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 별의 가브리엘의 권한으로 활동하는 지역 우주 성격자 군단이 이 논문집을 후원하였다
57:0.1 (651.1) 유란시아의 내력과 초기 역사에 관하여, 유란시아에 관한 기록을 얻으려고 예루셈의 기록 보관소로부터 발췌한 것을 발표하면서, 우리는 현대의 관습에 따라서―1년이 365 1/4 일이고 윤년이 있는 오늘날의 달력으로―시간을 계산하라고 지시를 받았다. 대체로, 정확한 연대를 밝히려고 전혀 애쓰지 않겠지만 그러한 연대는 기록에 남아 있다. 이 역사적 사실을 발표하는 더 좋은 방법으로서, 우리는 가장 가까운 자연수를 쓰겠다.
57:0.2 (651.2) 백만 년이나 2백만 년 전에 생긴 사건을 언급할 때, 우리는 서력 기원으로 20세기 초기의 몇 십년대로부터 그 연대만큼 거꾸로, 그러한 사건의 연대를 표시하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아득히 먼 이 사건들이, 우수리 없이, 수천 년, 수백만 년, 수십억 년의 기간에 일어난 것으로서 묘사하겠다.
57:1.1 (651.3) 유란시아는 너희의 태양에서 기원이 있었고, 그 태양은 안드로노버 성운의 잡다한 자손 가운데 하나인데, 이 성운은 한때 네바돈 지역 우주의 물리적 동력과 물질 덩어리의 한 구성 분자로서 조직되었다. 이 큰 성운 자체는 아주 오래 전에, 오르본톤 초우주에서, 공간의 우주 물력 전하(電荷)에서 비롯하였다.
57:1.2 (651.4)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 당시에, 파라다이스의 1차 물력 조직책들은, 나중에 안드로노버 성운으로서 조직된 공간 에너지를 오랫동안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57:1.3 (651.5) 987,000,000,000년 전에 오르본톤 시리즈의 물력 부조직자와 당시에 대행 검열자 811,307번은 유버르사로부터 바깥으로 여행하면서, 그때 오르본톤 동쪽 부분의 어떤 구역에서, 공간의 조건이 물질화 현상을 개시하는 데 유리하다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에게 보고하였다.
57:1.4 (651.6) 900,000,000,000년 전에 유버르사의 기록 보관소는 유버르사 균형 회의가 초우주 정부에게 허가증을 발행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증거하는데, 이것은 811,307번 검열자가 앞서 지정한 지역으로 물력 조직자 하나와 참모진을 파송할 것을 인가하였다. 오르본톤 당국은 이 잠재 우주를 최초로 발견한 자가 새 물질 창조를 시작하라고 요청하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명령을 집행하라고 위임하였다.
57:1.5 (652.1) 이 허가증이 기록된 것은 그 물력 조직자와 참모진이 유버르사로부터 그 동쪽 공간 구역으로 먼 길을 이미 떠났음을 뜻하고, 거기서 나중에 그들은 오래 걸린 활동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이 활동은 오르본톤에서 한 새로운 물리적 창조가 출현함으로 종결될 것이었다.
57:1.6 (652.2) 875,000,000,000년 전에 굉장한 안드로노버 성운, 876,926 번이 정식으로 개시되었다. 오로지 물력 조직자와 연락 참모진의 계심이 이 에너지 소용돌이를 비롯하는 데 필요했는데, 그것은 결국 거대한 이 공간 회오리바람으로 성장했다. 그러한 성운 회전이 시작된 뒤에, 살아 있는 물력 조직자들은 다만 회전하는 원반의 평면에 대하여 직각으로 물러난다. 그 이후로, 에너지 본래의 성질은 그러한 새 물리적 체계가 점진적으로 질서 있게 진화할 것을 보장한다.
57:1.7 (652.3) 이 무렵에 이야기는 초우주 성격자들의 활동으로 옮겨진다. 실제로 그 이야기는 이 시점에서―오르본톤 초우주의 동력 지도자와 물리 통제자들이 행동하도록 공간 에너지 조건을 준비해 놓고서, 파라다이스 물력 조직자들이 철수하려고 준비하는 바로 이 무렵에―적절히 시작된다.
57:2.1 (652.4) 진화하는 물질 창조는 모두 둥그런 가스 성운(星雲)으로부터 태어나며, 그러한 1기의 성운은 모두 가스로 존재하는 초기 시절에 내내, 둥그렇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성운은 보통 나선형이 된다. 별을 형성하는 활동이 과정을 마치고 나서, 성운은 흔히 별의 집합으로서 또는 거대한 별이 되어 끝나고, 이 별들은 여러 면에서 너희의 왜소한 태양계와 비슷하게, 수가 일정하지 않은 행성과 위성, 그리고 작은 물질 집단에 둘러싸인다.
57:2.2 (652.5) 800,000,000,000년 전에, 안드로노버 창조는 오르본톤의 웅장한 1기 성운[1] [1] 중에 하나로서 모양을 잘 갖추었다. 근처의 여러 우주에서 천문학자들이 이 공간 현상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눈길을 끌 만한 것을 거의 구경하지 못했다. 인접한 여러 창조에서 얻은 인력 추정치는 안드로노버 지역에서 공간에 물질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가리켰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57:2.3 (652.6) 700,000,000,000년 전에, 안드로노버 체계는 거대한 규모를 이루고 있었고, 아주 급히 진화하는 이 새 물질 체계의 동력 중심들을 지원하고 그들에게 협조를 제공하려고, 둘러싼 아홉 물질 창조에 추가로 물리 통제자들이 파견되었다. 이 아득히 먼 시절에, 차후의 창조들에게 물려준 물질은 모두 이 거대한 공간 바퀴의 테두리 안에 붙잡혀 있었다. 이 바퀴는 늘 계속하여 소용돌이쳤고, 그 최대 지름에 이른 뒤에, 계속해서 응축하고 줄어드는 동안에 점점 더 빠르게 소용돌이쳤다.
57:2.4 (652.7) 600,000,000,000년 전에, 안드로노버의 에너지를 동원하는 기간이 절정에 이르렀고, 그 성운은 그 최대 질량에 다다랐다. 이때 그것은 납작해진 긴 구체(球體)와 얼마큼 비슷한 모양을 한, 거대한 둥그런 가스 구름이었다. 이때는 상이한 질량이 형성되고 회전 속도가 달라지는 초기였다. 인력과 기타 영향력이 바야흐로 공간의 가스를 조직된 물질로 바꾸는 일을 시작하려고 했다.
57:3.1 (653.1) 그 엄청난 성운은 이제 비로소 차츰 나선형의 모습을 갖추었고, 먼 우주에 있는 천문학자들도 눈으로 뚜렷이 보게 되었다. 이것이 대부분의 성운들의 자연스런 역사이다. 별을 내던지고 우주를 짓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우주에서 이 2기의 성운은 보통 나선형 현상으로서 관찰된다.
57:3.2 (653.2) 그 아득히 먼 시대에 근처의 천문학자들은, 안드로노버 성운이 이렇게 변형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20세기 천문학자들이 망원경을 우주를 향해 돌리고 인접한 바깥 공간에서 지금 시대의 나선형 성운을 관찰할 때 보는 것과 똑같은 것을 보았다.
57:3.3 (653.3) 질량의 극대화에 이를 무렵이 되자, 가스인 알맹이의 인력 통제가 약화되기 시작했고 가스가 탈출하는 단계가 뒤따랐는데, 가스는 두 개의 거대하고 뚜렷한 팔로서 흘러 나왔고, 이 두 팔은 서로 모체의 반대 편에서 기원을 가졌다. 이 엄청난 중앙 핵심의 빠른 회전은 튀어나오는 이 두 가스 흐름에게 곧 나선형의 모습을 주었다. 튀어나온 이 팔 부분들이 식고 나중에 응축되자, 결국 팔의 매듭지어진 모습을 낳았다. 더 밀집된 이 부분들은 성운의 가스 구름 한가운데서 공간을 통하여 소용돌이치는 광대한 체계와 하위 체계들의 물리적 물질이었고, 모체인 바퀴의 인력 손아귀 안에 단단히 붙잡혀 있었다.
57:3.4 (653.4) 그러나 그 성운은 수축하기 시작했고, 회전율의 증가는 인력의 통제를 더욱 약화시켰다. 오래지 않아서 바깥의 가스 지역은 성운 핵심의 직접 끌어안는 힘으로부터 실제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불규칙한 윤곽을 가진 순회로를 타고 공간으로 나갔다가 핵심 지역으로 돌아와서 그 순회로를 마쳤다. 그러나 이것은 성운의 진보에서 일시적 단계일 뿐이었다. 회전율이 늘 빨라지는 것은 곧 거대한 별들을 공간으로 독립된 회로 위에, 내던질 것이었다.
57:3.5 (653.5) 그리고 이것이 아득히 오랜 세월 전에 안드로노버에서 일어났다. 그 에너지 바퀴는 최대로 커질 때까지 자꾸 자랐고, 그리고 나서 수축이 시작되었을 때, 더욱 빨리 빙빙 돌았으며, 결국에는 결정적 원심(遠心)단계에 도달하고 큰 붕괴가 시작되었다.
57:3.6 (653.6) 500,000,000,000년 전에 안드로노버의 첫 별이 태어났다. 타오르는 이 줄기는 모체의 인력 손아귀로부터 갈라져 나왔고, 공간을 가르고서 창조된 우주에서 하나의 독립된 모험에 들어갔다. 그 궤도는 그 별이 도망가는 경로에 따라서 정해졌다. 그러한 젊은 별은 재빨리 구체가 되고, 공간의 별로서 길고도 파란 많은 생애를 시작한다. 말기에 이른 성운의 핵심을 제쳐놓고, 대다수의 오르본톤 별은 비슷한 출생을 겪었다. 이 도망하는 별들은 다채로운 기간을 거쳐서 진화하고 나중에 우주에 소용된다.
57:3.7 (653.7) 400,000,000,000년 전에 안드로노버 성운이 물질을 다시 잡아들이는 기간이 시작되었다. 근처의 작은 별들 중에 다수는 모체의 핵심이 차츰 커지고 계속 응축되는 결과로서 다시 붙잡혔다. 오래지 않아, 성운이 응축되는 말기 국면이 시작되었는데, 이 기간은 에너지와 물질로 이루어진 엄청난 이 공간 집합체들이 마지막으로 분리되기 전에 반드시 앞서는 기간이다.
57:3.8 (654.1) 이 시기 뒤에 1백만 년이 채 되지 않아서, 네바돈 미가엘, 곧 파라다이스 창조 아들이 붕괴하는 이 성운을 우주를 짓는 모험 장소로 선택하였다. 거의 당장에 구원자별의 건축 세계들과 1백 별자리 본부 집단의 행성들이 시작되었다. 특별히 지어진 이 집단의 세계들을 완성하는 데는 거의 1백만 년이 걸렸다. 지역 체계 본부인 행성들은 그때부터 약 50억 년 전까지 이어지는 기간에 걸쳐 건축되었다.
57:3.9 (654.2) 300,000,000,000년 전에 안드로노버의 별 회로들은 자리를 잘 잡았고, 그 성운 체계는 일시나마 비교적 물리적으로 안정된 기간을 거치고 있었다. 이 무렵에 미가엘의 참모진이 구원자별에 도착했고, 오르본톤의 유버르사 정부는 네바돈 지역 우주를 물리적으로 인정하였다.
57:3.10 (654.3) 200,000,000,000년 전에 안드로노버의 중앙 집합체에서 거대한 열이 발생되는 것과 함께, 수축과 응축이 진행되는 것이 보였다. 중앙의 별 모체인 바퀴 가까이 있는 지역에서도 비교적 틈이 나타났다. 바깥 지역은 더 안정되고 더 잘 조직되었고, 새로 태어난 별들의 둘레를 도는 어떤 행성들은 충분히 식어서 생명을 옮겨 심기에 적당하였다. 네바돈에서 가장 오래 된, 사람 사는 행성들은 이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57:3.11 (654.4) 이제 완성된 네바돈의 우주 작용이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며, 미가엘의 창조는 사람이 살고, 진보하는 필사자가 승천하는 우주로서 유버르사에 등록되었다.
57:3.12 (654.5) 100,000,000,000년 전에 성운에서 팽팽하게 응축하는 힘의 정점이 도달되었고, 열의 팽창력이 극대화되는 점에 이르렀다. 인력과 열이 다투는 이 임계(臨界) 단계는 때때로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지만, 인력(引力)과 벌이는 싸움에서 머지 않아 열이 이기고, 별이 분산되는 볼 만한 시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 성운의 2기 생애가 끝난 것을 표시한다.
57:4.1 (654.6) 1기 단계의 성운은 둥그렇고, 제2 단계는 나선형이며, 제3 단계는 별이 처음으로 분산되는 시기이다. 한편 제4기는 별이 분산되는 둘째이자 마지막 주기를 포함하고, 모체의 핵심은 공 모양의 성단(星團)으로서, 아니면 말기 태양계의 중심으로 활동하는 혼자 있는 별로서 끝난다.
57:4.2 (654.7) 75,000,000,000년 전에 이 성운은 그 별 가족 단계의 절정에 이르렀다. 이때는 별을 잃어버리는 첫째 기간의 정점이었다. 이 별들의 대다수는 그 뒤에 광범위한 체계의 행성ㆍ위성ㆍ흑도(黑島)ㆍ혜성ㆍ운석, 그리고 우주의 먼지 구름을 확보하였다.
57:4.3 (654.8) 50,000,000,000년 전에 별이 분산되는 이 첫 시기가 끝났다. 그 성운은 그 존재의 제3기를 급히 마치고 있었고, 이 기간에 그 성운은 876,926개 별 체계에 기원을 주었다.
57:4.4 (654.9) 25,000,000,000년 전에는 성운 생명의 제3기가 끝나는 것을 구경했고, 이 부모 성운으로부터 파생되어, 널리 펼쳐진 별 체계들이 조직되고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수축하고 열의 발산이 늘어나는 과정은 성운 찌꺼기의 중심 덩어리에서 계속되었다.
57:4.5 (655.1) 10,000,000,000년 전에 안드로노버의 제4기가 시작되었다. 핵심 덩어리가 최대 기온에 도달하였고, 응축의 임계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최초의 모체인 핵심은 그 자체 내부의 열이 응축되는 긴장, 그리고 둘러싼 해방된 별 체계 집단의 늘어나는 인력 조수(潮水)의 당기는 힘, 이 둘의 통합된 압력을 받아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성운이 별을 생산하는 둘째 주기를 개시할 핵심의 분출이 다가왔다. 성운 존재의 제 4기가 바야흐로 시작되려 했다.
57:4.6 (655.2) 8,000,000,000년 전에 끔찍한 마지막 분출이 시작되었다. 그러한 우주 격변이 있을 때는 오직 바깥에 있는 체계들만 안전하다. 그리고 이것이 성운의 종말의 시작이었다. 마지막으로 별을 토해내는 것은 거의 20억 년에 걸쳐 이어졌다.
57:4.7 (655.3) 7,000,000,000년 전에는 안드로노버의 마지막 분열의 절정을 구경하게 되었다. 이때는 말기의 큰 별들이 태어나고 지역에 국한된 물리적 소란이 절정에 이른 기간이었다.
57:4.8 (655.4) 6,000,000,000년 전에는 마지막 분열이 끝나고 너희 태양이 출산되는 것을 표시하였고, 너희 태양은 안드로노버의 둘째 별 가족에서 끝에서부터 56번째였다. 성운 핵심의 이 마지막 분출은 136,702개의 별을 낳았고, 그 대부분은 혼자 있는 공이었다. 안드로노버 성운에서 기원을 가진 별 및 별 체계의 총수는 1,013,628개였다. 태양계를 가진 별의 수는 1,013,572개였다.
57:4.9 (655.5) 그리고 위대한 안드로노버 성운은 이제 더 없지만, 공간의 이 모체 구름 속에서 비롯한, 많은 별과 그 행성 집단 안에서 계속 산다. 이 웅장한 성운의 마지막 핵심의 잔재는 아직도 불그스레한 빛을 띠고 타며, 165 세계로 이루어진 나머지 행성 가족에게 계속하여 수그러진 빛과 열을 준다. 이 세계들은 막강한 두 세대의 빛의 군주들을 낳은, 이 존경할 모체를 지금 돌고 있다.
57:5.1 (655.6) 5,000,000,000년 전에 너희의 태양은 비교적 고립된 타오르는 공이었고, 근처에 돌고 있는 공간 물질의 대부분을 자체에게로 모았는데, 이 물질은 그 자체의 출생을 따른 최근의 격변에서 생긴 찌꺼기였다.
57:5.2 (655.7) 오늘날, 너희의 태양은 비교적 안정을 이룩했지만, 11년 반이 되는 흑점의 주기는 태양이 청춘기에 변광성이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너희 태양의 초기 시절에, 계속된 수축과 그에 따른 점진적 온도의 증가는 표면에서 엄청난 경련을 일으켰다. 이 거대한 융기는 밝기가 변하는 주기를 마치는 데 3일 반이 걸렸다. 이 변하는 상태, 정기적으로 뛰는 이 맥박은, 너희 태양으로 하여금 곧 마주치게 된 어떤 외부 영향력에 무척 민감하게 만들었다.
57:5.3 (655.8) 이처럼 지역 공간의 무대가 몬마시아의 독특한 기원을 위하여 준비되었는데, 이것이 너희 태양의 행성 집단의 이름이고, 그 태양계에 너희 세계가 속한다. 1퍼센트가 채 안 되는 오르본톤의 행성 체계들이 이와 비슷한 기원을 가졌다.
57:5.4 (655.9) 4,500,000,000년 전에 막대한 앙고나 체계가 혼자 있는 이 태양 근처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 큰 체계의 중심은 공간의 어두운 거성(巨星)이었는데, 단단하고 상당히 충전되어 있었고, 엄청나게 당기는 인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57:5.5 (656.1) 태양이 맥박치는 동안, 최대로 확장된 순간에 앙고나가 태양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자, 가스 물질의 흐름이 공간으로, 태양의 거대한 혀로서 분출되어 나왔다. 타오르는 이 가스 혀들은 처음에 변함없이 태양 속으로 도로 떨어졌다. 그러나 앙고나가 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 거대한 방문객의 당기는 인력(引力)이 너무 커져서 이러한 가스 혀들은 어떤 점에서 부서지곤 했는데, 그 뿌리는 태양 속으로 도로 떨어졌고, 한편 바깥 부분들은 떨어져 나가서 독립된 물질 덩어리, 곧 태양 운석들을 형성하곤 했다. 이것들은 즉시 자체의 타원형 궤도에서 태양의 둘레를 돌기 시작했다.
57:5.6 (656.2) 앙고나 체계가 더 가까이 다가가자, 태양의 분출물이 점점 더 커졌다. 갈수록 더 많은 물질이 태양으로부터 당겨져서, 둘레의 공간에서 회전하는 독립된 물체들이 되었다. 앙고나가 태양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이 상황은 약 50만 년 동안 발전되었고, 그렇게 되자 태양은 자체에서 정기적인 내부 경련 중 하나와 연관하여 부분적 분열을 겪었다. 정반대 쪽에서 동시에, 막대한 분량의 물질이 토해졌다. 앙고나 편에서 보아서, 양쪽 끝이 뾰족하고 가운데는 두드러지게 불룩한, 태양 가스의 거대한 기둥이 빠져 나왔고, 이것은 태양의 직접 인력 통제를 벗어나 영구히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57:5.7 (656.3) 태양에서 이렇게 떨어져 나온, 태양 가스의 이 큰 기둥은 나중에 태양계의 12 행성으로 진화했다. 이 거대한 태양계 조상의 분출에 조수(潮水)처럼 동조해서, 태양의 맞은 편으로부터 반응하여 가스가 분출된 것은 그 뒤에 태양계의 운석과 공간의 먼지로 응축되었다. 하지만 이 물질의 많은 부분, 상당히 많은 부분은 나중에, 앙고나 체계가 먼 공간으로 물러감에 따라서, 태양 인력에 다시 붙잡혔다.
57:5.8 (656.4) 태양계 행성들의 조상 물질, 그리고 소행성과 운석이 되어 태양을 지금 돌고 있는 거대한 부피의 물질을 뽑아내는 데 성공하기는 했어도, 앙고나는 이 태양 물질 가운데 어느 것도 자체를 위하여 확보하지 못했다. 방문하던 그 체계는 태양 물질의 어느 것도 실제로 훔쳐갈 만큼 아주 가까이 오지 않았지만, 오늘날의 태양계를 구성하는 물질 모두를 사이에 있는 공간으로 잡아당길 만큼 충분히 가깝게, 휙 다가왔다.
57:5.9 (656.5) 앙고나가 태양에서 떼어내기에 성공한 부분, 인력으로 부푼 거대한 부분의 덜 무겁고 가늘어지는 끝에서 식어서 응축하는 핵심들로부터, 내부의 다섯 행성과 외부의 다섯 행성이 곧 소규모로 형성되었고, 한편 토성과 목성은 더 육중하고 불룩한 중앙 부분으로부터 형성되었다. 목성과 토성의 강력하게 당기는 인력은 앙고나로부터 훔친 물질의 대부분을 일찍부터 잡아들였고, 이것은 앙고나에 속한 어떤 위성들의 역행(逆行)하는 움직임이 증거하는 바와 같다.
57:5.10 (656.6) 목성과 토성은 지나치게 가열된 태양 가스의 거대한 기둥의 바로 그 중심으로부터 유래되었으니까, 상당히 뜨겁게 가열된 태양 물질을 너무 많이 포함하여 밝은 빛으로 빛났고 막대한 열량을 방출했다. 따로 된 공간 물체로서 형성된 뒤에, 잠시 동안 이것들은 실제로 2차 태양이었다. 태양계 행성들 가운데 가장 큰 이 두 행성은 오늘날까지 대체로 가스로 남았고, 아직도 완전히 응축되거나 고체가 되는 점에 이르기까지 식지도 않았다.
57:5.11 (656.7) 다른 10 행성에서 응축되는 가스의 핵심은 곧 고체가 되는 단계에 이르렀고, 그래서 근처의 공간에서 돌고 있는 운석 물질의 늘어나는 분량을 자체 쪽으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태양계의 세계들은 이처럼 두 가지 기원을 가졌다: 가스로 응축된 핵심이 나중에 엄청난 양의 운석을 잡아들임으로 커진 것이다. 정말로 그 핵심들은 아직도 계속하여 운석을 잡아들이지만, 그 숫자는 크게 줄어들었다.
57:5.12 (657.1) 그 행성들은 모체인 태양의 적도(赤道) 평면에서 태양의 둘레를 돌지 않는데, 그 행성들이 태양의 회전으로 던져졌더라면 그렇게 할 것이다. 그것들은 오히려 앙고나 별의 분출이 있던 평면에서 여행하며, 이것은 태양 적도의 평면에 대하여 상당한 각을 이루고 존재하였다.
57:5.13 (657.2) 앙고나는 태양의 물질을 조금도 생포할 수 없었지만, 너희의 태양은 모습이 바뀌는 자체의 행성 가족에게, 그 방문하는 체계를 돌던 공간 물질을 얼마큼 보태 주었다. 앙고나의 강렬한 인력의 장(場) 때문에, 그에 종속하는 행성 가족은 그 검은 거성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진 궤도를 돌고 있었다. 태양계의 조상 물질이 분출된 뒤에 얼마 안 되어, 그리고 앙고나가 아직 태양 근처에 있는 동안, 앙고나 체계의 주요 행성들 가운데 셋이 육중한 태양계의 조상에게 너무 가까이 휙 던져졌기 때문에, 태양계의 당기는 인력은 태양의 인력 때문에 늘어나고 충분히 커져서, 앙고나 인력의 힘을 이기고 그 하늘 방랑자의 이 세 종속체를 영구히 떼어냈다.
57:5.14 (657.3) 태양으로부터 생겨난 태양계 물질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궤도를 도는 성질을 처음에 부여받았고, 이 세 개의 외래 공간 물체의 침입이 아니었다면, 태양계 물질은 모두 아직도 같은 방향의 궤도 운동을 유지할 것이다. 실제로 일어난 바와 같이, 세 앙고나 종속체의 충격은 태어나는 태양계 안으로 새로운 외래 방향의 물력을 투입했고, 그 결과로 역행 운동이 나타났다. 어느 천문 체계에서도 역행(逆行) 운동은 언제나 사고로 생기며, 반드시 외래 공간 물체가 부딪치는 충격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그러한 충돌이 반드시 역행 운동을 낳지 않을지 모르지만, 다양한 기원을 가진 덩어리들을 포함하는 체계 외에는, 결코 아무런 역행이 일어나지 않는다.
57:6.1 (657.4) 태양계가 태어난 뒤에, 태양의 분출이 줄어드는 기간이 따랐다. 다시 50만 년 동안, 태양은 차츰차츰 갈수록 줄어드는 양의 물질을 둘레의 공간으로 계속 퍼부었다. 그러나 궤도가 불규칙했던 이 초기 시절에, 둘러싼 물체들이 태양에 아주 가까이 다가왔을 때, 모체인 태양은 이 운석 물질의 큰 부분을 다시 잡아들일 수 있었다.
57:6.2 (657.5) 태양에 아주 가까운 행성들은 조수같은[2] [2] 마찰로 먼저 회전이 느려지게 된 행성들이다. 그러한 인력의 영향은 또한 행성 궤도를 안정시키는 데 이바지하고, 행성이 자체의 축을 도는 속도에 대하여 브레이크 노릇을 하면서 행성이 늘 더 천천히 돌게 만든다. 이것은 자전(自轉)이 멈출 때, 행성의 한 반구(半球)가 언제나 태양이나 더 큰 물체를 향하게 만들 때까지 계속된다. 이것은 수성(水星)과 달이 보여주는 바와 같으며, 달은 유란시아를 향하여 언제나 같은 얼굴을 보인다.
57:6.3 (657.6) 달과 지구의 조수 같은 마찰이 균등하게 될 때, 지구는 언제나 달을 향하여 같은 반구(半球)를 돌릴 터이고, 하루와 한 달이 비슷할 것이다―그 길이가 약 47일이다. 그러한 궤도의 안정을 얻었을 때, 조수 같은 마찰은 거꾸로 작용하고, 이제 더 지구로부터 달을 멀리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차츰 그 위성을 행성의 방향으로 끌어당길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달이 지구에서 약 17,600킬로미터 안으로 접근하는 아득히 먼 그 앞날에, 지구의 인력 작용은 달을 분열시키겠고, 이 조수 같은 인력으로 인한 폭발은 달을 조그만 입자로 산산조각낼 것이다. 이 입자들은 그 세계 둘레에 토성의 고리를 닮은 물질의 고리로서 집합할 수도 있고, 아니면 운석(隕石)이 되어 지구로 차츰 이끌릴 수도 있다.
57:6.4 (658.1) 공간 물체들의 크기와 밀도가 비슷할 때,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밀도가 비슷한 두 공간 물체의 크기가 비교적 같지 않고, 작은 것이 큰 것에 차츰 다가가면, 작은 물체의 궤도의 반지름이 큰 물체의 반지름의 2.5배보다 작게 될 때, 작은 물체의 분열이 일어날 것이다. 공간에 있는 거성들 사이에서 충돌은 참으로 보기 드물지만, 이 인력의 조수 같은 작용으로 인한 작은 물체의 분열은 아주 흔하다.
57:6.5 (658.2) 유성(流星)이 떼지어 생기는 것은, 유성들이 더 큰 물질 덩어리의 조각이기 때문이며, 이것들은 근처에 있는 더 큰 공간 물체들이 행사하는 인력의 조수 같은 작용으로 분열된 것이다. 토성의 고리들은 분열된 어느 위성의 조각들이다. 목성의 달 가운데 하나는 지금 조수 같은 작용으로 분열되는 임계 지대에 아슬아슬하게 가까이 가고 있고, 몇백만 년 안에 그 행성에게 잡히든지, 아니면 인력의 조수 작용으로 인하여 분열을 겪을 것이다. 태양계의 다섯째 행성은 무척 오래 전에, 불규칙한 궤도를 돌았고, 정기적으로 목성에 점점 더 가까이 접근했으며, 마지막에 인력의 조수 작용으로 분열되는 임계 지대에 들어가서, 급히 조각이 나고 오늘날 소행성의 집합이 되었다.
57:6.6 (658.3) 4,000,000,000년 전에는 목성과 토성의 체계들이 조직되는 것을 구경하였고, 이것은 수십억 년 동안 계속 커진 자체의 달들을 제외하고, 오늘날 관찰되는 바와 무척 비슷했다. 사실, 태양계의 행성과 위성들은 모두, 계속해서 운석을 잡아들이는 결과로서, 아직도 자라고 있다.
57:6.7 (658.4) 3,500,000,000년 전에 다른 10 행성의 응축하는 핵심들이 잘 형성되었고, 대다수의 달의 핵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작은 위성들 가운데 더러는 나중에 뭉쳐서 오늘날의 더 큰 달들을 이루었다. 이 시대를 행성이 조립되는 시대로 여겨도 좋다.
57:6.8 (658.5) 3,000,000,000년 전에 태양계는 오늘날과 아주 비슷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 구성원들은, 공간의 운석들이 엄청난 비율로 행성과 그 위성들에 줄곧 쏟아짐에 따라서, 계속해서 덩치가 커졌다.
57:6.9 (658.6) 이 무렵에 너희의 태양계는 네바돈의 물리 등록부에 기록되었고, 몬마시아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57:6.10 (658.7) 2,500,000,000년 전에 행성들은 덩치가 엄청나게 커졌다. 유란시아는 오늘날 크기의 약 10분의 1로 잘 발육된 구체였고, 아직도 운석을 첨가함으로 빨리 자라고 있었다.
57:6.11 (658.8) 이 엄청난 활동은 모두 유란시아 서열의 진화 세계를 만드는 데 정상 부분이며, 시간 세계에서 생명의 모험을 위한 준비로서, 그러한 공간 세계들이 물리적 진화를 시작하기 위한 무대를 세우는 데 천문학적 준비 과정이다.
57:7.1 (658.9) 이 초기 시절 동안 내내, 태양계의 공간 지역에는 파괴적이고 응축된 작은 물체들의 떼가 들끓고 있었고, 물질을 태워 보호하는 공기가 없는 가운데 그러한 우주 물체들은 유란시아의 표면에 바로 부딪쳤다. 이 끊임없는 충격은 행성의 지표를 얼마큼 뜨거운 채로 두었고, 이것은 그 구체가 자람에 따라서 인력 작용이 늘어남과 함께, 철과 같이 무거운 원소들이 차츰 행성의 중심을 향하여 점점 더 가라앉게 한 영향력이 비로소 작용하게 만들었다.
57:7.2 (659.1) 2,000,000,000년 전에 지구는 분명히 달을 능가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이 행성은 그 위성보다 컸지만, 이 무렵까지 크기에 별 차이가 없었는데, 이때 엄청난 공간 물체들이 지구에게 붙잡혔다. 당시에 유란시아는 현재 크기의 약 5분의 1이었으며, 원시적 대기를 붙들어 둘 만큼 충분히 크게 되었고, 이 대기(大氣)는 가열된 내부와 식어 가는 껍질 사이에서, 안에 있는 원소들이 투쟁하는 결과로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57:7.3 (659.2) 분명한 화산(火山) 활동은 이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운석들이 공간으로부터 가져온 원소, 방사성이 있거나 무거운 원소들이 더욱 깊고 깊이 파묻혀서 지구의 내부 온도는 계속 높아졌다. 방사성을 가진 이 원소들을 연구하면 유란시아의 표면이 10억 년이 더 되었다는 것을 드러낼 것이다. 라디움 시계는 행성의 나이를 과학적으로 추정하는 데 가장 믿을 만한 시계이다. 그러나 모든 그러한 추정치는 너무 짧은데, 이는 너희의 정밀 검사에 소용되는 방사성 물질은 모두 지구 표면에서 추출된 것이고, 따라서 유란시아가 이 원소들을 비교적 최근에 얻었음을 나타낸다.
57:7.4 (659.3) 1,500,000,000년 전에 지구는 현재 크기의 2/3가 되었고, 한편 달은 그 현재 질량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구가 달보다 빠른 속도로 커진 것은 지구로 하여금 그 위성이 최초에 가지고 있던 얼마 안 되는 대기를 천천히, 비로소 강탈하게 만들었다.
57:7.5 (659.4) 화산의 활동은 이제 절정에 이르렀다. 지구 전체가 타오르는 진정한 지옥이었고, 그 표면은 무거운 금속들이 중심을 향하여 가라앉기 전에, 초기에 녹아 있던 상태를 닮았다. 이때가 화산 시대이다. 그런데도 비교적 가벼운 화강암으로 주로 이루어진 껍질이 차츰 형성되고 있다. 언젠가 생명을 지원할 수 있는 행성을 위하여 무대가 준비되고 있다.
57:7.6 (659.5) 행성에 원시 대기(大氣)가 천천히 생성되고 있으며, 이제는 얼마큼의 수증기, 1산화 탄소, 2산화 탄소, 염화 수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유리(遊離)된[3] [3] 질소나 산소는 거의 또는 전혀 없다. 화산 시대에 세계의 대기는 이상한 광경을 보여준다. 앞에 열거한 가스 외에도, 대기는 많은 종류의 화산 가스로 무겁게 채워져 있고, 공기의 띠가 성숙함에 따라서, 행성 표면에 항상 팽개쳐지는 무거운 운석 소나기의 타 버린 산물로 채워진다. 그렇게 운석이 타는 것은 대기의 산소를 거의 소모해 버리는데, 운석의 폭격 비율은 아직도 엄청나다.
57:7.7 (659.6) 이내, 대기는 더욱 안정되고 충분히 식어서, 행성의 뜨겁고 거친 표면에서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수천 년 동안 유란시아는 하나의 광대하고 이어진 수증기의 담요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이 시대에 해는 지구의 표면에 결코 빛난 적이 없었다.
57:7.8 (659.7) 대기에 있는 탄소의 상당 부분은 추출되어 행성의 지표 층에 풍부한 여러 가지 금속의 탄산염을 형성하였다. 나중에 훨씬 많은 양의 이 탄소 가스를 초기의 무성한 식물 생명이 소비하였다.
57:7.9 (660.1) 후기에도, 계속되는 용암의 흐름과 쏟아지는 운석들은 공기에 있는 산소를 거의 완전히 소모해 버렸다. 곧 나타나는 원시 대양(大洋)의 초기 침전물조차 아무런 색깔 있는 돌이나 이판암(泥板岩)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대양이 나타난 뒤에 오랫동안, 대기에는 유리된 산소가 거의 없었다. 해초 및 다른 형태의 식물 생명이 나중에 산소를 발생시킬 때까지, 산소는 상당한 양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57:7.10 (660.2) 화산 시대에 행성에 있던 원시적 대기는, 운석 떼들의 부딪치는 충격을 거의 막아 주지 않는다. 수백만의 운석들이 그러한 공기의 띠를 꿰뚫고, 고체로서 행성의 껍질에 부딪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후기 시대에 산소로 강화되는 대기의 방패, 항상 강해지는 마찰력의 방패를 견딜 만큼 큰 것으로 판명되는 운석들의 수가 차츰 줄어들었다.
57:8.1 (660.3) 1,000,000,000년 전이 유란시아 역사가 실제로 시작한 날짜이다. 그 행성은 대체로 오늘날의 크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에 그 행성은 네바돈의 물리 등록부에 기록되었고, 유란시아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57:8.2 (660.4) 끊임없이 수증기가 응결됨과 함께, 공기는 지구의 껍질이 식는 것을 수월하게 만들었다. 화산의 활동은 내부 열의 압력과 껍질의 수축을 일찍부터 균형시켰고, 화산의 수가 급히 줄어들자, 그리고 껍질이 식고 조정되는 이 시기가 진전되자, 지진이 나타났다.
57:8.3 (660.5) 유란시아의 참 지질학적 역사는 첫 대양이 형성되도록 지구의 껍질이 넉넉히 식는 것과 함께 시작된다. 지구의 식어 가는 껍질에서 물과 수증기의 응결은, 일단 시작되자, 거의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의 끝이 되자 대양은 온 세계에 퍼졌고, 평균 1.6킬로미터가 넘는 깊이로 행성 전체를 덮었다. 조수(潮水)는 지금 관찰되는 것과 비슷하게 그때 작용하고 있었지만, 이 원시의 대양은 짜지 않았다. 그 물은 세상을 덮은, 실질적으로 민물이었다. 그 당시에 염소의 대부분은 여러 가지 금속과 결합되었지만, 수소(水素)와 합쳐서 이 물을 약한 산성으로 만들기에 넉넉히 염소가 있었다.
57:8.4 (660.6) 이 아득히 먼 시대가 열릴 때 유란시아는 물에 잠긴 행성이라고 상상해야 한다. 나중에, 더 깊고, 따라서 밀도가 더 높은 용암의 흐름이 현재 태평양의 밑바닥에서 나왔고, 물로 덮인 표면의 이 부분은 상당히 눌리게 되었다. 차츰차츰 두꺼워지는 땅 껍질의 균형을 보상하여 조정하려고 처음 대륙의 땅 덩어리가 세계의 대양에서 솟아나왔다.
57:8.5 (660.7) 950,000,000년 전에 유란시아는 하나의 큰 대륙과 하나의 큰 물 덩어리, 태평양이 있는 그림을 제시한다. 화산들은 아직 널리 퍼져 있고 지진(地震)은 잦고도 심하다. 운석들은 계속해서 지구를 폭격하지만, 그 빈도와 크기가 줄어들고 있다. 대기는 맑아지고 있지만, 2산화 탄소의 양은 계속 많다. 지구의 껍질은 차츰 안정되고 있다.
57:8.6 (660.8) 이 무렵에 유란시아는 행성 행정을 위하여 사타니아 체계에 배치되었고, 놀라시아덱의 생명 기록부에 기입되었다. 그리고 나서 작고 하찮은 그 구체의 행정적 승인이 시작되었다. 그 구체는 미가엘이 나중에 필사자로서 자신을 수여하는 엄청난 사업에 착수할 행성이 되도록 운명이 정해졌고, 거기서 미가엘은 나중에 유란시아로 하여금 그후에 “십자가의 세계”로 지역에서 알려지게 만든 여러 체험에 참여할 것이다.
57:8.7 (661.1) 900,000,000년 전에는 예루셈에서 사타니아의 첫 정찰단이 유란시아에 도착하는 것이 보였는데, 그들은 그 행성을 검사하고, 생명 실험 장소가 되도록 적응되어 있는가 보고하라고 파송되었다. 이 위원회는 24명으로 구성되었고, 생명 운반자, 라노난덱 아들, 멜기세덱, 세라핌, 그리고 초기 시절에 행성의 조직 및 행정과 상관이 있는 다른 계급의 하늘 생명들을 포함했다.
57:8.8 (661.2) 행성에 관하여 힘들여 조사를 마친 뒤에, 이 위원회는 예루셈으로 돌아가서 체계 군주에게 유리하다고 보고했고, 유란시아를 생명 실험 등록부에 기입할 것을 추천했다. 그에 따라 너희 세계는 예루셈에서 십일(十一) 행성으로 등록되었고, 생명 운반자들은 그들이 나중에 생명을 옮기고 심으라는 명령을 가지고 도착할 때, 그들에게 기계ㆍ화학ㆍ전기(電氣) 방법으로 동원하는 새로운 원본을 개시할 허가가 내릴 것이라고 통지를 받았다.
57:8.9 (661.3) 마땅한 절차를 거쳐, 예루셈에서 12명으로 이루어진 혼합 위원회가 행성 점령 준비를 마쳤고 이것은 에덴시아에 있는, 70명으로 이루어진 행성 위원회의 인가를 받았다. 생명 운반자들에게 자문하는 상담자들이 제안한 이 계획은 마침내 구원자별에서 승인을 받았다. 그 뒤에 곧, 네바돈 방송에는 유란시아가 생명 운반자들이 60번째로 사타니아의 실험을 행할 무대가 될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고, 이것은 네바돈 생명 원본들 중에서 사타니아 종류를 확대하고 개량하도록 고안되었다.
57:8.10 (661.4) 온 네바돈에 보낸 우주 방송에서 유란시아가 처음으로 인정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유란시아에게 완전한 우주 지위가 주어졌다. 그 뒤에 곧, 초우주의 소구역 및 대구역 본부 행성들의 기록부에 유란시아가 등록되었다. 이 시대가 끝나기 전에, 유란시아는 유버르사의 행성 생명 기록부에 기입되었다.
57:8.11 (661.5) 이 시대 전체가 잦고도 격심한 폭풍우의 특징을 가졌다. 지구의 초기 껍질은 계속해서 변하는 상태에 있었다. 지표의 냉각이 굉장한 용암의 흐름과 번갈아 일어났다. 세상의 표면 어디서도 이 최초의 행성 껍질을 조금도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모두 깊은 근원에서 분출하는 용암과 너무 자주 섞이고, 초기의 세계적 대양에서 생긴 후일의 침전물과 섞여 왔다.
57:8.12 (661.6) 세상의 표면 어디서도, 카나다 동북부에 헛슨 만 둘레보다, 고대의 대양이 있기 전에 생긴 이 바위들의 변화된 잔재가 더 많이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널리 퍼진 이 화강암 고지(高地)는 대양이 생기기 이전 시대에 속하는 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 돌 지층은 가열되고, 구부러지고, 비틀리고, 구겨졌고, 거듭하여 이 지층은 일그러뜨리는 이 변형 체험을 거쳤다.
57:8.13 (661.7) 대양 시대 동안 내내, 층을 이룬 엄청난 지층, 화석이 없는 돌 지층이 이 고대의 대양 밑바닥에 가라앉았다. (석회암은 화학적 침전의 결과로 형성될 수 있다. 오래 된 석회암이 모두 해양 생명의 침전으로 생기지는 않았다.) 이 고대의 바위 구조에서 아무 데도 생명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우연히, 물 시대의 나중 침전물이 생명이 생기기 이전의 지층, 더 오래 된 이 지층들과 섞이지 않는 한, 이 바위들은 아무런 화석을 포함하지 않는다.
57:8.14 (662.1) 지구의 초기 껍질은 상당히 불안정했지만, 산들은 아직 형성되는 과정에 있지 않았다. 행성은 형성되는 동안에 인력의 압력을 받아 수축되었다. 산은 수축되는 구체의 식는 껍질이 무너져서 생기는 결과가 아니라, 비와 인력과 침식(浸蝕) 활동의 결과로서 나중에 나타난다.
57:8.15 (662.2) 이 시대에 대륙의 땅 덩어리는 지구 표면의 거의 10퍼센트를 덮을 때까지 늘어났다. 대륙의 땅 덩어리가 물 위에 썩 솟아나올 때까지, 심한 지진은 시작되지 않았다. 한번 시작되자, 지진은 오랜 세월 동안 그 빈도와 가혹한 정도가 늘어났다. 수백만 년 동안 지진이 줄어들었지만, 유란시아에는 아직도 날마다 평균 열 다섯 번 일어난다.
57:8.16 (662.3) 850,000,000년 전에 지구의 껍질이 안정되는 진정한 첫 시기가 시작되었다. 무거운 금속들의 대부분은 구체의 중심을 향하여 가라앉았고, 식어 가는 껍질은 앞선 시대에 한 것처럼 그렇게 대규모로 무너지기를 그쳤다. 돌출한 땅과 그보다 무거운 대양의 바닥 사이에 균형이 더 잘 이루어졌다. 지표 밑에 있는 용암의 흐름은 거의 세계적으로 퍼졌고, 이것은 냉각과 수축과 지표의 이동 때문에 생긴 변동을 보상하고 안정시켰다.
57:8.17 (662.4) 화산 분출과 지진의 빈도와 심한 정도는 계속 줄어들었다. 대기는 화산 가스와 수증기를 깨끗이 치우고 있었지만, 2산화 탄소의 비율은 아직도 높았다.
57:8.18 (662.5) 공중에서, 땅에서, 전기(電氣)의 교란도 또한 줄어들고 있었다. 용암의 흐름은 껍질을 다채롭게 만들고 어떤 공간 에너지로부터 행성을 더 잘 절연시키는 원소들의 혼합물을 땅 표면으로 가지고 왔다. 이 모든 것은 자력(磁力)을 띤 두 극의 작용에서 나타나다시피, 땅 에너지의 통제를 용이하게 하고 그 흐름을 규제하는 데 많이 기여했다.
57:8.19 (662.6) 800,000,000년 전에는 처음으로 큰 땅덩이의 시기, 곧 대륙이 더욱 솟아나는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 보였다.
57:8.20 (662.7) 지구의 수권(水圈)이 처음에는 세계에 퍼진 대양으로, 나중에는 태평양으로 응축한 뒤로, 태평양의 물 덩어리는 그때 지구 표면의 10분의 9를 덮었다고 상상해야 한다. 바다로 떨어지는 운석들은 대양의 밑바닥에 쌓였는데, 일반적으로 말해서 운석들은 무거운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땅에 떨어지는 운석들은 대체로 산화(酸化)되고, 나중에 침식으로 닳아 버렸고, 대양의 분지(盆地)로 씻겨 내려갔다. 이처럼 대양의 밑바닥은 갈수록 더 무거워졌고, 이 위에 어떤 장소에서는 16킬로미터나 깊게 물 덩어리의 무게가 더해졌다.
57:8.21 (662.8) 태평양이 밑으로 더욱 가라앉는 것은 대륙의 땅 덩어리를 위로 밀도록 더욱 작용했다. 지금 오스트랄리아, 남북 아메리카, 남극 대륙이라고 부르는 덩어리들과 더불어, 유럽과 아프리카는 태평양의 깊은 데서부터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한편 태평양의 바닥은 이를 보상하여 가라앉는 조정을 더 계속하였다. 이 기간의 끝이 되자 지구 껍질에서 거의 3분의 1이 땅으로 이루어졌고, 모두가 하나의 대륙 덩어리였다.
57:8.22 (662.9) 이렇게 땅이 더욱 높아지면서, 행성에서 처음으로 기후 차이가 생겨났다. 땅의 융기, 우주 구름, 대양의 영향은 기후 변동의 주요한 요인이다. 아시아의 땅 덩어리의 기본 골격은 땅이 최대로 솟아났을 때 거의 14.4킬로미터 높이에 이르렀다. 높이 올라간 이 지역 위에 떠 있는 공기 속에 수분이 많았더라면, 거대한 얼음 담요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빙하기는 사실보다 훨씬 앞서 다가 왔을 것이다. 몇억 년이 지나서야, 그렇게 많은 땅이 다시 물 위에 나타났다.
57:8.23 (663.1) 750,000,000년 전에, 대륙의 땅 덩어리가, 크게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처음으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나중에 대양의 물이 들어오게 했고, 그린랜드를 포함해서, 남북 아메리카의 두 대륙이 서쪽으로 떠내려가는 길을 마련하였다. 동서 방향의 긴 분열은 아프리카를 유럽으로부터 떼어 냈고, 오스트랄리아, 태평양 군도, 남극 대륙을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잘라냈다.
57:8.24 (663.2) 700,000,000년 전에 유란시아는 생명을 지원하기에 적당한 조건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대륙의 떠돌이는 계속되었고, 점점 더 대양은 긴 손가락 같은 바다로서 땅을 쳐들어갔으며, 이 바다는 해양 생명의 서식지가 되기에 아주 적당한, 얕은 바다와 아늑한 만(灣)들을 마련해 주었다.
57:8.25 (663.3) 650,000,000년 전에는 땅덩어리가 더욱 분리되었고, 그 결과로서 대륙의 내해(內海)가 더욱 연장되었다. 이런 바다는 유란시아 생명에 필수였던 짠맛 정도에 빨리 이르고 있었다.
57:8.26 (663.4) 세월이 세월을 잇고, 시대가 지나고 또 지남에 따라서, 잘 보존되어 쌓이고 쌓인 돌 페이지에서 나중에 발견된 바와 같이, 유란시아의 생명 기록부를 적은 것은 바로 이 여러 바다와 뒤이어 생긴 바다였다. 옛 시절에 이 내륙의 바다들은 참으로 진화의 요람이었다.
57:8.27 (663.5) [한 생명 운반자가 발표했다. 그는 최초의 유란시아 군단의 단원이었고 이제는 거주하는 관찰자이다.]
58:0.1 (664.1) 온 사타니아에 유란시아와 비슷한 세계, 생명을 수정(修正)하는 행성이 꼭 61개 있다. 사람이 사는 세계들의 대다수는 확정된 기법에 따라서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한 구체에서 생명 운반자들은 생명을 심는 그들의 계획에 거의 재량이 없다. 그러나 약 열 세계 가운데 하나는 십일 행성으로 지정되고, 생명 운반자들의 특별 등록부에 배정된다. 그러한 행성에서 우리는 표준 우주 종류의 살아 있는 존재들을 수정하거나 어쩌면 개량하려는 노력으로, 어떤 생명 실험에 착수할 허락을 받는다.
58:1.1 (664.2) 600,000,000년 전에 예루셈으로부터 파송된 생명 운반자 위원회가 유란시아에 도착했고, 사타니아 체계의 606번 세계에서 생명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로, 물리적 조건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사타니아에서 네바돈 생명 원본들을 시작하는 606번째 경험이 되며, 지역 우주의 기본적 표준 생명을 설계하면서 우리가 고치고 수정할 60번째 기회가 될 것이었다.
58:1.2 (664.3) 생명 운반자들은 한 구체의 조건이 진화의 주기를 시작할 때가 무르익기 전에 생명을 개시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우리는 그 행성의 물리적 진보가 지원하고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빨리 생명을 개발할 수도 없다.
58:1.3 (664.4) 사타니아 생명 운반자들은 소금 형태의 생명을 계획했다. 따라서 대양의 바다가 충분히 짜게 되기까지 생명을 심는 방향으로 아무런 걸음을 내디딜 수 없었다. 유란시아 부류의 원형질은 오직 적당한 소금물 속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조상이 되는 모든 생명―식물과 동물―은 소금물로 된 서식지에서 진화하였다. 더욱 높게 조직된 육지 동물조차, 필수인 바로 이 소금 용액이 그 몸을 통해서 피의 흐름 속에 돌지 않으면 계속해서 살 수 없고, 이 피의 흐름은 이 “짠 바다” 속에 있는 조그만 살아 있는 세포를 모두 아낌없이 씻어 내리고, 글자 그대로 잠기게 한다.
58:1.4 (664.5) 너희의 원시 조상들은 짠맛이 나는 대양(大洋)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오늘날, 바로 이 대양과 같은 짠 용액이 너희 몸 속에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개별 세포를 화학 용액으로 적신다. 이 용액의 모든 요소는 행성에서 활동하기로 된 살아 있는 처음 세포들의 첫 원형질 반응을 자극한 소금물과 견줄 만하다.
58:1.5 (664.6) 그러나 이 시대의 막이 오르자 유란시아는 모든 면에서 초기 형태의 해양 생명을 지원하기에 유리한 상태를 향하여 진화하고 있다. 전개되는 물리적 환경―땅과 공간의 환경―에 최선으로 적응될 것이라고 우리가 결정한 생명 형태들을 자리잡게 하려는 나중의 여러 시도를 위하여, 느리지만 확실하게, 땅에서, 또 인접한 공간 지역에서 물리적 발전이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58:1.6 (665.1) 후일에 사타니아의 생명 운반자 위원회가 예루셈으로 돌아왔는데, 그들은 대륙의 땅 덩어리가 더 부서지기까지 기다리기를 선호하였고, 이것은 실제로 생명을 심기 시작하기 전에, 더욱 많은 내륙의 바다와 아늑한 만을 마련해 줄 것이었다.
58:1.7 (665.2) 생명이 해양에서 기원을 가지는 행성에서는 수많은 내륙의 바다가, 얕은 바다와 아늑한 만의 널리 뻗은 해안선이, 생명을 심는 데 이상적 조건을 마련해 준다. 그리고 지구에서 바로 그러한 바다가 빨리 분포되고 있었다. 고대에 있던 이 내륙의 바다는 150미터에서 180미터보다 더 깊은 일이 드물었고, 태양 빛은 180미터보다 더 깊이 대양의 물을 침투할 수 있다.
58:1.8 (665.3) 후기 시대의 따듯하고 온화한 풍토에서, 바로 그러한 바닷가에서, 원시의 식물 생명은 땅으로 올라가는 길을 찾았다. 거기서 공기 속에 밀도가 높은 탄소는 새로운 육지 종류의 생명에게 빠르고 무성하게 자랄 기회를 주었다. 이 대기가 그때 식물의 성장에 이상적이었으나 포함한 2산화 탄소의 비율이 아주 높아서, 사람은커녕, 아무 동물도 지구의 표면에서 살 수 없었다.
58:2.1 (665.4) 행성의 대기(大氣)는 태양의 총 빛 방출량의 약 20억분의 1을 걸러서 받는다. 북 아메리카에 떨어지는 빛의 값을 시간당 1킬로와트에 2센트의 비율로 치른다면, 1년에 빛의 요금은 약 800,000조(兆) 달라가 될 것이다. 시카고의 햇빛 요금은 하루에 1억 달라가 훨씬 넘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태양으로부터 다른 형태의 에너지를 받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빛은 너희 대기에 태양이 미치는 유일한 공헌이 아니다. 인간의 시력이 인식하는 범위 위와 아래로 미치는 파장을[1] [4] 포함해서, 광대한 태양 에너지가 유란시아에 퍼부어진다.
58:2.2 (665.5) 지구의 대기는 극자외선[2] [5] 파장 끝에 태양이 방사하는 많은 것을 거의 통과시키지 않는다. 이 짧은 파장의 대부분은 지표 위에서 약 16킬로미터 수준 전역에 걸쳐서 존재하는 한 오존층에 흡수되며, 이 층은 공간을 향하여 다시 16킬로미터까지 뻗는다. 이 지역에 스며드는 오존은, 지구 표면의 조건에서 0.25센티미터 두께의 층을 이룰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비교적 작고 겉보기에 하찮은 양의 오존은 햇빛에 있는 위험하고 파괴적인 이 자외선의 지나친 방사로부터 유란시아 거주자들을 보호한다. 그러나 이 오존층이 조금만 더 두텁다면, 너희는 상당히 중요하고 건강에 좋은 자외선을 빼앗길 것이다. 이 자외선은 지금 지구 표면에 미치며, 가장 필수인 너희의 비타민 중 하나의 조상이 된다.
58:2.3 (665.6) 상상력이 모자라는 너희 필사 기계론자 중에 더러는 아직도 물질 창조와 인간의 진화를 우연(偶然)이라 보기를 고집한다. 유란시아 중도자들은 물리학과 화학에서 5만 가지가 넘는 사실을 수집했는데, 이것들이 우연의 법칙과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며, 물질 창조에 총명한 목적이 있음을 틀림없이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이 모든 것은 물리학과 화학 분야 바깥에, 그들이 조사한 10만 가지가 넘는 결과의 목록을 전혀 계산에 넣지 않았고, 중도자들은 이것들이 물질 우주를 계획하고 창조하고 유지하는 지성이 있음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58:2.4 (666.1) 너희의 태양은 죽음을 초래하는 빛을 진정한 홍수처럼 퍼부으며, 유란시아에서 너희의 쾌적한 삶은, 40가지가 넘는 작용, 겉보기에 어쩌다가 일어나는 보호 작용의 “우연한” 영향 때문인데, 이것들은 이 독특한 오존층의 작용과 비슷하다.
58:2.5 (666.2) 밤에 대기가 “덮어주는” 효과가 아니라면, 방사로 말미암아 열을 너무 빨리 잃어 버려서, 인조(人造) 시설을 쓰지 않고서는 생명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58:2.6 (666.3) 지구의 대기에서 아래쪽 8킬로미터부터 9.6킬로미터는 대류권(對流圈)이다. 여기는 바람과 공기의 흐름이 있는 지역이며, 이것은 날씨 현상을 일으킨다. 이 지역 위는 내부 이온 층이고, 그 위는 성층권이다. 지구의 표면으로부터 올라가면서, 9.6킬로미터나 14.4킬로미터까지 기온이 꾸준히 떨어지고, 그 높이에서 약 화씨 영하 70도를 기록한다. 화씨로 영하 65도에서 70도에 이르는 이 기온의 범위는 64킬로미터 더 올라가면서 바뀌지 않는다. 기온이 불변하는 이 영역이 성층권이다. 72킬로미터나 80킬로미터의 높이에서, 기온은 비로소 오른다. 오로라가 전시되는 수준에서, 기온이 화씨 1200도에 이를 때까지, 이 기온의 상승이 계속되고, 산소를 이온화하는 것은 이 극심한 열이다. 그러나 그러한 희박하게 된 공기에서 온도는 지구 표면에서 계산하는 열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다. 너희의 모든 대기의 절반은 처음 4.8킬로미터에서 발견될 것을 기억하여라. 가장 높은 오로라 빛줄기가 지구의 대기의 높이를 가리킨다―약 640킬로미터이다.
58:2.7 (666.4) 오로라 현상은 태양의 흑점과 직접 관련된다. 이 태양의 회오리바람은 마치 땅에서 열대 지방의 폭풍우처럼, 태양의 적도(赤道) 위와 아래에서 반대 방향으로 소용돌이친다. 그러한 대기의 교란은 적도 위나 아래서 생길 때, 반대 방향으로 소용돌이친다.
58:2.8 (666.5) 태양의 흑점이 빛의 주파수를 바꾸는 힘은 이 태양 폭풍의 중심들이 엄청난 자석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한 자장(磁場)은 흑점의 분화구로부터 바깥으로 공간을 통해서, 전하를 띤 입자들을 지구의 바깥 대기까지 던질 수 있고, 거기서 이온화하는 입자들의 영향력은 그러한 무척 볼 만한 오로라를 보여준다. 따라서 태양의 흑점이 아주 한창일 때―또는 바로 뒤에―너희는 가장 큰 오로라 현상을 보는데, 그때 흑점들이 적도에 자리잡는 경향이 더 있다.
58:2.9 (666.6) 나침반의 바늘조차 이 태양의 영향에 민감한데, 해가 뜨는 동안에 바늘이 조금 동쪽으로, 해가 저물 무렵이 가까워짐에 따라서 조금 서쪽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날마다 일어나지만, 태양 흑점의 주기가 절정에 있는 동안, 이 나침반의 변동은 2배나 크다. 낮에 생기는 이러한 나침반의 떠돌이는 대기의 상부(上部)에서 생기는 이온화의 증가에 반응하는 것이며, 이온화는 햇빛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58:2.10 (666.7) 성층권 위에서 두 가지 다른 수준에서, 전기를 띤 전도(傳導) 지역이[3] [6] 존재하는 것은 너희의 장파 및 단파 방송이 장거리에 송신되는 것을 설명한다. 때때로 너희의 방송은, 이 바깥 이온 층의 영역에서 이따금 몰아치는 무서운 폭풍에 방해를 받는다.
58:3.1 (666.8) 우주가 물질화하는 초기 시절에 공간 지역에는 광대한 수소(水素) 구름이 흩어져 있는데, 이것은 바로 그러한 천문학상의 먼지 덩어리가 먼 공간에 두루, 많은 지역의 특징을 지금 나타내는 것과 같다. 타오르는 별들이 방사 에너지로 분쇄하고 분산시키는 조직된 물질의 상당 부분은, 일찍 나타나는 구름, 공간의 이 수소 구름 속에서 처음에 만들어졌다. 어떤 특별한 조건 밑에서 큰 수소 덩어리의 핵 속에서도 원자의 붕괴가 또한 일어난다. 원자를 만들고 원자를 분해하는 이 모든 현상에는, 상당히 가열된 성운의 경우처럼, 방사 에너지를 가진 짧은 우주선이 밀물처럼 쏟아지는 일이 뒤따른다. 이 다양한 방사물에는 유란시아에서 알려지지 않은 형태의 공간 에너지가 뒤따른다.
58:3.2 (667.1) 우주 공간에 있는 짧은 빛의 에너지 전하는 조직된 공간 영토에서 존재하는 모든 다른 형태의 방사 에너지보다 4백배가 더 크다. 짧은 우주선(宇宙線)의 출력은, 타오르는 성운이나 팽팽한 전기장(電氣場), 바깥 공간이나 광대한 수소 먼지 구름에서 오든지 상관 없이, 온도ㆍ인력ㆍ전압의 갑작스러운 긴장의 변동에 따라서 질적ㆍ양적으로 수정된다.
58:3.3 (667.2) 우주선의 근원에서 일어나는 이 사태는 많은 우주 사건과 회전하는 물질의 궤도에 따라 결정되며, 이 궤도는 수정된 동그라미에서부터 극도의 타원형에 이르기까지 변한다. 전자(電子)의 자전(自轉)이 때때로 같은 물리적 지대에서도 더 커다란 물질의 움직임과 반대 방향이기 때문에, 물리적 조건은 또한 크게 바뀔 수도 있다.
58:3.4 (667.3) 광대한 수소 구름은 우주의 진정한 화학 실험실이며, 모든 단계의 진화하는 에너지와 변형하는 물질을 품고 있다. 아주 빈번히 겹치고, 따라서 널리 섞이는, 큰 2중성의 가장자리 가스에서 큰 에너지 활동이 또한 일어난다. 그러나 엄청나고 광범위한 이 공간 에너지 활동 중에 아무것도 조직된 생명의 현상―살아 있는 물건과 존재의 생식질(生殖質)―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공간의 이 에너지 조건은 생명을 정착시키는 데 필수인 환경과 관련되지만, 그 조건은 방사 에너지를 가진, 파장이 더 긴 빛 중에 더러가 그런 것처럼, 생식질의 유전 인자(因子)들을 나중에 수정하는 데 효력이 없다. 생명 운반자들이 심은 생명은 우주 에너지를 가진 짧은 우주선이 이렇게 놀랍게 범람하는 데 대하여 충분히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
58:3.5 (667.4) 생명 운반자들이 유란시아에서 생명을 정착시키는 일을 실제로 시작할 수 있기 전에, 이 기본 우주 조건이 모두 유리한 상태로 발전되어야 했다.
58:4.1 (667.5) 우리를 생명 운반자라 부른다고 해서 너희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행성에 생명을 나를 수 있고, 나르기도 하지만, 유란시아에 아무 생명도 가져오지 않았다. 유란시아의 생명은 독특하며, 행성에 기원이 있었다. 이 구체는 생명을 수정하는 세계이며, 여기서 나타나는 모든 생명은 바로 여기서, 행성에서 우리가 빚어냈다. 그리고 유란시아에 있는 것과 똑같은 생명 존재는 온 사타니아에, 아니 온 네바돈의 어느 다른 세계에도 없다.
58:4.2 (667.6) 550,000,000년 전에 생명 운반자 군단은 유란시아로 돌아왔다. 영적 권능과 초물리 세력들과 협동하여, 우리는 이 세계 최초의 생명 형태들을 준비하고 창시했으며, 그것들을 이 영역의 쾌적한 바다에 심었다. 행성 영주 칼리가스티아의 시절까지 (행성 바깥의 성격자들을 제외하고) 모든 식물 생명은 우리가 최초에, 동시에 심은 동일한 세 개의 해양 생명에서 기원을 가졌다. 이 세 개의 생명 이식(移植)에는 다음과 같은 명칭이 붙었다: 중앙 이식, 곧 유라시아 및 아프리카 이식, 동부 이식, 곧 오스트랄리아 이식, 그리고 서부 이식이며, 서부는 그린랜드와 두 아메리카를 포함한다.
58:4.3 (668.1) 500,000,000년 전에, 원시적 해양 식물 생명이 유란시아에서 자리를 잘 잡았다. 그린랜드와 북극의 땅 덩어리는, 남북 아메리카와 함께, 오랫동안 느리게 서향으로 떠내려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프리카는 조금 남쪽으로 움직였고, 동서 방향의 골짜기, 곧 지중해 분지를 그 자체와 모체 사이에 만들었다. 남극, 오스트랄리아, 그리고 태평양 섬들이 가리키는 땅은 남쪽과 동쪽에서 갈라졌고, 그날 이후로 멀리 떠내려갔다.
58:4.4 (668.2) 부서지는 대륙 땅 덩어리의 동서로 갈라진 틈에, 가운데 바다의 보호된 열대의 만(灣)에, 우리는 원시 형태의 해양 생명을 전에 심었다. 우리가 해양 생명을 셋이나 심은 목적은, 땅이 나중에 분리됨에 따라서 큰 땅 덩어리가 각자 이 생명을 물이 따듯한 바다 속으로 꼭 가져가도록 보장하려는 것이었다. 육지 생명이 나타나는 후일의 시대에 큰 대양의 물이, 떠내려가는 이 대륙 땅 덩어리를 떼어놓을 것이라 우리는 내다보았다.
58:5.1 (668.3) 대륙 땅 덩어리의 떠돌이는 계속되었다. 지구의 핵심은 강철처럼 조밀하고 단단해졌고, 1 입방 센티미터에 거의 1,500톤의 압력 밑에 깔려 있었다. 엄청난 인력의 누르는 힘 때문에, 깊은 내부는 아주 뜨거웠고 아직도 그렇다. 중심에서 온도가 태양 표면 온도보다 약간 높을 때까지, 표면에서 밑으로 가면서 온도가 올라간다.
58:5.2 (668.4) 지구 덩어리의 겉에서 1600킬로미터는 주로 다른 종류의 바위로 구성되어 있다. 그 밑에는 더 조밀하고 무거운 금속 원소들이 있다. 초기에 대기(大氣)가 있기 이전 시대를 통하여 내내, 세상은 녹아 있고 상당히 가열된 상태에서 아주 거의 액체 였기 때문에, 무거운 금속들은 안으로 깊숙히 가라앉았다. 오늘날 표면 가까이서 발견되는 것들은 고대 화산들의 분비물, 나중에 널리 퍼진 용암의 흐름, 그리고 그보다 최근에 운석으로 투입된 것을 대표한다.
58:5.3 (668.5) 바깥 껍질의 두께는 약 64킬로미터였다. 이 바깥 껍질을 두께가 다른 녹은 현무암의 바다가 받쳐 주고, 껍질은 바로 그 위에 놓여 있었다. 이것은 높은 압력 밑에 깔린 유동적인 녹은 용암층이었지만, 변하는 행성의 압력을 평준화하려고 늘 이리저리 흐르는 성질을 가졌고, 그렇게 함으로 지구의 껍질을 안정시키는 경향이 있다.
58:5.4 (668.6) 굳어지지 않고 방석 같은 이 녹은 현무암의 바다 위에서 대륙들이 오늘날도 계속 떠다닌다. 이렇게 보호하는 조건이 아니라면, 더욱 심한 지진이, 글자 그대로 세계를 흔들어 조각으로 만들 것이다. 지진은 딱딱한 바깥 껍질이 미끄러지고 이동함으로 생기며, 화산이 지진을 일으키지 않는다.
58:5.5 (668.7) 지구 껍질의 용암층은 식었을 때 화강암을 형성한다. 유란시아의 평균 밀도는 물보다 5배 반이 조금 넘는다. 화강암의 밀도는 물의 밀도의 3배보다 작다. 지구의 핵심은 물의 12배나 밀도가 높다.
58:5.6 (668.8) 바다의 밑바닥은 땅 덩어리보다 더 조밀하고, 이것이 대륙을 물 위에 뜨게 만든다. 바다 밑바닥은 해수면 위로 튀어나올 때, 대체로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것이 발견될 것이다. 현무암은 땅 덩어리를 이루는 화강암보다 상당히 더 무거운 용암의 형태이다. 또 한편, 대륙이 대양의 바닥보다 가볍지 않다면, 인력이 대양의 가장자리를 땅 위로 잡아당길 터이지만, 그러한 현상을 관찰할 수 없다.
58:5.7 (668.9) 대양의 무게는 또한 바다 밑바닥에서 압력이 증가하는 한 요인이다. 아래에 있지만 비교적 더 무거운 대양의 지층들은 그 위에 있는 물의 무게와 함께, 높이 있지만 훨씬 가벼운 대륙들의 무게에 가깝다. 그러나 모든 대륙은 대양 속으로 기어가는 성질이 있다. 대양의 바닥 수준에서 대륙의 압력은 1평방 센티미터에 약 1,400킬로그람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대양의 밑바닥에서 4600미터 높이에 서 있는 대륙 덩어리의 압력일 것이다. 대양 바닥에 있는 물의 압력은 1평방 센티미터에 겨우 350킬로그람이다. 차이 나는 이 압력은 대륙들로 하여금 대양의 바닥을 향하여 미끄러져 내리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58:5.8 (669.1) 생명이 생기기 이전 시대에 대양의 밑바닥이 눌린 것은, 혼자 있던 대륙 땅 덩어리를 아주 높이 들어올려서, 측면의 압력이 동쪽ㆍ서쪽ㆍ남쪽 가장자리로 하여금 아래로, 밑에 깔려 있는 반 끈적끈적한 용암 지층 위로, 둘러싼 태평양 바다로 미끄러져 내리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이 대륙의 압력을 아주 충분히 보상했기 때문에, 고대의 이 아시아 대륙의 동쪽 해안은 크게 갈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로 죽 그 동쪽 해안선은 인접한 대양 깊은 곳의 절벽 위에서 둥둥 떠 있어 왔고, 물 속 무덤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려고 위협한다.
58:6.1 (669.2) 450,000,000년 전에, 식물 생명으로부터 동물 생명으로 변이(變移)가 일어났다. 이 변천은 분리되는 여러 대륙의 널리 뻗은 해안선에서, 아늑한 열대의 만과 개펄의 얕은 물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 발전은 모두 최초의 생명 원본들에 본래부터 있었고, 차츰차츰 일어났다. 초기의 원시 식물 형태의 생명, 그리고 후기의 잘 규명된 동물 유기체(有機體) 사이에 많은 과도기 단계가 있었다. 오늘날도 과도기의 끈적끈적한 곰팡이들이 버티고 있는데, 이것들은 좀처럼 식물이나 동물로 분류할 수 없다.
58:6.2 (669.3) 식물 생명이 동물 생명으로 진화되는 것을 추적할 수 있고, 점진적으로 가장 간단한 것으로부터 가장 복잡하고 발달된 유기체로 이끄는 단계적 시리즈의 식물과 동물을 발견할 수 있지만, 동물계의 큰 부문 사이에서나, 인간이 생기기 이전의 가장 높은 동물 종류와 인류의 시초 인간 사이에서도, 그런 연결하는 고리를 너희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른바 이 “빠진 고리”는 언제까지나 빠진 채로 있을 터이니, 그것들이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는 뻔한 이유 때문이다.
58:6.3 (669.4) 한 시대에서 다음 시대까지, 근본적으로 새로운 종(種)의 동물 생명이 나타난다. 종들은 작은 변화가 차츰차츰 쌓인 결과로서 진화하지 않는다. 완전히 발육된, 새로운 서열의 생명으로서 나타나며, 갑자기 나타난다.
58:6.4 (669.5) 새로운 종과 다양화된 서열의 살아 있는 유기체들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온전히 생물학적이며, 엄밀하게 말하면 자연스럽다. 아무런 초자연 현상이 이 유전의 변화에 관련되지 않았다.
58:6.5 (669.6) 대양에서 물의 짠맛이 알맞을 때 동물 생명이 진화했고, 소금물이 해양 생명의 동물 몸을 통해서 돌게 만드는 것은 비교적 간단했다. 그러나 대양이 수축하고 소금의 비율이 크게 높아졌을 때, 바로 이 여러 동물은 체액에서 소금기를 줄이는 능력을 진화했으며, 이것은 민물에서 살기를 배운 유기체들이 소금을 보존하는 기발한 기법으로, 체액 속에서 소금을 적당한 정도로 유지하는 능력을 얻은 것과 같다.
58:6.6 (669.7) 바위 속에 박혀 있는 해양 생명의 화석(化石)을 연구하는 것은 이 원시 유기체들이 초기에 조정하는 싸움을 겪었음을 드러낸다. 식물과 동물은 이 조정하는 실험을 결코 그치지 않는다. 환경은 늘 변하고 있고, 살아 있는 유기체들은 결코 그치지 않는 변화에 적응하려고 언제나 애쓰고 있다.
58:6.7 (670.1) 모든 새 서열의 생명이 가진 생리적 장비와 해부학적 구조는 자연 법칙의 작용에 반응해서 생긴다. 그러나 그 뒤에 지성 재산은 타고난 두뇌 능력에 따라서 보조 지성 영들이 수여한 것이다. 지성은 물리적 진화는 아니지만, 순전히 물리적ㆍ진화적 발전이 허락하는 두뇌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58:6.8 (670.2) 이득과 손실이 거의 끝없이 되풀이 되는 주기(週期), 조정하고 다시 조정하는 주기를 거쳐서, 살아 있는 모든 유기체는 시대를 거듭하여, 앞뒤로 오락가락한다. 우주와 화합을 이루는 자는 지속하고, 이 목표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존재를 그친다.
58:7.1 (670.3) 생명이 시작되는 시대, 곧 원생대(原生代)에, 세상의 바깥 껍질을 구성한 광대한 집단의 바위 체계는 이제 지구 표면에서 여러 곳에 나타나지 않는다. 후일에 쌓인 모든 누적물 밑에서 그런 집단이 솟아날 때, 오로지 식물과 초기의 원시 동물 생명의 화석 유물만 발견될 것이다. 물로 퇴적된 오래 된 바위들 가운데 더러는 후일의 지층과 한데 섞여 있고, 초기 형태의 어떤 식물 생명의 화석 유물을 때때로 산출한다. 한편 가장 위층에서는 더 원시 형태의 초기 해양 동물 유기체가 얼마큼 때때로 발견될 수 있다. 여러 곳에서, 동물과 식물을 포함하여, 초기의 해양 생명 화석을 품은, 층화된 가장 오래 된 이 바위 층은, 차별화되지 않은 더 오래 된 돌 바로 위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
58:7.2 (670.4) 이 시대의 화석은 조류(藻類), 산호 같은 식물, 원시의 원충류(原蟲類), 해면 같은 과도기 유기체를 산출한다. 그러나 초기의 바위 층에서 그러한 화석이 없는 것은 그 화석이 투입되었을 때 생물이 다른 곳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반드시 증명하지는 않는다. 이 초기 시절을 통해서 생명은 드문드문 있었고, 느리게나마 땅 껍질에서 길을 개척했다.
58:7.3 (670.5) 이 옛 시대의 바위는 지금 지구의 표면이나 표면 아주 가까이, 현재 땅 면적의 약 8분의 1 위에 널려 있다. 이 과도기의 돌, 곧 가장 오래 된 층화된 바위 층의 평균 두께는 약 2.4킬로미터가 된다. 어떤 지점에서 이 고대의 바위 체계는 두께가 6.4킬로미터 되지만, 이 시대에 속한 것으로 사람들이 주장하는 층의 다수는 그보다 후기에 속한다.
58:7.4 (670.6) 북 아메리카에서, 화석을 품은 이 고대의 원시 돌 층은 카나다의 동부ㆍ중부ㆍ북부 지역에 걸쳐, 표면에 나타난다. 펜실바니아와 고대의 아디론닥 산맥으로부터 서쪽으로 미시간ㆍ위스칸신ㆍ미네소타를 거쳐서 연장되는, 이 바위의 드문드문한 동서 산마루가 또한 있다. 다른 산마루는 뉴펀드랜드서부터 알라바마까지, 그리고 알라스카에서부터 멕시코까지 이어진다.
58:7.5 (670.7) 이 시대의 바위는 온 세계에 여기저기 노출되어 있지만, 수피리어 호수 근처와 콜로라도 강의 그랜드 캐년에 있는 것보다 더 풀이하기 쉬운 것은 없다. 거기에는 화석을 품은 이 원시 바위가 여러 겹으로 존재하며, 그 아득한 시절에 격변과 표면의 변동이 있었음을 증거한다.
58:7.6 (670.8) 이 돌 층은, 지구의 껍질에서 화석을 품은 가장 오래 된 지층인데, 지진으로 인한 융기와 초기 화산의 결과로 구겨지고, 접히고, 괴상하게 비틀어졌다. 이 시대 용암의 흐름은 많은 철ㆍ구리ㆍ납을 행성의 표면 가까이로 올려 왔다.
58:7.7 (670.9) 지구에는 그러한 활동을 위스칸신의 세인트 크루아 계곡보다 더 그림처럼 보여주는 데가 거의 없다. 이 지역에는 땅에 있는 용암의 흐름이 연달아 물 속에 잠겨서 그 결과로 바위가 퇴적되는 현상이 127번이나 연속으로 일어났다. 위쪽의 바위 퇴적과 간헐적인 용암 흐름 가운데 많은 것은 오늘날 없다. 이 체계의 밑바닥은 땅 속에 깊이 묻혀 있지만, 그런데도 지난 시대의 이 층화된 기록 가운데 약 65에서 70군데가 눈에 보이게 지금 드러나 있다.
58:7.8 (671.1) 상당한 땅이 거의 해수면 가까이에 있던 이 초기 시절에, 여러 번 연달아 땅이 물 속에 가라앉고 솟아났다. 지구의 껍질은 비교적 안정된 후기에 막 들어가고 있었다. 더 일찍 있었던 대륙의 떠돌이로부터 생긴 파동, 곧 상승과 하강은 큰 땅 덩어리들이 빈번히 정기적으로 가라앉게 만들었다.
58:7.9 (671.2) 원시 해양 생물이 살던 이 시대에, 대륙 해안의 광범위한 면적은, 몇 미터에서 800미터까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오래 된 사암(砂岩)과 역암(礫岩)이 이 고대의 해안에서 침전되어 쌓인 것을 대표한다. 이 초기의 층화에 속하는 퇴적암은 생명이 시작되기 훨씬 앞서, 전세계에 퍼진 대양이 초기에 나타나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지층 바로 위에 놓여 있다.
58:7.10 (671.3) 이 과도기 암석 퇴적물의 상부 지층 가운데 더러는 소량의 이판암(泥板岩)이나 검은 빛을 띤 점판암(粘板岩)을 포함하는데, 이것은 유기(有機) 탄소가 존재했음을 가리키며, 뒤따르는 석탄기, 곧 석탄 시대에 지구를 뒤덮은 식물 생명 형태의 조상이 존재했음을 입증한다. 이 암석 지층에 있는 구리의 상당 부분은 물에서 퇴적한 결과로 생긴다. 더러는 더 오래 된 암석 틈에서 발견되며, 고대에 어떤 보호받은 해안선에서 느릿한 늪의 물이 농축된 것이다. 북 아메리카와 유럽의 철 광산은 퇴적물과 분출물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것들의 일부는 더 오래 된 층화되지 않은 암석, 그리고 일부는 생명이 형성되던 과도기에 속하는, 나중에 층화된 암석에 놓여 있다.
58:7.11 (671.4) 이 시기에는 세계의 바다 전역에 걸쳐서 생명이 퍼지는 것이 눈에 뜨이고, 해양 생명은 유란시아에서 자리를 잘 잡게 되었다. 얕고 널리 퍼진 내륙 바다의 밑바닥은 식물이 풍부하고 무성하게 성장하여 차츰 덮이고 있고, 한편 해안가의 바다는 간단한 형태의 동물 생명으로 들끓고 있다.
58:7.12 (671.5) 이 이야기는 모두, 세계가 기록한 광대한 “바위 책”의 화석 페이지 안에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다. 이 생물지리학 기록의 거대한 페이지는 너희가 풀이하는 기술만 얻는다면, 어김없이 진상을 일러준다. 이 고대의 바다 지층 가운데 많은 것은 지금 땅 위에 높이 들려 있고, 오랜 세월에 걸친 그 퇴적물은 그 초기 시절에 있었던 생명의 투쟁을 일러준다. 너희의 시인(詩人)이 말한 바와 같이, 이것이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우리가 밟는 티끌은 한때 살아 있었도다.”
59:0.1 (672.1) 우리는 유란시아의 역사가 약 10억 년 전에 시작하고 다음 5대 시기를 거쳐서 전개된다고 본다:
59:0.2 (672.2) 1. 생명 이전 시기는 행성이 현재 크기에 이른 무렵으로부터 생명이 자리를 잡은 때까지, 처음 4억 5천만 년에 걸친 기간이다. 너희의 학자들은 이 기간을 시생대(始生代)로 불러 왔다.
59:0.3 (672.3) 2. 생명이 싹트는 시기는 그 다음 1억 5천만 년 동안 펼쳐진다. 이 시기는 앞에 생명 이전 시대, 곧 대변동 시대와 그 뒤에 상당히 더 발달된 해양 생명 시대 사이에 끼어 있다. 이 시기는 너희 학자들에게 원생대(原生代)로 알려져 있다.
59:0.4 (672.4) 3. 해양 생명 시기는 그 다음 2억 5천만 년을 채우며, 너희에게 고생대(古生代)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59:0.5 (672.5) 4. 시초 육지 생명 시기는 그 다음 1억 년 동안 이어지며, 중생대(中生代)로 알려져 있다.
59:0.6 (672.6) 5. 포유 동물 시기는 마지막 5천만 년을 차지한다. 이 최근의 시기는 신생대(新生代)로 알려져 있다.
59:0.7 (672.7) 이처럼 해양 생명 시기는 너희 행성의 역사에서 약 4분의 1을 차지한다. 이 시기는 긴 여섯 기간으로 세분될 수 있는데, 각 기간은 지질학 분야와 생물학 영역에서 잘 규명된 어떤 발전의 특징이 있다.
59:0.8 (672.8) 이 시기가 시작될 때, 바다의 밑바닥, 널리 퍼진 대륙붕, 그리고 해안 가까이 있는 수많은 얕은 분지는 무성한 식물로 덮여 있다. 좀더 간단한 원시 형태의 동물 생명은 이미 선행(先行)하는 식물 유기체로부터 발전되었고, 초기의 동물 유기체는 많은 내륙의 바다가 원시 해양 생명으로 바글거릴 때까지, 여러 땅 덩어리의 광범위한 해안선을 따라서 차츰 진행하였다. 이 초기의 유기체 중에 극소수가 껍질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것이 화석으로서 보존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뒤잇는 시대에 아주 조직적으로 적힌 생명 기록을 보존하는, 그 위대한 “돌 책”의 처음 장들을 위하여 무대가 준비되어 있다.
59:0.9 (672.9) 북 아메리카 대륙에는 전체 해양 생명 시기의 화석이 박힌 퇴적물이 놀랍게도 풍부하다. 가장 처음에 생긴 오래 된 지층은 널리 퍼진 침식 퇴적물 때문에, 선행하는 시기의 후반 지층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이 퇴적물은 행성이 발전한 이 두 단계를 뚜렷하게 분리한다.
59:1.1 (673.1) 지구의 표면에서 비교적 고요하던 이 시기가 개시될 때가 되자, 생명은 여러 내륙 바다와 대양의 해안선에 국한되어 있고, 아직 아무 형태의 육지 유기체가 진화하지 않았다. 원시의 해양 동물은 자리를 잘 잡았고, 다음의 진화적 발전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다. 아메바는 이 초기 단계에 있는 동물 생명의 생존자의 전형(典刑)이며, 그에 앞선 과도기 끝 무렵에 나타났다.
59:1.2 (673.2) 400,000,000년 전에, 식물과 동물을 포함하여 해양 생명은 온 세계에 상당히 잘 흩어져 있다. 세계의 기후는 조금 따듯해지고 더 온화해진다. 여러 대륙, 특히 남북 아메리카의 해안가는 널리 물에 잠긴다. 새로운 대양들이 출현하고, 더 오래 된 수역(水域)은 크게 확대된다.
59:1.3 (673.3) 식물은 이제 처음으로 땅 위로 기어 올라오고, 곧 바다가 아닌 서식지에 적응하는 데 상당히 진보한다.
59:1.4 (673.4) 갑자기 단계적 조상이 없이, 첫 다세포 동물이 나타난다. 삼엽충이 진화했고, 오랜 세월 동안 삼엽충(三葉蟲)이 바다를 지배한다. 해양 생명의 견지에서 볼 때, 이때는 삼엽충 시대이다.
59:1.5 (673.5) 이 시간 구역의 후기 부분에 북 아메리카와 유럽의 상당 부분은 바다로부터 솟아났다. 지구의 껍질은 일시 안정되었고, 산맥, 아니 차라리 육지의 고지(高地)들은 대서양과 태평양 해안을 따라서, 서인도 섬들에 걸쳐, 그리고 유럽 남부에서, 올라섰다. 카리비안 지역 전부가 상당히 높아졌다.
59:1.6 (673.6) 390,000,000년 전에 대륙은 아직도 높이 솟아 있었다. 아메리카의 동부 및 서부와 서 유럽의 여러 부분에서 이 시절에 놓인 돌 지층을 찾을 수 있고, 이것은 삼엽충 화석을 지니는 가장 오래 된 바위이다. 땅 덩어리 속으로 삐죽 찌르는, 손가락 같이 긴 만(灣)이 많이 있었고 거기에는 화석을 품은 이 바위들이 저장되었다.
59:1.7 (673.7) 몇백만 년 안에 태평양은 두 아메리카 대륙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땅이 가라앉는 것은 주로 땅 껍질의 조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옆으로 땅이 퍼지는 것, 곧 대륙이 기어가는 것도 또한 요인이었다.
59:1.8 (673.8) 380,000,000년 전에 아시아는 가라앉고 있었고, 모든 다른 대륙은 잠시 동안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가 진행되자, 새로 나타나는 대서양이 모든 인접한 해안선을 광범위하게 잠식하였다. 대서양 북부, 곧 북극해는 당시에 남쪽 걸프 바다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 남쪽 바다가 아팔라치아 골에 들어갔을 때, 그 물결은 동쪽에서 알프스만큼 높은 산맥에 부딪쳐 부서졌다. 그러나 대체로 대륙들은 흥미 없는 낮은 땅이었고, 도무지 경치는 아름답지 않았다.
59:1.9 (673.9) 이 시대의 침전물은 네 가지 종류이다:
59:1.10 (673.10) 1. 역암(礫岩)―해안선 가까이에 퇴적된 물질.
59:1.11 (673.11) 2. 사암(砂岩)―얕은 물이지만, 물결이 개흙이 가라앉는 것을 막기에 넉넉했던 물에서 쌓인 퇴적물.
59:1.12 (673.12) 3. 이판암(泥板岩)[1] [7]―더 깊고 조용한 물에서 쌓인 침전물.
59:1.14 (673.14) 이 시대의 삼엽충 화석들은 잘 주목된 어떤 변화와 더불어, 어떤 기본적 통일성이 있음을 제시한다. 최초의 세 생명을 심은 것으로부터 발전한 초기의 동물은 특색이 있었다. 서반구에서 나타나는 초기의 동물은 유라시아 집단의 동물, 그리고 오스트랄아시아나 오스트랄리아 및 남극 종류의 동물과 조금 달랐다.
59:1.15 (674.1) 370,000,000년 전에, 남북 아메리카가 크게, 거의 전부 물에 잠기는 일이 생겼고, 뒤이어 아프리카와 오스트랄리아가 가라앉았다. 겨우 북 아메리카의 어떤 부분이 이 케임브리아기(紀)의 얕은 바다 위에 남아 있었다. 5백만 년이 지난 뒤에, 바다는 올라오는 육지 앞에서 물러가고 있었다. 땅이 꺼지고 땅이 올라가는 이 모든 현상은 극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몇백만 년에 걸쳐 느리게 일어났다.
59:1.16 (674.2) 이 시기에 삼엽충 화석을 품은 지층은, 중앙 아시아를 제쳐놓고, 모든 대륙 전역에 걸쳐서 여기저기 표면에 솟아나온다. 여러 지역에서 이 바위들은 수평으로 있지만, 산맥에서는 압력을 받고 접힘으로 기울어지고 뒤틀린다. 그러한 압력은 여러 곳에서 이 퇴적물의 원래 특징을 바꾸어 놓았다. 사암은 차돌이 되고 이판암은 점판암으로 바뀌었고, 한편 석회석은 대리석으로 변화되었다.
59:1.17 (674.3) 360,000,000년 전에 육지는 아직도 솟아오르고 있었다. 남북 아메리카는 쑥 올라와 있었다. 서 유럽과 영국 제도(諸島)는, 깊이 물에 잠긴 웨일즈의 여러 부분을 제외하고, 떠오르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아무런 큰 빙상(氷床)이 없었다. 유럽ㆍ아프리카ㆍ중국ㆍ오스트랄리아에서 이 지층과 연관하여 나타났다고 생각되는 빙하 퇴적물은 고립된 산 빙하 때문이거나, 또는 나중에 생긴 빙하 부스러기가 옮겨졌기 때문이다. 세계의 기후는 대양성이었고, 대륙성이 아니었다. 남쪽의 바다는 지금보다 그때 더 따듯했고, 그 바다는 북 아메리카를 지나 북쪽으로, 극지방까지 뻗었다. 걸프 해류는 북 아메리카의 중앙 부분을 지나갔고, 동쪽으로 구부러져서 그린랜드의 해안을 적시고 따듯하게 했으며, 지금은 얼음으로 덮인 그 대륙을 진정한 열대의 파라다이스로 만들었다.
59:1.18 (674.4) 해양 생명은 온 세계에 상당히 비슷했고 해초, 단세포 유기체, 단순한 해면, 삼엽충, 그리고 다른 갑각류(甲殼類) 동물―새우ㆍ게ㆍ가재―로 이루어져 있었다. 3천 가지 종류의 완족(腕足) 동물이 이 시기의 끝에 나타났고, 그 가운데 겨우 2백 가지가 살아남았다. 이 여러 동물은 실질적으로 변하지 않은 채로 오늘날까지 내려온 초기 생명의 종류를 대표한다.
59:1.19 (674.5) 그러나 삼엽충이 지배적인 생물이었다. 삼엽충은 유성(有性) 생물이었고 여러 형태로 존재했다. 헤엄을 잘 치지 못했기 때문에 삼엽충은 느릿하게 물에서 떠다니거나 바다 밑바닥에서 기어다녔고, 나중에 나타나는 적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 자체를 보호하려고 몸을 감았다. 이것들은 길이가 5센티미터에서부터 30센티미터까지 자랐고, 네 가지 뚜렷한 집단으로 발전했는데, 육식ㆍ채식ㆍ잡식 종류와 “개흙을 먹는 종류”였다. 후자의 무리가 대체로 무기(無機) 물질을 먹고 사는 능력은―이것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다세포 생물이었는데―이 종류가 어째서 크게 증가하고 오랫동안 살아남았는가 설명해 준다.
59:1.20 (674.6) 이것이 세계 역사에서 5천만 년에 걸친 긴 기간 끝에서 본, 유란시아의 생물지질학적 그림이었고, 이 기간을 너희 지질학자는 캠브리아기(紀)라고 지칭한다.
59:2.1 (674.7) 이 시대의 특징을 나타내는 현상, 정기적으로 땅이 솟아오르고 가라앉는 현상은 모두 차츰차츰 생겼고 놀라운 광경이 아니었으며, 거의 또는 도무지 화산 활동이 뒤따르지 않았다. 이렇게 연달아 땅이 솟아오르고 꺼지는 동안 내내, 아시아 대륙의 모체는 다른 땅 덩어리들과 같은 역사를 충분히 함께 가지지 않았다. 이 대륙은 많은 범람을 겪었고, 특히 초기 역사에서, 처음에는 한쪽에서 나중에는 다른 쪽에서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 대륙은 다른 여러 대륙에서 발견될 수 있는, 한결같은 바위 퇴적물을 내놓지 않는다. 최근 시대에 아시아는 모든 땅 덩어리 가운데 가장 안정되어 있었다.
59:2.2 (675.1) 350,000,000년 전에는 중앙 아시아를 제쳐놓고, 모든 대륙에서 큰 홍수 시기가 시작되었다. 땅 덩어리들은 거듭해서 물로 덮였다. 오직 해안의 고지들만 얕고도 널리 퍼진, 동요하는 내륙의 바다 위에 남아 있었다. 3대 범람이 이 시기의 특징을 나타냈지만, 이 시기가 끝나기 전에, 대륙들은 다시 올라섰고, 땅이 물 위에 솟아오른 면적의 총합은 지금 존재하는 것보다 15퍼센트가 컸다. 카리비안 지역은 어지간히 높아졌다. 이 시기는 유럽에서 잘 표시되지 않는데, 이는 땅의 변동이 적고, 한편 화산의 활동이 더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59:2.3 (675.2) 340,000,000년 전에, 아시아와 오스트랄리아를 제외하고, 광범위한 땅의 침몰이 또 한 번 일어났다. 세계의 여러 대양의 물은 대체로 서로 섞였다. 이때는 대단한 석회암 시대였고, 이 시대에 생긴 돌의 상당한 양은 석회를 분비하는 조류(藻類)가 만들어 낸 것이다.
59:2.4 (675.3) 몇백만 년 뒤에 아메리카의 두 대륙과 유럽의 큰 부분은 물에서 비로소 솟아났다. 서반구에서는 태평양의 한 가닥만 멕시코와 현재의 록키 산맥 지역 위에 남아 있었지만, 이 시기의 끝이 가까워오자 대서양과 태평양의 해안은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
59:2.5 (675.4) 330,000,000년 전은 전세계에 걸쳐서 비교적 고요한 시간 구역이 시작됨을 표시하며, 많은 땅이 다시 물 위에 있었다. 적막한 땅이 이렇게 지배한 데 유일한 예외는 켄터키 동부에서 북 아메리카의 큰 화산 분출이었고, 이것은 세계가 일찍이 본 가장 큰 단일 화산 활동 중에 하나였다. 이 화산재는 4.6미터에서 6미터의 깊이로 1280 평방 킬로미터를 덮었다.
59:2.6 (675.5) 320,000,000년 전에 이 시기에서 세 번째로 큰 홍수가 터졌다. 이 범람으로 생긴 바다는 이전의 대홍수에 잠겼던 땅을 모두 덮었고, 한편 두 아메리카와 유럽 전역에 걸쳐서 여러 방향으로 더 멀리 뻗었다. 북 아메리카의 동부와 서 유럽은 3000미터에서 4600미터까지 물 밑으로 잠겼다.
59:2.7 (675.6) 310,000,000년 전에 세계의 땅 덩어리들은, 북 아메리카의 남부를 빼고, 다시 쑥 올라와 있었다. 멕시코가 솟아나서 이렇게 걸프 해를 만들었으며, 이것은 그 뒤로 신분을 유지했다.
59:2.8 (675.7) 이 시기의 생명은 줄곧 진화한다. 세상은 다시 한 번 조용하고 비교적 평화롭다. 기후는 따듯하고 온화한 채로 있고, 육지의 식물이 바닷가로부터 더욱 멀리 옮겨 간다. 생명 원본들이 잘 발달되어 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식물 화석은 거의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59:2.9 (675.8) 이때는 개별 동물 유기체가 진화한 대단한 시대였다. 하지만 식물로부터 동물로 옮겨가는 것과 같은 많은 기본적 변화는 그보다 앞서 일어났다. 척추가 없는 수준의 모든 생명 부류가 이 시대에 놓인 바위의 화석에서 대표되는 점까지, 해양 동물계가 발전되었다. 그러나 이 동물은 모두 해양 유기체였다. 바닷가를 따라서 땅속에 파고든 몇 종류의 벌레들을 제외하고, 아무 육지 동물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육지 식물도 아직 대륙을 뒤덮지 않았다. 대기에 아직도 2산화 탄소가 너무 많이 있어서 공기로 숨쉬는 것이 살게 할 수 없었다. 좀더 원시적인 어떤 것들을 제외하고, 1차적으로 모든 동물은 존재하기 위해서 직접 또는 간접으로 식물 생명에 의존한다.
59:2.10 (676.1) 삼엽충은 아직도 많이 눈에 띄었다. 이 작은 동물은 수만 가지의 모양으로 존재했고, 현대 갑각류 동물의 선구자이다. 삼엽충 가운데 더러는 25에서 4천 개의 아주 작은 눈이 있었고, 더러는 퇴화된 눈이 있었다. 이 시기가 막을 내리자, 삼엽충은 몇 가지 다른 형태의 무척추 생명과 함께 바다를 정복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 기간이 시작될 때 싹 멸망했다.
59:2.11 (676.2) 석회를 분비하는 조류(藻類)가 널리 퍼졌다. 산호의 초기 조상들이 수천 종이나 존재했다. 바다 벌레가 풍부했고, 많은 종류의 해파리가 있었는데 그 뒤로 멸종해 버렸다. 산호와 후기 종류의 해면이 진화했다. 두족류(頭足類)가 잘 발달되었고, 현대의 진주색 앵무조개, 문어ㆍ오징어ㆍ꼴뚜기로서 살아남았다.
59:2.12 (676.3) 많은 종류의 조가비 동물이 있었지만, 이것들의 껍질은 후일의 경우처럼 그때 방어 목적에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복족류(腹足類)가 고대의 바닷물에 있었고 그들은 껍질이 하나인 두드럭고둥ㆍ경단고둥ㆍ달팽이를 포함했다. 쌍각(雙殼) 복족류는 당시에 존재했던 것과 비슷하게, 그 사이에 낀 수백만 년을 통해서 내려왔고, 홍합ㆍ조개ㆍ굴ㆍ가리비를 포함한다. 밸브 껍질을 가진 유기체들도 또한 진화했고, 이 완족류(腕足類)는 오늘날 존재하는 것과 비슷하게 그 고대의 바다에서 살았다. 이것들은 돌쩌귀가 달린 종류, 톱니 있는 종류, 그리고 다른 종류의 보호하는 밸브 설비까지 가졌다.
59:2.13 (676.4) 이렇게 해양 생명에서 둘째로 큰 기간에 관한 진화 이야기가 끝나며, 이것은 너희의 지질학자들에게 오르도비스기(紀)로 알려져 있다.
59:3.1 (676.5) 300,000,000년 전에 땅이 가라앉는 또 다른 큰 시기가 시작되었다. 고대 실루리아기 바다의 남쪽과 북쪽을 향한 침식은 유럽과 북 아메리카의 대부분을 삼키려고 준비하였다. 육지는 바다 위로 그다지 높이 솟아 있지 않아서, 해안선 둘레에 침전물이 많이 생기지 않았다. 바다는 석회 껍질을 가진 생명으로 바글거렸고, 이 조개 껍질이 바다 밑바닥으로 떨어져서 아주 두터운 석회석 층을 차츰 쌓았다. 이것이 처음으로 광범위한 석회석 침전이며, 실질적으로 유럽과 북 아메리카 전체를 덮지만, 오직 몇 군데에서만 땅거죽에 나타난다. 이 고대 바위 층의 두께는 평균 약 300미터가 된다. 그러나 이 침전물의 다수는 그 뒤에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솟아오르고 단층이 생김으로 크게 모습이 일그러졌고, 많은 것이 차돌ㆍ이판암ㆍ대리석으로 변했다.
59:3.2 (676.6) 유럽 남부와 메인 주 동부의 큰 화산들에 있는 것, 그리고 퀘벡의 용암 흐름을 제쳐놓고, 아무런 화성암이나 용암이 이 시기의 바위 층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화산 활동은 대체로 지났다. 이 시기는 물에 침전이 생기는 전성기였고, 거의 또는 아무런 산(山)이 형성되지 않았다.
59:3.3 (676.7) 290,000,000년 전에 바다는 대체로 대륙들로부터 물러났고, 둘러싸는 대양들의 밑바닥은 가라앉고 있었다. 땅 덩어리들은 다시 물에 잠기기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모든 대륙에서 초기의 산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이 땅 껍질의 융기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아시아의 히말라야, 그리고 큰 칼레도니아 산맥이었는데, 이것은 아일랜드에서부터 스콧트랜드를 거쳐서 스핏츠버겐까지 뻗는다.
59:3.4 (677.1) 이 시대의 매장물에는 가스ㆍ기름ㆍ아연ㆍ납이 많이 발견되며, 가스와 기름은 앞서 육지가 가라앉을 때 밑으로 내려간 굉장한 집합의 식물 및 동물 물질로부터 비롯된다. 한편 매장된 광물은 느린 수역(水域)의 침전물을 대표한다. 다수의 바위 소금 매장물이 이 시기에 속한다.
59:3.5 (677.2) 삼엽충이 급속히 줄어들고 무대의 중심은 더 큰 연체 동물, 곧 두족류(頭足類)가 차지했다. 이 동물은 길이가 4.6미터, 지름이 30센티미터가 되게 자랐고, 바다의 주인이 되었다. 이 종(種)의 동물은 갑자기 나타나서 바다 생명을 지배했다.
59:3.6 (677.3) 이 시대의 큰 화산 활동은 유럽 구역에서 있었다. 지중해 골 둘레에, 그리고 특히 영국 제도 근처에서 이제 생긴 것과 같이 그렇게 맹렬하고 널리 퍼진 화산의 분출은 수백만 년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날 영국 제도 지역 위로 퍼진 용암의 흐름은 두께가 7600미터나 되게 용암과 바위가 번갈아 있는 층으로 나타난다. 얕은 바다 밑바닥 위에 퍼진, 이따금씩 생기는 용암 흐름이 이 바위들을 만들었고, 이처럼 바위 매장물과 섞였다. 이 모든 것이 나중에 바다 위로 높이 솟아올랐다. 맹렬한 지진이 북 유럽에서, 특히 스콧트랜드에서 일어났다.
59:3.7 (677.4) 해양성 기후는 온화하고 변치 않은 채로 있었고, 따듯한 바다가 극지의 해안을 적셨다. 완족 동물과 기타 해양 생명의 화석이 바로 북극까지, 이 퇴적물에서 발견될 수 있다. 복족류ㆍ완족류ㆍ해면, 그리고 산호초를 만드는 산호가 줄곧 늘어났다.
59:3.8 (677.5) 이 시기의 끝에는 실루리아기의 바다가 두 번째로 전진하는 것을 구경하며, 남쪽과 북쪽 대양의 바다가 또 한 번 서로 섞인다. 두족류가 해양 생명을 지배하고, 한편 관련된 생명 형태가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분화된다.
59:3.9 (677.6) 280,000,000년 전에 여러 대륙이 실루리아기의 둘째 범람으로부터 대체로 솟아나왔다. 이렇게 가라앉은 바위 퇴적물은 북 아메리카에서 나이아가라 석회석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 바위 층 위로 나이아가라 폭포가 지금 흐르기 때문이다. 이 바위 층은 동쪽 산맥으로부터 미시시피 강 유역까지 뻗지만, 남쪽을 빼고, 서쪽으로 멀리 미치지 않는다. 몇 층이 카나다에, 남 아메리카의 일부, 오스트랄리아, 그리고 유럽의 대부분에 연장되지만, 이 나이아가라 계열의 평균 두께는 약 200미터가 된다. 나이아가라 퇴적물 바로 위에서 역암, 이판암, 바위 소금의 집합체가 여러 지역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 이것은 2차 침전이 누적된 것이다. 이 소금은 큰 개펄에 정착되었고, 이 개펄은 번갈아서 바다에 열렸다가 나중에 단절되었기 때문에, 용액 속에 있는 다른 물질과 함께 소금이 퇴적되면서 증발이 일어났다. 어떤 지역에서는 이 바위 소금 바닥의 두께가 21미터나 된다.
59:3.10 (677.7) 기후는 고르고 따듯하며, 해양의 화석들은 극지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시기가 끝날 때가 되어서, 바다는 아주 광범위하게 짜서 거의 아무 생명도 살아남지 못한다.
59:3.11 (677.8) 실루리아기의 마지막 침수가 끝날 무렵에, 갯나리 석회석의 퇴적물에서 증명되다시피, 극피(棘皮) 동물―바다나리―가 크게 늘어났다. 삼엽충은 거의 사라져 버렸고 연체(軟體) 동물이 바다에서 군주 노릇을 계속하며, 산호초 형성이 크게 늘어난다. 이 시기에, 조건이 유리한 위치에 원시의 물전갈이 처음으로 진화한다. 그 뒤에 얼마 있다가, 갑자기 참 전갈―실제로 공기를 숨쉬는 것―들이 나타난다.
59:3.12 (678.1) 이러한 발전이 2천5백만 년에 걸쳐서, 제3 해양 생명기를 끝마쳤고, 이것은 너희 학자들에게 실루리아기로 알려져 있다.
59:4.1 (678.2) 땅과 물이 오랜 세월에 걸쳐 투쟁하면서, 오랫동안 바다가 비교적 승리했지만, 육지가 승리하는 시절이 바로 눈앞에 다가온다. 대륙의 떠돌이는 그다지 멀리 진행하지 않았지만, 때때로, 세계에서 거의 모든 땅이 가느다란 지협과 좁은 육지 다리로 연결된다.
59:4.2 (678.3) 실루리아기의 마지막 범람이 끝나고 땅이 솟아오르자, 세계의 발전과 생명의 진화에서 한 중요한 시기가 막을 내린다. 지구에서 새로운 시대가 밝아온다. 옛 시절의 벌거벗고 보잘것없는 풍경이 화려한 푸른 옷을 걸치고, 처음으로 웅대한 숲들이 곧 나타날 것이다.
59:4.3 (678.4) 이 시대의 해양 생명은 초기의 종(種) 분리 때문에 아주 다양했지만, 나중에는 이 모든 다른 종류가 자유롭게 서로 섞이고 관계를 가졌다. 완족 동물은 일찍 절정에 이르렀고, 절지(節肢) 동물이 그들을 이어받았으며, 따개비들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사건은 물고기과(科)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이때는 물고기 시대가 되었고, 세계 역사에서 이 시대의 특징은 척추 동물 종류이다.
59:4.4 (678.5) 270,000,000년 전에 대륙들은 모두 물 위에 나와 있었다. 수백만 년 동안 그렇게 많은 땅이 한 번에 물 위에 있은 적이 없었다. 이때는 전세계 역사에서 땅이 가장 많이 솟아난 시기의 하나였다.
59:4.5 (678.6) 5백만 년 뒤에, 남북 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 북 아시아, 오스트랄리아의 육지 지역이 잠시 범람했고, 북 아메리카에서 땅은 언젠가 거의 완전히 물에 잠겼으며, 그 결과로 생긴 석회석 지층은 두께가 150미터에서 1500미터에 이른다. 이 데본기에 속하는 여러 바다는 처음에는 한 방향으로, 나중에는 다른 방향으로 뻗어서, 북 아메리카의 엄청난 극지에 내륙의 바다가 칼리포니아 북부를 통해서 태평양으로 출구를 찾았다.
59:4.6 (678.7) 260,000,000년 전에, 육지가 가라앉는 이 시기의 끝 무렵에, 태평양ㆍ대서양ㆍ 북극해ㆍ걸프해와[2] [8] 동시에 연결된 바다가 북 아메리카를 일부 덮었다. 데본기의 첫째 홍수의 후기 단계 퇴적물은 두께가 평균 약 300미터에 이른다. 이 시절의 특징을 나타내는 산호초는 내륙의 바다가 맑고 얕았음을 가리킨다. 그러한 산호 퇴적물은 켄터키 주의 루이빌 근처, 오하이오 강둑에 노출되어 있고, 두께가 약 30미터 되며 2백이 넘는 변종을 포함한다. 이 산호 형성은 카나다와 북 유럽을 통해서 북극 지역까지 뻗는다.
59:4.7 (678.8) 이 침수에 뒤이어, 많은 해안선이 상당히 높아져서, 이전의 퇴적물은 개흙이나 이판암으로 뒤덮였다. 또한 붉은 사암 층도 있고, 이것은 데본기 침전물의 한 특징을 나타내는데, 이 붉은 층은 지구의 표면에서 상당 부분에 연장되고, 남북 아메리카, 유럽ㆍ러시아ㆍ중국ㆍ아프리카ㆍ오스트랄리아에서 발견된다. 그러한 붉은 퇴적물은 건조하거나 반 건조한 조건을 암시하지만, 이 시기의 기후는 아직도 온화하고 평온하였다.
59:4.8 (679.1) 이 시기를 통하여, 신시나티 섬 남동쪽에 있는 땅은 물 위에 쑥 올라와 있었다. 그러나 서 유럽의 아주 많은 부분은, 영국 제도를 포함해서, 물에 잠겼다. 웨일즈와 독일, 그리고 유럽의 다른 여러 곳에서, 데본기의 바위는 두께가 6000미터가 된다.
59:4.9 (679.2) 250,000,000년 전에는 물고기과가 나타나는 것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이 척추 동물은 인간이 나타나기 이전의 모든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의 하나이다.
59:4.10 (679.3) 절지(節肢) 동물, 곧 갑각류는 첫 척추 동물의 조상이었다. 물고기과의 선조들은 수정된 두 가지 절지 동물의 조상이었는데, 하나는 머리와 꼬리를 연결하는 기다란 몸을 가졌고, 한편 다른 하나는 등뼈가 없고 턱이 없는 예비 물고기였다. 그러나 이 예비 종류들은, 동물 세계에서 첫 척추 동물인 물고기가 북쪽에서 갑자기 나타났을 때, 급히 멸망했다.
59:4.11 (679.4) 가장 큰 참 물고기의 다수는 이 시대에 속하며, 이를 가진 어떤 종류들은 길이가 7.6미터에서 9.1미터가 되었다. 오늘날의 상어는 이 고대 물고기의 잔재이다. 폐어(肺魚)와 갑옷 물고기는 그들의 진화의 정점에 이르렀고, 이 시기가 끝나기 전에 물고기는 민물과 짠물, 양쪽에 적응하였다.
59:4.12 (679.5) 물고기 이 및 뼈가 묻힌 진정한 뼈의 지층은 이 기간의 끝 무렵에 쌓인 퇴적물에서 발견될 수 있고, 풍부한 화석 지층은 칼리포니아 해안을 따라 놓여 있는데, 이는 태평양의 많은 아늑한 만이 그 지역의 땅까지 뻗었기 때문이다.
59:4.13 (679.6) 땅에는 새 서열의 육지 식물이 급속히 들끓었다. 물가 근처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거의 아무 식물도 땅에서 자라지 않았다. 이제 갑자기, 다산하는 고사리과가 나타났고, 세계의 모든 구석에서 급히 솟아오르는 땅 표면에 빨리 퍼졌다. 두께가 60센티미터, 키가 12미터 되는 나무 종류들이 곧 발달했고, 나중에 잎이 진화했지만, 이 초기 종류들은 겨우 기초적인 잎만 있었다. 작은 식물이 많이 있었지만 그 화석들은 발견되지 않는데, 이는 대개 그들이 더 일찍 나타난 박테리아에게 멸망되었기 때문이다.
59:4.14 (679.7) 땅이 올라오자, 북 아메리카는 그린랜드까지 뻗는 육지 다리로 유럽과 연결되었다. 오늘날 그린랜드는 그 얼음 외투 밑에 이 초기 육지 식물의 잔재를 가지고 있다.
59:4.15 (679.8) 240,000,000년 전에 유럽과 남북 아메리카의 여러 부분의 땅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 침몰은 마지막이자 가장 적게 퍼진 데본기 홍수가 나타났음을 표시한다. 북극의 바다는 다시 남쪽으로 북 아메리카의 상당한 부분으로 움직였고, 대서양은 유럽과 서 아시아의 큰 부분에 넘쳤으며, 한편 남태평양은 인도의 대부분을 덮었다. 이 범람은 천천히 나타났고, 똑같이 느리게 물러갔다. 헛슨 강 서쪽 둑을 따라 있는 캣스킬 산맥은 북 아메리카 표면에서 발견되는 바, 이 시기에 가장 큰 지질학 기념비의 하나이다.
59:4.16 (679.9) 230,000,000년 전에 바다는 계속 물러가고 있었다. 북 아메리카의 상당 부분이 물 위에 나와 있었고, 큰 화산 활동이 세인트 로렌스 지역에서 생겼다. 몬트리올에 있는 로얄 산은 이 화산들 중 하나의 좁은 부분이 침식된 것이다. 이 시기 전체의 퇴적물은 북 아메리카의 아팔라치아 산맥에서 잘 드러나며, 거기에는 서스크하나 강이 이 잇따른 지층을 노출하는 골짜기를 팠고, 그 두께는 4000미터가 넘었다.
59:4.17 (680.1) 대륙들의 융기가 진행되었고, 대기는 산소로 강화되고 있었다. 땅은 키가 30미터 되는 광대한 고사리 숲, 그리고 그 시절의 특이한 나무들, 곧 고요한 숲으로 덮였다. 아무 소리도, 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는데, 그런 나무들은 잎이 없었기 때문이다.
59:4.18 (680.2) 이렇게 해양 생명의 진화에서 가장 긴 시기의 하나, 물고기 시대가 저물었다. 세계 역사에서 이 기간은 거의 5천만 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때는 너희 학자들에게 데본기로 알려지게 되었다.
59:5.1 (680.3) 앞선 기간에 물고기의 출현은 해양 생명의 진화에서 정점을 가리킨다. 이 시점부터 죽, 육지 생명의 진화가 더욱 중요하게 된다. 첫 육지 동물의 출현을 위하여 거의 이상적으로 무대가 준비되고서 이 시기가 시작된다.
59:5.2 (680.4) 220,000,000년 전에 대륙의 많은 지역은, 북 아메리카의 대부분을 포함해서, 물 위에 나와 있었다. 땅은 화려한 식물로 덮였고, 이때는 정말로 고사리 시대였다. 2산화 탄소가 아직도 대기에 있었지만, 정도가 줄어들었다.
59:5.3 (680.5) 그 뒤에 얼마 안 되어, 북 아메리카의 중앙 부분이 범람했고, 두 개의 큰 내륙의 바다를 만들었다. 대서양과 태평양 해안의 고지들은 현재의 해안선을 바로 넘어서 있었다. 이 두 바다는 당장에 합쳐졌고, 다른 생명 형태를 서로 섞었으며, 이 해양 동물상(動物相)의 연합은 급속히 세계적으로 해양 생명이 감소하는 시기가 시작되고 차후의 육지 생명 기간이 시작되는 것을 표시했다.
59:5.4 (680.6) 210,000,000년 전에 물이 따듯한 북극의 바다가 북 아메리카와 유럽의 대부분을 덮었다. 남극의 바다는 남 아메리카와 오스트랄리아를 범람했고, 한편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어지간히 높아졌다.
59:5.5 (680.7) 바다가 가장 높아졌을 때, 새로운 진화적 발전이 갑자기 일어났다. 돌연히 첫 육지 동물이 나타났다. 땅 위나 물에서 살 수 있는 이 동물의 수많은 종자가 있었다. 공기로 숨쉬는 이 양서(兩棲) 동물은 절지 동물로부터 발전되었고, 이것들이 헤엄치는 데 쓰이는 부레는 허파로 진화했다.
59:5.6 (680.8) 바다의 짠물로부터 육지 달팽이, 전갈ㆍ개구리가 기어 나왔다. 오늘날 개구리는 아직도 물 속에서 알을 낳고, 그 새끼는 처음에 작은 물고기, 곧 올챙이로서 존재한다. 이 기간은 당연히 개구리 시대라 할 수 있다.
59:5.7 (680.9) 그 뒤에 곧, 곤충이 처음으로 나타났고, 거미ㆍ전갈ㆍ바퀴벌레ㆍ귀뚜라미ㆍ메뚜기와 함께, 세계의 여러 대륙을 곧 뒤덮었다. 잠자리는 가로가 76센티미터에 이르렀다. 바퀴벌레가 1천 종이 개발되었고, 어떤 것은 길이가 10센티미터까지 자랐다.
59:5.8 (680.10) 두 집단의 극피(棘皮) 동물이 특별히 잘 발달되었고, 이것들은 실제로 이 시대를 안내하는 화석이다. 조개를 먹고 사는 큰 상어들이 또한 상당히 진화했고, 5백만 년이 넘도록 대양을 지배했다. 기후는 여전히 따듯하고 온화했으며, 해양 생명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민물고기가 발달하고 있었고, 삼엽충은 멸종에 다가가고 있었다. 산호는 드물었고, 갯나리가 상당량의 석회석을 만들고 있었다. 세련된 건축용 석회석의 층은 이 시기에 쌓였다.
59:5.9 (681.1) 많은 내륙 바다의 물은 석회와 기타 광물을 많이 품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해양 종자의 진보와 발달을 크게 방해했다. 돌이 널리 퇴적되는 결과로서, 결국 바다가 맑아졌는데, 이러한 돌은 어떤 곳에서 아연과 납을 포함한다.
59:5.10 (681.2) 이 초기 석탄 시대의 퇴적물은 두께가 150미터에서 600미터가 되었고, 사암ㆍ이판암ㆍ석회석으로 이루어졌다. 가장 오래 된 지층은, 많은 자갈과 분지의 침전물과 함께, 육지 및 해양 동물과 식물의 화석을 산출한다. 더 오래 된 이 지층에는 쓸 수 있는 석탄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유럽 전역에 걸쳐서 이 퇴적물은 북 아메리카에서 쌓인 것과 무척 비슷하다.
59:5.11 (681.3) 이 시기의 끝 무렵에, 북 아메리카의 땅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잠시 중지되었고, 바다가 돌아와서 이전 바닥의 반 가량을 덮었다. 이 범람은 짧았고, 땅의 대부분은 곧, 물 위로 쑥 솟아올랐다. 남 아메리카는 아프리카를 경유해서 유럽과 아직도 연결되었다.
59:5.12 (681.4) 이 시기는 보주ㆍ슈바르츠발트[3] [9]ㆍ유랄 산맥이 시작되는 것을 보았다. 오래 된 다른 산맥들의 그루터기가 영국과 유럽 전역에서 발견될 것이다.
59:5.13 (681.5) 200,000,000년 전에 석탄기(石炭紀)에서 정말로 활발한 단계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보다 앞서 2천만 년 동안, 더 이른 석탄 퇴적물이 쌓이고 있었지만, 이제 더 널리 석탄을 형성하는 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실제로 석탄이 쌓이는 시기의 길이는 2천5백만 년이 조금 넘었다.
59:5.14 (681.6) 해양 바닥의 활동으로 생기는 해면의 움직임 때문에 육지는 정기적으로 올라가고 내려가고 있었다. 이 껍질의 불안정―땅이 가라앉고 솟아오르는 것―은 해안 늪지대에 있는 무성한 식물과 관련하여, 광범위한 석탄 퇴적물의 생산에 기여했고, 이 때문에 이 시기는 석탄기로 알려지게 되었다. 기후는 전 세계에 걸쳐 아직도 온화했다.
59:5.15 (681.7) 석탄층은 이판암ㆍ바위ㆍ역암과 번갈아 있다. 미국의 중부와 동부에 있는 이 석탄층은 두께가 12미터에서 15미터까지 달라진다. 그러나 이 퇴적물의 다수는 나중에 땅이 높아질 때 씻겨 내려갔다. 북 아메리카와 유럽의 어떤 부분에서, 석탄을 품은 지층은 두께가 5,400미터 된다.
59:5.16 (681.8) 현재 석탄층 밑에 있는 점토(粘土)에서 나무가 자란 것과 같이, 나무 뿌리의 존재는 석탄이 지금 발견되는 바로 그곳에서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석탄은 아득히 먼 이 시대의 수렁에서, 또 늪 해안에서 자라던 무성한 식물이 물 속에 보존되고, 압력으로 수정된 잔재이다. 석탄층은 흔히 가스와 기름, 두 가지를 품는다. 토탄(土炭) 지층은 옛날의 식물 성장의 잔재이며, 적당한 압력과 열을 받으면 일종의 석탄으로 바뀌곤 한다. 무연탄은 다른 석탄보다 압력과 열을 더 받았다.
59:5.17 (681.9) 북 아메리카의 여러 지층 속에 있는 석탄층은 땅이 몇 번이나 내려가고 올라갔는가를 가리키며, 그 수는 일리노이 주에서 10번, 펜실바니아 주에서 20번, 알라바마 주에서 35번, 카나다에서 75번에 이르기까지 다르다. 민물과 바닷물 화석이 석탄층에서 발견된다.
59:5.18 (682.1) 이 시기를 통하여 내내, 남북 아메리카의 산맥들은 활동이 많았고, 안데스와 록키 산맥 남부의 선조(先祖)가 올라갔다. 대서양과 태평양의 큰 높은 해안 지역이 가라앉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아주 침식되고 물에 잠겨서 두 대양의 해안선은 대체로 현재 위치로 물러났다. 이 범람기의 퇴적물은 두께가 평균 약 300미터가 된다.
59:5.19 (682.2) 190,000,000년 전에는 북 아메리카의 석탄기 바다가 오늘날의 록키 산맥 지역에서 서쪽으로 뻗는 것이 보였고, 이것에는 칼리포니아 북부를 통해서 태평양에 이르는 수로(水路)가 있었다. 해안선이 갈팡질팡 움직이던 이 시기에 해안의 땅이 솟아오르고 내려감에 따라서, 두 아메리카와 유럽 전역에 걸쳐서, 석탄이 한 층 한 층, 계속해서 쌓였다.
59:5.20 (682.3) 180,000,000년 전에 석탄기의 막이 내렸고, 이 기간에 석탄은 세계 전역에서―유럽ㆍ인도ㆍ중국, 북 아프리카, 두 아메리카에서―형성되었다. 석탄 형성 시기가 막을 내릴 때, 미시시피 강 유역 동쪽의 북 아메리카는 솟아올랐고, 이 구역의 대부분은 그 뒤로 죽, 바다 위에 남아 있었다. 육지가 솟아오르던 이 시기는 아팔라치아 지역에서, 또 서부에서, 북 아메리카의 현대 산맥들이 시작되는 것을 표시한다. 알라스카와 칼리포니아에서,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의 산맥을 형성하는 지역에서, 화산들이 활발하였다. 동부 아메리카와 서 유럽은 그린랜드 대륙을 거쳐 연결되었다.
59:5.21 (682.4) 육지가 솟아난 것은 전기(前期)의 해양성 기후를 비로소 수정하고, 그 대신에 덜 따듯하고 더 변동하는 대륙성 기후가 시작되도록 변화시켰다.
59:5.22 (682.5) 이 시절의 식물은 포자(胞子)를 품고 있었고, 바람은 이 씨들을 멀리, 또 널리 퍼뜨릴 수 있었다. 석탄기 나무들의 줄기는 보통 그 지름이 2.1미터요, 키가 흔히 37.5미터가 되었다. 현대의 고사리는 참으로 이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다.
59:5.23 (682.6) 일반적으로, 이때는 민물 유기체가 성장하는 시기였고, 이전의 해양 생명에 거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기간의 중요한 특징은 개구리와 그 사촌들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석탄 시대의 생명의 특징은 고사리와 개구리였다.
59:6.1 (682.7) 이 기간은 해양 생명에서 중추가 되는 진화적 발전이 끝나고, 나중에 육지 동물 시대로 이끄는 과도기가 시작됨을 표시한다.
59:6.2 (682.8) 이 시대는 생명이 크게 곤궁하게 된 시대였다. 수천의 해양 종자가 멸망했고, 땅에서 생명은 아직도 거의 자리잡지 못했다. 이때는 생물학상의 시련이 있던 시절, 땅의 거죽으로부터, 그리고 대양의 깊은 곳으로부터, 생명이 거의 사라졌던 시대였다. 긴 해양 생명 시대가 끝날 무렵에, 지구에는 10만이 넘는 생물의 종이 있었다. 이 과도기가 끝날 때는 5백 종이 채 안 되게 살아남았다.
59:6.3 (682.9) 이 새로운 시기의 특이한 점은 지구의 껍질이 식거나 화산 활동이 오래 부재한 것보다, 일상적이고 전에 있던 영향력이―바다가 제한되고 엄청난 땅 덩어리들이 더욱 솟아난 것이―특별히 합쳐진 때문이었다. 이전 시절의 따듯한 해양성 기후는 사라지고 있었고, 더 사나운 대륙성 종류의 날씨가 급히 발달하고 있었다.
59:6.4 (683.1) 170,000,000년 전에 진화에 큰 변화와 조정이 지구 표면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해양의 바닥이 가라앉음에 따라서, 전 세계에서 땅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고립된 산마루들이 나타났다. 북 아메리카의 동부는 바다 위에 높이 솟아 있었고, 서부는 천천히 솟아오르고 있었다. 대륙들은 크고 작은 소금 호수와 수많은 내륙의 바다로 덮여 있었고, 좁은 해협이 이런 바다를 대양과 연결하였다. 이 과도기의 지층은 두께가 300미터에서 2,100미터에 이른다.
59:6.5 (683.2) 지구의 껍질은 육지가 솟아오르던 이 기간에 널리 주름이 졌다. 아주 오랫동안 남 아메리카를 아프리카와 연결하고 북 아메리카를 유럽과 연결했던 대륙들을 포함해서, 어떤 육지 다리들이 사라진 것을 제외하고, 이때는 대륙이 솟아나던 시기였다.
59:6.6 (683.3) 차츰차츰 내륙의 호수와 바다는 전 세계에서 말라 버리고 있었다. 고립된 산 빙하와 지역 빙하가 특히 남반구에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여러 지역에서 이 지역 얼음이 형성되어 생긴 빙하의 퇴적물은, 위쪽의 후기 석탄 퇴적물 중 더러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새로운 두 기후 요인―빙하 작용과 건조성―이 나타났다. 지구에서 다수의 높은 지역이 건조한 불모의 땅이 되었다.
59:6.7 (683.4) 기후가 변화하는 이 시기를 통하여, 큰 변동이 또한 육지 식물에서도 일어났다. 씨앗 식물이 처음으로 나타났고, 이 식물은 나중에 늘어난 육지 동물 생명에게 더 좋은 식량을 공급해 주었다. 곤충은 철저한 변화를 겪었다. 겨울과 가뭄 동안에 활동이 중지되어 생기는 요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휴식 단계가 진화했다.
59:6.8 (683.5) 육지 동물 가운데 개구리가 앞선 시대에 정점(頂點)에 다다랐고, 빨리 쇠퇴하였다. 그러나 개구리가 살아남은 것은 아득하고 극도로 힘든 이 시절에, 마르고 있던 웅덩이와 연못에서도 오래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무는 이 개구리 시대에, 아프리카에서, 개구리가 파충류로 넘어가는 진화의 첫 걸음이 일어났다. 땅 덩어리들이 아직도 연결되었으니까, 이 파충류 이전 생물, 일종의 공기 호흡 동물이 온 세계에 퍼졌다. 이때가 되자, 대기가 아주 바뀌어서 동물의 호흡을 지원할 만큼 놀랍게 도움이 되었다. 이 파충류 이전의 개구리가 도착한 뒤에 곧, 북 아메리카는 유럽, 아시아, 남 아메리카로부터 일시 고립되고 단절되었다.
59:6.9 (683.6) 대양의 바닷물이 차츰차츰 식는 것은 대양 생명의 파괴에 크게 기여했다. 그 시대의 해양 동물은 유리한 세 은신처에 임시 피난했는데, 이는 현재 멕시코 걸프 지역, 인도의 간지스 만, 지중해 분지(盆地)의 시실리 만이었다. 그리고 이 세 지역으로부터, 곤경에서 태어난 새 해양 종자들이 떠나가 나중에 바다를 다시 채웠다.
59:6.10 (683.7) 160,000,000년 전에 땅은 육지 동물의 생명을 부양하는 데 적응된 식물로 대체로 덮였고, 대기는 동물이 호흡하는 데 이상적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해양 생명이 줄어드는 기간과 생물학적으로 어려운 시련기가 끝났고, 이 시련기는 살아남을 가치를 가진 것들을 제외하고, 온갖 형태의 생명을 없애버렸다. 따라서 남은 것들은 뒤따르는 행성 진화 시대에서 더 급속히 발달하고 상당히 분화된 생명의 조상으로서 활동할 자격이 있었다.
59:6.11 (684.1) 이 생물학적 시련기의 끝은, 너희 학자들에게 페름기로 알려져 있고, 또한 오랜 고생대(古生代)의 끝을 표시하는데, 고생대는 행성 역사의 4분의 1, 곧 2억5천만 년을 차지한다.
59:6.12 (684.2) 유란시아에서 생명의 보육원, 광대한 대양의 보육원은 그 목적에 소용이 되었다. 고등 육지 동물을 지탱하기 위하여 대기(大氣)가 산소를 충분히 품기 전에, 땅이 생명을 지원하기에 적당하지 않았던 오랜 시대 동안, 바다는 이 세상의 초기 생명을 기르고 양육했다. 뭍에서 제2 단계의 진화가 비로소 펼쳐지자, 이제 바다의 생물학적 중요성은 점진적으로 줄어든다.
59:6.13 (684.3) [네바돈의 한 생명 운반자가 발표했다. 그는 유란시아에 배치된 최초 군단의 일원이다.]
60:0.1 (685.1) 해양 생명만이 살던 시대는 끝났다. 육지가 높아지고, 껍질이 식고 대양이 식는 것, 바다가 제한되고 그에 따라 깊어진 것은 북쪽 위도에서 땅이 크게 늘어난 것과 아울러, 적도(赤道) 지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모든 지역에서 세계의 기후를 변화시키도록 모두 함께 크게 작용하였다.
60:0.2 (685.2) 앞선 시기의 말기는 참으로 개구리 시대였지만, 육지 척추 동물의 이 조상은 이제 더 지배하지 않았고, 상당히 줄어든 무리로서 살아남았다. 극소수의 종류가 이전의 생물학적 수난기의 엄격한 시련을 이겨냈다. 포자(胞子)를 지닌 식물조차도 거의 멸종해 버렸다.
60:1.1 (685.3) 이 시기에 침식으로 생긴 침전물은 대부분 역암ㆍ이판암ㆍ사암이었다. 아메리카와 유럽의 이 침전물에 두루 있는 석고와 붉은 지층은 이 대륙들의 기후가 건조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건조한 지역들은 둘러싼 산지에서 맹렬하고 정기적으로 쏟아지는 소나기에 크게 침식되었다.
60:1.2 (685.4) 이 지층에서 화석은 거의 발견되지 않을 터이나, 사암에서 육지 파충류의 수많은 발자국이 관찰될 수도 있다. 여러 지역에서 이 시기의 붉은 사암 퇴적물 300미터는 아무런 화석을 품지 않는다. 육지 동물의 생명은 겨우 아프리카의 어떤 부분에서만 계속되었다.
60:1.3 (685.5) 이 퇴적물은 두께가 900미터에서부터 3000미터까지 되며, 태평양 해안에서는 5,400미터까지 된다. 나중에 용암이 이 많은 지층 사이에 투입되었다. 헛슨 강의 팔리세이드는 이 트라이아스기 지층 사이에 현무암 용암이 돌출하여 형성되었다. 화산의 활동은 세계의 다른 부분에 널리 퍼져 있었다.
60:1.4 (685.6) 유럽, 특히 독일과 러시아에서 이 시기의 퇴적물이 발견될 수 있다. 잉글랜드에 있는 신적색(新赤色) 사암은 이 시기에 속한다. 바다가 침입한 결과로서 남쪽 알프스에서 석회석이 쌓였고, 그 지역에서 특이한 백운암(白雲岩) 석회석 벽ㆍ봉우리ㆍ기둥이 된 것을 이제 볼 수 있다. 이 지층은 아프리카와 오스트랄리아 전역에 걸쳐 발견될 것이다. 카라라 대리석은 그러한 변조된 석회석으로부터 생긴다. 이 시기에 속하는 것은 전혀 남 아메리카의 남부 지역에서 발견되지 않을 터인데, 이는 대륙의 그 부분이 물 밑에 남아 있었고, 따라서 그 이전과 이후에 계속하여 오직 물에 있던 퇴적물, 곧 해양 퇴적물을 내놓기 때문이다.
60:1.5 (686.1) 150,000,000년 전에 세계 역사에서 초기 육지 생명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생명은 잘 견디지 못했지만, 해양 생명 시기의 벅차고 냉혹한 말기보다 더 잘 견디었다.
60:1.6 (686.2) 이 시대가 시작되자, 북 아메리카의 동부와 중부, 남 아메리카의 북쪽 절반, 유럽의 대부분, 그리고 아시아 전체가 물 위로 썩 나와 있었다. 북 아메리카는 처음으로 지리적으로 고립되었지만 오랫동안 그렇지는 않았는데, 이는 베링 해협의 육지 다리가 곧 다시 솟아나서 그 대륙을 아시아와 연결했기 때문이다.
60:1.7 (686.3) 북 아메리카에서 큰 골짜기들이 생겼고, 이것들은 대서양과 태평양 해안과 평행하였다. 동부 코넥티컷트의 큰 단층이 나타났고, 한쪽은 결국 3.2킬로미터 가라앉았다. 이 북 아메리카 골짜기의 다수는, 산 지역의 민물이나 짠물 호수의 많은 분지처럼, 침식으로 생긴 침전물로 나중에 채워졌다. 채워진 이 꺼진 땅 부분은 나중에 지하에서 일어난 용암의 흐름으로 인하여 크게 높아졌다. 여러 지역의 석화림(石化林)은 이 시기에 속한다.
60:1.8 (686.4) 태평양 해안은 대륙이 침수된 동안에 보통 물 위에 있었는데, 칼리포니아 남부와 지금의 태평양에서 그때 존재했던 큰 섬 하나를 제외하고, 내려갔다. 고대의 이 칼리포니아 바다에는 해양 생명이 풍부했고, 동쪽으로 뻗어서 중서부 지역의 오래 된 바다 분지와 연결하였다.
60:1.9 (686.5) 140,000,000년 전에, 갑자기, 앞선 시기에 아프리카에서 개발된 두 파충류 이전 조상이 준 암시만 받고서, 파충류가 완전히 발육된 형태로 나타났다. 이것들은 빨리 발달했고 금방, 악어, 비늘 있는 파충류, 그리고 결국에는 바다뱀과 나르는 파충류를 생산하였다. 이것들의 과도기 조상은 급속히 사라졌다.
60:1.10 (686.6) 빨리 진화하는 파충류 공룡은 곧 이 시대의 군주가 되었다. 공룡은 알을 낳았고, 작은 두뇌로 모든 동물과 구별되었는데, 나중에는 40톤이나 되는 몸을 가누는 데 0.5킬로그람이 채 되지 않는 두뇌를 가졌다. 그러나 초기의 파충류는 더 작았고, 육식을 하며 뒷다리로 캉가루처럼 걸었다. 그들은 속이 빈, 새 종류의 뼈를 가졌고, 나중에는 뒷발에 세 발가락만 발달시켰는데, 그들의 많은 화석 발자국은 큰 새들의 발자국으로 잘못 인식되었다. 나중에는 채식하는 공룡이 진화했다. 그들은 모두 네 발로 걸었고, 이 무리의 한 가지는 보호하는 갑옷을 개발했다.
60:1.11 (686.7) 몇백만 년 뒤에 첫 포유동물이 나타났다. 이것들은 태반(胎盤)이 없었고 재빨리 실패작인 것이 판명되었다. 아무것도 살아남지 않았다. 이것은 포유동물 종류를 개량하려고 실험한 노력이었지만, 유란시아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60:1.12 (686.8) 이 시기의 해양 생명은 변변치 않았어도, 바다가 새로이 침입함과 더불어 급속히 개선되었고, 이 침입은 다시 얕은 물에서 광범위한 해안선을 만들었다. 유럽과 아시아 둘레에 얕은 물이 더 많이 있었으니까, 가장 풍부한 화석 지층은 이 대륙들 근처에서 발견될 것이다. 오늘날 너희가 이 시대의 생명을 연구하고 싶다면, 인도와 남태평양 분지의 섬들 뿐 아니라 히말라야ㆍ시베리아ㆍ지중해 지역을 조사해 보아라. 해양 생명에서 뛰어난 한 특성은 아름다운 암모나이트 무리가 존재한 것이었고, 이들의 화석 자취는 전세계에서 발견된다.
60:1.13 (686.9) 130,000,000년 전에 바다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시베리아와 북 아메리카는 베링 해협의 육지 다리로 연결되었다. 풍부하고 독특한 해양 생명이 칼리포니아의 태평양 해안에서 나타났고, 거기서 1천 종이 넘는 암모나이트가 상급의 두족류 부류로부터 발전되었다. 이 시기에 생명의 변화는 과도적이고 차츰 일어났는데도, 참으로 혁신적이었다.
60:1.14 (687.1) 이 기간은 2천5백만 년이 넘도록 연장되며, 트라이아스기로 알려져 있다.
60:2.1 (687.2) 120,000,000년 전에 파충류 시대의 새 국면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큰 사건은 공룡이 진화하고 쇠망한 것이었다. 육지 동물의 생명은 크기 면에서 최대로 발달하였고, 이 시대의 끝이 되자, 지구의 표면에서 거의 멸망해 버렸다. 공룡은 길이가 60센티미터 채 안 되는 종으로부터, 거대하고 육식하지 않고 길이가 22.5미터 되는 공룡에 이르기까지 온갖 크기로 진화했는데, 그 뒤로 살아 있는 어떤 생물도 덩치 면에서 결코 이와 어깨를 견주지 못했다.
60:2.2 (687.3) 공룡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북 아메리카 서부에서 비롯하였다. 이 괴물 파충류는 록키 산맥 지역에 두루, 북 아메리카의 대서양 해안 전부를 따라서, 서 유럽, 남 아프리카, 그리고 인도에 파묻혀 있지만, 오스트랄리아에는 없다.
60:2.3 (687.4) 이 큼직한 생물은 자꾸 커짐에 따라서, 더욱 활동이 줄어들고 약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룡은 그렇게 엄청난 양의 먹이가 필요했고, 땅이 이들로 들끓었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굶어 죽고 멸종되었다―그 상황을 이겨낼 지능이 모자랐다.
60:2.4 (687.5) 오랫동안 높아졌던 북 아메리카 동부의 대부분은, 이때가 되자 평평해지고 대서양으로 씻겨 내려갔으며, 그래서 해안은 지금보다 몇백 킬로미터나 더 멀리 뻗었다. 대륙의 서부는 아직 높이 올라와 있었지만, 이 지역조차 나중에 북쪽 바다와 태평양의 침입을 받았고, 태평양은 동쪽으로 다코타의 블랙 힐스 지역까지 뻗었다.
60:2.5 (687.6) 콜로라도ㆍ몬타나ㆍ와이오밍의 이른바 모리슨 지층에서 나온 풍부한 민물 화석이 보여주다시피, 이때는 민물 시대였고 그 특징은 많은 내륙 호수이다. 이 통합된 짠물 및 민물 퇴적물의 두께는 600미터에서 1500미터까지 달라진다. 그러나 이 지층에는 석회석이 거의 없다.
60:2.6 (687.7) 북 아메리카로 아주 밑으로 뻗은, 바로 이 극지의 바다는 마찬가지로 곧 출현하는 안데스 산맥을 제외하고 남 아메리카 전체를 덮었다. 중국과 러시아의 대부분은 물에 잠겼지만, 물의 침입은 유럽에서 가장 컸다. 독일 남부에서 아름다운 석판 인쇄에 쓰이는 돌이 이 침수 기간에 쌓였는데, 이것은 옛 곤충들의 아주 섬세한 날개와 같은 화석이 바로 어제 있었던 것처럼 보존되어 있는 지층이다.
60:2.7 (687.8) 이 시대의 식물상(植物相)은 앞선 시기의 것과 무척 비슷했다. 고사리가 지속했고, 침엽수와 소나무가 갈수록 더 오늘날의 종류처럼 되었다. 석탄이 더러 지중해 북쪽 해안을 따라서 아직도 형성되고 있었다.
60:2.8 (687.9) 바다가 돌아와서 기후가 좋아졌다. 산호는 유럽의 바다에 퍼졌고, 기후가 아직도 온화하고 한결같았음을 증명하지만, 산호는 천천히 식는 극지방의 바다에 결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시절의 해양 생명은, 특히 유럽의 바다에서, 크게 개선되고 발전했다. 산호와 갯나리가 지금까지보다 큰 무리로 잠시 나타났다. 그러나 암모나이트가 대양에서 무척추 생명을 지배했고 그 평균 크기는 7.5센티미터에서 10센티미터에 이르렀다. 하지만 한 종은 지름이 2.4미터나 되었다. 해면(海綿)이 어디에나 있었고, 오징어와 굴이 계속해서 진화했다.
60:2.9 (688.1) 110,000,000년 전에 가능한 해양 생물들이 계속하여 전개되고 있었다. 성게가 이 시기에 뛰어난 돌연 변이의 하나였다. 게ㆍ바다가재, 그리고 현대 종류의 갑각류가 성숙했다. 뚜렷한 변화가 물고기과에서 일어났고, 철갑상어 종류가 먼저 나타났다. 그러나 육지 파충류로부터 내려온 사나운 바다뱀이 아직도 온 바다에 들끓었고, 바다뱀은 물고기과 전체를 멸망시키려고 위협했다.
60:2.10 (688.2) 이때는 계속하여 뚜렷이, 공룡의 시대였다. 공룡이 땅에 너무나 들끓어서, 두 종이 이전에 바다가 침식하는 시기에 먹이를 얻으려고 물에 뛰어들었다. 이 바다뱀은 진화에서 뒷걸음을 대표한다. 새로운 몇 종이 진보하고 있지만, 어떤 혈통은 고정된 상태로 남아 있고, 더러는 뒤로 이끌리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 바로 이것이 이 두 종류의 파충류가 땅을 버렸을 때 일어났다.
60:2.11 (688.3) 바다뱀은 시간이 지나자 크게 자라서 대단히 느려졌고, 결국에는 멸망했는데, 이는 바다뱀이 큰 두뇌가 없어서 엄청난 몸을 보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어룡(魚龍)은 때때로 길이가 15미터 되게 자랐고, 대다수는 길이가 10.5미터 넘은 것이 사실인데도, 바다뱀의 두뇌는 무게가 56그람도 채 되지 않았다. 해양 악어도 육지 종류의 파충류로부터 복귀한 것이지만, 바다뱀과 달리, 이 동물은 알을 낳으려고 언제나 땅으로 돌아왔다.
60:2.12 (688.4) 자체를 보존하려는 쓸데없는 노력으로 두 종의 공룡이 물로 옮겨간 뒤에 곧, 땅에서 사는 생활의 극심한 경쟁 때문에, 다른 두 종류가 공중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나르는 이 익룡(翼龍)은 후일에 진짜 새의 조상이 아니었다. 이것들은 뼈 속이 빈 뛰는 공룡으로부터 진화했고, 그 날개는 펼치면 6미터에서 7.5미터가 되는, 박쥐 같은 형태였다. 날아다니는 이 고대(古代)의 파충류는 길이가 3미터 되도록 자랐고, 현대의 뱀의 것과 무척 비슷하게, 분리할 수 있는 턱을 가졌다. 한동안 이 날아다니는 파충류는 성공인 듯했지만, 공중을 날아다니는 자로서 생존하게 만드는 경로를 따라서 진화하지 못했다. 이것들은 살아남지 않은 새 조상의 혈통을 대표한다.
60:2.13 (688.5) 바다거북은 이 시기에 늘어났고, 북 아메리카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들의 조상은 북쪽의 육지 다리를 거쳐서 아시아로부터 넘어왔다.
60:2.14 (688.6) 1억 년 전에 파충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공룡은, 엄청난 덩치에 비하여 거의 머리가 없는 동물이었고, 그러한 엄청난 몸에 영양을 공급하기에 충분히 먹이를 마련할 지능이 모자랐다. 그래서 느린 이 육지 파충류의 멸망하는 수가 항상 늘어났다. 그때부터 진화는 덩치의 크기가 아니라 두뇌의 성장을 따를 것이고, 두뇌의 발달은 동물의 진화와 행성의 진보에서 뒤따르는 시대의 특징을 나타낼 것이다.
60:2.15 (688.7) 파충류의 절정과 쇠망의 시작을 포함하는 이 시기는 거의 2천5백만 년 동안 계속되었고, 주라기라고 알려져 있다.
60:3.1 (688.8) 대단한 백악기(白堊期)는 분필을 만드는, 다산하는 유공충(有孔蟲)이 바다를 휩쓴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이 시기는 유란시아에서 오랜 파충류 지배의 종말을 가져왔고, 육지에서 꽃피는 식물과 새 종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이때는 또한 대륙들의 서향 및 남향 떠돌이가 그치는 시절이고, 뒤따라서 엄청난 껍질의 일그러짐과 동시에 널리 용암(鎔岩)의 흐름과 큰 화산 활동이 생긴다.
60:3.2 (689.1) 앞선 지질학 시기가 막을 내릴 때가 가까워지자, 대륙의 상당 부분은 물 위에 나와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 산 봉우리가 없었다. 그러나 대륙의 떠돌이가 계속되자, 대륙은 태평양 깊은 바닥에서 처음으로 큰 장애에 부딪쳤다. 이 지질 세력의 싸움은 알라스카로부터 밑으로 멕시코를 거쳐 케이프 혼까지 뻗는 광대한 남북 방향의 산맥 전부를 형성하도록 충격을 주었다.
60:3.3 (689.2) 이처럼 이 기간은 지질학 역사에서 현대 산의 형성 단계가 된다. 이 시절 이전에는 산 봉우리가 거의 없었고, 다만 폭이 아주 넓고 높아진 땅의 등성이만 있었다. 이제 태평양 해안의 범위가 높아지기 시작했지만, 현재 해안선에서 1,120킬로미터 서쪽에 있었다. 시에라 산맥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고, 금(金)을 지니는 그 석영 지층은 이 시기에 있던 용암 흐름의 산물이다. 북 아메리카의 동부에서 대서양의 압력은 또한 땅이 솟아오르도록 작용하고 있었다.
60:3.4 (689.3) 100,000,000년 전에 북 아메리카 대륙, 그리고 유럽의 일부는 물 위에 쑥 나와 있었다. 두 아메리카 대륙의 찌그러짐이 계속되었고, 남 아메리카의 안데스의 모습을 바꾸고, 북 아메리카의 서부 평야를 차츰 높였다. 멕시코의 대부분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고, 남대서양은 남 아메리카의 동부 해안을 침식하여, 결국은 현재의 해안선에 이르렀다. 대서양과 인도양은 그때, 오늘날의 상태와 대체로 같았다.
60:3.5 (689.4) 95,000,000년 전에 아메리카와 유럽의 땅 덩어리는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 남쪽 바다가 북 아메리카의 침략을 개시하였고, 차츰 북쪽으로 뻗어서 북극해와 연결하였는데, 이것은 두 번째로 큰 대륙의 침수이다. 이 바다가 마침내 물러갔을 때, 그 대륙을 지금 있는 근처에 두었다. 이 큰 침수가 시작되기 전에, 동부의 아팔라치아 고지는 바닷물 수준까지 거의 완전히 약화되었다. 지금 토기(土器)를 만드는 데 쓰이는 순수한 점토로 이루어진, 색깔이 있는 여러 지층은 이 시대에 대서양 해안 지역에 쌓였고, 그 평균 두께는 약 600미터였다.
60:3.6 (689.5) 큰 화산 활동이 알프스의 남쪽에서, 또 현재 칼리포니아의 해안 범위에 있는 산맥의 줄을 따라서 일어났다. 수백만 년 동안에 가장 크게, 멕시코에서 땅껍질이 찌그러졌다. 큰 변화가 또한 유럽ㆍ러시아ㆍ일본, 그리고 남 아메리카 남부에서도 일어났다. 기후는 점점 더 다양하게 되었다.
60:3.7 (689.6) 90,000,000년 전에 속씨 식물이 이 초기의 백악기 바다로부터 솟아났고, 곧 대륙을 덮었다. 이 육지 식물은 무화과나무ㆍ목련ㆍ툴립나무와 함께, 갑자기 나타났다. 이 시기 뒤에 곧, 무화과나무ㆍ빵나무ㆍ야자나무가 유럽에, 그리고 북 아메리카의 서부 평원에 퍼졌다. 아무런 새 육지 동물이 나타나지 않았다.
60:3.8 (689.7) 85,000,000년 전에 베링 해협이 막혔고, 북쪽 바다의 식는 물을 막아버렸다. 그때까지는 대서양 및 걸프해의 해양 생명과 태평양의 해양 생명은, 두 수역의 온도 차이 때문에 크게 달랐다. 이제 이 수역들은 균일하게 되었다.
60:3.9 (689.8) 분필과 녹색 모래 이회토(泥灰土)가 이 시기에 이름을 주었다. 이 시절의 침전물은 얼룩덜룩했고, 분필ㆍ이판암ㆍ사암, 그리고 열등한 석탄, 곧 갈탄과 함께 소량의 석회석으로 구성되었으며, 여러 지역에서 침전물은 기름을 포함했다. 이 지층의 두께는 어떤 지역에서 60미터에서, 북 아메리카 서부와 수많은 유럽 지방에서 3,000미터에 이른다. 록키 산맥의 동부 경계지를 따라서 이 침전물은 기울어진 산기슭의 언덕 지대에서 관찰할 수 있다.
60:3.10 (690.1) 전세계에서 이 지층에는 분필이 스며들어 있고, 구멍이 많은 반(半)바위로 된 이 지층은 뒤집힌 노출 부분에서 물을 받고, 현재 지구의 건조한 많은 지역에 물을 공급하도록, 밑으로 전한다.
60:3.11 (690.2) 80,000,000년 전에 지구의 껍질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대륙 떠돌이의 서향 진행이 멈추고 있었고, 뒤쪽 대륙 덩어리의 느릿하게 움직이는 엄청난 에너지가 남북 아메리카의 태평양 해안선을 찌부러뜨렸고, 이에 반응하여 아시아의 태평양 해안선을 따라서 깊이 변화를 일으켰다. 이 태평양 둘레에서 일어난 땅의 융기는 궁극에 오늘날의 산맥들을 이루었고, 길이가 40,000킬로미터가 넘었다. 그 출산에 따른 융기는 유란시아에서 생명이 나타난 뒤에, 가장 크게 땅거죽이 일그러진 것이었다. 용암의 흐름은 지상과 지하에서, 광범위하고 널리 퍼졌다.
60:3.12 (690.3) 75,000,000년 전은 대륙의 떠돌이가 끝난 것을 표시한다. 알라스카에서부터 케이프 혼까지, 태평양 해안의 긴 산맥이 완성되었지만, 아직까지 봉우리가 거의 없었다.
60:3.13 (690.4) 대륙의 떠돌이가 멈춰서 생긴 뒤쪽 밀기는 북 아메리카의 서부 평원을 계속해서 높였고, 한편 동부에서 대서양 해안 지역에서 약화된 아팔라치아 산맥은 거의, 또는 도무지 기울어지지 않고, 수직(垂直)으로 튀어나왔다.
60:3.14 (690.5) 70,000,000년 전에 록키 산맥 지역이 최대로 솟아오른 것과 연결하여, 땅껍질이 찌그러졌다. 큰 바위 조각이 브리티시 콜럼비아에서, 표면에서 24킬로미터나 위로 밀렸다.[1] [10] 여기서 캠브리아기의 바위들이 백악기 지층 위에 비스듬하게 밀려나왔다. 록키 산맥의 동쪽 비탈에서, 카나다 경계 가까이, 또 한 번 볼 만하게 위로 밀림이 있었다. 여기서 당시에는 최근이었던 백악기 퇴적물 위로 밀려난, 생명이 생기기 이전의 돌 지층을 발견할 수 있다.
60:3.15 (690.6) 이때는 전세계에서 화산 활동이 있던 시대였고, 이것은 작고 고립된 수많은 원뿔 모양의 화산이 생겨나게 만들었다. 바다 밑의 화산들이 물 속에 가라앉은 히말라야 지역에서 터졌다. 아시아의 나머지 지역의 상당 부분도, 시베리아를 포함하여, 아직도 물 밑에 있었다.
60:3.16 (690.7) 65,000,000년 전에 사상 최대의 용암 흐름 중의 하나가 일어났다. 이때와 전기(前期)의 용암 흐름이 퇴적된 지층은 두 아메리카 전역에서, 아프리카 남부와 북부, 오스트랄리아, 그리고 유럽의 여러 부분에서 발견될 것이다.
60:3.17 (690.8) 육지 동물은 거의 바뀌지 않았지만, 특히 북 아메리카에서, 대륙이 크게 솟아올라왔기 때문에 빨리 번식했다. 북 아메리카는 이 시절에 육지 동물이 진화하는 큰 벌판이었고, 유럽의 대부분은 물 밑에 있었다.
60:3.18 (690.9) 기후는 아직도 따듯하고 한결같았다. 극지방은, 북 아메리카의 중부와 남부에서 현재 기후와 아주 비슷한 날씨를 누렸다.
60:3.19 (690.10) 식물 생명에서 큰 진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육지 식물 가운데 속씨 식물이 휩쓸었고, 너도밤나무ㆍ자작나무ㆍ오크나무ㆍ밤나무ㆍ시카모어ㆍ단풍나무, 그리고 현대의 야자수를 포함하여 오늘날의 많은 나무가 처음으로 나타났다. 과실ㆍ풀ㆍ곡식이 풍부했고, 씨를 맺는 이러한 풀 및 나무와 식물 세계의 관계는 사람의 조상과 동물 세계의 관계와 같다―이들은 진화의 중요성으로 보면 바로 사람의 출현 다음으로 중요하다. 갑자기, 이전에 단계적 변화가 없이, 꽃피는 식물의 큰 과(科)가 돌연 변이로 생겼다. 이 새로운 식물상은 곧 전 세계에 퍼졌다.
60:3.20 (691.1) 60,000,000년 전에, 육지 파충류가 비록 쇠퇴하고 있었지만, 공룡은 땅의 군주로서 줄곧 군림했고, 좀더 민첩하고 활발한 부류, 작고 뛰는 캉가루 종류의 육식하는 공룡이 이제 선두를 빼앗았다. 그러나 언젠가 그 전에, 새로운 부류의 채식하는 공룡들이 나타난 적이 있고, 이것들이 급속히 증가한 것은 풀과의 육지 식물이 나타난 데 기인한다. 풀을 먹는 이 새 공룡들 중에 하나는 진짜 네발 동물이었고, 두 뿔과 망토 같은 어깨 테두리가 있었다. 지름이 6미터 되는 육지 종류의 거북이가 나타났고, 또한 현대의 악어와 현대 부류의 참 뱀이 나타났다. 큰 변화가 또한 물고기와 기타 형태의 해양 생명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60:3.21 (691.2) 앞선 시대에 물가를 걷고 헤엄치는 선조류(先鳥類)는 공중에서 성공하지 못했고, 나르는 공룡도 마찬가지였다. 이것들은 짧게 산 종이요, 금방 멸종되었다. 이것들도 공룡의 운명, 멸망을 겪었는데, 몸 크기에 비해서 너무나 뇌의 내용이 적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와 전기에 포유동물을 생산하려는 시도가 유산된 것과 마찬가지로, 공중을 나를 수 있는 동물을 생산하려는 둘째 시도가 실패했다.
60:3.22 (691.3) 55,000,000년 전에 진화의 행진은 진짜 새의 시조(始祖)가 갑자기 나타남으로 두드러졌는데, 비둘기 같은 이 작은 생물은 모든 새 종류 생명의 조상이었다. 이것은 땅에서 나타난 셋째 종류의 나르는 생물이었고, 파충류 집단으로부터 직접 솟아났으며, 당대의 나르는 공룡이나, 이를 가진 초기 종류의 육지 새로부터 솟아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때는 파충류가 쇠퇴하는 시대 뿐 아니라, 새의 시대로 알려지게 되었다.
60:4.1 (691.4) 대단한 백악기가 막을 내리고 있었고, 그 종말은 바다의 대륙 대침공이 끝난 것을 표시한다. 특히 이것이 북 아메리카에 관해서 참말인데, 거기에는 꼭 24번 큰 범람이 있었다. 나중에 사소한 침수(沈水)가 있었지만, 이 중에 아무것도 이 시대와 이전 시대의 광범위하고 길었던 바다의 침략과 비교할 수 없다. 땅과 바다가 번갈아 지배하던 이 시기는 1백만 년의 주기로 일어났다. 대양의 바닥과 대륙 수준이 이렇게 오르내림과 관련하여, 오랜 세월에 걸친 리듬이 있었다. 바로 이 리듬 있는 껍질의 운동은 이때부터 줄곧, 지구의 역사 전체를 통해서 죽, 그러나 빈도와 범위가 줄어들면서 계속될 것이다.
60:4.2 (691.5) 이 시기에는 또한 대륙의 떠돌이가 끝나고, 유란시아에서 현대의 산들이 형성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대륙 덩어리들의 압력, 그리고 오랜 세월에 걸친 떠돌이의 저지된 운동량은 산을 만드는 유일한 영향력이 아니다. 산맥의 위치를 결정하는 데 주요한 근본적 요인은 기존하는 낮은 땅, 곧 골짜기이며, 이것은 땅의 침식으로 생긴 비교적 가벼운 퇴적물과 이전 시대의 해양 표류물로 채워지게 되었다. 가벼운 이 땅 지역은 두께가 때때로 4,500미터에서 6,000미터가 되었다. 따라서 껍질이 어떤 이유로든 압력을 받을 때, 이 가벼운 지역들은 먼저 구겨지고, 접히고, 위로 올라가서, 지구의 껍질에서나 혹은 껍질 밑에서 작용하는, 싸우고 반대하는 세력 및 압력을 보상하는 조정을 허락한다. 때때로 이렇게 땅의 밀어 올리기는 접힘이 없이 생긴다. 그러나 록키 산맥이 올라간 것과 연관해서, 지하에서, 또 지표에서, 여러 지층의 엄청난 위로밀림과 더불어, 접힘과 기울어짐이 크게 일어났다.
60:4.3 (692.1)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산들은 오래 된 동서 체계의 산들 사이에, 아시아와 그린랜드와 북 유럽에 있다. 중년의 산들은 태평양 둘레의 집단에, 그리고 유럽의 둘째 동서 체계에 있으며, 후자는 거의 같은 때에 생겼다. 이 거대한 솟아오름은 길이가 거의 16,000킬로미터가 되고, 유럽으로부터 서인도 제도의 고지로 뻗는다. 가장 젊은 산들은 록키 산맥 체계에 있고, 거기서 오랜 세월 동안, 땅의 융기가 일어났지만 다만 바다가 연달아 덮었다. 하지만 고지들 가운데 더러는 섬으로 남았다. 중년의 산들이 형성되고 나서, 진정한 산 고지가 높아졌고, 이것은 나중에 자연 요인의 통합된 예술로 말미암아, 오늘날의 록키 산맥으로 조각되었다.
60:4.4 (692.2) 현재 북 아메리카의 록키 산맥 지역은 최초의 땅이 높아진 것이 아니다. 그 고지는 침식으로 인하여 평평하게 된 지 오래 되었고, 그리고 나서 다시 높아졌다. 현재 산맥의 앞줄이 다시 높아진 최초의 산맥의 흔적이 남은 것이다. 파이크스 봉우리와 롱스 봉우리가 이 산 활동의 뛰어난 예이며, 산(山) 생명에서 두 세대, 또는 더 지나서 연장된다. 이 두 봉우리는 앞서 몇 차례 범람이 있던 동안에, 물 위에서 머리를 들고 있었다.
60:4.5 (692.3) 지리학 뿐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이때는 땅에서, 또 물 밑에서 파란 많고 활동이 많았던 시대였다. 성게가 늘어났고, 한편 산호와 갯나리가 줄어들었다. 이전 시대에 압도적 영향을 미쳤던 암모나이트도 또한 빨리 쇠퇴하였다. 땅에서 고사리 숲은, 대체로 소나무, 그리고 거대한 삼나무를[2] [11] 포함하여, 다른 현대의 나무로 바뀌었다. 이 기간의 끝이 되기까지, 태반(胎盤)을 가진 포유동물이 아직 진화하지 않았지만, 후세에 미래 포유동물 종류의 초기 조상이 등장하는 것을 위하여 생물학적 무대가 충분히 마련되었다.
60:4.6 (692.4) 육지 생명이 초기에 나타나는 때로부터 인종, 그리고 그와 나란한 가지들의 직계 조상이 나타난 최근 시대까지, 세상의 진화에서 긴 시대가 이렇게 막을 내린다. 이 백악기는 5천만 년을 차지하고, 육지 생명 가운데 포유동물 이전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데, 이것은 1억 년의 기간에 걸치며, 중생대 (中生代)로 알려져 있다.
60:4.7 (692.5) [사타니아에 배치되었고, 지금 유란시아에서 활동하는 한 네바돈 생명 운반자가 발표했다].
61:0.1 (693.1) 포유동물 시대는 태반이 있는 포유동물이 기원을 가진 시절부터 빙하 시대의 끝까지 이어지며, 5천만 년보다 조금 적게 차지한다.
61:0.2 (693.2) 이 신생대(新生代)에 세상의 경치는 매력 있는 모습을―경사가 완만한 언덕, 넓은 골짜기, 폭 넓은 강, 큰 숲을―나타냈다. 이 시간 구역 중에 두 번이나 파나마 지협이 올라가고 내려갔다. 세 번이나 베링 해협의 육지 다리도 그렇게 했다. 동물의 종류는 많고도 다채로웠다. 나무는 새들로 바글거렸고, 진화하는 동물 종자들이 주도권을 얻으려고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는데도, 온 세상이 동물의 천국이었다.
61:0.3 (693.3) 5천만 년에 걸치는 이 시대의 다섯 기(紀)에 쌓인 퇴적물은 연속된 포유동물 왕조의 화석 기록을 지니고 있으며, 바로 인간이 실제로 나타나는 시대까지 직접 이끈다.
61:1.1 (693.4) 50,000,000년 전에 세계의 땅 지역은 아주 대체로 물 위에 있거나, 겨우 조금만 물 밑에 잠겼다. 이 시기의 지층과 퇴적물은 육지와 해양의 것이었으나, 주로 육지 퇴적물이었다. 상당히 오랫동안 육지가 차츰차츰 올라섰지만, 동시에 더 낮은 수준으로, 바다를 향해서 씻겨 내려갔다.
61:1.2 (693.5) 이 시기에 일찍, 북 아메리카에서 태반(胎盤)을 가진 종류의 포유동물이 갑자기 나타났고, 이것들은 이때까지 가장 중요한 진화적 발전이었다. 이전에 태반이 없는 포유동물목(目)이 존재했지만, 이 새 종류는 기존의 파충류 조상으로부터 직접, 갑자기 튀어나왔는데, 이것들의 후손은 공룡이 쇠망하던 시절을 거쳐서 계속 버티었다. 태반을 가진 포유동물의 아버지는 작고, 상당히 활발하고, 육식을 하며, 껑충 뛰는 종류의 공룡이었다.
61:1.3 (693.6) 이 원시 포유동물 종류에서 포유동물의 기본적 본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포유동물은 다음 면에서, 모든 다른 형태의 동물 생명보다 엄청나게 살아남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포유동물은:
61:1.4 (693.7) 1. 비교적 성숙하고 잘 발육된 자식을 낳을 수 있다.
61:1.5 (693.8) 2. 애정을 가지고 새끼에게 양분을 먹이고 새끼를 양육하고 보호할 수 있다.
61:1.6 (693.9) 3. 자기를 존속시키는 일에 우수한 두뇌력을 쓸 수 있다.
61:1.9 (694.1) 45,000,000년 전에, 해안선이 아주 일반적으로 침몰하는 것과 관련하여, 대륙의 골격이 높아졌다. 포유동물 생명이 급속히 진화하고 있었다. 작은 파충류인, 알 낳는 종류의 포유동물이 번성했고, 후일의 캉가루 선조가 오스트랄리아를 누볐다. 얼마 안 되어, 작은 말, 발 빠른 코뿔소, 코가 긴 타피르, 원시 돼지, 다람쥐, 리머[1] [12], 오파섬, 그리고 원숭이 같은 몇 부족의 동물이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작고 원시적이었고, 산 지역의 숲 사이에서 살기에 가장 적합했다. 타조 같은 큰 육지 새가 3미터의 키로 발달했고, 가로 23센티미터 세로 33센티미터 크기의 알을 낳았다. 이것들은 후일에 거대한 타는 새의 선조였는데, 이 새는 상당히 머리가 영리했고 한때 인간을 공중에서 날랐다.
61:1.10 (694.2) 초기 신생대의 포유동물은 땅에서, 물 밑에서, 공중에서, 그리고 나무 꼭대기에서 살았다. 그들은 한 쌍에서 열한 쌍에 이르는 유방 선(腺)을 가졌고, 모두가 상당히 많은 털로 덮였다. 후일에 나타나는 목(目)들과 공통으로, 그들은 두 벌의 연속된 이를 개발했고, 몸 덩치에 비해서 큰 두뇌를 소유했다. 그러나 이들 전체에서 현대 형태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61:1.11 (694.3) 40,000,000년 전에 북반구의 땅 지역이 비로소 높아졌고, 이에 새롭고 광범위한 땅 퇴적물, 그리고 용암의 흐름, 뒤틀림, 호수의 형성, 침식을 포함하여, 다른 종류의 땅의 활동이 뒤따랐다.
61:1.12 (694.4) 이 시기의 후반에 유럽의 대부분이 물에 잠겼다. 땅이 약간 올라가고 나서, 그 대륙은 호수와 만으로 덮였다. 북극해는, 유랄의 함몰을 통해서, 남쪽으로 달려 지중해와 연결되었는데, 당시에 지중해는 북쪽으로 확장했고, 고지에 알프스ㆍ카르파티아ㆍ아페닌ㆍ피레네 산들은 바다의 섬으로 물 위에 나와 있었다. 파나마 지협은 올라섰고, 대서양과 태평양은 갈라졌다. 북 아메리카는 베링 해협의 육지 다리로 아시아와 연결되고, 그린랜드와 아이스랜드를 경유해서 유럽과 연결되었다. 북쪽 위도에서 지구의 땅 순회로를 오직 유랄 해협이 절단했고, 이것은 북극의 바다와 확대된 지중해를 연결하였다.
61:1.13 (694.5) 상당한 유공충(有孔蟲) 석회석이 유럽의 바다에 퇴적되었다. 오늘날 바로 이 돌은 알프스에서 3,000미터, 히말라야에서 4,800미터, 티벳에서는 6,000미터의 높이로 솟아올랐다. 이 시기의 백악 퇴적물은 아프리카와 오스트랄리아의 바닷가를 따라서, 남 아메리카의 서해안에서, 그리고 서인도 제도 근처에서 발견된다.
61:1.14 (694.6) 이른바 이 시신세(始新世) 기간을 통해서 내내, 포유동물 및 기타 관계된 형태의 생명은 거의 또는 아무런 방해 없이 계속하였다. 북 아메리카는 그때 오스트랄리아를 빼고, 모든 대륙과 땅으로 연결되었고, 세상은 차츰차츰 여러 종류의 원시 포유동물 집단으로 북적거렸다.
61:2.1 (694.7) 이 기간의 특징은 태반(胎盤)을 가진 포유동물이 더욱, 급속히 진화한 것이며, 이들은 이 시절에 발전하던 포유동물 생명 중에 더욱 진보한 형태였다.
61:2.2 (694.8) 초기의 태반 포유동물은 육식하는 선조로부터 솟아나왔지만, 아주 곧 채식하는 가지들이 발달하였고, 오래지 않아서 잡식하는 여러 포유동물과(科)도 또한 솟아나왔다. 속씨 식물도 급속히 늘어나는 포유동물의 주요한 먹이였고, 오늘날의 식물과 나무의 대다수를 포함하여 현대의 육지 식물상(植物相)은, 이전 시기에 나타났다.
61:2.3 (695.1) 35,000,000년 전은 태반을 가진 포유동물이 세상을 정복하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표시한다. 남쪽의 육지 다리는 널리 퍼졌고, 그때 엄청나게 컸던 남극 대륙을 남 아메리카, 남 아프리카, 오스트랄리아와 다시 연결하였다. 높은 위도에서 땅이 집결하고 있는데도, 열대 바다가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에, 세계의 기후는 비교적 온화한 채로 남았고, 땅도 충분히 높아지지 않아서 빙하를 만들 수 없었다. 광범위한 용암의 흐름이 그린랜드와 아이스랜드에서 일어났고, 어떤 석탄은 이 지층 사이에 퇴적되고 있었다.
61:2.4 (695.2) 뚜렷한 변화가 행성의 동물상(動物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바다 생명은 크게 수정을 겪고 있었으며, 해양 생물에서 오늘날 목(目)들의 대부분이 존재했고, 유공충은 계속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곤충 생명은 이전 시대의 것과 무척 비슷했다. 콜로라도의 플로리산트 화석 지층은 까마득한 이 시절의 후기에 속한다. 살아 있는 곤충과의 대부분은 이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당시에 존재했던 다수는 지금 멸종되었다. 하지만 이것들의 화석이 남아 있다.
61:2.5 (695.3) 뭍에서 이때는 두드러지게 포유동물이 혁신하고 팽창하던 시대였다. 더 일찍 있었고 더 원시적인 포유동물 가운데, 1백이 넘는 종이 이 시기가 끝나기 전에 절멸했다. 덩치가 크고 두뇌가 작은 포유동물조차 곧 멸망했다. 두뇌와 민첩성은 동물이 살아남는 법의 진보에서 갑옷과 덩치를 대체하였다. 그리고 공룡과가 쇠망하면서, 포유동물이 천천히 지구를 정복했고, 나머지 파충류 조상을 빠르고 완벽하게 파괴하였다.
61:2.6 (695.4) 공룡이 사라짐과 함께, 다른 큰 변화가 도마뱀과의 여러 분과에서 일어났다. 초기 파충류과에서 살아남은 가지는 바다거북ㆍ뱀ㆍ악어였고, 이들과 더불어 존경받을 개구리였는데, 개구리는 사람의 시초 조상을 대표하는, 남아 있는 유일한 집단이다.
61:2.7 (695.5) 여러 무리의 포유동물은 지금은 멸종한 독특한 동물에서 기원을 가졌다. 육식하는 이 생물은 고양이와 물개를 교배한 잡종 비슷한 것이었는데, 땅에서나 물에서 살 수 있었고, 상당히 머리가 좋고 대단히 활발했다. 유럽에서는 개과의 조상이 진화했고, 곧 많은 종류의 작은 개들을 낳았다. 같은 무렵에 비버ㆍ다람쥐ㆍ땅다람쥐ㆍ생쥐ㆍ토끼를 포함하여, 갉아먹는 설치류(齧齒類)가 나타나서 즉시 주목할 만한 형태의 생명이 되었으며, 그 뒤로 이 과에서 거의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시기의 후기 퇴적물은, 조상 형태로 있는 개ㆍ고양이ㆍ너구리ㆍ족제비의 화석 잔재를 포함한다.
61:2.8 (695.6) 30,000,000년 전에 현대 종류의 포유동물이 비로소 나타났다. 이전에는 포유동물이 산에서 사는 종류였기 때문에, 산에서 대체로 지내는 편이었다. 발톱을 가진 육식하는 것들과 구별하여, 갑자기 평원(平原) 종류, 곧 발굽이 있는 종류, 풀을 뜯는 종들의 진화가 시작되었다. 이 풀 뜯는 동물은 다섯 발가락과 이를 44개 가진, 분화되지 않은 조상으로부터 솟아나왔는데, 이것은 그 시대가 끝나기 전에 멸망했다. 이 기간을 통해서 내내, 발가락의 진화는 세 발가락 단계를 지나서 진보하지 않았다.
61:2.9 (695.7) 말은 진화의 뛰어난 본보기이며, 이 시절에 북 아메리카와 유럽, 양쪽에서 살았다. 하지만 말의 발전은 후일의 빙하(氷河) 시대까지 충분히 끝나지 않았다. 코뿔소과는 이 시기의 끝에 나타났지만, 나중에 최대의 확장기를 거쳤다. 돼지 같은 한 작은 생물도 개발되었고, 이것은 여러 종의 돼지와 멧돼지와 하마(河馬)의 조상이 되었다. 낙타와 라마는 북 아메리카에서 이 시기의 중간쯤에 비롯하였고, 서부 평원에 들끓었다. 나중에 라마는 남 아메리카로, 낙타는 유럽으로 옮겨 갔으며, 곧 두 가지가 북 아메리카에서 멸종되었다. 하지만 몇 마리 낙타가 빙하 시대까지 살아남았다.
61:2.10 (696.1) 이 무렵에 주목할 일이 북 아메리카 서부에서 생겼다. 고대 리머의 초기 조상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 과(科)는 참 리머로 여길 수 없지만, 그들의 등장은 참 리머가 나중에 솟아나온 혈통이 확립되었음을 표시한다.
61:2.11 (696.2) 바다를 향해 갔던 이전 시대의 육지 뱀들처럼, 이제 태반(胎盤) 포유동물의 한 부족 전체가 땅을 버리고, 대양에서 살림터를 잡았다. 이것들은 그 뒤로 늘 바다에 남았고, 현대의 고래ㆍ돌고래ㆍ쥐돌고래ㆍ물개ㆍ바다사자를 낳았다.
61:2.12 (696.3) 행성에서 새 종류 생명은 줄곧 발달했지만, 중요한 진화적 변화는 거의 없었다. 갈매기ㆍ왜가리ㆍ플라밍고ㆍ대머리수리ㆍ매ㆍ독수리ㆍ부엉이ㆍ메추라기ㆍ타조를 포함하여, 현대에 있는 새들의 대다수가 존재했다.
61:2.13 (696.4) 1천만 년을 차지하는 이 점신세(漸新世)의 끝이 되기까지, 해양 생명 및 육지 동물과 함께, 식물 생명은 아주 크게 진화했고, 오늘날과 비슷하게 땅 위에 있었다. 상당한 분화가 나중에 나타났지만, 살아 있는 것들의 대부분의 조상 형태는 그때 살아 있었다.
61:3.1 (696.5) 땅이 높아지고 바다가 분리된 것은 천천히 세계의 날씨를 바꾸고 있었고 차츰 날씨를 서늘하게 했지만, 기후는 아직도 온화했다. 세쿼이아와 목련은 그린랜드에서 자랐지만, 아열대 식물이 남쪽으로 비로소 이주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끝이 되기까지, 따듯한 기후에서 사는 이 식물과 나무는 대체로 북쪽 위도에서 사라졌고, 그들의 자리는 추위에 더 잘 견디는 식물과 낙엽수가 차지했다.
61:3.2 (696.6) 풀의 종류가 크게 늘어났고, 많은 포유동물 종자의 이는 차츰 오늘날의 풀 뜯는 종류와 같은 모양으로 개조되었다.
61:3.3 (696.7) 25,000,000년 전에 땅이 높아지던 긴 시대에 뒤이어, 육지가 조금 물에 잠겼다. 록키 산맥 지역은 높이 솟은 채로 있어서, 침식된 물질의 퇴적은 동쪽으로 낮은 땅 전역에 걸쳐서 계속되었다. 시에라 산맥은 상당히 다시 솟았고, 사실은 그 뒤로 늘 솟아오르고 있었다. 칼리포니아 지역에서 6.4킬로미터에 이르는 큰 수직(垂直) 단층은 이 시절부터 유래한다.
61:3.4 (696.8) 20,000,000년 전에는 정말로 포유동물의 황금 시대였다. 베링 해협의 육지 다리가 올라왔고, 엄니가 네 개 있는 마스토돈, 다리 짧은 코뿔소, 그리고 고양이과의 여러 변종을 포함하여, 많은 집단의 동물이 아시아에서 북 아메리카로 이주했다.
61:3.5 (696.9) 첫 사슴이 나타났고, 북 아메리카는 즉시 반추(反芻) 동물이―사슴ㆍ소ㆍ낙타ㆍ들소, 그리고 몇 종자의 코뿔소가―들끓었지만, 키가 1.8미터 넘는 큰 돼지는 멸종했다.
61:3.6 (697.1) 이 시기와 후기의 거대한 코끼리는 덩치가 클 뿐 아니라 큰 두뇌를 소유했는데, 오스트랄리아를 빼고 곧 전세계에 넘쳤다. 계속 살아 갈 수 있게 만들 만큼 충분히 큰 두뇌를 가진 거대한 동물이 한 번 세계를 정복했다. 이 시대에 상당히 지능적인 생명과 대항하여, 코끼리만큼 큰 어떤 동물이라도 크고 우수한 질의 두뇌를 소유하지 않았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지능과 적응 면에서, 오직 말이 코끼리에 접근했고, 바로 사람만이 코끼리를 능가했다. 그렇기는 해도, 이 시기가 시작할 때 생존하던 50종의 코끼리 가운데, 겨우 두 가지가 살아남았다.
61:3.7 (697.2) 15,000,000년 전에 유라시아의 산 지역들이 높아지고 있었고, 이 지역에 두루 얼마큼의 화산 활동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서반구 용암의 흐름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 불안한 조건이 온 세계를 지배했다.
61:3.8 (697.3) 지브랄타 해협이 닫혔고, 스페인은 오래 된 육지 다리로 아프리카와 연결되었다. 그러나 지중해는 프랑스를 지나서 뻗은 좁은 수로(水路)를 통해서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갔고, 산봉우리와 고지들은 이 고대의 바다 위에서 섬처럼 보였다. 나중에, 이 유럽의 바다는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뒤에, 지중해는 인도양과 연결되었고, 한편 이 시기 끝에 수에즈 지역이 높아져서 지중해는 한동안 내륙의 짠 바다가 되었다.
61:3.9 (697.4) 아이스랜드 육지 다리가 물 밑에 잠겼고, 북극의 바다가 대서양의 바다와 서로 섞였다. 북 아메리카의 대서양 해안은 급히 식었지만, 태평양 해안은 지금보다 더 따듯한 채로 남았다. 대양의 큰 해류가 작용하고 있었고, 오늘날과 비슷하게 기후에 영향을 주었다.
61:3.10 (697.5) 포유동물 생명은 줄곧 진화했다. 엄청난 말 떼가 북 아메리카의 서부 평원에서 낙타들과 합세하였다. 이때는 코끼리만 아니라 참으로 말의 시대였다. 말의 머리는 동물의 품질 면에서 코끼리의 머리에 버금가지만, 한 가지 점에서, 놀랐을 때 도망치는 뿌리 깊은 성향을 결코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은 결정적으로 열등하다. 말은 코끼리처럼 감정을 통제하는 힘이 모자라고, 한편 코끼리는 덩치가 크고 민첩성이 모자라서 몹시 장애를 겪는다. 이 기간에 얼마큼 코끼리와 같고 말과 비슷한 동물이 진화했지만, 급속히 늘어나는 고양이과가 이를 즉시 멸종시켰다.
61:3.11 (697.6) 유란시아가 이른바 “말이 없는 시대”로 들어가고 있으니까, 너희는 이 동물이 너희 조상에게 얼마나 중요했는가 멈추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은 말을 처음에 먹을 것으로, 다음에는 여행에, 나중에는 농업과 전쟁에 썼다. 말은 오랫동안 인류에게 봉사하고, 인간의 문명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61:3.12 (697.7) 이 시기에 생물학상의 발전은 나중에 사람이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무대를 준비하는 방향으로 크게 기여했다. 중앙 아시아에서 진정한 부류의 원시 원숭이와 고릴라가 진화했고, 이것들은 지금은 멸절해 버린 공통된 조상을 가졌다. 그러나 이 종들 가운데 어느 것도, 나중에 인류의 조상이 되도록 예정된 생물의 혈통과 관련되지 않는다.
61:3.13 (697.8) 몇몇 집단이, 특히 늑대와 여우가, 개과를 대표했다. 고양이족을 표범, 그리고 칼이를 가진 큰 호랑이가 대표했고, 후자는 북 아메리카에서 처음으로 진화했다. 현대의 고양이과와 개과는 온 세상에서 수가 늘어났다. 족제비ㆍ담비ㆍ수달ㆍ너구리가 번성했고, 북쪽 위도 전역에 걸쳐서 발달했다.
61:3.14 (698.1) 새가 계속 진화했다. 하지만 뚜렷한 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파충류도 현대의 부류와―뱀ㆍ악어ㆍ바다거북과―비슷했다.
61:3.15 (698.2) 이렇게 세계 역사에서 대단히 사건이 많고 흥미 있던 시기가 막을 내렸다. 이 코끼리와 말의 시대는 중신세(中新世)라고 알려져 있다.
61:4.1 (698.3) 이때는 북 아메리카ㆍ유럽ㆍ아시아에서 빙하기 이전에 육지가 높아지던 시기이다. 땅의 지형은 크게 바뀌었다. 산맥이 태어나고, 강이 진로를 바꾸며, 고립된 화산들이 온 세계에서 터졌다.
61:4.2 (698.4) 10,000,000년 전에 대륙들의 낮은 곳에서 광범위하게 지역적으로 땅 침전물이 쌓이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침전물의 대부분은 나중에 옮겨졌다. 이 시절에 유럽의 상당 부분은 잉글랜드ㆍ벨지움ㆍ프랑스의 여러 부분을 포함하여, 아직도 물 밑에 있었고, 지중해는 북 아프리카의 상당 부분을 덮었다. 북 아메리카에서 광범위한 퇴적물이 산밑에서, 호수에서, 큰 분지에서 만들어졌다. 이 퇴적물은 평균 약 60미터이고, 다소 색깔이 있고, 화석이 드물다. 북 아메리카 서부에 두 개의 큰 민물 호수가 존재했다. 시에라는 높아지고 있었고, 샤스타ㆍ후드ㆍ레이니어는 산으로서 생애를 시작했다. 그러나 후일에 빙하기까지, 북 아메리카는 대서양의 침몰 부분을 향하여 비로소 기어가지 않았다.
61:4.3 (698.5) 잠시 동안 세상의 모든 육지는 오스트랄리아를 제외하고 다시 연결되었고, 마지막으로 동물의 세계적 대이동이 일어났다. 북 아메리카는 남 아메리카와 아시아와 다 연결되었고, 동물 생명이 자유롭게 교환되었다. 아시아의 나무늘보ㆍ아마딜로ㆍ영양(羚羊)ㆍ곰이 북 아메리카로 들어갔고, 한편 북 아메리카의 낙타는 중국으로 갔다. 코뿔소가 오스트랄리아와 남 아메리카를 제외하고, 온 세계로 이주했으나, 이 시기 끝이 되자 서반구에서 멸종되었다.
61:4.4 (698.6) 대체로, 전기(前期)의 생명은 줄곧 진화하고 퍼졌다. 고양이과가 동물 생명을 지배했고, 해양 생명은 거의 정지했다. 다수의 말이 아직 세 발가락을 가졌지만, 현대 종류가 도착하고 있었다. 라마, 그리고 기린 같은 낙타가 풀 뜯는 평원에서 말과 섞였다. 기린이 아프리카에서 나타났고, 그때 지금처럼 긴 목을 가졌다. 남 아메리카에서 나무늘보ㆍ아마딜로ㆍ개미핥기, 그리고 남 아메리카 종류의 원시 원숭이가 진화했다. 대륙들이 마침내 고립되기 전에, 그 덩치 큰 동물 마스토돈은 오스트랄리아를 제외하고, 어디에나 이주해 갔다.
61:4.5 (698.7) 5,000,000년 전에 말은 지금 상태로 진화했고, 북 아메리카로부터 전세계로 이주했다. 그러나 말은 홍인(紅人)이 도착하기 오래 전에, 기원이 있던 대륙에서 멸종되었다.
61:4.6 (698.8) 기후는 차츰 추워지고, 육지 식물은 천천히 남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북쪽 지협 위로 동물의 이주를 막은 것은, 처음에는 북쪽에서 심해지는 추위였다. 그 뒤에 이 북 아메리카 육지 다리가 가라앉았다. 그 뒤에 곧 아프리카와 남 아메리카 사이의 육지 연결은 마침내 물에 잠겼고, 서반구는 오늘날의 상태와 비슷하게 고립되었다. 이 시절 이후로, 다른 종류의 생명이 동반구와 서반구에서 발달하기 시작했다.
61:4.7 (699.1) 이처럼 거의 1천만 년 동안 계속된 시기가 막을 내리고, 사람의 조상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는 보통 선신세(鮮新世)라고 부르는 시절이다.
61:5.1 (699.2) 전기의 끝이 되자, 북 아메리카의 동북부와 북 유럽의 땅은 광범위한 규모로 상당히 높아졌고, 북 아메리카에서는 광대한 지역이 9,000미터까지, 그리고 더 높아지고 있었다. 이전에는 이 북쪽 지역에 온화한 기후가 지배했고, 북극의 바다는 모두 증발하도록 열려 있었으며, 빙하기가 거의 끝날 때까지 이 바다는 줄곧 얼음이 없었다.
61:5.2 (699.3) 이렇게 육지가 올라오는 것과 동시에 대양의 해류가 바뀌었고, 계절풍이 방향을 바꾸었다. 이 조건은 결국, 북쪽의 고지(高地)에 무겁게 젖어 있는 대기의 움직임으로부터 거의 항상 비가 쏟아지게 만들었다. 높아지고, 따라서 서늘한 이 지역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깊이가 6,000미터에 이를 때까지 눈이 계속 내렸다. 눈이 가장 깊이 쌓인 지역은, 고도(高度)와 함께, 나중에 압력으로 인한 빙하 흐름의 중심점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 지나친 강설이 이 북쪽 고지를 이처럼 굉장한 눈 외투로 계속 덮는 한, 빙하 시대가 이어졌다. 이 눈은 곧, 단단하지만 기어가는 얼음으로 형태를 바꾸었다.
61:5.3 (699.4) 이 시기의 큰 빙상은 모두 높아진 고지에 자리잡고 있었고, 오늘날 그 빙상들이 발견되는 산지에 있지 않았다. 빙하 얼음의 반은 북 아메리카에 있었고, 4분의 1은 유라시아에, 4분의 1은 다른 곳, 주로 남극에 있었다. 아프리카는 얼음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오스트랄리아는 남극의 얼음 담요로 거의 덮여 있었다.
61:5.4 (699.5) 이 세상의 북쪽 지역은 여섯 번이나 따로, 뚜렷한 얼음의 침공을 받았다. 하지만 각 개별 빙상의 활동과 관련하여 전진과 후퇴가 수십 번 있었다. 북 아메리카에서 얼음은 두 중심에서, 나중에는 세 중심에서 모였다. 그린랜드가 덮였고, 아이스랜드는 얼음의 흐름 밑에 완전히 묻혔다. 유럽에서 얼음은 다른 때에,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빼고, 영국 제도를 덮었고, 프랑스까지 서 유럽으로 퍼졌다.
61:5.5 (699.6) 2,000,000년 전에 북 아메리카의 첫 빙하가 남쪽으로 전진을 시작했다. 빙하기가 이제 시작되고 있었고, 이 빙하는 북쪽의 압력 중심들로부터 전진하고 다시 거기로 후퇴하는 데, 거의 1백만 년을 써버렸다. 중앙의 빙상(氷床)은 남쪽으로 칸사스까지 뻗었는데, 동쪽과 서쪽의 얼음 중심들은 그때 그다지 널리 퍼져 있지 않았다.
61:5.6 (699.7) 1,500,000년 전에 첫 대빙하가 북쪽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동안에 굉장한 양의 눈이 그린랜드와 북 아메리카 동북부에 내리고 있었고, 머지 않아 이 동부의 얼음 덩어리는 남쪽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얼음의 둘째 침공이었다.
61:5.7 (699.8) 처음에 있은 이 두 얼음 침공은 유라시아에서 널리 퍼지지 않았다. 이 빙하기의 시초에, 북 아메리카는 마스토돈, 털 있는 맘모스, 말ㆍ낙타ㆍ사슴ㆍ사향소ㆍ들소ㆍ나무늘보, 큰 비버, 칼이를 가진 호랑이, 코끼리만큼 큰 나무늘보, 그리고 많은 집단의 개 및 고양이과로 들끓었다. 그러나 이 시절 이후로, 빙하기의 심해지는 추위로 그들의 수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빙하기의 끝 무렵에, 이 동물 종자의 대부분은 북 아메리카에서 절멸되었다.
61:5.8 (700.1) 얼음으로부터 떨어진 곳에서, 세계의 뭍과 물에서 사는 생명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얼음의 침공 사이사이에, 기후는 대체로 현재만큼 온화했고, 아마 조금 더 따듯했다. 빙하는 퍼져서 엄청난 지역을 덮기는 하지만, 결국 지역 현상이다. 빙하의 비활동기, 그리고 엄청난 빙산들이 메인주 해안에서 대서양으로 미끄러져 가고 퓨지트 사운드를 통과하여 태평양으로 미끄러져 내리고 노르웨이의 피오르드 밑으로 북해로 천둥치며 내려간 시절 사이에, 해안선 지역의 기후는 크게 바뀌었다.
61:6.1 (700.2) 이 빙하기에 있었던 큰 사건은 원시인의 진화였다. 인도에서 조금 서쪽으로, 지금은 물 밑에 있는 땅에서, 오래 된 북 아메리카 리머 종류의 아시아 이민 자손 사이에서, 원시 포유동물이 갑자기 나타났다. 이 조그만 동물은 대체로 뒷다리로 걸었고, 몸 크기에 비해서, 또 다른 동물의 두뇌와 비교해서, 큰 두뇌를 소유했다. 이 목(目) 생명의 70대에서 새로운 상급 집단의 동물이 갑자기 분화했다. 이 새로운 중간 포유동물이―크기와 키가 선조의 거의 두 배가 되고, 비례해서 커진 두뇌력을 가졌다―겨우 자리를 잘 잡았는데, 그때 세 번째로 결정적 돌연 변이, 곧 영장목(靈長目)이 갑자기 나타났다. (바로 이때, 중간 포유동물의 혈통 안에서 퇴보하는 진화가 원숭이의 조상을 낳았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가지는 점진적으로 진화하여 앞으로 나아갔고, 한편 원숭이 부족은 정지 상태에 남아 있거나, 아니면 실제로 후퇴하였다.)
61:6.2 (700.3) 1,000,000년 전에 유란시아는 사람 사는 세계로서 등록되었다. 진보하는 영장목의 혈통 안에서 돌연 변이가 갑자기 두 명의 원시 인간, 인류의 실제 조상을 생산하였다.
61:6.3 (700.4) 이 사건은 빙하의 세 번째 전진이 시작될 무렵에 일어났다. 그래서 자극과 활력을 주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너희의 옛 조상이 태어나고 번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유란시아 원주민의 유일한 생존자, 에스키모인은 지금도 혹독한 북방 기후에서 살기를 선호한다.
61:6.4 (700.5) 인간은 빙하기의 끝이 가까울 때까지, 서반구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빙하기 사이에 그들은 서쪽으로 지중해 둘레를 지나갔고, 곧 유럽 대륙을 누볐다. 서 유럽의 동굴에서, 인간의 뼈가 열대와 북극 동물의 잔해와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빙하가 전진하고 후퇴하는 후기 시대를 통해서 죽, 이 지역에서 사람이 살았음을 증언한다.
61:7.1 (700.6) 빙하기 동안 내내 다른 활동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얼음의 활동은 북쪽 위도에서 모든 다른 현상을 무색하게 만든다. 땅의 어느 다른 활동도 그러한 특징을 가진 증거를 지형에 남기지 않는다. 특이한 표석(漂石)[2] [13], 그리고 땅의 구멍, 호수, 옮겨진 돌, 돌가루와 같은 지표의 분열 현상은 자연에서 어떤 다른 현상과 관련 없이 발견될 것이다. 얼음은 또한 완만한 돌출부, 곧 빙퇴구(氷堆丘)로 알려진 지표의 진동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그리고 빙하가 진행함에 따라서, 빙하는 강을 옮기고 지구의 얼굴 전체를 바꾸어 놓는다. 오로지 빙하가 내막을 알리는 표류물을―지상ㆍ측면ㆍ말단 빙퇴석을―남겨 놓는다. 이러한 표류물, 특히 지상에 있는 빙퇴석(氷堆石)은, 북 아메리카에서 동쪽의 해안 북부에서부터 서쪽으로 연장되며, 유럽과 시베리아에서 발견된다.
61:7.2 (701.1) 750,000년 전에, 북 아메리카의 중앙 및 동부 빙원(氷原)이 합쳐진 넷째 빙상이 남쪽으로 한창 진행 중에 있었는데, 절정에 달했을 때 일리노이주 남부에 이르렀고, 미시시피 강을 80킬로미터 서쪽으로 옮겨놓았으며, 동쪽에서 오하이오 강과 펜실바니아주 중부만큼 남쪽으로 뻗었다.
61:7.3 (701.2) 아시아에서 시베리아 빙상(氷床)은 가장 남쪽으로 쳐들어갔고, 한편 유럽에서 진행하는 얼음은 알프스 산의 장벽에 바로 못 미처 멈추었다.
61:7.4 (701.3) 500,000년 전에, 얼음이 다섯 번째로 전진하던 동안에, 새로운 사태가 인간의 진화 과정을 가속했다. 갑자기, 한 세대에, 여섯 유색 민족이 원주민 인간 혈통으로부터 돌연 변이로 생겼다. 이때는 2중으로 중요한 날짜이니, 그때가 또한 행성 영주가 도착한 것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61:7.5 (701.4) 진행하는 다섯째 빙하는 북 아메리카에서 모두 세 얼음 중심의 합동 침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쪽 돌출부는 세인트 로렌스 계곡 밑에 짧게만 뻗었고, 서쪽의 빙상은 남향으로 거의 진출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심의 돌출부는 남쪽에 이르러 아이오와주의 대부분을 덮었다. 유럽에서 이 얼음 침공은 전기의 것만큼 널리 퍼지지 않았다.
61:7.6 (701.5) 250,000년 전에, 여섯째이자 마지막 빙하 활동이 시작되었다. 북부 고지가 조금 가라앉기 시작한 사실이 있었는데도, 이때는 북부 빙원에서 가장 크게 눈이 쌓인 기간이었다.
61:7.7 (701.6) 이 침공에서 세 개의 큰 빙상은 하나의 광대한 얼음 덩어리로 뭉쳤고, 서부의 산들은 모두 이 빙하 활동에 참여했다. 이것은 북 아메리카에서 모든 얼음 침공 가운데 가장 컸다. 얼음은 그 압력 중심들로부터 2,400킬로미터가 넘게 남쪽으로 움직였고, 북 아메리카는 가장 낮은 기온을 체험하였다.
61:7.8 (701.7) 200,000년 전에, 마지막 빙하가 진행하는 동안에, 유란시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진행과 많이 상관되는 사건―루시퍼 반란―이 일어났다.
61:7.9 (701.8) 150,000년 전에 여섯째이자 마지막 빙하의 남쪽 연장 부분이 가장 멀리 미쳤고, 서부의 빙상은 막 카나다 경계를 넘었다. 중부는 칸사스ㆍ미조리ㆍ일리노이로 내려왔고, 동쪽 빙상은 남쪽으로 진행하고, 펜실바니아와 오하이오의 절반을 넘게 덮었다.
61:7.10 (701.9) 이것은 많은 곶, 곧 얼음 돌출부를 내보낸 빙하인데, 이 돌출부는 오늘날의 크고 작은 호수를 만들었다. 이 빙하가 물러갈 때, 북 아메리카의 그레이트 레이크스 체계가 만들어졌다. 유란시아의 지질학자들은 이 사태의 여러 단계를 아주 정확히 추론했는데, 다른 시점에서 이 물 덩어리가 처음에는 미시시피 유역으로 흘러 들어가고, 다음에 동쪽으로 헛슨 유역으로 갔으며, 마지막에는 북쪽 길을 경유하여 세인트 로렌스로 흘러갔다고 옳게 추측했다. 연결된 그레이트 레이크스 체계가 현재의 나이아가라 길로 물을 비우기 시작한 지는 3만 7천 년이 되었다.
61:7.11 (702.1) 100,000년 전에, 마지막 빙하가 물러나는 동안에, 광대한 극지의 빙상들이 비로소 형성되었고, 누적된 얼음의 중심이 상당히 북쪽으로 옮겨갔다. 미래에 육지가 올라오거나 대양의 해류가 수정되는 것과 상관 없이, 북극 지역이 계속 얼음으로 덮여 있는 한, 또 하나의 빙하기는 도저히 생길 수 없다.
61:7.12 (702.2) 이 마지막 빙하는 10만 년 동안 진행하고 있었고, 북쪽으로 후퇴를 마치는 데는 비슷한 길이의 시간이 필요했다. 온대 지방은 5만 년이 조금 넘게 얼음에서 해방된 채로 있었다.
61:7.13 (702.3) 가혹한 빙하기는 많은 종자를 없애버렸고, 수많은 다른 종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여러 종이 이리저리 옮겨다님으로 뼈저리게 시련을 받았는데, 이러한 이동은 나아가고 물러나는 얼음 때문에 필요하게 되었다. 땅에서 빙하를 왔다갔다 따라다닌 동물은 곰ㆍ들소ㆍ순록ㆍ사향소ㆍ맘모스ㆍ마스토돈이었다.
61:7.14 (702.4) 맘모스는 탁 트인 초원을 찾았지만, 마스토돈은 숲 지역의 아늑한 가장자리를 더 좋아했다. 늦은 시절까지 맘모스는 멕시코에서부터 카나다까지 흩어졌고, 시베리아 종류는 털로 덮이게 되었다. 백인이 나중에 들소를 죽여버린 것처럼, 마스토돈은 홍인에게 멸망될 때까지 북 아메리카에서 버티었다.
61:7.15 (702.5) 북 아메리카에서, 마지막 빙하 활동이 있던 동안에 말ㆍ타피르ㆍ라마, 그리고 칼이를 가진 호랑이가 멸종되었다. 그들 대신에 나무늘보ㆍ아마딜로ㆍ카피바라가 남 아메리카로부터 올라왔다.
61:7.16 (702.6) 전진하는 얼음 앞에 강제된 생명의 이동은 식물과 동물의 특별한 혼합을 일으켰으며, 마지막 얼음 침공이 물러나자, 북극의 식물과 동물의 많은 종자가 어떤 산봉우리들에 높이 버려졌고, 거기로 그들은 빙하로 인하여 멸망되는 것을 피하려고 여행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옮겨진 이 식물과 동물을 유럽의 알프스 산의 높은 데서, 그리고 북 아메리카의 아팔라치아 산맥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61:7.17 (702.7) 빙하 시대는 마지막으로 종결된 지질학 기간, 이른바 홍적세(洪績世)이고, 길이는 2백만 년이 넘었다.
61:7.18 (702.8) 35,000년 전은 행성의 극지를 제쳐놓고, 큰 빙하 시대의 종말을 표시한다. 이 시점은 또한 물질 아들딸의 도착과, 아담 섭리 시대의 시작에 가까우므로 중요하며, 이것은 대체로 충적세(沖積世), 곧 빙하 이후 시기가 시작되는 것에 해당한다.
61:7.19 (702.9) 포유동물 생명이 대두된 때부터 얼음이 물러갈 때까지, 그리고 유사(有史) 시대까지 계속 이어지는 이 이야기는, 거의 5천만 년에 걸친다. 이때는 마지막―현재―지질학 기간이고, 너희의 학자들에게는 신생대(新生代) 또는 근세 시대라고 알려져 있다.
62:0.1 (703.1) 약 1백만 년 전에, 태반이 있는 포유동물, 리머 종류의 초기 혈통으로부터, 세 번 연달아 갑자기 돌연 변이가 생김으로 인류의 직계 조상이 나타났다. 이 초기 리머의 지배적 요소는, 서부 집단, 곧 후기 아메리카 집단의 진화하는 생명 원형질로부터 유래하였다. 그러나 인간 조상의 직계 혈통을 세우기 전에, 이 혈통은 아프리카에서 진화한, 중부에서 심은 생명의 기여로 강화되었다. 동부 생명 집단은 인간종을 실제로 낳는 데 거의 또는 아무것도 이바지하지 않았다.
62:1.1 (703.2) 인간종의 족보에 관계되는 초기의 리머는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북부에서 당시에 살던, 이전에 존재하던 긴팔원숭이와 원숭이[1] [14] 부족들과 직접 관련이 없었고, 이들의 자손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이것들은 현대 종류 리머의 자손도 아니었으나, 양자(兩者)에 공통되지만, 멸종한 지 오래 된 조상으로부터 솟아났다.
62:1.2 (703.3) 이 초기의 리머는 서반구에서 진화했으나, 인류의 직계 포유동물 조상이 자리잡은 것은 남서 아시아에서, 중앙 생명 이식이 있었던 최초의 지역이지만 동부 지역의 경계에서 일어났다. 몇백만 년 전에 북 아메리카 종류의 리머는 베링 육지 다리 위로 서쪽으로 이주했고, 아시아 해안을 따라서 천천히 남서쪽으로 진행했다. 이주하는 이 부족들은 당시에 확대된 지중해, 그리고 인도 반도(半島)의 높아지는 산 지역 사이에 놓인, 기후 좋은 지역에 마침내 이르렀다. 인도 서쪽에 있는 이 땅에서 그들은 다른 유리한 혈통들과 합쳤고, 이렇게 인류의 족보를 세웠다.
62:1.3 (703.4) 시간이 흐르자, 산 지역의 남서쪽에서 인도의 바닷가는 차츰차츰 물에 잠겼고, 이 지역의 생명을 완전히 고립시켰다. 북쪽을 제외하고, 이 메소포타미아 반도, 곧 페르시아 반도에 이르거나 거기서부터 도망할 접근 경로가 하나도 없었고, 그 길은 빙하의 남향 침공으로 인하여 거듭해서 두절되었다. 당시에 거의 천국 같은 이 지역에서, 이 리머 종류 포유동물의 우수한 후손으로부터, 위대한 두 집단이 솟아났는데, 현대의 원숭이족과 오늘날의 인간종이다.
62:2.1 (703.5) 1백만 년보다 조금 더 전에, 메소포타미아의 시조 포유동물[2] [15], 곧 북 아메리카 리머 종류로서 태반이 있는 포유동물의 직계 후손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들은 활동적인 작은 생물이었고, 키가 거의 90센티미터였다. 버릇으로 뒷다리로 서서 걷지는 않았지만, 쉽게 똑바로 설 수 있었다. 이것들은 털이 많고, 재빠르고, 원숭이 같은 짓으로 종알거렸지만, 원숭이족과 달리, 고기를 먹었다. 상당히 쓸모 있는 움켜쥐는 엄지발가락 뿐 아니라, 다른 손가락과 마주 볼 수 있는 원시 엄지손가락을 가졌다. 이 시점 이후로, 인간 이전의 종들은 마주 볼 수 있는 엄지손가락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고, 한편 엄지발가락의 움켜쥐는 힘을 차츰 잃어버렸다. 후일의 원숭이족들은 움켜쥐는 엄지발가락을 간직했지만, 결코 인간 종류의 엄지를 개발하지 못했다.
62:2.2 (704.1) 이 시조 포유동물은 서너 살이 되었을 때 완전히 자랐고, 가능한 수명이 평균 약 20년이었다. 일반적으로, 자손들은 하나씩 생겼지만 쌍둥이가 때때로 있었다.
62:2.3 (704.2) 이 새 종의 구성원은 그때까지 땅에서 존재했던 어떤 동물 중에서도, 몸 크기에 비해 가장 큰 두뇌를 가졌다. 그들은 나중에 원시인의 특징을 나타냈던 많은 감정을 느끼고 수많은 본능을 공통으로 가졌으며, 호기심이 많았고 어떤 시도라도 성공했을 때 아주 우쭐해하였다. 배고픔과 성욕이 잘 발달되었고, 서투른 형태로 구애하고 짝을 선택하는 일에, 분명히 성(性)의 상대를 선택함을 드러냈다. 자기들의 친족을 방어하느라고 사납게 싸우곤 했고, 가족 관계가 아주 부드러웠으며, 자기를 낮추는 감각을 소유했는데, 이것은 부끄러움과 뉘우침에 가까웠다. 그들은 대단히 사랑이 깊었고, 짝에게 충성하는 것은 감동적이었지만, 환경이 그들을 떼어놓았을 때, 새 짝을 고르곤 했다.
62:2.4 (704.3) 키가 작았고, 자기들의 숲 거주지에 있는 위험을 깨닫는 날카로운 머리를 가졌기 때문에 특별한 두려움을 개발하여 그들이 현명한 예방 조치를 취하도록 이끌었으며, 이것은 생존에 아주 엄청나게 이바지하였다. 예를 들면, 그들은 높은 나무 꼭대기에 어설픈 오두막을 지었는데, 이것은 땅에서 살면서 생기는 많은 위험을 제거했다. 인류의 두려워하는 성향의 시작은 더 자세히 말하면 이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62:2.5 (704.4) 이 시조 포유동물은 이전에 나타냈던 것보다, 부족 정신이 더 발달되었다. 정말로 상당히 사교적이었지만, 그런데도 일상 생활에서 보통 일을 하다가 어떤 방법으로든 방해를 받았을 때 대단히 싸우기 좋아했고, 분노를 충분히 건드렸을 때 불같은 성미를 나타냈다. 그러나 호전적 성질은 좋은 목적에 쓰였다. 우수한 집단은 열등한 이웃과 서슴지 않고 전쟁하였고, 이처럼 선택적 생존으로 그 종은 점진적으로 개량되었다. 그들은 곧 이 지역의 작은 생물의 생활을 지배했고, 더 오래 되고 육식하지 않는, 원숭이 같은 부족들은 극소수가 살아남았다.
62:2.6 (704.5) 적극성이 있는 이 작은 동물은 메소포타미아 반도에서 1천 년이 넘도록 번식하고 퍼졌고, 신체의 종류와 일반 지능이 항상 개량되었다. 이 새로운 부족이 가장 높은 종류의 리머 조상에서 기원을 가진 뒤, 꼭 70대가 되자, 그 다음의 획기적 발전이 일어났다―유란시아에서 인간의 진화에서 다음으로 극히 중대한 걸음이 되는 조상이 갑자기 분화되어 생긴 것이다.
62:3.1 (704.6) 시조 포유동물의 생애에서 일찍, 이 우수한 한 쌍의 재빠른 생물이 살던 나무꼭대기 집에서 쌍둥이, 수놈 하나와 암놈 하나가 태어났다. 조상과 비교해서, 이들은 정말로 잘생긴 작은 생물이었다. 몸에 거의 털이 없었어도 따듯하고 온화한 기후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것은 아무런 신체의 장애가 아니었다.
62:3.2 (705.1) 이 아이들은 키가 120센티미터 조금 넘게 자랐다. 모든 면에서 부모보다 덩치가 컸고, 다리가 더 길고 팔이 더 짧았다. 거의 완전히 마주 볼 수 있는 엄지손가락을 가졌고, 이것은 거의 오늘날 인간의 엄지손가락만큼, 다양한 일에 잘 적응되었다. 그들은 똑바로 서서 걸었고, 후일의 인종만큼, 걷기에 거의 잘 적응된 발을 가졌다.
62:3.3 (705.2) 그들의 두뇌는 인간보다 열등하고 작았지만, 조상보다 대단히 우수하고, 조상과 비교해서 훨씬 컸다. 그 쌍둥이는 일찍부터 우수한 지능을 나타냈으며, 시조 포유동물의 종족 전체에서 곧 우두머리로서 인정받았고, 원시 형태의 사회 조직과 투박하지만 경제적 노동 분업을 정말로 시작했다. 이 오누이는 짝을 지었고, 곧 자신과 상당히 비슷한 아이들 21명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가졌다. 이들은 모두 키가 120센티미터 넘고, 모든 면에서 조상의 종보다 뛰어났다. 이 새 집단은 중간 포유동물의 핵심을 이루었다.
62:3.4 (705.3) 새롭고 우수한 이 집단의 수가 크게 늘어났을 때, 전쟁, 무자비한 전쟁이 터졌다. 그 끔찍한 싸움이 끝났을 때, 시조 포유동물 가운데 전에 있었던 조상 종은 하나도 살아남지 않았다. 그 종에서 수가 적지만 더 강력하고 머리 좋은 가지가 조상을 희생하고 살아남았다.
62:3.5 (705.4) 이제 거의 1만 5천 년 (6백 세대) 동안, 이 생물은 세상의 이 부분에서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지난 시대의 크고 사나운 동물이 모두 멸망했다. 이 지역에 토착인 큰 짐승들은 육식을 하지 않았고, 고양이과에서 큰 종자, 사자와 호랑이는 지구의 표면에서 특별히 보호받은 이 구석을 아직 침범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중간 포유동물은 용감해졌고, 세상에서 그들이 있던 구석을 전부 정복했다.
62:3.6 (705.5) 조상 종자(種子)와 비교해서, 중간 포유동물은 모든 면에서 더 나았다. 잠재 수명도 더 길었고, 약 25년이었다. 기초적 인간 특성 가운데 몇 가지가 이 새 종에서 나타났다. 조상이 전시한 타고난 성향 외에도, 이 중간 포유동물은 어떤 불쾌한 상황에서 메스꺼움을 보이는 능력이 있었다. 더 나아가서 분명한 저축 본능을 소유했다. 나중에 쓰려고 먹이를 감추곤 했고, 방어하고 공격하는 탄약으로서 적당한, 매끄럽고 동그란 자갈, 그리고 어떤 종류의 둥근 돌을 모으는 데 마음이 쏙 빠졌다.
62:3.7 (705.6) 이 중간 포유동물은, 나무 꼭대기 집과 터널이 여러 개 있는 지하 피난처를 지으면서 벌인 경쟁에서 보인 바와 같이, 분명한 집 짓는 성향을 처음으로 나타낸 동물이다. 나무로 된 피난처와 지하 피난처에서, 안전을 마련한 첫 포유동물 종자였다. 거주하는 장소로서 나무를 대체로 포기했고, 낮에는 땅에서 살고 밤에는 나무 꼭대기에서 잤다.
62:3.8 (705.7)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자연스러운 수의 증가는 결국 심각한 먹이 경쟁과 성(性)의 경쟁을 낳았고, 이 모든 것이 서로 죽이는 일련의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것은 그 종 전체를 거의 없애버렸다. 이 싸움은 1백명도 채 안 되는 한 집단이 살아남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평화가 다시 한 번 찾아왔고, 혼자 살아남은 이 부족은 나무 꼭대기 침실을 새로 짓고, 다시 한 번 정상이고 얼마큼 평화스러운 삶을 시작하였다.
62:3.9 (705.8) 얼마나 아슬아슬한 차이로 인간 이전의 조상이 때때로 멸종할 뻔했는가 너희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다. 어떤 기회에, 온 인류의 조상(祖上) 개구리가 5센티미터만 적게 팔짝 뛰었더라면, 진화 과정 전부가 뚜렷하게 바뀌었을 것이다. 시조 포유동물 종의 직계에 리머 같은 어머니는 새로운 상급 포유동물목(目)의 아버지를 낳기 전에, 겨우 털끝 만한 차이로 적어도 다섯 번이나 죽음을 모면했다. 그러나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아슬아슬했던 탈출은, 영장목 쌍둥이를 밴 어머니가 잠자고 있던 나무를 벼락이 때린 때였다. 중간 포유동물인 이 부모는 심하게 충격을 받고 크게 그슬렸다. 일곱 아이 가운데 셋은 하늘에서 떨어진 이 번개에 맞아 죽었다. 진화하는 이 동물은 미신에 사로잡힌 듯하였다. 나무꼭대기 집을 벼락 맞은 이 쌍은 정말로 중간 포유동물 종에서 진취적인 무리의 지도자였다. 그들의 본보기를 따라서, 머리가 더 깨인 가족들을 포함하여, 그 부족의 과반수가 이 장소로부터 약 3.2킬로미터 옮겨 가서, 나무꼭대기에 새 거처와 새 지상 피난처를―갑작스런 위험이 있을 때 임시 은둔할 장소를―짓기 시작했다.
62:3.10 (706.1) 집이 완성된 뒤에 얼마 안 있어, 수많은 투쟁을 겪은 노병인 이 쌍은 자랑스럽게도 쌍둥이의 부모가 되었다. 이 쌍둥이는 그때까지 세상에 일찍이 태어난 가운데 가장 흥미 있고 중요한 동물이었으니, 인간 이전의 진화에서 다음으로 중대한 걸음, 영장목(靈長目)에서 새로운 종의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62:3.11 (706.2) 이 영장목 쌍둥이가 태어난 것과 같은 때에, 또 한 쌍이―중간 포유동물 부족 가운데서 특히 우둔한 수놈과 암놈, 머리와 육체 면에서 열등한 쌍이―또한 쌍둥이를 낳았다. 이 쌍둥이는 수놈 하나와 암놈 하나였는데, 무엇을 정복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이것들은 오로지 먹이를 얻는 데 관심이 있었고, 고기를 먹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짐승을 잡는 데 전혀 흥미가 없었다. 이 우둔한 쌍둥이는 오늘날 원숭이족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그들의 후손은 기후가 온화하고 열대 과일이 풍부한, 좀더 따듯한 남쪽 지역을 찾았고, 긴팔원숭이와 원숭이의 시초 종류와 교배하고, 그 결과로 크게 저하된 가지들을 제쳐놓고, 거기서 그 시절과 상당히 비슷하게 살아왔다.
62:3.12 (706.3) 그래서 사람과 원숭이는 중간 포유동물로부터 솟아났으니까 관련이 있음을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그 족(族)에서 두 쌍의 쌍둥이가 같은 시대에 출생하고 나중에는 갈라졌다. 열등한 쌍은 현대 종류의 원숭이ㆍ비비ㆍ침판지ㆍ고릴라를 낳도록 정해졌고, 우수한 쌍은 바로 사람으로 진화한 상승 혈통을 계속하도록 운명이 정해졌다.
62:3.13 (706.4) 현대 인간과 원숭이는 같은 족과 종으로부터 솟아나기는 했어도, 같은 부모로부터 솟아나지는 않았다. 사람의 조상은 이 중간 포유동물 부족에서 선택된 잔재의 우수한 핏줄로부터 내려왔고, 한편 현대의 원숭이는 (어떤 선재하던 종류의 리머ㆍ긴팔원숭이ㆍ원숭이, 그리고 기타 원숭이 같은 동물을 제외하고) 이 중간 포유동물 집단에서 가장 열등한 쌍의 후손이다. 이 쌍은 그들 족속의 맹렬한 마지막 전투 중에, 먹이를 저장하는 지하 피난처에서 2주가 넘도록 숨었다가, 적대 행위가 완전히 끝난 뒤에 나타나서, 겨우 살아남았다.
62:4.1 (706.5) 우수한 쌍둥이, 수놈 하나와 암놈 하나가, 중간 포유동물 부족 가운데 두 마리의 지도자에게 태어났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이 동물 새끼들은 특별한 목(目)이었다. 그들은 부모보다도 몸에 털이 더욱 적었고, 아주 어릴 때 몸을 곧게 세우고 걷기를 고집했다. 그들의 조상은 언제나 뒷다리로 걷기를 배웠지만, 이 영장목(靈長目) 쌍둥이는 처음부터 똑바로 섰다. 그들은 키가 150센티미터 넘게 자랐고, 머리는 그 부족에서 남들과 비해서 더 크게 자랐다. 일찍부터 몸짓과 소리로 서로 교통하기를 배웠지만, 이 새로운 표현을 결코 그 종족에게 이해시킬 수 없었다.
62:4.2 (707.1) 약 14살이 되었을 때, 그들은 그 부족으로부터 도망쳤고, 가족을 일으키고 영장목의 새 종자를 세우기 위해서 서쪽으로 갔다. 이 새로운 생물을 영장목이라 일컫는 것이 아주 적절한데,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인간 가족의 직계이자 직접, 동물 조상이었기 때문이다.
62:4.3 (707.2) 이처럼 영장목은 메소포타미아 반도의 서해안에서 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 반도는 그때 남쪽 바다 속으로 쑥 튀어나왔다. 한편 지능이 덜하고 가까이 관련된 부족들은 반도의 정점 둘레에, 그리고 동쪽 해안선 위쪽에서 살았다.
62:4.4 (707.3) 영장목은 중간 포유동물인 전임자보다, 사람에 더 가깝고 동물과 거리가 더 멀었다. 이 새 종의 골격 비율은 원시 인류의 것과 대단히 비슷했다. 인간 종류의 손과 발이 충분히 발육되었으며, 이 생물은 걸을 수 있었고, 후일에 그들의 어느 인간 후손만큼이나 잘 뛸 수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나무에서 살기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예전의 조상들처럼, 겁이 많았기 때문에 밤에 안전 조치로서 계속해서 나무 꼭대기에 의존했다. 손을 더욱 사용한 것은 타고난 두뇌력을 개발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지만, 그들은 정말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머리를 아직 소유하지 않았다.
62:4.5 (707.4) 그 영장목의 감정적 성품은 비록 그 선조와 거의 다르지 않았어도, 그들의 모든 성향은 인간의 경향을 더 나타냈다. 정말로 그들은 빛나는 우수한 동물이었고, 약 10살에 성숙기에 이르고 약 40년의 자연 수명을 가졌다. 즉, 자연사했다면 그만큼 오래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옛 시절에는 자연사한 동물이 거의 없었는데, 생존 투쟁이 아주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62:4.6 (707.5) 이제, 시조 포유동물이 생긴 때부터 약 2만 1천 년에 걸쳐, 거의 9백 세대의 발전이 있은 뒤에, 영장목은 갑자기 놀라운 두 생물, 처음으로 참 인간들을 출산했다.
62:4.7 (707.6) 이와 같이 북 아메리카 리머 종류로부터 솟아나온 시조 포유동물이 중간 포유동물을 낳았고, 이 중간 포유동물은 다음에 우수한 영장목을 낳았으며, 이들은 원시 인류의 직계 선조가 되었다. 영장목 부족들은 인간의 진화에서 마지막으로 중대한 고리였으나, 5천 년도 채 되지 않아 이 특별한 부족들 가운데 한 마리도 살아남지 않았다.
62:5.1 (707.7) 서기 1934년부터 처음 두 인간이 출생하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꼭 993,419년이다.
62:5.2 (707.8) 놀랄 만한 이 두 생물은 참 인간이었다. 그들의 많은 조상처럼 완전한 인간 엄지손가락을 소유했고, 한편 오늘날의 인류처럼, 똑같이 완전한 발을 가졌다. 그들은 걷고 달리는 자요, 기어오르는 자가 아니었다. 엄지발가락의 움켜쥐는 기능이 없었다, 완전히 없었다. 위험 때문에 그들이 나무 꼭대기로 몰렸을 때, 그들은 마치 오늘날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기어올랐다. 곰처럼 나무의 몸통을 기어올라가곤 했고, 침판지나 고릴라처럼 나무가지를 잡고 몸을 휙 위로 던져, 올라가지 않았다.
62:5.3 (708.1) 이 처음 인간들(과 그 후손)은 12살에 완전히 성숙했고, 약 75년의 잠재 수명을 가졌다.
62:5.4 (708.2) 많은 새로운 감정이 이 인간 쌍둥이에게 일찍부터 나타났다. 그들은 물건과 기타 존재에 대하여 감탄하는 것을 체험했고, 상당한 허영심을 보였다. 그러나 감정의 발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진보는 새로운 집단의 느낌, 정말로 인간다운 느낌, 곧 경외ㆍ존경심ㆍ겸손, 그리고 원시 형태의 고마움조차도 포함하여, 예배하는 감정 집단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었다. 자연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연결되어, 두려움이 바야흐로 원시 종교를 낳으려 한다.
62:5.5 (708.3) 이 원시 인간 속에 그러한 인간다운 느낌이 나타났을 뿐 아니라, 상당히 진화된 훨씬 많은 감정이 또한 기초 형태로 있었다. 그들은 동정심ㆍ부끄러움ㆍ뉘우침을 미약하게 의식했고 사랑ㆍ미움ㆍ복수를 날카롭게 의식했으며, 또한 뚜렷한 질투하는 느낌에 쉽게 빠졌다.
62:5.6 (708.4) 이 처음 두 인간―쌍둥이―는 영장목 부모에게 커다란 시련이었다. 너무나 호기심이 많고 모험을 좋아해서, 그들은 여덟 살이 되기 전에 수많은 경우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실제로 일어난 바와 같이, 12 살이 되기까지, 그들은 숱하게 상처를 입었다.
62:5.7 (708.5) 아주 일찍부터 그들은 말로 뜻을 소통하기를 배웠다. 10살이 되자 그들은 개량된 신호와 거의 50 가지 관념을 가리키는 언어를 고안해냈고, 조상들의 투박한 의사(意思) 소통 기술을 크게 개선하고 확대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애써도, 그들은 부모에게 새로운 신호와 상징 가운데 겨우 몇 개만 가르칠 수 있었다.
62:5.8 (708.6) 약 9살이 되었을 때, 그들은 어느 화창한 날에, 강가를 따라 훌쩍 떠나서 중대한 회의를 가졌다. 유란시아에 주둔했던 하늘 지성 존재는 누구나, 바로 나도 포함해서, 이 대낮의 밀회에서 생긴 거래를 지켜보는 자로서, 거기에 있었다. 이 중요한 날에 그들은 서로 함께, 서로를 위하여 살자는 데 의견을 모았고, 이것은 그러한 일련의 합의에서 처음이었다. 이 합의는 마침내 그들이 열등한 동료 동물로부터 달아나서 북쪽으로 떠나자는 결정으로 이끌었고, 그들은 이처럼 인류의 기초를 세우게 되리라는 것을 조금도 깨닫지 못했다.
62:5.9 (708.7) 우리 모두가 작은 이 두 야만인이 계획하고 있는 것에 크게 관심을 가졌어도, 우리는 그들의 지성 작용을 통제할 힘이 없었다. 우리는 멋대로 그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허락할 수 있는 행성 활동의 한계 안에서, 우리 생명 운반자들은 모두, 동료들과 함께, 그 인간 쌍둥이를 북쪽으로, 털이 많고 얼마큼 나무에서 사는 그들의 족속으로부터 멀리 이끌려고 일을 꾸몄다. 그래서, 총명하게 선택하는 자신들의 논리에 따라서, 그 쌍둥이는 이주했고 우리의 감독 때문에 그들은 북쪽으로 한적한 곳으로 옮겨갔다. 거기서 그들은 영장목 부족의 열등한 친척들과 섞임으로 생물학상의 퇴화 가능성을 피했다.
62:5.10 (708.8) 고향 숲을 떠나기 얼마 전에, 긴팔원숭이의 공격이 있었을 때 그들은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는 그들만큼 지능이 없었지만, 자손에 대해서 높은 정도의 값진 포유동물의 애정을 가졌고, 어머니는 그 놀라운 쌍을 구하려는 노력으로 목숨을 두려움 없이 버렸다. 어머니의 희생도 헛되지 않았으니, 아버지가 지원군과 함께 도착해서 침략자들이 패주할 때까지 적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62:5.11 (709.1) 인류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서 이 젊은 쌍이 동료들을 버리고 난 직후에, 영장목인 그들의 아버지는 슬픔에 잠겼다―비통에 잠겼다. 다른 아이들이 먹을 것을 가져왔을 때도, 그는 먹기를 마다하였다. 눈부신 자손이 사라졌으니, 평범한 친구들 사이에서 삶은 살아볼 가치가 없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숲 속으로 헤매다녔고, 적대하는 긴팔원숭이들의 공격을 받고 맞아 죽었다.
62:6.1 (709.2) 행성의 바다에 우리가 생명의 원형질을 처음 심은 그날부터, 우리 생명 운반자들은 조심스럽게 기다리면서 오래 지키는 기간을 거쳤고, 처음으로 정말로 총명하고 의지를 가진 존재들이 나타난 것은 자연히 우리에게 큰 기쁨과 최고의 만족감을 안겨 주었다.
62:6.2 (709.3) 이 행성에 우리가 도착할 때 유란시아에 배치된 일곱 보조 지성 영의 작용을 지켜봄으로 우리는 그 쌍둥이의 정신적 발달을 구경하고 있었다. 행성 생명의 오랜 진화적 발전을 통해서 내내, 지칠 줄 모르는 이 지성 봉사자들은 그들이 점진적으로 우수한 동물의 연달아 커지는 두뇌력과 접촉하는 능력이 늘어나는 것을 항상 기록하였다.
62:6.3 (709.4) 원초적 동물 생명의 본능적 조건 반사 행위에서, 처음에는 오직 직관의 영이 활동할 수 있었다. 더 높은 종류가 분화함과 아울러, 이해의 영은 그러한 생물에게 여러 개념을 저절로 관련시키는 재주를 부여할 수 있었다. 나중에 우리는 용기의 영이 작용함을 지켜보았다. 진화하는 동물은 서툰 형태의 보호하는 자의식을 정말로 개발하였다. 포유동물 집단이 나타난 뒤에, 우리는 지식의 영이 더욱 큰 정도로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상급 포유동물의 진화는 상담의 영의 활동을 가져왔고, 그에 따라서 떼 짓는 본능이 성장하고 원시적 사회 발전이 시작되었다.
62:6.4 (709.5) 시조 포유동물, 중간 포유동물, 영장목을 통해서 계속, 처음 다섯 보조자의 봉사가 늘어나는 것을 우리는 점점 더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둘, 가장 높은 지성 봉사자들은 결코 유란시아 종류의 진화 지성 안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62:6.5 (709.6) 어느 날―그 쌍둥이가 10살쯤 되었을 때―예배의 영이 쌍둥이 중에서 여자의 지성, 그리고 조금 뒤에 남자의 지성과 처음 접촉했을 때 우리에게 쏟아진 기쁨을 상상해 보아라. 인간의 지성에 아주 가까운 무엇이 절정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그리고 약 1년 뒤에, 깊이 생각하고 고의(故意)로 결정을 내린 결과로, 그들이 집을 떠나서 북쪽으로 길을 가자고 드디어 결심했을 때, 그때 지혜의 영이 유란시아에서, 그리고 이제 인정받은 이 두 인간의 머리 속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62:6.6 (709.7) 일곱 보조 지성 영이 즉시, 새로운 체제로, 동원되었다. 우리는 기대에 부풀어 활기에 넘쳤고, 오랫동안 기다리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유란시아에서 의지(意志)를 가진 인간을 진화시키려고 오랜 세월에 걸쳐 기울인 노력이 열매 맺는 문턱에 우리가 왔음을 알았다.
62:7.1 (709.8) 우리는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 쌍둥이가 도망친 다음 날 한낮에, 유란시아의 행성 수신 초점에서 우주 회로 신호를 처음으로 시험하는 섬광이 번쩍 있었다. 물론 우리는 모두, 큰 사건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고 달아올랐다. 그러나 이 세계가 생명을 실험하는 장소였으니까, 행성에 있는 지적 생명을 인정받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정말로 어떻게 평가받을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애태우지 않았다. 그 쌍둥이가 달아난 뒤 사흘 째, 생명 운반자 집단이 떠나기 전에, 첫 행성 회로의 설립을 맡은 네바돈 천사장이 도착했다.
62:7.2 (710.1) 이날은 유란시아에서 중대한 날이었는데, 그날 우리의 작은 집단이 행성의 우주 통신극 둘레에 모여서, 행성에서 새로 세워진 지성 회로를 타고 구원자별로부터 온 첫 소식을 받았다. 그리고 천사장 군단의 우두머리가 받아쓰게 한 이 첫 소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62:7.3 (710.2) “유란시아에 있는 생명 운반자들에게―안부를 전한다! 유란시아에 의지(意志)의 위엄을 가진 지성이 존재한다는 신호를 네바돈 본부에 등록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우리는 구원자별ㆍ에덴시아ㆍ예루셈에서 크게 기뻐한다는 확신을 보낸다. 쌍둥이가 북쪽으로 달아나고, 자손을 열등한 조상과 떼어놓으려고, 의도하여 내린 결정을 주목하였다. 이것은 유란시아에서 머리―인간 종류의 머리―가 내린 첫 결정이며, 이를 인정하는 이 첫 소식이 전달되는 통신 회로를 자동으로 설립한다.”
62:7.4 (710.3) 이 새 회로를 타고 다음에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의 인사가 들어왔는데, 이것은 우리가 정착시킨 생명 형태에 우리가 간섭하는 것을 금하는 지시, 거주하는 생명 운반자들에게 주는 지시를 포함했다. 우리는 인간이 진보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행성의 진화 계획이 자연스럽게 풀려나가는 데 생명 운반자들이 언제라도 멋대로 기계적으로 간섭한다고 추측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우리는 특별한 방법으로 환경을 조종하고 생명 원형질을 보호하는 것이 허락되었는데, 특별하지만 온통 자연스러운 바로 이 감독이 중단되어야 했다.
62:7.5 (710.4) 최고자들이 말씀을 마치자마자, 당시에 사타니아 체계의 군주였던 루시퍼의 아름다운 말씀이 행성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 생명 운반자들은 그들의 우두머리의 환영하는 말씀을 들었고, 그로부터 예루셈으로 돌아가라는 허락을 받았다. 루시퍼로부터 전해 온 이 말씀은 유란시아에서 생명 운반자들이 한 일의 공식 승인을 포함했고, 사타니아 체계에서 확립된 대로 네바돈의 생명 원본들을 개선하려고 우리가 기울인 어떤 노력에 대해서도, 앞날에 아무런 비판을 받지 않도록 우리를 면제하였다.
62:7.6 (710.5) 구원자별과 에덴시아와 예루셈으로부터 전해 온 이 여러 말씀은 오랜 세월에 걸쳐 생명 운반자들이 행성을 감독하는 일이 끝났음을 정식으로 표시했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근무해 왔고, 오로지 일곱 보조 지성 영과 물리 통제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제, 의지(意志), 곧 예배하고 하늘 가기를 택할 수 있는 힘이 행성의 진화된 인간 속에서 나타났으니까, 우리는 할 일이 끝났음을 깨달았고 우리 집단은 길을 떠나려고 준비했다. 유란시아가 생명을 수정하는 세계이니까, 조수 12명과 함께 선임 생명 운반자 2명을 남겨놓는 것이 허락되었는데, 나는 이 집단의 일원으로 선택되었고, 그 뒤로 늘 유란시아에서 살아왔다.
62:7.7 (710.6) (서기 1934년부터) 꼭 993,408년 전에, 유란시아는 네바돈 우주에서 인간이 사는 행성으로서 공식으로 인정되었다. 생물학상의 진화는 다시 한 번, 의지의 위엄을 가진 인간 수준에 도달했다. 사타니아의 606번 행성에 사람이 도착한 것이다.
63:0.1 (711.1) 처음 두 인간이―쌍둥이가―11 살이었을 때, 실제 인간의 둘째 세대, 곧 처음으로 얻은 자식의 부모가 되기 전에, 유란시아는 사람이 사는 세계로서 등록되었다. 구원자별에서 전해 온 천사장의 말씀은 공식으로 행성을 인정하는 이 기회에, 다음 말씀으로 끝을 맺었다:
63:0.2 (711.2) “사람의 지성이 사타니아 606번에서 나타났는데, 새 민족의 이 부모를 안돈과 폰타라 부르겠다.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 우주의 아버지가 내리는 영 선물이 빨리 몸소 깃들도록 모든 천사장이 기도한다.”
63:0.3 (711.3) 안돈은 네바돈에서 주는 이름이요, “완전해지고 싶은 인간의 갈망을 나타내는, 아버지 같은 첫 사람”을 의미한다. 폰타는 “완전해지고 싶은 인간의 갈망을 나타내는, 아들 같은 첫 사람”을 의미한다. 안돈과 폰타는 자기 생각 조절자와 융합할 때 이름을 받기까지, 결코 이 두 이름을 알지 못했다. 유란시아에서 필사자로서 체류하는 동안 내내, 그들은 서로 손타안과 손타엔으로 불렀고, 손타안은 “어머니에게 사랑받음,” 손타엔은 “아버지에게 사랑받음”을 뜻한다. 자신들에게 이런 이름을 주었고, 그 뜻은 그들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함을 가리켰다.
63:1.1 (711.4) 여러 점에서, 안돈과 폰타는 지구의 표면에서 언젠가 살았던 인간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쌍이었다. 이 놀라운 쌍은 온 인류의 실제 부모였고, 많은 직계 후손보다 모든 면에서 우수했으며, 그들의 모든 조상, 가까운 조상 및 먼 조상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63:1.2 (711.5) 이 첫 인간 쌍의 부모는, 그들 부족의 평균과 거의 다른 듯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총명한 구성원 편에 속했고, 그 집단은 싸울 때 돌을 던지고 곤봉 쓰는 것을 처음으로 배운 집단이었다. 그들은 또한 날카로운 바늘 모양의 돌ㆍ부싯돌ㆍ뼈를 사용했다.
63:1.3 (711.6) 아직도 부모와 함께 사는 동안, 안돈은 곤봉 끝에 날카로운 부싯돌 조각을 묶었고, 이 목적으로 동물의 힘줄을 썼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그와 똑같이 모험을 좋아하고 호기심 많은 누이의 목숨을 구하는 데, 그는 적어도 열두 번이나 그러한 무기를 잘 써먹었으며, 그 누이는 어떤 탐험 여행에도 어김없이 그를 따라다녔다.
63:1.4 (711.7) 허다한 후일의 후손이 부끄럽게도, 뒤떨어진 원숭이족 사촌들과 짝지었다. 안돈과 폰타가 영장목 부족들로부터 달아나려고 한 결정은, 이들의 특징을 나타낸 저질의 지성보다 훨씬 높은 품질의 지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이 단순한 동물보다 더한 무엇이라는 어렴풋한 느낌은 인격을 소유했기 때문이었고, 깃드는 생각 조절자의 계심이 그런 느낌을 키웠다.
63:2.1 (712.1) 북쪽으로 달아나기로 결심한 뒤에, 안돈과 폰타는 한동안 두려움, 특히 아버지와 그 직계 가족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까 하는 두려움에 빠졌다. 그들은 적대하는 친척들의 공격을 받는 것을 상상했고, 그래서 벌써부터 시샘하는 부족원들의 손에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을 깨달았다. 어린이로서, 그 쌍둥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서로 붙어 다니면서 보냈고, 이 때문에 영장목 부족의 동물 사촌들 사이에서 결코 지나치게 평판이 좋은 적이 없었다. 동떨어진 아주 우수한 나무 집을 지은 것도 부족에서 그들의 위치를 개선하지 않았다.
63:2.2 (712.2) 나무 꼭대기 사이에 지은 이 새 집에서, 어느 날 밤, 사나운 폭풍에 잠이 깬 뒤에, 무서워서 다정한 포옹 속에 서로를 부둥켜안으면서, 그들은 부족의 거처와 나무 꼭대기의 집을 떠나려고 마침내, 완전히 마음을 먹었다.
63:2.3 (712.3) 그들은 북쪽으로 반나절 여행하는 거리에 어설픈 나무 꼭대기 은신처를 이미 마련해 놓았다. 이것은 고향 숲을 떠난 첫날에 그들이 지낼 비밀스럽고 안전한 은신처였다. 그 쌍둥이는 밤에 땅에서 있는 것을 죽는 듯이 싫어하는 영장목의 두려움을 가졌는데도, 밤이 오기 조금 전에 북쪽으로 여행 길을 떠나갔다. 이런 밤 여행을 시도하는 것은 보름달이 있더라도 비상한 용기가 필요했지만, 부족원과 친척들이 그들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그들을 추적할 가능성이 덜하다고 똑바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자정이 지난 지 얼마 안 되어, 그들은 앞서 준비해 놓은 회합 장소에 안전히 다다랐다.
63:2.4 (712.4) 북쪽으로 가는 여행 길에 노출된 부싯돌 매장물을 발견했고, 여러 용도에 알맞게 생긴 많은 돌을 발견하고, 앞날을 위하여 물자를 모았다. 이 부싯돌을 어떤 목적에 더 알맞게 쪼개려고 노력하면서, 안돈은 불이 튀는 부싯돌의 성질을 발견했고, 불을 지피려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기후가 아직도 쾌적했고, 불이 거의 필요 없었기 때문에, 그때 이 생각은 머리 속에 깊이 박히지 않았다.
63:2.5 (712.5) 그러나 하늘에서 가을 해는 낮아지고 있었고, 그들이 북쪽으로 여행함에 따라서, 밤은 더욱 서늘해졌다. 이미 그들은 몸을 따듯하게 하려고 동물의 가죽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집을 떠난 지 한 달이 되기 전에, 안돈은 그가 부싯돌로 불을 지필 수 있다 생각한다고 짝에게 뜻을 알렸다. 불을 지피는 데 부싯돌의 불꽃을 쓰려고 두 달 동안 애썼지만, 실패하기만 했다. 날마다 이 쌍은 부싯돌을 쳐서 나무에 불을 붙이려고 애쓰곤 했다. 마침내, 어느 날 저녁, 해가 질 무렵에 그 기술의 신비가 풀렸는데, 그때 폰타에게 근처의 나무에 기어 올라가서 버려진 한 새 둥지를 확보할 생각이 떠올랐다. 그 둥지는 말라서, 상당히 불붙기 쉬웠고, 따라서 불꽃이 떨어지는 순간, 당장 타올라서 큰 불덩이가 되었다. 성공한 데 너무나 놀라고 당황해서, 그들은 불을 거의 잃을 뻔했지만, 적당한 땔감을 더해서 불을 살렸고, 다음에 온 인류의 부모가 땔나무를 얻으려고 처음으로 탐색을 나섰다.
63:2.6 (712.6) 이것은 짧지만 파란 많은 그들의 생애에서 가장 기쁜 순간 중에 하나였다. 밤새 그들은 불이 타는 것을 구경하며 앉아 있었고, 기후에 대항하고, 따라서 그들의 발견이 남쪽 땅에서 사는 동물 친척들로부터 언제까지나 독립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사흘 동안 쉬고 불을 즐기고 난 뒤에, 다시 길을 떠났다.
63:2.7 (712.7) 안돈의 영장목 조상들은 번개로 붙은 불에 가끔 땔감을 더한 적이 있지만, 결코 이전에는 땅의 생물이 뜻대로 불을 지피는 방법을 소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 쌍둥이는 마른 이끼와 기타 물질이 새 둥지만큼 불이 잘 붙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63:3.1 (713.1) 쌍둥이가 집을 떠난 밤부터 첫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거의 2년이 되었다. 그들은 아이를 손탓이라고 불렀고, 손탓은 유란시아에서 출생할 때 보호하는 덮개에 싸인 첫 사람이었다. 인류가 시작되었고, 이 새로운 진화와 함께, 더욱 약해진 아기들을 적절히 돌보는 본능이 나타났으며, 이런 아기들은 순전히 동물인 종류와 대조해서 지적 서열의 지성이 점진적으로 발달하는 특징을 나타낸다.
63:3.2 (713.2) 안돈과 폰타는 아이들을 모두 19명 가졌고, 손자 손녀를 거의 50명, 증손을 6명 볼 때까지 살았다. 그 가족은 인접한 네 개의 바위 피난처, 곧 반 동굴에서 거주했는데, 그 중에 셋은 복도로 서로 연결되었고, 안돈의 아이들이 고안한 부싯돌 연장으로 부드러운 석회석에서 이 복도를 파냈다.
63:3.3 (713.3) 이 초기 안돈 사람들은 대단히 뚜렷한 씨족 정신을 드러냈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사냥했고, 결코 집터로부터 그다지 멀리 떠나지 않았다. 자기들이 고립되고 독특한 집단의 살아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떨어져 있기를 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듯했다. 이렇게 밀접한 인척 관계를 느끼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보조 영들이 지성에게 베푸는 봉사가 향상되었기 때문이었다.
63:3.4 (713.4) 안돈과 폰타는 씨족의 양육과 향상을 위하여 끊임없이 수고했다. 그들은 42살까지 살았고, 그 나이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툭 튀어나온 바위가 떨어져서 죽음을 당했다. 아이들 중에 다섯 명과 손자ㆍ손녀 11명이 함께 죽었고, 거의 스무 명의 후손이 심한 부상을 입었다.
63:3.5 (713.5) 부모가 죽고 나서, 발을 몹시 다쳤는데도, 손탓은 즉시 그 씨족의 지도권을 쥐었고, 그의 아내, 곧 맨 위 누이가 그를 유능하게 보조했다. 그들의 처음 과제는 죽은 부모ㆍ형제ㆍ자매ㆍ아이들을 효과적으로 무덤에 넣도록 돌을 굴려 올리는 것이었다. 이 매장하는 행위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죽은 뒤에 살아남는 것에 대한 그들의 관념은 아주 어렴풋하고 분명치 않았고, 대체로 그들의 환상적이고 다채로운 꿈 속의 생활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63:3.6 (713.6) 이 안돈과 폰타의 가족은 20 세대에 이르기까지 같이 지냈는데, 그때 식량 경쟁과 사회적 마찰이 합쳐서 비로소 가족이 흩어지게 되었다.
63:4.1 (713.7) 원시인―안돈 족속―은 까만 눈과 거무스레한 살갗, 누런 빛과 붉은 빛의 잡종과 같은 것이었다. 멜라닌은 모든 인간의 살갗에서 발견되는, 색을 입히는 물질이다. 그것은 최초의 안돈 살갗에 있는 물감이다. 일반적 겉모습과 피부 색깔로 보면 이 초기의 안돈 족속은 살아 있는 어느 다른 인간 종류보다, 오늘날의 에스키모를 더 비슷하게 닮았다. 그들은 추위를 막으려고 동물의 가죽을 처음으로 쓴 사람이었고, 오늘날의 인간보다 몸에 털이 거의 더 많지 않았다.
63:4.2 (713.8) 이 초기 인간의 동물 조상이 누렸던 부족 생활은 수많은 시초의 사회 모임에 전조(前兆)가 되었고, 이 존재들의 발달하는 감정과 늘어난 두뇌력과 함께, 즉시 사회 조직이 발달하고 씨족 노동의 새로운 분업이 생겼다. 그들은 몹시 흉내를 잘 냈지만, 놀이 본능은 조금만 발달되었고, 유머 감각이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원시인은 때때로 빙그레 웃었지만, 결코 마음껏 너털 웃음을 웃지는 않았다. 유머는 후일에 아담 종족이 물려준 유산(遺産)이었다. 이 초기 인간은 나중에 진화하는 많은 필사자처럼, 그렇게 아픔을 예민하게 느끼지 않았고 불쾌한 상황에 그다지 민감하지도 않았다. 출산은 폰타와 그 직계 후손에게 아프거나 괴로운 시련이 아니었다.
63:4.3 (714.1) 그들은 놀라운 부족이었다. 남자들은 제 짝과 자식들의 안전을 위하여 영웅처럼 싸우곤 했고, 여자들은 아이들에게 사랑으로 헌신했다. 그러나 그들의 애족심은 온전히 직계 씨족에게만 국한되었다. 그들은 가족에게 대단히 충성했고, 제 아이들을 방어하는 데 죽음도 서슴지 않았지만, 손자ㆍ손녀를 위하여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려 애쓰는 개념을 깨우칠 수 없었다. 종교의 탄생에 필수인 모든 감정이 이미 이 유란시아 원주민에게 있었는데도, 이타주의는 인간의 가슴 속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63:4.4 (714.2) 이 초기의 인간은 동무들에 대하여 감동적 애정, 그리고 서툴기는 하지만 진짜 우정 관념을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 열등한 부족들과 항상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전투 중에서, 이 원시인들 중에 하나가 부상한 동료 투사를 보호하고 구하려 애쓰면서 한 손으로 용감히 싸우는 것은 후일에 흔히 보는 광경이었다. 후일에 진화가 발전되면서 대단히 고귀하고 상당히 인간다운 많은 특성이 이 원시 민족들에게 전조(前兆)로 나타난 것은 감동이 된다.
63:4.5 (714.3) 최초의 안돈 씨족은 27대까지 끊어지지 않고 지도자의 핏줄을 유지했고, 그때 손탓의 직계 후손 가운데서 아무런 남자 자손이 나타나지 않자, 그 씨족에서 통치권을 지망하는 두 경쟁자가 주도권을 쥐려고 싸움에 들어갔다.
63:4.6 (714.4) 안돈 씨족들이 널리 퍼지기 전에, 일찍부터 서로 뜻을 교통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잘 발달된 언어가 진화했다. 이 언어는 줄곧 성장했으며, 활발하고 가만히 있지 못하고 호기심 많은 이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발명하고 환경에 적응했기 때문에, 거의 날마다 낱말이 더해졌다. 이 언어는 나중에 유색 인종들이 나타나기까지, 유란시아의 말, 초기 인간 가족의 언어가 되었다.
63:4.7 (714.5) 시간이 흐르자, 안돈 씨족들의 수가 늘어났고, 가족들의 접촉이 많아지면서 마찰과 오해를 낳았다. 이 민족들은 오로지 두 가지만 머리 속에 생각하고 있었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하여 사냥하는 것, 그리고 이웃 부족들의 손에서 실제로 어떤 불공평한 대우나 모욕을 받든지, 또는 받았다고 생각하여 복수하려고 싸우는 것이었다.
63:4.8 (714.6) 가족 싸움이 늘어났고, 부족 전쟁이 터졌으며, 유능하고 진보된 집단의 가장 좋은 성분 중에서 심각한 손실이 있었다. 이 손실 가운데 더러는 돌이킬 수 없었고, 능력과 지능을 가진 가장 귀중한 핏줄이 더러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이 초기 민족과 그 원시 문명은 씨족들이 벌인 이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하여 멸종의 위협을 받았다.
63:4.9 (714.7) 그러한 원시인을 오랫동안 평화롭게 살도록 유도하기는 불가능하다. 사람은 싸우는 동물의 자손이며, 가까이 붙어 있을 때 교양 없는 사람들은 서로를 짜증나게 하고 성나게 한다. 생명 운반자들은 진화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이 성향을 알며, 따라서 발전하는 인간들을 궁극에 적어도 뚜렷이 다르고 따로 된 세 민족, 그리고 더 흔하게 여섯 민족으로 분리하도록 주선한다.
63:5.1 (715.1) 초기의 안돈 종족들은 아시아로 아주 깊숙이 파고들지 않았고, 처음에는 아프리카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 시절에 지리(地理)는 그들에게 북쪽으로 가라고 가리켰고, 느리게 진행하는 셋째 빙하의 얼음에 방해를 받을 때까지, 이 사람들은 북쪽으로 멀리 멀리 떠나갔다.
63:5.2 (715.2) 이 광범위한 빙상이 프랑스와 영국 제도에 이르기 전에, 안돈과 폰타의 후손은 유럽으로 서쪽으로 밀고 나갔고, 그때 따듯했던 북해의 바다까지 이르는 큰 강들을 따라서, 따로 떨어진 촌락을 세운 것이 1천 개가 넘는다.
63:5.3 (715.3) 이 안돈 부족들은 프랑스에서 일찍부터 강가에서 정착한 사람들이었고, 솜 강을 따라서 수만 년 동안 살았다. 솜 강은 빙하에 영향을 받지 않은 강이었고, 그 시절에 오늘날과 비슷하게 바다로 흘러 들어갔다. 이것이 어째서 안돈 후손의 자취가 그렇게 많이 이 강 유역의 진로를 따라서 발견되는가 설명한다.
63:5.4 (715.4) 이 유란시아 토착민은 나무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비상시에 아직도 나무 꼭대기로 올라갔다. 강가를 따라서, 위에서 튀어나온 절벽의 보호 밑에, 그리고 접근하는 길이 잘 내려다보이고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는 산허리의 석굴 속에서 정규적으로 살았다. 그들은 이렇게 연기로 지나치게 불편을 겪지 않고서, 지핀 불로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정말로 동굴에서 사는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후일에 빙상이 나중에 남쪽으로 더 내려와서 그들의 후손을 동굴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숲 가장자리 가까이서, 그리고 냇물 가에서 야영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63:5.5 (715.5) 일부 보호된 거처를 감추는 데 그들은 아주 일찍부터 놀랍게 영리해졌고, 돌로 된 침실, 지붕이 둥근 돌 오두막을 만드는 데 큰 솜씨를 보였으며, 밤에는 그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러한 오두막의 입구는 앞에 돌을 굴려서 막았고, 이것은 이 목적을 위해서 지붕의 돌들이 마지막에 제자리에 놓여지기 전에 안에 들여 놓은 큰 돌이었다.
63:5.6 (715.6) 안돈 족속은 두려움이 없고 솜씨 있는 사냥꾼이었으며, 야생의 딸기와 어떤 나무 열매들을 제외하면 순전히 고기를 먹고 살았다. 안돈이 돌도끼를 발명한 것처럼, 그의 후손도 던지는 막대기와 작살을 일찍 발견하고 효과 있게 사용했다. 마침내 연장을 만드는 머리가 도구를 쓰는 손과 함께 활동하고 있었고, 이 시초 인간들은 부싯돌 연장을 다듬는 데 상당히 솜씨가 있게 되었다. 오늘날의 인간이 금ㆍ백금ㆍ다이아몬드를 찾아서 땅 끝까지 여행하는 것과 비슷하게, 그들은 부싯돌을 찾아서 멀리, 또 널리 여행했다.
63:5.7 (715.7) 여러 가지 다른 면에서 이 안돈 부족은 퇴보하는 후손들이 50만 년 동안 도달하지 못한 정도의 지능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 후손들은 여러 번, 불을 피우는 여러 가지 방법을 되풀이해서 다시 발견했다.
63:6.1 (715.8) 안돈 족속이 더욱 흩어짐에 따라서, 그 씨족들의 문화적ㆍ영적 상태는 오나가의 시절까지 거의 1만 년 동안 퇴보했다. 오나가는 이 부족들의 지도권을 쥐고 그들 사이에 평화를 가져왔고, 처음으로 모두가 “사람과 동물에게 숨을 주시는 분”을 예배하도록 이끌었다.
63:6.2 (716.1) 안돈의 철학은 매우 뒤범벅이 되어 있었고, 어쩌다가 불을 발견하여 크게 편안해졌기 때문에 불 숭배자가 될 뻔한 것을 겨우 모면했다. 그러나 논리는 자신이 발견한 불로부터 더 우수하고 더 경외감을 자아내는, 열과 빛의 근원인 태양으로 그를 인도하였다. 하지만 태양이 너무 멀리 있어서 그는 태양 숭배자가 되지는 않았다.
63:6.3 (716.2) 안돈 족속은 자연―천둥ㆍ번개ㆍ비ㆍ눈ㆍ우박ㆍ얼음―을 두려워하기를 일찍 배웠다. 그러나 이 초기 시절에 배고픔은 늘 되풀이되는 욕구였고, 그들이 대체로 동물을 먹고 살았으니까, 궁극에 일종의 동물 숭배를 발전시켰다. 안돈에게, 먹이가 되는 큰 동물은 창조의 힘과 오래 가는 권력의 상징이었다. 때때로 이 큰 여러 동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지정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특이한 동물이 한창 있을 때, 동굴 벽에 그 동물의 서투른 윤곽이 그려지곤 했고, 나중에는 예술이 계속 진보함에 따라서, 그러한 동물 신(神)이 여러 가지 장신구에 새겨졌다.
63:6.4 (716.3) 아주 일찍부터 안돈 종족은 부족이 숭배하는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을 삼가는 버릇을 길렀다. 젊은이들의 머리에 인상을 주기에 더 알맞게, 당장 그들은 경외하는 예식을 진화시켰는데, 이것은 이 존경받는 한 동물의 몸 근처에서 진행되었다. 더 나중에 그 후손이 이 원시적 연출을 더 공들인 희생 예식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것이 예배의 일부로서 희생물 바치기의 기원이다. 모세가 이 관념을 히브리인의 의식(儀式)에서 더 다듬었고, 이론으로는 이를 사도 바울이 “피를 흘림”으로 죄를 대속하는 교리로서 보존했다.
63:6.5 (716.4) 이 원시 인간의 생활에서 먹을 것이 온통 중요한 일이었다는 것은, 그들의 큰 선생 오나가가 이 단순한 사람들에게 가르친 기도에서 나타난다. 이 기도는 다음과 같다:
63:6.6 (716.5) “아, 생명의 숨이여, 오늘날 우리에게 나날의 양식을 주시고, 얼음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며, 숲에 있는 우리의 적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시고, 자비롭게 큰 저승으로 우리를 받으소서.”
63:6.7 (716.6) 오나가는 현재 카스피 바다 지역, 고대 지중해의 북쪽 바닷가에, 오반이라 부르는 촌락에서 본부를 유지했는데, 이곳은 메소포타미아 남쪽 땅으로부터 북쪽으로 이끄는 여행 길이 서쪽으로 도는 곳에, 머무르는 장소였다. 오반으로부터 그는 하나의 신의 교리와 그가 큰 저승이라 부른, 다음 세상의 개념을 전파하려고 먼 촌락들까지 선생들을 보냈다. 이 오나가의 밀사(密使)들은 세상에서 첫 선교사였다. 그들은 또한 처음으로 고기를 익히고, 먹을 것을 요리하는 데 불을 처음으로 정규적으로 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작대기 끝에, 또한 뜨거운 돌 위에 고기를 익혔고, 나중에는 큰 덩어리를 불 속에서 구웠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은 거의 전적으로 날 고기 먹는 버릇으로 돌아갔다.
63:6.8 (716.7) 오나가는 (서기 1934년부터) 983,323년 전에 태어났으며, 그는 69살이 되기까지 살았다. 행성 영주 이전 시절에 살던 이 큰 지성인이자 영적 지도자가 이룩한 업적의 기록은 이 원시 민족들을 참된 사회로 조직한, 가슴 떨리는 이야기이다. 그는 효율적 부족 정부를 세웠고, 그와 같은 것은 수천 년 동안 뒤잇는 세대들이 이룩하지 못했다. 두 번 다시, 행성 영주가 도착할 때까지, 그토록 높은 영적 문명은 땅에 없었다. 이 소박한 사람들은 원시적이기는 해도 진정한 종교를 가졌다. 그러나 질이 나빠지는 그들의 후손이 나중에 그 종교를 잃어버렸다.
63:6.9 (717.1) 안돈과 폰타는 여러 후손처럼 생각 조절자를 받았지만, 오나가의 시절이 되어서야 조절자와 수호 세라핌이 큰 떼를 지어 유란시아로 왔다. 이때는 정말로, 원시인의 황금기였다.
63:7.1 (717.2) 인류의 빛나는 창시자 안돈과 폰타는 행성 영주가 도착하고 나서 유란시아의 판결이 있을 때 인정을 받았으며, 시간이 되자 예루셈에서 시민 자격을 가지고, 저택 세계의 체제에서 솟아났다. 그들은 결코 유란시아로 돌아가도록 허락받은 적이 없어도, 그들이 세운 민족의 역사를 알고 있다. 그들은 칼리가스티아의 배반을 슬퍼했고, 아담의 실패 때문에 슬퍼했지만, 미가엘이 마지막으로 자신을 수여할 무대로 그들의 세계를 선택하였다는 발표를 듣고서 넘치게 기뻐했다.
63:7.2 (717.3) 예루셈에서 안돈과 폰타는 자신의 생각 조절자와 융합했고, 또한 손탓도 포함하여, 아이들 몇 명도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직계 후손에서도 대다수가 겨우 영 융합을 이룩하였다.
63:7.3 (717.4) 안돈과 폰타가 예루셈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 뒤에, 그들은 첫째 저택 세계로 돌아가서, 유란시아로부터 하늘의 구체들까지 가는 시간 순례자들을 환영하는 상물질계 성격자들과 함께 수고하도록 체계 군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이 근무에 무기한으로 배치되었다. 그들은 이 계시와 관련하여, 유란시아에 인사말을 보내려고 애썼지만, 현명하게도 이 요청은 거절되었다.
63:7.4 (717.5) 그리고 이것이 유란시아의 역사 전체에서 가장 영웅답고 황홀한 장(章), 온 인류의 독특한 부모가 진화하고, 사는 투쟁을 겪고, 죽고, 영원히 살아남은 것에 관한 이야기를 엮은 것이다.
64:0.1 (718.1) 이 글은 거의 1백만 년 전에 안돈과 폰타의 시절부터, 행성 영주의 시절을 거쳐 빙하 시대의 끝까지 살았던, 유란시아의 진화 종족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64:0.2 (718.2) 인류는 생긴 지 거의 1백만 년이 되었고, 그 이야기의 처음 절반은 대체로 유란시아에서 행성 영주 이전 시절에 해당한다. 인류 역사의 후반은 행성 영주가 도착하고 여섯 유색 인종이 나타날 때에 시작되며, 대체로 보통 구석기 시대로 여기는 기간에 해당한다.
64:1.1 (718.3) 원시인이 땅에서 진화하여 나타난 것은 1백만 년이 조금 못 되었고, 원시인은 활발한 체험을 겪었다. 원시인은 본능적으로 열등한 원숭이족과 섞이는 위험을 피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해수면에서 9,000미터 높이에 있는 건조한 티벳의 고지 때문에 원시인은 동쪽으로 이주할 수 없었다. 커진 지중해 때문에 남쪽이나 서쪽으로도 갈 수 없었는데, 지중해는 그때 동쪽으로 인도양까지 뻗었다. 그리고 북쪽으로 가면서 그는 전진하는 얼음에 부딪쳤다. 그러나 계속 이주하는 길이 얼음에 막혀 있을 때에도, 비록 흩어지는 부족들이 갈수록 적대하게 되었어도, 좀더 영리한 집단들은, 지능이 열등하고 나무에서 사는, 털 많은 사촌들 사이에서 살려고 남쪽으로 갈 생각을 결코 품지 않았다.
64:1.2 (718.4) 사람이 가장 일찍 품는 종교적 감정 가운데 많은 것이 이 지리적 상황에―오른쪽에 산, 왼쪽에는 바다, 앞에는 얼음에―갇힌 환경에서 그가 무력하다는 느낌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진취적인 이 안돈 족속은 남쪽에 나무에서 사는 열등한 친척들에게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64:1.3 (718.5) 이 안돈 족속은 인간이 아닌 친척들의 버릇과 달리, 숲을 피했다. 숲에서 사람은 언제나 저하되었고, 인간의 진화는 반드시 오직 탁 트인 높은 위도 지방에서 앞으로 나아갔다. 훤히 트인 땅에서 부딪치는 추위와 배고픔은 행동과 발명과 주변머리를 자극한다. 이 안돈 부족이 이 혹독한 북쪽 기후에서 어려움과 결핍을 견디면서 현재 인류의 개척자를 기르고 있는 동안, 뒤떨어진 사촌들은 그들이 일찍이 공통으로 기원을 가졌던 땅, 남쪽 열대의 숲에서 사치스럽게 살고 있었다.
64:1.4 (718.6) 이 사건들은 제3 빙하 시대에, 지리학자의 계산에 따르면, 첫째 빙하기에 일어났다. 처음 두 빙하는 북 유럽에서 널리 퍼지지 않았다.
64:1.5 (718.7) 빙하 시대의 대부분에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육지로 연결되었고, 한편 나중에 아프리카는 시실리 육지 다리로 유럽과 붙었다. 안돈 족속이 이주하던 때에, 서쪽에 잉글랜드로부터 유럽과 아시아를 거쳐, 동쪽에 자바까지 이어진 육로가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랄리아는 다시 고립되었고, 이것은 그 자체의 특이한 동물상의 발전을 더 강화했다.
64:1.6 (719.1) 950,000년 전에, 안돈과 폰타의 후손은 동쪽으로, 그리고 서쪽으로 멀리 옮겨 갔다. 서쪽으로, 그들은 유럽을 지나서 프랑스와 잉글랜드까지 갔다. 후일에 동쪽으로 자바까지 멀리 파고들었고, 거기서 그들의 뼈가―소위 자바인이―아주 최근에 발견되었으며, 그리고 나서 타스마니아까지 줄곧 여행했다.
64:1.7 (719.2) 서쪽으로 가는 집단은 동쪽으로 가는 집단보다, 같은 조상에서 비롯한 뒤떨어진 혈통에 적게 오염되었다. 동쪽 집단은 더딘 동물 사촌들과 아주 자유롭게 섞였다. 진취성이 없는 이 사람들은 남쪽으로 흘러갔고, 당장에 열등한 부족들과 짝지었다. 나중에, 그들의 잡종 후손의 커지는 무리가 북쪽으로 돌아와서, 급히 확장하는 안돈 종족과 짝지었고, 그러한 유감스러운 연합은 우수한 핏줄을 어김없이 저하시켰다. 숨을 주시는 이의 숭배를 유지하는 원시 촌락들이 자꾸 줄어들었다. 일찍 있었던 이 초기 문명은 절멸의 위협을 받았다.
64:1.8 (719.3) 유란시아에서는 늘 이와 같았다. 우수한 자가 열등한 자와 자유롭게 번식하도록 버려두는 어리석음 때문에, 큰 장래를 가진 문명이 잇달아 퇴화했고 마침내 소멸되었다.
64:2.1 (719.4) 900,000년 전에 안돈과 폰타의 예술과 오나가의 문화는 지구의 표면에서 사라지고 있었고, 문화ㆍ종교, 그리고 부싯돌 이용조차도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갔다.
64:2.2 (719.5) 이때는 큰 무리의 열등한 잡종 집단이 프랑스 남부로부터 잉글랜드로 도착하던 시절이었다. 이 부족들은 원숭이 같은 숲의 생물과 아주 널리 섞여서, 거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무 종교도 없었지만, 서툴게나마 부싯돌을 쓸 줄 알았고, 불을 지피기에 충분한 지능을 소유했다.
64:2.3 (719.6) 유럽에서 그들 뒤에 얼마큼 우수하고 자식을 많이 낳는 민족이 따라왔는데, 이들의 후손은 북쪽에 얼음으로부터 남쪽에서 알프스와 지중해까지 대륙 전체에 곧 퍼졌다. 이 부족들이 이른바 하이델버그 인종이다.
64:2.4 (719.7) 문화가 퇴폐하던 이 오랜 기간에, 잉글랜드의 폭스홀 종족, 그리고 인도의 북서쪽에 있던 바도난 부족들은, 안돈의 전통을 더러, 그리고 오나가 문화의 어떤 잔재를 계속해서 간직했다.
64:2.5 (719.8) 폭스홀 종족은 가장 서쪽에 있었고, 안돈 문화의 많은 것을 간직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또한 부싯돌 이용하는 지식을 보존했고, 이것을 후손, 곧 에스키모의 옛 조상에게 전해 주었다.
64:2.6 (719.9) 폭스홀 종족의 유물이 잉글랜드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았어도, 이 안돈 족속은 정말로 그 지역에서 처음으로 산 사람들이었다. 당시에 육지 다리는 아직도 프랑스를 잉글랜드와 연결했고, 안돈 후손이 살던 초기 촌락의 대부분이 그 옛날의 강과 바닷가를 따라서 자리잡았기 때문에, 이 촌락들은 이제 영국 해협과 북해의 바다 밑에 있다. 그러나 서넛은 아직도 잉글랜드 해안에 물 위에 나와 있다.
64:2.7 (720.1) 폭스홀 종족 가운데 좀더 머리가 있고 영적인 자들의 다수는 그들의 종족 우수성을 유지하고 원시 종교 관습을 지속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후일의 혈통과 나중에 섞임에 따라서, 후일에 얼음이 찾아온 뒤에 잉글랜드로부터 서쪽으로 계속 여행했고, 오늘날의 에스키모로서 살아남았다.
64:3.1 (720.2) 서쪽에 있는 폭스홀 종족 외에도, 분투하는 또 다른 문화 중심이 동쪽에 버티고 있었다. 이 집단은 안돈의 고손(高孫), 바도난의 부족 사이에, 인도의 북서 고지의 언덕 지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인간을 희생물로 한 번도 바치지 않은, 안돈의 유일한 후손이었다.
64:3.2 (720.3) 이 고지의 바도난 사람들은 널리 펼쳐진 고원을 차지했는데, 이 고원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시내들이 가로지르고 사냥감이 풍부했다. 티벳에 있는 그들의 어떤 사촌들처럼, 그들은 투박한 돌 오두막, 언덕가의 석굴, 그리고 반(半) 지하 통로에서 살았다.
64:3.3 (720.4) 북쪽의 부족들은 갈수록 더 얼음을 무서워하게 되었고, 그들이 기원이 있던 고향 가까이 살던 사람들은 물을 지나치게 무서워하게 되었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 반도가 차츰차츰 대양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았고, 그 반도가 몇 번이나 솟아났는데도, 바다의 위험과 이따금 바다에 잠기는 두려움에 관하여 이 원시 종족의 전통이 생겨났다. 이 두려움은, 강물이 넘치는 체험을 겪은 것과 함께, 어째서 그들이 살기에 안전한 장소인 고지(高地)를 찾았는가 설명한다.
64:3.4 (720.5) 바도난 종족의 동쪽에, 인도 북부의 시왈릭 산에서, 땅에서 어느 다른 부류보다, 사람과 여러 가지 인간 이전 집단 사이의 과도기 종류에 더 가까운 화석(化石)을 발견할 수 있다.
64:3.5 (720.6) 850,000년 전에 우수한 바도난 부족들은 열등하고 짐승 같은 이웃들을 몰살하는 전쟁을 시작했다. 1천 년 안에, 이 지역에 있던 어중간한 짐승 집단의 대부분이 죽음을 당하거나 남쪽 숲으로 밀려갔다. 열등한 자를 근절시키는 이 투쟁은 그 시대에 산에서 살던 부족들 가운데서 조금 개선을 가져왔다. 이 개량된 바도난 혈통의 혼합 후손들이, 겉보기에는 새로운 민족―네안데르탈 종족―으로서 활동 무대에 등장했다.
64:4.1 (720.7) 네안데르탈인은 뛰어난 용사였고, 널리 여행했다. 그들은 인도 북서쪽에 있는 고지의 중심들로부터 차츰차츰 서쪽으로 프랑스까지, 동쪽으로 중국까지, 또 밑으로 북 아프리카까지도 퍼졌다. 그들은 진화하는 유색 인종들이 이주할 때까지, 거의 50만 년 동안 세계를 지배했다.
64:4.2 (720.8) 800,000년 전에는 사냥감이 풍부했다. 코끼리와 하마 뿐 아니라, 여러 종의 사슴이 유럽을 돌아다녔다. 가축은 풍부했고, 말과 이리가 어디에나 있었다. 네안데르탈인은 뛰어난 사냥꾼이었고, 프랑스에 있는 부족들은 가장 성공한 사냥꾼에게 제일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주는 풍습을 처음으로 채택했다.
64:4.3 (721.1) 사슴은 이 네안데르탈 종족에게 상당히 쓸모가 있었고, 먹을거리와 옷으로서, 또 연장을 만드는 데 쓰였는데, 그들이 뿔과 뼈를 여러 용도에 썼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의 문화가 없었지만, 거의 안돈 시절의 수준에 이를 때까지 부싯돌 작업을 크게 개량했다. 나무 손잡이에 붙인 큰 부싯돌이 다시 쓰이게 되었고, 도끼와 곡괭이로 사용되었다.
64:4.4 (721.2) 750,000년 전에 넷째 빙상이 남쪽으로 한참 진행하였다. 개량된 도구로 네안데르탈인은 북쪽의 강을 덮는 얼음에 구멍을 뚫고, 이 공기 구멍으로 올라온 물고기를 창으로 찌를 수 있었다. 언제나 이 부족들은 다가오는 얼음 앞에서 물러났는데, 이때 얼음은 가장 널리 유럽을 침공했다.
64:4.5 (721.3) 이 시절에 시베리아 빙하는 가장 남쪽으로 행진하고 있었고, 원시 인간으로 하여금, 기원이 있던 땅을 향하여 도로, 남쪽으로 움직이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인간종은 아주 분화되어서, 진보하지 않는 원숭이 친척들과 더 섞일 위험이 크게 줄어들었다.
64:4.6 (721.4) 700,000년 전에 넷째 빙하, 유럽에서 가장 큰 빙하가 물러가고 있었다. 사람과 동물은 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기후는 서늘하고 축축했고, 원시인은 다시 유럽과 서 아시아에서 번성했다. 차츰차츰 숲은 아주 최근에 빙하에 덮였던 땅 위로 북쪽으로 퍼졌다.
64:4.7 (721.5) 포유동물 생명은 큰 빙하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 포유동물은 얼음과 알프스 사이에 놓인 좁은 지대에서 버티었고, 빙하가 물러나자, 다시 온 유럽에 재빨리 퍼졌다. 아프리카로부터, 시실리 육지 다리 위로, 곧은 엄니를 가진 코끼리, 코가 넓은 코뿔소, 하이에나, 아프리카 사자가 도착했고, 이 새로운 여러 동물은 칼이를 가진 호랑이와 하마를 거의 멸종시켰다.
64:4.8 (721.6) 650,000년 전에는 따듯한 기후가 계속되는 것이 보였다. 간빙기(間氷期)의 중간이 되자, 날씨가 무척 따듯해져서 알프스는 얼음과 눈을 거의 벗어 버렸다.
64:4.9 (721.7) 600,000년 전에 얼음은 그때 가장 북쪽의 후퇴점에 이르렀고, 몇천 년 동안 쉬고 난 뒤에, 다시 남쪽으로 다섯 번째 나들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5만 년 동안 기후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유럽의 사람과 동물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전기에 있던 약한 건조성이 줄어들었고, 알프스의 빙하는 강 유역까지 멀리 내려왔다.
64:4.10 (721.8) 550,000년 전에 진행하던 빙하는 다시 사람과 동물을 남쪽으로 밀었다. 그러나 이때 사람은 넓은 지대에서 넉넉히 여지가 있었는데, 이 지대는 북동쪽으로 아시아로 뻗고, 빙상과 당시에 지중해의 크게 확대된 흑해(黑海) 연장 부분 사이에 놓여 있었다.
64:4.11 (721.9) 넷째와 다섯째 빙하가 있던 시절에 네안데르탈 종족의 투박한 문화가 더욱 퍼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진보가 거의 없어서, 참으로 유란시아에서 새롭고 수정된 종류의 지적 생명을 만들려는 시도가 마치 실패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거의 25만 년 동안 이 원시 민족들은 떠돌아다니고, 사냥하고, 싸우며, 잠시 동안 어떤 방향으로 나아졌지만, 대체로, 그들의 우수한 안돈 조상과 비교해서 꾸준히 퇴보하고 있었다.
64:4.12 (721.10) 영적으로 어두웠던 이 시대에, 미신을 믿는 인류의 문화는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갔다. 네안데르탈인은 부끄러운 미신을 넘어서, 정말로 아무 종교가 없었다. 그들은 구름, 특히 엷거나 짙은 안개를 죽는 듯이 무서워했다. 자연력을 두려워하는 원시 종교가 차츰 개발되었고, 한편 풍부한 사냥감과 아울러, 연장의 발전이 이 사람들로 하여금 먹을거리에 대해 걱정을 덜하고 살 수 있게 만들자, 동물 숭배는 줄어들었다. 사냥감 쫓기를 여자로 보상하는 것은 사냥 솜씨를 크게 개선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새로운, 두려움의 종교는 자연력 뒤에 보이지 않는 세력을 달래려는 노력으로 이끌었고, 나중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자연력을 달래려고 인간을 바치기에 이르렀다. 유란시아에서 뒤처진 인종들은 사람을 잡아 바치는 이 끔찍한 풍습을 바로 20세기까지 지속시켰다.
64:4.13 (722.1) 이 초기 네안데르탈인은 도저히 태양 숭배자라고 부를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어둠을 무서워하며 살았고, 밤이 오는 것을 죽는 듯 두려워했다. 달이 조금 비치기만 하면, 그럭저럭 지냈다. 그러나 달이 어두울 때 그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달이 다시 비치도록 유인(誘引)하려는 노력으로 그들 가운데 표본이 되는 가장 나은 남자와 여자를 잡아 바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태양이 정기적으로 돌아올 것을 일찍이 배웠지만, 달은 오로지 그들이 동료인 부족 사람을 잡아 바쳤기 때문에 돌아오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 종족이 진보함에 따라서, 희생의 대상과 목적이 점진적으로 바뀌었지만, 종교 예식의 일부로서, 인간을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64:5.1 (722.2) 500,000년 전에, 인도의 북서 고지에서 살던 바도난 부족들은 또 다른 큰 종족 싸움에 말려들었다. 1백년이 넘도록 이 무자비한 전쟁이 격렬하게 계속되었고, 그 오랜 싸움이 끝났을 때, 겨우 약 1백 가구가 남았다. 그러나 이 생존자들은 당시에 살아 있던, 안돈과 폰타의 모든 후손 가운데 가장 영리하고 바람직한 자들이었다.
64:5.2 (722.3) 이제, 이 고지의 바도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롭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에 사람이 거하는 고지 지역의 동북부에서 살고 있던 한 남자와 여자가 갑자기 특별히 영리한 집단의 아이들을 낳기 시작했다. 이것이 산긱 가족이었고, 유란시아의 여섯 유색 인종 모두를 낳은 조상이었다.
64:5.3 (722.4) 이 산긱 아이들은 19명이었는데, 동료들보다 머리가 더 좋았을 뿐 아니라, 살갗이 태양 빛에 노출되고 나서 여러 색깔로 바뀌는 독특한 성향을 나타냈다. 이 아이들 19명 가운데, 다섯은 붉고, 둘은 오렌지 색이고, 넷은 누렇고, 둘은 풀빛이고, 넷은 푸르고, 둘은 남빛이었다. 이러한 색은 아이들이 나이가 들자 더욱 뚜렷해졌고, 이 젊은이들이 나중에 동료 부족 사람들과 짝지었을 때, 그 자손은 모두 산긱 부모의 피부색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64:5.4 (722.5) 이 무렵에 행성 영주가 도착한 것을 지적한 뒤에, 나는 이제 연대순의 이야기를 중지하고, 그동안에 우리는 유란시아의 여섯 산긱 인종을 따로 고려한다.
64:6.1 (722.6) 보통의 진화하는 행성에서는, 진화하는 여섯 유색 인종이 하나씩 나타난다. 홍인(紅人)이 먼저 진화하고, 뒤잇는 유색 인종들이 나타나기 전에,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을 돌아다닌다. 유란시아에서 모두 여섯 인종이 동시대에, 그것도 한 가족 안에서 태어난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64:6.2 (723.1) 유란시아에서 이전에 안돈 사람들이 나타난 것도 사타니아에서 새로운 일이었다. 지역 체계의 어느 다른 세계에서도, 의지를 가진 그런 사람 종족이 진화하는 유색 인종보다 먼저 진화하지 않았다.
64:6.3 (723.2) 1. 홍인. 이 민족은 인류에서 놀라운 종이요, 여러 면에서 안돈과 폰타보다 우수했다. 그들은 가장 총명한 집단이었고, 산긱 아이들 중에서 처음으로 부족의 문명과 정부를 개발하였다. 그들은 언제나 일부 일처(一夫一妻) 주의를 지켰다. 그들의 혼합된 후손들도 한 사람을 여럿과 짝짓는 일이 드물었다.
64:6.4 (723.3) 후일에 그들은 아시아에서 황인 형제들과 심각하고도 오래 끈 분쟁이 있었다. 그들은 일찍부터 활과 화살의 발명으로 도움을 받았지만, 불행하게도 자기들끼리 싸우는 조상의 성향을 많이 물려받았고, 이것이 그들을 너무 약화시켜서 황인 부족들은 아시아 대륙에서 그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64:6.5 (723.4) 약 8만 5천 년 전에, 홍인종의 비교적 순수한 나머지가 떼를 지어 북 아메리카로 건너갔는데, 그 뒤에 얼마 안 되어 베링 지협이 가라앉았고, 이렇게 그들을 고립시켰다. 아무 홍인도 아시아로 돌아온 적이 없다. 그러나 시베리아, 중국, 중앙 아시아, 인도, 유럽의 전역에 걸쳐서 그들은 다른 유색 인종들과 섞인 혈통을 많이 뒤에 남겼다.
64:6.6 (723.5) 아메리카로 건너갔을 때, 홍인은 초기에 기원을 가진 많은 가르침과 전통을 가지고 갔다. 홍인의 직계 조상은 행성 영주의 세계 본부가 후일에 벌인 활동과 전에 접촉이 있었다. 그러나 두 아메리카에 이르고 난 뒤 짧은 시일 안에, 홍인들은 이 가르침을 잃어버리기 시작했고, 지적ㆍ영적 문화가 크게 쇠퇴하였다. 오래지 않아, 이 사람들이 다시 자기들끼리 아주 맹렬히 싸움에 빠져서, 이 부족 전쟁은 비교적 순수한 홍인의 이 잔재가 급속히 멸망하게 만들 것처럼 보였다.
64:6.7 (723.6) 이렇게 크게 퇴보했기 때문에 홍인은 망한 듯했는데, 약 6만 5천 년 전에, 오나모나론톤이 지도자요 영적 구원자로서 나타났다. 그는 아메리카 홍인들 사이에서 일시적 평화를 가져왔고, “큰 영”의 숭배를 부활시켰다. 오나모나론톤은 96살까지 살았고, 칼리포니아의 큰 세쿼이아 나무들 사이에서 본부를 유지했다. 후일에 그의 자손의 다수가 블랙 푸트 인디안 사이에서 현대까지 내려왔다.
64:6.8 (723.7) 시간이 지나자, 오나모나론톤의 가르침은 어렴풋한 전통이 되어 버렸다. 서로 죽이는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고, 이 위대한 선생이 있던 시절 이후로, 결코 또 다른 지도자가 그들 사이에 보편적 평화를 가져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총명한 축에 속하는 혈통이 이 부족 싸움에서 자꾸 이슬처럼 사라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능하고 총명한 이 홍인들이 북 아메리카 대륙에서 위대한 문명을 세웠을 것이다.
64:6.9 (723.8) 중국에서 아메리카로 건너간 뒤에, 북부의 홍인은 백인에게 나중에 발견될 때까지, 다시는 결코 다른 세계 영향과 (에스키모를 빼고) 접촉을 가지지 않았다. 홍인이 후일에 아담 혈통과 섞여서 개량될 기회를 거의 완전히 놓쳐 버린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실제로 일어난 바와 같이, 홍인은 백인(白人)을 다스릴 수 없었고 기꺼이 백인을 섬기려 하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두 종족이 섞이지 않으면, 둘 가운데 하나가 망한다.
64:6.10 (723.9) 2. 주황인. 이 종족의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이나 세우려는 충동, 또 모든 것을 세우려는 특이한 충동이었고, 단지 어느 부족이 가장 큰 무더기를 만들 수 있는가 보려고 광대한 돌무더기를 쌓기까지 했다. 비록 진취적 민족은 아니었어도, 그들은 영주의 여러 학교로부터 큰 이익을 얻었고, 교육을 받으려고 대표들을 거기로 보냈다.
64:6.11 (724.1) 주황 민족은 지중해가 서쪽으로 물러감에 따라서, 처음으로 아프리카를 향해서 남쪽으로 해안선을 따라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아프리카에서 유리한 발판을 확보하지 못했고, 나중에 도착하는 녹색 종족에게 멸종이 되었다.
64:6.12 (724.2) 끝이 오기 전에, 이 민족은 많은 문화적, 영적 바탕을 잃었다. 그러나 이 불행한 민족의 뛰어난 지도자 포슌타가 현명하게 지휘한 결과로서 높은 생활이 크게 부흥되었으며, 그는 약 30만 년 전에 그들의 본부가 아마겟돈에 있었을 때, 그들을 보살폈다.
64:6.13 (724.3) 주황인과 녹색인 사이에 마지막 큰 싸움이 에집트의 나일 강 하류 유역 지방에서 일어났다. 오래 끈 이 전쟁은 거의 1백년 동안 수행되었고, 싸움이 끝났을 때 주황 민족의 극소수가 살아남았다. 이 사람들의 산산이 흩어진 잔재는 녹색인에게, 그리고 나중에 도착하는 남색인에게 흡수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종족으로서 주황인은 10만 년쯤 전에, 존재를 그쳤다.
64:6.14 (724.4) 3. 황인. 원시의 황인 부족들은 처음으로 사냥을 그만두고, 안정된 공동체를 세우고, 농업에 바탕을 둔 가정 생활을 개발했다. 지능 면에서 그들은 얼마큼 홍인보다 못했지만, 사회적으로, 집단으로, 종족의 문명을 육성하는 문제에서 모든 산긱 종족보다 우수한 것을 입증했다. 형제 정신을 개발했기 때문에, 여러 부족이 비교적 평화로운 가운데 함께 살기를 배웠고, 아시아로 차츰 확장함에 따라서, 그들 앞에 있는 홍인종을 몰아낼 수 있었다.
