2) “그러나 나는 너희만 세상에 두고 떠나지 아니하리라. 내가 떠난 뒤에 금방, 너희에게 돕는 영을 보내리라. 너희 가운데서 내 자리를 차지할 자, 너희에게 진리의 길을 계속 가르칠 자, 너희를 위로하기도 할 자를 너희가 받으리라.

180:3.4 (1947.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너희는 하나님을 믿으며 또한 계속하여 나를 믿으라. 비록 내가 너희를 떠나야 하더라도, 나는 너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의 우주에는 머무를 장소가 많이 있다고 너희에게 이미 일렀노라. 이것이 참말이 아니라면, 너희에게 이에 대하여 거듭 이르지 아니하였으리라. 이 빛의 세계들로, 아버지의 하늘에 있는 여러 정거장으로 내가 돌아가리니, 너희가 그리로 언젠가 올라가리라. 이 여러 곳으로부터 내가 이 세상으로 왔고, 하늘에 있는 구체들에서 아버지의 일을 하려고 이제 내가 돌아가야 할 때가 가까웠느니라.

180:3.5 (1947.4) “내가 이처럼 너희보다 먼저 아버지의 하늘나라로 가면, 이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필사 아들들을 위하여 준비된 곳에서 너희가 나와 함께 있도록, 내가 확실히 너희를 부르러 보내리라. 비록 내가 너희를 두고 떠나야 하더라도 나는 정신적으로 너희와 함께 있고, 더 큰 우주에 계신 내 아버지께로 내가 막 올라가려 하는 것 같이, 내 우주에서 너희가 내게로 올라왔을 때 궁극에 너희가 나와 함께 몸소 있게 될지니라. 너희가 충분히 알아듣지 못할지라도, 내가 너희에게 이른 것은 참이고 영원하니라. 나는 아버지께로 가고, 비록 너희가 지금 나를 따를 수 없을지언정, 너희는 다가오는 시대에 나를 분명히 따를지니라.”

180:3.6 (1947.5) 예수가 앉았을 때, 토마스가 일어나서 말했다: “주여, 우리는 당신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고, 그래서 물론 우리가 그 길을 알지 못하나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 길을 우리에게 보이신다면, 우리는 바로 오늘 밤에 당신을 따르리이다.”

180:3.7 (1947.6) 토마스의 말을 들었을 때, 예수는 대답했다: “토마스야, 내가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를 거치지 않고 어떤 사람도 아버지께로 가지 못하느니라. 아버지를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먼저 나를 발견하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아느니라. 그리고 너희가 나를 아나니, 너희가 나와 함께 살아 왔고 너희가 지금 나를 보는 까닭이라.”

180:3.8 (1947.7) 그러나 이 가르침은 많은 사도에게, 특히 빌립에게 너무나 깊었다. 나다니엘과 몇 마디 말한 뒤에, 빌립이 일어나서 말했다: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소서, 그리하면 당신이 말씀한 모든 것이 훤해지리이다.”

180:3.9 (1947.8) 빌립이 말을 마치자 예수가 말했다: “빌립아, 내가 너와 함께 그리 오래 있었거늘 그래도 지금도 네가 나를 모르느냐? 다시 내가 선언하노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그러면 어찌하여 네가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이소서 하고 말할 수 있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심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하는 말씀은 내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너희에게 가르치지 않았느냐? 나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말하고, 스스로 말하지 않노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내가 이 세상에 있고, 내가 그렇게 하였노라. 아버지는 내 안에 거하고 나를 통해서 일하시니라.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할 때, 나를 믿으라. 아니면 내가 산 바로 그 일생을 보고―행한 일을 보고―나를 믿으라.”

180:3.10 (1948.1) 물을 마셔 기운을 차리려고 주가 옆으로 가자, 열한 사도는 이 가르침을 놓고 열띤 토론에 들어갔고, 예수가 돌아와서 그들에게 앉으라고 손짓했을 때, 바로 베드로는 긴 연설을 시작하고 있었다.

4. 약속된 돕는 이

180:4.1 (1948.2) 예수는 이렇게 계속 가르쳤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나서, 땅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한 일을 아버지가 충분히 승인한 뒤, 내 영토의 마지막 통치권을 받은 뒤에, 아버지께 말씀드리리라: 땅에 내 아이들끼리만 두고 떠났으므로, 다른 선생을 보내는 것이 내 약속을 지키는 것이나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승인하실 때, 내가 모든 육체에게 진리의 영을 퍼부으리라. 이미 내 아버지의 영이 너희 마음 속에 있고, 이날이 다가올 때 너희가 지금 아버지를 지닌 것 같이 또한 나를 지니리라. 이 새 선물은 살아 있는 진리의 영이라. 불신자들이 처음에는 이 영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겠으나 빛의 아들들은 다 기쁘게, 진심으로 그를 받아들이리라. 너희가 나를 안 것 같이 이 영이 올 때 너희가 그를 알겠고, 너희는 마음 속에 이 선물을 받고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리라. 도움과 안내 없이 내가 너희를 두고 떠나려 하지 않음을 너희가 이처럼 깨닫느니라. 나는 너희를 외롭게 두고 떠나지 아니하리라. 오늘 나는 너희와 함께 몸으로만 있을 수 있노라. 다가오는 시절에 너희가 어디 있더라도, 그리고 너희 각자와 동시에, 내가 너희와 함께, 내가 있기를 바라는 모든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리라. 내가 떠나는 것이 더 좋은 것, 너희와 함께 더욱 좋게, 더욱 충만히 영으로 있도록 내가 육신의 모습으로 너희를 떠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180:4.2 (1948.3) “꼭 몇 시간 있으면 세상은 나를 더 바라보지 못하려니와 너희에게 이 새 선생, 진리의 영을 보낼 때까지도 너희는 가슴 속에서 계속 나를 알리라. 내가 몸으로 너희와 함께 살아 온 것 같이, 그때 나는 너희 안에서 살리라. 나는 영 나라에서 너희의 개인 체험과 하나가 되리라. 그리고 이 일이 일어났을 때,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의 생명은 내 안에 계신 아버지와 함께 숨어 있으나, 내가 또한 너희 안에 있음을 너희가 분명히 알리라.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지켰고, 너희는 나를 사랑했고 내 말을 지키리라. 내 아버지가 그의 영을 내게 나누어준 것 같이, 마찬가지로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나누어주리라.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내릴 이 진리의 영은 너희를 안내하고 위로하며, 궁극에 너희를 모든 진리로 이끌리라.

180:4.3 (1948.4) “지금도 우리 눈앞에 바로 닥친 시험을 견디기에 너희가 더 잘 준비될까 하여, 아직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런 일을 너희에게 이르노라. 이 새 날이 올 때, 아버지 뿐 아니라 아들이 너희에게 깃들리라. 아버지와 내가 땅에서, 바로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한 인격으로, 사람의 아들로서 일해 온 것 같이, 이 하늘의 선물들은 늘 하나가 다른 하나와 함께 일하리라. 이 영(靈) 친구는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모든 것을 너희가 기억하게 하리라.”

180:4.4 (1948.5) 주가 잠시 멈추자, 유다 알패오는 대중 앞에서 그나 그의 형제가 예수에게 일찍이 던진 몇 안 되는 질문 가운데 하나를 대담하게 던졌다. 유다가 말했다: “주여, 당신은 친구로서 언제나 우리 사이에 사셨나이다. 이 영으로 드러내는 외에, 당신이 자신을 이제 더 나타내지 않을 때,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알아보리이까? 세상이 당신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가 어떻게 당신에 관하여 확신하리이까? 당신이 어떻게 자신을 우리에게 보이시려 하나이까?”

180:4.5 (1949.1) 예수는 모두를 내려다보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귀여운 아이들아, 나는 떠나고 내 아버지께로 돌아가노라. 조금 있으면 너희가 여기서 보는 것처럼 살과 피로 된 나를 구경하지 못하리라. 얼마 안 있으면, 이 물질인 몸을 빼고, 나와 꼭 같은 내 영을 너희에게 보내리라. 이 새 선생은 너희 각자와 함께, 너희 마음 속에서 살 진리의 영이요, 그렇게 빛의 아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서로에게 이끌릴 것이라. 바로 이 방법으로 내 아버지와 나는 너희 각자의 혼 속에서 살 수 있고, 내가 지금 너희를 사랑하는 것 같이 서로 사랑함으로 체험을 겪으며 그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를 사랑하는 모든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서 또한 살 수 있느니라.”

180:4.6 (1949.2) 유다 알패오는 주가 무슨 말씀을 했는가 충분히 알아듣지 못했지만, 새 선생이 온다는 약속을 깨달았고, 안드레의 얼굴 표정으로부터 자기의 물음에 흡족한 대답을 받았음을 깨달았다.

5. 진리의 영

180:5.1 (1949.3) 신자들의 마음 속으로 예수가 보내겠다, 모든 육체에게 퍼붓겠다고 약속한 새 조력자는 진리의 영이다. 신이 주시는 이 재산은 진리의 글이나 율법이 아니요, 진리의 형태나 표현으로 작용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새 선생은 진리의 확신이요, 진정한 영 수준에서 참된 뜻을 의식하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 새 선생은 생생하고 성장하는 진리, 커지고 펼쳐지고 적응하는, 진리의 영이다.

180:5.2 (1949.4) 신성한 진리는 영이 알아보는 살아 있는 실체이다. 진리는 신성을 깨닫고 하나님과 교통함을 의식하는 높은 영적 수준에서만 존재한다. 너희는 진리를 알 수 있고, 진리를 실천할 수 있다. 너희는 혼 속에서 진리의 성장을 체험하고, 지성 속에서 진리를 깨우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 진리를 공식ㆍ법전ㆍ신조 또는 인간 행위의 지적 본보기 속에 가두어둘 수 없다. 신성한 진리를 인간이 공식(公式) 으로 만들려고 나설 때, 그 진리는 빨리 죽는다. 갇혀 있던 진리를 죽은 뒤에 건지는 것은 궁극에 기껏해야, 지적 분석으로 미화(美化)된 지혜를 특이한 형태로 실현하는 것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가만히 있는 진리는 죽은 진리요, 오직 죽은 진리만, 하나의 이론으로서 붙잡혀 있을 수 있다. 살아 있는 진리는 움직이며, 인간의 지성 속에서 오직 체험으로 존재할 수 있다.

180:5.3 (1949.5) 지능은 우주 지성의 계심으로 빛을 받는 물질 존재로부터 생겨난다. 지혜는 새로운 의미 수준까지 높아진 지식, 그리고 지혜 보조자의 우주 자질이 있음으로 활성화된 지식의 의식(意識)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리는 영을 부여받은 존재들만 맛보는 영적 실체 가치이며, 그런 존재들은 우주 의식의 초물질 수준에서 활동하고, 진리를 깨달은 뒤에, 자기 혼 안에서 활성화하는 그 영이 살고 군림하도록 허락한다.

180:5.4 (1949.6) 우주 통찰력을 가진 참된 사람은 모든 지혜로운 말씀 안에 생생한 진리의 영을 찾는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신에 도달하는 살아 있는 진리의 수준까지 항상 지혜를 높인다. 영적으로 전진하지 않는 혼은 그동안 내내, 살아 있는 진리를 죽은 수준의 지혜로, 단순히 격이 높아진 지식의 영토로 끌고 내려간다.

180:5.5 (1949.7) 진리의 영의 초인간 통찰력을 벗어 버렸을 때, 황금률은 높은 윤리적 행위 규칙에 지나지 않는다. 글자 그대로 풀이했을 때, 황금률은 사람의 동료를 크게 불쾌하게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황금률의 지혜를 영적으로 헤아리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머리 속에 있는 솔직한 진실 전부를 너희에게 털어놓기를 너희가 바라니까, 따라서 너희의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을 전부 솔직하게, 동료 존재들에게 털어놓아야 할 것이라고 너희가 추리할지 모른다. 황금률의 그러한 비영적 해석은 말할 수 없는 불행과 끝없는 슬픔을 가져올지 모른다.

180:5.6 (1950.1) 어떤 사람들은 황금률이 인간이 형제임을 순전히 지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라고 헤아리고 해석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 인간 관계의 표현을 인간 성품의 부드러운 느낌을 감정적으로 만족시키는 것으로 체험한다. 또 다른 필사자는 바로 이 황금률을 모든 사회 관계를 재는 자, 사회적 행위의 기준이라고 인식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황금률이 모든 친교 관계에 대해서, 최고의 도덕적 의무 개념을 이 표현에서 나타낸 선생, 위대한 도덕 선생이 내린 긍정적 명령이라고 본다. 그러한 도덕적 존재들의 일생에서 황금률은 그들의 모든 철학의 지혜로운 핵심이자 그 경계선이 된다.

180:5.7 (1950.2)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사랑하는 신자(信者) 단체의 나라에서, 이 황금률은 상급 수준에서 해석할 때 영적으로 실현하는 생생한 빛깔을 띠며, 그런 해석은 하나님의 필사 아들들로 하여금 주의 이 명령이, 신자가 그들과 접촉하는 결과로서 그 동료들이 가능한 최대의 이득을 얻는 방법으로 동료들과 상관하라고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으로 보게 만든다. 네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참된 종교의 본질이다.

180:5.8 (1950.3) 황금률의 가장 높은 실천과 가장 참된 해석은 그러한 신다운 선언의 실체, 오래가는 생생한 실체에 담긴 진리의 정신을 의식하는 데 있다. 이 우주 관계의 규칙이 가진 참된 우주 의미(意味)는 오로지 그 영적 실천에서, 아들의 영이 필사 인간의 혼에 깃드는 아버지의 영에게 행동 법칙을 풀이할 때 드러난다. 영의 인도를 받는 그러한 필사자는 이 황금률의 참된 의미를 깨달을 때, 친근한 우주에서 사는 시민이라는 확신을 넘치도록 얻는다. 영 실체에 관한 그들의 이상(理想)은, 예수가 우리 모두를 사랑한 것 같이 동료들을 사랑할 때에야 만족되며,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것의 실체이다.

180:5.9 (1950.4) 신성한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마다 그 개인의 요건과 능력에 따라서 때에 맞게 조절하고 우주에 맞게 적응시킬 수 있는 바로 이 철학을 먼저 파악해야,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주의 가르침과 습관을 너희가 적절히 이해하기를 바랄 수 있다. 주의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영적 선언이다. 그의 철학이 물질 면에서 함축하는 것조차 그 영적 상관 관계와 따로 고려하는 것은 유익할 수 없다. 주의 권고에 담긴 정신은 우주에 대하여 온갖 이기적(利己的) 반응으로 저항하지 않는 데 있고, 아울러 하나님을 알고, 갈수록 더 그를 닮기 위하여, 참된 영적 가치―신성한 아름다움, 무한한 선, 영원한 진리―의 올바른 수준에 적극적ㆍ점진적으로 도달하는 것이다.

180:5.10 (1950.5) 사랑, 사심(私心)없는 마음은, 진리의 영이 인도하는 대로, 여러 관계를 항상 때에 맞게 다시 적응하는 해석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 사랑은 사랑받는 개인이 우주에서 얻는 가장 높은 이익에 관하여 항상 변하고 확대되는 개념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사랑은 더 나아가서, 영의 인도를 받는 한 필사자가 우주의 다른 시민들을 사랑하는 관계, 성장하는 생생한 관계에 혹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모든 다른 사람에 관하여, 바로 이 태도를 가진다. 현재의 잘못된 환경, 그리고 신성한 운명, 즉 완전에 이르는 영원한 목표, 이 두 가지에 비추어서, 이렇게 때에 맞게 사랑의 적응 전체가 이루어져야 한다.

180:5.11 (1950.6) 그래서 황금률도 무저항의 가르침도 결코 신조나 교훈으로서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뚜렷이 인식해야 한다. 오직 실천함으로, 진리의 영이 실천으로 해석하는 그 의미를 깨달음으로 이것들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영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사랑으로 접촉하라고 지시한다.

180:5.12 (1951.1) 이 모두가 옛 종교와 새 종교의 차이를 뚜렷이 가리킨다. 옛 종교는 자아의 희생을 가르쳤고, 새 종교는 오로지 사회 봉사와 우주에 대한 이해가 통합되어, 자아 잊어버리기, 곧 향상된 자아 실현을 가르친다. 옛 종교는 두려움을 의식함으로 자극을 받았고, 하늘나라의 새 복음은 진리의 확신, 영원하고 보편적 진리의 정신에 지배된다. 그리고 아무리 경건하거나 교리에 충성함을 보여도, 하늘나라 신자의 생활 체험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영에게서 태어난 아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자연스럽고 너그럽고 진지한 바로 그 친절이 빠진다면 이를 보상할 수 없다. 전통도, 형식으로 예배하는 예식(禮式) 체제도, 사람이 동료에 대하여 진정한 동정심이 모자라는 것을 메울 수 없다.

6. 떠나야 할 필요

180:6.1 (1951.2)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과 마태가 주께 수많은 질문을 던진 뒤에, 주는 작별 강연을 계속하여 말씀했다: “너희에게 닥치고 있는 것을 위하여 준비되어 심각한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떠나기 전에 이 모든 것에 관하여 너희에게 이르노라. 권력자들은 단지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경고하노니, 너희를 죽이는 자가 하나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가까워 오느니라. 이 모든 것을 저희가 너희에게, 그리고 너희가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자들에게 행하리니, 저희가 아버지를 모르는 까닭이라. 저희는 나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함으로, 아버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느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나의 새 계명을 너희가 지켜 왔다면, 너희를 물리칠 때 저희는 나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것이라. 내가 모든 것을 알았다는 것을 너희가 알고,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너희가 온갖 고통을 겪는 가운데 내 영이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것을 알고서, 내 때가 지금 온 것 같이 너희의 때가 올 때, 너희가 힘을 얻도록 내가 이런 일에 관하여 너희에게 미리 이르노라. 이 목적을 위하여, 맨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아주 분명히 일렀노라. 사람의 적은 집 안에 있는 적일지 모른다고 너희에게 경고까지 한 적이 있노라. 비록 개별 신자의 혼에 어김없이 큰 평화를 가져왔을지라도, 이 하늘나라 복음은 사람이 기꺼이 내 가르침을 진심으로 믿기까지,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버릇을 기꺼이 필사 일생을 사는 주요 목적으로 만들 때까지, 땅에서 평화를 가져오지 아니하리라.

180:6.2 (1951.3) “내가 아버지께로 가려 할 때가 온 것을 알고서, 내가 너희를 떠나매, 너희 가운데 아무도 어찌하여 우리를 떠나시나이까? 하고 묻지 않아서 내가 놀라노라. 그런데도 너희가 마음 속에 그리 묻는 것을 내가 아노라. 친구로서 친구에게,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이르리라.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정말로 유익하니라. 내가 떠나지 않으면, 새 선생이 너희 마음 속에 올 수 없느니라. 너희 혼 안에서 살고 너희 영을 진리로 이끌 이 영(靈) 선생을 보낼 수 있기 전에, 나는 이 필사의 몸을 벗고 하늘에 내 자리로 되돌아가야 하느니라. 그리고 내 영이 너희에게 깃들려고 올 때, 그는 죄와 올바름의 차이를 비추고, 이것들에 관하여 너희가 마음 속에서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게 하리라.

180:6.3 (1951.4) “나는 너희에게 아직 할 말이 많아도 바로 지금 너희는 더 견딜 수 없느니라. 하지만 그가, 진리의 영이 올 때, 너희가 내 아버지의 우주에서 여러 거처를 지나가는 동안, 궁극에 너희를 모든 진리에 이르기까지 안내하리라.

180:6.4 (1951.5) “이 영은 스스로 말하지 않을 터이나 아버지가 아들에게 드러낸 것을 너희에게 선언하고, 다가올 것들을 너희에게 보이기까지 하리라. 내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 것 같이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이 영은 나에게서 솟아나고, 나의 진리를 너희에게 드러내리라. 아버지가 이 영토에서 가진 모든 것이 이제 내 것이요, 그런즉 이 새 선생이 내 것을 취하여 너희에게 드러내리라 내가 일렀노라.

180:6.5 (1952.1) “조금만 있으면 내가 잠시 동안 너희를 떠나리라. 그 뒤에 너희가 다시 나를 볼 때, 나는 이미 아버지께로 가는 도중이겠고, 그래서 그때에도 너희가 나를 보는 것은 오랫동안이 아니리라.”

180:6.6 (1952.2) 그가 한 순간 멈춘 동안, 사도들은 서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가 우리에게 이르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 ‘조금만 있으면 내가 너희를 떠나리라’ 그리고 ‘너희가 나를 다시 볼 때, 이는 오랫동안이 아니리니,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도중일 것임이라.’ ‘조금 있으면’과 ‘오랫동안이 아니라’는 말로 그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느냐? 그가 우리에게 이르는 것을 알 수 없구나.”

180:6.7 (1952.3) 그들이 이렇게 물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는 말했다: “조금 있으면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너희가 나를 다시 볼 때,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도중일 것이라 하였을 때 내가 무엇을 의미하였는가 너희끼리 묻느냐? 사람의 아들이 죽어야 하나, 다시 살아나리라고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일렀노라. 그러면 내 말의 뜻을 너희가 헤아릴 수 없느냐? 너희는 처음에 슬프게 되겠으나, 나중에 이 일이 일어난 뒤에 이를 이해하는 많은 사람과 함께 너희가 기뻐하리라. 여자는 산고(産苦)를 겪는 시간에 정말로 슬퍼해도 일단 아이를 낳으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알고 기뻐하는 가운데 자기의 고통을 즉시 잊어버리느니라. 마찬가지로 내가 떠나는 것을 너희가 슬퍼하려 하지만 나는 곧 너희를 다시 보리라. 그때 너희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겠고,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는 새 계시가 너희에게 오리라. 죽음을 이기는 바로 이 생명의 계시 속에 모든 세상들이 복을 받으리라. 이제까지 너희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온갖 요청을 드렸느니라. 너희가 나를 다시 본 뒤에, 너희는 또한 내 이름으로 구하여도 좋고, 그리하면 내가 너희 말을 들으리라.

180:6.8 (1952.4) “나는 여기 땅에서 속담(俗談)으로 너희를 가르쳐 왔고 비유로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내가 그리한 것은 너희가 영적으로 겨우 어린아이인 까닭이라. 그러나 아버지와 그의 나라에 관하여 너희에게 분명히 말할 때가 오고 있느니라. 바로 아버지가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에게 더 충만히 계시되기를 바라므로, 내가 이것을 하리라. 필사 인간은 영 아버지를 볼 수 없고, 따라서 아버지를 너희 사람의 눈에 보여주려고 내가 세상으로 왔노라. 그러나 너희의 영이 완전히 성장했을 때, 그때 너희는 바로 아버지를 볼지니라.”

180:6.9 (1952.5) 주의 말씀을 듣고 나서, 열한 사도는 서로 말했다: “보라, 그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는도다. 분명히 주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느니라. 그러나 어째서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하시느냐?” 그들이 아직까지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음을 예수는 알았다. 이 열한 사람은 오래 간직했던 관념, 유대인 메시아의 개념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이 예수가 메시아라고 단단히 믿으면 믿을수록, 땅에 있는 나라가 영화롭게 물질적으로 승리한다는 뿌리 깊은 개념은 갈수록 더욱 문제가 되었다.

제 181 편 마지막 훈계와 경고

유란시아서

제 181 편

마지막 훈계와 경고

181:0.1 (1953.1) 열한 사도에게 작별의 강연을 마치고 나서, 예수는 격식을 차리지 않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집단으로서 또 개인으로서 그들의 관심을 끄는 여러 체험을 이야기했다. 친구인 선생이 그들을 떠나려 한다는 생각이 마침내 이 갈릴리 사람들에게 분명해지기 시작했고, 그들은 조금 있으면 그가 다시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다시 오시는 일이 또한 잠시 동안이라는 것을 쉽게 잊어버렸다. 사도와 주요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잠시 동안 (부활과 승천 사이의 짧은 기간에) 돌아온다는 이 약속이 예수가 아버지를 잠깐 찾아보려고 방금 떠나고 그 뒤에 하늘나라를 세우려고 돌아올 것을 가리킨다고 정말로 생각했다. 그의 가르침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선입관, 그리고 간절히 품었던 희망, 이 두 가지와도 일치했다. 그들이 일생동안 지녔던 관념, 그리고 욕구가 성취되는 희망이 이렇게 들어맞았기 때문에, 그들의 뜨거운 열망(熱望)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주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181:0.2 (1953.2) 작별의 강연을 논의하고 그 말씀이 그들의 머리 속에서 자리잡기 시작한 뒤에, 예수는 사도들을 조용하게 하고 마지막 훈계와 경고를 말씀하기 시작했다.

1. 마지막 위안의 말씀

181:1.1 (1953.3) 열한 사도가 제 자리에 앉고 나서, 예수는 일어나서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육체를 입고 너희와 함께 있는 한, 너희 가운데서나 온 세계에서 나는 오직 한 개인일 수밖에 없노라. 그러나 필사 성질을 지닌 이 옷에서 해방되었을 때, 나는 너희 각자에게, 그리고 이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모든 다른 사람 속에 영으로 깃드는 자로서 돌아올 수 있노라. 이 방법으로 사람의 아들은 모든 참된 신자의 혼 속에서 영적 육신화가 되리라.

181:1.2 (1953.4) “내가 너희 안에 살고 너희를 통하여 일하려고 돌아왔을 때, 내가 이 생명을 통하여 계속 너희를 더욱 잘 인도할 수 있고, 가장 높은 하늘에서 미래에 여러 거처를 통하여 너희를 안내할 수 있노라. 아버지의 영원한 창조에서 사는 것은 끊임없이 게으름 피우는 휴식과 이기적 편안을 즐기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품위와 진리와 영광 속에서 끊임없이 진보하는 것이라. 내 아버지의 집에 많고 많은 정거장 하나하나가 멈추는 장소요, 앞에 있는 다음 생명을 위하여 너희를 준비시키려고 고안된 생명이라. 그래서 빛의 아이들은 줄곧 영광스러운 곳으로 이리저리 가서 신의 토지에 이르리니, 거기서 아버지가 모든 일에 완전한 것 같이 저희가 영적으로 완전하게 되리라.

181:1.3 (1953.5) “내가 너희를 떠날 때 너희가 나를 따르고자 하면, 내 가르침의 정신과 내 일생의 이상에 따라서 살려고―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아주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라. 이를 행하고, 내가 어쩌다가 이 세상에서 살도록 요구된 것과 같은 일생, 육체를 입은 자연스러운 내 일생을 모방하려고 애쓰지 말라.

181:1.4 (1954.1) “아버지는 나를 이 세상으로 보냈지만 겨우 너희 몇 사람이 나를 완전히 받아들이려고 선택하였느니라. 나는 모든 육체에게 내 영을 쏟아 붓겠으나, 모든 사람이 이 새 선생을 혼의 안내자와 조언자로 받아들이기를 택하지는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깨우침을 받고 깨끗해지고 위로를 받으리라. 그리고 이 진리의 영은 저희 안에서 영생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물이 솟는 샘이 되리라.

181:1.5 (1954.2) “이제, 내가 너희를 떠나려 하매, 위로의 말을 하고자 하노라.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노라. 세상이 하는 것처럼―재어서―이 선물을 주지 않고 너희가 받아들일 만큼 모두, 각자에게 주리라. 너희는 마음에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세상을 이겼고, 내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너희 모두가 이기리라. 사람의 아들이 죽음을 당하리라 너희에게 경고했으나 너희에게 보장하노니, 아버지께로 가기 전에, 잠깐이 될지라도 내가 돌아오리라.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간 뒤에, 너희와 함께 있고 바로 너희 마음 속에서 거할 새 선생을 내가 분명히 보내리라. 너희가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절망하지 말라. 그러나 너희가 모든 것을 미리 알았으므로 오히려 믿으라. 내가 큰 애정으로 너희를 사랑했고, 나는 너희를 떠나고 싶지 않으나,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 내 때가 왔노라.

181:1.6 (1954.3) “너희가 박해를 받고서 널리 흩어지고 많은 슬픈 일로 낙심한 뒤에도, 이 진리 가운데 어느 것도 의심하지 말라. 너희가 흩어져 각자 제 자리로 돌아가고 사람의 아들을 적들의 손에 버려둘 때 너희가 내 고독(孤獨)을 알리니, 그와 같이 너희가 세상에서 혼자임을 느낄 때 내가 너희의 고독을 알리라. 그러나 나는 결코 혼자 있지 않고, 언제나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시니라. 그러한 때도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리라. 너희가 평화를 가지고, 평화를 더욱 풍부히 가지도록 이 모든 것을 내가 너희에게 일렀노라. 이 세상에서 너희가 시련을 겪겠으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에서 승리하였고, 영원한 기쁨과 영구한 봉사로 이끄는 길을 너희에게 보였음이라.”

181:1.7 (1954.4)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동료 일꾼들에게 평화를 주지만, 이것은 이 물질 세상에서 얻는 기쁨과 만족 같은 종류의 평화가 아니다. 믿지 않는 유물론자와 운명론자는 오직 두 가지의 평화와 혼의 위로를 얻기를 바랄 수 있다. 그들은 불가피한 것을 부닥치거나 최악을 견디겠다고 굳게 각오한 금욕주의자이든지, 아니면 낙천가가 되어서, 결코 정말로 오지 않는 평화를 헛되이 동경하면서, 인간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솟아오르는 희망을 늘 품어야 한다.

181:1.8 (1954.5) 땅에서 사는 데는 얼마큼의 금욕주의와 낙관주의가 쓸모 있지만, 이 중에 어느 것도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를 입은 형제들에게 주는 숭고한 평화와 아무 상관이 없다. 미가엘이 땅에 있는 자녀들에게 주는 평화는, 자신이 육체를 입고 바로 이 세상에서 필사 생명을 살았을 때 자신의 혼을 채웠던 바로 그 평화이다. 예수의 평화는, 육체를 입고 필사 생명을 살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가 충분히 배우는 데 성공한 개인, 하나님을 아는 개인이 얻는 기쁨과 만족감이다. 예수의 정신이 지녔던 평화는 신성한 아버지가 슬기롭게, 이해하는 마음으로 넘치도록 보살피는 것이 사실임을 절대로 믿는 인간 신앙에 기초를 두었다. 예수는 땅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사람들이 그를 그릇되게 “슬픈 사람”이라고 일컫기까지 했지만, 이 모든 체험 속에서, 이를 통하여, 그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있다고 완전히 확신하는 가운데, 일생의 목적을 가지고 나아가도록 늘 힘을 준, 그러한 자신감으로 위로를 받았다.

181:1.9 (1954.6) 예수는 각오가 굳었고 끈질겼으며, 그의 사명을 이룩하는 데 속속들이 헌신했지만, 감정이 무디고 살갗이 굳어진 금욕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일생의 체험에서 즐거운 모습을 늘 찾으려 했지만, 눈이 멀고 스스로 속는 낙관주의자가 아니었다. 주는 그에게 무슨 일이 쏟아질까 모두 알았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따르는 사람 각자에게 이 평화를 준 뒤에, 그는 변함없이 말할 수 있었다: “너희는 마음에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181:1.10 (1955.1) 그러면 예수의 평화는, 시간 세계와 영원 속에서 자기의 생애가, 전적으로 슬기롭고 만물을 사랑하는 전능한 영 아버지의 보살핌과 보호를 안전히, 온전히 받고 있음을 완전히 믿는 아들이 가지는 평화와 확신이다. 이것은 정말로, 필사인의 머리가 이해할 수 없는 평화이지만, 믿는 인간의 가슴이 충만히 누릴 수 있는 평화이다.

2. 개인적으로 주신 작별의 훈계

181:2.1 (1955.2) 주는 사도들에게 한 집단으로서 작별의 가르침을 주고 마지막 훈계의 말씀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각 개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작별의 축복과 함께, 각자에게 개인적으로 조언하는 말씀을 주었다. 그들은 마지막 만찬을 들려고 처음에 앉았을 때 그대로 식탁 주위에 아직도 앉아 있었고, 주가 식탁을 돌아가면서 그들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예수가 이야기할 때 각 사람이 일어섰다.

181:2.2 (1955.3) 요한에게 예수는 말했다: “요한아, 너는 형제들 가운데 가장 어리니라. 너는 나와 아주 가까이 있었고,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랑으로 내가 너희 모두를 사랑하지만, 나와 언제나 가까이 있어야 하는 세 사람 중의 하나로 안드레가 너를 지명하였느니라. 이밖에도, 너는 나를 대신하여 행동했고, 땅에서 내 가족에 관한 여러 문제에서 계속 그렇게 행동해야 하느니라. 그리고 요한아, 육체로서 나에게 속하는 자들을 네가 계속 보살필 것이라 충분히 확신을 가지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노라. 내 사명에 대하여 저희가 현재 혼동해도, 내가 육체로 남아 있다면 내가 어찌 하리라 생각되는 대로, 어떤 면에서도 네가 저희에게 계속하여 모든 동정과 조언과 도움을 베풀도록 처리하여라. 저희가 모두 와서 빛을 보고 하늘나라로 온전히 들어갈 때 너희 모두가 저희를 기쁘게 환영하는 동안에, 요한아, 나를 위하여 네가 저희를 환영할 줄을 믿노라.

181:2.3 (1955.4) “이제, 땅에서 내 생애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내 가족에 관하여 너에게 어떤 전할 말이라도 남기도록 옆에 가까이 남아 있으라. 아버지가 내 손에 맡긴 일에 관하여 말하면, 육체를 입고 죽는 것 외에 이제 다 이루었고, 나는 이 마지막 잔을 마실 준비가 되었노라. 그러나 땅에서 내 아버지 요셉이 내게 맡겨준 책임에 관하여, 내 일생 동안에 이것들을 수행하였으나 이제 이 모든 문제에 네가 나 대신에 행동하기를 기대하노라. 내 대신에 이를 하라고 너를 택하였으니, 요한아 네가 가장 나이 어리고, 따라서 이 다른 사도들보다 더 오래 살 것 같기 때문이라.

181:2.4 (1955.5) “한때 나는 너와 네 형을 우뢰의 아들이라 불렀노라. 너는 고집이 세고 참을성 없이 우리와 함께 첫걸음을 내디디었어도, 무지(無知)하고 경솔한 불신자들 머리 위에 내가 불을 퍼붓기를 네가 바란 이후로, 너는 많이 바뀌었느니라. 그리고 아직도 더 바뀌어야 하느니라. 너는 내가 너희에게 오늘 밤에 준 새 계명을 지키는 사도가 되어야 하느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형제들에게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가 가르치는 데 일생을 바치라.”

181:2.5 (1955.6) 눈물 방울이 주르르 뺨으로 굴러 떨어지며 2층 방에서 거기 서 있는 동안, 요한 세베대는 주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내 주여, 그렇게 하리이다. 그러나 어떻게 내 형제들을 더 사랑하기를 배울 수 있나이까?” 그리고 나서 예수가 대답했다: “네가 먼저 하늘에 계신 저희의 아버지를 더욱 사랑하기를 배울 때, 그리고 시간 세계와 영원 속에서 저희의 복지에 네가 참으로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 뒤에, 너는 형제들을 더욱 사랑하기를 배우리라. 살피는 동정심, 사심 없는 봉사, 아낌없는 용서가 그런 모든 인간적 관심을 촉진하느니라. 아무도 젊다고 너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지만, 나이가 때로는 경험을 대표하며 인간사에서 아무것도 실제 체험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땅히 고려하라, 언제나 너에게 타이르노라. 모든 사람과, 더군다나 하늘나라 형제 단체의 네 친구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려고 애쓰라. 요한아, 하늘나라를 위하여 네가 설득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다투지 말라.”

181:2.6 (1956.1) 그리고 나서, 자기 자리를 돌아서 지나가면서, 주는 가룟 유다의 자리 옆에서 한 순간 멈추었다. 사도들은 유다가 이 일이 있기 전에 돌아오지 않은 것에 오히려 놀랐고, 예수가 그 배반자의 빈 자리 옆에 서 있는 동안, 예수의 슬픈 얼굴빛이 무슨 의미인가 매우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마 안드레를 빼고, 예수가 초저녁에, 또 저녁 식사 동안에 그들에게 비춘 바와 같이, 그들 가운데 아무도 회계(會計)가 주를 배반하려고 나간 것을 티끌만큼도 눈치채지 못했다.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어서, 그들 중에 하나가 주를 저버릴 것이라고 주가 이르신 것을 한동안 아주 잊어버렸다.

181:2.7 (1956.2) 예수는 이제 열심당원 시몬에게 건너갔고, 그는 일어서서 이 훈계에 귀를 기울였다: “너는 아브라함의 참 아들이지만, 너를 이 하늘나라의 아들로 만들려고 애쓰면서 내가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지.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 형제 모두가 너를 사랑하느니라.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고 네가 또한 하늘나라를 사랑함을 내가 알지만, 너는 아직도 네 취향(趣向)대로 이 하늘나라가 오게 만들려고 마음이 굳었느니라. 네가 궁극에 내 복음의 영적 성질과 의미를 깨닫고, 네가 복음을 선포하려고 용감한 일을 하리라는 것을 잘 알지만, 내가 떠날 때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걱정이 되노라. 네가 넘어지지 않을 것을 알면 내가 기뻐하리라. 내가 아버지께로 간 뒤에, 네가 내 사도가 되기를 그만두지 않고, 하늘나라의 대사(大使)로서 네가 적절히 처신할 것을 내가 알 수 있다면, 내가 기쁘게 되리라.”

181:2.8 (1956.3) 예수가 열심당원 시몬에게 말씀을 마치자마자, 불 같은 애국자는 젖은 눈을 닦으면서 대답했다: “주여, 내가 충성할까 걱정하지 마소서.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는 데 내 일생을 바치도록 내가 모든 일에 등을 돌렸고, 나는 넘어지지 아니하리이다. 나는 이제까지 온갖 실망을 견디었고, 나는 당신을 버리지 아니하리이다.”

181:2.9 (1956.4) 그리고 나서 시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예수는 말했다: “특히 이와 같은 때,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정말로 마음이 시원하구나. 그러나 착한 친구여, 네가 무엇을 말하는지 너는 아직도 모르느니라. 한 순간이라도 나는 너의 충성, 너의 헌신을 의심하고 싶지 않고, 이 모든 다른 사람처럼, 네가 서슴지 않고 싸움터에 나가서 나를 위하여 죽을 것을 내가 아노라” (그들은 모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이 너에게 요구되지 아니하리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내 제자들은 그 나라를 세우려고 싸우지 아니하리라고 내가 거듭 너희에게 일렀노라. 시몬아, 이것을 여러 번 너희에게 일렀으나, 너는 진실을 마주보려 하지 않느니라. 나에 대하여, 또 하늘나라에 대하여, 네가 충성할까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떠날 때, 그리고 네가 내 가르침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것과 하늘나라에서 또 다른 영적 체제 사무를 다루는 현실에 너의 그릇된 생각을 적응해야 한다는 것을 네가 마침내 깨닫게 될 때, 너는 어찌하려느냐?”

181:2.10 (1956.5) 시몬은 더 말하고 싶어했지만, 예수는 손을 들어 그를 막고서, 말을 이었다: “내 사도들 가운데 아무도 마음 속에 너보다 더 성실하고 정직하지 않으나, 내가 떠난 뒤에 아무도 너보다 더 속이 뒤집히고 마음 아파하지 않으리라. 네가 어떤 실망에 빠졌더라도 내 영이 너와 함께 거하겠고, 이들, 너의 형제들은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땅에서 가진 시민권과 아버지의 영적 국가에서 아들 신분, 이 둘의 관계에 대하여 너희에게 가르친 것을 잊지 말라. 케자의 것을 케자에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이른 모든 것을 잘 생각해 보라. 시몬아, 국가 권력에 대한 현세의 의무, 그리고 하늘나라의 형제 단체에서 영적 봉사를 동시에 인식하는 것에 관한 나의 권고를 필사 인간이 어떻게 적절히 따를 수 있는가 보여주는 데 너의 일생을 바치라. 네가 진리의 영의 가르침을 받으면, 현세의 통치자들이 오직 하나님께 속하는 존경과 섬김을 주제넘게 너에게 요구하지 않는 한, 땅에서 시민이 되고 하늘에서 아들이 되는 요건 사이에 결코 아무런 갈등이 없으리라.

181:2.11 (1957.1) “이제 시몬아, 네가 마침내 이 모든 것을 깨달을 때, 그리고 너의 우울함을 떨쳐버리고 큰 권능으로 이 복음을 선포하면서 떠나간 뒤에, 네가 낙심하는 시절을 통해서도 내내, 내가 너와 함께 있었고, 최후까지 너와 함께 계속할 것을 결코 잊지 말라. 너는 언제나 내 사도가 되겠고, 기꺼이 네가 영의 눈으로 보고 너의 뜻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충만히 굴복하게 된 뒤에, 그때 너는 내 대사로서 수고하러 돌아오리라. 내가 너에게 가르친 진리를 더디게 알아듣는다고 해서, 너에게 수여한 권한을 아무도 너에게서 빼앗지 못할지니라. 그래서 시몬아, 한번 더 너에게 경고하노니, 칼로 싸우는 자는 칼로 망해도, 영적으로 수고하는 자는 지금 있는 나라에서 기쁨과 평화를 가질 뿐 아니라 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얻느니라. 네 손에 맡겨진 일이 땅에서 끝났을 때, 시몬아, 너는 저기 내 나라에서 나와 함께 앉을지니라. 몹시 바라던 하늘나라를 네가 정말로 보겠으나, 이 생명에서는 아니라. 줄곧 나를 믿고, 내가 너에게 드러낸 것을 믿으라. 그리하면 너는 영생의 선물을 받으리라.”

181:2.12 (1957.2) 열심당원 시몬에게 말씀을 마치고 나서, 예수는 마태 레위에게 걸어가서 말했다: “사도 집단의 기금(基金)을 마련하는 일이 이제 더 네게 맡겨지지 아니하리라. 당장, 아주 곧 너희는 모두 흩어지겠고, 너희 형제 가운데 겨우 한 사람하고도 위로하고 받들어주는 관계를 가지는 것이 허락되지 아니하리라. 이 하늘나라 복음을 너희가 전파하려고 앞으로 가는 동안에,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새 동료들을 찾아야 하리라. 너희가 훈련받는 동안에 나는 둘씩 너희를 보냈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를 두고 떠나므로, 너희가 충격을 받고 정신을 차린 뒤에, 이 좋은 소식, 믿음으로 활력을 얻은 필사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선포하며, 너는 혼자 밖으로, 땅 끝까지라도 가리라.”

181:2.13 (1957.3) 그러자 마태가 말했다: “그러나 주여, 누가 우리를 보내고, 어디로 갈지 우리가 어찌 알리이까? 안드레가 우리의 길을 보일 것이니이까?” 예수는 대답했다: “아니라, 레위야, 복음을 선포하는 일로 안드레는 이제 더 너희를 지도하지 않으리라. 새 선생이 오는 그날까지, 정말로 그는 너희의 친구요 조언자로서 계속하리라. 그리고 나서 진리의 영이 하늘나라를 펼치는 일에 수고하라고 너희 하나하나를 바깥으로 이끌리라. 세관에서 처음에 나를 따르려고 나선 그날 이후로, 많은 변화가 너에게 왔느니라. 그러나 친교(親交)하는 관계에서 이방인이 유대인과 나란히 앉는 형제 단체의 환상을 네가 볼 수 있기 전에, 많은 변화가 더 와야 하느니라. 그러나 충분히 만족할 때까지, 네 유대인 형제들을 설득하고 싶은 마음을 따라 일을 계속하고 그 다음에 힘차게 이방인에게 방향을 돌리라. 레위야, 너는 한 가지를 분명히 믿어도 좋으니라: 너는 형제들의 신임과 애정을 얻었고, 저희가 다 너를 사랑하느니라.” (그리고 모두 열 명이 주의 말씀에 말없이, 승인한다는 표시를 하였다.)

181:2.14 (1958.1) “레위야, 금고를 채우느라 네가 걱정하고 희생하고 수고한 것에 대하여, 네 형제들이 모르는 많은 것을 내가 아노라. 돈자루를 가지고 다니는 자가 자리에 없어도, 하늘나라 사자들과 함께 내 작별 모임에 세리(稅吏)인 대사가 여기 있으니 내가 기쁘도다. 영(靈)의 눈으로 내 가르침의 뜻을 네가 헤아리도록 내가 기도하노라. 새 선생이 네 마음 속에 올 때, 그가 인도하는 대로 계속 따르라. 사람의 아들을 대담히 따르고 하늘나라 복음을 믿은, 미움받던 세리에게 아버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네 형제들에게―아니 온 세상에―보이라. 바로 처음부터, 레위야, 내가 이 다른 갈릴리 사람들을 사랑한 것 같이 너를 사랑하였노라. 그러면 아버지도 아들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음을 잘 아는 까닭에, 너의 수고를 통해서 복음을 믿게 된 사람들 사이에서, 네가 그렇게 구별하지 않도록 하여라. 그래서 하나님이 아무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 보시기에, 그리고 하늘나라의 친교에서, 누구에게나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이는 데 너의 여생을 바치라.”

181:2.15 (1958.2) 그리고 나서 예수는 야고보 세베대에게 걸어갔고, 주가 그에게 말씀하실 때 그는 말없이 서 있었다: “야고보야, 너와 네 아우가 언젠가 내게 와서 하늘나라에서 우대받는 명예를 구하였고 내가 그러한 명예는 아버지가 주시는 것이라 너희에게 일렀을 때, 나는 너희가 내 잔을 마실 수 있는가 물었고, 너희 둘은 그렇다고 대답하였느니라. 그때는 네가 할 수 없었더라도, 그리고 지금도 할 수 없다면, 너는 바야흐로 겪을 체험으로 그러한 봉사를 위하여 곧 준비되리라. 그런 행동으로 너희는 그때 형제들을 성나게 하였느니라. 저희가 이미 너희를 충분히 용서하지 않았다면, 네가 내 잔을 마시는 것을 볼 때 저희가 용서하리라. 네 봉사가 길든 짧든, 인내하여 네 목숨을 건지라.[1] [28] 새 선생이 올 때, 그가 동정하는 자세를 가르치게 하고, 나를 철석같이 믿음으로, 그리고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복종함으로 생겨나는 관용, 사람을 헤아리는 바로 그 관용을 그 선생이 너에게 가르치게 하라. 하나님을 알고 아들을 믿는 제자의 인간적 애정과 함께 신다운 위엄을 보여주는 데 네 일생을 바치라. 그렇게 사는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복음을 드러내리라. 너와 네 아우 요한은 다른 길로 가겠고, 너희 중 하나는 다른 자보다 훨씬 먼저 영원한 나라에서 나와 함께 앉을 수도 있느니라. 참된 지혜는 용기 뿐 아니라 신중(愼重)을 포함한다는 것을 배우고자 하면 너에게 많이 도움이 되리라. 너의 공격적 태도에 어울리게 너는 지혜를 배워야 하느니라. 내 제자들이 이 복음을 위하여 서슴지 않고 목숨을 버릴 최고의 순간이 오리라. 그러나 어떤 보통 경우에도, 네가 살아서 기쁜 소식을 계속 전파하도록 불신자의 진노를 달래는 것이 훨씬 더 좋으리라. 여러 해 사는 것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을 많이 설득하도록, 네 힘이 닿는 한, 땅에서 오래 살라.”

181:2.16 (1958.3) 야고보 세베대에게 말씀을 마치고 나서, 주는 안드레가 앉은 식탁 끝까지 돌아 걸어가서, 충실하게 돕는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안드레야, 너는 하늘나라 대사들의 임시 우두머리로서 나를 충실하게 대표하였도다. 비록 네가 때때로 의심하였고 어떤 때에는 위험하게 두려움을 보였으나, 그래도 네 동료들을 다루는 데 너는 언제나 성실하게 공정하고, 뛰어나게 공평하였느니라. 너와 네 형제들을 하늘나라의 사자로서 세운 뒤로 계속, 너를 이 선택받은 자들의 임시 우두머리로 지명한 것을 제외하고, 너희는 모든 집단 행정 사무를 자치(自治)해 왔느니라. 어떤 다른 현세의 문제도 나는 너의 결정을 지도하거나 그에 영향을 미치려고 행동하지 않았노라. 내가 이렇게 한 것은 나중에 너희의 모든 집단 결정을 지휘하는 데 지도자를 마련해 주기 위한 것이었느니라. 내 우주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온 우주에서, 우리의 형제인 아들들은 어떤 영적 관계에도 개인으로서 대접받지만, 모든 집단 관계에서 우리는 어김없이 분명한 지도자를 마련해 주느니라. 우리 나라는 질서 있는 나라요, 의지를 가진 둘 이상의 인간이 협동하여 활동하는 곳에 반드시 지도하는 권한이 마련되느니라.

181:2.17 (1959.1) “이제, 안드레야, 내가 임명한 권한으로 네가 형제들의 우두머리이고, 네가 이렇게 나의 개인 대표로서 봉사했으매, 그리고 내가 바야흐로 너희를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려고 하는즉, 이 현세의 행정 사무에 관한 모든 책임에서 너를 해방하노라. 이제부터 영적 지도자로서 네 자격으로 네가 얻고, 따라서 네 형제들이 자유로이 인정하는 것을 제외하고, 너는 형제들에게 어떤 권한도 행사하면 안 되느니라. 내가 아버지께로 간 뒤에 저희가 분명한 법적 행위로 너에게 그러한 권한을 회복하지 않으면, 이 시간부터 너는 형제들에게 아무 권한을 행사해서는 안 되느니라. 그러나 이 집단의 행정 우두머리 책임을 이렇게 면제하는 것은 바로 눈앞에 닥친 시련의 시절에, 든든한 사랑의 손으로 네 형제들을 한데 붙들어두도록 네 힘이 닿는 대로 무엇이든지 할 도덕적 책임을 어떤 면에서도 덜지 않나니, 육체를 입고서 내가 떠나고 너희 가슴 속에서 살고 궁극에 너희를 모든 진리로 이끌 그러한 새 선생을 파송하는 사이에 시련의 시절이 틀림없이 있느니라. 내가 너희를 떠나려고 준비하므로, 너희 가운데 있는 한 사람으로서 내가 있을 때 시작되고 그 권한을 부여받았던 모든 행정 책임에서 너를 해방하고자 하노라. 이제부터 너희에 대하여, 그리고 너희 가운데서, 나는 오로지 영적 권한을 행사하리라.

181:2.18 (1959.2) “네 형제들이 너를 조언자로 계속 두기를 바란다면, 내가 지시하노니, 어떤 세상 일과 영적 일에도, 복음을 믿는 성실한 여러 신자 집단 사이에서 너는 최선을 다하여 평화와 조화를 권장해야 하느니라. 너희 형제들 사이에서 형제 사랑의 실용적 모습을 촉진하는 데 너의 여생을 바치라. 육체를 입은 내 형제들이 이 복음을 믿으려고 온전히 올 때 저희에게 친절하라. 서쪽에 그리스인들과 동쪽에 아브너에게, 사랑하고 치우치지 않게 헌신함을 나타내라. 이 내 사도들이, 땅에서 사방으로 흩어지고 거기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구원받는 좋은 소식을 선포하더라도, 바로 앞에 닥친 고달픈 시절에 너는 저희를 한데 붙들어야 하느니라. 그 극심한 시련을 겪는 시절에, 너희는 새 선생, 진리의 영이 오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서, 내가 몸소 함께 있지 않고서 너희는 이 복음 믿기를 배워야 하느니라. 그래서 안드레야, 사람들이 보기에 큰 일 행하는 것이 너에게 맡겨지지 않을지 몰라도 그러한 일을 하는 자들에게 선생과 조언자가 되는 데 만족하여라. 땅에서 끝까지 네 일을 계속하여라. 그리하면 영원한 나라에서 이 봉사를 네가 계속할지니, 왜냐하면 내가 이 무리에 속하지 않는 다른 양들이 있다고 여러 번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더냐?”

181:2.19 (1959.3) 그리고 나서 예수는 알패오 쌍둥이에게 건너가서, 둘 사이에 서서 말했다: “귀여운 아이들아, 너희는 나를 따르기로 작정한 세 형제 집단 중의 하나로다. 너희 여섯이 다 자기 혈육과 함께 평화롭게 일을 잘 했으되, 아무도 너희보다 낫게 하지 않았느니라. 어려운 시절이 바로 우리 앞에 닥쳤느니라. 너희와 형제들에게 닥치는 모든 것을 너희가 이해하지 못할지 모르나, 너희가 한때 하늘나라 일에 부름받았음을 결코 의심하지 말라. 한동안, 아무런 군중을 다룰 일이 없을 터이나, 낙심하지 말라. 너희 일생의 일이 끝났을 때, 내가 높은 곳에서 너희를 받아들이고, 거기서 영화롭게 너희는 천사 무리와 수많은 하나님의 높은 아들들에게 너희가 구원받은 이야기를 일러주리라. 평범한 수고의 질을 높이는 데 너희의 일생을 바치라. 땅에 있는 모든 사람과 하늘의 천사들에게, 하나님을 특별히 섬기는 데 한동안 일하라고 부름 받은 뒤에, 얼마나 즐겁고 용감하게 필사 인간이 예전에 하던 일로 돌아갈 수 있는가 보여주라. 한동안, 겉으로 나타나는 하늘나라 사무에서 너희의 일이 끝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체험을 새롭게 깨우침과 함께,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 시시한 노동이나 세속의 수고와 같은 것이 없다는 높은 깨달음을 가지고, 너희는 예전에 하던 일로 돌아가야 하느니라. 나와 함께 일해 온 너희에게 모든 것이 신성하게 되었고, 땅에서 하는 모든 수고가 아버지 하나님께 드린 봉사가 되기까지 하였느니라. 너희의 옛 사도 동료들이 하는 일에 관하여 소식을 들을 때, 저희와 함께 기뻐하고, 저희가 기다리는 동안에 하나님께 시중들고 섬기는 자로서 나날의 일을 계속하여라. 너희는 내내 나의 사도였고, 언제나 그러할지며, 다가오는 나라에서 내가 너희를 기억하리라.”

181:2.20 (1960.1) 그리고 나서 예수는 빌립에게 건너갔고, 그는 선 채로 주로부터 이 말씀을 받았다: “빌립아, 너는 나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많이 했어도 나는 최선을 다하여 모두 대답하였고, 이제 가장 정직하지만 비영적 정신에서 일어난 그러한 너의 마지막 질문에 내가 대답하리라. 나는 항상 너희에게 돌아왔는데, 너는 ‘주가 떠나가고 세상에서 우리끼리만 남겨놓으면 내가 무엇을 할까?’ 혼잣말을 하고 있었느니라. 아, 너는 믿음이 적구나! 그래도 너는 거의 여러 형제만큼 믿음을 가졌고, 빌립아, 너는 착한 집사였느니라. 너는 오직 몇 번만 우리의 기대에 어긋났고, 그 실패 가운데 하나를 우리는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이용했느니라. 너의 집사(執事) 직책은 거의 끝났고, 곧 네가 하라고 부름 받은 일―이 하늘나라 복음 전하는 일―을 충만히 해야 하느니라. 빌립아, 너는 언제나 사람들이 네게 보여주기를 바랐고, 오래지 않아 너는 큰 일을 보게 될지니라.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네가 보는 것이 훨씬 더 나으리라. 그러나 물질만 보는 눈으로도 네가 성실하였은즉, 너는 살아서 내 말이 이루어짐을 보리라. 그리고 나서 네가 영적 시력을 축복받았을 때, 네 할 일을 하러 떠나가서, 물질 지성의 눈이 아니라 영적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찾고 영원한 현실을 추구하도록 인류를 이끄는 운동에 네 목숨을 바치라. 빌립아, 네가 땅에서 큰 사명을 가졌음을 기억할지니, 세상이 너의 성향과 똑같이 인생을 바라보는 자들로 가득 차 있음이라. 너는 큰 일을 해야 하고, 믿음 속에서 그 일을 마쳤을 때, 내 나라에서 너는 나에게로 올지니라. 그리하면 눈이 구경하지 못하고 귀도 듣지 못하고 필사자의 머리도 생각지 못한 것을 내가 크게 기뻐하며 네게 보여주리라. 그동안에, 영의 나라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고, 내가 새 선생의 영으로서, 영의 나라에서 너를 앞으로 인도하게 하여라. 내가 이 땅의 필사자로서 너와 함께 머물렀을 때 내가 이룰 수 없던 것을 이 방법으로 너를 위하여 많이 행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빌립아, 언제나 기억하여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181:2.21 (1960.2) 그리고 나서 주는 나다니엘에게 건너갔다. 나다니엘이 서자, 예수는 앉으라고 명하고, 옆에 앉으면서 말했다: “나다니엘아, 네가 내 사도가 된 뒤로, 너는 편견 없이 살고 더욱 관대하게 되려고 연습하기를 배웠느니라. 그러나 네가 배울 것이 훨씬 많이 있느니라. 너의 한결같은 성실함에 동료들이 언제나 훈계를 받았으니, 너는 저희에게 축복이었도다. 내가 떠났을 때, 너의 솔직함은 새 형제와 옛 형제들과 함께 어울리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느니라. 좋은 생각을 표현하는 것조차 듣는 사람의 지적(知的) 상태와 영적 성장에 따라서 조절되어야 하는 것을 너는 배워야 하느니라. 분별과 함께할 때 성실은 하늘나라의 일에서 가장 쓸모가 있느니라.

181:2.22 (1961.1) “형제들과 함께 일하기를 배우고자 하면, 네가 더욱 영구한 일을 성취할 수도 있느니라. 그러나 너처럼 생각하는 자들을 찾아서 자신이 떠나버린 것을 발견하면, 그 경우에 하나님을 아는 제자가 세상에서 혼자 있고 동료 신자들로부터 온통 고립되었을 때도 하늘나라를 세우는 자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하는 데 일생을 바치라. 나는 네가 끝까지 충실할 것을 알고, 하늘에 있는 내 나라에서 더 크게 봉사하는 일에 언젠가 너를 환영하리라.”

181:2.23 (1961.2) 그리고 나서 나다니엘이 예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처음에 이 하늘나라에 봉사하도록 나를 부르신 뒤로 늘 당신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왔지만,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나이다. 나는 다음에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 모르고, 내 형제의 대부분도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하지만, 혼란스럽다고 고백하기를 꺼려하나이다. 당신은 나를 도와주실 수 있나이까?” 예수는 손을 나다니엘의 어깨에 얹으면서 말했다: “친구여, 나의 영적 가르침의 뜻을 깨달으려고 애쓰면서 너희가 어리둥절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니, 네가 유대 전통의 선입관으로 인하여 무척 장애를 받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에 따라서 내 복음을 풀이하려는 끈질긴 성향으로 너무나 혼란에 빠졌음이라.

181:2.24 (1961.3) “입으로 전하는 말로 내가 너희에게 많이 가르쳤고, 나는 너희 가운데서 내 일생을 살아 왔노라. 너희의 머리를 깨우치고 너희 혼을 해방하려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내가 행하였고, 너희는 내 가르침과 일생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모든 선생 중에 대선생의 손에서―실제 체험으로―얻으려고 이제 준비해야 하느니라. 이제 너희를 기다리는 이 모든 새 체험을 겪는 가운데, 나는 너희 앞에 가고, 진리의 영이 너희와 함께 할지니라. 두려워 말라. 너희가 이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새 선생이 올 때, 땅에서 너희 여생을 통하여 내내, 그리고 영원한 시대에 계속 너희의 훈련을 통하여, 그가 너희에게 드러내리라.”

181:2.25 (1961.4) 그리고 나서, 주는 모두를 향하여 말했다: “복음의 온전한 뜻을 너희가 깨닫지 못했다고 절망하지 말라. 너희는 유한한 필사 인간일 뿐이요,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것은 무한하고 신성하고 영원하니라. 참을성을 가지고 기운을 내라. 파라다이스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완전하게 되는 체험을 너희가 점진적으로 계속 얻을 영원한 시대가 너희 앞에 있느니라.”

181:2.26 (1961.5) 그리고 나서 예수는 토마스에게로 갔고, 그는 서서 주의 말씀을 들었다: “토마스야, 너는 때때로 믿음이 모자랐지만, 의심하는 시절이 왔을 때, 용기가 모자란 적이 없었느니라. 그릇된 선지자와 거짓된 선생들이 너를 속이지 못할 것을 내가 잘 아노라. 내가 떠난 뒤에, 네 형제들은 새 가르침을 보는 너의 비평 방법을 더욱 고맙게 여기리라. 다가올 시절에 너희가 모두 땅 끝까지 흩어질 때, 네가 여전히 나의 대사(大使)임을 기억하라. 자기 생애에서 영의 열매를 맺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는, 영에게서 태어난 남녀들의 체험 속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일하느니라. 그러한 생생한 진리가 펼쳐지는 것을 만났을 때, 사람의 비평하는 물질적 정신이 어떻게 지적으로 의심하는 타성(惰性)을 이길 수 있는가 보여주는 큰 일에 너의 일생을 바쳐라. 토마스야, 네가 우리와 함께 하여 나는 기쁘도다. 잠시 어리둥절한 때가 지난 뒤에, 너는 하늘나라의 수고를 계속하리라. 너의 의심은 형제들을 당황하게 했어도 나를 괴롭힌 적이 없느니라. 나는 너를 신임하고, 땅에서 가장 먼 구석까지도 네 앞에 가리라.”

181:2.27 (1962.1) 그리고 나서 주는 시몬 베드로에게 갔다. 예수가 말씀하는 동안에 그는 서 있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이 하늘나라 복음을 대중에게 선포하는 데 네 일생을 바칠 것을 아노라. 그러나 나와 함께 가까이 여러 해 동안 지냈어도, 네가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도록 많이 돕지 못하여 걱정이 되는구나. 무슨 체험을 거쳐야 네가 입 조심하기를 배우겠느냐? 네가 생각 없이 입을 열어, 너의 주제넘은 자신감 때문에, 너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문제를 일으켰는지! 그리고 너는 이 약점을 극복하지 않으면 너 자신에게 더욱 많은 문제를 일으킬 운명을 가졌느니라. 이 약점이 있는데도 형제들이 너를 사랑함을 네가 알고, 또한 이 결점이 너에 대한 나의 애정을 조금도 다치지 않음을 이해해야 하지만, 그런 결점은 너의 쓸모를 줄이고, 그침 없이 너에게 문제를 일으키느니라. 그러나 바로 오늘 밤에 겪을 체험으로부터, 의심할 여지 없이 너는 큰 도움을 받으리라. 시몬 베드로야, 내가 너에게 이제 이르는 것을 마찬가지로, 여기 모인 네 형제 모두에게 이르노라: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 때문에 실수하는 큰 위험에 빠지리라. 기록되었으되, ‘목자가 얻어맞고 양들이 널리 흩어지리라’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내가 없을 때, 나에게 닥치는 일 때문에 너희 가운데 더러는 의심에 굴복하고 넘어질 큰 위험이 있느니라. 그러나 내가 이제 너희에게 약속하노니, 잠시 동안 내가 너희에게 돌아오고, 그리고 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181:2.28 (1962.2) 그때 베드로가 손을 예수의 어깨에 얹고 말했다: “내 형제 모두가 당신 때문에 의심에 빠져도 상관 없이, 당신께 약속하오니, 당신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 때문에 내가 걸려 넘어지지 아니하리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가겠고, 필요하다면 당신을 위하여 죽으리이다.”

181:2.29 (1962.3) 베드로가 주 앞에 섰고, 모두가 뜨거운 감정과 그를 향한 진정한 사랑에 넘쳐서 부르르 떨자, 예수는 그의 젖은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베드로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오늘 밤에 수탉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서너 번 부인하리라. 이처럼 나와 평화로운 관계에서 배우지 못한 것을 너는 많은 시련과 슬픔을 통해서 배우리라. 네가 이 필요한 교훈을 정말로 배운 뒤에, 너는 형제들에게 힘을 주고, 이 복음을 전도하는 데 바치는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느니라. 하지만 너는 감옥에 갇히고, 아마도, 나를 따라서 아버지의 나라를 세우는 데 사랑으로 봉사하는, 최상의 값을 치를 수도 있느니라.

181:2.30 (1962.4) “그러나 내 약속을 기억하여라: 내가 살아난 뒤에, 아버지께로 가기 전에 한동안 너희와 함께 머무르리라. 너희가 지금 곧 거쳐야 하는 것을 위하여, 오늘 밤에도 아버지가 너희 하나하나에게 힘 주시기를 내가 간구하리라.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내가 너희를 다 사랑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이제부터 너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느니라.”

181:2.31 (1962.5) 다음에 찬송을 하나 부르고 나서, 그들은 올리브산에 있는 캠프를 향하여 떠났다.

제 182 편 겟세마네에서

유란시아서

제 182 편

겟세마네에서

182:0.1 (1963.1) 엘리야와 마리아 마가의 집에서 겟세마네 캠프로 돌아가는 길에 예수가 열한 사도를 이끌었을 때는 이 목요일 밤 10시쯤이었다. 산에서 그날 이후로, 눈을 떼지 않고 예수를 감시하는 것을 요한 마가는 자기 일로 삼았다. 요한은 잠이 모자랐으므로, 주가 2층 방에서 사도들과 함께 있는 동안 몇 시간 쉬었다. 그러나 그들이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소리를 듣자, 그는 일어나서 재빨리 몸에 리넨 외투를 걸쳤고, 그들을 따라서 도시를 지나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공원 옆에 그들의 사립 야영지로 갔다. 이날 밤과 이튿날 내내, 요한 마가는 주에게 아주 가까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계속하여, 십자가에 처형되는 시간까지 모든 것을 구경하고 주가 말씀한 많은 것을 엿들었다.

182:0.2 (1963.2) 예수와 열한 사도가 캠프로 돌아가는 동안, 사도들은 유다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로소 궁금해졌고, 그들 가운데 하나가 예수를 저버릴 것이라는 주의 예언에 관하여 서로 말을 주고받았으며, 가룟 유다에게 만사가 순조롭지 않다는 것을 처음으로 의심했다. 그러나 캠프에 다다르고, 그가 그들을 맞이하려고 기다리며 거기 있지 않은 것을 볼 때까지, 그들은 드러내놓고 유다에 관하여 논평하는 데 말려들지 않았다. 유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알려고 모두가 안드레를 에워쌌을 때, 그들의 우두머리는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나는 유다가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그가 우리를 버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1. 마지막 집단 기도

182:1.1 (1963.3) 캠프에 도착하고 몇 순간 지난 뒤에 예수는 그들에게 말했다: “친구와 형제들아, 너희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느니라. 이 시간에, 그리고 우리끼리 따로 떨어져 있고, 그동안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우리가 해야 하는 모든 일에 이제부터 우리를 지탱할 힘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기를 바라노라.”

182:1.2 (1963.4) 이렇게 말씀하고 나서, 예수는 올리브산에서 위쪽에 조금 떨어진 곳으로 길을 인도했고, 예루살렘이 전부 내려다보이는 가운데, 그들을 임명하는 날에 한 것처럼, 그의 둘레에 동그라미를 지어, 납작한 큰 바위 위에 무릎을 꿇으라고 명했다. 그리고 나서, 거기에 부드러운 달빛 아래서 영화롭게 되어 그들 가운데 서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르고 기도했다:

182:1.3 (1963.5) “아버지여, 내 때가 왔사오니,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도록 이제 아들을 영화롭게 하소서. 내 영토에 있는 모든 생물에 대한 전권을 아버지가 내게 주신 줄 알고, 나는 하나님의 믿는 아들이 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리이다. 내가 지은 사람들이 아버지가 유일한 참 하나님이요 만물의 아버지임을 아는 것, 그리고 아버지가 세상으로 보낸 자를 저희가 믿는 것, 이것이 영생이나이다. 아버지여, 땅에서 나는 아버지를 높이었고 아버지가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마쳤나이다. 우리 창조에 있는 자녀들에게 수여하는 과제를 거의 마쳤고, 오직 육체를 입은 내 목숨을 버리는 일이 남았나이다. 이제, 아 아버지여, 이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으로 나를 영화롭게 하시고 아버지의 바른 편에 한번 더 나를 받으소서.

182:1.4 (1964.1) “아버지가 세상에서 선택하고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나는 아버지를 나타냈나이다. 저희는―모든 생명이 아버지 손에 있는 것 같이―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가 저희를 내게 주셨고, 나는 생명의 길을 가르치면서 저희 가운데 살아 왔고 저희는 믿었나이다. 이 사람들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아버지로부터 왔고, 육체를 입은 내 인생이 아버지를 여러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것임을 배우고 있나이다. 아버지가 주신 진리를 나는 저희에게 드러냈나이다. 이 내 친구와 대사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받으려고 진지하게 결의하였나이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나왔고, 아버지가 나를 이 세상으로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려 한다고 저희에게 일렀나이다. 아버지여, 이 택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나이다. 저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요, 육체로 머무른 동안 내가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대표한 것 같이, 내가 아버지의 일로 돌아간 뒤에 나를 세상에 대표하라고 세상에서 택한 자들을 위한 것이나이다. 이 사람들은 내 것이요 아버지가 저희를 내게 주셨으나, 나의 모든 것이 늘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이었던 모두를 아버지가 이제 내 것이 되게 하셨나이다. 아버지는 내 안에서 높임을 받으셨고 이제 이 사람들 안에서 내가 영예 받기를 비나이다. 나는 이제 더 이 세상에 있을 수 없고, 아버지가 내게 하라고 주신 일로 돌아가려 하나이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와 우리 나라를 대표하라고 이 사람들을 두고 떠나야 하나이다. 아버지여, 육체로 목숨을 바치려고 내가 준비하는 동안 이 사람들이 충실하도록 지키소서.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이 내 친구들이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게 도우소서. 저희와 함께 있을 수 있는 한, 내가 저희를 지키고 안내할 수 있었어도, 나는 이제 떠나려 하나이다. 우리가 저희를 위로하고 힘을 줄 새 선생을 우리가 보낼 수 있을 때까지, 아버지여, 저희와 가까이 계시옵소서.

182:1.5 (1964.2) “아버지는 내게 열두 사람을 주셨고 하나만 제외하고 저희를 모두 지켰지만, 복수의 아들은 우리와 더 사귀려 하지 않나이다. 이 사람들은 연약하고 물러도 우리가 저희를 신뢰할 수 있음을 아나이다. 나는 저희를 증명했고, 저희가 아버지를 존경하는 것처럼 저희는 나를 사랑하나이다. 나를 위하여 저희가 많이 고통받아야 하지만 하늘나라에서 아들이 되는 확신을 가지는 기쁨으로 저희가 또한 채워지기를 바라나이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고 진리를 가르쳤나이다. 나를 미워해 온 것처럼 세상이 저희를 미워할 수도 있지만,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지 말고 오직 세상에서 악으로부터 저희를 지켜주시기를 구하나이다. 저희를 진리 속에서 거룩하게 하소서,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이나이다. 아버지가 나를 이 세상으로 보내신 것 같이, 바로 그렇게 이 사람들을 세상으로 보내고자 하나이다. 저희에게 가르친 진리와 드러낸 사랑을 통하여 깨끗하게 되라 저희를 격려하도록 저희를 위하여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아버지를 섬기는 일에 일생을 거룩히 바쳤나이다. 아버지여, 내가 떠난 뒤에 아버지가 이 형제들을 돌보기를 아버지께 부탁할 필요가 없음을 잘 아나이다. 나처럼 아버지가 저희를 사랑함을 아오나, 아들이 그런 것 같이 아버지가 필사 인간을 사랑함을 저희가 더 잘 깨닫도록 내가 이렇게 하나이다.

182:1.6 (1964.3) “이제 아버지여, 이 열한 사람 뿐 아니라, 또한 이제 믿거나, 저희가 미래에 수고할 때 전하는 말씀을 통하여 지금부터 하늘나라 복음을 믿을지도 모르는 모든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자 하나이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같이, 저희가 다 하나 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으며, 이 신자들이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있고, 우리의 영들이 다 저희에게 깃들기를 바라나이다.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내 아이들이 하나이면, 그리고 내가 저희를 사랑한 것 같이 저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을 믿고, 내가 계시한 진리와 영광을 기꺼이 받아들이리이다. 아버지가 내게 준 영화(榮華)를 나는 이 신자들에게 드러냈나이다. 아버지가 영적으로 나와 함께 사신 것 같이, 나는 저희와 함께 육체를 입고 살았나이다. 아버지가 나와 하나였던 것 같이, 나는 저희와 하나가 되었고, 새 선생도 저희와 함께, 그리고 저희 안에서 늘 하나가 되리이다. 그리고 아들이 하는 것처럼 아버지가 저희를 사랑하며, 나를 사랑한 것 같이 아버지가 저희를 사랑하는 것을 육신으로 내 형제들이 알도록, 나는 이 모든 것을 행하였나이다. 아버지여, 머지 않아 저희가 와서 영광 속에 나와 함께 있고, 나아가서 파라다이스 품에서 아버지와 함께 하도록 이 신자(信者)들을 구하기 위하여 나와 함께 일하소서. 필사 육체의 모습으로 시간 세계에서 씨 뿌려 얻는 영원한 수확으로서, 아버지가 내 손에 주신 모든 것을 저희가 볼 수 있도록, 나와 함께 겸손히 섬기는 자들을 나와 함께 영화롭게 두고자 하나이다. 이 세상의 기초(基礎)를 놓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내가 가졌던 영화를 땅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 보여주기를 내가 몹시 바라나이다. 올바른 아버지여, 이 세상은 아버지를 거의 몰라도 나는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를 이 신자들에게 알려주었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이름을 다른 세대들에게 알려주리이다.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셨던 것 같이―정말 그러하니―아버지가 세상에서 저희와 함께 계시리라 이제 내가 저희에게 약속하나이다.”

182:1.7 (1965.1) 열한 사도는 몇분 동안 예수의 둘레에 이렇게 동그라미를 지어 무릎을 끓고 남아 있다가 일어나서 가까이 있는 캠프로 말없이 돌아갔다.

182:1.8 (1965.2) 예수는 추종자들 사이에서 단결이 있기를 기도했지만, 똑같이 행동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죄는 움직이지 않는 수준의 악한 타성(惰性)을 만들어내지만, 올바름은 영원한 진리의 살아 있는 현실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신다운 영들이 점진적으로 교통하는 가운데, 개인이 체험하는 창조 정신에 영양을 준다. 신자인 아들이 신성한 아버지와 가지는 영적 친교에는, 자기들의 교리가 최종이고 그 종파가 우수하다는 집단 의식이 결코 존재할 수 없다.

182:1.9 (1965.3) 사도들과 함께 이 마지막 기도를 드리는 과정에서 주는 그가 아버지의 이름을 세상에 나타냈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이것이 육체를 입고서 완전하게 된 일생을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냄으로써 참으로 그가 한 일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려 했지만, “스스로 계신 이”라고 언급하는 지경보다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자신을 더 드러내라고 재촉받았을 때 오직 “나는 스스로 계신 이”라고 밝혔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가 땅에서 일생을 마치고 나서 아버지의 이 이름이 더욱 드러났고, 그래서 주, 곧 육신화된 아버지는 참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182:1.10 (1965.4) 나는 생명의 빵이라.

182:1.11 (1965.5) 나는 생명의 물이라.

182:1.12 (1965.6) 나는 세상의 빛이라.

182:1.13 (1965.7) 나는 모든 시대의 소망이라.

182:1.14 (1965.8) 나는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열린 문이라.

182:1.15 (1965.9) 나는 끝없는 생명의 실체이라.

182:1.16 (1965.10) 나는 선한 목자이라.

182:1.17 (1965.11) 나는 무한한 완전에 이르는 길이라.

182:1.18 (1965.12)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182:1.19 (1965.13) 나는 영생의 비밀이라.

182:1.20 (1965.14)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182:1.21 (1965.15) 나는 유한한 내 자녀들의 무한한 아버지이라.

182:1.22 (1965.16)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라.

182:1.23 (1965.17) 나는 살아 있는 진리를 아는 모든 사람의 희망이라.

182:1.24 (1965.18) 나는 한 세상에서 다음 세상으로 잇는 생명의 다리이라.

182:1.25 (1965.19) 나는 시간과 영원을 잇는 생명의 고리이라.

182:1.26 (1965.20) 이처럼 예수는 모든 세대에게 하나님 이름의 생생한 계시를 확대하였다. 신의 사랑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냄에 따라서, 영원한 진리는 늘 그의 이름을 더욱더 드러낸다.

2. 배반당하기 이전의 마지막 시간

182:2.1 (1966.1) 캠프로 돌아와서 유다가 자리에 없음을 알았을 때 사도들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열한 사람이 배반한 동료 사도에 관하여 열띤 논의에 말려든 동안, 다윗 세베대와 요한 마가는 예수를 한 옆으로 모시고 가서, 그들이 며칠 동안 유다를 감시하고 있었는데, 그가 주를 적들의 손에 팔아넘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털어놓았다. 예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였으나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친구들아,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어떻게 뜻하시지 않으면 아무 일도 사람의 아들에게 일어날 수 없느니라. 너희는 마음에 걱정하지 말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함께 해결되리라.”

182:2.2 (1966.2) 예수의 명랑한 태도는 사라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는 점점 더 심각해졌고 슬퍼지기까지 했다. 사도들은 마음이 많이 불안해졌기 때문에 주가 텐트로 돌아가라 친히 부탁했을 때조차 돌아가기 싫어 했다. 다윗과 요한과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그는 모두 열한 사도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친구들아, 너희는 가서 쉬라. 내일의 일을 위하여 준비하라. 우리 모두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뜻에 복종해야 함을 기억하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맡기노라.”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들에게 텐트로 가라고 손짓했지만, 그들이 갈 때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을 불러 말했다: “너희가 잠시 나와 함께 남아 있기를 바라노라.”

182:2.3 (1966.3) 사도들은 다만 글자 그대로 지쳤기 때문에, 잠에 곯아떨어졌다. 예루살렘에 온 이후로 죽 잠이 모자라고 있었다. 그들이 따로 자기 잠자리로 가기 전에, 열심당원 시몬은 칼과 다른 무기(武器)들이 저장되어 있는 자기 텐트로 모두를 이끌고 가서, 각자에게 이 싸우는 도구를 나누어주었다. 나다니엘을 제외하고, 모두가 이 무기를 받고 그것으로 무장하였다. 나다니엘은 무장(武裝)을 거절하며 말했다: “형제들아, 주는 그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그 나라를 실현하려고 제자들이 칼로 싸워서는 안 된다고 우리에게 거듭 일렀느니라. 나는 이것을 믿고, 주가 그를 방어하느라고 우리에게 칼을 쓰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지 않노라. 우리는 모두 그의 막강한 힘을 보았고, 그가 적들에 대항하여 자신을 방어하기를 원한다면 그리할 수 있음을 아노라. 그가 적들에게 저항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과정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애쓰는 것을 나타냄이 틀림없도다. 기도는 하여도 나는 칼을 휘두르지 않겠노라.” 나다니엘의 연설을 듣자, 안드레는 자기 칼을 열심당원 시몬에게 돌려주었다. 그래서 밤 동안 흩어질 때 그들 중에 아홉이 무장하였다.

182:2.4 (1966.4) 한동안 유다가 배반자인 것을 분개하는 마음 때문에 사도들은 머리 속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마지막 기도를 드리는 과정에서 유다를 언급하는 주의 말씀 때문에 그가 그들을 버렸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182:2.5 (1966.5) 여덟 사도가 마침내 자기 텐트로 돌아간 뒤에,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이 주의 지시를 받으려고 옆에 서 있는 동안, 예수는 다윗 세베대를 소리쳐 불렀다: “가장 빠르고 믿을 만한 사자를 내게 보내라.” 다윗이 한때 예루살렘과 벳세다 사이에 밤 동안 사자 봉사에서 주자였던 야곱이라는 사람을 주께 데려왔을 때, 예수는 그에게 말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필라델피아에, 아브너에게 가서 말하라: ‘주가 너에게 평화의 문안을 보내며, 그가 자기 적들의 손에 넘겨질 때가 왔다, 저희가 그를 죽게 하겠으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고, 아버지께로 가기 전에 너에게 얼마 안 있어 나타날 것이요, 그때 새 선생이 언제 너희 마음 속에 살려고 오는가 너에게 지침을 주리라.’” 그리고 마음에 들게 야곱이 이 전하는 말을 연습했을 때 예수는 그를 떠나보내며 말했다: “어떤 사람이 너에게 무엇을 할까 두려워 말지니, 야곱아 오늘 밤 보이지 않는 사자가 네 옆에서 달리리라.”

182:2.6 (1967.1) 그리고 나서 그들과 함께 야영하던, 그리스인 방문자들의 우두머리를 향하여 말했다: “내 형제여, 내가 너에게 미리 경고하였은즉, 바야흐로 일어나려 하는 사건에 마음이 흔들리지 말라. 사람의 아들이 적들, 유대인의 주사제와 권력자들의 선동으로 죽음을 당하리라. 그러나 아버지께로 가기 전에, 내가 살아나서 잠시 동안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이 모든 것이 일어남을 네가 보고 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네 형제들에게 힘을 주라.”

182:2.7 (1967.2) 보통 상황에서는 사도들이 주에게 직접 밤 인사를 드렸을 터이지만, 이날 저녁에 그들은 유다가 탈퇴했음을 갑자기 깨닫고 나서 그에 골똘했고, 주의 작별 기도의 특별한 성질에 너무 감동을 받아서, 잘 가라는 인사를 듣고 말없이 떠났다.

182:2.8 (1967.3) 예수는 안드레가 그날 밤에 옆을 떠날 때 이렇게 말하기는 했다: “안드레야, 내가 이 잔을 마신 뒤에, 내가 너희에게 다시 올 때까지 네 형제들을 함께 붙들어두도록 할 수 있는 대로 하여라. 내가 이미 너희 모두에게 일러준 것을 깨달았으니 네 형제들에게 힘을 주라. 평화가 네게 있을지어다.”

182:2.9 (1967.4) 때가 이미 너무 늦었기 때문에, 사도들 가운데 아무도 그날 밤에 보통 아닌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최악에 대비하도록 그들은 잠을 청했다. 유월절을 준비하는 날 오후에는 아무런 속세의 일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주사제들이 아침 일찍 주를 체포하려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직 다윗 세베대와 요한 마가가 바로 그날 밤에 예수의 적들이 유다와 함께 오고 있음을 알았다.

182:2.10 (1967.5) 다윗은 그날 밤에 베다니ㆍ예루살렘 길로 연결하는 위쪽 산길에서 파수를 보려고 준비했고, 한편 요한 마가는 기드론을 거쳐 겟세마네로 올라오는 길에서 지킬 작정이었다. 스스로 짊어진 전초(前哨) 임무를 보려고 떠나기 전에 다윗은 예수에게 작별을 알리며 말했다: “주여, 당신과 함께 봉사하느라고 나는 대단히 즐거웠나이다. 내 형제들은 당신의 사도이지만, 나는 그보다 작은 일을 마땅히 해야 하는 대로 기쁘게 처리하였나이다. 그리고 당신이 가실 때, 나는 마음에 사무치게 당신이 안 계셔 서운하리이다.” 그러자 예수가 다윗에게 말했다: “다윗아, 이 사람아, 남들은 하라고 시킨 일을 했으나 이 봉사는 네가 마음에 우러나서 하였고, 너의 헌신은 내가 잊지 아니하였노라. 너도 언젠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나와 함께 섬길지니라.”

182:2.11 (1967.6) 그리고 나서, 위쪽 산길 옆에서 망을 보려고 갈 준비를 하면서 다윗은 예수에게 말했다: “주여, 당신도 아시다시피, 나는 당신의 가족을 부르러 사람을 보냈고, 저희가 오늘 밤 예리고에 있다고 한 사자가 보낸 소식을 받았나이다. 밤에 그 끔찍한 길을 올라오는 것이 위험할 터이므로, 저희는 내일 아침 일찍 여기에 오리이다.” 다윗을 내려다보며 예수는 다만 말했다: “그리 될지어다, 다윗아.”

182:2.12 (1967.7) 다윗이 올리브산으로 올라가고 나서, 요한 마가는 시내를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길 가까이서 지키고 있었다. 예수 가까이 있고, 무슨 일이 돌아가는지 알고 싶은 큰 욕심이 아니었다면, 요한은 이 자리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다윗이 그를 떠난 뒤에 조금 있다가, 예수가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과 함께 가까운 골짜기로 물러나는 것을 지켜보았을 때, 요한 마가는 한데 엉킨 헌신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서, 파수 자리를 버리고 그들을 뒤따라가서, 수풀 속에 숨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동산에서 마지막 순간에, 유다와 무장한 호위병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나타나기 바로 전에 벌어진 모든 것을 보고 엿들었다.

182:2.13 (1968.1) 이 모든 것이 주의 캠프에서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가룟 유다는 성전 경비원의 지휘관과 의논하고 있었는데, 그 지휘관은 배반자의 지시를 받고 예수를 체포하기 위하여 떠날 준비를 하며 부하들을 소집했다.

3. 겟세마네에서 혼자서

182:3.1 (1968.2) 캠프 둘레에서 모든 것이 가라앉고 조용해진 뒤에, 예수는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을 데리고 가까운 골짜기에서 조금 위로, 전에 기도하고 교통하려고 자주 갔던 곳으로 올라갔다. 세 사도는 그가 몹시 침울함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고, 주가 그렇게 마음이 무겁고 슬픔에 잠긴 것을 전에 지켜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그가 기도하는 장소에 다다랐을 때, 그는 세 사람에게 앉아서 함께 지키라고 명했고, 한편 그는 돌 던지면 닿을 곳에 기도하러 가버렸다.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나서 그는 기도했다: “아버지여, 나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이 세상으로 왔고 그대로 하였나이다. 내가 육체로 이 목숨을 버릴 때가 왔음을 알고, 이로부터 움츠러들지 않사오나 이 잔을 마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가 알고 싶나이다. 내가 살아서 아버지를 기쁘게 한 것 같이, 죽어서도 아버지를 기쁘게 하리라는 확신을 내게 보내소서.”

182:3.2 (1968.3) 주는 몇 순간 동안 기도(祈禱)에 잠긴 태도로 남아 있었고, 그리고 나서 세 사도에게 가서, 이들이 잠에 곯아떨어진 것을 발견했는데, 눈꺼풀이 무겁고 깨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깨우면서 예수는 말했다: “저런! 너희는 한 시간도 나와 함께 지킬 수 없느냐? 내 혼이 죽기까지 지극히 슬프고, 내가 너희의 동반을 무척 바라는 것을 너희는 깨달을 수 없느냐?” 세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 뒤에, 주는 다시 혼자서 따로 갔고, 땅에 엎드려 다시 기도했다: “아버지여, 이 잔을 피할 수 있음을 내가 아나이다―모든 것이 아버지께 가능하나이다―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왔고, 이것이 쓴 잔이기는 해도, 아버지의 뜻이라면 마시고자 하나이다.” 그가 이렇게 기도를 마치자, 막강한 천사 하나가 옆에 내려와서, 그에게 말하고 그를 어루만지며 힘을 주었다.

182:3.3 (1968.4) 세 사도와 말하려고 돌아왔을 때, 예수는 이들이 잠에 빠진 것을 다시 발견했다. 이들을 깨우며 말했다: “너희가 지키고 나와 함께 기도하는 것이 필요한 그러한 시간에―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더욱 기도할 필요가 있는데―내가 너희를 떠날 때 어찌하여 잠에 빠지느냐?”

182:3.4 (1968.5) 그리고 나서, 세 번째로 주는 물러가서 기도했다: “아버지여, 잠자는 내 사도들을 보시오니, 저희에게 자비를 보이소서. 정신은 정말 간절하여도 육신이 약하나이다. 이제, 아 아버지여, 이 잔을 지나쳐서 안 된다면, 마시고자 하나이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기도를 마치고 나서, 그는 땅에서 엎드린 채로 한 순간 있었다. 일어서서 사도들에게 돌아갔을 때, 그는 다시 한번 이들이 잠들었음을 발견했다. 이들을 둘러보고, 불쌍히 여기는 손짓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는 계속 자고 쉬라. 결정의 시간이 지났느니라. 사람의 아들이 적들의 손에 팔려 넘어갈 시간이 우리에게 닥쳤느니라.” 깨울까 하여 그들의 몸을 흔들려고 손을 뻗으면서 말했다: “일어나라, 캠프로 돌아가자. 보라 나를 저버리는 자가 가까이 있고, 내 양 떼가 흩어질 때가 왔음이라. 그러나 이런 일에 관하여 내가 이미 너희에게 일렀노라.”

182:3.5 (1968.6) 예수가 추종자들 사이에서 살던 여러 해 동안, 그들은 정말로 그의 신다운 성품에 관하여 많은 증명이 있었지만, 바로 지금 그가 인간이라는 새 증거를 바야흐로 구경하게 되었다. 그의 신성(神性)을 보이는 모든 계시 가운데 가장 큰 계시, 부활이 있기 바로 전에, 그가 필사 성품을 가졌다는 가장 큰 증명, 굴욕과 십자가 처형이 있어야 한다.

182:3.6 (1969.1) 동산에서 기도할 때마다, 그의 인간성은 그의 신성을 더 단단하게, 믿음으로 붙들었다. 그의 인간 의지는 아버지의 신다운 뜻과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다. 막강한 천사가 그에게 일러준 다른 여러 말씀 가운데, 모든 필사 인간이 시간의 존재로부터 영원히 진보하는 길까지 지나가는 데 물질의 분해를 거쳐야 하는 것과 똑같이, 사람의 죽는 체험을 아들이 거침으로 땅에서 수여 생애를 마치기를 아버지가 바란다고 전하는 말씀이 있었다.

182:3.7 (1969.2) 초저녁에는 그 잔을 들이키기가 그다지 어려운 듯 보이지 않았지만, 인간 예수가 사도들에게 작별을 알리고 쉬라고 그들을 보내자, 그 시련은 더욱 소름끼치는 것이 되었다. 예수는 모든 인간 체험에서 흔히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북받침과 가라앉음을 겪었고, 바로 지금 그는 일 때문에 피곤해졌고, 오랜 시간 힘들게 수고하고 사도들의 안전에 관하여 애처롭게 걱정하여 지쳐버렸다.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때에 육신화한 하나님의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느꼈는가 감히 이해할 수 없지만, 뚝뚝 방울지어 땀이 얼굴에서 굴러떨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큰 고뇌를 겪고 말할 수 없는 슬픔을 견디었다는 것을 안다. 자연스러운 사건이 흘러가는 대로 버려두기를 아버지가 뜻하셨다고 그는 드디어 확신했다. 자신을 구하려고, 한 우주의 최고 우두머리로서 자기의 통치권을 전혀 쓰지 않기로 그는 완전히 결심하였다.

182:3.8 (1969.3) 광대한 창조에서 집합된 무리들은, 가브리엘과 인격화된 예수의 조절자, 이 둘의 임시 합동 지휘 하에서, 이 장면 위에 이제 하늘을 떠돌고 있었다. 이 하늘 군대의 사단장(師團長)들은 예수 자신이 그들에게 개입하라고 명령하지 않으면, 땅에서 벌어지는 이 사건에 간섭하지 말라고 거듭하여 경고를 받았다.

182:3.9 (1969.4) 사도들과 헤어지는 체험은 예수의 인간 가슴에 큰 부담이었다. 사랑으로 인한 이 슬픔은 그를 내리눌렀고, 그가 잘 알다시피 그를 기다리던 죽음과 마주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사도들이 얼마나 약하고 얼마나 무지한가 깨달았고, 이들을 두고 떠나기가 두려웠다. 떠날 때가 왔음을 잘 알았지만, 그의 인간 마음은 고통스럽고 슬픈 이 끔찍한 곤경을 피할 어떤 정당한 길이 혹시 없을까 찾아내기를 몹시 바랐다. 이렇게 피할 길을 찾다가 찾아내지 못하자, 그 마음은 잔을 기꺼이 마시려 했다. 미가엘의 신다운 정신은 그가 열두 사도를 위하여 최선을 다한 것을 알았다. 그러나 예수의 인간 마음은 세상에 이들만 버려두고 가기 전에 그들을 위해서 무언가 더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예수의 가슴은 에이는 듯 아팠고, 그는 참으로 형제들을 사랑했다. 그는 육신(肉身)의 가족과 떨어져 있었고, 그가 택한 동료들 가운데 하나는 그를 저버렸다. 아버지 요셉의 민족은 그를 거절하였고, 이로서 땅에서 특별 사명을 가진 민족으로서 그들의 멸망할 운명을 결정하였다. 사랑이 헛수고가 되고 자비가 거절받음으로 그의 혼은 고통을 받았다. 이때는 바로, 마음을 짓밟는 잔인함과 끔찍한 고통으로 모든 것이 압도하는 듯이 보이는, 인간의 두려운 한 순간이었다.

182:3.10 (1969.5) 예수의 인간성은 남모르는 외로움, 대중 앞에서 겪는 치욕, 그의 운동이 실패로 보이는 이 상황에 덤덤하지 않았다. 이 모든 감정은 말할 수 없는 무게로 그를 내리눌렀다. 이 큰 슬픔 가운데 그의 머리는 나사렛에서 어린 시절과 갈릴리에서 그가 초기에 하던 일로 돌아갔다. 이렇게 큰 시련을 거치는 때에, 머리 속에서 땅에서 봉사하던 때에 즐거웠던 많은 장면이 떠올랐다. 나사렛ㆍ가버나움ㆍ헤르몬산, 그리고 반짝이는 갈릴리 바다에서 해가 뜨고 해가 지던 이 옛 기억들을 되살려 그의 인간 마음을 굳게 다지고, 오래지 않아 그를 저버릴 배반자와 마주치려고 준비하면서 자신을 달랬다.

182:3.11 (1970.1) 유다와 군인들이 도착하기 전에, 주는 평상시의 침착을 넉넉히 다시 찾았다. 정신이 육체를 이겼고, 믿음은 두려워하거나 의심을 품는 인간의 모든 성향을 압도하였다. 인간 성품을 한껏 실현하는 것을 재는 최고의 시험에 부닥쳤고 이를 만족스럽게 통과하였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아낌없이 헌신한 필사 인간으로서, 차분히, 그가 절대로 질 수 없음을 충분히 확신하고서, 한번 더 사람의 아들은 적들과 마주칠 준비가 되었다.

제 183 편 예수가 배반당하고 체포되다

유란시아서

제 183 편

예수가 배반당하고 체포되다

183:0.1 (1971.1) 마침내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을 깨운 뒤에, 예수는 그들이 내일의 직무에 대비하여 자기 텐트로 돌아가서 잠을 청하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때가 되자 세 사도는 정신이 초롱초롱해졌고, 잠깐 눈을 붙였기 때문에 기분이 새로와졌다. 게다가 그들은 흥분한 두 사자가 그 장면에 도착하자 자극을 받고 잠이 깨었다. 이 사자들은 다윗 세베대가 어디 있는가 찾았고, 베드로가 그들에게 다윗이 망보는 곳을 가르쳐 주자, 재빨리 그를 찾아 갔다.

183:0.2 (1971.2) 비록 사도들 가운데 여덟이 잠에 곯아떨어졌어도, 그들과 나란히 야영한 그리스인들은 문제가 일어날까 더 두려워했는데, 너무나 두려워서 위험한 일이 생길 경우에 경종을 울리라고 파수 하나를 세워놓았다. 이 두 사자가 캠프로 서둘러 갔을 때, 그리스인 파수는 동료들을 모두 깨우기 시작했고, 그들은 텐트에서 완전히 옷을 차려 입고 완전히 무장하여, 줄지어 나왔다. 여덟 사도를 제외하고 캠프 전체가 이제 잠에서 깨어났다. 베드로는 동료들을 부르고 싶었지만, 예수는 분명히 그를 막았다. 주는 그들에게 모두 자기 텐트로 돌아가라고 부드럽게 타일렀지만, 그들은 그 제안 따르기를 망설였다.

183:0.3 (1971.3) 추종자들을 해산하지 못했으므로, 주는 그들을 버려두고 겟세마네 공원 입구 가까이, 올리브 기름틀을 향해서 걸어 내려갔다. 비록 세 사도와 그리스인들과 캠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그를 바짝 따라가기를 주저했어도, 요한 마가는 올리브 나무들을 거쳐 서둘러 돌아서, 올리브 기름틀 가까이, 작은 오두막에 몰래 숨었다. 체포하는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사도들을 방해하지 않고 그를 붙잡도록 예수는 캠프에서, 친구들로부터 물러났다. 유다가 그를 배반하는 광경이 사도들의 적개심을 너무 건드려서 군인들에게 저항하다가 그와 함께 감금될까 저어하여, 주는 체포될 때 사도들이 깨어 있고 그 자리에 있게 만드는 것이 두려웠다. 함께 붙잡힌다면, 그들도 함께 죽을까 걱정이 되었다.

183:0.4 (1971.4) 그를 죽이려는 계획이 유대인 권력자 회의에서 시작된 것을 알았어도, 예수는 또한 모든 그런 사악한 계획이 루시퍼와 사탄과 칼리가스티아의 충분한 승인을 받았음을 알고 있었다. 또한 영역의 이 모반자들이 사도들 모두가 그와 함께 죽는 것을 보고 싶어 하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183:0.5 (1971.5) 예수는 올리브 기름틀 위에 혼자 앉아서, 거기서 배반자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이때 오직 요한 마가와 셀 수 없이 많은 하늘 관찰자의 무리가 그를 보았다.

1. 아버지의 뜻

183:1.1 (1971.6) 육체를 입고 주가 사신 생애가 종결되는 것과 관련된 수많은 말씀과 많은 사건의 의미를 사람들이 오해할 큰 위험이 있다. 무지한 종과 감각이 무딘 군인들에게 예수가 잔인한 대우를 받은 것, 그 재판의 불공평한 진행, 종교 지도자라고 공언하는 자들의 무딘 태도를, 이 모든 고통과 치욕에 참을성 있게 복종하면서 예수가 파라다이스에 계시는 아버지의 뜻을 참으로 실행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정말로, 진실로, 태어날 때부터 죽기까지, 아들이 필사 체험의 잔을 끝까지 들이켜야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아주 모질게 주를 고문(拷問)하고, 저항하지 않는 몸에 아주 끔찍하게 모욕을 연달아 퍼부은 인간, 문명화되었다고 생각되는 인간들의 미개한 행위를 부추기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예수가 필사 인생의 마지막 몇 시간에 견디도록 강요되었된 비인간적이고 충격적인 이러한 체험은 어떤 의미에서도, 아버지의 신성한 뜻과 상관이 없었다. 지친 사도들이 몸이 피곤해서 잠에 빠진 동안에, 공원(公園)에서 그가 세 차례 드린 기도에 나타난 바와 같이, 사람이 하나님께 마침내 굴복했을 때 그의 인간 성품은 승리에 넘쳐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를 서약했다.

183:1.2 (1972.1)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모든 필사자가 땅에서 육체를 입고 일생을 마쳐야 하는 것과 똑같이, 수여 아들이 땅에서 일생을 자연스럽게 마치기를 바라셨다. 보통 남자와 여자는 땅에서 마지막 몇 시간, 그리고 뒤이어 죽는 사건을 특별한 섭리로 쉽게 만들어주기를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예수는 사건들이 자연스럽게 풀려나가는 것과 보조를 맞추어 육체를 입은 목숨을 버리기로 했다. 끔찍할 정도로 확실히, 믿을 수 없는 굴욕과 치욕스러운 죽음을 향하여 휩쓸어간 비인간적 사건들이 사악하게 겹친 잔인한 손아귀에서, 그는 집요하게 자신을 구출하지 않으려 했다. 이 놀라운 증오의 표시, 그리고 전례 없이 잔인한 표현은 모조리, 나쁜 사람과 사악한 필사자들이 저지른 일이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그렇게 뜻하지 않았고, 예수의 대적들이 그렇게 지시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생각이 모자라는 악한 필사자들이 수여 아들을 이렇게 거절할 것을 보장하려고 많이 일했다. 죄의 아버지조차 십자가에서 처형받는 장면의 끔찍한 공포를 피하여 얼굴을 돌렸다.

2. 유다가 도시에서

183:2.1 (1972.2) 마지막 만찬을 들다가 그렇게 갑자기 식탁을 떠난 뒤에, 유다는 바로 사촌 집으로 갔고,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은 성전 경비원의 지휘관에게 곧장 갔다. 유다는 그 지휘관에게 경비원들을 소집하라 요청하고, 자기가 이들을 예수에게로 이끌 준비가 되었음을 그에게 알렸다. 기대된 것보다 조금 일찍 그 장면에 유다가 나타났기 때문에, 마가의 집을 향하여 떠나는 데 얼마큼 지체되었고, 유다는 그 집에서 아직도 사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예수를 발견하기를 기대했다. 주와 열한 사도는 배반자와 경비원들이 도착하기까지 꼬박 15분 전에 엘리야 마가의 집을 떠났다. 체포하는 사람들이 마가의 집에 이르렀을 때가 되어, 예수와 열한 사람은 도시의 담 바깥으로 한창 나가서, 올리브산 캠프로 가는 도중이었다.

183:2.2 (1972.3) 마가의 주택에서, 열한 사람의 일행 속에, 예수를 이렇게 발견하지 못하여 유다는 마음이 많이 흔들렸는데, 그 중에서 오직 두 사람이 대항하기 위하여 무기를 지녔다. 오후에 그들이 캠프를 떠났을 때 그는 어쩌다가 오직 시몬 베드로와 열심당원 시몬이 칼을 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유다는 도시가 조용할 때, 그리고 저항할 기회가 거의 없을 때 예수를 붙잡기를 희망했다. 그 배반자는 그들이 캠프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면, 60명이 넘는 충실한 제자들과 마주칠까 두려웠고, 그는 또한 열심당원 시몬이 수중에 무기를 수북하게 쌓아놓은 것을 알았다. 충성스러운 열한 사도가 그를 얼마나 미워할까 깊이 생각하자, 유다는 갈수록 더 조바심이 났고, 그들이 모두 그를 죽이려고 할까 두려웠다. 그는 불충했을 뿐 아니라 속으로 정말 겁쟁이였다.

183:2.3 (1973.1) 2층 방에서 그들이 예수를 찾아내지 못했을 때, 유다는 경비대의 지휘관에게 성전으로 돌아가라고 요청했다. 그 배반자와 한 약속이 그날 자정까지 예수를 붙잡아 오라고 요구한 것을 알고서, 이때가 되어 권력자들은 예수를 받아들이는 준비로 대사제(大司祭)의 집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유다는 같이 온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가의 집에서 예수를 놓쳤다, 그를 체포하러 겟세마네로 가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충실히 따르는 사람들이 60명이 넘게 그와 함께 야영하고 있고, 모두 단단히 무장하고 있다고 배반자는 이어서 설명했다. 유대인 권력자들은 예수가 언제나 무저항을 가르쳤다고 유다에게 주의를 주었지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모두가 그런 가르침에 복종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고 유다는 대답했다. 그는 정말로 자기 몸을 걱정했고, 따라서 무장한 군인 40명의 무리를 대담하게 요구했다. 유대 당국은 그런 무장한 군대가 관할 밑에 없었으니까, 대번에 안토니아 요새로 가서 로마인 사령관에게 이 경비대를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를 체포할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사령관은 재빨리 그 요청을 거절했고 그들을 그의 상관에게 보냈다. 무장한 로마 경비원들을 이용할 허락을 얻으려고 마침내 그들이 할 수 없이 바로 빌라도에게 갔을 때까지, 이렇게 한 부서에서 다른 부서로 가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빌라도의 집에 다다랐을 때는 밤이 늦었고, 그는 이미 아내와 함께 침실로 물러가 있었다. 그는 그 계획과 전혀 상관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아내가 그 요청을 허락하지 말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더군다나 꺼려했다. 그러나 유대인 산헤드린의 담당 관리가 자리에 있고 그가 친히 이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에, 이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도 그가 나중에 시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총독은 그 간청을 허락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183:2.4 (1973.2) 따라서, 가룟 유다가 11시 반쯤 되어 성전을 떠났을 때, 그에게는 60명이 넘는 사람―성전 경비원과 로마 군인들, 그리고 주사제와 권력자들의 호기심 있는 하인들―이 따라붙었다.

3. 주가 붙잡히다

183:3.1 (1973.3) 횃불과 등불을 들고 이 무장한 군인 및 경비원의 일행(一行)이 동산에 접근했을 때, 누가 예수인가 재빨리 확인할 준비가 되고, 그래서 예수의 동료들이 그를 방어하려고 집결할 수 있기 전에 체포하는 자들이 쉽사리 예수를 잡을 수 있게 하려고, 유다는 일당의 앞에 훨씬 바깥으로 걸어나왔다. 유다가 주의 적들보다 앞서 나와 있기를 택한 데에는 아직도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군인들보다 앞서 그가 그 장면에 도착한 것처럼 보일 것이라, 그래서 예수 주위에 모인 사도들과 다른 사람들이 유다를 그의 뒤꿈치를 바짝 쫓아오는 무장한 경비원들과 직접 관련짓지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다는 체포하는 자들이 오는 것을 그들에게 경고하려고 서둘러 온 것처럼 꾸미려는 생각까지 했지만, 예수가 배반자에게 그런 생각을 방해하는 인사를 함으로 이 계획은 망쳐졌다. 비록 유다에게 친절하게 말했지만, 주는 유다를 배반자로서 맞이했다.

183:3.2 (1973.4) 30명 남짓한 동료 야영자들과 함께 있던 베드로ㆍ야고보ㆍ요한이, 횃불을 들고 무장한 무리가 산꼭대기를 휙 돌아오는 것을 보자마자, 이 군인들이 예수를 붙잡으러 오고 있음을 알았고, 모두 올리브 기름틀 가까이 달려갔는데, 거기에는 주가 달빛이 비치는 가운데 혼자 앉아 있었다. 군인들의 일행이 한쪽으로 다가오자, 세 사도와 그 동료들은 반대 쪽에서 다가왔다. 유다가 주에게 앞으로 걸어나와 인사하자, 주를 사이에 두고, 거기에 두 무리가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고, 유다는 그의 이마에 배반의 입맞춤을 하려고 준비하였다.

183:3.3 (1974.1) 경비원들을 겟세마네로 이끈 뒤에 그 배반자는 단지 군인들에게 예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입맞춤으로 그에게 인사한다는 약속을 이행하고, 다음에 그 장면에서 재빨리 물러날 수 있을까 바라고 있었다. 유다는 사도들이 모두 그 자리에 있고 감히 그가 그들의 사랑하는 선생을 배반한 것을 징계하느라고 자신을 집중하여 공격할까 크게 두려워했다. 그러나 주가 그를 배반자로 인사했을 때, 그는 정신이 너무 혼란하여 달아나려고 애쓰지 않았다.

183:3.4 (1974.2) 배반자가 다가올 수 있기 전에, 예수가 한 옆으로 걸어가서, 왼쪽 맨 앞에 있는 군인, 로마인들의 지휘관을 향하여,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하고 말했으니, 실제로 그를 배반하는 일로부터 유다를 구하려고 예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노력하였다. 그 지휘관은 대답했다, “나사렛 예수라.” 그러자 예수는 그 장교 앞으로 즉시 걸어나가서, 이 모든 세상을 지은 하나님의 차분한 위엄을 갖추고 거기 서서 말했다, “내가 그로다.” 이 무장한 무리 중에서 여러 사람이 예수가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을 들었고, 더러는 그의 대단한 행적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이 그가 이렇게 대담하게 자기 신분을 밝히는 말을 들었을 때, 행렬 앞 몇 줄에 선 자들이 갑자기 뒤로 자빠졌다. 그가 차분하고 품위 있게 신분을 밝히는 것을 듣고서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따라서 유다는 배반하려던 계획을 밀고 나갈 필요가 없었다. 주는 대담하게 적들에게 자신을 드러냈고, 그들은 유다의 도움 없이 그를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배반자는 이 무장한 무리와 함께 그가 거기 있는 것을 설명하려고 무슨 일인가 해야 했다. 게다가 예수를 그들의 손에 넘겨준다는 약속에 대한 보상으로 그가 수북히 받을 것이라 믿었던 큰 상(賞)과 명예를 받을 자격을 갖추기 위하여, 유대인 권력자들과 맺은, 주를 배신하는 거래에서 자기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183:3.5 (1974.3) 예수의 모습을 보고 그의 특별한 목소리를 듣고, 처음에 비틀거렸다가 경비원들이 다시 모이고, 사도와 제자들이 더 가까이 오자, 유다는 예수에게 걸어나가서,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만세― 주여, 선생이여.” 이렇게 유다가 주를 품에 안자, 예수는 말했다. “친구여, 이렇게 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느냐! 너는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배반까지 하려느냐?”

183:3.6 (1974.4) 사도와 제자들은 그 광경을 보고 글자 그대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 순간 아무도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자 예수는 유다의 배반하는 포옹을 풀고, 경비원과 군인들에게 걸어나가서 다시 물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다시 지휘관은 대답했다, “나사렛 예수라.” 예수는 다시 대답했다: “내가 그라고 너희에게 일렀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나를 찾거든, 이 다른 사람들이 가도록 버려두라. 나는 너희와 함께 갈 준비가 되었노라.”

183:3.7 (1974.5) 예수는 경비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었고, 군인들의 지휘관은 세 사도와 그 동료들이 평안히 제 갈 길을 가도록 아주 기꺼이 버려두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떠날 수 있기 전에, 예수가 지휘관의 명령을 기다리며 서 있는 동안, 대사제의 시리아인 경호원 말고라는 사람이 예수 앞에 걸어나와 그의 손을 뒤로 묶으려고 준비했다. 하지만 로마인 지휘관은 예수를 이렇게 묶으라고 지시하지 않았다. 주가 이러한 굴욕을 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베드로와 동료들은 이제 더 자제할 수 없었다. 베드로는 긴 칼을 뽑아 들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말고를 치려고 앞으로 후딱 나섰다. 그러나 미처 군인들이 대사제의 하인을 방어하려고 나올 수 있기 전에, 예수는 손을 들어 베드로를 막으며 엄하게 말했다: “베드로야, 네 칼을 거두라. 칼을 드는 자는 칼로 망할지니라. 내가 이 잔을 마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깨닫지 못하느냐? 게다가, 이 몇 사람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고 싶어 하는 열두 군단(軍團)이 넘는 천사와 그 동료들을 지금도 내가 지휘할 수 있음을 네가 알지 못하느냐?”

183:3.8 (1975.1) 예수가 추종자들의 이러한 육체적 저항의 표시를 이렇게 실질적으로 그만두게 했어도, 이것은 경비대 지휘관의 두려움을 일으키기에 넉넉했다. 그는 이제 군인들의 도움을 얻어서 예수를 꽉 붙들고 재빨리 그를 묶었다. 그들이 그의 손을 굵은 노끈으로 묶는 동안에 예수는 그들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너희가 강도나 붙잡듯 칼과 막대기로 나를 대적하여 오느냐? 나는 날마다 성전에서 너희와 함께 있었고, 대중 앞에서 사람들을 가르쳤거늘, 너희는 나를 잡으려고 조금도 애쓰지 아니하였도다.”

183:3.9 (1975.2) 예수가 묶이고 나서, 지휘관은 주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를 구조하려고 애쓸까 두려워서, 그들을 붙잡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군인들은 그렇게 빠르지 못했다. 그들을 체포하라는 지휘관의 명령을 흘려듣고서 예수의 추종자들이 황급히 골짜기로 달아났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요한 마가는 근처의 오두막에 숨어 있었다. 경비원들이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떠나자, 요한 마가는 달아나는 사도와 제자들을 따라잡기 위해서 오두막에서 살그머니 나오려 했다. 그러나 막 그가 빠져 나올 때, 달아나는 제자들을 쫓다가 돌아오는 마지막 군인들 중 하나가 가까이 지나가고 있었고, 리넨 겉옷을 걸친 이 젊은이를 보고 쫓아가서, 거의 그를 따라잡았다. 사실, 그 군인은 겉옷을 붙잡기에 넉넉히 요한에게 가까이 갔지만, 그 젊은이는 옷을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채로 달아났고, 군인은 헛되이 겉옷만 손에 쥐었다. 요한 마가는 쏜살같이 위쪽 산길에, 다윗 세베대에게 갔다. 그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다윗에게 이야기하고 나서, 그들 둘은 잠자는 사도들의 텐트로 서둘러 돌아가서 주가 배반당하고 체포된 것을 여덟 명 모두에게 알려주었다.

183:3.10 (1975.3) 여덟 사도가 깨어날 무렵에, 위에 있는 골짜기로 달아났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어찌해야 할까 의논하려고 그들은 모두 올리브 기름틀 가까이서 함께 모였다. 그동안에, 올리브 나무들 사이에 숨어 있던 시몬 베드로와 요한 세베대는 군인과 경비원과 하인들의 패거리를 뒤쫓아 이미 가버렸고, 이들은 이제 가망 없는 죄인을 이끌 듯 예루살렘으로 예수를 이끌고 있었다. 요한은 그 패거리 뒤에 바짝 쫓아갔지만 베드로는 멀찌감치 따라갔다. 군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뒤에, 요한 마가는 시몬 베드로와 요한 세베대의 텐트에서 찾아낸 겉옷 하나를 주워 입었다. 그는 경비원들이 예수를 안나스, 은퇴한 대사제의 집으로 데려간다고 추측했다. 그래서 그는 올리브 농원(農園)을 통하여 길을 둘러가서, 그 패거리보다 앞서 갔고, 대사제 저택의 대문 입구 가까이 숨었다.

4. 올리브 기름집에서 있은 토론

183:4.1 (1975.4) 야고보 세베대는 시몬 베드로와 자기 아우 요한과 갈라졌고, 그래서 그는 이제 올리브 기름틀이 있는 곳에서 다른 사도와 동료 야영자들과 한데 모여서, 주가 붙잡힌 상황에 비추어서 어찌해야 할까 의논했다.

183:4.2 (1975.5) 안드레는 동료 사도들을 집단으로 관리하는 모든 책임에서 전에 해방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일생에서 가장 큰 이 위기에, 그는 말이 없었다. 잠시 비공식 논의가 있은 뒤에, 열심당원 시몬은 올리브 기름집의 돌담 위에 서서, 주와 하늘나라 운동에 충성해야 한다고 뜨겁게 탄원하면서, 동료 사도와 다른 제자들에게 그 패거리 뒤를 얼른 쫓아가서 예수를 구출하라고 훈계했다. 나다니엘의 충고가 아니었더라면, 그 일행의 대다수는 공격적인 그의 지휘를 따를 생각이 있었다. 시몬이 말을 마친 순간에 나다니엘은 일어서서, 무저항에 관하여 예수가 자주 되풀이하던 가르침에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더 나아가서, 좋은 소식, 곧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면서 세상으로 떠나가야 할 때를 위하여 그들이 목숨을 보존해야 한다고 예수가 바로 그날 밤에 지시했음을 상기시켰다. 야고보 세베대가 나다니엘의 이 주장을 격려했고, 야고보는 이제 어떻게 베드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주가 체포되는 것을 막으려고 칼을 뺐는가, 시몬 베드로와 동료 칼잡이들에게 칼을 칼집에 넣으라고 예수가 명했다고 이야기했다. 마태와 빌립도 또한 연설했지만, 나사로에게 죽음을 자초하지 말라고 예수가 조언한 적이 있다는 사실에 토마스가 주의를 불러일으킬 때까지, 이 논의에서 아무런 뚜렷한 방도가 생기지 않았다. 토마스는 주가 친구들이 그를 방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적대하는 인간들을 좌절시키려고 신의 능력을 계속 삼가 쓰지 않았으니까, 주를 구하기 위하여 그들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토마스는 그들에게 다윗 세베대가 집단을 위하여 정보 교환소와 사자 본부를 유지하려고 캠프에 남아 있을 것을 알고, 각자 자신을 위하여 흩어지라고 설득했다. 그날 새벽 2시 반이 되자, 사람들이 캠프를 버리고 떠났고 오직 다윗이 사자 서넛과 함께 가까이 남아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예수가 어디로 끌려갔는가,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관하여 정보를 얻으려고 파송되었다.

183:4.3 (1976.1) 나다니엘ㆍ마태ㆍ빌립 그리고 쌍둥이, 이 다섯 사도는 벳바게와 베다니에서 숨었다. 토마스ㆍ안드레ㆍ야고보, 그리고 열심당원 시몬은 도시 안에 숨어 있었다. 시몬 베드로와 요한 세베대는 안나스의 집으로 따라갔다.

183:4.4 (1976.2) 동이 튼 뒤에 조금 있다가, 시몬 베드로는 겟세마네 캠프로 헤매면서 돌아갔고, 깊은 절망에 빠져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다윗은 한 사자에게 책임을 지워서 그를 형 안드레와 함께 지내라고 보냈는데, 안드레는 예루살렘에서 니고데모의 집에 있었다.

183:4.5 (1976.3) 십자가 처형이 끝날 때까지, 요한 세베대는 예수가 지시한 대로 남아 있었고, 언제나 가까이 준비되어 있었다. 다윗의 사자들에게 시간마다 정보를 준 사람은 요한이었고, 이 소식을 사자들은 동산 캠프에 있는 다윗에게 전달했으며, 다음에 이것은 숨어 있는 사자들에게, 또 예수의 가족에게 전해졌다.

183:4.6 (1976.4) 분명히, 목자가 얻어맞고 양들이 흩어진다! 바로 이 상황을 예수가 그들에게 미리 경고했다는 것을 모두가 어렴풋이 깨닫지만, 그들은 주가 갑자기 사라진 것에 너무나 심하게 충격을 받아서 정상으로 머리를 쓸 수 없다.

183:4.7 (1976.5) 날이 밝은 뒤에 조금 있다가, 베드로가 형과 함께 있으라고 파송된 바로 뒤에, 육체로 예수의 아우인 유다가 숨이 차서, 예수의 나머지 가족보다 먼저 캠프에 도착했지만, 주가 이미 체포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그는 이 정보를 어머니와 형제와 자매에게 전하려고 예리고 길을 서둘러서 도로 내려갔다. 다윗 세베대는 유다를 통해서, 예수의 가족에게 베다니에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 모이라고, 거기서 그의 사자들이 정기적으로 그들에게 가져올 소식을 기다리라는 말을 보냈다.

183:4.8 (1976.6) 사도와 주요 제자들과 땅에 있는 예수의 가족에 관하여 말하면, 이것이 목요일 밤 후반의 상황이었다. 이 집단과 개인들은 모두 사자(使者)의 봉사로 서로 연결이 유지되었고, 다윗 세베대가 이 봉사를 겟세마네 캠프에 있는 그의 본부에서 계속 운영했다.

5. 대사제의 저택으로 가는 길

183:5.1 (1977.1) 동산에서 예수와 함께 길을 떠나기 전에, 성전 경비대의 유대인 지휘관과 군인 집단의 로마인 지휘관 사이에, 예수를 어디로 데려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다툼이 일어났다. 성전 경비대의 지휘관은 예수를 대사제 대리(代理) 가야바의 집으로 끌고 가야 한다고 명령을 내렸다. 로마 군인들의 지휘관은 예수를 전직(前職) 대사제이자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의 저택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지시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유대 교회 율법의 집행에 상관되는 모든 문제에서 로마인들이 안나스와 직접 상대하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로마인 지휘관의 명령을 따랐고, 그들은 예비 심문을 받도록 예수를 안나스의 집으로 데려갔다.

183:5.2 (1977.2) 유다는 지휘관들 가까이, 따라서 행진하면서 주고받는 말을 모두 들었지만, 그 논쟁에 전혀 끼지 않았는데, 유대인 지휘관이나 로마인 장교가 배반자에게 말도 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렇게 경멸하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183:5.3 (1977.3) 이 무렵에 요한 세베대는, 반드시 가까이 남아 있으라고 주가 지시한 것을 기억했기 때문에, 두 지휘관 사이에, 따라서 행진하는 예수 가까이 서둘러 갔다. 성전 경비대의 사령관은, 요한이 따라서 다가오는 것을 보고서, 조수(助手)에게 말했다: “이 사람을 잡아서 묶어라. 이 친구의 추종자 중에 하나이라.” 그러나 로마인 지휘관이 이 말을 들었을 때, 두리번거리다가 요한을 보고서, 그 사도가 자기 옆에 와야 한다고, 아무도 그를 건드리면 안 된다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나서 로마인 지휘관은 유대인 지휘관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배반자도 겁쟁이도 아니라. 나는 동산에서 그를 보았는데, 그는 우리에게 저항하려고 칼을 빼지 않았느니라. 그는 자기의 주와 함께 있으려고 앞으로 나설 만큼 용기를 가졌고, 아무도 그에게 손대지 말지니라. 로마의 율법은 어떤 죄수도, 재판석 앞에 함께 설 친구를 적어도 하나 가져도 좋다고 허락하느니라. 이 사람이 그의 주, 그 죄수 옆에 서는 것을 막지 말지니라.” 이 말을 들었을 때, 유다는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해서, 행진하는 사람들의 뒤로 물러가버렸고, 안나스의 저택에 혼자 다다랐다.

183:5.4 (1977.4) 이것이 어째서 요한 세베대가 이날 밤과 이튿날, 고된 체험을 통하여 끝까지 예수 가까이 남아 있도록 허락을 받았는가 설명한다. 요한이 유대 교회 법정의 처리를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행동하라고 지명된 로마인 고문 비슷한 지위를 가졌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요한에게 무슨 말을 하거나 그를 건드리기를 두려워했다. 안나스 저택의 대문에서 성전 경비대의 지휘관에게 예수를 넘겨주면서, 그 로마인이 조수에게 이렇게 말했을 때, 특권을 가진 요한의 지위는 더욱 안전해졌다: “이 죄수를 따라가서 이 유대인들이 빌라도의 허락 없이 그를 죽이지 않도록 처리하라. 저들이 그를 암살하지 않도록 경계하고, 그의 친구 갈릴리 사람이 곁에 서서, 일의 진행을 모두 지켜보도록 처리하라.” 다른 열 사도는 할 수 없이 숨어 있어야 했지만, 이렇게 요한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을 바로 그때까지, 줄곧 예수 가까이 있을 수 있었다. 요한은 로마의 보호를 받으며 행동했고, 유대인들은 주가 돌아가실 때까지 감히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183:5.5 (1977.5) 안나스의 저택으로 가는 동안 내내, 예수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체포된 때부터 안나스 앞에 나타날 때까지, 사람의 아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제 184 편 산헤드린 법정 앞에서

유란시아서

제 184 편

산헤드린 법정 앞에서

184:0.1 (1978.1) 안나스의 대리인들은 예수가 붙잡힌 뒤에 안나스의 저택으로 그를 즉시 데려오라고 로마 군인들의 지휘관에게 몰래 전에 지시하였다. 전직 대사제는 유대인 교회 권위자들의 우두머리로서 그의 위신(威信)을 유지하기를 바랐다. 또한 예수를 그의 집에 몇 시간 동안 구류하는 데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는데, 곧 산헤드린 법정을 합법적으로 소집하는 시간을 벌려는 것이었다. 성전에서 아침 희생물을 바치는 시간 이전에 산헤드린 법정을 여는 것은 율법에 어긋났는데, 이 희생물은 새벽 3시쯤에 바쳤다.

184:0.2 (1978.2) 산헤드린 회원들의 법정이 그의 사위 가야바의 저택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안나스는 알았다. 산헤드린의 회원 약 30명은 예수가 그들 앞에 혹시 끌려 왔을 때 예수를 재판할 준비가 되도록, 자정까지 대사제의 집에서 모여 있었다. 재판하는 법정을 구성하는 데 23명만 요구되었으니까,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굳세게, 터놓고 반대한 사람들만 모여 있었다.

184:0.3 (1978.3) 올리브산에 있는 안나스의 저택에서 예수는 세 시간쯤 보냈고, 여기는 사람들이 그를 체포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요한은 안나스의 저택에서 자유롭고 안전했는데, 로마인 지휘관이 한 말 뿐 아니라, 또한 그와 형 야고보가 나이 든 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들은 전직(前職) 대사제가 어머니 살로메의 먼 친척이었기 때문에, 그 저택에 여러 번 손님이었다.

1. 안나스의 심문

184:1.1 (1978.4) 안나스는 성전의 소득으로 부유하게 되었고, 그의 사위가 대사제 대행이고, 자신이 로마 당국과 관련을 가졌기 때문에, 정말로 온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이었다. 그는 태도가 부드럽고 교활한 모사(謀士)요 계교를 꾸미는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를 처치하는 문제를 지휘하고 싶었다. 퉁명스럽고 공격적인 사위에게 그렇게 중요한 과제를 전적으로 맡기기가 두려웠다. 안나스는 주의 재판이 꼭 사두개인들의 손에 맡겨지도록 처리하기를 바랐다. 예수의 운동을 지지한 산헤드린 회원의 거의 전부가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바리새인들이 더러 동정할 가능성을 두려워했다.

184:1.2 (1978.5) 주가 그의 집을 방문하고, 그가 차갑게 경계하면서 주를 맞이하는 것을 보고 나서 즉시 떠난 뒤로, 안나스는 몇 년 동안 예수를 만나보지 못했다. 안나스는 일찍부터 이렇게 안면이 있었던 것을 이용하고, 그렇게 하여 예수가 그의 주장을 버리고 팔레스타인을 떠나라고 설득해 볼 생각이 있었다. 그는 좋은 사람을 죽이는 데 끼어드는 것을 꺼려했고, 예수가 죽음을 당하기보다 차라리 나라를 떠나기를 택할지 모른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튼튼하고 각오가 굳은 갈릴리 사람 앞에 섰을 때, 안나스는 그런 제안이 쓸데없으리라는 것을 당장 깨달았다. 예수는 안나스가 기억했던 것보다 더욱 위엄 있고 매우 차분했다.

184:1.3 (1979.1) 예수가 어렸을 때, 안나스는 그에게 큰 관심을 가졌지만, 환전상 및 다른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몰아내느라고 예수가 최근에 행한 것 때문에 이제 그의 소득이 위협을 받았다. 이 행위는 예수의 가르침보다 전직 대사제의 반감(反感)을 훨씬 더 불러일으켰다.

184:1.4 (1979.2) 안나스는 널찍한 접견실에 들어가서 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예수를 그 앞으로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말없이 주를 찬찬히 살펴보느라고 몇 순간이 지난 뒤에, 말했다: “네가 우리 나라의 평안과 질서를 깨뜨리는즉슨, 너의 가르침에 대하여 무슨 조처(措處)가 있어야 함을 네가 깨달으렷다.” 안나스가 예수를 캐묻는 듯이 바라보자, 주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시 안나스가 말했다. “선동자인 열심당원 시몬 외에, 네 제자들의 이름이 무엇인고?” 다시 예수는 그를 내려다보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184:1.5 (1979.3) 예수가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 것에 안나스는 어지간히 속이 뒤집혔고, 너무 뒤집혀서 예수에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호의를 가지거나 말거나, 너는 아랑곳하지 않는고? 다가오는 너의 재판 문제를 결정하는 데, 내가 가진 권력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느냐?” 이 말을 듣자 예수는 말했다: “안나스여, 내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면 네가 나에 대하여 아무 권력을 가질 수 없음을 네가 아는도다. 더러는 무지한 까닭에 사람의 아들을 죽이려 하고, 저희는 분별이 그보다 없거니와, 친구여 너는 네가 무엇을 하는지 아느니라. 그런즉 너는 어찌 하나님의 빛을 물리칠 수 있느냐?”

184:1.6 (1979.4) 예수가 친절한 태도로 하신 말씀은 안나스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전에 그는 머리 속에서 예수가 팔레스타인을 떠나든지 아니면 죽어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그는 용기를 불러일으켜 물었다: “도대체 네가 무엇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애쓰느냐? 너는 어떤 사람이라고 주장하느냐?” 예수는 말했다: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놓고 말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나는 회당에서, 또 여러 번 성전에서 가르쳤고, 거기서 모든 유대인과 많은 이방인이 내 말을 들었느니라. 나는 몰래 아무것도 말한 적이 없거늘, 그러면 어찌하여 내 가르침에 대하여 네가 묻느냐? 어찌하여 너는 내 말을 들은 자들을 불러내고 저희에게 묻지 않느냐? 보라, 바로 네가 이 가르침을 들어 본 적이 없다 하더라도, 내가 말한 것을 온 예루살렘이 들었느니라.” 그러나 안나스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가까이 서 있던, 저택의 우두머리 집사가 손으로 예수의 얼굴에 따귀를 붙이고 말했다: “어찌 네가 감히 그런 말로 대사제에게 대꾸하느냐?” 안나스는 그 집사를 꾸짖지 않았지만, 예수는 그에게 말했다: “친구여, 내가 잘못된 말을 하였으면, 그 잘못에 대하여 증언하라. 그러나 내가 진리를 말하였으면, 어찌하여 네가 나를 치느냐?”

184:1.7 (1979.5) 안나스는 집사(執事)가 예수를 때린 것이 유감스러웠어도, 너무 거만해서 그 문제를 거들떠볼 수 없었다. 혼란에 빠져 그는 다른 방으로 갔고, 거의 한 시간 동안 집안의 시중드는 사람과 성전 경비원들과 함께 예수를 버려두었다.

184:1.8 (1979.6) 그가 돌아왔을 때, 주의 옆으로 가서 말했다: “너는 메시아, 이스라엘의 구원자라 주장하느냐?” 예수가 말했다: “안나스여, 너는 나를 어릴 때부터 알았느니라. 내 아버지가 정하신 것을 제외하고 내가 누구라고 주장하지 않았고, 내가 모든 사람,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파송된 것을 네가 아느니라.” 그러자 안나스가 말했다: “네가 메시아라고 주장했다는 소리를 내가 들었노라. 그 말이 진실이냐?” 예수는 안나스를 바라보았지만 이렇게만 대답하였다. “네가 그리 말하였도다.”

184:1.9 (1980.1) 언제 예수가 산헤드린의 법정 앞에 끌려올 것인가 물으려고 사자들이 이때쯤 가야바의 저택으로부터 도착했고, 날이 밝을 때가 가까웠기 때문에, 안나스는 예수를 묶인 채로, 성전 경비원들이 호위하게 하여 가야바에게 보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있다가 그 자신이 그들의 뒤를 따라 갔다.

2. 안뜰에서 베드로가

184:2.1 (1980.2) 경비원과 군인의 일행이 안나스의 저택 입구에 다가가는 동안, 요한 세베대는 로마 군인의 지휘관 옆에서 행진하고 있었다. 유다는 얼마큼 뒤떨어져 있었고, 시몬 베드로는 멀찌감치 떨어져 따라갔다. 요한이 예수와 경비원들과 함께 저택의 안뜰로 들어간 뒤에, 유다는 대문으로 다가왔지만, 예수와 요한을 보고 나서, 가야바의 집으로 계속 갔고, 거기서 주의 진짜 재판이 나중에 열릴 것을 알았다. 유다가 떠난 뒤에 곧 시몬 베드로가 도착했고, 대문 앞에 서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를 저택 안으로 막 데려가려고 할 바로 그때, 요한이 그를 보았다. 대문을 지키던 여자 문지기는 요한을 알았고, 요한이 그 여자에게 베드로를 들여보내라 요청하며 말을 붙였을 때, 그 여자는 즐겁게 찬성했다.

184:2.2 (1980.3) 안뜰에 들어서자, 베드로는 석탄 불 있는 데로 가서 불을 쪼이려고 했는데, 밤이 으슬으슬 추웠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에 예수의 적들 사이에서 무척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고, 정말로 그는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주가 요한에게 훈계한 것처럼 주는 그에게 가까이 있으라고 지시하지 않았다.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에게 속했고, 그들은 주가 재판받고 십자가에 처형되는 시간에 목숨을 위태롭게 하지 말라고 특별히 경고를 받았다.

184:2.3 (1980.4) 저택의 대문으로 다가오기 조금 전에 베드로는 긴 칼을 던져 버렸고 그래서 안나스의 안뜰에 무장하지 않은 채로 들어갔다. 그의 머리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고 그는 예수가 체포된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 상황의 현실―여기 안나스의 안뜰에서 대사제의 하인들 옆에서 불을 쬐고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없었다. 다른 사도들이 무엇을 하는가 궁금했고, 머리 속에서 어떻게 요한이 그 저택에 들어갈 허가를 받게 되었는지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요한이 문지기에게 그를 들여보내라고 청했으니까, 요한이 하인들에게 알려져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184:2.4 (1980.5) 여자 문지기가 베드로를 들여보낸 뒤에 조금 있다가, 그가 불 옆에서 몸을 따듯하게 하는 동안, 그 여자는 베드로에게 다가가서 짓궂게 말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자, 베드로는 이렇게 얼굴이 알려진 것에 놀라지 않았어야 하는데, 그 소녀에게 자기를 저택 대문을 통과시키라고 요청한 것은 요한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나 긴장하고 불안한 상태에 있어서, 이렇게 제자로 신분이 확인되자 그는 침착을 잃었고, 오로지 머리 속에서 제일 처음 떠오르는 생각으로―목숨을 가지고 달아날 생각으로―“나는 아니라”고 말하여 하녀의 물음에 재빨리 대꾸했다.

184:2.5 (1980.6) 금방 또 다른 하인이 베드로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저희가 이 친구를 붙잡을 때, 동산에서 내가 너를 보지 않았느냐? 너도 그의 추종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는 이제 속속들이 놀랐다. 이 고발하는 사람들로부터 안전히 달아날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맹렬히 부인하며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을 모르오. 추종자 중에 하나도 아니라.”

184:2.6 (1980.7) 이때쯤 대문을 지키는 여자 문지기가 베드로를 한쪽으로 끌고 가서 말했다: “네가 이 예수의 제자임이 확실하니라. 추종자들 중에 하나가 내게 너를 뜰 안으로 들여보내라 청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내 언니가 너를 이 사람과 함께 성전에 있는 것을 보았느니라. 어찌하여 네가 이를 아니라 하느냐?” 그 하녀가 그를 고발하는 말을 들었을 때, 베드로는 잔뜩 욕을 퍼붓고 맹세하며 예수를 도무지 모른다고 부인하며 다시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의 추종자가 아니라. 나는 그를 알지도 못하고, 전에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노라.”

184:2.7 (1981.1) 베드로는 한동안 불 곁을 떠나서, 안뜰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달아나고 싶었지만, 자기한테 눈을 끌까 두려웠다. 추워져서, 그는 불 곁으로 돌아갔는데, 그에게 가까이 서 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말했다: “분명히 너는 이 사람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이라. 이 예수는 갈릴리 사람이요, 네 사투리가 너를 드러내니, 네가 또한 갈릴리 사람처럼 말하기 때문이라.” 다시 베드로는 주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부인했다.

184:2.8 (1981.2) 베드로는 너무 속이 뒤집혀서, 불에서 멀리 떨어져서 혼자 현관에 남아서 고발하는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려고 했다. 이렇게 혼자 떨어져 한 시간 넘게 지낸 뒤에, 그 문지기와 그 언니가 어쩌다가 그를 만났고, 그들 둘이 다시 베드로가 예수의 추종자라고 놀리는 투로 비난했다. 다시 그는 그 고발을 부인했다. 그가 한번 더 예수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부인했을 때, 수탉이 울었고, 베드로는 바로 그날 밤 일찍, 주가 그에게 경고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마음이 무겁고 죄책감에 짓눌려 거기 서 있는데, 저택의 문들이 열렸고, 가야바의 집으로 가는 길에 경비원들이 예수를 이끌고 지나갔다. 주가 베드로를 지나는 동안에, 주는 횃불의 빛으로, 예전에 자신 있고 겉으로 용감한 사도의 얼굴에서 절망의 빛을 보았고, 돌이켜 베드로를 바라보았다. 베드로는 살아 있는 한, 결코 그 얼굴빛을 잊지 못했다. 필사 인간이 주의 얼굴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언뜻 보는 눈길, 동정과 사랑이 한데 섞인 그런 눈길이었다.

184:2.9 (1981.3) 예수와 경비원들이 저택의 대문 바깥으로 나간 뒤에, 베드로는 그들을 따라갔지만, 조금 뿐이었다. 더 멀리 갈 수 없었다. 그는 길가에 주저앉아 슬피 울었다. 이 비통한 눈물을 흘리고 나서, 형 안드레를 찾기를 바라면서 캠프를 향하여 되돌아갔다. 캠프에 도착하고 나서 그는 겨우 다윗 세베대만 찾아냈는데,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그의 형이 숨은 곳으로 그를 안내하라고 사자 하나를 보냈다.

184:2.10 (1981.4) 베드로의 체험은 전부 올리브산에 있는 안나스의 저택 안뜰에서 일어났다. 그는 대사제 가야바의 저택으로 예수를 따라가지 않았다. 수탉이 우는 소리에 자기가 주를 거듭 부인했다는 것을 베드로가 깨닫게 된 것은 이 모두가 예루살렘 바깥에서 일어났음을 가리키는데, 도시의 성 안에서 새 종류를 기르는 것이 법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184:2.11 (1981.5) 수탉의 울음소리가 베드로를 제 정신이 들게 할 때까지, 몸을 따듯이 하려고 현관을 오르락내리락 거닐 때, 그는 다만 얼마나 영리하게 하인들의 비난을 피했는가, 그가 예수의 편이라는 것을 확인하려는 그들의 의도를 어떻게 망쳐 버렸는가 생각했다. 한동안, 그는 이 하인들이 이렇게 그를 심문할 아무런 도덕적 권한이나 법적 권한이 없다고만 생각했고, 생각컨대 신분이 확인되고, 아마도 붙잡히고 감옥에 들어갈 것을 피하는 데 얼마나 좋은 방법을 썼는가 정말로 자신을 칭찬했다. 수탉이 울 때까지, 자기가 주를 부인했다는 것이 베드로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예수가 그를 바라볼 때까지, 그는 하늘나라의 대사로서 그의 특권에 부끄럽지 않게 살지 못한 것을 깨닫지 못했다.

184:2.12 (1981.6) 타협하고 최소의 저항이 있는 길을 따라서 첫 걸음을 내디디었으니까, 이미 결정한 행동 과정을 계속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베드로에게 명백하지 않았다. 잘못 시작하고 나서, 돌이켜 바로잡는 것은 위대하고 고귀한 인격을 요구한다. 너무나 흔히, 사람의 머리는, 일단 발길을 들이고 나서, 그릇된 길을 계속하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184:2.13 (1982.1) 부활이 있은 뒤에 그가 주를 만나고, 주를 부인하던 이 비참한 밤의 체험을 겪기 전과 똑같이 그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베드로는 결코 그가 용서받을 수 있다고 완전히 믿지 않았다.

3. 산헤드린 회원의 법정 앞에서

184:3.1 (1982.2) 이 금요일 새벽 3시 반쯤에, 대사제 가야바가 산헤드린의 심문(審問) 법정이 개회되었다고 선언하고, 공식 재판을 받도록 예수를 그들 앞으로 데려오라고 요청했다. 세 차례에 걸쳐 이전에 산헤드린은 대다수의 투표로 예수의 사형을 선포한 적이 있으며, 율법을 어기고, 신성을 모독하고, 이스라엘의 선조들의 전통을 모욕했다는 비공식 죄목으로 그가 죽어 마땅하다고 결정을 내렸다.

184:3.2 (1982.3) 이것은 정식으로 소집한 산헤드린 회의가 아니었고, 보통 장소, 즉 성전에, 깎은 돌로 지은 방에서 열리지 않았다. 이것은 산헤드린 의원 약 30명이 모여서 특별 재판을 하는 법정이었고 대사제의 저택에서 열렸다. 요한 세베대는 이른바 이 재판을 통하여 내내, 예수와 함께 자리에 있었다.

184:3.3 (1982.4) 이 주사제와 서기관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바리새인들 가운데 더러가 그 예수, 그들의 지위를 위협하고 그들의 권한에 도전하는 자가 이제 안전히 손아귀에 있다고 얼마나 뻐기었는지! 복수에 불타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그가 결코 살아서 달아나지 못하리라고 굳게 결심하였다.

184:3.4 (1982.5) 보통은, 사형(死刑) 죄목으로 사람을 재판할 때 유대인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진행하였고, 증인 선택과 재판의 전체 운영에 온갖 공평한 보호 조치를 마련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 가야바는 치우치지 않은 판사이기보다 검사(檢事)였다.

184:3.5 (1982.6) 예수는 평상시의 옷을 입고 손이 뒤에 묶인 채로 이 법정 앞에 나타났다. 그의 위엄 있는 모습에 그 법정 전체가 놀라고 얼마큼 어리둥절했다. 그들은 그러한 죄인을 바라본 적도 없고, 목숨을 건 재판을 받는 사람에게서 그렇게 침착한 태도를 구경한 적도 없었다.

184:3.6 (1982.7) 유대 율법은 죄수에게 한 죄목을 씌울 수 있기 전에, 어떤 항목에도 적어도 증인 두 사람이 찬성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유대 율법이 배반자의 증언을 특별히 금했기 때문에, 유다는 증인으로 쓰일 수 없었다. 스무 명이 넘는 거짓 증인들이 예수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려고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들의 증언이 너무나 모순되고 너무나 명백히 날조(捏造)된 것이어서, 산헤드린 의원들 자체가 그 연출을 무척 부끄러워했다. 예수는 이 거짓 증인들을 인자하게 내려다보면서 거기 서 있었고, 바로 그의 얼굴빛이 거짓말하는 증인들을 쩔쩔매게 하였다. 이 모든 허위 증언이 있는 동안 내내, 주는 입을 열지 않았고, 그들의 많은 거짓 고발에 조금도 대꾸하지 않았다.

184:3.7 (1982.8) 처음으로 그 증인들 가운데 어떤 두 사람이 의견의 일치와 비슷한 것에라도 가까이 간 것은, 한 성전 강연을 하는 과정에서,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부수고, 손을 쓰지 않고 지은 또 다른 성전을 사흘 안에 세우겠다”고 예수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두 사람이 증언했을 때였다. 언급된 그 논평을 했을 때, 그가 자신의 몸을 가리켰다는 사실과 상관 없이, 그것은 예수가 말씀하신 꼭 그대로가 아니었다.

184:3.8 (1982.9) “이 죄목들 가운데 어느 것에도 너는 대답이 없느냐?” 하고 대사제가 예수에게 소리를 질렀어도, 예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이 모든 거짓 증인이 증언하는 동안에 그는 말없이 거기 서 있었다. 증오, 광신, 거리낌없는 과장(誇張)이 이 거짓 증인들이 하는 말의 특징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증언은 그 자체에 얽혀서 실패했다. 그들의 거짓 고발에 대한 최선의 반박(反駁)은 주의 차분하고 품위 있는 침묵이었다.

184:3.9 (1983.1) 거짓 증인들의 증언이 시작된 뒤에 얼마 있다가, 안나스가 도착하고 가야바 옆자리에 앉았다. 안나스는 이제 일어서서, 성전을 부순다고 하는 예수의 이 위협이 그에 대한 세 가지 죄목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184:3.10 (1983.2) 1. 그는 민중을 비웃는 위험한 자이다. 민중에게 불가능한 것들을 가르치고 달리 민중을 속였다.

184:3.11 (1983.3) 2. 신성한 성전에 폭력 쓰기를 주장했으니까, 그는 미친 개혁자이다, 아니면 어떻게 그가 성전을 부술 수 있는가?

184:3.12 (1983.4) 3. 그가 새 성전을 짓겠다, 그것도 손을 쓰지 않고 짓겠다고 약속했으니, 그는 마술을 가르쳤다.

184:3.13 (1983.5) 예수가 유대 율법을 위반하여 죽어 마땅한 죄가 있다고 산헤드린 전체가 전에 찬성한 적이 있지만, 그들은 이제 그의 행위와 가르침에 관하여 빌라도가 그 죄인에게 사형 선고 내리는 것을 정당화할 죄목을 개발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합법적으로 사형에 처할 수 있기 전에, 로마 총독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안나스는 예수가 사람들 사이에 풀어놓기에는 위험한 선생으로 보이게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할 생각이 있었다.