64:6.15 (724.5) 그들은 세상의 영적 본부의 영향이 미치는 곳으로부터 멀리 떠나갔고, 칼리가스티아 배반이 있고 나서 큰 어두움 속으로 떠내려갔다. 그러나 이 민족 사이에서 한 번 밝은 시대가 있었는데, 약 10만 년 전에 싱랑톤이 이 부족들의 지도권을 맡고서 “하나의 진리”를 숭배할 것을 선포하였다.
64:6.16 (724.6) 황인종이 비교적 큰 무리로 살아남은 것은 그들이 부족 사이에 평화를 지켰기 때문이다. 싱랑톤의 시절부터 현대 중국의 시기까지, 황인종은 유란시아의 민족들 중에서 평화로운 축에 속했다. 이 종족은 나중에 들여온 아담 혈통의 유산, 적지만 강력한 유산을 받았다.
64:6.17 (724.7) 4. 녹색인. 녹인종(綠人種)은 원시인 가운데 능력이 뒤떨어지는 집단 중에 하나였고, 그들은 다른 방향으로 널리 이주함으로 크게 약화되었다. 흩어지기 전에, 이 부족들은 약 35만 년 전에, 판탓의 지도 밑에서 크게 문화의 부흥을 겪었다.
64:6.18 (724.8) 녹인종은 크게 세 가지로 갈라졌다. 북쪽 부족은 황인종과 청인종에게 정복되고 노예가 되고 흡수되었다. 동쪽 집단은 그 시절의 인도 민족과 혼합되었고, 그 잔재가 아직도 그들 사이에 남아 있다. 남쪽의 민족은 아프리카로 들어갔고, 거기서 그들은 거의 똑같이 열등한 주황 사촌들을 멸망시켰다.
64:6.19 (724.9) 여러 면에서 이 두 집단은 이 싸움에서 비슷하게 겨루었는데, 이는 각자가 거인 계급의 혈통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들의 많은 지도자가 키가 240에서 270센티미터나 되었다. 이 녹색인의 거인 혈통은 이 남쪽 나라, 곧 에집트 국가에 대체로 국한되었다.
64:6.20 (725.1) 승리한 녹색인의 나머지는 나중에 남인종(藍人種)에게 흡수되었고, 이 남색인은 종족이 분산된 최초의 산긱 중심에서 마지막으로 발전하고 이주한 유색 민족이었다.
64:6.21 (725.2) 5. 청인. 청인은 위대한 민족이었다. 그들은 일찍이 창을 발명했고, 나중에 현대 문명에 쓰이는 많은 기술의 초보를 알아냈다. 청인은 황인이 가진 혼 및 감정과 함께, 홍인의 두뇌력을 소유했다. 아담의 후손은 후일에 지속한 어떤 유색 인종보다 이들을 더 좋아했다.
64:6.22 (725.3) 초기의 청인(靑人)은 칼리가스티아 영주의 참모진에 속한 선생들의 설복에 반응했고, 배반한 그 지도자들이 나중에 왜곡한 가르침 때문에, 큰 혼란에 빠졌다. 다른 원시 종족들처럼 그들은 칼리가스티아 배반으로 빚어진 소동으로부터 결코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성질을 결코 완전히 극복하지도 못했다.
64:6.23 (725.4) 칼리가스티아가 몰락한 뒤 약 5백년이 되어, 원시 종류의―그래도 참되고 유익한―배움과 종교의 부흥이 널리 일어났다. 올란도프가 청인종 사이에서 큰 선생이 되었고, 많은 부족을 “최고 우두머리”라는 이름 아래 참 하나님의 숭배로 돌아가도록 이끌었다. 후일에 이 종족이 아담 혈통과 혼합함으로 아주 크게 개선되는 시절까지, 이것은 청인이 이룩한 가장 큰 진보였다.
64:6.24 (725.5) 유럽의 구석기 시대에 관한 연구와 탐구는 대체로 이 고대의 청인의 연장ㆍ뼈ㆍ공예품을 발굴하는 것과 상관된다. 이른바 유란시아의 백인종은 이 청인의 후손이며, 처음에 황인과 홍인이 조금 섞여 수정되고, 나중에 보라종의 큰 부분을 동화함으로 크게 개선되었다.
64:6.25 (725.6) 6. 남인종. 홍인이 모든 산긱 종족 가운데 가장 진보한 것처럼, 흑인은 진취성이 가장 떨어졌다. 그들은 고지의 고향으로부터 마지막으로 이주하였다. 아프리카로 여행해서 그 대륙을 점령했고, 대대로 노예로서 강제로 옮겨졌을 때를 제외하고, 그 뒤로 늘 거기에 남아 있었다.
64:6.26 (725.7) 아프리카에서 고립되어서, 남색인 종족들은 홍인과 마찬가지로, 아담 혈통의 주입으로 얻었을 종족 향상을 거의 또는 전혀 얻지 못했다. 그들은 오르보논의 시절에 크게 영적 각성을 체험했고, 그때까지 아프리카에서 홀로 남인종은 거의 진보하지 않았다. 오르보논이 부르짖은 “신 중의 신”을 나중에 거의 완전히 잊어버렸지만, 알지 못하는 이를 숭배하는 소망을 전적으로 잃지는 않았다. 적어도 몇천 년 전까지 그들은 일종의 숭배를 유지했다.
64:6.27 (725.8) 뒤처져 있지만 이 남색인 종족들은 하늘의 권력 앞에서 어느 다른 지상 종족과 똑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
64:6.28 (725.9) 이 시대는 여러 종족 사이에서 격심한 투쟁이 있던 시대였으나, 행성 영주의 본부 가까이에서 좀더 깨우치고 최근에 가르침을 받은 여러 집단은 비교적 화평한 가운데 함께 살았다. 하지만 루시퍼 반란이 터짐으로 이 체제가 심각하게 혼란을 겪을 때까지, 세계 종족들은 아무런 큰 문화적 업적을 이룩하지 않았다.
64:6.29 (726.1) 이 다른 민족들은 모두, 때때로 문화적ㆍ영적 부흥을 체험하였다. 만산트는 행성 영주 이후 시대에 큰 선생이었다. 그러나 한 종족 전체에게 두드러지게 영향을 주고 영감을 불러일으킨 뛰어난 지도자와 선생들만 여기에 언급된다. 시간이 지나자, 다른 지역에서 작은 선생들이 많이 나타났다. 특히 칼리가스티아 반란이 터지고 나서 아담이 도착하기까지 길고도 어두운 시대에, 그들은 합쳐서, 문화 있는 문명이 완전히 붕괴하는 것을 방지했던 유익한 총합 영향력에 크게 이바지했다.
64:6.30 (726.2) 공간 세계에서 셋 또는 여섯 유색 인종을 진화시키는 계획에는 좋고도 충분한 이유가 많이 있다. 비록 유란시아 필사자가 이 모든 이유를 넉넉히 헤아릴 처지에 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다음을 지적하고 싶다:
64:6.31 (726.3) 1. 다양성은 자연 도태(淘汰)가 널리 작용하기 위하여, 우수한 혈통이 구별되어 살아남는 기회를 마련하는 데 필수이다.
64:6.32 (726.4) 2. 다른 민족들이 우수한 유전 인자(因子)를 보유할 때, 이 다양한 민족들을 서로 교배함으로 더 힘세고 나은 민족을 얻게 된다. 우수한 아담 혈통과 철저하게 섞임으로 하나의 합동 민족을 나중에 효과적으로 개량할 수 있었다면, 유란시아 종족들은 그렇게 일찍 섞임으로 이득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한 실험을 현재의 종족 조건 밑에서 유란시아에서 실행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파괴적일 것이다.
64:6.33 (726.5) 3. 종족을 다양화함으로 건전하게 경쟁을 자극한다.
64:6.34 (726.6) 4. 종족 지위의 차이, 그리고 각 종족 안에서 생기는 집단 지위의 차이는 인간의 관용과 이타주의가 발달하는 데 필수이다.
64:6.35 (726.7) 5. 진화 세계의 민족들이 비교적 높은 수준까지 영적으로 발전할 때까지, 인종의 동질성은 바람직하지 않다.
64:7.1 (726.8) 산긱 가족의 유색 후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그들이 인접한 영토로 확장할 기회를 찾는 동안, 다섯째 빙하, 지질학 계산으로는 셋째 빙하가, 유럽과 아시아 위로 남쪽을 향하여 한창 떠내려 가고 있었다. 이 초기의 유색 인종들은 그들이 태어난 빙하 시대의 혹독함과 곤경으로 특별히 단련을 받았다. 이 빙하는 아시아에서 아주 널리 퍼져서, 몇천 년 동안 동 아시아로 이주하는 길이 막혀 버렸다. 그리고 아라비아가 높아진 결과로서 지중해가 나중에 물러날 때까지, 그들이 아프리카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64:7.2 (726.9) 이처럼 거의 10만 년 동안 이 산긱 민족들은 산기슭 언덕 근처에 퍼졌고, 다른 민족들 사이에 특이하지만 자연스러운 싫은 감정이 일찍 나타났는데도, 얼마큼 서로 섞였다.
64:7.3 (726.10) 행성 영주 시절과 아담 시절 사이에, 인도는 지구의 표면에서 일찍이 발견된 바 가장 국제적 인구의 고향이 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혼합은 녹색인ㆍ주황인ㆍ남색인 종족을 아주 많이 품게 되었다. 이 2차 산긱 민족들은 남쪽 땅에서, 살기가 더 쉽고 편안함을 발견했고,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나중에 아프리카로 옮겨 갔다. 1차 산긱 민족들, 곧 우수한 민족들은 열대 지방을 피했다. 홍인은 북동쪽으로 아시아로 갔고, 황인이 그 뒤를 바짝 따라갔으며, 한편 청인은 북서쪽으로 유럽으로 이주했다.
64:7.4 (727.1) 홍인은 후퇴하는 얼음의 발꿈치를 좇아서, 일찍 북동쪽으로 옮겨 가기 시작했고, 인도의 고지 둘레를 지나면서, 아시아의 동북부를 모두 차지했다. 그들 뒤에 황인 부족들이 바짝 따라갔고, 이들은 나중에 홍인을 아시아로부터 북 아메리카로 몰아냈다.
64:7.5 (727.2) 비교적 순수한 핏줄의 홍인종 잔재가 아시아를 버렸을 때 11 부족이 있었는데, 그들은 7천명이 조금 넘는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이었다. 이 부족들에게 혼합된 조상을 가진, 작은 세 집단이 따라왔는데, 이 중에 제일 큰 것은 주황인과 청인 종족의 조합이었다. 이 세 집단은 결코 홍인과 완전히 친하지 않았고, 남쪽으로 멕시코와 중앙 아메리카로 일찍 떠나갔으며, 거기서 그들은 나중에 황인과 홍인의 작은 혼합 집단과 합쳐졌다. 이 민족들은 모두 서로 결혼했고, 융합된 새 민족을 세웠으며, 이 민족은 순수한 핏줄의 홍인보다 싸움을 훨씬 덜 좋아했다. 5천 년 안에 이 융합된 민족은 세 집단으로 나뉘었고, 멕시코, 중앙 아메리카, 남 아메리카에서 각자 문명을 세웠다. 남 아메리카의 가지는 아담의 피를 약간 받기는 했다.
64:7.6 (727.3) 어느 정도까지, 초기의 홍인과 황인은 아시아에서 섞였고, 이 연합으로 생긴 자손은 동쪽으로, 그리고 남쪽 바닷가를 따라서 떠나갔는데, 결국에는, 빠르게 늘어나는 황인종에게 반도와 근처 바다의 섬들로 밀려났다. 그들은 오늘날의 갈색인이다.
64:7.7 (727.4) 황인종은 계속해서 동 아시아의 중부 지역을 차지했다. 모두 여섯 유색 인종 가운데 그들은 가장 큰 무리로 살아남았다. 황인들이 이따금 종족 전쟁에 말려들기는 했지만 홍인ㆍ녹색인ㆍ주황인이 벌인 것처럼, 그렇게 끊임없이 무자비하게 멸종하는 전쟁을 수행하지 않았다. 이 세 종족은 그들의 적인 다른 종족들에게 마침내 거의 전멸되기 전에, 실질적으로 자체를 파괴했다.
64:7.8 (727.5) 다섯째 빙하가 유럽에서 남쪽으로 그리 멀리 뻗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산긱 민족들이 북서쪽으로 이주하는 길이 어느 정도 열렸다. 얼음이 물러가자 몇몇 다른 작은 종족 집단과 함께, 청인(靑人)은 안돈 부족들이 갔던 옛 길을 따라서 서쪽으로 옮겨 갔다. 그들은 연달아 파도를 이루어 유럽에 쳐들어갔고, 그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64:7.9 (727.6) 유럽에서 그들은 초기에 공통으로 조상인 안돈의 네안데르탈 후손과 마주쳤다. 예전에 있던 이 유럽의 네안데르탈인은 빙하로 말미암아 남쪽과 동쪽으로 밀려갔고, 이처럼 산긱 부족들의 침공하는 사촌들을 속히 만나고 그들을 흡수할 위치에 있었다.
64:7.10 (727.7) 일반적으로, 그리고 첫째로, 산긱 부족들은 초기에 평야에 살던 안돈 족속의 퇴보된 후손보다 더 영리했고, 대부분의 면에서 훨씬 우수했다. 이 산긱 부족들이 네안데르탈 종족과 섞인 것은 더 오래 된 종족을 즉시 개선되게 만들었다. 이 산긱 피의 주입, 특히 청인의 피는 네안데르탈 종족을 두드러지게 개선하였고, 이것은 동쪽으로부터 유럽을 휩쓴, 갈수록 더 영리한 부족들이 잇달아 파도처럼 밀려온 데서 나타났다.
64:7.11 (727.8) 뒤따르는 간빙기(間氷期)에, 이 새 네안데르탈 종족은 잉글랜드로부터 인도까지 뻗었다. 고대의 페르시아 반도에 있던 청인의 나머지는 나중에 어떤 다른 사람들, 주로 황인과 섞였고, 그 결과로 생긴 혼합 종족을 나중에 아담의 보라 종족이 얼마큼 개량하였으며, 이들은 현대의 아랍 사람, 거무스레한 살빛의 유목 부족으로서 지속해 왔다.
64:7.12 (728.1) 현대 민족들의 산긱 조상을 확인하려고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나중에 아담의 피가 섞임으로, 종족의 혈통이 후일에 개량되었다는 것을 계산에 넣어야 한다.
64:7.13 (728.2) 우수한 종족들은 북쪽 기후, 곧 온대 기후를 찾았으며, 한편 주황ㆍ녹색ㆍ남색 종족들은 새로 높아진 육지 다리 위로, 연달아 아프리카로 몰려갔고, 그 다리는 서쪽으로 물러가는 지중해를 인도양으로부터 떼어냈다.
64:7.14 (728.3) 종족 기원의 중심으로부터 마지막으로 이주한 산긱 종족은 남색인(藍色人)이었다. 녹색인이 에집트에서 주황인을 죽이고, 그렇게 하면서 자체를 크게 약화시키고 있을 무렵에, 해안을 따라서 팔레스타인을 통해서 남쪽으로 흑인의 큰 집단 이동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신체가 튼튼한 이 남색인 종족들이 에집트에 넘쳤을 때, 그들은 순전히 인구의 위력으로 녹색인의 뿌리를 뽑아버렸다. 이 남인종은 주황인의 잔재와 녹색인 혈통의 상당수를 흡수했고, 어떤 남색인 부족들은 이 종족 혼합으로 말미암아 상당히 개선되었다.
64:7.15 (728.4) 그래서 처음에는 주황인이, 다음에 녹색인, 그 뒤에 남색인(흑인)이, 더 후에는 남색인, 청인, 그리고 수정된 녹색인의 잡종 민족이 에집트를 정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담이 도착하기 오래 전에, 유럽의 청인과 아라비아의 혼합 종족은 남인종을 에집트로부터, 아프리카 대륙에서 멀리 남쪽으로 몰아냈다.
64:7.16 (728.5) 산긱 민족의 이동이 막을 내리자, 녹색인과 주황인 종족은 사라져 버렸고, 홍인은 북 아메리카, 황인은 동 아시아, 청인은 유럽을 지키고 있으며, 남인종은 아프리카로 이끌려 갔다. 인도는 혼합된 2차 산긱 종족들을 품고 있으며, 홍인과 황인이 혼합된 갈색인은 아시아 해안에서 떨어진 섬들을 지키고 있다. 오히려 우수한 잠재성을 가진 혼합 민족이 남 아메리카의 고지를 차지하고 있다. 더 순수한 안돈 족속은 유럽의 가장 북쪽 지역에서, 그리고 아이스랜드와 그린랜드와 북 아메리카의 동북부에서 산다.
64:7.17 (728.6) 빙하(氷河)가 가장 멀리 진행한 기간에, 안돈 부족들의 맨 서쪽 가지는 바다로 거의 밀려가게 되었다. 그들은 오늘날의 잉글란드 섬 남쪽의 좁고 길쭉한 땅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여섯째이자 마지막 빙하가 마침내 나타났을 때 그들을 바다로 뛰어들도록 몬 것은 되풀이된 이 빙하의 진행에 관한 전통이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바다로 모험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배를 만들고, 그들이 바라건대 무서운 얼음 침공이 없을까 싶은 새 땅을 찾아 나섰다. 그들 가운데 더러는 아이스랜드에, 더러는 그린랜드에 도착했지만, 대다수는 망망한 바다에서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서 죽었다.
64:7.18 (728.7) 8만 년 조금 더 전에, 홍인이 북 아메리카의 북서쪽으로 들어간 뒤에 얼마 안 되어, 북극의 바다가 얼어붙고 그린랜드에서 지역 빙원(氷原)이 진행한 것은, 유란시아 토착민의 이 에스키모 후손을 더 좋은 땅, 새 집을 찾도록 몰아냈다. 그리고 그들은 그때 그린랜드를 북 아메리카의 동북부의 땅 덩어리로부터 떼어 낸 좁은 해협을 안전히 건너서 성공했다. 그들은 홍인이 알라스카에 도착한 뒤 약 2천 1백년쯤 되어 그 대륙에 이르렀다. 그 뒤에 청인의 혼합된 혈통 가운데 더러가 서쪽으로 여행했고, 후일의 에스키모들과 섞였으며, 이 연합은 에스키모 부족들에게 조금 유익했다.
64:7.19 (728.8) 약 5천 년 전에 헛슨 만의 남동쪽 해안가에서, 인디안 부족과 외로운 에스키모 무리가 어쩌다가 만나는 일이 생겼다. 이 두 부족은 서로 의사를 전하기가 어려움을 발견했지만, 금방 그들은 서로 결혼했고, 그 결과로 이 에스키모들은 결국 더 수가 많은 홍인에게 흡수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약 1천 년 전에 백인이 처음으로 대서양 해안에 어쩌다가 상륙할 때까지, 북 아메리카 홍인이 어느 다른 인간 혈통과 가진 유일한 접촉이다.
64:7.20 (729.1) 이 초기 시절의 투쟁은 용기와 용맹, 아니 영웅심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너희의 초기 조상이 가졌던 견실하고 튼튼한 특성 가운데 많은 것이 후일 종족들한테서 사라진 것을 우리는 모두 섭섭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진보하는 문명이 제공하는 많은 세련된 것의 가치를 이해하지만, 너희의 옛 조상들이 보인 훌륭한 내구력과 뛰어난 헌신이 없어 서운히 여기며, 이것은 때때로 위대하고 숭고한 정신에 가까웠다.
65:0.1 (730.1) 기초적인 진화하는 물질 생명―지성 이전의 생명―은 물리 통제사들이 형성한 것이요, 인가받은 생명 운반자들의 활발한 봉사와 관련하여, 일곱 으뜸 영이 생명을 나누어 주는 봉사이다. 이 세 가지 창조성이 나란히 활동하는 결과로서 유기체의 물리적 지성 능력이 개발되며, 이것은 바깥 환경의 자극에 대하여, 나중에는 내부의 자극, 곧 유기체 지성 자체에서 비롯하는 영향력에 대하여, 지적으로 반응하는 물질적 작용이다.
65:0.2 (730.2) 그러면 생명의 생산과 진화에는 세 가지 뚜렷하게 다른 수준이 있다:
65:0.3 (730.3) 1. 물리적 에너지 분야―지성 능력의 생산.
65:0.4 (730.4) 2. 보조 영들이 베푸는 지성 봉사―이것은 영 능력에 영향을 미친다.
65:0.5 (730.5) 3. 필사 지성에게 영을 부여하는 것―이것은 궁극에 생각 조절자의 수여를 초래한다.
65:0.6 (730.6) 기계적이고 가르칠 수 없는 수준에서, 환경에 대한 유기체의 반응은 물리 통제자의 분야에 속한다. 보조 지성 영들은 적응하는 지성, 곧 기계적이 아니고 가르칠 수 있는 종류의 지성―체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유기체의 반응 작용―을 활성화하고 규제한다. 영 보조자들이 이렇게 지성 잠재력을 조종하는 것 같이, 생명 운반자들은 인간의 의지가―하나님을 아는 능력과 그를 예배하려는 힘이―나타나기 바로 전까지, 상당한 재량권을 가지고 진화 과정에서 환경의 측면을 통제한다.
65:0.7 (730.7) 생명 운반자, 물리 통제자, 영 보조자의 통합된 활동이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유기체의 진화 과정을 조절한다. 이것이 어째서 진화가―유란시아나 다른 곳에서―반드시 의도하여 생긴 것이고 결코 우연이 아닌가 하는 이유이다.
65:1.1 (730.8) 생명 운반자들은 성격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잠재력을 부여받았고, 오직 극소수 계급의 생물이 이 힘을 소유한다. 이 지역 우주 아들은 세 가지 다른 존재 단계에서 활동하는 능력이 있다. 그들은 보통 중간 단계의 아들로서 임무를 수행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기원을 가진 상태이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 단계에서는 도저히 생명 운반자가 물리적 에너지와 물질 입자를 살아서 존재하는 단위로 찍어 내는 자로서, 전기ㆍ화학 분야에서 활동할 수 없다.
65:1.2 (730.9) 생명 운반자들은 다음 세 수준에서 활동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한다:
65:1.3 (730.10) 1. 물리적인 전기ㆍ화학 수준.
65:1.6 (731.1) 생명 운반자들이 생명을 심는 데 착수하려고 준비할 때, 그러한 사업을 위한 장소를 고르고 난 뒤에, 그들은 생명 운반자의 변형을 담당하는 천사장 위원회를 소집한다. 이 집단은 물리 통제자와 그 동료들을 포함하여, 10 계급의 다양한 성격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천사장의 우두머리가 이 집단을 주관하며, 그는 이 자격으로 가브리엘의 명령에 따라서, 그리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허락을 받아서 행동한다. 이 존재들이 알맞게 회로가 연결되었을 때, 그들은 생명 운반자들 안에서 그들로 하여금 물리적인 전기ㆍ화학 수준에서 즉시 활동할 수 있게 만드는 그러한 수정을 가한다.
65:1.7 (731.2) 생명 원본들이 작성되고 물질 조직이 알맞게 완성된 뒤에, 생명을 퍼뜨리는 데 관계된 초물질 세력이 당장에 활발하게 되고, 생명이 존재한다. 이렇게 되고 나서, 생명 운반자들은 당장에 그들의 정상적 중간 단계의 성격 존재로 돌아가며, 비록 새로운 형태의 살아 있는 물질을 유기체로 만드는―창조―하는 능력을 다 잃어 버려도, 그 상태에서 그들은 살아 있는 단위들을 조종하고, 진화하는 유기체를 움직일 수 있다.
65:1.8 (731.3) 유기체의 진화가 어떤 과정을 다 밟고 나서, 인간 종류의 자유 의지가 가장 높은 진화 유기체에서 나타난 뒤에, 생명 운반자들은 그 행성을 떠나든지, 아니면 포기 서약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유기체의 진화 과정에 더 영향을 주려는 어떤 시도도 삼가겠다고 서약해야 한다. 새로이 진화된, 의지를 가진 사람을 돌보는 책임이 맡겨질 자들에게 앞날에 조언자로서 그 행성에서 남아 있고 싶어 하는 생명 운반자들이 자청해서 그런 맹세를 했을 때, 12명으로 구성된 한 위원회가 소집되는데, 체계 군주의 권한을 받아서, 그리고 가브리엘의 허락을 얻어 행동하는, 저녁별들의 우두머리가 이 위원회를 주관한다. 당장에 이 생명 운반자들은 셋째 단계의 성격 존재―준영 수준의 존재―로 변화된다. 나는 유란시아에서 이 셋째 단계의 존재에서, 안돈과 폰타의 시절 이후로 늘 활동해 왔다.
65:1.9 (731.4) 우주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될 수 있을 때, 온전히 영이 되는 가능한 제4 단계의 존재가 되기를 우리는 기대한다. 그러나 바람직한 이 상급 지위를 우리가 무슨 기법으로 이룰 수 있는지 우리에게 결코 밝혀진 적이 없다.
65:2.1 (731.5) 해초에서 비롯하여 지상 세계의 주인이 되기까지 사람이 올라간 이야기는 정말로 생물학상의 투쟁을 겪고 지성이 살아남은 모험담이다. 사람의 시원(始原) 조상들은 글자 그대로, 고대(古代) 내륙 바다의 광대한 해안선에서, 완만하고 물이 따듯한 만(灣)과 개펄에 있던 것, 대양 바닥에서 나온 끈적이요 흘러나온 물질이었다. 바로 그런 바다에서 생명 운반자들은 세 가지 독립된 생명을 유란시아에 심었다.
65:2.2 (731.6) 동물 비슷한 어중간한 유기체들을 낳은 그 획기적 변화에 참여한 초기 종류의 해양 식물 가운데 극소수의 종(種)이 오늘날 존재한다. 해면(海綿)은 이 초기의 중간 종류 중에 하나가 살아남은 것이며, 이 유기체를 통해서 식물에서 동물로 점진적 이동이 일어났다. 이 초기의 과도기 형태들은, 현대의 해면과 동일하지 않지만, 무척 그와 비슷했다. 그들은 참으로 이도 저도 아닌―식물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유기체였지만, 궁극에 진정한 동물 형태의 생명이 발전하게 만들었다.
65:2.3 (732.1) 박테리아는 대단히 원시적 성질을 가진 간단한 식물 유기체이며, 생명이 초기에 시작될 때부터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의 기생(寄生)하는 행동은 어느 정도 퇴화를 나타내기까지 한다. 많은 곰팡이도 또한 진화에서 퇴화 작용을 대표하며, 잎파랑이 만드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다소 기생하게 된 식물이다. 병을 일으키는 대다수의 박테리아와 보조하는 바이러스 생체는 정말로 이 집단의 변질된 기생 곰팡이에 속한다. 중간에 끼어 있는 시대에 광대한 식물 생명 분야의 모든 것은 박테리아와 함께, 같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왔다.
65:2.4 (732.2) 상급의 원생(原生) 동물 종류의 생명이 곧 나타났고, 갑자기 나타났다. 이 아득한 시절부터, 아메바는 전형적 단일 세포인 동물 유기체인데 이제까지 거의 달라지지 않고 내려왔다. 아메바는 그것이 생명의 진화에서 마지막이자 가장 큰 성취였을 때 한 것과 비슷하게 오늘날도 장난을 친다. 이 미세한 생물 및 그 원생 동물 사촌들과 동물 세계의 관계는, 박테리아와 식물계(植物界)의 관계와 같다. 이것들은 생명의 분화에서 초기에 진화하는 첫 걸음을 대표하였고, 또 후일에 발전하는 데 실패했다.
65:2.5 (732.3) 오래지 않아서 초기의 단일 세포 동물 종류는 볼복스 계획에서 처음으로, 즉시 히드라와 해파리의 선을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 자기들끼리 결합했다. 그 다음에 불가사리ㆍ바다나리, 바다 성게, 해삼ㆍ지네ㆍ곤충ㆍ거미ㆍ갑각류, 그리고 가까이 관계된 집단인 지렁이와 거머리가 진화했고, 연체 동물―굴ㆍ문어ㆍ달팽이―가 곧 뒤따랐다. 수백 종이 사이에 끼어 나타났다가 멸망했는데, 오직 길고 긴 투쟁에서 살아남은 것만 여기에 언급한다. 진보하지 않는 그런 종자들은, 나중에 나타나는 물고기과와 함께, 오늘날 정태적 부류의 초기 하등 동물을 대표하며 이것들은 생명 나무에서 진보하지 못한 가지이다.
65:2.6 (732.4) 이처럼 등뼈가 있는 첫 동물, 곧 물고기의 등장을 위해서 무대가 준비되었다. 이 물고기과로부터 두 가지 독특한 수정이 솟아나왔는데, 개구리와 도롱뇽이다. 그리고 바로 개구리가 동물 생명에서 일련의 진보하는 분화를 비롯하였고, 마침내 바로 사람에 이르렀다.
65:2.7 (732.5) 개구리는 인류의 살아남은 조상들 가운데 가장 일찍 있던 것 중에 하나이지만, 이것도 진보하지 못했고 그 아득한 시절과 무척 비슷하게 오늘날도 지속한다. 개구리는 지구의 표면에서 지금 살고 있는, 초기의 원시 종족들의 유일한 조상 종(種)이다. 인류는 개구리와 에스키모인 사이에 살아남은 조상이 하나도 없다.
65:2.8 (732.6) 개구리는 파충류를 낳았고, 파충류는 거의 절멸한 위대한 동물 과(科)였지만, 절멸하기 전에, 새과(科) 전부, 그리고 포유동물에서 수많은 목(目)을 낳았다.
65:2.9 (732.7) 인간이 생기기 이전의 모든 진화에서 가장 큰 한 번의 비약은 파충류가 새가 되었을 때 일어났다. 오늘날의 새 종류―독수리ㆍ오리ㆍ비둘기ㆍ타조―는 모두 아주 오래 전에 거대한 파충류로부터 내려왔다.
65:2.10 (732.8) 개구리과에서 내려온 파충류 세계를 오늘날 네 가지 살아남은 문(門)이 대표하는데, 진보하지 않는 두 문, 곧 뱀과 도마뱀, 그리고 이들과 더불어 그 사촌, 악어와 바다거북이 있다. 어느 정도 진보하는 한 문, 곧 새과가 있고, 넷째는 포유동물의 조상이고 인간종의 직접 가계이다. 그러나 비록 떠난 지 오래 되지만, 지나가는 파충류의 큰 덩치는 코끼리와 마스토돈에서 메아리쳤고, 한편 그들의 특이한 형태는 뛰는 캉가루에서 지속되었다.
65:2.11 (733.1) 오직 14 문(門)이 유란시아에서 출현했으며, 물고기가 맨 마지막이었다. 새와 포유동물 뒤에는 더 이상 새로운 강(綱)이 발달되지 않았다.
65:2.12 (733.2) 육식하는 버릇을 가졌지만 비교적 큰 두뇌를 가진, 민첩하고 작은 파충류 공룡으로부터 태반을 가진 포유동물이 갑자기 솟아나왔다. 이 포유동물은 빨리 발전했고, 여러 면에서, 현대의 보통 변종들을 낳았을 뿐 아니라, 고래와 물개 같은 해양 종류로, 그리고 박쥐과(科) 같이 공중을 나르는 것으로도 진화하였다.
65:2.13 (733.3) 이처럼 사람은 고대에 동서(東西)로 뻗은 아늑한 바다에서 서부에 심은 생명으로부터 주로 파생된, 고등 포유동물로부터 진화했다. 동부 및 중앙 집단의 살아 있는 유기체들은 인간 이전 수준의 동물 존재에 도달하는 방향으로 유리하게 일찍 진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생명을 배치한 동쪽 초점은, 가장 높은 종류의 생식질을 거듭해서 돌이킬 수 없이 잃어버려서, 인간의 잠재성을 회복할 능력을 언제까지나 빼앗겼기 때문에, 그것은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인간 이전의 지적 상태에 이르는 데 실패했다.
65:2.14 (733.4) 이 동부 집단에서 지성이 발달할 능력의 질이 다른 두 집단보다 아주 분명히 열등했기 때문에, 생명 운반자들은 상관들의 찬성을 얻어서, 진화 생명에서 열등한 이 인간 이전 혈통을 더욱 제한하도록 환경을 조종하였다. 겉으로 드러난 모든 모습으로 볼 때, 이 열등한 집단의 생물이 제거된 것은 우연이었지만, 실제로 그것은 전적으로 의도한 것이다.
65:2.15 (733.5) 지능의 진화가 펼쳐지면서 나중에, 인간종의 리머 조상은 다른 지역보다 북 아메리카에서 훨씬 앞서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생명을 심은 서부의 무대로부터 베링 육지 다리를 건너, 해안을 따라서 남서 아시아로 옮겨 가도록 인도되었고, 거기서 그들은 줄곧 진화하고, 중앙 생명 집단의 어떤 혈통이 더해짐으로 이익을 보았다. 이처럼 사람은 어떤 서부 및 중앙 생명 혈통으로부터, 그러나 중앙에서 근동에 이르는 지역에서 진화했다.
65:2.16 (733.6) 이 방법으로 유란시아에 심은 생명은 빙하 시대까지 진화했고, 그때 바로 사람 이 처음으로 나타나서 행성에서 파란 많은 생애를 시작했다. 빙하 시대에 원시인이 땅에 이처럼 나타난 것은 단지 우연이 아니라, 계획하여 생긴 일이다. 빙하 시대의 혹독함과 가혹한 날씨는 엄청난 생존 자질을 가진 튼튼한 종류의 인간의 생산을 촉진하려는 목적에 맞게 모든 면에서 조정되었다.
65:3.1 (733.7) 초기에 진화로 진보하면서 있었던 사건, 이상하고 겉보기에 괴이한 많은 사건을 오늘날의 인간 지성에게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살아 있는 것들의 이상한 진화로 보이는 이 모든 것에 두루, 어떤 목적을 가진 계획이 작용하고 있지만, 생명 형태들이 일단 활동한 뒤에 우리는 그 발달에 멋대로 간섭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65:3.2 (733.8) 생명 운반자들은 모든 가능한 자연 자원을 사용하고, 생명 실험에서 발전하는 진도를 높일 어떤 우연한 환경이라도 이용해도 좋다. 그러나 우리는 식물이나 동물의 진화에 기계적으로 간섭하거나, 또는 그 운영과 과정을 멋대로 주무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65:3.3 (733.9) 유란시아 필사자들이 원시의 개구리를 발전시키는 방법으로 진화했고, 꼭 개구리 한 마리에 잠재한 이 상승하는 혈통이 어떤 기회에 멸종을 겨우 피했다는 이야기를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이 길목에서 사고가 한 번 났다고 해서 인류의 진화가 끝나 버렸을 것이라 추측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1천개 이상의 다른 혈통, 멀리 떨어진 곳에 돌연 변이하는 생명 혈통을 지켜보고 기르고 있었는데, 이것들을 여러 가지 다른 형태의 인간 이전 수준으로 발달하도록 인도할 수 있었다. 특별한 이 조상 개구리는 우리가 세 번째로 고른 것이며, 그에 앞서 두 생명 혈통은 그들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우리가 온갖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죽어버렸다.
65:3.4 (734.1) 자식을 낳기 전에 안돈과 폰타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비록 인간의 진화를 늦추겠지만, 진화를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안돈과 폰타가 나타난 다음에, 동물 생명에서 돌연 변이하는 인간 잠재성이 소모되기 전에, 일종의 인간 부류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유리한 혈통이 7천 개 이상 진화하였다. 팽창하는 인간종의 다른 가지들이 이 상급 혈통의 다수를 나중에 동화하였다.
65:3.5 (734.2) 물질 아들과 딸, 곧 생물학적 개량자들이 한 행성에 도착하기 오래 전에, 진화하는 동물 종자의 인간 잠재성이 소모되었다. 동물 생명의 이 생물학상의 지위는 셋째 단계의 보조 영을 동원하는 현상으로 인하여 생명 운반자들에게 드러나며, 이 현상은 모든 동물 생명이 인간 이전 개체들의 변이 잠재성을 낳을 능력이 소모되는 것과 동시에, 자동으로 일어난다.
65:3.6 (734.3) 유란시아에서 인류는 자체의 인간 혈통을 가지고 필사자의 발전 문제를 풀어야 한다―앞날의 세월을 통틀어, 인간 이전의 근원으로부터 아무 종족도 더 진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 필사 종족들에게 아직도 있는 진화 잠재성을 총명하게 육성함으로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인간의 발전을 성취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인간의 의지가 나타나기 전에 생명의 혈통을 기르고 보존하는 방향으로 우리 생명 운반자들이 하던 일을, 그러한 사건이 있은 뒤에, 우리가 진화에 적극 참여하다가 물러난 뒤에, 사람은 스스로 해야 한다. 대체로 사람의 진화 운명은 자신의 손 안에 있고, 과학적 지능은 머지 않아 통제되지 않은 자연 도태와 우연한 생존이 마구잡이로 작용하는 것을 대신해야 한다.
65:3.7 (734.4) 진화를 보살피는 일을 논의하면서, 장기적으로 앞을 내다보면, 너희가 언젠가 생명 운반자 군단에 부속될 때, 너희는 생명을 관리하고 이식하는 계획과 기법에 관하여 제안하고 어떤 가능한 개선을 이룩할 기회가 풍부하고도 넉넉히 있으리라 지적해도 괜찮을 것이다. 참아라! 너희가 좋은 생각이 있으면, 너희 지성이 우주 영토의 어느 부분을 위해서 더 좋은 관리 방법을 풍부히 가지고 있다면, 다가올 시대에 그러한 생각을 너희 친구와 동료 행정가들에게 발표할 기회를 너희는 분명히 가질 것이다.
65:4.1 (734.5) 유란시아가 생명을 실험하는 세계로서 우리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라. 이 행성에서 우리는 네바돈 생명 설계에 사타니아식 적응을 수정(修正)하고, 가능하면 개선하려고 60번째 시도했으며, 우리가 표준 생명 형태에서 수많은 유익한 수정을 가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자세히 말하자면, 유란시아에서 우리는 미래 전체를 통해서, 온 네바돈에 쓸모가 있을 특성, 28가지 이상으로 생명을 수정하는 특성을 고안하고 만족스럽게 시범을 보였다.
65:4.2 (735.1) 해 보지 않고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시도한다는 의미에서, 어떤 세계에서도 생명을 정착시키는 것은 결코 실험이 아니다. 생명을 진화시키는 것은 늘 진보하고 차이가 생기고 변하는 기법이지만, 결코 어쩌다가 일어나거나 방치되지 않으며, 우연이라는 의미에서 통째로 실험적인 것도 아니다.
65:4.3 (735.2) 인간 생활의 여러 모습은 필사자가 존재하는 현상이 머리를 써서 계획되었다는 것, 유기체의 진화는 단순히 우주에서 우연(偶然)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풍부한 증거를 마련해 준다. 살아 있는 세포가 다칠 때, 그 세포는 이웃의 정상 세포를 자극하고 활성화하는 힘을 가진 어떤 화학 물질을 손질하는 능력을 소유한다. 그래서 정상 세포들은 상처난 곳에서 고치는 과정을 수월하게 하는 어떤 물질을 즉시 분비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정상이고 다치지 않은 이 세포들은 번식을 시작한다―이 세포들은 사고(事故)로 파괴되었을지 모르는 어떤 동료 세포라도 갈아치울 새 세포를 만드는 일을 실제로 시작한다.
65:4.4 (735.3) 상처를 낫게 하고 세포를 재생하는 데 관련된 이 화학 작용과 반응은 가능한 화학 반응 및 생물학적 영향에서 10만 가지가 넘는 단계와 특성을 포함하는 한 공식을 생명 운반자들이 선택했음을 가리킨다. 유란시아의 생명 실험에 맞는 이 공식을 마침내 결정하기 전에, 생명 운반자들은 실험실에서 50만 번이 넘게 특정한 실험을 진행하였다.
65:4.5 (735.4) 이 치유하는 화학 약품을 더 많이 알게 될 때, 유란시아 과학자들은 상처의 치유에 더 효율성이 늘고, 간접으로 어떤 심각한 병들을 어떻게 통제하는가 더욱 알게 될 것이다.
65:4.6 (735.5) 생명이 유란시아에서 자리를 잡은 이후로, 생명 운반자들은, 이 기법이 고통을 더 줄이고 관계된 정상 세포의 번식 능력을 더 잘 통제한다는 의미로 이 치유 기술을 개량해 왔고, 이 기술은 또 다른 사타니아 세계에 소개되었다.
65:4.7 (735.6) 유란시아의 생명 실험에는 많은 독특한 모습이 있었지만, 두 가지 뛰어난 사건은 여섯 유색 인종이 미처 진화하기 전에 안돈 종이 등장한 것, 그리고 나중에 단일 가족에서 산긱 돌연 변이가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유란시아는 사타니아에서 처음으로, 같은 인간 가족으로부터 여섯 유색 인종이 솟아나온 세계이다. 그들은 보통, 인간 이전의 동물 혈통 안에서 독립된 돌연 변이로부터 얻어진 다양화된 혈통으로 생기며, 보통 한 번에 하나씩, 그리고 홍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여러 빛깔을 거쳐 남색인에 이르기까지, 연달아서 오랜 기간에 걸쳐서 나타난다.
65:4.8 (735.7) 또 다른 특출한 과정의 변화는 행성 영주가 늦게 도착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영주(領主)는 의지가 발생할 무렵에 한 행성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러한 계획을 따랐더라면, 칼리가스티아는 여섯 산긱 종족이 출현하는 것과 동시에 거의 50만 년 뒤에 나타나지 않고, 안돈과 폰타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유란시아에 왔을지 모른다.
65:4.9 (735.8) 사람이 사는 보통 세계에서는, 안돈과 폰타가 나타날 때나 그 뒤에 언젠가, 생명 운반자들의 요청을 받고 나서 한 행성 영주가 허락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란시아는 생명을 수정하는 세계로 지정되었으니까, 사전(事前) 합의에 따라서, 나중에 행성 영주가 도착할 때까지, 멜기세덱 관찰자 12명이 생명 운반자들에게 조언자로서, 그리고 행성의 감독자로서 파송되었다. 생각 조절자들이 안돈과 폰타의 필사 지성에 깃들 수 있게 만든 어떤 결정을 안돈과 폰타가 내렸을 때, 이 멜기세덱들이 왔다.
65:4.10 (736.1) 유란시아에서 생명 운반자들이 사타니아의 생명 형태를 개량하려고 기울인 노력은 겉보기에 쓸모 없는 형태의 과도기 생명을 많이 생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이미 생긴 이익은 표준 생명의 설계를 유란시아에서 수정(修正)한 것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하다.
65:4.11 (736.2) 유란시아의 진화하는 생명 속에 의지(意志)가 일찍 나타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도였고, 우리는 성공했다. 보통은 유색 인종들이 오랫동안 존재하기까지 의지는 태어나지 않으며, 우수한 종류의 홍인 사이에서 먼저 나타난다. 너희의 세계는 사타니아에서 인간 종류의 의지가 유색 종족이 생기기 전에 나타난 유일한 행성이다.
65:4.12 (736.3) 그러나 마침내 인류의 포유동물 조상을 낳은 유전 인자들의 조합과 결합을 마련하려는 노력으로, 우리는 다르고 비교적 쓸모가 없는 수백, 수천 가지 유전 인자(因子)의 조합과 결합을 버려둘 필요성에 부닥쳤다. 우리의 노력에서 생긴 부산물, 겉보기에 이상한 이 부산물 가운데 많은 것을 너희가 행성의 과거를 파헤치면서 뚫어지게 볼 것이 분명한데, 이들 가운데 더러는 제한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얼마나 수수께끼 같은지 나는 잘 이해할 수 있다.
65:5.1 (736.4) 유란시아에서 지적 생명을 수정하려는 우리의 특별한 노력이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비극적 타락, 곧 칼리가스티아 배반과 아담의 실패로 인하여 무척 장애를 받았다는 것이 생명 운반자들에게 유감(有感)의 근원이었다.
65:5.2 (736.5) 그러나 이 생물학적 모험 전체를 통해서 내내, 우리가 가장 크게 실망한 것은 어떤 원시적 식물 생명이 아주 널리, 기대했던 것보다 크게, 잎파랑이 이전 수준의 기생(寄生) 박테리아로 돌아감으로 생겨났다. 식물 생명의 진화에서 이 결말은 고등 포유동물에서, 특히 좀더 취약한 인간종에서 많은 비참한 질병을 일으켰다. 이 곤란한 상황에 우리가 부닥쳤을 때, 우리는 이와 관계된 어려움을 얼마큼 가볍게 여겼는데, 아담 생명질을 나중에 섞는 것이 그 결과로 생기는 혼합된 종족의 저항 력을 아주 강화해서 그 종족이 식물 종류의 유기체가 일으키는 모든 병에 실질적으로 면역이 되게 만들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은 아담이 실패한 불운 때문에, 실망하도록 운명이 정해졌다.
65:5.3 (736.6) 유란시아라고 부르는 이 작은 세상을 포함해서, 온 우주는 다만 우리의 승인을 얻거나 그저 우리의 편리에 맞게 관리되는 것이 아니요, 우리의 변덕을 만족시키고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은 더군다나 아니다. 우주의 관리를 책임지는 지혜롭고 전능한 존재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지혜로운 통치, 권력자의 군림, 진보하는 행진에 진심으로 협조하는 것이 생명 운반자들에게 어울리고 필사 지성인들에게 마땅하다.
65:5.4 (736.7) 유란시아에 미가엘이 수여된 바와 같이, 물론 시련에 어떤 보상이 따른다. 그러나 모든 그러한 고려 사항과 상관 없이, 나중에 온 이 행성의 하늘 감독자들은 인류가 마침내 진화적 승리를 거두고, 우리의 원래 계획과 생명 형태들이 정당함을 궁극에 입증할 것이라 완전히 확신함을 표현한다.
65:6.1 (737.1) 움직이는 물체의 정밀한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하게 결정하기는 불가능하다. 하나를 재려는 어떠한 시도도 불가피하게 다른 하나에 변화를 낳는다. 원형질의 화학적 분석을 시도할 때, 필사 인간은 똑같은 종류의 역설(逆說)에 부닥친다. 화학자는 죽은 원형질의 화학 작용을 밝힐 수 있지만, 살아 있는 원형질의 물리적 조직이나 동태적 성과를 헤아릴 수 없다. 과학자는 늘 생명의 신비에 점점 더 가까이 갈 터이지만, 결코 그 신비를 찾아낼 수 없다. 원형질을 분석하기 위해서 그것을 죽여야 한다는 것밖에 다른 이유가 없다. 죽은 원형질은 살아 있는 원형질과 무게가 같지만, 똑같지 않다.
65:6.2 (737.2) 살아 있는 물건과 존재에는 처음에 부여된 적응 자질이 있다. 모든 살아 있는 식물이나 동물 세포에, 모든 살아 있는 유기체에는―물질이든 영적이든―환경에 대하여 조정하고, 유기체가 적응하고, 확대된 생명을 실현하고 싶은 욕구, 늘 더욱 완전해지고 싶은 끝없는 욕구가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이렇게 그침 없이 노력하는 것은, 그들 안에 완전을 향한 타고난 투쟁심이 존재함을 입증한다.
65:6.3 (737.3) 식물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걸음은 잎파랑이를 만드는 능력이 발달한 것이었고, 둘째로 큰 진보는 홀씨가 복잡한 씨앗으로 넘어가는 진화였다. 홀씨는 생식하는 인자로서 아주 효과적이지만, 홀씨에는 씨앗에 원래 있는, 변하고 쉽게 적응하는 가능성이 모자란다.
65:6.4 (737.4) 고등 종류 동물의 진화에서 가장 쓸모 있고 복잡한 사건 중에 하나는, 순환하는 혈구 안에서 철이 산소를 나르고 2산화탄소를 제거하는 매체로서 2중 역할을 하는 능력을 개발한 것이다. 이 적혈구의 행동은 어떻게 진화하는 유기체들이 다르거나 바뀌는 환경에 그들의 기능을 적응할 수 있는가 보여준다. 사람을 포함해서, 고등 동물은 적혈구(赤血球) 안에 있는 철의 행위로 세포 조직에 산소를 공급하는데, 이 적혈구는 살아 있는 세포에 산소를 날라 주고, 똑같이 효과 있게 2산화 탄소를 제거한다. 그러나 다른 금속들도 똑같은 목적에 쓰이도록 만들 수 있다. 오징어는 이 기능에 구리를 쓰고, 멍게는 바나디움을 이용한다.
65:6.5 (737.5) 유란시아의 고등 포유동물에서 치아의 진화가 그러한 생물학상의 조정이 계속된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사람의 먼 조상의 경우 이는 서른 여섯에 이르렀고, 그 다음에 시조 인간과 그의 가까운 친척들에서는 서른 둘 방향으로 적응하는 재조정을 시작했다. 이제 인류는 스물 여덟을 향하여 천천히 끌려가고 있다. 진화 과정은 이 행성에서 아직도 활발하게, 적응하면서 진행되고 있다.
65:6.6 (737.6) 그러나 살아 있는 유기체가 겉보기에 신비롭게 조정하는 것은 순전히 화학적이고, 온전히 물리적이다. 어느 한 순간에도, 어떤 인간의 피 흐름 속에도, 12 가지 내분비선의 호르몬 생산물 사이에 15,000,000 가지가 넘는 화학 반응이 일어날 가능성이 존재한다.
65:6.7 (737.7) 하등 형태의 식물 생명은 물리ㆍ화학ㆍ전기적 환경에 전적으로 민감하다. 그러나 생명의 등급이 높아짐에 따라서, 일곱 보조 영이 지성에게 베푸는 봉사가 하나씩 작용하게 되고, 지성은 갈수록 더 순응하고 창조성이 늘어나며, 조정하고 지배한다. 동물이 공기ㆍ물ㆍ땅에 적응하는 능력은 초자연적 자질이 아니라, 초물리적 조정이다.
65:6.8 (738.1) 물리학과 화학만으로는 어떻게 한 인간이 초기 바다에 있는 시원의 원형질로부터 진화했는가 설명할 수 없다. 배우는 능력, 기억, 그리고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반응은 지성이 부여한 것이다. 물리학의 법칙은 훈련에 민감하지 않으며, 이 법칙들은 변할 수 없고, 변하지 않는다. 화학 반응은 교육으로 고쳐지지 않으며, 불변하고 믿을 만하다. 무제한 절대자의 계심을 제쳐놓고, 전기 및 화학 반응은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지성은 체험으로부터 이익을 얻고, 되풀이되는 자극에 대하여 반응하는 행동의 버릇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65:6.9 (738.2) 지성이 생기기 이전의 유기체는 환경의 자극에 반응하지만, 지성의 봉사에 반응하는 유기체는 환경 자체를 조절하고 조종할 수 있다.
65:6.10 (738.3) 한 인격자의 발달하는 지성이 어떤 타고난 영적 감수(感受) 능력을 소유하고, 따라서 영적으로 진보하고 달성하는 가능성을 가지는 것과 똑같이, 물리적 두뇌는 관련된 신경 체계와 함께, 지성이 베푸는 봉사에 반응하는 타고난 능력을 소유한다. 지적ㆍ사회적ㆍ도덕적ㆍ영적 진화는 일곱 보조 영과 초물리적 동료들이 지성에게 베푸는 봉사에 의존한다.
65:7.1 (738.4) 일곱 보조 지성 영은 한 지역 우주에서 하등의 지적 존재들에게 다능한 지성 봉사자이다. 이 계급의 지성은 지역 우주 본부로부터, 또는 그와 연결된 어떤 세계로부터 보살핌을 받지만, 체계의 서울에서 하등 지성의 기능에 영향을 미치도록 지도한다.
65:7.2 (738.5) 진화 세계에서는 많은 것, 허다한 것이 이 일곱 보조자가 하는 일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 보조자들은 지성에게 봉사하는 자요, 신체의 진화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이것은 생명 운반자의 분야이다. 그런데도 이 영 자질이, 생명 운반자들의 전개되는 본래 체제의 예정된 자연 과정과 완벽하게 통합된 것은 필사자가 어째서 지성 현상에서 자연의 손길, 그리고 자연스런 과정이 해결되어 나가는 것밖에 아무것도 헤아릴 수 없는가 설명한다. 하지만 물질에 붙어 있는 지성의 자연스러운 반응과 연결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할 때, 너희는 때때로 얼마큼 어리둥절하게 된다. 유란시아가 최초의 계획을 더 따르는 방향으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성의 현상에서 눈길 끄는 것이 더욱 적게 보일 것이다.
65:7.3 (738.6) 일곱 보조 영은 개체라기보다 회로와 같으며, 이 영들은 보통 세계에서 지역 우주 전역에 걸치는 다른 보조 작용과 함께 회로가 연결된다. 그러나 생명을 실험하는 행성에서 그들은 비교적 고립되어 있다. 그리고 유란시아에서, 여러 생명 형태의 독특한 성질 때문에, 하등 보조자들은 더 표준화된 종류의 생명을 부여한 경우보다 진화 유기체들과 접촉하는 데 훨씬 더 어려움을 겪었다.
65:7.4 (738.7) 게다가, 보통의 진화 세계에서 일곱 보조 영은 유란시아보다 동물이 발전하는 여러 승진 단계와 동시화가 더 잘된다. 꼭 하나의 예외가 있지만, 보조자들은 네바돈 우주 전역에 걸쳐서 온갖 활동을 하면서 겪은 중에 유란시아 유기체들의 진화하는 지성과 접촉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 세계에는 많은 형태의 어중간한 현상―기계적이고 가르칠 수 없는 종류, 그리고 기계적이 아니고 가르칠 수 있는 종류의 유기체 반응의 혼란스러운 조합―이 발달되었다.
65:7.5 (739.1) 일곱 지성 영은 환경에 대하여 유기체의 반응이 순전히 기계적인 서열과 접촉을 가지지 않는다. 살아 있는 유기체가 보이는 그러한 지성 이전(以前)의 반응은 순전히 동력 중심, 물리 통제자, 그리고 그 동료들의 에너지 분야에 관계된다.
65:7.6 (739.2) 체험으로부터 배우는 잠재 능력을 얻는 것은 보조 영들의 활동이 시작됨을 표시하며, 그들은 원시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가장 낮은 지성으로부터 인간의 진화 눈금에서 가장 높은 종류에 이르기까지 활동한다. 보조 영들은 달리 얼마큼 신비스러운 행위, 그리고 충분히 파악되지 않았지만, 물질 환경에 대한 지성의 빠른 반응의 근원이고 형태이다. 충실하고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이 영향력은 동물 지성이 인간 수준의 영 감수성을 얻을 때까지, 오랫동안 예비 봉사를 해내야 한다.
65:7.7 (739.3) 보조자들은 여섯째 단계, 곧 예배의 영 수준까지, 체험하는 지성이 진화하는 동안 독점하여 활동한다. 이 수준에서 불가피하게 봉사의 중복이 일어난다―이것은 상급 수준의 발전이 나중에 이루어질 것을 기대해서, 상위에 있는 자가 하위에 있는 자와 조정하려고 손을 뻗는 현상이다. 그 위에 추가되어 일곱째이자 마지막 보조자인 지혜 영의 행동에 영의 봉사가 뒤따른다. 영 세계가 베푸는 봉사 전역에 걸쳐서 개인은 영이 협동하는 갑작스러운 과도기를 결코 체험하지 않으며, 반드시 이 여러 변화는 차츰차츰 생기고 서로 보완한다.
65:7.8 (739.4) 환경의 자극에 대하여 물리적 (전기ㆍ화학적), 정신적으로 반응하는 분야들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하며, 다음에 이 분야들은 모두 영적 활동과 동떨어진 현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물리적ㆍ정신적ㆍ영적 인력이 작용하는 분야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도, 우주 실체의 뚜렷이 다른 영역들이다.
65:8.1 (739.5) 시간과 공간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으며,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어떤 공간 조건에서는 시간의 지연을 피할 수 없다.
65:8.2 (739.6) 진화로 생명을 발달시키는 변화를 일으키는 데 어째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는가 아리송하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한 행성의 물리적 변형이 허락하는 것보다 조금도 더 빨리 생명 과정을 펼치도록 시간을 맞출 수 없다. 우리는 한 행성의 자연스러운 물리적 발전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지질의 진화에 절대로 아무 힘을 쓸 수 없다. 물리적 조건이 허락한다면, 우리는 1백만 년보다 훨씬 시간을 적게 쓰고, 생명이 진화를 완성하도록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파라다이스의 최상 통치자들의 관할 밑에 있고, 시간은 파라다이스에 존재하지 않는다.
65:8.3 (739.7) 개인이 시간을 재는 척도는 일생(一生)의 길이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은 시간에 제약을 받고, 따라서 진화가 시간을 오래 끄는 과정이라고 여긴다. 수명(壽命)이 잠시 존재하도록 제한을 받지 않는 우리에게는, 진화가 그렇게 오래 끄는 일거리처럼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파라다이스에서, 무한의 지성 속에, 그리고 영원의 행위 안에 이것들은 모두 현재이다.
65:8.4 (739.8) 지성의 진화가 물리적 조건이 느리게 발달하는 데 달려 있고 그 때문에 늦어지는 것 같이, 마찬가지로 영적 진보는 정신력의 확장에 달려 있고, 어김없이 지능의 발달이 지연됨으로 늦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 진화가 교육이나 문화나 지혜에 달려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혼은 정신 문화와 상관 없이 진화할지 모르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정신 능력과 소망―살아남겠다는 선택과 늘 더욱 나아지려는 결심―이 없는 가운데서 진화하지 않는다. 살아남는 것은 지식과 지혜의 소유에 달려 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진보는 아주 확실히 그렇다.
65:8.5 (740.1) 우주의 진화 실험실에서 지성은 언제나 물질을 지배하며, 영은 늘 지성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다양한 재산이 동시화하고 조정하는 데 실패하면 시간의 지연을 일으킬지 모른다. 그러나 개인이 하나님을 정말로 알고, 찾고, 그처럼 되기를 바란다면, 시간의 장애와 상관없이 살아남는 것이 보장된다. 물리적 지위가 지성을 불리하게 만들고, 비뚤어진 정신이 영적 달성을 늦출지 모르지만, 이 장애물 가운데 아무것도 혼을 다하여 의지(意志)가 선택한 것을 짓밟을 수 없다.
65:8.6 (740.2) 물리적 조건이 무르익었을 때, 갑자기 정신의 진화가 일어날지 모른다. 지성의 지위가 순조로울 때 갑자기 영적 변화가 생길지 모른다. 영적 가치가 마땅한 인정을 받을 때, 그때 우주의 중요성을 식별할 수 있게 되고, 점점 더 그 인격자는 시간의 장애에서 해방되고, 공간 세계의 제한으로부터 벗어난다.
66:0.1 (741.1) 보통 세계에서 한 라노난덱 아들이 오는 것은 의지(意志)가, 영원히 살아남는 길을 택하는 능력이, 원시인의 지성 안에서 개발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유란시아에서 행성 영주는 인간의 의지가 나타난 뒤에 거의 50만 년이 되어서 도착했다.
66:0.2 (741.2) 약 50만 년 전에, 여섯 유색 인종, 곧 산긱 인종들이 나타남과 동시에, 행성 영주 칼리가스티아는 유란시아에 도착했다. 영주가 도착했을 때 땅에는 거의 5억의 원시 인간이 있었고, 그들은 유럽ㆍ아시아ㆍ아프리카에 잘 흩어져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에 세운 영주의 본부는 세계 인구의 중심 부근에 있었다.
66:1.1 (741.3) 칼리가스티아는 라노난덱 아들이었고, 2차 계급에서 9,344번이었다. 그는 대체로 지역 우주 사무의 행정에, 그리고 후일에는 특히 사타니아 지역 체계의 관리에 경험을 쌓았다.
66:1.2 (741.4) 사타니아에서 루시퍼가 군림하기 전에, 칼리가스티아는 예루셈에서 생명 운반자 에게 자문하는 자들의 회의에 부속되었다. 루시퍼는 칼리가스티아를 자신의 개인 참모진에서 한 지위로 진급시켰고, 그는 연달아 다섯 번이나 명예롭고 책임이 중한 임무를 쓸 만하게 마쳤다.
66:1.3 (741.5) 칼리가스티아는 아주 일찍부터 행성 영주로 임명받으려고 애썼지만, 그의 요청이 별자리 회의에서 인가를 받으러 올라왔을 때, 거듭하여 별자리 아버지들의 찬성을 얻지 못했다. 칼리가스티아는 십일(十一) 세계, 다시 말해서 생명을 수정하는 세계에 행성 통치자로서 파송되는 것을 특별히 바란 듯하다. 마침내 유란시아로 배치받을 때까지, 그의 탄원은 여러 번 인가를 받지 못했다.
66:1.4 (741.6) 칼리가스티아는 예루셈으로부터 세상의 통치를 책임지는 자리로 떠나갔는데, 이때 그는 어떤 사소한 문제에서 기존 질서와 의견을 달리하는 경향과 더불어 그의 특징을 나타내는 어떤 초조감이 있었는데도, 그가 태어나고 머무른 우주의 복지에 충성하고 헌신한 기록, 부러움을 살 만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66:1.5 (741.7) 명석한 칼리가스티아가 체계의 서울을 떠났을 때 나는 예루셈에 있었다. 어느 행성의 영주(領主)도, 50만 년 전, 그 중대한 날에 칼리가스티아보다 더 풍부한 예비 체험이나 더 좋은 전망을 가지고 세상을 통치하는 생애를 시작하지 않았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내가 그 사건의 이야기를 지역 우주에 방송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한 순간이라도 이 고귀한 라노난덱이 행성을 관리하는 신성한 책임을 그렇게 곧 저버리고, 드높은 우주 아들 계급의 좋은 이름을 그토록 끔찍하게 더럽힐 것이라는 생각이 털끝만큼도 들지 않았다. 나는 유란시아가 그렇게 경험이 있고, 찬란하고 독창적인 지능 존재를 세상사를 주관하는 자리에 모실 것이므로, 유란시아가 온 사타니아에서 가장 운이 좋은 대여섯 행성에 속한다고 정말로 여겼다. 칼리가스티아가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반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 나는 파악하지 못했고, 그때 나는 성격 자만심이 얼마나 미묘한가 그다지 이해하지 못했다.
66:2.1 (742.1)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는 그의 임무를 수행하려고 혼자 파송되지 않았고, 보통 보내는 보조자와 행정 조수의 일행이 그를 뒤따랐다.
66:2.2 (742.2) 이 집단의 우두머리에는 달리가스티아, 곧 행성 영주의 부관인 조수가 있었다. 달리가스티아도 2차 라노난덱 아들이었고, 그 계급에서 319,407번이었다. 그가 칼리가스티아의 동료로서 배치 받을 때, 그의 계급은 조수였다.
66:2.3 (742.3) 행성 참모진은 큰 무리의 협조하는 천사와 한 집단의 다른 하늘 존재들을 포함했으며, 이들은 인류의 이익을 증진하고 복지를 추진하기 위하여 배치되었다. 그러나 너희의 관점에서 볼 때, 전체에서 가장 흥미 있는 집단은 영주 참모진의 유형(有形) 참모들이었다―그들을 때때로 칼리가스티아 1백인이라고 불렀다.
66:2.4 (742.4) 영주 참모진의 구성원, 다시 물질화된 이 100명은 유란시아 모험을 시작하기 위하여 785,000명이 넘는 자원자, 하늘 가는 예루셈 시민들로부터 칼리가스티아가 뽑았다. 선택된 100명은 각자 다른 행성에서 왔고, 아무도 유란시아 출신이 아니었다.
66:2.5 (742.5) 이 예루셈 자원자들은 체계 서울로부터 천사의 수송으로 유란시아로 바로 인도되었는데, 도착하고 나서 그들에게 특별히 행성에서 근무하는 2중 성질의 사람 모습, 즉 피와 살로 되어 있지만, 또한 체계의 생명 회로에 맞춰져 있는 실질 몸이 마련될 수 있을 때까지, 천사 몸에 실린 채로 있었다.
66:2.6 (742.6) 이 예루셈 시민 100명이 도착하기 얼마 전에, 유란시아에 거주하며 감독하는 생명 운반자 2명은, 그들의 계획을 미리 완벽하게 세웠으므로, 안돈과 폰타의 혈통에서 선택한 생존자 100명의 생명질을 영주 참모진의 유형 참모들을 위하여 계획될 물질 몸으로 옮겨 심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예루셈과 에덴시아에 탄원하였다. 이 요청은 예루셈에서 허락을 받고 에덴시아에서 인가를 받았다.
66:2.7 (742.7) 따라서, 생명 운반자들은 안돈과 폰타 후손 가운데 남자 50명과 여자 50명을 선택하였고, 이들은 그 독특한 민족에서 가장 좋은 살아남은 혈통을 대표한다. 하나나 둘을 제외하고, 종족 발전에 이바지한 이 안돈 사람들은 서로 낯선 사람이었다. 그들은 영주의 행성 본부 문턱에서, 생각 조절자들의 지시와 천사의 안내를 조정함으로, 널리 떨어져 있는 장소로부터 모집되었다. 여기서 인간 주체 100명은 아발론으로부터 온, 상당히 솜씨 있는 자원 위원회의 손에 맡겨졌고, 그들은 이 안돈 후손의 생명질의 일부 물질을 뽑는 것을 지도하였다. 살아 있는 이 물질은 그때 예루셈에서 온, 영주 참모진의 구성원 100명이 쓰도록 지어진 물질 몸 속으로 옮겨졌다. 그동안에, 체계 서울에 새로 도착한 시민들은 천사의 수송기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66:2.8 (742.8) 칼리가스티아 1백인을 위하여 특별한 몸을 글자 그대로 창조한 것과 함께, 이 작업은 수많은 전설을 낳았는데, 이 중에 많은 것은 나중에 아담과 이브가 행성에 취임한 것과 관련된 후일의 전통과 뒤범벅이 되었다.
66:2.9 (743.1) 예루셈 자원자 100명을 실은 수송 천사들이 도착한 때부터 그 땅에서 3중의 존재인 그들이 의식을 찾기까지, 다시 인격화하는 작업 전체는 꼭 열흘이 걸렸다.
66:3.1 (743.2) 행성 영주의 본부는 그 시절에 페르시아 만(灣) 지역, 나중에 메소포타미아에 해당하는 구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66:3.2 (743.3) 그 시절에 메소포타미아에서 기후와 풍경은, 그 뒤에 때때로 지배했던 조건과 무척 다르게, 모든 면에서 영주 참모진과 그 조수들이 벌인 사업에 유리했다. 원시적인 유란시아인의 문화와 문명이 어떤 초기 수준까지 발전하도록 유도하려고 설계된 자연 환경의 일부로서, 그렇게 유리한 기후를 가지는 것이 필요했다. 그 시절에 하나의 큰 과제는, 사람을 사냥꾼으로부터 목자(牧者)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목자가 나중에 평화를 사랑하고 집에서 사는 농부로 진화할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66:3.3 (743.4) 유란시아에서 행성 영주의 본부는 젊고 개발되는 구체에서 그러한 주둔지의 전형(典刑)이었다. 영주가 있는 촌락의 핵심은 매우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도시였고, 높이가 12미터 되는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세계 문화의 중심은 달리가스티아에게 명예를 돌리는 뜻으로 달라마시아라고 이름을 지었다.
66:3.4 (743.5) 그 도시는 10 구역으로 배열되어 있고, 유형 참모진의 10개 회의의 본부 저택들이 이 구역들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도시의 한가운데에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모시는 성전이 있었다. 영주와 그 동료들의 행정 본부는 바로 성전 둘레에, 한데 모인 열두 방에 배치되었다.
66:3.5 (743.6) 달라마시아의 건물은 모두 단층이었고, 예외는 2층인 회의 본부, 그리고 가운데, 만인의 아버지를 모시는 성전이었는데, 이것은 작아도 3층이었다.
66:3.6 (743.7) 그 도시는 건축 자재 면에서 그 초기 시절의 최고 기술―벽돌―의 표본이었다. 돌이나 나무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둘러싼 민족들 사이에서 집 건물과 마을 건축은 달라마시아의 본보기로 말미암아 크게 나아졌다.
66:3.7 (743.8) 영주의 본부 가까이, 온갖 종족과 계층의 인간들이 거주했다. 근처에 있는 이 부족들로부터 여러 영주 학교의 첫 학생들이 모집되었다. 초기에 이 달라마시아의 학교들은 투박하기는 했어도, 그 원시 시대의 남녀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마련해 주었다.
66:3.8 (743.9) 영주의 유형 참모진은 둘러싼 부족들 가운데서 우수한 사람들을 주위에 계속 끌어 모았고, 이 학생들을 훈련하고 그들에게 영감을 부어준 다음에, 각자 민족의 선생과 지도자로서 돌려보냈다.
66:4.1 (743.10) 영주 참모진의 도착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 소식이 널리 퍼지는 데 거의 1천 년이 걸렸지만, 메소포타미아 본부 가까이 있던 부족들은 유란시아에서 새로 거주하는 1백인의 가르침과 행동에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후일에 너희의 많은 신화(神話)는 이 영주 참모진의 구성원들이 유란시아에서 초인간으로 다시 인격화된, 이 초기 시절에 관한 왜곡된 전설로부터 생겨났다.
66:4.2 (744.1) 행성 바깥에서 온 그런 선생들이 좋은 영향을 미치는 데 심각한 장애물은 사람들이 그들을 신으로 여기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칼리가스티아 1백인―남자 50명과 여자 50명―이 지구에 나타난 기법을 제쳐놓고, 초자연 방법을 쓰거나 초인간적 조종에 의존하지 않았다.
66:4.3 (744.2) 그러나 유형(有形) 참모들은 여전히 초인간이었다. 그들은 유란시아에서 특별한 3중 존재로서 사명을 시작했다:
66:4.4 (744.3) 1. 그들은 형체를 가졌고 비교적 인간이었는데, 인류 중에 한 종족의 실제 생명질, 곧 유란시아의 안돈의 생명질을 몸에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66:4.5 (744.4) 영주 참모진의 1백 명은 이전에 그들의 필사 신분에 따라서, 남녀 별로 수가 똑같이 나누어졌다. 이 집단에서 각 사람은 함께 부모가 되어 어떤 새로운 서열의 육체적 존재를 낳을 능력이 있었지만, 오직 어떤 조건 하에서 부모가 되는 길을 택하라고 조심스러운 지시를 받았다. 행성 영주의 유형 참모진은 특별한 행성 근무로부터 은퇴하기 얼마 전에 후계자들을 낳는 것이 관습이었다. 보통 이것은 행성 아담과 이브가 도착할 때나, 그 뒤에 얼마 안 되는 때이다.
66:4.6 (744.5) 따라서 이 특별 존재들은 그들이 남녀의 결합으로 어떤 종류의 물질 인간이 태어날지, 거의 또는 전혀 몰랐다. 그들은 결코 몰랐다. 그들이 세상의 일을 집행하면서 그런 걸음을 밟을 때가 오기 전에, 그 체제 전부가 반란으로 뒤집혔고, 나중에 부모 노릇을 한 사람들은 그 체계의 생명 기류(氣流)로부터 격리되었다.
66:4.7 (744.6) 칼리가스티아 참모진의 물질화된 이 구성원들은 안돈 종족의 피부색과 언어를 따랐다. 그들은 다음의 차이점을 제외하고, 그 영역의 필사자처럼 먹을 것을 먹었다: 다시 빚어진 이 집단의 육체는 고기가 없는 음식물로 충분히 만족되었다. 이것은 과일과 견과가 풍부한 따듯한 지역에 그들의 살곳을 결정한 고려 사항 가운데 하나였다. 고기 없는 음식물로 살아가는 풍습은 칼리가스티아 1백인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왜냐하면 이 풍습이 가까이, 그리고 멀리 퍼져서, 둘러싼 많은 부족, 한 때 순전히 고기를 먹던 진화 종족으로부터 내려 온 집단의 먹는 버릇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66:4.8 (744.7) 2. 1백인은 물질 존재였으나 초인간 존재였고, 높고 특별한 서열의 독특한 남자와 여자로서 유란시아에서 다시 빚어졌다.
66:4.9 (744.8) 예루셈에서 임시 시민 자격을 누렸지만, 이 집단은 아직까지 미처 생각 조절자와 융합되지 않았다. 그들이 자원하고 나서, 내려가는 아들 계급과 연결되어 행성에서 근무하도록 인가를 받았을 때, 그들의 조절자가 분리되었다. 그러나 이 예루셈 사람들은 초인간 존재였다―승천하면서 자라는 혼을 지녔다. 육체를 입고서 필사자로 사는 동안, 혼은 싹의 상태에 있다. 혼은 태어나서 (부활하여) 상물질 생명이 되고, 연속되는 상물질 세계들을 거쳐서 성장을 겪는다. 칼리가스티아 1백인의 혼은, 일곱 저택 세계에서 진보하는 체험을 거치면서 예루셈의 시민 자격을 얻기까지, 이렇게 성장하였다.
66:4.10 (744.9) 받은 지시에 순응하여 참모진은 성교(性交)로 번식을 시작하지 않았지만, 자기들의 몸 구조를 공들여 연구했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단계의 지적(지성) 결합과 상물질 (혼) 결합을 세밀하게 탐구했다. 달라마시아에서 머무른 지 33년째 해에, 담이 완성되기 오래 전에, 단 집단의 2번과 7번이, 그들이 (남녀의 구별이 없고 물질이 아니라고 생각된) 상물질 자아를 연결하는 데 따르는 현상을 어쩌다가 발견했다. 이 모험의 결과는 첫 1차 중도인(中道人)인 것이 드러났다. 이 새로운 존재는 행성의 참모진과 그 하늘 동료들의 눈에 완전히 보이지만, 여러 인간 부족의 남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행성 영주의 허가를 받아서 유형 참모진 전체가 비슷한 존재들을 낳는 일에 착수했고, 개척자인 단 쌍의 지침을 따라서 모두가 성공했다. 이처럼 영주의 참모진은 결국 50,000명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1차 중도자 집단을 낳았다.
66:4.11 (745.1) 이 중간 종류의 인간은 세계 본부의 일을 수행하는 데 크게 쓸모가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달라마시아에 머물렀던 원시인들은 보이지 않는 이 준영(準靈)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고, 이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 진화하는 필사자들에게 영 세계의 전부였다.
66:4.12 (745.2) 3. 칼리가스티아 1백인은 개인적으로 불멸한다, 죽지 않는다. 체계의 생명 기류에 있는 해독하는 보충물이 그들의 물질 형태를 통하여 돌았다. 그들이 반란을 통해서 생명의 기류와 접촉을 잃지 않았다면, 나중에 하나님의 아들이 도착할 때까지, 아니면 하보나와 파라다이스까지 중단된 여행을 다시 시작하도록 언젠가 나중에 풀려날 때까지, 줄곧 기한 없이 살았을 것이다.
66:4.13 (745.3) 사타니아 생명 기류에 있는 해독하는 보충물은 생명나무의 과실로부터 얻었는데, 이것은 칼리가스티아가 도착했을 때 놀라시아덱의 최고자들이 유란시아에 보낸, 에덴시아의 떨기나무였다. 달라마시아 시절에 이 나무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성전, 가운데 뜰에서 자랐고, 바로 이 생명나무의 열매가 영주 참모진의 물질적 존재가 그 나무에 접근할 수 있는 한, 무기한으로 줄곧 살게 만들었고, 이들은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할 존재였다.
66:4.14 (745.4) 진화 종족에게는 아무 가치가 없지만, 이 초월 영양은 칼리가스티아 1백인에게, 그리고 그들과 관련되었던 수정된 안돈 사람 1백 명에게, 계속된 생명을 주기에 아주 충분했다.
66:4.15 (745.5) 이와 관계되어, 안돈 사람 1백 명이 그들의 인간 생식질을 영주 참모진의 구성원에게 기여했을 때, 생명 운반자들은 이들의 필사 몸 안에 체계 회로의 보충물을 넣었다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그들은 이처럼 세세로 이어, 신체가 죽지 않고 참모진과 같은 때에 줄곧 살 수 있게 만들어졌다.
66:4.16 (745.6) 결국 안돈 사람 1백 명은 상관의 새로운 몸에 그들이 기여한 것을 알게 되었고, 바로 안돈 부족의 이 자손 1백 명은 영주의 유형 참모진의 개인 수행원으로서 본부에 남아 있었다.
66:5.1 (745.7) 1백인은 각각 10명으로 이루어진 10개 자치 회의에서 근무하도록 조직되었다. 이 열 회의 가운데 둘 이상이 합동 회의에서 만날 때, 달리가스티아가 그러한 연결 집회를 주관하였다. 이 10개 집단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66:5.2 (745.8) 1. 식품과 물질 복지 회의. 앙이 이 집단을 주관하였다. 이 유능한 집단은 먹을 것, 물ㆍ옷, 그리고 인류의 물질적 진보를 보살폈다. 그들은 우물 파기, 샘물 통제, 관개를 가르쳤다. 높은 산지로부터 온 사람과 북쪽에서 온 사람들에게 옷으로 쓰기 위하여 가죽을 처리하는 개량된 방법을 가르쳤고, 예술과 과학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천 짜기를 소개하였다.
66:5.3 (746.1) 먹을 것을 저장하는 방법에 큰 진전이 있었다. 먹을 것은 익히고, 말리고, 그을림으로 보존되었고, 이처럼 먹을 것은 최초의 재산이 되었다. 사람은 굶어죽을 위험에 대비하라고 가르침을 받았고, 굶주림은 주기적으로 세계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66:5.4 (746.2) 2. 동물을 길들이고 이용하는 위원회. 이 회의는 짐을 싣고 사람을 나르는 일에 인간을 돕고, 먹을 것을 제공하고, 나중에는 땅을 가는 데 쓸모 있을 가장 적합한 동물을 고르고 사육하는 과제에 전념했다. 본이 이 유능한 집단을 지도했다.
66:5.5 (746.3) 오늘날까지 길들인 동물로서 계속해 온 어떤 것들과 함께, 지금은 멸종되었지만, 몇 가지 종류의 유익한 동물을 길들였다. 사람은 오랫동안 개와 함께 살았고, 청인은 코끼리를 길들이는 데 이미 성공했다. 소도 조심스러운 사육 방법에 따라서, 가치 있는 식품의 근원이 되도록 무척 개량되었다. 버터와 치즈가 사람의 식단에서 보통 물건이 되었다. 사람들은 짐을 나르는 데 소를 사용하는 것을 가르침 받았지만, 말은 후일까지 길들이지 못했다. 이 집단의 참모들은 끌어당기는 일을 쉽게 하려고, 처음으로 바퀴 쓰는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66:5.6 (746.4) 이 시절에 소식을 전하는 비둘기가 처음으로 쓰였고, 긴 여행을 떠날 때 소식을 보내거나 도움을 청하려는 목적으로 사람들이 이 비둘기를 가지고 다녔다. 본 집단은 큰 판도르를 타는 새로 길들이는 데 성공했지만, 이 새들은 3만 년도 더 전에 멸종되었다.
66:5.7 (746.5) 3. 육식 동물의 정복에 관한 조언자. 원시인이 어떤 동물을 길들이려고 애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적대하는 동물 세계의 나머지 동물에게 먹히지 않도록 어떻게 자신을 보호하는가 배워야 한다. 단이 이 집단을 지휘하였다.
66:5.8 (746.6) 고대 도시에서 담을 쌓는 목적은 적대하는 사람들의 기습을 막을 뿐 아니라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담이 없이, 숲에서 사는 사람들은 나무 위 집, 돌 움막, 그리고 밤에 불을 유지하는 데 의존하였다. 따라서 이 선생들이 인간의 거처를 개량하는 법을 생도들에게 가르치는 데 많은 시간을 바치는 것이 아주 당연했다. 개량된 기술을 이용하고, 덫을 써서 동물을 정복하는 일이 크게 진보되었다.
66:5.9 (746.7) 4. 지식 전파 및 보존 담당 교직원. 이 집단은 그 초기 시절에 순전히 교육하는 노력을 조직하고 지도했다. 팟이 이를 주관하였다. 팟의 교육 방법은 고용을 감독하는 것이었고, 이에 개량된 노동 방법의 교육이 뒤따랐다. 팟은 첫 알파벳을 만들고 기록하는 체계를 소개하였다. 이 알파벳은 25 글자로 되어 있었다. 글쓰는 재료로 이 초기의 민족들은 나무 껍질, 진흙 서판, 석판, 두드린 가죽으로 만든 일종의 가죽 종이, 벌집으로 만든 어설픈 형태의 종이 같은 물질을 이용했다. 칼리가스티아의 모반이 있은 뒤에 곧 파괴된 달라마시아 도서관은 2백만이 넘는 따로 된 기록으로 이루어졌고 이것은 “팟의 집”이라고 알려졌다.
66:5.10 (746.8) 청인(靑人)은 알파벳 쓰기를 몹시 좋아했고, 그러한 길을 따라서 가장 크게 진보했다. 홍인은 그림 글자를 더 좋아했으며, 한편 황인종은 오늘날 사용하는 것과 비슷하게, 낱말과 관념을 대표하는 기호(記號)를 쓰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나중에 알파벳과 훨씬 많은 것이 반란을 뒤이은 혼란기에 세상에서 사라졌다. 칼리가스티아의 배반은 한 보편적 언어를 가질 희망이, 적어도 말할 수 없이 긴 세월 동안,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였다.
66:5.11 (747.1) 5. 산업 및 무역 위원회. 이 회의는 부족 안에서 산업을 촉진하는 데, 그리고 여러 평화로운 집단 사이에 무역을 증진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 지도자는 놋이었다. 이 집단은 온갖 형태의 원시 제조업을 권장했다. 원시인의 상상력을 끌기 위하여 많은 새로운 상품을 마련함으로 생활 수준의 향상에 직접 이바지했다. 과학 및 예술 회의가 생산한 개량된 소금의 무역을 크게 늘였다.
66:5.12 (747.2) 달라마시아의 여러 학교에서 교육받은 이 깨우친 집단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상업 신용이 실행되었다. 그들은 중앙의 신용(信用) 교환소로부터 돈표를 확보했고, 사람들이 이것을 물물 교환하는 실제 상품을 대신하여 받았다. 세계는 이 장사 방법을 몇십만 년 동안 개선하지 못했다.
66:5.13 (747.3) 6. 계시 종교 대학. 이 단체는 활동하는 데 느렸다. 유란시아 문명은 글자 그대로 모루와 망치 사이와 같이 필요와 두려움 사이에서 단련되었다. 그러나 이 집단은 행성 이탈의 격변이 있고 나서 후일에 혼란이 생겨 그들의 수고가 중단되기 전에, 생물을 두려워(귀신을 숭배)하는 대신에 창조자를 경외하도록 만들려는 시도는 상당히 진보했다. 이 회의의 우두머리는 합이었다.
66:5.14 (747.4) 영주의 참모진 가운데 아무도 진화를 까다롭게 만들 계시를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진화의 힘을 최대로 소모했을 때에야 그들은 계시를 발표했다. 그러나 합은 일종의 종교 예식을 확립하려는 도시 거주자들의 소망에 굴복하기는 했다. 그의 집단은 달라마시아 사람들에게 일곱 가지 예배하는 찬송을 마련해 주었고, 또한 그들에게 날마다 찬양하는 구절을 주었으며, 궁극에는 “아버지의 기도”를 그들에게 가르쳤는데 다음과 같다:
66:5.15 (747.5) “만물의 아버지여, 주의 아들에게 우리가 영광을 돌리오니, 은혜로 우리를 내려다보소서. 아버지 외에, 무서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소서. 우리의 신다운 선생들이 우리를 기뻐하게 만드시고, 언제까지나 우리 입술에 진리를 담아 주소서. 폭력과 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며, 장로들을 공경하고 이웃에 속하는 것을 존중하는 마음을 주소서. 이 계절에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할 푸른 풀밭과 새끼 많이 낳는 양 떼를 주소서. 약속하신 개량자가 하루빨리 오기를 기도하오며, 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 같이, 우리도 아버지의 뜻을 이 세상에서 실행하고자 하나이다.”
66:5.16 (747.6) 영주의 참모진은 종족을 개량하는 자연스런 수단과 평범한 방법을 쓰도록 제한을 받았어도, 생물학적으로 높이 발전하고 나서, 그 뒤에 진화로 성장하는 목표로서 새 종족, 아담의 선물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였다.
66:5.17 (747.7) 7. 건강과 생명의 수호자. 이 회의는 보건을 소개하고 원시적 위생을 증진하는 데 관심을 가졌고, 룻이 이를 지휘하였다.
66:5.18 (747.8) 그 회원들은 후일에 혼란한 와중에 잊혀지고 20세기까지 결코 다시 발견되지 않은 많은 것을 가르쳤다. 인류에게 익히고, 끓이고, 굽는 것이 질병을 피하는 수단이며, 또한 그렇게 익혀 먹는 것이 유아(幼兒)의 사망률을 크게 줄이고, 일찍 젖떼기를 쉽게 만든다는 것도 가르쳤다.
66:5.19 (747.9) 룻의 건강 수호자들이 초기에 가르친 많은 것이, 비록 상당히 왜곡되고 크게 바뀌었지만, 땅의 부족들 사이에 모세의 시절까지 지속하였다.
66:5.20 (748.1) 이 무지한 종족들 사이에서 위생을 증진하는 길에 큰 장애물은 많은 병의 진정한 원인이 너무 작아서 맨 눈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있었고, 또한 그들 모두가 불을 미신처럼 존중했기 때문이다. 쓰레기를 태우라고 그들을 설득하는 데 수천 년이 걸렸다. 그동안에 그들은 썩는 쓰레기를 파묻도록 재촉받았다. 이 시대에 위생에서 큰 발전은 건강을 주고 병을 없애는 햇빛의 성질에 관한 지식을 전파함으로부터 생겼다.
66:5.21 (748.2) 영주가 도착하기 전에, 목욕은 순전히 종교 예식이었다. 원시인들에게 건강 관습으로서 몸을 씻으라고 설득하기는 정말로 힘들었다. 한 주에 한 번 정오 예배에, 만인의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일과 관련하여 실행해야 할 정화(淨化) 예식의 일부로서, 룻은 마침내 종교 선생들이 물로 몸 씻기를 포함하도록 유도하였다.
66:5.22 (748.3) 이 건강 수호자들은 또한 개인적 우정의 약속으로서 침을 교환하거나 피를 마시는 것 대신에 악수를 소개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지도하는 상관들의 가르침을 강제한 압박 밑에서 풀려났을 때, 이 원시 민족들은 건강을 해치고 병을 퍼뜨리는 관습, 무지하고 미신을 믿는 옛 관습으로 서슴지 않고 되돌아갔다.
66:5.23 (748.4) 8. 행성의 예술 및 과학 회의. 이 무리는 초기 인간의 산업 기술을 개량하고, 아름다움에 대한 사람의 개념을 높이는 데 많이 이바지했다. 그들의 지도자는 멕이었다.
66:5.24 (748.5) 세상에 두루, 예술과 과학은 밑바닥에 있었지만, 달라마시아 사람들은 물리학과 화학의 기본을 배웠다. 도기(陶器)가 진보되고, 치장하는 예술이 모두 개량되었고,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보라 종족이 도착할 때까지, 음악은 그다지 진보하지 않았다.
66:5.25 (748.6) 선생들이 거듭하여 재촉했는데도, 이 원시인들은 증기력(蒸氣力) 실험에 찬성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갇혀 있는 수증기의 폭발하는 힘을 크게 두려워하는 것을 결코 이겨낼 수 없었다. 그러나 금속과 불을 가지고 작업하도록 마침내 설득되었다. 하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금속 조각은 초기의 인간에게 무서운 물건이었다.
66:5.26 (748.7) 멕은 안돈 족속의 문화를 진보시키고, 청인의 예술을 개선하느라고 큰 일을 하였다. 청인과 안돈 혈통의 혼합은 예술적으로 재주 있는 종류를 낳았고, 그들 가운데 여럿이 조각(彫刻)의 대가가 되었다. 그들은 돌이나 대리석을 가지고 일하지 않았지만, 구워서 단단해진 그들의 진흙 작품은 달라마시아의 동산을 장식했다.
66:5.27 (748.8) 가내(家內) 예술에서 큰 진보가 있었는데, 그 대부분은 길고도 어두운 반란 시대에 사라졌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결코 다시 발견되지 않았다.
66:5.28 (748.9) 9. 진보된 부족 관계의 관리자. 이 집단은 인간의 사회를 국가 수준으로 올리는 일을 맡은 집단이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툿이었다.
66:5.29 (748.10) 이 지도자들은 부족들 사이에 결혼하게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들은 심의를 거듭하고 서로 알게 될 충분한 기회가 있은 뒤에 구애(求愛)하고 결혼하는 것을 권장했다. 순전히 군사적인 전쟁 춤은 다듬어졌고, 귀중한 사회적 목표에 쓰이도록 만들어졌다. 여러 가지 경쟁하는 놀이가 소개되었지만, 이 옛 사람들은 심각한 민족이었고, 이 초기 부족들에게는 유머가 거의 없었다. 이 여러 관습 가운데 거의 아무것도 나중에 행성이 반란으로 붕괴된 뒤에 살아남지 않았다.
66:5.30 (749.1) 툿과 그 동료들은 평화로운 성질의 집단 관계를 육성하고, 전쟁을 규제하고 인간답게 하도록 만들며, 부족들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고, 부족 정부를 개량하려고 수고했다. 달라마시아 근방에서 상급 문화가 발달하였고, 이 개량된 사회 관계는 더 멀리 있는 부족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데 무척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남 아프리카, 케이프 타운의 20세기 사회가 북쪽에 있는 왜소한 부시맨의 투박한 문화와 전혀 다른 것과 같이, 영주의 본부에서 유행되는 문명의 형태는 다른 데서 진화하는 미개 사회와 아주 달랐다.
66:5.31 (749.2) 10. 부족 조정 및 종족 협동의 최고 법정. 반이 이 최고 회의를 지도하였는데, 이것은 인간사를 감독하는 책임을 맡은 모든 다른 아홉 특별 위원회의 상소(上訴)를 처리하는 법정이었다. 이것은 널리 활동하는 회의였고, 특별히 다른 집단에게 지정되지 않은 문제, 지상의 관심거리인 모든 문제를 맡았다. 이 선택된 집단은 유란시아 최고 법정의 기능을 맡도록 인가받기 전에, 미리 에덴시아의 별자리 아버지의 승인을 받았다.
66:6.1 (749.3) 세계 문화의 발달 정도는 그 토착 존재들의 사회적 유산(遺産)으로 측정되고, 문화의 확장 속도는 그 거주자들이 새롭고 진보된 관념을 이해하는 능력에 따라서 온전히 결정된다.
66:6.2 (749.4) 전통을 노예처럼 따르는 것은 감상적(感傷的)으로 지난날을 오늘과 연결함으로 안정과 협동을 낳지만, 마찬가지로 창의성을 죽이고 인격자의 창조 능력을 해방시키지 않는다. 칼리가스티아 1백인이 도착해서 그 시절의 사회 집단 안에서 개인의 창의성을 부르짖는 새 복음을 비로소 선포했을 때, 온 세계는 전통에 묶인 관습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그러나 이 유익한 통치는 오래지 않아 중단되어서, 종족들은 결코 관습에 예속된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난 적이 없으며, 풍습이 아직도 유란시아를 지나치게 지배한다.
66:6.3 (749.5) 칼리가스티아 1백인―사타니아 저택 세계의 졸업생들―은 예루셈의 예술과 문화를 잘 알았지만, 그러한 지식은 원시 인간이 가득한 미개 행성에서 거의 쓸모가 없었다. 이 현명한 존재들은 그 시절에 원시 민족들을 갑자기 변화시키거나 대규모로 향상시키는 일에 착수하는 것이 좋지 않음을 알았다. 인종이 느리게 진화하는 것을 잘 알았고, 땅에서 사람의 생활 형식을 고치려는 어떤 근본적 시도도 지혜롭게 삼갔다.
66:6.4 (749.6) 10개 행성 위원회는 각자 그들에게 맡겨진 관심거리를 향상시키려고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시작했다. 그들의 계획은 둘러싼 부족들 가운데 최고의 지성인들을 끌어들이고 훈련시킨 뒤에, 사회를 향상시키는 밀사로서 이들을 그 민족에게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66:6.5 (749.7) 한 민족이 특별히 요청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결코 그 민족에게 담당 밀사가 파송되지 않았다. 특정한 부족이나 종족의 향상과 진보를 위하여 수고한 자들은 반드시 그 부족이나 종족의 토착민이었다. 1백인은 우수한 종족의 버릇이나 도덕 관습조차 다른 부족에게 부과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들은 각 종족이 오래 지켜 온 관습을 향상하고 진보시키려고 언제나 참을성 있게 일했다. 유란시아의 단순한 사람들은 그들의 사회 관습을 달라마시아로 가져왔지만, 새롭고 더 좋은 관행과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문화와 접촉함으로, 그리고 우수한 지성인들과 관계를 가짐으로 그 관습을 향상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과정은 더디기는 했어도 아주 효과가 있었다.
66:6.6 (750.1) 달라마시아 선생들은 의식하여, 생물학적 진화로 생기는 순전한 자연 선택에 사회적 선택을 더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인간 사회를 어지럽히지 않았지만, 그 사회의 자연스러운 정상적 진화를 뚜렷이 가속하였다. 그들의 동기는 진화로 진보하는 것이요, 계시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었다. 인류는 가지고 있는 보잘것없는 종교와 도덕을 얻는 데 오랜 세월을 보냈다. 깨우친 우수한 존재들이 너무 가르치고 지나치게 계몽함으로 뒤떨어진 종족들을 향상시키는 일에 손댈 때, 반드시 그런 혼란과 절망이 생기는데, 이 초인간들은 그렇게 해서 인류로부터 이 보잘것없는 진보를 강탈하는 것이 좋지 않음을 잘 알았다.
66:6.7 (750.2) 아프리카의 심장부에서는 자식들이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계속 부모의 통제와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기독교 선교사들이 거기에 가서, 이 아이들이 21살이 된 뒤에, 전혀 부모의 제한에 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침으로 이 풍습을 한 세대 안에 갈아치우려고 애쓸 때, 다만 혼란과 모든 권한의 붕괴를 가져올 뿐이다.
66:7.1 (750.3) 영주의 본부는 지극히 아름다웠고, 비록 그 시절의 원시인에게 두려운 마음이 들도록 설계되었지만, 아주 검소했다. 축산업의 소개를 통해서 궁극에 농업의 발전을 북돋는 것이 이 수입된 선생들의 동기였으니까, 건물은 특별히 크지 않았다. 도시의 담 안에서 땅에 지은 시설은 약 2만의 인구를 부양하기 위하여 풀밭과 밭을 마련하기에 충분했다.
66:7.2 (750.4) 중앙에 예배를 위한 성전과 감독하는 초인간 집단의 10개 위원회의 저택 내부는 정말로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었다. 거주에 쓰이는 건물이 깔끔하고 깨끗함의 본보기였어도, 후일의 발전과 견주어서 모든 것이 무척 간단하고 아주 원시적이었다. 자연히 유란시아에 속하지 않은 어떤 방법도 이 문화 본부에서 이용되지 않았다.
66:7.3 (750.5) 영주의 유형 참모진은 간단하고 모범 되는 거처들을 주관했고, 그 거처들을 세계의 사회 중심과 교육 본부에서 머무르는, 학생으로 온 관찰자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좋은 인상을 주도록 고안된 집으로 유지하였다.
66:7.4 (750.6) 가족 생활의 분명한 질서, 그리고 비교적 안정된 위치에 있는 한 주거에서 한 가족이 함께 사는 것은 이 달라마시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며, 주로 1백인과 그 생도들의 본보기와 가르침 때문이었다. 달라마시아의 초인간 남녀들이 인류가 손자ㆍ손녀를 사랑하고 그 후손을 위하여 계획하도록 이끌기까지, 가정은 하나의 사회 단위로서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야만인은 자식을 사랑하지만, 문화인은 손자ㆍ손녀도 사랑한다.
66:7.5 (750.7) 영주의 참모진은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함께 살았다. 그들 자신이 낳은 아이가 없었던 것이 참말이지만, 달라마시아의 50 모범 가정은 안돈과 산긱 종족의 우수한 가족들로부터 모은 어린아이를 5백 명이 안 되게 데리고 있은 적이 없다. 이 아이들의 다수는 고아였다. 그들은 이 초월 부모의 단련과 훈련을 받았고, 그리고 나서 영주의 여러 학교에서 3년을 보낸 뒤에 (13살에서 15살까지 다녔다) 그들은 결혼할 자격이 있었고, 각 종족에서 필요한 부족들에게 영주의 밀사로서 임명받을 준비가 되었다.
66:7.6 (751.1) 팟은 산업 학교로서 시행한 달라마시아의 교육 계획을 후원했는데, 여기서 생도들은 실습으로 배우고, 실습을 통하여 날마다 유익한 과제를 수행함으로 힘들여 진출하였다. 이 교육 계획은 인품의 발달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무시하지 않았지만, 손으로 하는 훈련을 첫째로 쳤다. 교육은 개인에게, 또 집단으로 했다. 남자와 여자들이, 그리고 남녀가 같이 행동함으로 생도들을 가르쳤다. 이 집단 교육의 절반은 남녀 따로 행했고, 나머지 반은 남녀 공학이었다. 학생들은 개인으로서 손재주를 배웠고, 집단이나 학급을 이루어 사귀었다. 그들은 자기 또래의 사람들과 집단 작업을 하는 것 뿐 아니라, 더 나이 어린 집단, 더 나이 많은 집단, 그리고 어른들과 사귀도록 훈련을 받았다. 또한 가족 집단, 놀이하는 소집단, 학급과 같은 결합에도 익숙해졌다.
66:7.7 (751.2) 각자의 종족과 일하려고 메소포타미아에서 훈련받은 후일의 학생들 사이에는 홍인과 청인의 대표들과 함께, 서 인도의 산지(山地)로부터 온 안돈 사람들이 있었다. 더 나중에는 소수의 황인종도 받아들였다.
66:7.8 (751.3) 합은 원시 종족들에게 도덕률을 제시했다. 이 법전은 “아버지의 길”로 알려졌고, 다음 일곱 계명으로 구성되었다:
66:7.9 (751.4) 1. 만민의 아버지 외에 어떤 신(神)도 두려워하거나 섬기지 말라.
66:7.10 (751.5) 2. 세상의 통치자인 아버지의 아들을 거역하지 말고, 그의 초인간 동료들에게도 불경함을 보이지 말라.
66:7.11 (751.6) 3. 사람의 재판관 앞에 부름받았을 때 거짓말하지 말라.
66:7.12 (751.7) 4. 남자나 여자나 어린아이를 죽이지 말라.
66:7.13 (751.8) 5. 이웃의 물건이나 가축을 훔치지 말라.
66:7.16 (751.11) 이것이 거의 30만 년 동안 달라마시아의 법이었다. 그리고 이 법이 새겨진 많은 돌이 지금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의 해안에서 뚝 떨어져 바다 밑에 놓여 있다. 각 요일에 이 계명들 가운데 하나를 명심하고, 이것을 인사에, 그리고 식사 때 감사를 드리려고 쓰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66:7.17 (751.12) 이 시절의 시간 측정은 음력의 달이었고, 이 기간은 28일로 계산되었다. 낮과 밤을 빼고, 이것이 초기 민족들에게 알려진 유일한 시간 계산이었다. 7일로 된 한 주를 달라마시아 선생들이 소개하였고, 이것은 7이 28의 4분의 1이라는 사실에서 생겨났다. 초우주에서 7이라는 수의 중요성은 의심할 여지 없이, 영적 암시를 보통의 시간 계산에 집어넣을 기회를 그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한 주 기간의 자연스런 기원은 하나도 없다.
66:7.18 (751.13) 그 도시 주위에 160킬로미터 반지름 안에 있는 시골은 잘 정착되었다. 도시 바로 둘레에서, 영주 학교의 졸업생 수백 명이 동물 사육에 종사했고, 그렇지 않으면 그 참모진과 수많은 인간 조수(助手)로부터 받은 지침을 수행했다. 몇몇은 농사와 원예에 종사하였다.
66:7.19 (751.14)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 것에 대한 벌로서, 인류가 농사 짓는 신세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얼굴에서 땀을 흘리며 너희는 들의 열매를 먹을지니라” 하는 것은 배반한 칼리가스티아의 지휘 밑에서 어리석은 짓, 루시퍼 반란에 사람이 가담했다는 이유로 벌을 내리는 선고가 아니었다. 땅을 경작하는 것은 진화 세계에서 진보하는 문명을 세우는 데 본래부터 있다. 행성 영주와 그 참모진이 유란시아에 도착한 때와 칼리가스티아가 모반자 루시퍼와 운명을 같이 하기로 작정했던 그 비극의 시절 사이에 개재하는 30만 년 동안 내내, 이 명령은 그들의 모든 가르침의 핵심이었다. 흙을 가지고 일하는 것은 저주(詛呪)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모든 활동 가운데 가장 사람다운 것을 누리도록 그렇게 허락받은 모든 사람에게 주는 가장 고귀한 축복이다.
66:7.20 (752.1) 반란이 터졌을 때, 달라마시아에 거주하던 인구는 거의 6천 명이었다. 이 수는 정규 학생들을 포함하지만, 늘 1천 명이 넘는 방문자와 관찰자를 넣지 않는다. 그 아득히 먼 시절에 얼마나 놀라운 진보가 이루어졌는가 너희는 거의 또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 시절에 인간이 얻은 거의 모든 놀라운 소득은 사람을 속이고 선동하는 칼리가스티아의 재난에 뒤따라 생긴 끔찍한 혼란과 비참한 영적 암흑으로 인하여 깨끗이 지워졌다.
66:8.1 (752.2) 칼리가스티아의 오랜 생애를 돌이켜보건대, 우리는 그의 행동에서 눈길을 끌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뚜렷한 모습을 발견한다. 그는 극도로 개인주의자였다. 거의 모든 항의 집단을 편드는 경향이 있었고, 은근한 비평을 가볍게 표현하는 자를 보통 동정하였다. 권한에 지배받을 때 불안해하고, 어떤 형태의 감독이라도 얼마큼 분개하는 이 경향이 일찍부터 나타난 것을 우리는 탐지한다. 선임자의 조언을 조금 분하게 여기고, 상관의 권한 밑에서 얼마큼 불안해했지만, 그런데도 시험이 다가왔을 때는 언제나 우주 통치자들에게 충성하고, 별자리 아버지들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가 부끄럽게도 유란시아를 저버릴 그때까지, 아무런 진짜 잘못이 결코 그에게서 발견되지 않았다.
66:8.2 (752.3) 루시퍼와 칼리가스티아는 모두, 그들의 비판하는 경향, 또 자만심이 미묘하게 발전하고 이와 관계되어 자신을 중요시하는 느낌이 지나친 것에 관하여, 참을성 있는 가르침과 사랑의 경고를 받아 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도와주려는 이 모든 시도가 근거 없는 비판으로, 개인의 자유를 부당하게 간섭하는 것이라고 오해되어 왔다. 칼리가스티아와 루시퍼는 친절한 조언자들이 몹시 비난받을 수 있는 동기로 움직인다고 판단했고, 그런 비난할 만한 동기가 자신의 뒤틀린 생각과 그릇 인도된 계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차츰 자라는 자신의 이기심으로 사심(私心)없는 조언자들을 판단하였다.
66:8.3 (752.4) 칼리가스티아 영주가 도착한 때로부터, 행성의 문명은 거의 30만 년 동안 어지간히 정상 방법으로 진보하였다. 생명을 수정하는 구체이고, 따라서 불규칙하게 일어나는 수많은 것과 진화에서 변동하는 특별한 사건들에 지배되는 것을 제쳐놓고, 루시퍼 반란, 그리고 동시에 일어난 칼리가스티아 배반이 있던 시절까지, 유란시아는 그 행성 경력을 볼 때 아주 흡족하게 진보하였다. 그 뒤의 모든 역사는, 나중에 아담과 이브가 그들의 행성 사명을 마치는 데 실패한 것 뿐 아니라, 이 크나큰 실수로 말미암아 분명히 바뀌었다.
66:8.4 (752.5) 유란시아의 영주는 루시퍼 반란이 있을 당시에 어두운 길에 빠졌고, 따라서 행성에서 오래 가는 혼란을 일으켰다. 별자리 통치자 및 다른 우주 권력자들이 같이 행동함으로, 그는 나중에 군주 권한을 빼앗겼다. 그는 아담이 행성에서 머무르던 때까지, 고립된 유란시아의 불가피한 흥망을 함께 나누었고, 새로운 보라 민족―아담과 이브의 후손―의 생명력을 주입함으로 필사 종족들을 개량하려는 계획이 유산(流産)되도록 만드는 데 무엇인가 기여하였다.
66:8.5 (753.1) 타락한 영주가 인간사를 어지럽힐 힘은 아브라함 시절에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필사자로 육신화함으로 엄청나게 단축되었고, 나중에 미가엘이 육신을 입고 살던 시절에, 이 배반한 영주는 마침내 유란시아에서 모든 권한을 빼앗겼다.
66:8.6 (753.2) 유란시아에서 악마가 몸으로 와 있다는 교리는, 비록 배신하고 불의한 칼리가스티아가 행성에 있었다는 데 얼마큼 근거가 있지만, 그런데도 그러한 “악마”가 정상 인간의 정신이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그 정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가르침은 통째로 허위이다.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수여되기 전에도, 칼리가스티아나 달리가스티아도 결코 필사자를 억압하거나 인간의 의지를 거슬러서 무엇인가 하도록 어떤 정상 인간에게도 강요할 수 없었다. 사람의 자유 의지는 도덕적인 일을 최종으로 좌우한다. 깃드는 생각 조절자조차 사람 자신의 의지가 택하는 것에 반대하여, 한 가지 생각이나 한 가지 행위를 사람에게 강제하려고 하지 않는다.
66:8.7 (753.3) 이제 그 영역의 이 모반자는, 옛 부하들을 해칠 권력을 다 빼앗기고서, 유버르사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루시퍼 반란에 참가한 모든 자에게 최종 판결을 내리기를 기다린다.
67:0.1 (754.1) 과거의 어떤 중대한 시대에 관한 지식, 특히 행성에 반란이 일어난 것과 그 결과에 관한 지식이 없이는 유란시아에서 인간의 존재와 연결된 문제들을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 비록 이 동란은 유기체 진화의 걸음을 심각하게 방해하지 않았어도, 사회의 진보와 영적 발전의 과정을 두드러지게 수정하였다. 행성의 초물리적 역사 전체가 파괴적인 이 재난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
67:1.1 (754.2) 루시퍼의 조수, 사탄이 한 번 정기 검열로 방문했을 때, 30만 년 동안 칼리가스티아는 유란시아를 책임지고 있었다. 사탄이 행성에 도착했을 때, 그의 모습은 사악한 위풍을 그린 너희의 풍자 만화들을 조금도 닮지 않았다. 그는 대단히 눈부신 라노난덱 아들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놀라지 말지니, 바로 사탄은 눈부신 빛의 생물이라.”
67:1.2 (754.3) 이 검열을 받는 중에 사탄은 루시퍼가 그때 제안한 “자유 선언서”를 칼리가스티아에게 알려 주었다. 지금 우리가 알다시피, 영주는 반란이 선포되고 나서 행성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찬성하였다. 지역 우주에 충성하는 성격자들은, 맡긴 책임을 이렇게 미리 계획하여 배반한 것 때문에 칼리가스티아 영주를 특별히 멸시한다. 창조 아들은 이러한 경멸을 이 말씀으로 표현했다: “너는 너의 지도자 루시퍼와 같으니, 그는 죄가 가득하여 불의(不義)를 지속하였느니라. 진리 가운데 거하지 않았은즉, 그는 자신을 높이기 시작할 때부터 왜곡하는 자였더라.”
67:1.3 (754.4) 한 지역 우주의 어떤 행정 사무에서도, 새로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진화하는 필사자의 복지와 안내를 책임지는 행성 영주에게 맡긴 것보다 더 신성하게 생각되는 높은 직무는 없다. 그리고 온갖 형태의 악한 것 중에서 아무것도, 맡긴 책임을 저버리고 자기가 신임하는 친구들에게 불충하는 것보다 성격의 지위를 더 파괴하지 않는다. 깊이 숙고하여 이 죄를 저지르면서, 성격이 아주 완전히 비뚤어졌기 때문에, 칼리가스티아의 머리는 그 이후로 결코 다시 균형을 완전히 찾을 수 없었다.
67:1.4 (754.5) 죄를 보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다. 그러나 우주 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죄는 알면서 우주의 현실에 저항하는 성격자의 태도이다. 잘못은 현실을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것이라 여길 수도 있다. 악한 것은 우주의 현실을 부분적으로 이루거나 그 현실에 그릇되게 적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죄는 신의 실체에 일부러 저항하는 것―멀쩡한 정신으로 영적 진보를 반대하는 것―이요, 한편 불의는 인식된 현실에 대하여 드러내놓고 끈질기게 항거하는 것이요, 우주에서 미친 짓에 가까이 가도록 성격이 붕괴되는 정도를 의미한다.
67:1.5 (755.1) 잘못은 지능이 날카롭지 못함을 가리키며, 악(惡)은 지혜가 모자람, 죄는 지나친 영적 빈곤을 가리킨다. 하지만 불의(不義)는 성격자의 통제력이 사라진 것을 가리킨다.
67:1.6 (755.2) 그리고 죄를 아주 여러 번 선택하고 아주 빈번히 되풀이할 때, 죄는 버릇이 될 수 있다. 습관으로 죄를 저지르는 자는 쉽게 불의하게 되고, 우주와 거기 있는 모든 신다운 실체에 대항하여 마음을 다하여 모반하는 자가 될 수 있다. 온갖 형태의 죄가 용서 받을 수 있지만, 불의에 굳어진 자가 언제라도 그릇된 행동 때문에 진지하게 슬픔을 맛보거나 죄의 용서를 받아들일까 우리는 의심이 든다.
67:2.1 (755.3) 사탄의 검열이 있은 뒤에 조금 있다가, 그리고 행성 행정부가 유란시아에서 바야흐로 대단한 성과를 얻으려 하기 직전에, 칼리가스티아는 동료 달리가스티아와 오랫동안 연장된 회담을 가졌고, 그 뒤에 달리가스티아는 유란시아의 10개 위원회의 특별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집회는 칼리가스티아 영주가 자신이 유란시아의 절대 군주라 선포하려고 한다는 발표로 시작되었고, 행성 정부가 다시 조직되고 행정 권한을 가진 직책들이 나중에 다시 분배될 때까지, 모든 행정 집단이 모든 기능과 권력을 수탁자인 달리가스티아의 손으로 넘겨줌으로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67:2.2 (755.4) 이 놀라운 요구가 발표된 뒤에, 최고 조정 회의의 의장, 반의 대가다운 호소가 뒤따랐다. 탁월한 행정관이자 유능한 이 법학자는 칼리가스티아가 제안한 과정이 행성의 반란에 가까이 가는 행위라고 낙인을 찍고, 사타니아의 체계 군주 루시퍼에게 상소(上訴)가 올라갈 수 있을 때까지, 회의에 참석한 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참여를 삼가라고 호소했는데, 그는 참모진 전부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따라서, 상소가 예루셈으로 올라갔는데, 당장에 칼리가스티아가 유란시아에서 최고 군주라고 지명하며 그의 지침에 절대로, 도전하지 않고 충성할 것을 지시하는 명령이 돌아왔다. 이 놀라운 소식에 답하여, 기품 있는 반은 일곱 시간에 걸쳐 기억에 남을 연설을 했으며, 이 연설에서 달리가스티아ㆍ칼리가스티아ㆍ루시퍼가 네바돈 우주의 통치권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정식으로 고발하였다. 그리고 그는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에게 지지와 확인을 받으려고 호소했다.
67:2.3 (755.5) 그동안에 체계의 회로들이 단절되었고, 유란시아는 고립되어 버렸다. 행성에 있는 하늘 생명의 무리는 모두 갑자기 아무 경고 없이 고립되고, 어떤 외부의 상담과 조언도 받지 못하게 완전히 단절된 것을 발견했다.
67:2.4 (755.6) 달리가스티아는 칼리가스티아가 “유란시아의 하나님이요 만민 위에 최고”라고 선포했다. 그들 앞에 이렇게 선포되자, 논쟁의 선이 뚜렷하게 그어졌다. 각 집단은 자기네끼리 물러나서 심의를 시작했고, 이 논쟁은 결국 행성에 있던 모든 초인간 성격자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었다.
67:2.5 (755.7) 세라핌과 케루빔과 기타 하늘 존재들이 이 모진 싸움에, 길고도 죄 많은 이 투쟁의 결정에, 말려들었다. 유란시아가 고립될 때 유란시아에 어쩌다가 있었던 많은 초인간 무리가 여기에 묶여 있었고, 세라핌과 그 동료들처럼, 죄와 올바름 사이에―루시퍼의 길과 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뜻 사이에―선택하도록 강요되었다.
67:2.6 (756.1) 7년이 넘도록 이 싸움이 이어졌다. 관련된 모든 성격자가 마지막 결정을 내릴 때까지, 에덴시아 당국은 간섭하거나 끼어들려 하지 않았고, 끼어들지도 않았다. 그때가 되기까지, 반과 충성스러운 동료들은 그들이 정당함을 확인받거나, 오래 끌었던 걱정과 견딜 수 없는 불안에서 풀려나지도 못했다.
67:3.1 (756.2) 사타니아의 서울, 예루셈에서 반란이 터진 것을 멜기세덱 회의가 방송했다. 비상시 멜기세덱들이 즉시 예루셈에 파송되었고, 가브리엘은 권한을 도전받은 창조 아들의 대표로서 행동하겠다고 자원하였다. 사타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난 사실이 방송되는 것과 함께, 그 체계는 자매 체계들로부터 고립되고 격리되었다. “하늘에서,” 사타니아의 본부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그 전쟁은 지역 체계의 어느 행성에나 퍼졌다.
67:3.2 (756.3) 유란시아에서 1백인의 유형(有形) 참모진 가운데 40명이 (반을 넣어서) 반란에 가담하기를 거절했다. 참모진의 많은 인간 조수(수정된 사람 및 다른 사람들)도 또한 미가엘과 그의 우주 정부를 용감하고 고귀하게 방어한 자였다. 세라핌과 케루빔 사이에서 성격자들이 끔찍하게 분실되었다. 행성에 배치된 행정 및 과도기 세라핌 가운데 거의 절반이 루시퍼의 운동을 지지하여, 그들의 지도자 및 달리가스티아와 합세하였다. 1차 중도인(中道人) 중에서 40,119명이 칼리가스티아와 손을 잡았으나 이 존재들 가운데 나머지는 맡긴 책임에 충실한 채로 남아 있었다.
67:3.3 (756.4) 배반한 영주는 불충한 중도인과 기타 무리의 반란 성격자들을 집결시키고 그들이 그의 명령을 집행하도록 조직했고, 한편 반은 충성하는 중도자와 기타 충실한 무리를 모으고 행성 참모진과 버려진 다른 하늘 성격자들을 구하기 위하여 큰 전투를 시작했다.
67:3.4 (756.5) 이 투쟁이 있던 시기에 충성파는 달라마시아 동쪽에 몇 킬로미터 떨어져, 담이 없고 보호가 잘 되지 않은 촌락에 거주했다. 그러나 깨어 있고 항상 지키는 충성하는 중도인들이 그들의 주거를 낮에도 밤에도 경계했고, 그들은 귀중한 생명나무를 가지고 있었다.
67:3.5 (756.6) 반란이 터지자, 충성하는 케루빔과 세라핌들은 충실한 중도자 3명의 도움을 받아서 생명나무의 관리를 맡았고, 오직 참모진에서 충성파 40명, 그리고 그들과 관계된 수정된 필사자들이 이 에너지 식물의 열매와 잎을 먹도록 허락했다. 참모진의 동료인 이 수정된 안돈 족속은 56명이 있었고, 불충한 참모진에서 안돈 수행원 16명은 주인을 따라서 반란에 가담하기를 거절했다.
67:3.6 (756.7) 칼리가스티아 반란이 터졌던 중대한 7년에 걸쳐서 내내, 반은 사람ㆍ중도자ㆍ천사로 이루어진 그의 충성스러운 군대를 보살피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했다. 흔들림 없이 우주 정부에 그렇게 충성하는 태도를 반이 유지하게 한 그 영적 통찰력과 정신의 확고함은 맑은 생각, 지혜로운 생각, 논리적 판단, 진지한 동기, 사심 없는 목적, 지적 충성, 체험의 기억, 단련받은 인품에서, 그리고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의심하지 않고 헌신한 데서 생긴 산물이었다.
67:3.7 (756.8) 기다리는 이 7년은 마음을 살피고 혼을 단련하는 시간이었다. 한 우주의 사무에서 그러한 위기는 영적 선택의 한 요인으로서 지성이 얼마나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는가 보여준다. 교육ㆍ훈련ㆍ체험은 진화하는 모든 도덕적 인간이 내리는, 생사를 좌우하는 대부분의 결정에서 요인이 된다. 그러나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의 뜻과 길에 충성으로 헌신하는 놀라운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완전히 헌신한 인간 의지에게 능력을 주도록, 깃드는 영이, 결정하는 인격의 힘과 바로 접촉하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반의 수정된 인간 동료, 아마돈의 체험에서 일어났다.
67:3.8 (757.1) 아마돈은 루시퍼 반란에서 뛰어난 인간 영웅이다. 안돈과 폰타의 이 남자 후손은 영주의 참모진에게 생명질(生命質)을 기여한 1백인 중에 하나였고, 그 사건 이후로 늘, 반에게 동료이자 인간 조수로서 부속되었다. 길고도 벅찬 투쟁을 통해서 내내, 아마돈은 두령의 편에 섰다. 7년에 걸친 투쟁 전체를 통해서, 아마돈과 충성스러운 동료들이 머리가 좋은 칼리가스티아의 온갖 속이는 가르침에 불굴의 정신으로 저항하는 동안에, 진화 종족의 출신인 이 사람이 달리가스티아의 궤변에 끄떡도 하지 않고 버틴 것은 감격스러운 광경이었다.
67:3.9 (757.2) 최대의 지능, 그리고 우주 사무에서 광대한 체험을 가진 칼리가스티아는 잘못된 길에 빠졌다―죄를 품었다. 최소의 지능을 가지고 우주 체험이 전혀 없는 아마돈은 우주에 봉사하는 일에 굳게 견디고, 동료에게 굳게 충성하였다. 반은 지적 결의와 영적 통찰력을 멋지고 효과 있게 조합한 가운데 지성과 영을 이용했고, 이렇게 함으로 인격의 실현을 체험하는 수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등급에 도달했다. 지성과 영이 완전히 하나가 되면, 초인간적 가치가 있는 것을, 아니 상물질 실체까지도, 창조하는 가능성이 된다.
67:3.10 (757.3) 이 비극의 시절에 술렁이던 사건들을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다. 그러나 드디어 마지막 성격자가 최종 결정을 내렸고, 그때, 그러나 그제서야, 에덴시아의 최고자 한 분이 유란시아에서 권한을 몰수하려고 긴급 멜기세덱들과 함께 도착했다. 칼리가스티아가 군림했던 전체 모습을 적은 기록은 예루셈에서 지워졌고, 행성을 복원시키는, 시험 시대가 막을 열었다.
67:4.1 (757.4) 마지막 출석을 불렀을 때, 영주 참모진의 유형 참모들은 다음과 같이 줄을 선 것이 발견되었다. 반과 그의 조정 법정 전부가 충성한 채로 남아 있었다. 앙과 식량 회의에서 세 참모는 살아남았다. 동물 사육 위원회는 다 반란에 휩쓸렸고, 마찬가지로 동물 정복 고문들도 다 그렇게 되었다. 팟과 교육 직원에서 다섯 참모가 구제되었다. 놋과 산업 및 무역 위원회는 모두 칼리가스티아와 합세하였다. 합과 계시 종교 대학 전부가 반과 그의 고귀한 집단과 함께 충성한 채로 남았다. 룻과 건강 위원회 전부가 분실되었다. 예술 및 과학 회의는 전부 충성한 채로 남았지만, 툿과 부족 정부 위원회는 모두 분실되었다. 이처럼 1백인 가운데 40명은 구제되었고 나중에 예루셈으로 옮겨갔으며, 거기서 파라다이스로 가는 여행을 다시 시작했다.
67:4.2 (757.5) 행성 참모진에서 반란에 동조한 60명은 놋을 지도자로 뽑았다. 그들은 모반하는 영주를 위해서 마음을 다하여 일했지만, 체계의 생명 회로가 주는 영양을 빼앗긴 것을 곧 발견했다. 그들은 필사 존재의 지위로 강등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정말로 초인간이었지만, 동시에 물질이고 필사자였다. 그들의 수를 늘이려는 노력으로, 달리가스티아는 최초의 60명과 수정된 안돈 동료 44명이 머지 않아 죽음으로 사라질 운명을 가진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즉시 성교로 자식을 낳으라고 명령했다. 달라마시아가 멸망한 뒤에, 불충한 참모들은 북쪽과 동쪽으로 옮겨갔다. 그들의 후손은 놋 족속으로, 그들이 거하던 곳은 “놋의 땅”으로 오랫동안 알려졌다.
67:4.3 (758.1) 반란으로 인하여 버림받고 지상의 아들딸과 곧 짝지은 이 비범한 초인간 남녀들의 존재는 신들이 필사자들과 짝지으려고 내려왔다는, 전설로 내려온 이야기를 쉽게 낳았다. 이처럼 신화(神話)의 성질을 가졌지만, 반란 이후 시절의 사실에 근거를 둔 수많은 전설이 생겨났다. 이것은 조상이 놋 족속 및 그 후손들과 이렇게 접촉한 다양한 민족의 민속 이야기와 전통에서 자리를 차지했다.
67:4.4 (758.2) 영적 영양을 빼앗긴, 모반한 참모들은 결국 자연사로 죽었다. 나중에 인류의 우상 숭배의 상당한 부분은 칼리가스티아 시절에 상당히 존경받았던 이 존재들의 기억을 지속하려는 소망에서 생겨났다.
67:4.5 (758.3) 참모진 1백명이 유란시아에 왔을 때, 그들은 임시로 생각 조절자로부터 분리되었다. 멜기세덱 관리자들이 도착하고 나서 즉시, 충성한 인격자들은 (반을 빼고) 예루셈으로 돌아갔고, 그들을 기다리던 조절자와 다시 뭉쳤다. 우리는 반역한 참모 60명의 운명을 모른다. 관계된 조절자들은 아직도 예루셈에서 기다린다. 루시퍼 반란 전부가 마침내 판결되고 모든 참가자의 운명이 선포될 때까지, 의심할 여지 없이, 문제는 지금 상태대로 남을 것이다.
67:4.6 (758.4) 천사와 중도자와 같은 존재들은 칼리가스티아와 달리가스티아처럼 찬란하고 신임받는 통치자가 길을 잃는 것―배반의 죄를 저지르는 것―을 상상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죄에 빠진 자들은―일부러 또는 미리 계획하여 반란에 들어가지는 않았는데―신임했던 지도자들에게 속은 자기 상관들에게 잘못 끌려갔다. 마찬가지로 원시적으로 생각하는 진화된 필사자의 지지를 얻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67:4.7 (758.5) 예루셈과 잘못에 빠진 여러 행성에서 루시퍼 반란의 희생자가 된 모든 인간 및 초인간 존재의 대다수는 진심으로 어리석은 짓을 뉘우친 지 오래다. 그리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사타니아 반란 사무의 판결을 아주 최근에 시작했는데, 그들이 마침내 판결을 마칠 때, 진지하게 뉘우친 모든 그러한 존재가 어떤 방법으로 회복되고, 우주의 어떤 단계에 봉사하도록 회복될 것이라고 우리는 참으로 믿는다.
67:5.1 (758.6) 반란의 선동이 있은 뒤에, 달라마시아와 그 근처에서 거의 50년 동안 큰 혼란이 휩쓸었다. 빈틈없이, 철저하게 온 세계를 다시 조직하는 일이 시도되었다: 문화를 증진하고 종족을 개량하는 정책으로서, 혁명이 진화를 대체하였다. 달라마시아와 그 근처에 있던 우수하고 어느 정도 훈련받은 체류자들 사이에 문화적 지위의 갑작스런 진보가 나타났지만, 바깥에 있는 민족들에게 이 새로운 급진적 방법을 시도했을 때, 말할 수 없는 혼란과 민족의 수라장이 당장에 일어난 결과였다. 그 시절에 절반 진화된 원시인은 자유를 재빨리 방종(放縱)으로 풀이하였다.
67:5.2 (758.7) 반란이 있고 나서 바로 뒤에, 선동했던 참모진 전부가 반 야만인의 떼에 대항하여 그 도시를 열심히 방어하는 데 말려들었고, 이 반 야만인들은 때 이르게 그들에게 가르쳐 준 자유주의의 결과로 그 담을 포위했다. 그 아름다운 본부가 남쪽의 물결 밑에 가라앉기 몇년 전에, 그릇 인도되고 잘못된 가르침을 받은, 달라마시아 후배지(後背地)의 부족들이 반 야만스런 공격으로 그 찬란한 도시를 이미 휩쓸었고, 탈퇴한 참모진과 그 동료들을 북쪽으로 몰아냈다.
67:5.3 (759.1) 개인과 집단에게 자유를 주자는 생각을 따라서 인간 사회를 즉시 다시 건설하려는 칼리가스티아의 계획은 재빠른 실패, 대체로 완벽한 실패인 것이 입증되었다. 사회는 급히 그 옛날의 생물학적 수준으로 가라앉았고, 혼란에 빠진 세계를 이 동란이 전보다 더 나쁘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으니까, 발전하려는 투쟁은 칼리가스티아 체제가 시작될 때 있던 자리보다 그다지 앞서지 않은 데서 모두 다시 시작되었다.
67:5.4 (759.2) 반란이 있은 지 162년이 지나서 해일(海溢)이 달라마시아를 휩쓸었고, 행성의 본부는 바닷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 찬란한 시대에 있었던 귀한 문화의 거의 모든 자취가 지워질 때까지, 이 땅은 다시 솟아나지 않았다.
67:5.5 (759.3) 세계의 처음 서울이 물에 잠겼을 때, 그 도시에는 유란시아에서 가장 낮은 부류의 산긱 종족들만 살고 있었고, 이 배반자들은 아버지의 성전을 빛과 불의 거짓 신, 녹에게 바친 사당(祠堂)으로 이미 바꾸어 버렸다.
67:6.1 (759.4) 반을 따르는 자들은 인도 서부의 고지로 일찍 물러났고, 거기서 혼란에 빠진 낮은 땅 민족들의 공격을 면했다. 그 은둔처로부터, 초기 바도난 선조가 산긱 부족들이 태어난 시절 바로 전에 인류의 복지를 위하여 모두 영문 모르고서 한때 일했던 것 같이, 그들은 세계를 복원할 계획을 세웠다.
67:6.2 (759.5) 멜기세덱 관리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반은 인간사의 행정을 각자 4명으로 된 10개 위원회의 손에 맡겼고, 이 집단은 영주의 체제와 똑같았다. 거주하는 선임 생명 운반자들은 이 40인의 회의를 임시 지도하는 일을 맡았고, 이것은 기다리던 7년 동안 내내 활동했다. 충성한 참모 39명이 예루셈으로 돌아갔을 때, 아마돈 족속의 비슷한 집단이 이 책임을 맡았다.
67:6.3 (759.6) 이 아마돈 족속은 아마돈이 속했던 충성한 안돈 사람 144명의 집단에서 비롯하였고, 이들은 그의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집단은 남자 39명과 여자 105명으로 구성되었다. 이 가운데 56명은 불사(不死)의 지위를 가졌는데, 모두가 (아마돈을 제외하고) 참모진의 충성한 사람들과 함께 옮겨졌다. 이 귀중한 무리에서 나머지는 반과 아마돈의 지휘 하에 필사 시대가 끝날 때까지 땅에서 계속 있었다. 그들은 번식하고, 반란 이후 시기에 길고도 어두운 세월을 통해서, 세상을 위하여 지도력을 계속 마련해 준 생물학적 효소였다.
67:6.4 (759.7) 반은 아담의 시절까지 유란시아에 남아 있었고, 행성에서 활동하는 모든 초인간 성격자에게 이름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반과 아마돈은 15만 년이 넘도록, 멜기세덱들이 베푸는 특화된 생명 봉사와 함께, 생명나무의 기법으로 목숨을 유지하였다.
67:6.5 (759.8) 선임 별자리 통치자, 곧 놀라시아덱의 최고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확인을 받고서, 행성 관리자였던 12명의 멜기세덱의 회의가 유란시아의 사무를 오랫동안 관리했다. 한 자문 회의가 멜기세덱 관리자들과 관련되어 있었고 이렇게 구성되었다: 타락한 영주의 충성스러운 조수 중에서 1명, 거주하는 생명 운반자 2명, 견습 훈련을 받는, 삼위일체를 체험한 아들 1명, 자원하는 교육 아들 1명, 아발론의 찬란한 저녁별 1명 (정기적으로), 세라핌의 우두머리와 케루빔의 우두머리, 두 이웃 행성으로부터 온 고문들, 하위 천사 생명의 총독, 중도인의 사령관 반. 이렇게 유란시아는 아담이 도착할 때까지 통치되고 관리되었다. 용감하고 충성스러운 반이, 유란시아의 사무를 그렇게 오랫동안 관리한 행성 관리자 자문 회의에서 한 자리에 배치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67:6.6 (760.1) 유란시아의 멜기세덱 관리자 12명은 영웅다운 일을 해냈다. 그들은 문명의 잔재를 보존했으며, 반은 그들의 행성 정책을 충실하게 집행했다. 반란이 있은 뒤 1천 년 안에, 그는 세계에서 널리 흩어진, 350개가 넘는 상급 집단을 가지고 있었다. 이 문명의 전진 기지(基地)들은, 산긱 종족, 특히 청인과 놋 족속과 조금 섞인, 충성스러운 안돈 사람들로 대체로 구성되었다.
67:6.7 (760.2) 반란으로 끔찍한 좌절이 있었는데도, 땅에는 생물학상으로 장래가 보이는 좋은 핏줄이 많이 있었다. 멜기세덱 관리자들의 감독 하에, 반과 아마돈은 계속하여 인류의 자연스러운 진화를 돌보았고, 궁극에 유란시아로 물질 아들과 딸의 파견을 정당화한 수준에 이를 때까지, 사람의 신체적 진화를 진척시켰다.
67:6.8 (760.3) 반과 아마돈은 아담과 이브가 도착하고 나서 얼마 안 되기까지 땅에 남아 있었다. 그 뒤에 몇년이 지나서 그들은 예루셈으로 옮겨졌고, 거기서 반은 그를 기다리던 조절자와 다시 합쳤다. 파라다이스의 완전함, 그리고 모이고 있는 필사 최후 군단의 밝혀지지 않은 운명에 이르는 멀고 먼 길에서, 앞으로 가라는 명령을 기다리면서 반은 지금 유란시아의 이익을 위하여 수고한다.
67:6.9 (760.4) 루시퍼가 유란시아에서 칼리가스티아를 지지한 뒤에, 반이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에게 상소했을 때, 별자리 아버지들은 반이 주장하는 모든 쟁점에서 즉시 그를 지지하는 결정을 보냈다는 것을 기록해야 한다. 이 판결은 그에게 미치지 못했는데, 그 판결이 이동 중에 있을 때 행성의 통신 회로가 두절되었기 때문이다. 겨우 최근에야 이 실제 판결이 중계하는 에너지 송신자의 수중에 던져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고, 거기서 그것은 유란시아가 고립된 이후로 죽, 버려진 채로 있었다. 유란시아 중도자들이 조사한 결과로 이것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이 판결의 발표는 유란시아가 별자리 회로에 회복되기까지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행성간 통신에서 생긴 이 명백한 사고(事故)는 에너지 송신자들이 정보를 받고 보낼 수 있지만, 통신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길 수 있었다.
67:6.10 (760.5) 사타니아의 법적 기록에서 반의 절차상 지위는 에덴시아 아버지들의 이 판결이 예루셈에서 기록될 때까지, 실제로, 최종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67:7.1 (760.6) 생물이 빛을 일부러, 끈질기게 물리치는 것이 성격에게 주는 (구심적) 결과는 불가피하고 개인적이며, 오로지 신과 성격을 가진 그 생물에게만 관심거리이다. 그러나 불의(不義)의 수확, 혼을 죽이는 수확은 의지를 가진 그 불의한 생물이 마음 속에서 거두는 것이다.
67:7.2 (761.1) 그러나 죄가 외부에 미치는 영향은 그렇지 않다: 마음 속에 품은 죄의 비성격 (원심적) 결과는 불가피하고 집단에게 생기며, 영향을 미치는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는 생물 모두의 관심거리이다.
67:7.3 (761.2) 행성의 행정이 붕괴된 뒤에 5만 년쯤 되어서, 지구의 사무는 너무나 분열되고 지연되어서 35만 년 이전에 칼리가스티아가 도착했을 때 존재했던, 일반적 진화 상태보다 거의 나아지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진보가 있었지만, 다른 방향에서 근거를 많이 잃었다.
67:7.4 (761.3) 죄의 효과는 결코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주의 행정 구역들은 유기적이며, 모두가 한 성격자의 곤경을 어느 정도까지 함께 짊어져야 한다. 죄가 현실에 대한 그 성격자의 태도이니까, 우주 가치의 어떤 관련된 수준에서도 본래부터 가진 그 부정적 수확을 드러내도록 정해져 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 악행, 또는 죄 많은 계획이 낳는 총 결과는 오직 실제로 행하는 수준에서 체험하는 것이다. 우주 법칙을 어기는 것은 머리를 심각하게 쓰거나 영적 체험을 해치지 않고도, 물리적 영역에서 치명적일 수도 있다. 죄가 존재 전체의 태도일 때, 머리가 선택하고 혼이 의도하는 것을 죄가 대표할 때에야 죄는 성격자의 생존에 치명적 결과를 가득히 가져온다.
67:7.5 (761.4) 악과 죄는 그 결과를 물질 및 사회의 영역에서 쏟아부으며, 때때로 우주 실체의 어떤 수준에서 영적 진보를 늦출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존재가 지은 죄도 결코 남의 성격이 살아남는, 신이 준 권한이 실현되는 것을 막지 않는다. 영원히 살아남는 것은 오직 머리가 내리는 결정과 개인 자신의 혼이 내리는 선택으로 위태롭게 될 수 있다.
67:7.6 (761.5) 유란시아에서 죄는 생물학상의 진화를 늦추도록 기여한 것이 거의 없지만, 아담의 유산으로부터 생기는 총 이익을 필사 종족들로부터 빼앗도록 작용했다. 죄는 지적 발전, 도덕적 성장, 사회의 진보, 대규모의 영적 달성을 엄청나게 늦춘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을 알고 그의 신성한 뜻을 진심으로 행하기를 바라든지, 죄는 그의 가장 높은 영적 달성을 막지 못한다.
67:7.7 (761.6) 칼리가스티아는 모반을 일으켰고 아담과 이브는 실패했지만, 유란시아에서 그 뒤에 태어난 어떤 필사자도 이러한 실수 때문에 개인의 영적 체험으로 고통을 받지는 않았다. 칼리가스티아의 반란이 있은 뒤에 유란시아에서 태어난 모든 필사자가 어떤 방법으로, 시간으로 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혼들의 미래 복지는 결코 조금이라도 영원 속에 위태롭게 되지 않았다. 어느 누구나 남의 죄 때문에 영적으로 굶어 죽게 되지 않는다. 죄의 영향은 행정ㆍ지능ㆍ사회 분야에서 널리 미치는데도, 죄가 낳는 도덕적 죄책감이나 그 영적 결과는 온통 개인에게 일어난다.
67:7.8 (761.7) 어째서 그러한 대재난이 일어나도록 버려두는가 우리는 그 지혜를 헤아릴 수 없으나, 지역 소동이 우주에 널리 반영되는 바와 같이, 그 소동이 유익하게 해결되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헤아릴 수 있다.
67:8.1 (761.8) 사타니아의 여러 세계에서 많은 용감한 사람이 루시퍼 반란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구원자별의 기록은 범람하는 선동의 물결을 아마돈이 영화롭게도 거절하고, 흔들림 없이 반에게 헌신했으므로, 아마돈을 체계 전체에서 뛰어난 인물로 묘사한다―보이지 않는 아버지와 미가엘 아들의 통치권에 그들은 함께 흔들리지 않고 충성하였다.
67:8.2 (762.1) 이 중대한 보고서들이 작성될 때 나는 에덴시아에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구원자별의 방송을 샅샅이 읽으면서 맛보았던 흥분을 아직도 의식하고 있다. 안돈 종족에서 실험 중인 최초의 혈통으로부터 솟아나온, 옛날의 이 준(準)야만인이 보인 믿을 수 없이 확고한 태도, 초월적 헌신, 아름다운 충성심을 그 방송이 하루하루 알려 주었다.
67:8.3 (762.2) 에덴시아로부터 구원자별을 거쳐, 유버르사에도, 긴 7년 동안 사타니아 반란에 관해서 하위의 모든 하늘 생명이 던진 첫 질문은 항상, 언제나 이와 같았다: “유란시아의 아마돈이 무엇을 가졌기에, 아직도 끄떡하지 않고 버티는가?”
67:8.4 (762.3) 루시퍼 반란이 지역 체계와 그에 딸린 여러 타락한 세계에 지장을 주었고, 이 아들과 그릇 인도된 동료들의 손실이 놀라시아덱 별자리의 진보를 일시 방해했다면, 자연이 낳은 이 한 아들과 전우(戰友) 143명 집단의 굳센 행위,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를 광범위하게 발표한 효과를 저울로 재어 보아라. 아마돈의 불충한 상관들의 그렇게 엄청난 반대 압력에 부딪쳐서, 그들은 더 높은 우주 관리 및 행정 개념을 지지하여 꿋꿋하게 버티었다. 너희는 안심할지니, 이것은 네바돈 우주와 오르본톤 초우주에서, 루시퍼 반란의 모든 해악과 슬픔의 총합이 결코 능가할 수 없이 이미 좋은 일을 했다.
67:8.5 (762.4) 그리고 이 모두가, 파라다이스에서 필사 최후 군단을 동원하고, 승천하면서 진보하는 필사자―흔들리지 않는 아마돈과 같은 바로 그러한 필사자―를 대체로 구성하는 보통 진흙에서 이 광대한 집단의 하인, 신비스러운 앞날의 하인들을 모집하려는 아버지의 우주 계획이 슬기로움을 아름답게 감동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비춰 준다.
68:0.1 (763.1) 이 글은 동물 존재보다 거의 낫지 않은 지위로부터, 중간의 여러 시대를 거쳐, 어설프기는 하지만 진정한 문명이 인류의 고등 민족들 사이에서 진화한 후기 시절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거친, 길고 긴 전진하는 투쟁에 관한 이야기의 시작이다.
68:0.2 (763.2) 문명은 종족이 획득하는 것이요, 생물학적으로 타고나지 않는다. 따라서 아이들을 모두 문화가 있는 환경에서 길러야 하며, 한편 이어지는 각 젊은 세대는 그 교육을 새로 받아야 한다. 문명의 우수한―과학ㆍ철학ㆍ종교적―품질은 한 세대가 다른 세대에게 직접 물려주어 전달되지 않는다. 이 문화적 성취는 오로지 사회적 유산(遺産)을 현명하게 보호함으로 보존된다.
68:0.3 (763.3) 달라마시아 선생들이 협동 체제의 사회적 진화를 개시하였고, 30만 년 동안 인류는 집단으로 활동하는 관념 속에서 양육되었다. 청인은 누구보다도 많이, 홍인은 어느 정도, 흑인은 가장 적게, 이 초기의 사회 교육으로 인하여 이익을 보았다. 근래에는 황인종과 백인종이 유란시아에서 가장 진보된 사회 발전을 보였다.
68:1.1 (763.4) 가까이 모였을 때 사람은 흔히 서로 좋아하기를 배우지만, 원시인은 형제답게 느끼는 정신, 그리고 동료들과 사회적 접촉을 가지려는 욕구가 자연스럽게 넘쳐흐르지 않았다. 오히려 이 초기 종족들은 슬픈 체험을 겪음으로 “뭉치는 가운데 힘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유란시아에서 사람의 형제 정신을 즉시 실현하는 데 지금 방해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자연스러운, 형제로서 매력이 부족한 것이다.
68:1.2 (763.5) 유대 관계는 일찍부터, 살아남기 위해 치르는 값이 되었다. 혼자 있는 사람은, 그가 어떤 공격을 받더라도 분명히 복수해 줄 어떤 집단에 그가 속하는 것을 증명하는 부족 표시를 지니지 않으면, 무력했다. 카인의 시절에도 집단 관계를 가리키는 어떤 표시가 없이 혼자서 바깥에 돌아다니는 것은 목숨에 위태로웠다. 문명은 사람이 비명(非命)에 죽지 않게 하는 보험이 되었고, 한편 사회의 수많은 법적 요구에 순응함으로 그 보험료를 지불하였다.
68:1.3 (763.6) 원시 사회는 이처럼 필요를 서로 교환하고, 교제함으로 더욱 안전하게 사는 데 기초를 두었다. 이렇게 고립을 두려워한 결과로서, 또 마지못해 협동하는 수단으로, 인간 사회는 오랜 세월의 주기를 거쳐 진화해 왔다.
68:1.4 (763.7) 원시 인간은 일찍부터 집단이 그 개별 단위의 단순 합계보다 훨씬 크고 강력하다는 것을 배웠다. 사람 1백 명이 뭉쳐서 한 뜻으로 일하면 큰 돌을 움직일 수 있다. 잘 훈련된 평화 수호자 스무 명은 성난 폭도를 제지할 수 있다. 그래서 단지 많은 사람과 관련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리하게 협동하는 자들을 조직한 결과로서 사회가 태어났다. 그러나 협동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특성이 아니다. 처음에는 두려움을 통해서, 그리고 나서 나중에는 시간 세계의 어려움에 대처하는 데, 그리고 영원한 위험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비하여 지키는 데, 협동이 가장 유익하기 때문에 사람은 협동하기를 배운다.
68:1.5 (764.1) 이처럼 자체를 일찍부터 원시(原始) 사회로 조직한 민족들은 자기 동료들에 대한 방어 뿐 아니라, 자연을 공격하는 데 더 성공하게 되었다. 그들이 살아남을 확률이 더 컸다. 따라서 방해 요인이 많았는데도, 문명은 유란시아에서 꾸준히 진보했다. 사람이 많은 실수를 저질렀어도 지금까지 인간의 문명이 정지되거나 파괴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사람과 관계를 가짐으로 살아남는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68:1.6 (764.2) 오스트랄리아 원주민과 아프리카의 부시맨 및 피그미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그러한 원시 사회 조건이 오늘날 남아 있다는 사실이 현대의 문화 사회가 오히려 최근의 현상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 뒤떨어진 민족들 사이에서, 얼마큼 초기의 집단 적개심, 개인적 의심과 비슷한 것, 그리고 모든 원시 종족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상당히 반사회적인 다른 특성이 관찰될 것이다. 고대에 사교성이 없던 종족들의 이 불쌍한 잔재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개인주의 경향이 사회적 진보에서 더 효력 있고 강력한 조직 및 결합과 경쟁해서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말해 주는 증언이다. 60이나 80킬로미터마다 다른 방언을 쓰는 종족, 뒤떨어지고 의심이 많은 이 반사회적 종족들은, 행성 영주의 유형(有形) 참모진의 가르침, 그리고 아울러 아담 집단의 종족 개량자들이 후일에 기울인 노력이 없었다면, 너희가 지금 어떤 세계에서 살고 있을 것인가 보여준다.
68:1.7 (764.3)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현대의 표현은 무지한 망상이요, 한때 허구였던 “황금 시대”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황금 시대의 전설에 관한 유일한 근거는 달라마시아와 에덴의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개량된 사회들은 유토피아 같은 꿈의 실현과 거리가 멀었다.
68:2.1 (764.4) 문명화된 사회는 혼자 살기 싫은 것을 극복하려고 사람이 초기에 노력한 결과이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 사랑함을 반드시 뜻하지는 않으며, 어떤 원시 집단들의 시끄러운 현상태가 초기의 부족들이 무엇을 겪어 왔는가 잘 설명해 준다. 그러나 비록 한 문명의 개인들이 서로 부딪치고, 서로 싸운다고 해도, 그리고 문명 자체가 애쓰고 투쟁하는 모순 덩어리처럼 보인다고 해도, 문명은 지겹게 단조로운 정체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열심히 애쓴다는 것을 입증한다.
68:2.2 (764.5) 지능의 수준은 문화가 진보하는 속도에 상당히 기여하지만, 사회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생활 형태에서 위험 요인을 줄이도록 설계되어 있고, 생활 속에서 고통을 줄이고 쾌락 요소를 늘이는 데 성공한 만큼, 빨리 사회가 진보해 왔다. 이처럼 사회 단체 전체가 운명의 목표를 향하여―멸종하든 살아남든―그 목표가 자아 유지인가 자아 욕구의 충족인가에 따라서, 천천히 나아간다. 자아 유지는 사회를 일으키며, 한편 지나친 자아 욕구의 충족은 문명을 파괴한다.
68:2.3 (764.6) 사회는 자아의 영속(永續), 자아 유지, 자아 욕구의 충족에[1] [16] 관심을 가지지만, 인간의 자아 실현은 많은 문화 집단이 즉시 이룰 목표가 될 가치가 있다.
68:2.4 (765.1) 자연인(自然人)에 있는 군집 본능은 유란시아에서 지금 존재하는 것과 같은 사회 조직이 발전한 것을 설명하기에 도저히 충분하지 않다. 이 타고난 군생(群生) 성향은 인간 사회의 밑바닥에 깔려 있지만, 사람의 사교 성향의 상당 부분은 얻은 것이다. 인간들이 초기에 교제하도록 이바지한 두 가지 큰 영향은 배고픔과 성욕(性慾)이었다. 사람은 이 두 본능을 동물 세계와 함께 가진다. 인간들을 한데로 몰고 붙들어 둔 다른 두 가지 감정은 허영과 두려움, 특히 귀신을 두려워한 것이었다.
68:2.5 (765.2) 역사(歷史)는 사람이 오랜 세월에 걸쳐, 먹을 것을 얻으려고 투쟁한 기록일 뿐이다. 원시인은 배고플 때에야 겨우 생각했다. 식량을 저장하는 것은 원시인에게 첫 극기(克己), 자아의 단련이었다. 사회가 성장하자, 배고픔은 상호 교제의 유일한 동기가 되지 못했다. 수많은 다른 종류의 욕구, 여러 가지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은 모두 인류가 더욱 가까이 교제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는 인간의 필요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지나치게 성장하여 꼭대기가 무겁다. 20세기의 서양 문명은 사치의 엄청난 부담과 인간의 욕구 및 열망이 터무니없이 증가함으로, 지쳐서 끙끙거린다. 현대 사회는 널리 서로 관계되고 상당히 복잡하게 서로 의존하는, 가장 위험한 한 단계의 긴장을 견디고 있다.
68:2.6 (765.3) 배고픔, 허영, 그리고 귀신 공포증은 계속하여 사회에 압력을 주었지만, 성욕의 만족은 일시적이고 돌발하는 것이었다. 성욕만으로 원시인 남녀가 가정을 유지하는 무거운 짐을 지도록 강요되지는 않았다. 초기의 가정은, 자주 만족시키지 않을 때 남자가 느끼는 성욕의 불만, 그리고 여자의 헌신하는 모성애에 기초를 두었으며, 여자는 얼마큼 이 모성애를 모든 고등 동물의 암컷과 함께 가진다. 무력한 아기의 존재는 남자와 여자의 활동이 초기에 구별되게 하였다. 여자는 안정된 거주를 유지해야 했고, 거기서 여자는 땅을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아주 이른 시절부터, 여자가 있는 곳을 언제나 집으로 여겼다.
68:2.7 (765.4) 곧 사라지는 성욕의 열정 때문이 아니라 먹을 것이 필요한 결과로서, 이처럼 여자는 일찍부터 발달하는 사회 계획에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여자는 자아의 유지에 꼭 필요한 협동자였다. 여자는 먹을 것을 마련하는 사람이요, 짐 싣는 동물이요, 사납게 분개하지 않고 큰 혹사(酷使)를 견디곤 하는 동반자였고, 이 모든 바람직한 특성 위에, 여자는 성욕을 만족시키는 수단, 항상 옆에 있는 수단이었다.
68:2.8 (765.5) 문명 속에서 지속하는 가치를 가진 거의 모든 것이 가족에서 뿌리를 가진다. 가족은 처음으로 성공한 평화 집단이었고, 남자와 여자는 그들의 대립 관계를 어떻게 조절하는가 배우면서, 동시에 아이들에게 평화의 추구를 가르쳤다.
68:2.9 (765.6) 진화에서 결혼의 역할은 단지 개인 행복의 실현이 아니라, 종족을 살아남게 하는 보험이었다. 자아의 유지와 자아의 영속은 가정의 진짜 목표였다. 자아의 욕구 충족은 어쩌다 일어나며, 성적 결합을 보장하는 미끼인 것을 제외하고, 꼭 필요하지는 않다. 자연은 살아남기를 요구하지만, 문명의 예술은 결혼의 기쁨과 가정 생활의 만족감을 계속 늘인다.
68:2.10 (765.7) 허영이 확대되어 자만ㆍ포부ㆍ명예까지 포함한다면, 어떻게 이러한 성향이 인간 관계의 형성에 이바지하는가 뿐 아니라 또한 이것들이 어떻게 사람을 단결하게 만드는가 우리가 헤아릴 수 있다. 이는 앞에 나서서 뽐내 보일 청중이 없이는 그러한 여러 감정이 쓸데없기 때문이다. 허영은 사람들이 내보이고 자신이 만족할 사회적 무대를 필요로 하는 다른 감정 및 충동과 머지 않아 결합되었다. 이 집단의 감정들은 모든 예술ㆍ의식(儀式), 그리고 온갖 형태의 운동 경기 및 경쟁을 시작하게 하였다.
68:2.11 (766.1) 허영심은 사회의 탄생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이 계시가 있을 때, 허영심 많은 세대의 빗나간 노력은 상당히 특화된 문명의 복잡해진 구조 전체를 늪에 처박고 가라앉히려고 위협한다. 쾌락을 얻으려는 욕구는 배고픔을 채우려는 욕구를 대신한 지 오래다. 먹고 살기 위한 정당한 사회적 목표는 저열하고 위협하는 형태의 자아 욕구의 충족으로 재빨리 변하고 있다. 먹고 살기 위한 활동은 사회를 건설하지만, 자제하지 않은 자아 욕구의 충족은 어김없이 문명을 파괴한다.
68:3.1 (766.2) 원시적 욕구는 최초의 사회를 낳았지만, 귀신을 무서워하는 것은 그 사회를 단결시키고 사회의 존재에 인간 이상의 모습을 나누어 주었다. 보통의 두려움은 생리적으로 생긴다: 신체가 고통받는 두려움, 배고픔을 견디는 것, 또는 땅에서 생기는 어떤 재난이 그렇다. 그러나 귀신 공포증은 새롭고 고상한 종류의 무서움이다.
68:3.2 (766.3) 인간 사회의 진화에서 가장 큰 단일 요인은 아마도 귀신 꿈이었다. 대부분의 꿈이 원시인의 머리를 크게 어지럽게 했지만, 귀신 꿈은 실제로 초기의 인간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들었고, 미신을 믿는 이 꿈꾸는 사람들을 영(靈) 세계의 어렴풋하고 보이지 않는, 상상(想像)하는 위험에 대비하여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기꺼이 진지하게 결합한 가운데 서로 부둥켜안도록 만들었다. 귀신 꿈은 동물과 인간 종류의 지성 사이에서 가장 일찍 나타나는 한 가지 차이점이었다. 동물은 죽은 뒤에 살아남는 것을 그려볼 수 없다.
68:3.3 (766.4) 이 귀신 요인을 제외하고, 모든 사회는 근본적 필요와 생물학적 기본 욕구에 기초를 두었다. 그러나 귀신 공포증은 문명에 새로운 요인을 도입하였고, 이 무서움은 뻗어서 개인의 기본적 필요를 멀리 벗어나고, 집단을 유지하는 싸움조차도 훨씬 뛰어넘었다. 죽은 사람의 떠나간 영을 무서워하는 것은 새롭고 놀라운 형태의 두려움을 드러냈고, 소름끼치게 하는 이 강력한 공포는 초기 시대의 허술한 사회 질서를 채찍질하여, 고대에 철저하게 훈련되고 잘 통제된 원시 집단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의미 없는 이 미신 가운데 더러는 아직까지도 내려오며, 현실이 아니고 초자연적인 것을 미신으로 두려워함을 통해서, “지혜의 시작이 되는, 주를 두려워함”을 나중에 발견하도록 사람의 지성을 준비시켰다. 진화로 생긴 근거 없는 두려움은 계시로 영감을 받은, 신을 경외하는 느낌으로 바뀌도록 고안되어 있다. 귀신을 두려워하는 초기의 제사는 강력한 사회적 유대가 되었고, 그 아득한 시절 이후로 늘, 인류는 대체로 영적 성향을 얻으려고 애써 왔다.
68:3.4 (766.5) 배고픔과 사랑은 사람을 한데로 몰았으며, 허영심과 귀신 공포증은 사람을 단결시켰다. 그러나 평화를 조장하는 계시의 영향 없이, 이러한 감정만으로 인간의 상호 관계에서 의심하고 짜증내는 긴장을 견딜 수 없다. 초인간 근원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사회의 긴장은 어떤 한계에 이르고 나서 폭발하며, 사회를 동원하는 바로 이 영향―배고픔ㆍ사랑ㆍ허영ㆍ두려움―은 인류를 전쟁과 살육으로 돌입하도록 협력한다.
68:3.5 (766.6) 인류의 평화 성향은 자연스러운 자질이 아니다. 그것은 계시된 종교의 가르침으로부터, 진보하는 종족들의 쌓인 체험으로부터, 그러나 특히 평화의 왕,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비롯된다.
68:4.1 (767.1) 현대의 모든 사회 제도는 너희의 야만인 조상이 가졌던 원시 관습의 진화로부터 생겨난다. 오늘날의 관습은 지난날의 관습이 고쳐지고 확대된 것이다. 버릇과 개인의 관계는, 관습과 집단의 관계와 같다. 집단의 관습은 민속(民俗)이나 부족의 전통―군중의 관습―으로 발전한다. 오늘날 인간 사회의 모든 사회 제도가 이 초기의 시작에 그 초라한 기원을 가진다.
68:4.2 (767.2) 도덕 관습은 집단의 생활을 대중이 존재하는 조건에 적응하려는 노력에서 생겨났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도덕 관습은 사람의 처음 사회 제도였다. 그리고 이 부족의 반응은 모두, 고통과 치욕을 피하고, 동시에 쾌락과 권력을 누리려고 애쓰는 노력으로부터 생겼다. 민속의 기원은, 언어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의식하지 않고 의도하지 않은 것이며, 따라서 언제나 신비 속에 가려져 있다.
68:4.3 (767.3) 귀신 공포증은 원시인으로 하여금 초자연적인 것을 상상하도록 몰았고, 따라서 윤리와 종교가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미칠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다음에 윤리와 종교는 대대로 사회의 도덕관과 관습을 다치지 않고 보존하였다. 도덕 관습을 일찍 확립하고 구체화한 한 가지는,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을 살다가 죽었든 그 방법에 몹시 마음을 쓰며, 그래서 그들이 육체를 입고 있을 때 존중했던 생활 규칙을 감히 가볍게 멸시하는 살아 있는 필사자에게 끔찍한 벌을 퍼부으리라는 믿음이었다. 이 모두가 오늘날 황인종의 조상 존중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나중에 개발되는 원시 종교는 도덕 관습을 안정시키면서 귀신 공포증을 크게 강화했지만, 진보하는 문명은 갈수록 더 인류를 두려움의 사슬과 미신에 노예가 된 상태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68:4.4 (767.4) 달라마시아 선생들의 가르침, 사람을 해방하고 자유롭게 만드는 가르침을 받기 전에, 관습이 된 의식(儀式)은 옛날 사람을 무력한 희생자로 붙들어 두었다. 원시의 야만인은 끊임없는 예식에 둘러싸였다. 아침에 깨어날 때부터 밤에 동굴에서 잠에 곯아떨어질 때까지 그가 행한 것은 무엇이나 꼭 어떻게―그 부족의 풍습에 따라서―해야 되었다. 야만인은 풍습이라는 학정에 노예가 되었고, 그의 생활은 자유롭거나, 즉흥이거나, 독창성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더 높은 정신적 존재나, 도덕적 존재나, 사회적 존재를 향하여 아무런 자연스런 진보가 없었다.
68:4.5 (767.5) 초기의 인간은 관습에 꽉 붙들려 있었다. 야만인은 관습에 진정한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사고 방식과 개량된 생활 방법을 감히 시작한 부류로부터 변화가 때때로 일어났다. 그런데도 원시인의 타성(惰性)은 너무 빨리 진보하는 문명에 잘못 적응하는 파멸의 길로 너무 갑자기 굴러떨어지는 것을 막는 생물학적 안전 장치이다.
68:4.6 (767.6) 그러나 이러한 관습은 순전한 악은 아니며, 관습의 진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급진적 혁명으로 관습을 대규모로 수정하는 일에 손대는 것은 문명의 지속에 거의 치명적이다. 관습은 문명을 붙들어 놓은, 연속시키는 끈이었다. 인간의 역사가 지나간 길은 버린 관습과 시대에 뒤진 사회 관습의 찌꺼기로 널려 있다. 그러나 더 낫고 더 적당한 관습을 채택한 것을 제외하고, 자체의 도덕관을 버린 문명은 하나도 지탱하지 못했다.
68:4.7 (767.7) 한 사회가 살아남는 것은 주로 그 도덕관의 점진적 발달에 달려 있다. 관습의 진화 과정은 실험해 보고 싶은 욕망에서 생겨난다. 새로운 생각이 제시된다―경쟁이 따른다. 진보하는 문명은 진취적인 생각을 품에 안고 오래 견딘다. 시간과 환경은 마침내 살아남는 데 더 적당한 집단을 고른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사회의 구성에서 생긴 변화를 따로 고립시켜 보았을 때, 각 변화가 더 나아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니, 정말로 아니다! 왜냐하면, 유란시아 문명이 전진하는 긴 투쟁에 아주 여러 번 후퇴가 있었기 때문이다.
68:5.1 (768.1) 토지는 사회의 무대요, 사람들은 배우이다. 사람은 토지의 상황에 순응하도록 그의 연기를 늘 조절해야 한다. 도덕 관습의 진화는 언제나 인구 밀도에 달려 있다. 이것은 헤아리기 힘들어도 참말이다. 사람의 토지 이용 기술, 곧 유지하는 기술에 생활 수준을 더한 것은 민속(民俗)의 총합, 곧 도덕 관습이다. 그리고 생활의 요구에 대하여 사람이 적응한 것의 총합이 사람의 문화적 문명이다.
68:5.2 (768.2) 가장 일찍 있었던 인간의 문화는 동반구의 강들을 따라서 생겨났고, 거기서 전진하는 문명의 행진에 네 가지 큰 단계가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68:5.3 (768.3) 1. 수집 단계. 먹어야 되는 것, 배고픔은 산업 조직의 첫 형태, 원시적으로 먹이 수집하는 줄을 서게 하였다. 먹을 것을 집으면서 땅을 지나가는 그러한 굶주린 사람들이 행진하는 줄은 때때로 16킬로미터나 되곤 했다. 이것은 원시 유목민 단계의 문화였고, 지금 아프리카의 부시맨이 이 생활 형태를 따른다.
68:5.4 (768.4) 2. 사냥 단계. 무기(武器)인 연장의 발명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냥꾼이 되고, 따라서 먹을 것을 얻으려고 노예처럼 일하는 생활로부터 상당한 자유를 얻게 만들었다. 중대한 전투에서 주먹을 심하게 다친, 생각 깊은 어느 안돈 사람이 팔 대신에 기다란 막대기를, 그리고 주먹 대신에, 힘줄로 끝에 단단한 부싯돌 조각을 묶어서 쓰는 관념을 다시 찾아냈다. 많은 부족이 이런 종류의 생각을 따로 해냈고, 이 여러 형태의 망치는 인간의 문명에서 크게 전진하는 한 걸음이었다. 오늘날 오스트랄리아의 어떤 원주민은 이 단계를 지나서 거의 진보하지 않았다.
68:5.5 (768.5) 청인은 솜씨 있는 사냥꾼이요 덫꾼이 되었다. 그들은 강에 울타리를 쳐서 물고기를 대량으로 잡았고, 나머지를 겨울에 쓰려고 말렸다. 여러 형태의 교묘한 올가미와 덫이 사냥감을 잡는 데 이용되었지만, 이보다 원시적 종족들은 큰 동물을 사냥하지 않았다.
68:5.6 (768.6) 3. 목축 단계. 이 단계의 문명은 동물을 길들임으로 가능해졌다. 아랍인과 아프리카 원주민은 최근에 목축하는 민족에 속한다.
68:5.7 (768.7) 목축 생활은 식량에 노예가 된 상태로부터 더욱 부담을 덜어 주었다. 사람은 그의 자본에서 생기는 이자(利子), 곧 가축 떼의 증가분으로 사는 것을 배웠고, 이것은 문화와 진보를 위하여 더 여가를 마련해 주었다.
68:5.8 (768.8) 목축 이전의 사회는 남녀가 협동하는 사회였지만, 동물 사육이 파급된 것은 여자를 사회에서 노예가 되는 처지로 떨어뜨렸다. 그 전에는 동물의 고기를 확보하는 것이 남자의 의무였고, 먹을 채소를 마련하는 것이 여자의 일이었다. 따라서, 남자가 생활의 목축 시대에 들어갔을 때, 여자의 위엄은 크게 떨어졌다. 여자는 여전히 생활에 필수인 채소를 생산하느라고 수고해야 되었고, 한편 남자는 풍부한 동물의 고기를 마련하기 위하여 고작 동물의 떼가 있는 곳으로 가기만 하면 되었다. 이처럼 남자는 비교적 여자로부터 독립되었다. 목축 시대를 통하여 내내, 여자의 지위는 꾸준히 떨어졌다. 이 시대의 끝이 되어서 여자는 인간인 동물보다 거의 낫게 되지 않았으며, 동물의 떼가 노동하고 새끼를 낳도록 기대한 것처럼, 일하고 인간의 자식을 낳는 신세로 떨어졌다. 목축 시대의 남자는 가축을 지극히 사랑했다. 남자가 제 아내를 더 깊이 사랑할 수 없었으니, 더군다나 딱한 일이었다.
68:5.9 (769.1) 4. 농업 단계. 이 시대는 식물(植物)을 길들임으로 시작되었고, 이것은 가장 높은 종류의 물질 문명을 대표한다. 칼리가스티아와 아담 모두가 원예와 농업을 가르치려고 애썼다. 아담과 이브는 목동이 아니라 채소를 가꾸는 사람이었고, 채소 재배는 당시에 상급 문화였다. 식물의 재배는 인류의 모든 종족에게 사람을 고상하게 만드는 영향을 미친다.
68:5.10 (769.2) 농업은 세계의 인구 밀도를 4배가 넘게 늘였다. 농업은 이전의 문화 단계의 목축하는 직업과 겸할 수도 있었다. 세 단계가[2] [17] 겹칠 때, 남자는 사냥하고 여자는 땅을 경작한다.
68:5.11 (769.3) 목자와 토지를 경작하는 자 사이에는 언제나 마찰이 있어 왔다. 사냥꾼과 목자는 투사요, 싸움을 좋아하였다. 농사꾼은 평화를 더 사랑하는 종류였다. 동물과 관련을 가지는 것은 싸움과 무력(武力)을 암시하며, 식물과 관계를 가지는 것은 참을성과 평온과 평화를 주입시킨다. 농업과 산업은 평화로운 활동이다. 그러나 세상의 사회 활동으로서 이 두 가지의 약점은, 흥분과 모험이 모자라는 것이다.
68:5.12 (769.4) 인간 사회는 사냥 단계로부터 목축 단계를 거쳐서, 땅에서 농사 짓는 단계로 진화했다. 그리고 이 진보하는 문명의 각 단계에 방랑 생활이 차츰 줄어들었다. 남자는 갈수록 더 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68:5.13 (769.5) 그리고 이제 산업은 농업을 보충하고 그 결과로 더욱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시민 계급에는 비농업 집단이 늘어났다. 그러나 가장 높은 사회 발전조차 늘 건전한 농업의 기초 위에 서야 한다는 것을 그 지도자들이 깨닫지 못한다면, 산업 시대는 살아남기를 바랄 수 없다.
68:6.1 (769.6) 사람은 흙에서 생긴 생물이며, 자연의 산물이다. 사람이 아무리 진지하게 땅을 벗어나려 해도, 끝까지 두고 보면 분명히 실패한다. “너희는 티끌이요, 티끌로 돌아갈지니라”하는 것은 모든 인류에게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사람의 근본적 싸움은 땅을 위한 싸움이었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것이다. 원시 인간의 처음 사회 관계는 이 토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었다. 인구 밀도는 모든 사회 문명의 기초가 된다.
68:6.2 (769.7) 사람의 지능은 예술과 과학의 수단으로 땅의 소산을 늘였다. 동시에 자손의 자연 증가가 얼마큼 통제되었고, 따라서 문화가 있는 문명을 세우기 위하여 생계와 여가가 마련되었다.
68:6.3 (769.8) 인간 사회는, 인구가 토지 기술에 따라서 정비례로, 그리고 주어진 생활 수준에 반비례하여 변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법칙에 지배된다. 이 초기 시대 전체를 통해서, 사람과 토지에 관계된 공급과 수요의 법칙이 지금보다 더, 인구와 토지의 추정치를 결정했다. 토지가―점령되지 않은 지역이―풍부한 시절에는 사람의 필요가 컸고, 따라서 사람 목숨의 값이 상당히 높아졌다. 따라서 생명의 손실은 더욱 끔찍한 것이었다. 토지가 귀하고, 이에 관계되어 인구가 과잉인 기간에는, 사람의 목숨이 비교적 값싸졌고, 그래서 전쟁ㆍ기근ㆍ유행병에 관심을 덜 쏟았다.
68:6.4 (770.1) 토지의 소산이 줄어들거나 인구가 늘어날 때 불가피한 투쟁이 다시 시작되었고, 인간의 성품에서 가장 나쁜 특성이 표면으로 나타났다. 토지 소산의 증가, 기계 기술의 개선, 인구의 감소는 모두 인간 성품에서 좋은 면이 발달하도록 촉진하는 경향이 있다.
68:6.5 (770.2) 개척지의 사회는 인간성의 서투른 면이 나타나게 만든다. 영적 문화와 함께, 예술과 참된 과학적 진보는,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심이 인구 밀도가[3] [18] 조금 적은, 농업과 산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지원을 받을 때, 그런 도심에서 최선으로 이루어졌다. 도시는 반드시 그 거주자들의 권력을, 좋은 곳에 쓰든 나쁜 곳에 쓰든, 몇 배로 늘인다.
68:6.6 (770.3) 가족의 크기는 언제나 생활 수준에 영향을 받아 왔다.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안정된 상태나 차츰 사멸하는 점까지 가족이 작아진다.
68:6.7 (770.4) 오랜 세월을 통해서 생활 수준은, 단순한 양이 아니라, 살아남는 인구의 질을 결정했다. 지역 계급의 생활 수준은 새로운 사회 계층, 새로운 도덕 관습을 낳았다. 생활 수준이 너무 복잡하거나 지나치게 사치스럽게 될 때, 그것은 급속히 자살이 된다. 카스트는 조밀한 인구가 심하게 경쟁하는 높은 사회적 압력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직접 결과이다.
68:6.8 (770.5) 초기의 종족들은 흔히, 인구를 제한하도록 고안된 관습에 의존하였다. 모든 원시 부족은 기형(奇形) 아이와 병약한 아이를 죽였다. 아내를 사들이는 시절 이전에 여자 아기들은 빈번히 죽음을 당했다. 때때로 아이들은 출산할 때 목 졸려 죽음을 당했지만, 가장 잘 쓰이는 방법은 내버리는 것이었다. 쌍둥이의 아버지는 보통 하나를 죽여야 한다고 우겼는데, 이는 여러 아기를 낳는 것은 요술이나 부정(不貞) 때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체로, 동성(同性)의 쌍둥이는 살려 두었다. 쌍둥이에 대한 이 금기는 한때 거의 보편적이었지만, 결코 안돈 족속의 풍습의 일부가 되지 않았다. 안돈 종족은 쌍둥이를 언제나 행운의 전조로 여겼다.
68:6.9 (770.6) 많은 종족이 유산(流産)하는 기술을 배웠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출산이 금기로 확정된 뒤에, 이 관습은 아주 흔하게 되었다. 미혼녀가 제 자식을 죽이는 것은 오랫동안 관습이었지만, 좀더 개화된 집단들 사이에서 이 사생아(私生兒)는 소녀의 어머니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많은 원시 씨족은 유산과 유아를 죽이는 관습 때문에 거의 절멸되었다. 그러나 도덕 관습의 명령과 상관 없이, 일단 젖을 빨린 뒤에는 죽음을 당하는 아이들이 극히 드물었다―모성애가 너무 강하다.
68:6.10 (770.7) 20세기에도, 인구를 통제하는 이 원시 방법의 찌꺼기가 남아 있다. 오스트랄리아에는 한 부족이 있는데, 거기에는 어머니가 아이를 두셋보다 더 기르는 것을 거부한다. 한 식인종 부족이 다섯 번째 태어난 아이마다 먹어치운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마다가스카에서 어떤 부족들은 아직도 어떤 운 나쁜 날에 태어난 아이들을 다 죽이며, 이것은 모든 아기의 약 25퍼센트의 죽음을 초래한다.
68:6.11 (770.8) 세계의 관점에서 볼 때, 과잉 인구는 지난날에 결코 심각한 문제가 된 적이 없다. 그러나 전쟁이 줄어들고 과학이 점점 더 인간의 병을 통제하면, 가까운 앞날에 과잉 인구는 심각한 문제가 될지 모른다. 그러한 때에 세계 지도층의 지혜를 크게 시험하는 일이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유란시아 통치자들이, 비범한 자들의 극단과 엄청나게 증가하는 보통 이하의 집단 대신에, 보통 사람, 곧 안정된 인간의 증가를 촉진할 통찰력과 용기를 가질 것인가? 보통 인간이 양육되어야 한다. 보통 사람은 문명의 등뼈요, 종족에서 돌연 변이 천재들이 나오는 근원이다. 보통 이하의 사람은 사회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하등 수준의 산업 관리, 곧 동물 수준보다 높은 지능을 요구하지만, 상급 부류의 인류를 위하여 분명히 진정한 종과 속박이 되는 그러한 낮은 등급의 노동에 필요한 것보다 더 생산되어서는 안 된다.
69:0.1 (772.1) 감정 면에서, 사람이 유머ㆍ예술ㆍ종교를 이해하는 능력은 그의 동물 조상을 뛰어넘는다. 사회적으로, 사람은 연장을 만들고 의사(意思)를 교환하고 제도를 만드는 자이므로 그의 우수성을 드러낸다.
69:0.2 (772.2) 인간이 오랫동안 사회 집단을 유지할 때, 그러한 집합은 궁극에 제도화되는 어떤 활동 경향을 반드시 낳는다. 인간의 제도의 대부분은 노동을 절약하고, 동시에 집단 안전의 향상에 무언가 이바지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69:0.3 (772.3) 문명화된 사람은 그가 확립한 제도의 특성, 제도가 안정되고 지속하는 것에 대해서 큰 자부심을 가진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제도는 다만, 금기(禁忌)가 보존하고 종교가 위엄을 부여함으로 축적된 지난날의 도덕 관습에 불과하다. 그러한 유산은 전통이 되고, 전통은 궁극에 관습으로 모습을 바꾼다.
69:1.1 (772.4) 제도의 지나친 발전은, 인격이 빛을 잃고 창의성이 줄어들기 때문에, 어김없이 개인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그런데도, 인간의 제도는 모두 어떤 사회적 필요, 지난날이나 오늘의 필요를 보살핀다. 사람은 진보하는 문명이 만든 이 작품에 자신이 지배되도록 버려두기보다 그 제도를 통제해야 한다.
69:1.2 (772.5) 인간의 제도는 세 가지 일반 등급이 있다:
69:1.3 (772.6) 1. 자아 유지 제도. 이러한 제도는 굶주림과 이에 관계된 자아 보존의 본능에서 생겨나는 관습을 포함한다. 이런 제도는 산업과 재산, 이익을 위한 전쟁, 그리고 사회의 모든 통제 작용을 포함한다. 조만간에 두려움의 본능은 금기, 관습, 종교적 제재의 수단을 써서, 생존을 위한 이런 제도의 확립을 촉진한다. 그러나 두려움과 무지와 미신은 모든 인간 제도가 초기에 기원을 가지고 후일에 발전하는 데서, 뛰어난 역할을 해냈다.
69:1.4 (772.7) 2. 자아 영속 제도. 이러한 제도는 성욕, 모성 본능, 그리고 종족들의 부드러운 상급 감정에서 생겨나는, 사회가 세운 질서이다. 이것은 가정과 학교, 가족 생활, 교육ㆍ윤리ㆍ종교를 보호하는 사회 조치를 포함한다. 이런 제도는 결혼 관습, 방어를 위한 전쟁, 가정 만들기를 포함한다.
69:1.5 (772.8) 3. 자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제도. 이것은 허영심의 성향과 자부심의 감정으로부터 생겨나는 관습이다. 이것은 옷을 입고 몸을 치장하는 풍습, 사회의 관행, 영광을 위한 전쟁ㆍ춤ㆍ흥행ㆍ놀이, 그리고 관능을 만족시키는 다른 단계를 포함한다. 그러나 문명은 자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뚜렷한 제도를 결코 진화시킨 적이 없다.
69:1.6 (773.1) 이 세 집단의 사회 관습은 밀접하게 서로 관계되고, 미세하게 서로 의존한다. 유란시아에서 이 여러 제도는 단일 사회 기구로서 활동하는 복잡한 조직이 된다.
69:2.1 (773.2) 원시 산업은 끔찍한 기근을 막는 보험으로서 천천히 생겨났다. 옛날에 살던 사람은 풍부한 수확이 있는 동안에 빈곤한 시절에 대비하여 먹을 것을 저축한 몇몇 동물로부터 교훈을 받기 시작했다.
69:2.2 (773.3) 초기의 검소와 원시 산업이 시작되기 전에, 보통 부족의 운명은 궁핍과 진짜 고통이 가득한 운명이었다. 원시 인간은 먹을 것을 얻으려고 동물 세계 전체와 경쟁해야 했다. 경쟁의 당기는 힘은 늘 사람을 짐승의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가난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가혹한 상태였다. 재산은 저절로 생기는 선물이 아니요, 노동과 지식과 조직으로부터 생긴다.
69:2.3 (773.4) 원시인은 교제(交際)의 이점을 더디게 깨닫지 않았다. 교제는 사람을 조직하도록 이끌었고, 조직의 처음 결과는 노동의 분업이었으며, 그 결과로 시간과 물자가 즉시 절약되었다. 이 노동의 전문화는 압력에 적응함으로―저항이 약한 길을 추구함으로―생겨났다. 원시의 야만인은 결코 어떤 진짜 일도 즐겁게 하지 않았고 기꺼이 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순응한 것은 어쩔 수 없이 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69:2.4 (773.5) 원시인은 고된 일을 싫어했고, 심각한 위험에 부딪치지 않으면 서두르려 하지 않았다. 노동에서 시간 요소, 주어진 과제를 특정한 시간 안에 해치우는 생각은 전적으로 현대에 생긴 개념이다. 옛날 사람들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한 맹렬한 싸움과 늘 높아지는 생활 수준의 2중 요구가 원시 인간, 자연히 활동하지 않는 종족을 근면의 길로 몰았다.
69:2.5 (773.6) 노동, 일부러 기울이는 노력은 사람을 짐승과 구별하며, 짐승의 노력은 대체로 본능적이다. 노동의 필요성은 사람에게 최고의 축복이다. 영주의 참모진은 다 일했고, 유란시아에서 육체 노동을 고상하게 만들려고 많이 공헌했다. 아담은 동산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은 일했다―그는 만물을 창조하는 이, 지원하는 이였다. 히브리인은 근면을 최고로 친 처음 부족이었다. 그들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라”하고 처음으로 선포한 민족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종교는 초기의 이상(理想), 게으름으로 되돌아갔다. 주피터는 술 잔치하는 이였고, 부다는 명상에 잠겨 여가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69:2.6 (773.7) 산긱 부족들은 열대에서 떨어져 살 때, 상당히 부지런했다. 그러나 게으른, 마술 추종자와 일하기를 외치는 사도(使徒)―선견을 이용한 자―들 사이에는 길고 긴 싸움이 있었다.
69:2.7 (773.8) 인간은 불과 물과 먹을 것을 보존하는 데 처음으로 선견을 이용했다. 그러나 원시인은 날 때부터 노름꾼이었다. 원시인은 언제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언가 얻기를 바랐으며, 이 옛 시절에 너무나 자주, 참는 관습으로부터 얻은 성공을 마력의 탓으로 돌렸다. 요술은 선견ㆍ절제ㆍ산업에게 느리게 길을 비켰다.
69:3.1 (773.9) 원시 사회에서 노동의 분업은 자연스런 상황에 따라서, 다음에는 사회적 상황에 따라 결정되었다. 초기에 노동이 전문화되는 체제는 다음과 같았다:
69:3.2 (774.1) 1. 남녀 구별에 따른 전문화. 선택하여 아이가 있게 되면서 여자의 일이 생겨났다. 여자는 자연히 남자보다 아기들을 더 사랑했다. 이처럼 여자는 일상적인 일꾼이 되었고, 한편 남자는 사냥꾼과 투사가 되어서, 집중하여 일하고 쉬는 기간이 있었다.
69:3.3 (774.2) 오랜 세월에 걸쳐 내내, 금기(禁忌)는 여자를 자기 밭에 꼭 붙잡아 두도록 작용했다. 남자는 아주 이기적으로 더 편한 일을 골랐고, 일상적인 고된 일을 여자에게 맡겼다. 남자는 언제나 여자의 일 하기를 부끄러워했지만, 여자는 남자의 일을 하는 것을 결코 거리끼는 적이 없었다. 그러나 기록하기 이상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집을 짓고 장만하는 데 언제나 같이 일했다.
69:3.4 (774.3) 2. 나이와 질병에 따라서 생기는 수정. 이 차이는 다음의 노동 분업을 결정했다. 늙은 남자와 병든 자는 일찍이 연장과 무기(武器)를 만드는 데 종사했다. 그들은 나중에 관개 시설을 만드는 데 배치되었다.
69:3.5 (774.4) 3. 종교에 기초를 둔 분화. 주술사(呪術師)는 처음으로 육체 노동에서 면제된 인간이었다. 그들은 전문 직종의 개척자였다. 대장장이는 마술을 쓰는 주술사와 경쟁한 작은 집단이었다. 금속을 가지고 일하는 그들의 솜씨는 사람들이 그들을 무서워하게 만들었다. “흰 대장장이”와 “검은 대장장이”는[1] [19] 백마술과 흑마술을 믿는 초기의 신앙을 낳았다. 이 신앙은 나중에, 착한 귀신과 악한 귀신, 곧 착한 영과 악한 영을 믿는 미신과 결부되었다.
69:3.6 (774.5) 대장장이는 특권을 누린 첫 비종교 집단이었다. 그들은 전쟁 동안에 중립자로 간주되었고, 이렇게 남는 여가는 하나의 계급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원시 사회의 정치가가 되게 만들었다. 이 특권을 지나치게 악용함으로 대장장이들은 널리 미움을 받게 되었고, 주술사는 기회를 놓칠세라 경쟁자를 미워하도록 부추겼다. 과학과 종교 사이에 있은 이 첫 싸움에서 종교(미신)가 이겼다. 마을에서 쫓겨난 뒤에, 대장장이들은 촌락의 변두리에 첫 여인숙, 곧 대중을 위한 하숙집을 만들었다.
69:3.7 (774.6) 4. 주인과 종. 노동의 다음 분화는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관계에서 생겨났는데, 이것은 인간의 노예 제도가 시작된 것을 의미했다.
69:3.8 (774.7) 5. 다양한 신체 및 정신 자질에 기초를 둔 분화. 사람의 타고난 차이가 노동의 계속된 분업을 유리하게 만들었다. 모든 인간은 똑같이 태어나지 않는다.
69:3.9 (774.8) 산업에서 초기의 전문가는 부싯돌 벗기는 자와 석공이었고, 그 다음에는 대장장이가 뒤따랐다. 그 뒤에 집단의 전문화가 생겼다. 온 가족과 씨족이 어떤 종류의 노동에 종사했다. 부족의 주술사를 제쳐놓고, 가장 일찍 있었던 사제 계급 중에 하나는 칼 만드는 전문가들의 집단을 미신으로 높이 섬겼기 때문에 생겨났다.
69:3.10 (774.9) 산업에서 처음 집단 전문가는 돌소금 수출상과 도공(陶工)이었다. 여자는 평범한 오지그릇을 만들었고 남자는 화려한 것을 만들었다. 어떤 부족 사이에서는 여자가 바느질하고 천을 짰고, 다른 부족에서는 남자가 그 일을 했다.
69:3.11 (774.10) 초기의 상인은 여자였는데, 여자는 첩자로 고용되었고 상업을 부업(副業)으로 했다. 이내 무역이 확대되고, 여자는 중개인―중매인―으로 행동했다. 그리고 나서 상인 계급이 나타났고, 그들이 봉사한 대가로 수수료, 곧 이익을 받았다. 집단의 물물 교환이 성장한 것은 상업으로 발전했고, 상품 교환에 뒤이어서 기술 노동자의 교환이 생겼다.
69:4.1 (775.1) 여자를 사로잡아서 치르는 결혼 다음에 계약 결혼이 따랐던 것처럼, 침공으로 생긴 약탈 뒤에는 물물 교역이 뒤따랐다. 그러나 말없이 물물 교환을 하는 초기의 관습과 후일에 현대의 교환 방법으로 무역하는 사이에 해적(海賊) 행위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69:4.2 (775.2) 무장(武裝)한 무역상들이 처음 물물 교환을 했으며, 그들은 중간 지점에 물건을 놓아 두곤 했다. 여자들이 처음으로 시장을 열었고, 여자는 아주 일찍부터 있었던 상인(商人)이었는데, 이는 그들이 짐꾼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무사(武士)였다. 아주 일찍부터 무역 계산대가 발달되었고, 이것은 상인들이 무기로 서로 손이 미치지 못하도록 충분히 넓은 벽이었다.
69:4.3 (775.3) 말없이 물물 교환을 위해서 맡긴 물품을 지키려고 주물이 사용되었다. 그러한 시장은 도둑맞을 염려가 없었다. 물물 교환을 하거나 사지 않으면 아무것도 옮겨지지 않곤 했다. 주물이 지키고 있으면 상품은 언제나 안전했다. 초기의 상인은 자신의 부족 안에서 면밀하게 정직했지만, 먼 데서 온 낯선 사람을 속이는 것은 괜찮게 여겼다. 초기의 히브리인조차 이방인과 거래하는 데 다른 윤리 규정을 인정했다.
69:4.4 (775.4) 사람들이 무장하지 않고 신성한 시장에서 만나기 전에, 오랜 세월 동안 말없는 물물 교환이 계속되었다. 바로 이런 장터는 첫 성소(聖所)의 자리가 되었고, 어떤 나라에서는 나중에 “피난의 도시”로 알려졌다. 어떤 피난자가 시장에 다다라도 그는 안전했고, 공격받을 염려가 없었다.
69:4.5 (775.5) 처음의 저울추는 밀알과 기타 곡식의 낟알이었다. 교환의 처음 매체는 물고기나 염소였다. 나중에 송아지가 물물 교환의 단위가 되었다.
69:4.6 (775.6) 현대의 글자는 초기의 상업 기록에서 생겨났다. 사람의 처음 문서는 장사를 선전하는 기록, 소금 광고였다. 초기에 있던 많은 전쟁은 부싯돌ㆍ소금ㆍ금속과 같은 천연 매장물 때문에 일어났다. 맨 처음 맺은 공식(公式) 부족 조약은 소금 매장물을 부족들 사이에 같이 쓰는 것과 관계되었다. 이런 조약 장소는 친절하고 평화롭게 생각을 교환하고 여러 부족이 서로 섞이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69:4.7 (775.7) 글쓰기는 “소식 막대기,” 매듭진 끈, 그림으로 기록하기, 상형 문자, 조가비 띠의 단계를 거쳐서 초기의 상징 알파벳까지 발전했다. 소식(消息) 보내기는 원시적인 연기(煙氣) 신호로부터, 달리는 사람, 동물 타는 사람, 철로, 비행기까지, 그리고 전보ㆍ전화, 무선 통신에 이르기까지 진화했다.
69:4.8 (775.8) 고대의 상인이 새로운 생각과 개량된 방법을 사람 사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옮겼다. 모험과 연결하여, 상업은 탐험과 발견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 모두가 수송을 낳았다. 상업은 문화의 교류를 조장함으로 사람을 문명화시키는 좋은 도구였다.
69:5.1 (775.9) 자본은 오늘을 포기하고 앞날을 위하여 노동을 이용하는 것이다. 저축은 유지하고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보험이다. 먹을 것의 저장은 자제(自制)를 개발시켰고, 자본과 노동의 첫 문제를 만들어냈다. 먹을 것을 가진 사람은, 강도로부터 이를 보호할 수만 있다면, 먹을 것이 없는 사람보다 뚜렷한 장점을 가졌다.
69:5.2 (775.10) 초기의 은행가는 부족에서 용감한 사람이었다. 그는 집단의 귀중품을 맡아서 가지고 있었고, 한편 공격을 받았을 경우에 씨족 전부가 그의 오두막을 방어하곤 했다. 이처럼 개인의 자본과 집단 재산의 축적은 이내 군대 조직으로 이끌었다. 처음에 그러한 예방책은 바깥의 침공자들로부터 재산을 방어하려고 고안되었지만, 나중에는 이웃 부족의 재산과 재물을 침략하기 시작함으로 군대 조직을 연습시키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69:5.3 (776.1) 자본의 축적으로 이끈 기본 욕구는 다음과 같다:
69:5.4 (776.2) 1. 배고픔―선견과 연결된다. 먹을 것을 저축하고 보존하는 것은 앞날의 필요를 위해서 준비하는 충분한 선견이 있는 사람들에게 권력과 위안을 뜻했다. 식량의 저장은 기근과 재난에 대비하여 적절한 보험이었다. 그리고 원시의 도덕 관습 전체가 정말로, 사람이 오늘보다 내일을 중요시하는 것을 도우려고 고안되어 있다.
69:5.5 (776.3) 2. 가족 사랑―가족이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려는 소망. 자본은 앞날의 필요를 보장하기 위하여 오늘의 욕구가 강요하는데도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다. 이 앞날의 필요의 얼마큼은 사람의 자손과 상관이 있을지 모른다.
69:5.6 (776.4) 3. 허영심―사람이 재산 축적한 것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 여벌의 옷은 탁월을 나타내는 첫 표시의 하나였다. 수집하는 허영은 일찍부터 사람의 자존심을 끌었다.
69:5.7 (776.5) 4. 지위―돈으로 사회 및 정치적 위신을 사려는 열심. 상업화된 귀족들이 일찍부터 생겨났고, 귀족 계급에 끼는 것은 왕족에게 무슨 특별한 봉사를 해주는 데 달려 있기도 하고, 또는 솔직하게 돈을 낸 댓가로 허락되기도 했다.
69:5.8 (776.6) 5. 권력―주인이 되려는 갈망.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수단으로서 귀중품의 임대가 행해졌는데, 1년에 100퍼센트가 옛 시절에 이자율이었다. 대금업자는 항상 빚진 자들의 떼를 만들어 자신이 왕이 되었다. 종들은 아주 초기 형태의 축적한 재산이었고, 옛날에는 빚 때문에 생긴 종살이는 죽은 뒤에 몸을 통제하기까지 연장되었다.
69:5.9 (776.7) 6. 죽은 자의 귀신을 두려워하는 것―보호를 받으려고 사제에게 내는 요금. 다음 생명을 거쳐서 그들이 나아가는 것을 쉽게 만들기 위하여 재산을 쓰는 목적으로, 사람들은 일찍부터 사제들에게 죽음을 위한 선물을 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제들은 아주 부자가 되었고, 고대에 으뜸가는 자본가였다.
69:5.10 (776.8) 7. 성욕―아내를 하나 또는 여럿 가지려는 욕구. 남자가 처음으로 한 장사의 형태는 여자 교환이었고, 이것은 말을 파는 것보다 훨씬 앞섰다. 그러나 성(性) 노예의 매매는 결코 사회를 진보시키지 않았다. 그러한 장사는 민족의 치욕이었고, 지금도 그러한데, 이는 한꺼번에 그 장사가 가족 생활의 발전을 방해하고, 우수한 민족들의 생물학적 건강을 해쳤기 때문이다.
69:5.11 (776.9) 8. 수많은 형태의 자아 욕구의 충족. 부(富)가 권력을 주니까 더러는 부를 추구했고, 더러는 재산이 편안한 생활을 뜻하기 때문에 재산을 위하여 수고했다. 초기의 사람은 (그리고 후일의 어떤 사람들도) 재산을 사치품에 헤프게 쓰는 경향이 있었다. 취하게 하는 물품과 마약은 원시 종족들의 흥미를 끌었다.
69:5.12 (776.10)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서 사람들은 저축하는 새로운 동기를 얻었다. 최초의 배고픔 위에, 새로운 욕구가 빨리 불어났다. 빈곤을 아주 싫어해서, 죽었을 때 부자들만 천국으로 바로 간다고 생각되었다. 재산을 아주 소중히 여겨서, 허세부리는 잔치는 사람의 이름에서 불명예를 지워버리곤 했다.
69:5.13 (777.1) 재산의 축적은 일찍부터 사회적으로 탁월함을 가리키는 상징이 되었다. 어떤 부족에서는, 개인들이 어떤 휴일에 태우거나 동료 부족 사람들에게 거저 나누어 줌으로 감명을 주려고 몇 년 동안 재산을 쌓곤 했다. 이것은 그들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현대의 민족들도 아낌없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누어 주면서 흥청거리며, 한편 부자들은 큰 박애 및 교육 기관에 기부한다. 사람의 방법은 다르지만, 그 성향은 아주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69:5.14 (777.2) 그러나 옛날의 많은 부자가 그의 재물을 탐내는 자에게 피살되는 두려움 때문에 많은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는 것을 기록해야 공평하다. 부유한 사람들은 재산을 경시하는 것을 보이려고, 보통 노예 몇십 명을 잡아 바쳤다.
69:5.15 (777.3) 자본은 사람을 해방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자본은 사회 및 산업 조직을 크게 복잡하게 만들었다. 부당한 자본가들이 자본을 악용하는 것은 자본이 현대 산업 사회의 기초라는 사실을 없애지 않는다. 자본과 발명을 통해서 지금 세대는 땅에서 이전에 있던 어떤 세대보다도 더 높은 정도의 자유를 누린다. 이것을 생각 없고 이기적인 관리자들이 자본을 많이 악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실로서 기록한다.
69:6.1 (777.4) 원시 사회는 네―산업ㆍ규제ㆍ종교ㆍ군사―분과와 함께 불ㆍ동물ㆍ노예ㆍ재산을 도구로 씀으로 생겨났다.
69:6.2 (777.5) 불을 피우는 것은, 한 걸음에, 언제까지나 사람과 동물을 구별했다. 불은 인간의 기본 발명, 곧 발견이다. 모든 동물이 불을 무서워했기 때문에, 불은 사람으로 하여금 땅에서 머무를 수 있게 하였다. 불은 저녁때 사회적 교제를 북돋았다. 불은 추위와 들짐승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했을 뿐 아니라, 귀신에 대하여 방어 조치로도 쓰였다. 처음에는 열을 얻기보다 빛을 밝히려고 불이 쓰였다. 뒤떨어진 많은 부족은 불빛이 밤새도록 있지 않으면 잠을 자려 하지 않았다.
69:6.3 (777.6) 불은 사람을 교화시키는 좋은 수단이었고, 불을 잃지 않고 타고 있는 목탄을 이웃에게 줌으로, 사람에게 손해 보지 않고 남에게 이익이 되는 수단을 주었다. 어머니나 맏딸이 집안의 불을 돌보았고, 불은 사람의 첫 선생이었으며, 경계하는 태도와 신뢰가 요구되었다. 초기의 가정은 건물이 아니었지만, 가족은 불, 가족의 화로 둘레에 모였다. 아들이 새 집을 차렸을 때, 가족의 화로로부터 횃불을 가지고 갔다.
69:6.4 (777.7) 불을 발견한 안돈은 불을 예배 대상으로 다루기를 피했지만, 그 후손의 다수는 불꽃을 하나의 주물이나 영으로 여겼다. 쓰레기를 태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불이 주는 위생적 이익을 얻지 못했다. 원시인은 불을 무서워했고, 언제나 불을 기분 좋게 간직하려고 했으며, 따라서 향을 뿌렸다. 어떠한 상황에도 옛날 사람들은 결코 불 속에 침을 뱉거나, 또는 어떤 사람과 타고 있는 불 사이에 지나가려 하지 않았다. 초기의 인류는 불을 지필 때 쓰는 황철광과 부싯돌조차도 성스럽게 여겼다.
69:6.5 (777.8) 불을 끄는 것은 죄였다. 오두막에 불이 붙으면, 타도록 내버려 두었다. 성전과 성당에 있는 불은 신성했고, 해마다 또는 어떤 재난이 있은 뒤에 새 불을 지피는 관습을 제외하고, 결코 불이 꺼지도록 버려두지 않았다. 여자들이 집의 불을 관리했기 때문에, 여자들은 사제로 뽑혔다.
69:6.6 (778.1) 불이 어떻게 신들로부터 내려왔는가에 관한 초기의 신화는 번개로 불이 붙는 것을 지켜본 데서 생겼다. 초자연의 기원이 있다는 이 생각은 곧장 배화(拜火)로 이끌었고, 불의 숭배는 “불을 지나가는” 관습으로 발전되었으며, 이는 모세의 시절까지 계속된 풍습이었다. 죽은 뒤에 불을 지나간다는 관념이 아직도 남아 있다. 불의 신화는 초기 시절에 좋은 단결 수단이었고, 파시 교도의 상징에 아직도 남아 있다.
69:6.7 (778.2) 불은 먹을 것을 익혀 먹게 만들었고, “날로 먹는 사람”은 비웃는 표현이 되었다. 익히는 것은 음식을 소화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줄였고, 그래서 초기의 인간에게 사회적 문화를 가질 힘을 얼마큼 남겨 주었다. 한편 동물의 사육은 식량의 확보에 필요한 노력을 줄임으로 사회 활동을 할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69:6.8 (778.3) 불은 금속 세공(細工)의 길을 열었고, 나중에 증기 동력의 발견과 오늘날 전기의 사용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69:7.1 (778.4) 우선 첫째로, 동물 세계 전체가 사람의 적이었다. 인간은 자신을 짐승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배워야 했다. 처음에 사람은 동물을 먹어치웠지만, 나중에는 길들이고 사람을 위해서 일하도록 만드는 것을 배웠다.
69:7.2 (778.5) 동물 길들이기는 어쩌다가 일어났다. 아메리카 인디안이 들소를 사냥하는 것과 비슷하게, 야만인은 동물의 떼를 사냥하곤 했다. 야만인은 동물의 떼를 둘러싸서 동물을 통제할 수 있었고, 이처럼 식량에 필요한 대로 동물을 죽일 수 있었다. 나중에는 우리가 건축되었고, 동물의 떼 전체를 사로잡곤 했다.
69:7.3 (778.6) 어떤 동물은 길들이기 쉬웠지만, 많은 동물은 코끼리처럼 사로잡혀 있을 때 새끼를 낳으려 하지 않았다. 후일에 어떤 동물 종자는 사람의 존재에 복종하려 하고 사로잡혀 있어도 새끼를 낳는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처럼 동물 길들이기는 좋은 종자를 골라서 사육함으로 진전되었고, 이것은 달라마시아 시절 이후로 크게 진보한 기술이었다.
69:7.4 (778.7) 개는 처음으로 길들인 동물이었고, 개를 길들이는 어려운 체험은 어떤 개가 하루 종일 한 사냥꾼 주위를 따라다닌 뒤에 실제로 사냥꾼과 함께 집으로 갔을 때 시작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개는 식용으로, 사냥과 수송에, 그리고 동반하는 동물로 쓰였다. 처음에 개는 이리처럼 울부짖기만 했으나, 나중에 짖기를 배웠다. 개의 날카로운 후각은 개가 영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을 낳았고, 따라서 개를 주물로 모시는 종파가 생겼다. 망보는 개를 고용한 것은 처음으로 씨족 전체가 밤에 잘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눈에 보이는 적 뿐 아니라 유령으로부터 집을 보호하려고 지키는 개를 이용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개가 짖을 때는 사람이나 짐승이 다가온 것이지만, 개가 길게 울부짖을 때는 유령들이 가까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개가 밤에 울부짖는 것은 죽음을 상징한다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믿는다.
69:7.5 (778.8) 사냥꾼이었을 때 남자는 여자에게 꽤 친절했다. 그러나 동물을 길들인 뒤에, 칼리가스티아가 일으킨 혼란과 더불어, 많은 부족이 자기네 여자들을 부끄럽게 다루었다. 너무나 남자는 동물을 다루듯이 여자를 대했다. 남자가 여자를 무자비하게 대한 것은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장(章)의 하나이다.
69:8.1 (778.9) 원시인은 서슴지 않고 동료들을 종으로 만들었다. 여자는 첫 종, 가족의 종이었다. 목축하는 사람은 여자를 열등한 성(性) 상대인 종으로 만들었다. 이 종류의 성 노예는 남자가 여자에게 의존하는 성향이 줄어들자, 바로 그 결과로 생겨났다.
69:8.2 (779.1) 바로 얼마 전까지도 정복자의 종교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전쟁 포로들이 노예 처지로 떨어졌다. 그보다 더 전에 포로는 잡아먹히든지, 고문을 받아 죽든지, 서로 싸우게 되든지, 영들에게 희생되든지, 아니면 노예가 되었다. 노예 제도는 학살이나 잡아먹기보다 대단히 진보한 것이다.
69:8.3 (779.2) 노예로 만드는 것은 전쟁 포로를 자비롭게 취급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전진한 것이었다. 아이 성(城)을 취한 복병은[2] [20]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을 전멸시키고, 정복자의 허영을 채우려고 임금만 살려놓았는데, 이것은 문명화되었다고 생각되는 민족들도 실행했던 미개한 학살을 충실히 보여준다. 바샨의 임금 옥을 침공한 것은 똑같이 모질고 같은 결과를 낳았다.[3] [21] 히브리인은 적을 “남김없이 죽였고,” 그 재산을 모두 전리품으로 가졌다. 그들은 공물을 바치는 모든 도시가, 위반하면 “모든 남자의 죽음”을 각오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부족의 자부심을 덜 가진, 당대의 많은 부족은 우수한 포로를 부족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관습을 시작한 지 오래 된다.
69:8.4 (779.3) 아메리카의 홍인처럼, 사냥꾼은 노예를 만들지 않았다. 포로를 동료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죽였다. 목축하는 민족들 사이에는 노예 제도가 유행하지 않았는데, 이는 노동자가 거의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목자들은 남자 포로를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만 노예로 취했다. 모세의 법에는 이 여자 포로를 아내로 만드는 것에 관하여 특정한 지시가 들어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들을 돌려보낼 수 있었지만, 히브리인은 그러한 퇴짜맞은 배우자를 노예로 파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이것은 적어도 문명에서 하나의 진보였다. 히브리인의 사회 기준은 어설프기는 했지만, 둘러싼 부족들보다 훨씬 위에 있었다.
69:8.5 (779.4) 목자는 첫 자본가였는데, 가축 떼가 자본이었고, 그들은 그 이자―자연 증가분―으로 먹고 살았다. 그리고 이 재산을 노예나 여자들이 관리하라고 맡기기 싫어했다. 그러나 나중에 남자 죄수들을 받았고, 죄수들에게 땅을 갈도록 강요했다. 이것이 농노(農奴)―땅에 딸린 사람―의 첫 기원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땅을 경작하는 것을 쉽게 배웠고, 따라서 좋은 노예 종족이 되었다.
69:8.6 (779.5) 노예 제도는 연속되는 인간 문명에서 빠뜨릴 수 없는 고리였다. 노예 제도라는 다리 위로 사회는 혼란과 게으름으로부터 질서와 문명화된 활동이 있는 곳까지 건너갔다. 노예 제도는 뒤떨어지고 게으른 민족들이 일하도록 강요하고, 따라서 그들보다 우수한 자의 사회적 진보를 위하여 부와 여가를 마련해 주었다.
69:8.7 (779.6) 노예 제도는 사람으로 하여금 원시 사회를 규제하는 작용을 발명하도록 강요했으며, 그것은 정부의 시작을 낳았다. 노예 제도는 강력한 규제를 요구했고, 봉건 영주들이 노예를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세(中世)의 유럽에서 거의 사라졌다. 고대의 뒤떨어진 부족들은, 오늘날의 오스트랄리아 원주민과 마찬가지로, 결코 노예를 가지지 않았다.
69:8.8 (779.7) 노예 제도가 사람을 억압한 것은 참말이지만, 억압이라는 학교에서 사람은 부지런함을 배웠다. 노예들은 상급 사회가 생기는 것을 마지못해 도와주었고, 궁극에는 그 사회의 축복을 함께 가졌다. 노예 제도는 문화와 사회적 성취가 있는 조직을 창조하지만, 모르는 사이에 곧, 파괴적인 모든 사회악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며, 안에서 사회를 공격한다.
69:8.9 (779.8) 현대의 기계 발명은 노예를 쓸모 없이 만들었다. 노예 제도는 일부다처와 마찬가지로 수지가 맞지 않아 사라진다. 그러나 큰 무리의 노예를 갑자기 해방하는 것은 재난임이 반드시 입증되었다. 이들이 단계적으로 해방될 때 문제가 덜 따랐다.
69:8.10 (780.1) 오늘날, 사람은 사회의 노예가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 포부 때문에 빚의 노예로 전락한다. 강제하는 노예 제도가 사라지고 새롭고 개량된 형태로 수정된 산업 노예 상태가 대두되었다.
69:8.11 (780.2) 사회의 이상은 모든 사람이 자유를 가지는 것이지만, 게으름은 결코 묵인되어서는 안 된다. 튼튼한 육체를 가진 사람은 모두 적어도 자기가 먹고 살 만큼의 일을 하도록 강요되어야 한다.
69:8.12 (780.3) 현대의 사회는 거꾸로 간다. 노예 제도는 거의 사라졌고, 길들인 동물도 사라져 간다. 문명은 동력을 얻으려고 불에―무기체의 세계에―다시 손을 뻗고 있다. 사람은 불, 동물, 노예 제도를 거쳐서 야만 상태에서부터 올라왔다. 오늘날 사람은 뒤로 손을 뻗어서, 자연의 원소 창고로부터 부와 동력의 새로운 비밀과 근원을 쥐어짜려고 애쓴다.
69:9.1 (780.4) 원시 사회는 거의 공동체였지만, 원시인은 현대 공산주의 신조(信條)를 지키지는 않았다. 이 초기의 공산주의는 단순한 이론이나 사회적 신조가 아니라, 간단하고 실용적인 자동 조정이었다. 공산주의는 빈궁과 빈곤을 막았고, 이 고대의 부족들은 구걸과 매춘을 거의 알지 못했다.
69:9.2 (780.5) 원시 공산주의는 특히 사람을 똑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않았고, 평범을 찬양하지도 않았지만, 비활동과 게으름을 높이 쳐주었다. 그리고 근면을 짓누르고 포부를 죽였다. 공산주의는 원시 사회의 성장에 필수인 임시 발판이었지만, 네 가지 강한 인간의 성향을 거스르기 때문에, 더 높은 사회 체제로 진화하도록 길을 비켰다:
69:9.3 (780.6) 1. 가족. 사람은 재산을 쌓기만 바라지 않는다. 사람은 자본이 되는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한다. 그러나 초기의 공산 사회에서, 사람의 자본은 이내 소비되든지, 아니면 죽을 때 집단에 분배되었다. 재산 상속이 없었다―상속세가 100퍼센트였다. 나중에 자본을 축적하고 재산을 물려주는 관습은 사회의 뚜렷한 진보였다. 그리고 나중에 자본을 잘못 사용함으로 지나친 남용이 따랐는데도, 이것은 참말이다.
69:9.4 (780.7) 2. 종교적 경향. 원시인은 또한 다음 세상에서 생명을 시작하는 토대로서 재산을 저축하고 싶어했다. 이 동기는 어째서 사람의 개인 소유물을 함께 파묻는 관습이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는가 설명한다. 옛날 사람들은 오로지 부자만 즉시 어떤 쾌락과 위엄을 가지고 죽음에서 살아난다고 믿었다. 계시된 종교를 가르치는 선생, 특히 기독교 선생들은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와 같은 조건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처음으로 선포했다.
69:9.5 (780.8) 3. 자유와 여가를 가지고 싶은 소망. 사회가 진화하는 초기 시절에 개인의 소득을 집단에서 나누는 것은 실질적으로 일종의 노예 제도였다. 일하는 자는 게으른 자에게 노예가 되었다. 이것이 공산주의의 자살적 약점이다. 선견이 없는 자는 검소한 자에게 붙어사는 것이 버릇이었다. 현대에도 생각 없는 자는 나라가 (세금을 내는 검소한 자들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데 의존한다. 자본이 없는 자는 아직도 자본이 있는 자가 먹여 주기를 바란다.
69:9.6 (780.9) 4. 안전과 권력의 욕구. 진취적이며 성공하는 개인들의 속이는 버릇 때문에 공산주의는 마침내 무너졌는데, 그들은 자기 부족에서 꼼짝하지 않고 게으름 부리는 자에게 종이 되는 것을 피하려는 노력으로, 다채로운 핑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처음에 모든 저축은 비밀이었다. 원시의 불안감은 눈에 보이게 자본 축적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후일에도 지나치게 재산을 많이 쌓는 것은 아주 위험했다. 임금은 부자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어떤 죄목을 분명히 만들어 내곤 하였으며, 한 부자가 죽었을 때, 그 가족이 공공의 복지나 임금에게 큰 돈, 곧 상속세를 낼 때까지 장례식을 치르지 못하게 막았다.
69:9.7 (781.1) 초기에 여자는 공동체의 재산이었고, 어머니가 가족을 지배했다. 초기의 족장들은 모든 땅을 소유했고, 모든 여자를 소유한 사람이었다. 결혼은 족장의 찬성이 필요했다. 공산주의가 지나가자, 여자들은 개인별로 소유되었고, 아버지는 차츰 가정의 통제권을 쥐었다. 이처럼 가정이 비롯되었고, 지배했던 일부다처 관습은 차츰 일부일처(一夫一妻)로 바뀌었다 (일부다처제는 결혼에서 여자 노예의 요소가 남은 것이다. 일부일처제는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기르고, 공동의 문화를 가지고, 자아를 개선하는 아름다운 기업에서 생기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관계, 노예가 없는, 비할 데 없이 이상적인 관계이다.)
69:9.8 (781.2) 처음에는 연장과 무기(武器)를 포함해서, 모든 재산이 부족의 공동 재산이었다. 처음에는 몸소 만진 모든 물건이 사유 재산이었다. 낯선 사람이 한 컵으로 마시면, 그때부터 그 컵은 그의 것이었다. 다음에 피가 흘린 곳은 어디나, 다친 그 개인이나 집단의 재산이 되었다.
69:9.9 (781.3) 사유 재산은 그 소유자의 인격의 일부가 담겨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이처럼 처음부터 존중받았다. 재산에 대하여 사람이 정직한 것은 이 종류의 미신에 안전히 기초를 두었다. 아무런 경찰이 개인의 소유물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집단 안에서는 아무런 도둑질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른 부족의 물건을 취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재산 관계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고, 일찍부터 개인의 소유물을 불에 태우고 죽은 자와 함께 파묻었으며, 나중에는 남아 있는 가족이나 부족이 이를 물려받았다.
69:9.10 (781.4) 치장하는 종류의 개인 소유물은 부적을 달고 다니는 데서 생겨났다. 허영에 더하여 귀신을 무서워하는 것은 원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부적을 벗게 만들려는 온갖 시도를 물리치도록 만들었고, 그러한 재산은 필수품보다 더 귀중하게 평가되었다.
69:9.11 (781.5) 잠자는 자리는 아주 일찍부터 사람의 한 재산이었다. 나중에 부족의 추장이 집터를 배정하였고, 추장은 집단을 위해서 모든 부동산을 관리했다. 이내, 불 피는 자리는 소유권을 부여하였고, 그 뒤에 우물은 인접한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었다.
69:9.12 (781.6) 물웅덩이와 우물은 첫 사유 재산에 속했다. 주물 관습 전부가 물웅덩이ㆍ우물ㆍ나무ㆍ농작물ㆍ꿀을 지키는 데 이용되었다. 주물에 대한 믿음을 잃고 나서, 법이 개인 소유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진화되었다. 그러나 사냥 법, 곧 사냥하는 권리는 토지법을 훨씬 앞섰다. 아메리카의 홍인은 결코 개인의 토지 소유권을 이해하지 못했다. 홍인은 백인의 관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69:9.13 (781.7) 사유 재산은 일찍부터 가족의 문장(紋章)으로 표시되었는데, 이것이 가족 문장의 초기 기원이다. 부동산은 또한 영들의 감시를 받게 할 수 있었다. 사제들은 한 조각의 땅을 “거룩히 바치고,” 그러면 그 땅은 그 위에 세운 요술 금기(禁忌)의 보호를 받곤 했다. 금기의 소유자는 “사제의 증서”를 가졌다고 했다. 히브리인은 이 가족 땅의 경계 표지를 크게 존중했다. “이웃의 경계 표지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표시하는 돌덩이는 사제의 머리 글자를 가졌다. 머리 글자로 표시했을 때는 나무조차도 사유 재산이 되었다.
69:9.14 (782.1) 옛날에는 농작물만 사유(私有)가 되었으나, 연속해서 거두는 농작물은 소유권을 부여했다. 이처럼 농업은 개인 토지 소유권의 유래가 되었다. 개인들은 처음에 종신 소유권을 받았다. 죽을 때 땅은 부족에게 되돌아갔다. 부족이 개인에게 수여한 최초의 토지 소유권은 무덤―가족을 묻는 땅―이었다. 후일에 땅은 울타리를 친 자에게 속했다. 그러나 도시는 언제나 어떤 땅을 공유 목초지로서, 그리고 포위되었을 때 쓰려고 남겨 놓았다. 이런 “공유지”는 초기 형태의 집단 소유권이 남은 것이다.
69:9.15 (782.2) 결국에는 나라가 재산권을 개인에게 나누어 주었고, 세금을 부과할 권리를 유보하였다. 이 소유권을 확보해 놓고서, 지주들은 임대료를 걷을 수 있었고, 토지는 소득의 한 근원―자본―이 되었다. 마침내 땅은 정말로 매매(賣買)ㆍ이전(移轉)ㆍ저당, 권리 상실과 함께, 남에게 양도할 수 있었다.
69:9.16 (782.3) 사유 재산권은 자유를 늘이고 안정성을 높였다. 그러나 개인의 토지 소유권은 공동체의 통제와 지도가 실패했을 경우에만 사회의 인가를 받았고, 곧 노예ㆍ농노, 그리고 땅을 가지지 못한 계급이 뒤이어 따랐다. 그러나 개량된 기계는 차츰 사람을 종이 하는 고된 일로부터 해방시키고 있다.
69:9.17 (782.4) 재산권은 절대적이 아니고, 순전히 사회적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정부ㆍ법ㆍ질서, 그리고 현대 민족들이 즐기는 시민의 권리, 사회적 자유, 관습ㆍ평화ㆍ행복은 개인의 재산 소유권을 둘러싸고 성장했다.
69:9.18 (782.5) 현재의 사회 질서가 반드시 옳지는 않다―신성하거나 거룩하지는 않다―그러나 인류는 개정하는 일을 천천히 하는 것이 좋겠다.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너희 조상이 알고 있는 어떤 제도보다도 엄청나게 더 좋다. 너희가 사회 질서를 바꿀 때는 반드시 더 낫게 바꾸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조들이 버린 형식을 가지고 실험할 생각을 가지지 말라. 뒤로 가지 말고, 앞으로 나가라! 진화가 앞으로 나가게 하여라! 뒷걸음을 하지 말지어다.
70:0.1 (783.1) 생계를 잇는 문제를 일부 풀자마자, 사람은 인간의 접촉을 규제하는 일에 부닥쳤다. 산업의 발달은 법과 질서와 사회적 조정을 요구했다. 사유 재산은 정부를 필요하게 만들었다.
70:0.2 (783.2) 진화 세계에서 적개심은 자연히 생기고, 오로지 사회를 규제하는 어떤 종류의 체계가 평화를 보장한다. 사회적 규제는 사회의 조직과 뗄 수 없고, 관계는 어떤 통제하는 권한이 있음을 의미한다. 정부는 부족ㆍ씨족ㆍ가족ㆍ개인의 대립 관계가 조정되기를 강요한다.
70:0.3 (783.3) 정부는 의식하지 않고 발달한 것이요, 시행 착오로 진화한다. 정부는 살아남을 가치가 있고, 따라서 정부는 전통이 된다. 무정부는 비참을 더하고, 따라서, 정부, 곧 상대적 법과 질서는 천천히 태어났거나 태어나고 있다. 살기 위하여 투쟁해야 한다는 요구는 문명에 이르기까지 진보하는 길을 따라서 글자 그대로 인류를 몰았다.
70:1.1 (783.4) 전쟁은 진화하는 사람의 자연스런 상태요 물려받은 것이다. 평화는 문명이 진보한 정도를 재는, 사회의 척도이다. 진보하는 민족들이 어느 정도 교제하기 전에, 사람은 극도로 개인주의이고, 지나치게 의심이 많고, 믿을 수 없이 다투기를 좋아했다. 폭력은 자연의 법칙이요, 적의(敵意)는 자연인의 자동 반응이며, 한편 전쟁은 다만 바로 이 활동을 집단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명의 구조가 사회의 진보에 따르는 혼란에 시달릴 때는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인간의 상호 관계에서 생기는 염증을 폭력으로 해결하는 이 옛 방법으로, 즉시 파괴 성향으로 되돌아간다.
70:1.2 (783.5) 전쟁은 오해와 염증에 대하여 동물처럼 반응하는 것이다. 모든 그러한 문제와 어려움의 문명화된 해결에 평화가 뒤따른다. 나중에 질이 나빠진 아담 족속과 놋 족속과 함께, 산긱 민족들은 모두 싸움을 좋아했다. 안돈 족속은 일찍부터 황금률을 배웠으며, 오늘날도 그 에스키모 후손은 대체로 그 법을 따라 산다. 관습은 그들 사이에 확고하며, 그들에게는 사나운 대립 관계가 없는 편이다.
70:1.3 (783.6) 안돈은 자식들에게, 각자가 나무를 저주하면서 막대기로 나무를 때림으로 말다툼 해결하는 것을 가르쳤다. 막대기를 먼저 부러뜨린 자가 이긴 사람이었다. 후일의 안돈 족속은 대중의 구경거리를 열어서 싸움을 해결하곤 했는데, 거기서 싸우는 자들이 서로 놀리고 비웃었고, 한편 청중은 박수로 이긴 자를 결정했다.
70:1.4 (783.7) 그러나 사회가 실제로 평화스런 기간을 체험하고 전쟁 비슷한 연습을 인가할 만큼 충분히 진화하기까지, 전쟁과 같은 현상이 전혀 있을 수 없다. 전쟁한다는 바로 그 개념은 어느 정도의 조직이 있음을 의미한다.
70:1.5 (784.1) 사회 집단들이 생겨나자, 개인의 짜증은 집단의 감정 속에 파묻혀 사라지기 시작했고, 이것은 부족 안에서 평온을 증진했지만, 부족들 사이의 평화를 희생하였다. 이처럼 먼저 내부 집단, 곧 부족이 평화를 누렸고, 그들은 언제나 바깥 집단, 다른 부족 사람들을 싫어했다. 일찍부터 사람은 타지방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70:1.6 (784.2) 그러나 이것도 처음에는 효과가 없었다. 오해를 해소하려고 애썼을 때, 초기의 족장들은 적어도 1년에 한 번, 부족의 돌싸움을 허가하는 것이 필요함을 흔히 발견했다. 그 씨족은 두 무리로 갈라져 하루 종일 싸움에 빠지곤 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저 재미로 하는 외에 아무런 다른 이유가 없었고, 그들은 정말로 싸움을 즐겼다.
70:1.7 (784.3) 전쟁이 지속하는 것은 사람이 동물로부터 진화한 인간이기 때문이며, 동물은 다 싸움을 좋아한다. 초기에 전쟁의 원인은 다음과 같았다:
70:1.8 (784.4) 1. 배고픔은 식량을 얻기 위한 침공으로 이끌었다. 땅이 부족한 것은 언제나 전쟁을 불러 왔고, 이러한 투쟁에서 초기의 평화로운 부족들은 실질적으로 멸종했다.
70:1.9 (784.5) 2. 여자의 부족(不足)―집안 일꾼이 모자라는 것을 해소하려는 시도. 여자를 훔치는 것은 반드시 전쟁을 일으켰다.
70:1.10 (784.6) 3. 허영심―부족의 용맹을 나타내려는 욕심. 우수한 집단은 그들의 생활 방식을 열등한 민족에게 강제하기 위하여 싸우려 한다.
70:1.11 (784.7) 4. 노예―노동 계급이 될 새 일꾼을 모집할 필요.
70:1.12 (784.8) 5. 복수는 이웃 부족이 동료 부족 사람의 죽음을 초래했다고 믿었을 때, 전쟁의 동기가 되었다. 애도(哀悼)는 머리 하나를 집으로 가져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복수(復讐)하는 전쟁은 근대에 바로 이르기까지 좋은 평가를 받았다.
70:1.13 (784.9) 6. 오락―이 초기 시절에 젊은 남자들은 전쟁을 오락으로 보았다. 전쟁을 위하여 좋은 충분한 핑계가 생기지 않으면, 평화가 답답할 때, 가까이 있는 부족들은, 노는 날로, 거짓 싸움을 즐기기 위해서, 약탈에 참가하려고 반(半) 우호적 전쟁에 나가는 습관이 있었다.
70:1.14 (784.10) 7. 종교―종파로 전향하는 자들을 얻으려는 욕심. 원시 종교들은 모두 전쟁을 인가했다. 겨우 요즈음에 와서야 종교는 전쟁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초기의 사제들은, 유감스럽게도 보통, 군사력과 손을 잡았다. 오랜 세월 동안에 큰 평화 운동 중의 하나는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려는 시도였다.
70:1.15 (784.11) 이 옛 부족들은 언제나 그들의 신들의 명령을 받고서, 추장(酋長)이나 주술사의 요청을 받고서, 전쟁을 일으켰다. 히브리인은 그러한 “전투의 하나님”을 믿었고, 그들이 미디안 족속을 침공한 이야기는 옛날에 부족 전쟁에서 일어난 잔학 행위의 전형적 이야기이다. 모든 남자를 도살하고 나중에는 모든 남자 아이와 처녀가 아닌 모든 여자를 죽인 이 침공은 20만 년 전에 한 부족 추장의 관습에 경의를 표했을 것이다. 이 모두가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1] [22] 행해졌다.
70:1.16 (784.12) 이것은 사회의 진화―종족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이야기, 사람이 땅에서 자신의 운명을 해결해 나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한 잔학 행위는, 사람이 그 책임을 신들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신이 부추긴 것이 아니다.
70:1.17 (784.13) 군사적(軍事的) 자비는 인류를 더디게 찾아왔다. 한 여자 데보라가 히브리인을 통치했을 때에도, 바로 이 대규모의 잔학 행위가 계속되었다. 그 여자의 장군이 이방인에게 승리했을 때 “모든 무리가 칼날에 이슬이 되게” 만들었고, “하나도 남지 않았다.”
70:1.18 (785.1) 아주 일찍부터 민족의 역사에서, 독이 있는 무기(武器)가 쓰였다. 온갖 종류의 몸 부분 자르기가 실행되었다. 사울은 자기 딸 미갈을 위해서 내야 할 지참금으로, 다윗에게 필리스티아인 1백 명의 포피(包皮)를 서슴지 않고 요구했다.
70:1.19 (785.2) 초기의 전쟁에는 부족 전체가 싸웠으나, 후일에는 서로 다른 부족에 속한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이 있을 때, 두 부족이 싸우는 대신에, 그 두 사람만 결투에 들어갔다. 다윗과 골리앗의 경우에서 보다시피, 두 군대가 각 편에서 뽑은 대표 사이의 싸움 결과에 모두를 거는 것이 또한 관습이 되었다.
70:1.20 (785.3) 전쟁이 처음으로 개선된 것은 포로를 잡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여자는 전투 행위에서 제외되었고, 그리고 나서 뒤이어 비전투원을 인정하게 되었다. 전투가 더욱 복잡하게 되는 것과 발을 맞추어 군대 계급과 상비군이 곧 개발되었다. 그러한 용사들은 여자와 교제하는 것이 일찍부터 금지되었고, 여자들은 오래 전에 싸움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여자들은 언제나 군인들을 먹이고 돌보았으며, 그들이 싸우도록 계속 격려했다.
70:1.21 (785.4) 전쟁을 선언하는 관습은 큰 진보이다. 싸우겠다는 의사(意思)를 그렇게 선언하는 것은 공정 감각이 도래했음을 가리키며, 뒤이어 “문명화된” 전쟁 규칙이 차츰 발전되었다. 아주 일찍부터 종교적인 장소 가까이에서, 나중에는 어떤 거룩한 날에 싸우지 않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다음에는 피난처의 권리를 공인하는 일이 따랐으며, 정치적 망명자는 보호를 받았다.
70:1.22 (785.5) 이렇게 전쟁은 원시적인 사람 사냥으로 시작하여 후일에 “문명화된” 국가들의 얼마큼 질서 있는 체계로 차츰 발전했다. 그러나 사회의 우호적 태도는 적대하는 태도를 천천히 바꿀 뿐이다.
70:2.1 (785.6) 지나간 시대에 격심한 전쟁은, 1만 년 동안에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을 그러한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고 새로운 생각을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들곤 하였다. 전쟁으로 생기는 이러한 어떤 이득을 얻으려고 끔찍한 대가를 치르는 것은 사회가 일시 야만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문명화된 논리는 물러나야 했다. 전쟁은 효력이 센 약이요, 아주 비싸고 몹시 위험하다. 어떤 사회적 질병을 가끔 고치지만, 전쟁은 때때로 환자를 죽이고 사회를 파괴한다.
70:2.2 (785.7) 상존하는 국가 방어의 필요성은 사회에서 새롭고 진보된 많은 조정을 일으킨다. 오늘날의 사회는 허다한 유익한 기술 혁신의 이익을 누리는데, 이것들은 처음에 전적으로 군사(軍事) 목적이었고, 춤은 전쟁의 덕으로 비롯되었으며, 춤은 초기 형태의 군사 훈련의 하나였다.
70:2.3 (785.8) 전쟁은 지난날의 문명에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전쟁이:
70:2.4 (785.9) 1. 훈련, 곧 강제된 협동을 부과했다.
70:2.5 (785.10) 2. 사람들이 인내와 용기를 소중히 여기게 만들었다.
70:2.6 (785.11) 3. 민족주의를 육성하고 자리잡게 만들었다.
70:2.9 (785.14) 전쟁은 어떤 진화적 가치와 사람을 선택하는 가치가 있지만, 노예 제도와 마찬가지로, 문명이 천천히 진보함에 따라서 언젠가 전쟁을 버려야 한다. 옛날의 전쟁은 여행과 문화의 교류를 촉진했는데, 이런 목표는 현대의 수송과 통신 방법으로 지금 더 쉽게 달성된다. 옛날의 전쟁은 국가를 강화했지만, 현대의 전투는 문명 세계의 문화를 뒤집어엎는다. 고대의 전쟁은 열등한 종족의 학살을 초래했다. 현대 전투의 최종 결과는 가장 훌륭한 인간 혈통을 골라서 파괴하는 것이다. 초기의 전쟁은 조직과 효율성을 촉진했지만, 이것은 이제 현대 산업의 목표가 되었다. 지난 시대에 전쟁은 문명을 앞으로 나가게 한 사회적 효소(酵素)였다. 지금은 포부와 발명이 이 결과를 더 낫게 달성한다. 고대의 전쟁은 전투하는 하나님 개념을 지지했지만, 현대인은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말을 들었다. 지난날에는 전쟁이 많은 가치 있는 목적에 소용이 되었고, 문명을 세우는 데 필수 발판이었지만, 전쟁은 급속히 문화에 손해가 되고 있다―전쟁을 불러일으키는 데 따르는 끔찍한 손해에 비례해서 어떤 면으로도 사회에 이익을 배당할 수 없다.
70:2.10 (786.1) 한때 의사들은 방혈(防血)이 여러 가지 병을 치료한다고 믿었지만, 의사들은 그 뒤로 이러한 질병의 대부분에 더 좋은 처방을 발견했다. 그래서 전쟁이 낳는 국제적 유혈(流血)은 분명히, 국가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더 좋은 방법을 발견하도록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70:2.11 (786.2) 유란시아의 나라들은 민족적 군사주의와 산업주의 사이에 벌어지는 거대한 싸움에 이미 들어갔고, 여러 면에서 이 투쟁은 목자인 사냥꾼과 농부 사이에 오랜 세월에 걸쳤던 투쟁과 비슷하다. 그러나 산업주의가 군사주의를 이기려면, 산업주의를 따르는 위험을 피해야 한다. 유란시아에서 싹트는 산업의 위험은 다음과 같다:
70:2.12 (786.3) 1. 물질주의, 곧 영적으로 눈이 먼 상태로 강하게 흘러가는 경향.
70:2.13 (786.4) 2. 부와 권력의 숭배, 가치의 왜곡.
70:2.14 (786.5) 3. 사치의 악덕, 문화적 미숙.
70:2.15 (786.6) 4. 게으름, 봉사에 무감각한 것, 이 두 가지 위험이 커진다.
70:2.16 (786.7) 5. 바람직하지 않게 종족이 연약해지는 것, 생물학상의 악화.
70:2.17 (786.8) 6. 표준화된 산업에 노예가 되는 위협, 인격이 성장하지 않는 것. 노동은 사람을 고상하게 만들지만, 고역은 감각을 마비시킨다.
70:2.18 (786.9) 군사주의는 독재이며 잔인하다―야만스럽다. 정복자들 사이에서 사회 조직을 촉진하지만, 정복당한 자를 무너뜨린다. 산업주의가 더 문명화된 것이며, 창의성을 촉진하고 개성을 북돋아주도록, 산업주의를 실천해야 한다. 사회는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창의성을 길러주어야 한다.
70:2.19 (786.10) 전쟁을 영화롭게 기리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오히려 문명의 진보를 계속하기 위해서 전쟁의 대용품이 무엇을 마련해야 주어야 하는가 더 똑똑히 볼 수 있도록 전쟁이 사회에 무슨 이익을 가져왔는가 헤아려 보아라. 그러한 적당한 대용품을 마련하지 않으면, 전쟁이 오랫동안 계속될 것을 너희는 확신해도 좋다.
70:2.20 (786.11) 평화가 사람의 물질적 복지에 최선이라는 것을 속속들이 거듭하여 사람이 확신하기까지, 그리고 인류의 자아 보존 반응에 속하는, 늘 쌓이는 감정과 에너지를 방출하도록 예정된 집단 욕구를 이따금 해소하는 타고난 성향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사회가 평화적 대용품을 지혜롭게 마련할 때까지, 사람은 결코 평화를 정상 생활의 형태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70:2.21 (786.12) 그러나 지나는 길에 덧붙인다면, 전쟁을 체험의 학교로 존중해야 하며, 이 학교는 거만한 개인주의자로 이루어진 민족을 상당히 집중된 권한―최고 집행자―에 복종하도록 강요했다. 옛날 방식의 전쟁은 선천적으로 위대한 사람을 지도자로 뽑았지만, 현대의 전쟁은 이제 더 이렇게 하지 않는다. 지도자를 찾으려면, 사회는 이제 평화를 정복하는 일, 곧 산업ㆍ과학, 그리고 사회적 성취에 눈을 돌려야 한다.
70:3.1 (787.1) 가장 원시적 사회에서는 집단이 전부이다. 아이들조차 집단의 공동 재산이다. 진화하는 가족은 아이를 기르는 일에 집단을 대체하였고, 한편 생겨나는 씨족과 부족들은 사회 단위로서 가족을 대신했다.
70:3.2 (787.2) 성욕과 모성애는 가족을 일으킨다. 그러나 가족을 초월하는 집단들이 비로소 형성되기까지 진짜 정부는 나타나지 않는다. 집단이 가족을 갖기 이전 시절에, 비공식으로 뽑은 개인들이 지도자가 되었다. 아프리카의 부시맨은 결코 이 원시 단계를 넘어서 진보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무리 안에 우두머리가 없다.
70:3.3 (787.3) 가족들은 씨족, 곧 친척 집합의 혈연으로 뭉치게 되었다. 씨족들은 나중에 부족, 곧 영토를 가진 공동체로 진화하였다. 전쟁과 외부의 압력은 인척 관계를 가진 씨족들에게 부족을 조직하도록 강요했지만, 어느 정도 내부의 평화로 이 초기의 원시 집단들을 결속한 것은 상업과 무역이었다.
70:3.4 (787.4) 환상적 평화를 계획하는, 감상에 젖은 어떤 궤변보다, 국제 무역(貿易) 조직이 유란시아의 평화를 훨씬 더 증진할 것이다. 언어의 발달이, 그리고 개량된 수송 뿐 아니라 통신 방법이, 무역 관계를 수월하게 만들었다.
70:3.5 (787.5) 공통된 언어의 부재(不在)는 언제나 평화 집단의 성장을 막았지만, 돈은 현대 무역에서 보편적 언어가 되어버렸다. 대체로, 산업 시장이 현대 사회를 결속한다. 이익의 동기는 봉사하려는 욕구로 커졌을 때, 사람을 문명화시키는 강력한 도구이다.
70:3.6 (787.6) 초기 시대에 각 부족은 바깥으로 나가면서 두려움과 의심이 증가하는 그러한 여러 동심원(同心圓)에 둘러싸여 있었다. 따라서, 한때는 낯선 사람을 모두 죽이는 것, 나중에는 그들을 종으로 만드는 것이 관습이었다. 옛날의 친교 관념은 씨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했으며, 씨족의 회원 자격은 죽은 뒤에도 계속된다고 생각되었다―이것은 가장 초기의 영생 개념의 하나이다.
70:3.7 (787.7) 부족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의식(儀式)은 서로의 피를 마시는 것이었다. 어떤 집단에서는 피를 마시는 대신에 침을 교환하였고, 이것이 사교에서 입맞추는 관습의 옛 기원이다. 그리고 관계를 맺는 모든 의식은, 결혼이든 입족 예식이든, 언제나 잔치를 벌임으로 끝났다.
70:3.8 (787.8) 후일에는 붉은 포도주로 묽게 만든 피가 쓰였고, 결국에는 오직 포도주를 입족 의식을 봉인하려고 마셨는데, 이 의식은 포도주 잔을 스침으로 표시했고, 마실 것을 삼키고서 끝났다. 히브리인은 이 입족 의식을 고쳐서 실행하였다. 그들의 아랍 조상은 서약을 이용했는데, 서약은 후보자의 손이 부족 원주민의 생식기에 놓인 동안 실시되었다. 히브리인은 받아들인 외국인을 친절하게, 형제처럼 다루었다. “너희와 함께 거하는 외국인은 너희 사이에 태어난 자와 같게 될지니, 너희는 그를 네 몸처럼 사랑할지니라.”
70:3.9 (787.9) “손님 자격의 친교”는 임시 친교 관계였다. 방문하는 손님이 떠날 때, 접시를 반쪽으로 깨뜨리고 한 조각을 떠나는 친구에게 주었고, 그것은 나중에 방문하려고 도착할지 모르는 제삼자를 위하여 적당한 소개장으로 쓰이곤 하였다. 손님들은 자기의 여행과 모험에 관하여 이야기함으로 방문에 대하여 보답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옛날의 이야기꾼들은 아주 인기가 좋아서, 결국 관습은 사냥하거나 수확하는 철 동안에 이야기꾼의 활동을 금지하였다.
70:3.10 (788.1) 첫 평화 조약은 “피의 유대”였다. 싸우는 두 부족을 대표하는 평화 대사(大使)들이 만나서, 경의를 표하고, 다음에 나아가서 살갗에서 피가 날 때까지 찌르곤 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서로의 피를 빨아먹고 평화를 선언하곤 했다.
70:3.11 (788.2) 가장 일찍 있었던 평화 사절단은 옛날 적들의 성욕(性慾)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 가장 예쁜 자기네 처녀들을 데려오는 남자들의 대표단이었는데, 성욕이 전쟁 요구를 물리치는 데 이용된 것이다. 그렇게 명예를 받은 부족은 자체가 바치는 처녀들을 데리고, 답례 방문을 하곤 했다. 그리고 나서 평화가 정착된 것이다. 그리고 추장들의 가족 사이에서 서로 결혼하는 것이 인가되었다.
70:4.1 (788.3) 첫 평화 집단은 가족이었고, 다음에는 씨족ㆍ부족, 나중에는 민족이었으며, 민족은 결국 영토를 가진 현대 국가가 되었다. 유란시아의 나라들이 아직도 전쟁 준비에 막대한 돈을 쓰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도, 오늘날의 평화 집단들이 혈연을 넘어서 국가들을 포함한 지 오래 되었다는 사실은 아주 격려가 된다.
70:4.2 (788.4) 씨족은 부족 안에서 혈연을 가진 집단이며, 그들의 존재는 다음과 같은 어떤 공통된 이익에 빚을 지고 있다:
70:4.3 (788.5) 1. 공통된 조상까지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70:4.4 (788.6) 2. 공통된 종교 토템에 충성한다.
70:4.5 (788.7) 3. 같은 지방 사투리를 말한다.
70:4.6 (788.8) 4. 공통된 거처를 함께 쓴다.
70:4.9 (788.11) 씨족의 수령들은 반드시 부족 추장에게 종속되었고, 초기의 부족 정부는 씨족들의 허술한 연합이었다. 오스트랄리아 원주민은 결코 부족 형태의 정부를 개발하지 못했다.
70:4.10 (788.12) 씨족의 평화시 추장은 보통 모계(母系)를 통해서 다스렸다. 부족의 전시(戰時) 추장은 부계를 확립했다. 부족 추장 및 초기 임금의 법정은 씨족의 수령들로 구성되었고, 그들을 임금 앞으로 1년에 몇 번씩 초대하는 것이 풍습이었다. 이것은 임금으로 하여금 그들을 지켜보고 그들의 협조를 더 단단히 확보하게 만들었다. 씨족들은 지역의 자치 정부에서 값진 목적에 쓰였지만, 크고 강한 국가의 성장을 아주 더디게 만들었다.
70:5.1 (788.13) 인간의 모든 제도는 시작이 있었고, 결혼ㆍ산업ㆍ종교와 꼭 마찬가지로, 국가의 정부는 점진적 진화의 산물이다. 초기의 씨족과 원시 부족들로부터, 연속되는 체제의 인간 정부가 차츰 개발되었고, 20세기에 둘째 3분의 1의 특징을 나타내는 그러한 형태의 사회 및 시민 규제에 바로 이르기까지, 이러한 정부는 생겼다가 없어졌다.
70:5.2 (788.14) 가족 단위가 차츰 나타나자, 씨족 조직에서, 같은 피를 가진 가족들의 집합에서, 정부의 기초가 세워졌다. 진짜 정부 단체의 처음은 장로 회의였다. 이런 규제하는 집단은 어떤 유능한 방법으로 탁월함을 보인 노인들로 구성되었다. 야만인도 지혜와 경험을 존중하였고, 장로들이 지배하는 오랜 세월이 뒤따랐다. 나이 든 소수가 이렇게 독재하는 통치는 차츰 족장의 관념으로 발전했다.
70:5.3 (789.1) 초기의 장로 회의에는 모든 정부 기능, 곧 행정ㆍ입법ㆍ사법 기능의 잠재성이 존재했다. 당대의 관습을 풀이했을 때, 그 회의는 법정이었다. 새로운 양식의 사회 관습을 세울 때는 입법 기관이었고, 그러한 선포와 법령이 집행되는 한도까지, 그것은 행정부였다. 그 회의의 의장은 나중에 부족 우두머리의 선구자 중에 하나였다.
70:5.4 (789.2) 어떤 부족에는 여자 회의가 있었고, 때때로 많은 부족이 여자 통치자를 가졌다. 홍인의 어떤 부족들은 “7인 회의”의 만장일치 통치를 따르는 면에서 오나모나론톤의 가르침을 보존했다.
70:5.5 (789.3) 다투는 사회가 평화나 전쟁을 경영할 수 없다는 것을 인류가 깨닫기는 어려웠다. 원시의 “교섭”은 유익한 일이 드물었다. 여러 씨족의 수령들이 명령하는 군대는 한 사람이 지휘하는 강한 군대에 맞서서 승산이 없다는 것을 종족은 일찍부터 배웠다. 전쟁은 반드시 임금을 만들었다.
70:5.6 (789.4) 처음에 전쟁 추장은 군사 근무에만 뽑혔고, 평화시에는 그 권한의 얼마를 포기하곤 했는데, 이때 추장의 임무는 사회적 성질을 더 띠었다. 그러나 차츰차츰 그들은 평화 기간을 잠식하기 시작했고, 한 전쟁에서 다음 전쟁이 있기까지 내내, 계속하여 다스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흔히 한 전쟁이 끝나고 다음 전쟁이 생기는 데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도록 처리하였다. 이 초기의 전쟁 군주들은 평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70:5.7 (789.5) 후일에 어떤 추장들은 군대 근무가 아닌 일 때문에 선출되었고, 특별한 체격이나 뛰어난 개인 능력 때문에 뽑히었다. 홍인은 흔히 두 벌의 추장―총재, 곧 평화시 추장, 그리고 상속되는 전쟁 추장―이 있었다. 평화시의 통치자는 또한 판관이요 선생이었다.
70:5.8 (789.6) 주술사가 어떤 초기의 공동체를 다스렸고, 그들은 흔히 추장으로서 행동했다. 한 사람이 사제, 의원, 최고 집행자로서 행동하곤 했다. 아주 흔히 초기의 왕의 문장(紋章)은 최초에 사제의 옷의 표시나 상징이었다.
70:5.9 (789.7) 이런 단계를 걸쳐서 정부의 행정부가 차츰 생기게 되었다. 씨족 및 부족 회의는 자문하는 기능을 가지고, 또 나중에 나타나는 입법부와 사법부의 선구자로서, 계속하였다. 아프리카에는 오늘날 이 모든 형태의 원시 정부가 여러 부족 사이에서 실제로 존재한다.
70:6.1 (789.8) 완전한 집행 권한을 가진 추장이 나타난 뒤에야 효과적인 국가 통치가 다가왔다. 한 인물에게 관념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권한을 줌으로써 효과적 정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사람은 발견했다.
70:6.2 (789.9) 통치권은 가족의 권한이나 재산 관념으로부터 생겨났다. 족장인 소왕(小王)이 정말로 임금이 되었을 때, 그를 때때로 “민족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나중에, 임금은 영웅으로부터 솟아나왔다고 생각되었다. 세월이 더 지나서, 왕이 신성한 기원을 가졌다는 믿음 때문에, 통치권이 상속되었다.
70:6.3 (789.10) 세습(世襲)하는 왕권은 이전에 임금이 죽고 후계자가 선출되는 사이에, 대혼란을 일으켰던 무정부 상태를 피했다. 가족은 생물학상의 우두머리가 있고, 씨족은 자연히 선택된 지도자가 있었다. 부족과 나중에 생긴 국가는 자연스런 지도자가 없었다. 이것은 추장이나 왕의 자리를 물려주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였다. 왕의 가족과 귀족 제도의 관념은 또한 씨족이 “이름 소유권”을 가지는 관습에 기초를 두었다.
70:6.4 (790.1) 왕의 계승은 결국 초자연의 일로 간주되었고, 왕족의 피는 칼리가스티아 영주의 육체화된 참모진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처럼 왕은 주물 인격자가 되었고 사람들은 터무니없이 왕을 무서워하게 되었으며, 특별한 형태의 대화를 궁정에서 쓰도록 채택하였다. 요즈음까지도 왕의 손길은 병을 고친다고 생각되었고, 어떤 유란시아 민족들은 아직도 그들의 통치자가 신에게서 기원을 가졌다고 여긴다.
70:6.5 (790.2) 초기의 주물 임금은 흔히 은둔 속에 두었다. 그는 너무나 신성해서 잔칫날과 휴일을 빼고는 사람들이 볼 수 없다고 여겼다. 보통 한 대표가 그를 흉내내도록 선택되었고, 이것이 수상(首相)의 기원이다. 첫 내각의 관리는 식량 관리자였고, 다른 사람들이 곧 뒤를 이었다. 통치자들은 이내 상업과 종교를 책임지는 대표들을 지명했다. 내각의 발전은 집행 권한을 개인적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직접 내디딘 걸음이었다. 초기 임금의 이러한 조수들은 인정받는 귀족이 되었고, 여자들이 전보다 더 존경받게 되자, 왕의 아내는 차츰 왕비의 위엄으로 올라갔다.
70:6.6 (790.3) 양심 없는 통치자들은 독을 발견함으로 큰 권력을 쥐었다. 일찍부터 궁중의 요술은 악마처럼 잔학했다. 임금의 적들은 금방 죽었다. 그러나 아주 잔학한 폭군도 얼마큼 제한을 받았다. 그는 늘 암살당하는 두려움 때문에 적어도 자제하였다. 주술사ㆍ마술사ㆍ사제는 언제나 임금에게 강력한 저지 세력이었다. 나중에는, 지주(地主), 곧 귀족들이 제어하는 영향력을 미쳤다. 그리고 때때로 씨족과 부족들이 그저 들고일어나서, 전제 군주와 폭군을 뒤집어엎었다. 폐위된 통치자는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흔히 자살하는 선택권이 주어졌는데, 이것은 어떤 환경에서 자살하는, 고대 사회의 유행을 낳았다.
70:7.1 (790.4) 혈연 관계는 처음 사회 집단들을 결정했고, 인간 관계는 친척인 씨족을 확대했다. 서로 결혼하는 것은 집단을 확대하는 다음 걸음이었고, 그에 따라 생긴 복잡한 부족은 처음으로 참된 정치 단체였다. 사회의 발전에서 다음의 진보는 종교적 종파와 정치 클럽의 진화였다. 이것들은 처음에 비밀 사회로서 나타났고, 최초에는 온전히 종교적이었는데, 나중에는 행동을 규제하였다. 처음에 이러한 비밀 사회는 남자들의 클럽이었고, 나중에 여자들의 클럽이 나타났다. 이내 클럽은 두 등급, 사회ㆍ정치적 등급과 종교적이고 신비스런 등급으로 나누어졌다.
70:7.2 (790.5) 이 사회들이 비밀을 지키는 데는 많은 까닭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70:7.3 (790.6) 1. 어떤 금기를 위반하는 것 때문에 통치자의 비위를 건드리는 두려움.
70:7.4 (790.7) 2. 소수의 종교 의식(儀式)을 거행하기 위해서.
70:7.7 (790.10) 이 사회들이 지키는 바로 그 비밀은 모든 회원에게, 나머지 부족 사람에 대해서 신비의 힘을 주었다. 비밀은 또한 허영심에도 호소한다. 가입한 자들은 당대에 사회에서 귀족이었다. 남자 아이는 전에 여자들과 함께 채소를 거두었는데, 입회식이 있은 뒤에는 어른들과 함께 사냥했다. 사춘기 시험에 미끄러져, 남자들의 거처 바깥에서 강제로 여자와 아이들과 함께 남아 있는 것, 여자처럼 여겨지는 것은 최고의 치욕이요, 부족에서 불명예였다. 게다가, 가입하지 않은 자들은 결혼이 허락되지 않았다.
70:7.8 (791.1) 원시 인간은 아주 일찍부터 사춘기 청년들에게 성욕의 자제를 가르쳤다. 사춘기부터 결혼하기까지 소년들을 부모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관습이 되었고, 소년의 교육과 훈련은 남자들의 비밀 사회에 맡겼다. 이러한 클럽의 주요 활동 가운데 하나는 사춘기의 청년들을 통제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사생아가 생기는 것을 막았다.
70:7.9 (791.2) 이 남자의 클럽이 다른 부족에서 온 여자를 사용하는 데 돈을 치렀을 때, 상업화된 매춘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집단들은 놀랍게도 성의 문란에 빠지지 않았다.
70:7.10 (791.3) 사춘기에 입문하는 의식(儀式)은 보통 5년의 기간에 연장되었다. 많이 고행과 아픈 절단이 이 의식에 들어갔다. 할례가 이런 비밀 사회 중 하나에 입회 의식으로서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사춘기 입문의 일부로서 부족의 표시를 몸에 새겼다. 문신(文身)은 그러한 부족원의 표징으로서 시작되었다. 그러한 고문은, 상당한 고난과 함께, 이 젊은이들을 강하게 단련시켰고, 생명의 현실과 그에 따른 불가피한 시련으로 그들에게 감명을 주도록 고안되었다. 나중에 나타나는 운동 시합과 육체적 경기가 이 목적을 더 잘 수행한다.
70:7.11 (791.4) 그러나 비밀 사회들은 사춘기의 도덕성을 개량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사춘기 예식의 주요한 목적의 한 가지는 소년에게 다른 남자의 아내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70:7.12 (791.5) 험한 단련과 훈련을 이렇게 몇 년 동안 거친 다음, 결혼하기 바로 전에, 이 젊은 남자들은 보통, 여가와 자유를 가지도록 잠시 동안 풀려났고, 그 뒤에 돌아와서 결혼하고 부족의 금기에 일생 동안 복종하였다. 그리고 이 고대의 관습은 “젊어서 난봉을 피우는” 어리석은 관념으로서 현대까지 계속되었다.
70:7.13 (791.6) 후일에 많은 부족이 여자들의 비밀 클럽을 만드는 것을 인가했는데, 그 목적은 사춘기의 소녀들을 아내와 어머니가 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입회한 다음에 소녀는 결혼할 자격이 있었고 “신부 보이기”에 나가는 것이 허락되었는데, 이것은 그 시절에 사회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는 모임이었다. 결혼하지 않을 것을 서약한 여자들의 계급은 일찍부터 생겼다.
70:7.14 (791.7) 결혼하지 않은 남자의 집단과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은 여자의 집단이 따로 조직되었을 때, 당장에 비밀 아닌 클럽들이 등장했다. 이 사회들은 정말로 처음 학교였다. 남자의 클럽과 여자의 클럽은 서로를 괴롭히는 경향에 흔히 빠졌지만, 어떤 진보된 부족들은 달라마시아 선생들과 접촉을 가진 뒤에, 남녀 공학(共學)을 실험했고, 남녀 모두를 위하여 기숙사가 있는 학교를 가지고 있었다.
70:7.15 (791.8) 비밀 사회들은 주로 그 입회식의 신비스런 특징으로 말미암아, 사회 계층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 사회의 회원들은 애도하는 의식―조상 숭배―에서 호기심 있는 자를 놀라게 해서 쫓아내려고 처음으로 가면을 썼다. 나중에 이 의식은 가짜 강령회(降靈會)로 발전되었고, 거기서 귀신이 나타났다고 소문이 났다. “새로이 탄생”한 고대의 사회들은 신호를 썼고, 특별한 비밀 은어(隱語)를 이용했다. 또한 어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맹세했다. 그들은 밤의 경찰로서 행동했고, 그밖에도 넓은 범위의 사회 활동 분야에서 일했다.
70:7.16 (792.1) 모든 비밀 결사는 선서를 부과하고 신뢰를 강요했으며, 비밀을 지키라고 가르쳤다. 이런 명령은 폭도에게 두려움을 주고 폭도를 통제했다. 그들은 또한 경계를 맡는 사회 단체로서 행동했으며, 따라서 사형(私刑) 법을 실천했다. 이들은 부족들이 전쟁할 때 첫 간첩이었고, 평화 시절에는 첫 비밀 경찰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양심 없는 왕이 바늘방석에 앉게 만들었다. 그들을 상쇄하기 위해서, 왕들은 자체의 비밀 경찰을 길렀다.
70:7.17 (792.2) 이러한 사회 단체는 처음으로 정당을 낳았다. 처음 정당 정치는 “강한 자” 대 “약한 자”였다. 옛날에는 내란이 있은 다음에야 행정부가 갈렸는데, 이것은 약한 자가 강해졌다는 것을 풍부히 증명한다.
70:7.18 (792.3) 이 클럽들은 빌려준 돈을 걷기 위하여 상인에게 고용되었고, 세금을 걷기 위해서 통치자에게 고용되었다. 세금 걷는 것은 오랜 투쟁이었는데, 가장 이른 형태 중의 하나는 십일조, 곧 사냥이나 전리품의 10분의 1이었다. 세금은 최초에 왕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부과되었지만, 성전 예배를 지원하는 헌금으로 변장했을 때 세금 걷기가 더 쉽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70:7.19 (792.4) 이윽고 이 비밀 결사(結社)들은 첫 자선 조직으로 성장했고, 나중에는 초기의 종교 단체―교회의 선구자―로 진화했다. 마침내 이 사회들 중에 더러는 부족간의 사회, 곧 첫 국제 단체가 되었다.
70:8.1 (792.5) 인간의 정신ㆍ육체의 불평등은 사회 계급이 나타날 것을 보장한다. 사회 계층이 없는 유일한 세계는 가장 원시적 세계와 가장 진보된 세계이다. 새로 시작되는 문명은 아직 사회적 수준의 차별을 시작하지 않았고, 한편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세계는 이러한 인류의 구분을 대체로 지워버렸으며, 이러한 구분은 중간에 있는 모든 진화 단계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70:8.2 (792.6) 사회가 야만 상태에서 미개(未開) 상태로 솟아오름에 따라서, 그 인간 구성원은 다음의 일반적 이유 때문에, 여러 등급으로 분류되는 경향이 있다:
70:8.3 (792.7) 1. 자연스런 이유―접촉, 친척 관계, 결혼. 처음 사회적 구별은 남녀ㆍ나이ㆍ혈연―추장과 무슨 인척 관계인가―에 기초를 두었다.
70:8.4 (792.8) 2. 개인적 이유―능력과 끈기와 기술, 그리고 불굴의 정신을 인정하는 것. 언어의 능숙, 지식, 일반적 지능의 인정이 곧 뒤따랐다.
70:8.5 (792.9) 3. 우연―전쟁과 이민은 인간 집단을 분리하였다. 계급의 진화는 정복에, 승자와 피정복자의 관계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고, 한편 노예 제도는 자유로운 자와 매인 자로, 처음으로 일반적 사회의 구분(區分)을 가져왔다.
70:8.6 (792.10) 4. 경제적 이유―빈부(貧富). 재산, 그리고 노예의 소유는 한 사회 계급의 유전적 기초가 되었다.
70:8.7 (792.11) 5. 지리적 이유―도시나 시골의 촌락이 생기자 그에 따라서 계급이 생겨났다. 도시와 시골은 각자가 목자나 농부, 그리고 상인이나 산업가로 전문화되는 데 기여했으며, 그들의 관점과 반응은 달랐다.
70:8.8 (792.12) 6. 사회적 이유―다른 여러 집단의 사회적 가치를 대중이 추정하는 데 따라서 계급이 차츰 형성되었다. 가장 일찍부터 생긴 이 종류의 구분에는 사제와 선생, 통치자와 무사(武士), 자본가와 상인, 보통 노동자와 노예가 있었다. 노예는 결코 자본가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임금 받는 자는 때때로 자본가의 서열에 낄 수 있었다.
70:8.9 (793.1) 7. 직업적 이유―직종이 늘어나자, 그들은 계급과 조합을 세우는 경향이 있었다. 노동자는 세 집단으로 나뉘었는데, 곧 주술사를 포함한 전문가 계급, 다음에 기술 노동자, 미숙련 노동자가 뒤따랐다.
70:8.10 (793.2) 8. 종교적 이유―초기의 종파 클럽은 씨족과 부족 안에서 자체의 계급을 만들었고, 사제들의 경건함과 신비스러움은 그들이 따로 된 사회 집단으로 오랫동안 지속하게 만들었다.
70:8.11 (793.3) 9. 종족의 이유―일정한 국가나 영토 단위 안에 둘 이상의 종족이 존재하는 것은 보통 피부색에 따른 카스트를 만들어낸다. 인도 최초의 카스트 제도는, 초기 에집트의 카스트와 마찬가지로, 피부색에 기초를 두었다.
70:8.12 (793.4) 10. 나이―청춘기와 성년기. 부족 사이에서 소년은 아버지가 사는 한, 아버지의 보호 밑에 남아 있었고, 한편 소녀는 결혼할 때까지 어머니의 보살핌에 맡겨졌다.
70:8.13 (793.5) 융통성 있고 변하는 사회 계급은 진화하는 문명에 필수이지만, 계급이 카스트가 될 때, 사회 수준이 굳어질 때, 사회의 안정은 개인의 창의성을 줄임으로 향상된다. 사회적 카스트는 산업에서 한 사람의 자리를 찾는 문제를 풀지만, 또한 개인의 발전을 뚜렷이 단축시키고 사회의 협동을 실질적으로 방해한다.
70:8.14 (793.6) 사회에서 여러 계급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으니까, 진보하는 문명에서 다음과 같은 생물학적ㆍ지적ㆍ영적 자원의 영리한 조종을 통해서, 계급은 사람이 진화로 말소할 때까지 존속할 것이다:
70:8.15 (793.7) 1. 종족 혈통의 생물학적 혁신―열등한 인간 혈통을 골라서 없앤다. 이것은 필사자의 많은 불평등을 없애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70:8.18 (793.10)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미래에 아득하게 천년이 허다하게 지나야 그 참된 열매를 얻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의 진보를 가속(加速)하는 이러한 요인을 총명하게, 현명하게, 참을성 있게 조종함으로, 많은 사회적 개선이 즉시 생길 것이다. 종교는 혼란으로부터 문명을 들어올리는 강력한 지렛대이지만, 건전한 정상 유전(遺傳)에 단단히 기초를 둔, 건전한 정상 지성의 지레 받침이 없이 힘을 쓸 수 없다.
70:9.1 (793.11) 자연은 사람에게 아무 권리를 주지 않는다. 단지 목숨과 그 목숨을 이을 세상을 준다. 자연은 살 권리조차 주지 않는다. 무장하지 않은 사람이 배고픈 호랑이를 원시림에서 만났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가 생각하면 이를 짐작할 것이다. 사회가 사람에게 주는 첫째 선물은 안전이다.
70:9.2 (793.12) 차츰차츰 사회는 권리를 주장했고, 오늘날 이 권리는 다음과 같다:
70:9.4 (793.14) 2. 군사적 방어―준비를 통해 얻는 안전.
70:9.5 (793.15) 3. 내부 평화의 보존―개인에 대한 폭력과 사회의 무질서를 방지하는 것.
70:9.6 (794.1) 4. 성의 통제―결혼, 가족 제도.
70:9.8 (794.3) 6. 개인 및 집단 경쟁의 육성.
70:9.9 (794.4) 7. 젊은이를 교육하고 훈련하는 준비.
70:9.10 (794.5) 8. 무역과 상업의 촉진―산업의 발전.
70:9.11 (794.6) 9. 노동 조건과 보상의 개선.
70:9.12 (794.7) 10. 영적 동기를 얻어 이 모든 다른 사회 활동을 고상하게 만들려는 목적으로 종교 관습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
70:9.13 (794.8) 권리가 기원을 알 수 없이 오래 되었을 때, 이를 흔히 자연권이라 부른다. 그러나 인간의 권리는 정말로 자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며, 전부 사회적이다. 이 권리는 상대적이고 늘 변하고 있으며, 경기 규칙에 불과하다―늘 바뀌는 인간의 경쟁 현상을 다스리는, 인정된 여러 관계를 조정한 것이다.
70:9.14 (794.9) 어느 시대에 권리로 여길 수 있는 것은 다른 시대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수의 장애자와 퇴화된 자가 살아남은 것은 그들이 그렇게 20세기 문명을 거추장스럽게 할 어떤 자연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당대의 사회, 곧 도덕 관습이 그렇게 선포하기 때문이다.
70:9.15 (794.10) 인간의 권리 중에 거의 아무것도 유럽의 중세에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때는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속했고, 권리는 국가나 교회가 허락한 특권이나 은혜였다. 이 잘못에 대한 저항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믿음으로 인도했기 때문에, 똑같이 잘못되었다.
70:9.16 (794.11) 약하고 열등한 자는 언제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였다. 그들은 국가가 강하고 우수한 자에게 그들의 요구를 채워주고 그밖에 결점을 회복하도록 강요해야 한다고 언제나 주장했는데, 이런 결점은 아주 빈번히 바로 그들의 무관심과 게으름에서 자연히 생긴 결과이다.
70:9.17 (794.12) 그러나 이 평등의 이상(理想)은 문명의 소산이다. 자연 속에 평등은 발견되지 않는다. 문화 자체도 문화를 받아들일 사람의 바로 그 능력이 다른 것은 사람이 평등하지 않게 타고난 것을 확실히 보여준다. 자연스러운 평등이라 생각되는 것을 갑자기 비진화 방법으로 실현하는 것은 문명화된 사람을 원시 시대의 투박한 관습으로 재빨리 되돌려 보낼 것이다. 사회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권리를 제공할 수 없지만, 각자의 다른 권리를 공정하고 공평하게 관리할 것을 약속할 수 있다. 자연인에게 자아 유지를 추구하고, 자아 존속에 참여하고, 한편 동시에 어느 정도 자아 욕구의 충족을 즐기는 공평하고 평화로운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사회의 일이요 임무이며, 자아에 관한 이 세 가지는 모두, 인간의 행복의 총합이다.
70:10.1 (794.13) 자연이 응보를 베푼다는 것은 사람이 만든 이론이며, 현실이 아니다. 자연 속에서, 응보는 순전히 이론이요, 전부 허구(虛構)이다. 자연은 오직 한 가지 응보를 마련해 준다―결과는 불가피하게 원인을 좇는다.
70:10.2 (794.14) 사람이 파악하는 응보는 사람이 자기의 권리를 찾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점진적 진화의 문제였다. 응보 개념은 영이 부여한 지성을 구성할지 모르지만, 응보 개념은 완전히 발육되어 공간 세계로 솟아나지 않는다.
70:10.3 (794.15) 원시인은 모든 현상이 한 인격자가 저지른 것이라 생각했다. 누가 죽었을 경우에, 야만인은 무엇이 그를 죽였는가가 아니라, 누가 죽였는가 물었다. 따라서 사고로 사람을 죽인 것은 인정되지 않았고, 죄를 벌할 때 범죄자의 동기는 통째로 무시되었다. 판결은 입은 손해에 따라서 정해졌다.
70:10.4 (795.1) 가장 초기의 원시 사회에서 여론은 직접 작용했고, 법을 담당하는 관리가 필요 없었다. 원시인의 인생에는 사생활이 없었다. 이웃이 한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졌다. 따라서 이웃이 사사로운 일을 엿보는 권리가 생긴다. 집단 전체가 각 개인의 행동에 관심을 가지고, 어느 정도 통제해야 한다는 이론에 근거를 두고 사회가 규제되었다.
70:10.5 (795.2) 사람들은 귀신이 주술사와 사제들을 통해서 응보를 베푼다고 아주 일찍부터 믿었다. 이것이 이 계급을 최초로 범죄를 탐지하고 율법을 시행하는 자로 만들었다. 범죄를 찾아내려고 그들이 초기에 쓴 방법은 독물ㆍ불ㆍ고통으로 시련을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야만스런 시련은 서투른 중재 기술에 불과했다. 이런 시련이 논쟁을 반드시 공정하게 해결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독물을 주었을 때, 피고가 게워 버리면 무죄였다.
70:10.6 (795.3) 구약은 이 혹독한 시련 중에 하나, 결혼 생활의 죄에 대한 시험을 기록한다. 한 남자가 그의 아내가 정절을 지키지 않았다고 의심하면, 아내를 사제에게 데리고 가서 그가 의심하는 바를 이야기했고, 그 뒤에 사제는 거룩한 물과 성전 마루에서 쓸어모은 것으로 이루어진 혼합물을 준비하곤 했다. 위협하는 저주를 포함하여 마땅한 의식을 치른 뒤에, 고발당한 아내는 그 더러운 약을 마시라고 강요받았다. 아내에게 죄가 있으면, “저주를 일으키는 그 물이 그 여자에게 들어가서 쓰게 될 것이며, 그 여자의 배가 붓고 허벅지는 썩을지라. 그리고 민족 사이에서 저주를 받으리라.” 어쩌다가 어떤 여자가 이 더러운 물 한 모금을 쭉 들이키고 몸이 아픈 징후를 보이지 않으면, 그 여자는 시샘하는 남편이 고소한 죄목에서 풀려났다.
70:10.7 (795.4) 진화하는 거의 모든 부족이 범죄를 찾아내는 이 포학한 방법을 언젠가 실행한 적이 있다. 결투는 혹독한 시련으로 죄를 정하는 재판이 현대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70:10.8 (795.5) 3천 년 전에 히브리인과 기타 반문명화된 부족들이, 응보를 시행하는 그런 원시 방법을 쓴 것에 놀라서는 안 된다. 그러나 생각 있는 사람들이, 성스러운 기록을 수집한 페이지 안에 그러한 미개 상태의 유물을 남겨두려 했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의심되는 결혼의 부정(不貞)을 찾아내고 판결하는 일에 관하여, 어떤 신성한 존재도 그렇게 부당한 지침을 필사 인간에게 결코 준 적이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70:10.9 (795.6) 사회는 일찍부터 눈에는 눈, 목숨에는 목숨으로, 복수하여 갚는 태도를 채택하였다. 진화하는 부족들은 모두 피를 갚는 이 권리를 인정했다. 복수(復讐)는 원시 생활의 목표가 되었지만, 종교는 그 뒤로 이 초기의 부족 풍습을 크게 고쳤다. 계시된 종교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언제나 선포했다, “‘복수는 나의 일이라’ 주가 말씀하시니라.” 초기 시절에 복수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불문율의 핑계로 행해지는 오늘날의 살인과 아주 다르지 않았다.
70:10.10 (795.7) 자살은 흔한 형태의 복수였다. 사람이 살아서 복수할 수 없다면, 그는 귀신으로서 돌아와서 적에게 노여움을 퍼부을 수 있다는 믿음을 품고 죽었다. 이 믿음이 아주 널리 퍼졌으니까, 적의 문간에서 자살한다는 위협은 보통 적을 항복시키는 데 넉넉했다. 원시인은 생명을 그다지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찮은 일에 자살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달라마시아 사람들의 가르침은 이 관습을 크게 줄였으며, 최근에는 여가ㆍ편안ㆍ종교ㆍ철학이 합쳐서 인생을 더 즐겁고 바람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단식 투쟁은 이 옛 시절의 복수 방법의 현대판이다.
70:10.11 (796.1) 가장 초기 형태의 진보된 부족 율법 중의 하나는 피의 복수를 하나의 부족 일로 떠맡는 것과 상관이 있었다. 그러나 설명하기 야릇하지만, 그때에도 남자는 값을 충분히 치르고 아내를 샀다면, 벌을 받지 않고 아내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에스키모는 범죄에 대한 벌을, 살인의 경우에도, 피해자의 가족이 선포하고 시행하라고 맡긴다.
70:10.12 (796.2) 또 한 가지 진보는 금기(禁忌) 위반에 대하여 벌금을 물게 하는 것, 벌칙 조항이었다. 이 벌금은 처음으로 공공 수익이었다. “피의 값”을 치르는 관습은 또한 피로 갚는 복수의 대안(代案)으로서 유행하였다. 그러한 손해는 보통 여자나 가축으로 물었다. 실제로 벌금, 돈으로 보상하는 것이 범죄에 대한 벌로서 인정을 받기까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형벌 관념이 본질적으로 보상이었으니까, 사람의 목숨을 포함하여 모든 것에, 결국 값이 매겨지게 되었고, 그 값을 손해로서 치를 수 있었다. 히브리인은 피 값 치르는 관습을 처음으로 폐지하였다. 모세는 그들이 “사람 죽인 죄를 지은 살인자의 목숨 대신에 아무 배상을 받지 말라, 그를 반드시 죽여야 할지니라”하고 가르쳤다.
70:10.13 (796.3) 이처럼 처음에는 가족이, 다음에는 씨족이, 나중에는 그 부족이 응보를 시행하였다. 참된 응보의 관리는 원수 갚는 일을 개인과 친척 집단으로부터 빼앗아서, 사회 집단, 곧 국가의 손에 넘겨주는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70:10.14 (796.4) 산 채로 태워 죽이는 벌은 한때 보통 관습이었다. 하무라비와 모세를 포함해서, 고대의 많은 통치자가 이 관습을 인정하였고, 모세는 많은 범죄, 특히 심각한 성적(性的) 성질을 가진 범죄는 화형에 처함으로 벌을 주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만일 “제사장”이나 다른 유지의 “딸”이 공공 창녀가 되면, “그 여자를 불에 태워 죽이는” 것이 히브리인의 관습이었다.
70:10.15 (796.5) 반역―자기 부족의 동료를 “팔아 넘기거나” 배반하는 것―은 처음으로 죽을 죄였다. 가축을 훔치는 것은 보편적으로 즉시 죽는 벌을 받았고, 최근에도 말을 훔치는 것은 비슷하게 벌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벌의 무거움은 벌의 확실성과 신속성만큼 가치 있는 범죄 억제책이 아니라는 것이 발견되었다.
70:10.16 (796.6) 사회가 범죄를 벌하지 못할 때, 집단의 분개심은 보통 사적(私的) 제재로 죽이는 수단으로서 나타난다. 피신처의 조항은 갑작스런 이런 집단의 분노를 피하는 수단이었다. 사적 제재로 죽이기와 결투(決鬪)는 개인이 사사롭게 시정(是正)하는 일을 국가에게 넘겨주기 싫어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70:11.1 (796.7) 새벽에 언제 밤에서 낮으로 이어지는가를 정확히 가리키는 것만큼, 도덕 관습과 법을 뚜렷이 구분하기가 힘들다. 도덕 관습은 형성 과정에 있는 법 및 경찰의 규제이다. 오랫동안 확립되었을 때, 규명되지 않은 도덕 관습은 엄밀한 법, 분명한 규칙, 잘 규명된 사회 관습으로 구체화되는 경향이 있다.
70:11.2 (796.8) 법은 반드시 처음에 부정적이고 무엇을 하지 말라 한다. 진보하는 문명에서는 법이 더욱 적극성을 띠고 무엇을 지시한다. 초기의 사회는 부정적(否定的)으로 작용했으며, 모든 다른 사람에게 “너희는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림으로 개인에게 살 권리를 주었다. 개인에게 주는 모든 권한이나 자유는 모든 다른 사람의 자유를 단축시키며, 금기, 곧 원시의 율법이 이 일을 해냈다. 금기라는 관념 전체가 본래부터 부정적인데, 이는 원시 사회가 완전히 무엇을 막으려고 조직되었고, 초기에 응보의 시행은 금기를 집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초에 이 법들은, 후일의 히브리인이 보여주었다시피, 오직 동료 부족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히브리인은 이방인을 다루는 경우에 다른 윤리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70:11.3 (797.1) 증언을 더 진실하게 만들려는 노력으로, 맹세는 달라마시아 시절에 생겨났다. 그러한 맹세는 자신에게 저주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아무도 자기가 태어난 집단에 불리하게 증언하려 하지 않았다.
70:11.4 (797.2) 범죄는 부족의 도덕 관습을 공격하는 것이었고, 죄는 귀신이 인가한 금기를 어기는 것이었다. 범죄와 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오랫동안 혼란이 있었다.
70:11.5 (797.3) 사람은 이기심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금기를 만들었고, 사회는 이를 전통적 관습으로 인가하였으며, 한편 종교는 관습을 성스럽게 도덕법으로 만들었다. 이처럼 세 가지 모두가 인간의 생활을 더 안전하고 신성하게 만드는 데 협력하였다. 권리가 종교의 인가를 받지 않았더라면, 초기 시절에 사회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모두, 신들이 선조에게 그들의 오래 된 법, 금기를 주었다고 주장했다.
70:11.6 (797.4) 율법은 오래 된 인간 체험, 구체화되고 공인된 여론이 법전으로 기록된 것이다. 도덕 관습은 축적된 체험이었고, 이것을 토대로 나중에 유력한 지식인들이 성문화된 법을 작성했다. 고대의 재판관은 아무 법이 없었다. 판결을 내릴 때, 그는 다만 “이것이 관습이다”하고 말했다.
70:11.7 (797.5) 법정 판결에서 선례를 언급하는 것은 재판관이 성문화(成文化)된 법을 변하는 사회 조건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나타낸다. 이것은 전통이 연속된다는 감명을 주면서, 변하는 사회 조건에 대하여 점진적으로 적응하는 길을 마련해 준다.
70:11.8 (797.6) 재산에 관한 투쟁은 여러 방법으로 처리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70:11.9 (797.7) 1. 싸움에 걸린 재산을 없애버린다.
70:11.10 (797.8) 2. 무력으로―논쟁하는 자들은 싸움으로 해결했다.
70:11.13 (797.11) 초기의 법정은 주먹 싸움으로 판결했다. 판사는 단지 심판이나 중재인이었다. 그들은 인가된 규칙에 따라서 싸움이 진행되도록 처리했다. 법정에서 격투에 들어갈 때, 각 편은 다른 편에게 진 뒤에 그 비용과 벌금을 물려고 재판관에게 보증금을 냈다. “힘이 아직도 옳았다.” 후일에는, 말싸움이 주먹 싸움을 대신하였다.
70:11.14 (797.12) 원시적 응보 관념 전체가 공정을 찾기보다 논쟁을 해결하고, 이처럼 공중의 무질서와 개인의 폭력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원시인은 지금 불공평하다고 여길 것을 그다지 분개하지 않았다. 권력을 가진 자는 권력을 이기적으로 쓸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도 어떤 문명의 지위는 그 법정이 얼마나 철저하고 공평한가, 그 판사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재판하는가에 따라서 아주 정확하게 결정되는가 한다.
70:12.1 (797.13) 정부의 진화에서 큰 싸움은 권력의 집중과 관계되었다. 잘 조정된 행정부ㆍ입법부ㆍ사법부 사이에 권력의 적당한 균형이 유지되었을 때, 대의 정치 종류의 국가 정부가 사람 사는 세계에서 진화 민족들을 최선으로 규제한다는 것을 우주 행정가들은 경험으로 배웠다.
70:12.2 (798.1) 원시의 권한은 힘, 육체의 힘에 바탕을 두었지만, 이상적 정부는 대의 정치 체계이며, 거기서 능력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 그러나 미개한 시절에는 온통 전쟁이 너무 많아서 대의 정치가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없었다. 권한의 분리와 지휘의 통일 사이에 있었던 오랜 투쟁에서, 독재자가 이겼다. 원시 장로 회의가 초기에 가졌던 분산된 권력은 차츰, 절대 군주의 몸에 집중되었다. 진짜 임금들이 나타난 뒤에, 장로의 집단은 준입법 및 사법(司法)에 관하여 자문하는 단체로서 지속되었다. 후일에 동등한 지위를 가진 입법 기관이 나타났고, 결국에는 판결하는 최고 법정이 입법 기관과 따로 확립되었다.
70:12.3 (798.2) 임금은 도덕 관습, 곧 최초의 법 또는 불문율의 집행자였다. 나중에 임금은 제정된 법령, 곧 구체화된 여론을 집행했다. 인민 집회가 여론의 표현으로서, 늦게 등장했어도 사회의 큰 진보를 표시하였다.
70:12.4 (798.3) 초기의 임금은 도덕 관습―전통이나 여론―에 크게 제한을 받았다. 최근에 어떤 유란시아 국가들은 이 도덕 관습을 통치를 위한 근거 자료로 성문화하였다.
70:12.5 (798.4) 유란시아 필사자들은 자유를 가질 자격이 있고, 정부 체계를 만들어야 하며, 헌법, 또는 국가 권한과 행정 절차에 관한 기타 헌장을 채택해야 한다. 이렇게 하고 나서, 가장 유능하고 자격 있는 동료를 최고 집행자로 뽑아야 한다. 입법부에 있는 대표들을 위해서, 그러한 신성한 책임을 완수하도록, 지능과 도덕 면에서 자격 있는 자들만 뽑아야 한다. 고등 법정과 최고 법정의 판사 경우에, 오로지 타고난 능력을 부여받고 충만한 체험으로 지혜롭게 된 자들만 선출해야 한다.
70:12.6 (798.5) 사람들이 자유를 유지하고 싶으면, 자유 헌장을 고른 뒤에, 다음 사항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헌장을 지혜롭고 총명하고 두려움 없이 해석해야 한다:
70:12.7 (798.6) 1. 행정부나 입법부가 부당하게 권력을 강탈하는 것.
70:12.8 (798.7) 2. 무지하고 미신을 믿는 선동자들의 술수.
70:12.9 (798.8) 3. 과학적 진보의 지연.
70:12.10 (798.9) 4. 평범이 지배하는 막다른 골목.
70:12.11 (798.10) 5. 사악한 소수의 지배.
70:12.12 (798.11) 6. 야심 있고 머리 좋은, 독재를 꿈꾸는 자의 통제.
70:12.13 (798.12) 7. 공포가 일으키는 비참한 혼란.
70:12.14 (798.13) 8. 양심 없는 자들이 착취하는 것.
70:12.15 (798.14) 9. 국가가 세금으로 시민을 노예로 만드는 것.
70:12.16 (798.15) 10. 사회 및 경제적 공평을 이루지 못하는 것.
70:12.19 (798.18) 이것들이 진화하는 세계에서 대의 정치라는 엔진을 다스리는 장치로서 작용하는 법정, 헌법에 따른 법정의 목적이요 목표이다.
70:12.20 (799.1) 유란시아에서 정부를 완전하게 만들려는 인류의 투쟁은, 행정의 경로를 완전하게 만들고, 그 경로를 늘 변하는 시대의 요구에 적응하며, 정부 안에서 권력을 더 균형 되게 분산시키고, 다음에 참으로 지혜로운 행정 지도자들을 뽑는 것과 상관이 있다. 신성하고 이상적 형태의 정부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계시될 수 없고, 시공 우주에서 두루, 각 행성의 남녀가 천천히 힘들여 발견해야 한다.
71:0.1 (800.1) 국가는 문명에서 하나의 유익한 진화이며, 국가는 사회가 전쟁의 황폐와 고통으로부터 얻은 순이익을 대표한다. 국정(國政)의 기술조차 단지 싸우는 부족과 나라들 사이에 무력의 경쟁을 조절하는 기술이 축적된 것이다.
71:0.2 (800.2) 현대의 국가는 집단의 권력을 얻으려는 오랜 투쟁에서 살아남은 제도이다. 우수한 권력이 결국 이겼고, 그것은 시민이 국가를 위하여 죽고 사는 절대적 의무를 가졌다는 도덕적 신화와 함께, 사실로 있는 산물―국가―를 낳았다. 그러나 국가는 신에게서 기원을 가지지 않았다. 국가는 의도하여 총명한 인간 행위로 생겨나지도 않았다. 국가는 순전히 진화된 제도이며, 전적으로 저절로 생겼다.
71:1.1 (800.3) 국가는 영토가 있고 사회를 규제하는 조직이며, 가장 강력하고 효과 있고 오래 가는 국가는 단일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국민은 공통된 언어와 도덕 관습과 제도를 가지고 있다.
71:1.2 (800.4) 초기의 국가들은 작았고, 모두 정복으로 생긴 결과였다. 이 국가들은 자원하는 결합으로 생겨나지 않았다. 정복하는 유목민들이 많은 국가를 세웠고, 이들은 평화로운 목자나 정착한 농부들 위에 와락 덮쳐서 그들을 무찌르고 노예로 만들곤 했다. 정복의 결과로 생긴 그러한 국가들은, 강제로 여러 층으로 이루어졌다. 계급이 불가피했고, 계급 투쟁은 늘 진 자를 도태시켰다.
71:1.3 (800.5) 아메리카 홍인의 북쪽 부족들은 진정한 국가 상태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 그들은 느슨한 부족 연맹, 아주 원시적 국가 형태를 지나서 발전하지 못했다. 그들의 가장 가까운 접근은 이로쿼이 연방이었으나, 이 여섯 민족의 집단은 결코 제대로 국가로서 활동한 적이 없고, 현대의 국가 생활에 다음과 같은 어떤 필수인 것들이 빠졌기 때문에 살아남지 못했다:
71:1.4 (800.6) 1. 사유 재산의 획득과 상속.
71:1.7 (800.9) 4. 실용적 가족 조직. 이 홍인들은 모계 가족과 조카 상속을 고수하였다.
71:1.9 (800.11) 6. 강력한 행정 우두머리.
71:1.12 (800.14) 홍인들은 너무 민주적이었다. 그들은 좋은 정부를 가졌지만 그 정부는 실패하였다. 그들이 때 이르게, 더 진보된 백인의 문명에 부닥치지 않았더라면, 결국 국가를 진화시켰을 것이다. 백인은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정부 방법을 따르고 있었다.
71:1.13 (801.1) 성공적인 로마 국가는 다음에 기초를 두었다:
71:1.15 (801.3) 2. 농업, 그리고 동물 길들이기.
71:1.18 (801.6) 5. 노예 제도―시민의 여러 계급.
71:1.22 (801.10) 로마 문명에서 가장 큰 약점이자 그 제국이 궁극에 멸망하게 된 한 가지 요인은, 21살에 남자아이를 해방하고 무조건 여자아이를 풀어놓은 조치, 자유롭고 진취적이라고 생각된 조치였는데, 여자아이는 자신이 고르는 남자와 결혼하거나, 집을 나가서 나라에서 부도덕하게 될 자유가 있었다. 사회에 끼친 해악은 이 개혁 자체만 아니라, 오히려 그 조치를 갑자기 널리 채택한 그 방법에 있었다. 로마의 멸망은 한 국가가 너무 빨리 확장하고, 이와 관련하여 내부에서 타락했을 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를 가리킨다.