184:3.14 (1983.6) 그러나 완전히 침착하게, 침묵을 깨뜨리지 않고 주가 거기 서 있는 모습을 가야바는 이제 더 견딜 수 없었다. 그 죄수가 말하도록 유인할까 싶은 방법을 적어도 하나 안다고 그는 생각했다. 따라서, 예수의 편으로 부리나케 가서, 주의 얼굴에 고발하는 손가락을 흔들면서 말했다: “내가 명하노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가 구원자인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우리에게 이르라.” 예수는 가야바에게 대답했다: “내가 그니라. 곧 나는 아버지께로 가고, 얼마 안 있어 사람의 아들은 권능을 받고서 하늘 무리들 위에 다시 한번 군림하리라.”

184:3.15 (1983.7) 예수가 이 말을 입 밖에 내는 것을 들었을 때, 대사제는 몹시 성이 났고 겉옷을 와락 찢으며 외쳤다: “우리가 증인이 어찌 더 필요하리요? 보라, 이제 너희는 모두 이 사람이 신성 모독함을 들었도다. 너희는 법을 어기고 신성을 모독한 이 자를 이제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뇨?” 그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죽어 마땅하니라. 십자가에 달리게 하라.”

184:3.16 (1983.8) 자신 수여 임무에 관계된 한 가지 질문을 제외하고, 안나스나 산헤드린 의원들 앞에 있을 때 예수는 무엇을 물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순간에 뚜렷하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184:3.17 (1983.9) 안나스는 그 재판이 더 진행되고, 나중에 빌라도에게 제출하기 위해서, 예수와 로마 율법 및 로마 제도의 관계에 대하여 분명한 성질의 죄목을 작성하기를 바랐다. 의원들은 이 문제를 빨리 매듭지으려고 초조했다. 이것은 그날이 유월절을 준비하는 날이고 오후에는 아무런 세속의 일을 해서는 안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유월절 축하 기간에만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있었으니까, 그가 유대 땅에서 로마인의 수도 케자리아로 언제라도 돌아갈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184:3.18 (1983.10) 그러나 안나스는 법정을 통제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아주 뜻하지 않게 예수가 가야바에게 대답한 뒤에, 대사제는 앞으로 걸어나와서 손으로 예수의 얼굴에 따귀를 올려붙였다. 법정의 다른 의원(議員)들이 그 방을 나가면서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그들 가운데 여럿이 비웃으며 손바닥으로 예수를 찰싹 때리자, 안나스는 참으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렇게 무질서하게, 들어본 적이 없는 그런 혼란 속에, 산헤드린 의원들이 예수를 재판하는 이 첫 회의가 4시 반에 끝났다.

184:3.19 (1984.1) 편협하고 전통에 눈이 먼 거짓 판사 30명은, 거짓 증인들과 함께, 한 우주의 올바른 창조자를 주제넘게 재판하고 있다. 이 열렬한 고발자들은 이 하나님인 사람의 품위 있는 침묵과 지극한 태도에 분통이 터졌다. 그의 침묵은 견디기 두려웠고, 그의 말투는 두려움 없이 무시하는 태도였다. 그는 이들의 위협에 끄떡하지 않았고 공격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사람이 하나님을 재판하지만, 그런 때에도 그는 이들을 사랑하고, 할 수 있으면 구원하려고 한다.

4. 굴욕의 시간

184:4.1 (1984.2) 사형(死刑) 선고를 내리는 문제가 있을 때 유대인의 율법은 법정에서 두 번 심의하기를 요구했다. 이 두 번째 회의는 첫째 회의 다음 날에 열려야 했고, 그 사이의 시간은 법정의 의원들이 금식하고 애도하면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예수가 죽어야 한다는 결정을 확인하려고 다음 날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겨우 한 시간 기다렸다. 그동안에 예수는 성전 경비대의 보호 밑에서 접견실에 남아 있었고, 이들은 대사제의 하인들과 함께, 온갖 종류의 모욕을 사람의 아들에게 퍼부으면서 즐거워했다. 그들은 비웃고, 그에게 침 뱉고, 그를 모질게 쳤다. 막대기로 그의 얼굴을 때리고, 그리고 나서 “너 구원자여, 너를 때린 자가 누군가 우리에게 예언하라” 말하곤 했다. 이렇게 그들은 한 시간 꼭 채워 계속했고, 저항하지 않는 이 갈릴리 사람을 욕하고 학대하였다.

184:4.2 (1984.3) 무지하고 무딘 경비원과 하인들 앞에서 고통당하고 거짓 재판을 받던 이 비극의 시간에, 요한 세베대는 인접한 방에서 혼자 공포 속에 기다렸다. 이 학대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예수는 요한에게, 머리를 끄덕여 그에게 물러나라고 표시했다. 그의 사도가 이 모욕을 구경하라고 방에 남게 둔다면, 요한의 분노가 너무 끓어올라서 저항하다가 의분(義憤)을 터뜨리면 아마도 죽음을 초래했으리라는 것을 주는 잘 알았다.

184:4.3 (1984.4) 이 끔찍한 시간을 통해서 내내, 예수는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 온 우주의 하나님과 인격 관계 속에 결합된 혼(魂), 인류 중에서 부드럽고 민감한 이 혼에게는 그가 들이킨 치욕의 잔(盞) 중에서 무지하고 잔인한 이 경비원과 하인들의 손에 맡겨진 이 끔직한 시간보다 더 쓰라린 부분이 없었다. 이들은 이른바 이 산헤드린 법정의 의원들이 본보기를 보인 것에 자극을 받아서 그를 학대하였다.

184:4.4 (1984.5) 사랑하는 군주가 죄로 어두워진 구체, 불행한 유란시아에서 무지하고 잘못 인도된 사람들의 뜻에 복종하는 이 광경을 하늘의 지성 존재들이 구경하는 동안, 광대한 우주에 몸서리치는 의분이 휩쓴 것을 인간의 마음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184:4.5 (1984.6) 사람이 영적으로 도달하거나 지적으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을 모욕하고 육체적으로 공격하고 싶어하도록 이끄는 특성, 사람 안에 있는 이 동물같은 특성은 무엇인가? 반(半)문명화된 사람에게는 아직도 지혜와 영적 달성 면에서 우수한 사람에게 분통을 터뜨리려고 하는 나쁜 잔인성이 숨어 있다. 문명화되었다고 생각되는 이 사람들이 저항하지 않는 사람의 아들에게 이렇게 몸으로 공격해서 어떤 형태의 동물적 쾌락을 얻는 동안에, 그들의 못된 야비함과 짐승 같은 잔학성을 구경하라. 이 모욕과 비웃음과 주먹이 예수에게 쏟아지는 동안, 그는 방어하지 않았지만, 방어할 수 없는 자는 아니었다. 예수는 지지 않았다. 단지 물질적 의미에서 다투지 않았을 뿐이다.

184:4.6 (1985.1) 이때는 방대하고 널리 퍼진 우주의 창조자ㆍ지원자ㆍ구원자로서 길고도 파란 많은 생애에서 주가 가장 큰 승리를 거둔 순간들이었다. 하나님을 사람에게 드러내는 일생을 마음껏 살았으니까, 예수는 이제, 새롭고 전례 없던 일, 사람을 하나님에게 드러내는 일에 들어간다. 예수는 이제 사람의 인격이 고립되는 온갖 두려움을 최종으로 극복하는 것을 여러 세계에 보여주고 있다. 사람의 아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 신분임을 깨달았다. 예수는 그가 아버지와 하나임을 서슴지 않고 주장한다. 그 하늘같은 최고의 체험이 사실이요 진실인 것에 근거를 두고, 그와 아버지가 하나인 것 같이, 하늘나라를 믿는 모든 사람이 그와 하나가 되라고 훈계한다. 예수의 종교에서 실제 체험은 이처럼, 영적으로 고립되고 우주에서 외로운 이 땅의 필사자들이 인격의 고립, 그리고 아울러 모든 두려움의 결과 및 관련된 무력한 느낌을 피할 수 있게 하는 분명하고 확실한 기법이 된다. 하늘나라의 형제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믿는 아들들은 개인적으로, 또 행성 전체가, 자아의 고립을 최종으로 벗어나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을 아는 신자는 우주 규모에서 영적으로 친교하는―완전을 달성하는 신성한 운명을 영원히 실현하는 것과 관련하여 하늘에서 시민 자격을 얻는―환희와 장엄함을 점점 더 맛본다.

5. 법정의 2차 회의

184:5.1 (1985.2) 5시 반에 법정은 다시 모였고, 예수는 요한이 기다리고 있는 인접한 방으로 끌려갔다. 여기서 로마 군인과 성전 경비원들은 예수를 감시했고, 한편 법정은 빌라도에게 제시할 죄목들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안나스는 신성 모독의 죄목은 빌라도에게 아무 중요성이 없으리라고 동료들에게 분명히 말했다. 유다는 법정의 이 2차 회의 동안에 자리에 있었지만, 아무런 증언도 하지 않았다.

184:5.2 (1985.3) 법정의 이 회의는 겨우 반시간 걸렸고, 빌라도 앞으로 가려고 폐회했을 때, 그들은 예수가 사형을 받아 마땅하다는 기소장(起訴狀)을 세 항목 아래 작성했다:

184:5.3 (1985.4) 1. 그는 유대 민족을 타락시키는 자였다. 민중을 속이고 반란을 선동했다.

184:5.4 (1985.5) 2. 케자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184:5.5 (1985.6) 3. 새 종류의 나라의 임금이요 창시자라 주장함으로, 황제에 대항하여 반역을 선동했다.

184:5.6 (1985.7) 이 과정 전부가 변칙이었고 전적으로 유대 율법에 어긋났다. 성전을 부수고 다시 사흘 안에 세운다는 예수의 진술에 관하여 증언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어떤 문제에도 두 증인이 찬성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점에 관해서도, 아무 증인도 피고(被告)를 변호하지 않았고, 예수는 그가 무슨 의도로 말했는가 설명하라고 요청받지도 않았다.

184:5.7 (1985.8) 법정이 일관성을 가지고 그를 재판할 수 있었던 유일한 항목은 신성을 모독했다는 죄목이었고, 이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증언에 달렸을 것이다. 신성 모독죄에 관해서도, 그들은 사형 선고를 하려고 정식(正式)으로 투표하지 않았다.

184:5.8 (1985.9) 빌라도 앞으로 가져가려고, 그들은 이제 주제넘게 세 가지 죄목을 작성했고, 이에 대하여 아무 증언도 청취하지 않았으며, 고발당한 죄인이 자리에 없는 가운데 합의를 보았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바리새인 세 사람이 자리를 떠났다. 그들은 예수가 죽는 것을 보고 싶어 했지만, 증인 없이, 그가 자리에 없는 가운데 그에게 불리한 죄목을 작성하려 하지 않았다.

184:5.9 (1986.1) 예수는 산헤드린의 법정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죄 없는 생애를 심판하는 동안에 그들은 예수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예수는 빌라도가 낭독하는 것을 들을 때까지, 그들이 내놓은 공식 죄목을 (사람으로서) 알지 못했다.

184:5.10 (1986.2) 예수가 요한과 경비원들과 함께 방에 있는 동안, 그리고 법정이 2차 회의에 들어간 동안, 대사제의 저택 근처에 있던 어떤 여인들이 그 친구들과 함께, 이상한 죄인을 보러 왔고, 그들 가운데 하나가 그에게 물었다: “네가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냐?” 예수는 대답했다: “내가 너에게 일러도, 네가 나를 믿지 아니하겠고 내가 물어도 네가 대답하지 않으리라.”

184:5.11 (1986.3) 그날 아침 6시에 예수는 가야바의 집에서 빌라도 앞에 나타나도록 옮겨졌고, 이것은 이 산헤드린 법정이 아주 부당하게 변칙으로 선포한 사형 선고의 확인을 위한 것이었다.

제 185 편 빌라도 앞에서 열린 재판

유란시아서

제 185 편

빌라도 앞에서 열린 재판

185:0.1 (1987.1) 서기 30년, 4월 7일, 이 금요일 아침 6시가 조금 지난 뒤에, 예수는 로마인 집정관 빌라도 앞으로 끌려왔는데, 그는 시리아 총독의 직접 감독 하에 유대ㆍ사마리아ㆍ이두미아를 다스렸다. 성전 경비원들이 밧줄에 묶인 주를 로마인 총독 앞으로 인도했고, 산헤드린 법정 (주로 사두개인들), 가룟 유다, 대사제 가야바를 포함하여 약 50명의 고발자와 사도 요한이 그를 따랐다. 안나스는 빌라도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185:0.2 (1987.2) 사람의 아들을 체포하는 데 로마 군인들을 동원하려고 전날 저녁에 허가를 얻은 사람들로부터 예수가 일찍 그 앞에 끌려오리라는 통지를 받았기 때문에, 빌라도는 일어나 있었고 이른 아침에 찾아온 이 무리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재판은 집정관 관저 앞에서 진행되도록 주선되었는데, 이것은 안토니아 요새에 덧붙여 지은 건물이었고, 빌라도와 그 아내는 예루살렘에 들렸을 때 이 요새를 그들의 본부로 삼았다.

185:0.3 (1987.3) 비록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하는 일의 상당 부분을 집정관 본부 안에서 했어도, 공개 재판은 바깥에서, 정문으로 이끄는 계단에서 열렸다. 이것은 유대인에 대한 양보 조치였는데, 그들은 유월절을 위하여 준비하는 이날, 누룩이 쓰일지 모르는 어떤 이방인 건물에도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한 행위는 예식 면에서 그들을 더럽게 만들고, 이렇게 함으로 오후에 감사 잔치 음식을 먹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또한 해가 진 뒤에, 유월절 저녁을 먹을 자격을 받기 전에, 정화(淨化) 예식을 거치는 것이 필요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185:0.4 (1987.4) 이 유대인들은 재판으로 예수를 죽이려고 계략을 꾸미는 동안, 양심에 조금도 거리끼지 않았는데, 그렇다 해도 예식에 따른 정결(淨潔)과 전통적 규칙을 지키는 이 모든 문제에 빈틈이 없었다. 시간 세계와 영원 속에서 인간의 복지에 티끌처럼 하찮은 것에 빈틈없이 주의를 기울이면서 신성한 성질을 가진 높고 거룩한 책임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이 유대인들만이 아니었다.

1. 본디오 빌라도

185:1.1 (1987.5) 본디오 빌라도가 작은 여러 지방을 다스리는 어지간히 훌륭한 총독이 아니었다면, 티베리우스는 도저히 빌라도가 10년 동안 유대 지방의 집정관(執政官)으로 남아 있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당히 훌륭한 행정가였어도, 그는 도덕적으로 비겁한 사람이었다. 유대인의 총독으로서 자신이 맡은 과제의 성질을 이해할 만한 큰 인물은 아니었다. 이 히브리인들이 진짜 종교, 기꺼이 목숨을 바칠 믿음을 가졌고, 제국 전역에 걸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수백만이 예루살렘을 신앙의 성지(聖地)로 우러러보며, 산헤드린을 땅에서 가장 높은 법정으로 존중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185:1.2 (1988.1) 빌라도는 유대인을 사랑하지 않았고, 이 뿌리 깊은 미움은 일찍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로마의 모든 지방 가운데, 아무 데도 유대보다 더 다스리기 어렵지 않았다. 빌라도는 결코 유대인을 다루는 데 관련된 문제들을 정말로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총독의 체험을 겪으면서 아주 일찍부터, 거의 치명적이고 자살 같은 일련의 실수를 저질렀다. 바로 이러한 실수가 유대인들에게 그를 압박할 힘을 주었다. 빌라도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를 원했을 때, 그들은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 위협하기만 하면 되었고, 그러면 빌라도는 재빨리 항복하곤 했다. 집정관이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듯 보이는 것, 곧 도덕적 용기가 모자란 것은, 주로 유대인들과 몇 가지 논쟁을 가졌던 기억 때문이었고,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그들이 그를 이겼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빌라도가 그들을 두려워하며, 그가 티베리우스 앞에서 자기 자리가 어찌될까 두려워하는 것을 알았고, 수많은 경우에 총독에게 크게 불리하게 이 지식을 이용했다.

185:1.3 (1988.2) 유대인에게 빌라도의 인기가 떨어진 것은 몇 가지 불행한 대결의 결과로서 생겨났다. 첫째로, 그는 우상 숭배의 상징인 모든 형상에 대하여 그들이 가진 뿌리 깊은 편견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전임자 밑에서 로마 군인들의 관습이었던 것처럼, 자기 군인들이 군기(軍旗)에서 케자의 형상을 떼어내지 않고서 예루살렘에 들어가도록 버려두었다. 유대인의 큰 대표단이 군기에서 이 형상을 제거해달라고 탄원하면서 닷새 동안 빌라도를 기다렸다. 그는 그들의 청원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즉시 죽인다고 그들을 위협했다. 빌라도는 자신이 회의론자였기 때문에, 강렬한 종교적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종교적 확신 때문에 죽기를 서슴지 않을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유대인들이 그의 관저 앞에서, 반항하는 태도로 줄지어 서서, 얼굴이 땅에 닿기까지 엎드리고, 죽을 준비가 되었다는 말을 보내왔을 때, 그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그때 빌라도는 자기가 기꺼이 실행하지 않을 것을 하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굴복했고, 예루살렘에 있는 군인들의 군기에서 그 형상을 떼어내라고 명령했다. 그는 그날부터 계속 그가 대체로 유대인 지도자들의 변덕에 지배되고 있음을 발견했고, 이들은 이 방법으로, 실행하기 꺼려하는 것을 하겠다고 위협하는 빌라도의 약점을 발견했다.

185:1.4 (1988.3) 그후에 빌라도는 땅에 떨어진 이 위신(威身)을 다시 회복하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고, 따라서 케자 숭배에 보통 쓰이는 것과 같은 황제의 방패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 궁전의 담에 걸어 놓았다. 유대인들이 항의했을 때, 그는 끄떡하지 않았다. 그가 항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자, 그들은 즉시 로마에 상소했고, 그러기가 무섭게 황제는 그 거슬리는 방패들을 떼어내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나서 빌라도는 전보다도 더욱 체신이 떨어졌다.

185:1.5 (1988.4) 유대인들이 그를 대단히 싫어하게 만든 또 다른 일은, 큰 종교적 축제가 있을 때 예루살렘으로 오는 수백만의 방문자들을 위하여 물의 공급을 늘이는 새 수도교(水道橋)의 건축 비용을 지불하느라고 성전 금고에서 감히 돈을 가져간 것이다. 오로지 산헤드린이 성전 자금을 지출할 수 있다고 유대인들은 주장했고, 이 주제넘은 결정 때문에 그들은 결코 빌라도 규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 결정의 결과로 스무 번 이상의 폭동이 있었고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다. 심각했던 폭동 가운데 마지막 폭동은 마침 큰 무리의 갈릴리 사람들이 제단에서 예배드리는 동안에 그들을 살인한 것과 상관이 있었다.

185:1.6 (1988.5) 갈팡질팡하는 이 로마인 권력자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들어, 그리고 자기 개인의 지위를 보호하려고 예수를 희생했지만, 사마리아인들을 필요 없이 살육한 결과로 그가 마침내 쫓겨났다는 것이 중대하다. 이것은 군대를 게리짐 산으로 이끈 어느 거짓 메시아의 주장과 관련하여 일어났는데, 이 사람은 거기에 성전의 그릇들이 묻혀 있다고 주장했고, 성스러운 그릇들이 숨겨진 장소를 약속한 대로 밝히지 못하자, 사나운 폭동들이 터졌다. 이 사건의 결과로서, 시리아 총독은 빌라도를 로마로 오라고 명하였다. 빌라도가 로마로 가는 길에 티베리우스가 죽었고, 그는 유대의 집정관으로 다시 임명되지 않았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데 찬성한 판결을 후회했으나 그는 결코 완전히 그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새 황제의 눈에 들지 않게 되자, 로잔 지방으로 은퇴했고, 거기서 후일에 목숨을 끊었다.

185:1.7 (1989.1) 빌라도의 아내 클라우디아 프로큘라는 그 여자에게 시중드는 하녀의 말을 통해서 예수에 대하여 익히 들었고, 이 하녀는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페니키아인 신자였다. 빌라도가 죽은 뒤에, 클라우디아는 새 소식을 전파하는 데 두드러지게 관여했다.

185:1.8 (1989.2) 이 모두가 이 비극의 금요일 오후에 벌어진 많은 것을 설명한다. 어째서 유대인들이 주제넘게 빌라도에게 강요했는가―예수를 재판하라고 6시에 일어나게 했는가―또한 어째서 예수를 사형하라는 요구를 감히 거절한다면 황제 앞에서 그를 반역죄로 고소하겠다고 그들이 서슴지 않고 위협했는가 이해하기 쉽다.

185:1.9 (1989.3) 유대인 권력자들과 불리하게 말려든 적이 없는, 자격 있는 로마인 총독은 결코 피에 굶주린 이 광신자들이, 거짓된 죄목에 대하여 결백하고 잘못이 없다고 그 자신이 선언한 사람의 죽음을 초래하도록 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을 다스리라고 2류인 빌라도를 보냈을 때, 로마는 큰 실수, 세상사에 멀리 영향을 미치는 잘못을 저질렀다. 티베리우스가 제국에서 가장 훌륭한 지방 행정가를 유대인에게 보내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2. 빌라도 앞에 예수가 나타나다

185:2.1 (1989.4) 예수와 고발자들이 빌라도의 재판정 앞에 모였을 때, 로마인 총독이 나와서 모여 있는 일행을 향하여 물었다. “너희가 이 사람을 무슨 죄목으로 고발하느냐?” 예수를 해치우는 일을 떠맡은 사두개인과 의원(議員)들은 빌라도 앞에 가서, 분명한 죄목을 자진해서 말하지 않고서, 예수에게 선언된 사형 선고의 확인을 요구하려고 전에 굳게 결의했다. 그래서 산헤드린 법정의 대변인은 빌라도에게 대답했다: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라면, 우리가 그를 당신에게 넘기지 않았어야 하나이다.”

185:2.2 (1989.5) 그들이 예수의 죄목을 말하기 꺼려하는 것을 지켜보았을 때, 빌라도는 그의 죄에 관하여 그들이 밤새도록 심의하느라고 바빴던 것을 알았지만, 그들에게 대답했다: “너희가 어떤 분명한 죄목에도 합의하지 않았으니, 어찌하여 너희가 이 사람을 데려다가 너희 율법에 따라서 재판하지 않느냐?”

185:2.3 (1989.6) 그때 산헤드린 법정의 서기(書記)가 빌라도에게 말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라도 사형에 처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며, 우리 민족을 선동하는 이자는 그가 말하고 행한 것 때문에 죽어 마땅하나이다. 그러므로 이 선포를 확인하려고 우리가 당신 앞으로 왔나이다.”

185:2.4 (1989.7) 이처럼 어물쩍 넘기려고 애쓰면서 로마인 총독 앞에 온 것은 산헤드린 의원들이 빌라도의 공정성과 명예와 위엄을 그다지 존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예수에 대하여 악의와 험악한 감정을 가졌다는 것을 드러낸다. 지배받는 이 시민들이 지방 총독 앞에 나타나서 한 사람에게 공평한 재판을 허락하기 전에, 분명한 죄목을 채택하지도 않고 그의 집행 선포를 요구하다니, 무슨 뻔뻔스러운 처사인가!

185:2.5 (1990.1) 빌라도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예수가 행한 일을 얼마큼 알았고, 그가 고소당할 수 있는 죄목들은 유대교 율법의 침해와 상관이 되리라 짐작했다. 그래서 그 사례를 그들 자체의 법정으로 회부하려고 애썼다. 또 한편, 빌라도는 그들이 지독하게 몹시 미워하여 경멸하게 된, 자기 민족의 한 사람에 대해서도, 그들이 사형 선고를 선언하고 집행하는 권한이 없다고 대중 앞에서 고백하게 만든 것을 마음 속에 고소해하였다.

185:2.6 (1990.2) 빌라도가 아내 클라우디아로부터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관하여 이야기를 더 들은 것은 몇 시간 전, 자정 조금 전, 그리고 그가 예수를 몰래 체포하는 데 로마 군인들을 쓰도록 허가한 뒤였다. 클라우디아는 얼마큼 유대교를 믿는 사람이었고, 후일에 예수의 복음을 믿는, 충분히 자격 있는 신자가 되었다.

185:2.7 (1990.3) 빌라도는 이 청문회를 미루고 싶었지만, 유대인 지도자들이 그 소송 사건을 밀고 나가기로 굳게 각오한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때가 유월절 준비일의 아침이었을 뿐 아니라 이날이 금요일이었으니까, 또한 쉬고 예배하는 안식일을 위하여 유대인들이 준비하는 날임을 알았다.

185:2.8 (1990.4) 이 유대인들이 불경스러운 태도로 접근하는 것에 무척 민감했기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를 재판 없이 사형에 처하라는 그들의 요구를 기꺼이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들이 죄수에 대하여 죄명을 제시하도록 몇 순간 기다리고 나서, 그들을 향하여 말했다: “나는 이 사람에게 재판 없이 사형을 선고하지 않겠노라. 그에 대하여 죄명을 문서(文書)로 제시하기 전까지, 그를 심문하는 데 찬성하지 않겠노라.”

185:2.9 (1990.5) 빌라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대사제와 다른 사람들은 법정의 서기(書記)에게 신호했고, 그리고 나서 그는 빌라도에게 예수에 대하여 문서로 기록한 죄명을 넘겨주었다. 이 죄목은 다음과 같았다:

185:2.10 (1990.6) “우리 산헤드린 의원의 법정은 이 사람이 다음 죄로 인하여 그가 행악자요 우리 민족을 선동하는 자임을 발견함.

185:2.11 (1990.7) “1. 우리 국민을 타락시키고 반란을 일으키도록 우리 민족을 선동했다.

185:2.12 (1990.8) “2. 사람들이 케자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금했다.

185:2.13 (1990.9) “3. 자신을 유대인의 임금이라 부르고 새 나라를 세운다고 가르쳤다.”

185:2.14 (1990.10) 예수는 이 중에 어떤 죄목으로도 정식으로 재판을 받거나 법적으로 선고받지 않았다. 이 죄목들이 처음에 낭독되었을 때, 듣지도 못했다. 그러나 예수는 집정관 관저에서 경비원들의 보호 하에 있었는데, 빌라도는 거기서 그를 데려오게 했고, 빌라도는 이 죄목들을 예수가 듣는 가운데 되풀이하라고 고집했다.

185:2.15 (1990.11) 예수가 이 죄목들을 들었을 때, 그는 유대인 법정 앞에서 이 문제들에 관하여 말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음을 잘 알았고, 요한 세베대와 그 고발자들도 알았지만, 예수는 이 거짓 죄목들에 대하여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빌라도가 그를 고발한 자들에게 답변하라고 명했을 때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진행 전체가 불공평한 데 너무 놀라고, 예수의 잠잠하고 훌륭한 태도에 너무 감동해서, 빌라도는 죄수를 본부 안으로 데리고 가서 친히 심문하기로 마음먹었다.

185:2.16 (1990.12) 빌라도는 머리 속이 헛갈렸고, 마음 속에 유대인들이 두려웠으며, 피에 굶주린 고발자들 앞에서, 예수가 거기에 당당하게 서서, 말없이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동정과 슬픔에 찬 애정의 빛을 띠고 그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광경 때문에, 그의 정신은 힘차게 감동을 받았다.

3. 빌라도의 개인 심문

185:3.1 (1991.1) 빌라도는 예수와 요한 세베대를 개인 전용의 방으로 데려갔고, 경비원들을 바깥에 복도에 두었다. 죄수더러 앉으라고 청하면서 그는 예수 옆에 앉아서 몇 마디 물었다. 빌라도는 예수에 대한 첫째 죄목, 그가 국민을 타락시키는 자요 반란을 선동하는 자인 것을 믿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면서 예수와 말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물었다: “너는 케자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가르친 적이 있느냐?” 예수는 요한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이나 내 가르침을 들은 어느 다른 사람에게라도 물으라.” 그리고 나서 빌라도는 요한에게 이 세금 문제에 대하여 물었고, 요한은 주의 가르침에 관하여 증언하고, 예수와 그의 사도들은 케자와 성전, 양쪽에 세금을 물었다고 설명했다. 요한에게 묻고 나서, 빌라도는 말했다. “내가 너와 이야기한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않도록 하라.” 요한은 이 문제를 결코 밝히지 않았다.

185:3.2 (1991.2) 그리고 나서 빌라도는 예수에게 더 물어보려고 몸을 돌이켜 말했다: “그리고 이제 너에 대한 셋째 죄목에 관하여 묻건대, 네가 유대인의 임금이냐?” 빌라도의 목소리에 아마 진정하게 묻는 빛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집정관에게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빌라도여, 네가 이것을 스스로 묻느냐, 아니면 이 다른 사람들, 나를 고발하는 자들로부터 이 질문을 받았느냐?” 그러자 얼마큼 분개하는 어조로, 총독은 대답했다: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주사제들이 너를 잡아 넘기고 너에게 사형을 선고하라 내게 요구하였느니라. 나는 저희가 가져온 죄목들이 정당한가 묻고, 네가 무슨 일을 했는가 나 스스로 찾아내려고 애쓸 따름이라. 내게 말하라. 네가 유대인의 임금이라 말한 적이 있느냐, 그리고 네가 새 나라를 세우려고 애썼느냐?”

185:3.3 (1991.3) 그러자 예수는 빌라도에게 대답했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네가 깨닫지 못하느냐?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였다면, 분명히 내 제자들이 싸워서 내가 유대인들의 손에 넘겨지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내가 네 앞에 이렇게 끈에 묶여 있는 것은 내 나라가 영적 국가요, 아니 믿음을 통하여, 사랑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들의 형제 단체인 것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기에 충분하니라. 이 구원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도 위한 것이라.”

185:3.4 (1991.4) “그러면 결국 네가 임금이냐?”하고 빌라도가 말했다. 예수가 대답했다: “옳도다, 내가 그런 임금이요, 내 나라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믿는 아들들이 모인 가족이라. 이 목적을 위하여, 내 아버지를 모든 사람에게 보이고, 하나님의 진리까지도 증언하려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노라. 지금도 너에게 선언하노니, 진리를 사랑하는 자마다 내 목소리를 듣느니라.”

185:3.5 (1991.5) 그러자 빌라도가 반은 비웃으며 반은 진지하게 말했다. “진리, 무엇이 진리냐―누가 알소냐?”

185:3.6 (1991.6) 빌라도는 예수의 말씀을 헤아릴 수 없었고, 그의 영적 나라의 성질을 알아들을 수도 없었지만, 그 죄수가 죽어 마땅한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고 이제 확신했다. 얼굴을 맞대고 예수를 한 번 본 것은, 부드럽고 지쳤어도 당당하고 곧은 이 사람이 현세에 이스라엘의 보좌에 스스로 앉을 포부를 가진, 사납고 위험한 혁명가가 아닌 것을 빌라도가 확신하기에도 넉넉했다. 자기를 임금이라고 불렀을 때 예수가 무슨 뜻으로 말했는가 빌라도는 얼마큼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금욕주의자의 가르침에 익숙했기 때문이고, 이들은 “지혜로운 사람은 임금이라”고 선언했다. 반란을 선동하는 위험한 인물이 아니라 예수는 해롭지 않은 공상가, 결백한 광신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빌라도는 속속들이 확신했다.

185:3.7 (1991.7) 주를 심문한 뒤에, 빌라도는 주사제들, 그리고 예수를 고소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서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을 심문했는데, 그에게서 아무 잘못을 찾지 못하노라. 나는 너희가 고발한 죄가 그에게 있다고 생각지 않고, 그를 풀어주어야 한다 생각하노라.” 이 말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은 대단히 성이 났고, 너무 성이 나서 예수가 죽어야 한다고 사납게 소리를 질렀다. 산헤드린 의원들 가운데 하나가 대담하게 빌라도의 옆으로 걸어와서 말했다: “이 사람은 민중을 선동하고,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 땅에 두루 계속하였나이다. 그는 해독을 끼치는 자요, 행악자이니, 당신이 이 사악한 사람을 풀어주면 오랫동안 후회하리이다.”

185:3.8 (1992.1) 빌라도는 예수를 어찌할까 몰라서 난처했다. 그래서 예수가 일을 갈릴리에서 시작했다고 이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때 유월절에 참석하려고 도시에 들린 헤롯 앞에 서라고 예수를 보내서 그 소송 사건을 결정하는 책임을 피하려고, 적어도 생각할 시간을 벌려고 생각했다. 또한 이런 표시가 관할권 문제로 생긴 수많은 오해 때문에, 자신과 헤롯 사이에 얼마 동안 있었던 좋지 않은 감정을 얼마큼 푸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185:3.9 (1992.2) 경비원들을 부르면서 빌라도는 말했다: “이 사람은 갈릴리 사람이라. 당장에 헤롯에게 데려가라. 헤롯이 심문한 뒤에, 그가 발견한 것을 내게 보고하라.”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헤롯에게 데리고 갔다.

4. 헤롯 앞에 선 예수

185:4.1 (1992.3) 예루살렘에 들렸을 때 헤롯 안티파스는 헤롯 대제의 옛 마카비 궁전에서 머물렀는데, 이 옛 임금의 집으로 성전 경비원들이 예수를 끌고 갔고, 고발한 자들과 늘어나는 군중이 그를 뒤따라갔다. 헤롯은 예수에 관하여 소문을 오랫동안 들어 왔고, 예수에 관하여 무척 호기심이 있었다. 이 금요일 아침에 사람의 아들이 앞에 섰을 때, 이 사악한 이두미아인은 한 순간도, 세포리스에서 그 앞에 나타나서, 자기 아버지가 받아야 할 돈에 관하여 공정한 결정을 내리기를 탄원했던 옛 시절의 그 소년을 결코 기억하지 못했는데, 소년의 아버지는 공공(公共) 건물 중 하나에서 일하다가 사고(事故)로 돌아가셨다. 예수의 일이 갈릴리에 집중되었을 때 예수에 대하여 크게 걱정한 적이 있었지만, 헤롯이 아는 한, 그는 예수를 본 적이 없었다. 예수가 빌라도와 유대 지방 사람들의 보호 밑에 있었으므로, 앞으로 예수로부터 어떤 문제가 생겨도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헤롯은 그를 보고 싶어했다. 헤롯은 예수가 행한 기적들에 대하여 익히 들어 왔고, 예수가 무슨 이적(異蹟)을 행하는 것을 정말로 보고 싶어 하였다.

185:4.2 (1992.4) 그들이 예수를 헤롯 앞으로 데려왔을 때, 사분(四分) 군주는 그의 품위 있는 모습과 침착한 얼굴빛에 깜짝 놀랐다. 헤롯은 예수에게 질문을 한 15분쯤 던졌지만, 주는 대꾸하려 하지 않았다. 헤롯은 예수를 비웃고 그에게 기적을 행해 보라고 덤비었어도, 예수는 질문에 대답하거나 비웃음에 대꾸하려 하지 않았다.

185:4.3 (1992.5) 그리고 나서 헤롯은 고개를 돌려 주사제와 사두개인들이 고발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고, 이들이 주장하는 바 사람의 아들의 여러 악행에 관하여 빌라도가 들은 것을 모두, 그리고 덧붙여 많이 들었다. 예수가 입을 열지도 않고 그를 위하여 이적을 행하지도 않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에, 한동안 예수를 놀려댄 뒤에, 드디어 헤롯은 그에게 임금의 헌 자주빛 예복을 차려 입히고 도로 빌라도에게 보냈다. 헤롯은 자신이 유대 지방에 있는 예수에 대하여 아무 관할권이 없음을 알았다. 마침내 예수를 갈릴리에서 몰아냈다고 믿게 되어 즐겁기는 했어도, 빌라도가 예수를 사형에 처하는 책임을 가진 것을 고맙게 여겼다. 헤롯은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결과로 그를 괴롭히던 두려움에서 결코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헤롯은 어떤 때에는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요한인가 두려워하기도 하였다. 이제 그는 그 두려움에서 해방되었다. 예수가 감히 그의 사생활을 들추어내고 비난했던, 입이 거칠고 불 같은 선지자와 아주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5. 예수가 빌라도에게 돌아오다

185:5.1 (1993.1) 경비원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도로 데리고 왔을 때, 그는 집정관 관저의 앞 계단으로 나갔는데, 거기에는 재판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주사제와 산헤드린 의원들을 한데 부르고 이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이 사람이 민족을 타락시키고, 세금 내는 것을 금하며, 유대인의 임금이라 주장한다는 죄목으로 그를 내 앞에 데려왔느니라. 내가 그를 심문했고, 이러한 죄를 저지른 것을 발견하지 못하노라. 사실은, 그에게서 아무 잘못을 찾지 못하노라. 그리고 나서 그를 헤롯에게 보냈는데, 헤롯이 우리에게 도로 돌려보냈으니, 사분(四分) 군주가 똑같은 결론을 내렸음이 틀림없도다. 이 사람이 죽어 마땅한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음이 분명하니라. 너희가 아직도 그가 징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풀어주기 전에 그를 기꺼이 매질하겠노라.”

185:5.2 (1993.2) 예수를 석방하는 것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항의하는 소리를 막 지르려 할 바로 그때, 유월절 축제를 기념하여 한 죄수를 놓아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할 목적으로 방대한 군중이 집정관 관저로 행진하여 다가왔다. 감옥에 갇힌 어떤 죄수나 사형수를 유월절에 사면(赦免) 받도록 민중이 선택하게 하는 것이 얼마 동안 로마 총독들의 관습이었다. 이 군중이 한 죄수를 놓아달라고 요청하려고 그 앞으로 왔다. 예수가 아주 최근에 군중에게 큰 인기가 있었으므로, 예수가 이제 그의 재판석 앞에 있는 죄인이니까, 유월절에 호의를 보이는 표시로 이 갈릴리 사람을 풀어줄 것을 이 무리에게 제안하여 곤경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빌라도에게 떠올랐다.

185:5.3 (1993.3) 군중이 밀물처럼 건물의 계단으로 올라오자, 빌라도는 그들이 바라바라는 이름을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바라바는 이름난 정치 선동자요, 살인한 강도, 어느 사제의 아들이었고, 최근에 예리고 길에서 강도짓을 하고 살인하던 현장에서 붙잡혔다. 이 사람은 유월절 축제가 끝나자마자 처형되도록 선고를 받았다.

185:5.4 (1993.4) 빌라도는 일어서서, 주사제들이 예수를 그에게 데려왔고, 주사제들은 어떤 죄목으로 예수를 사형에 처하기를 구한다는 것, 그는 그 사람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군중에게 설명했다. 빌라도는 말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를 놓아 주는 것이 너희에게 더 좋으냐, 이 살인자 바라바냐, 아니면 이 갈릴리 사람 예수이냐?” 빌라도가 이렇게 말하자, 주사제와 산헤드린 의원들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바라바, 바라바!” 주사제들이 예수를 사형에 처할 생각이 있음을 사람들이 보았을 때, 그들은 그를 죽이라는 아우성에 재빨리 합세했고, 한편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크게 소리쳤다.

185:5.5 (1993.5) 이보다 며칠 전에 군중은 예수를 경외하는 눈으로 보았지만, 하나님의 아들임을 주장하고 나서, 이제 주사제와 권력자들에게 붙잡혀서 빌라도 앞에서 생사가 걸린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을 폭도들은 우러러보지 않았다. 성전 바깥으로 환전상과 상인들을 몰아낼 때 예수는 민중의 눈에 영웅일 수 있었지만, 적들의 손에서 생사가 걸린 재판을 받는, 저항하지 않는 죄수일 때는 그렇지 않았다.

185:5.6 (1993.6) 주사제들이 예수의 피를 보려고 소리치면서, 악명 높은 살인자를 용서해달라고 악쓰는 광경을 보고서 빌라도는 화가 치밀었다. 그들이 악의(惡意)와 증오에 차 있음을 보았고, 그들의 편견과 질투를 눈치챘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의 가장 큰 죄가 상징적으로 자신을 유대인의 임금이라고 부른 것인데, 너희는 어찌하여 이 사람보다 살인자의 목숨을 살려달라 할 수 있느냐?” 그러나 이것은 빌라도가 할 현명한 말이 아니었다. 유대인은 자부심을 가진 민족이었고, 지금 로마의 정치에 지배되고 있지만, 권력과 영광을 크게 나타내고 이방인의 사슬에서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가 오기를 희망하였다. 이상한 교리를 가르치고, 이제 체포되어, 죽어 마땅한 죄로 고발당한 선생, 온순한 태도를 가진 이 선생이, “유대인의 임금”이라고 언급된다는 암시에 그들은 빌라도가 짐작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분개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논평이 그들 민족의 존재에서 성스럽고 영예롭게 여긴 모든 것을 모욕한다고 보았고, 따라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라고 한껏 목청이 터져라 힘차게 외쳤다.

185:5.7 (1994.1) 고발당한 죄목에 대하여 예수가 결백한 것을 빌라도는 알았고 그가 공정하고 용기 있는 재판관이었다면 예수를 무죄로 하고 풀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성난 유대인들을 무시하기가 두려웠고 자기 임무를 행하기를 망설이는 동안에, 한 사자(使者)가 다가와서 아내 클라우디아가 보낸, 밀봉한 서신을 그에게 내밀었다.

185:5.8 (1994.2) 빌라도는 앞에 놓여 있는 문제를 더 진행하기 전에, 막 받은 서신(書信)을 읽기를 바란다는 뜻을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알렸다. 아내가 보낸 이 편지를 뜯고서 빌라도는 읽었다: “저희가 예수라고 부르는, 이 결백하고 공정한 사람과 당신이 아무 상관도 하지 말기를 내가 비나이다. 그 사람 때문에 지난 밤 꿈 속에서 많이 고생하였나이다.” 클라우디아로부터 온 이 쪽지는 빌라도를 크게 흥분하게 만들고 그렇게 이 문제의 판결을 늦추었을 뿐 아니라, 불행하게도 유대인 권력자들이 군중 사이에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바라바를 놓아주라 요구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치라고 사람들을 재촉할 시간을 상당히 마련해 주었다.

185:5.9 (1994.3) 마침내,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려고 다시 한번 자세를 취하며, 빌라도는 유대 권력자들과 사면(赦免)을 구하는 혼합된 군중에게 물었다. “유대인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자를 내가 어찌하랴?” 그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십자가에 못박아라!” 혼합된 군중한테서 나온 이 만장 일치의 요구는 부당하고 두려움에 질린 재판관 빌라도를 소스라치게 놀라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185:5.10 (1994.4) 그리고 나서 한번 더 빌라도는 말했다: “너희가 어째서 이 사람을 못박으려 하느냐? 무슨 악행을 그가 저질렀느냐? 누가 앞으로 나와서 그를 적대하여 증언하겠느냐?” 그러나 빌라도가 예수를 두둔하여 말하자, 그들은 더욱 외치기만 했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십자가에 못박아라!”

185:5.11 (1994.5) 그러자 빌라도는 유월절 죄수를 사면하는 것에 관하여 그들에게 다시 호소하며 말했다: “다시 한번 너희에게 묻노니, 이 너희 유월절에 이 죄인들 가운데 누구를 너희에게 풀어주랴?” 다시 군중은 외쳤다, “바라바를 달라!”

185:5.12 (1994.6) 그리고 나서 빌라도가 말했다: “내가 살인자 바라바를 풀어주면, 예수를 어떻게 하랴?” 한번 더 군중은 한 목소리로 외쳤다. “십자가에 못박아라! 십자가에 못박아라!”

185:5.13 (1994.7) 빌라도는 주사제와 산헤드린 의원들의 직접 지시를 받고 행동하는 이 폭도의 끈질긴 아우성에 더럭 겁이 났다. 그런데도 군중을 달래고 예수를 구하려고 적어도 한번 더 애쓰려고 마음먹었다.

6. 빌라도의 마지막 호소

185:6.1 (1994.8) 이 금요일 아침 일찍, 빌라도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에 오직 예수의 적들만 참가하였다. 그가 밤에 붙잡히고 이른 아침에 재판받는 것을 많은 친구가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믿는다고 해서 또한 붙잡혀서 죽어 마땅하다고 판결을 받을까 두려워서 숨고 있었다. 주를 죽이라고 지금 외치는 군중 속에는 오직 적이라고 맹세한 사람과 줏대 없고 생각 없는 사람들만 있었다.

185:6.2 (1995.1) 빌라도는 그들의 동정심에 마지막으로 한번 호소하려 했다. 예수의 피를 흘리려고 외치는 이 그릇 인도된 폭도(暴徒)의 외침을 무시하기가 두려워서, 그는 유대인 경비원과 로마 군인들에게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라고 명령했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부당하고 불법인 과정이었으니, 로마의 법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도록 선고받은 사람들만 이렇게 채찍을 맞도록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 시련을 주려고 경비원들은 예수를 관저에 딸린 지붕 없는 안뜰로 데리고 갔다. 그의 적들은 이 채찍질을 구경하지 않았어도 빌라도는 보았고, 그들이 이 고약한 학대를 마치기 전에, 그는 채찍질하는 사람들에게 그만두라 지시하고 예수를 자기 앞으로 끌고 오라고 손짓했다. 예수가 채찍질하는 기둥에 묶여 있는 동안, 매질하는 사람들이 그를 때리던 매듭진 채찍을 내려놓기 전에, 그들은 다시 그에게 자주빛 겉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서, 이마 위에 얹었다. 그들은 갈대를 가짜 홀(笏)로서 손에 쥐어주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놀리면서 말했다: “만세, 유대인의 임금이여!” 그들은 그에게 침을 뱉고, 손으로 따귀를 때렸다. 그들 가운데 하나는, 예수를 빌라도 앞으로 돌려보내기 전에, 손에서 갈대를 빼앗아서 그의 머리를 쳤다.

185:6.3 (1995.2) 그리고 나서 빌라도는 피 흘리고 살이 찢긴 이 죄수를 이끌고, 뒤섞인 군중 앞에 그를 내보이면서 말했다: “이 사람을 보라! 다시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를 찾지 못하노라. 그를 채찍질하였으니, 풀어주고자 하노라.”

185:6.4 (1995.3) 낡은 자주빛 임금 옷을 걸치고, 인자하게 생긴 이마를 찌르는 가시관을 쓰고서, 나사렛 예수가 서 있었다. 얼굴은 피로 얼룩지고, 자세는 고통과 슬픔으로 구부정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지독히 미워하는 감정에 빠지고 종교적 편견에 노예가 된 자들의 무딘 가슴에 호소할 수 없었다. 이 광경은 광대한 우주 영역을 통해서, 엄청난 몸서리를 치게 만들었지만, 예수를 죽이려고 결의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185:6.5 (1995.4) 주의 곤경을 보고 처음 충격을 받고나서 정신을 차리자, 그들은 더 크게, 더 길게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십자가에 못박아라, 못박아라, 못박아라!”

185:6.6 (1995.5) 그들에게 동정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빌라도는 그런 느낌에 호소하는 것이 헛일임을 깨달았다. 그는 앞으로 걸어나가서 말했다: “너희가 이 사람을 죽이겠다고 굳게 마음 먹은 것을 내가 깨닫지만, 죽어 마땅하도록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누가 그의 범죄를 선언하겠느냐?”

185:6.7 (1995.6) 그러자 바로 대사제가 앞으로 걸어나와서, 빌라도에게 다가가면서, 성이 나서 선언했다: “우리에게는 신성한 법이 있고, 그 법에 따라서 이 사람은 죽어야 하나니,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체하였음이라.” 이 말을 듣자,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더욱 무서웠을 뿐 아니라, 아내가 준 쪽지, 또 신들이 땅으로 내려온다는 그리스 신화를 회상하면서, 이제 그는 예수가 아마도 신다운 인물일 것이라는 생각에 부들부들 떨었다. 군중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하고, 그동안에 그를 더 조사할까 싶어 예수의 팔을 붙들고 다시 그를 건물 안으로 이끌고 갔다. 빌라도는 이제 두려워 갈피를 잡지 못했고, 미신 때문에 어리둥절하고 폭도의 완고한 태도에 시달렸다.

7. 빌라도의 마지막 회견

185:7.1 (1995.7) 두려운 느낌이 들어 떨면서, 빌라도는 예수의 옆에 앉아서 물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정말로, 너는 누구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저희가 말하는데, 이것이 무슨 소리냐?”

185:7.2 (1996.1) 그러나 예수가 아무런 죄가 없다고 선언하고서도, 그리고 정식으로 사형 선고를 받기 전에 그에게 채찍질을 하게 한 그렇게 부당한 재판관, 사람을 두려워하며 약하고 줏대 없는 재판관이 물었을 때, 예수는 그런 물음에 도저히 대답할 수 없었다. 예수는 빌라도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빌라도가 말했다: “너는 나와 말하기 싫으냐? 내가 아직도 너를 풀어놓거나 십자가에 못박게 할 권력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느냐?”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하늘로부터 허락받지 않았다면, 네가 나에게 아무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느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았으면, 너는 사람의 아들에게 아무 권한을 행사할 수 없도다. 그러나 너는 복음을 모르니, 그다지 죄가 없도다. 나를 저버리고 나를 너에게 넘긴 자들, 저희에게 죄가 더 크니라.”

185:7.3 (1996.2) 예수와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이 대화는 빌라도를 속속들이 놀라게 했다. 도덕적으로 겁쟁이요 재판에 약자인 이 사람은 이제 미신에 사로잡혀 예수를 두려워하고 유대인 지도자들을 끔찍히 무서워하는 이중의 압박 밑에서 허덕였다.

185:7.4 (1996.3) 다시 빌라도는 군중 앞에 나타나서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이 오직 종교의 율법을 어긴 자인 것을 확신하노라. 너희는 그를 데리고 가서 너희 법에 따라서 그를 재판해야 하느니라. 그가 너희 전통을 위반했다고 해서 어찌하여 너희가 그를 죽이는 데 내가 찬성할 것을 기대하느냐?”

185:7.5 (1996.4) 빌라도는 예수를 거의 풀어주려 했는데, 그때 대사제 가야바가 비겁한 로마인 재판관에게 다가와서, 빌라도의 얼굴에 징벌하듯 손가락을 흔들며 군중 전체가 들을 수 있게 성나서 말을 뱉었다: “이 사람을 풀어주면, 당신은 케자의 친구가 아니라, 황제가 모든 것을 알도록 내가 처리하겠노라.” 이 공개적 위협은 빌라도에게 너무 지나쳤다. 자기 개인의 장래가 어찌될까 하는 두려움에 이제 모든 다른 고려 사항은 빛을 잃게 되었고, 비겁한 총독은 예수를 재판석 앞으로 끌고 나오라 명령했다. 주가 그들 앞에 거기 서 있는 동안, 그는 예수를 가리키며 비웃는 투로 말했다: “너희 임금을 보라.” 유대인들이 대답했다: “그를 없애라. 십자가에 못박아라!” 그러자 빌라도가 잔뜩 비꼬고 빈정대며 말했다: “내가 너희 임금을 십자가에 못박으랴?” 유대인들이 대답했다, “옳소, 십자가에 못박아라! 우리에게는 케자 외에 아무 임금이 없소이다.” 그러자 유대인들을 무시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를 살려낼 아무 희망이 없음을 깨달았다.

8. 빌라도의 비극적 굴복

185:8.1 (1996.5) 여기 사람의 아들로서 육신화한 하나님의 아들이 섰다. 고발장 없이 붙잡히고 증거 없이 고발당했으며, 증인 없이 재판받고 선고 없이 징벌을 받았다. 그리고 그에게서 아무 잘못을 찾을 수 없다고 고백한 불공정한 재판관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이제 곧 받을 것이었다. 예수가 “유대인의 임금”이라 언급하여 그들의 애국심에 호소하려고 생각했다면, 빌라도는 철저히 실패했다. 유대인은 그러한 임금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주사제와 사두개인들이 “우리에게는 케자 외에 아무 임금이 없소이다”라는 선언은 생각이 없는 민중에게도 충격이었지만, 그 폭도들이 감히 주의 운동을 지지하려 했더라도 예수를 구하기에는 이제 너무 늦었다.

185:8.2 (1996.6) 빌라도는 소동이나 폭동을 두려워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기간에 그런 소란이 일어나는 위험을 감히 무릅쓰지 않았다. 그는 케자로부터 최근에 질책을 받았고, 또 한 번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가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명령했을 때 그 폭도들은 갈채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대야와 물 얼마큼을 달라 하고서, 거기서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결백하노라. 그를 죽여야 한다고 너희는 굳게 결심하였으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를 찾지 못했노라. 너희가 이를 책임지라. 군인들이 그를 인도하리라.” 그리고 나서 폭도들이 갈채하며 대답했다: “그의 피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쏟아질지어다.”

제 186 편 십자가에 못박히기 바로 전

유란시아서

제 186 편

십자가에 못박히기 바로 전

186:0.1 (1997.1) 예수와 고발자들이 헤롯을 보려고 떠났을 때, 주는 사도 요한을 향하여 말했다: “요한아, 너는 나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 더 없느니라. 내 어머니께로 가서, 내가 죽기 전에 나를 보도록 어머니를 모셔 오라.” 주의 요청을 들었을 때, 요한은 적들 사이에 주를 혼자 두고 떠나기 싫었어도, 베다니로 서둘러 갔다. 거기에는 예수의 가족 전부가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 모여 기다리고 있었고, 이들은 예수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린 나사로의 자매였다.

186:0.2 (1997.2) 아침에 몇 번, 사자들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예수의 재판의 진행에 관하여 소식을 가져왔다. 그러나 예수가 사형되기 전에 어머니를 보고 싶다고 요청하는 말을 가지고 요한이 도착하기 꼭 몇 분 전까지, 예수의 가족은 베다니에 도착하지 않았다. 예수가 자정에 체포된 뒤로 일어난 모든 것을 요한 세베대가 그들에게 일러준 뒤에, 어머니 마리아는 당장에 요한을 따라서 맏아들을 보러 갔다. 마리아와 요한이 도시에 도착할 때가 되어, 예수는 그를 십자가에 못박을 로마 군인들을 동반하고 이미 골고다에 다다랐다.

186:0.3 (1997.3)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한과 함께 아들에게 가려고 떠났을 때, 누이 동생 룻은 나머지 가족과 함께 뒤에 남으려 하지 않았다. 룻이 어머니를 따라가려고 각오가 굳었기 때문에, 오빠 유다가 룻과 함께 갔다. 주의 나머지 가족은 야고보의 지도 하에서 베다니에 남아 있었고, 거의 시간마다 다윗 세베대의 사자들이 그들에게 맏형 나사렛 예수를 사형에 처하는 그 끔찍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가 보고하는 말을 전했다.

1. 가룟 유다의 마지막

186:1.1 (1997.4) 이 금요일 아침 8시 반쯤에 빌라도 앞에서 예수의 청문회가 끝났고, 주는 그를 십자가에 못박을 로마 군인들의 보호에 맡겨졌다. 로마인들이 예수를 맡자마자, 유대인 경비대의 지휘관은 부하들과 함께 성전 본부로 행진하여 돌아갔다. 주사제와 동료 산헤드린 의원들은 경비대의 뒤를 바짝 따라갔고, 성전에, 돌을 깎아 만든 너른 방에, 여느 때 회의하는 장소로 바로 갔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를 어떻게 처리했는가 알려고 기다리는 다른 산헤드린 의원들을 많이 발견했다. 예수의 재판과 사형 선고에 관하여 가야바가 산헤드린에 보고하느라고 바쁜 동안에, 유다는 주를 체포하고 사형 선고를 내리는 데 그가 한 역할에 대하여 보상(報償)을 요구하려고 그들 앞에 나타났다.

186:1.2 (1997.5) 이 유대인들은 모두 유다를 몹시 싫어했다. 그들은 다만 더할 나위 없이 경멸하는 느낌으로 그 배반자를 바라보았다. 가야바 앞에서 예수가 재판받는 동안 내내, 그리고 그가 빌라도 앞에 나타난 동안, 유다는 자신의 배반 행위에 관하여 양심이 찔렸다. 그는 또한 예수를 배반한 사람으로서 수고한 대가로 그가 받기로 된 보상에 대하여 비로소 얼마큼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유대 당국의 차갑고 쌀쌀한 태도가 싫었다. 그런데도 비겁한 행위에 대하여 그는 후하게 보상받기를 기대했다. 산헤드린의 전체 회의 앞에 부름받고, 거기서 자신이 칭송받는 것을 들으며, 한편 그가 나라에 베풀었다고 자처했던 그러한 큰 수고의 표시로서 그들이 자기에게 적당한 명예를 수여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니까 대사제의 하인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바로 방 바깥으로 그를 불러냈을 때, 자기 중심인 이 배반자가 크게 놀란 것을 상상해 보라. 그 하인이 말했다: “유다여, 예수를 배반한 것에 대하여 당신에게 돈을 주라고 나는 지시를 받았소. 여기 당신의 보상이 있소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가야바의 하인은 유다에게 은화(銀貨) 서른 잎을 담은 자루를 주었다―당시에 우수하고 건강한 노예의 값이었다.

186:1.3 (1998.1) 유다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방으로 도로 달려갔지만, 문지기가 막았다. 산헤드린에게 상소(上訴)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그를 들여 놓으려 하지 않았다. 이 유대인 권력자들이 그로 하여금 친구인 주를 배반하게 만들고, 그리고 나서 상금으로 그에게 은화 서른 잎을 주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창피를 당했고 환멸을 느꼈으며, 완전히 마음이 짓밟혔다. 말하자면, 넋을 잃은 듯이, 그는 성전을 떠나서 걸어갔다. 정신없이 돈 자루를 깊은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바로 그 호주머니에 그는 사도들의 자금을 담은 자루를 아주 오랫동안 가지고 다녔다. 그는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러 가고 있던 군중의 뒤를 따라서 도시를 통해 헤매다녔다.

186:1.4 (1998.2) 유다는 사람들이 예수를 못박은 채로 가로대를 올리는 것을 먼 거리에서 보았고, 이것을 보고 나서 성전으로 도로 달려갔다. 문지기를 지나 강제로 들어가서, 아직도 회의 중인 산헤드린 앞에 섰다. 그 배반자는 거의 숨을 쉬지 못했고, 어지간히 어지러웠지만, 그럭저럭 더듬거리며 이런 말을 뱉었다: “내가 죄 없는 자의 피를 팔아넘겼으니 죄를 지었소이다. 당신들은 나를 모욕하였소이다. 내가 수고한 것에 대하여, 보상으로서 내게 돈―노예의 값―을 내밀었소이다. 내가 이렇게 한 것을 뉘우치오이다. 여기 당신들의 돈이 있소이다. 나는 이 행위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소이다.”

186:1.5 (1998.3) 유대인 권력자들은 유다의 말을 듣자, 그에게 코웃음을 쳤다. 그들 중에 유다가 서 있던 곳 가까이 앉아 있던 한 사람은 그에게 방에서 나가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너의 주는 로마인들에게 이미 사형당했고, 네 죄책감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네가 알아서 처리하라―그리고 꺼져라!”

186:1.6 (1998.4) 산헤드린의 방을 떠나면서, 유다는 돈 자루에서 은화 서른 잎을 꺼내서 성전 마루에 동댕이쳤다. 성전을 떠났을 때, 그 배반자는 거의 미쳐 버렸다. 유다는 죄의 참 성질을 깨닫는 체험을 이제 겪고 있었다. 악행의 온갖 매력과 황홀함과 취한 기분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 그 행악자는 혼자 서서, 환멸에 빠지고 실망한 그의 혼을 판결하는 선고(宣告)를 직면하고 있다. 죄는 저지를 때 사람을 매혹하고 모험하는 맛이 나지만, 이제 벌거벗고 낭만적이 아닌 사실을 거두는 일에 직면해야 한다.

186:1.7 (1998.5) 한때 땅에서 하늘나라의 대사였던 이 사람은, 이제 버림받은 채로 외로이 예루살렘의 거리를 지나서 걸었다. 그의 절망은 필사적이고 거의 절대적이었다. 계속 도시를 통해서, 담 바깥으로, 힌놈의 골짜기의 끔찍한 외로움 속으로 쏘다녔다. 거기서 가파른 바위로 기어 올라가서, 외투의 허리띠를 쥐고 한쪽 끝을 어느 작은 나무에 매고 다른 끝을 목 둘레에 묶었고, 절벽 너머로 몸을 내던졌다. 죽기 전에, 불안한 그의 손이 묶었던 매듭이 풀어졌고, 배반자의 몸은 밑에 들쭉날쭉한 바위 위로 떨어지면서 박살이 났다.

2. 주의 태도

186:2.1 (1999.1) 체포되었을 때, 예수는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땅에서 할 일이 끝났음을 알았다. 자기가 어떤 종류의 죽음을 겪을 것인가 잘 알았고, 이른바 그의 재판의 세부에 관하여 거의 아랑곳하지 않았다.

186:2.2 (1999.2) 산헤드린 의원들의 법정 앞에서, 그는 거짓 맹세하는 증인들의 증언에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친구가 묻든, 적이 묻든, 반드시 대답을 끌어낼 오직 한 가지 물음이 있었으니, 곧 땅에서 그의 사명의 성질과 신성(神性)에 관한 물음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인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어김없이 대답했다. 호기심 있고 사악한 헤롯 앞에서, 끝까지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빌라도 앞에서, 그의 말씀 덕분에 빌라도나 어떤 다른 진지한 사람이 진리를 더 잘 알도록 도움이 될까 생각했을 때에야 입을 열었다. 예수는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것이 쓸데없음을 사도들에게 전에 가르쳤고, 그가 가르친 것을 이제 감히 실천했다. 이때 그의 행위는, 신다운 성품의 말없는 위엄과 엄숙한 기품과 함께, 인간의 성품을 참을성 있게 복종시키는 것을 본보기로 보여주었다. 그가 고발당한 정치적 죄목에 관계된 어떤 질문도―총독의 관할에 속한다고 그가 인식한 어떤 문제라도―그는 빌라도와 함께 아주 기꺼이 이야기했다.

186:2.3 (1999.3) 모든 다른 필사 인간이 해야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인간사의 자연스럽고 평범한 과정에 복종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예수는 확신했고, 따라서 사회적으로 근시안이고 영적으로 눈먼 동료 필사자들이 책략을 꾸민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순전히 인간다운 그의 능력, 설득하는 웅변조차 이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비록 예수가 유란시아에서 살다가 죽었어도, 그의 인생 전부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가 창조하고 끊임없이 유지하는 우주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가르침을 주려고 고안된 구경거리였다.

186:2.4 (1999.4) 근시안인 이 유대인들은 보기 사납게 주를 죽이라고 아우성을 쳤고, 한편 그는 무서운 침묵 속에서 한 나라가―땅에서 그의 아버지의 민족이―사멸(死滅)하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거기에 서 있었다.

186:2.5 (1999.5) 예수는 이유 없이 계속 쏟아지는 모욕을 받고서 침착을 유지하고 위엄을 주장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인격을 얻었다. 그는 위협에 끄떡하지 않았다. 안나스의 하인에게 처음에 폭행을 당했을 때, 그에게 대적하여 정식으로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을 요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제안했을 뿐이다.

186:2.6 (1999.6) 처음부터 끝까지, 빌라도 앞에서 그가 이른바 재판이라는 것을 받을 때, 구경하는 하늘의 무리들은 “예수 앞에서 빌라도가 심판받는” 장면의 그림을 우주에 방송하는 것을 자제할 수 없었다.

186:2.7 (1999.7) 가야바 앞에 있을 때, 그리고 모든 거짓 증언이 밝혀지고 나서, 예수는 대사제의 물음에 서슴지 않고 대답했고, 이렇게 자신의 증언 속에서 그를 신성 모독으로 정죄할 근거로 삼고 싶었던 것을 마련해 주었다.

186:2.8 (1999.8) 의도는 좋았어도 그를 석방하려고 빌라도가 건성으로 기울인 노력을 주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정말로 빌라도를 불쌍히 여겼고, 전혀 깨닫지 못하는 그의 정신을 일깨워주려고 진지하게 애썼다. 예수를 고발한 죄목(罪目)을 취소하라고 로마인 총독이 유대인들에게 아무리 호소했어도, 그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슬픈 그 시련 전체를 통하여 내내, 소박한 품위와 허세부리지 않는 위엄을 가지고 처신했다. 그를 죽이려 하는 자들이 그가 “유대인의 임금”인가 물었을 때 그들이 진지하지 않다고 비난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제한하는 설명을 조금 덧붙이고 그 칭호를 받아들였는데, 이는 그들이 그를 거절했지만, 그가 영적 의미에서도 그들에게 민족의 진정한 지도력을 마지막으로 제공한 사람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86:2.9 (2000.1) 이 재판 중에 예수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의 말씀은 하나님과 협동하는 관계에서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인품을 완성할 수 있는가 모든 필사자에게 보여주기에 충분했고, 그러한 사람이 참으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를 택하고 이렇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활동적인 아들이 될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의 생애에서 어떤 방법으로 명백히 나타날 수 있는가 온 우주에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186:2.10 (2000.2) 그가 무지한 필사자들을 사랑한 것은, 거친 군인과 지각없는 하인들의 놀림ㆍ구타(毆打)ㆍ주먹질을 당하고서 그가 보인 참을성과 대단한 침착성에서 넉넉히 드러난다. 그들이 그의 눈을 가리고, 놀리면서 “너를 친 자가 누구인가 우리에게 예언하라” 외치며 얼굴을 쳤을 때, 그는 성을 내지도 않았다.

186:2.11 (2000.3) 예수가 채찍질을 받은 뒤에, 빌라도가 군중 앞에 예수를 내세우고 “이 사람을 보라!” 외쳤을 때, 빌라도는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더 참되게 말했다. 두려움에 질린 로마인 총독은, 정말로, 바로 그 순간에 우주가 귀를 기울이고 멈춰서, 그 우주의 사랑하는 군주가 눈이 멀고 타락한 필사 백성들의 놀림과 주먹질로 이렇게 굴욕당하는 이 독특한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거의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빌라도가 말하자, “하나님인 사람을 보라!”하는 소리가 온 네바돈에 두루 메아리쳤다. 한 우주에 두루,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그 이후로, 그 사람을 계속 보았고, 한편 하보나의 하나님, 온 우주의 최고 통치자는 시공의 이 지역 우주에서 필사 인간의 이상(理想)을 성취한 것으로서 그 나사렛 사람을 받아들인다. 비할 데 없는 일생에서 그는 하나님을 사람에게 드러내지 못한 적이 없다. 이제, 필사 생애의 이 마지막 사건에서, 그리고 나중에 죽을 때, 그는 새롭게 감동적으로 사람을 하나님께 드러내 보였다.

3. 믿음직한 다윗 세베대

186:3.1 (2000.4) 빌라도 앞에서 청문회가 끝나고 예수가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진 뒤에 조금 있다가, 성전 경비원들의 한 무리가 주의 추종자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거나 체포하려고 겟세마네로 서둘러 갔다. 그러나 이들이 도착하기 오래 전에 이 추종자들은 흩어졌다. 사도들은 지정된 숨는 장소로 물러갔고, 그리스인들은 따로 갈라져 예루살렘에 있는 여러 집으로 가버렸으며,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다윗 세베대는 예수의 적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주가 무척 자주 기도하고 예배하려고 은거했던 곳 가까이, 골짜기 위로 대여섯 텐트를 일찍부터 이동하였다. 여기에 숨고, 동시에 사자(使者) 봉사를 위하여 한 중심, 조정하는 근거지를 유지하려고 생각했다. 다윗이 캠프를 떠나기가 무섭게 성전 경비원들이 도착했다. 거기서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자 그들은 캠프를 불사르는 것으로 만족했고, 그리고 나서 성전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그들의 보고를 받고 나서, 산헤드린은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렇게 철저히 놀라고 뿌리가 뽑히어, 폭동이 일어날 위험이나 또는 집행자들의 손에서 예수를 구하려고 아무런 시도도 없으리라는 것에 만족했다. 그들은 마침내 숨을 편히 쉴 수 있었고, 그래서 폐회(閉會)하고, 저마다 유월절을 위하여 준비하려고 제 갈 길을 갔다.

186:3.2 (2000.5) 십자가 처형을 위하여 빌라도가 예수를 로마 군인들에게 넘기자마자, 한 사자가 다윗에게 알리려고 겟세마네로 서둘러 갔고, 주자(走者)들이 5분 안에 벳세다ㆍ펠라ㆍ필라델피아ㆍ시돈ㆍ세켐ㆍ헤브론ㆍ다마스커스ㆍ알렉산드리아로 달려갔다. 이 사자들은, 유대인 권력자들의 끈질긴 부탁을 받고서 로마인들이 막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려 한다는 소식을 가져갔다.

186:3.3 (2001.1) 이 비극의 날 내내, 주가 무덤에 안치되었다는 소식이 마침내 나갈 때까지, 다윗은 사도와 그리스인들, 그리고 베다니에서 나사로의 집에 모여 있던, 예수의 세상 식구들에게, 사자들을 통해서 거의 반시간마다 보고를 보냈다. 예수가 무덤에 묻혔다는 소식을 가지고 사자들이 떠났을 때, 유월절을 축하하기 위하여, 또 다가오는 안식일에 쉬라고, 다윗은 지역 연락원 집단을 해산하고 그들에게 니고데모의 집에서 일요일 아침에 그에게 조용히 보고하라고 지시했는데, 거기서 그는 안드레와 시몬 베드로와 함께 며칠 동안 숨어 있을 생각이었다.

186:3.4 (2001.2) 생각이 특이한 이 다윗 세베대는 예수의 주요 제자들 가운데서, 그가 죽고 “사흘째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주의 주장을 글자 그대로, 간단히 사무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다윗은 한때 예수가 이렇게 예언하는 것을 들었고, 글자 그대로 믿는 성질의 머리였기 때문에,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경우에 그 소식을 퍼뜨리려고 가까이 있도록, 니고데모의 집에서 일요일 아침 일찍 사자들을 모으려고 이제 일을 꾸몄다. 다윗은 예수의 추종자들 가운데 아무도 예수가 그렇게 빨리 무덤에서 돌아오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믿는 것에 대하여 거의 입을 열지 않았고, 먼 도시와 신자 중심들로 금요일 아침에 파송된 연락원들에게 일러준 것을 제외하고, 일요일 아침 일찍 사자단(使者團)을 총동원하는 것에 대하여 아무 말도 비치지 않았다.

186:3.5 (2001.3) 그래서 예수를 따르던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 전역에 두루, 그리고 그 둘레에 흩어져서, 그날 밤 유월절 저녁을 먹고 이튿날에는 숨어 있었다.

4. 십자가 처형을 위한 준비

186:4.1 (2001.4) 단지 유대인 권력자들의 아우성에 저항하기가 두려웠기 때문에 결백한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넘겨준 죄책감을 이처럼 피하려 애쓰면서 군중 앞에서 손을 씻은 뒤에, 빌라도는 주를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주라고 명령했고, 그들의 지휘관에게 주를 즉시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말했다. 예수를 떠맡은 뒤에, 군인들은 집정관 관저의 안뜰로 그를 도로 데려갔고, 헤롯이 그에게 입혔던 겉옷을 벗긴 뒤에 그들은 주를 자신의 옷으로 갈아 입혔다. 이 군인들은 그를 비웃고 조롱했지만, 더 이상 육체적 징벌을 가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이제 로마 군인들과 따로 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숨어 있었고, 적들은 제 갈 길을 갔으며, 요한 세베대조차 이제 더 옆에 있지 않았다.

186:4.2 (2001.5) 빌라도가 예수를 군인들에게 넘긴 것은 8시가 조금 지난 뒤였고,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는 장소를 향하여 떠난 것은 9시 조금 전이었다. 반시간이 넘는 이 동안에, 예수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한 큰 우주의 집행 사무는 실지로 정지되었다. 가브리엘과 네바돈의 으뜸 통치자들은 여기 유란시아에 모여 있든지, 아니면 유란시아에서 사람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하여 정보를 계속 받으려는 노력으로, 천사장들의 공간 보고서를 바짝 정신차려 듣고 있었다.

186:4.3 (2001.6) 군인들이 예수와 함께 골고다를 향하여 떠날 준비가 되었을 때, 그들은 보기 드문 그의 침착성과 비상한 품위에, 불평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데 비로소 감명을 받았다.