71:1.23 (801.11) 초기의 국가는 영토의 결속을 위하여 혈통의 유대가 줄어들어 가능하게 되었고, 그러한 부족 연맹은 정복으로 보통 견고하게 되었다. 모든 하찮은 투쟁과 집단의 차이를 초월하는 통치권이 참 국가의 특징이지만, 아직도 많은 계급과 카스트가 옛 시절의 씨족과 부족들의 잔재로서 후일의 국가 조직에 남아 있다. 나중에 나타난, 영토를 가진 큰 국가들은, 같은 핏줄을 가진 그보다 작은 이 씨족 집단들과 오랫동안 쓰라린 투쟁을 겪었고, 부족 정부는 가족과 국가 권한 사이에 가치 있는 과도기인 것이 판명되었다. 후일에 많은 씨족이 무역과 기타 산업 조합으로부터 생겨났다.
71:1.24 (801.12) 국가의 통합에 실패하는 것은 유럽에서 중세의 봉건주의처럼, 통치 방법이 국가 이전의 조건으로 후퇴하게 만든다. 이 어두운 시대에, 영토를 가진 국가들은 멸망했고, 작은 성(城) 집단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생겼으며, 씨족과 부족 단계의 발전이 다시 나타났다. 비슷한 준국가들이 지금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존재하지만, 이들 모두가 진화에서 후퇴는 아니다. 다수가 미래 국가의 초기 핵심이다.
71:2.1 (801.13) 민주주의는 이상이지만, 문명의 소산이요 진화의 소산이 아니다! 천천히 가라! 살펴서 선택하여라!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민주주의의 위험 때문이다:
71:2.3 (801.15) 2. 저질이고 무지한 통치자를 선택하는 것.
71:2.4 (801.16) 3. 사회의 진화에서 기본적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
71:2.7 (802.1) 여론(輿論), 일반적 의견은 언제나 사회가 처지게 만들었다. 그렇기는 해도, 여론은 값지니, 여론이 사회의 진화를 더디게 하지만, 문명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여론을 교육하는 것은 문명을 가속하는 유일하게 안전하고 참된 방법이다. 무력은 잠시 편리할 뿐이고, 총알이 투표에게 길을 양보함에 따라서 문화의 성장은 갈수록 더 빨라질 것이다. 여론, 도덕 관습은 사회의 진화와 국가의 발전에 기본적ㆍ근본적 에너지이지만, 국가에 가치가 있으려면 여론의 표현은 폭력을 쓰지 않아야 한다.
71:2.8 (802.2) 사회의 진보를 재는 척도는, 폭력을 쓰지 않는 표현을 통해서, 여론이 개인의 행동과 국가의 규제를 통제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서 결정된다. 여론이 개인 선거권의 힘을 갖추었을 때 정말로 문명화된 정부가 다가온 것이다. 보통 선거가 사물을 반드시 바르게 결정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나쁜 일조차도 올바르게 처리하는 방법을 대표한다. 진화는 단숨에 최상급의 완전을 낳지 않지만, 오히려 비교가 되고 진보하는 실용적 조정을 낳는다.
71:2.9 (802.3) 실용적이고 효과 있는 형태의 대의 정치가 진화하는 데 열 걸음 또는 단계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71:2.10 (802.4) 1. 사람의 자유. 노예 제도, 농노(農奴), 그리고 온갖 형태의 인간의 구속은 사라져야 한다.
71:2.11 (802.5) 2. 지성의 자유. 자유로운 민족이 교육―영리하게 생각하고 지혜롭게 계획하도록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자유는 보통, 유익하기보다 해롭다.
71:2.12 (802.6) 3. 법대로 다스리는 것. 오로지 인간 통치자의 의지와 변덕을, 인가된 기본법에 따라서 세워진 법령으로 갈아치울 때 사람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71:2.13 (802.7) 4. 언론의 자유. 대의(代議) 정치는 인간의 열망과 의견을 나타내기 위하여 온갖 형태의 표현의 자유가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71:2.14 (802.8) 5. 재산의 안전. 어떤 형태로 개인의 재산을 사용할 권한을 마련해 주지 못하면, 어떤 정부도 오래 견딜 수 없다. 사람은 그의 개인 재산을 쓰고, 통제하고, 주고, 팔고, 빌려 주고, 물려줄 권리를 가지고 싶어한다.
71:2.15 (802.9) 6. 탄원할 권리. 대의 정치는 시민들이 말할 권리가 있다고 가정한다. 탄원하는 특권은 자유로운 시민권에 본래부터 있다.
71:2.16 (802.10) 7. 통치하는 권리.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으로 넉넉지 않다. 탄원하는 권한은 정부를 실제로 관리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71:2.17 (802.11) 8. 보통 선거권. 대의 정치는 총명하고 유능한 보통 선거권자를 전제 조건으로 한다. 그러한 정부의 성격은 정부를 구성하는 자의 됨됨이와 인품에 따라서 늘 결정될 것이다.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투표권은 남녀에게 보편적으로 남아 있지만, 효과 있게 고쳐지고, 다시 분류되고, 달리 구별될 것이다.
71:2.18 (802.12) 9. 공복(公僕)의 통제. 시민이 공무원과 공복을 안내하고 통제하는 지혜로운 기법을 소유하고 쓰지 않으면, 어떤 국가 정부도 쓸모 있고 효과적일 수 없다.
71:2.19 (802.13) 10. 총명하고 훈련받은 대표. 민주주의가 살아남는 것은 대의 정치의 성공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것은 기술 훈련을 받고, 지적으로 유능하고, 사회에 충성하며, 도덕적으로 건전한 사람들만 공직에 선출하는 관습에 조건을 받는다. 오로지 그런 준비가 있어야 국민의 정부, 국민이 다스리는 정부, 국민을 위한 정부가 보존될 수 있다.
71:3.1 (803.1) 한 정부의 정치 또는 행정의 형태는, 시민의 진보에 기본적인 것―자유ㆍ안전ㆍ교육 및 사회적 조정―을 마련해 준다면, 거의 중요성이 없다. 어떤 국가인가가 아니라, 국가가 무엇을 하는가가 사회의 진화 과정을 좌우한다. 국민이 뽑은 지도자들이 예가 되다시피, 결국은 어떤 국가도 국민의 도덕적 가치 기준을 뛰어넘을 수 없다. 무지와 이기심은 가장 높은 종류의 정부라도 꼭 무너지게 만들 것이다.
71:3.2 (803.2) 매우 유감으로 생각되어야 하지만, 민족의 자기 중심주의는 사회가 살아남는 데 필수였다. 선택된 백성이라는 신조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부족의 결속과 국가 건설에 으뜸가는 요소였다. 그러나 온갖 종류의 불관용(不寬容)을 없앨 때까지, 어떤 나라도 이상적 활동 수준에 이를 수 없다. 그리고 과학ㆍ상업ㆍ놀이ㆍ종교를 조정하는 것이 불관용을 물리치는 데 최선이다.
71:3.3 (803.3) 이상적인 국가는 강력하고 조화되어 움직이는 세 가지 추진력의 자극을 받고서 활동한다:
71:3.4 (803.4) 1. 사람이 형제임을 깨닫고 사랑으로 충실하는 것.
71:3.7 (803.7) 이상적 국가의 법은 가지 수가 많지 않으며, 그 법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기 시대를 지나서, 자제가 향상되는 결과로서 개인의 자유가 분명히 진보하는 시대로 넘어갔다. 높은 수준에 있는 국가는 국민에게 일하지 않을 수 없게 할 뿐 아니라, 기계 시대로 진보하여 고된 일로부터 해방되어 얻는 늘어난 여가를 유익하고 고상하게 이용하도록 유도한다. 여가는 물건을 소비할 뿐 아니라 생산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71:3.8 (803.8) 어떤 사회도, 게으름을 허용하거나 빈곤을 묵인할 때 그다지 많이 진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함이 있고 퇴화된 핏줄을 아낌없이 지원하고, 아무 제한 없이 번식하도록 허락하면, 결코 빈곤과 의존성을 없앨 수 없다.
71:3.9 (803.9) 도덕적인 사회는 그 국민의 자존심을 보존하고 모든 정상적인 개인에게 자아를 실현하는 적당한 기회를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러한 사회적 성취 계획은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진 사회를 낳을 것이다. 최소한으로 규제하는 정부의 감독으로 사회의 진화가 촉진되어야 한다. 가장 적게 다스리고, 가장 많이 조정하는 국가가 제일 좋다.
71:3.10 (803.10) 이상적 국가는 진화로, 시민 의식, 곧 사회에 봉사하는 의무와 특권의 인식이, 천천히 성장함으로 성취되어야 한다. 처음에는, 이권(利權) 운동자들의 행정 목표를 좇아서, 사람들이 정부의 짐을 하나의 임무로서 맡지만, 나중에는 사람들이 그러한 직책을 하나의 특권으로서, 가장 큰 명예로서 추구한다. 어떤 수준에 있더라도, 문명의 지위는 국가의 책임을 자청해서 받아들이는 국민의 됨됨이가 충실하게 보여준다.
71:3.11 (803.11) 국민의 모든 다른 형태의 경제 및 상업 단체와 마찬가지로, 참된 연방에서는 전문가가 도시와 지방을 다스리는 사무를 운영하고 관리한다.
71:3.12 (803.12) 진보된 국가에서, 정치적 봉사는 국민의 가장 높은 헌신으로 평가된다. 가장 지혜롭고 고귀한 시민의 가장 큰 포부는 시민의 인정을 얻고, 정부가 맡기는 어떤 자리에 선출되거나 임명되는 것이다. 그러한 정부는 봉사를 인정하는 가장 높은 명예를 공무원이나 사회에 봉사하는 자에게 수여한다. 다음에 명예는 차례대로 철학자ㆍ교육자ㆍ과학자ㆍ산업가ㆍ군인에게 수여된다. 부모는 아들딸의 탁월성에 따라 마땅히 상을 받으며, 순전히 종교적인 지도자는 영적 국가의 대사(大使)이니까, 진짜 보상을 다른 세계에서 받는다.
71:4.1 (804.1) 경제와 사회와 정부는 남아 있으려면 진화해야 한다. 진화하는 세계에서 정적(靜的) 조건은 무엇이 썩고 있음을 가리키며, 오직 진화의 흐름과 함께 앞으로 움직이는 제도만 지속한다.
71:4.2 (804.2) 확대되는 문명의 진취적 계획은 다음을 포함한다:
71:4.10 (804.10) 8. 불운한 자를 보살피기.
71:4.12 (804.12) 10. 과학과 예술의 증진.
71:4.15 (804.15) 문명의 예술에서 생기는 이러한 진보는 필사자의 노력에서 가장 높은, 인간답고 신다운 목표의 실현으로―사람의 형제 정신을 사회에서 성취하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개인적 지위에 이르도록―바로 이끌며, 이것은 모든 사람의 소망,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최상의 소망에서 드러난다.
71:4.16 (804.16) 진정한 형제 정신의 출현은, 모든 사람이 서로 기쁘게 짐을 지는 그러한 사회 질서가 도착했음을 가리킨다. 그들은 실제로 황금률을 실천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러한 이상적 사회는,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 추구하는 봉사에 헌신함으로 주로 자극받는 자를 약한 자나 악한 자가 부당하고 사악하게 이용하려고 잠복해서 기다릴 때는 실현될 수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오직 한 길이 실용적이다: “황금률을 지키는 사람”은 그들의 평화로운 성질을 이용하거나 진보하는 문명의 파괴를 추구할지도 모르는 뒤떨어진 동료에 대항해서 적절한 방어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이상에 따라서 진취적 사회를 세워도 좋다.
71:4.17 (804.17) 각 세대에 이상주의자가 그보다 낮은 서열의 인간에게 멸종되도록 버려두면, 이상주의는 진화하는 행성에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 이상주의의 가장 큰 시험이 있다: 이기적 소득을 얻거나 나라를 크게 만들려는 목적으로 다른 민족을 공격하는 작전에 이 군사력을 쓰려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하나의 진보한 사회가, 전쟁을 좋아하는 이웃들의 온갖 공격을 받아도 그 사회를 안전하게 지킬 그러한 군사적 준비를 유지할 수 있는가? 국가가 살아남으려면 전쟁 준비가 필요하며, 오직 종교적 이상(理想)이 방어 준비를 공격에 악용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오로지 사랑, 형제 정신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누르는 것을 막을 수 있다.
71:5.1 (805.1) 경쟁은 사회의 진보에 필수이지만, 규제를 받지 않은 경쟁은 폭력을 낳는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경쟁은 산업 자체가 살아남을 것인가를 선언할 뿐 아니라, 산업에서 사람의 자리를 결정하므로 경쟁은 천천히 전쟁을 대신하고 있다. (살인과 전쟁은 도덕 관습 앞에서 지위가 다르며, 살인은 사회의 초기 시절 이후로 금지되었고, 한편 아직 인류 전체가 전쟁을 금지한 적은 없다.)
71:5.2 (805.2) 이상적 국가는 개인의 경쟁에서 폭력을 제외하고 개인적 주도권의 불공평을 막기에 겨우 충분할 만큼 사회적 행위의 규제를 떠맡는다. 여기에 국가의 큰 문제가 있다: 어떻게 산업에서 평화와 평온을 보장하고, 국가의 권력을 지원하기 위하여 세금을 내고, 동시에 세금이 산업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막으면서, 국가가 기생충이나 폭군이 되지 않게 보장할 수 있는가?
71:5.3 (805.3) 어느 세상에서도 그 초기 시대를 통하여 내내, 경쟁은 진보하는 문명에 꼭 필요하다. 사람의 진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협동은 갈수록 더 효과 있게 된다. 상급 문명에서는 협동이 경쟁보다 더 능률이 있다. 원시인은 경쟁에 자극을 받았다. 초기 진화의 특징은 생물학상의 적자(適者)가 살아남는 것이지만, 영리한 협동, 서로 이해하는 친교, 영적 형제 정신이 후일의 문명을 더 낫게 촉진한다.
71:5.4 (805.4) 산업의 경쟁은 지나친 낭비이며 상당히 비효율적인 것이 참말이지만, 이 낭비적 경제 운동을 없애려는 어떤 노력도, 그러한 조절이 개인의 기본 자유 중에 어느 것을 아주 손톱만큼이라도 취소할 때, 묵인해서는 안 된다.
71:6.1 (805.5) 이익을 얻으려는 동기가 봉사하려는 동기로 인하여 확대될 수 없다면,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오늘날의 경제는 운명이 정해졌다. 생각이 좁은 자기 이익에 기초를 둔 무자비한 경쟁은 궁극에, 그 경쟁이 유지하려 하는 것마저도 파괴한다. 순전히 사리(私利)를 추구하는 이익 동기는 기독교의 이상과 양립할 수 없다―예수의 가르침과 더군다나 어긋난다.
71:6.2 (805.6) 경제학에서 이익을 얻으려는 동기와 봉사하려는 동기의 관계는 종교에서 두려움과 사랑의 관계와 같다. 그러나 이익의 동기를 갑자기 파괴하거나 없애서는 안 된다. 이익 동기는 그런 동기가 없으면 나태한 사람을 부지런히 일하게 만든다. 그러나 사회의 에너지를 일으키는 이 자극제의 목적이 언제까지나 이기적일 필요는 없다.
71:6.3 (805.7) 경제 활동에서 이익의 동기는 높은 체제의 사회에 전적으로 천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익 동기는 문명의 초기 단계 전체에 걸쳐서 필수인 요소이다. 사람들이 경제적 노력과 사회 봉사를 위하여, 여러 가지 우수한 종류의 비이익 동기―최상의 지혜, 흥미 있는 형제 정신, 탁월한 영적 달성을 얻으려는 초월적 욕구―를 단단히 잡을 때까지, 이익을 얻으려는 동기를 사람들한테서 빼앗아서는 안 된다.
71:7.1 (806.1) 지속하는 국가는 문화에 기초를 두고, 이상에 지배되며, 봉사로 인하여 자극을 받는다. 교육의 목적은 기술을 획득하고, 지혜를 추구하며, 자아를 실현하고, 영적 가치 기준에 도달하는 것이어야 한다.
71:7.2 (806.2) 이상적 국가에서는 교육이 일생을 통해서 내내 계속되며, 때로는 철학이 그 국민의 주요한 추구 대상이 된다. 그런 나라의 국민은 인간 관계의 중요성, 실체의 의미, 가치 기준의 고귀함, 생활의 목표, 영화로운 우주 운명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높이는 것으로서 지혜를 추구한다.
71:7.3 (806.3) 유란시아인은 새롭고 더 높은, 문화 있는 사회를 이루는 꿈을 가져야 한다. 교육은 순전히 이익 때문에 움직이는 경제 체계가 사라짐과 함께, 새로운 가치 수준으로 뛰어오를 것이다. 교육은 너무나 오랫동안 지역과 군대에 치중하였고, 자아를 찬미하고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교육은 궁극에 세계적ㆍ이상적이어야 하고, 자아를 실현하고 우주를 깨달아야 한다.
71:7.4 (806.4) 교육은 성직자의 통제를 받다가, 요즈음에 법률가와 사업가들이 통제하는 일로 넘어가 버렸다. 궁극에는 철학자와 과학자에게 교육을 맡겨야 한다. 철학, 곧 지혜의 탐구가 주요한 교육 목표가 될 수 있도록, 선생들은 자유로운 존재, 진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71:7.5 (806.5) 교육은 실천하는 사업이다. 교육은 일생을 통해서 내내 계속되어야 하며, 그래서 인류는 다음과 같이 높아지는 수준의 필사자의 지혜를 차츰차츰 체험해야 한다:
71:7.7 (806.7) 2. 체험의 의미를 깨달음.
71:7.10 (806.10) 5. 목표를 자극하는 것―도덕.
71:7.13 (806.13) 그리고 나서, 이러한 성취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필사자로서 궁극에 지성이 도달하는 수준, 하나님을 의식하는 수준까지 올라갈 것이다.
71:8.1 (806.14) 어떤 인간 정부에서도 유일하게 성스러운 모습은 국가를 행정ㆍ입법ㆍ사법 활동의 세 분과로 나눈 것이다. 우주는 기능과 권한을 그렇게 분리하는 계획에 따라서 관리된다. 효과적 사회 규제나 국민의 정부에 관한 이 신성한 개념을 제쳐놓고, 시민이 더욱 자제하고 더욱 사회에 봉사하는 목표를 향하여 늘 진보하고 있다면, 한 민족이 어떤 형태의 국가를 선택하는가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 민족의 날카로운 지능, 경제적 지혜, 사회적 지략, 도덕적 체력은 모두 국가에 충실하게 반영된다.
71:8.2 (806.15) 국가의 진화에는 다음과 같이 한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진보가 필요하다:
71:8.3 (806.16) 1. 행정부ㆍ입법부ㆍ사법부, 세 부분으로 정부를 창조하는 것.
71:8.4 (806.17) 2. 사회ㆍ정치ㆍ종교 활동의 자유.
71:8.5 (807.1) 3. 온갖 형태의 노예 제도와 인간적 속박의 폐지.
71:8.6 (807.2) 4. 국민이 세금 부과에 고삐를 쥐는 능력.
71:8.7 (807.3) 5. 보편적 교육의 확립―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진 교육.
71:8.8 (807.4) 6. 지역 정부와 국가 정부 사이의 적당한 조정.
71:8.9 (807.5) 7. 과학의 육성과 질병의 정복.
71:8.10 (807.6) 8. 남녀 평등을 마땅히 인정하며, 산업과 정부에서 여자들이 특화된 봉사를 하는 것과 아울러, 가정ㆍ학교ㆍ교회에서 남녀가 조화되어 활동하는 것.
71:8.11 (807.7) 9. 기계의 발명과 후일의 기계 시대를 정복함으로 사람이 고된 일에 예속되지 않게 만드는 것.
71:8.12 (807.8) 10. 방언의 정복―보편적 언어의 승리.
71:8.13 (807.9) 11. 전쟁의 종결―여러 국가의 대륙 법정이 국가와 종족의 의견 차이를 국제적으로 판결하는 것. 대륙 법정에서 정기적으로 은퇴하는 우두머리들로부터 자동으로 선택된, 행성의 최고 재판소가 이 법정을 주관한다. 대륙 법정은 권한을 가지며, 세계 법정은 자문한다―도덕에 관여한다.
71:8.14 (807.10) 12. 지혜의 추구가 세계에 널리 유행하는 것―철학이 높아지는 것. 세계 종교의 진화, 이것은 행성이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는 초기 국면에 들어감을 예시한다.
71:8.15 (807.11) 이것들이 진보하는 정부의 필요 조건이요, 이상적 국가의 표시이다. 유란시아는 이 높은 이상을 이룩하기에 아득히 멀었지만, 문명화된 민족들은 첫 걸음을 내디디었다―인류는 더 높이 진화하는 운명을 향하여 행진하고 있다.
72:0.1 (808.1) 라나포지의 허가를 받고, 에덴시아 최고자들의 승인을 받아서, 사타니아 체계에 속하고 그리 멀지 않은 어느 행성에서 사는 인류, 가장 진보된 인류의 사회, 도덕 및 정치 생활에 관하여 나는 얼마큼 이야기할 허가를 받았다.
72:0.2 (808.2) 루시퍼 반란에 참여했기 때문에 고립된 사타니아의 모든 세계 중에서, 이 행성은 유란시아와 매우 비슷한 역사를 거쳤다. 두 구체의 비슷한 점은 의심할 여지 없이, 어째서 이 특별 발표가 인가되었는가 설명한다. 왜냐하면 체계 통치자들이 한 행성에서, 다른 행성의 일을 이야기하는 데 찬성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72:0.3 (808.3) 유란시아처럼 이 행성은, 루시퍼 반란과 관련하여, 그 행성 영주가 불충함으로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 심판 아들이 그 필사 민족들에게 한 번도 수여된 적이 없기 때문에, 아담이 유란시아에 온 뒤에 곧, 그 행성은 한 물질 아들을 받았고, 이 아들도 직무를 이행하지 못하여 그 구체가 고립되게 만들었다.
72:1.1 (808.4) 행성에 이 모든 장애가 있었는데도, 아주 우수한 문명이 대체로 오스트랄리아 크기의 고립된 대륙에서 발전되고 있다. 이 나라의 인구는 약 1억4천만이다. 거기에 사는 민족은 혼합된 종족이고, 주로 청인과 황인이며, 유란시아의 이른바 백인종보다 조금 더 보라의 비율이 높다. 이 다른 종족들은 아직 서로 충분히 섞이지 않았지만, 아주 흡족하게 사귀고 친교한다. 이 대륙에서 평균 수명은 이제 90년이며, 그 행성에서 사는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15퍼센트가 길다.
72:1.2 (808.5) 이 나라의 산업 기구는 그 대륙의 독특한 지형(地形)으로부터 생기는 어떤 큰 이점을 누린다. 1년에 8개월 동안 비가 많이 내리는 높은 산들은 그 나라의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이 자연스러운 배치는 수력(水力)의 이용을 유리하게 만들고, 그 대륙의 건조한 서쪽 4분의 1에 물 대는 것을 크게 수월하게 만든다.
72:1.3 (808.6) 이 사람들은 자급 자족한다. 다시 말해서 둘러싼 나라들로부터 아무것도 수입하지 않고서 언제까지나 살 수 있다. 지하 자원은 충분하며, 과학 기술로 그들은 생활 필수품의 부족을 어떻게 메우는가 배웠다. 국내 상업은 활발하지만, 자기보다 덜 진보된 이웃들이 두루 적개심을 가졌기 때문에 거의 외국과 무역을 하지 않는다.
72:1.4 (808.7) 이 대륙 국가는, 대체로 그 행성의 진화 추세를 따랐다. 부족 단계로부터 강력한 통치자와 왕들이 등장하기까지 발전하는 데 몇천 년이 걸렸다. 여러 다른 체제의 정부가 절대 권한을 가진 군주들을 이어받았다―유산된 공화국과 공동체 국가, 그리고 독재자들이 끝없이 많이 오고갔다. 이 성장은 약 5백 년 전까지 계속되었는데, 그때 정치적으로 시끄러운 기간에, 그 나라의 강력한 세 권력자인 집정관들 가운데 하나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다른 통치자들 중에 하나, 곧 나머지 둘 가운데 더 낮은 자도 권력의 자리를 비운다는 조건으로 그가 양위할 것을 자청했다. 이처럼 그 대륙의 통치권이 한 통치자의 손에 쥐어졌다. 그 통합된 국가는 1백 년이 넘도록 강력한 군주 정치 밑에서 진보했고, 그동안에 훌륭한 자유 헌장이 진화하였다.
72:1.5 (809.1) 그 뒤에 군주제로부터 대의정치 형태로 넘어 가는 것은 차츰 일어났고, 임금은 겨우 사회적이나 감상적인, 이름 뿐인 우두머리로 남았으며, 남자 후손의 씨가 말랐을 때 마침내 사라져 버렸다. 현재 있는 공화국은 꼭 2백 년 동안 존재해 왔는데, 그동안에 다음에 이야기하려는 정치 기법을 향하여 줄곧 진보가 있었다. 그리고 산업과 정치 분야에서 최근의 발전이 지난 10년 동안에 일어났다.
72:2.1 (809.2) 이 대륙 국가는 이제 대의(代議) 제도의 정부가 있고, 나라의 서울은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중앙 정부는 비교적 자유로운 1백 주(州)로 된 강력한 연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여러 주는 주지사와 입법가를 뽑고 임기는 10년이며, 아무도 재선될 자격이 없다. 주의 판사들은 주지사로부터 종신으로 임명받고 입법부의 확인을 받으며, 이 입법부는 시민 10만 명에 한 명씩 뽑은 대표들로 구성된다.
72:2.2 (809.3) 도시의 크기에 따라 도시 정부에는 다섯 가지 다른 종류가 있지만, 어느 도시도 1백만이 넘게 거주자를 가지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전체로 보아서, 이 도시를 다스리는 계획은 아주 간단하고, 직접이고 경제적이다. 가장 높은 부류의 시민들이 도시 행정의 몇 가지 공직을 치열하게 추구한다.
72:2.3 (809.4) 연방 정부는 동등한 세 분과, 곧 행정부ㆍ입법부ㆍ사법부를 포함한다. 연방의 최고 집행자는 지역의 보통 선거로 6년마다 뽑는다. 적어도 주 입법가 75명이 탄원하고 그 주의 주지사(州知事)들이 찬성할 경우를 제외하고, 그는 다시 뽑힐 자격이 없으며, 그것도 오직 한 임기 뿐이다. 그는 살아 있는 모든 전직(前職) 최고 집행자로 이루어진 초월 내각의 자문을 받는다.
72:2.5 (809.6) 1. 상원은 산업ㆍ전문직ㆍ농업, 그리고 기타 집단의 노동자들이 선출하며, 경제 활동에 따라서 투표한다.
72:2.6 (809.7) 2. 하원은 산업이나 전문직에 들어가지 않는 사회ㆍ정치ㆍ철학 집단을 포함하는 어떤 사회 조직들이 뽑는다. 정상 지위를 가진 모든 시민은 두 계급의 대표들을 선출하는 데 참여하지만, 그 선거가 상원 또는 하원에 관계되는가에 따라서, 그들은 다르게 분류된다.
72:2.7 (809.8) 3. 제삼원―연로 정치가들―은 국민에게 오래 봉사한 고참들을 포함하며, 최고 집행자와 (연방 밑의) 지역 집행자들, 최고 재판소의 우두머리, 그리고 입법을 맡는 다른 상하원의 한쪽을 주관하는 관리들이 지명하는, 많은 탁월한 사람을 포함한다. 이 집단은 많아야 1백 명으로 제한되어 있고, 그 회원들은 연로 정치가들 자체에서 대다수의 결정에 따라서 뽑힌다. 회원 자격은 종신(終身)이며, 빈 자리가 생길 때, 지명받은 자들의 명단에서 가장 많은 투표를 받는 사람이 이렇게 공식으로 선출된다. 이 단체의 범위는 순전히 자문이지만, 여론을 힘차게 규제하며, 정부의 온갖 지부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72:2.8 (810.1) 연방의 행정 작업의 상당 부분을 (연방 밑에 있는) 10개 지역 당국이 수행하며, 이것은 각기 10개 주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역 부서들은 온전히 집행 및 관리를 맡으며, 입법이나 사법 기능이 없다. 10명의 지역 집행자는 연방의 최고 집행자가 친히 임명한 자이며, 그 임기는 그의 임기와 같다―6년이다. 연방 최고 재판소는 이 지역 행정자 10명의 임명을 승인하며, 이들은 다시 임명되지 않지만, 은퇴하는 집행자는 자동으로 그 후계자의 동료이자 조언자가 된다. 그밖에 이 지역 우두머리들은 행정 관리들로 이루어진 자기의 내각을 고른다.
72:2.9 (810.2) 이 나라는 두 가지 주요 법정 체계―법 재판소와 사회 경제 재판소―의 판결을 받는다. 법 재판소는 다음 세 수준에서 활동한다:
72:2.10 (810.3) 1. 소(小)재판소는 시와 지역을 관할하며, 소재판소의 결정은 높은 주(州) 재판소에 상소될 수 있다.
72:2.11 (810.4) 2. 주 최고 재판소의 결정은 연방 정부, 또는 시민의 권한이나 자유의 위협에 관련되는 모든 문제에서 최종이다. 지역 집행자는 어느 사례(事例)도 대번에 연방 최고 재판소의 법관들에게 가져갈 권한을 받는다.
72:2.12 (810.5) 3. 연방 최고 재판소―국가의 주장, 그리고 주 재판소로부터 올라오는 상소 사례를 판결하기 위한 고등 재판소. 이 최고 법정은 40세가 넘고 75세 미만의 남자 12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들은 어느 주 재판소에서 2년 이상 봉사하고, 초월 내각과 입법 집회의 제삼원에서 대다수의 승인을 받아, 최고 집행자로부터 이 높은 자리에 임명되었다. 이 최고 사법 기관은 적어도 3분의 2 투표로 결정을 내린다.
72:2.13 (810.6) 사회 경제 재판소는 다음 세 부문에서 활동한다:
72:2.14 (810.7) 1. 부모 재판소, 가정과 사회 체계의 입법 및 행정 부서와 관련되어 있다.
72:2.15 (810.8) 2. 교육 재판소―주 및 지역 학교 체계들과 연결되고, 교육 행정 기능을 가진 행정부 및 입법부와 관련된 사법 기관.
72:2.16 (810.9) 3. 산업 재판소―모든 경제적 오해를 매듭짓는 전권(全權)이 맡겨진 사법 재판소.
72:2.17 (810.10) 연방의 최고 법정은 국가 정부의 셋째 입법부, 곧 연로 정치가 회의에서 4분의 3의 투표를 받을 경우를 제외하고, 사회 경제적 사례에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그밖에 부모ㆍ교육ㆍ산업을 담당하는 고등 법정들의 결정은 모두 최종이다.
72:3.1 (811.1) 이 대륙에서 같은 지붕 밑에서 두 가족이 사는 것은 법에 어긋난다. 집단 거주가 불법이 되었으니까, 아파트 종류의 건물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자들은 아직도 클럽ㆍ호텔, 그리고 기타 집단 거처에서 산다. 허용되는 가장 작은 집터는 4645 평방 미터의 땅을 마련해야 한다. 집의 목적으로 쓰이는 모든 토지와 기타 재산은, 최소 집터 할당의 10배까지 세금(稅金)이 면제된다.
72:3.2 (811.2) 이 사람들의 가정 생활은 지난 1세기 동안 크게 개선되었다. 부모,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아동의 교양을 가르치는 부모 학교에 참석하는 것이 의무이다. 작은 시골 촌락에서 사는 농부들조차 이 일을 통신으로 마쳐야 하며, 열흘에―2주마다―한 번씩, 말로 하는 강의를 들으려고 근처의 중심으로 간다. 1주에 5일로 된 달력을 쓰기 때문이다.
72:3.3 (811.3) 각 가족에 있는 아이들의 평균 수는 다섯이며, 그들은 부모의 완전한 통제를 받든지, 아니면 부모 중 하나나 둘이 다 죽었을 때, 부모 법정이 지명한 보호자들의 완전한 통제를 받는다. 어떤 가족도 완전한 고아(孤兒)의 보호권을 받는 것을 큰 영예로 여기며, 고아는 최선의 부모 자격을 나타내는 자들의 가정에 맡겨진다.
72:3.4 (811.4) 이 사람들은 가정을 그들 문명의 기본 제도로 여긴다. 한 아이의 교육과 인격 훈련의 가장 값진 부분은 부모로부터, 그리고 집에서 얻기를 기대하며, 아버지는 아이의 교육에 거의 어머니만큼 주의를 기울인다.
72:3.5 (811.5) 모든 성교육은 집에서 부모나 법적 보호자들이 베푼다. 도덕 교육은 학교의 작업장에서 노는 시간에 선생들이 제공하지만, 종교 훈련은 그렇지 않다. 종교 훈련은 부모가 독점하는 특권이라고 생각되며, 종교를 가정 생활의 필수 부분으로 여긴다. 순전히 종교적 가르침은 오직 철학의 전당(殿堂)에서만 대중에게 베풀어지고, 유란시아의 교회와 같이 순전한 종교 조직은 이 민족 사이에서 발달하지 않았다. 그들의 철학을 따르면, 종교는 하나님을 알고 동료에게 봉사함을 통해서 동료 사랑을 드러내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행성에 있는 다른 나라들의 종교 상태의 전형(典刑)은 아니다. 종교가 이 사람들 사이에서 전적으로 가족의 문제이기 때문에, 순전히 종교적 집회에 바쳐진 공공 장소가 하나도 없다. 유란시아인들이 버릇으로 말하다시피, 정치적으로 교회와 국가는 온전히 분리되었지만, 종교와 철학은 이상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
72:3.6 (811.6) 20년 전까지, 영적 교육자들은 (유란시아의 목사들과 견줄 만하다) 아이들이 부모한테서 알맞게 교육 받았는가 확인하기 위해서 아이들을 정기적으로 검사하려고 각 가정을 찾아보며, 그들은 정부의 감독을 받고 있었다. 지금 이 영적 조언자와 검사자들은 새로 세운 영적 진보 재단의 지휘 밑에 있고, 이것은 자진해서 내는 기부금의 지원을 받는다. 아마도 이 제도는 파라다이스 심판 아들이 도착할 때까지 더 진화하지 않을지 모른다.
72:3.7 (811.7) 아이들은 15살까지 법적으로 부모 밑에 남아 있으며, 그때 시민의 책임을 받도록 처음 입회식이 거행된다. 그 뒤에, 5년마다 연달아 다섯 기간에, 그러한 또래의 집단을 위하여 비슷한 공식 행사가 거행되는데, 거기서 부모에 대한 그들의 의무가 줄어들며, 한편 국가에 대한 새로운 시민의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맡는다. 투표권은 20살에 주며, 부모의 승낙 없이 결혼할 권리는 25살까지 주지 않고, 아이들은 30살이 되면 집을 떠나야 한다.
72:3.8 (812.1) 결혼과 이혼 법률은 나라에 두루 한결같다. 20살―시민 선거권을 가질 나이―가 되기 전에 결혼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의사(意思)를 통지하고 나서 1년 뒤에, 그리고 신부와 신랑이 결혼 생활의 책임에 관하여 부모 학교에서 마땅히 교육받은 것을 보이는 증명서를 제출한 뒤에야 겨우 결혼할 허가가 내린다.
72:3.9 (812.2) 이혼 규칙은 얼마큼 느슨하지만, 부모 법정에서 발행하는 별거의 선포는 이혼 신청을 기록한 지 1년이 지날 때까지 받지 못한다. 그리고 이 행성에서 1년은 유란시아에서보다 훨씬 길다. 그들이 쉬운 이혼법을 가졌는데도, 현재 이혼율은 유란시아에서 문명화된 민족들의 이혼율의 10분의 1 밖에 안 된다.
72:4.1 (812.3) 이 나라의 교육 제도는 5살부터 18살까지 다니는, 대학 밑의 학교에서 의무이며 남녀 공학이다. 이 학교들은 유란시아의 학교들과 엄청나게 다르다. 교실이 하나도 없고, 한 때에 오직 한 가지 공부만 추구하는데, 처음 3년 뒤에는 모든 생도가 조교(助敎)가 되고, 그들 밑에 있는 자들을 가르친다. 책은 오로지, 학교의 작업장에서, 그리고 학교 농장에서 생기는 문제들을 푸는 데 도움이 될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서만 쓰인다. 대륙에서 쓰이는 많은 가구(家具)와 기계 장치는―이때가 큰 발명과 기계화의 시대이니까―이 작업장에서 생산된다. 각 작업장 옆에는 기초 도서관이 있고, 거기서 학생들은 필요한 참고 서적을 뒤질 수도 있다. 농업과 원예도 또한 각 지역 학교에 인접한 큰 농장에서, 교육 기간 전체를 통해서 내내 가르친다.
72:4.2 (812.4) 저능한 아이들은 오직 농업과 축산 분야에서 훈련을 받고, 특별히 관리하는 식민지에 일생 동안 맡겨진다. 거기서 이들은 부모가 되지 못하도록 성별로 분리되며, 부모 노릇은 정상 이하의 모든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이 제한된 조치는 75년 동안 운영되었다. 여기에 맡기는 선포는 부모 법정에서 내려온다.
72:4.3 (812.5) 모두가 한 해에 한 달 동안 휴가를 가진다. 대학 밑의 학교들은 열 달로 된 1년에 아홉 달 동안 운영되며, 휴가는 부모와 함께, 또는 친구들과 여행하면서 보낸다. 이 여행은 성인 교육 프로그람의 일부이고, 일생에 걸쳐서 이어진다. 그러한 비용에 쓸 자금은 노령 보험에서 쓰이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축적된다.
72:4.4 (812.6) 학교 시간의 4분의 1은 놀이―경쟁하는 운동―에 바치고, 이 경쟁에서 생도들은 지역 시합부터, 주(州)와 지방의 시합을 거쳐서, 솜씨와 씩씩함을 겨루는 전국 시합까지 올라간다. 마찬가지로, 과학과 철학의 경쟁 뿐 아니라 웅변과 음악의 경쟁은, 낮은 사회 부문에서 전국의 영예를 얻는 경쟁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의 관심을 차지한다.
72:4.5 (812.7) 학교의 정부는 서로 관련된 세 지부(支部)를 가진 국가 정부의 복사판이며, 교직원은 셋째 부서, 곧 자문하는 입법 부서로서 활동한다. 이 대륙에서 교육의 주요한 목적은 모든 생도를 자립하는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다.
72:4.6 (813.1) 18살에 대학 밑의 학교 체제에서 졸업하는 아이들은 모두 솜씨 있는 기능공이다. 다음에 책을 연구하고 특별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성인 학교나 대학에서 시작된다. 머리 좋은 학생이 계획보다 앞서 제 일을 마치면, 그에게 시간과 수단으로 상을 주며, 그것으로 그는 자신이 고안한 어떤 조그만 사업을 추진해도 좋다. 교육 체계 전체가 개인을 알맞게 훈련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72:5.1 (813.2) 이 민족 사이에서 산업의 상황은 그들의 이상과 거리가 멀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아직도 문제를 안고 있지만, 양자가 성실하게 협동하는 계획에 적응이 되고 있다. 이 독특한 대륙에서 노동자는 갈수록 모든 산업 분야의 기업에서 주주(株主)가 되고 있다. 모든 영리한 노동자가 천천히 작은 자본가가 되고 있다.
72:5.2 (813.3) 사회의 대립은 줄어들고 있고, 선의(善意)가 빨리 퍼지고 있다. 노예 제도가 폐지된 이후로 (1백 년이 넘는다) 아무런 심각한 경제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것은 1년에 2퍼센트씩 해방시킴으로 이러한 조정이 차츰차츰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정신ㆍ 도덕ㆍ 신체의 시험을 만족스럽게 거친 노예들은 시민권을 받았고, 이 우수한 노예들의 다수는 전쟁에서 잡힌 포로이든지, 아니면 그런 포로의 아들딸이었다. 그들은 50년쯤 전에 마지막 열등한 노예들을 출국시켰고, 퇴화되고 나쁜 계급의 인구를 줄이는 과제에 최근에 착수하고 있다.
72:5.3 (813.4) 이 사람들은 산업에서 생기는 오해를 조절하고 경제적 남용을 시정하는 새로운 기술을 요즈음에 개발했는데, 이것은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예전의 방법보다 뚜렷하게 개선되었다. 개인이나 산업의 의견 차이를 조정하는 데 쓰이는 과정으로 폭력은 금지되었다. 임금(賃金)과 이익과 기타 경제 문제는 엄격하게 규제되지 않지만,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산업 법규에 통제를 받으며, 한편 산업 재판소가 산업에서 생겨나는 모든 논쟁에 판결을 내린다.
72:5.4 (813.5) 산업 재판소들은 겨우 30년이 되었지만, 대단히 만족스럽게 활동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생긴 발전은, 이제부터 산업 재판소들이 다음 세 부문에 속하는 법적 보상을 인정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72:5.5 (813.6) 1. 투자된 자본에 대한 법정(法定) 이자율.
72:5.8 (813.9) 이 조건들은 계약에 따라서 먼저 만족되어야 하든지, 아니면 소득이 줄어들 경우에 그들은 일시적 감소를 비례해서 분담해야 한다. 이 고정된 비용을 초과하는 모든 이익은 그 다음부터 배당금으로 간주되고, 자본ㆍ기술ㆍ노동, 이 세 부문 모두에게 비례해서 분배되어야 한다.
72:5.9 (813.10) 10년마다 지역 집행자는 소득을 얻는 1일 법정 노동 시간을 조정하고 선포한다. 산업은 이제 5일로 된 1주에 근거를 두고 운영하며, 나흘 일하고 하루를 논다. 이 사람들은 일하는 날에 6시간 일하며, 학생들처럼, 열 달로 된 1년에 아홉 달 일한다. 휴가를 여행에 보통 쓰며, 새로운 수송 방법이 아주 최근에 개발되었기 때문에, 나라 전체가 여행에 흠뻑 빠져 있다. 기후는 1년에 약 8개월 동안 여행을 허락하며, 그들은 기회를 최대한으로 이용한다.
72:5.10 (813.11) 2백 년 전에는 이익 동기가 산업을 온통 지배했지만, 오늘날 다른 더 높은 추진력이 이익 동기를 급속히 대체하고 있다. 이 대륙에서 경쟁은 심하지만, 상당한 부분이 산업으로부터 운동, 기술, 과학적 성취, 지적 달성으로 옮겨졌다. 경쟁은 사회에 봉사하고 정부에 충성하는 데서 가장 활발하다. 이 사람들 사이에서 공직에 봉사하는 것은 급속히 주요한 포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그의 기계 작업장 사무실에서 하루에 여섯 시간 일하고, 다음에 정치 학교의 지역 지부로 서둘러 가서, 거기서 공직(公職)을 얻을 자격을 갖추려고 애쓴다.
72:5.11 (814.1) 노동은 이 대륙에서 더 명예로운 직업이 되고 있으며, 18살이 넘고 몸이 정상인 모든 국민은 집과 농장에서, 어떤 인정받는 산업에서, 일시 일자리 잃은 자를 흡수하는 공공 사업에서, 또는 광산에서 강제 노동자 단체에서 일한다.
72:5.12 (814.2) 이 사람들은 또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혐오감―게으름과 벌어들이지 않은 재산에 대한 혐오감―을 비로소 기르고 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그들은 기계를 정복하고 있다. 그들도 한때는 정치적 자유를 위하여, 나중에는 경제적 자유를 위하여 투쟁했다. 이제 그들은 이 두 가지를 즐기는 단계에 들어가고 있고, 한편 그 위에 열심히 번 여가를 비로소 고맙게 여기고 있으며, 이 여가는 더욱 자아를 실현하는 데 바칠 수 있다.
72:6.1 (814.3) 이 나라는 자존심을 상하는 종류의 자선을, 노년기의 안전을 품위 있게 보장하는 정부 보험으로 바꿔치우려고, 굳은 결의로 노력하고 있다. 이 나라는 아이들을 모두 교육시키고 모든 사람에게 직업을 마련해 준다. 따라서 허약하고 나이 든 사람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런 보험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72:6.2 (814.4) 이 민족 사이에서 모든 사람은, 주(州)의 노동 위원장으로부터 70세까지 남아서 일하도록 자격을 부여하는 허가를 받지 않는 한, 65세에 소득을 얻는 직업으로부터 은퇴해야 한다. 이 나이 제한은 공무원이나 철학자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신체적으로 일할 수 없게 된 자나 영구하게 불구(不具)가 된 사람은, 지역 정부의 연금 위원장이 확인한 법정의 명령에 따라서, 나이에 상관 없이 은퇴자 명단에 올라갈 수 있다.
72:6.3 (814.5) 노년기 연금을 위한 기금은 네 가지 근원으로부터 생긴다:
72:6.4 (814.6) 1. 한 달에 하루의 소득은 연방 정부가 이 목적으로 강제로 떼어 가며, 이 나라에서는 모두가 일한다.
72:6.5 (814.7) 2. 유산(遺産)―부유한 많은 시민이 이 목적으로 기금을 남긴다.
72:6.6 (814.8) 3. 주(州)의 광산에서 강제 노동으로부터 얻은 소득. 징집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지원하고 은퇴 분담금을 떼어놓은 뒤에, 그들의 노동으로부터 생기는 잉여 이익은 모두 이 연금(年金) 기금에 넘겨진다.
72:6.7 (814.9) 4. 지하 자원에서 생기는 소득. 대륙에서 모든 천연 재산은 사회가 위탁한 재산으로서 연방 정부가 가지고 있고, 그로부터 생긴 소득은 질병의 예방, 천재 교육, 그리고 정치 학교에서 특별히 장래가 보이는 개인들의 비용과 같은 사회적 목적을 위하여 이용된다. 지하 자원으로부터 생기는 소득의 반은 노년 연금 기금으로 들어간다.
72:6.8 (814.10) 주 및 지역의 보험 통계 재단이 여러 가지 보호하는 보험을 공급하지만, 노년 연금은 10개 지역 분과를 통해서 연방 정부가 홀로 관리한다.
72:6.9 (814.11) 이러한 정부 기금은 오랫동안 정직하게 관리되어 왔다. 반역과 살인 다음에, 재판소에서 내리는 가장 무거운 벌은 대중의 신임을 저버리는 데 내려진다. 사회 및 정치적 불충은 이제 모든 범죄 중에서 가장 흉악한 것으로 여긴다.
72:7.1 (815.1) 연방 정부는 노년 연금의 관리, 그리고 천재와 독창성을 육성하는 데만 간섭한다. 주 정부는 조금 더 개별 시민에 관심을 가지며, 한편 지역 정부는 훨씬 더 간섭하거나 사회주의적이다. 도시는 (또는 도시의 어떤 하위 부서들은) 건강, 위생, 건물 규제, 미화(美化), 물 공급, 그리고 조명ㆍ난방ㆍ오락ㆍ음악ㆍ통신과 같은 문제에 관여한다.
72:7.2 (815.2) 어떤 산업에서도 먼저 건강에 주의를 기울인다. 어떤 단계의 육체적 복지는 산업과 공동체의 특권으로 간주되지만, 개인과 가족의 건강 문제는 개인의 관심거리일 뿐이다. 의술에서는, 순전히 개인적인 모든 다른 문제의 경우처럼, 간섭을 삼가는 것이 더욱 정부의 계획이 되는 경향이 있다.
72:7.3 (815.3) 도시는 전혀 세금을 부과하는 권한이 없고, 빚을 질 수도 없다. 도시는 주 재무부로부터 머리 수에 따라 수당을 받고, 그러한 수입(收入)을 그들의 사회주의적 기업에서 생긴 소득으로, 그리고 여러 상업 활동에 면허를 줌으로 보충해야 한다.
72:7.4 (815.4) 급히 이동하는 시설은 도시 테두리의 확장을 대단히 실용성 있게 만들며, 이것은 도시의 통제를 받는다. 도시의 소방(消防) 부서는 화재 방지 및 보험 재단들의 지원을 받고, 도시나 시골에 있는 모든 건물은 불연성(不燃性)이다―75년이 넘도록 이렇게 되었다.
72:7.5 (815.5) 시에서 임명하는 치안 담당 관리는 하나도 없다. 주 정부가 경찰력을 관리한다. 이 부서는 25세부터 50세 사이에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거의 전부 충원된다. 대부분의 주(州)는 아주 높은 독신 세금을 부과하고, 이것은 주 경찰에 가입하는 모든 남자에게 지급된다. 보통 주에서 경찰력은 이제 50년 전 경찰력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72:7.6 (815.6) 경제 및 기타 조건이 대륙의 다른 여러 구역에 따라 크게 다르니까, 비교적 자유롭고 주권을 가진 1백 주의 세금 계획은 거의 또는 전혀 한결같지 않다. 주마다 10개의 기본 헌법 조항이 있고, 이것들은 연방 최고 재판소의 찬성이 없이 고칠 수 없다. 그리고 이 조항들 중의 하나는 어느 한 해에 어떤 재산이라도 그 가치에 대해서 1퍼센트가 넘는 세금을 부과하지 못하게 하고, 집터는 도시이든 시골이든, 여기서 면제된다.
72:7.7 (815.7) 연방 정부는 빚을 질 수 없으며, 전쟁 목적을 제외하고, 어떤 주라도 돈을 빌릴 수 있기 전에, 4분의 3의 주민 투표가 요구된다. 연방 정부가 빚을 질 수 없으니까,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 국가 방어 회의는 여러 주에게 사람과 물자 뿐 아니라 돈도 내라고, 필요한 대로 부과할 권한이 있다. 그러나 어떤 부채도 25년이 넘게 계속될 수 없다.
72:7.8 (815.8) 연방 정부를 지원하는 소득은 다음의 다섯 근원으로부터 생긴다:
72:7.9 (815.9) 1. 수입세. 모든 수입품은 이 대륙에서 생활 수준을 보호하려고 고안된 관세를 물어야 하는데, 생활 수준은 그 행성에서 다른 어느 나라보다 훨씬 높다. 산업 국회의 양원(兩院)이 경제 사무를 맡는 최고 집행자의 추천을 비준한 뒤에, 최고 산업 재판소가 이 관세들을 정하는데, 최고 집행자는 이 두 입법 기관이 합동으로 임명한 사람이다. 노동자가 산업을 담당하는 상원을 선출하고, 자본가가 하원을 선출한다.
72:7.10 (816.1) 2. 특허권 사용료. 연방 정부는 10개 지역 실험실에서 발명과 새로운 창작품을 권장하며, 온갖 종류의 천재―예술가ㆍ작가ㆍ과학자―들을 원조하고, 그들의 특허를 보호한다. 그 대신에 정부는 기계, 책, 예술 작품, 식물 또는 동물에 관계되든지 상관 없이, 모든 그러한 발명과 창작품으로부터 생긴 이익의 절반을 가진다.
72:7.11 (816.2) 3. 상속세. 연방 정부는 재산의 크기와 기타 조건에 따라서, 1퍼센트에서 50퍼센트까지 누진되는 상속세를 부과한다.
72:7.12 (816.3) 4. 군사 장비. 육군 및 해군 장비를 상업 및 오락 용도로 빌려 줌으로 상당한 금액을 번다.
72:7.13 (816.4) 5. 자연 자원. 자연 자원으로부터 생기는 소득은, 연방의 주 헌장에 지정된 특별한 목적으로 전부 요구되지 않을 때, 나머지는 국가의 금고로 넘겨진다.
72:7.14 (816.5) 국가 방어 회의가 평가한 전쟁 기금을 제외하고, 연방 정부의 예산은 입법을 담당하는 상원에서 시작되고, 하원의 동의를 얻고, 최고 집행자의 승인을 받고, 마지막에 1백 명으로 이루어진 연방 예산 위원회가 이를 유효하게 만든다. 이 위원회의 회원들은 주지사의 지명을 받고, 24년 동안 근무하도록 주 의회가 선출하며, 4분의 1을 6년마다 선출한다. 6년마다 이 기관은, 4분의 3 투표로 그 중에서 한 사람을 우두머리로 선택하고, 이렇게 그는 연방 재무부의 지도자이자 통제자가 된다.
72:8.1 (816.6) 5살부터 18살까지 이어지는 기본 의무 교육 프로그람에 보태서, 특별 학교들이 다음과 같이 유지된다:
72:8.2 (816.7) 1. 정치 학교. 이 학교들은 국가ㆍ지역ㆍ주(州), 이 세 등급으로 되어 있다. 국가의 공직은 4 부문으로 분류된다. 공직의 첫째 부문은 주로 국가 행정에 관계되는데, 이 집단의 관리들은 모두, 지역의 정치 학교와 국가 정치(政治) 학교를 졸업한 자라야 된다. 개인들은 10개의 정치 학교 중 어디든 졸업하고 나서, 둘째 부문에서, 정치적 직책이나, 선거를 통한 직책이나 임명된 직책을 받아들여도 좋다. 그들이 맡는 임무는 지역 행정과 주 정부에 있는 직책에 관계된다. 제3 부문은 주 정부의 직책이며, 그러한 관리들은 오직 주의 정치 학위를 소지하는 것이 요구된다. 넷째이자 마지막 부문의 관리들은 정치 학위를 소지하는 것이 요구되지 않고, 그러한 직책은 모두 지명된다. 이런 직책은 작은 조수 자리, 비서직, 기술 직책이며, 정부의 행정 자격에서 활동하는 학식 있는 여러 직종이 그 일을 수행한다.
72:8.3 (816.8) 소재판소와 주 재판소의 판사들은 주(州)의 정치 학교에서 받은 학위를 지니고 있다. 사회ㆍ교육ㆍ산업의 문제를 다루는 사법 재판소의 판사들은 지역 학교의 학위를 소지한다. 연방 최고 재판소의 판사들은 이 모든 정치 학교로부터 받은 학위를 가져야 한다.
72:8.4 (817.1) 2. 철학 학교. 이 학교들은 철학의 전당(殿堂)과 연결되어 있고, 공공 기능으로서 얼마큼 종교와 관련된다.
72:8.5 (817.2) 3. 과학 기관. 이 기술 학교들은 교육 체계보다 오히려 산업과 조정되며, 15 부문 밑에서 관리된다.
72:8.6 (817.3) 4. 전문직 훈련 학교. 이 특별 기관들은 12 가지의 다양한 학문 직종을 위하여 기술 훈련을 마련해 준다.
72:8.7 (817.4) 5. 육군 학교와 해군 학교. 국가 본부 가까이, 그리고 해안에 있는 25개의 군사 중심에는, 18세부터 30세까지 자원하는 시민의 군사 훈련에 전념하는 기관들이 유지된다. 25세가 되기 전에 이 학교들에 입학하려면 부모의 승인이 요구된다.
72:9.1 (817.5) 모든 공직 후보자는 주ㆍ지역, 또는 연방의 정치 학교 졸업생들에게 제한되어 있어도, 이 나라의 진취적 지도자들은 보통 투표 계획에서 심각한 약점을 발견했으며, 약 50년 전에 수정된 투표 계획을 위한 헌법 조치를 마련했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72:9.2 (817.6) 1. 20세 이상의 모든 남자와 여자는 한 표를 가진다. 이 나이가 되고 나서, 모든 시민은 두 투표 집단에서 회원 자격을 받아들여야 한다. 경제 활동―산업ㆍ전문직ㆍ농업 또는 무역 활동―에 따라서, 그들은 첫째 집단에 참가하게 된다. 정치ㆍ철학ㆍ사회적 경향에 따라서 둘째 집단에 들어가게 된다. 이처럼 모든 노동자는 선거권을 가진 어떤 경제 집단에 속하며, 이 조합들은 비경제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로 권력이 분산된 국가 정부와 아주 비슷하게 통제된다. 이 집단에 등록한 것은 12년 동안 바꿀 수 없다.
72:9.3 (817.7) 2. 주지사 혹은 지역 집행자의 지명을 받고 나서, 지역 최고 회의의 명령에 따라서, 사회에 크게 봉사했거나 또는 정부에 근무하면서 비상한 지혜를 보인 개인들은 5년 이상의 기간마다 그들에게 수여된 추가 투표권을 받아도 좋으며, 그 초월 투표권은 9을 넘지 못한다. 어느 복수 투표권을 가진 자도 그 최대 투표는 10이다. 과학자ㆍ발명가ㆍ선생ㆍ철학자, 영적 지도자는 또한 늘어난 정치 권력을 받음으로 이렇게 인정받고 영예를 얻는다. 특별 학부가 학위를 주는 것과 아주 비슷하게, 주와 지역의 최고 회의가 이 높아진 시민 특권을 수여하는데, 수령자는 다른 학위와 함께, 몸소 이룩한 업적의 목록에 시민의 인정을 받는 그러한 상징을 보태는 것에 긍지를 느낀다.
72:9.4 (817.8) 3. 광산에서 강제 노동을 하라고 판결을 받은 모든 사람, 그리고 세금으로 지원을 받는 모든 정부 공무원은 그러한 근무 기간에, 투표권을 잃는다. 이것은 65세에 연금을 받고 은퇴하는 나이 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72:9.5 (817.9) 4. 5년마다 낸 연평균 세금을 반영하는 투표권에는 다섯 등급이 있다. 세금을 많이 낸 자는 5표까지 추가 투표권이 허락된다. 이 투표권의 수여는 모든 다른 인정과 상관 없지만, 어떤 경우에도 누구든지 10표가 넘게 던질 수 없다.
72:9.6 (818.1) 5. 이 선거권 계획이 채택되었을 때, 경제 체계, 곧 기능적 체계를 지지하고 지역 투표 방법을 포기하였다. 모든 시민은 이제 거처에 상관 없이, 산업ㆍ사회, 또는 전문직 집단의 회원으로서 투표한다. 그래서 유권자는 정부의 신뢰와 책임을 맡는 자리에 가장 자격 있는 회원들만 뽑는, 단결되고 뭉쳐진 총명한 집단으로 구성된다. 이 기능 투표권, 곧 집단 투표권 계획에 한 가지 예외가 있다: 6년마다 연방의 최고 집행자는 전국 투표로 선출되며, 어느 시민도 한 표밖에 던지지 못한다.
72:9.7 (818.2) 최고 집행자의 선거를 제외하고, 이처럼 투표권은 시민의 경제적ㆍ직업적ㆍ지적ㆍ사회적 분류에 따라서 행사된다. 이상적인 국가는 유기체이며, 자유롭고 지적인 모든 시민 집단은 그보다 큰 유기체인 정부 안에서 하나의 중대하고 작용하는 기관(器官)을 대표한다.
72:9.8 (818.3) 정치 학교들은 결함이 있거나, 게으르거나, 무관심하거나, 범죄성이 있는 어떤 개인한테서도 투표권을 빼앗을 의도를 가지고, 법적 절차를 주 재판소에서 시작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이 사람들은 한 나라의 50퍼센트가 열등하거나 결함이 있으면서 투표권을 가질 때, 그런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헤아린다. 그들은 평범이 지배하면 어떤 나라도 멸망한다는 것을 믿는다. 투표는 의무이며, 투표를 하지 않는 자에게 무거운 벌금이 부과된다.
72:10.1 (818.4) 이 종족이 범죄, 광기(狂氣), 퇴화를 다루는 방법은 어떤 면에서 유쾌하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다른 면에서는 대부분의 유란시아인에게 충격임이 드러날 것이다. 범죄자와 결함 있는 자를 보통 성별에 따라서, 다른 농업 식민지에 보내며, 그들은 자급하고도 남는다. 그보다 더 심각한 습관성 범죄자와 치료할 수 없이 미친 자는 죽이는 가스 방에서 죽도록 재판소에서 선고를 받는다. 살인은 별도로 하고, 정부의 신임을 저버리는 것을 포함해서, 수많은 범죄가 또한 사형(死刑)을 받으며, 판결의 시행은 분명하고 빠르다.
72:10.2 (818.5) 이 사람들은 법의 부정적 시대로부터 긍정적 시대로 지나가고 있다. 요즈음에 그들은 살인과 큰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구류 식민지에서 종신으로 근무하도록 선고하여 범죄 방지를 시도할 정도까지 이르렀다. 그러한 죄수들은 나중에 더 정상으로 되었다는 것을 보이면, 가석방(假釋放)되거나 사면을 받을 수도 있다. 이 대륙에서 살인율은 다른 나라들의 비율의 겨우 1퍼센트이다.
72:10.3 (818.6) 죄수와 결함 있는 자들의 번식을 막으려는 노력이 1백 년도 더 전에 시작되었고, 이미 흡족한 결과를 낳았다. 미친 사람을 위하여 아무런 감옥이나 병원이 없다. 한 가지 이유는, 이 집단이 유란시아에서 발견되는 것의 겨우 10퍼센트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72:11.1 (818.7) 국가 방어 회의의 총재는 연방 군사 학교의 졸업생들을 능력과 경험에 따라서, 일곱 계급으로, “문명의 수호자”로 임명할 수 있다. 이 회의는 25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높은 부모 재판소, 교육 재판소, 산업 재판소가 그들을 지명하고, 연방 최고 법정이 이를 확인해 주며, 이 회의에서 조정된 군사(軍事) 참모진의 우두머리가 직권상 의장을 맡는다. 그러한 회원들은 70세가 되기까지 근무한다.
72:11.2 (819.1) 그러한 임명받은 장교들이 추구하는 과정은 4년 걸리고, 변함없이 어떤 상업이나 전문직의 통달과 관계된다. 관계된 이 산업ㆍ과학, 또는 전문직의 교육을 받지 않고는 군사 훈련을 결코 주지 않는다. 군사 훈련이 끝났을 때, 개인은 4년 과정 동안에, 마찬가지로 과정이 4년 걸리는 어느 특별 학교에서 나누어 주는 교육의 절반을 받은 것이다. 이 방법으로 기술 또는 전문직 훈련의 처음 절반을 확보하는 동안에, 다수의 남자들에게 자신을 부양할 기회를 마련해 줌으로, 직업 군인 계급의 창설을 피한다.
72:11.3 (819.2) 평화 시절에 군대 복무는 순전히 자원이며, 어느 지부에서 근무하더라도 복무는 4년 동안이다. 그동안에 모든 남자는 군사 전술을 통달하는 것 외에 어느 특별한 직종의 연구를 추구한다. 음악 훈련을 받는 것은 중앙 군사 학교에서, 그리고 그 대륙의 변두리 근처에 흩어져 있는 25개 훈련소에서, 주요한 즐거움 중에 하나이다. 산업이 한산한 기간에 수천 명의 실업자가 육지와 바다와 공중에서 대륙의 군사 방어를 강화하는 데 자동으로 이용된다.
72:11.4 (819.3) 둘러싼 적대 민족들의 침공에 대한 방어로서 이 사람들이 강력한 전쟁 시설을 유지하지만, 1백 년이 넘도록 그들이 이 군사 자원을 공격하는 전쟁에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의 명예로 기록해도 좋다. 전쟁 능력을 공격에 이용하려는 유혹에 무릎 꿇지 않고서, 문명을 힘차게 지킬 수 있는 점까지 그들은 문명화되었다. 통일된 대륙 국가가 세워진 이후로 아무 내란이 없었지만, 이 사람들은 지난 2세기 동안 아홉 번이나 맹렬히 방어 전쟁을 수행하도록 요구되었으며, 그 가운데 셋은 강력한 세계 열강의 연방에 대항한 것이었다. 비록 이 나라가 적대하는 이웃들의 공격에 대해서 적절한 방어를 유지하지만, 그 나라는 정치가ㆍ과학자ㆍ철학자를 훈련하는 데 훨씬 더 많이 주의를 기울인다.
72:11.5 (819.4) 세계와 평화를 누리고 있을 때, 이동할 수 있는 모든 방어 장치는 아주 충분히 무역ㆍ상업ㆍ오락에 고용된다. 전쟁이 선포될 때는 나라 전체가 동원된다. 전쟁 기간을 통해서 내내, 모든 산업에서 군대 임금이 지불되며, 모든 군사 분과의 우두머리들은 최고 집행자의 내각에서 회원이 된다.
72:12.1 (819.5) 이 독특한 민족의 사회와 정부가 여러 면에서 유란시아의 국가들보다 우수하지만, 다른 여러 대륙에 있는 정부들은 (이 행성에 열 하나가 있는데) 유란시아의 진보된 나라들보다 뚜렷이 열등하다.
72:12.2 (819.6) 이제 바로 이 우수한 정부는 열등한 민족들과 대사(大使) 관계를 세우려고 계획하고 있으며, 둘러싼 이 나라들에 선교사를 보내자고 주장하는 큰 종교 지도자가 처음으로 나타났다. 우수한 문화와 종교를 다른 민족에게 강요하려고 노력했을 때, 허다한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을 그들이 바야흐로 저지르려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진보된 문화를 가진 이 대륙 국가가 그저 나가서 이웃 민족들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그들을 교육시킨 다음에, 뒤처진 형제들에게 문화의 밀사(密使)로 돌려보내기만 한다면, 이 세계에서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말할 것도 없이, 심판 아들이 진보된 이 나라에 곧 온다면, 큰 일이 이 세계에 빨리 일어날 수 있다.
72:12.3 (820.1) 유란시아에서 문명을 향상하고 정부의 진화를 보강하려는 뜻으로 특별 허가를 받고서, 이 이웃 행성의 일을 이야기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유란시아인의 관심을 끌고 흥미를 자아내게 할 훨씬 더 많은 것을 늘어놓을 수 있지만 이 발표는 우리가 허락받은 명령의 범위까지 다룬다.
72:12.4 (820.2) 그러나 유란시아인은 사타니아 체계에서 그 자매 구체가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심판관 임무나 수여 임무의 혜택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살펴야 한다. 유란시아의 여러 민족은, 이 대륙 국가를 그 행성의 다른 나라들과 구별하는 것 같은 그런 문화적 차이 때문에 서로 분리되지도 않았다.
72:12.5 (820.3) 진리의 영이 부어진 것은 주를 수여받은 세계에서 인류를 위하여 큰 업적을 이룩할 영적 기초를 마련해 준다. 따라서 유란시아는 법률, 기계 장치, 상징ㆍ관습ㆍ언어와 아울러, 행성의 정부를 더 빨리 실현하도록 준비가 훨씬 더 잘 되어 있다―이 모두가 법 아래에서 세계에 두루 평화를 이룩하는 데 아주 힘차게 이바지할 수 있고, 영적 노력을 기울이는 진짜 시대가 언젠가 밝아오도록 이끌 수 있다. 그러한 시대는 빛과 생명의 시대, 행성에서 유토피아 시대로 이끄는 문턱이다.
73:0.1 (821.1) 칼리가스티아가 패망하고 그에 따라 사회가 혼란해져서 생긴 문화적 퇴폐와 영적 빈곤은 유란시아 민족들의 육체적 상태, 곧 생물학적 상태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칼리가스티아와 달리가스티아의 불만에 뒤따라 그렇게 빨리 생긴 문화 및 도덕의 후퇴와 아주 상관 없이, 유기적 진화는 빠른 걸음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행성의 역사에서 거의 4만 년 전에, 순전히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유란시아 민족들의 발전이 절정에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을 근무하던 생명 운반자들이 주목한 때가 왔다. 멜기세덱 행성 관리자들은 이 의견에 찬성하면서,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에게 생명 운반자들과 함께 탄원을 드리자고 쉽게 찬성했고, 이 탄원은 생물학적 개량자, 곧 물질 아들과 딸의 파송을 허가할 목적으로 유란시아 검열을 요청하였다.
73:0.2 (821.2) 이 요청은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에게 올린 것이었고, 이는 칼리가스티아가 몰락하고 예루셈에서 권력이 일시 자리를 비운 뒤로 늘, 그들이 유란시아의 많은 사무에 대하여 직접 관할권을 전에 행사했기 때문이다.
73:0.3 (821.3) 십일(十一) 세계, 곧 실험 세계 시리즈를 감독하는 군주 타바만시아가 행성을 검열하려고 왔고, 종족의 진전을 살핀 뒤에, 그는 유란시아에 물질 아들들을 보내 줄 것을 정식으로 추천했다. 이 검열이 있은 지 1백 년이 채 안 되어, 아담과 이브, 곧 지역 체계의 물질 아들과 딸이 도착했고, 반란으로 뒤에 처지고 영적으로 고립시키는 금지령의 지배 하에 있는 한 행성에서, 혼란에 빠진 일의 실마리를 풀려고 애쓰는 어려운 과제를 시작했다.
73:1.1 (821.4) 정상(正常) 행성에서 물질 아들이 도착하는 것은 보통, 발명과 물질적 진보와 지적 깨우침이 있는 중대한 시대가 다가옴을 알릴 것이다. 대부분의 세계에서 아담 이후 시대는 대단한 과학 시대이지만, 유란시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육체적으로 건강한 종족들이 행성에 살았지만, 부족들은 야만스럽고 도덕적으로 침체된 늪에서 시들고 있었다.
73:1.2 (821.5) 반란이 있은 뒤 1만 년이 되자, 영주의 행정부가 쌓아 놓은 공적이 실질적으로 다 지워져 버렸다. 세상의 종족들은 잘못 인도받은 이 아들이 오지 않은 경우보다 형편이 조금도 낫지 않았다. 겨우 놋 족속과 아마돈 족속 사이에서, 달라마시아의 전통과 행성 영주의 문화가 지속되었다.
73:1.3 (821.6) 놋 족속은 영주의 참모진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분자들의 후손인데, 그 이름은 그들의 처음 지도자 놋에서 유래하며, 그는 한때 달라마시아의 산업 및 무역 위원회의 의장이었다. 아마돈 족속은 반과 아마돈과 함께 충성하기로 작정한 안돈 족속의 후손이었다. “아마돈 족속”은 종족을 가리키는 용어라기보다 문화 종교적 명칭이다. 종족 면에서 볼 때, 아마돈 족속은 본질적으로 안돈 족속이었다. “놋 족속”은 문화와 종족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놋 족속 자체가 유란시아의 여덟째 종족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73:1.4 (822.1) 놋 족속과 아마돈 족속 사이에는 전통적 적대 관계가 존재했다. 이 싸움은 이 두 집단의 자손이 어떤 공동 사업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항상 표면에 나타났다. 나중에도 에덴 동산의 사무에서, 그들이 평화롭게 함께 일하기는 대단히 힘들었다.
73:1.5 (822.2) 달라마시아가 멸망한 뒤에 얼마 안 되어, 놋의 추종자들은 세 주요 집단으로 갈라졌다. 중앙 집단은 페르시아 만 상류 가까이에 그들 최초의 집, 바로 근처에 남아 있었다. 동쪽 집단은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바로 동쪽에 엘람의 고지(高地) 지역으로 옮겨 갔다. 서쪽 집단은 지중해에 시리아의 동북 바닷가에서, 그리고 인접한 영토에서 자리를 잡았다.
73:1.6 (822.3) 이 놋 족속은 산긱 종족들과 자유롭게 짝을 짓고 유능한 후손을 남겼다. 그리고 모반한 달라마시아 사람들 후손 중에 더러는 나중에 메소포타미아 북쪽의 땅에서 반과 그의 충성스러운 추종자들과 합쳤다. 여기서, 반 호수와 카스피 바다 남쪽 지역 근처에서, 놋 족속은 아마돈 족속과 섞이고 사귀었으며, 그들은 “옛날의 강한 사람들” 축에 끼었다.
73:1.7 (822.4) 아담과 이브가 도착하기 전에 이 무리―놋 족속과 아마돈 족속―들은 땅에서 가장 진보하고 문화가 발달한 민족이었다.
73:2.1 (822.5) 타바만시아의 검열이 있기 전에 거의 1백 년 동안, 반과 그 동료들은, 고지에 있던 본부, 세계의 윤리ㆍ문화의 본부로부터, 약속된 하나님의 아들, 곧 종족 개량자,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 반역한 칼리가스티아의 뒤를 이을 자격 있는 후계자가 오리라 외치고 있었다. 그 시절에 세계 거주자의 대다수는 그러한 예언에 거의 또는 아무런 흥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반과 아마돈과 가까이 접촉을 가졌던 사람들은 그러한 가르침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약속된 아들을 실제로 영접하려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73:2.2 (822.6) 반은 가장 가까운 동료들에게 예루셈에 있는 물질 아들들의 이야기, 일찍이 유란시아에 오기 전에 그 아들들에 관하여 알고 있던 것을 일러주었다. 수수하지만 매력 있는 동산의 집에서 이 아담 아들들이 늘 살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았고, 아담과 이브가 도착하기 83년 전에, 그들이 오리라 선포하고 그들을 영접하기 위하여 동산 집을 준비하는 일에 헌신할 것을 제안했다.
73:2.3 (822.7) 그들의 고지 본부로부터, 또 멀리 흩어져 있는 61개 촌락으로부터, 반과 아마돈은 기꺼이 일하고 싶은 열심 있는 노동자 무리를 3천 명이 넘게 모집했고, 이들은 엄숙한 집회에서, 약속된―적어도 기대하던―아들을 위하여 준비하는 이 사명에 헌신하였다.
73:2.4 (822.8) 반은 자원자들을 1백 중대(中隊)로 나누었고, 각 중대에는 중대장 하나, 그리고 자신의 개인 참모진에서 연락 장교로 일했던 부관을 한 명 두고, 아마돈을 자신의 부관으로 두었다. 이 위원회들은 모두 진지하게 준비 작업을 시작했고, 동산을 마련하는 장소 위원회는 이상적인 자리를 찾아서 힘차게 떠나갔다.
73:2.5 (822.9) 칼리가스티아와 달리가스티아는 나쁜 일을 하는 힘을 많이 빼앗겼어도, 동산을 준비하는 일을 좌절시키고 방해하려고, 할 수 있는 대로 무엇이든지 했다. 그러나 그들의 악한 음모는 그 사업을 진척시키려고 지칠 줄 모르고 노동한, 거의 1만 명의 충성스러운 중도인(中道人)이 성실하게 활동함으로 대체로 상쇄되었다.
73:3.1 (823.1) 장소 위원회는 거의 3년 동안 자리를 비웠다. 이 위원회는 가능한 세 장소에 관하여 적당하다고 보고했다. 첫째는 페르시아 만(灣)에 있는 섬이었고, 둘째는 나중에 둘째 동산으로서 차지했던, 강가의 자리였고, 셋째는, 지중해의 동쪽 해안으로부터 서쪽으로 튀어나온 길고도 좁은 반도(半島)였다―거의 섬이었다.
73:3.2 (823.2) 그 위원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셋째 장소를 선호했다. 이 자리가 선택되었고, 이 지중해의 반도로, 생명나무를 포함하여 세계의 문화 본부를 옮기는 데 2년이 걸렸다. 반과 그 일행이 도착했을 때, 반도에서 거주하던 자들 중에서 한 집단만 빼고 모두가 싸우지 않고 자리를 비웠다.
73:3.3 (823.3) 이 지중해의 반도는 상쾌한 기후를 가졌고 기온이 따듯했다. 이 안정된 날씨는 둘러싼 여러 산 때문에, 그리고 이 지역이 내륙의 바다에서 실질적으로 섬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둘러싼 고지(高地)에서 비가 풍부하게 쏟아졌지만, 에덴 자체에는 비가 내리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밤마다 인공으로 관개하는 광범위한 수로(水路)의 망으로부터 “안개가 올라와서” 동산의 식물을 적셔 주었다.
73:3.4 (823.4) 이 땅 덩어리의 해안선은 상당히 높이 올라와 있었고, 본토와 연결하는 목은 가장 좁은 곳의 폭이 겨우 43킬로미터였다. 동산에 물을 대는 큰 강은 반도의 고지로부터 내려와서, 본토에 이르는 반도의 목을 거쳐서 동쪽으로, 그리고 거기서부터 메소포타미아의 낮은 땅을 거쳐서 그 너머에 바다로 흘러갔다. 그 강은 에덴 반도의 바닷가의 산에서 기원을 가진 네 개의 지류(支流)로부터 물을 받았는데, 이것들이 “에덴에서 나간” 강의 “네 수원(水源)”이며, 이것은 나중에 둘째 동산을 둘러싸는 강들의 지류와 혼동되었다.
73:3.5 (823.5) 동산을 둘러싸는 여러 산에는 귀중한 돌과 금속이 많았다. 하지만 이것들은 별로 주목을 받지 않았다. 지배적인 생각은 원예를 높이고 농업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73:3.6 (823.6) 동산으로 선택된 장소는 아마도 온 세상에서 그 종류로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였고, 기후는 당시에 이상적이었다. 다른 어디에도 그렇게 식물(植物)로 천국을 표현한 곳이 되도록 아주 완전히 적합한 장소가 없었다. 이 장소에서 유란시아 문명의 노른자가 모이고 있었다. 바깥에, 건너편에, 세상은 어두움과 무지와 야만 속에 놓여 있었다. 에덴은 유란시아에서 하나의 밝은 장소였고, 자연히 사랑받는 꿈 같은 곳이었으며, 곧 아름답고 완전해진 경치의 영화로움을 표현하는 시(詩)같은 곳이 되었다.
73:4.1 (823.7) 생물학적 개량자인 물질 아들들이 한 진화 세계에서 머무르기 시작할 때, 그들의 거처를 흔히 에덴 동산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별자리의 서울 에덴시아의 특징, 꽃이 아름답게 피고 식물이 화려한 특징을 가지기 때문이다. 반은 이 관습을 잘 알았고, 따라서 반도(半島) 전체를 동산에 넘겨주도록 주선했다. 인접한 본토를 위하여 목장과 동물 사육이 계획되었다. 동물 생명 가운데 새와 다채로운 길들인 종자들만 공원에서 보였다. 반의 지시는 에덴이 동산, 오로지 동산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구역 안에서는 결코 아무 동물도 죽이지 않았다. 건축하는 여러 해 동안 내내, 동산의 일꾼들이 먹는 고기는 다, 본토에서 지키고 유지하는 동물의 떼로부터 가져왔다.
73:4.2 (824.1) 첫 과제는 반도의 목 부분에, 가로질러서 벽돌 담을 세우는 일이었다. 이것이 일단 끝나자, 경치를 아름답게 만들고 집을 짓는 진짜 일을 방해받지 않고 진행할 수 있었다.
73:4.3 (824.2) 동물이 있는 동산은 큰 담 바로 바깥에, 그보다 작은 담을 쌓아서 만들었다. 그 사이의 공간은 온갖 종류의 들짐승이 차지했고,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 추가된 방어로 쓰였다. 이 동물원은 12 대부문으로 조직되었고, 담으로 둘러싸인 길은 이 여러 집단 사이로부터 동산의 12 대문(大門), 강, 그리고 중앙 지역을 차지하는, 강에 인접한 목초지로 인도했다.
73:4.4 (824.3) 동산을 준비하는 일에 오직 자원하는 노동자만 사용되었다. 임금(賃金)을 받는 노동자는 하나도 결코 쓰이지 않았다. 그들은 동산을 가꾸고, 자신을 부양하기 위하여 동물의 떼를 돌보았다. 가까이 있는 신자(信者)들로부터 식량의 기부도 받았다. 이 어수선한 시절에, 세상의 혼란 상태에 따르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는데도, 이 큰 사업은 마치기까지 계속되었다.
73:4.5 (824.4) 그러나 기대하던 아들과 딸이 얼마나 빨리 올지 모르고, 그들의 도착이 늦어질 경우에 젊은 세대도 또한 그 사업을 계속하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반이 넌지시 비쳤을 때, 이것은 큰 실망의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반의 편에서 믿음이 모자람을 인정하는 듯했으며, 어지간히 문제를 일으키고 많은 탈주자가 생기게 만들었다. 그러나 반은 준비하는 계획을 수행하였고, 그동안에 탈주자들의 자리를 더 젊은 자원자로 채웠다.
73:5.1 (824.5) 에덴 반도 한가운데, 돌로 만든 우주의 아버지의 아름다운 성전, 동산의 성소(聖所)가 있었다. 북쪽에는 행정 본부가 세워졌고, 남쪽에는 일꾼과 그 가족들을 위하여 집들이 건축되었다. 서쪽에는 제안된 대로 기대하는 아들의 교육 체계의 학교들을 위하여 땅이 할당되었고, 한편 “에덴의 동쪽”에는 약속된 아들과 그 직계 후손을 위하여 예정된 거처가 세워졌다. 에덴을 건축하는 계획은 인간 1백만 명을 위하여 집과 넓은 땅을 마련해 놓았다.
73:5.2 (824.6) 아담이 도착했을 때, 동산이 겨우 4분의 1이 끝났어도, 거기에는 몇천 킬로미터나 되는 관개하는 도랑과 19,000킬로미터가 넘는 포장된 보도(步道)와 도로가 있었다. 여러 구역에 5천동(棟)이 조금 넘는 벽돌 건물이 있었고, 나무와 식물은 거의 셀 수 없이 많았다. 공원(公園)에 있는 어느 주택 집단이라도 집의 수는 기껏해야 일곱이었다. 그리고 동산의 구조물은 수수했어도, 무척 예술적이었다. 도로와 작은 길은 잘 지어졌고, 주위 풍경은 아름답게 꾸며졌다.
73:5.3 (824.7) 동산의 위생 시설은 그때까지 유란시아에서 시도한 어떤 것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에덴의 마실 물은 정결함을 보존하려고 고안된 위생 규칙을 엄격하게 지킴으로 건강에 좋게 유지되었다. 이 옛 시절에 많은 문제가 이 규칙을 소홀히 하여 생겨났지만, 반은 동산의 수원(水源)에 아무것도 떨어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함을 동료들에게 차츰차츰 강조하였다.
73:5.4 (825.1) 하수도를 처리하는 체계가 나중에 세워지기 전에 에덴 사람들은 모든 쓰레기나 썩는 물질을 꼼꼼히 파묻는 관습을 지켰다. 아마돈의 검열자들은 날마다 질병의 있음직한 원인을 찾느라고 순찰했다. 유란시아인은 후일에 19세기와 20세기까지, 다시는 인간의 병을 방지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지 못했다. 아담의 체제가 무너지기 전에, 땅에 파묻은 벽돌 파이프로 하수(下水) 처리 체계가 건설되었고, 이것은 담 밑으로 이어져서, 동산의 바깥 담, 곧 작은 담을 거의 1.6킬로미터 지나서, 에덴의 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73:5.5 (825.2) 아담이 도착할 때가 되기까지, 세상에서 그 구역에 있는 식물의 대부분은 에덴에서 자라고 있었다. 많은 과실ㆍ곡식ㆍ견과가 이미 크게 개량되었다. 현대의 뭇 채소와 곡식이 여기서 처음 재배되었지만, 몇십 종류의 먹는 식물(植物)이 나중에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73:5.6 (825.3) 동산의 약 5퍼센트는 고도의 인조(人造) 재배 기술로 경작하였고, 15퍼센트는 일부 경작되었으며, 나머지는 아담이 도착할 때까지 얼마큼 자연 상태로 놓아두었는데, 그의 생각에 따라서 공원을 완성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73:5.7 (825.4) 그래서 에덴 동산은 약속된 아담과 그 배우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그리고 이 동산은 완전하게 관리되고 정상으로 통제받는 가운데 한 세계에 큰 영예가 되었을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의 일반 계획을 아주 기뻐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의 거처를 꾸미는 일에 많이 손을 보았다.
73:5.8 (825.5) 아담이 도착했을 때 치장 작업은 도저히 끝났다고 할 수 없어도, 그 곳은 이미 아름답게 식물로 장식되어 보석과 같았다. 아담이 에덴에서 머무르던 옛 시절에 동산 전체가 새로운 모습을 입었고, 새 규모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갖추었다. 이 시절 이전이나 이후에 결코 유란시아는 그렇게 원예와 농업을 아름답고 충만하게 펼쳐 보인 적이 없었다.
73:6.1 (825.6) 동산의 성전 가운데에 반은 오랫동안 지켜 오던 생명나무를 심었고, 그 이파리는 “민족들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 과일은 반이 그렇게 오랫동안 땅에서 버티게 해주었다. 일단 유란시아에서 물질 형태를 입고 나타난 뒤에, 아담과 이브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 에덴시아의 선물에 의존할 것을 반은 잘 알았다.
73:6.2 (825.7) 체계 서울에 있는 물질 아들들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생명나무가 필요하지 않다. 오직 행성에서 다시 인격화되었을 때, 그들은 육체가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첨가물에 의존한다.
73:6.3 (825.8)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비유적 표현, 잡다한 인간의 체험을 가리키는 상징적 이름일지 모르지만, “생명나무”는 신화(神話)가 아니었다. 생명나무는 실재하였고, 오랫동안 유란시아에 있었다.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이 칼리가스티아를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로, 또 예루셈 시민 1백 명을 그의 행정 참모진으로 임명하는 것을 인가했을 때, 멜기세덱들 편에 에덴시아의 한 떨기나무를 행성으로 보냈고, 이 식물은 유란시아에서 자라서 생명나무가 되었다. 이 형태의 지능 없는 생명은 별자리 본부 구체의 토산물이며, 하보나 구체들 뿐 아니라 지역 우주와 초우주의 본부 세계에서 또한 발견되지만, 체계의 서울에는 없다.
73:6.4 (826.1) 이 초월 식물은 동물 존재에서 나이를 먹게 하는 요소를 해독(害毒)하는 어떤 공간 에너지를 저장했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비화학 방법으로 에너지를 저장하는 전지(電池)와 같았고, 먹었을 때 우주에서 생명을 늘이는 힘을 신비하게 방출하였다. 이 형태의 자양분은 유란시아에 있는 보통의 진화 존재에게 온전히 쓸모 없었지만, 특별히 칼리가스티아 참모진의 물질화된 구성원 1백 명, 그리고 영주 참모진에게 생명질을 기여한 수정된 안돈 족속 1백 명에게 쓸모가 있었다. 이 안돈 족속도 그 대가로 그 생명 보충물을 소유하게 되었고, 이것은 달리 죽어야 할 존재를 무기한으로 더 살게 하기 위하여 생명나무의 과일을 이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73:6.5 (826.2) 영주가 다스리던 시절에 그 나무는 아버지의 성전에, 가운데 있는 둥그런 뜰에서, 땅에서 솟아나 자라고 있었다. 반란이 터지고 나서, 반과 그 동료들은 임시 캠프에서 그 나무를 가운데 핵심으로부터 다시 길렀다. 이 에덴시아 떨기나무를 나중에 그들의 고지 피난처로 가져갔고, 거기서 그 나무는 반과 아마돈에게 15만 년이 넘도록 쓰였다.
73:6.6 (826.3) 반과 그 동료들은 아담과 이브를 위해서 동산을 준비했을 때 에덴시아의 나무를 에덴 동산으로 옮겨 심었으며, 거기서 다시 한 번 그 나무는 아버지를 예배하는 또 다른 성전의 가운데에, 둥그런 뜰에서 자랐다.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이중 형태의 육체 생명을 유지하려고 그 열매를 정기적으로 먹었다.
73:6.7 (826.4) 물질 아들의 계획이 빗나갔을 때, 아담과 그의 가족은 그 나무의 핵심을 동산에서 가지고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놋 족속이 에덴을 쳐들어갔을 때, “그들이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신들과 같이” 되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주 놀랍게도 그들은 아무도 그 나무를 지키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몇년 동안 그 과일을 아낌없이 먹었지만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그들이 모두 그 땅의 물질 필사자였기 때문이다. 그 나무 열매의 보충물 노릇을 하는 성분이 그들에게 모자랐다. 그들은 생명나무로부터 혜택을 얻을 수 없어서 성이 났고, 그들의 한 내란과 연관되어, 성전과 나무는 모두 불에 타버렸다. 동산이 나중에 물에 잠길 때까지 오로지 돌담만 남아 있었다. 이것이 두 번째로 파괴된, 아버지의 성전이었다.
73:6.8 (826.5) 이제 유란시아에서 모든 육체는 살다가 죽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아담과 이브, 그 자녀와 손자들은 동료들과 함께, 시간이 지나자 모두 죽었다. 따라서 그들은 지역 우주의 승천 계획에 지배를 받았고, 그 계획에는 육체가 죽고 나서 저택 세계의 부활이 뒤따른다.
73:7.1 (826.6) 아담이 첫째 동산을 비우고 난 뒤에, 다양하게 놋 족속, 큣 족속, 순트 족속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나중에 동산은 아담 족속과 협조하는 것을 반대한 북쪽 놋 족속의 거처가 되었다. 아담이 동산을 떠난 뒤에, 그 반도(半島)에는 거의 4천 년 동안 이 낮은 등급의 놋 족속이 들끓었다. 이때 둘러싼 화산들의 맹렬한 활동과 시실리를 아프리카로 잇는 육지 다리가 가라앉는 것과 관련하여, 지중해의 동쪽 바닥이 무너졌고, 에덴 반도 전체를 바다 밑으로 끌고 갔다. 이 광범위한 침몰과 동시에 동부 지중해의 해안선이 크게 높아졌다. 이것이 유란시아가 일찍이 품에 간직했던 가장 아름다운, 자연의 창작품의 마지막이었다. 이 침몰은 갑작스럽지 않았고, 반도 전체가 완전히 가라앉기까지 몇백 년이 걸렸다.
73:7.2 (827.1) 우리는 동산이 이렇게 사라진 것을 어떤 면에서도 신성한 계획이 유산(流産)된 결과라거나 아담과 이브가 실수한 결과라고 여길 수 없다. 우리는 에덴이 가라앉은 것을 자연 현상이 아닌 어떤 다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세계 민족들을 회복하는 일에 착수하기 위하여 보라 인종의 비축 인구가 축적되었을 바로 그 무렵에 맞추어서, 에덴이 가라앉는 일이 생긴 듯이 보인다.
73:7.3 (827.2) 멜기세덱들은 아담에게, 그 자신의 가족이 50만이 될 때까지, 종족을 개량하고 혼합하는 순서를 개시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동산이 결코 아담 족속의 영구한 집이 되라고 의도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온 세상에 새 생명의 밀사(密使)가 되도록 정해져 있었다. 땅에서 곤궁한 종족들에게 사심 없이 수여되기 위해서 동원될 예정이었다.
73:7.4 (827.3) 멜기세덱들이 아담에게 준 지침은, 그의 직계 아들딸을 책임질 종족 본부, 대륙 본부, 분과 본부들을 세워야 하며, 한편 그와 이브는 생물학적 개량, 지적 진보, 도덕의 회복, 이러한 세계적 직책을 맡는 고문이자 조정자로서, 세상의 이 다양한 수도(首都)들 사이에서 시간을 나누어 써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74:0.1 (828.1) 아담과 이브는 서기 1934년부터 따져서 37,848년 전에 유란시아에 도착했다. 그들은 봄이 무르익어 동산에 꽃이 한창 피었을 때 도착했다. 정오에 발표도 없이, 두 천사 수송기가 유란시아로 생물학적 개량자들을 나르는 일을 맡은 예루셈 직원들을 동반하고, 우주의 아버지 성전 근처에서, 회전하는 행성의 표면에 천천히 내렸다. 아담과 이브의 몸을 다시 물질로 만드는 모든 작업은 새로 지은 이 성소의 구역 안에서 이루어졌다. 도착한 때부터, 그 세계의 새 통치자로서 등장하기 위해서 두 가지 인간 형태로 그들이 다시 지어지기까지 열흘이 지났다. 그들은 동시에 의식을 다시 찾았다. 물질 아들과 딸은 반드시 함께 봉사한다. 항상 어디서나 결코 떨어지지 않는 것이 그들이 베푸는 봉사의 본질이다. 그들은 쌍을 이루어 일하라고 고안되어 있고, 홀로 활동하는 일은 드물다.
74:1.1 (828.2) 행성 유란시아에 온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에서 선임 물질 아들 집단의 단원이었고, 함께 14,311번이었다. 그들은 셋째 육체 시리즈에 속했고, 키는 240센티미터가 조금 넘었다.
74:1.2 (828.3) 유란시아로 오려고 뽑혔을 때, 아담은 배우자와 함께 실험하고 시험하는, 예루셈의 물리 실험실에 고용되어 있었다. 1만 5천 년이 넘도록 그들은 살아 있는 형태의 수정(修正)에 적용되는 실험 에너지 부문에서 지도자였다. 이보다 훨씬 전에 그들은 예루셈에서 새로 도착한 자들을 위한 여러 시민 학교에서 선생이었다. 그들이 유란시아에서 나중에 한 행위의 이야기와 관련하여,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74:1.3 (828.4) 유란시아에서 아담으로서 모험하는 사명에 자원자를 모집한다는 선포가 발표되었을 때, 선임 집단의 물질 아들과 딸 전부가 자원하였다. 멜기세덱 검사자들은, 라나포지와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의 승인을 얻어, 나중에 유란시아의 생물학적 개량자로서 활동하게 된 아담과 이브를 마침내 선택했다.
74:1.4 (828.5) 아담과 이브는 루시퍼 반란이 있을 때 미가엘에게 끝까지 충성했다. 그런데도 그 쌍은 체계 군주와 그의 내각(內閣) 앞에서 검사와 지시를 받기 위하여 호출되었다. 유란시아에서 있었던 일의 자세한 내용을 담은 충분한 발표를 들었고, 그들은 싸움으로 분열된 그런 세계에서 다스리는 책임을 받아들이면서 어떤 계획을 추구할 것인가 샅샅이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은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에게, 그리고 구원자별의 미가엘에게 충성한다는 합동 서약을 마쳤다. 그리고 유란시아의 멜기세덱 관리자 집단이 그들이 배치받은 세계의 통치를 포기하는 것이 좋다고 여길 때까지, 자신들이 그 통치 단체의 지배 하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라고 그들은 마땅히 충고를 받았다.
74:1.5 (829.1) 이 예루셈 쌍은 사타니아의 서울과 다른 곳에 자손 1백 명―아들 50명과 딸 50명―을 남겨 두었는데, 이 아이들은 전진의 함정을 피한 훌륭한 사람들이었고, 부모가 유란시아를 향하여 떠날 때, 우주의 책임을 맡은 충성스러운 관리자로서 모두 임명되었다. 수여를 받아들이는 마지막 예식과 관련된 작별 실습이 있고 나서 그들 모두가 물질 아들들의 아름다운 성전에 참석하였다. 이 아이들은 그들 계급의 비물질화 본부까지 부모를 따라갔고, 부모가 천사의 수송을 위한 준비에 앞서 성격이 의식을 잃고서 잠들었을 때,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작별을 알리고 성공을 빈 자였다. 아이들은 부모가, 사타니아 체계의 606번 행성에서, 눈에 보이는 우두머리, 실제로는 유일한 통치자 쌍이 곧 되리라는 것을 기뻐하면서, 가족이 회합한 가운데 얼마큼 함께 시간을 보냈다.
74:1.6 (829.2) 이렇게 아담과 이브는 시민들이 환호하고 성공을 비는 가운데, 예루셈을 떠났다. 그들은 유란시아에서 부닥칠 모든 임무와 위험에 관하여, 적절히 준비를 갖추고 충분히 가르침을 받고서, 새로운 직책이 기다리는 곳으로 떠나갔다.
74:2.1 (829.3)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에서 잠에 빠졌다. 유란시아에서 그들을 환영하느라고 모인 막대한 군중이 모여 있는 앞에서 아버지의 성전에서 깨어났을 때, 그들은 익히 소문을 들어 왔던 두 존재, 반과 그의 충성스러운 동료 아마돈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칼리가스티아가 이탈할 당시에 있었던 이 두 영웅이, 새 동산 집에서 그들을 처음으로 반갑게 맞이한 자였다.
74:2.2 (829.4) 에덴의 말은 아마돈이 사용했던, 안돈 족속의 방언(方言)이었다. 반과 아마돈은 24 글자로 된 새 알파벳을 만들어서 이 언어를 두드러지게 개량했고, 그들은 에덴의 문화가 세상에 두루 퍼짐에 따라서 그 말이 유란시아의 언어가 되는 것을 보기를 바랐다. 아담과 이브가 예루셈을 떠나기 전에 이 인간의 방언을 충분히 통달했기 때문에, 이 안돈의 아들은 세상을 다스리는 높은 통치자가 그에게 자기 방언으로 말을 거는 것을 들었다.
74:2.3 (829.5) “새들을 놓아 주어라. 약속된 아들이 오셨다는 말씀을 새들이 전하게 할지어다”하고 외치면서, 멀리서 가까이서 모여든, 소식 나르는 비둘기의 회합 장소까지 주자(走者)들이 황급히 달려갔을 때, 그날 온 에덴이 크게 흥분하고 즐거워하였다. 신자들의 수백 촌락이 충실하게, 해마다, 바로 그런 경사를 위하여 집에서 기른 이 비둘기들을 계속 공급하였다.
74:2.4 (829.6) 아담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바깥에 퍼지자, 근처에 있는 부족 사람 수천 명이 반과 아마돈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한편 여러 달 동안 순례자들이 아담과 이브를 환영하고, 보이지 않는 아버지께 경배를 드리려고 에덴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74:2.5 (829.7) 깨어난 뒤에 곧, 아담과 이브는 성전 북쪽의 큰 언덕에서 열린 정식 환영회까지 호위를 받았다. 자연히 생긴 이 언덕은 세상의 새 통치자들이 취임하는 것을 위하여 미리 확장되고 준비되었다. 여기서 정오에 유란시아 접대 위원회는 사타니아 체계의 이 아들과 딸을 환영했다. 아마돈은 이 위원회의 의장(議長)이었고, 그 위원회는 여섯 산긱 종족으로부터 각자 대표 한 사람씩, 중도자의 임시 우두머리, 충성스러운 딸이자 놋 족속의 대변인 아난, 동산의 설계자이자 건축자의 아들이며 돌아가신 아버지의 계획의 집행자였던 노아, 그리고 거주하는 두 생명 운반자를 넣어서 12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었다.
74:2.6 (830.1) 다음 행위는 유란시아 관리자 회의(會議)의 우두머리인 선임 멜기세덱이 행성 관리 책임을 아담과 이브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물질 아들과 딸은 놀라시아덱의 최고자들에게, 그리고 네바돈의 미가엘에게 충성을 서약했고, 반은 그들이 유란시아의 통치자라고 선포했다. 이렇게 함으로 반은 멜기세덱 관리자들의 행위의 덕분으로 15만 년이 넘도록 지녔던 직함에 따른 권한을 포기하였다.
74:2.7 (830.2) 아담과 이브는 이 기회에, 정식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자리에 취임하는 이때, 임금다운 예복을 걸쳤다. 달라마시아의 예술이 모두 세상에서 사라지지는 않았다. 직물 짜기는 에덴 시절에 아직도 유행하고 있었다.
74:2.8 (830.3) 그리고 나서 천사장들의 선포가 들렸고, 가브리엘의 방송하는 목소리가 사타니아의 606번 행성에서, 유란시아의 둘째 심판 점호, 그리고 은혜와 자비를 베푸는 제2 섭리 시대에, 잠자고 있던 생존자들이 부활(復活)될 것을 선포하였다. 영주의 섭리 시대는 지나갔고, 아담 시대, 곧 행성의 제3 시대가 소박하지만 위엄 있는 광경 속에 열린다. 그리고 그 행성에서 권한을 가졌던 전임자의 협조가 부족해서 세계적 혼란이 있었는데도, 유란시아의 새 통치자들은 유리하게 보이는 조건 하에서 통치를 시작한다.
74:3.1 (830.4) 이제, 정식으로 취임하고 난 뒤에,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행성이 고립된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귀에 익었던 방송은 조용했고, 행성 바깥과 통신하는 회로가 전혀 없었다. 예루셈에 있던 동료들은 자리가 안정된 행성 영주와 경험 있는 참모진, 그러한 세계에서 초기에 체험을 겪는 동안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고 그들과 협동할 유능한 참모진이 있는, 순조롭게 운영되는 세계들로 가버렸다. 그러나 유란시아에는 반란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행성 영주는 상당히 활발했고, 악한 일을 저지를 힘의 대부분을 빼앗겼지만 아직도 아담과 이브의 과제를 어렵게, 그리고 어느 정도 위험스럽게 만들 수 있었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꿈에서 깨어난 예루셈의 아들과 딸은 그날 밤 보름달이 비치는 아래서 동산을 통해서 거닐면서 다음 날의 계획을 이야기하였다.
74:3.2 (830.5) 고립된 유란시아에서, 칼리가스티아의 배반이 있었던, 혼란에 빠진 행성에서 아담과 이브의 첫날이 이렇게 끝났다. 그들은 땅에서 지내는 첫날 밤에, 밤이 깊기까지 걷고 이야기했다―그리고 너무나 쓸쓸했다.
74:3.3 (830.6) 땅에서 아담이 지낸 둘째 날은 행성 관리자들과 자문 위원회와 함께 회의를 가지면서 보냈다. 여러 멜기세덱과 그 동료들로부터, 아담과 이브는 칼리가스티아 반란의 세부, 그리고 그 동란이 세상의 진보에 미친 결과에 대하여 더 이야기를 들었다. 대체로 가슴 아프게 하는 이야기, 세상사를 잘못 처리한 것에 관한 이러한 긴 이야기였다. 그들은 사회의 진화 과정을 가속하려던 칼리가스티아의 계획이 완전히 물거품이 된 것에 관하여, 있는 사실을 모두 들었다. 또한 신의 진보 계획과 따로 행성의 진보를 이룩하려고 애쓰는 것이 어리석음을 충분히 깨닫게 되었다. 슬프지만 정신을 일깨워 주는 날―유란시아에서 둘째 날―이 이렇게 저물었다.
74:3.4 (831.1) 셋째 날은 동산의 검열에 쓰였다. 사람을 태우는 큰 새―판도르―를 타고 아담과 이브는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 장소 위에서, 공중에서 나르는 동안에, 동산의 광대한 지대를 내려다보았다. 에덴의 아름다움과 위엄을 가진 이 동산을 만들려고 수고한 모든 사람에게 명예를 돌리기 위하여 풍성한 잔치를 치르면서, 이 검열하는 날이 끝났다. 또 다시, 셋째 날 밤이 늦도록, 그 아들과 배우자는 동산에서 거닐고 그들이 닥친 문제가 얼마나 방대한가 이야기했다.
74:3.5 (831.2) 넷째 날에 아담과 이브는 동산 집회에서 연설했다. 취임식을 거행한 산으로부터, 사람들에게 세계를 회복하려는 그들의 계획에 관하여 말했고, 죄와 반란의 결과로서 유란시아가 굴러 떨어진 낮은 수준으로부터 그 사회 문화를 구제하려고 추구할 여러 방법의 윤곽을 설명했다. 이날은 대단한 날이었고, 세상사를 운영할 새 행정부에서 책임을 맡으려고 뽑힌 남녀의 회의를 위한 잔치로 끝을 맺었다. 주목하라! 남자 뿐 아니라 여자들도 이 무리 속에 있었고, 달라마시아 시절 이후로 땅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브가, 한 여자가, 남자와 함께 세상사의 명예와 책임을 나누는 것을 바라보다니, 놀라운 개혁이었다. 이렇게 땅에서 넷째 날이 끝났다.
74:3.6 (831.3) 다섯째 날은 임시 정부의 조직에 쓰였고, 이것은 멜기세덱 관리자들이 유란시아를 떠날 때까지 앞으로 활동할 행정부였다.
74:3.7 (831.4) 여섯째 날은 수많은 종류의 사람과 동물을 검열하는 데 쓰였다. 에덴에서 동쪽으로 담을 따라서, 아담과 이브는 하루 종일 호송을 받으면서 행성의 동물 생명을 보았고, 그러한 여러 종류의 생물이 거하는 세계의 혼란 속에서 질서를 찾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더 많이 이해하였다.
74:3.8 (831.5) 보여준 수천 가지 동물의 성질과 활동을 얼마나 자세히 아담이 이해하는가 지켜본 것은 이 여행에서 그를 따라간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 한 동물을 한 번 보는 순간, 그는 동물의 성품과 행동을 지적하곤 했다. 아담은 한 번 보고, 모든 물질 생물의 기원과 성품과 활동을 묘사하는 이름을 줄 수 있었다. 이 검열 여행에서 그를 안내한 사람들은 세상의 새 통치자가, 온 사타니아에서 가장 노련한 해부학자 중의 하나인 것을 몰랐다. 이브는 똑같이 능숙했다. 아담은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너무 작은, 살아 있는 것들의 집단을 설명함으로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
74:3.9 (831.6) 땅에서 머무른 여섯째 날이 저물었을 때, 아담과 이브는 “에덴의 동쪽”에, 그들의 새 집에서 처음으로 쉬었다. 유란시아 모험을 하는 동안 처음 엿새는 아주 바빴고, 그들은 아주 기쁜 마음으로, 모든 활동을 그만두고 하루 종일 쉴 것을 기대하였다.
74:3.10 (831.7) 그러나 상황은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아담이 유란시아의 동물 생명을 아주 총명하게, 아주 샅샅이 논했던, 막 지나버린 그날의 체험은, 능숙한 취임 연설과 매력 있는 몸가짐과 더불어, 동산 거주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 지능을 너무 압도했기 때문에, 그들은 새로 도착한 예루셈의 아들과 딸을 통치자로 진심으로 받아들이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대다수는 엎드려 그들을 신으로서 예배할 준비가 거의 되어 있었다.
74:4.1 (832.1) 그날 밤, 여섯째 날 밤에, 아담과 이브가 잠자는 동안, 에덴의 중앙 구역, 아버지의 성전 근처에서 야릇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거기서 부드러운 달빛 아래, 열심 있고 흥분한 남자와 여자 몇백 명이 자기네 지도자들의 탄원, 정열에 넘치는 탄원을 몇 시간 동안 들었다. 그들은 좋은 뜻을 가졌지만, 새 통치자들이 어째서 단순히 친근한 민주적 방법을 쓰는가 단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날이 밝기 훨씬 전에, 세상사를 새로 맡는 임시 행정자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아담과 그의 짝은 전적으로 너무나 겸손하며 티를 내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神)이 육체의 모습을 입고 내려왔고, 아담과 이브는 실제로 신이거나, 아니면 경건한 숭배를 받아 마땅한 상태에 아주 가깝다고 결정했다.
74:4.2 (832.2) 아담과 이브가 땅에서 보낸 처음 엿새 동안의 놀라운 사건들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에도, 준비되지 않은 머리에 아주 너무나 벅찼다. 그들의 머리는 빙글빙글 돌았다. 사람마다 존경심으로 숭배하는 태도로 절하고 겸손하게 복종하여 엎드릴 수 있도록, 그 고귀한 쌍을 정오에 아버지의 성전으로 모셔오자는 제안에 그들은 함께 휩쓸렸다. 그리고 동산 거주자들은 이 모든 일에 정말로 진지했다.
74:4.3 (832.3) 반은 항의했다. 아마돈은 밤 동안 아담과 이브와 함께, 뒤에 남은 명예 보초의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자리에 없었다. 그러나 반의 항의는 일축되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너무 겸손하고 너무 티를 내지 않는다고, 그리고 바로 그는 신에게서 멀지 않은데,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땅에서 그리 오래 살았는가, 그리고 아담이 오는 것과 같은 큰 사건을 그가 어떻게 일으켰는가? 하는 말을 들었다. 흥분한 에덴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서, 찬미하려고 산까지 메고 올라가려 했을 때, 반은 무리를 헤쳐 나가서, 중도자(中道者)들과 통신할 수 있으므로 중도자의 우두머리를 황급히 아담에게 보냈다.
74:4.4 (832.4) 좋은 뜻을 가졌지만 잘못 인도된 이 필사자들의 제안이 있었다고, 소스라치게 놀라운 소식을 아담과 이브가 들은 것은 땅에서 일곱째 날의 새벽이 가까운 때였다. 그리고 나서, 사람 태우는 새들이 재빨리 그들을 성전으로 데려오려고 날아가는 동안에도, 중도자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아담과 이브를 아버지의 성전으로 수송했다. 이 일곱째 날 아침 일찍부터, 그리고 바로 얼마 전에 그들을 영접하던 산에서, 아담은 신의 아들 계급에 관하여 설명하는 뜻으로 장황하게 이야기하고, 오로지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지명하는 자들만 숭배를 받아도 좋다고 이 땅의 사람들에게 뚜렷이 일러주었다. 아담은 그가 어떤 명예도, 그리고 어떤 존경도 받겠지만, 결코 숭배는 안 된다! 하고 알기 쉽게 설명했다.
74:4.5 (832.5) 그날은 중요한 날이었고, 한낮이 되기 바로 전, 세계 통치자들의 취임을 예루셈이 인정한다는 소식을 가져온 천사 사자(使者)가 도착했을 무렵, 아담과 이브는 군중을 떠나면서, 아버지의 성전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는 이제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계심의 물질적 상징이 있는 곳까지 가서, 우리 모두를 만들고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그분에게 경배하여 절하라. 그리고 이 행동으로 너희가 결코 다시 하나님 외에 아무도 경배할 유혹을 받지 않겠다고 성실하게 약속하라.” 그들은 다 아담이 지시하는 대로 했다. 사람들이 성전 근처에서 엎드려 있는 동안 물질 아들과 딸은 외로이 고개를 숙이고 산에서 서 있었다.
74:4.6 (832.6) 이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전통의 기원이었다. 언제나 에덴에서는 이 일곱째 날을 성전에서 한낮의 집회에 바쳤다. 오랫동안 이날을 자기 교양을 쌓는 데 바치는 것이 관습이었다. 오전은 육체의 개선에, 한낮은 영적 예배에, 오후는 지성의 교양에 바쳤고, 한편 저녁은 함께 모여서 기뻐하는 데 쓰였다. 이것은 한 번도 에덴에서 법이 되지 않았지만, 아담의 행정부가 땅에서 지배하는 한, 관습이었다.
74:5.1 (833.1) 멜기세덱 관리자들은 아담이 온 뒤에 거의 7년 동안 계속하여 근무하였으나, 그들이 세상 일의 행정을 아담에게 넘기고 예루셈으로 돌아갈 때가 마침내 다가왔다.
74:5.2 (833.2) 관리자들과 작별하는 데 하루 종일이 걸렸고, 저녁 때 멜기세덱들은 각자 아담과 이브에게 작별하면서 조언을 주고 성공을 빌었다. 아담은 여러 번 조언자들에게 땅에서 그와 함께 남아 있으라고 부탁했지만, 언제나 이 간청은 거절되었다. 물질 아들들이 세상사의 운영을 완전히 책임져야 할 때가 왔다. 그래서 사타니아의 천사 수송기들은 예루셈을 향하여 14 존재를 싣고 자정(子正)에 행성을 떠났고, 반과 아마돈의 이동은 멜기세덱 12명의 출발과 동시에 일어났다.
74:5.3 (833.3) 한동안 유란시아에서 모든 일이 순조로웠고, 아담이 궁극에 에덴의 문명을 차츰차츰 확장시키는 일을 촉진하려고 어떤 계획을 세울 수 있을 듯하였다. 그는 멜기세덱들의 조언을 따르려고, 바깥 세계와 무역 관계를 개발할 생각으로 공업 기술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에덴이 붕괴되었을 때, 1백개가 넘는 원시 제조 공장이 가동하고 있었고, 가까이 있는 부족들과 널리 무역 관계가 수립되었다.
74:5.4 (833.4) 오랜 세월 동안 아담과 이브는 진화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특화된 기여를 준비하려고 세상을 개선하는 기법을 전에 교육받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야만인ㆍ미개인, 그리고 반(半)문명화된 인간이 사는 세계에서, 법과 질서를 세우는 일과 같이 코앞에 닥친 문제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동산에 모여든, 지구(地球) 인구의 노른자를 제쳐놓고, 아담의 문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조금이라도 되어 있는 집단이 여기저기 겨우 몇이 있었다.
74:5.5 (833.5) 아담은 세계 정부를 세우려고 영웅답게 굳게 결심하여 노력을 기울였지만, 가는 곳마다 끈질긴 저항에 부딪쳤다. 아담은 이미 에덴에 두루, 집단 통제 체계를 작동시켰고, 이 여러 중대(中隊)를 모두 에덴 연맹으로 연합시켰다. 그러나 아담이 동산 바깥으로 나가서 이 개념을 바깥의 부족들에게 적용하려고 애썼을 때, 문제, 심각한 문제가 뒤따랐다. 아담의 동료들이 동산 바깥에서 일하기 시작한 순간, 칼리가스티아와 달리가스티아의 저항, 잘 계획된 저항에 직접 부딪쳤다. 몰락한 영주는 세계 통치자의 자리에서 쫓겨났지만, 행성에서 제거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땅에 있었고, 인간 사회를 회복하려는 아담의 모든 계획에 적어도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었다. 아담은 칼리가스티아에게 적대하여 그 종족들에게 경고하려고 애썼지만, 그의 대적(大敵)이 필사자의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일은 아주 어렵게 되었다.
74:5.6 (833.6) 에덴 사람들 사이에서도 전혀 제한 없는 개인의 자유를 부르짖는 칼리가스티아의 가르침에 빠진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아담에게 끝없이 문제를 일으켰다. 그들은 질서 있게 진보하고 착실한 발전을 위하여 최선으로 짜놓은 계획을 언제나 뒤집어엎었다. 마침내 아담은 이들과 즉시 교제하려는 계획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반이 조직하던 방법으로 되돌아갔으며, 에덴 사람들을 1백인씩 중대로 나누고 각 중대에는 중대장, 그리고 10명의 집단을 책임지는 부관들을 두었다.
74:5.7 (834.1) 아담과 이브는 군주 정치 대신에 대의(代議) 정치를 실시하려고 왔지만, 온 지구의 표면에서 자격 있는 정부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얼마 동안 아담은 대의 정치를 수립하려는 온갖 수고를 포기했고, 에덴의 체제가 무너지기 전에 그는 바깥에서 무역 및 사회 중심을 거의 1백 개 세우는 데 성공했으며, 거기에는 강력한 개인이 아담의 이름으로 다스렸다. 이전에 반과 아마돈이 이 중심들의 대부분을 조직한 적이 있었다.
74:5.8 (834.2) 한 부족이 다른 부족에게 대사를 보내는 것은 아담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정부의 진화에서 크게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이었다.
74:6.1 (834.3) 아담 가족의 집터는 12.8 평방 킬로미터가 조금 넘었다. 이 집터 바로 둘레에서, 30만 명이 넘는 순수 핏줄의 자손을 돌보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계획된 건물 가운데 오직 첫째 단위가 언젠가 완성되었을 뿐이다. 이 초기의 시설이 넘치도록 아담의 가족이 늘어나기 전에, 에덴 계획 전부가 물거품이 되었고 그들은 동산을 비웠다.
74:6.2 (834.4) 아담손은 유란시아에서 보라 인종의 맏아들이며, 그 누이와 이브손, 곧 아담과 이브가 낳은 둘째 아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멜기세덱들이 떠나기 전에, 이브는 다섯 아이―세 아들과 두 딸―의 어머니였다. 그 다음에 둘은 쌍둥이였다. 그들은 임무 불이행이 있기 전에, 아이 63명, 곧 딸 32명과 아들 31명을 낳았다. 아담과 이브가 동산을 떠났을 때, 그들의 가족은 4대로 이루어졌고, 순수 핏줄 후손은 1647명이 되었다. 그들이 동산을 떠난 뒤에, 땅에서 필사자의 핏줄과 공동으로 부모가 되어 낳은 자손 2명을 제쳐놓고, 아이들을 42명이나 거느렸다. 그리고 이것은 아담이 놋 족속과 진화 민족들에게 부모가 된 경우를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74:6.3 (834.5) 아담의 아이들은, 한 살이 되자 어머니의 젖을 뗄 때 동물의 젖을 먹지 않았다. 이브는 많은 종류의 견과의 즙과 많은 과일의 주스를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이러한 먹을 것의 화학 작용과 에너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가 생겨날 때까지 이브는 아이들에게 영양이 되도록 이것들을 알맞게 섞어 주었다.
74:6.4 (834.6) 에덴에서 아담의 구역 바로 바깥에는 불로 익혀 먹기가 널리 이용되었지만, 아담의 집에서는 익혀 먹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먹을 것―과일ㆍ견과ㆍ곡식―이 익었을 때 먹기에 적당한 것을 알았다. 그들은 하루에 한 번, 정오 뒤에 곧, 먹었다. 아담과 이브는 또한 생명나무의 혜택과 연결하여, 우주 방사물로부터 직접 “빛과 에너지”를 빨아들였다.
74:6.5 (834.7) 아담과 이브의 몸은 어렴풋한 빛을 발산했지만, 그들은 동료들의 관습을 좇아서 반드시 옷을 입었다. 낮에는 거의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어도, 저녁때는 두르는 밤옷을 걸쳤다. 경건하고 거룩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머리를 둘러싸는 전통적 후광(後光)의 기원은 아담과 이브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의 몸에서 방사되는 빛은 대체로 옷에 가려졌으니까, 머리에서 방출되는 빛만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담손의 후손은 특별히 영적으로 앞섰다고 생각된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개념을 언제나 이렇게 묘사했다.
74:6.6 (834.8) 아담과 이브는 약 8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에서 서로, 그리고 친자식들과 통신할 수 있었다. 이 생각 교환은 그들의 골 구조에 가까이 자리잡은 섬세한 가스 방을 이용함으로 이루어졌다. 이 작용으로 그들은 생각의 진동을 보내고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힘은 악의 불협화음과 교란에 생각이 굴복할 때, 순간적으로 정지되었다.
74:6.7 (835.1) 아담의 아이들은 16살이 될 때까지 학교를 다녔고, 나이든 아이들이 더 어린 아이들을 가르쳤다. 어린아이들은 30분마다, 큰 아이들은 시간마다 활동을 바꾸었다. 아담과 이브의 이 아이들이 노는 것, 순전히 재미있어서 즐겁고 신나는 활동에 빠져 있음을 지켜보는 것은, 유란시아에서 분명히 새로운 광경이었다. 오늘날 종족들의 놀이와 유머는 대체로 아담의 핏줄로부터 유래한다. 아담 족속은 모두 날카로운 유머 감각이 있었을 뿐 아니라 음악을 잘 이해했다.
74:6.8 (835.2) 약혼하는 평균 나이는 18살이었고, 그때 이 젊은이들은 결혼의 책임을 지는 준비로, 2년의 교육 과정에 들어갔다. 스무 살에 결혼할 자격이 있었고, 결혼한 뒤에 일생의 일을 시작하거나, 이를 위하여 특별한 준비에 들어갔다.
74:6.9 (835.3) 후일에 어떤 여러 나라에서, 신들로부터 내려왔다고 생각되는 왕족들의 형제와 자매가 결혼하는 관습은 아담 후손의 전통까지―그들이 서로 짝지을 수밖에 없으니까―거슬러 올라간다. 동산에서 첫째와 둘째 세대의 결혼 예식은 반드시 아담과 이브가 거행하였다.
74:7.1 (835.4) 아담의 아이들은 서쪽 학교에 4년 동안 다니는 것 외에 “에덴의 동쪽”에서 살고 일했다. 16살이 될 때까지, 예루셈 학교의 방법을 좇아서, 지적 훈련을 받았다. 16살부터 20살까지, 그들은 동산의 다른 끝에서 여러 유란시아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았고, 거기서 또한 낮은 학급에서 선생으로 봉사하였다.
74:7.2 (835.5) 동산의 서쪽 학교 체계의 목적은 온통 교제였다. 오전의 휴식 시간은 실용적 원예와 농업에, 오후 시간은 경쟁하는 놀이에 쓰였다. 저녁은 사회적으로 교제를 가지고 개인의 친교를 개발하는 데 이용되었다. 종교 및 성(性) 교육은 가정의 분야, 부모의 임무로 여겼다.
74:7.3 (835.6) 이 여러 학교에서 가르침은 다음에 관한 교육을 포함하였다:
74:7.5 (835.8) 2. 황금률, 사회 교제의 기준.
74:7.6 (835.9) 3. 개인의 권리와 집단의 권리의 관계,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의무.
74:7.7 (835.10) 4. 여러 지구 종족의 역사와 문화.
74:7.8 (835.11) 5. 세계 무역을 진보시키고 개선하는 방법.
74:7.11 (835.14) 학교는, 사실은 동산의 활동이, 모두 방문객에게 언제나 열려 있었다. 무기를 지니지 않은 관찰자는 잠시 방문할 경우에, 에덴에 자유로이 입장이 허락되었다. 한 유란시아인이 동산에서 머무르려면 “입양되어야” 했다. 그는 아담 수여의 계획과 목적에 관하여 교육을 받고, 이 사명을 지키겠다는 뜻을 알리고, 다음에 아담의 사회적 통치와 우주의 아버지의 영적 통치권에 충성함을 선언했다.
74:7.12 (836.1) 동산의 법은 예전의 달라마시아 율법에 기초를 두었고, 일곱 항목 아래에 선포되었다:
74:7.13 (836.2) 1. 건강 및 위생 법칙.
74:7.15 (836.4) 3. 무역과 상업의 법규.
74:7.16 (836.5) 4. 공정한 놀이 및 경쟁 법칙.
74:7.20 (836.9) 에덴의 도덕 법규는 달라마시아의 일곱 계명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아담 족속은 이 계명들을 지키는 여러 가지 추가된 이유를 가르쳤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는 금령(禁令)에 관하여, 생각 조절자가 깃드는 것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 추가 이유로 제시되었다. 그들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누구나 자기의 피를 흘려야 할지니, 하나님이 그의 모습대로 사람을 만드셨음이라”하고 가르쳤다.
74:7.21 (836.10) 에덴에서 대중(大衆) 예배 시간은 한낮이었고, 해질녘은 가족 예배 시간이었다. 아담은 판에 박힌 기도를 막으려고 최선을 다했고, 효과적 기도는 완전히 개인적이어야 한다, “혼이 바라는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에덴 사람들은 달라마시아 시절부터 내려온 그 기도와 형태를 계속해서 썼다. 아담은 또한 종교 의식에서 피 흘리는 희생물 대신에 땅의 열매를 바치는 것으로 바꾸려고 애썼지만, 동산이 무너지기 전에는 거의 진전이 없었다.
74:7.22 (836.11) 아담은 종족들에게 남녀 평등을 가르치려고 애썼다. 이브가 남편 옆에서 일하는 방식은 동산에 있는 모든 거주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여자는 새 존재를 만들기 위하여 연합하는 생명 요소를 남자와 똑같이 이바지한다고 아담은 분명히 가르쳤다. 그때까지 인류는 모든 출산이 “아버지의 허리”에서 거한다고 가정했다. 어머니를 기껏해야, 미처 태어나지 않은 것을 먹이고 갓난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시설로 바라보았다.
74:7.23 (836.12) 아담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쳤지만, 그것은 비교해 보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땅에 있는 종족들 가운데 영리한 편에 속하는 사람들은 보라 인종의 우수한 아이들과 서로 결혼할 허락을 받을 때를 열심히 기대했다. 종족을 개량하는 이 훌륭한 계획이 이루어졌더라면, 유란시아가 얼마나 다른 세계가 되었을 것인가! 실제 일어난 그대로도, 진화 민족들이 어쩌다가 확보한 이 소량의 수입(輸入)된 종족의 피로부터 엄청난 이득이 생겼다.
74:7.24 (836.13) 이처럼 아담은 그가 머무른 세계의 복지와 향상을 위해서 일했다. 그러나 이 섞인 잡종 민족들을 더 나은 길로 이끄는 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74:8.1 (836.14) 유란시아를 엿새 동안에 창조했다는 이야기는 아담과 이브가 동산을 처음 훑어보는 데 꼭 엿새를 보냈다는 전통에 근거를 두었다. 이 상황은 달라마시아 사람들이 최초에 소개한 한 주(週)의 기간을 거의 신성한 것으로 인가했다. 아담이 동산을 검사하고, 예비적 조직 계획을 짜면서 6일을 보낸 것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지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예배하려고 일곱째 날을 고른 것은, 여기에 함께 이야기한 사실에 전적으로 우연히 생겼다.
74:8.2 (837.1) 세상을 엿새 안에 만들었다는 전설은, 사실 3만 년도 더 지나서, 나중에 생각한 것이다. 그 이야기의 한 특성, 곧 해와 달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해와 달을 오랫동안 가렸던, 미세한 먼지로 이루어진 짙은 우주 구름으로부터 세상이 한때 갑자기 나타났다는 전통에 기원을 가졌을지 모른다.
74:8.3 (837.2) 아담의 갈비로부터 이브를 빚어 낸 이야기는 아담이 도착한 것과 45만 년도 더 전에 행성 영주의 유형 참모진이 온 것과 관련하여, 살아 있는 물질을 서로 교환한 데 관련된 수술, 천상의 수술이 혼동되어 압축된 것이다.
74:8.4 (837.3) 세상 민족들의 대다수는 아담과 이브가 유란시아에 도착하고 나서 그들을 위하여 지어진 육체 형태를 입었다는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 진흙으로 사람이 빚어졌다는 믿음은 동반구에서 거의 보편적이었다. 이 전통은 필립핀 섬들로부터 세계를 돌아서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많은 집단이, 점진적으로 창조―진화―되었다는 초기의 관념 대신에, 어떤 특별 창조 방법으로 사람이 진흙에 기원을 가졌다는 이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74:8.5 (837.4) 달라마시아와 에덴의 영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인류는 인간종의 점진적 향상을 믿는 경향이 있었다. 진화의 사실은 현대에 발견된 것이 아니다. 옛 사람들은 인간이 진보하는, 느린 진화적 특징을 이해하였다. 옛날의 그리스인은 메소포타미아에 가까이 있었는데도, 이 생각을 뚜렷이 가졌다. 땅에 있는 다양한 종족들의 진화 개념은 딱할 정도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런데도 많은 원시 부족은 그들이 여러 가지 동물의 후손이라고 믿고 가르쳤다. 원시 민족들은 자기네 조상이라고 생각되는 동물을 “토템”으로 고르는 관습을 가졌다. 어떤 북 아메리카 인디안 부족들은 그들이 비버와 이리로부터 생겨났다고 믿었다. 어떤 아프리카 부족들은 하이에나로부터, 한 말레이 부족은 리머로부터, 한 뉴 기니아 집단은 앵무새로부터 그들이 내려왔다고 가르친다.
74:8.6 (837.5) 아담 족속 문명의 잔재와 바로 접촉을 가졌기 때문에, 바빌로니아인은 사람이 창조된 이야기를 불리고 꾸몄다. 그들은 사람이 신들로부터 바로 내려왔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그 민족이 귀족의 기원을 가졌다는 생각을 고수했고, 이것은 진흙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교리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74:8.7 (837.6) 천지 창조에 관한 구약(舊約)의 설명은 모세의 시절이 훨씬 지난 뒤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세는 히브리인에게 그렇게 왜곡된 이야기를 가르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창조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에 이르기까지 간단하고 요약된 이야기를 제시하였고, 이렇게 함으로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라 부른 창조자, 곧 우주의 아버지를 경배하라는 그의 말이 더욱 호소력이 있기를 바랐다.
74:8.8 (837.7) 초기의 가르침에서 아주 지혜롭게도, 모세는 아담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려고 애쓰지 않았고, 모세가 히브리인의 최고의 선생이었으니까, 아담의 이야기는 천지 창조의 이야기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초기의 전통이 아담 이전의 문명을 인정했다는 것은, 아담 시절 이전의 인간사(人間事)에 관한 어떤 언질도 없애려고 의도했던 후일의 편집자들이 소홀히 하여, 카인이 “놋의 땅”으로 옮겨 가고, 거기서 아내를 얻었다는 언급, 내막을 드러내는 언급을 없애지 못한 사실에 뚜렷이 나타난다.
74:8.9 (838.1)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뒤에 오랫동안, 히브리인은 널리 사용한 글자가 없었다. 그들은 이웃에 있는 필리스티아인으로부터 알파벳 쓰기를 배웠는데, 이 사람들은 더 높은 크레테 문명으로부터 정치적으로 피신하여 온 자들이었다. 히브리인은 기원전 약 900년까지 거의 글을 쓰지 않았고, 그렇게 늦은 때까지 아무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몇 가지 다른 천지 창조 이야기가 유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에서 포로 생활을 한 뒤에 그들은 수정된 메소포타미아 판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더 기울었다.
74:8.10 (838.2) 유대인의 전통은 모세에 관하여 분명히 고정되었고, 그가 아브라함의 핏줄을 추적하여 아담까지 미치려고 애썼기 때문에, 유대인은 아담이 온 인류의 처음이라고 가정했다. 야웨는 창조자였고, 아담이 처음 사람이라 생각되었으니까 야웨는 아담을 만들기 바로 전에 세상을 만들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나서 아담이 엿새를 보냈다는 전통이 그 이야기에 섞여 들어갔고, 그 결과로서 모세가 땅에서 머무른 지 거의 1천 년이 지난 뒤에, 엿새 안에 천지를 창조했다는 전통이 기록되었으며, 나중에는 모세가 그 글을 썼다고 명예를 돌렸다.
74:8.11 (838.3) 유대인 사제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사물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의 기록을 이미 마쳤다. 곧 그들은 이 이야기가 최근에 발견된, 모세가 적은 천지 창조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기원전 500년 무렵에, 당대의 히브리인은 이 글을 신이 준 계시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후일의 민족들이 신화 같은 이야기를 보는 것과 상당히 비슷하게 이 글을 여겼다.
74:8.12 (838.4) 모세의 가르침이라고 소문난 이 가짜 서적은 프톨레미, 곧 그리스 사람인 에집트 왕의 눈에 뜨였고,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그의 새 도서관을 위하여 이것을 70인 학자의 위원회에게 그리스어로 옮기게 하였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나중에 히브리교와 기독교의 “성서”에서 후기 수집의 일부가 된 글 사이에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이 신학 체계들과 동일시됨으로, 그러한 개념들은 오랫동안 많은 서양 민족의 철학에 깊이 영향을 미쳤다.
74:8.13 (838.5) 기독교의 선생들은 명령으로 인류를 창조했다는 관념을 영속하게 하였고, 이 모두가 한때 유토피아 같이 복된 황금 시대가 있었다는 가설, 그리고 사람 또는 초인간이 타락했다는 이론을 직접 형성하도록 만들었으며, 이것은 어째서 사회가 유토피아 아닌 상태에 있는가 설명했다. 인생, 그리고 우주에서 사람의 처지를 이렇게 내다보는 것은 기껏해야 실망을 주는 것이니, 왜냐하면 그것이 한때 어떤 행성 행정자들의 잘못 때문에 이를 꾸짖으려고 인류에게 노여움을 퍼부은 신, 복수심에 불타는 신을 암시할 뿐 아니라, 사람이 진보하지 않고 오히려 후퇴한다는 믿는 생각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이다.
74:8.14 (838.6) “황금 시대”는 신화(神話)이지만 에덴은 사실이었고, 동산의 문명은 실제로 멸망하였다. 아담과 이브는 동산에서 117년 동안 버티었고, 그때 이브의 성급함과 아담의 그릇된 판단을 통해서, 이들은 예정된 길을 주제넘게 벗어났으며, 급속히 자신들에게 재난을 부르고, 망할 정도까지 온 유란시아의 발전하는 걸음을 늦추었다.
75:0.1 (839.1) 유란시아에서 1백 년이 넘도록 수고한 뒤에, 아담은 동산 바깥에서 거의 아무런 진전을 볼 수 없었다. 바깥 세상은 그다지 나아지는 듯 보이지 않았다. 종족 개량의 실현은 아득히 먼 일로 보였고, 상황은 아주 절망적이어서, 구제하기 위해서 최초의 계획에 들어 있지 않은 무엇이 요구되는 듯하였다. 적어도 이런 생각이 아담의 머리에 이따금 떠올랐고, 그는 여러 번 이브에게 그렇게 표현했다. 아담과 그의 짝은 충성스러웠지만, 그들은 같은 부류와 떨어져 있었고, 그들 세계가 닥친 불쌍한 곤경은 견디기 힘들었다.
75:1.1 (839.2) 실험 중이고 반란으로 마비되고, 고립된 유란시아에서 아담의 임무는 벅찬 사업이었다. 물질 아들과 딸은 행성에서 받은 과제가 어렵고 까다로움을 일찍부터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다방면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제를 용감하게 시작했다. 그러나 인간의 핏줄 사이에서 결함 있는 자와 퇴화된 자를 없애는 온통 중요한 일에 착수했을 때, 그들은 아주 낙심했다. 그들은 궁지에서 빠져 나갈 길을 전혀 찾을 수 없었고, 예루셈이나 에덴시아에 있는 상관들과 의논할 수 없었다. 여기서 그들은 떨어져서, 날마다 어떤 새롭고 까다롭게 얽힌 문제, 풀 수 없는 듯한 어떤 문제에 부닥쳤다.
75:1.2 (839.3) 정상 조건에서 행성 아담과 이브가 처음으로 할 일은 종족들을 조정하고 혼합시키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란시아에서 그런 사업은 대체로 희망이 없는 듯했는데, 그 종족들은 생물학상으로 건강해도, 더디고 결함 있는 핏줄을 제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75:1.3 (839.4) 아담과 이브는 그들이 사람의 형제 정신을 선포하기에 전혀 준비되지 않은 구체(球體)로 온 것을 발견했으며, 이것은 비참한 영적 어둠 속에서 더듬으면서, 혼란에 빠져 있고, 앞서 있던 행정부의 사명이 유산됨으로 더군다나 나쁘게 진창에 빠진 세계였다. 생각과 도덕은 낮은 수준에 있었고, 종교적 통일을 이룩하는 일을 시작하는 대신에, 그들은 거주자들을 가장 간단한 형태의 종교적 믿음으로 전향시키는 일을 다 다시 시작해야 했다. 채용할 준비가 된 한 언어를 찾는 대신에, 수백 가지 지방 사투리를 쓰는 세계적 혼란에 부닥쳤다. 행성에서 봉사하는 어떤 아담도 이보다 더 힘든 세상에 발을 디딘 적이 없었다. 장애물은 넘을 수 없고 여러 문제는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듯이 보였다.
75:1.4 (839.5) 그들은 고립되어 있었고, 그들을 짓누르는 엄청난 외로운 느낌은 더군다나 멜기세덱 관리자들이 일찍 떠났기 때문에 더해졌다. 겨우 간접으로, 천사 계급들의 수단을 이용하여, 그들은 행성 바깥에 있는 어떤 존재하고도 통신할 수 있었다. 천천히 그들의 용기는 줄어들고 투지는 떨어졌으며, 때때로 그들의 믿음은 흔들리다시피 하였다.
75:1.5 (840.1) 그리고 이것이 부닥친 과제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을 때, 이 고귀한 두 사람이 소스라치게 놀란 참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모두 행성에서 받은 과제의 수행과 관련된 사업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75:1.6 (840.2) 아마 네바돈의 어떤 물질 아들도 유란시아의 불쌍한 처지에서 아담과 이브가 부딪친 것처럼, 그렇게 어렵고 겉보기에 희망 없는 과제에 부딪친 적이 없다. 그러나 더 멀리 내다보고 참을성이 있었더라면 언젠가 성공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더군다나 이브는, 아주 너무 참을성이 없었다. 그들은 길고 길게 견디는 시험에 차분히 착수하려 하지 않았다. 당장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싶었고, 또 보았지만, 그렇게 얻은 결과는 자신들과 그 세상에 아주 비참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75:2.1 (840.3) 칼리가스티아는 동산에 자주 찾아왔고 아담과 이브와 여러 번 회담을 가졌지만 타협과 지름길 모험이 담긴 어떤 제안에도 그들은 끄떡하지 않았다. 넌지시 비추는 모든 그러한 제안에 효과적 면역을 일으키도록, 반란의 결과가 그들 앞에 넉넉히 있었다. 아담의 어린 자식들조차 달리가스티아의 서곡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물론, 칼리가스티아나 그 동료도, 아담의 아이들에게 나쁜 일을 하라고 설득하기는커녕, 어떤 사람에게도 자신의 뜻을 거슬러 영향을 미칠 힘이 없었다.
75:2.2 (840.4) 칼리가스티아는 아직도 직함으로는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 잘못 인도되었지만, 그래도 지역 우주의 높은 아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유란시아에서 그리스도 미가엘이 왔을 때에야 마침내 자리에서 쫓겨났다.
75:2.3 (840.5) 그러나 그 몰락한 영주는 끈질겼고 각오가 굳었다. 그는 얼마 안 있어 아담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노력을 그만두었고, 이브에게 교활하게 옆 공격을 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 악한 자는 성공할 유일한 가망은 놋 족속 집단 가운데 상위 계층에 속하는 적당한 사람들을 교묘히 이용하는 데 있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이 놋 족속은 한때 그의 유형(有形) 참모진 동료들의 후손이었다. 그리고 보라 인종의 어머니를 옭아매기 위해서 적절하게 계획이 세워졌다.
75:2.4 (840.6) 이브에게는 아담의 계획에 대항하여 싸우거나 그들의 행성 임무를 위태롭게 할 어떤 일이라도 저지를 의도가 전혀 없었다. 멀리 내다보면서 먼 장래 효과를 위하여 계획하기보다 당장의 결과를 보는 여자의 경향을 알기 때문에, 멜기세덱들은 떠나기 전에, 행성에서 고립된 지위에 따르는 특이한 위험에 관하여 이브에게 각별히 타일렀고, 이브에게 결코 제 짝의 옆을 벗어나지 말라고, 다시 말해서 그들의 공동 사업을 촉진하기 위하여 아무런 개인적이거나 비밀스런 방법도 시도하지 말라고 특별히 경고하였다. 이브는 1백 년이 넘도록 이 지침을 아주 면밀하게 지켜나갔고, 세라파타시아라는 이름의 어떤 놋 족속의 지도자와 즐기고 있는 방문, 갈수록 더 사사롭고 비밀스러운 방문에 어떤 위험이 따르리라는 것이 이브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건 전체가 아주 차츰차츰, 자연스럽게 발전되어서, 이브는 눈치채지 못하고 걸려들었다.
75:2.5 (840.7) 동산 거주자들은 에덴의 초기 시절부터 놋 족속과 접촉이 있었다. 그들은 칼리가스티아 참모진에서 직무를 게을리 하는 참모들의 혼합된 후손으로부터 많은 귀중한 도움과 협조를 받았고, 이들을 통해서 에덴의 체제는 이제 완벽한 붕괴와 마지막 멸망을 만나게 되었다.
75:3.1 (841.1) 아버지가 죽고 나서 세라파타시아가 놋 부족들의 서부 연맹, 곧 시리아 연맹을 지휘하는 자리에 올랐을 때, 아담은 땅에서 처음 1백 년을 막 마쳤다. 세라파타시아는 살갗이 갈색인 남자였고, 한때 달라마시아의 건강 위원회의 우두머리가, 그 아득히 먼 옛 시절에 청인종의 으뜸가는 지적 여자들 중에서 하나와 짝지어 낳은 명석한 후손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이 혈통은 권한을 쥐었고, 서부 놋 부족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미쳤다.
75:3.2 (841.2) 세라파타시아는 동산에 몇 번 찾아왔고, 아담의 운동이 올바른 것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시리아의 놋 족속의 지휘를 맡은 뒤에 곧, 그는 동산에 있는 아담과 이브의 작업과 제휴 관계를 수립하려는 뜻을 발표했다. 그의 민족에서 대다수는 이 계획에 그와 함께 하였고, 아담은 모든 이웃 부족 가운데 가장 힘있고 영리한 자들이 세계 개선 계획을 지원하도록 거의 통째로 설득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그것은 분명히 격려가 되었다. 이 큰 사건 바로 뒤에, 세라파타시아와 그의 새 참모진은 아담과 이브의 집에서 환대를 받았다.
75:3.3 (841.3) 세라파타시아는 아담의 모든 부관 가운데 가장 유능하고 능률 있는 한 사람이 되었다. 어떤 활동에도 그는 온통 정직하고 속속들이 성실했다. 나중에도, 그가 교활한 칼리가스티아에게 상황의 도구로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했다.
75:3.4 (841.4) 대번에 세라파타시아는 에덴의 부족 관계 위원회의 부의장이 되었고, 먼 부족들이 동산의 운동을 지지하도록 설득하는 작업을 더욱 힘차게 실행하기 위하여 많은 계획이 세워졌다.
75:3.5 (841.5) 세라파타시아는 아담과 이브―특히 이브―와 여러 번 회의를 가졌고, 그들의 방법을 개선하기 위하여 여러 계획을 의논했다. 어느 날, 이브와 이야기하는 동안, 보라 인종의 큰 집단이 모집되기를 기다리면서, 기다리는 궁핍한 부족들을 즉시 개선하려고 그동안에 무엇인가 할 수 있다면, 아주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세라파타시아에게 퍼뜩 떠올랐다. 놋 족속이, 가장 진취적이고 협조하는 종족으로서, 일부 기원을 보라 핏줄에 가진 한 지도자가 그들에게 태어나게 할 수 있다면, 이 민족들을 동산에 더 가깝게 묶어 두는 강력한 끈이 될 것이라고 세라파타시아는 주장했다. 그리고 멀쩡한 정신에, 정직하게, 이 모든 것이 세계의 복지를 위한 것이라 생각되었는데, 이는 동산에서 자라고 교육받을 이 아이는 그의 아버지 민족에게 영원히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75:3.6 (841.6) 세라파타시아가 어떤 제안을 했어도 그가 아주 정직하고 전적으로 성실했다는 것을 다시 강조해야 한다. 칼리가스티아와 달리가스티아의 손에 자기가 놀아나고 있다고 그는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혼란에 빠진 유란시아 민족들을 세계적으로 개량하는 일을 시도하기 전에, 보라 인종의 예비군을 견실하게 확보하는 계획에 세라파타시아는 온통 충성했다. 그러나 이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몇백 년이 걸릴 터이고, 그는 참을성이 없었다. 금방 나타나는 어떤 결과―자신의 일생에서 무언가―를 보고 싶었다. 세상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 것이 거의 없는 것에 아담이 때때로 낙심한다고 그는 이브에게 분명히 말했다.
75:3.7 (841.7) 5년이 넘도록 이 계획은 남몰래 완성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이브가 카노와 비밀 회담을 가지기로 찬성하는 데까지 나아갔는데, 카노는 근처에 우호적인 놋 족속의 거류민 가운데 가장 똑똑한 지적 존재요 활동적인 지도자였다. 카노는 아담 체제에 무척 공감하였다. 사실, 그는 동산과 우호 관계를 가지는 데 찬성한 이웃 놋 족속의 성실한 영적 지도자였다.
75:3.8 (842.1) 아담의 집으로부터 멀지 않은 데서, 가을 저녁 땅거미가 질 때, 운명의 만남이 일어났다. 이브는 잘생기고 열심 있는 카노를 전에 만난 적이 없었다―그리고 그는 영주 참모진에 속하는 먼 선조 가운데서, 우수한 체격과 뛰어난 지능이 살아남은 훌륭한 표본이었다. 카노도 또한 세라파타시아의 계획이 옳다는 것을 철저히 믿었다. (동산 바깥에서는 한 사람이 여럿과 짝짓는 것은 보통 관습이었다.)
75:3.9 (842.2) 칭찬과 열심에, 또 대단한 개인적 설득에 영향을 받아서, 이브는 그때 거기서 많이 이야기해 왔던 사업을 시작하기로, 더 크고 더 널리 미치는 신의 계획에, 세상을 구원하는 자기의 작은 계획을 보태기로 찬성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이브는 운명의 걸음을 내디디었다. 엎지른 물이었다.
75:4.1 (842.3) 행성에 있던 하늘 생명은 술렁거렸다. 아담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브에게 동산에, 그의 옆으로 오라고 청했다. 두 방향에서 동시에 일함으로 세상의 개선을 가속하는, 오랫동안 품어 왔던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전부, 아담은 이제 처음으로 들었다: 세라파타시아의 사업을 집행하는 것과 동시에 신의 계획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75:4.2 (842.4) 달빛 비치는 동산에서 물질 아들과 딸이 이렇게 교통하는 동안, “동산의 목소리”는 불복종한 것 때문에 그들을 꾸짖었다. 그 목소리는, 그들이 동산의 약속을 어겼다, 멜기세덱들의 지시(指示)에 복종하지 않았다, 우주 통치자에게 책임을 다하겠다는 서약을 지키지 못했다고, 에덴의 쌍에게 이른 바로 내 자신의 발표에 지나지 않았다.
75:4.3 (842.5) 이브는 선과 악의 실행에 참여하기로 찬성한 것이다. 선(善)은 신의 계획을 수행하는 것이요, 죄는 신의 뜻을 일부러 어기는 것이다. 악은 계획을 그릇되게 적용하고 기법을 잘못 적응하는 것이며, 이것은 우주의 부조화와 행성의 혼란을 일으킨다.
75:4.4 (842.6)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을 때마다, 동산의 쌍은 선과 악을 섞는 칼리가스티아의 제안에 넘어가지 말라고, 관리하는 천사장에게 경고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훈계를 받았다: “선과 악을 섞는 날에, 너희는 그 땅의 필사자와 같이 될지니라. 너희는 반드시 죽으리라.”
75:4.5 (842.7) 이브는 비밀로 만났던 운명의 계제에, 자주 되풀이되던 이 경고에 대하여 전에 카노에게 일러 주었지만, 카노는 그러한 훈계의 중요성이나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좋은 동기와 참된 의도를 가진 남녀는 아무런 악을 행할 수 없다, 이브는 분명히 죽지 않고, 오히려 그들 후손의 몸에서 새롭게 살 것이요, 그 후손은 자라서 세상에 복을 주고 세상을 안정시킬 것이라고 이브를 안심시켰다.
75:4.6 (842.8) 신의 계획을 수정하는 이 계획이 비록 아주 진지하게, 오직 세상의 복지에 관하여 가장 높은 동기만 가지고 잉태되고 집행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악이었다. 이는 그것이 올바른 목적을 이룩하는 그릇된 길을 대표하기 때문이요, 바른 길, 신의 계획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75:4.7 (843.1) 카노가 매력 있음을 이브가 발견한 것은 참말이었고, 이브는 “인간사(人間事)에 관하여 새롭고 확대된 지식을 얻고, 인간 성품을 빨리 이해하는 것이 아담 성품을 이해하는 데 보충이 된다”는 구실로 유혹자가 약속했다는 것을 모두 깨달았다.
75:4.8 (843.2) 그날 밤 동산에서, 그 슬픈 상황에서 내 의무가 된 바와 같이, 나는 보라 인종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어머니 이브가 책임을 이행하지 못하게 만든 이야기의 자초지종을 충분히 들었고, 그 당면한 상황에 관하여 두 사람에게 조언하고 의논했다. 그들은 이 충고 가운데 더러는 따르고, 더러는 버렸다. 이 회담은 너희의 기록에 “주 하나님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를 부르고 ‘너희가 어디 있느냐’”하고 묻는 것으로 나타난다. 보기 드물고 특별한 일을 모두, 자연스럽든 영적이든, 직접 신들이 친히 간섭한 탓으로 돌리는 것이 후세대의 관습이었다.
75:5.1 (843.3) 이브가 꿈에서 깨어난 것은 보기에 참으로 애처로웠다. 아담은 그 곤경 전체를 헤아렸고, 마음이 찢어지고 풀이 꺾이기는 했어도, 일을 그르친 짝에게 오직 불쌍한 느낌과 동정심을 보였다.
75:5.2 (843.4) 실패를 깨닫고 절망에 빠져, 이브가 잘못을 저지른 다음 날 아담은 라오타를 찾았는데, 그 여자는 동산의 서부(西部) 학교들의 우두머리이자 명석한, 놋 족속의 여자였다. 생각 끝에 그는 이브처럼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라. 아담은 속지 않았다.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이브와 운명을 함께 하기로 작정하였다. 인간을 초월하는 애정으로 그는 제 짝을 사랑했고, 유란시아에서 이브가 없이 혼자 지키는 가능성을 생각하니 이를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75:5.3 (843.5) 이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들었을 때,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동산 거주자들은 다룰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이웃에 있는 놋 족속의 촌락에 전쟁을 선포했다. 에덴의 문 바깥을 지나서, 준비되지 않은 이 사람들에게 덮쳤고, 이들을 모조리 죽였다―남자나 여자나 어린아이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카노, 아직 태어나지 않은 카인의 아버지도 이슬로 사라졌다.
75:5.4 (843.6)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깨닫고 나서, 세라파타시아는 어쩔 줄 몰라했고, 두려움과 뉘우침으로 제 정신이 아니었다. 다음 날 그는 큰 강에 빠져 죽었다.
75:5.5 (843.7) 아담의 아이들은 아버지가 외롭게 헤매는 30일 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는 어머니를 위로하려고 애썼다. 그때가 끝나자 판단이 제대로 섰고, 아담은 집으로 돌아와서 그들이 앞날에 어찌 행동할 것인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75:5.6 (843.8) 그릇 인도받은 부모가 저지른 어리석은 짓의 결과를 죄 없는 아이들이 흔히 함께 받는다. 아담과 이브의 바르고 고귀한 아들과 딸들은 아주 갑자기, 아주 무자비하게 밀어닥친 믿을 수 없는 비극의 슬픔, 말할 수 없는 슬픔에 파묻혔다. 50년이 지나도, 자식 중에서 나이든 자녀들은 그 비참한 시절의 애처로움과 슬픔, 특히 아담이 집을 비운 그 30일 간의 공포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동안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어머니는 아담이 어디 있는지, 어떤 운명에 빠졌는지 까맣게 몰랐다.
75:5.7 (843.9) 바로 이 30일 동안은 이브에게 슬프고 괴로운 몇 년처럼 길었다. 이 고귀한 사람은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영적으로 슬펐던 기간, 속 썩던 그 기간의 결과로부터 결코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그들이 나중에 겪은 결핍과 물질적 어려움의 어떤 모습도, 이브의 기억에는 외롭고 견딜 수 없이 불안했던 그 무서운 여러 날, 두려운 여러 밤과 도저히 견줄 수 없었다. 이브는 세라파타시아의 성급한 행동에 관하여 소식을 들었고, 제 짝이 슬픔에 못 이겨 목숨을 끊었는지, 혹은 자기의 잘못을 꾸짖느라고 세상에서 제거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아담이 돌아왔을 때, 이브는 기쁨과 고마움을 느겼고, 고되게 봉사하면서 길고도 어려운 일생을 함께 사는 동안 그 만족감은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75:5.8 (844.1)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이브가 실수한 뒤에 70일이 되기까지 아담은 그들이 어떤 성질의 반칙을 저질렀는가 확신이 없었는데, 그때 멜기세덱 관리자들이 유란시아로 돌아와서 세상일의 관할권을 맡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들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았다.
75:5.9 (844.2) 그러나 아직도 문제가 더 터지려 하고 있었다. 에덴 가까이 있는 놋 족속 촌락이 절멸되었다는 소식은 북쪽에 있는 세라파타시아의 고향 부족들에게 전해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고, 대번에 큰 무리가 동산으로 행진해 오려고 집결하고 있었다. 이렇게 아담 족속과 놋 족속 사이에 길고도 쓰라린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아담과 그 추종자들이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있는 둘째 동산으로 옮겨 간 뒤에도 이 적대 행위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와 그 여자 사이에, 그의 씨와 그 여자의 씨 사이에” 맹렬하고 오래 이어지는 불화가 있었다.
75:6.1 (844.3) 놋 족속이 행진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담은 멜기세덱들의 상담을 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조언하려 하지 않았고, 최선이라 생각되는 대로 일을 처리하라고 이르기만 하고, 그가 어떤 길을 택하든지, 가능한 한 친절히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멜기세덱들은 아담과 이브가 스스로 세우는 계획에 간섭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75:6.2 (844.4) 아담은 그와 이브가 실패한 것을 알았다. 멜기세덱 관리자들이 그 자리에 온 것이 그렇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그들의 개인 지위나 앞날의 운명이 어찌될 것인가 그는 아직 아무것도 몰랐다. 자기들의 지도자를 따르겠다고 약속한 충성스러운 추종자 1천2백여 명과 그는 밤새 의논하였고, 다음 날 정오에 이 순례자들은 새 집을 찾아서 에덴을 떠나갔다. 아담은 전쟁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고, 따라서 놋 족속에게 저항하지 않고 첫째 동산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75:6.3 (844.5) 에덴의 카라반은 동산을 떠난 지 사흘째에, 예루셈으로부터 온 천사 수송기들이 도착하여 정지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담과 이브는 아이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통고를 받았다. 수송기들이 기다리는 동안, 선택의 나이(스무 살)에 이른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유란시아에 남아 있거나 놀라시아덱 최고자들의 피보호자가 되는 선택이 주어졌다. 3분의 2가 에덴시아로 가기로 했다. 약 3분의 1은 부모와 함께 남아 있기로 했다. 선택의 나이가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은 모두 에덴시아로 데려갔다. 이 물질 아들과 딸, 그리고 아이들이 슬프게 이별하는 것을 보고서 아무도 위반자의 길이 고달프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담과 이브의 이 자손들은 이제 에덴시아에 있다. 그들에게 어떤 처분이 내릴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
75:6.4 (844.6) 슬프고 슬픈 카라반은 계속 여행하려고 준비하였다. 이보다 무엇이 더 비극일 수 있었을까! 그렇게 높은 희망에 부풀어 한 세상으로 와서, 그렇게 축복 속에 영접 받고, 그리고 나서 에덴을 부끄러움 속에 떠나가고, 새로 살 곳을 미처 찾기도 전에 아이들을 4분의 3도 더 잃어버리다니!
75:7.1 (845.1) 에덴의 카라반이 멈춘 동안에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위반 행위의 성질에 대하여 통지받고 그들의 운명이 어찌될 것인가 조언을 받았다. 가브리엘이 판결을 선포하려고 나타났다. 이렇게 판결을 받았다: 유란시아 행성에 있는 아담과 이브는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으로 판결을 내린다. 사람 사는 이 세상의 통치자로서 그들은 수탁자의 서약을 어겼다.
75:7.2 (845.2) 죄책감 때문에 풀이 죽기는 했어도, 아담과 이브는 구원자별에 있는 재판관들이 “우주 정부를 모욕했다는” 어떤 고발에 대해서도 그들이 면죄되었다는 선고를 듣고 크게 기뻐했다. 그들이 모반한 죄가 있다는 주장은 없었다.
75:7.3 (845.3) 에덴의 부부는 자신들이 그 땅에서 필사자의 지위로 떨어졌고, 미래에 세상 종족들의 앞날을 기대하면서, 이제부터 유란시아의 남자와 여자로서 행동해야 한다고 통지를 받았다.
75:7.4 (845.4) 아담과 이브가 예루셈을 떠나기 오래 전에, 그들의 선생들은 신의 계획을 크게 벗어나는 일이 있을 경우에 생기는 결과를 설명해 주었다. 필사자 육체의 지위로 떨어지는 것이 확실한 결과요 분명한 벌이며, 행성에서 그들이 이루어야 할 임무를 집행하지 못할 때 그런 벌이 어김없이 따른다는 것을 그들이 유란시아에 도착하기 전에도 그후에도 나는 친히 거듭 경고했다. 그러나 물질 계급 아들의 불사(不死) 지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담과 이브가 임무를 이루지 못하는 데 어떤 결과가 따르는가 똑똑히 이해하는 데 필수이다.
75:7.5 (845.5) 1.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에 있는 동료들처럼, 영의 지성 인력 회로와 지적 관계를 가짐으로 불사의 지위를 유지했다. 정신이 분리됨으로 이 중대한 자양분이 끊어질 때, 그때 사람이 어떤 영적 수준에 있는가에 상관 없이, 불사의 지위는 없어진다. 육체의 분해를 뒤따르는 필사자의 지위가 아담과 이브가 책임을 지적으로 이행하지 못함으로 생기는 불가피한 결과였다.
75:7.6 (845.6) 2. 유란시아의 물질 아들과 딸은 또한 이 세상의 필사 육체의 모습으로 인격화되었으니까, 두 가지 순환 체계를 유지하는 데 더욱 의존했는데, 하나는 신체의 성질로부터 생기고, 하나는 생명나무의 열매에 저장된 초월 에너지로부터 생긴다. 관리하는 천사장은 언제나 아담과 이브에게, 맡긴 임무의 불이행(不履行)은 지위의 강등을 낳고, 실패한 뒤에 이 에너지 근원에 접근하는 것이 거절된다고 훈계했다.
75:7.7 (845.7) 칼리가스티아는 아담과 이브를 덫에 옭아넣는 데 성공했지만, 이들을 우주 정부에 맞서 드러내놓고 반항하도록 이끌려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이 한 일은 정말로 나빴지만, 그들은 결코 진리를 멸시한 죄가 없고, 우주의 아버지와 그 창조 아들의 올바른 통치에 맞서 알면서 반란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75:8.1 (845.8) 아담과 이브는 높은 물질 아들의 지위로부터 낮은 필사 인간의 지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타락이 아니었다. 아담의 실패로 즉시 결과가 나타났는데도 인류는 개량되어 왔다. 보라 민족을 유란시아 종족들에게 주는 신의 계획이 유산(流産)되기는 했어도, 필사 종족들은 아담과 그 후손이 유란시아 종족들에게 얼마큼 기여한 것으로부터 엄청나게 이득을 얻었다.
75:8.2 (846.1) “사람의 타락”은 전혀 없었다. 인류의 역사는 점진적 진화의 역사였고, 아담의 수여는 이전에 그들의 생물학적 조건과 비교해서 세계 민족들을 크게 개량하였다. 유란시아의 우수한 혈통은 이제 안돈ㆍ산긱ㆍ놋ㆍ아담, 따로 된 이 네 가지 근원으로부터 얻은 유전 요소를 포함한다.
75:8.3 (846.2) 아담이 인류에게 내린 저주의 원인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아담이 신의 계획을 수행하는 데 실패했고, 신과 한 약속을 어겼고, 그와 배우자의 생물 지위가 아주 확실히 낮아졌지만, 이 모든 일이 일어났어도, 인류에 끼친 그들의 공헌은 유란시아에서 문명을 진보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75:8.4 (846.3) 너희 세계에서 아담의 사명의 결과를 평가하면서, 공정을 기하자면 행성의 조건을 인지할 것이 요구된다. 아담은 아름다운 짝과 함께 예루셈으로부터 어둡고 혼란에 빠진 이 행성으로 옮겨졌을 때, 거의 희망 없는 과제에 부닥쳤다. 그러나 여러 멜기세덱과 그 동료들의 조언에 인도를 받았더라면, 그리고 더 참을성이 있었다면, 결국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브는 개인의 해방과 행성에서 행동의 자유를 부르짖는 선전, 모르는 사이에 파고드는 선전에 귀를 기울였다. 자기에게 맡겨진 이 생명으로 하여금 생명 운반자들이 최초에 설계했던, 당시의 혼합된 계급, 한때 행성 영주의 참모진에 딸렸던 자식 낳는 존재의 생명질과 예전에 합쳐진 적이 있었던 혼합된 계급의 생명과 때 이르게 섞이게 만들었으므로, 이브는 물질 아들 계급의 생명질을 가지고 실험하도록 유도되었다.
75:8.5 (846.4) 파라다이스로 너희가 올라가는 길에 내내, 완전한 길, 완전에 이르는 길, 영원히 완전하게 되는 길에서, 지름길이나 개인의 발명이나, 아니면 개선하는 다른 조치로, 확정된 신의 계획을 돌아가려고 참을성 없이 애써도 너희는 결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75:8.6 (846.5) 통틀어서, 온 네바돈의 어느 행성에서도 더 가슴 아팠던 지혜의 부족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잘못된 걸음이 진화하는 우주의 사무에서 일어나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거대한 창조의 일부이며, 만사가 완전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우리의 우주는 완전하게 창조되지 않았다. 완전은 우리의 영원한 목표요, 기원이 아니다.
75:8.7 (846.6) 이것이 기계론적 우주라면, 첫째 근원 중심이 오직 하나의 물력이고 또한 성격자도 아니고, 모든 창조가 엄격한 법칙에 지배되는 물질, 에너지 활동이 변치 않는 특징을 가진 물리적 물질의 광대한 집합이라면, 그때 우주 상태가 불완전한데도 완전이 지배할지 모른다. 아무 의견 차이가 없고 아무 마찰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 완전과 불완전이 생기는 진화 우주에서, 의견 차이와 오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기뻐한다. 이로서 우주에서 성격자가 있다는 사실과 그들의 행동이 증명되는 까닭이다. 우리의 창조가 성격자의 지배를 받는 하나의 존재라면, 너희는 성격이 살아나고, 진급하고, 성취하는 것이 가능함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격이 성장하고 체험하고 모험하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우주가 겨우 기계적이거나 또는 수동적으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 성격이 있고 진취성이 있으니까, 얼마나 영화로운 우주인가!
76:0.1 (847.1) 아담이 대항하지 않고 놋 족속에게 첫째 동산을 넘겨주고 떠나기로 했을 때, 그와 추종자들은 서쪽으로 갈 수 없었는데, 에덴 사람들이 그런 바다 모험에 적당한 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북쪽으로 갈 수 없었다. 북쪽의 놋 족속이 이미 에덴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그들은 남쪽으로 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 지역의 산에는 적대하는 부족들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열려 있는 유일한 길은 동쪽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당시에 쾌적했던 지역을 향하여 동쪽으로 여행했다. 뒤에 남았던 많은 사람이 나중에 동쪽으로 여행하여, 유역에 있는 아담 족속의 새 집에서 그들과 합쳤다.
76:0.2 (847.2) 카인과 산사는 모두 아담의 카라반이 메소포타미아의 두 강 사이의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에 태어났다. 산사의 어머니 라오타는 딸이 태어날 때 죽었다. 이브는 많이 고생했지만 우수한 체력 때문에 살아남았다. 이브는 라오타의 아이 산사를 품에 안았고, 산사를 카인과 함께 길렀다. 산사는 자라서 큰 능력을 가진 여자가 되었다. 산사는 사르간의 아내가 되었는데, 사르간은 북쪽 청인 종족의 우두머리였고, 그 시절에 청인의 진보에 기여하였다.
76:1.1 (847.3) 아담의 카라반이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기까지 거의 1년이 꼬박 걸렸다. 그 강이 홍수로 넘쳐 있음을 발견하고, 둘째 동산이 되도록 정해진, 강들 사이의 땅으로 건너가기 전에, 그들은 거의 6주 동안 개울 서쪽의 평야에서 야영(野營)한 채로 남아 있었다.
76:1.2 (847.4) 에덴 동산의 임금이자 높은 사제가 행진해 오고 있다는 말이 둘째 동산 땅의 거주자들의 귀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서둘러 동쪽 산지로 달아났다. 아담은 도착했을 때 그가 바라던 영토가 다 비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여기 이 새 자리에서 아담과 그를 돕는 자들이 새 집을 짓고, 문화와 종교의 새 중심을 세우는 작업에 착수했다.
76:1.3 (847.5) 이 장소는 아담이 알기로, 반과 아마돈이 제안한 동산을 지으려고 가능한 자리를 선택하라고 임명받은 위원회가 택한 최초의 세 장소 중의 하나였다. 두 강 자체가 그 시절에 좋은 천연 방어물이었고, 둘째 동산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져서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이 가까워지기 때문에, 남쪽에, 강들 사이의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서, 90킬로미터나 뻗는 방어벽을 세울 수 있었다.
76:1.4 (847.6) 새 에덴에서 자리를 잡은 뒤에, 투박한 생활 방법을 채택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온통 참말인 듯했다. 자연은 다시 한 번 멋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이제 아담 족속은 불친절한 자연과 필사 존재의 여러 모순과 마주친 가운데, 준비되지 않은 흙으로부터 생계를 잇고 생활의 현실을 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첫째 동산이 그들을 위하여 어느 정도 준비된 것을 발견했지만, 둘째 동산은 바로 자신들의 손이 일함으로 “얼굴에 땀을 흘려” 창조되어야 했다.
76:2.1 (848.1) 카인이 태어난 뒤 2년이 채 안 되어 아벨이 태어났는데, 그는 둘째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 사이에 태어난 첫 아이였다. 자라서 12살이 되었을 때 아벨은 목동이 되기를 택하고 카인은 농업에 종사하기를 선택했다.
76:2.2 (848.2) 자, 그 시절에는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을 사제에게 바치는 것이 관습이었다. 목자는 양 떼를 가져오고, 농부는 들의 열매를 가져오곤 했다. 이 풍습에 따라서, 카인과 아벨은 마찬가지로 사제들에게 때마다 예물을 드렸다. 두 소년은 여러 번 자기의 직업이 비교해서 더 좋다고 다투었고, 아벨은 그가 동물 희생을 바치는 것이 우대받는다고 재빨리 지적하였다. 카인은 첫째 에덴의 전통, 즉 들의 열매가 예전에 우대된 것을 들어 항의했지만 헛일이었다. 아벨은 이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좌절에 빠진 형을 조롱하였다.
76:2.3 (848.3) 첫째 에덴 시절에 아담은 동물 잡아바치기를 그만두게 하려고 정말로 애썼고, 그래서 카인은 그의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는 선례가 있었다. 그러나 둘째 에덴의 종교 생활을 조직하기는 힘들었다. 아담은 건축ㆍ방어ㆍ농업의 일과 관련된 수많은 미세한 일을 책임지고 있었다. 영적으로 많이 풀이 죽었기 때문에, 그는 예배와 교육의 조직을 첫째 동산에서 그런 자격으로 일했던, 놋의 피를 받은 사람들에게 맡겼다. 아주 짧은 사이에도, 예식을 거행하는 놋 족속 사제들은 아담 이전 시절의 기준과 규칙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76:2.4 (848.4) 두 소년은 결코 잘 어울린 적이 없었고, 이 희생물 바치는 문제는 그들 사이에 미움이 커지도록 더욱 부채질하였다. 아벨은 그가 아담과 이브 두 사람의 아들인 것을 알았고, 카인에게 아담이 그의 아버지가 아닌 것을 어김없이 강조하였다. 아버지가, 청인과 홍인과 섞이고 또 토종 안돈 핏줄과 나중에 섞인 놋 족속 출신이었으니까, 카인은 순수한 보라종이 아니었다. 이 모두가, 카인의 타고난 호전적 유산과 함께, 그로 하여금 동생을 더욱 미워하는 마음을 품게 만들었다.
76:2.5 (848.5) 그들 사이에 긴장이 마침내 해결되었을 때 그 소년들은 각각 열 여덟과 스물이었는데, 어느 날 아벨의 빈정거리는 말이 싸우기 좋아하는 형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게 만들었고, 그래서 카인은 진노하여 달려들어 그를 죽였다.
76:2.6 (848.6) 아벨의 행동을 지켜보면 인품 발달의 요인으로서, 환경과 교육이 얼마큼 가치있는가 확증한다. 아벨은 이상적 유전(遺傳)을 물려받았고, 유전은 모든 인품의 바닥에 놓여 있다. 그러나 열등한 환경의 영향은 이 훌륭한 유산을 거의 상쇄해 버렸다. 아벨은, 특히 어린 시절에 불리한 주위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스물다섯이나 서른까지 살았더라면, 그는 도무지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훌륭한 유전이 그때 저절로 나타났을 것이다. 저질의 유전에서 생긴 인격의 장애를 정말로 극복하는 데는 좋은 환경이 크게 기여할 수 없지만, 나쁜 환경은, 적어도 인생에서 어린 시절에, 뛰어난 유전을 아주 실질적으로 망쳐 놓을 수 있다. 좋은 사회 환경과 적당한 교육은 좋은 유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데 필수인 토양이요 상황이다.
76:2.7 (849.1) 아벨의 죽음은 개들이 주인 없는 양 떼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부모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카인은 아담과 이브에게 그들의 어리석은 짓을 생각나게 하는 섬뜩한 사람이 빨리 되고 있었고, 그들은 동산을 떠나려는 그의 결심을 북돋아 주었다.
76:2.8 (849.2)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카인이 책임의 불이행을 상징했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카인의 생활은 반드시 행복하지는 않았다. 동료들이 그에게 불친절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리에 있는 것을 동료들이 의식하지 못하면서 분개하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아무런 부족 표시를 지니지 않았으니까, 그를 어쩌다 만나는 첫 이웃 부족 사람들의 손에 죽게 될 것을 카인은 알았다. 두려움과 얼마큼의 후회 때문에 그는 뉘우치게 되었다. 카인에게 한 번도 조절자가 깃든 적이 없었고, 그는 언제나 가족의 징계에 반대하고 아버지의 종교를 멸시해 왔다. 그러나 이제 그는 어머니 이브에게 가서 영적 도움과 안내를 부탁했고, 신의 도움을 정직하게 구했을 때, 한 조절자가 그에게 깃들었다. 그리고 이 조절자가 안에 깃들고 바깥을 내다보면서, 카인에게 뚜렷하게 우수한 장점을 주었고, 이것이 그로 하여금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는 아담 부족 사람으로 취급하게 만들었다.
76:2.9 (849.3) 그래서 카인은 놋의 땅을 향하여, 둘째 동산의 동쪽으로 떠났다. 그는 아버지 민족의 한 집단에서 큰 지도자가 되었고, 어느 정도 세라파타시아의 예언을 이루었는데, 왜냐하면 그가 일생에 걸쳐서 놋 족속의 이 지파와 아담 족속 사이에 평화를 촉진했기 때문이다. 카인은 먼 사촌 레모나와 결혼했고, 첫 아들 에녹은 엘람의 놋 족속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리고 몇백 년 동안, 엘람 족속과 아담 족속은 줄곧 평화를 지켰다.
76:3.1 (849.4) 둘째 동산에서 세월이 지나자 실패의 결과는 더욱 분명해졌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시아로 추방된 아이들 뿐 아니라, 아름답고 고요한 옛 집을 대단히 그리워했다. 이 훌륭한 쌍이 그 땅에서 보통 육체의 지위로 떨어진 것을 지켜보는 것은, 참으로 애처로웠다. 그러나 그들은 품위와 용기로 낮아진 지위를 견디었다.
76:3.2 (849.5) 아담은 지혜롭게도 아이들과 그 동료들에게 국가 행정, 교육 방법, 종교적 헌신을 훈련시키느라고 시간의 대부분을 썼다. 이런 선견이 없었다면, 그가 죽고 나서 큰 혼란이 생겼을 것이다. 실제로 일어난 바와 같이, 아담의 죽음은 그의 민족의 일을 운영하는 데 아무런 차이를 가져오지 않았다. 아담과 이브가 죽기 훨씬 전에, 자식과 추종자들이 에덴에서 영화로웠던 시절을 차츰 잊기를 배웠다는 것을 그들은 깨달았다. 그 추종자의 대다수가 에덴의 장려함을 잊어버린 것은 다행이었다. 불행한 환경에 대하여 그들이 지나친 불만을 품는 일은 그다지 있을 듯하지 않았다.
76:3.3 (849.6) 아담 족속의 국가 통치자는 유전적으로 첫째 동산의 아들들로부터 나왔다. 아담의 첫 아들 아담손(아담 벤 아담)은 둘째 에덴의 북쪽에서 보라 인종의 2차 중심을 세웠다. 아담의 둘째 아들 이브손은 솜씨 있는 지도자요 행정가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브손은 아담만큼 오래 살지 못했고, 그의 큰아들 잔삿은 아담 부족들의 우두머리로서 아담의 후계자가 되었다.
76:3.4 (849.7) 종교 지도자, 곧 사제들은 셋으로부터 생겼고, 그는 둘째 동산에서 태어나고 살아 있는 아담과 이브의 아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는 아담이 유란시아에 도착한 지 129년이 지난 뒤에 태어났다. 셋은 아버지 민족의 영적 지위를 개선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고, 둘째 동산에서 새 사제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의 아들 에노스는 새로운 체제로 드리는 예배의 기초를 놓았고, 손자 케난은 주위의 가까운 부족과 먼 부족들에게 대외 선교 봉사를 시작했다.
76:3.5 (850.1) 셋의 사제직은 세 가지 일을 하는 사업이었고, 종교와 건강과 교육을 포함했다. 이 서열의 사제들은 종교 의식을 거행하고, 의사(醫師)와 위생 검사자로서 일하며, 동산의 여러 학교에서 선생으로 행동하도록 훈련을 받았다.
76:3.6 (850.2) 아담의 카라반은 첫째 동산에서 몇백 가지의 식물과 곡식의 씨앗ㆍ구근(球根)을 강들 사이의 땅으로 가져갔다. 그들은 또한 수두룩한 양 떼와 온갖 종류의 길들인 동물을 얼마큼 데리고 갔다. 이 때문에, 그들은 둘러싼 부족들보다 큰 장점을 소유했다. 그들은 처음 동산에서 가졌던 옛 문화의 이득을 많이 누렸다.
76:3.7 (850.3) 첫째 동산을 떠날 때까지 아담과 그의 가족은 언제나 과일ㆍ곡식ㆍ견과를 먹고 살았다. 메소포타미아로 가는 길에 처음으로 약초와 채소를 먹었다. 고기를 먹는 것은 일찍부터 둘째 동산에 소개되었으나, 아담과 이브는 정규 식사(食事)의 일부로서 결코 고기를 먹지 않았다. 아담손이나 이브손이나, 또는 첫째 동산에서 태어난 첫째 세대의 다른 아이들도, 육식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다.
76:3.8 (850.4) 아담 족속의 문화적 업적과 지적 발달은 둘러싼 민족들을 크게 능가했다. 그들은 세 번째 알파벳을 만들었고, 그밖에도 현대의 예술ㆍ과학ㆍ문학의 선조인 많은 것의 기초를 놓았다. 여기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땅에서 그들은 글쓰기, 금속 가공, 도자기 만들기, 천 짜기 기술을 유지했고, 사람들은 그들이 만든 종류의 건축을 수천 년 동안 능가하지 못했다.
76:3.9 (850.5) 보라 종족들의 가정 생활은 그들이 살던 시대에 이상적이었다. 아이들은 농업, 장인(匠人)의 기술, 동물 기르기의 훈련 과정을 받거나, 아니면 사제ㆍ의사ㆍ선생이 되는 셋 사람의 세 가지 의무를 수행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76:3.10 (850.6) 그리고 셋 사람의 사제직을 생각할 때, 높은 생각을 가지고, 건강과 종교를 가르쳤던 고귀한 선생, 이 참 교육자들을 후일의 부족과 둘러싼 나라들에 있던 천하고 상업적인 사제직과 혼동하지 말지어다. 신과 우주에 관한 그들의 종교 개념은 진보되었고, 얼마큼 정확하며, 그들의 건강 규칙은 당대에 뛰어났고, 그 뒤로 사람들이 그들의 교육 방법을 결코 능가한 적이 없다.
76:4.1 (850.7) 아담과 이브는 사람 가운데 보라 인종, 유란시아에서 아홉 번째로 나타난 인종의 시조였다. 아담과 그의 자손은 푸른 눈을 가졌고, 보라 민족은 흰 살결과 밝은―노란 색, 붉은 색, 갈색―머리털의 특징을 가졌다.
76:4.2 (850.8) 이브는 아이를 낳을 때 산통을 겪지 않았다. 초기의 진화 종족들도 그렇지 않았다. 오로지 진화한 사람이 놋 족속, 그리고 나중에 아담 족속과 결합해서 생긴 혼합된 종족들이 심한 출산의 아픔을 겪었다.
76:4.3 (851.1)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에 있는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영양으로 에너지를 받았고, 음식과 빛을 먹고 살면서, 유란시아에서 밝혀지지 않은, 물질을 초월하는 어떤 에너지로 보충되었다. 유란시아에서 낳은 그들의 자손은 에너지를 흡수하고 빛을 순환시키는 부모의 자질을 물려받지 않았다. 그들은 한 가지 순환을 가지고 있었고, 피로 영양을 받는 인간 종류의 순환이었다. 오래 살기는 했어도 그들은 반드시 죽도록 고안되었다. 하지만 수명은 뒤잇는 각 세대마다 인간의 평균을 향하여 줄어들었다.
76:4.4 (851.2) 아담과 이브와 첫 세대의 아이들은 동물의 고기를 먹을 것으로 쓰지 않았다. 온통 “나무의 열매”만 먹고 살았다. 첫 세대 뒤에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유제품을 먹기 시작했지만,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이 고기 없는 식사를 계속 따랐다. 그들과 나중에 연합한 남쪽 부족들의 다수도 또한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이 채식하는 부족들의 대부분은 동쪽으로 옮겨 갔고, 이제는 인도 민족들 안에서 섞인 채로 살아남았다.
76:4.5 (851.3) 아담과 이브의 육체적ㆍ영적 시력(視力)은 모두 오늘날의 민족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들의 특별한 감각은 훨씬 더 날카로웠으며, 그들은 중도자와 천사 무리, 멜기세덱, 그리고 몰락한 영주 칼리가스티아를 볼 수 있었고, 영주는 그의 고귀한 후계자와 의논하러 몇 차례 왔다. 그들은 실패가 있은 뒤에 1백 년이 넘도록 이 하늘 존재들을 보는 능력을 지녔다. 아이들의 경우에 이 특별한 감각은 그다지 날카롭지 않았고, 뒤잇는 각 세대마다 줄어드는 경향이 있었다.
76:4.6 (851.4) 아담의 아이들에게는 대체로 조절자가 깃들었는데, 이는 그들 모두가 의심할 여지 없이, 살아남을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우수한 자손은 진화된 아이들처럼 두려움에 지배되지 않았다. 유란시아의 현대 민족들은 두려움이 아주 많은데, 종족의 신체를 개량하려는 계획을 일찍부터 그르쳐서, 너희 조상이 아담의 생명질을 아주 적게 받았기 때문이다.
76:4.7 (851.5) 물질 아들과 그 자손의 몸 세포는 행성에서 태어난 진화 존재보다 훨씬 더 질병에 저항력이 있다. 토착 종족들의 몸 세포는 이 땅에서 질병을 일으키는, 미세하고 극미한 살아 있는 유기체와 비슷하다. 이 사실은 어째서 유란시아 민족들이 그렇게 많은 신체의 질병을 물리치려고 과학적 노력을 기울여 그토록 많이 수고해야 하는가 설명한다. 너희 종족들이 아담의 생명을 더 지녔더라면, 너희는 훨씬 더 질병에 저항력이 있을 것이다.
76:4.8 (851.6) 유프라테스 강가의 둘째 동산에서 자리를 잡은 뒤, 아담은 그가 죽은 뒤에 세상을 이롭게 하려고, 그의 생명질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남기기를 택했다. 따라서, 이브는 12명으로 구성된 종족 개량 위원회의 우두머리에 임명되었고, 아담이 죽기 전 이 위원회는 유란시아에서 가장 높은 종류의 여자 1682명을 골랐으며, 이 여자들은 아담의 생명질로 아이를 배었다. 그들이 낳은 아이들은 112명을 제외하고, 모두 어른이 되기까지 자랐고, 그래서 이 방법으로 세계는 우수한 남자와 여자 1570명을 보탬으로 이득을 보았다. 이 어머니 후보자들은 둘러싼 모든 부족으로부터 선택되었고, 땅에 있는 대부분의 종족들을 대표했다. 대다수는 놋 족속의 가장 높은 핏줄로부터 선택되었고, 그들은 막강한 안드 종족의 옛 시조였다. 이 아이들은 각자 어머니의 부족 환경에서 태어나고 거기서 자랐다.
76:5.1 (851.7) 둘째 에덴을 세운 뒤에 오래지 않아서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뉘우침이 받아들일 만하고, 비록 그들이 그 세계의 필사자의 운명을 겪도록 정해지기는 했어도, 분명히 유란시아의 잠자는 생존자 계열에 들어갈 자격을 얻을 것이라고 공식 통지를 받았다. 멜기세덱들이 매우 감동스럽게 선포한 복음, 그들이 부활하고 회복될 것이라는 이 복음을 그들은 완전히 믿었다. 그들이 저지른 죄는 판단을 잘못한 때문이었고, 의식하면서 일부러 반항하여 저지른 죄는 아니었다.
76:5.2 (852.1)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 시민으로서 생각 조절자를 가지지 않았고, 유란시아에서 첫째 동산에서 활동했을 때 조절자가 그들에게 깃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필사자의 지위로 떨어진 뒤에 얼마 있다가, 그들은 안에 새로운 계심을 의식하게 되었고, 진지하게 뉘우침과 더불어, 인간의 지위가 조절자로 하여금 그들 안에 깃들 수 있게 만든 것을 깨달았다. 조절자가 안에 깃드심을 이렇게 안 것은 그들의 남은 생애를 통하여 내내, 아담과 이브의 마음을 크게 기쁘게 하였다. 사타니아의 물질 아들로서 실패한 것을 알았지만, 그들은 또한 우주에서 하늘 가는 아들로서, 파라다이스로 가는 생애가 아직도 그들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76:5.3 (852.2) 아담은 그가 행성에 도착함과 동시에 섭리 시대의 부활이 일어난 것을 알았고, 아마도 다음 서열의 아들이 오는 것과 관련하여 그와 아내가 다시 인격화되리라 믿었다. 그는 이 우주의 군주 미가엘이 오래지 않아 유란시아에 나타날 것을 몰랐다. 그는 다음에 도착할 아들은 아보날 계급에 속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담과 이브가 미가엘로부터 받은 말씀, 유일한 개인적인 말씀을 곰곰이 생각한 것은 무언가 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늘 위안이 되었다. 우정과 위로를 나타내는 다른 말씀 가운데, 전해온 이 소식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너희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형편을 고려했고, 내 아버지의 뜻에 늘 충성하려는, 너희 마음 속의 소망을 기억하였노라. 내가 유란시아로 올 때, 그 전에 내 영역에서 하위의 아들들이 너희를 부르지 않는다면, 너희는 필사의 잠의 품에서 깨어나도록 부름을 받으리라.”
76:5.4 (852.3) 그리고 이것은 아담과 이브에게 큰 신비였다. 그들은 이 말씀에서 아마도 그들이 특별히 부활한다는 약속 비슷한 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러한 가능성은 그들의 마음을 크게 기쁘게 했지만,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몸소 나타나시는 것과 관련된 부활이 있을 때까지 그들이 쉴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무슨 뜻인가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래서 에덴의 부부는 하나님의 아들 한 분이 언젠가 오시리라 언제나 선포했고, 그들이 실수하고 슬픔을 겪은 세계가 아마도, 이 우주 통치자가 파라다이스의 수여 아들로서 활동하려고 선택하는 영역이 될지 모른다는 믿음, 적어도 몹시 바라는 희망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알려 주었다. 이 소식은 너무 좋아서 참말이 아닌 듯 보였어도, 아담은 전쟁으로 상처받은 유란시아가 결국, 사타니아 체계에서 가장 운이 좋은 세계, 온 네바돈이 부러워하는 행성인 것이 입증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품어 보았다.
76:5.5 (852.4) 아담은 530 년 동안 살았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라고 할까 싶은 것으로 죽었다. 육체 작용이 단지 낡아 버렸던 것이다. 붕괴하는 과정이 고치는 과정을 차츰차츰 따라잡았고, 피할 수 없는 끝이 다가왔다. 이브는 심장이 약해져서 19년이나 앞서 죽었다. 그들은 모두 신성하게 예배하는 성전 가운데에 묻혔고, 이 성전은 그 거류지의 담이 완성된 뒤에 얼마 안 되어, 그들의 계획에 따라서 전에 지었다. 그리고 이것이 예배하는 장소의 마루 밑에, 이름나고 경건한 남녀를 묻는 관습의 기원이었다.
76:5.6 (852.5) 유란시아의 초물질 정부는 멜기세덱들의 지휘 하에 계속되었으나, 진화하는 종족들과 직접 육체로 접촉하는 일은 두절되었다. 행성 영주의 유형(有形) 참모진이 도착했던 그 아득히 먼 시절부터, 반과 아마돈의 시절을 거쳐서 아담과 이브가 도착할 때까지, 육체를 가진 우주 정부 대표들은 행성에서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담의 실패와 함께, 45만 년이 넘는 기간에 걸치는 이 체제는 끝이 났다. 영적 분야에서, 돕는 천사들은 생각 조절자들과 함께 줄곧 투쟁하였고, 그들 모두가 개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영웅처럼 일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시절에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도착할 때까지, 멀리 미치는 세계 복지를 위하여 아무런 포괄적 계획이 땅에 있는 필사자들에게 선포되지 않았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력과 참을성과 권한을 가지고, 불행한 유란시아를 개선하고 영적으로 회복하는 일을 진전시키기 위하여 기초를 쌓았다.
76:5.7 (853.1) 그러나 불운만이 유란시아의 운명은 아니었다. 이 행성은 또한 네바돈 지역 우주에서 가장 운이 좋았다. 조상의 잘못과 초기의 세계 통치자들의 실수가 행성을 그렇게 희망 없는 혼란된 상태로 곤두박질하게 만들고, 죄와 악으로 인하여 더욱 진창이 되었다면, 유란시아인은 바로 이 어두운 배경이 네바돈 미가엘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하는 성격을 드러낼 무대로서 이 세계를 고른 것을 모두 이득으로 계산해야 한다. 유란시아가 그 얽히고 설킨 사무를 바로잡는 데 창조 아들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유란시아에서 죄와 악은 창조 아들에게,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비할 데 없는 사랑과 자비와 참을성을 드러낼, 더군다나 뚜렷한 배경을 마련해 주었다.
76:6.1 (853.2) 아담과 이브는 그들이 언젠가,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서 저택 세계들에서 인생을 다시 시작하리라고 멜기세덱들이 약속한 것을 굳게 믿고서 죽음의 휴식으로 들어갔으며, 저택 세계 모두가 유란시아에서 보라 인종의 물질적 육체를 입고 사명을 시작하기 전 시절에 그들에게 아주 익숙한 세상이었다.
76:6.2 (853.3) 그들은 그 영역의 필사자의 망각, 의식 없는 잠에 빠져 오랫동안 쉬지 않았다. 아담이 죽은 뒤에 셋째 날, 경건한 장례식을 치르고 둘째 날에, 에덴시아의 임시 최고자의 지지를 받고, 구원자별에 계시고 미가엘을 대행하는 늘 하나된 이의 승인을 받은 라나포지의 명령을 가브리엘이 받았는데, 이것은 유란시아에서 아담의 실패가 있었을 때 탁월한 생존자들의 특별 점호를 지시했다. 그리고 유란시아 시리즈에서 제 26번 특별 부활을 지시하는 이 명령에 따라서, 아담과 이브는 첫째 동산의 체험에서 동료였던 1316명과 함께, 사타니아 저택 세계의 부활실에서 다시 인격을 얻고 다시 조립되었다. 충성한 많은 다른 사람은 아담이 도착할 때 이미 옮겨져 있었고, 뒤이어 잠자는 생존자와 자격을 갖춘 살아 있는 승천자들의 섭리 시대 판결이 내렸다.
76:6.3 (853.4)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에서 시민권을 얻을 때까지, 진보해서 올라가는 세계들을 빨리 거쳤고, 기원이 있던 행성에서 다시 한 번, 그러나 이때는 다른 계급의 우주 성격자의 일원으로서 거주자가 되었다. 그들은 영구(永久) 시민―하나님의 아들―로서 예루셈을 떠났는데, 하늘 가는 시민―사람의 아들―로서 돌아왔다. 그들은 체계의 서울에서 유란시아 근무에 즉시 부속되었고, 나중에 현재 유란시아의 자문ㆍ통제 기관을 구성하는 24 상담자 가운데 회원 자격을 받았다.
76:6.4 (854.1) 이렇게 유란시아의 행성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끝난다. 이것은 시련ㆍ비극ㆍ승리의 이야기, 좋은 의도를 가졌어도 속임에 넘어간 물질 아들과 딸에게, 적어도 개인적으로 승리한 이야기이며, 의심할 여지 없이, 마지막에 그들의 세계, 그리고 반란으로 뒤집히고 악에 시달렸던 그 거주자들에게는 궁극에 승리한 이야기이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보건대, 아담과 이브는 급속히 움직이는 문명에 힘차게 이바지했고, 인류의 생물학적 진보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들은 땅에서 큰 문화를 남겼지만, 아담의 유전(遺傳)이 일찍부터 묽어지고 궁극에 가라앉게 된 마당에, 그러한 진보된 문명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문명을 만드는 것은 민족이요, 문명이 민족을 만들지 않는다.
77:0.1 (855.1) 네바돈에서 사람 사는 세계들의 대부분은 하나 이상 되는 집단의 독특한 존재들을 품고 있는데, 그들은 그 영역의 필사자와 천사 계급 사이의 가운데쯤에 생명이 활동하는 수준에서 존재한다. 그래서 그들을 중도인(中道人)이라 부른다. 시간 시계에서 어쩌다가 생긴 듯하지만, 그들은 아주 널리 퍼져 있고 돕는 자로서 아주 소중하며, 그래서 우리는 모두, 행성의 통합된 봉사에서 그들을 하나의 필수 계급으로 받아들인 지 오래다.
77:0.2 (855.2) 유란시아에는 뚜렷이 다른 두 계급의 중도자들이 활동한다. 1차 군단, 곧 선임 군단은 달라마시아 시절에 생겼고, 2차 군단, 곧 젊은 집단의 기원은 아담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77:1.1 (855.3) 1차 중도자들은 유란시아에서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이 독특하게 서로 연결된 데서 기원을 가진다. 우리는 다른 세계와 다른 체계에서 비슷한 생물이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다른 기법으로 생겨났다.
77:1.2 (855.4) 진화하는 행성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연달아 수여되는 것은 그 땅의 영적 질서 에서 두드러진 변화를 일으키고, 때때로 한 행성에서 영적 대리자와 물질 대리자들이 서로 관계하는 작용을 아주 고쳐서,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는 것이 좋다. 영주 칼리가스티아 참모진의 유형(有形) 참모 1백 명의 지위는 바로 그러한 독특한 상호 관계를 보여준다. 그들은 예루셈에서 하늘 가는 상물질 시민으로서, 자식 낳는 특권이 없는 초물질 인간이었다. 유란시아에서, 행성에서 내려가서 봉사하는 자로서, (나중에 그들 가운데 더러가 그렇게 한 바와 같이) 그들은 물질 자손을 낳을 수 있고 남녀가 다른 물질 인간이었다. 어떻게 이 1백 명이 초물질 수준에서 부모 노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지만,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유형 참모진의 남자와 여자가 초물질로 (성교 아닌 방법으로) 연결한 것은 처음으로 1차 중도자 자식이 나타나게 만들었다.
77:1.3 (855.5) 필사자와 천사(天使), 이 두 수준 중간에 있는 이 계급의 생물은, 영주 본부의 사무를 수행하는 데 크게 쓸모가 있으리라는 것이 즉시 발견되었고, 따라서 유형 참모진에서 각 쌍은 비슷한 존재를 생산하라고 허락을 받았다. 이 노력은 첫째 집단에서 중도인 50명을 낳았다.
77:1.4 (855.6) 이 독특한 집단의 일을 1년 동안 지켜본 뒤에, 행성 영주는 제한 없이 중도자의 생산을 허가했다. 이 계획은 자식 낳는 힘이 계속되는 한 수행되었고, 따라서 최초 집단, 50,000명이 생겨났다.
77:1.5 (856.1) 각 중도자를 낳는 사이에 반년의 기간이 끼었고, 그러한 존재 1천 명이 각 쌍에게 태어나자, 결코 더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1천 번째 자식이 나타난 뒤에 어째서 이 힘이 소모되었는지 전혀 설명할 수 없다. 아무리 더 실험해도 실패밖에 아무 결과가 없었다.
77:1.6 (856.2) 이 생물은 영주의 행정에서 정보(情報) 군단을 구성했다. 그들은 두루 돌아다녔고, 세계의 종족들을 연구하고 지켜보고, 행성 본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인간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영주와 그 참모진의 작업에 다른 소중한 봉사를 베풀었다.
77:1.7 (856.3) 이 체제는 행성에서 반란이 있던 비극의 시절까지 이어졌는데, 이 반란은 1차 중도자 가운데 5분의 4를 조금 넘게 덫에 걸리게 만들었다. 충성한 무리는 멜기세덱 관리자들을 위한 봉사에 들어갔고, 아담의 시절까지, 이름뿐의 지도자인 반의 밑에서 활동했다.
77:2.1 (856.4) 이것이 유란시아 중도인의 기원ㆍ성품ㆍ활동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두 계급―1차와 2차―사이의 친척 관계는, 행성에서 반란이 있던 시절부터 아담의 시절까지, 영주 칼리가스티아의 유형 참모진의 모반 참모들로부터 내려온 혈통을 따르기 위해서, 이 시점에서 1차 중도자 이야기를 중단하는 것을 필요하게 만든다. 둘째 동산의 초기 시절에, 2차 계급 중도인(中道人) 조상의 절반을 제공한 것은 바로 이 유전의 혈통이었다.
77:2.2 (856.5) 영주의 참모진에서 육체를 가진 참모들은 그들의 특별 계급이 안돈 부족의 선택된 핏줄의 품질과 합쳐진, 통합 품질을 몸에 담은 자손을 낳는 계획에 참여할 목적으로, 남자와 여자로 구성되었다. 이 모두가 나중에 아담이 나타날 것을 예상한 것이다. 생명 운반자들은 영주 참모진의 합동 자손과 아담과 이브의 1대 자손의 연합을 포함하는, 새 종류의 필사자를 전에 계획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새 계급의 행성 인간을 예상하여 계획을 세웠고, 이 사람들이 인간 사회에서 선생이자 통치자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한 존재들은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다스리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이 거의 완전히 유산되었으니까, 유란시아가 이처럼 인자한 지도력과 비할 데 없는 문화를 가진, 얼마나 훌륭한 귀족을 빼앗겼는지 우리는 결코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유형 참모진이 나중에 자식을 낳았을 때, 그것은 반란이 있은 뒤, 그들이 체계의 생명 흐름과 연락을 빼앗긴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77:2.3 (856.6) 반란 이후 시대에 유란시아에는 특별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 위대한 문명이―달라마시아의 문화가―붕괴하고 있었다. “그 시절에 네비림(놋 족속)이 땅에 있었고, 이 신들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가서 저희에게 아이들을 낳아 주었으니, 이 아이들은 ‘옛날의 용사’요 ‘이름난 사람’이었더라.” 그 참모진과 그 초기 후손은 도저히 “신들의 아들들”이라 할 수 없어도, 그 아득한 시절에 진화하는 필사자들은 이들을 그렇게 여겼다. 전통에 따르면 이들의 키조차 과장되었다. 그러면 이것이 땅에 내려와서, 거기서 사람의 딸들과 함께 고대(古代) 영웅의 민족을 낳은 신들에 대한, 거의 보편적인 민속(民俗) 이야기의 기원이다. 그리고 이 모든 전설은 둘째 동산에서 나중에 나타나는 아담 족속의 종족 혼합과 더욱 혼동하게 되었다.
77:2.4 (857.1) 영주 참모진의 유형(有形) 참모 1백 명이 안돈의 인간 혈통의 생식질(生殖質)을 지녔으니까, 그들이 성교로 번식에 들어가면, 그 후손은 다른 안돈 족속 부모의 자손을 아주 닮을 것이라고 자연히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그 참모진에서 모반자 60명, 곧 놋을 따르던 자들이 실제로 성교로 번식에 들어갔을 때, 생겨난 아이들은 거의 모든 면에서 안돈 족속과 산긱 민족들보다 훨씬 우수한 것이 판명되었다. 예기하지 않았던 이 탁월성은 육체와 지능의 품질 뿐 아니라, 영적 능력에서도 특징이 나타났다.
77:2.5 (857.2) 놋 족속의 첫 세대에서 나타나는 이 돌연 변이의 특성은 안돈 족속 생식질의 유전 인자(因子)의 배치와 화학적 구성 요소에서 일어난 어떤 변화로부터 생겨났다. 참모들의 몸 안에 있는, 생명을 유지하는 사타니아 체계의 강력한 회로가 이런 변화를 일으켰다. 이 생명 회로는 특화된 유란시아 형의 염색체로 하여금 네바돈에서 예정한 생명 표현 중에 사타니아 특화의 표준화된 형태와 비슷하게 다시 조직하도록 만들었다. 체계의 생명 흐름의 작용으로 생식질을 변화시키는 이 방법은 유란시아 과학자들이, X선을 이용하여, 식물과 동물의 생식질을 수정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77:2.6 (857.3) 이렇게 놋 민족들은 안돈 족속 기여자의 몸에서 유형 참모들의 몸으로 아발론 외과 의사들이 옮긴 생명질에서 일어난 변화, 어떤 특이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변화로부터 생겨났다.
77:2.7 (857.4) 생식질을 기여한 안돈 족속 1백인은 그 대신 생명나무를 보완하는 유기체를 소유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타니아 생명의 흐름이 마찬가지로 그들의 몸에 투입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참모진을 따라서 반란에 참여한 수정된 안돈 족속 44명도 자기들끼리 짝짓고, 놋 민족의 상급 혈통에 크게 이바지했다.
77:2.8 (857.5) 안돈 족속의 수정된 생식질을 지닌 104명을 포함하는 이 두 집단은 놋 족속의 조상을 이루며, 그들은 유란시아에 나타난 여덟째 종족이었다. 유란시아에서 인간 생명의 이 새로운 모습은, 이것이 예기하지 않았던 발전의 하나라는 것을 제쳐놓고, 생명 수정 세계로서 이 행성을 이용하는 최초의 계획이 작용하는 또 다른 국면을 나타낸다.
77:2.9 (857.6) 순수 핏줄의 놋 족속은 훌륭한 종족이었으나, 차츰 땅의 진화 민족들과 함께 섞였고, 얼마 안 되어 크게 질이 저하되었다. 반란이 있은 지 1만 년이 되자, 그들의 평균 수명은 진화 종족들보다 거의 길지 않은 점까지 쇠퇴하였다.
77:2.10 (857.7) 놋 족속의 후기 수메르 후손이 만든 진흙 서판 기록을 고고학자들이 파낼 때, 수메르 왕들의 목록이 몇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기록들이 거슬러 올라갈수록, 개별 임금의 통치는 25년이나 30년에서부터 150년 이상으로 길어진다. 이 옛 왕들의 통치가 이렇게 길어지는 것은 옛날 놋 족속 통치자들 가운데 더러는 (영주 참모진의 직계 후손) 후일에 계승한 자들보다 더 오래 살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또한 왕조를 달라마시아까지 거슬러 올라가 연장하려고 애쓴 것을 가리킨다.
77:2.11 (857.8) 그렇게 오래 산 개인들의 기록은 또한 시간을 재는 단위로서 달과 해를 혼동했기 때문이다. 성서에 아브라함의 족보에서, 그리고 중국인의 옛 기록에서도 이것을 관찰할 수 있다. 28일로 된 한 달, 곧 한 기간을 나중에 소개된, 350일이 넘는 해와 혼동한 것이 사람이 그토록 오래 살았다는 전통에 책임이 있다. 9백 “해”가 넘도록 산 사람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 기간은 70년이 채 못되고, 그러한 생애는, 나중에 “고희(古稀)”라고 부르게 되었다시피, 오랜 세월 동안 대단히 나이 많은 것으로 여겼다.
77:2.12 (858.1) 한 달을 28일로 시간을 계산하는 것은 아담의 시절 이후로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나 에집트인이 약 7천 년 전에, 달력의 개혁에 착수했을 때, 그들은 아주 정밀하게 일을 했고, 365일로 된 1년을 소개했다.
77:3.1 (858.2) 달라마시아가 물 밑에 가라앉은 뒤에, 놋 족속은 북쪽과 동쪽으로 옮겨 갔고, 대번에 새 도시 딜문을 그들의 민족과 문화의 본부로 세웠다. 놋이 죽은 뒤에 약 5만 년이 되어, 영주 참모진의 후손이 새 도시 딜문을 바로 둘러싸는 땅에서 생계를 잇기에 너무 많아졌을 때, 그리고 그들이 뻗어나가서 경계에 인접하는 안돈 및 산긱 부족들과 서로 결혼한 뒤에, 그들 종족의 단결을 유지하려고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그 지도자들의 머리에 떠올랐다. 따라서 부족들의 회의가 열렸고, 많이 의논을 거친 뒤에, 놋의 후손 바블롯의 계획이 승인되었다.
77:3.2 (858.3) 바블롯은 그때 그들이 차지한 영토의 중심에 위세가 당당해 보이는 종족 찬양의 전당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이 전당(殿堂)에는 세계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그런 종류의 탑을 세울 것이었다. 그 탑은 한때 그들이 위대했던 것을 기리는 대단한 기념비가 될 것이었다. 이 기념비를 딜문에 세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더러는 그들의 첫째 서울 달라마시아가 바다에 가라앉았다는 전통을 기억하면서, 그렇게 큰 건물은 바다의 위험으로부터 충분히 떨어진 곳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77:3.3 (858.4) 바블롯은 새 건축물이 앞날에 놋 족속의 문화와 문명(文明)의 중심에서 노른자가 되도록 계획했다. 그의 조언(助言)이 마침내 지배했고, 그의 계획에 따라서 공사가 시작되었다. 새 도시는 탑을 설계하고 건축한 자의 이름을 따서 바블롯이라고 이름지을 것이었다. 이 위치는 나중에 바블로드로, 그리고 결국 바벨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77:3.4 (858.5) 그러나 놋 족속은 이 사업의 계획과 목적에 관하여 아직도 얼마큼 감정이 갈라져 있었다. 지도자들도 건축 계획이나, 건물이 완성된 뒤에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관하여, 전부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았다. 4년 반 동안 일한 뒤에, 그 탑을 세우는 목적과 동기에 관하여 큰 논쟁이 벌어졌다. 그 싸움이 아주 극심해서, 모든 작업이 중지되었다. 먹을 것을 나르는 자들이 분쟁의 소식을 퍼뜨렸고, 부족들의 큰 무리가 건축터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탑을 세우는 목적에 관하여, 세 가지 다른 관점이 제안되었다.
77:3.5 (858.6) 1. 가장 큰 무리는 거의 절반이었는데, 그들은 놋 족속의 역사와 종족 우월성을 기리는 기념비인 탑을 짓는 것을 보고 싶어했다. 그들은 그 탑이 모든 미래 세대의 칭찬을 얻을 만큼 크고 위세 있는 구조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77:3.6 (858.7) 2. 다음으로 가장 큰 당파는 딜문의 문화를 기념하도록 고안된 탑을 바랐다. 그들은 바블롯이 큰 상업ㆍ예술ㆍ제조업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77:3.7 (859.1) 3. 가장 적은 소수파는 탑을 세우는 것은 칼리가스티아 반란에 참여한 그들 선조의 어리석은 짓을 속죄하는 기회를 마련한다고 주장했다. 그 탑을 만민의 아버지를 예배하는 데 바쳐야 한다, 새 도시를 짓는 목적 전부가 달라마시아를 대신하는 것―둘러싼 미개인들을 위하여 문화와 종교의 중심으로서 활동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77:3.8 (859.2) 종교적 집단의 의견은 재빨리 부결되었다. 대다수는 그들의 조상이 반란을 저지른 죄가 있다는 가르침을 부인했고, 그러한 종교적 낙인을 분개하였다. 그 논쟁의 세 관점 중에 하나를 처리하고, 다른 둘을 토론으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싸움에 빠졌다. 종교파, 곧 비전투자들은 남쪽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달아났고, 한편 동료들은 거의 말살될 때까지 싸웠다.
77:3.9 (859.3) 약 1만 2천 년 전에 바벨의 탑을 세우려는 두 번째 시도가 있었다. 안드 족속의 혼합 종족들(놋 족속과 아담 족속)은 처음 구조의 폐허 위에 새 전당을 세우는 일에 착수했으나, 그 사업을 위하여 충분한 지원이 없었다. 그 사업은 허세부리는 자체의 무게 때문에 무너졌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바벨의 땅으로 알려졌다.
77:4.1 (859.4) 바벨 탑 때문에 서로 죽이는 싸움이 즉시 가져온 결과는 놋 족속의 분산이었다. 이 내란은 피가 순수한 놋 족속의 수를 크게 줄였고, 여러 면에서 그들이 아담이 오기 전에 큰 문명을 세우지 못한 데 책임이 있었다. 이때부터 계속하여, 놋 족속의 문화는 아담의 피가 주입(注入)되어 개량될 때까지, 12만 년이 넘도록 쇠퇴했다. 그러나 아담의 시절에도 놋 족속은 여전히 유능한 민족이었다. 그들의 혼합된 후예 중에 많은 사람이 동산 건축자 속에 끼었고, 반의 무리에서 지휘관 몇 명은 놋 족속이었다. 아담의 참모진에서 일하던 가장 유능한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이 종족에 속했다.
77:4.2 (859.5) 놋 족속의 4대 중심 가운데 셋은 바블롯 투쟁이 있고 나서 즉시 세워졌다:
77:4.3 (859.6) 1. 서부, 곧 시리아의 놋 족속. 민족주의나 종족의 기념을 부르짖는 자들의 나머지는 북쪽으로 여행했고, 안돈 족속과 뭉쳐서 메소포타미아 북서쪽에, 후일에 놋 족속의 중심을 세웠다. 이것은 흩어지는 놋 족속 중에서 가장 큰 무리였고, 나중에 나타나는 아씨리아인의 혈통에 크게 기여하였다.
77:4.4 (859.7) 2. 동부, 곧 엘람의 놋 족속. 문화와 상업을 주장하던 자들은 큰 떼를 지어 동쪽에 엘람으로 옮겨 갔고, 거기서 혼합된 산긱 부족들과 뭉쳤다. 3만에서 4만 년 전에 엘람 족속은 대체로 그 성품이 산긱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둘러싼 미개인들보다 우수한 문명을 줄곧 유지했다.
77:4.5 (859.8) 둘째 동산이 세워진 뒤에, 근처에 있는 이 놋 족속의 촌락을 “놋의 땅”이라고 언급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리고 이 놋 집단과 아담 족속 사이에 오랫동안 비교적 평화로웠던 기간에 그 두 종족이 크게 섞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아들들(아담 족속)이 사람의 딸들(놋 족속)과 서로 짝짓는 것이 점점 더 풍습이 되었기 때문이다.
77:4.6 (860.1) 3. 중부, 곧 수메르 이전의 놋 족속.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입구에 있던 작은 집단은 종족 통일성을 더 많이 유지했다. 그들은 몇천 년 동안 버티었고, 궁극에는 아담 족속과 섞여서 유사(有史) 시대에 수메르 민족을 세웠던 놋 족속의 조상을 이루었다.
77:4.7 (860.2) 이 모두가 어떻게 수메르인이 아주 갑자기, 신비하게, 메소포타미아에서 활동 무대에 나타났는가 설명한다. 학자들은 결코 이 부족들을 추적해서 수메르인의 시초까지 거슬러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 수메르인은 달라마시아가 바다에 가라앉은 뒤에, 20만 년 전에 기원을 가졌다. 세상의 다른 곳에서 기원을 가진 흔적이 없이, 이 고대의 부족들은 성전(聖殿)과 금속 가공, 농업ㆍ동물ㆍ도기(陶器), 천 짜기, 상법ㆍ민법전, 그리고 종교 예식과 오래 된 글 체계를 포함하여, 완전히 성장한 우수한 문화를 가지고 문명의 지평선에 갑자기 나타난다. 유사(有史) 시대의 초기에 그들은 달라마시아의 알파벳을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고, 딜문에서 기원을 가진 특이한 글쓰기 체계를 채택하였다. 수메르어는 세상에서 거의 사라졌어도, 셈어가 아니었다. 그 말은 이른바 아리아인의 언어들과 공통되는 것이 많았다.
77:4.8 (860.3) 수메르인이 남긴 정교한 여러 기록은, 옛날의 딜문 도시 가까이에, 페르시아 만에 자리잡은 한 놀라운 촌락의 위치를 묘사한다. 에집트인은 고대에 영화로웠던 이 도시를 딜맛이라고 불렀고, 한편 나중에 아담화되어 버린 수메르인은 첫째와 둘째 놋 족속의 도시를 달라마시아와 혼동하였으며, 셋을 모두 딜문이라 불렀다. 고고학자들은 이미 고대 수메르인의 이 진흙 서판들을 발견했는데, 이 서판들은 “문명화되고 문화 생활의 본보기를 가지고 신들이 인류에게 처음에 복을 내렸던,” 땅에 있는 이 천국을 언급하였다. 사람과 하나님의 천국, 딜문을 기술하는 이 서판들은 여러 박물관의 먼지 낀 선반에서 이제 말없이 쉬고 있다.
77:4.9 (860.4) 수메르인은 첫째와 둘째 에덴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담 족속과 널리 서로 결혼했는데도, 북쪽에 있는 동산 거주자들을 줄곧 외래 민족으로 여겼다. 더 오래 된 놋 족속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수메르인의 마음은, 딜문 시의 웅장함과 천국의 전통을 우대하여, 후일의 이 영광스러운 추억을 무시하도록 이끌었다.
77:4.10 (860.5) 4. 북부 놋 족속과 아마돈 족속―반 족속. 이 집단은 바블롯의 전투보다 이전에 생겼다. 가장 북쪽에 있는 이 놋 족속은 놋과 그 후계자들의 지휘를 버리고, 반과 아마돈의 지휘를 따른 자들의 후손이다.
77:4.11 (860.6) 초기에 반의 동료들 가운데 더러는 아직도 그의 이름을 지닌 호수의 물가 근처에 나중에 정착했고, 이 장소 근방에서 그들의 전통이 생겨났다. 아라랏 산이 그들의 신성한 산이 되었고, 시나이 산이 히브리인에게 가졌던 것과 대체로 같은 중요성을 후일의 반 족속에게 가졌다. 1만 년 전에 아씨리아인의 반 족속 조상은, 일곱 계명으로 된 도덕률을 아라랏 산에서 신들이 반에게 주었다고 가르쳤다. 반과 그의 동료 아마돈이 산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행성으로부터 산 채로 들려 올라갔다고 그들은 굳게 믿었다.
77:4.12 (860.7) 아라랏 산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있는 신성한 산이었고, 이 옛 시절에 관한 너희 전통의 상당한 부분이 바빌로니아인의 홍수 이야기와 연결되어 얻어졌으니까, 아라랏 산과 그 지역이 노아와 널리 홍수가 있었다는 후일의 유대인 이야기에 섞여 들어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77:4.13 (860.8) 기원전 약 35,000년에 아담손은 그의 문명 중심을 세우려고 가장 동쪽에 있는 옛 반 족속의 촌락들 가운데 하나를 방문했다.
77:5.1 (861.1) 2차 중도자의 족보에 관하여 놋 족속 내력(來歷)의 윤곽을 그렸으니까, 이 이야기는 이제 그들의 족보에서 절반인 아담 족속을 고려해야 한다. 2차 중도자들은 또한 유란시아의 보라 인종의 맏아들, 아담손의 손자이기 때문이다.
77:5.2 (861.2) 아담손은 아담과 이브의 아이들 가운데,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땅에 남아 있기로 결정한 무리 속에 있었다. 자, 아담의 이 맏아들은 반과 아마돈으로부터 북쪽의 고지(高地)에 있는 그들의 집 이야기를 가끔 들었고, 둘째 동산이 세워진 뒤에 얼마 있다가 그가 어려서 꿈에 그리던 이 땅을 찾아서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77:5.3 (861.3) 이때 아담손은 120살이었고, 첫째 동산에서 태어난 순수 핏줄의 아이 32명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부모와 함께 남아서 둘째 동산을 발전시키는 데 부모를 돕고 싶어했지만, 그의 짝과 아이들을 잃어버려서 마음이 크게 어수선했는데, 이들은 최고자들의 피보호자가 되기로 한 아담의 다른 아이들과 함께, 모두 에덴시아로 가기로 했다.
77:5.4 (861.4) 아담손은 부모를 유란시아에 버리고 가지 않으려 했고, 어려움이나 위험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둘째 동산에서 가진 교제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초기에 방어하고 건축하는 활동을 추진하려고 많이 일했지만, 기회가 닿는 대로 일찍 북쪽으로 떠나려고 작정하였다. 비록 그의 출발은 온통 즐거웠지만, 아담과 이브는 큰아들을 잃고, 그가 결코 돌아오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를 낯설고 적대하는 세계로 보내는 것을 많이 슬퍼했다.
77:5.5 (861.5) 27명의 일행이 아담손을 따라서, 그가 어려서 꿈에 그리던 이 사람들을 찾아갔다. 3년이 조금 넘자 아담손의 일행은 실제로 그들의 모험의 대상이었던 그 목표를 찾아냈고, 이 사람들 가운데서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스무 살 난 여인을 발견했는데, 그 여자는 영주 참모진의 순수 핏줄을 가진 후예의 마지막이라고 주장했다. 이 여자 라타는 자기의 조상은 모두 영주의 몰락한 참모진 가운데 두 사람의 후손이라고 말했다. 그 여자는 그 종족에서 마지막 사람이었고, 살아 있는 형제나 자매가 아무도 없었다. 그 여자는 짝짓지 않기로 거의 작정했고, 자식이 없이 죽으리라 거의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라타는 당당한 아담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라타가 에덴의 이야기, 반과 아마돈의 예언이 어떻게 정말로 이루어졌는가 들었을 때, 그리고 동산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라타는 오직 한 가지 생각에―아담의 아들인 이 상속자와 결혼하려는 생각에―휩싸였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재빨리 아담손에게도 생겼다. 석 달이 조금 지나서 그들은 결혼했다.
77:5.6 (861.6) 아담손과 라타는 아이가 67명인 가족을 거느렸다. 그들은 위대한 혈통을 가진 세계 지도자들을 낳았지만, 그보다 무엇인가 더 하였다. 이 두 존재가 정말로 초인간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네 번째마다 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독특한 계급이었다. 그 넷째 아이는 흔히 눈에 보이지 않았다. 세계 역사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라타는 크게 걱정되었다―미신을 믿기까지 했다―그러나 아담손은 1차 중도자의 존재를 잘 알았고, 무언가 비슷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상하게 행동하는 아이가 두 번째로 생겼을 때, 하나가 남자이고 하나가 여자였으니까, 그는 이들을 짝지어 주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것이 2차 계급 중도자의 기원이다. 1백 년 안에, 이 현상이 그치기 전에, 거의 2천 명이 태어났다.
77:5.7 (862.1) 아담손은 396살까지 살았다. 여러 번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아보려고 돌아왔다. 7년마다 그와 라타는 남쪽으로 둘째 동산으로 여행했고, 그동안에 중도자들은 그의 민족의 복지에 관하여 그에게 정보를 알려 주었다. 아담손의 일생 동안에 그들은 진리와 올바름을 찾는 새롭고 독립된 세계 중심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봉사했다.
77:5.8 (862.2) 아담손과 라타는 이렇게 이 놀라운 조수(助手) 군단을 지휘하였고, 그들은 상급의 진리를 퍼뜨리는 데, 또 높은 영적ㆍ지적ㆍ육체적 생활 기준을 퍼뜨리는 데, 오랜 생애에 걸쳐서 그들과 함께 수고했다. 그리고 세상을 개선하려고 이렇게 노력한 결과는 후일의 후퇴로 인하여 결코 완전히 빛을 잃지는 않았다.
77:5.9 (862.3) 아담손 족속은 아담손과 라타의 시절부터 거의 7천 년 동안, 높은 문화를 유지했다. 나중에 그들은 이웃의 놋 족속과 안돈 족속과 섞이게 되었고, 또한 “고대의 힘센 사람들” 사이에 끼었다. 그리고 그 시대에 있었던 진보의 얼마큼은 지속하여 후일에 유럽 문명으로 꽃핀 문화적 가능성의 잠재 부분이 되었다.
77:5.10 (862.4) 이 문명의 중심은 코펫 닥 가까이, 카스피 바다의 남단(南端)의 동쪽 지역에 자리잡았다. 투르키스탄의 구릉 지대에서 조금 올라가서, 한때 보라 인종의 아담손 족속의 본부였던 것의 자취가 있다. 코펫 산맥의 낮은 구릉 지대에 놓인, 좁고 비옥한 옛 지대에 자리잡은 이 고지의 터에서, 여러 기간에 연달아 네 가지 다채로운 문화가 일어났는데, 각기 다른 네 집단의 아담손 후예가 이것들을 육성하였다. 그들 가운데 둘째 집단이 서쪽을 향하여 그리스와 지중해의 섬들로 옮겨갔다. 아담손의 후예의 나머지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오는 마지막 안드 인파의 섞인 핏줄과 함께, 북쪽과 서쪽으로 이주해서 유럽으로 들어갔고, 그들도 또한 인도를 침입한 안드ㆍ아리아 족속 사이에 끼었다.
77:6.1 (862.5) 1차 중도자들은 거의 초인간 기원을 가졌으나, 2차 서열은 순수한 아담 족속의 핏줄이, 선임 집단의 부모인 공통된 조상의 후손,[1] [23] 인간화 된 후손과 뭉쳐서 생긴 자손이다.
77:6.2 (862.6) 아담손의 아이들 가운데 2차 중도자의 특이한 조상이 꼭 16명 있었다. 독특한 이 아이들은 남녀별로 똑같이 나누어졌고, 각 쌍은 성의 결합과 비성(非性) 결합을 이용하는 통합 방법으로 70일마다 2차 중도자 하나를 낳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땅에서 그 전에 결코 가능하지 않았고, 그 뒤에 그런 일이 생긴 적도 없다.
77:6.3 (862.7) 이 아이들 열 여섯 명은 (그들의 특이한 점을 제외하면) 그 땅의 필사자로서 살다가 죽었으나, 전기로 에너지를 받는 그들의 자손은 줄곧 살아 있으며, 필사 육체의 한계에 지배되지 않는다.
77:6.4 (862.8) 여덟 쌍은 각자 궁극에 중도자 248명을 낳았고, 이렇게 최초의 2차 군단―1984명―이 생겨났다. 2차 중도자에는 여덟 가지 하위 집단이 있다. 이들은 A-B-C 첫째ㆍ둘째ㆍ셋째, 이런 식으로 부른다. 그리고 나서 D-E-F 첫째ㆍ둘째,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77:6.5 (862.9) 아담의 실패가 있은 뒤에 1차 중도자들은 멜기세덱 관리자들에게 봉사하는 일로 되돌아갔고, 한편 2차 집단은 아담손 중심에, 그가 죽을 때까지 부속되었다. 이 2차 중도자 가운데 33명, 즉 아담손이 죽었을 때 그들 조직에서 우두머리였던 자들은 그 계급 전부를 멜기세덱들에게 봉사하는 일로 휩쓸고 가서, 1차 군단과 연결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것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동료들을 버리고 행성 관리자들에게 봉사하는 일로 단체로 넘어갔다.
77:6.6 (863.1) 아담손이 죽은 뒤에, 나머지 2차 중도자들은 유란시아에서 이상하고 조직되지 않은 채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영향력이 되었다. 그때부터 마키벤타 멜기세덱의 시절까지, 그들은 불규칙하고 조직되지 않은 존재를 이끌어 왔다. 그들은 어느 정도 이 멜기세덱의 통제를 받았지만, 그리스도 미가엘의 시절까지 여전히 못된 일을 많이 저질렀다. 미가엘이 땅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그들은 모두 앞날의 운명에 관하여 마지막 결정을 내렸고, 충성스러운 대다수는 그때 1차 중도자들의 지휘를 받으려고 지원하였다.
77:7.1 (863.2) 1차 중도자들의 대다수는 루시퍼 반란이 터졌을 때, 죄에 빠졌다. 행성 반란의 참상이 계산되었을 때, 다른 손실 가운데도, 최초의 50,000명 가운데 40,119명이 칼리가스티아 탈퇴에 참가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77:7.2 (863.3) 최초에 2차 중도자의 수는 1984명이었는데, 이 가운데에서 873명은 미가엘의 통치와 제휴하지 못했고, 오순절 날에 유란시아가 행성 심판을 받는 것과 관련하여, 정식으로 구금되었다. 아무도 이 타락한 자들의 앞날을 내다볼 수 없다.
77:7.3 (863.4) 두 집단의 반역한 중도자들은 체계 반란 사건의 마지막 판결을 기다리면서, 이제 보호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의 행성 섭리 시대가 개시되기 전에, 땅에서 이상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
77:7.4 (863.5) 이 불충한 중도자들은 어떤 상황에 필사자의 눈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고, 비엘세붑의 동료들에게 이것이 특히 참말이었는데, 비엘세붑은 배신한 2차 중도자들의 두목이었다. 그러나 이 독특한 생물은 그리스도가 죽고 부활할 때까지 땅에 또한 있던, 어떤 반역한 케루빔 및 세라핌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옛날 저자들 가운데 더러는 이 반역한 중도인을 악령과 악마로 불렀고, 배반한 세라핌을 악한 천사로 불렀다.
77:7.5 (863.6) 파라다이스 수여 아들이 일생을 산 뒤에, 어느 세계에서나 악한 영들은 어떤 필사자의 지성도 지배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있던 시절 이전에―생각 조절자들이 보편적으로 오고 주의 영이 모든 육체에게 퍼부어지기 전에―이 반역 중도자들은 실제로 어떤 열등한 필사자의 지성에 영향을 미치고 얼마큼 그들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었다. 조절자가 초인간 지성 존재들과 연락하는 동안에, 인격으로부터 사실상 떨어져 있을 때 충실한 중도인이 유란시아 운명 예비군의 인간 지성과 접촉하는 유능한 보호자로서 일할 때 작용하는 방법과 아주 비슷하게, 이것이 이루어졌다.
77:7.6 (863.7) “그리고 저희가 그에게 온갖 종류의 아픈 군중을 데리고 왔더니, 저희는 귀신 들린 자와 미친 자들이었더라”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단지 비유적 표현은 아니다. 예수는 미친 것과 악령에 들린 것의 차이를 알고 헤아렸다. 하지만 그 시대와 세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머리 속에, 이 두 상태는 크게 혼동되었다.
77:7.7 (863.8) 오순절 이전에도, 어떤 모반한 영도 정상 인간의 지성을 지배할 수 없었고, 그날 이후로 열등한 필사자의 허약한 지성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도무지 없다. 진리의 영이 도착한 뒤로, 귀신을 쫓아냈다고 생각한 것은 귀신 들린다는 관념을 히스테리ㆍ광기(狂氣), 정신 박약과 혼동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미가엘의 수여가 유란시아에 있는 모든 인간의 지성이 귀신에 들릴 가능성으로부터 영원히 해방했다고 해서, 그런 일이 옛 시대에 일어나지 않았다고 상상하지 말지어다.
77:7.8 (864.1) 반역한 중도자 무리 전체가 현재 에덴시아 최고자들의 명에 따라서 죄수로 붙들려 있다. 그들은 이제 더 짓궂은 심술로 이 세상을 누비고 다니지 않는다. 생각 조절자의 계심과 상관 없이, 진리의 영을 모든 육체에 퍼붓는 것은 어떤 종류나 모습의 불충한 영들이 가장 박약한 인간 지성조차도 다시 한 번 침입하는 것을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오순절 이후로 귀신 들리는 것과 같은 일은 결코 다시 일어날 수 없다.
77:8.1 (864.2) 최근에 이 세상의 판결이 있을 당시에, 잠자고 있던, 시간 세계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미가엘이 옮겼을 때, 중도인들이 뒤에 남게 되었다. 행성의 영적 일과 준(準) 영적 일을 돕기 위하여 남은 것이다. 그들은 이제 두 계급을 포함해서, 10,992명에 이르는 단일 군단으로서 활동한다. 현재 각 서열의 선임 회원이 번갈아서 유란시아 연합 중도자들을 다스린다. 오순절 뒤에 조금 있다가 한 집단으로 통합된 뒤로, 이 체제가 생겼다.
77:8.2 (864.3) 더 나이 든 서열, 곧 1차 서열은, 대체로 숫자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1-2-3 첫째, 4-5-6 첫째, 이런 따위의 이름을 흔히 받는다. 유란시아에서 아담의 중도자들은, 1차 중도자의 숫자 명칭과 구별하려고, 알파벳 순서로 부른다.
77:8.3 (864.4) 두 계급은 영양과 에너지 흡수에 관해서 비물질 존재이지만, 그들은 인간의 특성을 많이 가지며, 너희의 예배 뿐 아니라 유머도 즐기고 알아들을 수 있다. 필사자에게 딸려 있을 때, 그들은 인간의 일하고 쉬고 노는 정신에 젖는다. 그러나 중도자들은 잠자지 않으며, 자식을 낳는 능력도 없다. 어떤 의미에서 2차 집단은 남자답고 여자다운 모습에 따라서 구별되며, 흔히 “그” 또는 “그 여자”로 언급된다. 그들은 흔히 그런 쌍을 이루어 일한다.
77:8.4 (864.5) 중도자는 사람이 아니고 천사도 아니지만, 2차 중도자의 성품은 천사보다 사람에 가깝다. 그들은 어떻게 보면 너희 종족의 출신이며, 따라서 인간 존재와 접촉할 때, 대단히 이해심이 많고 동정심이 있다. 그들은 인류의 여러 종족을 위해서, 또 이들과 함께 하는 일에 세라핌에게 소중하며, 두 계급은 필사자에게 개인 수호자로 일하는 세라핌에게 필수이다.
77:8.5 (864.6) 유란시아 연합 중도자들은 타고난 자질과 얻은 기술에 따라서, 행성의 세라핌들과 함께 봉사하도록 다음 집단으로 조직된다:
77:8.6 (864.7) 1. 중도 사자. 이 무리는 이름을 가진다. 그들은 작은 무리이며, 빠르고 믿을 수 있게 개인적 의사를 전하는 봉사에서 진화 세계에서 크게 도움이 된다.
77:8.7 (864.8) 2. 행성 파수꾼. 중도자는 공간 세계의 수호자요 파수꾼이다. 그들은 그 영역의 초자연 존재들에게 중요한, 수많은 현상과 종류의 통신 모두를 위하여 중요한 관찰자의 임무를 수행한다. 그들은 행성의 보이지 않는 영적 영역을 순찰한다.
77:8.8 (865.1) 3. 접촉 성격자. 이 통신문을 전달하는 데 쓰인 주체의 경우처럼, 물질 세계의 필사 존재들과 접촉하는 데, 중도인이 반드시 쓰인다. 그들은 영 수준과 물질 수준을 그렇게 연결할 때 필수 요소이다.
77:8.9 (865.2) 4. 진보 조수. 이들은 중도인 가운데 영적으로 더 높은 자이며, 그들은 행성에서 특별 집단을 이루어 활동하는 여러 계급의 세라핌에게 조수로서 분배된다.
77:8.10 (865.3) 중도자들은 위로 세라핌, 아래로 인간 사촌과 접촉하는 능력이 크게 다르다. 예를 들면, 1차 중도자들은 물질 대리자와 바로 접촉하기가 지극히 힘들다. 그들은 천사 종류의 존재에 훨씬 더 가깝고, 따라서 행성에서 주둔하는 영적 세력과 함께 일하고, 그에 봉사하는 데 보통 배치된다. 그들은 하늘에서 온 방문자와 학생 체류자들을 동반하고 안내하는 자로서 행동하며, 한편 2차 생물은 그 영역의 물질 존재들에게 봉사를 베푸는 데 거의 순전히 부속된다.
77:8.11 (865.4) 충성하는 2차 중도자 1111명은 땅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 1차 동료들과 견주어서, 그들은 확실히 물질적이다. 필사자의 시야(視野) 바로 바깥에서 존재하며, 사람들이 “물질적 사물”이라 부르는 것과 마음대로 육체적 접촉을 하기에 충분한 범위 안에서 조절할 수 있다. 이 독특한 자들은 그 영역의 짐승도 제외하지 않고 시공(時空)의 사물에 대하여 어떤 분명한 능력을 지닌다.
77:8.12 (865.5) 천사들의 탓으로 돌리는, 글자 그대로 일어난 많은 현상은 2차 중도인이 해낸 것이다. 예수의 복음을 가르치던 초대의 선생들을 그 시절의 무지한 종교 지도자들이 감옥에 던졌을 때, 실제로 “주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그들을 데리고 나왔더라.” 그러나 헤롯의 명령에 따라 야고보가 죽은 뒤, 베드로가 구출된 경우에, 천사의 탓으로 돌린 일을 행한 것은 2차 중도자였다.
77:8.13 (865.6) 오늘날 그들의 주요한 일은, 행성의 운명 예비군을 구성하는 남녀에게, 인식되지 않는 채 몸소 연락하는 동료로서 하는 일이다. 행성의 하늘 감독자들로 하여금 여러 탄원의 시작을 마침내 유도하도록, 유란시아에서 성격자들 및 상황의 조정을 일으킨 것은 이 2차 집단이 한 일이었고, 1차 군단의 어떤 자들이 이를 훌륭하게 지원하였다. 이러한 탄원은 일련의 계시를 가능하게 만든 명령을 내리게 했으며, 이 발표는 그 계시의 일부이다. 그러나 중도자들은 “강신술”(降神術)이라는 일반 명칭 아래에서 행해지는 더러운 연기(演技)와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현재 유란시아에 있는 중도자들은, 모두 명예로운 신분을 가졌고, 이른바 “영매(靈媒) 능력”이라는 현상과 관련이 없다. 그들은 때때로 필요한 물리적 활동을 하거나 물질 세계와 달리 접촉하는 것을 인간의 감각이 깨닫는 것처럼 인간이 구경하는 것을 보통 허락하지 않는다.
77:9.1 (865.7) 필사 인간과 같은 진화된 승천자와 천사 무리와 대조해서, 중도자는 여러 우주에 두루, 여러 서열의 세계에서 발견되는 첫째 집단의 영구 거주자로 간주해도 좋다.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면서 여러 군데서 그러한 영구(永久) 시민들과 마주치게 된다.
77:9.2 (866.1) 행성에서 봉사하라고 배치된 여러 계급의 하늘 존재들과 달리, 중도자들은 사람이 거하는 세계에서 산다. 세라핌은 오고가지만, 중도인은 남아 있고, 앞으로도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 행성에 토박이이기 때문에, 그들은 봉사자요, 천사 무리의 변하는 행정을 조화시키고 연결시키는, 하나의 계속하는 체제를 마련해 준다.
77:9.3 (866.2) 유란시아의 실제 시민으로서, 중도자들은 친척으로서 이 구체의 운명에 관심을 가진다. 자기들이 태어난 행성의 진보를 위하여 끊임없이 일하는, 굳게 결의한 단체이다. 그들 계급의 표어가 그 각오를 암시해 준다: “연합 중도자들은 착수한 것을 반드시 이룬다.”
77:9.4 (866.3) 에너지 회로를 통과하는 능력은 어떤 중도자도 행성을 떠날 수 있게 하지만, 우주 당국이 언젠가 해방할 때까지 그들은 행성을 떠나지 않기로 개인별로 서약했다. 중도자들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는 시대까지, 한 행성에서 닻을 내린다. 1-2-3 첫째를 제외하고, 충실한 중도인은 아무도 유란시아를 떠난 적이 없다.
77:9.5 (866.4) 1차 계급에서 가장 위인 1-2-3 첫째는, 오순절 뒤에 곧, 행성에서 직접 근무하는 것으로부터 풀려났다. 이 고귀한 중도자는 행성에서 반란이 있던 비극의 시절에, 반과 아마돈과 더불어 굳건히 지켰고, 겁 없는 지도력은 그의 서열에서 희생자를 줄이는 데 힘이 되었다. 그는 현재 예루셈에서 24 상담자의 일원으로 근무하며, 오순절 이후로 한 번, 유란시아의 총독으로서 이미 활동한 적이 있다.
77:9.6 (866.5) 중도자는 행성에 묶여 있지만, 필사자가 멀리서 온 여행자와 이야기하고 행성의 먼 지방에 관하여 배우는 것과 비슷하게, 중도자는 우주의 먼 장소에 관하여 배우려고 하늘 여행자들과 대화를 가진다. 이래서 그들은 이 체계와 우주, 아니 오르본톤과 그 자매 창조들에 관해서도 정통하게 되며, 이렇게 그들은 인간이 존재하는 상급 수준에서 시민권을 얻으려고 준비한다.
77:9.7 (866.6) 중도자는 완전히 발육된 채로―미숙한 상태로부터 성장하거나 발전하는 기간을 거치지 않고서―생겨나지만, 지혜와 체험 면에서 결코 성장(成長)을 그치지 않는다. 필사자처럼 그들은 진화하는 생물이요, 진정하게 진화로 성취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유란시아 중도자 군단에는 위대한 지성과 막강한 인물이 많이 있다.
77:9.8 (866.7) 더 넓은 각도에서 보면, 유란시아의 문명은 유란시아의 필사자와 유란시아의 중도자들이 공동으로 지은 작품이다. 그리고 두 문화 수준 사이에 현재 차이가 있어도 이것은 참말이며, 이 차이는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는 시대가 오기까지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77:9.9 (866.8) 중도자의 문화는 죽지 않는 행성 시민 계급의 산물이니까, 인간의 문명을 성가시게 하는 현세의 변천에 비교적 면역이 되어 있다. 사람의 세대는 잊어버린다. 중도자 군단은 기억하며, 그 기억은 사람이 사는 너희 세계의 전통을 간직하는 보물 창고이다. 이렇게 한 행성의 문화는 늘 그 행성에서 남아 있고,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를 유란시아의 중도자들이 육체를 입은 사촌(四寸)들에게 전한 것과 같이, 적당한 상황에서 지난 날의 사건들을 그렇게 소중히 간직한 기억을 사람이 이용할 수 있게 된다.
77:9.10 (867.1) 중도자는 아담과 이브가 죽고 나서 유란시아의 물질적 사무와 영적 사무 사이에 생긴 틈을 보상해 주는 솜씨 있는 봉사자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너희의 형이요, 유란시아에서 안정된 빛과 생명의 지위를 얻으려는 오랜 투쟁에서 전우이다. 연합 중도자들은 반란의 시험을 거친 군단이며, 이 세상이 오랜 세월 동안 바라던 목표에 다다를 때까지, 사실로 평화가 땅에서 다스리고 진실로 사람들의 가슴 속에 선의가 생길 아득히 먼 그날까지, 행성의 진화에서 그들의 역할을 충실히 해낼 것이다.
77:9.11 (867.2) 이 중도자들이 행하는 귀중한 일 때문에, 그들이 영역의 영적 체제에 참으로 긴요한 부분이라고 우리는 결론을 내렸다. 반란이 행성 사무에 상처를 내지 않은 곳에서 그들은 세라핌에게 더욱 큰 도움이 된다.
77:9.12 (867.3) 높은 영, 천사 무리, 중도(中道) 친구들의 조직 전부가, 진화하는 필사자가 점진적으로 올라가고 완전을 이룩하는 파라다이스 계획을 촉진하는 데 열심히 헌신하고 있다. 이것은 필사자와 중도자를 위하여 똑같이, 우주에서 하늘 같은 사업이다―하나님을 사람에게 모셔 오고, 그리고 나서 숭고한 종류의 협동으로, 사람을 하나님께,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영원히 봉사하고 신성한 성취가 있는 길로 데리고 가는 계획, 살아남게 하는 숭고한 계획이다.
78:0.1 (868.1) 둘째 동산은 거의 3만 년 동안 문명의 요람이었다. 아담 종족들은 여기 메소포타미아에서 버티고 그 자손을 땅 끝까지 보냈고, 후일에는 놋 부족과 산긱 부족과 섞이자 안드 족속으로 알려졌다. 이 지역으로부터, 유사(有史) 시대의 행적을 시작하고 유란시아에서 문화의 진보를 아주 엄청나게 가속한 남녀들이 떠나갔다.
78:0.2 (868.2) 이 논문은 행성에서 보라 인종의 역사를 묘사하며, 이 역사는 아담의 실패가 있은 뒤에 곧, 기원전 약 35,000년에 시작하며, 기원전 약 15,000년에 안드 민족들을 형성하려고 놋 부족과 산긱 부족과 혼합하던 시기를 거쳐서, 기원전 약 2000년에 메소포타미아의 고향으로부터 마지막으로 사라질 때까지 이어진다.
78:1.1 (868.3) 아담이 도착했을 때 종족들의 지성과 도덕은 낮은 수준에 있었어도, 신체의 진화는 칼리가스티아의 반란으로 생긴 긴급 사태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은 채로 진행되었다. 아담이 여러 종족의 생물학적 지위에 기여한 것은 그 사업이 일부 실패했는데도, 유란시아의 사람들을 엄청나게 개량하였다.
78:1.2 (868.4) 아담과 이브는 또한 인류의 사회ㆍ도덕ㆍ지능의 진보에 귀중한 많은 것을 기여하였다. 그들의 자손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문명은 엄청나게 가속되었다. 그러나 3만 5천 년 전에, 일반 세상은 문화가 거의 없었다. 문명의 어떤 중심이 여기저기 존재했지만, 유란시아의 대부분은 야만 속에서 시들었다. 종족과 문화의 분산은 다음과 같았다:
78:1.3 (868.5) 1. 보라 인종―아담 족속과 아담손 족속. 아담 족속 문화의 주요한 중심은 둘째 동산에 있었고, 여기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삼각 지역에 놓여 있었다. 이곳은 정말로 서양과 인도 문명의 요람이었다. 보라 인종의 2차 중심, 곧 북쪽 중심은 아담손 족속의 본부였고, 이것은 코펫 산맥 가까이 카스피 바다의 남쪽 해안의 동쪽에 놓여 있었다. 이 두 중심으로부터 둘러싼 땅으로 문화와 생명질이 떠나갔고, 이것은 즉시 모든 종족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다.
78:1.4 (868.6) 2. 수메르 이전 족속과 기타 놋 족속. 메소포타미아에는 또한 강들의 입구 가까이에, 달라마시아 시절의 고대 문화의 잔재가 있었다. 수천 년이 지나면서, 이 무리는 북쪽에 있는 아담 족속과 속속들이 섞였지만, 그들의 놋 족속 전통을 결코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다. 레반트에서 정착했던 다른 여러 놋 족속의 집단은 대체로 나중에 커지는 보라 인종에게 흡수되었다.
78:1.5 (869.1) 3. 안돈 족속은 아담손 본부의 북쪽과 동쪽에 상당히 대표적인 촌락을 대여섯 유지했다. 그들도 또한 투르키스탄에 두루 흩어졌고, 한편 그들의 고립된 집단들이 유라시아에 두루, 특히 산악 지역에 지속하였다. 이 원주민들은 아이스랜드와 그린랜드와 함께, 유라시아 대륙의 북쪽 땅을 아직도 지키고 있었지만, 유럽의 평야에서 청인에게, 그리고 더 멀리 아시아의 강 유역에서 확장하는 황인종에게 쫓겨난 지 오래 되었다.
78:1.6 (869.2) 4. 홍인(紅人)은 두 아메리카를 차지했고, 아담이 도착하기 5만 년쯤 전에 아시아에서 밀려났다.
78:1.7 (869.3) 5. 황인종. 중국 종족들은 동부 아시아를 단단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의 가장 진보된 촌락들은 현대 중국의 북서쪽에, 티벳과 닿는 지역에서 자리를 잡았다.
78:1.8 (869.4) 6. 청인종(靑人種). 청인은 유럽 전역에 걸쳐 흩어졌으나, 그들 문화의 상급 중심들은 지중해 분지에, 당시에 기름졌던 유역에, 그리고 북서 유럽에 자리잡았다. 네안데르탈인을 흡수한 것은 청인의 문화를 크게 더디게 만들었지만, 그밖에 청인은 유라시아의 모든 진화 민족 가운데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모험심이 있고 탐험을 좋아했다.
78:1.9 (869.5) 7. 드라비다 이전의 인도. 인도에 있는 종족들―땅에 있는 모든 종족을 포함하지만, 특히 녹인종, 주황 인종, 흑인종―의 복잡한 혼합은 바깥에 놓인 지역들보다 조금 높은 문화를 유지했다.
78:1.10 (869.6) 8. 사하라 문명. 남인종(藍人種)의 우수한 요소는, 지금 큰 사하라 사막인 지역에서 가장 진보된 촌락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 남색 집단, 곧 흑인 집단은 가라앉은 주황 인종과 녹인종의 널리 퍼진 혈통을 지녔다.
78:1.11 (869.7) 9. 지중해 분지. 인도 바깥에서 가장 많이 섞인 종족은 지금 지중해 분지인 곳을 차지했다. 여기서 북쪽에서 온 청인과 남쪽에서 온 사하라 주민이 동쪽에서 온 놋 족속과 아담 족속을 만나고, 함께 섞였다.
78:1.12 (869.8) 이것이 보라 인종이 크게 비로소 팽창하기 전, 약 2만 5천 년 전에, 세상의 그림이었다. 미래 문명의 희망은 메소포타미아의 강들 사이의 둘째 동산에 달려 있었다. 여기 남서 아시아에, 큰 문명의 잠재성, 곧 달라마시아 시절과 에덴의 시대로부터 건져낸 개념ㆍ이상을 세계에 퍼뜨릴 가능성이 존재하였다.
78:1.13 (869.9) 아담과 이브는, 제한되기는 했어도 유력한 후손을 남겼고, 유란시아에 있던 하늘의 관찰자들은 잘못하는 물질 아들과 딸의 이 후손들이 어떻게 처신하려는가 알아보려고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78:2.1 (869.10) 몇천 년 동안 아담의 아들들은 메소포타미아의 강을 따라서 수고하였고, 남쪽에서 관개하고 치수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북쪽에서 방어를 완벽하게 만들며, 첫 에덴에서 영화로웠던 전통을 간직하려고 애썼다.
78:2.2 (869.11) 둘째 동산의 지도층에서 나타난 영웅심은 유란시아의 역사에서 놀랍고 영감을 주는 서사시(敍事詩)의 하나이다. 이 빛나는 사람들은 아담 사명의 목적을 결코 완전히 잊지 않았고, 따라서 둘러싼 열등한 부족들의 영향을 용감하게 물리쳤으며, 한편 땅에 있는 종족들에게 밀사로서 꾸준히 연속하여 빼어난 아들딸을 기쁘게 내보냈다. 때때로 이 팽창은 고향의 문화를 소모했지만, 언제나 이 우수한 민족들은 자체를 회복하였다.
78:2.3 (870.1) 아담 족속의 문명과 사회, 그리고 문화적 지위는 유란시아의 진화된 종족들의 일반 수준보다 훨씬 위에 있었다. 오로지 반과 아마돈, 그리고 아담손 족속의 오래 된 촌락들 사이에서 어떤 면에서도 비할 만한 문명이 있었다. 그러나 둘째 에덴의 문명은 인위적 구조물이었고―진화되지 않았다―따라서 자연스러운 진화 수준에 이르기까지 악화되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
78:2.4 (870.2) 아담은 위대한 지적ㆍ영적 문화를 뒤에 남겼으나 그 문화는 기계적 장치 면에서 는 진보되지 않았는데, 이는 모든 문명이 발명의 결과를 보장하기 위하여 쓸 수 있는 자연 자원, 타고난 재능, 충분한 여가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보라 인종의 문명은 아담의 존재와 첫째 에덴의 전통에 달려 있었다. 아담이 죽은 뒤에, 그리고 수천 년이 지나가며 이 전통이 흐릿해짐에 따라서, 아담 족속의 문화 수준은 둘러싼 민족들의 상태, 그리고 보라 인종의 자연스럽게 진화하는 문화적 능력과 서로 균형되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저하되었다.
78:2.5 (870.3) 그러나 아담 족속은 기원전 19,000년에 450만에 이르는 참 민족이었고, 이미 둘러싼 민족들에게 그들의 자손 몇백만 명을 퍼부었다.
78:3.1 (870.4) 보라 인종은 수천 년 동안 에덴의 평화로운 전통을 간직했으며, 이것이 그들이 영토를 정복하는 데 오래 지체한 것을 설명한다. 인구가 늘어나 압박을 받을 때, 영토를 더 확보하려고 전쟁을 일으키는 대신에, 그들은 잉여 거주자들을 다른 종족들에게 선생으로 보냈다. 예전에 있었던 이 이민(移民)의 문화적 효과는 오래 가지 않았지만, 아담 족속의 선생ㆍ무역가ㆍ탐험가들을 흡수한 것은 둘러싼 민족들에게 생물학적으로 생기를 불어넣었다.
78:3.2 (870.5) 아담 족속 가운데 더러는 일찍부터 서쪽으로 나일 강 유역까지 여행했다. 더러는 동쪽으로 아시아로 파고들어 갔으나, 이들은 소수파였다. 후일에 있었던 대규모의 움직임은 널리 북쪽으로, 그리고 거기서부터 서쪽으로 향했다. 주로 그것은 차츰차츰, 그러나 끊임없이 북쪽을 향한 진격이었고, 반이 넘는 무리가 북쪽으로, 다음에는 서쪽으로 카스피 바다를 돌아서 유럽으로 들어갔다.
78:3.3 (870.6) 약 2만 5천 년 전에 아담 족속의 좀더 순수한 요소의 다수는 북쪽 길을 한창 가고 있었다. 북쪽으로 침투함에 따라서 그들은 아담의 모습이 더욱 줄어들었고, 이것은 투르키스탄을 차지했을 때가 되어, 다른 민족들, 특히 놋 족속과 속속들이 뒤섞이기까지 계속되었다. 순수 핏줄을 가진 보라 인종은 거의 아무도 유럽이나 아시아로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
78:3.4 (870.7) 기원전 약 30,000년부터 10,000년까지, 신기원(新紀元)을 이루는 종족 혼합이 서남 아시아 전역에 걸쳐서 일어나고 있었다. 투르키스탄의 고지에서 거주하던 자들은 씩씩하고 활력 있는 민족이었다. 인도의 북서쪽에는 반 시절의 문화가 많이 지속하였다. 이 여러 촌락에서 더 북쪽으로 옛 안돈 족속의 노른자가 보존되어 있었다. 그리고 문화와 특성을 가진 이 우수한 두 종족은 북쪽으로 움직이는 아담 족속에게 흡수되었다. 이 혼합은 많은 새 개념을 채택하도록 이끌었고, 문명의 진보를 수월하게 하고, 예술ㆍ과학, 그리고 사회적 문화의 모든 국면을 크게 앞서게 하였다.
78:3.5 (871.1) 기원전 약 15,000년에, 아담 족속의 초기 이동이 끝나면서 세상에서 어느 다른 데보다, 아니 메소포타미아보다도, 유럽과 중앙 아시아에는 아담의 후손들이 더 많이 있었다. 그들은 유럽의 청인종을 대체로 침투하였다. 놋 족속, 안돈 족속 그리고 홍인 및 황인 산긱 종족과 섞인 아담 족속의 큰 저장이 지금 러시아와 투르키스탄이라고 부르는 땅의 남쪽 지대를 두루 차지했다. 유럽의 남부와 지중해의 가장자리는 아담의 핏줄이 한 줌 섞인, 안돈 및 산긱 종족들―주황인ㆍ녹색인ㆍ남색인―이 차지하였다. 소 아시아와 중부 및 동부 유럽의 땅은 대체로 안돈 족속의 부족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78:3.6 (871.2) 섞인 유색 인종은 이 무렵에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온 사람들로 인하여 크게 보강되었고, 에집트에서 세력을 지키며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사라지는 문화를 이어받으려고 준비했다. 흑인 종족들은 아프리카에서 더 남쪽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홍인종처럼 거의 고립되었다.
78:3.7 (871.3) 사하라 문명은 가뭄에 시달리고 지중해 분지의 문명은 홍수에 시달렸다. 아직까지도 청인종은 진보된 문화를 개발하지 못했다. 안돈 족속은 아직도 북극과 중앙 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녹인종과 주황 인종은 그런 신분으로서 멸종되었다. 남인종(藍人種)은 아프리카에서 남쪽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느리기는 하지만 오래 끌면서 종족의 질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78:3.8 (871.4) 인도의 민족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문명을 가지고 침체되어 있었다. 황인은 중앙 아시아에서 자기가 차지한 것을 통합하고 있었다. 갈색인은 근처 태평양의 여러 섬에서 아직 문명을 시작하지 않았다.
78:3.9 (871.5) 이러한 종족의 분산은, 광범위한 기후의 변화와 관련하여, 안드 시대의 유란시아 문명을 개시하려고 세계의 무대를 준비하였다. 이 초기의 이동은 기원전 25,000년에서 15,000년까지, 1만 년의 기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후일의 이동, 곧 안드 족속의 이동은 기원전 15,000년부터 6000년까지 계속되었다.
78:3.10 (871.6) 아담 족속의 이 초기 인파가 유라시아를 지나가는 데 세월이 너무 오래 걸려서 그들의 문화는 대체로 이동하면서 사라졌다. 오로지 후일의 안드 족속이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아무리 먼 거리에서도 에덴의 문화를 간직할 만큼 충분히 빨리 움직였다.
78:4.1 (871.7) 안드 종족은 순수한 핏줄의 보라 인종과 놋 족속 및 여러 진화 민족을 1차적으로 섞은 것이다. 무릇 안드 족속은 현대 민족들보다 아담의 피를 훨씬 높은 비율로 가졌다고 생각해야 한다. 주로, 안드 족속이라는 용어는 종족의 유산이 8분의 1에서 6분의 1까지 보라인 종족들을 부르는 데 쓰인다. 현대의 유란시아인은, 북쪽의 백인조차 이 비율보다 훨씬 적게 아담의 피를 지닌다.
78:4.2 (871.8) 가장 초기의 안드 민족들은 2만 5천 년도 더 전에 메소포타미아에 인접한 지역에서 기원을 가졌고, 아담 족속과 놋 족속의 혼합으로 이루어졌다. 둘째 동산은 줄어드는 보라 피의 동심원(同心圓)에 둘러싸였고, 안드 종족이 태어난 것은 종족이 섞이는 이 도가니의 가장자리에서였다. 나중에, 이동하는 아담 족속과 놋 족속이 당시에 기름진 투르키스탄 지역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곧 우수한 거주자들과 섞였고, 이렇게 생긴 종족의 혼합은 안드 종류를 북쪽으로 뻗게 하였다.
78:4.3 (872.1) 안드 족속은 순수 핏줄의 보라 인종이 살던 시절 이후로 유란시아에서 나타난 바 가장 좋고 다능한 인간 핏줄이었다. 그들은 아담 종족과 놋 종족의 살아남은 잔재 중에 가장 높은 종류의 대부분, 나중에는 황인ㆍ청인ㆍ녹인 가운데서 가장 좋은 핏줄을 얼마큼 포함했다.
78:4.4 (872.2) 이 옛 안드 족속은 아리아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리아인 이전 종족이었다. 백인이 아니었고, 백인 이전의 종족이었다. 그들은 서양 민족도 동양 민족도 아니었다. 그러나 여러 나라 말을 하는, 이른바 백인종의 혼혈에게 코카서스 인종이라 부르는 일반화된 동질성을 주는 것은 안드 족속의 유산이다.
78:4.5 (872.3) 보라 인종의 좀더 순수한 핏줄은 평화를 추구하는 아담의 전통을 간직하였고, 이것이 어째서 초기에 있었던 민족 이동이 평화롭게 이주하는 성질을 더 띠었는가 설명한다. 그러나 놋 족속의 핏줄은 이때가 되어 호전적 민족이었는데, 아담 족속이 이들과 뭉쳐짐에 따라서, 그 안드 후손은, 그 시절과 시대에 유란시아에서 산 중에서 가장 솜씨 있고 현명한 군국주의자였다. 그때부터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움직임은 갈수록 더 군사적 특징을 띠었고, 실제로 정복자와 더 비슷해졌다.
78:4.6 (872.4) 이 안드 족속은 모험을 좋아했고 돌아다니는 성향을 가졌다. 산긱이나 안돈 족속의 피를 더하면 그들을 안정되게 만들었다. 그렇다 해도 후일에 그 자손들은 지구를 배로 한 바퀴 돌아서 멀리 있는 마지막 대륙을 발견할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았다.
78:5.1 (872.5) 2만 년 동안 둘째 동산의 문화는 지속되었으나 기원전 약 15,000년까지 꾸준한 쇠퇴를 겪었고, 이때 셋 사람의 사제직이 부활되고 아모삿이 지도자가 된 것은 밝은 시대를 열었다. 나중에 유라시아로 퍼진 문명의 거대한 물결은, 아담 족속이 둘러싼 혼합된 놋 족속과 널리 연합하여 안드 족속을 형성한 결과로서 생긴, 동산의 큰 부흥에 뒤이어 즉시 퍼졌다.
78:5.2 (872.6) 이 안드 족속은 유라시아와 북 아프리카 전역에 걸쳐서 새로이 진격을 개시하였다.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신장(新疆)을 통해서 안드 족속의 문화가 지배했고, 유럽을 향한, 사람들의 꾸준한 이주는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새로 온 사람들 때문에 계속 상쇄되었다. 그러나 아담의 혼합된 후예의 마지막 이동이 시작될 무렵까지, 안드 족속을 메소포타미아 본토의 종족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저히 정확하다 할 수 없다. 이때가 되자 둘째 동산에 있는 종족들조차 너무 섞여서 그들은 이제 더 아담 족속이라 여길 수 없었다.
78:5.3 (872.7) 투르키스탄의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새 사람들, 특히 나중의 안드 기병들로 말미암아 항상 부활되고 새로워졌다. 이른바 아리아인의 조상 언어는 투르키스탄의 고지에서 형성되는 과정에 있었다. 그것은 그 지역의 안돈 족속 방언이 아담손 족속과 후기 안드 족속의 언어와 섞인 것이었다. 많은 현대 언어가 유럽과 인도,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평야의 위쪽 지대를 정복한 이 중앙 아시아 부족들의 이 초기 언어로부터 생겨났다. 이 고대 언어는 아리아인이라 부르는 그 모든 유사성을 서양의 여러 언어에게 주었다.
78:5.4 (872.8) 기원전 12,000년이 되자, 세상에서 안드 족속 핏줄의 4분의 3은 북부와 동부 유럽에 거주하였고,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나중에 마지막 탈출이 일어났을 때, 이 마지막 이민 인파의 65퍼센트는 유럽으로 들어갔다.
78:5.5 (873.1) 안드 족속은 유럽 뿐 아니라, 중국의 북부와 인도까지 이주했고, 한편 많은 무리가 선교사ㆍ선생ㆍ상인으로서 땅 끝까지 파고들었다. 그들은 사하라의 산긱 종족들의 북쪽 집단에게 상당히 기여하였다. 그러나 오직 몇몇 선생과 상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나일 강 상류보다 더 남쪽으로 파고들었다. 나중에, 혼합된 안드 족속과 에집트인이 적도(赤道) 훨씬 밑으로 아프리카의 동부와 서부 해안 밑으로 따라갔지만, 마다가스카르에 이르지는 않았다.
78:5.6 (873.2) 이 안드 족속은 인도에서 이른바 드라비다인, 후일에는 정복하는 아리아인이었다. 그리고 중앙 아시아에서 그들의 존재는 투란 족속의 조상을 크게 개선하였다. 이 종족에서 많은 사람이 신장과 티벳을 경유해서 중국으로 여행했고, 후일의 중국인 핏줄에 바람직한 품질을 보탰다. 때때로 작은 무리들이 일본ㆍ타이완, 동인도 제도, 중국 남부로 들어갔다. 하지만 거의 아무도 해안선의 길로 중국 남부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78:5.7 (873.3) 이 종족 132명은 일본에서 작은 배로 떼를 지어 출발하여, 결국에는 남 아메리카에 다다랐고, 안데스의 토착민과 서로 결혼함으로 후일에 잉카를 통치한 자들의 조상을 세웠다. 그들은 쉬운 단계를 거쳐 태평양을 건넜고, 가는 길에 발견한 많은 섬에서 머물렀다. 폴리네시아 집단의 섬들은 지금보다 더 많고 더 컸는데, 이 안드 종족의 뱃사람들은 그들을 따라간 얼마큼의 사람들과 함께, 이동하는 중에 토착 집단들을 생물학적으로 변화시켰다. 안드 족속이 침투한 결과로서 지금은 물 밑에 가라앉은 이 여러 지방에서, 번성하는 문명의 중심이 많이 생겨났다. 이스터 섬은 오랫동안 이 사라진 집단 중 하나의 종교 및 행정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오래 전에 태평양을 항해한 안드 족속 가운데 132명을 빼고, 아무도 결코 두 아메리카 본토에 이르지 못했다.
78:5.8 (873.4) 안드 족속의 이주와 정복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분산될 때까지, 기원전 8000년에서 6000년까지 이어졌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쏟아져 나옴에 따라서 그들은 고향의 생물학적 저장을 계속 소모했고, 한편 둘러싼 민족들을 두드러지게 강화하였다. 지나간 모든 나라에 그들은 유머ㆍ예술ㆍ모험ㆍ음악ㆍ제조업을 기여했다. 그들은 동물을 길들이는 기술이 있었고 농업에 전문가였다. 얼마 동안, 적어도 그들의 존재는 보통, 더 오래 된 종족들의 종교 관념과 도덕 풍습을 개량하였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의 문화는 조용히 유럽ㆍ인도ㆍ중국, 그리고 북 아프리카와 태평양 군도(群島)에 퍼졌다.
78:6.1 (873.5) 안드 족속이 기원전 8000년에서 6000년 사이에 마지막으로 세 차례 파도를 이루어 메소포타미아에서 쏟아져 나왔다. 세 차례에 걸쳐 이 문화의 큰 물결은, 동쪽에서 산지(山地) 부족들의 압력이 있었고 서쪽에서 평야 사람들이 성가시게 굴었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에서 할 수 없이 쫓겨났다. 유프라테스 강 유역, 그리고 인접한 영토의 거주자들은 마지막에 탈출할 때 여러 방향으로 갈라졌다:
78:6.2 (873.6) 65퍼센트는 카스피 바다의 길로 유럽으로 들어가서 새로 등장하는 백인―청인과 옛 안드 족속의 혼합 민족―을 정복하고 그들과 섞였다.
78:6.3 (873.7) 큰 무리의 셋 사제들을 포함하여, 10퍼센트는 동쪽으로, 엘람의 고지를 거쳐서 이란의 고원과 투르키스탄으로 옮겨 갔다. 그들의 후손 가운데 다수는 나중에, 북쪽 지역에서 온 아리아인 형제들과 함께 인도로 몰려갔다.
78:6.4 (874.1)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10퍼센트는 북향 길을 가다가 동쪽으로 돌아서 신장에 들어갔고, 거기서 그들은 안드 족 황인 거주자들과 함께 섞였다. 이 종족 연합에서 나온 유능한 자손의 대다수는 황인종의 북쪽 가지를 즉시 개선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78:6.5 (874.2) 달아나는 이 안드 족속의 10퍼센트는 아라비아를 가로질러 가서, 에집트로 들어갔다.
78:6.6 (874.3) 열등한 이웃 부족 사람들과 서로 결혼하지 않고 자신들을 지키며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입구 근처, 물가 지역에서 아주 우수한 문화를 가졌던 안드 족속의 5퍼센트는 집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이 집단은 많은 우수한 놋 족속과 아담 족속의 핏줄이 살아남은 것이다.
78:6.7 (874.4) 안드 족속은 기원전 6000년이 되어 이 지역을 거의 완전히 비웠다. 하지만 둘러싼 산긱 종족들과 소 아시아의 안돈 족속과 널리 섞인 안드 족의 후손은, 거기서 훨씬 후일에 북쪽과 동쪽을 침공한 자들에 대항하여 싸웠다.
78:6.8 (874.5) 둘째 동산의 문화 시대는 둘러싼 열등한 종족들이 더욱 침투함으로 막을 내렸다. 문명은 서쪽으로 나일 강과 지중해의 섬들로 옮겨 갔고, 메소포타미아에서 그 원천이 저하된 뒤에 오랫동안 거기서 계속하여 번성하고 진보하였다. 그리고 제지받지 않고 열등한 민족들이 이렇게 들어온 것은, 북쪽 미개인들이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나중에 정복하도록 길을 닦았으며, 그들은 남아 있는 유능한 혈통을 몰아냈다. 후일에도 문화를 가진 그 잔재는 무지하고 거친 이 침공자들의 존재를 여전히 분개했다.
78:7.1 (874.6)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철에 강이 둑을 넘쳐흐르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이 홍수는 그들의 생활에 해마다 터지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북쪽에서 점진적인 지질학적 변화의 결과로서 새로운 위험이 메소포타미아 유역을 위협했다.
78:7.2 (874.7) 처음 에덴이 물 속에 가라앉은 뒤에 몇천 년 동안, 지중해의 동부 해안가 근처의 산과 메소포타미아의 북서쪽과 북동쪽의 산들은 계속해서 높아졌다. 고지가 이렇게 높아지는 것은 기원전 약 5000년에 크게 가속되었고, 이것은 북쪽 산맥에 강설량이 크게 늘어남과 함께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두루, 봄이 되면 전례 없이 큰 홍수를 일으켰다. 봄에 생기는 이 홍수는 더욱 악화되어서, 결국 강 지역에 거주하던 자들은 동쪽의 고지로 밀려났다. 거의 1천 년 동안 수십 도시가 널리 퍼진 이러한 홍수 때문에 실질적으로 버림받았다.
78:7.3 (874.8) 거의 5천 년 뒤에, 바빌로니아에서 포로로 살던 히브리인 사제들이 유대 민족의 유래를 아담까지 거슬러 추적하려고 애썼을 때, 그 이야기를 연결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 중 한 사람에게, 그런 수고를 집어치우고, 노아 홍수 시절에 온 세상이 사악한 가운데 물에 빠지게 만들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추적하여 이처럼 노아의 살아남은 세 아들 중 하나에게까지 바로 거슬러 올라가기에 훨씬 좋은 처지에 있으려는 생각이었다.
78:7.4 (875.1) 물이 지구의 표면 전체를 덮은 때에 관한 전통은 널리 퍼져 있다. 많은 종족이 지난 시대 어느 때인가 세계적 홍수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성경에 있는 노아ㆍ방주ㆍ홍수에 관한 이야기는 바빌로니아에서 포로로 살던 동안에 히브리인 사제들이 발명한 것이다. 유란시아에 생명이 정착한 뒤로 보편적 홍수는 한 번도 있은 적이 없다. 지구의 표면이 완전히 물로 덮인 때는 땅이 나타나기 전, 시생대(始生代) 동안이었다.
78:7.5 (875.2) 그러나 노아는 정말로 살아 있었다. 그는 에렉 가까이 강가의 촌락 아람에서 포도주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는 해마다 강물이 올라오는 날짜를 적은 기록을 만들었다. 그는 강 유역을 오르내리면서, 모든 집을 나무로, 배 모양으로 지으라, 홍수 철이 다가올 때 밤마다 가족의 동물을 갑판에 올려놓으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많은 비웃음을 샀다. 그는 해마다 이웃에 있는 강가의 여러 촌락으로 가서, 며칠 있으면 홍수가 오리라 경고하곤 했다. 마침내, 드물게 몹시 쏟아진 비로 해마다 있는 홍수가 몹시 커져서, 갑자기 솟아오른 물이 마을 전체를 싹 쓸어버렸다. 오직 노아와 그의 직계 가족이 집으로 쓰는 배에서 구제되었다.
78:7.6 (875.3) 이 여러 홍수는 안드 족속 문명의 붕괴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홍수 기간이 끝나자, 둘째 동산은 사라져 버렸다. 오직 남쪽에, 그리고 수메르인 사이에서, 옛 영광의 어떤 자국이라도 남아 있다.
78:7.7 (875.4) 가장 오래 된 문명의 하나인 이것의 잔재는 메소포타미아의 이 지역에서, 그리고 북동쪽과 북서쪽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러나 더 오래 된 달라마시아 시절의 흔적은 페르시아 만의 바다 밑에 존재하고, 첫 에덴은 지중해의 동쪽 끝, 물 밑에 잠겨 있다.
78:8.1 (875.5) 안드 족속의 마지막 분산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생물학적 중추를 부수었을 때, 이 우수한 종족의 작은 소수(小數) 집단이 두 강 입구 가까이 있던 그들의 고향에 남아 있었다. 이들은 수메르인이었고, 기원전 6000년이 되자 그들의 줄기는 대체로 안드 족속이 되었다. 하지만 그 문화의 성격은 놋 족속에 더 가까웠으며, 그들은 달라마시아의 옛 전통에 집착하였다. 그런데도 해안 지역의 이 수메르인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마지막 안드 족속이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종족들은, 이 시대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두개골 종류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이미 이 늦은 시점에 속속들이 섞여 있었다.
78:8.2 (875.6) 수사가 아주 크게 번성한 것은 이 홍수가 있던 시절이었다. 처음에 낮은 곳에 세운 도시는 물에 잠겼고, 그래서 둘째 마을, 곧 더 높이 있던 마을은 그 시절의 특이한 공예품 본부로서 낮은 곳에 있던 도시를 이어받았다. 이 홍수가 나중에 줄어들자, 우르는 도기 산업의 중심이 되었다. 약 7천 년 전에 우르는 페르시아 만에 있었고, 그 뒤로 강의 퇴적물은 땅을 현재의 한계까지 쌓아 올렸다. 이 촌락들은 치수(治水) 작업이 개선되고 강들의 입구가 넓어졌기 때문에, 홍수로부터 피해를 적게 보았다.
78:8.3 (875.7)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유역에서 곡식을 심던 평화로운 사람들은 투르키스탄과 이란 고원에 있던 미개인의 침공에 시달린 지 오래 되었다. 그러나 고지의 목초지에서 가뭄이 늘어났기 때문에, 이제 공동으로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침공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침공은 더군다나 심각했는데, 둘러싼 이 목자와 사냥꾼들이 대량의 길들인 말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말의 소유는 남쪽에 있는 부유한 이웃에 비하여 그들을 군사적으로 엄청나게 유리하게 만들었다. 짧은 기간에 그들은 온 메소포타미아를 휩쓸고, 마지막 문화의 물결을 밀어냈으며 이것은 유럽, 서 아시아, 북 아프리카 모두에 퍼졌다.
78:8.4 (876.1) 이 메소포타미아 정복자들은 그들의 계층 안에, 아담 핏줄의 얼마큼을 포함하여, 투르키스탄의 혼합된 북부 종족들의 우수한 안드 혈통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덜 진보되었지만 더 활력 있는, 북에서 온 이 부족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잔재를 재빨리, 기꺼이 동화(同化)했고, 당장에 역사(歷史) 연대기의 처음에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그 혼합된 민족으로 발달하였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사라지는 문명의 많은 단계를 재빨리 되살렸고, 강 유역에 살던 부족들의 예술, 그리고 수메르인의 문화에서 많은 것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셋째 바벨 탑까지 세우려고 애썼고, 나중에 그 용어를 그들 국가의 이름으로 채택하였다.
78:8.5 (876.2) 동북부로부터 온 이 미개한 기병들이 유프라테스 강 유역 전체에 들끓었을 때, 그들은 페르시아 만에서 강 입구 근처에 거주하던 안드 족속의 잔재를 정복하지 않았다. 이 수메르인은 우수한 지능, 더 나은 무기, 그리고 그들이 지은 광범위한 군사적 운하(運河) 체계 때문에 자신들을 방어할 수 있었다. 이 운하는 물웅덩이를 서로 연결하는 관개 계획에 덧붙인 것이었다. 그들은 동일한 집단 종교를 가졌기 때문에 뭉친 민족이었다. 북서쪽에 있는 이웃들이 고립된 도시 국가로 갈라진 지 오랜 뒤에도, 이렇게 그들은 종족과 국가의 통일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도시 집단 가운데 어느 것도 뭉친 수메르인을 정복할 수 없었다.
78:8.6 (876.3) 그리고 북쪽에서 온 침략자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이 수메르인이 유능한 선생이요 행정자인 것을 신임하고 그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배웠다. 북쪽에, 그리고 서쪽에 에집트로부터 동쪽에는 인도까지, 모든 민족이 그들을 예술과 산업의 선생으로, 상업의 지도자로서, 나라의 행정자로서 크게 존경하고 찾았다.
78:8.7 (876.4) 초기의 수메르 연방이 깨어진 뒤에, 셋 족속 사제들의 변절한 후손이 후일의 도시 국가들을 다스렸다. 이 사제들이 이웃 도시들을 정복했을 때에야 그들은 자신을 왕이라고 불렀다. 다른 신(神)을 경계하는 마음 때문에, 후일에 도시 임금들은 사르곤 시절 이전에 강력한 연방을 세우지 못했다. 각 도시는 그 도시의 신이 모든 다른 신보다 우수하다고 믿었고, 따라서 그들은 공통된 지도자에게 복종하려 하지 않았다.
78:8.8 (876.5) 도시의 사제들이 미약하게 통치하던 이 긴 기간을 키시의 사제 사르곤이 끝을 맺었는데, 그는 자기가 임금이라고 선포하고 메소포타미아 전체와 인접한 땅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대에는 이것이, 사제가 다스리고 사제에 억눌려 있고 각 도시가 자체의 도시 신과 자체의 예식 관습을 가진, 그런 도시 국가들의 종말을 가져왔다.
78:8.9 (876.6) 이 키시 연방이 깨어진 뒤에, 이 강 유역의 도시들 사이에 우위를 얻으려고 오랫동안 끊임없이 전쟁하던 기간이 따랐다. 그리고 통치권은 수메르ㆍ아카드ㆍ키시ㆍ에렉ㆍ우르ㆍ수사 사이에 다양하게 바뀌었다.
78:8.10 (876.7) 기원전 2500년 무렵에 수메르인은 북쪽에 있는 수 족속과 구 족속의 손에 크게 패배를 겪었다. 홍수로 생긴 언덕 위에 세운, 수메르의 서울 라가시가 함락되었다. 에렉은 아카드가 무너진 뒤에, 30년 동안 버티었다. 하무라비의 통치가 확립될 때가 되자 수메르인은 북쪽의 셈 족속의 계층에 흡수되었고, 메소포타미아의 안드 족속은 역사의 페이지에서 사라졌다.
78:8.11 (877.1) 기원전 2500년에서 2000년까지,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유목민이 날뛰었다. 네르 족속은 안돈 족속과 안드 족속이 혼합되어 생긴 부족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낳은 후손 가운데 카스피 집단이 마지막으로 분출한 것이다. 미개인들은 메소포타미아를 멸망시키지 못했고, 나중에 기후의 변화가 이를 이룩하였다.
78:8.12 (877.2) 이것이 아담의 시절 뒤에 보라 인종, 그리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있던 그들의 고향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들의 고대 문명은, 우수한 민족들이 바깥으로 이주하고 열등한 이웃들이 이민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마침내 멸망했다. 그러나 미개한 기병들이 그 유역을 정복하기 오래 전에, 동산 문화의 상당 부분이 아시아ㆍ아프리카ㆍ유럽으로 퍼졌고, 거기서 유란시아의 20세기 문명을 일으킨 효소를 생산하였다.
79:0.1 (878.1) 아시아가 인류의 고향이다. 이 대륙의 남쪽 반도에서 안돈과 폰타가 태어났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의 고지에서 그들의 후손 바도난은 원시 문화 중심의 기초를 세웠고, 이것은 50만 년이 넘도록 이어 왔다. 여기서 인류의 이 동부 초점에서 산긱 민족들은 안돈의 혈통으로부터 분화(分化)되었고, 아시아는 그들의 처음 집이요, 첫 사냥터, 첫 전쟁터였다. 남서 아시아는 달라마시아 사람, 놋 족속, 아담 족속, 안드 족속의 이어지는 문명을 보았고, 이 지역으로부터 현대 문명의 잠재성이 세계로 퍼졌다.
79:1.1 (878.2) 2만 5천 년이 넘도록, 거의 기원전 2000년까지 계속해서, 유라시아의 심장부는 주로 안드 족속이었으나 그 성분이 줄어들었다. 투르키스탄의 낮은 땅에서 안드 족속은 서쪽으로 내륙 호수들을 돌아서 유럽으로 들어갔고, 한편 이 지역의 고지로부터 동쪽으로 침투했다. 동부 투르키스탄 (신장), 그리고 그보다 덜한 정도로 티벳은 고대의 출입구였고, 거기를 통해서 이 메소포타미아 민족들은 산을 거쳐서 황인의 북쪽 땅으로 갔다. 안드 족속의 인도 침투는 투르키스탄의 고지로부터 펀잡으로, 그리고 이란의 풀 뜯는 땅으로부터 발루키스탄을 거쳐서 진행되었다. 이 초기의 민족 이동은 어떤 의미에서도 정복(征服)이 아니었다. 이것은 오히려 안드 부족들이 인도의 서부와 중국으로 계속하여 흘러 들어간 것이다.
79:1.2 (878.3) 거의 1만 5천 년 동안, 혼합된 안드 족속의 문화 중심들은 신장에서 타림 강의 분지에, 남쪽으로는 티벳의 고지 지역에서 지속되었고, 여기서 안드 족속과 안돈 족속이 널리 섞였다. 타림 강 유역은 가장 동쪽에 있는 참 안드 문화의 전진 기지(基地)였다. 여기서 그들은 촌락들을 지었고, 동쪽으로 진취적인 중국인, 북쪽으로 안돈 족속과 무역 관계를 시작하였다. 그 시절에 타림 지역은 기름진 땅이었고, 비가 많이 왔다. 고비의 동쪽에는 탁 트인 초원이 있었고, 거기서 동물을 기르던 자들은 차츰 농업으로 전향하였다. 이 문명은 비를 실은 바람이 남동쪽으로 바뀌었을 때 무너졌으나, 그 전성기에 이 문명은 바로 메소포타미아와 힘을 겨루었다.
79:1.3 (878.4) 기원전 8000년이 되어, 중앙 아시아의 고지 지역에서 건조함이 천천히 심해진 것은 안드 족속을 강의 저지대와 바닷가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심해지는 가뭄은 그들을 나일 강, 유프라테스 강, 인더스 강, 황하 유역으로 몰았을 뿐 아니라, 안드 문명에서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다. 새 계급의 사람들, 곧 상인이 큰 무리를 지어 비로소 나타났다.
79:1.4 (879.1) 기후 조건이 이동하는 안드 족속에게 사냥을 쓸모없게 만들었을 때, 그들은 목자가 됨으로 더 오래 된 민족들의 진화 과정을 밟지 않았다. 상업과 도시 생활이 나타났다. 에집트로부터 메소포타미아와 투르키스탄을 거쳐서 중국과 인도의 강들까지, 상당히 문명화된 부족들이 제조업과 무역에 전념하는 여러 도시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아도니아는 중앙 아시아에서 상업(商業)의 대도시가 되었고, 그 위치는 오늘날 아슈카바드 시 가까이 있었다. 돌ㆍ금속ㆍ나무ㆍ도기를 다루는 상업이 땅과 바다에서 빨리 발달되었다.
79:1.5 (879.2) 그러나 항상 심해지는 가뭄이 차츰 카스피 바다의 남쪽과 동쪽 땅으로부터 안드 족속의 대탈출을 가져왔다. 민족 이동의 물결이 북쪽이 아니라 남쪽을 향하여 길을 바꾸기 시작했고, 말을 탄 바빌로니아인은 메소포타미아로 밀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79:1.6 (879.3) 더 나아가서 중앙 아시아에서 심해지는 건조성은 인구를 줄이고 이 사람들의 호전성을 약화시키도록 작용하였다. 북쪽에서 강우량이 줄어들어 유목하는 안돈 족속이 할 수 없이 남쪽으로 내려갔을 때, 투르키스탄에서 엄청난 안드 족속의 탈출이 있었다. 이것은 이른바 아리아인이 레반트와 인도로 들어가는 마지막 이동이다. 이렇게 아담의 혼합된 후손들의 오랜 분산이 절정에 이르렀고, 이 동안에 모든 아시아 민족, 그리고 태평양의 섬 민족들의 대부분이, 이 우수한 종족들로 인하여 어느 정도 개량되었다.
79:1.7 (879.4) 이렇게 동반구에 흩어졌으나, 안드 족속은 메소포타미아와 투르키스탄에 있는 고향을 잃어버렸는데, 안돈 족속의 광범위한 이 남방 이동이 중앙 아시아에서 거의 사라지는 점까지 안드 족속의 수를 줄어들게 했기 때문이다.
79:1.8 (879.5) 그러나 그리스도 이후 20세기에도, 투란과 티벳 종족들 사이에, 이 지역에서 이따금 발견되는 금발 종류가 증언하는 바와 같이, 안드 족속 혈통의 흔적이 있다. 옛날 중국의 연대기(年代記)는 양자강에 있는 평화로운 촌락들 북쪽으로, 붉은 머리털의 유목민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며, 거기서 오래 전에 타림 분지에서 금발의 안드 족속 종류와 갈색 머리의 몽고인 부류가 있었다는 것을 충실히 기록하는 그림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79:1.9 (879.6) 중앙 아시아의 안드 족속의 잠자던 군사적 재능이 마지막으로 크게 나타난 것은 서기 1200년이었는데, 이때 징기스칸 밑에서 몽고인이 아시아 대륙의 반 이상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옛날의 안드 족속처럼, 이 용사들은 “하늘에 계신 유일한 하나님”이 존재함을 선포하였다. 그들의 제국이 일찍 무너진 것은 서양과 동양의 문화적 교류를 오랫동안 늦추었고, 아시아에서 유일신 개념이 성장하는 것을 크게 방해했다.
79:2.1 (879.7) 인도는 유란시아 민족들이 모두 섞인 유일한 지역이며, 안드 족속의 침공이 마지막 혈통을 더했다. 인도 북서쪽에 있는 고지에서 산긱 종족들이 태어났고, 예외 없이 각 종족의 사람들이 옛 시절에 인도 아대륙(亞大陸)에 파고들었으며, 유란시아에서 일찍이 존재한 가장 이질적 종족 혼합을 뒤에 남겼다. 고대의 인도는 이동하는 종족들을 붙잡아 두는 분지로 작용했다. 그 반도의 기초는 옛날에 지금보다 좁았고, 간지스 강과 인더스 강 삼각지의 상당한 부분은 최근 5만 년 동안 생긴 결과이다.
79:2.2 (879.8) 인도에서 가장 일찍부터 있었던 종족 혼합은 이동하는 홍인과 황인이 원주민 안돈 족속과 섞인 것이다. 이 집단은 큰 무리의 주황 민족 뿐 아니라, 동부에 절멸한 녹색 민족의 대부분을 흡수하여 나중에 약화되었고, 제한된 양으로 청인과 혼합하여 얼마큼 개량되었지만, 큰 집단의 남인종을 동화함으로 극도로 손해를 보았다. 그러나 이른바 인도 원주민은 도저히 이 옛 민족을 대표한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은 오히려 가장 열등한 남쪽과 동쪽의 변두리 세력이고, 이것은 초기의 안드 족속이나 나중에 나타나는 아리아인 사촌들에게 결코 완전히 흡수되지 않았다.
79:2.3 (880.1) 기원전 20,000년이 되기까지, 인도 서부의 인구는 이미 아담 족속의 피 흔적이 있었고, 유란시아 역사에서 결코 어느 한 민족이 그렇게 많은 종족을 통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2차 산긱 혈통들이 지배한 것은 불행한 일이었고, 옛날에 있었던 이 종족의 도가니에 청인과 홍인이 대체로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재난이었다. 1차 산긱 혈통이 더 많았더라면, 더욱 위대하게 되었을까 싶은 문명의 향상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일이 전개된 바와 같이, 홍인은 두 아메리카에서 자신을 죽이고 있고, 청인은 유럽에서 즐겁게 장난치고 있었으며, 아담의 초기 후손은 (나중의 후손 대부분도) 인도나 아프리카나 다른 곳에서, 검은 빛을 띤 민족들과 섞일 욕구를 거의 보이지 않았다.
79:2.4 (880.2) 기원전 15,000년 무렵에, 투르키스탄과 이란 전역에서 인구의 압력이 팽창한 것은 인도를 향하여 정말로 광범위한 안드 민족의 이동을 일으켰다. 1천 5백 년이 넘도록 이 우수한 민족들은 발루키스탄의 고지를 통하여 쏟아져 들어와서 인더스와 간지스 강 유역에 퍼졌으며, 천천히 남쪽으로 데칸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북서쪽에서 온 이 안드 족속의 압력은 남쪽과 동쪽에 있는 열등한 사람들의 다수를 버마와 중국 남부로 몰았지만, 침공자들이 종족으로서 사라지는 것을 막을 만큼 충분하지는 않았다.
79:2.5 (880.3) 인도가 유라시아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한 것은 대체로 지형(地形)의 문제였다. 북쪽으로부터 받는 인구의 압력은 대다수의 사람들을 남쪽으로, 데칸의 줄어드는 영토로 밀어냈을 뿐이고, 데칸은 어디나 바다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주해 갈 인접한 땅이 있었더라면, 그 열등한 사람들은 사방으로 밀려났을 터이고, 우수한 혈통은 더 높은 문명을 이룩했을 것이다.
79:2.6 (880.4) 실제로 일어난 바와 같이, 초기 정복자인 이 안드 족속은 서로 결혼하는 것에 관하여 엄격한 제한을 둠으로 그들의 신분을 보존하고 종족을 삼키는 인파를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애썼다. 그런데도 안드 족속은 기원전 10,000년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 민족의 대중 전체가 이들을 흡수함으로 두드러지게 개량되었다.
79:2.7 (880.5) 종족의 혼합은 문화의 융통성을 촉진하고 진보하는 문명에 도움이 되므로 언제나 유익하다. 그러나 종족 혈통에서 열등한 요소가 주류를 이룬다면, 그러한 성취는 잠시일 뿐이다. 여러 나라 말을 쓰는 문화는 우수한 혈통이 열등한 혈통과 충분한 간격을 두고 자체를 번식할 때에야 보존될 수 있다. 우수한 자의 번식이 줄어들면서 열등한 자가 제한 없이 번식하는 것은, 어김없이 문화적 문명의 자살이 된다.
79:2.8 (880.6) 안드 정복자들이 실제보다 세 배가 되었거나, 아니면 주황ㆍ녹색ㆍ남색의 혼합 거주자들 중에서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3분의 1을 몰아내거나 없앴더라면, 인도는 세계에서 주요한 문화적 문명 중심의 하나가 되었을 터이고, 의심할 여지 없이, 투르키스탄으로, 그리고 거기에서 북쪽으로 유럽으로 흘러 들어간, 메소포타미아인의 후기 인파를 더 유인했을 것이다.
79:3.1 (881.1) 인도를 정복한 안드 족속과 토종 핏줄의 혼합은 결국 드라비다인이라 부른 그 혼합된 민족을 낳았다. 초기에 있었고 좀더 순수했던 드라비다인은 문화적으로 성취할 큰 능력을 소유했는데, 이 능력은 그들의 안드 족 유산(遺産)이 점진적으로 묽어짐에 따라서 줄곧 약화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거의 1만 2천 년 전에 인도의 싹트는 문명을 망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적은 양의 아담의 피를 주입한 것조차 사회의 발전을 두드러지게 가속하였다. 이 복합 혈통은 대번에 그때 땅에서 가장 다능한 문명을 낳았다.
79:3.2 (881.2) 인도를 정복한 뒤에 얼마 안 되어, 드라비다 안드 족속은 메소포타미아와 종족 및 문화의 접촉을 잃어버렸지만, 나중에 뱃길과 카라반 길이 열리자 이 연락이 다시 회복되었다. 지난 1만 년 안에 어느 때도 인도가 서쪽으로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동쪽으로 중국과 완전히 접촉을 잃은 적이 없다. 하지만 산의 장벽은 서쪽의 교류를 크게 유리하게 만들었다.
79:3.3 (881.3) 인도 종족들의 우수한 문화와 종교적 경향은 드라비다인이 지배하던 옛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며, 일부는 일찍이 있었던 안드 족속의 침공과 나중에 아리아인의 침공을 통하여 셋 사람 사제들이 아주 많이 인도로 들어갔다는 사실 때문이다. 인도의 종교 역사를 통하여 이어지는 일신교의 실마리는 이처럼 둘째 동산에서 아담 족속의 가르침으로부터 뻗어나온다.
79:3.4 (881.4) 기원전 16,000년부터 일찍 셋 사람 사제 1백 명의 일행이 인도로 들어가서, 다국어를 쓰는 그 민족의 서쪽 절반에서 종교적 정복을 거의 이루었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는 오래 가지 않았다. 5천 년 안에 그들이 지녔던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교리는 불의 신(神)의 삼자일체 상징으로 변질되었다.
79:3.5 (881.5) 그러나 안드 족속의 이동이 끝나기까지 7천 년이 넘도록 인도 거주자의 종교 상태는 세계 전체보다 훨씬 높았다. 이 시절에 인도는 세계에서 선두를 이끄는 문화ㆍ종교ㆍ철학ㆍ상업을 가진 문명을 낳을 가망이 있었다. 그리고 안드 족속이 남쪽 사람들 밑에 완전히 파묻혀 사라지지 않았더라면, 이 운명이 아마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79:3.6 (881.6) 드라비다인 문화의 중심은 강 유역에서, 주로 인더스 강과 간지스 강에서, 그리고 동 갓츠를 통해서 바다로 흐르는 큰 세 강을 따라서, 데칸에서 자리를 잡았다. 서 갓츠의 바닷가를 따라서 있던 촌락들의 탁월성은 바다로 수메르와 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79:3.7 (881.7) 드라비다인은 가장 일찍 도시를 세우고, 육지와 바다로 널리 수출입 사업에 종사한 민족들에 속한다. 기원전 7000년이 되어 낙타의 일행들이 먼 메소포타미아까지 정기적으로 여행하고 있었다. 드라비다인의 해상 운송은 아라비아 해를 가로질러 페르시아 만에 있는 수메르인의 여러 도시까지 해안을 따라 밀고 들어갔으며, 벵골 만의 바다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동인도 제도(諸島)까지 멀리 갔다. 글쓰는 기술과 함께, 알파벳이 이 뱃사람과 상인들을 통해서 수메르에서 수입되었다.
79:3.8 (881.8) 이 상업 관계는 국제적 문화를 더욱 다양화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도시 생활의 많은 세련된 물건이, 그리고 사치품도, 일찍부터 나타나게 만들었다. 나중에 나타나는 아리아인이 인도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드라비다인의 얼굴에서 산긱 종족들 안에 파묻힌 사촌(四寸)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들은 상당히 진보된 문명을 발견하였다. 생물학적 한계가 있었어도 드라비다인은 우수한 문명을 세웠다. 그것은 온 인도 전역에 걸쳐서 흩어졌고, 데칸에서 현대까지 살아남았다.
79:4.1 (882.1) 안드 족속의 두 번째 인도 침투는 그리스도 이전 제3 천년의 중간에, 거의 5백 년 동안에 벌어진 아리아인의 침공이었다. 이 민족 이동은 안드 족속이 투르키스탄의 고향에서 마지막으로 탈출한 것을 가리킨다.
79:4.2 (882.2) 초기 아리아인의 중심들은 인도의 북쪽 절반에, 특히 북서쪽에 흩어져 있었다. 이 침공자들은 그 나라의 정복을 결코 끝내지 않았고, 나중에 이것을 소홀히 여겨서 파멸을 만났는데, 이는 그들의 적은 수가 남쪽에 있는 드라비다인에게 흡수되도록 취약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며, 이 드라비다인은 나중에 히말라야 지방을 제외하고 반도(半島) 전체에 들끓었다.
79:4.3 (882.3) 아리아인은 북쪽 지방을 제외하고, 인도에서 종족 면에서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데칸에서 그들의 영향은 종족보다 문화ㆍ종교에 끼친 것이었다. 인도 북부에서 이른바 아리아인 피가 더 많이 지속한 것은 이 지역에 그들이 큰 무리로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나중에 정복자ㆍ상인ㆍ선교사들로 인하여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 이전 바로 1세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아리아인의 피가 펀잡으로 줄곧 스며들었고, 마지막 유입(流入)은 헬라 민족의 전투를 뒤따랐다.
79:4.4 (882.4) 간지스 강 평야에서 아리아인과 드라비다인은 결국에 섞여서 높은 문화를 일으켰고, 이 중심은 북동쪽으로부터, 중국이 기여(寄與)한 것으로 인하여 나중에 강화되었다.
79:4.5 (882.5) 인도에는, 얼마큼 민주적인 아리아인 체계로부터 전제(專制) 형태와 군주 형태의 정부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사회 조직이 때때로 번성하였다. 그러나 사회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모습은 큰 사회 카스트가 지속된 것이었는데, 종족의 신분을 지속하려는 노력으로 아리아인이 이를 시작하였다. 정교한 이 카스트 제도는 오늘날까지 지속되어 왔다.
79:4.6 (882.6) 4대 카스트 가운데서 첫째를 빼고 모두가, 정복자인 아리아인이 열등한 백성과 피가 섞이는 것을 막으려는 헛된 노력에서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상급의 카스트, 곧 선생인 사제들은, 셋 족속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리스도 뒤 20세기의 브라만들은 둘째 동산의 사제들로부터 직계로 내려온 문화적 후손이다. 하지만 그 가르침은 화려한 그 선조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다.
79:4.7 (882.7) 아리아인이 인도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둘째 동산의 종교에서 남아 있던 전통에 간직된 그들의 신 개념을 가져왔다. 그러나 아리아인이 민족으로서 없어진 뒤에, 브라만 사제들은 데칸의 열등한 종교들과 갑자기 접촉하여 생긴 이교도의 여세를 결코 막아낼 수 없었다. 이처럼 인구의 대다수가 열등한 종교들의 미신,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미신의 속박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래서 인도는 옛 시절에 전조가 보였던 높은 문명을 일으키지 못했다.
79:4.8 (882.8) 그리스도 이전 6세기에 일어난 영적 각성은 인도에서 버티지 못했고, 마호메트 교도의 침공이 있기 전에 망했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일에 온 인도를 이끌려고 언젠가 더 위대한 고타마가 나타날지 모른다. 그리고 나서 사람을 마비시키는 영향, 진보하지 않는 영적 시력(視力)의 영향 밑에서 아주 오랫동안 혼미 상태에 빠졌던, 다능한 민족의 문화적 잠재성이 열매 맺는 것을 세상이 지켜볼 것이다.
79:4.9 (883.1) 문화는 생물학적 기초 위에 세워지지만, 카스트만 가지고 아리아인의 문화를 지킬 수 없었다. 이는 종교, 참 종교가, 인간의 형제 정신에 기초를 둔 우수한 문명을 세우도록 사람을 재촉하는 더 높은 에너지의 필수 근원이기 때문이다.
79:5.1 (883.2) 인도에 관한 이야기는 안드 족속이 더 오래 된 진화 민족들을 정복하고 궁극에 그 속에 파묻힌 것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동 아시아의 이야기는 1차 산긱, 특히 홍인과 황인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더 온당하다. 이 두 민족은, 유럽에서 청인들을 아주 크게 뒤처지게 만든, 저하된 네안데르탈인의 피와 섞이는 것을 대체로 피했으며, 따라서 1차 산긱 부류의 우수한 잠재성을 간직하였다.
79:5.2 (883.3) 초기의 네안데르탈인은 유라시아 전역에 널리 흩어졌고, 동쪽 날개는 저하된 동물 핏줄로 더욱 오염되었다. 이 인간 이하 부류들은 제5 빙하기 때문에 남쪽으로 밀려났고, 이것은 동 아시아로 산긱의 민족 이동을 아주 오랫동안 막았던 바로 그 빙상(氷床)이었다. 홍인이 인도의 고지를 돌아서 북동쪽으로 움직였을 때, 홍인은 북동 아시아가 이 인간 이하의 부류가 없음을 발견했다. 홍인종의 부족 조직은 다른 어느 민족들보다 더 일찍 형성되었고, 그들은 산긱 종족들의 중앙 아시아 중심지로부터 처음으로 이주한 자이다. 열등한 네안데르탈인의 핏줄은 나중에 이동하는 황인 부족들에게 멸망되거나 본토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홍인은 황인 부족들이 도착하기 전에, 거의 10만 년 동안 동 아시아에서 세력을 떨쳤다.
79:5.3 (883.4) 30만 년도 더 전에 황인종의 주류가 남쪽에서 바닷가의 이주민으로서 중국으로 들어갔다. 천년이 지날 때마다 그들은 내륙으로 멀리 멀리 침투했으나, 그들은 비교적 최근까지, 이동하는 티벳 형제들과 접촉을 가지지 않았다.
79:5.4 (883.5) 증가하는 인구의 압력은 북쪽으로 움직이는 황인종으로 하여금 홍인의 사냥터 속으로 비로소 밀고 들어가게 만들었다. 종족 사이의 자연스런 적대 감정과 더불어 이 침략은 적대 행위가 증가되게 하였고, 이처럼 더 깊이 아시아의 기름진 땅을 얻으려는 중대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79:5.5 (883.6) 홍인종과 황인종 사이에 오랜 세월에 걸친 이 싸움은 유란시아 역사에서 하나의 서사시이다. 20만 년이 넘도록 우수한 이 두 민족은 끊임없이 지독한 싸움을 벌였다. 초기의 투쟁에서는 홍인들이 대체로 성공했고, 그들의 침공하는 패거리들은 황인의 여러 촌락에 대소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황인은 전투 기술을 배우는 똑똑한 생도였고, 친구들과 평화롭게 사는 두드러진 능력을 일찍부터 나타냈다. 중국인은 뭉친 가운데 힘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배운 사람이었다. 홍인 부족들은 서로 죽이는 싸움을 계속하였고, 무자비한 중국인의 공격하는 손에 대번에 거듭 패배를 겪기 시작했으며, 중국인은 용서 없이 북쪽으로 행진을 계속했다.
79:5.6 (883.7) 10만 년 전에, 크게 학살당한 홍인 부족들이 마지막 빙하기의 물러가는 얼음을 등지고 싸우고 있었는데, 베링 지협(地峽) 위로, 서반구로[1] [24] 가는 육상 통로가 지나갈 수 있게 되었을 때, 이 부족들은 아시아 대륙의 불친절한 바닷가를 망설이지 않고 버렸다. 순수한 마지막 홍인들이 아시아를 떠난 지 8만 5천 년이 되지만, 오랜 세월에 걸친 그 싸움은 승리한 황인종에게 유전의 자국을 남겼다. 북쪽의 중국 종족들은, 시베리아에 사는 안돈 족속과 함께, 홍인의 핏줄을 많이 동화(同化)하였고, 그렇게 함으로 어지간히 이득을 보았다.
79:5.7 (884.1) 북 아메리카의 인디안은 아담과 이브의 안드 자손과도 결코 접촉을 가지지 않았고, 아담이 오기 5만여 년 전에, 그들의 아시아 고향을 빼앗겼다. 안드 족속이 이동하던 시절에 순수 홍인의 핏줄은 북 아메리카에서 유목하는 부족으로서 퍼지고 있었고, 이들은 소규모로 농사를 짓던 사냥꾼이었다. 이 종족 및 문화 집단들은, 두 아메리카에 도착할 때부터 기독교 시대의 첫째 천년 끝에 유럽의 백인 종족들에게 발견될 때까지, 나머지 세계와 거의 완전히 고립된 채로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는 에스키모인이, 북쪽의 홍인 부족들이 본 중에서 백인에 가장 가까웠다.
79:5.8 (884.2) 안드 족속의 영향을 제쳐놓고, 오직 홍인과 황인 종족이 높은 정도의 문명을 일찍이 이룩한 인간 혈통이었다. 가장 오래 된 아메리카 인디안의 문화는 칼리포니아에 있는 오나모나론톤 중심이었으나, 이것은 기원전 35,000년이 되어서 사라진 지 오래 되었다. 멕시코와 중앙 아메리카에서, 그리고 남 아메리카의 산지에서 나중에 더 오래 지속되는 문명은, 주로 홍인이지만 황인ㆍ주황인ㆍ청인이 상당히 섞인 종족이 세운 것이다.
79:5.9 (884.3) 안드 족속 혈통의 흔적이 페루에 다다르기는 했어도, 이 문명은 산긱의 진화적 산물이었다. 북 아메리카의 에스키모, 그리고 남 아메리카의 폴리네시아 안드 족속 몇을 빼고, 서반구의 민족들은 그리스도 이후 제1 천년 끝까지 나머지 세상과 아무 접촉이 없었다. 유란시아 종족들을 개량하려는 멜기세덱의 최초의 계획에는, 아담의 순수 핏줄 후손 1백만 명이 두 아메리카의 홍인을 개량하러 가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79:6.1 (884.4) 건너 북 아메리카로 홍인을 몰아낸 뒤에 얼마 있다가, 세력이 커지는 중국 민족은 동 아시아의 여러 강 유역에서 안돈 족속을 깨끗이 쓸어 버렸고, 북쪽에 시베리아로, 그리고 서쪽에 투르키스탄으로 그들을 몰아냈는데, 거기서 그들은 곧 안드 족속의 우수한 문화와 접촉하게 되었다.
79:6.2 (884.5) 버마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인도와 중국의 문화가 섞이고 혼합되어서 그 지역에서 연속되는 문명을 일으켰다. 사라진 녹색 인종이 세계에서 어느 다른 데보다 여기서 큰 비율로 지속하였다.
79:6.3 (884.6) 많은 다른 인종이 태평양의 섬들을 차지했다. 대체로, 남쪽에, 그리고 그때 더 널리 퍼져 있던 섬들은 녹인(綠人)과 남인(藍人)의 피를 많이 지닌 민족들이 차지하였다. 북쪽 섬들은 안돈 족속이, 나중에는 황인과 홍인의 혈통을 많이 품은 종족들이 차지했다. 일본 민족의 선조는 기원전 12,000년까지 본토에서 밀려나지 않았는데, 이때 그들은 남쪽으로 해안을 따라 북쪽의 중국 부족들에게 강력한 공격을 받고서 쫓겨났다. 그들의 마지막 탈출은 인구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신다운 인물로 여기게 된 어느 추장이 주도권을 쥐었기 때문이었다.
79:6.4 (885.1) 인도와 레반트의 민족들처럼, 승리한 황인 부족들은 물가를 따라서, 또 강의 상류에 최초의 중심지들을 세웠다. 해안에 있던 촌락들은 잦아지는 홍수(洪水)와 바뀌는 강 물줄기가 낮은 땅의 도시들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자, 후일에는 잘 견디지 못했다.
79:6.5 (885.2) 2만 년 전에 중국인의 선조는 원시 문화와 배움이 있는 강력한 중심을 열두 군데, 특히 황하와 양자강을 따라서 세웠다. 그리고 신장(新彊)과 티벳으로부터 우수한 혼합 민족들의 꾸준한 인파가 도착함으로, 이제 이 중심들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티벳으로부터 양자강 유역까지의 이민은 북쪽처럼 그다지 널리 퍼지지 않았고, 티벳의 중심들은 타림 분지만큼 진보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이동은 안드 족속의 피를 얼마큼 동쪽으로 강가의 촌락들로 날랐다.
79:6.6 (885.3) 고대 황인종의 우수성은 4대 요인 때문이다:
79:6.7 (885.4) 1. 유전 요인. 유럽에 있는 푸른 사촌들과 달리, 홍인종과 황인종 모두가 저하된 인간 핏줄과 섞이는 것을 대체로 피했다. 북쪽의 중국인은 소량의 우수한 홍인과 안돈 족속의 핏줄로 이미 강화되어 있었고, 안드 족속의 피가 상당히 흘러 들어옴으로 곧 이득을 보게 되어 있었다. 남쪽의 중국인은 이 점에서 그다지 운이 좋지 않았는데, 그들은 오랫동안 녹인종을 흡수함으로 고생하였고, 나중에 드라비다 안드 족속의 침공으로 말미암아 인도에서 밀려나오는 열등한 민족들의 떼가 침투해 들어와서 더욱 약해졌다. 오늘날 중국에는 북부 종족과 남부 종족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79:6.8 (885.5) 2. 사회적 요인. 황인종은 자기들끼리 평화를 지키는 것이 귀중함을 일찍이 배웠다. 내부의 평화 성향은 그들의 문명이 수백만 사이에 퍼지는 것을 보장하도록 인구의 증가에 크게 이바지했다. 기원전 25,000년부터 5000년까지, 유란시아에서 가장 큰 집단 문명은 중국의 중앙과 북부에 있었다. 황인은 종족의 단결을 처음으로―대규모의 문화ㆍ사회ㆍ정치 문명을 처음으로―이룩한 사람이었다.
79:6.9 (885.6) 기원전 15,000년에 중국인은 공격적인 군국주의자였다. 그들은 지난날을 지나치게 존중함으로 약화되지 않았고, 그 수가 1천2백만이 채 되지 않았으며, 하나의 공통 언어를 쓰는 밀집된 단체를 이루었다. 이 시대에 그들은 진짜 국가를 세웠고, 유사(有史) 시대의 정치적 연합보다 훨씬 더 뭉쳐지고 동질성이 있었다.
79:6.10 (885.7) 3. 영적 요인. 안드 족속이 이동하던 시대에 중국인은 땅에서 영적 민족에 속했다. 싱랑톤이 선포한 하나의 진리를 숭배하는 데 오랫동안 매달린 것은 대부분의 다른 민족들보다 그들이 앞서게 했다. 진취적이고 앞선 종교의 자극은 흔히 문화의 발전을 좌우하는 요인이다. 인도가 시드는 동안, 진리를 최고의 신으로서 모시는 종교의 자극, 활력을 주는 자극을 받으며 중국은 선두를 달렸다.
79:6.11 (885.8) 이렇게 진리를 숭상하는 정신은 자연의 법칙과 인류의 잠재성을 연구하고 두려움 없이 탐구하도록 자극하였다. 6천 년 전에도 중국인은 아직도 날카로운 연구자였고 진리를 적극적으로 탐구하였다.
79:6.12 (885.9) 4. 지리적 요인. 중국은 서쪽에 산, 동쪽에는 태평양의 보호를 받는다. 오로지 북쪽에 공격받을 길이 열려 있으며, 홍인의 시절부터 후일에 안드 족속의 후손이 오기까지, 어떤 공격하는 민족도 북쪽을 차지하지 않았다.
79:6.13 (886.1) 그리고 산의 장벽이 없고 나중에 영적 문화가 쇠퇴하지 않았더라면, 황인종은 의심할 여지 없이, 투르키스탄으로부터 안드 민족 이동의 더 큰 부분을 끌어들이고, 의문의 여지 없이 세계 문명을 재빨리 지배했을 것이다.
79:7.1 (886.2) 약 1만 5천 년 전에 안드 족속은 어지간히 큰 떼를 지어서, 디다오 (狄道)[2] [25] 통로를 가로질러서, 간쑤(甘肅)의 중국 촌락들 사이에서, 황하 상류의 유역 위에 퍼지고 있었다. 당장에 그들은 동쪽으로 허난(河南)까지 침투했고, 거기에는 가장 진보한 촌락들이 자리를 잡았다. 서쪽으로부터 이렇게 침투한 것은 대체로 안돈 족속이 절반이고 안드 족속이 절반이었다.
79:7.2 (886.3) 황하를 따라서 생긴 문화의 북부 중심들은 언제나 양자강에 있는 남쪽 촌락들보다 더 진취성이 있었다. 적은 무리라도 이 우수한 필사자들이 도착한 뒤 몇천 년 안에, 황하를 따라 생긴 촌락들은 양자강에 있는 마을들보다 선두로 나섰고, 남쪽에 있는 형제보다 우위를 차지했으며, 이 자리는 그 뒤로 늘 유지되었다.
79:7.3 (886.4) 안드 족속이 그렇게 많았기 때문이 아니고, 그 문화가 그다지 우수했기 때문도 아니었으나, 그들과 섞인 것은 더 능력 있는 혈통을 낳았다. 북쪽의 중국인은 타고난 유능한 지성을 약간 자극하기에 겨우 넉넉할 만큼 안드 족속의 피를 받았지만, 이것은 북부 백인 종족들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들떠 있고 탐험하고 싶은 호기심으로 그들을 불태울 만큼 많지는 않았다. 이렇게 안드 족속의 유전을 적게나마 주입한 것은 산긱 부류의 타고난 침착성을 적게 방해하였다.
79:7.4 (886.5) 후일에 안드 족속의 인파는 메소포타미아의 어떤 진보된 문화를 함께 가져왔다. 서쪽으로부터 온 마지막 이민 물결의 경우에 이것이 특히 참말이었다. 그들은 북쪽 중국인의 경제 및 교육 관습을 크게 개량하였다. 황인종의 종교 문화에 그들이 미친 영향은 오래 가지 않았지만, 그들의 나중 후손들은 후일에 생긴 영적 각성에 많이 이바지했다. 그러나 에덴과 달라마시아의 아름다움에 관한 안드 족속의 전통은 중국인의 전통에 영향을 미쳤다. 옛날 중국의 전설은 “신들의 땅”이 서쪽에 있다고 본다.
79:7.5 (886.6) 중국 민족은, 투르키스탄에서 기후가 변하고 후일의 안드 족속 이민이 도착하고 나서 기원전 1만 년이 되기까지, 비로소 도시를 세우고 제조업에 종사하지 않았다. 이 새로운 피가 주입된 것은 황인의 문명에 크게 보태기보다, 우수한 중국인 혈통의 잠재 성향을 더욱, 그리고 빨리 개발하도록 자극하였다. 허난(河南)에서부터 산시(陝西)까지, 진보된 문명의 잠재성이 열매를 맺고 있었다. 금속 가공과 모든 제조 기술이 이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79:7.6 (886.7) 옛날에 중국과 메소포타미아의 어떤 시간 계산, 천문학, 정부의 행정 방법은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두 중심 사이에 상업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생겼다. 중국 상인들은 수메르인 시절에도, 투르키스탄을 거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육로로 여행하였다. 이 교환은 한편으로 치우치지도 않았다―유프라테스 강 유역은, 간지스 평야에 있던 민족들처럼, 이로 인하여 상당히 이득을 보았다. 그러나 기후의 변화와 그리스도 이전 제3 천년에 있었던 유목민의 침공은 중앙 아시아의 카라반 길을 거치는 무역의 양을 크게 줄였다.
79:8.1 (887.1) 홍인은 너무 많이 전투를 겪어서 고생했지만, 중국인 사이에서 국가의 발전은, 아시아를 철저히 정복했기 때문에 늦어졌다는 것이 아주 빗나간 말은 아니다. 그들은 민족을 단결하는 큰 잠재성을 가졌으나 그 잠재성을 알맞게 개발하지 못했는데, 항상 바깥에서 침공하는 위험이 주는, 계속 몰아붙이는 자극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79:8.2 (887.2) 동 아시아의 정복을 마치는 것과 함께 이 고대의 군사(軍事) 국가는 차츰차츰 허물어졌다―지난날의 전쟁을 잊어버렸다. 홍인종과 가졌던 서사시 같은 투쟁에서, 활 쏘는 민족들과 옛날에 싸웠다는 흐릿한 전통이 겨우 지속되었다. 중국인은 일찍부터 농사를 짓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고, 이것은 그들의 평화 성향에 더 이바지했다. 한편 농업에 필요한 인구 밀도보다 훨씬 적은 인구는 그 나라의 평화 성향에 더욱 기여했다.
79:8.3 (887.3) 지난날의 성취를 의식하는 태도 (오늘날 얼마큼 줄어들었다), 압도적으로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보수주의, 잘 발달된 가족 생활은 조상 숭배를 낳았고, 궁극에는 과거의 인물을 숭배하다시피 존경하는 관습을 초래하였다. 그리스ㆍ로마의 문명이 붕괴된 뒤에 5백여 년 동안, 유럽에서 백인 종족들 사이에 아주 비슷한 태도가 지배하였다.
79:8.4 (887.4) 싱랑톤이 가르쳤던 “하나의 진리”를 믿는 신앙과 숭배는 결코 완전히 죽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새로운 상급 진리의 추구는 이미 확립된 것을 존경하는 성향이 깊어짐으로 빛을 잃게 되었다. 황인종의 천재는 천천히 미지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알려진 것의 보존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빨리 진보하던 문명이었던 것이 정체(停滯)하게 된 이유이다.
79:8.5 (887.5) 기원전 4000년과 500년 사이에 황인종의 정치적 재통일이 이루어졌으나 양자강과 황하(黃河)에 있던 중심들의 문화적 연합은 이미 그 전에 성취되었다. 후일에 부족 집단의 이러한 정치적 재통일은 싸움 없이 되지 않았지만, 전쟁에 대한 사회의 여론은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조상 숭배, 늘어나는 지방 언어, 그리고 몇천 년 동안 군사 행동의 요청이 없어진 것은 이 민족을 극도로 평화롭게 만들었다.
79:8.6 (887.6) 진보된 국가를 일찍 개발하리라는 전망을 실현하지 못했는데도, 황인종은 문명의 기술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특히 농업과 원예 분야에서 점진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산시와 허난에서 농본주의자들이 부닥친 치수(治水) 문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집단의 협동을 요구했다. 그러한 관개 및 토양 보존의 문제는 적지 않게 서로 의존하는 성향이 발달하도록 이바지했고, 그 결과로 농업 집단들 사이에 평화가 촉진되었다.
79:8.7 (887.7) 학교가 세워짐과 더불어, 글쓰기의 발전이 곧 전례 없는 규모로 지식을 보급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그러나 뜻을 표시하는 글쓰기 체계의 거추장스러운 본질은 인쇄술이 일찍 나타났는데도, 지식 계급의 수에 한계를 지워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회를 표준화하고 종교ㆍ철학적으로 독단화되는 과정이 빨리 진행되었다. 조상을 숭배하는 종교의 발전은 자연 숭배를 포함하는 미신의 범람으로 더욱 복잡하게 되었으나, 진정한 하나님 개념의 남은 흔적이 제국의 상제(上帝) 숭배에 간직된 채로 남아 있다.
79:8.8 (888.1) 조상 숭배의 큰 단점은 뒤를 돌아보는 철학을 조장하는 것이다. 지난날로부터 지혜를 거두는 것이 아무리 현명하더라도, 지난날을 진리의 유일한 근원으로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진리는 상대적이고 팽창한다. 진리는 언제나 현재에서 살고, 각 세대의 사람들 안에서―아니 각 인생 속에서―새 표현을 이룩한다.
79:8.9 (888.2) 조상 존중에 있는 큰 장점은 그러한 태도가 가족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중국 문화가 놀랍게 안정되고 지속하는 것은 가족에게 최고의 지위를 줌으로 생기는 결과이니, 왜냐하면 문명은 가족의 효과적 작용에 직접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가족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 아니 어떤 다른 민족도 거의 접근하지 못하는 그런 종교적 중요성까지 얻었다.
79:8.10 (888.3) 짙어져 가는 조상 숭배 교파가 강요하는 효도(孝道)와 가족에 대한 충성은 우수한 가족 관계와 오래 가는 가족 집단이 세워지는 것을 보장했고, 이것은 모두 문명을 보존하는 데 다음 요소를 수월하게 만들었다:
79:8.11 (888.4) 1. 재산과 부(富)의 보존.
79:8.12 (888.5) 2. 한 세대를 넘어서 지식을 한데 모은다.
79:8.15 (888.8) 안드 족속이 오면서 시작된 중국 문명의 형성기는, 그리스도 전 6세기에 크게 윤리적ㆍ도덕적ㆍ반(半)종교적 각성이 있기까지 계속된다. 중국인의 전통은 지난날의 발전에 관한 흐릿한 기록을 간직한다. 즉 모계 가족에서 부계(父系) 가족으로 옮겨 간 것, 농업의 확립, 건축의 발전, 산업의 시작―이 모든 것을 연달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어떤 다른 비슷한 설명보다도 훨씬 더 정확하게, 한 우수한 민족이 미개한 수준에서 훌륭히 올라간 그림을 제시한다. 이 시기에 그들은 원시 농경 사회로부터 도시ㆍ제조업, 금속 가공과 상업 교류, 정부ㆍ글쓰기ㆍ수학ㆍ예술ㆍ과학ㆍ인쇄술을 포함하는 더 높은 사회 조직으로 성장했다.
79:8.16 (888.9) 그래서 황인종의 고대 문명은 여러 세기를 통해서 지속해 왔다. 중국 문화에서 처음으로 중요한 진보가 있은 지 거의 4만 년이 된다. 비록 후퇴가 여러 번 있었으나, 한(漢)의 아들들의 문명은 20세기 시대에 바로 이르기까지, 계속 진보하는 단절되지 않은 그림을 어느 것보다 가장 가깝게 제시한다. 백인 종족의 기계 및 종교의 발전은 높은 수준이었으나, 그들은 결코 가족에 대한 충성심, 집단 윤리, 또는 개인의 도덕성 면에서 중국인을 뛰어넘은 적이 없다.
79:8.17 (888.10) 이 옛 문화는 인간의 행복에 많이 기여했다. 수백만의 인간이 살다가 죽었고, 그 문화의 업적으로 복을 받았다. 몇 세기 동안 이 위대한 문명은 지난날의 월계관에 기대고 있었지만, 지금도 필사 존재의 초월 목표를 새로이 그려 보려고, 끝없는 진보를 위하여 쉴새없는 투쟁을 또 한 번 시작하려고 다시 깨어나고 있다.
80:0.1 (889.1) 유럽의 청인은 큰 문화적 문명을 스스로 이룩하지 않았어도, 아담화된 그 핏줄이 나중에 안드 침공자들과 섞였을 때, 보라 민족과 그 안드 후계자의 시절 이후로 일찍이 유란시아에서 나타난 진취적 문명을 이룩한 가장 강력한 혈통 하나를 낳은 생물학적 기초를 제공했다.
80:0.2 (889.2) 현대의 백인 종족들은 아담 혈통의 남은 핏줄을 포함하는데, 이 아담 혈통은 산긱 종족, 얼마큼 홍인과 황인이지만 특히 청인과 섞이게 되었다. 모든 백인 민족에는 최초의 안돈 족속의 줄기가 상당한 비율로 있고, 초기 놋 족속의 혈통은 더욱 많이 있다.
80:1.1 (889.3) 마지막 안드 족속이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밀려나기 전에, 그들의 많은 형제는 모험가ㆍ선생ㆍ상인ㆍ군인으로서 유럽으로 들어갔다. 보라 인종이 있던 옛 시절에 지중해의 계곡은 지브랄타 지협(地峽)과 시실리 육지 다리로 보호되었다. 사람이 아주 일찍부터 가졌던 해상 무역의 얼마큼은 이 내륙 호수들에서 자리를 잡았고, 거기서 북쪽에서 온 청인과 남쪽에서 온 사하라인이 동쪽에서 온 놋 족속과 아담 족속을 만났다.
80:1.2 (889.4) 지중해의 동쪽 계곡에서 놋 족속은 그들의 가장 광범위한 문화 중의 하나를 세웠고, 이 중심들로부터 얼마큼 남쪽 유럽으로, 그러나 특히 아프리카 북부로 파고들었다. 얼굴이 넓적한 놋 및 안돈 종류의 시리아인은, 천천히 솟아오르는 나일 강 삼각지에 있는 그들의 촌락들과 관련하여, 아주 일찍부터 도기와 농업을 들여왔다. 그들은 또한 양ㆍ염소ㆍ가축, 그리고 다른 길들인 동물을 수입했고, 크게 개량된 금속 가공 방법을 가져왔으며, 시리아는 당시에 그 산업의 중심이었다.
80:1.3 (889.5) 3만 년이 넘도록 에집트는 꾸준히 흘러 들어오는 메소포타미아인을 받았고, 그들은 자신의 예술과 문화를 가져와서 나일 강 유역의 문화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큰 떼의 사하라 민족들이 진입한 것은 나일 강가를 따라 있던 초기의 문명을 크게 퇴화시켰고, 그래서 에집트는 1만 5천여 년 전에 가장 낮은 문화 수준에 도달했다.
80:1.4 (889.6) 그러나 그 이전에는 아담 족속의 서향 이동을 막을 것이 거의 없었다. 사하라는 탁 트인 풀 뜯는 땅이었고, 거기에 목자와 농사꾼이 퍼져 있었다. 이 사하라인은 한 번도 제조업에 종사하지 않았고, 도시를 세우지도 않았다. 그들은 남색-흑인 집단이었고, 멸종된 녹색 및 주황 인종의 핏줄을 널리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땅이 솟아오르고 물을 실은 이동하는 바람이, 번영하고 평화로운 이 문명의 잔재를 흩어 버리기 전에, 그들은 아주 적은 양의 보라 유전을 받았다.
80:1.5 (890.1) 아담의 피는 대부분의 인종들에게 나누어졌으나, 더러는 다른 인종보다 더 확보하였다. 인도의 혼합 종족과 검은 빛을 띤 아프리카 민족들은 아담 족속의 마음을 끌지 못했다. 홍인이 두 아메리카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더라면 아담 족속은 홍인과 자유롭게 섞였을 것이다. 그들은 황인에게 친절한 마음이 있었지만, 황인도 마찬가지로 멀리 떨어진 아시아에 있어서 접촉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모험이나 이타주의에 마음이 움직였을 때나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밀려났을 때,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유럽의 청인 종족들과 연합하기를 택했다.
80:1.6 (890.2) 청인은 그때 유럽을 휩쓸었고, 그 전에 이동하던 아담 족속이 싫어하는 종교적 관습이 없었으며, 보라 인종과 청인종 사이에 성적 매력이 크게 작용했다. 청인 가운데 빼어난 자는 아담 족속과 짝짓도록 허락받는 것을 높은 명예로 여겼다. 청인은 누구나 아주 솜씨 있고 예술적이 되어서 어느 아담 족속 여자의 사랑을 얻으려는 꿈을 품었으며, 아담 족속의 눈길을 받는 것은 우수한 청인 여자의 가장 높은 꿈이었다.
80:1.7 (890.3) 이동하는 이 에덴의 아들들은 천천히 청인종의 높은 부류와 연합했고 그들의 문화 풍습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한편 네안데르탈 종족의 남아 있는 혈통을 무자비하게 없애버렸다. 종족을 혼합하는 이 기법은, 열등한 핏줄의 제거와 함께, 힘차고 진취적이고 우수한 청인 집단을 열둘 이상 낳았는데, 이들 가운데 하나를 너희는 크로마뇽인이라 불러 왔다.
80:1.8 (890.4) 이것과 기타 이유로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초기 물결은 거의 순전히 유럽으로 갔으며, 좀더 유리한 이동 경로였다는 것은 이 중에 가장 작은 이유는 아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현대 유럽 문명의 전제 조건을 결정하였다.
80:2.1 (890.5) 보라 인종이 유럽으로 초기에 팽창한 것은 오히려 갑작스러운 어떤 기후와 지질의 변화로 단축되었다. 북쪽의 빙원들이 물러가자, 서쪽으로부터 물을 실은 바람이 북쪽으로 옮겨졌고, 사하라의 확 트인 큰 목초 지역을 차츰차츰 불모의 사막으로 만들었다. 이 가뭄은 큰 사하라 고원에서 살던 거주자들을 흩어 버렸는데, 그들은 키가 작고 갈색 머리와 까만 눈을 가졌으나 얼굴이 길었다.
80:2.2 (890.6) 더 순수한 남색 요소들은 남쪽으로 중앙 아프리카의 숲으로 옮겨 갔고, 그 뒤로 늘 거기에 남아 있었다. 좀더 혼합된 무리들은 세 방향으로 퍼졌다: 서쪽에 우수한 부족들은 스페인으로, 그리고 거기서부터 유럽의 인접한 부분으로 옮겨 갔고, 나중에 지중해에서 얼굴이 길고 갈색 머리털을 가진 민족의 핵심을 이루었다. 사하라 고원의 동쪽에 있던 진취성이 가장 적은 가지는 아라비아로, 그리고 거기서부터 메소포타미아 북부와 인도를 통해서 멀리 세일론까지 옮겨 갔다. 중앙 집단은 북쪽과 동쪽으로 나일 강 유역까지, 그리고 팔레스타인으로 옮겨 갔다.
80:2.3 (890.7) 데칸으로부터 이란ㆍ메소포타미아를 거쳐서, 지중해의 양쪽 바닷가를 따라서 흩어진 현대 민족들 사이에 어떤 정도의 인척 관계를 가리키는 것은 바로 이 2차 산긱 종속 계층이다.
80:2.4 (890.8) 아프리카에서 이런 기후의 변화가 있을 무렵에, 잉글랜드는 대륙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고, 덴마크는 바다에서 솟아올랐으며, 한편 지중해의 서쪽 분지를 보호하던 지브랄타 지협(地峽)은 지진의 결과로 무너졌고, 이 내륙의 호수를 대서양 수준까지 재빨리 올려 놓았다. 대번에 시실리 육지 다리가 물 속에 잠겼고, 한 바다 지중해를 만들고 이를 대서양과 이었다. 이 자연의 대이변은 인간 촌락 수십 개를 물에 잠기게 하였고, 온 세계 역사에서 홍수로 말미암아 최대로 생명의 손실을 일으켰다.
80:2.5 (891.1) 지중해 분지가 이렇게 물에 삼켜진 것은 아담 족속의 서향 이동을 즉시 줄였고, 한편 사하라인이 크게 유입된 것은, 아담 족속의 늘어나는 무리를 위하여 그들이 에덴의 북쪽과 동쪽으로 출구를 찾도록 이끌었다. 아담의 후손들이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북쪽으로 여행하자, 그들은 산의 장벽과 당시에 확대된 카스피 바다와 마주쳤다. 투르키스탄 전역에 흩어진 촌락 주위에서, 여러 세대 동안 아담 족속은 사냥하고 짐승을 기르고 땅을 갈았다. 천천히 이 훌륭한 민족은 영토를 유럽으로 뻗었다. 그러나 이제 아담 족속은 동쪽으로부터 유럽으로 들어가서 청인의 문화가 아시아보다 몇천 년 뒤떨어진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이 지역이 메소포타미아와 거의 전적으로 접촉이 없었기 때문이다.
80:3.1 (891.2) 청인(靑人) 문화의 옛 중심은 유럽의 모든 강을 따라서 자리를 잡았지만, 오직 솜 강이 빙하기 이전 시대에 따랐던 바로 그 경로에서 지금도 흐른다.
80:3.2 (891.3) 우리는 청인이 유럽 대륙에 스며들었다고 이야기하지만, 몇십의 종족 부류가 있었다. 3만 5천 년 전에도, 유럽의 청인종은 이미 홍인과 황인의 핏줄을 지닌 어지간히 섞인 민족이었고, 한편 대서양의 바닷가 땅에서, 또 오늘날의 러시아 지역에서, 상당한 양의 안돈 족속의 피를 흡수하고, 남쪽으로 사하라 종족들과 접촉이 있었다. 그러나 많은 종족 집단을 열거하려고 애쓰는 것은 무익할 것이다.
80:3.3 (891.4) 아담 이후 시절의 초기에 유럽의 문명은 청인(靑人)의 활력과 예술을 아담 족속의 창조적 상상력과 독특하게 섞은 것이었다. 청인은 크게 활력을 가진 민족이었으나, 아담 족속의 문화와 영적 지위를 크게 저하시켰다. 허다한 자가 처녀들을 속이고 유혹하는 경향 때문에, 아담 족속은 그들의 종교를 크로마뇽인에게 인식시키기가 아주 어려웠다. 몇만 년 동안 유럽에서 종교는, 인도와 에집트에서 발전한 것과 비교해서 낮은 수준에 있었다.
80:3.4 (891.5) 청인은 어떤 거래에서도 완전히 정직했고, 혼합된 아담 족속의 성적(性的) 타락이 도무지 없었다. 그들은 처녀기를 존중했고, 전쟁 때문에 남자가 부족하게 되었을 때에만 일부다처(一夫多妻)를 실행했다.
80:3.5 (891.6) 이 크로마뇽 민족은 용감하고 멀리 내다보는 종족이었다. 그들은 효과적인 아이 훈련 체계를 유지했다. 부모 양쪽이 이 수고에 참여했고, 나이 든 아이들의 도움이 충분히 이용되었다. 아이들은 각자 동굴 보존, 예술, 부싯돌 만들기를 조심스럽게 훈련을 받았다. 나이가 어릴 때 여자는 가정 기술과 소박한 농업을 훤히 통달했고, 한편 남자는 솜씨 있는 사냥꾼이요 용감한 무사(武士)였다.
80:3.6 (891.7) 청인은 사냥꾼이요, 어부요, 먹을 것을 모으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배 만들기에 숙달되었다. 돌도끼를 만들고, 나무를 자르고, 통나무 오두막을 세웠으며, 이것은 일부가 땅 밑에 있었고 가죽으로 그 지붕을 덮었다. 그리고 시베리아에는 아직도 비슷한 오막살이를 짓는 종족들이 있다. 남쪽의 크로마뇽인은 대체로 동굴과 석굴에서 살았다.
80:3.7 (892.1) 겨울이 모질게 추울 때, 동굴 입구에서 밤에 망보는 파수들이 얼어죽는 것은 드물지 않았다. 그들은 용기가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예술가였다. 아담 족속과 섞이는 것은 창조적 상상력을 갑자기 가속했다. 청인 예술의 절정은 약 1만 5천 년 전, 곧 살갗이 더 검은 민족들이 아프리카로부터 스페인을 통해서 북쪽으로 오던 시절 이전이었다.
80:3.8 (892.2) 약 1만 5천 년 전에 알프스의 숲은 널리 퍼지고 있었다. 세계의 즐거운 사냥터를 메마른 불모(不毛)의 사막으로 바꾼 바로 그 기후의 강요 때문에, 유럽의 사냥꾼들은 강 유역으로, 그리고 바닷가로 밀려나고 있었다. 비바람이 북쪽으로 이동함에 따라서, 유럽의 트인 큰 목초지들이 숲으로 덮이게 되었다. 크게, 비교적 갑작스럽게 이렇게 기후가 변화한 것은 유럽의 종족들을 광활한 평야의 사냥꾼으로부터 목자(牧者)로, 그리고 어느 정도는 어부와 땅을 경작하는 자로 바꾸도록 몰았다.
80:3.9 (892.3) 한편으로 문화의 발전을 낳았어도, 이 변화는 어떤 생물학상의 후퇴를 일으켰다. 이전의 사냥 시대에 우수한 부족들은 상급의 전쟁 포로들과 서로 결혼했고, 열등하다고 판단된 자를 어김없이 죽였다. 그러나 비로소 촌락을 세우고 농업과 상업에 종사함에 따라서, 그들은 평범한 많은 포로를 노예로 살려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 노예들의 후손이 나중에 크로마뇽 부류 전체를 아주 크게 저하시켰다. 이 문화의 후퇴는 동쪽으로부터 새로운 추진력을 받을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그때 메소포타미아인의 마지막 대규모 침공이 유럽을 휩쓸어 크로마뇽 부류를 재빨리 흡수하고, 백인의 문명을 시작하였다.
80:4.1 (892.4) 안드 족속이 유럽으로 꾸준한 흐름을 이루어 쏟아지는 동안, 일곱 번 큰 침공이 있었고, 마지막에 도착한 자들은 세 차례 큰 인파(人波)를 이루어 말을 타고 왔다. 더러는 에게 바다의 섬들을 거쳐서, 그리고 다뉴브 강 유역을 거슬러 유럽으로 들어갔으나, 그보다 일찍 있었던 더 순수한 핏줄의 대다수는 볼가 강과 돈 강의 목초지를 가로질러 북쪽 경로로 서북 유럽으로 이동했다.
80:4.2 (892.5) 셋째와 넷째 침공 사이에, 러시아의 여러 강과 발트 해를 거쳐서 시베리아로부터 온, 안돈 족속의 한 떼가 북쪽에서 유럽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북쪽의 안드 부족들에게 즉시 동화되었다.
80:4.3 (892.6) 그보다 일찍 있었던 더 순수한 보라 인종의 팽창은, 나중에 얼마큼 군사적이고 정복을 좋아하는 안드 족속 후손의 팽창보다 훨씬 더 평화적이었다. 아담 족속은 평화를 좋아하고, 놋 족속은 싸우기를 좋아했다. 이 두 핏줄의 연합은, 나중에 산긱 종족들과 섞여서, 유능하고 공격적인 안드 족속을 낳았고, 그들은 실제로 군사적 정복을 실행하였다.
80:4.4 (892.7) 그러나 말은 서양에서 안드 족속의 지배를 결정한 진화적 요인이었다. 말은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기동성의 이점을 흩어지는 안드 족속에게 주었고, 안드 기병(騎兵)의 마지막 집단으로 하여금 카스피 바다를 둘러서 재빨리 진행하여, 온 유럽을 휩쓸도록 만들었다. 그 전에 안드 족속의 인파는 모두 아주 느리게 움직여서,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멀리 떨어진 데는 어디서나, 붕괴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 후일의 인파는 너무 빨리 움직여서 그들은 단결된 무리로 유럽에 이르렀고, 어느 정도 더 높은 문화를 아직도 지니고 있었다.
80:4.5 (893.1) 힘차게 달리는 안드 기마병들이 그리스도 이전 제6 및 제7 천 년에 등장했을 때, 중국과 유프라테스 강 지역을 제외하고, 사람이 사는 세계 전체가 1만 년 동안에 이룩했던 문화의 진보는 아주 제한되었다. 이 기마병들이 청인 가운데 가장 나은 요소를 흡수하고 가장 못한 요소를 없애면서 러시아의 평원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움직임에 따라서, 이들은 섞여서 한 민족이 되었다. 이들은 이른바 노르딕 종족, 곧 스칸디나비아, 게르만, 앙글로 삭슨 민족들의 선조였다.
80:4.6 (893.2) 오래지 않아서 우수한 청인의 핏줄은 북 유럽 전역에 걸쳐서 안드 족속에게 완전히 흡수되었다. 오로지 라프랜드(그리고 어느 정도 브리타니)에서 더 오래 된 안돈 족속이 신분 비슷한 것이라도 보존하였다.
80:5.1 (893.3) 북 유럽의 부족들은 투르키스탄과 남부 러시아 지역을 통해서 메소포타미아로부터 꾸준히 흘러 들어오는 이민으로 계속 강화되고 개량되었고, 마지막 안드 기병의 군대가 유럽을 휩쓸었을 때, 세계의 모든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그 지역에서 안드 유전을 가진 사람들이 이미 더 많이 있었다.
80:5.2 (893.4) 3천 년 동안 북쪽 안드 족속의 군사 본부는 덴마크에 있었다. 이 중앙 거점으로부터 연달아 정복하는 군대가 떠나갔고, 이것은 지나가는 여러 세기가 메소포타미아 정복자들이 정복된 민족들과 마침내 혼합되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안드 성향이 자꾸 줄어들고, 갈수록 더 백인이 되어 버렸다.
80:5.3 (893.5) 청인은 북쪽에서 흡수되었고, 남쪽을 침투한 백인 기병 침공자들에게 마침내 굴복했지만, 진행하는 혼합된 백인종 부족들은 크로마뇽인의 완강하고 오래 끈 저항에 부딪쳤다. 그러나 우수한 지능과 항상 늘어나는 생물학적 저장은 그들로 하여금 더 오래 된 종족을 싹 쓸어버릴 수 있게 하였다.
80:5.4 (893.6) 백인과 청인 사이에 결정적인 싸움은 솜 강 유역에서 벌어졌다. 여기서, 청인종의 정예가 남쪽으로 움직이는 안드 족속과 통렬하게 싸웠고, 이 크로마뇽인은 백인 침공자의 우수한 군사 작전에 무릎을 꿇기 전에, 5백 년이 넘도록 그들의 영토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 솜 강 전투에서 북쪽 군대의 승리한 사령관 토르는 북쪽 백인 부족들의 영웅이 되었고, 나중에는 그들 가운데 더러가 그를 신으로서 존경했다.
80:5.5 (893.7) 가장 오래 버틴 청인의 본거지는 프랑스 남부에 있었으나, 마지막으로 큰 군사 저항 세력은 솜 강을 따라서 무너졌다. 후일의 정복은 강을 따라서 상업의 침투, 인구의 압력 때문에, 그리고 열등한 자들을 무자비하게 죽임과 아울러, 우수한 자들과 계속 서로 결혼함으로 진행되었다.
80:5.6 (893.8) 한 열등한 포로가 부적당하다고 안드 족 장로들의 부족 회의가 판결하고 나서, 그는 공들인 예식을 치르고 샤먼 사제들에게 넘겨졌고, 그들은 강으로 그를 데리고 가서 “즐거운 사냥터”로 입장하는―물 속에 처넣어 죽이는―예식을 치렀다. 이 방법으로 유럽의 백인(白人) 침공자들은 자체의 계급으로 빨리 흡수되지 않은, 마주친 모든 민족을 멸종시켰고 이렇게 청인은 끝장이 났다―빨리 끝났다.
80:5.7 (893.9) 크로마뇽 청인은 현대 유럽 종족들의 생물학적 기초를 이루었으나, 나중에 그들의 고토(故土)를 친 강건한 정복자들에게 흡수됨으로 겨우 살아남았다. 청인의 핏줄은 유럽의 백인 종족들에게 튼튼한 특성과 신체의 활력을 많이 기여했지만, 혼합된 유럽 종족의 유머와 상상력은 안드 족속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이 안드와 청인의 연합은 북쪽의 백인 종족들을 일으켰고, 즉시 안드 족속 문명의 쇠퇴, 일시적 성질의 둔화를 초래하였다. 결국, 이 북쪽 미개인의 잠재 우수성이 나타나서 오늘날의 유럽 문명이 되었다.
80:5.8 (894.1) 기원전 5000년이 되어서, 진화하는 백인 종족들은 독일 북부와 프랑스 북부, 그리고 영국 제도(諸島)를 포함하여, 북 유럽에 두루 세력을 떨쳤다. 청인과 둥근 얼굴을 한 안돈 족속이 한동안 중앙 유럽을 장악했다. 후자는 주로 다뉴브 강 유역에서 자리를 잡았고, 결코 안드 족속에게 완전히 밀려나지 않았다.
80:6.1 (894.2) 안드 족속의 마지막 이동이 있던 시절부터 문화는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쇠퇴하였고, 인접한 문명의 중심은 나일 강 유역으로 옮겨 갔다. 에집트는 땅에서 가장 앞선 집단의 본부로서, 메소포타미아를 이어받았다.
80:6.2 (894.3) 나일 강 유역은 메소포타미아 유역보다 조금 전에 홍수로 피해를 당하기 시작했으나, 운이 훨씬 좋았다. 이 초기의 좌절은 연속하여 안드 족속 이민이 흘러들어옴으로 보상되고도 남았으며, 그래서 비록 에집트의 문화가 정말로 유프라테스 강 지역에서 파생되었어도, 선두에 서는 듯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5000년에, 메소포타미아에서 홍수가 있던 기간에, 뚜렷이 다른 일곱 집단의 인간이 에집트에 있었다. 한 집단을 빼고, 그들 모두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왔다.
80:6.3 (894.4)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마지막 탈출이 있었을 때, 에집트는 가장 솜씨 있는 예술가와 장인(匠人)을 아주 많이 얻어서 운이 좋았다. 이 안드 장인들은 강가의 생활, 강의 범람, 관개, 건조기에 속속들이 익숙했기 때문에, 아주 편안하게 느꼈다. 그들은 나일 강 유역의 보호된 위치를 좋아했다.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서 지낼 때보다 거기서 적의 침입과 공격을 훨씬 덜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에집트인의 금속 가공 기술에 크게 이바지했다. 여기서 그들은 흑해 지역으로부터 오는 철광석 대신에 시나이 산으로부터 오는 것을 처리하였다.
80:6.4 (894.5) 에집트인은 아주 일찍부터 그들의 도시 신들을 정교한 국가 체계의 신들로 모았다. 그들은 광범위한 신학(神學)을 개발하고, 똑같이 광범위하지만 부담스러운 사제 제도를 가졌다. 몇몇 다른 지도자들이 셋 족속의 옛 종교적 가르침의 잔재를 부활시키려고 했으나 이 노력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안드 족속은 에집트에서 첫 돌 구조물을 지었다. 돌로 지은 피라미드 가운데서 처음이자 가장 아름다운 것을 임호텝이 세웠는데, 그는 수상(首相)으로 일하던 안드 족속으로 건축의 천재였다. 이전의 건물은 벽돌로 지어 왔는데, 많은 돌 구조물이 세계의 여러 구석에서 세워졌어도 이것은 에집트에서 처음이었다. 그러나 건축 기술은 이 위대한 건축가가 살던 시절부터 꾸준히 쇠퇴하였다.
80:6.5 (894.6) 이 찬란한 문화 시대는 나일 강가를 따라서 일어난 내란으로 말미암아 단축되었고, 그 나라는 메소포타미아가 그랬던 것처럼, 살기 어려운 아라비아로부터 온 열등한 부족들과 남쪽으로부터 온 흑인들로 곧 들끓었다. 그 결과로 5백 년이 넘도록 사회의 진보는 꾸준히 줄어들었다.
80:7.1 (895.1) 메소포타미아에서 문화가 쇠퇴하는 기간에, 얼마 동안 지중해 동부의 여러 섬에서 우수한 문명이 지속되었다.
80:7.2 (895.2) 기원전 12,000년 무렵에, 안드 족속의 한 명석한 부족이 크레테로 이주하였다. 이 섬은 그러한 우수한 무리가 아주 일찍 정착한 유일한 섬이었고, 거의 2천 년이 지나서 이 바다 사람들의 후손이 이웃의 섬들까지 퍼졌다. 이 집단은 북쪽 놋 족속의 반 계열과 서로 결혼했던, 얼굴이 좁고, 키가 작은 안드 족속이었다. 그들은 모두 키가 180센티미터가 되지 않았고, 몸이 더 크고 열등한 동료들에게 글자 그대로, 본토에서 밀려났다. 크레테로 간 이 이민들은 직물ㆍ금속ㆍ도기ㆍ배관(配管)에, 그리고 돌을 건축 재료로서 사용하는 데 상당히 솜씨가 있었다. 그들은 글쓰기에 착수했고, 목자와 농사꾼으로서 생계를 이었다.
80:7.3 (895.3) 크레테에 이들이 정착한 뒤 거의 2천 년이 되자, 아담손의 키 큰 후손들이 북쪽의 섬들을 건너서 그리스까지 갔고, 이들은 메소포타미아의 북쪽에, 고지에 있는 고향으로부터 거의 바로 내려왔다. 사토는 이 그리스인의 선조를 서쪽으로 인도했는데, 사토는 아담손과 라타의 직계 후손이었다.
80:7.4 (895.4) 그리스에서 마지막으로 정착한 집단은 아담손 족속의 둘째 문명의 끝을 이루는, 선택되고 우수한 민족의 375명으로 구성되었다. 아담손의 이 후일의 자손들은 태동하는 백인 종족들 중에서 당시에 가장 귀중한 핏줄을 지녔다. 그들은 높은 지적 계급의 출신이었고, 육체로 보건대, 첫 에덴의 시절 이후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80:7.5 (895.5) 얼마 안 되어 그리스와 에게 해 제도(諸島) 지역은 서양의 무역ㆍ예술ㆍ문화의 중심으로서,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아담손 선구자의 문화를 제외하고, 에집트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에게 세계의 실질적으로 모든 예술과 과학이 또한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유래되었다. 이 그리스 민족의 모든 예술과 천재가, 아담과 이브의 첫 아들 아담손과 특별한 둘째 아내 사이에 생긴 후손이 직접 받은 유산(遺産)이었는데, 이 여자는 칼리가스티아 영주의 순수한 놋 족속 참모진으로부터 끊어지지 않은 혈통을 따라서 내려온 딸이었다. 그리스인이 그들이 신과 초인간 존재들로부터 직접 내려왔다는 신화의 전통을 가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80:7.6 (895.6) 에게 해 지역은 뚜렷한 다섯 문화 단계를 거쳤고, 각자 이전보다 영적 수준이 낮았으며, 머지 않아, 그리스인의 후세들이 들여온 다뉴브 노예들의 자손, 급히 번식하는 평범한 자손들의 무게에 짓눌려, 마지막으로 화려한 예술의 시대가 사라졌다.
80:7.7 (895.7) 카인 후손의 어머니 숭배가 가장 크게 유행한 것은 크레테에서 이 시기였다. 이 종파는 “큰 어머니”를 숭배하면서 이브에게 영광을 돌렸다. 이브의 형상이 어디에나 있었다. 대중을 위한 수천의 성당이 크레테 섬과 소 아시아에 전역에 걸쳐 세워졌다. 이 어머니 숭배는 그리스도의 시절까지 지속되었고, 땅에서 예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에게 영광을 돌리고 예배한다는 구실로, 나중에 초대 기독교에 합병되었다.
80:7.8 (895.8) 기원전 6500년 무렵이 되기까지 안드 족속의 영적 유산은 크게 쇠퇴하였다. 아담의 후손들은 널리 퍼졌고, 더 오래 되고 수가 많은 인종들 속에서 실질적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러한 안드 문명의 퇴폐는 그들의 종교 기준이 사라짐과 더불어, 세상에서 영적으로 불쌍한 민족들을 한탄할 처지에 버려두었다.
80:7.9 (896.1) 기원전 5000년이 되어서, 아담의 후손들 가운데 가장 순수한 세 혈통은 수메르와 북 유럽과 그리스에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전체가, 아라비아로부터 스며들어온 섞이고 더 검은 종족들이 흘러들어옴으로 천천히 나빠지고 있었다. 이 열등한 민족들이 온 것은 안드 족속의 생물학적ㆍ문화적 잔재를 바깥으로 흩어지게 하는 데 더욱 기여하였다. 비옥한 초생달[1] [26] 전역으로부터 모험을 더 좋아하는 민족들이 서쪽의 섬들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 이민들은 곡식과 채소를 가꾸었고, 길들인 동물을 데리고 왔다.
80:7.10 (896.2) 기원전 약 5000년에, 진취적 메소포타미아인의 막강한 무리가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나와서 사이프러스 섬에 정착하였다. 약 2천 년 뒤에, 북쪽에서 온 미개한 떼가 이 문명을 뿌리 뽑았다.
80:7.11 (896.3) 또 하나의 큰 식민지가 지중해에, 후일에 카르타고 자리 가까이에 정착했다. 그리고 북 아프리카로부터 큰 무리의 안드 족속이 스페인으로 들어가서, 나중에 에게 해 제도로부터 이탈리아로 더 전에 온 형제들과 스위스에서 섞였다.
80:7.12 (896.4) 에집트의 문화가 메소포타미아를 따라 쇠퇴했을 때, 많은 유능하고 앞선 가족들이 크레테로 달아났고, 이처럼 이미 앞선 이 문명을 크게 키웠다. 그리고 에집트에서 온 열등한 무리들이 도착하여 나중에 크레테의 문명을 위협했을 때, 문화가 더 발달된 가족들은 서쪽으로, 그리스로 옮겨 갔다.
80:7.13 (896.5) 그리스인은 위대한 선생이요 예술가일 뿐 아니라, 또한 세상에서 가장 큰 상인이요 식민지를 일으키는 자였다. 그들의 예술과 상업을 끝내 삼켜 버린 열등한 자들의 물결에 무릎을 꿇기 전에, 그들이 서쪽으로 문화의 전진(前進) 기지들을 대단히 많이 심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초기 그리스 문명에서 상당히 많은 진보가 후일에 남 유럽 종족들 안에서 지속되었고, 이 아담손 족속의 혼혈 후손 가운데 다수가 인접한 본토의 부족들에게 합병되었다.
80:8.1 (896.6)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안드 종족들은 북쪽으로 유럽까지 이주하여 청인과 뒤섞였고, 서쪽으로 지중해 지역으로 가서 사하라인과 남쪽 청인 혼혈의 잔재와 섞였다. 그리고 얼굴이 넓고 산에서 사는 생존자, 예전에 있었던 안돈 부족의 생존자들은 백인종의 이 두 가지를 널리 떼어놓았고, 지금도 그러하며, 이 안돈 부족들은 이 중앙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 왔다.
80:8.2 (896.7) 안돈의 이 후예는 유럽의 중앙 및 남동부에서 산 지역의 대부분을 통해서 흩어졌다. 그들은 소 아시아로부터 새로 온 사람들로 말미암아 흔히 강화되었고, 그들은 큰 세력으로 이 지역을 차지했다. 고대의 힛 사람은 안돈 족속의 핏줄로부터 직접 내려온다. 그들의 창백한 살갗과 넓은 얼굴은 그 종족의 전형(典型)이었다. 이 핏줄은 아브라함의 조상에 들어 있었고, 후일에 그의 유대인 후손의 특징인 얼굴 모습에 많이 기여했으며, 유대인 후손은 안드 족속으로부터 유래한 문화와 종교를 가졌어도, 아주 다른 언어를 썼다. 그들의 말은 뚜렷이 안돈 말이었다.
80:8.3 (897.1) 이탈리아, 스위스, 남부 유럽의 호수에서, 쌓인 더미나 통나무 기둥 위에 세운 집에서 거주했던 부족들은 아프리카인, 에게인, 그리고 특히 다뉴브인 이민들의 커지는 곁가지였다.
80:8.4 (897.2) 다뉴브인은 안돈 족속이었고, 발칸 반도를 거쳐서 유럽으로 들어갔던 농부와 목자였는데, 그들은 다뉴브 강 유역을 경유해서 북쪽으로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도기(陶器)를 만들고 땅을 일구었고, 유역에서 살기를 좋아했다. 다뉴브인의 가장 북쪽 촌락은 벨지움의 리에주에 있었다. 이 부족들은 그들 문화의 중심과 근원으로부터 떨어져 나감에 따라서, 빨리 저하되었다. 가장 좋은 도기는 그들보다 먼저 있던 촌락들의 작품이다.
80:8.5 (897.3) 크레테 섬에서 온 선교사들이 일한 결과로서, 다뉴브인은 어머니 숭배자가 되었다. 이 부족들은 나중에, 소 아시아의 바닷가로부터 배를 타고 온 안돈 뱃사람의 무리와 혼합했는데, 이들도 어머니 숭배자였다. 따라서 중앙 유럽의 상당 부분은, 얼굴이 넓적한 백인 종족의 이 혼합된 부류가 차지했으며, 그들은 어머니 숭배와 죽은 사람을 화장(火葬)하는 종교 의식을 실천했는데, 이는 어머니 종교 신봉자들이 죽은 사람을 돌 움막에서 태우는 것이 풍습이었기 때문이다.
80:9.1 (897.4) 안드 족속의 이동이 끝날 때 가까이 유럽에서 종족의 혼합은 다음과 같이 대체로 세 백인 종족으로 정리되었다:
80:9.2 (897.5) 1. 북방 백인 종족. 이른바 이 노르딕 종족은 주로 청인과 안드 족속의 혼합이었으나, 또한 어지간한 양의 안돈 족속, 그리고 그보다 적은 양의 홍인 및 황인 산긱의 피를 품었다. 따라서 북방의 백인 종족은 가장 바람직한 이 네 가지 인간 핏줄을 담았다. 그러나 가장 많은 유전은 청인으로부터 내려왔다. 초기의 전형적 노르딕인은 얼굴이 길고, 키가 크고, 금발이었다. 그러나 오래 전에 이 민족은 백인 종족의 모든 가지와 속속들이 섞였다.
80:9.3 (897.6) 침공하는 노르딕인이 마주친 유럽의 원시 문화는 청인과 섞인, 퇴화하는 다뉴브인의 문화였다. 오늘날 독일에서 두 종족 집단의 존재가 증언하다시피, 노르딕 덴마크인과 다뉴브 안돈 족속의 문화가 라인 강에서 만나서 섞였다.
80:9.4 (897.7) 노르딕인은 발트 해 바닷가로부터 온 호박(琥珀)의 무역을 계속했고, 브렌너 통로를 거쳐서 다뉴브 강 유역에 얼굴 넓적한 사람들을 상대로 큰 상업을 일으켰다. 다뉴브인과 이렇게 접촉이 늘어난 것은 이 북방 족속을 어머니 숭배로 이끌었고, 몇천 년 동안 죽은 사람을 화장하는 것이 스칸디나비아 전역에 걸쳐서 거의 보편적이었다. 이것이 먼저 있던 백인 종족들이 유럽 전역에 묻혀 있어도, 어째서 그들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가 설명한다―오직 돌과 진흙 항아리 속에 그들의 재만 남았다. 이 백인들은 또한 거처를 지었고, 결코 동굴에서 살지 않았다. 이것은 어째서 또 다시 백인의 옛 문화의 물증이 거의 없는가 설명한다. 하지만 그 전에 있었던 크로마뇽 종류는 동굴과 석굴에서 단단히 봉해진 곳에 잘 간직되어 있다. 말하자면, 북 유럽에서 어느 날 퇴보하는 다뉴브인과 청인의 원시 문화가 있고, 그 다음 날 갑자기 엄청나게 우수한 백인의 문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80:9.5 (897.8) 2. 중부 백인 종족. 이 무리는 청인과 황인과 안드 족속의 핏줄을 포함하기는 해도, 주로 안돈 족속이었다. 이 민족은 얼굴이 넓고, 거무스름하고, 짝달막했다. 이들은 노르딕인과 지중해 종족들 사이에 쐐기처럼 박혔으며, 그 넓은 거점은 아시아에 두고, 그 끝은 프랑스 동부를 파고들었다.
80:9.6 (898.1) 거의 2만 년 동안 안돈 족속은 안드 족속에게 중앙 아시아의 북쪽으로 멀리 멀리 밀려났다. 기원전 3000년이 되어서 심해지는 건조한 기후는 이 안돈 족속을 투르키스탄으로 다시 되돌려 보냈다. 안돈 족속의 이 남향 진출은 1천 년이 넘도록 이어졌고, 카스피 바다와 흑해(黑海) 둘레에서 갈라져서, 발칸과 우크라이나를 거쳐 유럽으로 파고들었다. 이 침공은 아담손 후손의 남은 집단을 포함했고, 침공기의 후반에는 셋 족속 사제들의 많은 후손 뿐 아니라 이란의 안드 족속을 상당수 데리고 갔다.
80:9.7 (898.2) 기원전 2500년이 되기까지, 안돈 족속의 서향 진출은 유럽에 다다랐다. 그리고 투르키스탄 산지(山地)의 미개인들이 온 메소포타미아, 소 아시아, 다뉴브 강 분지에 들끓은 것은 그때까지 모든 문화적 후퇴 가운데 가장 심각하고 오래 지속된 후퇴를 낳았다. 이 침공자들은 중부 유럽 종족들의 성격을 분명히 안돈처럼 만들었고, 이 종족들은 그 뒤로 계속 알프스 족의 특징을 지닌 채로 남았다.
80:9.8 (898.3) 3. 남방 백인 종족. 갈색 머리를 한 이 지중해 종족은 안드 족속과 청인의 혼합으로 이루어졌고, 북쪽보다 안돈 핏줄을 적게 가졌다. 이 무리는 또한 사하라인을 통해서, 상당한 양의 2차 산긱 피를 흡수했다. 후일에 백인종의 이 남방 지파에 지중해 동부로부터 강력한 안드 족속의 요소가 주입되었다.
80:9.9 (898.4) 그러나 지중해 바닷가의 땅에는, 기원전 2500년에 유목민의 대침공이 있던 시절까지 안드 족속이 스며들지 않았다. 유목민이 지중해 동부 지역을 침공했던 이 여러 세기 동안, 육지의 교통과 무역은 거의 중지되었다. 이렇게 육지 여행이 방해된 것은 해상 교통과 무역을 크게 확장시켰다. 지중해의 해상(海上) 무역은 약 4500년 전에 한창이었다. 이 해상 교류의 발달은 지중해 분지의 바닷가 지역 전체에 두루, 안드 족속 후손의 갑작스런 팽창을 가져왔다.
80:9.10 (898.5) 이 종족 혼합이 남방 유럽 종족, 전체에서 가장 많이 섞인 종족의 기초를 쌓았다. 이 시절 뒤로 이 종족은 특히 아라비아의 청인-황인-안드 민족들과 계속된 혼합을 더 겪었다. 이 지중해 종족은, 사실, 둘러싼 민족들과 아주 자유롭게 섞여서, 따로 된 부류로 거의 구별할 수 없다. 그러나 대체로 그 구성원은 키가 작고, 얼굴이 길고, 갈색 머리를 했다.
80:9.11 (898.6) 북쪽에서 안드 족속은 전쟁과 결혼을 통해서 청인을 말살했지만, 남쪽에서 청인의 큰 무리가 살아남았다. 바스크인과 베르베르인은 이 민족의 살아남은 두 가지를 대표하지만, 이 민족들조차 사하라인과 속속들이 섞였다.
80:9.12 (898.7) 이것이 기원전 약 3000년에 중앙 유럽에서 나타난 종족 혼합의 그림이었다. 아담이 사명을 부분적으로 이행하지 못했는데도, 상급 부류들은 섞였다.
80:9.13 (898.8) 이때는 신석기(新石器) 시대가 다가오는 청동기 시대와 겹치는 시절이었다.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어머니 숭배와 관련된 청동기 시대였다.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에서는 태양 숭배와 관련된 신석기 시대였다. 이때는 둥그렇고 지붕 없는 태양 신전을 짓던 때였다. 유럽의 백인 종족들은 정력이 있는 건축가였고, 후일에 그들의 자손이 스톤헨지에서 했던 것과 비슷하게, 태양에 대한 표시로서 큰 돌들을 세워놓기를 좋아했다. 태양 숭배가 유행한 것은 이때가 남부 유럽에서 대단한 농업 시대였음을 가리킨다.
80:9.14 (899.1) 비교적 최근에 이 태양 숭배 시대의 미신이 지금도 브리타니의 민속에서 남아있다. 1500년이 넘도록 기독교도가 되었어도 이 브리타니인은 악한 눈을 쫓아내기 위하여 신석기 시대의 부적을 아직도 지닌다. 그들은 아직도 번개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굴뚝에 천둥 돌을[2] [27] 가지고 있다. 이 브리타니인은 스칸디나비아의 노르딕인과 섞인 적이 없다. 그들은 서 유럽에서 지중해 혈통과 섞인 최초의 안돈 거주자가 살아남은 것이다.
80:9.15 (899.2) 그러나 백인 민족들을 노르딕ㆍ알프스ㆍ지중해 종족으로 주제넘게 분류하는 것은 잘못이다. 종족이 너무 많이 혼합되어서 그렇게 분류할 수 없다. 한때는 백인종을 그러한 등급으로 분류하기에 어지간히 잘 규명된 구분이 있었지만, 그 뒤에 종족이 널리 서로 섞였으며, 얼마큼이라도 뚜렷하게 이 차이를 확인하는 것이 이제는 더 가능하지 않다. 오늘날 북 아메리카의 거주민과 마찬가지로 기원전 3000년에도, 고대의 사회 집단들은 한 민족이라 할 수 없었다.
80:9.16 (899.3) 이 유럽의 문화는 5천 년 동안 줄곧 성장하고 어느 정도 서로 섞였다. 그러나 언어의 장벽은 서양 국가들의 완전한 교류를 막았다. 지나간 세기에 이 문화는 북 아메리카의 세계적 인구 속에서 섞이기에 가장 좋은 기회를 누리고 있었다. 그 대륙의 앞날은, 유지되는 사회 문화의 수준 뿐 아니라, 그 현재 및 미래 인구로 들어가도록 허락되는 종족 요소들의 질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81:0.1 (900.1) 칼리가스티아와 아담의 임무에서 예상했던, 세상 개선 계획이 실패함으로 생긴 변동과 상관 없이, 인간의 진보와 종족의 발전을 재는 눈금으로 볼 때 인종의 기본 유기체의 진화는 종족들을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진화는 늦출 수 있어도 멈출 수 없다.
81:0.2 (900.2) 보라 인종의 영향은, 계획했던 것보다 수가 적기는 했어도 문명의 진보를 낳았고, 이 영향은 아담 시절 이후에, 인류가 거의 1백만 년 동안, 이전의 존재 전체를 통해서 진보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81:1.1 (900.3) 아담 시절 이후로 약 3만 5천 년 동안, 문명의 요람은 서남 아시아에 있었고, 나일 강 유역으로부터 동쪽으로, 조금 북쪽에 아라비아 북부를 가로지르고, 메소포타미아를 통해서 투르키스탄으로 계속 뻗었다. 그리고 기후는 그 시대에 문명을 세우는 데 결정적 요인이었다.
81:1.2 (900.4) 아담 족속의 초기 이동을 그치게 한 것은 북 아프리카와 서 아시아에 있었던 큰 기후 및 지질학적 변화였으며, 이것은 확대된 지중해로 그들을 유럽 방향에서 막고, 이민의 물결을 북쪽과 동쪽으로, 투르키스탄으로, 빼돌렸다. 육지가 올라오고 그에 따라 기후의 변화가 이렇게 그칠 때가 되어, 기원전 약 15,000년에, 동쪽에는 아시아에서 산맥으로, 서쪽에는 유럽에서 확대되는 숲으로 인하여 아직도 갇혀 있던 안드 족속의 문화적 효소와 생물학적 비축을 제외하고, 문명은 세계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이르기까지 정체되었다.
81:1.3 (900.5) 기후의 진화는 이제 모든 다른 노력이 이루지 못한 것을 성취하려 한다. 다시 말해서, 유라시아 사람으로 하여금 사냥을 버리고 더 진보된 동물 기르기와 농사 직종을 가지라고 강요한다. 진화는 느릴까 싶지만, 무섭게 효과가 있다.
81:1.4 (900.6) 초기의 농사꾼들이 노예들을 아주 널리 이용했기 때문에, 농부는 예전에 사냥꾼과 목자 모두에게 업신여김을 받았다. 오랜 세월 동안 땅을 경작하는 것은 천하게 생각되었다. 따라서 흙을 만지는 일은 저주라는 개념이 생겼는데, 오히려 흙으로 수고하는 것은 모든 축복 가운데 으뜸이다. 카인과 아벨의 시절에도 목축 생명을 바치는 것은 농산물을 드리는 것보다 더 높이 여겼다.
81:1.5 (900.7) 사람은 보통 사냥꾼으로부터, 목자의 시기를 거쳐서 바뀌어 농사꾼으로 진화했으며, 이것이 또한 안드 족속 사이에 참말이었지만, 그보다 더 흔하게, 기후의 필요에 따른 진화적 강요가 부족 전체를 사냥꾼으로부터 성공적 농부로 바로 넘어가도록 만들곤 했다. 그러나 사냥에서 농사로 바로 넘어가는 이 현상은, 보라 핏줄과 높은 정도로 종족이 혼합된 지역에서만 일어났다.
81:1.6 (901.1) 진화 민족들(특히 중국인)은, 어쩌다가 축축하게 된 씨나 죽은 자에게 먹을 것으로 무덤에 둔 씨가 싹트는 것을 지켜봄으로, 씨를 심고 농작물 재배하는 것을 일찍부터 배웠다. 그러나 서남 아시아에 두루, 기름진 강 바닥과 인접한 평야를 따라서, 안드 족속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개량된 농업 기술을 쓰고 있었고, 그 선조는 둘째 동산의 테두리 안에서 농업과 채소 가꾸기를 주요한 직업으로 삼았다.
81:1.7 (901.2) 몇천 년 동안 아담의 자손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위쪽 경계에 있는 고지 전역에 걸쳐서, 동산에서 개량한 밀과 보리를 심었다. 아담과 아담손의 자손들은 여기서 만나서 무역하고, 사회적으로 섞였다.
81:1.8 (901.3) 생활 조건이 이렇게 강제로 변화된 것은 그렇게 많은 비율의 인류로 하여금 식생활 관습에서 잡식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밀ㆍ쌀ㆍ채소로 된 식사(食事)와 가축의 고기를 섞어 먹는 것은 이 고대 민족들의 건강과 활력 면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큰 걸음을 표시하였다.
81:2.1 (901.4) 문화의 성장은 문명의 도구(道具)가 발전하는 데 달려 있다. 사람이 야만으로부터 올라가면서 이용한 도구는 그 도구가 더 높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인력을 해방하는 바로 그 한도까지 효과가 있었다.
81:2.2 (901.5) 사회적 면에서 문화가 싹트고 진보가 시작되는 현대의 장면에서 지금 사는 너희는, 사회와 문명에 관하여 생각할 여분의 겨를이 실제로 조금 있는데, 너희의 옛 선조들이 깊이 돌이켜보고 사회적인 생각을 하는 데 바칠 수 있는 여가가 거의 또는 도무지 없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81:2.3 (901.6) 인간의 문명에서 처음 4대 진보는 다음과 같았다:
81:2.8 (901.11) 불은 처음으로 큰 발견이었고 궁극에 과학 세계에 이르는 문을 열었지만, 이 점에서 원시인에게 거의 가치가 없었다. 원시인은 자연의 원인이 보통 현상을 설명한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81:2.9 (901.12) 어디에서 불이 왔는가 질문을 받았을 때, 안돈과 부싯돌의 단순한 이야기는, 어떤 프로메테우스라는 자가 어떻게 불을 하늘로부터 훔쳤는가 하는 전설로 곧 대체되었다. 옛날 사람들은 그들이 몸소 이해하는 범위 바깥의 모든 자연 현상에 대하여 초자연적 설명을 얻으려고 애썼다. 많은 현대인도 계속 이렇게 한다. 이른바 자연 현상을 비인격 현상으로 만드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참 원인을 찾는 솔직하고 정직하고 두려움 없는 연구가 현대 과학을 낳았다: 그런 연구가 점성학을 천문학으로, 연금술을 화학으로, 마술을 의술(醫術)로 바꾸었다.
81:2.10 (901.13) 기계가 생기기 전 시대에, 사람이 스스로 하지 않고 일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동물의 사용이었다. 동물을 길들인 것은 사람의 손에 살아 있는 연장을 쥐어 주었고, 동물을 영리하게 사용하는 것은 농업과 수송을 위하여 길을 준비했다. 이러한 동물이 없이, 사람은 원시 상태로부터 후일의 문명 수준으로 올라갈 수 없었다.
81:2.11 (902.1) 길들이기에 가장 적당한 동물의 대부분은 아시아에서, 특히 중앙 지역에서부터 서남 지역에 이르기까지 발견되었다. 이것이 어째서 세계의 다른 어느 부분보다 그 위치에서 문명이 더 빨리 진보했는가 하는 한 이유였다. 이 동물 중에 다수는 두 번이나 이전에 길들인 적이 있었고, 안드 족속 시대에 그 동물을 다시 한 번 길들였다. 그러나 개는 아주 오래 오래 전에, 청인이 받아들인 뒤로 늘 사냥꾼과 함께 남아 있었다.
81:2.12 (902.2) 투르키스탄의 안드 족속은 말을 널리 길들인 첫 민족이었고, 이것이 어째서 그들의 문화가 아주 오랫동안 지배했는가 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기원전 5000년이 되자, 메소포타미아ㆍ투르키스탄ㆍ중국의 농부들은 양ㆍ염소ㆍ소ㆍ낙타, 말ㆍ가금ㆍ코끼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황소ㆍ낙타ㆍ말ㆍ야크를 짐 싣는 짐승으로 이용했다. 바로 사람은 한때 짐을 부리는 짐승이었다. 청인종의 어느 통치자는 한때 그의 짐꾼 거류지에 10만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81:2.13 (902.3) 노예 제도와 토지를 사유(私有)하는 제도는 농업과 함께 왔다. 노예 제도는 주인의 생활 수준을 높여 주었고, 사회의 문화를 누릴 여가를 더 마련해 주었다.
81:2.14 (902.4) 야만인은 자연에 복종하는 노예이지만, 과학 문명은 천천히 인류에게 늘어나는 자유를 부여하고 있다. 동물ㆍ불ㆍ바람ㆍ물ㆍ전기, 그리고 발견되지 않은 다른 에너지 근원을 통해서, 사람은 쉴새없이 수고할 필요로부터 자신을 해방했고, 앞으로도 계속 해방할 것이다. 기계를 풍부하게 발명함으로 생기는 일시적 어려움과 상관 없이, 그러한 기계 발명으로부터 얻게 되는 궁극의 이득은 측량할 수 없다. 사람이 일을 처리하는 새롭고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하고, 계획하고, 상상할 여가를 가질 때까지, 문명은 세워지기는커녕, 결코 번영할 수 없다.
81:2.15 (902.5) 사람은 먼저 은신처를 단지 취하고, 바위 선반 밑에 살거나 동굴에 거주했다. 다음에 나무와 돌 같은 천연 재료를 가족 움막을 짓는 데 이용하였다. 마지막으로 집을 짓는 창조 단계에 들어갔고, 벽돌과 기타 건축 자재 만드는 것을 배웠다.
81:2.16 (902.6) 투르키스탄 고지의 민족들은 현대에 가까운 종족들 중에서 처음으로 나무로 집을 지었다. 이 집들은 아메리카에 개척하여 정주한 사람들이 초기에 지은 통나무 집과 아주 다르지 않았다. 평야에 두루, 인간의 거처는 벽돌로 지었으며, 나중에는 구운 벽돌을 썼다.
81:2.17 (902.7) 강가에 살던 이전의 종족들은 땅에, 동그라미 안에 높은 장대들을 세워서 움막을 지었다. 꼭대기들을 한데 모아서, 움막을 위한 뼈대를 만들었고, 이것을 가로지르는 갈대로 엮었으며, 작품 전체가 엎어진 큰 광주리 같았다. 그리고 나서 이 구조물에 진흙 칠을 할 수 있었고, 이것은 햇빛에 말린 다음, 아주 쓸모 있는 거처, 비바람에 견디는 거처가 되곤 했다.
81:2.18 (902.8) 이 초기의 움막으로부터, 나중에 온갖 종류의 광주리를 짜는 생각이 따로 생겨났다. 한 집단 사이에서, 도기(陶器)를 만드는 생각은 이 장대 틀을 젖은 진흙으로 바르는 효과를 지켜보는 데서 생겨났다. 구워서 도기를 단단하게 만드는 법은 진흙으로 바른 이 원시 움막 중 하나가 어쩌다가 타는 바람에 발견되었다. 옛 시절의 여러 기술은 초기 민족들의 일상 생활에 따르는 우연한 일에서 생기는 적이 많았다. 적어도 이것이, 아담이 올 때까지, 인류가 진화하는 발걸음에 관하여 거의 전적으로 참말이었다.
81:2.19 (903.1) 약 50만 년 전에 영주의 참모진이 도기를 처음으로 소개했지만, 진흙 그릇을 만드는 것은 15만 년이 넘도록 실지로 그쳤다. 오로지 그 만(灣)의[1] [28] 바닷가에, 수메르 이전의 놋 족속이 계속해서 진흙 그릇을 만들었다. 도기를 만드는 기술은 아담의 시절에 부활되었다. 이 기술의 전파는 아프리카, 아라비아, 중앙 아시아의 사막 지역이 뻗는 것과 동시에 일어났고, 개량된 기술이 연달아 파도를 이루어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바깥으로 동반구에 퍼졌다.
81:2.20 (903.2) 이 안드 시대의 문명을 그들의 도기나 다른 예술의 단계로 반드시 추적할 수는 없다. 인간이 진화하는 순조로운 과정은 달라마시아와 에덴, 이 두 체제로 인하여 엄청나게 까다로워졌다. 후일의 화병과 도구가 더 순수한 안드 민족들이 예전에 만든 작품보다 못한 경우가 흔히 생긴다.
81:3.1 (903.3) 투르키스탄의 기름지고 훤히 트인 초원의 땅, 사냥하며 동물이 풀 뜯는 땅이 기후로 말라버린 것은 기원전 12,000년 무렵에 시작하여, 그 지역의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형태의 산업과 투박한 제조업에 의존하도록 강요하였다. 더러는 길들인 가축 떼를 기르는 일로 발길을 돌렸고, 더러는 농사꾼이 되거나 물에서 자라는 먹을거리를 모으는 사람이 되었지만, 안드 족속에서 상급 부류의 지적 존재들은 상업과 제조업을 선택했다. 전체 부족(部族)이 한 가지 산업의 개발에 몰두하는 것이 관습이 되기도 하였다. 나일 강 유역으로부터 힌두 쿠시까지, 그리고 간지스 강으로부터 황하에 이르기까지, 우수한 부족들의 주요한 사업은 땅을 경작하는 것이 되었고, 상업은 부업이 되었다.
81:3.2 (903.4) 무역, 그리고 원자재를 여러 가지 상품으로 만드는 제조업의 증가는 초기의 얼마큼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데 직접 도움이 되었고, 이 공동체들은 문화와 문명의 기술을 퍼뜨리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광범위한 세계 무역 시대가 오기 전에, 사회의 공동체는 부족 단위였다―확대된 가족 집단이었다. 무역(貿易)은 다른 종류의 인간들이 서로 친교하도록 이끌었고, 이처럼 문화의 더 빠른 교류에 이바지하였다.
81:3.3 (903.5) 약 1만 2천 년 전에, 독립된 도시의 시대가 밝아오고 있었다. 원시 무역과 제조업을 하는 이 도시들은 반드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지대에 둘러싸여 있었다. 생활 수준이 높아짐으로 산업이 촉진된 것이 참말이지만, 너희는 옛날의 도시 생활의 세련된 정도에 관하여 아무런 오해를 가져서는 안 된다. 초기의 종족들은 지나치게 깔끔하거나 깨끗하지 않았고, 보통의 원시 공동체는 단지 흙과 쓰레기가 쌓인 결과로서, 25년마다 30에서 60센티미터가 높아졌다. 이 오래 된 도시들 가운데 어떤 것은 굽지 않은 진흙 오두막이 오래 가지 않았기 때문에 둘레의 땅보다 아주 빨리 높아졌고, 옛날의 폐허 바로 위에 새 주거(住居)를 짓는 것이 풍습이었다.
81:3.4 (903.6) 금속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이 초기의 산업 및 상업 도시 시대의 특성이었다. 너희는 투르키스탄에서 기원전 9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청동기 문화를 이미 발견하였고, 안드 족속은 마찬가지로 철ㆍ금ㆍ구리를 가지고 일하는 것을 일찍부터 배웠다. 그러나 더 진보된 문명의 중심들로부터 떨어진 곳에서는 조건이 아주 달랐다.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와 같은 아무런 뚜렷한 시기가 없었다. 모두 세 시기가 한꺼번에 다른 지역에서 존재했다.
81:3.5 (904.1) 금은 사람이 처음으로 찾아다닌 금속이었다. 금은 작업하기 쉬웠고, 처음에는 장식품으로만 쓰였다. 구리가 다음에 이용되었으나, 주석(朱錫)과 섞어서 더 단단한 청동을 만들기까지 널리 쓰이지 않았다. 투르키스탄의 아담손 족속 가운데 한 사람이 구리와 주석을 섞어서 청동 만드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들의 고지에 구리 광산이 마침 주석 매장 옆에 있었다.
81:3.6 (904.2) 투박한 제조업과 초기 산업이 나타나자, 상업은 문화를 가진 문명의 보급에 재빨리 가장 유력한 영향이 되었다. 육지와 바다를 거쳐 무역의 길이 열린 것은 문명이 섞이게 할 뿐 아니라, 여행, 그리고 문화의 혼합을 크게 수월하게 만들었다. 기원전 5000년이 되자 문명화된 땅과 반문명화된 땅에 두루, 말이 일반적으로 쓰였다. 이 후일의 종족들은 길들인 말 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4륜차와 2륜 전차(戰車)를 가지고 있었다. 오랜 세월 전에 바퀴가 쓰였지만, 이제 그렇게 장비를 갖춘 차량이 상업과 전쟁, 두 군데서 보편적으로 이용되었다.
81:3.7 (904.3) 여행하는 무역상과 떠돌아다니는 탐험가는 모든 다른 영향력을 합친 것보다 유사(有史) 이후의 문명의 진보에 더 많이 기여했다. 군사적 정복ㆍ식민화, 그리고 후일의 종교들이 조장한 선교 사업도 또한 문화 보급에 요인이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무역 관계에 2차적이었고, 무역 관계는 산업에서 급속히 발전하는 기술과 과학으로 인하여 늘 가속되었다.
81:3.8 (904.4) 아담의 핏줄이 인간 종족에 주입된 것은 문명의 걸음을 빠르게 했을 뿐 아니라, 또한 모험과 탐험의 성향을 크게 자극했고, 그 결과로 안드 족속의 빨리 번식하는 혼혈 후손이 유라시아와 북 아프리카의 대부분을 이내 차지하였다.
81:4.1 (904.5) 밝아오는 유사 시대와 접촉이 생김에 따라서, 유라시아 전체, 북 아프리카, 태평양 군도(群島)에 인류의 복합 종족들이 퍼졌다. 오늘날 이 종족들은 유란시아의 다섯 가지 기본 인간 혈통이 섞이고 다시 섞인 결과로 생겨났다.
81:4.2 (904.6) 유란시아 종족들은 각자 어떤 구별되는 신체의 특징으로 확인되었다. 아담 족속과 놋 족속은 얼굴이 길었고, 안돈 족속은 얼굴이 넓었다. 산긱 종족들은 중간 얼굴이었고, 황인과 청인은 넓적 얼굴인 편이었다. 청인 종족들은, 안돈 족속의 핏줄과 섞였을 때, 뚜렷이 넓적 얼굴이 되었다. 2차 산긱들은 중간에서 긴 편의 얼굴이었다.
81:4.3 (904.7) 이 두개골 규격이 종족의 기원을 해독(解讀)하는 데 쓸모가 있어도, 통틀어서 뼈대가 훨씬 더 믿을 만하다. 유란시아 종족들의 초기 발전에는 최초에 다섯 가지 뚜렷이 다른 종류의 뼈 구조가 있었다:
81:4.4 (904.8) 1. 안돈 부류, 유란시아 토착민.
81:4.5 (904.9) 2. 1차 산긱, 홍인ㆍ황인ㆍ청인.
81:4.6 (904.10) 3. 2차 산긱, 주황인ㆍ녹색인ㆍ남색인.
81:4.9 (904.13) 이 5대 종족 집단이 널리 서로 섞임에 따라서, 계속된 혼합은 산긱 유전의 우성(優性) 때문에 안돈 부류를 가리는 경향이 있었다. 라프인과 에스키모인은 안돈 종족과 산긱 청인 종족이 혼합된 것이다. 그들의 뼈 구조는 토착 안돈 부류를 간직하는 것에 아주 가깝다. 그러나 아담 족속과 놋 족속은 다른 종족들과 아주 섞여서, 오직 일반화된 코카서스 계급으로만 탐지할 수 있다.
81:4.10 (905.1) 따라서, 대체로, 지난 2만 년 동안에 쌓인, 사람의 유물을 파헤침에 따라서, 다섯 가지 최초의 종류를 똑똑히 구분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한 뼈 구조의 연구는 인류가 이제 대략 세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드러낼 것이다:
81:4.11 (905.2) 1. 코카서스 인종―놋과 아담의 핏줄이 안드 족속과 혼합되었는데, 1차와 (얼마큼) 2차 산긱과 혼합됨으로, 그리고 안돈 족속과 상당히 교배함으로 더 수정되었다. 서양의 백인 종족들은, 얼마큼의 인도인 및 투란인 종족들과 함께, 이 집단에 속한다. 이 구분에서 통일되는 요소는 많든 적든 안드 족속의 유전이 있는 것이다.
81:4.12 (905.3) 2. 몽고 인종―1차 산긱 부류이며, 최초의 홍인과 황인과 청인 종족을 포함한다. 중국인과 아메리카 인디안이 이 무리에 속한다. 유럽에서 몽고 인종 부류는 2차 산긱과 안돈 족속과 혼합됨으로 수정되고, 안드 족속의 주입으로 더욱 수정되었다. 말레이와 기타 인도네시아 민족들이 이 분류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들은 높은 비율의 2차 산긱 피를 지니고 있다.
81:4.13 (905.4) 3. 흑색 인종―2차 산긱 종류는 최초에 주황ㆍ녹색ㆍ남색 종족들을 포함했다. 이것은 흑인이 가장 잘 설명하는 부류이며, 아프리카와 인도와 인도네시아 도처에, 2차 산긱 종족들이 있는 곳은 어디에나 발견될 것이다.
81:4.14 (905.5) 중국 북부에는 코카서스 종류와 몽고 종류가 얼마큼 섞였다. 레반트에서는 코카서스와 흑색 인종이 서로 섞였다. 인도에서는, 남 아메리카에서처럼, 모두 세 종류가 대표된다. 살아남은 세 부류의 골격 특징은 아직도 지속하며, 오늘날 인간 종족들의 후기 선조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
81:5.1 (905.6)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가 있는 문명은 반드시 상관되지는 않는다. 어느 시대라도 유기체의 진화는 문화가 퇴폐하는 한가운데서도 방해받지 않고 진행될 수 있다. 그러나 오랜 기간의 인간 역사를 조사했을 때, 결국은 진화와 문화가 원인과 결과로서 관계됨을 관찰할 것이다. 진화는 문화가 없이도 진행될지 모르지만, 문화가 있는 문명은 먼저 종족이 진보하는 적당한 배경이 없이 번영하지 않는다. 아담과 이브는 인간 사회가 진보하는 데 낯선 문명의 기술을 하나도 들여오지 않았으나, 아담의 피는 종족들의 타고난 능력을 확대했고, 경제가 발전하고 산업이 진보하는 그 걸음을 가속하였다. 아담을 수여한 것은 종족들의 두뇌력을 개선하였고, 이렇게 함으로 자연스러운 진화 과정을 크게 재촉하였다.
81:5.2 (905.7) 농사를 짓고, 동물을 길들이고, 건축을 개량함으로 인류는 살기 위한 끊임없는 최악의 투쟁을 차츰 피했고, 사는 과정을 무엇으로 즐겁게 만드는가 찾으려고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자꾸 높아지는, 물질적 편안의 수준에 도달하려는 수고의 시초였다. 제조업과 산업을 통해서, 사람은 필사 생활에서 쾌락의 성분을 차츰 키우고 있다.
81:5.3 (906.1) 그러나 문화적 사회는 날때부터 모든 사람이 공짜로 회원 자격을 가지고 온전히 평등한 물려받은 특권을 주는 클럽, 크고 자선하는 클럽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회는 높고 늘 진보하는, 지상의 일꾼들의 동업 조합이며, 세상을 후세에 자식과 손자들이 살고 진보할 수 있는 더 좋은 곳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귀족 일꾼만 그 계열로 받아들인다. 이 문명 조합은 비싼 가입비를 받아내고, 엄격하고 세찬 훈련을 부과하며, 찬성하지 않는 자와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누구나 무거운 벌을 내리고, 한편 공통된 위험과 종족의 위협에 대하여 더 안전해진 것을 제외하고, 개인의 방종이나 특권을 거의 주지 않는다.
81:5.4 (906.2) 사회적 관계는 생존을 보장하는 일종의 보험이며, 사람들은 이 보험이 이로움을 깨달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희생하고 개인의 자유를 단축하는 보험료를 기꺼이 내며, 사회는 이렇게 집단으로 더 보호받는 것에 대한 값으로 그 구성원으로부터 보험료를 받아낸다. 잘라 말하면, 오늘날 사회의 구조는 시행 착오로 생긴 보험 계획이며, 이것은 인류의 초기 체험의 특징을 나타내는, 끔찍하고 반사회적 조건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어느 정도 보장하고 보호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81:5.5 (906.3) 이처럼 사회는 제도를 통하여 시민의 자유, 자본과 발명을 통해서 경제적 자유, 문화를 통해서 사회적 해방, 경찰의 규제를 통해서 폭력을 당하지 않을 자유를 확보하기 위하여 서로 협동하는 계획이다.
81:5.6 (906.4) 힘이 정의(正義)를 낳지는 않으나, 힘은 뒤잇는 각 세대가 공통으로 인정하는 권리를 집행한다. 정부의 주요한 임무는 권리를 규명하고, 계급의 차이를 정당하고 공평하게 규제하며, 법의 통치 밑에서 기회의 평등을 실시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권리는 사회적 임무와 결합되어 있다. 집단의 특권은 보험 작용이며, 이것은 집단에게 봉사하는 힘겨운 보험료 전액을 낼 것을 어김없이 요구한다. 개인의 권리 뿐 아니라 집단의 권리는, 성(性) 버릇의 규제를 포함하여, 보호해야 한다.
81:5.7 (906.5) 집단의 규제에 지배를 받는 자유는 사회의 진화에서 정당한 목표이다. 제한 없는 자유는 불안정하고 경솔한 인간 지성들이 지어낸 헛되고 환상 같은 꿈이다.
81:6.1 (906.6) 생물학적 진화는 늘 앞으로 나아갔지만, 많은 문화적 진화는 유프라테스 강 유역으로부터 파도를 지어 나갔으며, 이러한 파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순수 혈통을 가진 아담 후손 전체가 아시아와 유럽의 문명을 강화하려고 마침내 떠나갈 때까지, 연달아 약화되었다. 종족들은 완전히 섞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문명은 상당한 정도까지 섞였다. 문화가 천천히 세계에 두루 퍼졌다. 그리고 이 문명은 유지되고 양육(養育)되어야 한다. 이는 오늘날 문화의 새 근원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고, 문명이 진화하는 느린 걸음에 활력을 주고 이를 자극할 안드 족속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81:6.2 (906.7) 지금 유란시아에서 진화하고 있는 문명은 다음 요인에서 생겨났고, 또 그 요인에 달려 있다:
81:6.3 (906.8) 1. 자연 상황. 물질 문명의 성질과 범위는 대체로 소용되는 자연 자원에 따라 결정된다. 기후ㆍ날씨, 그리고 수많은 물리적 조건은 문화의 진화를 결정하는 요인이다.
81:6.4 (907.1) 안드 족속의 시대가 열렸을 때, 온 세계에 광활하고 비옥하고 탁 트인 사냥 지역이 오직 두 군데 있었다. 하나는 북 아메리카에 있었고, 거기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퍼져 있었다. 다른 하나는 투르키스탄의 북쪽에 있었고, 그 일부는 안돈 황인이 차지했다. 서남 아시아에서 우수한 문화가 진화한 결정적 요인은 종족과 기후였다. 안드 족속은 위대한 민족이었으나, 그들 문명의 과정에 결정적 요인은 이란ㆍ투르키스탄ㆍ신장이 더욱 건조해진 것이었고, 이것이 자꾸 메말라 가는 그들의 땅에서 생계를 잇는 새롭고 진보된 방법을 발명하고 채택하도록 강요했다.
81:6.5 (907.2) 여러 대륙의 지형, 그리고 달리 땅이 배치된 상황은 평화나 전쟁을 결정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 유란시아 사람 중에 극소수가, 북 아메리카의 종족들이 누려 왔던 것 같이 계속하여 방해받지 않고 발전할 유리한 기회를 누렸다―그들은 넓은 대양(大洋) 때문에 실지로 사방에서 보호를 받았다.
81:6.6 (907.3) 2. 자본재. 문화는 결코 빈곤한 조건 밑에서 발달하지 않는다. 여가는 문명의 진보에 필수이다. 도덕적ㆍ영적 가치가 있는 개인의 인품은 물질적 부(富)가 없는 가운데 얻을 수 있지만, 문화를 가진 문명은 오로지, 포부와 더불어 여가를 허락하는 물질적 번영이 있는 조건에서만 생긴다.
81:6.7 (907.4) 원시 시대의 유란시아에서, 인생은 심각하고 진지한 일이었다. 그리고 인류가 건강에 좋은 열대 기후를 향하여 항상 떠다니는 성향이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투쟁과 그침 없는 수고를 피하려는 것이었다. 이 따듯한 거주 지대는 극심한 생존 투쟁을 벗어나 얼마큼 한숨 돌리게 했지만, 이렇게 편안을 추구한 종족과 부족들은 피땀 흘려 벌지 않은 여가를 문명의 진보를 위하여 이용하는 일이 드물었다. 머리를 써서 수고함으로 노력을 줄이고, 노동 일수(日數)를 줄임으로 땅으로부터 생계를 얻는 것을 배우고, 그처럼 잘 벌어들이고 유익한 여가를 누릴 수 있었던 종족들의 생각과 계획으로부터, 변함없이 사회의 진보가 생겼다.
81:6.8 (907.5) 3. 과학 지식. 문명의 물질적 면은 반드시 과학적 자료가 쌓이기를 기다려야 한다. 활과 화살을 발견하고 동력의 목적으로 동물을 이용한 뒤에, 사람이 바람과 물의 사용을 배우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으며, 증기(蒸氣)와 전기의 이용이 뒤따랐다. 직물 짜기와 도기, 동물 길들이기, 금속 가공 뒤에는, 글을 쓰고 인쇄하는 시대가 따랐다.
81:6.9 (907.6) 지식은 힘이다. 발명은 반드시 세계적 규모로 문화의 발전이 가속되는 것보다 앞서 간다. 과학과 발명은 무엇보다도 인쇄기로부터 이익을 보았고, 이 모든 문화 활동과 발명 활동의 상호 작용은 문화가 진보하는 속도를 엄청나게 빠르게 하였다.
81:6.10 (907.7) 과학은 사람에게 수학이라는 새 언어의 사용을 가르치며, 엄밀한 선을 따라서 사람의 생각을 훈련시킨다. 과학은 또한 오류를 없앰으로 철학을 안정시키며, 한편 미신을 없앰으로 종교를 깨끗하게 한다.
81:6.11 (907.8) 4. 인간 자원. 노동력은 문명을 퍼뜨리는 데 필수이다. 모든 다른 조건이 같다면, 수가 많은 민족은 수가 적은 종족을 지배할 것이다. 따라서 인구를 어느 선까지 늘이지 못하는 것은 국가의 운명이 완전히 실현되는 것을 막지만, 계속된 성장이 자살이 되는 그러한 인구 증가의 한계가 있다. 정상 인구 밀도의[2] [29] 적정 수준을 넘어서 인구가 증가하는 것은 생활 수준의 하락을 초래하거나, 아니면 평화로운 침투나 군사적 정복, 곧 강제 점령으로 영토의 경계가 즉시 확장됨을 뜻한다.
81:6.12 (908.1) 너희는 때때로 전쟁의 참화에 충격을 받지만, 사회와 도덕이 발전하는 충분한 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하여 큰 무리의 필사자를 생산하는 것이 필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행성에서 그러한 번식과 더불어 곧 인구의 과잉이라는 심각한 문제가 일어난다. 사람이 사는 세계들의 대부분은 작다. 유란시아는 평균이며, 아마 크기가 좀 작다. 민족의 인구가 적정 수준에서 안정되는 것은 문화를 향상시키고 전쟁을 막는다. 그리고 성장을 그칠 때를 아는 나라는 현명한 나라이다.
81:6.13 (908.2) 그러나 지하 자원이 가장 풍부한 대륙과 가장 앞선 기계 장비가 있어도 그 민족의 지능이 쇠퇴한다면, 거의 진보하지 못할 것이다. 지식은 교육으로 얻을 수 있지만, 지혜는 참된 문화에 필수이며, 오로지 경험을 통해서, 날 때부터 총명한 남녀들이 지혜를 확보할 수 있다. 그러한 민족은 체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고, 참으로 지혜롭게 될 수도 있다.
81:6.14 (908.3) 5. 물질 자원의 효율성. 많은 것이 자연 자원, 과학 지식, 자본재, 인간의 잠재성을 이용하는 데 사람이 얼마큼 지혜를 보이는가에 달려 있다. 초기 문명에서 주요한 요인은 사회의 지혜로운 군주가 행사하는 세력이었다. 원시인은 같은 시대의 우수한 사람들이 글자 그대로 그에게 떠맡긴 문명을 가졌다. 잘 조직되고 우수한 소수(小數)가 대체로 이 세상을 다스려 왔다.
81:6.15 (908.4) 힘이 무엇을 정당화하지는 않지만, 힘은 무엇이 지금 존재하고 역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결정한다. 유란시아는 겨우 요즘에야 힘과 정의(正義)의 윤리를 기꺼이 논의하려는 점까지 사회가 도달했다.
81:6.16 (908.5) 6. 언어의 효율성. 문명의 보급은 언어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살아 있고 성장하는 언어는 문명화된 생각과 계획의 팽창을 보장한다. 초기 시절에 중요한 진보는 언어에서 이루어졌다. 오늘날, 발전하는 생각의 표현을 수월하게 만들기 위해서, 언어의 계속된 발전이 크게 필요하다.
81:6.17 (908.6) 언어는 집단의 교제로부터 진화했고, 각 지역 집단은 의사를 소통하는 자체의 체계를 개발하였다. 언어는 손짓ㆍ표징, 외치는 소리와 흉내내는 소리, 억양, 그리고 후일의 알파벳을 소리내는 데 붙는 악센트를 통해서 성장했다. 언어는 사람이 가진 가장 크고 가장 쓸모 있는, 생각에 쓰이는 연장이지만, 언어는 사회 집단들이 얼마큼 여가를 얻을 때까지 결코 번성하지 않았다. 말을 가지고 노는 성향은 새로운 낱말―속어―를 개발한다. 대다수가 그 속어를 채택하면, 관습은 그 속어가 언어가 되게 만든다. 한 가족 집단에서 사람들이 “아기 말투”에 빠지는 것은 지방 사투리의 기원을 설명한다.
81:6.18 (908.7) 언어가 다른 것은 평화를 연장시키는 데 항상 큰 장벽이었다. 지방 사투리를 정복하는 것은 한 민족 전체에, 한 대륙에서, 또는 전 세계에 한 문화를 보급하는 것보다 앞서야 한다. 보편적 언어는 평화를 촉진하고 문화를 보장하며 행복을 증진한다. 한 세상의 언어가 몇 개로 줄어들 때조차도, 주도하는 문화 민족들이 이 언어들을 통달하는 것은 세계의 평화(平和)와 번영을 이룩하는 데 막강한 영향을 미친다.
81:6.19 (908.8) 국제어의 개발을 향하여 유란시아에서 진보가 거의 없었어도, 국제 상업 교류의 확립은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리고 언어ㆍ무역ㆍ예술ㆍ과학, 경쟁 놀이, 또는 종교와 관련되는가에 상관 없이, 이 모든 국제 관계가 육성되어야 한다.
81:6.20 (909.1) 7. 기계 장치의 효율성. 문명의 진보는 연장, 기계 및 분배 경로의 발달과 소유와 직접 관계된다. 개량된 연장, 정교하고 효율 있는 기계들은 진보하는 문명의 무대에서 서로 다투는 집단들의 생존을 좌우한다.
81:6.21 (909.2) 초기 시절에 땅을 가는 데 적용된 유일한 에너지는 노동력이었다. 사람을 쓰지 않고 황소로 대신한 것은, 사람을 일자리에서 내쫓았기 때문에, 오래 걸린 싸움이었다. 나중에는 기계가 사람을 대체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발전은 모조리 사회의 진보에 직접 이바지했는데, 이는 그것이 더 가치 있는 과제를 성취하기 위하여 노동력을 해방하기 때문이다.
81:6.22 (909.3) 지혜롭게 사용하면, 과학은 사람을 사회적으로 해방하는 큰 수단이 될지 모른다. 노동을 절약하는 새 종류의 기계가 너무 빨리 발명되는 결과로서 큰 집단이 갑자기 일자리를 잃게 되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지적 수준이 너무 낮아서 그런 과도기 문제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는 지혜로운 방법과 건전할 기술을 발견할 수 없는 나라에게만, 기계 시대가 재난으로 판명될 수 있다.
81:6.23 (909.4) 8. 횃불 쥔 자들의 인품. 사회의 유산은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있었고 문화와 지식의 총합에 무엇이라도 이바지한 모든 사람의 어깨 위에 설 수 있게 만든다. 문화의 횃불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이 작업에서 가정은 늘 기초 제도가 될 것이다. 놀이와 사회 생활이 다음에 오며, 마지막이지만, 복잡하고 상당히 조직된 사회에서 똑같이 필수인 학교가 뒤따른다.
81:6.24 (909.5) 곤충은 일생을 위하여 완전히 교육받고 장비를 갖춘 채로 태어난다―정말로 아주 좁고 순전히 본능적 존재이다. 인간의 아기는 교육 없이 태어난다. 따라서 사람은 어린 세대를 교육하는 훈련에 고삐를 쥠으로, 문명이 진화하는 과정을 크게 수정할 힘을 소유한다.
81:6.25 (909.6) 문명의 증진과 문화의 전진에 이바지하는 20세기 최대의 영향력은, 세계 여행의 두드러진 증가와 통신 방법의 전례 없던 개선이다. 그러나 교육의 개선은 확대되는 사회 구조와 발걸음을 맞추지 못했다. 윤리에 대한 현대의 이해도 더 순전히 지적이고 과학적인 노선을 따른 성장에 맞추어 발전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현대 문명은 영적 발전과 가정 제도의 보호 면에서 걸음을 멈춘 상태에 있다.
81:6.26 (909.7) 9. 종족의 이상. 한 세대의 이상(理想)은 바로 뒤잇는 후세를 위하여 운명의 경로를 개척한다. 사회에서 횃불을 쥔 자들의 품질은 문명이 전진하는가 후퇴하는가를 좌우한다. 한 세대의 가정ㆍ교회ㆍ학교는 뒤잇는 세대의 인격의 경향을 미리 정해 준다. 한 종족이나 나라가 도덕적ㆍ영적으로 움직이는 힘은 그 문명에서 문화의 속도를 대체로 결정한다.
81:6.27 (909.8) 이상은 사회적 흐름의 근원을 높인다. 그리고 어떤 흐름도, 압력이나 방향을 통제하는 무슨 기술이 이용된다 하더라도, 그 근원보다 조금도 더 높이 올라가지 못할 것이다. 문화가 있는 문명의 가장 물질적 면을 추진하는 힘조차 사회의 성취 중에서 물질 성향이 가장 적은 곳에 거한다. 지능은 문명의 작용을 통제하고, 지혜는 이를 지휘할지 모르지만, 영적 이상을 찾는 것은 한 달성 수준에서 다음 수준까지 인간의 문화를 정말로 높이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이다.
81:6.28 (910.1) 처음에, 인생은 존재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인생은 이제 생활 수준을 높이기 위한 싸움이며, 다음에는 생각의 질을 높이는 싸움이 될 것이요, 이것은 앞으로 땅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목표이다.
81:6.29 (910.2) 10. 전문가의 조정. 초기에 노동의 분업으로, 나중에는 그에 따라 전문화한 결과로 문명은 엄청나게 진보되었다. 문명은 이제 전문가들을 효과 있게 조정하는 데 달려 있다. 사회가 확대됨에 따라서, 다양한 전문가들을 함께 모으는 어떤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
81:6.30 (910.3) 사회ㆍ예술ㆍ기술ㆍ산업의 전문가는 줄곧 늘어나고, 기술과 숙달 면에서 나아질 것이다. 이렇게 능력이 다양화되고 직업이 상이한 것은, 조정하고 협동하는 효과적 수단이 개발되지 않는다면, 궁극에 인간 사회를 약화시키고 무너지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창의성과 전문화 능력을 가진 지능은, 발명이 급속히 성장하고 문화 팽창의 걸음이 빨라짐으로 생기는 모든 문제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적당한 방법을 고안하는 데 전적으로 유능할 것이다.
81:6.31 (910.4) 11. 일자리를 찾는 방책. 사회의 발전에서 다음 시대는, 항상 늘어나고 확대되는 전문화에 대하여 더 낫게, 더 효과 있는 협동과 조정에서 나타날 것이다. 노동이 더욱 다양화됨에 따라서, 개인을 적당한 일자리로 지도하는 어떤 기술이 고안되어야 한다. 유란시아의 문명화된 민족들 사이에서, 기계는 실업(失業)을 낳는 유일한 원인이 아니다. 경제의 복잡성, 그리고 산업 및 직업의 전문화가 꾸준히 증가하는 것은 노동자에게 일자리 찾아주는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81:6.32 (910.5) 사람을 일하도록 훈련하는 것만으로 넉넉하지 않다. 복잡한 사회에서는 또한 일자리를 찾는 효과적 방법이 마련되어야 한다. 생계를 잇는 상당히 특수화된 기술을 시민에게 훈련시키기 전에, 전문화된 일에서 잠시 일자리를 잃었을 때 이용될 수 있는, 하나 이상의 보통 노동ㆍ상업, 또는 직종에서 훈련을 받아야 한다. 어떤 문명도 큰 실업자 계급을 오랫동안 지니고서 살아남을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최선의 시민조차 공공(公共) 금고로부터 지원을 받음으로 비뚤어지고 사기(士氣)를 잃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베푸는 자선조차, 팔다리가 멀쩡한 시민에게 오래 베풀었을 때 해독이 된다.
81:6.33 (910.6) 고도로 전문화된 그런 사회는 옛 민족들의 오래 된 공동체 및 봉건적 관습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많은 보통 서비스가 수긍할 만하게, 이롭게 사회화될 수 있는 것이 참말이지만, 총명하게 협동하는 어떤 기술로, 상당히 훈련받고 극도로 전문화된 인간들을 최선으로 관리할 수 있다. 현대화된 조정과 우호적 규제는, 더 낡은 원시 공산주의 방법이나 무력(武力)에 기초를 두고 독재로 규제하는 기구보다 더 오래 가는 협동을 낳을 것이다.
81:6.34 (910.7) 12. 기꺼이 협동하는 정신. 인간 사회의 진보에 하나의 큰 장애물은 크고 사회화된 인간 집단, 그리고 그보다 작고 반대 생각을 가진 단체, 즉 반사회적 생각을 가진 개별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인류의 반사회적 단체, 이 둘의 이익과 복지 사이에서 생기는 싸움이다.
81:6.35 (910.8) 교육 방법과 종교적 이상이, 높은 종류의 총명한 애국심과 국가에 대한 헌신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어떤 국가의 문명도 오래 가지 못한다. 이런 부류의 총명한 애국심과 문화적 단결이 없으면, 모든 국가가 지방적 질투와 지역의 자체 이권의 결과로서, 무너지는 경향이 있다.
81:6.36 (911.1) 세계적 문명을 유지하는 것은 평화와 친교 속에서 어떻게 함께 사는가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효과적 조정이 없이, 산업 문명은 지나친 전문화의 위험, 즉 단조로움과 편협, 그리고 불신과 질투를 기르는 성향으로 인하여 위태롭게 된다.
81:6.37 (911.2) 13. 효과적이고 지혜로운 지도층. 문명에는 많은 것, 허다한 것이, 열심히 효과 있게 짐을 끌어당기는 정신에 달려 있다. 큰 짐을 드는 데 열 사람은, 함께―모두가 같은 순간에―들지 않는다면, 한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다. 그러한 단체 작업―사회적 협동―은 지도층에 달려 있다. 지난날과 오늘날의 문화적 문명은, 시민이 지혜로운 진취적 지도자들과 영리하게 협동하는 데 기초를 두었다. 그리고 사람이 더 높은 수준으로 진화하기까지, 문명은 지혜롭고 활력 있는 지도층에 계속 의존할 것이다.
81:6.38 (911.3) 높은 문명은 물질적 부(富), 지적 위대함, 도덕적 가치, 사회적 재치, 우주 통찰력, 이러한 것들을 현명하게 상관시킴으로부터 태어난다.
81:6.39 (911.4) 14. 사회의 변화. 사회는 신이 준 제도가 아니다. 사회는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현상이다. 지도자들이 그 시대의 과학의 발전과 발걸음을 맞추는 데 필수인 사회 조직의 변화를 더디게 일으킬 때, 전진하는 문명은 반드시 늦어진다. 이 모든 것 때문에, 오래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물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며, 한 개념을 다만 진기하고 새롭다는 이유로 무조건 채택해서도 안 된다.
81:6.40 (911.5) 사람은 사회의 장치를 가지고 실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조절하는 이러한 모험은 반드시, 사회 진화의 역사를 충분히 통달한 자들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이 개혁자들은 고려하고 있는 사회 실험이나 경제 실험의 분야에서 실지로 체험을 가진 자들의 지혜를 반드시 참조해야 한다. 어떤 큰 사회의 변화나 경제의 변화도 갑자기 시도해서는 안 된다. 온갖 종류의 인간적 조정―물리적ㆍ사회적, 또는 경제적 조정―에는 시간이 필수이다. 오로지 도덕적ㆍ영적 조정이 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고, 이것들조차 그 물질적ㆍ사회적 반응이 충분히 작용하는 데 시간의 흐름이 필요하다. 문명이 한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넘어가는 중대한 시기에, 민족의 이상(理想)은 주요한 지지와 확신이 된다.
81:6.41 (911.6) 15. 과도기 붕괴의 예방. 사회는 오랜 세월에 걸쳐 시행 착오로 얻은 산물이다. 사회는 동물 수준에서 행성 지위를 가진 인간 수준까지 인류가 오랜 세월에 걸쳐 연속된 단계를 올라감으로 선택해서 조정하고, 거듭 조정하여 살아남은 것이다. 어떤 문명에서도―어느 한 순간에도―가장 큰 위험은 과거의 정착된 방법으로부터 새롭고 더 낫지만 실습해 보지 않은 미래의 과정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붕괴되는 위협이다.
81:6.42 (911.7) 지도층은 진보를 좌우한다. 지혜ㆍ통찰력ㆍ선견은 국가가 지속하는 데 필수이다. 유능한 지도층이 비로소 사라질 때까지 문명은 결코 정말로 위태롭지 않다. 그러한 지혜로운 지도자의 수는 결코 인구의 1퍼센트를 넘은 적이 없다.
81:6.43 (911.8) 문명은 진화의 사다리에서 이 가로대를 딛고, 급속히 팽창하는 20세기의 문화를 낳은 힘찬 영향력이 개시될 수 있는 자리에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오로지 이 필수인 것들에 집착함으로, 사람은 오늘날의 문명이 계속 발전하고 확실히 살아남도록 마련하면서, 그 문명을 유지하기를 바랄 수 있다.
81:6.44 (912.1) 이것이 아담 시절 이후로 문명을 세우려고 세상의 민족들이 겪은, 길고 긴 투쟁의 요점이다. 오늘날의 문화는 이 벅찬 진화에서 생긴 최종의 결과이다. 인쇄가 발견되기 전에는 진보가 비교적 느렸는데, 이는 한 세대가 앞 세대들의 업적으로부터 그렇게 빨리 이득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인간 사회는 문명이 투쟁해 온, 지금까지의 세월 동안에 축적된 여세(餘勢)의 힘으로, 앞으로 돌진하고 있다.
82:0.1 (913.1) 결혼―짝짓기―는 남녀의 구별에서 생겨난다. 결혼은 그러한 남녀 구별에 사람이 반응하는 조정이며, 한편 가족 생활은 그러한 진화하며 적응하는 모든 조정으로 생기는 결과이다. 결혼은 오래 버티고 있다. 결혼은 생물학적 진화에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지만, 모든 사회적 진화의 기초이며, 따라서 어떤 형태로 계속 존재할 것이 확실하다. 결혼은 인류에게 가정을 주었고, 가정은 길고도 힘드는 진화의 투쟁 전체에서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다.
82:0.2 (913.2) 종교 제도, 사회 제도, 교육 제도는 모두 문화가 있는 문명이 살아남는 데 필수이지만, 가족은 사람을 문명화시키는 으뜸 세력이다. 어린아이는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인생의 기본의 대부분을 배운다.
82:0.3 (913.3) 옛 시절의 인간들은 아주 부유한 사회 문명을 소유하지 않았지만, 가진 것을 충실하게 효과적으로 다음 세대에 넘겨주었다. 이 과거 문명의 대부분은, 가정이 효과 있게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최소한의 다른 제도적 영향과 더불어 계속 진화했다는 것을 너희는 깨달아야 한다. 오늘날 인간 종족들은 부유한 사회 및 문화적 유산을 소유하며, 이를 뒤잇는 세대들에게 지혜롭고 효과 있게 전해 주어야 한다. 하나의 교육 기관으로 가족은 유지되어야 한다.
82:1.1 (913.4) 남자와 여자 사이에 큰 성격 차이가 있는데도, 성욕은 종(種)의 번식을 위하여 남녀가 한데 모이는 것을 보장하기에 넉넉하다. 인간들이 나중에 사랑과 헌신, 결혼의 정절(貞節)이라 부르는 것을 많이 체험하기 오래 전에, 이 본능은 효과 있게 작용했다. 짝짓기는 타고난 성향이며, 결혼은 짝짓기가 사회에 미치는 진화적 영향이다.
82:1.2 (913.5) 성(性)에 대한 흥미와 욕구는 원시 종족들에게 지배하는 정열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성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번식하는 체험 전부가 상상으로 아름답게 치장되지 않았다. 높이 문명화된 민족들이 느끼는 정열, 온 몸을 감싸는 성의 정열은 주로 종족이 섞인 때문이며, 관련된 상상력과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놋 족속과 아담 족속이 진화적 성품을 자극하는 곳에서 특히 그렇다. 그러나 이 안드 족속의 유전을 진화 종족들이 아주 소량으로 흡수했기 때문에, 더 날카로운 성(性) 의식과 더 강한 짝짓는 욕구를 부여받음으로 이처럼 일깨워지고 자극받은, 동물적 정열에 충분한 자제력을 마련하지 못했다. 진화 종족 가운데, 홍인이 가장 높은 성 규율을 가지고 있었다.
82:1.3 (913.6) 결혼과 관계된 성의 규제는 다음을 가리킨다:
82:1.4 (913.7) 1. 문명이 비교적 진보한 것. 문명은 유익한 경로에서, 도덕 관습을 지키면서 성욕을 만족시킬 것을 갈수록 더 요구한다.
82:1.5 (914.1) 2. 어느 민족에나 들어 있는 안드 혈통의 분량. 성은 그러한 무리들 사이에서 육체 및 감정의 본질 중에서 가장 높고 낮은 것을 모두 표현하게 되었다.
82:1.6 (914.2) 산긱 종족들은 정상으로 동물적 정열이 있었지만, 이성(異性)의 아름다움이나 육체적 매력을 상상하거나 인식하는 성향을 거의 나타내지 않았다. 성적 매력이라 부르는 것은 오늘날의 원시 종족들에게도 거의 없다. 혼합되지 않은 이 종족들은 분명한 짝짓는 본능이 있지만, 사회의 통제가 필요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성적 매력을 충분히 느끼지 않는다.
82:1.7 (914.3) 짝짓는 본능은 사람을 지배하는, 인간의 육체적 추진력이다. 그것은 개인의 만족을 가장하여, 제 몸의 편안을 찾고 개인의 책임을 벗어나는 것보다 종족의 복지와 영속을 더 중요하게 여기도록, 이기적인 사람을 실질적으로 속이는 하나의 감정이다.
82:1.8 (914.4) 하나의 제도로서 결혼은, 예전에 시작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아를 존속시키려는 생물학적 성향이 사회에서 진화한 것을 묘사한다. 진화하는 인종이 영속하는 것은 종족의 이 짝짓는 충동이 존재함으로 확실하게 되며, 이 욕구는 쉽게 말해서 성적 매력이라고 부른다. 위대한 이 생물학적 욕구는 온갖 종류의 관련된 본능과 감정, 그리고―육체적ㆍ지적ㆍ도덕적ㆍ사회적―관습을 충동하는 축(軸)이 된다.
82:1.9 (914.5) 야만인에게는 먹을 것의 공급이 강제된 동기이지만, 문명이 풍부한 식량을 보장할 때, 성욕은 지배하는 충동이 되는 적이 빈번하며, 따라서 늘 사회의 규제가 필요하다. 동물의 경우에, 본능의 주기(週期)가 짝짓는 성향을 통제하지만, 사람은 대체로 자제(自制)하는 존재이니까, 성욕이 아주 주기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따라서 사회가 개인에게 자제를 부과하는 것이 필요하다.
82:1.10 (914.6) 고삐가 풀리고 지나치게 탐닉할 때, 인간의 어떤 감정이나 충동도, 이 강력한 성욕만큼 많은 해독과 슬픔을 낳을 수 없다. 이 충동을 사회의 규제에 영리하게 굴복시키는 것은 어느 문명이라도 그 현실성을 재는 최고의 시험이 된다. 자제, 거듭된 자제는, 진보하는 인류의 항상 늘어나는 요구이다. 비밀을 가지는 것, 불성실ㆍ위선(僞善)은 성 문제를 눈에 띄지 않게 할지 모르지만,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으며, 윤리를 향상시키지도 않는다.
82:2.1 (914.7) 결혼의 진화에 관한 이야기는 다만 사회와 종교와 국가의 제한이 주는 압력을 통해서 성을 통제하던 역사이다. 자연은 개인을 거의 인식하지 않는다. 자연은 이른바 도덕을 알아보지 못한다. 자연은 오로지, 순전히 종의 번식에만 아랑곳한다. 자연은 강제로 번식을 주장하지만, 그 결과로 생기는 문제를 사회가 해결하라고 무관심하게 버려두며, 이처럼 진화하는 인류에게, 늘 따라다니는 주요한 문제를 만들어 낸다. 이 사회적 갈등은 기본적 본능과 진화하는 윤리 사이에 끝없이 벌어지는 싸움에 있다.
82:2.2 (914.8) 옛날 종족들 사이에는 남녀의 관계에 대하여 거의 또는 아무 규제가 없었다. 이 자유로운 성관계 때문에 아무런 매춘이 없었다. 오늘날, 피그미와 기타 뒤처진 집단은 아무런 결혼 제도가 없다. 이 종족들을 연구하는 것은 원시 민족들이 따른, 단순한 짝짓기 관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옛 종족들을 모두, 그들 시대의 관습의 도덕 수준에 비추어서 연구하고 판단해야 한다.
82:2.3 (915.1) 그러나 자유로운 성관계는 지독한 야만 수준보다 결코 평판이 더 좋은 적이 없었다. 사회 집단들이 비로소 형성되는 순간, 결혼 법규와 결혼 제한이 발달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짝짓기는 거의 완전히 자유로운 성관계로부터 비교적 완전히 성을 제한하는 20세기 수준까지, 여러 번 과도기를 거쳐서 진보해 왔다.
82:2.4 (915.2) 부족이 발전하는 가장 옛 단계에서 도덕 관습과 제한하는 금기는 아주 투박했으나, 이것들이 남녀를 떼어놓기는 했다―이것은 평온ㆍ질서ㆍ근면을 조장했다―그리고 결혼과 가정의 오랜 진화가 시작되었다. 성별에 따른 복장ㆍ치장, 종교 관행에 대한 관습은 이 초기의 금기(禁忌)에 기원이 있었고, 이 금기는 성의 자유의 범위를 명확히 정하고, 따라서 결국 악덕ㆍ범죄ㆍ죄의 개념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중요한 축제 날, 특히 5월제에는 성(性)에 대한 어떤 제한도 중지하는 것이 오랫동안 풍습이었다.
82:2.5 (915.3) 여자는 언제나 남자보다 더 엄격한 금기에 지배되었다. 초기의 도덕 관습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결혼하지 않은 여자에게 같은 정도로 성의 자유를 주었지만, 아내가 남편에게 충실하는 것이 아내에게 반드시 요구되었다. 원시의 결혼은 남자에게 성의 자유를 크게 줄이지 않았지만, 아내에게 더 이상 성의 자유를 금했다. 결혼한 여자들은 반드시 머리 장식, 옷차림ㆍ베일ㆍ은둔ㆍ치장ㆍ반지와 같은 어떤 표시를 지녔고, 이것은 한 등급으로서 그들을 따로 구별했다.
82:3.1 (915.4) 결혼은 사람의 그칠 줄 모르는 번식―자기를 퍼뜨리는―욕구의 긴장, 늘 있는 생물학적 긴장에 사회적 유기체가 제도로 반응하는 것이다. 짝짓기는 보편적으로 자연스럽고, 사회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진화하는 동안, 그에 따라서 짝짓기 관습이 진화했으며, 이것이 결혼 제도의 시초이다. 사회의 진화가 도덕 관습이 생기는 단계까지 진보하는 곳은 어디에나, 결혼이 진화된 제도로서 발견될 것이다.
82:3.2 (915.5) 결혼에는 두 가지 뚜렷한 영역이 언제나 있었고, 언제나 있을 터인데, 도덕 관습, 곧 짝짓기의 바깥 면을 규제하는 법과, 그밖에 남자와 여자들의 비밀스럽고 개인적인 관계이다. 사회가 부과한 성 규제에 맞서 개인은 언제나 반항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이 성 문제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자아의 유지는 개인에게 일어나지만 집단이 이를 수행하며, 자아의 존속은 사회적이지만, 개인의 충동으로 확보된다.
82:3.3 (915.6) 모든 종족 사이에서 보다시피, 존중되었을 때 도덕 관습은 성욕을 제한하고 통제하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 결혼의 기준은 언제나 도덕 관습의 현재 힘, 그리고 국가 정부의 기능이 제대로 작용함을 가리키는 참다운 지표였다. 그러나 초기에 있던 성(性) 및 짝짓기에 관한 도덕 관습은 모순되고 투박한 규칙들의 집합이었다. 부모ㆍ아이들ㆍ친척ㆍ사회 모두가 결혼의 규제에 이익이 엇갈려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이 있었는데도, 결혼을 높이고 실천한 종족들은 자연히 더 높은 수준으로 진화했고, 큰 수가 살아남았다.
82:3.4 (915.7) 원시 시절에 결혼은 사회적 지위를 얻으려고 치르는 값이었다. 아내를 소유하는 것은 탁월의 표시였다. 야만인은 결혼하는 날을 책임을 맡고 성년기에 들어가는 표시로 바라보았다. 한 시대에는 결혼을 사회에 대한 의무로 여겼고, 다른 시대에는 종교적 의무로, 또 다른 시대에는 국가에게 시민을 마련해 주는 정치적 요건으로 생각되었다.
82:3.5 (916.1) 초기의 많은 부족은 훔치는 공적을 결혼 자격으로 요구했다. 후일의 민족들은 그렇게 침공하여 약탈하는 것을, 운동 경쟁과 겨루는 경기(競技)로 바꿔치웠다. 이 경기에서 이긴 자에게는 1등상―그 계절에 신부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주었다. 머리 사냥꾼들 사이에서, 젊은이는 적어도 머리 하나를 소유할 때까지 결혼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두개골은 때때로 살 수 있었다. 아내 사들이기가 줄어들자, 수수께끼 경쟁으로 아내를 얻게 되었고, 이것은 흑인의 여러 집단 사이에 아직도 남아 있는 풍습이다.
82:3.6 (916.2) 진보하는 문명과 함께, 어떤 부족들은 남자들이 겪는 어려운 결혼 시험을 여자들의 손에 넘겼다. 이처럼 여자들은 그들이 선택하는 남자를 유리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 결혼 시험은 사냥과 투쟁, 그리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 능력을 포함했다. 신랑이 적어도 1년 동안 신부의 가족에 들어가서, 거기서 살고 수고하며, 그가 얻으려고 하는 아내를 가질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오랫동안 요구되었다.
82:3.7 (916.3) 아내의 자격은 고된 일을 해내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아내는 농사 일의 어떤 부분을 주어진 시간 안에 해내는 것이 요구되었다. 결혼하기 전에 아이를 낳으면, 그 여자는 더군다나 값이 있었다. 이렇게 그 여자의 생산 능력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82:3.8 (916.4) 옛날의 종족들이 결혼하지 못한 것을 창피나 죄라고까지 여겼다는 사실은 아이 결혼의 유래를 설명한다. 사람은 결혼해야 하니까, 이를수록 더 좋은 것이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영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믿음이 또한 널리 퍼졌고, 이것이 태어날 때조차, 때때로 낳기 전에, 성별에 달려 있지만, 아이들을 결혼시키는 추가된 동기였다. 옛 사람들은 죽은 사람도 결혼해야 한다고 믿었다. 최초의 중매쟁이들은 죽은 사람들을 위한 결혼을 협상하려고 고용되었다. 이 중매자들이 죽은 아들과 다른 가족의 죽은 딸의 결혼을 성사시키도록 한 부모가 주선하곤 했다.
82:3.9 (916.5) 후일의 종족들 사이에서는 사춘기가 결혼하는 보통 나이였으나, 문명의 진보에 비례해서 결혼하는 나이가 늦어졌다. 사회의 진화에서 일찍부터 특이한 독신 계급의 남자와 여자들이 생겨났다. 정상의 성욕이 얼마큼 모자라는 개인들이 이 계급을 시작하고 유지했다.
82:3.10 (916.6) 많은 부족이 신부를 그 남편에게 주기로 된 날 바로 전에, 통치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신부와 성관계를 가지도록 허락했다. 이 사람들은 각자 소녀에게 선물을 주곤 했으며, 이것이 결혼 선물을 주는 관습의 기원이었다. 어떤 집단에서는 젊은 여자가 자기 지참금을 벌 것이라 기대하였고, 이것은 신부를 전시하는 방에서 신부가 성교 서비스에 대한 값으로 받은 선물로 이루어졌다.
82:3.11 (916.7) 어떤 부족들은 젊은 남자를 과부와 늙은 여자에게 결혼시켰고, 나중에 홀아비가 되었을 때, 젊은 여자와 결혼하도록 허락하곤 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표현한 대로, 그들의 생각에 두 젊은이가 짝짓도록 놓아 둘 경우처럼 양쪽 부모가 바보가 되지 않을 것을 보장하였다. 다른 부족들은 짝짓기를 비슷한 나이 또래에 제한했다. 어떤 나이 집단에 결혼을 제한한 것이 근친 상간(相姦) 개념을 처음으로 낳았다. (인도에서는 지금도 결혼하는 데 아무런 나이 제한이 없다.)
82:3.12 (916.8) 어떤 도덕 관습 밑에서는 과부를 크게 두려워했고, 과부는 남편의 무덤에서 죽음을 당하든지 자살하도록 허락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배우자와 함께 영의 나라로 간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죽은 것은 거의 변함없이, 살아 있는 과부의 탓으로 돌렸다. 어떤 부족들은 과부를 산 채로 태웠다. 한 과부가 계속해서 살면, 대체로 재혼을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그 여자의 인생은 계속 애도하고, 견딜 수 없게 사회의 제한을 받는 인생이었다.
82:3.13 (917.1) 옛 시절에는 지금 부도덕하다고 여기는 많은 관습을 장려하였다. 원시의 아내들은 남편이 다른 여자들과 정사(情事)를 벌이는 것을 크게 자랑으로 여기는 일이 뜸하지 않았다. 소녀에게 순결은 결혼에 큰 방해물이었다. 결혼하기 전에 아이를 낳는 것은, 아이 낳을 수 있는 동반자를 남자가 가진 것이 확실하니까, 아내로서 한 소녀의 바람직함을 크게 높여 주었다.
82:3.14 (917.2) 많은 원시 부족은 여자가 아이를 배기까지 연습 결혼을 인가했으며, 아이를 가졌을 때 정식으로 결혼식이 거행되곤 했다. 다른 집단에서는 첫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 아내가 아이를 못 낳으면, 그 부모가 여자를 돌려받아야 했고, 결혼은 취소되었다. 도덕 관습은 모든 부부가 아이 가질 것을 요구했다.
82:3.15 (917.3) 이 원시의 연습 결혼은 전혀 방종과 비슷한 데가 없었다. 이것은 다만 진지한 생산력의 시험이었다. 계약하는 사람들은 생식 능력이 입증되자마자 영구하게 결혼했다. 현대의 부부가, 머리의 뒷전에서 결혼 생활에 온전히 만족하지 않으면 편리하게 이혼할 생각으로 결혼할 때, 그들은 실제로 일종의 연습 결혼에 들어가는 것이며, 이것은 그들보다 덜 개화된 조상들이 정직하게 모험하는 위치보다 훨씬 아래에 있는 결혼이다.
82:4.1 (917.4) 결혼은 언제나 재산ㆍ종교와 가깝게 연결되어 왔다. 재산은 결혼을 안정시키는 것이요, 종교는 결혼에 도덕성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82:4.2 (917.5) 원시의 결혼은 투자요, 경제적 투기(投機)였다. 불장난하는 일이 아니라 사업하는 문제였다. 옛 사람들은 집단의 이익과 복지를 위하여 결혼했다. 따라서 집단, 곧 부모와 장로들이 그들의 결혼을 계획하고 주선했다. 그리고 재산 관습이 결혼 제도를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는 것은, 결혼이 많은 현대 민족보다, 초기의 부족들 사이에서 더 오래 갔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82:4.3 (917.6) 문명이 진전되고 사유 재산이 관습에서 더 인정을 받음에 따라서, 도둑질은 큰 범죄가 되었다. 간통은 일종의 도둑질, 남편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초기에 있었던 법규와 도덕 관습에서 간통은 특별히 언급되지 않았다. 여자는 아버지의 재산으로서 시작했고, 아버지는 그의 권리를 딸의 남편에게 넘겨주었다. 모든 합법적 성관계는 이 기존 재산권에서 생겨났다. 구약(舊約)은 여자를 일종의 재산으로 다룬다. 코란은 여자들이 열등하다고 가르친다. 남자는 아내를 친구나 손님에게 빌려줄 권리를 가졌고, 이 관습은 아직도 어떤 종족들 사이에서 유행한다.
82:4.4 (917.7) 현대에 성에 대한 경계심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화하는 도덕 관습의 산물이다. 원시의 남자는 아내를 잃을까 경계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제 재산을 지키고 있었다. 아내를 남편보다 더 엄격하게 성(性)을 책임지게 하는 이유는 결혼 생활에서 아내의 부정(不淨)이 자손과 상속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문명의 행진에서 아주 일찍부터 사생아는 평판이 나빴다. 처음에는 여자만 간통으로 벌을 받았다. 나중에 도덕 관습은 또한 여자의 상대도 책망할 것을 선포했으며, 오랜 세월 동안, 피해자인 남편이나 보호자인 아버지는 침해한 남자를 죽일 온전한 권리가 있었다. 현대의 민족들은 이 관습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불문율 밑에서 이른바 정절을 침해한 범죄를 인정한다.
82:4.5 (917.8) 순결의 금기가 재산 관습의 한 단계로서 기원을 가졌으니까, 이 금기는 처음에 결혼한 여자에게 적용되었어도 결혼하지 않은 소녀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후일에는 구혼자보다 아버지가 순결을 더 요구했다. 처녀는 아버지에게 장사의 재산이었다―처녀는 값이 더 비쌌다. 순결이 더 요구되자, 남편이 되려는 자를 위하여 순결한 신부를 적절히 기르는 서비스를 인정하는 뜻으로 아버지에게 신부의 값을 치르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일단 시작되자, 여자의 순결을 지키는 이 생각이 종족들에게 꽉 들어박혀서, 처녀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소녀들을 글자 그대로 장 속에 가두는 것, 실제로 몇 년 동안 잡아가두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그래서 그후의 기준과 처녀성 시험은 자동으로 전문 창녀 계급을 낳았다. 그들은 퇴짜맞은 신부, 처녀가 아닌 것이 신랑의 어머니한테 들킨 여자들이었다.
82:5.1 (918.1) 아주 일찍부터 야만인은 종족의 혼합이 자손의 질을 높인다는 것을 관찰했다. 부족 안에서 결혼하는 것이 반드시 나빴다는 것이 아니라, 바깥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반드시 비교해서 더 나았다. 따라서 도덕 관습은 가까운 친척 사이에 성관계를 제한하도록 정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족외 결혼이 진화적 변화와 개선을 위하여 선택하는 기회를 크게 늘인다는 것이 인식되었다. 족외 결혼으로 생긴 사람들은 더 능력이 있고 냉혹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능력이 더 컸다. 부족 안에서 결혼하는 자들은, 그들의 도덕 관습과 함께, 차츰 사라졌다. 이것은 모두 천천히 일어났고, 야만인은 의식해서 그런 문제를 따져보지 않았다. 그러나 후일의 진보하는 민족들은 따져보았고, 또한 부족 안의 결혼이 지나치면 때때로 일반적 결점이 생긴다는 것을 관찰했다.
82:5.2 (918.2) 좋은 핏줄을 가진 자들의 근친 교배가 때때로 강력한 부족을 세우지만, 유전적 결함이 있는 자들의 근친 교배로 나쁜 결과가 생기는 놀라운 경우는 사람의 머리에 더 강하게 인상을 주었고, 그 결과로서 진보하는 도덕 관습은 갈수록 더, 아예 가까운 친척 사이에 결혼을 막는 금기를 형성했다.
82:5.3 (918.3) 종교는 오랫동안 족외 결혼을 막는 효과적 장벽이었다. 많은 종교적 가르침은 신도가 아닌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여자는 보통 족내 결혼, 남자는 족외 결혼 풍습을 더 좋아했다. 재산은 언제나 결혼에 영향을 미쳤고, 때때로, 재산을 한 씨족 안에서 보존하려는 노력으로, 아버지의 부족 안에서 남편을 고르라고 여자에게 강요하는 관습이 생겼다. 이런 종류의 판결은 사촌(四寸)의 결혼을 크게 번성하도록 이끌었다. 또한 기술의 비밀을 보존하려는 노력으로 안에서 짝짓는 관습을 지켰다. 솜씨 있는 직공들은 가진 기술의 지식을 가족 안에서 지키려 하였다.
82:5.4 (918.4) 우수한 무리들은, 고립되었을 때 언제나 같은 혈족끼리 짝짓기로 되돌아갔다. 놋 족속은 15만 년이 넘도록 부족 안에서 결혼하는 큰 집단 중의 하나였다. 후일의 족내 결혼 관습은 보라 인종의 전통에 엄청나게 영향을 받았는데, 보라 인종의 경우 처음 짝짓기는 어쩔 수 없이 형제와 자매 사이였다. 형제와 자매의 결혼은 옛날 에집트ㆍ시리아ㆍ메소포타미아에, 그리고 안드 족속이 한때 차지했던 땅에 두루, 보통이었다. 에집트인은 왕족의 피를 깨끗하게 지키려는 노력으로 형제 자매끼리 결혼하는 관습을 오랫동안 지켰고, 이 관습은 페르시아에서 더 오래 지속되었다. 아브라함 시절 이전에 메소포타미아인 사이에서는, 사촌 결혼이 의무였다. 사촌은 사촌과 먼저 결혼할 권리가 있었다. 아브라함 자신은 배다른 누이와 결혼했지만, 그러한 연합은 후일에 유대인 관습에서 허락되지 않았다.
82:5.5 (919.1) 형제 자매 사이의 결혼을 처음으로 그만둔 것은 다처(多妻) 관습 하에서 생겼는데, 이는 누이인 아내가 다른 아내나 아내들을 도도하게 지배했기 때문이다. 어떤 부족의 관습은 죽은 형제의 과부에게 장가드는 것을 막았지만, 살아 있는 형제가 그의 죽은 형제를 위하여 자식을 낳아 줄 것을 요구했다. 어떤 정도라도 안에서 결혼하는 데 저항하는 생물학적 본능은 없다. 그러한 제한은 전적으로 금기의 문제이다.
82:5.6 (919.2) 남자가 두둔했기 때문에 족외 결혼이 마침내 지배했다. 바깥에서 아내를 얻는 것은 인척들로부터 더 큰 자유를 얻을 것을 보장했다. 친숙은 경멸을 낳는다. 그래서, 개인의 선택 요인이 짝짓기를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 부족 바깥에서 짝을 고르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82:5.7 (919.3) 많은 부족은 마침내 씨족 안의 결혼을 금했으며, 다른 부족들은 어떤 카스트와 짝짓는 것을 제한했다. 자기 토템의 여자와 결혼하지 못하게 하는 금기는 여자를 이웃의 부족으로부터 훔치는 관습을 촉진하였다. 나중에는, 친척 관계보다 오히려 영토에 거주하는 것에 따라서 결혼을 규제했다. 족내 결혼이 현대의 족외 결혼 관습으로 진화한 데는 여러 단계가 있었다. 금기가 서민에게 족내 결혼을 막는 것에 근거를 둔 뒤에도, 추장과 왕들은 왕족의 핏줄을 모으고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가까운 친척과 결혼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관습은 보통 군림하는 통치자에게 성 문제에서 어떤 자유를 허락했다.
82:5.8 (919.4) 후일의 안드 민족들의 존재는 산긱 종족들이 자신의 부족 바깥에서 짝지으려는 욕구가 증가한 것과 많이 상관이 있다. 그러나 이웃하는 집단들이 비교적 평화롭게 함께 사는 것을 배우기까지, 족외 결혼은 유행될 수 없었다.
82:5.9 (919.5) 족외 결혼 자체가 평화를 추진한다. 부족들 사이의 결혼은 적대 행위를 줄였다. 족외 결혼은 부족의 조정과 군사(軍事) 연합으로 이끌었다. 힘을 키워 주기 때문에 족외 결혼이 지배하게 되었고, 족외 결혼이 국가를 세웠다. 모험과 탐험은 짝짓는 범위를 연장하는 데 기여했고, 종족 문화의 교류를 크게 수월하게 만들었다.
82:5.10 (919.6) 종족의 결혼 관습에서 달리 설명할 수 없는 모순점은 대체로, 이 족외 결혼 관습과 그에 따른 아내 훔치기와 다른 부족으로부터 아내 사들이기 때문이며, 이 모두가 독립된 부족 관습의 혼합을 초래하였다. 족내 결혼을 막는 이 금기가 사회적이요 생물학적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 단계의 사돈 관계, 곧 아무런 핏줄 관계를 대표하지 않는 경우를 포함하여, 친척 사이의 결혼을 막는 금기에서 잘 나타난다.
82:6.1 (919.7) 오늘날 세상에 순수한 민족은 하나도 없다. 옛날에 진화된 최초의 유색 민족들 가운데 세상에서 오직 두 가지 대표 민족, 곧 황인과 흑인이 지속하고 있다. 이 두 종족조차 멸망한 유색 민족들과 많이 섞여 있다. 이른바 백인 종족이 주로 옛날의 청인으로부터 내려왔어도, 백인종은 두 아메리카에 있는 홍인처럼, 모든 다른 종족과 얼마큼 섞였다.
82:6.2 (919.8) 여섯 가지 유색 산긱 종족 가운데, 셋은 1차이고 셋이 2차였다. 비록 1차 종족―청인ㆍ홍인ㆍ황인―이 여러 면에서 세 2차 종족보다 우수했어도, 이 2차 종족은 많은 바람직한 특성이 있었고, 그들 가운데 상급 핏줄을 흡수했더라면 1차 민족들이 어지간히 향상되었으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82:6.3 (920.1) “반(半) 카스트,”[1] [30] “잡종,” “튀기”에 대한 오늘날의 편견은, 현대의 종족 교배가 대체로, 관계된 종족들 안에 심하게 열등한 핏줄 사이에 있기 때문에 생긴다. 너희는 또한 같은 종족의 퇴화된 핏줄이 서로 결혼할 때 바람직하지 않은 자손을 얻는다.
82:6.4 (920.2) 오늘날의 유란시아 종족들이, 그들의 가장 낮은 층에 저하되고 반사회적이고 박약하고 버림받은 종자들의 저주로부터 풀려날 수 있다면, 얼마큼 종족을 혼합시키는 데 거의 반대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종족 혼합이 몇 종족에서 가장 높은 부류 사이에 일어날 수 있다면, 반대는 더군다나 적을 것이다.
82:6.5 (920.3) 우수한 이질 혈통의 교배는 새롭고 더 활력 있는 핏줄을 창조하는 비결이다. 이것은 식물ㆍ동물ㆍ인종의 경우에 참말이다. 혼혈은 활력을 증가시키고 생식 능력을 높인다. 여러 민족의 평균이나 우수한 층에서 종족의 혼합은, 북 아메리카의 미국의 현재 인구에서 보다시피, 창조 잠재성을 크게 증가시킨다. 그러한 짝짓기가 낮거나 열등한 계층 사이에서 일어날 때, 오늘날 인도 남부의 민족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창조성이 줄어든다.
82:6.6 (920.4) 종족의 혼합은 새 특징의 갑작스런 출현에 크게 기여하며, 그러한 혼혈이 우수한 핏줄의 연합이면, 이 새 특징은 또한 우수한 특성이 될 것이다.
82:6.7 (920.5) 오늘날의 종족들이 열등하고 퇴화된 핏줄로 인하여 지나치게 부담을 받는 한, 대규모의 종족 혼합은 아주 치명적일 터이나 그런 실험에 대한 대부분의 반대는 생물학적 고려보다 사회 및 문화적 편견에 근거를 둔다. 열등한 핏줄 사이에서도, 잡종은 흔히 그 조상들보다 낫다. 우성 인자의 기능 때문에, 혼혈은 종의 개선을 낳는다. 종족의 상호 혼합은 혼혈 속에서 바람직한 우성 인자가 더 많이 있을 가능성을 높인다.
82:6.8 (920.6) 몇천 년 동안에 일어났던 것보다, 지난 1백 년 동안에 유란시아에서 종족 혼혈이 더 많이 일어나고 있다. 인간의 혈통을 이종(異種) 교배하는 결과로서 생기는 심한 부조화의 위험은 크게 과장되었다. “혼혈아”의 주요한 문제는 사회적 편견 때문이다.
82:6.9 (920.7) 백인과 폴리네시아 종족을 섞는 핏트케언 실험은 그 백인과 폴리네시아 여자들이 꽤 좋은 종족 혈통이었기 때문에, 어지간히 성공했다. 가장 높은 부류의 백인ㆍ홍인ㆍ황인 종족 사이에 서로 교배하는 것은 새롭고 생물학적으로 효과 있는 많은 특징을 즉시 낳을 것이다. 이 세 민족은 1차 산긱 종족에 속한다. 백인과 흑인 종족 사이의 혼합은 당장의 결과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고, 그러한 흑백 혼혈의 자손은 사회 및 종족의 편견이 이를 못마땅하게 보이게 만들려고 애쓰는 것처럼 못마땅하지도 않다. 신체적으로, 그러한 흑백의 혼혈은, 어떤 다른 면에서 조금 못하기는 해도, 인류의 탁월한 표본이다.
82:6.10 (920.8) 1차 산긱 종족이 2차 산긱 종족과 혼합할 때, 전자가 희생되는 값으로 후자는 어지간히 개량된다. 작은 규모로―오랜 기간에 연장될 때―1차 종족이 2차 집단의 개량을 위해서 그렇게 희생으로 기여하는 데 심각한 반대가 거의 있을 수 없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2차 산긱들은 어떤 면에서 1차 종족들보다 우수했다.
82:6.11 (921.1) 결국, 인종의 진짜 위협은, 종족이 서로 교배하는 데 따르는 어떤 상상하는 위험보다, 오히려 문명화된 여러 종족 중에 열등하고 퇴화된 핏줄이 마구 번식하는 데서 발견될 것이다.
83:0.1 (922.1) 이 글은 결혼 제도가 옛날에 시작된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결혼은 집단의 절제 없는 난잡한 교배로부터, 여러 가지 변화와 적응을 거쳐서, 궁극에 부부의 짝짓기를 실현하게 한 결혼 기준이 나타나기까지 진보해 왔으며, 부부가 짝짓는 것은 가장 높은 사회 체제인 가정을 세우려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연합하는 것이다.
83:0.2 (922.2) 결혼은 여러 번 위험에 빠졌고, 결혼 관습은 지탱하기 위하여 재산과 종교에 몹시 의존해 왔다. 그러나 결혼과 그에 따라 생기는 가정을 언제까지나 보호하는 진짜 영향력은, 남자와 여자가, 가장 원시적 야만인이거나 또는 가장 교양 있는 필사자이거나, 분명히 혼자 살려고 하지 않는, 단순하고 타고난 생물학적 사실이다.
83:0.3 (922.3) 성욕 때문에,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을 동물보다 더 나은 무엇으로 만들도록 꼬임을 받았다. 자아를 돌보고 자아를 만족시키는 성관계에는 자아를 부인(否認)하는 어떤 결과가 뒤따르며, 이타적 임무와 종족을 이롭게 하는 수많은 가정 책임을 맡는 것을 보장한다. 여기서 성은 야만인을 문명인답게 만드는, 인정도 의심도 받지 않는 도구였으니, 왜냐하면 바로 이 성(性) 충동이 저절로, 어김없이 사람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만들고 궁극에는 남을 사랑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83:1.1 (922.4) 결혼은 남녀의 육체적 사실에서 생겨나는 많은 인간 관계를 규제하고 통제하기 위하여 고안된 사회 장치이다. 그러한 제도로서, 결혼은 두 방향에서 작용한다:
83:1.2 (922.5) 1. 개인의 성관계를 규제할 경우에.
83:1.3 (922.6) 2. 자손ㆍ상속ㆍ계승, 그리고 사회 질서를 규제할 때. 질서가 더 오래 된 최초의 기능이었다.
83:1.4 (922.7) 결혼으로부터 생겨나는 가족 자체가 재산 관습과 함께, 결혼 제도를 안정시키는 장치이다. 결혼을 안정시키는 다른 유력한 요소는 자부심ㆍ허영심ㆍ기사도ㆍ의무, 그리고 종교적 확신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결혼을 인정하거나 부인할 수 있어도, 결혼은 도저히 하늘에서 정한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의 가족은 뚜렷하게 인간의 제도요, 진화로 발전한 것이다. 결혼은 사회 제도이지, 교회의 한 분과가 아니다. 종교가 결혼에 힘차게 영향을 미쳐야 하는 것이 참말이지만, 종교만으로 결혼을 통제하고 규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83:1.5 (922.8) 원시의 결혼은 1차적으로 산업이었다. 현대에도 결혼은 흔히 사회나 사업의 일이다. 안드 핏줄의 혼합이 미치는 영향을 통해서, 그리고 진보하는 문명의 관습의 결과로서, 천천히 결혼은 서로 나누고 낭만이 있으며, 부모답고 시(詩) 같으며, 사랑이 넘치고 윤리가 있으며, 아니 이상주의가 되고 있다. 그러나 원시의 짝짓기에는 선택과 이른바 낭만적 사랑이 극히 적었다. 옛 시절에 남편과 아내는 별로 같이 있지 않았다. 자주 함께 먹지도 않았다. 그러나 옛 사람들 사이에서, 개인의 사랑은 성(性)의 매력과 강하게 연결되지 않았다. 그들은 대체로, 같이 살고 일하기 때문에, 서로를 좋아하게 되었다.
83:2.1 (923.1) 원시의 결혼은 반드시 소년과 소녀의 부모가 계획하였다. 이 관습과 자유롭게 선택하는 시절 사이의 과도기 단계는 결혼 중개인, 곧 전문 중매인이 차지했다. 이 중매인들은 처음에 이발사였고, 나중에는 사제였다. 최초에 결혼은 집단의 행사였고, 다음에는 가족의 문제였다. 요즘에야 결혼은 개인의 모험이 되었다.
83:2.2 (923.2) 매력이 아니라, 강제로 원시의 결혼을 처리하였다. 옛 시절에 여자는 성에 냉담하지 않았고, 도덕 관습이 주입되어 오직 성적 열등감을 가졌다. 침공이 무역을 앞선 것처럼, 사로잡아 결혼하는 것이 계약 결혼에 앞섰다. 어떤 여자들은 자기 부족의 늙은 남자들에게 정복되는 것을 피하려고, 사로잡힐 때 모른 체하곤 했다. 그들은 다른 부족에서 온 제 또래의 남자 손에 굴러 떨어지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이 거짓 도망은 강제로 생포하는 것과 나중에 매력으로 구혼하는 사이에 과도기 단계였다.
83:2.3 (923.3) 초기 형태의 결혼식은 탈출하는 흉내, 일종의 도망 연습이었고, 이것은 한때 흔했던 관습이었다. 나중에는 생포를 흉내내는 것이 정상 결혼식의 일부가 되었다. 현대의 소녀가 “사로잡히는 데” 저항하는 체하는 것, 결혼에 대하여 말하기 싫어하는 것은 다 옛 관습의 유물이다. 문턱을 넘어 신부(新婦)를 메고 가는 것은 몇 가지 고대의 관습, 다른 것 중에도 아내 훔치는 시절을 생각나게 한다.
83:2.4 (923.4) 여자에게는 결혼한 동안 자기 뜻대로 처신하는 완전한 자유가 오랫동안 주어지지 않았으나, 총명한 여자들은 언제나 머리를 영리하게 써서 이 제한을 피할 수 있었다. 남자가 보통 구혼을 주도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여자는 은밀하게 할 뿐 아니라, 때로는 공식으로 결혼을 개시하였다.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여자는 구혼과 결혼의 모든 단계에서 맡는 역할이 늘어났다.
83:2.5 (923.5) 결혼하기 전 구혼 기간에 사랑, 낭만, 개인 선택의 증가는 세계 종족들에게 안드 족속이 공헌한 것이다. 남녀 사이의 관계는 순조롭게 진화하고 있었다. 진보하는 많은 민족이 효용과 소유권에 근거를 둔 옛날의 동기 대신에 얼마큼 이상이 된 성적 매력의 개념을 차츰 받아들이고 있다. 일생의 짝을 고르는 데 성적 충동과 사랑의 느낌이 냉철한 계산을 비로소 대체하고 있다.
83:2.6 (923.6) 최초에 약혼은 결혼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옛 민족들 사이에서 약혼 기간에 성관계를 가지는 것은 관습이었다. 최근에는 종교가 약혼과 결혼 사이의 기간에 성관계를 막는 금기를 만들었다.
83:3.1 (923.7) 옛날 사람들은 사랑과 약속을 믿지 않았다. 오래 가는 연합은 어떤 확실한 보증, 곧 재산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아내 사는 값을, 이혼하거나 아내를 버릴 경우에 남편이 잃도록 정해진 벌금이나 보증금으로 여겼다. 신부(新婦) 사는 값을 일단 치르고 나서, 남편의 소인(燒印)을 그 여자에게 찍는 것을 많은 부족이 허락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아직도 아내를 사들인다. 사랑으로 얻은 아내, 곧 백인의 아내를 그들은 고양이에 비교하는데, 그 여자가 한 푼도 들지 않기 때문이다.
83:3.2 (924.1) 신부(新婦) 구경은 신부가 아내로서 더 높은 값을 받으리라는 생각으로 대중에게 전시하기 위하여 딸을 잘 입히고 치장하는 계제이다. 그러나 그들은 동물처럼 팔리지는 않았다―후일의 부족들 사이에서 그런 아내는 남에게 양도할 수 없었다. 아내를 사는 것이 반드시 냉혈한 돈 거래도 아니었다. 수고는 아내를 사는 데 현금과 같았다. 다른 면에서 바람직한 남편이 제 아내의 값을 치를 수 없으면, 여자의 아버지에게 양자(養子)가 될 수 있었고, 그리고 나서 결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난한 남자가 아내를 구하면서 욕심 많은 아버지가 달라는 값을 치를 수 없으면, 장로들이 흔히 그 아버지에게 바짝 압력을 넣곤 했는데, 이것은 그의 요구를 수정하게 만들곤 하였고, 그렇지 않으면 눈이 맞아 도망치는 일이 생길 수 있었다.
83:3.3 (924.2)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아버지들은 딸을 파는 것처럼 보이기가 싫었고, 그래서 신부 사는 값을 계속 받는 한편, 신부의 값과 대충 같은 값으로, 그 쌍에게 귀중한 선물을 주는 관습을 시작했다. 그리고 신부 값을 치르기가 나중에 중지되고 나서, 이 선물은 신부의 지참금이 되었다.
83:3.4 (924.3) 지참금의 관념은 신부가 독립한다는 인상을 전하려는 것, 아내가 노예이고 동반자가 재산이었던 시대가 지난 지 아주 오래되었음을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남자는 지참금을 완전히 돌려주지 않고서 지참금을 가져온 아내와 이혼할 수 없었다. 어떤 부족들 사이에서는 상호 보증금, 실제는 결혼 보증금이 신부와 신랑, 양쪽의 부모에게 맡겨졌는데, 이것은 한 쪽이 다른 쪽을 버렸을 경우에 몰수하기로 되었다. 아내 사들이기에서 지참금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아내를 샀다면, 아이들은 아버지에게 속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은 아내의 가족에 속했다.
83:4.1 (924.4) 결혼 예식은 결혼이 두 사람이 내린 결정이 열매를 맺은 것일 뿐 아니라, 최초에 공동체의 일이었다는 사실에서 생겼다. 짝짓기는 개인의 활동일 뿐 아니라 집단의 관심거리였다.
83:4.2 (924.5) 요술과 의식(儀式)과 예식이 옛날 사람들의 생활 전체를 둘러쌌고, 결혼은 예외가 아니었다.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결혼을 더 진지하게 여김에 따라서, 결혼 예식은 갈수록 더 허세 부리는 것이 되었다. 초기의 결혼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재산 권익에 한 요인이었고, 따라서 법적 예식이 필요했으며, 한편 나중에 생기는 아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가능한 널리 홍보(弘報)할 것을 요구했다. 원시인은 아무런 기록이 없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결혼 예식을 구경해야 했다.
83:4.3 (924.6) 처음에 결혼식은 약혼 수준에 더 가까웠고, 다만 같이 살 뜻을 대중에게 통지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결혼식은 정식으로 같이 먹는 것이었다. 어떤 부족들 사이에는 부모가 단지 딸을 남편에게 데리고 갔다. 다른 경우에는 유일한 의식(儀式)이 선물을 정식으로 교환하는 것이었고, 그 뒤에 신부의 아버지가 딸을 신랑에게 내어주곤 했다. 여러 레반트 종족 사이에서는 온갖 형식을 생략하는 것이 관습이었고, 결혼은 성관계로 끝을 맺었다. 홍인은 더 정교한 결혼 축하를 처음으로 개발하였다.
83:4.4 (924.7) 사람들은 아이 낳지 못하는 것을 크게 두려워했고, 불임을 영이 장난치는 탓으로 돌렸기 때문에, 다산(多産)을 보장하려는 노력은 또한 결혼을 어떤 요술이나 종교 의식과 관련시키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행복하고 아이를 많이 낳는 결혼을 보장하려는 이 노력으로 많은 부적이 이용되었다. 계약하는 당사자들의 출생 별을 확인하려고 점성가들의 자문도 받았다. 한때는 살림이 넉넉한 사람들 사이에서, 인간을 잡아 바치는 것이 모든 결혼에 정규 행사였다.
83:4.5 (925.1) 사람들은 행운의 날을 찾았고, 목요일을 가장 유리하게 여겼다. 보름달에 올린 결혼식은 특별히 행운이라고 생각되었다. 새로 결혼한 자에게 곡식을 던지는 것이 근동에서 여러 민족의 관습이었다. 이것은 아이가 많을 것을 보장한다고 생각된 요술 의식이었다. 어떤 동양 민족들은 이 목적에 쌀을 썼다.
83:4.6 (925.2) 불과 물은 귀신과 악령을 방지하는 가장 좋은 수단으로 언제나 생각되었다. 따라서 거룩한 물을 세례로 뿌리는 것 뿐 아니라, 제단에 불을 지피고 촛불 켜는 것이 결혼식에 흔히 보였다. 오랫동안 가짜 결혼일을 정하고, 그리고 나서 귀신과 영들을 길에서 쫓아내려고 갑자기 그 행사를 연기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83:4.7 (925.3) 새로 결혼한 사람들을 놀리고 신혼 여행을 하는 자들에게 못된 장난을 하는 것은 모두 아득히 먼 시절의 유물이며, 그때는 귀신의 질투를 일으키는 것을 피하려고 귀신의 눈에 불쌍하고 불안해 보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되었다. 신부가 베일을 쓰는 것은, 귀신이 그 여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또한 그렇지 않으면 시샘하고 부러워할 귀신이 그 여자의 아름다움을 못 보게 감추려고 신부를 가장(假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시절의 유물이다. 신부의 발은 예식이 있기 바로 전에, 결코 땅에 닿아서는 안 되었다. 20세기에도 기독교 관습으로, 차량이 내리는 데서부터 교회의 제단까지 카펫을 까는 것이 아직도 관습이다.
83:4.8 (925.4) 가장 오래 된 결혼식 형태의 하나는 그 결합이 자식 많을 것을 보장하려고 사제가 결혼 침대에 복을 주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어떤 공식 결혼 의식이 생기기 오래 전에 행해졌다. 결혼 관습의 진화에서 이 기간에는 결혼식 손님들이 밤에 침실을 통해서 줄지어 지나가는 것을 기대하였고, 이것은 이처럼 결혼이 성사되었음을 보았다는 법적 입증이었다.
83:4.9 (925.5) 결혼 이전에 온갖 시험이 있었는데도, 어떤 결혼이 나쁘게 된다는 운(運)의 요인은, 원시의 남자에게 결혼의 실패에 대하여 보험으로 보호를 추구하도록 이끌었고, 사제와 요술을 찾게 만들었다. 이 운동은 결국 현대의 교회 결혼식을 직접 낳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결혼은 대체로, 계약하는 부모들이―나중에는 그 부부가―내리는 결정이라고 인정되었으며, 한편 교회와 국가가 지난 5백 년 동안에 관할권을 맡았고, 지금은 감히 결혼을 선언한다.
83:5.1 (925.6) 결혼의 초기 역사에서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은 그 부족의 남자들에게 속했다. 나중에, 한 여자는 일시에 남편이 오직 하나 있었다. 일시에 한 남자와 사는 이 관습은 그 집단의 난교(亂交)로부터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여자에게는 오직 한 남자가 허락되었어도, 그 여자의 남편은 그러한 일시적 관계를 마음대로 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허술하게 규제된 이러한 관계는 무리를 지어 사는 것과 구별해서, 짝을 지어 사는 방향으로 가는 첫걸음이었다. 결혼이 발전하는 이 단계에서 아이들은 보통 어머니에게 속했다.
83:5.2 (925.7) 짝짓기의 진화에서 다음 걸음은 집단 결혼이었다. 결혼의 이 공동체 단계는 가족 생활의 전개에서 사이에 끼어야 했는데, 이는 부부의 결합을 영구하게 하기에는 아직도 결혼 관습이 충분히 튼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제와 자매들의 결혼이 이 집단에 속했다. 한 가족의 다섯 형제가 다른 가족의 다섯 자매와 결혼하곤 했다. 전 세계에서 더 허술한 형태의 공동체 결혼이 차츰 여러 종류의 집단 결혼으로 발전했다. 이 집단 결합은 대체로 토템 관습에 규제를 받았다. 가족 생활은 느리고 확실하게 발전했는데, 성 및 결혼의 규제가 아이들이 더 많이 살아남는 것을 보장함으로 바로 그 부족의 생존을 유리하게 했기 때문이다.
83:5.3 (926.1) 더 진보된 부족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복혼(複婚)―일부 다처(一夫多妻)와 일처 다부(一妻多夫)―의 관습 앞에서 집단 결혼은 차츰 자리를 양보하였다. 그러나 일처다부는 결코 널리 퍼지지 않았고, 여왕이나 부유한 여인들에게 보통 국한되었다. 더군다나 그것은 관례로, 여러 형제와 한 아내가 사는, 집안 일이었다. 카스트와 경제적 제한은 때때로 여러 남자가 오직 한 아내로 만족하는 것을 필요하게 만들었다. 그런 때에도, 여자는 오직 한 사람과 결혼하고, 나머지는 합동 자손의 “아저씨”로서 적당히 참아 주곤 했다.
83:5.4 (926.2) 한 남자가 “자기 형제의 씨를 기르는” 목적으로 죽은 형제의 과부와 사귀도록 요구하는 유대인의 관습은 고대 세계의 절반이 넘는 데서 있던 관습이었다. 이것은 결혼이 개인의 결합이기보다 가족의 일이었던 시절의 유물이었다.
83:5.5 (926.3) 일부다처 제도는 다른 시절에 네 종류의 아내를 인정했다:
83:5.6 (926.4) 1. 예식을 올린 아내, 곧 합법적 아내.
83:5.10 (926.8) 아내들이 모두 똑같은 지위를 가지고 아이들이 모두 평등한 그러한 참 복혼은 아주 드물었다. 보통은 복혼의 경우에도 우두머리 아내, 신분이 있는 동반자가 가정을 지배했다. 그 여자 혼자, 의식(儀式)으로서 결혼식을 올렸고, 신분이 있는 아내와 특별히 주선하지 않으면, 오직 사들이거나 지참금을 낸 그러한 배우자의 아이들만 상속을 받을 수 있었다.
83:5.11 (926.9) 신분이 있는 아내는 반드시 사랑하는 아내가 아니었다. 옛날에 신분을 가진 아내는 보통 그렇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내, 곧 애인은 종족들이 어지간히 진보할 때까지, 특히 진화하는 부족들이 놋 족속과 아담 족속과 섞이기까지, 등장하지 않았다.
83:5.12 (926.10) 금기의 아내―법적 지위를 가진 한 아내―는 첩을 두는 관습을 만들어 냈다. 이 관습 밑에서 한 남자는 오직 한 아내를 가져도 좋았지만, 그는 몇 명이라도 첩들과 성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첩 제도는 일부일처(一夫一妻)에 이르는 디딤돌이요, 버젓한 복혼으로부터 벗어나는 첫걸음이었다. 유대인ㆍ로마인ㆍ중국인의 첩은 아주 흔히 아내의 몸종이었다. 나중에는, 유대인 사이처럼, 남편에게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그 법적 아내를 어머니로 여기었다.
83:5.13 (926.11) 아이를 배거나 젖을 먹이는 아내와 성관계를 하지 말라는 오래 된 금기는 일부 다처제를 권장하는 경향이 컸다. 원시의 여자들은 고된 일과 더불어 자주 임신했기 때문에 아주 일찍 늙었다. (지나치게 짐을 진 그런 아내들은, 아이로 몸이 무겁지 않을 때, 그들을 달마다 한 주 동안 고립시켰다는 사실 덕분에 겨우 그럭저럭 버티었다.) 그러한 아내는 흔히 아이를 배는 데 지쳤고, 둘째이자 더 젊은 아내를, 아이 낳는 일과 집안 일을 도와줄 수 있는 아내를 얻으라고 남편에게 부탁하곤 했다. 따라서 새 아내를 더 나이 든 배우자가 보통 기쁘게 환호하였다. 성적 질투 수준에 있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83:5.14 (926.12) 아내들의 수는 남자가 오직 그들에게 살림을 차려줄 능력에 따라서 제한되었다. 부유하고 유능한 남자는 아이들을 많이 바랐고, 아기 사망률이 아주 높았기 때문에, 큰 가족을 이루는 데 한 떼의 아내들이 필요했다. 여럿인 이 아내들 중에서 다수는 단순한 노동자요 노예 아내였다.
83:5.15 (927.1) 인간의 관습은 진화하지만, 아주 느리다. 하렘의[1] [31] 목적은 왕좌를 받들기 위해서 튼튼하고 수많은 혈족의 단체를 세우는 것이었다. 어떤 추장은 한때 그가 하렘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한 아내로 만족해야 한다고 확신을 가졌다. 그래서 그의 하렘을 대번에 해고했다. 불평을 품은 아내들은 친정 집으로 돌아갔는데, 감정을 상한 친척들이 성이 나서 추장에게 몰려왔고, 그때 그 자리에서 그를 없애버렸다.
83:6.1 (927.2) 일부일처제는 독점이다. 이것은 이 바람직한 상태에 도달하는 자에게 좋지만, 그렇게 운이 좋지 않은 자에게 생물학적 어려움을 주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개인에게 미치는 효과에 아주 상관 없이, 일부일처제는 확실히 아이들에게 가장 좋다.
83:6.2 (927.3) 가장 일찍 있었던 일부일처제는 어쩔 수 없는 상황, 곧 가난 때문이었다. 일부일처는 문화적ㆍ사회적인 것이요,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럽다, 다시 말해서 진화 인간에게 부자연스럽다. 일부일처는 더 순수한 놋 족속과 아담 족속에게 온통 자연스러웠고, 모든 진보된 종족에게 크게 문화적 가치가 있었다.
83:6.3 (927.4) 갈대아 부족들은 아내가 그 배우자에게 둘째 아내나 첩을 두지 않겠다고 결혼 전에 서약을 부과하는 권리를 인정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일부일처의 결혼을 찬성했다. 조상 숭배는, 결혼을 신성한 일로 보는 기독교의 잘못이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일부일처제를 촉진했다. 생활 수준의 향상조차도 한결같이 여러 아내를 가지는 것에 대항하여 작용했다.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오실 때가 되자, 문명화된 세계의 거의 전부가 이론적 일부일처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수동적 일부일처제는, 인류가 진짜 부부 결혼의 관습에 길들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83:6.4 (927.5) 이상적 부부(夫婦) 결혼은 결국 독점 성관계와 비슷한 것이며, 이 일부일처의 목표를 추구하면서, 그 요구 조건에 협조하고 그 조건을 준수하려고 최선을 다했을 때에도, 새롭고 개량된 이 사회 질서에서 자리를 찾지 못하는 그런 불행한 남녀의 부럽지 않은 형편을 사회가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회의 경쟁 무대에서 짝을 얻지 못하는 것은 뛰어넘을 수 없는 어려움이나 현재의 도덕 관습이 지워준 다방면의 제한 때문일 수도 있다. 참으로, 일부일처제는 그런 관계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상적이지만, 혼자 사는 차가움 속에서 외톨이로 남은 자에게 불가피하게 큰 어려움을 안겨 준다.
83:6.5 (927.6) 불행한 소수(小數)는 진화하는 문명의 발전하는 관습 밑에서 대다수가 진보할 수 있도록 언제나 고생해야 했다. 그러나 유리하게 된 대다수는 그들보다 운이 나쁜 동료를 친절하게, 배려하는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들은 전진하는 사회의 진화에서 가장 높은 관습의 인가를 받고서 모든 생물학적 욕구를 채워 주는 이상적 성(性) 대상자의 계열에서 회원 자격을 얻지 못한 값을 치러야 한다.
83:6.6 (927.7) 일부일처는 언제나 인간의 성생활의 진화에서 이상적 목표였고, 지금도 그렇고, 언제까지나 그러할 것이다. 이 참된 부부 결혼이라는 이상에는 극기가 따르며, 따라서 단지 계약 당사자의 한쪽이나 양쪽이 모든 인간 미덕의 절정, 곧 강한 자제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실패하는 일이 아주 흔하다.
83:6.7 (927.8) 순전히 생물학적 진화와 구별해서, 일부일처는 사회 문명의 진보를 재는 척도이다. 일부일처는 반드시 생물학적이거나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사회의 문명을 당장에 유지하고 계속 발전시키는 데 필수이다. 그것은 세련된 감정, 도덕적 인격의 향상, 영적 성장에 이바지하며, 이런 것은 복혼의 경우에 도무지 불가능하다. 남편의 사랑을 얻으려는 경쟁에 어쩔 수 없이 말려든 동안에, 여자는 결코 이상적인 어머니가 될 수 없다.
83:6.8 (928.1) 부부의 결혼은 밀접한 이해와 효과적 협동을 유리하게 만들고 조장하는데, 이것들은 부모의 행복, 아이의 복지, 사회의 효율성을 위해서 최선이다. 서투른 강요로 시작된 결혼은 자아의 교양, 자제, 자아 표현, 자아 존속을 낳는 훌륭한 제도로 차츰 진화하고 있다.
83:7.1 (928.2) 결혼 관습이 초기에 진화할 때 결혼은 마음대로 그만둘 수 있는 허술한 연합이었고, 아이들은 언제나 어머니를 따랐다.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 있는 끈은 본능적이고, 도덕 관습의 발전 단계와 상관 없이 작용했다.
83:7.2 (928.3) 원시 민족들 사이에서는 겨우 결혼의 약 절반이 만족스러운 것이 판명되었다. 이별의 가장 흔한 원인은 아이가 없는 것이었고, 이를 언제나 아내의 탓으로 돌렸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내는 영 세계에서 뱀이 된다고 믿었다. 더 원시적 관습 밑에서 남자 혼자의 선택으로 이혼(離婚)이 이루어졌고, 어떤 민족들 사이에서 이 기준은 20세기까지 지속해 왔다.
83:7.3 (928.4) 도덕 관습이 진화함에 따라서, 어떤 부족들은 두 가지 형태의 결혼을 개발했다. 보통의 결혼은 이혼을 허락했으며, 사제가 맺은 결혼은 이별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내 사들이기와 아내의 지참금의 시작은, 결혼의 실패에 따른 재산 벌칙을 들여옴으로써 이별을 줄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정말로, 이 고대의 재산 요인이 현대의 많은 결합을 안정시킨다.
83:7.4 (928.5) 공동체에서 신분, 그리고 재산 특권이 주는 사회적 압력은 언제나 결혼 금기와 관습의 유지에 효력이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결혼은 꾸준히 진보해 왔고 현대의 세상에서 진보된 기초 위에 서 있다. 개인의 선택―새로운 자유―를 무척 크게 생각하는 민족들 사이에서 널리 불만이 퍼짐으로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받는데도 그렇다. 진보된 종족들 사이에서 이러한 적응의 격변은 갑자기 사회의 진화가 가속되는 결과로서 나타나지만, 그보다 진보하지 못한 민족들 사이에서 결혼은 계속 번성하며, 더 오래 된 관습의 지도를 받으며 천천히 개량된다.
83:7.5 (928.6) 결혼에 이상적이지만 극도의 개인주의적 사랑의 동기가 더 낡고 오랫동안 확립된 재산 동기를 새로 갑자기 대체한 것은 불가피하게 결혼 제도를 일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람이 결혼하는 동기는 언제나 실제의 결혼 도덕을 훨씬 능가했으며, 19세기와 20세기에 결혼에 대한 서양의 이상은, 자기 중심이고 겨우 얼마큼 통제된, 종족들의 성(性) 충동을 갑자기 껑충 뛰어넘었다. 어느 사회에서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이 큰 무리로 존재하는 것은 도덕 관습이 일시 붕괴하거나 과도기에 있음을 가리킨다.
83:7.6 (928.7) 결혼의 진짜 시험은, 긴 세월을 통해서 내내, 계속된 친밀성이었고, 이것은 모든 가족 생활에서 불가피한 것이다. 온갖 허영에 탐닉하고 자존심을 충분히 만족시킬 것을 기대하도록 교육받고, 제멋대로 행하고 버릇 없는 두 젊은이는 도저히 결혼하고 가정(家庭)을 일으키는 일―자기를 감추고, 절충하고, 헌신하고, 아이들의 교양에 아낌없이 헌신하는 일생의 협동 관계―에 도저히 크게 성공하기를 바랄 수 없다.
83:7.7 (929.1) 현대의 서양 민족들 사이에서 늘어나는 이혼 경향은 구혼(求婚)에 들어가는 고도의 상상력과 환상적 낭만에 대체로 책임이 있으며, 이것은 모두 여자의 개인적 자유가 커지고 경제적 자유가 늘어남으로 더욱 까다롭게 된다. 쉬운 이혼은, 그것이 자제의 부족이나 정상으로 인격자의 조정이 실패한 결과일 때, 아주 최근에, 또 아주 많은 개인적 괴로움과 종족의 고통을 겪은 결과로서 사람이 벗어났던 그 투박한 사회 단계로 곧장 돌아가도록 이끌 뿐이다.
83:7.8 (929.2) 그러나 사회가 어린아이와 젊은이를 적절히 교육하지 못하고, 사회 질서가 적당한 결혼 전 훈련을 마련하지 못하는 한, 현명하지 못하고 미숙하고 어린 이상주의로 결혼에 진입하는 것을 결정해야 하는 한, 그동안만큼 이혼이 유행할 것이다. 사회 집단이 젊은이들에게 결혼 준비를 마련해 주지 못하는 한, 그 범위까지 이혼은 사회의 안전 밸브로서 작용해야 하며, 이것은 진화하는 도덕 관습이 급속히 성장하는 시대에, 더욱 나쁜 상황을 방지한다.
83:7.9 (929.3) 옛 사람들은 꼭 오늘날의 어떤 사람들만큼이나 결혼을 진지하게 여긴 듯하다. 현대에 성급하고 성공하지 못한 많은 결혼은, 젊은 남녀가 짝짓는 자격을 갖추게 하는 옛 관습보다 크게 개선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큰 모순은 사랑을 높이고 결혼을 이상으로 만들면서, 이 두 가지를 철저히 검사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83:8.1 (929.4) 궁극에 가정으로 이끄는 결혼은 정말로 사람의 가장 고귀한 제도이지만, 그 본질은 인간적이다. 결혼을 결코 성사(聖事)라고 부르지 말았어야 했다. 셋 족속 사제들은 결혼을 종교 의식(儀式)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에덴 뒤에 수천 년 동안, 짝짓기는 순전히 사회와 시민의 제도로서 계속되었다.
83:8.2 (929.5) 인간의 관계를 신의 관계와 비교하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다. 결혼과 가정 관계에서 남편과 아내의 연합은 진화 세계에서 필사자의 물질적 기능이다. 정말로 남편과 아내가 진보하려고 인간으로서 진지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로 많은 영적 진보가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 참말이지만, 이것은 결혼이 반드시 신성함을 뜻하지 않는다. 영적 진보는 인간의 노력을 다른 방향에 진지하게 적용하는 결과로서 생긴다.
83:8.3 (929.6) 결혼은 조절자와 사람의 관계나, 또는 그리스도 미가엘과 인간 형제 사이의 친교와도 참으로 견줄 수 없다. 어떤 면에서도 그러한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결합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다. 이러한 관계에 대한 인간의 잘못된 생각이 결혼의 지위에 대하여 그렇게 많은 혼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다.
83:8.4 (929.7) 결혼이 신의 행위로 인하여 맺어졌다고 어떤 집단의 필사자들이 상상한 것도 또한 유감스럽다. 그러한 믿음은, 계약한 당사자의 상황이나 소망과 상관 없이, 결혼 상태가 취소될 수 없다는 개념으로 바로 이끈다. 그러나 결혼이 취소되는 사실 자체가 바로, 신이 그러한 연합에 관련된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어떤 두 물건이나 사람을 함께 일단 합쳐 놓았으면, 신의 뜻이 그들이 분리되라고 선포할 때까지, 그들은 그렇게 합쳐진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제도인 결혼에 관해서 말하면, 성질과 기원이 순전히 인간적 결혼과 대조해서, 어느 결혼이 우주 감독자들의 승인을 받을 수 있는 연합인가 말하려고 누가 감히 판단을 내리겠는가?
83:8.5 (930.1) 그런데도, 높은 곳의 구체들에는 이상적 결혼이 있다. 각 지역 체계의 서울에는 하나님의 물질 아들과 딸들이, 결혼의 끈 속에서, 그리고 자식을 낳고 기르는 목적으로, 남녀가 연합하는, 최고에 이른 이상을 보여준다. 결국, 필사자의 이상적 결혼은 인간적으로 신성하다.
83:8.6 (930.2) 결혼은 언제나 현세의 이상적인 것에 대하여 사람이 가진 최고의 꿈이었고 아직도 그렇다. 비록 이 아름다운 꿈이 전부 이루어지는 일이 드물어도, 그 꿈은 영화로운 이상으로서 오래 가며,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더욱 노력하도록 진보하는 인류를 늘 유혹한다. 그러나 가족 생활에서 서로 관계를 가지는 가혹한 요구 속에 첨벙 뛰어들기 전에, 젊은 남녀는 결혼의 현실에 관하여 더러 배워야 마땅하다. 젊은 마음에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느 정도 결혼 전의 실망으로 누그러져야 한다.
83:8.7 (930.3) 그러나 젊은이가 결혼을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을 나무라서는 안 된다. 그러한 꿈은 가족 생활의 미래 목표를 눈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결혼, 그리고 그 뒤에 가족 생활의 실용적이고 평범한 요건을 깨닫는 데 사람을 무디게 만들지 않는 한, 자극을 주며 유익하다.
83:8.8 (930.4) 결혼의 이상은 요즈음에 크게 진보했다. 어떤 민족들 사이에서 여자는 자기 배우자와 실질적으로 동등한 권한을 누린다. 적어도 개념으로는, 가족은 자식을 기르는 조합, 그에 따라 성(性)의 정절이 뒤따르는 충성스러운 조합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 신판(新版) 결혼조차, 모든 면에서 인격과 개성에게 서로 독점권을 주기까지, 주제넘게 극단으로 치우칠 필요는 없다. 결혼은 단지 개인주의 이상이 아니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의 진화하는 사회적 협동 관계요, 당대의 도덕 관습 밑에서 존재하고 작용하며, 금기에 제약을 받고, 사회의 법과 규제에 따라서 집행된다.
83:8.9 (930.5) 여자의 자유가 갑자기 늘어나서 사회 조직에 너무 갑자기 밀어닥친 문제들 때문에 가정 제도가 지금 벅찬 시험을 겪고 있는데도, 20세기의 결혼은 지난 시대의 결혼과 견주어서 우뚝 서 있으며, 여자의 자유는 지난 세대의 도덕 관습이 느릿느릿 진화하는 가운데 여자에게 아주 오랫동안 주지 않았던 권리이다.
84:0.1 (931.1) 물질적 필요가 결혼의 기초를 세웠고, 성욕은 결혼을 아름답게 꾸몄으며, 종교는 결혼을 인가하고 찬양하였고, 국가는 결혼을 요구하고 규제하였다. 한편 후일에, 진화되는 사랑은 문명의 가장 유익하고 숭고한 제도인 가정를 낳고 창조하는 것으로서 결혼을 비로소 정당화하고 영화롭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가정을 세우는 것은 모든 교육하는 노력의 중심이요 본질이 되어야 한다.
84:0.2 (931.2) 짝짓기는 정도가 다른 자아의 만족과 결부되어, 순전히 자아를 존속시키는 행위이다. 결혼, 곧 가정을 세우는 것은 대체로 자아를 유지하는 문제이며, 사회가 진화함을 뜻한다. 사회 그 자체는 가족 단위가 집합됨으로 생긴 구조이다. 개인들은 행성의 요인으로서 아주 일시적이다―오로지 가족이 사회의 진화에서 계속하는 매체이다. 가족은 문화와 지식이 대량으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흐르는 경로이다.
84:0.3 (931.3) 기본적으로, 가정은 사회학적 제도이다. 결혼은 자아 유지에 협동하고 자아 영속에 협력함으로부터 생겨났으며, 자아 충족의 요소는 대체로 부수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가정은 인간의 존재에서 모두 세 가지 기본 활동을 포함하며, 한편 생명을 퍼뜨리는 것은 가정을 근본적 인간 제도로 만들고, 성(性)은 가정과 모든 다른 사회 활동을 분리한다.
84:1.1 (931.4) 결혼은 성관계에 기초를 두지 않았고, 성관계는 결혼에 따르는 것이었다. 결혼은 원시의 남자에게 필요하지 않았고, 그는 아내와 아이들과 가정을 책임지느라고 자신을 번거롭게 만들지 않고서 마음대로 성욕을 채웠다.
84:1.2 (931.5) 여자는 자식에게 육체와 감정으로 애착을 가졌기 때문에 남자와 협동하는 데 의존했고, 이것은 여자를 결혼의 보호하는 울타리 속으로 떠민다. 그러나 아무런 생물학적 직접 욕구가 남자를―결혼에 붙잡아 두기는커녕―결혼으로 이끌지 않았다. 남자로 하여금 결혼에 이끌리게 만든 것은 사랑이 아니라 배고픔이었고, 배가 고파서 처음에 야만스런 남자가 여자에게, 여자의 아이들과 나누어 쓰는 원시 오두막으로 이끌렸다.
84:1.3 (931.6) 결혼은 성관계에 따른 의무를 의식하여 깨달음으로 생기지도 않았다. 원시인은 성의 즐거움과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는 것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때는 처녀가 아이를 밸 수 있다는 것을 보편적으로 믿었다. 야만인은 일찍부터 아기들이 영(靈) 나라에서 만들어진다는 생각을 가졌다. 임신은 영, 곧 진화하는 귀신이 여자에게 들어간 결과라고 믿었다. 식품과 악한 눈도 또한 처녀나 결혼하지 않은 여자에게 임신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고, 한편 후일의 관념은 생명의 시작을 숨과 햇빛에 연결시켰다.
84:1.4 (932.1) 초기의 많은 민족은 귀신을 바다와 결부시켰다. 따라서 처녀들은 목욕하는 관습에 크게 제한을 받았다. 젊은 여자들은 성관계를 가지는 것보다 밀물이 있을 때 바다에서 몸 적시는 것을 훨씬 더 무서워했다. 기형(奇形)이거나 조산(早産)으로 생긴 아기들은 부주의한 목욕이나 악령의 행위를 통해서, 여자의 몸으로 들어간 동물의 새끼라고 여겼다. 물론 야만인은 그런 자식이 태어날 때 목 졸라 죽이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84:1.5 (932.2) 계몽의 첫 단계는 성관계가 임신하게 하는 귀신이 여자에게 들어가는 길을 연다는 관념과 함께 다가왔다. 그 뒤로 사람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식을 시작하는 살아 있는 유전 인자(因子)를 똑같이 기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20세기에도, 많은 부모가 아직도 인간 생명의 기원에 대하여 아이들을 얼마큼 무지한 가운데 두려고 애쓴다.
84:1.6 (932.3) 생식(生殖)의 기능에는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가 따른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어떤 단순한 종류의 가족이 보장되었다. 어머니 사랑은 본능이며, 결혼처럼 도덕 관습에서 생기지 않았다. 모든 포유 동물의 어머니 사랑은 지역 우주의 보조 지성 영들에게서 본래부터 받은 자질이며, 그 강도와 헌신은 반드시 그 종(種)의 무력한 유아기가 얼마나 긴가에 따라 정비례한다.
84:1.7 (932.4)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는 자연스럽고, 강하고, 본능이며, 따라서 원시 여인들로 하여금 많은 이상한 조건을 참고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견디도록 강제한 관계이다. 어쩔 수 없는 이 어머니 사랑은 남자와 벌이는 모든 싸움에서 언제나 여자를 아주 엄청나게 불리한 자리에 몰아넣은, 장애가 되는 감정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종(種)에서 모성 본능은 지배하지 않는다. 포부ㆍ이기심, 종교적 확신으로 꺾일 수도 있다.
84:1.8 (932.5)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는 결혼도 가정도 아니지만, 그 핵심으로부터 이 두 가지가 솟아나왔다. 이 일시적 협동 관계가 그 결과로 생긴 자손을 기를 만큼 오래 갔을 때 짝짓기의 진화에서 큰 발전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가정을 이루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84:1.9 (932.6) 이 초기 부부들의 적대 감정과 상관 없이, 그 결합이 허술했어도 살아남을 확률은 이 남녀의 협동 관계로 인하여 크게 개선되었다. 협동하는 남자와 여자는, 가족과 자손을 제쳐놓더라도, 두 남자나 두 여자보다 대부분의 경우에 엄청나게 우수하다. 남녀가 이렇게 짝짓는 것은 많은 사람을 살아남게 하였고, 인간 사회의 바로 그 시작이었다. 남녀가 따로 노동을 분화하는 것은 또한 편안에 도움이 되고 사람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었다.
84:2.1 (932.7) 여자가 정기적으로 피 흘리고 출산할 때 피를 더 잃는 것은 일찍부터 피가 아이를 창조한다는 (아니 혼이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는) 것을 암시했고, 인간 관계에서 혈연의 개념을 낳았다. 옛 시절에 모든 후손은 여자의 핏줄로 계산하였고, 이것이 상속에서 조금이라도 확실한, 유일한 부분이었다.
84:2.2 (932.8) 어머니와 아이의 혈연 관계, 본능적이고 생물학적 관계에서 생겨났으므로, 원시의 가족은 불가피하게 모계 가족이었다. 그리고 많은 부족이 이 배치를 오랫동안 지켰다. 모계 가족은 무리에서 집단으로 결혼하는 단계로부터, 일부다처와 일부일처의 부계 가족의 생활, 후일의 개선된 가정 생활로 넘어가는 유일하게 가능한 과도기였다. 모계 가족은 자연스럽고 생물학적이었다. 부계 가족은 사회ㆍ경제ㆍ정치적인 것이었다. 북 아메리카 홍인들 사이에서 모계 가족이 지속된 것은, 어째서 다른 면에서 진취적인 이로쿼이인이 결코 진짜 국가가 되지 못했는가 하는 주요한 이유 중에 하나이다.
84:2.3 (933.1) 모계 가족의 관습 밑에서 아내의 어머니는 집에서 거의 최고의 권한을 누렸다. 아내의 형제와 조카들조차 가족을 감독하는 데 남편보다 더 분주했다. 아버지의 이름은 흔히 제 자식들을 따라서 다시 지었다.
84:2.4 (933.2) 아주 초기의 종족들은 아버지에게 공을 거의 돌리지 않았고, 아이가 전적으로 어머니로부터 온다고 보았다. 그들은 접촉하는 결과로서, 아이들이 아버지를 닮는다고, 또는 어머니가 아이들이 아버지를 닮았으면 했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아이들이 “표시되었다”고 믿었다. 나중에는 모계 가족에서 부계(父系) 가족으로 넘어가는 때가 다가왔을 때, 아이를 낳은 공을 아버지가 온전히 가졌으며, 임신한 여자에 대한 많은 금기(禁忌)는 나중에 그 남편을 포함하도록 연장되었다. 아이를 기대하는 아버지는 해산할 때가 가까워오자 일을 그만두었고, 아이가 태어날 때 침대로 가서 아내와 함께 3일에서 8일까지 남아서 쉬었다. 아내는 그 다음 날 일어나서 고된 일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남편은 축하를 받으려고, 침대에 남아 있었다. 이것은 모두 아이에 대한 아버지의 권리를 확립하려고 고안된 옛 관습의 일부였다.
84:2.5 (933.3) 처음에는 남자가 아내의 종족에게로 가는 것이 관습이었으나, 후일에는 남자가 신부 값을 치르거나 이를 위해 일한 뒤에, 제 아내와 아이들을 자기 사람들에게로 데리고 갈 수 있었다. 모계 가족으로부터 부계 가족으로 넘어간 것은, 달리 의미가 없는데 어째서 어떤 종류의 사촌 결혼을 금지하고, 한편 똑같은 인척 관계에 있는 다른 것은 인정되었는가를 설명한다.
84:2.6 (933.4) 사냥꾼의 풍습이 지나가고, 남자가 짐승을 길러 주요한 식량 공급을 좌우하게 되었을 때, 모계 가족은 재빨리 끝에 이르렀다. 모계 가족은 다만 새로 생긴 부계 가족과 경쟁하는 데 성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어머니의 남자 친척들에게 투입된 권력은 남편이자 아버지에게 집중된 권력과 경쟁할 수 없었다. 여자는 아이를 배고, 계속된 권한과 늘어나는 집안의 권력을 행사하는 두 가지 과제에 힘이 부치었다. 새로 등장하는 아내 훔치기와 나중에 아내 사들이기는 모계 가족의 종말을 재촉하였다.
84:2.7 (933.5) 모계 가족으로부터 부계 가족으로 넘어가는 굉장한 변화는 인류가 일찍이 일으킨 가장 급진적이고, 완전히 거꾸로 돌아가는 조정 중에 하나였다. 이 변화로 말미암아 대번에 사회적 표현이 늘어나고 가족을 이루는 모험이 증가하였다.
84:3.1 (933.6) 모성 본능이 여자를 결혼으로 이끌었는지 모르지만, 여자를 결혼한 채로 남아 있도록 실질적으로 강제한 것은, 관습의 영향과 함께 남자의 우수한 힘이었다. 전원 생활은 새로운 체계의 관습, 부계 종류의 가족 생활을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었다. 짐승을 기르고 초기에 농사 짓는 관습 하에서, 가족 단결의 기초는 아버지의 권한, 도전받지 않고 멋대로 하는 권한이었다. 모든 사회는, 국가이든 가족이든, 족장 계급이 독재 권한을 갖는 단계를 거쳤다.
84:3.2 (934.1) 구약(舊約) 시대에 여성에게 인색하게 예의를 보인 것은 목자들의 도덕 관습을 참되게 반영한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하는 말이 증언하다시피, 히브리 족장들은 모두 목자였다.
84:3.3 (934.2) 그러나 지난 시대에 남자가 여자를 낮추어 보는 의견을 가진 것에 대하여 남자는 바로 그 여자보다 더 큰 잘못은 없다. 여자는 비상시에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시 시대에 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여자는 눈부신 영웅도 위기의 영웅도 아니었다. 생존 투쟁에서 아이를 밴 것은 뚜렷한 불구였고, 모성애는 부족을 방어할 때 여자에게 장애물이 되었다.
84:3.4 (934.3) 원시의 여자들은 또한 남자가 싸우기 좋아하고 사내다운 것을 찬미하고 갈채를 보냄으로 뜻하지 않게 남자에게 의존하는 성향을 길렀다. 무사(武士)를 이렇게 추켜세운 것은 남자의 자존심을 높였고, 한편 여자의 자존심을 그만큼 억누르고 여자로 하여금 더욱 의존하게 만들었다. 군복은 아직도 여성의 감정을 힘차게 뒤흔든다.
84:3.5 (934.4) 진보한 축에 속하는 민족들 사이에서, 여자는 남자처럼 크거나 힘세지 않다. 여자는 약자이니까, 따라서 더 요령 있는 사람이 되었다. 여자는 일찍부터 성적 매력을 파는 것을 배웠다. 여자는 남자보다 생각이 깊지는 않았지만, 더 민첩하고 보수적이었다. 남자는 전쟁터에서, 그리고 사냥할 때, 여자의 상관이었다. 그러나 집에서 여자는 가장 원시적인 남자들도 보통 술책으로 이겼다.
84:3.6 (934.5) 목자는 먹을거리를 자기의 짐승 떼에서 찾았지만, 이 전원 시대를 통하여 내내, 여자는 아직도 먹을 채소를 마련해야 했다. 원시의 남자는 흙을 피했다. 흙은 너무나 평화롭고 모험하는 재미가 너무 없었다. 또한 여자가 채소를 더 잘 가꿀 수 있다는 오래 된 미신이 있었는데, 여자가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뒤에 처진 많은 부족에서, 남자는 고기를, 여자는 채소를 요리하며, 오스트랄리아의 원시 부족들이 행진할 때 여자들은 결코 사냥거리를 잡지 않고, 한편 남자는 뿌리 하나 캐려고 몸을 굽히려 하지 않는다.
84:3.7 (934.6) 여자는 언제나 일해야 했다. 적어도 바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자는 진정한 생산자였다. 남자는 보통 그보다 더 쉬운 길을 택했고, 이 불평등은 인류의 역사 전체를 통하여 존재하였다. 여자는 언제나 짐꾼이었고, 가족 재산을 나르고 아이들을 돌보았으며, 이렇게 싸움이나 사냥을 하도록 남자를 자유롭게 버려두었다.
84:3.8 (934.7) 남자가 땅을 경작하는 데 찬성했을 때, 그때까지 여자의 일로 여겨 왔던 것을 하겠다고 찬성했을 때, 여자의 첫 해방이 왔다. 남자 포로가 이제 더 죽음을 당하지 않고 농사꾼 노예가 되었을 때가 크게 전진하는 발걸음이었다. 이것이 여자의 해방을 가져왔고, 그래서 여자는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훈련하는 데 시간을 더 바칠 수 있었다.
84:3.9 (934.8) 어린것들에게 우유를 마련한 것은 아기들이 더 일찍 젖을 떼게 만들었으며, 따라서 때때로 잠시 불임에서 해방된 어머니들이 아이를 더 낳도록 만들었다. 한편 송아지 젖과 염소 젖의 사용은 아기의 사망률을 크게 줄였다. 사회가 짐승을 기르던 단계 이전에는 어머니가 아기들이 네다섯 살이 될 때까지 젖을 먹이곤 하였다.
84:3.10 (934.9) 원시 전쟁의 감소는 남녀 구별에 근거를 둔 노동 분업 사이의 불균형을 크게 줄였다. 그러나 여자들은 아직도 진짜 일을 해야 되었고, 한편 남자들은 망보는 임무를 맡았다. 어떤 캠프나 마을도 낮이나 밤에 지키지 않은 채로 버려둘 수 없었지만, 이 과제조차 개를 길들여 가벼워졌다. 대체로 농업의 시작은 여자의 품위와 사회적 지위를 높였다. 적어도 이것은 바로 남자가 농부로 전향할 때까지 참말이었다. 그리고 남자가 땅을 가는 일에 손을 대자마자, 즉시 농사짓는 방법의 큰 개선이 뒤따랐고, 이것은 뒤잇는 세대들을 통해서 계속 연장되었다. 사냥과 전쟁이 있을 때 남자는 조직이 귀중함을 배웠고 이 기술을 산업에 들여왔으며, 나중에 여자가 하는 일의 많은 부분을 물려받았을 때 여자의 허술한 노동 방법을 크게 개량했다.
84:4.1 (935.1)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떤 시대에도 여자의 지위는, 하나의 사회 제도로서 결혼이 얼마나 진화하여 진보했는가를 재는 공평한 평가 기준이다. 한편 결혼 자체의 진보는 인간의 문명이 얼마나 진보했는가를 기록하는 상당히 정확한 척도이다.
84:4.2 (935.2) 여자의 지위는 언제나 사회의 역설(逆說)이었다. 여자는 언제나 남자를 민첩하게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여자는 언제나 남자의 더 강한 성욕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의 승진을 위하여 이용했다. 남자에게 비참한 노예로 붙들려 있을 때조차, 여자는 자기의 성적 매력을 교묘하게 팔아서, 흔히 남자를 지배하는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다.
84:4.3 (935.3) 옛날의 여자는 남자에게 친구나 연인, 애인이나 협동자가 아니라, 오히려 한 덩이의 재산, 하녀나 종이었고, 나중에는 경제적 협동자요, 노리개요, 아이 낳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적당하고 흐뭇한 성관계에는 반드시 여자가 선택하고 협동하는 요소가 들어갔고, 이것은 언제나 영리한 여자들에게, 여성으로서 그들의 사회 지위에 상관 없이,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지위에 상당히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들의 속박을 가볍게 하려는 노력으로, 여자들이 줄곧 기민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남자의 불신과 의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84:4.4 (935.4) 남녀는 서로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어 왔다. 남자는 여자를 이해하기 어려움을 발견했고, 의심하고 경멸하지 않더라도, 무지로 인한 불신과 두려운 환상이 야릇하게 섞인 눈으로 여자를 보았다. 부족과 종족의 많은 전통은 고난(苦難)을 이브나 판도라, 또는 어떤 다른 여성 대표의 탓으로 돌렸다. 이런 이야기들은 언제나 왜곡되어서 여자가 남자에게 악을 가져온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 모두가 한때 여자를 보편적으로 불신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독신 사제직을 지지하면서 늘어놓은 여러 이유 중에서 으뜸가는 것은 여자의 천함이었다. 마법사라고 생각된 대부분의 사람이 여자라는 사실은 여성의 오래 된 평판을 더 좋게 만들지 않았다.
84:4.5 (935.5) 남자는 오랫동안 여자가 특이하다, 아니 비정상이라고 여겼다. 남자는 여자가 혼이 없다고 믿기도 하였다. 따라서 여자들에게 이름을 주지 않았다. 옛날에는 여자와 처음 성관계 가지는 것을 크게 두려워했다. 따라서 사제가 처녀와 첫 성교를 가지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여자의 그림자조차 위험하다고 생각되었다.
84:4.6 (935.6) 임신은 한때 일반적으로 여자를 위험하고 더럽게 만드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여러 부족의 관습이, 아이가 태어난 뒤에 어머니가 긴 정화(淨化) 의식을 거쳐야 한다고 선포했다. 해산하는 자리에 남편이 참여한 집단을 제외하고, 사람들은 출산을 앞둔 어머니를 피하고 혼자 버려두었다. 옛날 사람들은 집안에서 아이를 낳게 하는 것조차 피했다. 마침내, 늙은 여자들이 진통 중에 어머니를 보살피는 것이 허락되었고, 이 관습이 산파라는 직업을 낳았다. 분만을 쉽게 하려는 노력으로, 출산 중에 몇십 가지 어리석은 것을 말하고 행하였다. 귀신의 방해를 막으려고 갓난아이에게 거룩한 물을 뿌리는 것이 관습이었다.
84:4.7 (935.7) 혼합되지 않은 부족들 사이에서 출산은 비교적 쉬웠고, 겨우 두세 시간 걸렸다. 혼합된 민족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쉬운 일이 드물다. 여자가 출산할 때 죽으면, 특히 쌍둥이를 낳을 때, 그 여자는 영과 간통한 죄가 있다고 믿었다. 나중에, 상급 부족들은 출산할 때 죽는 것을 하늘의 뜻으로 보았다. 그러한 어머니들은 고귀한 이유로 죽었다고 간주되었다.
84:4.8 (936.1) 여자의 옷과 몸을 드러내는 것에 관한, 이른바 여자의 정숙(貞淑)은 월경이 있을 때 눈에 뜨일까 하는 지독한 두려움에서 생겨났다. 그렇게 들키는 것은 중대한 죄였고, 금기를 어기는 것이었다. 옛날의 관습 밑에서, 사춘기로부터 출산기의 끝까지, 모든 여자는 한 달에 한 주를 꼭 채워, 완전히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었다. 여자가 만지거나 앉거나 베고 누울 만한 모든 것은 “더러워졌다.” 달마다 월경이 끝난 뒤에 악령을 몸에서 몰아내려는 노력으로 소녀를 무자비하게 때리는 것이 오랫동안 관습이었다. 그러나 한 여자가 출산기를 지났을 때, 그 여자는 보통 더 배려해 주는 대우를 받았고, 더 많은 권리와 특권을 받았다. 이 모든 것을 보건대, 여자들이 업신여김을 받은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리스인조차 월경하는 여자를 몸을 더럽히는 3대 원인의 하나로 보았고, 나머지 둘은 돼지고기와 마늘이었다.
84:4.9 (936.2) 아무리 어리석었어도 이 옛 개념들은 좋은 일을 했는데, 그런 개념들이 과로한 여자들에게, 적어도 젊었을 때, 반가운 휴식과 유익한 명상 시간을 가지도록 한 달에 한 주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은 나머지 시간에 남자 동료들을 다룰 지혜를 익힐 수 있었다. 여자를 이렇게 격리한 것은 또한 남자들을 지나친 성욕의 탐닉으로부터 보호했고, 이렇게 함으로 인구를 제한하고 자제를 향상하는 데 간접으로 이바지했다.
84:4.10 (936.3) 남자가 마음대로 제 아내를 죽일 권리를 빼앗겼을 때 큰 진보가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여자가 결혼 선물을 소유할 수 있을 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후일에는 여자가 재산을 소유하고 통제하고, 처분까지 하는 권리를 얻었다. 그러나 여자는 교회에서나 국가에서 공직(公職)을 가질 권리를 오랫동안 빼앗겼다. 여자는 그리스도 이후 20세기까지, 그리고 이 세기에, 언제나 얼마큼 재산으로 취급되었다. 여자는 남자의 지배 밑에서 은둔하던 상태로부터 세계적으로 자유를 널리 얻지 못했다. 진보된 민족들 사이에서도, 남자가 여자를 보호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남자가 우수함을 말없이 주장하는 것이었다.
84:4.11 (936.4) 그러나 원시의 여자들은 최근에 자유롭게 된 자매들이 곧잘 하듯이,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상당히 행복하고 만족하였다. 더 낫거나 다른 형태의 존재를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84:5.1 (936.5) 자아를 존속시키는 일에 여자는 남자와 동등하지만, 자아를 유지하는 협동 관계에서 여자는 뚜렷이 불리하게 수고한다. 강제된 이 모성(母性)의 장애는 오로지, 진보하는 문명의 깨우친 관습으로, 그리고 남자가 늘어나는 공평 감각을 얻음으로써 겨우 보상할 수 있다.
84:5.2 (936.6) 사회가 진화함에 따라서 성의 기준은 여자들 사이에서 더 높아졌는데, 이는 성 관습을 위반한 결과로부터 그들이 더 고통을 받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성 기준은 문명이 요구하는 그 순전한 공평 감각의 결과로서 겨우 뒤늦게 개선되고 있다. 자연은 도무지 공평을 모른다―여자 혼자서 분만의 아픔을 견디게 만든다.
84:5.3 (936.7) 현대의 남녀 평등 관념은 아름답고, 확장하는 문명에 어울리지만, 그 관념은 자연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힘이 정의일 때, 남자는 여자에게 거만하게 군다. 정의ㆍ평화ㆍ공평이 더 많이 지배할 때, 여자는 차츰차츰 노예 상태와 낮은 신분에서 솟아나온다. 여자의 사회적 지위는 대체로 어느 나라나 어느 시대에도, 군사주의의 정도에 반비례하여 변하였다.
84:5.4 (937.1) 그러나 남자는 여자의 권리를 의식하여, 또는 일부러 빼앗지는 않았고, 그리고 나서 차츰차츰, 투덜거리면서 그 권리를 여자에게 돌려주었다. 이 모두가 사회의 진화에서 의식하지 않고 계획하지 않은 사건이었다. 늘어난 권리를 즐길 때가 정말로 왔을 때, 여자는 권리를 가졌고, 남자의 의식하는 태도와 아주 상관 없이 모두 가졌다. 사회적 조정은 문명의 지속하는 진화의 일부이며, 이를 마련하려고 도덕 관습은 느리지만 확실히 변한다. 진보하는 도덕 관습은 천천히 갈수록 더 여자에게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여자에게 계속 모질었던 부족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84:5.5 (937.2) 아담 족속과 놋 족속은 여자를 더 많이 인정했으며, 이주하는 안드 족속에게 영향을 받은 무리들은 여자의 사회적 신분에 관하여 에덴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었다.
84:5.6 (937.3) 초기의 중국인과 그리스인은 둘러싼 대부분의 민족들보다 여자를 더 낫게 대우했다. 그러나 히브리인은 지나치게 여자를 불신했다. 서양에서 여자는 기독교에 달라붙게 된 바울의 교리 밑에서, 가파른 오르막길에 부딪쳤다. 그래도 기독교는 남자에게 더 엄격한 성의 책임을 지워줌으로 도덕 관습을 진보시켰다. 여자의 신분은 마호메트교에서 여자에게 따르는 특이한 지위의 하락으로 거의 희망이 없으며, 다른 몇 가지 동양 종교의 가르침 밑에서 여자는 더군다나 운이 나쁘다.
84:5.7 (937.4)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 여자를 정말로 해방했다. 집의 울타리로부터 여자를 대체로 자유롭게 풀어 놓은 것은 현대의 공장(工場)이었다. 새로운 유지 장치에서 남자의 신체적 능력은 이제 더 중대한 필수 요소가 되지 않았다. 과학은 남자의 힘이 여자의 힘보다 이제 더 아주 우수하지 않도록 생활 조건을 변화시켰다.
84:5.8 (937.5) 이러한 변화는 집안의 노예 신세로부터 여자를 해방하는 경향이 있었고, 여자의 지위를 크게 수정해서, 여자는 실질적으로 남자와 같이 개인의 자유와 성교의 결정권을 이제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한때 여자의 가치는 여자가 먹을 것을 생산하는 능력에 있었으나, 발명과 부(富)는 여자로 하여금 활동해야 할 새로운 세계―품위와 매력의 분야―를 창조할 수 있게 하였다. 이처럼 산업은 여자의 사회ㆍ경제적 해방을 위하여, 의식하지도 않고 뜻하지도 않은 싸움을 싸워서 이겼다. 또 다시 진화는 계시조차 이룩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는 데 성공했다.
84:5.9 (937.6) 사회에서 여자의 지위를 규제하는 불공평한 도덕 관습에서 벗어난 깨우친 민족들의 극단적 반응은 정말로 추와 같았다. 산업화된 민족들 사이에서 여자는 거의 모든 권한을 받았고, 군대 복무와 같은 많은 의무로부터 면제된다. 존재를 위한 싸움이 완화될 때마다 여자의 해방에 도움이 되었고, 일부일처제를 향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여자는 직접 이득을 보았다. 사회가 진취적으로 진화하면서 관습이 조정될 때마다, 약한 자는 언제나 훨씬 더 이득을 본다.
84:5.10 (937.7) 부부 결혼의 이상(理想)에 비추어 볼 때, 여자는 마침내 인정(認定)ㆍ위엄ㆍ독립ㆍ평등ㆍ교육을 얻어냈다. 그러나 여자가 새롭고 전례 없는 이 모든 성취를 누릴 자격이 있는지 입증될 것인가? 사회의 해방이 가져온 이 위대한 성취에 대하여 현대 여성은 게으름ㆍ무관심ㆍ불임ㆍ간통으로 반응할 것인가? 오늘날, 20세기에 여자는 오랫동안 세상에 존재하면서 중대한 시험을 거치고 있다!
84:5.11 (938.1) 종족 번식 면에서 여자는 남자와 동등한 짝이며, 따라서 종족의 진화가 전개되는 데 똑같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진화는 갈수록 더 여성의 권리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여자의 권리는 결코 남자의 권리가 아니다. 남자가 여자의 권리를 가지고 잘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여자도 남자의 권리를 가지고 번성할 수 없다.
84:5.12 (938.2) 남녀는 각자 자신의 뚜렷한 존재 분야가 있고, 그 분야 안에서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여자가 글자 그대로 남자의 권리를 모두 가지고 싶어한다면, 머지 않아, 동정심도 감정도 없는 경쟁이, 많은 여성이 지금 즐기고, 남자들로부터 아주 최근에 얻어낸, 그 기사도(騎士道) 정신과 특별한 배려를 분명히 없애버릴 것이다.
84:5.13 (938.3) 문명은 남녀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결코 없애버릴 수 없다. 대대로 도덕 관습은 변하지만, 본능은 결코 그렇지 않다. 타고난 모성애는 결코 해방된 여자로 하여금 산업에서 남자와 심각하게 경쟁하도록 버려두지 않는다. 언제까지나 남녀는 각자 자신의 분야 안에서 힘을 떨칠 터이니, 이것은 생물학적 분화와 정신적 차이에 따라서 결정되는 분야이다.
84:5.14 (938.4) 남녀는 각자 언제나 자신의 특별한 분야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그 분야들이 때때로 겹칠 것이다. 오직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는 같은 조건으로 경쟁한다.
84:6.1 (938.5) 번식의 욕구는 자아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어김없이 남자와 여자를 함께 모이게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들이 서로 협동하는 속에―가정을 세우는 일에―함께 남아 있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84:6.2 (938.6) 성공하는 인간 제도는 모두, 실질적으로 조화를 이룬 개인 이익의 대립을 용납하며, 가정을 만드는 것도 예외가 아니다. 결혼은 가정을 세우는 기초요, 상반되는 협동의 가장 높은 표현이며, 이것은 아주 흔히 천성과 사회의 접촉의 특징이 된다. 갈등은 피할 수 없다. 짝짓기는 선천적이며, 자연히 일어난다. 그러나 결혼은 생물학상의 일이 아니라, 사회적인 일이다. 정열(情熱)은 남자와 여자가 한데 모일 것을 보장하지만, 그보다 약한 부모 본능과 사회 관습이 그들을 함께 붙들어 놓는다.
84:6.3 (938.7) 남성과 여성은 실지로 보건대, 가깝고 밀접하게 결합된 속에서 사는, 같은 종자의 두 가지 다른 변종이다. 그들의 관점과 전체 인생의 반응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서로를 충분히 진정하게 이해할 능력이 도무지 없다. 남녀 사이에 완전한 이해는 도달할 수 없다.
84:6.4 (938.8) 여자는 남자보다 직감이 더 좋은 듯하지만, 여자는 또한 얼마큼 논리가 덜한 듯하다. 그러나 여자는 언제나 도덕의 기치를 쥔 사람이요, 인류의 영적 지도자였다. 요람을 흔드는 손은 아직도 운명과 사귄다.
84:6.5 (938.9) 남자와 여자 사이에 성품ㆍ반응ㆍ관점ㆍ생각의 차이는 걱정을 일으키기는커녕, 개별적으로, 또 집단으로, 인류에게 상당히 유익하다고 간주되어야 한다. 많은 계급의 우주 생물은 두 단계로 성격을 표현하도록 지어졌다. 사람, 물질 아들, 중간 한계자[1] [32] 중에서, 이 차이는 암컷과 수컷으로 묘사된다. 세라핌, 케루빔, 상물질 동반자 사이에서는, 양성, 즉 적극적인 것, 그리고 음성, 즉 수줍은 것으로 언급되었다.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체계에서 어떤 삼자일체 결합처럼, 그러한 2중 관계는 융통성을 크게 높이고 선천적 한계를 이겨낸다.
84:6.6 (939.1) 남자와 여자는 필사 생애 뿐 아니라 상물질 생애와 영적 생애에 서로 필요하다. 여성과 남성 사이에 관점의 차이는 첫 생명을 지나서도, 그리고 지역 우주와 초우주를 올라가면서 내내 지속된다. 그리고 하보나에서도, 한때 남자와 여자였던 순례자들은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면서 여전히 서로를 도울 것이다. 최후자 군단에서도, 결코 인간이 남성과 여성이라고 부르는 인격의 성향을 지워 버릴 만큼 사람의 모습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인류의 이 두 가지 기본 변종은 줄곧 서로를 골똘히 생각에 빠지게 하고, 자극하고, 북돋아 주고 돕는다. 그들은 난처한 우주 문제들을 푸는 데, 그리고 다채로운 우주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언제나 서로 협동에 의존할 것이다.
84:6.7 (939.2) 남녀는 결코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기 바랄 수 없어도, 그들은 효과적으로 보완한다. 협동은 얼마큼 개인적으로 대립되지만, 사회를 유지하고 재생하는 능력이 있다. 결혼은 남녀의 차이를 완화하도록 고안된 제도이며, 한편 문명을 계속하게 하고 종족의 번식을 보장한다.
84:6.8 (939.3) 결혼은 인간의 모든 제도의 근원이니, 결혼이 가정을 일으키고 가정을 유지하는 길로 바로 이끌기 때문이며, 이것이 사회 구조의 기초이다. 가족은 자아 유지 작용과 중대하게 연결되어 있다. 가족은 문명의 도덕 관습 밑에서 종족이 영속할 유일한 희망이며, 동시에 상당히 만족스러운 어떤 형태의 자아 충족을 가장 효과적으로 마련해 준다. 가족은 사람이 이룬 가운데 가장 큰, 순전히 인간다운 성취이며, 남녀의 생물학적 관계의 진화를 남편과 아내의 사회적 관계와 실제로 통합한다.
84:7.1 (939.4) 남녀가 짝짓는 것은 본능이요, 아이들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따라서 가족은 자동으로 존재하게 된다. 종족이나 국가의 가족들이 어떠하면, 그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가족들이 좋으면, 사회도 마찬가지로 좋다. 유대 민족과 중국 민족의 문화가 크게 안정된 것은 그들의 가족 집단의 힘에 달려 있다.
84:7.2 (939.5) 아이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여자의 본능은, 결혼과 원시의 가족 생활을 조장하는 데 여자를 이해 관계가 있는 당사자로 만들도록 작용한다. 남자는 후일의 관습과 사회 풍습의 압력 때문에 가정을 이루도록 강제되었을 뿐이다. 남자는 결혼과 가정을 이루는 일에 더디게 흥미를 가졌는데, 이는 성행위가 남자에게 아무런 생물학적 결과를 지워주지 않기 때문이다.
84:7.3 (939.6) 성적 연합은 자연스럽지만, 결혼은 사회적인 것이며 반드시 도덕 관습에 규제를 받아 왔다. (종교ㆍ도덕ㆍ윤리적) 관습은 재산ㆍ자존심ㆍ기사도(騎士道)와 함께, 결혼 제도와 가족 제도를 안정시킨다. 관습이 이리저리 변할 때는 언제나, 가정 및 결혼 제도의 안정에 변동이 생긴다. 결혼은 이제 재산 단계를 벗어나서 개인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예전에는 여자가 남자의 소유물이었으니까 남자가 여자를 보호했고, 여자는 같은 이유로 남자에게 복종했다. 그 장점에 상관 없이, 이 체계는 안정을 가져왔다. 지금은 여자를 더 이상 재산으로 여기지 않으며, 결혼 및 가정 제도를 안정시키도록 고안된 새로운 도덕 관습이 솟아나고 있다:
84:7.4 (939.7) 1. 종교의 새 기능―부모의 체험이 필수라는 가르침, 우주의 시민을 낳는다는 관념, 자식을 낳는―아들들을 아버지께 드리는―특권을 더욱 이해하는 것.
84:7.5 (940.1) 2. 과학의 새 기능―출산은 남자의 통제 밑에서, 점점 더 자원하는 것이 된다. 옛 시절에는 아이를 바라는 욕망이 도무지 없는 가운데, 이해의 부족이 아이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장했다.
84:7.6 (940.2) 3. 쾌락 유혹의 새 기능―이것은 종족의 생존에 새로운 요인을 시작한다. 옛날 사람은 바라지 않는 아이들을 죽도록 버려두었다. 현대인은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는다.
84:7.7 (940.3) 4. 부모 본능의 향상. 각 세대는 이제, 부모 본능이 충분히 강하지 않아서 아이 낳는 것을 보장할 수 없는 사람들을 종족 번식의 흐름에서 없애버리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은 다음 세대에 부모가 될 사람들이다.
84:7.8 (940.4) 그러나 하나의 제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협동 관계로서, 가정은 더 자세히 말하면 달라마시아 시절, 약 5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안돈과 그 직계 후손의 일부일처 관습이 사라진 지 오래 되었다. 그러나 놋 족속과 나중에 아담 족속의 시절 이전에, 가족 생활은 그다지 자랑할 것이 없었다. 아담과 이브는 온 인류에게 오래 가는 영향을 미쳤다. 세계 역사에서 처음으로, 남자와 여자들이 동산에서 나란히 일하는 것이 보였다. 온 가족이 채소 가꾸는 사람이 되는 에덴의 이상은 유란시아에서 새로운 관념이었다.
84:7.9 (940.5) 초기의 가족은, 노예들과 함께, 관련된 일하는 집단을 포함하였고, 모두가 한 거처에서 살았다. 결혼과 가족 생활은 반드시 동일하지 않았지만, 필요 때문에 가깝게 관련되었다. 여자는 언제나 개별 가족을 바랐고, 결국 여자는 뜻대로 했다.
84:7.10 (940.6)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거의 보편적이며, 뚜렷이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 옛날 사람들은 아이의 복지를 위하여 언제나 어머니의 이익을 희생했다. 에스키모인 어머니는 아직까지도 목욕시키는 셈으로 제 아기를 핥아 준다. 그러나 원시의 어머니들은, 제 자식들이 아주 어릴 때만 젖을 먹이고 보살폈다. 그들은 동물처럼, 아이들이 자라자마자 내버렸다. 오래 가고 계속되는 인간 관계는 오직 생물학적 사랑에만 기초를 둔 적이 없다. 동물은 제 새끼를 사랑한다. 사람―문명화된 사람―은 손자ㆍ손녀를 사랑한다. 문명이 높을수록, 아이들이 승진하고 성공할 때 부모의 기쁨이 더욱 커진다. 이처럼 이름 자존심에 대하여 새롭고 더 높은 깨달음이 생기게 되었다.
84:7.11 (940.7) 옛 종족들 사이에서 대가족이 반드시 애정이 깊지는 않았다. 다음 이유 때문에 아이들이 많은 것이 바람직했다:
84:7.12 (940.8) 1. 아이들은 일꾼으로서 값이 있었다.
84:7.13 (940.9) 2. 아이들은 노령 보험이었다.
84:7.14 (940.10) 3. 딸을 팔 수 있었다.
84:7.15 (940.11) 4. 가족의 자부심은 이름 남길 것을 요구한다.
84:7.16 (940.12) 5. 아들들은 보호와 방어를 마련해 주었다.
84:7.19 (940.15) 조상 숭배자는 아들 못 가지는 것을 온 세월과 영원을 통해서 최악의 재난으로 여긴다. 그들은 죽은 뒤의 축제를 거행하고, 영 나라를 통하여 귀신이 나아가는 데 필요한 희생물을 바칠 아들들을 무엇보다도 더 바란다.
84:7.20 (941.1) 옛날의 야만인 사이에서, 자식에게 벌주는 것은 아주 일찍 시작되었다. 동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복종이 실패나 죽음까지도 뜻한다는 것을 아이는 일찍부터 깨달았다. 문명이 아이가 어리석은 행동의 자연스런 결과를 받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은 현대에 사람의 불복종에 아주 크게 기여한다.
84:7.21 (941.2) 에스키모인 아이들은 징계와 벌이 거의 없이 잘 자라는데, 이것은 그들이 나면서부터 온순한 작은 동물이기 때문이다. 홍인과 황인의 아이들은 거의 똑같이 다루기 쉽다. 그러나 안드 족속 유전을 가진 종족들 중에서는 아이들이 그다지 차분하지 않다. 상상력이 더 많고 모험을 더 좋아하는 이 어린이들은 훈련과 징계가 더 필요하다. 아이를 훈련하는 현대의 문제는 다음 이유로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
84:7.22 (941.3) 1. 상당한 정도로 종족이 혼합된 것.
84:7.23 (941.4) 2. 인위적이고 겉핥기인 교육.
84:7.24 (941.5) 3. 부모를 모방함으로 아이가 훈련을 얻을 수 없는 것―부모가 너무나 자주 가족의 그림에서 빠져 있다.
84:7.25 (941.6) 가족을 징계하는 옛 관념은 생물학적 관념이었고, 부모가 아이의 존재를 만든 사람이었다는 깨달음에서 생겨났다. 가족 생활에 관한 진보하는 이상은 아이를 세상으로 데려오는 것은 어떤 부모의 권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에서 최고의 책임이 따른다는 개념으로 이끌고 있다.
84:7.26 (941.7) 문명은 부모가 모든 의무를 맡고, 아이는 모든 권리를 가졌다고 간주한다. 아이가 부모를 존경하는 마음은, 자식을 낳는 것이 무슨 의무를 암시하는가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투쟁에서 이기도록 아이를 돕는 데서 인자하게 보여주는 보살핌ㆍ훈련ㆍ애정의 결과로서 자연히 생겨난다. 참된 부모는 계속하여 서비스와 봉사를 베푸는 데 몰두하며, 지혜로운 아이는 이를 깨닫고 고맙게 여기게 된다.
84:7.27 (941.8) 현재의 산업 및 도시 시대에, 결혼 제도는 새로운 경제 노선을 따라서 진화하고 있다. 가족 생활은 갈수록 더 비싸게 되었고, 한편 예전에 재산이었던 아이들은 경제적 부채가 되었다. 그러나 문명 자체의 안전은 아직도 한 세대가 다음 세대와 미래 세대의 복지에 기꺼이 투자하려는 짙어지는 성향에 달려 있다. 그리고 부모의 책임을 국가나 교회에 떠맡기려고 어떤 시도를 하더라도 문명의 복지와 진보에 자살(自殺) 행위임이 입증될 것이다.
84:7.28 (941.9) 아이들과 그 결과로 생기는 가족 생활과 더불어, 결혼은 인간의 성품에서 가장 높은 잠재성을 자극하며, 동시에 필사자의 인격에서 활기를 띤 이 특성을 표현하는 이상적 길을 마련해 준다. 가족은 인간종이 생물학적으로 존속하게 한다. 집은 자연스러운 사회 무대이며, 자라는 아이들은 거기서 핏줄로 이어진 형제 정신의 윤리를 깨달을 수 있다. 가족은 근본적 친교 단위이며, 그 안에서 부모와 아이들은 참을성ㆍ이타주의ㆍ너그러움ㆍ인내심의 교훈을 배우며, 이것들은 모든 사람 사이에서 형제 정신을 실현하는 데 아주 긴요하다.
84:7.29 (941.10) 문명화된 종족들이 더욱 널리 안드 족속의 가족 회의 관습으로 돌아간다면, 인간 사회는 크게 개선될 것이다. 안드 족속은 족장이나 독재 형태의 가족 정부를 유지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주 형제답고 친교 성향이 있고, 가족의 성질을 가진 모든 제안과 규칙을 자유로이 솔직하게 토론하였다. 그들은 가족을 다스리는 모든 일에 이상적으로 형제 정신이 있었다. 이상적 가족 안에서 효도와 부모 사랑은 모두 형제처럼 헌신함으로 커진다.
84:7.30 (942.1) 가족 생활은 참된 도덕의 선구자요, 의무에 충성하는 의식(意識)의 근거이다. 가족 생활에서 강제된 관계는 다채로운 다른 인물에 대하여 필요한 적응을 강제함으로 인격을 안정시키고 인격의 성장을 자극한다. 그러나 오히려, 참된 가족―좋은 가족―은 자식을 낳는 부모에게 창조자가 그의 자녀들에게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 드러내며, 한편 동시에 그러한 참된 부모는 우주의 모든 아이들의 부모, 파라다이스 부모의 사랑을 올라가면서 드러내는, 길게 연속되는 과정의 첫걸음을 제 자식들에게 보여준다.
84:8.1 (942.2) 가족 생활의 큰 위협은 자아 욕구의 충족, 즉 위험하게 높아지는 현대 쾌락광의 물결이다. 결혼으로 이끈 첫째 동기는 예전에 경제 요인이었고, 성적 매력은 2차적인 것이었다. 자아 유지에 기초를 둔 결혼은 자아의 존속으로 이끌었고, 그와 동시에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자아 욕구의 충족을 마련해 주었다. 결혼은 살기 위한 세 가지 큰 동기를 모두 포함하는, 인간 사회의 유일한 제도이다.
84:8.2 (942.3) 최초에 재산은 자아를 유지하는 기본 제도였고, 한편 결혼은 자아를 존속시키는 독특한 제도로서 작용했다. 배를 채우는 것과 놀이와 유머는, 이따금 얻는 성욕의 만족과 더불어 자아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이기는 했어도, 진화하는 도덕 관습이 자아 욕구를 충족시키는 어떤 뚜렷한 제도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 여전히 사실이다. 즐거움을 얻는 전문화된 기술을 이렇게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 제도는 이 쾌락 추구에 완전히 젖어 있다. 재산의 축적은 온갖 종류의 자아 욕구를 더욱 충족시키는 도구가 되고 있으며, 한편 결혼은 흔히 오직 쾌락의 수단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 지나친 탐닉, 널리 퍼진 이 쾌락광은, 일찍이 사회의 진화적 가족 생활 제도인 가정을 노리는 가장 큰 위협이다.
84:8.3 (942.4) 보라 인종은 새롭고 겨우 불완전하게 실현된 특징―유머 감각과 함께 놀이 본능―을 인류의 체험 속에 들여왔다. 이 본능은 어느 만큼 산긱과 안돈 족속 안에 있었지만, 아담의 핏줄은 이 원시 성향을 가능한 쾌락으로 높였고, 이것은 새롭고 영화롭게 된 형태로 자아의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다. 배고픔을 달래는 것을 제쳐놓고, 기본 형태의 자아 욕구의 충족은 성욕을 채우는 것이며, 이 형태의 육체적 쾌락은 산긱과 안드 족속을 혼합함으로 엄청나게 높아졌다.
84:8.4 (942.5) 안드 이후 종족들의 차분하지 못한 성질, 호기심ㆍ모험, 그리고 쾌락에 빠지는 특징이 합친 곳에 진짜 위험이 있다. 혼의 갈증은 육체의 쾌락으로 채울 수 없다. 가정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쾌락을 지혜롭지 못하게 찾는다고 늘어날 수 없다. 너희는 예술ㆍ색깔ㆍ소리ㆍ리듬ㆍ음악, 그리고 사람 치장의 자원을 다 써 버리더라도, 그렇게 함으로 너희는 혼을 높이거나 정신에 자양분 주기를 바랄 수 없다. 허영심과 유행은 가정을 만들고 아이를 훈련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없다. 자존심과 경쟁심은 뒤잇는 세대들의 살아남는 성질을 높이는 데 무력하다.
84:8.5 (942.6) 진보하는 하늘 존재들은 모두 휴식을 즐기고 회상(回想) 지도자들의 보살핌을 누린다. 건강에 좋은 기분 전환을 얻고 사람을 격려하는 놀이에 참여하는 모든 노력은 건전하다. 기분을 새롭게 하는 잠ㆍ휴식ㆍ오락, 그리고 단조로운 지루함을 막는 모든 유흥은 가치가 있다. 경쟁하는 시합, 이야기를 엮는 것, 맛있는 것을 맛보는 것조차 자아 욕구 충족의 형태로서 쓸모가 있을까 한다. (먹을 것을 맛내려고 너희가 소금을 쓸 때, 거의 1백만 년 동안 사람은 먹을 것을 재 속에 집어넣어야 소금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멈추어 생각해 보아라.)
84:8.6 (943.1) 사람은 즐길지어다. 인종은 수많은 방법으로 쾌락을 발견할지어다. 진화하는 인류는 온갖 종류의 정당한 자아 욕구의 충족, 오랫동안 위를 향한 생물학적 투쟁으로 얻는 열매를 탐구할지어다. 사람은 오늘날의 즐거움과 쾌락의 얼마큼은 수고하여 잘 벌었다. 그러나 너희는 운명의 목표를 잘 보아라! 쾌락이 자아 유지의 도구가 된 재산을 파괴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자살이다. 그리고 자아 욕구의 충족이 결혼의 파탄, 가정 생활의 퇴폐, 가정의 파괴를 가져온다면, 치명적인 값을 치른 것이다―가정은 사람이 진화로 얻은 최고의 성취이며, 문명이 살아남을 유일한 희망이다.
85:0.1 (944.1) 도덕적 관계를 제외하고 모든 영적 영향을 제쳐놓으면, 원시 종교는 생물학적 기원을 가졌고, 자연스럽게 진화로 발전한 것이다. 고등 동물은 무서움을 가졌지만 아무런 환상이 없고, 따라서 종교가 없다. 사람은 두려운 마음에, 환상의 수단으로 원시 종교를 만들어낸다.
85:0.2 (944.2) 인간종이 진화하면서 원시적 표현으로 숭배가 나타나는 것은 사람의 머리가 지금 인생과 다음 세상의 인생에 관하여 더 복잡한 개념을 형성할 수 있기 훨씬 전이며, 이것은 종교라고 부를 만하다. 초기의 종교는 완전히 지적 성질을 가졌고 관계되는 상황에 전적으로 달려 있었다. 예배의 대상은 무척 암시적이었다. 그 대상은 손 가까이 있거나, 생각이 단순한 원시 유란시아인의 보통 체험 속에서 크게 돋보이는 자연의 사물로 구성되었다.
85:0.3 (944.3) 일단 자연 숭배를 지나서 진화한 뒤에 종교는 영적 기원의 뿌리를 얻었지만, 그런데도 반드시 사회의 환경에 제약을 받았다. 자연 숭배가 개발됨에 따라서, 사람의 개념은 초인간 세계에서 분업(分業)을 상상했다. 호수ㆍ나무ㆍ폭포ㆍ비, 그리고 수백 가지 땅에 있는 다른 보통 현상을 대표하는 자연의 영들이 있었다.
85:0.4 (944.4) 필사 인간은 언제인가, 자신을 포함해서, 땅 표면에 있는 모든 것을 숭배했다. 사람은 또한 하늘에 있고 땅 밑에 있는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숭배하였다. 원시인은 온갖 권능의 표시를 두려워했다. 원시인은 이해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을 모두 숭배했다. 폭풍우ㆍ홍수ㆍ지진ㆍ산사태ㆍ화산ㆍ불ㆍ열ㆍ추위와 같은 막강한 자연력을 지켜보는 것은 사람의 확대되는 지성에 크게 감명을 주었다. 인생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일을 아직도 “하나님의 행위”요[1] [33], “섭리의 신비한 처분”이라는 용어로 언급한다.
85:1.1 (944.5) 진화하는 사람이 숭배하게 된 첫 대상은 돌이었다. 오늘날 인도 남부의 카테리 종족은, 인도 북부의 수많은 부족들처럼 아직도 돌을 숭배한다. 야곱이 돌 위에서 잔 것은 돌을 공경했기 때문이며, 그 돌에 기름을 붓기까지 하였다. 라헬은 제 천막에 신성한 돌을 몇 개 숨겼다.
85:1.2 (944.6) 경작하는 들이나 목초지의 표면에서 돌이 아주 갑자기 나타나는 그 특징 때문에, 돌은 원시인에게 보통이 아니라는 깊은 인상을 주었다. 사람들은 침식 작용이나 흙이 뒤집힘으로 생기는 결과를 계산하지 못했다. 돌은 흔히 동물을 닮았기 때문에 또한 원시 민족들에게 크게 감명을 주었다. 문명화된 사람들은 산 속에 있는, 동물, 아니 사람의 얼굴을 아주 많이 닮은 수많은 돌의 형상에 눈을 빼앗긴다. 그러나 가장 깊은 영향을 준 것은 운석(雲石)이었고, 원시 인간은 이 운석들이 화려하게 타오르면서 대기를 뚫고 돌진하는 것을 보았다. 유성(流星)은 원시인에게 두려운 것으로 보였고, 그는 그러한 불타는 줄기가 영이 땅으로 향하여 가는 길을 표시한다고 쉽사리 믿었다. 특히 사람들이 나중에 그 운석들을 발견했을 때, 그러한 현상을 숭배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다른 돌을 더욱 크게 존경하게 만들었다. 벵갈에서는 많은 사람이 서기 1880년에 땅에 떨어진 운석을 숭배한다.
85:1.3 (945.1) 고대의 모든 씨족과 부족은 신성히 여기는 돌이 있었고, 대부분의 현대 민족은 어떤 종류의 돌―보석―을 얼마큼 숭상함을 나타낸다. 다섯 돌의 집단이 인도에서 존중되었다. 그리스에서 그것은 30개의 집합이었다. 홍인 사이에서 숭상받는 것은 보통, 돌의 동그라미였다. 로마인은 주피터를 부를 때 반드시 공중에 돌을 던졌다. 오늘날까지도 인도에서는 돌이 증인으로 쓰일 수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돌이 율법의 부적으로서 이용되었고, 그 위엄으로 위법자를 법정으로 마구 끌고갈 수 있었다. 그러나 단순한 필사자는 반드시 신과 엄숙한 의식(儀式)의 대상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러한 주물은 흔히 단지 정말로 숭배받는 대상의 상징일 뿐이다.
85:1.4 (945.2) 옛날 사람들은 돌에 있는 구멍을 특이하게 여겼다. 그러한 구멍 많은 바위는 병을 고치는 데 특별히 효력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돌을 달고 다니려고 귀에 구멍을 뚫은 것이 아니라 귀의 구멍을 열린 채로 두려고 돌을 집어넣었다. 현대에도 미신 믿는 사람들은 동전에 구멍을 뚫는다. 아프리카에서 원주민은 주물 돌을 놓고 법석을 떤다. 사실, 뒤떨어진 모든 부족과 민족들 사이에서 돌은 아직도 미신처럼 존경을 받는다. 돌 숭배는 지금도 전 세계에 퍼져 있다. 묘비는 떠나간 동료 존재의 귀신과 영을 믿는 신앙과 관련하여, 돌에 새겨진 형상과 우상의 살아남은 상징이다.
85:1.5 (945.3) 산 숭배가 돌 숭배를 따랐고, 처음에 사람이 모신 산들은 큰 암석층이었다. 신들이 산에서 산다고 믿는 것이 당장에 풍습이 되었고, 그래서 이 추가된 이유 때문에 높은 고지(高地)를 숭배하였다. 시간이 지나자, 어떤 산은 어떤 신과 연결되었고, 따라서 거룩하게 되었다. 무지하고 미신을 믿는 토착민은 동굴이 악령과 마귀가 있는 지하 세계로 이끈다고 믿었고, 이와 반대로 산들은 나중에 진화하는, 착한 영과 신의 개념과 동일시되었다.
85:2.1 (945.4) 사람은 처음에 식물을 두렵게 여겼고, 다음에는 거기서 나오는, 사람을 취하게 하는 술 때문에 식물(植物)을 숭배했다. 원시인은 술에 취하면 사람이 신답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한 체험에는 특별하고 신성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현대에도 알코올은 “주정(酒精)”이라[2] [34] 알려져 있다.
85:2.2 (945.5) 시초의 인간은 두려움과 미신 같은 경외감을 가지고 싹트는 낟알을 바라보았다.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싹트는 낟알로부터 깊은 영적 교훈을 끌어내고 그 위에 종교적 관념의 기초를 둔 사람은 아니었다.
85:2.3 (945.6) 나무를 숭배하는 종파는 가장 오래 된 종교 집단에 속했다. 모든 옛 결혼식은 나무 밑에서 올렸고, 여자들은 아이를 바랐을 때 숲에서 튼튼한 참나무를 사랑하듯 껴안고 있는 것이 때때로 발견되곤 했다. 많은 식물과 나무가 정말로 약효가 있거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숭배를 받았다. 야만인은 모든 화학 작용이 초자연의 물력이 직접 활동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85:2.4 (945.7) 나무 귀신에 대한 관념은 다른 부족과 종족들 사이에서 크게 달랐다. 어떤 나무에는 친절한 영이 깃들었고, 다른 것들은 사람을 속이는 모진 귀신을 품었다. 핀란드인은 대부분의 나무에 친절한 영이 들어 있다고 믿었다. 스위스인은 오랫동안 나무를 불신했고, 나무가 교활한 귀신을 담고 있다고 믿었다. 인도와 러시아 동부의 거민들은 나무 귀신이 모질다고 생각했다. 파타고니아인은 옛날 셈 족속처럼, 아직도 나무를 숭배한다. 나무 숭배를 그만둔 지 오랜 뒤에도, 히브리인은 숲에서 사는 다양한 신을 계속 섬기었다. 중국을 제외하고, 한때 생명나무를 믿는 보편적 종파가 있었다.
85:2.5 (946.1) 점치는 나무 막대기로 지구의 표면 밑에 있는 물이나 귀금속을 탐지할 수 있다는 믿음은 옛날 나무 종파의 유물이다. 5월제 기둥, 크리스마스 나무, 그리고 나무를 톡톡 두드리는 미신 관습은 나무를 숭배하는 옛 풍습과 후일의 나무 종파들의 어떤 것을 지속한다.
85:2.6 (946.2) 가장 일찍 있었던 형태의 자연 숭배 가운데 다수는 나중에 진화하는 숭배 기술과 섞이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 깨어나는 인류의 종교적 성품이 영적 영향의 자극에 충분히 민감해지기 오래 전에, 보조 지성이 활성화시킨 가장 이른 종류의 숭배가 작용하고 있었다.
85:3.1 (946.3) 원시인은 고등 동물에 대하여 특이하고 친근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선조들은 동물과 함께 살아 왔고 그들과 교미까지 하였다. 아시아 남부에서는 사람의 혼이 동물 형태를 입고 땅으로 돌아온다고 일찍부터 믿었다. 이 관념은 동물을 숭배하는, 그보다 더 일찍 있던 관습의 잔재이다.
85:3.2 (946.4) 시초의 인간들은 동물의 힘과 교묘함 때문에 동물을 존경했다. 그들은 어떤 생물의 날카로운 후각과 멀리 보는 눈은 영이 안내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모든 동물이 어떤 민족에게, 어느 때인가 숭배를 받았다. 그러한 숭배 대상에는 반인반마(半人半馬) 또는 인어(人魚)와 같이, 반은 인간이고 반은 동물이라고 간주된 생물이 있었다.
85:3.3 (946.5) 히브리인은 히스기아 왕의 시절까지 뱀을 숭배했고, 힌두교인은 아직도 집 뱀과 친한 관계를 유지한다. 중국인의 용(龍) 숭배는 뱀교가 살아남은 것이다. 뱀의 지혜는 그리스 의술의 상징이었고, 현대 의사들이 아직도 상징으로 이용한다. 뱀을 홀리는 기술은 뱀 사랑 종파의 여자 샤먼 시절부터 내려왔는데, 이 샤먼들은 날마다 뱀에게 물린 결과로 면역이 되었으며, 사실은 진짜 뱀독에 중독이 되었고 이 독이 없이 지낼 수 없었다.
85:3.4 (946.6) 곤충과 기타 동물의 숭배는 후일에 황금률―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 바라는 대로 남(모든 형태의 생명)에게 해 주기―를 잘못 풀이함으로 조장되었다. 옛날 사람들은 한때 새들의 날개가 모든 바람을 일으킨다고 믿었고, 따라서 날개 달린 모든 생물을 무서워하고 숭배했다. 초기의 노르딕인은 해나 달의 일부를 먹어 버린 이리가 일식(日蝕)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힌두인은 말의 머리를 가진 비시누를 흔히 보여준다. 동물적 상징은 잊혀진 신이나 사라진 종파를 흔히 대표한다. 진화 종교에서 일찍부터 양은 희생 동물의 전형(典型)이 되었고, 비둘기는 평화와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85:3.5 (946.7) 종교에서는 상징이 최초에 숭배하던 관념을 갈아치우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그 상징은 좋거나 나쁠 수 있다. 그리고 상징은 우상을 직접 숭배하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되며, 우상 숭배에서는 물질 대상을 직접, 실제로 숭배한다.
85:4.1 (946.8) 인류는 땅ㆍ공기ㆍ물ㆍ불을 숭배해 왔다. 원시 종족들은 샘물을 모시고 강을 숭배했다. 지금도 몽골리아에는 영향력이 큰 강(江) 종파가 번성한다. 세례는 바빌론에서 종교 의식이 되었고, 그리스인은 해마다 목욕 의식을 거행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부글거리는 샘물, 용솟음치는 샘, 흐르는 강, 성난 격류에 영들이 거한다고 상상하기가 쉬웠다. 움직이는 물은 이 단순한 사람들에게 영이 살아 움직이는 것과 초자연의 힘을 믿도록 생생하게 감명을 주었다. 어떤 때는 어떤 강의 신을 성나게 할까 두려워, 물에 빠지는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 뻗기를 거절하곤 했다.
85:4.2 (947.1) 많은 사물과 수많은 사건이 다른 시대에 다른 민족들에게, 종교적 자극으로 작용하였다. 인도의 여러 산(山) 부족들은 아직도 무지개를 숭배한다.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무지개는 거대한 하늘 뱀이라고 생각되었다. 히브리인과 기독교인은 무지개를 “약속의 활”이라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세계의 한 구석에서 유익하다고 여기는 영향력을 다른 지역에서 불길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동풍은 남 아메리카에서 신인데, 그 바람이 비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동풍이 악마인데, 먼지를 불러오고 가뭄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옛 베두인 족속은 자연 영이 모래 회오리바람을 일으킨다고 믿었고, 모세의 시절에도 자연 영들을 믿는 관념이 충분히 강해서, 그것들이 히브리 신학에서 불ㆍ물ㆍ공기의 천사로 지속되는 것을 보장했다.
85:4.3 (947.2) 수많은 원시 부족과 초기의 많은 자연 종파가 구름ㆍ비ㆍ우박 모두를 무서워하고 숭배했다. 천둥과 번개가 따르는 폭풍은 원시인이 두려움에 질리게 만들었다. 그는 이 자연력의 교란에 너무 감명 받아서, 천둥을 성난 신의 목소리로 여겼다. 불의 숭배와 번개를 무서워하는 태도는 서로 연결되었고, 많은 초기 집단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85:4.4 (947.3) 두려움에 질린 원시 필사자의 머리 속에서 불은 마술과 섞였다. 마술을 신봉하는 자는 주문(呪文)을 실습할 때, 어쩌다 생긴 긍정적 결과를 눈에 선하게 기억하지만, 몇십 번의 부정적 결과, 철저한 실패를 태연하게 잊어버린다. 불의 숭배는 페르시아에서 절정에 이르렀고, 거기서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어떤 부족들은 불을 하나의 신 그 자체로 섬기었다. 다른 부족들은 불을 그들이 존경하는 신들의 영, 정화(淨化)하고 씻어 버리는 영의 타오르는 상징으로 모셨다. 베스타[3] [35] 여신을 섬기는 처녀들은 신성한 불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고, 20세기에 많은 종교적 예배 의식의 일부로서 아직도 사람들은 촛불을 켠다.
85:5.1 (947.4) 바위ㆍ산ㆍ나무ㆍ동물의 숭배는 자연히 성장해서, 자연력을 두렵게 섬기는 단계를 거치고, 해ㆍ달ㆍ별을 신으로 만들기까지 발전했다. 인도와 기타 지역에는 별이, 육체를 입은 삶을 떠난 위대한 사람들의 영화롭게 된 혼이라 여겼다. 갈대아의 점성가들은 자신들이 하늘 아버지와 땅 어머니의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85:5.2 (947.5) 달 숭배는 태양 숭배를 앞섰다. 달의 숭상은 사냥하던 시대에 절정에 이르렀고, 한편 태양 숭배는 그 뒤의 농업 시대에 주요한 종교 예식이 되었다. 태양 숭배는 처음에 인도에서 널리 뿌리를 내렸고, 거기서 가장 오랫동안 견디었다. 페르시아에서 태양 숭배는 후일에 미트라 종파를 낳았다. 많은 민족 사이에서 태양은 임금의 선조라고 여겼다. 갈대아인은 “우주의 일곱 동그라미”의 중심에 태양을 놓았다. 후일의 문명은 한 주의 첫날을 그 이름으로 불러 태양에 영예를 돌렸다.
85:5.3 (947.6) 태양신은 처녀에게서 태어난 운명의 아들들의 신비한 아버지라고 생각되었고 이 아들들은 때때로 은혜를 받은 민족에게 구세주로서 수여된다고 생각되었다. 언제나 어떤 신성한 강에 누가 이 초자연적 아기들을 떠내려 보냈고, 그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구출되었으며, 그 뒤에 자라서 그 민족에게 기적의 인물과 구원자가 되곤 하였다.
85:6.1 (948.1) 땅의 표면에, 그리고 위로 하늘에 있는 모든 다른 것을 숭배했으니까, 사람은 자신을 찬미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생각이 단순한 야만인은 짐승ㆍ사람ㆍ신을 조금도 뚜렷이 구별하지 않는다.
85:6.2 (948.2) 시초의 인간은 모든 특별한 사람을 초인간으로 여겼고, 그러한 존재들을 아주 두려워해서, 경외하는 느낌으로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글자 그대로 그들을 숭배했다. 쌍둥이를 낳는 것조차도 아주 운이 좋든지, 아니면 아주 운이 나쁘다고 생각되었다. 미치광이, 간질병자, 정신 박약자는 흔히 머리가 정상인 동료들의 숭배를 받았고, 그들은 그러한 비정상 존재 속에 신이 계신다고 믿었다. 사제ㆍ임금ㆍ선지자가 숭배를 받았다. 사람들은 옛날의 거룩한 자들이 신들에게서 영감을 받는다고 우러러보았다.
85:6.3 (948.3) 부족의 추장들은 죽고 나서 신으로 대접받았다. 나중에는 탁월한 사람들이 죽고 나서 성인(聖人)이 되었다. 하늘의 도움 없이 일어나는 진화는 죽은 인간의 영, 영화롭게 되고 높아지고 진화한 영보다 더 높은 신을 만들어 낸 적이 없다. 진화의 초기에서 종교는 자체의 신들을 만들어낸다. 계시를 내리는 과정에서 신들은 종교를 형성한다. 진화 종교는 필사 인간의 형상과 모습을 따라서 그 신들을 만들어낸다. 계시 종교는 필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으로 진화시키고 변화시키려고 애쓴다.
85:6.4 (948.4) 귀신인 신들은 인간의 기원을 가졌다고 생각되었는데, 이들은 자연 신(神)과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연 숭배는 만신전―신들의 자리로 높여진 자연의 영들―을 진화시켰기 때문이다. 자연을 숭배하는 종파들은 나중에 등장하는 귀신 종교를 따라서 계속 발전하였고, 서로 영향을 주었다. 많은 종교 체계는 두 가지 신의 개념, 자연 신과 귀신 신을 포함하였다. 귀신 영웅이자 또한 번개의 주인인 토르가 보여주다시피, 어떤 신학에는 이 개념들이 뒤범벅이 되어 서로 얽혔다.
85:6.5 (948.5)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숭배하는 것은, 현세의 통치자들이 백성에게 그러한 숭배를 명령하고 그러한 요구를 정당화하면서, 그들이 신으로부터 내려왔다고 주장했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85:7.1 (948.6) 자연 숭배는 원시 남녀의 머리 속에서 자연히, 저절로 생긴 듯 보일지 모르며, 또 그렇게 생겨났다. 그러나 그동안 언제나 바로 이 원시인의 머리 속에서 여섯째 보조 영이 작용하고 있었고, 그 영은 인간 진화의 이 단계에서 지도하는 영향력으로서 이 민족들에게 이전에 수여되었다. 이 영은, 그 첫 표현이 아무리 원시적이라도, 인간종의 예배 욕구를 항상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동물을 무서워하는 것은 경배하는 표현을 자극했고, 그 초기의 관습이 자연의 대상물에 집중되었는데도, 예배의 영은 무엇인가 숭배하고 싶은 인간의 충동에 분명한 기원을 주었다.
85:7.2 (948.7) 생각이 아니라 느낌이, 모든 진화적 발전에 안내하고 고삐를 쥐는 영향이었다는 것을 너희는 기억해야 한다. 원시인의 머리에는 두려움, 회피, 영예 돌리기, 숭배 사이에 거의 차이가 없다.
85:7.3 (948.8) 예배의 욕구가 지혜―명상하고 체험을 생각하는 것―의 훈계와 지도를 받을 때, 그때 진정한 종교 현상으로 비로소 발전한다. 일곱째 보조 영, 곧 지혜의 영이 효과적으로 봉사할 때, 예배하면서 사람은 자연과 자연의 대상으로부터, 자연의 하나님에게, 자연스런 만물의 영원한 창조자에게 비로소 고개를 돌린다.
86:0.1 (950.1) 이전의 원시적 예배 욕구로부터 종교가 진화하는 것은 계시에 달려 있지 않다. 보편적 영이 수여한 여섯째와 일곱째 지성 영의 지휘하는 영향 하에 인간의 지성이 정상으로 작용하면, 그러한 발전을 보장하기에 전적으로 충분하다.
86:0.2 (950.2) 인간의 의식 속에서 자연이 인격화되고, 영이 되고, 결국 신(神)이 됨에 따라서, 사람이 최초에 자연력에 대하여 가졌던 두려움, 종교가 있기 전의 두려움은 차츰 종교성을 띠게 되었다. 그러므로 원시 종류의 종교는, 진화하는 동물 지성이 일단 초자연의 것에 관한 개념을 생각해 본 뒤에, 그런 지성의 심리적 타성이 낳는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결과였다.
86:1.1 (950.3) 신을 예배하는 자연스러운 욕구를 제쳐놓고, 초기의 진화 종교의 뿌리는 인간이 우연―이른바 운(運), 보통 일어나는 일―을 체험한 데 기원이 있다. 원시인은 먹을거리를 사냥하는 사람이었다. 사냥의 결과는 늘 변하는 것이 틀림없고, 이것은 행운과 불운이라고 사람이 해석하는 그런 체험을 낳는다. 불운은 험한 경지에서 아슬아슬하고 시달리는 삶을 항상 살던 남녀의 인생에서 큰 요인이었다.
86:1.2 (950.4) 야만인의 제한된 지적 시야(視野)는 우연에 너무 치중하였고, 그래서 운은 그의 인생에서 항상 있는 요인이 된다. 원시의 유란시아인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하여 싸웠다. 그들은 우연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위험한 인생을 살았다. 알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재난을 늘 두려워하는 것이 절망의 구름이 되어 이 야만인들 위에 떠 있었고, 이것은 실지로 모든 즐거움이 빛을 잃게 만들었다. 그들은 불운을 가져올 무슨 일을 저지르는가 늘 두려워하며 살았다. 미신을 믿는 야만인은 행운이 이어지는 것을 언제나 두려워했고, 그런 행운이 재난이 다가올 분명한 전조(前兆)라고 생각했다.
86:1.3 (950.5) 불운이 올까 이렇게 늘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을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사람이 떠돌아다니다가 행운을 만날지 모르는데―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데―어째서 열심히 일하고 불운을 거두어야 하는가―무언가 공들이고 아무것도 못 거두어야 하는가? 생각 없는 사람들은 행운을 잊어버린다―당연하다고 생각한다―그렇지만, 불운은 뼈저리게 기억한다.
86:1.4 (950.6) 초기의 인간은 불안 속에서, 우연―불운―을 항상 두려워하면서 살았다. 인생은 흥미 있는 우연(偶然)의 장난이었고, 존재하는 것은 노름이었다. 얼마큼 문명화된 사람들이 아직도 우연을 믿고, 남아 있는 노름 성향을 보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원시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언가 얻으려는 정열, 그리고 무언가 수고를 들이고 아무것도 못 얻는 두려움, 이 두 가지 큰 관심거리 사이에 갈팡질팡했다. 그리고 목숨을 거는 이 노름은 초기 야만인의 머리에 주요한 관심거리요 최고의 매력이었다.
86:1.5 (951.1) 후일에 양치는 사람들은 바로 이 우연과 운(運)의 관점을 가졌고, 그후에 농사꾼들은 수확이 사람이 거의 또는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많은 것에 직접 영향을 받는 것을 더욱 의식하였다. 농부는 더위와 추위 뿐 아니라, 가뭄ㆍ홍수ㆍ우박ㆍ폭풍우ㆍ해충, 식물의 병으로 자신이 손해보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모든 자연의 영향이 개인의 번영에 영향을 주었으므로 이를 행운이나 불운이라고 여겼다.
86:1.6 (951.2) 이 우연과 운의 개념은 모든 옛 민족의 철학에 진하게 스며들었다. 최근에도 솔로몬의 지혜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내가 돌아와서 보니, 빠른 자가 달리기에 이기지 않고, 힘센 자가 전쟁에 이기지도 않으며, 지혜로운 자가 빵을 얻지도 않고, 명철한 사람이 부(富)를 얻지도 않으며, 기술 있는 사람이 은혜를 받지도 않도다. 그러나 운명과 우연이 저희 모두에게 내리느니라. 이는 사람이 제 운명을 알지 못함이라. 물고기가 나쁜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덫에 걸리는 것 같이, 사람의 자식들도 나쁜 때가 갑자기 닥칠 때, 그때 덫에 걸리느니라.”
86:2.1 (951.3) 걱정은 야만인의 머리 속에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남자와 여자가 지나친 걱정에 빠질 때 다만 까마득히 먼 조상의 자연 상태로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걱정이 실제로 고통스러워질 때, 걱정은 활동을 억제하고, 어김없이 진화적 변화와 생물학적 적응을 시작한다. 고통과 괴로움은 점진적 진화에 필수이다.
86:2.2 (951.4) 살려는 투쟁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어떤 뒤떨어진 부족들은 아직도 새로 해가 뜰 때마다 울부짖고 슬퍼한다. 원시인은 끊임없이 물었다, “누가 나를 괴롭히는가?” 곤경에 빠지는 물질적 근원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영으로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신비스러운 것을 두려워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경외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함으로부터 종교가 태어났다. 이처럼 자연을 두려워하는 것은 처음에 우연 때문에, 그리고 나서 신비스러움 때문에, 살려는 투쟁에서 한 요인이 되었다.
86:2.3 (951.5) 원시인의 머리는 논리가 있었으나 영리하게 연결지을 관념이 거의 없었다. 야만인의 머리는 교육받지 않았고, 도무지 세련되지 않았다.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을 따르면, 야만인은 이것들이 원인과 결과라고 보았다. 문명화된 사람이 미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야만인의 경우에 그저 단순한 무지에 불과했다. 인류는 목적과 결과 사이에 반드시 어떤 관계가 있지는 않다는 것을 느리게 배웠다. 행위와 그 결과 사이에 존재에서 여러 가지 반응이 나타난다는 것을 인간들은 겨우 비로소 깨닫고 있다. 야만인은 만질 수 없고 추상적인 것을 모조리 의인화하려고 애쓰며, 따라서 자연과 우연은 귀신―영―으로, 나중에는 신으로, 인격화된다.
86:2.4 (951.6) 사람은 자연히 자기를 위해서 최선이라고 판단되는 것, 당장이거나 먼 앞날에 이익이 되는 것을 믿는 경향이 있다. 자기 이익은 대체로 논리를 흐리게 만든다. 야만인과 문명화된 사람들의 생각하는 머리의 차이는 성질보다 내용의 차이, 질보다 정도의 차이이다.
86:2.5 (951.7) 그러나 이해하기 힘든 것을 초자연적 원인의 탓으로 계속 돌리는 것은 온갖 형태의 지적으로 힘든 일을 피하는, 게으르고 편리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운(運)은 단지 인간이 존재하던 어느 시대에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을 포함하려고 만들어 낸 용어일 뿐이다. 운은 사람들이 꿰뚫어볼 수 없거나 그렇게 하기 싫은 현상을 가리킨다. 우연(偶然)은 사람이 너무 무지하거나 게을러서 원인을 밝히지 못하는 것을 알리는 낱말이다. 사람들은 호기심과 상상력이 결핍되었을 때, 종족들이 창의력과 모험이 모자랄 때에야 자연 현상을 우연이나 불운으로 여긴다. 생명 현상의 탐구는 머지 않아 우연ㆍ행운, 그리고 이른바 우연에 대한 사람의 관념을 깨뜨리며, 그 자리에, 분명한 원인이 모든 결과에 앞서는, 법칙과 질서가 있는 우주를 채워 넣는다. 이렇게 존재하면서 닥치는 두려움은 살아가는 기쁨으로 바뀐다.
86:2.6 (952.1) 야만인은 모든 자연이 살아 있다고, 자연 속에 무엇이 들어 있다고 보았다. 문명화된 사람은 가는 길에 걸리고 그에게 부딪치는 생명 없는 물건을 아직도 발로 걷어차고 저주한다. 원시인은 결코 어떤 것도 우연이라 여기지 않았다. 모든 것에는 반드시 의도(意圖)가 있었다. 원시인에게 운명의 분야, 운의 작용, 영 세계는 원시 사회와 마찬가지로, 그저 조직되지 않은 채로 아무렇게나 펼쳐 있었다. 행운은 영 세계가 변덕스럽게 기분대로 반응하는 것이라고 보았고, 나중에는 신들의 유머라고 보았다.
86:2.7 (952.2) 그러나 모든 종교가 물활론(物活論)으로부터 발전하지는 않았다. 초자연의 것들에 대한 다른 개념들은 물활론과 같은 시대에 있었고, 이 여러 관념도 또한 신의 숭배로 이끌었다. 자연주의는 종교가 아니다―종교의 산물이다.
86:3.1 (952.3) 죽음은 진화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충격이요, 가장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우연과 신비의 조합이었다. 생명의 신성함이 아니라 죽음의 충격이 두려움을 불러일으켰고, 이처럼 효과적으로 종교를 육성했다. 야만인 민족들 중에서 죽음은 보통 사고(事故) 때문에 생겼고, 그래서 사고로 생기지 않은 죽음은 갈수록 더 신비스러워졌다. 기대하는 자연 생명의 끝은 원시인의 의식 속에서 또렷하지 않았고, 죽음이 불가피한 것을 사람이 깨닫는 데 기나긴 세월이 걸렸다.
86:3.2 (952.4) 초기의 인간은 생명을 사실로 받아들였고, 한편 죽음을 어떤 종류의 방문으로 여겼다. 모든 종족은 죽지 않은 사람들에 관한 전설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죽음에 대한 초기 태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전통이다. 인간의 머리 속에는 흐릿하고 체계 없는 영 세계에 대하여 뿌연 개념이 이미 존재했는데, 거기서부터 인생에서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것이 왔고, 설명할 수 없는 여러 현상이 적힌 이 긴 목록에 죽음이 첨가되었다.
86:3.3 (952.5) 인간의 모든 병과 자연사는 처음에 영(靈)의 영향 때문이라고 믿었다. 오늘날에도 어떤 문명화된 종족들은 질병을 “적”이 일으킨 것이라고 보며, 종교 예식에 의존하여 이를 치유하려고 한다. 나중에 더 복잡한 신학 체계는 여전히 죽음을 영 세계의 행위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이 모든 것이 원죄(原罪)와 인간의 타락과 같은 교리를 낳았다.
86:3.4 (952.6) 질병과 죽음이 찾아온 앞에서 인간이 약한 것을 인식함과 더불어, 막강한 자연력 앞에 무력(無力)함을 깨달은 것은 야만인으로 하여금 초물질 세계로부터 도움을 찾도록 재촉했고, 그는 이 초물질 세계가 이 신비스러운 인생의 부침(浮沈)의 근원이라고 어렴풋이 상상했다.
86:4.1 (952.7) 필사 인격자의 초물질 단계 개념은 의식하지 않고서, 순전히 우연하게 일상 생활의 사건들과 귀신 꿈을 연결지어 생겨났다. 돌아가신 추장에 관하여 부족에서 몇 사람이 동시에 꿈을 꾸는 것은 그 늙은 추장이 정말로 어떤 형태로 돌아왔음을 확신하게 하는 증거인 것처럼 보였다. 땀투성이가 되어 벌벌 떨고 소리치면서, 그러한 꿈에서 깨어나던 야만인에게는 그것이 모두 아주 현실이었다.
86:4.2 (953.1) 미래에 존재한다는 관념이 꿈에 기원을 가진 것은, 눈에 보이는 사물을 써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을 언제나 상상하는 경향을 설명한다. 꿈ㆍ귀신, 앞날의 생명에 대한 이 새 개념은 즉시, 자아를 보존하는 생물학적 본능과 연결하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효과적으로 해독하기 시작했다.
86:4.3 (953.2) 초기의 인간은 또한, 숨에 대하여, 특히 추운 기후에서 많이 걱정했는데, 그런 곳에서 숨은 내쉬었을 때 구름처럼 보였다. 생명의 호흡은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별하는 유일한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숨이 몸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잠자는 동안 온갖 종류의 야릇한 일을 행하는 꿈은 인간의 주위에 비물질인 무엇이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인간의 혼에 대한 가장 원시적 개념, 즉 귀신은, 호흡과 꿈 개념의 체계로부터 생겨났다.
86:4.4 (953.3) 결국 야만인은 자신이 2중―몸과 호흡―이라고 생각했다. 숨에서 몸을 빼면 영, 곧 귀신이 되었다. 아주 분명히 인간에 기원을 가졌지만, 귀신이나 영은 초인간으로 간주되었다. 몸을 잃어버린 영이 존재한다는 이 관념은 드문 것, 특별한 것, 흔치 않은 것,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일어나는 것을 설명하는 듯하였다.
86:4.5 (953.4) 죽은 뒤에 살아남는다는 원시 신조는 반드시 불멸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스물을 넘어서 셀 수 없는 존재들은 도저히 무한과 영원을 상상할 수 없다. 그보다 그들은 거듭 육신화하는 것을 생각했다.
86:4.6 (953.5) 주황 민족은 특히 윤회와 환생(還生)의 신앙에 빠졌다. 이 환생 신앙은 자손이 선조들의 유전과 특성을 닮은 것을 지켜본 데서 생겼다. 조부모와 기타 선조들을 따라 아이들의 이름을 짓는 관습은 환생을 믿기 때문이었다. 후일의 어떤 종족들은 사람이 세 번에서 일곱 번까지 죽는다고 믿었다. (저택 세계들에 관한 아담의 가르침의 잔재인) 이 관념과 계시된 종교의 많은 다른 찌꺼기를 20세기 미개인들의 교리, 다른 면에서 불합리한 교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86:4.7 (953.6) 초기의 인간은 지옥이나 앞날의 벌에 대하여 아무 관념이 없었다. 야만인은 미래의 인생이, 온갖 악운을 빼고, 꼭 이 인생과 같다고 보았다. 나중에는, 좋은 귀신과 나쁜 귀신이, 따로따로의 운명―천국과 지옥―을 가졌다고 상상했다. 그러나 많은 원시 종족이 사람이 이 인생을 떠난 그대로 다음 인생에 들어간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늙고 초라하게 된다는 생각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늙은이들은 너무 허약해지기 전에 죽음을 당하는 것을 훨씬 더 좋아했다.
86:4.8 (953.7) 거의 모든 집단이 귀신이 된 혼의 운명에 관하여 다른 생각을 가졌다. 그리스인은 약한 사람이 약한 혼을 가졌음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러한 핏기 없는 혼들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장소로 하데스를 발명했다. 튼튼하지 못한 이 종자들은 또한 그림자가 짧다고 생각되었다. 초기의 안드 족속은 그들의 귀신이 선조의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중국인과 에집트인은 혼과 몸이 같이 남아 있다고 한때 믿었다. 에집트인 사이에서 이것은 조심스럽게 무덤을 건축하고 몸을 보존하는 노력으로 이끌었다. 현대의 민족들도 죽은 자의 부패를 멈추게 하려고 애쓴다. 히브리인은 개인의 유령(幽靈) 복사품이 저승으로 내려간다, 그것은 살아 있는 자의 땅으로 돌아올 수 없다고 상상했다. 그들은 혼의 발전에 관한 교리에서 이 중요한 걸음을 내디디었다.
86:5.1 (953.8) 사람의 비물질 부분을 귀신ㆍ영ㆍ그림자ㆍ유령ㆍ망령, 나중에는 혼, 이렇게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렀다. 혼은 초기 인간의 꿈 속 복사판이었으며, 만지는 데 반응하지 않는 것을 제쳐놓고, 필사자 자신과 모든 면에서 똑같았다. 꿈 속 복사판에 대한 관념은 사람 뿐 아니라,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모두가 혼을 가졌다는 개념으로 바로 이끌었다. 이 개념은 자연이 영을 가졌다는 관념을 오랫동안 지속하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에스키모인은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이 영을 가졌다고 아직도 생각한다.
86:5.2 (954.1) 몸이 없는 혼의 소리를 듣고 그 혼을 볼 수도 있지만, 만질 수는 없었다. 차츰 종족의 꿈 생활은 진화하는 이 영 세계의 활동을 발전시키고 확대해서, 죽음은 마침내 “귀신을 버리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동물이나 거의 다름없는 부족들을 제외하고, 모든 원시 부족은 어떤 혼 개념을 개발했다. 문명이 진보하자, 미신 같은 이 혼 개념은 깨어지고, 혼은 하나님을 아는 필사 지성과 그 안에 깃드는 신다운 영, 곧 생각 조절자가 합동으로 창조하는 것이라는 새 개념을 얻으려고 사람은 온전히 계시와 개인의 종교적 체험에 의존한다.
86:5.3 (954.2) 옛날의 필사자들은 깃드는 영(靈)과 진화 성질을 가진 혼(魂), 이 개념들을 보통 구별하지 못했다. 몸이 없는 혼이 날 때부터 몸에 붙어 있는가, 아니면 몸을 소유하는 외부의 힘인가 야만인은 무척 혼동하고 있었다. 혼란한 가운데 논리적 생각의 부재(不在)는 혼ㆍ귀신ㆍ영에 관하여 야만인의 관점이 어째서 터무니없이 모순되는가 설명한다.
86:5.4 (954.3) 향기가 꽃에서 나오는 것 같이 혼이 몸에서 나온다고 생각되었다. 옛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혼이 여러 방법으로 몸을 떠날 수 있다고 믿었다:
86:5.5 (954.4) 1. 흔하게 잠시 기절할 때.
86:5.6 (954.5) 2. 잠 속에서, 자연스럽게 꿈을 꾸면서.
86:5.9 (954.8) 야만인은 재채기를 혼이 몸에서 달아나려다가 그만둔 것으로 보았다. 깨어 있고 지키고 있으면, 몸은 혼이 도망하려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나중에는, 재채기 다음에, “하나님이 너에게 복을 줄지어다!”하는 것 같이, 언제나 종교적 표현이 따랐다.
86:5.10 (954.9) 진화의 초기부터 잠은 귀신 혼이 몸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여겼고, 잠자는 사람의 이름을 말하거나 외침으로 그 혼을 다시 불러들일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종류의 무의식 상태에 있을 때 혼은 더 멀리 있다고, 아마 영원히 도망치려 하는 것―죽음이 다가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꿈은 잠을 잘 때, 몸을 잠깐 떠나 있는 동안 혼이 겪는 체험이라고 여겼다. 야만인은 깨어서 겪는 체험의 어떤 부분과 마찬가지로, 꿈이 똑같이 현실이라고 믿는다. 옛 사람들은 혼이 몸으로 돌아갈 겨를을 가지도록 잠자는 사람을 차츰차츰 깨우는 관습을 지켰다.
86:5.11 (954.10) 오랜 세월을 통해서 계속, 사람들은 밤 동안에 나타나는 유령에 겁을 먹었고, 히브리인은 예외가 아니었다. 모세가 금지령을 내렸는데도,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이 꿈 속에서 그들에게 말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모세는 옳았다. 왜냐하면 평범한 꿈은 영 세계의 성격자들이 물질 존재와 교통하려 할 때 쓰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86:5.12 (954.11) 옛날 사람들은 혼이 동물이나 생명이 없는 물체에도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동물 신분을 가진 인간 늑대 관념을 낳았다. 사람이 낮에는 법을 지키는 시민이 될 수 있으나, 잠들었을 때 그의 혼은 밤 동안에 약탈 행위를 하느라 쏘다니려고 늑대나 어떤 다른 동물에 들어갈 수 있었다.
86:5.13 (955.1) 원시인은 혼이 숨과 결합되어 있고, 혼의 성질을 숨을 불어 나누어 주거나 옮겨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용감한 추장은 갓난아이에게 숨을 내뿜고, 이렇게 용기를 나누어 주곤 했다. 초기의 기독교인 사이에서 성령을 주는 예식에는 후보자에게 숨을 불어 주는 일이 뒤따랐다. 시편의 저자는 말했다: “주의 말씀으로 하늘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 있는 온 무리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숨을 불어 만들어졌도다.” 맏아들이 죽어 가는 아버지의 마지막 숨을 붙잡으려고 애쓰는 것이 오랫동안 풍습이었다.
86:5.14 (955.2) 나중에는 숨과 똑같이,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존중하게 되었다. 물 속에 비치는 자신의 그림자를 또한 때때로 자아의 복사판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보았고, 사람들은 미신의 두려움을 가지고 거울을 다루었다. 문명화된 많은 사람이 지금도 사람이 죽었을 경우에 거울을 벽으로 돌려놓는다. 어떤 뒤처진 부족들은 그림ㆍ도화(圖畵)ㆍ모형, 또는 형상을 만드는 것은 혼의 전부나 일부를 몸에서 빼낸다고 아직도 믿으며, 따라서 그러한 일이 금지된다.
86:5.15 (955.3) 혼은 일반적으로 숨과 동일한 것이라 생각되었지만, 또한 여러 민족은 혼의 위치를 머리ㆍ머리카락ㆍ심장ㆍ간ㆍ피ㆍ지방에 두었다. “아벨의 피가 땅에서 외친다”는 것은 한때 귀신이 피 속에 있다는 관념을 표현한다. 셈 족속은 혼이 몸의 지방(脂肪) 속에 거한다고 가르쳤으며, 동물의 지방을 먹는 것은 많은 사람 사이에서 금기였다. 머리 사냥은, 머리 가죽 벗기기와 마찬가지로, 적의 혼을 사로잡는 방법이었다. 최근에 눈은 혼이 내다보는 창문이라고 생각되었다.
86:5.16 (955.4) 혼이 서너 개 있다는 교리를 고수하는 자들은 혼을 하나 잃는 것은 불쾌, 둘은 병, 셋은 죽음을 뜻한다고 믿었다. 혼 하나는 숨 속에, 하나는 머리에, 하나는 머리카락에, 하나는 심장에 살았다. 아픈 사람들은 그들의 헤매는 혼을 다시 잡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탁 트인 곳에서 활보하라는 조언을 받았다. 가장 위대한 주술사는 병든 사람의 아픈 혼을 새것, “새로 난 것”으로 바꾼다고 생각되었다.
86:5.17 (955.5) 바도난의 후손들은 두 혼, 숨과 그림자의 관념을 개발했다. 초기의 놋 족속은 사람이 두 인격으로, 혼과 몸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인간의 존재를 설명하는 이 철학은 나중에 그리스인의 관점에서 반영되었다. 그리스인 자신은 세 혼을 믿었다. 식물 혼은 위장에, 동물 혼은 심장에, 지적인 혼은 머리 속에 거한다고 믿었다. 에스키모인은 사람이 세 부분, 몸ㆍ혼ㆍ이름을 가진다고 믿는다.
86:6.1 (955.6) 사람은 자연 환경을 물려받고, 사회 환경을 익히고, 귀신에 쌓인 환경을 상상했다. 국가는 사람이 자연 환경에 반응한 것, 가정은 사회 환경에 반응한 것, 교회는 사람이 귀신에 둘러싸여 있다는 망상에 반응한 것이다.
86:6.2 (955.7) 인류의 역사에서 아주 일찍부터, 귀신과 영이 있는 공상(空想) 세계가 현실이라는 것을 보편적으로 믿었고, 새롭게 상상한 이 영 세계는 원시 사회에서 권력이 되었다. 온 인류의 정신 및 도덕 생활은 인간의 생각과 행위에서 이 새 요소가 나타남으로 영구하게 달라졌다.