186:4.4 (2001.7) 십자가에 처형하는 장소로 예수와 함께 떠나는 데 지체된 것은 대체로, 그 지휘관이 사형 선고를 받은 두 도둑을 함께 데리고 가려고 마지막 순간에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날 아침에 십자가에 못박히기로 되었으니까, 로마인 지휘관은 이 두 사람이 유월절 축제 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기보다, 기왕이면 예수와 함께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186:4.5 (2002.1) 도둑들은 준비가 되자마자 안뜰로 끌려 왔고, 거기서 예수를 바라보았다. 하나는 처음으로 보았지만, 다른 하나는 예수가 말씀하는 것을 성전에서, 또 펠라 캠프에서 여러 달 전에, 자주 들은 적이 있었다.

5. 예수의 죽음과 유월절의 관계

186:5.1 (2002.2) 예수의 죽음과 유대인의 유월절 사이에는 아무런 직접 관계가 없다. 이날, 유대인의 유월절을 준비하는 날에, 성전에서 유월절 양들을 바칠 때쯤, 주가 육체를 입은 목숨을 버린 것은 참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어쩌다 함께 일어났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도 땅에서 사람의 아들의 죽음이 유대인의 희생 제도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예수는 유대인이었지만, 사람의 아들로서 그는 이 영역에서 한 필사자였다. 이미 열거한 사건, 그리고 얼마 있다가 주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이 시간까지 이끄는 사건들은, 이 무렵에 그의 죽음이 순전히 자연스러운 일, 사람이 처리한 일이었다는 것을 가리키기에 넉넉하다.

186:5.2 (2002.3)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도록 계획하고 사형을 집행한 것은 사람이요, 하나님이 아니었다. 유란시아에서 인간사(人間事)의 진행에 아버지가 간섭을 마다하신 것이 참말이지만,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는 땅에서 실행된 대로 아들의 죽음을 선포하거나 청구하거나 요구하지 않았다. 어떤 방법으로, 머지 않아, 예수가 필사의 몸, 살을 입은 육신화를 벗어야 했으리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두 도둑 사이에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서, 셀 수 없이 많은 방법으로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이 모두가 사람이 한 일이요,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다.

186:5.3 (2002.4) 세례받을 때, 주는 일곱째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을 우주에 수여하는 일을 마치는 데 필요했던 체험, 땅에서 육체를 입고 맛보라고 요구된 체험 기법을 이미 마쳤다. 바로 이때, 땅에서 예수의 임무는 끝났다. 그 뒤에 산 여생은 모두, 그가 죽는 방법조차, 이 세상에서, 그리고 다른 세계들에서 필사 인간들의 복지와 향상을 위하여, 그의 편에서 순전히 몸소 베푸신 수고였다.

186:5.4 (2002.5)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필사 인간이 신앙을 통해서 영적으로 의식할 수 있다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그 복음은 예수의 죽음과 상관이 없다. 정말로, 이 하늘나라 복음 전부가 주의 죽음으로 엄청나게 빛을 받았다는 것이 참말이기는 하지만, 그의 생애로 인하여 더욱 빛을 받았다.

186:5.5 (2002.6) 땅에서 사람의 아들이 말씀하고 행한 모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서로 형제라는 신조를 크게 빛나게 했지만, 하나님과 사람의 이 기본 관계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는 사랑과 신다운 아들들의 타고난 자비, 이 우주 사실에 본래부터 있다.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온 우주에 두루, 모든 다른 세상에서, 사람과 창조주 사이에 감동적이고 신답게 아름다운 이 관계는 영원부터 존재해 왔다. 그리고 이 관계는 어떤 면에서도, 하나님의 창조 아들들이 정기적으로 이처럼 자신을 수여하는 행위와 상관이 없으며, 그들은 이처럼 각자의 지역 우주에서 무제한 통치권을 마지막으로 얻기 위하여 치러야 할 값의 일부로서 자신이 창조한 지적 존재들의 성품과 모습을 입는다.

186:5.6 (2002.7)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사람과 하나님이 함께 협동하는 관계를 이렇게 초월적으로 보여준 이후와 마찬가지로, 유란시아에서 예수가 살다가 죽기 전에도 땅에 있는 필사 인간을 사랑하셨다. 유란시아에서 한 사람으로서 네바돈의 하나님이 육신화한 이 막대한 거래는 영원ㆍ무한하고 우주적인 아버지의 속성을 더 크게 만들 수 없지만, 네바돈 우주의 모든 다른 행정가와 생물을 풍성하게 만들고 일깨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이렇게 미가엘이 수여되었다고 해서 우리를 더 사랑하지는 않아도, 하늘의 모든 다른 지적 존재는 그렇다. 이것은 예수가 하나님을 사람에게 드러냈을 뿐 아니라, 또한 마찬가지로 신들에게, 그리고 온 우주에 있는 하늘의 지적 존재들에게, 사람을 새롭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186:5.7 (2003.1) 예수는 죄를 갚는 희생물로서 죽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류의 타고난 도덕적 죄를 대신 갚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종족으로서 죄가 없다. 죄를 지었다는 느낌은 순전히 개인이 저지르는 죄, 아버지의 뜻과 그 아들들의 행정부에 대하여, 알면서 깊이 생각하여 반항하는 문제이다.

186:5.8 (2003.2) 죄와 반란은 하나님의 파라다이스 아들들을 수여하는 근본 계획과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구제하는 계획은 우리가 보기에 수여 계획의 임시 모습인 듯하다.

186:5.9 (2003.3) 유란시아의 필사자에게 하나님이 베푸는 구원은, 예수가 무지한 필사자들의 잔인한 손에 죽지 않았더라도, 똑같이 효과 있고 어김없이 확실했을 것이다. 땅의 필사자들이 주를 좋게 받아들이고, 주가 육체를 입은 인생을 자진하여 그만두고 유란시아를 떠났더라면, 하나님의 사랑과 아들의 자비, 이 사실―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너희 필사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너의 개인 체험에서 그러한 진리를 사실로 만드는 데는 오직 한 가지가 요구되는데, 영에게서 태어난 너의 믿음이다.

제 187 편 십자가에 못박히다

유란시아서

제 187 편

십자가에 못박히다

187:0.1 (2004.1) 두 도적이 준비된 뒤에, 한 백부장의 지휘 하에 군인들은 십자가에 처형하는 장면을 향하여 떠났다. 이 군인 12명을 책임진 백부장(百夫長)은 겟세마네에서 예수를 붙잡으려고 전날 밤에 로마 군인들을 이끌었던 바로 그 지휘관이었다. 십자가에 못박힐 각 사람에게 군인 네 명을 배치하는 것이 로마인의 관습이었다. 두 도둑은 십자가에 못박히려고 끌려가기 전에 적절히 채찍을 맞았지만, 예수는 육체의 징벌을 더 받지 않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지휘관은 예수가 선고를 받기도 전에 이미 충분히 채찍질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187:0.2 (2004.2) 예수와 함께 못박힌 두 도둑은 바라바의 동료였고, 바라바가 빌라도의 유월절 사면(赦免)으로 풀려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지도자와 함께 처형되었을 것이다. 예수는 이처럼 바라바 대신에 십자가에 못박혔다.

187:0.3 (2004.3) 예수는 그가 이제 바야흐로 하려는 일, 십자가 처형에 자유의지로 순응한다. 이 체험을 미리 내다보면서 그는 말했다: “내가 목숨을 기꺼이 버리는 까닭에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고 붙드시느니라. 그러나 나는 내 목숨을 다시 찾겠고, 아무도 내 목숨을 내게서 빼앗지 못하느니라―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목숨을 버릴 권한이 있고 붙잡을 권한이 있노라. 나는 아버지로부터 그런 명령을 받았노라.”

187:0.4 (2004.4) 이날 아침 9시 바로 전에, 군인들은 예수를 집정관 관저에서 골고다로 끌고 갔다. 그들 뒤에 예수를 남모르게 동정하던 많은 사람이 따랐지만, 2백 명 이상 되는 이 무리의 대부분은 적이든지, 아니면 호기심 있는 한가한 사람들이었고, 이들은 다만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는 충격을 즐기고 싶어했다. 유대인 지도자들 가운데 겨우 몇 사람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보려고 나갔다. 빌라도가 그를 로마 군인들에게 넘겼고 그가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까, 그들은 성전에서 회의하는 데 바빴고, 거기서 예수의 추종자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토론했다.

1. 골고다로 가는 길

187:1.1 (2004.5) 관저의 안뜰을 떠나기 전에, 군인들은 예수의 어깨에 가로대를 올려놓았다. 선고받은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못박힐 장소까지 가로대를 나르라고 강요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렇게 선고받은 사람은 십자가 전체가 아니라, 이 짧은 재목만 날랐다. 세 십자가를 세우기 위한 더 길고 수직(垂直)으로 세우는 재목들은 이미 골고다로 수송되었고, 군인과 죄수들이 도착할 때가 되자, 땅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187:1.2 (2004.6) 관습에 따라서 그 지휘관은 행렬을 이끌었고, 작은 흰 판자들을 가지고 갔는데, 이 위에는 목탄으로 죄수들의 이름과 선고받은 죄목의 성질이 적혀 있었다. 두 도둑을 위해서 백부장은 그들의 이름이 적힌 게시판을 가지고 있었고, 그 밑에는 “도적”이라는 낱말이 하나 적혀 있었다. 희생자를 가로대에 못박고, 수직 재목 위에 제 자리로 들어올린 뒤에, 선고받은 사람이 무슨 죄로 십자가에 못박히는가 모든 증인이 알 수 있도록, 이 게시판을 십자가 꼭대기, 죄수의 머리 바로 위에 못박는 것이 관습이었다. 예수의 십자가에 붙여놓으려고 백부장이 가지고 간 설명문은 바로 빌라도가 라틴어ㆍ그리스어ㆍ아람어로 썼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사렛 예수―유대인의 임금.”

187:1.3 (2005.1) 빌라도가 이 설명문을 썼을 때 아직 자리에 있던 유대 당국의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유대인의 임금”이라 부른 데 맹렬히 항의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러한 고발이 그가 선고를 받게 만든 죄목의 일부였다고 그들에게 상기시켰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생각을 바꾸라고 밀어붙일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적어도 “그가 말하되, ‘나는 유대인의 임금이라’”고 고치라 탄원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완강했고 글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 더 계속된 온갖 간청에 그는 이렇게만 대답했다: “내가 이미 썼으니, 엎질러진 물이라.”

187:1.4 (2005.2) 보통은, 큰 무리의 사람들이 선고받은 죄수를 구경하도록 가장 먼 길로 골고다까지 걸어가는 것이 관습이었지만, 이날 그들은 가장 가까운 길로 다마스커스 대문까지 갔는데, 이 대문은 도시 바깥으로, 북쪽으로 이끌었다. 이 길을 따라가서 금방 골고다에 다다랐으며,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처형하는 공식 장소였다. 골고다를 지나서 부자들의 별장이 있었고, 길 건너편에는 많은 부유한 유대인의 무덤이 있었다.

187:1.5 (2005.3)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유대인의 처형 방법이 아니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이 집행 방법을 페니키아인으로부터 배웠다. 헤롯조차도, 온갖 잔인한 일을 했지만 십자가 처형을 이용하지는 않았다. 로마인들은 결코 로마 시민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고, 오직 노예와 지배받는 민족들이 이 치욕스러운 방법으로 죽음을 당했다. 예루살렘이 포위된 동안,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뒤 꼭 40년이 되어, 온 골고다는 수천의 십자가로 덮였고, 그 십자가에 날이면 날마다 유대 민족의 청춘이 이슬로 사라졌다. 이날 씨 뿌린 것으로부터 정말로 끔찍한 수확이었다.

187:1.6 (2005.4) 죽음의 행렬이 예루살렘의 좁은 거리를 따라서 지나가는 동안, 다정한 많은 유대 여인이 예수가 그런 치욕스러운 죽음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서 눈물을 그칠 수 없었으니, 그들은 격려하고 동정하는 예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고 사랑으로 봉사한 그의 일생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가 지나가는 동안에, 이 숱한 여인들이 슬퍼하고 한탄하였다. 그들 가운데 더러가 감히 옆으로 따라오려고 했을 때, 주는 그들에게 얼굴을 향하고 말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오히려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내 일은 거의 끝났으나―나는 곧 아버지께로 가노라―예루살렘이 끔찍하게 고통받는 시절이 바로 시작되느니라. 보라, 아이 없는 자와 어린것들에게 젖을 먹인 적이 없는 가슴이 복이 있도다 너희가 말할 날이 다가오고 있느니라. 그날에 너희가 끔찍한 고통에서 구원받도록 산에 있는 돌들에게 너희 위로 굴러 떨어지라 기도하리라.”

187:1.7 (2005.5) 십자가에 달리려고 끌려가고 있는 사람에게 친절을 보이는 것이 엄격하게 법에 어긋났기 때문에, 이 예루살렘 여인들이 예수에게 동정심을 보인 것은 정말로 용감한 일이었다. 구경꾼들이 선고(宣告)받은 사람을 놀리고 비웃고 조롱하는 것은 허락되었지만, 조금이라도 동정심을 표현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친구들이 숨어 있는 이 암울한 시간에, 동정의 표현을 고맙게 여기기는 했어도, 예수는 그에게 감히 동정심을 보여서 마음 착한 이 여인들이 당국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를 바랐다. 이와 같은 때에도 예수는 자신을 거의 생각지 않았고, 오직 예루살렘과 온 유대 민족에게 닥쳐올 끔찍한 비극의 날을 생각했다.

187:1.8 (2006.1) 십자가에 못박히려고 가는 길에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주는 몹시 지쳤고, 기운이 거의 다하였다. 엘리야 마가의 집에서 마지막 만찬을 든 뒤로, 먹을 것도 물도 입에 대지 못했고, 한 순간 눈을 붙이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게다가 가혹한 채찍질과 그에 따른 육체적 고통과 피 흘림은 말할 것도 없고, 선고받는 시간까지 연달아 청문회가 있었다. 이 모든 것 위에 극도의 정신적 고통, 날카로운 영적 긴장, 인간적으로 외로운 끔찍한 느낌이 겹쳐졌다.

187:1.9 (2006.2)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길에, 대문을 거친 뒤에 곧, 예수가 가로대를 지고 비틀거리자 육신의 힘이 잠시 빠졌고, 그는 무거운 짐의 무게에 눌려 쓰러졌다. 군인들이 그에게 소리를 지르고 발로 그를 걷어찼지만, 그는 일어날 수 없었다. 이것을 보았을 때, 예수가 무엇을 이미 견디었는가 알았기 때문에, 그 지휘관은 군인들에게 그만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나서 지나가던 어떤 사람, 키레네에서 온 시몬이라는 사람에게, 예수의 어깨에서 가로대를 받아들라고 명령했고, 그에게 골고다까지 가는 남은 길을 가로대를 지고 가라고 강제했다.

187:1.10 (2006.3) 이 시몬이라는 사람은 북 아프리카의 키레네에서 유월절에 참석하려고 먼 길을 왔다. 도시의 담 바로 바깥에서 다른 키레네 사람들과 함께 멈추었고, 로마인 지휘관이 그에게 예수의 가로대를 나르라고 명령했을 때, 그는 도시에 있는 성전 예배에 가는 길이었다. 시몬은 십자가에서 주가 돌아가시는 시간을 통해서 내내 남아 있었고, 주의 친구와 적들 중에 많은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활이 있은 뒤에, 그리고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에, 그는 하늘나라 복음을 믿는 용감한 신자가 되었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자기 가족을 하늘나라로 인도했다. 두 아들, 알렉산더와 루푸스는 아프리카에서 새 복음을 가르치는 아주 유능한 선생이 되었다. 그러나 시몬은 예수의 짐을 대신 졌는데, 이 예수와 한때 다쳤던 그의 아들과 사귄 유대인 선생이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결코 알지 못했다.

187:1.11 (2006.4) 이 죽음의 행렬이 골고다에 다다랐을 때는 9시가 조금 지났고, 로마 군인들은 두 도둑과 사람의 아들을 각자의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착수했다.

2. 십자가에 못박히다

187:2.1 (2006.5) 군인들은 먼저 주의 팔을 노끈으로 가로대에 묵었고, 그리고 나서 두 손을 나무에 못박았다. 이 가로대를 기둥 위에 들어올렸을 때, 군인들은 가로대를 십자가의 수직(垂直) 재목에 단단히 못박은 뒤에, 발을 나무에 묶고 못박았으며, 두 발을 꿰뚫으려고 긴 못 하나를 썼다. 수직 재목은 적당한 높이에 끼워 넣은 큰 나무못이 있었고, 이 못은 몸무게를 떠받들기 위하여 일종의 안장으로 쓰였다. 십자가는 높지 않았고, 주의 발은 땅에서 겨우 90센티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사람들이 비웃으며 그에게 뱉은 말을 다 들을 수 있었고, 아주 생각 없이 그를 놀려댄 모든 사람의 얼굴 표정을 뻔히 볼 수 있었다. 또한 거기 있던 사람들은 오래 지속되는 고통을 겪으며 서서히 죽는 이 시간에, 예수가 하신 모든 말씀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187:2.2 (2007.1) 십자가에 못박힐 사람들의 옷을 모두 벗기는 것이 관례였지만, 유대인들이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을 대중 앞에 노출하는 것을 크게 반대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모든 사람을 위하여 적절한 허리감는 천을 반드시 마련해 주었다. 따라서, 예수의 옷이 벗겨진 뒤에, 십자가에 올려지기 전에 그는 이렇게 걸쳤다.

187:2.3 (2007.2) 잔인하고 오래 지속되는 징벌을 마련하기 위해서 십자가 처형이 이용되었고, 희생자는 때때로 며칠 동안 죽지 않았다. 예루살렘에는 사람들이 십자가 처형을 반대하는 감정을 상당히 가졌고, 유대 여인의 사회가 존재했는데, 이들은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희생자에게 약물 넣은 포도주를 제공할 목적으로 반드시 한 대표를 처형 장소에 보냈다. 그러나 마취제 넣은 포도주를 맛보았을 때, 목이 마르기는 했어도, 예수는 마시려 하지 않았다. 주는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 의식을 지니기를 택했다. 처참하고 보기 어려운 이 모습으로도, 죽음을 마주하고 인간 체험의 끝까지 자진하여 복종함으로 죽음을 이기기를 바랐다.

187:2.4 (2007.3)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두 도둑은 이미 십자가에 올려졌고 그동안 내내 집행자들에게 욕을 퍼붓고 침을 뱉었다. 그들이 그를 가로대에 못박는 동안에 예수는 오직 말했다,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소서, 저희는 무엇을 하는지 모르나이다.” 사랑으로 헌신하는 그런 생각이 사심 없이 봉사하는 전 생애에 주요한 동기가 아니었다면 그토록 자비롭게 사랑으로 집행자들을 위하여 탄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생 동안에 가졌던 관념ㆍ동기ㆍ열망은 위기(危機)에 처했을 때 훤히 드러난다.

187:2.5 (2007.4) 주가 십자가에 들어올려진 뒤에, 지휘관은 죄목을 그의 머리 위에 못박았는데, 이것은 세 나라 말로 적혀 있었다: “나사렛 예수―유대인의 임금.” 유대인들은 이것을 모욕이라 믿었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그러나 빌라도는 공손하지 않은 그들의 태도에 기분이 거슬렸다. 그는 위협과 모욕을 받았다고 느꼈고, 좁은 마음으로 복수하는 이 방법을 이용했다. “모반자 예수”라고 쓸 수도 있었지만, 그는 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바로 나사렛이라는 이름을 얼마나 싫어 하는가 잘 알았고, 이렇게 그들에게 모욕을 주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처형되는 이 갈릴리 사람을 “유대인의 임금”이라 부르는 것을 보면, 또한 그들이 몹시 아픈 곳까지 다치리라는 것을 알았다.

187:2.6 (2007.5) 빌라도가 예수의 십자가에 이 비문(碑文)을 붙여놓고 어떻게 그들을 비웃으려 애쓴 것을 알았을 때, 유대인 지도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골고다로 서둘러 갔지만, 로마 군인들이 서서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감히 비문을 떼어내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 죄목을 없애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그 비문을 심각하게 여길까 두려워, 이 지도자들은 군중과 함께 섞여 조롱과 비웃음을 선동하려고 있는 힘을 다했다.

187:2.7 (2007.6) 예수가 십자가에 제 자리에 들어올려진 바로 뒤에, 그리고 지휘관이 주의 머리 위쪽에 죄목을 못박고 있는 동안에, 사도 요한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룻과 유다와 함께 그 장면에 도착했다. 요한은 열한 사도 가운데 유일하게 십자가 처형을 구경한 사람이었고, 예수의 어머니를 그 장면에 모시고 온 뒤에 곧, 자기 어머니와 그 친구들을 데리러 예루살렘으로 달려갔기 때문에, 요한조차도 그 자리에 내내 있지 않았다.

187:2.8 (2007.7) 예수는 요한과 아우와 누이와 함께 어머니를 보았을 때 빙긋 웃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동안에 주의 십자가 처형에 배치된 군인 네 사람은 관습대로, 그의 옷가지를 자기들끼리 나누었는데, 하나는 가죽 신, 하나는 터반, 하나는 허리띠, 넷째는 외투를 가졌다. 이것으로 튜닉, 다시 말해서 무릎 가까이 내려오는 솔기 없는 옷을 네 조각으로 자르는 일이 남았지만, 군인들이 얼마나 보기 드문 옷인가 보고 나서 튜닉을 가지려고 제비를 뽑기로 작정했다. 그들이 그의 옷가지를 나누고, 지각없는 군중이 그를 놀려대는 동안에, 예수는 내려다보았다.

187:2.9 (2008.1) 로마 군인들이 주의 옷을 가져간 것은 잘된 일이었다. 그렇지 않고, 추종자들이 이 옷가지들을 손에 넣었더라면 그들은 미신에 사로잡혀 유물(遺物) 숭배에 의존할 유혹에 빠졌을 것이다. 주는 추종자들이 땅에서 그의 일생과 연결할 어떤 물질적인 것도 가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거룩하게 바친, 높은 영적 이상에 전념한 인생의 기억만 인류에게 남겨주고 싶어했다.

3. 십자가 처형을 구경한 사람들

187:3.1 (2008.2) 이 금요일 아침 9시 반쯤에, 예수는 십자가에 달렸다. 11시가 되기 전까지, 1천 명을 웃도는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 광경을 구경하려고 모여 있었다. 주가 사람의 죽음, 아니 선고받은 범죄자의 가장 치욕스러운 죽음을 겪는 동안에, 창조자의 이 특이한 현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한 우주의 보이지 않는 무리가 이 끔직한 시간 내내, 말없이 서 있었다.

187:3.2 (2008.3)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동안 어느 때인가 마리아ㆍ룻ㆍ유다ㆍ요한ㆍ살로메 (요한의 어머니), 그리고 열심 있는 한 무리의 여인들이 십자가에 가까이 서 있었고, 이 무리는 클로바의 아내 마리아, 예수의 이모,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한때 세포리스에서 살았던 레베카를 포함했다. 그의 큰 참을성과 인내를 구경하고 심한 고통을 바라보는 동안, 이들과 예수의 다른 친구들은 조용히 있었다.

187:3.3 (2008.4) 지나가던 많은 사람이 머리를 흔들고 그에게 욕을 퍼부으며 말했다: “성전을 무너뜨리고 사흘 안에 다시 지으려 하다니, 네 몸이나 구하거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어찌 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느냐.” 마찬가지 방법으로 유대인 권력자들 가운데 더러가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저가 남은 구하였으되 자신은 구할 수 없구나.” 더러는 말했다: “네가 유대인의 임금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너를 믿겠노라.” 나중에 그들은 그를 더욱 놀리며 말했다: “저는 하나님이 저를 구원하리라 믿었는지라. 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기까지 하였더니―이제 저를 보라―두 도둑 사이에 십자가에 못박혀 있구나.” 두 도둑조차 또한 그에게 욕을 퍼붓고, 그를 비난하였다.

187:3.4 (2008.5) 그들이 놀리는 말에 예수가 아무런 대꾸를 하려 하지 않았고, 이 특별한 준비일의 한낮이 가까웠기 때문에, 11시 반이 되어서 시시덕거리고 놀려대던 군중은 제 갈 길을 가버렸으며, 그 장면에는 50명이 채 안 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사형수(死刑囚)를 감시하려고 자리를 잡은 동안에, 군인들은 이제 점심을 먹고 신 싸구려 포도주를 마시려고 준비했다. 포도주를 마시면서 놀리는 말투로 예수에게 축하의 잔을 올리며 말했다, “만세와 행운을! 유대인의 임금에게.” 그들은 놀리고 비웃어도 주가 관대하게 여기는 것에 놀랐다.

187:3.5 (2008.6) 그들이 먹고 마시는 것을 보았을 때, 예수는 내려다보며 말했다: “목이 마르다.” 경비대의 지휘관이 예수가 “목이 마르다” 하는 것을 듣자, 자기 병에서 포도주 얼마큼을 꺼내고 적셔진 해면(海綿) 마개를 창 끝에 꿰어, 타는 입술을 축일 수 있도록 예수에게 올려주었다.

187:3.6 (2008.7) 예수는 그의 초자연 권능에 의존하지 않고 살려고 의도했으며,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보통 필사자로 죽기를 택했다. 사람으로서 살았고―아버지의 뜻을 행하면서―사람으로서 죽고자 한다.

4. 십자가에 달린 도둑

187:4.1 (2008.8) 도둑 하나가 예수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말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어찌하여 너 자신과 우리를 구하지 않느냐?” 그러나 그가 예수를 꾸짖고 나자, 주의 가르침을 여러 번 들었던 다른 도둑이 말했다: “너는 하나님도 무섭지 않느냐? 우리가 저지른 일로 우리는 마땅히 고통받고 있지만, 이 사람은 부당하게 고통받는 것을 너는 깨닫지 못하느냐? 우리 죄를 용서하고 우리 혼을 구원해주기를 청하는 것이 더 좋으니라.” 이 도둑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예수는 그를 향하여 얼굴을 돌리고 맞다는 뜻으로 빙그레 웃었다. 예수의 얼굴이 자기를 향한 것을 보았을 때 그 악인은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꺼질 듯하는 믿음의 불꽃에 부채질하며 말했다: “주여, 당신의 나라로 가실 때 저를 기억하소서.” 그러자 예수는 말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언젠가 나와 함께 파라다이스에 가리라.”

187:4.2 (2009.1) 필사자로 죽는 아픔 한가운데서, 주는 믿음 있는 강도(强盜)의 신앙 고백에 귀를 기울일 겨를이 있었다. 구원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 이 도둑은 구원을 얻었다. 이보다 전에 여러 번 그는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었지만, 오직 의식이 있는 이 마지막 시간에야 주의 가르침을 향하여 진심으로 돌아섰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음을 맞이하는 그 태도를 보았을 때, 이 도둑은 이 사람의 아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이제 더 떨쳐버릴 수 없었다.

187:4.3 (2009.2) 도둑이 예수에게 감화를 받고 하늘나라로 받아들여지는 이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에 사도 요한은 자리에 없었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장면으로 어머니와 그 친구들을 모셔 오려고 도시로 가버렸다. 누가는 경비대의 개종한 로마인 지휘관으로부터 후일에 이 이야기를 들었다.

187:4.4 (2009.3) 사건이 일어나고 1세기의 3분의 2가 지난 뒤에 그 사건을 기억한 대로, 사도 요한은 십자가 처형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다른 기록들은 근무 중이던 로마인 백부장이 한 이야기에 기초를 두었는데, 그는 보고 들은 것 때문에 후일에 예수를 믿었고, 땅에서 하늘나라의 완전한 친교에 가입하였다.

187:4.5 (2009.4) 이 젊은이, 회개한 도둑은, 그러한 강도질하는 생애가 정치적 압력과 사회의 불공평에 대하여 효과적인 애국 항거라고 찬미한 사람들 때문에, 폭력과 악행을 일삼는 생활로 끌려들었다. 이런 종류의 가르침과 모험하려는 충동은, 다른 면에서 좋은 뜻을 가진 많은 젊은이를 이러한 대담한 강도질 파견에 지원하도록 이끌었다. 이 젊은이는 전에 바라바를 영웅으로 우러러보았다. 이제 그는 자기가 잘못했음을 알았다. 그는 옆에 여기 십자가에서 정말로 위대한 사람, 참된 영웅을 보았다. 그의 열심에 불을 붙이고, 도덕적 자존심에 대한 그의 가장 높은 관념을 북돋우고, 용기와 남자다움과 용감한 행위에 대한 그의 모든 이상을 되살린 영웅이 여기에 있었다. 예수를 바라보면서 사랑과 충성심과 진정한 위대함이 넘쳐흐르는 느낌이 그의 가슴 속에서 솟아올랐다.

187:4.6 (2009.5) 놀려 대는 군중 속에 있던 어떤 사람이라도, 혼 속에 믿음이 태어나는 것을 체험하고 예수의 자비에 호소했더라면, 믿음이 있는 그 도적에게 나타난 것과 똑같은 인자한 배려로 영접을 받았을 것이다.

187:4.7 (2009.6) 회개(悔改)한 도둑이 그들이 파라다이스에서 언젠가 만날 것이라는 주의 약속을 듣고 난 바로 뒤에 요한이 도시에서 돌아왔고, 그의 어머니와 거의 열두 여인 신도의 일행을 데리고 왔다. 요한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가까이 자리를 잡고 그 여자를 부축하였다. 그 여자의 아들 유다는 다른 쪽에 섰다. 예수가 이 장면을 내려다볼 때는 한낮이었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여자여, 어머니의 아들을 보소서!” 그리고 요한을 향하여 말했다: “이 사람아, 네 어머니를 보라!” 그리고 나서 두 사람에게 말했다: “나는 두 사람이 이 자리를 떠나기를 바라노라.” 그래서 요한과 유다는 마리아를 모시고 골고다를 떠났다. 요한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묵던 곳으로 예수의 어머니를 모시고 갔고, 그리고 나서 십자가 처형의 장면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유월절이 지난 뒤에 마리아는 벳세다로 돌아갔는데, 거기서 그 여자는 아무 사고 없이 여생을 요한의 집에서 살았다. 마리아는 예수가 죽은 뒤에 1년을 채 살지 못했다.

187:4.8 (2010.1) 마리아가 떠난 뒤에, 다른 여인들은 조금 떨어져 물러났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이 끊어질 때까지 예수에게 시중들며 남아 있었으며, 장사 지내려고 주의 몸을 내려놓았을 때 아직도 옆에 있었다.

5. 십자가에 달린 마지막 시간

187:5.1 (2010.2) 그런 현상이 있기에는 아직 철이 일렀어도, 12시 조금 지나서, 공중에 미세한 모래 때문에 하늘이 어두워졌다.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아라비아 사막으로부터 뜨거운 바람을 실은 모래 폭풍이 온다는 것을 알았다. 1시가 채 못되어 하늘이 너무 어두워져서 해를 가렸고, 나머지 군중은 도시로 서둘러 돌아갔다. 그후 조금 있다가 주가 목숨이 다했을 때, 30명이 안 되는 사람들, 오직 로마 군인 13명과 신자들 약 15명이 자리에 있었다. 이 신자들은 두 사람, 예수의 아우 유다와 요한 세베대를 제외하고 모두 여자였고, 요한은 주가 숨이 끊어지기 바로 전에 그 장면으로 돌아왔다.

187:5.2 (2010.3) 1시 뒤에 얼마 있다가, 사나운 모래 폭풍으로 어둠이 점점 짙어지는 가운데 예수는 인간의 의식을 잃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마지막 말씀, 자비와 용서와 훈계의 말씀을 하셨다. 마지막 소망을―어머니를 돌보는 것에 관하여―이미 표현하였다. 죽음이 가까워 오는 이 시간에 예수의 인간 정신은 히브리 성서, 특히 시편(詩篇)의 여러 구절을 되풀이하는 것에 의지하였다. 인간 예수가 의식하는 마지막 생각은 이제 20편ㆍ21편ㆍ22편으로 알려진, 시편의 한 부분을 머리 속에서 되풀이하는 것과 관계되었다. 입술이 때때로 움직이곤 했어도, 너무나 잘 알던 구절들이 머리 속을 지나가는 동안에 그 구절대로 낱말을 소리내어 말하기에 너무나 약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겨우 몇 번 이와 같은 말소리를 들었다, “주가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하실 줄 내가 아나이다,” “주의 손이 내 적을 모두 발견하리이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는 한 순간이라도 아버지의 뜻대로 살았다는 것을 티끌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대로 육체를 입은 목숨을 이제 버린다는 것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그를 버렸다고 느끼지 않았다. 다만 사라지는 의식 속에서 여러 성서 구절을 외우고 있었는데, 그 구절 가운데 이 시편 22편이 있었고, 이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어쩌다가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충분히 뚜렷하게 말한 세 구절 중에 하나였다.

187:5.3 (2010.4) 필사자 예수가 동료들에게 한 마지막 요청은 1시 반쯤에 있었고, 그때 두 번째로 “목이 마르다”하고 말했는데, 경비대의 바로 그 지휘관이, 그 시절에 보통 식초라고 부른 신 포도주에 적신 똑같은 해면으로 입술을 다시 축여주었다.

187:5.4 (2010.5) 모래 폭풍은 심해졌고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아직도 군인들과 작은 무리의 신자들이 곁에 있었다. 군인들은 십자가 가까이서 웅크리고, 살을 에는 모래로부터 몸을 보호하려고 한데 모여 웅크렸다. 요한의 어머니와 다른 사람들은 떨어진 곳에서 구경했고, 거기서 툭 튀어나온 바위로 얼마큼 보호를 받았다. 주가 드디어 마지막 숨을 내몰았을 때, 그의 십자가 밑에는 요한 세베대와 아우 유다, 누이 룻,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한때 세포리스에서 살던 레베카가 자리에 있었다.

187:5.5 (2011.1) 3시 바로 전에 예수는 큰 소리로 외쳤다, “끝났도다!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고개를 숙였고, 몸부림을 그만두었다. 로마인 백부장이 어떻게 예수가 죽었는가 보았을 때, 그는 가슴을 치며 말했다: “이 사람은 정말로 올바른 사람이었도다. 참으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이 틀림없도다.” 그리고 그때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187:5.6 (2011.2) 예수는―임금답게 산 것처럼―임금답게 죽었다. 그가 임금인 것을 거침없이 인정했고, 그 비극의 날 내내, 그 상황에 주인으로 대처하였다. 그가 택한 사도들의 안전을 보살핀 뒤에, 치욕스러운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말썽을 일으키는 베드로의 폭력에 지혜롭게 고삐를 잡았고, 필사 존재의 바로 끝까지 요한이 그에게 가까이 있도록 주선했다. 살인하려는 산헤드린에게 그의 참 성품을 드러냈고, 그의 군주 권한의 근원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빌라도에게 상기시켰다. 그는 자신의 가로대를 지고 골고다로 떠났고, 파라다이스 아버지께 필사자로서 얻은 그의 영을 넘겨줌으로 사랑으로 자신 수여를 마쳤다. 그러한 일생 뒤에―그러한 죽음을 닥쳐서―“끝났도다”하고 주는 참으로 말할 수 있었다.

187:5.7 (2011.3) 이날이 유월절과 안식일 모두를 준비하는 날이었으니까, 유대인들은 이 시체들이 골고다에서 노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빌라도 앞에 가서, 십자가에서 끌어내리고, 그래서 해지기 전에 범죄자들의 무덤 구덩이에 던질 수 있도록 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그들을 처치하기를 요구했다. 이 요청을 들었을 때, 빌라도는 예수와 두 도둑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이들을 처치하라고 당장에 군인 셋을 보냈다.

187:5.8 (2011.4) 이 군인들이 골고다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두 도둑에게 시킨 대로 따라서 했지만, 놀랍게도 예수가 이미 죽었음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것을 확인하려고 군인들 가운데 하나가 그의 왼쪽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다.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이틀이나 사흘 동안 산 채로 버티는 것이 보통이었어도, 예수의 압도적인 괴로운 감정과 격심한 영적 고통은 5시간 반이 조금 안 되어서, 육신을 입은 필사 생애를 그치게 했다.

6. 십자가 처형 뒤

187:6.1 (2011.5) 모래 폭풍이 부는 어두움 한가운데서, 3시 반쯤에, 다윗 세베대는 주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는 마지막 사자들을 내보냈다. 마지막 주자들을 베다니에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으로 보냈고, 거기서 예수의 어머니가 나머지 가족과 함께 멈추었다고 생각했다.

187:6.2 (2011.6) 주가 돌아가신 뒤에, 요한은 유다에게 책임을 지워, 여인들을 엘리야 마가의 집으로 보냈고, 거기서 그들은 안식일 동안 머물렀다. 요한 자신은 이때가 되어 로마인 백부장에게 잘 알려졌기 때문에, 빌라도로부터 예수의 몸을 가져가도 된다고 허가하는 명령을 가지고 요셉과 니고데모가 그 장면에 나타날 때까지, 골고다에 남아 있었다.

187:6.3 (2011.7) 이렇게 광대한 한 우주의 비극(悲劇)과 슬픔의 날이 끝났다. 그 우주의 수많은 지적 존재들은 사랑하는 군주가, 인간으로 육신화한 모습이, 십자가에 못박힌 끔찍한 광경에 몸서리를 쳤다. 필사자의 무딘 감정과 인간의 타락이 이렇게 나타난 것에 깜짝 놀랐다.

제 188 편 무덤에 있던 시간

유란시아서

제 188 편

무덤에 있던 시간

188:0.1 (2012.1) 예수의 필사 육체가 요셉의 무덤에 놓여 있던 하루 반,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한 사이의 기간은 미가엘이 땅에서 지낸 생애에서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시기이다. 우리는 사람의 아들이 무덤에 묻힌 것을 이야기하고 이 기록에 부활과 연결된 사건들을 적을 수 있지만, 금요일 오후 3시부터 일요일 새벽 3시까지, 약 36시간에 달하는 이 기간에 무슨 일이 정말로 벌어졌는가, 신빙성 있는 정보를 많이 제공할 수 없다. 주의 생애에서 이 기간은 로마 군인들이 그를 십자가에서 끌어내기 조금 전에 시작되었다. 그는 죽은 뒤에 거의 1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려 있었다. 두 도둑을 처치하느라고 지연되지 않았다면, 그를 더 일찍 끌어내렸을 것이다.

188:0.2 (2012.2) 유대인 권력자들은 도시 남쪽, 게헤나의 노천 무덤 구덩이에 예수의 시체를 던지게 하려고 전에 계획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들을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이 계획을 따랐더라면, 주의 몸은 사나운 짐승들에게 노출되었을 것이다.

188:0.3 (2012.3) 그동안에, 아리마대 요셉은 니고데모를 데리고 빌라도에게 가서, 적절히 장사를 지내려고 예수의 시체를 그들에게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의 친구들이 그런 시체를 소유하는 특권을 얻으려고 로마 당국에게 뇌물을 바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요셉은 사립 무덤에 예수의 시체를 옮길 허락을 얻는 데 돈이 필요하게 될 경우에 쓰려고, 큰 돈을 마련하여 빌라도 앞으로 갔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 때문에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 요청을 듣자, 그는 요셉에게 골고다로 가서 주의 몸을 즉시 완전히 소유하도록 인가하는 명령서에 재빨리 서명했다. 그동안에, 모래 폭풍이 어지간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예수의 시체가 노천의 공동 무덤 구덩이까지 도둑들의 시체를 따랐는가 확인할 목적으로 산헤드린을 대표하는 유대인 무리가 골고다를 향해서 이미 떠났다.

1. 예수를 무덤에 안치하다

188:1.1 (2012.4) 골고다에 다다랐을 때, 요셉과 니고데모는 군인들이 십자가에서 예수를 끌어내리고 있고, 예수의 추종자들 중에서 아무도 그의 시체가 범죄자의 무덤 구덩이로 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처리하려고 산헤드린의 대표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요셉이 주의 시체를 가지려고 빌라도의 명령을 백부장에게 내밀었을 때, 유대인들은 그 시체를 소유하려고 소동을 피우고 아우성쳤다. 고함을 치면서 그들은 시체를 가져가려고 사납게 애썼고, 그들이 이렇게 하자, 백부장은 군인 넷을 자기 옆에 불렀다. 시체가 땅에 놓인 대로, 그들은 칼을 뽑아 들고, 주의 몸 좌우에 버티고 섰다. 성이 머리끝까지 치민, 이 성난 유대인 폭도들을 그들이 밀어내는 동안 백부장은 다른 군인들에게 두 도둑을 버려두라고 명령했다. 질서를 다시 찾고 나서, 백부장은 빌라도로부터 받은 허가증을 유대인들에게 읽고, 옆으로 걸어 나와서 요셉에게 말했다: “이 시체는 네 것이니 좋은 대로 하라. 아무도 간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와 내 군인들은 대기하겠노라.”

188:1.2 (2013.1)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유대인 공동 묘지에 묻힐 수 없었고, 그러한 절차를 금하는 엄격한 법이 있었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이 법을 알았고, 골고다를 향하여 나가는 길에, 단단한 바위에서 깎아 새긴, 요셉의 새 가족 무덤에 예수를 묻기로 전에 작정했고, 이것은 골고다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사마리아로 이어지는 길 건너에 있었다. 아무도 이 무덤에 묻힌 적이 없었고, 그들은 주가 여기에 매장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요셉은 정말로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리라고 믿었지만, 니고데모는 몹시 의심했다. 산헤드린의 이 옛 회원들은 예수 믿는 것을 얼마큼 비밀로 지켰다. 하지만 그들이 공회에서 사퇴하기 전에도, 동료 산헤드린 회원들은 오랫동안 그들을 의심해 왔다. 이제부터 계속, 그들은 온 예루살렘에서 가장 과감하게 말하는 예수의 제자들이었다.

188:1.3 (2013.2) 4시 반쯤에 나사렛 예수의 장례 행렬이 골고다에서 길 건너 요셉의 무덤을 향하여 떠났다. 네 사람이 나르는 동안 그 시체는 리넨 시트에 둘둘 싸여 있었고, 갈릴리에서 온 충실한 여인 구경꾼들이 뒤따랐다. 무덤까지 예수의 물질 몸을 지고 간 사람들은 요셉ㆍ니고데모ㆍ요한, 그리고 로마인 백부장이었다.

188:1.4 (2013.3) 그들은 시체를 무덤 속으로 날랐다. 이것은 가로ㆍ세로가 약 3미터 되는 방이었고, 거기서 장사 지내려고 서둘러 시체를 준비했다. 유대인은 죽은 사람을 정말로 묻지는 않았고, 실제로 방부(防腐) 처리를 하였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몰약(沒藥)과 앨로를 잔뜩 가져왔고, 이제 이 용액으로 적신 붕대로 시체를 감았다. 방부 처리가 끝났을 때, 얼굴 둘레를 냅킨으로 동였고, 시체를 리넨 시트로 둘둘 감고, 엄숙하게 시체를 무덤의 선반에 두었다.

188:1.5 (2013.4) 시체를 무덤에 둔 뒤에, 백부장은 군인들에게 돌 문을 무덤 입구 앞으로 굴리는 일을 도우라고 신호했다. 그리고 나서 군인들은 도둑들의 시체를 가지고 게헤나를 향하여 떠났고, 한편 다른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유월절 축제를 지내려고 슬피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188:1.6 (2013.5) 이날이 준비일이고 안식일이 막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장례는 어지간히 서두르고 성급하게 처리되었다. 남자들은 도시로 서둘러 돌아갔지만 여인들은 아주 어두울 때까지 무덤 가까이 남아 있었다.

188:1.7 (2013.6) 이 모든 것이 진행되는 동안, 여인들은 가까이 숨어 있었고, 그래서 이 모두를 보고 주가 어디에 누웠는가 지켜보았다. 이처럼 몰래 온 것은 여인들이 그런 때에 남자들과 상관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여인들은 예수가 매장을 위해서 적절히 준비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요셉의 집으로 돌아가서, 안식일 동안 쉬었다가, 향료와 연고(軟膏)를 준비하고, 시체를 안치하기 위하여 주의 몸을 적절히 준비하려고 일요일 아침에 돌아오기로 자기들끼리 합의를 보았다. 이 금요일에 무덤가에서 이렇게 머문 여인들은 막달라 마리아, 클로바의 아내 마리아, 예수의 또 다른 이모 마르다, 세포리스의 레베카였다.

188:1.8 (2013.7) 다윗 세베대와 아리마대의 요셉을 제외하고,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거의 아무도 그가 사흘째에 무덤에서 일어나도록 예정되었다는 것을 정말로 믿거나 알아듣지 못했다.

2. 무덤을 지키기

188:2.1 (2014.1)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가 사흘째에 무덤에서 일어나리라는 약속을 무심코 흘려들었다면, 적들은 그렇지 않았다. 주사제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리라는 그의 말에 관하여 보고받은 것을 기억했다.

188:2.2 (2014.2) 이 금요일 밤, 유월절 저녁 식사 뒤에, 자정쯤에 유대인 지도자들의 한 무리가 가야바의 집에 모였고, 사흘째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리라는 주의 주장에 관하여 걱정되는 것을 의논했다. 예수의 친구들이 무덤에 손대지 못하도록 그의 무덤 앞에 로마인 경비원 한 명을 배치하라는 산헤드린의 공식 요청(要請)을 지니고, 이튿날 일찍 빌라도를 방문할 산헤드린 위원회 하나를 지명하고서 이 모임이 끝났다. 이 위원회의 대변인은 빌라도에게 말했다: “주여, 이 사기꾼 나사렛 예수가 아직도 살아 있는 동안에 ‘내가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나리라’하고 말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나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사흘이 지난 뒤까지, 그 무덤을 그 추종자들로부터 안전히 지키게 할 명령을 내려달라 요청하고자 우리가 당신 앞에 왔나이다. 우리는 그의 제자들이 와서 밤에 그를 훔치고 나서,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사람들에게 선포하지 않을까 크게 걱정되나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우리가 버려둔다면, 이 잘못은 그를 살려둔 것보다 훨씬 더 나쁘리이다.”

188:2.3 (2014.3) 산헤드린 의원들이 이렇게 요청하는 것을 들었을 때, 빌라도는 말했다: “너희에게 군인 10명의 경비대를 주겠노라. 너희는 가서 무덤을 안전히 지키라.” 그들은 성전으로 돌아갔고, 자체 경비대에서 10명을 확보하고 나서, 이 유대인 경비원 10명과 로마 군인 10명과 함께, 이 안식일 새벽에도 이들을 무덤 앞에서 보초(步哨)로 세워놓으려고 요셉의 무덤으로 행진했다. 이 사람들은 무덤 앞에 또 다른 돌을 굴려놓고서,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방해받을까 걱정하여, 빌라도의 봉인(封印)을 이 돌들 위에, 그리고 그 둘레에 눌러놓았다. 이 스무 명은 부활의 시간까지 경계하며 남아 있었고,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날라다 주었다.

3. 안식일에

188:3.1 (2014.4) 이 안식일 내내, 제자와 사도들은 숨어 있었고, 한편 온 예루살렘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이때 로마 제국의 온 구석과 메소포타미아에서 거의 150만의 유대인이 예루살렘에 와 있었다. 이때는 유월절 주간의 시작이었고, 이 모든 순례자가 예수가 부활했다는 말을 듣고 그 보고를 집으로 가지고 갈 것이다.

188:3.2 (2014.5) 토요일 밤 늦게, 요한 마가는 열한 사도를 몰래 아버지의 집으로 오시라고 호출했는데, 그들은 거기서 자정 바로 전에, 모두 주와 함께 이틀 밤 전에 마지막 만찬을 들던 바로 그 위층 방에서 모였다.

188:3.3 (2014.6)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룻과 유다와 함께, 해가 지기 바로 전, 이 토요일 저녁에 가족과 합치려고 베다니로 돌아갔다. 다윗 세베대는 니고데모의 집에서 남아 있었고, 거기서 일요일 아침 일찍 그의 사자들이 모이도록 전에 주선해 두었다. 예수의 몸에 방부 처리를 계속하려고 향료를 준비했던 갈릴리 여인들은 아리마대 요셉의 집에서 머물렀다.

188:3.4 (2014.7) 나사렛 예수가 요셉의 새 무덤에서 쉬고 있다고 생각된 이 하루 반의 기간에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어떤 다른 필사자가 같은 상황에서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십자가에서 똑같이 자연사한 듯하다.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하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들었다. 그의 생각 조절자는 인격을 갖춘 지 오래 되었고, 예수의 필사의 몸과 따로 존재를 유지했으니까, 그러한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넉넉히 이해하지 못한다. 인격이 된 주의 조절자는 어떤 의미에서도 그가 십자가에서 육체로 죽은 것에 영향을 받을 수 없다. 예수가 한동안 아버지의 손에 맡긴 것은, 인간 체험의 기록부를 저택 세계들로 옮기기 위하여 필사 지성을 영으로 만드는 과제에서, 조절자의 초기 행적의 영 사본(寫本)이었음이 틀림없다. 예수의 체험 속에는 구체(球體)에서 믿음이 성장하는 필사자의 영 본질, 또는 혼과 비슷한 어떤 영적 실체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의견일 따름이다―우리는 예수가 아버지께 무엇을 맡겼는지 모른다.

188:3.5 (2015.1) 우리는 주의 육체 형태가 일요일 새벽 3시쯤까지, 요셉의 무덤 속에, 거기에 안치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이 36시간 동안 예수 인격의 지위에 관하여 전적으로 분명치 않다. 얼마큼 다음과 비슷하게, 때때로 이것들을 우리끼리 감히 설명하려 해보았다:

188:3.6 (2015.2) 1. 미가엘의 창조자 의식은 풀려난 채로 있고, 몸으로 육신화한 데 들어 있던, 관계된 그 필사 지성을 완전히 벗어났음이 틀림없다.

188:3.7 (2015.3) 2. 우리가 알건대, 예수의 옛 생각 조절자는 이 기간에 땅에 계셨고, 집합한 하늘 무리들을 몸소 지시했다.

188:3.8 (2015.4) 3. 처음에는 그의 생각 조절자가 직접 기울인 노력으로,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끊임없이 그가 선택하여 조정된 대로, 나중에는 육체적 필요와 이상적 필사 존재의 영적 요구를 자신이 완전히 조정함으로, 나사렛 사람이 육체를 입은 일생에 쌓아 얻은 영 신분이,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보호에 맡겨진 것이 틀림없다. 이 영 실체가 부활한 인격의 일부가 되려고 돌아왔는지 그렇지 않은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랬다고 믿는다. 그러나 바깥 우주의 조직되지 않은 영역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우주들과 관련하여, 밝혀지지 않은 운명을 가진 네바돈 최후 군단을 지휘하기 위하여 나중에 해방되려고, 예수의 이 혼 신분(身分)이 “아버지의 품” 속에서 지금 쉬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우주에 있다.

188:3.9 (2015.5) 4. 우리는 예수의 인간 의식, 곧 필사자로서 가졌던 의식은, 이 36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기간에 우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인간 예수가 하나도 몰랐다고 믿을 근거를 가졌다. 필사자가 의식하기에 아무 시간의 경과가 없는 듯하였다. 즉 생명(生命)의 부활은, 똑같은 순간에, 죽음의 잠을 따라 일어난 것이다.

188:3.10 (2015.6) 이것이 무덤에서 이 기간에 예수의 지위에 관하여 우리가 기록할 수 있는 거의 전부이다. 우리가 암시할 수 있는 서로 관계된 여러 가지 사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도저히 이것들을 해석할 능력이 없다.

188:3.11 (2015.7) 사타니아의 첫째 저택 세계의 여러 부활실에 있는 광대한 안뜰에는, “미가엘 기념관”이라고 알려진 구조, 지금은 가브리엘의 봉인을 지니고 있는, 물질 및 상물질로 이루어진 웅대한 구조를 지금 볼 수 있다. 이 기념관은 미가엘이 이 세상을 떠난 뒤 얼마 있다가 지어졌는데, 이 비문을 지닌다: “유란시아에서 나사렛 예수가 필사자로서 이동한 것을 기념하여.”

188:3.12 (2016.1) 1백 명으로 이루어진 구원자별 최고 회의가 이 기간에, 유란시아에서 가브리엘이 사회(司會)를 보는 가운데 행정 회의를 열었다는 것을 보이는 기록들이 존재한다. 또한 유버르사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이 시간에, 네바돈 우주의 상태에 관하여 미가엘과 교통했다는 것을 보이는 기록들도 있다.

188:3.13 (2016.2) 우리는 주의 몸이 무덤에 누워 있는 동안에, 미가엘과 구원자별에 계시는 이마누엘 사이에 적어도 한 통신문이 지나갔다는 것을 알고 있다.

188:3.14 (2016.3) 예수의 몸이 무덤에 쉬고 있는 동안에 열린 회의, 예루셈에서 있었던 행성 영주들의 체계 회의에서 어떤 성격자가 칼리가스티아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을 믿을 만한 좋은 이유가 있다.

188:3.15 (2016.4) 에덴시아의 기록들은 놀라시아덱의 별자리 아버지가 유란시아에 있었고, 무덤에 있던 이 시간에 미가엘로부터 지침을 받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188:3.16 (2016.5) 그리고 겉보기에 육체적으로 죽은 이 시간에, 예수의 인격 전부가 잠들어 무의식에 빠져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가리키는 많은 다른 증거가 있다.

4. 주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의미

188:4.1 (2016.6) 예수는 필사 인간으로서 민족의 죄를 대속하거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기분을 상하고 용서 없는 하나님에게 다가가는 일종의 효과적 접근법을 마련하려고 십자가에서 이렇게 죽지 않았다.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죄 많은 인간이 구원받는 길을 열기 위한 희생물로서 자신을 바치지 않았다. 대속(代贖)하고 신을 달랜다는 이 관념들이 그릇되기는 하지만, 그런데도 십자가에서 예수가 이렇게 돌아가신 데 부여된 중요성, 지나쳐서는 안될 의미가 있다. 유란시아가 사람이 사는 다른 이웃 행성들 사이에서 “십자가의 세계”라고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188:4.2 (2016.7) 예수는 유란시아에서 육체를 입고 필사자의 일생을 한껏 살기를 바랐다. 죽음은 보통, 삶의 일부이다. 죽음은 필사자의 연극에서 마지막 막(幕)이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의미를 거짓되게 풀이하는 미신 같은 잘못을 피하려고 좋은 뜻으로 노력을 기울이면서, 너희는 주의 죽음의 참된 의미와 진정한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188:4.3 (2016.8) 필사 인간은 결코 대사기꾼들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예수는 여러 구체의 배반한 통치자와 타락한 영주들의 손아귀에서 몸값을 치르고 사람을 되찾으려고 죽지 않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조상의 악행 때문에 한 필사자의 혼을 벌하는 것처럼 상스러운 불의(不義)를 결코 생각해내지 않았다. 주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인간 종족이 하나님에게 지게 된 빚을 하나님께 갚으려는 노력으로 바친 희생물도 아니었다.

188:4.4 (2016.9) 예수가 땅에서 살기 전에는 너희가 그러한 하나님을 믿어도 아마도 정당화되었을지 모르지만, 주가 너희 동료 필사자들 사이에서 살다가 돌아가신 뒤에는 그렇지 않다. 모세는 창조자 하나님의 위엄과 응보를 가르쳤지만, 예수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었다.

188:4.5 (2016.10) 동물적 성질―악행을 하려는 성향―은 물려받을지 모르지만, 죄는 부모로부터 아이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죄는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법을 거슬러서, 의지를 가진 개별 생물이 의식하여, 깊이 생각한 끝에 반항하는 것이다.

188:4.6 (2017.1) 예수는 꼭 이 한 세계의 종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우주 전체를 위하여 살다가 돌아가셨다. 여러 영역의 필사자들은 예수가 유란시아에서 살다가 죽기 전에도 구원이 있었지만, 그런데도 이 세상에 그가 자신을 수여한 것은 구원의 길을 밝게 보여준 것이 사실이다. 그의 죽음은, 육체를 입고 죽은 뒤에 필사자가 확실히 살아남는다는 것을 언제까지나 분명히 밝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188:4.7 (2017.2) 예수를 희생하는 자, 몸값 치르는 자, 또는 죄값 치르는 자라 하는 것은 도저히 적당하지 않아도, 구원자라 언급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그는 언제까지나 구원받는 (살아남는) 길을 더욱 뚜렷하고 확실하게 만들었다. 네바돈 우주의 모든 세상에서 모든 필사자를 위하여 구원의 길을 더욱 낫게, 더욱 확실히 보여주었다.

188:4.8 (2017.3) 하나님이 참되고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관념, 예수가 일찍이 가르친 유일한 개념을 너희가 일단 깨달으면, 일관성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이 기분을 상한 군주요, 첫째 가는 즐거움이 잘못하는 백성들을 찾아내고, 자신과 거의 비슷한 어떤 존재가 그들을 위하여 고통받고, 대리자로서 그들 대신에 죽으려고 자청하지 않으면 그들이 알맞게 벌받도록 처리하는, 엄하고 전능한 통치자라는 온갖 원시적 하나님 개념을 너희는 당장에 깨끗이 버려야 한다. 몸값을 내고 죄를 대신 갚는다는 관념 전부가, 나사렛 예수가 가르치고 본보기를 보인 그 하나님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은 신다운 성품 가운데 어느 것보다 못하지 않다.

188:4.9 (2017.4) 죄를 대신 갚고 희생물을 바쳐야 구원을 받는다는 이 모든 개념은 이기심에 뿌리를 박고 근거를 두었다. 예수는 사람이 동료들에게 봉사를 베푸는 것이 영적 신자들의 가장 높은 형제 개념이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 신자(信者)의 으뜸가는 관심은 개인이 구원받고자 하는 이기적 소망이 아니라, 예수가 필사 인간을 사랑하고 섬긴 것 같이, 사람의 동료들을 사랑하고, 따라서, 섬기려는 사심 없는 욕구이어야 한다.

188:4.10 (2017.5) 진정한 신자는 죄로 인하여 앞날에 벌 받는 것을 그다지 걱정하지도 않는다. 진정한 신자는 오늘 하나님으로부터 지금 떨어져 있는 것에만 아랑곳한다. 지혜로운 아버지가 아들들을 꾸짖을 수 있다는 것은 참말이지만, 사랑으로, 고치는 목적으로 이 모든 것을 행한다. 아버지들은 성이 나서 벌을 내리지 않으며, 징벌하느라고 꾸짖지도 않는다.

188:4.11 (2017.6) 응보가 최고로 지배하는 우주에서 하나님이 엄격하고 정당한 군주라 하더라도, 죄 지은 자 대신에 결백한 희생자를 바꿔치는 어리석은 계획에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188:4.12 (2017.7) 예수의 죽음에 관하여 대단한 것은, 인간의 체험을 부유하게 하고 구원의 길을 넓히는 데 관계되다시피,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죽음을 마주한 더할 나위 없는 태도와 견줄 데 없는 그 정신이다.

188:4.13 (2017.8) 죄를 대신 갚는다는 이 몸값 관념 전체가 구원을 비현실 수준에 놓으며, 그러한 개념은 순전히 철학적이다. 인간의 구원은 실재하며, 사람의 믿음으로 구원을 붙잡을 수 있고, 이렇게 함으로 개별 인간의 체험 속으로 통합할 수 있는 두 가지 현실에 근거를 둔다. 즉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 그리고 그와 관계되어, 사람이 형제라는 진실이다. 결국은 “너희에게 빚진 자를 너희가 용서하는 것 같이, 너희의 빚도 용서를 받으리라”는 것이 참말이다.

5. 십자가로부터 얻는 교훈

188:5.1 (2017.9) 예수의 십자가는 참 목자가 그의 양떼 중에서 자격 없는 양에게도 최상으로 헌신하는 것을 한껏 보여준다. 그 십자가는 언제까지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를 가족의 기초 위에 둔다. 하나님은 아버지요 사람은 아들이다. 사랑, 즉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그 사랑은, 창조자와 인간 사이의 우주 관계에서 핵심 진리가 된다―악을 행하는 백성이 고통과 벌을 받는 데서 만족을 얻으려 하는 임금의 응보는 그렇지 않다.

188:5.2 (2018.1) 죄인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정죄(定罪)도 묵인도 아니지만, 오히려 영원한 구원, 사랑의 구원이라는 것을 십자가는 언제까지나 보여준다. 예수의 일생과 죽음이 사람들을 선하고 올바르게 살아남도록 설득한다는 의미에서, 그는 참으로 구원자이다. 예수는 사람들을 너무 사랑해서 그의 사랑은 인간의 가슴 속에서 사랑의 반응을 일깨운다. 사랑은 참으로 전염성이 있고 영원히 창조성이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죄를 용서하고 모든 악행을 삼킬 만큼, 충분히 힘차고 신다운 사랑을 본보기로 보여준다. 예수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정의보다―단지 엄밀한 의미에서 옳고 그른 것보다―더 상급의 올바름을 드러냈다. 신의 사랑은 다만 잘못을 용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잘못을 흡수하고 실제로 없애버린다. 사랑에서 나오는 용서는 자비로 베푸는 용서를 완전히 초월한다. 자비는 나쁜 일을 행한 죄를 한쪽으로 제쳐놓지만, 사랑은 죄와 그로부터 생기는 모든 약점을 언제까지나 없애버린다. 예수는 새로운 처세 방법을 유란시아에 가져왔다. 악에 저항하지 말고 악을 효과적으로 없애버리는 선을 그를 통해서 찾으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예수의 용서는 묵인이 아니라 정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이다. 구원은 잘못을 무시하지 않으며, 잘못된 것을 옳게 고친다. 참된 사랑은 미움과 타협하거나 미움을 묵인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을 없애버린다. 예수의 사랑은 결코 단지 용서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주의 사랑은 회복, 영원히 살아남는 것을 뜻한다. 너희가 이 영원한 회복을 의미한다면, 구원을 값을 치르고 되찾는 것으로 언급해도 전적으로 적절하다.

188:5.3 (2018.2) 사람들을 몸소 사랑하는 힘으로, 예수는 죄와 악의 위력을 깨뜨릴 수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 더 나은 처세 방법을 택하라고 사람들을 해방하였다. 예수는 과거로부터 구원받음을 묘사했고, 그러한 구원은 그 자체로 앞날의 승리를 약속했다. 이처럼 용서는 구원을 마련해주었다. 신의 사랑의 아름다움은, 일단 인간의 가슴 속에 완전히 받아들이면, 언제까지나 죄의 매력과 악의 힘을 없애버린다.

188:5.4 (2018.3) 예수의 고통은 십자가 처형에 국한되지 않는다. 실제로, 나사렛 예수는 정말로 벅차게 필사자로 존재하는 십자가에서 25년을 넘게 보냈다. 십자가의 참된 가치는 십자가가 그의 사랑의 최고이자 마지막 표현이요, 그의 자비의 완벽한 계시라는 사실에 있다.

188:5.5 (2018.4) 사람이 사는 수백만의 세계에서, 도덕적 투쟁을 그만두고 훌륭한 믿음의 싸움을 그만두라고 유혹받았을지 모르는 수십조에 이르는 진화하는 인간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다시 한 번 보고 나서, 다음에 하나님이 사심(私心) 없이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 바친 그의 육신화된 목숨을 버리는 광경에 영감을 받고서 착실히 전진하였다.

188:5.6 (2018.5) 십자가에서 죽음이 가져온 승리는 예수를 공격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에 나타난 정신에 모두 요약된다.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소서, 저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나이다”하고 기도했을 때, 그는 십자가를 사랑이 미움을 이기고 진리가 잘못과 싸워 승리하는 영원한 상징으로 만들었다. 사랑으로 헌신하는 그 태도는 광대한 한 우주에 두루 전염되었다. 제자들은 주로부터 그 헌신을 전염받았다. 이러한 봉사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라고 요청받은 최초의 선생, 주의 복음을 가르친 선생은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 때 말했다, “이 죄를 저희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소서.”

188:5.7 (2018.6) 십자가가 사람의 최선의 성품에 최대로 호소하는 것은 동료 인간에게 봉사하는 데 목숨을 기꺼이 버린 사람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기쁘게 버리려 하는 것, 사람은 이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질 수 없다―예수는 적을 위하여 목숨을 기쁘게 버릴 그런 사랑을 가졌고, 이것은 땅에서 그때까지 알려진 어떤 것보다 더 큰 사랑이었다.

188:5.8 (2019.1) 유란시아와 마찬가지로 다른 여러 세상에서,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인간 예수가 죽는 이 숭고한 광경은 필사자들의 감정을 휘저었고, 한편 최상으로 헌신하도록 천사들을 일깨웠다.

188:5.9 (2019.2) 십자가는 신성한 봉사, 사람이 동료의 복지와 구원에 목숨 바치는 것을 나타내는 높은 상징이다. 십자가는 죄지은 사람 대신에, 기분을 상한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 결백한 하나님의 아들을 희생함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그리고 광대한 우주를 통해서 두루, 선한 자가 자신을 악한 자에게 바치고, 그렇게 함으로 바로 이 사랑으로 헌신하는 태도로 그들을 구원하는 신성한 상징으로서 언제까지나 서 있다. 십자가는 가장 높은 형태의 사심 없는 봉사를 나타내는 표시로서, 죽어도, 십자가에서 죽어도, 마음을 다하여 봉사하면서 올바른 생명을 완전히 바치는 최고의 헌신(獻身)의 표시로서 서 있다. 예수가 수여한 생명의 상징, 이 큰 상징이 된 바로 그 광경은, 우리 모두에게 가서 마찬가지로 봉사하고 싶어하도록 참으로 영감을 준다.

188:5.10 (2019.3)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는 예수를 바라볼 때, 생각 있는 남녀는 하찮은 골칫거리와 순전히 거짓으로 꾸며낸 많은 불만은커녕, 인생의 가장 혹독한 어려움에 닥쳐도 도저히 다시는 불평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의 삶은 너무 영화롭고 죽음은 아주 승리에 넘쳐서, 우리 모두가 이 두 가지를 기꺼이 함께 하도록 마음이 이끌린다. 소년 시절부터, 십자가에서 죽는 이 감동적인 광경에 이르기까지, 미가엘의 자신 수여 전체에는 마음을 끄는 참된 힘이 있다.

188:5.11 (2019.4) 그러면 너희가 십자가를 하나님의 계시(啓示)로 바라볼 때, 원시인의 눈이나 후일의 야만인의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도록 하여라. 이들은 모두 하나님이 엄격하게 응징하고 엄밀하게 법을 집행하는 무자비한 군주라고 여겼다. 오히려 너희는 그의 광대한 우주의 필사 종족들에게 바치는 일생의 사명에 예수가 쏟은 사랑과 헌신의 최종 표현을 십자가에서 꼭 보도록 하여라. 사람의 아들의 죽음 속에서, 필사자 구체에 사는 아들들에게 쏟는 아버지의 신다운 사랑이 펼쳐지는 그 절정을 보아라. 이처럼 십자가는 그러한 선물과 헌신을 기쁘게 받는 사람에게 기꺼이 애정을 바치고 자진해서 구원을 주는 것을 묘사한다. 십자가에는 아버지가 요구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오로지 예수가 아주 기쁘게 준 것, 피하려 하지 않은 것만 있었다.

188:5.12 (2019.5) 사람이 달리 예수를 고맙게 여기고 땅에서 그가 자신을 수여한 뜻을 이해할 수 없다면, 적어도 예수가 필사자의 고통을 함께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이 현세에서 얼마나, 어떤 고통을 받는가 창조자가 모른다고 결코 아무도 걱정할 수 없다.

188:5.13 (2019.6) 우리가 알건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사람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과 아들의 끝없는 자비를 사람이 깨닫도록 자극하고, 이 보편적 진리를 한 우주 전체에 퍼뜨리기 위한 것이다.

제 189 편 부활

유란시아서

제 189 편

부활

189:0.1 (2020.1) 금요일 오후에 예수가 묻힌 뒤에 곧, 그때 유란시아에 있던 네바돈 천사장의 우두머리는, 의지(意志)를 가진 잠자는 인간들의 부활을 담당한 회의를 소집했고, 예수를 부활시키는 가능한 기법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집결한 이 지역 우주 아들들, 곧 미가엘이 창조한 존재들은 자신들의 책임 하에 이렇게 했고, 가브리엘이 그들을 소집하지 않았다. 한밤이 되어서 지음받은 존재들은 창조자의 부활을 쉽게 만들기 위해서 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들은 가브리엘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싶어 했는데, 가브리엘은 미가엘이 “자신의 자유 의지로 생명을 버렸으니까, 또한 자신의 결심에 따라서 생명을 다시 집어 올릴 힘이 있다”고 그들에게 가르쳤다. 천사장과 생명 운반자들, 그리고 인간을 회복하고 상물질(上物質)을 창조하는 일에 종사하는 동료들로 구성된 회의가 끝난 뒤에 얼마 있다가, 그때 유란시아에서 모인 하늘 집단들을 몸소 지휘하는, 예수의 인격화된 조절자가 초조하게 기다리는 구경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189:0.2 (2020.2) “너희 가운데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인 창조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거들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그 영역의 한 필사자로서, 그는 필사자의 죽음을 겪었으나, 한 우주의 군주로서 아직도 살아 있느니라. 너희가 지켜보는 것은 나사렛 예수가 육체를 입은 생명으로부터 상물질 생명까지 필사자로서 이동하는 것이라. 이 예수의 영(靈) 이동은 바로 내가 그의 인격으로부터 분리되고 너희의 임시 지도자가 되었을 때 끝났으며, 너희의 아버지인 창조자는, 물질 세계에서 출생하고 나서 자연사(自然死)하고 상물질 세계에서 부활을 겪고 참된 영 존재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필사 인간의 체험을 전부 거치기를 택하였느니라. 이 체험의 어떤 단계를 너희가 바야흐로 지켜보려 하지만 너희는 거기에 참여해서는 안 되느니라. 지음받은 존재를 위하여 보통 하는 것을 너희는 창조자를 위하여 해서는 안 되느니라. 창조 아들은 자신 안에 그가 창조한 아들들 가운데 누구의 모습을 입고도 자신을 수여할 힘을 가졌고, 관찰할 수 있는 그의 생명을 버리고 그 생명을 다시 집어올릴 힘이 몸 안에 있느니라. 그리고 그는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직접 명령으로 이 힘을 가졌으며, 나는 무엇에 관하여 말하는지 사정을 아노라.”

189:0.3 (2020.3) 인격이 된 조절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가브리엘로부터 가장 낮은 케루빔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초조하게 기대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들은 무덤에서 예수의 필사 육체를 보았고, 사랑하는 군주의 우주 활동이 있다는 증거를 탐지했다. 그러한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일이 되어 가는 것을 보려고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1. 상물질 모습으로

189:1.1 (2020.4) 일요일 새벽 2시 45분에, 신분이 알려지지 않은 파라다이스 성격자 일곱 명으로 이루어진 파라다이스 육신화 위원회가 그 장면에 나타났고, 즉시 무덤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3시 10분 전에, 물질 및 상물질(上物質)이 한데 섞인 활동의 강렬한 진동이 요셉의 새 무덤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서기 30년 4월 9일, 이 일요일 새벽 3시 2분에 상물질 모습으로 부활한 나사렛 예수의 인격이 무덤에서 나왔다.

189:1.2 (2021.1) 부활한 예수가 무덤에서 솟아나온 뒤에, 거의 36년 동안 땅에서 살고 일하던, 살로 이루어진 그 몸은 무덤 벽감(壁龕)에, 다치지 않고 리넨 시트에 감긴 채로, 요셉과 그 동료들이 금요일 오후에 안치한 바로 그대로, 거기에 아직도 누워 있었다. 무덤 입구 앞에 있던 돌도 조금도 건드리지 않았고, 빌라도의 봉인도 아직 깨뜨리지 않은 채였고, 군인들이 아직도 지키고 있었다. 성전 경비원들이 계속 근무하고 있었고, 로마인 경비대는 자정(子正)에 이미 교대했다. 이 파수들 가운데 아무도 밤새워 지키던 물건이 새로운 더 높은 형태의 존재로 살아난 것, 그들이 지키고 있던 몸은 지금, 벗어나서 부활한 예수의 상물질 인격과 이제 더 아무 관계가 없는, 버려진 껍데기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189:1.3 (2021.2) 모든 개인적 면에서 물질은 상물질의 뼈대이며, 이 두 가지는 지속하는 영 실체가 비친 그림자라는 것을 인류는 더디게 깨닫는다. 얼마나 있어야 너희가 시간은 영원이 움직이는 모습이요, 공간은 파라다이스 실체들의 휙 지나가는 그림자라고 여기겠는가?