86:6.3 (955.8) 극심한 두려움 때문에 후일에 원시 민족들의 모든 미신과 종교는 이 망상과 무지(無知), 이 주요 전제(前提) 조건 속에 압축되었다. 이것이 계시를 받기 직전까지 사람의 유일한 종교였고, 오늘날 세계의 많은 종족이 겨우 이 투박한 진화 종교를 가지고 있다.
86:6.4 (955.9) 진화가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행운은 좋은 영, 불운은 나쁜 영과 연결되었다. 변하는 환경에 할 수 없이 적응하는 불편은 불운으로, 귀신들이 불만을 가진 것으로 여겼다. 원시인은 타고난 예배 욕구와 우연에 관한 잘못된 개념으로부터 천천히 종교를 진화시켰다. 문명화된 사람은 이 우연의 사태를 극복하려고 보험이라는 계획을 마련한다. 현대 과학은 가상하는 영과 변덕스러운 신들 대신에 보험 회계사에게 수학으로 계산하게 한다.
86:6.5 (956.1) 지나가는 각 세대는 선조들의 어리석은 미신에 빙그레 웃으며, 한편 깨우친 후손들이 더욱 빙그레 웃게 만들, 잘못된 생각 및 숭배를 계속 마음 속에 품는다.
86:6.6 (956.2) 그러나 마침내 원시인의 머리가 모든 타고난 생물학적 욕구를 초월하는 생각으로 차 있었다. 드디어 사람은 물질적 자극에 대한 반응보다 더 큰 어떤 것에 바탕을 둔 사는 기술을 발전시키려 하였다. 원시의 철학적 생활 방침의 시초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초자연적 생활 기준이 바야흐로 나타나려 했다. 왜냐하면 영 귀신이 성날 때 불운을 쏟아 붓고 기쁠 때 행운을 던진다면, 인간의 행동을 그에 따라서 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옳고 그른 것의 개념이 마침내 진화했고, 땅에서 어떤 계시가 있기 오래 전에, 이 모두가 일어났다.
86:6.7 (956.3) 이 개념이 고개를 들자, 늘 기분이 상한 영을 달래려는 길고도 쓸데없는 싸움, 진화 종교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신세, 그리고 무덤과 성전, 희생물과 사제(司祭)들에게 인간의 노력을 바치는, 오래 계속된 낭비가 시작되었다.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값을 치렀으나, 그 모든 비용을 치를 만했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사람은 비교적 옳고 그른 것을 자연스럽게 의식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윤리가 태어난 것이다!
86:7.1 (956.4) 야만인은 보험의 필요성을 느꼈고, 따라서 불운에 대비하여 마법의 보험 증서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두려워하고 미신을 믿고 공포에 떨고, 사제에게 선물을 바침으로 벅찬 값을 기꺼이 치렀다. 원시 종교는 단지 숲에서 사는 위험에 대하여 보험료를 내는 것이었다. 문명화된 사람은 산업에서 생기는 사고(事故)와 현대 생활 형태의 비상 사태에 대비하여 물질적 보험료를 낸다.
86:7.2 (956.5) 현대 사회는 사제와 종교의 영역으로부터 보험 장사를 빼앗고 있으며, 이것을 경제학 분야에 놓는다. 종교는 무덤을 지나서 생명을 보장하는 데 점점 더 관계하고 있다. 현대인, 적어도 생각하는 자는, 운을 통제하려고 이제 더 물 쓰듯 보험료를 내지 않는다. 불운에 대비하는 보험 계획으로서 종교가 예전에 작용한 것과 반대로, 종교는 더 높은 철학 수준으로 천천히 올라가고 있다.
86:7.3 (956.6) 그러나 이 옛 종교 관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숙명론에 젖고 희망 없이 비관에 빠지는 것을 막았다. 운명에 영향을 미치려고 적어도 무언가 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귀신을 두려워하는 종교는, 사람에게 귀신의 행동을 규제해야 한다는 것, 인간의 운명을 통제하는 초물질 세계가 있다는 것을 마음에 심어 주었다.
86:7.4 (956.7) 현대의 문명화된 종족들은 귀신 공포증이 행운과 흔한 생존의 불평등을 설명한다는 생각을 막 벗어나고 있다. 인류는 귀신과 영 때문에 불운이 생긴다고 설명하는 사슬에서 해방을 얻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생의 부침(浮沈)에 영적 원인이 있다는 그릇된 교리를 내버리고 있는 한편, 인간의 모든 불평등을 정치적 부적응, 사회의 불공평, 산업의 경쟁에 돌리라고 명령하는, 거의 똑같이 거짓된 가르침을 놀랍게도 기꺼이 받아들일 태도를 나타낸다. 그러나 새로운 입법, 자선 행위의 성장, 산업 재조직의 증가는, 그 자체가 아무리 좋아도, 출생한 사실과 생활에서 생기는 우연을 고쳐주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사실을 파악하고, 자연 법칙 안에서 지혜롭게 조종하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바라는 것을 얻고 바라지 않는 것을 피하게 만들 것이다. 과학적 행동으로 이끄는 과학 지식이 이른바 우연히 생기는 재난에 대하여 유일한 해독제이다.
86:7.5 (957.1) 산업과 전쟁, 노예 제도와 국가 정부는 자연 환경 안에서 사람이 사회적으로 진화하는 데 반응하여 생겨났다. 종교도 비슷하게 가상(假想)하는 귀신 세계, 망상하는 환경에 대하여 반응함으로 생겨났다. 종교는 자아를 유지하는 진화된 발전이었고, 최초에는 그릇된 개념이고 철저히 논리가 없었는데도, 효과가 있었다.
86:7.6 (957.2) 원시 종교는 헛된 두려움의 강력하고 거창한 힘을 이용해서, 초자연의 기원을 가진 진정한 영적 세력, 곧 생각 조절자의 수여를 위해서 인간 지성의 토양을 준비시킨다. 신다운 조절자는 그 뒤로 언제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태도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변화시키려고 수고해 왔다. 진화는 느린가 싶지만, 틀림없이 효과가 있다.
87:0.1 (958.1) 귀신 숭배는 불운의 위험을 상쇄하는 수단으로서 진화했으며, 그 원시적 종교 관행을 지키는 것은 불운을 걱정하고 죽은 자를 지나치게 두려워함으로 생긴 결과였다. 이 초기 종교 가운데 아무것도 신을 인식하거나 초인간을 존경하는 것과 그다지 상관이 없었다. 그러한 의식(儀式)은 대체로 소극적이었고, 귀신을 피하거나 내쫓거나 강제하려고 고안되었다. 귀신 숭배는 재난에 대한 보험보다 더한 것도 덜한 것도 아니었고, 더 높은 앞날의 이익을 위한 투자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87:0.2 (958.2) 사람은 귀신 숭배와 오랫동안 격심한 투쟁을 해왔다. 인간의 역사에서 아무것도, 귀신 및 영 공포증에 사람이 비참하게 노예가 된 이 그림보다 더 측은한 느낌을 일으키도록 예정되지 않았다. 바로 이 두려움이 태어나면서, 인류는 종교적으로 진화하는 오르막길에서 발을 내디디었다. 인간의 상상력은 자아(自我)의 바닷가를 떠나갔고, 참된 신, 진정한 하나님 개념에 이를 때까지 또 다시 정박할 곳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87:1.1 (958.3) 죽음이 육체로부터 또 하나의 귀신을 해방시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을 무서워했다. 옛날 사람들은 죽음을 방지하려고, 새 귀신과 다투어야 하는 곤경을 피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귀신이 죽음의 장면을 떠나서, 죽은 자의 땅으로 길을 떠나게 유인하려고 언제나 안달하였다. 죽을 때 귀신이 솟아나서 나중에 귀신의 고향으로 떠나기까지의 과도기라 생각된 동안에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귀신을 가장 무서워했고, 이 귀신의 고향은 거짓 하늘에 대한 흐릿한 원시 개념이었다.
87:1.2 (958.4) 귀신이 초자연 능력이 있다고 믿기는 했어도, 야만인은 귀신이 초자연 지능을 가졌다고는 도저히 생각하지 않았다. 귀신들의 눈을 가리고 속이려는 노력으로 많은 계교와 전술이 쓰였다. 문명화된 사람은 아직도 경건함을 겉으로 표시하면 어떻게든 전지(全知)한 신조차 속일 것이라는 희망에 기대를 많이 건다.
87:1.3 (958.5) 원시인은 질병을 두려워했는데, 병이 흔히 죽음의 전조(前兆)인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부족의 주술사가 앓는 사람을 고치지 못하면, 아픈 사람을 보통 가족 오두막에서 옮겼고, 더 작은 오두막으로 데려가거나, 아니면 노천에서 혼자 죽도록 버려두었다. 죽음이 일어난 집은 보통 부수어 버렸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집을 반드시 피했고, 이 두려움은 시초 인간으로 하여금 튼튼한 거처를 짓지 못하게 막았다. 두려움은 또한 영구한 촌락이나 도시의 건설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87:1.4 (958.6) 야만인들은 씨족의 한 사람이 죽었을 때 밤을 새우고 이야기했다. 시체 근처에서 잠이 들면 그들도 죽을까 두려워했다. 시체로부터 전염(傳染)되는 것은 죽은 자를 무서워하는 것이 옮음을 입증했고, 모든 민족이 죽은 자와 접촉이 있은 뒤에 개인을 깨끗하게 하려고 고안된 공들인 정화(淨化) 예식을 언젠가 이용하였다. 옛 사람들은 시체에게 빛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시체를 결코 어둠 속에 남아 있도록 버려두지 않았다. 20세기에 죽은 사람의 방에서 아직도 촛불을 켜며, 사람들은 아직도 죽은 자와 함께 깨어 있다. 이른바 문명화된 사람은 생활 철학에서 시체를 두려워하는 생각을 아직도 완전히 없앴다고 할 수 없다.
87:1.5 (959.1) 그러나 이 모든 두려움과 상관 없이, 사람들은 여전히 귀신을 속이려고 애썼다. 죽은 사람의 오두막이 파괴되지 않았으면, 결코 문이 아니라, 벽에 있는 구멍을 통해서 시체를 옮겼다. 귀신을 혼란에 빠지게 만들고, 귀신이 머무르는 것을 막고 돌아오지 못하게 보장하려고 이 절차를 밟았다. 조객(弔客)들은 또한 귀신이 따라오지 않도록 장례식으로부터 다른 길로 돌아갔다. 귀신이 무덤에서 되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장하려고, 뒷걸음질과 수십 가지 다른 전략이 쓰였다. 남녀는 귀신을 속이려고 흔히 옷을 바꾸어 입었다. 애도하는 복장은 살아남은 사람들을 변장시키려고, 후일에는 죽은 자에게 존경을 표시하고, 그래서 귀신을 달래려고 고안되었다.
87:2.1 (959.2) 종교에서 귀신을 달래는 소극적 계획은 영에게 강요하고 부탁하는 적극적 계획보다 오랫동안 앞섰다. 인간의 첫 숭배 행위는 방어(防禦) 현상이요 존경 현상이 아니었다. 현대인은 화재에 대비해서 보험 드는 것을 현명하게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야만인은 귀신이 불운을 일으키는 것에 대비하여 보험을 마련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보장을 얻으려는 노력이 귀신 숭배의 기술과 의식이었다.
87:2.2 (959.3) 한때 귀신의 큰 소망은 방해 없이 저승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빨리 “눕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귀신을 눕히는 의식을 치를 때, 살아 있는 자의 행위에서 무엇을 저지르거나 빠뜨리는 무슨 잘못도 귀신이 귀신 나라로 가는 것을 분명히 더디게 했다. 이것은 귀신을 불쾌하게 만든다고 믿었고, 성난 귀신은 재난과 불운과 불행의 근원이라 생각되었다.
87:2.3 (959.4) 장례식은 귀신의 혼이 미래의 집을 향하여 떠나도록 유인하려는 사람의 노력에서 생겨났고, 장례식의 설교는 최초에, 새 귀신이 어떻게 거기에 가는가 가르치려고 고안되었다. 귀신의 나그네 길을 위하여 먹을 것과 옷가지를 마련해 주는 것이 풍습이었고, 이 물건들을 무덤 안이나 가까이에 놓았다. 야만인은 “귀신을 눕히는” 데―귀신을 무덤 근처에서 쫓아내는 데―사흘에서 1년이 걸린다고 믿었다. 에스키모인은 혼이 몸과 함께 사흘 동안 머무른다고 아직도 믿는다.
87:2.4 (959.5) 사람이 죽은 뒤에는 귀신이 집으로 마음이 끌려 돌아오지 않도록 침묵을 지키거나 애도하였다. 자학(自虐)―상처내기―는 보통의 애도 형태였다. 머리가 깨인 많은 선생이 이것을 막으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다. 단식과 기타 형태의 극기(克己)는 귀신을 기쁘게 한다고, 저승을 향하여 실제로 떠나기 전, 근처에 숨어 있는 과도기에, 그 귀신은 산 사람의 고통을 기뻐한다고 생각되었다.
87:2.5 (959.6) 오랫동안 그리고 빈번히 애도하고 활동하지 않는 기간은 문명의 진보에 커다란 장애물의 하나였다. 해마다 몇 주, 아니 몇 달까지도 이렇게 비생산적이고 쓸데없는 애도에 낭비되었다. 직업으로 애도(哀悼)하는 자들이 장례식 때 고용되었다는 사실은 애도가 의식(儀式)이요, 슬픔의 증거가 아님을 가리킨다. 현대인은 존경해 마지않아서, 또는 사별한 것이 슬퍼서 죽은 자를 애도할지 모르지만, 옛날 사람들은 두려워서 그렇게 했다.
87:2.6 (959.7) 죽은 자의 이름은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그 이름은 흔히 언어에서 추방되었다. 이러한 이름은 금기(禁忌)가 되었고, 이 방법으로 언어는 항상 빈곤하게 되었다. 이것은 결국 “사람이 결코 언급하지 않는 이름이나 날”과 같은 상징 언어와 비유적 표현이 늘어나게 만들었다.
87:2.7 (960.1) 옛날 사람들은 몹시 귀신을 쫓아버리고 싶어서, 그들이 일생에서 바랐을까 싶은 것을 모조리 귀신에게 내밀었다. 귀신들은 아내와 하인들을 바랐다. 살림이 넉넉한 야만인은 죽을 때 적어도 노예 아내 하나가 산 채로 파묻히기를 기대하였다. 나중에는 과부가 남편의 무덤에서 목숨을 끊는 것이 풍습이 되었다. 아이가 죽었을 때, 어른 귀신이 따라가서 아이 귀신을 돌보도록, 어머니나 아주머니나 할머니가 흔히 목 졸려 죽음을 당했다. 이렇게 제 목숨을 버린 자들은 기꺼이 그렇게 했다. 정말로, 그들이 관습을 어기고 살았더라면, 귀신이 노여워한다는 두려움은 원시인이 누렸던 얼마 안 되는 그런 즐거움마저 인생에서 빼앗았을 것이다.
87:2.8 (960.2) 죽은 추장을 따라가라고 큰 떼의 종들을 보내는 것이 풍습이었다. 노예들은 그 주인이 죽었을 때, 귀신 나라에서 그를 섬기라고 죽음을 당했다. 보르네오인은 아직도 안내하는 동반자를 마련한다. 노예는 죽은 주인과 함께 귀신의 길을 떠나라고 창에 찔려 죽는다. 살인 당한 사람의 귀신은 자기를 죽인 자의 귀신을 노예로 가지기를 기뻐한다고 믿었다. 이 개념은 사람들이 머리 사냥을 하도록 유인했다.
87:2.9 (960.3) 귀신은 먹을 것의 냄새를 즐긴다고 생각되었다. 장례식 잔치에 먹을 것을 바치는 것은 한때 보편적이었다. 먹기 전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원시 방법은, 주문을 중얼거리면서 영들을 달래는 목적으로 불 속에 먹을 것을 조금 던지는 것이었다.
87:2.10 (960.4) 죽은 자는 살았을 때 가졌던 연장과 무기(武器)의 귀신을 쓴다고 생각되었다. 물건을 깨뜨리는 것은 “그것을 죽이는” 것이며, 따라서 귀신 나라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떠나가라고 그 귀신을 놓아 주었다. 재산도 태우거나 파묻어 희생하였다. 옛날 장례식의 낭비는 엄청났다. 후일의 종족들은 종이 모형을 만들어서, 이 죽음의 희생물을 바칠 때 진짜 물건과 사람 대신에 그림으로 바꿔치웠다. 친척 상속이 재산을 태우고 파묻는 것을 대체했을 때, 문명에 큰 진보가 있었다. 이로쿼이 인디안은 장례식의 낭비에 많은 개혁을 실행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재산 보존은 그들로 하여금 북부 홍인 가운데 가장 강력한 자가 되게 만들었다. 현대인은 귀신을 무서워한다고 생각되지 않지만, 풍습은 질기며, 땅에 있는 많은 재산이 아직도 장례 의식과 사망 예식에 소모된다.
87:3.1 (960.5) 깊어지는 귀신 숭배는 조상 숭배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조상 숭배가 보통 귀신, 그리고 상급 영, 곧 발달하는 신들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초기의 신들은 다만 세상을 떠나 영화롭게 된 인간이었다.
87:3.2 (960.6) 조상 숭배는 최초에 숭배라기보다 조상을 두려워하는 것이었으나, 그러한 관념은 귀신을 두려워하고 숭배하는 태도를 널리 퍼뜨리는 데 분명히 기여했다. 초기의 조상 및 귀신 숭배자들은 하품할 때 몸 속으로 나쁜 귀신이 들어가지 않을까 하여 하품하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87:3.3 (960.7) 양자(養子)를 얻는 관습은 혼이 평안하고 잘 가기 위해서 죽은 뒤에 누군가가 공물을 꼭 마련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야만인은 동료의 귀신들을 두려워하며 살았고, 죽은 뒤에 자기 귀신의 안전한 처신을 계획하는 데 남는 시간을 썼다.
87:3.4 (960.8) 대부분의 부족들은 적어도 1년에 한 번, 온갖 귀신의 잔치를 시작하였다. 로마인은 해마다 열두 번 귀신 잔치와 그에 따르는 예식이 있었다. 1년의 반은 이 옛 종파들과 연결된 어떤 종류의 예식에 바쳤다. 어느 로마 황제는 축제일을 1년에 135일로 줄임으로 이 풍습을 개혁하려고 애썼다.
87:3.5 (961.1) 귀신 숭배는 줄곧 진화하고 있다. 귀신들이 불완전한 단계에서 더 높은 단계의 존재로 지나간다고 상상되자, 그 숭배는 결국 영, 아니 신들까지도 예배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상급 영들에 관한 다양한 관념과 상관 없이, 모든 부족과 종족이 한때 귀신을 믿었다.
87:4.1 (961.2) 귀신 공포증은 모든 세계 종교의 근원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부족이 귀신들이 한 종류라는 옛 관념에 집착하였다. 그들은 귀신이 기뻐할 때 사람의 운이 좋고, 귀신이 성날 때는 운이 나쁘다고 가르쳤다.
87:4.2 (961.3) 귀신을 두려워하는 숭배가 확대됨에 따라서 상급 종류의 영, 어떤 개별 인간이라고 신분을 확인할 수 없는 영들에 대한 인식이 생겨났다. 이들은 귀신 나라의 영토를 지나서 더 높은 영의 영토로 나아간 영, 졸업하거나 영화롭게 된 영들이었다.
87:4.3 (961.4) 두 종류의 영 귀신이 있다는 개념은 세계 전역에 두루, 느리지만 확실하게 진보했다. 이 새로운 이영(二靈) 사상은 한 부족에서 다른 부족으로 퍼질 필요가 없었다. 세계 전역에 걸쳐서 따로 솟아났다. 확대되는 진화된 지성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 한 개념의 힘은 그 현실성이나 논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념의 뚜렷함과 개념을 널리 쉽게 간단히 적용하는 데 있다.
87:4.4 (961.5) 더 후에 사람의 상상력은 좋은 초자연의 매체와 나쁜 매체의 개념을 상상했다. 어떤 귀신은 결코 착한 영의 수준으로 진화하지 않았다. 귀신을 두려워하는 초기의 일영(一靈) 사상은 차츰 이영 사상으로 진화했고, 이것은 땅의 일을 눈에 보이지 않게 통제한다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마침내 행운과 불운에는 각자를 통제하는 자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두 종류 사이에서, 불운을 가져오는 집단은 더 활발하고 수가 많다고 믿었다.
87:4.5 (961.6) 좋은 영, 나쁜 영의 교리가 마침내 성숙했을 때, 그것은 모든 종교 관념 가운데 가장 널리 퍼지고 오래 지속하였다. 이 이원 사상은 큰 종교 철학의 진보를 의미했는데,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행운과 불운을 설명하게 하고, 한편 동시에 어느 정도 일관성 있게 행동하는 초인간 존재를 믿게 하기 때문이다. 영들은 좋든지 아니면 나쁘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을 수 있었다. 가장 원시적 종교의 일영 사상에 담긴 초기 귀신들이 완전히 변덕스럽다고 상상했던 것처럼, 이 영들도 그렇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사람은 일관성 있게 행동하는 초인간 세력을 마침내 상상할 수 있었고, 이것이 종교 진화의 역사 전체에서, 인간 철학의 성장에서, 가장 중대한 진리의 발견 중에 하나였다.
87:4.6 (961.7) 그러나 진화된 종교는 이영 사상의 개념을 얻으려고 끔찍한 값을 치렀다. 사람이 초기에 가진 철학은, 하나는 좋은 영이고 다른 하나는 나쁜 영, 오직 두 가지의 영을 가정함으로, 영의 불변성과 현세의 행운의 변화를 절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사람으로 하여금 우연의 변수를 변하지 않는 초인간 세력의 개념과 조화할 수 있게 만들었지만, 이 교리는 그 뒤로 계속, 종교가들이 우주의 통일성을 파악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진화 종교의 신들은 일반적으로 암흑 세력의 반대에 부딪쳤다.
87:4.7 (962.1) 이 모든 것에 나타나는 비극은, 이러한 생각들이 사람의 원시 지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 온 세계에 나쁘거나 화목하지 않은 영이 정말로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런 불행한 상황은 칼리가스티아 반란이 있을 때까지 생기지 않았고, 오순절까지만 지속되었다. 선과 악이 우주에서 대등하다는 개념은 20세기에도 인간의 철학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세계 종교의 대부분은 귀신 숭배가 고개를 들던 시절, 아득히 오랜 시절에 태어난 이 문화적 표시를 아직도 지닌다.
87:5.1 (962.2) 원시인은 영과 귀신이 거의 무제한의 권리를 가졌으나 아무런 의무가 없다고 보았다. 영들은 사람이 여러 가지 의무가 있어도 아무 권리가 없다고 여긴다고 생각되었다. 사람이 자기의 영적 임무를 항상 이행하지 못해서 영들이 사람을 업신여긴다고 믿었다. 인류는 귀신이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값으로 귀신 섬기는 세금을 계속 부과한다고 일반적으로 믿었고, 아주 작은 불운도 귀신이 활동한 탓으로 돌렸다. 초기의 인간들은 신들이 받을 어떤 명예를 그들이 간과하는가 아주 두려워해서, 알려진 모든 영에게 희생물을 바친 뒤에, 그저 철저히 안전하게 해두려고, “알지 못하는 신들”에게 다시 한 번 바쳤다.
87:5.2 (962.3) 이제 단순한 귀신 숭배에 더 진보되고 비교적 복잡한 영 및 귀신을 숭배하는 풍습이 뒤따랐으며, 이것은 사람의 원시적 상상(想像) 속에서 상급의 영들이 진화함에 따라서 그들을 섬기고 숭배하는 것이었다. 종교 예식은 영이 진화하고 진보하는 데 발걸음을 맞추어야 한다. 확대된 숭배는 초자연 존재들을 믿는 것과 관련하여 실행되는 자아 유지 기술, 곧 영 환경에 대한 자아의 조정이었을 뿐이다. 산업 조직과 군사 조직은 자연 및 사회 환경에 대한 조정이었다. 결혼이 남녀의 요구를 채우려고 생겨난 것처럼, 종교적 조직은 상급의 영 세력과 영적 존재들을 믿는 관념에 반응하여 진화했다. 종교는 사람이 우연의 신비에 관한 망상에 적응하는 것을 나타낸다. 영을 두려워하고 후일에 영을 숭배하는 것은 불행에 대비하는 보험으로서, 번영을 보장하는 방책으로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87:5.3 (962.4) 야만인은 좋은 영들이 자기 일을 하느라고 다니고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 거의 없다고 상상한다. 기분이 좋은 상태로 두어야 하는 것은 나쁜 귀신과 영들이었다. 따라서, 원시 민족들은 호의를 가진 영보다 악의(惡意) 있는 귀신들에게 더 주의를 기울였다.
87:5.4 (962.5) 인간의 번영은 특히 악한 영들이 질투하게 만든다고 생각되었고, 그들이 앙갚음하는 방법은 인간 대리자를 통해서, 그리고 악한 눈의 기술을 써서 보복하는 것이었다. 영을 피하는 것과 상관되는 단계의 숭배는, 악한 눈의 간계와 상당히 관계되었다. 악한 눈을 무서워하는 것은 거의 세계적으로 퍼졌다. 아름다운 여인들은 악한 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베일을 썼다. 나중에는 아름답게 여김받고 싶어 하는 뭇 여인이 이 관습을 따랐다. 나쁜 영을 이렇게 두려워한 것 때문에 어두워진 뒤에 아이들을 바깥에 내보내는 일이 드물었고, 옛날의 기도는 언제나 “악한 눈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는 부탁을 담았다.
87:5.5 (962.6) 코란은 한 장 전체를 악한 눈과 주문(呪文)에 배당하며, 유대인은 이를 믿었다. 남근(男根) 숭배 전부가 악한 눈에 대한 방어로서 생겨났다. 생식 기관은 악한 눈을 힘없게 만드는 유일한 주물로 생각되었다. 악한 눈은 태어나기 전에 부모가 아이들에게 감화를 주는 것, 곧 어머니의 영향에 관하여 첫 미신이 생기게 하였고, 이 유행은 한때 거의 보편적이었다.
87:5.6 (963.1) 질투는 인간의 뿌리 깊은 특성이다. 따라서 원시인은 질투를 초기 신들의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사람은 일단 귀신 속이기를 실행한 뒤에, 곧 영들을 속이기 시작했다. “영들이 우리의 아름다움과 번영을 시샘하면, 우리 스스로를 볼품 없이 만들고 우리의 성공을 하찮게 말하리라” 말했다. 그러니까, 초기의 겸손은 자아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시샘하는 영들을 따돌리고 속이려는 시도였다.
87:5.7 (963.2) 인간의 번영을 영들이 질투하게 되는 것을 방지하려고 채용한 방법은 운 좋거나 많이 사랑받는 어떤 물건이나 사람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다. 자신이나 가족에게 칭찬하는 말을 깎아내리는 관습은 이 방법으로 기원을 가졌고, 그것은 결국 문명화된 겸손ㆍ자제ㆍ예의로 진화했다. 같은 동기와 발걸음을 맞추어, 못나 보이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아름다움은 영들의 시샘을 일으켰고, 아름다움은 죄 많은 인간의 자존심을 표시하였다. 야만인은 못난 이름을 찾았다. 이 유행의 특성은 예술의 진보에 큰 장애가 되었고, 세계를 오랫동안 어둠침침하고 보기 싫게 만들었다.
87:5.8 (963.3) 영을 숭배하던 시절에, 목숨은 기껏해야 노름이요 영이 통제함으로 생기는 결과였다. 영들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이용될 때를 제쳐놓고, 사람의 앞날은 노력이나 부지런이나 재능의 결과가 아니었다. 영을 달래는 예식은 무거운 짐이었고, 인생을 지루하고 거의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대대로 숱한 민족이 이 초월 귀신의 교리를 개선하려고 애썼지만, 어떤 세대도 아직까지 감히 그것을 통째로 물리치려 하지 않았다.
87:5.9 (963.4) 영들의 의도와 뜻은 전조(前兆)ㆍ신탁ㆍ징조의 수단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 영의 말씀은 점치기ㆍ예언ㆍ마술ㆍ시련ㆍ점성술로 풀이하였다. 그 숭배 전체가 이 가장된 뇌물을 통해서 영들을 달래고, 만족시키고 매수(買收)하려고 고안된 계획이었다.
87:5.10 (963.5) 이처럼 새롭고 확대된 세계 철학이 성장하였고 이는 다음으로 이루어졌다:
87:5.11 (963.6) 1. 의무―영들을 기분 좋게, 적어도 중립 상태로 두기 위해서 해야 할 일.
87:5.12 (963.7) 2. 권리―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영들을 적극 설득하려고 고안된 바른 행위와 예식.
87:5.13 (963.8) 3. 진리―영들을 똑똑히 이해하는 것, 영들에 대한 태도, 따라서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
87:5.14 (963.9) 옛날 사람들이 앞날을 알려고 애쓴 것은 단지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불운을 피하고 싶어했다. 점치기는 단지 곤경을 피하려는 시도였다. 이 시절에 꿈은 앞을 예언한다고 생각되었고, 한편 보통 아닌 것은 모두 전조라고 생각되었다. 오늘날도 문명화된 민족들은 징조와 표시, 그리고 옛날의 깊어지는 귀신 숭배에서 기타 미신의 잔재를 믿는 괴로움에 시달렸다. 사람은 아주 느리고 고통스럽게 진화 생명의 눈금을 올라가는 데 사용한 이 방법들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버릴 것이다.
87:6.1 (963.10) 사람들이 귀신만 믿었을 때, 종교 의식은 더 개인적이고, 더 체계가 없었지만, 높은 영들을 인식한 것은 그들을 다루는 데 “높은 영적 방법”의 이용이 필요하게 만들었다. 영을 달래는 기법을 개선하고 다듬으려는 이 시도는 직접 영들에 대한 방어 조치를 고안하게 만들었다. 땅에서 사는 인생에서 작용하는, 통제할 수 없는 세력 앞에 정말로 사람은 무력하게 느꼈고, 그의 열등감은 어떤 보상하는 조정, 곧 사람 대 우주의 일방적인 싸움에서, 승산(勝算) 있게 만드는 어떤 기법을 찾으려고 애쓰게 만들었다.
87:6.2 (964.1) 숭배의 초기 시절에 귀신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려는 사람의 노력은 달래기, 곧 뇌물로 불행을 피하려는 시도에 국한되었다. 귀신 숭배의 진화가 나쁜 영 뿐 아니라 좋은 영이 있다는 개념에 이르기까지 진보함에 따라서, 이 예식들은 더 적극적 성질을 가진 시도로, 행운을 얻으려는 노력으로 바뀌었다. 사람의 종교는 이제 더 철저하게 소극적인 것이 아니었고, 사람은 행운을 얻으려는 노력을 그만두지도 않았다. 얼마 안 되어 사람은 영의 협동을 강제할 수 있는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종교가는 스스로 지어낸 영 환상의 끊임없는 요구 앞에 이제는 더, 방비 없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야만인은 영이 행위하도록 강제하고 영의 도움을 강요할 수 있는 무기(武器)를 비로소 발명한다.
87:6.3 (964.2) 사람의 첫 방어 노력은 귀신을 향한 것이었다.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살아 있는 자는 죽은 자에게 저항하는 방법을 비로소 고안하였다. 귀신을 놀라게 하고 쫓아 버리기 위하여 많은 기술이 개발되었고, 이 가운데 다음 것을 늘어놓아도 좋겠다:
87:6.4 (964.3) 1. 목을 자르고 몸을 무덤에 묶어 놓기.
87:6.5 (964.4) 2. 죽음이 있었던 집에 돌 던지기.
87:6.6 (964.5) 3. 시체를 거세하거나 시체의 다리를 분지르기.
87:6.7 (964.6) 4. 돌 밑에 묻기, 현대 묘비의 한 기원.
87:6.8 (964.7) 5. 화장(火葬), 귀신 문제를 막으려고 후일에 발명한 것.
87:6.11 (964.10) 귀신은 시끄러우면 들볶이고 놀란다고 생각되었다. 소리지르기, 종 소리, 북 소리는 산 사람들로부터 귀신을 쫓아냈다. 이러한 옛 방법은 죽은 자를 위하여 “밤샘”할 때 아직도 유행한다. 나쁜 냄새의 혼합물이 반갑지 않은 영들을 쫓아내려고 이용되었다. 영들이 자신을 보았을 때 허겁지겁 달아나라고 영들의 소름끼치는 형상이 세워졌다. 개는 귀신이 다가오는 것을 탐지할 수 있다, 개는 높은 소리로 짖어서 경고한다, 귀신이 가까이 있을 때 수탉이 울곤 한다고 믿었다. 풍향계로서 수탉을 쓰는 것은 이 미신이 지속된 것이다.
87:6.12 (964.11) 귀신을 막는 데는 물이 가장 좋은 방책이라고 생각되었다. 거룩한 물, 곧 사제들이 발 씻은 물은 모든 다른 형태보다 뛰어났다. 불과 물은 다 귀신들이 뚫고 지나갈 수 없는 장벽이라고 믿었다. 로마인은 시체 둘레에 물을 세 번 날랐고, 20세기에 몸에 신성한 물을 뿌리고 공동 묘지에서 손씻는 것은 아직도 유대인의 의식(儀式)이다. 세례는 후일에 물로 행하는 의식의 특성이었다. 원시의 목욕은 종교 예식이었다. 요즘에 와서야 목욕은 위생 관습이 되었다.
87:6.13 (964.12) 그러나 사람은 귀신을 강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종교 의식과 기타의 관습을 통해서, 사람은 곧 영의 행위를 강요하려고 애썼다. 귀신 쫓아내기는 한 영을 통제하거나 쫓아내려고 다른 영을 이용하는 것이며, 이 전술은 또한 귀신과 영들을 놀라게 하는 데 이용되었다. 좋은 세력과 나쁜 세력이 있다는 이영(二靈) 개념은 한 힘이 다른 힘과 싸우게 만들려고 애쓰는 충분한 기회를 사람에게 주었다. 왜냐하면 힘센 사람이 약한 사람을 해치울 수 있다면 힘센 영은 분명히 열등한 귀신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원시의 저주(詛呪)는 작은 영들을 겁주려고 고안된 강제하는 관습이었다. 나중에 이 풍습은 적들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87:6.14 (965.1) 더 오래 전에 있던 도덕 관습으로 돌아감으로 영과 반신반인(半神半人)들이 바람직하게 행동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고 사람들이 오랫동안 믿었다. 현대인은 똑같은 과정을 밟는 죄가 있다. 너희는 서로에게 보통 말, 날마다 쓰는 말로 이야기하지만, 기도할 때는 다른 세대의 더 오래 된 말씨, 이른바 엄숙한 말씨에 의존한다.
87:6.15 (965.2) 이 신조는 또한 성전 매춘과 같은, 성교의 성질을 가진 많은 종교 의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설명한다. 원시의 풍습으로 이렇게 돌아가는 것은 많은 재난을 막는 확실한 보호 조치라 생각되었다. 머리가 단순한 이 민족들의 경우에, 모든 그러한 연출에는 현대인이 난교(亂交)라고 부를 만한 점이 도무지 없었다.
87:6.16 (965.3) 다음에 의식(儀式)에서 서약하는 관습이 왔고, 곧 뒤이어 종교적 서약과 거룩한 맹세가 따랐다. 이 맹세의 대부분에 자학(自虐)과 자기 몸 잘라내기가 따랐고, 나중에는 단식(斷食)과 기도가 뒤따랐다. 금욕은 나중에 확실한 강제 조치라고 생각되었다. 이것은 성욕을 억제하는 문제에서 특히 참말이었다. 그래서 원시인은 그의 종교 관습에서 굳은 결심으로 내핍 생활을 일찍부터 개발하였고, 이것은 달가워하지 않는 영들로부터 모든 그러한 고통과 결핍에 대해서 좋게 반응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 의식으로서, 자학과 금욕이 효과가 있다는 믿음이었다.
87:6.17 (965.4) 현대인은 드러내놓고 영들을 강요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도 신과 협상하려는 성향을 나타낸다. 현대인은 아직도 맹세하고, 나무를 두드리고, 손가락을 포개고[1] [36], 어떤 낡아빠진 구절을 외우며 침 뱉는다. 한때 그런 구절은 마력(魔力)이 있는 표현이었다.
87:7.1 (965.5) 종파와[2] [37] 같은 사회 조직은 그것이 도덕적 감각과 종교적 충성을 보존하고 자극하는 상징을 마련하기 때문에 지속했다. 예배는 “오래 된 가족들”의 전통으로부터 생겨났고, 확립된 제도로서 지속되었다. 모든 가족은 어떤 종류의 예배를 지니고 있다.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이상은 어떤 지속되는 상징을 붙잡는다―살아남는 것을 보장하고 실현을 확대하는 어떤 문화적 명시 기법을 추구한다―그리고 예배는 감정을 조장하고 만족시킴으로 이 목적을 이룬다.
87:7.2 (965.6) 문명의 아침이 밝아올 때부터 사회의 문화나 종교적 진보에서 마음을 끄는 운동마다 의식(儀式), 상징적 예식을 개발하였다. 의식하지 않고 성장할수록 이 예식은 더 단단히 신봉자들을 붙잡았다. 예배는 정서를 보존하고 감동을 주었지만, 언제나 사회의 재편성과 영적 진보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87:7.3 (965.7) 예배하는 종파가 언제나 사회의 진화를 더디게 만들었는데도, 도덕 기준과 영적 이상을 가진 현대의 허다한 신봉자가 아무런 적절한 상징이―서로 밀어줄 아무런 종파가―소속해야 할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유감이다. 그러나 종교적 제사는 제조될 수 없으며 성장해야 한다. 어떤 두 집단의 예배도 권한으로 그 의식(儀式)을 멋대로 표준화하지 않는 한, 동일할 수 없다.
87:7.4 (965.8) 초기 기독교의 예배는 일찍이 상상하거나 고안한 어떤 의식 중에서도 가장 효과 있고, 마음을 끌고, 오래 가는 것이었으나, 그 가치의 많은 부분은 최초의 기본 신조들 가운데서 허다한 것이 없어짐으로 과학 시대에 파손되었다. 기독교의 예배는 많은 기초적 개념을 잃어버림으로 활력을 잃었다.
87:7.5 (965.9) 과거에는 예배가 탄력성 있고 그 상징이 확대될 수 있을 때 진리가 빨리 자라고 자유롭게 확대되었다. 풍부한 진리와 적응할 수 있는 예배는 사회의 빠른 진보를 유리하게 만들었다. 의미 없는 예배 의식은 철학을 대체하고 논리를 예속하게 만들려고 애쓸 때, 종교를 망친다. 진정한 예배는 성장한다.
87:7.6 (966.1) 단점과 장애물에 상관 없이, 진리가 새롭게 계시될 때마다 새 종파가 생겼고, 예수의 종교를 다시 진술하는 것조차도 새롭고 적당한 상징을 개발해야 한다. 현대인은 새롭고 커지는 개념ㆍ이상ㆍ충성을 나타내는 어떤 적당한 상징을 찾아야 한다. 이 향상된 상징은 종교적 생활, 영적 체험으로부터 생겨나야 한다. 상급 문명의 이 상급 상징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고, 사람이 형제라는 강력한 이상을 담고 있어야 한다.
87:7.7 (966.2) 오래 된 종파들은 너무 자기 중심이었다. 새 종파는 사랑을 쏟음으로 생긴 산물이어야 한다. 오래 된 종파와 마찬가지로, 새 종파는 정서(情緖)를 길러 주고, 감동을 주고 충성을 조장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일해야 한다. 새 종파는 영적 진보를 수월하게 하고 우주의 의미 있는 것들을 향상하며, 도덕적 가치를 키우고 사회 발전을 격려하며, 개인에게 높은 종류의 종교 생활을 자극해야 한다. 새 종파는 생활에서 현세적이며 영원한 목표―사회적이며 영적인―최고의 목표를 마련해야 한다.
87:7.8 (966.3) 어떤 종파도 가정의 생물학적ㆍ사회학적ㆍ종교적 의미에 기초를 두지 않으면, 오래 지속하고 사회 문명의 진보와 개인의 영적 달성에 이바지할 수 없다. 살아남는 종파는 변화가 그치지 않는 가운데서 영구한 것을 상징해야 한다. 그 종파는 항상 바뀌는 사회 변화의 흐름을 통일하는 것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그 종파는 참된 의미를 인식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높이며, 정말로 고귀한 좋은 가치 기준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87:7.9 (966.4) 그러나 새롭고 마음에 드는 상징을 발견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은 현대인이 하나의 집단으로서, 과학적 태도에 집착하고 미신을 피하고, 무지를 무척 싫어하며, 한편 개인으로서 그들 모두가 신비를 몹시 좋아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존경하기 때문이다. 어떤 종파도 어떤 멋진 신비를 담고, 성취할 수 없는 어떤 값진 것을 감추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더 나아가서, 새로운 상징은 그 집단에게 중요할 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의미가 있어야 한다. 어떤 쓸모 있는 상징이라도 그 형태는 개인 스스로 주도권을 가지고 수행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또한 동료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새 종파가 정지된 것이 아니고 힘차게 움직일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적으로 인류가 진보하는 데 무언가 값진 것을 정말로 이바지할지 모른다.
87:7.10 (966.5) 그러나 한 종파는―의식(儀式)이나 표어나 목표와 같은 상징이―너무 복잡하면 작용할 수 없다. 그리고 헌신, 충성스러운 반응을 요구해야 한다. 효과적인 모든 종교는 가치 있는 상징을 어김없이 개발한다. 그 신봉자들은 그러한 의식을, 사람을 가두고 보기 흉하게 만들고 숨막히게 하는, 판에 박힌 예식으로 구체화되는 것을 막는 것이 좋겠다. 그런 예식은 오로지 모든 사회의 진보, 도덕의 진보, 영적 진보에 장애가 되고, 진보를 더디게 만들 수 있다. 어떤 종파도 도덕적 성장을 지체하고 영적 진보를 촉진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종파의 예배는 뼈대요, 그 둘레에 몸소 영적 체험을 가지는 살아 있는 힘찬 몸이―참 종교가―자란다.
88:0.1 (967.1) 생명이 없는 사물이나 동물이나 사람 속으로 영이 들어간다는 개념은 매우 오래 되고 존중받을 믿음이며, 종교의 진화가 시작될 때부터 유행하였다. 신에 들린다는 이 교리는 틀림없는 주물 숭배이다. 야만인이 반드시 주물을 예배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 논리적으로, 그는 안에 들어 있는 영을 숭배하고 존경한다.
88:0.2 (967.2) 처음에, 사람들은 주물 속에 든 영은 죽은 사람의 귀신이라고 믿었고, 나중에는 더 높은 영들이 주물 안에 거한다고 상상했다. 그래서 주물 숭배는 결국, 귀신ㆍ혼ㆍ영을 비롯하여, 악마에 들리는 것에 관한 모든 원시 관념을 합병하였다.
88:1.1 (967.3) 원시인은 언제나 특별한 것은 무엇이나 주물(呪物)로 만들고 싶어했다. 따라서 많은 것이 우연히 기원을 가졌다. 사람이 아프다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가 낫는다. 많은 약(藥)의 명성, 병을 치료하는 우연한 방법에 바로 이런 일이 참말이다. 꿈과 연결된 물건은 주물로 바뀌기가 쉬웠다. 보통 산이 아니라 화산, 별이 아니라 살별이 주물이 되었다. 시초의 인간은 별똥과 운석이 특별한 찾아오는 영이 땅에 도착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88:1.2 (967.4) 처음 주물은 특이하게 표시된 조약돌이었고, 사람은 그 뒤로 늘 “신성한 돌”을 찾았다. 구슬 목거리는 한때 신성한 돌의 수집이요, 부적을 모은 것이었다. 많은 부족이 주물 돌을 가졌지만, 카바와[1] [38]스쿤의 돌과[2] [39] 달리,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불과 물도 또한 초기의 주물이었고, 거룩한 물을 믿는 믿음과 더불어, 불의 숭배는 아직도 남아 있다.
88:1.3 (967.5) 나무 주물은 후일에 개발되었다. 그러나 어떤 부족들 사이에서 자연 숭배가 지속한 것은 어떤 종류의 자연 영이 깃든 부적의 관념을 낳았다. 식물(植物)과 과일이 주물이 되었을 때, 이것들은 먹지 못하는 금기가 되었다. 사과는 이 분류에 처음으로 들어갔다. 레반트 민족들은 결코 사과를 먹지 않는다.
88:1.4 (967.6) 동물이 인간의 살을 먹으면, 그 동물은 주물이 되었다. 이 방법으로 개는 파시 교도의 신성한 동물이 되었다. 주물이 동물이고 귀신이 그 안에 영구히 거하면, 주물 사상은 환생(還生)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여러 방법으로 야만인은 동물을 부러워했다. 그들은 동물보다 우수하다고 느끼지 않았고, 가장 좋아하는 짐승을 따라서 흔히 이름을 지었다.
88:1.5 (967.7) 동물이 주물이 되었을 때 그 주물인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라는 금기가 뒤따랐다. 꼬리 없는 원숭이와 꼬리 있는 원숭이는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일찍부터 주물 동물이 되었다. 나중에는 또한 뱀ㆍ새ㆍ돼지를 비슷하게 여겼다. 한때는 송아지가 주물이었고 우유는 금기였으며, 한편 배설물을 높이 쳐주었다. 팔레스타인에서, 특히 페니키아인이 뱀을 숭배하였는데, 이들은 유대인과 함께 뱀을 악한 영의 대변자라고 생각했다. 많은 현대인도 파충류가 부적의 힘이 있다고 믿는다. 아라비아로부터 계속하여 인도를 통해서, 홍인의 모키 부족의 뱀춤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뱀을 숭배하였다.
88:1.6 (968.1) 한 주에 어떤 날은 주물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금요일을 운이 나쁜 날로 여겨 왔고, 13이라는 수는 나쁜 수였다. 운 좋은 숫자, 3과 7은 후일의 계시로부터 생겼다. 4는 원시인에게 운 좋은 숫자였고, 나침반의 4점을 일찍부터 깨달은 데서 생겨났다. 가축이나 다른 소유물을 세는 것은 운이 나쁘다고 생각되었다. 옛 사람들은 인구 조사, “사람들의 수를 세는 것”을 반드시 반대했다.
88:1.7 (968.2) 원시인은 성교를 부당한 주물로 만들지 않았다. 생식 기능에는 겨우 조금 눈을 돌렸을 뿐이다. 야만인은 자연스러운 생각을 가졌고, 음탕하거나 음란하지 않았다.
88:1.8 (968.3) 침은 효력 있는 주물이었다. 사람에게 침을 뱉어 악마를 쫓아낼 수 있었다. 장로나 상관이 사람에게 침 뱉는 것은 최고의 칭찬이었다. 인체의 여러 부분, 특히 머리카락과 손톱을 잠재 주물로 여겼다. 길게 자라는 추장의 손톱을 높이 쳐주었고, 손톱 깎은 것은 강력한 주물이었다. 두개골 주물을 믿는 관념은 후일에 머리 사냥을 많이 설명한다. 탯줄은 높이 쳐주는 주물이었다. 오늘날도 아프리카에서 그렇게 여긴다. 인류의 처음 장난감은 보존된 탯줄이었다. 흔히 하다시피, 탯줄은 진주와 함께 엮어서 사람의 첫 목거리가 되었다.
88:1.9 (968.4) 꼽추 아이와 절름발이 아이는 주물로 간주되었다. 미치광이는 달에 영향을 받는다고 믿었다. 원시인은 천재와 광기(狂氣)를 가릴 수 없었다. 천치를 때려죽이거나 주물 인물로 모셨다. 히스테리는 점점 더 마술에 대한 대중의 믿음을 확증하였다. 간질병자는 흔히 사제와 주술사였다. 술에 취하는 것은 신들린 형태로 여겼다. 야만인이 흥청거리고 마실 때, 그가 한 짓에 대한 책임을 거부할 목적으로 머리털에 나뭇잎을 달았다. 독과 술 취하게 하는 것은 주물이 되었고, 이것들은 귀신이 들렸다고 생각되었다.
88:1.10 (968.5) 많은 사람이 천재는 지혜로운 귀신이 들린 주술 인물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재주 있는 사람들은 사리를 채우려고, 곧 사기(詐欺)와 술수에 의존하는 것을 배웠다. 주물 인간은 사람보다 높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신답고, 아니 잘못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추장ㆍ임금ㆍ사제ㆍ선지자, 교회 지도자들은 결국, 큰 힘을 쓰고 한없는 권한을 행사한다.
88:2.1 (968.6) 귀신은 육체를 입고 살아 있을 때 자기에게 속했던 어떤 물건에 거하기를 좋아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했다. 이 관념은 현대의 많은 유품(遺品)의 효력을 설명한다. 옛날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의 지도자의 뼈를 숭앙하였고 아직도 많은 사람이 성자(聖者)와 영웅의 유골을 미신으로 두렵게 여긴다. 오늘날도 위인의 무덤에 사람들이 순례한다.
88:2.2 (968.7) 유품을 믿는 관념은 옛적 주물 숭배의 부산물이다. 현대 종교의 유품은 야만인의 주물을 합리화하고 이처럼 현대의 종교 체계에서 위엄 있고 존경받는 자리로 올려놓으려는 시도이다. 주물과 마술을 믿는 것은 이교도 같지만, 유품과 기적을 받아들이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된다.
88:2.3 (969.1) 화로―난로―는 얼마큼 주물, 하나의 신성한 장소가 되었다. 성소와 성전은 처음에 주물 장소였는데, 거기에 죽은 자들이 묻혔기 때문이다. 모세는 히브리인의 주물 오두막을 그때 존재하던 하나님의 율법 개념이었던 큰 주물을 모신 장소로 높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돌 제단을 믿는 특이한 가나안 신앙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나님의 집이 될지니라.” 그들이 모시는 하나님의 영이 그러한 돌 제단에 거한다고 그들은 참으로 믿었고, 돌 제단은 실제로 주물이었다.
88:2.4 (969.2) 뛰어난 죽은 사람의 모습과 기억을 보존하려고 최초의 형상들이 만들어졌는데, 이것들은 정말로 기념비였다. 우상은 주물 숭배를 다듬은 것이다. 원시인은 거룩하게 바치는 예식이 영으로 하여금 형상 안에 들어가게 만든다고 믿었다. 마찬가지로 어떤 물건은 축복받았을 때 부적(符籍)이 되었다.
88:2.5 (969.3) 옛 달라마시아 도덕 법규에 둘째 계명을 보태면서, 모세는 히브리인 사이에서 주물 숭배를 통제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주물로서 성스럽게 될까 싶은 형상을 한 가지도 만들지 말라고 면밀하게 그들에게 지시하였다. 그는 분명히 말했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거나 아래로 땅에 있거나, 또는 지상의 바다에 있는 어떤 것이라도 그 새긴 형상이나 모습을 만들지 말지니라.” 이 계명은 유대인 사이에서 예술을 늦추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주물 숭배를 줄였다. 그러나 모세는 아주 현명해서 갑자기 옛 주물을 갈아치우려고 하지 않았고, 따라서 전쟁 제단이자 종교적 성소, 즉 언약 상자 안에, 율법과 나란히 어떤 유품들을 두는 데 찬성하였다.
88:2.6 (969.4) 말씀, 더군다나 특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긴 말씀은, 결국 주물이 되었다. 이 방법으로 숱한 종교의 거룩한 책들이 주물 감옥이 되어서, 사람의 영적 상상력을 가두어 두었다. 주물에 대항하는 모세의 바로 그 노력이 최고의 주물이 되었다. 그의 계명은 후일에 예술을 바보짓으로 만들고, 아름다운 것을 즐기고 찬미하는 것을 더디게 만드는 데 쓰였다.
88:2.7 (969.5) 옛 시절에, 권한을 가진 주물 낱말은 두려움을 일으키는 교리였고, 이것은 사람을 종으로 만드는 모든 폭군 가운데 가장 끔직한 것이었다. 주물이 된 교리는 필사 인간으로 하여금 본성을 드러내고 편협ㆍ광신ㆍ미신ㆍ불관용, 그리고 가장 지독하고 미개한 잔인 행위로 이끈다. 지혜와 진리를 현대에 존중하는 것은, 주물을 만드는 성향으로부터 생각하고 이치를 따지는 더 높은 수준으로 최근에 피한 것일 뿐이다. 다양한 종교가들이 신성한 책으로 여기는, 축적된 여러 주물 기록에 관해서 말하면, 책 안에 있는 것이 진리일 뿐 아니라, 모든 진리가 그 책에 들어 있다고 사람들이 믿는다. 이 신성한 책들 중에서 하나가 어쩌다가 지구가 평평하다고 말하면, 오랜 세대가 지나는 동안, 다른 면에서는 멀쩡한 남녀들이 행성이 둥글다는 분명한 증거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88:2.8 (969.6) 눈이 어쩌다 한 구절에 떨어지도록 이 신성한 책 중에 하나를 열어 보는 관습을 따르는 것은 일생의 중대한 결정이나 사업을 좌우할지도 모르는데, 그 버릇은 터무니없는 주물 숭배에 지나지 않는다. “신성한 책”을 놓고 선서하거나, 최고로 존경하는 어떤 물건으로 맹세하는 것은 일종의 세련된 주물 숭배이다.
88:2.9 (969.7) 그러나 야만인 추장의 손톱 깎은 것을 주물로 두려워하는 것을 비롯하여 글자ㆍ율법ㆍ전설ㆍ우화ㆍ신화ㆍ시(詩)ㆍ연대기의 훌륭한 수집을 찬미하기까지 나아간 것은 정말로 진화적 진보를 나타내며, 결국 이것들은 적어도 “신성한 책”으로서 수집한 그 시절과 사건이 있기까지, 여러 세기 동안 체질하여 거른 도덕적 지혜를 반영한다.
88:2.10 (970.1) 주물이 되려면, 말씀은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되어야 했고, 신에게서 영감을 받아서 썼다고 생각되는 기록을 인용하는 것은 교회 권한을 확립하였으며, 한편 국가 형태의 진화는 국가 권한이 성숙하게 만들었다.
88:3.1 (970.2) 주물 숭배는 아주 일찍부터 신성한 돌을 섬기는 관념으로부터 우상 숭배, 식인 풍습, 자연 숭배를 거쳐서 토템 신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원시 종교를 침투한다.
88:3.2 (970.3) 토템 신앙은 사회 풍습과 종교 풍습을 종합한 것이다. 최초에는, 생물학적 기원이 있다고 생각되던 토템 동물을 존중하는 것은 식량의 공급을 보장한다고 생각되었다. 토템은 한꺼번에 그 집단과 그들의 신의 상징이었다. 그러한 신은 인격처럼 된 씨족이었다. 토템 신앙은 다른 면에서 개인적인 종교를 사회적 종교로 만들려는 시도의 한 단계였다. 토템은 결국 여러 현대 민족의 깃발, 곧 나라의 상징으로 진화하였다.
88:3.3 (970.4) 주물 자루, 주술사의 자루는 귀신이 들어박힌 여러 가지 소문난 물건을 담은 자루였고, 옛날의 주술사는 결코 자기 권능의 상징인 그 자루가 땅에 닿게 하지 않았다. 20세기에 문명화된 민족들도 마찬가지로, 국가 의식(意識)의 상징인 깃발이 결코 땅에 닿지 않도록 처리한다.
88:3.4 (970.5) 사제직과 임금 직책의 휘장(徽章)은 결국 주물로 간주되었고, 가장 높은 국가의 주물은 씨족으로부터 부족까지, 영주로부터 군주권까지, 토템으로부터 깃발까지, 여러 단계의 발전을 거쳤다. 주물이 된 임금은 “신이 준 권한”으로 다스렸고, 여러 가지 다른 형태의 정부가 생겼다. 사람들은 또한 민주주의를 주물로 만들었고, 이것은 집합하여 “여론”이라고 불렀을 때, 보통 사람의 생각을 높이고 찬양한다. 한 사람의 의견은 그 자체로 볼 때 그다지 값지게 여기지 않지만, 민주주의로서 여러 사람이 집단으로 활동할 때, 바로 이 평범한 판단은 응보를 중재하는 물건이요 올바름의 표준이라고 여긴다.
88:4.1 (970.6) 문명화된 사람은 과학을 통해서 실재하는 환경 문제를 공격한다. 야만인은 환상적인 귀신 환경에 실재하는 문제를 마술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마술은 영들이 있다고 추측된 환경을 조종하는 기술이었고, 그 환경의 작용은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끊임없이 설명했다. 마술은 주물을 사용하거나 다른 더 힘센 영들을 통해서, 자진해서 영의 협조를 얻고, 마음 내켜 하지 않는 영의 도움을 강요하는 기술이었다.
88:4.2 (970.7) 마술ㆍ마법ㆍ강신술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88:4.5 (970.10) 과학의 목적은 마술의 목적과 똑같다. 명상과 논리가 아니라, 오히려 오랜 체험을 통해서, 차츰차츰, 고통스럽게, 인류는 마술에서 과학으로 진보하고 있다. 사람은 차츰 진리 속으로 후퇴하고, 잘못하여 시작하고, 잘못하면서 진보하며, 마침내 진리의 문턱에 다다른다. 과학적 방법이 도착하고 나서야 사람은 앞을 향했다. 그러나 원시인은 실험하든지 아니면 멸망해야 했다.
88:4.6 (970.11) 초기에 미신에 매혹된 것은 나중에 과학적 호기심의 근원이 되었다. 이 원시적 미신 속에는 진취적인 힘찬 감정―두려움과 아울러 호기심―이 있었다. 옛날의 마술에는 진보하는 추진력이 있었다. 이러한 미신은 행성의 환경을 알고 통제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태어난 것을 가리켰다.
88:4.7 (971.1) 야만인이 자연사의 개념을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술은 야만인에게 그러한 위력을 가졌다. 후일에 원죄(原罪) 관념은, 자연사를 설명하기 때문에 종족에 대한 마술의 위력을 약화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한 사람의 자연사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죄 없는 열 사람이 죽음을 당하는 것이 한때는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것이 어째서 고대의 민족들이 빨리 불어나지 않았는가 하는 한 가지 이유이며, 이것은 아직도 어떤 아프리카 부족들에게 참말이다. 고발당한 개인은 보통, 아니 죽음에 부닥쳤을 때에도, 죄를 고백하였다.
88:4.8 (971.2) 마술은 야만인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는 치켜 깎은 머리털이나 손톱 깎은 것에 마법을 쓰면 적을 실제로 죽일 수 있다고 믿는다. 뱀에게 물려 죽는 것은 마법사가 마술을 쓴 탓으로 돌렸다. 마술을 퇴치하기가 어려운 것은 두려움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서 생긴다. 원시 민족들은 마술을 너무나 무서워해서 마술이 실제로 사람을 죽였고, 그러한 결과는 이 그릇된 관념을 입증하기에 충분했다. 실패할 경우에는 언제나 어떤 그럴듯한 설명이 있었다. 결함이 있는 마술은 더 큰 마술로 치유하였다.
88:5.1 (971.3) 몸과 연결된 어떤 것도 주물이 될 수 있으니까, 가장 옛적의 마술은 머리카락과 손톱ㆍ발톱과 상관이 있었다. 몸에서 잘라낸 것에 따른 비밀은 적이 몸에서 나온 무엇을 소유하고, 이를 해로운 마술에 쓸까 하는 두려움에서 생겨났다. 따라서 몸에서 나온 모든 배설물은 조심스럽게 파묻었다. 침이 해로운 마술에 쓰일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대중 앞에서 침뱉기를 삼갔다. 뱉은 침은 언제나 덮었다. 음식 찌꺼기, 옷가지ㆍ장식품조차 마술의 도구가 될 수 있었다. 야만인은 결코 제가 먹고 난 아무 찌꺼기도 식탁에 남겨 두지 않았다. 그러한 관습이 위생적 가치가 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적이 이를 마술 의식에 쓸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이 모두가 행해졌다.
88:5.2 (971.4) 사람의 살, 호랑이 발톱, 악어 이, 독 있는 식물의 씨앗, 뱀 독, 사람의 머리카락과 같이 크게 다양한 종류의 물건을 섞어서 마법의 부적을 만들었다. 죽은 사람의 뼈는 대단히 마력이 있었다. 발자국에서 생겨난 먼지조차도 마술에 쓰일 수 있었다. 옛날 사람들은 사랑의 부적을 크게 믿었다. 피와 기타 형태의 분비물이 사랑의 마술적 효과를 보장할 수 있었다.
88:5.3 (971.5) 형상(形象)이 마술에 효력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형상이 만들어졌고, 형상을 나쁘게 또는 잘 다룰 때, 똑같은 효과가 진짜 몸에 일어난다고 믿었다. 물건을 살 때, 미신 믿는 사람들은 파는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려고 단단한 나무 조각을 씹곤 했다.
88:5.4 (971.6) 까만 소의 우유는 상당히 마력이 있었고, 또한 까만 고양이도 그러했다. 지팡이나 막대기도, 북ㆍ종ㆍ매듭과 함께, 마력이 있었다. 모든 옛 물건은 마력이 있는 부적이었다. 새롭거나 더 높은 문명의 관습을 좋지 않게 보았는데, 그 관습이 나쁜 마술의 성질을 가졌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기록ㆍ인쇄물ㆍ그림을 오랫동안 그렇게 여겼다.
88:5.5 (971.7) 이름, 특히 신들의 이름은, 존경심을 가지고 다루어야 한다고 원시인은 믿었다. 이름을 하나의 개체로, 신체를 가진 인물과 다른 영향으로 여겼다. 이름은 혼과 그림자와 똑같이 존중되었다. 돈을 빌릴 때 이름을 전당 잡혔으며, 빌린 돈을 치르고 다시 찾기까지, 사람은 제 이름을 쓸 수 없었다. 오늘날 사람은 증서에 제 이름을 서명한다. 개인의 이름은 곧 마술에서 중요하게 되었다. 야만인은 이름을 두 개 가지고 있었다. 중요한 이름은 보통 경우에 쓰기에 너무 거룩하다고 여겼고, 따라서 둘째 이름, 곧 날마다 쓰는 이름―별명―이 생겼다. 야만인은 낯선 사람에게 그의 진짜 이름을 결코 알려 주지 않았다. 이상한 성질을 가진 어떤 체험을 겪어도 이름을 갈게 되었다. 어떤 때는 병을 고치거나 불운을 그치게 하려는 노력으로 이름을 갈았다. 야만인은 부족의 추장으로부터 이름을 사서, 새 이름을 가질 수 있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직함과 학위에 투자한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부시맨처럼, 가장 원시적 부족들 사이에서는 개인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88:6.1 (972.1) 요술 막대기를 사용하고, “주술” 의식을 통해서, 그리고 주문을 외움으로 마술을 썼으며, 마술을 쓰는 사람이 옷을 벗고 일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원시 마술사들 사이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많았다. 마술에서 “주술”은 치료가 아니라, 신비를 뜻한다. 야만인은 결코 자신을 치료하지 않았다. 마술 전문가의 조언을 받을 때를 빼고, 야만인은 결코 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20세기 부두교의 주술사는 옛날 마술사의 전형이다.
88:6.2 (972.2) 마술에는 대중 단계와 개인 단계가 있었다. 주술사ㆍ샤먼, 또는 사제가 행하는 것은 부족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여자 마술사ㆍ요술사ㆍ마법사는 사사로운 마술,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마술을 시행했고, 이것은 사람의 적들에게 불운을 가져오는 강제 방법으로서 쓰였다. 이영(二靈), 좋은 영과 나쁜 영의 개념은 백마술과 흑마술을 믿는 후일의 관념을 낳았다. 종교가 진화함에 따라서, 마술은 자신의 종파 바깥에서 영 활동에 쓰이는 용어였고, 마술은 또한 귀신을 믿는 더 오래 된 신앙에도 적용되었다.
88:6.3 (972.3) 낱말의 조합, 찬송가와 주문을 외우는 의식(儀式)은 어지간한 마술이었다. 초기에 쓰인 어떤 주문은 마침내 기도로 진화했다. 흉내내는 마술이 당장에 실행되었다. 연출로 기도를 나타냈고, 마술 춤은 극적인 기도(祈禱)에 지나지 않았다. 기도는 희생에 부수되는 것으로서, 차츰 마술을 대신하였다.
88:6.4 (972.4) 손짓은 언어보다 더 오래 되었으니까, 더 거룩하고 마력이 있었고, 흉내내기는 강한 마력이 있다고 믿었다. 홍인은 흔히 물소 춤을 연출했고, 그 춤에서 그들 가운데 하나가 물소 노릇을 연기하고, 잡혀서, 다가오는 사냥이 성공할 것을 보장하곤 했다. 5월제의 성(性) 잔치는 단지 흉내내는 마술이었고, 식물 세계의 성의 정열에 암시로 호소하는 것이었다. 인형(人形)은 처음에 아기 못 낳는 아내한테 마술 부적으로서 이용되었다.
88:6.5 (972.5) 마술은 진화하는 종교적 나무에서 나온 가지였고, 결국 과학 시대라는 열매를 맺었다. 점성술을 믿는 것은 천문학의 발전으로 이끌었다. 철학자의 돌을 믿는 신앙은 금속의 통달로 이끌었고, 마법의 수를 믿는 것은 수학의 기초를 쌓았다.
88:6.6 (972.6) 그러나 부적으로 아주 가득 찬 세계는 개인의 모든 포부와 창의력을 없애는 데 많이 기여했다. 더 노력하거나 부지런하여 얻은 열매는 마술로 간주되었다. 사람이 이웃보다 들에서 알곡을 더 거두면, 추장에게 마구 끌려가서 게으른 이웃의 들에서 이 여분의 곡식을 꼬여 갔다고 고발당할 수 있었다. 정말로, 미개한 시절에 아주 많이 아는 것은 위험했고, 언제나 흑(黑) 마술사로서 사형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88:6.7 (972.7) 차츰 과학이 생활에서 노름 요소를 제거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교육 방법이 실패한다면, 거의 즉시 원시의 마술을 믿는 신앙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러한 미신은 아직도 이른바 문명화된 많은 사람의 머리 속에 남아 있다. 주문에 홀린다, 별 자리가 나쁘다, 귀신 들린다, 영감(靈感), 귀신처럼 사라진다, 재주가 많다, 귀신에 홀린다, 천둥 맞는다, 깜짝 놀란다는 말처럼, 언어는 그 종족이 마술의 미신에 오랫동안 젖어 있었다는 것을 증언하는 화석(化石)을 많이 담고 있다. 지적인 사람들이 아직도 행운, 악한 눈, 점성술을 믿는다.
88:6.8 (973.1) 옛적의 마술은 현대 과학을 낳은 고치이며, 그 시대에 불가결했으나 이제 더 쓸모가 없다. 그래서 무지한 미신으로 가득 찬 공상은 과학의 개념이 태어날 수 있을 때까지, 사람들의 원시 지성을 흔들어 놓았다. 오늘날 유란시아는 이 지적 진화에서 황혼이 저무는 지대에 있다. 세계의 절반이 진리의 빛과 과학으로 발견한 사실을 열심히 움켜쥐고 있고, 한편 나머지 반은 옛적의 미신, 그러나 얄팍하게 가장된 마술의 팔에 안겨 시들고 있다.
89:0.1 (974.1) 원시인은 자신이 영들에게 빚을 졌다, 죄값을 물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야만인이 이를 보건대, 공평하게 하자면 영들은 훨씬 더 많은 불운을 그들에게 퍼부을 수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이 개념은 죄와 구원의 교리로 발전되었다. 혼은 자격을 빼앗기고―원죄(原罪)를 가지고―세상에 왔다고 간주되었다. 혼은 값을 물고 찾아야 했다. 속죄양이 마련되어야 했다. 머리 사냥꾼은 해골 숭배를 실천하고, 그 위에 자기 목숨의 대용품, 즉 희생자를 마련할 수 있었다.
89:0.2 (974.2) 야만인은 일찍부터 영들이 인간의 빈곤ㆍ고통ㆍ굴욕을 구경함으로 최고의 만족을 얻는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처음에 사람은 오직 저지른 죄에만 아랑곳했으나, 나중에는 빠뜨리는 죄를 걱정하게 되었다. 후일의 희생 제도 전부가 이 두 관념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이 새로운 의식은 영을 달래는 희생 예식을 지키는 것과 상관이 있었다. 원시인은 신들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무슨 특별한 일을 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오직 진보한 문명이 한결같이 차분하고 선의를 가진 하나님을 인정한다. 신을 달래는 것은 앞날의 축복을 얻으려는 투자라기보다 당장의 불운을 막는 보험이었다. 귀신을 피하고 쫓아내고 강제하고 달래는 의식(儀式)은 모두 서로 합병된다.
89:1.1 (974.3) 금기(禁忌)를 지키는 것은 사람이 불운을 피하려는 노력, 무엇인가를 피함으로 영 귀신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금기는 처음에 종교적인 것이 아니었으나 일찍부터 귀신이나 영의 인가를 받았고, 이렇게 강화되었을 때 금기는 법과 제도를 만들게 되었다. 금기는 예식 기준의 근원이요, 원시적 자제(自制)의 조상이었다. 금기는 가장 이른 형태의 사회 규제였고, 오랫동안 유일한 규제였다. 금기는 아직도 사회를 규제하는 구조의 기본 단위이다.
89:1.2 (974.4) 야만인의 머리 속에서 이 금지 사항이 강요하는 존경심은 금기를 집행한다고 생각된 자의 권능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똑같았다. 금기는 처음에 불운을 어쩌다 겪었기 때문에 생겨났다. 나중에는 추장(酋長)과 샤먼―영 귀신, 아니 신의 명령을 받는다고 생각되었던 주물 인간―이 금기를 제안했다. 영의 꾸짖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원시인의 머리 속에서 아주 대단했고, 그래서 금기를 어겼을 때 때때로 원시인은 놀라서 죽기도 하며, 이런 극적인 사건은 금기가 살아남은 자의 생각에 미치는 위력을 엄청나게 강화한다.
89:1.3 (974.5) 아주 일찍부터 있었던 금지 사항은 여자와 기타 재산에 손대지 말라는 제한이었다. 종교가 금기의 진화에서 비로소 더 큰 역할을 하게 되자, 금지된 물건을 더럽다, 나중에는 거룩하지 않다고 여겼다. 히브리인의 기록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가득히 언급하지만, 이 노선을 따른 그들의 관념은 많은 다른 민족의 관념보다 훨씬 덜 성가시고 범위가 좁았다.
89:1.4 (975.1) 히브리인의 열 가지 명령뿐 아니라 달라마시아와 에덴의 일곱 계명은 분명한 금기였고, 가장 오래 된 금지 조항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똑같이 부정 형태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법규는 앞서 있던 몇천 가지 금기를 대신했으므로, 참으로 사람을 해방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후일의 계명은 복종한 값으로 무엇인가 분명히 약속했다.
89:1.5 (975.2) 먹을 것에 대한 초기의 금기는 주물 숭배와 토템 신앙으로부터 생겨났다. 돼지는 페니키아인에게 신성하고 소는 힌두인에게 신성했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에집트인의 금기는 히브리와 이슬람 신앙에서 지속되었다. 먹을 것에 대한 금기의 한 변종은 임신한 여자가 어떤 식품을 너무 먹고 싶어해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식품을 닮는다는 믿음이었다. 그러한 고급 식품은 그 아이에게 금기가 되곤 했다.
89:1.6 (975.3) 먹는 방법은 곧 금기가 되었고, 그래서 고대와 현대의 식탁 예절이 생겨났다. 카스트 제도와 사회의 표준은 옛 금지 조항의 흔적을 가리키는 찌꺼기이다. 금기는 사회를 조직하는 데 어지간히 효과가 있었으나, 끔찍하게 부담이 되었다.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 체제는 쓸모 있는 건설적 규칙 뿐 아니라, 고리타분하고 낡고 쓸모 없는 금기도 보존하였다.
89:1.7 (975.4) 그러나 방대하고 잡다한 금기를 제외하고, 원시인을 비평할 처지에 있는 문명화된 사회는 하나도 없을 것이요, 원시 종교의 지지를 받지 않았더라면 금기는 결코 지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진화에서 많은 필수 요소는 무척 비싼 대가를 치렀고, 노력ㆍ희생ㆍ자제 면에서 큰 값을 요구했지만, 이 자제(自制)의 성취는 사람이 딛고 기어올라간 문명의 사다리의 참된 발판이었다.
89:2.1 (975.5) 우연을 두려워하고 불운을 무서워하는 것은 이러한 재난을 방지하는 보험이라 생각된 원시 종교를 발명하도록 글자 그대로 사람을 족쳤다. 종교는 마술과 귀신으로부터, 영(靈)과 주물을 거쳐서, 금기로 진화했다. 원시 부족마다 금지된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있었고, 이것은 실제로 사과였지만, 온갖 종류의 금기가 무겁게 달린 1천개나 되는 가지를 상징하였다. 그 금지된 나무는 반드시 “너희는 무엇을 하지 말라”하고 말했다.
89:2.2 (975.6) 야만인의 생각이 좋은 영과 나쁜 영을 상상하는 점까지 진화하는 동안에, 그리고 금기가 진화적 종교의 엄숙한 지지를 받았을 때, 새로운 죄 개념이 등장하기 위하여 무대가 모두 준비되었다. 계시된 종교가 미처 나타나기도 전에, 세상에서 죄의 개념은 보편적으로 확립되었다. 오로지 죄 개념으로 인하여, 원시인의 머리에 자연사는 이치가 있게 되었다. 죄는 금기를 어기는 것이요, 죽음은 죄에 대한 벌이었다.
89:2.3 (975.7) 죄는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의식(儀式)이었고, 생각이 아니라 행위였다. 이 죄 개념 전부가 딜문, 그리고 땅에 있던 작은 천국의 시절에 관한, 남아 있는 전통 때문에 육성되었다. 아담과 에덴 동산의 전통은 또한 종족들의 개벽 시절에 한때 “황금 시기”가 있었다는 꿈에 신빙성을 부여했다. 이 모두가 특별 창조가 있을 때 사람이 기원을 가졌고, 사람이 완전한 상태로 생애를 시작했으며, 금기를 어긴 것―죄―가 나중에 그를 불쌍한 곤경에 빠뜨렸다는 신앙에 후일에 표현된 생각을 입증했다.
89:2.4 (976.1) 금기를 버릇처럼 어기는 것은 악덕이 되었고, 원시 율법은 악덕을 범죄로 만들고, 종교는 악덕을 죄로 만들었다. 옛 부족들 사이에서 금기를 어기는 것은 범죄와 죄를 합친 것이 되었다. 공동체의 재난은 반드시 부족의 죄에 대한 벌이라고 간주되었다. 번영과 올바름이 붙어 다닌다고 믿은 자에게는, 악한 자가 번영하는 듯 보이는 것이 너무 걱정 되어서, 금기를 위반하는 자를 벌하려고 지옥을 발명하는 것이 필요했다. 앞날에 벌을 주는 이 장소의 수는 하나에서 다섯까지 달랐다.
89:2.5 (976.2) 죄의 고백과 용서의 관념은 원시 종교에서 일찍부터 나타났다. 사람들은 다음 주(週)에 저지르려고 하는 죄 때문에, 대중 회의에서 용서를 부탁하곤 했다. 고백은 다만 용서하는 의식이었고, 또한 더럽히는 것을 대중에게 통지하는 것이요, “더럽다 더러워!”하고 외치는 의식이었다. 그리고 나서 정화(淨化)하는 모든 의식 절차가 뒤따랐다. 고대의 모든 부족이 의미 없는 이 예식을 따랐다. 위생 관습인 듯한 옛 부족들의 많은 관습은 대체로 예식이었다.
89:3.1 (976.3) 극기가 이 종교의 진화에서 다음 단계로서 다가왔다. 금식은 보통 관습이었다. 곧 여러 가지 형태의 육체적 쾌락, 특히 성적(性的) 성질을 가진 쾌락을 그만두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굶는 의식은 여러 고대 종교에 뿌리 깊이 박혀 있고, 실질적으로 현대의 모든 신학 사상 체계에까지 전해져 내려왔다.
89:3.2 (976.4) 죽은 자와 함께 재산을 태우고 파묻는 낭비적 관습으로부터 야만인이 막 회복할 무렵이 되자, 바야흐로 종족들의 경제 구조가 비로소 모습을 갖추고 있을 때, 극기를 부르짖는 이 새 종교 교리가 나타났고, 수만 명의 진지한 혼이 가난을 친구로 삼기 시작했다. 재산은 영적 장애물로 간주되었다. 물질 소유가 영적으로 위험하다는 이 개념을 빌로와 바울의 시절에 사람들이 널리 품었고, 그 뒤로 늘 유럽의 철학에 두드러지게 영향을 주었다.
89:3.3 (976.5) 빈곤은 단지 육체를 죽이는 의식의 일부였고, 이것은 불행하게도 많은 종교, 특별히 기독교의 기록과 가르침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행은 억제하는, 흔히 어리석은 이 의식(儀式)이 부정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야만인에게 자제를 가르쳤고, 이는 사회의 진화에서 가치 있는 진보였다. 극기와 자제는 초기의 진화 종교로부터 생긴, 가장 큰 두 가지 사회적 이득이었다. 자제는 사람에게 새로운 생활 철학을 주었고, 이기적 만족이라는 분자(分子)를 늘이려고 늘 애쓰는 대신에, 개인적 요구인 분모(分母)를 낮춤으로 인생의 분수(分數)를 높이는 기술을 사람에게 가르쳤다.
89:3.4 (976.6) 스스로를 단련하는 이 옛 관념은 매질과 온갖 종류의 육체적 고문을 포함했다. 어머니 숭배교의 사제들은 육체적 고통의 미덕을 가르치는 데 특히 적극적이었고, 스스로 거세를 받음으로 본보기를 보였다. 히브리인, 힌두교 신자, 불교 신자는 이 고행(苦行)의 교리를 열심히 따른 자였다.
89:3.5 (976.7) 옛 시절을 통해서 내내, 사람들이 이 방법으로 신들이 적는 극기(克己) 장부에 공적을 더하려고 애썼다. 어떤 감정의 압박을 받고 있을 때 극기와 고행(苦行)을 하겠다고 서약하는 것이 한때는 풍습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이 서약은 신들과 계약하는 형태를 취했고,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고행하고 육체를 억제한 값으로 신들이 무언가 분명히 하기로 생각되었다는 면에서, 진화에서 참된 진보였다. 부정적 서약과 긍정적 서약이 있었다. 오늘날 인도의 어떤 무리들 사이에서, 이렇게 해롭고 극단적 성질을 가진 서약을 가장 잘 준수한다.
89:3.6 (977.1) 극기와 굴욕을 부르짖는 종파가 성의 만족에 눈을 돌린 것은 자연스러울 뿐이다. 전투에 들어가기 전에 군인들 사이에서, 성욕을 절제하는 종파가 의식으로서 생겨났다. 후일에 이것은 “성자(聖者)들”의 관습이 되었다. 이 종파는 결혼을 겨우 간통보다 덜한 악으로서 묵인했다. 세상의 많은 큰 종교가 이 고대의 숭배에 나쁘게 영향을 받았지만, 아무것도 기독교보다 더 두드러지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사도 바울은 이 숭배를 받드는 신자였고, 그의 개인적 관점은 그가 기독교 신학에 묶어놓은 가르침에 반영된다: “남자가 여자에게 손대지 않는 것이 좋으니라.” “모든 사람이 바로 나와 같기를 바라노라.” “그러므로 결혼하지 않은 자와 과부들에게 내가 이르노니, 나처럼 지내는 것이 저희에게 좋으니라.” 바울은 그러한 가르침이 예수의 복음의 일부가 아님을 잘 알았고, 이를 인정했다는 것은 그의 진술에서 나타난다, “계명이 아니라 허락으로서 내가 이것을 이르노라.” 그러나 이러한 열심 때문에 바울은 여자들을 경시하게 되었다. 이 모두가 딱한 것은, 그의 개인적 의견이 위대한 세계 종교의 가르침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천막을 만드는 그 선생의 조언에 글자 그대로 널리 순종한다면, 인류는 갑자기 영화롭지 못한 종말에 다다를 것이다. 더군다나 한 종교가 성욕을 절제하는 옛 종파와 관련된 것은 결혼과 가정, 곧 사회의 진정한 기초이자 인간을 진보시키는 기본 제도에 대항하는 싸움으로 직접 이끈다. 모든 그러한 신앙이 여러 민족의 숱한 종교에서 독신 사제 계급의 형성을 조장했다는 것에 놀래서는 안 된다.
89:3.7 (977.2) 언젠가 사람은 어떻게 방종하지 않고서 자유를, 포식하지 않고서 영양을, 방탕하지 않고 즐거움을 누리는가 배워야 한다. 극단적 극기(克己)보다, 자제가 행동을 규제하는 더 좋은 인간적 정책이다. 예수는 결코 추종자들에게 이런 부당한 관점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89:4.1 (977.3) 종교적 헌신의 일부로서, 희생은 다른 여러 가지 경건한 의식처럼, 간단한 한 가지 기원을 가지지 않았다. 권력 앞에 절하고, 신비가 있는 가운데 경건히 찬미하는 태도로 엎드러지는 경향의 전조(前兆)는 개가 주인 앞에서 아양부리는 데서 나타난다. 숭배하려는 충동으로부터 희생물 바치는 행동까지는 겨우 한 걸음일 뿐이다. 원시인은 그가 희생하는 값을 그가 받는 고통으로 쟀다. 희생물 바치는 관념이 처음 종교 의식에 달라붙었을 때, 아픔을 낳지 않는 헌물은 하나도 고려되지 않았다. 처음 희생물은 머리카락을 뽑고, 살을 베어내고, 절단하고, 이를 쳐서 뽑고, 손가락을 잘라 버리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 문명이 진보하자, 이 투박한 희생 개념들은 자기 절제, 금욕주의ㆍ금식ㆍ궁핍의 의식(儀式) 수준으로, 나중에는 슬픔과 고통, 정욕(情慾)의 억제를 통해서 성스럽게 바치는 기독교의 교리로 높이 올라갔다.
89:4.2 (977.4) 종교의 진화에서 일찍부터 두 가지 희생 개념이 존재했으며, 선물 바치는 관념은 추수를 감사하는 태도를 암시했고, 빚 갚는 희생은 죄값을 치른다는 관념을 포함하였다. 나중에는 대용품 개념이 발전하였다.
89:4.3 (977.5) 그후에, 사람은 그의 희생물이 무슨 성질을 가졌든지, 희생물은 신들에게 보내는 말씀을 지닌 사자로서 작용할 수도 있다고 상상했다. 희생물은 신의 콧구멍에 달콤한 향기와 같을 수도 있다. 이것은 희생 의식에서 향과 기타 미학적 특성을 낳았고, 그 의식은 희생물 바치는 잔치로 발전되었으며, 시간이 지나자 잔치는 갈수록 더 공들이고 화려하게 되었다.
89:4.4 (978.1) 종교가 진화함에 따라서, 화해하고 달래는 희생 의식은, 회피와 구슬리기와 귀신 쫓기와 같은 더 오래 된 방법을 대신하였다.
89:4.5 (978.2) 최초의 희생 관념은 조상의 영들이 공평한 세금을 부과한다는 관념이었다. 나중에야 속죄 관념이 개발되었다. 종족의 진화적 기원을 가진 개념을 사람이 벗어남에 따라서, 행성 영주 시절의 전통과 아담의 체재가 세월의 흐름을 통해 걸러짐에 따라서, 죄와 원죄의 개념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그래서 어쩌다가 저지른 개인의 죄에 대한 희생은 종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희생물을 바치는 교리로 진화하였다. 희생물을 바쳐 대신 갚는 것은, 알지 못하는 신의 분개심과 질투조차 포함하는 총괄 보험 조치였다.
89:4.6 (978.3) 쉽게 기분 상하는 허다한 영과 욕심 부리는 신들에 둘러싸여서, 원시인이 큰 무리의 빚쟁이 신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영적 빚을 갚는 데 일생 동안 모든 사제ㆍ의식ㆍ희생물이 필요했다. 원죄 교리, 곧 종족이 죄가 있다는 교리는, 사람마다 영 권력자들에게 무거운 빚을 지고서 인생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89:4.7 (978.4) 선물과 뇌물을 사람들에게 준다. 그러나 신들에게 주었을 때 선물과 뇌물은 헌신하든지 거룩하게 된다고 이야기했고, 또는 희생물이라 불렀다. 극기는 소극 형태로 신을 달래는 것이었고, 희생물 바치는 것은 적극 형태가 되었다. 신을 달래는 행위는 찬송하고 신을 영화롭게 하고, 아첨하고 신을 즐겁게 하는 것까지도 포함하였다. 옛날에 신을 달래던 종파의 이 적극적 풍습의 잔재가 현대의 신성한 예배 형태를 이룬다. 오늘날의 예배 형태는 다만 적극적으로 신을 달래는 기술, 희생물 바치는 이 옛 기술을 의식(儀式)으로 만든 것이다.
89:4.8 (978.5) 동물을 바치는 것은 현대 종족들에게 일찍이 의미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원시인에게 중요했다. 이러한 미개인은 동물을 실제 친척, 가까운 친척으로 여겼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은 제물을 바치는 데 약삭빨라졌고, 일하는 동물 바치기를 그쳤다. 처음에는 길들인 동물을 포함하여 어떤 물건을 드리더라도 가장 좋은 것을 바쳤다.
89:4.9 (978.6) 어떤 에집트 통치자가 다음을 바쳤다고 했을 때, 빈 말로 자랑한 것이 아니다: 노예 113,433명, 송아지 493,386마리, 배 88척, 금 우상 2756개, 꿀과 기름 331,702항아리, 포도주 228,380항아리, 거위 680,714마리, 빵 6,744,428덩어리, 동전 5,740,352자루. 이렇게 하려고 그는 땀흘리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무겁게 부과해야 했다.
89:4.10 (978.7) 신들이 희생물의 혼을 즐겼으니까 순전한 필요가 궁극에는 이 반야만인으로 하여금 바친 희생물의 물질 부분을 먹게 만들었다. 옛적에 신성한 식사, 현대의 통례에 따르면 성찬식이라는 구실로, 이 관습은 정당화되었다.
89:5.1 (978.8) 옛적에 사람을 잡아먹던 풍습에 대한 현대의 개념은 통째로 틀리다. 그것은 옛 사회의 도덕 관습의 일부였다. 현대 문명에는 식인(食人) 풍습이 전통으로 끔찍해도, 그것은 원시 사회에서 사회 및 종교 구조의 일부였다. 집단의 이익은 식인 풍습을 강요했다. 그것은 필요의 충동을 통해서 자랐고, 미신과 무지에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지속되었다. 사회ㆍ경제ㆍ종교ㆍ군사적 관습이었다.
89:5.2 (979.1) 원시 인간은 식인자였고, 사람의 고기를 즐겼다. 따라서 영과 그가 섬기는 원시적 신들에게 먹는 선물로서 사람의 고기를 바쳤다. 귀신 영이 단지 모습이 변화된 사람이었고, 먹을 것이 사람에게 가장 큰 필요였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먹을 것은 영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89:5.3 (979.2) 식인 풍습은 진화된 민족들 사이에서 한때 거의 보편적으로 퍼졌다. 산긱 족속은 모두 식인종이었으나, 최초에 안돈 족속은 그렇지 않았고, 놋 족속과 아담 족속도 그렇지 않았다. 진화 종족들과 크게 섞이기까지 안드 족속도 그렇지 않았다.
89:5.4 (979.3) 사람 고기에 맛을 들이면 그 입맛은 자란다. 굶주림이나 우정이나 복수나 종교 의식을 통해서 시작되고 나서, 사람의 살을 먹는 것은 버릇된 식인 풍습으로 계속된다. 사람을 먹는 일은 식량이 모자라서 생겼다. 하지만 이것이 근본적 이유였던 적은 드물다. 그러나 에스키모인과 초기의 안돈 족속은 기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 사람의 고기를 먹은 적이 드물다. 홍인은, 특히 중앙 아메리카에서, 식인종이었다. 한때는 원시의 어머니가 아이를 배느라고 잃어버린 기운을 되찾으려고 제 아이를 잡아먹는 것이 일반 풍습이었고, 퀸즈랜드에서 첫 아이는 아직도 이렇게 죽음을 당하고 잡아먹히는 일이 빈번하다. 근대에는 아프리카의 많은 부족이 하나의 전쟁 조치로서, 자기 이웃들을 무서워 떨게 만드는 일종의 끔찍한 짓으로서, 식인 풍습에 일부러 의존했다.
89:5.5 (979.4) 식인 풍습은 더러 한때 우수했던 핏줄이 퇴화함으로 생겼지만, 대체로 진화 종족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사람 잡아먹는 것은 사람들이 적에게 맹렬하고 모진 감정을 느꼈을 때 비롯되었다. 사람의 고기를 먹는 것은 엄숙한 복수(復讐) 예식의 일부가 되었다. 이 방법으로 적의 귀신이 없어지든지 또는 잡아먹는 사람의 귀신과 융합될 수 있다고 믿었다. 마법사들이 사람 고기를 먹음으로 권능을 얻는다는 관념이 한때 널리 퍼졌다.
89:5.6 (979.5) 사람을 잡아먹는 어떤 집단은 오직 자기네 부족 사람만 먹곤 했다. 일종의 거짓된 영적 근친 교배였는데, 이것은 부족의 단결을 강화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또한 적의 힘을 빼앗는다는 생각으로 앙갚음하려고 적들을 먹어치웠다. 친구나 동료 부족 사람의 몸을 먹는다면 그의 혼에게 명예를 돌리는 것이라 생각되었고, 한편 이처럼 적을 먹어치우는 것은 적에 대한 마땅한 징벌에 지나지 않았다. 야만인의 머리는 아예 일관성을 찾는 허세를 부리지 않았다.
89:5.7 (979.6) 어떤 부족들 사이에서 늙은 부모는 자기 자식들에게 먹히려고 애썼고, 다른 부족들 사이에서는 가까운 친척 잡아먹기를 삼가는 것이 풍습이었다. 그들의 몸은 팔거나 낯선 사람의 것과 바꾸었다. 도살하려고 살찌운 여자와 아이들을 파는 상당한 상업이 있었다. 병이나 전쟁이 인구를 통제하지 못할 때, 남는 사람은 예식도 차리지 않고 잡아먹혔다.
89:5.8 (979.7) 식인 풍습은 다음 영향 때문에 차츰 사라지고 있었다:
89:5.9 (979.8) 1. 때때로 식인 풍습이 공동체의 예식, 곧 동료 부족 사람에게 사형(死刑)의 벌을 내리기 위하여 집단으로 책임 맡는 것이 되었다. 피 흘린 죄는 모두가, 사회가 참여했을 때 범죄가 되지 않는다. 아시아에서 마지막 식인 풍습은 집행이 끝난 범죄자들을 이렇게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89:5.10 (979.9) 2. 식인 풍습은 아주 일찍부터 종교 의식이 되었지만, 귀신 공포증의 성장이 반드시 사람을 먹는 수준으로 내려가도록 작용하지는 않았다.
89:5.11 (979.10) 3. 결국 식인 풍습은 몸에서 겨우 어떤 부분이나 내장을 먹는 데까지 진보했고, 이것들은 혼을 담거나 영 부분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었다. 피를 마시는 것은 흔했고, 몸에서 “먹을 수 있는” 부분을 약과 함께 섞는 것이 관습이었다.
89:5.12 (980.1) 4. 남자에게 국한되었고, 여자는 사람 고기를 먹는 것이 금지되었다.
89:5.13 (980.2) 5. 다음에는 추장ㆍ사제ㆍ주술사에게 국한되었다.
89:5.14 (980.3) 6. 다음에 식인 풍습은 상급 부족 사이에서 금기가 되었다. 사람을 먹지 말라는 금기는 달라마시아에서 시작되었고, 천천히 세계에 퍼졌다. 한때 파묻은 시체를 파내서 먹는 것이 흔한 관습이었기 때문에, 놋 족속은 식인 풍습을 퇴치하는 수단으로서 화장(火葬)을 권장했다.
89:5.15 (980.4) 7.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식인 풍습에 마지막 종을 울렸다. 사람의 고기가 우수한 사람, 추장들의 먹을 것이 되었으니까, 그것은 결국 더욱 우수한 영들을 위하여 예비되었다. 그리고 가장 낮은 부족들을 제외하고, 이처럼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효과적으로 식인 풍습을 그치게 하였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가 충분히 자리잡았을 때, 사람 잡아먹는 것은 금기가 되었고, 인간의 살은 오직 신들의 먹을 거리였다. 사람은 겨우 예식에서 작은 부스러기, 성찬(聖餐)을 먹을 수 있었다.
89:5.16 (980.5) 마침내, 희생물 바치는 목적으로 동물 대용품이 널리 쓰이게 되었고, 더 뒤떨어진 부족들 사이에서도 개 잡아먹기는 사람 잡아먹기를 크게 줄였다. 개는 처음에 길들인 동물이었고, 그 자체로서, 그리고 먹을거리로서 높이 쳐주었다.
89:6.1 (980.6) 사람 제물은 식인 풍습을 고치는 처방일 뿐 아니라, 그 간접 결과였다. 영 세계까지 호송하는 영을 마련하는 것은 또한 사람 잡아먹기를 줄어들게 했는데, 죽여서 바친 이 희생물을 먹는 것은 풍습이 된 적이 없다. 어떤 형태로 어느 때인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관습에 전혀 빠지지 않은 민족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안돈 ㆍ놋ㆍ아담 족속은 식인 풍습에 가장 적게 물들었다.
89:6.2 (980.7)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거의 보편적이었다. 이 풍습은 중국인ㆍ힌두인ㆍ에집트인ㆍ히브리인ㆍ메소포타미아인ㆍ그리스인ㆍ로마인의 종교 관습에서 지속하였고, 많은 다른 민족, 뒤떨어진 아프리카 및 오스트랄리아 부족들 사이에서 요즘까지도 지속되었다. 후일에 아메리카 인디안은 식인(食人) 풍습에서 태어난 문명을 가졌고, 따라서 특히 중앙 및 남 아메리카에서 사람을 잡아 바치는 풍습에 흠뻑 젖어 있었다. 갈대아인은 보통 계제에 사람 바치기를 처음으로 버린 사람들에 속했고, 동물로 대신하였다. 약 2천 년 전에 일본에 마음씨 고운 어느 황제는 사람 잡아 바치는 것을 대신하려고 진흙 형상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 바치기가 북 유럽에서 사라진 것은 1천 년이 채 안 된다. 어떤 뒤떨어진 부족들 사이에서는 자원하는 자들이 사람 바치기를 아직도 행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종교적 자살이나 의식(儀式)으로 하는 자살이었다. 한때 어느 샤먼이 어떤 부족에서 크게 존경받는 한 노인을 바치라고 시켰다. 사람들이 반항했고, 복종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그 노인은 아들로 하여금 자신을 보내게 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정말로 이 관습을 믿었다.
89:6.3 (980.8) 예붓다와 그의 외딸에 관한, 히브리인의 이야기보다 더 비극이고 애처로운 체험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이것은 오래 되고 옛날부터 지켜 온 종교 관습과 진보하는 문명의 상반되는 요구 사이에 생긴, 가슴 아픈 싸움을 잘 나타낸다. 보통 관습이었다시피, 좋은 의도를 가진 이 사람은 어리석은 맹세를 하였고, 적들을 이기는 것에 대하여 어떤 값을 치르겠다고 찬성하면서 “전쟁의 신”과 협상했다. 이 값은 집으로 돌아올 때 그를 맞이하려고 집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자를 바치는 것이었다. 예붓다는 충실한 종들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그를 맞이하려고 가까이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알고 보니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 그를 집으로 맞아들이려고 나왔다. 그래서 그렇게 근래의 시절에도, 문명화되었다고 생각된 민족 사이에서, 두 달 동안 제 운명을 슬퍼한 뒤에 아버지가 이 아름다운 소녀를, 그 동포 부족 사람들의 찬성을 얻고서, 사람 제물로 실제로 바쳤다. 그리고 사람을 제물로 바치지 말라고 모세가 엄하게 명령한 마당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바보 같고 쓸데없는 맹세를 하는 데 빠지며, 옛날 사람들은 그러한 모든 서약을 무척 거룩하게 여겼다.
89:6.4 (981.1) 옛 시절에는 얼마큼 중요한 새 건물을 짓기 시작할 때, “기초에 넣는 제물”로서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풍습이었다. 이것은 그 구조물을 감시하고 보호하는 한 귀신 영을 마련해 주었다. 중국인이 쇳물을 부어 종을 만들려고 준비했을 때, 풍습은 종 소리를 좋게 만들려는 목적으로 적어도 소녀 하나를 바쳐야 한다고 명했다. 뽑힌 소녀는 산 채로 녹은 쇳물 속으로 던져졌다.
89:6.5 (981.2) 노예를 산 채로 넣고 중요한 담을 세우는 것은 많은 무리가 오랫동안 가졌던 관습이었다. 후일에 북 유럽 부족들은 새 건물의 담 속에 산 사람을 파묻는 이 관습 대신에,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를 담 속에 넣는 것으로 바꿔치웠다. 중국인은 담을 쌓는 동안에 죽은 일꾼들을 담 속에 묻었다.
89:6.6 (981.3) 팔레스타인의 어느 대단치 않은 임금은 예리고 담을 세우면서 “그의 맏아들 아비람을 잃고 그 기초를 세웠고, 막내아들 세굽을 잃고 그 대문들을 세웠다.”[1] [40] 그런 근래의 시절에, 이 아버지는 그 도시의 대문의 기초 구멍에 두 아들을 산 채로 넣었을 뿐 아니라, 그의 행동은 또한 “주의 말씀을 따른” 것이라고 기록되었다. 모세는 기초에 이 제물 바치는 것을 금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가 죽고 나서 곧 이 풍습으로 돌아갔다. 장신구와 기념품을 새 건물의 초석 속에 집어넣는 20세기 예식은 원시의 기초 제물을 생각나게 한다.
89:6.7 (981.4) 첫 열매를 영들에게 바치는 것은 오랫동안 여러 민족의 관습이었다. 이제는 이를 지키는 것이 얼마큼 상징이지만, 모두가 사람을 잡아바치는 옛날 예식의 잔재이다. 첫 아이를 제물로 바친다는 생각은 옛 사람들, 특히 페니키아인 사이에서 널리 퍼졌고, 이들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버린 자들이었다. 제물을 바치면서 “목숨 대신에 목숨을”하고 말하곤 했다. 이제는 사람이 죽었을 때 너희가 “티끌에서 티끌로”하고 말한다.
89:6.8 (981.5) 아브라함이 마지못해 아들 이삭을 바치는 광경은, 문명화된 감수성에 충격이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 새롭거나 이상한 관념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큰 감정의 압박을 받을 때, 첫 아들을 바치는 것은 오랫동안 유행한 풍습이었다. 여러 민족이 이 이야기와 비슷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무슨 드물거나 특별한 일이 생겼을 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필요하다는, 세계에 널리 퍼진 깊은 관념이 한때 존재했기 때문이다.
89:7.1 (981.6) 모세는 사람을 대신하는 몸값을 개시함으로 사람 바치는 풍습을 끝내려고 애썼다. 그는 그 민족으로 하여금 그들의 성급하고 어리석은 맹세의 최악의 결과를 피할 수 있게 만든 체계적 계획을 세웠다. 확정된 요금에 따라서, 땅과 재산과 아이들을 구제할 수 있었고, 이 요금을 사제들에게 낼 수 있었다. 첫 아이를 잡아 바치기를 그만둔 무리들은, 이 끔찍한 행위를 계속한 뒤처진 이웃보다 큰 이점을 곧 가졌다. 그러한 뒤떨어진 많은 부족은 아들들을 이렇게 잃었기 때문에 크게 약화되었을 뿐 아니라, 지도층의 계승조차도 가끔 끊어졌다.
89:7.2 (982.1) 일시적인 아이 바치기의 부산물은 첫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집 문설주에 피를 문지르는 풍습이었다. 이것을 한 해의 신성한 축제의 하나와 연결하여 자주 행했고, 이 예식은 한때 멕시코에서 에집트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대부분에서 유행했다.
89:7.3 (982.2) 대부분의 집단이 의식으로 아이들을 잡아죽이기를 그만둔 뒤에도, 갓난아기를, 떨어진 광야나 강물에 작은 배 속에 홀로 두는 것이 풍습이었다. 사르곤ㆍ모세ㆍ싸이러스ㆍ로물루스의 경우와 같이, 아이가 살아남으면, 신들이 그를 살리려고 간섭했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나서 첫 아들을 신성하게 또는 희생물로서 드리는 관습, 즉 아이들이 자라도록 내버려 두고, 다음에 죽이는 것에 준하여 그들을 추방하는 관습이 따랐다. 이것이 식민지가 생긴 기원이었다. 로마인의 식민화 계획은 이 관습을 지켰다.
89:7.4 (982.3) 원시적 숭배와 관련되어, 성(性)의 문란으로 생긴 많은 특이한 관계는 사람을 바치는 것과 관련하여 기원이 생겼다. 옛날에는, 여자가 머리 사냥꾼을 만났을 때, 몸을 제공함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나중에는 신들에게 희생물로서 성스럽게 바친 소녀는 몸을 일생 동안 성전에서 신성한 성교 서비스에 바침으로 제 목숨 찾기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이 방법으로 그 여자는 몸 찾는 돈을 벌 수 있었다. 이렇게 몸값을 치르는 데 종사하는 여인과 성관계를 가지는 것은 사람을 무척 고상하게 만드는 일로 여겼다. 이 신성한 소녀들과 사귀는 것은 종교 예식이었고, 게다가 이 의식 전부가 평범한 성욕 만족을 얻기 위하여 그럴듯한 구실을 주었다. 이것은 소녀와 그 짝들이 스스로 기쁘게 실행한, 야릇한 종류의 자기 속임이었다. 문명이 진화로 진보할 때 도덕 관습은 언제나 뒤에서 끌려 가고, 이처럼 진화하는 종족들의 관습, 더 오래 되고 더 야만스러운 성 관습을 인가해 주었다.
89:7.5 (982.4) 성전의 매춘은 결국 남부 유럽과 아시아에 두루 퍼졌다. 성전의 창녀들이 번 돈은 모든 민족 사이에서 거룩하게―신들에게 드리는 고급 선물로―여겼다. 가장 높은 부류의 여인들이 성전의 매춘 시장에 들끓었고, 번 돈을 온갖 종류의 신성한 서비스와 공익 사업에 바쳤다. 상급 여인들의 상당수가 성전에서 임시로 몸 파는 서비스로 지참금을 모았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런 여자를 아내로 가지기를 더 좋아했다.
89:8.1 (982.5) 희생물로 죄값 치르기와 성전 매춘은 실제로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의 변종이었다. 다음에는 딸들을 거짓으로 바치는 일이 따랐다. 이 예식은 일생 동안 처녀성을 지키는 데 헌신하는 것과 더불어 방혈(防血)하는 것이었고, 이보다 오래 된 성전 매춘에 대한 도덕적 반작용이었다. 후일에는 처녀들이 신성한 성전 불을 지키는 봉사에 헌신하였다.
89:8.2 (982.6) 사람들은 결국 몸의 어떤 부분을 드리는 것이 사람을 완전히 제물로 바치는 더 오래 된 관습을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신체를 잘라내는 것도 또한 괜찮은 대용품이라고 생각되었다. 머리카락ㆍ손발톱ㆍ피, 그리고 손가락과 발가락조차 바쳤다. 후일에 거의 보편적이었던 옛 할례 의식은 부분을 희생하는 의식(儀式)의 산물이었다. 순전한 희생이었고, 거기에 위생을 지키려는 아무런 생각이 따라붙지 않았다. 남자들은 할례를 받았고, 여자들은 귀에 구멍을 뚫었다.
89:8.3 (983.1) 나중에는 손가락을 잘라내는 대신에 함께 묶는 것이 풍습이 되었다. 머리를 밀고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도 마찬가지로 종교적 헌신의 형태였다. 내시(內侍)를 만드는 것은 처음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생각을 고친 것이었다. 코와 입술 뚫기는 아직도 아프리카에서 실행되고 있고, 문신(文身)은 예전에, 상스럽게 몸에 상처를 입히는 풍습이 예술답게 진화한 것이다.
89:8.4 (983.2) 희생물 바치는 관습은, 진보하는 가르침의 결과로서, 결국 약속의 관념과 연결되었다. 마침내 신들이 사람과 진짜 협정을 맺는다고 생각되었고, 이것은 종교를 안정시키는 데 내디딘 큰 걸음이었다. 율법, 곧 계약이, 운ㆍ두려움ㆍ미신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89:8.5 (983.3) 사람은 그의 하나님 개념이 우주 통치자들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수준으로 나아갔을 때까지, 신과 계약하는 것을 결코 꿈에도 그릴 수 없었다. 사람이 초기에 가졌던 하나님 관념은 너무 인간을 닮아서, 자신이 비교적 믿을 만하고, 도덕과 윤리가 있게 될 때까지, 사람은 의지할 수 있는 신을 상상할 수 없었다.
89:8.6 (983.4) 그러나 신들과 계약을 맺는다는 생각이 마침내 도래하였다. 진화하는 인간은 결국 그의 신들과 주제넘게 협상할 정도의 도덕적 위엄을 얻었다. 그래서 희생물을 바치는 사업은 사람이 철학적으로 하나님과 협상하는 노름으로 차츰 발전했다. 이 모두가 불운에 대비해서 보험에 드는 새로운 조치, 아니 오히려 번영을 더 분명히 사들이는 향상된 기술이었다. 이 옛날의 제물이 신들에게 거저 드리는 선물, 고마움이나 추수 감사의 표시로 자진해서 드리는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품지 말라. 이런 제물은 참된 예배의 표현이 아니었다.
89:8.7 (983.5) 원시 형태의 기도는 영들과 협상하는 것, 신들과 따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탄원과 설득으로 무언가 더 형태가 있는 비싼 것을 대신하는 일종의 물물 교환이었다. 종족들의 발전하는 상업은 무역하는 정신을 불러일으켰고, 물물 교환하는 눈치를 개발하였다. 이제 이 특성은 사람이 신을 숭배하는 방법에도 비로소 나타났다. 어떤 사람이 남보다 장사를 더 잘하는 상인인 것처럼,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낫게 기도하는 자로 생각되었다. 올바른 사람의 기도는 높이 여김을 받았다. 올바른 사람은 영들에게 셈을 다 치른 자, 신들에게 모든 의식(儀式) 의무를 충분히 끝낸 사람이었다.
89:8.8 (983.6) 초기의 기도는 도저히 예배라 할 수 없었다. 기도는 건강ㆍ재산ㆍ목숨을 위하여 협상하는 탄원이었다. 여러 면에서, 기도는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별로 바뀌지 않았다. 기도를 아직도 책에서 읽어치우고, 형식으로 외우고, 바퀴에 붙이고 나무에 걸어 놓으려고 적으며, 거기서 지나가는 바람은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후― 하고 부는 수고를 덜어 줄 것이다.
89:9.1 (983.7)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는 유란시아 의식(儀式)이 진화하는 과정에 걸쳐서 내내, 사람을 잡아먹는, 피 흘리는 장사로부터 더 높고 상징적 수준으로 나아갔다. 희생물을 바치는 초기의 의식은 후일에 성찬 예식을 낳았다. 그후에는 사제가 혼자서 사람 희생물의 작은 조각이나 사람의 피 한 방울을 취하고, 그리고 나서 모두가 동물 대용품을 먹곤 했다. 몸값, 돈으로 되찾기, 계약과 같은 이 옛 관념은 후일에 성찬 예배로 진화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예식의 진화는 사람들과 교제하게 하는 막강한 영향을 미쳤다.
89:9.2 (984.1) 하나님의 어머니 숭배와 연결되어, 멕시코와 기타 장소에서, 케이크와 포도주를 드는 성찬이 더 오래 된, 사람을 바치는 관습에 있는 살과 피에 준하여 결국 이용되었다. 히브리인은 유월절 예식의 일부로서 이 의식을 오랫동안 지켰고, 이 예식으로부터 나중에 기독교식의 성찬식이 생겼다.
89:9.3 (984.2) 고대 사회의 형제 정신은 피를 마시는 의식에 기초를 두었다. 옛날 유대인의 친교는 희생물의 피를 흘리는 일이었다. 바울은 “영구한 약속의 피” 위에 새 기독교 종파를 세우기 시작했다. 바울이 피와 희생물에 관한 가르침으로 기독교를 쓸데없이 성가시게 만들기는 했어도, 인간이나 동물을 바쳐서 속죄하는 교리를 한 숨에 끝내버렸다. 그의 신학적 절충은, 계시조차도 진화의 점진적 통제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마지막이자 온통 충분한 사람 제물이 되었다. 신성한 재판관은 이제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만족한 것이다.
89:9.4 (984.3) 그래서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희생물 바치는 예식은 성찬 예식으로 진화했다. 따라서 현대 종교의 성찬은 사람을 잡아서 바치는 예식, 충격을 주는 옛날 예식과 그보다 이전에 있었던 사람 잡아먹는 의식, 이 두 가지를 정통으로 이어받은 예식이다. 많은 사람이 아직도 구원을 받으려고 피에 의존하지만, 적어도 그것은 비유요 상징이요 신비가 되었다.
89:10.1 (984.4) 옛날 사람은 희생물을 바침으로 겨우 하나님의 은혜를 의식하기에 이르렀다. 현대인은 구원받음을 스스로 의식하는 새로운 기법을 개발해야 한다. 죄의식은 필사자의 머리 속에 버티고 있지만, 거기에서 나온 구원의 생각 형태는 낡아빠지고 케케묵었다. 영적 필요라는 현실은 지속되지만, 지적 진보는 지성과 혼을 위하여 평안과 위로를 얻는 옛 방법을 없애버렸다.
89:10.2 (984.5) 죄는 의도하여 신에게 불충하는 것이라고 다시 정의를 내려야 한다. 불충에는 정도 차이가 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부분적 불충, 갈등으로 갈라진 충성, 무관심이라는 죽어가는 충성, 신이 없는 이상에 헌신하는 데서 나타나는 죽은 충성이 있다.
89:10.3 (984.6) 죄를 지었다는 감각이나 느낌은 도덕 관습을 어겼음을 의식하는 것이요, 그것이 반드시 죄는 아니다. 의식하면서 신에게 불충함이 없을 때 진짜 죄는 없다.
89:10.4 (984.7) 죄책감을 깨닫는 가능성은 인류에게 초월적 탁월성이 있다는 표시이다. 죄책감은 사람이 비열함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대하게 될 잠재성이 있고 언제나 올라가는 영광을 가진 생물로서 사람을 구별한다. 그러한 모자란다는 느낌은 시초의 자극이며, 이것은 믿음으로 필사자의 지성을 도덕적으로 고귀한 수준, 우주 통찰력과 영적 생활의 훌륭한 수준으로 변화시키는 그러한 믿음의 승리로, 빠르게 확실히 이끌어야 한다. 이처럼 인간의 존재에서 모든 의미 있는 것이 현세의 것으로부터 영원한 것으로 바뀌고, 모든 가치가 인간다운 것으로부터 신다운 것으로 높아진다.
89:10.5 (984.8) 죄의 고백은 불충을 씩씩하게 물리치는 것이지만, 그러한 불충이 시공에서 낳는 결과를 조금도 줄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백―죄의 성질을 진지하게 인정하는 것―은 종교적 성장과 영적 진보에 필수이다.
89:10.6 (985.1) 신이 죄를 용서하는 것은, 충성 관계의 단절이 의식하여 반항한 결과임을 한동안 인간이 의식한 뒤에, 충성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용서를 찾을 필요는 없으며, 오직 사람과 창조자 사이에 충성 관계가 다시 세워짐을 의식함으로 용서를 얻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충성하는 아들들은 모두 행복하고 봉사를 사랑하며,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길에서 늘 앞으로 나아간다.
90:0.1 (986.1) 종교적 관행의 진화는 구슬리기, 회피, 귀신 쫓아내기, 강요ㆍ화해ㆍ달래기로부터 제물 바치기, 죄지은 값 물어내기, 값을 치르고 되찾기에 이르기까지 진보하였다. 종교적 의식을 치르는 기술은 원시 종파의 형태로부터, 주물을 거쳐서 마술과 기적에 이르기까지 변화되었다. 물질을 초월하는 영역에 대한 사람의 개념이 갈수록 더 복잡해지는 데 반응하여 의식(儀式)이 더 복잡해지자, 불가피하게 주술사ㆍ샤먼ㆍ사제들이 의식을 지배하였다.
90:0.2 (986.2) 원시인의 진보하는 개념에서 결국, 영 세계는 보통 사람에게 반응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사람들 가운데 오직 예외인 자들만 신에게 말씀을 드릴 수 있었다. 영들은 오직 특별한 남자나 여자의 말만 듣곤 했다. 이처럼 종교는 차츰차츰 남의 손을 빌리게 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반드시 주술사나 샤먼이나[1] [41] 사제가 신자와 숭배 받는 대상 사이에 끼어든다. 오늘날 유란시아 체계의 조직된 종교의 신앙은 이 수준에서 진화하는 발전을 거치고 있다.
90:0.3 (986.3) 진화 종교는 단순하고 온통 강력한 두려움에서 생겨나고, 이 두려움은 알지 못하는 것, 설명할 수 없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부딪쳤을 때 인간의 머리를 통해서 솟구친다. 궁극에 종교는 전능한 사랑을 매우 단순히 깨닫는 경지에 이르며, 인간의 혼이 우주의 아버지가 우주의 아들들을 한없이 사랑한다는 개념을 깨우칠 때, 이 사랑은 견딜 수 없이 그 혼을 휩쓴다. 그러나 종교적 진화의 시작과 절정 사이에는 샤먼이 판치는 긴 세월이 끼며, 이들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중개자ㆍ통역자ㆍ중재자로서 주제넘게 자리를 차지한다.
90:1.1 (986.4) 샤먼은 상급 주술사요, 예식을 맡는 주물 인간이요, 진화 종교의 모든 관습에서 초점이 되는 인물이었다. 많은 집단에서 샤먼은 전쟁 추장보다 높았는데, 이것은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을 알린다. 샤먼은 때때로 사제로서, 아니 사제인 임금으로서도 활동하였다. 후일의 어떤 부족들은 초기의 샤먼 주술사(점쟁이)와 나중에 나타나는 샤먼 사제를 모두 가졌다. 여러 경우에 샤먼의 직책은 상속되었다.
90:1.2 (986.5) 옛날에 이상한 것은 무엇이나 귀신에 들렸다고 보았기 때문에, 어떤 놀라운 기형(奇形), 정신이나 육체의 기형은, 주술사가 되는 자격이었다. 이들 가운데 많은 남자가 지랄병을 가졌고, 많은 여자가 히스테리가 있었다. 이 두 종류는 신과 악마에 들린 것 뿐 아니라, 옛적의 영감(靈感)의 상당 부분을 설명했다. 옛날부터 있던 사제들의 상당수가 나중에 망상증 환자라 부른 등급에 속했다.
90:1.3 (987.1) 사소한 문제에서 속임수를 썼을지 모르지만, 대다수의 샤먼은 그들이 신들렸다는 사실을 믿었다. 황홀한 상태나 몸이 굳어지는 발작에 스스로 빠질 수 있는 여자는 강력한 샤먼이 되었다. 나중에 그런 여자들은 선지자와 영 매체가 되었다. 그들의 몸이 굳어지는 황홀한 상태는, 주장에 따르면, 죽은 사람의 귀신과 교통하는 데 보통 관련되었다. 뭇 여자 샤먼이 또한 전문 춤꾼이었다.
90:1.4 (987.2) 그러나 모든 샤먼이 스스로에게 속지는 않았다. 많은 샤먼이 눈치 빠르고 유능한 사기꾼이었다. 그 직업이 발전함에 따라서, 풋내기는 주술사 자격을 얻기 위해서 시련과 극기로 10년의 세월을 견습생으로 일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샤먼들은 전문 형태의 복장을 개발했고 신비스러운 행위를 흉내냈다. 그들은 부족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신비스러운 느낌이 들게 하는 어떤 신체적 상태를 유도하려고 흔히 마약을 이용했다. 보통 사람들은 날랜 손재주의 묘기를 초자연의 것으로 여겼고, 약삭빠른 사제들은 복화술(複話術)을 처음으로 이용하였다. 여러 옛날 샤먼은 뜻하지 않게 최면술과 마주쳤고, 다른 사람들은 자기 배꼽을 오랫동안 뚫어져라 봄으로 자기 최면을 유도했다.
90:1.5 (987.3) 많은 사람이 이 술수와 속임수를 이용했지만, 하나의 등급으로서 그들의 명성은 결국 겉으로 나타난 업적에 달려 있었다. 샤먼이 시도한 일에 실패했을 때, 그럴듯한 변명을 늘어놓을 수 없으면, 강등(降等)되거나 죽음을 당했다. 이처럼 정직한 샤먼은 일찍 이슬로 사라졌고, 오직 눈치 빠른 배우들만 살아남았다.
90:1.6 (987.4) 늙은이와 힘센 사람들의 손에서 부족 사무의 독점 지휘를 빼앗아 눈치 빠른자, 영리한 자, 선견이 있는 자의 손에 던져 준 것은 주술 신앙이었다.
90:2.1 (987.5) 영을 불러내는 것은 아주 정밀하고 상당히 까다로운 절차였고, 옛날의 말로 행해지는 오늘날의 교회 의식과 견줄 만하다. 인류는 아주 일찍부터 초인간적 도움, 계시를 추구하였고, 사람들은 샤먼이 실제로 그러한 계시를 받는다고 믿었다. 샤먼들은 일할 때 암시의 큰 힘을 이용했어도, 거의 변함없이 그것은 소극적 암시였다. 겨우 최근에 와서야 적극적으로 암시 기술이 이용되었다. 샤먼 직업이 발전하는 초기에 그들은 비 부르기, 병 고치기, 범죄 찾아내기와 같은 직종으로 전문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병 고치는 것은 샤먼 주술사의 주요한 기능이 아니었다. 그보다 차라리 생활의 위험을 알고 통제하는 것이었다.
90:2.2 (987.6) 고대에 종교와 속세에서 쓰인 흑마술은 사제나 예언자나 샤먼이나 주술사들이 부릴 때 백마술이라고 불렀다. 흑마술을 실행하는 자를 마법사ㆍ마술사ㆍ요술사ㆍ마녀ㆍ마술쟁이ㆍ강신술사ㆍ요술쟁이ㆍ점쟁이로 불렀다. 시간이 지나자, 자연을 초월한다고 주장하는 그러한 접촉은 모두 요술이나 주술로 분류되었다.
90:2.3 (987.7) 마녀의 마법은 더 일찍 있던 비정상이고 인정받지 않은 영들이 부리는 마술을 포함했다. 샤먼의 주술은 보통의 영, 그리고 부족이 인정하는 신들이 행하는 기적과 관계되었다. 후일에 마녀는 악마와 연결되었고, 이처럼 종교적 불관용을 비교적 최근에 많이 드러내는 무대가 마련되었다. 마술은 많은 원시 부족에게 종교였다.
90:2.4 (987.8) 샤먼들은 우연이 영들의 뜻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크게 믿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자주 결정을 내렸다. 이 제비뽑는 성향이 현대에 남아 있는 것은 우연이 결정하는 많은 노름 뿐 아니라, 또한 잘 알려진 “술래로 따돌리기”하는[2] [42] 운문(韻文)에서도 나타난다. 한때는 따돌림받은 술래는 죽어야 했다. 이제 그런 사람은 어떤 어린아이 놀이에서 술래이다. 원시인에게 심각한 일이었던 것이 현대에 어린아이의 오락으로 살아남았다.
90:2.5 (988.1) “뽕나무 꼭대기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 너는 분발할지라”하는 것처럼, 주술사는 징조와 전조를 크게 믿었다. 종족의 역사에서 아주 일찍부터 샤먼들은 별에 눈을 돌렸다. 원시의 점성술은 세계에 널리 퍼진 믿음이요 관습이었다. 꿈의 풀이도 널리 퍼졌다. 이 모든 것 후에, 죽은 자의 영과 교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변덕스러운 여자 샤먼이 뒤이어 나타났다.
90:2.6 (988.2) 고대에 기원이 있지만, 기우사(祈雨師)나 천기(天氣)를 움직이는 샤먼은 오랜 세월을 거쳐서 죽 버티어 왔다. 극심한 가뭄은 옛날 농사꾼에게 죽음을 뜻했다. 날씨를 통제하는 것이 고대의 많은 마술의 목적이었다. 문명화된 사람은 아직도 대화할 때 날씨를 보통 이야기거리로 삼는다. 옛날 사람들은 모두 샤먼이 비를 내리게 하는 힘이 있다고 믿었지만, 실패했을 때 왜 실패했는가 설명하는 그럴듯한 핑계를 내놓을 수 없으면, 그를 죽이는 것이 풍습이었다.
90:2.7 (988.3) 로마의 황제들은 거듭 점성가들을 추방했지만, 대중이 그들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변함없이 되돌아왔다. 그들을 쫓아낼 수 없었고, 그리스도 뒤 16세기에도 서양에서 교회와 국가의 지도자들은 점성술의 후원자였다. 총명하다고 생각되는 허다한 사람이, 행운의 별이나 불운의 별의 지배를 받으며 사람이 태어날 수 있다고, 천체들이 나란히 있는 것은 땅에서 여러 가지 모험의 결과를 좌우한다고 아직도 믿는다. 귓구멍 넓은 사람들이 아직도 점쟁이를 후원한다.
90:2.8 (988.4) 그리스인은 신탁(神託)의 조언이 효력이 있다고 믿었고, 중국인은 마귀로부터 보호를 받으려고 마술을 썼으며, 주술은 인도에서 번성했고 아직도 중앙 아시아에서 버젓이 지속한다. 주술은 세계의 많은 곳에서 두루, 겨우 요즈음에야 버린 관습이다.
90:2.9 (988.5) 때때로 참 선지자와 선생들이 일어나서 주술 신앙을 비판하고 폭로하였다. 사라지는 홍인조차도 지난 몇백 년 안에 그러한 선지자가 있었는데, 쇼니 족의 텐스콰타와는 태양의 일식(日蝕)이 1808년에 있을 것을 예언했고, 백인의 악덕을 비난하였다. 허다한 참된 선생이 오랫동안의 진화 역사를 통해서, 여러 부족과 종족 사이에서 나타났다. 어떤 시대의 샤먼이나 사제가 대중(大衆) 교육을 반대하고 과학의 진보를 망치려고 애쓰더라도 그들에게 도전하려고 참된 선생들이 늘 계속해서 나타날 것이다.
90:2.10 (988.6) 여러 면에서, 빗나간 방법으로, 옛 샤먼들은 하나님의 목소리요 섭리의 보관자로서 명성을 유지했다. 그들은 갓난아기에게 물을 뿌렸고, 그들에게 이름을 주었으며, 남자들에게 할례를 주었다. 모든 장례식을 주관했고, 죽은 자가 영 나라에 안전히 도착했다고 공식으로 선포했다.
90:2.11 (988.7) 샤먼 사제와 주술사들은, 겉으로 영들에게 바치는 제물인 여러 가지 요금을 축적함으로 흔히 아주 부유하게 되었다. 뜸하지 않게 샤먼은 실질적으로 부족 재산을 다 끌어 모으곤 했다. 부자가 죽고 나면, 그의 재산을 샤먼과 어떤 공익 사업이나 자선(慈善)에 똑같이 나누는 것이 풍습이었다. 이 관습은 아직도 티벳의 어떤 구석에서 행해지는데, 거기에는 남자 인구의 반이 이 등급의 비생산자에 속한다.
90:2.12 (989.1) 샤먼은 옷을 잘 차려 입었고, 아내를 보통 몇명 거느렸다. 그들은 최초의 귀족이었고, 부족의 모든 제한을 면제받았다. 그들은 아주 흔히 낮은 등급의 머리와 도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경쟁자를 마녀나 마술사라고 불러서 억눌렀고, 아주 흔히 영향력과 권력을 가진 자리에 올랐으며, 그래서 추장이나 임금을 지배할 수 있었다.
90:2.13 (989.2) 원시인은 샤먼을 필요악이라고 여겼다. 샤먼을 무서워했으나 사랑하지는 않았다. 옛날 사람은 지식을 존경했고, 지혜를 존중하고 그 값을 치렀다. 샤먼은 대체로 사기(詐欺)였지만, 주술을 존중하는 것은 종족의 진화에서 지혜에 웃돈을 지불했음을 잘 보여준다.
90:3.1 (989.3) 옛날 사람이 자신과 물질 환경이 직접, 귀신의 변덕과 영의 취미에 민감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의 종교가 물질적 일에만 순전히 관계되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현대인은 자기의 물질 문제를 직접 공격한다. 사물이 그의 머리를 총명하게 쓰는 데 반응하는 것을 깨닫는다. 마찬가지로 원시인은 물리적 영토에 있는 생명과 에너지를 수정하고, 아니 통제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우주에 대한 원시인의 이해가 제한된 것은 그로 하여금 귀신ㆍ영ㆍ신들이 몸소 직접, 생명과 물질을 낱낱이 통제하는 데 관여한다는 관념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이치에 맞게 원시인은 이 초인간 매개자들의 은혜와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90:3.2 (989.4) 이 관점에서 비추어 볼 때, 고대의 종파 예식에서 설명할 수 없고 비합리적인 많은 것이 이해된다. 종파의 예식은 원시인이 자기가 살고 있는 물질 세계를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원시인은 목숨을 연장하고 건강을 보장하려는 목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모든 병과 죽음 그 자체가 최초에는 영 현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샤먼이 주술사와 사제로서 활동하면서, 또한 의사(醫師)와 외과 의사로 수고해야 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90:3.3 (989.5) 원시인의 머리는 사실을 알지 못하여 장애를 받을지 모르지만, 그 모든 것에 논리가 있었다. 생각 깊은 사람들이 병과 죽음을 지켜볼 때, 그들은 이러한 고난의 원인을 규명하는 데 착수하고, 이해하는 데 따라서, 샤먼과 과학자는 고통에 관한 다음 여러 이론을 주창하였다:
90:3.4 (989.6) 1. 귀신―영의 직접 영향. 병과 죽음을 설명하는 데 가장 일찍 제기된 가설은 영들이 혼이 몸에서 나오도록 유혹함으로 병을 일으키며, 혼이 돌아가지 못하면 죽음이 따른다는 것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병을 일으키는 귀신이 악의로 하는 행위를 너무 무서워해서, 흔히 먹을 것이나 물도 주지 않고 아픈 사람을 버렸다. 그릇된 근거와 상관 없이, 이 관념은 병든 사람을 실질적으로 격리하고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았다.
90:3.5 (989.7) 2. 폭력―분명한 원인. 어떤 사고나 죽음의 원인은 확인하기 아주 쉬웠고, 그래서 이러한 원인은 귀신 행위의 종류로부터 일찍 제거되었다. 전쟁, 동물과 싸움하기, 그리고 기타 금방 확인할 수 있는 매체들에 따르는 사망과 상처는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병이 낫는 데 오래 걸리거나, 또는 “자연스러운” 원인으로 생겨도 상처가 곪는 것은 여전히 영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오랫동안 믿었다. 관찰할 수 있는 아무런 자연 요인을 발견할 수 없으면, 영 귀신들이 여전히 병과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90:3.6 (990.1) 오늘날 아프리카와 기타 지역에서, 횡사(橫死)가 아닌 죽음이 일어날 때마다 어떤 사람을 죽이는 원시 민족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주술사는 죄 있는 편을 지적한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다가 죽으면, 그 아이는 즉시 목 졸려 죽음을 당했다―한 목숨으로 다른 목숨을 갚는다.
90:3.7 (990.2) 3. 마술―적들의 영향. 많은 질병이 요술, 곧 악한 눈, 그리고 누구를 지적하는 마술 활의 작용으로 인하여 생긴다고 생각되었다. 한때는 누구에게 손가락질하는 것이 정말로 위험했다. 아직도 손가락질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된다. 분명치 않은 병과 죽음이 있을 경우에, 옛날 사람들은 정식으로 검시하고, 시체를 해부하고, 무엇을 발견하면 그것이 죽음의 원인이라고 결정을 내리곤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요술의 책임으로 돌리곤 했으며, 따라서 그에 책임 있는 마녀를 죽이는 것이 필요했다. 옛날 검시관의 검시는 마녀라고 생각된 자들의 목숨을 많이 건졌다.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 부족 사람은 스스로 마술을 쓴 결과로 죽을 수 있다고 믿었고, 이 경우에는 아무도 고발되지 않았다.
90:3.8 (990.3) 4. 죄―금기 위반에 대한 벌. 비교적 근래에 이르러, 질병은 개인이나 종족이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이라고 믿었다. 이 수준의 진화를 거치는 민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이론은, 사람이 금기를 어기지 않았으면 질병으로 고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질병과 고통을 “그들 안에 있는 전능자의 화살”로 여기는 것은 그러한 관념의 전형이다. 중국인과 메소포타미아인은 오랫동안 병이 나쁜 악마들이 행동한 결과라고 여겼다. 하지만 갈대아인은 또한 별이 고통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신이 성난 결과로 질병이 생긴다는 이 이론은, 문명화되었다고 소문난 여러 집단의 유란시아인 사이에서 아직도 유행한다.
90:3.9 (990.4) 5. 자연 원인. 인류는 에너지ㆍ물질ㆍ생명을 다루는 물리적 분야에서, 원인과 결과의 상호 관계인 물질적 비밀을 배우는 데 아주 더디었다. 고대 그리스인은 아담손의 가르침의 전통을 간직했기 때문에, 모든 병이 자연의 원인에서 생긴 결과인 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자였다. 과학 시대의 전개는 질병과 죽음에 대하여 사람이 오랜 세월에 걸쳐 가졌던 이론을 느리고 확실하게 무너뜨리고 있다. 열병은 초자연적 질환 종류로부터 처음으로 제거된 인간의 한 질병이었고, 점진적으로 과학 시대는 아주 오랫동안 인간의 지성을 가두어 두었던 그 무지의 사슬을 깨뜨렸다. 노령(老齡)과 전염을 이해하는 것은 귀신ㆍ영ㆍ신들이 인간의 비참한 일과 필사자의 고통을 몸소 일으킨다는, 사람의 두려움을 차츰 없애버리고 있다.
90:3.10 (990.5) 진화는 어김없이 그 목적을 이룬다. 진화는 미지의 것을 미신으로 두려워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무서워하는 마음을 사람에게 불어넣으며, 이것은 하나님 개념이 생기는 발판이다. 그리고 신에 대하여 진보된 이해가 생기고 나서, 바로 이 진화 기법은 나란히 일어나는 계시의 행위를 통해서, 어김없이 생각의 힘을 움직이게 만들며, 이것은 목적을 이루는 데 쓰인 발판을 용서 없이 없애버릴 것이다.
90:4.1 (990.6) 옛날 사람의 생활 전부가 질병의 예방이었다. 그들의 종교는 적지 않게 질병을 예방하는 기술이었다. 그리고 이론이 잘못된 것과 상관 없이, 그들은 그 이론을 실천하는 데 마음을 다하였다. 그들의 치료 방법을 한없이 신뢰하였고, 이것은 그 자체로서 강력한 치료법이었다.
90:4.2 (991.1) 이 옛날의 한 샤먼의 어리석은 보살핌을 받고서 낫는 데 필요한 믿음은 결국, 후일에 비과학적 병 치료에 참여하는 어떤 후계자의 손에서 치료받는 데 필요한 믿음과 실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90:4.3 (991.2) 더 원시적인 부족들은 아픈 사람을 크게 무서워했고, 아픈 사람을 오랜 세월 동안 주의해서 피하고, 부끄럽게도 소홀히 하였다. 샤먼 직책이 진화되어 질병을 고치겠다고 찬성하는 사제와 주술사가 생겼을 때, 인도주의가 크게 진보하였다. 다음에 씨족 전체가 병실로 몰려가서 병 귀신을 소리쳐 쫓아내며 샤먼을 돕는 것이 풍습이 되었다. 여자가 진찰하는 샤먼이 되는 일이 드물지 않았고, 한편 남자는 치료를 베풀곤 했다. 질병을 진찰하는 보통 방법은 한 동물의 창자를 검사하는 것이었다.
90:4.4 (991.3) 노래하고, 높은 소리를 지르고, 몸에 안수(按手)하고, 환자에게 입김을 불어서, 그리고 기타 여러 방법으로 병을 치료하였다. 후일에는 성전에서 잠자는 데 의존하는 것이 널리 퍼졌고, 자는 동안에 치료가 일어난다고 생각되었다. 주술사들은 성전에서 잠자는 것과 관련하여 결국 실제로 수술을 해 보았다. 처음에 한 수술 중에서 두통 귀신이 도망가게 하려고 머리뼈에 구멍 뚫는 수술이 있었다. 샤먼들은 골절과 삔 것을 치료하고 부스럼과 종기(腫氣) 째는 것을 배웠다. 여자 샤먼은 산파 노릇에 숙달하게 되었다.
90:4.5 (991.4) 몸에서 환부나 더러워진 곳에 무언가 요술인 것을 문지르고, 부적을 던지고, 나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 치료 방법이었다. 누구라도 버려진 부적을 집으면, 그는 즉시 그 병에 걸리거나 흠을 얻는다고 믿었다. 약초와 다른 진짜 약들이 소개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주문을 외우는 것과 관련하여 마사지, 곧 몸을 주물러서 영 쫓아내기가 개발되었고, 현대인이 바르는 약을 문질러 몸에 넣는 것처럼, 약을 문질러서 집어넣으려는 노력이 이에 앞섰다. 방혈과 더불어, 상처난 부분을 흡각(吸角)으로 피 뽑아내기, 그리고 빨아내기가 병을 일으키는 영을 제거하는 데 쓸모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90:4.6 (991.5) 물은 효험 있는 주물이었으니까, 여러 가지 병을 고치는 데 이용되었다. 병을 일으키는 영을 땀을 흘려서 없앨 수 있다고 오랫동안 믿어 왔다. 수증기 목욕을 높이 쳐주었고, 천연 온천은 곧 원시 요양지로서 번창하였다. 시초 인간은 열이 아픔을 덜어준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햇빛, 신선한 동물의 기관(器官), 뜨거운 진흙, 뜨거운 돌을 썼고, 이 방법들 가운데 많은 것이 아직도 이용된다. 영들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노력으로 리듬이 사용되었고, 톰톰 북이 널리 쓰였다.
90:4.7 (991.6)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 병은 영과 동물 사이에 꾸민 사악한 음모로 일어난다고 생각되었다. 동물이 일으키는 모든 질병에는 유익한 식물(植物) 치료법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낳았다. 홍인은 식물이 보편적 치료약이라는 이론에 특별히 집착했다. 그들은 식물의 뿌리를 뽑았을 때 남은 뿌리 구멍에 반드시 피 한 방울을 집어넣었다.
90:4.8 (991.7) 금식, 식사 조절, 반대 자극제들이 흔히 치료 조치로서 쓰였다. 인간의 분비물은 분명히 마력이 있었으니까, 높이 쳐주었다. 이처럼 피와 오줌은 아주 일찍부터 쓰인 약이었고, 뿌리와 여러 가지 소금으로 인하여 약의 종류가 확대되었다. 샤먼들은 냄새가 나쁘고 맛이 좋지 않은 약으로 질병 귀신을 몸에서 쫓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정결하게 하는 것은 아주 일찍부터 일상의 치료법이 되었고, 날 코코아와 키니네의 가치는 약학에서 가장 초기의 발견에 속한다.
90:4.9 (992.1) 그리스인은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참된 합리적 방법을 처음으로 발달시켰다. 그리스인과 에집트인은 다 유프라테스 강 유역으로부터 의학 지식을 받았다. 기름과 포도주는 상처를 낫게 하는 데 아주 일찍부터 쓰인 약이었다. 아주까리 기름과 아편을 수메르인이 이용하였다. 효과 있는 이 고대의 치료 비법의 다수는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때 그 효력을 잃었다. 사기와 미신 실습이 성공하는 데는 비밀이 반드시 필수였다. 오로지 사실과 진리가 완전히 깨닫게 하는 빛을 추구하며, 과학적 연구로 얻는 조명과 계몽을 달가워한다.
90:5.1 (992.2) 의식(儀式)의 요점은 그 연기를 완벽하게 하는 데 있다. 야만인 사이에서 의식은 아주 정밀하게 실행해야 한다. 의식을 올바르게 치렀을 때에야 그 예식이 영들에게 강요하는 힘을 소유한다. 의식에 흠이 있으면, 다만 신들을 성나게 하고 노엽게 만들 뿐이다. 따라서, 사람의 천천히 진화하는 머리가 의식 치르는 기술이 그 효력을 결정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빈틈없는 의식의 거행을 지휘하려고 머지않아 초기의 샤먼이 훈련받은 사제로 진화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래서 몇만 년 동안 끊임없는 의식은 사회를 거추장스럽게 만들고 문명을 성가시게 하였으며, 생활의 모든 행위, 종족의 모든 사업에 견딜 수 없는 짐이 되었다.
90:5.2 (992.3) 의식은 풍습을 거룩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의식은 사회 관습과 종교 관습의 보존에 이바지할 뿐 아니라, 신화(神話)를 만들어내고 지속시킨다. 또 한편, 의식 자체가 신화로부터 생겼다. 의식은 흔히 처음에 사회 예식이었고, 나중에 경제 예식이 되었고, 마침내 종교 예식의 거룩함과 위엄을 얻었다. 의식은 기도ㆍ춤ㆍ연극에서 보다시피, 개인이나 집단으로―또는 양쪽에서―실행할 수 있다.
90:5.3 (992.4) 아멘과 셀라와[3] [43]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낱말은 의식의 일부가 된다. 욕하는 버릇, 신성 모독은 거룩한 이름을 예전에 의식에서 되풀이하던 것이 타락된 것이다. 거룩한 성소까지 순례하는 것은 아주 오래 된 의식이다. 의식은 다음에 정화하고 깨끗이 하고 성화(聖化)하는 공들인 예식으로 성장했다. 원시 부족에서 비밀 사회의 입회식은 실제로 투박한 종교 의식이었다. 옛날의 신비 종파들의 예배 기법은 단지 누적된 종교 의식을 한 번 길게 연출하는 것이었다. 의식은 마침내 현대 종류의 사회 예식과 종교적 예배, 곧 기도와 노래, 화답하여 글 읽기, 그리고 다른 개인 및 집단의 영적 헌신을 포함하는 예배로 진화하였다.
90:5.4 (992.5) 사제는 샤먼으로부터 신탁을 받는 사제, 점쟁이, 노래하는 자, 춤추는 자, 기우사(祈雨師), 종교 유품 보호자, 성전 관리자, 그리고 사건을 점치는 자를 거쳐서, 종교적 예배를 실제로 지휘하는 자의 신분에 이르기까지 진화했다. 결국 그 직책은 상속하게 되었고, 연속되는 사제 계급이 일어났다.
90:5.5 (992.6) 종교가 진화함에 따라서 사제들은 그들의 타고난 재주나 특별한 취향에 따라서 전문화하기 시작했다. 더러는 노래하는 자, 더러는 기도하는 자, 더러는 제사하는 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웅변하는 자―설교자―가 나타났다. 종교가 제도화되었을 때, 이 사제들은 “하늘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우겼다.
90:5.6 (992.7) 자신들의 경건함과 권한을 높이기 위해서 예배자를 신비에 젖게 하려고 옛날 말로 종교 의식을 거행함으로, 또 잡다한 마술의 속임수로, 사제들은 서민을 감동시키고 두려워하게 만들려고 언제나 애써 왔다. 이 모든 것에 있는 큰 위험은 의식이 종교의 대용품이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90:5.7 (993.1) 사제들은 과학의 발전을 더디게 만들고 영적 진보를 막으려고 많은 일을 했지만, 문명을 안정시키고, 어떤 종류의 문화를 높이는 데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사제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의식의 지휘자로 활동하기를 그만두었고, 신학으로―하나님을 정의(定義)하는 시도로―눈길을 돌렸다.
90:5.8 (993.2) 사제가 종족의 목에 매달린 맷돌처럼 무거웠음을 부인하지 않지만, 참된 종교 지도자는 더 높고 더 나은 실체에 도달하는 길을 가리키는 데 귀중하였다.
91:0.1 (994.1) 기도는 종교의 한 매체로서, 예전에 종교성이 없는 혼잣말과 대화하는 표현으로부터 진화했다. 원시인이 자의식을 얻게 되자, 남을 의식함으로부터 불가피하게 따르는 결과, 즉 사회에 반응하고 하나님을 깨닫는 두 가지 가능성이 생겼다.
91:0.2 (994.2) 아주 일찍부터 있던 기도(祈禱) 형태는 신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표현은, 너희가 어떤 중요한 사업을 시작할 때 친구에게 “내게 행운을 빌어주렴”하고 말하는 것과 비슷했다. 원시인은 마술에 종이 되었고, 행운과 불운이 인생의 모든 일에 끼어들었다. 행운을 비는 이 탄원은 처음에 혼잣말이었다―마술 부리는 자가 생각하는 것을 그저 소리내어 지껄이는 것과 같았다. 다음에 운을 믿는 이 사람들은 친구와 가족에게 밀어 달라 부탁하고, 이내 씨족이나 부족 전체를 포함하는 어떤 형태의 예식이 거행되곤 하였다.
91:0.3 (994.3) 귀신과 영의 개념이 진화했을 때, 이 간청은 인간을 초월하는 연설이 되었고, 신들을 의식하게 되자 그러한 표현은 진정한 기도의 수준에 이르렀다. 이것을 보여주는 예로서, 어떤 오스트랄리아 부족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원시 종교의 기도는 영과 초인간 성격자들에 대한 그들의 관념보다 일찍 생겼다.
91:0.4 (994.4) 종교적 각성이 있기 전에 초기의 민족들이 했던 것처럼, 인도의 토다 부족은 어느 특별한 이에게 향하지 않고 기도하는 이 관습을 지금 지킨다. 오직 토다인 사이에서, 이것은 그들의 퇴화하는 종교가 이 원시 수준으로 돌아가는 것을 나타낸다. 토다인의 우유 장수 사제들이 행하는 오늘날의 의식은 종교 예식이 아닌데, 이는 이 비개인적 기도가 어떤 사회적 가치나 도덕 가치나 영적 가치를 보존하거나 높이는 데 아무것도 이바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91:0.5 (994.5) 종교가 생기기 이전의 기도는 멜라네시아인의 마나[1] [44] 관습, 아프리카 피그미족의 우다[2] [45] 신앙, 북 아메리카 인디안의 마니토우[3] [46] 미신의 일부였다. 아프리카의 바간다 부족은 겨우 요즈음에야 마나 수준의 기도를 벗어났다. 이 초기 진화의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지역 및 민족의―신들에게, 주물ㆍ부적ㆍ귀신ㆍ통치자에게, 그리고 보통 사람에게 기도를 올렸다.
91:1.1 (994.6) 초기에 진화된 종교의 기능은 천천히 모습을 갖추는 가치 기준, 필수인 사회적ㆍ도덕적ㆍ영적 가치 기준을 간직하고 확대하는 것이다. 종교의 이러한 임무를 인류가 아직 의식하면서 지켜보지 않았지만, 이것은 주로 기도의 기능으로 이루어진다. 기도하는 관습은 어떤 집단이든 상급의 가치를 이처럼 보존해 두려는 (현실화하려는) 노력,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노력을 대표한다. 그러나 기도가 보호되지 않는다면, 모든 거룩한 날이 재빨리 단지 노는 날의 처지로 되돌아갈 것이다.
91:1.2 (995.1) 종교와 그 매체는, 매체 중에 으뜸은 기도인데, 오직 일반적으로 사회에 인식된 가치 기준, 집단의 인정을 받는 가치 기준과 함께 연합되어 있다. 따라서, 원시인이 비열한 감정을 만족시키거나 염치없이 이기적 포부를 채우려고 애쓸 때, 그는 종교의 위안을 얻지 못하고 기도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 개인이 어떤 반사회적인 것이라도 성취하려고 한다면, 그는 비종교적 마술의 도움을 추구하고 마술사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기도의 도움을 빼앗긴다. 따라서 기도는 아주 일찍부터 사회의 진화, 도덕의 진보, 영적 달성을 힘차게 장려하는 수단이 되었다.
91:1.3 (995.2) 그러나 원시인의 머리는 논리도 일관성도 없었다. 초기의 인간은 물질적인 것이 기도의 분야가 아님을 깨닫지 못했다. 생각이 단순한 이 사람들은 먹을 것, 피난처ㆍ비ㆍ사냥감, 그리고 다른 물질 재화가 사회의 복지를 높인다고 판단했고, 따라서 이러한 물질의 축복을 얻으려고 빌기 시작했다. 이것은 기도를 곡해하는 것이었으나 사회적ㆍ윤리적 행동으로 이 물질적 목표를 이루려는 노력을 북돋아 주었다. 그러한 기도의 타락은 한 민족의 영적 가치를 낮추지만, 그런데도 그들의 경제ㆍ사회ㆍ윤리적 관습을 직접 향상하였다.
91:1.4 (995.3) 가장 원시 종류 지성의 경우에, 기도는 오직 혼잣말일 뿐이다. 기도는 일찍부터 대화가 되고, 급속히 집단 예배의 수준으로 확대된다. 기도하는 것은 원시 종교에서 마술 이전의 주문이,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도덕의 이상을 확대할 수 있는 유익한 권력자나 존재들의 실체를 인간의 머리가 깨닫는 수준까지 진화했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 세력들이 인간을 초월하며, 자의식하는 인간 및 동료 필사자의 자아와 다르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종교의 효력이 개인적이라는 것을 눈에 선하게 볼 때까지, 참된 기도는 나타나지 않는다.
91:1.5 (995.4) 기도는 물활론(物活論)과 거의 관련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싹트는 종교적 감정과 나란히 존재할 수도 있다. 여러 번, 종교와 물활론은 도무지 동떨어진 기원을 가졌다.
91:1.6 (995.5) 무서움이라는 원시적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에, 모든 기도가 죄를 지었다는 더러운 느낌, 실제 죄이든 상상하는 죄이든, 죄 지었다는 부당한 확신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참 위험이 있다. 그러나 현대에는 많은 사람이 기도에 충분히 시간을 써서, 그들이 보잘것없거나 죄가 많다고 이렇게 해롭게 곰곰이 생각하도록 이끌 것 같지는 않다. 기도를 잘못 이용하고 왜곡하는 데 따르는 위험은 무지ㆍ미신, 형식의 고정화, 활력의 상실에 있고, 유물론과 광신(狂信)에 있다.
91:2.1 (995.6) 처음의 기도는 단지 소망을 말로 표현한 것, 진지한 바람을 표현한 것이었다. 다음에 기도는 영의 협조를 얻는 기술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 기도는 모든 값진 가치 기준을 보존하는 면에서 종교를 돕는 상급 기능에 도달했다.
91:2.2 (995.7) 기도와 마술, 이 두 가지는 사람이 유란시아 환경에 맞게 반응하는 결과로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 일반화된 관계를 별도로 하고, 이 두 가지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기도는 언제나 비는 자아의 적극적 행위를 가리켰다. 기도는 언제나 정신적이고, 때때로 영적인 것이었다. 마술은 보통, 시행자, 마술 실습자의 자아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현실을 조종하려는 시도를 가리켰다. 기원을 따로 가졌는데도, 마술과 기도는 후일의 발전 단계에서 서로 관련되었다. 마술은 공식(公式)으로부터 의식(儀式)과 주문을 거쳐서, 참된 기도의 문턱에 이르기까지 목표를 높임으로 때때로 올라갔다. 기도는 때때로 너무 물질적이었고, 그래서 유란시아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기법, 가짜 마술의 기법으로 굴러 떨어졌다.
91:2.3 (996.1) 기도가 신들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이 깨달았을 때, 기도는 오히려 부탁, 간청이 되었다. 그러나 가장 참된 기도는 실제로, 사람과 창조주 사이에 교통하는 것이다.
91:2.4 (996.2) 어떤 종교에서도 희생물 바치는 관념이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자신의 거룩하게 된 뜻을 드리는 대신에, 사람들이 물질 재산 드리기를 추구하므로, 참된 기도의 더 높은 효력을 어김없이 떨어뜨린다.
91:2.5 (996.3) 종교가 성격을 가진 하나님을 벗어버릴 때, 그 기도는 신학과 철학 수준으로 옮겨진다. 한 종교에서 가장 높은 하나님 개념이, 범신적 이상주의에서 보는 것 같은 비성격 신 개념이 될 때, 어떤 형태의 신비스러운 교통의 근거를 마련해 주기는 해도, 참된 기도의 효능에 치명적인 것이 드러난다. 참 기도는 반드시 사람이, 성격을 가진 우수한 존재와 교통함을 나타낸다.
91:2.6 (996.4) 종족이 진화하는 초기에, 그리고 현대에도, 보통 필사자의 일상 체험에서 기도는 사람이 자신의 잠재 의식과 대화하는 현상과 아주 가깝다. 그러나 지적으로 기민하고 영적으로 진보하는 개인이 인간 지성의 상의식(上意識) 수준, 깃드는 생각 조절자의 영토와 얼마큼 접촉하는, 그러한 기도 분야가 또한 있다. 그 위에, 우주의 영적 세력이 받고 인식하는 데 관계되는 참된 기도의 분명한 영적 단계가 있으며, 이것은 모든 인간답고 지적인 관계와 전혀 다르다.
91:2.7 (996.5) 기도는 진화하는 인간 지성의 종교적 감각을 기르는 데 크게 이바지한다. 기도는 인격의 고립을 막도록 작용하는 힘찬 영향력이다.
91:2.8 (996.6) 기도는 종족의 진화에서 자연 종교와 관련된 하나의 기술을 대표하며, 이것은 또한 윤리적으로 뛰어난 더 높은 종교, 곧 계시 종교의 체험적 가치의 일부를 형성한다.
91:3.1 (996.7) 언어 쓰는 것을 처음 배울 때, 아이들은 그들에게 귀를 기울일 사람이 하나도 없어도, 생각을 말로 해보는, 말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창조적 상상력이 싹이 트자, 이들은 상상의 동무들과 이야기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이 방법으로 싹트는 자아가 가상(假想)하는 타아(他我)와 교통하기를 추구한다. 이 기법으로 그 아이는 일찍부터 혼잣말하는 것을 가짜 대화로 바꾸기를 배우고, 이 대화 속에서 이 타아는 말로 하는 그의 생각, 바람을 표현한 것에 대답한다. 어른의 생각에서 상당한 부분이 대화 형태로 머리 속에서 이루어진다.
91:3.2 (996.8) 초기에 원시 형태의 기도는 오늘날 토다 부족의 반(半) 마술적 암송, 특별히 어느 누구에게 드리는 것이 아닌 기도와 아주 비슷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법은 타아의 관념이 태어남으로, 대화 형태의 교통으로 진화하는 경향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타아 개념은 신다운 위엄을 가진 우수한 지위로 높아지고, 그러면 기도가 종교의 매체로서 등장한 것이다. 많은 단계를 거쳐서,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이 원시 형태의 기도는 총명하고 참으로 윤리 있는 기도의 수준에 이르기 전에, 진화하도록 정해져 있다.
91:3.3 (997.1) 연속되는 여러 세대의 기도하는 필사자들이 파악하다시피, 타아(他我)는 귀신ㆍ주물ㆍ영들을 거쳐서 다신교의 신들, 궁극에는 유일한 하나님 곧 기도하는 자아의 가장 높은 이상과 가장 고귀한 소망을 구현하는 신다운 존재에 이르기까지 진화한다. 이렇게, 기도하는 자의 가장 높은 가치와 이상을 보존하는 일에, 기도는 종교의 가장 유력한 매체로서 작용한다. 타아를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신답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개념이 나타나기까지, 기도는 언제나 사람을 사교적으로 만들고 교화하고 영답게 변화시키는 연습이다.
91:3.4 (997.2) 믿음으로 드리는 단순한 기도는 인간의 체험에서 힘찬 진화를 입증하고, 이렇게 함으로 원시 종교에서 가상(假想)의 상징인 타아와 함께 가졌던 옛날의 대화는 무한자의 영과 교통하는 수준, 그리고 모든 지적 창조의 영원한 하나님이자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실체를 진정하게 의식하는 수준까지 높아졌다.
91:3.5 (997.3) 기도하는 체험 속에서 초월 자아인 모든 것을 제쳐놓고, 윤리적인 기도는 더 나은 삶과 더 높은 달성을 위하여 사람의 자존심을 높이고 자아를 강화하는 훌륭한 방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물질적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필사자가 체험하는 하의식(下意識)의[4] [47] 저수지를 보라, 영감과 안내를 받기 위해서는 물질인 자가 영적인 자, 신비의 훈계자와 닿는 상의식(上意識)의 경계를 보라, 기도는 도움을 얻기 위해서 인간의 자아로 하여금 이렇게 양쪽을 보도록 유도한다.
91:3.6 (997.4) 기도는 늘 두 가지 인간 체험, 영적 기술과 서로 관련된 심리적 과정이었고, 또 늘 그럴 것이다. 기도의 이 두 기능은 결코 완전히 떼어놓을 수 없다.
91:3.7 (997.5) 깨우침을 얻은 기도는 바깥에 계시고 성격을 가진 하나님 뿐 아니라, 또한 안에 계시고 비성격인 신, 깃드는 조절자를 헤아려 보아야 한다. 사람이 기도할 때 파라다이스에 계신 우주의 아버지 개념을 붙잡으려고 애쓰는 것은 무척 어울린다. 그러나 가장 실용적 목적을 위해서 가장 효과 있는 기법은, 원시의 지성이 늘 버릇처럼 한 것과 똑같이, 가까이 있는 타아의 개념으로 돌아가고, 다음에 이 타아의 관념이 단순한 허구(虛構)로부터 사실로 조절자의 계심 속에서 하나님이 필사 인간에 깃든다는 진리에 이르기까지 진화했음을 인식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사람은 자기 속에 깃들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 우주의 아버지의 바로 그 계심이자 알맹이인 타아, 실재하고 진정하고 신다운 타아와 함께, 말하자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다.
91:4.1 (997.6) 간청하는 사람이 제 동료들보다 이기적 이점을 찾을 때는 어떤 기도도 윤리적일 수 없다. 이기적이고 물질을 찾는 기도는 사심(私心)없는 신다운 사랑에 바탕을 둔, 윤리적 종교와 양립할 수 없다. 윤리에 어긋나는 모든 그러한 기도는 거짓 마술의 원시 수준으로 돌아가며, 진보하는 문명과 깨우친 종교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기적 기도는 자애로운 응보에 기초를 둔, 모든 윤리 정신을 짓밟는다.
91:4.2 (997.7) 기도는 결코 행동을 대신하는 정도가 되기까지 타락해서는 안 된다. 어떤 윤리적 기도도 행동을 자극하며, 자아를 초월하여 이상적 목표에 이르려는 진취적 노력으로 안내한다.
91:4.3 (998.1) 너희가 어떤 기도를 드리더라도 공정하여라. 하나님이 편애를 보이고, 다른 자녀들과 너희의 친구와 이웃, 아니 적보다도 더 너를 사랑하기를 기대하지 말라. 그러나 자연 종교, 즉 진화된 종교에서 드리는 기도는, 후일에 계시된 종교처럼 처음에는 윤리가 없다. 모든 기도는, 개별로 하든 공동으로 하든,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기도는 자아나 또는 남을 중심으로 드릴 수 있다. 기도가 비는 자를 위해서나 동료를 위해서 아무것도 구하지 않을 때, 혼(魂)의 그러한 태도는 참된 예배의 수준으로 향한다. 자기 본위의 기도는 고백과 부탁을 포함하고, 흔히 물질적 은혜를 부탁하는 것이다. 용서를 다루고 더욱 자제하기 위한 지혜를 찾을 때, 기도는 얼마큼 더 윤리가 있다.
91:4.4 (998.2) 이기심 없는 종류의 기도는 힘을 주고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만, 사람이 법과 질서가 있는 물리적 우주에서 산다는 것을 진보하는 과학의 발견이 보여줌에 따라서, 물질적 기도는 실망을 주고 사람이 환상에서 깨어나게 만들도록 정해져 있다. 한 개인이나 민족이 어린 시기에는 원시적ㆍ이기적ㆍ물질적 기도를 드리는 특징이 있다. 어느 정도까지 모든 그러한 부탁은, 그러한 기도에 대한 응답을 얻는 데 기여하는 노력과 수고로 어김없이 이끈다는 점에서 효력이 있다. 믿음으로 하는 진정한 기도는, 그러한 부탁이 영적 인정을 받을 가치가 없더라도, 생활 기법을 더 터득하는 데 반드시 이바지한다. 그러나 영적으로 앞선 사람은 원시적이거나 미숙한 생각을 하는 자가 그렇게 기도하는 것을 말리려고 애쓸 때 크게 조심해야 한다.
91:4.5 (998.3) 비록 기도가 하나님을 바꾸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도는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기대하며 기도하는 사람 속에서 크고 오래 가는 변화를 흔히 일으킨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기도는 진화하는 민족들의 남녀 안에서, 상당한 마음의 평안ㆍ명랑ㆍ차분함ㆍ용기, 자아의 통달과 공정한 정신의 근원이었다.
91:5.1 (998.4) 조상 숭배에서 기도는 조상의 이상을 추구하는 길로 이끈다. 그러나 신을 예배하는 한 모습으로서 기도는 모든 다른 그러한 관습을 뛰어넘는데, 이는 기도가 신의 이상을 추구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기도에서 타아의 개념이 지극히 높아지고 신답게 되면서, 사람의 이상도 따라서 단지 인간의 수준에서 하늘 같고 신다운 수준을 향하여 올라가며, 모든 그러한 기도의 결과는 인품을 높이고 인격을 깊이 통일하는 것이다.
91:5.2 (998.5) 그러나 기도는 반드시 개인 기도일 필요는 없다. 집단이나 집회에서 하는 기도는 그 영향이 상당히 사회에 퍼지므로 아주 효과가 있다. 한 무리가 도덕의 향상과 영적 진보를 위하여 공동체의 기도에 참여할 때, 그러한 예배는 그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에게 반응한다. 참여하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더 나아진다. 한 도시 전체나 한 나라 전부조차 그렇게 기도하는 예배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고백과 뉘우침과 기도는 개인과 도시, 나라와 온 민족을 힘찬 개혁의 노력과 과감한 성취를 향하여 용감하게 행동하도록 이끌어 왔다.
91:5.3 (998.6) 너희가 어떤 친구를 비난하는 버릇을 참으로 고치고 싶다면, 그러한 태도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일생에 날마다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버릇을 길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대체로 두 가지 조건에 의존한다:
91:5.4 (998.7) 1. 누구를 위해서 기도할 때 그 사람이 이를 알아야 한다.
91:5.5 (999.1) 2.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를 위하여 기도하든, 그 사람과 가까운 사회적 접촉을 가져야 한다.
91:5.6 (999.2) 기도하는 기법으로 조만간에 모든 종교는 제도화된다. 시간이 되면 기도는 수많은 2차적 매체와 결합되는데, 사제, 신성한 책, 예배 의식, 예식과 같이, 더러는 유익하고 더러는 확실히 해롭다.
91:5.7 (999.3) 그러나 영적 빛을 더 크게 받은 사람은, 자기의 허약한 영적 통찰력을 동원하기 위하여 상징을 몹시 바라는, 부족한 지능을 받은 자를 참고 너그럽게 보아야 한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업신여기는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상징이 없어도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는, 형태와 의식이 없이, 신을 숭배하고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 존중하기가 어려운 자에게 상징의 은혜로운 봉사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예배하는 가운데 대부분의 필사자는 그들이 예배하는 목표인 대상의 어떤 상징을 그려본다.
91:6.1 (999.4) 한 영역에서 개인적인 영적 세력 및 물질 감독자들의 뜻과 행위와 연결되지 않으면, 기도는 사람의 물리적 환경에 아무런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기도로 간청하는 범위에 아주 분명한 한계가 있지만, 그러한 한계는 기도하는 자의 믿음에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다.
91:6.2 (999.5) 기도는 진정한 병, 유기체의 병을 고치는 기술이 아니지만, 튼튼한 체력을 즐기는 데, 그리고 수많은 정신ㆍ감정ㆍ신경의 질병을 고치는 데 엄청나게 이바지해 왔다. 실제로 박테리아 때문에 생기는 병의 경우에도, 기도는 여러 번 다른 치료 과정의 효력에 크게 보탬이 되었다. 기도는 쉽게 성내고 투덜거리는 많은 병자를 인내(忍耐)의 표본으로 변화시키고, 그로 하여금 고통받는 모든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자가 되게 하였다.
91:6.3 (999.6) 기도의 효력에 관한 과학적 의심, 그리고 신다운 근원으로부터 도움과 안내를 받으려 하는 늘 있는 욕구, 이 두 가지를 절충하기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믿음으로 드리는 성실한 기도는 개인의 행복, 개인의 자제, 사회적 조화, 도덕적 진보, 영적 달성을 증진하는 데 막강한 힘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말라.
91:6.4 (999.7) 기도가 순전히 인간다운 관습, 사람의 타아와 가지는 대화이라도, 기도는 인간 지성의 무의식 영역에 쌓아 두고 보존된, 인간 성품에 비축된 힘을 실현하는 데 가장 효과 있게 접근하는 기법이다. 기도의 종교적 함축성과 영적 중요성은 별도로 하고, 기도는 건전한 심리학적 버릇이다. 충분히 곤경(困境)에 빠지면,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든 어떤 도움의 근원에게 기도를 드리고 싶어한다는 것이 인간의 체험에서 사실이다.
91:6.5 (999.8) 너의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탁할 정도로 너무 게으름을 피지 말지어다. 그러나 너 스스로가 각오를 가지고 닥친 문제에 용감하게 달려들면서, 너를 안내하고 버티게 할 지혜와 영적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서슴지 말고 부탁하여라.
91:6.6 (999.9) 기도는 종교적 문명의 진보와 보존에 필수 요소였고, 기도하는 자가 오로지 과학적 사실, 철학적 지혜, 지적 성실성, 영적 믿음에 비추어 기도한다면, 사회를 더욱 향상시키고 영답게 변화시키는 데 기도는 아직도 힘차게 공헌할 것이 있다. 예수가 제자들을 가르친 것 같이―정직하게, 사심 없이, 공평하게, 의심하지 말고―기도하라.
91:6.7 (1000.1) 그러나 기도하는 자가 몸소 영적 체험을 겪으면서 드리는 기도의 효력은, 어떤 면에서도 그러한 예배자의 지적 이해력, 철학적 총명, 사회적 수준, 문화적 지위, 또는 필사자의 기타 성취에 달려 있지 않다.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에 심리적ㆍ영적으로 부수되는 것들은 즉시, 개인에게 생기고 체험하는 것이다. 필사자가 무슨 다른 업적이 있던 상관 없이, 누구나 창조주와 교통할 수 있고, 사람이 창조자의 실체, 깃드는 생각 조절자와 접촉하는 바로 그 영역의 문턱에 아주 실질적으로 즉시 다가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은 하나도 없다.
91:7.1 (1000.2) 신비주의는 하나님이 앞에 계시다는 의식을 기르는 기법으로서 아주 칭찬할 만하지만, 그러한 풍습이 사회에서 고립되도록 이끌고 종교적 광신(狂信)에 이를 때 신비주의는 거의 비난을 받을 만하다. 지나치게 흥분한 신비주의자가 신이 주는 영감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전적으로 너무나 흔히 자신의 머리 속 깊은 데서 우러나온 것이다. 명상에 잠기면 필사자의 지성이 그 깃드는 조절자와 접촉하는 것이 흔히 유리하게 되지만, 동료 인간에게 베푸는 사심 없는 직책에서 마음을 다하여 사랑으로 봉사를 베푸는 것이 그 접촉을 수월하게 만드는 일이 더욱 흔하다.
91:7.2 (1000.3) 지난 시대에 나타났던 위대한 종교 스승과 선지자들은 극단적 신비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남녀였고, 동료 필사자에게 사심 없이 봉사함으로 하나님을 최선으로 섬겼다. 예수는 자주 사도들만 외딴 곳으로 데리고 가서 잠시 동안 명상과 기도에 잠기게 했지만, 대체로 사도들이 군중과 함께 봉사하는 접촉을 가지게 하였다. 사람의 혼은 영적 영양 뿐 아니라 영적 운동이 필요하다.
91:7.3 (1000.4) 종교적 환희는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생길 때는 괜찮아도, 그러한 체험은 깊은 영적 인품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감정의 영향으로 생긴 부산물일 때가 더 흔하다. 종교적인 사람은 눈에 선한 심리적 그림, 강렬하게 감동한 체험을 모조리 신의 계시나 영적 교통이라 여겨서는 안 된다. 진정한 영적 황홀경은 보통, 바깥으로 크게 차분하며, 거의 완전한 감정 통제와 연결된다. 그러나 예언을 받는 참된 환상은 심리학을 초월하는 그림이다. 그러한 방문은 거짓 환각이 아니요, 최면 같은 황홀경도 아니다.
91:7.4 (1000.5) 인간의 지성이 하의식(下意識)에서 떠오르는 것이나 상의식(上意識)의 자극에 민감할 때, 그 지성은 이른바 영감에 반응하여 행위할지 모른다. 둘 중에 어느 경우라도, 의식 알맹이가 그렇게 확대되는 것은 얼마큼 그 사람에게 낯선 것처럼 보인다. 자제하지 않고 신비주의에 빠지는 열심과 과격한 종교적 황홀경은 영감을 받았다는 증명서, 신이 준다고 생각되는 증명서는 아니다.
91:7.5 (1000.6) 신비주의ㆍ황홀경ㆍ영감과 같은 이 모든 이상한 종교적 체험이 진정한가를 재는 실용적 시험은 이 현상이 한 개인을 어떻게 만드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91:7.6 (1000.7) 1. 건강이 나아지고 몸이 더 건강하게 되는가.
91:7.7 (1000.8) 2. 개인의 정신 생활에서 더 효과 있게, 실용적으로 활동하게 하는가.
91:7.8 (1000.9) 3. 개인의 종교적 체험을 더욱 충만하고 즐겁게 사회와 연결짓는가.
91:7.9 (1000.10) 4. 틀에 박힌 필사 존재의 평범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나날의 생활을 더욱 낫게 영답게 변화시키는가.
91:7.10 (1001.1) 5.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 개인이 더욱 사랑하고 음미하게 하는가.
91:7.13 (1001.4) 그러나 기도는 특별한 이러한 종교적 체험과 아무런 진정한 관계가 없다. 기도가 지나치게 미학으로 흐를 때, 기도가 거의 순전히 천국의 신에 대한 아름답고 복된 명상으로 이루어질 때, 기도는 그 친교적 영향력을 많이 잃어버리고 기도하는 사람을 신비주의와 고립으로 향하게 한다. 지나친 비밀 기도와 연결된 어떤 위험이 있으며, 집단의 기도, 공동 예배가 그런 기도를 고치고 예방한다.
91:8.1 (1001.5) 기도에는 참으로 저절로 일어나는 모습이 있는데, 이는 원시인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뚜렷한 개념을 가지기 훨씬 전에, 자기가 비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시초의 인간은 두 가지 다른 상황에서 비는 버릇이 있었다: 끔찍한 곤경에 빠졌을 때, 도움을 얻으려고 손을 뻗는 충동을 느꼈고, 기쁨에 날뛸 때, 충동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데 빠졌다.
91:8.2 (1001.6) 기도는 마술이 진화된 것이 아니다. 이 둘은 따로 생겨났다. 마술은 신을 형편에 맞게 적응시키려는 시도였고, 기도는 인격자를 신의 뜻에 맞게 조정하려는 노력이다. 참된 기도는 도덕과 종교성이 있지만, 마술은 이 중에 어느 것도 없다.
91:8.3 (1001.7) 기도는 길들인 관습이 될 수도 있고, 많은 사람은 남이 기도하기 때문에 기도한다. 또 더러는 그들이 때맞추어 간청을 드리지 않으면 무슨 끔찍한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서 기도한다.
91:8.4 (1001.8) 어떤 사람에게 기도는 고마움을 차분하게 표현하는 것이요, 다른 사람에게는 찬미와 사회적 예배를 집단이 표현한 것이다. 어떤 때 기도는 다른 사람의 종교를 흉내낸 것이요, 한편 참되게 기도할 때 기도는 사람의 영적 성품이 어디에나 계시는 창조자의 영과 성실하게, 신뢰하면서 가지는 교통이다.
91:8.5 (1001.9) 기도는 하나님을 의식함을 저절로 입 밖에 내는 것일 수도 있고, 신학적 고백문을 뜻 없이 낭독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혼이 드리는 환희의 찬미이든지, 아니면 두려움에 질린 필사자가 종처럼 복종하는 것일 수 있다. 때때로 기도는 영적 목마름을 애처로이 표현한 것이고, 때때로 경건한 구절을 뻔뻔스럽게 외치는 것이다. 기도는 기쁨에 넘친 찬미이든지 또는 용서를 찾는 겸손한 간청일지 모른다.
91:8.6 (1001.10) 기도는 불가능한 것을 바라는 어린아이 같은 부탁이든지, 아니면 도덕적 성장과 영적 권능을 얻으려는 성숙한 탄원일 수도 있다. 간구는 날마다 먹는 빵을 얻기 위하거나, 하나님을 찾고 그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을 다하는 소망을 담을 수도 있다. 기도는 온통 이기적 요청일 수도 있고, 사심 없는 형제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참되고 훌륭한 손짓일 수도 있다.
91:8.7 (1001.11) 기도는 복수하려는 성난 외침일 수도 있고, 자기의 적을 위한 자비로운 중재일 수도 있다. 기도는 하나님의 생각을 바꾸려는 희망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사람의 자아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기법일 수도 있다. 기도는 엄격하다고 생각되는 재판관 앞에서 길 잃은 죄인이 움츠러들어 드리는 탄원이든지, 또는 살아 계신 자비로운 하늘 아버지의 해방된 아들이 기쁨에 넘쳐 표현하는 말일 수도 있다.
91:8.8 (1001.12) 현대인은 순전한 개인적 방법으로 하나님과 여러 가지를 의논한다는 생각에 어리둥절해한다. 많은 사람이 때마다 기도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들은 특별한 압력을 받아야―비상시에―겨우 기도한다. 사람은 하나님께 말씀드리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지만 오직 영적 어린이가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나서거나 그의 생각을 주제넘게 바꾸려 할 것이다.
91:8.9 (1002.1) 그러나 참된 기도는 실체에 이른다. 공기가 올라가고 있을 때에도, 어떤 새든지 날개를 펴지 않고는 날아오를 수 없다. 기도가 사람을 높여 주는 것은 기도가 우주의 올라가는 영적 기류(氣流)를 이용하여 진보하는 기법이기 때문이다.
91:8.10 (1002.2) 진정한 기도는 영적 성장에 보탬이 되고, 태도를 고치며, 신과 교통함으로부터 생기는 만족을 낳는다. 그 기도는 하나님 의식이 저절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91:8.11 (1002.3)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리를 더 계시해주고, 아름다움을 더 헤아리게 만들고, 확대된 선(善) 개념을 줌으로 사람의 기도에 응답한다. 기도는 주관적 손짓이지만, 인간 체험의 영적 수준에서 막강한 객관적 실체들과 접촉한다. 기도는 인간을 초월하는 가치를 얻으려고 인간이 뜻깊게 손을 뻗는 것이다. 기도는 가장 효력 있는 영적 성장 자극제이다.
91:8.12 (1002.4) 말은 기도와 상관이 없다. 말은 다만 영적 간청의 강물이 어쩌다 흘러가는 지적 경로일 뿐이다. 기도에 쓰이는 낱말의 가치는 사사롭게 드리는 예배에서 순전히 자신에게 암시하며, 집단 예배에서는 사회에게 암시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태도에 응답하고, 말에 응답하지 않는다.
91:8.13 (1002.5) 기도는 전투에서 달아나는 기법이 아니라, 오히려 전투 한가운데서 성장에 이르는 자극이다. 물건이 아니라 오직 가치있는 것을 위해서,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장을 위하여 기도할진저.
91:9.1 (1002.6) 너희가 효과 있는 기도를 드리고 싶다면, 널리 적용되는 간구의 법칙을 마음 속에 새겨야 한다:
91:9.2 (1002.7) 1. 너희는 우주 현실의 문제에 성실하고 씩씩하게 맞섬으로 힘있는 기도자로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너희는 우주의 끈기를 가져야 한다.
91:9.3 (1002.8) 2. 너희는 인간으로서 적응하는 인간적 능력을 정직하게 다 소모했어야 한다. 너희는 부지런했어야 한다.
91:9.4 (1002.9) 3. 너희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영적 성장의 품속에, 머리 속의 모든 소망과 혼의 모든 희망을 던져야 한다. 너희는 의미 있는 것들이 향상되고 가치 기준이 높아짐을 체험했어야 한다.
91:9.5 (1002.10) 4. 너희는 신의 뜻을 마음을 다하여 선택해야 한다. 너희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절대적 핵심을 없애야 한다.
91:9.6 (1002.11) 5.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고 행하기를 바랄 뿐 아니라, 너희는 아버지의 뜻을 실제로 행하는 데 조건 없이 거룩히 바치고 힘차게 헌신해 왔다.
91:9.7 (1002.12) 6. 너희의 기도는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신의 완전을 달성하는―길에 부딪치는 특정한 인간 문제를 푸는 신성한 지혜를 얻도록 순전히 지향될 것이다.
92:0.1 (1003.1) 유란시아에서 어떤 체계적 계시가 내리기 오래 전부터, 사람은 진화하는 체험의 일부로서 자연히 생긴 종교를 소유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기원을 가진 이 종교는 그 자체로서 사람이 가진, 동물을 초월하는 자질의 산물이었다. 진화 종교는 야만인ㆍ미개인ㆍ문명인 안에서 작용하고, 그에게 부딪치는 다음 영향력의 보살핌을 통해서, 수천 년에 걸쳐서 인류가 체험적 경력을 쌓는 동안 천천히 생겼다:
92:0.2 (1003.2) 1. 예배 보조자―동물 의식에서 실체를 파악하는, 동물 초월 잠재성이 나타나는 것. 이것을 신을 찾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라고 불러도 좋다.
92:0.3 (1003.3) 2. 지혜 보조자―상급의 표현 경로에서, 그리고 늘 확대되는 신의 실체 개념을 향하여, 경건한 지성 속에 찬미를 지도하는 성향이 나타나는 것.
92:0.4 (1003.4) 3. 성령(聖靈)―이것은 지성을 초월하는 초기의 선물이며, 모든 진정한 인격 안에 어김없이 나타난다. 예배를 갈망하고 지혜를 바라는 지성에게 베푸는 이 봉사는 신학 개념으로서, 또 실제로 사실로 인격이 체험하는 것으로서 인간이 살아남는다는 가설을 스스로 깨닫는 능력을 창조한다.
92:0.5 (1003.5) 이 세 가지 신성한 보살핌이 나란히 작용하는 것은 진화적 종교의 성장을 시작하고 추진하기에 아주 넉넉하다. 이 영향을 나중에 생각 조절자, 세라핌, 진리의 영이 확대하며, 이 모두가 종교의 발전 속도를 빠르게 한다. 이 매체들은 유란시아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왔고, 이 행성이 사람 사는 구체로 남아 있는 한, 여기서 계속할 것이다. 이 신성한 매체들의 많은 잠재성은 아직까지 표현될 기회를 가진 적이 없다. 필사자의 종교가 상물질 가치와 영적 진리의 숭고한 꼭대기를 향하여 한 수준 한 수준 올라감에 따라서, 많은 것이 다가오는 시대에 드러날 것이다.
92:1.1 (1003.6) 초기의 공포증과 귀신들로부터, 영들을 처음에 강제하고 다음에 구슬리려는 노력을 포함하여, 연속된 여러 발전 단계를 통해서 종교가 진화한 것을 추적해 보았다. 부족의 주물은 성장하여 토템과 부족 신이 되었고, 마술 주문은 현대의 기도가 되었다. 처음에 하나의 희생 행위였던 할례는 위생 절차가 되었다.
92:1.2 (1003.7) 종족들이 야만인이었던 초기 시절 전체에 걸쳐서, 종교는 자연 숭배로부터 귀신 숭배를 거쳐서 주물 숭배에 이르기까지 진보했다. 문명이 밝아옴과 함께 인류는 더 신비스러운 상징적 관념을 신봉했고, 한편 이제 성숙기에 가까워지면서 인류는 참 종교를 이해하기에, 아니 바로 진리의 계시가 시작되는 것을 위해서도 성숙해지고 있다.
92:1.3 (1004.1) 종교는 영적 관념과 환경에 대하여 지성이 생물학적으로 반응함으로 일어난다. 종교는 한 민족 안에서 좀처럼 멸망하거나 바뀌지 않는 것이다. 종교는 어느 시대에도 신비스러운 것에 대한 사회의 조정이다. 하나의 사회 제도로서, 종교는 의식ㆍ상징ㆍ제사ㆍ성서ㆍ제단ㆍ성소(聖所)ㆍ성전을 포함한다. 거룩한 물, 유품ㆍ주물ㆍ부적ㆍ예복ㆍ종(鐘)ㆍ북ㆍ사제직이 모든 종교에 공통으로 있다. 그리고 순전히 진화된 종교를 마술이나 요술로부터 온전히 분리하기는 불가능하다.
92:1.4 (1004.2) 신비와 권능이 언제나 종교적 느낌과 두려움을 자극해 왔고, 한편 감정은 이 둘의 발달을 강력하게 조절하는 요소로서 늘 작용해 왔다. 두려움은 언제나 기본되는 종교적 자극제였다. 두려움은 진화 종교에서 신들의 모습을 꾸미고, 원시 신자의 종교 의식(儀式)을 자극한다.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서, 두려움은 경외ㆍ찬미ㆍ존경ㆍ동정심으로 인하여 수정되고, 그리고 나서 가책과 뉘우침이 이를 더욱 조절한다.
92:1.5 (1004.3) 어느 아시아 민족은 “하나님은 크게 두려운 분이라”고 가르쳤다. 그것은 순전히 진화된 종교의 산물이다. 가장 높은 부류의 종교적 생활의 계시가 된 예수는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선언했다.
92:2.1 (1004.4) 종교는 모든 인간 제도 가운데 가장 경직되고 신축성이 없지만, 변하는 사회 뒤에 처져서 적응한다. 결국, 진화된 종교는 변하는 도덕 관습을 반영하며, 다시 이것은 계시된 종교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느리고 확실하게, 하지만 투덜거리면서, 종교(예배)는 지혜―체험적 논리가 안내하고 신의 계시가 비춰 주는 지식―의 발자국을 좇아서 따라간다.
92:2.2 (1004.5) 종교는 도덕 관습에 집착한다. 이미 있던 것은 오래 되었고, 신성하다고 생각된다. 다른 이유가 아니고 이 때문에, 돌로 만든 연장은 청동기 시대와 철기(鐵器) 시대까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 말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나에게 돌로 된 제단을 만들고자 하거든 너희는 깎은 돌로 세우지 말지니, 만드는 데 연장을 쓰면, 너희는 제단을 더럽혔느니라.” 오늘날도, 힌두인은 원시의 불 송곳을 써서 제단에 불을 지핀다. 진화된 종교의 과정에서, 새로운 것은 언제나 신성 모독으로 여겼다. 성찬(聖餐)은 새롭고 가공된 먹을 것이 아니라, 가장 원시적 식품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불로 구운 고기, 쓴 나물과 함께 이스트 넣지 않은 빵.” 온갖 종류의 사회 관행, 그리고 법 절차까지도 옛 모습에 집착한다.
92:2.3 (1004.6) 음탕하다고 여길 수 있는 많은 것이 다른 종교의 성서에 발표된 것을 보고 현대인이 놀랄 때, 지나가는 세대들이 그들의 선조가 거룩하고 신성하다고 여긴 것을 두려워 없애지 못했다는 것을 멈추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 세대가 음탕하다고 볼 수도 있는 많은 것을, 이전 세대들은 용납된 관습의 일부로, 아니 인정받은 종교 의식이라고까지 여겼다. 상당한 양의 종교적 논쟁은, 오래 되었지만 꾸짖어 마땅한 관습을 새로 제시된 논리와 절충하고, 오래 되고 묵은 풍습을 신조로 영속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면서 그럴듯한 이론을 찾으려는 끊임없는 시도 때문에 일어났다.
92:2.4 (1004.7) 그러나 종교의 성장을 너무 갑자기 가속하려고 애쓰는 것은 어리석을 따름이다. 한 종족이나 민족은 어떤 상급 종교로부터도, 적응하는 천재와 함께, 당대의 그 진화적 지위와 상당히 일치되고 양립할 수 있는 것을 동화할 수 있을 뿐이다. 사회ㆍ기후ㆍ정치ㆍ경제 조건은 모두, 종교적 진화 과정과 진보를 결정하는 데 온통 영향을 미친다. 사회의 도덕은 종교, 다시 말해서, 진화된 종교에 좌우되지 않는다. 오히려 종족의 도덕이 종교의 형태를 결정한다.
92:2.5 (1005.1) 사람의 종족들은 이상하고 새로운 종교를 그저 겉으로만 받아들인다. 새 종교를 그들의 도덕 관습과 옛날의 믿는 방식에 실제로 적응시킨다. 이것은 어떤 뉴질랜드 부족의 예가 잘 보여준다. 이 부족의 사제들은 이름만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뒤에, 가브리엘로부터 바로 계시를 받았다고 고백했는데, 그 계시의 취지는 바로 이 부족이 하나님이 택한 민족이 되었고, 그들이 절제 없는 성관계, 그리고 오래 되고 꾸짖어 마땅한 풍습, 그들의 수많은 다른 풍습에 마음대로 빠지는 것을 허락한다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새로 기독교인이 된 자들은 모두, 새롭고 덜 까다로운 이 기독교 해석으로 즉시 전향하였다.
92:2.6 (1005.2) 종교는 언젠가 온갖 종류의 반대되고 모순되는 행위를 인가한 적이 있고, 지금 부도덕하거나 죄라고 여기는 거의 모든 것을 한때는 인정했다. 체험으로 배우지 않고 논리의 도움을 받지 않은 양심은, 결코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안전하고 틀림없는 안내자가 된 적이 없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양심은 인간의 혼에게 말씀하는 신의 목소리가 아니다. 양심은 다만 존재의 어떤 현재 단계에서도 그 관습의 도덕적ㆍ윤리적 알맹이의 총합이다. 양심은 단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인간답게 생각한 이상적 반응을 나타낼 뿐이다.
92:3.1 (1005.3) 인간의 종교를 연구하는 것은 화석을 지닌, 지난 시대의 사회의 지층을 검사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습을 한 신들의 도덕 관습은 그러한 신들을 처음 생각한 사람들의 도덕률을 참되게 반영한다. 옛 종교와 신화(神話)는 사라진 지 오래된, 민족들의 신앙과 전통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 이 옛 의식 관습은 새로운 경제 관습과 사회의 진화와 나란히 지속하며, 물론 터무니없이 모순되어 보인다. 그 의식(儀式)의 남은 찌꺼기는 지난날의 민족 종교의 참 모습을 보여준다. 그 종파들은 진리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교리를 널리 펼치려고 형성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여라.
92:3.2 (1005.4) 종교는 언제나 대체로 관례ㆍ의식ㆍ관행ㆍ예식ㆍ독단의 문제였다. 종교는 끈질기게 해악을 끼치는 잘못, 즉 선택 받은 백성이라는 망상에 보통 물들어 있다. 주문 외우기, 영감, 계시, 신을 달래기, 뉘우침, 죄값 물어내기, 중재, 희생물 바치기, 기도, 죄 고백, 예배, 죽은 뒤에 부활, 성찬ㆍ의식ㆍ몸값ㆍ구원, 몸값 내고 되찾기, 계약ㆍ더러움ㆍ정화(淨化)ㆍ예언ㆍ원죄(原罪)와 같은 기본적 종교 관념―이 모두가 원시의 귀신 공포증이 있었던 옛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92:3.3 (1005.5) 원시 종교는 물질적 존재를 위한 싸움이 무덤을 넘어서 사는 것을 포함하려고 연장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신조를 유지하는 것은 자아 보존 투쟁이, 상상하는 귀신 및 영 세계의 영토까지 연장된 것이다. 그러나 진화된 종교를 비난할 유혹을 받을 때 조심하여라. 바로 진화된 종교는 일어난 사실임을 기억할지니,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어떤 개념의 힘은 그 개념이 확실하거나 진실한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얼마나 생생하게 인간에게 호소하는가에 있다.
92:3.4 (1006.1) 진화된 종교는 변화나 수정을 위하여 아무런 대책이 없다. 과학과 달리, 진화된 종교는 그 자체를 진취적으로 수정하는 방안을 마련하지 않는다. 진화된 종교는 그 추종자들이 그 종교가 “유일한 진리”라고 믿기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성자들이 전해 받은 신앙”은 이론적으로 최종이고 틀릴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진보가 그 단체 자체를 수정하거나 파괴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숭배 단체는 발전에 저항한다. 따라서 언제나 숭배 단체에게 수정을 강제해야 한다.
92:3.5 (1006.2) 오로지 두 가지 영향이 자연 종교의 교리를 수정(修正)하고 향상할 수 있는데, 하나는 느리게 진행하는 도덕 관습의 압력이요, 다른 하나는 신기원의 계시가 정기적으로 빛을 비추는 것이다. 그리고 진보가 느린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옛날에는 진취성이나 창의성이 있으면 요술사로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뜻했다. 숭배 단체는 몇 세대에 걸친 시대와 오랜 세월에 걸친 주기를 가지고 느리게 진보한다. 그러나 그 단체는 앞으로 나아간다. 귀신을 믿는 진화된 신앙은 계시된 종교의 철학을 받아들일 기초를 쌓았고, 이것은 궁극에 그 근원인 미신을 파괴할 것이다.
92:3.6 (1006.3) 종교는 여러 가지로 사회의 발전에 장애가 되었지만, 종교가 없이 지속되는 도덕이나 윤리, 가치 있는 문명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종교는 많은 비종교 문화의 어머니가 되었다: 조각은 우상 만들기에서, 건축은 성전 짓기에서, 시(詩)는 주문에서, 음악은 예배하는 노래에서, 연극은 영의 인도를 대신하는 연기에서, 춤은 철마다 예배하는 잔치에서 비롯하였다.
92:3.7 (1006.4) 그러나 종교가 문명의 발전과 보존에 필수였다는 사실에 주의를 불러일으키는 한편, 자연 종교는 달리 그 종교가 육성하고 유지한 바로 그 문명을 또한 절름발이로 만들고 방해하려고 많이 수고했다는 것을 적어야 한다. 종교는 산업 활동과 경제 발전을 방해했다. 노동을 헤프게 쓰고 자본을 낭비했다. 종교는 가족에게 반드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평화와 선의를 적절히 육성하지 않았다. 종교는 때때로 교육을 게을리 했고 과학의 성장을 더디게 만들었다. 죽음을 부유하게 꾸미기 위해서 삶을 지나치게 빈곤하게 만들었다. 진화된 종교, 인간의 종교는 정말로 이 모든 것, 그리고 더 많은 잘못ㆍ오류ㆍ실수를 저지른 죄가 있다. 그런데도 종교는 문화적 윤리, 문명화된 도덕, 사회의 단결을 유지했고, 계시된 종교가 후일에 많은 이러한 진화적 결점을 메우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92:3.8 (1006.5) 진화된 종교는 사람에게 가장 비용이 많이 든 제도였지만, 비할 수 없이 효과가 있었다. 인간의 종교는 오직 진화된 문명에 비추어서 정당화될 수 있다. 사람이 동물의 진화에서 올라간 결과가 아니라면, 그러한 종교 발전 과정을 정당화할 수 없을 것이다.
92:3.9 (1006.6) 종교는 자본의 축적을 용이하게 만들었고, 어떤 종류의 일을 육성했다. 사제들의 여가는 예술과 지식을 권장했고, 결국 그 종족은 초기에 윤리적 기법의 온갖 잘못의 결과로서 많은 것을 얻었다. 정직한 샤먼과 그렇지 않은 샤먼은 비용이 무척 비싸게 들었어도, 그들은 제 값을 충분히 했다. 지식 계급과 과학 그 자체는, 기생하는 사제 계급으로부터 솟아나왔다. 종교는 문명을 육성하고, 사회의 연속성을 마련해 주었고, 세세토록 도덕을 유지하는 경찰력이 되었다. 종교는 인간의 단련과 자제를 마련해 주었고, 이것은 지혜가 생길 수 있게 만들었다. 종교는 진화에서 효과 있는 채찍이며, 이 채찍은 게으르고 고통 받는 인류를 지능이 놀고 있는 자연 상태로부터 더 높은 이성과 지혜의 수준으로, 앞으로, 위로 가도록 사정 없이 몬다.
92:3.10 (1006.7) 그리고 동물로서 올라가서 얻은 이 신성한 유산, 진화된 종교를 계시된 종교로 계속 검열함으로, 그리고 진정한 과학의 불타는 용광로를 이용하여 늘 계속 다듬고 고귀하게 만들어야 한다.
92:4.1 (1007.1) 계시는 진화를 따르지만 언제나 진취적이다. 한 세계의 역사 시대를 통해서 종교의 계시는 늘 확대되고 있고 연달아 사람을 더욱 깨우치는 것이었다. 연속하여 진화하는 종교들을 분류하고 검열하는 것이 계시의 사명이다. 그러나 계시가 진화된 종교들을 높이고 개선하려면, 신의 그러한 방문은 그 가르침을 발표하는 시대의 생각 및 반응과 너무 멀리 동떨어지지 않은 가르침을 묘사해야 한다. 이처럼 계시는 언제나 진화와 연락을 유지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한다. 계시된 종교는 반드시 받아들이는 사람의 능력에 제한을 받는다.
92:4.2 (1007.2) 그러나 겉으로 나타나는 연락이나 유래와 상관 없이, 계시된 종교는 반드시, 최종 가치를 가진 어떤 신, 그리고 죽은 뒤에 인격 신분이 살아남는다는 어떤 개념을 믿는 신앙의 특징을 가진다.
92:4.3 (1007.3) 진화된 종교는 감상적이지만 논리가 없다. 그 종교는 가상하는 귀신 및 영 세계를 믿는 것에 대한 사람의 반응이다―미지의 것을 깨닫고 두려워함으로 자극 받는, 인간의 믿음이자 반사 작용이다. 실재하는 영적 세계가 계시 종교를 제시한다. 계시 종교는 우주의 신들을 믿고 기대려 하는 필사자의 갈망에 지능을 초월하는 우주가 반응하는 것이다. 진화된 종교는 인류가 멀리 빙 돌아서 진리를 찾으려고 더듬는 것을 그린다. 계시된 종교는 바로 그 진리이다.
92:4.4 (1007.4) 종교적 계시를 내린 여러 사건이 있었지만, 신기원(新紀元)의 중요성을 가진 것은 겨우 다섯이다. 이것들은 다음과 같다:
92:4.5 (1007.5) 1. 달라마시아의 가르침. 칼리가스티아 영주 참모진의 유형(有形) 참모 1백인이 참된 첫째 근원 중심 개념을 처음으로 유란시아에 선포하였다. 확대되는 이러한 신의 계시는 행성의 탈퇴와 교육 체제의 붕괴로 갑자기 끝날 때까지, 30만 년이 넘도록 이어졌다. 반이 한 일을 제쳐놓고, 달라마시아 계시의 영향은 온 세계에서 실질적으로 사라졌다. 아담이 도착할 때가 되자 놋 족속조차 이 진리를 잊어버렸다. 1백인의 가르침을 받은 모든 사람 가운데, 홍인이 그 가르침을 가장 오래 지녔다. 그러나 큰 영의 관념은 아메리카 인디안의 종교에서 겨우 흐릿한 개념이었고, 기독교와 접촉을 가졌을 때 그 개념이 크게 분명해지고 강화되었다.
92:4.6 (1007.6) 2. 에덴의 가르침. 아담과 이브는 진화 민족들에게 만물의 아버지 개념을 다시 묘사했다. 첫째 에덴의 붕괴는 아담의 계시가 미처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에 그 과정을 멈추게 했다. 그러나 중지된 아담의 가르침을 셋 족속 사제들이 계속하였고, 이 진리의 얼마큼은 세계에서 결코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다. 레반트의 종교적 진화의 경향 전체가 셋 족속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수정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2500년이 되자 인류는 에덴 시절에 후원받았던 계시를 대체로 잃어버렸다.
92:4.7 (1007.7) 3. 살렘의 멜기세덱. 네바돈의 이 비상시 아들은 유란시아에서 세 번째로 진리의 계시를 개시했다. 그의 가르침의 근본 교훈은 신뢰와 믿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전능한 은혜로움을 의지할 것을 가르쳤고, 믿음은 행위요, 행위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다고 선포했다. 그의 가르침은 다양한 진화된 종교의 관념 및 풍습과 차츰 서로 섞였고, 그리스도 이후 처음 천년이 시작될 때 유란시아에서 있었던 여러 신학 체계로 마침내 발전되었다.
92:4.8 (1008.1) 4.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미가엘은 하나님이 우주의 아버지라는 개념을 유란시아에 네 번째로 발표했고, 이 가르침은 그 뒤로 늘 널리 지속하였다. 그의 가르침의 본질은 사랑과 봉사였다. 즉 지음받은 아들이 아버지 하나님이 사랑으로 베푸는 봉사를 깨닫고, 또 그에 반응하여 자진하여 사랑으로 예배하는 것이요, 그러한 지음받은 아들들은 자유 의지로 형제들에게 봉사를 베풀고, 이러한 봉사로 마찬가지로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을 기쁘게 깨닫는다.
92:4.9 (1008.2) 5. 유란시아 논문집. 이 글은 이 논문집 가운데 하나인데, 이것은 유란시아의 필사자들에게 주는 최근의 진리 발표이다. 이 여러 논문은 모든 이전의 계시와 다르니, 이것은 한 우주 성격자의 작품이 아니라, 여러 존재의 종합된 발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의 아버지 앞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어떤 계시도 결코 완벽할 수 없다. 하늘이 베푸는 모든 다른 봉사는 기껏해야 부분적ㆍ일시적이며, 시공의 지역 조건에 실용적으로 적응되었다. 이처럼 인정하는 것은 모든 계시에서 즉시 생기는 효과와 권한을 아마도 깎아내릴지 모르지만, 유란시아의 필사 종족들에게 최근에 진리를 이처럼 내린 계시의 미래 영향과 권한을 약화시키는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그렇게 솔직히 말하는 것이 좋은 때가 유란시아에 왔다.
92:5.1 (1008.3) 진화된 종교에서, 신들은 사람과 비슷한 모습으로 존재한다고 생각되었다. 계시된 종교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아니 신의 유한한 모습을 따라서 빚어졌다고―가르침 받았다. 계시의 가르침과 진화의 산물이 혼합되어 합성된 신앙의 경우에 하나님 개념은 다음이 섞인 것이다:
92:5.2 (1008.4) 1. 여러 진화 종파의 선재하는 관념.
92:5.5 (1008.7) 대부분의 큰 종교 시기는 어떤 뛰어난 인물의 일생과 가르침으로 개시되었다. 지도층은 역사에서 대다수의 가치 있는 도덕 운동에 기원을 주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지도자의 가르침을 희생하면서 그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가 선포하는 진리를 놓치더라도 그 인물을 경외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유가 없지는 않다. 진화 인간의 가슴 속에는, 위로부터 또 저 세상으로부터 도움을 찾는 본능적 소망이 있다. 이 갈망은 행성 영주와 나중에 물질 아들들이 땅에 나타나기를 기대하도록 고안되었다. 유란시아에서 사람은 이 초인간 지도자와 통치자들을 빼앗겼고, 따라서 초자연 기원과 기적 같은 생애에 관계되는 전설로 인간 지도자들을 덮어 가림으로써 항상 이 손실을 메우려고 애쓴다.
92:5.6 (1008.8) 많은 민족이 그들의 지도자가 처녀로부터 태어났다고 상상했다. 이러한 지도자의 생애에는 기적의 사건들이 헤프게 널려 있고, 그가 돌아오기를 각자의 집단이 언제나 기대한다. 중앙 아시아에서 부족 사람들은 아직도 징기스칸이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티벳ㆍ중국ㆍ인도에서는 부처를 기다린다. 이슬람에서는 모하메드이고, 아메리카 인디안 사이에서는 헤수나닌 오나모나론톤이었다. 히브리인은 대체로 아담이 물질적 통치자로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바빌론의 신 마르둑은 아담의 전설이 지속된 것이고, 이 하나님의 아들 관념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였다. 아담이 땅에 나타난 뒤에, 이른바 하나님의 아들들은 세계의 여러 종족 사이에 공통된 것이었다.
92:5.7 (1009.1) 그러나 사람들이 이들을 미신으로 경외한 것과 상관 없이, 인류의 도덕ㆍ철학ㆍ종교의 진보를 위해서, 이 선생들은 받침점과 같은 현세의 인물이요, 그 위에 계시된 진리의 지렛대가 놓여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92:5.8 (1009.2) 오나가로부터 구루 나낙까지 1백만 년 동안 유란시아의 인간 역사에서 수백의 종교 지도자가 있었다. 이 기간에 종교적 진리와 영적 믿음의 물결이 여러 번 밀물과 썰물처럼 올라오고 내려갔으며, 지난날에 유란시아에서 있었던 각 종교의 부흥은 어떤 종교 지도자의 일생과 가르침과 동일시되었다. 근래의 선생들을 고려하면서 아담 뒤에 유란시아에서 7대 종교 시대로 이들을 묶는 것이 도움이 될까 한다:
92:5.9 (1009.3) 1. 셋 족속 시대. 아모삿의 지도 밑에서 다시 생긴 셋 족속 사제들은 아담 이후에 큰 선생들이 되었다. 그들은 안드 족속의 땅에서 두루 활동했고, 그들의 영향은 그리스인ㆍ수메르인ㆍ힌두인 사이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후자 사이에서 이 사제들은 힌두 신앙의 브라만으로서 오늘날까지 계속하였다. 셋 족속과 그 추종자들은 아담이 계시한 삼위일체 개념을 결코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다.
92:5.10 (1009.4) 2. 멜기세덱 선교사 시대. 유란시아 종교는 그리스도보다 거의 2천 년 전에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살렘에 살면서 가르쳤을 때, 그가 임명한 선생들의 노력으로 적지 않게 부활되었다. 이 선교사들은 믿음이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하여 지불하는 값이라고 선포했고, 그들의 가르침은 비록 금방 나타나는 종교를 낳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후일에 진리 선생들이 유란시아 종교들을 세우게 된 그 기초를 형성하였다.
92:5.11 (1009.5) 3. 멜기세덱 이후 시대. 아메니모피와 이크나톤 두 사람이 이 시기에 가르쳤지만, 멜기세덱 이후 시대에 뛰어난 종교적 천재는 레반트의 베두인 집단의 지도자이자 히브리 종교의 창립자―모세―였다. 모세는 일신교를 가르쳤다. 그는 말했다: “듣거라, 아 이스라엘아, 주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라.” “주, 그는 하나님이로다. 그 외에 아무도 없도다.” 모세는 그의 민족 사이에서 귀신 숭배의 찌꺼기를 뿌리 뽑으려고 끈질기게 추구하였고, 그 신봉자들에게 사형을 내리기까지 했다. 후계자들이 모세의 유일신 사상을 더럽혔지만, 나중에 그들은 그의 많은 가르침으로 돌아갔다. 모세의 위대함은 지혜와 총명에 있다. 다른 사람들은 더 위대한 하나님 개념을 가졌지만, 어느 누구도 큰 무리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진보된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는 데 그렇게 성공하지는 않았다.
92:5.12 (1009.6) 4. 기원전 6세기. 많은 사람이 이 세기에 진리를 선포하려고 일어났는데, 이때는 유란시아에서 일찍이 구경했던 바 종교적 각성이 있던 큰 세기 중에 하나였다. 이들 가운데 고타마ㆍ공자ㆍ노자ㆍ조로아스터, 그리고 자이나교 선생들을 기록해야 한다. 고타마의 가르침은 아시아에서 널리 퍼지게 되었고, 수백만이 그를 부처로 존경한다. 공자와 중국인의 도덕의 관계는 플라톤과 그리스 철학의 관계와 같았고, 이 두 가지 가르침에 대하여 종교적 반응이 있었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어느 쪽도 종교 스승은 아니었다. 공자가 인간성에서 본 것이나 플라톤이 이상주의에서 본 것보다, 노자는 도(道)에서 하나님을 더 보았다. 조로아스터는 유행하던 이영(二靈) 사상, 곧 좋은 영과 나쁜 영 개념에 많이 영향을 받았지만, 동시에 하나의 영원한 신 관념과 궁극에 빛이 어둠을 이긴다는 생각을 분명히 높였다.
92:5.13 (1010.1) 5. 서기 1세기. 종교 스승으로서, 나사렛의 예수는 세례자 요한이 세운 종파를 가지고 시작했으며, 금식과 형식을 피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나아갔다. 예수를 제외하고, 타르수스의 바울과 알렉산드리아의 빌로는 이 시대에 가장 위대한 선생이었다. 그들의 종교 개념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닌 그 종교의 진화에 지배적인 역할을 해 왔다.
92:5.14 (1010.2) 6. 서기 6세기. 모하메드는 그가 살던 시대의 많은 교리보다 뛰어난 종교를 창시했다. 그의 종교는 외국 종교의 사회적 요구에 대하여, 또 자기 민족의 종교 생활의 모순에 대한 항쟁이었다.
92:5.15 (1010.3) 7. 서기 15세기. 이 시기에는 두 가지 종교 운동을 보았는데, 하나는 서양에서 기독교의 통일이 무너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양에서 새 종교가 합성된 것이다. 유럽에서는 제도화된 기독교가 계속된 성장이 통일과 양립할 수 없게 만든 정도까지 경직되었다. 동양에서는 이슬람교ㆍ힌두교ㆍ불교의 통합된 가르침을 나낙과 추종자들이 시크교로 합성했는데, 이것은 아시아의 가장 진보된 종교 중에 하나였다.
92:5.16 (1010.4) 유란시아의 앞날은 의심할 것 없이, 종교적 진리―하나님이 아버지이고 모든 사람이 형제인 것―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등장하는 특징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지적 신학이 사타니아 체계에서 유란시아의 특징을 나타내는 바와 같이, 이 미래 선지자들의 뜨겁고 성실한 노력을 종교 사이의 장벽을 높이는 데 쏟기보다, 그런 여러 신학을 따르는 많은 추종자 사이에서, 영적으로 신을 예배하는 종교적 형제 정신을 기르는 방향으로 더욱 쏟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92:6.1 (1010.5) 20세기 유란시아의 종교들은 사람이 신을 숭배하려는 충동이 어떻게 사회에서 진화했는가에 관하여 재미있는 연구를 제공한다. 많은 종교가 귀신을 숭배하던 시절 이후로 거의 진보하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피그미인 가운데 더러는 영에 둘러싸인 환경을 조금 믿지만, 그들의 부류는 아무런 종교적 반응이 없다. 그들은 종교의 진화가 시작되었을 때 원시인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오늘날 그대로 있다. 원시 종교의 기본 신앙은 죽은 뒤에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성격을 가진 하나님을 예배하는 개념은 상급의 진화적 발전, 아니 계시의 첫째 단계까지 이르렀음을 가리킨다. 디야크인은 겨우 가장 원시적 종교 관습을 진화했을 뿐이다. 비교적 근래의 에스키모인과 아메리카 인디안은 무척 빈약한 하나님 개념을 가졌다. 그들은 귀신을 믿었고 죽은 뒤에 어떤 종류로 살아남는다는 분명치 않은 관념을 가졌다. 오늘날의 오스트랄리아 원주민은 귀신을 두려워하고, 어둠을 무서워하고, 투박한 조상 존중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줄루인은 귀신을 두려워하고 희생물 바치는 종교를 막 진화시키고 있다. 많은 아프리카 부족은, 기독교인과 모하메드 교인의 선교 사업을 통한 것을 제외하면, 종교의 진화에서 주물 단계를 넘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무리들은, 옛 트라키아인처럼, 일신교 관념을 오랫동안 지녀왔는데, 트라키아인도 불멸을 믿었다.
92:6.2 (1010.6) 유란시아에서 진화 종교와 계시 종교는, 이 여러 논문을 쓰던 시대에 세계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신학 체계로 섞이고 합병되는 동안에, 나란히 진보하고 있다. 이 여러 종교, 20세기에 유란시아의 종교들은 다음과 같이 열거해도 좋다:
92:6.14 (1011.12) 고대에 가장 진보된 종교는 유대교와 힌두교였고, 각기 동양과 서양에서 종교의 발전 과정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힌두인과 히브리인 모두가 자기네 종교가 영감과 계시를 받았다고 믿었고, 다른 것은 모두 한 참된 신앙이 퇴폐된 형태라고 믿었다.
92:6.15 (1011.13) 인도는 힌두ㆍ시크ㆍ모하메드ㆍ자이나 교인으로 갈라져 있고, 각기 하나님과 사람과 우주를 다르게 파악하는 대로 이들을 묘사했다. 중국은 도가(道家)와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고, 일본에서는 신도를 섬긴다.
92:6.16 (1011.14) 국제적이고 종족을 넘어선 큰 신앙은 히브리교ㆍ불교ㆍ기독교ㆍ이슬람교이다. 불교는 세일론과 버마에서부터 티벳과 중국을 거쳐서 일본까지 뻗는다. 오직 기독교가 이에 맞설 만큼, 여러 민족의 도덕 관습에 적응하는 능력을 보였다.
92:6.17 (1011.15) 히브리교는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넘어가는 철학적 과도기를 포함한다. 그것은 진화된 종교와 계시된 종교를 연결하는 진화의 고리이다. 히브리인은 초기에 그들의 진화된 신들로부터 곧장, 계시된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따라간 유일한 서양 민족이었다. 그러나 이 진리는 이사야의 시절까지 결코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사야는 우주의 창조자와 종족 신 관념이 뒤섞여 합쳐진 관념을 다시 한 번 가르쳤다: “아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는 하나님이요, 주 홀로 계시나이다. 주가 하늘과 땅을 만드셨나이다.” 한때 서양 문명이 살아남을 희망은 히브리인의 숭고한 선(善) 개념, 그리고 헬라인의[1] [48] 진보된 아름다움의 개념에 있었다.
92:6.18 (1011.16)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일생과 가르침에 관한 종교이며, 이것은 유대교의 신학에 기초를 두었고, 조로아스터교의 어떤 가르침과 그리스 철학을 흡수함으로 더욱 수정되었는데, 주로 빌로ㆍ베드로ㆍ바울, 이 세 사람이 이를 형성했다. 바울의 시절 이후로 이 종교는 여러 단계의 진화를 거쳤고, 아주 속속들이 서양화되어서, 유럽 바깥에 여러 민족이 기독교를 낯선 하나님이 낯선 사람들에게 준 이상한 계시로 바라본 것은 아주 당연하다.
92:6.19 (1011.17) 이슬람은 북 아프리카, 레반트, 동남 아시아의 종교 문화를 연결한다. 후일의 기독교 가르침과 연결하여, 이슬람을 일신교로 만든 것은 유대인의 신학이었다. 모하메드의 추종자들은 높은 삼위일체 가르침을 믿기 어려워했다. 그들은 세 분의 신다운 성격자와 하나의 신의 교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갑자기 상급의 계시된 진리를 받아들이라고 진화된 지성들을 유도하기는 언제나 어렵다. 사람은 진화된 인간이며, 대체로 진화적 기법으로 종교를 얻어야 한다.
92:6.20 (1012.1) 조상 숭배는 한때 종교의 진화에서 결정적 진보였지만, 불교와 힌두교처럼 비교적 진보된 아주 많은 것 사이에, 이 원시 개념이 중국ㆍ일본ㆍ인도에서 지속하는 것은 놀랍고도 딱하다. 서양에서 조상 숭배는 민족의 신을 우러러보고 종족의 영웅을 존경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20세기에, 영웅을 모시는 이 민족주의 종교는 여러 가지 급진적ㆍ민족주의적 비종교주의에서 그 모습을 나타내며, 이것이 서양에서 많은 종족과 민족의 특징을 나타낸다. 바로 이 태도 중에 많은 것이 영어를 쓰는 민족들의 이름난 대학과 큰 산업 공동체에서 또한 발견된다. 이 개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종교는 다만 “풍족한 생활을 함께 추구하는 것”이라는 관념이다. “민족 종교”는 로마 초기의 황제 숭배로, 그리고 신도(神道)로―국가의 황제 가족 숭배로―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92:7.1 (1012.2) 종교는 결코 과학적 사실이 될 수 없다. 철학은 정말로 과학적 기초 위에 놓여있지만, 종교는 늘 진화된 것이거나 계시된 것이거나, 아니면 오늘날 세상에서 그런 것처럼, 이 두 가지의 가능한 조합으로 남을 것이다.
92:7.2 (1012.3) 새 종교는 발명될 수 없다. 새 종교는 진화되든지 아니면 갑자기 계시된다. 모든 새로운 진화 종교는 단지 오래 된 신앙의 진보하는 표현이요, 새롭게 적응하고 조정된 것일 따름이다. 오래 된 것은 존재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힌두교ㆍ불교ㆍ이슬람교, 그리고 당대의 다른 종파들이 자란 그 토양과 형태로부터 시크교가 싹트고 꽃핀 것처럼, 새로운 것과 합쳐진다. 원시 종교는 아주 민주적이었다. 야만인은 재빨리 빌리거나 빌려 주었다. 오로지 계시된 종교에서, 독재하고 너그럽지 않은 자기 본위의 신학이 나타났다.
92:7.3 (1012.4) 유란시아의 여러 종교는 사람을 하나님에게로 데려오고 사람에게 아버지를 깨닫게 하는 범위 안에서, 다 좋다. 어떤 집단의 신자라도, 그들의 교리가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한 태도는 믿음이 확실한 것이 아니라 신학이 오만(傲慢)하다는 것을 더 말해 준다. 모든 다른 신앙에 담긴 최선의 진리를 연구하고 소화함으로 이득을 얻을 수 없는 유란시아 종교는 하나도 없으니, 모두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들은 이웃의 남아 있는 미신과 낡아빠진 의식(儀式)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을 헐뜯기보다, 그들의 살아 있는 영적 믿음에서 가장 좋은 것을 빌리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92:7.4 (1012.5) 이 모든 종교는 사람이 똑같은 영적 인도에 대하여 다른 지적 반응을 보이는 결과로서 일어났다. 이 종교들은 결코 그 신조ㆍ교리ㆍ의식이 한결같이 되기를 바랄 수 없다―이것들은 지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종교들은 만물의 아버지를 참으로 경배하는 데서 통일을 얻을 수 있고, 언젠가 그렇게 하리니, 이것이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며, 영적으로 모든 사람은 동등하다는 것은 언제까지나 참말이다.
92:7.5 (1012.6) 원시 종교는 대체로 물질의 가치를 의식하는 것이었지만, 문명은 종교적 가치를 높이며, 이는 참 종교가 의미 있고 최고의 가치를 가진 봉사에 자아를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진화함에 따라서, 윤리는 도덕을 다루는 철학이 되고, 도덕성은 가장 높은 의미를 가진 것과 최상의 가치―신답고 영적인 이상―의 기준으로, 자아를 훈련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종교는 저절로 우러나오는 지극한 헌신, 사랑으로 충성하는 산 체험이 된다.
92:7.6 (1013.1) 다음이 종교의 품질을 가리킨다:
92:7.8 (1013.3) 2. 의미 있는 것들의 깊이―최고의 가치가 있는 이것들을 이상적으로 이해하는 데 개인이 민감해지는 것.
92:7.9 (1013.4) 3. 헌신의 깊이―이 신성한 가치 기준에 헌신하는 정도.
92:7.10 (1013.5) 4. 이상주의로 영적 생활을 하는 이 우주의 길에서 인격이 매이지 않고 진보하는 것, 곧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주에서 결코 그치지 않고 진보하는 시민임을 깨닫는 것.
92:7.11 (1013.6) 종교적 의미는 어린아이가 전능 개념을 부모로부터 하나님으로 옮길 때 자의식 속에서 진보한다. 그러한 아이의 종교적 체험은 전부, 대체로 두려움 아니면 사랑이 부모와 자식 관계를 지배했는가에 달려 있다. 노예들은 주인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개념으로 바꾸는 데 언제나 큰 어려움을 겪었다. 문명과 과학과 진보된 종교는 끔찍한 자연 현상에서 생겨난 두려움에서 인류를 벗어나게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더 높은 깨우침을 얻은 교육받은 사람은 신과 교통하는 데 중개인에게 온통 의존하려는 성향을 벗어나야 한다.
92:7.12 (1013.7) 인간답고 눈에 보이는 것을 숭배함으로부터 신답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숭배하도록 옮겨가는 과정에서, 우상 숭배로 머뭇거리는 이 중간 단계를 피할 수 없지만, 이 단계는 깃드는 신의 영이 돕는 봉사를 의식함으로 단축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은 그의 신 개념 뿐 아니라, 또한 그가 명예를 돌리기로 선택한 영웅들의 인품에도 깊이 영향을 받아 왔다. 신답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숭배하게 된 자들이 그 사람을―씩씩하고 용기가 넘치는 그 영웅―요셉의 아들 요수아를 놓치고 못보았다는 것은 무척 유감이다.
92:7.13 (1013.8) 현대인은 알맞게 종교를 스스로 의식하고 있지만, 사회의 변화가 가속되고 전례 없이 과학이 발전함으로 현대인의 예배 관습은 혼란에 빠지고 의심을 받고 있다. 생각하는 남녀는 종교를 다시 정의하기를 바라고, 이 요구는 종교가 자체를 다시 평가하기를 강요할 것이다.
92:7.14 (1013.9) 현대인은 2천 년 동안에 일어난 것보다 더 많이, 한 세대에 인간의 가치를 다시 조정하는 일에 부닥쳤다. 그리고 이 모두가 종교에 대한 사회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며, 이는 종교가 생각하는 기술일 뿐 아니라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92:7.15 (1013.10) 참된 종교는 늘, 동시에 모든 지속하는 문명의 영원한 기초이자 안내하는 별이 되어야 한다.
93:0.1 (1014.1) 멜기세덱은 비상시 아들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들이 한 지역 우주의 여러 세계에서 놀라운 범위의 활동에 종사하기 때문이다. 어떤 특별한 문제가 일어나거나 무엇인가 특별한 일을 시도해야 할 때, 아주 흔히 멜기세덱이 그 과제를 받아들인다. 멜기세덱 아들들이 비상시에, 그리고 우주의 널리 다양한 수준에서, 아니 성격을 나타내는 육체 수준에서도 활동하는 능력은 그들 계급에 특이하다. 오로지 생명 운반자가 이렇게 변형하는 범위의 성격 활동을 어느 정도라도 함께 한다.
93:0.2 (1014.2) 멜기세덱 계급의 우주 아들은 유란시아에서 대단히 활발했다. 12명의 한 집단이 생명 운반자들과 함께 봉사했다. 후일에 있었던 12명의 집단은 칼리가스티아 탈퇴가 있은 바로 뒤에 너희 세계의 관리자가[1] [49] 되었고, 아담과 이브의 시절까지 줄곧 권한을 쥐었다. 이 열두 멜기세덱은 아담과 이브의 실수가 있고 나서 유란시아로 돌아왔고, 그 뒤로 나사렛 예수가 사람의 아들로서 직함으로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가 된 날까지, 행성 관리자로서 계속하였다.
93:1.1 (1014.3) 유란시아에서 아담의 임무가 실패하고 나서 뒤이은 수천 년 동안에, 계시된 진리는 소멸될 위협을 받았다. 비록 머리가 진보하기는 했어도, 인간 종족들은 천천히 영적으로 쇠퇴하고 있었다. 기원전 약 3000년에 하나님 개념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무척 흐릿하게 되었다.
93:1.2 (1014.4) 멜기세덱 관리자 12명은 미가엘이 앞으로 그들의 행성에 수여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일이 얼마나 빨리 일어날 것인지 몰랐다. 따라서 그들은 엄숙한 회의를 열었고, 유란시아에서 진리의 빛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슨 조치를 취해 달라고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에게 탄원했다. 이 간청은 “사타니아의 606번 세계에서 사무의 운영은 온전히 멜기세덱 관리자들의 권한에 속한다”는 지시와 함께 기각되었다. 그리고 나서 관리자들은 아버지 멜기세덱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수여 아들이 도착할 때까지” 그들 스스로 선택한 방식대로 계속하여 진리를 지켜야하고, 이 수여 아들은 “몰수되고 확실치 않은 상태로부터 행성의 여러 직함을 구할 것이라”는 말씀만 겨우 받았다.
93:1.3 (1014.5) 자신들의 수단을 이용하라고 아주 완전히 내던져진 결과로서, 행성 관리자 12명 중의 하나,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온 네바돈 역사에서 꼭 여섯 번만 행해진 일을 하겠다고 자원했다. 이것은 땅에서 그 영역에 임시 사는 사람으로 인격화하는 것, 세상에 봉사하는 비상시(非常時) 아들로서 자신을 수여하는 것이었다. 구원자별 당국이 이 모험을 허가했고, 마키벤타 멜기세덱의 실제 육신화는, 팔레스타인에서 앞으로 살렘 시가 되기로 예정된 곳 가까이에서 이루어졌다. 행성 관리자들은 생명 운반자와 어떤 물리 통제사들, 그리고 유란시아에서 거주하는 다른 하늘 성격자들의 협력을 얻어서, 이 멜기세덱 아들을 육신으로 만드는 사무 전체를 끝마쳤다.
93:2.1 (1015.1) 마키벤타가 유란시아의 인류에게 수여된 것은 예수가 태어나기 1973년 전이었다. 그가 온 것은 볼만한 구경거리는 아니었고, 그가 물질화되는 것은 인간의 눈이 구경하지 못했다. 그가 암돈의 텐트에 들어간 그 중대한 날에 필사 인간이 그를 처음으로 지켜보았고, 암돈은 수메르인 핏줄을 가진 갈대아인 목자였다. 그의 임무의 선포는 이 목자에게 간단히 이른 말씀에 나타나 있다, “나는 멜기세덱이요, 엘 엘리욘, 최고자, 오직 하나인 하나님의 사제이라.”
93:2.2 (1015.2) 그 목자가 놀랐다가 정신이 들었을 때, 이 낯선 사람에게 여러 가지를 캐물은 뒤에, 그는 멜기세덱에게 자기와 저녁을 같이 들자고 청했다. 이것이 마키벤타가 그의 오랜 우주 경력에서 물질 음식을 처음으로 먹은 것이고, 물질 영양은 물질 존재로서 94년의 일생을 통해서 그를 유지하게 되었다.
93:2.3 (1015.3) 그리고 그날 밤에, 그들이 별 빛 아래서 이야기하는 동안,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실체에 대한 진리를 드러내는 사명을 시작했다. 그때 팔을 휘두르면서 암돈을 향해서 말했다. “엘 엘리욘, 최고자는 하늘에 있는 별, 그리고 우리가 사는 바로 이 땅까지도 지으신 신성한 창조자요, 또한 하늘에서 가장 높은 하나님이라.”
93:2.4 (1015.4) 멜기세덱은 자기 둘레에, 나중에 살렘 공동체의 핵심을 이룬 한 무리의 생도와 제자와 신자들을 몇년 안에 모았다. 그는 곧 팔레스타인에서 두루, 엘 엘리욘 최고자의 사제, 살렘의 현자로서 이름이 알려졌다. 둘러싼 어떤 부족들 사이에서 그는 흔히 살렘의 족장, 곧 임금으로 언급되었다. 살렘은 멜기세덱이 사라진 뒤에 예부스 시가 되었고, 나중에 예루살렘이라고 부른 장소였다.
93:2.5 (1015.5) 개인적 모습을 보면 멜기세덱은 그 당시에, 혼합된 놋 민족과 수메르 민족을 닮았고, 키가 거의 180센티미터이고 위엄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갈대아어와 기타 여섯 가지 말을 했다. 가슴에 세 동심원의 상징을 지닌 것을 제외하고, 그는 가나안 사제들과 비슷하게 옷을 입었는데, 세 동심원은 사타니아에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상징이었다. 그가 봉사하는 과정에서 추종자들은 이 세 동심원의 표시를 너무나 거룩하게 여겼고, 그래서 그들은 결코 감히 그것을 쓰지 않았는데, 몇 세대가 지나면서 곧 잊혀졌다.
93:2.6 (1015.6) 마키벤타는 그 영역에 있는 사람들의 방식대로 살았어도, 결코 결혼하지 않았고, 땅에서 자손을 남길 수도 없었다. 그의 육체는, 남자의 몸을 닮기는 했지만, 어느 인종의 생명질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을 제외하고, 실제는 칼리가스티아 영주 참모진의 물질화된 참모 1백인이 사용한 몸, 특별히 지어진 종류의 몸이었다. 유란시아에는 생명나무도 없었다. 마키벤타가 땅에서 얼마큼 오랫동안 남아 있었더라면, 그의 신체 작용은 차츰 나빠졌을 것이다. 실제 일어난 바와 같이, 그는 물질 몸이 망가지기 시작하기 오래 전에, 94년에 걸친 자신 수여 임무를 끝마쳤다.
93:2.7 (1016.1) 육신화된 이 멜기세덱은 생각 조절자를 받았는데, 이 조절자는 시간 세계의 훈계자요 육체의 조언자로서 그의 초인간 성격에 깃들었고, 이렇게 유란시아 문제들과 육신화된 아들 안에 거하는 기법에 대하여, 체험과 실용적 첫걸음을 거쳤다. 이것은 이 아버지 영으로 하여금 나중에 하나님의 아들, 미가엘이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땅에 나타났을 때 그의 인간 지성 속에서 아주 용감하게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유란시아에서 두 지성 속에서 일찍이 활동한 유일한 생각 조절자이지만, 두 지성은 인간다울 뿐 아니라 신다웠다.
93:2.8 (1016.2)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 마키벤타는 행성 관리자 집단의 동료 11명과 완전히 연락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계급의 하늘 성격자들과 교통할 수 없었다. 멜기세덱 관리자들을 제쳐놓고, 그는 사람보다 초인간 지성 존재들과 더 접촉을 가지지 않았다.
93:3.1 (1016.3) 10년이 지나자, 멜기세덱은 살렘에서 여러 학교를 세웠고, 둘째 에덴에서 옛날 셋 족속 사제들이 개발한, 오래 된 체제를 모방하여 학교를 만들었다. 나중에 개종한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시작한 십일조 체제의 개념조차, 또한 옛날 셋 족속 풍습의 남은 전통으로부터 내려왔다.
93:3.2 (1016.4) 멜기세덱은 유일한 하나님, 우주의 신 개념을 가르쳤지만, 사람들이 이 가르침을 놀라시아덱의 별자리 아버지와 연결짓도록 버려두었고, 그는 이 아버지를 엘 엘리욘―최고자라고 불렀다. 멜기세덱은 루시퍼의 지위와 예루셈 사무의 상태에 관하여 거의 입을 다물었다. 체계 군주 라나포지는 미가엘의 수여가 끝날 때까지 유란시아와 거의 상관하지 않았다. 살렘의 학생들 대다수에게 에덴시아는 하늘이었고, 최고자는 하나님이었다.
93:3.3 (1016.5) 세 동심원의 상징은 멜기세덱이 자신 수여의 표시로 채택했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람ㆍ천사ㆍ하나님의 세 왕국을 대표한다고 풀이했다. 그들은 이 믿음을 계속 가지도록 허락되었다.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거의 아무도 이 세 동그라미가 신성하게 유지하고 지휘하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무한하고 영원하고 우주적인 성질을 상징한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했다. 아브라함조차 최고자 세 분이 하나로서 활동한다고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이 상징을 에덴시아의 최고자 세 분을 대표한다고 여겼다. 멜기세덱은 그의 표시가 상징하는 삼위일체 개념을 가르친 한도에서, 보통 이를 놀라시아덱 별자리의 보론다덱 통치자 세 분과 관련지었다.
93:3.4 (1016.6) 멜기세덱은 에덴시아 최고자―유란시아의 신―들이 다스린다는 사실을 넘어서, 하층 계급의 추종자들을 가르치려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 멜기세덱은 지역 우주의 운영과 조직을 포함하여 상급 진리를 가르쳤고, 한편 명석한 제자 켄 사람 노르단과 그 집단에 속한 열심 있는 학생들에게 그는 초우주에 대하여, 그리고 하보나도 포함하여, 진리를 가르쳤다.
93:3.5 (1016.7) 멜기세덱은 카트로의 가족과 함께 30년이 넘도록 같이 살았는데, 그 가족의 식구들은 이 상급 진리를 많이 알았고, 그들 가족 안에서 오랫동안, 아니 그들의 뛰어난 후손 모세의 시절까지도, 그 진리를 지속하였다. 모세는 어머니 편에서 다른 근원을 통해서 뿐 아니라, 이쪽, 그의 아버지 편에서도, 이처럼 멜기세덱 시절부터 물려받은 강력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93:3.6 (1016.8) 멜기세덱은 추종자들에게 그들이 받아들이고 소화할 만한 능력이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쳤다. 하늘과 땅에 대하여, 사람ㆍ하나님ㆍ천사에 관한 현대의 많은 종교 관념조차 이 멜기세덱의 가르침과 그다지 멀지 않다. 그러나 이 위대한 선생은 모든 것을 한 하나님, 우주의 신, 하늘에 계신 창조자, 신성한 아버지의 교리 밑에 종속시켰다. 사람이 찬미하라고 호소할 목적으로, 그리고 바로 이 우주의 아버지의 아들로서 미가엘이 나중에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길을 예비할 목적으로, 이 가르침이 강조되었다.
93:3.7 (1017.1) 멜기세덱은 어느 앞날에 또 다른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가 온 것처럼 육체를 입고 오지만 여자에게서 태어나리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이것이 어째서 후일에 수많은 선생이 예수가 “언제까지나 멜기세덱의 서열을 좇는” 사제, 곧 봉사자라고 주장한 까닭이다.
93:3.8 (1017.2) 따라서 멜기세덱은 유일한 하나님의 실제 파라다이스 아들의 수여를 위하여, 길을 예비하고 세계 추세의 일신교 단계를 준비하였다. 그는 이 하나님이 만물의 아버지라고 뚜렷하게 묘사하였고 이 아버지가, 개인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간단한 조건으로 사람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하나님이라고 아브라함에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땅에 나타났을 때, 미가엘은 파라다이스 아버지에 관하여 멜기세덱이 가르친 모든 것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93:4.1 (1017.3) 살렘의 예배 예식은 무척 간단했다. 멜기세덱 교회의 진흙 서판 명부에 서명하거나 표시한 사람은 누구나 다음 신조를 외우고 동의했다:
93:4.2 (1017.4) 1. 나는 엘 엘리욘, 최고자 하나님, 만물의 유일한 우주 아버지요 창조자를 믿는다.
93:4.3 (1017.5) 2. 희생물과 태운 제물이 아니라 나의 믿음을 보고 하나님이 은총을 내린다고 멜기세덱이 최고자와 한 언약을 나는 믿는다.
93:4.4 (1017.6) 3. 나는 멜기세덱의 일곱 계명에 복종하고, 최고자와 이렇게 약속했다는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이를 것을 약속한다.
93:4.5 (1017.7) 이것이 살렘 부락의 교리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렇게 짧고도 단순한 믿음의 선언조차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 너무 많고 앞선 것이었다. 그들은 다만 아무것도 바치지 않고―믿음으로―신의 은총을 얻는다는 개념을 깨달을 수 없었다. 그들은 사람이 신들에게 벌금을 물어야 할 신세를 타고났다는 믿음을 너무나 깊이 확신했다. 너무 오랫동안, 너무 열심히, 사제들에게 희생물을 바치고 선물을 주었기 때문에, 구원, 즉 신의 은총이 멜기세덱의 언약을 믿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거저 주는 선물이라는 좋은 소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건성으로 믿었고, 그것조차 “옳게 여김을” 받았다.
93:4.6 (1017.8) 멜기세덱이 선포한 칠계명은 옛날 달라마시아 최고 법의 순서를 따라서 모습을 갖추었고, 첫째와 둘째 에덴에서 가르친 칠계명과 무척 비슷했다. 살렘 종교의 이 명령은 다음과 같았다:
93:4.7 (1017.9) 1. 너희는 하늘과 땅을 지으신 최고 창조자 외에 어떤 신도 섬기지 말라.
93:4.8 (1017.10) 2. 믿음이 영원한 구원을 얻는 데 유일한 요구 조건임을 의심하지 말라.
93:4.9 (1017.11) 3. 거짓 증언하지 말라.
93:4.14 (1018.3) 어떤 희생물을 바치는 것도 그 부락 안에서 허락되지 않았지만, 멜기세덱은 오랫동안 지켜 온 관습을 갑자기 뿌리뽑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잘 알았고, 따라서 고기와 피를 바치는 예전의 제사가 아니라 빵과 포도주의 성찬으로 대신하라고 이 사람들에게 지혜롭게 제안하였다. “살렘의 왕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져왔더라” 하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조심스러운 개혁조차 아주 성공하지는 않았다. 여러 부족은 모두 살렘 교외에서 보조 중심들을 유지했고, 거기서 희생물과 태운 제물을 바쳤다. 케도라오머에게 승리한 뒤에, 아브라함도 이 미개한 풍습에 의존하였다. 그는 전통적 희생물을 바칠 때까지 다만 속이 아주 편치 않았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까지 포함하여, 추종자들의 종교 관습에서 희생물 바치는 이 성향을 결코 완전히 없애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93:4.15 (1018.4) 예수처럼, 멜기세덱은 엄격하게 그의 수여 임무를 마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도덕 관습을 개혁하고 세상의 관습을 바꾸려 애쓰지 않았고, 상급의 위생 관습이나 과학적 진리를 선포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두 가지 과제를 이루려고 왔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한 분 계시다는 진리를 땅에서 살려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우주의 아버지의 파라다이스 아들이 나중에 사람으로서 자신을 수여하는 것을 위하여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93:4.16 (1018.5) 멜기세덱은 살렘에서 94년 동안 계시된 기본적 진리를 가르쳤고, 이 기간에 아브라함은 세 번에 나누어 살렘 학교를 다녔다. 그는 마침내 살렘의 가르침으로 개종하였고, 멜기세덱의 가장 명석한 생도이자 주요한 지지자의 하나가 되었다.
93:5.1 (1018.6) “선택된 민족”이라 말하는 것은 잘못일까 하지만, 아브라함이 선택된 사람이라 언급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멜기세덱은 그때 유행하는 여러 신을 믿는 신앙과 구별하여, 하나님이 한 분 계시다는 진리를 살려두는 책임을 아브라함에게 맡겼다.
93:5.2 (1018.7) 마키벤타가 활동할 장소로서 팔레스타인을 선택한 것은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어떤 인간 가족과 접촉을 시작하려는 희망에 얼마큼 근거를 두었다. 멜기세덱이 육신화할 때, 아브라함의 가족처럼 살렘의 교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똑같이 잘 된 많은 가족이 땅에 있었다. 홍인과 황인, 그리고 서쪽과 북쪽으로 안드 족속 후손들 사이에, 똑같이 자질을 가진 가족들이 있었다. 그러나 또 한편, 이 장소들 중에 어디도 지중해의 동쪽 바닷가만큼, 땅에서 미가엘이 나중에 나타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에서 멜기세덱이 선교하고 나중에 히브리 민족 사이에서 미가엘이 나타난 것은 적지 않게, 지리(地理) 때문에, 팔레스타인이 세계에서 당시에 존재했던 무역ㆍ여행ㆍ문명과 관련하여 중앙에 자리잡았다는 사실로 결정되었다.
93:5.3 (1018.8) 한동안 멜기세덱 관리자들은 아브라함의 선조들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들은 어떤 세대에서 지능과 창의력이 있고 지혜롭고 성실한 특징을 가진 자손이 나올 것이라고 자신 있게 기대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테라의 아이들은 모든 면에서 이러한 기대를 채웠다. 테라의 이 다능한 아이들과 접촉하는 이 가능성이 바로 마키벤타가 에집트나 중국이나 인도나 또는 북쪽 부족들 사이가 아니라 살렘에 나타난 것과 상당히 상관이 있었다.
93:5.4 (1019.1) 테라와 그의 온 가족이 살렘 종교로 건성으로 개종하였고, 이 종교는 갈대아에서 전파되었다. 그들은 오비드의 설교를 통해서 멜기세덱의 소식을 들었는데, 오비드는 우르에서 살렘의 교리를 선포한 페니키아인 선생이었다. 그들은 곧장 살렘으로 가려고 우르를 떠났지만, 아브라함의 아우 나홀이 멜기세덱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태도가 미지근했고 그들에게 하란에서 머물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지 오래 지나서야 그들은 가져온 가족 신들을 기꺼이 모조리 깨뜨렸다. 그들은 살렘의 유일한 하나님을 믿고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신을 버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
93:5.5 (1019.2) 아브라함의 아버지 테라가 죽고 몇 주 지난 뒤에, 멜기세덱은 아브라함과 나홀 두 사람을 이렇게 초청하려고 제자들 가운데 하나, 힛 사람 야람을 보냈다. “살렘으로 오라, 너희가 여기서 우리가 영원한 창조자에 관한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들을지니, 너희 두 형제의 깨우친 자손으로 인하여 온 세계가 복을 받으리라.” 그런데 나홀은 멜기세덱 복음을 전부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는 뒤에 남아서 그의 이름을 지닌 강력한 도시 국가를 세웠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삼촌과 함께 살렘으로 가기로 작정하였다.
93:5.6 (1019.3) 살렘에 도착하고 나서 아브라함과 롯은 도시 가까이 있는 산지의 요새를 골랐고, 거기서 그들은 북쪽 침공자들의 잦은 기습에 대비하여 방어할 수 있었다. 이때에 힛 족속, 아씨리아인ㆍ필리스티아인과 기타 집단이 중부와 남부 팔레스타인의 부족들을 항상 침공했다. 산지에 있는 본거지로부터 아브라함과 롯은 살렘까지 자주 찾아갔다.
93:5.7 (1019.4) 살렘 가까이에서 자리잡은 지 오래지 않아 아브라함과 롯은, 그때 팔레스타인에서 가뭄이 있었기 때문에 식량 공급을 얻으려고 나일 강 유역까지 여행했다. 에집트에서 잠깐 머무르는 동안 아브라함은 에집트 왕좌에 있는 먼 친척을 발견했고, 그는 이 임금을 위하여 두 차례에 걸쳐, 사령관으로 일하여 군사적 토벌에 대단히 성공했다. 나일 강 지역에 머무르던 후반기에 그와 아내 사라는 궁중에서 살았고, 에집트를 떠날 때, 그의 군사 작전에서 얻은 전리품의 한 몫을 받았다.
93:5.8 (1019.5) 아브라함이 에집트 궁중의 명예를 떨쳐 버리고 마키벤타가 후원하는 더 영적인 일로 돌아가는 데는 큰 결심이 필요했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에집트에서도 존경을 받았고, 파라오 앞에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을 때, 파라오는 아브라함에게 돌아가서 살렘의 운동에 대해서 서약한 것을 실행하라고 힘차게 밀어주었다.
93:5.9 (1019.6) 아브라함은 임금의 포부를 가졌고, 에집트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그는 온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 민족을 살렘의 통치 하에 두자는 계획을 롯 앞에 펼쳐 놓았다. 롯은 장사에 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의견 차이가 생긴 뒤에, 그는 무역과 축산업에 종사하려고 소돔으로 갔다. 롯은 군인이나 양치기의 생활을 싫어했다.
93:5.10 (1019.7) 아브라함은 가족과 함께 살렘으로 돌아오고 나서, 그의 군사 계획을 다듬기 시작했다. 그는 살렘 지역에서 국가 통치자로서 곧 인정을 받았고, 근처의 일곱 부족을 그의 지휘 하에 연합했다. 정말로 멜기세덱은 가까스로 아브라함을 제어하였고, 아브라함은 나가서 칼로 이웃 부족들을 잡아들여서 그들에게 이처럼 살렘의 진리를 더 빨리 알리려는 열심에 불타 있었다.
93:5.11 (1019.8) 멜기세덱은 모든 둘러싼 부족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군사 우선주의자가 아니었고, 여러 군대가 이리저리 이동하는 동안에 어떤 군대로부터도 공격을 받은 적이 없었다. 나중에 실행된 바와 같이, 그는 아브라함이 살렘 방어 정책을 세우는 것을 전부 마음에 들어했지만, 야심에 불타는 생도의 정복 계획을 승인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관계가 우호적으로 단절되었고, 아브라함은 군사 본부를 세우려고 헤브론으로 갔다.
93:5.12 (1020.1) 아브라함이 훌륭한 멜기세덱과 가까운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그는 둘레에 있는 작은 나라의 임금들보다 큰 이점을 가졌다. 그들은 모두 멜기세덱을 존중했고, 지나치게 아브라함을 무서워했다. 아브라함은 이들이 이렇게 두려워함을 알았고, 이웃을 공격할 적당한 기회를 노릴 뿐이었다. 이 통치자들 중에 더러가 소돔에 살고 있는 조카 롯의 재산을 주제넘게 침공했을 때, 이런 핑계가 생겼다. 이 소식을 듣자, 아브라함은 연합한 일곱 부족의 선두에서, 적을 공격했다. 318명이 되는 자신의 경호단이, 이때 공격한 4000명이 넘는 군대를 지휘하였다.
93:5.13 (1020.2) 아브라함이 전쟁을 선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말리려고 떠났지만, 옛 생도가 전쟁에서 승리해서 돌아올 때에야 겨우 그를 따라잡았다. 아브라함은 살렘의 하나님이 그가 적들을 이기게 해주었다고 주장했고, 자기 전리품에서 10분의 1을 살렘의 금고에 내겠다고 고집하였다. 나머지 90퍼센트는 헤브론에 있는 그의 서울로 옮겼다.
93:5.14 (1020.3) 싯딤에서 이 전투가 있은 뒤에, 아브라함은 열한 부족으로 이루어진 둘째 연방의 지도자가 되었고,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뿐 아니라, 그 근처에 다른 부족들도 모두 똑같이 하도록 처리했다. 소돔의 왕과 가진 외교 거래는, 대체로 그를 두렵게 여기는 태도와 더불어, 소돔 임금과 다른 사람들이 헤브론의 군사 연방에 합세하게 만들었다. 팔레스타인에서 강력한 국가를 세우는 과제에 아브라함은 정말로 한창 진전을 보았다.
93:6.1 (1020.4) 아브라함은 온 가나안을 정복할 꿈을 꾸었다. 멜기세덱이 그 사업을 인가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의 결심을 겨우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사업을 시작하려고 거의 작정했을 때, 이 계획된 왕국의 통치자로서 그를 이어받을 아들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비로소 그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그는 멜기세덱과 또 한 번 회담을 주선했다. 이 회견의 과정에서 살렘의 사제,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아들은 아브라함에게 하늘나라의 영적 개념의 편을 들어, 물질적으로 정복하고 현세에 다스리는 그의 계획을 버리라고 설득했다.
93:6.2 (1020.5) 멜기세덱은 아모리 연방과 싸우는 것이 헛되다고 아브라함에게 설명했지만, 이 뒤떨어진 씨족들은 어리석은 풍습 때문에 확실히 자살하는 것이라, 그래서 몇 세대 안에 그들이 너무나 약해져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그동안에 크게 수가 늘어나고 그들을 쉽사리 정복할 것이라고 멜기세덱은 똑같이 분명하게 일러 주었다.
93:6.3 (1020.6) 그리고 멜기세덱은 살렘에서 아브라함과 공식 서약을 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하늘을 우러러보고, 할 수 있거든 별을 세어 보아라. 그렇게 네 씨가 많아질지니라.”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믿었고, “이것은 그의 의로움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나서 멜기세덱은 그의 자손이 에집트에서 머무른 뒤에 가나안을 미래에 차지한다는 이야기를 일러 주었다.
93:6.4 (1020.7) 멜기세덱이 아브라함과 맺은 이 약속은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하겠다고 찬성하는 협정, 신과 인간 사이의 위대한 유란시아 협정이다.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의 지시를 따르겠다고 찬성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구원은 오직 일함으로―희생물과 제물을 바쳐서―얻을 수 있다고 믿어 왔다. 이제 멜기세덱은 구원, 하나님의 은총을 믿음으로 얻으리라는 좋은 소식을 유란시아에 다시 가져왔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 복음은 너무 앞선 것이었다. 나중에 셈 부족 사람들은 더 예전의 희생물 바치기와 피를 흘려 죄값 물어내기로 돌아가는 것을 더 좋아했다.
93:6.5 (1021.1) 이 서약을 한 뒤에 오래지 않아서, 멜기세덱이 약속한 대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태어났다. 이삭이 출생한 뒤에, 아브라함은 멜기세덱과 한 약속에 대해서 대단히 엄숙한 태도를 가졌고, 이를 기록하려고 살렘으로 갔다. 대중 앞에서 공식으로 약속을 받아들이는 이 자리에서, 그는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갈았다.
93:6.6 (1021.2) 살렘 신자의 대부분은 할례를 행하였다. 하지만 멜기세덱은 결코 할례를 의무로 만든 적이 없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언제나 할례를 무척 반대해 왔기 때문에, 그는 이 계제에 살렘의 약속을 인정한다는 표시로, 이 의식(儀式)을 공식으로 받아들여 그 사건을 엄숙하게 만들기로 작정했다.
93:6.7 (1021.3) 멜기세덱의 원대한 계획을 지지하여 아브라함이 개인의 포부를 이렇게 정말로 대중 앞에서 포기한 뒤에, 세 하늘 존재가 마므레 평원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소돔과 고모라가 자연의 재해로 파괴된 것에 관하여 나중에 꾸민 이야기들과 결부되었는데도, 이것은 사실로 나타난 일이다. 그리고 그 시절에 일어난 사건들에 관한 이 전설은 아주 최근 시대에도 도덕과 윤리가 얼마나 뒤처졌는가를 가리킨다.
93:6.8 (1021.4) 엄숙한 언약을 마치고 나서,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화해는 완벽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살렘 거류지의 시민 및 군사의 지휘를 다시 맡았고, 이 거류지는 그 전성기에 멜기세덱 단체의 명부에, 정기적으로 십일조 내는 사람을 10만 명이 넘게 유지했다. 아브라함은 살렘 성전을 크게 개선하고 학교 전체를 위하여 새 텐트를 마련했다. 그는 십일조 체제를 늘렸을 뿐 아니라, 선교를 선전하는 분과의 운영 개선에 크게 이바지한 외에도, 학교 사업을 운영하는 많은 개량된 방법을 시작하였다. 그는 또한 가축의 개량과 살렘의 낙농 사업을 다시 조직하기 위해서 많이 일했다. 아브라함은 당대에 날카롭고 능률 있는 실업가요 부자였다. 그는 지나치게 경건하지 않았어도 속속들이 성실했고, 마키벤타 멜기세덱을 믿었다.
93:7.1 (1021.5) 멜기세덱은 몇 년 동안 학생들을 계속해서 가르치고 살렘 선교사들을 훈련시켰고, 이들은 둘러싼 모든 부족에, 특별히 에집트, 메소포타미아, 소 아시아에 침투했다. 몇십 년이 지나자, 이 선생들은 살렘으로부터 멀리 멀리 여행했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키벤타의 복음을 가지고 갔다.
93:7.2 (1021.6) 아담손의 후예는 반 호수의 물가 근처에서 무리를 지어 있었고, 이들은 살렘 종파의 힛 족속 선생들의 말을 기꺼이 들었다. 예전에 이 안드 족속의 중심으로부터 유럽과 아시아의 먼 지역까지 선생들이 파송되었다. 살렘 선교사들은 온 유럽, 아니 영국 제도에도 침투했다. 한 무리는 페로스 제도(諸島)를 거쳐서 아이스랜드의 안돈 족속에게로 갔고, 한편 또 한 무리는 중국을 통과하여 동쪽 섬들에 있는 일본인에게 이르렀다. 살렘과 메소포타미아와 반 호수로부터 동반구의 부족들을 깨우치려고 모험의 길을 떠난 남녀의 생애와 체험은 인류의 연대기에서 영웅적인 장(章)을 이룬다.
93:7.3 (1022.1) 그러나 과제가 너무나 크고 부족들이 너무 뒤처져 있어서, 그 결과는 흐릿하고 분명치 않았다. 한 세대가 지나가는 동안 살렘의 복음이 여기저기 투입되었지만, 팔레스타인을 제외하고, 유일한 하나님 개념은 한 부족이나 민족 전체의 계속된 충성심을 모을 수 없었다. 예수가 오기 오래 전에, 옛 살렘 선교사들의 가르침은 더 오래 된 보편적 미신과 신앙 속에 대체로 파묻혔다. 최초의 멜기세덱 복음은 큰 어머니, 태양, 그리고 기타 옛 종파를 믿는 신앙으로 거의 온통 흡수되었다.
93:7.4 (1022.2) 오늘날 인쇄술의 장점을 누리는 너희는 이 옛 시대에 진리를 지속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가, 한 세대가 지나가는 동안 새로운 교리를 놓치기가 얼마나 쉬웠는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언제나 새 교리가 예전의 종교적 가르침과 마술 풍습 덩어리 속으로 흡수되는 경향이 있었다. 새로운 계시는 언제나 더 오래 된 진화된 신앙에 오염된다.
93:8.1 (1022.3)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뒤에 얼마 안 있어, 마키벤타는 유란시아에서 비상 수여를 마치기로 작정했다. 멜기세덱이 육체를 입은 체재를 마치기로 결정한 것은 수많은 조건에 영향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주요한 것은 둘러싼 부족들이, 그리고 직계 동료들조차, 그를 하나의 반신(半神)으로 여기고 그를 초자연 존재로 바라보는 성향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었고, 그는 참으로 초자연 존재였다. 그러나 그들은 지나치게, 상당히 미신적 경외감으로 그를 우러러보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유 외에, 유일한 하나님의 진리가 추종자들의 머리 속에 굳게 자리잡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이 죽는 때보다 훨씬 전에 땅에서 활동하던 장면을 떠나기를 바랐다. 따라서 마키벤타는 어느 날 밤에 인간 동반자들에게 잘 자라 인사를 하고 나서, 살렘에서 그의 텐트로 물러갔다. 그들이 아침에 부르러 갔을 때, 그는 거기에 없었으니, 동료들이 그를 데리고 갔기 때문이다.
93:9.1 (1022.4) 멜기세덱이 그렇게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브라함에게 큰 시련이었다. 그가 온 것처럼 그는 언젠가 가야 한다고 추종자들에게 비록 충분히 경고했어도, 그들은 놀라운 지도자를 잃어버린 것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시절의 전통을 기초로 모세가 에집트에서 히브리 노예들을 이끌고 나왔지만, 살렘에 세운 큰 조직은 거의 사라졌다.
93:9.2 (1022.5) 멜기세덱이 사라진 것은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 큰 슬픔을 가져왔고, 그는 결코 이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물질적인 나라를 세우려는 포부를 버렸을 때 그는 헤브론을 포기했다. 그리고 이제, 영적인 나라를 세우는 일에 그의 동료가 사라지고 나서, 그는 살렘을 떠나서 게랄에, 그의 재산 근처에서 살려고 남쪽으로 갔다.
93:9.3 (1022.6) 멜기세덱이 사라진 직후에 아브라함은 무서워지고 겁이 났다. 게랄에 도착하자 그는 신분을 감추었고, 그래서 아비멜렉은 그의 아내를 데려갔다. (사라와 결혼하고 나서 얼마 있다가 아브라함은 어느 날 밤 그의 찬란한 아내를 가지기 위해서 그를 죽이려 하는 음모를 엿들었다. 이 외에는 용감하고 위험을 겁내지 않는 그 지도자에게 이 두려움은 공포가 되었다. 온 일생 동안 그는 누군가가 사라를 취하려고 몰래 그를 죽이려 할까 두려워했다. 그리고 이것이 어째서 세 번이나 따로, 이 용감한 남자가 정말 비겁함을 드러냈는가 하는 까닭이다.)
93:9.4 (1023.1) 그러나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의 후계자로서 자기 임무를 행하는 데 오랫동안 방해를 받지 않았다. 그는 곧 필리스티아인 사이에서, 그리고 아비멜렉의 민족에서 개종한 사람들을 얻고서 그들과 조약을 맺었고, 그 대신에 그들의 많은 미신, 특히 첫아들을 잡아 바치는 그들의 풍습에 물이 들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다시 팔레스타인에서 큰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모든 집단의 존경을 받았고 모든 왕이 그를 존중하였다. 그는 둘러싼 모든 부족 가운데서 영적 지도자였고, 그의 영향은 그가 죽은 뒤에 얼마 동안 계속되었다. 인생이 저물 때 그는 다시 한 번 헤브론으로 돌아갔는데, 여기는 초기에 그의 활동 무대요 멜기세덱과 연합하여 그가 일하던 장소였다. 아브라함의 마지막 일은 메소포타미아의 경계에, 아우 나홀의 도시로, 아들 이삭을 위한 아내로서 자기 민족에서 여자를 얻으려고, 충직한 하인들을 보내는 것이었다. 사촌과 결혼하는 것이 오랫동안 아브라함 민족의 풍습이었다. 그리고 사라진 살렘 학교에서 멜기세덱으로부터 배운 하나님을 믿고서 아브라함은 안심하고 죽었다.
93:9.5 (1023.2) 다음 세대가 멜기세덱의 이야기를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5백 년 안에 많은 사람이 그 이야기 전부를 신화로 여겼다. 이삭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썩 잘 보존했고, 살렘 거류지의 복음을 키웠지만, 야곱이 이 전통의 중요성을 파악하기는 더 힘들었다. 요셉은 멜기세덱을 굳게 믿었고, 대체로 이 때문에, 형제들이 그를 꿈꾸는 사람으로 여겼다. 에집트에서 요셉의 명예는 주로 증조부 아브라함의 기억 때문이었다. 요셉에게 에집트 군대의 지휘권이 제공되었지만, 멜기세덱의 전통과 아브라함과 이삭이 후일에 가르친 것을 아주 굳게 믿었기 때문에, 그는 문관 행정자로서 일하기를 택했고, 하늘나라를 진척시키기 위하여 이처럼 그가 더 일을 잘 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93:9.6 (1023.3) 멜기세덱의 가르침은 충분하고 충만했지만, 이 시절에 관한 기록은 후일의 히브리인 사제들에게 불가능하고 환상인 듯하였다. 하지만 적어도 바빌론에서 구약의 기록을 무더기로 편집할 때까지, 많은 사람이 이런 기록을 얼마큼 이해했다.
93:9.7 (1023.4)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대화라고 묘사하는 구약의 기록은 실제로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회담이었다. 후일의 서기관들은 멜기세덱이라는 낱말을 하나님과 비슷한말로 여겼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주의 천사”와 아주 여러 번 접촉했다는 기록은 그들이 멜기세덱과 수없이 만나서 이야기한 것을 언급한다.
93:9.8 (1023.5) 이삭ㆍ야곱ㆍ요셉에 대한 히브리인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보다 훨씬 더 믿을 만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도 사실과 다른 것을 많이 담고 있고,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였던 시절에 히브리 사제들이 이 기록들을 수집할 때, 의도하여 내용을 변경한 것도 있고, 뜻하지 않게 변경된 것도 있다. 케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가 아니었다. 하갈처럼 그 여자는 다만 첩이었다. 아브라함의 모든 재산은 본처 사라의 아들, 이삭에게로 갔다. 아브라함은 기록이 가리키는 것처럼 아주 늙지는 않았고, 아내는 훨씬 더 젊었다. 나중에 이삭이 기적 같이 출생했다고 주장하기 위하여 두 사람의 나이는 깊이 생각한 끝에 수정되었다.
93:9.9 (1023.6) 유대인의 민족 자부심은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였던 시절로 말미암아 엄청나게 오그라들었다. 민족의 열등감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들은 다른 극단, 국가와 민족의 자기 본위로 넘어갔고, 거기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모든 다른 종족 위에 자신들을 높일 생각으로 그들의 전통을 왜곡하고 곡해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브라함과 다른 민족 지도자들을, 바로 멜기세덱도 제외하지 않고 모든 다른 사람 위에 높이 올리려는 목적으로 그들의 모든 기록을 주의 깊게 편집했다. 따라서 히브리 서기관들은 발견할 수 있는 대로 이 중대한 시절의 기록을 모조리 없애버렸고, 싯딤 전투 이후에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이 만나는 이야기만 보존했는데, 그들은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큰 명예를 바치는 것을 반영한다고 판단하였다.
93:9.10 (1024.1) 그래서, 멜기세덱의 모습을 놓치면서, 그들은 약속된 수여 아들의 영적 사명에 관하여 이 비상시 아들이 가르친 것을 또한 놓쳤다. 이 사명의 성질을 아주 완전히, 완벽하게 놓쳤기 때문에 그들의 후손 중에 거의 아무도, 마키벤타가 예언한 대로 미가엘이 땅에서 육체를 입고 나타났을 때, 그를 알아보고 받아들일 수 없었고 기꺼이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93:9.11 (1024.2) 그러나 히브리서를 쓴 사람들 중에 하나는 멜기세덱의 사명을 알았는데, 이렇게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최고자의 사제, 이 멜기세덱은 또한 평화의 임금이었더라.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삶을 시작한 날도 끝날도 없으나 하나님의 아들처럼 만들어진 까닭에, 그는 사제로 계속하여 거하더라.” 이 저자는 나중에 나타나는 미가엘 수여의 종류로서 멜기세덱을 일컬었고, 예수가 “멜기세덱의 서열을 좇아서 언제까지나 봉사자”였다고 확인하였다. 이 비교는 무척 유감스럽기는 했지만, 그리스도가 세계에 자신을 수여할 때 근무하던 “열두 멜기세덱 관리자 서열에 따라서” 그리스도가 유란시아를 책임질 임시 권리를 받았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었다.
93:10.1 (1024.3) 마키벤타가 육신화한 여러 해 동안 유란시아의 멜기세덱 관리자들은 11명으로서 활동했다. 마키벤타는 비상시 아들로서 그의 임무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이 사실을 열한 동료에게 알렸고, 그들은 그가 육체를 벗어날 기술을 즉시 준비하고, 안전하게 최초의 멜기세덱 지위로 회복시켰다. 그리고 살렘으로부터 사라진 뒤 사흘째에, 그는 유란시아에 배치 받은 동료 11명 사이에 나타났고, 사타니아 606번에서 행성 관리자의 하나로서, 중단된 그의 생애를 다시 시작했다.
93:10.2 (1024.4) 마키벤타는 살과 피를 가진 인간으로서, 그가 시작한 것과 똑같이 갑자기 예식을 차리지 않고, 자신 수여를 마쳤다. 그의 출현이나 출발에 아무런 특별한 발표나 전시가 따르지 않았다. 그가 유란시아에 나타난 표시로 부활시 출석의 점검이나 행성 섭리 시대의 종결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임무는 비상시 수여였다. 그러나 아버지 멜기세덱이 그를 공식으로 책임에서 해방하고, 그의 비상시 수여가 네바돈의 최고 행정자, 곧 구원자별의 가브리엘로부터 승인을 받았다는 통지를 받기까지, 마키벤타는 인간의 육체를 입고서 그의 체재를 끝내지 않았다.
93:10.3 (1024.5) 마키벤타 멜기세덱은 그가 육체를 입고 있을 때 그의 가르침을 믿었던 사람들의 후손의 일에 계속하여 큰 흥미를 가졌다. 그러나 이삭을 통해서, 켄 족속과 서로 결혼해서 생겨난 아브라함의 후손은, 살렘의 가르침에 대해서 어떤 뚜렷한 개념이라도 오랫동안 계속 품고 있었던 유일한 핏줄이었다.
93:10.4 (1024.6) 바로 이 멜기세덱은 뒤이은 열아홉 세기를 통하여 내내, 많은 선지자ㆍ예언자와 함께 줄곧 일했고, 이처럼 미가엘이 땅에 나타날 때가 무르익기까지 살렘의 진리를 살려 두려고 애썼다.
93:10.5 (1025.1) 마키벤타는 미가엘이 유란시아에서 승리할 때까지 행성 관리자로서 줄곧 일했다. 그 뒤에 24 지도자의 하나로서 예루셈에서 유란시아 근무에 부속되었고, 겨우 최근에야 예루셈에서 창조 아들의 개인 대사 자리로 승진했으며, 유란시아의 영주 대리 직함을 지닌다. 유란시아가 사람 사는 행성으로 남아 있는 한, 마키벤타 멜기세덱은 아들 계급의 임무로 완전히 돌아가지 않고, 시간으로 따지자면, 언제까지나 그리스도 미가엘을 대표하는 행성의 봉사자로 남아 있으리라고 우리는 믿는다.
93:10.6 (1025.2) 마키벤타의 수여가 유란시아에서 비상시 수여였으니까, 그의 앞날이 무엇일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네바돈의 멜기세덱 집단은 그들 가운데 한 명을 영구하게 잃었을지 모른다. 최근의 판결이 에덴시아의 최고자들로부터 내려왔고 나중에 유버르사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확인을 받았는데, 이것은 수여된 이 멜기세덱이 타락한 행성 영주, 칼리가스티아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정해졌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이 점에서 우리의 추측이 옳다면, 이것이 매우 있음직하다: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유란시아에 몸소 다시 나타나서, 어떤 변경된 방법으로 폐위된 행성 영주의 직책을 다시 시작하든지, 아니면 지금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 직함을 실제로 지니는 그리스도 미가엘을 대표하는 행성 영주 대리로서 활동하려고 땅에 나타날지 모른다. 마키벤타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해서, 우리에게 도대체 뚜렷이 보이지 않지만, 그런데도 아주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은 앞에 말한 추측이 아마 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강하게 암시한다.
93:10.7 (1025.3) 유란시아에서 승리함으로 미가엘이 어떻게 칼리가스티아와 아담, 이 둘의 계승자가 되었는가, 그가 어떻게 행성에서 평화의 왕이 되고 둘째 아담이 되었는가 우리는 잘 안다. 이제 우리는 이 멜기세덱에게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 대리라는 직함이 수여되는 것을 본다. 그가 또한 유란시아의 물질 아들 대리가 될 것인가? 아니면 기대하지 않고 전례 없던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가, 곧 아담과 이브가 아니면 그들 후손 가운데 더러가 유란시아의 둘째 아담의 대리라는 직함을 가지고 미가엘의 대표로서 행성으로 언젠가 돌아올 것인가?
93:10.8 (1025.4) 심판 아들과 삼위일체의 교육 아들들이 앞날에 확실히 나타나리라는 것과 관련된 이 모든 추측은, 창조 아들이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분명한 약속과 관련하여, 유란시아를 앞날이 확실치 않은 행성으로 만들고, 온 네바돈 우주에서 가장 흥미 있고 관심을 끄는 구체 중의 하나로 만든다. 이것이 아주 있음직하다: 유란시아가 빛과 생명 시대에 다가가는 어떤 미래 시대에, 루시퍼 반란과 칼리가스티아 탈퇴 사건들이 마침내 판결된 뒤에, 심판 아들이나 아니 삼위일체의 교육 아들들 뿐 아니라, 마키벤타ㆍ아담ㆍ이브, 그리고 그리스도 미가엘이 동시에 유란시아에 오심을 우리가 구경할 수도 있다.
93:10.9 (1025.5) 유란시아 지도자, 곧 24 상담자로 이루어진 예루셈 집단에 마키벤타가 있다는 것은, 그가 진보하고 승천하는 우주 계획을 거쳐서, 파라다이스 최후 군단까지도, 유란시아 필사자들을 따라가도록 운명이 정해졌다는 믿음을 입증하는 충분한 증거라는 것이 오랫동안 우리 계급의 의견이었다. 유란시아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었을 때, 아담과 이브가 이처럼 파라다이스로 가는 모험에서 지구의 동료들을 따라가도록 운명이 정해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93:10.10 (1025.6) 1천 년 미만 전에, 옛날에 살렘의 현자였던 바로 이 마키벤타 멜기세덱은 1백 년이 되는 기간에 행성에 거주하는 총독으로 행동하면서, 유란시아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있었다. 그리고 행성의 사무를 지도하는 지금 체계가 계속된다면, 1천 년이 조금 지나서 같은 자격으로 돌아오도록 예정되었을 것이다.
93:10.11 (1026.1) 이것이 마키벤타 멜기세덱에 관한 이야기이니, 그는 일찍이 유란시아 역사에 관련을 가지게 된 가장 독특한 모든 등장 인물 중에 하나요, 너희의 불규칙하고 특이한 세계가 앞날에 겪는 체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운명이 정해졌을지도 모르는 성격자이다.
94:0.1 (1027.1) 살렘 종교의 초기 선생들은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의 가장 멀리 떨어진 부족들까지 침투했고, 사람이 우주의 하나님 한 분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신의 은총을 얻는 데 치르는 유일한 값이라는 마키벤타의 복음을 늘 전파하였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과 한 약속은 살렘과 다른 중심들로부터 떠나간 모든 초기 선전의 본보기였다. 동반구 전체에 멜기세덱의 가르침을 가지고 간 이 고귀한 남녀들보다 어떤 종교에도 더 열심이고 적극적인 선교사들이 결코 유란시아에 있은 적이 없다. 이 선교사들은 여러 민족과 종족으로부터 모집되었고, 그들은 대체로 개종한 원주민의 중개를 통해서 가르침을 퍼뜨렸다. 그들은 세계의 여러 구석에 훈련 중심을 세웠고, 거기서 원주민에게 살렘 종교를 가르치고, 다음에 이 생도들을 자신의 민족 가운데서 선생으로 활동하라고 임명했다.
94:1.1 (1027.2) 멜기세덱의 시절에, 인도는 국제적인 나라였고, 최근에 북쪽과 서쪽에서 침공하는 아리안과 안드 족속의 정치적ㆍ종교적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때 반도에서 오직 북쪽과 서쪽 부분에 아리아인이 널리 스며들었다. 베다 시대에 새로 온 이 이민들은 그들의 많은 부족 신을 가져왔다. 그들의 종교적 예배 형태는, 아직도 아버지가 사제로서 어머니는 여사제로서 활동하고, 가족의 화로(火爐)가 아직도 제단으로서 이용되었으므로, 이전에 있었던 선조, 안드 족속의 예식 풍습을 가까이 따랐다.
94:1.2 (1027.3) 베다 숭배는 그때 선생이자 사제인 브라만 카스트의 지휘 하에 성장하고 변형하는 과정을 밟고 있었고, 이 카스트는 확대되는 예배 의식에 차츰 고삐를 쥐고 있었다. 살렘 선교사들이 인도 북부에 침투했을 때, 옛 아리아인의 신 33명의 혼합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94:1.3 (1027.4) 이 아리아인의 다신교는 이전의 일신교의 퇴화를 가리키며, 이것은 그들이 부족 단위로 갈라지고 각 부족이 자체가 모시는 신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안드 족속이 있던 메소포타미아에서 최초의 일신교와 삼위일체 사상이 이렇게 퇴화한 것은 그리스도 이전 둘째 천년의 처음 몇 세기에 다시 합성하는 과정에 있었다. 여러 신이 하늘의 주 댜우스 피타[1] [50], 변덕스러운 공기(空氣)의 주 인드라, 그리고 머리가 셋 달린 불의 신이요, 땅의 주이며 더 일찍 있던 삼위일체 개념의 남은 흔적을 상징하는 아그니, 이 삼자의 통일된 지도 하에서 만신전으로 조직되었다.
94:1.4 (1027.5) 분명한 최고신교의[2] [51] 발전이 진화된 일신교를 위하여 길을 놓고 있었다. 가장 오래 된 신 아그니는 흔히 만신전 전체에서 아버지인 우두머리로서 높임을 받았다. 때때로 프라자파티라 부르고 때로는 브라마라고 이름지은, 아버지 신의 원리는 브라만 사제들이 나중에 살렘 선생들과 벌인 신학 투쟁에서 사라져 버렸다. 브라만은 베다의 만신전 전체를 활성화하는 에너지이자 신이 되는 원리라고 생각되었다.
94:1.5 (1028.1) 살렘 선교사들은 멜기세덱의 유일한 하나님, 하늘의 최고자를 전파했다. 이 묘사는 아버지 브라마가 모든 신의 근원이라는 새로 태어나는 개념과 전적으로 부조화되지는 않았지만, 살렘의 교리는 의식이 없었고, 따라서 브라만 사제의 교리ㆍ전통ㆍ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의식의 준수와 희생물 바치는 예식은 별도로 하고, 브라만 사제들은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다는 살렘의 가르침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94:1.6 (1028.2) 하나님을 의지할 것과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기를 부르짖는 멜기세덱 복음을 물리친 것은 인도(印度)에게 생사를 좌우하는 전환점을 표시했다. 살렘 선교사들은 베다의 모든 옛 신을 믿는 신앙을 버리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지도자, 곧 베다교의 사제들은 유일한 하나님과 하나의 단순한 신앙을 부르짖는 멜기세덱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94:1.7 (1028.3) 브라만들은 살렘 선생들에 대항하려는 노력으로 당대의 신성한 기록들을 추려 냈고, 이 모음은 나중에 편집되어 현대까지 릭 베다로서 내려왔는데, 이것은 가장 오래 된 신성한 책들 중에 하나이다. 브라만들이 자기네 예배 의식과 희생을 구체화하고 모양을 갖추고, 이것들을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 부과하려고 애씀에 따라서, 둘째ㆍ셋째ㆍ넷째 베다가 뒤따랐다. 가장 좋은 면을 보았을 때, 이 기록들은 개념의 아름다움과 진리를 헤아리는 면에서 비슷한 성질을 가진 어느 다른 수집에도 필적한다. 그러나 이 우수한 종교가 인도 남부에서 수천 가지 미신과 제사와 의식으로 오염되자, 그것은 필사 인간이 일찍이 개발한 신학 중에서 가장 얼룩덜룩한 체계로 점차 모습을 바꾸었다. 베다를 한번 검토하면 사람이 상상한 것 가운데 신에 관한 가장 높은 개념과 가장 비천한 개념을 얼마큼씩 드러낼 것이다.
94:2.1 (1028.4) 살렘 선교사들이 남쪽으로 드라비다의 데칸으로 파고 들어감에 따라서, 그들은 심해지는 카스트 제도에 부닥쳤는데, 이것은 높아지는 2차 산긱 민족들의 물결을 직면하여 종족 신분의 상실을 막으려는 아리아인의 계획이었다. 브라만 사제 카스트가 이 체계의 바로 그 본질이었기 때문에, 이 사회 질서는 살렘 선생들의 진전을 대단히 지연시켰다. 이 카스트 제도는 아리아 민족을 구하지 못했지만, 브라만을 영속시키는 데 성공했고, 그들은 다음에 인도에서 오늘날까지 종교의 주도권을 유지했다.
94:2.2 (1028.5) 이제, 더 높은 진리를 거부함으로 베다 신앙이 약화되자, 아리아인의 종파는 데칸으로부터 점점 더 침입을 당했다. 종족이 멸망하고 종교가 죽어가는 대세를 막으려는 절망스러운 노력으로, 브라만 카스트는 자신들을 모든 다른 것 위에 높이려고 애썼다. 그들은 신에게 희생물 바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대단히 효력이 있고, 그 효능이 온통 강력하다고 가르쳤다. 우주의 두 가지 기본 되는 신성한 원칙 중의 하나는 신 브라만이고, 다른 하나는 브라만 사제라고 선포했다. 다른 어떤 유란시아 민족들 사이에서도 사제들이 자기네 신들 위에 자기를 높이고, 신들이 받을 영예를 자신이 가로채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이 주제넘은 주장으로 너무 터무니 없이 극단적으로 우겼기 때문에, 둘러싼 덜 진보된 여러 문명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온 타락하는 종파들 앞에서, 그 아슬아슬한 체계가 통째로 무너졌다. 광대한 베다 사제직 자체가 버둥거렸고, 자신들의 이기적이고 지혜롭지 못한 주제넘은 짓이 온 인도에 가져온, 무기력과 비관주의의 검은 물결 밑으로 사라졌다.
94:2.3 (1029.1) 자아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잡초로서 연달아 육신화되는 끝없는 싸움에서, 자아가 비진화 방법으로 영속한다는 두려움을 확실히 낳았다. 태어나는 일신교가 될 뻔한 것에 부착될 수 있었던 모든 오염시키는 신앙 중에서, 아무것도 드라비다의 데칸에서 온 이 윤회(輪廻) 신앙―혼이 다시 육신화한다는 교리―보다 더 어리석어 보이는 것은 없었다. 진저리나고 단조롭게 거듭 윤회한다는 것을 믿는 이 관념은 오래 간직했던 희망, 일찍부터 베다 신앙의 일부로서, 죽고 나서 구원 받고 영적 승진을 발견하는 희망을 분투하는 필사자로부터 빼앗았다.
94:2.4 (1029.2) 철학적으로 사람을 쇠약하게 하는 이 가르침 뒤에, 브라만, 곧 온 창조의 대혼(大魂)과 절대로 연합하여 우주의 휴식과 평화 속에 잠김으로, 자아를 영원히 벗어난다는 교리가 발명되었다. 필사자의 욕망과 인간의 포부는 실질적으로 빼앗기고 거의 파괴되었다. 2천 년이 넘도록 인도의 상급 지성은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려고 애썼고, 그래서 영적 절망의 사슬 속에 많은 힌두 민족의 혼을 실질적으로 쇠고랑으로 채운 후일의 종파들과 가르침이 들어오도록 문이 활짝 열렸다. 모든 문명 가운데서, 베다의 아리아인은 살렘의 복음을 물리친 것 때문에 가장 끔찍한 값을 치렀다.
94:2.5 (1029.3) 카스트만 가지고 아리아인의 종교 문화 체계를 영속할 수 없었고, 데칸의 열등한 종교들이 북쪽에 침투하자, 절망과 낙심의 시대가 열렸다. 이 어두운 시절에 아무 생명도 죽이지 않는 종파가 일어났고, 그 뒤로 늘 지속하였다. 새로운 종파들 중에서 많은 것이 버젓이 무신론이었고, 얻을 수 있는 그런 구원은 오직 사람이 도움 받지 않고 노력하여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모든 불행한 철학의 많은 부분에 두루, 멜기세덱의 가르침, 아니 아담의 가르침의 잔재가 왜곡되어 남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94:2.6 (1029.4) 이때는 힌두 신앙의 후기 성서, 곧 브라마나와 우파니샤드가 수집된 시절이었다. 몸소 믿음으로 유일한 하나님을 체험한다는 개인적 종교의 가르침을 물리치고, 데칸에서 온, 비천하고 사람을 약화시키는 종파들과 교리의 물결에, 그리고 신을 인격화하는 생각과 환생(還生) 사상에 오염되었기 때문에 브라만 사제들은 이러한 오염시키는 관념에 대하여 맹렬한 반응을 체험했다. 참된 실체를 추구하고 찾아내려는 분명한 노력이 있었다. 브라만들은 인도인의 신 개념에서 사람 닮은 모습을 없애는 데 착수했지만,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개념에서 성격을 없애는 끔찍한 잘못에 빠졌으며, 파라다이스 아버지라는 드높은 영적 이상이 아니라, 만물을 둘러싸는 절대자라는 아득한 형이상학적 관념을 가지고 솟아났다.
94:2.7 (1029.5) 자체를 보존하려는 노력으로 브라만들은 멜기세덱의 유일한 하나님을 물리쳤고, 이제 그들은 브라만, 분명치 않고 미혹적인 철학적 자아, 비성격이고 무력한 그것을 가정(假定)하게 되었고, 이것은 그 불행한 날부터 20세기까지 인도의 영적 생활을 힘없고 기운 빠지게 만들었다.
94:2.8 (1029.6) 불교가 인도에서 일어난 것은 우파니샤드를 기록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1천 년 동안 성공했는데도, 불교는 후일의 힌두교와 경쟁할 수 없었다. 도덕 수준이 더 높았는데도, 초기에 불교의 하나님 묘사는 힌두교보다도 분명하지 않았고, 힌두교는 작은 신, 개인을 상대하는 신들을 마련해 주었다. 알라가 우주에서 최고의 하나님이라는 뚜렷한 개념을 가진, 호전적 이슬람교의 돌진 앞에서 불교는 인도 북부에서 마침내 굴복했다.
94:3.1 (1030.1) 브라만교의 최고 단계를 도저히 종교라 할 수 없지만, 그것은 참으로 철학과 형이상학 분야로 필사 지성이 도달한 가장 고귀한 노력의 하나였다. 최종의 실체를 찾아내려고 길을 떠났으니까, 종교의 기본적 두 가지 개념을 빼고, 인도의 지성은 멈추지 않고 신학의 거의 모든 단계에 관하여 숙고해 보았다. 이 두 개념은 온 우주의 생물을 지으신 우주의 아버지가 존재하는 것, 그리고 영원한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그들에게 완전하라고 명하신 그 아버지에게 도달하려고 애쓰는 동안에 바로 이 사람들이 우주에서 승천 체험을 겪는 사실이다.
94:3.2 (1030.2) 브라만의 개념을 보면 그 시절의 지성인은 만물에 침투하는 어떤 절대자 관념을 참으로 붙잡았는데, 이는 이 가정이 한꺼번에 창조 에너지이자 우주의 반응이라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브라만은 도무지 정의(定義)를 내릴 수 없는 것이라 생각되었고, 오직 모든 유한한 성질을 연달아 부정함으로 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히 이것은, 절대 존재, 아니 무한한 어떤 존재를 믿는 관념이었지만, 이 개념에는 대체로 성격 특성이 빠져 있고, 따라서 개별 신자가 이를 체험할 수 없었다.
94:3.3 (1030.3) 브라만 나라야나는 절대자, 무한한 스스로 있는 그것, 곧 잠재 우주의 원초적 창조 잠재력이요, 모든 영원을 통해서 정적(靜的)으로 존재하고 잠재하는 우주의 자아로 생각되었다. 당시의 철학자들이 신 개념에서 그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면, 브라만이 연합하고 창조하는 성질이 있고, 지음받고 진화하는 존재들이 가까이할 수 있는 하나의 성격자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면, 다음에 그러한 가르침은 유란시아에서 신에 관한 가장 진보된 초상화가 되었을 터인데, 이는 그 가르침이 총체적 신(神)의 활동에서 처음 다섯 수준을 포함하고, 아마도 나머지 둘을 상상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94:3.4 (1030.4) 어떤 단계에서 하나의 우주 대혼(大魂)이 모든 생물 존재를 합친 것의 총체라는 개념은 인도의 철학자들을 최상 존재의 진실에 무척 가까이 가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이러한 진실은 그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는데, 그들이 브라만 나라야나라는 이론적 일신교 목표에 이르는 데 타당하거나 합리적인 어떤 개인적 접근법도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94:3.5 (1030.5) 인과 관계의 연속을 말하는 카르마 원칙은, 다시, 최상위의 신 계심 안에 시공의 모든 행위의 영향이 통합된다는 진리와 아주 가까웠다. 그러나 이 가정은 결코 개별 신자가 개인적으로 나란히 신에 도달하는 길을 마련하지 않았고, 겨우 우주의 대혼이 모든 인격을 궁극에 삼킨다고만 하였다.
94:3.6 (1030.6) 브라만교의 철학은 또한 생각 조절자의 깃드심을 거의 깨달을 뻔했지만, 진리를 오해함으로 타락되기만 했다. 혼이 브라만의 깃드심이라는 가르침은, 이렇게 우주의 하나가 깃드는 것을 제쳐놓고, 따로 인간의 개성이 전혀 없다는 관념에 완전히 오염되지 않았더라면, 진보된 종교를 위하여 길을 닦았을 것이다.
94:3.7 (1030.7) 자아의 혼이 대혼과 합쳐진다는 교리에서, 인도의 신학자들은 인간다운 무엇, 새롭고 독특한 무엇, 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하나가 됨으로부터 태어나는 무엇이 살아남는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혼이 브라만으로 돌아간다는 가르침은 조절자가 우주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진리와 거의 같은 방향이다. 그러나 조절자와 달리, 또한 살아남는 무엇이 있으니, 이것은 필사 인격자의 상물질 사본(寫本)이다. 이 근본 개념이 브라만 철학에 치명적으로 빠져 있다.
94:3.8 (1031.1) 브라만 철학은 우주의 많은 사실에 접근했고, 수많은 우주 진리에 가까이 갔다. 그러나 절대ㆍ초월ㆍ유한 수준과 같이 몇 가지 수준의 실체를 구별하지 못하는 잘못을 너무 자주 저질렀다. 절대 수준에서 유한하고 환상인가 싶은 것이 유한 수준에서 절대로 실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철학은 또한 우주의 아버지의 기본 성격을 조금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진화 인간의 제한된 하나님 체험으로부터 영원한 아들이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한없이 체험하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어떤 수준에서도 우주의 아버지를 몸소 접촉하는 것이 가능하다.
94:4.1 (1031.2) 인도에서 몇 세기가 지나자, 민중은 멜기세덱 선교사들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수정되고 나중에 브라만 사제들이 구체화한, 베다의 옛 의식(儀式)으로 어느 정도 돌아갔다. 세계 종교 가운데 가장 오래 되고 가장 국제적인 이 종교는 불교ㆍ자이나교, 그리고 나중에 나타나는 모하메드교ㆍ기독교의 영향에 반응하여, 더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이 도착할 때가 되자 그 가르침은 “백인의 종교”가 될 정도로 이미 너무나 서양화되었고, 따라서 힌두의 지성인에게 이상하고 낯설었다.
94:4.2 (1031.3) 힌두 신학은 현재 네 가지 내려가는 수준의 신과 신성을 그린다:
94:4.3 (1031.4) 1. 브라만, 절대자, 무한한 하나, 스스로 존재하는 그것.
94:4.4 (1031.5) 2. 삼신일체(三神一體), 힌두교에서 제일 높은 삼자일체. 이 결합에서, 첫째 구성원 브라마는 브라만―무한―으로부터 스스로 창조되었다고 생각된다. 범신적인 무한한 하나와 가까운 신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브라마는 우주의 아버지 개념의 기초를 이룰 수도 있다. 브라마는 또한 운명과 동일시된다.
94:4.5 (1031.6) 둘째와 셋째 구성원, 시바와 비슈누 숭배는 그리스도 이후 첫째 천년 동안에 일어났다. 시바는 삶과 죽음의 주, 다산(多産)의 신이요, 파괴의 주였다. 비슈누는 정기적으로 사람 모습으로 육신화한다는 믿음 때문에 대단히 인기가 좋았다. 이 방법으로 비슈누는 인도인의 상상 속에서 실재하고 살아 있게 된다. 더러는 시바가, 더러는 비슈누가 만물 위에 최고라고 여겼다.
94:4.6 (1031.7) 3. 베다 및 베다 이후의 신들. 아그니ㆍ인드라ㆍ소마와 같이, 아리아인이 가졌던 고대의 여러 신은 삼신일체의 세 구성원에 2차적인 것으로서 지속하였다. 이에 더하여 수많은 신이 베다 시대 인도의 옛 시절 이후로 일어났고, 그들은 또한 힌두인의 만신전에 합병되었다.