189:1.4 (2021.3)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한, 이 우주의 어느 생물이나 다른 우주에서 온 어떤 성격자도 나사렛 예수가 이렇게 상물질로 부활한 것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금요일에 그는 이 땅의 한 필사자로서 생명을 버렸고, 일요일 아침에 놀라시아덱의 사타니아 체계의 한 상물질 존재로서 생명을 다시 계속하였다. 예수의 부활에 관하여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한 그대로, 그리고 언제라고 지적한 그 무렵에 부활이 일어난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이 필사자의 이동, 즉 상물질 부활과 관계된 모든 알려진 현상은 요셉의 새 무덤에서, 바로 거기서 일어났고, 거기에 예수의 필사 물질의 유물(遺物)은 시체 싸는 천에 감겨서 누워 있었다고 또한 기록할 수 있다.

189:1.5 (2021.4) 우리가 알건대, 지역 우주의 어떤 창조된 존재도 이렇게 상물질로 깨어나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우리는 파라다이스의 일곱 성격자가 무덤을 둘러싼 것을 깨달았지만, 주가 깨어나는 것과 관련하여 그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구경하지 못했다. 예수가 가브리엘 옆에, 무덤 바로 위에 나타나자마자, 파라다이스에서 온 일곱 성격자는 유버르사로 즉시 떠나겠다는 뜻을 알렸다.

189:1.6 (2021.5) 다음의 진술로 예수의 부활에 관한 개념을 언제까지나 분명히 해두자:

189:1.7 (2021.6) 1. 그의 물질 몸, 즉 육체는 부활한 인격의 일부가 아니었다. 예수가 무덤에서 나왔을 때, 살로 이루어진 그의 몸은 다치지 않은 채로 무덤에 남아 있었다. 그는 입구 앞에 있는 돌들을 움직이지 않고, 빌라도의 봉인들을 다치지 않고, 무덤에서 솟아나왔다.

189:1.8 (2021.7) 2. 그는 영이나 네바돈의 미가엘로서 무덤에서 솟아나오지 않았다. 그는 유란시아에서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육신화하기 전에 가졌던 것과 같은, 창조자 군주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189:1.9 (2021.8) 3. 부활한 하늘가는 상물질 존재로서, 이 사타니아 지역 체계, 첫째 저택 세계 부활실에서 솟아나오는 자들의 상물질 인격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서 그는 이 요셉의 무덤에서 나왔다. 저택 나라 1번의 부활실들이 있는 광대한 안뜰의 중심에 미가엘 기념관이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방법으로 체계의 이 첫째 저택 세계에서 유란시아에서 주가 부활하는 것을 돌보았다고 짐작하게 한다.

189:1.10 (2022.1) 무덤에서 일어나서 예수가 처음으로 한 일은 가브리엘을 맞이하고, 그에게 이마누엘 밑에서 우주 사무를 집행하는 책임을 계속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멜기세덱의 우두머리에게, 형제의 인사를 이마누엘에게 전하라고 지시했다. 다음에 그는 에덴시아의 최고자에게 그가 필사자로서 이동한 것에 관하여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인가를 요청했다. 그리고 자기 계급의 생물이 된 창조자에게 인사하고 그를 환영하려고 여기 함께 모인 무리, 일곱 저택 세계에서 집합한 상물질 무리를 향하여, 예수는 죽은 후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상물질 예수는 말했다: “육체를 입고 내 일생을 마쳤으므로, 하늘가는 내 사람들의 생활을 더 잘 알고 파라다이스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더욱 드러내도록, 과도기 형태를 입고서 잠시 내가 여기에 머무르고자 하노라.”

189:1.11 (2022.2) 말씀을 마친 뒤에, 예수는 인격이 된 조절자에게 신호했고, 부활을 구경하려고 유란시아에 모였던 모든 우주 지성 존재는 각자의 우주 직책으로 즉시 파송되었다.

189:1.12 (2022.3) 예수는 이제 상물질 수준에서 접촉을 시작했고, 하나의 생물로서, 유란시아에서 잠시 동안 그가 살려고 선택한 삶의 요구 조건을 배우는 첫걸음에 들어갔다. 상물질 세계의 이 입문 절차는 지구 시간으로 한 시간이 더 걸렸는데, 육체를 입은 옛 동료들이 예루살렘에서 나와서, 그가 부활한 증거라고 여기는 것을 발견하려고 빈 무덤을 놀라서 엿보는 동안에 예수가 그들과 교통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두 번 중단되었다.

189:1.13 (2022.4) 이제 예수가 필사자로서 이동하는 것―사람의 아들이 상물질로 부활하는 것―을 마쳤다.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의 중간에 있는 인격자로서 주의 일시적 체험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는 몸 안에 본래부터 있는 힘을 통해서 이 모두를 해냈고, 어떤 성격자도 그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는 이제 상물질 예수로서 살고, 이 상물질 생활을 시작하는 동안에, 살로 이루어진 그의 물질 몸은 무덤에서 다치지 않은 채로 거기 누워 있다. 군인들은 아직도 지키고 있고, 바위들 근처에 있는 총독의 봉인은 아직 다치지 않은 채로 있다.

2. 예수의 물질 몸

189:2.1 (2022.5) 3시 10분에, 부활한 예수가 사타니아의 일곱 저택 세계로부터 모인 상물질 성격자들과 친교하는 동안에, 천사장―부활 천사―의 우두머리는 가브리엘에게 다가가서 예수의 물질 몸을 요구했다. 천사장의 우두머리는 말했다: “군주 미가엘의 수여 체험에 생긴 상물질 부활에 우리가 참여해서는 안 되지만, 즉시 분해하도록 그의 필사 시체를 우리가 책임지게 해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우리의 비물질화 기법을 쓰려고 제안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시간을 가속하는 과정을 이용하고자 하나이다. 군주가 유란시아에서 살다가 돌아가신 것을 우리는 충분히 보았나이다. 하늘의 무리들은 한 우주의 창조자요 지지자의 인간 모습이 천천히 썩는 광경을 기억하고 싶지 않나이다. 온 네바돈의 하늘 지성 존재들의 이름으로, 나사렛 예수의 필사 육체의 관리를 내게 맡기고, 우리가 즉시 분해를 진행하도록 인가하는 명을 내리시기를 요청하나이다.”

189:2.2 (2023.1) 가브리엘이 에덴시아의 선임 최고자와 의논하고 나서, 하늘 무리들의 천사장 대변인은 그가 결정하는 대로 예수의 물질 시체를 그렇게 처분하라고 허락을 받았다.

189:2.3 (2023.2) 이 요청을 허락받은 뒤에, 천사장의 우두머리는 모든 계급의 하늘 성격자 대표들의 수많은 무리를 비롯하여 많은 동료의 도움을 요청했고, 그리고 나서 유란시아 중도자들의 도움을 얻어, 예수의 육체를 소유하려고 나섰다. 이 죽은 몸은 순전히 물질로 지은 것이었고, 육체요 글자 그대로 죽은 몸이었다. 그 몸은 부활한 상물질 형태가 봉인한 무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 무덤에서 옮겨질 수 없었다. 어떤 상물질 보조 성격자들의 도움을 얻어서, 상물질 형태는 한때 영으로 이루어지게 만들어질 수 있고, 그래서 보통 물질과 상관 없이 될 수 있으며, 한편 다른 때에는 그 영역의 필사자와 같은 물질 존재들이 알아보고 접촉하게 될 수 있다.

189:2.4 (2023.3) 거의 한 순간에 분해하여 위엄 있게 공손히 시체를 처분하는 준비로서, 그들이 무덤에서 예수의 몸을 옮기려고 준비하는 동안에, 무덤 입구(入口)에서 돌들을 굴려서 옮기는 일은 유란시아의 2차 중도자들에게 맡겨졌다. 이 두 돌 가운데 큰 것은 맷돌과 아주 비슷한 커다란 둥근 물건이었고, 바위에서 깎아 낸 홈 안에서 움직였으며, 그래서 무덤을 열거나 닫으려고 그 돌을 좌우로 굴릴 수 있었다. 구경하던 유대인 경비원과 로마 군인들이, 새벽의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이 커다란 돌이 무덤 입구로부터, 겉보기에는 저절로―그러한 움직임을 설명할 수단이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굴러가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그 장면에서 황급히 달아났다. 유대인들은 집으로 달아났고, 나중에 이 일을 성전(聖殿)에 있는 지휘관에게 돌아가서 보고했다. 로마인들은 안토니아 요새까지 달아났고, 백부장이 임무를 맡고 도착하자마자, 그들이 본 것을 그에게 보고했다.

189:2.5 (2023.4) 유대인 지도자들은 배반자 유다에게 뇌물을 제공함으로, 예수를 제거한다고 생각된 더러운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이 곤란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초소를 버리고 달아난 경비원들에게 벌을 줄 생각은 하지 않고, 이 경비원과 로마인 군인들에게 뇌물 주는 수단을 썼다. 그들은 이 스무 명, 각자에게 얼마큼의 돈을 주었고,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지시했다: “우리가 밤에 자는 동안, 그의 제자들이 우리에게 들이닥쳐 시체를 가져갔더라.” 그리고 유대인 지도자들은 군인들에게, 그들이 뇌물을 받았다는 것을 총독이 언제라도 알게 될 경우에 빌라도 앞에서 그들을 변호하겠다고 엄숙히 약속했다.

189:2.6 (2023.5)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을 믿는 기독교의 믿음은 “빈 무덤”의 사실에 근거를 두었다. 무덤이 비었다는 것은 정말로 사실이었지만, 이것은 부활의 진실이 아니다. 첫 신자들이 도착했을 때 무덤은 참으로 비어 있었고, 이 사실은 주가 의심할 여지 없이 부활한 사실과 아울러, 참되지 않은 믿음, 곧 예수의 물질적 필사 육체가 무덤에서 살아났다는 가르침을 형성하도록 이끌었다. 사실로 보이는 것들을 조합한다고 해서 영적 실체 및 영원한 가치와 상관되는 진리를 반드시 만들 수 있지는 않다. 개별 사실이 물질적으로 참말이라도, 한 집단의 사실을 연결한다고 틀림없이 참된 영적 결론으로 이끈다고 할 수 없다.

189:2.7 (2023.6) 예수의 무덤은 비어 있었지만, 예수의 몸이 회복되거나 부활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체를 특별히 독특한 방법으로 분해하려는 하늘 무리들의 요청이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시간 지연이 중간에 개재(介在)하지 않고서, 그리고 필사자가 썩고 물질이 부패하는, 평범하고 눈에 보이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티끌이 티끌로” 돌아가는 것이다.

189:2.8 (2024.1) 예수의 필사 시체는, 시간적으로 자연스러운 이 분해 방법이 크게 가속되고, 거의 한 순간에 일어나는 점까지 급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제외하고, 땅에서 모든 인간의 육체에 그 특징이 나타나다시피, 성분이 분해되는 바로 그 자연스러운 과정을 겪었다.

189:2.9 (2024.2) 미가엘이 부활했음을 가리키는 참된 증거는 영적 성질을 가졌다. 하지만 부활한 상물질의 주를 만나고 알아보고 그와 이야기를 나눈, 이 영역의 많은 필사자의 증언이 이 가르침을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유란시아를 떠나기 전에 주는 거의 1천 명의 인간이 몸소 겪은 체험의 일부가 되었다.

3. 섭리 시대의 부활

189:3.1 (2024.3) 이 일요일 새벽 4시 반이 조금 지난 뒤에, 가브리엘은 천사장들을 옆으로 호출하고 유란시아에서 아담의 섭리 시대를 끝내는 일반 부활을 개시하려고 준비했다. 이 큰 사건과 관계된 광대한 무리의 세라핌과 케루빔이 적절한 진형(陣形)을 이루어 정렬되었을 때, 상물질 미가엘이 가브리엘 앞에 나타나서 말했다: “내 아버지가 몸 속에 생명을 가진 것 같이, 그는 아들에게 몸 속에 지니라고 생명을 주셨느니라. 비록 내가 우주 관할권 행사를 완전히 다시 시작하지는 않았어도, 스스로 짊어진 이 한계는 어떤 방법으로도 잠자는 내 아들들에게 생명을 수여하는 것을 제한하지 않느니라. 행성 부활의 점호를 시작하여라.”

189:3.2 (2024.4) 천사장의 회로는 유란시아에서 그때 처음으로 가동했다. 가브리엘과 천사장 무리들은 행성의 영적 극점이 있는 자리로 옮겨 갔고, 가브리엘이 신호를 내렸을 때, 첫째 체계의 저택 세계로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번쩍 날아갔다: “미가엘의 명령에 따라서, 유란시아 섭리 시대에 죽은 자는 일어날지어다!” 그러자 아담 시절 이후로 잠들고 이미 심판받으러 가지 않은 유란시아 인류의 모든 생존자가, 상물질을 입을 준비가 되어, 저택 나라의 여러 부활실에 나타났다. 그리고 한 순간에 세라핌과 그 동료들은 저택 세계들을 향하여 떠나려고 준비했다. 살아남는 이 필사자들을 집단으로 관리하는 데 한때 배치되었던 이 수호 세라핌들이 보통은 저택 나라의 부활실에서 그들이 깨어나는 순간에 자리에 있었을 터이지만, 예수의 상물질 부활과 관련하여 가브리엘이 여기에 있어야 할 필요 때문에 이때, 바로 이 세상에 있었다.

189:3.3 (2024.5) 개인 수호 천사를 가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 그리고 영적 인격의 진보에 요구된 수준을 마친 사람들이 아담과 이브 시절 이후에 저택 나라로 가버렸는데도, 또 비록 유란시아 아들들의 특별 부활과 천년(千年) 부활이 여러 번 있었어도, 이것은 행성 점호의 셋째 부활, 곧 완벽한 섭리 시대의 부활이었다. 첫째는 행성 영주가 도착했을 때, 둘째는 아담 시절에 일어났다. 그리고 이 셋째는 나사렛 예수의 상물질 부활, 곧 필사자로서 이동한 것을 신호했다.

189:3.4 (2024.6) 천사장의 우두머리가 행성의 부활을 개시하는 신호를 받고 나서, 사람의 아들의 인격화된 조절자는 유란시아에 집합한 하늘 무리들을 지휘하는 권한을 양도했고, 지역 우주의 이 아들들 모두를 각자의 사령관 관할로 넘겼다. 이렇게 하고 나서, 그는 미가엘이 필사자로서 이동하는 일이 끝났음을 이마누엘에게 등록하려고 구원자별을 향하여 떠났다. 유란시아에서 근무하라고 요구되지 않은 모든 하늘 무리가 즉시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상물질 예수와 함께 유란시아에 남았다.

189:3.5 (2025.1) 이것이 예수가 부활한 사건을, 정말로 일어난 그대로, 부분적이고 제한된 인간의 시력(視力) 한계를 벗어나서 구경한 자들이 본 그대로 이야기한 것이다.

4. 빈 무덤의 발견

189:4.1 (2025.2) 이 일요일 이른 새벽에 예수가 부활하던 때를 접근하면서, 우리는 열 사도가 엘리야와 마리아 마가의 집에서 묵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거기서 주와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드는 동안에 기댔던 바로 그 소파에서 쉬면서, 그들은 위층 방에서 잠자고 있었다. 이 일요일 아침에 토마스를 제외하고, 그들 모두가 거기에 모여 있었다. 처음에 모였던 토요일 밤 늦게, 토마스는 그들과 함께 몇 분 동안 있었지만, 예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사도들의 모습이 그에게 너무나 보기 딱했다. 그는 동료들을 둘러보고 즉시 방을 떠났고, 벳바게에 있는 시몬의 집으로 갔는데, 거기서 외로이 어려움을 삭이려고 생각했다. 사도들은 모두, 의심과 절망이 아니라, 두려움과 슬픔과 창피를 겪었다.

189:4.2 (2025.3) 니고데모의 집에서, 다윗 세베대와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특출한 자가 12에서 15명 정도 모였다. 아리마대 요셉의 집에는 중요한 여인 신도(信徒)가 15에서 20명 정도 있었다. 오로지 이 여인들이 요셉의 집에서 지냈는데, 안식일 동안과 안식일이 끝난 날 저녁에 집안에 숨어 있었고, 그래서 무덤에서 지키고 있는 군인 경비대에 관하여 몰랐다. 둘째 돌이 무덤 앞에서 굴려 치워졌고, 이 두 개의 돌에 빌라도의 봉인(封印)이 찍혀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189:4.3 (2025.4) 이 일요일 새벽 3시 조금 전에, 날이 밝는 첫 표시가 동쪽에서 비로소 나타나자, 다섯 여인은 예수의 무덤을 향해서 떠났다. 특별한 방부(防腐) 처리 로션을 충분히 준비했고, 리넨 붕대를 많이 가지고 갔다. 예수의 몸에 더 꼼꼼하게 장례를 위하여 기름을 바르고, 더 깔끔히 몸을 새 붕대로 감으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189:4.4 (2025.5) 예수의 몸에 기름 바르는 이 임무를 띠고 간 여인들은 막달라 마리아, 알패오 쌍둥이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 형제의 어머니 살로메, 추자의 아내 요안나,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에즈라의 딸 수잔나였다.

189:4.5 (2025.6) 다섯 여인이 연고를 지고서, 빈 무덤 앞에 다다른 것은 3시 반쯤이었다. 다마스커스 대문 바깥으로 나가면서, 얼마큼 공포에 질려서 도시(都市) 안으로 달아나는 한 무리의 군인들과 마주쳤고, 이 때문에 그들은 몇분 동안 멈추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더 일어나지 않자, 그들은 다시 갈 길을 재촉하였다.

189:4.6 (2025.7) 나가는 길에 자기들끼리 “돌을 굴려 치우는 것을 누가 도와줄까?”하고 말했기 때문에, 그들은 무덤의 입구에 그 돌이 굴려 치워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짐을 내려놓고, 두렵고 크게 놀라서 비로소 서로를 보았다. 그들이 두려움에 떨며 거기에 서 있는 동안, 막달라 마리아가 대담하게 둘 중에 작은 돌을 돌아서, 열려 있는 무덤으로 감히 들어갔다. 이 요셉의 무덤은 길의 동쪽 편, 언덕 위 동산에 있었고, 또한 동쪽을 향하였다. 이때가 되자, 마리아가 주의 몸이 놓여 있던 자리까지 무덤 속을 들여다보고, 시체가 사라진 것을 겨우 알아볼 만큼 날이 밝았다. 마리아는 사람들이 예수를 안치했던, 돌의 우묵한 곳에, 예수의 머리가 놓여 있던 곳에 접힌 수건과 그를 감았던 붕대가 다치지 않은 채로, 하늘 무리들이 시체를 옮기기 전에 돌에 놓여 있던 그대로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덮는 시트는 무덤의 벽감 밑부분에 놓여 있었다.

189:4.7 (2026.1) 몇 순간 무덤의 출입구에서 머무른 뒤에 (무덤으로 처음에 들어갔을 때는 뚜렷이 보이지 않았다), 마리아는 예수의 몸이 사라진 것과 그 자리에 시체를 싸는 이 천만 보고서, 놀라고 괴로워하는 비명을 질렀다. 여인들 모두가 몹시 불안해 하였다. 도시의 대문에서 공포에 질린 군인들을 만난 뒤로 그들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마리아가 이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자, 공포에 질려서 황급히 달아났다. 그리고 다마스커스 대문까지 내리 달려갔을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이때가 되어서, 요안나는 그들이 마리아를 버린 것에 양심이 찔렸다. 그 여자는 동무들을 다시 집결했고 그들은 무덤을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189:4.8 (2026.2) 무덤에서 나오면서 기다리는 자매들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놀란 막달라는 더군다나 무서웠는데, 그들이 무덤에 가까이 가자, 이제 그들에게 달려가서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는 거기 없느니라―저희가 그를 데려갔느니라!” 그 여자는 그들을 무덤으로 도로 이끌고 갔고, 모두 들어가서 무덤이 빈 것을 보았다.

189:4.9 (2026.3) 그리고 나서 다섯 여인 모두가 입구 가까이 있는 돌 위에 앉아서 그 상황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생각이 아직 그들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은 안식일 동안 자기들끼리 있었고, 시체가 다른 안치될 장소에 옮겨졌다고 짐작했다. 그러나 그 곤경(困境)에 대한 그러한 해명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을 때, 시체를 쌌던 천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없어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시체를 감았던 바로 그 붕대가 무덤 선반에, 제 자리에, 겉보기에는 다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니, 어떻게 시체가 옮겨질 수 있었는가?

189:4.10 (2026.4) 이 새 날의 동이 트는 이른 시간에 이 여인들이 거기 앉아 있다가 한쪽을 보고서 말없이 꼼짝하지 않는 낯선 사람을 지켜보았다. 한 순간 그들은 다시 놀랐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그에게 달려가서, 그가 마치 동산 관리자인가 생각한 듯이 그를 향해 물었다: “당신이 주를 어디로 옮겨 갔나이까? 저희가 그를 어디에 두었나이까? 우리가 가서 그를 보도록 우리에게 이르소서.” 낯선 사람이 마리아에게 대꾸하지 않자, 마리아는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가 말했다: “우리는 요셉의 무덤에 안치된 예수를 찾사오나, 그가 사라졌나이다. 당신은 저희가 그를 어디로 옮겨 갔는지 아시나이까?”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이 예수가 갈릴리에 있을 때에도, 그가 죽을 터이나 다시 살아나리라 너희에게 이르지 않더냐?” 이 말씀은 여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지만, 주는 모습이 너무 바뀌어서, 그들은 아직도 어둑어둑한 빛을 등지고 있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이 그의 말씀을 골똘히 생각하는 동안, 그는 막달라 사람을 향해 귀에 익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아야.” 익숙한 인자함으로, 정답게 인사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그 여자는 주의 목소리인 줄 알았고, 달려가서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외쳤다: “내 주여, 내 선생이여!” 영화로운 모습을 입고 그들 앞에 선 이가 주인 것을 다른 여인들이 모두 알아보았고, 재빨리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189:4.11 (2027.1) 이 인간들의 눈은 그때 예수를 동반한 어떤 상물질 성격자들과 제휴한 변압자와 중도자들의 특별 수고 덕분에 상물질 모습의 예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189:4.12 (2027.2) 마리아가 그의 발을 품에 안으려고 하자, 예수는 말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마리아야, 나는 네가 알던, 육체를 입은 나와 같지 않으니라. 아버지께로 올라가기 전에, 이 모습을 입고, 한동안 내가 너희와 함께 머무르리라. 그러나 너희는 모두 이제 가서, 내 사도들―그리고 베드로―에게, 내가 살아났다고, 너희가 나와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이르라.”

189:4.13 (2027.3) 놀라운 충격을 받고 나서 정신을 차린 뒤, 이 여인들은 서둘러 도시로, 엘리야 마가의 집으로 돌아갔고, 거기서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모두 열 사도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 말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은 처음에 여인들이 환상을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예수가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막달라 마리아가 되풀이했을 때, 그리고 베드로가 자기 이름을 들었을 때, 그는 무덤으로 황급히 가서 이 일을 제 눈으로 확인하려고 위층 방에서 달려나갔고, 그 뒤에 요한이 바짝 쫓아갔다.

189:4.14 (2027.4) 여인들은 예수와 함께 말씀을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도들에게 되풀이했지만, 그들은 믿고 싶어하지 않았고, 베드로와 요한처럼 스스로 가서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5. 무덤에 간 베드로와 요한

189:5.1 (2027.5) 두 사도가 골고다와 요셉의 무덤을 향하여 뛰어가는 동안, 베드로의 생각은 두려움과 희망 사이에 오락가락했다. 그는 주를 만나기가 두려웠지만, 예수가 그에게 특별한 말씀을 보냈다는 이야기에 희망이 솟아났다. 예수가 정말로 살아 있다고 반은 설득이 되었고, 사흘째에 살아난다는 약속을 회상했다. 이야기하기는 이상하지만, 십자가 처형이 있은 뒤로, 북쪽으로 예루살렘을 통해서 허둥지둥 가는 이 순간까지, 이 약속은 그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도시 바깥으로 서둘러 나가는 동안, 기쁨과 희망이 섞인 이상한 환희가 요한의 혼 속에서 샘처럼 솟아났다. 그는 여인들이 살아나신 주를 정말로 보았다고 절반은 확신이 들었다.

189:5.2 (2027.6) 요한은 베드로보다 젊었으니까 그보다 빨리 달려서 먼저 무덤에 다다랐다. 요한이 문에서 머물러 무덤을 들여다보았고, 무덤은 마리아가 묘사한 바로 그대로였다. 금방 시몬 베드로가 달려왔고, 들어가서, 바로 그 빈 무덤과 함께 아주 특이하게 정돈된 시체 싸는 천을 보았다. 베드로가 나오자, 요한도 들어가서 스스로 모두 보았고, 그리고 나서 돌 위에 앉아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거기 앉아 있으면서 그들은 예수에 관하여 들은 것을 낱낱이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살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분명히 파악할 수 없었다.

189:5.3 (2027.7) 베드로는 누가 무덤을 뒤졌구나, 적들이 시체를 훔쳐갔구나, 아마도 경비원들에게 뇌물을 주었나 보다 하고 처음에 상상했다. 그러나 요한은 시체가 도둑 맞았다면, 무덤은 도저히 그렇게 정돈된 채로 남아 있을 수 없을 것이라 추측했고, 또한 붕대가 어떻게 남아 있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렇게 겉보기에 다치지 않은 채로 있는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시체 쌌던 천을 더 자세히 훑어보려고 무덤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두 번째로 무덤에서 나왔을 때,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돌아와서 입구에서 눈물 흘리는 것을 보았다. 마리아는 예수가 무덤에서 살아났다고 믿으면서 사도들에게 갔지만, 모두 그 여자의 보고를 믿으려 하지 않자, 풀이 죽고 절망에 빠졌다. 그 여자는 무덤 가까이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고, 거기서 귀에 익은 예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189:5.4 (2027.8) 베드로와 요한이 가버리고 나서 마리아가 서성거리는 동안에, 주는 다시 그 여자 앞에 나타나서 말했다: “의심하지 말라. 네가 보고 들은 것을 믿을 용기를 가지라. 내 사도들에게 돌아가서, 내가 살아났다, 내가 저희에게 나타나리라, 그리고 약속한 대로, 저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다시 이르라.”

189:5.5 (2028.1) 마리아는 마가의 집으로 서둘러 돌아갔고, 다시 예수와 함께 이야기했다고 사도들에게 말했지만, 그들은 마리아를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놀려 대기를 그쳤고,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 찼다.

제 190 편 예수가 상물질 모습으로 나타나다

유란시아서

제 190 편

예수가 상물질 모습으로 나타나다

190:0.1 (2029.1) 부활한 예수는 그 영역에서 필사자의 올라가는 상물질 생애를 체험할 목적으로, 이제 유란시아에서 짧은 기간을 보내려고 준비한다. 상물질로 사는 이 시간을 필사자로 육신화한 세상에서 보내도록 정해지기는 했어도, 이 기간은 예루셈의 일곱 저택 세계에서 진보하는 상물질 생명을 거치는 사타니아 필사자들의 체험과 모든 면에서 대등한 것이다.

190:0.2 (2029.2) 예수 안에 본래부터 있고, 그로 하여금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게 만든 이 모든 힘―생명 자질―은 그가 하늘나라 신자에게 수여하는 영생이라는 바로 그 선물이요, 이것은 지금도 자연사의 사슬을 벗어나 신자들이 부활하는 것을 확실하게 만든다.

190:0.3 (2029.3) 이 영역의 필사자들은, 예수가 이 일요일 아침에 무덤에서 살아났을 때 가졌던 것과 똑같은 종류의 과도기 몸, 곧 상물질(上物質) 몸으로, 부활의 아침에 살아날 것이다. 이 몸은 속에 도는 피가 없고, 그러한 존재는 평범한 물질 식품을 먹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상물질 형태는 실재한다. 예수가 부활한 뒤에 여러 신자가 그를 보았을 때, 그들은 정말로 그를 보았고, 환상이나 환각에 스스로 속은 자가 아니었다.

190:0.4 (2029.4) 예수의 부활에 관한 지속된 믿음은 초대 복음을 가르치던 모든 분파의 신앙에서 으뜸가는 특징이었다. 예루살렘ㆍ알렉산드리아ㆍ안티옥ㆍ필라델피아에서 복음 선생들은 모두 주가 부활한 것을 절대로 믿는 신앙으로 뭉쳤다.

190:0.5 (2029.5) 주의 부활을 선포하는 데 막달라 마리아가 맡은 특출한 역할을 볼 때, 베드로가 사도들의 대변자였던 것처럼, 마리아는 여인단(女人團)의 우두머리 대변자였다는 것을 적어야 한다. 마리아는 여인 일꾼들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그들의 우두머리 선생이요 알려진 대변자였다. 마리아는 대단히 신중한 여인이 되었고, 그래서 요셉의 동산 관리인이라고 생각했던 남자에게 말을 거는 대담성은 다만 그 여자가 무덤이 빈 것을 발견하고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는가를 가리킬 뿐이다. 유대 여인이 낯선 남자에게 가까이 가지 않는 전통적 자제(自制)를 한 순간 잊게 한 것은 그 여자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고통스러웠는가, 그 여자가 얼마나 온전히 헌신했는가를 가리킨다.

1. 부활의 전령

190:1.1 (2029.6) 사도들은 예수가 그들을 두고 떠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살아난다는 약속과 함께, 죽는다는 그의 말씀을 모두 흘려들었다. 그들은 부활이 다가온 그대로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고, 문제삼을 수 없는 증거를 어쩔 수 없이 발견하고 바로 그들이 겪은 절대적 증명이 눈앞에 펼쳐질 때까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190:1.2 (2030.1) 다섯 여인이 예수를 보았고 그와 함께 이야기했다고 말한 보고를 사도들이 믿으려 하지 않았을 때,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으로 돌아갔고 다른 여인들은 요셉의 집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요셉의 딸과 다른 여자들에게 자신들의 체험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여자들은 그들이 보고한 것을 믿었다. 6시가 조금 지난 뒤에 아리마대 요셉의 딸, 그리고 예수를 본 네 여인이 니고데모의 집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이 모든 사건을 요셉, 니고데모, 다윗 세베대, 그리고 그곳에 모인 다른 사람들에게 늘어놓았다. 니고데모와 다른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의심했고,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것을 의심했으며, 유대인들이 시체를 옮겼다고 추측했다. 요셉과 다윗은 그 보고를 믿고 싶어했다. 너무 간절해서 그 무덤을 조사해 보려고 서둘러 나갔고, 모든 것이 여인들이 설명한 바로 그대로였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들은 무덤을 그렇게 마지막으로 구경한 사람들이었는데, 왜냐하면 대사제가 시체 쌌던 천을 없애버리라고 7시 반에 성전 경비대의 지휘관을 무덤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그 지휘관은 리넨 시트 속에 모든 것을 말아서, 근처의 벼랑 너머로 던져 버렸다.

190:1.3 (2030.2) 무덤에서 다윗과 요셉은 즉시 엘리야 마가의 집으로 갔고, 위층 방에서 그들은 열 사도와 함께 회의를 열었다. 오직 요한 세베대만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것을, 어렴풋이라도 믿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베드로는 처음에 믿었지만, 주를 찾지 못하자, 깊은 의심에 빠졌다. 그들은 다 유대인들이 시체를 옮겼다고 믿고 싶어했다. 다윗은 이들과 다투려 하지 않았지만, 떠날 때 말했다: “너희는 사도요, 이 일을 이해해야 하느니라. 나는 너희와 다투지 않겠노라. 그렇다 해도, 나는 이제 니고데모의 집으로 돌아가는데, 거기서 오늘 아침에 모이자고 사자들과 약속하였노라. 그리고 저희가 모였을 때, 나는 저희의 마지막 임무로, 주가 부활하신 것을 알리는 전령으로서 저희를 보내겠노라. 주가 돌아가신 뒤에 사흘째에 살아날 것이라고 주가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었고, 나는 그를 믿노라.” 그리고 풀이 죽고 비참한 하늘나라 대사들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자청해서 통신과 정보를 담당한 이 우두머리는 사도들을 두고 떠났다. 위층 방에서 나가는 길에, 그는 사도의 자금이 모두 들어 있는 유다의 돈 자루를 마태 레위의 무릎에 내려놓았다.

190:1.4 (2030.3) 다윗의 사자 26명 중에서 마지막 사람이 니고데모의 집에 다다른 것은 9시 반쯤이었다. 다윗은 재빨리 널찍한 안뜰에 그들을 모으고 연설했다:

190:1.5 (2030.4) “여러분, 그리고 형제들이여, 나에게, 또 서로에게 서약한 대로 지금까지 내내 너희는 나를 섬겨 왔고, 내가 아직까지 너희 손에 거짓 정보를 한 번도 보낸 적이 없음을 증언하라 내가 요청하노라. 하늘나라의 자원하는 사자로서 마지막 사명으로 너희를 보내고자 하노라. 그리고 그리하면서 나는 너희를 선서로부터 해방하고, 이렇게 사자단(使者團)을 해체하노라. 여러분, 내가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우리는 할 일을 마쳤느니라. 주는 이제 더 필사 사자가 필요 없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도다. 저희가 그를 체포하기 전에, 그가 죽었다가 사흘째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우리에게 일렀느니라. 내가 그 무덤을 보았는데―무덤이 비어 있더라. 나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네 여인과 함께 이야기했고, 저희는 예수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라. 이제 나는 너희를 해체하고, 너희에게 작별을 알리며, 각자의 임무로 너희를 보내노라. 그리고 믿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가지고 갈 소식은 이것이라: ‘예수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그 무덤은 비었도다.’”

190:1.6 (2030.5)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대다수는 다윗에게 이렇게 하지 말라 설득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나서 사자들을 말리려고 애썼지만, 그들은 의심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일요일 아침 10시 조금 전에, 이 주자(走者) 26명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힘찬 진실과 사실을 전하는 첫 통보자로서 떠나갔다. 허다한 다른 경우에 했던 것처럼, 그들은 다윗 세베대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한 선서를 지키기 위하여 이 임무를 띠고 떠나갔다. 이 사람들은 다윗을 크게 신임했다. 머물러서 예수를 본 사람들과 이야기하지도 않고서, 이 배치를 받고 떠났다. 대다수는 다윗이 일러준 것을 믿었고, 얼마큼 의심한 자들도, 똑같이 확실하고 똑같이 빠르게 그 소식을 가지고 갔다.

190:1.7 (2031.1) 사도들, 하늘나라의 영적 단체는 이날 위층 방에서 모여 있고, 거기서 두려움을 보이고 의심을 표현했는데, 한편 사람들이 형제임을 가르치는 주의 복음을 사회에 퍼뜨리는 첫 시도를 대표하는 이 보통 사람들은, 두려움 없는 유능한 지도자의 명령을 받고서 한 세상과 한 우주의 부활하신 구세주를 선포하려고 떠나간다. 그가 선택한 대표들은 그의 말씀을 기꺼이 믿거나 증인들의 증거를 받아들이기 전에, 이 중대한 봉사에 종사한다.

190:1.8 (2031.2) 이 26명은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으로, 남쪽에 비엘세바로부터 북쪽에는 다마스커스와 시돈까지, 동쪽에 필라델피아로부터 서쪽에 알렉산드리아까지, 신자들의 모든 중심으로 파송되었다.

190:1.9 (2031.3) 동료들을 두고 떠났을 때, 다윗은 어머니를 보려고 요셉의 집으로 갔고, 다음에 그들은 기다리는 예수의 가족과 합류하려고 베다니로 갔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속세의 재산을 처분하기까지 다윗은 그들과 함께 베다니에서 거했고, 필라델피아에 있는 오라비 나사로와 함께하려고 가는 여행 길에 그들을 동반했다.

190:1.10 (2031.4) 이때부터 한 주쯤 안에 요한 세베대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벳세다에 있는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갔다. 예수의 바로 밑 아우 야고보는 가족과 함께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다. 룻은 베다니에서 나사로의 자매들과 함께 남았다. 예수의 나머지 가족은 갈릴리로 돌아갔다. 다윗 세베대는 6월초에 예수의 막내 누이 룻과 결혼한 다음 날에, 마르다와 마리아와 함께, 베다니를 등지고 필라델피아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2. 베다니에 예수가 나타나다

190:2.1 (2031.5) 상물질로 부활한 때부터 예수의 영이 하늘로 올라가는 시각까지, 그는 땅에서 신자들에게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19번 따로 나타났다. 적이나, 또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 그가 나타나는 것을 영적으로 이용할 수 없는 자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무덤에서 다섯 여인에게 처음으로 나타났고, 두 번째도 무덤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났다.

190:2.2 (2031.6) 세 번째 나타난 것은 베다니에서 이 일요일 정오쯤이었다. 한낮이 조금 지나서, 예수의 바로 밑 아우 야고보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부활한 오라비의 빈 무덤 앞에 서서, 나사로의 동산에서, 머리 속에서 다윗의 사자가 한 시간쯤 전에 그들에게 가져온 소식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었다. 야고보는 언제나 맏형이 땅에서 이룰 사명을 믿고 싶어했지만, 예수의 일과 상관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고, 예수가 메시아라고 사도들이 나중에 주장한 것을 깊이 의심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온 가족이 그 사자가 가져온 소식에 깜짝 놀라 혼란에 빠지다시피 했다. 마침 야고보가 나사로의 빈 무덤 앞에 서 있는 동안에, 막달라 마리아가 그 장면에 나타났고 요셉의 무덤에서 이른 새벽 시간에 겪은 체험을 그 가족에게 흥분해서 늘어놓았다. 그 여자가 말을 마치기 전에, 다윗 세베대와 그의 어머니가 도착했다. 말할 것도 없이 룻은 그 보고를 믿었고, 다윗과 살로메와 이야기를 나눈 뒤에 유다도 믿었다.

190:2.3 (2032.1) 그동안에, 그들이 야고보를 찾고 있었는데 미처 찾아내기 전에, 그가 거기에 동산에서 무덤 근처에 서 있는 동안, 야고보는 마치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만진 것 같이, 근처에 누가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고, 보려고 몸을 돌이켰을 때, 자기 옆에서 이상한 모습이 차츰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너무나 놀라서 입을 열 수 없었고, 너무 무서워 달아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서 그 이상한 모습은 말했다: “야고보야, 나는 하늘나라의 봉사에 너를 부르려고 왔노라. 네 형제들과 진지하게 손잡고 내 뒤를 따르라.” 야고보는 자기 이름을 들었을 때, 그에게 말을 건 사람이 맏형 예수임을 알았다. 사람들은 모두 주의 상물질 모습을 알아보는 데 얼마큼 어려움을 겪었지만, 일단 그들과 대화를 시작했을 때 거의 아무도 그 목소리를 알아보거나, 아니면 매력 있는 그의 인품을 확인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190:2.4 (2032.2) 예수가 말을 건네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야고보는 “내 아버지여, 형이여” 하고 외치면서 예수의 발 앞에 비로소 쓰러졌다. 그러나 그와 이야기하면서 예수는 그에게 일어서라고 명했다. 그들은 거의 3분 동안 동산을 지나서 걸으며 이야기했다. 옛 시절의 체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가까운 앞날의 사건들을 예측했다. 그들이 집으로 가까이 가자, 예수는 말했다: “내가 너희 모두에게 함께 인사할 때까지, 야고보야, 잘 있거라.”

190:2.5 (2032.3) 바로 그들이 벳바게에서 그를 찾는 동안에, 야고보는 외치면서 집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나는 이제 막 예수를 보았고 그와 이야기하고 말을 나누었노라.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났더라! ‘내가 너희 모두에게 함께 인사할 때까지, 잘 있거라’ 하며 내 앞에서 사라졌느니라.” 말을 마치자마자 유다가 돌아왔고, 그는 유다를 위하여 동산에서 예수를 만난 체험을 다시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비로소 예수가 부활한 것을 믿었다. 야고보는 이제 갈릴리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다윗은 외쳤다: “흥분한 여인들만 본 것이 아니라. 용감한 남자들도 그를 비로소 보았구나. 나도 직접 그를 만나기를 기대하노라.”

190:2.6 (2032.4) 다윗은 오래 기다리지 않았는데, 바로 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 2시 조금 전에 예수가 네 번째로 필사자가 인식하도록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땅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 모두 합쳐서 스무 명 앞에 눈에 보이게 나타났다. 주는 열린 뒷문에 나타나서 말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육체를 입었던 나와 한때 가까웠던 사람들에게 안녕, 그리고 하늘나라의 내 형제와 자매들에게 친교가 있기를. 너희가 어찌 의심할 수 있느냐? 마음을 다하여 진리의 빛을 따르겠다고 선택하기 전에, 어찌하여 너희는 그렇게 오래 머뭇거렸느냐? 그런즉 너희는 모두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와서 진리의 영과 친교하여라.” 그들이 놀라서 처음에 충격을 받았다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마치 그를 품에 안으려는 듯이 그를 향하여 움직이자, 그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190:2.7 (2032.5) 그들은 모두 도시로 달려가서 의심하는 사도(使徒)들에게,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 일러주고 싶었지만, 야고보가 그들을 막았다. 오직 막달라 마리아만 요셉의 집으로 돌아가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들이 동산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예수가 그에게 말한 어떤 것들 때문에, 야고보는 이 상물질 모습으로 방문한 사실을 널리 퍼뜨리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서 부활하신 주와 함께 이날 이야기 나눈 것을 야고보는 결코 더 이상 밝히지 않았다.

3. 요셉의 집에서

190:3.1 (2033.1) 사람의 눈이 알아보도록 예수가 다섯 번째로 상물질로 나타난 것은 아리마대 요셉의 집에서 모인 25명쯤 되는 여신도들이 있는 가운데 바로 이 일요일 오후, 4시 15분쯤이었다. 주가 이렇게 나타나기 바로 몇 분 전에 막달라 마리아는 요셉의 집으로 돌아갔다. 예수의 아우 야고보는 베다니에서 주가 나타나신 것에 관하여 사도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전에 부탁했다. 그는 마리아에게 그 사건을 여신도들에게 삼가 보고하지 말라고 요청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여인들이 다 비밀을 지키라고 서약하게 한 뒤에, 마리아는 나서서 베다니에서 예수의 가족과 함께 있는 동안에 아주 최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야기했다. 마리아가 가슴 떨리는 이 이야기를 한창 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고 엄숙한 침묵이 그들을 덮었다. 바로 그들 한가운데 완전히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살아나신 예수를 그들은 바라보았다. 그는 그들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하늘나라의 친교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異邦人)도, 부자나 가난한 자도, 자유로운 자나 매인 자도, 남자나 여자도 없을지니라. 너희는 또한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복음을 통해서 인류가 해방된다는 좋은 소식을 널리 전파하라고 부름받았느니라. 온 세상으로 가서, 이 복음을 선포하고 신자들이 복음 믿는 것을 확인하여라. 너희가 이렇게 하는 동안, 병자에게 봉사를 베풀고, 마음이 약하고 두려움에 질린 자를 북돋아주기를 잊지 말라. 그리고 나는 언제나, 땅 끝까지라도 너희와 함께 하리라.”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고, 한편 여인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말없이 경배했다.

190:3.2 (2033.2) 이때까지 예수가 상물질 모습으로 다섯 번 나타난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는 네 번 증인으로 보았다.

190:3.3 (2033.3) 늦은 아침에 사자들을 내보낸 결과로서, 그리고 요셉의 집에서 예수가 이렇게 출현한 것에 관한 암시(暗示)가 무의식 중에 흘러나가서, 예수가 살아났다, 많은 사람이 그를 보았다고 주장한다는 보고가 도시 근처에서 떠돈다는 말이 초저녁에 유대인 권력자들의 귀에 비로소 들어갔다. 산헤드린 의원들은 이 소문에 속속들이 흥분했다. 안나스와 급히 의논한 뒤에, 가야바는 그날 저녁 8시에 열도록 산헤드린 회의를 소집했다. 이 모임에서 예수의 부활을 입 밖에 내는 사람은 누구나 회당에서 내쫓는다는 조치를 취했다. 그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나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제안까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공포에 가까운 혼란 속에서 그 회의가 해산되었기 때문에, 이 제안이 투표에 붙여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전에 예수의 문제가 끝났다고 감히 생각했다. 그들은 나사렛 사람과 정말 골칫거리가 막 시작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4. 그리스인들에게 나타나다

190:4.1 (2033.4) 4시 반쯤에, 플라비우스라는 사람의 집에서, 주는 거기에 모인 그리스인 신자 약 40명에게 여섯 번째로 상물질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들이 주가 부활하셨다는 보고를 토론하느라고 몰두해 있는 동안, 문들이 단단히 잠겨 있었는데도, 그는 그들 한가운데에 모습을 나타내고, 말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유대인들 사이에 나타났으나, 그는 모든 사람을 보살피려고 왔느니라. 내 아버지의 나라에는 유대인도 이방인도 없을지니라, 너희는 모두 형제―하나님의 아들―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가 하늘나라의 대사들로부터 받은 것 같이, 너희는 온 세상으로 가서 이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라. 그리하면 아버지의 아들들, 믿음과 진리의 아들들이 형제로서 사랑하는 가운데 내가 너희와 사귀리라.” 그리고 이렇게 책임을 지워주고 나서 그는 떠났고, 그들은 그를 더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저녁 내내 집안에 남아 있었고, 너무나 경외감과 두려움에 휩싸여,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지 못했다. 이 그리스인들 중에 아무도 그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은 이 일을 의논하고, 주가 그들을 다시 찾아올까 희망하며 깨어 있었다. 이 무리 가운데, 군인들이 예수를 체포하고 유다가 입맞추어 그를 배반했을 때 겟세마네에 있었던 그리스인이 여러 명 있었다.

190:4.2 (2034.1) 예수가 부활(復活)했다는 소문과 추종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난 것에 관한 보고가 빨리 퍼지고 있고, 도시 전체가 흥분이 고조되어 들떠 있었다. 이미 주는 그의 가족에게, 여인들에게, 그리고 그리스인들에게 나타난 적이 있었고, 얼마 안 있어 사도들 한가운데 나타난다. 산헤드린은 유대인 권력자들에게 아주 갑자기 밀어닥친 이 새로운 문제들을 곧 고려하기 시작할 것이다. 예수는 사도들에 관하여 많이 생각하지만, 그들을 찾아보기 전에, 엄숙하게 돌이켜보고 깊이 생각하는 몇 시간 동안 더 그들을 버려두기를 바란다.

5. 두 형제와 함께 걷다

190:5.1 (2034.2) 예루살렘에서 11킬로미터쯤 서쪽에 엠마오에는 두 목자 형제가 살았는데, 이들은 제사ㆍ예식ㆍ축제에 참석하느라고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주간을 보냈다. 형 클레오파스는 예수를 얼마큼 믿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는 회당에서 쫓겨났다. 그 아우 야곱은 믿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주의 가르침과 행하신 일에 관하여 들은 것에 많이 흥미를 느꼈다.

190:5.2 (2034.3) 이 일요일 오후에, 예루살렘에서 5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5시 몇분 전에, 이 두 형제가 엠마오로 가는 길을 따라서 터벅터벅 걷는 동안에, 그들은 예수와 그의 가르침과 행적에 관하여, 특히 그의 무덤이 비었고, 어떤 여인들이 그와 이야기했다는 소문에 관하여, 아주 열심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클레오파스는 이러한 보고를 믿을 생각이 반쯤 있었지만, 야곱은 그 사건 전부가 아마도 사기(詐欺)라고 주장하였다. 집을 향하여 길을 가면서 이렇게 다투고 토론하는데, 그들이 계속 길을 가는 동안, 예수의 상물질 모습이 그들을 따라가면서 나타났고, 이것은 일곱째 출현이었다. 클레오파스는 예수가 가르치는 것을 전에 자주 들었고, 예루살렘 신자들의 집에서 몇 번 그와 함께 음식을 먹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주가 그들과 함께 거리낌없이 이야기했을 때도, 그는 주를 알아보지 못했다.

190:5.3 (2034.4) 얼마큼 그들과 함께 걸은 뒤에 예수는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다가올 때 너희는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진지하게 나누었느냐?” 예수가 말씀을 마치자, 그들은 가만히 서서, 슬픈 빛을 띠고 놀라워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클레오파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요즘에 일어난 일들을 모르다니, 그럴 수가 있느뇨?” 그리고 나서 주는 물었다. “무슨 일이냐?” 클레오파스가 대답했다: “이 일에 대하여 모른다면, 예루살렘에서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이 소문을 듣지 못한 사람은 당신 뿐이라. 그는 하나님과 모든 사람 앞에서 힘차게 말씀하고 행동했던 선지자였는지라. 주사제(主司祭)와 우리 권력자들이 그를 로마인들에게 넘기고 저희에게 그를 십자가에 달라고 요구하였더라. 자,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방인의 지배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할 자가 그 사람이기를 바랐는지라.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가 십자가에 못박힌 지 이제 사흘째요, 어떤 여인들이 오늘 아침 아주 일찍 그의 무덤으로 갔다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선언하여 오늘 우리를 놀라게 하였는지라. 그리고 바로 이 여인들은 저희가 이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우기며, 저희는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주장하는지라. 그 여인들이 이 일을 남자들에게 보고했을 때, 두 사도가 무덤으로 달려가서 마찬가지로 무덤이 빈 것을 발견하였더라”―그리고 이 대목에서 “하지만 저희는 예수를 구경하지 못했는지라”하고 야곱은 형이 말하는 데 불쑥 끼어들었다.

190:5.4 (2035.1) 그들이 나란히 걷는 동안, 예수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진리를 이해하는 데 정말로 느리구나! 너희가 토론하는 것이 이 사람의 가르침과 일에 대해서라고 내게 이르니, 내가 이 가르침에 익숙하고도 남은즉 너희를 깨우쳐줄까 하노라.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그의 하늘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저희가 이 진리의 나라,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가르치는 이 새 나라에서, 사랑으로 봉사하는 형제로서 친교하는 영적 즐거움을 누리면서 해방과 자유를 찾으리라, 이렇게 이 예수가 늘 가르쳤느니라. 이 사람의 아들이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했는가, 병자와 고통받는 자를 보살피고, 두려움에 빠지고 악에 노예가 된 자를 해방하였는가 너희는 회상하지 못하느냐? 이 나사렛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고, 그를 사형에 처하려는 적들에게 넘겨지고, 사흘째에 살아나리라고 제자들에게 이른 것을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이 모든 것을 듣지 못하였느냐?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원받는 이날에 관하여 성서에서 읽은 적이 없느냐? 그 사람 안에서 땅에 있는 모든 가족이 복을 받으리라, 그는 빈곤한 자의 외침을 듣고, 그를 찾는 가난한 자의 혼을 구하리라, 모든 나라가 그를 복되다 하리라고 거기에 적혀 있느니라. 그러한 구원자는 메마른 땅에 큰 바위의 그림자와 같으리라. 그는 두 팔에 양들을 모으고, 부드럽게 양들을 가슴에 안아 나르면서, 참 목자와 같이 양떼를 먹이리라. 영적으로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고 절망에 빠진 죄수들을 완전한 해방과 빛 가운데로 끌어내리리라.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이 영원히 구원하는 큰 빛을 보리라. 마음이 상한 자를 동여매고, 죄에 포로 된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두려움에 노예가 되고 악에 매인 자에게 감옥 문을 열어주리라. 슬피 우는 자를 위로하고, 슬픔과 억압 대신에 구원의 기쁨을 저희에게 주리라. 그는 모든 나라의 소망이요, 올바름을 찾는 자에게 영원한 기쁨이 되리라. 이 진리와 올바름의 아들은 병을 고치는 빛과 구원하는 힘으로 세상에서 일어나겠고, 그의 민족을 죄에서 구원하기까지 하며, 잃어버린 자를 정말로 찾고 구원하리라. 약한 자를 멸하지 않고, 올바름을 간절히 목마르게 찾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베풀리라. 그를 믿는 자는 영생(永生)을 얻으리라. 그가 그의 영을 모든 육체에 퍼붓고, 이 진리의 영은 각 신자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솟아오르는 샘물이 되리라, 이렇게 적혀 있느니라. 이 사람이 너희에게 가져다 준 하늘나라 복음이 얼마나 큰지 너희는 알아듣지 못하였느냐? 얼마나 큰 구원이 너희에게 다가왔는지 너희는 깨닫지 못하느냐?”

190:5.5 (2035.2) 이때가 되어서 그들은 이 형제가 사는 마을에 가까이 왔다. 길을 따라 걷는 동안에 예수가 이 두 사람을 가르치기 시작한 뒤로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곧 그들의 초라한 거처 앞에 멈추었고, 예수는 길을 계속 내려가면서 그들을 막 떠나려 했지만, 그들은 예수에게 들어와서 함께 머물라고 강청(强請)하였다. 그들은 해질녘이 가까웠고, 주가 함께 머물라고 떼를 썼다. 마침내 예수는 찬성하였고, 집으로 들어간 뒤에 금방, 그들은 먹으려고 앉았다. 그들은 예수에게 축복할 빵을 드렸고, 그가 비로소 빵을 뜯어서 그들에게 넘겨주는 동안에, 그들의 눈이 열렸고, 클레오파스는 손님이 바로 주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가 “주로구나―”하고 말하자, 상물질 모습의 예수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190:5.6 (2036.1) 그리고 나서 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우리가 길을 따라 걸으면서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동안, 우리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른 것이 당연하니라! 그동안에 그는 성서의 가르침을 풀이하여 우리가 깨닫게 하였는지라!”

190:5.7 (2036.2) 그들은 멈추어 먹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은 상물질 모습의 주를 보았고, 집 밖으로 달려나가서, 주가 살아나셨다는 좋은 소식을 퍼뜨리려고 예루살렘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190:5.8 (2036.3) 이날 저녁 9시쯤에, 주가 열 사람에게 나타나기 바로 전에, 달아오른 이 두 형제는 위층 방에 있는 사도들에게 들이닥쳤다. 그들이 예수를 보았고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선언했다. 예수가 그들에게 일러준 모든 것, 그리고 빵을 뜯을 때가 되기까지 그가 누구인지 어떻게 그들이 알아보지 못했는가 일러주었다.

제 191 편 사도와 다른 지도자들에게 나타나다

유란시아서

제 191 편

사도와 다른 지도자들에게 나타나다

191:0.1 (2037.1) 부활이 있었던 일요일은 사도들의 생애에서 끔찍한 날이었고, 열 사람은 문에 빗장을 지르고 그 위층 방에서 그날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달아날 수도 있었지만, 바깥에 나다니는 것이 발견되면 산헤드린 관리에게 체포되는 것이 두려웠다. 토마스는 벳바게에서 혼자서 그의 곤경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었다. 동료 사도들과 함께 남아 있었더라면 그는 더 잘 버티었을 터이고, 더 유익한 길을 따라서 그들의 토론을 이끄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91:0.2 (2037.2) 하루 종일 요한은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생각을 지지하였다. 그는 예수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주가 확언한 것을 적어도 다섯 번, 사흘째를 언급한 것을 적어도 세 번 열거했다. 요한의 태도는 그들에게, 특히 형 야고보, 그리고 나다니엘에게 어지간히 영향을 주었다. 요한이 그 집단에서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들에게 더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91:0.3 (2037.3) 고립된 처지는 그들이 고생하는 큰 원인이었다. 요한 마가는 그들이 성전 근처에서 되어 가는 일과 연락을 유지하게 해주었고, 도시에서 생기는 여러 소문에 관하여 그들에게 정보를 주었지만, 예수가 이미 나타난 것을 본 다른 무리의 신자들로부터 소식을 모을 생각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은 다윗의 사자들이 이제까지 베풀었던 종류의 봉사였지만, 이 사자들은 모두,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신자 무리에게 부활을 알리는 사자로서 마지막 임무를 띠고 자리를 비웠다. 이 여러 해 동안 처음으로 사도들은 하늘나라 일에 관하여 나날의 정보를 얻는 데 그들이 얼마나 다윗의 사자들에게 의존했는가 깨달았다.

191:0.4 (2037.4) 이날 하루 종일, 베드로는 그답게, 주가 부활한 것을 믿기도 하고 의심도 하면서 감정이 오락가락하였다. 베드로는 마치 예수의 몸이 안에서 그저 증발한 것처럼, 무덤에서 시체를 쌌던 천이 거기에 놓인 광경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베드로는 궁리하였다. “그러나 그가 살아서 자신을 여인들에게 보일 수 있다면, 어째서 자신을 우리에게, 사도들에게 보이지 않는가?” 그가 그날 밤 안나스의 안마당에서 예수를 부인했기 때문에, 아마도 자기가 사도들 가운데 있기 때문에, 예수가 그들에게 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베드로는 슬퍼지곤 했다. 그리고 나서 “내 사도들에게―그리고 베드로에게―가서 이르라” 하는 여인들이 가져온 말씀에 기운을 얻곤 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듣고 격려를 받는다는 것은 여인들이 살아나신 주를 정말로 보고 주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을 믿어야 함을 의미했다. 이처럼 베드로는 하루 종일, 믿었다가 의심하며 갈팡질팡했고, 8시가 조금 지나서 안마당으로 나갔다. 그가 주를 부인(否認)한 것 때문에 예수가 그들에게 오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베드로는 사도들 사이에서 자리를 비우려고 생각했다.

191:0.5 (2037.5) 처음에 야고보 세베대는 그들에게 모두 무덤으로 가자고 주장했다. 그는 신비의 진상을 알아보려고 무언가 하는 데 크게 찬성했다. 야고보의 재촉에 반응해서 그들이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막은 사람은 나다니엘이었는데, 그는 이때 목숨을 부당하게 위태롭게 하지 말라는 예수의 경고를 그들에게 상기시킴으로 이렇게 했다. 한낮이 되자 야고보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차분해져서 경계하며 기다렸다. 그는 말이 없었다. 예수가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아서 엄청나게 실망했고, 다른 무리와 개인들에게 주가 여러 번 나타난 것을 몰랐다.

191:0.6 (2038.1) 안드레는 이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많이 기울였다. 그 상황에 몹시 어리둥절하였고, 보통 이상으로 의심이 들었지만, 적어도 동료 사도들을 지도하는 책임에서 벗어난 어떤 홀가분한 느낌을 맛보았다. 그들이 정신 헛갈리는 이때가 닥치기 전에 주가 지도하는 짐을 내려준 것을 그는 정말로 고맙게 여겼다.

191:0.7 (2038.2) 이 비극의 날, 길고 피곤한 몇 시간 동안, 한 번이 넘게, 그 무리에서 유일하게 지탱하는 영향을 미친 것은, 나다니엘이 그답게 자주 기여한 철학적 조언이었다. 그는 하루 종일, 열 명 사이에서 정말로 고삐를 쥐는 세력이었다. 한 번도 그는 주가 부활하신 것을 믿거나 불신한다고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이 지남에 따라서, 그는 점점 더 예수가 다시 살아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고 믿고 싶어졌다.

191:0.8 (2038.3) 열심당원 시몬은 너무나 움츠러들어서 그 토론에 끼지 못했다. 시간의 대부분을 그는 방 한 구석에서 벽을 바라보며 소파에 기대고 있었고, 하루 종일 여섯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하늘나라 개념은 무너졌고, 주의 부활이 그 상황을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의 실망은 무척 개인적이었고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부활과 같은 엄청난 사실이 닥쳐도 갑자기 통지받은 순간에 회복하지 못했다.

191:0.9 (2038.4) 기록하기 이상하지만, 여느 때 말이 없던 빌립은 이날 오후 내내, 말을 많이 했다. 아침 나절에는 할 말이 거의 없었지만, 오후 내내 다른 사도들에 관하여 물었다. 베드로는 빌립의 질문에 자주 귀찮아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의 물음을 마음씨 좋게 받아들였다. 빌립은 예수가 정말로 무덤에서 살아났다면, 그의 몸이 십자가에 못박힌 자국이 눈에 보이게 있을 것인가 특별히 알고 싶어했다.

191:0.10 (2038.5) 마태는 상당히 정신이 헛갈렸고, 동료들의 토론에 귀를 기울였지만, 머리 속에서 앞으로 그들의 재정 문제를 곰곰이 살피면서 시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예수가 부활했다고 생각된 것과 상관 없이 유다는 사라졌고, 다윗은 격식 차리지 않고 자금을 마태에게 넘겼으며, 그들에게 권위 있는 지도자가 없었다. 부활에 관한 그들의 논쟁을 마태가 깊이 고려하는 데 생각이 미치기 전에, 그는 이미 주와 얼굴을 마주하고 보게 되었다.

191:0.11 (2038.6) 알패오 쌍둥이는 이 심각한 토론에 거의 끼어들지 않았고, 늘 하던 시중을 드느라고 꽤 바빴다. 빌립의 질문에 대답하여 그들 가운데 하나가 한 말은 그들의 태도를 표현했다: “우리는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 어머니가 주와 함께 이야기했다고 말씀하시고, 우리는 어머니를 믿노라.”

191:0.12 (2038.7) 토마스는 그가 흔히 겪는, 절망적으로 우울한 시기에 한창 빠져 있었다. 그날 얼마 동안 잠잤고, 나머지 시간에는 산에서 걸어다녔다. 그는 동료 사도들과 다시 함께 있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혼자서 있고 싶은 바람이 더 강했다.

191:0.13 (2038.8) 주는 여러 가지 이유로, 사도들에게 처음으로 상물질(上物質)로 나타나는 것을 미루었다. 첫째로, 그들이 그가 부활했다는 말을 들은 뒤에, 육체를 입고 아직 그들과 함께 있을 때 그의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그들에게 일러준 것을 잘 생각해 볼 겨를을 가지기를 바랐다. 주는 그들 모두에게 모습을 나타내기 전에, 베드로가 그의 특이한 어떤 문제와 씨름하기를 바랐다. 둘째로, 그가 처음으로 나타날 때 토마스가 그들과 함께 있기를 바랐다. 요한 마가는 이 일요일 아침 일찍, 벳바게에 있는 시몬의 집에서 토마스를 찾아냈고, 그렇다는 말을 사도들에게 11시쯤에 전해 왔다. 나다니엘이나 어떤 다른 두 사도가 그를 찾아갔다면, 이날 어느 때라도 토마스는 사도들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그는 정말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전날 밤에 사실 그대로 떠났기 때문에, 너무 마음이 거만해서 그렇게 빨리 제 발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튿날이 되자 그는 너무나 우울해졌고, 그래서 그가 돌아갈 마음을 먹기까지 거의 한 주가 걸렸다. 사도들은 그를 기다렸고, 그는 형제들이 그를 찾고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요청하기를 기다렸다. 토마스는 이처럼 다음 토요일 저녁까지 동료들과 떨어져 있었고, 그때 어둠이 찾아온 뒤에, 베드로와 요한은 벳바게로 가서 그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예수가 처음으로 그들에게 나타난 뒤에, 그들이 대번에 갈릴리로 가지 않았는가 하는 까닭이다. 그들은 토마스 없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1. 베드로에게 나타나다

191:1.1 (2039.1) 예수가 마가의 집 뜰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난 것은 이 일요일 저녁에, 8시 반이 가까운 때였다. 이것은 여덟 번째로 상물질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주를 부인한 이후로, 베드로는 의심과 죄책감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다. 토요일 내내, 또 이 일요일에, 그는 아마도 이제 더 사도가 아닌가 하는 두려움과 싸웠다. 그는 유다의 운명에 소스라치게 놀랐고, 자기도 주를 배반했다고까지 생각했다. 물론 주가 죽은 자 가운데서 정말로 살아났다면, 그가 사도들과 함께 있는 것이 예수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못하게 방해할지 모른다고, 이날 오후 내내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의 틀 속에서, 그러한 혼의 상태에서, 풀 죽은 사도가 꽃과 풀숲 사이로 거니는 동안에 예수는 베드로에게 나타났다.

191:1.2 (2039.2) 안나스의 집 현관에서 주가 지나가면서 보낸 인자한 눈길을 베드로가 생각했을 때, 그리고 빈 무덤에서 돌아온 여인들이 그날 아침 일찍 그에게 가져온 소식, “내 사도들에게―그리고 베드로에게―가서 이르라”하는 그 놀라운 소식을 머리 속에서 살펴보는 동안, 이 자비(慈悲)의 표시를 생각하는 동안, 믿음은 비로소 의심을 이겼고, 그는 가만히 서서 주먹을 불끈 쥐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음을 믿노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이르리라.” 그리고 이렇게 말하자, 그 앞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갑자기 나타나서, 귀에 익은 목소리로 베드로에게 말을 걸었다: “베드로야, 적은 너를 가지고 싶어했어도 나는 너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네가 나를 부인한 것은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 아님을 알았노라. 그런즉 네가 미처 부탁하기도 전에 너를 용서하였노라. 그러나 너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자에게 좋은 복음(福音) 소식을 전하려고 준비하면서, 이제 너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당면한 골칫거리를 그만 생각해야 하느니라. 이제 더 하늘나라로부터 네가 무엇을 얻을까 아랑곳하지 말고, 오히려 비참한 영적 가난 속에 사는 자에게 네가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걱정해야 하느니라. 시몬아, 새 날의 전투를 위하여, 사람의 자연 지성에 생기는 영적 어둠과 악한 의심과 투쟁하기 위하여, 자세를 갖추어라.”

191:1.3 (2039.3) 베드로와 상물질 예수는 뜰을 통해서 걸었고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일에 대하여 거의 5분 동안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서 그가 물끄러미 보는 가운데 주는 사라지며 말했다: “내가 너희 형제들과 함께 너를 볼 때까지, 베드로야 잘 있거라.”

191:1.4 (2039.4) 한 순간, 베드로는 그가 살아나신 주와 함께 이야기했고, 아직도 하늘나라의 대사(大使)인 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깨달음에 휩싸였다. 그는 영화롭게 된 주가 복음을 계속 전파하라고 그에게 타이르심을 막 들었다. 그리고 가슴 속에서 이 모든 것이 넘쳐흐르자, 위층 방으로, 동료 사도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숨이 차게 흥분하여 외쳤다: “나는 주를 보았노라. 그가 뜰에 계셨느니라.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그는 나를 용서하셨더라.”

191:1.5 (2040.1) 베드로가 뜰에서 예수를 보았다는 선언은 동료 사도들에게 깊이 감명을 주었고 그들은 의심을 거의 버릴 준비가 되었는데, 그때 안드레가 일어나서 동생의 보고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지 말라고 경고했다. 베드로가 전에 헛것을 본 적이 있다고 안드레는 넌지시 비추었다. 환상 속에서 주가 물 위로 그들에게 걸어오는 것을 베드로가 보았다고 주장한 것, 갈릴리 바다에서 밤에 본 그 환상을 안드레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어도, 그는 이 사건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내비치기에 넉넉히 이야기했다. 형이 빗대어 한 말에 시몬 베드로는 무척 마음이 상했고, 즉시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쌍둥이는 베드로를 무척 딱하게 여겼으며, 두 사람이 그에게 건너가서 동정심을 보이고 그들이 그를 믿는다고 말하며, 그들의 어머니도 또한 주를 보았다고 다시 주장했다.

2. 사도들에게 처음으로 나타나다

191:2.1 (2040.2) 그날 저녁 9시가 조금 지난 뒤에, 그리고 클레오파스와 야곱이 떠난 뒤에, 알패오 쌍둥이는 베드로를 위로했고 한편 나다니엘은 안드레를 꾸짖었다. 열 사도가 붙잡힐까 두려워서 문을 다 빗장으로 잠그고서 위층 방에서 모여 있는 동안, 상물질 모습으로 주가 그들 한가운데 갑자기 나타나서 말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내가 나타날 때 어찌하여 너희는 마치 유령을 본 듯 그리 놀라느냐? 육체를 입고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내가 이 일에 관하여 이르지 아니하더냐? 주사제와 권력자들이 내가 죽음을 당하도록 넘겨주리라, 너희 무리 가운데 하나가 나를 저버릴 것이라, 사흘째에 내가 살아나리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더냐? 여인들, 클레오파스와 야곱, 하다 못해 베드로의 보고에 대하여 너희가 온갖 의심을 하고 이 모든 토론을 하다니 무엇 때문이냐? 얼마나 오랫동안 너희가 내 말을 의심하고 내 약속을 믿지 않겠느냐? 그리고 실제로 나를 보았으매 너희가 믿겠느냐? 이제도 너희 가운데 하나가 자리에 없느니라. 너희가 다시 한 번 모였을 때,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무덤에서 살아난 것을 너희 모두가 확실히 안 뒤에, 여기서 갈릴리로 떠나라. 하나님을 믿고, 서로를 믿으라. 그렇게 너희는 하늘나라의 새 수고를 시작할지니라. 너희가 갈릴리로 갈 준비가 되기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예루살렘에 머물리라. 나의 평화를 너희에게 두고 떠나노라.”

191:2.2 (2040.3) 그들에게 말을 마치고 나서, 상물질 예수는 눈앞에서 한 순간에 사라졌다. 모두 엎어져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라진 주를 경배했다. 이것은 주가 아홉 번째로 상물질로 나타난 것이다.

3. 상물질 인간들과 함께

191:3.1 (2040.4) 이튿날 월요일은 전부, 그때 유란시아에 있던 상물질 인간들과 함께 있는 데 쓰였다. 주의 상물질 과도기 체험에 참여하는 자로서, 사타니아의 일곱 저택 세계로부터 다양한 계급의 과도기 필사자들과 더불어, 1백만이 넘는 상물질 지도자와 동료들이 유란시아로 왔다. 상물질 모습의 예수는 이 눈부신 지성 존재들과 함께 40일 동안 머물렀다. 그는 그들을 가르쳤고, 그 지도자들로부터, 사타니아의 사람 사는 여러 세계에서 온 필사자들이 체계의 상물질 구체들을 통과하면서 거치는 상물질 과도기의 생명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191:3.2 (2041.1) 이 월요일 자정 무렵에 주의 상물질 모습은 상물질 진보의 둘째 단계로 넘어가기 위하여 조절되었다. 다음에 지상의 필사 아이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는 둘째 단계의 상물질 존재였다. 상물질 생애에서 주가 나아가는 동안, 상물질 지성 존재와 변화시키는 그 동료들이, 주를 필사자의 물질 눈에 보이게 만들기가 기술적으로 점점 더 어려워졌다.

191:3.3 (2041.2) 예수는 4월 14일, 금요일에, 상물질의 셋째 단계로, 17일 월요일에 넷째 단계로, 22일 토요일에 다섯째 단계로, 27일 목요일에 여섯째 단계로, 5월 2일 화요일에 일곱째 단계로, 7일 일요일에 예루셈 시민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14일 일요일에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의 품에 들어갔다.

191:3.4 (2041.3) 이전의 여러 자신 수여(授與)와 연관하여, 그가 별자리 본부에서 거주한 것으로부터, 아니 계속 초우주 본부 봉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를 거쳐서, 시공에서 올라가는 필사자의 생애를 이미 충만히 체험했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네바돈의 미가엘은 우주에서 체험하는 봉사를 마쳤다. 바로 이 상물질 체험으로 네바돈의 창조 아들은 일곱째이자 마지막 우주 수여를 정말로 마치고 만족스럽게 끝맺었다.

4. 열 번째 나타나다 (필라델피아에서)

191:4.1 (2041.4) 필사자가 알아보도록 예수가 상물질 모습으로 열 번째 나타난 것은 필라델피아에서 4월 11일, 화요일, 8시가 조금 지난 뒤였고, 거기서 아브너와 나사로, 그리고 그 동료 150명쯤에게 나타났는데, 이들은 70인 전도단 가운데 50명이 넘는 사람들을 포함한다. 이렇게 나타난 것은 회당(會堂)에서 특별 회의가 열린 바로 뒤였는데,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 그리고 다윗의 사자가 가져왔던, 부활에 관한 최근의 보고를 논의하려고 아브너가 이 회의를 소집하였다. 부활한 나사로가 이제 이 신자 집단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보고를 그들이 믿기는 어렵지 않았다.