94:4.7 (1031.8) 4. 반신(半神): 후일의 종파에서 믿는 초인간ㆍ준신(準神)ㆍ영웅, 악마ㆍ귀신ㆍ악령ㆍ요정(妖精)ㆍ괴물ㆍ도깨비ㆍ성자(聖者)들.
94:4.8 (1031.9) 힌두교는 오랫동안 인도 국민에게 활력을 주지 못했지만, 동시에 보통, 관대한 종교였다. 힌두교의 큰 장점은 그 종교가 유란시아에서 나타난 바 가장 잘 적응하고 형태가 없는 종교임이 입증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힌두교는 거의 한없이 바뀔 능력이 있고, 지적 브라만의 높은 반(半) 일신교 같은 추측으로부터 천하고 억압받는 계층의 무지한 신자들이 가진 터무니없는 주물 사상과 원시적 숭배 풍습에 이르기까지, 신축성 있게 조정할 정도로 특별히 범위가 넓다.
94:4.9 (1032.1) 힌두교가 살아남은 것은 본질적으로 그 종교가 인도에서 기본 사회 조직의 필수 부분이기 때문이다. 힌두교는 어지러워지거나 파괴될 수 있는 아무런 큰 성직자 계층이 없다. 힌두교는 사람들의 생활 형태에 함께 얽혀 있다. 힌두교가 변하는 조건에 대하여 적응하는 능력은 모든 다른 종파를 뛰어넘는다. 많은 다른 종교에 대하여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나타내며, 고타마 부다와 바로 그리스도조차도 비슈누가 육신화한 것이라 주장한다.
94:4.10 (1032.2) 오늘날 인도에서, 예수의 복음―하나님이 아버지이고 모든 사람이 아들이요, 따라서 형제인 것―을 묘사할 필요가 크며, 이 형제 정신은 사랑으로 베풀고 사회에 봉사할 때 개인적으로 이루어진다. 인도에는 철학의 틀이 존재하고, 신을 숭배하는 구조가 있다. 다만 필요한 것은 미가엘이 일생을 수여한 일을 백인의 종교로 만드는 성향이 있었던, 서양의 독단과 교리를 벗어 버린 복음, 사람의 아들이 준 최초의 복음에 나타난 힘찬 사랑의 불꽃, 활력을 주는 불꽃이다.
94:5.1 (1032.3) 최고자 하나님,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퍼뜨리면서 아시아를 통과하는 동안, 살렘 선교사들은 거쳐 간 여러 나라의 철학과 종교 사상을 많이 흡수했다. 그러나 멜기세덱과 그 후계자들이 임명한 선생들은 그들에게 맡긴 책임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유라시아 대륙의 모든 민족에게 파고들었고, 그들이 중국에 도착한 것은 그리스도 이전 둘째 천년의 중엽이었다. 수이푸(敘府)에서[3] [52] 1백 년이 넘도록 살렘 사람들은 그들의 본부를 유지하면서 거기서 중국인 선생들을 훈련시켰고, 이들은 황인종의 영토 전역에 두루 가르쳤다.
94:5.2 (1032.4) 가장 원시 형태의 도교(道敎)가 중국에서 일어난 것은 이 가르침의 직접 결과였는데, 도교는 오늘날 그 이름을 지닌 것과 크게 다른 종교였다. 초기, 곧 시초의 도교는 다음 요소의 복합이었다:
94:5.3 (1032.5) 1. 싱랑톤의 남아 있는 가르침, 이것은 상제(上帝), 곧 하늘님의 개념으로 지속되었다. 싱랑톤이 살던 시절에 중국인은 거의 일신교를 믿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의 진리를 숭배하는 데 마음을 쏟았고, 이것은 나중에 하늘의 영, 곧 우주의 통치자로 알려졌다. 그리고 황인종은 결코 이 초기의 신 개념을 완전히 잃지 않았다. 하지만 뒤이은 여러 세기에 많은 하위 신과 영이 그들의 종교 속으로 모르는 사이에 기어 들어왔다.
94:5.4 (1032.6) 2. 사람의 믿음에 반응하여 인류에게 은혜를 내리려 하는 최고 창조자 신을 믿는 살렘 종교. 그러나 멜기세덱 선교사들이 황인종의 땅을 침투했을 때가 되자, 그들이 최초에 전한 말씀은 마키벤타 시절에 살렘의 간단한 교리와 상당히 달라졌다는 것이 또한 너무나 참말이다.
94:5.5 (1032.7) 3. 모든 악을 피하려는 욕구와 함께, 인도의 철학자들이 가진 브라만 절대자 개념. 베다 신앙을 가르치는 인도인 선생들은 동쪽으로 향한 살렘 종교의 전파에 아마도 가장 큰 외래 영향력을 미쳤고, 그들은 자기네 브라만―절대자―개념을 살렘 사람들의 구원 사상에 불어 넣었다.
94:5.6 (1033.1) 이 복합 신앙은 종교 철학 사상에서 밑받침하는 영향이 되어 황인과 갈색 종족들의 땅을 통해서 퍼졌다. 일본에서 이 원시 도교는 신도(神道)로 알려졌고, 팔레스타인의 살렘으로부터 아득히 먼 이 나라에서, 민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인류가 잊지 않게 하려고 땅에서 살았던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육신화한 것에 대하여 배웠다.
94:5.7 (1033.2) 중국에서 이 관념들은 모두 늘 성장하는 조상 숭배 종파와 후일에 뒤범벅이 되고 섞여 버렸다. 그러나 싱랑톤의 시절 이후로 중국인은 사제들에게 무력한 노예가 된 적이 없다. 황인종은 미개한 속박의 처지로부터 질서 있는 문명으로 처음 솟아나온 종족인데, 이는 그 종족이 비굴하게 신들을 두려워하던 처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고, 다른 종족들이 무서워한 것처럼 죽은 사람의 귀신을 무서워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사제들로부터 초기에 해방된 지경을 넘어서 진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중국은 거의 똑같이 비참한 잘못, 조상 숭배에 빠졌다.
94:5.8 (1033.3) 그러나 살렘 사람들의 수고는 헛되지 않았다. 6세기에 중국의 위대한 철학자들은 이들의 복음의 기초 위에 자기들의 가르침을 확립하였다. 노자와 공자의 시절에 도덕적 분위기와 영적 감정은 그 이전 시대에 살렘 선교사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자라났다.
94:6.1 (1033.4) 미가엘이 오시기 약 6백 년 전에, 육체를 떠난 지 오래 된 멜기세덱에게는 땅에서 그의 순수한 가르침이 더 오래 된 유란시아 신앙 속으로 널리 흡수됨으로 지나치게 위태로워지고 있는 듯하였다. 한동안 미가엘의 선구자였던 그의 사명이 실패할 위험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스도 이전 6세기에, 영적 대리자들의 특별한 조정을 통해서, 행성 감독자들조차도 이를 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유란시아에 다양한 종교적 진리가 아주 특별히 발표되었다. 몇몇 인간 선생들의 주선을 통해서, 살렘의 복음은 다시 진술되고 다시 활력을 찾았고, 그때 발표된 대로, 많은 것이 이 글을 쓸 때까지 지속하였다.
94:6.2 (1033.5) 영적 진보가 있었던 이 독특한 세기의 특징은 문명화된 세계 전역에 걸쳐서, 종교ㆍ도덕ㆍ철학 면에서 위대한 선생이 나타난 것이다. 중국에서 탁월한 두 선생은 노자(老子)와 공자(孔子)였다.
94:6.3 (1033.6) 도(道)가 모든 창조의 유일한 첫째 근원라고 선포했을 때 노자는 살렘 전통의 개념에 기초를 두었다. 노자는 큰 영적 선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의 영원한 운명은 도, 최상의 하나님, 우주의 임금과 영원히 하나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궁극의 원인을 가장 날카롭게 이해하였는데, 이는 “하나는 절대 도로부터 생겨나고, 하나로부터 우주의 이원(二元)이 나타나며, 그러한 이원에서 삼위가 솟아나오고, 삼위는 모든 실체의 최초의 근원이라”[4] [53]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실체는 우주에 있는 잠재성과 실재물 사이에 늘 균형되어 있고, 신의 영이 이것들을 영원히 조화시킨다.”
94:6.4 (1033.7) 노자는 또한 악을 선으로 갚는 교리를 가장 일찍 발표한 사람 중에 하나였다: “선은 선을 낳지만, 참으로 선한 자에게는 악도 또한 선을 낳는다.”
94:6.5 (1033.8) 그는 사람은 창조자에게 돌아간다고 가르쳤고, 생명을 우주의 잠재성으로부터 인격이 태어나는 것으로 그렸으며, 한편 죽음은 사람의 이 인격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았다. 그가 가진 참된 믿음의 개념은 특별했고, 그도 또한 이것을 “어린아이의 태도”와 견주었다.
94:6.6 (1034.1)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뚜렷이 이해했으니,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절대 신은 애쓰지 않아도 늘 이긴다. 그는 인류에게 강요하지 않지만, 언제나 그들의 참된 소망에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은 영원히 참고, 그 뜻의 표현은 영원히 불가피하다.” 참 종교가에 대해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는 진리를 표현하면서 말했다. “착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진리를 쥐고 있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이 재산을 동료들에게 주려고 애쓰는데, 이는 그것이 진리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절대자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이익이 되고 결코 파괴하지 않는다. 참 신자의 목적은 언제나 행동하는 것이나 결코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94:6.7 (1034.2) 노자가 무저항을 가르치고, 행위와 강요를 구별한 것은 나중에 “아무것도 보거나 행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신앙으로 곡해되었다. 그러나 노자는 결코 그러한 잘못을 가르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무저항을 내세운 것은 중국 민족의 평화로운 성향이 더욱 발달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94:6.8 (1034.3) 그러나 20세기 유란시아에서 유행하는 도교는 그 옛 철학자의 드높은 감정 및 우주의 개념과 공통되는 것이 거의 없다. 그는 파악한 대로 진리를 가르쳤으니, 이것이다: 절대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세상을 다시 만들 그 신성한 에너지의 근원이요, 그 에너지로 사람은, 도(道), 곧 우주의 영원한 신이요 절대 창조자와 영적으로 하나되는 경지까지 올라간다.
94:6.9 (1034.4) 공부자(孔夫子)는 6세기에 중국에서 노자와 같은 시대에 살고 나이가 더 어린 사람이었다. 공자의 신조는 황인종의 오랜 역사에서 상급의 도덕적 전통에 기초를 두었고, 또한 살렘 선교사들의 남아 있는 전통에 얼마큼 영향을 받았다. 그의 주요한 업적은 옛 철학자들의 지혜로운 말씀을 모은 데 있다. 일생 동안 그는 사람들이 거절한 선생이었지만, 그의 글과 가르침은 그 뒤로, 중국과 일본에[5] [54] 큰 영향을 미쳤다. 공자는 마술이 있던 자리에 도덕을 올려놓았으므로 샤먼들에게 본보기를 보였다. 그러나 그는 너무 손을 댔다. 그는 질서를 새로운 주물로 만들고 조상의 행위를 공경하도록 만들었으며, 이 글을 쓸 때 중국인은 아직도 조상의 행위를 받들어 모신다.
94:6.10 (1034.5) 유교가 설파하는 도덕은, 땅의 길은 하늘의 길이 일그러져 비친 그림자요, 이 세상 문명의 참된 모범은 하늘의 영원한 질서가 거울에 비친 것이라는 이론에 바탕을 둔다. 유교(儒敎)에서 잠재하는 하나님 개념은 천도(天道), 곧 우주의 원본을 강조한 것에 비하여 거의 완전히 경시되었다.
94:6.11 (1034.6) 동양에 있는 소수를 제외하고 모두가 노자의 가르침을 잃어버렸지만, 공자의 글은 그 뒤로 늘, 유란시아인의 거의 3분의 1의 문화에 도덕적 구조의 기초가 되었다. 이 공자의 교훈은 지난날의 최선을 지속하기는 해도, 그렇게 존중받은 업적을 낳은 중국인의 바로 그 탐구 정신에 얼마큼 해로웠다. 진시황 황실의 노력과 묵자(墨者)의 가르침이 이 교리의 영향에 맞서 싸웠으나 헛일이었다. 묵자는 윤리적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를 둔 형제 정신을 부르짖었다. 그는 새로운 진리를 찾는 옛 탐구 정신에 다시 불을 붙이려고 했지만, 그의 가르침은 공자의 제자들의 억센 반대에 부딪쳐 실패했다.
94:6.12 (1034.7) 중국에서 영적으로 어둡던 시대에, 다른 여러 영적 선생과 도덕 스승들처럼, 결국 추종자들이 공자와 노자 모두를 신격화하였고, 이 시대는 도교 신앙이 쇠퇴하고 왜곡되던 때와 인도로부터 불교 선교사들이 오던 사이에 끼었다. 영적으로 퇴폐한 이 여러 세기 동안, 황인종의 종교는 불쌍한 신학으로 퇴화했다. 그 속에는 악마ㆍ용ㆍ악귀가 들끓었고, 이것은 모두 깨우침을 받지 못한 필사 지성에게 두려움이 돌아오는 것을 가리킨다. 진보된 종교 때문에 한때 인간 사회의 선두에 있던 중국은, 다음에 하나님 의식을 개발하는 참된 길에서 잠시 진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뒤로 처졌다. 이 하나님 의식(意識)은 개별 필사자의 경우 뿐 아니라, 시공의 진화 행성에서 문화와 사회의 진보의 특징을 나타내는, 복잡하고 복합된 문명이 참으로 진보하는 데 필수이다.
94:7.1 (1035.1) 중국에서 노자와 공자와 같은 시대에, 진리를 가르친 또 하나의 위대한 선생이 인도에서 나타났다. 고타마 싯달타는 인도 북부 지방 네팔에서 그리스도 이전 6세기에 태어났다. 그의 추종자들은 나중에 그가 환상처럼 부유한 통치자의 아들인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진실로, 그는 남쪽 히말라야의 작은 외딴 산 계곡에서 주위가 묵인하여 다스린, 어느 조그만 족장의 옥좌를 분명히 이어받을 후계자였다.
94:7.2 (1035.2) 고타마는 요가를 쓸데없이 6년 동안 연습한 뒤에, 불교의 철학으로 발전된 어떤 이론을 만들어냈다. 싯달타는 성장하는 카스트 제도에 맞서서, 굳게 각오했지만 보람없는 싸움을 벌였다. 이 젊은 선지자인 왕자에게는 그 시절에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끈, 대단히 성실하고 독특하게 사심 없는 태도가 있었다. 그는 육체를 학대하고 몸에 고통을 줌으로 개인의 구원을 얻으려 애쓰는 풍습이 가치가 없다고 비방하였다. 그리고 추종자들에게 그의 복음을 온 세계에 가져가라고 훈계하였다.
94:7.3 (1035.3) 인도에서 혼란과 극단적 종파의 풍습이 넘치는 가운데서, 고타마의 온건하고 절제 있는 가르침은 가뭄에 시원한 비처럼 들렸다. 그는 신과 사제들, 그리고 그들에게 희생물 바치는 것을 비난했지만, 그도 마찬가지로 우주의 하나인 이의 성격을 깨닫지 못했다. 개별 인간의 혼이 존재하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고타마는 물론, 혼이 윤회한다는 오래 지녀온 관념에 맞서 용감하게 싸움을 벌였다. 그는 사람들을 두려움에서 구원하고, 큰 우주에서 사람들을 안락하고 편안한 느낌을 가지게 하려고 고귀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하늘 가는 필사자의 진정한 하늘 집으로―파라다이스로―그리고 영원히 존재하여 더욱 봉사하는 길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못했다.
94:7.4 (1035.4) 고타마는 진정한 선지자였다. 은둔자 고닷의 훈계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그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살렘 복음을 부활시키는 영감으로 온 인도를 일깨웠을지 모른다. 고닷은 멜기세덱 선교사들의 전통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은 어느 가족을 통해서 내려왔다.
94:7.5 (1035.5) 베나레스에서 고타마는 학교를 세웠는데, 둘째 해에 한 생도 바우탄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에 관한 살렘 선교사들의 전통을 선생에게 전파했다. 우주의 아버지에 대하여 아주 뚜렷한 개념을 가지지 못했어도, 싯달타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간단한 믿음―에 대하여 진보된 자세를 가졌다. 추종자들 앞에서 그 자신 그렇게 선언했으며, “거저 구원을 주는 반가운 소식, 높은 자와 낮은 자, 모두가 올바름과 응보를 믿음으로 지극한 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인도 사람들에게 선포하라고 학생들을 60명씩 떼를 지어 보내기 시작했다.
94:7.6 (1035.6) 고타마의 아내는 남편의 복음을 믿었고 여승 계급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의 아들은 후계자가 되어 종파의 세를 크게 떨쳤다. 고타마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새로운 관념을 파악했지만, 나이 들었을 때, 믿음만으로 신의 은총을 얻는 살렘의 복음에 주춤하였고, 만년에 죽으면서 말했다. “너 자신의 구원을 해결하라.”
94:7.7 (1036.1) 선포된 중에 최선을 보면 희생물ㆍ자학(自虐)ㆍ의식(儀式)ㆍ사제에 매이지 않고 보편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고타마의 복음은 그 시대에 혁명이요 놀라운 교리였다. 그것은 놀랍게도 살렘 복음의 부흥과 같았다. 그 복음은 수백만의 절망하는 혼들에게 구원을 주었고, 그 뒤에 여러 세기 동안 괴상하게 일그러졌는데도, 수많은 인간의 희망으로서 아직도 지속한다.
94:7.8 (1036.2) 싯달타는 그의 이름을 지닌 현대 종파들에서 살아남은 것보다 훨씬 많은 진리를 가르쳤다. 기독교가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 불교는 고타마 싯달타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94:8.1 (1036.3) 불교도가 되기 위해서 사람은 “나는 부처님께 피신한다. 교리 속에 피신한다. 단체에 피신한다”하고 도피문을 외워서 신앙을 대중 앞에서 고백하기만 했다.
94:8.2 (1036.4) 불교는 신화에 기원을 가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에서 기원을 가졌다. 고타마를 따르는 자들은 주, 또는 선생이라는 뜻으로 그를 사스타라고 불렀다. 자신이나 그의 가르침이 인간을 초월한다는 주장을 전혀 내세우지 않았지만, 제자들은 일찍부터 그를 깨우친 자, 부처, 나중에는 석가모니 부처라고 불렀다.
94:8.3 (1036.5) 고타마의 최초의 복음은 다음의 네 가지 고귀한 진리에 바탕을 두었다:
94:8.8 (1036.10) 고통의 교리와 고통에서 벗어남과 가까이 연결된 것은 팔도(八道)의 철학이었고, 이는 바른 견해, 바른 포부,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생각, 바른 숙고이다.[6] [55] 고통에서 도피함으로 모든 노력ㆍ욕구ㆍ애정을 없애는 것이 고타마의 의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가르침은 모든 희망과 포부를 전적으로 현세의 목표와 물질 대상에 거는 것이 헛됨을 필사 인간에게 보이려고 고안되었다. 사람이 동료 사랑하기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 신자는 또한 이 물질 세계의 관계를 넘어서, 영원한 앞날의 실체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94:8.9 (1036.11) 고타마가 전파한 도덕 계율은 다섯 가지였다:
94:8.12 (1036.14) 3. 정절(貞節)을 버리지 말라.
94:8.15 (1036.17) 추가 계율, 곧 버금가는 계율이 몇 있었고, 이를 지키는 것은 신자들의 재량이었다.
94:8.16 (1036.18) 싯달타는 인격이 불멸함을 도저히 믿었다고 할 수 없다. 그의 철학은 겨우 일종의 기능 연속성을 생각해 놓았다. 그는 열반이라는 교리 속에 무엇을 담으려 뜻했는지 결코 뚜렷이 정의를 내리지 않았다. 필사자로 존재하는 동안에 이론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열반을 사람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로 보지 않았음을 가리킬 것이다. 열반은 사람을 물질 세계에 묶어두는 모든 사슬이 깨뜨려진, 최고의 깨우침이요 하늘 같이 복된 상태를 가리켰다. 필사 인생의 욕구에 매이지 않고 언제라도 다시 육신이 되는 모든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94:8.17 (1037.1) 고타마의 최초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의 도움은 별도로 하고,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사람을 구원하는 믿음이나 초인간 권력자들에게 드리는 기도가 있을 자리가 없다. 인도의 미신을 최소로 줄이려는 시도로, 고타마는 마술로 사람을 구원한다고 외치는 뻔뻔한 주장으로부터 사람들을 돌이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을 기울이면서, 후계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잘못 풀이하고, 무언가 달성하려 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 싫고 고통스러운 것이라 외치도록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최고의 행복은 바람직한 목표를 총명하게 열심히 추구하는 것과 연결되고, 그러한 성취는 우주에서 자아를 실현하면서 참으로 진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추종자들은 간과하였다.
94:8.18 (1037.2) 싯달타의 가르침에 있는 큰 진리는 우주에 절대적 응보가 있음을 선포한 것이었다. 그는 필사 인간이 일찍이 발명한 가운데, 신이 없이 최선의 철학을 가르쳤다. 그 철학은 이상적 인본주의였고, 미신과 마술 의식(儀式), 귀신이나 악귀 공포증이 생길 근거를 아주 실질적으로 없애버렸다.
94:8.19 (1037.3) 불교에서 최초의 복음에 있는 큰 약점은 그 복음이 사심 없이 사회에 봉사하는 종교를 낳지 않은 것이다. 불교 단체는 오랫동안, 신자들의 우애 단체가 아니라, 오히려 조교(助敎)들의 공동체였다. 고타마는 그들이 돈 받는 것을 금했고, 이렇게 함으로 계층 조직의 성향이 자라는 것을 막으려고 애썼다. 고타마 자신은 상당히 사교적이었다. 참말로 그의 일생은 그의 설교보다 훨씬 위대했다.
94:9.1 (1037.4) 불교가 부처, 곧 깨우친 자를 믿음으로 구원 얻기를 권했기 때문에 불교는 번성했다. 불교는 동 아시아에 두루 발견되는 어느 다른 종교 체계보다 멜기세덱의 진리를 더 많이 대표하였다. 그러나 낮은 카스트의 군주였던 아소카가 자신을 보호하는 노력으로 불교를 지지할 때까지, 불교는 한 종교로서 널리 퍼지지 않았다. 아소카는 에집트의 이크나톤 다음으로, 멜기세덱과 미가엘 사이에 가장 눈에 띄는 국가 통치자 중에 하나였다. 아소카는 불교 선교사들의 선전을 통해서 큰 인도 제국을 세웠다. 25년의 기간에 그는 1만 7천 명이 넘는 선교사를 훈련시키고, 이들을 알려진 온 세계의 가장 먼 미개척지까지 보냈다. 한 세대 안에 그는 세계의 절반에서 불교가 지배적 종교가 되게 만들었다. 불교는 티벳ㆍ카쉬미르ㆍ세일론, 버마ㆍ자바ㆍ시암ㆍ고려[7] [56]ㆍ중국ㆍ일본에서 곧 자리가 잡혔다. 크게 보아서, 불교는 불교가 갈아치우거나 개량한 것들보다 훨씬 뛰어난 종교였다.
94:9.2 (1037.5) 불교가 인도의 고향으로부터 아시아 전체로 전파된 것은 성실한 종교가들이 영적으로 헌신하고 끈질기게 선교한 흥미 있는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고타마의 복음을 전하는 선생들은 육로로 카라반 길의 위험을 무릅썼을 뿐 아니라, 아시아 대륙을 지나서 사명을 추구하는 동안에 중국해의 위험에 부딪쳤고, 그들의 신앙이 전하는 소식을 모든 민족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이 불교는 이제 더 고타마의 단순한 교리가 아니었다. 그를 신으로 만든, 기적이 된 복음이었다. 그리고 인도에서 그 고지(高地)의 고향으로부터 불교가 멀리멀리 퍼짐에 따라서, 불교는 고타마의 가르침과 더욱 달라졌고, 불교가 갈아치운 종교들과 더욱 비슷해졌다.
94:9.3 (1038.1) 불교는 나중에 중국에서 도교에, 일본에서는 신도에, 티벳에서는 기독교에 많이 영향을 받았다. 1천 년이 지난 뒤에, 불교는 인도에서 단지 시들고 사라졌다. 불교는 브라만화되고 나중에는 비굴하게 이슬람에게 항복했으며, 한편 나머지 동양의 상당 부분에서 고타마 싯달타가 결코 알아보지 못했을 의식(儀式)으로 퇴화되었다.
94:9.4 (1038.2) 남쪽에서 싯달타의 가르침에서 근본주의자의 전형(典型)은 세일론, 버마,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지속하였다. 이것은 초기의 교리, 즉 반사회적 교리를 고수하는, 불교의 히나야나 종파이다.
94:9.5 (1038.3) 그러나 미처 인도에서 붕괴하기 전에, 고타마 추종자의 중국 집단과 북부 인도 집단은, 히나야나, 즉 “소승(小乘)”을 고수한 남쪽의 순수파들과 대조해서, 구원에 이르는 “대승(大乘)” 마하야나 가르침을 비로소 개발하였다. 이 대승 불교 신자들은 불교 교리에 본래부터 있던 사회적 제한에서 풀려났고, 그 뒤로 늘, 불교의 이 북쪽 가지는 중국과 일본에서 계속 진화하였다.
94:9.6 (1038.4) 불교가 오늘날 생생하고 성장하는 종교가 된 것은 불교가 그 신도들의 가장 높은 도덕적 가치를 많이 보존하는 데 성공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차분함과 자제를 권장하고, 마음의 침착과 행복을 키우고, 슬픔과 애통을 막는 데 크게 이바지한다. 이 철학을 믿는 자는 그렇지 않은 많은 사람보다 더 낫게 인생을 산다.
94:10.1 (1038.5) 티벳에는 불교ㆍ힌두교ㆍ도교ㆍ기독교와 통합되어 멜기세덱의 가르침이 가장 이상하게 관련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불교 선교사들이 티벳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이 유럽의 북쪽 부족들 사이에서 발견한 것과 아주 비슷한 원시의 야만 상태와 마주쳤다.
94:10.2 (1038.6) 이 순진한 티벳 사람들은 오래된 마술과 부적을 전부 버리려 하지 않았다. 오늘날 티벳 의식에 있는 종교 예식을 검토해 보면, 머리를 민 사제의 단체가 지나치게 성장한 것을 드러내며, 이들은 종(鐘)ㆍ노래ㆍ향(香), 행렬ㆍ묵주ㆍ형상, 부적ㆍ그림, 거룩한 물, 화려한 의상, 그리고 정성들인 성가대를 포함하는 정교한 의식을 거행한다. 그들은 굳어진 교리와 경직된 신조, 신비스러운 의식과 특별한 금식이 있다. 그들의 계층은 중ㆍ여승ㆍ주지(住持)들과 큰 라마를 포함한다. 그들은 천사와 성자들, 거룩한 어머니와 신들에게 기도한다. 그들은 죄를 고백하고, 연옥을 믿는다. 절은 광대하고 사원(寺院)은 웅장하다. 그들은 성스러운 의식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그러한 예식이 구원을 준다고 믿는다. 기도문을 바퀴에 붙이고, 바퀴가 돌면 그 간구가 효력이 있다고 믿는다. 현대에 어느 다른 민족에서도 그렇게 많은 종교로부터 그렇게 많은 것을 준수하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한 누적된 의식(儀式) 문집은 터무니없이 성가시고 못 견딜 짐이 될 것은 불가피하다.
94:10.3 (1038.7) 티벳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사람끼리 형제인 것, 그리고 영원한 우주에서 늘 올라가는 시민이라는 예수 복음의 간단한 가르침을 제외하고, 모든 주요한 세계 종교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 왔다.
94:11.1 (1038.8) 불교는 그리스도 이후 첫째 천년에 중국으로 들어갔고, 황인종의 종교 관습에 잘 들어맞았다. 조상을 숭배하면서 그들은 죽은 자에게 오랫동안 빌었다. 이제 그들은 또한 죽은 자를 위해서도 빌 수 있었다. 불교는 사그라지는 도교에서 남은 의식 풍습과 곧 섞였다. 예배를 드리는 사원(寺院)과 분명한 종교 의식과 더불어, 새로 합성된 이 종교는 곧 중국ㆍ고려ㆍ일본의 민족들이 널리 받아들인 종파가 되었다.
94:11.2 (1039.1) 고타마의 추종자들이 그 종파의 전통과 가르침을 너무 왜곡하여 그를 신성한 존재로 만들 때까지 불교가 세상에 전해지지 않은 것은, 어떤 면에서 불행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인생에 관한 이 신화는, 수많은 기적으로 실제로 치장되었다시피, 불교의 북부 복음, 곧 마하야나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무척 호소력이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94:11.3 (1039.2) 나중에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더러는 석가모니 부처의 영이 살아 있는 부처로서 땅에 정기적으로 돌아온다고 가르쳤고, 이렇게 부처의 형상ㆍ절ㆍ의식(儀式), 그리고 사기꾼인 “살아 있는 부처들”이 무기한으로 영속하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처럼 위대한 인도인의 신교(新敎)는 궁극에, 그가 아주 두려움 없이 대항하고 그토록 용감히 비난했던 바로 그 예식 풍습에, 그리고 의식용 주문에, 그 자체가 묶여 있음을 발견했다.
94:11.4 (1039.3) 불교도의 철학에서 큰 발전은 모든 진리의 상대성을 이해했다는 데 있다. 이 가설의 작용을 통해서, 불교도는 자신과 다른 여러 사람 사이의 차이 뿐 아니라, 자기네 종교 경전(經典)들의 상이점을 절충하고 상관시킬 수 있었다. 작은 진리는 작은 지성을 위하여, 큰 진리는 큰 지성을 위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94:11.5 (1039.4) 이 철학은 또한 부처의 (신다운) 성품이 모든 사람 안에 거한다고, 사람은 스스로 노력해서 이 속 사람의 신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은 유란시아의 종교가 사람에게 깃드는 조절자의 진리를 가장 뚜렷하게 발표한 것 중에 하나이다.
94:11.6 (1039.5) 그러나 싯달타의 최초의 복음에 있는 큰 제한은, 추종자들이 풀이한 바와 같이, 자아를 객관적 실체로부터 고립시키는 방법으로 필사 성품의 모든 한계로부터 인간의 자아를 완전히 해방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우주에서 자아의 참된 실현은 우주의 실체, 그리고 공간에 제한받고 시간에 제약되는 에너지ㆍ지성ㆍ영으로 이루어진 유한한 우주와 일체가 되는 결과로서 생긴다.
94:11.7 (1039.6) 그러나 불교의 예식과 겉으로 나타나는 행사가 불교가 여행한 여러 나라에 있는 예식과 행사에 엄청나게 오염되었어도, 때때로 이 체계의 사상과 관념을 받아들인 위대한 사상가들의 철학적 생활에 이런 퇴화가 있었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2천 년이 넘도록, 아시아의 많은 최고 지성인은 절대 진리와 절대자에 관한 진리를 확인하는 문제에 힘을 기울였다.
94:11.8 (1039.7) 절대자에 대한 높은 개념의 진화는 많은 생각 경로를 통해서, 빗나간 논리의 길을 거쳐서 이루어졌다. 이 무한의 교리가 위로 올라간 길은 히브리 신학에서 하나님 개념이 진화한 것만큼 뚜렷이 정의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우주들의 시초 근원을 상상하는 도중에, 불교도의 지성이 다다르고, 머무르고, 거쳐 간 어떤 일반 수준이 있었다.
94:11.9 (1039.8) 1. 고타마의 전설. 개념의 근저에는 인도의 선지자였던 왕자, 싯달타의 일생과 가르침, 즉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고타마를 깨우친 자라는 관념의 상태를 넘어서 추가된 속성을 비로소 얻을 때까지, 이 전설은 여러 세기를 통해서, 아시아의 넓은 땅을 통과하며 여행하는 동안, 신화 속에서 자랐다.
94:11.10 (1040.1) 2. 여러 부처. 고타마가 인도의 민족들에게 왔다면, 다음에 아득히 먼 과거에 인류의 종족들은 다른 진리 선생이 오시는 축복을 받았고, 아득히 먼 앞날에 의심할 여지 없이 또 축복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추리하였다. 이것은 부처가 많이, 제한 없이 무한히 있다, 아니 누구나 부처가 되기를―부처의 신성을 얻기를―바랄 수 있다고 하는 가르침도 낳았다.
94:11.11 (1040.2) 3. 절대 부처. 부처들의 수가 무한에 가까이 이를 때가 되자, 다루기 힘든 이 개념을 그 시절의 지성인이 다시 통일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모든 부처가 단지 어떤 더 높은 본질, 무한하고 조건 없이 존재하는 어떤 영원한 하나, 모든 실체의 어떤 절대 근원이 겉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여기서부터 계속, 불교에서 신 개념은, 최선의 형태로 보아서, 고타마 싯달타의 인간 몸을 벗어나고, 그 개념을 끈으로 묶어 두었던, 사람 모습의 제한을 벗어 버렸다. 이 최종 개념, 영원한 부처는 절대자, 때로는 무한한 스스로 계신 이와도 쉽게 동일시될 수 있다.
94:11.12 (1040.3) 이 절대 신 관념은 결코 아시아 민족들 사이에 크게 유행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이 땅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철학을 통일하고 우주론을 조화시키도록 만들었다. 절대 부처 개념은 때때로 준(準)성격을 가졌고, 때때로 온전히 비성격이었다―아니 무한한 창조 세력이기도 했다. 그러한 개념은 철학에 도움이 되어도, 종교의 발전을 좌우하지 않는다. 사람 모습을 한 야웨조차도, 무한히 멀리 있는, 불교나 브라만교의 절대자보다 더 큰 종교적 가치가 있다.
94:11.13 (1040.4) 때때로 절대자는 무한한 스스로 계신 이 안에 담겨 있다고도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 추측은 약속의 말씀,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 신의 은총을 얻고 영원히 살아남는 것을 보장하리라는 살렘의 단순한 복음을 무척 듣고 싶어했던 갈급한 대중에게 찬물을 끼얹어 위로하는 것이었다.
94:12.1 (1040.5) 불교의 우주론에서 큰 약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인도와 중국의 많은 미신으로 불교가 오염된 것이요, 다른 하나는 고타마를 처음에 깨우친 자로서, 나중에 영원한 부처로 높인 것이다. 기독교가 많은 잘못된 인간 철학을 흡수하여 고생한 것처럼, 불교도 사람의 출생 표시를 지닌다. 그러나 고타마의 가르침은 지난 2천5백 년 동안 줄곧 진화해 왔다. 깨우침을 받은 기독교인에게 여호와 개념이 호렙 산의 악령과 동일하지 않은 것 같이, 깨우침을 받은 불교도에게 부처 개념은 이제 더 고타마의 인격이 아니다. 용어의 부족은, 옛날의 명칭을 감상적으로 보유하는 것과 함께, 흔히 종교 개념에 있었던 진화의 참된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게 유도한다.
94:12.2 (1040.6) 절대자와 대조하여 하나님 개념은 불교에서 차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근원은 소승과 대승의 추종자들을 이처럼 구별하던 옛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후자의 불교 종파 사이에서 하나님과 절대자의 두 가지 개념이 마침내 무르익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한 세기 한 세기, 일본에서 료닌(良忍)[8] [57], 호넨 쇼닌(法然上人)[9] [58], 신란(親鸞)의[10] [59] 가르침과 함께, 하나님 개념이 진화하였고, 마침내 이 개념은 아미다 부처 관념에서 열매를 맺었다.
94:12.3 (1041.1) 이 신자들 사이에서, 죽음을 겪고 나서 혼은 궁극의 존재, 열반(涅槃)에 들어가기 전에, 파라다이스에서[11] [60] 체류하기를 선택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서쪽에 있는 파라다이스의 하나님, 아미다의 신다운 자비와 사랑으로 돌보심을 믿음으로 이 새로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선포되었다. 아미다 신자들의 철학은, 유한한 필사자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무한한 실체를 고수한다. 그들은 그 종교에서 온통 자비로운 아미다를 믿는 신앙에 매달리며, 그 아미다는 세상을 무척 사랑해서, 참으로 믿으면서 깨끗한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필사자 한 명도 파라다이스의 하늘 같은 행복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94:12.4 (1041.2) 불교의 큰 장점은 그 신봉자들이 모든 종교로부터 마음대로 진리를 고르는 것이다. 그러한 선택의 자유는 어느 유란시아 종교의 특징이 된 적이 드물다. 이 점에서 일본의 정토진종(淨土眞宗) 교파는 세계에서 가장 진취적 종교 집단의 하나가 되었다. 이 교파는 고타마 추종자들의 옛 선교 정신을 부활시켰고, 다른 민족들에게 선생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어떤 근원에서도, 아니 온갖 근원에서 이렇게 진리를 기꺼이 취하려 하는 자세는 그리스도 이후 20세기 전반(前半)에 종교 신자들 사이에서 나타난, 정말로 칭찬받을 경향이다.
94:12.5 (1041.3) 불교 그 자체는 20세기의 부흥을 겪고 있다. 기독교와 접촉을 가짐으로 불교의 사회적 모습은 크게 향상되었다. 배우려는 욕구가 그 단체의 승려들 마음 속에서 다시 불이 붙었고, 이 신앙에 두루, 교육의 확산은 종교의 진화에서 새로운 걸음을 분명히 자극할 것이다.
94:12.6 (1041.4) 이 글을 쓸 때, 아시아의 상당 부분은 불교에 희망을 걸고 있다. 인도에서 그 위대한 선생의 제자들이 한때 그가 새 진리를 선포함을 들은 것과 같이, 지난날의 암흑 시대를 통해서 아주 용감히 버티어 온 이 고귀한 신앙은 확대된 우주 실체들에 관한 진리를 다시 한 번 받아들일 것인가? 그렇게 오랫동안 찾던, 하나님과 절대자에 대한 새로운 개념의 발표가 활력을 주며 자극하는 데 이 옛 신앙이 다시 한 번 꿈틀할 것인가?
94:12.7 (1041.5) 진화적 기원을 가진 여러 종교와 접촉함으로 19세기 동안에 축적된 교리와 독단에 방해받지 않은 말씀, 사람을 고귀하게 만드는 미가엘의 말씀이 선포되기를 온 유란시아가 기다리고 있다. 불교ㆍ기독교ㆍ힌두교에게, 아니 온갖 신앙을 가진 민족들에게도, 예수에 관한 복음이 아니라, 예수의 복음의 생생한 영적 실체를 발표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95:0.1 (1042.1) 인도가 동 아시아의 많은 종교와 철학을 낳은 것처럼, 레반트도[1] [61] 서양 세계에서 신앙의 고향이었다. 살렘 선교사들은 팔레스타인과 메소포타미아, 에집트ㆍ이란ㆍ아라비아를 거쳐서, 서남 아시아 전역에 두루 퍼졌고, 어디서나 좋은 소식, 마키벤타 멜기세덱의 복음을 선포했다. 이 여러 지역의 어떤 곳에서 그들의 가르침은 열매를 맺었다. 다른 데서 그들은 성공한 정도가 달랐다. 때때로 그들의 실패는 지혜가 모자랐기 때문이었고, 때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다.
95:1.1 (1042.2) 기원전 2000년이 되기까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들은 셋 족속의 가르침을 거의 잃어버리다시피 하였고, 두 무리의 침략자가 지녔던 원시 신앙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는데, 하나는 서쪽 사막에서 흘러 들어온 베두인 셈 족속이고, 다른 하나는 북쪽으로부터 내려온, 말 타는 미개 족속이었다.
95:1.2 (1042.3) 그러나 한 주의 일곱째 날을 존중하는 옛 아담 족속의 풍습은 결코 메소포타미아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멜기세덱 시절에, 일곱째 날을 불운 중에서 가장 나쁜 것으로 여겼을 따름이다. 그 시대는 금기로 가득하였고, 나쁜 일곱째 날에 길을 떠나거나, 요리하거나, 불을 지피는 것은 불법이었다. 유대인은 그들이 발견한 메소포타미아의 많은 금기를 팔레스타인으로 가져갔고, 이것들은 일곱째 날, 곧 샤바툼을 지키는 바빌로니아의 풍습에 기초를 두었다.
95:1.3 (1042.4) 살렘 선생들이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종교를 다듬고 개선하려고 많이 수고했지만, 그들은 여러 민족이 유일한 하나님을 영구히 인식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한 가르침은 150년이 넘도록 우세했지만, 그리고 나서 잡다한 신들을 믿는 예전의 신앙에 차츰 무릎을 꿇었다.
95:1.4 (1042.5) 살렘 선생들은 메소포타미아 신들의 수를 크게 줄였고, 한때는 주요한 신을 벨ㆍ샤마쉬ㆍ나부ㆍ아누ㆍ이아ㆍ마르둑ㆍ씬, 이렇게 일곱으로 만들었다. 새 가르침이 절정에 올랐을 때 그들은 이 신들 가운데 셋을 모든 다른 것 위에 최고로 올려놓았는데, 바빌로니아의 삼신은 벨ㆍ이아ㆍ아누, 곧 땅과 바다와 하늘의 신이었다. 또 다른 여러 삼신조(三神組)가 다른 지역에서 생겨났고, 모두가 안드 족속과 수메르인의 삼위일체 가르침을 연상시키고, 멜기세덱의 세 동그라미 표시를 믿는 살렘 사람들의 신앙에 기초를 두었다.
95:1.5 (1042.6) 살렘 선생들은 신들의 어머니이자 성교와 다산(多産)의 영, 이시타르의 인기를 결코 완전히 이기지 못했다. 그들은 이 여신 숭배를 다듬느라고 많이 수고했지만, 바빌로니아인과 그 이웃들은 가장된 형태의 성교 숭배를 결코 극복한 적이 없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두루, 모든 여자가, 적어도 일생의 초기에 한 번, 낯선 사람들의 품에 안기는 것이 보편적 풍습이 되었다. 이것은 이시타르가 요구하는 헌신이라고 생각되었고, 다산은 대체로 이렇게 여성이 몸을 바치는 데 달려 있다고 믿었다.
95:1.6 (1043.1) 멜기세덱의 가르침이 초기에 이룩한 진보는, 키시에 있는 학교의 지도자 나보닷이 유행하던 성전 매춘 풍습을 합동으로 공격하기로 결정할 때까지 어지간히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살렘 선교사들은 이러한 사회 개혁을 일으키려는 노력에 실패했고, 이 실패의 구렁에서 그들의 더 중요한 영적ㆍ철학적 가르침이 모두 패배 속에 사라져 버렸다.
95:1.7 (1043.2) 살렘의 복음이 이렇게 실패한 데 뒤이어 즉시 이시타르의 제사가 크게 유행하였고, 이것은 이미 아스타롯으로서 팔레스타인, 이시스로서 에집트, 아프로디테로서 그리스, 아스타르트로서 북쪽의 부족들을 침범한 의식이었다. 이시타르 숭배의 이러한 부흥과 연결하여 바빌로니아 사제들은 점성술로 다시 돌아섰다. 점성술은 마지막으로 메소포타미아에서 큰 부흥을 겪었으며, 점치기가 유행하고 몇 세기 동안 사제 계층은 갈수록 더 악화되었다.
95:1.8 (1043.3) 멜기세덱은 만물의 아버지요 조물주인 유일한 하나님에 관하여 가르치라고,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신의 은총을 얻는다는 복음을 전파하라고 추종자들에게 전에 경고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일을 시도하고, 천천히 이루어지는 진화 대신에 갑자기 개혁하려고 애쓰는 잘못을 새 진리 선생들이 저지르는 경우가 흔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멜기세덱 선교사들은 도덕 기준을 그 사람들에게 너무 높이 올려놓았다. 그들은 너무 많은 일을 시도했고 그들의 고귀한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그들은 분명한 복음을 설파하라, 우주의 아버지가 실재한다는 진리를 외치라고 임명받았지만, 그들은 도덕 관습을 뜯어고치는 운동, 겉보기에 가치 있는 운동에 얽히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의 큰 사명은 옆길로 빠지고, 좌절과 망각 속에서 거의 사라졌다.
95:1.9 (1043.4) 키시에 있던 살렘 본부는 한 세대 안에 종말에 이르렀고,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선전은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살렘 학교들의 잔재는 버티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작은 무리들은 유일한 창조자를 믿는 신앙을 계속했고, 메소포타미아 사제들의 우상 숭배와 부도덕에 맞서 싸웠다.
95:1.10 (1043.5) 그들의 가르침이 거부되고 난 다음 기간에 살았던 살렘 선교사들은 구약 시편의 많은 부분을 기록하고 돌에 새겼으며, 이것을 후일의 히브리 사제들이 포로 생활 시절에 돌에서 발견했고, 나중에 유대인이 저술했다고 여기는 찬송 모음에 이것들을 합병하였다. 바빌론에서 온 이 아름다운 찬송들은 벨마르둑의 성전에서 기록된 글이 아니다. 이 노래들은 초기 살렘 선교사들 후손의 작품이었고, 바빌로니아 사제들의 마술 수집과 뚜렷이 대조가 된다. 욥기는 키시에,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있던 살렘 학교의 가르침을 무척 잘 반영한다.
95:1.11 (1043.6) 메소포타미아의 상당한 종교 문화가 아메니모피와 이크나톤의 작품을 통해서 에집트를 거쳐, 히브리 문학과 예배문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에집트인은 사회적 의무에 관한 가르침을 놀랍게도 간직했는데, 이것은 예전에 있던 메소포타미아의 안드 족속으로부터 내려왔고,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차지했던 후일의 바빌로니아인은 대체로 이것을 잃어버렸다.
95:2.1 (1043.7) 멜기세덱이 준 최초의 가르침은 에집트에서 정말로 깊이 뿌리내렸고, 거기서 이 가르침은 나중에 유럽으로 퍼졌다. 나일 강 유역의 진화 종교는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있던 우수한 핏줄, 곧 놋 족속, 아담 족속, 그리고 후일에 안드 민족들이 도착함으로 정기적으로 강화되었다. 때때로 에집트의 많은 문관 행정가가 수메르인이었다. 이 시절에 인도가 세계 종족들이 많이 혼합된 사람들을 품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에집트도 유란시아에서 발견되는 바 가장 철저히 혼합된 종류의 종교 철학을 육성했고, 나일 강 유역으로부터 이것은 세계의 여러 구석으로 퍼졌다. 유대인은 바빌로니아인으로부터 세계 창조에 관한 그들의 관념을 상당히 받았지만, 에집트인으로부터 신의 섭리 개념을 얻었다.
95:2.2 (1044.1) 메소포타미아보다 에집트에서 살렘의 가르침을 더 유리하게 만든 것은 철학이나 종교의 성향이 아니라, 정치 및 도덕의 성향이었다. 에집트에서 각 부족의 지도자는 왕좌를 쟁취한 뒤에, 그의 부족 신이 최초의 신이요 모든 다른 신의 창조자라고 선포함으로, 자기의 왕조를 영속시키려고 애썼다. 이 방법으로 에집트인은 차츰 초월신 관념에 익숙해졌는데, 이것은 나중에 우주를 창조한 신의 교리에 이르는 디딤돌이었다. 일신교 개념은 에집트에서 몇 세기 동안 오락가락 흔들렸고,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언제나 세력을 넓혔지만, 결코 진화하는 다신교 개념을 아주 이기지는 않았다.
95:2.3 (1044.2) 오랜 세월 동안, 에집트의 민족들은 자연신 숭배에 젖어 있었다. 더 자세히 말하면, 따로 된 40 부족은 저마다 특별한 집단의 신을 가졌고, 하나는 황소, 하나는 사자, 하나는 숫양, 이런 따위를 숭배했다. 그보다 전에 그들은 아메리카 인디안과 무척 비슷하게, 토템 부족들이었다.
95:2.4 (1044.3) 시간이 지나자 에집트인은, 벽돌로 만든 지하 저장실에 묻힌 시체들은 썩는데, 벽돌이 없는 무덤에 놓여진 시체들은 소다가 스며든 모래의 작용 때문에, 보존―썩지 않도록 처리―되는 것을 관찰하였다. 이러한 관찰은 여러 가지 실험으로 이끌었고, 이것은 후일에 죽은 자를 향료로 처리하는 풍습을 낳았다. 에집트인은 몸을 보존하는 것이 사람이 미래 생애를 거쳐가는 것을 수월하게 만든다고 믿었다. 몸이 썩은 뒤 먼 앞날에 개인을 적절히 확인할 수 있도록, 그들은 시체와 함께, 매장할 때 조상(彫像)을 무덤에 세워 놓고 관 위에 비슷한 모습을 새겨놓았다. 이 무덤에 세우는 조상을 만드는 것은 에집트의 예술을 크게 개선하였다.
95:2.5 (1044.4) 여러 세기 동안 에집트인은 무덤이 시체를 보호하며, 그 결과로 죽은 뒤에 쾌적하게 살아남는 것을 보호하는 장치라고 믿었다. 후일에 마술 풍습의 진화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일생 동안 성가셨지만, 아주 효과적으로 그들이 무덤의 종교를 벗어나게 하였다. 사제들은 관에 부적이 되는 구절을 새기곤 하였고, 이것이 “지하 세계에서 사람의 심장 빼앗기는 것”을 막는 보호 조치라고 믿었다. 이내 여러 종류의 이 주문(呪文)이 수집되었고, 사자(死者)의 서로서 보존되었다. 그러나 나일 강 유역에서 마술 의식은 일찍부터, 그 시절의 의식(儀式)이 흔치 않게 도달하는 정도로, 양심과 인품의 분야와 관련되었다. 그리고 후일에 구원받는 것은 무덤을 공들여 짓기보다 이러한 윤리적ㆍ도덕적 이상에 달려 있었다.
95:2.6 (1044.5) 이 시절의 미신은, 침이 병 고치는 약으로서 효력이 있다는 널리 퍼진 믿음에 잘 나타나는데, 이 관념은 에집트에서 기원이 있었고 거기서부터 아라비아와 메소포타미아로 퍼졌다. 호루스가 셋과 싸움을 벌이는 전설에는 그 젊은 신이 제 눈을 잃어버렸지만, 셋을 정복한 뒤에 지혜로운 신 토스가 이 눈이 다시 보이게 해주었고, 토스는 상처에 침을 뱉어 낫게 하였다.
95:2.7 (1044.6) 에집트인은 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은 자격 있는 죽은 사람의 혼이 살아남는 것을 가리킨다고 오랫동안 믿었다. 다른 생존자들은 해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고 생각했다. 어떤 기간에는 태양 숭배가 일종의 조상 숭배가 되었다. 큰 피라미드의 비탈진 입구로 이끄는 길은 북극성을 똑바로 가리켰다. 그래서 임금의 혼은 무덤에서 나올 때 고정된 별들의 별자리, 움직이지 않는 확정된 별자리로 똑바로 갈 수 있었고, 그러한 별은 임금이 사는 처소로 생각되었다.
95:2.8 (1045.1) 비스듬히 내려오는 태양 빛이 땅을 향하여 구름 속의 구멍을 통해서 통과하는 것을 관찰했을 때, 사람들은 임금과 기타 올바른 사람들이 올라갈 수 있도록 하늘 계단을 내려놓는 것을 상징한다고 믿었다. “페피 임금은 그의 광채를 발 밑에 계단이 되라고 내려놓았고, 이를 딛고서 어머니한테로 올라가려 했다.”
95:2.9 (1045.2) 멜기세덱이 육체를 입고 나타났을 때, 에집트인은 주위의 민족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종교가 있었다. 몸을 잃어버린 혼은 주문으로 알맞게 준비를 갖추면, 중간에 있는 악령들을 피하고 오시리스의 재판실까지 갈 수 있다고, 거기서 “살인ㆍ강도ㆍ거짓ㆍ간음ㆍ도둑질ㆍ이기심”의 죄가 없으면, 지극히 복스러운 나라로 입장이 허락되리라 그들은 믿었다. 이 혼을 저울에 달아서 모자라는 것이 발견되면, 지옥으로, 삼키는 여신에게 맡겨질 것이었다. 이것은 둘러싼 여러 민족의 신앙과 비교해서, 비교적 진보된 미래 생명의 개념이었다.
95:2.10 (1045.3) 땅에서 육체를 입고서 사람이 일생에 지은 죄 때문에 저 세상에서 재판받는다는 개념은 에집트로부터 히브리 신학으로 옮겨갔다. 재판이라는 낱말은 히브리 시편 전체에 꼭 한 번 나타나는데, 에집트인이 바로 그 찬송가를 썼다.
95:3.1 (1045.4) 에집트의 문화와 종교가 주로 안드 족속이 살던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유래했고 히브리인과 그리스인을 통해서 대부분, 후일의 문명에 전달되었어도, 에집트인의 사회 및 윤리적 이상주의의 상당 부분은 순전히 차츰차츰 발달된 것으로서, 나일 강 유역에서 일어났다. 안드 족속에 기원을 가진 진리와 문화를 많이 수입했는데도, 미가엘의 수여가 있기 전에 다른 어느 제한된 지역에서 비슷하게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나타난 것보다 에집트에서 순전히 인간적 발전으로서 도덕 문화가 더 발달되었다.
95:3.2 (1045.5) 도덕의 진화는 계시에 온통 의존하지는 않는다. 높은 도덕 개념은 사람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사람에게 신다운 영이 깃들기 때문에, 사람은 몸소 체험하는 생활로부터 영적 가치 기준을 발달시키고 우주를 보는 통찰력을 얻어낼 수 있다. 양심과 인품이 그랗게 자연스럽게 진화하는 범위는 또한, 옛날에 둘째 에덴으로부터, 나중에는 살렘에 있는 멜기세덱 본부로부터,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들이 정기적으로 나타남으로 커졌다.
95:3.3 (1045.6) 살렘의 복음이 에집트에 침투하기 몇천 년 전에, 에집트에서 도덕의 지도자들은 정의와 공평, 그리고 탐욕 회피를 가르쳤다. 히브리 성서가 쓰여지기 3천 년 전에, 에집트인의 표어는 이것이었다: “올바른 기준을 가진 사람, 올바른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은 서느니라.” 그들은 부드러움과 절제와 신중을 가르쳤다. 이 시대의 큰 선생들 중에 하나는 이런 말을 전했다, “옳게 행하고,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대하라.” 이 시대에 에집트인의 세 가지 표어는 진리ㆍ응보ㆍ올바름이었다. 유란시아에서 순전히 인간다운 종교 가운데 아무것도, 나일 강 유역에서 한때 있던 이 인본주의에서 나타난 사회적 이상과 위대한 도덕성을 일찍이 뛰어넘은 적이 없다.
95:3.4 (1045.7) 발달하는 이 윤리 개념과 도덕적 이상이 담긴 토양 속에서 살렘 종교의 살아남은 교리가 번성했다. 이런 말씀을 믿은 민족의 가슴 속에서 선악 개념은 쉽게 반응했다, “평화로운 자는 생명을 얻고, 죄 있는 자는 죽음을 받느니라,” “사랑받는 일을 행하는 자는 마음이 평안하며, 미움받는 일을 하는 자는 죄가 있도다.” 몇 세기 동안 나일 강 유역의 거주자들은 후일에 생긴, 옳은 것과 그른 것―선악―의 개념을 미처 생각해 보기도 전에, 이 솟아나는 윤리적ㆍ사회적 기준에 따라서 살았다.
95:3.5 (1046.1) 에집트의 사람들은 지적ㆍ도덕적이었으나 영적 성품이 지나치게 높지는 않았다. 에집트인 사이에서 6천 년 동안에 위대한 선지자가 겨우 4명 일어났다. 그들은 아메니모피를 한 동안 따랐고, 옥반을 죽였다. 이크나톤을 짧은 한 세대 동안 건성으로 받아들였고, 모세를 물리쳤다. 종교 상황보다는 다시 정치 상황이, 유일한 하나님을 외치는 살렘의 가르침을 위하여 아브라함이, 그리고 나중에는 요셉이, 에집트 전역에 수월하게 큰 영향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살렘 선교사들이 처음에 에집트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들어온 이민들의 수정된 도덕 기준과 섞인 문화, 상당히 윤리적인 진화된 문화와 마주쳤다. 나일 강 유역에 있던 이 초기의 선생들은 양심이 하나님의 명령이라, 신의 목소리라고 처음으로 선포했다.
95:4.1 (1046.2) 때가 되자 에집트에서 많은 사람이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고, 더러는 아메니모피라 부른 한 선생이 나타났다. 이 예언자는 양심을 옳고 그른 것을 중재하는 가장 높은 정점까지 올려놓았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고 가르쳤으며, 태양신에게 부탁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선포했다.
95:4.2 (1046.3) 아메니모피는 재산과 행운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가르쳤고, 이 개념은 나중에 나타나는 히브리 신학에 속속들이 영향을 미쳤다. 이 고귀한 선생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모든 행위를 결정하는 요소라, 사람은 순간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에 대한 책임을 깨달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이 현자의 가르침은 나중에 히브리어로 번역되었고, 구약을 글로 쓰기 오래 전에 그 민족의 신성한 책이 되었다. 이 선한 사람의 주요한 설교는 정부가 맡긴 직책에 올바르고 정직하게 임할 것을 아들에게 가르치는 것과 상관되었고, 옛날의 이 고귀한 감정은 현대의 어떤 정치가에게도 명예가 될 것이다.
95:4.3 (1046.4) 나일 강에 있던 이 지혜로운 사람은 “재산은 날개를 달고 날아가 버린다”―땅에 있는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다―고 가르쳤다. 그의 큰 기도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사람들의 말”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행위”로 향하라고 타일렀다. 그의 가르침의 요점은 이러했다: 일은 사람이 꾸며도 결과는 하나님이 정한다. 히브리어로 번역된 그의 가르침은 구약에서 잠언의 철학이 되었다. 그리스어로 번역되어서, 그 가르침은 이후의 모든 헬라인의 종교 철학에 영향을 미쳤다. 후일에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 필로는 지혜서의 사본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95:4.4 (1046.5) 아메니모피는 진화로 생긴 윤리와 계시된 교훈을 보존하려고 활동했고, 그의 글에서 이것들을 히브리인과 그리스인, 두 민족에게 전해 주었다. 그는 이 시대의 종교 스승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은 아니었지만, 서양 문명의 성장에서 두 개의 중요한 고리가 되는 후일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으므로 그는 가장 영향력이 있었다―그 하나는 히브리인이고, 이들 가운데서 서양의 종교 신앙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인이니, 그들은 순수한 철학 사상을 유럽에서 가장 높이 발전시켰다.
95:4.5 (1046.6) 히브리인의 잠언에서 15장ㆍ17장ㆍ20장, 그리고 22장 17절에서 24장 22절까지는 거의 글자 그대로, 아메니모피의 지혜서에서 가져갔다. 히브리인 시편의 1편은 아메니모피가 썼고, 이것은 이크나톤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95:5.1 (1047.1) 아메니모피의 가르침은 에집트인의 머리 속에서 그 위력을 천천히 잃고 있었는데, 그때 어느 에집트인, 살렘의 의사의 영향을 통해서, 왕실의 한 여자가 멜기세덱의 가르침을 지원하였다. 이 여자는 아들, 에집트의 파라오, 이크나톤에게 이 유일한 하나님의 교리를 받아들이라고 설득했다.
95:5.2 (1047.2) 육체를 입은 멜기세덱이 사라진 뒤에, 그때까지 어떤 인간도 이크나톤처럼, 살렘에 계시된 종교의 개념, 그렇게 놀랍게 뚜렷한 개념을 가진 적이 없었다. 어떤 면에서 이 젊은 에집트 왕은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비범한 사람들 중에 하나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영적 쇠퇴가 깊어지는 이 시기에, 그는 엘 엘리욘[2] [62], 유일한 하나님의 교리를 에집트에서 살려 두었고, 이처럼 철학적 일신교의 길을 유지했으며, 이것은 당시에, 미가엘의 미래 수여를 위한 종교적 배경에 중요했다. 다른 이유 중에 이 공훈을 인정해서, 아이 예수가 에집트로 옮겨졌다. 거기서 이크나톤의 영적 후계자들 가운데 더러가 그를 보았고, 유란시아에 대한 그의 신성한 사명의 어떤 국면을 어느 정도 이해하였다.
95:5.3 (1047.3) 멜기세덱과 예수 사이에 가장 큰 인물이었던 모세는 히브리 종족과 에집트 왕실이 함께 세상에 준 선물이었다. 이크나톤이 모세만큼 융통성과 능력이 있고, 그의 놀라운 종교적 지도력에 어울리는 정치적 천재를 보였더라면, 에집트는 그 시대에 일신교를 믿는 큰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이 일어났더라면, 예수가 필사 생애의 반이 넘는 부분을 에집트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조금 있다.
95:5.4 (1047.4) 이 특별한 이크나톤이 한 것처럼, 모든 역사를 통해서 결코 어떤 임금도 그렇게 면밀하게 진행하여 한 나라 전체를 다신교로부터 일신교로 한번에 몰지 않았다. 아주 놀라운 각오를 가지고, 이 젊은 통치자는 과거와 인연을 끊고, 자기 이름을 고치고[3] [63], 서울을 버리고, 전혀 새 도시를 짓고, 한 민족 전체를 위하여 새로운 예술과 문학을 창조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빨리 움직였다. 그가 사라졌을 때 버틸 수 있는 것보다 더 지었고, 너무 많이 지었다. 또한 그는 민족의 물질적 안정과 번영을 마련해 주지 못했고, 이 모두가 나중에 역경(逆境)과 억압의 물결이 에집트인을 휩쓸었을 때 그의 종교적 가르침에 불리하게 반응했다.
95:5.5 (1047.5) 놀랍게도 맑은 선견이 있고 특별히 단 한 가지 목적에 마음을 쏟은 이 사람이 모세같이 정치적 지혜가 있었더라면, 서양 세계에서 종교 진화와 진리 계시의 역사 전체를 바꾸었을 것이다. 그는 사제들을 대체로 불신했고, 일생 동안 사제들의 활동을 제어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자기네 종파를 몰래 유지했고, 그 젊은 임금이 권력을 놓자마자 뛰쳐나와 행동했다. 그들은 나중에 생긴 에집트의 모든 문제를 그의 통치 기간에 일신교를 세운 것과 재빨리 연결지었다.
95:5.6 (1047.6) 아주 지혜롭게도 이크나톤은 태양신의 모습으로 가장하여 일신교를 세우려고 애썼다. 태양 숭배 속으로 모든 신을 흡수함으로 우주의 아버지를 숭배하려는 이 결정은 살렘의 의사가 준 조언 때문이었다. 이크나톤은 신이 아버지요 어머니인 것에 관하여 당시에 존재했던 아톤 신앙의 일반화된 교리를 취하여 한 종교를 창시했으며, 이것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가깝고 경건한 관계를 인정하였다.
95:5.7 (1048.1) 이크나톤은 충분히 지혜로워서 겉으로 태양신 아톤의 숭배를 유지하였고, 한편 이를 가장하여 유일한 하나님, 곧 아톤의 창조자요 만물의 가장 높은 아버지를 예배하는 길로 동료들을 이끌었다. 이 젊은 선생이자 임금은 글을 많이 썼고,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지닌 해설의 저자였는데, 31장으로 된 이 책을 다시 권력을 잡은 사제들이 모조리 없애버렸다. 이크나톤은 또한 찬송을 137편 썼는데, 이 가운데 열두 편이 지금 구약의 시편(詩篇)에 간직되어 있고, 히브리인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
95:5.8 (1048.2) 일상 생활에서 이크나톤의 종교에서 최고의 말씀은 “올바름”이었고, 그는 옳게 행하는 개념을 재빨리 확대하여, 국가의 윤리 뿐 아니라 국제 윤리까지 포함하였다. 이 세대는 놀랍게 개인의 경건함을 찾았고 총명한 남녀 사이에서 하나님을 찾아내고 이해하려고 진정으로 몹시 바라는 특징이 있었다. 그 시절에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재산이 많은 것은 어떤 에집트인에게도 법 앞에서 전혀 특혜를 주지 않았다. 에집트의 가족 생활은 도덕 문화를 간직하고 육성하는 데 많이 이바지했고, 팔레스타인에서 후일에 유대인에게 훌륭한 가족 생활을 하도록 격려하였다.
95:5.9 (1048.3) 이크나톤의 복음에 치명적 약점은 거기에 담긴 가장 위대한 진리, 즉 아톤이 에집트 뿐 아니라 또한 “온 세계, 사람과 동물, 이 에집트 땅 외에 모든 외국 땅, 아니 시리아와 쿠시까지도 창조하신 분이라. 그는 만물을 제 자리에 두고 만물의 필요를 채워 주시니라”하는 가르침이었다. 이 신 개념은 높고도 높았지만,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그러한 국제 종교를 가졌다는 느낌은 전쟁터에서 에집트 군대의 사기를 높이지 못했고, 한편 이것은 사제들에게 젊은 왕과 그의 새 종교에 대항해서 사용할 유력한 무기(武器)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후일의 히브리인이 가진 개념보다 훨씬 높은 신 개념을 가졌지만, 국가를 세우는 자의 목적에 소용되기에 너무 앞선 것이었다.
95:5.10 (1048.4) 비록 일신교의 이상이 이크나톤의 죽음으로 상처를 받았지만, 유일한 하나님 관념은 많은 집단의 머리 속에 남아 있었다. 이크나톤의 사위는 사제들을 따라가서 다시 옛 신들을 숭배하였고, 이름을 투탄카멘으로 바꾸었다. 서울은 테베로 돌아왔고, 사제들은 땅에서 살찌고 궁극에는 온 에집트의 7분의 1을 소유하였다. 대번에 바로 이 계급의 사제들 중에 하나가 대담하게 왕관을 빼앗았다.
95:5.11 (1048.5) 그러나 사제들은 일신교의 물결을 완전히 이길 수 없었다. 그들은 점점 더 그 신들을 통합하고 두 이름을 붙여서 부를 수밖에 없었고, 갈수록 신들의 가족이 줄어들었다. 이크나톤은 이전에 하늘의 불타는 원반을 창조자 하나님과 연결시켰고, 이 개념은 그 젊은 개혁가가 죽은 지 오랜 뒤에도, 사람들, 아니 사제들의 가슴 속에서도, 줄곧 불타올랐다. 일신교 개념은 결코 에집트에서, 세상에서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개념은 바로 그 거룩한 아버지의 창조 아들이 올 때까지도 버티었고, 이크나톤은 이 유일한 하나님을 온 에집트가 예배하도록 무척 열심히 선포했다.
95:5.12 (1048.6) 이크나톤의 교리의 약점은 그가 너무 앞선 종교를 제시했기 때문에 오직 교육받은 에집트인이 그의 가르침을 넉넉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농사에 종사하는 하층 계급은 결코 그의 복음을 정말로 알아듣지 못했고, 따라서 사제들과 함께, 이시스와 그 배우자 오시리스를 섬기던 예전의 숭배로 돌아갈 준비가 되었으며, 오시리스는 어둠과 악의 신, 셋의 손에 잡혀서 잔혹한 죽음을 당하고 나서 기적으로 부활했다고 생각되었다.
95:5.13 (1049.1) 모든 사람이 불멸한다는 가르침은 에집트인에게 너무 진보된 것이었다. 오직 임금과 부자들에게 부활할 가망이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심판받는 날에 대비하여 몸을 아주 조심스럽게 향료로 처리하고 보존하였다. 그러나 이크나톤이 가르친 대로, 누구나 구원받고 부활한다는 민주주의가 궁극에 이겼고, 나중에 에집트인은 말 못하는 동물이 살아남는다고 믿을 정도까지 되었다.
95:5.14 (1049.2) 유일한 하나님의 숭배를 민족에게 강요하려는 이 에집트 군주의 노력이 비록 실패한 듯했어도, 그가 한 일의 영향은 몇 세기 동안 팔레스타인과 그리스에서 지속되었고, 이렇게 에집트는 나일 강의 진화된 문화와 유프라테스의 계시된 종교, 이 두 가지를 서양에서 후일의 모든 종족에게 전한 중개인이 되었다는 것을 적어야 한다.
95:5.15 (1049.3) 나일 강 유역에서 도덕이 발달하고 사람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던 이 위대한 시대의 영화로움은 히브리인의 민족 생활이 시작되던 무렵에 급속히 사라지고 있었다. 에집트에서 머무른 결과로서 이 베두인 족속은 이 가르침 가운데 많은 것을 가져갔고, 이크나톤의 교리 가운데 상당 부분을 그들의 민족 종교 안에 지속시켰다.
95:6.1 (1049.4) 멜기세덱 선교사들 가운데 더러는 팔레스타인으로부터 메소포타미아를 통해서, 큰 이란 고원으로 계속 지나갔다. 5백 년이 넘도록 살렘의 선생들은 이란에서 전진하였고 그 나라 전체가 멜기세덱의 종교로 휙 넘어가고 있었는데, 그때 통치자가 교체되어서 갑자기 모진 박해를 시작하였고, 이것은 살렘 종파의 일신교 가르침을 실질적으로 그치게 만들었다. 아브라함의 약속에 관한 교리는 페르시아에서 거의 멸종되었는데, 도덕이 부활되던 그 중대한 세기, 그리스도 이전 6세기에, 조로아스터가 꺼져 가는 살렘 복음의 불꽃을 다시 살리는 듯이 보였다.
95:6.2 (1049.5) 이 새 종교의 창시자는 씩씩하고 모험을 좋아하는 젊은이였고,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우르에 처음으로 순례하러 가서 칼리가스티아와 루시퍼 반란에 관한 전통을―다른 여러 전통과 함께―얻어들었으며, 이 모든 것이 그의 종교적 성품에 힘차게 호소하였다. 따라서, 우르에 있을 때 꿈을 꾼 결과로서, 그는 북쪽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민족의 종교를 뜯어고치는 데 착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응보의 하나님이라는 히브리 관념, 신에 관한 모세의 개념을 흡수했다. 최고의 하나님 관념이 그의 머리 속에 뚜렷했고, 그는 모든 다른 신을 악마로 내려놓고, 이들을 메소포타미아에서 듣던 악마들의 신세로 만들었다. 그는 우르에 전통이 남아 있던 일곱 으뜸 영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따라서 최상의 신이 일곱 명 있고, 그 꼭대기에 아우라 마즈다가 있는 그러한 세계를 창조했다. 그는 이 하위 신들을 옳은 율법, 좋은 생각, 고귀한 정부, 거룩한 인품, 건강, 불멸을 이상화한 것과 연결시켰다.
95:6.3 (1049.6) 이 새 종교는 기도하고 의식(儀式)을 치르는 종교가 아니라, 행동―일―하는 종교였다. 이 종교의 하나님은 최고의 지혜를 가진 존재요 문명의 후원자였다. 이것은 악ㆍ무위(無爲)ㆍ후진성을 감히 없애려고 한 호전적 종교 철학이었다.
95:6.4 (1049.7) 조로아스터는 불의 숭배를 가르치지 않았지만, 보편적이고 최상으로 지배하는 영, 순수하고 지혜로운 영의 상징으로서 불꽃을 이용하려 했다. (후일에 추종자들이 이 상징인 불꽃을 모시고 숭배한 것은 너무나 참말이다.) 마침내, 어느 이란 왕을 개종시키고 나서, 이 새 종교는 무력(武力)으로 퍼졌다. 그리고 조로아스터는 “빛의 주(主)의 진리”라고 믿은 것을 위해서 싸움터에서 영웅답게 죽었다.
95:6.5 (1050.1) 조로아스터교는 유란시아에서 일곱 으뜸 영에 관하여 달라마시아와 에덴에서 주었던 가르침을 지속하는 유일한 종파이다. 삼위일체 개념을 진화시키지 못했지만, 어떤 면에서 조로아스터교는 칠중 하나님 개념에 가까이 갔다. 최초의 조로아스터교는 순수한 이원론이 아니었다. 초기의 가르침이 비록 악을 시간 세계에서 선과 동등한 것으로 그렸어도, 악은 분명히 선한 자의 궁극의 실체 속에 영원히 사라졌다. 후일에 와서야 선과 악이 동등한 조건으로 싸운다는 개념을 신봉하였다.
95:6.6 (1050.2) 히브리 성서에 기록되었다시피, 유대인이 지닌 천국과 지옥의 전통, 그리고 악마에 관한 교리는 남아 있는 루시퍼와 칼리가스티아의 전통에 근거를 두었지만, 주로 유대인이 페르시아인의 정치와 문화에 지배되던 시절에 조로아스터 신자들로부터 얻었다. 에집트인처럼 조로아스터는 “심판의 날”을 가르쳤지만, 이 사건을 세상의 끝과 연결하였다.
95:6.7 (1050.3) 페르시아에서 조로아스터교를 이어받은 종교조차 두드러지게 그에 영향을 받았다. 이란의 사제들이 조로아스터교의 가르침을 없애려고 했을 때, 그들은 옛 미트라 숭배를 부활시켰다. 미트라교는 레반트와 지중해 지역에 두루 퍼졌고, 한동안 유대교와 기독교와 같은 시대에 있었다.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은 이처럼 유대교와 기독교, 이를 통해서 모하메드교, 이 세 가지 큰 종교에 연달아 영향을 주게 되었다.
95:6.8 (1050.4) 그러나 조로아스터의 드높은 가르침과 고귀한 찬송가들은 파르시 교도들이 그의 복음을 현대에 왜곡한 것과 거리가 멀며, 그들은 죽은 자를 크게 두려워하였고 아울러 조로아스터가 결코 묵인하지 않았을 그러한 궤변을 믿었다.
95:6.9 (1050.5) 이 위대한 사람은, 어두운 세계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이르는 빛의 길을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살렘의 불빛이 아주 어슴푸레 타면서 완전히, 끝내 꺼지지 않도록 지키려고 그리스도 이전 6 세기에 솟아난 그 독특한 무리 중의 한 사람이었다.
95:7.1 (1050.6) 유일한 하나님에 관한 멜기세덱의 가르침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비교적 최근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조직하는 것에 관한 마키벤타의 지시를 오해했기 때문에 살렘 선교사들은 아라비아에서 실패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처럼 군사력이나 국가의 강요를 통해서 복음을 펼치려고 어떤 노력도 하지 말라는 그의 훈계를 그들 나름대로 해석한 것에 이렇게 방해를 받지 않았다.
95:7.2 (1050.7) 멜기세덱의 가르침은 중국이나 로마에서도, 바로 살렘에 아주 가까이 있는 이 사막 지역보다 더 철저히 실패하지는 않았다. 동양과 서양 민족의 대다수가 각자 불교와 기독교 신자가 된 지 오랜 뒤에도, 아라비아 사막은 몇천 년 동안 있던 그대로 계속하였다. 각 부족은 자체의 옛 주물을 모셨고, 많은 개별 가족은 자기네 집 수호신을 가지고 있었다. 바빌로니아인의 이시타르, 히브리인의 야웨, 이란인의 아우라, 기독교의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사이에 싸움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한 개념이 결코 다른 개념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었다.
95:7.3 (1051.1) 아라비아에 두루 여기저기서, 흐릿한 유일한 하나님 개념에 집착한 가족과 씨족들이 있었다. 그러한 무리들은 멜기세덱ㆍ아브라함ㆍ모세ㆍ조로아스터의 전통을 소중히 간직했다. 예수의 복음에 반응했을지 모르는 수많은 중심이 있었지만, 사막 땅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은, 지중해 여러 나라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타협하고 개혁하는 자들과 반대로, 엄격하고 굽히지 않는 무리였다. 예수의 추종자들이 “온 세계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그의 명령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더 품위를 지키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 스스로가 부수되는 사회적 요구 조건을 그리 엄하지 않게 고안했더라면, 아라비아를 포함하여 많은 지역이 기쁘게 그 목수 아들의 단순한 복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95:7.4 (1051.2) 레반트의 위대한 일신교가 아라비아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이 사실인데도, 이 사막의 땅은 한 신앙을 일으킬 수 있었다. 사회적 요구는 심하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그 신앙은 일신교였다.
95:7.5 (1051.3) 사막에 있는 원시적이고 조직되지 않은 신앙들에 관하여 부족ㆍ종족, 또는 국가의 성질을 가진 오직 한 요인이 있었는데, 그것은 거의 모든 아라비아 부족이 메카에 있는 어떤 성전의 검은 돌 주물에 기꺼이, 특이하게 널리 존경심을 표하는 것이었다. 함께 접촉하고 존경하는 이 자리는 나중에 이슬람 종교가 자리잡게 만들었다. 이 셈족의 유대인이 화산(火山)의 신 야웨를 모신 것과 같이, 그들의 아랍 사촌은 카바의 돌을[4] [64] 떠받들었다.
95:7.6 (1051.4) 이슬람의 장점은 뚜렷하고 윤곽이 분명하게, 알라가 하나밖에 없는 신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그 약점은 여자의 천대와 함께, 군사력을 종교의 선포와 관련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은 만물의 유일한 신, 우주의 신의 발표를 완강하게 고집해 왔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을 아시도다. 그는 자비롭고 동정심을 가진 이로다.” “참으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선을 넘치게 베푸시도다.” “그리고 내가 아플 때, 그는 나를 고치시도다.” “세 사람이 함께 말할 때는 언제라도, 하나님이 넷째 분으로 계시는 까닭이라,” 왜냐하면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또한 보이는 이요 감추어진 이가 아니냐?”
96:0.1 (1052.1) 신을 생각할 때 사람은 먼저 모든 신을 인정하고, 다음에 모든 외국 신을 자기 부족 신에 종속시키고, 마지막에는 최종ㆍ최상의 가치를 가진 한 분의 하나님 외에 아무 신도 인정하지 않는다. 유대인은 모든 신을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라는 숭고한 개념으로 통합하였다. 마찬가지로 힌두인은 여러 모습의 신들을 릭 베다에서 묘사된 “신들의 한 가지 영성(靈性)”으로 통합하였고, 한편 메소포타미아인은 그 신들을 더 집중된 벨마둑 개념으로 축소하였다. 이러한 일신교 관념은 팔레스타인 지방의 살렘에서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나타난 뒤 오래지 않아서, 온 세계에서 널리 성숙해졌다. 그러나 멜기세덱의 신 개념은, 포함하고 종속시키고 배제하는 진화된 철학 개념과 달랐다. 그 개념은 순전히 창조하는 힘에 기초를 두었고, 얼마 안 되어 메소포타미아ㆍ인도ㆍ에집트에서 가장 높은 신 개념들에 영향을 미쳤다.
96:0.2 (1052.2) 켄 족속과 몇몇 다른 가나안 부족은 살렘의 종교를 전통으로서 존중하였다. 멜기세덱이 육신화한 한 가지 목적은 이것이었다: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 땅에 수여되는 것을 위하여 길을 예비하려고 바로 그 유일한 하나님의 종교가 육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주의 아버지를 믿는 민족이 있어 그가 그들 사이에 나타날 수 있기까지 미가엘은 도저히 유란시아에 올 수 없었다.
96:0.3 (1052.3) 살렘의 종교는 팔레스타인에서 켄 족속 사이에 그들의 신조로서 지속되었고, 이 종교는 히브리인이 나중에 채택한 바와 같이, 처음에 에집트인의 도덕적 가르침에 영향을 받고, 나중에 바빌로니아인의 신학 사상에, 마지막으로 이란인의 선악 개념에 영향을 받았다. 사실로 히브리 종교는 아브라함과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맺은 계약에 바탕을 두었고, 진화적으로 많은 독특한 상황에서 생긴 부산물이지만, 문화적으로 온 레반트의 종교ㆍ도덕ㆍ철학으로부터 마음대로 빌려왔다. 히브리 종교를 통해서, 에집트ㆍ메소포타미아ㆍ이란의 도덕 및 종교 사상의 상당 부분이 서양 민족들에게 전달되었다.
96:1.1 (1052.4) 옛날의 셈 족속은 만물 안에 영이 깃들어 있다고 보았다. 동물과 식물 세계의 영들이 있고, 각 해마다 영이 있고 자손을 돌보는 주(主)가 있으며, 불ㆍ물ㆍ공기의 영들이 있었다. 두려워하고 섬겨야 하는 영이 가득한, 진정한 만신전(萬神殿)이 있었다. 우주의 창조자에 관한 멜기세덱의 가르침은 결코 이 하급 영이나 자연신을 믿는 신앙을 결코 완전히 없애지 못했다.
96:1.2 (1052.5) 다신교로부터 최고신교(最高神敎)를 거쳐 일신교까지 히브리인이 진보한 것은 중단되지 않고 연속하여 일어난 개념의 발전이 아니었다. 신 개념이 진화하는 동안 그들은 여러 번 퇴보를 경험했고, 한편 어느 한 시대에나, 다른 집단의 셈 족속 신자들 사이에서 다른 하나님 개념이 존재했다. 때때로 수많은 명칭이 여러 하나님 개념에 적용되었는데,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유대 신학의 진화에 관계되는 대로 이 여러 가지 신 명칭이 이렇게 정의될 것이다:
96:1.3 (1053.1) 1. 야웨는 남쪽 팔레스타인 부족들의 신이었고, 이들은 이 신(神) 개념을 호렙 산, 곧 시나이 화산과 연결지었다. 야웨는 다만 셈 부족과 종족들의 눈을 끌고 숭배를 요구한 수백ㆍ수천의 자연 신 가운데 하나였다.
96:1.4 (1053.2) 2. 엘 엘리욘. 살렘에서 멜기세덱이 머무른 뒤에 몇 세기 동안 그의 신 교리는 여러 해석판(版)으로 지속되었지만, 대체로 엘 엘리욘, 하늘의 최고 하나님이라는 명칭으로 대체로 암시되었다. 셈 족속의 많은 사람은, 아브라함의 직계 후손을 포함해서, 다른 때에 야웨와 엘 엘리욘, 이 둘을 숭배했다.
96:1.5 (1053.3) 3. 엘 샤다이. 엘 샤다이가 무엇을 대표하는지 설명하기 힘들다. 이 하나님 관념은 아메니모피의 지혜서의 가르침으로부터 유래하고, 이크나톤의 아톤 교리에 영향을 받고, 이 위에 엘 엘리욘의 개념에 담긴 멜기세덱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혼합물이었다. 그러나 엘 샤다이의 개념은 히브리인의 머리에 스며들면서 사막의 야웨 신앙에 철저히 영향을 받게 되었다.
96:1.6 (1053.4) 이 시대의 종교에서 지배했던 관념 중의 하나는 에집트인이 가졌던 신의 섭리 개념, 곧 물질적 번영이 엘 샤다이를 섬기는 것에 대한 보상이라는 가르침이었다.
96:1.7 (1053.5) 4. 엘. 온통 용어가 뒤섞이고 개념이 흐릿한 가운데, 많은 경건한 신자들은 이 모든 진화하는 신 개념을 숭배하려고 진지하게 애썼고, 이 복합된 신을 엘이라고 언급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 용어는 베두인의 자연 신들 중에서 또 다른 신을 포함했다.
96:1.8 (1053.6) 5. 엘로힘. 키시와 우르에는 수메르인과 갈대아인 무리들이 오랫동안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아담과 멜기세덱 시절의 전통에 기초를 둔, 세 분이 하나가 된 하나님을 가르쳤다. 이 교리는 에집트로 옮겨졌고, 거기서 이 삼위일체는 엘로힘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단수(單數)인 엘로아로서 숭배되었다. 에집트의 철학 집단, 그리고 히브리 핏줄을 가진, 후일에 알렉산드리아의 선생들은 여러 신의 이런 통일성을 가르쳤고, 에집트를 탈출하던 시절에 모세의 조언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이 삼위일체를 믿었다. 그러나 삼자가 일체가 된 엘로힘 개념은 그들이 바빌로니아인의 정치적 영향 밑에 들어갈 때까지, 결코 히브리 신학의 참 부분이 되지 못했다.
96:1.9 (1053.7) 6. 잡다한 이름. 셈 족속은 자기네 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 꺼려했고, 따라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때때로 수많은 다른 명칭에 의존했다: 하나님의 영,주(主),주의 천사, 전능자, 거룩한 하나, 최고자, 아도나이, 옛적부터 늘 계신 이,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 하늘과 땅의 창조자, 키리오스, 야, 만군의 주, 하늘의 아버지.
96:1.10 (1053.8) 여호와는 히브리인의 오랜 체험에서 마침내 진화한, 완성된 야웨 개념을 가리키려고 근래에 쓰인 명칭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은 예수의 시절 이후 1천 5백 년이 될 때까지 쓰이지 않았다.
96:1.11 (1054.1) 기원전 약 2000년까지 시나이 산은 이따금 화산으로 활동했고,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머무르던 시절까지, 때때로 분출이 일어났다. 이 화산의 분출과 관련하여 천둥 치듯 폭발이 있었을 때 불과 연기는 모두, 둘러싼 지역의 베두인 족속에게 감동을 주고 겁을 먹게 만들었고, 그들이 야웨를 크게 무서워하게 만들었다. 이 호렙 산의 영은 나중에 히브리인 셈 족속의 신이 되었고, 그들은 결국 그 신이 모든 다른 신 위에 최고라고 믿었다.
96:1.12 (1054.2) 가나안 족속은 오랫동안 야웨를 섬겼고, 비록 켄 족속에서 많은 사람이 살렘 종교의 초월신 엘 엘리욘을 얼마큼 믿었어도, 가나안 족속의 대다수는 적당히 옛 부족 신들의 숭배를 고수하였다. 그들은 행성 사이의 하나님은커녕, 국제적 하나님 편을 들어서 자기네 민족의 신을 도저히 기꺼이 버리려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우주의 신에 생각이 미치지 않았고, 따라서 이 부족들은 야웨와 금ㆍ은 송아지를 포함하여, 그들의 부족 신을 계속 숭배했으며, 송아지는 베두인 목자들의 시나이 화산 영(靈) 개념을 상징했다.
96:1.13 (1054.3) 시리아인은 자기네 신을 섬기면서 또한 히브리인의 야웨를 믿었는데, 그들의 선지자들이 시리아의 임금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저희의 신들은 산의 신들이라. 그러므로 저희가 우리보다 강하도다. 그러나 저희와 맞서 들에서 싸우자. 그리하면 분명히 우리가 저희보다 강하리라.”
96:1.14 (1054.4) 사람의 문화가 앞으로 전진함에 따라서, 작은 신들은 최고의 신에 종속된다. 위대한 조브는[1] [65] 겨우 감탄 소리로서 남아 있다. 일신교를 믿는 자들은 그들의 하급 신을 영ㆍ악마ㆍ운명, 네레이드ㆍ요정ㆍ브라우니,[2] [66] 난쟁이ㆍ반쉬[3] [67], 악한 눈으로서 보존한다. 히브리인은 최고신교를 거쳤고, 오랫동안 야웨 외에도 다른 신들이 있음을 믿었지만, 그들은 점점 더 이 외국 신들이 야웨 밑에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들은 아모리인의 신 케모스가 사실로 있음을 인정했지만, 그가 야웨 밑에 있다고 주장했다.
96:1.15 (1054.5) 야웨 관념은 하나님에 관한 필사자의 모든 이론 가운데 가장 광범위하게 발전하였다. 그 점진적 진화는 오직 아시아에서 있었던 부처 개념의 변화와 비교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야웨 개념이 마지막에 우주의 아버지 개념으로 인도한 것 같이, 끝에는 우주 절대자 개념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한 역사적 사실의 문제로서, 유대인이 이렇게 호렙 산의 부족 신으로부터 후일에 자애롭고 자비로운 창조자인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신을 보는 관점을 바꾸었지만, 그의 이름을 바꾸지는 않았다. 그들은 계속하여 내내, 이 진화하는 신 개념을 야웨라고 불렀다.
96:2.1 (1054.6) 동방의 셈 족속은 잘 조직되고 훈련받은, 말 타는 사람들이었고, 비옥한 초생달의[4] [68] 동부 지역에 쳐들어가서, 거기서 바빌로니아인과 함께 뭉쳤다. 우르 가까이서 갈대아인은 동쪽 셈 족속 가운데 가장 진보한 편에 속했다. 페니키아인은 지중해의 바닷가를 따라서 팔레스타인의 서부 구역을 차지했던 혼합된 셈 족 집단, 우수하고 조직이 잘 된 집단이었다. 종족 면에서 셈 족속은 유란시아 민족들 가운데 가장 많이 섞인 축에 속했고, 아홉 세계 민족 가운데 거의 모두로부터 얻은 유전 요소를 포함하였다.
96:2.2 (1054.7) 아라비아의 셈 족속은 거듭해서 북쪽에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싸우면서 들어갔지만, 더 조직이 잘 되어 있고 높이 문명화된 북쪽의 셈 족속과 힛 족속에게 번번이 밀려났다. 나중에, 드물게 심한 기근이 있는 동안에, 방랑하는 이 베두인 족속은 에집트의 공공 사업에 계약 노동자로서 큰 떼를 지어 에집트로 들어갔고, 나일 강 유역에서 평범한 짓밟힌 일꾼으로서 날마다 힘든 노동에 종이 되는, 쓰라린 체험을 겪는 신세가 되었을 뿐이다.
96:2.3 (1055.1) 마키벤타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시절 이후에야 겨우, 어떤 셈 부족을 그들의 특이한 종교 관념 때문에, 이스라엘의 자녀라, 나중에는 히브리인, 유대인, “선택된 민족”이라 부르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모든 히브리인에게 시조가 아니었다. 그는 에집트에서 포로로 잡혀 있던 모든 베두인 셈 족속의 선조도 아니었다. 그의 자손이 에집트에서 나와서 나중에 유대 민족의 핵심을 이룬 것은 참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씨족들 속으로 합병된 대다수의 남녀는 에집트에서 결코 머무른 적이 없다. 그들은 에집트에서 온 아브라함의 후손과 그들의 셈 족속 동료들이 아라비아 북부를 거쳐서 여행하는 동안에, 모세의 지휘를 따르기로 결정한 동료 유목민에 지나지 않았다.
96:2.4 (1055.2) 머지 않아 히브리 국가를 형성할 셈 민족이 에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시절이 되자 엘 엘리욘, 최고자, 그리고 믿음을 통해서 신의 은총을 얻는다고 약속했던 멜기세덱의 가르침은 대체로 잊혀졌다. 그러나 포로로 살던 이 기간을 통해서 이 아라비아 유목민은 그들의 종족 신으로서 야웨를 믿는, 남아 있는 전통적 신앙을 유지했다.
96:2.5 (1055.3) 서로 다른 1백이 넘는 아라비아 부족들이 야웨를 숭배하였고, 히브리와 에집트의 혼합된 핏줄을 포함하여, 에집트의 지식 계급 사이에서 지속하던, 멜기세덱의 엘 엘리욘 개념에 물든 것을 제쳐놓고, 포로가 된 하층 계급의 히브리 노예들이 가졌던 종교는 마술을 쓰고 희생물을 바치던 옛 야웨 의식(儀式)의 수정판이었다.
96:3.1 (1055.4) 최상 창조자에 관한 히브리인의 개념과 이상(理想)의 진화가 시작된 것은 그 위대한 지도자요 선생이자 조직자인 모세 밑에서, 셈 족속이 에집트를 떠난 그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어머니는 에집트의 왕족에 속했고, 아버지는 정부와 베두인 포로들 사이에 셈 족속의 연락 장교였다. 이처럼 모세는 우수한 종족 근원으로부터 내려온 성품을 가졌다. 그의 조상은 너무 많이 섞여서 그를 어느 한 종족 집단으로 분류하기 힘들다. 그가 이렇게 섞인 부류가 아니었다면, 궁극에 그의 지휘 하에 에집트에서 아라비아 사막까지 달아난 베두인 셈 족속과 상관하게 된 다양한 무리를 다룰 수 있게 만든 그 드문 재능과 적응 능력을 결코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다.
96:3.2 (1055.5) 나일 왕국의 문화가 유혹이었는데도, 모세는 아버지의 민족과 운명을 같이 하기를 선택했다. 이때 이 위대한 조직자는 아버지의 민족을 궁극에 해방시키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는데, 이 베두인 포로들은 도저히 그 이름에 마땅한 종교가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개념이 거의 없었고, 세상에서 희망이 없었다.
96:3.3 (1055.6) 어떤 지도자도 일찍이 이보다 더 버림받고 풀이 꺾이고 기가 죽고 무지한 인간 집단을 개혁하고 격려하는 일에 결코 손을 댄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노예들은 유전 혈통에 잠자는 발전 가능성을 지녔고, 반란을 일으키고 자유를 얻으려고 투쟁하는 날에 대비하여 유능한 조직자 단체를 구성할 만큼 모세가 지도한, 교육받은 지도자들이 충분히 있었다. 이 우수한 사람들은 그 민족의 토착민 감독자로서 고용되어 있었다. 모세가 에집트의 통치자들에게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큼 교육을 받았다.
96:3.4 (1056.1) 모세는 동포 셈 족속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외교로 협상하려고 애썼다. 그와 동생은 에집트 임금과 협정을 맺었고, 그에 따르면 그들은 아라비아 사막을 향해서 나일 강 유역을 평화롭게 떠나도록 허락을 받았다. 에집트에서 오랫동안 수고한 것에 대한 표시로 그들은 많지 않은 돈과 물건을 받기로 되었다. 히브리인 편에서는 파라오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고 에집트에 맞서 어떤 연방에도 가입하지 않기로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그 임금은 나중에 이 조약을 깨는 것이 좋다고 보았고, 그의 간첩들이 베두인 노예들 사이에서 불충함을 발견했다는 핑계를 이유로 내밀었다. 그들이 에집트에 맞서서 유목민을 조직하려고 사막으로 갈 목적으로 자유를 찾는다고 그는 주장했다.
96:3.5 (1056.2) 그러나 모세는 낙심하지 않았다. 그는 때를 기다렸다. 1년이 채 안 되어 남쪽에서 리비아인이 강력하게 밀고 들어오고, 북쪽에서 그리스 해군이 침입하여 동시에 공격하는 데 저항하느라고 에집트의 군대가 넋이 빠져 있을 때, 이 겁 없는 조직자는 볼만한 야간 도주(逃走)에 동포를 이끌어 에집트에서 탈출하였다. 자유를 향한 이 돌진은 철저히 계획되고 능숙하게 집행되었다. 그들은 파라오와 작은 무리의 에집트인들이 열심히 쫓아 왔는데도 성공했다. 이들은 피난민의 방어에 부딪쳐 모두 쓰러졌고 많은 전리품을 남겨 주었으며, 이 모두가 사막에 있는 조상의 집을 향해서 행진하는 동안, 도망쳐 전진하는 노예 집단의 약탈로 불어났다.
96:4.1 (1056.3) 진화되고 향상된 모세의 가르침은 온 세계의 거의 절반에 영향을 미쳤고, 20세기에도 아직 영향을 미친다. 모세는 더 진보된 에집트의 종교 철학을 이해했고, 한편 베두인 노예들은 그러한 가르침에 관하여 거의 아는 것이 없었지만, 그 선조들이 야웨라고 부른 호렙 산의 신을 결코 완전히 잊은 적이 없다.
96:4.2 (1056.4)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마키벤타 멜기세덱의 가르침을 들은 적이 있었고, 그들의 공통된 종교관은 왕족의 피를 가진 여자와 포로가 된 민족의 남자 사이에 보기 드문 결합이 이루어진 것을 설명한다. 모세의 장인은 엘 엘리욘을 섬기는 켄 사람이었지만, 해방자의 부모는 엘 샤다이를 믿었다. 이처럼 모세는 엘 샤다이 신자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장인(丈人)의 영향을 통해서 그는 엘 엘리욘 신자가 되었다. 히브리인이 에집트에서 탈출한 뒤에 시나이 산 근처에서 야영할 때가 되자, (모든 그의 옛 관념으로부터) 그는 새롭고 확대된 신 개념을 형성했고, 이것을 지혜롭게 그의 민족에게, 확대된 옛 부족 신 야웨 개념으로 선포하기로 작정했다.
96:4.3 (1056.5) 모세는 이 베두인 족속에게 엘 엘리욘의 개념을 가르치려고 애썼지만, 에집트를 떠나기 전에 그들이 결코 이 교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부족이 섬기는 사막(沙漠)의 신을 추종자들의 유일한 신으로서 절충해서 채택하기로 그는 생각 끝에 결정했다. 모세는 다른 민족과 나라가 다른 신을 가지면 안 된다고 꼬집어 가르치지 않았지만, 야웨가 만물 위에 으뜸이라, 특히 히브리인에게 그렇다고 확고히 주장했다. 그러나 옛 이름 야웨의 탈 밑에서, 새롭고 더 높은 신 개념을 이 무지한 노예들에게 제시하려고 애쓰는 거북한 문제로 그는 늘 골치를 앓았으며, 언제나 베두인 부족들의 금 송아지가 이 야웨를 상징했다.
96:4.4 (1056.6) 야웨가 달아나는 히브리인의 신이었다는 사실은 어째서 그들이 거룩한 시나이 산 앞에서 그리 오래 머물렀는가, 어째서 거기서 그들이 십계(十戒)를 받았는가 설명하며, 이것을 모세는 호렙 산의 신 야웨의 이름으로 선포하였다. 시나이 산 앞에서 이렇게 오래 머무르는 동안, 새로이 진화하는 히브리인 예배의 종교 의식(儀式)이 더욱 다듬어졌다.
96:4.5 (1057.1) 그들이 산밑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머무르던 셋째 주에 호렙 산이 사납게 분출하지 않았더라면, 모세는 얼마큼 진보된 예배 예식을 확립하고, 4분의 1세기 동안 추종자들을 그대로 유지하는 데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듯하다. “야웨의 산은 불 속에 휩싸였고, 화로의 연기처럼 연기가 떠오르고 산 전체가 크게 떨었더라.”[5] [69] 이 천재지변을 보건대, 그들의 하나님은 “막강하고 무서우며, 삼키는 불이요, 두렵고 전능하니라”하는 가르침을 모세가 동포에게 명심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놀랍지 않다.
96:4.6 (1057.2) 야웨는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히브리인을 선민으로 골랐다고 모세는 선포했다. 그는 새 민족을 세우고 있었고, 지혜롭게도 종교적 가르침을 민족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야웨가 엄한 감독자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추종자들에게 일러 주었다. 그런데도, 야웨가 “모든 육체에게 영의 하나님”이라고 그들을 가르쳤을 때,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은 너희의 안식처요, 그 아래에 영원한 팔이 있도다”하고 말했을 때, 모세는 그들의 신 개념을 키우려고 애썼다. 야웨가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이라, 하나님이 “너희를 버리지 않고, 너희를 멸망시키거나 너희 선조와 한 약속을 잊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가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 아버지들에게 한 맹세를 잊지 아니할 것임이라”하고 모세는 가르쳤다.
96:4.7 (1057.3) 야웨가 “진실한 하나님이요 불의가 없고 모든 길에 정당하고 옳다”고 제시했을 때, 모세는 그를 최고 신의 위엄까지 올려놓으려고 영웅다운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도, 이 드높은 가르침이 있었는데도, 추종자들의 이해력이 제한된 것은 하나님을 사람 모습을 한 존재로서, 성내고 진노하고 가혹함으로 날뛰며, 아니 복수심에 불타 있고 사람의 행위에 쉽게 영향을 받는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게 만들었다.
96:4.8 (1057.4) 모세의 가르침 밑에서, 이 부족의 자연신 야웨는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 되었고, 그는 황야를 거쳐서 추방된 곳까지도 그들을 따라갔으며, 거기서 곧 주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라고 생각되었다. 후일에 유대인이 바빌론에서 종으로서 포로 생활을 한 것은, 만국의 하나님이 되는 일신교의 역할을 맡기 위하여, 진화하는 야웨 개념을 드디어 해방하였다.
96:4.9 (1057.5) 히브리인의 종교 역사에서 가장 독특하고 놀라운 모습은 호렙 산의 원시 신으로부터, 뒤이은 영적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거쳐서, 두 이사야의 신 교리에 묘사된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기까지, 신 개념이 이렇게 계속 진화한 것과 관계되며, 두 이사야는 사랑이 넘치고 자비로운 창조자 아버지를 묘사하는 훌륭한 개념을 선포했다.
96:5.1 (1057.6) 모세는 군대 지도자, 사회 조직자, 종교 스승이 특별히 통합된 사람이었다. 그는 마키벤타와 예수 사이의 시절에, 개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세계적 스승이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개혁 조치를 도입하려고 애썼는데, 이에 관하여 아무 기록이 없다. 한 사람의 일생 동안에, 그는 후일에 한 나라가 탄생하고 한 종족이 영속하기 위한 기초를 놓은 한편, 이른바 히브리인이라고 부르고 여러 나라 말을 쓰는 집단을 노예 신세와 개화되지 않고 방랑하던 처지로부터 이끌어냈다.
96:5.2 (1057.7) 탈출하던 당시에 히브리인이 아무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모세의 큰 업적에 관하여 기록이 거의 없다. 모세의 시절과 그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그 위대한 지도자가 죽은 지 천년도 더 지나서 존재하던 전통으로부터 내려왔다.
96:5.3 (1058.1) 모세가 에집트인과 둘러싼 레반트 부족의 종교들보다 앞서서 많이 진행한 것은 멜기세덱 시절의 켄 족속의 전통 때문이었다. 마키벤타가 아브라함, 그리고 같은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지 않았더라면, 히브리인은 희망 없는 어둠 속에서 에집트에서 나왔을 것이다. 모세와 그의 장인 예드로는 멜기세덱 시절에 있던 전통의 잔재를 거두어 들였고, 이 가르침은 에집트인의 학문과 합쳐서, 이스라엘인의 개량된 종교와 의식을 만들도록 모세를 인도하였다. 모세는 조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에집트와 팔레스타인의 종교와 도덕 관습에서 최선을 선택하였고, 이 풍습을 멜기세덱의 가르침에서 내려온 전통과 연결짓고서, 히브리인의 예배 의식 체계를 만들었다.
96:5.4 (1058.2) 모세는 섭리를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초자연의 힘이 나일 강과 자연의 다른 요소들을 통제한다는 에집트의 교리에 흠뻑 젖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하여 큰 환상을 가졌지만, 속속들이 진지한 마음으로 이렇게 가르쳤다. 히브리인이 하나님께 복종하면, “그는 너희를 사랑하고 복을 주고 수를 늘리리라. 그는 너희 자궁의 열매와 너희 땅의 소산(所産)―옥수수와 포도주, 기름과 너희 양 떼―를 늘이리라. 너희를 모든 민족보다 번성하게 만들고, 주 너희 하나님은 너희한테서 모든 병을 떠나게 하고, 에집트의 나쁜 병 중에 아무것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라.” 모세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주 너희 하나님을 기억하라, 이는 그가 재산을 얻을 힘을 너희에게 주심이라.” “너희는 뭇 나라에게 빌려 주어도, 너희는 빌리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많은 나라를 다스릴지나 저희는 너희 위에 다스리지 못할지니라.”
96:5.5 (1058.3) 그러나 이 위대한 인간 모세가 무지하고 무식한 히브리인이 알아듣도록 그의 드높은 엘 엘리욘, 최고자 개념을 적응하려고 애쓰는 것을 구경하기는 참으로 딱했다. 모여든 지도자들에게 그는 우뢰처럼 소리쳤다, “주 너희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요, 그 외에 아무도 없느니라.” 한편 혼합된 군중에게 선포했다, “모든 신 가운데 누가 너희의 하나님과 같으리오?” 모세는 용감하게 주물과 우상 숭배에 저항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고, 이렇게 선언했다, “호렙 산에서 불 한가운데서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날, 너희는 아무 모습을 구경하지 못하였도다.” 그는 또한 어떤 종류의 형상을 만드는 것도 금했다.
96:5.6 (1058.4) 모세는 야웨가 자비롭다고 선포하기를 두려워했고, “주 너희 하나님은 가장 높은 신이요, 가장 높은 주, 위대한 하나님, 막강하고 무서운 하나님이요, 사람을 중시하지 않으시니라”하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응보를 두려워하여 그의 민족이 경외감에 빠지게 만들기를 더 좋아했다. 또 “너희가 복종하지 않을 때 너희 하나님은 죽이시니라. 너희가 복종할 때 그는 너희를 고치고 생명을 주시니라”하고 선포하면서, 그는 난폭한 씨족들을 다루려고 애썼다. 그러나 모세는 이 부족들이 “그의 모든 계명을 지키고 모든 계율에 복종하는” 조건으로 그들이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그들에게 가르쳤다.
96:5.7 (1058.5) 이 옛 시절에 히브리인은 하나님의 자비로움에 대하여 거의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전능자요, 주는 전쟁하는 이, 전쟁의 하나님이요, 권능이 영화롭고, 그의 적들을 가루로 만드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배웠다. “주 너희 하나님은 너희를 구원하려고 장막 가운데서 걸으시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했지만, 또한 “파라오의 마음을 굳어지게 만들고,” “그들의 적을 저주하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96:5.8 (1058.6) 모세는 이스라엘의 아들딸에게 우주적이며 인자한 신을 얼핏 보여주었지만, 대체로, 그들의 일상적 야웨 개념은 둘러싼 민족들의 부족 신보다 거의 낫지 않은 하나님 개념이었다. 그들의 하나님 개념은 원시적이고 투박하고, 사람과 비슷하였다. 모세가 죽었을 때, 이 베두인 부족들은 옛날 호렙 산과 사막의 신들의 개념, 어느 정도 미개한 관념으로 재빨리 되돌아갔다. 모세가 지도자들에게 이따금 제시한 환상, 확대되고 더 숭고한 하나님의 환상은 곧 눈앞에서 사라졌고, 한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주물이었던 금송아지 숭배로 돌아섰는데, 이것은 팔레스타인 목자들에게 야웨의 상징이었다.
96:5.9 (1059.1) 모세가 히브리인의 지휘를 요수아에게 넘겼을 때, 모세는 아브라함ㆍ나홀ㆍ롯의 간접 자손, 그리고 관계된 다른 부족들 안에서 몇천 명을 이미 모았고, 그들을 채찍질하여 스스로 지탱하고 어느 정도 자치하며 목자 생활을 하는 투사들의 민족으로 만들었다.
96:6.1 (1059.2) 모세가 죽고 나서 그의 드높은 야웨 개념은 재빨리 질이 나빠졌다. 요수아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온통 지혜롭고 인자하고 전능한 하나님을 믿는 모세의 전통을 계속 간직했지만, 서민들은 사막에서 가졌던 더 오래 된 야웨 개념으로 재빨리 돌아갔다. 신 개념의 이러한 후퇴는 여러 부족의 족장, 이른바 판관들이 연달아 통치하는 동안에 더욱 계속되었다.
96:6.2 (1059.3) 모세라는 특별한 인물의 마력은 더욱 확대된 하나님 개념의 영감을그 추종자들의 마음 속에서 살려 두었다. 그러나 일단 팔레스타인의 기름진 땅에 다다르자, 그들은 양을 치던 유목민 처지에서, 정착하여 얼마큼 주저앉은 농부로 재빨리 바뀌었다. 이러한 생활 풍습의 진화와 종교 관점의 변화는 그들이 하나님, 야웨의 성품에 대하여 가진 개념의 특징에 얼마큼 철저한 변화를 요구했다. 시나이에 있던 엄격하고 투박하고 가혹하고 천둥처럼 소리치는 사막의 신(神)이 나중에 나타나는 개념, 사랑과 응보와 자비의 하나님 개념으로 성질이 변하기 시작하는 시절에, 히브리인은 모세의 드높은 가르침을 거의 잃어버렸다. 일신교의 모든 개념을 거의 잃어버리다시피 하였다. 그들은 유란시아의 영적 진화에서 불가결한 고리로서 수고할 민족, 멜기세덱이 가르친 유일한 하나님을 바로 그 만물의 아버지의 수여 아들이 육신화하기까지 보존할 집단이 되는 기회를 거의 잃어버릴 뻔하였다.
96:6.3 (1059.4) 절망에 빠져서 요수아는 부족 사람들의 머리 속에 최고의 야웨 개념을 유지하려고 애썼고, 야웨가 “내가 모세와 함께 한 것 같이, 나는 너희와 함께 하리라. 나는 너희를 놓치거나 버리지 아니하리라”하고 선언하게 만들었다. 요수아는 믿지 않는 민족에게 엄격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필요함을 깨달았고, 이 민족은 그들의 옛 토착 종교를 아주 기꺼이 믿으면서, 신앙과 의로움을 부르짖는 종교에서 전진하려 하지 않았다. 요수아의 가르침의 요점은 이렇게 되었다: “야웨는 거룩한 하나님이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그는 너희가 규칙 어긴 것이나 너희의 죄를 잊지 아니하리라.” 이 시대에 가장 높은 개념은 야웨를 “권능과 심판과 응보의 하나님”으로 묘사하였다.
96:6.4 (1059.5) 그러나 이 어두운 시대에도, 이따금 한 선생이 외로이 일어나서 모세의 신 개념을 선포하곤 하였다: “너희 사악한 아이들은 주를 섬길 수 없나니, 그가 거룩한 하나님인 까닭이라.” “필사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 공정하겠느냐? 사람이 창조주보다 더 깨끗하겠느냐?” “너희가 찾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찾아내겠느냐? 너희가 완전에 이르기까지 전능자를 찾아낼 수 있느냐? 보라, 하나님이 크셔도 우리가 그를 알지 못하느니라. 전능자를 만지면서 우리는 그를 발견할 수 없느니라.”
96:7.1 (1060.1) 족장과 사제들의 지도 하에서 히브리인은 팔레스타인에서 허술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들은 곧, 사막에서 가졌던 뒤떨어진 신앙으로 도로 돌아갔고, 덜 진보된 가나안의 종교 풍습에 오염되었다. 그들은 우상 숭배에 빠지고 방종하게 되었고, 그들의 신 개념은 어떤 살아남은 살렘 집단이 유지했던, 에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하나님 개념보다 훨씬 밑으로 떨어졌으며, 이것은 시편의 어느 부분과 이른바 욥기에 기록되어 있다.
96:7.2 (1060.2) 시편은 20명 이상의 저자들이 쓴 작품이다. 많은 것을 에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선생들이 썼다. 레반트가 자연신들을 숭배하던 이 시절에, 엘 엘리욘, 최고자가 제일 높은 것을 믿은 사람들이 아직도 상당히 있었다.
96:7.3 (1060.3) 어떤 종교적 기록의 수집도 시편처럼, 하나님을 예배하고 감동을 주는 하나님 개념을 그렇게 풍부히 표현하지 못했다. 이 놀라운 예배 문헌의 수집을 훑어보면서, 어떤 다른 단일 문집도 그렇게 긴 세월에 걸쳐 쓰이지 않았음을 기억하면서, 찬송하고 찬양하는 독립된 각 노래의 근원과 연대(年代)를 고려할 수 있다면 무척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시편은 레반트에 두루, 살렘 종교를 믿던 사람들이 품었던 다른 하나님 개념을 기록한 것이며, 아메니모피와 이사야 사이의 기간 전체를 포함한다. 시편에는 투박한 부족 신 관념으로부터 나중에 히브리서에 엄청나게 확대된 이상에 이르기까지 온갖 단계의 하나님 개념이 묘사되었으며, 히브리서에는 야웨가 사랑이 그윽한 통치자요 자비로운 아버지로 묘사된다.
96:7.4 (1060.4) 이렇게 볼 때, 이러한 찬송가의 집합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일찍이 모은, 가장 귀중하고 유익한 예배 감정을 수집한 것이다. 이 찬송가집에 담긴 예배 정신은 세상의 모든 다른 신성한 책에 있는 정신을 뛰어넘는다.
96:7.5 (1060.5) 욥기에 제시된 얼룩덜룩한 신의 그림은 거의 3백 년에 걸쳐서, 20명이 넘는 메소포타미아의 종교 스승들이 지은 것이다. 이 메소포타미아 신앙의 수집에서 발견되는 드높은 신 개념을 읽을 때, 너희는 팔레스타인의 어두운 시절, 갈대아 지방의 우르 근처에서 참 하나님의 개념이 최선으로 간직되었음을 깨달을 것이다.
96:7.6 (1060.6) 팔레스타인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혜와 만물에 침투하는 성질을 흔히 파악했지만, 그의 사랑과 자비를 파악한 적은 드물다. 이 시절의 야웨는 “그의 적들의 혼을 지배하려고 악령들을 보내며,” 자기의 복종하는 아이들을 번성케 하고 한편 모든 다른 사람을 저주하고 그들에게 끔찍한 심판을 내린다. “그는 교활한 자의 계교를 망치며, 지혜로운 자를 제가 만든 속임수에 빠뜨려 잡는다.”
96:7.7 (1060.7) 오직 우르에서 한 목소리가 일어나서 하나님의 자비를 외치며 말했다.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에게 은총을 얻고 기쁨으로 그의 얼굴을 뵐지니,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신다운 올바름을 주실 것임이라.” 이렇게 우르에서 믿음으로 구원, 신의 은총을 얻는다는 것이 설파되었다: “그는 뉘우치는 자에게 인자하시며, ‘구렁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그를 구원하라, 내가 몸값을 찾아낸 까닭이라’하고 말씀하시니라. 누구라도 ‘나는 죄를 지었고 옳은 것을 곡해하였으며, 그것이 내게 이롭지 않았도다’하고 말하면, 하나님은 그를 구렁에서 구원하실 것이요, 그는 빛을 볼지니라.” 멜기세덱의 시절 이후로, 레반트 세계는 엘리후의 이 놀라운 가르침처럼, 그렇게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격려하는 소식, 인간이 구원받는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으니, 엘리후는 우르의 선지자였고, 살렘 신자들, 다시 말해서 한때 메소포타미아에서 멜기세덱 거류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사제였다.
96:7.8 (1061.1) 이처럼 메소포타미아에서 살렘 선교사들의 잔재는, 길게 이어진 이스라엘 선생들의 선구자가 나타날 때까지, 히브리 민족의 분열기에 진리의 빛을 유지했다. 이 선생들은 만물에게 우주의 창조자 아버지의 이상, 곧 야웨 개념의 진화가 절정에 이를 때까지, 개념을 하나씩 쌓으면서 결코 멈추지 않았다.
97:0.1 (1062.1) 히브리인의 영적 지도자들은 그들 이전에 다른 아무도 성공한 적이 없는 일―오직 철학자만 이해할 수 있는 추상적 신 관념으로 바꾸지 않고서, 그들의 하나님 개념에서 사람 모습 벗기는 일―을 해냈다. 서민들조차 성숙한 야웨 개념을 개인의 아버지는 아니라도, 적어도 종족의 아버지로 여길 수 있었다.
97:0.2 (1062.2) 멜기세덱 시절에 사람들은 살렘에서 하나님의 성격 개념을 뚜렷하게 가르침 받았지만, 그 개념은 에집트에서 탈주하던 시절에 흐릿하고 안개 같았고, 영적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반응하여 대대로 히브리인의 머리 속에서 겨우 차츰차츰 발달하였다. 야웨의 성격 개념은 신의 여러 다른 속성보다 훨씬 더 연속된 점진적 발달이었다. 모세로부터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히브리인의 머리 속에서 하나님의 성격에 관한 개념은 거의 끊임없이 성장하였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이 궁극에 이 개념을 높고 영화롭게 만들었다.
97:1.1 (1062.3) 팔레스타인에서 둘러싼 민족들의 적대하는 압력은, 곧 히브리인 족장들에게 부족 조직을 중앙 집권적 정부로 연합하지 않으면 살아남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쳤다. 행정 권한이 이렇게 집중된 것은 사무엘이 선생이자 개혁자로서 활동하는 훨씬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97:1.2 (1062.4) 사무엘은 멜기세덱의 진리를 예배 형태의 일부로 지속시켰던 살렘 선생들의 긴 혈통에서 솟아나왔다. 이 선생은 씩씩하고 결의가 굳은 사람이었다. 모세 시절에 믿었던 최고의 야웨를 예배하도록 그가 온 이스라엘을 돌이키기 시작했을 때 그는 거의 보편적 반대에 부딪쳤고, 특별한 각오와 함께, 오직 크게 헌신하는 마음이 그로 하여금 이 반대를 견딜 수 있게 했다. 그때에도 그는 겨우 얼마큼 성공했다. 히브리인 중에서 절반인 지식층만 상급 야웨 개념을 섬기도록 설득했으며, 나머지 반은 그 나라의 부족 신들을 숭배하고 열등한 야웨 개념을 계속 간직하고 있었다.
97:1.3 (1062.5) 사무엘은 일을 후딱 해치우는 부류의 사람이었고, 하루에 동료들과 함께 나가서 바알 장소를 스물이나 뒤엎을 수 있는 실용적 개혁자였다. 그는 순전한 강요의 힘으로 진전을 보았다. 말로 설교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가르치는 적은 더욱 적었지만, 그는 행동으로 옮겼다. 하루는 바알 사제를 조롱하고 있었고, 다음 날은 사로잡힌 임금을 찍어 죽였다. 그는 열심히 유일한 하나님을 믿었고, 그 유일한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라는 뚜렷한 개념을 가졌다: “지구의 여러 기둥은 주의 것이요, 그 위에 주가 세상을 두셨도다.”[1] [70]
97:1.4 (1063.1) 그러나 사무엘이 신 개념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은 야웨가 변함이 없다, 어김없이 완전하고 신성함을 언제까지나 똑같이 구현한다는 우렁찬 선언이었다. 이 시절에 야웨는 그가 이러저러하게 행한 것을 언제나 뉘우치고, 질투로 마음이 변하는, 변덕스러운 하나님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제, 히브리인이 에집트를 뛰쳐나온 뒤에 처음으로, 그들은 이런 깜짝 놀랄 말씀을 들었다, “이스라엘의 힘은 거짓말하거나 뉘우치지 아니하리니, 그가 사람처럼 뉘우치지 않음이라.” 신과 가지는 거래는 변치 않는다고 외쳤다. 사무엘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되풀이했고,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 모든 진리ㆍ안정ㆍ불변의 근원이라고 선언했다. 히브리인은 언제나 그들의 하나님을 사람으로, 초인간으로, 기원을 알 수 없는 높은 영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듣건대, 옛날에 호렙 산의 신은 창조자의 완전함을 갖춘, 변치않는 하나님으로 높이 올려졌다. 사무엘은 진화하는 하나님 개념이 변덕스러운 사람의 생각과 필사 존재의 부침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도록 돕고 있었다. 그의 가르침을 받고서 히브리인의 하나님은 부족신 서열의 관념에서 전능하고 변함없는 창조자요 모든 창조의 감독자라는 이상의 높이까지 비로소 올라가고 있었다.
97:1.5 (1063.2) 그는 하나님이 성실하며, 계약을 지킬 만큼 믿을 만하다는 이야기를 새롭게 전파했다. 사무엘은 말했다: “주는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그는 우리와 영구한 약속을 하셨고, 이 약속은 모든 면에 체계 있고 확실하니라.” 그래서 온 팔레스타인에 두루, 최고의 야웨를 섬기러 돌아오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활기에 넘친 이 선생은 늘 외쳤다. “아 주 하나님, 주는 위대하시니, 주와 같은 이가 하나도 없고, 주 외에 어떤 다른 하나님도 없음이니이다.”
97:1.6 (1063.3) 그때까지 히브리인은 야웨의 은총을 주로 물질적 번영 면에서 보았다. 이렇게 감히 선포했을 때, 이는 이스라엘에게 큰 충격이었고, 사무엘은 목숨을 거의 잃을 뻔하였다: “주는 사람을 부하게도 만들고 가난하게도 만드시며, 낮추기도 하고 높이기도 하시니라. 그는 티끌 속에서 가난한 자를 높이시고, 거지들을 들어올리사 영광의 보좌를 물려받게 하려고 군주들 사이에 저희를 세우시느니라.” 모세 이후로, 겸손한 자와 복을 적게 받은 자에게 그렇게 마음을 위로하는 약속이 선포된 적이 없었고, 가난한 자들 속에서 절망하던 수많은 사람이 영적 지위를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을 비로소 가지게 되었다.
97:1.7 (1063.4) 그러나 사무엘은 부족 신 개념을 넘어서 그다지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 야웨가 모든 사람을 만들었지만, 주로 히브리인, 그가 택한 민족의 일에 분주하다고 선포하였다. 그렇기는 해도, 모세의 시절처럼, 다시 한 번 하나님 개념은 거룩하고 올바른 신을 묘사했다. “주처럼 거룩한 자가 하나도 없느니라. 누가 이 거룩한 주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느냐?”
97:1.8 (1063.5) 세월이 지나가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나이 든 지도자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진보했으니, 이렇게 외쳤기 때문이다: “주는 지식의 하나님이요, 행동을 저울로 재느니라. 주는 땅 끝까지 심판할 것이요, 자비로운 자에게 자비를 보이며, 또한 곧은 사람을 바르게 대하리라.” 자비로운 자에게 국한되지만, 여기서도 자비의 빛이 밝아온다. 나중에 그들이 곤경에 빠져서, 그의 민족에게 이렇게 타일렀을 때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제 주의 손아귀에 빠지자, 그의 자비가 크심이라.” “사람을 많이 구하든 적게 구하든, 주에게 아무 제한이 없느니라.”
97:1.9 (1063.6) 야웨 성품 개념의 이러한 점진적 발전은 사무엘의 후계자들이 일했을 때에도 계속되었다. 야웨가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이라 제시하려고 애썼지만, 그들은 사무엘의 걸음과 도저히 발을 맞추지 못했다. 그들은 사무엘이 나중에 파악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자비롭다는 개념을 개발하지 못했다. 야웨가 누구보다도 높다고 주장하면서도, 다른 신들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꾸준히,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었다. “아 주여, 나라는 주의 것이니이다. 주는 만물 위에 우두머리로서 높이 계시나이다.”
97:1.10 (1064.1) 이 시대의 기본 생각은 신의 권능이었다. 이 시대의 선지자들은 히브리인의 왕좌에 앉을 임금을 기르도록 고안된 종교를 설파했다. “아 주여, 위대함ㆍ권능ㆍ영광ㆍ승리ㆍ웅대함이 주께 속하나이다. 주의 손 안에 권능과 힘이 있고, 주는 만인을 위대하게 만들고 힘을 줄 수 있나이다.” 이것이 사무엘과 그 직계 후계자들이 살던 시절에 하나님 개념의 형편이었다.
97:2.1 (1064.2) 그리스도 이전 10세기에 히브리 민족은 두 왕국으로 갈라졌다. 이 두 정치 구역에서 진리를 가르치는 많은 선생이 깊어진 영적 퇴폐의 물결, 반작용의 물결을 막으려고 애썼고, 이 물결은 분단하는 전쟁 이후에 비참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결의가 굳고 무서운 줄 모르는 정의의 투사(鬪士) 엘리야가 가르침을 시작하기까지, 히브리인의 종교를 진전시키려는 이런 노력은 성공하지 않았다. 엘리야는 사무엘의 시절에 지녔던 것과 비할 만한 하나님 개념을 북쪽 왕국에서 회복했다. 엘리야는 진보된 하나님 개념을 제시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보다 먼저 있던 사무엘처럼 그는 분주해졌고, 바알의 여러 제단을 뒤엎고 거짓 신들의 우상을 깨 버렸다. 우상을 숭배하는 군주(君主)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혁을 실행했다. 그의 과제는 사무엘이 부닥쳤던 것보다 더욱 거창하고 어려웠다.
97:2.2 (1064.3) 엘리야가 부름받아 떠났을 때, 충실한 동료 엘리사는 그의 일을 떠맡았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가야의 귀중한 도움을 받아서, 팔레스타인에서 진리의 빛을 살려 두었다.
97:2.3 (1064.4) 그러나 이때는 신의 개념이 전진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아직까지 히브리인은 모세의 이상의 높이까지도 도달하지 못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는 상류 계층이 최고의 야웨 숭배로 돌아옴과 함께 막을 내렸고, 사무엘이 두어 둔 자리쯤까지, 우주의 창조자 관념이 회복된 것을 구경하였다.
97:3.1 (1064.5) 야웨 신자와 바알 추종자 사이에 오래 끈 논쟁은 종교 관념의 차이가 아니라 차라리 사회ㆍ경제 이념의 충돌이었다.
97:3.2 (1064.6) 팔레스타인 거주자들은 토지의 사유 재산권에 대하여 태도가 달랐다. 남쪽 부족, 곧 방랑하는 아라비아 부족들(야웨파)은 토지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권리―신이 씨족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땅을 팔거나 저당 잡힐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야웨가 ‘땅은 내 것이니 팔지 못할지니라’ 말씀하셨도다.”
97:3.3 (1064.7) 북쪽에 정착한 가나안 족속(바알파)은 자유롭게 땅을 사고팔고 저당 잡혔다. 바알이라는 말은 소유자를 뜻한다. 바알 종파는 두 가지 주요 교리에 기초를 두었다. 첫째는 재산의 교환ㆍ계약ㆍ약속―땅을 사고 파는 권리―를 정당화한 것이다. 둘째로, 바알은 비를 보낸다고 생각되었다―그는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신이었다. 좋은 수확을 거두는 것은 바알의 은혜에 달려 있었다. 그 종파는 대체로 땅ㆍ소유권ㆍ비옥함에 관심을 가졌다.
97:3.4 (1065.1) 일반적으로 바알파는 집ㆍ땅ㆍ노예를 소유했다. 그들은 귀족인 지주(地主)였고 도시에서 살았다. 각 바알은 신성한 장소와 사제, 그리고 “거룩한 여자,” 곧 의식에 쓰이는 창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97:3.5 (1065.2) 땅을 보는 관점의 이러한 기본적 차이로부터 가나안인과 히브리인의 사회ㆍ경제ㆍ도덕ㆍ종교적 태도에 맹렬한 적대감이 생겼다. 이 사회ㆍ경제적 논쟁은 엘리야의 시절까지 분명한 종교적 쟁점이 되지 않았다. 이 공격적 선지자의 시절부터, 더 엄밀하게 종교적 노선에서―야웨 대 바알―논쟁이 있었고, 이것은 야웨의 승리와 그 뒤에 일신교를 향한 운동으로 끝났다.
97:3.6 (1065.3) 엘리야는 야웨와 바알의 논쟁을 토지 문제로부터 히브리인의 이념과 가나안인의 이념의 종교적 측면으로 옮겼다. 아합이 나봇 일가의 땅을 소유하려는 음모를 꾸며 그들을 죽였을 때, 엘리야는 옛 토지 관습으로부터 도덕적 쟁점을 만들었고, 바알파에 맞서서 힘찬 투쟁을 벌였다. 이것은 또한 도시의 지배에 맞서서 시골 사람들이 벌인 싸움이었다. 주로 엘리야 밑에서 야웨는 엘로힘이 되었다. 그 선지자는 토지 개혁자로서 시작했고, 신을 높임으로 끝을 맺었다. 바알 신은 여럿이었고, 야웨는 하나였다―일신교가 다신교를 물리쳤다.
97:4.1 (1065.4) 부족 신―희생물과 예식으로 아주 오랫동안 섬김을 받던 신, 초기 히브리인의 야웨―가 자신의 민족 안에서도 범죄와 부도덕을 징계하려 하는 하나님이 되는 과도기에 아모스가 큰 걸음을 내디디었다. 그는 북쪽 부족들의 범죄ㆍ만취ㆍ억압ㆍ부도덕을 비난하려고 남부의 산지에서 나타났다. 모세의 시절 이후로, 그렇게 울려 퍼지는 진리가 팔레스타인에서 선포된 적이 없었다.
97:4.2 (1065.5) 아모스는 단지 회복자나 개혁자가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신 개념을 발견한 자였다. 그는 이전 사람들이 발표한 하나님에 관하여 많이 선포하였고, 이른바 선민 사이에서 죄를 묵인할 신성한 존재를 믿는 신앙을 용감히 공격했다. 멜기세덱 시절 이후에 처음으로, 민족의 정의와 도덕에 2중 잣대 사용을 비난하는 소리가 사람의 귀에 들렸다. 그들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바로 그들의 하나님 야웨가 그들의 생활에서 생기는 범죄와 죄를 어떤 다른 민족의 경우보다 더 참고 넘어가지 않는다는 소리를 히브리인의 귀가 들었다. 아모스는 사무엘과 엘리야의 엄하고 공정한 하나님을 상상했지만, 또한 잘못한 것을 벌줄 때 히브리인과 어느 다른 민족을 조금도 달리 생각하지 않는 하나님을 보았다. 이것은 자기 중심의 “선민” 교리에 대하여 정면 공격이었고, 그 시절에 많은 히브리인이 가슴에 사무치게 이를 분개하였다.
97:4.3 (1065.6) 아모스는 말했다: “산을 빚고 바람을 지으신 이, 일곱 별과 오리온을 형성한 이를 찾을지니, 그는 죽음의 그림자를 아침으로 바꾸고 낮을 밤처럼 어둡게 만드시느니라.” 건성으로 종교를 믿고 기회주의이고 때때로 부도덕한 동료들을 비난하면서, 변치 않는 야웨의 어김 없는 응보를 묘사하려고 애쓰면서 그는 행악자들에게 말했다, “비록 저희가 지옥으로 파고 들어가도 거기서 저희를 잡아내리라, 비록 저희가 하늘로 기어오르더라도, 거기서 저희를 끌어내리리라.” “그리고 적들 앞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도, 거기서 나는 응보의 칼을 지시하겠고 그 칼이 저희를 죽일지니라.” 꾸짖고 비난하는 손가락으로 그들을 가리키면서 “분명컨대, 너희가 한 일을 하나도 결코 잊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밀을 체질하는 것 같이, 나는 이스라엘의 집을 모든 나라 사이에 체질하리라”하고 야웨의 이름으로 선언했을 때, 아모스는 청중을 더욱 놀라게 했다.
97:4.4 (1066.1) 아모스는 야웨가 “만국의 하나님”이라고 선포하고, 의식(儀式)으로 올바름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돌로 쳐죽임을 당하기 전에, 이 용감한 선생은 최고의 야웨 교리를 살리기에 넉넉히 진리의 누룩을 퍼뜨렸다. 그는 멜기세덱의 계시가 더욱 진전되는 것을 보장했다.
97:4.5 (1066.2) 호세아는 모세가 가르친 사랑의 하나님 개념을 부활시킴으로, 아모스, 그리고 우주의 하나님이 응보한다는 아모스의 교리를 따랐다. 호세아는 희생물이 아니라 뉘우침을 통해서 용서받기를 외쳤다. 그는 신이 인자하고 자비롭다는 복음을 선포하며 말했다, “내가 너와 언제까지나 약혼하리라. 옳도다, 올바름과 심판 속에서, 인자하고 자비롭게 너희와 약혼하리라. 나는 충실하게 너희와 약혼까지 하리라,” “나는 저희를 아낌없이 사랑하리니, 내 성이 풀렸음이라.”
97:4.6 (1066.3) 호세아는 충실하게 아모스의 도덕적 경고를 계속했고,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저희를 꾸짖는 것이 내가 바라는 바라.” 그러나 “내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 ‘너희는 내 백성이라’ 이르리라, 그리고 저희는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나이다’하고 말하리라,” 이렇게 말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를 반역죄에 가깝게 잔인한 것으로 여겼다. 그는 계속 회개와 용서를 설교하며 말했다, “나는 저희의 타락을 고치리라, 저희를 아낌없이 사랑하리라, 내 성이 풀렸음이라.” 호세아는 늘 희망과 용서를 선포했다. 그의 말씀의 요점은 늘 이것이었다. “내 백성에게 내가 자비를 베풀리라. 저희는 나 외에 아무 하나님을 알지 못할지니, 나 외에 아무 구원자가 없음이라.”
97:4.7 (1066.4) 아모스는 그들이 선택된 백성이라 생각된다고 해서 야웨가 그들 중에서 범죄와 죄를 묵인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도록 히브리인의 민족 양심을 깨우쳤다. 한편 호세아는 신이 동정심이 가득하고 자애롭다는 자비로운 화음(和音)의 첫 음정을 시작했고, 후일에 이사야와 그 동료들은 이 화음을 아주 아름답게 노래했다.
97:5.1 (1066.5) 이때는 북부 씨족들 사이에서 더러가 개인의 죄와 민족의 범죄를 징계한다는 위협을 선언하고, 한편 더러가 남쪽 왕국이 죄지은 것에 대하여 징벌로 재난이 있으리라 예언하던 시절이었다. 히브리 국가들에서 양심과 의식(意識)이 일깨워진 것을 뒤이어 첫 이사야가 등장했다.
97:5.2 (1066.6) 이사야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성품, 곧 무한한 지혜, 변함없이 완전히 믿음직한 성질을 설파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고 묘사했다: “나는 또한 줄자 대로 심판하고 다림추 대로 공의를 펴리라.” “너희의 슬픔과 두려움에서, 너희가 수고하는 고된 속박의 처지에서 벗어나도록 주가 너희에게 휴식을 주리라.” “그리고 너희의 귀는 ‘이것이 길이라, 그 길로 가라’ 하는 말씀을 너희 뒤에서 들을지니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라, 나는 믿고 두려워 아니하리니, 주가 나의 힘이요 내 노래인 까닭이라.” “‘이제 와서 함께 의논하자’ ‘너희의 죄가 진홍 같아도, 눈과 같이 희게 될지라. 심홍처럼 붉어도 양털 같이 될지니라’ 주가 말씀하시니라.”
97:5.3 (1066.7) 두려움에 질리고 혼이 갈급한 히브리인에게 이 선지자는 말했다. “일어나서 빛날지어다. 너희의 빛이 다가왔고, 주의 영광이 너희를 비춤이라.” “주의 영이 내 가까이 오시니, 좋은 소식을 유순한 자에게 전파하라고 그가 내게 기름을 부으셨음이라.” “마음이 상한 자를 동여매고, 포로에게 자유를, 묶인 자에게 감옥 문이 열렸음을 선포하라고 나를 보내셨음이라.” “나는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하리니, 내 혼이 내 하나님 안에서 즐거울지라,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나를 입히고, 올바름의 옷으로 나를 덮으셨음이라.” “저희가 받는 모든 고통 속에 그가 고통을 받았고, 그의 앞에 있던 천사가 저희를 구하였도다.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가 저희를 되찾았도다.”
97:5.4 (1067.1) 이 이사야 뒤를 미가와 오바디아가 따랐고, 이들은 혼을 적셔 주는 그의 복음을 확인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그리고 용감한 이 두 사자는 사제에게 지배된 히브리인 의식(儀式)을 대담하게 비난하고, 두려움 없이 희생 제도 전체를 공격했다.
97:5.5 (1067.2) 미가는 “보상을 받고 재판하는 통치자, 보수를 받고 가르치는 사제, 돈을 받고 점치는 예언자들”을 꾸짖었다. 그는 미신과 제사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날을 가지라고 가르치며 말했다: “그러나 각 사람이 자기의 넝쿨 아래에 앉을지며, 아무도 그에게 겁을 주지 말지니, 이는 각자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대로 모든 사람이 살 것임이라.”
97:5.6 (1067.3) 미가가 전한 말씀의 요점은 늘 이것이었다: “태운 헌물을 가지고 내가 하나님 앞에 오리이까? 주가 숫양 1천 마리나 1만 강(江)에 가득 찬 기름으로 기뻐하시리이까?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내 첫 아이를, 내 혼이 지은 죄 때문에 내 몸의 열매를 드리리이까? 아, 사람아, 그는 나에게 무엇이 좋은지 보여주셨도다, 공정하게 행하고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너희 하나님과 더불어 걷는 것 말고 주가 너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느냐?” 이때는 위대한 시대였다. 정말로 풍운의 시절이었으니, 이때 2천 5백 년도 더 전에, 필사 인간은 사람을 그렇게 해방하는 소식을 들었고 더러는 이를 믿기도 하였다. 사제들의 끈질긴 저항이 없었다면, 이 선생들은 히브리인의 예배 의식에서 피비린내 나는 예식을 통채로 폐지했을 것이다.
97:6.1 (1067.4) 몇몇 선생이 이사야의 복음을 줄곧 해설했지만, 히브리인의 하나님 야웨를 국제적 신으로 만드는 일에 예레미야가 다음으로 과감한 걸음을 내디디었다.
97:6.2 (1067.5) 예레미야는 히브리인이 다른 나라와 전쟁할 때 야웨가 그들 편을 들지 않는다고 두려움 없이 선언했다. 그는 야웨가 온 땅,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다. 예레미야의 가르침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국제화하는, 올라가는 물결이 최고조에 달한 것이었다. 마침내, 언제까지나, 이 대담한 설교자는 야웨가 만국의 하나님이라, 에집트인에게 오시리스, 바빌로니아인에게 벨, 아씨리아인에게 아슈르, 또는 필리스티아인에게 다곤이 도무지 없다고 선포했다. 이렇게 히브리인의 종교는 이 무렵에, 그리고 그 이후로 세계에 두루, 일신교의 부흥을 함께 하게 되었다. 마침내 야웨 개념은 행성의 신 수준으로, 우주의 위엄을 가진 높이까지도 올라갔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동료 중에 많은 사람은 히브리 민족과 따로 있는 야웨를 생각하기가 어려움을 깨달았다.
97:6.3 (1067.6) 예레미야는 또한 이렇게 선언하면서, 이사야가 묘사한, 공정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을 전파했다: “옳도다, 나는 영원한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그러므로 인자함으로 내가 너희를 당기었노라.” “이는 그가 사람의 아들딸에게 고통 주기를 기뻐하지 않으심이라.”
97:6.4 (1067.7) 두려움 없는 이 예언자는 말했다: “우리의 주는 올바르고, 너그럽게 충고하며, 힘차게 일하시느니라. 사람마다 가는 길에 따라서, 사람이 한 일의 열매에 따라서 주려고, 사람의 모든 자손이 가는 길을 다 눈 뜨고 보시니라.” 그러나 예루살렘이 포위된 동안, “그리고 이제 내가 이 땅을 바빌론의 임금 느부갓네살, 내 종의 손에 주었노라”하고 말했을 때 그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반역죄로 생각되었다. 예레미야가 그 도시의 항복을 조언했을 때, 사제와 국가 통치자들은 그를 컴컴한 지하 감방의 더러운 구덩이 속으로 처박았다.
97:7.1 (1068.1) 히브리인의 국가가 멸망하고 메소포타미아에서 포로 생활을 한 것은 그 사제들의 굳게 결의한 행동이 아니었더라면, 그들의 확대되는 신학에 크게 유익함이 입증되었을 것이다. 나라는 바빌론의 군대 앞에서 패했고, 그들 민족을 두둔하던 야웨는 영적 지도자들의 국제적 설교로 고난을 받았다. 그들의 민족 신을 잃어버린 것을 분개했기 때문에, 새롭고 확대된 개념의 하나님이어도, 유대인을 국제화된 만국의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으로 회복시키려는 노력으로, 유대인 사제들은 히브리인의 역사에서 여러 우화(寓話)를 만들어내고 기적으로 보이는 사건들을 불렸다.
97:7.2 (1068.2) 포로 생활 기간에 유대인은 바빌로니아의 전통과 전설에 많이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조상ㆍ역사에 명예와 영광을 돌리려고 이러한 전설을 항상 왜곡했는데도, 그들은 채택한 갈대아인 이야기의 도덕적 바탕과 영적 의미를 어김없이 개선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97:7.3 (1068.3) 이 히브리인 사제와 서기관들은 머리 속에 단 하나의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이는 유대 나라를 복구하고, 히브리인의 전통을 영화롭게 하고, 종족의 역사를 높이는 것이었다. 이 사제들이 그들의 그릇된 생각을 서양 세계의 큰 부분에 부착시켰다는 사실에 분개심이 일어난다면, 그들이 일부러 이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영감을 받아서 썼다고 우기지 않았고 신성한 책을 쓴다고 공언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다만 포로 생활을 하던 동포의 오그라드는 용기를 북돋아 주려고 고안된 교과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민족 정신과 겨레의 사기(士氣) 높이는 것을 겨냥하고 있었다. 후일의 사람들이 이것과 기타 기록들을 모아서,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된 가르침을 적은 안내서로 만들게 되었다.
97:7.4 (1068.4) 유대인 사제들은 포로 생활이 끝난 뒤에 이 기록들을 아낌없이 이용해 먹었지만, 그들은 기를 꺾을 수 없는 젊은 선지자, 둘째 이사야가 있었기 때문에 동료 포로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데 크게 방해를 받았다. 둘째 이사야는 첫 이사야가 외친, 응보ㆍ사랑ㆍ올바름ㆍ자비의 하나님을 완전히 믿는 신자가 되었다. 그는 또한 예레미야와 함께, 야웨가 만국의 하나님이 되었음을 믿었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이 이론들을 아주 효과 있게 설파했고, 그가 유대인과 정복자들을 똑같이 개종시켰다는 것이 이를 나타낸다. 이 젊은 전도자는 그의 가르침을 기록에 남겨 놓았고, 적대하고 용서 없는 사제들은 그 가르침이 그와 전혀 상관없게 만들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과 웅대함을 순전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 기록을 예전의 이사야가 쓴 기록 사이에 집어넣게 되었다. 이처럼 이 둘째 이사야의 기록은 그 이름을 지닌 책에서 발견될 수도 있고, 40장에서 55장 끝까지 포함한다.
97:7.5 (1068.5) 마키벤타로부터 예수의 시절까지, 어떤 선지자나 종교 스승도 이 포로 생활 시절에 둘째 이사야가 선포했던 높은 하나님 개념에 이르지 못했다. 이 영적 지도자가 선포한 것은 작고, 사람 모습을 하고 사람이 만든 하나님은 전혀 아니었다. “보라, 그는 섬들을 티끌처럼 들어올리시느니라.” “그리고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 같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고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97:7.6 (1069.1) 마침내 마키벤타 멜기세덱은 진짜 하나님을 필사 인간에게 선포하는 인간 선생들을 바라보았다. 첫 이사야처럼, 이 지도자는 우주를 창조하고 떠받드는 하나님을 전파하였다. “나는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두었노라. 나는 땅을 헛되이 만들지 아니하였고, 사람이 살라고 땅을 빚었노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나 외에 아무 하나님이 없느니라.”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새 선지자는 말했다. “하늘이 사라지고 땅이 고갈될지라도 나의 올바름은 언제까지나 버티고, 나의 구원은 대대로 버틸지니라.” “너희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음이라, 절망하지 말지니, 내가 너희의 하나님인 까닭이라.” “나 외에 아무 하나님이―공정한 하나님과 구원자가―없느니라.”
97:7.7 (1069.2) 이와 같은 말씀을 듣는 것은 포로가 된 유대인에게 위로가 되었고, 마찬가지로 그 뒤로 늘 허다한 사람들을 위로했다: “주가 이렇게 말씀하시니라, ‘나는 너를 만들었고, 너를 되찾고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노라, 너는 내 것이라.’” “너희가 바다를 지나갈 때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니, 너희가 내 눈앞에 귀중함이라.” “여자가 제 아들을 동정하는 마음이 없다고 해서, 젖 먹는 제 아이를 잊을 수 있느냐? 옳도다, 여자는 잊을지 몰라도, 나는 내 아이들을 잊지 아니하리니, 보라, 내가 저희를 내 손바닥에 새겼음이라. 나는 내 손의 그림자로 저희를 가리기까지 하였노라.” “악한 자는 자기의 길을 버릴지며, 불의한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게 하라. 그러면 주는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리라, 우리 하나님한테 돌아오게 하라, 그가 넘치게 용서할 것임이라.”
97:7.8 (1069.3) 살렘의 하나님을 이렇게 새로 드러내는 복음을 다시 들어 보아라: “그는 제 양 떼를 목자처럼 먹이리라, 양들을 팔 안에 모으고 가슴에 품어 저희를 나르리라. 그는 약한 자에게 힘을 주고, 힘이 없는 자에게 힘을 키워 주도다. 주를 섬기는 자는 힘을 다시 찾겠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가리라. 저희가 달리고서 지치지 아니하겠고, 걸어도 쓰러지지 아니하리라.”
97:7.9 (1069.4) 이 이사야는 확대되는 최고의 야웨 개념을 담은 복음을 멀리 미치도록 선전했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을 우주의 창조자로 묘사함으로 그는 모세와 웅변으로 경쟁하였다. 우주의 아버지의 무한한 속성을 그린 그의 글은 시(詩)와 같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관하여 이보다 더 아름다운 말이 입에서 나온 적이 없다. 시편처럼, 이사야의 글은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오시기 전에 필사 인간의 귀가 들은 바, 영적 하나님 개념을 가장 숭고하고 참되게 발표한 것에 속한다. 그가 신을 묘사한 것을 들어 보아라: “나는 영원에서 거하는 높고 높은 자이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나 외에 아무 다른 하나님이 없느니라.” “그리고 주의 손이 짧아져서 사람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이 아니요, 귀가 어두워서 들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워도 위엄 있는 이 선지자가 신이 변치 않고 하나님이 충실함을 끈질기게 전파한 것은 유대 민족 사이에 새로운 교리였다. “하나님은 잊지 않고, 버리지 않고자 하시리라”하고 그는 외쳤다.
97:7.10 (1069.5) 이 대담한 선생은 사람이 하나님과 무척 가까운 사이라고 선포했고, 이렇게 말했다. “내 이름으로 부르는 자마다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했고, 저희는 나를 찬양함을 보일지니라. 나, 나조차도, 스스로를 위하여 저희가 지은 죄를 지워버리는 자이라, 나는 저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
97:7.11 (1069.6) 이 위대한 히브리인이 민족의 하나님 개념을 때려부수고, 한편 영화롭게 우주의 아버지의 신성을 선포하는 것을 들어 보아라. 그는 우주의 아버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발판이라.” 그런데도 이사야의 하나님은 거룩하고, 훌륭하고, 공정하며, 사람은 그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사막의 베두인 족속이 가졌던 개념, 성이 나 있고 복수심이 가득하고 질투하는 야웨 개념은 거의 사라졌다. 최고이며 보편적인 새 야웨 개념이 필사 인간의 머리 속에 나타났고, 인간의 눈앞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 신의 응보를 깨닫는 것은 원시적 마술과 생물학적 두려움을 없애기 시작했다. 마침내, 사람은 법과 질서가 있는 우주에 대하여 듣고, 믿을 수 있고 확고한 속성을 가진 우주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97:7.12 (1070.1) 숭고한 하나님을 외치는 이 전도자는 그칠 줄 모르고 이 사랑의 하나님을 선포하였다.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뉘우치고 겸손한 정신을 가진 자와 함께 하노라.” 이 위대한 선생은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 위로하는 말씀을 더 주었다: “그리고 주가 너를 줄곧 안내하고 너의 혼을 채워 주시리라. 너는 물을 준 동산 같고 그침 없이 흐르는 샘물과 같을지니라. 그리고 적이 홍수(洪水)처럼 온다면, 주의 영이 그에 맞서서 방어물을 세우리라.” 두려움을 없애는 멜기세덱의 복음과 신뢰를 낳는 살렘의 종교가 인류에게 축복을 내리려고 다시 한 번 앞을 비추었다.
97:7.13 (1070.2) 선견이 있고 용감한 이사야는 최고의 야웨, 사랑의 하나님, 우주의 통치자, 애정을 가진, 온 인류의 아버지의 위엄과 보편적 전능을 숭고하게 그림으로써 민족주의적 야웨가 실제로 빛을 잃게 하였다. 그 중대한 시절 이후로, 서양에서 가장 높은 하나님 개념은 보편적 응보, 신의 자비, 영원한 올바름을 포함했다. 훌륭한 언어로, 비할 데 없는 품위를 갖추고 이 위대한 선생은 전능한 창조자를 만인을 사랑하는 아버지로 그렸다.
97:7.14 (1070.3) 포로로 잡혀 있던 이 선지자는 바빌론의 강가에서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을 때 그의 민족에게, 그리고 뭇 나라의 민족들에게 설파하였다. 그리고 이 둘째 이사야는 약속된 메시아의 임무에 대하여, 종족 면에서 자기 중심인 그릇된 많은 개념을 없애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이 노력에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사제들이 그릇된 생각으로 민족주의를 키우는 일에 헌신하지 않았더라면, 두 이사야의 가르침은 약속된 메시아를 알아보고 받아들이기 위하여 길을 예비했을 것이다.
97:8.1 (1070.4) 히브리인의 체험 기록을 신성한 역사로 바라보고, 나머지 세상의 사무를 세속의 역사로 바라보는 관습은, 역사의 해석에 관하여 사람의 머리 속에 존재하는 많은 혼란에 책임이 있다. 이 문제는 유대인에게 세속의 역사가 없기 때문에 생긴다. 바빌로니아에 추방된 시절에 사제들이, 하나님이 히브리인과 가졌던, 기적이라고 생각된 거래의 기록, 구약에 묘사된 이스라엘의 신성한 역사의 새 기록을 준비한 뒤에, 그들은 히브리인의 나랏일에 관한 기존 기록―히브리 역사에서 얼마큼 정확한 몇 가지 다른 기록과 함께, “이스라엘 왕들의 업적” 과 “유다 왕들의 업적”―을 조심스럽게, 샅샅이 없애버렸다.
97:8.2 (1070.5) 세속의 역사의 통렬한 압력에 눌리고 피할 수 없이 강요당한 것이 어떻게, 포로가 되고 외국인에게 지배받는 유대인을 아주 공포에 빠지게 만들었는가, 그래서 그들이 자기네 역사를 완전히 새로 쓰고 개작하려고 애썼는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복잡한 그들 민족 체험의 기록을 간단히 살펴보아야 한다. 유대인은 신학을 떠나서 인생에 대하여 적당한 철학을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끔찍한 벌을 받고, 아울러 올바르면 신이 보상한다는 개념, 최초의 에집트인의 개념과 씨름했다. 욥의 연극은 이 그릇된 철학에 맞선 일종의 항거였다. 전도서에 담긴 솔직한 비관론은 섭리를 믿는 지나친 이 낙관적 신앙에 대한 반응, 처세에 현명한 반응이었다.
97:8.3 (1071.1) 그러나 외래 통치자의 압제 밑에서 지낸 5백 년은 참을성 있고 오래 견디는 유대인에게도 너무 지나쳤다. 선지자와 사제들은 외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아 주여, 언제까지니이까?” 성서를 탐구하는 동안에, 정직한 유대인의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어느 옛 예언자는 하나님이 그가 “택한 백성”을 보호하고 구원하리라고 약속했다. 아모스는 그들이 민족의 올바름의 기준을 다시 세우지 않으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릴 것이라 전에 위협했다. 신명기의 서기관은―선과 악, 축복과 저주와 같이―큰 선택이 있음을 묘사하였다. 첫 이사야는 인자한 임금이자 구원자에 대하여 설파하였다. 예레미야는 올바른 마음을 가지는―가슴 속 서판에 약속을 적는―시대를 선포하였다. 둘째 이사야는 희생물을 바치고 대속함으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말했다. 에스겔은 헌신적 봉사를 통하여 구원받음을 선포했고, 에즈라는 율법을 지킴으로 번영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있었는데도, 그들은 속박된 채로 남아 있고, 구원은 뒤로 미루어졌다. 그리고 나서 다니엘은 다가오는 “위기”―큰 형상을 깨뜨리고 영원한 올바른 통치, 즉 메시아의 왕국이 즉시 세워지는 것―을 묘사하는 각본을 제시했다.
97:8.4 (1071.2) 이 모든 거짓된 소망이 그 민족이 실망하고 좌절하는 지경까지 이끌었으므로, 유대인 지도자들은 너무 헛갈려서 신다운 파라다이스 아들이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사람의 아들로 육신화되어―금방 그들에게 왔을 때, 그를 알아보고 그의 사명과 봉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97:8.5 (1071.3) 모든 현대 종교는 인간의 역사의 어떤 시대를 기적으로 해석하려고 애씀으로 심각한 실수를 저질러 왔다. 하나님이 섭리로 아버지의 간섭하는 손을 여러 번 인간사의 흐름 속에 밀어넣은 것이 참말이지만, 신학의 독단(獨斷)과 종교적 미신을 이 인간의 역사의 흐름 속에서 기적 행위로 인하여 나타나는 초자연적 침전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최고자들이 사람의 나라에서 다스린다”는 사실은 세속의 역사를 이른바 신성한 역사로 바꾸지 않는다.
97:8.6 (1071.4) 신약의 저자와 후일에 기독교 작가들은 유대인 선지자들을 초월적 존재로 만들려는 시도로, 뜻은 좋았지만 히브리인 역사의 왜곡(歪曲)을 더욱 까다롭게 만들었다. 이처럼 히브리인의 역사는 유대인 저자와 기독교 저자들에게 비참하게 이용되었다. 현세의 히브리인 역사는 철저히 교리화되었다. 신성한 역사라는 허구로 바뀌었고, 이른바 기독교 국가들의 도덕 개념과 종교적 가르침과 헤어날 수 없이 한데 묶이게 되었다.
97:8.7 (1071.5) 히브리인의 역사에서 중대한 시점을 간단히 되새기는 것은 그 민족의 일상적인 현세의 역사를 꾸며낸 신성한 역사로 바꾸려고 유대인 사제들이 어떻게 기록된 사실을 바빌론에서 뜯어 고쳤는가 보여줄 것이다.
97:9.1 (1071.6) 이스라엘 족속에게 결코 12 부족이 없었다―겨우 서너 부족이 팔레스타인에서 정착했다. 히브리인의 국가는 이른바 이스라엘 족속과 가나안 족속이 연합한 결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딸은 가나안 족속 사이에서 살았더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희의 딸들을 아내로 삼고, 자기 딸들을 가나안 족속의 아들들에게 주었더라.” 히브리인이 가나안 족속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냈다고 이에 관한 사제들의 기록이 서슴지 않고 선포했는데도, 그들을 결코 몰아내지 않았다.
97:9.2 (1071.7) 이스라엘 사람 비슷한 의식(意識)은 에브라임의 산지에서 뿌리를 내렸다. 후일의 유대인 의식은 남쪽 유다의 씨족에서 생겼다. 유대인(유다 사람)은 언제나 북쪽 이스라엘 (에브라임) 사람들의 이름을 더럽히고 그 기록에 먹칠하려고 애썼다.
97:9.3 (1072.1) 과장된 히브리인의 역사는 암몬 족속이 요단 강 동쪽에 사는 동포 부족 사람들―길르앗 족속―을 공격하는 데 저항하려고 사울이 북부의 씨족들을 불러모음으로 비롯된다. 그는 3천 명 남짓한 군대로 적을 무찔렀고, 이 공훈이 산지의 부족들에게 그를 임금으로 만들도록 이끌었다. 추방된 사제들이 이 이야기를 다시 썼을 때, 그들은 사울의 군대를 330,000명으로 늘였고, 그 싸움에 참여한 부족들의 명단에 “유다”를 보탰다.
97:9.4 (1072.2) 암몬 족속을 무찌른 직후에, 사울은 그 군대의 인기를 얻어서 임금이 되었다. 이 사건에 아무 사제나 선지자가 끼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사제들은 신의 지시에 따라서 사무엘 선지가 사울을 임금으로 세웠다고 기록에 넣었다. 그들은 다윗의 유다 왕권을 위하여 “신에게서 내려온 후계”를 세우기 위해서 이렇게 했다.
97:9.5 (1072.3) 유대인 역사에서 가장 큰 왜곡은 다윗과 상관이 있었다. 사울이 암몬 족속을 무찌른 뒤에 (이 공을 그는 야웨에게 돌렸지만), 필리스티아 족속이 놀라서 북쪽 씨족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윗과 사울은 결코 뜻을 한데 모을 수 없었다. 6백 명을 거느린 다윗은 필리스티아 연맹에 들어갔고, 바닷가를 따라서 에스드랠론까지 행진했다. 가스에서 필리스티아 족속이 다윗에게 들을 떠나라고 명령했고, 그들은 그가 사울에게로 넘어갈까 두려워했다. 다윗은 물러났고, 필리스티아 족속은 사울을 공격해서 물리쳤다. 다윗이 이스라엘에 충성했더라면, 그들은 이런 짓을 할 수 없었다. 다윗의 군대는 여러 나라 말을 하는 불평꾼의 집합이었고, 대체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와 법을 피한 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97:9.6 (1072.4) 사울이 길보아에서 필리스티아 족속에게 패배한 비극은 둘러싼 가나안 족속이 보기에, 야웨를 신들 사이에서 낮은 자리로 떨어뜨렸다. 보통은 사울의 패배를 야웨를 배반한 탓으로 돌렸겠지만, 이번에 유다의 편집자들은 의식(儀式)을 잘못 치른 탓으로 돌렸다. 이 편집자들은 다윗의 왕권을 세우기 위한 배경으로 사울과 사무엘의 전통이 필요했다.
97:9.7 (1072.5) 다윗은 그의 작은 군대와 함께 히브리인의 도시가 아닌 헤브론에서 본부를 차렸다. 이내 그의 동료들은 그를 새 유다 왕국의 임금으로 선포했다. 유다는 대체로 히브리인이 아닌 요소―켄ㆍ갈렙ㆍ예부스 및 기타 가나안 족속―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유목민―양 치는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히브리인의 토지 소유 관념에 충실했다. 그들은 사막에 사는 씨족들의 이념을 지니고 있었다.
97:9.8 (1072.6) 신성한 역사와 세속의 역사의 차이점은 다윗 임금을 만드는 것에 관하여 구약에서 발견되는 두 가지 다른 이야기가 잘 설명해 준다. 그의 직계 추종자들이 (그의 군대가) 어떻게 그를 임금으로 만들었는가 하는 세속 이야기의 일부가 사제들이 만든 기록에 뜻하지 않게 남게 되었다. 이들은 나중에 신성한 역사에 관하여 길고도 지루한 설명을 준비했고, 거기에는 사무엘 선지가 신의 지시로 어떻게 다윗을 그의 형제들 사이에서 골랐는가, 공식으로 진행하여 정교하고 엄숙한 예식에 따라서 히브리인의 임금이 되도록 그에게 기름을 부었고, 그리고 나서 그를 사울의 후계자로 선포했는가 그려져 있다.
97:9.9 (1072.7) 아주 여러 번 사제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가진 기적같은 거래에 관하여 지어낸 이야기를 준비한 뒤에, 그 기록에 이미 남아 있던 평범하고 사실에 관계되는 언급을 완전히 없애지 못했다.
97:9.10 (1072.8) 다윗은 처음에 사울의 딸, 다음에는 부유한 에돔 사람 나발의 과부, 그 다음에는 게수르의 임금 탈마이의 딸과 결혼함으로, 정치적으로 자신을 키우려고 애썼다. 그는 힛 족속인 아내 밧세바는 말할 것도 없고, 예부스의 여인들로부터 여섯 아내를 골랐다.
97:9.11 (1073.1) 그런 방법으로 그런 민족으로부터, 다윗은 에브라임 족속의 이스라엘 왕국, 사라지는 북쪽 왕국의 유산과 전통을 이어받은 신성한 유다 왕국이라는 허구를 만들었다. 다윗이 거느린 유다의 국제적 부족은 유대인이기보다 오히려 이방인이었다. 그런데도 에브라임의 억압받은 장로들이 내려와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을 만들었다.” 군사적 위협이 있은 뒤에, 다윗은 그때 예부스 족속과 조약을 맺었고, 연합 왕국의 서울을 예부스(예루살렘)에 세웠는데, 이곳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중간 지점에 튼튼히 담을 쌓은 도시였다. 필리스티아 족속이 흥분했고 곧 다윗을 공격했다. 치열한 전투가 있은 뒤에 그들을 물리쳤고, 다시 한 번 야웨는 “만군의 주 하나님”으로 자리를 잡았다.
97:9.12 (1073.2) 그러나 야웨는 어쩔 수 없이 가나안의 신들과 이 영광을 얼마큼 나누어야 했는데, 다윗 군대의 대부분이 히브리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 기록에 (유다의 편집자들이 놓쳐서) 내막을 드러내는 이 말이 나타난다: “야웨가 내 앞에서 내 적들을 부수었도다. 그런즉 그는 그곳의 이름을 바알 페라짐이라 불렀더라.”[2] [71] 다윗의 병사들 가운데 80퍼센트가 바알의 신도였기 때문에 그들은 이렇게 했다.
97:9.13 (1073.3) 기브온 족속은 에브라임 족속과 평화 조약을 맺었는데, 사울은 가나안 도시 기브온을 쳤다, 이 때문에 야웨가 그를 버렸다고 지적함으로 사울이 길보아에서 졌다고 다윗은 설명했다. 사울의 시절에도 다윗은 필리스티아 족속에 대항하여 가나안 도시 케일라를 방어했고, 다음에 자기 서울을 한 가나안 도시에 정했다. 가나안 족속과 화해하는 정책과 걸음을 맞추어, 다윗은 사울의 후손 일곱 명을 교수대에 달리도록 기브온 족속에게 넘겨주었다.
97:9.14 (1073.4) 필리스티아 족속을 물리친 뒤에 다윗은 “야웨의 상자”를 손에 넣었고, 예루살렘으로 가져 와서, 그의 왕국에서 공식으로 야웨를 숭배하게 하였다. 다음에 그는 이웃 부족들―에돔 족속, 모압 족속, 암몬 족속, 시리아인―에게 무거운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97:9.15 (1073.5) 다윗의 부패한 정치 조직은, 히브리인의 도덕 관습에 어긋나게, 북쪽에서 땅의 개인 소유를 시작했고, 필리스티아 족속이 이전에 거두었던 카라반 관세를 대번에 장악했다. 그리고 나서 유리아를 결국 죽인 일련의 끔찍한 일들이 생겼다. 모든 사법(司法) 상소는 예루살렘에서 판결되었고, “장로”들은 이제 더 판결을 내릴 수 없었다. 반란이 터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압살롬을 선동자로 부를지 모른다. 그의 어머니는 가나안 사람이었다. 밧세바의 아들―솔로몬―외에도 왕좌를 얻으려고 다투는 자가 여섯이나 있었다.
97:9.16 (1073.6) 다윗이 죽은 뒤에 솔로몬은 모든 북쪽 세력의 정치 조직을 없애버렸지만, 아버지의 체제에 있던 모든 폭정과 세금을 계속하였다. 솔로몬은 사치스런 왕궁과 공들인 건축 사업으로 나라를 파산시켰는데, 레바논의 집, 파라오 딸의 궁전, 야웨의 성전, 임금의 궁전, 그리고 많은 도시의 담을 개축하는 공사가 있었다. 솔로몬은 거창한 히브리인의 해군을 만들었고, 시리아인 뱃사람들이 이를 운영하고 온 세계와 무역하였다. 그의 후궁들은 거의 1천 명에 이르렀다.
97:9.17 (1073.7) 이때가 되자 실로에 있던 야웨의 성전은 신용을 잃었고, 나라의 모든 숭배는 예부스에, 화려한 왕실 예배당에 집중되었다. 북쪽 왕국은 엘로힘을 숭배하는 쪽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파라오의 은혜를 누렸고, 파라오들은 나중에 유다를 노예로 만들고 남쪽 왕국이 조공을 바치게 했다.
97:9.18 (1073.8)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에는 풍파가―여러 번 전쟁이―있었다. 4년 동안 내란이 있고 세 왕조(王朝)가 지난 뒤에, 이스라엘은 땅을 사고 팔기 시작한, 도시의 전제 군주의 통치를 받았다. 오므리 왕조차 세메르의 토지를 사려고 했다. 그러나 샬마니저 3세가 지중해 바닷가를 장악하려고 작정했을 때, 종말이 다가왔다. 에브라임의 아합 임금은 다른 열 집단을 모아서 카르카르에서 저항했고, 그 싸움은 무승부였다. 아씨리아인은 제지되었지만, 연합군은 많은 사람을 잃었다. 이 큰 싸움은 구약에 언급되지도 않았다.
97:9.19 (1074.1) 아합 임금이 나봇한테서 땅을 사려고 했을 때 새로이 문제가 터졌다. 그의 페니키아인 아내는 나봇이 “엘로힘과 임금”의 이름을 모독했다는 죄명으로 나봇의 땅을 몰수할 것을 지시하는 서류에, 아합의 이름을 위조했다. 나봇과 그의 아들들은 재빨리 집행되었다. 활기에 찬 엘리야가 그 장면에 나타나서 아합이 나봇 가족을 죽인 것을 비난하였다. 가장 큰 선지자들 가운데 하나인 엘리야는, 땅을 파는 바알파의 태도에 대항하여, 시골을 정복하려는 도시의 시도에 맞서, 옛 토지 관습의 수호자로서 이처럼 그의 가르침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마리아에 있던 바알 선지자(부동산 대리인)들을 죽이려고 시골의 지주 예후가 집시의 족장 예호나답과 합세하기까지 그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
97:9.20 (1074.2) 예호아하스와 그 아들 예로보암이 이스라엘을 적들로부터 구원하자, 새 생활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때가 되자 어느 악당 귀족이 사마리아에서 다스렸고, 그의 약탈 행위는 옛 시절의 다윗 왕조에 필적했다. 국가와 교회는 손을 잡고 따라갔다. 언론의 자유를 누르려는 시도는 엘리야ㆍ아모스ㆍ호세아로 하여금 비밀 기록을 시작하게 만들었고, 이것이 유대교와 기독교 성경의 진짜 시작이었다.
97:9.21 (1074.3) 그러나 이스라엘 왕이 에집트 왕과 계교를 꾸미고 아씨리아에 더 조공 바치기를 거절할 때까지, 북쪽 왕국은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3년 동안 포위가 시작되었고, 뒤이어 북쪽 왕국이 온통 분산되었다. 이렇게 에브라임(이스라엘)은 사라졌다.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더한다”고 이사야가 말한 것 같이, 유다―유대인, “이스라엘의 자투리”―는 몇 사람의 손에 토지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내, 야웨의 성전과 나란히, 바알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생겼다. 이 공포의 통치는 소년 임금 요아스가 이끈 일신교 폭동으로 인하여 막을 내렸고, 그는 35년 동안 야웨를 위한 투쟁을 벌였다.
97:9.22 (1074.4) 다음 임금 아마시아는 세금을 내고 항거하는 에돔 족속 및 그 이웃들과 문제가 있었다. 큰 승리를 거둔 뒤에 그는 북쪽에 있는 이웃들을 치려고 등을 돌렸고, 똑같이 큰 패배를 맛보았다. 그리고 나서 시골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임금을 살해하고 그의 열여섯 살 난 아들을 왕좌에 앉혔다. 이 사람이 아자리아였고, 이사야는 그를 웃시야라 불렀다. 웃시야 이후에, 형편은 더욱 나빠졌고, 유다는 아씨리아 임금들에게 조공을 바침으로 1백 년 동안 존재했다. 첫 이사야는 예루살렘이 야웨의 도시이니까,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서슴지 않고 예루살렘이 망하리라고 선포했다.
97:9.23 (1074.5) 소년 임금 마낫세의 통치 밑에서 활동하던, 썩고 부유한 정치가 일당이 유다의 진짜 파멸을 가져왔다. 변화하는 경제는 바알 숭배가 돌아오는 것을 유리하게 만들었고, 바알의 개인 토지 거래는 야웨의 이념에 어긋났다. 아씨리아의 멸망과 에집트의 우세는 한동안 유다에게 구원을 가져왔고, 시골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았다. 요시아 밑에서 그들은 예루살렘의 썩어빠진 정치가 일당을 격퇴하였다.
97:9.24 (1074.6) 그러나 바빌론에 대항하여 아씨리아를 도우려고 네코의 막강한 군대가 에집트에서부터 바닷가를 따라 올라오자, 요시아가 나가서 감히 그 군대를 가로막으려고 했을 때, 이 시대는 비극의 막을 내렸다. 그는 소탕되어 버렸고, 유다는 에집트에 조공을 바치는 처지로 떨어졌다. 바알의 정당이 예루살렘에서 다시 권력을 잡았고, 이처럼 진짜 에집트 종살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서 바알 정치가들이 궁전과 사제를 모두 장악한 시기가 뒤따랐다. 바알 숭배는 토지의 비옥함과 상관될 뿐 아니라, 재산권을 다루는 경제 및 사회 제도였다.
97:9.25 (1075.1) 느부갓네살이 네코를 타도한 뒤에, 유다는 바빌론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10년의 유예 기간을 주었으나 곧 반란을 일으켰다. 느부갓네살이 그들을 치려고 왔을 때, 유다 족속은 야웨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노예 해방과 같은 사회 개혁을 시작했다. 바빌로니아 군대가 잠시 물러났을 때, 히브리인은 개혁의 마술이 그들을 구원했다고 기뻐했다. 이 기간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멸망이 다가오는 것을 일러 주었고, 대번에 느부갓네살이 돌아왔다.
97:9.26 (1075.2) 그래서 유다의 종말은 갑자기 다가왔다. 도시는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야웨와 바알의 싸움은 포로 생활로 끝이 났다. 포로 생활은 이스라엘의 자투리에게 충격을 주어 일신교로 몰았다.
97:9.27 (1075.3) 바빌론에서 유대인은 그들이 특별한 사회 및 경제 관습을 가졌으니까 팔레스타인에서 작은 집단으로서 존재할 수 없고, 그들의 이념이 이기려면 이방인을 개종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처럼 운명에 관한 새로운 개념―유대인은 야웨가 선택한 종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싹텄다. 구약의 유대 종교는 정말로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에 생성되었다.
97:9.28 (1075.4) 불멸의 교리도 또한 바빌론에서 모습을 갖추었다. 유대인은 미래 생활의 개념이 그들이 사회 정의의 복음을 강조하는 것을 깎아 내린다고 생각했다. 이제 처음으로 신학이 사회학과 경제학을 밀어냈다. 종교가 정치ㆍ사회학ㆍ경제학으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어야 하는, 인간의 생각 및 행동 체계로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97:9.29 (1075.5) 그래서 유대 민족에 관한 진실은 신성한 역사로 여겨 왔던 많은 것이 평범한 세속 역사를 적은 연대기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낸다. 유대교의 토양으로부터 기독교가 자라났지만, 유대인은 기적의 민족이 아니었다.
97:10.1 (1075.6) 이스라엘 족속의 지도자들은, 특별히 관대한 대우를 받고 신의 은총을 독점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에 만물을 지배하는 유일한 하나님의 진리를 들고 가는 특별한 수고를 하라고 선택된 백성이라고 그들을 가르쳤다. 그들이 이 운명을 성취하고자 하면, 모든 민족에게 영적 지도자가 되리라, 오시는 메시아는 그들과 온 세계 위에 평화의 왕으로서 군림하리라고 이 지도자들은 전에 유대인들에게 약속했다.
97:10.2 (1075.7) 페르시아인이 유대인을 해방했을 때, 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서 오직 사제(司祭)가 지배하는 율법ㆍ희생물ㆍ의식의 규율에 묶이게 되었을 뿐이다. 희생물을 바치고 속죄하는 의식을 지지하느라고 히브리 씨족들이 모세가 작별 웅변에서 제시한 놀라운 하나님 이야기를 물리친 것 같이, 이 히브리 민족의 잔재는 성장하는 사제층의 규율ㆍ규칙ㆍ의식을 지지하여 둘째 이사야의 훌륭한 개념을 물리쳤다.
97:10.3 (1075.8) 민족의 자기 본위, 메시아의 오심을 오해한 거짓 믿음, 사제층의 늘어나는 속박과 폭정은 (다니엘ㆍ에스겔ㆍ학개ㆍ말라기를 제외하고) 영적 지도자들로 하여금 언제까지나 입을 다물게 하였다. 그날부터 세례자 요한의 시절까지, 온 이스라엘은 영적 후퇴가 심해지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러나 유대인은 우주의 아버지 개념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리스도 뒤 20세기에 이르기까지도, 그들은 이 신 개념을 줄곧 따랐다.
97:10.4 (1076.1)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까지 일신교의 횃불을 넘겨 준 충실한 선생들이 끊이지 않고 모세로부터 세례자 요한까지 이어졌고, 한편 그들은 절제 없는 통치자들을 그침 없이 꾸짖고, 종교를 상업화하는 사제들을 비난하고, 최고의 야웨,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의 숭배를 고수하라고 사람들에게 늘 타일렀다.
97:10.5 (1076.2) 한 국가로서, 결국 유대인은 정치적 신분을 잃었지만, 하나인 우주의 하나님을 성실하게 믿는 히브리 종교는 흩어진 유랑자들의 가슴 속에 줄곧 살아 있다. 이 종교가 살아남은 것은 그것이 추종자들의 가장 높은 가치 기준을 보존하도록 효과 있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유대 종교는 한 민족의 이상을 보존했지만, 진리의 영역에서 진보를 육성하고 철학으로 창조적 발견을 북돋지 못했다. 유대 종교는 많은 결함이 있었다―철학이 모자랐고 미학적 성질이 거의 빠져 있었다―하지만 도덕적 가치를 보존했고, 따라서 지속하였다. 다른 신 개념들과 비교해서, 최고의 야웨는 뚜렷하고, 선명하고, 개인적이고 도덕이 있었다.
97:10.6 (1076.3) 유대인은 거의 아무 민족도 따른 적이 없을 정도로, 정의ㆍ지혜ㆍ진리ㆍ올바름을 사랑했지만, 신의 이러한 성질을 지적으로 파악하고 영적으로 이해하는 데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적게 기여하였다. 히브리 신학은 성장하고 싶어 하지 않았어도, 다른 두 세계 종교, 기독교와 모하메드교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7:10.7 (1076.4) 유대 종교는 또한 그 제도 때문에 버티었다. 고립된 개인들의 사사로운 관습으로서 종교가 살아남기는 어렵다. 이것은 늘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이었다. 제도화된 종교의 잘못을 보고서, 그들은 집단 활동의 기법을 없애려 한다. 모든 의식을 없애는 대신에, 의식(儀式)을 개혁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이 점에서 에스겔은 같은 시대의 사람들보다 더 지혜가 있었다.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주장하는 데 그들과 합세했지만, 그는 또한 우수하고 정화(淨化)된 의식을 충실히 지키는 관행을 확립하는 데 손을 댔다.
97:10.8 (1076.5) 이처럼 연달아 이스라엘의 선생들은, 일찍이 유란시아에서 있었던 종교의 진화에서 가장 큰 공적을 이루었다: 폭발하는 시나이 화산의 신령, 시샘하는 잔인한 신령, 야만스러운 악귀 야웨라는 미개한 개념으로부터, 나중에 고상하고 하늘 같은 최고의 야웨 개념, 만물의 창조자요, 사랑이 가득하고 자비로운, 온 인류의 아버지 개념이 되기까지 점진적이지만 계속된 변화가 있었다. 히브리인의 이 하나님 개념은 그의 아들, 네바돈 미가엘이 친히 주신 가르침과 일생의 본보기로 인하여 더욱 커지고 아주 아름답게 확대될 때까지, 우주의 아버지를 인간이 가장 높게 상상한 것이었다.
98:0.1 (1077.1) 멜기세덱의 가르침은 여러 길을 따라서 유럽으로 들어갔지만, 주로 에집트를 거쳐서 왔고, 철저하게 헬라화되고 나중에 기독교화된 뒤에 서양 철학에 담기게 되었다. 서양 세계의 이상은 기본적으로 소크라테스를 따랐고, 후일에 그 종교 철학은, 진화하는 서양 철학 및 종교와 접촉하여 수정되고 절충된 대로 예수의 종교 철학이 되었으며, 서양의 종교와 철학은 모두 결국 기독교 교회를 낳았다.
98:0.2 (1077.2) 살렘 선교사들은 유럽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계속하였고, 이것은 이따금 생겨난 많은 종파와 예식을 치르는 집단 속에 차츰 흡수되었다. 가장 순수한 형태로 살렘의 가르침을 유지한 자들 중에서 견유학파를 언급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것을 외치는 이 설교자들은 그리스도 이후 1세기에 로마인의 유럽에서 아직 활동하고 있었고, 새로 형성되는 기독교 속에 나중에 통합되었다.
98:0.3 (1077.3) 서양에서 허다한 군사 전투에서 싸웠던 유대인 용병(傭兵)들이 유럽에서 살렘 교리의 많은 부분을 퍼뜨렸다. 고대에 유대인은 신학의 특수성만큼, 군사적 용맹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98:0.4 (1077.4) 그리스 철학, 유대 신학, 기독교 윤리에서 기본 신조는 근본적으로, 더 이전에 있었던 멜기세덱의 가르침의 영향이었다.
98:1.1 (1077.5) 살렘의 선교사들이 임명시의 서약을 엄격하게 풀이하지 않았더라면, 그리스인 사이에서 큰 종교적 구조를 세웠을지 모른다. 마키벤타가 지워 준 이 서약은 순전히 예배를 위한 모임의 조직을 금하였고, 각 선생에게 결코 사제로서 활동하지 말고, 종교적 서비스 때문에 결코 돈을 받지 말고, 오직 먹을 것, 옷, 잠자리를 받는다는 약속을 강요하였다. 멜기세덱 선생들이 헬라 시대[1] [72] 이전의 그리스에 파고들었을 때, 그들은 아담손의 전통과 안드 족속의 절기를 아직도 간직한 민족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그리스의 바닷가에 도착한 점점 늘어나는 열등한 노예 떼가 가졌던 개념과 관념에 크게 오염되었다. 이 혼합은 피비린내 나는 의식과 함께, 투박한 물활론(物活論)으로 복귀하게 만들었고, 하층 계급들은 사형 선고받은 죄수들의 집행을 예식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98:1.2 (1077.6) 살렘 선생들의 초기 영향은 남부 유럽과 동방으로부터 이른바 아리아인의 침공을 받아서 거의 없어졌다. 이 헬라인 침공자들은 아리아인 동포가 인도로 가져간 것과 비슷하게, 사람 모습을 닮은 하나님 개념을 가져왔다. 이 개념의 도입은 그리스인의 신과 여신(女神) 가족의 진화를 시작하였다. 이 새 종교는 흘러 들어오는 미개한 헬라인 종파에 일부 기초를 두었지만, 또한 더 오래 전에 그리스에 살던 자들의 신화를 함께 가졌다.
98:1.3 (1078.1) 헬라 시대의 그리스인은 대체로 어머니 숭배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고 있음을 발견하였고, 이 민족들에게 자기네 인신(人神) 댜우스 또는 제우스를 강제했다. 최고신교를 믿는 셈 족속 사이에 있던 야웨처럼, 그는 이미 그리스의 하급 신들의 만신전 전체에서 우두머리가 되었다. 운명이 전체를 통제한다는 생각을 버렸더라면, 그리스인은 제우스 개념에서 참 일신교를 궁극에 이룩했을 것이다. 최종의 가치를 가진 하나님은 자신이 숙명의 중재자요 운명의 창조자이어야 한다.
98:1.4 (1078.2) 종교의 진화에서 이 요인들의 결과로서 올림푸스 산의 태평한 신들을 믿는 유행 관념이 즉시 개발되었다. 이 신들은 신보다 사람에 더 가까웠고, 총명한 그리스인은 결코 이 신들을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자신들이 만들어 낸 이 신들을 크게 사랑하거나 크게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제우스에 대해, 그리고 반인(半人) 반신(半神) 집단에 대하여 애국심과 민족적 느낌을 가졌지만, 그들이 도저히 이 신들을 모시거나 숭배했다고 할 수 없다.
98:1.5 (1078.3) 헬라인은 초기의 살렘 선생들의 반(反)사제 신조에 흠뻑 빠져 있어서, 하찮은 사제라도 전혀 그리스에서 생기지 않았다. 형상을 신들에게 만들어 바치는 것도 숭배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의 일이 되었다.
98:1.6 (1078.4) 올림푸스의 신들은 사람이 만든, 사람 모습의 신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는 윤리보다 미학을 담고 있다. 그리스의 종교는 한 신 집단이 다스리는 우주를 묘사했기 때문에 유익했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도덕ㆍ윤리ㆍ철학은 이내 신 개념을 훨씬 넘어서 진보했고, 지적 성장과 영적 성장의 이러한 불균형은 인도에서 입증되었다시피, 그리스에 위험했다.
98:2.1 (1078.5) 사람이 가볍게 여기는 피상적 종교는 특히 그 형태를 육성하고 신봉자들의 마음을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채워 줄 사제가 없을 때, 오래 버틸 수 없다. 올림푸스 산의 종교는 구원을 약속하지 않았고, 신자들의 영적 목마름을 채워 주지도 않았다. 따라서 멸망할 운명이었다. 생긴 지 1천 년 안에 이 종교는 거의 사라졌고, 그리스인은 민족 종교가 없이 지냈으며, 올림푸스 산의 신들은 상급 지성인에게 위력을 잃었다.
98:2.2 (1078.6) 이것이 동양과 레반트가 영적 의식(意識)의 부활을 겪고 일신교를 인식하려고 새로이 눈떴을 때 그리스도 이전 6세기를 지배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서양은 이 새로운 발전에 함께 하지 않았다. 유럽도 북 아프리카도 이 종교 부흥에 널리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스인은 훌륭한 지적 진보에 착수하였다. 비로소 두려움을 이기고 그 해독제로서 이제 더 종교를 찾지 않았지만, 그들은 참 종교가 혼의 갈급함, 영적 불안, 도덕적 절망에 약인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깊이 생각에 빠져―철학과 형이상학 속에―혼의 위안을 찾으려 했다. 자아의 보존―구원―을 숙고하다가 자아의 실현과 자아의 이해로 눈을 돌렸다.
98:2.3 (1078.7) 엄밀하게 사고함으로 그리스인은 살아남는다는 믿음의 대용품으로 쓰일 평안을 의식(意識)하려고 애썼지만, 그들은 철저히 실패했다. 오로지 헬라 민족들의 상류 사회에서 지식 계급이 이 새로운 가르침을 깨우칠 수 있었다. 옛 세대 노예의 후손인 하층 계급은 종교를 대신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었다.
98:2.4 (1079.1) 거의 모든 철학자가 “우주의 지능,” “하나님의 생각,” “큰 근원”을 가르친 살렘 교리의 신앙 배경에 허술하게 매달려 있었는데도, 그들은 온갖 형태의 숭배를 업신여겼다. 신다운 자와 유한을 초월하는 자를 인정하는 한,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솔직하게 일신교를 믿었다. 그들은 올림푸스 산에 있는 신ㆍ여신들 모임 전체를 그다지 인정하지 않았다.
98:2.5 (1079.2) 5세기와 6세기의 그리스 시인들, 특히 핀달은 그리스의 종교를 개혁하려고 애썼다. 그리스 종교의 이상을 높였지만, 그들은 종교가가 아니라 예술가였다. 최상의 가치 기준을 기르고 보존하는 기법을 개발하지 못했다.
98:2.6 (1079.3) 크세노파네스는 유일한 하나님을 가르쳤지만, 그의 신 개념은 필사 인간에게 친히 아버지가 되기에 너무나 범신적이었다. 첫째 원인, 시초 지성을 인정한 것을 제쳐놓고, 아낙사고라스는 기계론자였다. 소크라테스와 그 후계자, 곧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는 것은 미덕이요, 선한 것은 혼이 건강함을 말하며, 남을 부당하게 대하는 것보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낫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그릇되다, 신들은 지혜롭고 선하다고 가르쳤다. 그들의 주요한 미덕은 지혜ㆍ용기ㆍ절제ㆍ정의였다.
98:2.7 (1079.4) 헬라 종족과 히브리 종족 사이에서 종교 철학의 진화는 문화적 진보의 모습을 결정하는 하나의 제도로서, 교회의 기능을 대조해서 보여준다. 팔레스타인에서 인간의 생각은 너무 사제의 통제를 받고 성서에 지배되었기 때문에, 철학과 미학이 통째로 종교와 도덕 속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그리스에서 사제와 “신성한 기록”이 거의 완전히 없었던 것은 인간의 정신을 해방하고 자유롭게 만들었으며, 깊은 생각이 놀랍게 발전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개인의 체험으로서, 종교는 우주의 성질과 실체를 파고드는 지적 탐구와 발걸음을 맞추지 못했다.
98:2.8 (1079.5) 그리스에서 신앙은 생각에 종속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생각은 신앙의 지배를 받았다. 기독교가 장점이 많은 것은 히브리인의 도덕과 그리스인의 사상으로부터 많이 빌려 왔기 때문이다.
98:2.9 (1079.6) 팔레스타인에서 종교적 교리는 너무나 구체화되어 계속된 성장을 위협하였다. 그리스에서 인간의 생각은 너무 추상적이 되어, 하나님 개념은 분해되어 범신적 추측으로 인하여 뿌연 망상이 되었고, 이것은 브라만 철학자들이 생각한 비성격인 무한자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98:2.10 (1079.7) 그러나 이 시절에 보통 사람들은 자아의 실현과 추상적 신을 가르치는 그리스 철학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그다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기도를 들을 수 있는, 친히 상대하는 하나님과 함께, 구원받는다는 약속을 몹시 바랐다. 그들은 철학자들을 추방하고 살렘 종파의 잔재를 박해했으며, 이 두 신조가 많이 섞이게 되었고, 끔찍한 탐닉에 빠져 신비 종파들의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려고 준비하였고, 신비교는 그때 지중해의 여러 나라에서 번지고 있었다. 엘레우시스의 비밀 의식이 올림푸스 산의 만신전 안에서 성장했고, 이것은 그리스판의 다산(多産) 숭배였다. 디오니수스의 자연 숭배가 번성했다. 그 종파들 가운데 가장 나은 것은 오르페우스 단체였는데, 그 도덕적 설교와 구원을 준다는 약속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끌었다.
98:2.11 (1080.1) 구원에 이르는 이 새 방법, 감정적이고 불 같은 이 예식에 온 그리스가 말려들었다. 어떤 나라도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높은 예술적 철학에 다다른 적이 없다. 실질적으로 신이 없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약속이 전혀 없이, 그러한 진보된 윤리 체계를 아무도 일찍이 만든 적이 없다. 바로 이 그리스 종족들이 신비교의 미친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어느 나라도 그렇게 빨리, 깊게, 맹렬히 그렇게 깊은 지적 침체, 도덕적 결핍, 영적 빈곤으로 곤두박질하지 않았다.
98:2.12 (1080.2) 종교는 철학의 뒷받침 없이 오래 견디어 왔지만, 거의 아무 철학도 자체만으로 얼마큼 종교 편에 서지 않고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철학과 종교의 관계는 생각과 행동의 관계와 같다. 그러나 인간의 이상적 상태는 철학ㆍ종교ㆍ과학이 지혜ㆍ믿음ㆍ체험의 합쳐진 행위로 인하여, 하나의 의미 있는 통일체 속으로 용접되는 것이다.
98:3.1 (1080.3) 가족 신들을 숭배하는 예전의 종교 형태로부터 부족이 전쟁의 신 마르스를 섬기는 것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라틴 족속이 후일에 가졌던 종교는 그리스인과 브라만들의 지적 체계나 또는 몇몇 다른 민족이 가졌던 좀더 영적인 종교보다, 오히려 정치적 준수에 가까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98:3.2 (1080.4) 그리스도 이전 6세기에 멜기세덱의 복음이 크게 일신교의 부흥을 겪는 가운데, 너무 적은 수의 살렘 선교사들이 이탈리아에 침투했고, 침투한 사람들은 급속히 퍼지는 에투루리아 사제, 그리고 새 집단의 신과 성전의 영향을 이겨낼 수 없었으며, 이 모두가 로마의 국가 종교로 조직되었다. 라틴 부족들의 이 종교는 그리스인의 종교처럼 시시하거나 돈으로 움직일 수 없었고, 히브리인의 종교처럼 엄격하거나 전제적이지 않았다. 그 종교는 대체로 단순한 형식ㆍ맹세ㆍ금기를 지키는 일이었다.
98:3.3 (1080.5) 로마인의 종교는 그리스로부터 널리 문화를 도입한 데 크게 영향을 받았다. 결국 올림푸스 산의 신들의 대부분은 라틴 부족의 만신전으로 옮겨지고 통합되었다. 그리스인은 오랫동안 가족 화로의 불을 숭배했다―헤스티아는 화로의 처녀 여신이었다. 베스타는 로마인이 믿는, 집의 여신이었다. 제우스는 주피터, 아프로디테는 비너스가 되었고, 올림푸스 산의 많은 신이 이런 식으로 바뀌었다.
98:3.4 (1080.6) 로마의 젊은이들이 치르는 종교 입회식은 국가 봉사에 엄숙하게 헌신하는 계제였다. 선서와 시민권 부여는 실제로 종교 예식이었다. 라틴 종족들은 성전ㆍ제단ㆍ성소(聖所)를 유지했고, 위기에 신탁을 묻곤 했다. 영웅들의 뼈, 나중에는 기독교 성자들의 뼈를 보존했다.
98:3.5 (1080.7) 그리스인의 상당히 지적이고 예술적 숭배가 신비 종파들의 맹렬하고 대단히 감정적인 숭배 앞에 굴복한 것처럼, 형식을 찾고 감동이 없는 이 형태의 준종교적 애국심은 망할 운명을 가졌다. 이 지독한 종파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신비 종교인 하나님의 어머니 종파였는데, 그 시절에 로마에 현재 성 베드로 교회 바로 그 자리에 본부가 있었다.
98:3.6 (1080.8) 태어나는 로마 국가는 정치적으로 정복했지만, 한편 에집트ㆍ그리스ㆍ레반트의 종파ㆍ의식ㆍ신비ㆍ신 개념들에게 정복되었다. 이 수입된 종파들은 아우구스투스 시절까지 로마 국가 전역에 걸쳐 계속 번성했고, 아우구스투스는 순전히 정치적 이유와 국가적 이유로 신비교들을 퇴치하고 예전의 정치적 종교를 부활하려고 영웅다운 노력을 했으며 얼마큼 성공했다.
98:3.7 (1081.1) 국가 종교를 받드는 사제들 중에 하나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유일한 하나님, 모든 초자연 존재들을 주관하는 최종의 신 교리를 퍼뜨리려고 살렘의 선생들이 먼저 시도한 일이 있었다고 일러 주었다. 이 생각은 그 황제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그래서 그는 많은 성전을 짓고 성전을 아름다운 우상으로 가득 채웠으며, 국가의 사제직을 다시 조직하고, 국교(國敎)를 다시 세우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대사제로 행동하도록 임명했다. 그리고 황제로서 자신이 최고의 신이라고 서슴지 않고 선포했다.
98:3.8 (1081.2) 아우구스투스를 숭배하는 이 새 종교는 번성했고, 이것은 팔레스타인, 곧 유대인의 고향을 제외하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제국에서 두루 신봉되었다. 이 인간 신들의 시대는 공식 로마 종파가 스스로 높인 인간 신을 40명이 넘게 기록부에 가졌을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들 모두가 기적으로 태어나고 다른 초인간 속성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98:3.9 (1081.3) 열심 있는 설교자 집단, 즉 견유학파가 줄어드는 살렘 신자 무리의 마지막 저항이었고, 견유학파는 로마인들에게 거칠고 의미 없는 종교 의식을 버리고 멜기세덱의 복음을 담는 예배 형태로 돌아가라고 훈계했는데, 그 복음은 이전에 그리스 철학과 접촉함으로 수정되고 오염되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견유학파를 물리쳤다. 그들은 신비교 의식에 푹 빠지기를 더 좋아했는데, 신비교는 개인이 구원받는 희망을 주었을 뿐 아니라, 유흥ㆍ흥분ㆍ오락을 바라는 욕구도 또한 채워 주었다.
98:4.1 (1081.4) 그리스와 로마 세계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원시 가족의 종교와 국가 종교를 잃어버렸고, 그리스 철학의 뜻을 이해할 수 없거나 기꺼이 이해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에집트와 레반트에서 온, 볼 만하고 감동적인 여러 신비교에 눈을 돌렸다. 서민들은 구원받는다는 약속―오늘 종교적 위로를 받고 죽은 뒤에 불멸한다는 희망의 보장―을 몹시 바랐다.
98:4.2 (1081.5) 가장 유행하게 된 세 신비교는 다음과 같다:
98:4.3 (1081.6) 1. 쿠벨레와 그 아들 아티스를 믿는 프리지아인의 종파.
98:4.6 (1081.9) 프리지아인과 에집트인의 신비교들은 신의 아들이 (각각 아티스와 오시리스) 죽음을 겪고 신의 힘으로 부활되었으며, 나아가서 신비교에 적절히 입교하고, 신의 죽음과 부활 기념일을 경건하게 축하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함으로 그의 신다운 성품과 불멸을 함께 하는 자가 되리라고 가르쳤다.
98:4.7 (1081.10) 프리지아인의 예식은 무게가 있었지만 품위를 떨어뜨렸다. 피 흘리는 그들의 축제는 이 레반트 신비교들이 얼마나 질이 떨어지고 원시적이 되었는가를 가리킨다. 가장 거룩한 날은 검은 금요일, “피의 날”이었고, 이것은 아티스가 자초하여 죽은 것을 기념했다. 아티스의 희생과 죽음을 사흘 동안 축하한 뒤에, 축제는 그가 다시 살아난 것을 기념하여 기쁨으로 바뀌었다.
98:4.8 (1082.1) 이시스와 오시리스를 숭배하는 의식은 프리지아인의 제사보다 더 세련되고 인상적이었다. 이 에집트인의 의식은 옛날 나일 강 신의 전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 신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이 개념은 식물이 성장하다가 그치는 일이 해마다 되풀이되고, 그 뒤에 봄철에 모든 살아 있는 식물이 되살아나는 것을 관찰한 데서 유래했다. 이 신비교 제사를 준수하는 광란과 예식 때의 방탕한 향연은 신성(神性)을 깨닫는 “열심”으로 이끈다고 생각되었는데, 때때로 아주 구역질나는 것이었다.
98:5.1 (1082.2) 프리지아와 에집트의 신비교들은 결국 모든 신비 종파 가운데 가장 큰 것, 미트라 종파에 무릎을 꿇었다. 미트라 종파는 넓은 범위의 인간 성품에 호소했고, 이전에 있던 두 종파를 차츰 갈아치웠다. 미트라교는 레반트에서 모집한 여러 로마 군단의 선전(宣傳)을 통해서 로마 제국에 퍼졌다. 레반트에서 이 종교가 유행한 것은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이 신앙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새 종교 의식은 먼저 있었던 신비 종파들보다 크게 개선된 것이었다.
98:5.2 (1082.3) 미트라 종파는 이란에서 생겨났고, 조로아스터 추종자들의 호전적 반대가 있었는데도 그 고향에서 오래 버티었다. 그러나 미트라교가 로마에 이를 때가 되자, 이 종파는 조로아스터의 가르침 가운데 많은 것을 흡수하여 크게 개선되었다. 주로 미트라 종파를 통해서, 조로아스터의 종교는 나중에 나타나는 기독교에 영향을 미쳤다.
98:5.3 (1082.4) 미트라 종교는 큰 바위에서 생겨난 호전적 신을 묘사했는데, 그는 용감한 공훈을 세우고, 화살로 맞춘 바위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게 만들었다. 홍수가 일어났고, 이를 피하여 한 사람이 특별히 지어진 배를 타고 달아났으며, 마지막 만찬이 있었는데 이것을 미트라는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 태양신과 함께 축하했다. 이 태양신, 곧 솔 인빅투스는[2] [73] 조로아스터교의 아우라 마즈다라는 신의 개념이 퇴화한 것이다. 미트라는 태양신이 어둠의 신과 벌인 싸움에서 살아남은, 태양신의 투사로 생각되었다. 미트라는 신화의 신성한 황소를 죽인 것을 인정받아서 불멸하게 되었고, 하늘에 있는 신들 사이에서 인류를 위하여 중재하는 자의 위치로 높아졌다.
98:5.4 (1082.5) 이 종파의 신자들은 동굴과 기타 비밀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고, 찬송을 부르고 마술 주문을 중얼거리며, 희생으로 바친 동물의 고기를 먹고 피를 마셨다. 그들은 하루에 세 번 예배를 드렸고, 주마다 태양신의 날에 특별 예식이 있고, 해마다 미트라 축제, 12월 25일에 전체에서 가장 공들인 행사가 있었다. 성찬을 먹는 것은 영생을 보장했는데, 즉 죽은 뒤에 미트라의 품으로 바로 가서, 거기서 심판하는 날까지 더없는 행복 속에서 머무르는 것이다. 심판하는 날에 미트라의 하늘 열쇠는 충실한 자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파라다이스의 대문을 열고, 다음에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중에서 세례 받지 않은 자들은 모두, 미트라가 지구로 돌아오면 절멸될 것이었다. 남자는 죽으면 재판을 받으려고 미트라의 앞으로 가고, 세상이 끝날 때 미트라는 모든 죽은 자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마지막 심판을 받게 하리라고 가르쳤다. 사악한 자는 불로 멸망하고, 올바른 자는 미트라와 언제까지나 군림하리라는 것이다.
98:5.5 (1082.6) 처음에 이것은 남자만을 위한 종교였고, 신자들이 일곱 가지 다른 계급으로 입문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신자의 아내와 딸들이 큰 어머니의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고, 이 성전은 미트라 성전에 인접해 있었다. 여자들의 제사는 미트라의 의식, 그리고 아티스의 어머니 쿠벨레를 믿는 프리지아 종파 예식의 혼합이었다.
98:6.1 (1083.1) 여러 신비교와 기독교가 오기 전에, 개인적 종교는 북 아프리카와 유럽의 문명화된 여러 나라에서 독립된 제도로서 전혀 개발되지 않았다. 종교는 오히려 가족, 도시 국가, 정치와 제국의 일이었다. 헬라 시대의 그리스인은 중앙에 집중된 숭배 체계를 개발시킨 적이 없다. 의식은 지역에 국한되었고, 그들은 사제 계급도 없고 아무런 “신성한 책”도 없었다. 로마인과 비슷하게 그들의 종교 제도는 상급 도덕 및 영적 가치 기준을 보존하기 위하여 강력히 추진하는 매체가 없었다. 종교의 제도화가 보통 그 영적 질을 떨어뜨린 것이 참말이지만, 어떤 종교도 어느 정도, 크던 작던, 제도적 조직의 도움이 없이, 아직까지 살아남지 못했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98:6.2 (1083.2) 따라서 회의파ㆍ견유학파ㆍ쾌락주의파ㆍ금욕주의파의 시절까지,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미트라교와 바울의 새 종교 기독교가 대단한 경쟁을 벌이던 시절까지, 서양의 종교는 시들고 있었다.
98:6.3 (1083.3) 그리스도 이후 3세기에, 미트라교와 기독교의 교회는 겉모습과 의식의 특성이 무척 비슷했다. 그러한 예배 장소의 대부분은 땅 밑에 있었고, 두 종교의 제단 배경은 죄로 저주받은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온 구세주가 고통받는 것을 다양하게 그렸다.
98:6.4 (1083.4)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손가락을 거룩한 물에 담그는 것이 언제나 미트라교 신자들의 관습이었다. 어느 구역에는 한때 두 종교에 속한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 근처에 있는 대다수의 기독교 교회에 이 관습을 들여왔다. 두 종교가 세례를 이용했고, 빵과 포도주로 된 성찬을 먹었다. 미트라와 예수의 인품은 별도로 하고, 미트라교와 기독교의 한 가지 큰 차이점은, 하나는 군국주의를 북돋았고 다른 하나는 지나치게 평화적이었다. (후일에 기독교를 제외하고) 다른 종교들을 묵인한 것이 미트라교의 마지막 파멸을 가져왔다. 그러나 둘 사이의 싸움에서 결정적 요인은 여자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완전히 친교하도록 허락된 것이다.
98:6.5 (1083.5) 결국 이름으로는 기독교 신앙이 서양을 지배했다. 그리스 철학은 윤리적 가치를 가진 개념들, 미트라교는 예배를 준수하는 의식, 그리고 기독교는 그런 자격으로 도덕 기준과 사회적 기준을 보존하는 기법을 제공했다.
98:7.1 (1083.6) 창조 아들은 성난 하나님을 화해시키려고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자신을 유란시아 인류에게 수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 인류가 아버지의 사랑을 인식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도록 설득하려는 것이었다. 결국, 속죄 교리를 부르짖은 그 위대한 주창자도 이 진리를 얼마큼 깨달았는데, 그가 이렇게 선언했기 때문이다: “세상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3] [74]
98:7.2 (1084.1) 기독교의 기원과 전파를 다루는 것은 이 논문의 범위가 아니다. 기독교가 나사렛 예수라는 인물을 위주로 세워졌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그는 사람으로 육신화한, 네바돈의 미가엘 아들, 유란시아에서는 그리스도, 즉 기름 부어 거룩하게 된 자로 알려졌다. 이 갈릴리 사람을 따르던 자들이 기독교를 레반트와 서양에 두루 퍼뜨렸고, 그들의 선교하는 열심은 아시아에서 같은 시대에 살던 진지한 사람들, 불교를 가르쳤던 선생들 뿐 아니라, 뛰어난 선구자, 곧 셋 족속과 살렘 사람들의 열심에 필적하였다.
98:7.3 (1084.2) 기독교는 하나의 유란시아 신앙 체계로서, 다음의 가르침ㆍ영향ㆍ신앙ㆍ제사, 그리고 개인의 개별적 태도가 복합되어 생겨났다:
98:7.4 (1084.3) 1. 멜기세덱의 가르침, 이것은 지난 4천 년 동안에 생겨난, 서양과 동양의 모든 종교에 기본 요소이다.
98:7.5 (1084.4) 2. 히브리인의 도덕ㆍ윤리ㆍ신학의 체계, 그리고 섭리와 최고의 야웨를 믿는 신앙.
98:7.6 (1084.5) 3. 우주의 선과 악이 싸운다는 조로아스터교의 개념, 이것은 이미 유대교와 미트라교, 양쪽에 자국을 남겨 놓았다. 미트라교와 기독교 사이의 투쟁에 따른 오래 이어진 접촉을 통해서, 이란 선지자의 교리는 예수의 가르침이 헬라화되고 라틴화된 해석판에 담긴 교리ㆍ신조ㆍ우주론을 이루는 신학 및 철학적 모습과 구조를 결정하는 데 유력한 요소가 되었다.
98:7.7 (1084.6) 4. 신비교, 특히 미트라교, 그러나 또한 프리지아 종파에 있는 큰 어머니 숭배. 예수가 유란시아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조차 이란의 구세주이자 영웅 미트라가 기적으로 출생했다는 로마식 해석에 물들게 되었다. 미트라가 땅에 온 것은, 선물을 들고서, 다가오는 이 사건에 관하여 천사들의 통지를 받은 목자, 손꼽을 수 있는 몇 목자들만 구경했다고 생각되었다.
98:7.8 (1084.7) 5. 요셉의 아들 요수아가 인생을 산 역사적 사실,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인 나사렛 예수의 실체.
98:7.9 (1084.8) 6. 타르수스 바울의 개인적 관점. 미트라교는 바울이 소년이었을 때 타르수스에서 지배적 종교였다는 것을 기록해야 한다. 바울은 그가 개종한 사람들에게 좋은 뜻으로 쓴 편지들이 언젠가 후일에 기독교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길 것이라 꿈도 꾸지 않았다. 선의로 쓴 그러한 선생들의 기록을 후세에 이어받은 사람들이 이용한 책임을 그 선생들에게 물어서는 안 된다.
98:7.10 (1084.9) 7.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옥에서부터 그리스를 거쳐 시라큐스와 로마에 이르기까지 지배했던, 헬라 민족들의 철학적 생각. 그리스인의 철학은 당대의 어느 다른 종교 체계보다 바울판의 기독교와 더 조화되었고, 서양에서 기독교의 성공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리스 철학은 바울의 신학과 함께, 아직도 유럽 사람의 윤리적 기초를 이룬다.
98:7.11 (1084.10) 예수의 최초의 가르침은 서양에 파고들자 서양화되었고, 서양화됨에 따라서 모든 민족과 부류의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호소하는 잠재성을 잃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백인종의 사회ㆍ경제ㆍ정치 관습에 잘 적응된 종교가 되어 버렸다. 그것이 예수의 종교가 되기를 그만둔 지 오래다. 하지만 그 가르침의 길을 성실하게 따르려고 애쓰는 그러한 개인들에게 아직도 용감하게, 예수에 관한 아름다운 종교를 묘사한다. 그리스도,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아로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를 영화롭게 만들었지만, 기독교는 주가 친히 가르친 복음, 곧 하나님이 아버지요 모든 사람이 두루 형제라는 것을 대체로 잊어 버렸다.
98:7.12 (1085.1) 이것이 유란시아에서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가르친 것에 관한 긴 이야기이다. 네바돈의 이 비상시 아들이 자신을 유란시아에 수여한 지 거의 4천 년이 된다. 그 기간에 “엘 엘리욘, 최고 하나님의 사제”의 가르침은 모든 종족과 민족에게 파고들었다. 마키벤타는 그 특별 수여의 목적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나타나려고 준비했을 때, 그 하나님 개념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존재했고, 바로 이 하나님 개념은 우주의 아버지의 다채로운 자녀들이 공간에서 회전하는 행성에서 흥미를 자아내는 인생을 잠시 사는 동안, 그들의 생생한 영적 체험 속에서 아직도 새로이 불타고 있다.
99:0.1 (1086.1) 종교가 사회에서 이 세상의 제도와 관련이 가장 적을 때, 종교는 사회에 가장 높은 직무를 이행한다. 지난 시대에, 사회의 개혁이 대체로 도덕 분야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종교는 그 태도를 경제 및 정치 체제에서 생기는 광범위한 변화에 적응하지 않아도 되었다. 종교의 주요한 문제는 정치 및 경제 문화에 존재하는 사회 질서 속에서 악을 선으로 대체하려는 노력이었다. 이처럼 종교는 사회의 기존 질서를 간접으로 영속시키고, 기존하는 부류의 문명을 유지하도록 조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99:0.2 (1086.2) 그러나 종교는 새 사회 질서를 창조하거나 오래 된 질서를 보존하는 데 직접 관여해서는 안 된다. 참된 종교는 사회를 진화시키는 기법으로서 폭력의 사용에 반대하지만, 사회가 자체의 관례를 적응하고, 사회 제도를 새 경제 조건과 문화적 요구에 맞게 조절하려고 지적 노력을 기울이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
99:0.3 (1086.3) 종교는 지난 여러 세기에 때때로 일어난 사회 개혁을 승인했지만, 20세기에 필요 때문에 광범위하고 계속되는 사회 재건에 따른 조정을 직면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생활 조건이 아주 급속히 바뀌어서 제도의 수정은 크게 가속되어야 하고, 그에 따라서 종교는 새롭고 늘 변하는 이 사회 질서에 대하여 자체의 적응을 서둘러야 한다.
99:1.1 (1086.4) 기계의 발명과 지식의 보급은 문명을 수정하고 있다. 문화적 재난을 피하려면 어떤 경제적 조정과 사회의 변화가 절대로 필요하다. 다가오는 이 새 사회 질서는 천년 동안이나 만족하여 정착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변화하고 조정하고 또 다시 조정하는 과정을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 인류는 새롭고 밝혀지지 않은 행성의 운명을 향하여 행진하고 있다.
99:1.2 (1086.5) 종교는 도덕적 안정과 영적 진보를 위하여, 이렇게 늘 조건이 변하고 경제적 조정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 힘차게 활동하는 막강한 영향력이 되어야 한다.
99:1.3 (1086.6) 유란시아의 사회는 결코 지난 시대처럼 안정되기를 바랄 수 없다. 사회라는 배는 확립된 전통의 보호를 받던 만(灣)에서 바깥으로 나왔고, 진화의 운명이 기다리는 거친 바다로 뱃길을 떠났다. 사람의 혼은, 세계 역사에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시피, 도덕 기준이 적힌 해도(海圖)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종교적으로 안내하는 나침반을 참을성 있게 지켜보아야 한다. 사회적 영향으로서, 종교의 최고의 사명은 문명의 한 국면에서 다음 국면으로, 한 문화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넘어가는 이 아슬아슬한 과도기에, 인류의 이상(理想)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99:1.4 (1087.1) 종교는 성취해야 할 새 임무가 전혀 없지만, 새롭고 빨리 변하는 이 모든 인간 상황에 지혜로운 안내자이자 노련한 조언자로서 활동하는 것이 긴급히 요구된다. 사회는 더욱 기계적이고 밀집하고 복잡해지고 있으며, 더욱 중요하게 서로 의존하게 되고 있다. 종교는 새롭고 밀접한 이 상호 관계가 서로 퇴화하거나 파괴적이 되는 것을 방지하도록 작용해야 한다. 종교는 진보의 효소들이 문명의 문화적 맛을 파괴하는 것을 방지하는, 우주의 소금으로서 작용해야 한다. 이 새로운 사회 관계와 경제적 격변은 오직 종교의 봉사로 인하여, 오래 가는 형제 정신을 낳을 수 있다.
99:1.5 (1087.2) 인간적으로 보면, 신이 없는 인도주의는 고상한 손짓이지만, 참 종교는 다른 집단들의 필요와 고통에 대한 한 사회 집단의 민감성을 오랫동안 높일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과거에는 사회의 상층 계급이 무력한 하층이 겪는 고통과 억압에 귀를 막고 있는 동안 제도화된 종교가 수동적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지만, 현대에는 이 낮은 사회 계급이 이제 더, 그렇게 비참하게 무지하지도 않고 그렇게 정치적으로 무력하지도 않다.
99:1.6 (1087.3) 종교는 사회를 다시 건설하고 경제를 다시 조직하는 현세의 일에 유기적으로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종교는 자체의 도덕적 명령과 영적 교훈, 인간의 삶과 초월적 생존에 관하여 진취적 철학을 뚜렷하고 활기 있게 다시 진술함으로, 문명에서 생기는 이 모든 진보와 활발하게 발걸음을 맞추어야 한다. 종교의 정신은 영원하지만, 그 표현 형태는 인간 언어의 사전(辭典)이 수정될 때마다 다시 진술되어야 한다.
99:2.1 (1087.4) 제도가 된 종교는 앞으로 세계에 널리 사회를 다시 건설하고 경제를 다시 조직하는 이 일에 영감을 주고 지도할 수 없으니, 불행하게도 그런 종교가 재건될 운명을 가진 그 사회 질서와 경제 체제에 얼마큼 유기적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몸소 영적 체험으로 얻은 참 종교가 현재 문명의 위기에 유익하게, 창조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99:2.2 (1087.5) 제도가 된 종교는 이제 악순환의 막다른 골목에 갇혀 있다. 그런 종교가 먼저 자체를 다시 만들지 않고는 사회를 재건할 수 없다. 기존 질서에 너무나 빠뜨릴 수 없는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사회가 근본적으로 재건되기까지 그런 종교는 자체를 다시 만들 수 없다.
99:2.3 (1087.6) 종교가는 사회에서, 산업에서, 정치에서 개인으로서 활동해야 하지만, 집단이나 정당이나 기구(機構)로서 활동해서는 안 된다. 종교 활동을 제쳐놓고, 그러한 자격으로 주제넘게 활동하는 종교 집단은 당장에 정당, 경제 조직, 또는 사회 기구가 된다. 집단적 종교 활동은 종교 운동의 육성에 그 노력을 국한해야 한다.
99:2.4 (1087.7) 종교가 종교가들에게 향상된 우주 통찰력을 주었고,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하늘나라에 있는 형제로서 사랑하려는 진지한 소망에서 태어난, 그 우수한 사회적 지혜를 부여한 것을 제외하면, 사회를 재건하는 과제에서 종교가는 비종교가보다 더 가치가 없다. 이상적 사회 질서 속에서는 누구든지 제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한다.
99:2.5 (1087.8) 제도화된 교회는 기존의 정치ㆍ경제적 질서를 영화롭게 함으로 지난날에 사회에 소용이 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살아남으려면 그 교회는 그러한 활동을 재빨리 그쳐야 한다. 제도화된 교회에 유일하게 적절한 태도는 비폭력을, 곧 폭력을 쓰는 개혁 대신에, 평화로운 진화의 교리―땅에서 평화를 지키고 모든 사람 사이에 선의를 가지는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99:2.6 (1088.1) 현대의 종교는 오직 그 자체가 너무나 철저히 전통이 되고, 독단이 되고, 제도화되도록 버려두었기 때문에, 빨리 움직이는 사회의 변화에 대하여 그 태도를 조정하기가 어려움을 발견한다. 생생하게 체험하는 종교는 이 모든 사회 발전과 경제의 격변을 앞서 가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고, 그 와중에서 그런 종교는 도덕을 안정 시키고 사회를 안내하고 영적으로 인도하는 장치로서 늘 작용한다. 참 종교는 가치 있는 문화,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그와 같이 되려고 애쓰는 체험에서 생겨나는 그 지혜를 한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전해 준다.
99:3.1 (1088.2) 초대 기독교는 모든 국내의 분규, 사회적 책임, 경제 연맹에 전혀 매이는 일이 없었다. 오직 후일에 제도화된 기독교가 서양 문명의 정치 및 사회 구조의 유기적 일부가 되었다.
99:3.2 (1088.3) 하늘나라는 사회 질서도 경제 질서도 아니다. 순전히 하나님을 아는 개인들의 영적 형제 단체이다. 그러한 단체는 본래, 놀라운 정치ㆍ경제적 반응이 뒤따르는, 새롭고 놀라운 사회 현상인 것이 참말이다.
99:3.3 (1088.4) 신자는 사회의 고통에 무심하지 않고 국가의 불공정한 처사에 무관심하지 않으며, 경제적 견해를 무시하지 않고 전제(專制) 정치에 대하여 감각이 무디지도 않다. 개별 시민을 영적ㆍ이상적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에 종교는 사회의 재건에 직접 영향을 준다. 문화가 있는 문명은 이 개별 신자들이 다양한 사회ㆍ도덕ㆍ경제ㆍ정치 집단에서 활발하고 영향력 있는 구성원이 됨에 따라서 그들의 태도에 간접으로 영향을 받는다.
99:3.4 (1088.5) 높은 문화를 가진 문명을 이룩하는 것은 먼저 이상적 부류의 시민을 요구하며, 다음에 그러한 시민이 그러한 진보된 인간 사회의 경제 및 정치 제도를 통제할 수 있는, 이상적이고 적당한 사회 장치를 요구한다.
99:3.5 (1088.6) 지나친 거짓 감정 때문에, 교회는 혜택을 적게 받고 불운한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봉사해 왔고, 이것은 모두 좋았다. 그러나 바로 이 감정은 문명의 진보를 엄청나게 더디게 만든 핏줄, 종족에서 퇴화된 핏줄들을 지혜롭지 못하게 영속하게 만들었다.
99:3.6 (1088.7) 사회를 재건하려는 많은 개인은 제도화된 종교를 맹렬히 거부하면서, 결국 그들의 사회 개혁을 퍼뜨리는 데 열렬한 종교심을 가진다. 그래서 개인적이며 대체로 인식되지 않은 그 종교적 동기가 사회를 재건하는 현대의 예정표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99:3.7 (1088.8) 인정되지 않고 의식하지 않은 종류의 이 모든 종교 활동이 가진 큰 약점은 공개된 종교적 비판으로부터 이득을 얻고, 그렇게 함으로 유익한 수준까지 자기 수정(修正)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건설적 비평으로 단련받고, 철학으로 확대되고, 과학으로 정화(淨化)되고, 충성스러운 친교로 자양분을 받지 않으면, 종교는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다.
99:3.8 (1088.9) 전쟁하는 시기에 싸우는 각 나라가 그 종교를 군사 선전에 팔아넘길 때처럼, 종교가 거짓된 목표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왜곡되고 타락할 큰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사랑이 없는 열심은 반드시 종교에 해롭고, 한편 박해는 종교 활동을 어떤 사회의 추세나 신학의 추세를 따르는 방향으로 돌린다.
99:3.9 (1089.1) 종교는 오직 다음 방법으로 이 세상과 더러운 결속을 계속 피할 수 있다:
99:3.10 (1089.2) 1. 비판적으로 수정하는 철학.
99:3.11 (1089.3) 2. 어떤 사회ㆍ경제ㆍ정치적 연합에도 매이지 않는다.
99:3.12 (1089.4) 3. 창조적이고 사람을 위로하고 사랑을 확대하는 친교.
99:3.15 (1089.7) 신자들은 하나의 집단으로서 결코 종교 외에 어떤 것에도 아랑곳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러한 어떤 신자도, 한 개별 시민으로서, 어떤 사회나 경제나 정치의 재건 운동에 뛰어난 지도자가 되어도 좋다.
99:3.16 (1089.8) 어렵기는 해도 바람직한 이 모든 사회 봉사를 촉진하는 데 성공을 거두기까지 개별 시민을 인도하도록, 우주에 대하여 개별 시민의 충성심을 일으키고, 유지하고 북돋아 주는 것이 종교가 할 일이다.
99:4.1 (1089.9) 진정한 종교는, 신자를 사회에서 매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인간의 친교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부여한다. 그러나 종교 집단의 형식화는 그 집단이 조직하고 추진하려는 바로 그 가치 기준을 파괴하는 일이 흔하다. 인간의 친교와 신성한 종교는, 각각 그 성장이 평준화되고 조화되면 서로에게 유익하고 귀중하게 빛을 비춰줄 것이다. 종교는 모든 집단 관계에―가족ㆍ학교ㆍ클럽에―새로운 의미를 불어넣는다. 종교는 사용할 새 가치 기준을 나누어 주고 모든 참 유머를 높인다.
99:4.2 (1089.10) 사회의 지도층은 영적 통찰력으로 인하여 변화된다. 종교는 모든 집단 운동이 그 참된 목표를 잃지 않게 한다. 종교가 살아 있고 성장하는 신앙이라면, 종교는 아이들과 함께 가족 생활을 조화시키는 좋은 약이다. 아이들 없이는 가족 생활을 누릴 수 없다. 종교가 없이도 가족 생활은 할 수 있지만, 그러한 장애는 이 밀접한 인간 관계에 문제가 엄청나게 불어나게 만든다. 20세기의 처음 몇십 년 동안에, 가족 생활은 개인의 종교적 체험 다음으로 가장 크게 피해를 보는데, 이러한 피해는 종교적 충성으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의미와 가치 기준으로 이동하는 데 따르는 퇴폐로부터 생긴다.
99:4.3 (1089.11) 참된 종교는 일상 생활의 평범한 현실과 마주쳐서 힘차게 살아가는 뜻깊은 방법이다. 그러나 개인의 인품 개발을 자극하고 조정된 인격을 키우려면, 종교는 표준화되어서는 안 된다. 체험의 평가를 자극하고 가치 기준이자 미끼로서 쓰이려면, 종교가 판에 박혀서는 안 된다. 최고의 충성심을 권장하려면, 종교는 형식화되어서는 안 된다.
99:4.4 (1089.12) 문명의 사회적ㆍ경제적 성장에 무슨 격변이 따르는가에 상관 없이, 종교가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이 지배하는 그러한 체험을 개인 속에서 키워준다면 진정하고 가치가 있으니, 그러한 것이 최상 실체의 참된 영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사랑과 예배를 통해서 사람이 서로 친교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됨으로 뜻있게 된다.
99:4.5 (1090.1) 결국, 사람이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믿는가가 행위를 결정하고 개인의 성과를 지배한다. 순전히 사실에 관한 지식은, 감정으로 활성화되지 않으면, 보통 사람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의 활성화는 감정을 초월하며, 필사자의 인생에서 영적 에너지와 접촉함으로, 그리고 그 에너지의 방출을 통해서 초월 수준에서 인간 체험 전체를 조화시킨다.
99:4.6 (1090.2) 20세기의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시대에, 과학 시대의 회오리바람 같은 과도기에 생긴 경제적 격변, 서로 부딪치는 도덕의 풍조, 사회 문제의 역류 속에서, 허다한 남녀가 사람으로서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이들은 안달하고, 들떠 있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안정되지 않았다. 세계 역사에서 유례가 없게, 이들은 건전한 종교의 위로와 안정감이 필요하다. 전례 없는 과학적 성취와 기계의 발전을 직면하여, 사람들은 영적 침체와 철학의 혼란에 빠져 있다.
99:4.7 (1090.3) 종교가 사심 없이, 사랑으로 사회에 봉사하는 동기를 잃지 않으면, 종교가 점점 더 사사로운 문제가 되어도 아무 위험이 없다. 종교는 도시화ㆍ기계화와 함께, 많은 2차 영향, 즉 갑작스러운 문화의 혼합, 신조들의 상호 혼합, 교회 권한의 축소, 가족 생활의 변화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99:4.8 (1090.4) 사람의 가장 큰 영적 위협은 부분적 진보에 있으며, 성장을 미처 마치지 못하여 곤경에 빠지는 것이다. 진화된 종교, 두려움의 종교를 버리면서, 계시된 종교, 사랑의 종교를 즉시 붙잡지 못하는 것이다. 현대 과학, 특히 심리학은, 오직 두려움ㆍ미신ㆍ감정에 대체로 의존하는 종교들만 약화시켰다.
99:4.9 (1090.5) 과도기에는 반드시 혼란이 따르며, 다음 세 가지 경쟁하는 종교 철학 사이에 큰 투쟁이 끝날 때까지, 종교 세계에 평안이 거의 없을 것이다:
99:4.10 (1090.6) 1. 많은 종교에서 심령 현상(섭리적 신)을 믿는 믿음.
99:4.13 (1090.9) 우주의 실체에 다가가는 이 세 가지 부분적 접근법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로부터 진행하는 영ㆍ지성ㆍ에너지, 이 세 가지가 일치되어 존재하며 최상위 신 안에서 시공의 통일이 성취됨을 묘사하는 종교ㆍ철학ㆍ우주론의 계시적 발표로 궁극에 조화되어야 한다.
99:5.1 (1090.10) 종교는 순전히 개인의 영적 체험―하나님이 아버지임을 아는 것―이지만, 이 체험의 필연적 결과―사람이 형제임을 아는 것―에는 타아(他我)들에 대한 자아의 조정이 따르며, 이것은 종교 생활의 사회적 모습, 집단의 모습을 포함한다. 종교는 먼저 마음 속의 조정, 개인적 조정이며, 다음에 종교는 사회 봉사, 집단 조정의 문제가 된다. 사람이 사교성을 가진 사실은 어쩔 수 없이 종교 집단이 생길 것을 결정한다. 이 종교 집단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총명한 지도층에 아주 크게 달려 있다. 원시 사회에서 종교 집단은 반드시 경제 집단이나 정치 집단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종교는 언제나 도덕을 유지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장치였다. 현대에 많은 사회주의자와 인도주의자가 반대로 가르치고 있는데도, 이것은 아직도 참말이다.
99:5.2 (1091.1) 언제나 기억할지어다: 참 종교는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이고 사람이 너희 형제임을 아는 것이다. 종교는 벌을 받는 위협이나 앞날에 신비로운 보상을 받는다는 마술같은 약속을 종처럼 믿는 것이 아니다.
99:5.3 (1091.2) 예수의 종교는 인류를 움직이는 가장 힘찬 영향력이다. 예수는 전통을 산산조각 내고 독단을 파괴했으며, 시간 세계와 영원 속에서 가장 높은 이상을 성취하라―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 같이 완전하라―고 인류를 불렀다.
99:5.4 (1091.3) 종교 집단이 모든 다른 집단―하늘 나라의 영적 구성원의 사회적 모임―과 분리될 때까지, 종교는 활동할 기회가 거의 없다.
99:5.5 (1091.4) 사람이 온통 타락했다는 교리는, 종교가 사람을 향상시키는 성질과 사회에 귀중한 영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많이 없앴다. 예수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 선언했을 때, 그는 사람의 위엄을 회복하려고 애썼다.
99:5.6 (1091.5) 신자를 영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효과 있는 어떤 종교 관념도, 그러한 신자의 사회 생활에서 분명히 강력한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종교적 체험은 영이 인도하는 사람의 일상 생활에서 어김없이 “영의 열매”를 맺는다.
99:5.7 (1091.6) 사람들은 자기의 종교적 믿음을 나누는 것과 똑같이 확실하게, 궁극에 공통된 목표를 창조하는, 어떤 종류의 종교 집단을 만들어낸다. 언젠가 신자들은 함께 모여서 통일된 이상과 목적에 기초를 두고 실제로 협동할 것이요, 심리학 의견과 신학 관념에 근거를 두고서 협동하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신조(信條)가 아니라 목표가 신자들을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 참 종교가 개인의 영적 체험의 문제이므로, 개별 신자 각자가 그 영적 체험을 실현하는 것에 관하여 자신의 개인적 해석을 내리는 것이 불가피하다. “믿음”이라는 말이, 어떤 무리의 필사자들이 공통된 종교적 태도로 찬성할 수 있던 것을 신조로 만든 것이 아니라, 개인과 하나님의 관계를 대표하게 만들라. “네가 믿음을 가졌느냐? 그렇다면, 네 홀로 그 믿음을 간직하여라.”
99:5.8 (1091.7) 믿음이 오직 이상적 가치를 붙잡는 데 관여한다는 것은 신약의 어느 정의(定義)에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믿음이 바라는 사물의 본질이요, 보이지 않는 사물이 있다는 증거라고 선언한다.
99:5.9 (1091.8) 원시인은 자신의 종교적 확신을 말로 표현하는 데 거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종교는 생각으로 나타내기보다 춤으로 표현되었다. 현대인은 많은 신조를 생각해냈고, 종교적 신앙을 재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들어냈다. 앞날의 신자들은 자기의 종교를 생활에서 실천하고, 인간의 형제 정신에 마음을 다하여 봉사하는 데 몸을 바쳐야 한다. 사람의 종교적 체험이 아주 개인적이고 아주 숭고해서, 오직 “너무 깊은 곳에 있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으로만 그 체험을 깨닫고 표현할 수 있을 때가 무르익었다.
99:5.10 (1091.9) 예수는 추종자들이 때때로 모여서, 공통된 신앙을 가리키는 어떤 형식의 말씀을 외워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함께 모여서 실제로 무슨 일을 하라고―유란시아에서 그의 수여 생활을 기억하는, 공동체의 저녁을 먹으라고―정해 놓았을 뿐이다.
99:5.11 (1091.10) 그리스도가 영적 지도자의 최고의 이상이라고 제시하면서, 지난 시대에 국가나 종족의 깨우침에 기여한 사람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역사적 지도자였다는 것을 하나님을 의식하는 남녀가 부인하라고 감히 요구할 때, 기독교인은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지르는가?
99:6.1 (1092.1) 여러 종파로 갈라지는 것은 제도적 종교의 질병이요, 독단적 주장은 영적 성품을 종으로 만든다. 종교가 없는 교회보다는 교회가 없이 종교를 가지는 것이 훨씬 낫다. 20세기의 종교적 혼란은, 그 자체로서 저절로 영적 퇴폐를 가리키지 않는다. 혼란은 파괴에 앞설 뿐 아니라 성장이 있을 때에도 앞서 간다.
99:6.2 (1092.2) 종교를 사회 활동으로 만드는 데는 참된 목적이 있다. 집단 종교 활동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종교에 충성함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의 유혹을 크게 만든다, 최고의 가치 기준의 매력을 키운다, 사심 없이 친교하는 봉사를 향상한다, 가족 생활의 잠재성을 영화롭게 한다, 종교 교육을 촉진한다, 지혜로운 조언과 영적 안내를 마련한다, 모여서 예배보는 것을 격려한다. 모든 살아 있는 종교는 인간의 우정을 격려하며, 도덕을 보존하고 이웃의 복지를 촉진하며, 각 종교의 말씀, 영원한 구원의 말씀에 담긴 기본적 복음의 전파를 수월하게 만든다.
99:6.3 (1092.3) 그러나 종교가 제도화됨에 따라서, 종교가 선을 행할 힘은 줄어들고, 한편 악을 행할 가능성은 크게 늘어난다. 형식이 된 종교의 위험은 다음과 같다: 믿는 관념이 경직되고 감정이 분명한 형태가 된다, 세속화의 증가와 함께 기득권의 축적, 진리를 표준화시키고 경직되게 만들려는 경향, 종교가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봉사하는 옆길로 빠진다, 지도자들이 봉사자가 아니라 행정가가 되는 성향, 다른 종파 및 경쟁하는 파벌을 만드는 경향, 사람을 억압하는 교회 권한의 확립, 귀족 같은 “선민”의 태도가 생기는 것, 신성한 것에 대하여 거짓되고 과장된 관념을 조장하는 것, 종교를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고 예배를 고정시키는 것, 현재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과거를 존중하는 경향, 종교를 현대에 맞게 해석하지 못하는 것, 세속 기구의 기능과 얽히는 것. 여러 종교적 계급의 잘못된 차별을 낳는다. 정통성을 판결하는 참을성 없는 재판관이 된다. 모험을 좋아하는 젊은이의 흥미를 끌지 못하고, 영원한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유익한 말씀을 차츰 잃어버린다.
99:6.4 (1092.4) 형식적 종교는 하늘나라를 세우는 자로서 향상된 봉사를 베풀도록 사람을 해방하는 대신에, 사람들의 개인적 영적 활동을 제어한다.
99:7.1 (1092.5) 교회와 모든 다른 종교 집단이 비록 모든 세속 활동에 초연해야 하지만, 동시에 종교는 인간의 여러 제도의 사회적 조정을 방해하거나 늦추려고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인생은 더욱 의미 깊게 성장해야 한다. 사람은 자기의 철학을 개혁하고 종교를 정화(淨化)하는 일을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
99:7.2 (1092.6) 정치학은 사회 과학으로부터 배운 기술로, 종교 생활이 제공하는 통찰력과 동기를 가지고, 경제 조건과 산업을 재건해야 한다. 모든 사회 재건에서 종교는 초월적 목표, 당장의 일시적 목적을 뛰어넘는, 흔들리지 않는 목표에 안정된 충성심을 바치게 만든다. 환경이 급변하는 혼란의 와중에서, 필사 인간은 멀리 내다보는 우주 시각(視覺)으로부터 자양분을 얻는 것이 필요하다.
99:7.3 (1093.1) 종교는 사람에게 땅의 표면에서 용감하고 기쁘게 살라고 영감을 준다. 종교는 참을성과 정열, 통찰력과 열심, 동정심과 권력, 이상과 에너지를 연결한다.
99:7.4 (1093.2) 하나님의 통치 앞에서 명상하고, 신성한 의미와 영적 가치를 가진 여러 현실을 헤아리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현세의 문제를 지혜롭게 결정하거나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심을 뛰어넘을 수 없다.
99:7.5 (1093.3) 경제적으로 서로 의존하고 사회가 형제같이 지내는 것은 궁극에 형제 정신에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람의 천성은 꿈꾸는 자이지만, 과학은 사람을 정신차리게 만들며, 그래서 종교는 광신 반응으로 곤두박질하는 위험을 훨씬 줄이면서 사람을 당장 움직일 수 있다. 경제적 필요는 사람을 현실에 묶이게 만들고, 몸소 겪는 종교적 체험은 바로 이 사람이 항상 발전하고 진보하는 우주 시민이라는 영원한 현실과 얼굴을 마주하게 만든다.
100:0.1 (1094.1) 힘찬 종교 생활의 체험은 평범한 개인을 하나의 이상주의의 힘을 가진 인격자로 변화시킨다. 종교는 각 사람의 진보를 촉진함으로 모든 사람의 진보를 도우며, 모든 사람의 성취를 통해서 각자는 더욱 진보한다.
100:0.2 (1094.2) 다른 신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은 서로의 영적 성장을 자극한다. 사랑은 종교적 성장이 일어나는 토양―주관적 욕구의 만족이 아니라 객관적 매력―을 제공하지만, 그래도 사랑은 최고의 주관적 만족감을 낳는다. 종교는 일상 생활의 평범한 고역(苦役)을 귀중한 일로 만든다.
100:1.1 (1094.3) 종교는 의미의 성장과 가치 기준의 향상을 낳지만, 순전히 개인적인 평가가 절대적인 것의 수준으로 높아질 때 반드시 해악이 생긴다. 어린아이는 쾌락의 내용에 따라서 체험을 평가한다. 사람의 성숙도는 개인의 쾌락 대신에 더 고상한 의미를 찾는 정도, 아니 다양해진 생활 상황과 우주 관계에서 최고의 개념에 충성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높아진다.
100:1.2 (1094.4) 어떤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성장할 수 없고, 따라서 영적으로 고정되는 심각한 위험에 빠져 있다. 다른 시대에, 연속되는 문화에서, 그리고 진보하는 문명의 지나가는 단계에서, 의미의 성장을 위하여 준비가 있어야 한다. 성장을 억제하는 주요한 요소는 편견과 무지(無知)이다.
100:1.3 (1094.5) 모든 성장하는 어린아이에게 자신의 종교적 체험이 자랄 기회를 주어라. 이미 만들어진 어른의 체험을 아이에게 떠맡기지 말라. 기존 교육 체제를 통해서 해가 갈수록 조금씩 진보하는 것은, 영적 성장은커녕 반드시 지적 진보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어휘가 늘어난다고 인품이 성장한 것을 뜻하지 않는다. 단순히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진보가 성장을 참되게 가리킨다. 이상을 높이는 것, 가치 기준을 더욱 이해하는 것, 가치 기준의 새로운 의미, 그리고 최상의 가치 기준에 더욱 충성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의 성장을 가리킨다.
100:1.4 (1094.6) 아이들은 오직 어른 동료들이 충실해야 영구하게 감명을 받는다. 교훈이나 본보기조차 오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충실한 사람은 성장하는 사람이요, 성장은 감명을 주고 영감을 일으키는 현실이다. 오늘을 충성스럽게 살라―자라라―그러면 내일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올챙이가 가장 빨리 개구리가 되는 길은 순간마다 올챙이로서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100:1.5 (1094.7) 종교적 성장에 필수인 토양의 전제 조건은 자아를 실현하는 진취적 생활, 타고난 성향의 조정, 호기심을 따르고 적당한 모험을 즐기는 것, 만족한 느낌을 맛보는 것, 정신 차리고 깨어 있도록 자극하는 두려움의 작용, 놀라움의 매력, 그리고 자신이 보잘것 없음을 정상으로 의식하는 것, 즉 겸손이다. 성장은 또한 자아의 발견과 그에 따른 자기 비평―양심―에 의존하며, 이는 양심이 참말로 사람이 자신의 가치 기준과 습관, 개인의 이상에 따라서 스스로를 비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00:1.6 (1095.1) 종교적 체험은 몸의 건강, 물려받은 기질, 사회적 환경에 두드러지게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이 현세의 조건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헌신하는 내면의 영적 진보를 막지 않는다. 성장하고 자아를 실현하고 싶은 어떤 타고난 욕구가 모든 정상 필사자에게 있으며, 이것은 특별히 억제되지 않으면 작용한다. 영적 성장 잠재성을 가진 구성 자질을 기르는 확실한 기법은 최상의 가치 기준에 마음을 다하여 헌신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100:1.7 (1095.2) 사람은 종교를 주거나 받거나, 빌리거나 배우거나 잃어버릴 수 없다. 종교는 최종의 가치를 더욱 추구하는 데 비례하여 성장하는 개인적 체험이다. 따라서 우주적 견지에서 성장은 의미가 쌓이고 가치 기준이 늘 높아지는 것을 돕는다. 그러나 사람의 고귀함 그 자체는 언제나 의식하지 않고 성장한다.
100:1.8 (1095.3) 생각하고 행동하는 종교적 버릇은 영적 성장 체제에 기여한다. 사람은 영적 자극에 유리하게 반응하도록, 일종의 영적 조건 반사(反射)를 일으키도록, 종교적 성향을 개발할 수 있다. 종교적 성장을 유리하게 만드는 버릇에는 신성한 가치에 대한 발달된 감수성, 남의 종교 생활의 인식, 우주적 의미가 있는 것을 돌이켜보는 명상, 경건한 마음으로 문제를 푸는 것, 자기의 영적 생활을 동료들과 나누기, 이기심의 회피, 신의 자비를 주제넘게 바라지 않는 것, 하나님 앞에 서 있듯 사는 것을 포함한다. 종교적 성장의 여러 요인은 의도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성장 그 자체는 어김없이 의식하지 않고 일어난다.
100:1.9 (1095.4) 그러나 종교적 성장이 의식하지 않고 일어나는 성질은 그 성장이 인간 지능의 하의식(下意識)이라 생각되는 영역에서 일어나는 활동임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필사자 지성의 상의식(上意識) 수준에 있는 창조적 활동임을 가리킨다. 의식하지 않고 종교적으로 성장하는 현실을 깨닫는 체험은 상의식 기능이 존재함을 가리키는 하나의 분명한 증명이다.
100:2.1 (1095.5) 영적 발전은 첫째로, 참 영적 세력과 생생한 영적 연락을 유지하고, 둘째로 영적 열매를 줄곧 맺는 것에 달려 있다. 즉 사람이 영적 은인으로부터 받은 것을 동료들에게 베푸는 것이다. 영적 진보는 사람이 영적으로 부족함을 머리로 인식하고, 아울러 완전을 향한 욕구, 하나님을 알고 그와 같이 되려는 욕구, 마음을 다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목적을 자의식하는 데 달려 있다.
100:2.2 (1095.6) 영적 성장은 처음에 필요를 각성하고, 다음에 의미 있는 것을 헤아리며, 그리고 나서 가치 기준을 발견하는 것이다. 참된 영적 성장이 일어나는 증거는 사랑으로 동기를 얻고, 사심 없는 봉사로 인하여 자극받고, 신의 완전한 이상을 진심으로 공경하는 마음에 지배된 인격을 전시하는 데 있다. 이 체험 전부가 종교의 실체이며, 단순한 신학적 관념과 대조가 된다.
100:2.3 (1095.7) 종교는 우주에 대하여 영적으로 반응하는 기법, 깨우침을 받은 지혜로운 기법이 되는 체험 수준까지 진보할 수 있다. 그렇게 영화로운 종교는 인격의 세 수준, 지성ㆍ상물질ㆍ영 수준에서, 즉 지성에 대하여, 진화하는 혼 속에서, 깃드는 영과 함께 활동할 수 있다.
100:2.4 (1096.1) 영적 수준은 사람이 하나님과 가까움을 가리키는 지표이자 사람이 동료 존재들에게 쓸모 있음을 재는 자가 된다. 영적 성향은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의미 있는 것에 담긴 진리를 헤아리고, 가치 기준에 담긴 선을 발견하는 능력을 높여 준다. 영적 발전은 발전하는 능력에 따라 결정되며, 사랑의 이기적 성질을 없애는 데 비례하여 커진다.
100:2.5 (1096.2) 실제의 영적 상태는 신에 도달한 정도, 조절자와 조화된 정도를 측정한다. 궁극의 영적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최대의 실체에 이르는 것, 하나님다운 모습의 극대화와 대등하다. 영생은 무한한 가치 기준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다.
100:2.6 (1096.3) 인간이 자아를 실현하는 목표는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 유일하게 얻으려고 애쓸 가치가 있는 것은 신답고, 영적이고, 영원하다. 필사 인간은 육체의 기쁨을 즐기고 인간적 사랑에서 얻는 만족감을 누릴 자격이 있다. 그는 인간 관계와 현세의 제도에 충실함으로 이익을 얻는다. 그러나 이것들은 공간을 뛰어넘고, 시간을 극복하고, 신다운 완전함을 얻고 최후자로 봉사하는 영원한 운명을 성취할 불멸의 인격을 기르기 위한 영원한 기초가 아니다.
100:2.7 (1096.4) “하나님을 알고 하늘나라를 믿는 자에게 땅에 있는 만물이 무너진다 해도 무슨 상관이냐?”하고 말했을 때, 예수는 하나님을 아는 필사자의 깊은 확신을 보여주었다. 현세의 안전은 사라지기 쉽지만, 영적 보장은 깨어질 수 없다. 인간의 곤경ㆍ이기심ㆍ잔인ㆍ미움ㆍ악의ㆍ질투의 큰 물결이 필사자의 혼을 내려칠 때, 너희는 마음 속에 한 거점,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영의 요새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안심해도 좋다. 깃드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에게 자기의 혼을 맡기려고 바친 모든 인간에게 적어도 이것이 참말이다.
100:2.8 (1096.5) 차츰차츰 성장하든지 특정한 위기로 인하여 도달하든지 상관 없이, 그러한 영적 달성이 있은 뒤에, 새 가치 기준이 생길 뿐 아니라 인격의 새로운 적응이 일어난다. 영에게서 태어난 그러한 개인들은 인생에 다시 자극받으며,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포부가 물거품이 되고 아주 간절한 꿈이 깨어지는 동안에 차분히 구경할 수 있다. 그들은 그러한 재난이 단지, 우주에서 새롭고 더 숭고한 성취 수준에서 더 고귀하고 오래 가는 실체들을 육성하기 전에, 사람이 현세에 창조한 것을 부서뜨리는, 방향을 바꾸는 격변인 줄 분명히 안다.
100:3.1 (1096.6) 종교는 정적(靜的)이고 지극한, 정신의 평안을 얻는 기법이 아니다. 종교는 힘찬 봉사를 위하여 혼을 가라앉히는 충동이다. 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시중드는 충실한 봉사에 자아 전체가 지원하는 것이다. 종교는 최고의 목표, 영원한 상을 얻는 데 필수인 어떤 값이라도 치른다. 종교적 충성에는 완벽하게 바치는 마음이 있으며, 이것은 뛰어나게 숭고하다. 이 충성심은 사회적으로 효과 있고 영적 진취성이 있다.
100:3.2 (1096.7) 신자에게 하나님이란 낱말은 사람이 최고의 실체에 접근하고 신성한 가치를 인식하는 것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사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선악을 좌우하지 않는다. 도덕적 가치는 소망의 성취나 감정의 좌절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100:3.3 (1096.8) 가치 기준을 숙고할 때, 너희는 가치 그 자체와 가치가 있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너희는 즐거운 활동, 그리고 늘 점진적으로 더욱 높아지는 인간 체험의 수준에서 즐거운 활동을 뜻 있게 통합하고 더 낫게 진행하는 것, 이 둘 사이의 관계를 헤아려야 한다.
100:3.4 (1097.1) 의미는 체험이 가치 기준에 더하는 무엇이다. 의미는 가치 기준을 이해하여 의식하는 것이다. 혼자서만 누리는 순전히 이기적 기쁨은 실질적으로 목적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상대적 악에 가까워지는 의미 없는 쾌락을 암시할지 모른다. 실체들이 의미가 있고 정신적으로 연결될 때, 지성이 그러한 관계들을 인식하고 이해할 때, 가치는 사람이 체험하는 것이다.
100:3.5 (1097.2) 가치 기준은 결코 정지(靜止) 상태에 있을 수 없다. 실체는 변화, 성장이 있음을 가리킨다. 성장이 없이, 의미가 확대되고 가치가 높아지는 일이 없이, 변화는 가치가 없다―악이 될 가능성이 있다. 우주에 적응이 잘 되어 있을수록, 어떤 체험이라도 더 많은 중요성을 가진다. 가치는 개념의 착각이 아니다. 가치 기준은 실재하지만 반드시 관계라는 사실에 의존한다. 가치 기준은 언제나 실재하면서도 잠재한다―지난날에 어떠했던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것이요, 그리고 앞으로 있을 것이다.
100:3.6 (1097.3) 실재하는 것과 잠재하는 것을 연결하면 성장이 된다, 가치가 체험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은 그저 전진하는 것은 아니다. 전진은 언제나 의미가 있지만, 성장이 없으면 전진은 비교적 가치가 없다. 인생에서 최고로 값진 것은 가치 기준의 성장, 의미 있는 것들의 진보, 그리고 이 두 체험이 우주에서 서로 관계되는 것을 깨닫는 데 있다. 그러한 체험은 하나님을 의식함과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필사자는 자연을 초월하지는 않더라도, 참으로 인간을 초월하고 있다. 죽지 않는 혼이 생성되고 있다.
100:3.7 (1097.4) 사람은 성장을 일으킬 수 없어도 유리한 조건을 마련할 수 있다. 육체의 성장이거나, 지능의 성장이거나 영적 성장이거나 상관 없이, 성장은 반드시 의식하지 않고 일어난다. 따라서 사랑은 자란다. 사랑을 창조하거나, 만들어 내거나, 돈으로 살 수 없다. 사랑은 자라야 한다. 진화는 성장을 일으키는 우주 기법이다. 사회의 성장은 법을 세운다고 보장할 수 없고, 행정을 개선한다고 도덕의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은 기계를 만들어낼지 모르지만, 기계의 진정한 가치는 인간의 문화와 개인의 평가로부터 얻어야 한다. 사람이 성장에 유일하게 기여하는 것은 인격의 온 힘을―살아 있는 믿음을―동원하는 것이다.
100:4.1 (1097.5) 종교 생활은 헌신하는 인생이고, 헌신하는 인생은 창조하는 인생이요, 독창적이고 자연스러운 인생이다. 새로운 종교적 통찰력은 갈등에서 생겨나며, 갈등은 예전에 열등하게 반응하는 형식 대신에, 새롭고 더 낫게 반응하는 버릇의 선택을 개시한다. 새 의미가 있는 것들은 오로지 갈등 속에서 솟아난다. 오직 우수한 의미가 있는 것들에 담긴 상급 가치를 지지하지 않을 때에야 갈등이 지속된다.
100:4.2 (1097.6) 종교적 혼란은 피할 수 없다. 정신적 갈등과 영적 동요가 없이 아무런 성장이 있을 수 없다. 철학적 생활 기준을 세우는 것은 지성의 철학 영역에서 어지간한 소동을 일으킨다. 투쟁이 없이는 위대하고 선하고 참되고 고귀한 것들을 위한 충성심이 우러나지 않는다. 영적 시력이 맑아지고 우주 통찰력이 향상될 때 노력이 따른다. 인간의 지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비영(非靈) 에너지를 먹고 살다가 젖떼듯 떨어져 나가는 것에 저항한다. 게으른 짐승 같은 지성은 우주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씨름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려고 저항한다.
100:4.3 (1097.7) 그러나 종교 생활에서 큰 문제는 사랑이 지배함으로 인격자의 혼의 능력을 통일하는 과제에 있다. 건강, 정신의 효율성, 행복은 육체 체계, 지성 체계, 영 체계가 통일되었을 때 생겨난다. 사람은 건강과 위생에 관하여 이해하는 것이 많지만, 행복에 관해서 참으로 거의 깨우친 것이 없다. 가장 높은 행복은 영적 진보와 떼어낼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영적 성장은 오래 가는 기쁨, 너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평화를 낳는다.
100:4.4 (1098.1)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감각은 사물의 존재에 대하여 일러준다. 지성은 의미 있는 것들의 현실성을 발견하지만, 영적 체험은 개인에게 인생에서 참된 가치가 있는 것들을 드러낸다.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함으로, 사심 없이 사람을 사랑함으로, 인간 생활의 이 높은 수준에 이른다. 네가 동료 인간을 사랑하면, 너는 그들의 가치를 발견했음이 틀림없다. 예수가 사람을 그토록 사랑한 것은 사람을 무척 귀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너는 동료들의 동기를 발견함으로 그들의 가치를 가장 쉽게 발견한다. 누가 너를 짜증나게 하고 분개하는 느낌이 일게 하면, 너는 동정심을 가지고 그렇게 불쾌한 행위를 하는 그의 관점, 이유를 헤아리려고 애써야 한다. 일단 이웃을 이해하면, 너는 너그러워질 터이고, 이러한 너그러움은 자라서 우정이 되고 무르익으면 사랑이 될 것이다.
100:4.5 (1098.2) 정신의 눈을 뜨고서, 사람이 동굴에서 살던 시절에 네 원시 조상 중에 한 사람의 그림을 상상해 보아라―키가 작고, 보기 흉하고, 더럽고, 으르렁거리는 뚱뚱이이며, 바로 앞을 무섭게 쏘아보면서, 다리를 벌리고 서서, 곤봉을 치켜올리고, 미움과 적개심으로 씩씩거린다. 그러한 그림은 도저히 사람의 신다운 위엄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그림을 확대해 보자. 활기가 생긴 이 인간 앞에 칼이를 가진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고, 그 사람 뒤에는 한 여자와 두 아이가 있다. 그러한 그림이 인류 중에서 훌륭하고 고귀한 많은 것의 시작을 나타낸다는 것을 네가 즉시 깨닫지만, 그 사람은 이 두 그림에서 똑같다. 오직 이 둘째 스케치에서 너는 넓어진 시야의 덕을 보고 있다. 거기서 너희는 이 진화하는 필사자의 동기를 헤아린다. 너희가 그를 이해하기 때문에, 그의 태도는 칭찬할 가치가 있게 된다. 오직 동료들의 동기를 헤아릴 수만 있다면, 너희가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더 쉬워질까. 동료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너희는 결국 그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100:4.6 (1098.3) 너는 단순히 의지(意志)하는 행위로 참으로 동료를 사랑할 수는 없다. 오직 이웃의 동기와 감정을 속속들이 이해하는 데서 사랑이 태어난다. 오늘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루하루 네가 한 사람 더 사랑하기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하루 또는 한 주 한 주, 동료 중에 또 한 사람을 이해하는 일을 해낸다면, 그리고 이것이 네 능력의 한계라면, 너는 분명히 친교하고 있고 네 인격을 참으로 영적으로 변화시킨다. 사랑은 전염되며, 사람이 총명하고 지혜롭게 헌신할 때, 사랑은 미움보다 더 잘 번진다. 그러나 오직 진정하고 사심 없는 사랑이라야 참으로 전염된다. 각 필사자가 오직 힘찬 애정을 퍼붓는 초점이 될 수만 있다면, 사랑을 옮기는 이 유익한 바이러스는 곧 인류의 감정 흐름에 크게 침투해서, 모든 문명이 사랑으로 휩싸일 터이고, 그것이 사람의 형제 정신의 실현일 것이다.
100:5.1 (1098.4) 세상에는 길 잃은 혼이 가득하다. 신학적 의미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이 아니라, 방향 면에서 길을 잃었고, 좌절된 철학 시대의 여러 주의와 종파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종교적 권한에 복종하는 대신에 어떻게 생활 철학을 세우는가를 배운 사람들의 수가 너무 적다. (강의 바닥이 강은 아니지만, 성장의 경로인 사회화된 종교의 상징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100:5.2 (1098.5) 종교적 성장의 발걸음은 침체로부터 갈등을 거쳐서 조정된 길로, 불안한 상태로부터 의심하지 않는 믿음으로, 혼란스러운 우주 의식으로부터 통일된 인격으로, 현세의 목표로부터 영원한 목표로, 두려움에 사로잡힌 처지로부터 신의 아들이 되는 자유로 이끈다.
100:5.3 (1099.1) 최고의 이상에 충성함을 고백하는 것―하나님을 의식함을 정신으로, 감정으로, 영적으로 깨닫는 것―은 자연스러운 점진적 성장일 수도 있고, 아니면 위기의 경우처럼, 때때로 어떤 길목에서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 중대한 날에 다마스커스 길에서 바로 그러한, 갑작스럽고 대단한 감화를 받았다. 고타마 싯달타는 혼자 앉아서 궁극의 진리의 신비를 파고들려고 애쓴 그날 밤에 비슷한 체험을 했다. 많은 다른 사람도 비슷한 경험을 했고, 많은 참 신자가 갑작스러운 감화 없이 영적 진보를 이루었다.
100:5.4 (1099.2) 이른바 종교적 감화와 연결된 대단한 현상의 대부분은 전적으로 심리적 성질을 가졌지만, 영적 기원을 가진 체험이 이따금 일어난다. 영적 달성을 향하여 정신적으로 발돋움하는 어떤 수준에서도 절대로 온전히 정신을 기울일 때, 신다운 개념에 인간이 충성하는 동기가 완벽할 때, 믿는 필사자의 상의식(上意識) 지성의 목적, 집중되고 거룩하게 된 목적과 시간을 맞추려고 그 깃드는 영이 갑자기 내려와서 잡아채는 일이 무척 자주 생긴다. 통일된 지적ㆍ영적 현상을 그렇게 체험하는 것이 순전한 심리적 관계를 초월하는 요인에서 생기는 감화를 구성한다.
100:5.5 (1099.3) 그러나 감정만으로는 거짓된 감화이다. 사람은 느낌뿐 아니라 믿음도 가져야 한다. 그러한 정신을 일부 기울이는 그 한도까지, 그러한 인간의 충성심을 불완전하게 기울이는 그 한도까지, 감화 받는 체험은 지적 실체, 감정적 실체, 영적 실체의 혼합이 될 것이다.
100:5.6 (1099.4) 다른 면에서는 통일된 지적 생활에 실용적으로 소용되는 가정(假定)으로서, 사람이 이론적 하의식 지성을 인정하고 싶다면, 다음에 일관성을 지키기 위하여, 사람은 그에 상당하는 비슷한 영역, 더 높은 지적 활동이 있는 상의식 수준을 가정해야 한다. 이 상의식 수준은 깃드는 영 개체, 생각 조절자와 바로 접촉하는 지대이다. 이 모든 정신적 추측에 담긴 큰 위험은 놀라운 꿈과 함께, 환상과 기타 이른바 신비스러운 체험을 신이 인간 지성에게 전하는 것이라 여길지 모른다는 것이다. 지난 시절에, 신성한 존재들은 하나님을 아는 어떤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냈고, 그들이 신비스러운 황홀경이나 병적 환상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현상이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였다.
100:5.7 (1099.5) 감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 조절자와 접촉이 가능한 상물질 지대에 접근하는 더 좋은 방법은, 생생한 믿음과 진정한 예배, 마음을 다하는 사심 없는 기도를 통하는 것이리라. 인간의 지성이 의식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용솟음쳐 오르는 기억 중에 허다한 것이 신의 계시(啓示)요, 영의 인도라고 잘못 생각되어 왔다.
100:5.8 (1099.6) 버릇처럼 종교적 백일몽에 잠기는 습관과 관련하여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신비주의는 때때로 진정한 영적 교통 수단이었지만, 현실을 도피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인생의 바쁜 장면으로부터 잠시 물러나는 것은 심각한 위험이 아닐지 모르지만, 인격이 오랫동안 고립되는 것은 아주 바람직하지 못하다. 어떤 경우라도 환상을 의식하는 황홀경 같은 상태를 종교적 체험으로 길러서는 안 된다.
100:5.9 (1099.7) 신비스러운 상태의 특징은 비교적 수동적인 지능에 작용하면서 주의(注意)가 집중되는 선명한 점들과 함께 의식이 산만해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상의식인 영적 접촉 지대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의식을 향하여 의식을 끌어당긴다. 많은 신비주의자가 정신적 분리를 정신이 비정상으로 표현되는 수준까지 밀고 갔다.
100:5.10 (1100.1) 영적 명상에 잠기는 더욱 건전한 태도는, 돌이켜 신을 예배함으로, 그리고 감사드리는 기도에서 찾아야 한다. 육체를 입은 예수의 일생 후반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사람이 생각 조절자와 직접 교통하는 것을 이른바 이 신비의 체험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신비스러운 교통의 시작에 기여하는 요소들은 그러한 정신 상태가 위험한 것을 가리킨다. 육체의 피로, 금식, 정신의 분리, 깊은 아름다움을 의식하는 체험, 선명한 성욕 충동, 두려움ㆍ걱정ㆍ분노, 그리고 야단스러운 춤과 같은 것들이 신비스러운 상태를 촉진한다. 그러한 기초적 준비의 결과로서 생겨나는 많은 것들은 하의식 지성에서 기원을 가진다.
100:5.11 (1100.2) 신비 현상이 일어날 조건이 얼마나 유리했든지 상관 없이, 나사렛 예수는 파라다이스 아버지와 교통하기 위하여 결코 그런 방법을 쓴 적이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예수는 아무런 하의식의 망상이나 상의식의 착각을 겪지 않았다.
100:6.1 (1100.3) 진화된 종교와 계시된 종교는 방법이 뚜렷이 다를지 모르지만, 동기는 대단히 비슷하다. 종교는 생명의 특정한 기능이 아니라, 오히려 생활 방식이다. 참된 종교는 신자가 자신에게, 그리고 온 인류에게, 최고의 가치를 가졌다고 판단하는 어떤 실체에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 뛰어난 특징은 최고의 가치 기준에 의심 없이 충성하고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것이다. 최상의 가치 기준에 바치는 이 종교적 헌신은 종교심이 없다고 생각되는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에서, 그리고 종교가 없는 자들이 지지하는 운동에 열심히 충성을 바치는 데서 나타난다.
100:6.2 (1100.4) 신자가 인정하는 최고의 가치는 저속하거나 거짓일 수도 있지만, 그런데도 종교성이 있다. 최고로 여기는 가치가 참으로, 진정한 영적 가치를 가진 우주 실체인 그 한도까지, 종교는 진정하다.
100:6.3 (1100.5) 인간이 종교적 충동에 반응하는 표시는 고귀하고 위대한 성질을 띤다. 성실한 신자는 우주 시민임을 의식하고, 초인간 능력의 근원과 접촉함을 의식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우수하고 고결한 단체에 속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쁨에 떨고 활력을 얻는다. 가장 높은 우주 목표―최상의 목표―를 추구하는 자극으로 인하여 자아의 가치를 더욱 의식하게 된다.
100:6.4 (1100.6) 자아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동기의 충동, 흥미를 자아내는 충동에 무릎을 꿇었으며, 그 동기는 더욱 높은 자제를 부과하고 감정의 갈등을 줄이고 필사자의 인생을 참으로 살 가치가 있게 만든다. 인간의 한계의 병적 인식은, 가장 높은 우주 및 초우주 목표에 미치려는 도덕적 각오, 영적 포부와 관련하여 필사자의 결점을 자연히 의식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리고 인간을 초월하는 이상을 달성하려는 이 뜨거운 노력의 특징은 반드시 참을성ㆍ인내심ㆍ불굴ㆍ관대함이 늘어나는 것이다.
100:6.5 (1100.7) 그러나 참된 종교는 실천하는 사랑이요, 봉사하는 인생이다. 신자가 순전히 현세적이고 하찮은 많은 것에 초연하는 것은 결코 사회적 고립으로 이끌지 않으며, 초연하면서 유머 감각을 잃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종교는 인간 존재로부터 아무것도 빼앗지 않지만, 인생의 모든 것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준다. 그런 종교는 새 종류의 열심ㆍ열의ㆍ용기를 불러일으킨다. 십자군 정신까지도 불러일으킬지 모르며, 이것은 영적 통찰력으로, 그리고 인간이 충성하는 평범한 사회적 의무에 충실히 헌신함으로, 고삐를 쥐지 않으면 극도로 위험하다.
100:6.6 (1101.1) 종교 생활의 가장 놀라운 표시 중에 하나는 힘차고 숭고한 평안이니, 이것은 어떤 인간도 이해하기 힘든 평안이요, 모든 의심과 소동이 없음을 가리키는, 우주에 대한 자세이다. 그러한 수준의 영적 안정은 실망에 면역이 되어 있다. 그러한 신자들은 이렇게 말한 사도 바울과 같다: “죽음이나 삶이나, 천사나 군주나 권력이나, 현재 일이나 앞으로 다가올 일이나, 높이나 깊이나,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내지 못할 것을 내가 확신하노라.”
100:6.7 (1101.2) 승리하는 영광을 깨닫는 것과 관련하여 보장받는 느낌이 있으니, 이 느낌은 최상위의 실체를 깨달은 신자, 궁극위에 이르는 목표를 추구하는 신자의 의식 속에 거한다.
100:6.8 (1101.3) 진화된 종교가 진정한 체험이기 때문에, 진화된 종교조차 충성심과 위엄 면에서 이 모든 것이 해당된다. 그러나 계시 종교는 진정할 뿐 아니라 우수하다. 영적 시력이 확대됨으로 생기는 새로운 충성은 새 수준의 사랑과 헌신, 봉사와 친교를 창조한다. 그리고 향상된 이 모든 사회적 전망은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사람이 형제인 것을 더욱 크게 의식하게 한다.
100:6.9 (1101.4) 진화된 종교와 계시된 종교의 특별한 차이점은 새 품질의 신다운 지혜이니, 이 지혜가 순전히 체험으로 얻은 인간의 지혜에 더해진다. 그러나 인간의 종교 안에서, 그리고 그 종교와 더불어 얻는 체험은 더욱 내려주는 신다운 지혜와 우주 통찰력을 나중에 받을 능력을 개발시킨다.
100:7.1 (1101.5) 유란시아의 보통 필사자는 비록 나사렛 예수가 육체를 입고 머무르던 동안에 얻은 그 완벽한 인품의 높이까지 이르기를 바랄 수 없어도, 필사 신자는 누구나 예수의 인격이 완전해진 길을 따라서, 튼튼하고 통일된 인격을 개발하는 것이 아주 가능하다. 주의 인격의 독특한 모습은 그의 인격이 완전하기보다 균형된 것, 인격이 아름답게, 치우치지 않게 통일된 것이다. 예수를 가장 효과 있게 보여주는 것은 다음의 어떤 사람의 예이니, 예수를 고발하는 자들 앞에 서 있는 주를 향하여 손짓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을 보라!”
100:7.2 (1101.6) 예수의 어김없는 친절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지만, 그의 강건한 인품은 따르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참으로 성실했다. 그에게 아무런 위선이 없었다. 전혀 꾸밈이 없었고, 언제나 그는 무척 신선하게 진심이었다. 겉치레에 몸을 굽히지 않았고, 무엇인 체한 적이 없었다. 진리를 가르친 그대로 그는 진리를 실천하였다. 그는 바로 그 진리였다. 그의 세대에게 구원의 진리를 성실하게 선포하는 것이 때때로 고통을 가져왔지만, 그는 그런 진리를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의심하지 않고 모든 진리에 충성했다.
100:7.3 (1101.7) 그러나 주는 무척 분별이 있었고, 사람이 가까이할 수 있는 분이었다. 그가 베푼 모든 봉사는 대단히 실용적이었고, 한편 그의 모든 계획은 그러한 인가된 상식에 벗어나지 않는 특징을 가졌다. 기형(奇形)이고 유별나고 이상한 성향이 전혀 그에게 없었다. 그는 쉽게 변하거나, 변덕을 부리거나 히스테리를 보인 적이 없었다. 어떤 가르침에도, 무슨 일을 행해도, 특별한 예의 바른 감각과 아울러 언제나 지극한 분별이 있었다.
100:7.4 (1102.1) 사람의 아들은 언제나 매우 침착한 인물이었다. 적들조차 그에게 진지한 존경심을 보였다. 그들은 그가 앞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예수는 두려움이 없었다. 신다운 열심이 가득했지만, 결코 광신을 보이지 않았다. 감정이 살아 있어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상상력이 있었으나 언제나 실용적이었다. 그는 솔직하게 인생의 현실에 부딪쳤으나 결코 무디거나 단조롭지 않았다. 용기가 있어도 결코 무모하지 않았고, 신중했으나 결코 비겁하지 않았다. 동정심이 있어도 감상에 빠지지 않았고, 독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경건해도 거룩한 체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 매우 침착했으니, 인품이 아주 완전히 통일되었기 때문이다.
100:7.5 (1102.2) 예수의 독창성은 억눌리지 않았다. 그는 전통에 묶이거나 좁은 관습에 종처럼 순종함으로 지장을 받지 않았다. 의심 없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고, 절대 권한을 가지고 가르쳤다. 그러나 훌륭한 독창성이 있었어도 그의 선조와 그 시대 사람들의 가르침 속에 있는 진리의 보배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에서 가장 독창적인 것은 신을 두려워하고 희생물을 바치는 관습 대신에 사랑과 자비를 강조한 것이었다.
100:7.6 (1102.3) 예수는 대단히 넓은 견지에서 세상을 보았다. 그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도하라고 추종자들에게 타일렀다. 그는 전혀 마음이 좁지 않았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온 인류, 아니 한 우주조차도 담았다. 언제나 그는 이렇게 초청하였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올지어다.”
100:7.7 (1102.4) 예수에 관하여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였더라”하고 사람들이 참되게 말했다. 사람들 사이에 한 사람으로서 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주 숭고하게 의지했다. 어린아이가 땅에서 부모를 의지하는 것처럼 아버지를 의지했다. 그의 믿음은 완전했어도 결코 주제넘지 않았다. 자연이 아무리 모질게 보여도, 땅에 있는 사람의 복지에 아무리 개의치 않는 듯 보여도, 예수는 결코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실망에 면역(免疫)이 되었고, 박해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실패로 보이는 것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100:7.8 (1102.5) 그는 사람들을 형제처럼 사랑했고, 동시에 사람들의 타고난 자질과 얻은 성질이 어떻게 다른가 헤아렸다. “그는 두루 다니며 좋은 일을 하였더라.”
100:7.9 (1102.6) 예수는 드물게 명랑한 사람이었지만, 눈이 먼 분별 없는 낙관주의자가 아니었다. 늘 이렇게 훈계의 말씀을 주었다, “기운을 내라.” 확고히 하나님을 믿고 흔들리지 않고 사람을 신뢰했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자신 있는 태도를 지킬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믿었기 때문에, 언제나 감동을 주도록 사람들에게 마음을 썼다. 그래도 언제나 그의 신념에 충실했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에 헌신하려고 훌륭하게 각오가 굳었다.
100:7.10 (1102.7) 주는 언제나 너그러웠다. 그는 지치지 않고 말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도다.” 그는 말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한없이 너그러웠는데도, 그래도 그는 결코 낭비하거나 사치스럽지 않았다. 구원을 받으려면 너희가 믿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구하는 자는 누구든지 얻을지니라.”
100:7.11 (1102.8) 그는 솔직했으나 언제나 친절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죄인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한다고 거침없이 의견을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놀랍게 솔직하면서 내내 그는 어김없이 공정했다.
100:7.12 (1102.9) 때때로 인간적 슬픔의 잔을 깊숙이 들이켰는데도, 예수는 변치 않고 명랑했다. 두려움 없이 그는 존재의 현실에 부딪쳤고, 그래도 하늘나라 복음을 위한 열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열심을 자제했고, 결코 열심이 그를 지배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일”에 아낌없이 헌신했다. 이 신다운 열심은 영적 생각이 없는 형제들로 하여금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지만, 구경하는 우주는 그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의 모형이라고, 높은 수준의 영적 생활에 필사자가 최고로 헌신하는 본보기라고 그를 평가했다. 그리고 자제된 그의 열심은 쉽게 번졌다. 동료들은 그와 함께 신답게 낙관할 수밖에 없었다.
100:7.13 (1103.1) 이 갈릴리 사람은 슬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즐거운 사람이었다. “기뻐하고 지극히 즐거워하라”하고 늘 말했다. 그러나 의무가 요구할 때, “그늘진 죽음의 골짜기”를 기꺼이 용감히 걸었다. 즐거워했지만 동시에 겸손했다.
100:7.14 (1103.2) 그의 용기는 그의 참을성에 못지 않았다. 때이르게 행동하도록 압력을 받았을 때, 그는 오직 “내 때가 아직 다가오지 않았느니라” 대답하곤 했다.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의 차분한 자세는 탁월하였다. 그러나 악을 보고서 자주 분개하였고, 죄를 참지 못했다. 이따금 땅에 있는 자녀들의 복지에 해로운 것에 저항하도록 힘차게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죄를 분개하는 태도는 결코 죄인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지 않았다.
100:7.15 (1103.3) 그의 용기는 대단했지만 그는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 그의 표어는 “두려워 말라”는 것이었다. 그는 대단히 용기가 있었고, 때때로 영웅답게 용감했다. 그러나 그의 용기에 신중함이 있었고 이성(理性)으로 자제되었다. 그 용기는 믿음에서 생겨난 용기요, 함부로 맹목으로 주제넘게 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참으로 용감했지만 결코 만용을 부리지 않았다.
100:7.16 (1103.4) 주는 존경심의 본보기였다. 젊을 때에도 그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이 거룩하옵소서.” 그는 동료들이 그릇되게 숭배하는 것조차 존중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로 하여금 종교적 전통을 공격하거나 사람의 잘못된 관념을 공격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그는 참된 거룩함을 존중했고, 그래도 “너희 가운데 누가 나를 죄 있다고 선언하느냐?”하고 말하면서 동료들에게 온당하게 호소할 수 있었다.
100:7.17 (1103.5) 예수가 위대한 것은 선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는 어린아이들과 사귀었다. 부드러웠어도 사생활에서 잘난 체하지 않았고, 그래도 우주에서 완전해진 사람이었다. 동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를 주라고 불렀다.
100:7.18 (1103.6) 예수는 완전하게 통일된 인격자였다. 그리고 오늘날, 갈릴리에서 한 것처럼, 그는 계속 필사자의 체험을 통일하고 인간의 수고를 조정한다. 그는 생명을 하나가 되게, 인품을 고귀하게, 체험을 단순하게 만든다. 그는 인간의 지성 속에 들어가서 그 지성을 높이고 변화시키고 그 모습을 바꾼다. 이 말씀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마음 속에 가졌으면 새 사람이라. 오래된 것이 지나가고 있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고 있도다.”
101:0.1 (1104.1) 인간이 체험하는 종교는 진화하는 야만인이 원시적 두려움에 사로잡힌 상태로부터,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당당하게 의식하는, 그러한 문명화된 필사자가 숭고하고 훌륭한 신앙으로 해방을 얻는 수준까지 미친다.
101:0.2 (1104.2) 종교는 진취적 사회의 진화에서 생기는 상급 윤리 및 도덕의 근원이다. 그러나 종교 그 자체는 단지 도덕적 운동이 아니다. 하지만 종교가 겉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모습은 인간 사회의 윤리적ㆍ도덕적 운동력에 힘차게 영향을 받는다. 종교는 반드시 사람의 진화하는 성품에 영감을 주지만, 종교가 그 진화의 비결은 아니다.
101:0.3 (1104.3) 종교, 인격자의 확신과 믿음은, 믿지 않는 물질 지성에서 태어난 논리, 표면상 모순되는 절망의 논리를 반드시 이길 수 있다. 속에서 나오는 참되고 진정한 목소리, 바로 “세상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된 빛”이 정말로 있다. 이 영의 인도하심은 인간의 양심(良心)에서 우러나는 윤리적 재촉과 다르다. 종교적 확신을 가진 느낌은 감정보다 더한 것이다. 종교가 주는 확신은 머리로 따지는 이치, 아니 철학의 논리조차 뛰어넘는다. 종교는 믿음이요, 신뢰요, 확신이다.
101:1.1 (1104.4) 참된 종교는 자연의 증명으로 이치를 따지거나 타당함을 밝힐 수 있는 철학적 관념 체계가 아니며, 오직 낭만적인 신비주의 신봉자가 즐길 수 있는, 말할 수 없는 무아경(無我境)의 느낌에 젖는,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체험도 아니다. 종교는 논리의 산물이 아니지만, 안에서 볼 때 종교는 무척 이치가 있다. 종교는 인간 철학의 논리에서 생겨나지 않지만, 필사자의 한 체험으로서 무척 논리가 있다. 종교는 진화적 기원을 가진 도덕적 존재의 의식 속에서 신성을 체험하는 것이다. 종교는 시간 세계에서 영원한 실체들을 맛보는 참된 체험, 아직 육체를 입은 동안에 영적 만족을 얻는 것을 나타낸다.
101:1.2 (1104.5) 생각 조절자는 자신을 표현할 특별한 장치가 전혀 없다. 종교적 감정을 받아들이거나 나타내는 신비스러운 종교적 재능이 전혀 없다. 필사자의 지성에서 자연스럽게 정해진 작용을 통해서 이러한 체험을 겪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어째서 조절자가 항상 깃드는 그 물질 지성과 직접 교통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는가 한 가지 설명이 있다.
101:1.3 (1104.6) 신다운 영은 느낌이나 감정의 수단이 아니라, 가장 높고 가장 영적인 생각 분야에서 필사 인간과 접촉한다. 너희를 하나님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너희의 생각이지, 느낌이 아니다. 오로지 지성의 눈이 이 신다운 성품을 파악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을 정말로 헤아리고, 깃드는 조절자의 소리를 듣는 지성은 순수한 지성이다. “아무도 거룩하지 않고서 주를 보아서는 안 되느니라.” 마음 속의 모든 그러한 영적 교통은 영적 통찰력이라 언급한다. 그러한 종교적 체험은 하나님의 진화하는 아들들의 생각과 이상, 통찰력과 영적 노력이 있는 가운데서, 그리고 이것들 위에 조절자와 진리의 영이 활동하는 동안, 이 둘의 통합된 작용이 사람의 머리에 주는 인상으로부터 생긴다.
101:1.4 (1105.1) 그러면 시각(視覺)이나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과 통찰력으로 종교는 살아 있고 번성한다. 종교는 새 사실을 찾아내거나 독특한 체험을 발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류에게 이미 잘 알려진 사실에서 새로운 영적 의미를 찾아내는 데 있다. 가장 높은 종교적 체험은 믿음ㆍ전통ㆍ권한, 이러한 이전 행위에 달려 있지 않다. 종교는 숭고한 느낌과 순전한 신비스러운 감정의 산물도 아니다. 종교는 차라리 인간의 지성 안에 거주하는 영의 영향력과 영적 교통을 가지는 체험, 대단히 깊고 실재하는 체험이다. 그러한 체험을 심리학 용어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한, 종교는 다만 하나님을 믿는 현실을 맛보는, 그러한 순전히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현실로서 얻는 체험이다.
101:1.5 (1105.2) 종교는 물질적 우주론의 합리주의적 추측에서 생긴 산물이 아니지만, 그런데도 종교는 사람의 지성 체험에서 생기는 온전히 합리적 통찰력의 작품이다. 종교는 신비스러운 명상에서 태어나지 않고, 따로 떨어져 숙고함으로 생기지도 않는다. 하지만 종교는 늘 얼마큼 신비스러우며, 순전한 지적 이치와 철학적 논리 방식으로 반드시 정의를 내릴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참된 종교의 싹은 사람의 도덕 의식 분야에 기원이 있으며, 이 싹은 사람의 영적 통찰력의 성장에서 드러난다. 이 통찰력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필사 지성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생각 조절자가 계시는 결과로서 생기는, 인격자의 그 능력이다.
101:1.6 (1105.3) 믿음은 도덕적 통찰력과 가치 기준의 양심적 분별을 통합하며, 이전에 존재하던 진화적 의무 감각이 참된 종교의 족보를 완성한다. 종교에서 얻는 체험은 결국 어떤 하나님 의식, 그리고 믿는 인격자가 살아남는다는 의심 없는 확신을 낳는다.
101:1.7 (1105.4) 그러므로 종교적 열망과 영적 욕구는 단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하도록 이끌 그러한 성품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그러한 성품과 힘을 지녔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확신에 깊이 감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시의 빛을 받은 결과로서, 진화적 의무 및 책임 감각이 사람의 도덕적 성품에 아주 깊은 인상을 주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믿지 않을 권리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바로 그 지성의 위치와 바로 그 혼의 태도에 마침내 다다른다. 깨우치고 단련받은 그러한 개인들의 상급 지혜, 철학을 뛰어넘는 지혜는, 궁극에 그들에게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그의 선함을 불신하는 것은 인간의 지성과 혼 속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깊은 것―신다운 조절자―에 충실하지 않음을 입증할 것이라 가르친다.
101:2.1 (1105.5) 종교적 사실은 합리적이고 평범한 인간들이 겪는 종교적 체험으로 온전히 이루어진다. 오직 이런 뜻으로 종교가 과학적이라, 아니 심리적인 것이라고 언제라도 간주할 수 있다. 계시가 계시라는 증명은 인간이 체험하는 바로 이 사실이다: 계시는 겉보기에 서로 갈라지는 자연 과학, 그리고 종교에 관한 신학, 이 두 가지를 일관성 있고 논리적인 하나의 우주 철학으로, 즉 과학과 종교를 일치된 완전한 설명으로, 통합한다는 사실이며, 따라서 지성을 조화시키고 영을 만족시킨다. 그런 설명은 인간의 체험에서 어떻게 무한자가 물질 속에서, 지성들과 함께, 그리고 영에게, 그의 뜻과 계획을 성취하는가 몹시 알고 싶어 하는 필사자의 지성이 던지는 질문을 인간의 체험 속에서 대답한다.
101:2.2 (1106.1) 이성(理性)은 과학의 방법이요, 믿음은 종교의 방법이며, 논리는 철학이 시도하는 기법이다. 지성이 중간에 조절하여 물질과 영의 실체 및 관계를 이해하는 통일된 기법을 마련함으로, 계시는 상물질 관점의 부재를 보상한다. 참된 계시는 결코 과학을 부자연스럽게, 종교를 부조리하게, 또는 철학을 이치에 맞지 않게 만들지 않는다.
101:2.3 (1106.2) 이성은 과학을 연구함으로 자연을 통해서 첫째 원인으로 돌아가도록 이끌 수도 있지만, 과학에서 말하는 첫째 원인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변화시키는 데는 종교적 믿음이 필요하다. 계시는 더 나아가서, 그러한 믿음, 그러한 영적 통찰력이 타당함을 확인하는 데 필요하다.
101:2.4 (1106.3) 인간이 살아남는 것을 보살피는 하나님을 믿는 데는 두 가지 기본 이유가 있다:
101:2.5 (1106.4) 1. 인간의 체험, 개인적 확신, 깃드는 생각 조절자가 시작하여 어떻게든 머리에 떠올린 희망과 신뢰감.
101:2.6 (1106.5) 2. 진리의 영이 직접 손수 봉사하거나, 신다운 아들들이 세계에 자신을 수여하거나, 아니면 기록된 말씀을 계시함으로 진리가 계시되는 것.
101:2.7 (1106.6) 과학은 첫째 원인을 가정하면서 논리와 탐구를 그친다. 종교는 구원하는 하나님을 확신할 때까지 믿음으로 비행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사물을 분별하는 과학적 연구는 한 절대자가 실재하고 존재한다는 것을 논리로 암시한다. 종교는 인격자가 살아남도록 보살피는 하나님이 존재하고 실재한다는 것을 거리낌없이 믿는다. 형이상학이 형편없이 실패한 것, 철학조차도 얼마큼 이루지 못한 것을 계시(啓示)가 해낸다. 다시 말해서, 과학에서 첫째 원인과 종교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은 바로 똑같은 신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101:2.8 (1106.7) 이치는 과학을 증명하고, 믿음은 종교를 증명하며, 논리는 철학을 증명한다. 그러나 오로지 인간의 체험이 계시가 타당함을 확인한다. 과학은 지식을 낳고, 종교는 행복을 낳고, 철학은 통일성을 낳는다. 계시는 우주 실체에 이르는 접근법, 세 가지가 하나에 이르는 이 접근법이 체험으로 조화되는 것을 확인한다.
101:2.9 (1106.8) 자연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자연의 하나님, 운동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자연은 오직 물질ㆍ운동ㆍ생기―생명―을 나타낸다. 물질에 에너지를 더한 것은 어떤 조건 밑에서 살아 있는 형태로, 겉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처럼 자연 생명은 한 현상으로서 비교적 연속되지만, 그 개성은 온전히 일시적이다. 자연은 사람의 인격이 살아남는 것을 논리적으로 믿을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종교적인 사람은 개인을 상대하는 바로 이 하나님을 이미, 먼저 자신의 혼 속에서 발견한 것이다.
101:2.10 (1106.9) 믿음은 혼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낸다. 계시는 진화 세계에서 상물질 통찰력의 대용품이며, 믿음이 혼 속에서 보여주는 바로 그 하나님을 사람이 자연 속에서 볼 수 있게 만든다. 이처럼 계시는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 아니 지음받은 자와 창조자,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다리를 놓는 데 성공한다.
101:2.11 (1107.1) 자연을 숙고하는 것은 총명한 인도가 있다, 아니 생생한 감독이 있다는 방향을 논리적으로 가리키지만, 어떤 만족스러운 방법으로도 성격을 가진 하나님을 드러내지 않는다. 또 한편, 자연은 우주를 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작품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막을 아무것도 노출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는 없지만,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에, 자연의 연구는 우주에 대한 더 높고 더 영적인 해석과 온전히 양립한다.