191:4.2 (2041.5) 회당에서 아브너와 나사로가 그 모임을 막 시작하였고, 이들이 강단에서 함께 서 있었는데, 그때 주의 모습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을 신자인 청중 전부가 보았다. 그는 아브너와 나사로 사이에 나타났던 곳에서 앞으로 걸어 나왔고, 둘 중에 아무도 그를 지켜보지 못했는데, 예수는 무리에게 인사하면서 말했다:

191:4.3 (2041.6)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우리가 하늘에 아버지 한 분이 계시고, 오직 하나의 하늘나라 복음이―사람이 믿음으로 영생(永生)의 선물을 받는다는 좋은 소식이―있음을 너희가 다 아느니라. 너희가 복음에 충성하기를 기뻐하는 것 같이, 너희 가슴 속에서 형제를 위하는 새롭고 더 큰 사랑을 바깥에 퍼뜨리기를 진리의 아버지께 기도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내가 너희에게 봉사한 것 같이 너희는 모든 사람에게 봉사해야 하느니라. 사람을 이해하는 동정심과 형제의 애정으로, 저희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로마인이든, 페르시아인이든 에티오피아인이든, 좋은 소식의 선포에 헌신하는 너희의 모든 형제와 사귀라. 요한은 하늘나라를 미리 선포하였고, 너희는 권능으로 복음을 전도했으며, 그리스인들은 이미 좋은 소식을 가르치느니라. 그리고 나는 곧 진리의 영을 이 내 형제들 모두의 혼 속으로 보낼 것이요, 저희는 영적 어두움 속에 앉아 있는 동료들을 깨우치려고 일생을 아주 사심 없이 바쳤느니라. 너희는 모두 빛의 자녀이라, 그런즉 사람의 의심과 인간의 불관용을 보여 오해에 빠지지 말라. 너희가 믿음의 은혜로 불신자(不信者)를 사랑하도록 고상하게 되면, 널리 확대되는 믿는 가정에서 동료 신자를 너희가 또한 똑같이 사랑해야 하지 않느냐? 기억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대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191:4.4 (2042.1) “그러면 온 세상으로 가서, 하나님이 아버지요 사람들이 형제라는 이 복음을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 선포하라, 그리고 인류의 다른 종족과 부족들에게 좋은 소식을 제시하는 방법을 늘 지혜롭게 선택하라. 너희는 이 하늘나라 복음을 거저 받았고, 좋은 소식을 모든 나라에 거저 주리라. 악의 저항을 두려워 말지니, 내가 언제나, 아니 시대의 끝날까지도 너희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그리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두고 떠나노라.”

191:4.5 (2042.2) “내 평화를 너희에게 두고 떠나노라” 말했을 때, 그는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갈릴리에서 나타났을 때 한 번, 5백 명쯤의 신자들이 한 때 그를 보았는데, 이것을 제외하면, 필라델피아에서 이 무리는 한 번에 그를 본 무리들 중에서 가장 컸다.

191:4.6 (2042.3) 이튿날 아침 일찍, 토마스의 기분이 풀어지기를 기다리면서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머무르는 동안에도, 필라델피아에 있는 이 신자들은 나사렛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선포하며 다녔다.

191:4.7 (2042.4) 다음날 수요일에 예수는 상물질 동료 사회에서 간섭받지 않고 지냈으며, 오후 중간에 놀라시아덱 별자리 전역에 걸쳐, 사람 사는 구체들에 있는 모든 지역 체계의 저택(邸宅) 세계로부터 방문하는 상물질 대표단들을 영접했다. 그리고 그들은 창조자가 우주 지성 존재에서 자기 계급 중의 하나임을 알고 모두 기뻐했다.

5. 사도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다

191:5.1 (2042.5) 토마스는 올리브산 근처, 언덕 둘레에서 혼자서 외로이 한 주를 보냈다. 그동안에 그는 오직 시몬의 집에 있던 사람들과 요한 마가를 보았다. 두 사도가 그를 찾아내고, 마가의 집에 있는 회합 장소로 그를 데리고 돌아간 것은 4월 15일, 토요일 9시쯤이었다. 이튿날 토마스는 주가 여러 번 나타났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지만, 완강하게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이 주를 보았다고 생각하도록 베드로가 그들에게 열심을 불어넣었다고 주장했다. 나다니엘은 그와 이치를 따졌지만 아무 쓸모가 없었다. 버릇인 의심증과 관련하여 그의 감정은 고집스러웠고, 이 정신 상태는 그들을 피하여 달아났다는 창피스러운 느낌과 함께, 토마스 자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고립된 상황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그는 동료들로부터 물러나서 제 길을 갔는데, 지금 이들 사이에 돌아왔을 때도, 의식하지 못하면서 찬성하지 않는 태도를 가지는 편이었다. 그는 항복하는 데 더디었고, 지기를 싫어했다. 뜻하지 않게, 그에게 집중된 눈길을 정말로 즐거워했다. 동료들 모두가 그의 태도를 바꾸고 확신을 주려고 기울인 노력으로부터 의식하지 못하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꼬박 한 주 동안 그들을 만나지 못해 서운했는데, 그들이 끈질기게 주의를 기울인 것이 어지간히 즐거웠다.

191:5.2 (2042.6) 6시가 조금 지난 뒤에 그들은 저녁을 먹고 있었고, 베드로는 토마스의 한쪽에 앉고 나다니엘은 다른 쪽에 앉아 있었는데, 그때 의심하는 사도가 말했다: “내 눈으로 주를 보고,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기까지 나는 믿지 않겠노라.” 그들이 이렇게 저녁을 먹고 있는데, 또 문이 단단히 닫히고 잠겨 있는 동안에, 상물질 모습의 주가 갑자기 식탁의 둥근 곳 안에 나타났고, 토마스 바로 앞에 서서 말했다:

191:5.3 (2043.1)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온 세상으로 가서 이 하늘나라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다시 한 번 듣도록 너희가 모두 자리에 있을 때 다시 나타날까 하여, 내가 꼬박 한 주를 머물렀노라.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버지가 나를 세상으로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그렇게 보내노라. 내가 아버지를 드러낸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나날의 생활 속에서, 신의 사랑을 드러낼지니라. 사람의 혼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사랑하라고 너희를 보내노라. 너희는 다만 하늘의 기쁨만 선포할 뿐 아니라, 또한 나날의 체험 속에서 신다운 인생의 이 영적 현실을 보여야 하나니, 너희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물로서 이미 영생을 가졌음이라. 믿음을 가졌을 때, 하늘에서 권능이, 진리의 영이, 너희에게 다가왔을 때 너희는 문을 닫고 여기서 너희 빛을 감추지 아니하겠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온 인류에게 알리리라. 두려워서, 너희는 불쾌한 체험을 겪는 사실로부터 지금 달아나지만, 진리의 영으로 세례를 받고 나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얻는다는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새 체험을 얻으려고 너희는 용감히, 기쁘게 떠나가리라. 전통을 부르짖는 권한이 주는 헛된 안정감으로부터, 생생하게 체험하는 최상의 실체의 사실과 진실, 그리고 이를 믿음에 근거한 새 체제의 권한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충격에서 회복하는 동안, 너희는 여기서, 그리고 갈릴리에서 잠시 머물러도 좋으니라. 세상에 대한 너희의 사명은 내가 너희 사이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생을 살았다는 사실에, 너희와 모든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실에, 기초를 두느니라. 그리고 그 사명은 너희가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그 인생으로―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에게 봉사한 것 같이, 사람을 사랑하고 저희에게 봉사하는 실제의 산 체험으로―이루어질지니라. 믿음으로 세상에게 너희의 빛을 드러내라. 진리를 드러내어 전통에 멀어버린 눈을 뜨게 하라. 너희가 사랑으로 봉사를 베풀어서, 무지로 인한 편견(偏見)을 효과적으로 없애라. 사람을 이해하는 동정심과 사심 없는 헌신으로 그렇게 동료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감으로, 너희는 아버지 사랑을 유익하게 깨닫도록 저희를 이끌리라. 유대인은 선을 찬미하고 그리스인은 아름다움을 높였으며, 힌두인은 헌신을 설교하였고, 먼 나라의 금욕주의자는 존경을 가르치고 로마인은 충성을 요구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제자들에게 일생을, 아니 육체를 입은 형제에게 사랑으로 봉사하는 일생을 요구하노라.”

191:5.4 (2043.2) 이렇게 말씀하고 나서, 주는 고개를 숙여 토마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너 토마스야, 나를 보고 내 손의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을 수 없다면 믿지 않겠다고 하였거늘, 너는 이제 나를 보았고 내 말을 귀로 들었느니라. 비록 네가 내 손에서 아무 못 자국을 구경하지 못해도, 네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또한 입을 모습을 입고 내가 살아났으니, 네가 형제들에게 무어라고 말하겠느냐? 너는 진실을 인정하리니, 믿지 않는다고 아주 굳세게 주장할 때에도, 이미 마음 속에서 네가 믿기 시작했음이라. 토마스야, 막 무너지려 할 바로 그때, 네 의심은 언제나 아주 굳세게 주장하느니라. 토마스야, 너에게 명하노니, 의심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라―그리고 네가 마음을 다해서도 믿을 줄을 내가 아노라.”

191:5.5 (2043.3) 이 말씀을 듣자, 토마스는 상물질 모습의 주 앞에서 무릎을 꿇고 외쳤다: “내가 믿나이다! 내 주여, 선생이여!” 그리고 나서 주는 토마스에게 말했다: “토마스야, 정말로 나를 보고 내 말을 들었은즉 네가 믿었느니라. 다가올 시대에 육체의 눈으로 보지 않고 사람의 귀로 듣지 않았어도 믿을 자는 복되도다.”

191:5.6 (2043.4) 그리고 나서, 주의 모습이 식탁의 상석 가까이로 움직이면서, 그는 모두에게 말했다: “그리고 이제 너희는 모두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내가 얼마 안 있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 이 말씀을 하신 뒤에,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191:5.7 (2044.1)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을 열한 사도는 이제 넉넉히 확신했고, 이튿날 아침 아주 일찍, 동이 트기 전에, 갈릴리로 떠났다.

6. 알렉산드리아에서 나타나다

191:6.1 (2044.2) 열한 사도가 갈릴리로 가는 길에, 4월 18일, 화요일 저녁, 8시 반쯤에 여행 목적지에 가까이 가는 동안에, 예수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단과 약 80명의 다른 신자들에게 나타났다. 이것은 주가 상물질 모습으로 열두 번째로 나타난 것이다. 다윗의 사자가 십자가 처형에 관하여 보고를 끝냈을 때, 예수는 이 그리스인과 유대인들 앞에 나타났다. 예루살렘과 알렉산드리아 사이를 교대해서 달리는 사람들 중에서 다섯째인 이 사자(使者)는 그날 오후 늦게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는데, 그가 소식을 로단에게 전하고 나서, 사자로부터 직접 이 비극의 말을 듣기 위하여 신자들을 불러 모으기로 결정이 내렸다. 8시쯤에, 그 사자, 부시리스의 나단은 이 무리 앞에 와서, 앞의 주자(走者)가 이른 모든 것을 낱낱이 그들에게 일러주었다. 나단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이 말로 끝맺었다: “그러나 이 말을 우리에게 보내는 다윗은, 주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언하면서, 다시 살아나리라 선언했다고 전하나이다.” 마침 나단이 말하는 동안에, 상물질 예수가 거기에 모두가 환히 보도록 나타났다. 나단이 앉자, 예수는 말했다:

191:6.2 (2044.3)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내 아버지가 세상으로 나를 보내며 세우라고 한 것은 한 종족이나 한 나라, 어느 특별 집단의 선생이나 설교자에게 속하지 않느니라. 이 하늘나라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자유로운 자와 매인 자, 남자와 여자, 아니 어린아이에게도 속하느니라. 그리고 육체를 입고 사는 인생으로 너희는 다 이 사랑과 진리의 복음을 선포해야 하느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는 새롭고 놀라운 애정으로 서로 사랑할지니라. 내가 너희에게 봉사한 것 같이, 너희는 새롭고 놀랍게 헌신하는 마음으로 인류에게 봉사하리라. 사람들이 너희가 저희를 그렇게 사랑함을 볼 때, 그리고 얼마나 열심히 저희에게 봉사하는가 볼 때, 너희가 하늘나라의 신앙 동료가 되었음을 깨달을 것이요, 너희의 인생에서 보는 진리의 영을 따라 영원한 구원을 찾으리라.

191:6.3 (2044.4) “아버지가 나를 이 세상으로 보내신 것 같이, 바로 그대로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라고 너희 모두가 부름받았도다. 이 하늘나라 복음은 이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속하느니라. 그 복음을 겨우 사제(司祭)인 자들에게 보관하라고 맡기지 말라. 곧 진리의 영이 너희에게 다가오겠고,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로 이끌리라. 그러므로 이 복음을 전하면서 너희는 온 세상으로 가라. 그리고 보라, 나는 언제나, 아니 시대의 끝까지도, 너희와 함께 있노라.”

191:6.4 (2044.5) 이렇게 말씀하고 나서, 주는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밤새 이 신자들은 거기에 함께 남아서, 하늘나라를 믿는 자로서 그들의 체험을 되새기고, 로단과 그 동료들이 한 여러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음을 믿었다. 이 뒤 둘째 날에 부활을 알리는 다윗의 사자가 도착했는데, 그의 발표에 답하여, “옳도다, 우리가 아노니, 우리가 그를 보았음이라. 그는 그저께 우리에게 나타나셨느니라”하고 그들이 말했을 때, 그 사자가 놀란 것을 상상해 보라.

제 192 편 갈릴리에서 나타나다

유란시아서

제 192 편

갈릴리에서 나타나다

192:0.1 (2045.1) 사도들이 갈릴리를 향하여 예루살렘을 떠날 때가 되자, 유대인 지도자들은 상당히 조용해졌다. 예수가 하늘나라 신자 집단에게만 나타났으니까, 그리고 사도들이 숨어 있고 아무런 대중 전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 권력자들은 복음 운동이 결국, 효과적으로 분쇄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소문이 더욱 퍼지는 것이 불안했지만, 추종자의 무리가 시체를 옮겼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함으로, 뇌물 받은 경비원들이 모든 그러한 보고를 실질적으로 상쇄하기를 기대하였다.

192:0.2 (2045.2) 이때부터 계속하여 박해의 물결이 일어 사도들이 흩어지기까지, 베드로는 대체로 사도단(使徒團)의 우두머리로 인정되었다. 예수는 결코 어떤 그러한 권한도 주지 않았고, 동료 사도들도 결코 정식으로 그를 그런 책임 있는 자리에 선출하지 않았다. 보편적 찬성을 얻어서, 또한 그들의 으뜸가는 설교자였기 때문에, 그는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맡고 지켰다. 이제부터 계속 대중 전도가 사도들의 주요한 일거리였다. 그들이 갈릴리에서 돌아온 뒤에, 유다의 자리를 대신하여 뽑은 맛디아가 그들의 회계가 되었다.

192:0.3 (2045.3)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머무른 주간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리마대 요셉의 집에서 묵고 있던 여신도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2:0.4 (2045.4) 이 월요일 아침 일찍, 사도들이 갈릴리를 향해 떠났을 때, 요한 마가가 따라갔다. 그는 도시 바깥으로 그들을 따라 나갔는데, 베다니를 한참 지나고 나서, 그들이 그를 돌려보내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 생겨서, 대담하게 그들 사이에 다가갔다.

192:0.5 (2045.5) 살아나신 주의 이야기를 하느라고 갈릴리로 가는 길에 사도들은 몇 번이나 멈추었고, 따라서 수요일 밤 아주 늦게까지 벳세다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들이 다 잠이 깨어 아침 먹을 준비가 되기도 전에, 벌써 목요일 정오가 되었다.

1. 호숫가에서 나타나다

192:1.1 (2045.6) 4월 21일, 금요일 아침 6시쯤에, 상물질 모습의 주는 열 사도에게, 그들의 배가 벳세다에서 여느 때 배를 대는 곳 가까이 물가에 접근하는 동안에, 열세 번째로, 갈릴리에서는 처음으로 나타났다.

192:1.2 (2045.7) 사도들이 세베대의 집에서 기다리면서, 목요일 오후와 초저녁을 보낸 뒤에, 시몬 베드로는 그들에게 고기를 잡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베드로가 고기잡이 나들이를 제안했을 때, 사도들은 모두 따라가기로 작정했다. 밤새 그들은 그물을 가지고 수고했지만 아무 고기도 잡지 못했다. 고기를 잡지 못한 것에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이야기할 많은 흥미 있는 체험, 예루살렘에서 그들에게 아주 최근에 일어난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날이 밝자, 그들은 벳세다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물가로 가까이 가자, 그들은 누군가 호숫가에, 배를 대는 곳 가까이, 모닥불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 그들은 그가 물고기를 잡은 것을 맞이하려고 내려온 요한 마가라고 생각했지만, 물가로 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은 잘못 보았음을 깨달았다―그 사람은 요한이기에는 너무 키가 컸다. 물가에 있는 사람이 주라는 것이 그들 중 아무에게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째서 두려움, 배반, 죽음과 비극적으로 연결된 예루살렘의 꽉 막힌 환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예전에 같이 어울리던 장면 한가운데서, 그리고 탁 트인 자연 속에서, 예수가 그들을 만나고 싶어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갈릴리로 가면, 그가 거기서 그들을 만나리라고 일러주었고, 그는 바야흐로 그 약속을 지키려 했다.

192:1.3 (2046.1) 닻을 내리고, 물가로 가기 위해서 작은 배로 들어가려고 준비했을 때, 물가에 있던 사람이 소리쳐 불렀다, “얘들아, 너희는 무엇이라도 잡았느냐?” 그들이 “아니요”하고 대답했을 때, 그는 다시 말했다. “배의 바른 쪽에 그물을 던지라, 그리하면 너희가 물고기를 잡으리라.” 지시한 사람이 예수인 줄 몰랐어도, 그들은 지시받은 대로 함께 그물을 던졌고, 즉시 그물이 가득 찼다. 너무나 가득해서 도저히 끌어당길 수 없었다. 자, 요한 세베대는 눈치가 빨랐고, 무겁게 실린 그물을 보았을 때, 말을 건넨 사람이 주인 것을 알아차렸다. 이 생각이 머리 속에 떠오르자, 몸을 기울여 베드로에게 속삭였다: “주이라.” 베드로는 늘 생각 없이 행동하고 성급하게 헌신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요한이 이렇게 귀에 대고 속삭이자, 그는 주의 옆으로 더 빨리 갈까 하여 벌떡 일어나서 물 속으로 첨벙 몸을 던졌다. 형제들이 그 뒤에 바짝 따라갔고, 작은 배를 타고 물가로 왔기 때문에, 물고기 그물을 끌고 갔다.

192:1.4 (2046.2) 이때가 되자 요한 마가는 일어나 있었고, 무겁게 실은 그물을 가지고 사도들이 물가로 오는 것을 보고, 그들을 맞이하려고 물가로 달려 내려갔다. 그리고 열 명이 아니라 열한 사람을 보았을 때, 그는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이 살아나신 예수라고 짐작했고, 놀란 열 사람이 말없이 곁에 서 있는 동안에, 소년은 주께 달려가서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내 주여, 내 선생이여.” 그리고 나서 예수는 “평화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하고 인사했을 때 예루살렘에서 한 것과 달리, 보통 목소리로 요한 마가에게 말을 건넸다: “자, 요한아, 너를 다시, 걱정 없는 갈릴리에서 보니 반갑구나. 여기서 우리는 실컷 이야기할 수 있느니라. 요한아, 우리와 함께 머물러 아침을 먹으라.”

192:1.5 (2046.3) 예수가 그 젊은이와 이야기하는 동안, 열 명은 너무나 충격을 받고 깜짝 놀라서, 물고기가 담긴 그물을 물가로 당기기를 소홀히 했다. 이제 예수가 말했다: “너희가 잡은 물고기를 가져다가 얼마큼을 아침 식사를 위하여 준비하여라. 이미 우리는 모닥불과 빵이 많이 있느니라.”

192:1.6 (2046.4) 요한 마가가 주께 경의를 표하는 동안, 베드로는 한 순간 물가에, 거기서 숯불이 이글거리는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그 장면은 그가 주를 부인했던 안나스의 집 안뜰에서 자정에 본 숯불을 너무나 눈에 선하게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었지만, 머리를 흔들고, 주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외쳤다, “내 주여, 내 선생이여!”

192:1.7 (2046.5) 그리고 나서 그들이 그물을 끌어당기는 동안에 베드로는 친구들과 함께 거들었다. 그들이 물고기 잡은 것을 내려놓았을 때, 물고기를 세었는데, 큰 물고기가 153마리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이것을 또 하나의 기적으로 물고기를 잡았다고 여기는 잘못이 일어났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다만 주의 선견(先見)을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는 물고기가 거기 있는 것을 알았고, 따라서 사도들에게 어디에 그물을 던지라고 지시하였다.

192:1.8 (2047.1) 예수는 그들에게 말했다: “이제 모두 와서 아침을 먹으라. 내가 너희와 이야기하는 동안, 쌍둥이도 앉아야 하느니라. 요한 마가가 물고기를 다듬으리라.” 요한 마가는 큼직한 물고기를 일곱 마리 가져왔고, 이것을 주가 불 위에 놓았는데, 물고기가 익자, 소년은 물고기를 열 사람에게 드렸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빵을 떼어 요한에게 건네주었고, 그는 다시 빵을 배고픈 사도들에게 주었다. 그들 모두가 먹을 것을 받고 나서, 예수는 요한 마가에게 앉으라 했고, 손수 소년에게 물고기와 빵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먹는 동안에, 예수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갈릴리에서, 그리고 바로 이 호숫가에서 겪은 여러 체험을 되새겼다.

192:1.9 (2047.2) 이때 사도 집단에게 예수는 세 번째로 나타났다. 어부들이 물가에 왔을 때, 갈릴리 바다에서 타리케아의 생선 장수들이 이렇게 말을 거는 것이 이 어부들에게 흔한 체험이었기 때문에, 예수가 처음에 그들을 향하여 무슨 물고기라도 잡았는가 물었을 때 그들은 그가 누군지 의심하지 않았고, 이 장사꾼들은 물고기 말리는 영업을 위하여 싱싱한 물고기를 사려고 보통 가까이 있었다.

192:1.10 (2047.3) 예수는 한 시간이 넘게 열 사도와 요한 마가와 함께 이야기했고, 그리고 나서 물가를 왔다갔다 거닐며, 둘씩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러나 그가 함께 가르치라고 처음에 보냈던 똑같은 쌍들이 아니었다. 열한 사도가 전에 모두 예루살렘에서 함께 왔지만, 갈릴리에 가까이 가면서 열심당원 시몬은 점점 더 낙심하였고, 그래서 그들이 벳세다에 이르자 형제들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192:1.11 (2047.4) 이날 아침에 이들을 떠나기 전에, 예수는 자원하는 두 사도에게 열심당원 시몬에게 가서, 바로 그날 그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렇게 했다.

2. 사도들과 둘씩 이야기를 나누다

192:2.1 (2047.5) 아침 식사를 마쳤을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불 옆에 앉아 있는 동안, 예수는 베드로에게, 또 요한에게, 와서 물가에서 함께 걷자고 손짓했다. 그들이 나란히 걷자, 예수는 요한에게 말했다. “요한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이 “주여,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나이다”하고 대답하자, 주는 말했다: “그러면 요한아, 너그럽지 못한 태도를 버리고, 내가 너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람들 사랑하기를 배우라.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임을 증명하는 데 너의 일생을 바치라.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을 찾도록 재촉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 사랑은 모든 영적 선(善)의 근원이요, 참되고 아름다운 것의 알맹이라.”

192:2.2 (2047.6) 다음에 예수는 베드로를 향하고 물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대답했다. “주여, 내가 혼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함을 아시나이다.”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 양들을 먹이라. 약한 자, 가난한 자, 어린 자 돌보기를 소홀히 말라. 두려움이나 편애가 없이 복음을 전하라.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음을 늘 기억하라. 내가 너에게 봉사한 것 같이, 동료 인간에게 봉사하며, 내가 너를 용서한 것 같이 필사 동료를 용서하라. 경험을 통해서 명상의 가치와 총명하게 숙고하는 힘을 네가 배우도록 하여라.”

192:2.3 (2047.7) 길을 따라 조금 더 걸은 뒤에, 주는 베드로에게 돌이켜 물었다. “베드로야, 너는 정말로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자 시몬이 대답했다, “예, 주여, 내가 당신을 사랑함을 당신이 아시나이다.” 다시 예수는 말했다: “그러면 내 양들을 잘 보살피라. 양 떼에게 착하고 참된 목자가 되라. 저희의 신뢰를 저버리지 말라. 적의 손에 사로잡혀 놀라지 말라. 항상 경계하라―지키고 기도하라.”

192:2.4 (2047.8) 그들이 몇 걸음 더 갔을 때, 예수는 베드로를 향하여 세 번째로 물었다. “베드로야, 네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자 주가 그를 불신하는 듯한 것에 조금 슬퍼서, 베드로는 어지간히 감정이 섞인 소리로 말했다: “주여,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시고, 따라서 내가 정말로 참으로 당신을 사랑함을 아시나이다.”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내 양들을 먹이라. 양떼를 버리지 말라. 동료 목자 모두에게 본보기와 영감이 되라. 내가 너를 사랑해 온 것 같이 양떼를 사랑하고 내가 생명을 너희의 복지에 바쳐 온 것 같이 저희의 복지에 몸을 바치라. 그리고 끝까지 내 뒤를 따르라.”

192:2.5 (2048.1) 베드로는 이 마지막 말씀―그가 주의 뒤를 계속 따라야 한다는 것―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고, 예수를 향하여, 요한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당신의 뒤를 계속 따르면, 이 사람은 무엇을 하리이까?” 그러자 베드로가 말씀을 오해한 것을 깨닫고 예수는 말했다: “베드로야, 네 형제가 무엇을 할까 아랑곳하지 말라. 네가 떠난 뒤에, 아니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요한이 남기를 내가 뜻할지언정,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오직 네가 꼭 나를 따르도록 하여라.”

192:2.6 (2048.2) 이 논평은 형제들 사이에 퍼졌고, 많은 사람이 그리 생각하고 희망한 대로, 권능과 영광 속에 하늘나라를 세우려고 주가 돌아오기까지 요한이 죽지 않으리라는 뜻으로 예수가 말씀했다고 사람들은 받아들였다. 예수의 말씀의 이러한 해석은 열심당원 시몬을 봉사하러 돌아오게 하고 계속 일하게 한 것과 많이 상관이 있다.

192:2.7 (2048.3)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돌아가자, 예수는 안드레와 야고보와 함께 거닐며 이야기하러 갔다. 조금 걷고 나서 예수는 안드레에게 말했다. “안드레야, 너는 나를 신뢰하느냐?” 예수가 그렇게 묻는 것을 듣자, 사도들의 옛 우두머리는 가만히 서서 대답했다. “예, 주여, 분명히 당신을 신뢰하고, 내가 그런 줄 당신이 아시나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안드레야, 나를 신뢰하면, 너희 형제들을―베드로까지도―더욱 신뢰하라. 나는 한때 네 형제들의 지도를 너에게 맡겼노라. 내가 너를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처럼, 이제 너는 다른 사람들을 신뢰해야 하느니라. 모진 박해 때문에 네 형제들이 비로소 널리 흩어질 때, 육체로 내 아우인 야고보가 경험이 부족하여 질 수 없는 무거운 짐을 형제들이 지워줄 때, 야고보에게 생각 깊고 지혜로운 조언자가 되라. 그리고 나서 계속 신뢰할지니, 내가 너를 저버리지 않을 것임이라. 네가 땅에서 일을 마칠 때, 너는 내게로 올지니라.”

192:2.8 (2048.4) 다음에 예수는 야고보를 향하여 말했다: “야고보야, 너는 나를 신뢰하느냐?” 그리고 물론, 야고보는 대답했다: “예, 주여,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그러자 예수는 말했다: “야고보야, 나를 더욱 신뢰하면, 너는 형제들을 참지 못하는 일이 줄어들리라. 네가 나를 신뢰하겠다면, 신자들의 형제 단체에게 친절히 하는 것이 너에게 도움이 되리라. 네 말과 행위로 생기는 결과의 무게를 재는 것을 배우라. 씨 뿌리는 대로 거둠을 기억하라. 정신이 차분해지기를 기도하고 참을성을 기르라. 산 믿음과 함께, 이러한 미덕은 희생의 잔을 마실 때가 올 때 너를 붙들리라. 그러나 결코 절망하지 말라. 네가 땅에서 일을 마칠 때, 너도 와서 나와 함께 지낼지니라.”

192:2.9 (2048.5) 다음에 예수는 토마스와 나다니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토마스에게 말했다. “토마스야, 너는 나를 위해 수고하느냐?” 토마스는 대답했다. “예, 주여, 나는 지금, 그리고 언제나 당신을 위해 일하나이다.” 그러자 예수는 말했다: “나를 위해 수고하고자 하면, 내가 너를 위해 수고한 것 같이, 육체를 입은 내 형제들을 위하여 수고하라. 그리고 이 선행(善行)에 지치지 말고, 이 사랑의 수고를 위하여 하나님이 세운 자로서 견디라. 네가 땅에서 나와 함께 봉사를 마치고 나서, 영광 속에서 나와 함께 수고하리라. 토마스야, 의심을 버리고 믿고 진리를 아는 가운데 성장해야 하느니라.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믿을진대, 아주 유치한 행동을 그치라. 용기를 가지라. 굳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라.”

192:2.10 (2049.1) 그리고 나서 주는 나다니엘에게 말했다. “나다니엘아, 너는 나를 위하여 수고하느냐?” 그 사도가 대답하였다. “예, 주여, 애정을 다 쏟아 그리하나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말했다: “그런즉 마음을 다하여 나를 위하여 수고한다면, 지치지 않는 애정으로 땅에 있는 내 형제들의 복지에 꼭 헌신하도록 하여라. 조언할 때 우정을 섞고, 철학을 논할 때 사랑을 더하라. 내가 너를 위하여 수고한 것 같이, 동료들을 위하여 수고하라. 내가 너를 보살핀 것 같이, 사람들에게 충실하라. 비판을 줄일지니, 어떤 사람들에게는 많이 기대하지 말고, 그렇게 실망의 정도를 줄이라. 그리고 여기 땅에서 일을 마쳤을 때 너는 하늘에서 나와 함께 수고할지니라.”

192:2.11 (2049.2) 이 뒤에 주는 마태와 빌립과 이야기했다. 빌립에게 그는 말했다: “빌립아, 너는 나에게 복종하느냐?” 빌립은 대답했다, “예 주여, 목숨까지 바쳐서 당신께 복종하리이다.” 그러자 예수는 말했다: “네가 복종하고자 하면, 이방인의 땅으로 가서 이 복음을 선포하라. 복종하는 것이 희생물 바치는 것보다 낫다고 선지자들이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믿음으로 너희는 하나님을 아는 하늘나라 아들이 되었느니라. 오직 한 가지 복종할 율법이 있으니―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러 떠나라는 계명이라.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어둠 속에서 시들고 진리의 빛을 간절히 찾는 네 동료들에게 영생을 얻는다는 좋은 소식을 두려움 없이 전파하라. 빌립아, 이제는 더 돈과 물건을 위하여 바삐 일하지 말라. 이제 너는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좋은 소식을 전하라. 그리고 나는 네 앞에 가고, 끝까지라도 너와 함께 하리라.”

192:2.12 (2049.3) 다음에 주는 마태를 향해서 물었다: “마태야, 마음 속에 내게 복종할 생각이 있느냐?” 마태는 대답했다: “예, 주여, 나는 당신의 뜻을 행하는 데 온전히 헌신하고 있나이다.” 그러자 주는 말했다: “마태야, 내게 복종하고자 하면, 떠나서 이 하늘나라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가르치라. 이제는 더 네가 형제들에게 인생의 물질적인 것을 나누어주지 아니하리라. 이제부터 너도 영적 구원을 얻는다는 좋은 소식을 선포해야 하느니라. 이제부터 계속, 오로지 아버지 나라의 이 복음을 전하는 너의 직책에 복종하는 데만 마음을 쏟으라. 내가 땅에서 아버지의 뜻을 행한 것 같이, 마찬가지로 너는 신이 준 직책을 다할지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네 형제임을 기억하라. 아무도 두려워 말고 너는 하늘나라 복음의 유익한 진리를 선포하라. 그리고 내가 가는 곳으로, 너는 얼마 있지 않아 올지니라.”

192:2.13 (2049.4) 그리고 나서 그는 알패오 쌍둥이, 야고보와 유다와 함께 걸으며 이야기했고, 둘에게 물었다: “야고보와 유다야, 너희는 나를 믿느냐?” 그리고 “예, 주여, 우리가 믿나이다”하고 둘이 대답하자, 그는 말했다: “나는 너희를 곧 떠나리라. 내가 이미 육체로 너희를 떠났음을 너희가 아느니라.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전에 이 모습으로 잠깐 동안만 머무르노라. 너희는 나를 믿나니―너희는 내 사도요, 언제나 그러하리라. 내가 떠났을 때, 또 나와 함께 살려고 오기 전에 하던 일로 아마 너희가 돌아간 뒤에, 나와 교제한 것을 계속 믿고 기억하라. 눈에 보이게 너희가 하는 일에 변화가 생긴다고 하여 너희의 충성심이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여라. 땅에서 너희 끝날까지 하나님을 믿으라. 너희가 하나님의 믿음의 아들일 때, 이 땅의 모든 올바른 일이 거룩함을 결코 잊지 말라. 하나님의 아들이 하는 어떤 일도 평범할 수 없느니라. 그런즉 이제부터 계속, 마치 하나님을 위하여 하듯 너희 일을 하라. 그리고 이 세상에서 너희가 일을 마쳤을 때, 다른 더 좋은 세계들이 있으니, 거기서 너희가 마찬가지로 나를 위하여 일하리라. 이 모든 일에, 이 세상에서, 그리고 다른 세계들에서 나는 너희와 함께 일하겠고, 내 영이 너희 안에 거하리라.”

192:2.14 (2049.5) 알패오 쌍둥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을 때는 거의 10시가 되었고, 예수는 사도들을 떠나면서 말했다: “내일 한낮에 너희를 세운 산에서 모두 만날 때까지, 잘 있거라!”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3. 사도들을 세운 산에서

192:3.1 (2050.1) 4월 22일 토요일 정오에, 열한 사도는 가버나움에서 가까운 산에서 약속대로 모였고, 예수는 그들 사이에 나타났다. 이 모임은 주가 그들을 사도로서, 땅에서 아버지 나라의 대사(大使)로서 그들을 구별했던 바로 그 산에서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주가 열네 번째로 상물질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192:3.2 (2050.2) 이때 열한 사도는 주의 둘레에 동그라미를 지어 무릎을 꿇고서, 주가 책임 지우는 말씀을 되풀이하는 것을 들었고, 그들이 하늘나라의 특별한 일을 위하여 처음에 구별되었을 때처럼, 주가 임명하는 장면을 다시 연출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주의 기도를 빼고, 이 모두가 그들에게는 아버지께 봉사하는 데 그들을 예전에 거룩히 헌신한 것을 생각나게 하였다. 주가―상물질 예수가―이제 기도했을 때, 그것은 사도들이 한 번도 전에 들어 본 적이 없는 당당한 목소리와 권능 있는 말씀이었다. 그들의 주는 이제 자신의 우주에서, 손에 모든 권능과 권한을 넘겨받은 자로서 여러 우주의 통치자들과 말씀하였다. 그리고 이 열한 사람은 예전에 대사가 되는 서약(誓約)에 상물질적으로 다시 헌신하는 이 체험을 결코 잊지 않았다. 주는 이 산에서 그의 대사들과 함께 꼭 한 시간을 보냈고, 그들에게 사랑 어린 작별을 알리고 나서, 눈앞에서 사라졌다.

192:3.3 (2050.3) 그리고 꼭 한 주 동안 아무도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 주가 아버지께로 가버렸는지 알지 못했으니까, 사도들은 무슨 일을 할까 정말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그들은 벳세다에서 머물렀다. 주가 찾아오고 그들이 주를 만나지 못할까 저어하여 그들은 고기 잡으러 가기를 두려워했다. 이 한 주 동안 내내, 예수는 땅에서 상물질 인간들과 함께, 또 이 세상에서 겪고 있는 상물질 과도기의 일로 바빴다.

4. 호숫가에서 모이다

192:4.1 (2050.4) 예수가 나타났다는 말이 갈릴리에 두루 퍼지고 있었고, 주가 부활한 것에 관하여 묻고, 이 소문난 출현에 대하여 진실을 알아보려고 날마다 세베대의 집에 도착하는 신자(信者)들의 수가 늘어났다. 이번 주 초에 베드로는 다음 안식일, 오후 3시에 바닷가에서 대중 집회가 열릴 것이라는 말을 퍼뜨렸다.

192:4.2 (2050.5) 따라서, 4월 29일 토요일 3시에, 가버나움 근처에서 5백 명이 넘는 신자들이, 부활이 있은 뒤에 처음으로 베드로의 대중 설교를 들으려고 벳세다에 모였다. 그 사도는 최선을 다하였고, 호소력 있는 강연을 마친 뒤에, 그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서 거의 아무도 주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192:4.3 (2050.6) 베드로는 설교를 이렇게 마쳤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가 죽지 않았음을 증언하노라. 그가 무덤에서 살아났음을 선언하노라. 우리는 그를 보았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음을 선포하노라.” 이 믿음의 선언을 막 마치자, 그의 옆에, 이 모든 사람이 환히 보도록, 주는 상물질 모습으로 나타났고, 익숙한 어조로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그리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두고 떠나노라.” 이렇게 나타나고 그들에게 그리 말씀하고 나서, 그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것은 살아나신 예수가 열 다섯 번째로 상물질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192:4.4 (2051.1) 그들이 사도로 세움받은 산에서 주와 함께 회의를 가지는 동안에 열한 사도에게 말한 어떤 것 때문에, 사도들은 주가 갈릴리 신자들 무리 앞에서 주가 곧 대중 앞에 나타나리라, 그리고 주가 그렇게 하신 뒤에,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따라서 이튿날 4월 30일 일요일에 일찍, 열한 사람은 벳세다를 떠나서 예루살렘을 향하였다. 그들은 요단강으로 내려가는 길에 상당히 가르치고 전도했고, 그래서 5월 3일, 수요일 늦게까지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가족의 집에 도착하지 못했다.

192:4.5 (2051.2) 이것은 요한 마가에게 슬픈 귀가(歸家)였다. 그가 집에 도착하기 꼭 몇 시간 전에, 아버지 엘리야 마가는 뇌에 출혈이 생겨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죽은 자가 확실히 부활한다는 생각이 슬픔에 잠긴 사도들을 많이 위로했지만, 동시에 그들은 좋은 친구를 잃어서 참으로 슬퍼했고, 그는 큰 어려움과 실망이 닥쳤을 때에도 그들을 굳건하게 지지해 온 사람이었다. 요한 마가는 어머니를 위로하려고 할 수 있는 데까지 다했고, 어머니를 대신하여, 사도들이 그 집에서 자기들의 집처럼 계속 묵으라고 초청했다. 그리고 열한 사람은 이 위층 방을 오순절 날이 지나기까지 본부로 삼았다.

192:4.6 (2051.3) 사도들은 계획하여 유대인 당국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해가 떨어진 뒤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엘리야 마가의 장례와 관련하여 대중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이튿날 하루 종일 그들은 사건이 많았던 이 위층 방에서 조용히 숨어서 지냈다.

192:4.7 (2051.4) 목요일 밤에 사도들은 이 위층 방에서 대단한 모임을 가졌고, 토마스와 열심당원 시몬과 알패오 쌍둥이를 제외하고, 모두 주가 살아나셨다는 새 복음을 대중에게 전도하려고 떠날 것을 서약했다. 하늘나라 복음을―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사람이 형제인 것을―예수가 부활했다는 선포로 바꾸는 첫 걸음이 이미 시작되었다. 나다니엘은 대중에게 전하는 말씀의 요점이 이렇게 바뀐 데 반대했지만, 그는 베드로의 열변을 견딜 수 없었고, 제자들, 특히 여신도(女信徒)들의 열심을 이길 수도 없었다.

192:4.8 (2051.5) 그래서 베드로의 힘찬 지도를 받으면서, 미처 주가 아버지께로 올라가기 전에, 좋은 뜻을 가진 그의 대표자들은 예수의 종교를 새롭고 수정된 형태로, 예수에 관한 종교로, 차츰차츰 확실히 갈아치우는 미묘한 과정을 시작하였다.

제 193 편 마지막 출현과 승천

유란시아서

제 193 편

마지막 출현과 승천

193:0.1 (2052.1) 예수가 열여섯 번째, 상물질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5월 5일 금요일에 니고데모의 집 안뜰에서, 밤 9시쯤이었다. 이날 저녁에 예루살렘 신자들은 부활이 있은 뒤에 처음으로 한데 모이려고 시도했다. 이때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열한 사도, 여인단과 그 동료들, 그리고 주의 다른 주요 제자 약 50명이었는데, 이들은 그리스인 여러 명을 포함하였다. 이 신자 일행은 반시간이 넘도록 격식 차리지 않고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상물질 모습의 예수가 환히 보이도록 나타나서, 즉시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예수는 말했다:

193:0.2 (2052.2)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내가 육체를 벗어난 이후로 내가 나타났던 가운데, 이것이 가장 대표적 신자―사도와 제자들, 남자와 여자 모두―의 무리이라. 청컨대, 내가 너희 가운데 머무르는 것이 끝나야 한다고 미리 너희에게 일렀고, 내가 얼마 안 있어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너희에게 이른 것을 너희가 증언하라. 그리고 나서 어떻게 주사제와 유대인 권력자들이 나를 사형(死刑)에 처하도록 넘겨 주려 하겠고, 또 내가 무덤에서 살아나리라고 너희에게 분명히 일렀노라. 그러면 이 일이 일어났을 때 어찌하여 이 모든 것에 너희가 그리 당황하였느냐? 내가 사흘째에 무덤에서 살아났을 때 어찌하여 너희는 그리 놀랐느냐? 너희는 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들었으므로, 나를 믿지 못하였느니라.

193:0.3 (2052.3) “그리고 마음 속에서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머리로 내 가르침을 듣는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않도록, 이제 너희는 내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느니라. 너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내가 머무르기 시작한 때부터, 나의 한 가지 목적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땅에 있는 자녀들에게 드러내는 것이라 너희에게 가르쳤노라. 너희가 하나님을 아는 생애를 체험하도록, 나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수여 생애를 살았노라. 나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임을 드러냈고, 너희가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냈노라. 하나님이 너희를, 아들들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요, 내 말을 믿음으로 이 사실은 너희 가슴 속에서 영원하고 살아 있는 진리가 되느니라. 산 믿음으로 너희가 신성하게 하나님을 의식하게 될 때, 그때 너희는 빛과 생명의 자녀로서 영에게서 태어나나니, 그 영생으로 너희는 온 우주에 올라가고 파라다이스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찾는 체험을 얻을지니라.

193:0.4 (2052.4) “너희에게 훈계하노니, 사람들 사이에서 너희의 사명은 하늘나라 복음―하나님이 아버지라는 현실과 사람이 아들이라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임을 늘 기억하라. 유익한 복음의 일부만 아니라, 좋은 소식인 진리 전부를 선포하라. 너희가 전하는 말은 나의 부활 체험으로 인하여 바뀌지 않았느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여전히 하늘나라 복음의 유익한 진리이라. 너희는 떠나가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봉사할 것을 전파해야 하느니라. 세상이 가장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것이라: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믿음을 통하여 저희가 사람을 고귀하게 만드는 이 진리를 실제로 깨닫고 나날이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라. 나의 수여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하는 데 도움이 될 터이나, 저희가 영원한 아버지의 살아 있는 영 아들이라는 유익한 진리를 믿음으로 몸소 붙잡지 못하면, 그러한 지식이 충분치 않으니라. 하늘나라 복음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땅에서 그의 자녀들에게 봉사하는 데 관계되는 것이라.

193:0.5 (2053.1) “너희끼리 여기서, 내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지식을 함께 나누지만, 살아난 것은 이상하지 않으니라. 나는 내 목숨을 버리고 목숨을 다시 손에 잡을 힘이 있고, 아버지는 그러한 힘을 파라다이스 아들들에게 주시느니라. 내가 요셉의 무덤을 떠난 뒤에 곧, 한 시대의 죽은 자들이 영원한 승천을 시작한 것을 알고서 너희는 오히려 마음 속에서 기운을 얻어야 하느니라.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에게 봉사함으로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을 드러낸 것 같이, 너희가 어떻게 사랑의 봉사를 통해서 동료 인간에게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는가 보이려고 내가 육체를 입고 일생을 살았노라. 너희와 모든 다른 사람이, 너희가 다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도록 나는 사람의 아들로서 너희 가운데서 살아 왔노라. 그런즉 너희는 이제 온 세상으로 가서, 모든 사람에게 이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 것 같이 동료 필사자를 위하여 수고하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동안,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진리의 영을 보낼 때까지, 여기 예루살렘에서 머무르기만 하라. 그는 더욱 큰 진리로 너희를 이끌겠고 나는 너희와 함께 온 세상으로 가리라. 나는 너희와 함께 늘 있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두고 떠나노라.”

193:0.6 (2053.2) 그들에게 말씀을 마치고 나서, 주는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 신자들이 흩어지기 전에, 날이 거의 밝아 왔다. 밤새도록 그들은 함께 남아서, 주의 훈계를 열심히 토론하고, 그들에게 닥친 모든 일을 생각해 보았다. 야고보 세베대와 다른 사도들은 또한 갈릴리에서 상물질 모습의 주와 함께 겪은 체험에 대하여 그들에게 일러주었고, 그가 어떻게 세 번 그들에게 나타났는가 이야기하였다.

1. 시카에서 나타나다

193:1.1 (2053.3) 5월 13일 안식일 오후 4시쯤, 주는 시카에서 야곱의 우물 가까이, 날다와 약 75명 되는 사마리아 신자들에게 나타났다. 그 신자들은 생명의 물에 관하여 예수가 날다에게 말씀했던 곳 가까이, 이 장소에서 만나는 버릇이 있었다. 이날 부활의 보고에 관하여 그들이 토론을 막 마치자, 예수는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나서 말씀했다:

193:1.2 (2053.4)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내가 부활이요 생명임을 알고 너희가 기뻐하여도, 이것은 먼저 너희가 영원한 영에게서 태어나고 이로써 믿음으로 영생의 선물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면 너희에게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너희가 내 아버지의 믿음의 아들이어든 너희는 결코 죽지 않고 썩어 없어지지 아니할지니라. 하늘나라 복음은 너희에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가르쳤느니라. 하늘 아버지가 땅에 있는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이 좋은 소식은 온 세상에 전해져야 하느니라. 게리짐이나 예루살렘이 아니라, 너희가 있는 곳에서, 너희 그대로, 정신적으로, 진실하게 하나님을 예배할 때가 왔느니라. 너희의 혼을 구하는 것은 너희의 믿음이요, 구원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 그러나 속지 말지니, 구원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요,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수여되나, 육체를 입고 사는 이 영(靈) 생명의 열매를 맺는 체험이 따르느니라.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너희가 또한 사람이 형제라는, 관계된 진리를 자유로이 받아들임을 뜻하느니라. 그리고 사람이 네 형제이어든 그는 네 이웃보다 더 크며, 아버지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요구하시니라. 너의 형이나 동생은 네 가족에서 났은즉 너는 가족 사랑으로 사랑할 뿐 아니라, 또한 네가 네 몸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 같이 그를 위하여 수고하리라. 그리고 너희는 내 동포이매, 이처럼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를 위하여 수고하였으니, 너는 이처럼 네 형제를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수고하리라. 그러면 온 세상으로 가서, 이 좋은 소식을 모든 종족과 부족과 나라의 모든 인간에게 이르라. 내 영이 너희 앞에 갈지니, 내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193:1.3 (2054.1) 이 사마리아인들은 주가 이렇게 나타나신 것에 크게 놀랐고, 이웃 촌락과 마을로 서둘러 가서, 거기서 그들이 예수를 만났고 그가 그들에게 말씀했다는 소식을 널리 퍼뜨렸다. 그리고 이때 주는 상물질 모습으로 열 일곱 번째 나타나셨다.

2. 페니키아에서 나타나다

193:2.1 (2054.2) 티레에서 5월 16일, 화요일, 저녁 9시 조금 전에 주는 열여덟 번째로 상물질 모습으로 나타났다. 신자들의 모임이 끝나고, 막 흩어지려 할 때, 다시 나타나서 말씀했다:

193:2.2 (2054.3)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너희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사람의 아들이 살아난 것을 알고 기뻐하나니, 기뻐함으로 너희와 네 형제들이 또한 사람의 죽음을 거치고 살아날 줄을 너희가 아는 까닭이라. 그러나 그렇게 살아남는 것은 너희가 죽기 전에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찾는 영에게서 태어나는가에 달려 있느니라. 생명의 빵과 생명의 물은 오로지, 진리를 간절히 찾고 의로움―하나님―을 목마르게 찾는 자라야 받느니라. 죽은 자가 살아나는 사실은 하늘나라의 복음이 아니라. 이 큰 진리와 이 우주 사실이 모두 이 복음에 관계되나니, 그것들이 좋은 소식을 믿어서 생기는 결과의 일부요, 신앙으로 인하여, 행위로, 진실로, 영원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되는 자가 나중에 겪는 체험 속에 담겨 있는 까닭이라. 내 아버지는 모든 사람에게 이처럼 아들이 구원받음을 선포하라고 세상으로 나를 보내셨나니라. 그리고 마찬가지로 나는 아들이 이처럼 구원받음을 전파하라고 너희를 사방으로 보내노라. 구원은 하나님이 거저 주는 선물이지만, 영에게서 태어난 자는 즉시 동료 인간에게 사랑으로 봉사를 베푸는 데서 영의 열매를 즉시 내보이기 시작하리라. 그리고 영에게서 태어나고 하나님을 아는 필사자의 일생에서 열리는 신다운 영의 열매는, 사랑으로 베푸는 봉사, 사심 없는 헌신, 용감한 충성심, 성실하게 공정한 태도, 깨우친 정직함, 꺼지지 않는 희망, 맡기는 신뢰, 자비로운 봉사, 어김없는 선함, 용서하는 인내심, 오래 가는 평화이라. 신자라고 공언(公言)하는 자가 저희의 인생에서 이 신다운 영의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저희는 죽었고 진리의 영이 저희 안에 없나니라. 저희는 살아 있는 포도나무에 쓸모 없이 붙어 있는 가지요, 곧 제거되리라. 내 아버지는 믿음의 자녀들에게 영의 열매를 많이 맺으라 요구하시니라. 그런즉 너희가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너희 뿌리의 둘레를 파고, 열매 맺지 아니하는 가지를 쳐버리시리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늘을 향하여 나아가는 동안, 영의 열매를 갈수록 더 맺어야 하느니라. 너희는 어린아이로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도 좋지만, 아버지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영적(靈的) 어른만큼 키가 자라기를 요구하시니라. 그리고 이 복음에 담긴 좋은 소식을 모든 나라에 전하려고 너희가 바깥으로 갈 때, 나는 너희 앞에 가겠고, 내 진리의 영이 너희 마음 속에 거하리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두고 떠나노라.”

193:2.3 (2054.4) 그리고 나서 주는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튿날 이 이야기를 가지고 간 사람들이 티레를 떠나서 시돈, 그리고 안티옥과 다마스커스에도 갔다. 예수는 육체를 입었을 때 이 신자들과 함께 있었고, 그가 가르치기 시작하자 그들은 재빨리 그를 알아보았다. 친구들은 그의 상물질 모습이 눈에 보이게 되었을 때 쉽게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 말했을 때 결코 그의 인격을 알아보는 데 더디지 않았다.

3. 예루살렘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나다

193:3.1 (2055.1) 5월 18일 목요일 아침 일찍, 예수는 상물질 성격자로서 땅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났다. 열한 사도가 마리아 마가의 집 위층 방에서 아침을 먹으려고 막 앉으려 할 때, 예수는 그들에게 나타나서 말했다:

193:3.2 (2055.2)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갈 때까지, 아니 내가 진리의 영을 보낼 때까지도, 나는 너희에게 여기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부탁하였노라. 진리의 영이 모든 육체에 곧 퍼부어지고, 그는 하늘로부터 권능을 너희에게 부어 주리라.” 열심당원 시몬은 예수를 가로막고 물었다: “그러면 주여, 당신은 하늘나라를 회복하시겠나이까,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서 나타나는 것을 우리가 보리이까?” 시몬의 물음을 듣고 나서 예수는 대답했다: “시몬아, 너는 아직도 유대인 메시아와 물질적 왕국에 관한 옛 관념에 달라붙느니라. 그러나 영이 너희에게 내린 뒤에 너희는 영적 권능을 받을 것이요, 얼마 안 있어 온 세상으로 가서 이 하늘나라 복음을 전파하리라. 아버지가 나를 세상으로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마찬가지로 너희를 보내노라. 그리고 너희가 서로 사랑하고 믿기를 바라노라. 유다는 사랑이 식었기 때문에, 너희 충실한 형제들을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더 함께 있지 않느니라.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고, 아무도 혼자서만 살지 않느니라’ 이렇게 적힌 곳을 성서에서 너희는 읽지 아니하였느냐? 그리고 또한 쓰였으되: ‘친구를 가지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친절을 보여야 하느니라.’ 너희가 외롭게 되고 고립되는 재난과 불쌍한 처지에 빠지지 않도록 내가 너희를 가르치라고 둘씩 보내기까지 하지 않았더냐? 내가 육체를 입고 있을 때, 바로 내가 오랫동안 혼자 있도록 내가 버려두지 않은 것을 너희가 또한 잘 아느니라. 우리가 사귀던 바로 그 시초부터, 내가 아버지와 교통할 때에도, 나는 언제나 너희 가운데 두셋을 변함없이 곁이나 아주 가까이 두었노라. 그러므로 서로 신뢰하고 마음을 털어놓으라. 그리고 내가 너희를 세상에 외로이 두고 오늘 떠나려 하므로, 이것이 더군다나 필요하니라. 때가 왔느니라. 나는 아버지께 가려 하노라.”

193:3.3 (2055.3) 말씀을 마치고 나서, 그는 함께 오라고 손짓했고, 그들을 올리브산으로 이끌고 나갔다. 거기서 유란시아를 떠나는 준비로서 그들에게 작별을 알렸다. 이것은 올리브산까지 가는 엄숙한 여행이었다. 그들이 위층 방을 떠날 때부터 예수가 올리브산에서 함께 멈추었을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4. 유다가 패망한 원인

193:4.1 (2055.4) 주가 사도들에게 작별하면서 주신 말씀의 첫 부분에서, 유다를 잃은 것을 언급했고, 사회 및 친교에서 고립되는 위험에 대한 엄숙한 경고로서 배반한 동료 일꾼의 비극적 운명을 예로 들었다. 주의 논평에 비추어, 또 뒤이은 여러 세기 동안 누적된 깨우침에 비추어 보건대, 유다가 패망한 원인을 간단히 다시 살펴보는 것이 이 시대와 미래의 신자들에게 도움이 될까 한다.

193:4.2 (2055.5) 우리가 이 비극을 돌이켜보건대, 주로 유다가 아주 두드러지게 고립된 성격, 보통 있는 사회적 접촉에서 마음 문을 닫고 떨어져 있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잘못에 빠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동료 사도들에게 마음을 털어놓거나 자유로이 사귀기를 끈질기게 거절하였다. 그러나 고립된 종류의 성격인 것은, 그 자체로서 저절로, 그가 또한 사랑이 커지고 영적 은혜 속에서 성장하지 못한 일이 아니었다면, 유다에게 그런 해를 끼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엎친 데 덮쳐서, 그는 끈질지게 불평을 품었고, 복수심, 그리고 온갖 실망 때문에 버릇처럼 누군가에게 “받은 대로 갚기”를 몹시 바라는 마음, 이와 같은 정신적 적을 길렀다.

193:4.3 (2056.1) 개인의 습성과 정신적 성향의 이러한 유감스러운 조합은 사랑ㆍ믿음ㆍ신뢰로 이런 잘못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 선의를 가졌던 사람을 파멸로 이끌었다. 유다가 잘못된 길로 갈 필요가 없었다는 것은 토마스와 나다니엘의 경우에 잘 증명된다. 이 두 사람은 바로 이런 종류의 의심, 그리고 개별적 성향이 지나치게 두드러졌다. 안드레와 마태조차도 이러한 성향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이 사람들은 모두 예수와 동료 사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그들은 은혜 속에서, 진리를 아는 가운데서 성장했다. 형제들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동료들에게 속을 털어놓는 능력을 천천히 길렀다. 유다는 끈질지게 형제들과 마음을 털어놓으려 하지 않았다. 감정의 갈등이 쌓임으로 할 수 없이 자아 표현의 분출구를 찾았을 때, 항상 그는 비영적인 친척이나 어쩌다 알게 된 자의 조언을 찾고 지혜롭지 못한 위로를 받았는데, 그들은 하늘나라의 영적 현실의 복지와 진보에 관심이 없거나 이에 대하여 실제로 적의를 가졌고, 그는 땅에서 거룩하게 헌신한 대사, 그 하늘나라의 열두 대사 가운데 하나였다.

193:4.4 (2056.2) 다음의 개인적 성향과 인격의 약점이 원인이 되어 유다는 땅에서 투쟁에 실패하였다:

193:4.5 (2056.3) 1. 그는 고립된 부류의 인간이었다. 상당히 개인주의였고, 자라서 “문을 닫고” 사람과 사귈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된 종류의 사람이 되기를 선택했다.

193:4.6 (2056.4) 2. 어릴 때, 인생이 너무나 쉽게 풀려 나갔다. 좌절되는 것을 몹시 분개하였다.

193:4.7 (2056.5) 3. 실망에 부닥치는 철학적 기법을 결코 터득하지 못했다. 실망을 인간의 존재에서 정상(正常)으로 흔히 일어나는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대신에, 모든 개인적 문제와 실망 때문에 특별히 어떤 사람이나 동료 집단을 탓하는 버릇을 어김없이 따랐다.

193:4.8 (2056.6) 4. 불평 품기를 좋아했다. 언제나 복수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193:4.9 (2056.7) 5. 솔직하게 사실을 인정하기를 싫어 했다. 인생의 상황에 대하여 태도가 정직하지 않았다.

193:4.10 (2056.8) 6. 가까운 동료들과 개인적 문제를 의논하기 싫어 했고, 진짜 친구와 그를 참으로 사랑한 자들과 함께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과 관계를 가진 여러 해를 통틀어서, 결코 한 번도 순전히 개인적 문제로 주께 가지 않았다.

193:4.11 (2056.9) 7. 고귀한 인생에 대한 진정한 보상(報償)이 결국 영적 상(償)이라는 것을 그는 결코 배우지 못했는데, 영적 상은 육체를 입은 이 짧은 일생 동안에 반드시 분배되지는 않는다.

193:4.12 (2056.10) 인격의 고립이 지속되는 결과로서, 비통이 증가하고 슬픔이 늘어났으며, 걱정이 커지고 절망은 거의 견딜 수 없이 깊어졌다.

193:4.13 (2057.1) 자기 중심이고 극도로 개인주의인 이 사도가 정신ㆍ감정ㆍ영의 문제가 많이 있었지만, 다음이 주요한 문제였다: 그의 인격이 고립되었다. 그의 머리 속에 의심이 많았고 앙갚음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의 기질은 무뚝뚝하고 원한이 깊었다. 그의 감정에는 사랑도 용서도 없었다. 사회적으로 그는 속을 털어놓지 않고, 거의 온통 말이 없었다. 정신적으로 거만하고 이기적 포부를 가지게 되었다. 살아서 그는 자기를 사랑한 자를 무시(無視)하였고, 죽어서 친구가 없었다.

193:4.14 (2057.2) 그러면 이러한 것이 지적 요인이요 악의 영향이니, 한데 합쳐서, 어째서 선의를 가졌고 그밖에 한때 예수를 진지하게 믿었던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예수의 인격과 가까운 관계를 몇 년 동안 가진 뒤에도, 동료들을 버리고, 성스러운 운동을 거부하고, 그의 거룩한 직무를 저버리고, 신다운 주를 저버렸는가 설명한다.

5. 주의 승천

193:5.1 (2057.3) 5월 18일, 이 목요일 아침, 거의 7시 반이 되자, 예수는 말이 없고 얼마큼 어리둥절한 열한 사도와 함께, 올리브산 서쪽 비탈에 다다랐다. 이 위치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길 3분의 2쯤에, 그들은 예루살렘을 둘러보고 겟세마네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예수는 유란시아를 떠나기 전에, 이제 사도들에게 마지막 작별을 알리려고 준비했다. 그들 앞에 서자, 아무런 지시도 없이 그들은 둘레에 동그라미를 지어 무릎을 꿇었고, 주는 말씀했다:

193:5.2 (2057.4) “하늘로부터 너희가 권능을 부여받기까지 너희에게 예루살렘에서 머물라고 명하였고, 나는 이제 막 너희를 떠나려 하노라. 나는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려 하고, 곧, 금방 우리는 내가 머물렀던 이 세상에 진리의 영을 보내리라. 그가 온 뒤에, 너희는 먼저 예루살렘에서, 다음에 세상의 가장 먼 구석까지, 하늘나라 복음을 비로소 새로이 선포(宣布)할지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해 온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 같이 동료 필사자를 위하여 수고하라. 너희의 인생에서 열리는 영의 열매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모든 사람이 형제라는 진리를 사람들이 믿지 않을 수 없게 하여라. 너희에게 가르친 모든 것, 그리고 내가 너희 가운데서 살아 온 삶을 기억하여라. 내 사랑이 너희를 덮고, 내 영이 너희와 함께 살 것이요, 내 평화가 너희에게 거하리라. 잘 있거라.”

193:5.3 (2057.5) 이렇게 말씀을 마치자, 상물질(上物質) 주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른바 예수의 이 승천은 유란시아에서 40일 동안의 상물질 생애에 사람이 보는 앞에서 사라진 다른 경우와 아무 차이가 없었다.

193:5.4 (2057.6) 주는 예루셈을 거쳐 에덴시아로 갔고, 거기서 최고자들은 파라다이스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사렛 예수를 상물질 상태에서 해방하고, 영이 승천하는 경로를 거쳐서 그를 파라다이스 아들 지위와 구원자별의 최고 통치자 자리로 돌려보냈다.[1] [29]

193:5.5 (2057.7) 상물질 모습의 예수가, 완성된 네바돈 우주 통치권을 정식으로 확인받기 위하여 아버지의 바른 편으로 비로소 올라가려고, 열한 사도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사라진 것은 이날 아침 7시 45분쯤이었다.

6. 베드로가 모임을 소집하다

193:6.1 (2057.8) 베드로의 지시에 응하여, 요한 마가와 다른 사람들은 주요 제자들을 마리아 마가의 집으로 함께 부르려고 떠났다. 10시 30분이 되자, 예루살렘에서 살고 있는, 예수의 으뜸가는 제자 120명이 주의 작별의 말씀에 관한 보고를 듣고 승천 소식을 들으려고 모였다. 이 무리 가운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었다. 사도들이 최근에 갈릴리에 머물렀다가 돌아올 때 마리아는 요한 세베대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오순절이 지난 뒤에 마리아는 곧, 벳세다에 있는 살로메의 집으로 돌아갔다. 예수의 아우 야고보도 또한 이 모임에 와 있었는데, 이것은 주의 행성 생애가 끝난 뒤에 주의 제자들을 처음으로 소집한 회의(會議)였다.

193:6.2 (2058.1) 시몬 베드로는 동료 사도들을 대변하는 일을 나서서 맡았으며, 주와 열한 사도의 마지막 모임에 관하여 흥미 있는 보고를 드렸고, 주가 마지막으로 작별하고 승천하며 사라진 것을 아주 감동적으로 묘사했다. 그와 같은 모임은 일찍이 이 세상에서 일어난 적이 없었다. 그 모임의 이 부분은 한 시간이 채 안 걸렸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그들이 가룟 유다의 후계자를 고르기로 정했다, 이 자리에 제안된 두 사람, 맛디아와 유스도 사이에, 사도들이 결정할 수 있게 하려고 휴식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193:6.3 (2058.2) 그리고 나서 열한 사도는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거기서 이 사람들 가운데 누가 유다 대신에 수고할 사도가 될 것인가 결정하려고 제비를 뽑기로 찬성했다. 제비는 맛디아에게 떨어졌고, 그가 새 사도라는 선언이 있었다. 그는 그 직책에 정식으로 취임했고, 다음에 회계(會計)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후 사도들의 활동에서 맛디아는 거의 역할이 없었다.

193:6.4 (2058.3) 오순절 뒤에 곧, 쌍둥이는 갈릴리에 있는 자기 집들로 돌아갔다. 열심당원 시몬은 복음을 전도하러 떠나기 전에 얼마 동안 은둔했다. 토마스는 그보다 짧게 근심하다가 다시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다니엘은 예전의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는 대신에 예수에 관하여 전도하는 것에 대하여, 베드로와 갈수록 더 의견을 달리 했다. 다음 달 중순이 되어 이 의견(意見) 차이는 너무나 심해져서, 나다니엘은 물러났고, 아브너와 나사로를 찾아보려고 필라델피아로 갔다. 거기서 1년이 넘도록 머무른 뒤에, 메소포타미아 건너 땅으로 계속 가서, 그가 이해한 대로 복음을 전도했다.

193:6.5 (2058.4) 이것은 최초의 열두 명 가운데, 베드로ㆍ안드레ㆍ야고보ㆍ요한ㆍ빌립ㆍ마태, 이렇게 겨우 여섯 사도를 예루살렘에서 초기에 복음을 선포하는 무대에 배우(俳優)가 되도록 남겨놓았다.

193:6.6 (2058.5) 바로 정오 무렵에 사도들은 위층 방에 있는 형제들에게로 돌아갔고, 맛디아가 새 사도로 뽑혔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기도에 들어가라고 모든 신자를 불렀는데, 이 기도는 주가 보내기로 약속하신 영의 선물을 받으려고 준비되기 위한 것이었다.

제 194 편 진리의 영을 수여하다

유란시아서

제 194 편

진리의 영을 수여하다

194:0.1 (2059.1) 1시쯤에 신자 120명이 기도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모두가 이상한 것이 방에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동시에 이 제자들은 모두 새롭고 깊은 느낌, 곧 영적 기쁨ㆍ안전ㆍ자신감을 의식하게 되었다. 영적 힘을 이렇게 새롭게 의식하고 나서, 나가서 하늘나라 복음, 그리고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좋은 소식을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려는 강한 욕구가 뒤따랐다.

194:0.2 (2059.2) 베드로가 일어나서, 주가 그들에게 약속했던 진리의 영(靈)이 오신 것이 틀림없다고 선언하고, 그들이 성전으로 가서 그들의 손에 맡겨진 좋은 소식의 선포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베드로가 제안한 그대로 하였다.

194:0.3 (2059.3) 이 사람들은 그들이 전해야 하는 복음이 하나님이 아버지요 사람이 아들이라는 것을 훈련받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영적 환희와 개인적 승리를 느낀 바로 이 순간에, 이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식, 가장 큰 뉴스는 주가 부활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에서 권능을 받고, 떠나가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예수를 통하여 구원받는 것까지도―전파했지만, 뜻하지 않게, 복음 말씀 그 자체를 복음과 연결된 얼마큼의 사실로 바꿔치우는 잘못에 빠졌다. 베드로는 생각지 않고 이 실수에 앞장섰고, 다른 사람들은 계속 바울에 이르기까지 그의 뒤를 따랐으며, 바울은 좋은 소식의 신판(新版)으로부터 새 종교를 만들어냈다.

194:0.4 (2059.4) 하늘나라의 복음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 그리고 이와 함께 그 결과로 사람들이 아들이요 형제라는 진리이다. 그날부터 발전된 바와 같이 기독교는, 살아나고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와 함께, 신자의 친교 체험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194:0.5 (2059.5) 주를 죽이고 그의 가르침의 영향을 말소하려고 애썼던 세력을 이겼다는 느낌을 표현하려고 영을 받은 이 사람들이 이 기회를 낚아챈 것은 당연하다. 이와 같은 때에, 예수와 함께 가졌던 개인적 관계를 기억하고, 주가 아직도 살아 계시다, 그들의 우정은 끝나지 않았다, 주가 약속하신 대로 그 영이 정말로 그들에게 왔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쁨에 떨기가 더 쉬웠다.

194:0.6 (2059.6) 이 신자들은 갑자기 자신들이 다른 세상으로 옮겨갔다, 기쁨ㆍ권능ㆍ영광에 싸인 새로운 존재로 변했다고 느꼈다. 주는 그들에게 하늘나라가 권능을 가지고 오리라 일렀고, 더러는 그가 무슨 의미로 말씀했는가 비로소 깨닫는다고 생각했다.

194:0.7 (2059.7) 이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어떻게 이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버지요 사람이 형제라는, 예전에 전한 말씀 대신에 예수에 관한 새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는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1. 오순절 설교

194:1.1 (2060.1) 사도들은 40일 동안 숨어 있었다. 이날은 마침 유대인의 오순절(五旬節) 축제일이었고, 세계의 온 구석으로부터 수천의 방문자들이 예루살렘에 와 있었다. 많은 사람이 이 축제 때문에 도착했지만, 대다수는 유월절 뒤에 도시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겁이 난 이 사도들이 몇 주 동안의 은둔 생활에서 솟아나서 이제 대담하게 성전에 나타났고, 거기서 메시아가 살아났다는 새로운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사도가 마찬가지로 얼마큼 새롭게 통찰력과 힘을 영적으로 받았다는 것을 의식했다.

194:1.2 (2060.2) 2시쯤에, 베드로는 주가 이 성전에서 마지막으로 가르쳤던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열렬하게 연설하였고, 그 결과로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설득했다. 주는 가셨지만, 그들은 주에 관한 이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큰 힘을 가졌다는 것을 갑자기 발견했다. 그들이 전에 예수에게 헌신한 것이 옳았음을 입증하고, 동시에 사람들이 그를 믿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이야기를 더욱 선포하도록 계속 마음이 이끌린 것은 당연하다. 사도들 가운데 여섯 명, 베드로ㆍ안드레ㆍ야고보ㆍ요한ㆍ빌립ㆍ마태가 이 모임에 참석했다. 그들은 한 시간 반이 넘도록 이야기했고, 말씀을 그리스어ㆍ히브리어ㆍ아람어로 전했으며, 또한 말할 만큼 익숙한 다른 언어로도 몇 마디 하였다.

194:1.3 (2060.3) 유대인 지도자들은 사도들이 대담해진 것에 놀랐지만, 사도들의 이야기를 믿는 큰 무리 때문에 그들을 건드리기를 두려워했다.

194:1.4 (2060.4) 4시 반이 되어서, 2천 명이 넘는 새 신자들이 사도들을 따라서 실로암의 못으로 내려갔고, 거기서 베드로ㆍ안드레ㆍ야고보ㆍ요한은 주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군중에게 세례 주기를 마친 것은 어두워졌을 때였다.

194:1.5 (2060.5) 오순절은 세례받는 큰 축제요, 대문에서 전향자(轉向者), 즉 야웨 섬기기를 소망하는 이방인과 사귀는 때였다. 따라서 큰 무리의 유대인과 이방(異邦) 신자들이 이날에 세례받는 것이 더 수월했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어떤 면에서도 유대 신앙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이 뒤에도 얼마 동안, 예수 믿는 자들은 유대교 안에 있는 한 종파였다. 사도들을 포함해서 그들 모두가 유대인 예식 체계의 기본 요건에 아직도 충성했다.

2. 오순절의 중요성

194:2.1 (2060.6) 예수는 땅에서 살았고, 사람이 악마의 자식이라는 미신으로부터 사람을 되찾고 하나님의 아들, 믿음의 아들의 위엄까지 올려놓은 복음을 가르쳤다. 예수가 전한 말씀은 당대에 그가 전도하고 실천한 바와 같이, 말씀했던 시절에 사람의 영적 문제에 대한 효과적 해결책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세상을 떠났으니까, 그는 자기 대신에 진리의 영을 보낸다. 이 영은 사람 속에서 살고, 새로운 각 세대를 위하여 예수의 말씀을 다시 진술(陳述)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그래서 땅의 표면에서 나타날 새 집단의 필사자마다 새로운 최신판 복음을 가지게 될 것이요, 바로 그러한 개인적 깨우침과 집단을 위한 지침은 사람의 늘 새롭고 다채로운 영적 문제에 효과적 해결책인 것이 입증될 것이다.