101:2.12 (1107.2) 신기원(新紀元)의 현상으로서, 계시는 정기적으로 일어난다. 사람이 몸소 겪는 하나의 체험으로서 계시는 연속된다. 필사자의 인격 안에서, 아버지가 준 조절자 선물로서, 아들의 진리의 영으로서, 우주 영의 성령으로서 신이 활동하며, 한편 인간을 초월하는 이 세 가지 재산은 인간이 체험적 진화 속에서 최상위의 봉사로서 통일된다.
101:2.13 (1107.3) 참된 종교는 실체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이요, 도덕 의식이 낳는 믿음의 산물이요, 어떤 독단적 교리 집합에 단지 지적으로 찬성만 하는 것이 아니다. 참된 종교는 “바로 영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임을 우리의 영과 함께 증거하는” 체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종교는 신학적 주장이 아니라, 영적 통찰력과 혼의 숭고한 신뢰에 있다.
101:2.14 (1107.4) 너의 가장 깊은 성품―신다운 조절자―는 올바름을 간절히 목마르게 찾는 마음, 곧 신다운 완전을 찾는 어떤 갈망을 마음 속에서 만들어낸다. 종교는 신에게 도달하려는 이 마음 속의 욕구를 깨닫는 믿음의 행위이다. 구원받는 길이라, 인격이 살아남고, 참되고 선하다고 네가 간주하게 된 모든 가치가 살아남는 기법이라고 네가 의식하게 되는, 그런 혼의 신뢰, 그런 확신이 이처럼 생긴다.
101:2.15 (1107.5) 종교를 깨닫는 것은 결코 큰 학문이나 영리한 논리에 의존한 적이 없으며, 결코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런 깨달음은 영적 통찰력이요,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큰 종교 스승들 가운데 더러가, 아니 선지자들까지도, 때때로 속세의 지혜가 거의 없었는가 하는 이유이다. 종교적 믿음은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똑같이 소용된다.
101:2.16 (1107.6) 종교는 늘 자체의 비평가와 재판관이 되어야 한다. 종교는 바깥에서 이해하기는커녕, 결코 지켜볼 수 없다. 몸소 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너의 유일한 확신은 영적인 것을 믿는 너의 믿음과 그런 체험에 관한 바로 너의 통찰력이다. 비슷한 체험을 가져 본 어떤 동료에게도, 하나님의 성격이나 실체에 관하여 아무런 논의가 필요 없으며, 한편 이렇게 하나님에 관하여 확신이 없는 모든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어떤 가능한 논리도, 참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수 없다.
101:2.17 (1107.7) 심리학은 정말로 사회 환경에 대하여 종교가 반응하는 현상을 연구하려고 애쓸지 모르지만, 종교의 진정한, 내면의 동기와 작용을 파고들기를 바랄 수 없다. 오로지 신학이, 믿음의 범위와 계시의 기법이, 종교적 체험의 성질과 내용을 얼마큼이라도 지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다.
101:3.1 (1107.8) 종교는 생명력이 강해서, 배움이 없는 데서도 지속한다. 그릇된 우주론과 거짓된 철학에 오염되어도 종교는 살아 있다. 형이상학의 혼란을 겪어도 살아남는다. 종교적 흥망의 역사를 통틀어, 또 이를 통해서, 인간이 진보하고 살아남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늘 지속하는데, 곧 윤리적 양심과 도덕 의식이다.
101:3.2 (1108.1) 믿음에서 생기는 통찰력, 곧 영적 직관(直觀)은 생각 조절자와 관련하여 우주 지성이 부여한 것이고, 이 조절자는 아버지가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다. 영적 이성(理性), 곧 혼의 지능은 성령이 준 재산, 창조 영이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다. 영적 철학, 곧 영 실체들을 깨닫는 지혜는 진리의 영이 내려주는 것이요, 진리의 영은 수여 아들들이 함께 사람의 아들딸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리고 이 두 영 재산을 조정하고 서로 연결 짓는 것은 사람을 잠재 운명을 가진 영 인격자로 만든다.
101:3.3 (1108.2) 원시적이고 싹트는 형태로 있는 바로 이 영 인격을 조절자가 소유하는 것이 육체가 자연사를 겪은 뒤에 살아남는다. 살아 있는 움직임이 그쳐서,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의 그러한 일시적 협동 관계가 분리될 때, 영에 기원을 가진 이 복합 개체는 인간의 체험과 결합하여, 신다운 아들들이 마련한 생명의 길의 수단으로, 지성과 물질로 이루어진 물질 자아의 분해를 견디고 (조절자의 보호를 받고) 살아남는다.
101:3.4 (1108.3) 종교적 믿음을 통해서 사람의 혼은 그 자체를 드러내고, 솟아나는 혼의 성품이 지닌 신성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독특한 방법으로 그 믿음은 필사 인격자로 하여금 지적이고 시험하는 어떤 벅찬 사회 상황에 반응하도록 유인한다. 진정한 영적 믿음(참된 도덕 의식)은 다음 면에서 드러난다. 그 믿음은:
101:3.5 (1108.4) 1. 타고난 불리한 동물 성향이 있는데도, 윤리와 도덕이 진보하게 만든다.
101:3.6 (1108.5) 2. 쓰라린 실망과 마음을 짓밟는 패배를 겪고도 하나님이 선함을 믿는 숭고한 신뢰를 낳는다.
101:3.7 (1108.6) 3. 자연의 역경과 물리적 재난을 당하고도 깊은 용기와 자신감을 불러일으킨다.
101:3.8 (1108.7) 4. 좌절시키는 병, 살을 에는 육체의 고통이 있어도 설명할 수 없는 차분함과 지속하는 평안을 드러낸다.
101:3.9 (1108.8) 5. 부당한 대접과 아주 지독한 불공평한 대우를 받아도, 신비스러운 차분함과 인격의 침착성을 잃지 않는다.
101:3.10 (1108.9) 6. 사정없이 닥치는 운명이 잔인한 듯 보이고, 겉보기에 자연력이 인간의 복지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해도 궁극에 승리하는 신을 의지하는 태도를 유지한다.
101:3.11 (1108.10) 7. 온갖 반대되는 논리가 전시되어도, 하나님을 믿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키고, 모든 다른 지적 궤변을 견디는 데 성공한다.
101:3.12 (1108.11) 8. 거짓된 과학의 속이는 가르침과 건전하지 않은 철학의 그럴듯한 망상과 상관 없이, 혼이 살아남는다는 불굴의 신앙을 계속 드러낸다.
101:3.13 (1108.12) 9. 현대의 복잡하고 치우친 문명이 짓눌러 지워준 과중한 짐과 상관 없이, 살고 승리한다.
101:3.14 (1108.13) 10. 인간의 이기심, 사회적 대립, 산업의 욕심, 정치적 부적응이 있는데도 이타정신이 계속 살아남는 데 기여한다.
101:3.15 (1108.14) 11. 죄와 악의 당혹스러운 존재와 상관 없이, 우주의 통일과 신의 인도하심을 믿는 숭고한 믿음에 꿋꿋하게 매달린다.
101:3.16 (1108.15) 12. 어떤 일이 있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줄곧 하나님을 섬긴다. “그가 나를 죽여도, 그래도 나는 하나님을 섬기리라”하고 감히 선언한다.
101:3.17 (1108.16) 그러면 세 가지 현상으로, 우리는 사람이 자기 안에 거주하는 신다운 영이나 영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첫째로, 개인의 체험―종교적 믿음―으로, 둘째로 개인과 종족에게 주는 계시로, 셋째로 진짜 인간 존재에서 실제의 벅찬 상황이 있는 가운데 앞서 말한 12가지의 영다운 성취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사람의 물질 환경에 대하여 그러한 특별하고 부자연스러운 반응을 놀랍게 드러내는 것으로 이를 안다. 그리고 다른 것들이 더 있다.
101:3.18 (1109.1) 종교 분야에서 바로 그렇게 생명력이 강하고 활력 있는 신앙의 성과가, 인간의 성품에서 최고의 재산, 곧 종교적 체험을 몸소 소유하고 그 체험이 영적 현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자격을 필사 인간에게 준다.
101:4.1 (1109.2) 너희 세계가 대체로 기원, 아니 물리적 기원에 관해서도 무지하므로, 때때로 우주론을 가르치는 것이 현명한 듯 보였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앞날에 문제를 일으켰다. 계시의 법칙은 수고하여 얻지 않은 지식, 곧 때 이른 지식을 나누어주는 것을 금지하여 우리를 몹시 방해한다. 계시된 종교의 일부로서 발표하는 어떤 우주론도 시간이 아주 조금 지나면 작아서 못쓰게 되어 있다. 따라서, 그러한 계시를 공부하는 앞날의 학자들은, 계시 안에 발표된 관련된 우주론의 표면에서 오류를 발견하기 때문에, 그 계시가 담고 있을지 모르는 진정한 종교적 진리의 어떤 요소라도 던져 버릴 유혹을 받는다.
101:4.2 (1109.3) 진리의 계시에 참여하는 우리가 상관들이 내린 지침에 무척 엄격히 제한을 받는다는 것을 인류는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1천 년 동안에 있을 과학의 발견을 예상할 자유가 없다. 계시자들은 계시 명령의 일부를 구성하는 지침에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이나 어느 앞날에도, 이 어려움을 극복할 아무 방법을 모른다. 이 시리즈의 계시 발표에 담긴 역사적 사실과 종교적 진리는 다가올 시대의 기록 위에 굳게 서겠지만, 자연 과학에 관하여 우리가 진술한 많은 것이 짧은 몇 년 안에, 추가된 과학의 발전과 새로운 발견의 결과로서 수정할 필요가 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 새로운 발전의 결과를 우리가 지금 내다보기는 하지만, 우리는 계시하는 기록 속에 사람이 찾아내지 않은 그런 사실을 담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계시가 반드시 영감을 받지는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자. 이 계시에 담긴 우주론은 영감을 받지 않았다. 이 우주론은 우리가 오늘날의 지식을 조정하고 분류하라고 받은 허가에 제한을 받는다. 신이 준 통찰력, 영적 통찰력은 선물이지만, 인간의 지혜는 진화되어야 한다.
101:4.3 (1109.4) 진리는 언제나 하나의 계시이다: 깃드는 조절자가 일하는 결과로서 계시가 드러날 때 그것은 자기 계시이다. 어떤 다른 하늘 대리자나 집단이나 성격자의 활동으로 발표되었을 때, 이는 신기원(新紀元)을 여는 계시이다.
101:4.4 (1109.5) 결국, 종교는 그 열매로, 종교가 그 자체에 본래부터 있는 신성한 탁월성을 나타내는 방법과 한도에 따라서, 판단해야 한다.
101:4.5 (1109.6) 계시가 변함없이 영적 현상이지만, 진리는 오직 상대적으로 영감을 받을지 모른다. 우주론을 언급하는 진술 사항은 결코 영감을 받지 않았지만, 그러한 계시는 다음 방법으로 적어도 일시나마 지식을 뚜렷이 설명하므로, 엄청난 가치가 있다:
101:4.6 (1109.7) 1. 권위 있게 오류를 없앰으로 혼란을 줄인다.
101:4.7 (1109.8) 2. 이미 알려졌거나 알려질 때가 가까운 사실과 관찰을 조정한다.
101:4.8 (1110.1) 3. 아득한 과거에 있었던 신기원의 거래들에 관하여, 잃어버린 지식 중에 중요한 조각을 회복한다.
101:4.9 (1110.2) 4. 다른 방법으로 얻은 지식에서 빠진 중요한 간격을 채울 정보를 제공한다.
101:4.10 (1110.3) 5. 수반되는 계시에 담긴 영적 가르침을 비추는 방법으로 우주 자료를 제시한다.
101:5.1 (1110.4) 계시는 영이 획득하는 진리 중에서 진화적 오류를 가려내고 체질하는 필수 작업에서, 말할 수 없이 긴 세월을 절약하는 기법이다.
101:5.2 (1110.5) 과학은 사실을 다루며, 종교는 오로지 가치 기준에 관여한다. 개화된 철학을 통해서 지성은 사실과 가치 기준, 이 두 가지 의미를 통일하려고 애쓰고, 이렇게 함으로 완성된 실체 개념에 다다른다. 과학은 지식의 영토이고, 철학은 지혜의 영역이며, 종교는 믿음을 체험하는 분야임을 기억하여라. 그렇기는 해도 종교는 두 단계에서 겉으로 나타난다:
101:5.3 (1110.6) 1. 진화로 생긴 종교. 원시적 예배의 체험, 지성에서 파생된 종교이다.
101:5.4 (1110.7) 2. 계시된 종교. 우주에 대한 태도, 이것은 영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영원한 실체들이 보존되고, 인격이 살아남고, 궁극에 우주의 신에 도달하며, 그 신의 목적이 이 모두를 가능하게 만들었음을 확신하고 믿는 것. 조만간에 진화 종교가 영적으로 확대된 계시를 받도록 예정된 것은 우주 계획의 일부이다.
101:5.5 (1110.8) 과학과 종교 모두가 논리적 추론을 위하여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어떤 기초를 가정하고서 시작한다. 그래서 철학도 세 가지의 실체를 가정하고 그 경력을 시작해야 한다:
101:5.7 (1110.10) 2. 인간의 초물질 단계, 곧 혼이나 깃드는 영까지도 포함한다.
101:5.8 (1110.11) 3. 인간의 지성, 곧 영과 물질 사이에,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서로 교통하고 서로 상관하는 작용.
101:5.9 (1110.12) 과학자는 사실을 수집하고, 철학자는 관념을 조정하고, 선지자는 이상을 높인다. 느낌과 감정은 종교에 변함없이 따르지만 종교는 아니다. 종교는 체험하는 느낌일지 모르지만, 도저히 느낌을 체험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논리(합리화)도 감정(느낌)도, 본질적으로 종교적 체험의 일부가 아니다. 하지만 개인의 지성 상태와 기질의 경향에 따라서, 이 두 가지는 실체를 꿰뚫는 영적 통찰력을 촉진하는 신앙 연습과 여러 가지로 관련될지 모른다.
101:5.10 (1110.13) 진화 종교는 진화하는 인간 안에서 신을 경배하는 버릇을 만들어내고 육성하는 일을 맡은 지역 우주 지성 보조자가 부여한 자질이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한 원시 종교는 윤리와 도덕, 즉 인간의 의무 감각과 직접 관계된다. 그러한 종교들은 양심의 확신에 바탕을 두며, 비교적 윤리 있는 문명을 안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101:5.11 (1111.1) 개인적으로 계시된 종교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세 분을 대표하는 수여 영들의 후원을 받으며, 특히 진리의 확대에 관여한다. 진화된 종교는 개인에게 개인 의무라는 관념을 못박아 준다. 계시된 종교는 사랑하기를, 즉 황금률을 더욱 강조한다.
101:5.12 (1111.2) 진화된 종교는 온통 믿음에 의존한다. 계시는 신과 실체에 관하여 확대된 진리가 제시된다는 추가된 보장을 받고, 실제 체험에 관하여 더욱 가치 있는 증언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 체험은 진화로 얻은 믿음과 계시된 진리, 이 두 가지가 실제로 소용되는 연합의 결과로서 누적된다. 인간의 믿음과 신이 준 진리의 그러한 소용되는 연합은 상물질 인격을 실제로 얻는 길에 한창 나아간 인품을 소유하게 한다.
101:5.13 (1111.3) 진화적 종교는 믿음의 확신을 주고 양심이 옳음을 확인할 따름이다. 계시적 종교는 믿음의 확신뿐 아니라 계시된 실체들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진리를 마련해 준다. 종교에서 셋째 걸음, 종교의 체험에서 셋째 단계는 상물질 상태와 상관이 있으며, 이것은 상지혜(上知慧)를 더 단단히 붙잡는 것이다. 상물질적 진보에는 계시된 종교의 진리가 갈수록 더 확대된다. 너희는 최상의 가치, 신다운 선, 보편적 관계, 영원한 실체, 궁극의 운명에 관한 진리를 더욱 알게 될 것이다.
101:5.14 (1111.4) 상물질적 진보를 통하여 내내, 진리의 확신은 점점 더 믿음의 확신을 대체한다. 너희가 마침내 실제의 영 세계로 부름받을 때, 그때 순수한 영 통찰력이 주는 확신은 믿음과 진리 대신에 작용하든지, 또는 그보다 인격자가 확신하는 이 예전의 기법과 더불어, 그리고 그 위에 겹쳐서 작용할 것이다.
101:6.1 (1111.5) 계시된 종교의 상물질 단계는 살아남는 체험과 상관이 있으며, 그 단계의 큰 욕구는 영이 완전해지는 것이다. 또한 더욱 윤리적 봉사를 하도록 재촉하는 부름과 관련하여, 신을 예배하려는 상급의 욕구가 있다. 상물질 통찰력에는 일곱 신, 최상위를 아니 궁극위까지도, 늘 더욱 크게 의식하는 일이 따른다.
101:6.2 (1111.6) 맨 처음에 물질 수준에서 시작할 때부터 완전한 영 지위를 얻을 때까지 모든 종교적 체험에 두루, 조절자는 최상위 존재가 실체임을 몸소 깨닫는 비결이다. 바로 이 조절자는 또한 초월적으로 궁극위까지 도달하는 너희 신앙의 비결도 쥐고 있다. 진화하는 사람의 체험적 인격은, 실존적인 하나님의 조절자 본질과 연결되어 최상의 존재를 완성할 잠재성이며, 이것은 본래부터, 유한을 뛰어넘어서 궁극에 초월 인격에 이르기 위한 기초이다.
101:6.3 (1111.7) 도적적 의지는, 이치를 따져 얻은 지식에 기초를 두고 지혜로 인하여 확대되고 종교적 믿음이 인가한 결정을 포함한다. 그러한 선택은 도덕적 성질을 띠는 행위이고 도덕적 인격이 존재함을 증거하며, 도덕적 인격은 상물질 인격, 그리고 궁극에 얻는 참된 영 지위의 선구자이다.
101:6.4 (1111.8) 진화로 얻은 종류의 지식은 오직 원형질의 기억 물질이 축적된 것일 뿐이다. 이것은 가장 원시 형태의 생물 의식이다. 지혜는 관련짓고 다시 통합하는 과정에서 원형질의 기억으로부터 형성된 관념들을 포함하며, 그러한 현상은 인간의 지성을 단순한 동물 지성과 구별한다. 동물은 지식이 있지만, 오로지 사람이 지혜 능력을 소유한다. 그러한 지성 위에 아버지와 아들들의 영, 곧 생각 조절자와 진리의 영을 수여함으로, 진리는 지혜를 부여받은 개인에게 소용될 수 있다.
101:6.5 (1112.1) 유란시아에 수여되었을 때, 그리스도 미가엘은 세례를 받을 때까지 진화된 종교에 지배를 받으면서 살았다. 그 순간부터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건을 포함하여 그때까지, 그는 진화된 종교와 계시된 종교의 인도를 모두 받고서 일을 해 나갔다. 부활한 아침부터 하늘에 오를 때까지, 물질 세계로부터 영의 세계까지, 그는 필사자로 이동하는 여러 단계의 상물질 생명을 거쳤다. 하늘에 오른 뒤에, 미가엘은 최상위 체험, 곧 최상 존재에 이르는 체험을 겪은 주인이 되었다. 네바돈에서 최상위의 실체를 체험하는 무제한 능력을 가진 유일한 성격자이기 때문에, 그의 지역 우주에서, 그 우주에 대하여, 그는 당장에 최상 군주권 지위에 이르렀다.
101:6.6 (1112.2) 사람의 경우에, 깃드는 조절자와 궁극에 융합하고 그 결과로 일체가 되는 것―사람과 하나님의 본질을 인격이 통합하는 것―은 그를 최상위의 살아 있는 부분이 될 수 있게 하며, 최상위를 위해서, 그리고 그와 함께, 마침내 우주에서 봉사를 끝없이 추구하는 영원한 생득권을 한때 필사자였던 그런 사람에게 보장해 준다.
101:6.7 (1112.3) 시간이 흐르는 수단으로 공간을 거치는 그러한 멋지고 흥미를 자아내는 모험을 떠나기 위해서, 계시는 필사 인간에게 먼저 지식을 생각 및 결정으로 체계화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다음에 그는 냉정한 여러 생각을, 아니 생각으로서 무척 이치가 있고 이상으로서 아주 논리적인 그러한 개념까지 포함하여, 갈수록 더 실용적이지만 여전히 고매한 이상으로 변화시키는 고귀한 과제에 끊임 없이 지혜를 이용하라고 명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조절자가 그 개념들을 감히 통합하고 영답게 만들어서, 아들들의 진리 영이 행동하기 위하여 이처럼 준비된, 실제의 인간의 보완물이 되도록 이 개념들을 유한 지성 속에서 그러한 연합에 소용되게 만든다. 이 진리 영은 시공에서 나타나는 파라다이스 진리―보편적 진리―의 표현이다. 생각 및 결정, 논리적 이상, 신성한 진리를 조정하는 것은 올바른 인품을 소유하는 것이며, 이것은 필사자가 상물질 세계들의 실체, 늘 확대되고 점점 더 영적인 현실에 친숙해지는 데 필수 조건이다.
101:6.8 (1112.4) 예수의 가르침은 아름답게 조화된 지식ㆍ지혜ㆍ믿음ㆍ진리ㆍ사랑을 아주 넘치게 담고 있으며, 그래서 현세에서 마음의 평안, 지적 확신, 도덕적 깨우침, 철학적 안정, 윤리적 민감성, 하나님 의식, 그리고 인격이 살아남는다는 분명한 확신을 완벽하게 동시에 마련해 주는 첫 유란시아 종교였다. 예수의 믿음은 다음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에, 확실히 인간이 구원받는 길, 필사자가 우주에서 궁극에 성취하는 길을 가리켰다:
101:6.9 (1112.5) 1. 영이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몸소 깨닫고 물질의 사슬을 벗어나게 한다.
101:6.10 (1112.6) 2. 지적 속박을 벗어나게 한다: 사람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사람을 해방하리라.
101:6.11 (1112.7) 3. 영적으로 눈이 먼 상태를 벗어나게 한다. 필사 존재들의 친교 관계를 사람이 깨닫고 모든 우주 생물이 형제인 것을 상물질적으로 의식하게 한다. 봉사로 영적 현실을 발견하고, 봉사로 영의 가치가 선함을 드러낸다.
101:6.12 (1113.1) 4. 우주의 여러 영 수준을 달성함으로, 그리고 하보나의 조화와 파라다이스의 완전을 궁극에 깨달음을 통해서, 자아의 불완전을 벗어나게 한다.
101:6.13 (1113.2) 5. 자아를 벗어나게 하고, 최상위 지성의 우주 수준에 도달함으로, 자의식하는 모든 다른 존재의 달성과 조정함으로, 자의식의 한계를 벗어나게 한다.
101:6.14 (1113.3) 6. 시간 세계를 벗어나게 한다, 하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께 봉사하면서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한다.
101:6.15 (1113.4) 7. 유한한 것을 벗어나게 한다, 즉 최상위 안에서, 그를 통해서, 신과 하나인 상태가 완전해지고, 이렇게 함으로 인간은 초한(超限)한 것의 최후자 이후 수준에서 초월적으로 궁극위를 찾으려고 애쓴다.
101:6.16 (1113.5) 그러한 일곱 가지 구원은 우주의 아버지를 만나는 궁극의 체험을 완벽하게 완전히 실현하는 것과 대등하다. 이 모든 것의 가능성은 인간의 종교적 체험에서 믿음의 실체 안에 담겨 있다. 그렇게 담겨 있을 수 있으니, 예수의 믿음이 궁극의 것을 뛰어넘은 실체로부터도 자양분을 받았고, 그 실체들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예수의 믿음은 그러한 것이 시공의 진화 우주에서 겉으로 나타날 수 있는 한, 우주의 한 절대자 상태에 접근하였다.
101:6.17 (1113.6) 예수의 믿음을 사용함으로 필사 인간은 시간 세계에서 영원의 실체들을 미리 맛볼 수 있다. 예수는 인간의 체험 속에서 최후의 아버지를 발견했고, 필사 인생의 육체를 입은 그의 형제들은 아버지를 발견하는 바로 그 체험을 따라서 예수를 따라갈 수 있다. 그들은 현재 신분 그대로, 예수가 그의 신분대로 한 것처럼 아버지와 함께 하는 이 체험 속에서 똑같은 만족까지도 얻을 수 있다. 미가엘이 마지막으로 자신을 수여한 결과로서 새로운 여러 잠재성이 네바돈 우주에서 현실이 되었고, 이 중의 하나는 만물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 영원의 길을 새롭게 비추는 것이었다. 이것은 공간의 여러 행성에서 사는 첫 인생에서 물질인 피와 살을 입은 필사자도 거쳐 갈 수 있는 길이다. 예수는 신이 준 재산을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길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 재산은 요청만 하면 사람의 것이 되리라고 아버지가 선포하셨다. 인류가 신답더라도, 인류의 신앙 체험의 처음과 끝이, 예수 안에서 넘치도록 드러난다.
101:7.1 (1113.7) 하나의 생각은 행동을 위한 이론적 계획일 뿐이며, 반면에 분명한 결정은 사람이 인가한 행동 계획이다. 고정 관념은 인가(認可)를 거치지 않고 받아들인 행동 계획이다. 개인의 종교 철학을 세우는데 들어가는 물질은 그 개인의 내면 체험과 환경 체험, 이 두 가지로부터 얻는다. 사람이 처한 시기와 장소에서 사회적 지위, 경제적 조건, 교육받을 기회, 도덕적 경향, 제도의 영향, 정치적 발전, 종족의 경향, 종교적 가르침은 모두 개인의 종교 철학을 형성하는 요인이 된다. 타고난 기질과 지적 소질까지도, 종교적 철학의 형태를 뚜렷이 좌우한다. 직업ㆍ결혼ㆍ친족은 모두 사람의 개인적 생활 기준의 진화에 영향을 미친다.
101:7.2 (1113.8) 종교에 관한 철학은, 관념과 실험적 생활이 모두 동료들을 모방하는 경향에 따라 수정되는 바와 같이, 이 두 가지의 기본적 성장으로부터 진화한다. 철학적 결론이 건전한가 그렇지 않은가는 목적에 대한 민감도 및 평가의 정확성, 그리고 관련된 사고, 날카롭고 정직하고 분별력 있는 사고(思考)에 달려 있다. 도덕적으로 비겁한 자는 결코 높은 수준의 철학적 사고에 이르지 못한다. 새 수준의 체험을 시작하고, 알지 못하는 지적 생활 분야의 탐구를 시도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101:7.3 (1114.1) 당장에 새로운 체계의 가치 기준이 존재하게 된다. 원칙과 기준이 새롭게 형성된다. 버릇과 이상이 다시 모습을 갖춘다. 성격을 가진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을 얻고, 하나님과 가지는 관계에 대하여 확대되는 개념들이 뒤따른다.
101:7.4 (1114.2) 종교적 생활 철학과 비종교적 생활 철학의 큰 차이점은 인정된 여러 가치의 성질과 수준에, 그리고 충성심의 대상에 있다. 종교 철학의 진화에는 네 단계가 있다: 그러한 체험은 전통과 권한에 복종하도록 몸을 맡기면서, 다만 순응하는 체험이 될 수 있다. 아니면 그 철학은 나날의 생활을 안정시키기에 겨우 충분할 정도로, 하찮은 성취로 만족될 수도 있고, 따라서 그러한 우발적 수준에서 일찍부터 성장이 그친다. 그러한 사람들은 충분히 좋은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을 믿는다. 셋째 집단은 논리로 지적 수준까지 진보하지만, 문화에 종이 된 결과로서 거기서 침체에 빠진다. 문화적 사슬의 잔인한 손아귀에 아주 단단히 붙들려 있는 대단한 지성인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로 딱하다. 자기 문화의 사슬을, 과학이라 거짓되게 부르는 유물론적 사슬과 바꾸는 자를 지켜보는 것은 똑같이 애처롭다. 넷째 수준의 철학은 모든 관습과 전통의 장애로부터 자유를 얻고, 감히 정직하게, 충성스럽게, 두려움 없이, 진실하게 생각하고 행위하고 산다.
101:7.5 (1114.3) 어떤 종교 철학이라도 그 진정한 시험은 그 철학이 물질 세계의 현실과 영적 세계의 현실을 구별하는가 못하는가, 그리고 동시에 지적 노력을 기울이고 사회에 봉사할 때 그 현실이 하나로 된 것을 인식하는 데 있다. 건전한 종교 철학은 하나님의 것과 케자의 것을 혼동하지 않는다. 순전한 경이를 찾는 미학(美學) 종파를 종교의 대용품으로 인정하지도 않는다.
101:7.6 (1114.4) 철학은, 대체로 양심을 일깨우는 옛 이야기였던 원시 종교를, 높아지는 우주 현실의 가치를 맛보는, 생생한 체험으로 변화시킨다.
101:8.1 (1114.5) 생활을 자극하고 사는 방식을 정해 줄 때 관념은 믿음의 수준에 이른 것이다. 어느 가르침을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믿는 관념이다. 확실한 것도 확신을 가지는 것도 믿음이 아니다. 지성의 상태는 생활 방식을 실제로 지배할 때에야 믿음의 수준에 이른다. 믿음은 진정한 몸소 겪는 종교적 체험의 생생한 속성이다. 사람은 진리를 믿고,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선을 존중하지만, 이것들을 숭배하지 않는다. 그러한 구제하는 믿음의 태도는 오로지 하나님에 집중하며, 하나님은 이 모두를 성격화한 것이고 그보다 무한히 크다.
101:8.2 (1114.6) 관념은 언제나 사람을 제한하고 묶는다. 믿음은 확대하고 사람을 풀어놓는다. 관념은 고정시키지만, 믿음은 해방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 종교적 믿음은 고귀한 관념들의 관계를 넘는 것이요, 고상한 철학 체계보다 더 크다. 이것은 영적 목적, 신성한 이상, 최고의 가치에 관여하는 산 체험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을 알고, 사람에게 봉사한다. 관념은 집단의 소유물이 될 수도 있지만, 믿음은 개인의 것이다. 신학적 관념을 한 집단에게 제시할 수 있지만, 믿음은 오직 개별 신자의 마음 속에서 일어날 수 있다.
101:8.3 (1114.7) 믿음이 주제넘게 현실을 부인하고 추종자에게 가상된 지식을 수여할 때 믿음은 신뢰를 저버린 것이다. 믿음이 지적 성실성을 지키지 못하도록 조장하고, 최고의 가치와 신다운 이상에 바치는 충성심을 헐뜯을 때, 믿음은 사람을 저버린다. 믿음은 필사자의 인생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의무를 결코 피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믿음은 편협이나 박해나 불관용을 조장하지 않는다.
101:8.4 (1115.1) 믿음은 창조적 상상력에 쇠고랑을 채우지 않으며, 과학적 조사로 얻는 발견에 대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 편견을 유지하지도 않는다. 믿음은 종교를 활기 있게 만들고, 신자에게 영웅답게 황금률의 실천을 강요한다. 믿음의 정열은 지식에 비례하고, 믿음이 기울이는 노력은 숭고한 평안으로 이끄는 전주곡이다.
101:9.1 (1115.2) 이전의 진화 종교가 만들어내고 육성한 윤리적 책임을 지는 의무의 요구를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 종교에서 공언(公言)된 계시도 진정하다고 여길 수 없다. 계시는 진화된 종교의 윤리적 시야를 어김없이 확대하고, 한편 동시에, 어김없이 모든 이전에 있었던 계시의 도덕적 책임을 확대한다.
101:9.2 (1115.3) 인간의 원시 종교에 (또는 원시인의 종교에) 대하여 너희가 감히 비판적 판단을 내릴 때, 너희는 그러한 야만인의 깨우침과 양심의 상태에 따라서, 그들을 판단하고 그들의 종교적 체험을 평가할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종교를 바로 너의 지식 및 진리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101:9.3 (1115.4) 상물질 현실은 사람의 가장 높은 윤리 및 도덕 개념, 인생의 가장 큰 가치와 우주의 가장 심오한 현실에 대한 사람의 최선의 해석이 되며, 참된 종교는 이 상물질 현실을 믿지 않는 것이 그릇되리라고 어쩔 수 없이 사람을 훈계하는 확신, 혼 속의 숭고하고 깊은 확신이다. 그러한 종교는 다만 영적 의식이 내리는 최고의 명령에 지적 충성을 바치는 체험이다.
101:9.4 (1115.5) 오직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한, 그리고 도덕적인 자의 개념을 강화하는 한도까지, 아름다움의 추구는 종교의 일부이다. 높은 영적 동기로부터 얻은 목적으로 예술이 퍼질 때에야 예술은 종교성을 띤다.
101:9.5 (1115.6) 문명화된 사람의 깨우친 영적 의식은 어떤 특정한 지적 관념이나 어느 한 가지 특별한 생활 방식에 관여하기보다, 오히려 생활에 관한 진실, 필사 존재에서 늘 다시 일어나는 상황에 반응하는, 선하고 올바른 기법의 발견에 관여한다. 도덕적 의식은 그저, 나날의 행위를 통제하고 안내하면서 사람이 지켜야 한다고 의무가 요구하는 가치 기준, 윤리적이고 태어나는 그 상물질 가치 기준을 인간이 인식하고 깨닫는 데 적용되는 이름일 뿐이다.
101:9.6 (1115.7) 종교가 불완전한 것을 인정하지만, 종교의 성질과 기능은 적어도 두 가지로 실제로 명시된다:
101:9.7 (1115.8) 1. 종교의 영적 자극과 철학적 압력은 사람으로 하여금, 도덕적 가치에 대한 그의 판단을 직접 바깥으로 동료들의 일에 연장시키게 만든다―이것은 종교의 윤리적 반응이다.
101:9.8 (1115.9) 2. 종교는 인간 지성이 신다운 실체를 영적으로 의식(意識)하게 만들며, 그런 의식은 도덕적 가치가 있는 여러 기존 개념에 바탕을 두고, 이로부터 믿음을 통하여 유래하며, 영적 가치가 있는 첨가된 개념들과 조정된다. 이렇게 함으로 종교는 필사자의 일을 검열하며, 이것은 실제로, 시간 세계의 향상된 실체와 더 오래 지속하는 영원의 실체들을 믿는, 일종의 영화롭게 된 도덕적 신뢰와 확신이다.
101:9.9 (1116.1) 믿음은 도덕적 의식, 그리고 지속하는 실체에 대한 영적 개념을 잇는 다리가 된다. 구원하는 기법으로, 곧 점진적인 상물질의 변화로, 그리고 이를 통해서, 종교는 사람이 현세의 자연 세계의 물질적 한계를 벗어나서 영원한 영적 세계의 하늘같은 여러 실체에 도달하는 길이 된다.
101:10.1 (1116.2) 지능이 있는 사람은 그가 자연에서 생긴 아이, 물질 우주의 일부인 것을 안다. 마찬가지로, 그는 에너지인 우주에서, 수학 수준의 운동과 긴장 속에서 개별 인격이 살아남지 못하는 것을 헤아린다. 물리적 원인과 결과를 살펴본다고 해도 사람은 결코 영적 현실을 헤아릴 수도 없다.
101:10.2 (1116.3) 한 인간은 또한 그가 관념적 우주의 일부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비록 개념이 필사자의 수명을 넘어서 지속되더라도, 개념 속에 본래 있는 아무것도 그 파악하는 인격자가 몸소 살아남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논리와 이치의 가능성을 다 써 버린다 해도, 논리를 따지는 자나 추리하는 자에게 인격이 살아남는다는 영원한 진리를 결코 드러내지도 않을 것이다.
101:10.3 (1116.4) 물질 수준의 법칙은 인과(因果)의 연속성, 선행(先行)하는 행위에 대하여 결과가 끊임없이 반응한다고 정해 놓는다. 지성 수준은 관념의 연속성이 영구한 것, 선재하는 개념들로부터 개념의 가능성이 그침 없이 흐르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우주에서 이 둘 중에 어느 수준도 탐구하는 필사자에게, 지위의 불공평으로부터, 그리고 우주에서 하나의 하루살이 현실이라는 불안, 제한된 생명 에너지를 써버리고 나서 꺼질 운명을 가진 일시적 인격이라는 참을 수 없는 불안에서 벗어날 길을 드러내지 않는다.
101:10.4 (1116.5) 오직 영적 통찰력을 얻도록 이끄는 상물질의 길을 통해서, 사람은 우주에서 그의 필사 지위에 본래 있는 사슬을 언젠가 깨뜨릴 수 있다. 에너지와 지성은 파라다이스와 신에게로 되돌아가도록 인도하지만, 사람의 에너지 재산도 지성 재산도 그러한 파라다이스 신으로부터 직접 나오지 않는다. 오직 영적 의미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오직 영적 의미에서, 파라다이스 아버지가 현재, 사람에게 자질을 부여하고 깃들기 때문에 이것이 참말이다. 종교적 체험의 길을 통하여 참된 믿음을 실천하지 않고서, 인류는 결코 신을 발견할 수 없다. 하나님이 진리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물질적으로 제한된 막힌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게 하고, 죽음이 있는 물질 영토로부터 영생이 있는 영적 영토까지, 안전하게 인도될 합리적 희망을 사람에게 준다.
101:10.5 (1116.6) 종교의 목적은 하나님에 관한 호기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필사인 것과 신다운 것, 부분적인 것과 완전한 것, 사람과 하나님을 섞음으로, 지적 지속성과 철학적 안정을 얻고, 인간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부유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바로 종교적 체험을 통해서 사람의 이상에 대한 개념은 현실성을 부여받는다.
101:10.6 (1116.7) 결코 과학이나 논리로 신이 있음을 증명할 수 없다. 사리(事理)만으로 종교적 체험이 가치 있고 선하다는 것을 결코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진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의지(意志)하는 자는 누구나 영적 가치의 타당성을 이해할 것이다. 이것이 필사자 수준에서 종교적 체험이 실재함을 증명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가능한 접근법이다. 그러한 믿음은 물질 세계의 기계 같은 손아귀로부터, 그리고 지적 세계의 불완전으로 인한 잘못의 왜곡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을 마련해 준다. 믿음은 개별 인격이 계속해서 살아남는 것에 관하여 필사자가 생각하는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는, 유일하게 찾아낸 해결책이다. 사랑과 법칙과 통일이 있는 창조, 진보하면서 신에 도달하는 보편적 창조에서, 믿음은 완성된 실체에 이르고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여권(旅券)이다.
101:10.7 (1117.1) 종교는 사람이 이상주의로 고립되거나 영적으로 외로운 느낌을 실질적으로 치료한다. 종교는 하나님의 한 아들, 새롭고 의미 깊은 한 우주의 한 시민으로서, 믿는 사람을 해방시킨다. 혼 속에서 헤아릴 수 있는,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올바름의 빛을 따르면서, 이렇게 함으로 종교는 사람이 무한자의 계획과 영원자의 목적과 한편이 된다는 확신을 준다. 그러한 해방된 혼은 즉시 이 새 우주, 자기의 우주에서 비로소 평안함을 느낀다.
101:10.8 (1117.2) 네가 그러한 믿음의 변화를 체험할 때, 너는 이제 더 수학적 우주에 노예 같은 일부가 아니라, 오히려 우주의 아버지의 아들, 해방되고 의지를 가진 아들이다. 그러한 해방된 아들은 이제 더, 이 세상에서 존재가 끝날 때, 어찌해 볼 수 없는 멸망에 맞서 혼자서 싸우지 않는다. 이제는 더, 희망 없이 불리한 확률을 가지고 모든 자연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 아마도 희망 없는 환상을 의지하거나, 공상적 오류를 믿었다는 두려움, 몸을 마비시키는 두려움에, 이제는 더 비틀거리지 않는다.
101:10.9 (1117.3) 자,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들은 실체가 존재의 부분적 그림자에게 이기는 싸움에 함께 지원했다. 하나님과 거의 한없는 우주에 사는 모든 신다운 무리들이, 영생과 신성한 지위를 얻으려고 벌이는 천상의 싸움에서 그들 편에 있다는 사실을 마침내 모든 인간이 의식하게 된다. 믿음으로 해방된 그러한 아들들은 영원으로부터 온, 최상의 세력과 신다운 성격자들의 편을 들어, 시간 세계의 전투에 분명히 지원했다. 그들이 가는 길에 이제는 별들도 그들을 위하여 싸우고 있다. 마침내 그들은 안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주를 바라보며, 확실치 않은 물질적 고립 상태에 있다가 영원히 영적으로 진보하는 보장을 받고서 만사가 변화된다. 바로 시간도 겨우 파라다이스 실체들이 공간에서 움직이는 갑옷에 던진 영원의 그림자가 될 뿐이다.
102:0.1 (1118.1) 믿지 않는 유물론자에게 사람은 다만 진화에서 우연히 생긴 것이다. 살아남을 희망은 필사자의 상상력의 결과에 달려 있다. 사람의 두려움ㆍ사랑ㆍ갈망ㆍ관념은 겨우, 생명이 없는 어떤 물질 원자들의 우연한 배열에서 생긴 반응일 뿐이다. 아무리 대단하게 에너지를 전시하거나 신뢰를 표현해도 무덤을 지나서 사람을 데려갈 수 없다. 최선의 사람들이 기울이는 헌신적 노력,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재능도 죽고 나서 사라지도록 운명이 정해졌고, 죽음은 영원히 잊혀지고 혼이 소멸되는 길고도 외로운 밤이다. 필사자로 존재하던 현세의 태양 밑에서 살고 땀흘린 것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절망이 유일한 보상이다. 인생의 하루하루가 무자비한 멸망의 손아귀를 천천히, 단단히 조이며, 냉담하고 혹독한 물질 우주는 이 멸망이 인간의 소망 중에 아름답고 고귀하고, 고상하고 선한 모든 것에 최고의 모욕이 될 것이라 선포했다.
102:0.2 (1118.2) 그러나 그런 것이 사람의 종말과 영원한 운명은 아니다. 그러한 환상은 단지 영적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물질적 철학의 기계론적 궤변에 직면하여 용감하게 싸우며, 복잡한 배움의 혼란과 왜곡으로 인하여 눈이 먼, 어떤 헤매는 사람이 절망에 빠져 내뱉은 외침일 뿐이다.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딸 중에서 가장 겸손하고 배우지 못한 자의 편에서 믿음이 한 번 용감히 손을 뻗으면, 이 캄캄한 죽음이 전부, 그리고 이 모든 절망스러운 운명이, 언제까지나 깨끗이 사라져 버린다.
102:0.3 (1118.3) 인간의 가치 기준이 필사자의 체험에서 물질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으로, 인간다운 것으로부터 신다운 것으로, 시간 세계에서 영원으로 옮겨질 수 있다는 것을 사람의 도덕적 의식이 깨달을 때, 인간의 마음 속에서 이 구원하는 믿음이 태어난다.
102:1.1 (1118.4) 생각 조절자가 하는 일은, 사람의 원시적이고 진화적인 의무 감각이, 계시되는 영원한 실체들에 대하여 더 확실한 상급 신앙으로 변화되는 것을 설명한다. 최상의 달성에 이르는 신앙의 길을 이해할 능력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 속에 완전을 향한 갈망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라도, 신의 뜻을 행하기를 선택하면, 진리의 길을 알게 된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인간의 것은 이해해야 사랑을 받지만, 신다운 것은 사랑해야 이해한다.” 그러나 정직하게 의심하고 진지하게 묻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한 태도는 다만 완전을 달성하기 위하여 진보하는 나그네 길에서 늦어짐을 의미한다. 어린아이처럼 의지하는 것은 사람이 올라가서 하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보장하지만, 진보는 완전히 성장한 어른이 튼튼하고 확신하는 믿음을 힘차게 연습하는 데 온전히 달려 있다.
102:1.2 (1119.1) 과학의 논리는 시간 세계에서 지켜볼 수 있는 사실에 바탕을 두며, 종교에서 믿음은 영원 세계에서 영의 계획에 근거를 두고 주장한다. 우리를 위하여 지식과 논리가 이룰 수 없는 것을, 참된 지혜는 종교적 통찰력과 영적 변화를 통해서 믿음으로 성취하라고 우리에게 타이른다.
102:1.3 (1119.2) 반란으로 고립되었기 때문에, 유란시아에서 진리의 계시는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우주론의 진술과 너무나 자주 혼동되어 왔다. 진리는 대대로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지만, 그와 관련된 가르침, 물리적 세계에 대한 가르침은 날마다, 그리고 해마다 바뀐다. 영원한 진리는 어쩌다가 물질 세계에 관한 낡은 관념과 함께 발견된다고 해서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과학을 알수록 너희는 더욱 확신이 줄어든다. 종교를 믿을수록 너희는 더욱 확신을 가진다.
102:1.4 (1119.3) 과학에서 확실한 것들은 전부 지능으로부터 진행한다. 종교에서 확실한 것들은 전체 인격의 바로 그 기초에서 솟아나온다. 과학은 지성의 이해력에 호소하며, 종교는 육체ㆍ지성ㆍ영의 충성과 헌신에, 아니 인격 전체에도 호소한다.
102:1.5 (1119.4) 하나님은 온통 너무나 현실이고 절대적이어서, 어떤 물질적 증명의 표징이나 이른바 기적의 전시(展示)도 하나님의 실체를 증언하는 데 내놓을 수 없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알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무한한 실체의 신성한 명시에 우리가 몸소 참여하는 데 근거를 둔다.
102:1.6 (1119.5) 깃드는 생각 조절자는 광범위한 호기심과 더불어, 사람의 혼 속에서 완전을 찾으려는 참된 갈망을 어김없이 불러일으킨다. 오로지 하나님, 그 조절자의 신성한 근원과 교통함으로 이 호기심을 적절히 채울 수 있다. 사람의 간절한 혼은 살아 있는 하나님을 몸소 깨달음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것에도 흡족해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높고 완전한 도덕적 성격자보다 더 높은 무엇이든지 상관 없이, 우리의 갈급하고 유한한 개념 속에서 하나님은 그보다 못한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102:2.1 (1119.6) 관찰하는 지성인과 분별하는 사람들은 동료들의 생활에서 종교를 발견할 때 그 종교를 알아본다. 종교는 정의를 내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다 종교의 사회적ㆍ지적ㆍ도덕적ㆍ영적 열매를 알아본다. 이것은 모두, 종교가 인류의 재산이라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종교는 문화의 소산이 아니다. 종교에 대한 사람의 인식은 여전히 인간답고, 따라서 무지의 사슬에 묶이고 미신에 노예가 되며, 궤변의 속임수와 거짓 철학의 망상에 지배된다.
102:2.2 (1119.7) 진정한 종교적 확신을 보여주는 특징 중에 하나는, 그 주장이 절대적이고 태도가 굳건한데도, 확신을 표현하는 정신이 무척 차분하고 부드러워서, 결코 자기 주장이나 자기 본위의 찬미라는 인상을 한 푼도 전하지 않는 것이다. 종교적 체험에서 얻은 지혜는 인간적으로 특유하고 조절자에서 파생되니까 어딘가 역설(逆說)이다. 종교적 힘은 개인의 사사로운 특권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 그리고 모든 지혜의 영구한 근원의 그 숭고한 협동 관계가 해결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참되고 더러워지지 않은 종교에서 나오는 말씀과 행위는 모든 깨우친 필사자에게 강력한 권위를 가지게 된다.
102:2.3 (1119.8) 종교적 체험의 요인을 규명하고 분석하기는 어렵지만, 그러한 종교를 실천하는 자가 마치 영원자가 계신 앞에 이미 있는 것처럼 살고 할 일을 계속하는 것을 지켜보기는 어렵지 않다. 믿는 사람은 마치 불멸을 자기 손아귀에 이미 쥐고 있는 것처럼 이 현세의 생활에 반응한다. 그러한 필사자의 생활에는, 세상의 지혜만 흡수한 동료들의 생활과 그들을 영원히 구분할 타당한 독창성과 꾸밈없는 표현이 있다. 신자들은 현세의 풍조에 본래 있는 흥망으로 인하여 서두르는 고달픔과 고통스러운 압박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나서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생리학ㆍ심리학ㆍ사회학의 법칙이 설명하지 못하는, 안정된 인격과 차분한 인품을 나타낸다.
102:2.4 (1120.1) 시간은 지식을 얻는 데 변치 않는 요소이다. 은총 속에 성장하는 요인, 곧 종교적 체험의 모든 단계에서 분명히 진보하는 중요한 요인이 있지만, 종교는 그 재산을 즉시 소용되게 만든다. 지식은 영원히 추구하는 것이다. 너희는 언제나 배우고 있지만, 결코 절대 진리를 완전히 아는 데까지 도달할 수 없다. 지식만 가지고는 결코 절대로 확실한 것이 있을 수 없고, 오직 어림하는 확률이 늘어날 뿐이다. 그러나 영적 빛을 받은 종교적인 사람은 알고, 지금 안다. 그래도 깊고 분명한 이 확신은 그러한 건전한 머리를 가진 신자로 하여금 인간의 지혜의 진보에서 생기는 기복(起伏)에 조금이라도 흥미를 덜 느끼도록 만들지 않으며, 인간의 지혜는 그 지혜의 물질적 밑바닥에 천천히 움직이는 과학의 발전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102:2.5 (1120.2) 과학에서 얻는 발견조차, 발견한 것들을 파헤치고 서로 관계지을 때까지, 머리 속 생각의 흐름 속에 순회함으로 당면한 여러 사실이 실제로 의미 있는 것이 될 때까지, 인간이 체험하는 의식 속에서 참으로 현실은 아니다. 필사 인간은 그의 물리적 환경조차 지성 수준에서, 지성이 심리적으로 기록한 견지에서 바라본다. 따라서 사람이 우주에 대하여 상당히 통일된 해석을 내리고, 다음에 과학에서 이 에너지의 통일을 그의 종교적 체험에서 영의 통일과 동일시하려고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성은 통일되어 있다. 필사자의 의식은 지성 수준에서 살고, 부여받은 지성의 눈을 통해서 우주의 실체들을 파악한다. 지성의 견지(見地)는 실체의 근원인 첫째 근원 중심의 실존적 통일성을 낳지 못하겠지만, 에너지ㆍ지성ㆍ영이 최상 존재 안에서, 또 최상 존재로서, 체험으로 통합됨을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고, 언젠가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지성이 물질적 사물, 지적 의미를 가진 것, 영적 가치 기준을 단단히 알고 있지 않으면, 지성은 실체의 다양성을 이렇게 통일하는 데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오직 세 가지 기능적 실체가 하나로 조화되어 통일이 있으며, 오직 통일된 가운데 우주의 불변성과 일관성을 깨닫는 인격자가 만족한다.
102:2.6 (1120.3) 통일성은 인간의 체험에서 철학을 통해서 가장 쉽게 발견된다. 그리고 철학적 사고(思考) 전체가 늘 물질적 사실 위에 기초를 두어야 하지만, 참된 철학적 활력의 혼이자 에너지는 필사자의 영적 통찰력이다.
102:2.7 (1120.4) 진화된 인간은 자연히 힘든 일을 즐기지 않는다. 그의 생활 체험에서, 성장하는 종교적 체험의 강제적 요구 및 강력한 충동과 발걸음을 맞추는 것은 영적 성장, 지적 확장, 사실의 확대, 사회 봉사(奉仕) 면에서 끊임없이 활동함을 뜻한다. 상당히 활발한 인격과 따로 아무런 참된 종교가 없다. 따라서 사람들 중에서 게으른 축에 속하는 자는, 판에 박힌 종교의 교리와 신조가 마련하는 가짜 피난처로 물러감으로, 일종의 교묘한 자기 속임수로, 참된 종교 활동의 단련을 피하려고 흔히 애쓴다. 그러나 참된 종교는 살아 있다. 종교적 개념을 지적으로 구체화하는 것은 영적 죽음과 마찬가지다. 너희는 믿는 관념이 없는 종교를 생각할 수 없지만, 일단 종교가 겨우 하나의 관념으로 격하되면, 이제 더 종교가 아니다. 종교가 단지 일종의 인간 철학이 된 것이다.
102:2.8 (1121.1) 또한 불안정하고 잘 훈련받지 못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인생의 짜증나는 책임을 회피하는 길로서 종교의 감상적 관념을 이용하고 싶어한다. 마음이 오락가락 흔들리고 겁이 많은 어떤 필사자들이 진화적 인생의 끊임없는 압박을 벗어나려고 할 때, 그들이 이해하는 종교는 가장 가까운 피난처, 가장 좋은 도망 길을 제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용감하게, 아니 영웅답기까지, 인생의 풍파에 대응하기 위하여 사람을 준비시키는 것이 종교의 사명이다. 종교는 진화된 인간의 최고 재산이요, 사람으로 하여금 꾸준히 버티고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을 보는 듯 계속하게” 만드는 한 가지이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흔히 생활에서 물러나는 것과 같으며, 인간 사회와 상업이 펼쳐지는 확 트인 경기장에서 종교적 인생을 사는 더 벅찬 활동을 즐기지 않는 인간이 그런 후퇴를 받아들인다. 참된 종교는 행동해야 한다. 실제로 사람이 종교를 가졌을 때, 아니면 그보다도 종교가 사람을 참으로 지배하도록 버려둘 때, 행동은 종교의 결과가 될 것이다. 종교는 단지 생각만 하거나, 실행이 없이 느낌만으로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102:2.9 (1121.2) 종교가 흔히 지혜롭지 못하게, 아니 때때로 종교답지 않게 행동하는 사실을 우리가 간과하지 않지만, 종교는 행동한다. 빗나간 종교적 확신이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낳았지만, 언제나, 늘 종교는 무엇인가 행한다. 종교는 힘차다!
102:3.1 (1121.3) 지능의 부족이나 교육의 빈곤은 어김없이 상급의 종교적 달성을 불리하게 만든다. 이것은 영적으로 부족한 환경이 종교가 과학 지식의 세계와 철학적으로 접촉하는 주요 경로를 종교로부터 빼앗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지적 요소가 중요하지만 이 요소가 지나치게 발달하면 마찬가지로, 때때로 무척 장애가 되고 곤란해진다. 종교는 다음의 역설적 필요 밑에서 줄곧 수고해야 한다: 즉 모든 생각의 영적 효용을 경시하면서, 동시에 생각을 효과 있게 이용할 필요가 있다.
102:3.2 (1121.4) 종교적 억측은[1] [75] 피할 수 없지만 반드시 해롭다. 억측은 어김없이 그 대상을 변조한다. 억측은 종교를 무언가 물질이거나 인본주의인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논리적 사고를 맑게 하지 못하도록 직접 방해하는 한편, 간접으로 종교가 현세의 기능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데, 종교는 바로 그 세상과 영원히 대조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종교는 반드시 역설(逆說)의 특징을 가질 터이고, 이 역설은 우주의 물질 수준과 영 수준 사이에 체험적 연결―상물질계의 상지혜(上知慧), 즉 진리를 헤아리고 통일을 파악하는, 철학을 뛰어넘는 민감성―이 없어서 생겨난다.
102:3.3 (1121.5) 물질적 느낌, 인간의 감정은 물질적 행동, 이기적 행위로 바로 이끈다. 종교적 통찰력, 영적 동기는 종교 활동으로, 사회에 봉사하고 이타심으로 자선을 베푸는 사심 없는 행위로 바로 이끈다.
102:3.4 (1121.6) 종교적 소망은 신다운 실체를 갈급하게 찾는 것이다. 종교적 체험은 하나님을 찾아냈다는 의식을 깨닫는 것이다. 한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낼 때, 그 존재의 혼 속에서, 발견하고서 말할 수 없는 승리에 들뜬 상태를 체험하고, 그래서 그는 그보다 깨달음이 적은 동료들에게 사랑에 넘친 봉사로 그들과 접촉하도록 재촉을 받는다. 그가 하나님을 찾아낸 것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료들이 생기를 되찾게 하고 고귀하게 만들려고 자기 혼 속에서 영원한 선이 넘쳐흐르게 두는 것이다. 진짜 종교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회에 더욱 봉사하게 만든다.
102:3.5 (1122.1) 과학, 곧 지식은 사실을 의식하게 만들고, 종교, 곧 체험은 가치를 의식하게 만든다. 철학, 즉 지혜는 조화된 의식(意識)으로 이끌고, 계시는 (상물질계의 상지혜 대용품) 참된 실체를 의식하게 만든다. 한편 사실, 가치, 참된 실체를 조화되게 의식하는 것은 인격 실체, 곧 최대한의 존재를 깨닫고, 이와 함께 바로 그 인격이 살아남는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102:3.6 (1122.2) 지식은 사람에게 자리를 정해 주며, 사회 계층과 계급 제도를 낳는다. 종교는 사람에게 봉사하는 길로 이끌고, 따라서 윤리와 이타주의를 창조한다. 지혜는 이 두 관념과 사람의 동료들의 유대가 더 깊어지고 나아지도록 인도한다. 계시는 사람을 해방하고 사람이 영원한 모험을 떠나게 한다.
102:3.7 (1122.3) 과학은 사람을 분류하고, 종교는 네 몸과 같이 사람을 사랑한다. 지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공정(公正)하게 대우한다. 그러나 계시는 사람을 돋보이게 하고, 그가 하나님과 협동할 능력이 있음을 드러낸다.
102:3.8 (1122.4) 과학은 문화 단체를 창조하려고 헛되이 애쓴다. 종교는 영의 단체를 낳는다. 철학은 지혜의 단체를 위하여 애쓴다. 계시는 영원한 단체, 파라다이스 최후 군단을 묘사한다.
102:3.9 (1122.5) 지식은 사람이 인격을 가진 사실에 긍지를 가지게 하며, 지혜는 인격의 중요성을 의식하는 것이다. 종교는 인격의 가치를 인식하는 체험이요, 계시는 인격이 살아남는 것을 보장한다.
102:3.10 (1122.6) 과학은 한없는 우주의 분할된 부분들을 확인하고 분석하고 분류하기를 추구한다. 종교는 전체의 관념, 우주 전체를 붙잡는다. 철학은 과학의 여러 물질 부분을 전체의 영적 통찰력 개념과 동일시하려고 애쓴다. 철학이 이 시도에 실패하는 곳에 계시가 성공하며, 우주의 영역이 보편적이고 영원하며, 절대적이고 무한함을 확인한다. 따라서 무한한 스스로 계신 이의 우주는 끝이 없고, 한이 없고, 모든 것을 담는다―시간이 없고 공간이 없고 조건이 없다. 그리고 무한한 스스로 계신 이가 또한 네바돈 미가엘의 아버지이자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인 것을 우리는 증언한다.
102:3.11 (1122.7) 과학은 신이 하나의 사실임을 가리키고, 철학은 한 절대자 개념을 제시한다. 종교는 하나님이 자애로운 영적 성격자라고 상상한다. 계시(啓示)는 신이 계신 사실, 절대자 관념, 하나님의 영적 성격, 이 세 가지가 하나임을 확인하며, 더 나아가서 이 개념―존재하는 보편적 사실, 영원한 지성 관념, 생명을 가진 무한한 영―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제시한다.
102:3.12 (1122.8) 지식의 추구는 과학이며, 지혜의 탐구는 철학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종교요, 진리를 갈급하게 찾는 것은 하나의 계시이다. 그러나 사람이 우주를 꿰뚫어보는 영적 통찰력에 현실의 느낌을 붙여놓는 것은 깃드는 생각 조절자이다.
102:3.13 (1122.9) 과학에서 생각은 생각이 실현되는 표현보다 앞서며, 종교에서 실현하는 체험은 생각의 표현보다 앞서 간다. 깨우친 이성, 종교적 통찰력, 계시, 이 세 가지의 결과―믿는 의지―와 믿고자 하는 진화적 의지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102:3.14 (1122.10) 진화의 경우에, 종교는 흔히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개념들을 지어내게 만든다. 계시는 하나님이 바로 사람을 진화시키는 현상을 드러내며, 한편 그리스도 미가엘이 땅에서 사신 인생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사람에게 계시하는 현상을 바라본다. 진화는 하나님을 사람 모습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계시는 사람을 하나님답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102:3.15 (1122.11) 과학은 오로지 처음 원인(原因)들에 만족하고, 종교는 최상의 성격에, 철학은 통일에 만족한다. 계시는 이 세 가지가 하나이며, 모두가 선한 것을 확인한다. 우주에서 선한 것은 영원히 실재하는 것이요, 공간에서 악한 것이 낳는 일시적 망상은 그렇지 않다. 모든 성격자의 영적 체험에서 이것이 반드시 참이니, 실재하는 것은 선한 것이요, 선한 것은 실재하는 것이다.
102:4.1 (1123.1) 너희의 지성 속에 생각 조절자가 계시기 때문에, 너희가 하나님의 지성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이든 초인간이든, 어느 다른 지성을 이해하는 의식을 확신하는 것보다 더 신비스러운 것은 아니다. 종교와 사회 의식은 이것을 공통으로 가졌다: 두 가지가 남의 생각을 의식하는 데 바탕을 둔다. 너희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너희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법은 “그리스도 안에 있던 지성을 너희가 또한 품을 수 있게” 할 수 있는 바로 그 기법이다.
102:4.2 (1123.2) 인간의 체험은 무엇인가? 이는 다만 활발하고 궁금해하는 자아와 활발하고 바깥에 있는 어느 다른 실체 사이에 생기는 상호 작용이다. 체험의 양은 개념의 깊이, 그리고 외부에 있는 것들의 실체를 전부 인식한 것의 합으로 결정된다. 체험의 운동량은 기대하는 상상의 힘, 그리고 접촉한 실체의 외부 성질을 감각으로 발견하는 민감성을 더한 것이다. 체험하는 사실은 자의식과 기타 존재들―다른 것의 성질, 다른 지성의 성질, 다른 영의 성질―의 합에서 발견된다.
102:4.3 (1123.3) 사람은 아주 일찍부터 그가 세상이나 우주에서 혼자 있지 않음을 의식하게 된다. 자아의 환경 속에서, 남의 생각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저절로 자의식이 생겨난다. 믿음은 이 자연스러운 체험을 종교로 바꾸며, 이것은 남의 생각의 실체로서―근원ㆍ성질ㆍ운명으로서―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그런 지식은 언제나, 반드시 몸소 체험하는 실체이다. 하나님이 성격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한 인간 성격이 얻는 진짜 종교적 체험의 생생한 부분이 될 수 없다.
102:4.4 (1123.4) 인간의 종교적 체험에서 잘못의 요소는 우주의 아버지라는 영적 개념을 오염시키는 유물론의 내용에 정비례한다. 우주에서 영이 되기 전에 사람의 진보는 하나님의 성품과 순수하고 참된 영의 실체, 이 두 가지에 대한 이 그릇된 관념들을 스스로 벗어버리는 체험에 있다. 신은 영보다 더한 것이지만, 영적 접근법은 하늘 가는 사람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접근법이다.
102:4.5 (1123.5) 기도(祈禱)는 정말로 종교적 체험의 일부이지만, 더 본질적 교통, 신을 예배하는 교통을 많이 소홀히 하기까지, 현대 종교는 기도를 그릇되게 강조해 왔다. 지성의 숙고하는 힘은 예배로 인하여 깊어지고 넓어진다. 기도는 인생을 부유하게 만들지만 신을 예배하는 것은 운명이 보이게 빛을 밝힌다.
102:4.6 (1123.6) 계시된 종교는 인간의 존재에서 통일하는 요소이다. 계시는 역사를 통일하며, 지리학ㆍ천문학ㆍ물리학ㆍ화학ㆍ생물학ㆍ사회학ㆍ심리학을 조화시킨다. 영적 체험은 사람의 우주에 담긴 진정한 혼이다.
102:5.1 (1123.7) 무엇을 믿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믿는 그것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것과 대등하지 않지만, 그런데도, 간단한 생명이 인격의 지위까지 진화로 진보하는 것은, 처음부터 인격 잠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시공 우주에서 잠재성은 언제나 사실인 것보다 우월하다. 진화하는 우주에서 잠재성은 앞으로 다가올 무엇이요, 다가올 무엇은 신이 의도하여 내린 명령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102:5.2 (1124.1) 동물의 원시적 두려움이 항상 깊어지는 하나님 존경심으로, 그리고 커지는 우주 경외감으로 변화될 때, 바로 이 의도한 우월성은 지성의 개념 작용이 진화하는 데서 나타난다. 원시인은 믿음보다 종교적 두려움이 더 많았고, 잠재 영들이 실재하는 지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이 소심한 두려움이 영적 실체들을 믿는 생생한 믿음으로 바뀔 때 전시된다.
102:5.3 (1124.2) 너희는 진화 종교를 심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영적 기원을 가진, 몸소 체험하는 종교를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인간의 도덕은 가치를 인식할지 모르지만, 오로지 종교가 그러한 가치를 보존하고, 높이고, 영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한 활동이 있어도, 종교는 감정으로 변한 도덕보다 더한 무엇이다. 종교와 도덕의 관계는, 사랑과 의무, 아들 신분과 노예 신세, 본질과 물질의 관계와 같다. 도덕은 전능한 통제자, 섬겨야 할 신을 드러낸다. 종교는 모두를 사랑하는 아버지, 즉 예배와 사랑을 받을 하나님을 드러낸다. 그리고 다시, 이것은 종교의 영적 잠재성이 진화된 도덕의 사실화된 의무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102:6.1 (1124.3) 종교적 두려움을 철학적으로 없애고 과학이 꾸준히 진보하는 것은 거짓 신들의 사망률을 크게 높인다. 사람이 만든 신들이 이렇게 죽은 것은 잠시 영적 시력을 흐리게 만들지 모르지만, 영원한 사랑이자 살아 있는 하나님을 그렇게 오랫동안 가렸던 그 무지와 미신을 궁극에 없애버린다. 인간과 창조자의 관계는 생생한 체험이요, 힘찬 종교적 믿음이며, 이를 엄밀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다. 생명의 일부를 떼어놓고 이를 종교라 부르는 것은 생명을 해체하고 종교를 왜곡한다. 이것이 바로 예배를 받는 하나님이 모든 충성을 요구하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까닭이다.
102:6.2 (1124.4) 원시인이 섬기던 신들은 자신의 그림자보다 더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살아 있는 하나님은 신성한 빛이요, 그 빛이 중단되는 것은 모든 공간에서 창조의 그림자를 만든다.
102:6.3 (1124.5) 철학으로 도달한 신자는 개인에게 구원을 주는, 개인적으로 대하는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은 한 실체, 한 가치 기준, 하나의 성취 수준, 하나의 고상해진 과정, 하나의 변화, 시공의 궁극, 이상으로 만든 것, 에너지의 인격화, 인력(引力)을 가진 개체, 인간의 한 계획, 자아를 이상으로 만든 것, 자연의 융기(隆起), 선을 향하는 것, 앞을 향하는 진화의 충동, 또는 하나의 숭고한 가설보다 더한 무엇이다. 신자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 사랑은 종교의 본질이요, 우수한 문명이 솟아나는 근원이다.
102:6.4 (1124.6) 믿음은 있음직한 철학적 하나님을 개인의 종교적 체험에서 확실한 구원의 하나님으로 변화시킨다. 회의론은 신학 이론에 도전할지 모르지만, 몸소 겪는 체험의 신빙성을 확신하는 것은, 성장하여 믿음이 된 그 관념이 진실한 것을 확인한다.
102:6.5 (1124.7)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지혜로운 논리를 통해서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은 오로지 믿음으로, 몸소 겪는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 생명에 관계되는 많은 일에는 확률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우주의 실체와 접촉할 때, 그러한 목적과 가치를 팔팔한 믿음으로 접근할 때 확실한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지적 논리가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을 온전히 지지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러한 확신을 부인하는 불신자가 이를 문제 삼을 때에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나는 안다”하고 감히 말한다. 그렇게 의심하는 모든 사람에게, 신자는 이렇게 대답할 뿐이다, “내가 모르는 줄 네가 어찌 아는가?”[2] [76]
102:6.6 (1125.1) 사리(事理)는 언제나 믿음을 의심할 수 있지만, 믿음은 언제나 사리와 논리를 보충할 수 있다. 사리는 확률을 만들고, 믿음은 가망성을 대단히 확실한 것으로, 아니 영적 체험으로도 바꿀 수 있다. 하나님은 처음 진리이자 마지막 사실이다. 따라서 모든 진리는 하나님에게서 기원을 가지며, 한편 모든 사실은 그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하나님은 절대 진리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진리임을 알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설명하기 위해서―사람은 온 우주의 사실을 탐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진실임을 체험하는 것과 하나님의 사실에 관한 무지 사이의 엄청난 간격에는 오로지 생생한 믿음으로 다리를 놓을 수 있다. 사리만 가지고 무한한 진리와 우주의 사실을 조화시킬 수 없다.
102:6.7 (1125.2) 믿는 관념은 의심에 저항하고 두려움을 물리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믿음은 반드시 의심을 이기며, 이는 믿음이 적극적이고 살아 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보다, 진리는 잘못보다, 체험은 이론보다, 영적 실체는 시공의 따로 떨어진 사실보다 장점이 있다. 이 영적 확신에 대하여 납득이 가는 증거는 영이 사회에서 맺는 열매에 있으며, 그러한 신자, 믿는 사람들은 이 진정한 영적 체험을 얻는 결과로서 그 열매를 맺는다. 예수는 말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친구들을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리라.”
102:6.8 (1125.3) 하나님은 과학에서 하나의 가능성이요, 심리학에서 바람직한 것이며, 철학에서 있음직한 것, 종교에서는 확실히 있는 것, 종교적으로 체험하는 사실이다. 있음직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는 철학은, 확실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고 또 발견하는 그 종교적 믿음을 대단히 존중해야 한다고 논리는 요구한다. 사람이 쉽게 믿는다는 이유로, 과학은 종교적 체험을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 사람의 지적ㆍ철학적 재산이, 멀리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욱 낮은 지능에서 생겨났다고, 마침내 전혀 생각이나 느낌이 없는 원시 생명에서 기원을 가진다고 계속 가정하는 한, 그래서는 안 된다.
102:6.9 (1125.4) 진화의 여러 사실은, 하나님을 아는 필사자의 종교 생활에서 얻는 확실한 영적 체험이 실재한다는 진실에 맞서 대항해서는 안 된다. 총명한 사람들은 아이들처럼 따지기를 그만두고, 사실의 관찰과 나란히, 진리의 개념을 너그럽게 대하는 논리, 일관성 있는 어른의 논리를 사용하려고 애써야 한다. 거듭하여 일어나는 우주 현상 하나하나와 마주쳐서, 틀림없이 높은 것을 틀림없이 낮은 것의 탓으로 돌림으로 현재의 반론을 지속해서 되풀이할 때, 과학적 유물론은 파산되었다. 일관성이 있으려면, 목적을 가진 창조자의 활동을 인정해야 한다.
102:6.10 (1125.5) 유기체의 진화는 하나의 사실이다. 의도한 진화, 곧 진취적 진화는 진실이며, 늘 올라가는 진화적 성취 현상, 다른 면에서 모순되는 현상을 일관성 있게 만든다. 어떤 과학자라도 그가 선택한 과학에서 높이 올라갈수록, 최상 지성이 지배한다는 우주 진리의 편을 들어, 유물론적 사실에 근거를 둔 이론들을 점점 더 버릴 것이다. 유물론은 인생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예수의 복음은 모든 필사자를 엄청나게 향상시키고 하늘 같이 높인다. 필사자의 존재는 사람이 위로 뻗은 손과 신이 아래로 뻗은 구원의 손이 만나는 현실을 깨닫는, 흥미를 자아내는 황홀한 체험이라고 상상해야 한다.
102:7.1 (1126.1) 우주의 아버지는 스스로 존재하므로, 또한 설명이 필요 없다. 그는 모든 합리적인 필사자 안에서 실제로 산다.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를 확신할 수 없다. 아들 신분은 아버지 신분을 확실하게 만드는 유일한 체험이다. 우주는 어디서나 변화를 겪고 있다. 변하는 우주는 의존하는 우주요, 그러한 창조는 최종이거나 절대적일 수 없다. 유한한 우주는 온전히 궁극위와 절대자에게 의존한다. 우주와 하나님은 동일하지 않으니, 하나는 원인이요 다른 하나는 결과이다. 원인은 절대적이고 무한ㆍ영원하고 변함이 없다. 결과는 시공에서 일어나며, 초월성이 있지만 항상 바뀌고 언제나 성장하고 있다.
102:7.2 (1126.2) 하나님은 우주에서 스스로 원인이 된, 하나 뿐인 사실이다. 그는 사물과 존재들로 이루어진 온 창조의 질서ㆍ계획ㆍ목적의 비밀이다. 어디서나 변하는 우주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법칙,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버릇에 따라서 규제되고 안정된다. 하나님의 사실, 신의 법칙은 변함이 없다. 하나님의 진실, 그와 우주의 관계는 항상 진화하는 우주에 늘 적응할 수 있는 상대적 계시이다.
102:7.3 (1126.3) 하나님 없이 종교를 발명하려고 하는 자는 나무 없이 열매를 모으고, 부모 없이 아이들을 가지려 하는 자와 같다. 너희는 원인 없이 결과를 가질 수 없다. 오로지 스스로 계신 이만 원인이 없다. 종교적 체험이 일어나는 사실은 하나님이 계심을 가리키며, 사람이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그러한 하나님은 성격을 가진 신인 것이 틀림없다. 너희는 어느 화학 공식에게 빌거나, 어느 수학 등식에게 애걸하거나, 어느 가정(假定)을 숭배하거나, 어떤 가설에게 속을 털어놓거나, 어떤 과정과 교통하거나, 어떤 추상(抽象)에게 봉사하거나, 어떤 법칙과 함께 사랑에 넘치는 교제를 가질 수 없다.
102:7.4 (1126.4) 겉보기에 종교적인 여러 특성이 비종교적 뿌리에서 자랄 수 있다는 것은 참말이다. 사람은 지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래도 도덕적으로 선하고 충성스럽고, 효도하고 정직하며, 아니 이상주의자일 수도 있다. 사람은 순전히 인도주의인 많은 가지를 그의 기본 영적 성품에 접붙이고, 이처럼 신이 없는 종교의 편을 들어 자기의 주장을 증명하는 듯 보일지 모르지만, 그러한 체험에는 살아남는 가치, 곧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이 빠져 있다. 그러한 필사 체험에는 겨우 사회적 열매는 열려도, 영적 열매는 열리지 않는다. 신이 최초에 부여한 지성과 영의 뿌리로부터 살아 있는 영양소를 뽑아내는데도, 접붙임은 그 열매의 성질을 결정한다.
102:7.5 (1126.5) 종교의 지적(知的) 표시는 확신이다. 그 철학적 특징은 일관성이요, 사회적 열매는 사랑과 봉사이다.
102:7.6 (1126.6) 하나님을 아는 개인은 미신과 전통, 그리고 현대의 유물론 경향이 있는 미로에서 하나님 찾아내는 길을 가로막는 문제들을 못보거나 장애물을 눈치채지 못하는 자가 아니다. 그는 이 모든 방해물과 마주쳐서 이겼고, 팔팔한 믿음으로 이겨내고, 방해물이 있는데도 영적 체험의 고지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 반대 의견을 수집하고 어려움을 불리는 자들이 허다하고 영리하기 때문에, 속으로 하나님에 관하여 확신하는 많은 사람이 그런 확신의 느낌을 주장하기 두려워한다. 결점을 찾아내거나, 질문하거나, 반대 의견을 내놓는 데는 아무런 대단한 지능이 필요 없다. 그러나 이 여러 물음에 대답하고 이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는 눈부신 지성이 요구된다. 모든 그러한 피상적 주장을 다루는 데는 믿음의 확신이 가장 좋은 기법이다.
102:7.7 (1127.1) 과학이나 철학이나 또는 사회학이 참된 종교의 선지자들과 싸우는 데 감히 독단적이 된다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그런 근거없는 독단적 태도에, 개인의 확실한 영적 체험에서 생긴 태도, 더 멀리 내다보는 독단적 태도로 대답해야 한다, “나는 스스로 계신 이의 아들이니까, 내가 무엇을 겪었는가 알고 있다.” 한 신자의 개인적 체험이 독단(獨斷)에 도전받는다면, 사람이 체험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 믿음으로 태어난 이 아들은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바로 그 독단으로, 자기가 실제로 우주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말로 대답해도 좋다.
102:7.8 (1127.2) 오로지 무조건의 실체, 한 절대자가 감히 한결같이 독단을 주장할 수 있다. 독단을 주장하려고 가정하는 자는, 일관성이 있다면 머지않아 에너지 절대자, 보편적 진리, 무한한 사랑의 품으로 끌려감이 틀림없다.
102:7.9 (1127.3) 우주 실체에 이르는 비종교적 접근이, 믿음이 증명되지 않은 상태를 이유로 감히 믿음의 확신에 도전하면, 영을 체험한 사람은 마찬가지로, 과학이 다루는 사실과 철학 관념들이 마찬가지로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에 독단으로 도전하는 길을 택할 수 있다. 이 사실과 관념들이 마찬가지로, 과학자나 철학자의 의식 속에 있는 체험이기 때문이다.
102:7.10 (1127.4) 모든 존재 중에서 가장 피할 수 없고, 모든 사실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며, 모든 진리 가운데 가장 생생하고, 모든 친구 가운데 가장 사랑이 많으며, 모든 가치 중에서 가장 신성한 하나님에 관하여, 우리는 모든 우주 체험 중에서 가장 확실히 해 둘 권리가 있다.
102:8.1 (1127.5) 종교의 실체와 효력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증거는 인간이 체험하는 사실에 있다. 다시 말해서, 천성으로 두려움이 많고 의심하며, 자아를 보존하려는 강한 본능과 죽은 뒤에 살아남고 싶은 갈망을 날 때부터 가진 그 사람은, 오늘과 앞날의 아주 깊은 관심거리를 그의 믿음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권능과 성격자가 보호하고 지도하도록 기꺼이 완전히 맡기려 한다. 이것이 모든 종교의 한 핵심 진리이다. 이러한 보살핌과 마지막 구원을 받는 값으로 그 권능이나 성격자가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에 대하여 어떤 두 종교도 의견이 같지 않다. 사실, 그 종교들은 모두 얼마큼 의견이 다르다.
102:8.2 (1127.6) 어떤 종교라도 진화의 눈금에서 그 종교가 차지하는 지위에 관해서 말한다면, 종교를 도덕적 판단과 윤리적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최선일지 모른다. 어떤 종교라도 그 종류가 높을수록, 항상 나아지는 사회적 도덕과 윤리적 문화를 권장하며, 또한 이에 격려를 받는다. 우리는 종교를 그에 수반되는 문명의 상태에 따라 판단할 수 없다. 차라리 한 문명의 참 본질을 자체 종교의 순수함과 고상함에 따라서 추정하는 것이 좋다. 세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많은 종교 스승은 거의 교육을 받지 않았다. 세상의 지혜는 영원한 실체들을 믿는 유익한 믿음을 실천하는 데 필요하지 않다.
102:8.3 (1127.7) 다른 시대에 있던 여러 종교의 차이점은 사람이 현실을 다르게 이해하는 데, 그리고 도덕적 가치, 윤리적 관계, 영적 실체들을 사람이 다르게 인식하는 데 온통 의존한다.
102:8.4 (1127.8) 윤리는 다른 방법으로 지켜볼 수 없는, 내부의 영적ㆍ종교적 성장의 걸음을 충실하게 비치는 영원한 거울, 사회나 종족의 거울이다. 사람은 언제나 그가 아는 최선의 조건으로, 가장 깊은 개념과 가장 높은 이상의 조건으로, 하나님을 생각했다. 역사적 종교도 반드시 그 종교가 인정하는 가장 높은 가치 기준으로부터 하나님 개념을 만들어냈다. 모든 지적 인간이 그가 아는 바 가장 좋고 가장 높은 것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인다.
102:8.5 (1128.1) 종교가 사리와 지적 표현 방식으로 격하될 때, 자체의 윤리적 문화와 도덕적 진보의 기준에 따라서 판단하는 대로, 종교는 언제나 감히 문명과 진화하는 진보를 비판해 왔다.
102:8.6 (1128.2) 개인적 종교는 인간의 도덕의 진화를 앞서지만, 제도가 된 종교는 천천히 바뀌는 인류의 도덕 관습 뒤에 변함없이 처졌다는 것을 기록하는 것은 유감이다. 조직된 종교는 보수적으로 느린 것이 입증되었다. 종교의 발전에서 보통, 선지자들이 사람들을 이끌었다. 신학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나아가지 못하게 붙들었다. 종교는 마음 속의 문제, 즉 개인이 체험하는 문제이니까, 결코 종족들의 지적 진화보다 훨씬 앞서 발달할 수 없다.
102:8.7 (1128.3) 그러나 종교는 결코, 이른바 기적 같은 것에 호소함으로 향상될 수 없다. 기적을 추구하는 것은 원시의 마술 종교를 돌이켜 부르는 것이다. 참된 종교는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주장하는 것들과 아무 상관이 없고, 계시된 종교는 권위를 증명하려고 기적을 내세우지 않는다. 종교는 늘, 언제나 개인의 체험에 뿌리를 내리고 그에 바탕을 둔다. 너희의 가장 높은 종교, 예수의 일생은, 바로 그렇게 몸소 겪은 체험이었다: 육체를 입고서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찾다가 한껏 찾아내는 사람, 필사 인간이었고, 한편 바로 그 인간 체험 속에서 사람을 찾다가 무한히 높은 완전한 혼이 한껏 만족하기까지, 사람을 찾아내는 하나님이 세상에 나타났다. 그것이 종교, 아니 네바돈 우주에서 아직까지 계시된 가장 높은 종교이다―나사렛 예수가 땅에서 살았던 인생이다.
103:0.1 (1129.1) 사람의 참된 종교적 반응은 모두, 예배 보조자가 일찍부터 베푸는 봉사로 후원을 받고, 지혜 보조자의 검열을 받는다. 사람의 첫 초월 지성의 재산은 우주 창조 영의 성령 안에서 인격이 회로로 연결되는 재산이다. 신다운 아들들이 수여되거나 조절자가 보편적으로 수여되기 오래 전에, 이 영향은 윤리와 종교와 영적 수준에 대하여 사람의 관점을 확대하도록 작용한다. 파라다이스 아들의 수여가 있은 뒤에, 해방된 진리의 영은 종교적 진리를 깨닫는, 인간의 능력을 키우는 데 힘차게 이바지한다. 사람 사는 세계에서 진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생각 조절자는 인간이 가진 상급 부류의 종교적 통찰력을 개발시키는 데 더욱 참여한다. 생각 조절자는 우주의 창문이요, 이를 통하여 유한한 인간은 한없는 신, 우주의 아버지가 확실하고 신다운 것을 믿음으로 볼지도 모른다.
103:0.2 (1129.2) 인류의 종교적 성향은 타고난 것이다. 보편적으로 표현되고 자연 기원을 가진 듯하다. 원시 종교는 반드시 진화로 창시된다. 자연스러운 종교적 체험이 계속 진보함에 따라서, 다른 면에서는 천천히 움직이는 행성의 진화 과정에 진리의 정기적 계시가 때때로 끼어든다.
103:0.3 (1129.3) 유란시아에는 오늘날 네 종류의 종교가 있다:
103:0.4 (1129.4) 1. 자연 종교, 곧 진화 종교.
103:0.5 (1129.5) 2. 초자연 종교, 곧 계시 종교.
103:0.6 (1129.6) 3. 실제의 종교, 곧 유행하는 종교, 다른 정도로 자연 종교와 초자연 종교가 섞여 있다.
103:0.7 (1129.7) 4. 철학적 종교, 사람이 만든 종교, 즉 철학으로 생각해낸 신학 교리, 그리고 이치를 따짐으로 만들어진 종교.
103:1.1 (1129.8) 한 사회 집단이나 민족 집단 사이에서 종교적 체험이 일치하는 것은 개인에 깃드는 하나님의 분신(分身)이 동일한 성질을 가진 데서 생긴다. 다른 사람들의 복지에 관하여 사심 없는 관심을 일으키는 것은 사람 속에 있는 이 성직자이다. 그러나 인격이 독특하기 때문에―어느 두 필사자도 같지 않으니까―따라서 어느 두 인간도 자기 지성 속에 사는 신성한 영의 인도와 재촉을 비슷하게 풀이할 수 없는 것이 필연이다. 한 무리의 필사자는 영적 통일성을 체험할 수 있지만, 결코 철학적으로 균일하게 될 수 없다. 그리고 종교적 생각과 체험의 풀이의 이러한 다양성은 20세기의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종교에 대하여 500가지가 넘게 다르게 정의를 내렸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실제로, 인간은 누구나 자기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솟아나는 신의 충동에 대하여 자신의 체험적 해석으로 종교를 정의하며, 따라서 그러한 해석은 독특하고, 모든 다른 인간의 종교 철학과 온전히 달라야 한다.
103:1.2 (1130.1) 한 필사자가 동료 필사자의 종교 철학에 완전히 찬성할 때, 그 현상은 이 두 존재가 철학적ㆍ종교적 해석의 유사성에 관련된 문제들에 관하여 비슷한 종교적 체험을 겪었음을 가리킨다.
103:1.3 (1130.2) 너의 종교는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문제이지만, 너의 종교 생활이 자기 중심―한정되고 이기적이고 비사회적―으로 되는 것을 막을 목적으로, 너는 방대한 다른 종교적 체험을 (서로 다르고 다채로운 필사자들의 다양한 해석을) 이해하는 지식을 얻어야 한다.
103:1.4 (1130.3) 종교가 처음에 무언가를 믿는 원시적 신념이고, 다음에 가치 기준의 추구가 뒤따른다고 가정할 때, 합리주의는 그릇되다. 종교는 1차적으로 가치 기준의 추구이며, 다음에 해석하는 관념 체계가 형성된다. 믿는 관념―해석―보다 종교적 가치 기준―목표―에 대하여 사람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기가 훨씬 쉽다. 이것이 어째서 종교가 서로 충돌하는 수백 가지 관념―교리―를 유지하는 혼잡한 현상을 나타내면서, 한편 가치 기준과 목표에 찬성할 수 있는가 설명한다. 이것은 또한 특정한 개인이 종교 관념을 버리거나 바꾸는 마당에 자기의 종교적 체험을 지킬 수 있는가 설명한다. 종교적 관념에 혁신적 변화가 있는데도 종교는 버틴다. 신학(神學)은 종교를 낳지 않는다. 신에 관한 철학을 만들어 내는 것은 종교이다.
103:1.5 (1130.4) 신봉자들이 거짓된 것을 무척 많이 믿었다고 해서 종교가 무효로 되지는 않는데, 이는 종교가 가치 인식에 기초를 두고, 개인의 종교적 체험에서 생긴 믿음으로 종교가 입증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종교는 체험과 종교적 생각에 기초를 둔다. 신학, 즉 종교에 관한 철학은 그 체험을 풀이하려는 정직한 시도이다. 그러한 해석하는 관념은 옳거나 그를 수 있고, 아니면 진실과 잘못이 섞인 것일 수도 있다.
103:1.6 (1130.5) 영적 가치 기준을 인식함을 깨닫는 것은 관념 작용을 초월하는 체험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라 부르기로 작정한 이 “감각,” “느낌,” “직관,” 또는 “체험”을 가리키는 데 이용될 수 있는 아무런 낱말이 어느 인간 언어에도 없다. 사람 속에 거하는 하나님의 영은 인격을 가지지 않았다―조절자는 선(先)인격이다―하지만 이 훈계자는 가치를 제시하고, 신성의 맛을 풍기며, 신성은 가장 높고 무한한 의미에서 성격을 가졌다. 하나님이 적어도 성격을 가지지 않았다면, 의식할 수 없으며, 의식(意識)이 없다면 사람 밑에 있을 것이다.
103:2.1 (1130.6) 종교는 인간의 지성 속에서 작용하며 인간의 의식 속에서 종교가 나타나기 전에, 체험 속에서 사람은 종교를 깨달았다. 어린아이는 출생을 체험하기 전에, 약 아홉 달 동안 존재했다. 그러나 종교의 “출생”은 갑작스럽지 않고, 오히려 차츰차츰 솟아나는 것이다. 그런데도 머지않아 “태어나는 날”이 있다. 너희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영에게서 태어나지 않으면―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많은 육체의 출생이 “폭풍 같은 산고”와 기타 비정상 “출산”의 특징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허다한 영적 출생에 영의 고통이 많이 따르고 심리적 동요의 표시가 생긴다. 다른 영적 출생은 영적 체험이 높아짐과 함께, 최고의 가치를 인식하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성장이다. 하지만 의식해서 기울이는 노력, 그리고 분명한 개인적 결심이 없이는 아무런 종교적 발전이 일어나지 않는다. 종교는 결코 소극적 체험, 부정적 태도가 아니다. “종교의 탄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른바 종교적 감화를 받는 체험과 직접 관계되지는 않고, 이러한 감화는 정신의 갈등, 감정의 억압, 기분의 동요가 일어나는 결과로서, 생애의 후기에 일어나는 종교적 사건의 특징을 보통 나타낸다.
103:2.2 (1131.1) 그러나 사랑이 넘치는 하늘 아버지의 자녀임을 의식하면서 자라도록 부모가 기른 사람들은 정신적 위기, 감정의 격변을 통해야 하나님과 그렇게 친교함을 겨우 의식할 수 있는 필사 동료들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103:2.3 (1131.2) 사람의 지성에 있는 진화의 토양에서 계시된 종교의 씨앗이 싹트며, 이 토양은 아주 일찍부터 사회 의식을 낳는 도덕적 성품이다. 한 아이의 도덕적 성품을 처음 자극하는 것은 남녀의 차이나 죄책감이나 개인의 자부심이 아니라, 오히려 정의 및 공평의 충동, 그리고 친절―동료들에게 유익한 봉사―를 베풀려는 충동과 상관이 있다. 일찍부터 생긴 그러한 도덕적 각성을 길렀을 때 갈등ㆍ격변ㆍ위기가 비교적 없는 종교 생활이 차츰 발달한다.
103:2.4 (1131.3) 인간은 누구나 아주 일찍부터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충동과 이타적 충동 사이에 싸움 비슷한 것을 체험한다. 그러한 도덕적 갈등을 해결하는 과제에서 인간을 초월하는 도움을 찾는 결과로서, 흔히 하나님을 의식하는 첫 체험을 얻을 수 있다.
103:2.5 (1131.4) 어린아이의 심리 상태는 부정적이 아니라, 자연히 긍정적이다. 허다한 필사자가 부정적인 것은 그렇게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긍정적이라고 할 때, 그의 도덕적 충동을 언급하며, 이 지성의 힘이 솟아나는 것은 생각 조절자가 도착했음을 알린다.
103:2.6 (1131.5) 그릇된 가르침이 없는 가운데, 정상 아이의 지성은, 부정적으로 죄와 죄책감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의식이 고개를 들면서, 도덕적 올바름과 사회 봉사를 향하여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종교적 체험이 발달하면서 갈등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피할 수 없이 인간 의지의 결정ㆍ노력ㆍ기능이 언제나 있다.
103:2.7 (1131.6) 도덕적 선택에는 많든 적든, 도덕적 갈등이 보통 따른다. 아이의 지성 속에서 맨 처음에 생기는 바로 이 싸움은 이기심의 욕구와 이타심의 충동 사이에 생긴다. 생각 조절자는 이기적 동기를 가진 인격의 가치 기준을 무시하지 않지만, 인간의 행복을 얻는 목표에 이르고, 하늘 나라의 기쁨에 이르는 것으로서, 이타심의 충동을 조금 더 우대하도록 작용한다.
103:2.8 (1131.7) 한 도덕적 존재가 이기심의 욕구가 있는데도 사심 없이 되기를 선택할 때, 그것은 원시 종교의 체험이다. 어떤 동물도 그렇게 선택할 수 없다. 그러한 결정은 인간답고도 종교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실을 용납하고, 사회에 봉사하려는 충동을 나타내며, 이 충동이 사람의 형제 정신의 기초이다. 자유 의지 행위로 머리가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그러한 결정은 종교적 체험이 된다.
103:2.9 (1131.8) 그러나 어린아이가 도덕적 능력을 얻고, 따라서 이타적 봉사를 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장하기 전에, 그는 이미 튼튼하고 잘 통일된 이기적 성품을 개발하였다. 사실로 일어나는 바로 이 상황이 “높은” 성품과 “낮은” 성품 사이에, “죄 많은 늙은이”와 은혜로운 “새 성품” 사이에 싸움이 있다는 이론을 낳는다. 일생에 아주 일찍부터 정상인 어린아이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한다.
103:2.10 (1131.9) 사람은 제 실속을 찾는 욕구를 자아―그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반대로 이타심을 가지려는 의지를 제 몸 바깥에 있는 어떤 영향―하나님―과 동일시하고 싶어한다. 정말로 그러한 판단이 옳으니, 이는 자아를 추구하지 않는 모든 그러한 욕구는 깃드는 생각 조절자의 인도하심에 실제로 기원을 가지며, 이 조절자는 하나님의 분신이다. 인간은 의식 속에서 영 훈계자의 충동을 이타적 욕구, 동료 인간을 생각하는 욕구로서 깨닫는다. 적어도 이것이 어린아이의 머리 속에서 일찍부터 생기는 근본적 체험이다. 자라는 어린아이가 통일된 인격을 얻지 못할 때, 이타심의 욕구가 너무 지나치게 자라서 자아의 복지에 심각한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 그릇된 지도를 받은 양심은 많은 갈등ㆍ걱정ㆍ슬픔, 그리고 인간의 끝없는 불행의 원인이 될 수 있다.
103:3.1 (1132.1) 영ㆍ꿈, 그리고 다양한 기타 미신을 믿는 관념은 모두 원시 종교들의 진화적 기원에 하나의 역할을 했지만, 너희는 씨족이나 부족의 단결 정신의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초기 인간 지성의 도덕적 성품에서 생기는 이기심ㆍ이타심의 갈등에 도전한 바로 그 사회적 상황이 집단 관계에서 제시되었다. 원시적 오스트랄리아인은 영들을 믿는데도, 아직도 종교의 초점을 씨족에 둔다. 시간이 지나면, 그러한 종교 개념은 처음에는 동물로, 나중에는 초인간이나 어떤 신으로서 인격화되는 경향이 있다. 아프리카 부시맨의 신앙은 토템 신앙조차도 되지 않지만, 그처럼 열등한 종족조차 자기 이익과 집단 이익의 차이를 인식하며, 이것은 세속의 것과 신성한 것의 가치를 원시적으로 구별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 집단은 종교적 체험의 근원이 아니다. 사람의 초기 종교에 이 모든 원시적 기여가 어떤 영향을 미치든 상관 없이, 참된 종교적 충동은 사심 없이 되려는 의지를 촉진하는 진정한 영 존재에 그 기원을 가지는 것이 여전히 사실이다.
103:3.2 (1132.2) 자연의 경이와 신비, 즉 비인격 마나를[1] [77] 믿는 원시 신앙은 후일의 종교가 나타날 것을 예시한다. 그러나 머지않아, 진화하는 종교는 개인이 사회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얼마큼 몸소 희생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더 행복하고 더 풍족하게 만들기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궁극에 종교는 하나님과 사람이 베푸는 봉사가 되도록 정해졌다.
103:3.3 (1132.3) 종교는 사람의 환경을 바꾸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오늘날 필사자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종교에서 많은 것은 이렇게 할 힘이 없게 되었다. 환경이 너무나 자주 종교를 지배하였다.
103:3.4 (1132.4) 어느 시대의 종교에도 지극히 중요한 체험은 신학적 교리나 철학 이론에 관한 생각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 기준과 사회적 의미에 대한 감정이라는 것을 기억하여라. 도덕 개념이 마술 요소를 대체함에 따라서 종교는 유리하게 진화한다.
103:3.5 (1132.5) 사람은 마나, 마술, 자연 숭배, 귀신 공포증, 동물 숭배와 같은 미신을 거쳐서 여러 가지 예식에 이르기까지 진화했고, 그런 예식으로 인하여 개인의 종교적 태도는 씨족의 집단 반응이 되었다. 다음에 이 예식들은 부족 신앙으로 집중되고 구체화되었고, 궁극에 이 두려움과 신앙은 신으로 인격화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종교적 진화에서 결코 도덕 요소가 통째로 빠지지는 않았다.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충동은 언제나 힘이 있었다. 그리고 이 강력한 영향은―하나는 인간의 영향이요 다른 하나는 신의 영향인데―1천 가지의 파괴적 성향과 적대심 때문에 무척 자주 절멸의 위협을 받았는데도 세월의 변천을 통해서 종교가 살아남는 것을 보장했다.
103:4.1 (1133.1) 사회의 행사와 종교적 모임의 차이, 특징이 되는 차이는, 세속의 모임과 반대로 종교적 모임이 친교의 분위기에 젖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인간의 교제는 신다운 자와 친교하는 느낌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집단 예배의 시작이다. 사람들이 함께 먹는 것은 가장 초기 종류의 사회적 친교였고, 그래서 초기 종교들은 예식에서 바치는 희생물의 얼마큼을 예배자들이 먹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기독교에서도 주의 성찬은 이 형태의 친교를 유지한다. 친교 분위기는 이기적 자아와 깃드는 영 훈계자의 이타적 욕구의 싸움에서, 신선한 느낌을 주고 위로하는 휴전 기간을 마련해 준다. 이것이 참된 예배에 이르는 전주곡이다―하나님의 계심을 연습하는 것이요, 궁극에 사람의 형제 정신이 태어나게 만든다.
103:4.2 (1133.2) 원시인이 하나님과 친교가 중단되었다고 느꼈을 때, 그는 속죄하려고, 친한 관계를 되찾으려는 노력으로 어떤 종류의 희생물을 바치는 데 의존하였다. 올바름을 간절히 목마르게 찾는 것은 진리의 발견으로 이끌고, 진리는 이상을 키우며, 이것은 개별 신자에게 새로운 문제를 일으킨다. 이는 우리의 이상이 기하 급수(級數)로 자라는 경향이 있고, 한편 그 이상에 부끄럽지 않게 사는 우리의 능력은 겨우 산술 급수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103:4.3 (1133.3) (죄를 의식함이 아니라) 죄를 지은 느낌은 영적 교통이 중단되거나 사람이 도덕적 이상을 낮추는 데서 생긴다. 사람의 가장 높은 도덕적 이상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비슷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그러한 곤경을 벗어날 수 있다. 사람은 자기의 가장 높은 이상에 부끄럽지 않게 살기를 바랄 수 없지만, 하나님을 찾아내고, 갈수록 더 그를 닮아가는 목표에 충실할 수 있다.
103:4.4 (1133.4) 예수는 희생물을 바치고 속죄하는 예식을 쓸어버렸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선포함으로, 이 모든 꾸며낸 죄책감의 근거와 우주에서 고립된 느낌을 없애버렸다. 인간과 창조자의 관계는 자식과 부모의 기초 위에 놓여 있다. 하나님은 필사 아들딸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된다. 그러한 친밀한 가족 관계의 정당한 부분이 아닌 모든 예식은 영원히 취소된다.
103:4.5 (1133.5) 아버지 하나님은, 자식의 실제 미덕이나 자격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동기―사람의 목적과 의도―를 인식함으로 자식인 사람을 다룬다. 그 관계는 부모와 자식 관계이며, 신의 사랑이 이를 움직이게 만든다.
103:5.1 (1133.6) 초기의 진화적 지성은 두려운 느낌에서 주로 파생되는, 사회적 의무와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느낌이 생기게 만든다. 사회에 봉사하려는 더 분명한 욕구와 이타주의 이상(理想)은 인간의 지성에 깃드는 신다운 영의 직접 충동에서 파생된다.
103:5.2 (1133.7) 남에게 착한 일을 하는 이 생각과 이상―사람이 이웃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이 무엇인가 희생하려는 충동―은 처음에 대단히 제한되어 있다. 원시인은 오직 그에게 아주 가까운 자, 그를 이웃으로 다루는 자들만 이웃으로 여긴다. 종교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사람의 이웃 개념은 씨족ㆍ부족ㆍ나라를 포함하도록 커진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온 인류를 포함하도록, 우리가 적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기까지, 이웃의 규모를 크게 만들었다. 모든 정상 인간의 마음 속에는 이 가르침이 도덕적이라―옳다―고 말해 주는 무엇이 있다. 이 이상을 가장 적게 실천하는 자들조차 이것이 이론적으로 옳다고 인정한다.
103:5.3 (1134.1) 모든 사람은 사심 없고 이타심을 가지려는 이 보편적 인간 욕구가 도덕적인 것을 인식한다. 인본주의자는 이 욕구의 기원을 물질 지성이 자연스럽게 작용하는 탓으로 돌린다. 종교가는 필사 지성이 가진 참으로 사심 없는 욕구는 생각 조절자가 안에서 영적으로 인도하심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더 바르게 인식한다.
103:5.4 (1134.2) 그러나 자아의 의지(意志)와 자아를 넘는 의지 사이에서 생기는 이 초기의 싸움에 관한 사람의 해석은 반드시 믿을 만하지 않다. 오로지 상당히 잘 통일된 인격자가 자아의 갈망과 싹트는 사회 의식이 여러 모습으로 다투는 것을 중재할 수 있다. 자아는 자기의 이웃만큼 권리를 가지고 있다. 둘 중에 어느 것도 개인의 눈길과 봉사를 독점으로 요구하지 못한다.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인간의 가장 초기 형태의 죄책감이 생긴다.
103:5.5 (1134.3) 오로지 자아의 자존심 욕구와 더 높은 자아(신다운 영)의 이타적 욕구가, 통합하고 감독하는 인격의 통일된 의지로 조정되고 절충될 때에야 인간의 행복을 얻게 된다. 진화 인간의 지성은 감정적 충동의 자연스러운 증가, 그리고 영적 통찰력―진정한 종교적 반성―에 바탕을 둔 사심 없는 욕구의 도덕적 성장, 이 둘 사이의 싸움을 심판하는 까다로운 문제에 늘 부딪친다.
103:5.6 (1134.4) 자아를 위해서, 그리고 최다수의 타아(他我)를 위해서 똑같은 이익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시간과 공간의 틀 속에서 반드시 만족스럽게 풀 수 없는 문제를 제시한다. 영원히 산다면 그러한 적대 관계는 해결될 수 있지만, 짧은 인생에서 이것은 해결될 수 없다. 예수는 이렇게 그러한 역설(逆說)을 언급하였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는 자는 잃겠거니와 누구든지 하늘 나라를 위하여 제 목숨을 버리는 자는 얻으리라.”
103:5.7 (1134.5) 이상을 추구하는 것―하나님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죽기 전과 후에 이어지는 노력이다. 죽은 뒤의 인생은 필사 존재와 본질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 이 생명에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좋은 일이 앞날의 생명을 향상하는 데 바로 기여한다. 진정한 종교는 자연사의 문을 거치는 결과로서 사람에게 부여되는 미덕, 고귀한 인품의 모든 미덕을 얻는다는 헛된 희망을 북돋음으로 도덕적 태만과 영적 게으름을 조장하지 않는다. 참된 종교는 필사자가 수명이 있는 동안에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노력을 헐뜯지 않는다. 필사자의 소득은 모두 첫 단계에 살아남는 불멸의 체험을 강화하는 데 바로 기여한다.
103:5.8 (1134.6) 사람의 모든 이타적 충동이 단지 자연스러운 군집 본능이 발달된 것이라 가르칠 때, 이것은 사람의 이상주의에 치명적이다. 그러나 자기 혼의 이 상급 욕구가 필사 지성에 깃드는 영적 세력으로부터 방출된다는 것을 사람이 알게 될 때, 사람은 고귀하게 되고 힘차게 에너지를 얻는다.
103:5.9 (1134.7) 영원하고 신다운 무엇이 자기 속에 살며 애쓴다는 것을 사람이 일단 완전히 깨닫는 것은 사람을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넘어서 들어올린다. 그래서 우리의 이상이 초인간 기원을 가졌다는 힘찬 믿음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의 이타적 확신, 사람이 형제라는 느낌을 현실로 만든다.
103:5.10 (1134.8) 사람은 자기의 영적 분야에서 자유 의지가 있다. 필사 인간은 전능한 하나님의 엄격한 통치에 복종하는 힘없는 종이 아니요, 기계론적 우주 결정론에서 희망 없는 숙명에 희생되는 자도 아니다. 아주 참되게 말하면, 사람은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설계하는 자이다.
103:5.11 (1135.1) 그러나 사람은 압력을 받는다고 구원을 얻거나 고귀하게 되지 않는다. 영의 성장은 진화하는 혼 속에서 일어난다. 압력을 가하면 인격을 비뚤어지게 만들지 모르지만, 결코 성장을 자극하지 않는다. 교육시키는 압력조차도, 비참한 체험을 막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겨우 부정적으로 유익하다. 모든 바깥 압력이 최소인 곳에서 영적 성장이 가장 크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도다.” 사람은 가정과 공동체, 교회와 국가의 압력이 가장 적을 때 가장 좋게 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보하는 사회에서 가정, 사회 단체, 교회, 국가가 할 일이 없다는 뜻으로 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103:5.12 (1135.2) 사회의 종교 집단에서 한 구성원이 그런 단체의 요구 조건을 따랐을 때, 그는 종교적 관념이 진실인가, 그리고 종교적 체험이 사실인가에 관하여 자신의 개인적 해석을 완전히 표현하는 종교의 자유를 누리도록 격려를 받아야 한다. 한 종교 집단의 안전은, 동질의 신학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통일되는 데 달려 있다. 한 종교 집단은 “자유 사상가”가 될 필요 없이, 자유롭게 생각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교회든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람이 형제인 것이 옳다고 인정하고, 감히 그 구성원에게 어떤 교리의 압력도 주지 않는다면 큰 희망이 있다.
103:6.1 (1135.3) 신학은 인간 정신의 행동과 반응을 연구하는 것이다. 신학의 개인적 표현에는 심리학과, 신학의 체계적 묘사에는 철학과, 어느 정도 반드시 통합되어야 하기 때문에, 신학은 결코 하나의 과학이 될 수 없다. 신학은 언제나 너의 종교를 연구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종교를 연구하는 것은 심리학이다.
103:6.2 (1135.4) 사람이 바깥에서 그의 우주를 연구하고 조사하는 일에 접근할 때, 그는 여러 가지 자연 과학을 만들어낸다. 자신과 우주의 연구를 안에서 접근할 때, 그는 신학과 형이상학에 기원을 준다. 사물과 존재들로 이루어진 우주에 접근하는 이 두 가지 정반대되는 길에서 얻은 조사 결과와 가르침 사이에 처음에 나타나도록 정해진 많은 차이점을 조화하려는 노력으로, 후일에 철학이라는 기술이 발달한다.
103:6.3 (1135.5) 종교는 영적 관점, 인간 체험의 내면성을 깨닫는 것과 상관이 있다. 사람의 영적 성품은 그에게 바깥에 있는 우주를 안에서 보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따라서, 순전히 인격이 체험하는 내면성의 견지에서 보았을 때, 모든 창조의 성질이 영적인 듯 보인다는 것이 참말이다.
103:6.4 (1135.6) 사람이 자신의 육체 감각의 물질적 자질 및 관계된 지성의 파악을 통해서 우주를 분석하여 검사할 때, 우주는 기계적이고 에너지와 물질인 듯하다. 실체를 연구하는 그러한 기법은 안에 있는 우주를 바깥으로 내놓는 것이다.
103:6.5 (1135.7) 우주에 대하여 논리와 일관성이 있는 철학 개념은 유물론(唯物論)이나 유심론(唯心論)의[2] [78] 가설 위에 세울 수 없으니, 이는 이 두 생각 체계가, 보편적으로 적용되었을 때 우주를 왜곡하여 보도록 강요되기 때문이다. 즉 전자는 내면을 바깥에서 보는 우주를 접촉하며, 후자는 바깥을 안에서 보는 우주의 성질을 깨닫는다. 그러면 과학이나 종교는 결코 그 자체로서 저절로, 혼자 힘으로, 인간 철학의 안내가 없이, 신의 계시의 빛을 받지 않고서, 보편적 진리 및 관계를 적절히 이해하기를 바랄 수 없다.
103:6.6 (1136.1) 언제나 사람 속에 있는 영은 자체를 표현하고 자아의 실현을 위하여 지성의 장치와 기법에 의존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물질 실체를 바깥에서 체험하는 것은 그 체험하는 인격자의 지성 의식에 바탕을 둔다. 따라서 영적인 것과 물질인 것, 인간의 속 체험과 바깥 체험은 반드시 지성의 기능과 상관되며, 그들이 의식으로 깨닫는 것에 관하여, 지성의 활동에 제약을 받는다. 사람은 머리 속에서 물질을 체험한다. 사람은 혼 속에서 영적 실체를 체험하지만, 머리 속에서 이 체험을 의식하게 된다. 지능은 필사자가 겪는 체험의 총합을 조화시키고, 항상 조정하고 제한하는 물건이다. 에너지 및 사물, 그리고 영적 가치, 이 두 가지는 의식하는 머리의 매체를 통해서 그 해석에 따라 색깔을 얻는다.
103:6.7 (1136.2) 과학과 종교가 더 조화되도록 조정하는 데 너희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중간에 개재하는 상물질 사물 및 존재가 있는 세계의 영토를 너희가 까맣게 모르기 때문이다. 지역 우주는 물질ㆍ상물질ㆍ영으로 이렇게 실체가 명시되는 세 등급이나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상물질 각도의 접근은 자연 과학에서 발견된 것과 종교 정신의 작용 사이에 있는 모든 차이점을 지워 버린다. 이치를 따지는 것은 과학을 이해하는 기법이요, 믿음은 종교에서 통찰력을 얻는 기법이며, 상지혜는 상물질 수준의 기법이다. 상지혜는 초물질 실체에 대한 감수성이며, 그 내용이 지식 및 이치이고 그 본질이 믿음과 통찰력이기 때문에, 상지혜는 불완전한 성장을 보상하기 시작한다. 상지혜는 물질 인격자가 도달할 수 없는, 서로 달라지는 실체 파악을 초월 철학으로 절충하는 것이다. 상지혜는 어느 정도 육체로 사는 물질 인생 이후에 살아남은 체험에 바탕을 둔다. 그러나 상당히 동떨어진 과학과 종교 분야의 상호 작용을 절충하는 어떤 방법을 소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많은 필사자가 인식했다. 그리고 형이상학은 잘 알려진 이 간격에 다리를 놓으려고, 사람이 쓸데없이 시도한 결과이다. 그러나 인간의 형이상학은 빛을 던지기보다 사람을 헛갈리게 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형이상학은 상물질의 상지혜의 부재를 메우려고, 의도는 좋았지만, 사람이 쓸데없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103:6.8 (1136.3) 형이상학은 실패인 것이 입증되었다. 사람은 상지혜를 파악할 수 없다. 계시는 진리를 알아보는 상지혜 민감성이 물질 세계에 부재하는 것을 메울 수 있는 유일한 기법이다. 계시는 진화하는 구체(球體)에서 이치를 따짐으로 발달한 형이상학의 혼란을 권위 있게 명료하게 해준다.
103:6.9 (1136.4) 과학은 사람이 자기의 물리적 환경, 에너지 및 물질의 세계를 연구하려는 시도이다. 종교는 사람이 영적 가치가 있는 우주를 체험하는 것이다. 상당히 거리가 먼 이 개념들의 조사 결과를 우주에 대한 합리적이고 통일된 태도와 비슷한 무엇으로 조직하고 관련지으려는, 사람의 정신 노력으로 철학이 개발되어 왔다. 계시로 분명해진 철학은, 상지혜가 없는 가운데, 그리고 상지혜를 대신하는, 사람의 이치의 대용품―형이상학―이 붕괴하고 실패한 마당에, 적절하게 활동한다.
103:6.10 (1136.5) 옛날 사람은 에너지 수준과 영 수준을 구별하지 않았다. 수학적인 것과 의지가 있는 것을 처음으로 분리하려고 애쓴 것은 보라 인종과 그 안드 족 후계자들이었다. 문명화된 사람은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한, 아주 예전의 그리스인과 수메르인의 발걸음을 갈수록 더 따라갔다. 그리고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철학은 영 개념과 에너지 개념 사이에 항상 벌어지는 틈에 다리를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간 시대에 이 여러 차이점은 최상위 안에서 조화된다.
103:6.11 (1137.1) 상상과 추측은 과학의 범위를 연장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과학은 반드시 이치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이치를 따지는 것은 안정시키는 영향력이요 도움 되는 하녀이지만, 종교는 언제까지나 믿음에 의존한다. 그리고 자연 세계와 영적 세계 현상의 잘못된 해석, 과학과 종교라고 잘못 부르는 것들이 언제나 있어 왔고, 늘 있을 것이다.
103:6.12 (1137.2) 과학을 어설프게 파악하고, 종교를 힘없이 붙잡고, 하다가 그만둔 형이상학의 시도로부터 사람은 철학의 뼈대를 지으려고 애썼다. 물질 세계와 영 세계 사이에 온통 중요하고 필수인 형이상학의 연결이 붕괴되지 않고, 형이상학이 물리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상물질 간격에 다리 놓는 데 실패하지 않았다면, 현대인은 정말로 자신과 우주에 대하여 가치 있고 마음을 끄는 철학을 세우려할 것이다. 필사 인간에게는 상물질 지성 및 물질에 관한 개념이 모자란다. 계시는 우주에 대한 논리적 철학을 세우기 위하여, 그리고 그 우주에서 확실하고 안정된 자기 자리를 만족스럽게 이해하기 위하여, 사람이 무척 긴급히 필요한 이 개념 자료의 부족을 메우는 유일한 기법이다.
103:6.13 (1137.3) 계시는 진화 인간이 상물질 간격을 메우는 유일한 희망이다. 상지혜의 도움 없이, 믿음과 이치는 합리적 우주를 파악하고 연구할 수 없다. 상지혜의 통찰력이 없이, 필사인은 물질 세계의 현상에서 선(善)ㆍ사랑ㆍ진리를 헤아릴 수 없다.
103:6.14 (1137.4) 사람의 철학은 물질 세계를 향하여 상당히 기울어질 때, 합리주의나 자연주의가 된다. 영적 수준을 향하여 특별히 기울어질 때 철학은 이상주의나 신비주의가 되기도 한다. 몹시 불행하게도 형이상학에 기댈 때, 철학은 어김없이 회의에, 혼란에 빠지게 된다. 지난 시대에, 사람의 지식과 지적 평가의 대부분은 이 세 가지 파악의 왜곡 중 하나에 빠졌다. 철학은 감히 직선 모양의 논리로 실체에 관한 해석을 예측하지 않는다. 철학은 결코 실체가 타원 모양으로 균형된 것, 그리고 모든 관계 개념이 본질적으로 굽어진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03:6.15 (1137.5) 필사인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철학은 과학의 이치에, 종교의 믿음에, 그리고 계시가 주는, 진리를 알아보는 통찰력에, 논리적 기초를 두어야 한다. 이러한 통합으로 사람은 적당한 형이상학을 개발하지 못하고 상물질의 상지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상할 수 있다.
103:7.1 (1137.6) 이치를 따지는 것은 과학을 지탱하고 믿음은 종교를 지탱한다. 추론에 바탕을 두지는 않아도, 믿음은 이치에 맞는다. 비록 논리에 의존하지 않지만, 그런데도 건전한 논리가 믿음을 북돋아 준다. 이상적 철학조차 믿음을 기를 수 없다. 정말로, 과학과 더불어, 믿음은 그러한 철학의 바로 그 근원이다. 믿음, 인간의 종교적 통찰력은 오로지 계시함으로 사람에게 확실히 가르칠 수 있고, 영이신 하나님이 영적 조절자로 깃드심을 필사자가 몸소 겪어야 확실하게 깊어질 수 있다.
103:7.2 (1137.7) 참된 구원은, 물질을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상물질 연락이 있는 분야를 거쳐서, 영적 상호 관계가 있는 높은 우주 상태에 이르기까지, 필사 지성을 신답게 진화시키는 기법이다. 지상의 진화에서 물질적 직관 본능이 논리로 따져 얻은 지식의 출현을 앞서는 것처럼, 영적 직관의 통찰력이 나타나는 것은 상물질 및 영적 추리가 나중에 출현하고 하늘에서 진화하는 훌륭한 프로그람을 체험할 것을 미리 알리며, 이 천상의 진화는 일시적 인간의 잠재성을 실제로, 신다운 영원한 인간, 파라다이스 최후자로 변화시키는 사업이다.
103:7.3 (1138.1) 그러나 하늘 가는 사람이 하나님 체험을 얻으려고 안으로, 파라다이스를 향하여 손을 뻗음에 따라서, 마찬가지로 그 사람은 물질 우주의 에너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바깥으로, 공간을 향하여 손을 뻗고 있을 것이다. 과학의 진보는 사람이 땅에서 사는 인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이 지역 우주와 초우주를 올라가는 체험은, 적지 않게 에너지의 변질과 물질 변형의 연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지만, 신은 하나되는 것이요, 신이 하나됨은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의 영적 가치를 담을 뿐 아니라, 우주 통제자와 파라다이스 섬의 에너지 사실을 또한 인식하고, 한편 이 두 단계의 우주 실체는 합동 행위자의 지성 관계에서 완전히 서로 상관되고, 최상 존재의 솟아나는 신의 유한 수준에서 통일된다.
103:7.4 (1138.2) 체험적 철학의 중재로 과학적 태도와 종교적 통찰력을 연합하는 것은 사람이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오랜 체험의 일부이다. 수학이 추정(推定)한 것과 통찰력이 확실히 얻은 것은 최대의 달성인 최상위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수준의 체험에서, 지성 논리의 조화시키는 기능을 반드시 필요로 할 것이다.
103:7.5 (1138.3) 그러나 한 인격의 과학적ㆍ영적 모습이 진리에 지배되고, 진리가 무슨 결론을 내리든 상관 없이 어디든지 이끄는 대로 진리를 따를 것을 진심으로 바라지 않는 한, 논리는 과학의 조사 결과와 종교의 통찰력을 조화시키는 데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103:7.6 (1138.4) 논리는 철학의 기법이요, 철학의 표현 방법이다. 참 과학의 분야 안에서, 추리는 반드시 진정한 논리에 순종한다. 참된 종교의 분야 안에서, 속을 들여다보는 과학적 접근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믿음이 도무지 근거가 없어 보이더라도, 믿음은 안에서 보는 관점의 기초에서 볼 때 반드시 논리가 있다.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면서, 우주는 물질로 보일지 모른다. 안에서 바깥을 보면, 바로 그 우주는 온통 영적인 듯이 보인다. 이치는 물질을 의식함에서 생기고, 믿음은 영적 의식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계시로 강화된 철학의 중재를 통해서, 논리는 안과 바깥의 관점 모두를 확인할 수도 있고, 이렇게 함으로 과학과 종교, 이 두 가지를 안정시킨다. 따라서, 공동으로 철학의 논리와 접촉함으로, 과학과 종교, 이 두 가지가 갈수록 더 서로에게 관대하게 되고, 회의(懷疑)가 더욱 줄어들 수도 있다.
103:7.7 (1138.5) 발달하는 과학과 종교가 필요한 것은 더욱 탐구하는, 두려움 없는 자아 비판이요, 진화적 지위의 불완전함을 더욱 크게 인식하는 것이다. 과학과 종교의 스승들은 흔히 너무 자신 있고 독단적이다. 과학과 종교는 오로지 그들이 가진 사실에 대하여 자체를 비판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의 무대를 떠나는 순간, 이치는 물러나든지, 아니면 거짓 논리의 배우자로 빨리 퇴화되어 버린다.
103:7.8 (1138.6) 진리―우주 관계, 우주 사실 및 영적 가치의 이해―는 진리의 영이 베푸는 봉사를 통해서 얻는 것이 최선이고, 계시로 비평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계시는 과학도 종교도 창시하지 않는다. 계시의 기능은 과학과 종교를 실체의 진리와 조정하는 것이다. 계시가 없는 가운데서 또는 계시를 받아들이거나 붙잡지 못할 때, 필사 인간은 언제나 자기가 만든 쓸데없는 형이상학의 손짓에 의존했고, 형이상학은 인간에게 진리의 계시, 또는 상물질 인격의 상지혜를 대신하는 유일한 대용품이다.
103:7.9 (1139.1) 물질 세계를 다루는 과학은 사람으로 하여금 물리적 환경을 통제하고, 어느 정도 지배할 수 있게 만든다. 영적 체험의 종교는 친교하는 충동의 근원이며, 이것은 과학 시대의 문명이 복잡한 와중에서 사람들이 함께 살도록 만든다. 형이상학, 그러나 계시는 더 확실히, 과학과 종교, 이 둘을 발견하기 위하여 공통으로 만나는 장소를 마련해 주며, 동떨어졌어도 서로 의존하는 이 생각 분야들을 논리 있게 서로 연결지어서, 과학적으로 안정되고 종교적으로 확실한, 잘 균형된 철학으로 만드는 인간의 노력을 가능하게 한다.
103:7.10 (1139.2) 필사자의 지위에서는 아무것도 절대로 증명할 수 없다. 과학과 종교 모두가 가정(假定)에 바탕을 둔다. 상물질 수준에서 과학과 종교의 여러 가설은 상지혜 논리로 어느 정도 증명이 가능하다. 최대의 지위인 영적 수준에서, 실제로 실체를 맛보고 실체와 함께 맛보는 체험 이전에, 유한한 증명을 보일 필요가 차츰 사라진다. 그러나 그때에도 유한한 것을 지나서 증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이 많이 있다.
103:7.11 (1139.3)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분야는, 증명되지 않았어도, 사람의 지성 자질을 구성하는 실체에 대한 민감성을 이용하여 받아들인 어떤 여러 가정에 근거를 둔다. 물질ㆍ움직임ㆍ생명, 이 세 가지 실체를 가정함으로, 과학은 자랑스러운 그 추리 경력을 시작한다. 종교는 지성ㆍ영ㆍ우주―즉 최상 존재―이 세 가지가 정당함을 가정하고서 시작한다.
103:7.12 (1139.4) 과학은 공간에서 시간적 에너지와 물질을 다루는 수학을 생각하는 분야가 된다. 종교는 유한한 현세의 영 뿐 아니라, 또한 영원한 최고의 영을 다루기를 가정한다. 오로지 상지혜를 오랫동안 겪는 체험을 통해서, 우주를 파악하는 이 두 가지 극단이 기원ㆍ기능ㆍ관계ㆍ실체ㆍ운명을 비슷하게 풀이하도록 만들 수 있다. 일곱 으뜸 영의 회로에는 에너지와 영의 분산이 최대로 조화되어 있다. 최상위의 신 속에 에너지와 영이 처음으로 통일되고, 첫째 근원 중심, 스스로 계신 이의 무한 속에 최종으로 통일된다.
103:7.13 (1139.5) 이치를 따지는 것은 에너지와 물질로 이루어진 물리적 세계 속에서, 그 세계와 함께 겪는 체험에 관하여, 의식이 내리는 결론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믿음은 영적 의식―필사자가 달리 증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정당함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논리는 믿음과 이치가 통일되어 진리를 찾아 통합하여 전진하는 것이며, 필사 존재를 구성하는 지성 자질에, 사물ㆍ의미, 가치 기준을 날 때부터 인식하는 데, 기초를 둔다.
103:7.14 (1139.6) 생각 조절자의 계심에는 영적 실체가 있다는 진정한 증명이 있다. 그러나 이 계심이 정당한 것을 바깥 세계에 증명할 수 없고, 이처럼 하나님이 깃드심을 체험하는 사람에게만 그럴 수 있다. 조절자를 의식하는 것은 진리를 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선을 초월 지성이 파악하는 것, 그리고 인격의 사랑하는 동기에 기초를 둔다.
103:7.15 (1139.7) 과학은 물질 세계를 발견하고, 종교는 그 세계를 평가하고, 철학은 그 의미를 풀이하려 애쓰며, 한편 과학의 물질적 관점과 종교의 영적 개념을 조정한다. 그러나 역사(歷史)는 과학과 종교가 결코 완전히 의견이 같을 수 없는 영역이다.
103:8.1 (1140.1) 과학과 철학이 모두 이치와 논리로 하나님이 있음직하다는 것을 가정할까 싶어도,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몸소 겪는 종교적 체험만이 성격을 가진 그러한 최상의 신이 확실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생생한 진리를 그렇게 육신화하는 기법으로, 하나님이 아마도 있으리라는 철학적 가정은 종교적 현실이 된다.
103:8.2 (1140.2) 하나님이 확실히 계심을 체험하는 것에 관한 혼란은 개인들이 따로, 그리고 다른 종족의 사람들이 그 체험을 달리 풀이하고 진술하는 데서 생겨난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에 관한 대화는 지적ㆍ철학적이니까 서로 다르며, 때때로 혼란을 일으킬 정도로 허위이다.
103:8.3 (1140.3) 착하고 고귀한 남자가 제 아내를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하지만 결혼 애정 심리학의 필기 시험에 도저히 만족스럽게 합격할 수 없을지 모른다. 또 다른 남자는 제 배우자를 거의 또는 전혀 사랑하지 않아도, 그러한 시험에 아주 적절히 합격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의 참된 성품을 들여다보는 통찰력이 불완전하다고 그의 사랑의 현실이나 성실성을 한 푼어치도 무효로 만들지는 않는다.
103:8.4 (1140.4) 너희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믿음으로 그를 알고 사랑한다면―그러한 체험의 현실이, 과학이 의심을 넌지시 비치는 말이나, 논리로 트집잡기나, 철학의 가설, 아니면 하나님 없는 종교를 만들려는, 좋은 뜻을 가진 사람들의 영리한 제안 때문에, 어떤 면에서도 줄어들거나 상처 입게 하지 말라.
103:8.5 (1140.5) 하나님을 아는 신자의 확신은 의심하는 유물론자의 불확신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체험을 가진 신자의 깊은 믿음과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불신자의 불확신에 힘차게 도전해야 한다.
103:8.6 (1140.6) 철학이 과학과 종교 양자에게 최대의 도움을 주려면, 유물론과 범신주의의 두 극단을 피해야 한다. 오로지 인격의 실체―변화 가운데 영구한 것―을 인식하는 철학이 사람에게 도덕적 가치가 있을 수 있고, 물질 과학과 영적 종교를 다루는 이론 사이에 다리로서 소용될 수 있다. 계시는 진화하는 철학의 허약성을 보상하는 물건이다.
103:9.1 (1140.7) 신학(神學)은 종교의 지적 내용을 다루고, 형이상학(계시)은 철학적 모습을 다룬다. 종교적 체험은 종교의 영적 내용이다. 종교의 지적 내용에 신화 같은 변덕과 심리학적 망상이 있고, 형이상학의 잘못된 가정(假定)과 스스로 속이는 기법, 종교의 철학적 내용의 정치적 왜곡과 사회ㆍ경제적 변질이 있는데도, 개인적 종교에서 얻는 영적 체험은 여전히 진정하고 타당하다.
103:9.2 (1140.8) 종교는 단지 생각 뿐 아니라 느낌ㆍ행동ㆍ생활과 상관이 있다. 사고(思考)는 물질 생활과 더 가깝게 관계되며, 온통 그렇지는 않지만, 주로 이치와 과학의 사실에 지배를 받고, 영의 분야를 향한 비물질 범위에서는 진리에 지배를 받아야 한다. 사람의 신학이 아무리 착각이고 그릇되더라도, 사람의 종교는 전적으로 진정하고 영구히 참될 수 있다.
103:9.3 (1141.1) 최초의 형태의 불교는 유란시아의 진화 역사 전체를 통해서 대두된 바, 신이 없는 최선의 종교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이 종교가 발전되자, 신이 없는 채로 남지는 않았다. 신앙이 없는 종교는 모순이다. 하나님 없이, 종교는 하나의 철학적 모순이요 지적 부조리이다.
103:9.4 (1141.2) 자연 종교가 마술과 신화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후일에 계시 종교들의 실체와 진리, 그리고 예수가 가졌던 종교의 완벽하고 유익한 복음을 무효로 만들지 않는다.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은 마침내 종교에서 마술을 믿는 미신, 신화(神話)의 환상, 전통적 독단의 사슬을 벗겨 버렸다. 그러나 이 초기의 마술과 신화는 물질을 초월하는 가치와 존재들의 계심과 실체를 가정함으로써, 나중에 나타나는 우수한 종교를 위하여 무척 효과 있게 길을 닦았다.
103:9.5 (1141.3) 종교적 체험은 순전히 영적ㆍ주관적 현상이지만, 그러한 체험은 우주의 객관적 실체의 가장 높은 영역을 향하여 분명하고 생생한 믿음의 태도를 받아들인다. 종교적 철학의 이상은, 온 우주의 무한한 아버지의 절대적 사랑에 사람이 조건 없이 기대도록 이끌 그러한 믿음이요 신뢰이다. 그러한 진정한 종교적 체험은 이상주의적 욕구를 철학으로 구체화한 것을 훨씬 초월한다. 그런 체험은 실제로 구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오로지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배우고 행하는 일에만 아랑곳한다. 그러한 종교를 가졌다는 표시는, 최상의 신을 믿는 믿음, 영원히 살아남는다는 희망, 그리고 사랑, 특히 동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103:9.6 (1141.4) 신학이 종교의 주인이 될 때, 종교는 죽는다. 종교는 생명이 아니라 교리가 된다. 신학(神學)의 사명은 단지 개인이 영적 체험을 자의식하도록 돕는 것이다. 신학은 종교의 체험적 주장을 정의하고 분명히 밝히고 해설하고 정당화하는 종교적 노력이며, 결국 이 주장은 오직 생생한 믿음으로만 입증할 수 있다. 우주의 상급 철학에서, 지혜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믿음과 연합하게 된다. 이치ㆍ지혜ㆍ믿음은 사람의 가장 높은 인간적 성취이다. 이치를 따지는 것은 사람에게 사실의 세계, 사물을 소개하며, 지혜는 사람에게 진리의 세계, 즉 관계를 소개한다. 믿음은 사람을 신의 세계로, 영적 체험을 겪게 한다.
103:9.7 (1141.5) 믿음은 이치가 갈 수 있는 데까지 아주 기꺼이 이치를 데리고 가며, 그리고 나서 철학의 한계 끝까지 지혜와 함께 계속 간다. 다음에 믿음은 오직 진리의 동반을 받으면서, 한이 없고 결코 그치지 않는 우주 여행 길을 감히 떠난다.
103:9.8 (1141.6) 과학(지식)은 이치가 정당하다, 사람이 우주를 파악할 수 있다는 본래의(보조 영의) 가정 위에 기초를 둔다. 철학(조화된 이해)은 지혜가 정당하다, 물질 우주가 영적 우주와 조화될 수 있다는 본래(지혜 영)의 가정(假定) 위에 기초를 둔다. 종교(몸소 영적으로 체험하는 진리)는 믿음이 정당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는 본래(생각 조절자)의 가정 위에 기초를 둔다.
103:9.9 (1141.7) 필사 인생의 현실을 충분히 깨닫는 것은 이치ㆍ지혜ㆍ믿음, 이 세 가지의 가정을 점진적으로 기꺼이 믿으려 하는 태도에 있다. 그러한 인생은 진리에 자극을 받고 사랑이 지배하는 인생이며, 이것들은, 존재한다는 것을 물질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객관적 우주 실체의 이상이다.
103:9.10 (1142.1) 일단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인식하고 나서, 이치를 따지는 것은 지혜를 나타낸다. 지혜가 옳은 것과 그른 것, 진리와 잘못 사이에서 선택할 때, 지혜는 영의 인도하심을 보여준다. 이처럼 지성ㆍ혼ㆍ영의 활동은 늘 가까이 연합되고, 기능 면에서 서로 연결된다. 이치는 사실에 관한 지식을 다루고, 지혜는 철학과 계시를, 믿음은 살아 있는 영적 체험을 다룬다. 진리를 통해서 사람은 아름다움에 이르고, 영적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선의 높이까지 올라간다.
103:9.11 (1142.2) 믿음은 단지 신의 계심이 주는 신비스러운 느낌 뿐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하는 길로 이끈다. 믿음은 그 감정적 결과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참된 종교는 만족스러운 감정일 뿐 아니라, 믿고 아는 체험이다.
103:9.12 (1142.3) 종교적 체험에는 그 영적 내용에 비례하는 한 실체가 있으며, 그러한 실체는 이치ㆍ과학ㆍ철학ㆍ지혜, 그리고 인간의 모든 다른 성취를 뛰어넘는다. 그러한 체험으로 얻은 확신은 무너질 수 없고, 종교적 생활의 논리는 사람이 반박할 수 없다. 그러한 지식의 확신은 인간을 초월한다. 그 만족감은 극도로 신성하고, 그 용기는 꺾을 수 없고, 그 헌신에 의심이 없으며, 그 충성은 더할 나위 없고, 그 운명은 최종이다―영원하고 최종이고 보편적인 것이다.
104:0.1 (1143.1) 계시된 종교의 삼위일체 개념을 여러 진화 종교에 있는 삼원조(三員組) 관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삼원조 관념은 많은 암시적 관계로부터 생겼지만, 주로 손가락이 세 마디이기 때문에, 최소한 세 다리가 있어야 의자를 안정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떠받쳐 주는 세 점이 텐트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원시인은 오랫동안, 셋을 넘어서 셀 수 없었다.
104:0.2 (1143.2) 지난날과 오늘날, 낮과 밤, 뜨거움과 차가움, 암놈과 숫놈과 같은 어떤 자연스러운 쌍들을 제쳐놓고, 사람은 무릇 삼원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면, 어제와 오늘과 내일, 일출과 정오와 일몰, 아버지와 어머니와 어린아이이다. 사람들은 갈채를 세 차례 승리자에게 보냈다. 죽은 사람은 셋째 날에 묻혔고, 세 번 목욕함으로 귀신을 달랬다.
104:0.3 (1143.3) 인간의 체험에서 이러한 자연스러운 연결의 결과로서 삼원조가 종교에서 나타났고, 그것도 신들의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나 그들의 어떤 대표자도 인류에게 계시되기 오래 전에 나타났다. 나중에 페르시아인ㆍ인도인ㆍ그리스인ㆍ에집트인ㆍ바빌로니아인ㆍ로마인ㆍ스칸디나비아인은 모두 삼원조의 신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아직도 참된 삼자일체(三者一體)가 아니었다. 삼원조의 신들은 모두 자연스러운 기원을 가졌고, 유란시아에서 대부분의 가장 지적인 종족들에게 언젠가 나타났다. 진화로 생긴 삼원조 개념은 계시된 삼위일체 개념과 때때로 섞이게 되었다. 이 경우에는 흔히 두 가지를 구별하기가 불가능하다.
104:1.1 (1143.4)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를 이해하도록 이끈 계시, 유란시아에서 첫 계시를 약 50만 년 전에 칼리가스티아 영주의 참모진이 주었다. 이 최초의 삼위일체 개념은 행성의 반란이 터지고 나서 안정되지 않았던 시절에, 세상에서 사라졌다.
104:1.2 (1143.5) 첫째 동산과 둘째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삼위일체를 두 번째로 발표했다. 이 가르침은 약 3만 5천 년 뒤에 마키벤타 멜기세덱의 시절에도 완전히 잊혀지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셋 족속의 삼위일체 개념이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에서, 그러나 특별히 인도에서 지속했고, 인도에서 아그니, 즉 베다에서 머리가 셋인 불의 신으로, 오랫동안 남았다.
104:1.3 (1143.6)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삼위일체를 세 번째로 발표하였고, 살렘의 현자가 걸쳤던 가슴받이에 세 동심원(同心圓)이 이 교리를 상징하였다. 그러나 마키벤타는 팔레스타인의 베두인 족속에게 우주의 아버지, 영원한 아들, 무한한 영에 관하여 가르치기가 아주 어려움을 알아차렸다. 그의 제자들의 대부분은 삼위일체가 놀라시아덱의 최고자 세 분으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했고, 몇 사람은 삼위일체가 체계 군주, 별자리 아버지, 지역 우주의 창조 신이라고 파악했다.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ㆍ아들ㆍ영의 관계라는 개념을 어렴풋이라도 깨달은 자들은 더욱 적었다.
104:1.4 (1144.1) 살렘 선교사들의 활동을 통해서, 삼위일체에 관한 멜기세덱의 가르침은 유라시아와 북 아프리카의 상당 부분에 걸쳐 차츰 퍼졌다. 후일의 안드 족속 시대와 멜기세덱 이후 시대에 삼원조와 삼자일체를 구별하는 것은 흔히 어렵고, 그때 두 개념은 어느 정도까지 서로 섞이고 한데 엉키었다.
104:1.5 (1144.2) 힌두교 신자 사이에서 삼자일체 개념은 존재ㆍ지능ㆍ기쁨으로서 뿌리를 내렸다. (나중에 인도인의 개념은 브라마ㆍ시바ㆍ비슈누였다.) 셋 족속 사제들이 더 일찍 있었던 삼위일체 묘사를 인도로 가져왔지만, 살렘 선교사들이 후일의 삼위일체 관념을 들여왔고, 인도의 토착 지식인들이 이러한 교리들을 진화된 삼원조 개념과 복합시킴으로 이를 발달시켰다.
104:1.6 (1144.3) 불교 신자의 신앙은 삼자일체의 성질을 가진 두 교리를 개발했다. 먼저 있던 것은 선생ㆍ율법ㆍ우애였고, 고타마 싯달타가 이를 발표하였다. 부다를 따르던 사람들의 북쪽 가지에서 발달한 후일의 개념은 최상의 주, 성령, 육신화한 구원자를 포함했다.
104:1.7 (1144.4) 힌두교와 불교 신자의 이 관념들은 진정한 삼자일체 가설, 다시 말해서 일신교의 하나님이 세 가지로 나타난다는 관념이었다. 참된 삼자일체 개념은 따로 있는 세 신을 그저 한데 모아 놓은 것이 아니다.
104:1.8 (1144.5) 히브리인은 멜기세덱 시절에, 켄 족속의 전통으로부터 삼위일체에 대하여 알았지만, 유일한 하나님, 야웨를 향한 그들의 일신교적 열심이 모든 그러한 가르침을 가리게 만들었고, 그래서 예수가 나타날 때까지 엘로힘 교리는 유대인의 신학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뿌리가 뽑혔다. 히브리인의 지성은 삼자일체 개념을 하나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일신교 관념과 절충할 수 없었다.
104:1.9 (1144.6) 이슬람 신앙의 추종자들도 마찬가지로, 삼위일체 관념을 깨닫지 못했다. 태어나는 일신교는 다신교와 부딪쳤을 때, 언제나 삼자일체 사상을 너그럽게 보기 어렵다. 삼자일체 관념은 교리의 탄력성과 아울러 확고한 일신교 전통이 있는 종교에서 뿌리를 가장 잘 내린다. 위대한 일신론자, 히브리인과 이슬람 교인들은 삼신(三神) 숭배, 다신론, 그리고 삼자일체 사상, 즉 삼자의 신성과 성격이 일체로 명시되어 존재하는 하나의 신을 예배하는 것, 이 세 가지를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104:1.10 (1144.7) 예수는 사도들에게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구성원들에 관한 진리를 가르쳤지만, 그들은 예수가 비유로, 그리고 상징으로 말한다고 생각했다. 히브리인의 일신교에서 양육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지배하는 야웨 개념과 부딪치는 듯이 보이는 어떤 관념에도 귀를 기울이기가 어려움을 깨달았다. 그리고 초대의 기독교인은 삼위일체 개념에 저항하는 히브리인의 편견을 물려받았다.
104:1.11 (1144.8) 기독교에서 삼위일체의 처음은 안티옥에서 선포되었고, 하나님, 그의 말씀, 그의 지혜로 이루어졌다. 바울은 아버지ㆍ아들ㆍ영으로 구성된 삼위일체에 관하여 알았지만, 이에 관하여 설교하는 일이 드물었고, 새로 형성되는 여러 교회에 보낸 몇몇 편지에서만 언급하였다. 그때에도, 동료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은 예수, 곧 지역 우주의 창조 아들과 신의 둘째 분, 곧 파라다이스의 영원한 아들을 혼동하였다.
104:1.12 (1144.9)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은 그리스도 이후 1세기 끝 가까이에 인정받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우주의 아버지, 네바돈의 창조 아들, 구원자별의 신성한 봉사자―지역 우주의 어머니 영이자 창조 아들의 창조 배우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104:1.13 (1145.1) 예수가 살던 시절 이후로, 이 계시 발표문에서 내놓기까지, (특별히 그 계시를 받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 유란시아에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사실적 신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이 사실 면에 잘못이 있었더라도, 영적 관계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참말이었다. 오직 그 철학의 함축성과 우주론에 관한 결과에서, 이 개념은 장애를 겪었다. 우주에 생각이 미치는 많은 사람이 신의 둘째 분, 무한한 삼위일체의 둘째 구성원이 한때 유란시아에 거했다는 것을 믿기는 어려웠다. 정신적으로 이것은 참말이지만, 실제로 사실이 아니다. 미가엘 창조자들은 영원한 아들의 신성을 충분히 담고 있지만, 절대 성격자가 아니다.
104:2.1 (1145.2) 일신교는 다신교의 모순에 맞서는 하나의 철학적 항의로서 일어났다. 처음에 초자연적 활동의 세분화와 아울러 만신전을 조직하고, 다음에 최고신교(最高神敎)로 많은 신 위에 하나의 신을 높이고, 마침내 최종의 가치를 가진 유일한 하나님을 제외하고 모두 배척함을 통해서 일신교가 개발되었다.
104:2.2 (1145.3) 삼자일체 사상은 누구와도 관계 없는 우주 의미를 가진 신, 사람 모습을 벗고 외로운 신이 하나인 것을 상상하기가 불가능한 것에 대한 체험적 항의에서 생겨난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철학은 순전한 일신교의 신 개념으로부터 성격의 품질을 뽑아내는 경향이 있고, 누구와도 관계 없는 이 하나님 관념을 이처럼 범신적 절대자의 지위로 낮춘다. 다른 동급의 성격 존재들과 대등한 성격 관계가 없는 하나님이 무슨 개인적 성품을 가졌는가 이해하기는 언제나 어려웠다. 신 속에 있는 성격은 그러한 신이, 성격을 가진 다른 대등한 신과 관계를 가지고 존재할 것을 요구한다.
104:2.3 (1145.4) 삼위일체 개념의 인식을 통해서, 사람의 지성은 시공의 여러 우주에 있는 사랑과 법칙의 상호 관계를 얼마큼 파악하기를 바랄 수 있다. 영적 믿음을 통해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얻지만, 이 영적 믿음이 물질 우주의 예정된 법칙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곧 알아차린다. 하나님이 자기의 파라다이스 아버지라는, 사람의 믿음이 확고한 것과 상관 없이, 확대되는 우주의 지평은 사람이 또한 파라다이스 신의 실체가 보편적 법칙임을 인정하라, 파라다이스로부터 바깥으로 뻗으며, 영원한 세 분의 창조 아들과 창조 딸들이 만든 진화하는 지역 우주들보다도 더 위에 있는 삼위일체의 통치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이러한 신의 연합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사실이요 실체요 영원한 불가분성이다.
104:2.4 (1145.5) 그리고 바로 이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실재하는 개체이다―성격자가 아니지만, 그런데도 참된 절대 실체이다. 성격자는 아니지만 그런데도 공존하는 성격자―아버지ㆍ아들ㆍ영인 성격자―들과 모순되지 않는다. 삼위일체는 세 파라다이스 신을 한데 모음으로 궁극에 생기는, 총합보다 커지는 신 실체이다. 삼위일체의 질ㆍ특징ㆍ기능은 세 파라다이스 신의 속성을 단순히 더한 것이 아니다. 삼위일체의 기능은 독특하고 고유하며, 아버지ㆍ아들ㆍ영의 속성을 분석함으로 온전히 예측할 수 없는 무엇이다.
104:2.5 (1146.1) 예를 들면, 주는 땅에 계셨을 때, 추종자들에게 응보는 결코 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반드시 집단의 기능이라고 훈계하였다. 신들도 성격자로서 응보를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이 기능을 하나의 집단으로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로서 수행한다.
104:2.6 (1146.2) 아버지ㆍ아들ㆍ영이 삼위일체로 연합된 개념을 파악하는 것은 어떤 다른 세 가지 관계의 연장된 발표를 위하여 인간의 지성을 준비시킨다. 신학적 이유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개념으로 넉넉히 만족될지 모르지만, 철학과 우주론의 논리는 첫째 근원 중심의 다른 여러 삼자일치 연합을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삼자일치 속에서 무한자는 우주에서 나타나는―물력과 에너지와 동력, 원인과 반응, 잠재성과 사실성, 인력과 긴장, 원본과 원칙과 통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여러 관계에서―아버지가 아닌 여러 자격으로 활동한다.
104:3.1 (1146.3) 인류는 때때로 세 분의 신으로 이루어진 삼위일체를 이해하기에 이르렀지만, 일관성을 위해서 모두 일곱 절대자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음을 인간의 지능이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 관하여 참된 모든 것이 어느 삼자일치에 관하여 반드시 참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삼자일치는 삼자일체와 다른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기능적 모습에서, 삼자일치(三者一致)는 삼자일체와 비슷할지 모르지만, 결코 성질이 삼자일체와 같은 형태는 아니다.
104:3.2 (1146.4) 필사 인간은 유란시아에서 시야를 넓히고 개념을 확대하는 중요한 시대를 거치고 있으며, 그의 우주 철학은 인간이 생각하는 지적 무대가 확대되는 것과 발걸음을 맞추기 위하여 진화를 가속해야 한다. 우주 의식이 넓어짐에 따라서, 필사 인간은 물질 과학, 지적 철학, 영적 통찰력에서 그가 발견하는 모든 것이 서로 관계됨을 파악한다. 그래도 우주가 통일되어 있다는 이 모든 믿음과 함께, 사람은 모든 존재의 다양성을 깨닫는다. 신의 불변성에 관한 온갖 개념이 있는데도, 사람은 항상 변하고 체험으로 성장하는 우주 속에서 그가 사는 것을 깨닫는다. 영적 가치가 살아남는 것을 깨달음과 상관 없이, 사람은 물력ㆍ에너지ㆍ동력을 다루는 수학과 예비 수학을 늘 살펴야 한다.
104:3.3 (1146.5) 무한의 영원히 충만한 성질은 진화하는 우주들의 시간적 성장과 또 거기에서 체험하는 거주자들의 불완전성과 어떤 방법으로 절충되어야 한다. 총 무한의 개념은, 필사자의 지능과 상물질 혼이, 최종의 가치가 있고 사람을 영적으로 변화시키는 중요성이 있는 이 개념을 깨닫도록 어떤 방법으로 구분되고 제한되어야 한다.
104:3.4 (1146.6) 이치는 우주 실체의 일신교적 통일성을 요구하지만, 유한한 체험은 여럿인 절대자, 그리고 우주 관계에서 그들이 조화된다는 가설을 요구한다. 동급의 존재들이 없다면 다양한 절대 관계가 나타날 가능성이 전혀 없고, 차이ㆍ변수ㆍ변경자ㆍ감쇠자(減衰者)ㆍ제한자, 또는 감소자들이 활동할 기회가 전혀 없다.
104:3.5 (1146.7) 이 여러 논문에서 총 실체(무한)는 다음 일곱 절대자 안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104:3.13 (1147.5) 첫째 근원 중심은 영원한 아들의 아버지이고, 또한 파라다이스 섬에게 원본이다. 그의 성격은 아들 속에서 제한되지 않았지만, 신 절대자 속에서 성격은 잠재성이 되었다. 아버지의 에너지는 파라다이스와 하보나에서 드러났고, 동시에 무제한 절대자 속에서 그 에너지가 감추어졌다. 무한자는 합동 행위자의 그침 없는 행위 속에서 늘 드러나며, 한편 우주 절대자의 활동, 보상하지만 가려진 활동에서 영원히 작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동급의 여섯 절대자와 관계되며, 따라서 끊임없이 영원이 되풀이되는 동안 내내, 모두 일곱이 무한의 전역을 둘러싼다.
104:3.14 (1147.6) 절대 관계의 삼자일치는 불가피한 듯 보일 것이다. 성격자는 모든 다른 수준과 마찬가지로, 절대 수준에서 다른 성격과 연합하기를 추구한다. 세 파라다이스 성격자의 연합은 첫 삼자일치, 곧 아버지ㆍ아들ㆍ영의 성격 단결을 영원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 세 분이 성격자로서 통일된 기능을 위하여 한데 모일 때, 이로서 기능적으로 통일되는 한 삼자일치를 구성하며, 삼자일체―하나의 유기적 개체―는 아니지만, 그런데도 하나의 삼자일치, 즉 셋이 기능적으로 일치한 총합이다.
104:3.15 (1147.7)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삼자일치가 아니다. 하나의 기능적 일치가 아니라, 오히려 나누어져 있지 않고, 나눠 놓을 수 없는 신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성격자로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데, 이는 삼위일체가 그들의 나눠지지 않는 신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첫째 삼자일치와 아무런 그러한 성격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데, 이는 첫째 삼자일치가 세 분으로서 그들의 기능적 연합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삼위일체로서―나눠지지 않은 신으로서―그들의 성격 집합인 삼자일치에 대하여 외부 관계를 집단으로 유지한다.
104:3.16 (1147.8) 따라서 여러 절대 관계 사이에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독특하며, 실존적 삼자일치가 몇 가지 있지만, 오직 하나의 실존적 삼위일체가 있다. 삼자일치는 하나의 개체가 아니다. 그것은 유기체가 아니라 오히려 기능적인 것이다. 그 구성원은 단체라기보다 협동하는 자들이다. 삼자일치의 구성 분자는 개체일 수도 있지만, 삼자일치 그 자체는 하나의 연합이다.
104:3.17 (1147.9) 그러나 삼자일체와 삼자일치 사이에 한 가지 비교할 점이 있다. 이 두 가지가 궁극에는, 구성 분자가 가진 속성들의 합, 식별할 수 있는 합보다는 다른 무엇인 기능이 된다. 그러나 이들을 이처럼 기능적 관점에서 비교할 수 있지만, 그밖에 그들은 아무런 명백한 관계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대체로 기능이 구조와 가지는 관계로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삼자일치 연합의 기능은 삼자일체의 구조나 개체의 기능이 아니다.
104:3.18 (1147.10) 그렇기는 해도 여러 삼자일치가 실재하며, 이것들은 아주 현실이다. 삼자일치 속에 총 실체가 기능이 되며, 이를 통하여 우주의 아버지는 무한의 총 기능에 대하여 직접, 친히 고삐를 쥔다.
104:4.1 (1147.11) 일곱 가지 삼자일치를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우주의 아버지는 각자의 1차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여라. 그는 우주의 첫 아버지 근원이요, 절대 중심, 시초 원인, 우주의 통제자, 한없는 에너지 공급자, 최초의 통일, 무제한 지지자, 신의 첫째 분, 시초의 우주 원본, 무한의 본질이며, 지난날에 그러했고 늘 그럴 것이다. 우주의 아버지는 성격을 가진, 절대자들의 원인이며, 가장 높은 절대자이다.
104:4.2 (1148.1) 일곱 가지 삼자일치의 성질과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제시해도 좋다:
104:4.3 (1148.2) 제1 삼자일치―성격이 있고 목적을 가진 삼자일치. 이것은 세 신 성격자를 모은 것이다:
104:4.7 (1148.6) 이것은 사랑ㆍ자비ㆍ봉사, 이 세 가지의 통합이다―영원한 세 파라다이스 성격자가 의도하여 친히 사귀는 것이다. 이것은 신답게 친교하고, 지음받은 자를 사랑하고, 아버지답게 행동하고, 하늘에 올라가기를 권장하는 연합이다. 이 제1 삼자일치의 신다운 성격자들은 성격을 물려주고, 영을 수여하고, 지성을 부여하는 신들이다.
104:4.8 (1148.7) 이것은 무한한 의지를 가진 삼자일치이며, 영원한 현재를 통해서, 과거ㆍ현재ㆍ미래 시간의 모든 흐름 속에서 행위한다. 이 연합은 무한한 의지를 낳고, 성격을 가진 신이 진화 우주의 인간에게 스스로를 계시하는 작용을 마련한다.
104:4.9 (1148.8) 제2 삼자일치―동력 원본의 삼자일치. 자그마한 극자(極子)이든지, 타오르는 별이든지 또는 소용돌이치는 성운이든지, 중앙 우주나 초우주들까지도,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 가장 큰 물질 조직에 이르기까지, 물리적 원본―우주의 배치―는 반드시 이 삼자일치의 기능에서 파생된다. 이 연합은 다음으로 구성된다:
104:4.11 (1148.10) 2. 파라다이스 섬.
104:4.13 (1148.12) 셋째 근원 중심의 우주 대리자들이 에너지를 조직한다. 절대 물질이 된 파라다이스 원본을 따라서, 에너지가 형성된다. 그러나 그침 없는 이 모든 조종 뒤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계심이 있고, 그들의 연합은 파라다이스 원본을 처음으로 가동시켜 합동 행위자인 무한한 영이 출생하고 동시에 하보나가 나타나게 만들었다.
104:4.14 (1148.13) 종교적 체험을 겪으면서 사람은 사랑인 하나님과 접촉하지만, 그러한 영적 통찰력은 그 원본, 즉 파라다이스가 우주의 사실인 것을 총명하게 인식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파라다이스 성격자들은 신다운 사랑의 힘,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모든 생물이 자유 의지로 찬미를 드리게 하며, 영에게서 태어난 모든 그러한 성격자를 하나님의 최후자 아들이 끝없이 봉사하는 천상의 기쁨으로 이끈다. 제2 삼자일치는 이러한 작용이 펼쳐지는 공간 무대의 건축자이다. 이 삼자일치는 우주에 배치 되는 원본들을 결정한다.
104:4.15 (1148.14) 사랑은 제1 삼자일치의 신성의 특징을 나타낼지 모르지만, 원본(原本)은 제2 삼자일치가 은하계에 나타난 것이다. 제1 삼자일치와 진화하는 성격자들의 관계는, 제2 삼자일치와 진화하는 우주들의 관계와 같다. 원본과 성격은 첫째 근원 중심의 행위 가운데 두 가지 가장 중요한 표현이다. 그리고 아무리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여전히 동력의 원본과 사랑이 넘치는 성격자는 동일한 보편적 실체인 것이 참말이다. 파라다이스 섬과 영원한 아들은 우주의 아버지 물력의 헤아릴 수 없는 성품이 나란히, 그러나 정반대로 계시된 것들이다.
104:4.16 (1149.1) 제3 삼자일치―영을 진화시키는 삼자일치. 영적 명시의 총체성은 그 처음과 끝이 이 연합에 있으며, 다음으로 구성된다:
104:4.20 (1149.5) 영 잠재성으로부터 파라다이스 영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은 아버지의 순전한 영 본질, 아들ㆍ영의 활동적 영 가치, 신 절대자의 제한 없는 영 잠재성, 이 삼자일치 연합에서 실체가 표현된다. 영의 실존적 가치는 이 삼자일치 속에서 원초적으로 창시되고, 완벽하게 명시되고, 마지막 운명을 가진다.
104:4.21 (1149.6) 아버지는 영에 앞서 존재하고, 아들ㆍ영은 활발한 창조 영으로서 활동하며, 신 절대자는 모두를 둘러싸는 영으로서, 아니 영을 지나서도 존재한다.
104:4.22 (1149.7) 제4 삼자일치―무한 에너지의 삼자일치. 이 삼자일치 안에서, 공간의 잠재력으로부터 일력(一力)에 이르기까지 모든 에너지 실체의 처음과 끝이 영원하게 된다. 이 모임에는 다음이 들어간다:
104:4.25 (1149.10) 3. 무제한 절대자.
104:4.26 (1149.11) 파라다이스는 우주에서 물력과 에너지를 활성화하는 중심이다―첫째 근원 중심의 우주 위치요, 무제한 절대자의 우주 초점이요, 모든 에너지의 근원이다. 이 삼자일치 안에 실존적으로 있는 것은 무한한 우주의 에너지 가능성이며, 이 가운데 대우주와 총우주는 겨우 부분적으로 겉에 나타난 것이다.
104:4.27 (1149.12) 제4 삼자일치는 근본 단위의 우주 에너지를 절대로 통제하며, 모습이 바뀌는 우주를 통제하고 안정시키는 능력, 절대 이하의 능력이 체험적 신들에서 나타나는 것에 정비례하여, 이 에너지를 무제한 절대자의 손아귀로부터 방출한다.
104:4.28 (1149.13) 이 삼자일치는 물력이요 에너지이다. 무제한 절대자의 끝없는 잠재성은 파라다이스 섬의 절대력 둘레에 집중하며, 거기서부터 다른 면에서 정적(靜的)인 무제한자의 고요함 속에서 상상할 수 없는 흥분이 퍼진다. 그리고 무한한 에너지 공급자, 즉 첫째 근원 중심의 헤아릴 수 없는 원본과 아무도 알아낼 수 없는 계획과 조화되어, 무한한 우주의 심장, 물질로 된 파라다이스 심장의 끝없는 맥박이 뛴다.
104:4.29 (1149.14) 제5 삼자일치―무한히 반응하는 삼자일치. 이 연합은 다음으로 이루어진다:
104:4.30 (1149.15) 1. 우주의 아버지.
104:4.32 (1149.17) 3. 무제한 절대자.
104:4.33 (1149.18) 이 모임은 신이 아닌 실체의 영토 안에서 실현할 수 있는 만물의 무한한 기능의 실현을 영원하게 만든다. 이 삼자일치는 다른 삼자일치들이 의지(意志)하고, 원인이 되고 긴장을 일으키고 원본이 되는 행동과 계심에 대하여 한없이 반응하는 능력을 나타낸다.
104:4.34 (1150.1) 제6 삼자일치―우주에서 연합된 신의 삼자일치. 이 배합은 이렇게 구성된다:
104:4.38 (1150.5) 이것은 우주에 계신 신의 연합이요, 신의 초월성과 관련하여, 신이 우주 안에 거하심을 말한다. 이것은 신이 되어버린 실체의 영토 바깥에 놓인 실체들을 향하여 무한 수준에서 신성이 마지막으로 미치는 범위이다.
104:4.39 (1150.6) 제7 삼자일치―무한히 통일되는 삼자일치. 이것은 시간과 영원 속에서 기능적으로 나타나는 무한한 통일, 곧 실재물과 잠재물이 나란히 통일되는 것이다. 이 집단은 다음으로 이루어진다:
104:4.43 (1150.10) 합동 행위자는 유한한 것으로부터 초월적인 것을 거쳐서, 계속하여 절대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온갖 수준의 모습으로 현실이 된 모든 실체의 다른 기능적 모습을 보편적으로 통합한다. 우주 절대자는 활발하고 의지를 가진, 무언가 일으키는 신 실체의 한없는 가능성으로부터, 무제한 절대자의 헤아릴 수 없는 영토에 있는 실체, 곧 정태적이고 반응하는 비신(非神) 실체의 끝없는 가능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불완전한 실체의 다른 모습에 본래 있는 여러 차이점을 완전히 보상한다.
104:4.44 (1150.11) 이 삼자일치 안에서 활동함에 따라서, 합동 행위자와 우주 절대자는 신에 대하여, 또 신이 아닌 계심에 대하여 마찬가지로 민감하다. 또한 첫째 근원 중심도 마찬가지이며, 그는 이 관계에서 모든 의도와 목적으로 볼 때, 스스로 계신 이의 개념과 구분할 수 없다.
104:4.45 (1150.12) 이러한 대략은 여러 삼자일치 개념을 밝히기에 넉넉하다. 여러 삼자일치의 궁극 수준을 모르니까, 너희는 처음 일곱 가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더 자세히 설명하려는 시도가 지혜롭다고 여기지 않지만, 첫째 근원 중심에게는 열 다섯 가지 삼자일치 연합이 있고, 그 가운데 여덟은 이 논문집에서 밝히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밝히지 않은 이 여러 연합은, 최상위의 체험 수준을 지나는 실체ㆍ사실성ㆍ잠재성과 관련된다.
104:4.46 (1150.13) 여러 삼자일치는 무한을 기능적으로 안정시키는 평형 바퀴요, 일곱 무한 절대자의 독특성을 통일하는 것이다. 무한이 일곱 절대자로 다양화되었는데도, 아버지이자 스스로 계신 이로 하여금 기능적 무한의 통일을 체험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여러 삼자일치가 실존적으로 있기 때문이다. 첫째 근원 중심은 어떤 삼자일치에서도 통일하는 구성원이다. 그분 안에서 만물이 제한 없는 시작, 영원한 존재, 무한한 운명을 가진다―”그분 안에 모든 것이 존재한다.”
104:4.47 (1150.14) 비록 이 여러 연합이 아버지이자 스스로 계신 이의 무한성을 늘일 수 없어도, 이런 연합은 그의 실체가 무한 이하와 절대 이하로 나타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듯하다. 일곱 가지 삼자일치는 유연성을 높이고 새로운 깊이를 영원하게 하며, 새로운 가치를 신답게 만들고 새로운 가능성을 드러내며, 새로운 의미를 밝힌다. 시간과 공간에서, 또 영원한 우주에서, 다양하게 겉으로 나타나는 이 모든 모습은 최초에 무한한 스스로 계신 이가 가상적으로 가만히 계신 상태에서 존재한다.
104:5.1 (1151.1) 구성에서 아버지가 들어가지 않는 어떤 다른 삼자일치 관계들이 있지만, 이들은 진정한 삼자일치가 아니며, 그들은 아버지의 여러 삼자일치와 반드시 구별된다. 이들은 여러 가지로, 버금 삼자일치, 나란한 삼자일치, 그리고 삼극일치로 부른다. 이들은 여러 삼자일치가 존재하는 결과로 생긴다. 이 여러 연합 중에서 둘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104:5.2 (1151.2) 사실성의 삼극일치. 이 삼극(三極)일치는 세 가지 절대 사실의 상호 관계에 있다:
104:5.6 (1151.6) 영원한 아들은 영 실체의 절대자, 곧 절대 성격자이다. 파라다이스 섬은 우주 실체에서 절대적인 것이요, 곧 절대 원본이다. 합동 행위자는 지성 실체의 절대자, 곧 절대 영 실체와 동급이며, 성격과 권능이 실존적으로 신으로 합성된 것이다. 이 삼자일치의 연합은 궁극에 현실화된 실체―영, 우주 또는 지성 실체―의 총합을 조화시키기에 이른다. 그것은 사실이 되는 데 제한이 없다.
104:5.7 (1151.7) 잠재성의 삼극일치. 이 삼극일치는 세 잠재성의 절대자의 연합에 있다:
104:5.11 (1151.11) 이처럼 모든 잠자는 에너지 실체―영 실체, 지성 실체 또는 우주 실체―의 무한한 저수지(貯水池)들이 서로 연합되어 있다. 이 연합은 모든 잠자는 에너지 실체를 통합하게 한다. 그 잠재성은 무한하다.
104:5.12 (1151.12) 여러 삼자일치가 무한한 기능의 통일에 1차적으로 관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삼극일치는 체험적 신들이 우주에 출현하는 데 관련이 있다. 여러 삼자일치는 체험적 신―최상위ㆍ궁극위ㆍ절대자―와 간접으로 관련되지만, 삼극일치는 직접 관여한다. 그들은 솟아나는 최상 존재의 권능과 성격을 합성하는 데서 나타난다. 그리고 공간에서 일시 사는 인간에게 최상 존재는 스스로 계신 이의 통일성을 계시한 것이다.
105:0.1 (1152.1) 높은 계급의 우주 지성 존재들도 무한을 겨우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실체의 최종을 오직 상대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지성이, 실재한다고 부르는 모든 것의 기원 및 운명의 영원함과 신비를 꿰뚫어 보기를 추구할 때, 영원ㆍ 무한을 거의 한이 없는 타원이라고 생각함으로 그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도움이 될지 모른다. 이 타원은 하나의 절대 원인으로 말미암아 생겼고, 끝없이 다양화되는 이 우주 영역에 두루 활동하며, 운명의 어떤 절대적이고 무한한 잠재성을 늘 추구한다.
105:0.1 (1152.1) 높은 계급의 우주 지성 존재들도 무한을 겨우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실체의 최종을 오직 상대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지성이, 실재한다고 부르는 모든 것의 기원 및 운명의 영원함과 신비를 꿰뚫어 보기를 추구할 때, 영원ㆍ 무한을 거의 한이 없는 타원이라고 생각함으로 그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도움이 될지 모른다. 이 타원은 하나의 절대 원인으로 말미암아 생겼고, 끝없이 다양화되는 이 우주 영역에 두루 활동하며, 운명의 어떤 절대적이고 무한한 잠재성을 늘 추구한다.
105:0.2 (1152.2) 필사의 지능이 실체 전부의 개념을 파악하려고 애쓸 때, 그러한 유한한 지성은 무한한 실체와 얼굴을 마주친다. 실체의 전부는 무한이며, 따라서 개념 능력이 무한하지 않은 어떤 지성도 이를 결코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105:0.3 (1152.3) 인간의 지성은 영원의 존재들에 관하여 적절한 개념을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고,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실체 전부에 대한 우리의 개념들조차 묘사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렇기는 해도 우리는 그러한 발표를 시도할까 한다. 하지만 필사자의 머리가 이해하는 수준까지 번역하고 수정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개념들이 깊이 왜곡되어야 함을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다.
105:1.1 (1152.4) 여러 우주에 있는 철학자들은 무한 속에서 절대적 시초의 원인은 무한한 자, 영원한 자, 절대적인 스스로 계신 이로서 활동하는 우주의 아버지에게 있다고 말한다.
105:1.2 (1152.5) 이 무한한 스스로 계신 이 관념을 필사 지능에게 발표하는 데 따르는 숱한 위험 요소가 있는데, 이는 이 개념이 인간이 체험으로 이해하는 것과 너무나 거리가 멀어서 의미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가치를 오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해도, 절대 기원과 무한한 운명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데 접근하기 위하여, 스스로 계신 이에 관한 철학적 개념은 유한한 존재들에게 어떤 기초를 마련해 준다. 그러나 실체의 기원과 결실을 밝히려고 어떤 시도를 하더라도, 이 스스로 계신 이 개념은 모든 성격 의미와 가치에서, 신의 첫째 분, 즉 모든 성격자의 우주의 아버지와 뜻이 같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자. 하지만 이 스스로 계신 이라는 가설은 신(神)이 되지 않은 우주 실체의 영역에서 아주 뚜렷이 확인할 수 없다.
105:1.3 (1152.6) 스스로 계신 이는 무한자이다. 스스로 계신 이는 또한 무한이다. 연속되는 시간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실체는 무한한 스스로 계신 이 안에서 기원을 가지고, 과거의 무한한 영원 속에 그가 홀로 존재했다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첫째 철학적 가설임이 틀림없다. 스스로 계신 이의 개념은 제한되지 않은 무한, 곧 무한한 영원 전체 속에서 언제라도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이 아직 분화되지 않은 그러한 실체를 의미한다.
105:1.4 (1153.1) 하나의 실존적 개념으로서 스스로 계신 이는 신화되지도 비신화(非神化)되지도 않았고, 실재하는 것도 잠재성도 아니며, 성격도 비성격도 아니요, 정적(靜的)인 것도 동적(動的)인 것도 아니다. 스스로 계신 이가 계시다고 말하는 것 외에 아무런 제한이 무한자에게 적용될 수 없다. 스스로 계신 이라는 철학적 가정은 무제한 절대자 개념보다 얼마큼 더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의 우주 개념이다.
105:1.5 (1153.2) 유한한 자의 생각에는 단지 시작이 있어야 한다. 실체에는 결코 진정한 시작이 없었어도, 여전히 실체가 무한에게 명시되는 어떤 근원적 관계들이 있다. 그 실체 이전, 원초적 영원의 상황은 다음과 비슷한 무엇으로 생각해도 좋다: 무한히 까마득한 어떤 가상(假想)하는 과거 영원의 순간에, 스스로 계신 이를 물체이자 비물체로서, 원인이자 결과로서, 의지(意志)이자 반응으로서 생각해도 좋다. 이 가상하는 영원의 순간에, 무한 전역에 걸쳐 아무런 구별이 없다. 무한은 무한자로 채워져 있으며, 무한자는 무한을 둘러싼다. 이것이 영원의 가상된 정적 순간이다. 실재하는 것들은 아직도 그 잠재성 안에 담겨 있고, 잠재성이 있는 것들은 스스로 계신 이의 무한 속에서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있으리라 추측하는 이 상황에서도 우리는 자아 의지의 가능성이 존재함을 가정해야 한다.
105:1.6 (1153.3) 사람이 우주의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은 몸소 겪는 체험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여라. 영적으로 아버지인 하나님을 너와 모든 다른 필사자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너희가 체험으로 예배하는 우주의 아버지 개념은 첫째 근원 중심, 즉 스스로 계신 이가 무한하다는 너의 철학적 가설보다 반드시 작은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아버지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높고 낮은 생물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을 뜻하지만, 신에게는 우주의 생물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많이 있다. 너의 아버지요 내 아버지인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 안에서 실제로 체험하는 하나의 실체로서 우리가 파악하는, 무한자의 그 단계이다. 그러나 스스로 계신 이는 첫째 근원 중심에 관하여 알 수 없다고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가설로서 늘 남아 있다. 그리고 그 가설조차 아마도 최초의 실체의 헤아릴 수 없는 무한에 훨씬 못 미친다.
105:1.7 (1153.4) 온 우주는, 거기에 셀 수 없이 많은 집단의 거주하는 성격자들과 함께, 하나의 방대하고 복잡한 유기체이다. 그러나 첫째 근원 중심은 그가 의도한 명령에 반응하여 실재하게 된 우주와 성격자들보다 무한히 더 복잡하다. 네가 총 우주의 엄청난 크기에 두려운 마음이 들 때, 이해할 수 없는 이 창조조차도 무한자의 부분적 계시에 지나지 않음을 멈추어 생각해 보아라.
105:1.8 (1153.5) 무한은 정말로 필사자가 알아듣는 체험 수준과 멀지만, 유란시아에서 현재 시대에도 너희의 무한 개념들이 자라고 있고, 미래 영원으로 계속 뻗어나가는 너희의 끝없는 생애에 두루, 그 개념들은 줄곧 자랄 것이다. 제한 없는 무한은 유한한 인간에게 의미가 없지만, 무한은 스스로를 제한할 수 있고, 모든 수준의 우주 존재들에게 실체의 표현을 허용한다. 그리고 모든 우주 성격자를 향하여 무한자가 돌리는 그 얼굴은 아버지, 사랑이 넘치는 우주의 아버지의 얼굴이다.
105:2.1 (1153.6) 실체의 기원을 생각할 때, 모든 절대 실체는 영원부터 있고, 존재하기 시작한 적이 없이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여라. 우리는 실존적인 세 분의 신과 파라다이스 섬과 세 절대자를 절대 실체로 언급한다. 우리가 인간에게 절대 실체들의 연속되는 기원을 발표하면서 시공의 언어에 의존하는데도, 이 일곱 가지 실체는 나란히 영원하다.
105:2.2 (1154.1) 실체 기원의 연대순 묘사를 따르면서, 스스로 계신 이 안에 “처음” 의지가 표현되고 “처음”으로 반응이 일어나는 한 순간, 이론적으로 가정하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실체의 기원과 발생을 그리려고 시도할 때, 이 단계는 무한한 자가 무한성으로부터 스스로 분화한 것이라 생각해도 좋지만, 이 이원(二元) 관계의 가정은 무한자, 즉 스스로 계신 이가 영원히 연속하는 것을 인식함으로 삼자일치 개념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확대되어야 한다.
105:2.3 (1154.2) 스스로 계신 이가 이렇게 스스로 모습을 바꾸는 것은, 신이 된 실체와 신이 되지 않은 실체, 잠재하는 실체와 실재하는 실체, 그리고 도저히 그리 분류될 수 없는 어떤 다른 실체들로 마침내 몇 가지로 분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론적 일원(一元)인 스스로 계신 이의 이러한 분화(分化)는 바로 그 스스로 계신 이 안에서 일어나는 동시 관계들로 인하여 영원히 통합된다―이 스스로 계신 이는 잠재 이전이자 사실 이전(以前)의 실체이며, 선(先)인격이고 단일성(單一性) 선실체이며, 그 선(先)실체는 무한하지만 첫째 근원 중심의 계심에서 절대로, 그리고 우주의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 속에서 성격으로 드러난다.
105:2.4 (1154.3) 이 내부의 변형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계신 이는 일곱 가지 자아 관계를 위한 기초를 세운다. 혼자인 스스로 계신 이라는 철학적 (시간) 개념과 삼자일치인 과도기의 (시간) 스스로 계신 이 개념은 이제 칠중자인 스스로 계신 이를 포함하도록 확대될 수 있다. 이 칠중―즉 일곱 단계―의 성품은 무한의 일곱 절대자와 가지는 관계로 제시하는 것이 최선일지 모른다:
105:2.5 (1154.4) 1. 우주의 아버지. 영원한 아들의 아버지인 스스로 계신 이. 이것은 사실로 있는 자들의 원초적 성격 관계이다. 아들의 절대 성격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을 절대 사실로 만들고, 모든 성격자의 아들 가능성을 입증한다. 이 관계는 무한자가 성격자임을 입증하고, 최초의 아들의 성격에서 그 영적 계시를 완성한다. 아직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 우리의 아버지를 숭배할 수도 있는 필사자들도 스스로 계신 이의 이 단계를 영적 수준에서 어느 정도 체험할 수 있다.
105:2.6 (1154.5) 2. 우주 통제자. 영원한 파라다이스의 원인인 스스로 계신 이. 이것은 사실로 있는 것들의 원초적 비성격 관계, 최초의 비영적 관련이다. 우주의 아버지는 사랑인 하나님이다. 우주 통제자는 원본인 하나님이다. 이 관계는 형태―배열―의 잠재성을 안정시키고, 비성격 및 비영적 관계의 원판―모든 복사품을 만들게 하는 원판―을 결정한다.
105:2.7 (1154.6) 3. 우주 창조자. 영원한 아들과 하나인 스스로 계신 이. 아버지와 아들의 이 연합은 (파라다이스가 있는 가운데) 창조 집단을 비롯하며, 이것은 마침내 합동 성격자와 영원한 우주가 나타나게 만든다. 유한한 필사자의 관점에서 볼 때, 하보나 창조가 영원히 나타남과 함께 실체가 참으로 시작한다. 신의 이 창조 행위는 행위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또 그를 통해서 일어나며, 그의 본질은 사실인 것들의 모든 수준에서, 또 그에 대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통일되게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신의 창조성은 어김없이 통일된 특징을 가지며, 이 통일성은 이원(二元)인 아버지와 아들이 절대로 하나이고 아버지ㆍ아들ㆍ영의 삼위일체가 바깥으로 반영된 것이다.
105:2.8 (1155.1) 4. 무한한 지지자. 스스로 연합하는 스스로 계신 이. 이것은 실체의 정적(靜的) 상태와 잠재성의 원초적 연합이다. 이 관계에서, 제한받는 것과 제한받지 않는 것 모두가 보상된다. 스스로 계신 이의 이 단계는 우주 절대자―신 절대자와 무제한 절대자를 통일하는 자―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
105:2.9 (1155.2) 5. 무한한 잠재성. 스스로 제한한 스스로 계신 이. 이것은 스스로 계신 이가 의지로 스스로를 제한함을 영원히 증거하는 무한의 기준점이며, 그 덕택으로 세 가지 자기 표현과 자기 계시가 이루어졌다. 스스로 계신 이의 이 국면은 보통 신 절대자라고 이해한다.
105:2.10 (1155.3) 6. 무한한 능력. 정적(靜的)이며 반응하는 스스로 계신 이. 이것은 끝없는 자궁이요, 미래에 모든 우주가 팽창하는 가능성이다. 스스로 계신 이의 이 단계는 아마도 무제한 절대자의 계심, 인력을 초월하는 계심이라고 파악하는 것이 가장 좋다.
105:2.11 (1155.4) 7. 우주의 무한자. 스스로 계신 이로서 스스로 계신 이. 이것은 무한의 정지 상태, 또는 자기 관계, 즉 무한한 실체가 영원한 사실이요 실체가 무한하다는 보편적 진리이다. 이 관계를 성격이라고 식별할 수 있는 한, 이는 모든 성격자의―절대 성격자까지도―신성한 아버지 안에서 여러 우주에게 드러난다. 이 관계가 비성격 방법으로 표현될 수 있는 한, 우주의 아버지가 계신 앞에서 순수 에너지와 순수한 영이 절대로 일치된 것으로서 우주들이 이를 접촉한다. 이 관계를 절대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 한, 그것은 첫째 근원 중심의 제일인 성질에서 드러난다. 공간 세계의 인간으로부터 파라다이스 시민에 이르기까지, 그분 속에서 우리 모두가 살고 움직이고 우리의 존재를 가진다. 그리고 극미한 극자(極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총 우주에 대해서도 참말이며, 지금 있는 것, 지금까지 있어 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있을 것에 대해서도 똑같이 참말이다.
105:3.1 (1155.5) 스스로 계신 이 안에서 일곱 가지 근원적 관계는 무한한 일곱 절대자로서 영원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실체의 기원과 무한의 분화를 연속되는 이야기로 묘사하더라도, 사실은 일곱 절대자 모두가 제한 없이, 나란히 영원하다. 필사자의 머리는 이들의 시작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일곱 절대자가 아무런 시작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 이 개념은 반드시 자리를 비켜야 한다. 그들은 영원하고 언제나 그런 상태로서 있어 왔다. 일곱 절대자는 실체의 전제(前提) 조건이다. 그들은 이 여러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105:3.2 (1155.6) 1. 첫째 근원 중심. 신의 첫째 분이자 원초적 비신(非神)의 원본, 하나님, 우주의 아버지, 창조자, 통제자, 지지자. 보편적 사랑, 영원한 영, 무한한 에너지. 모든 잠재성 중의 잠재성이며 모든 실재하는 것들의 근원. 모든 정적인 것의 안정성이자 모든 변화를 일으키는 활력. 원본의 근원이자 성격자들의 아버지. 집단으로서, 모두 일곱 절대자는 무한과 동등하게 되지만, 바로 그 우주의 아버지는 사실로 무한하다.
105:3.3 (1155.7) 2. 둘째 근원 중심. 신의 둘째 분, 최초의 영원한 아들. 스스로 계신 이의 절대 성격 실체들이며 “스스로 계신 이의 성격”을 실현하고 계시하기 위한 기초. 아무 성격자도 영원한 아들을 통하지 않고서 그의 우주의 아버지에게 도달하기를 바랄 수 없다. 모든 성격자의 이 절대 원본의 행위와 도움이 없이 아무 성격자도 영 수준의 존재에 이를 수 없다. 둘째 근원 중심 안에서 영은 제한이 없고 한편 성격은 절대적이다.
105:3.4 (1156.1) 3. 파라다이스 근원 중심. 둘째이자 비신(非神) 원본, 영원한 파라다이스 섬. “스스로 계신 물력”을 실현하고 계시하기 위한 바탕이요, 우주에 두루, 인력 통제를 확정시키기 위한 기초. 현실화되고 비영적이며, 비성격이고 의지가 없는 모든 실체에게 파라다이스는 절대 원본이다. 영 에너지가 어머니인 아들의 절대 성격을 통해서 우주의 아버지와 관계된 것처럼, 마찬가지로 모든 우주 에너지는 파라다이스 섬의 절대 원본을 통해서 첫째 근원 중심의 인력 통제에 붙잡혀 있다. 파라다이스는 공간 속에 없다. 공간은 파라다이스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존재하며, 장기적 운동은 파라다이스와 가지는 관계를 통하여 결정된다. 영원한 섬은 절대로 쉬고 있으며, 조직되어 있고 조직되는 모든 다른 에너지는 영원히 움직이고 있다. 모든 공간 속에서 오로지 무제한 절대자의 계심만 고요하며, 무제한자는 파라다이스와 동급이다. 파라다이스는 공간의 초점에 존재하며, 무제한자는 공간을 채우고, 모든 상대적 존재는 그 존재를 이 영토 안에서 가진다.
105:3.5 (1156.2) 4. 셋째 근원 중심. 신의 셋째 분, 합동 행위자. 파라다이스의 우주 에너지를 영원한 아들의 영 에너지와 무한히 통합하는 자. 의지(意志)하는 동기와 물력의 작용을 완전히 조정하는 자. 사실인 실체와 사실로 되고 있는 실체를 조정하는 자. 그의 다양한 자식들의 보살핌을 통해서, 무한한 영은 영원한 아들의 자비를 드러내고, 한편 동시에 무한한 조종자로서 활동하면서 영원히 파라다이스의 원본을 공간의 에너지 속으로 엮어 넣는다. 바로 이 합동 행위자, 이 행위의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한없는 계획과 목적을 완전히 표현한 자이며, 한편 그 자신은 방대한 우주의 생물에게 지성의 근원으로서, 또 지능 수여자로서 활동한다.
105:3.6 (1156.3) 5. 신 절대자. 우주 실체의 원인이 되고 잠재적으로 성격이 될 가능성, 신의 모든 잠재성의 총체. 신 절대자는 제한이 없는 절대적 비신(非神) 실체들을 목적에 맞게 제한하는 자이다. 신 절대자는 절대적인 것을 제한하는 자이며, 제한받는 것들을 절대화하는 자―운명 개시자이다.
105:3.7 (1156.4) 6. 무제한 절대자. 정적(靜的)이고 반응하며 정지해 있다. 스스로 계신 이의 밝혀지지 않은 우주 무한성, 신이 되지 않는 총 실체요, 모든 최종 비성격 잠재성이다. 공간은 무제한자의 기능을 제한하지만, 무제한자의 계심은 한이 없고 무한하다. 총 우주에는 개념의 범위가 있지만, 무제한자의 계심은 한이 없다. 영원조차도 이 비신 절대자의 가없는 고요함을 소모할 수 없다.
105:3.8 (1156.5) 7. 우주 절대자. 신이 된 자와 신이 되지 않은 것을 통일하는 자.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을 서로 관련시키는 자. 우주 절대자는 (정적이고 잠재하며 연합 성질이 있으니까) 항상 존재하는 것과 미완성인 것 사이의 긴장을 보상한다.
105:3.9 (1156.6) 무한의 일곱 절대자는 실체의 시초를 구성한다. 필사 지성들이 간주하고 싶어 하는 바와 같이, 첫째 근원 중심이 모든 절대자보다 선행(先行)하는 듯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유익하더라도 그러한 가설은 아들, 영, 세 절대자, 파라다이스 섬이 영원히 공존하기 때문에 무효가 된다.
105:3.10 (1157.1) 절대자들이 스스로 계신 이이자 첫째 근원 중심의 명시라는 것은 하나의 진실이다. 이 절대자들은 결코 시작이 없었으나 첫째 근원 중심과 나란히 영원자인 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영원히 있는 절대자들의 관계를 역설(逆說)에 빠지지 않고 시간적 언어와 공간의 개념 형태로 반드시 발표할 수 있지는 않다. 그러나 무한의 일곱 절대자의 기원에 관하여 무슨 혼란이 있든지 상관 없이, 모든 실체가 그들이 영원에 존재하는 것과 무한한 관계에 근거를 둔다는 것은 사실이자 진리이다.
105:4.1 (1157.2) 우주의 철학자들은 스스로 계신 이가 모든 실체의 최초의 근원인, 영원의 존재라고 가정한다. 그와 동시에 스스로 계신 이가 여러 1차적 자아 관계로―무한의 일곱 단계로―스스로 분할한다고 가정한다. 이 가정과 동시에 셋째 가설이 있다―무한의 일곱 절대자가 영원에 출현했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 계신 이의 일곱 단계와 이 일곱 절대자의 이원(二元) 관계가 영원하게 된 것이다.
105:4.2 (1157.3) 스스로 계신 이의 자아 계시는 이처럼 정적 자아로부터 자아 분할과 자아 관계를 거쳐서 절대 관계까지, 즉 스스로 유래한 절대자들과 가지는 관계에 이르기까지 진행한다. 이원의 성질은 이처럼 무한의 일곱 절대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스스로 계신 이의 자아 분할 단계에서 일곱 가지 무한과 영원히 연합한 속에서 존재한다. 이 여러 이중 관계는 우주들에 대하여 일곱 절대자로서 영원하게 되면서, 모든 우주 실체를 위하여 기본적 근거를 영원하게 만든다.
105:4.3 (1157.4)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삼자일치를 낳으며, 삼자일치는 만물의 영원한 조상이라고 언젠가 진술된 적이 있다. 정말로 세 가지 큰 등급의 원초적 관계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105:4.4 (1157.5) 1. 통일 관계. 스스로 계신 이 안에서 존재하는 여러 관계, 이것들의 통일은 세 가지의 자아 분화로, 다음에는 일곱 가지로 파악되는 바와 같다.
105:4.5 (1157.6) 2. 이원 관계. 칠중인 스스로 계신 이와 무한의 일곱 절대자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관계.
105:4.7 (1157.8) 절대자들의 상호 관계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삼자일치 관계들은 이원의 기초 위에서 생겨난다. 그러한 삼자일치 연합은 모든 실체의 잠재성을 영원하게 만든다. 이러한 연합은 신이 된 실체와 신이 되지 않은 실체 모두를 포함한다.
105:4.8 (1157.9) 스스로 계신 이는 하나인 제한 없는 무한이다. 여러 가지 이원 관계는 실체의 기초를 영원하게 만든다. 여러 삼자일치는 보편적 기능으로서 궁극에 무한의 실현에 이른다.
105:4.9 (1157.10) 실존 이전의 것들은 일곱 절대자 안에서 실존적이 되며, 실존적인 것들은 삼자일치, 즉 절대자들의 기본 관계 속에서 작용하게 된다. 여러 삼자일치가 영원하게 됨과 동시에 우주의 무대가 준비된다―잠재하는 것들이 존재하고 사실이 된 것들이 자리에 있다. 영원이 충만해지면 우주 에너지가 다양해지고, 파라다이스 영이 퍼지고, 성격의 수여와 함께 지성이 부여되는 것을 구경한다. 이 덕분으로 이 모든 신 및 파라다이스 파생물은 생물 수준에서 체험으로 통일되고, 생물을 초월하는 수준에서는 다른 기법으로 통일된다.
105:5.1 (1158.1) 스스로 계신 이의 최초의 분화(分化)를 본래 있는 독립된 의지의 탓으로 돌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한한 실체의 선포를 파라다이스 신이 의지(意志)하는 여러 행위, 그리고 여러 기능적 삼자일치가 이에 반응하여 조정하는 탓으로 돌려야 한다.
105:5.2 (1158.2) 유한한 자가 신이 되기 전에는, 모든 실체의 다양화가 절대 수준에서 일어난 듯 보일 것이다. 그러나 유한한 실체를 선포하는 의지 행위는 절대성이 제한됨을 의미하며 상대적인 것들이 출현함을 암시한다.
105:5.3 (1158.3) 우리가 이 이야기를 하나의 연속된 것으로 발표하고, 절대자로부터 직접 파생된 것으로서 유한한 자의 역사적 등장을 그리지만, 초월자들은 유한한 모든 것을 앞서고 또 뒤따랐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초월 궁극자들은 유한자와 가지는 관계에서, 원인이기도 하고 완성이기도 하다.
105:5.4 (1158.4) 유한한 가능성은 무한자에 본래부터 있지만, 가능성이 가망성과 불가피성으로 변질하는 것은 첫째 근원 중심의 의지, 스스로 존재하는 자유 의지의 탓으로 돌려야 하며, 그는 모든 삼자일치 관계를 활성화시킨다. 오로지 아버지 의지의 무한함이 하나의 궁극자가 궁극에 생기게 하거나 한 유한자를 창조하도록 절대 수준의 존재를 일찍이 제한할 수 있었을 것이다.
105:5.5 (1158.5) 상대적이고 제한된 실체가 나타남과 함께, 실체의 새로운 시대―성장의 시대―가 존재하게 되며, 이것은 무한의 높이에서 유한자의 영토로 당당하게 밑으로 축소되는 것이요, 유한자는 언제까지나 파라다이스와 신에게로 안쪽으로 빙 돌면서, 무한 근원에 합당한 높은 운명을 언제나 추구한다.
105:5.6 (1158.6) 상상할 수 없는 이러한 움직임이 우주 역사의 시작을 표시하고, 시간 그 자체가 존재하게 되는 것을 표시한다. 한 인간에게 유한자의 시작은 실체의 기원이다. 인간의 생각으로 보건대, 유한자에 앞서, 상상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도 없다. 새로이 나타나는 이 유한한 실체는 최초의 두 단계에서 존재한다:
105:5.9 (1158.9) 그러면 이것이 두 가지로 최초에 명백히 나타난 것들이다: 완전하게 구성된 자와 진화로 완전하게 된 자. 이 둘은 영원의 관계에서 동급이지만, 시간의 한계 속에서 다른 듯이 보인다. 자라는 것에게 시간 요인은 성장을 의미한다. 2차 유한자들은 자란다. 따라서 자라고 있는 자는 시간 세계에서 불완전하게 보이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차이점은 파라다이스의 이쪽에서 무척 중요하지만, 영원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105:5.10 (1158.10) 우리는 완전한 자와 완전하게 된 자가 1차와 2차 최대자라고 말하지만, 아직 또 다른 부류가 있다. 1차인 자와 2차인 자 사이에 삼자일체화하는 관계와 기타 여러 관계는 3차 최대자의 출현을 초래한다―이것들은 완전하지도 않고 완전해지지도 않지만, 조상이 되는 두 요인과 동급에 있는 사물ㆍ의미ㆍ가치이다.
105:6.1 (1159.1) 유한한 존재들의 선포 전체가, 기능적 무한의 절대적 관계 안에서, 잠재하는 것들로부터 사실로 있는 것들로 변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유한자의 창조적 현실화에 대한 많은 반응 가운데, 다음을 열거해도 좋다:
105:6.2 (1159.2) 1. 신의 반응은 세 수준에서 체험적 최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보나에서 성격을 가진 영이 최상인 사실, 앞으로 있을 대우주에서 성격 있는 자의 권능이 최상이 될 가능성, 그리고 앞날의 총 우주에서 어떤 최상 수준에서 작용하는 체험적 지성이 가진, 어떤 미지의 기능의 한도.
105:6.3 (1159.3) 2. 우주의 반응은 초우주 공간 수준을 위한 건축 계획들이 활성화되는 것과 관련되며, 이 진화는 일곱 초우주의 물리적 조직에 두루,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105:6.4 (1159.4) 3. 유한한 실체를 선포한 것에 대한 생물의 반응은 하보나의 영원한 거주자 서열에서 완전한 존재, 그리고 일곱 초우주로부터 진화로 완전하게 된 승천자들의 출현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진화하는 (시간 세계에서 창조적) 체험으로서 완전에 이르는 것은 출발점이 완전과 다른 무엇을 암시한다. 따라서 진화된 창조에서 불완전이 생긴다. 그리고 이것이 잘못이 일어날 가능성의 기원이다. 그릇된 적응ㆍ불화(不和)ㆍ투쟁, 이 모든 것은, 물리적 우주로부터 인격을 가진 인간에 이르기까지, 진화로 성장하는 데 본래부터 있다.
105:6.5 (1159.5) 4. 진화로 인한 시간 지연에 본래 있는 불완전에 대한 신의 반응은 칠중 신의 보상하는 계심에서 드러나며, 이들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되고 있는 것은 완전한 자와 완전하게 된 자, 이 둘과 통합된다. 이 시간 지연은 진화와 분리할 수 없고, 진화는 시간이 지나면 창조성이 된다. 다른 여러 이유 뿐 아니라 시간 지연 때문에, 최상위의 전능한 힘은 칠중 신이 신으로서 성공하는 데 근거를 둔다. 이 시간 지연은, 최대의 발전을 이룩하면서 지음 받은 인격자들로 하여금 신과 협동하는 자가 되게 허락함으로, 신이 창조하는 일에 인간이 참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필사 인간의 물질 지성조차 이처럼 신다운 조절자와 둘이서 불멸의 혼을 만드는 일에 파트너가 된다. 칠중 신은 또한 승천 이전에 불완전했던 한계를 보충할 뿐 아니라, 타고난 완전의 체험적 한계를 보충하는 기법도 마련해 준다.
105:7.1 (1159.6) 초월자들은 무한 이하이고 절대 이하이지만 유한을 넘고 생물을 초월한다. 초월자는 절대자의 초월 가치를 유한자의 최대 가치와 서로 연결짓는, 한 통합 수준으로서 궁극에 이른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초월적인 것은 유한자의 결과로서,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유한자를 예상하여, 궁극에 생긴 듯이 보일 것이다. 이것이 유한자를 “예시한 것”이라 본 자들도 있다.
105:7.2 (1159.7) 초월적인 것이 반드시 발전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초월적인 것은 유한한 의미에서 진화를 초월한다. 그것은 비체험적인 것도 아니지만, 그러한 것이 인간에게 의미가 있는 대로, 체험을 초월한다. 아마도 그러한 역설(逆說)의 가장 좋은 예는 완전한 중앙 우주이다: 중앙 우주는 도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없다―오로지 파라다이스 섬이 “물질화되었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절대적이다. 일곱 초우주처럼 진화로 된 유한한 창조가 아니다. 하보나는 영원하지만, 성장하지 않는 우주라는 의미에서 변화가 없지는 않다. 하보나는 인간으로 (하보나 토착민으로) 채워져 있고, 그들은 결코 사실로 창조된 적이 없는데, 왜냐하면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보나는 꼭 유한하지도 않고, 그래도 절대적이라 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을 보여준다. 하보나는 더군다나 절대적 파라다이스와 유한한 창조들 사이에 완충 지대 노릇을 하고, 더 나아가서 초월자들의 기능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보나 자체는 초월적 물건이 아니다―그것은 하보나이다.
105:7.3 (1160.1) 최상위가 유한자들과 관련되는 것 같이, 궁극위는 초월자들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이처럼 최상위와 궁극위를 비교하지만, 그들은 정도 차이가 아닌 무엇이 다르다. 그 차이는 또한 질의 문제이다. 궁극위는 초월 수준에서 예측된, 최상위를 초월하는 것보다 더 큰 무엇이다. 궁극위는 그 모든 것이지만, 그보다 더 크다: 궁극위는 새로운 신 실체들이 궁극에 이르는 것이요, 지금까지 제한이 없던 것의 새로운 여러 단계를 제한하는 것이다.
105:7.4 (1160.2) 초월 수준과 관련된 실체들 가운데 다음이 있다:
105:7.5 (1160.3) 1. 신으로서 궁극위의 계심.
105:7.8 (1160.6) 4. 두 계급의 파라다이스 물력 조직자.
105:7.9 (1160.7) 5. 공간 잠재력의 어떤 수정(修正).
105:7.10 (1160.8) 6. 영의 어떤 가치.
105:7.11 (1160.9) 7. 지성의 어떤 의미.
105:7.12 (1160.10) 8. 초한(超限) 품질과 실체.
105:7.15 (1160.13)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우주는 유한ㆍ초월ㆍ절대 수준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해도 좋다. 이것은 성격자들이 행동하고 에너지가 변형되는 끝없는 드라마가 펼쳐지는 우주 무대이다.
105:7.16 (1160.14) 이 다양한 모든 실체를 몇 가지 삼자일치가 절대로, 총 우주 건축가들이 기능적으로, 그리고 일곱 으뜸 영이 상대적으로 통일하며, 으뜸 영들은 칠중 신의 신성을 최상 수준 밑에서 조정한다.
105:7.17 (1160.15) 칠중 신은 최대의 지위와 최대 아래 지위를 가진 생물에게 우주의 아버지의 성격과 신성(神性)이 계시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영이신 하나님의 신다운 영적 봉사가 나타나는 것과 상관이 없는 관계, 첫째 근원 중심의 다른 일곱 가지 관계가 있다.
105:7.18 (1160.16) 영원히 아득한 과거에 절대자들의 물력, 신들의 영, 그리고 신들이 낳은 성격자들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아 의지의 원초적 자아 의지에 반응하여 술렁거렸다. 이 우주 시대에 이 모든 실체의 한없는 가능성이 절대 이하로 나타나는, 광범위한 우주의 전체 광경에 대하여 일어난 엄청난 반응을 우리 모두가 구경하고 있다. 그리고 첫째 근원 중심의 처음 실체의 계속된 분화가, 세월이 쌓이고 또 쌓이도록, 이어지고 또 이어지기까지, 아득하고 상상할 수 없는 절대적 무한의 지대로, 계속하여, 바깥으로 진행하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하다.
106:0.1 (1162.1) 신과 우주 실체의 기원 및 명시(明示)의 관계를 하늘 가는 필사자가 얼마큼 알아야 한다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는 또한 자신과 실존적 실체와 체험적 실체들, 잠재하는 실체와 실재하는 실체들의 수많은 수준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대하여도 무엇인가 이해해야 한다. 사람이 땅에서 느끼는 방향 감각, 우주를 보는 통찰력, 영적 방향은 모두, 우주 실체들을 더 낫게 이해하고, 이들이 서로 상관되고, 통합되고, 통일되는 기법을 더 잘 이해함으로 개선된다.
106:0.1 (1162.1) 신과 우주 실체의 기원 및 명시(明示)의 관계를 하늘 가는 필사자가 얼마큼 알아야 한다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는 또한 자신과 실존적 실체와 체험적 실체들, 잠재하는 실체와 실재하는 실체들의 수많은 수준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대하여도 무엇인가 이해해야 한다. 사람이 땅에서 느끼는 방향 감각, 우주를 보는 통찰력, 영적 방향은 모두, 우주 실체들을 더 낫게 이해하고, 이들이 서로 상관되고, 통합되고, 통일되는 기법을 더 잘 이해함으로 개선된다.
106:0.2 (1162.2) 현재 대우주와 태어나는 총 우주는 숱한 형태와 단계의 실체로 이루어져 있고, 이것들은 다시 기능적 활동의 몇 가지 수준에서 존재한다. 다양한 이 존재하는 것과 잠재하는 것들은 이 여러 논문에서 이전에 암시되었고, 이것들을 이제 개념의 편리를 위하여 다음의 분류로 묶는다:
106:0.3 (1162.3) 1. 불완전한 유한자. 이것은 대우주에서 하늘 가는 인간의 현재 지위, 유란시아 필사자의 현재 지위이다. 이 수준은 행성의 인간으로부터 운명에 도달하기까지 사람의 존재를 포함하지만, 도달한 자를 제외한다. 이 수준은 초기의 물리적 시작으로부터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기 직전까지, 그러나 안정된 기간을 제외하고서, 그 사이에 있는 우주들에 관계된다. 이 수준은 시공에서 창조 활동이 있는 현재의 범위를 구성한다. 이 수준은 현재 우주 시대가 막을 내리는 것을 위하여, 파라다이스로부터 바깥으로 움직이는 듯하다. 그 시대가 막을 내리면 대우주가 빛과 생명에 이르는 것을 구경하고, 또한 확실히, 첫째 바깥 공간 수준에서 발전하여 성장하는 어떤 새로운 질서의 출현을 구경할 것이다.
106:0.4 (1162.4) 2. 최대 유한자. 이것은 운명에―현재 우주 시대의 규모 안에서 밝혀진 운명에―도달한 모든 체험하는 인간의 현재 지위이다. 우주들도 영적ㆍ물리적으로, 최대의 지위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최대”라는 용어 자체가 상대적 용어이다―무엇과 가지는 관계에서 최대인가? 현재 우주 시대에 최대인 것은 겉보기에 최후인데, 다가올 시대의 조건으로 보면, 참 시작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하보나의 어떤 단계는 최대 서열인 듯이 보인다.
106:0.5 (1162.5) 3. 초월자. 유한을 초월하는 (앞서는) 이 수준은 유한한 진행을 따른다. 유한한 시작이 유한 이전에 가진 기원, 그리고 겉보기에 유한한 모든 종말이나 운명이 유한 이후에 가지는 중요성을 암시한다. 파라다이스와 하보나의 상당 부분이 초월 서열에 있는 듯이 보인다.
106:0.6 (1162.6) 4. 궁극자. 이 수준은 총 우주 중요성이 있고 완성된 총 우주의 운명 수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포함한다. 파라다이스와 하보나는 (특히 아버지 세계들의 회로) 여러 면에서 궁극의 중요성을 가진다.
106:0.7 (1163.1) 5. 공동 절대자. 이 수준은 창조가 표현되는, 총 우주를 초월하는 분야에서 체험하는 자들이 계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106:0.8 (1163.2) 6. 절대자. 이 수준은 실존적 일곱 절대자가 영원부터 계심을 뜻한다. 이 수준은 또한 어느 정도로 연합하는 체험적 달성을 포함할지 모르지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그 방법을 모른다. 아마도 성격의 접촉 잠재성을 통할 것이다.
106:0.9 (1163.3) 7. 무한. 이 수준은 실존 이전이며 체험 이후이다. 무한의 제한 없는 통일은 모든 시작보다 앞에 있고 모든 운명 뒤에 있는 가상하는 실체이다.
106:0.10 (1163.4) 실체의 이 여러 수준은 현재 우주 시대에 절충하는 편리한 상징법이요 필사자의 견지에서 본 것이다. 필사자가 아닌 다른 견지에서, 그리고 다른 우주 시대의 관점에서 실체를 보는 여러 가지 다른 방법이 있다. 따라서 여기에 함께 발표된 개념들은 전부 상대적이며, 다음 여러 가지에 제약을 받고 제한된다는 의미에서 상대적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106:0.11 (1163.5) 1. 필사자 언어의 한계.
106:0.12 (1163.6) 2. 필사자 지성의 한계.
106:0.13 (1163.7) 3. 일곱 초우주의 발달이 제한되어 있다.
106:0.14 (1163.8) 4. 파라다이스로 필사자가 올라가는 데 관계되지 않는 그러한 초우주 발전의 여섯 가지 중요한 목적을 너희는 모른다.
106:0.15 (1163.9) 5. 너희는 영원의 관점을 얼마큼도 파악할 능력이 없다.
106:0.16 (1163.10) 6. 일곱 초우주가 진화로 펼쳐지는 현시대에 관하여 뿐 아니라, 모든 우주 시대와 가지는 관계에서 우주의 진화와 운명을 묘사하기가 불가능하다.
106:0.17 (1163.11) 7. 실존 이전의 존재나 체험 이후의 존재들이―시작보다 앞에, 또 운명 뒤에 놓여 있는 것들이―정말로 무엇을 뜻하는지 어떤 인간도 깨달을 능력이 없는 것.
106:0.18 (1163.12) 실체의 성장은 연속되는 여러 우주 시대의 상황에 제약을 받는다. 중앙 우주는 하보나 시대에 아무런 진화적 변화를 겪지 않았지만, 초우주 시대의 현시기에 하보나는 진화하는 초우주들과 함께 조정함으로 유도된 어떤 진보적 변화를 겪고 있다. 이제 진화하는 일곱 초우주는 언젠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지위를 얻을 터이고, 현재 우주 시대에 그 성장 한계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 없이, 다음 시대, 제1 바깥 공간 수준의 시대는 초우주들을 현시대 운명의 한계로부터 해방할 것이다. 완성된 위에 충만이 계속 쌓이고 있다.
106:0.19 (1163.13) 이것들이 우주에서 사물ㆍ목적ㆍ가치의 성장에 대하여, 그리고 늘 올라가는 실체 수준에서 이들의 통합에 관하여 통일된 개념을 발표하려 애쓰면서 우리가 부딪치는 얼마큼의 한계이다.
106:1.1 (1163.14) 유한한 실체의 1차 단계, 곧 영에 기원을 가진 단계는 인간 수준에서 완전한 인격자로서, 그리고 우주 수준에서는 완전한 하보나 창조로서 직접 표현된다. 체험하는 신조차도 이렇게 하보나에 계신 최상위 하나님의 영(靈) 몸에서 표현된다. 그러나 유한한 자의 2차, 진화 단계, 시간과 물질에 제약을 받는 단계들은 오로지 성장하고 달성하는 결과로서 우주에서 통합된다. 결국에는 2차 유한자, 즉 완전하게 되는 유한자는 모두 1차 완전의 수준과 같은 수준에 이르겠지만, 그런 운명은 시간 지연에 지배되고, 이것은 중앙 창조에서 유전적으로 발견되지 않는 제한, 초우주의 구조에 따르는 제한이다. (우리는 3차 유한자가 존재한다는 말을 들어 보았지만, 그들을 통합하는 기법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106:1.2 (1164.1) 이 초우주의 시간 지연, 완전을 성취하는 데 있는 이 장애물은, 인간이 진화적 성장에 참여하게 만든다. 시간 지연은 이처럼 인간으로 하여금, 바로 그 인간을 진화시키는 데 창조자와 협동하는 관계에 들어갈 수 있게 만든다. 크게 성장하는 이 시절에 불완전한 자는 칠중 신의 봉사를 통해서 완전한 자와 서로 관련을 가진다.
106:1.3 (1164.2) 칠중 신은 공간의 진화하는 여러 우주에서 파라다이스 신이 시간의 장벽을 인식함을 가리킨다. 살아남는 한 물질 인격자가 파라다이스로부터 아무리 멀리 있어도, 공간에 아무리 깊은 데서 기원을 가지더라도, 칠중 신이 거기에 계시며, 불완전하고 허덕이는 그러한 진화 인간에게 진리ㆍ아름다움ㆍ선으로 이루어진 봉사, 사랑으로 자비로운 봉사를 베푸는 일에 종사하는 것이 발견될 것이다. 칠중자가 신으로서 베푸는 봉사는 영원한 아들을 거쳐서 파라다이스 아버지에게 이르기까지 안쪽으로, 그리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을 거쳐서 지역 우주의 아버지―창조 아들―들에게 이르기까지, 바깥으로 손을 뻗는다.
106:1.4 (1164.3) 사람은 인격을 가졌고 영적 진보로 올라가니까, 칠중신의 신성, 성격을 가진 영적 신성을 발견한다. 그러나 인격자의 진보에 관여하지 않는, 칠중자의 다른 단계들이 있다. 이 신 집합에서 신의 모습은 현재, 일곱 으뜸 영과 합동 행위자의 연락 속에서 통합되지만, 이 모습은 최상 존재의 태어나는 성격 속에서 영원히 통일되는 운명을 가졌다. 칠중신의 다른 여러 단계는 현재 우주 시대에 여러 가지로 통합되지만, 모두가 마찬가지로 최상위 안에서 통일되는 운명을 가졌다. 모든 국면에서 칠중자는 현재 대우주의 기능적 실체가 상대적으로 통일되는 근원이다.
106:2.1 (1164.4) 칠중 신이 유한한 진화를 기능적으로 조정하는 것 같이, 최상 존재는 궁극에 운명의 달성을 통합한다. 최상 존재는 신이 대우주의 진화를 완성하는 것이다―영 핵심 주위에 물리적 진화가 있고, 물리적으로 진화하는 영토, 회전하고 소용돌이치는 영토를 영 핵심이 궁극에 지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두가 다음 성격자가 내리는 명령에 따라서 일어난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파라다이스 성격자, 우주 의미에서 창조 성격자, 인간적 의미에서 필사 성격자, 궁극의 의미 또는 체험으로 총합하는 의미에서 최상위 성격자.
106:2.2 (1164.5) 최상위의 개념은 영 성격, 진화적 권능, 그리고 권능과 성격의 합성―진화적 권능을 영 성격과 통일하고 영 성격이 그 권능을 지배하는 것―을 구별하여 인식해야 한다.
106:2.3 (1164.6) 모든 것을 종합해 보건대, 영은 파라다이스로부터 하보나를 거쳐서 온다. 에너지와 물질은 겉보기에 공간의 깊은 데서 진화하는 듯하고, 하나님의 창조 아들들과 함께 무한한 영의 자식들이 이를 동력으로 조직한다. 이 모두가 체험적인 것이다. 이것은 창조자인 신들과 진화하는 인간까지도 포함하여, 넓은 범위의 살아 있는 존재들을 끌어들이는, 시공의 거래이다. 대우주에서 창조자인 신들이 권능을 통달하는 것은 차츰 확대되어 시공의 우주들이 진화로 정착되고 안정되는 것을 포함하며, 이것이 칠중 신의 체험적 권능이 절정에 오르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의 아버지가 조절자를 수여하는 것으로부터 파라다이스 아들들이 일생을 수여하기까지, 시공에서 신성을 달성하는 전역을 둘러싼다. 이것은 벌어들인 권능, 입증한 권능, 체험으로 얻은 권능이며, 파라다이스 신들이 가진 영원의 권능, 헤아릴 수 없는 권능, 실존적 권능과 대조가 된다.
106:2.4 (1165.1) 칠중 신이 신으로서 성취하는 것들로부터 생기는 이 체험적 권능 자체는, 통합―총합―을 이용하여, 진화하는 창조들을 체험으로 통달한 전능한 권능으로서 신의 결합하는 성질을 명시한다. 이 전능한 힘은 다음에 최상위 하나님의 성격, 하보나에 계시는 영 성격과 연합하여, 하보나 세계들 바깥 지대의 시범 구체에서 영 성격이 결합됨을 발견한다. 이처럼 체험적 신은 시공의 산물인 권능에 중앙 우주에서 거하는 영 계심과 신다운 성격을 부여함으로, 긴 진화적 투쟁을 끝마친다.
106:2.5 (1165.2) 이처럼 최상 존재는 시공에서 진화하는 모든 것을 모조리, 궁극에 품에 안으며, 한편 이 성질에 영 성격을 부여한다. 생물이, 아니 필사자도 이 대단한 거래에 참여하는 인격자이니까, 그들도 최상위를 알고, 그러한 체험적 신의 참된 자식으로서 최상위를 알아볼 능력을 분명히 얻는다.
106:2.6 (1165.3) 네바돈의 미가엘은 파라다이스 아버지와 같으니, 아버지의 파라다이스 같은 완전함을 함께 가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진화하는 필사자는 언젠가 체험하는 최상위와 유사함을 얻을 터이니, 그들이 참으로 그가 진화로 얻은 완전함을 함께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106:2.7 (1165.4) 최상위 하나님은 체험을 겪는다. 따라서 그는 완벽하게 체험할 수 있다. 일곱 절대자의 실존적 실체는 체험 기법으로 파악할 수 없다. 기도하고 예배하는 자세로, 유한한 인간의 인격이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성격 실체들만 파악할 수 있다.
106:2.8 (1165.5) 최상 존재의 권능과 성격의 통합이 끝난 가운데, 그렇게 관련될 수 있는 몇 가지 삼극일치의 모든 절대성이 관련될 것이다. 모든 유한한 성격자가 진화된 이 당당한 성격자를 체험으로 도달하고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 가는 사람들이 가정된 일곱째 단계의 영 존재에 도달할 때, 그들은 그 단계에서, 절대 이하 수준에서, 체험을 겪을 수 있는 최상 존재 속에 드러난 바와 같이, 절대적이고 무한한 여러 삼극일치의 새로운 의미와 가치의 실현을 체험할 것이다. 그러나 최대로 발전하는 이 여러 단계에 이르는 것은 아마도 대우주 전체가 빛과 생명 속에 나란히 안정될 때를 기다릴 것이다.
106:3.1 (1165.6) 초한(超限) 건축가들은 계획을 만들어낸다. 최상 창조자들은 계획한 것을 존재하게 만든다. 최상 존재는 시간 속에 최상 창조자들이 창조한 대로, 으뜸 건축가들이 공간에서 예측한 대로, 이를 충만하게 완성시킨다.
106:3.2 (1165.7) 현재 우주 시대에 총 우주의 행정을 조정하는 것은 총 우주 건축가들의 기능이다. 그러나 현재 우주 시대가 종결될 때, 전능 최상위의 출현은 진화로 생긴 유한자가 체험적 운명의 첫째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릴 것이다. 이 사건은 분명히 제1 체험적 삼자일체―최상 창조자들, 최상 존재, 총 우주 건축가들의 통합―의 기능을 완성시킬 것이다. 이 삼자일체는 더 나아가서 총 우주를 진화로 통합하는 일을 성취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106:3.3 (1166.1)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참으로 무한한 삼위일체이고, 이 최초의 삼위일체를 포함하지 않는 어떤 삼자일체도 도저히 무한할 수 없다. 그러나 최초의 삼위일체는 순전히 절대적 신들의 연합으로 생긴 결말이다. 절대 이하의 존재들은 이 원초적 연합과 아무 상관이 없다. 나중에 나타나는 체험적 삼자일체들은 인격자들의 기여까지도 포함한다. 분명히 이것은 궁극 삼자일체의 경우에 참말이며, 거기서 주 창조 아들들이 그 최상 창조자 구성원들 사이에 바로 그렇게 계신 것은 이 삼자일체 연합 안에 인간이 실제로 겪는 진정한 체험이 동시에 자리에 있음을 가리킨다.
106:3.4 (1166.2) 제1 체험적 삼자일체는 궁극의 결말을 집단으로 성취하게 한다. 집단 연합은 개인의 능력을 예시(豫示)할 수 있게, 아니 초월할 수 있게 하며, 이것은 유한 수준을 지나서도 참말이다. 다가올 시대에, 일곱 초우주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뒤에, 의심할 여지 없이, 최후 군단은 궁극 삼자일체의 명령을 받은 대로, 최상 존재 안에서 권능과 성격이 연합된 대로, 파라다이스 신들의 목적을 공포(公布)할 것이다.
106:3.5 (1166.3) 과거 영원과 미래 영원의 모든 거대한 우주 발전을 통하여 두루,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우주의 아버지 요소들이 커지는 것을 탐지한다. 스스로 계신 이로서, 그가 총 무한을 침투한다고 우리는 철학적으로 가정하지만, 어떤 인간도 그러한 가설을 체험으로 이해할 수 없다. 우주들이 확대됨에 따라서, 그리고 시간이 조직하는 공간으로 인력(引力)과 사랑이 뻗어나감에 따라서, 우리는 첫째 근원 중심을 더욱 많이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인력의 행위가 무제한 절대자의 공간 계심을 침입하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우리는 신 절대자가 신으로 계신 가운데 영 생물이 진화하고 커지며, 한편 우주와 영의 진화는 모두, 유한한 신 수준에서 지성과 체험으로 인하여 최상 존재로서 통일되고, 초월 수준에서 궁극 삼자일체로서 조정하고 있음을 탐지한다.
106:4.1 (1166.4)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분명히 궁극의 의미에서 조정하지만, 이 점에서 스스로 제한한 절대자로서 활동한다. 체험하는 궁극 삼자일체는 초월적인 것을 초월자로서 조정한다. 영원한 미래에 이 체험적 삼자일체는 통일성을 높임으로, 궁극 신의 궁극에 이르는 계심을 더욱 활성화할 것이다.
106:4.2 (1166.5) 궁극 삼자일체가 총 우주를 조정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한편, 궁극위 하나님은 총 우주 전체를 지휘하는 초월 권능을 가진 성격이 된 것이다. 궁극위가 궁극에 이르는 일을 마치는 것은 총 우주가 완성됨을 암시하고 이 초월적 신이 완전히 솟아남을 의미한다.
106:4.3 (1166.6) 궁극위가 완전히 솟아나고서 무슨 변화가 터질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최상위가 지금 영적으로 몸소 하보나에 계시는 것 같이, 마찬가지로 궁극위도 또한, 그러나 초한 의미와 성격 초월 의미에서 하보나에 계신다. 그리고 궁극위의 제한된 대관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너희에게 일러 준 적이 있다. 하지만 너희는 그들이 현재 계신 곳이나 기능에 관하여 들은 적이 없다.
106:4.4 (1167.1) 그러나 궁극 신이 솟아나는 데 따르는 행정적 영향과 상관 없이, 그의 초월적 신성의 성격 가치를 이 신 수준의 현실화에 참여했던 모든 성격자가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유한자를 초월하는 것은 오로지 궁극의 달성으로 이끌 수 있을 따름이다. 궁극위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지만, 여전히, 절대자들과 기능적으로 관계하는 능력이 본래부터 있는데도, 절대 이하이다.
106:5.1 (1167.2) 최상위가 진화로 체험하는 실체의 최고점인 것처럼, 궁극위도 초월적 실체의 정점이다. 이 두 체험적 신이 실제로 솟아나는 것은 2차 체험적 삼자일체가 생길 기초를 놓는다. 이것은 절대 삼자일체, 즉 최상위 하나님, 궁극위 하나님, 밝혀지지 않은 우주 운명 종결자, 이 셋의 연합이다. 그리고 이 삼자일체는 이론적으로 잠재성의 절대자―신 절대자, 우주 절대자, 무제한 절대자―를 활성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절대 삼자일체가 마침내 형성되는 것은, 하보나에서부터 제4차, 가장 바깥 공간 수준까지, 총 우주 전체의 진화가 완결된 뒤에야 일어날 수 있다.
106:5.2 (1167.3) 이 체험적 삼자일체들은, 체험하는 신의 성격 품질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도달한 신의 통일된 특징을 나타내는, 성격이 아닌 모든 다른 품질을 서로 연결짓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이 발표가 주로 우주 통일의 성격 국면을 다루지만, 그런데도, 최상 존재의 진화와 연관하여 지금 진행되는, 권능을 가진 성격의 통합이 보여주다시피, 온 우주의 비성격 모습도 마찬가지로 통일을 겪도록 예정된 것이 참말이다. 최상위의 영 성격 품질은 전능자의 권능 특권과 분리할 수 없고, 최상위 지성의 알려지지 않은 잠재성이 이 두 가지를 보충한다. 하나의 성격자인 궁극위 하나님도 궁극 신의 비성격 모습과 동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절대 수준에서 신 절대자와 무제한 절대자는, 우주 절대자가 계신 앞에서 분리할 수 없고 구별할 수 없다.
106:5.3 (1167.4) 삼자일체들은 그 자체로서 저절로 성격이 아니지만,[1] [79] 성격을 적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성격을 둘러싸고, 집단적 의미에서 비성격 기능과 서로 관련짓는다. 그러면 삼자일체들은 언제나 신의 실체이지만, 결코 성격을 가진 실체는 아니다. 한 삼자일체의 성격 모습은 그 개별 구성원에 본래 있고, 개별 성격자로서 그들은 그 삼자일체가 아니다. 오직 하나의 집합으로서 그들은 삼자일체이며, 바로 그것이 삼자일체이다. 그러나 삼자일체는 둘러싼 신 모두를 포함한다. 삼자일체는 신이 하나되는 것이다.
106:5.4 (1167.5) 세 절대자―신 절대자, 우주 절대자, 무제한 절대자―는 삼자일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신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신이 된 자가 삼자일체가 될 수 있다. 모든 다른 결합은 삼자일치이든지, 아니면 삼극일치이다.
106:6.1 (1167.6) 총 우주의 현재 잠재성은 도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잠재성은 아마도 궁극에 가까울지 모르고, 절대 이하의 우주 규모 안에서 절대적 의미 및 가치를 완전히 계시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우리는 판단한다. 따라서 세 절대자의 한없는 가능성의 모든 표현을 상상하려고 시도하거나, 신 절대자의 현재 비성격 수준에서 절대자 하나님이 체험으로 성격화되는 것을 상상하려고 시도할 때 우리는 상당한 어려움에 부딪친다.
106:6.2 (1168.1) 최상 존재의 현실화를 위하여, 궁극 삼자일체가 형성되고 완전히 활동하는 것을 위하여, 궁극위 하나님이 궁극에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아니 절대 삼자일체가 시작되는 것을 위해서도, 총 우주의 공간 무대는 적절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2차 체험적 삼자일체가 완전히 활동하는 것에 관한 우리의 개념은 널리 퍼지는 총 우주까지도 뛰어넘는 무엇을 의미하는 듯하다.
106:6.3 (1168.2) 우리가 하나의 무한한 우주―총 우주를 지나서 어떤 제한할 수 없는 우주―를 가정하고, 절대 삼자일체의 마지막 발전이 궁극을 초월하는 그러한 활동 단계에서 바깥에서 생길 것이라고 상상한다면, 절대 삼자일체의 완성된 기능은 무한한 여러 창조에서 마지막으로 표현되고, 모든 잠재성이 마침내 절대로 현실화하리라 추측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항상 확대되는 실체의 여러 구역을 통합하고 연합하는 것은 그렇게 연결된 구역들 안에 있는 모든 실체를 포함하는 데 비례하여, 절대 지위에 접근할 것이다.
106:6.4 (1168.3) 달리 말하면 이렇다: 절대 삼자일체는 그 이름이 가리키다시피, 그 총 기능이 정말로 절대적이다. 제약되거나 한정되거나 아니면 달리 제한된 기초 위에서, 어떻게 절대 기능이 총체를 표현할 수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그러한 총체 기능도 (잠재성에) 제약을 받지 않으리라 가정해야 한다. 제약받지 않은 것은 또한, 적어도 질적 관점에서 보면, 한이 없으리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양적 관계에 관하여 우리는 그다지 확실치 않다.
106:6.5 (1168.4)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확신한다: 실존적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무한하고, 한편 체험적 궁극 삼자일체는 무한 이하이지만, 절대 삼자일체는 분류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비록 체험으로 기원이 생기고 구성되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실존적인, 잠재성의 절대자들에 부딪친다.
106:6.6 (1168.5) 인간의 지성이 그러한 아득한 초인간 개념을 파악하려고 애쓰는 것은 도저히 유익하지 않지만, 절대 삼자일체의 영원한 행위는 잠재성의 절대자들이 어떤 식으로 결국 체험적이 된다고 생각해도 좋다. 이것은 무제한 절대자는 아니라도, 우주 절대자에 관하여 이치에 맞는 결론인 듯 보일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우주 절대자가 정적이고 잠재성이 있을 뿐 아니라, 이 낱말들의 총체적 신의 의미에서 또한 다른 것과 연합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상상할 수 있는 신 및 성격의 가치에 관해서 말하면, 이렇게 추측하는 사건들이 신 절대자가 성격화하는 것, 그리고―체험적 신들의 셋째이자 마지막인―절대자 하나님의 성격이 완성되는 데 본래 있는, 성격을 초월하는 가치와 성격을 넘는 의미가 나타나는 것을 암시한다.
106:7.1 (1168.6) 실체의 무한한 통합을 다루는 개념들을 형성하는 데 겪는 어려움 가운데 더러는 모든 그러한 개념이 우주 발전의 최후와 같은 무엇, 언젠가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의 실현, 어떤 종류의 체험적 실현을 포함한다는 사실에 본래부터 있다. 양적 무한을 최종으로 언젠가 마지막에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세 잠재 절대자 안에는, 아무리 많은 체험적 발전도 결코 소모할 수 없는, 탐구하지 않은 가능성이 반드시 남아 있음이 틀림없다. 영원 그 자체는 절대적이지만, 절대를 넘지 않는다.
106:7.2 (1169.1) 최종의 통합이라는 시험적 개념조차, 제한 없는 영원의 결실과 분리할 수 없고, 따라서 상상할 수 있는 어떤 미래 시간에도 실질적으로 실현할 수 없다.
106:7.3 (1169.2)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를 구성하는 신들의 의지 행위가 운명을 확정한다. 운명은 세 가지 큰 광대한 잠재성 안에서 정해지며, 그 절대성은 미래에 발전하는 모든 가능성을 포함한다. 우주 운명 종결자의 행위가 아마도 운명을 성취하고, 이 행위는 아마도 절대 삼자일체 안에서 최상위와 궁극위와 관계된다. 어떤 체험적 운명도, 체험하는 인간이 적어도 얼마큼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무한한 실존자들에 부딪치는 운명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최종 운명은 실존적이자 경험으로 얻는 달성이며 신 절대자를 말려들게 하는 듯하다. 그러나 신 절대자는 우주 절대자의 덕분으로, 무제한 절대자와 영원한 관계를 가진다. 체험 가능성을 지닌 이 세 절대자는 실제로 실존적이고 그보다 크며, 그들은 한없고,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고,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가없고, 측량할 수 없다―참으로 무한하다.
106:7.4 (1169.3) 그러나 목적을 달성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은 그러한 가상(假想) 운명에 대하여 철학적 이론을 세우는 것을 막지 않는다. 도달이 가능한 절대적 하나님으로서 신 절대자의 현실화는 실질적으로 실현하기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런데도, 그러한 최후의 결실은 하나의 이론적 가능성으로 남는다. 무제한 절대자가 어떤 상상할 수 없는 무한 우주에 말려드는 것은 끝없이 영원한 미래에 헤아릴 수 없이 아득할지 모르지만, 그런데도 그러한 가설은 타당하다. 필사자ㆍ상물질자ㆍ영ㆍ최후자ㆍ초월자, 그리고 다른 자들은, 우주들 자체 및 모든 다른 국면의 실체와 더불어, 절대 가치가 있는 잠재적 최종 운명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존재나 우주도 그러한 운명의 모습을 전부 완벽하게 언제라도 도달할 것인가 우리는 의심이 든다.
106:7.5 (1169.4) 아버지를 이해하는 데 너희가 아무리 성장한다 하더라도, 아버지인 스스로 계신 이의 밝혀지지 않은 무한성에 너희의 머리는 언제나 어지러울 것이다. 그 무한의 탐구되지 않은 광대함은, 영원의 주기 전역에 걸쳐서 내내, 언제나 헤아릴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남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무리 많은 부분을 너희가 깨닫더라도, 존재하는지 어쩐지 너희가 미처 의심도 하지 못할 훨씬 많은 부분이 언제나 남아 있을 것이다. 유한한 존재의 영토에서 참말인 것처럼, 똑같이 초월 수준에서도 이것이 참말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일은 끝이 없다!
106:7.6 (1169.5) 최종 의미에서 그렇게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는 것은 어떤 면에서도 우주의 인간이 낙심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정말로 너희는 칠중자ㆍ최상위ㆍ궁극위의 신 수준에 이를 수 있고, 그렇게 하며, 이 수준이 너희에게 가지는 의미는, 아버지 하나님을 무한히 깨닫는 것이 영원히 존재하는 절대 지위를 가진 영원한 아들에게, 그리고 합동 행위자에게 의미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사람을 괴롭히기는커녕, 모든 끝없는 미래를 통해서 내내, 영원조차도 소모하거나 끝내지 않을 가능성, 인격을 개발하고 신과 교제하는 가능성을 하늘 가는 인격자가 앞으로 가지리라는 최상의 확신이 되어야 한다.
106:7.7 (1169.6) 대우주의 유한한 생물에게 총 우주 개념은 거의 무한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 없이, 거기 있는 초한(超限) 건축가들은 끝없는 스스로 계신 이 안에서 상상하지 못한 앞날의 발전에 총 우주가 관계되는 것을 파악한다. 공간 그 자체도 겨우 궁극의 조건, 중부 공간에서 고요한 지대의 상대적 절대성 안에서 제한하는 조건일 뿐이다.
106:7.8 (1170.1) 총 우주 전체가 마침내 완성되는, 상상할 수 없이 아득한 앞날의 영원한 순간에,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역사 전체를 겨우 시작이라고, 지도(地圖)가 그려지지 않은 무한 속에서 더욱 크고 더욱 황홀한 변화를 위해서 어떤 유한한 초월적 기초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우리 모두가 돌이켜볼 것이다. 그러한 미래 영원의 순간에 총 우주는 여전히 젊은 듯이 보일 것이다. 정말로, 결코 그치지 않는 영원의 한없는 가능성에 부닥쳐서 총 우주는 언제나 젊을 것이다.
106:7.9 (1170.2) 무한한 운명을 달성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은 조금이라도 그런 운명에 대한 관념을 생각해 보는 것을 막지 않는다. 그리고 세 가지 절대 잠재성이 언제라도 완벽하게 현실이 될 수 있다면, 총 실체의 마지막 통합을 상상할 수 있으리라고 우리는 서슴지 않고 말한다. 이러한 발전이 일어나는 것은 무제한 절대자, 우주 절대자, 신 절대자가 완벽하게 현실화되는 데 기초를 두고, 세 잠재성의 연합은 스스로 계신 이의 잠재력을 이루며, 이것은 영원의 중지된 실체, 모든 미래와 그보다 더한 것의 정지된 가능성들이다.
106:7.10 (1170.3) 신중히 말해도 그러한 궁극의 사건들은 오히려 아득한 후일의 이야기이다. 그런데도 세 가지 삼자일체의 여러 작용ㆍ성격자ㆍ연합 속에서, 아버지인 스스로 계신 이의 일곱 가지 절대 국면이 다시 통일되는 이론적 가능성을 우리가 탐지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것은 우리가 세 가지 삼자일체 개념과 얼굴을 마주하도록 만들고, 그것은 실존적 지위를 가진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그리고 체험적 성질과 기원을 가지고 나중에 나타나는 두 삼자일체를 포함한다.
106:8.1 (1170.4) 가장 높은 삼자일체의[2] [80] 성질을 인간의 지성에게 묘사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영원 속에 실현되는 이론적 무한에서 명시되는 바와 같이, 체험적 무한의 전부를 실제로 총합한 것이다. 가장 높은 삼자일체에서, 체험하는 무한자는 실존적 무한자와 같은 신분을 얻으며, 이 둘은 체험 이전(以前)이자 실존 이전의 스스로 계신 이 안에서 하나와 같다. 가장 높은 삼자일체는 15 가지 삼자일치 및 관계된 삼극일치에서 암시되는 모든 것의 최종 표현이다. 상대적 존재는 최후에 이르는 존재를, 실존적이든 체험적이든,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최후에 이르는 자는 반드시 상대적인 것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106:8.2 (1170.5) 가장 높은 삼자일체는 몇 단계에서 존재한다. 그것은 인간 수준보다 훨씬 위에 있는 존재들의 상상력을 어지럽게 하는 그러한 가능성ㆍ확률ㆍ필연성을 포함한다. 그것은 하늘 철학자들이 아마 의심하지 않은 함축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함축성은 삼자일치에 있고, 삼자일치들은 결국 측량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106:8.3 (1170.6) 가장 높은 삼자일체를 묘사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우리는 세 수준의 개념을 제시하기로 선택하니, 다음과 같다:
106:8.4 (1170.7) 1. 세 가지 삼자일체의 수준.
106:8.7 (1170.10) 이것들은 통일성이 높아지는 수준이다. 실제로, 가장 높은 삼자일체는 첫째 수준이고, 한편 둘째와 셋째 수준은 첫째의 통일에서 파생되는 것들이다.
106:8.8 (1171.1) 첫째 수준: 이 첫째 연합 수준에서, 세 가지 삼자일체가 신 성격자들의 집합, 뚜렷하지만 완전하게 동시화된 집합으로서 활동한다고 생각된다.
106:8.9 (1171.2) 1.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세 파라다이스 신―아버지ㆍ아들ㆍ영의 연합.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세 가지 기능―절대 기능, 초월 기능 (궁극성 삼위일체)[3] [81], 유한 기능(최상 삼위일체)을 포함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언제라도, 항상, 이들 가운데 어느 것도 되고, 모두도 된다.
106:8.10 (1171.3) 2. 궁극 삼자일체. 이것은 최상 창조자들, 최상위 하나님, 총 우주 건축가들이 신으로서 연합한 것이다. 이것이 이 삼자일체의 신 모습을 적절히 제시한 것이지만, 이 삼자일체의 다른 단계들이 있다는 것을 적어야 한다. 하지만 이 단계들은 그 신의 모습과 완전하게 조정되는 듯이 보인다.
106:8.11 (1171.4) 3. 절대 삼자일체. 이것은 신의 모든 가치에 관하여, 최상위 하나님, 궁극위 하나님, 우주 운명 종결자의 집합이다. 이 삼자일치된 집합의 어떤 다른 단계는, 팽창하는 우주에서 신이 아닌 가치들과 상관이 있다. 그러나 체험적 신들의 권능과 성격 모습이 지금 체험으로 통합되는 과정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들은 여러 신 단계와 함께 통일되고 있다.
106:8.12 (1171.5) 가장 높은 삼자일체에서 이 세 가지 삼자일체의 연합은 실체의 가능한 한없는 통합을 마련해 준다. 이 집합은 원인과 중간에 있는 자와 최후에 이른 자, 시작하는 자와 실현하는 자와 성취하는 자, 그리고 시작ㆍ존재ㆍ운명을 포함한다. 아버지ㆍ 아들의 협동 관계는 아들ㆍ영이 되었고, 다음에 영ㆍ최상위, 그리고 계속해서 최상위ㆍ궁극위, 궁극위ㆍ절대자, 아니 절대자와 아버지 무한자까지도 되었다―이것이 실체 집단의 완성이다. 마찬가지로, 신과 성격에 아주 직접 관계되지 않는 다른 여러 단계에서, 위대한 첫째 근원 중심은 영원의 궤도 둘레에서, 절대적인 스스로 존재함으로부터 끝없는 자아 계시를 거쳐서, 최종의 자아 실현에 이르기까지―절대 실존자로부터 최종의 체험자들에 이르기까지―실체의 한없음을 스스로 실현한다.
106:8.13 (1171.6) 둘째 수준: 세 가지 삼자일체의 조정은 불가피하게 체험적 신들이 연합된 연결에 관계되며, 이들은 이 삼자일체들과 유전적으로 연합되어 있다. 이 둘째 수준의 성질은 때때로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106:8.14 (1171.7) 1. 최상위. 이것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파라다이스 신들의 창조 아들 및 창조 딸과 체험적 연락을 가지면서, 신에게 생기는 통일성의 결과이다. 최상위는 첫째 단계인 유한한 진화가 완성되어 신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106:8.15 (1171.8) 2. 궁극위. 이것은 둘째 삼자일체가 궁극에 얻은 통일성이 신에게 나타나는 결과이며, 신이 초월적 초한 성격이 된 것이다. 궁극위는 많은 품질을 가진, 다양하게 간주되는 통일성에 있고, 그에 대한 인간의 개념은 적어도 통제하고 지휘하고, 몸소 체험할 수 있고, 긴장을 통일하는 그러한 단계의 궁극성을 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에 이른 신은 밝혀지지 않은 많은 다른 모습이 있다. 궁극위는 최상위와 비교할 만하지만 동일하지 않으며, 궁극위는 단지 최상위를 확대한 것도 아니다.
106:8.16 (1172.1) 3. 절대자. 가장 높은 삼자일체의 둘째 수준에서 셋째 구성원의 특성에 관하여 많은 이론이 있다. 절대자 하나님은 의심할 여지 없이, 절대 삼자일체의 마지막 기능이 성격에 미치는 결과로서 이 연합에 말려들어 있다. 그래도 신 절대자는 영원의 지위를 가진 실존적 실체이다.
106:8.17 (1172.2) 이 셋째 구성원에 관한 개념의 어려움은 그러한 구성원 자격을 전제하는 것은 절대자가 꼭 하나 있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에 본래부터 있다. 이론적으로, 그러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면, 세 절대자가 하나로서 체험으로 통일된 것을 우리가 구경해야 한다. 무한 속에서 실존적으로 하나의 절대자가 있다고 우리는 가르침을 받았다. 누가 이 셋째 구성원일 수 있는가 조금도 뚜렷하지 않지만, 그러한 것은 어떤 형태로 상상하지 못하게 연락되고 우주에서 명시되는 신 절대자, 우주 절대자, 무제한 절대자로 구성될지 모른다고 흔히 가정된다. 분명히, 가장 높은 삼자일체는 세 절대자를 완전히 통일하지 못하고서 완벽한 기능을 도저히 얻을 수 없고, 세 절대자는 무한한 가능성을 모두 완전히 실현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통일될 수 없다.
106:8.18 (1172.3) 가장 높은 삼자일체의 셋째 구성원이 우주 절대자라고 상상하고, 이 개념이 우주 절대자가 정적(靜的)이고 잠재할 뿐 아니라 연합 성질이 있다고 상상한다면, 아마도 최소한의 진리 왜곡일 것이다. 그러나 총 신의 기능과 창조하고 진화하는 모습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우리는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다.
106:8.19 (1172.4) 비록 가장 높은 삼자일체에 대하여 완성된 개념을 형성하기 어렵지만, 한정된 개념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가장 높은 삼자일체의 둘째 수준이 본질적으로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된다면, 최상위 하나님, 궁극위 하나님, 절대자 하나님의 연합이, 이 체험적 신들의 조상인, 성격을 가진 삼자일체들의 연합이 낳는 성격 반응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아주 가능하게 된다. 체험하는 이 세 신이, 그들의 조상이자 원인이 되고 첫째 수준을 구성하는 삼자일체들이 더욱 통일되는 직접 결과로서, 둘째 수준에서 분명히 통일될 것이라는 의견을 우리는 감히 가져 본다.
106:8.20 (1172.5) 첫째 수준은 세 가지 삼자일체로 구성된다. 둘째 수준은 체험으로 진화한 성격자, 체험으로 궁극에 이른 성격자, 체험적이고 실존적인 신 성격자들의 성격 연합으로서 존재한다. 가장 높은 완벽한 삼자일체를 이해하는 데 무슨 개념의 어려움이 있든지 상관 없이, 둘째 수준에서 이 세 신의 성격 관계는 위엄자가 신이 되는 현상에서, 바로 우리의 우주 시대에 대하여 분명히 나타났다. 신 절대자는 궁극위를 통해서, 그리고 최상 존재의 초기 창조 명령에 반응하여 활동하면서, 이 둘째 수준에서 위엄자를 현실화하였다.
106:8.21 (1172.6) 셋째 수준: 둘째 수준에서 가장 높은 삼자일체의 제한 없는 가정(假定)에서는, 전체 무한에 지금 있거나, 전에 있었거나, 앞으로 있을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실체가 가진 어떤 단계의 상관 관계도 포함된다. 최상 존재는 영일 뿐 아니라 또한 지성ㆍ권능ㆍ체험이다. 궁극위는 이 모두이고 이를 훨씬 넘으며, 한편 이와 관련하여 신 절대자, 우주 절대자, 무제한 절대자가 하나가 된다는 개념에 모든 실체가 실현되는 절대 최후성이 담겨 있다.
106:8.22 (1172.7) 최상위, 궁극위, 완성된 절대자, 이 셋의 연합에는, 스스로 계신 이가 최초에 분할한 모습, 무한의 일곱 절대자를 출현하게 만든 무한의 모습을 기능적으로 다시 조립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비록 우주의 철학자들은 이렇게 될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다고 판단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자주 이렇게 묻는다: 둘째 수준에서 가장 높은 삼자일체가 언젠가 삼자일체의 통일을 성취할 수 있다면, 다음에 그러한 신(神)이 통일되는 결과로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 계신 이를 체험으로 달성 가능한 존재로 현실화하는 길로 직접 이끌 것이라 우리는 확신한다. 성격을 가진 존재들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스스로 계신 이가 아버지 무한자로서 우리가 체험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할 수 있다. 이 절대 운명이 비성격 관점에서 무엇을 의미할까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고, 오로지 영원이 아마도 해명해 줄 수 있을 문제이다. 그러나 가능성이 적은 이 궁극의 일을 우리가 성격을 가진 생물로서 보건대, 모든 성격자의 마지막 운명을 바로 이 성격자들의 우주의 아버지가 마침내 알 것이라 우리는 추측한다.
106:8.23 (1173.1) 우리가 과거 영원에 계셨던 스스로 계신 이를 철학적으로 상상할 때, 그는 혼자 계시고 그 옆에 아무도 없다. 미래 영원 속으로 앞을 내다볼 때, 우리는 스스로 계신 이가 하나의 실존자로서 도저히 변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지만, 광대한 체험적 차이가 있다고 예측하고 싶다. 그러한 스스로 계신 이 개념은 충만한 자아 실현을 의미한다―스스로 계신 이의 자아 계시에 의도하여 참여한 자가 되고, 총 무한의 절대 의지(意志) 부분, 즉 절대적 아버지의 마지막 아들로서 영원히 남아 있을 그러한 성격자들이 사는 한없는 은하계를 포함한다.
106:9.1 (1173.2) 가장 높은 삼자일체 개념에서 우리는 한없는 실체의 가능한 체험적 통일을 가정하며, 이 모두가 아주 먼, 정말로 아득한 영원 속에서 일어날지 모른다는 이론을 때때로 세운다. 그런데도, 모든 과거와 미래의 우주 시대처럼, 바로 이 시대에 실제로 현재, 무한의 통일이 있다. 그러한 통일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안에서 실존적이다. 체험하는 실체로서 무한의 통일은 생각할 수 없이 아득히 멀지만, 무한의 조건 없는 통일은 지금, 우주가 존재하는 현재 순간을 지배하며, 절대적인 실존적 품위를 가지고 모든 실체의 다양한 모습을 뭉친다.
106:9.2 (1173.3) 영원이 성취된 최후 수준에서 무한한 통일을 상상하려고 애쓸 때, 유한한 인간은 그들의 유한한 존재에 본래 있는 지능의 한계와 얼굴을 마주친다. 시간과 공간과 체험은 인간의 개념에 장벽이 된다. 그래도 시간을 들이지 않고, 공간을 제쳐놓고 체험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도 우주 실체에 대하여 제한된 이해조차 얻을 수 없다. 시간에 대한 민감성이 없이, 어떤 진화 인간도 연속되는 관계들을 도저히 파악할 수 없다. 공간을 파악하지 않고는 어떤 생물도 동시에 일어나는 관계를 헤아릴 수 없다. 체험이 없이는, 어떤 진화 인간도 존재할 수조차 없다. 오로지 무한의 일곱 절대자가 정말로 체험을 초월하며, 그들조차 어떤 국면에서는 체험할지 모른다.
106:9.3 (1173.4) 시간ㆍ공간ㆍ체험은 사람이 상대적 실체를 파악하는 데 가장 크게 도움되는 것인데, 그래도 사람이 완벽하게 실체를 파악하는 데 가장 끔찍한 장애물이다. 필사자와 기타 많은 우주 생물은 잠재하는 것들이 공간에서 현실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 진화하여 결실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이 과정 전부가 파라다이스와 영원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시공(時空) 현상이다. 절대 수준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 거기에는 어떤 잠재하는 것도 실재하는 것으로 파악해도 좋다.
106:9.4 (1173.5) 모든 실체를 통일하는 개념은, 이 시대나 어느 다른 우주 시대에 있든지 상관 없이, 실존적인 것과 체험하는 것, 기본적으로 이 두 가지이다. 그러한 통일은 가장 높은 삼자일체 속에서 체험으로 실현되는 과정에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삼자일체가 겉으로 현실화되는 그 정도는 우주에서 실체에 대한 제한과 실체의 불완전성이 사라지는 데 정비례한다. 그러나 실체의 총 통합은 무조건, 영원히, 실존적으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안에 있다. 그 속에서 바로 이 우주 순간에, 무한한 실체는 절대로 통일되어 있다.
106:9.5 (1174.1) 체험하는 자의 관점과 실존적인 자의 관점이 일으키는 역설(逆說)은 피할 수 없고,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와 가장 높은 삼자일체는 각각, 오직 하나의 시공 상대성으로서 필사자들이 파악할 수 있는 영원의 관계라는 사실에 어느 정도 근거를 둔다. 가장 높은 삼자일체가 차츰 체험으로 현실이 되는 것에 관한 인간의 개념―시간 관점―은 이것이 이미 현실이 된 것이라 덧붙여 가정함으로―영원의 관점으로―보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두 관점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실존적으로 무한이 통일된 것이며, 체험하는 가장 높은 삼자일체가 실제로 계시고 완벽하게 겉으로 나타났음을 탐지하지 못하는 것은 얼마큼 다음의 이유 때문에, 서로 일으키는 왜곡에 기인하는 진실을 받아들이라고 우리는 유한한 필사자들에게 제안한다:
106:9.6 (1174.2) 1. 인간의 한정된 관점, 제한되지 않은 영원 개념을 파악할 능력이 없다.
106:9.7 (1174.3) 2. 불완전한 인간 지위, 체험하는 것들의 절대 수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106:9.8 (1174.4) 3.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 인류는 체험하는 기법으로 진화하도록 설계되어 있고, 따라서 본래부터 체질적으로 체험에 기대야 한다는 사실. 오로지 절대자가 실존적이면서 체험할 수 있다.
106:9.9 (1174.5)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서 우주의 아버지는, 가장 높은 삼자일체에서 스스로 계신 이이다. 아버지가 무한함을 사람이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유한한 한계 때문이다. 실존적이고 홀로 계시고, 삼위일체에 앞서고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스스로 계신 이 개념, 그리고 체험하는 가장 높은 삼자일체 뒤에 있고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스스로 계신 이를 가정하는 것은 바로 똑같은 가설이다. 무한자 안에서 아무런 실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겉으로 나타나는 모든 발전은 실체를 받아들이고 우주를 이해하는 능력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106:9.10 (1174.6)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스스로 계신 이는 모든 실존자에 앞서, 그리고 모든 체험자 뒤에 존재해야 한다. 이런 개념들이 인간의 머리 속에서 영원과 무한의 역설(逆說)을 밝혀 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결코 끝나지 않는 이 문제들에 새로 달라붙어 싸우도록 그러한 유한한 지성인들을 자극해야 한다. 이 문제들은 구원자별에서, 그리고 나중에 최후자로서, 그리고 널리 퍼지는 여러 우주에서 너희의 영원한 생애의 끝없는 미래를 통해서, 줄곧 너희의 흥미를 자아낼 것이다.
106:9.11 (1174.7) 머지 않아 모든 우주 성격자는 영원을 향한 마지막 추구가 끝없이 무한을 탐구하는 것, 절대적 첫째 근원 중심을 찾아내는, 결코 그치지 않는 항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머지 않아 우리 모두가, 모든 생물의 성장이 아버지와 같이 되는 것에 비례함을 알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무한 자체의 끝없는 가능성에 이르는 영원한 여권(旅券)임을 이해하게 된다. 무한자를 추구하는 데 성공하는 것은 아버지와 같아짐을 성취하는 데 정비례하고, 이 우주 시대에 아버지의 실체들은 신의 품질 안에 드러난다는 것을 필사자가 언젠가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우주의 인간들은 신답게 사는 체험 속에서 신의 이 품질을 몸소 이용하며, 신답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실제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106:9.12 (1175.1) 물질이고 유한하고 진화하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바탕을 둔 인생은 직접, 인격자의 무대에서 영이 지배권을 얻게 만들고, 그러한 인간을 아버지 무한자를 이해하는 데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데리고 간다. 그러한 아버지다운 인생은 진리에 근거를 두고, 아름다움에 민감하고, 선에 지배되는 인생이다. 하나님을 아는 그러한 사람은 마음 속에서 신을 예배함으로 빛을 받고, 바깥으로 모든 인격자가 두루 형제라는 정신에 마음을 다하여 봉사하는 데 헌신한다. 이것은 자비로 가득 차고 사랑으로 마음이 움직여 봉사를 베푸는 것이며, 한편 우주 지혜와 자아 실현의 수준, 하나님을 찾아내고 아버지를 예배하는, 항상 올라가는 수준에서, 일생의 이 모든 품질은 진화하는 인격 안에서 통일된다.
107:0.1 (1176.1) 우주의 아버지는 파라다이스에, 우주의 바로 한가운데에 몸소 거하지만, 또한 시간 지역에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자녀들의 지성 속에, 공간 세계에 실제로 계시니, 그가 신비의 훈계자로서 그들에게 깃들기 때문이다. 영원한 아버지는 행성에서 사는 필사 아들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동시에 아주 가깝게 관계되어 있다.
107:0.2 (1176.2) 조절자는 사람의 혼 속에서 아버지의 구체적인 사랑이 사실이 된 것이다. 그들은 필사 지성 속에 갇혀 있는 약속, 사람이 영원한 생애를 가진다는 진정한 약속이다. 그들은 사람의 완전하게 된 최후자 인격의 본질이며,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이 본질을,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신성한 계심에 실제로 도달하기까지, 한 걸음 한 걸음 숱한 우주까지 올라감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삶에 이르는 신다운 기법을 점진적으로 통달하는 동안에 미리 맛볼 것이다.
107:0.3 (1176.3) 하나님은 자신이 완전한 것 같이 사람에게 완전하라고 명령하였고, 그처럼 예정된 천상의 운명을 이루는 데 사람에게 체험하는 협동자가 되려고 조절자로서 내려오셨다. 사람의 지성에 깃드는 하나님의 분신(分身)은, 사람이 이 신다운 조절자와 손잡고 우주의 아버지를 찾아낼 수 있다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의 보장이며, 그는 사람이 육체로 사는 시절에도 그를 찾고 아들 삼으려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107:0.4 (1176.4) 창조 아들을 본 필사자는 누구든지 우주의 아버지를 보았고, 신다운 조절자가 깃드는 사람에게는 파라다이스 아버지가 깃든다. 깃드는 조절자의 인도함을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않고서 따르는 필사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다. 조절자의 계심을 의식하는 것은 하나님이 앞에 계심을 의식하는 것이다. 조절자가 사람의 진화하는 혼과 영원히 융합하는 것은 우주에서 신의 동료로서 하나님과 영원히 결합하는 것을 사실로 체험하는 것이다.
107:0.5 (1176.5) 하나님처럼 되고 파라다이스에 이르러서, 거기서 신의 실제 몸 앞에서 신이 준 선물의 무한한 근원을 예배하려는, 가라앉힐 수 없는 그 열망과 그침 없는 갈망을 사람 속에서 만들어내는 것은 조절자이다. 조절자는 필사자인 아들과 파라다이스 아버지를 실제로 연결하고, 그를 아버지께로 갈수록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살아 있는 계심이다. 조절자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거리에 따라, 그리고 영원한 아버지의 보편성과 반대로 사람이 많이 치우친 정도에 따라 생기는 엄청난 우주 긴장을 우리에게 보상하여 평준화시키는 존재이다.
107:0.6 (1176.6) 조절자는 유한한 인간의 지성 속에 갇혀 있는 무한한 존재의 절대 본질이며, 그러한 필사자가 선택하는 대로, 궁극에는 하나님과 사람의 이 임시 결합을 완성하고 끝없이 우주에 봉사하는 것을 위하여 새 종류의 존재를 진정하게 현실화한다. 조절자는 하나님이 사람의 아버지라는 진리를 사실로 만드는 신다운 우주 실체이다. 조절자는 사람의 틀림없는 우주 나침반이요, 언제나, 어김없이 사람의 혼을 하나님 방향으로 가리킨다.
107:0.7 (1177.1) 진화하는 여러 세계에서, 의지(意志)를 가진 인간은 존재하면서 세 가지 일반적 발전 단계를 거친다: 조절자가 도착할 때부터 사람이 비교적 완전히 성장하기까지, 유란시아에서는 약 스무 살까지, 훈계자를 때때로 생각 변경자라 일컫는다. 이때부터 분별의 나이, 약 마흔에 이르기까지, 신비의 훈계자를 생각 조절자라 부른다. 분별의 나이에 이른 때부터 육체를 벗어나기까지, 그들은 흔히 생각 통제자로서 언급된다. 필사 생명의 이 세 단계는 지성을 복사(複寫)하고 혼을 진화시키면서 조절자가 진보하는 세 단계와 아무 관련이 없다.
107:1.1 (1177.2) 생각 조절자는 최초의 신의 본질로부터 생겼으므로, 그들의 성품과 기원에 대하여 아무도 주제넘게 권위를 가지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나는 겨우 구원자별의 전통과 유버르사의 의견을 나눠줄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다만 우리가 이 신비의 훈계자, 그리고 대우주에 두루 그들과 관계된 존재들을 어떻게 여기는가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107:1.2 (1177.3) 생각 조절자가 어떤 방식으로 수여되는가에 관하여 다채로운 의견이 있어도, 그들의 기원에 관해서는 아무런 그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우주의 아버지, 첫째 근원 중심으로부터 직접 비롯한다고 모두가 동의한다. 그들은 지음받은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무한한 하나님의 실제 계심을 구성하는, 조각이 된 존재이다. 그들의 밝혀지지 않은 많은 동료와 더불어, 조절자는 묽어지지 않고 섞이지 않은 신성(神性), 제한되지 않고 엷어지지 않은, 신의 일부이다. 조절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한, 조절자는 하나님이다.
107:1.3 (1177.4) 첫째 근원 중심의 절대성을 벗고 그들이 언제 따로 존재를 시작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그들이 몇이나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지성에 깃들려고 시간 세계의 행성에 그들이 도착하기까지, 우리는 그들의 생애에 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그때부터 계속, 우리는 삼자일체 운명을 성취하기까지, 그리고 이를 포함한 그들의 우주 진보에 대하여 얼마큼 익숙하다: 어떤 필사 승천자와 융합함으로 성격을 얻는 것, 우주의 아버지의 명령으로 성격을 얻는 것, 또는 생각 조절자들의 알려진 배치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107:1.4 (1177.5) 우리는 모르지만, 우주가 커짐에 따라서, 조절자와 융합할 후보자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서, 조절자들이 항상 개별화되고 있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조절자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 짚어보려 하는 데 우리가 똑같이 틀릴 가능성이 있을지 모른다. 바로 하나님처럼,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 성품을 가진 이 분신들은 실존적으로 무한한지 모른다.
107:1.5 (1177.6) 생각 조절자가 생겨나는 기법은 우주의 아버지의 밝혀지지 않은 기능의 하나이다. 우리는 첫째 근원 중심의 다른 동료 절대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아버지 분신들의 생산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믿을 충분한 이유를 가졌다. 조절자는 다만, 영원히, 신이 준 선물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생겼고,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과 같다.
107:1.6 (1177.7) 융합하는 사람과 가지는 관계에서 그들은 하늘 같은 사랑과 영적 봉사를 드러내며, 이것은 하나님이 영이라는 선언을 충분히 확인한다. 그러나 이 초월적 봉사에 보태서, 유란시아 필사자에게 한 번도 밝혀진 적이 없는 많은 것이 일어난다. 시간 세계에 사는 사람의 인격의 일부가 되라고 우주의 아버지가 자신의 몸을 줄 때, 도대체 무슨 일이 정말로 벌어지는지 우리가 넉넉히 이해하지도 못한다. 파라다이스 최후자들이 올라가면서 진보하는 것은, 아직까지 사람과 하나님의 더할 나위 없는 이 협동 관계에 본래 있는 가능성을 다 드러내지도 않았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보건대, 아버지 분신은 절대적 하나님에 도달할 수 있는 운명을 가진 인간에게 절대적 하나님이 주는 선물임이 틀림없다.
107:1.7 (1178.1) 우주의 아버지가 그의 선(先)인격 신을 조각내는 것처럼, 무한한 영도 영 융합 시리즈에 속하는 살아남는 필사자의 진화하는 혼에 깃들고, 실제로 그와 융합하려고 자기의 선(先)지성 영의 부분을 개체로 만든다. 그러나 영원한 아들의 성품은 이렇게 조각낼 수 없다. 최초의 아들의 영은 퍼지든지, 아니면 따로따로 성격을 가진다. 아들이 융합한 사람은 영원한 아들의 창조 아들이 영을 개별화하여 주신 것과 뭉쳐진다.
107:2.1 (1178.2) 조절자는 처녀 존재로서 개체가 되며, 모두가 해방되거나, 융합하거나, 아니면 인격이 된 훈계자가 되도록 정해져 있다. 우리는 일곱 계급의 생각 조절자가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구분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흔히 다음과 같이 다른 계급들을 언급한다:
107:2.2 (1178.3) 1. 처녀 조절자, 영원히 살아남으려는 진화하는 후보자의 지성 속에서 첫 임무에 봉사하는 자. 신비의 훈계자들의 신다운 성품은 영원히 한결같다. 신별에서 처음에 나갈 때, 그들의 체험적 성품이 또한 한결같다. 그 뒤에 체험의 차이는 우주에서 봉사하면서 실제로 체험하는 결과이다.
107:2.3 (1178.4) 2. 상급 조절자. 시간 지역에 사는 사람의 신분, 그리고 셋째 근원 중심이 지역 우주에서 나타나는, 영의 개별화된 부분, 이 둘 사이에 마지막 융합이 일어나는 세계에서, 의지를 가진 사람과 함께 하나나 몇 생애 동안 봉사한 자.
107:2.4 (1178.5) 3. 최상 조절자. 진화 세계에서 시간 속에 겪는 모험에 근무한 적이 있지만, 그 인간 짝이 어떤 까닭으로 영원히 살아남기를 거절한 그러한 훈계자, 그리고 나중에 다른 진화 세계에서 다른 필사자의 다른 모험에 배치된 훈계자. 최상 조절자는 처녀 훈계자보다 더 신답지는 않아도 체험을 더 겪었으며, 체험을 적게 가진 조절자가 할 수 없는 일을 인간 지성 속에서 할 수 있다.
107:2.5 (1178.6) 4. 사라진 조절자. 여기서 신비의 훈계자의 생애를 따라가는 우리의 노력에 중단이 생긴다. 넷째 단계의 봉사가 있는데 이에 관하여 우리는 확실치 않다. 멜기세덱들은 넷째 단계 조절자들이 온 우주를 돌아다니면서, 파견 임무로 일한다고 가르친다. 외톨 사자들은 이들이 바로 아버지와 함께 참신한 교제 기간을 즐기면서, 첫째 근원 중심과 한 몸이 되어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리고 조절자가 두루 계시는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총 우주를 돌아다니는 것도 아주 가능성이 있다.
107:2.6 (1178.7) 5. 해방된 조절자. 진화하는 구체의 필사자를 위하여 시간 지역에서 봉사하는 일로부터 영원히 풀려난 신비의 훈계자. 그들의 역할이 무엇인가 우리는 모른다.
107:2.7 (1179.1) 6. 융합한 조절자―최후자. 초우주에서 하늘 가는 사람과 하나가 된 자, 파라다이스 최후 군단에 속하는 승천자, 시간 지역에서 영원에 이르는 승천자의 짝. 생각 조절자는 보통, 하늘 가는, 시간 지역의 필사자와 융합하며, 살아남는 그런 필사자와 함께 승천자별에서 출입이 기록된다. 그들은 하늘 가는 존재의 길을 따른다. 하늘 가는 진화하는 혼과 융합하고 나서, 그 조절자는 우주의 절대 실존적 수준으로부터, 하늘 가는 성격자와 함께 기능적으로 연합하는 유한한 체험적 수준으로 옮겨 가는 듯하다. 실존적 신다운 성품의 모든 특성을 지니면서, 융합한 조절자는 살아남는 필사자의 하늘 가는 생애와 분해할 수 없이 연결된다.
107:2.8 (1179.2) 7. 인격이 된 조절자. 육신화한 파라다이스 아들과 함께 봉사한 자, 그리고 필사자에게 깃드는 동안에 특별한 공훈을 세웠지만, 살아남기를 거부한 주체에게 깃들었던 많은 조절자. 우리는 그런 조절자들이 배치받은 초우주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추천을 받아서 인격을 얻는다고 믿을 이유를 가지고 있다.
107:2.9 (1179.3) 이 신비스러운 하나님 조각들을 분류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이 있다. 우주에 배치되는 데 따라서, 개별 필사자에게 깃드는 데 성공한 정도에 따라서, 또는 융합할 필사 후보자의 종족 계보에 따라서 분류할 수도 있다.
107:3.1 (1179.4) 신비의 훈계자의 파송ㆍ관리ㆍ지휘, 그리고 모두 일곱 초우주의 근무로부터 돌아오는 것에 관계된 모든 우주 활동은 신성한 구체 신별에 집중된 듯하다. 내가 아는 한, 오직 조절자 및 아버지의 다른 개체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그 구체에 가 본 적이 없다.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선(先)인격 존재가 신별을 조절자들과 고향 구체로서 함께 쓰는 것 같이 보인다. 우리는 이 동료 존재들이 어떤 방식으로 신비의 훈계자들의 현재 및 미래 봉사에 관계될 수도 있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로 모른다.
107:3.2 (1179.5) 생각 조절자들이 아버지한테로 돌아갈 때, 그들은 기원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영역, 신별로 돌아간다. 아마도 이 체험의 일부로서, 이 비밀 구체에 자리잡고 있다고 보고된 아버지 신성의 특화된 명시 뿐 아니라, 아버지의 파라다이스 성격과 실제로 접촉이 있다.
107:3.3 (1179.6) 파라다이스의 일곱 비밀 구체 모두에 관하여 우리는 무언가 알지만, 다른 데보다 신별에 관하여 아는 것이 적다. 높은 영적 서열에 있는 존재들은 신에게서 오직 세 가지 명령을 받는데, 다음과 같다:
107:3.4 (1179.7) 1. 언제나 자기의 선배와 상관들의 체험과 자질에 알맞는 존경을 보일 것.
107:3.7 (1179.10) 내가 신별로 가는 것은 아주 쓸모 없으리라고 나는 자주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인격이 된 조절자와 같은 자를 제외하고, 어떤 거주하는 존재도 나는 아마 볼 수 없을 터이고, 나는 조절자들을 다른 데서 본 적이 있다. 신별에는 내게 진정한 가치나 이익이 되는 아무것도, 나의 성장과 발전에 필수인 아무것도 없다고 아주 확신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거기로 가는 것이 금지되지 않았을 것이다.
107:3.8 (1180.1) 우리가 신별로부터 조절자의 성품과 기원에 관하여 거의 또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으니까, 우리는 수많은 다른 근원으로부터 정보를 모을 수밖에 없고, 그러한 지식이 유익하려면 이 축적된 자료를 수집하고 연결하고 서로 관련짓는 것이 필요하다.
107:3.9 (1180.2) 생각 조절자가 나타낸 용맹과 지혜는 그들이 엄청난 규모와 범위의 훈련을 거쳤음을 가리킨다. 그들이 인격자가 아니니까, 신별의 여러 교육 기관에서 이 훈련을 제공해야 한다. 인격화된 독특한 조절자들은 의심할 것 없이, 신별에 있는 조절자 훈련 학교들의 직원을 구성한다. 우리는 중앙에 있는 이 감독하는 군단을, 자기 우주 영역의 종족과 민족들에게 일곱 번 자신 수여를 마친, 지금 미가엘 계급의 처음 파라다이스 아들의 조절자, 인격화된 조절자가 주관한다는 것을 안다.
107:3.10 (1180.3) 인격이 되지 않은 조절자에 관하여 우리는 정말로 거의 아는 것이 없다. 우리는 오직 인격이 된 계급들과 접촉하고 통신을 가진다. 이들은 신별에서 이름을 받고, 반드시 번호가 아니라 이름으로 알려진다. 인격이 된 조절자들은 신별에 영구하게 주소를 가지며, 그 신성한 구체가 그들의 집이다. 그들은 오직 우주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그 거처를 떠난다. 거의 아무도 지역 우주의 영토에서는 발견되지 않지만, 더 많은 무리가 중앙 우주에 있다.
107:4.1 (1180.4) 생각 조절자가 신답다고 말하는 것은 오직 기원의 성질을 인정하는 것이다. 영원ㆍ무한한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본질, 보편적으로 계시는 그러한 절대 본질의 조각 안에 담길 수 있는, 신의 모든 잠재 속성의 본질을 그렇게 순수한 신성이 품는 것이 대단히 있음직하다.
107:4.2 (1180.5) 조절자의 실제 근원은 무한한 것이 틀림없고, 진화하는 필사자의 불멸하는 혼과 융합하기 전에는 조절자의 실체가 절대성에 가까움이 틀림없다. 조절자는 보편적 의미에서, 신의 의미로 보아 절대자는 아니지만, 조각난 성품의 가능성으로 보면 그들은 아마 참으로 절대적인 자이다. 그들은 보편성이 제한되어 있지만, 성품은 제한되지 않았다. 바깥으로 뻗는 성질은 한정되어 있지만, 의미ㆍ가치ㆍ사실을 집중하는 성향을 보면 그들은 절대적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신이 주신 선물을 아버지의 제한된 절대 분신이라고 일컫는다.
107:4.3 (1180.6) 아무 조절자도 파라다이스 아버지께 불충한 적이 없다. 하위 계급의 성격 생물은 때때로 불충한 동료들과 다투어야 할지 모르지만, 조절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람에게 봉사하고 우주에서 활동하는 그들의 드높은 영역에서, 그들은 가장 높고 그르칠 수 없다.
107:4.4 (1180.7) 인격을 얻지 못한 조절자들은 오로지 인격이 된 조절자에게만 눈에 보인다. 나의 계급, 외톨 사자는, 영감 받은 삼위일체 영과 함께, 영적 반응 현상의 수단으로 조절자의 계심을 알아낼 수 있다. 그리고 세라핌조차 사람의 물질 지성 속에 훈계자의 계심과 관련된 것으로 짐작되는 영의 빛을 때때로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아무도, 조절자가 인격이 되지 않으면 그들의 참 계심을 실제로 식별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성품은 진화 세계에서 온, 하늘 가는 필사자의 융합된 인격과 뭉친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조절자가 보편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높이, 순전히, 신에게서 기원과 성품을 가졌음을 뚜렷이 가리킨다.
107:4.5 (1181.1) 이 신다운 계심에 따르는, 특징이 되는 빛, 영의 빛남이 있는데, 이것은 생각 조절자와 일반적으로 관련되어 왔다. 네바돈 우주에서 이 파라다이스 광채는 널리 “표시등”으로 알려져 있다. 유버르사에서는 이를 “생명의 빛”이라 부른다. 유란시아에서 이 현상은 때때로 “세상으로 오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으로 언급되었다.
107:4.6 (1181.2) 우주의 아버지께 도달한 모든 존재에게는 인격이 된 생각 조절자들이 눈에 보인다. 어떤 단계에 있는 조절자도, 모든 다른 존재ㆍ개체ㆍ영ㆍ성격자, 그리고 영의 명시와 함께, 파라다이스 신들에 기원이 있고 대우주의 주요 정부를 주관하는 최상 창조 성격자들이 언제나 식별할 수 있다.
107:4.7 (1181.3) 조절자의 깃드심의 참된 중요성을 너희가 깨달을 수 있는가? 너희의 유한한 필사 성품 속에 깃들고 그와 융합하는, 절대적이고 무한한 신, 우주의 아버지의 절대 분신을 가지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말로 헤아릴 수 있는가? 필사 인간이 전체 우주의 실존적 원인의 실제 분신과 융합할 때, 전례 없고 상상할 수 없는 그런 협동 관계의 운명에 결코 아무런 한계가 지워질 수 없다. 영원 속에서, 사람은 객관적 신의 무한함 뿐 아니라, 바로 그 하나님의 주관적 분신의 끝없는 가능성도 발견할 것이다. 조절자는 필사 인격자에게 하나님의 놀라움을 드러내며, 이 하늘 같은 계시(啓示)는 결코 그칠 수 없으니, 이는 조절자가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필사 인간에게는 하나님과 같기 때문이다.
107:5.1 (1181.4) 진화하는 필사자는 지성이 영과 물질 사이에서 우주가 중재하는 것이라고 보기 쉬운데, 이는 중재가 정말로 너희가 식별할 수 있다시피 지성의 주요한 봉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각 조절자가 지성을 가진 것을 인간이 파악하기가 몹시 어려우며, 이는 조절자가 실체의 절대 수준에서 하나님의 분신이고, 이것이 선(先)인격일 뿐 아니라 또한 어떤 에너지와 영의 분산보다도 앞서기 때문이다. 에너지와 영의 구별이 있기 전에 일원론 수준에서는 지성의 아무런 중재 작용이 있을 수 없는데, 이는 조정할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107:5.2 (1181.5) 계획하고 일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조절자는 지성에 비례하여 자아의 힘을 가졌음이 틀림없다. 그들은 서로, 다시 말해서 첫째 또는 처녀 집단보다 높은 온갖 형태의 훈계자들끼리 서로 교통하는 한없는 능력을 소유한다. 그들의 상호 교통의 성질과 취지에 관하여 우리는 밝힐 것이 거의 없는데, 이는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틀림없이 지성을 가졌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결코 인격화될 수 없을 것이다.
107:5.3 (1181.6) 생각 조절자가 지성을 가진 것은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이 지성을 가진 것과 같다―이것은 합동 행위자의 여러 지성에게 조상이 되는 무엇이다.
107:5.4 (1181.7) 조절자 속에 있다고 가정하는 종류의 지성은 수많은 다른 서열의 선(先)인격 존재의 지성 자질과 비슷함이 틀림없는데, 이것들은 짐작컨대, 마찬가지로 첫째 근원 중심에서 기원을 가진다. 이 서열들 가운데 다수가 유란시아에서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들은 모두 지성을 소유한 품질을 드러낸다. 또한 최초의 신의 이러한 개체화는 수많은 진화 종류의 비필사 존재들, 그리고 그러한 신의 분신과 융합하는 능력을 개발한, 제한된 수의 비진화 존재하고도 뭉치는 것이 또한 가능하다.
107:5.5 (1182.1) 한 생각 조절자가 살아남는 인간의 진화하는 혼, 불멸의 상물질 혼과 융합될때, 하늘 가는 그 필사자가 우주에서 진보하는 영 수준에 이를 때까지, 조절자의 지성이 그 인간의 지성과 따로 지속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107:5.6 (1182.2) 하늘 가는 체험을 거친 최후자 수준에 이르고 나서 이 여섯째 단계 영들은, 그러한 하늘 가는 성격자의 신 단계와 인간 단계 사이에 연락자로서 이전에 활동했던 필사자의 지성과 조절자의 지성의 어떤 단계가 연합됨을 나타내는, 어떤 지성 요인을 변화시키는 듯하다. 체험하는 이 지성의 품질은 아마도 진화하는 신―최상 존재―의 체험 자질을 “최상으로 변화시키고” 나중에 확대한다.
107:6.1 (1182.3) 인간의 체험 속에서 생각 조절자와 마주치다시피, 조절자는 영적 영향이 있고 사람을 인도하는 것을 드러낸다. 조절자는 정말로 하나의 영(靈), 순수한 영이지만, 영보다 더한 것이다. 우리는 결코 신비의 훈계자들을 흡족하게 분류할 수 있은 적이 없다. 그들에 관하여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 같다는 것이 전부이다.
107:6.2 (1182.4) 조절자는 사람이 영원을 얻을 가능성이며, 사람은 조절자가 인격을 얻을 가능성이다. 너희의 개별 조절자는 너희의 현세의 신분을 영원하게 만드는 희망을 가지고 너희를 영답게 만들려고 일한다. 조절자는 영 아버지의 사랑, 아름답고 자신을 주는 사랑으로 흠뻑 젖어 있다. 그들은 참으로, 신답게, 너희를 사랑한다. 영의 희망을 가지고 사람의 지성 안에 갇혀 있는 포로이다. 외로움이 끝나고 너희와 함께 물질적 의복과 시간의 옷의 한계를 벗어나도록, 너희의 필사 지성이 신성(神性)에 이르기를 몹시 바란다.
107:6.3 (1182.5) 너희가 파라다이스에 이르는 길은 영에 도달하는 길이요, 조절자의 성품은 우주의 아버지의 영적 성품의 계시를 충실하게 펼쳐 보일 것이다. 파라다이스에 올라간 뒤에, 영원한 생애의 최후자 이후 단계에서, 영으로 하지 않는 다른 봉사에서 조절자는 옛날의 인간 짝과 아마도 접촉할지 모른다. 그러나 파라다이스에 올라가는 것과 최후자로 사는 생애는, 하나님을 알고 영답게 변화하는 필사자, 그리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조절자가 베푸는 영적 봉사가 협동하는 관계이다.
107:6.4 (1182.6) 우리는 생각 조절자가 영, 순수한 영, 짐작컨대 절대 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조절자는 또한 순전한 영 실체보다 더 큰 무엇임이 틀림없다. 지성을 가졌다는 추측에 덧붙여서, 또한 순수 에너지의 요인들도 있다. 하나님이 순수 에너지와 순수 영의 근원임을 너희가 기억한다면, 그의 분신들이 이 두 가지임을 깨닫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조절자가 파라다이스 섬의 순간적ㆍ보편적 인력 회로를 타고 공간을 통과하는 것은 사실이다.
107:6.5 (1182.7) 이처럼 신비의 훈계자가 온 우주의 물질 회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수수께끼이다. 그들이 물질 인력(引力) 회로를 타고 대우주 전역에 걸쳐 번쩍이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그들이 바깥 공간 수준까지 파고들 수 있다는 것이 아주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파라다이스 인력이 있는 자리를 따라서 이 지역들로 분명히 갈 수 있다. 내 계급의 성격자는, 또한 대우주의 경계를 지나서 합동 행위자의 지성 회로를 거쳐 갈 수 있지만, 우리는 바깥 공간에 지도가 그려지지 않은 지역에서 조절자들이 계심을 확실히 탐지한 적이 없다.
107:6.6 (1183.1) 그리고, 물질 인력 회로를 이용하지만, 그래도 조절자는 물질 창조처럼 그에 지배되지 않는다. 조절자는 인력으로부터 생긴 결과가 아니라, 인력의 조상의 분신이다. 그들은 인력의 출현을 앞선다고 가정되는 한 우주 수준의 존재에서 조각이 되었다.
107:6.7 (1183.2) 생각 조절자는 그들이 수여될 때부터 필사 주체가 자연스럽게 죽고 나서 신별을 향하여 떠나려고 풀려나는 날까지 조금도 쉬지 않는다. 자기의 주체가 자연사의 문을 거치지 않는 그러한 조절자는 이 일시의 휴식조차도 얻지 못한다. 생각 조절자는 에너지 흡수가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에너지요, 가장 높고 신성한 서열의 에너지이다.
107:7.1 (1183.3) 생각 조절자는 인격자가 아니지만, 실재하는 개체이다. 필사자에게 깃드는 동안, 결코 실제로 인격을 갖추지 않지만, 그들은 참으로 완전하게 개별화되었다. 생각 조절자는 참 인격자가 아니요, 참 실체이다, 온 우주에서 알려진 가운데 가장 순수한 서열의 실체이다―신의 계심이다. 비록 인격은 없지만, 아버지의 놀라운 이 분신은 존재로서, 그리고 그들이 필사자에게 현재 베푸는 봉사의 영적 단계에 비춰 보아, 때때로 영 개체로서 보통 언급된다.
107:7.2 (1183.4) 생각 조절자가 의지(意志)하는 특권과 선택하는 힘이 있는 인격자가 아니라면, 그들이 어떻게 필사 주체를 고르고 진화 세계에 있는 이 인간들에게 깃들려고 자원할 수 있는가? 이것은 묻기는 쉬워도, 아마도 온 우주에서 아무 존재도 결코 꼭 맞는 답을 발견하지 못했다. 내 계급의 성격자, 외톨 사자들조차, 성격이 아닌 개체에서 의지ㆍ선택ㆍ사랑이 부여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107:7.3 (1183.5) 생각 조절자가 선택하는 모든 선(先)인격 수준에서 의지를 가졌음이 틀림없다고 우리는 가끔 추측해 왔다. 그들은 인간에게 깃들려고 자원하고, 사람의 영원한 생애를 위하여 계획을 세우며, 상황에 따라서 적응하고 수정하고 대체하는데, 이러한 활동은 진정한 의지(意志)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필사자에게 애정을 가졌고, 우주의 위기에 활동하며, 인간의 선택에 따라서 단호하게 행동하기를 늘 기다리고 있는데, 이 모두가 상당히 의지하는 반응이다. 인간 의지의 분야와 관계되지 않은 모든 상황에 그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권한의 행사, 어떤 의미에서도 의지에 해당하는 것, 극대화된 결정을 가리키는 행위를 나타낸다.
107:7.4 (1183.6) 조절자가 의지를 가졌다면, 어째서 필사 의지에 굴종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은 조절자의 의지가 절대 성질이 있기는 하지만, 선(先)인격으로 의지가 표시되기 때문이라 우리는 믿는다. 인간의 의지는 우주 실체의 인격 수준에서 활동하며, 우주에서 두루, 비성격인 것―즉 성격이 아닌 것, 성격 밑에 있는 것, 선(先)인격인 것―은 존재하는 인격자의 의지와 행위에 늘 민감하다.
107:7.5 (1183.7) 창조된 존재들과 비성격 에너지가 있는 우주에 두루, 우리는 성격과 동떨어져서 뜻ㆍ의지ㆍ선택ㆍ사랑이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지 못한다. 조절자와 기타 비슷한 개체들의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는 비성격 실체들과 연합하여 활동하는, 이러한 성격의 속성을 구경하지 못한다. 조절자를 인격 이하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겠고, 그러한 개체를 초월 인격이라고 암시하는 것도 적당하지 않을 터이나, 그러한 존재를 선(先)인격이라 말하는 것이 전적으로 괜찮을 것이다.
107:7.6 (1184.1) 우리 계급의 존재에게, 신의 이 분신은 신의 선물이라 알려져 있다. 조절자는 기원이 신성하다는 것, 그들이 우주의 아버지의 거의 무한한 영역에 두루, 모든 물질 인간과 직접 한없이 교통하는 가능성을 우주의 아버지가 남겨두었음을 가리키는 그럴듯한 증명이자 시범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며, 이 모든 것은 그가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성격 안에 조절자의 계심이나 무한한 영의 성격자들 안에서 조절자가 간접으로 베푸는 봉사를 통하는 것과 별도이다.
107:7.7 (1184.2) 신비의 훈계자를 맞아들이는 주인이 되기를 기뻐하지 않을 지음받은 존재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최후자가 될 운명을 가진 사람, 의지를 가진 진화된 인간을 제외하고, 아무 계급의 존재에게도 이처럼 깃들지 않는다.
108:0.1 (1185.1) 인류에 대하여 생각 조절자가 이룰 사명은 시공의 필사 인간에게 우주의 아버지를 대표하고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의 선물이 근본적으로 할 일이다. 그들의 사명은 또한 필사자의 정신을 키우고, 사람의 불멸의 혼을 신다운 높이까지, 그리고 파라다이스의 완전한 영적 수준까지 변화시키는 사명이다. 이렇게 일시적 생물인 인간의 성품을 영원한 최후자의 신다운 성품으로 변화시키는 체험을 겪으면서, 조절자는 한 독특한 종류의 존재, 완전한 조절자와 완전해진 인간의 영원한 결합인 존재가 생기게 하며, 그런 존재는 우주의 어떤 다른 기술로도 복사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108:0.2 (1185.2) 우주 전체에서 아무것도 비실존적[1] [82] 수준에서 겪는 체험의 사실을 대신할 수 없다. 무한한 하나님은 언제나 그렇듯이, 충만하고 완벽하며, 악과 사람의 체험을 제외하고, 만물을 무한히 둘러싼다. 하나님은 그릇된 일을 할 수 없고, 그르칠 수 없다. 하나님은 친히 겪어보지 않은 것을 체험적으로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선견은 실존적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영은 파라다이스로부터 내려와서 유한한 필사자와 함께, 하늘 가는 생애에서 일어나는 모든 진정한 체험에 참여한다. 오로지 그러한 방법으로 실존적인 하나님은 진실로, 사실로, 사람에게 체험하는 아버지가 될 수 있다. 영원한 하나님의 무한은 유한한 체험을 거치는 가능성을 포함하며, 정말로 그 가능성은 인간이 인생의 부침을 겪는 체험을 실제로 나누는, 조절자 분신이 베푸는 봉사에서 사실이 된다.
108:1.1 (1185.3) 신별로부터 필사자에게 봉사하려고 파송될 때, 조절자들의 실존적 신성 자질은 동일하지만, 진화하는 인간 속에서, 그들과 이전에 접촉한 것에 비례하여, 체험의 질이 다르다. 우리는 조절자를 배치하는 근거를 설명할 수 없지만, 깃든 성격자에게 적응하는 데 영원히 적합한 어떤 지혜로운 효과적 정책에 따라서, 이 신의 선물이 수여된다고 추측한다. 우리가 지켜보건대, 체험을 더 겪은 조절자가 흔히 상급 부류의 인간 지성에 깃드는 자이다. 따라서 인간의 유전은 선택과 배치를 결정하는 데 상당한 요인임이 틀림없다.