194:2.2 (2060.7) 물론, 이 영의 첫 사명은 진리를 육성하고 개인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니, 이는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높은 형태의 인간의 해방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이 영의 목적은 신자에게서 고아라는 느낌을 없애는 것이다. 예수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았으니까, 진리의 영이 사람의 마음 속에서 거하려고 오지 않았다면, 모든 신자가 외로운 느낌을 맛볼 것이다.

194:2.3 (2061.1) 아들의 영을 이렇게 수여한 것은 온 인류에게 나중에 아버지 영(조절자)의 보편적 수여를 위하여 모든 정상(正常) 인간의 지성을 효과적으로 준비시켰다. 어떤 의미에서, 이 진리의 영은 우주의 아버지와 창조 아들, 이 두 분의 영이다.

194:2.4 (2061.2) 퍼부어진 진리의 영을 뚜렷이 지적으로 의식하게 되기를 기대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그 영은 결코 영 자신을 의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미가엘, 곧 아들을 의식하게 만든다. 처음부터 예수는 진리의 영이 스스로 말하지 않으리라 가르쳤다. 그러므로 네가 진리의 영과 친교한다는 증명은 이 영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가엘과 향상된 친교(親交)를 가지는 체험에서 발견된다.

194:2.5 (2061.3) 그 영은 또한 땅에서 사신 주의 일생을 비추고 다시 풀이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도와서 주의 말씀을 회상하고 알아듣게 하려고 왔다.

194:2.6 (2061.4) 다음에, 예수가 육체를 입고 살았던 것 같이, 또 영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세대, 지나가는 각 세대의 신자 한 사람 한 사람 속에서 지금 다시 새로이, 거듭하여 사는 것 같이, 진리의 영은 신자가 예수의 가르침과 일생이 현실이었다고 증언하는 것을 도우려고 왔다.

194:2.7 (2061.5) 그래서 진리의 영은 정말로, 모든 신자를 모든 진리로, 하나님의 아들, 하늘 가는 영원한 아들이라는 현실을 생생하게, 그리고 차츰차츰 영적으로 의식하는 체험을 더욱 알도록 이끌려고 오는 것처럼 보인다.

194:2.8 (2061.6) 예수는, 누구라도 글자 그대로 따르려고 애쓸 본보기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복종한 사람을 드러내는 일생을 살았다. 육체로 산 이 일생은, 십자가에서 죽고 나중에 부활한 것과 함께, 당장에 사람을 악마의 손아귀로부터―기분 상한 하나님으로부터 죄가 있다고 판결받지 않도록―사람을 도로 사려고 이처럼 몸값을 치렀다는 새 복음이 되었다. 그러나 비록 그 복음이 크게 왜곡되었어도, 예수에 대한 이 새 소식이 초기의 하늘나라 복음의 근본 진리와 가르침을 많이 지녔다는 것이 사실이다. 머지 않아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사람이 형제라는 이 감추어진 진리가 솟아나서 온 인류의 문명을 효과적으로 바꿀 것이다.

194:2.9 (2061.7) 그러나 지능의 이러한 잘못은 어떤 면에서도 신자(信者)가 영적으로 크게 진보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진리의 영이 내린 뒤 한달이 채 안 되어, 주와 함께 몸소 사랑에 넘친 관계를 가졌던 거의 4년 동안보다, 사도들 하나하나가 영적으로 더 진보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유익한 복음의 진실을 예수가 부활한 사실로 이렇게 갈아치운 것도, 그들의 가르침이 빠르게 전파되는 것을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의 인물과 부활에 관한 새로운 가르침 때문에 예수의 말씀이 빛을 잃은 것은 좋은 소식의 전파를 크게 용이하게 만든 듯하였다.

194:2.10 (2061.8) “영의 세례”라는 용어는 이 무렵에 아주 널리 쓰이게 되었는데, 다만 이렇게 진리의 영이 수여된 것을 의식하여 받아들이고, 이 새로운 영적 능력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이전에 겪은 모든 영적 영향이 확대된 것임을 개인적으로 인정함을 의미한다.

194:2.11 (2061.9) 진리의 영이 수여된 이후로 사람은 아버지의 영, 즉 생각 조절자, 아들의 영, 즉 진리의 영, 영의 영, 즉 성령, 이렇게 세 가지 영의 가르침과 안내에 지배된다.

194:2.12 (2062.1) 어떤 면에서, 인류는 우주 영(靈)의 일곱 가지 영향력이 미치는 이중 세력에 지배된다. 초기의 진화 종족의 필사자는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의 일곱 보조 지성 영의 점진적 접촉에 지배를 받는다. 지능과 영적 인식의 눈금에서 사람이 위로 올라감에 따라서, 궁극에 일곱 가지 상급 영적 세력이 사람 위에 떠돌고, 사람 안에 거하게 된다. 그리고 진보하는 여러 세계에 있는 이 일곱 영은 다음과 같다:

194:2.13 (2062.2) 1. 우주의 아버지가 내리신 영―생각 조절자.

194:2.14 (2062.3) 2. 영원한 아들의 영적 계심―온 우주의 영 인력(引力), 모든 영의 교통에 쓰이는 확실한 경로.

194:2.15 (2062.4) 3. 무한한 영의 영적 계심―모든 창조에 널리 있는 영 지성, 모든 진보하는 지성 존재가 가진 지적(知的) 인척 관계의 영적 근원.

194:2.16 (2062.5) 4. 우주의 아버지와 창조 아들의 영―진리의 영, 이것은 대체로 우주 아들의 영으로 여겨진다.

194:2.17 (2062.6) 5. 무한한 영과 우주 어머니 영의 영―성령(聖靈), 이것은 대체로 우주 영의 영으로 여겨진다.

194:2.18 (2062.7) 6. 우주 어머니 영의 지성 영―지역 우주의 일곱 보조 지성 영(靈).

194:2.19 (2062.8) 7. 아버지와 아들들과 영들의 영―영에게서 태어난 필사자의 혼이 파라다이스의 생각 조절자와 융합한 뒤에, 그리고 나중에 파라다이스 최후 군단에서 신답고 영화로운 지위에 이른 뒤에, 그 영역에서 하늘 가는 필사자가 가지는 새로운 이름의 영.

194:2.20 (2062.9) 그래서 진리의 영이 내린 것은 하나님을 찾아서 승천하는 탐구를 도우려고 고안된 최종의 영 재산을 세상으로, 또 거기 있는 민족들에게 가져왔다.

3. 오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94:3.1 (2062.10) 야릇하고 이상한 많은 가르침이 오순절 날에 대한 초기의 이야기와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 진리의 영, 즉 새 선생이 인류와 함께 거하려고 온 이날에 일어난 사건들은 후세에, 어리석게도 감정 중시 주의가 갑자기 확산되는 것과 혼동되었다. 쏟아진 이 아버지와 아들의 영의 주요한 사명은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자비로움에 관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신다운 모든 다른 신격 특성보다 사람들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신성(神性)의 진실이다. 진리의 영은 1차적으로 아버지의 영 성품과 아들의 도덕적 품위를 드러내는 데 관심을 가진다. 창조 아들은 육체를 입고서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드러냈다. 진리의 영은 마음 속에서 창조 아들을 사람들에게 드러낸다. 일생에 “영의 열매”를 맺을 때, 사람은 다만 땅에서 산 자신의 일생에서 주가 나타낸 특성을 내보이는 것이다. 땅에 살았을 때, 예수는 하나의 인격자로서―나사렛 예수로서―일생을 살았다. 사람에게 깃드는 “새 선생”의 영으로서, 오순절 뒤로, 주는 진리를 가르침 받은 각 신자의 체험 속에서 일생을 새로이 살 수 있었다.

194:3.2 (2062.11) 인생을 사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이 이해하기 힘들고, 이 우주에서 진리가 지배하고 그 속에서 올바름이 승리한다는 관념과 조화시키기가 어렵다. 너무나 흔히 중상(中傷)ㆍ거짓말ㆍ부정직(不正直)ㆍ불의―죄―가 이기는 것처럼 보인다. 궁극에 믿음이 악ㆍ죄ㆍ불의를 이기는가? 이긴다. 예수의 일생과 죽음은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의 선이 진실하고 그의 믿음이 언제나 정당화되리라는 영원한 증명이다. “하나님이 와서 구원할 것인가 보자” 하면서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비웃었다. 십자가에 처형되는 그날은 어둡게 보였지만, 부활의 아침은 영화롭게 밝았다. 오순절 날은 더욱 밝고 더욱 즐거웠다. 비관적으로 절망하는 종교들은 인생의 짐에서 벗어나기를 찾으며, 끝없이 잠자고 쉬는 가운데 멸종되기를 바란다. 이것들은 원시의 두려움과 공포에서 생긴 종교이다. 예수의 종교는 허덕이는 인류에게 선포해야 할 새로운, 믿음의 복음이다. 이 새 종교는 믿음ㆍ희망ㆍ사랑에 바탕을 둔다.

194:3.3 (2063.1) 필사의 일생은 예수에게 아주 힘들고, 아주 모질고, 아주 심한 타격을 입혔다. 이 사람은 믿음과 용기,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흔들리지 않는 결심으로 이 절망스러운 직무에 대응하였다. 예수는 모든 끔찍한 현실 가운데서 인생을 살고―죽을 때에도―인생을 통달하였다. 인생에서 해방되려고 종교를 사용하지 않았다. 예수의 종교는 또 다른 존재에서 기다리는 더없는 기쁨을 누리려고 이 생명에서 벗어나기를 추구하지 않는다. 예수의 종교는 사람이 육체를 입고 지금 사는 인생을 높이고 고상하게 만들기 위하여 또 다른 영적 존재의 기쁨과 평화를 마련해 준다.

194:3.4 (2063.2) 종교가 사람들에게 아편이라면, 그것은 예수의 종교가 아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감각을 마비시키는 약을 마시기를 물리쳤고, 모든 육체에 쏟아진 그의 영은 사람을 위로 이끌고 앞으로 재촉하는, 힘찬 세계적 영향이다. 앞을 향하는 영적 욕구는 이 세상에 있는 가장 힘센 추진력이다. 진리를 배우는 신자는 땅에서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다.

194:3.5 (2063.3) 오순절 날에 예수의 종교는 민족의 제한과 종족의 사슬을 모두 깨뜨렸다. 이것은 언제까지나 진리이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해방이 있다.” 이날에 진리의 영은 주가 모든 필사자에게 친히 주신 선물이 되었다. 이 영은 하늘나라 복음을 더욱 효과 있게 전파하라고 신자들에게 자격을 주는 목적으로 내렸지만, 그들은 쏟아진 영을 받는 체험이,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면서 형성하는 새 복음의 일부라고 잘못 생각했다.

194:3.6 (2063.4) 진리의 영이 모든 성실한 신자에게 수여되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라. 이 영 선물은 사도들에게만 내린 것이 아니다. 위층 방에 모인 남녀 120명은 모두, 온 세상에 두루, 마음이 정직한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새 선생을 받았다. 이 새 선생은 인류에게 수여되었고, 진리를 사랑하는 데 따라서, 그리고 영적 실체를 깨닫고 이해하는 능력에 따라서, 모든 사람이 받았다. 마침내, 참 종교는 사제(司祭)들과 모든 신성한 계급의 보호를 받던 처지에서 벗어나 한 사람 한 사람의 혼 속에서 그 진정한 표현을 발견한다.

194:3.7 (2063.5) 예수의 종교는 가장 높은 부류의 영적 인격을 만들어내고 그 사람의 신성함을 선포하므로, 가장 높은 종류의 인간 문명을 육성한다.

194:3.8 (2063.6) 오순절에 진리의 영이 온 것은 과격하지도 보수적이지도 않은 종교를 가능하게 만들며, 그런 종교는 낡은 것도 새로운 것도 아니다. 늙은이나 젊은이에게 지배되어서도 안 된다. 예수가 땅에서 살았다는 사실은 시간을 표시하는 닻을 내리기 위하여 고정된 점을 마련해 주며, 한편 진리의 영을 수여한 것은 그가 실천한 종교와 선포한 복음을 영구히 확장하고 끝없이 성장하게 만든다. 그 영은 모든 진리로 안내하며, 영은 끝없이 진보하고 신성하게 펼쳐지는 종교, 확대되고 늘 성장하는 종교를 가르치는 선생이다. 이 새 선생은 진리를 찾는 신자에게 사람의 아들의 인격과 성품 안에 아주 거룩하게 접혀 있던 것을 언제까지나 펼쳐줄 것이다.

194:3.9 (2064.1) “새 선생”을 주신 것과 관련되어 나타난 현상,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함께 모였던 여러 종족과 민족의 사람들이 사도들의 전도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예수의 종교가 보편성이 있음을 가리킨다. 하늘나라 복음은 어떤 특별한 민족이나 문화나 언어와도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이 오순절 날은 예수의 종교를 자체가 물려받은 유대인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려고 영이 크게 노력했음을 입증했다. 모든 육체에 영이 쏟아지는 이 전시가 있은 뒤에도, 처음에 사도들은 개종한 사람들에게 유대교의 요구 조건을 부과하려고 애썼다. 바울조차도 이방인을 이 유대 관습에 복종시키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형제들과 다툼이 있었다. 어떤 계시(啓示)된 종교도 어떤 민족 문화에 젖게 되거나, 아니면 기존의 종족ㆍ사회 또는 경제 관습과 연결되는 심각한 잘못을 저지를 때에는 온 세상에 퍼질 수 없다.

194:3.10 (2064.2) 진리의 영의 수여는 어떤 형태와 예식과 신성한 장소에도, 그 영이 충분히 나타난 것을 맛본 자의 특별한 행위에도, 달려 있지 않다. 그 영이 위층 방에 모인 사람들에게 닥쳤을 때, 그들은 말없이 기도에 막 들어갔으니까, 그저 거기에 앉아 있기만 했다. 그 영은 도시 뿐 아니라 시골에도 내렸다. 사도들이 그 영을 받기 위하여, 몇년 동안 혼자서 명상하려고 외로운 곳으로 따로 갈 필요가 없었다. 언제까지나 오순절은 영적 체험의 관념과 특별히 유리한 환경에서 얻는다는 개념을 별개의 것으로 만든다.

194:3.11 (2064.3) 오순절은, 그날 영적으로 부여된 것과 함께, 언제까지나 주의 종교를 물리적 세력에 전혀 의존하지 않도록 해방하려고 고안되었다. 이 새 종교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이제 영적 무기를 갖추었다. 그들은 어김없는 용서, 견줄 데 없는 선의(善意), 풍부한 사랑으로, 나가서 세상을 정복해야 한다. 그들은 선으로 악을 이기고, 사랑으로 미움을 정복하고, 진리 속에서 용감하고 팔팔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길 장비를 갖추었다. 예수는 그의 종교가 결코 소극적이 아니라고 이미 추종자들에게 가르쳤다. 제자들은 봉사를 베푸는 데, 사랑을 드러내는 데, 언제나 활발하고 적극성이 있어야 했다. 이 신자들은 이제 더 야웨를 “만군의 주”로 바라보지 않았다. 이제 영원한 신을 “하나님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여겼다. 하나님이 또한 누구에게도 영적 아버지라는 진리를 충분히 깨닫는 데 어느 정도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적어도 거기까지 진보했다.

194:3.12 (2064.4) 개인적으로 상처받은 것을 용서하고, 가장 지독한 불의(不義) 한가운데서도 부드러움을 유지하며, 끔찍한 위험이 앞에 닥쳐도 차분히 있으며, 두려움 없이 사랑과 인내의 행위로 미움과 진노의 악에 도전하는 힘을 오순절은 필사 인간에게 주었다. 유란시아는 그 역사 속에서 파괴적인 여러 대전쟁의 상처를 겪었다. 이러한 끔찍한 투쟁에 참여한 모든 편이 패배했다. 승자는 오직 하나 있었다. 이 모진 투쟁에서 평판이 높아져 솟아난 유일한 승자가 있었으니―곧 나사렛 예수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그의 복음이었다. 더 좋은 문명을 세우는 비결은 인간이 형제라는 주의 가르침, 사랑하고 서로 신뢰하는 선의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194:3.13 (2065.1) 오순절이 닥칠 때까지, 종교는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을 드러냈을 뿐이다. 오순절 이후에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을 찾고 있지만, 하나님이 또한 사람을 찾고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내고 나서 그 사람 안에서 거하라고 자신의 영을 보내는 광경이 온 세상을 비추고 있다.

194:3.14 (2065.2) 오순절에 절정에 이른 예수의 가르침이 있기 전에, 더 오래 된 여러 종교의 교리에는 여자에게 거의 또는 아무런 영적 지위가 없었다. 오순절 이후에, 하늘나라의 형제 단체에서 여자와 남자는 동등하게 하나님 앞에 섰다. 이렇게 영의 특별한 방문을 받은 120명 가운데 여인 제자가 많이 있었고, 그들은 이 축복을 남자 신도와 똑같이 나누어 가졌다. 예배 의식을 주관하는 성직을 이제 더 남자가 감히 독점할 수 없다. 바리새인은 “여자나 문둥병자나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계속 감사드릴지 모르지만, 예수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여자는 성에 근거를 둔 온갖 종교적 차별에서 언제까지나 해방되었다. 오순절은 종족의 특징, 문화의 차이, 사회 계급, 또는 성(性) 편견에 근거를 둔, 모든 종교적 차별을 없애버렸다. 새 종교를 믿는 이 신자들이 “주의 영이 있는 곳에 해방이 있다”하고 늘 외쳤던 것이 당연하다.

194:3.15 (2065.3) 예수의 어머니와 아우가 120명의 신자들 사이에 있었고, 이 보통 제자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또한 쏟아부은 영을 받았다. 이들은 좋은 선물을 동료들보다 더 많이 받지 않았다. 아무런 특별한 선물이 땅에서 예수의 집안 사람들에게 내려지지 않았다. 오순절은 특별한 사제 계급과 신성한 가족에 대한 온갖 관념의 종말을 고했다.

194:3.16 (2065.4) 오순절 이전에, 사도들은 예수를 위하여 많은 것을 버렸다. 집과 가족과 친구, 속세의 물건과 지위를 바쳤다. 그들은 오순절에 하나님께 헌신하였고, 아버지와 아들은 자신들을 사람에게 줌으로―사람 안에서 살라고 그들의 영을 보내어―응답했다. 자아(自我)를 버리고 영을 얻는 이 체험은 감정적 체험이 아니었다. 총명하게 자아를 포기하고, 아낌없이 거룩하게 바치는 행동이었다.

194:3.17 (2065.5) 오순절은 복음을 믿는 자들 사이에 영적 단결의 부름이었다. 그 영이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에게 내려왔을 때, 똑같은 일이 필라델피아와 알렉산드리아에, 참 신자들이 거하는 모든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신자 무리 가운데 오로지 한 마음과 혼이 있었다”는 것이 글자 그대로 참말이었다. 예수의 종교는 세상이 일찍이 본 가운데, 가장 강력한 통일하는 영향력이다.

194:3.18 (2065.6) 오순절은 개인ㆍ집단ㆍ나라ㆍ종족들의 자기 주장을 줄이려고 예정된 것이다. 긴장이 너무 고조되어 이따금 파괴하는 전쟁으로 터져나오는 것은 이 자기 주장의 정신이다. 인류는 오직 영적 접근으로 통일될 수 있고, 진리의 영은 세계에 보편적 영향력이다.

194:3.19 (2065.7) 진리의 영이 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받는 자를 오직 하나님의 뜻과 사람들의 복지에 마음을 다하는, 일생의 목적을 표현하도록 인도한다. 이기심(利己心)이라는 물질적 정신은 영적으로 새로이 내려준 이 사심없는 정신에 먹혀 사라졌다. 그때에도 지금도, 오순절은 역사 속의 예수가 실제로 체험하는 신의 아들이 되었음을 가리킨다. 쏟아진 이 영을 받는 기쁨을 인간 생활에서 의식하며 맛보았을 때, 이는 건강에 좋은 강장제요, 지성에 자극이요, 혼에 한없는 에너지이다.

194:3.20 (2065.8) 기도가 오순절 날에 영을 데려오지 않았지만, 기도는 각 신자의 특징을 나타내는, 영을 받는 능력을 결정하는 데 많이 상관되었다. 기도는 아낌없이 영을 내리도록 신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지만, 아주 흔히 더 크고 더 깊은 길을 파며, 그래서 그 길로, 성실한 기도와 참된 예배를 통해서, 잊지 않고 창조주와 끊임없는 교통을 유지하는 사람의 가슴과 혼으로, 신이 내려주시는 것이 흘러갈 수도 있다.

4. 기독교 교회의 시작

194:4.1 (2066.1) 예수가 그렇게 갑자기 적들에게 붙잡히고, 그렇게 빨리 두 도둑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사도와 제자들은 완전히 사기(士氣)가 꺾였다. 주가 체포되고 묶이고 채찍 맞고 십자가에 달렸다는 생각은 사도들에게도 너무 지나쳤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과 경고를 잊어버렸다. 그는 정말로 “하나님과 모든 사람 앞에서 행위와 말씀이 힘찬 선지자”였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희망했던 대로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할 메시아는 도저히 될 수 없었다.

194:4.2 (2066.2) 다음에 부활과 함께 절망에서 벗어나고, 그들이 주의 신성을 믿는 신앙이 회복된다. 거듭해서 주를 만나고 주와 함께 이야기하며, 그는 그들을 올리브산으로 데리고 나가서, 거기서 작별(作別)을 알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간다고 일러준다. 그들이 권능을 부여받을 때까지―진리의 영이 올 때까지―예루살렘에서 머물라고 이른다. 그리고 오순절 날에 이 새 선생이 오고, 그들은 당장에 새 힘을 얻어 복음을 전파하러 나간다. 죽어서 패배한 지도자가 아니라, 살아 계신 주를 대담하고 용감하게 따르는 사람들이다. 주는 이 전도자들의 가슴 속에 살아 계신다. 하나님은 이들의 머리 속에 있는 교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혼 속에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

194:4.3 (2066.3) “날마다 저희는 굳세게 마음을 합하여 성전에서 계속 모였고 집에서 빵을 나누었더라. 먹을 것을 기쁨으로, 한 마음으로 받았고, 저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모든 사람의 지지를 얻었더라. 저희 모두가 영으로 충만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으며, 믿은 군중은 한 마음과 한 뜻을 가졌고, 저희 가운데 한 사람도 무엇을 가졌든지 제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함께 썼더라.”

194:4.4 (2066.4)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사람이 서로 형제라는 하늘나라 복음을 나가서 전도하라고 예수가 세웠던 이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들은 새 복음을 가졌고, 새 체험으로 불이 붙었으며, 새로운 영적 에너지로 가득 찼다. 그들이 전하는 말씀은 살아나신 주를 선포하는 것으로 갑자기 바뀌었다: “나사렛 예수, 막강한 행적과 이적으로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 하나님이 미리 아신 것 같이, 굳게 결의한 법정이 넘겨준 주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죽였도다. 그는 모든 선지자의 입으로 하나님이 미리 알려준 것들을 이처럼 이루셨느니라. 하나님이 이 예수를 살렸고, 하나님은 그를 주, 그리스도로 만들었느니라. 하나님의 바른 손으로 높임을 받고, 아버지로부터 영의 약속을 받았으므로, 그는 너희가 보고 듣는 영을 퍼부었도다. 너희의 죄가 지워지고, 아버지가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그리스도를 보내도록 회개하라. 모든 것이 회복되는 시절까지 하늘은 그 예수를 받아들여야 하느니라.”

194:4.5 (2066.5) 하늘나라 복음, 예수가 가르친 말씀은, 갑자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질되었다. 그들은 이제 예수가 살다가 죽고 부활한 사실을 선포했고, 그가 시작한 일을 마치려고 이 세상으로 빨리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전파했다. 그래서 초기 신자들이 전한 소식은 그가 처음에 오셨던 사실에 관하여 전도하는 것, 그리고 그가 다시 오신다는 희망을 가르치는 것과 상관되었고, 그들은 그의 두 번째 오심이 아주 가까이 다가올 사건이라고 생각하였다.

194:4.6 (2067.1) 그리스도는 바야흐로 급속히 형성되는 교회의 신조가 되려고 했다. 그는 살아 있고, 사람들을 위해 죽었으며, 영을 주었고, 다시 오신다. 예수는 신자들의 모든 생각을 채웠고, 하나님과 그밖에 모든 다른 것에 대하여 모든 새로운 개념을 좌우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 예수의 아버지”라는 새 교리에 너무 열중해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아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랑의 아버지이라”는 예전에 전하던 말씀에 아랑곳할 수 없었다. 형제 사랑과 전례 없는 선의가 신자들의 이 초기 공동체에서 놀랍게 표현된 것은 참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를 믿는 신자들의 친교였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가족 국가에 속하는 형제들의 친교가 아니었다. 그들의 선의(善意)는 예수가 수여되었다는 개념에서 태어난 사랑에서 솟아났고, 필사 인간이 형제임을 인식한 데서 생겨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쁨으로 충만하였고, 모든 사람이 예수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에 이끌리는 그러한 새롭고 독특한 인생을 살았다. 하늘나라 복음 대신에, 그 복음에 관한 활기있고 해설적 논평을 사용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것조차도 인류가 일찍이 알게 된 가장 위대한 종교였다.

194:4.7 (2067.2) 새로운 친교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믿은 군중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친교, 빵을 같이 먹고 기도하기를 꾸준히 계속하였더라.” 그들은 서로 형제와 자매라고 불렀다.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인사했고, 가난한 자를 보살폈다. 그것은 예배할 때뿐 아니라 살면서 가지는 친교였다. 그들은 법령 때문에 공동체인 것이 아니라, 재물을 동료 신자와 함께 나누려는 소망 때문에 공동체였다. 자기 세대 안에 아버지의 나라를 세우는 일을 마치려고 예수가 돌아올 것이라 자신 있게 기대했다. 땅에 있는 소유물을 자진하여 이렇게 나누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직접 나타난 특징이 아니었다. 할 일을 마치고 하늘나라를 완성하려고 그가 언제라도 돌아오리라고, 이 남녀들이 아주 진지하고 자신 있게 믿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생각이 모자라는 이 형제 사랑을 좋은 의도로 이렇게 실험한 마지막 결과는 비참했고 불행을 낳고 있었다. 수천의 성실한 신자들이 재산을 팔고 그들의 자본재(資本財)와 기타 생산적 자산을 처분해버렸다. 시간이 지나자, 기독교인들의 “똑같이 나누는” 재산은 줄어들어 종말에 이르렀다―그러나 세상은 종말에 이르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안티옥의 신자들은 예루살렘의 동료 신자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돈을 걷고 있었다.

194:4.8 (2067.3) 이 시절에 그들은 주의 만찬(晩餐)을 제정된 방식에 따라서 축하했다. 다시 말해서, 사이 좋게 친교하는 회식을 위하여 모였고 식사가 끝날 때 성찬을 들었다.

194:4.9 (2067.4) 처음에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거의 20년이 지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기 시작했다. 세례가 신자의 친교에 가입하는 데 유일한 조건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아무런 조직이 없었고, 단지 예수를 믿는 형제 단체였다.

194:4.10 (2067.5) 이 예수 종파는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고, 다시 한 번 사두개인들이 그들을 주목했다. 그 가르침 가운데 아무것도 전혀 유대 율법의 준수를 방해하지 않는 것을 알고서, 바리새인들은 그 상황을 꺼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예수 종파의 지도자들을 감옥에 넣기 시작했고, 이것은 유력한 랍비들 중의 한 사람, 가말리엘의 조언을 받아들이라고 설득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가말리엘은 이들에게 조언하였다, “이 사람들을 멀리하고 버려두라. 이 회의나 이 일이 사람에게서 생겨났다면 뒤집히려니와 하나님에게서 생겨났다면, 너희가 뒤집어엎을 수 없을 것임이라. 아마도 너희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는 것까지 발견될까 두려우니라.” 그들은 가말리엘의 조언을 따르기로 결정했고, 예루살렘에서 평화롭고 조용한 시간이 뒤따랐으며, 이 동안에 예수에 관한 새 복음은 빨리 퍼졌다.

194:4.11 (2068.1)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인들이 큰 무리를 지어 올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만사가 순조로웠다. 로단의 생도 두 명이 예루살렘에 도착했고, 헬라파 사이에서 사람을 많이 개종(改宗)시켰다. 그들이 초기에 개종한 사람들 가운데 스테반과 바나바가 있었다. 이 유능한 그리스인들은 그다지 유대인의 관점을 가지지 않았고, 유대인 형태의 예배와 기타 예식 절차를 잘 따르지 않았다. 이 그리스인 신자들의 행위 때문에, 예수 단체와 바리새인 및 사두개인들 사이에 평화로운 관계가 종결되었다. 스테반과 그리스인 동료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더 가깝게 전도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유대인 권력자들과 직접 충돌하게 만들었다. 스테반의 한 대중 설교에서, 그가 강연의 못마땅한 부분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모든 재판 형식을 걷어치우고, 나서서 그 자리에서 그를 돌로 쳐 죽였다.

194:4.12 (2068.2) 스테반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믿는 자들 중에서 그리스 거류민의 지도자였고, 이렇게 새 신앙의 첫 순교자요, 초기 기독교회를 정식으로 조직하는 구체적 원인이 되었다. 이 새로운 위기로 인하여 신자들은 이제 더 유대 신앙 안에 있는 한 종파로서 계속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불신자들과 따로 독립해야 한다고 모두 찬성했다. 스테반이 죽은 지 한 달 안에,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의 지도 하에서 조직되었고, 예수의 아우 야고보가 그 교회에서 이름으로는 우두머리로 임명되었다.

194:4.13 (2068.3) 그리고 나서 유대인들의 새롭고 무자비한 박해가 터졌으며, 예수에 관한 이 새 종교를 안티옥에서 나중에 기독교라고 불렀는데, 그래서 이 종교를 활발하게 가르치는 선생들은 떠나서 예수를 선포하면서 제국의 끝까지 갔다. 바울의 시절 이전에, 이 소식을 가지고 가는 주도권은 그리스인의 손에 있었다. 이 첫 선교사들은 후일의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옛날에 알렉산더가 행진한 길을 따라서, 가자와 티레를 거쳐, 안티옥, 다음에 소 아시아를 지나서 마케도니아까지, 그런 뒤에 계속 로마까지, 그리고 제국의 가장 먼 구석까지 갔다.

제 195 편 오순절 이후

유란시아서

제 195 편

오순절 이후

195:0.1 (2069.1) 오순절에 베드로가 설교한 결과는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려고 노력하는 데 사도들 대다수의 미래 정책을 결정하고 계획을 확정할 만큼 대단했다. 베드로는 기독교회의 진정한 창시자였다. 바울은 기독교의 소식을 이방인에게 가져갔고, 그리스인 신자들은 이를 온 로마 제국으로 가져갔다.

195:0.2 (2069.2) 전통에 묶여 있고 사제에게 억눌려 있던 히브리인은 한 민족으로서, 하나님은 아버지요 사람은 서로 형제라는 예수의 복음이나, 또는 그리스도가 부활하고 승천했다고 베드로와 바울이 선포한 것을 (후일에 기독교) 믿지 않았어도, 로마 제국의 나머지는 생성되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좋게 받아들인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서양 문명은 이 시절에 지적(知的) 문명이었고, 전쟁에 지쳐 있고, 모든 기존 종교와 우주 철학에 대하여 철저히 회의를 품었다. 그리스 문화의 수혜자인 서양 세계의 민족들은 존경받는 전통, 위대한 과거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철학ㆍ예술ㆍ문학 면에, 그리고 정치의 발전에서 물려받은 큰 업적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업적이 있었어도 마음에 흡족한 종교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몹시 바라던 영적 소망은 채워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195:0.3 (2069.3) 그러한 인간 사회의 무대에, 기독교가 전파한 말씀에 담겨 있는 예수의 가르침이 갑자기 밀어닥쳤다. 이 서양 민족들의 간절한 마음에 이렇게 새 체제의 생활이 제시되었다. 이 상황은 더 오래 된 종교 관습, 그리고 세상에 준 예수의 말씀의 새로운 기독교화된 해석, 이 둘 사이에 즉시 갈등이 생김을 의미했다. 그러한 갈등은 틀림없이 새 것이나 옛 것의 결정적 승리이든지, 아니면 어느 정도의 타협을 낳는다. 역사는 그 투쟁이 타협으로 끝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독교는 너무 많은 것을 주제넘게 포섭하려 했기 때문에 어느 민족이라도 한두 세대 안에 동화(同化)할 수 없었다. 기독교는 예수가 사람의 혼에 제시한 것처럼 단순한 영적 호소가 아니었다. 종교 예식, 교육, 마술, 의술, 예술, 문학, 법률, 정부, 도덕, 성(性) 규제, 일부다처제, 그리고 어느 정도로 노예 제도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분명한 태도를 취했다. 기독교는 새 종교가 아니라―온 로마 제국과 동양 전체가 기다리고 있던 어떤 것이 아니라―새 체제의 인간 사회로서 나타났다. 그러한 허세로서, 기독교는 오랜 세월에 걸친 사회적ㆍ도덕적 충돌을 급히 재촉하였다. 예수의 이상은 그리스 철학이 다시 풀이하고 기독교 안에서 사회에 퍼진 바와 같이, 이제 서양 문명의 윤리ㆍ도덕ㆍ종교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인류의 전통에 대담하게 도전하였다.

195:0.4 (2069.4) 처음에, 기독교는 오직 낮은 사회ㆍ경제 계층만 개종시켰다. 그러나 2세기 초가 되자, 그리스ㆍ로마 문화의 최상 부분은 이 새 체제의 기독교 신앙, 사는 목적과 존재 목표에 대한 이 새로운 개념에 갈수록 더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195:0.5 (2070.1) 유대인의 기원을 가진 이 새로운 말씀이 자체가 태어난 땅에서 거의 실패했는데, 어떻게 그리 급속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로마 제국에서 일류 지성인들을 사로잡았는가? 기독교가 철학적 종교와 신비 종파들에게 승리한 것은 다음 이유 때문이었다:

195:0.6 (2070.2) 1. 조직. 바울은 위대한 조직가였고 그 후계자들은 그가 시작한 속도를 유지했다.

195:0.7 (2070.3) 2. 기독교는 철저히 헬라화되었다. 히브리 신학의 정수(精髓) 뿐 아니라 그리스 철학의 최선을 담았다.

195:0.8 (2070.4) 3.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새롭고 위대한 이상을 담았고, 이것은 예수가 수여한 일생에 대한 반향이요, 온 인류를 구원하는 그의 말씀이 반영된 것이다.

195:0.9 (2070.5) 4.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미트라교와 기꺼이 타협해서, 미트라교 추종자 가운데 상급인 절반이 안티옥 종파에 설득되었다.

195:0.10 (2070.6) 5. 마찬가지로, 다음 세대와 후일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교도와 그렇게 더 타협했고, 그래서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까지도 새 종교에 설득되었다.

195:0.11 (2070.7) 그러나 기독교인은 이교도의 예식 행사를 받아들이고, 한편 이교도가 바울 기독교의 헬라화 판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했으니까 이교도와 수지맞는 장사를 했다. 미트라 종파와 거래한 것보다 그들은 이교도와 더 이익이 남는 협상을 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타협에서도, 기독교인은 페르시아 신비교의 상스러운 부도덕과 또한 비난받을 수많은 다른 풍습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정복자가 되고도 남았다.

195:0.12 (2070.8) 지혜로웠든 그렇지 않았든, 기독교의 이 초기 지도자들은 예수의 많은 개념을 구하고 촉진하려는 노력으로 계획하여 예수의 이상에 상처를 냈고, 그들은 뛰어나게 성공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라! 이렇게 상처입은 주(主)의 이상은 아직도 복음 속에 잠자고 있으며, 궁극에 세상에 대하여 온전한 권능을 주장할 것이다.

195:0.13 (2070.9) 이렇게 기독교가 이교화(異敎化)됨으로 옛 체제는 예식 성질을 지닌 많은 하찮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기독교는 다음 이유로 주도권을 얻었다:

195:0.14 (2070.10) 1. 인간의 도덕 면에서 새롭고 엄청나게 높은 기준을 부르짖었다.

195:0.15 (2070.11) 2. 새롭고 크게 확대된 하나님 개념을 세상에 주었다.

195:0.16 (2070.12) 3. 불멸의 희망은 세상에 인정받는 종교가 보장하는 것의 일부가 되었다.

195:0.17 (2070.13) 4. 나사렛 예수를 사람의 갈급한 혼에게 주었다.

195:0.18 (2070.14) 예수가 가르친 큰 진리 중에서 많은 것이 이 초기의 타협에서 거의 분실되었지만, 이교화된 이 기독교의 종교 안에 아직도 잠자고 있으며, 그 기독교도 또한 사람의 아들의 일생과 가르침의 바울판 해석이었다. 그리고 미처 이교화되기 전에도 기독교는 먼저 철저히 헬라화되었다. 기독교는 그리스인에게 많이, 듬뿍 빚을 졌다. 에집트에서 온 어느 그리스인이 니케아에서 그렇게 용감하게 일어서서, 그렇게 두려움 없이 이 집회에 도전했고, 그래서 그 집회는 예수의 수여에 관한 참 진실이 세상에서 사라질 위험에 빠지도록 예수의 성품에 관한 개념을 감히 흐릿하게 만들지 못했다. 이 그리스인의 이름은 아다나시우스였고, 이 신자의 웅변과 논리가 아니었다면, 아리우스의 신조가 승리했을 것이다.

1. 그리스인의 영향

195:1.1 (2071.1) 기독교의 헬라화는 사도 바울이 아데네에서 아레오파구스[1] [30] 회의 앞에 서서, 아데네 사람들에게 “알지 못하는 신”에 관하여 이야기한 그 중대한 날에 진지하게 시작되었다. 거기서 아크로폴리스의 그늘 아래서, 이 로마 시민은 유대인의 땅 갈릴리에서 기원을 가졌던 새 종교의 자기 해석을 선포했다. 그리스인의 철학과 예수의 가르침 사이에는 이상하게 비슷한 무엇이 있었다. 공통된 목표가 있었다―이 두 가지가 개인의 등장을 겨냥했다. 그리스인은 사회적ㆍ정치적 등장, 예수는 도덕적ㆍ영적 등장이 목표였다. 그리스인은 정치적 자유로 이끄는 지적 자유주의를 가르쳤고, 예수는 종교적 해방으로 인도하는 영적 자유주의를 가르쳤다. 이 두 관념이 한데 모여 인간의 자유를 위한 새롭고 강력한 헌장이 되었고, 사람의 사회ㆍ정치ㆍ영적 해방을 알리는 전조(前兆)가 되었다.

195:1.2 (2071.2) 기독교는 주로 두 가지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고, 경쟁하는 모든 다른 종교를 이겼다:

195:1.3 (2071.3) 1. 그리스의 지성인은 유대인한테서도 새롭고 좋은 관념을 기꺼이 빌렸다.

195:1.4 (2071.4) 2. 바울과 그 후계자들은 기꺼이, 하지만 날카롭고 현명하게, 타협하는 사람이었다. 신학(神學)을 파는 기민한 상인이었다.

195:1.5 (2071.5) 아데네에서 바울이 일어서서 “그리스도이자 십자가에 못박힌 분”을 전했을 때, 그리스인은 영적으로 갈급했다. 궁금하여 묻고, 관심을 가졌고, 실제로 영적 진리를 찾고 있었다. 로마인이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항하여 싸웠고, 한편 그리스인은 받아들였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 문화의 일부로서 당시에 수정된 이 새 종교를 후일에 받아들이도록 로마인을 글자 그대로 강제한 것은 그리스인이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라.

195:1.6 (2071.6) 그리스인은 아름다움, 유대인은 거룩함을 존중했지만, 두 민족이 진리를 사랑하였다.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인은 종교를 제외하고, 모든 인간 문제―사회ㆍ경제ㆍ정치ㆍ철학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토론했다. 거의 아무 그리스인도 종교에 그다지 눈길을 돌리지 않았고, 그들의 종교조차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러 세기 동안 유대인은 이 다른 분야의 사상을 소홀히 해왔고, 한편 머리를 종교에 쏟았다. 그들의 종교를 아주 심각하게, 너무나 심각하게 다루었다. 예수가 전한 말씀의 내용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여러 세기 동안 이 두 민족의 사상(思想)이 뭉쳐서 생긴 산물은 이제 새 체제의 인간 사회에, 그리고 어느 정도 새 체제의, 인간의 종교 관념 및 관습에 추진력이 되었다.

195:1.7 (2071.7) 알렉산더가 근동 세계에 헬라 문명을 퍼뜨렸을 때, 그리스 문화의 영향은 이미 서부 지중해의 땅에 침투하였다. 작은 도시 국가에서 사는 한, 그리스인은 종교와 정치를 잘 처리했으나, 마케도니아의 왕이 아드리아 해로부터 뻗어서 인더스 강까지 그리스를 감히 하나의 제국으로 키웠을 때, 문제가 시작되었다. 그리스의 예술과 철학은 제국을 확장하는 과제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지만, 정치적 행정이나 종교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이 커져 제국이 된 뒤에, 오히려 촌티 나는 신들은 조금 이상하게 보였다. 오래된 유대 종교의 기독교 판이 다가왔을 때, 그리스인은 정말로 유일한 하나님, 더 위대하고 더 훌륭한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

195:1.8 (2072.1) 헬라 문화의 제국은 그런 상태로 오래 갈 수 없었다. 제국의 문화적 지배가 계속되었지만, 서방으로부터 제국의 행정을 위하여 로마의 정치적 수완을 얻은 뒤에, 그리고 동방으로부터 한 종교를 얻은 뒤에야 오래 견디었고, 그 종교의 유일한 하나님은 제국의 품위를 갖추었다.

195:1.9 (2072.2) 그리스도 이후 1세기에, 헬라 문화는 이미 절정에 이르렀고, 쇠퇴가 시작되었다. 학문이 진보되고 있었지만, 천재(天才)가 줄어들고 있었다. 바로 이때, 기독교에 얼마큼 담겨 있었던, 예수의 관념과 이상이 구출된 그리스 문화와 학문의 일부가 되었다.

195:1.10 (2072.3) 알렉산더는 그리스 문명의 문화적 선물을 가지고 동방으로 진격했다. 바울은 예수 복음의 기독교판을 가지고 서방을 공략했다. 그리고 서방 전역에 걸쳐 그리스 문화가 지배한 곳에, 헬라화된 기독교가 뿌리를 내렸다.

195:1.11 (2072.4) 예수의 말씀의 동방판은, 그의 가르침에 더 충실하게 남기는 했어도, 타협하지 않는 아브너의 태도를 계속 따랐다. 결코 헬라화된 해석판처럼 진보하지 못했고, 궁극에 이슬람 운동 속에 파묻혀 사라졌다.

2. 로마인의 영향

195:2.1 (2072.5) 로마인은 그리스 문화를 통째로 이어받았고, 제비로 뽑는 정치 대신에 대의정치(代議政治)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로마가 이상한 언어와 민족에 대하여, 아니 종교에 대해서도, 새로이 관대한 태도를 온 서양 세계로 가져왔으므로, 이 변화는 당장에 기독교에 유리하게 되었다.

195:2.2 (2072.6) 로마에서 초기의 기독교인 박해 중에 많은 것은 오로지 전도할 때 불행하게도 “나라”라는 용어를 썼기 때문이다. 로마인은 어떤 종교에도 관대했지만, 정치적으로 경쟁하는 티가 나는 것은 무엇이나 대단히 분개했다. 그래서 대체로 오해 때문에 생긴 이 초기의 박해가 사라졌을 때, 종교의 선전을 위하여 무대가 활짝 열렸다. 로마인은 정치적 통치에 관심을 가졌고, 예술이나 종교에 거의 아랑곳하지 않았어도 이 두 가지에 특별히 관대하였다.

195:2.3 (2072.7) 동방의 율법은 엄격하고 원칙이 없었다. 그리스의 율법은 유연하고 예술적이었다. 로마의 법은 기품이 있고 존경심을 일으켰다. 로마의 교육은 전례 없는 무딘 충성심을 낳았다. 초기의 로마인은 정치적으로 헌신하고 숭고하게 몸을 바친 사람들이었다. 정직하고 열심이 있고 이상에 헌신했지만, 그 이름에 마땅한 종교가 없었다. 그들이 바울의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그리스인 선생들이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5:2.4 (2072.8) 이 로마인은 위대한 민족이었다. 자신을 다스렸기 때문에 서양을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러한 견줄 데 없는 정직, 헌신, 굳센 자제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성장시키는 데 이상적 토양이었다.

195:2.5 (2072.9) 정치적으로 국가에 헌신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그리스 및 로마인이 제도화된 교회에 영적으로 충성하는 것은 수월했다. 로마인은 오직 교회가 국가와 경쟁하는 존재라고 두려워했을 때, 교회에 대항하여 싸웠다. 민족의 철학이나 토착 문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로마는 그리스 문화를 자기 것으로 이어받았고, 용감하게 그리스도를 자체의 도덕 철학으로 채용했다. 기독교는 로마의 도덕적 문화가 되었지만, 그렇게 대규모로 새 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개인적 체험이라는 의미로 볼 때, 그것이 도저히 로마의 종교가 되었다고 할 수 없다. 많은 개인이 정말로 이 모든 국가 종교의 표면 밑으로 파고들었고, 혼을 살리는 영양을 얻으려고, 헬라화되고 이교화된 기독교에 잠재하는 진리 속에, 숨은 의미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한 것은 참말이다.

195:2.6 (2073.1) 금욕주의자, 그리고 금욕주의자의 호소, “자연과 양심”에 대한 건전한 호소는 적어도 지적 의미에서, 로마 전체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더 낫게 준비시켰을 뿐이다. 로마인은 성품과 훈련으로 보면 법률가였고, 자연 법칙까지도 존경했다. 이제, 기독교 안에서, 로마인은 자연 법칙에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헤아렸다. 시세로와 버질을 낳을 수 있는 민족은 바울의 헬라화된 기독교를 받아들일 만큼 성숙했다.

195:2.7 (2073.2) 그래서 이 로마화된 그리스인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자기들의 종교를 철학화하고, 그 관념을 조정하고 그 이상을 체계화하며, 종교 관습을 생활의 기존 흐름에 적응하기를 강요하였다. 이 모두가 히브리 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고, 후일에 신약이 그리스어로 기록됨으로 엄청나게 도움을 받았다.

195:2.8 (2073.3) 유대인과 많은 다른 민족과 반대로, 그리스인은 오랫동안 불멸(不滅), 죽은 뒤에 어떤 식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을 약간이나마 믿어 왔고,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의 바로 그 핵심이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그들에게 강하게 호소할 것이 확실했다.

195:2.9 (2073.4) 그리스 문화와 로마의 정치적 승리가 연속된 것은 지중해의 땅을 한 언어와 한 문화를 가진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하였고, 서양 세계가 유일한 하나님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켰다. 유대교는 이 하나님을 마련해 주었지만, 유대교는 로마화된 이 그리스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빌로는 그들의 반대를 줄이려고 얼마큼 거들었지만, 기독교는 그들에게 더 좋은 유일한 하나님 개념을 드러냈고, 그들은 이를 쉽사리 받아들였다.

3. 로마 제국 밑에서

195:3.1 (2073.5) 로마의 정치적 지배가 확립된 뒤에, 그리고 기독교가 널리 퍼진 뒤에, 기독교인은 그들이 유일한 하나님, 위대한 종교 개념을 가졌지만 제국이 없음을 발견했다. 그리스 및 로마인은 그들이 큰 제국을 가졌어도, 제국 숭배와 영적 통일에 적당한 종교 개념으로 쓰일 하나님이 없음을 발견했다. 기독교 신자들은 제국을 받아들였고, 제국은 기독교를 채택했다. 로마인은 통일된 정치적 통치, 그리스인은 통일된 문화와 학문, 기독교는 통일된 종교 사상과 관습을 마련해 주었다.

195:3.2 (2073.6) 로마는 제국을 보편화함으로 민족주의 전통을 극복하였고, 역사에서 처음으로 다른 종족과 나라들이, 적어도 명칭으로는 하나의 종교를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195:3.3 (2073.7) 금욕주의자의 활기 있는 가르침과 구원을 준다는 신비(神秘) 종파의 약속 사이에 큰 싸움이 있었을 때, 기독교는 로마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다. “사심(私心) 없다”는 낱말이 없는 언어를 가진 민족, 영적으로 갈급한 민족에게, 기독교는 신선하게 위로하는 말씀과 사람을 해방하는 힘을 가지고 다가왔다.

195:3.4 (2073.8) 신자들이 봉사하는 생애를 산 태도, 아니 맹렬한 박해가 있던 초기에 믿음을 위하여 신자들이 죽을 때 취한 그 태도조차, 기독교에게 대단히 큰 힘을 주었다.

195:3.5 (2073.9) 그리스도가 아이들을 사랑한 것에 관한 가르침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원하지 않았을 때, 아기, 특히 여자 아이를, 내버려 죽게 하는 널리 퍼졌던 관습을 곧 그치게 만들었다.

195:3.6 (2074.1) 기독교 예배의 초기 방식은 대체로 유대인 회당에서 이어받고, 미트라교 의식(儀式)에 따라서 고치고, 거기에 후일에 많은 이교도의 허식(虛飾)을 더했다. 초대 기독교 교회의 뼈대는 유대교로 전향하고 기독교인이 된 그리스인들로 구성되었다.

195:3.7 (2074.2) 그리스도 이후 2세기는 전 세계 역사에서 좋은 종교가 서양 세계에서 발전하기에 가장 좋은 때였다. 1세기에 기독교는 투쟁과 타협으로 뿌리를 내리고 빨리 퍼지려고 자체를 준비했다. 기독교는 황제를 받아들였다. 나중에 황제는 기독교를 채택했다. 이때는 새 종교가 퍼지기에 좋은 시대였다. 종교의 자유가 있었고, 여행이 보편화되었고, 사상은 어디에 매이지 않았다.

195:3.8 (2074.3) 헬라화된 기독교를 이름으로만 채택하여 생긴 영적 추진력은 로마에 너무 늦게 왔고, 그래서 한창 시작된 도덕의 쇠퇴를 막거나, 이미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퍼지는, 종족의 쇠퇴를 보상하지 못했다. 이 새 종교는 제국 로마에게 문화적 필수품이었고, 더 큰 의미에서 영적 구원을 얻는 수단이 되지 못한 것은 지극히 불행한 일이다.

195:3.9 (2074.4) 정부의 일에 개인 참여의 부족으로 생기는 확실한 결과, 지나친 온정(溫情) 주의, 무거운 세금과 극심한 징세의 폐단, 무역 적자(赤字)로 인하여 레반트로 금(金)이 유출된 것, 유흥의 광란, 로마식 표준화, 여자 지위의 격하, 노예 제도와 종족의 타락, 육체의 전염병, 영적으로 싹이 없는 지경에 가까이 가기까지 제도화된 국가 교회로부터는 좋은 종교조차 큰 제국을 구원할 수 없었다.

195:3.10 (2074.5)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조건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초기의 학교들은 전혀 오염되지 않은 예수의 가르침을 많이 계속 유지했다. 판타에누스는 클레멘트를 가르쳤고, 다음에 계속하여 나다니엘을 따라가서 인도에서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예수의 이상의 얼마큼은 기독교를 세우는 데 희생되었어도, 공정하게 말하면, 2세기 끝이 되자 그리스ㆍ로마 세계의 거의 모든 위대한 지성인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을 기록해야 한다. 거의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195:3.11 (2074.6) 제국이 무너진 뒤에도 기독교가 살아남는 것을 보장하도록 이 로마 제국은 충분히 오래 지속하였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기독교 대신에 하늘나라 복음을 받아들였더라면, 로마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는 때때로 생각해 보았다.

4. 유럽의 암흑 시대

195:4.1 (2074.7) 교회는 사회에 부속된 것이요 정치와 같은 편이니까, 교회는 이른바 유럽의 “암흑 시대”의 지적ㆍ영적 쇠퇴를 함께 할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대에, 종교는 더욱 수도원 중심이 되고, 금욕주의화되고 합법적인 것이 되었다. 영적 의미에서 기독교는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이 기간을 통해서 내내, 잠자고 세속화된 이 종교와 나란히, 연속되는 신비주의의 흐름이 있었고 이것은 비현실에 가깝고 철학적으로 범신(汎神)주의와 비슷한, 환상 같은 영적 체험이었다.

195:4.2 (2074.8) 어둡고 절망에 빠진 이 여러 세기 동안, 종교는 실질적으로, 다시 남의 손을 빌리는 것이 되었다. 개인은 교회의 압도적 권한ㆍ전통ㆍ명령 앞에서 거의 길을 잃어버렸다. 신의 법정에서 특별한 영향력을 미친다고 생각되고, 따라서 효력이 있게 하소연하면 신들 앞에서 사람을 위하여 좋게 말해줄 수 있는 화려한 “성자(聖者)” 집단이 창조되어 새로운 영적 위험이 생겼다.

195:4.3 (2075.1) 그러나 기독교는 충분히 사회에 퍼지고 이교화되어서, 다가오는 암흑 시대를 막을 힘은 없었지만, 도덕적으로 어둡고 영적으로 침체된 이 오랜 기간에 살아남기 위하여 더 준비가 잘 되었다. 기독교는 서양 문명의 긴 밤을 통해서 줄곧 버티었고, 르네상스가 밝아왔을 때 아직도 도덕적 세력으로서 세상에서 작용하고 있었다. 암흑 시대가 지난 뒤에, 기독교의 회복은 그 가르침의 수많은 종파를 낳았고, 이 종파들은 특별한 지성ㆍ감정ㆍ영적 부류의 인간에게 적당한 신앙이었다. 그리고 이 특별한 여러 기독교 집단, 즉 종교 집단 중에서, 다수가 이 발표문을 작성할 때 아직도 지속한다.

195:4.4 (2075.2)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를 예수에 관한 종교로 뜻하지 않게 변질시킴으로 생겨난 역사를 드러낸다. 더 나아가서 헬라화, 이교화(異敎化), 세속화, 제도화, 지적 쇠퇴, 영적 타락을 겪고, 도덕적 겨울잠을 자고, 절멸의 위협을 겪으며, 그 뒤에 회생(回生)하고 분열되며, 최근에 비교적 회복되는 역사를 제시한다. 그러한 족보는 본래부터 활력이 있고 광대한 회복하는 자원을 소유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바로 이 기독교가 문명을 깨우친 서양 민족들의 세계에 지금 존재하고, 살아남기 위한 투쟁에 직면하고 있으며, 이 싸움은 지배권을 얻으려 했던 지난날의 투쟁의 특징이었던 그 중대한 여러 위기보다 훨씬 더 불길(不吉)하다.

195:4.5 (2075.3) 종교는 과학적 지성과 유물론적 경향을 가진 새 시대의 도전에 이제 직면하고 있다. 세속의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벌어지는 이 거대한 싸움에서, 예수의 종교는 궁극에 승리할 것이다.

5. 현대의 문제

195:5.1 (2075.4) 20세기는 기독교와 모든 다른 종교가 풀어야 할 새로운 문제를 가져왔다. 문명이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사회를 안정시키고 그 물질적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고 사람이 온갖 노력을 기울이면서, “먼저 하늘에 있는 실체들을 찾는” 의무가 더욱 필요하게 된다.

195:5.2 (2075.5) 토막토막 자르고, 격리하고, 고립시키고, 지나치게 분석했을 때, 진리는 때때로 사람을 헛갈리게 하고 잘못 인도하기도 한다. 살아 있는 진리는, 물질 과학의 사실로서 또는 중간에 있는 예술의 영감(靈感)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영적 현실로서, 통째로 받아들일 때에야 진리 추구자를 바르게 가르친다.

195:5.3 (2075.6) 종교는 사람에게 그의 신다운 영원한 운명을 계시하는 것이다. 종교는 순전히 몸소 겪는 영적 체험이며, 다음과 같이, 언제까지나 사람이 가진 다른 높은 형태의 생각과 구별되어야 한다:

195:5.4 (2075.7) 1. 물질적 현실인 사물에 대한 사람의 논리적 태도.

195:5.5 (2075.8) 2. 추한 것과 반대되는 아름다움을 사람이 미학적으로 이해하는 것.

195:5.6 (2075.9) 3. 사람이 사회에 대한 책임과 정치적 의무를 윤리적으로 인식하는 것.

195:5.7 (2075.10) 4. 인간의 도덕성을 느끼는, 사람의 감각조차 그 자체로서 그것만으로, 종교는 아니다.

195:5.8 (2075.11) 종교는 우주에서 믿음ㆍ신뢰ㆍ확신을 요구하는 가치를 찾아내도록 고안되어 있고, 종교는 결국 예배(禮拜)가 된다. 지성이 발견한 상대적 가치와 반대로, 종교는 혼을 위해서 최고의 가치를 찾아낸다. 그러한 초인간적 통찰력은 오로지 진정한 종교적 체험을 통해야 얻을 수 있다.

195:5.9 (2075.12) 중력(重力)이 없는 태양계처럼, 영적 실체에 근거를 둔 도덕이 없이 사회의 체계는 오래도록 유지될 수 없다.

195:5.10 (2076.1) 육체를 입고서 잠시 사는 일생에, 호기심을 채우거나 혼 속에서 솟아오르는 잠재 모험심을 모두 만족시키려고 애쓰지 말라. 참아라! 값싸고 더러운 모험으로 멋대로 돌진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말라. 너의 에너지를 활용하고 정열에 고삐를 쥐라. 차분히 있고, 진보하는 모험과 가슴 떨리는 발견이 가득한 생애, 끝없는 생애가 장엄하게 펼쳐지기를 기다리라.

195:5.11 (2076.2) 사람의 기원(起源)이 어디 있는가 혼란에 빠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못보고 놓치지 말라. 예수가 어린아이들조차 사랑했다는 것, 인격이 큰 가치가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는 것을 언제까지나 잊지 말라.

195:5.12 (2076.3) 세상을 볼 때, 너희가 보는 악한 검은 조각들은 궁극에 선한 하얀 배경과 대조해서 나타나는 것을 기억하라. 너희는 단지, 까만 악의 배경에 초라하게 보이는, 하얀 선(善)의 조각들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다.

195:5.13 (2076.4) 널리 퍼뜨리고 선포할 좋은 진리가 그렇게 많이 있는데, 어째서 세상에 악이 사실로 보인다고 해서 사람들은 악(惡)에 골몰해야 하는가? 진리의 아름다운 영적 가치는 악의 현상보다도 더욱 유쾌하고 사람의 정신을 높여준다.

195:5.14 (2076.5) 현대 과학이 실험 기법을 추구하는 것과 같이, 종교에서 예수는 체험의 방법을 주장하고 따랐다. 우리는 영적 통찰력의 인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지만,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의무에 충성하고, 신의 선함을 예배함으로 이 혼의 통찰력에 가까이 간다. 그러나 이 모든 가치 있는 것 중에서 사랑은 진정한 통찰력으로 이끄는 참된 안내자이다.

6. 유물론

195:6.1 (2076.6) 과학자는 뜻하지 않게 인류를 유물론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영원한 도덕 은행(銀行)에서 경솔하게 지불 청구를 시작했지만, 이 인간 체험의 은행은 광대한 영적 재산을 가졌고, 그 은행에 대한 지불 청구를 들어줄 수 있다. 오로지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들이 인류의 영적 자산이 충분히 있는가 공포에 빠진다. 유물론적이고 세속적인 공포가 끝날 때, 예수의 종교가 파산되지 않은 것이 드러날 것이다. 하늘나라의 영적 은행은 “예수의 이름으로” 꺼내 쓰는 모든 사람에게 믿음과 소망을 주고, 도덕적 보장을 줄 것이다.

195:6.2 (2076.7) 유물론과 예수의 가르침 사이에 어떤 명백한 갈등이 있든지 상관 없이, 너희는 다가오는 시대에, 주의 가르침이 완전히 승리할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실제로, 참 종교는 과학과 어떤 논쟁에도 말려들 수 없고, 어떤 면에서도 물질적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종교는 다만 과학에 개의하지 않지만, 과학과 공감하며, 한편 그 과학자에게 최대의 관심을 기울인다.

195:6.3 (2076.8) 지식만 추구하는 것은 그에 따른 지혜로운 해석이 없이, 그리고 종교적 체험을 보는 영적 통찰력 없이, 궁극에 비관(悲觀)과 인간의 절망으로 이끈다. 얄팍한 지식은 참으로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195:6.4 (2076.9) 이 책을 기록할 때, 유물론 시대의 최악의 고비는 지나갔다. 사물을 더 이해하는 시절이 이미 밝아오고 있다. 과학 세계의 상급 지성인은 철학 면에서 이제 더 전적으로 유물론을 지지하지 않지만, 하층 계급의 사람들은 옛 가르침의 결과로서 아직도 그 방향으로 쏠린다. 그러나 이 물리적 현실주의 시대는 땅에서 사람의 일생에 지나가는 사건일 뿐이다. 현대 과학은 참 종교를―예수를 믿는 사람의 인생에서 풀이된 예수의 가르침을―다치지 않고 두었다. 과학이 이룩한 업적은, 인생을 그릇되게 풀이한 유치한 환상을 깨뜨렸을 뿐이다.

195:6.5 (2077.1) 땅에서 사는 인생에 관하여 말하면, 과학은 양적(量的) 체험이요, 종교는 질적 체험이다. 과학은 현상을 다루고 종교는 기원ㆍ가치ㆍ목표를 다룬다. 물리적 현상을 설명하려고 원인을 어디에 돌리는 것은 궁극의 것을 모른다는 고백이요, 끝에는 과학자를 시초의 큰 원인―파라다이스에 계신 우주의 아버지―까지 곧장 거슬러 올라가도록 인도할 뿐이다.

195:6.6 (2077.2) 기적이 일어나던 시대로부터 기계 시대로 맹렬히 방향을 바꾼 것은 사람을 온통 불안하게 만든 것이 드러났다. 우주를 기계로 보는 거짓 철학의 영리함과 교묘함은 바로 그들의 기계론적 주장이 거짓임을 나타낸다. 한 유물론자의 지성이 보인 숙명론(宿命論)의 영리함은 우주가 눈이 보이지 않고 목적이 없는 에너지 현상이라는 주장이 그릇됨을 언제까지나 증명한다.

195:6.7 (2077.3) 교육받았다고 생각되는 어떤 사람들의 기계론적 자연주의,[2] [31] 거리에 있는 보통 사람의 지각없는 세속주의, 이 두 가지는 순전히 사물에 흥미를 가진다. 이런 사상은 영적 성질을 가진 어떤 진정한 가치도, 인정(認定)도, 만족감도 낳지 못할 뿐 아니라, 믿음과 희망과 영원한 보장이 빠져 있다. 현대 생활에서 하나의 큰 문제는 사람이 너무 바빠서 영적 명상과 종교적 예배를 위하여 틈을 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95:6.8 (2077.4) 유물론은 사람을 혼이 없는 자동 인형(人形)으로 격하시키고, 단지 낭만이 없는 기계론적 우주의 수학 공식에서 무력한 자리를 찾는 산술 기호로 만든다. 그러나 큰 수학자가 없이 이 모든 광대한 수학적 우주가 어디에서 오는가? 과학은 물질의 보존에 관하여 상세히 논할지 모르지만, 종교는 사람의 혼이 보존되는 것을 입증한다―종교는 사람이 영적 실체와 영원한 가치를 체험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

195:6.9 (2077.5) 오늘날 유물론을 믿는 사회학자는 한 공동체를 조사하고, 이에 대하여 보고서를 쓰고, 발견한 그대로 사람들을 버려둔다. 1천 9백 년 전에, 배우지 못한 갈릴리 사람들은 사람의 정신 체험에 영적으로 기여한 일생을 바친 예수를 살펴보았고, 다음에 나가서 로마 제국 전체를 뒤집어엎었다.

195:6.10 (2077.6) 그러나 중세(中世)의 나팔 소리에 맞추어 영적 전투에 나서라고 현대인을 부르려고 애쓸 때, 종교 지도자들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종교는 새로운 최신 표어를 마련해야 한다. 민주주의나 어떤 다른 정치적 만병 통치약도 영적 진보를 대신할 수 없다. 거짓 종교는 현실로부터 도피를 의미할지 모르지만, 예수의 복음은 영적 진보가 있는 영원한 현실의 바로 그 문앞까지 필사 인간을 데려갔다.

195:6.11 (2077.7) 지성이 물질로부터 “솟아났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우주가 단지 기계 작용이고 지성이 물질에 같이 붙어 있다면, 우리는 어떤 관측된 현상에 대하여 결코 두 가지 다른 해석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진리ㆍ아름다움ㆍ선 개념은 물리학이나 화학에 본래부터 있지 않다. 기계는 진리를 알기는커녕, 아는 능력도 없고, 올바름을 간절히 찾고 선을 소중히 간직할 능력이 없다.

195:6.12 (2077.8) 과학은 물리적일 수도 있지만, 진리를 헤아리는 과학자의 지성은 당장에 물질을 초월한다. 물질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물질은 자비를 사랑하거나 영적 실체를 기뻐할 수도 없다. 영적 깨우침에 기초를 두고 인간의 체험에 뿌리를 둔 도덕적 확신은 물리적 관측에 기초를 둔 수학적 추론과 똑같이 실재하고 확실하지만, 한층 높은, 다른 수준에서 그렇다.

195:6.13 (2077.9) 사람이 겨우 기계라면, 물질 우주에 대하여 얼마큼 획일적으로 반응할 것이다. 인격은커녕, 개성(個性)이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195:6.14 (2077.10) 온 우주의 중심에서 파라다이스의 절대적 기계 작용이 있는 사실은, 둘째 근원 중심의 조건 없는 의지가 계신 앞에서, 결정 요인이 우주에서 혼자만 정하는 법칙이 되지 않도록 영원히 처리한다. 물질 작용이 있기는 해도, 그것만 작용하지는 않는다. 기계 작용이 있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결정(決定)하는 작용이 있어도, 그것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195:6.15 (2078.1) 지성과 영, 이 둘이 함께 존재하지 않는다면, 물질로 이루어진 유한한 우주는 궁극에 획일적이고 결정론(決定論)대로 될 것이다. 우주 지성의 영향은 물질 세계 속에도 항상 자발성을 주입한다.

195:6.16 (2078.2) 어떤 존재 영역에서도 자유, 곧 독창성은 영적 영향과 우주 지성이 통제하는 정도에, 다시 말해서, 인간의 체험에서 “아버지의 뜻”을 실제로 행하는 정도에, 정비례하여 커진다. 그래서 일단 너희가 하나님을 찾으려고 길을 떠나면, 이는 하나님이 너희를 이미 찾았다는 확고한 증명이다.

195:6.17 (2078.3)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것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모든 과학적 발견은 우주에 자유와 획일성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발견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발견할 수 있었다. 발견된 물건은 실재하며, 획일적인 듯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의 사물로서 규명될 수 없었다.

7. 유물론의 취약성

195:7.1 (2078.4) 물질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기계론적 우주론처럼 그렇게 허약한 이론이 참된 종교를 몸소 체험하는 광대한 영적 자원을 그에게서 빼앗도록 버려두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결코 사실은 진정한 영적 믿음과 언쟁하지 않지만, 이론은 그럴 수도 있다. 과학은 종교적 신앙―영적 실체와 신성한 가치를 믿는 인간의 신앙―을 없애려고 애쓰기보다, 미신(迷信)의 말소에 전념하는 것이 좋다.

195:7.2 (2078.5) 종교가 사람에게 영적 면에서 해주는 것을, 과학은 사람에게 물질 면에서 해야 한다: 인생을 보는 시야를 늘이고 인격을 키우는 일이다. 참된 과학은 참된 종교와 오래 다툴 일이 없다. “과학적 방법”은 다만 물질적 모험과 물리적 성취를 재는 지적 척도일 뿐이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온통 지적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과학적 방법은 영적 실체와 종교적 체험의 평가에 도무지 쓸모가 없다.

195:7.3 (2078.6) 현대 기계론자의 모순은 이렇다: 이것이 단지 물질적 우주이고 사람이 겨우 기계라면, 그런 사람은 자신이 그런 기계인 것을 전혀 알아볼 수 없고, 마찬가지로 그런 기계 인간은 그러한 물질 우주가 존재하는 사실을 도무지 의식(意識)하지 못할 것이다. 기계론적 과학이 낳은 유물론적 낙심과 절망은 과학자의 지성에 영이 깃드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그런 과학자의 바로 그 초물질 통찰력이 잘못되고 스스로 모순되는 유물론적 우주 개념들을 만들어냈다.

195:7.4 (2078.7) 영원하고 무한한 파라다이스 가치, 곧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의 가치는 여러 시공 우주에서 현상이 일어나는 사실 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이 영적 가치를 찾아내고 헤아리는 데는 영에게서 태어난 필사자가 믿음의 눈으로 보기를 요구한다.

195:7.5 (2078.8) 영적으로 진보하는 실체와 가치는 “심리적 예상”―단지 물질 지성의 미화된 몽상―이 아니다. 그러한 실체와 가치는 깃드는 조절자, 사람의 지성 속에 사는 하나님 영의 영적 예측이다. 희미하게 얼핏 본 “상대성”의 발견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 하나님이 영원ㆍ무한하다는 너희의 개념이 흔들리게 하지 말지어다. 자아 표현의 필요에 관하여 너희가 온갖 간청을 드릴 때, 조절자의 표현, 진정하고 더 나은 자아 표현을 못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라.

195:7.6 (2079.1) 이것이 겨우 물질적 우주라면, 물질 인간은 결코 그렇게 순전한 물질적 존재를 가지는 기계적 인품 개념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우주에 대한 바로 이 기계론 개념은 그 자체로서 지성의 비물질 현상이며, 아무리 철저히 물질에 조건을 받고 기계적으로 통제되는 듯 보여도, 모든 지성은 비물질 기원을 가진다.

195:7.7 (2079.2) 필사 인간이 가진 얼마큼 진화된 정신 작용은 일관성이나 지혜를 지나치게 부여받지 않는다. 사람의 자만은 가끔 이성(理性)을 뛰어넘고 자신의 논리를 벗어난다.

195:7.8 (2079.3) 가장 비관적인 유물론자의 바로 그 비관주의는, 그 자체로서 저절로, 비관주의자가 보는 우주가 전적으로 물질이 아닌 것을 충분히 증명한다.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이 두 가지가 사실 뿐 아니라 가치를 의식하는 지성 속에 생기는 개념적 반응이다. 우주가 참으로 유물론자가 보는 바와 같은 우주라면, 다음에 인간 기계인 사람은 바로 그 사실을 도무지 의식하여 깨닫지 못할 것이다. 영에게서 태어난 지성 안에서 가치의 개념을 의식하지 않고는, 우주가 오직 물질이라는 사실과 우주 작용이 기계론에 따른 현상인 것을 사람이 도무지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의 기계는 다른 기계의 성질이나 가치를 의식할 수 없다.

195:7.9 (2079.4) 생명과 우주에 대한 기계론적 철학은 과학적일 수 없으니, 이는 과학이 오로지 물질과 사실만 인식하고 다루기 때문이다. 철학은 불가피하게 과학을 초월한다. 사람은 자연 속에 있는 물질적 사실이지만, 사람의 생명은 지성의 통제 속성과 영의 창조 성질을 나타내니까, 자연의 물질 수준을 뛰어넘는다.

195:7.10 (2079.5) 사람이 기계론자가 되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것은 그 사람이 지능과 도덕 면에서 자살하려고 쓸데없이 노력하는 비참한 현상을 나타낸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

195:7.11 (2079.6) 우주가 단지 물질이고 사람이 겨우 기계라면, 이런 우주의 기계 작용을 가정하는 과학자에게 용기를 줄 아무런 과학이 없을 것이다. 기계는 자체를 재거나 분류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 오로지 기계를 초월하는 지위를 가진 어떤 개체가 그러한 과학적 작품을 만들 수 있다.

195:7.12 (2079.7) 우주 실체가 겨우 하나의 광대한 기계라면, 다음에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그런 평가로부터 통찰력을 의식하기 위해서, 우주 바깥에, 우주와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

195:7.13 (2079.8) 사람이 겨우 기계라면, 무슨 기법(技法)으로 이 사람이 자기가 겨우 기계라는 것을 믿게 되거나 아니면 안다고 주장하는가? 사람이 스스로 의식하여 자신을 평가하는 체험은 결코 단순한 기계의 속성이 아니다. 자의식(自意識)하고 기계론자로 자처하는 사람은 기계론에 대한 가능한 최선의 대답이다. 유물론이 사실이라면, 자의식하는 기계론자가 결코 있을 수 없다. 사람이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기 전에, 먼저 도덕을 아는 인격자이어야 한다는 것이 또한 참말이다.

195:7.14 (2079.9) 유물론의 바로 그 주장은 그러한 독단을 주제넘게 부르짖는 지성이 초물질 의식을 가졌음을 암시한다. 기계 작용은 나빠질지 모르지만, 결코 진보할 수 없다. 기계는 생각하거나 창조하거나 꿈을 꾸거나, 뜻을 품거나 무엇을 이상으로 만들거나, 진리를 간절히 찾거나, 올바름을 목마르게 찾지 않는다. 기계는 다른 기계들에게 봉사하고, 영원히 진보할 목표로서 하나님을 찾아내고 그와 같이 되려고 애쓰는 숭고한 과제를 택하려고 정열을 가지고 자기의 일생을 자극하지 않는다. 기계는 결코 지능도 감정도, 미학도 윤리도, 도덕도 영적 성향도 없다.

195:7.15 (2079.10) 예술은 사람이 기계론적 존재가 아닌 것을 증명하지만, 사람이 영적으로 불멸함을 증명하지 않는다. 예술은 필사자의 상물질이요, 물질 인간과 영적 인간 사이에 있는 분야이다. 시(詩)는 물질적 현실을 벗어나 영적 가치들을 향하려는 노력이다.

195:7.16 (2080.1) 높은 문명에서는 예술이 과학을 인간답게 만들고, 한편 다음에 참 종교가―영적 가치와 영원한 가치를 보는 통찰력이―예술을 영적으로 변화시킨다. 예술은 실체에 대한 인간의 시공 평가를 나타낸다. 종교는 우주의 가치를 신성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요, 영적으로 올라가고 커지면서 영원히 진보함을 의미한다. 오직 시간 속에 실체의 그림자로서 영원이 비쳐주는 신다운 본보기, 영의 표준을 예술이 못볼 때에야 시간 세계의 예술이 위험하다. 참된 예술은 인생에서 물질인 것을 효과 있게 조종한다. 종교는 인생에서 물질적 사실을 고상하게 변화시키고, 예술의 영적 평가를 그치지 않는다.

195:7.17 (2080.2) 자동 인형(人形)이 자동 기계론이라는 철학을 상상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다른 동료 자동 인형에 대하여 그런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고 주제넘게 생각하다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가!

195:7.18 (2080.3) 과학자를 마땅히 인식하지 않으면 물질 우주에 대한 어떤 과학적 해석도 가치가 없다. 예술가를 인식하지 않으면 예술에 대한 어떤 평가도 진정하지 않다. 도덕가를 제외하면 도덕률에 대한 어떤 평가도 가치가 없다. 철학자를 무시하면 어떤 철학의 인식도 교훈이 되지 않고, 신자의 실제 체험이 없이는 종교가 존재할 수 없으며, 신자는 바로 이 체험 속에서, 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아내고 알려고 애쓴다. 마찬가지로, 온 우주는 스스로 계시는 이, 그 우주를 만들고 쉬지 않고 관리하는 무한한 하나님과 동떨어져서는 의미가 없다.

195:7.19 (2080.4) 기계론자―인본주의자―는 물질의 흐름과 함께 떠내려가는 성향이 있다. 유심론자(唯心論者)와 심령주의자는 에너지 흐름의 과정, 겉보기에 순전히 물질적 과정을 수정하려고 지능과 활력을 가지고 감히 노를 젓는다.

195:7.20 (2080.5) 과학은 머리의 계산으로 살며, 음악은 감정의 박자를 표현한다. 종교는 무한자의 영원한 상급 멜로디를 측정한 것과 시공에서 조화를 이룬, 혼의 영적 리듬이다. 종교적 체험은 인생에서 참으로 수학을 초월하는 무엇이다.

195:7.21 (2080.6) 언어에서 알파벳은 유물론의 기계 장치를 대표하며, 한편 천 가지 생각, 위대한 관념, 그리고―사랑과 미움, 비겁과 용기에 관한―고귀한 이상의 의미를 표현하는 낱말들은, 물질 법칙과 영적 법칙이 정의한 규모 안에서 정신이 연출한 것을 묘사하며, 그 연출은 인격 의지의 주장의 안내를 받고, 본래부터 주어진 상황에 제약을 받는다.

195:7.22 (2080.7) 우주는 과학자가 발견하고 과학으로 여기게 되는 법칙, 기계 작용, 불변성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주는 이렇게 우주 현상을 지켜보고, 우주에서 물질 측면의 기계적 단계에 본래 있는 수학적 사실을 분류하는 과학자, 호기심 있고 생각에 잠기고, 선택하고 창조하며 통합하고 구별하는 과학자와 같다. 우주는 예술가의 작품과 비슷하지도 않지만, 오히려 영적 목표를 달성하려는 노력으로 물질적 사물의 세계를 초월하려고 애쓰는 예술가, 힘을 기울이고, 꿈을 꾸고, 큰 뜻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는 예술가와 같다.

195:7.23 (2080.8) 과학이 아니라 과학자가 에너지와 물질로 이루어진, 진화하고 진보하는 우주의 현실을 깨닫는다. 예술 작품이 아니라 예술가가 물질 존재와 영적 해방 사이에 일시적 상물질 세계가 존재하는 것을 보여준다. 종교가 아니라 종교를 실천하는 자가 영원히 진보하면서 마주치게 될 영 현실과 신성한 가치가 존재함을 입증한다.

8. 세속적 전체주의

195:8.1 (2081.1) 그러나 사람이 유물론과 기계론을 대체로 정복한 뒤에도, 20세기 세속주의의[3] [32] 지독한 영향은 영문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의 영적 체험을 여전히 망칠 것이다.

195:8.2 (2081.2) 두 가지 세계적 영향이 현대의 세속주의를 조장하였다. 세속주의의 아버지는 19세기와 20세기에 이른바 과학―무신론적 과학―의 태도, 편협하고 신을 믿지 않는 태도였다. 현대 세속주의의 어머니는 중세의 전체주의적 기독교회였다. 세속주의는 제도화된 기독교회가 서양 문명을 거의 완전히 지배한 것에 대한 반항이 커짐으로 비롯되었다.

195:8.3 (2081.3) 이 계시(啓示)가 있을 때, 유럽과 아메리카의 생활에서 지배하는 지적ㆍ철학적 풍토는 명백히 세속적이다―인본주의이다. 3백 년 동안 서양 사상은 차츰차츰 세속화되었다. 종교는 갈수록 더 이름뿐인 영향이 되었고, 대체로 예식을 치르는 행사였다. 서양 문명에서 기독교인이라 공언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눈치채지 못하면서 실제로 세속주의자이다.

195:8.4 (2081.4) 전체주의적 교회의 지배, 사람을 시들게 하는 손아귀로부터, 서양 민족의 생각과 생활을 해방하는 데는 큰 힘, 막강한 영향력이 필요했다. 세속주의는 교회의 통제하는 사슬을 깨뜨려버렸고, 이제 다음 차례에 현대인의 마음과 정신 위에 새롭고 신을 모르는 종류의 지배력을 굳히려고 위협한다. 전제 및 독재 정치를 행하는 국가는 과학적 유물론과 철학적 세속주의에서 직접 생긴 산물이다. 제도화된 교회의 압제에서 사람을 해방하자마자, 세속주의는 사람을 전체주의 국가에게 사슬에 묶인 노예로 팔아버린다. 세속주의는 사람을 교회에 예속된 처지에서 풀어주고서, 정치ㆍ경제적 노예가 되는 처지로 팔아넘길 뿐이다.

195:8.5 (2081.5) 유물론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세속주의는 아예 하나님을 무시(無視)한다. 적어도 이것이 초기의 태도였다. 한때는 종교의 전체주의 속박에 항거했던 세속주의가 최근에 더욱 호전적 태도를 갖추었고 그런 종교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20세기의 세속주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조심하여라! 인간 사회에서 신이 없는 이 철학은 오로지 불안, 적의(敵意), 불행, 전쟁, 세계적 재난으로 이끌 뿐이다.

195:8.6 (2081.6) 세속주의는 결코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인간 사회에서 아무것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귀담아 듣거라! 교회의 전체주의에 대하여, 세속적 반항을 통해서 얻은 유익한 이점을 빨리 던져버리지 말라. 서양 문명은 오늘날 세속주의로 저항한 결과로서 많은 자유와 만족을 누린다. 세속주의가 저지른 큰 잘못은 이것이다: 종교적 권한이 거의 통째로 생활을 통제하는 데 항거하면서, 그러한 교회의 폭정으로부터 해방을 얻은 뒤에, 세속주의자들은 더 나아가서 바로 하나님에게, 때때로 말없이, 때때로 드러내놓고, 반란을 시작하였다.

195:8.7 (2081.7) 아메리카의 산업주의에 나타난 놀라운 창조성, 그리고 서양 문명에서 전례 없던 물질적 진보는 세속주의의 반란(反亂) 덕분이다. 그리고 세속주의의 반란이 너무 지나치고 하나님과 참 종교를 못보고 놓쳤기 때문에, 뒤이어 또한 기대하지 않던 세계 전쟁과 국제적 불안이라는 수확을 거두었다.

195:8.8 (2081.8) 현대의 세속주의 반란이 가져온 축복, 곧 관용, 사회 봉사, 민주 정치, 시민의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희생할 필요는 없다. 세속주의자는 과학을 촉진하고 교육을 향상하기 위하여 참 종교를 적대할 필요가 없었다.

195:8.9 (2082.1) 그러나 세속주의는 생활 규모가 확대되면서 최근에 얻은 이 모든 이익을 낳은 유일한 부모는 아니다. 20세기에 얻은 이익 뒤에는 과학과 세속주의 뿐 아니라, 또한 인식되지 않고 인정받지 않은, 나사렛 예수의 일생(一生)과 가르침의 영적 작용이 있다.

195:8.10 (2082.2) 하나님 없이, 종교가 없이, 과학적 세속주의는 결코 그 세력들을 조정하고, 서로 다른 경쟁하는 이권(利權) ㆍ 종족ㆍ 민족주의를 조화시킬 수 없다. 이 세속주의적 인간 사회는 비할 데 없는 물질적 업적을 이루었어도, 천천히 무너지고 있다. 하나님 적대주의가 이렇게 붕괴하는 데 저항하는 주요 응집 세력은 민족주의이다. 그리고 민족주의는 세계 평화에 으뜸가는 장벽이다.

195:8.11 (2082.3) 세속주의가 본래부터 가진 약점은 세속주의가 정치와 권력을 위하여 윤리와 종교를 버리는 것이다. 너희는 단지, 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면서 사람의 형제 정신을 이룩할 수 없다.

195:8.12 (2082.4) 세속주의 방향의 사회적ㆍ정치적 낙관은 망상(妄想)이다. 하나님 없이는 자유와 해방도, 재산과 재물도, 평화로 인도하지 않을 것이다.

195:8.13 (2082.5) 과학ㆍ교육ㆍ산업ㆍ사회의 완벽한 세속화는 오직 재난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20세기의 처음 3분의 1 동안에 유란시아인들은 그때까지 기독교 시대를 통틀어서 죽은 것보다 더 많은 인간을 죽였다. 이것은 겨우 유물론과 세속주의로부터 얻는 끔찍한 수확의 시작일 뿐이다. 아직도 더 끔찍한 파괴가 다가올 것이다.

9. 기독교의 문제

195:9.1 (2082.6) 너희의 영적 유산(遺産)의 가치, 여러 세기를 통해서 유물론과 세속 시대의 황폐한 시절에 이르기까지 흘러 내려온 진리의 흐름을 간과하지 말라. 지난 시절의 미신 같은 교리들을 떨어버리려고 온갖 값진 노력을 기울이면서, 너희는 영원한 진리를 단단히 붙들도록 하여라. 그러나 참을성을 가져라! 미신에 저항하는 현재의 반란이 끝났을 때, 예수의 복음에 담긴 진리는 새롭고 더 나은 길을 비추려고 영화롭게 지속할 것이다.

195:9.2 (2082.7) 그러나 이교(異敎)처럼 변하고 사회화된 기독교는 때묻지 않은 예수의 가르침과 새로이 접촉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는 땅에서 사신 주의 일생을 보는 새로운 통찰력이 모자라서 시들고 있다. 예수의 종교를 새로이 더 충만히 계시하는 것은 유물론적 세속주의 제국을 정복하고, 기계론적 자연주의의 세계 지배를 뒤엎을 운명을 가지고 있다. 유란시아는 사회를 다시 조정하고, 도덕적 각성과 영적 깨우침이 있는 가장 놀랍고 황홀한 한 시대에 이르는 고비에서 지금 부르르 떨고 있다.

195:9.3 (2082.8) 예수의 가르침은, 크게 수정되기는 했어도, 태어날 때의 신비 종파, 암흑 시대의 무지와 미신(迷信)을 겪고 살아남았고, 지금도 20세기의 유물론ㆍ기계론ㆍ세속주의를 천천히 이기고 있다. 큰 시험이 있고 패배할 위협을 받는 그러한 시절은 언제나 큰 계시가 내리는 시절이다.

195:9.4 (2082.9) 종교는 새로운 지도자, 오로지 예수와 그의 견줄 데 없는 가르침에만 감히 의존할 영적인 남녀가 필요하다. 기독교가 사회 및 물질 문제에 계속 바쁘면서 영적 사명을 오랫동안 소홀히 하면, 영적(靈的) 부활은 사람을 영적으로 회복시키는 데 순전히 몸을 바칠 선생, 예수의 종교를 가르치는 새 선생들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나서 영에게서 태어난 이 사람들은 사회ㆍ도덕ㆍ경제ㆍ정치 면에서 세계를 다시 조직하는 데 필요한 지도력과 영감을 재빨리 공급할 것이다.

195:9.5 (2083.1) 사실과 모순되고, 가장 높은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의 개념과 어울리지 않는 종교를 현대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왜곡되고 때묻은 현대 기독교의 참된 최초의 기초(基礎)를―예수의 참 일생과 가르침을―다시 발견할 때가 왔다.

195:9.6 (2083.2) 원시인은 미신으로 종교적 두려움에 매인 인생을 살았다. 현대의 개화된 사람들은 강한 종교적 확신에 지배되는 생각을 두려워한다. 생각하는 사람은 종교에 붙들려 있기를 언제나 두려워했다. 힘세고 감동시키는 종교가 지배하려고 위협할 때, 그는 변함없이 이를 합리화하고 전통으로 만들고 제도화하려고 애쓰며, 이렇게 종교를 통제하고 싶어 한다. 계시된 종교조차도 그러한 과정으로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지배하는 것이 된다. 현대의 총명한 남녀는 예수의 종교가 그들에게―또 그들을 가지고―무슨 변화를 일으킬까 두려워서 피한다. 모든 그러한 두려움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 예수의 종교는, 정말로, 그 신자를 지배하고 변화시키며, 사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알려고 애쓰는 데 일생을 바치라고 요청하고, 사는 에너지를 사람의 형제 정신을 위하여 사심 없이 봉사하는 데 거룩히 바칠 것을 요구한다.

195:9.7 (2083.3) 이기적인 남녀는, 필사 인간에게 일찍이 제공된 가장 큰 영적 보물을 위해서도, 단지 그런 값을 치르려 하지 않는다. 어리석고 사람을 속이는 이기심(利己心)의 추구에 뒤따르는 슬픈 실망에 사람이 충분히 환멸을 느꼈을 때, 형식이 된 종교가 열매 없는 것을 알아차리고 난 다음에야, 하늘나라 복음으로, 나사렛 예수의 종교로 향할 생각을 진심으로 가질 것이다.

195:9.8 (2083.4) 세상은 직접 체험하는 종교가 더욱 필요하다. 기독교―20세기에 최선의 종교―조차 예수에 관한 종교일 뿐 아니라, 대체로 사람이 남의 손을 빌려서 맛보는 종교이다. 사람들은 인정된 종교 선생들로부터 물려받은 그대로, 그 종교를 통째로 삼킨다. 땅에서 정말로 산 그대로 예수를 보고, 생명을 주는 그의 가르침을 사람이 손대지 않은 채로 알 수만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큰 깨우침을 맛볼 것인가! 아름다운 것을 묘사하는 말씀은, 이를 구경하는 것처럼 기쁨에 떨게 만들 수 없고, 교리(敎理)의 말씀도 하나님이 앞에 계심을 아는 체험처럼 사람의 혼에 영감을 줄 수 없다. 그러나 기대하는 믿음은, 저 건너 여러 세상에 신성한 가치를 가진 영원한 영적 현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도록, 사람의 혼 속에 희망의 문을 늘 열어 놓고 있을 것이다.

195:9.9 (2083.5) 기독교는 인간의 욕심, 전쟁의 미친 짓, 권력을 향한 욕심이 도전하는 앞에서 감히 이상(理想)을 낮춰 버렸다. 그러나 예수의 종교는 때묻지 않고 초월적인 영적 권유로 서 있으며, 사람의 힘이 자라기까지, 동물로서 진화한 이 모든 유물을 딛고 일어서라고, 은혜로 참된 인간 운명의 도덕적 높이까지 이르라고 소리친다.

195:9.10 (2083.6) 기독교는 형식 치중, 지나친 조직, 지성의 중시, 그리고 다른 비영적 경향 때문에 천천히 죽을 위협을 받는다. 현대의 기독교회는 예수가 인류의 뒤잇는 세대를 계속 영적으로 변화시키라고 임명한 것과 같은, 그러한 박력 있는 신자들의 단체가 아니다.

195:9.11 (2083.7) 이른바 기독교는 종교적 관념과 관습 뿐 아니라 사회 및 문화 운동이 되어 버렸다. 현대 기독교의 흐름은 여러 고대(古代) 이교도의 늪과 많은 야만인의 수렁에서 물을 받고 있다. 순전히 그 근원이라고 생각되는 높은 갈릴리 고원 뿐 아니라, 많은 옛 문화의 분수령이 이 현대 문화의 흐름에 물을 주고 있다.

10. 앞날

195:10.1 (2084.1) 기독교는 정말로 이 세상에 크게 기여했지만, 이제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이다. 세상은 주를 모든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필사자, 영에게서 태어난 필사자의 체험 속에서, 다시 땅에서 사는 예수를 구경하는 것이 필요하다. 원시 기독교의 부흥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익하다. 너희가 있는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현대 문화는 예수의 일생의 새로운 계시(啓示)로 영적 세례를 받고, 영원한 구원을 주는 복음을 새로 이해함으로 빛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높이 들어올려질 때, 예수는 모든 사람을 끌어당길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정복자보다 더한 것, 아니 모든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낫게 살아가는, 넘쳐 흐르는 근원까지 되어야 한다. 몸소 체험하면서 하나님이 계시는 현실을 발견함으로 종교가 신성하게 될 때까지, 종교는 상급의 인본주의일 뿐이다.

195:10.2 (2084.2) 땅에서 예수가 산 일생의 아름다움과 숭고함, 그 인간성과 신성(神性), 단순함과 독특함은 사람을 구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놀랍고 마음을 끄는 그림을 제시한다. 그래서 어느 시대의 신학자와 철학자라도, 사람 모습을 입은 하나님의 그러한 초월적 자신 수여로부터, 감히 영적으로 사람을 묶어놓는 신조(信條)를 만들거나 신학 체계를 지어내지 못하게 효과적으로 제지해야 한다. 예수 안에서 우주는 한 필사 인간을 만들어냈고, 그 사람 안에서 사랑의 정신은 시간의 물질적 장애를 이기고, 물리적 기원을 가진 사실을 극복했다.

195:10.3 (2084.3) 항상 기억하라―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필요하다. 우주의 최종에 이르는 신성한 운명을 얻는 체험, 영원한 성격 체험을 완전히 마침내 성취하는 데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필요하다.

195:10.4 (2084.4) “네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은 아마도, 아버지가 살아 계신, 사랑의 영이라는 선언 다음으로, 예수가 일찍이 말씀한 가장 위대한 선언이었다.

195:10.5 (2084.5) 주를 믿으라고 사람들을 설득할 때,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강제로 또는 의무나 관습으로 처음 십리를 가는 것이 아니라,[4] [33] 오히려 아낌없이 봉사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헌신적 태도로 십리를 더 가는 것이며, 이것은 사랑으로 형제를 붙잡고 필사 존재에서 상급의 신성한 목표를 향하여 영적 안내를 받도록 형제를 계속 설득하려고, 예수처럼 손 뻗는 것을 나타낸다. 기독교는 지금도 기꺼이 처음 십리를 가지만, 진정하게 십리를 더 가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인류는 시들고, 도덕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넘어진다―예수를 따른다고 공언(公言)하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가 제자들에게 살고 사랑하고 봉사하라고 가르친 대로 정말로 살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

195:10.6 (2084.6) 예수의 하늘나라 단체를 영적으로 부활시키는 방법으로, 새롭고 변화된 인간 사회를 건설하는 모험으로 부르는 소리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기쁨에 떨게 할 것이요, 사람들은 육체를 입은 예수의 친구로서 땅에서 돌아다니던 시절 이후로 이처럼 감동받은 적이 없다.

195:10.7 (2084.7) 하나님이 실제로 계심을 부인(否認)하는 어떤 사회 체계나 정치 체제도, 건설적이고 지속하는 어떤 방법으로 인간 문명이 진보하는 데 이바지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세분되고 세속화된 바와 같이, 기독교는 자체가 더욱 진보하는 데 가장 큰 단일 장애물이 된다. 이것은 특히 동양의 경우에 참말이다.

195:10.8 (2084.8) 교회 중심주의는 당장에, 그리고 언제까지나, 하늘나라의 영적 관계에서, 사람의 형제 정신에 담긴, 예수의 신앙 친구들의 생생한 믿음, 성장하는 정신, 직접 겪는 체험과 공존할 수 없다. 지난날에 이룬 업적의 전통을 간직하려는 칭찬할 만한 소망은 때때로, 낡아버린 예배 체계의 방어로 이끈다. 고대(古代)의 사상 체계를 돌보려는 좋은 뜻을 가진 소망은, 현대인의 확대되고 진보하는 지성의 영적 갈망을 채우도록 고안된, 새롭고 적절한 수단과 방법의 후원을 효과적으로 막는다. 마찬가지로, 20세기의 기독교회는 진정한 복음―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을 즉시 진전시키는 길에 큰 장애가 되지만, 이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195:10.9 (2085.1) 복음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에게 기쁘게 충성하려는 열심 있는 많은 사람은, 그의 일생과 가르침의 정신을 너무나 조금 나타내는 교회를 열심히 지지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을 깨달으며, 그들은 그리스도가 그런 교회를 세웠다고 그릇된 가르침을 받아 왔다. 예수는 이른바 기독교회를 세우지 않았지만, 그의 성품과 일치되는 모든 면에서, 땅에서 일생에 그가 한 일의 대변자, 현존하는 최선의 대변자로서 교회를 육성해 왔다.

195:10.10 (2085.2) 기독교회가 오직 주의 계획을 감히 지지하려고 한다면, 무관심한 듯이 보이는 수많은 젊은이가 그러한 영적 사업에 지원하려고 앞으로 달려나오고, 이 큰 모험을 서슴지 않고 끝까지 마칠 것이다.

195:10.11 (2085.3) 기독교는 자체의 표어(標語) 하나에 담겨 있는 운명과 심각하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갈라져 서로 싸우는 집은 버틸 수 없다.” 비기독교 세계는 종파로 갈라진 기독교 세계에 도저히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 있는 예수는 가능한 기독교의 통일에 유일한 희망이다. 참된 교회―예수의 형제 정신―은 눈에 보이지 않고, 영적이며, 꼭 한결같은 것이 아니라, 조화의 특징을 가졌다. 획일성은 기계 성질을 가진 물리적 세계의 표시이다. 영적 조화는 살아 있는 예수와 믿음으로 연합하여 생기는 열매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형제 단체를 진전시키는 데 이제 더 장애물이 되지 말아야 한다. 이 형제 단체는 제도가 되어버린 사회 조직과 반대로, 살아 있는 유기체가 될 운명을 가졌다. 이 단체는 그러한 사회 조직을 잘 이용해도 좋지만, 그것에 밀려나서는 안 된다.

195:10.12 (2085.4) 그러나 20세기의 기독교조차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종족에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도덕적 천재가 통합되어 생긴 산물이요, 참으로 땅에서 선(善)을 지지하는 가장 큰 세력 중에 하나였고, 따라서 타고난 결함과 얻은 결함이 있어도, 아무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힘찬 도덕적 감정을 가진, 생각하는 사람들의 지성을 움직이려고 아직도 궁리한다.

195:10.13 (2085.5) 그러나 교회가 상업(商業)과 정치에 말려드는 데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한 거룩하지 않은 연합은 주를 지독하게 팔아넘기는 것이다. 진심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제도화된 강력한 교회가 새로 태어난 종파의 숨통을 때때로 감히 틀어막고 어쩌다 정통 아닌 옷을 걸친 듯이 보이는 진리의 사자(使者)들을 박해하려고 한 것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195:10.14 (2085.6) 그런 방식의 예배를 더 좋아한 사람들이 세상에 없었다면 그러한 교회가 살아남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참말이다. 영적으로 게으른 많은 사람이 의식과 신성한 전통으로 이루어진 고대의 권위적 종교를 몹시 바란다. 모든 사람이 종교적 권위 없이 지낼 수 있도록 만들기에는 인간의 진화와 영적 진보가 도저히 충분하지 않다. 하늘나라의 보이지 않는 형제 단체는, 이 여러 가지 사회 및 기질 등급의 가족 집단이 참으로 영에게 인도받는 하나님의 아들이 기꺼이 된다면, 그들을 포함해도 괜찮다. 그러나 이 예수의 형제 단체에는 종파의 경쟁도, 집단의 원한도, 도덕적으로 상위에 있고 영적으로 틀릴 수 없다는 주장(主張)도, 설 자리가 없다.

195:10.15 (2086.1) 기독교인의 이 여러 집단은 서양 문명의 민족들 사이에서 수많은 다른 종류의 사람, 신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을 수용하는 데 소용될지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의 그러한 분열은 예수의 복음을 동양(東洋) 민족들에게 가지고 가려고 시도할 때, 심각한 약점을 제시한다. 이 민족들은 따로, 기독교와 얼마큼 떨어져서, 예수의 종교가 있다는 것을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하며, 기독교는 갈수록 더 예수에 관한 종교가 되었다.

195:10.16 (2086.2) 유란시아의 큰 희망은 예수의 유익한 말씀을 새로 확대하여 발표함으로 예수를 새로이 드러내는 가능성에 있으며, 그 말씀은 오늘날 예수를 따른다고 공언하는 자들의 수많은 집단을 사랑의 봉사로 영적 연합을 이룰 것이다.

195:10.17 (2086.3) 세속의 교육조차도, 그 교육이 어떻게 인생의 계획과 인격의 향상을 시작하는가 젊은이를 가르치는 일에 더 주의를 기울이려 한다면, 이 큰 영적 부흥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모든 교육의 목적은 인생 최대의 목적, 즉 훌륭하고 잘 균형된 인격의 발달을 촉진하고 육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너무 지나친 자아 만족 대신에 도덕적 훈련을 가르치는 것이 대단히 필요하다. 그러한 기초 위에 종교는 필사인의 일생을 더 충만하고 보람있게 만드는 데, 아니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고 향상하는 데도 영적 자극을 줄지 모른다.

195:10.18 (2086.4) 기독교는 즉석에서 만들어진 종교이며, 따라서 저속(低速) 기어에서 작용해야 한다. 고속 기어의 영적 성과는 예수의 참 종교가 새로 드러나고 더욱 널리 받아들여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렸던 한 목수의 평범한 제자들이 어떤 가르침을 시작하여, 이것이 3백 년 안에 로마 제국을 정복하였고, 다음에 계속하여, 로마를 멸망시킨 야만인들을 설득한 것을 보니, 기독교는 막강한 종교이다. 바로 이 기독교는 히브리 신학과 그리스 철학의 흐름 전체를 정복했다―흡수하고 향상시켰다. 다음에 신비교와 이교(異敎) 사상에 지나치게 젖은 결과로서, 1천 년이 넘도록 혼수 상태에 빠졌을 때, 이 기독교는 스스로 살아나서 서양 세계 전체를 실질적으로 다시 정복했다. 기독교는 충분히 예수의 가르침을 담고 있어 자체의 불멸을 얻을 수 있다.

195:10.19 (2086.5) 기독교가 예수의 가르침을 더 깨달을 수 있기만 하다면, 현대인이 새롭고 더욱 복잡해지는 문제의 해결을 돕는 데 훨씬 더 이바지할 수 있다.

195:10.20 (2086.6) 기독교가 큰 장애를 겪는 것은 온 세상의 지성인들이 보기에 기독교가 서양 문명의 사회 체계, 산업 생활, 도덕 기준의 일부라고 신분이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뜻하지 않게 이상이 결여된 과학, 원칙 없는 정치, 일하지 않고 얻은 재산, 자제 없는 쾌락, 인격 없는 지식, 양심(良心) 없는 권력, 도덕을 모르는 산업을 묵인한 죄책감 밑에서 비틀거리는 사회를 후원하는 듯이 보였다.

195:10.21 (2086.7) 현대 기독교의 희망은, 서양 문명의 사회 체계와 산업 정책의 후원을 그만두어야 하며, 한편 아주 용감히 찬양하는 그 십자가 앞에서 겸손히 머리를 숙이고, 거기서 나사렛 예수로부터, 필사 인간이 일찍이 들을 수 있던 가장 큰 진리―하나님은 아버지요 사람은 형제라는 산 복음―을 다시 배우는 데 있다.

제 196 편 예수의 믿음

유란시아서

제 196 편

예수의 믿음

196:0.1 (2087.1) 예수는 숭고하고 성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지녔다. 필사 존재에서 생기는 평범한 부침(浮沈)을 겪었지만, 하나님이 확실히 보살피고 안내하심을 결코 종교적으로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믿음은 신성한 존재, 그에게 깃든 조절자의 활동에서 생겨난 통찰력의 결과였다. 그의 믿음은 전통적이거나 단순히 지적 믿음이 아니었고, 온전히 개인적이고 순수한 영적 믿음이었다.

196:0.2 (2087.2) 인간 예수는 하나님이 참되고 아름답고 선할 뿐 아니라, 거룩하고 공정(公正)하고 위대하다고 보았다. 신의 이 모든 속성을 머리 속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으로 한데 집중하였다. 예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요, 동시에 “하늘에 계신, 생명과 사랑의 아버지”였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개념을 예수가 창시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새로이 계시(啓示)함으로, 그리고 모든 필사 인간이 이 사랑의 아버지의 자식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포함으로 그 생각을 숭고한 체험으로 높이고 들어올렸다.

196:0.3 (2087.3) 예수는 우주와 투쟁하느라고 허덕이는 사람, 적대하는 죄 많은 세상과 결사적으로 씨름하는 사람처럼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매달리지 않았다. 어려움의 한가운데서 단지 위안으로서, 또는 절망의 위협 속에서 위로로서 믿음에 의존하지 않았다. 믿음은 그저 불쾌한 현실과 생활의 슬픔을 보상(報償)해 주는 망상이 아니었다. 필사 존재에서 생기는 모든 자연스러운 곤경과 이 세상의 모순에 직면하여 최고로,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평안함을 맛보고, 하늘 아버지의 바로 그 계심 가운데서, 믿음으로 엄청난 생활의 기쁨을 느꼈다. 이 승리한 믿음은 실제로 영적으로 얻은 생생한 체험이었다. 인간적 체험의 가치에 예수가 크게 기여한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관하여 대단히 많은 새 관념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팔팔한 믿음, 새로운 상급 종류의 믿음을 아주 훌륭하게, 인간답게 보여준 것이다. 이 우주의 어떤 세상에서도, 어느 한 필사자의 일생에서, 나사렛 예수의 인간 체험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생생한 실체가 된 적이 없었다.

196:0.4 (2087.4) 지역 우주의 이 세계와 어느 다른 세계에서도 유란시아에서 사신 주의 일생에서 새로운 상급의 종교를 발견하는데, 이것은 우주의 아버지와 개인적으로 영적 관계를 가지는 데 기초를 두고, 진정한 개인적 체험을 거친 최고의 권한으로 온전히 인정받은 종교이다. 예수의 이 살아 있는 믿음은 지적(知的) 숙고보다 더한 것이요, 신비스러운 명상이 아니었다.

196:0.5 (2087.5) 신학(神學)은 신앙을 고정시키고 형성하고 정의하고 교리로 만들지 모르지만, 예수의 인생에서 신앙은 개인적이고, 살아 있고, 독창성 있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순전히 영적 믿음이었다. 이 믿음은 전통을 존경하는 마음도, 신성한 신조로 지녔던 한낱 지적 관념도 아니었지만, 오히려 숭고한 체험이요 그를 단단히 붙든 깊은 확신이었다. 그의 믿음은 너무 참되고 모든 것을 포함했기 때문에, 어떤 영적 의심도 절대로 쓸어버리고, 어떤 상반되는 욕구도 효과적으로 없애버렸다. 아무것도 뜨겁고 숭고한 믿음, 기가 꺾이지 않는 이 믿음의 영적 정박지에서 그를 몰아낼 수 없었다. 명백한 패배를 당하거나 실망과 끔찍한 절망이 한창일 때도, 그는 전혀 두려움 없이, 영적 불굴(不屈)을 가득히 의식하면서 신이 계신 앞에서 차분하게 섰다. 예수는 확고한 믿음을 소유한다는 힘찬 확신을 지녔고, 인생의 벅찬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아버지의 뜻에 의심하지 않고 충성함을 어김없이 보였다. 더할 나위 없는 이 믿음은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는, 잔인하고 정신을 짓밟는 위협에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196:0.6 (2088.1) 종교적 천재(天才)의 경우에, 강한 영적 믿음은 비참한 광신으로, 종교적 자부심의 과장으로 이끄는 일이 허다하지만, 예수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실지 생활에서 그는 자신의 특별한 믿음과 영적 달성으로 인하여 불리한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영적 승진이 하나님과 친히 겪는 체험의 표현, 온전히 무의식이자 저절로 일어나는, 혼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196:0.7 (2088.2) 모든 것을 다 바치고 굽힐 줄 모르는 예수의 영적 믿음은 결코 광신이 되지 않았는데, 이 믿음이 실제적이고 보통 일어나는 사회ㆍ경제ㆍ도덕적 생활 상황의 조화된 가치에 대하여 공정한 지적 판단을 부인하려고 결코 애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눈부시게 조화된 인격이었다. 완전하게 갖춘 신다운 존재였다. 그는 또한 땅에서 하나의 인격으로서 활동하는 존재, 인간답고 신다운 하나의 통합된 존재로서, 훌륭하게 조정되었다. 주는 언제나 혼의 믿음을 성숙한 경험으로 얻은 지혜 및 평가와 조정했다. 인간적으로 충성하는 모든 일―개인의 명예, 가족 사랑, 종교적 의무, 사회적 임무, 경제적 필요―의 현실과 신성함을 날카롭게 깨닫는 것과 조화된 관계에서, 개인적 믿음, 영적 희망, 도덕적 헌신은 언제나 비할 데 없이 종교적으로 통일되어 서로 관련되었다.

196:0.8 (2088.3) 예수의 믿음은 모든 영적 가치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발견된다고 상상했고, 따라서 “먼저 하늘나라를 찾으라”고 하였다. 예수는 진보된 이상적 하늘나라 친교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완성되는 것을 보았다.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의 바로 그 핵심은 이것이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그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처럼 하늘나라가 하나님의 뜻을 구성한다고 상상했기 때문에, 놀랍게 자기를 잊고 한없는 열심으로 이를 실현하는 운동에 몸을 바쳤다. 하지만 열심히 일했던 어떤 임무에도, 그리고 특별한 그의 일생 전체를 통해서, 광신자의 격분이나 자기 본위 종교인의 피상적 천박성이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196:0.9 (2088.4) 주의 일생 전부가 이 살아 있는 믿음, 이 숭고한 종교적 체험으로 인하여 한결같이 조절되었다. 이 영적 태도가 완전히 그의 생각과 느낌, 믿음과 기도, 가르침과 설교를 지배했다. 한 아들이 하늘 아버지의 안내와 보호가 확실하고 분명한 것을 믿는 이 개인적 믿음은 그의 독특한 인생에 영적 실체의 심오한 자질을 부어주었다. 그래도, 신과 가까운 관계를 이렇게 아주 깊이 의식했는데도, 이 갈릴리 사람, 하나님의 갈릴리 사람은, 누가 그를 “선한 선생”이라 일컬었을 때, 그 순간에 대답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자아를 잊어버리는 그러한 눈부신 태도를 구경할 때, 어떻게 우주의 아버지가 자신을 그에게 충만히 나타내고, 그를 통해서 자신을 그 영역의 필사자들에게 드러낼 수 있었는가 우리는 비로소 이해한다.

196:0.10 (2088.5) 예수는 그 영역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모든 헌물 가운데 가장 큰 것을 가져왔으니, 즉 신(神)의 뜻을 행하는 훌륭한 봉사에 자신의 뜻을 거룩히 드리고 바친 것이다. 예수는 언제나, 한결같이,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견지에서 종교를 풀이했다. 기도나 종교 생활에서 어떤 다른 모습에 관하여 주의 생애를 연구할 때, 그가 무엇을 가르쳤는가가 아니라 무슨 일을 했는가 보라. 그에게 기도(祈禱)는 영적 태도의 성실한 표현이요, 혼의 충성 선언, 개인적 헌신의 낭독, 감사의 표시, 긴장된 감정의 방지이다. 갈등의 예방이요, 지적 사고(思考)의 승화요, 소망을 고귀하게 만들고, 도덕적 결심을 확신하고, 값진 생각을 하며, 상급 성향에 활력을 붓고, 충동을 거룩히 바치는 것이다. 관점의 해명이요, 믿음의 선언, 의지의 초월적 항복, 확신의 숭고한 주장, 용기의 전시, 발견의 선언이요, 최고의 헌신을 고백하는 것이다. 거룩히 헌신함을 확인하는 것, 어려움을 조정하는 기법이요, 이기심ㆍ악ㆍ죄를 향한 인간의 모든 성향을 물리치려고 혼의 통합된 능력을 힘차게 동원하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헌신적으로 거룩히 바친 바로 그러한 인생을 살았고, 바로 그러한 기도로 일생을 승리로 마쳤다. 견줄 데 없는 그의 종교 생활의 비결은 하나님의 계심을 이렇게 의식하는 것이었다. 계몽이나 목소리나 환상이나 특별한 종교적 버릇이 아니라, 총명한 기도와 성실한 예배로―하나님과 끊임없이 교통함으로―그 비결을 얻었다.

196:0.11 (2089.1) 땅에서 사신 예수의 일생에서 종교는 생생한 체험, 즉 영적인 것의 존중을 비롯하여 올바름을 실행하기까지, 직접 몸소 행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믿음은 신성한 영의 열매, 초월적 열매를 맺었다. 그 믿음은 어린아이의 믿음처럼 미숙하고 쉽사리 믿는 태도가 아니라, 여러 면에서 어린아이의 생각처럼 의심하지 않는 믿음과 비슷하였다. 아이가 부모를 믿는 것과 비슷하게 예수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우주를 깊이 신뢰했다―어린아이가 부모의 환경을 믿는 것 같이, 바로 그렇게 믿었다. 우주가 근본적으로 선함을 예수가 진심으로 믿은 것은 어린아이가 지상의 환경이 안전함을 믿는 것과 대단히 비슷하였다. 어린아이가 땅에 있는 부모에게 기대듯 하늘 아버지를 의지하였고, 뜨거운 믿음은 결코 하늘 아버지가 확실히 보살핌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두려움이나 의심이나 회의(懷疑)에 심각하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불신(不信)이 그의 일생에서 자유로운 독창적 표현을 막지는 않았다. 성장한 어른의 굳건하고 총명한 용기, 그리고 의지하는 어린아이의 성실하고 신뢰하는 낙관, 이 두 가지를 가졌다. 그의 믿음은 전혀 두려움 없는 그러한 신뢰의 높이까지 다다랐다.

196:0.12 (2089.2) 예수의 믿음은 어린아이가 부모를 의지하는 것과 같이 순수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절대로 의심없이 믿었고, 그래서 그 믿음은 동료 존재들과 접촉하는 매력에, 그리고 우주의 경이에 반응했다. 신다운 것에 기대는 감각이 아주 완벽하고 대단히 자신이 넘쳐서, 자기가 절대로 안전하다는 기쁨과 확신을 낳았다. 그의 종교적 체험에는 망설이는 겉치레가 전혀 없었다. 성장한 어른의 이 위대한 지능 속에서 어린아이의 믿음이 종교적 의식(意識)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를 최고로 다스렸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고서 너희는 하늘나라로 들어가지 못할지니라”하고 한때 말한 것은 당연하다. 예수의 믿음이 어린아이 같기는 했어도, 어떤 의미에서도 유치하지는 않았다.

196:0.13 (2089.3)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를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함께 믿으라, 하나님의 사랑이 현실인 것을 믿고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보장이 확실한 것을 완전히 믿고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주는 모든 추종자가 그의 초월적 믿음을 충분히 함께 가지기를 바란다. 그가 믿은 것을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가 믿은 것처럼 믿으라고, 예수는 대단히 감동스럽게 추종자들을 자극했다. 이것이 “나를 따르라”하는 한 가지 최상의 요구 조건의 온전한 의미이다.

196:0.14 (2090.1) 땅에서 예수의 일생은 한 가지 큰 목적에 바쳤다―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 종교적으로 그리고 신앙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예수의 믿음은 어린아이의 믿음처럼 의지했지만, 전혀 주제넘지 않았다. 그는 건전하고 당당한 결정을 내리고, 다양한 실망을 용감히 겪고, 특별한 어려움을 굳게 이겨냈으며, 의무의 엄격한 요구 조건을 주춤하지 않고 따랐다. 예수가 믿은 것을 믿고 그가 믿은 것처럼 믿는 데는 힘찬 의지와 틀림없는 확신이 필요했다.

1. 인간 예수

196:1.1 (2090.2) 아버지의 뜻에 그리고 사람에게 봉사하는 데 바친 예수의 열정은 사람의 결심과 인간적 결의보다 더한 것이었다. 그렇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데 진심으로 바친 거룩한 열정이었다. 미가엘이 군주라는 사실이 아무리 대단해도 상관 없이, 너희는 사람들로부터 인간 예수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 주는 하나님일 뿐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는 사람들에게 속하고, 사람들은 그에게 속한다. 인간 예수를 투쟁하는 필사자로부터 빼앗으려고 종교 자체를 잘못 해석하는 것은 얼마나 딱한 일인가! 그리스도가 인간인가 신인가 토론하면서 나사렛 예수가 신앙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한 종교적 인간이었다는 예외적 진리를 놓치지 말라. 그는 유란시아에서 일찍이 살았던 가운데 참으로 가장 종교적 인간이었다.

196:1.2 (2090.3) 열아홉 세기 동안 신학의 전통과 종교적 독단(獨斷) 한가운데 묻혔던 그의 무덤으로부터 인간 예수의 상징적 부활을 증언할 때가 무르익었다. 나사렛 예수는,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라는 빛나는 개념에도 이제 더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이 계시를 통해서, 사람의 아들이 전통적 신학(神學)의 무덤으로부터 회복되고, 그 이름을 지니는 교회와 모든 다른 종교에게 살아 있는 예수로서 제시된다면, 얼마나 초월적 수고가 될 것인가! 기독교 신자들의 친교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종교적으로 헌신하고, 사람에게 사심 없이 봉사하는 데 거룩히 바친 그의 참 일생을 보여주면서, 그 친교가 주를 “따를” 수 있도록, 서슴지 않고 그러한 믿음과 생활 관습을 조정할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인이라고 공언(公言)한 자들은,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경제적으로 잘못 적응된 이기적 친교, 거만하며 신성하게 되지 않은 친교가 노출될까 두려워하는가? 갈릴리의 예수가 필사 인간의 지성과 혼 속에서 개인적 종교 생활의 이상으로서 다시 자리를 찾는다면, 제도화된 기독교는 전통적 교회 권한이 위협받는 가능성을, 아니 교회 권한이 전복될까 두려워하는가? 정말로, 예수의 살아 있는 종교가 예수에 관한 신학적 종교를 갑자기 갈아치운다면, 기독교 문명에서 일어날 사회적 재조정, 경제적 변화, 도덕의 회복, 종교적 수정은 철저하고 혁신이 될 것이다.

196:1.3 (2090.4) “예수를 따르는” 것은 그의 종교적 믿음을 몸소 함께 가지고, 사람에게 사심 없이 봉사한 주의 일생의 그 정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예수가 무엇을 믿었는가를 찾아내고, 그 이상(理想)을 발견하며, 그의 드높은 인생의 목적을 성취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지식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은 예수의 종교적 일생과 그가 어떻게 그런 일생을 살았는가를 아는 것이다.

196:1.4 (2090.5) 서민들은 예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진실이 세상에 다시 선포된다면, 종교적 동기에 거룩히 바친 그의 성실한 인생을 발표하는 것에 서민들은 다시 반응할 것이다.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기쁘게 들은 것은 그가 그들 가운데 하나요, 꾸밈없는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적 스승은 정말로 보통 사람이었다.

196:1.5 (2091.1) 육체를 입은 예수의 일생, 겉에서 보이는 일생을 글자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믿음을 함께 가지는 것이 하늘나라를 믿는 사람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가 하나님을 의지한 것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가 사람들을 믿은 것 같이 사람들을 믿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이나 사람들이 형제인 것을 놓고 한 번도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는 하나를 생생하게 보여준 예이었고, 다른 하나의 심오한 시범이었다.

196:1.6 (2091.2) 인간인 것을 의식한 때부터 신다운 것을 깨닫기까지 사람이 진보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사람의 성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의식하는 데까지 올라갔다. 주는 필사 지능의 믿음, 그리고 깃드는 조절자의 행위가 함께 성취하여, 인간다운 것으로부터 신다운 것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높이 올라갔다. (그가 인간이라는 현실을 내내 충분히 의식하면서) 신성(神性)의 총체에 도달한 것을 사실로 깨닫는 데는, 차츰차츰 신답게 되는 것을 믿음으로 의식하는 일곱 단계가 따랐다. 점진적으로 자아를 각성하는 이 여러 단계는 주의 자신 수여 체험에서 다음의 특별한 여러 사건으로 구별된다:

196:1.7 (2091.3) 1. 생각 조절자의 도착.

196:1.8 (2091.4) 2. 열두 살쯤 되었을 때,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나타났던 이마누엘의 사자.

196:1.9 (2091.5) 3. 세례에 뒤따른 여러 표시.

196:1.10 (2091.6) 4. 변모산에서 겪은 체험.

196:1.11 (2091.7) 5. 상물질 부활.

196:1.12 (2091.8) 6. 영으로서 승천.

196:1.13 (2091.9) 7. 마침내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품에 안긴 것. 이것은 그의 우주를 다스리는 무제한 통치권을 부여하였다.

2. 예수의 종교

196:2.1 (2091.10) 언젠가 기독교회의 개혁(改革)은 충분히 깊이 파고들어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인 예수의 가르침, 변질되지 않은 종교적 가르침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너희는 예수에 관한 종교를 전파해도 좋지만, 예수의 종교를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오순절의 열심에 빠져, 베드로는 뜻하지 않게 새 종교, 부활하고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종교를 창시했다. 사도 바울은 나중에 이 새 복음을 기독교로 변화시켰는데, 이것은 그의 신학 견해를 담고 다마스커스 길에서 그가 예수를 개인적으로 체험한 것을 그리는 종교였다. 하늘나라 복음은 갈릴리의 예수가 몸소 겪은 종교적 체험에 기초를 두었으며, 기독교는 거의 순전히 사도 바울이 개인적으로 겪은 종교적 체험에 기초를 두었다. 신약(新約)의 거의 전부가, 의미 있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예수의 종교 생활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종교적 체험을 토론하고 그 자신의 종교적 확신을 그리는 데 바쳐진다. 마태ㆍ마가ㆍ누가의 어떤 부분은 별도로 하고, 이 진술에 주목할 예외는 히브리서와 야고보 서한 뿐이다. 베드로도 그가 쓴 글에서, 주의 개인적 종교 생활로 겨우 한 번 되돌아갔을 뿐이다. 신약은 훌륭한 기독교 문헌이지만, 예수다운 모습이 빈약할 따름이다.

196:2.2 (2091.11) 육체를 입은 예수의 일생은, 원시적 경외감과 인간적 존경이 나타나는 초기의 관념으로부터, 몸소 영적 교통을 가지는 여러 해를 거쳐서, 마침내 그가 아버지와 하나임을 의식하는 높은 상급 지위에 이를 때까지 거쳐간, 뛰어난 종교적 성장을 묘사한다. 그러므로 짧은 일생 안에 예수는 사람이 땅에서 시작하고, 연속된 파라다이스 이전 생애 수준의 여러 영 훈련 학교에서[1] [34] 오래 머무른 뒤에야 보통 이룩하는, 종교적ㆍ영적 진보 체험을 거쳤다. 예수는 개인의 종교적 체험에서 확실히 믿는 것들을 순전히 인간으로서 의식(意識)하는 경지로부터, 자기의 신 성품을 분명히 깨닫는 숭고한 영적 높이까지, 그리고 한 우주의 경영에서 우주의 아버지와 그가 가까운 관계를 가졌음을 의식하기까지, 나아갔다. 그를 선한 선생이라고 부른 사람에게 자기도 모르게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외에 아무도 선하지 않으니라” 말하도록 자극한 상태, 필사자로서 의존하는 겸손한 지위로부터 진보하였고 그에게 “너희 가운데 누가 나를 정죄하느냐?” 외치도록 이끈 신성(神性)의 성취를 숭고하게 의식하기까지 이르렀다. 인간인 것으로부터 신다운 것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점진적으로 올라간 것은 순전히 필사자의 성취였다. 이렇게 신성에 이르고 나서, 하나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여전히 똑같은 인간 예수, 사람의 아들이었다.

196:2.3 (2092.1) 마가ㆍ마태ㆍ누가는 신의 뜻을 확인하고 그 뜻을 행하려는 숭고한 투쟁에 몰두한 인간 예수의 그림을 얼마큼 간직한다. 요한은 신성을 완전히 의식하면서 땅에서 걸어다닌 승리한 예수의 그림을 제시한다. 주의 일생을 연구한 자들이 저지른 큰 잘못은, 더러가 그를 전적으로 인간이라 생각했고 더러는 오직 신(神)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의 체험 전부를 통해서 내내, 아니 아직도 그렇다시피, 그는 참으로 인간이자 신이었다.

196:2.4 (2092.2) 그러나 인간 예수가 종교를 가졌다고 인식되기는 했어도 신다운 예수(그리스도)가 거의 하룻밤 사이에 종교가 되었기 때문에 가장 큰 잘못이 일어났다. 바울의 기독교는 사람들이 신다운 그리스도를 틀림없이 경배하도록 만들었지만, 갈릴리의 예수, 투쟁하는 용감한 인간 예수를 거의 전적으로 못보고 놓쳤다. 인간 예수는 개인의 종교적 믿음의 용기와 그에 깃드는 조절자의 영웅다운 행위로 인하여, 낮은 인간 수준에서 신과 하나가 되기까지 올라갔으며, 이처럼 모든 필사자가 그렇게 인간으로부터 신성에 이르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그러한 새 생명의 길이 되었다. 어떤 영적 단계, 어떤 세계에 있는 필사자라도 예수 개인의 일생에서, 가장 낮은 영 수준에서 가장 높은 신다운 가치에 이르기까지, 몸소 겪는 모든 영적 체험의 시초부터 끝까지 올라가는 동안에, 그들에게 힘을 주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을 발견할지 모른다.

196:2.5 (2092.3) 신약을 기록하던 당시의 저자(著者)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을 아주 깊이 믿었을 뿐 아니라, 하늘나라를 완성하려고 그가 즉시 땅으로 돌아오리라고 열심히, 진지하게 믿었다. 주가 즉시 돌아온다는 이 굳센 믿음은 순전히 인간다운 주의 체험과 속성을 묘사하는 언급을 기록에서 빼버리는 경향을 많이 부추겼다. 기독교 운동 전체가 나사렛 예수의 인간다운 그림으로부터 멀리, 부활한 그리스도, 영화롭게 되었고 곧 돌아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쪽으로 가는 경향이 있었다.

196:2.6 (2092.4)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인간 형제들을 위하여 수고하면서 몸소 체험한 종교를 세웠다. 바울은 영화롭게 된 예수가 예배의 대상이 되고, 그 형제 단체가 신다운 그리스도를 믿는 동료 신자들로 이루어진 그러한 종교를 세웠다. 예수의 자신 수여에서 이 두 개념은 신이자 인간인 일생에 잠재했다. 땅에서 사신 일생에서 주의 인간 성품과 신다운 성품이 뗄 수 없이 붙어 있고 최초의 하늘나라 복음에서 아주 영화롭게 발표된 바와 같이, 이 두 성품을 적절히 인정하는 통일된 종교를 추종자들이 만들지 못한 것은 정말로 유감스럽다.

196:2.7 (2093.1) 예수가 세상에서 아주 진심으로 헌신한 종교가였다는 것을 기억하기만 한다면, 너희는 그의 어떤 강경한 발언에 충격을 받거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아낌없이 몸을 바친, 온통 거룩하게 헌신한 필사자였다. 어렵게 보이는 말씀 가운데 많은 것은 추종자에게 내리는 명령이라기보다 믿음을 친히 고백한 것이요 헌신(獻身)의 서약이었다. 바로 이러한 한결같은 목적과 사심 없는 헌신으로 인하여 그는 짧은 일생에 인간의 지성을 정복하는 데 그렇게 특별히 진보할 수 있었다. 그의 선언 가운데 많은 것은 모든 추종자에게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부과한 요구를 고백한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하늘나라 운동에 헌신하면서, 예수는 지나간 다리를 모두 불살랐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있는 모든 장애물을 희생했다.

196:2.8 (2093.2) 예수가 가난한 자를 축복한 것은 그들이 보통 성실하고 경건했기 때문이다. 부유한 자가 보통 바람을 피우고 신앙심이 없기 때문에 그들을 비난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종교가 없는 빈민을 비난하고, 거룩하게 헌신하는 경건한 부자를 칭찬할 것이다.

196:2.9 (2093.3) 예수는 세상에서 사람이 마음을 편안히 가지도록 이끌었다. 금기(禁忌)에 노예가 된 처지로부터 사람들을 구했고, 세상이 근본적으로 악하지 않다고 가르쳤다. 그는 땅의 생활을 벗어나기를 동경(憧憬)하지 않았다.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 아버지의 뜻을 만족스럽게 행하는 기법을 통달했다. 현실인 세상의 바로 한가운데서 이상적 종교 생활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바울과 달리, 예수는 인류에 대하여 비관적 견해를 가지지 않았다. 주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바라보았고, 살아남기를 택한 자에게 장대하고 영원한 앞날이 있음을 미리 알았다. 도덕 면에서 회의론자가 아니었고,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 눈으로 사람을 보았다. 모든 사람이 사악하기보다 약하다고, 타락하기보다 갈팡질팡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지위가 어떻든 상관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의 형제였다.

196:2.10 (2093.4) 그는 사람들에게 시간 세계와 영원 속에서 자신을 높이 평가하라고 가르쳤다. 사람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예수는 기꺼이 인류에게 끊임없이 봉사하는 데 몸을 바쳤다. 그의 종교에서 황금률을 필수 요인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이 유한자(有限者)의 무한한 가치였다. 어떤 필사자가 예수의 특별한 신임을 얻고서도 격려를 받지 않을 수 있는가?

196:2.11 (2093.5) 예수는 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아무런 규칙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의 사명은 종교에 관한 것이었고, 종교는 순전히 개인의 체험이다. 사회가 성취할 가장 높은 궁극의 목적은 결코 사람들이 형제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뛰어넘기를 바랄 수 없고, 이것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인식에 기초를 둔다. 사회가 성취할 모든 이상은 오직 이 신의 나라가 올 때 이루어질 수 있다.

3. 종교의 우월성

196:3.1 (2093.6) 개인의 영적 종교적 체험은 필사자가 겪는 대부분의 문제에 효과적 해결책이며, 인간의 모든 문제를 효과 있게 분류하고 평가하고 조정한다. 종교는 인간의 걱정거리를 없애거나 사라지게 만들지 않지만, 이를 분해하고 흡수하고 밝게 비춰주고 초월한다. 참된 종교는 필사자의 모든 요구 조건에 효과적으로 순응하기 위하여 인격을 통일한다. 종교적 믿음―깃드는 신의 계심이 분명히 이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우주의 첫째 근원을 그것으로 인식하는 지적 논리, 이 첫째 근원을 그분이라고 확언하는 혼의 분명한 주장,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을 어김없이 좁힐 수 있게 만들며, 예수의 복음에서 그분은 하늘 아버지요, 인간을 구원하는, 성격을 가진 하나님이다.

196:3.2 (2094.1) 우주 실체에는 꼭 세 가지 원소(元素)가 있으니, 사실ㆍ관념ㆍ관계이다. 종교적 의식은 이 실체들을 과학ㆍ철학ㆍ진리로서 식별한다. 철학은 이 활동을 이성ㆍ지혜ㆍ믿음―물리적 실체, 지적 실체, 영적 실체―로 보고 싶어한다. 우리는 이 실체들을 사물ㆍ의미ㆍ가치로 부르는 버릇이 있다.

196:3.3 (2094.2) 실체를 점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과 대등하다. 하나님을 찾아내는 것, 실체와 동일함을 의식하는 것은 자아 완성―자아 전체, 자아 총체―의 체험과 맞먹는다. 총 실체의 체험은 하나님을 충만히 깨닫는 것이요, 하나님을 아는 최종 체험이다.

196:3.4 (2094.3) 인생의 총합은 사람이 사실로 교육받고, 지혜로 고귀하게 되며, 종교적 믿음으로 구원되는―정당하게 되는―것을 아는 것이다.

196:3.5 (2094.4) 물리적 확실성은 과학의 논리(論理)에 있고, 도덕적 확실성은 철학의 지혜에, 영적 확실성은 진정한 종교적 체험의 진실함에 있다.

196:3.6 (2094.5) 지성이 전적으로 물질은 아니기 때문에, 사람의 지성은 높은 수준의 영적 통찰력과 그에 상당하는 신성한 가치 분야에 이를 수 있다. 사람의 지성 속에 영 알맹이가―신의 계심인 조절자가―있다. 인간의 지성에 이 영(靈)이 깃든다는 세 가지 증거가 따로 있다:

196:3.7 (2094.6) 1. 인도주의적 교제―사랑. 순전한 동물 지성은 자아를 보호하려고 함께 살지 모르지만, 오직 영이 깃든 지능이 사심 없이 이타적(利他的)이고 조건 없이 사랑하는 성질이 있다.

196:3.8 (2094.7) 2. 우주의 해석―지혜. 영이 깃든 지성만이 우주가 개인에게 친절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196:3.9 (2094.8) 3. 인생의 영적 평가―예배. 영이 깃든 사람만이 신의 계심을 깨닫고, 이처럼 신성(神性)을 미리 맛보는 가운데, 그리고 그와 함께 더욱 충만한 체험을 얻기를 추구할 수 있다.

196:3.10 (2094.9) 인간의 지성은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지 않으며, 인간의 체험은 우주를 보는 통찰력을 낳지 않는다. 통찰력, 곧 도덕적 가치를 인식하고 영적 의미를 헤아리는 것에 관하여 말하면, 인간의 지성이 할 수 있는 것은 발견ㆍ인식(認識)ㆍ해석, 그리고 선택밖에 없다.

196:3.11 (2094.10) 우주의 도덕적 가치는 필사 지성이 세 가지 기본적 판단을 내림으로, 곧 선택함으로, 지적 소유물이 된다:

196:3.12 (2094.11) 1. 자아의 판단―도덕적 선택.

196:3.13 (2094.12) 2. 사회적 판단―윤리적 선택.

196:3.14 (2094.13) 3. 하나님에 대한 판단―종교적 선택.

196:3.15 (2094.14) 따라서 인간의 모든 진보는 계시와 진화의 공동 기법으로 실현되는 듯하다.

196:3.16 (2094.15) 사랑을 주는 신다운 자가 사람 속에 살지 않으면, 사람은 사심 없이 영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 해석하는 자가 지성 속에 살지 않으면, 우주의 통일성을 참으로 깨달을 수 없다. 평가하는 자가 사람과 함께 거하지 않으면, 사람은 도저히 도덕적 가치를 평가하고 영적 의미를 헤아릴 수 없다. 이 사랑하는 자는 무한한 사랑의 바로 그 근원으로부터 온다. 이 해석자는 우주의 통일의 일부이며, 이 평가자는 신성하고 영원한 실체에 담긴 모든 절대 가치의 중심 근원의 자식이다.

196:3.17 (2095.1) 종교적 의미를―영적 통찰력을―가진 도덕적 평가는 선과 악, 진실과 잘못,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 인간다운 것과 신다운 것, 시간과 영원 사이에 개인이 선택함을 가리킨다. 인간이 살아남는 것은 상당히 많이 이 영적 가치 분류자가―깃드는 해석자이자 통일자가―골라놓은 가치를 선택하려고 인간의 의지(意志)를 거룩하게 바치는 데 달려 있다. 개인의 종교적 체험은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으니, 하나는 인간의 지성 속에서 발견하는 단계요, 하나는 깃드는 신다운 영이 계시하는 단계이다. 지나치게 세상에 익숙하거나 또는 종교가라고 공언하는 자들의 경건치 못한 행위의 결과로서, 한 사람 또는 한 세대의 사람들조차 안에 깃드는 하나님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그만둘 수 있다. 신의 계시(啓示)를 받으면서 진보하지 못하거나 그 계시에 도달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영적으로 부진한 그러한 태도는 깃드는 생각 조절자의 계심과 영향 때문에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다.

196:3.18 (2095.2) 신이 깃드는 현실을 깨닫는 이 심오한 체험은 언제까지나 자연 과학의 투박한 유물론 기법을 초월한다. 너희는 영적 기쁨을 현미경 밑에 놓을 수 없고, 사랑을 저울에 달 수 없고, 도덕적 가치를 자로 잴 수 없다. 영적 예배의 질(質)을 수치로 어림잡을 수도 없다.

196:3.19 (2095.3) 히브리인은 도덕적으로 숭고한 종교를 가졌고, 그리스인은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종교를 발전시켰으며, 바울, 그리고 함께 의논한 자들은 믿음ㆍ소망ㆍ자선의 종교를 창시했다. 예수는 사랑의 종교, 즉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는 보장과 함께, 인간의 형제 정신에 봉사하면서, 이 사랑을 나누는 결과로 기쁨과 만족을 얻는 종교를 계시하고 본보기로 보였다.

196:3.20 (2095.4) 깊이 생각하여 도덕적 결정을 내릴 때마다, 사람은 즉시 혼(魂)에 새로이 신(神)이 쳐들어오는 것을 체험한다. 도덕적 선택은 외부 조건에 대하여 안에서 반응하는 동기로서 종교가 된다. 그러나 그러한 진정한 종교는 순전히 주관적 체험이 아니다. 그런 종교는 객관적 총체―우주와 그 창조주―에 대하여 의미 깊게, 총명하게 반응하는 개인의 주관성 전체를 의미한다.

196:3.21 (2095.5) 사랑하고 사랑받는, 아름답고 초월적인 체험은 순전히 주관적이라고 해서 단순히 정신의 환상은 아니다. 필사 존재와 관련되고 참으로 신다운, 하나의 객관적 실체, 생각 조절자는 인간이 지켜보기에 순전히 주관적 현상으로서 작용하는 듯이 보인다. 사람이 가장 높은 객관적 실체,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은 오직 그를 알고 예배하고 그의 아들임을 깨닫는, 순전히 주관적 체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196:3.22 (2095.6) 참된 종교적 예배는 자아를 속이는, 쓸데없는 혼잣말이 아니다. 예배는 신답게 실재하는 것, 실체의 바로 그 근원인 것과 몸소 교제하는 것이다. 사람은 예배로 인하여 더 나아질 생각을 품고, 그렇게 함으로 궁극에는 최선에 이른다.

196:3.23 (2095.7)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 이상으로 삼고 이를 위하여 봉사하려는 시도는 진정한 종교적 체험을―영적 실체를―대신하는 물건이 아니다. 심리학과 유심론(唯心論)은 종교적 실체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 지능이 추정하는 것은 정말로 거짓 신―사람 모습을 입은 신―을 창시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참으로 의식하는 상태는 그런 기원을 가지지 않는다. 하나님 의식(意識)은 깃드는 영 안에 거한다. 사람이 만든 많은 종교적 체계는 인간 지능이 빚은 것으로부터 생겨나지만, 하나님 의식이 반드시, 괴상한 이 종교적 노예 체계의 일부는 아니다.

196:3.24 (2095.8) 하나님은 단지 사람의 유심론(唯心論)이 발명한 물건이 아니라, 동물을 뛰어넘는 모든 그러한 통찰력과 가치의 바로 그 근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진리ㆍ아름다움ㆍ선 개념을 통일하려고 지어낸 가설(假說)이 아니다. 사랑의 성격자이며, 그로부터 이 모든 우주 명시가 파생된다. 사람의 세계에 있는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은 파라다이스 실체들을 향하여 올라가는 필사자 체험의 영적 성향이 높아짐으로 통일된다.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의 통일은 오로지 하나님을 아는 인격의 영적 체험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196:3.25 (2096.1) 도덕성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의식하는 데, 조절자가 안에 계심을 몸소 깨닫는 데 필수인 선재(先在)하는 토양이지만, 그러한 도덕성은 종교적 체험과 그 결과로 생기는 영적 통찰력의 근원이 아니다. 도덕적 성품은 동물을 뛰어넘지만 영 밑에 있다. 도덕성은 의무를 인식하는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존재함을 깨닫는 것과 같다. 인격이 달성하는 물질 분야와 영적 분야 사이에 상물질이 작용하는 것 같이, 도덕의 구역은 동물 지성과 인간 종류의 지성 사이에 끼어 있다.

196:3.26 (2096.2) 진화하는 지성(知性)은 법칙ㆍ도덕률ㆍ윤리를 발견할 수 있지만, 수여된 영, 깃드는 조절자는 점진하는 인간 지성에게 입법자,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모든 것의 아버지 근원을 드러낸다. 그렇게 빛을 받은 사람은 종교를 소유하며, 하나님을 찾으려는, 길고 모험이 가득한 탐구를 시작하기 위하여 영적 장비가 갖추어져 있다.

196:3.27 (2096.3) 도덕성은 반드시 영적인 것이 아니지만, 전적으로, 순전히 인간다울지 모른다. 하지만 참된 종교는 모든 도덕적 가치를 높이고 더욱 뜻있게 만든다. 종교가 없는 도덕은 궁극의 선을 드러내지 못하며, 또한 그 자체의 도덕적 가치조차 살아남지 못하게 한다. 종교는 도덕이 인식하고 승인하는 모든 것을 강화하고 영화롭게 만들고, 확실히 살아남게 만든다.

196:3.28 (2096.4) 종교는 과학ㆍ예술ㆍ철학ㆍ윤리ㆍ도덕률 위에 서 있지만, 이로부터 독립되지 않는다. 이것들은 모두 개인 및 사회적인, 인간의 체험 속에 떼어낼 수 없이 서로 얽혀 있다. 종교는 필사 성품을 입고서 사람이 맛보는 최고의 체험이지만, 언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영원히 신학(神學)이 진정한 종교적 체험을 언제라도 적절히 묘사할 수 없게 만든다.

196:3.29 (2096.5) 종교적 통찰력은 패배한 사람에게 더 높은 소망과 새 결심을 가지게 하는 힘을 소유한다. 사랑은 사람이 우주에서 올라가면서 이용해도 좋은 가장 높은 동기이다. 그러나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이 빠져 버린 사랑은 기껏해야 감정, 철학적 왜곡, 정신의 환상, 영적 속임수일 뿐이다. 사랑은 반드시 상물질 및 영으로 진보하는 연속된 수준에서 다시 정의(定義)되어야 한다.

196:3.30 (2096.6) 예술은 사람이 물질 환경에서 아름다움이 없는 상태를 벗어나려고 애쓰는 결과로 생기며, 예술은 상물질 수준을 향하는 손짓이다. 과학은 사람이 물질 우주에서 수수께끼로 보이는 것을 풀려는 노력이다. 철학은 사람이 인간의 체험을 조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종교는 사람의 최고의 손짓이요, 최종의 실체를 향하여 장엄하게 손을 뻗는 것, 하나님을 찾아내고 그와 같이 되려는 결심이다.

196:3.31 (2096.7) 종교적 체험 분야에서, 영적 가능성은 잠재하는 현실이다. 앞을 향한 사람의 영적 욕구는 정신의 환상이 아니다. 사람이 우주에서 꿈꾸는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닐지 모르지만, 많은 것, 허다한 것이 진리이다.

196:3.32 (2096.8) 어떤 사람들의 인생(人生)은 너무 위대하고 고귀해서, 단지 성공적인 낮은 수준으로 내려올 수 없다. 동물은 환경에 적응해야 하지만, 종교적인 사람은 환경을 뛰어넘고, 이 방법으로 이 신의 사랑을 보는 통찰력을 통해서, 현재 물질 세계의 한계를 벗어난다. 이 사랑 개념은 사람의 혼 속에서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을 발견하려는, 동물을 뛰어넘는 노력이 생기게 만든다.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을 찾아낼 때, 사람은 그 품에 안겨 영화롭게 된다. 사람은 이를 실천하고, 정의(正義)를 실행하려는 소망으로 불탄다.

196:3.33 (2097.1) 낙심하지 말지니, 인간의 진화는 아직도 진행되고 있고, 예수 안에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주는 계시(啓示)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196:3.34 (2097.2) 현대인이 당면한 큰 도전은 인간의 지성 안에 거하는 신다운 훈계자와 의사 소통을 개선하는 것이다. 육체를 입고서 사람이 겪는 가장 큰 모험은 영 의식의 경계지에 이르려고―신성한 계심과 접촉하려고―마음을 다하여 노력을 기울이면서, 혼 의식이 태어나는 어둑한 영역을 거쳐서, 자의식(自意識) 테두리를 확장하려고, 치우치지 않고 정신 차려 노력하는 데 있다. 그러한 체험은 하나님 의식이요, 앞서 존재하는 진실, 곧 하나님을 이해하는 종교적 체험을 힘차게 확인하는 체험이다. 그러한 영 의식은 하나님의 아들임이 사실인 것을 아는 것과 대등하다. 그렇지 않으면, 아들이라는 확신은 믿음의 체험이다.

196:3.35 (2097.3)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은 자아(自我)를 우주와 함께, 그리고 우주의 가장 높은 수준의 영적 실체와 통합되는 것과 대등하다. 어떤 가치라도 오직 그 영적 알맹이만 썩지 않는다.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도 인간의 체험에서 썩지 않을지 모른다. 사람이 살아남기를 택하지 않는다면, 그때 뒤에 남는 조절자는 사랑으로 태어나고 봉사하면서 양육된 그 실체들을 보존한다. 이 모두가 우주의 아버지의 일부이다. 아버지는 살아 있는 사랑이요, 아버지의 이 생명은 그 아들들 안에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영은 아들들의 아들―필사 인간―안에 계신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보건대, 아버지 관념은 여전히 인간의 가장 높은 하나님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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