108:1.2 (1185.4) 비록 분명히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모든 생각 조절자가 자원자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언제라도 자원하기에 앞서, 그들은 깃들 후보자에 관하여 완전한 자료를 소유한다. 천사가 작성한 가계(家系)의 초안, 그리고 예상된 생애 활동의 형태가 지역 우주의 서울로부터 초우주 본부까지 안으로 뻗는 반영 기법으로, 파라다이스를 거쳐서 신별에 있는 조절자 예비군에 전달된다. 이 예측은 필사 후보자의 선행(先行)하는 유전 조건 뿐 아니라, 있음직한 지적(知的) 자질과 영적 능력의 평가도 다룬다. 이렇게 조절자들은 지성의 자세한 성품에 관하여 충분히 통지를 받은 그러한 지성에 깃들려고 자원한다.
108:1.3 (1186.1) 자원하는 조절자는 인간 후보자의 세 가지 자격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다:
108:1.4 (1186.2) 1. 지적 능력. 그 지성이 정상인가? 지적 잠재성, 지능 능력이 무엇인가? 그 개인이 진정한 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자랄 수 있는가? 지혜가 활동할 기회가 있는가?
108:1.5 (1186.3) 2. 영적 이해. 경건하게 발전할 전망, 즉 종교적 성품이 태어나고 성장할 전망. 혼의 잠재성, 얼마큼 영적 수용 능력이 예상되는가?
108:1.6 (1186.4) 3. 지적 능력과 영적 능력의 총합. 이 두 자질이 강건한 인품을 낳고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불사(不死)의 혼을 확실히 진화시키는 데 기여하도록 어느 정도로 연합하고 통합하는 것이 가능한가.
108:1.7 (1186.5) 이 여러 사실을 앞에 놓고, 훈계자들은 배치를 받으려고 자유롭게 자원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아마도 조절자가 한 명이 넘게 자원한다. 아마도 이 무리의 자원하는 조절자들로부터 필사 후보자의 인격을 영적으로 변화시키고 영원하게 만드는 과제에 가장 적당한 자를, 인격을 얻은 감독 계급들이 고른다. (조절자들의 배치와 근무에서 사람이 남자인가 여자인가는 고려되지 않는다.)
108:1.8 (1186.6) 조절자가 자원하고 실제로 파송되는 사이에 끼는 짧은 시간은, 추측컨대 인격화 된 훈계자들의 여러 신별 학교에서 보내는데, 거기서 기다리는 필사 지성의 기초 형태가, 성격에 접근하고 지성을 영이 되게 만드는 데 가장 효과 있는 계획에 관하여 배치된 조절자를 가르치는 데 이용된다. 이 지성 모형은 초우주 거울 봉사가 제공하는 자료를 종합하여 작성된다. 적어도 이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요, 외톨 사자들의 긴 우주 생애를 통해서 내내, 인격을 얻은 숱한 조절자와 접촉함으로 얻은 정보를 종합한 결과로서 우리가 얻은 의견이다.
108:1.9 (1186.7) 조절자가 실제로 신별에서 일단 파송되고 나서, 그 순간과 선택한 주체의 지성 속에 나타나는 시각 사이에, 실질적으로 아무런 시간이 개재하지 않는다. 신별로부터 유란시아까지 조절자가 이동하는 데 걸리는 평균 시간은 117 시간, 42분, 7초이다. 이 시간의 거의 모두가 유버르사에서 등록하는 데 쓰인다.
108:2.1 (1186.8) 인격자에 관한 예측이 신별로 전달되자마자 조절자들이 봉사를 자원하지만, 인간 주체가 처음으로 도덕적 인격자로서 결정을 내리기까지, 그들은 실제로 배치되지 않는다. 인간 아이가 처음으로 내리는 도덕적 선택은 일곱째 지성 보조자 안에 자동으로 표시되고, 지역 우주 창조 영을 거쳐서, 초우주 관할 으뜸 영이 계신 가운데 합동 행위자의 보편적 지성 인력(引力) 회로에 순간에 등록된다. 당장에 그 으뜸 영은 이 정보를 신별로 보낸다. 조절자들은 유란시아에, 평균하여 여섯째 생일 바로 전에, 인간 주체에게 도착한다. 현재 세대에, 5년 10개월과 4일이 걸린다. 다시 말해서, 땅에서 살면서 2134번째 날이다.
108:2.2 (1187.1) 보조하는 지성 영들의 깃드는 봉사로 정식으로 준비되고 성령 안에 회로가 이어질 때까지, 조절자는 필사자의 지성에 침투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 조절자를 받기 위하여 인간 지성이 이렇게 자격을 갖추게 하려고 모두 일곱 보조자가 나란히 활동하는 것이 요구된다. 사람의 지성이 예배를 향하여 손을 뻗는 태도를 나타내고, 솟아나는 선과 악의 가치 사이에서 택하는―도덕적 선택―능력을 나타냄으로 지혜가 작용함을 가리켜야 한다.
108:2.3 (1187.2) 이렇게 조절자를 받기 위하여 인간 지성의 무대가 마련된다. 그러나 다른 이 영 봉사의 영적 조정자로서 진리의 영이 활동하고 있는 세계들을 제쳐놓고, 대체로 그들은 그러한 지성에 깃들려고 금방 나타나지 않는다. 수여 아들의 이 영이 계시면, 일곱째 보조 지성 영이 활동하기 시작하고, 이 지성 영이 그러한 필사 지능에게 앞서 봉사한, 관계된 여섯 보조자를 조정하는 잠재성을 얻었다고 우주 어머니 영에게 알리는 그 순간, 조절자가 어김없이 온다. 따라서 오순절 시절 이후로 늘, 유란시아에서 도덕적 지위를 가진 모든 정상 지성에게 신다운 조절자가 보편적으로 수여되었다.
108:2.4 (1187.3) 진리의 영을 받은 지성의 경우에도, 조절자는 도덕적 결정이 나타나기 전에 필사자의 지능에 멋대로 쳐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도덕적 결정이 내렸을 때, 신별로부터 직접, 이 영 조수가 관할권을 맡는다. 신다운 조절자와 그 인간 주체 사이에 작용하는 아무런 중재자나 또는 사이에 끼어드는 다른 권한이나 권력이 없다. 하나님과 사람은 바로 관련되어 있다.
108:2.5 (1187.4) 진화 세계의 거주자들에게 진리의 영이 퍼부어지는 시절 이전에, 조절자의 수여는 여러 가지 영의 영향과 인격자의 태도에 따라서 결정되는 듯하다. 우리는 그런 수여를 지배하는 법칙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한 진화하는 지성에 깃들려고 자원한 조절자들의 해방을 도대체 무엇이 좌우하는지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의 영이 수여되기 전에 그러한 지성 속에 조절자가 도착하는 것과 관계된 듯 보이는 수많은 영향과 조건을 관찰하는데, 다음과 같다:
108:2.6 (1187.5) 1. 개인 수호 천사가 배치되는 것. 한 필사자에게 전에 조절자가 깃들지 않았으면, 개인 수호자의 배치는 조절자를 당장에 데려 온다. 조절자의 봉사와 개인 수호 천사가 베푸는 봉사 사이에 아주 분명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관계가 더러 존재한다.
108:2.7 (1187.6) 2. 지적 달성과 영적 성취 면에서 3급 수준에 이르는 것. 3급 수준에 도달하고 나서, 그러한 성취가 그러한 문제에 관여하는 지역 우주 성격자들에게 미처 알릴 수 있기도 전에, 조절자가 필사 지성 안에 도착하는 것을 나는 지켜보았다.
108:2.8 (1187.7) 3. 특별한 영적 중요성이 있는 최상의 결정을 내리고 나서. 행성에서 개인의 위기가 있을 때, 그러한 인간 행동에는 기다리는 조절자가 즉시 도착하는 일이 따른다.
108:2.9 (1187.8) 4. 형제 사랑의 정신. 정신적 수준에 도달하고 개인 수호자들을 배치받는 것과 상관 없이―위기에 내리는 결정과 비슷한 아무것이 없어도―진화하는 필사자가 동료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지배되고, 육체를 입은 동포에게 사심 없이 봉사하려고 헌신했을 때, 기다리는 조절자는 어김없이 그러한 필사 봉사자의 지성에 깃들려고 내려온다.
108:2.10 (1188.1) 5.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의도(意圖)를 선언하는 것. 공간 세계에서 많은 필사자가 겉보기에 조절자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싶은데, 그래도 훈계자가 나타나지 않음을 우리는 관찰한다. 그러한 사람들이 나날을 사는 대로 그들을 줄곧 지켜보는데, 금방 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추구를 시작할 결정에 조용히, 거의 의식하지 않고서 도달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생각 조절자가 당장에 파송됨을 관찰한다.
108:2.11 (1188.2) 6. 최상 존재의 영향. 조절자가 필사 거주자의 진화하는 혼과 융합하지 않는 세계에서,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영향에 반응하여 조절자가 때때로 수여되는 것을 우리는 지켜본다. 그러한 수여는 최상 존재에서 기원을 가지는 어떤 우주 반사 작용으로 말미암아 결정된다고 우리는 추측한다. 어째서 이 조절자들이 어떤 부류의 진화하는 필사 지성과 융합할 수 없는지 또는 융합하지 않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한 거래는 우리에게 밝혀진 적이 없다.
108:3.1 (1188.3) 우리가 아는 한, 조절자들은 온 우주에서 독립된 작업 단위로 조직되고, 신별로부터 직접 관리되는 듯하다. 그들은 일곱 초우주에 두루 한결같고, 동일한 종류의 신비의 훈계자들이 모든 지역 우주에서 봉사한다. 우리는 수많은 시리즈의 조절자가 있음을 지켜보아서 아는데, 이것은 종족들을 통해서, 섭리 시대를 넘어서, 그리고 여러 세계ㆍ체계ㆍ우주에 뻗는 연속된 조직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들이 대우주에서 두루 서로 교환할 수 있게 활동하기 때문에, 이 신의 선물들을 추적하기가 극도로 어렵다.
108:3.2 (1188.4) 조절자들은 (신별 바깥에서) 오직 일곱 초우주 본부에서만 완벽하게 기록에 올라 있다. 하늘 가는 각 사람에 깃드는 각 조절자의 번호와 계급은 파라다이스 당국이 바깥에 초우주 본부로 보고하며, 거기서부터 관계된 지역 우주 본부에 통신되고, 관련된 특정한 행성에 전달된다. 그러나 지역 우주의 기록은 생각 조절자들의 총 번호를 밝히지 않는다. 네바돈 기록에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대표들이 지정한 대로, 오직 지역 우주의 배치 번호만 들어 있다. 조절자의 총 번호의 참 의미는 오직 신별에서만 알려져 있다.
108:3.3 (1188.5) 인간 주체는 그 조절자의 번호로 흔히 알려진다. 필사자는 조절자와 융합하기까지 진짜 우주 이름을 받지 않으며, 운명 수호자가 그 새 사람에게 새 이름을 수여함으로 그 결합이 알려진다.
108:3.4 (1188.6) 비록 우리가 오르본톤에 있는 생각 조절자들의 기록을 가졌고 그들에 대하여 절대로 아무 권한도 없고 그들과 행정 연락도 없지만, 우리는 지역 우주의 개별 세계들과 신별에 있는 신의 선물들의 중앙 거점(據點) 사이에, 무척 밀접한 행정적 연락이 있다고 굳게 믿는다. 우리는 수여되는 파라다이스 아들이 나타난 뒤에, 진화하는 세계가 행성에서 조절자들의 감독자인, 인격이 된 조절자 하나를 배치받는 것을 안다.
108:3.5 (1189.1) 지역 우주 검열자들이 행성 검사를 시행할 때, 그들이 세라핌의 우두머리들에게, 그리고 한 진화하는 세계의 행정부에 딸린 다른 계급 존재들의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떠맡기는 것과 똑같이, 행성의 생각 조절자의 우두머리에게 언제나 말하는 것을 주목하기는 흥미롭다. 유란시아는 타바만시아에게 그러한 정기 검열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는데, 그는 네바돈 우주에서 모든 생명 실험 행성을 다스리는 감독자이다. 초인간 성격자의 우두머리들에게 훈계와 기소장을 발표한 데 보태어, 그가 조절자의 우두머리에게 다음의 감사 말씀을 또한 발표했다는 것을 여러 기록이 드러낸다. 그 우두머리가 행성이나 구원자별이나 유버르사나 또는 신별에 있었는지 우리는 분명히 알지 못하지만, 타바만시아는 이렇게 말했다:
108:3.6 (1189.2) “이제 당신들, 나보다 훨씬 위에 있는 상관들에게, 체험 행성 시리즈에 일시 권한의 자리에 배치받은 자로서 옵니다. 이 불규칙한 구체(球體)에서 봉사하려고 자청한 이 훌륭한 무리의 하늘 봉사자, 신비의 훈계자들에게 찬미와 깊은 존경을 표현하려고 옵니다. 아무리 어려운 위기에도 당신들은 결코 넘어지지 않습니다. 네바돈의 기록에서나 오르본톤 위원회 앞에서도, 결코 신다운 조절자 하나를 기소한 적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책임을 맡긴 대로 이행하였고, 신답게 충실했습니다. 혼란에 빠진 이 행성에서 수고하는 모든 자의 잘못을 조절하고 부족함을 메우는 데 당신들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당신들은 놀라운 존재요, 이 뒤처진 영역의 혼들 속에서 좋은 것을 지키는 분입니다. 자원 봉사자로서 겉보기에 내 관할 밑에 있는 동안에도, 나는 당신들에게 존경을 표합니다. 당신들의 지극한 사심 없는 정신, 이해심 있는 봉사, 치우치지 않는 헌신을 겸손히 인식하면서 나는 당신들 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당신들에게는 싸움에 찢기고, 비탄에 잠기고, 병에 시달리는 이 세상에서 필사 거주자에게 하나님 같은 봉사자라는 이름이 마땅합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영예를 돌립니다! 경배만 제외하고 당신들에게 모든 것을 인정합니다!”
108:3.7 (1189.3) 암시하는 여러 증거의 결과로서, 우리는 조절자들이 철저히 조직되었고, 아득히 멀고 중앙에 있는 어떤 근원, 아마 신별로부터, 이 신의 선물들을 무척 총명하고 효과 있게 지휘하는 행정부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그들이 신별로부터 여러 세상으로 가고, 그들의 주체가 죽고 나서, 의심할 여지 없이 거기로 돌아간다는 것을 안다.
108:3.8 (1189.4) 상위 영 계급들 사이에서는 행정 작용을 찾아내기가 극도로 어렵다. 내 계급의 성격자들은 우리의 특정한 임무를 집행하면서, 의심할 여지 없이, 널리 퍼진 우주를 서로 관련짓게 하는 자로서 하나되어 활동하고 있는 집단, 수많은 다른 성격 집단 및 신 이하의 비성격 집단과 함께 의식하지 않고서 참여하고 있다. (인격이 된 조절자들을 제쳐놓고) 우리가 수많은 계급의 선(先)인격 개체들의 계심을 한결같이 의식하는, 인격이 된 유일한 집단의 생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처럼 일하고 있다고 우리는 추측한다.
108:3.9 (1189.5) 우리는 조절자들의 계심을 의식하며, 이들은 첫째 근원 중심의 선(先)인격 신 조각이다. 우리는 영감 받은 삼위일체 영들의 계심을 느끼며, 이들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초월 성격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으로부터 솟아나는, 어떤 밝혀지지 않은 여러 계급이 영으로 계심을 어김없이 알아차린다. 그리고 너희에게 밝혀지지 않은 또 다른 개체들에 대하여 우리가 온통 무감각하지는 않다.
108:3.10 (1190.1) 외톨 사자들은 진화하는 최상 존재의 확대되는 신 안에 기록되는 이 여러 가지 영향을 조정하는 성격자라고 네바돈의 멜기세덱들은 가르친다. 시간 세계의 설명되지 않은 숱한 현상을 체험으로 통일하는 데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 매우 가능성이 있지만, 우리는 이렇게 활동하는 것을 확실히 의식하지 않는다.
108:4.1 (1190.2) 신의 다른 분신들과 조정하는 가능성을 제쳐놓고, 조절자는 필사 지성 속에서 활동하는 분야에서 아주 혼자이다. 아버지가 대우주에서 두루, 모든 능력과 권한을 직접 친히 행사하는 것을 그만두신 듯 보이지만, 파라다이스 신들의 자식인 최상 창조자들의 이익을 위하여 이 기권(棄權) 행위가 있는데도, 아버지는 진화하는 인간의 지성과 혼 속에 계시는,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권리를 자신에게 분명히 남겨 놓았다는 사실을 신비의 훈계자들이 웅변으로 말해 준다. 이것은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영적 인력과 일치하여, 창조된 모든 인간을 그에게로 끌어당기도록 행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아직 유란시아에 계실 때, 너희에게 수여된 파라다이스 아들은 말했다, “내가 들려 올라가면, 모든 사람을 끌어당기리라.” 우리는 파라다이스 아들과 그 창조 동료들이 영적으로 당기는 이 힘을 알아차리고 이해하지만, 인간의 지성 안에서 그렇게 용감히 살고 일하는 이 신비의 훈계자 속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온통 지혜로운 아버지가 어떻게 활동하는지 그렇게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108:4.2 (1190.3) 비록 사람의 자녀의 지성 속에서 독립되어 행동하지만, 온 우주의 작업에 종속되거나 이와 조화되거나 또는 겉으로 관계된 듯하지 않으면서, 이 신비스러운 존재들은 깃드는 사람에게 신의 이상을 향하도록 재촉하며, 앞날의 더 나은 삶의 목적과 목표를 향하여 사람을 언제나 위로 유혹한다. 이 신비의 훈계자는 네바돈 우주에서 두루, 미가엘의 영적 국가를 세우는 데 끊임없이 보조하며, 한편 오르본톤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통치권을 안정시키는 데 신비롭게 이바지한다. 조절자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아이인 최상 창조자들이 또한 바로 그 뜻을 몸소 구현하니까, 조절자의 행위와 우주 통치자의 통치권이 서로 의존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비록 겉으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아버지가 조절자로 계심과 아버지가 네바돈 미가엘로 통치하는 권한은 같은 신성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임이 틀림없다.
108:4.3 (1190.4) 생각 조절자는 어떤 다른 영적 계심과 아주 상관 없이, 오가는 듯이 보인다. 그들은 모든 다른 영(靈) 영향의 성과를 다스리고 통제하는 것과 아주 동떨어져서 우주 법칙에 따라서 활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외관상의 독립성과 상관 없이, 장기간에 걸친 관찰의 결과는 보조 지성 영들, 성령, 진리의 영, 그리고 기타 영향을 포함하여, 조절자가 모든 다른 영의 봉사와 완전한 동시화되고 조정되어 인간 지성 속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 없이 드러낸다.
108:4.4 (1190.5) 칼리가스티아 동란이 있은 뒤에 유란시아가 고립되었던 것처럼 한 세계가 반란으로 고립될 때, 한 행성이 모든 바깥의 연결된 통신으로부터 차단될 때, 개인 사자들을 제쳐놓고, 행성 사이나 우주와 직접 통신하는 오직 하나의 가능성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구체들에 있는 조절자들의 연락을 통하는 것이다. 한 세계에서나 한 우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없이, 조절자는 결코 직접 아랑곳하지 않는다. 한 행성의 고립은 결코 조절자에게, 그리고 그들이 지역 우주나 초우주나 중앙 우주의 어느 부분하고도 통신하는 능력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것이 어째서 격리된 세계에서, 운명 예비군에 속하는, 최상이자 스스로 행동하는 조절자들과 접촉이 그리 자주 일어나는가 하는 까닭이다. 행성이 고립되는 장애를 둘러가는 수단으로서 그러한 기법이 이용된다. 최근에는 천사장 회로가 유란시아에서 활동했지만, 그 통신 수단은 대체로 천사장 군단 자체의 거래에 국한된다.
108:4.5 (1191.1) 방대한 우주에서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여 어리둥절한 많은 영 현상을 우리는 인식한다.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우리는 아직도 통달한 자가 아니다. 이 헤아릴 수 없는 일의 상당 부분은 인력 사자와 어떤 종류의 신비의 훈계자들이 해낸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조절자가 오로지 필사의 정신을 개조하는 데만 헌신한다고 믿지 않는다. 인격을 갖춘 조절자와 기타 계급의 밝혀지지 않은 선(先)인격 영들은, 그 영역의 사람들과 우주의 아버지가 직접 가지는 접촉, 설명되지 않은 접촉에 대표자라고 나는 확신한다.
108:5.1 (1191.2) 유란시아에서 사는 것과 같은 복합 존재에 깃들려고 자원할 때 조절자는 어려운 임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들은 너희 지성 속에 존재하며, 거기서 그 영역의 영적 지능들의 훈계를 받고, 그리고 나서 전하는 이 영적 말씀을 물질 지성에게 다시 받아쓰게 하거나 번역해 주는 일을 도맡아 왔다. 그들은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데 꼭 필요하다.
108:5.2 (1191.3) 인간이 충분한 정도로 협동하는 능력이 없거나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 주체의 체험에서 명심하지 못하는 사항을 지금 한 수준에서 다음 수준으로 조절자가 이월하는 것 같이, 생각 조절자가 너의 현재 인생에서 이용할 수 없는 것, 약혼한 사람에게 제대로 전할 수 없는 진리를 그는 다음 단계의 존재에서 쓰도록 충실하게 간직할 것이다.
108:5.3 (1191.4) 한 가지 너희가 믿을 수 있는 것이 있다: 조절자는 자신이 보호하라고 맡긴 어떤 것도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 돕는 영이 일을 게을리 했다는 소리를 우리는 들은 적이 없다. 지역 우주 부류의 아들들도 포함하여, 천사 및 다른 높은 부류의 영 존재들은 때때로 악을 용납하고 때때로 신의 길을 벗어날지 모르지만, 조절자는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절대로 믿을 만하며, 이것은 모두 일곱 집단에게 똑같이 참말이다.
108:5.4 (1191.5) 너의 조절자는 너의 새로운 다음 단계 존재의 잠재성이요, 네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되는 자격을 미리 수여한 것이다. 네 의지가 찬성함으로, 그 찬성을 얻어서, 조절자는 물질 지성의 인간 성향을, 태어나는 상물질 혼의 동기와 목적을 가진 행위, 사람을 변화시키는 행위에 굴복시키는 힘을 가졌다.
108:5.5 (1191.6) 신비의 훈계자는 생각을 돕는 자가 아니라, 생각을 조절하는 자이다. 그들은 새 세계들을 위한 새로운 지성과 너의 미래 생애의 새 이름을 만들 목적으로, 조정하고 영답게 변화시킴으로, 물질 지성과 함께 수고한다. 그들의 사명은 현세의 인생이 아니라, 주로 앞날의 인생과 관계된다. 그들은 이 세상의 조수가 아니라, 하늘의 조수라 부른다. 그들은 필사자의 생애가 술술 풀리게 만드는 데 관심이 없고, 오히려 자극하여 결심하게 하고 결심하는 일이 많이 늘어나도록 너의 생애를 적당히 어렵고 거칠게 만드는 데 관심을 가진다. 위대한 생각 조절자가 계심은 생활을 편안하게 하거나 고심하는 생각으로부터 해방시키지 않지만, 그러한 신의 선물은 지극히 마음을 안정시키고 더할 나위 없이 정신을 평안하게 만들어야 한다.
108:5.6 (1192.1) 일시적이고 항상 변하는 너의 기쁘고 슬픈 감정은 대체로, 네 속의 정신 상태와 바깥 물질 환경에 대한 순전히 인간답고 물질적인 반응이다. 그러므로 이기적 위안과 인간적 위로를 얻으려고 조절자를 바라보지 말라. 영원한 모험을 위하여 너를 준비시키는 것, 네가 꼭 살아남게 하는 것이 조절자가 할 일이다. 너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지거나 너의 다친 자존심을 따독거리는 것이 신비의 훈계자의 사명이 아니다. 조절자의 눈을 끌고 그의 시간을 차지하는 것은, 하늘 가는 오랜 생애를 위하여 너의 혼을 준비하는 일이다.
108:5.7 (1192.2) 조절자가 너희의 지성 속에서, 너희의 혼을 위하여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의심이 든다. 신다운 훈계자와 인간 지성이 우주에서 연합할 때 무슨 일이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가 내가 충분히 인식하는지 나는 모른다. 계획과 목적이 아니라, 성취하는 실제 방식에 관하여,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얼마큼 신비이다. 이것이 바로 어째서 필사 인간에게 주는 이 하늘 선물을 일컬을 적당한 이름을 찾는 데 우리가 그러한 어려움에 부딪치는가 하는 이유이다.
108:5.8 (1192.3) 생각 조절자는 너희의 두려워하는 느낌을 사랑과 자신감의 확신으로 바꾸고 싶어한다. 그러나 기계처럼 멋대로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그것은 네가 할 일이다. 너를 두려움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결정을 집행하면서 너는 글자 그대로 정신적 지레 받침을 제공하고, 그 위에 조절자는 들어올리고 진보하는 빛을 주는 영적 지렛대를 나중에 움직일지 모른다.
108:5.9 (1192.4) 종족들의 높은 성향과 낮은 성향 사이에, (단지 네가 옳다, 그르다 부를까 싶은 것들이 아니라) 정말로 옳거나 그른 것 사이에 날카롭고 윤곽이 뚜렷한 갈등이 일어날 때, 그러한 체험에 조절자가 분명하고 적극적인 어떤 방법으로 반드시 참여할 것을 너는 믿을 수 있다. 그러한 조절자 활동을 그 인간 짝이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조금도 그 가치와 현실성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108:5.10 (1192.5) 네가 개인 운명 수호자를 가지고도 살아남지 못한다면, 그 수호 천사는 그에게 맡긴 일을 충실히 집행했는가 확인 받기 위해서 판결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생각 조절자는 그 주체가 살아남지 못할 때 그렇게 검사를 받지 않는다. 천사는 아마도 완전한 봉사에 미치지 못할지 모르지만, 생각 조절자가 파라다이스의 완전한 방법으로 일하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안다. 그들의 봉사는 신별 바깥에 있는 어떤 존재에게도 비난 받을 가능성이 없는, 티 없는 기법의 특징을 가진다. 너희는 완전한 안내자를 가졌다. 따라서 완전의 목표를 분명히 달성할 수 있다.
108:6.1 (1192.6) 고귀하고 완전한 조절자가 땅에서 동물 기원을 가진 존재와 시험적 결합을 정말로 완성하려고, 유란시아 필사자와 같은 물질 인간의 지성 속에서 실제로 존재하려고 스스로 나서는 것은 정말로 신답게 신분을 낮추는 놀라운 일이다.
108:6.2 (1193.1) 한 세계의 거주자들이 전에 무슨 지위를 가졌든지 상관 없이, 신다운 아들이 자신을 수여한 뒤에, 그리고 진리의 영이 모든 인간에게 내린 뒤에, 조절자는 의지를 가진 모든 정상 인간의 지성에 깃들려고 그러한 세계로 몰려든다. 수여된 파라다이스 아들의 사명이 끝나고 나서, 이 훈계자들은 참으로 “너희 안에 있는 하늘 나라”가 된다. 신의 선물을 내려주심으로 아버지는 죄와 악에 가능한 가장 가깝게 접근한다. 이는 조절자가 인간이 저지르는 불의(不義) 한가운데에서도 필사 지성 속에서 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글자 그대로 참말이기 때문이다. 깃드는 조절자는 순전히 더럽고 이기적인 생각으로 인하여 특히 고통을 받는다. 그들은 아름답고 신성한 것이 무시됨을 답답해하며, 사람의 어리석고 동물 같은 많은 두려움과 유치한 걱정 때문에 그들이 하는 일은 거의 좌절된다.
108:6.3 (1193.2) 신비의 훈계자는 의심할 여지 없이, 우주의 아버지를 수여한 것, 우주에서 바깥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사람은 머리 속의 정신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올바름 속에서, 완벽한 진리 가운데 창조된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한때 어느 위대한 선생이 훈계하였다. 조절자는 신, 하나님이 자리에 계신 표시이다. “하나님의 모습”은 신체의 비슷함이나 사람의 물질적 자질의 제한된 한계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우주에 있는 비천한 인간들에게 생각 조절자를 신이 수여하면서 우주의 아버지가 영으로 계시는 선물을 말한다.
108:6.4 (1193.3) 조절자는 네 안에서 영적 달성의 원천이요, 신다운 인격을 얻을 희망이다. 그는 살아남는 권능이요 특권이요 가능성이니, 이것은 너를 완전히, 언제까지나, 단순한 동물과 구별한다. 물질적 육체의 신경 에너지 작용을 타고 지성에 미치는 바깥의 물리적 자극과 반대로, 그는 더 높고 참으로 내부에 있고 생각하게 하는 영적 자극이다.
108:6.5 (1193.4) 앞날의 생애를 맡은 이 충실한 보관자는 정신이 창조한 것은 무엇이나 영적 사본(寫本)으로 어김없이 복사한다. 이처럼 그들은 살아남는 세계에서 부활하도록 실제로 너희가 있는 그대로 (오직 영적으로), 천천히 확실하게 너희를 다시 만들고 있다. 지극하게 영적으로 다시 창조한 이것들은 모두, 너의 진화하는 불멸의 혼, 너의 상물질 자아로 태어나는 실체 속에 간직되고 있다. 조절자가 이렇게 만든 복사품을 의식이 깨닫는 빛에 드러나도록 충분히 떠올릴 수 있는 일이 드문데도, 이러한 실체들은 실제로 있다.
108:6.6 (1193.5) 참된 너, 너의 더 높고 진보하는 자아, 더 나은 상물질 자아이자 앞날의 영적 자아의 인간 조상이 너인 것처럼, 조절자는 참된 너의 신성한 조상이다. 심판과 검열자들이 네가 살아남는다고 선포하고 새로운 세계로, 너의 충실한 짝―조절자인 하나님―과 영원히 연락하면서 결코 그치지 않는 존재로, 위쪽으로 너를 통과시킬 때, 그들이 식별하는 것은 바로 이 진화하는 상물질 혼이다.
108:6.7 (1193.6) 조절자는 너희의 진화하는 불사의 혼의 영원한 조상이요 신성한 원본이다. 그들은 영적 미래 생애에 비추어서, 물질적인 오늘의 존재를 통달하려고 애쓰라고 사람을 이끄는 그침 없는 충동이다. 훈계자는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 가지고 옥에 갇혀 있는 자요, 영원한 진보의 원천이다. 얼마큼 직접 경로에서 자기의 주체와 교통하는 것을 그들이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상징과 기타 간접 방법을 던져 버리고 인간 파트너의 지능에게 전할 말을 곧장 번쩍 보낼 수 있을 때 얼마나 기뻐하는지!
108:6.8 (1194.1) 너희 인간은 거의 무한한 파노라마를 끝없이 펼치는 일을 시작하였고, 이것은 기운을 북돋아주는 봉사, 비할 데 없는 모험, 알 수 없는 숭고한 경지, 가없는 달성을 위하여, 결코 그치지 않고 항상 넓어지는 기회의 영역을 한없이 확장한다. 어두운 구름이 머리 위에 덮일 때, 너희의 믿음은 깃드는 조절자가 계신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너희는 필사자가 헤아릴 수 없는 안개를 지나서, 사타니아 저택 세계들이 손짓해 부르는 높이에 영원한 올바름의 해가 맑게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109:0.1 (1195.1) 생각 조절자는 우주 생애를 사는 아이이며, 정말로 처녀 조절자는 필사 인간이 자라고 발육하는 동안에 체험을 얻어야 한다. 인간 아이의 인격이 진화로 존재하는 싸움을 위하여 자라는 동안, 조절자도 다음 단계의 올라가는 삶을 연습하면서 성장하게 된다. 어린아이가 어린 시절 초기에 사회 생활과 놀이 생활을 통해서 어른 활동에 적응할 융통성을 얻는 것처럼, 깃드는 조절자도 상물질 생애와 상관 있는 활동을 필사자가 예비로 계획하고 연습하는 덕택으로, 다음 단계의 우주 인생을 위하여 기술을 터득한다. 인간적 존재는 미래 생명의 늘어나는 책임과 더 큰 기회를 위하여 준비하면서 조절자가 효과 있게 이용하는 연습 기간이다. 그러나 네 안에 살기는 해도, 조절자의 노력은 현세의 생활에서, 그리고 행성에서 존재하면서 일어나는 일에 그다지 관계되지 않는다. 오늘날 생각 조절자들은, 말하자면, 인간의 진화하는 지성 속에서 우주 생애의 현실을 미리 연습하고 있는 것이다.
109:1.1 (1195.2) 처녀 조절자가 신별에서 파송되기 전에 그들의 훈련과 발육을 위하여 포괄적이고 공들인 계획이 있는 것이 틀림없지만, 우리는 이에 대하여 그다지 많이 알지 못한다. 의심할 바 없이, 깃드는 체험을 가진 조절자가 필사자와 관계하는 새로운 사명에 발을 내디디기 전에, 다시 훈련시키는 광범위한 체계가 또한 존재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우리는 실제로 모른다.
109:1.2 (1195.3) 훈계자가 깃들었던 한 필사자가 살아남지 못할 때마다, 그 조절자가 신별로 돌아올 때 연장된 훈련 과정에 들어간다고 나는 인격이 된 조절자들한테서 들었다. 이 추가 훈련은 한 인간 속에 깃든 체험으로 인하여 가능하게 되고, 그 조절자가 진화하는 시간 세계들로 방면되기 전에 그 훈련이 실시된다.
109:1.3 (1195.4) 실제 살아보는 체험을 대신할 것은 우주에서 하나도 없다. 새로 생긴 생각 조절자의 완전한 신성은 이 신비의 훈계자에게 어떤 방식으로도 노련하게 봉사하는 능력을 부여하지 않는다. 체험은 살면서 존재하는 것과 떼어낼 수 없다. 체험은 너에게 신다운 자질이 아무리 많아도 실제로 삶으로 얻을 필요가 없다고 너에게 면제해 줄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따라서, 최상위의 현재 분야 안에서 살고 활동하는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생각 조절자는 체험을 얻어야 한다. 낮고, 경험이 없는 무리로부터 더 높고 경험을 얻은 무리로 진화해야 한다.
109:1.4 (1196.1) 조절자는 필사자의 지성 속에서 분명한 발전하는 생애를 거친다. 그들은 달성한 실체를 얻으며, 이것은 영원히 그들의 것이다. 특정한 필사 주체가 살아남든 그렇지 않든, 육체의 종족과 어떤 접촉을 가지더라도 그 결과로서 조절자는 그의 기술과 능력을 점진적으로 획득한다. 그들은 또한 살아남는 능력을 가진 불사의 혼의 진화를 촉진하는 일에 인간 지성과 동등하게 협동하는 자이다.
109:1.5 (1196.2) 조절자의 진화에서 첫 단계는 필사 존재의 살아남는 혼과 융합할 때 도달된다. 따라서, 너희는 본질적으로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 이르기까지 안쪽으로, 위로 진화하는 한편, 조절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바깥으로, 밑으로 진화한다. 그래서 이러한 신과 인간의 결합으로 생기는 최종 산물은 영원히 사람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아들일 것이다.
109:2.1 (1196.3) 너희는 체험과 관련하여 조절자 분류―처녀ㆍ상급ㆍ최상―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너희는 또한 어떤 기능적 분류―스스로 행동하는 조절자―도 알아보아야 한다. 스스로 행동하는 조절자는:
109:2.2 (1196.4) 1. 조절자를 필사 주체에게 빌려 주기만 하는 부류의 세계에서, 아니면 인간이 살아남지 못한, 실제로 융합하는 한 행성에서 일시 깃드는 자로서, 의지를 가진 한 사람의 진화하는 인생 속에서 어떤 필요한 체험을 얻었다. 그러한 훈계자는 상급이나 최상 조절자이다.
109:2.3 (1196.5) 2. 3급 정신 수준에 이르고 개인 수호 천사를 배치받은 한 인간 안에서, 안정된 영적 능력을 얻었다.
109:2.4 (1196.6) 3. 최상의 결정을 내리고 조절자와 엄숙하고 진지한 약혼에 들어간 주체를 가졌다. 그 조절자는 실제로 융합하는 때를 미리 내다보며, 그 결합을 사실로 일어난 사건으로 여긴다.
109:2.5 (1196.7) 4. 필사자가 승천하는 어느 진화 세계에서 운명 예비군 중 하나에 소집된 주체를 가지고 있다.
109:2.6 (1196.8) 5. 언젠가 사람이 잠든 사이에, 어떤 연락ㆍ접촉ㆍ재등록의 공적이나, 또는 배치받은 세계의 영적 행정부와 관련된, 인간 바깥의 다른 수고를 하려고, 갇혀 있는 필사자의 지성으로부터 일시 분리되었다.
109:2.7 (1196.9) 6. 그 행성의 영적 체제에 필수인 어떤 우주 공적을 실행할 책임을 맡은 영 인격자의 육체적 보완자인 어떤 인간의 체험에서 위기에 닥쳐 봉사했다.
109:2.8 (1196.10) 스스로 행동하는 조절자는 소속된 필사 주체의 안과 바깥에서 세운 수많은 공훈이 가리키다시피, 자기가 직접 깃드는 인격자를 끌어들이지 않는 모든 문제에서, 뚜렷한 정도로 의지를 소유하는 듯하다. 그러한 조절자는 그 영역의 수많은 활동에 참여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지상의 거처에서, 탐지되지 않고 깃드는 자로서 활동하는 일이 더 흔하다.
109:2.9 (1196.11) 의심할 여지 없이, 더 경험이 있는 이 상급 부류의 조절자는 다른 영역에 있는 자들과 통신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행동하는 조절자는 이렇게 서로 교통하는 한편, 오직 공동으로 일하는 수준에서, 자기가 머무르는 영역의 조절자 봉사에 필수인 보관 자료를 간직하는 목적으로 그렇게 한다. 하지만 그들은 때때로 위기가 닥쳤을 때 행성간 문제에서 활동한다고 알려져 있다.
109:2.10 (1197.1) 스스로 행동하는 최상 조절자는 인간의 몸을 뜻대로 떠날 수 있다. 깃드는 자는 필사 생명에 유기적(有機的) 또는 생물학적 부분이 아니다. 그들은 그 위에 신답게 얹혀 있다. 최초의 생명 계획에서 조절자가 마련되기는 했지만, 그들은 물질로 존재하는 데 필수는 아니다. 그런데도 깃드는 자리를 일단 잡은 뒤에, 그들이 필사 거처를 잠깐이라도 떠나는 일이 대단히 드물다는 것을 적어야 한다.
109:2.11 (1197.2) 초월 행동을 하는 조절자는 자기에게 맡겨진 과제를 완수했고, 오로지 물질 생명의 수송 수단이 분해되거나 그 불사의 혼이 옮겨지기만을 기다리는 자이다.
109:3.1 (1197.3) 신비의 훈계자가 하는 자세한 일의 특성은 배치의 성질에 따라서, 그가 연락 조절자인가 또는 융합 조절자인가 아닌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어떤 조절자는 그 주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단지 빌려 주기만 한다. 다른 조절자들은, 그 주체가 살아남으면, 영원히 융합하는 허락을 받은 인격 후보자로서, 수여된다. 또한 다른 체계와 우주들 뿐 아니라 다른 행성 부류 사이에서, 그들이 하는 일에 조금 차이가 있다. 그러나 대체로, 그들의 노동은 놀랍게도 한결같으며, 어떤 창조된 계급의 하늘 존재들이 맡는 임무보다도 더 한결같다.
109:3.2 (1197.4) 어떤 원시 세계에서 (1번 시리즈 집단), 조절자는 체험하는 훈련으로서, 주로 자아 교양(敎養)과 진취적 발전을 위하여 인간의 지성에 깃든다. 처녀 조절자는 원시인이 판결의 골짜기에[1] [83] 도착하는 초기 시절에 보통 그런 세계에 파송되지만, 그때 비교적 극소수가 태동하는 상급 수준의 영적 지위에 이르려고, 자아를 통달하고 인품을 얻는 산을 지나서 도덕적 높이까지 올라갈 것을 택한다. (그러나 조절자와 융합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이 영 융합 승천자로서 살아남기는 한다.) 조절자는 원시 지성과 일시적 관계를 가지면서 값진 훈련을 받고 놀라운 체험을 얻으며, 그들은 다른 세계에서 우수한 존재들의 이익을 위하여 이 체험을 나중에 이용할 수 있다.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도 결코 넓은 온 우주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109:3.3 (1197.5) 또 다른 세계에서는 (2번 시리즈 집단) 조절자를 다만 필사 존재에게 빌려 준다. 여기서 훈계자는 그렇게 깃드는 일을 통해서 결코 융합하는 인격을 얻을 수 없지만, 인간 주체에게 필사 일생 동안에 큰 도움을, 유란시아 필사자에게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이 준다. 조절자는 여기서 상급 영적 달성을 위한 모범으로서, 살아남을 인품을 완전하게 만드는 흥미 있는 과제에 일시 조수로서, 단일 생명 기간에 필사 인간에게 빌려 준다. 그 조절자는 자연사 뒤에 돌아오지 않는다. 살아남는 이 필사자는 영 융합을 통해서 영생을 얻는다.
109:3.4 (1197.6) 유란시아와 같은 세계에서는 (3번 시리즈 집단) 신의 선물과 정말 약혼, 생사(生死)를 정하는 약속이 있다. 네가 살아남으면, 영원한 결합, 영구한 융합, 사람과 조절자를 한 존재로 만드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109:3.5 (1197.7) 이 시리즈의 세계에서 세 골을 가진 필사자의 경우에, 조절자가 한 골 부류와 두 골 부류보다 현세의 인생 동안에 그 주체와 훨씬 많이 실제 접촉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죽은 뒤의 생애에서, 세 골 부류는 한 골 부류와 두 골 종족 ―유란시아 종족―들과 똑같이 진행한다.
109:3.6 (1198.1) 두 골 세계에서는, 수여되는 파라다이스 아들이 머무른 뒤에, 의심할 여지 없이 살아남을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처녀 조절자가 배치되는 일이 드물다. 그러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능력을 가진 총명한 남녀에게 깃드는 거의 모든 조절자는 상급이나 최상 부류에 속한다.
109:3.7 (1198.2) 유란시아에서 초기의 많은 진화 민족에는 세 집단의 존재들이 있었다. 너무 동물 같아서 조절자를 받을 능력이 도무지 모자라는 그러한 자들이 있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조절자를 받을 능력을 드러내고, 도덕적 책임을 질 나이가 되었을 때 즉시 조절자를 받아들인 자들이 있었다. 경계선의 자리를 차지하는 셋째 등급이 있었는데, 그들은 조절자를 받을 능력이 있었지만, 그 사람이 몸소 간청을 하고 나서야 훈계자가 그 지성에 깃들 수 있었다.
109:3.8 (1198.3) 그러나 부적당하고 열등한 조상의 자질을 통해서 권리를 상실함으로 실질적으로 살아남을 자격을 잃은 자의 경우에, 많은 처녀 조절자가 진화 지성과 접촉하면서 값진 예비 체험을 가졌고, 이처럼 어떤 다른 세계에서 더 높은 부류의 지성에게 나중에 배치 받기 위하여 더 나은 자격을 갖추었다.
109:4.1 (1198.4) 깃드는 조절자는 인간들 사이에 상급 형태의 지적 교통에 크게 도움을 준다. 동물은 동료의 느낌을 가지지만, 서로 개념을 교통하지 않는다. 감정을 표현할 수 있어도, 생각과 이상을 표현할 수 없다. 동물의 기원을 가진 사람들도 생각 조절자가 수여되기까지, 동료들과 높은 종류의 지적 대화나 영적 교통을 체험하지 못한다. 하지만 언어를 개발할 때 그러한 진화 인간은 조절자를 받기 위하여 순탄한 길을 밟고 있다.
109:4.2 (1198.5) 동물은 서툰 방법으로 서로 교통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원시 접촉에는 거의 또는 아무런 인격이 없다. 조절자는 인격이 아니다. 그들은 선(先)인격 존재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격의 근원으로부터 오며, 그들의 계심은 사람의 인격의 질적 표현을 확대한다. 조절자가 이전에 체험을 가졌으면, 특히 이것이 참말이다.
109:4.3 (1198.6) 조절자의 부류는 인격 표현의 잠재성과 크게 상관이 있다. 오랜 세월을 통해서 계속하여, 유란시아의 많은 위대한 지적 지도자와 영적 지도자는 주로 그들에게 깃든 조절자의 우수함과 이전에 얻은 체험 때문에 큰 영향을 미쳤다.
109:4.4 (1198.7) 깃드는 조절자들은 옛 시절 원시인의 후손을 변화시키고 사람답게 만드는 데 다른 영적 영향과 적지 않게 협동했다. 만일 유란시아 거주자의 지성에 깃드는 조절자들이 물러난다면, 세계는 원시 시절에 사람들이 보였던 많은 장면과 관습으로 천천히 되돌아갈 것이다. 신다운 훈계자는 진보하는 문명이 가진 하나의 참 가능성이다.
109:4.5 (1198.8) 나는 유란시아에서 어느 지성인에 깃드는 생각 조절자를 지켜보았는데, 유버르사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오르본톤에서 이전에 열 다섯 지성에 깃들었다. 우리는 이 훈계자가 다른 여러 초우주에서 비슷한 체험을 겪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다고 추측한다. 그는 놀라운 조절자요 이 현시대에 유란시아에서 가장 쓸모 있고 강력한 세력 중의 하나이다. 살아남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을 이 인간이 (그리고 너희 온 세계가) 이제 거둔다. 살아남을 자질이 없는 자는 그가 지금 가진 노련한 조절자조차도 빼앗길 터이고, 한편 살아남을 전망이 있는 자는, 게을러 포기한 자가 가졌던, 앞서 경험이 있는 조절자까지 받을 것이다.
109:4.6 (1199.1) 어떤 의미에서 조절자들은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의 영역에서 행성 사이의 교류를 어느 정도 촉진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 같은 행성에서 두 번 깃드는 체험이 주어지는 일은 드물다. 유란시아에서 지금 일하면서 이 세계에 전에 있었던 조절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가 유버르사의 기록 보관소에 그들의 번호와 기록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는 물정을 알고서 말한다.
109:5.1 (1199.2) 스스로 행동하는 최상 조절자들은, 해방되었어도 통제된 경로, 창조적 상상력의 경로에서 인간의 생각이 자유롭게 흐를 때, 영적 중요성이 있는 요인들을 그 머리에 흔히 기여할 수 있다. 그런 때, 그리고 때때로 잠자는 동안에, 조절자는 정신의 흐름을 붙잡아서 그 흐름을 멈추게 하고, 다음에 그 생각의 진행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다. 이 모두가 상의식(上意識)이 있는 높은 구석에서 깊은 영적 변화를 일으키기 위하여 행해진다. 이처럼 지성의 세력 및 에너지가 현재와 미래의 영적 수준에서 접촉하는 기본음에 더 충만하게 조절된다.
109:5.2 (1199.3) 지성에게 빛을 던져 주는 것, 즉 네 안에 항상 거하는 잠재 인격자의 지혜ㆍ진리ㆍ선함ㆍ아름다움을 네가 어느 정도 의식할 수 있도록, 네 안에서 줄곧 말하는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때때로 가능하다.
109:5.3 (1199.4) 그러나 미덥지 않고 빨리 바뀌는 너희의 정신 태도는 흔히 조절자의 계획을 망치고 그의 일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조절자의 일은 필사 종족의 타고난 성품에만 방해를 받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의 선입견, 굳어진 생각, 오래 지녀온 편견으로 인하여 크게 늦어진다. 이러한 장애 때문에, 오직 조절자의 미완성 작품이 의식 속으로 여러 번 떠오르며, 개념의 혼란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정신의 상황을 낱낱이 살펴볼 때, 생각과 체험 하나하나가 어떻게 될 뻔했는가를 통째로 무시하면서, 바로 그것이 실제로, 근본적으로 무엇인가를 재빨리 인식하는 것이 안전하다.
109:5.4 (1199.5) 인생의 큰 문제는 조상의 생활 성향을 신비의 훈계자의 신성한 계심이 시작한 영적 충동의 요구에 적응하는 것이다. 우주 및 초우주 생애에서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지만, 네가 유란시아에서 지금 사는 인생에는 누구나 할 수 없이 두 주인을 섬겨야 한다. 사람은 계속하여 현세에 절충하는 인간적 기술에 재빨라야 하며, 한편 오직 한 주인에게 영적 충성을 바쳐야 한다. 이것이 어째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넘어지고 실패하고 지치며, 진화의 투쟁에서 생기는 압박에 무릎을 꿇는가 하는 이유이다.
109:5.5 (1199.6) 큰 골 자질의 유전적 유산(遺産), 그리고 전기 화학적으로 전체를 통제하는 유산, 이 두 가지는 효과 있게 조절자의 활동 분야를 제한하도록 작용하지만, (정상의 지성에서는) 어떤 유전적 장애도 결코 궁극의 영적 성취를 막지 못한다. 유전은 인격자의 통달하는 속도에 간섭할지 모르지만, 하늘 가는 모험을 궁극에 성취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네가 조절자와 협조하겠다면, 그 신의 선물은 머지 않아 불사의 상물질 혼을 발달시키고, 그와 융합한 뒤에, 그 새 인간을 지역 우주의 군주인 주 아들에게, 그리고 궁극에는 파라다이스에 계신 조절자의 아버지에게 내보일 것이다.
109:6.1 (1200.1) 조절자들은 결코 그르치지 않는다.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어떤 것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의미를 발견하거나 평가하는 인격자가 살아남든 살아남지 못하든 상관 없이, 의지(意志)를 가진 모든 인간 속에 중요한 가치는 모조리 확실히 살아남는다. 그리고 이러하니, 필사 인간은 살아남기 싫다고 해도 좋다. 그래도 그 일생의 체험은 버려지지 않는다. 영원한 조절자는 그러한 실패한 듯한 인생의 가치 있는 모습을 어느 다른 세계로 가지고 가서, 거기서 살아남는 이 의미와 가치를 어떤 더 높은 부류의 필사 지성에게, 살아남을 능력이 있는 지성에게 준다. 가치 있는 체험은 하나도 결코 헛되이 일어나지 않는다. 참된 의미나 진정한 가치는 하나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109:6.2 (1200.2) 융합 후보자에 관계되다시피, 신비의 훈계자가 그 필사 동료에게 버림받고, 그 인간 파트너가 하늘 가는 생애를 추구하기 싫다고 하면, 자연사로 (또는 그 전에) 풀려났을 때, 조절자는 살아남지 못하는 그 사람의 머리 속에서 진화한,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것을 모조리 가지고 간다. 뒤잇는 인간 주체들이 살아남지 못해서 한 조절자가 융합 인격을 얻는 데 거듭 실패하고 이 훈계자가 나중에 인격을 갖춘다면, 이 모든 필사 지성에 깃들고 그 지성을 통달하면서 얻은 체험은 모두 그러한 새로 인격을 갖춘 조절자의 실제 소유물이 될 터이고, 이 재산을 모든 미래 시대를 통해서 즐기고 이용할 것이다. 인격을 갖춘 이 계급의 조절자는 모든 예전 주인들의 살아남는 특성을 모두 복합하여 조립한 것이다.
109:6.3 (1200.3) 오랜 우주 체험을 가진 조절자들이 수여 임무를 띤 신다운 아들에게 깃들려고 자원할 때, 그들은 이 근무를 통해서 인격 달성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영들의 아버지는 이 자원자들에게 흔히 인격을 내려주고, 그들 부류의 지휘자로 세운다. 그들은 신별에서 권한을 영예롭게 받은 인격자이다. 그리고 그들의 독특한 성품은 여러 번 필사자에게 깃든 체험을 모자이크로 인간성을 구현한 것이요, 또한 마지막으로 깃드는 체험을 얻으려고 수여되는 파라다이스 아들의 인간적 신성을 가리키는 영 성적표이다.
109:6.4 (1200.4) 너희 지역 우주에서 조절자들의 활동은 네바돈 미가엘의 인격화된 조절자의 지휘를 받는데, 바로 그 훈계자는 미가엘이 요수아 벤 요셉의 몸을 입고서 인생을 살았을 때, 한 걸음 한 걸음 그를 안내하였다. 이 특별한 조절자는 그에게 맡긴 책임에 충실하였고, 이 용감한 훈계자는 인간 성품을 지혜롭게 지휘하고, 아버지의 완전한 뜻을 행하는 길을 선택하는 데 그 파라다이스 아들의 필사 지성을 늘 안내하였다. 이 조절자는 이전에 아브라함 시절에 마키벤타 멜기세덱과 함께 봉사했고, 이렇게 깃들기 전에, 그리고 이 두 수여 체험 사이에, 엄청난 공훈을 세우는 일에 종사하였다.
109:6.5 (1200.5) 이 조절자는 예수의 인간 지성 속에서 정말로 승리하였다―이것은 인생에서 거듭하여 생기는 상황 하나하나에서,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말하면서, 아버지의 뜻에 거룩하게 헌신함을 유지한 그 지성이었다.
109:6.6 (1200.6) 바로 이 조절자는 그의 힘찬 인격의 헤아릴 수 없는 성품 속에서 세례 받기 전에 요수아 벤 요셉의 인간성을 이제 돌이켜본다. 그 인간성은, 필사의 체험에서 얻을 수 있는 영적 가치가 완전히 소모되기까지 살았던 그 평범한 인생의 비천한 환경으로부터, 모든 유란시아 사람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가 창조한 영원하고 생생한 가치의 성적표, 영원하고 살아 있는 성적표이다.
109:6.7 (1201.1) 한 조절자에게 맡겨진 것, 영구한 가치를 지닌 모든 것은 영원히 살아남는 것이 보장된다. 어떤 경우에는, 앞날에 깃드는 필사 지성에게 수여하려고 훈계자가 이 소유물을 보관한다. 다른 경우에는, 인격을 갖추고 나서, 살아남고 보존된 이 실체들은 총우주 건축가들에게 근무할 때 앞으로 이용하려고 보관된다.
109:7.1 (1201.2) 조절자가 아닌 아버지 분신들이 인격을 갖출 수 있는지 없는지 우리가 말할 수 없지만, 너희는 인격이 우주의 아버지가 군주의 자유 의지로 수여한 것이라고 들었다. 우리가 아는 한, 조절자 부류의 아버지 분신(分身)은 오로지 한 인격 존재에게 베푸는 봉사를 통해서 인격 속성을 획득해야 인격을 얻는다. 인격을 갖춘 이 조절자들은 신별을 집으로 삼고, 거기서 선(先)인격 동료들을 가르치고 지도한다.
109:7.2 (1201.3) 인격을 갖춘 생각 조절자는 방대한 온 우주에서, 매이지 않고, 배치되지 않고 통치하는, 안정시키고 보상하는 자이다. 그들은 창조자와 인간의 체험―실존적인 것과 체험적인 것―을 통합한다. 그들은 시간과 영원이 결합된 존재이다. 우주 행정에서 선(先)인격인 것과 인격인 것을 결합시킨다.
109:7.3 (1201.4) 인격을 갖춘 조절자는 총우주 건축가들의 집행자, 온통 지혜롭고 강력한 집행자이다. 그들은 우주의 아버지의 모든 분야의 봉사―성격, 선(先)인격, 초월 성격 봉사―를 친히 베푸는 대리자이다. 궁극위 하나님의 영토에서 초월적 초한 구체들의 모든 영역에 두루, 아니 절대자 하나님의 수준까지도, 비상한 것, 특별한 것, 기대치 않은 것을 몸소 베푸는 자이다.
109:7.4 (1201.5) 조절자는 자기의 존재 안에 모든 알려진 인격 관계를 받아들이는, 우주에서 독특한 존재이다. 그들은 총(總) 인격이다―인격 이전이고, 인격이며, 인격 이후의 존재이다. 그들은 영원한 과거, 영원한 현재, 영원한 미래에서 한 것 같이, 우주의 아버지의 성격을 보살핀다.
109:7.5 (1201.6) 아버지는 무한자와 절대자 서열에 있는 실존적 성격을 영원한 아들에게 수여했지만, 실존적인 선(先)인격 조절자에게 수여된, 인격화된 조절자 종류의 체험하는 인격을 자신이 봉사하기 위하여 남겨놓기로 하셨다. 이들은 이처럼 궁극위, 최상위ㆍ궁극위, 아니 궁극위ㆍ절대자 수준에 이르기까지, 그 초한(超限) 영역에서 초월적 봉사를 베푸는, 미래에 영원한 초월 성격이 되도록 정해졌다.
109:7.6 (1201.7) 인격이 된 조절자가 우주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눈에 뜨이는 일은 드물다. 때때로 그들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과 의논하며, 때때로 칠중의 창조 아들의 인격화된 조절자들이 보론다덱 통치자들과 협의하려고 별자리 본부 세계들로 온다.
109:7.7 (1201.8) 유란시아의 보론다덱 행성 관찰자―너희 세계의 긴급 섭정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는 관리 담당 최고자―가 주둔하는 총독이 계신 앞에서 그의 권한을 주장했을 때, 그는 자신이 선택한 완전한 참모진과 함께 유란시아의 비상(非常) 행정을 시작했다. 그는 즉시 모든 동료와 조수들에게 그들의 행성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그가 섭정을 맡은 순간 그의 앞에 나타났던, 인격화된 조절자 세 분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이렇게 나타나리라는 것도 몰랐는데, 이는 이전의 섭정 시절에 그들이 신다운 존재를 그렇게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섭정을 맡은 최고자는 인격을 갖춘 이 자원 조절자들을 위하여, 직책을 맡기거나 임무를 정해 주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 세 명의 총(總) 인격 존재는 그때 유란시아에서 근무하던 수많은 계급의 하늘 존재들 가운데, 가장 활동이 많은 축에 속했다.
109:7.8 (1202.1) 인격이 된 조절자들은 수많은 계급의 우주 성격자들을 위하여 광범위한 서비스를 수행하지만, 우리는 조절자가 깃든 진화 인간들과 함께 이러한 봉사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이 특별한 인간 신은 대우주 전체에서 가장 놀라운 성격자들에 속하며, 아무도 그들의 미래 임무가 무엇일까 주제넘게 예측하지 않는다.
110:0.1 (1203.1) 불완전한 존재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데는 피할 수 없는 비극이 따르며, 충실한 친구로서 이러한 고통을 보편적으로, 사랑으로 함께 하는 것이 그 완전한 조상 신의 성품이다.
110:0.2 (1203.2) 내가 한 우주의 사무를 아는 한도에서, 나는 생각 조절자의 사랑과 헌신이 모든 창조에서 참으로 가장 신다운 애정이라고 본다. 아들들이 여러 민족에게 베푸는 봉사에 나타나는 사랑은 훌륭하지만, 조절자가 개인에게 헌신하는 것은 감동을 주도록 숭고하고 신성하게 아버지답다. 파라다이스 아버지는 개별 인간과 몸소 접촉하는 이 형식을 혼자만의 창조자 특권으로 남겨두신 듯하다. 진화하는 행성의 자녀들에게 그렇게 황홀하게 깃드는, 이 비인격 개체들이 베푸는 놀라운 봉사와 엄밀하게 견줄 만한 것은 온 우주에서 아무것도 없다.
110:1.1 (1203.3) 조절자는 인간 존재의 물질적 두뇌 속에서 산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조절자는 그 영역에 사는 육체적 인간의 유기적 부분이 아니다. 생각 조절자는 단일 신체 기관의 경계 안에서 존재하기보다 사람의 필사 지성에 깃든다고 상상하는 것이 더 마땅한 듯하다. 간접으로, 눈치채지 못하게, 조절자는 항상, 특히 상의식(上意識) 속에서 경건하게 지성이 영과 숭고한 접촉을 가지는 동안에, 그 인간 주체와 교통하고 있다.
110:1.2 (1203.4) 나는 진화하는 필사자가 자기 안에 사는 조절자가 사심 없이 하는 훌륭한 일을 더 낫게 이해하고 그 진가(眞價)를 더 잘 깨닫도록 내가 도울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데, 그들은 사람의 영적 복지를 늘이는 과제에 무척 진심으로 충실하다. 이 훈계자는 인간 지성의 상급 단계에 효과적인 봉사자이다. 인간 지능의 영적 가능성을 지혜롭고 익숙하게 조종하는 자이다. 이 하늘 조수들은 행복이 있는 하늘 안식처로, 안으로, 위로 너희를 안전하게 안내하는 엄청난 과제에 헌신한다. 지칠 줄 모르고 수고하는 그들은 너희의 영원한 생명 속에서 신의 진리의 승리, 곧 앞날에 인격자가 되는 일에 거룩히 헌신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인간 지성을 악의 여울목으로부터 멀리 이끌고, 한편 사람의 진화하는 혼을 아득히 먼 영원의 바닷가에, 신의 완전한 항구를 향하여 솜씨 있게 안내하는 조심스러운 일꾼이다. 조절자는 자애로운 지도자요, 땅에서 너희의 짧은 생애에서 어둡고 분명치 않은 미로를 통하여 너희를 인도하는 안전하고 확실한 안내자이다. 그들은 점진적으로 완전하게 되는 길에서, 앞으로 자기의 주체를 항상 재촉하는 참을성 있는 선생이다. 그들은 사람의 인품의 숭고한 가치를 조심스럽게 보관하는 자이다. 너희가 조절자를 더욱 사랑하고, 함께 더욱 충만히 협조하고, 조절자를 사랑으로 더욱 소중히 여길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다.
110:1.3 (1204.1) 신다운 내재자는 결코 그치지 않는 존재의 다음 단계를 위하여 너희를 영적으로 준비시키는 데 주로 아랑곳하지만, 또한 현세에 너희의 복지와 땅에서 너희의 진정한 성취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그들은 너희의 건강, 행복, 참된 번영에 이바지하기를 기뻐한다. 영원히 진보하는 너희의 미래 생명에 불리하지 않은 문제, 행성에서 진보하는 모든 문제에서 너희의 성공에 무관심하지 않다.
110:1.4 (1204.2) 네가 나날이 하는 일과 네 일생의 다양한 세부가, 현세에 너의 중요한 선택과 생사를 좌우하는 영적 결정에 영향을 주고, 따라서 혼이 살아남고 영원히 진보하는 너의 문제를 푸는 데 요인이 되는 바로 그 한도까지, 조절자는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며 아랑곳한다. 순전한 현세의 복지에 관해서 수동적이지만, 조절자는 너의 영원한 앞날의 모든 일에 관하여 신답게 적극성을 띤다.
110:1.5 (1204.3) 어떤 재난이 있어도, 정신력을 완전히 망가뜨리지 않는 어떤 질병에 걸려도, 조절자는 너와 함께 남아 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이 놀라운 선물이 땅에서 거할 천막으로서 써야 되는 그 육체를, 알면서 더럽히거나, 달리 일부러 오염시키는 것은 얼마나 불친절한가. 물리적 독물은 모두, 물질 지성을 높이려는 조절자의 노력을 크게 늦추며, 한편 두려움ㆍ분노ㆍ시샘ㆍ질투ㆍ의심ㆍ불관용 같은 정신적 독물은 마찬가지로 진화하는 혼의 영적 진보를 엄청나게 방해한다.
110:1.6 (1204.4) 오늘 너는 네 조절자가 구애(求愛)하는 시기를 거치고 있다. 너의 지성과 혼의 영원한 결합을 찾는 신의 영이 너에게 맡긴 책임에 네가 충실한 것이 드러나기만 한다면, 상물질로 하나가 된 상태, 그 뛰어난 조화, 그 우주적 조정, 그 신성한 조율, 그 하늘같은 융합, 결코 그침 없는 신분의 혼합, 하나된 그 존재 상태가 궁극에 따를 것이다. 이것은 아주 완전하고 확정된 것이기 때문에 가장 노련한 성격자들조차 융합 파트너―필사 인간과 신다운 조절자―를 따로 된 신분으로 결코 분리하거나 인식할 수 없다.
110:2.1 (1204.5) 생각 조절자는 인간의 지성에 깃들 때, 자신이 그리고 신별에서 인격화된 조절자들이 결정하고 예정한 대로, 모형 생애, 곧 이상적 일생을 가지고 오며 이것은 유란시아의 인격화된 조절자의 인가를 받았다. 이처럼 그들은 인간 주체의 지적ㆍ영적 발전을 위하여 분명하고 미리 정해진 계획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지만, 어떤 인간에게도 이 계획을 받아들이는 의무는 지워지지 않는다. 너희는 모두 숙명을 가진 주체이지만, 신이 준 이 숙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미리 예정되지는 않았다. 너희는 생각 조절자가 짠 순서의 어느 부분이나 전부를 싫다고 할 완전한 자유가 있다. 너희가 기꺼이, 총명하게 허가하는 대로, 인격을 지휘하는 데 그들이 더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그러한 생각의 변화와 영적 조정을 일으키는 것이 그들이 할 일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도 이 신다운 훈계자들은 너희를 이용하거나, 아니면 너희가 선택하고 결정할 때 어떤 방법으로도 멋대로 너희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조절자는 너희 인격이 가진 주권을 존중한다. 조절자는 언제나 너희 뜻에 복종한다.
110:2.2 (1204.6) 일하는 방법을 보면 그들은 끈질기고 영리하고 완전하지만, 주인의 의지하는 자아를 다치지 않는다. 어떤 인간도 결코 제 뜻을 거슬러, 신다운 훈계자에게서 영적 감화를 받지 않는다. 살아남는 것은 신들의 선물이요, 이것은 시간 세계의 인간이 원해야 되는 것이다. 결국, 너를 위하여 조절자가 무슨 일에 성공하든지, 네가 협동하겠다고 찬성함으로 그 변화가 이루어졌음을 기록이 보여줄 것이다. 하늘 가는 생애에서 생기는 엄청난 변화의 발걸음 하나하나를 성취하는 데 너는 조절자와 기꺼이 파트너가 되었을 것이다.
110:2.3 (1205.1) 조절자는 너희의 생각 그 자체를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영적으로 변화시키려고, 영원하게 만들려고 한다. 천사도 조절자도 인간의 생각에 영향을 주는 데 직접 몰두하지 않는다. 사람의 생각은 너희가 독점하는, 인격자의 특권이다. 조절자는 너희의 생각하는 과정을 개선하고, 고치고, 조절하고, 조정하는 일에 헌신한다. 그러나 특히, 구체적으로 너희 생애의 영적 사본(寫本), 즉 살아남는 목적을 위하여 너희의 참된 승진하는 자아의 상물질 성적표를 좋게 만드는 일에 헌신한다.
110:2.4 (1205.2) 조절자는 인간 지성의 상급 수준의 분야에서 일하며, 필사자의 지능에서 생기는 모든 개념의 상물질 복사판을 만들려고 끊임 없이 애쓴다. 따라서 인간의 지성 회로에 부딪치고 그 안에 집중하는 두 가지 실체가 있다. 하나는 생명 운반자들의 최초 계획으로부터 진화한 필사의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신별의 높은 구체들에서 온 불사(不死)의 개체, 하나님으로부터 온 깃드는 선물이다. 그러나 필사의 자아는 또한 인격 자아이며, 인격을 가졌다.
110:2.5 (1205.3) 너는 인격이 있는 한 사람으로서 지성과 의지(意志)를 가졌다. 조절자는 하나의 선(先)인격 생물로서 선지성과 선(先)의지를 가졌다. 네가 눈을 마주하고 보듯 조절자의 지성에 네가 완전히 순응하면, 너희의 두 지성은 하나가 되고, 너는 조절자의 지성으로 보강된다. 나중에, 이 새 지성, 즉 통합된 지성이 내리는 결정을 너의 의지가 하라고 시키고 이를 집행하면, 그 조절자의 선(先)인격 의지는 너의 결정을 통해서 인격 표현을 달성한다. 그 특별한 계획이 관계되어 있는 한, 너와 그 조절자는 하나이다. 너의 지성은 신성과 발걸음을 맞추었고, 그 조절자의 뜻은 인격 표현을 달성하였다.
110:2.6 (1205.4) 이 신분이 실현되는 범위까지, 너는 상물질 서열의 존재에 정신적으로 가까이 가고 있다. 상물질 지성은 다양하게 물질 성품과 영적 성품을 가진, 협동하는 지성들의 내용과 총합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따라서 상물질 지능은 지역 우주에서 한 뜻에 지배되는, 이중 지성을 의미한다. 필사자의 경우에, 이것은 인간에 기원을 가진 의지요, 사람이 인간 지성을 하나님의 생각하심과 일체로 만듦으로 그 의지는 신답게 되고 있다.
110:3.1 (1205.5) 조절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신성하고 더할 나위 없는 경기(競技)를 벌이고 있다. 그들은 시공에서 최상의 모험 중 하나에 말려들었다. 그들의 더 큰 영원의 과제들을 계속 집행하는 동안, 일시적인 너희의 짧은 투쟁에서 너희가 협조하여 그들의 도움을 허락할 때 그들은 얼마나 행복한지! 그러나 보통, 조절자가 너와 교통하려 애쓸 때, 전하는 말씀이 인간 지성의 에너지가 흐르는, 물질의 흐름 속에서 묻혀버린다. 겨우 어쩌다가 너는 그 메아리를, 신의 목소리의 어렴풋하고 아득한 메아리를 듣는다.
110:3.2 (1205.6) 너의 조절자가 필사 인생을 통해서 너를 안내하고 네가 살아남게 만드는 사업에 성공하는 것은 네가 믿는 이론보다 너의 결정과 결심과 굳건한 믿음에 달려 있다. 인격의 성장에서 생기는 이 모든 움직임은 네가 조절자와 협조하는 것을 돕기 때문에, 너의 승진에 유익한 힘찬 영향력이 된다. 그들은 네가 저항을 그치도록 너를 돕는다. 필사자가 완전을 달성하려고 올라가는 길을 따라서 진보하라고 정해진 그 계획에 협조하는 데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한까지, 생각 조절자는 지상(地上)의 사업에 성공하거나 겉보기에 실패한다. 살아남는 비결은 하나님 같이 되려는 최상의 인간 소망에, 그리고 그와 관계되어, 압도하는 그 소망을 마침내 이루는 데 필수인 것은 무엇이나 기꺼이 행하고 무엇이든지 되려는 마음에 달려 있다.
110:3.3 (1206.1) 우리가 한 조절자가 성공하거나 실패한 것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인간이 살아남는가 살아남지 않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조절자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의 본질로부터 왔고, 반드시 각 사업에 승리하여 솟아난다.
110:3.4 (1206.2) 너희 가운데 숱한 사람이 생활의 하찮은 일에 그렇게 많은 시간과 생각을 쓰고, 한편 영원한 중요성을 가진 더 본질적 실체들을 거의 전적으로 못보고 지나치는 것을 나는 지켜볼 수밖에 없는데, 바로 이러한 성취는 너희와 조절자 사이에 더욱 조화되는 기초적 합의를 보는 데 관련된다. 인간의 존재에서 큰 목표는 깃드는 조절자의 신성과 발걸음을 맞추는 것이다. 필사 인생에서 큰 성취는 너의 지성 속에서 기다리며 일하는 신다운 영의 영원한 목표에 참되게, 이해심을 가지고 헌신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운명을 실현하려는, 헌신적이고 굳게 결의한 노력은 명랑하고 즐거운 생활, 그리고 땅에서 성공하고 영예로운 생애를 가지는 것과 전적으로 어울린다. 조절자와 협동하는 데는 자신을 괴롭히거나, 거짓 경건, 또는 위선이고 허식인 자기 비하(卑下)가 따르지 않는다. 이상적인 인생은 두려워 걱정하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봉사하는 인생이다.
110:3.5 (1206.3) 혼란에 빠지고 어리둥절하고 때때로 낙심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조차, 깃드는 조절자의 이끄심에 저항함을 반드시 뜻하지 않는다. 그러한 태도는 어떤 때 신다운 훈계자와 적극 협조하는 자세가 모자람을 뜻할지 모르며, 따라서 영적 진보를 얼마큼 늦출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지적 감정의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혼이 확실히 살아남는 것을 한 치라도 방해하지 않는다. 무지(無知)만으로 결코 살아남는 것을 막을 수 없고, 혼동으로 생기는 의심이나 두려움에 싸인 불안도 그럴 수 없다. 오로지 조절자의 이끄심을, 의식하여 저항하는 것이 진화하는 불사의 혼이 살아남는 것을 막을 수 있다.
110:3.6 (1206.4) 조절자와 협동하는 것을 특별히 의식하는 과정으로 여겨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의 동기와 결정, 너의 충실한 결의와 최상의 소망은 참되고 효과 있는 협동이 된다. 다음과 같이 너는 의식하면서 조절자와 더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
110:3.7 (1206.5) 1. 신의 이끄심에 반응하려는 선택. 진리ㆍ아름다움ㆍ선함을 가장 높이 의식하는 데 인생의 기초를 두고, 다음에 지혜ㆍ예배ㆍ믿음ㆍ사랑을 통해서 이 신성의 질을 조정하는 것.
110:3.8 (1206.6) 2.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것―신다운 아버지를 진심으로 인식하고, 하늘의 어버이를 사랑으로 예배하는 것.
110:3.9 (1206.7) 3. 사람을 사랑하고 성실하게 봉사하기를 바라는 것―동료 필사자 하나하나를 총명하고 지혜롭게 사랑함과 더불어, 사람이 형제임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것.
110:3.10 (1206.8) 4. 우주 시민 자격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최상 존재에 대하여 점진적으로 늘어나는 너의 의무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 진화 인간과 진화하는 신이 서로 의존함을 아는 것. 이것이 우주 도덕의 탄생이요, 보편적 의무를 깨닫는 첫걸음이다.
110:4.1 (1207.1) 조절자는 시공의 주요 회로를 타고 들어오는 계속된 우주 정보의 흐름을 받을 수 있다. 그들은 여러 우주의 영(靈) 정보 및 에너지와 완전히 접촉하고 있다. 그러나 공통된 성품이 모자라고 반응하는 인식이 결여되기 때문에, 이 막강한 내재자(內在者)는 이 풍부한 지혜와 진리를 필사 주체의 지성에게 그다지 많이 전해 줄 수 없다.
110:4.2 (1207.2) 생각 조절자는 너의 상물질 혼을 진화시키도록 너의 지성을 영적으로 변화시키려고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바로 너는 속에서 일어나는 이 봉사를 대체로 의식하지 못한다. 바로 너의 물질 지능의 산물, 그리고 네 혼이 조절자와 같이 활동함으로 생긴 산물을 구별할 능력이 너에게 아주 없다.
110:4.3 (1207.3) 생각ㆍ결론, 그리고 머리 속의 다른 그림들이 갑자기 제시되는 것 중에서 더러는 때때로 조절자가 직접이나 간접으로 일한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흔하게 이것들은 밑에 깔려 있는 정신 수준에서 함께 집합하고 있던 생각들, 즉 진화하는 동물 지성의 회로에 본래 있는 기능, 정상이고 보통인 정신 기능에서 자연스럽고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관념 의식 속으로 갑자기 솟아난 것이다. (이 하의식(下意識)에서 솟아나온 것과 대조해서, 조절자의 계시는 상의식(上意識) 분야를 통해서 나타난다.)
110:4.4 (1207.4) 잔잔한 의식 수준을 지나서 머리 속의 모든 문제를 조절자가 관리하도록 맡기라. 때가 되면, 이 세계가 아니라면 여러 저택 세계에서, 조절자는 맡은 직책에 관하여 세밀한 보고를 하겠고, 궁극에는 그가 보호하고 지키라고 맡긴 그 의미와 가치를 내놓을 것이다. 너희가 살아남는다면, 조절자는 그 필사 지성의 값진 보물을 모조리 부활시킬 것이다.
110:4.5 (1207.5) 인간다운 자와 신다운 자,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광대한 간격이 존재한다. 유란시아 민족들은 아주 대체로 전기로, 그리고 화학적으로 통제되고, 그들의 공통된 행동이 대단히 동물 같고 보통 반응이 너무 감정적이기 때문에, 훈계자들이 그들을 안내하고 지도하기가 극도로 어려워진다. 너희에게 용감한 결정과 헌신적 협조가 너무 모자라서, 너희에게 깃드는 조절자가 인간 지성과 직접 교통하기가 거의 불가능함을 발견한다. 진화하는 필사자의 혼에게 새 진리의 빛을 번쩍 비쳐 주는 것이 가능함을 발견할 때에도, 흔히 이 영적 계시는 그 사람을 너무 눈이 멀게 만들어서, 광신주의의 발작을 일으키거나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 어떤 다른 지적 소동을 일으킨다. 숱한 새 종교와 이상한 “주의(主義)”는 생각 조절자의 통신이 중단되고, 불완전하게 전해지고, 잘못 이해되고, 멋대로 왜곡되어 생겼다.
110:4.6 (1207.6) 몇천 년 동안, 각 세대에 스스로 행동하는 조절자와 함께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는 존재들이 차츰 줄어들었다는 것을 예루셈의 기록이 보여준다. 이것은 깜짝 놀라게 하는 그림이요, 사타니아의 감독 성격자들은 너희 행성의 어떤 직속 감독자들이 내민 여러 제안에 호의를 보이는데, 그들은 상급 영적 부류의 유란시아 민족들을 육성하고 보존하려고 고안된 조치를 개시하라고 주장한다.
110:5.1 (1207.7) 조절자의 사명과 영향을 보통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과 혼동하고 헛갈리지 말지니, 이것들은 직접 관련이 없다. 양심은 인간답고 순전히 정신적 반응이다. 양심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지만, 양심은 도저히 하나님이 혼에게 말씀하는 목소리는 아니다. 그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조절자의 소리가 하나님의 목소리일 것이다. 양심은 옳게 행동하라고 마땅히 너를 타이른다. 그러나 조절자는 그 위에, 무엇이 참으로 옳은지, 다시 말해서 훈계자의 이끄심을 네가 깨달을 수 있을 때, 깨달을 수 있는 대로, 너에게 일러 주려 애쓴다.
110:5.2 (1208.1) 사람의 꿈꾸는 경험, 조절되지 않은 잠자는 머리가 어지럽게, 조리 없이 행진하는 것은 조절자가 인간 지성의 서로 다른 요인들을 조화하고 연결하지 못했다는 적절한 증명이 된다. 조절자는 다만, 단일 생애 동안에 인간다운 것과 신다운 것처럼, 그렇게 다르고 다양한 두 종류의 생각을 멋대로 조화시키고 동시화할 수 없다. 조절자가 그런 일을 할 때, 그들이 가끔 하다시피, 그러한 사람들은 죽는 체험을 거칠 필요 없이 바로 저택 세계로 옮겨진다.
110:5.3 (1208.2) 충분히 의식이 깨어 있는 시간에 결정하고 선택한 대로, 조절자가 깃드는 인격자의 의지가 이전에 충분히 승인한 것,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 상지성(上知性)의 영역에 던져진 것만 잠자는 시기에 조절자가 성취하려 애쓰며, 상지성은 인간과 신이 서로 관계되어 연락하는 영토이다.
110:5.4 (1208.3) 필사 주인이 잠자는 동안, 조절자는 물질 지성의 상급 수준에서 지은 것을 의식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그리고 너희의 괴상한 꿈 중에 더러는 조절자가 효과 있게 접촉하지 못했음을 가리킨다. 꿈 속의 생활에서 불합리한 것들은 표현되지 않은 감정의 압박을 증거할 뿐 아니라, 또한 조절자가 제시한 영적 개념의 표현이 끔찍하게 일그러졌음을 증언한다. 바로 너의 정열ㆍ충동, 그리고 타고난 기타 성향은 자체를 그림으로 나타내고, 의식 없이 자는 동안에, 안에 깃드는 자가 정신의 기록으로 적어 놓으려고 애쓰는 신의 말씀을 자체의 표현되지 않은 욕망으로 갈아치운다.
110:5.5 (1208.4) 꿈 속에서 조절자가 무슨 내용을 전했는가 가정하는 것은 극도로 위험하다. 너희가 잠자는 동안에 조절자가 일하기는 하지만, 너희의 보통 꿈꾸는 체험은 순전히 생리 및 정신 현상이다. 마찬가지로, 조절자가 개념을 등록한 것과 필사자의 양심의 명령을 거의 연속되게 의식하여 받는 것, 이 둘을 구별하려고 애쓰는 것은 위험하다. 이것은 개인이 구별하고 개인적 결정으로 풀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사람은, 필사 지성의 반응을 신의 위엄을 가진 분야로 높이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보다, 조절자의 표현을 순전히 인간적 체험이라고 믿고서 이를 물리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생각 조절자의 영향은 전부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로 상의식 체험이라는 것을 기억하여라.
110:5.6 (1208.5) 너희가 정신의 여러 수준을 올라감에 따라서, 다른 정도로, 점점 더, 어떤 때는 직접, 그러나 더 흔히 간접으로, 너희는 조절자와 교통한다. 그러나 인간의 머리에서 생기는 새로운 개념마다 조절자의 명령이라는 생각을 품는 것은 위험하다. 너희 계급의 존재에게는 네가 조절자의 목소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실제는 너 자신의 지능에서 생겨나온 것일 경우가 더욱 흔하다. 이것은 위험한 분야이며, 사람마다 자신의 자연스러운 인간적 지혜와 초인간적 통찰력에 따라서 스스로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110:5.7 (1208.6) 이 통신을 하는 데 쓰인 인간의 조절자는 그렇게 광범위한 활동을 즐기는데, 이는 주로 그 조절자가 속에 계신 것이 바깥으로 어떻게 나타나더라도 이 인간이 거의 완전히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 전부에 대하여 그가 의식해서 아주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 정말로 다행이다. 그는 그가 사는 시대와 세대에서 상당히 경험 있는 조절자 중에 하나를 지니고 있는데, 그래도 이 다능한 조절자가 그의 지성 속에 있는 것과 관련된 현상에 대하여 그가 수동적으로 반응하고 이에 대하여 개의치 않는 것은 드물고도 다행한 반응이라고 그 운명 수호자가 선언했다. 이 모두가 여러 영향의 유리한 조정을 허락하며, 상급 활동 분야에서 조절자에게, 그리고 건강ㆍ효율ㆍ평안의 관점에서 볼 때 짝이 되는 그 사람에게 유리하다.
110:6.1 (1209.1) 물질 세계에서 인격이 실현한 것의 총합은 필사자가 도달이 가능한, 일곱 정신 수준을 연달아 정복하는 데 담겨 있다. 7급 수준에 들어가는 것은 참 인간 성격이 활동하기 시작했음을 표시한다. 1급 수준을 마치는 것은 필사 존재가 비교적 성숙했음을 의미한다. 우주에서 성장하는 일곱 수준을 거치는 것이 비록 조절자와 융합하는 것과 똑같지 않아도, 이 여러 수준을 통달하는 것은 조절자와 융합하는 예비 단계에 이르렀음을 표시한다.
110:6.2 (1209.2) 일곱 수준을 달성하는―필사자가 비교적 성숙해지는―과제에서 조절자는 너와 대등한 파트너이다. 조절자는 일곱째부터 첫째까지 너와 함께 여러 수준을 올라가지만, 필사자의 지성이 적극 협동하는 것과 아주 상관 없이, 최상 지위와 스스로 행동하는 지위까지 진보한다.
110:6.3 (1209.3) 정신의 여러 수준은 순전히 지적인 것은 아니고, 온전히 상물질인 것도 아니다. 이것들은 인격 지위, 지적 달성, 혼의 성장, 그리고 조절자와 발걸음을 맞추는 것과 상관이 있다. 이 여러 수준을 거치는 데 성공하는 것은 다만 인격의 어느 한 국면이 아니라, 전체 인격이 조화되어 활동하기를 요구한다. 여러 부분이 성장해도 전체의 참된 성숙과 같지는 않다. 자아 전체―전체 자아―물질적ㆍ지적ㆍ영적 자아가 확대되는 것에 비례해서 부분들은 정말로 자란다.
110:6.4 (1209.4) 지적 성품이 영적 성품보다 더 빨리 발달할 때, 그러한 상황은 생각 조절자와 교통하는 것을 어렵고도 위험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지나친 영적 성장은 신다운 내재자의 영적 인도에 대하여 광신적이고 비뚤어진 해석을 낳는 경향이 있다. 영적 능력의 부족은 그러한 물질적 지능에게, 더 높은 상의식(上意識)에 거하는 영적 진리를 전달하는 것을 무척 어렵게 만든다. 깨끗한 버릇, 안정된 신경 에너지, 균형된 화학 작용을 가진 몸 속에 자리잡은 지성, 완전히 차분한 지성에게―육체ㆍ정신ㆍ영의 힘, 세 가지가 하나처럼 조화되어 발달했을 때―현세에 그러한 존재의 진정한 복지를 최소로 위협하거나 위험을 무릅쓰면서 최대의 빛과 진리를 나누어 줄 수 있다. 그렇게 균형되어 성장함으로 사람은 행성에서 진보하는 수준을 일곱째부터 첫째까지, 하나하나 올라간다.
110:6.5 (1209.5) 조절자는 언제나 너희 가까이 있고 너희에게 속하지만, 하나의 다른 존재로서 너에게 직접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은 드물다. 한 수준 한 수준, 너의 지적 결정, 도덕적 선택, 영적 발전은 조절자가 너의 지성 속에서 활동하는 능력을 더해 준다. 한 수준 한 수준 그렇게 함으로 너는 조절자와 교제하고 지성을 조율하는 낮은 단계로부터 올라가며, 그래서 조절자는 하나님을 찾는 이 지성과 혼의 진화하는 의식 위에, 더욱 눈에 선하게, 확신을 가지고, 운명을 그림으로 만든 것을 점점 더 기록할 수 있게 된다.
110:6.6 (1210.1) 네가 내리는 결정 하나하나가 조절자의 활동을 막거나 아니면 수월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바로 이러한 여러 결정은 인간 성취의 여러 수준에서 네가 승진하는 것을 좌우한다. 일생 최대의 결정, 그 결정과 위기의 관계는, 각 수준을 마치는 데 미치는 영향력과 크게 상관이 있다. 그런데도 결정의 빈도, 빈번한 되풀이, 끈질긴 되풀이는 또한 그러한 반응을 확실한 버릇으로 만드는 데 필수이다.
110:6.7 (1210.2) 인간이 진보하는 일곱 수준을 엄밀하게 정의하기는 어려운데, 이는 이 여러 수준이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이 수준들은 각 개인에게 다를 수 있고 각 인간의 성장 능력에 따라서 결정되는 듯하다. 우주의 진화에서 이러한 수준을 통달하는 것은 세 가지 면에서 반영된다:
110:6.8 (1210.3) 1. 조절자와 발걸음 맞추기. 영의 영향을 받는 지성은 수준을 달성하는 데 비례하여 조절자의 계심에 가까이 간다.
110:6.9 (1210.4) 2. 혼의 진화. 상물질 혼이 태어나는 것은 수준 통달의 범위와 깊이를 가리킨다.
110:6.10 (1210.5) 3. 인격의 현실성. 자아의 현실성의 정도는 수준의 통달에 직접 좌우된다. 일곱째부터 첫째 수준의 필사 존재로 올라감에 따라서, 사람은 더욱 현실성을[1] [84] 가지게 된다.
110:6.11 (1210.6) 여러 수준을 거침에 따라서, 물질적 진화를 겪는 아이는 불사의 가능성을 가진 성숙한 인간으로 자란다. 7급 수준에 있는 자의 실체, 씨눈 성질의 그림자 같은 실체는 한 지역 우주 시민의 태어나는 상물질 성품이 더 맑게 나타날 때 물러난다.
110:6.12 (1210.7) 인간의 성장에서 일곱 수준, 곧 정신 수준을 엄밀하게 정의(定義)하기가 불가능하지만, 성숙이 일어나는 이 여러 단계의 최소 및 최대 한계를 넌지시 제시하는 것을 허락할 수 있다:
110:6.13 (1210.8) 7급 수준. 인간이 손수 선택하고, 개인적 결정을 내리고, 도덕적 책임을 지는 힘, 그리고 영적 개성을 얻는 능력을 개발할 때 이 수준에 들어간다. 이것은 지혜 영의 지휘를 받고서 일곱 보조 지성 영이 연합하여 활동하는 것, 성령의 영향 속에서 필사 인간의 회로가 연결되는 것, 그리고 유란시아에서 필사 지성 속에 생각 조절자를 받아들이는 것과 함께, 진리의 영이 처음으로 활동함을 가리킨다. 7급에 들어가는 것은 한 필사 인간을 지역 우주에서 참된 잠재 시민으로 만든다.
110:6.14 (1210.9) 3급 수준. 조절자의 일은 인간 승천자가 3급 수준에 이르고 개인 운명 수호 천사를 받은 뒤에 훨씬 더 효과 있게 된다. 조절자와 수호 천사 사이에 겉으로 아무런 합동 노력이 나타나지 않지만, 그런데도 개인의 천사 수행원이 배치된 뒤에 우주에서 성취하고 영적으로 발전하는 모든 국면에, 놓칠 수 없는 개선이 있음을 관찰할 것이다. 3급 수준에 이르렀을 때, 조절자는 남은 필사 인생 동안에 사람의 지성을 상물질화하고 나머지 수준들을 마치게 하려고, 그리고 자연사가 그 독특한 협동 관계를 분해하기 전에, 신과 사람의 관계에서 마지막 단계를 성취하려고 노력한다.
110:6.15 (1210.10) 1급 수준. 필사자가 점진적으로 성취하는 1급이자 마지막 수준에 너희가 이르기까지, 조절자는 보통 때에 너와 직접, 즉시 말할 수 없다. 이 수준은 물질 몸인 옷으로부터 진화하는 상물질 혼을 해방하기 전에, 인간의 체험에서 지성ㆍ조절자의 관계가 가능한 최선으로 실현되는 것을 나타낸다. 지성, 감정, 우주 통찰력에 관해서 말하면, 이 1급 정신(精神) 수준의 도달은 인간의 체험에서 물질 지성과 영 조절자가 가능한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다.
110:6.16 (1211.1) 아마도 필사자가 진보하는 이 여러 정신 수준을 우주 수준이라 부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진화하는 혼과 솟아나는 최상 존재의 초기 관계의 상물질 의식을 얻기까지 점진적으로 접근하는, 실제 의미를 파악하고 가치를 깨닫는 수준들이다. 바로 이 관계가 여러 우주 수준의 중요성을 물질 지성에게 충분히 설명하는 것을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러한 수준의 달성은 겨우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식하는 데 관계될 뿐이다. 7급이나 6급 수준에 있는 자는 2급이나 1급에 있는 자처럼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경지에 거의 이를 수 있다―아들임을 의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낮은 수준의 존재는 최상 존재와 가지는 체험적 관계를 훨씬 적게 의식한다. 이 여러 우주 수준의 달성은, 자연사하기 전에 그러한 성취에 실패하면, 여러 저택 세계에서 승천자가 얻는 체험의 일부가 될 것이다.
110:6.17 (1211.2) 믿음이 주는 자극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완전히 깨닫는 것을 체험하게 하지만, 행위, 즉 결심한 것을 마치는 일은 최상 존재가 우주에서 사실이 되는 것과 점진적 친척 관계에 있다는 의식을 진화로 얻는 데 필수이다. 믿음은 영적 세계에서 잠재성을 사실로 변화시키지만, 오로지 선택하는 체험을 얻음으로, 그리고 이를 통해서, 최상위의 유한한 영역에서 잠재성은 사실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선택은 인격자가 행위할 때 물질적 결정에 영적 믿음을 붙여 놓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갈급히 찾는 마음의 인간적ㆍ물질적 지레 장치가 더 효과 있게 작용하도록 신의 영적 받침대를 제공한다. 물질 세력과 영적 세력이 그렇게 지혜롭게 조정되는 것은 우주에서 최상위의 현실화, 그리고 파라다이스 신들에 대한 상물질적 이해를 크게 높인다.
110:6.18 (1211.3) 여러 우주 수준의 통달은 상물질 혼의 양적 성장, 최상의 목적을 이해하는 것과 관계된다. 그러나 이 불멸하는 혼의 질적 지위는 필사인이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 파라다이스 잠재성의 사실 가치를 믿는 생생한 믿음을 붙잡는 데 온전히 달려 있다. 따라서 7급 수준에 있는 자는 2급, 아니 1급 수준에 있는 자와 마찬가지로, 우주적 성장을 더욱 실현하기 위하여 저택 세계들로 간다.
110:6.19 (1211.4) 우주 수준의 통달과 실제로 얻는 영적 종교적 체험 사이에는 간접 관계가 있을 뿐이다. 그러한 달성은 서로 영향을 주며, 따라서 서로 이익이 된다. 순전한 영적 발달은 행성의 물질적 번영과 거의 아무 상관이 없을지 모르지만, 수준의 달성은 인간이 성공하고 필사자가 성취하는 가능성을 반드시 크게 만든다.
110:6.20 (1211.5) 7급부터 3급 수준까지, 상물질 수준의 체험에 더욱 진입하는 데 대비하여, 필사 지성이 물질 생명 작용의 현실에 의존하지 않게 만드는 과제를 수행하면서 일곱 보조 지성 영의 행동이 늘어나고 통일된다. 3급 수준부터 계속하여 보조자의 영향은 차츰 줄어든다.
110:6.21 (1211.6) 일곱 수준은 가장 높은,[2] [85] 순전한 동물 수준으로부터, 한 인격 체험으로서 자의식하여 실제로 접촉하는, 가장 낮은 상물질 수준까지 이르는 필사자의 체험을 포함한다. 1급 우주 수준의 통달은 필사자가 상물질 이전 상태로 성숙했음을 알리며, 인간 성격에서 지성의 행위에 미치는 순전한 영향으로서 보조 지성 영들의 합동 봉사가 끝났음을 표시한다. 1급 수준을 지나서, 지성은 상물질 진화 단계의 지능과 더욱 비슷하게 되며, 이것은 우주 지성, 그리고 한 지역 우주의 창조 영이 부여한 자질, 보조자를 초월하는 자질이 합동으로 베푸는 봉사이다.
110:6.22 (1212.1) 조절자의 개별 생애에서 중대한 날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인간 주체가 3급 정신 수준을 돌파하고, (그에게 깃든 자가 이미 스스로 활동하지 않으면) 따라서 훈계자가 스스로 행동하며, 활동 범위가 늘어나는 것을 보장할 때이다. 다음에 짝인 사람이 1급 정신 수준에 다다르고, 이렇게 함으로 그들이,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 서로 교통할 수 있게 될 때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들이 마침내, 영원히 융합할 때이다.
110:7.1 (1212.2) 일곱 우주 수준의 달성은 조절자와 융합하는 것과 같지는 않다. 유란시아에는 자기의 여러 수준을 마친 필사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 그러나 융합은 아직도 더 크고 더 숭고한 다른 영적 성취에, 필사자의 의지를 생각 조절자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뜻에 마지막으로 완벽하게 일치시키는 것을 마치는 데 달려 있다.
110:7.2 (1212.3) 한 인간이 여러 수준의 우주적 성취를 마쳤을 때,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필사 의지의 최종 선택이 진화된 육체 생명 동안에 조절자로 하여금 인간의 신분과 상물질 혼의 연합을 마치는 것을 허락할 때, 혼과 조절자의 그러한 완성된 연결은 저택 세계들까지 따로 계속 가며, 거기서 조절자와 상물질 혼을 즉시 융합하라고 지정하는 명령이 유버르사로부터 내린다. 이 융합이 육체 생명 동안에 생기면, 한 순간에 그 물질 몸을 태워버린다. 그러한 광경을 목격할 수도 있는 인간들은 오직 옮겨 가는 그 필사자가 “불 수레 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볼 것이다.
110:7.3 (1212.4) 자기의 주체인 사람을 유란시아로부터 옮겨 간 대부분의 조절자는 상당히 경험이 있고, 다른 구체들에서 수많은 필사자에게 이전에 깃든 자였다는 것이 기록에 남아 있다. 빌려 주는 서열의 행성에서, 조절자는 값진 깃드는 체험을 얻는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살아남지 못하는 필사 주체 안에서만 조절자가 상급 작업을 위하여 체험을 얻는 것은 아니다.
110:7.4 (1212.5) 필사자와 융합하고 나서 조절자는 너의 운명과 체험을 함께 한다. 조절자들은 너희이다. 불사의 상물질 혼, 그리고 관련된 조절자가 융합한 뒤에, 하나가 가졌던 체험과 가치가 모두 결국 다른 하나의 소유물이 되며, 그래서 이 둘은 실제로 한 개체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새로운 존재는 영원한 미래를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영원한 과거로부터 왔다. 살아남는 혼 속에서 한때 인간적이었던 모든 것, 그리고 조절자 속에서 체험으로 신다운 모든 것이, 이제 새롭고 늘 올라가는 우주 인격자의 실제 재산이 된다. 그러나 각 우주 수준에서, 조절자는 그 수준에서 중요하고 가치 있는 속성만 그 새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다. 신다운 훈계자와 절대로 하나인 상태, 한 조절자의 재산을 완전히 소모하는 일은, 영들의 아버지요 항상 이 신의 선물의 근원인 우주의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도달하고 나서 오로지 영원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110:7.5 (1212.6) 진화하는 혼과 신다운 조절자가 마침내, 영원히 융합할 때, 하나는 다른 하나가 가진 체험할 수 있는 품질을 모두 얻는다. 이 동격의 인격자는, 한때 그 조상인 필사 지성이 지녔고 다음에 상물질 혼 안에서 거하던 살아남는 체험적 기억을 모두 소유하며, 그에 덧붙여 이 장래의 최후자는 필사자에게 깃들었던, 만세(萬世)를 통해서 조절자가 체험으로 얻은 모든 기억을 품는다. 그러나 신다운 훈계자가 과거 영원으로부터 앞으로 가져온 의미와 가치를 한 조절자가 인격 협동 관계에 완전히 부여하는 데는 미래 영원이 필요할 것이다.
110:7.6 (1213.1) 대다수의 유란시아인 경우에, 조절자는 죽음으로 구원이 도착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너희의 물질 존재 서열에 본래부터 있는 에너지 형태와 화학적 힘이 거의 완전히 지배하는 상태로부터, 태어나는 혼이 해방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조절자와 접촉하는 데 너희가 겪는 주요한 어려움은 본래부터 가진 바로 이 물질적 성품에 있다. 극소수의 필사자가 정말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너희는 신다운 조절자와 유리하게 연락하는 점까지 너희의 지성을 영적으로 개발하고 훈련하지 않는다. 인간 지성의 귀에는 자비의 아버지로부터 진행하는, 우주의 방송, 사랑의 방송이 전하는 다채로운 말씀으로부터 조절자가 번역해 주는 영적 탄원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 조절자는 너희 육체적 성품에 본래 있는 화학 및 전기(電氣) 세력에 아주 완전히 지배된 동물 지성 속에,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이 영의 인도를 의식하게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함을 발견한다.
110:7.7 (1213.2) 조절자는 필사 지성과 접촉하기를 기뻐한다. 그러나 동물의 저항을 깨뜨리고 너희와 직접 교통할 수 없으면서 말없이 머무르는 오랜 세월을 통해서 그들은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봉사의 눈금에서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생각 조절자는 더욱 유능하게 된다. 그러나 여러 저택 세계에서 지성과 지성이 마주하고 네가 조절자를 알아볼 때 인사하는 것처럼 똑같이 충만한 애정, 동정적이며 깊은 애정으로, 결코 조절자는 네가 육체를 입은 동안에 너에게 인사할 수 없다.
110:7.8 (1213.3) 필사 인생 동안에 물질 몸과 지성은 너를 조절자로부터 떼어놓고 자유롭게 교통하는 것을 막는다. 죽은 뒤, 영원한 융합이 있은 뒤에, 너와 조절자는 하나이다―너희는 따로 된 존재로 구별할 수 없다―따라서 네가 이해하는 식으로 교통할 필요는 존재하지 않는다.
110:7.9 (1213.4) 조절자의 목소리는 늘 네 안에 있지만, 너희의 대부분은 일생 동안에 그 목소리를 듣는 일이 드물 것이다. 3급과 2급을 달성한 수준 밑에 있는 인간은, 최상의 소망을 가진 순간, 최상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린 결과로 생기는 경우를 제외하고, 조절자가 직접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 일이 드물다.
110:7.10 (1213.5) 운명 예비병의 필사 지성과 행성 감독자들 사이에 접촉을 시작하고 그치는 동안에, 깃드는 조절자가 좋은 위치에 있어서 필사자인 짝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이 어떤 때에는 가능하다. 얼마 전에, 유란시아에서, 스스로 행동하는 조절자가 그 인간 동료에게 그런 소식을 전했는데, 그는 운명 예비군의 한 사람이었다. 이 소식은 이 말씀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제, 내가 간절히 보살피는 주인을 다치거나 위태롭게 하지 않으면서, 지나치게 꾸짖거나 낙심케 만들려는 의도가 없이, 나를 위하여, 그에게 이렇게 부탁하는 말을 기록하여라.” 그리고 나서 아름답게 감동을 주며 호소하는 훈계가 뒤따랐다. 다른 것 중에도 그 조절자는 이렇게 간청했다: “그가 나에게 더욱 충실하게 성실히 협조하고, 내가 놓아두는 과제들을 더 즐겁게 견디며, 내가 마련한 순서를 더 충실하게 수행할 것, 내가 선택한 여러 시련을 더 참을성 있게 견디고, 내가 고른 길을 더 끈질기게, 더욱 즐거워하면서 밟으며, 내가 그침 없이 노력한 결과로서 생길지도 모르는 영예를 더 겸손하게 받을 것―내가 깃드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나의 훈계를 전하여라. 그에게 나는 신다운 영의 최고의 헌신과 사랑을 주노라. 나의 사랑하는 주체에게 또한 이를지니, 맨 끝까지, 땅에서 마지막 싸움이 끝날 때까지,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내가 활동하겠고, 나에게 인격을 맡긴 것에 내가 충실하리라고. 그리고 살아남으라고, 나를 실망시키지 말며, 내가 꾹 참고 격렬하게 투쟁하여 생길 보상을 나한테서 빼앗지 말라고 그에게 훈계하노라. 우리가 인격을 얻는 것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노라. 한 수준 한 수준, 나는 이 인간 지성의 높이까지 참을성 있게 올라왔고, 내 부류의 우두머리한테서 인정을 받고 있다는 증언을 받았노라. 한 수준 한 수준 나는 심판을 받기까지 전진하고 있고, 기쁘게, 불안해하지 않으면서 나는 운명의 점호를 기다리며, 나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법정에 모든 것을 제출할 준비가 되어 있노라.”
111:0.1 (1215.1) 신다운 조절자가 인간의 지성 속에 계신 것은 과학이나 철학이 인격자의 진화하는 혼을 흡족히 이해하는 것을 언제까지나 불가능하게 만든다. 상물질 혼은 우주의 산물이며, 오직 우주적 통찰력과 영적 발견을 통하여 정말로 혼을 이해할지 모른다.
111:0.2 (1215.2) 혼, 그리고 안에 깃드는 영이 있다는 개념은 유란시아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 개념은 행성에서 다양한 체계의 신앙에서 자주 나타났다. 어떤 서양 신앙 뿐 아니라 동양의 많은 신앙이 사람이 인간적 재산을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신성한 유산을 가졌음을 깨달았다. 신이 바깥에 두루 계실 뿐 아니라 마음 속에 계시다는 느낌은 오랫동안 많은 유란시아 종교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인간의 성품 안에서 무언가, 잠시 살다가 가는 현세의 인생을 지나서 견딜 운명을 가진, 대단히 중대한 무엇이 자라고 있다고 사람들은 오랫동안 믿어 왔다.
111:0.3 (1215.3) 신의 영이 사람의 진화하는 혼을 낳았다는 것을 사람이 깨닫기 전에, 혼은 몸의 다른 기관―눈ㆍ간ㆍ콩팥ㆍ심장, 그리고 나중에는 골―에 거한다고 생각되었다. 야만인은 혼을 피ㆍ숨ㆍ그림자, 그리고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연결시켰다.
111:0.4 (1215.4) 아트만[1] [86] 개념으로 힌두교 선생들은 조절자의 성품과 계심을 이해하는 데 정말로 접근했지만, 진화하고 불멸의 잠재성을 가진 혼이 함께 존재함을 구별하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인은 인간 존재의 두 가지 모습, 양(陽)과 음(陰), 혼과 영을 인식하였다. 에집트인과 여러 아프리카 부족도 두 가지 요소, 즉 카와 바를 믿었다. 혼은 선재(先在)하지 않고, 오로지 영이 그렇다고 보통 믿었다.
111:0.5 (1215.5) 나일 강 유역의 거주자들은 은총을 얻은 각 사람은, 태어날 때나 바로 그 뒤에, 보호하는 영을 수여받는다고 믿었고, 이것을 카라고 불렀다. 그들은 이 수호 영이 일생을 통해서 그 필사 주체와 함께 남아 있고, 그보다 먼저 미래 상태로 지나간다고 가르쳤다. 룩소에 있는 한 신전(神殿)의 벽에는 아멘호텝 3세의 출생이 그려져 있는데, 그 어린 왕자가 나일 강 신의 팔 위에 그려져 있고, 그 가까이 왕자와 모습이 똑같은 또 다른 아이가 있는데, 그것은 에집트인이 카라고 부른 그 개체의 상징이다. 이 조각은 기원전 15세기에 완성되었다.
111:0.6 (1215.6) 카는 관계된 필사자의 혼을 현세의 인생에서 더 나은 길로 안내하기를 바라지만, 특별히 다음 세상에서 그 인간 주체의 행운에 영향을 미치고 싶어 하는 우수한 천재 영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시기에는 한 에집트인이 죽었을 때 그의 카가 큰 강의 건너편에서 그를 기다릴 것이라 기대했다. 처음에는, 오직 왕들이 카를 가졌다고 생각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올바른 사람은 모두 카를 소유한다고 믿었다. 어느 에집트 통치자는 마음 속에 있는 카에 대하여 말했다: “나는 카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았다. 나는 카의 지침을 어기기를 두려워했다. 나는 카로 인하여 번영하였고, 카가 나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처럼 성공했다. 나는 그의 지침으로 탁월하게 되었다.” 카는 “모든 사람 속에 하나님이 내리신 신탁”이라고 많은 사람이 믿었다. 많은 사람이 “너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즐겁게 영원을 보내리라”고 믿었다.
111:0.7 (1216.1) 진화하는 유란시아 필사자의 민족들은 모두 혼 개념에 해당하는 낱말을 가졌다. 많은 원시 민족은 혼이 인간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내다본다고 믿었다. 따라서 악한 눈이 악의(惡意)를 가진 것에 겁을 먹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사람의 영은 주의 등불이라”고 오랫동안 믿었다. 릭 베다는 말한다, “나의 지성이 나의 마음에게 말하도다.”
111:1.1 (1216.2) 조절자가 하는 일은 비록 영적 성질을 가졌지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지적 기초 위에 할 일을 모두 해야 한다. 지성은 인간의 토양이요, 그로부터 영 훈계자는 그가 깃드는 인격자의 협조를 얻어서 상물질 혼을 진화시켜야 한다.
111:1.2 (1216.3) 온 우주의 몇 가지 지성 수준에는 우주의 통일성이 있다. 성운들이 우주 공간에 있는 우주 에너지에서 기원을 가지는 것과 비슷하게, 지적(知的) 자아들은 우주 지성에서 기원을 가진다. 지적 자아의 인간 수준에서 (따라서 인격 수준에서), 필사 지성의 찬성을 얻어서, 그러한 인간 자아 속에서 절대 가치를 가진 개체 점(點)의 창조적 계심과 함께 인격자가 받는 영적 재산 때문에, 영의 진화 잠재성이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영이 물질 지성을 지배하는 것은 두 가지 체험에 제약을 받는다. 이 지성이 일곱 보조 지성 영의 봉사를 통해서 진화했어야 하고, 물질 (인격) 자아는 상물질 자아, 즉 진화하고 불사의 가능성이 있는 혼을 창조하고 육성하는 데, 깃드는 조절자와 협동하기를 선택해야 한다.
111:1.3 (1216.4) 물질 지성은, 인격자가 살고 자의식하며, 결정을 내리고 하나님을 택하거나 버리며, 스스로를 영원하게 만들거나 죽이는 무대이다.
111:1.4 (1216.5) 물질적 진화는 너에게 살아 있는 기계, 너의 몸을 마련해 주었다. 아버지 스스로 우주에서 알려진 가장 순수한 영 실체, 너의 생각 조절자를 너에게 부여하셨다. 그러나 네 손 안에, 너 자신의 결정에 지배되는 지성이 수여되었으며, 지성으로 너는 살거나 죽는다. 이 지성 안에서, 너는 이 지성을 가지고 너를 조절자와 같아지게 만들 수 있는 도덕적 결정을 내리며, 조절자와 같아짐은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이다.
111:1.5 (1216.6) 필사자의 지성은 물질적 일생 동안에 쓰기 위하여 인간에게 빌려 준 일시적 지능 체계이며, 인간이 이 지성을 사용함에 따라서 그들은 영원히 존재할 가능성을 받아들이거나 물리친다. 너의 뜻에 지배되는 우주 실체 중에서 지성이 대체로 너의 총재산이며, 혼―상물질 자아―는 필사 자아가 현세에 내리는 결정이 거두는 수확을 충실하게 묘사할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밑으로 전기 화학 작용 위에 살포시 놓여 있고, 위로는 영ㆍ상물질 에너지 체계에 살며시 닿는다. 이 두 체계 중 어느 것도 인간은 그 필사 인생 동안에 결코 완전히 의식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은 자신이 의식하는 지성 속에서 일해야 한다. 지성이 무엇을 이해하는가 하는 것보다 지성이 무엇을 이해하기를 바라는가, 이것이 살아남는 것을 보장한다. 지성이 무엇과 비슷한가가 아니라 지성이 무엇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가, 이것이 영의 신분을 증명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보다 사람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이 우주에서 승천하는 결과를 낳는다. 네가 오늘 무슨 신분인가 하는 것은, 날마다, 영원 속에서, 네가 무슨 신분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보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111:1.6 (1217.1) 지성은 인간의 의지가 죽음의 불협화음을 치거나 아니면 바로 그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을 확인하고 그 결과로 사람을 영원히 살아남게 만드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솟아나게 할 수 있는, 우주의 악기(樂器)이다. 결국, 사람에게 수여된 조절자는 악에 물들 수 없고 죄를 지을 능력이 없지만, 비뚤어지고 자아를 추구하는 인간 의지의 죄 짓는 음모로 인하여 필사자의 지성은 실제로 비틀리고 왜곡될 수 있고, 악하고 더러워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아는 인간의 의지, 영의 빛을 받은 의지에 따라서, 이 지성은 고귀하고, 아름답고, 참되고 선하게―실제로 위대하게―될 수 있다.
111:1.7 (1217.2) 진화된 지성은 우주의 지적 성향의 두 극단―온전히 기계화된 것과 완전히 영답게 변한 것―위에 스스로 명시될 때에야 완전히 안정되고 믿을 만하다. 순수한 기계적 통제와 참된 영 성품, 이 두 가지 지적 극단(極端) 사이에, 거대한 집단의 진화하고 올라 가는 지성들이 개재하며, 이들의 안정성과 차분함은 인격자의 선택, 그리고 영의 신분에 달려 있다.
111:1.8 (1217.3) 그러나 사람은 수동적으로 노예처럼, 의지를 조절자에게 넘겨주지 않는다. 오히려 조절자의 이끄심이 자연스러운 필사 지성의 욕구 및 충동과 다른 것을 의식할 때, 그렇게 의식하면서, 활발하게 적극적으로, 고분고분하게 그의 이끄심을 따르기를 택한다. 조절자는 사람의 지성을 조종하지만, 결코 그의 뜻에 어긋나게 지성을 지배하지 않는다. 조절자에게 인간의 뜻은 가장 중요하다. 진화하는 인간 지능이 활동하는 거의 한없는 무대에서 생각을 조절하고 인품을 변화시키는 영적 목표를 이루려고 애쓰는 동안, 조절자는 인간의 의지를 그렇게 여기고 존중한다.
111:1.9 (1217.4) 지성은 너의 배요, 조절자는 너의 뱃길 안내자, 인간의 의지는 선장(船長)이다. 필사의 배의 주인은, 신다운 안내자가 하늘 가는 혼이 영원히 살아남게 하는 상물질 항구로 안내하는 것을 믿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오로지 이기심과 게으름과 죄 많음으로 사람의 의지는 그러한 충실한 안내자의 지도를 물리치고, 자비를 거절한 나쁜 모래사장 위에, 용납한 죄의 바위들 위에, 필사자의 생애를 궁극에 결딴낸다. 너의 승인을 받아서, 이 충실한 뱃길 안내자는 시간의 장벽과 공간의 장애물을 거쳐서, 신다운 지성의 바로 그 근원까지, 그리고 이를 지나서 계속, 아니 조절자들의 파라다이스 아버지에게 이르기까지, 너를 안전히 데리고 갈 것이다.
111:2.1 (1217.5) 우주 지능의 지적 기능 전역에 걸쳐서, 총 지성이 지적 활동의 여러 부분을 지배한다. 지성의 본질은 기능적 통일이다. 따라서 그릇되게 안내 받은 자아가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하고 선택함으로 저지되고 방해 받을 때에도, 지성은 어김없이 이 구조적 통일성을 보인다. 의지의 위엄과 승천 특권이 있는 자아들과 가지는 모든 수준의 관계에서, 이 통일된 지성은 영의 조정을 변함없이 찾는다.
111:2.2 (1217.6) 필사인의 물질 지성은 상물질 천을 담은 우주의 베틀이며, 깃드는 생각 조절자는 그 천 위에 지속하는 가치와 신성한 의미를 지닌 한 우주 인품―궁극의 운명과 끝없는 생애를 가진 살아남는 혼, 잠재 최후자―의 영 무늬를 짜 넣는다.
111:2.3 (1218.1) 사람의 인격은 물질 몸에 있는 생명으로 말미암아 기능적 관계에 같이 묶여 있는 지성 및 영과 동일시된다. 그러한 지성과 영이 작용하는 이 관계는 지성과 영, 이 둘의 품질이나 속성의 어떤 조합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히 지속할 잠재성이 있는, 전혀 새롭고 독창적이고 고유한 우주 가치, 즉 혼을 낳는다.
111:2.4 (1218.2) 그러한 불사의 혼을 진화로 창조하는 데는 둘이 아니라 세 가지 요인이 있다. 인간의 상물질 혼의 이 세 가지 선행 조건은 다음과 같다:
111:2.5 (1218.3) 1. 인간의 지성, 그리고 그에 선행하고 그 지성에 미치는 모든 우주 영향.
111:2.6 (1218.4) 2. 이 인간의 지성에 깃드는 신다운 영, 그리고 인생에서 관계된 모든 영적 영향 및 요인과 함께, 절대적 영 성질을 가진 그러한 분신 속에 본래부터 있는 모든 잠재성.
111:2.7 (1218.5) 3. 물질 지성과 신다운 영 사이의 관계, 이것은 그러한 관계에 기여하는 어느 쪽 요인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가치를 뜻하고 의미를 지닌다. 이 독특한 관계의 실체는 물질도 영도 아니며, 상물질이다. 그것은 혼이다.
111:2.8 (1218.6) 중도인(中道人)들은 사람이 진화시키는 이 혼을, 하급 또는 물질 지성, 그리고 상급 또는 우주 지성과 구별하여, 중간 지성이라고 이름 지은 지 오래다. 이 중간 지성은 정말로 상물질 현상이니, 그것이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상물질로 진화하는 잠재성은 지성의 두 가지 보편적 충동에 본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을 알고 창조자의 신성에 이르려는, 사람의 유한한 지성의 충동이요, 다른 하나는 사람을 알고 인간의 체험을 얻으려는 창조자의 무한한 지성의 충동이다.
111:2.9 (1218.7) 불사의 혼을 진화시키는 이 숭고한 거래가 가능하게 되는 것은 그 필사 지성이 첫째로 인격을 가졌고, 둘째로 동물을 초월하는 실체들과 접촉하기 때문이다. 그 지성은 우주에서 봉사하는 초물질 자질을 소유하며, 이것은 도덕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도덕적 성품이 생겨나는 것을 보장하고, 그렇게 함으로 관련된 영적 봉사, 그리고 깃드는 생각 조절자와 진정한 창조적 접촉을 가지게 한다.
111:2.10 (1218.8) 인간 지성이 접촉함으로 그렇게 영적으로 변화되는 불가피한 결과는 혼이 차츰 태어나는 것이다. 혼은 하나님을 몹시 알고 싶어 하는 인간 의지에 지배되는 보조 지성이 우주의 영적 세력과 함께 연락하여 일함으로 합동으로 지은 산물이며, 그 우주 세력은 만물을 지으신 바로 그 하나님의 실제 분신―신비의 훈계자―의 전반적 통제를 받는다. 이처럼 자아의 물질적 필사 실체는 육체적 생명 기계가 현세의 한계를 뛰어넘고, 자아를 지속하기 위하여 진화하는 수송 수단 속에서 새 표현과 새 신분을 얻으며, 그 수송 수단이 상물질인 불사의 혼이다.
111:3.1 (1218.9) 필사 지성의 실수와 인간의 잘못된 행동은 혼의 진화를 두드러지게 늦출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잘못은 인간 의지의 찬성을 얻어서 깃드는 조절자가 혼의 진화를 한 번 시작하면, 그러한 상물질 현상을 억제할 수 없다. 그러나 필사자가 죽기 전에 언제라도, 바로 이 물질적 인간 의지는 그러한 선택을 취소하고 살아남기를 거절할 힘이 있다. 살아남은 뒤에도 하늘 가는 그 필사자는 영생을 거부할 이 특권을 아직도 지닌다. 조절자와 융합하기 전에 어느 때라도, 진화하고 승천하는 인간은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기를 선택할 수 있다. 조절자와 융합하는 것은 하늘 가는 필사자가 영원히, 조건 없이, 아버지의 뜻 행하기를 택했다는 사실을 알린다.
111:3.2 (1219.1)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에, 진화하는 혼은 필사 지성이 내린 초물질적 결정을 강화할 수 있게 된다. 혼은 초물질이니까, 인간이 체험하는 물질 수준에서 저절로 작용하지 않는다. 영 밑에 있는 이 혼은 조절자와 같이, 신의 어떤 영이 함께 일하지 않고서는 상물질 수준보다 높이 활동할 수도 없다. 이 물질 지성이, 관계된 기능을 가진 그러한 상물질 혼에게 아낌없이, 기꺼이, 그러한 권한을 넘겨줄 때, 그리고 그렇게 하는 동안을 제외하고, 죽음이나 이동이[2] [87] 필사 지성과 물질적으로 연합된 상태로부터 혼을 분리할 때까지, 그 혼은 마지막 결정을 내리지도 않는다. 사는 동안에 필사자의 의지, 결정하고 선택하는 인격의 힘은 물질 지성 회로에 거한다. 땅에서 필사자의 성장이 진행됨에 따라서, 이 자아는 귀중한 선택하는 힘과 더불어, 태어나는 상물질 혼 개체와 점점 더 동일시된다. 죽고 나서, 저택 세계에서 부활한 다음에, 그 인격은 상물질 자아와 완전히 동일시된다. 이처럼 혼은 인격 신분을 가진, 앞날에 상물질 수송 수단이 되는 새싹이다.
111:3.3 (1219.2) 이 불사의 혼은 처음에 전적으로 상물질 성질이지만, 발달 능력을 소유하기 때문에, 신의 영들과 융합할 가치가 있는 참 영 수준까지 반드시 올라가며, 보통은 사람의 머리 속에서 그러한 창조 현상을 시작한 우주의 아버지의 바로 그 영과 융합한다.
111:3.4 (1219.3) 인간의 지성과 신다운 조절자, 이 둘은―조절자는 충분히, 지성은 어느 정도― 진화하는 혼의 풍채 및 차별되는 성질을 의식한다. 그 혼은 자체의 진화적 성장에 비례하여, 갈수록 더 지성과 조절자를 연합된 신분으로서 의식하게 된다. 혼은 인간 지성과 신다운 영, 이 둘의 품질을 함께 가지지만, 지성 기능의 육성을 통해서, 영의 통제와 신의 지배를 늘이는 방향으로 끈질기게 진화하며, 지성 기능이 의미하는 것들은 참된 영 가치와 일치하기를 추구한다.
111:3.5 (1219.4) 필사자의 생애, 즉 혼의 진화는 시험 기간이 아니라 교육이다. 최상의 가치가 살아남는 것을 믿는 것이 종교의 핵심이다. 진정한 종교적 체험은 최상의 가치를 가진 것과 우주적 의미가 있는 것들이 뭉쳐서 하나의 우주 실체로 실현되는 데 있다.
111:3.6 (1219.5) 지성은 양(量), 실체, 의미 있는 것들을 이해한다. 그러나 질―가치―는 느껴진다. 느끼는 그 주체는 사물을 아는 지성, 그리고 실체화시키는, 관계된 그 영이 공동으로 창조한 것이다.
111:3.7 (1219.6)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은 하나님을 의식(意識)하는 가치의 실현이며, 사람의 진화하는 상물질 혼이 진리ㆍ아름다움ㆍ선에 젖어 있는 한, 그 결과로 생긴 그러한 존재는 파괴될 수 없다. 사람의 진화하는 혼 속에 영원한 가치가 조금도 살아남지 않으면, 필사의 존재는 의미가 없고, 생명 그 자체가 비극의 망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까지나 참말이다: 시간 세계에서 너희가 시작하는 것을―마칠 가치가 있다면―너희는 영원 속에서 확실히 마칠 것이다.
111:4.1 (1219.7) 인식하는 것은 바깥 세계로부터 받은 감각 인상을 개인의 기억 형태 속으로 맞춰 넣는 지적 과정이다. 이해하는 것은 이 인식된 감각의 인상(印象)과 그에 관계된 기억 형태가 동태적 원칙들의 망으로 통합되거나 조직되었음을 뜻한다.
111:4.2 (1220.1) 의미는 인식과 이해의 조합에서 파생된다. 의미는 완전한 감각 세계나 물질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의미와 가치는 오직 인간 체험의 정신, 즉 초물질 분야에서 파악된다.
111:4.3 (1220.2) 참된 문명의 진보는 모두, 인류의 이 정신 세계에서 태어난다. 참으로 창조적인 것은 오직 정신적 생활이다. 어느 세대라도 젊은이의 대다수가 흥미와 에너지를 감각 세계, 곧 바깥 세계의 추구, 물질만 중시하는 추구에 쏟을 때 문명은 도저히 진보할 수 없다.
111:4.4 (1220.3) 정신 세계와 바깥 세계는 다른 집합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젊은이의 4분의 3이 물질만 중시하는 직업에 들어가서 바깥 세계의 감각 활동을 추구하는 데 전념할 때 어떤 문명이라도 위태롭다. 젊은이가 소홀히 하여 윤리ㆍ사회학ㆍ우생학ㆍ철학ㆍ예술ㆍ종교ㆍ우주론에 흥미를 갖지 않을 때, 문명은 위험에 빠져 있다.
111:4.5 (1220.4) 오로지 인간이 체험하는 영(靈) 영역에 상의식 지성이 부딪침에 따라서 상의식 지성의 상급 수준에서, 더 낫고 더 오래 가는 문명을 세우는 데 이바지할 효과적 기본 모형들과 관련하여 너희는 상급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인격은 본래부터 창조성이 있지만, 이처럼 개인의 정신 생활에서만 활동한다.
111:4.6 (1220.5) 눈의 결정(結晶)은 반드시 육각형의 형태이지만, 결코 어느 두 결정도 같지 않다. 아이들은 종류를 따르지만, 어느 두 아이도, 아니 쌍둥이의 경우에도, 결코 똑같지 않다. 인격은 종류를 따라가지만 반드시 독특하다.
111:4.7 (1220.6) 행복과 기쁨은 정신 생활에서 기원을 가진다. 너는 진짜 기쁨을 아주 혼자서는 맛볼 수 없다. 혼자 사는 생활은 행복에 치명적이다. 가족과 나라조차도, 남과 나누면, 생활을 더욱 즐길 것이다.
111:4.8 (1220.7) 너희는 바깥 세계―환경―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너의 지시에 가장 많이 지배되는 것은 정신 세계의 창조성이니, 거기서 너의 인격은 선행(先行)하는 원인 법칙의 사슬로부터 대체로 해방되기 때문이다. 인격에는 의지의 제한된 주권이 관련되어 있다.
111:4.9 (1220.8) 사람의 이 정신 생활이 참으로 창조성이 있으니까, 이 창조성이 자발적이고 온통 함부로 일어날 것인가, 아니면 통제되고, 지휘되고, 긍정적일 것인가를 선택하는 책임이 각 사람에게 지워진다. 창조적 상상력이 활동하는 그 무대가 이미 편견ㆍ미움ㆍ두려움ㆍ분개심ㆍ앙갚음ㆍ편협으로 차 있을 때, 어떻게 그 상상력이 훌륭한 열매를 맺을 것인가?
111:4.10 (1220.9) 생각은 바깥 세계의 자극에서 기원을 가질지 모르지만, 이상은 오직 사람의 정신 세계의 창조 영역에서 태어난다. 오늘날 좋은 생각이 넘쳐흐르는 사람들이 세계의 여러 나라를 지도하지만, 그들의 이상은 빈곤하다. 이것이 어째서 빈곤ㆍ이혼ㆍ전쟁, 그리고 민족 사이의 반목이 일어나는가 설명한다.
111:4.11 (1220.10) 이것이 문제이다: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이 속 사람의 창조하는 힘을 받으면, 자유 의지 창조성은 자유 의지로 파괴하는 잠재성을 포함한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창조성이 파괴성으로 바뀔 때, 너희는 죄와 악의 황폐한 결과―억압ㆍ전쟁ㆍ파괴―와 얼굴을 마주한다. 악은 창조성이 치우친 것이요, 그것은 붕괴와 궁극의 파괴로 향한다. 모든 대립은 정신 생활의 창조 기능을 억제하므로 악하다―대립은 인격 안에서 내란을 일으키는 종자(種子)이다.
111:4.12 (1221.1) 정신적 창조성은 인격을 통합하고 자아를 통일함으로 인품을 고귀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한다. 이것이 언제까지나 참말이다: 지난날은 바꿀 수 없고, 오로지 속 자아의 현재 창조성이 수고함으로 앞날을 바꿀 수 있다.
111:5.1 (1221.2)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더도 덜도 아니고, 하나님―정신적 의미와 가치가 있는 그러한 인생을 가능하게 만든 바로 그 하나님―과 정신 생활을 사람이 기꺼이 나누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나누는 것은 하나님 같다―신답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영원한 아들과 무한한 영과 나누어 가지며, 한편 그들은 다시 여러 우주의 신다운 아들과 영 딸들과 함께 모든 것을 나누어 가진다.
111:5.2 (1221.3) 하나님을 본받는 것은 완전에 이르는 열쇠이다. 그의 뜻을 행하는 것은 살아남는 비결이요, 살아남아서 완전에 이르는 비결이다.
111:5.3 (1221.4) 필사자는 하나님 안에서 살며, 그래서 하나님은 필사자 속에서 살기를 뜻하셨다.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 같이, 그도―그리고 먼저―그렇게 자신의 일부를 사람과 같이 있으라고 맡겼다. 그는 인간의 의지에 복종하여 사람 안에 살고, 사람에게 깃들기로 찬성하였다.
111:5.4 (1221.5) 사람의 인격이 인간의 의지를 아버지의 뜻에 굴복하겠다고 찬성할 때―선택할 때―이 인생에서 평화를 얻고, 죽고 나서 살아남으며, 다음 인생에서 완전하게 되고, 영원까지 봉사하는 것―이 모두가 이제 (정신적으로) 이루어진다. 아버지는 자신의 한 조각을 사람의 인격 의지에 복종하게 만들기를 선택하셨다.
111:5.5 (1221.6) 그러한 인간의 선택은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의지를 거룩하게 바침이요, 의지의 확대, 의지를 영화롭게 함이요, 의지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선택은 사람의 의지를 현세의 중요성을 가진 수준에서 더 높은 지위로 들어올리며, 거기서 인간 아들의 인격은 영 아버지의 성격과 친교한다.
111:5.6 (1221.7) 인간 아들이 파라다이스에 하나님이 사실로 계신 앞에 실제로 서기 전에 한 시대가 지나가야 하더라도, 아버지의 뜻을 이처럼 택하는 것은 필사 인간이 영 아버지를 영적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이 선택은 사람의 의지를 부인하는 데―“내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에 있기보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나의 뜻이나이다”하고 사람이 분명히 확인하는 데 있다. 이렇게 선택하면, 머지 않아 하나님을 택하는 아들은 깃드는 하나님의 분신과 마음 속에서 뭉친(융합한) 것을 발견할 터이고, 한편 완전하게 되는 바로 이 아들은 사람의 인격이 조물주의 성격과 경건한 친교를 가지면서 지극한 인격의 만족을 발견할 것이다. 이 두 성격의 창조 속성은 스스로 의지(意志)한 공통된 표현에서 영원히 합쳐졌다―사람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 사이에 또 하나의 영원한 협동 관계가 태어난 것이다.
111:6.1 (1221.8) 필사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겪는 많은 문제는 우주에 대하여 그가 두 가지 관계를 가진 데서 생겨난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다―자연 속에서 존재하는데―그래도 자연을 초월할 수 있다. 사람은 유한하지만 그에게 무한의 불꽃이 깃들고 있다. 그러한 이중 상황은 잘못이 일어날 잠재성을 마련할 뿐 아니라, 또한 작은 걱정이 아니라 많은 불확실성을 안고 있는 숱한 사회적ㆍ도덕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111:6.2 (1222.1) 천성을 이기고 사람의 자아를 초월하는 데 요구되는 용기는 자만의 유혹에 굴복할지도 모르는 용기이다. 자아를 초월할 수 있는 필사자는 자신의 자의식을 신격화하는 유혹에 무릎을 꿇을지도 모른다. 필사자가 당면하는 궁지는 사람이 자연에 묶여 있고, 한편 동시에 독특한 자유―영적 선택을 내리고 행동하는 자유―를 가졌다는 두 가지 사실에 있다. 물질 수준에서 사람은 자기가 자연에 종속되며, 한편 영적 수준에서 그는 자연을, 그리고 현세의 유한한 모든 것을 이기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한 역설(逆說)은 유혹, 잘못의 가능성, 잘못된 결정과 떼어낼 수 없으며, 자아가 뻐기고 거만하게 될 때, 죄가 생겨날지 모른다.
111:6.3 (1222.2) 죄의 문제는 유한한 세계에서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유한의 사실은 악하지도 않고 죄가 되지도 않는다. 유한한 세계는 한 무한한 창조자에게 지음을 받았고―그의 신다운 아들들의 작품이며―따라서 좋음이 틀림없다. 유한한 것을 악용하고, 왜곡하고, 곡해하는 것이 죄와 악을 낳는다.
111:6.4 (1222.3) 영은 지성을 지배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지성은 에너지를 통제한다. 그러나 물리적 영토에서 지성은 원인과 결과의 수학(數學) 수준에 본래 있는 변화 가능성을 지성 자체가 머리를 써서 조종해야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다. 사람의 지성은 본래부터 에너지를 통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의 특권이다. 그러나 사람의 지성은 물리적 우주의 에너지 비결을 통달한 주인이 된 바로 그 한도 안에서,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한다.
111:6.5 (1222.4) 사람이 물리적 실체를 뜯어고치고 싶을 때, 그것이 자신이든 환경이든, 물질을 통제하고 에너지를 지휘하는 수단과 방법을 발견한 그 범위까지 사람은 성공한다. 도움을 받지 않은 지성은 불가피하게 연결된 자신의 신체 작용을 제외하고, 물질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미칠 힘이 없다. 그러나 육체 작용을 총명하게 사용함으로 지성은 다른 기계 작용, 아니 에너지 관계와 살아 있는 관계까지도 창조할 수 있고, 이것들을 이용해서 이 지성은 우주에서 그 물리적 수준을 더욱 통제하고, 아니 지배할 수도 있다.
111:6.6 (1222.5) 과학은 사실의 근원이요, 지성은 사실을 모르고 작용할 수 없다. 사실은 지혜를 만드는 데 쓰이는 건축 자재이며, 이것은 생활 체험으로 인하여 함께 단단히 붙는다. 사람은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고, 사람은 사랑이 없어도 하나님의 법칙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신의 법칙과 신의 사랑을 발견하고 자신의 진화하는 우주 철학 안에서 이것들을 체험으로 조화하기까지, 사람은 결코 첫째 근원 중심의 성품, 만물을 둘러싸는 그 성품의 무한한 균형미, 숭고한 조화, 지극한 충만함을 이해할 엄두도 낼 수 없다.
111:6.7 (1222.6) 물질적 지식이 늘어나는 것은 생각의 의미와 이상의 가치를 더욱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인간은 정신적 체험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지만, 그가 손수 발견한 진리를 일상 생활에서 생기는 무자비한 실용적 요구에 적용하기 위해서, 사실을 훤하게 알 필요가 있다.
111:6.8 (1222.7) 자신이 헤어날 수 없이 자연에 묶여 있고, 한편 현세의 유한한 모든 것을 완전히 뛰어넘는 영적 힘을 지닌 것을 보면서, 필사 인간이 불안한 느낌에 시달리는 것은 자연스러울 뿐이다. 그러한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 한가운데서, 오직 종교적 자신감―팔팔한 믿음―이 사람을 지탱해 줄 수 있다.
111:6.9 (1223.1) 사람의 필사 성품에 성가시게 붙어 다니고 그의 영적 인품을 위태롭게 하는 모든 위험 중에서 자만심이 가장 위험하다. 용기가 있으면 용감하지만 자기 본위는 허영심이요 자살에 이른다. 적당한 자신감을 슬퍼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스스로를 초월하는 능력은 사람과 동물 왕국을 구별하는 한 가지이다.
111:6.10 (1223.2) 한 개인에게서 발견되든 집단이나 민족이나 국가에서 발견되든, 자만은 사람을 속이고 취하게 하고 죄를 낳는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자만은 몰락을 앞질러 간다.”
111:7.1 (1223.3) 안전에 대한 불확실성―시간 세계와 머리 속에서 불확실성,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면서 펼쳐지는 길에서 무슨 사건들이 생길 것인가에 관한 불확실성―은 파라다이스로 가는 모험의 본질이며, 영적 안전, 그리고 영원한 안전, 우주의 아버지의 신다운 동정심과 무한한 사랑을 아들인 사람이 무조건 신뢰함으로 얻는 안전을 말한다. 우주에서 경험 없는 시민으로서 겪는 불확실성과 전능하고 온통 지혜롭고 만물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여러 우주 저택에서, 하늘 가는 아들로서 얻는 안전을 말한다.
111:7.2 (1223.4) 조절자가 충실하게 네 혼을 부르는 소리가 멀리서 울리는 것을 주의하라고 너에게 훈계해도 좋은가? 깃드는 조절자는 시간 세계에서 네 생애의 투쟁을 중지하거나, 아니 물질적으로 변경할 수도 없다. 이 고난의 세상을 통해서 네가 나그네 길을 가는 동안, 조절자는 인생의 어려움을 덜어줄 수 없다. 신다운 내재자는 너희 행성에서 사는 대로 네가 인생의 투쟁을 벌이는 동안, 오직 참을성 있게 견딜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네가 하려고만 한다면―네가 일하고 걱정하는 동안, 싸우고 수고하는 동안―용감한 조절자가 너와 함께, 너를 위해서, 싸우도록 허락할 수 있다. 너의 현재 물질 세계의 평범한 문제들과 어렵고 벅찬 이 모든 씨름을 하는 참된 동기, 마지막 목표, 영원한 목적을 나타내는 그림을 조절자가 항상 떠올리게 버려두기만 한다면, 너는 무척 위로와 영감을 받고, 아주 황홀해지고 흥미가 생길 수 있다.
111:7.3 (1223.5) 조절자는 이 모든 힘드는 물질적 수고에 필적하여 기울이는 영적 노력을 너에게 보여주는 과제를 수행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조절자를 돕지 않는가? 인간으로 존재하면서 이 세상의 어려움과 씨름하는 동안, 너는 어찌하여 조절자가 우주의 힘을 가진 영적 진리로 너를 강화하도록 허락하지 않는가? 네가 어쩔 줄 몰라서 지나가는 시절의 문제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 어째서 우주 생활의 영원한 전망을 뚜렷이 그린 환상으로 하늘 조수가 너를 응원하도록 격려하지 않는가? 네가 시간 세계의 장애물 한가운데서 수고하고 너의 필사 인생의 나그네 길에 성가신 불확실한 미로에서 갈팡질팡하는 동안, 어째서 너는 우주 관점으로 깨우침과 영감을 받으려 하지 않는가? 비록 너의 발이 땅에서 수고하는, 물질의 길을 밟아야 하더라도, 어째서 너는 조절자가 네 생각에 영적 변화를 일으키도록 허락하지 않는가?
111:7.4 (1223.6) 유란시아의 상급 인종들은 복잡하게 섞였다. 그들은 다른 기원을 가진 여러 종족과 핏줄의 혼합이다. 이 복합 성품은 일생에 조절자가 효과 있게 일하는 것을 극히 어렵게 만들며, 죽은 뒤에 조절자와 수호 세라핌이 닥치는 문제를 분명히 불린다. 내가 구원자별로 갔다가, 한 운명 보호자가 그 필사 주체에게 수고하는 어려움을 참작하는 공식(公式) 진술문을 발표한 것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는다. 이 세라핌은 이렇게 말했다:
111:7.5 (1223.7) “내가 겪는 문제의 상당 부분은 나의 주체의 두 성품 사이에 그치지 않는 싸움 때문이었다. 큰 포부를 가진 욕구가 동물 같은 게으름에 부딪치고, 우수한 민족의 이상이 열등한 종족의 본능과 섞이며, 위대한 지성의 높은 목적이 물려받은 원시적 유산(遺産)의 충동으로 반대에 부딪친다. 멀리 내다보는 훈계자의 장거리 관점이 시간 세계의 인간적 근시안으로 무효가 되고, 하늘 가는 존재의 진취적 계획이 물질적 성질의 욕구와 갈망으로 인하여 수정되며, 우주 지능이 번쩍 떠올린 것은 진화하는 종족의 화학 에너지 명령으로 취소된다. 천사들의 권고가 동물의 감정으로 인하여 반대에 부딪치고, 지능이 받은 훈련이 본능의 성향 때문에 물거품이 되며, 개인의 체험은 종족의 쌓인 성향으로 반대에 부딪친다. 최선의 목적이 최악의 흐름에 빛을 잃고, 천재의 날아오르는 힘이 평범의 인력(引力) 때문에 가라앉으며, 착한 것의 진보는 나쁜 것의 타성에 젖어 늦어진다. 아름다운 자의 예술은 악의 존재로 인하여 더러워지고, 건강한 부력(浮力)은 질병의 무력함에 중화되며, 믿음의 샘물은 두려움의 독에 오염된다. 기쁨의 샘물이 슬픔의 강물로 말미암아 쓰디쓰게 되고, 기대하는 즐거움이 쓰라린 현실로 인하여 사라지며, 삶의 기쁨이 죽음의 슬픔에 늘 위협을 받는다. 그러한 행성에 그러한 인생이라니! 그래도 생각 조절자가 늘 도움을 주고 재촉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상당한 정도의 행복과 성공을 얻었고, 바로 지금 저택 나라의 심판실까지 올라갔다.”
112:0.1 (1225.1) 진화하는 행성들은 인간이 기원을 가지는 구체요, 하늘 가는 필사자의 생애가 시작되는 세계이다. 유란시아가 너의 출발점이고, 여기서 너와 너의 신다운 조절자는 일시 결합하여 붙어 있다. 너는 완전한 안내자를 부여받았다. 따라서 네가 성실하게 시간 세계의 달리기를 하여 믿음의 마지막 목표를 얻고자 하면, 오랜 세월에 걸쳐 얻으려던 보상이 네 것이 될 것이다. 너에게 깃드는 조절자와 너는 영원히 뭉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너의 진짜 생명, 하늘 가는 생명이 시작될 터이고, 너의 현재 필사 상태는 거기에 이르는 현관일 뿐이다. 그때 네 앞에 펼쳐진 영원 속에서 최후자로서 너의 높은 진취적 사명이 시작될 것이다. 진화로 성장하는 이 모든 연속된 세월과 단계에 걸쳐서, 절대로 변하지 않은 채로 남는 너의 일부가 있으니, 그것이 인격이다―변화가 있는 가운데 영구한 것이다.
112:0.2 (1225.2) 성격을[1] [88] 정의하려 하는 것은 주제넘겠지만, 성격에 관하여 알려진 것들을 더러 열거하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112:0.3 (1225.3) 1. 성격은 바로 우주의 아버지가, 또는 아버지를 대행하는 합동 행위자가 수여한 품질, 실체 속에 있는 그 품질이다.
112:0.4 (1225.4) 2. 성격은 지성이나 영을 포함하여, 어떤 살아 있는 에너지 체계에도 부여될 수 있다.
112:0.5 (1225.5) 3. 성격은 선행(先行)하는 원인의 사슬에 완전히 지배되지는 않는다. 인격은 상대적으로 창조하거나 공동으로 창조하는 성질이 있다.
112:0.6 (1225.6) 4. 진화하는 물질 인간에게 수여되었을 때, 인격은 지성의 중재를 통해서 영이 에너지 물질을 통달하려고 애쓰게 만든다.
112:0.7 (1225.7) 5. 인격은 신분이 결여되어 있지만, 어떤 살아 있는 에너지 체계의 신분도 통일할 수 있다.
112:0.8 (1225.8) 6. 인력에 대하여 질적ㆍ양적 반응을 보이는 세 가지 에너지와 반대로, 인격은 성격 회로에 대하여 오직 질적(質的) 반응을 드러낸다.
112:0.9 (1225.9) 7. 변화가 있는 가운데서 인격은 변하지 않는다.
112:0.10 (1225.10) 8. 인격은 하나님께 선물을 드릴 수 있다―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자유 의지를 바칠 수 있다.
112:0.11 (1225.11) 9. 인격의 특징은 도덕성이다―다른 인격자들과 상대적 관계가 있음을 의식하는 특징이다. 인격은 행동 수준을 식별하고 그 차이를 까다롭게 분별한다.
112:0.12 (1225.12) 10. 인격은 독특하고, 절대로 독특하다. 인격은 시공에서 독특하다. 영원 속에서, 파라다이스에서 독특하다. 인격은 부여되었을 때 독특하다―복사품이 하나도 없다. 인격은 존재하는 순간마다 독특하며, 하나님과 가지는 관계가 독특하다―하나님은 인격자를 차별하지 않지만, 인격자를 더하지도 않으니, 인격자를 하나로 합칠 수 없기 때문이다―그들과 친교할 수 있지만 그들을 더할 수는 없다.
112:0.13 (1226.1) 11. 인격은 다른 성격의 계심에 직접 반응한다.
112:0.14 (1226.2) 12. 성격은 영에게 더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이처럼 아들과 가지는 관계에서 아버지가 먼저임을 보여준다. (지성을 영에 더할 필요는 없다.)
112:0.15 (1226.3) 13. 인격은 필사자가 죽은 뒤에, 살아남는 혼 속에서 신분을 가지고 살아날지도 모른다. 조절자와 인격은 변함이 없다. (혼 속에서) 그들 사이의 관계는 변화, 계속되는 진화에 불과하다. 이 변화(성장)가 그치면, 혼은 그칠 것이다.
112:0.16 (1226.4) 14. 인격은 시간을 독특하게 의식하며, 이것은 지성이나 영이 시간을 파악하는 것과 다른 무엇이다.
112:1.1 (1226.5) 우주의 아버지가 인간에게 잠재적으로 영원한 자질인 성격을 수여한다. 신이 주신 그러한 선물은 수많은 수준에서, 그리고 비천한 유한자로부터 가장 높은 초한자까지, 아니 절대자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연속된 우주 상황에서 작용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이처럼 인격은 세 우주 수준에서, 즉 세 우주 단계에서 작용한다:
112:1.2 (1226.6) 1. 위치 지위. 인격은 지역 우주, 초우주, 중앙 우주에서 똑같이 유능하게 활동한다.
112:1.3 (1226.7) 2. 의미 지위. 인격은 유한자ㆍ초한자(超限者)의 수준에서, 아니 절대자에 부딪치는 지경에도 효과 있게 활동한다.
112:1.4 (1226.8) 3. 가치 지위. 인격은 물질인 것, 상물질인 것, 영적인 것의 점진하는 분야에서 체험으로 실현될 수 있다.
112:1.5 (1226.9) 인격은 우주 차원에서 행위하는 완벽해진 범위가 있다. 유한 인격자의 차원은 셋이며, 대체로 다음과 같이 작용한다:
112:1.6 (1226.10) 1. 길이는 진보―공간을 통과하고 시간을 따르는 움직임―곧 진화의 방향과 성질을 나타낸다.
112:1.7 (1226.11) 2. 수직(垂直)의 깊이는 유기체의 욕구와 태도, 달라지는 수준의 자아 실현, 그리고 환경에 반응하는 일반 현상을 포함한다.
112:1.9 (1226.13) 유란시아 필사자에게 수여된 부류의 인격은 자아를 표현하는, 즉 인격자를 실현하는 일곱 차원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이 여러 차원의 현상은 유한한 수준에서 셋, 초한(超限) 수준에서 셋, 절대 수준에서 하나로 실현될 수 있다. 절대 이하의 수준에서는 이 일곱째 차원, 즉 총체 차원을 인격이 된 사실로서 체험이 가능하다. 가장 높은 이 차원은 연합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며, 무한하지는 않아도, 무한 아래에서 절대적인 것을 침투하는 차원의 잠재성이다.
112:1.10 (1226.14) 인격의 유한 차원은 우주에서 길이ㆍ깊이ㆍ넓이와 상관이 있다. 길이는 의미를 뜻하고, 깊이는 가치를 가리키며, 넓이는 통찰력―확실히 우주 실체를 체험으로 의식하는 능력―을 포함한다.
112:1.11 (1227.1) 상물질 수준에서는, 물질 수준의 이 유한 차원들이 모두 크게 향상되며, 어떤 새 차원의 가치는 실현이 가능하다. 상물질 수준에서 확대된 이 모든 차원의 체험은, 상지혜의 영향을 통해서, 또한 상물질 수학(數學)의 기여 때문에, 가장 높은 차원, 즉 인격의 차원과 함께 놀랍게 표현된다.
112:1.12 (1227.2) 체험으로 인격을 실현하는 데에는 차원 수준과 영적 수준이 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유한한 인간이 기억하려고 하면, 사람의 인격을 연구하는 데 필사자가 겪는 많은 어려움을 피할 수 있다.
112:1.13 (1227.3) 생명은 정말로 유기체(자아)와 그 환경 사이에 일어나는 과정이다. 인격은 신분의 가치와 연속성의 의미를 이 유기체와 환경의 연합에 나눠준다. 인격이 전체 상황에서 한 요인으로서 작용하니까, 이처럼 자극과 반응이 일어나는 현상은 단순한 기계적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너희가 인식할 것이다. 기계 작용은 태어날 때부터 수동적이며, 유기체들은 본래부터 능동적이라는 것은 언제나 참말이다.
112:1.14 (1227.4) 육체적 생명은 유기체 안보다, 유기체와 환경 사이에서 일어나는 과정이다. 그러한 과정은 모두, 그러한 환경에 대하여 유기체의 반응 형태를 지어내고 확립한다. 그리고 모든 그러한 지휘하는 형태는 목적의 선택에 상당히 영향을 미친다.
112:1.15 (1227.5) 지능의 중재를 통해서 자아는 환경과 의미 있는 접촉을 가진다. 유기체가 환경과 그러한 의미 있는 접촉(추진력에 대한 반응)을 가지는 능력과 자진성은 인격 전체의 태도를 나타낸다.
112:1.16 (1227.6) 인격은 고립되었을 때 그다지 잘 행동할 수 없다. 사람은 날 때부터 사회적인 생물이다. 그는 어디엔가 속하려고 몹시 바라는 마음에 지배된다. “아무도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2] [89]는 것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112:1.17 (1227.7) 그러나 살아 있고 활동하는 인간의 총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인격 개념은 여러 관계를 통합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뜻한다. 인격은 여러 관계를 조정할 뿐 아니라 실체의 모든 요인을 통일함을 가리킨다. 관계는 두 물건 사이에 존재하지만, 셋 이상의 물건들은 궁극에 한 체계를 이루며, 그러한 체계는 그냥 확대되거나 복잡한 관계보다 훨씬 더한 것이다. 이 구별은 극히 중요하며, 한 우주 체계에서 개별 구성원들은, 전체와 가지는 관계에서, 그리고 전체의 개성을 통할 경우를 제외하고,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112:1.18 (1227.8) 인간 유기체의 경우에 유기체의 부분들을 합치면 자아―개성―을 이루지만, 그러한 과정은 인격과 아무 상관이 없고, 우주 실체들에 관계된 바와 같이, 인격은 이 모든 요소를 통일한다.
112:1.19 (1227.9) 집합에서는 부분들이 합쳐지며, 체계에서는 부분들이 정돈된다. 체계는 조직―자리의 가치―때문에 의미가 있다. 좋은 체계에는 모든 요소가 질서 있는 위치에 있다. 나쁜 체계에는 무엇인가 빠져 있든지, 제 자리에서 밀려나 있다―어지러워져 있다. 인간 체계에서는 바로 인격이 모든 활동을 통일하며, 다음에 신분과 창조성의 품질을 부여한다.
112:2.1 (1227.10) 자아를 연구하는 데 다음을 기억하면 유익할 것이다:
112:2.2 (1227.11) 1. 육체적 체계들은 종속된다.
112:2.3 (1227.12) 2. 지적 체계들은 서로 나란히 있다.
112:2.6 (1228.1) 모든 자아 개념에서 산다는 사실이 먼저이고, 그 평가나 해석은 나중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사람의 아이는 먼저 살고, 나중에 삶에 대하여 생각한다. 우주 체제에서 통찰력은 선견보다 앞선다.
112:2.7 (1228.2) 하나님이 사람이 된다는 우주의 사실은 언제까지나 인격의 모든 의미를 바꾸고 가치를 변화시켰다. 낱말의 참 뜻대로 하면, 인간이거나 신이거나, 아니면 인간이면서 신이거나, 사랑은 전체 성격을 서로 존중함을 의미한다. 자아의 부분들은 수많은 방법으로 활동할지―생각하고, 느끼고, 바랄지―모르지만, 지적 활동에는 오로지 전체 인격의 조정된 속성이 집중된다. 이 모든 능력은 한 인간이, 인간이거나 신이거나 다른 한 존재를 성실하게 사심 없이 사랑할 때, 그 필사 지성의 영적 자질과 연결된다.
112:2.8 (1228.3) 실체에 관한 필사자의 모든 개념은 사람의 인격이 사실임을 가정하는 데 기초를 둔다. 초인간 실체에 대한 모든 개념은, 사람의 인격이 어떤 관계된 영적 개체 및 신격자의 우주 실체들과 함께, 그리고 그 실체들 속에서 겪는 체험에 기초를 둔다. 인격을 제외하고, 인간의 체험에서 비영적인 것은 무엇이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필사자가 다른 성격자들과―인간이든 신이든―가지는 모든 참다운 관계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신의 성격과 그러한 친교를 가지는 것이 우주에서 올라가는 영원한 목표이다.
112:2.9 (1228.4) 인격의 소유는 사람이 한 영적 존재인 것을 확인하는데, 이는 자아의 통일성과 인격의 자의식이 초물질 세계가 부여한 자질이기 때문이다. 한 필사 유물론자가 초물질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은, 그 자체로서 저절로, 그의 인간 머리 속에 영(靈)의 통합과 우주 의식이 존재함을 보여주고, 그것들이 작용함을 가리킨다.
112:2.10 (1228.5) 물질과 생각 사이에는 대단히 큰 간격이 존재하며, 물질 지성과 영적 사랑 사이에 있는 이 간격은 측량할 수 없이 더 크다. 기계론에 따른 전자(電子)의 결합이나 유물론의 에너지 현상으로 보는 어떤 이론으로도, 자의식(自意識)은 말할 것도 없고 의식을 설명할 수 없다.
112:2.11 (1228.6) 지성이 실체의 궁극적 분석을 추구함에 따라서, 물질은 물질적 감각에는 사라진 것이지만, 아직도 머리 속에 실체로 남는다. 물질이 사라진 뒤에 남는 바로 그 실체를 영적 통찰력이 추구하고 이의 궁극적 분석을 추구할 때, 실체는 머리 속에 사라진다. 그러나 영의 통찰력은 영적 성품을 지닌 우주의 실체들과 최상의 가치를 여전히 파악한다. 따라서 과학은 철학에게 길을 비키고, 한편 철학은 진정한 영적 체험에 본래 있는 결론에 굴복해야 한다. 생각은 지혜에게 무릎을 꿇고, 깨우침을 받고 돌이켜보는 예배 속에서 지혜는 사라진다.
112:2.12 (1228.7) 과학에서는 인간 자체가 물질 세계를 관찰한다. 철학은 물질 세계의 이러한 관찰 결과를 지켜보는 것이다. 종교, 곧 참된 영적 체험은, 시공에 있는 에너지 물질의 이러한 모든 상대적 통합의 관찰 결과를 지켜보는 것, 곧 우주 현실을 체험으로 깨닫는 것이다. 순전한 유물론에 기초를 두고 우주에 관한 철학을 세우는 것은, 처음에 인간이 의식하는 체험 속에서 모든 물질적인 것이 현실로 느껴진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관찰하는 자는 관찰의 대상(對象)이 될 수 없다. 무엇을 평가하는 것은 평가 받는 바로 그 대상을 어느 정도 초월하기를 요구한다.
112:2.13 (1228.8) 시간 세계에서, 생각하는 것은 지혜로 인도하고, 지혜는 신을 예배하게 만든다. 영원 속에서는 신을 예배하는 것이 지혜로 인도하고, 지혜는 궁극에 최종의 생각을 낳는다.
112:2.14 (1229.1) 진화하는 자아가 통일되는 가능성은 다음 구성 요소의 품질에 본래부터 있다. 즉 기본 에너지, 기본 세포 조직, 근본적인 화학적 전체 통제, 최상의 생각, 최상의 동기, 최상의 목표, 그리고 파라다이스에서 수여된 신다운 영 (사람의 영적 성품이 자의식하는 비밀)이다.
112:2.15 (1229.2) 우주의 진화하는 목적은 영(靈)이 갈수록 더 지배하는 것, 생각 조절자의 가르침과 인도함에 의지로 반응함으로, 인격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인간 및 초인간의 성격은 본래부터 우주적 품질의 특징을 가지며, 이 품질은 “지배의 진화”라고 불러도 좋은데, 성격 자체와 그 환경을 통제하는 힘이 확대되는 것이다.
112:2.16 (1229.3) 한때 인간이었던 하늘 가는 인격자는 자아에 대하여, 그리고 우주에서, 의지가 점점 더 지배하는 큰 두 단계를 거친다:
112:2.17 (1229.4) 1. 우주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고 그 결과로 우주를 통달함과 아울러 신분을 확대하고 현실화하는 기법을 통해서, 자아의 실현을 확대하는 최후자 이전 체험, 즉 하나님을 추구하는 체험.
112:2.18 (1229.5) 2. 하나님을 닮는 신다운 수준에 아직 다다르지 못한, 하나님을 찾는 지적 존재들에게 체험하는 최상 존재를 드러냄으로 자아의 실현을 창조적으로 확대하는, 최후자 이후 체험, 즉 하나님을 드러내는 체험.
112:2.19 (1229.6) 내려오는 성격자들은 최상 신, 궁극 신, 절대 신의 신성한 뜻을 확인하고 집행하는 확대된 자격을 추구함에 따라서, 그들의 여러 가지 우주 모험을 통해서 비슷한 체험을 얻는다.
112:2.20 (1229.7) 물질적 자아, 곧 인간 신분의 자아 개체는, 육체로 사는 동안에 물질 생명이 타고 다니는 수단이 계속 작용하는 데, 그리고 에너지와 지능의 불안한 균형이 계속 존재하는 데 의존하며, 이것은 유란시아에서 생명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러나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자아, 죽는 체험을 초월할 수 있는 자아는, 생명을 수송하는 일시적 수단―물질적 육체―로부터 더 오래 가며 불사의 성질을 가진 상물질 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계속하여 혼이 영 실체의 입김을 받고 궁극에 영 실체의 지위를 얻는 그 수준까지, 진화하는 인격 신분의 자리 이동 잠재성을 만들어 겨우 진화된다. 물질적 연합으로부터 상물질 신분까지 이렇게 실제로 이동하는 것은 지음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으려는 결정, 성실하고 끈질기고 꾸준한 결정을 내림으로 이루어진다.
112:3.1 (1229.8) 유란시아인은 무릇 한 가지 죽음, 생명 에너지의 물리적 중지만 인정한다. 그러나 인격이 살아남는 것에 관하여, 정말로 세 가지가 있다:
112:3.2 (1229.9) 1. 영적 (혼의) 죽음. 필사 인간이 살아남기를 마침내 거절하면, 그리고 거절하고 나서, 조절자와 보살피던 세라핌의 공동 의견에, 그가 영적으로 빚을 갚을 능력이 없고 상물질 면에서 파산했다는 선언이 내리고, 그러한 일치된 조언이 유버르사에 기록되고 나서, 검열자와 그 반영(反映) 동료들이 이 조사 결과를 확인한 뒤에, 그 결과로 오르본톤의 통치자들은 깃드는 훈계자를 즉시 해방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이렇게 조절자가 해방되는 것은 조절자가 버린 그 사람에 관련된, 개인 세라핌이나 집단 세라핌의 임무에 어떤 면에서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육체적 장치와 지성 장치의 살아 있는 에너지가 일시 계속하는 것과 상관 없이, 이 종류의 죽음은 최종의 의미를 가진다. 우주의 견지에서 볼 때 그 필사자는 이미 죽었다. 계속하는 생명은 다만 우주 에너지의 물질적 운동량이 지속하는 것을 가리킨다.
112:3.3 (1230.1) 2. 지적 (지성의) 죽음. 지능의 비정상을 통해서 또는 뇌의 작용이 일부 파괴되었기 때문에 상급 보조 봉사에 관련된 중대한 회로들이 붕괴될 때, 이 조건들이 고칠 수 없는 어떤 임계점을 지날 때, 깃드는 조절자는 신별로 떠나도록 즉시 풀려난다. 우주의 기록에는, 인간의 의지 활동에 필수인 지성 회로들이 망가졌을 때는 언제나, 필사 인격자는 죽었다고 생각된다. 육체의 살아 있는 장치가 계속 작용하는 것과 상관 없이, 이것은 또한 죽음이다. 몸에서 의지(意志)하는 지성을 빼면, 이제 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인간의 의지가 앞서 택한 데 따라서, 그러한 개인의 혼은 살아남을지 모른다.
112:3.4 (1230.2) 3. 육체의 (몸과 지성의) 죽음. 죽음이 한 인간에게 닥칠 때, 지성이 지적 작용으로서 활동을 그칠 때까지, 측량할 수 있는 뇌의 에너지가 리듬 있는 생명의 맥박을 그칠 무렵까지, 조절자는 지성의 요새에 남아 있다. 이 죽음이 있고 나서, 여러 해 전에 몸에 들어갈 때와 똑같이 예식을 차리지 않고, 조절자는 사라지는 그 지성을 떠나며, 유버르사를 거쳐서 신별로 진행한다.
112:3.5 (1230.3) 죽은 뒤에 물질 몸은 그 출처인 원소의 세계로 돌아가지만, 살아남는 인격의 두 가지 비물질 요소는 영속한다: 이전부터 존재하는 생각 조절자는 그 필사자 생애의 기억 사본(寫本)을 가지고 신별로 진행하며, 또한 죽은 인간의 불멸하는 상물질 혼이 남아서 운명 수호자가 보관하도록 맡겨진다. 혼의 이 단계와 형태, 한때 움직였지만 이제 가만히 있는 이 신분의 형태는 상물질 세계에서 다시 인격을 얻는 데 필수이다. 그 조절자와 그 혼의 재회는 살아남는 인격을 다시 조립하며, 상물질로 깨어날 때 네가 다시 정신을 차리게 만든다.
112:3.6 (1230.4) 개인 수호 천사를 가지지 않은 자의 경우에는 집단 관리자들이 신분을 보관하고 인격을 부활시키는 똑같은 서비스를 충실하고 유능하게 실행한다. 세라핌들은 인격을 다시 조립하는 데 필수이다.
112:3.7 (1230.5) 죽고 나서 생각 조절자는 일시 인격을 잃어버리지만, 신분을 잃지 않는다. 그 인간 주체는 일시 신분(身分)을 잃지만, 인격을 잃지 않는다. 저택 세계들에서 이 둘은 다시 뭉쳐 영원한 모습이 된다. 떠나 버린 생각 조절자는 결코 전에 깃들던 존재로서 땅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결코 인격은 인간의 의지가 없이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조절자가 빠진 인간은, 죽은 뒤에 활동하는 신분을 드러내거나, 어떤 방법으로도 땅에 살아 있는 존재들과 교통하지도 않는다. 조절자가 빠진 그러한 혼은 길거나 짧게 죽음의 잠을 자는 동안에, 전적으로, 절대로 의식(意識)이 없다. 살아남는 일을 마치기까지, 다른 인격자들과 교통하는 어떤 종류의 인격이나 능력도 전시될 수 없다. 저택 세계로 가는 자는 사랑했던 자들에게 소식을 보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현재 섭리 시대 기간에, 우주 전역에 걸쳐서 그러한 통신을 금하는 정책이 있다.
112:4.1 (1231.1) 물질적, 지적 또는 영적 성질의 죽음이 일어날 때, 조절자는 그 필사 주인에게 작별을 알리고 신별을 향하여 떠난다. 지역 우주와 초우주의 본부로부터, 두 정부의 감독자들과 반영으로 접촉이 이루어지며, 시간의 영토로 들어갔다고 기록된 것과 같은 번호로 훈계자가 나갔다고 등록된다.
112:4.2 (1231.2) 충분히 이해되지 않은 어떤 방법으로, 깃들었던 지성의 영적 가치와 상물질 의미를 지닌 조절자의 이중 사본에 담긴 대로, 우주 검열자들은 그 인생의 요약을 소유할 수 있다. 검열자들은 죽은 인간의 살아남는 인품과 영적 품질에 관한 조절자의 견해를 이용할 수 있고, 이 모든 자료는 세라핌의 기록과 함께, 관계된 그 개인이 판결을 받을 때 제출하는 데 소용된다. 이 정보는 또한 어떤 승천자들이, 죽고 나서 즉시 상물질 생애를 시작하고, 행성의 섭리 시대가 정식으로 종결되기 전에 저택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초우주 명령을 확인하는 데 쓰인다.
112:4.3 (1231.3) 살아 있는 자 가운데서 옮겨진 개인들의 경우를 제외하고, 육체가 죽은 뒤에, 풀려난 조절자는 즉시 신별의 집 구체로 간다. 살아남는 필사자가 사실로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시간에 그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에 관한 세부는 주로, 그 인간이 자신의 개별 권한으로 저택 세계들로 올라가는가, 아니면 한 행성 시대의 잠자는 생존자들이 섭리 시대의 호출을 기다리는가에 달려 있다.
112:4.4 (1231.4) 필사 동료가 한 섭리 시대 끝에 다시 인격을 얻을 무리에 속하면, 그 조절자는 이전에 봉사하던 체계의 저택 세계로 금방 돌아오지 않을 터이나, 선택에 따라서, 다음의 일시 배치 중 하나에 들어갈 것이다:
112:4.5 (1231.5) 1. 밝혀지지 않은 봉사를 위하여 사라진 훈계자의 서열에 소집된다.
112:4.6 (1231.6) 2. 파라다이스 체제를 관찰하는 데 한동안 배치된다.
112:4.7 (1231.7) 3. 신별의 여러 훈련 학교 중 한 군데에 등록된다.
112:4.8 (1231.8) 4. 아버지의 여러 파라다이스 세계의 회로를 구성하는 다른 신성한 여섯 구체 중 하나에서 학생 관찰자로서 한동안 머무른다.
112:4.9 (1231.9) 5. 인격이 된 조절자들의 사자가 되는 근무에 배치된다.
112:4.10 (1231.10) 6. 처녀 집단에 속하는 훈계자들을 훈련하는 데 전념하는 여러 신별 학교에서 부교사가 된다.
112:4.11 (1231.11) 7. 짝이었던 인간이 살아남기를 거절했을지 모른다고 믿을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경우에 근무할, 한 집단의 가능한 세계들을 택하라고 배치된다.
112:4.12 (1231.12) 죽음이 너에게 닥칠 때, 네가 3급 수준이나 더 높은 수준에 다다랐고, 따라서 개인 운명 수호자를 배치받았고, 조절자가 제출한, 살아남는 인품을 요약한 마지막 성적표가 운명 수호자한테서 무조건 인가를 받고―세라핌과 조절자가 그들이 작성한 생명 기록부와 추천서의 모든 항목에 본질적으로 찬성하고―유버르사에 있는 우주 검열자와 그 반영 동료들이 이 자료를 확인하면서 말을 흐리거나 망설이지 않고 그리 하면, 그런 경우에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구원자별에 이르는 통신 회로를 통해서 상급 지위를 가리키는 명령을 번쩍 내린다. 이렇게 풀려나면, 네바돈 군주의 법정은 살아남는 그 혼을 저택 세계의 부활실까지 즉시 통과시킬 것을 선포한다.
112:4.13 (1232.1) 나는 이렇게 가르침을 받았다. 개별 인간이 지체하지 않고 살아남으면, 그 조절자는 신별에서 등록하고, 파라다이스에서 우주의 아버지가 계신 데까지 나아가며, 즉시 돌아와서, 초우주와 배치받은 지역 우주에서 인격화된 조절자의 품에 안기고, 신별에 있는 인격화된 조절자 우두머리의 인정을 받으며, 그리고 나서 당장에 “신분 이동이 실현”된다. 이로부터 그는, 운명 수호자가 그 형태를 계획한 대로, 지구 출신 필사자의 살아남는 혼을 받기 위하여 준비된 실제 인격 형태를 입고서, 셋째 기간에, 저택 세계에서 호출 받는다.
112:5.1 (1232.2) 자아는 물질이든, 상물질이든, 영적이든, 하나의 우주 실체이다. 인격을 가진 자의 사실성은 아버지가 스스로 혼자 행동하든지, 아니면 다양한 우주 대리자들을 통해서, 우주의 아버지가 수여한 것이다. 한 존재가 성격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우주 유기체 안에서 그러한 존재가 상대적으로 개별화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우주는 실재하는 단위들을 거의 무한히 통합한 덩어리이며, 그 단위들은 모두 전체의 운명에 상대적으로 지배된다. 그러나 인격을 가진 자는 운명을 받아들이거나 운명을 물리치는 실제 선택을 부여 받았다.
112:5.2 (1232.3)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은 영원한 아버지와 같으니, 이것은 신다운 생각 조절자, 하나님의 실제 분신(分身)의 경우에 참인 것처럼 인격의 경우에도 똑같이 참이며, 아버지는 자신의 자유 의지로 선택하여 인격을 주신다. 사람의 인격은 영원하지만, 신분에 관해서, 제약을 받는 영원한 실체이다. 아버지의 뜻에 반응하여 출현했으니까, 인격은 신의 운명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러한 운명이 달성될 때 그가 자리에 있을 것인가 아닌가를 택해야 한다.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 인격은 체험적 신에 직접 도달하고, 최상 존재의 일부가 된다. 그 주기는 예정되었지만, 사람이 거기에 참여하는 것은 선택이요, 개인적이고 체험하는 것이다.
112:5.3 (1232.4) 필사자의 신분은 우주에서 일시적 생명의 상태이다. 그 신분은 인격자가 계속하는 하나의 우주 현상이 되기를 선택하는 그 한도 안에서만 현실이다. 이것이 사람과 한 에너지 체계 사이의 본질적 차이이다. 에너지 체계는 계속해야 하고,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온통 상관이 있다. 조절자는 참으로 파라다이스에 이르는 길이지만, 사람이 스스로 결심하여, 자유 의지로 선택함으로 그 길을 추구해야 한다.
112:5.4 (1232.5) 인간은 오직 물질적 의미에서 신분을 소유한다. 물질 지성이 지능의 에너지 체계 안에서 작용하는 대로, 물질 지성은 자아의 그러한 성질을 표현한다. 사람이 신분을 가졌다고 말할 때, 사람의 인격이 행동하고 그 의지가 선택하는 데 복종하도록 놓여진 지성 회로를 그가 소유한다는 것이 인정된다. 그러나 인간의 태아가 인생에서 일시 기생(寄生) 단계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물질적이고 순전히 일시적 명시이다. 우주의 견지에서 보면, 인간은 비교적 한 순간에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 인간은 오래 가지 않는다. 그러나 필사자의 인격은, 자신의 선택을 통해서, 그 신분의 자리를 잠시 있는 물질적 지능 체계로부터 그보다 더 높은 상물질 혼의 체계로 옮기는 힘을 소유하며, 그 혼은 생각 조절자와 관련하여, 인격이 명백히 나타나는 새 수송 수단으로서 창조된다.
112:5.5 (1233.1) 그리고 바로 이 선택하는 힘, 자유 의지가 있는 인간임을 가리키는 우주 표시가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큰 기회요, 최고의 우주 책임이다. 미래 최후자의 영원한 운명은 인간의 의지가 성실한가에 달려 있다. 신다운 조절자가 영원한 인격을 얻는 것은 필사자의 자유 의지가 진실한가에 달려 있다. 우주의 아버지가 새로운 하늘 가는 아들을 얻는 것은 필사자의 선택이 충실한가에 달려 있고, 최상 존재가 체험적 진화로 사실이 되는 것은 끈질기고 지혜로운 결정과 행동에 달려 있다.
112:5.6 (1233.2) 인격이 성장하는 여러 우주 수준을 궁극에 도달해야 하지만, 너 자신 아무 잘못도 없이, 뜻밖의 사고(事故)와 물질 존재에서 장애물이 네가 태어난 행성에서 이 여러 수준을 통달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그리고 너의 의도와 소망이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면, 시험 기간을 연장하는 선포가 내린다. 너는 자신을 증명할 추가 시간을 받을 것이다.
112:5.7 (1233.3) 한 인간 신분을 저택 세계로 진급시키는 것이 현명한가에 관하여 언제라도 의심이 생기면, 우주 정부들은 변함없이, 그 사람의 개인 이익에 맞게 판결을 내린다. 그들은 서슴지 않고 그러한 혼을 일시적 존재의 지위로 올려 주며, 한편 그들은 태어나는 상물질 의도와 영적 목적을 계속 지켜본다. 그러므로 신의 응보는 분명히 이루어지며, 신의 자비를 연장하여 베풀 기회가 더 주어진다.
112:5.8 (1233.4) 오르본톤 정부와 네바돈 정부는 필사자를 다시 인격화하는 우주 계획의 세부 작용이 절대로 완전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참을성ㆍ관용ㆍ이해와 자비로운 동정심을 나타낸다고 주장하고, 또 그렇게 한다. 어떤 진화 세계에서 오더라도, 발버둥치는 한 필사자로부터 하늘 가는 생애를 추구하는 영원한 기쁨을 빼앗는 위험을 초래하기보다, 우리는 차라리 한 체계가 반란하는 위험을 무릅쓰겠다.
112:5.9 (1233.5) 이것은 인간이 처음 기회를 거절한 마당에 두 번째 기회를 가질 것이라는 뜻이 아니며, 도무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의지(意志)를 가진 모든 사람이, 의심의 여지 없이, 자의식하는 한 가지 최종 선택을 내리는 참 기회를 한 번 얻어야 함을 의미한다. 여러 우주의 통치하는 판사들은 마지막으로 온전히 영원한 선택을 내리지 않은 어떤 존재한테서도 인격의 지위를 빼앗지 않을 것이다. 참된 의도와 진정한 목적을 드러낼 기회, 충분하고 풍부한 기회를 사람의 혼에게 주어야 하며, 또 줄 것이다.
112:5.10 (1233.6) 좀더 영적으로, 우주적으로 더 진급한 필사자는 죽을 때 바로 저택 세계들로 나아간다. 대체로 이 조치는 개인 수호 세라핌을 배치받은 자에게 작용한다. 다른 필사자들은 그들의 일에 대하여 판결이 끝날 때까지 붙잡혀 있을지 모르며, 그 뒤에 저택 세계로 나아가든지, 아니면 현재의 행성 섭리 시대의 끝에, 무더기로 다시 인격화될 잠자는 생존자의 대열에 배치될지 모른다.
112:5.11 (1233.7) 죽을 때 너, 살아남는 너는 떠나는 조절자와 다른데, 그때 너에게 바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설명하려는 내 노력을 번거롭게 하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이 중의 하나는 물리적 영역과 상물질 영역의 경계지에서 생기는 거래에 관하여 네가 알아듣는 수준까지 적절한 설명을 전하기가 불가능한 데 있다. 다른 하나는 유란시아의 하늘 정부 당국이 진리 계시자인 내 위원회에 지워 준 제한 때문에 생긴다. 발표할 수도 있는 흥미 있는 세부가 많이 있지만, 너희의 직계 행성 감독자들의 충고를 받고서 이것들을 내놓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허락받은 한계 안에서, 나는 이만큼 말할 수 있다:
112:5.12 (1234.1) 무언가 실재하는 것, 무언가 인간이 진화시키는 것, 신비의 훈계자에 추가되는 무엇이 있는데, 이것이 죽음 뒤에 살아남는다. 새로이 나타나는 이 개체는 혼이며, 너의 육체와 너의 물질 지성, 이 둘이 죽은 뒤에 혼이 살아남는다. 이 개체는 인간인 네가 신다운 너, 곧 조절자와 연락하여, 통합된 일생을 살고 노력함으로 합동으로 낳은 자식이다. 인간과 신의 족보를 가진 이 아이는 땅에서 기원을 가진 살아남는 요소이다. 그것은 상물질 자아요, 불사의 혼이다.
112:5.13 (1234.2) 지속하는 의미와 살아남는 가치를 가진 이 아이는, 사람이 죽을 때부터 다시 인격화되는 기간에 전혀 의식이 없고, 이 기다리는 시절을 통해서 내내, 운명 수호 세라핌의 보호를 받고 있다. 죽고 나서, 사타니아의 저택 세계에서 새로운 상물질 의식을 얻을 때까지, 너는 의식이 있는 존재로서 활동하지 않을 것이다.
112:5.14 (1234.3) 죽을 때 그 인격과 관련되었된 기능적 신분은, 생명의 움직임이 그침으로 중지된다. 사람의 인격은 그 구성 분자들을 뛰어넘지만, 그 기능적 신분은 그 부분들에 의존한다. 생명의 중지는 지성을 부여 받은 물리적 뇌의 형태를 파괴하며, 지성의 붕괴는 필사자의 의식을 그치게 한다. 바로 그 인격이 살아 있는 에너지와 관련되어 다시 활동하라고 허락할 우주 상황이 마련되기까지, 그 사람의 의식은 나중에 다시 나타날 수 없다.
112:5.15 (1234.4) 기원이 있는 세계로부터 여러 저택 세계까지 살아남는 필사자들이 이동하는 동안, 그들이 셋째 기간에 인격의 재조립을 체험하든지 아니면 집단으로 부활할 때 올라가든지 상관 없이, 인격의 본질에 대한 기록은 천사장들의 특별 활동이 있는 세계에서 그들이 충실하게 간직한다. 이 존재들은 (수호 세라핌이 혼의 보관자인 것처럼) 인격 보관자가 아니지만, 그런데도, 확인할 수 있는 인격 요소는 모조리 필사자의 생존을 관리하는 이 믿을 만한 수탁자들의 보호를 받아 적절히 지켜진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이에 끼는 시간에 필사자의 인격이 정확히 어디 있는가, 우리는 모른다.
112:5.16 (1234.5) 다시 인격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상황은 한 지역 우주의 여러 상물질 접대 행성의 부활실에서 일어난다. 생명을 조립하는 여기 이 여러 방에서 감독하는 당국은 우주―상물질ㆍ지성ㆍ영적―에너지의 관계를 마련해 주며, 이것은 잠자는 생존자가 다시 정신을 차리게 만든다. 한때 물질이었던 인격의 구성 부분들을 다시 짜 맞추는 데는 다음이 들어간다:
112:5.17 (1234.6) 1. 적당한 형태, 상물질 에너지 형태의 조립, 새로 살아남은 자는 이 형태를 입고서 비영(非靈) 실체와 접촉할 수 있고, 그 안에서 우주 지성의 상물질 변종은 회로가 연결될 수 있다.
112:5.18 (1234.7) 2. 조절자가 기다리는 상물질 인간에게 돌아오는 것. 조절자는 너의 하늘 가는 신분의 영원한 보관자이다. 너의 훈계자는 너의 인격이 깨어날 때를 위하여 지은 그 상물질 형태를 남이 아니라 바로 네가 차지할 것을 절대로 보장한다. 그 조절자는 너의 살아남는 자아에게 파라다이스 안내자 노릇을 다시 한 번 맡으려고, 너의 인격이 다시 조립될 때 자리에 있을 것이다.
112:5.19 (1235.1) 3. 이렇게 다시 인격화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 조립되었을 때, 잠자는 불사의 혼 잠재성을 간직한 세라핌 관리자는 수많은 우주 성격자의 도움을 얻어서, 기다리는 지성과 몸 형태 위에, 그 속에, 이 상물질 개체를 수여하며, 한편 최상위의 이 진화하는 아이를 기다리는 조절자와 영원히 연합하도록 맡긴다. 이것이 다시 인격화하는 과정, 즉 기억ㆍ통찰력ㆍ의식―곧 신분―의 재조립을 끝마친다.
112:5.20 (1235.2) 다시 인격화하는 사실은, 깨어나는 인간의 자아가 새로 분리된 우주 지성의 단계, 회로가 연결된 상물질 단계를 붙잡는 것이다. 인격이라는 현상은 우주 환경에 대하여 자아가 반응하는 그러한 신분이 영속하는 데 의존한다. 이것은 오로지 지성의 매체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자아의 모든 구성 요소가 계속 변화하는데도, 자아는 영속한다. 육체의 생명에서 변화는 차츰 일어난다. 죽을 때와 다시 인격을 얻을 때 그 변화는 갑작스럽다. 모든 자아(인격)의 참 실체는 그 구성 분자들이 그침 없이 변하는 덕분에 우주의 조건에 민감하게 활동할 수 있다. 침체는 불가피한 죽음에 이르러 끝난다. 인간의 생명은 변치 않는 안정된 인격이 통일하는, 생명 요소들의 끝없는 변화이다.
112:5.21 (1235.3) 이처럼 네가 예루셈의 저택 세계에서 깨어날 때, 너는 몹시 변해 있고 영적 변화는 대단히 클 것이다. 그래서 너의 생각 조절자와 운명 수호자는 새 세계들에서 너의 새 생명을 첫째 세계에 있던 너의 묵은 생명과 아주 충분히 연결시키는데, 이들이 아니라면, 너는 새 상물질 의식을 되살아나는 너의 예전 신분의 기억과 연결시키는 데 처음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인격을 가진 자아가 계속되는데도, 필사 생명에서 많은 것이 처음에는 흐릿하고 안개 같은 꿈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필사자의 많은 관계가 맑아질 것이다.
112:5.22 (1235.4) 오직 네 우주 생애의 일부이며 그에 필수인 기억과 체험만 생각 조절자가 상기시키고 연습시킬 것이다. 인간의 머리 속에 어떤 것이라도 이를 진화시키는 데 조절자가 협동자였다면, 다음에 이 가치 있는 체험은 조절자의 영원한 의식 속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너의 지난 생명과 그 기억 중에 허다한 것이 영적 의미도 상물질 가치도 없기 때문에, 물질인 두뇌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물질적 체험 가운데 많은 것이 한때 쓰인 발판으로서 사라질 터이고, 이것은 너에게 상물질 수준까지 다리를 놓아 주었으니까, 우주에서 이제 더 소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격, 그리고 인격자 사이의 여러 관계는 결코 발판이 아니다. 인격자들과 관계를 가진 사람의 기억은 우주에서 가치가 있고 영속할 것이다. 유란시아에서 짧지만 흥미를 자아내는 일생에 한때 동료였던 자들을 너는 여러 저택 세계에서 알게 될 터이고 그들은 너를 알 것이다. 게다가 너는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은 너를 기억할 것이다.
112:6.1 (1235.5) 나비가 애벌래 단계에서 솟아나는 것과 똑같이, 인간들의 참 인격은 저택 세계에서 솟아나고, 물질 육체 속에서 한때 가려져 있던 상태로부터 처음으로 드러나 보일 것이다. 지역 우주에서 상물질 생애는, 혼으로 존재하는 초기 상물질 수준에서 영적 정도가 차츰 높아지는 마지막 상물질 수준에 이르기까지, 인격 작용의 계속된 향상과 상관이 있다.
112:6.2 (1235.6) 지역 우주에서 사는 동안에 너희가 입는 상물질 인격 형태에 관하여 너희를 가르치기는 어렵다. 너희에게 인격이 분명히 표시될 수 있는 상물질 형태가 부여될 것이고, 이것은 결국 너희가 이해하지 못하는 옷이다. 그러한 형태는 전적으로 실체이지만, 너희가 지금 이해하는 물질 서열의 에너지 형태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태어난 행성에서 너희의 물질 몸이 어떤 목적에 소용되었던 것 같이, 지역 우주의 여러 세계에서 같은 목적에 소용된다.
112:6.3 (1236.1) 어느 정도까지, 물질 육체의 모습은 인격 신분의 됨됨이에 민감하다. 육체는 얼마큼 그 인격의 타고난 성품에서 무엇인가 반영한다. 상물질 형태는 더욱 그렇다. 육체 생명의 경우에 필사자는 비록 속이 아름답지 않더라도 겉으로 아름다울지 모른다. 상물질 생명의 경우에, 그리고 그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는 더욱, 인격의 형태는 안에 있는 인격자의 성품에 따라 정비례하여 달라질 것이다. 영적 수준에서, 바깥 형태와 속의 성품은 완벽하게 같아지는 점까지 비로소 접근하며, 이것은 더 높은 영 수준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완전해진다.
112:6.4 (1236.2) 상물질 상태에서 하늘 가는 필사자는 오르본톤 으뜸 영의 우주 지성 자질의 네바돈 개량 형태를 부여받는다. 필사자의 지능은 그 자체로서, 사라져 버렸고, 창조 영의 분화하지 않은 지성 회로에서 따로 떨어진 한 집중된 우주 개체로서 존재하기를 그쳤다. 그러나 필사 지성의 의미와 가치는 죽지 않았다. 지성의 어떤 단계들은 살아남는 혼 속에서 이어진다. 예전의 인간 지성의 어떤 체험적 가치를 조절자가 간직하고 있다. 하늘 가는 필사자를 최종으로 평가하는 데 관련된 수많은 존재는, 세라핌으로부터 우주 검열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아마도 이들을 지나서 최상위까지 그 범위가 연장되며, 이 존재들 안에 어떤 살아 있는 기록과 함께, 인간 생명이 육체를 입고 살던 대로 그 인간 생활의 기록이 지역 우주에 지속된다.
112:6.5 (1236.3) 인간의 의지(意志)는 지성 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그 의지는 물질적 지능을 잃어 버렸는데도 지속한다. 살아남고 나서 바로 뒤따르는 시간에, 하늘 가는 인격자는 인생에서 물려받은 인품의 형태와 새로 나타나는, 상물질계 상지혜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대체로 안내를 받는다. 저택 나라에서 가질 몸가짐에 관한 이 안내 지침은 상물질 생명의 초기 단계에서, 하늘 가는 인격자의 충분히 성장한 의지의 표현으로서 상물질 의지가 태어나기 전에, 쓸 만하게 활동한다.
112:6.6 (1236.4) 지역 우주 생애에는 인간으로 존재할 때 있었던 일곱 보조 지성 영에 견줄 만한 영향은 하나도 없다. 우주 지성을 지역 우주 지능의 창조 근원―신성한 봉사자―가 수정하고 표현한 대로, 상물질 지성은 이러한 우주 지성과 바로 접촉함으로 진화해야 한다.
112:6.7 (1236.5) 필사자의 지성은, 죽기 전에, 자의식하면서 조절자의 계심과 독립되어 있다. 보조 지성은 그 지성이 작용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 오직 관계된 물질 에너지의 형태가 필요하다. 그러나 상물질 혼은 초월 보조자이며, 물질 지성의 작용을 빼앗겼을 때, 조절자가 없이 자의식을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진화하는 이 혼은 예전에 관계된 보조 지성이 내린 여러 결정으로부터 얻은, 계속하는 특징을 소유하며, 이 특징은 그 기억 형태가, 돌아오는 조절자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을 때 활발한 기억이 된다.
112:6.8 (1236.6) 기억이 지속하는 것은 최초의 자아 신분이 유지된다는 증명이며, 인격이 연속되고 확대됨을 완벽하게 자의식하는 데 필수이다. 조절자 없이 올라가는 필사자는 인간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하여 천사(天使) 동료들의 지시에 의존한다. 영이 융합한 필사자의 상물질 혼은 이 외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기억의 형태는 혼 속에 존속하지만 이 형태는, 계속되는 기억으로서 즉시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되기 위하여 예전의 조절자의 계심이 요구된다. 조절자가 없으면, 살아남는 필사자가 이전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기억하는 의식을 다시 탐구하고 다시 배우고 다시 붙잡는 데 상당한 시간이 요구된다.
112:6.9 (1237.1)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혼은, 자아의 신분이 전에 앉아 있던 자리인 그 물질 지능의 질적ㆍ양적 행위와 동기를 충실하게 반영한다.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 택하면서, 필사자의 지성은 지혜 영의 지휘 밑에서, 통일된 일곱 보조 지성 영의 보호를 받으면서, 상물질 이전의 우주 생애에 들어간다. 나중에, 상물질 이전(以前)에 달성하는 일곱 수준을 마치고 나서, 상물질 지성의 자질을 보조 지성 위에 얹어 놓는 것은 지역 우주에서 진보하는 영(靈) 이전 생애, 즉 상물질 생애를 시작한다.
112:6.10 (1237.2) 인간은 그가 태어난 행성을 떠날 때, 보조자의 봉사를 뒤에 남겨 놓고, 오직 상물질 지능에 기댄다. 한 승천자가 지역 우주를 떠날 때, 그는 영적 수준에서 존재하게 되었고 상물질 수준을 통과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새로 나타나는 이 영 개체는 오르본톤 우주 지성이 직접 베푸는 봉사에 조율되어 있다.
112:7.1 (1237.3) 생각 조절자와 융합하는 것은 인격에게 영원한 사실로 있는 것들을 나누어 주며, 이것들은 이전에 오직 잠재했을 뿐이다. 새로 부여 받는 이 자질 가운데 다음을 언급해도 좋다: 신다운 성질이 고정되는 것, 과거 영원의 체험과 기억, 불사의 성질, 그리고 제한된 잠재 절대성의 한 단계.
112:7.2 (1237.4) 일시적 형태를 입고 땅에서 사는 너의 과정이 끝났을 때, 너는 더 좋은 세상의 기슭에서 깨어날 것이며, 궁극에 너는 영원한 포옹으로 너의 충실한 조절자와 뭉칠 것이다. 이 융합은 하나님과 사람을 하나로 만드는 신비, 유한한 인간이 진화하는 신비를 이루지만, 이것은 영원히 참이다. 융합은 신성한 승천자별 구체의 비밀이며, 신의 영과 융합을 체험한 자를 제외하고, 시간 세계에서 태어난 한 사람의 신분이 파라다이스 신의 영과 영원히 하나가 될 때 함께 붙은 그 실제 가치의 참된 의미를 어떤 생물도 이해할 수 없다.
112:7.3 (1237.5) 조절자와 융합하는 일은 보통 그 승천자가 지역 체계 안에서 거주하는 동안 이루어진다. 융합은 자연사를 초월하는 것으로서, 출생한 행성에서 일어날지도 모른다. 여러 저택 세계의 어느 한 군데나 또는 체계 본부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융합은 별자리에서 머무르는 때까지 늦춰질 수도 있고, 아니면 특별한 경우에 승천자가 지역 우주의 서울에 있을 때까지, 성취되지 않을지 모른다.
112:7.4 (1237.6) 조절자와 융합이 이루어졌을 때, 그러한 인격자의 영원한 생애에 아무런 앞날의 위험이 있을 수 없다. 하늘 존재들은 오랜 체험을 통하여 시험 받지만, 필사자는 진화 세계와 상물질 세계에서 비교적 짧고 맹렬한 시험을 거친다.
112:7.5 (1237.7) 조절자와 융합하는 것은 그 인간 성품이 마지막으로 돌이킬 수 없이 영원한 생애를 선택했다고 초우주의 명령이 선포할 때까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됨을 인가하는 것이고, 인가가 내렸을 때, 그 융합한 인격자가 초우주의 본부까지 언젠가 나아가도록 지역 우주의 경계를 궁극에 떠나라는 출국 허가이다. 초우주 본부로부터 시간의 순례자는 아득한 앞날에 하보나 중앙 우주와 신을 만나는 모험을 떠나도록 오랜 비행(飛行)을 위하여 2급 천사에 둘러싸인다.
112:7.6 (1238.1) 진화 세계에서 자아는 물질이다. 자아는 우주에서 한 사물이요, 그런 상태로 물질 존재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다. 자아는 시간 세계에서 한 사실이며, 세월 속의 변천에 민감하다. 살아남으려는 결정은 여기서 형성되어야 한다. 상물질 상태에서 자아는 새롭고 더 오래 가는 우주 실체가 되었고, 자아의 계속된 성장은 여러 우주의 지성 회로와 영 회로에 더욱 조율되는 데 달려 있다. 살아남으려는 결정은 이제 확인되고 있다. 자아가 영적 수준에 다다를 때, 자아는 우주에서 안전한 가치가 되었고, 이 새로운 가치는 살아남으려는 결정이 내렸다는 사실에 의존하며, 이 사실은 생각 조절자와 영원히 융합함으로 입증되었다. 참된 우주 가치를 지닌 지위를 성취했으니까, 그 사람은 가장 높은 우주 가치―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해방되는 잠재성을 얻는다.
112:7.7 (1238.2) 그러한 융합된 존재들의 우주 반응은 두 가지이다. 그들은 세라핌과 아주 다르지 않은, 따로 된 상물질 개인이며, 잠재성으로 보면 그들은 또한 파라다이스 최후자 서열에 있는 존재이다.
112:7.8 (1238.3) 그러나 융합된 개인은 정말로 한 인격, 한 존재이고, 이렇게 하나가 된 것을 우주에서 어떤 지적 존재가 분석하려 해도 조금도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낮은 데서부터 가장 높은 데까지 지역 우주의 법정을 거쳤는데, 이 중에서 아무도 사람이나 조절자, 하나와 다른 하나를 구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서 너는 마침내 네바돈의 군주에게, 지역 우주에서 너의 아버지 앞으로 인도된다. 거기서 창조하는 아버지 신분으로 이 시공 우주에서 네 생명의 사실을 가능하게 만든 바로 그 존재의 손에서 너는 신임장을 받을 터이고, 이것은 궁극에 우주의 아버지를 찾아서 너의 초우주 생애로 네가 진행하는 자격을 준다.
112:7.9 (1238.4) 승리한 조절자가 인간에게 훌륭하게 봉사함으로 인격을 얻었는가, 아니면 용감한 인간이 조절자와 같아지려는 성실한 노력을 통해서 불멸을 얻었는가? 이도 저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최상위의 하늘가는 인격자들 중에서 한 독특한 계급의 회원으로 진화를 마쳤으며, 그는 쓸모 있고, 충실하고, 능률 있다는 것이 언제라도 발견될 것이다. 그는 더욱 성장하고 발전하는 후보자요, 하보나의 일곱 회로를 거치고, 한때 땅에서 기원을 가졌던 혼이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의 실제 성격을 경건히 인식하면서 설 때까지, 늘 위로 뻗으며 그칠 줄 모르고 높이 올라간다.
112:7.10 (1238.5) 올라가는 이 장엄한 길에 내내, 생각 조절자는 하늘 가는 필사자를 앞으로 완전히 영적으로 안정시킨다는 신의 약속이다. 그동안에 필사자에게 자유 의지가 있는 것은 조절자에게 신답고 무한한 성품을 해방시키는 영원한 경로를 마련해 준다. 이제 이 두 신분이 하나가 되었다. 세월이나 영원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도 결코 사람과 조절자를 떼어낼 수 없으며, 그들은 갈라놓을 수 없고 영원히 융합되었다.
112:7.11 (1238.6) 조절자가 융합하는 여러 세계에서 신비의 훈계자의 운명은 하늘 가는 필사자의 운명과 동일하다―파라다이스 최후 군단이다. 조절자도 필사자도, 다른 쪽의 완전한 협동과 충실한 도움이 없이 그 독특한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이 특별한 협동 관계는 이 우주 시대의 모든 우주 현상 가운데, 가장 마음을 빼앗고 놀라운 일 중의 하나이다.
112:7.12 (1239.1) 조절자와 융합할 때부터 하늘 가는 자의 지위는 진화 인간의 지위이다. 인간 구성원은 먼저 인격을 누렸고, 따라서 인격자를 인식하는 데 관련된 모든 문제에서 조절자를 앞지른다. 이 융합된 존재의 파라다이스 본부는 신별이 아니라 승천자별이며, 하나님과 사람의 이 독특한 조합은 최후 군단에 이르기까지, 내내 하늘 가는 필사자로서 분류된다.
112:7.13 (1239.2) 조절자가 하늘 가는 필사자와 일단 융합하고 나서, 그 조절자의 번호는 초우주 기록에서 지워진다. 신별의 기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지만, 내가 추측하건대 그 조절자의 기록은 최후 군단의 임시 우두머리인 그랜드판다의 내부 법정의 비밀 영역으로 옮겨진다.
112:7.14 (1239.3) 조절자의 융합과 함께, 우주의 아버지는 물질인 인간에게 자신을 선물로 준다는 약속을 이루었다. 그는 사람에게 신성을 영원히 수여한다는 약속(約束)을 이행하고 그 계획을 성취하였다. 이처럼 사실이 된, 하나님과 가지는 숭고한 협동 관계에 본래부터 있는 한없는 가능성을 실현하고 현실로 만들려는 인간의 시도가 이제 시작된다.
112:7.15 (1239.4) 살아남는 필사자의 현재 알려진 운명은 파라다이스 최후 군단이다. 이것은 또한 필사 동반자와 영원한 결합 속에 합쳐진 모든 생각 조절자에게 운명의 목표이다. 파라다이스의 최후자들은 현재 대우주에 두루, 많은 사업에서 일하고 있지만, 일곱 우주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뒤 그 아득한 앞날에, 유한한 하나님이 이 최상 신을 지금 둘러싸는 신비에서 마침내 솟아났을 때, 그들은 실행할 다른 더욱 고귀한 과제들을 가질 것이라 우리 모두가 추측한다.
112:7.16 (1239.5) 너희는 어느 범위까지, 중앙 우주, 초우주, 지역 우주의 조직과 직원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너희는 방대한 이 창조들을 지금 다스리는 여러 성격자 중에서 어떤 이들의 특성과 기원에 관하여 무언가 일러주는 것을 들었다. 너희는 또한 대우주의 변두리를 지나서 멀리 바깥에, 첫째 바깥 공간 수준에서, 우주들을 담은 광대한 은하들이 조직되는 과정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엮는 과정에서 또한 최상 존재가 바깥 공간에, 지금 지도가 그려지지 않은 이 지역에서, 밝혀지지 않은 그의 3차 활동을 드러낼 것이라고 암시되었다. 너희는 또한 파라다이스 군단의 최후자들은 최상위의 체험하는 자녀라고 일러주는 것을 들었다.
112:7.17 (1239.6) 조절자와 융합한 필사자들은 동료 최후자들과 함께, 첫째 바깥 공간 수준에 있는 우주들의 관리에 어떤 방법으로 활동하도록 예정되었다고 우리는 믿는다. 우리는 때가 되면 이 엄청난 은하(銀河)들이 사람이 사는 우주가 되리라는 것을 한 푼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행정자들 사이에 파라다이스 최후자들이 발견될 것이라고 똑같이 확신하며, 그들의 성품은 인간과 창조자를 섞어서 생긴 우주 결과이다.
112:7.18 (1239.7) 얼마나 놀라운 모험인가! 얼마나 놀라운 모험담인가? 최상위의 자녀들, 인격을 얻고 사람처럼 된 이 조절자들, 조절자와 같아지고 영원하게 된 이 필사자들, 알려진 바 첫째 근원 중심의 본질의 가장 높은 표현, 그리고 우주의 아버지를 이해하고 그에 도달할 능력이 있는 가장 낮은 형태의 지적 생명, 이 둘의 신비스러운 조합이자 영원한 연합이 거대한 창조를 관리할 것이다. 그러한 합쳐진 존재들은 그러한 창조자와 인간의 협동 관계이며, 첫째 바깥 공간의 이 미래 우주들에서 두루 생기게 될지 모르는 모든 형태의 지적 생명의 훌륭한 통치자, 비할 데 없는 행정가, 이해심과 동정심이 있는 지도자가 될 것이라 우리는 상상한다.
112:7.19 (1240.1) 너희 필사자는 땅에서 동물의 기원을 가진 것이 참말이다. 너희의 뼈대는 정말로 티끌이다. 그러나 너희가 실제로 하겠다면, 너희가 정말로 바란다면, 오랜 세월에 걸쳐 내려온 유산(遺産)은 확실히 너희 것이요, 참된 인품을 입고서 너희는 언젠가 우주에서 두루 봉사하게 될 것이다―너희는 경험하는 최상위 하나님의 자녀요, 모든 성격자의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신다운 아들이다.
113:0.1 (1241.1) 시간 세계에서 봉사하는 영과 공간의 사자 무리들에 관한 이야기를 발표했으니, 우리는 수호 천사, 즉 개별 필사자에게 봉사하는 데 헌신하는 세라핌을 고려하게 된다. 필사자를 향상시키고 완전하게 만들기 위하여, 사람을 살아남게 하는 계획, 영적으로 진보하는 광대한 계획 전체가 마련되었다. 유란시아에서 지난 시대에, 이 운명 수호자들은 거의 유일하게 인정받은 천사 무리였다. 정말로 행성의 세라핌은 살아남을 자를 위하여 봉사하라고 파송된, 시중드는 영이다. 이 보살피는 세라핌들은 지난날과 오늘날의 모든 큰 사건에서 필사 인간의 영적 조수로서 활동해 왔다. 많은 계시에서 “천사들이 이렇게 말씀하였다.” 하늘에서 온 많은 지시는 “천사들이 봉사함으로 받았다.”
113:0.2 (1241.2) 세라핌은 전통적인, 하늘의 천사이다. 그들은 너희와 아주 가까이 살고, 너희를 위하여 대단히 많이 일하는, 보살피는 영이다. 그들은 인간의 지능이 발달한 초기부터 유란시아에서 봉사해 왔다.
113:1.1 (1241.3) 수호 천사에 관한 가르침은 신화(神話)가 아니다. 어떤 무리의 인간들은 실제로 개인 천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인정하여, 예수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에 관하여 말씀했다. “이 어린아이들 가운데 하나도 너희가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는 저희의 천사들이 언제나 내 아버지의 영이 계심을 바라보는 까닭이라.”
113:1.2 (1241.4) 최초에 세라핌들은 독립된 유란시아 종족들에게 분명히 배치되었다. 그러나 미가엘이 수여된 이후에, 그들은 인간의 지능, 영적 성향, 운명에 따라서 배치된다. 지능 면에서, 인류는 다음 세 등급으로 나눠진다:
113:1.3 (1241.5) 1. 보통 이하의 지성을 가진 자―정상의 의지력을 쓰지 못하는 자, 보통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자. 이 등급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 자를 포함한다. 그들은 신을 지적으로 예배하는 능력이 모자란다. 유란시아에서 보통 이하의 존재들은 한 대대(大隊)의 케루빔과 더불어, 한 무리의 세라핌, 즉 한 중대(中隊)를 그들에게 시중들라고 배치받으며, 이것은 또한 그 구체의 인생 투쟁에서 그들에게도 응보와 자비가 베풀어진다는 것을 증언한다.
113:1.4 (1241.6) 2. 보통 부류, 정상 부류의 인간 지성. 천사 봉사의 관점에서 볼 때, 대부분의 남녀는 인간이 진보하고 영적으로 발전하는 여러 수준을 거치면서, 그들의 지위에 따라서 일곱 등급으로 분류된다.
113:1.5 (1241.7) 3. 보통 이상의 지성을 가진 자―위대한 결정을 내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영적 성취의 잠재성을 가진 자. 깃드는 조절자와 얼마큼 접촉을 누리는 남녀. 다양한 운명 예비군의 구성원. 한 인간이 어쩌다가 어떤 수준에 있든지 상관 없이, 그러한 개인이 몇몇 운명 예비 군단 중에 어디라도 등록되면, 바로 그때 거기서, 개인 세라핌이 배치되고, 그때부터 땅에서 생애를 마칠 때까지, 그 필사자는 한 수호 천사의 계속된 봉사와 그침없는 보호를 받을 것이다. 또한 어떤 인간이라도, 최대의 결정을 내릴 때, 조절자와 진짜 약혼이 있을 때, 한 개인 수호자가 즉시 그 사람에게 배치된다.
113:1.6 (1242.1) 이른바 정상 존재들에게 봉사하는 경우에 천사의 배치는 인간이 지적ㆍ영적 수준을 도달한 데 따라서 정해진다. 너희는 7급 수준에서 필사의 옷을 입은 지성 속에서 시작하여, 자아를 이해하고, 자아를 정복하고, 자아를 통달하는 과제에서 안으로 여행한다. (자연사가 너의 생애를 끝내고 너의 투쟁을 저택 세계로 옮기지 않으면) 깃드는 조절자와 비교적 접촉이 있고 교통하는 1급 수준, 즉 안쪽 수준에 이를 때까지, 너는 한 수준, 한 수준 올라간다.
113:1.7 (1242.2) 초기 수준, 즉 7급 수준에 있는 인간들은, 필사자 1천 명을 돌보고 관리하는 데 배치된 1개 중대의 보조 케루빔과 함께 수호 천사 1명을 가지고 있다. 6급 수준에서는 1개 중대의 케루빔과 더불어 천사 한 쌍이, 이 하늘 가는 필사자 5백 명의 무리를 안내하는 데 배치된다. 5급 수준에 도달했을 때, 인간들은 약 1백 명의 중대로 분류되며, 한 집단의 케루빔과 함께 수호 세라핌 한 쌍이 책임을 맡는다. 4급 수준에 이르고 나서, 필사 존재들은 10명씩 집단을 이루어 집합되고, 다시 책임이 한 쌍의 세라핌에게 맡겨지고 이들은 1개 중대 케루빔의 도움을 받는다.
113:1.8 (1242.3) 한 필사 지성이 동물적 유산(遺産)의 타성을 깨뜨리고 인간의 지능과 도달한 영적 정도가 3급 수준에 이르렀을 때, 그때부터 개인 천사가 (실제는 둘) 하늘 가는 이 필사자에게 전적으로, 독점하여 헌신한다. 이처럼 이 인간의 혼은, 항상 계시고 점점 더 유능한 깃드는 생각 조절자뿐 아니라, 3급 수준을 마치고 2급 수준을 거치고 1급 수준에 도달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동안, 이 개인 운명 수호자들의 집중된 도움을 받는다.
113:2.1 (1242.4) 세라핌은 세 가지 업적 중에 하나나 그 이상(以上)을 실현한 인간 혼과 관계하는 데 배치될 때까지 운명의 수호자로 알려지지 않는다: 그 사람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최고의 결정을 내렸거나, 3급 수준에 들어갔거나, 아니면 운명 예비군 가운데 하나에 소집되었다.
113:2.2 (1242.5) 민족들의 진화에서, 필요한 도달 수준에 다다른 가장 첫 존재에게 한 운명 수호자가 배치된다. 유란시아에서 개인 수호자를 얻은 처음 필사자는 란토왁이었는데, 그는 오래 전에 홍인종의 현자였다.
113:2.3 (1242.6) 모든 천사 배치는 한 자원하는 세라핌 집단이 정하며, 이 임명은 언제나 인간의 필요에 따라서, 천사 쌍의 지위를 고려해서―천사의 체험ㆍ기술ㆍ지혜에 비추어서―정해진다. 오로지 오랫동안 봉사한 세라핌, 경험이 많고 시험을 겪은 부류가 운명의 파수로서 배치된다. 허다한 수호자가 조절자와 융합하지 않는 시리즈의 세계에서 값진 체험을 많이 겪었다. 조절자와 마찬가지로, 세라핌은 꼭 한 일생 동안 이 존재들을 따라다니며, 다음에 새로운 배치를 받기 위하여 해방된다. 유란시아에 있는 많은 수호자가 다른 여러 세계에서 이전에 이 실제 체험을 가졌다.
113:2.4 (1243.1) 인간들이 살아남지 못할 때, 그들의 개인 수호자나 집단 수호자는 같은 행성에서 비슷한 자격으로 되풀이해서 근무해도 좋다. 세라핌들은 개별 세계에 대하여 감상적인 호감을 가지게 되며, 아주 가깝고 밀접하게 관계했던 어떤 민족과 부류의 필사 인간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품는다.
113:2.5 (1243.2) 천사들은 그 인간 동료에 대하여 오래 가는 애정을 가지게 된다. 너희가 단지 그 세라핌들을 눈에 선하게 볼 수만 있다면, 그들에게 따듯한 애정을 가지게 될 것이다. 물질 몸을 벗어 버리고 영 형태가 주어지면, 너희는 인격의 여러 속성으로 볼 때 천사와 매우 가까울 것이다. 그들은 너희가 가진 감정의 대부분을 함께 가지며, 그 위에 몇 가지를 더 체험한다. 너희를 움직이고 그들이 얼마큼 이해하기 어려운 유일한 감정은, 유란시아에서 사는 보통 거주자의 정신 생활에서 아주 크게 자리잡는 동물적 두려움의 유산이다. 너희가 어째서 상급의 지적 능력, 아니 너희의 종교적 믿음까지도 그렇게 두려움에 지배되도록 버려두는지, 겁에 질려 걱정하며 어리석게 공포에 빠져 아주 철저히 사기가 죽는지, 천사들은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113:2.6 (1243.3) 세라핌은 모두 각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세계 근무에 배치하는 기록에, 그들은 흔히 자기의 행성 번호로 호칭된다. 우주 본부에서 그들은 이름과 번호로 등록된다. 이 접촉하는 통신에 쓰인 인간 주체의 운명 수호자는 네바돈의 제 182,314 천사군의 37 군대, 6 군단, 384 단위, 4 대대(大隊), 126 중대(中隊), 17 소대의 3번이다. 유란시아에서 이 세라핌, 그리고 이 인간 주체에게 주어진 현재 행성 임명 번호는 3,641,852이다.
113:2.7 (1243.4) 개인 수호자의 직무에서, 천사들을 운명 수호자로 배치할 때, 세라핌들은 언제나 봉사를 자원한다. 이번에 방문한 도시에서 어떤 필사자가 최근에 운명 예비군에 가입 허락을 받았다. 모든 그러한 인간에게 개인적으로 수호 천사가 따라붙으니까, 자격 있는 세라핌이 백 명이 넘게 그 배치를 받으려 하였다. 행성 지도자는 경험이 많은 개인들 중에서 12명을 뽑았고, 일생의 여행을 통해서, 이 인간을 안내하기에 가장 알맞다고 그들이 선택한 세라핌을 나중에 임명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똑같이 자격을 갖춘 세라핌 한 쌍을 골랐다. 이 세라핌 쌍 가운데 하나는 언제나 근무 중일 것이다.
113:2.8 (1243.5) 천사의 과제는 끊임 없을지 모르지만, 천사 쌍의 어느 쪽도 모든 시중드는 책임을 처리할 수 있다. 케루빔처럼, 세라핌은 보통 쌍으로 일하지만, 그들 아래에 있는 동료들과 달리, 세라핌은 때때로 혼자서 일한다. 인간들과 가지는 거의 모든 접촉에서 그들은 개인으로서 활동할 수 있다. 오직 우주의 상급 회로에서 통신하고 일하기 위해서, 두 천사가 필요하다.
113:2.9 (1243.6) 수호자 임무를 받아들일 때, 세라핌 한 쌍은 그 인간의 여생 동안 봉사한다. 존재의 보완자가 (두 천사 가운데 하나) 그 사업의 기록자가 된다. 이 보완 세라핌은 여러 진화 세계에서, 필사자의 기록 천사이다. 케루빔 쌍이 (케루빔 1명과 사노빔 1명) 기록을 유지하며, 이들은 언제나 그 수호 세라핌들과 관련되지만, 언제나 세라핌 중 하나가 이 기록을 보증한다.
113:2.10 (1244.1) 쉬고, 우주 회로의 생명 에너지로 다시 충전할 목적으로, 정기적으로 수호자를 그 보완자가 교대한다. 그리고 그가 자리를 비울 때 관련된 케루빔이 기록자로서 활동하며, 이것은 또한 그 보완 세라핌이 비슷하게 자리를 비울 때도 마찬가지이다.
113:3.1 (1244.2) 운명 수호자가 그 필사 주체를 위하여 하는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진화하는 물질 인간의 지성과 혼에 깃들고, 부딪치고, 이를 둘러싸는 수많은 비성격 영의 영향을 친히 조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인격자이며, 비인격 영과 선(先)인격 개체들이 그렇게 다분히 물질적이고 별개의 사적인 지성과 바로 접촉하기는 극히 힘들다. 지키는 천사의 사명에서 이 모든 영향은 얼마큼 통일되고, 진화하는 인간 성격의 성장하는 도덕적 성품이 이를 더 가깝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13:3.2 (1244.3) 특히, 이 수호 세라핌은 물리 통제자와 보조 지성 영들의 영토로부터 신성한 봉사자의 성령, 그리고 파라다이스의 셋째 근원 중심의 두루 계시는 영 계심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영의 다양한 대리자 및 영향을 상관시킬 수 있고, 또 그렇게 한다. 무한한 영의 이 광대한 보살핌을 이처럼 통일하고 더 개인적으로 만들고 나서, 다음에 그 세라핌은 합동 행위자의 이 통합된 영향을 아버지와 아들의 영적 계심과 상관시키는 일에 착수한다.
113:3.3 (1244.4) 조절자는 아버지의 계심이요 진리의 영은 아들의 계심이다. 이 신성한 재산은 수호 세라핌의 봉사로 인하여, 사람의 영적 체험의 하위 수준에서 통일되고 조정된다. 봉사하는 천사들은 필사 인간에게 봉사하면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자비를 통합하는 데 재질이 있다.
113:3.4 (1244.5) 육체가 죽고 상물질로 부활하는 사이의 시간에, 어째서 결국 수호 세라핌이 살아남는 필사자의 생각 형태, 기억 형식, 혼 실체들을 친히 보관하는 자가 되는가 하는 까닭이 여기에 드러난다. 무한한 영의 봉사하는 자손들 외에 아무도 우주의 한 수준에서 다른 더 높은 수준까지 이동하는 이 단계에서, 이렇게 인간을 위하여 활동할 수 없다. 너희가 마지막 이동하는 잠에 들어갈 때, 너희가 시간 세계에서 영원으로 지나갈 때에도, 한 높은 상천사가 인간 신분의 보관자로서, 인격을 고스란히 간직한 보장(保障)으로서, 너와 함께 이동한다.
113:3.5 (1244.6) 영적 수준에서, 세라핌은 우주에서 달리 개인적이 아니고 선(先)인격인 많은 봉사를 친히 베푼다. 그들은 조정하는 자이다. 지적 수준에서 지성과 상물질을 상관시키는 자이다. 그들은 해석하는 자이다. 물리적 수준에서 그들은 물리 통제사들과 연락을 가짐으로, 그리고 중도인의 협조하는 봉사를 통해서, 땅의 환경을 조종한다.
113:3.6 (1244.7) 이것이 시중드는 세라핌의 다채롭고 복잡한 활동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주에서 인류의 수준보다 조금만 높게 창조된, 그런 하급 천사 성격자가 어떻게 그토록 어렵고 복잡한 일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정말로 모르지만, 이 놀라운 봉사는 어떤 밝혀지지 않은 방법으로, 최상 존재의 인식되지 않고 밝혀지지 않은 작용 때문에 수월하게 된다고 추측하며, 그는 시공의 진화하는 여러 우주에서 현실화되고 있는 신이다. 최상 존재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진보하여 살아남는 영역에 두루, 세라핌은 필사자의 계속되는 진보에 필수인 부분이다.
113:4.1 (1245.1) 수호 세라핌은 지성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필사 지성에도 기원을 주는 똑같은 근원, 창조 영으로부터 솟아난다. 세라핌은 생각하는 머리를 자극하는 자이다. 그들은 인간의 머리 속에서 여러 수준에 도달하는 결정을 촉진하려고 줄곧 애쓴다. 조절자가 하듯 안에서부터 혼을 통해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깥에서 안을 향하여, 인간들의 사회ㆍ윤리ㆍ도덕적 환경을 통해서 일한다. 세라핌은 우주의 아버지가 미끼로 쓰는 신다운 조절자는 아니지만, 무한한 영의 봉사를 몸소 베푸는 대리자로서 활동한다.
113:4.2 (1245.2) 조절자의 지도를 받으면서, 필사 인간은 또한 세라핌의 안내를 쉽게 따른다. 조절자는 사람의 영원한 성품의 본질이요, 세라핌은 사람의 진화하는 성품―이 세상에서 필사 지성을, 다음 세상에서는 상물질 혼―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저택 세계에서 너희는 세라핌 강사(講師)들을 의식하고 그들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겠지만, 첫 세상에서 사람들은 보통 그들이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113:4.3 (1245.3) 세라핌은 새로운 진취적 체험이 있는 길로 인간의 발걸음을 안내함으로 사람들의 선생으로서 활동한다. 한 세라핌의 안내를 받아들이는 것은 편안한 생활을 뜻하는 일이 드물다. 이 인도함을 따르면서 너희는 도덕적 선택과 영적 진보가 있는 험한 산에 분명히 부딪치며, 너희가 용기가 있다면 그 산을 거쳐 갈 것이다.
113:4.4 (1245.4) 신을 예배하려는 충동은 대체로 상급 지성 보조자들의 영적 재촉으로 시작되고, 조절자의 이끄심으로 보강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식하는 필사자가 무척 자주 체험하는 기도(祈禱)하고 싶은 충동은 아주 흔히 세라핌이 영향을 미치는 결과로서 일어난다. 수호 세라핌은 하늘 가는 사람의 우주 통찰력을 키우려는 목적으로, 필사자의 환경을 항상 조종하며, 이것은 그러한 생존 후보자가 깃드는 조절자의 계심을 더욱 깨닫고, 이처럼 신의 계심이 이룰 영적 사명에 더욱 협동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113:4.5 (1245.5) 겉보기에, 깃드는 조절자와 둘러싸는 세라핌들 사이에 아무런 통신이 없는 듯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지극하게 한 마음으로 일하는 듯하다. 조절자의 활동이 가장 적을 때 수호자들이 가장 활발하지만, 그들의 봉사는 어떤 방법으로 이상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한 훌륭한 협동은 도저히 어쩌다가 생기거나 우연히 일어난다고 할 수 없다.
113:4.6 (1245.6) 수호 세라핌의 봉사하는 성격, 깃드는 조절자의 하나님 계심, 성령의 연결된 활동, 그리고 진리의 영이 가진 아들의 의식은 모두 한 필사 인격자 안에서, 그리고 그에게 베푸는 영적 봉사가 뜻 깊게 통일됨으로 서로 신성하게 관련된다. 비록 다른 근원과 다른 수준으로부터 오더라도, 이 하늘 영향력은 모두 최상 존재의 둘러싸고 진화하는 계심 속에서 통합된다.
113:5.1 (1245.7) 천사들은 인간 지성의 존엄성을 침범하지 않는다. 그들은 필사자의 의지를 조종하지 않는다. 그들은 깃드는 조절자와 바로 접촉하지도 않는다. 운명 수호자는 네 인격의 위엄을 지키는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너에게 영향을 미친다. 어떤 경우에도 이 천사들은 인간 의지의 자유 행위에 간섭하지 않는다. 천사나 어떤 다른 계급의 우주 성격자도, 인간이 택하는 특권을 줄이거나 단축할 권력이나 권한이 없다.
113:5.2 (1246.1) 천사들은 너희와 아주 가까이 있고 애틋하게 너희에게 관심을 가져서, 비유로 말하자면 “너희가 고집하여 아량이 없고 완고하기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 세라핌은 육체로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육체가 없다. 날개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 감정을 가졌고, 영적 성질의 느낌과 감정을 체험하며, 이것들은 어떤 면에서 인간의 감정과 비할 만하다.
113:5.3 (1246.2) 세라핌은 너희가 직접 하소연하는 것과 아주 상관 없이, 너희를 위하여 행동한다. 그들은 상관들의 명령을 집행하며, 따라서 너희의 지나가는 변덕이나 바뀌는 기분과 상관 없이 활동한다. 이것은 너희가 그들의 과제를 더 쉽게, 또는 더 어렵게 만들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차라리 천사들은 너희의 하소연이나 너희가 드리는 기도에 직접 아랑곳하지 않음을 뜻한다.
113:5.4 (1246.3) 천사들의 지능은 필사 인간이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인간에게 직접 소용되지 않는다. 그들은 대군주나 지도자가 아니다. 다만 수호자일 뿐이다. 세라핌들은 너희를 지킨다. 너희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려고 애쓰지 않는다. 너희는 자신의 갈 길을 계획해야 하지만, 그리고 나서 이 천사들은 네가 고른 길을 가능한 최선으로 이용하려고 행동한다. 그들은 인생의 일상 사무에 (보통은) 멋대로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공적을 세우라고 상관들로부터 지시를 받을 때, 너희는 이 수호자들이 그 명령을 수행하는 어떤 수단을 찾아내리라는 것을 안심하고 믿어도 좋다. 따라서 비상시가 아니면, 그것도 보통은 상관의 직접 명령을 받은 경우가 아니면, 그들은 인간 드라마의 그림 속으로 쳐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너희를 따라다닐 존재이며, 따라서 그들의 미래 작업과 인격 관계에 대하여 기초 교육을 받고 있다.
113:5.5 (1246.4) 세라핌은 어떤 상황에서 인간에게 물질적 봉사자로서 활동할 수 있지만, 이 자격으로 활동하는 일은 아주 드물다. 중도인과 물리 통제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은 인간의 이익을 위하여 넓은 범위에서 활동할 수 있다. 인류와 실제로 접촉하는 일조차 할 수 있지만, 그러한 일은 대단히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에 물질 영역의 상황은 세라핌의 행위에 영향을 받지 않은 채로 진행된다. 하지만 인간의 진화의 사슬에서 사활(死活)을 좌우하는 고리에 위험을 미치는 경우가 일어난 적이 있었고, 그런 경우에 수호 세라핌들이 당연히 솔선해서 행동했다.
113:6.1 (1246.5) 자연 수명을 누리는 동안에 세라핌이 베푸는 봉사에 대하여 무언가 너희에게 일러 주었으니, 나는 그 인간 동료가 필사의 분해를 겪을 때 운명 수호자들이 무슨 행동을 하는가 너희에게 알려주려고 노력하겠다. 네가 죽고 나서, 너의 기록, 신분의 세목, 그리고―필사 지성과 신다운 조절자의 봉사로 인하여 합동으로 진화한―인간 혼의 상물질 개체를, 너의 미래 존재에 관계되는 모든 다른 가치와 함께, 너, 진짜 너를 구성하는 모든 것과 함께, 운명 수호자가 충실하게 간직한다. 떠나는 조절자, 그리고 사실로 있던 인격이 대표하는, 계속 존재하는 신분은 제외된다.
113:6.2 (1246.6) 인간 지성에서 표시등(表示燈), 즉 세라핌이 조절자의 계심과 연결시키는 영(靈)의 광채가 사라지는 순간, 시중드는 천사는 연달아서 그 소대ㆍ중대ㆍ대대ㆍ단위ㆍ군단ㆍ군대의 지휘하는 천사들에게 몸소 보고한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마지막 모험을 위하여 정식으로 등록된 뒤에, 그러한 천사는 이 우주 승천 후보자의 천사군을 지휘하는 저녁별에게(또는 가브리엘의 다른 부관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행성의 세라핌 우두머리의 인가를 받는다. 가장 높은 이 조직 단위의 지휘자로부터 허락을 받고 나서, 그러한 운명 수호자는 첫째 저택 세계로 나아가고, 거기서 예전에 육체를 입고서 보호받던 자가 정신 차리기를 기다린다.
113:6.3 (1247.1) 개인 천사를 배치받고 난 뒤에 인간의 혼이 살아남지 못할 경우에, 시중들던 세라핌은 지역 우주의 본부로 나아가서, 거기서 전에 보고한 대로 그의 보완자의 전체 기록을 증거해야 한다. 다음에 그의 주체가 살아남지 못한 문제에서 책임을 면제받으려고, 천사장들의 법정 앞으로 간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하늘 가는 잠재성을 가진 또 다른 필사자에게, 아니면 세라핌이 봉사하는 어떤 다른 분과로 다시 배치를 받으려고 세계들로 돌아간다.
113:6.4 (1247.2) 그러나 개인 수호자와 집단 수호자 자격으로 봉사하는 것 외에도, 여러 방법으로 천사들은 진화하는 사람들의 시중을 든다. 저택 세계로 바로 가지 않는 주체를 지키던 개인 수호자들은, 할 일 없이 섭리 시대의 심판 점호를 기다리면서 거기에 묵지 않는다. 그들은 우주에 두루, 수많은 봉사 임무에 다시 배치된다.
113:6.5 (1247.3) 수호 세라핌은 필사 인간의 잠자는 혼의 살아남는 가치를 보관하는 수탁자이며, 마찬가지로 자리를 비운 조절자는 그러한 불멸하는 우주 존재의 신분이다. 새로이 빚어낸 상물질 형태와 연결하여 이 둘이 저택 나라의 부활실에서 같이 일할 때, 필사 승천자의 인격을 구성하는 요인들의 재조립이 일어난다.
113:6.6 (1247.4) 조절자는 너를 확인할 것이다. 수호 세라핌은 너를 다시 인격을 갖추게 하고, 그리고 나서 네가 땅에서 살던 시절의 충실한 훈계자에게 너를 다시 내보인다.
113:6.7 (1247.5) 그렇다 하더라도, 한 행성 시대가 끝날 때, 필사자로 하위 수준에 도달한 자들이 같이 모일 때, 여러 저택 구체의 부활실에서 그들을 다시 조립하는 것은 그들의 집단 수호자이며, 너희의 기록도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그는 큰 목소리를 가진 그의 천사들을 보낼 것이요, 그 나라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까지 그가 택한 자들을 함께 모으리라.”
113:6.8 (1247.6) 응보의 기법은 개인 수호자나 집단 수호자들이 살아남지 못하는 모든 성격자를 위하여 섭리 시대의 점호에 응답하라고 요구한다. 그러한 살아남지 못하는 자의 조절자는 돌아오지 않고, 점호를 부를 때 세라핌은 대답하지만, 조절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것이 “불의한 자의 부활”이요, 실제는 사람의 존재가 그침을 공식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 응보의 점호는 반드시 자비의 점호, 즉 잠자는 생존자들의 부활 바로 뒤에 따른다. 그러나 이것은 살아남는 가치를 가리는, 지고하고 전지한 심판들 외에 아무도 아랑곳할 바가 아니다. 그런 판결 문제는 정말로 우리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113:6.9 (1247.7) 집단 수호자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한 행성에서 봉사하고, 결국 수많은 잠자는 생존자의 잠든 혼의 보관자가 될지 모른다. 부활 반응이 저택 세계들에서 일어나니까, 그들은 한 주어진 체계의 많은 다른 세계에서 그렇게 근무할 수 있다.
113:6.10 (1247.8) 사타니아 체계에서, 루시퍼 반란이 있었을 때 잘못된 길에 빠졌던 개인 수호자와 집단 수호자들은, 다수가 어리석음을 진심으로 뉘우쳤는데도, 모두 그 반란의 마지막 판결이 있을 때까지 예루셈에 감금될 것이다. 우주 검열자들은 말을 듣지 않는 불충한 수호자들로부터 그들이 맡았던 혼들의 모든 모습을 가져갔고, 이 상물질 실체들을 안전히 보호하기 위하여 자원한 2품 천사들이 관리하라고 맡겼다.
113:7.1 (1248.1) 저택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이렇게 처음으로 깨어나는 것, 땅에서 살던 시절에 오래 사랑하고 늘 곁에 있던, 너를 동반하던 천사들을 거기서 처음으로 실제로 보는 것, 또한 땅에서 너의 지성에 그렇게 오래 깃들던 신다운 훈계자의 신분과 계심을 거기서 참으로 의식하게 되는 것은 하늘 가는 필사자의 생애에서 정말로 하나의 신기원이다. 그러한 체험은 영화로운 깨어남이요, 진정한 부활이다.
113:7.2 (1248.2) 상물질 구체에서 너의 시중을 드는 세라핌은 (두 명이 있다) 너의 공개된 동반자이다. 이 천사들은 여러 과도기 세계의 생애를 통해서 네가 진보하는 동안, 상물질 지위와 영 지위를 얻는 일에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너를 도우면서 너와 사귈 뿐 아니라, 여러 저택 세계에서 유지되는, 진화 세라핌을 위한 연장(延長) 학교에서 공부함으로 승진할 기회를 이용한다.
113:7.3 (1248.3) 인류는 단순한 부류의 천사 계급들보다 조금 못하게 지어졌다. 따라서 상물질 생활에서 너의 첫 임무는, 육체의 사슬로부터 풀려난 뒤에 인격 의식을 얻을 때 기다리고 있는 과제, 즉시 닥친 과제에서 세라핌에게 조수(助手) 노릇일 것이다.
113:7.4 (1248.4) 저택 세계들을 떠나기 전에, 모든 필사자가 영구한 세라핌 동료나 수호자들을 가질 것이다. 너희가 상물질 구체들을 올라감에 따라서, 생각 조절자와 네가 영원히 결합한다는 선포를 증언하고 인가하는 것은 결국, 수호 세라핌이다. 그들은 함께 너희의 인격 신분이 시간 세계로부터 온 육체를 입은 아이라고 증거한다. 그리고 나서 너희가 성숙한 상물질 상태에 이르면, 그들은 예루셈, 그리고 체계의 진보 및 문화를 가르치는 관련된 세계들을 거쳐서, 너희를 따라간다. 그 다음에 너희와 함께 에덴시아, 그리고 상급 교제가 있는, 그에 소속된 70 구체까지 간다. 나중에 그들은 멜기세덱들 앞까지 너희를 안내하고, 우주 본부 세계들에서 보내는 멋진 생애를 통하여 너희를 따라갈 것이다. 너희가 멜기세덱들의 지혜와 문화를 배우고 나서, 그들은 계속 너희를 구원자별로 데려갈 터이고, 거기서 너희는 온 네바돈의 군주와 얼굴을 마주하고 서게 될 것이다. 아직도 이 안내하는 천사들은 초우주의 소구역과 대구역을 통해서, 유버르사의 접대 세계들까지 줄곧 너희를 따라가고, 너희가 긴 하보나 비행(飛行)을 위하여 마침내 2품 천사에 둘러싸일 때까지, 너희와 함께 남아 있을 것이다.
113:7.5 (1248.5) 필사 생애 동안에 딸려 있던 운명 수호자들 가운데 더러는 하보나를 통해서 하늘 가는 순례자의 과정을 밟는다. 더러는 그들이 오래 사귀던 필사 동료에게 일시 작별하고, 다음에 이 필사자들이 중앙 우주의 궤도들을 통과하는 동안, 이 운명 수호자들은 천사별에서 그 여러 궤도를 마친다. 필사 동료가 시간 세계에서 마지막 이동의 잠에 들어갔다가 영원의 새로운 체험 속으로 깨어날 때, 그들은 파라다이스의 기슭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하늘 가는 세라핌들은 나중에 최후자 군단에서, 그리고 완결 천사 군단에서 다채로운 봉사에 들어간다.
113:7.6 (1248.6) 사람과 천사는 영원히 봉사할 때 다시 합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천사 임무가 어디로 데리고 가든지, 세라핌들은 진화 세계에서 온, 예전에 보호하던 자, 시간 세계의 하늘 가는 필사자와 언제나 교통한다. 인간이 기원을 가졌던 영역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애정을 느끼는 소속감은 결코 잊혀지지 않고, 완전히 끊어지지도 않는다. 사람과 천사는 시간 세계의 생애에서 한 것처럼, 영원한 시대에 신성한 근무에서 협동할 것이다.
113:7.7 (1249.1) 세라핌이 파라다이스 신들에게 도달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진화의 기원을 가진 한 사람을 파라다이스 입구까지 안내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운명 수호자로 배치 받는 것은 가장 높이 치는 천사 임무이다.
113:7.8 (1249.2) 오직 운명 수호자들이 1차 군단, 즉 필사 최후 군단으로 소집된다. 그러한 쌍들은 신분이 하나가 되는 최고의 모험에 말려들었다. 그들이 최후자 군단에 받아들여지기 전에, 두 존재는 천사별에서 영적으로 둘이 하나됨을 이룩한 것이다. 모든 우주 활동에서 그렇게 보완하던 두 천사 성품은, 이 체험에서 궁극에 두 영의 일치를 이룩하며,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비조절자 분신을 받고 그와 융합하는 새로운 능력 반응을 일으킨다. 그래서 시간 세계에서 너희가 사랑하던 천사 동료들 가운데 더러는 또한 영원 속에서 최후자 동료가 되니, 이들은 최상위의 아이요,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완전하게 된 아들이다.
114:0.1 (1250.1) 최고자들은 많은 하늘 세력과 대리자를 통해서, 그러나 주로 세라핌의 봉사를 통해서, 사람의 나라들을 다스린다.
114:0.2 (1250.2) 오늘 정오에, 유란시아에 있는 행성 천사와 수호자, 그리고 다른 자들의 출석 상황은 501,234,619쌍의 세라핌이었다. 나의 지휘 밑에, 200 천사군―세라핌 597,196,800쌍, 곧 개별 천사 1,194,393,600명―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기록부는 천사가 1,002,469,238명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천사 191,924,362명이 이 세계에서 수송ㆍ사자(使者)ㆍ사망의 임무를 띠고 자리를 비운 것이다. (유란시아에는 세라핌과 대체로 같은 수의 케루빔이 있고, 그들은 비슷하게 조직되어 있다.)
114:0.3 (1250.3) 세라핌 및 관계된 케루빔은 한 행성, 특히 반란으로 고립된 세계의 초인간 정부의 세부(細部)와 크게 상관이 있다. 천사들은 중도자(中道者)들의 유력한 도움을 받으며, 거주하는 총독과 그의 모든 동료 및 부하의 명령을 집행하는 봉사자, 실제로 물질을 초월하는 봉사자로서 유란시아에서 활동한다. 세라핌 등급은 개인 수호자와 집단 수호자가 아닌 많은 임무에 종사한다.
114:0.4 (1250.4) 유란시아는 체계ㆍ별자리ㆍ우주의 통치자들로부터 적절하고 효과적인 감독도 없이 지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행성의 정부는 사타니아 체계에서, 아니 온 네바돈에서도, 어느 다른 세계의 정부와도 다르다. 너희를 감독하는 계획이 이렇게 독특한 것은 몇 가지 특별한 상황 때문이다:
114:0.5 (1250.5) 1. 유란시아의 생명 수정(修正) 지위.
114:0.6 (1250.6) 2. 루시퍼 반란의 긴급 사태.
114:0.7 (1250.7) 3. 아담의 직무 불이행이 가져온 소동.
114:0.8 (1250.8) 4. 유란시아가 우주 군주가 수여된 세계들 중에 하나라는 사실로부터 생겨나는 여러 가지 불규칙한 점. 네바돈 미가엘은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이다.
114:0.9 (1250.9) 5. 행성 지도자 24명의 특별 기능.
114:0.10 (1250.10) 6. 행성에 천사장 회로가 설치된 것.
114:0.11 (1250.11) 7. 한때 육신화한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행성 영주 대관(大官)으로 근래에 지명된 것.
114:1.1 (1250.12) 사타니아 체계의 군주가 최초의 유란시아 통치권을 위탁받았다. 그는 이것을 처음에 멜기세덱과 생명 운반자들의 합동 위원회에게 넘겨주었고, 이 집단은 정식으로 선정된 행성 영주가 도착할 때까지 유란시아에서 활동했다. 루시퍼 반란이 있던 시절에 칼리가스티아 영주가 몰락한 뒤에, 유란시아는 미가엘이 육신을 입고 자신 수여를 마칠 때까지, 지역 우주 및 그 행정 분과들과 확실하고 안정된 어떤 관계도 가지지 않았고, 이때 늘 하나된 이는 미가엘이 유란시아의 영주라고 선포했다. 그러한 선포는 확실히, 원칙으로, 언제까지나 너희 세계의 지위를 해결했지만, 실제로 군주인 창조 아들은 유란시아 및 체계에서 격리된 모든 다른 행성의 정부에서 그를 대표할 권한을 가진 위원회, 옛 유란시아인 24명으로 이루어진 예루셈 위원회를 설립한 것을 제외하고, 행성을 친히 관리하려고 아무런 표시도 보이지 않았다. 이 위원회 중에서 한 명은 거주하는 총독으로서, 지금 언제나 유란시아에서 거주한다.
114:1.2 (1251.1) 행성 영주인 미가엘을 대신하는 대행(代行) 권한은 요즈음에 마키벤타 멜기세덱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이 지역 우주 아들은 거주하는 총독들이 연속하여 행정을 맡는 현재의 행성 체제를 수정하려는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114:1.3 (1251.2) 행성 영주 대행이 그의 직함에 따른 책임을 맡으려고 도착하지 않으면, 현재 섭리 시대 동안에, 유란시아 정부에서 아무런 뚜렷한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거의 없다. 우리 동료들 중에서 어떤 자들에게는, 언젠가 가까운 앞날에 24 상담자 가운데 하나를 총독으로서 행동하라고 유란시아로 보내는 계획이,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유란시아를 통치하는 대행 명령을 가지고 정식으로 오는 것으로 대체될 듯이 보인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는 행성 영주 대행으로서, 루시퍼 반란이 마침내 판결될 때까지, 아마도 행성이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는 아득한 그 앞날까지 줄곧, 행성의 책임을 맡을 것이다.
114:1.4 (1251.3) 더러는 현재 섭리 시대가 끝날 때까지, 마키벤타가 유란시아의 사무를 친히 지휘하려고 오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더러는 미가엘이 아직 육체를 입었을 때 약속한 대로 유란시아로 언젠가 돌아올 때까지, 영주 대행은 그런 식으로 오지 않을지 모른다고 주장한다. 또 더러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자도 포함하여, 어느 날 어느 시각이라도, 멜기세덱이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114:2.1 (1251.4) 너희 세계에 미가엘이 수여된 시절 이후로, 유란시아의 일반 관리는 한때 유란시아인이었던 24자로 구성된, 예루셈의 특별 집단에게 맡겨졌다. 이 위원회의 위원 자격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가 지켜보건대 그렇게 임명받은 자는 모두 사타니아 체계에서 최상위의 확대되는 통치권에 이바지한 사람이었다. 성품으로 보면 그들은 유란시아에서 활동할 때 모두 진정한 지도자였고, (마키벤타 멜기세덱을 제외하고) 이 지도자 품질은 저택 세계의 체험으로 인하여 더욱 커지고 예루셈 시민 훈련을 받아서 보충되었다. 위원들은 라나포지의 내각으로부터 24자 자리에 지명을 받으며,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의 재청을 받고 예루셈의 지정된 파수의 인가를 받으며, 미가엘의 명령에 따라서 구원자별의 가브리엘로부터 임명을 받는다. 임시로 임명받은 자는 이 특별 감독자 위원회의 영구 위원과 똑같이 활동한다.
114:2.2 (1251.5) 이 행성 관리자 위원회는 미가엘이 여기서 그의 마지막 자신 수여를 체험했다는 사실로부터 이 세계에서 생기는 활동을 감독하는 데 특히 관심을 가진다. 어떤 찬란한 저녁별의 연락 활동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미가엘과 가깝고도 밀접한 접촉이 유지되며, 그 찬란한 저녁별은 필사자로 자신을 수여하는 동안 예수에게 시중들었던 동일한 존재이다.
114:2.3 (1252.1) 너희에게 “세례자”라고 알려진 어떤 요한이, 현재 이 위원회가 예루셈에서 열릴 때 사회자이다. 그러나 이 위원회의 직권상 우두머리는 사타니아의 지정된 파수이며, 그는 구원자별에 있는 부검열자와 오르본톤의 최상 행정자를 직접 개인적으로 대표한다.
114:2.4 (1252.2) 옛 유란시아인들로 이루어진 바로 이 위원회의 위원들은 또한 체계에서 반란으로 고립된 다른 36 세계에 자문하는 감독자로서 행동한다. 그들은 체계 군주 라나포지가 이 행성들의 사무에 가깝고도 이해심 있는 손길을 유지하게 하는 데 매우 귀중한 봉사를 베푼다. 이 행성들의 사무는 아직도 다소 놀라시아덱의 별자리 아버지들의 전반적 통제 밑에 남아 있다. 이 24 위원은 격리된 각 행성에, 특히 유란시아에, 개인으로서 자주 다녀간다.
114:2.5 (1252.3) 고립된 다른 세계들은, 각각 한때 거기에 거주하던 자들로 이루어진, 비슷하고 크기가 다른 여러 위원회의 자문을 받는다. 그러나 이 다른 위원회들은 유란시아인 24자 집단 밑에 있다. 유란시아 위원회의 위원들은 이처럼 사타니아에서 격리된 각 세계에서 인간이 진보하는 모든 단계에 적극 관심을 가지는 한편, 그들은 특히, 유란시아 필사 민족들의 복지와 진보에 각별히 관심을 가진다. 이는 유란시아를 제외하고, 그들이 아무 행성의 사무도 즉시, 직접 감독하지 않기 때문이며, 여기서도 필사자가 살아남는 것에 관계된 어떤 분야를 제외하고, 그들의 권한은 완벽하지 않다.
114:2.6 (1252.4) 이 유란시아 상담자 24명이 정상적 우주 활동 계획을 벗어나서,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의 현재 지위에서 계속할지 아무도 모른다. 의심할 여지 없이, 한 섭리 시대가 끝나거나,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전권을 맡거나, 루시퍼 반란의 최종 판결이 내리거나, 또는 미가엘이 마지막으로 자신을 수여한 세계에 다시 나타나는 것과 같이, 행성의 지위에 어떤 변화가 뒤따를 때까지 그들은 현재 자격에서 계속 근무할 것이다. 현재 거주하는 유란시아 총독은 사타니아 체계가 별자리 회로들로 회복되는 순간, 마키벤타를 제외하고, 모두 파라다이스로 올라가기 위하여 해방될지 모른다는 의견으로 기우는 듯하다. 그러나 다른 의견들도 또한 유행한다.
114:3.1 (1252.5) 유란시아 시간으로 백년마다, 예루셈에 있는 24명의 행성 감독자 집단은 그들 중에 하나를 집행 대표로서, 거주하는 총독으로 행동하기 위하여 너희 세계에서 머물라고 지명한다. 이 이야기를 준비하는 시절에 이 집행관이 바뀌었고, 열아홉째로 그렇게 근무하는 자를 스무째가 이어받았다. 현재 행성 감독자의 이름을 너희에게 감추는데, 이는 오직 필사 인간이 놀라운 동료와 초인간 상급자들을 숭배하기가, 아니 신으로 모시는 것도 아주 쉽기 때문이다.
114:3.2 (1252.6) 거주하는 총독은 예루셈의 24 상담자의 대표인 것을 제외하고, 세상사의 경영에 아무런 개인적인 실제 권한이 없다. 그는 초인간 행정을 조정하는 자로서 행동하고, 유란시아에서 활동하는 천상 존재들의 존경받는 우두머리요, 널리 인정받는 지도자이다. 모든 계급의 천사 무리는 그를 자기들의 조정하는 지도자로 여기고, 한편 연합 중도자들은 1-2-3 첫째가 24 상담자의 일원이 되려고 떠난 뒤로, 뒤잇는 총독들을 행성에서 그들의 아버지로서 정말로 우러러본다.
114:3.3 (1253.1) 총독은 행성에서 실제의 개인적 권한을 소유하지 않지만, 그는 수십 가지 판결과 결정을 날마다 내려 보내며, 관계된 모든 성격자가 이를 최종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절차에 따른 통치자보다 아버지 같은 조언자에 훨씬 더 가깝다. 어떤 면에서 그는 행성 영주처럼 활동하지만, 그의 행정은 물질 아들들의 행정과 훨씬 더 비슷하다.
114:3.4 (1253.2) 유란시아 정부는 예루셈의 여러 위원회에서 대표되며, 이는 돌아오는 총독이 행성 영주들로 구성된 체계 군주 내각에서 임시 위원으로서 자리에 앉는다는 한 조치에 따른 것이다. 마키벤타가 영주 대행으로 임명되었을 때, 사타니아의 행성 영주 회의에서 그가 즉시 자기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지금까지 이 방향으로 그는 아무런 뜻을 표시하지 않았다.
114:3.5 (1253.3) 유란시아의 초물질 정부는 지역 우주의 상급 단위들과 아주 가까운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거주하는 총독은 예루셈 뿐 아니라 구원자별을 대표한다. 이는 그가 24 상담자를 위하여 행동하기 때문인데, 이들은 미가엘과 가브리엘을 직접 대표한다. 그리고 예루셈 시민이니까, 행성의 총독은 체계 군주를 위하여 대변자로 활동할 수 있다. 한 보론다덱 아들, 즉 에덴시아 관찰자가 별자리 당국을 직접 대표한다.
114:4.1 (1253.4) 유란시아의 통치권은 행성의 반란이 터진 뒤 얼마 안 되어, 놀라시아덱 정부가 행성의 권한을 한때 임의로 빼앗아 더욱 까다로워졌다. 유란시아에는 한 보론다덱 아들이 아직도 거주하는데, 그는 에덴시아 최고자들을 대표하는 관찰자요, 미가엘이 직접 행동하지 않는 마당에 행성 통치권의 수탁자이다. 현재 관찰하는 (그리고 언젠가 섭정하는) 최고자는 이렇게 유란시아에서 스물세 번째로 근무한다.
114:4.2 (1253.5) 에덴시아 최고자들의 통제 밑에 아직 어떤 집단의 행성 문제들이 있는데, 그 관할권은 루시퍼 반란이 있을 때 몰수되었다. 이 문제들에 대한 권한은 한 보론다덱 아들, 놀라시아덱 관찰자가 행사하는데, 그는 행성 감독자들과 아주 가까운 자문 관계를 유지한다. 종족 위원들은 유란시아에서 매우 활발하고, 그 여러 집단의 우두머리들은 거주하는 보론다덱 관찰자에게 비공식으로 부속되어 있으며, 그는 그들의 자문하는 지도자로서 행동한다.
114:4.3 (1253.6) 한 위기에 닥쳐서, 어떤 순전한 영적 문제들을 제쳐놓고, 정부에서 실제 통치하는 우두머리는 지금 관찰 임무를 띤, 에덴시아의 이 보론다덱 아들일 것이다. (이러한 순전한 영적 문제, 그리고 어떤 순전한 개인적 문제에서, 최고의 권한은 유란시아에서 요즈음에 설립된 천사장 계급의 분과 본부에 딸린, 지휘하는 천사장에게 부여된 듯하다.)
114:4.4 (1253.7) 관찰하는 최고자는 그의 재량으로, 심각한 행성 위기가 닥칠 때 행성 정부를 몰수할 권한이 있고, 유란시아의 역사에서 이것이 33번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한 때에 관찰 최고자는 섭정하는 최고자로서 활동하며, 오직 천사장들의 분과 조직을 제외하고, 행성에서 거주하는 모든 봉사자와 행정자에게, 도전받지 않는 권한을 행사한다.
114:4.5 (1253.8) 보론다덱 섭정은 반란으로 고립된 행성에만 특이하게 있지는 않다. 이는 최고자들이 사람이 사는 세계들의 사무에 어느 때라도 간섭해도 좋기 때문이며, 그들은 사람들의 나랏일을 처리하는 데 별자리 통치자들의 우수한 지혜를 집어넣는다.
114:5.1 (1254.1) 유란시아의 실제 행정은 정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우주 조직의 계통을 따라서, 분리된 입법ㆍ집행ㆍ사법 분과와 같은, 아무런 공식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다. 24 상담자는 행성의 정부에서 입법부에 가장 가깝다. 총독은 잠정적이고 자문하는 최고 집행자이며, 거부권은 관찰하는 최고자에게 남아 있다. 그리고 절대 권한을 가진 아무런 사법 권한이 행성에서 작용하지 않는다―오직 화해 위원회들이 있을 뿐이다.
114:5.2 (1254.2) 세라핌과 중도자들이 관련되는 대다수의 문제는, 공동의 찬성을 얻어서 총독이 결정한다. 그러나 24 상담자의 명령을 표현할 때를 제외하고, 그의 판결은 모두 화해 위원회, 행성 활동을 위하여 조직된 지역 당국, 또는 사타니아의 체계 군주에게 올리는 상고(上告)에도 지배를 받는다.
114:5.3 (1254.3) 행성 영주의 유형(有形) 참모진과 아담의 아들딸의 물질 체제가 빠진 것은 세라핌들이 베푸는 특별한 봉사, 그리고 중도인(中道人)들의 특별한 봉사로 어느 정도 보상된다. 천사장들, 관찰하는 최고자, 총독, 이 삼자일치의 존재가 행성 영주의 부재를 효과 있게 보충해 준다.
114:5.4 (1254.4) 어느 정도 느슨하게 조직되고 얼마큼 손수 관리되는 이 행성 정부는 기대한 것보다 효과가 있는데, 이는 천사장들이 베푸는, 시간을 절약하는 도움과 그들의 늘 준비된 회로 때문이고, 이것은 행성의 비상시와 행정의 어려움이 있을 때 자주 이용된다. 법대로 따지면, 행성은 아직도 놀라시아덱의 여러 회로에서 영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그러나 비상시에 천사장 회로를 이용함으로, 이 장애를 둘러갈 수 있다. 물론, 진리의 영이 1천9백년 전에 모든 육체에게 부어진 뒤로, 행성의 고립은 개별 필사자가 아랑곳할 일은 아니다.
114:5.5 (1254.5) 유란시아에서 하루의 행정은 그날의 상담하는 회의로 시작되며, 여기에는 총독, 행성의 천사장 우두머리, 관찰하는 최고자, 감독하는 상천사(上天使), 거주하는 생명 운반자들의 우두머리, 그리고 우주의 높은 아들들, 또는 어쩌다가 행성에 머무르는 어떤 학생 방문자들 사이에서 초청받은 손님들이 참석한다.
114:5.6 (1254.6) 총독 직속의 행정을 담당하는 내각은 12 세라핌으로 이루어지며, 이들은 행성의 진보 및 안정을 담당하는 직계 초인간 지도자로서 활동하는, 12 집단의 특별 천사의 임시 우두머리들이다.
114:6.1 (1254.7) 진리의 영이 퍼부어지는 것과 때를 맞추어 첫 총독이 유란시아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 12 집단의 특별 세라핌, 천사별 졸업생들이 따라왔는데, 이들은 즉시 어떤 특별한 행성 근무에 배치되었다. 이 높은 천사들은 행성을 감독하는 으뜸 세라핌으로 알려져 있고, 행성을 담당하는 관찰 최고자의 전반적 통제와 따로, 거주하는 총독의 직접 지시를 받고 있다.
114:6.2 (1255.1) 이 12 집단의 천사들은 거주하는 총독의 일반 감독을 받으며 활동하지만, 각 집단의 임시 우두머리인 12자 세라핌 회의가 그들을 직접 지휘한다. 이 회의는 또한 거주하는 총독의 자원 내각으로서 봉사한다.
114:6.3 (1255.2) 행성 세라핌의 우두머리로서, 나는 이 세라핌 우두머리들의 회의를 주관하며, 칼리가스티아의 탈퇴가 있을 때 이탈했던 자, 한때 행성에서 천사 무리의 우두머리였던 자를 계승하여, 유란시아에서 자원해서 근무하는 1차 계급 상천사이다.
114:6.4 (1255.3) 행성 감독을 맡는 12 집단의 으뜸 세라핌들은 유란시아에서 다음과 같이 활동한다:
114:6.5 (1255.4) 1. 시대 천사. 이들은 현시대의 천사, 섭리 시대의 집단이다. 이 하늘의 봉사자들은 각 세대의 사무가 일어나는 당대의 모자익에 맞도록 고안된 바와 같이, 그 사무의 감시와 지도를 담당한다. 유란시아에서 근무하는 현재의 시대 천사 집단은, 현재 섭리 시대 동안에 행성에 배치된 세 번째 집단이다.
114:6.6 (1255.5) 2. 진보 천사. 연속되는 사회 시대를 진화로 진보시키는 일을 개시하는 과제가 이 세라핌들에게 맡겨져 있다. 그들은 진화하는 인간의 타고난 진취적 성향을 개발하도록 육성한다. 그들은 마땅히 처리해야 하는 대로 일이 처리되도록 끊임없이 수고한다. 지금 수고하는 집단은 이 행성에 배치된 두 번째 집단이다.
114:6.7 (1255.6) 3. 종교 수호자. 이들은 “교회의 천사”이다. 지금 있고, 이 때까지 있어 왔던 것을 위하여 열심히 투쟁하는 자이다. 그들은 한 시대로부터 다음 시대로 도덕적 가치를 안전히 전달하기 위하여, 살아남은 것의 이상(理想)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그들은 진보 천사들이 이기려고 사용하는 외통수이며,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오래 되고 일시적 형태에 담긴 불멸의 가치를, 새롭고 따라서 덜 안정된 형태의 생각과 행동으로 옮기려고 내내 애쓴다. 이 천사들은 영적 형식을 놓고 경쟁하지만, 그들은 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의 극단적 교파주의, 그리고 의미 없는 논쟁으로 인한 분열의 근원은 아니다. 지금 유란시아에서 활동하는 집단은 이렇게 근무하는 다섯 번째 집단이다.
114:6.8 (1255.7) 4. 국가 생활의 천사. 이들은 “나팔의 천사,” 곧 유란시아에서 국가 생활의 정치적 성과를 지도하는 자이다. 국제 관계를 전반적으로 통제하는 일로 활동하는 이 집단은 행성에서 네 번째로 근무하는 집단이다. 특히 이 천사 분과의 봉사를 통해서, “최고자들은 사람의 나라에서 다스린다.”
114:6.9 (1255.8) 5. 종족의 천사. 정치적 관여와 종교적 분류에 상관 없이, 시간 세계의 진화 종족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일하는 자. 유란시아에는 아홉 인종의 잔재가 남아 있고, 이들은 서로 섞여서 현대 민족으로 통합되었다. 이 세라핌들은 종족 위원회들이 베푸는 봉사와 가깝게 관련되며, 유란시아에 지금 있는 집단은 오순절 뒤에 곧 행성에 배치된 최초의 집단이다.
114:6.10 (1255.9) 6. 미래의 천사. 이들은 예측하는 천사이며, 미래 시대를 예측하고 새롭고 진보하는 섭리 시대의 더 나은 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계획한다. 이들은 연속되는 시대를 설계하는 자이다. 행성에 지금 있는 집단은, 현재 섭리 시대가 비롯한 뒤로 이처럼 활동해 왔다.
114:6.11 (1256.1) 7. 계몽의 천사. 유란시아는 이제 행성의 교육을 촉진하는 데 전념하는 세 번째 세라핌 집단의 도움을 받고 있다. 이 천사들은 정신 및 도덕의 훈련이 개인ㆍ가족ㆍ집단ㆍ학교ㆍ공동체ㆍ국가, 그리고 민족 전체에 관계되는 그런 훈련에 종사한다.
114:6.12 (1256.2) 8. 건강의 천사. 이들은 건강을 증진하고 병을 방지하는 일에 헌신하는 필사 대리자들을 돕는 데 배치된, 봉사하는 천사이다. 현재 집단은 이 섭리 시대에 여섯 번째로 근무하는 집단이다.
114:6.13 (1256.3) 9. 가정 세라핌. 유란시아는 이제 인간 문명의 기본 제도인 가정(家庭)을 보존하고 향상하는 데 헌신하는, 다섯 번째로 봉사하는 천사 집단의 보살핌을 받는다.
114:6.14 (1256.4) 10. 산업 천사. 이 세라핌 무리는 유란시아 민족들 가운데 산업의 발전을 조장하고 경제 상태를 개선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이 집단은 미가엘이 수여된 뒤로, 일곱 번 갈렸다.
114:6.15 (1256.5) 11. 오락 천사. 이들은 놀이ㆍ유머ㆍ휴식의 가치를 돌보는 세라핌이다. 사람의 기분을 바꾸는 오락을 향상시키고, 따라서 인간의 여가를 더욱 유익하게 이용하는 것을 촉진하려고 늘 애쓴다. 현재 집단은 유란시아에서 그 서열에서 세 번째로 봉사하는 집단이다.
114:6.16 (1256.6) 12. 초인간 봉사의 천사. 이들은 천사 중의 천사이다. 행성에서 일시적이거나 영구하게 모든 다른 초인간 생명에게 봉사하는 데 배치된 세라핌이다. 이 집단은 현재 섭리 시대가 시작된 뒤로 일해 왔다.
114:6.17 (1256.7) 행성의 정책이나 과정을 다루는 문제에서, 이 여러 집단의 으뜸 세라핌들이 뜻이 맞지 않을 때 총독이 보통 그들의 의견 차이를 해결하지만, 그의 결정은 모두 그 의견 차이에 관계된 문제들의 성질과 중요성에 따라서, 상고(上告)에 지배를 받는다.
114:6.18 (1256.8) 이 천사 집단들 중에 어느 것도 그들의 임무 분야에 직접, 또는 멋대로 통제권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활동 분야의 사무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지만, 그들이 부속된 인간 활동 분야에 유리하게 영향을 미치도록, 행성의 조건을 조종하고 상황을 연결시킬 수 있고, 또 그렇게 한다.
114:6.19 (1256.9) 행성을 감독하는 으뜸 세라핌들은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많은 대리자를 이용한다. 그들은 개념 교환소, 지성을 집중시키는 자, 사업 추진자로서 활동한다. 새로운 상급 개념을 사람의 머리 속에 집어넣을 수 없지만, 그들은 한 인간 지능 안에 이미 나타난 어떤 상급 이상을 강화하려고 행동하는 일이 흔하다.
114:6.20 (1256.10) 그러나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이 여러 수단을 제쳐놓고, 으뜸 세라핌들은 운명 예비군을 동원하고, 훈련시키고, 유지함으로, 치명적 위험에 대비하여 행성의 진보를 보장한다. 이 예비병들의 주요 기능은 진화로 이루어지는 진보가 붕괴하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뜻밖의 일에 대비하여, 하늘 세력이 준비한 조치이다. 그들은 재난을 막는 보증이다.
114:7.1 (1257.1) 운명 예비군은 세상사를 다루는 초인간 행정부의 특별한 봉사에 가입 허가를 받은 살아 있는 남녀들로 구성된다. 이 군단은 진화 세계에서 시간 세계의 자녀들에게 자비와 지혜를 베푸는 부서의 운영을 도우려고, 그 영역의 영 지도자들이 각 세대에서 뽑은 남녀들로 이루어져 있다. 승천 계획의 사무를 운영하는 데, 의지를 가진 필사 인간이 그러한 책임을 맡을 능력이 있고 믿을 만하면, 즉시 그들을 이처럼 연락하고 이용하기 시작하는 것이 일반 관습이다. 따라서 남자와 여자들이 충분한 정신 능력, 적당한 도덕적 지위, 필요한 영적 성품을 가지고 현세에 행동 무대에 나타나자마자, 그들은 인간 연락자, 곧 필사 조수(助手)로서, 적절한 하늘 집단의 행성 성격자들에게 재빨리 배치된다.
114:7.2 (1257.2) 사람들이 행성 운명의 보호자로 뽑힐 때, 세계 행정가들이 집행하는 여러 계획에서 긴요한 개인이 될 때, 이때 행성의 세라핌 우두머리는 그들이 세라핌 군단에 현세에 부속되는 것을 확인하고, 이 필사 예비병들과 함께 일하도록 개인 운명 수호자들을 임명한다. 예비병은 모두 자의식하는 조절자를 가지고 있고, 그들의 대부분은 지적 성취와 영적 달성의 상급 우주 수준에서 활동한다.
114:7.3 (1257.3) 그 영역의 필사자는 사람이 사는 여러 세계에서 다음 이유로 운명 예비군에서 근무하도록 선택된다:
114:7.4 (1257.4) 1. 세상사(世上事)의 여러 가지 활동을 운영하는 데, 수많은 가능한 비상 임무를 위하여 비밀로 연습하는 특별한 능력.
114:7.5 (1257.5) 2. 사람의 인정과 보상을 받지 않고서 기꺼이 일하려는 마음, 아울러 어떤 특별한 사회적ㆍ경제적ㆍ정치적ㆍ영적 운동이나 또는 다른 운동에 마음을 다하여 헌신한다.
114:7.6 (1257.6) 3. 특별한 재능을 가졌고, 행성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세계에 앞으로 닥칠 비상 사태와 씨름하는 과제에, 아마도 유란시아 이전에 체험을 가진 생각 조절자를 소유한다.
114:7.7 (1257.7) 행성에서 하늘 봉사를 담당하는 각 분과는, 운명 지위를 가진 이 필사자의 연락 군단을 받을 자격이 있다. 사람이 사는 보통 세계는 따로 된, 70개 운명 군단을 고용하며, 이들은 현재 세상사의 초인간 운영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유란시아에는 행성에서 천사가 감독하는 각 집단마다 하나씩, 12 운명 예비군이 있다.
114:7.8 (1257.8) 12 집단의 유란시아 운명 예비병들은, 땅에서 수많은 중대한 직책을 위하여 미리 연습을 받고 가능한 행성 비상시에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 구체의 필사 거주자들로 구성된다. 이 통합 군단은 지금 96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작은 군단은 41명, 가장 큰 군단은 172명이다. 스무 명이 되지 않는 연락 성격자를 제쳐놓고, 이 독특한 집단의 구성원은 어떤 행성 위기에 가능한 활동을 위하여 그들이 준비되는 것을 도무지 의식하지 못한다. 이 필사 예비병들은 그들이 각자 소속된 군단의 선택을 받고, 생각 조절자와 수호 천사가 봉사하는 통합된 기법에 따라서, 지성의 깊은 곳에서 마찬가지로 훈련 받고 미리 연습을 받는다. 의식하지 못하면서 받는 이 훈련에는 수많은 다른 하늘 성격자가 여러 번 참여하는데, 이 모든 특별한 준비를 하는 동안 중도자들은 귀중하고 필수인 봉사를 해낸다.
114:7.9 (1258.1) 많은 세계에는 잘 적응된 2차 중도인들이 생각 조절자가 깃드는 지성에 솜씨 있게 파고들어, 유리하게 구성된 어떤 필사자의 생각 조절자와 다른 정도로 접촉할 수 있다. (우주적 조정이 바로 그렇게 우연히 합쳐서 이 계시가 유란시아에서 영어로 모습을 나타냈다.) 수많은 예비군에서 진화 세계의 그러한 가능한 연락 필사자들을 동원하며, 어느 정도까지, 앞을 내다보는 이 작은 집단의 인격자들을 통해서, 영적 문명이 진보되고 최고자들은 사람의 나라에서 다스릴 수 있다. 이처럼 이 운명 예비군의 남녀는 중도인이 사이에 끼어 봉사함으로, 그들의 조절자와 다른 정도로 접촉한다. 그러나 이 예비병들이 진화된 문화가 붕괴하거나 또는 살아 있는 진리의 빛이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활동하는 그러한 드문, 사회의 비상시와 영적 긴급 사태를 제외하고, 바로 이 필사자들은 동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는다. 유란시아에서 이 운명 예비병들은 인류 역사의 페이지를 장식한 일이 드물다.
114:7.10 (1258.2) 예비병들은 필수 행성 정보를 보존하는 자로서 의식하지 않고서 행동한다. 한 예비병이 죽고 나서, 여러 번 어떤 중대한 자료를 죽어 가는 예비병의 머리로부터 더 젊은 후계자한테로 이전하는 것은, 두 생각 조절자의 연결로 이루어진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예비군과 관련하여, 조절자들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많은 다른 방법으로 활동한다.
114:7.11 (1258.3) 유란시아에서 운명 예비군은 비록 아무런 영구 우두머리가 없어도, 그 다스리는 조직을 구성하는, 자체의 영구한 회의가 있다. 이러한 회의는 사법 회의, 역사성 회의, 정치 주권 회의, 그리고 많은 다른 것을 포함한다. 때때로, 그 예비군의 조직에 따라서, 이러한 영구 회의는 특정한 기능을 위하여, 예비군 전체의 이름 뿐인 (필사자) 우두머리를 임명해 왔다. 그러한 예비병 우두머리의 임기는 보통 몇 시간 지속하는 문제이며, 당면한 어떤 특정한 과제를 달성하는 데 국한된다.
114:7.12 (1258.4) 유란시아 예비군은 아담 족속과 안드 족속이 살던 시절에 그 구성원이 가장 많았는데, 예비군은 보라 피가 묽어짐과 함께 꾸준히 줄어들고 있고, 오순절 시절 무렵에 그 밑바닥에 이르렀으며, 그때부터 예비군 구성원은 꾸준히 늘어났다.
114:7.13 (1258.5) (유란시아에서 우주를 의식하는 시민들로 이루어진 우주 예비군은 지금 1천 필사자가 넘는데, 우주 시민권에 대한 그들의 통찰력은 지상(地上) 거처가 있는 그 구체를 훨씬 뛰어넘는다. 그러나 이 독특한 집단의 살아 있는 인간들의 활동의 진정한 성질이 무엇인가 내가 밝히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114:7.14 (1258.6) 유란시아 필사자는, 그들의 세계가 지역 우주의 어떤 회로들로부터 영적 면에서 비교적 고립되었다고 해서 우주에서 버림받거나 고아(孤兒)가 된 행성이라는 느낌을 가져서는 안 된다. 행성에는 세상사와 인간의 운명을 아주 분명하고 효과 있게 보살피는, 초인간적 감독이 작용하고 있다.
114:7.15 (1258.7) 그러나 너희는 이상적 행성 정부에 대하여 기껏해야 보잘것없는 개념만 가질 수 있는 것이 참말이다. 유란시아는 행성 영주의 초기 시절부터, 세계를 성장시키고 종족을 발전시키는 신의 계획이 유산되어 고통을 겪었다. 사타니아에서 사람 사는 충성한 세계들은 유란시아처럼 다스려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다른 고립된 세계들과 비교해서, 너희 행성의 여러 정부는 그다지 열등하지 않았다. 하나나 두 세계가 더 나쁘다고 말할 수 있고, 몇몇은 조금 나을지 모르지만, 대다수는 너희와 같은 수준에 있다.
114:7.16 (1259.1) 행성 행정의 불안정한 지위가 언제 끝날 것인지 지역 우주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듯하다. 네바돈의 멜기세덱들은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친히 다시 도착할 때까지, 행성 정부와 행정에 거의 변화가 없으리라는 견해를 지지하고 싶어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더 일찍 아니라면 이때, 대규모의 변화가 행성 경영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세계 행정의 그러한 수정이 어떤 성질을 가질 것인가 아무도 추측도 할 수 없는 듯하다. 네바돈 우주에서 사람 사는 세계들의 역사를 통틀어서, 그러한 사건이 일어난 전례가 없다. 유란시아의 미래 정부에 관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많은 것 중에 두드러진 한 가지는 천사장의 회로, 그리고 천사장의 분과 본부가 행성에 있는 것이다.
114:7.17 (1259.2) 우주의 여러 회의에서는 고립된 너희 세계를 잊지 않고 있다. 유란시아는 죄로 낙인이 찍히고, 반란으로 신의 돌보심이 두절된, 우주 고아(孤兒)가 아니다. 유버르사로부터 구원자별까지, 그리고 계속 예루셈까지, 아니 하보나와 파라다이스에서도, 그들은 모두 우리가 여기에 있음을 알고 있다. 유란시아에 지금 거하는 너희 필사자들은, 마치 그 구체가 믿음 없는 행성 영주에게 한 번도 배신을 당하지 않았던 것 같이, 똑같이 사랑스럽게 소중히 여겨지고, 똑같이 충실하게, 아니 그보다 더하게 보살핌을 받는다. “바로 아버지가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은 영원히 참말이다.
115:0.1 (1260.1) 아버지 하나님에게 아들인 것은 엄청난 관계이다. 최상위 하나님에게는 성취가 지위를 얻는 데 필수 조건이다―누구나 무엇일 뿐 아니라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115:1.1 (1260.2) 높거나 낮은 모든 지성이, 한 우주 구조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생각하는 타고난 능력이 없다면,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고 진화하는 지능들은 총 우주에서 무력할 것이요, 합리적 사고(思考) 형태를 시작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머리가 결론을 헤아릴 수 없고 참 기원을 꿰뚫어볼 수 없다면, 머리가 지어낸 이 여러 가설의 테두리 안에서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수단을 가질 수 있도록, 그러한 머리는 어김없이 결론을 가정(假定)하고 기원을 발명할 것이다. 인간의 사고를 위하여 그러한 우주 테두리는 합리적 지능 작용에 필수이지만, 그런 테두리는, 정도가 크던 작던, 예외 없이 잘못되어 있다.
115:1.2 (1260.3) 우주의 개념 구조들은 기껏해야 상대적으로 참되다. 이것들은 쓸모 있는 발판이요, 우주에 대한 이해가 확대되기 전에 궁극에 무너져야 한다. 진리ㆍ아름다움ㆍ선ㆍ도덕ㆍ윤리ㆍ의무ㆍ사랑ㆍ신성(神性)ㆍ기원ㆍ존재ㆍ목적ㆍ운명ㆍ시간ㆍ공간, 아니 신을 이해하는 것조차 상대적으로 참될 뿐이다. 하나님은 아버지보다 아주 훨씬 더 크지만, 아버지는 사람의 가장 높은 하나님 개념이다. 그런데도 창조자와 인간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묘사한 것은 오르본톤에서, 하보나에서, 파라다이스에서 얻을 신 개념, 필사자를 초월하는 개념으로 인하여 확대될 것이다. 사람은 필사자의 우주 테두리 안에서 생각해야 하지만, 생각을 펼칠 수 있는 다른 더 높은 테두리를 사람이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115:1.3 (1260.4) 필사자가 온 우주를 이해하기 쉽게 만들려고 우주 실체의 다양한 수준을 유한 수준, 초한(超限) 수준, 절대 수준이라 언급하였다. 이 중에서 오직 절대적인 것이 무조건 영원하고 참으로 실존적이다. 초한한 것과 유한한 것은 무한의 처음이자 원초적 절대 실체에서 나온 파생물이요, 수정(修正)된 것, 자격 제한이요, 묽게 만든 것이다.
115:1.4 (1260.5) 유한자의 영역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있는 덕택으로 존재한다. 높고 낮은 유한한 생물은, 우주 체제에서 유한자의 필요성에 대하여 여러 이론을 내놓아도 좋고 또 그렇게 했지만, 모든 것을 고려하건대, 유한자는 하나님이 그렇게 의지했기 때문에 존재한다. 우주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요, 조상이 되는 존재들, 즉 창조자나 어버이의 사전(事前) 행위와 선재하는 의지에 호소하지 않고서, 유한한 인간은 어째서 자신이 개인으로 존재하는가 합리적 이유를 내놓을 수도 없다.
115:2.1 (1261.1) 실존적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아무것도 은하(銀河)들에 두루 일어날 수 없으니, 이는 스스로 계신 이 안에 본래 있는 완벽한 무한이 일곱 절대자 안에 영원히 있고, 여러 삼자일치 속에서 기능적으로 관련되고, 여러 삼극일치 안에서 전달되어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여러 절대 관계에 이처럼 무한(無限)이 실존적으로 있다는 사실은, 조금도 우주의 새로운 체험적인 것들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들지 않는다. 유한한 인간의 관점에서, 무한은 잠재성을 가진 많은 것, 현재 사실로 있는 것보다 미래에 가능한 서열에 있는 많은 것을 포함한다.
115:2.2 (1261.2) 가치는 우주 실체에서 독특한 요소이다. 무한하고 신성한 어떤 것의 가치가 도대체 어떻게 늘어날 수 있는가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무한한 신의 관계에서도, 의미 있는 것은 늘어나지는 않더라도 수정될 수 있음을 발견한다. 체험적 우주에게는 실체 의미를 더 많이 이해함으로 신성한 가치조차도 실재하는 물건으로서 늘어난다.
115:2.3 (1261.3) 모든 체험 수준에서, 우주를 창조하고 진화시키는 계획 전체가 잠재하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바꾸는 문제인 듯하다. 이 변화는 공간 잠재력, 지성 잠재력, 영 잠재력의 분야와 똑같이 상관이 있다.
115:2.4 (1261.4) 여러 우주에서 잠재하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겉에 나타나는 그 방법은 수준마다 다르며, 유한자의 경우에는 체험적 진화요, 초한자의 경우에는 체험으로 궁극에 이르는 것이다. 실존적 무한은 정말로 만물을 포함하는 데 제한이 없고, 만물을 포함하는 바로 이 성질은 어쩔 수 없이, 진화로 유한한 체험을 겪는 가능성까지 포함한다. 그러한 체험적 성장 가능성은, 최상위에 부딪치고 또 그분 안에서 삼극일치 관계를 통해서 하나의 우주 사실이 된다.
115:3.1 (1261.5) 절대적 우주의 개념에는 한계가 없다. 이 근원적 실체의 범위와 성질이 어떻다고 정의하는 것은 무한에 조건을 다는 것이요, 영원이라는 순수 개념을 묽게 만드는 것이다. 무한ㆍ영원한 것, 영원ㆍ무한한 것의 개념은 범위에 제한이 없고 사실로 절대적이다. 유란시아의 과거, 현재, 또는 미래에, 무한의 실체나 실체의 무한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용어가 하나도 없다. 사람은 무한한 우주에 있는 유한한 인간이요, 한없고 가없고 결코 시작이 없고 결코 끝이 없는 존재에 대하여 일그러진 그림자와 묽어진 개념으로 만족해야 하며, 이를 이해하는 것은 정말로 사람의 능력을 지나친다.
115:3.2 (1261.6) 사람은 한 절대자라는 실체의 통일성을 먼저 깨뜨리려고 시도하지 않고서, 결코 절대자의 개념을 파악하기를 바랄 수 없다. 지성은 모든 다채로운 것을 통일하고 있지만, 바로 그러한 다양성이 없는 가운데서, 지성은 이해하는 개념들을 형성하려고 애쓸 아무런 근거를 발견하지 못한다.
115:3.3 (1261.7) 무한의 원초적 정지(靜止) 상태는 인간이 이해하려고 애쓰기 전에 분할되기를 요구한다. 무한에는 통일성이 있고, 이것은 이 여러 논문에서 스스로 계신 이로서―인간의 머리로 생각하는 최초의 가설로서―표현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이 통일이 이원(二元)과 삼자일치와 다양성이 되면서 그래도 조건 없이 통일체로 남아 있는지 인간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이 여럿으로 성격이 되는 것과 나란히, 사람이 멈추어서 갈라지지 않은 삼위일체 신을 생각해 볼 때, 비슷한 문제에 부닥친다.
115:3.4 (1262.1) 오로지 사람이 무한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 개념을 한 낱말로 표현하게 된다. 무한은 한편으로 통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끝이나 한계가 없는 다양성이다. 유한한 지능들이 지켜보는 무한은, 인간의 철학과 유한한 형이상학에서 최대의 역설(逆說)이다. 사람의 영적 성품은 예배를 체험할 때 위로 무한한 아버지께 손을 뻗지만, 사람의 지적 이해 능력은 최상 존재라는 최대 개념으로 인하여 소모되어 버린다. 최상위를 지나서, 개념은 갈수록 더 이름이요, 개념이 실체의 참 명칭이 되는 일이 더욱 적어진다. 갈수록 더 개념들은 유한을 초월하는 것을 향하여 사람이 유한하게 이해하는 예측이 된다.
115:3.5 (1262.2) 절대 수준에 관한 하나의 기본 개념은 세 단계의 가정을 포함한다:
115:3.6 (1262.3) 1. 최초자. 제한이 없는 첫째 근원 중심 개념, 스스로 계신 이의 근원의 명시. 거기서부터 모든 실체가 기원을 가진다.
115:3.7 (1262.4) 2. 실재자. 사실인 세 절대자, 곧 둘째 근원 중심, 셋째 근원 중심, 파라다이스 근원 중심을 모은 집단. 영원한 아들, 무한한 영, 파라다이스 섬의 삼극일치는 첫째 근원 중심의 독창성이 실제로 계시된 것이다.
115:3.8 (1262.5) 3. 잠재자. 잠재성의 세 절대자, 즉 신 절대자, 무제한 절대자, 우주 절대자의 연합. 이 실존적 잠재성의 삼극일치는 첫째 근원 중심의 최초인 성질의 잠재적 계시이다.
115:3.9 (1262.6) 최초자ㆍ실재자ㆍ잠재자의 상호 교제는 무한 속에서 긴장을 일으키며, 이것은 우주가 성장하는 모든 가능성을 낳는다. 그리고 성장은 칠중자ㆍ최상위ㆍ궁극위의 성질이다.
115:3.10 (1262.7) 신 절대자, 우주 절대자, 무제한 절대자가 교제할 때 잠재성은 절대적이며, 한편 사실성이 태어난다. 둘째 및 셋째 근원 중심과 파라다이스 근원 중심이 교제할 때 사실성은 절대적이고, 한편 잠재성이 태어난다. 첫째 근원 중심의 최초인 성질에 사실성이나 잠재성이 존재하는지 태어나는지 우리는 말할 수 없다―아버지는 계신다.
115:3.11 (1262.8) 시간 관점에서 볼 때, 실재자는 이미 있었고 지금 있는 무엇이요, 잠재자는 생겨나고 있고 앞으로 있을 무엇이요, 최초자는 지금 있는 무엇이다.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최초자ㆍ실재자ㆍ잠재자의 차이는 이처럼 명백하지 않다. 이 삼자일치의 성질은 파라다이스의 영원 수준에서 그다지 뚜렷하지 않다. 영원 속에 만물이 있다―다만 모두가 시공에서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115:3.12 (1262.9) 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사실성은 알맹이요 잠재성은 능력이다. 사실성은 한가운데 존재하며, 거기서부터 가장자리의 무한으로 확대된다. 잠재성은 무한의 가장자리로부터 안으로 들어오며, 만물의 중심에서 만난다. 최초성은 잠재하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실체를 변형시키고, 존재하는 실재물을 잠재하게 만드는 주기의 이중 운동을 먼저 일으키고, 다음에 이를 균형시키는 무엇이다.
115:3.13 (1262.10) 잠재성의 세 절대자는 우주에서 순전히 영원한 수준에서 작용하고, 따라서 절대 이하 수준에서는 결코 그 자격으로 활동하지 않는다. 실체의 내려가는 수준에서 잠재성의 삼극일치는 궁극위와 함께, 그리고 최상위한테 나타난다. 잠재하는 것은 어떤 절대 이하 수준에서, 한 부분에 관하여 시간에 맞추어 현실이 되는 데 실패할지 모르지만, 총합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뜻이 궁극에 이기며, 개인에 관해서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총합에 관해서는 변함없이 그렇다.
115:3.14 (1263.1) 우주에 존재하는 것들의 중심은 사실성의 삼극일치에 있다. 영이든 지성이든 에너지이든, 모두가 이 아들ㆍ영ㆍ파라다이스 연합에 집중한다. 영인 아들의 성격은 온 우주에 두루, 모든 성격자의 원본이다. 파라다이스 섬의 내용은 원본이요, 하보나는 그 원본의 완전한 계시요, 초우주는 원본의 완전하게 되고 있는 계시이다. 합동 행위자는 동시에 우주 에너지를 지성으로 활성화한 것, 영 목적을 개념화한 것, 그리고 물질 수준의 수학적 원인 및 결과를 영적 수준에서 의도하는 목적 및 동기와 통합하는 것이다. 유한한 우주에서, 그 우주에 대하여, 아들ㆍ영ㆍ파라다이스는 궁극위가 최상위 안에서 조건이 주어지고 제한을 받는 대로, 궁극위 안에서, 또 궁극위에 대하여 활동한다.
115:3.15 (1263.2)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면서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사실성(신)이다. 사람이 그 탐구에서 진화시키는 것은 (인간이 신답게 되는) 잠재성이다. 실재하는 사람, 잠재하는 사람, 그리고 영원한 사람이 함께 존재하고 통합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최초자이다.
115:3.16 (1263.3) 우주들의 마지막 동태(動態)는 실체가 잠재성으로부터 사실성으로 연속하여 이동하는 것과 상관이 있다. 이론적으로 이 변형에 끝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러한 것은 불가능하니, 이는 잠재자와 실재자가 모두 최초자 (스스로 계신 이) 안에서 회로가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분 확인은 우주가 발전적 진보에 어떤 한계를 부과하는 것을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든다. 스스로 계신 이와 일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결코 진보의 끝을 찾을 수 없으니, 이는 스스로 계신 이의 잠재성이 절대로 사실로 있으며, 스스로 계신 이의 사실의 잠재성이 또한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사실로 있는 것은 이제까지 불가능한 잠재하는 것을 실현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 줄 것이다―인간의 결정은 무엇이나 인간의 체험에서 새로운 실체를 현실로 만들 뿐 아니라, 또한 인간이 성장하는 새로운 능력을 개발시킨다. 어떤 어린아이 속에도 어른이 살고, 하나님을 아는 성숙한 사람 속에는 상물질 진보자가 거한다.
115:3.17 (1263.4) 성장의 기초가―절대로 사실로 있는 것들이―제약되지 않으니까, 그리고 성장의 가능성―절대 잠재성―이 제한되지 않으니까, 성장이 정지된 상태는 총 우주에서 결코 나타날 수 없다. 실제의 관점에서 볼 때, 우주의 철학자들은 끝과 같은 것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115:3.18 (1263.5) 제한된 관점에서 볼 때, 정말로 많은 끝, 활동의 많은 종결이 있지만, 더 높은 우주 수준에서 더 넓은 관점으로 볼 때, 아무런 끝이 없다. 다만 발전의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이동이 있을 뿐이다. 총 우주의 주요한 장기(長期) 성향은 몇 우주 시대, 즉 하보나 시대, 초우주 시대, 바깥 우주 시대와 관계된다. 그러나 연속된 관계의 이 기본적 구분조차도, 끝없는 영원의 대로(大路)에서 상대적 경계표보다 더한 것일 수 없다.
115:3.19 (1263.6) 최상 존재의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 마침내 꿰뚫어보는 것은,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의 개념 수준을 지나서 놓여 있는 궁극 신의 초한(超限) 성질을 진보하는 사람에게 열어 보일 수 있을 따름이다.
115:4.1 (1263.7) 최상위 하나님의 기원에 관한 어떤 고찰도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는 삼위일체가 최초의 신이며, 한편 최상위는 파생된 신이기 때문이다. 최상위의 성장에 대한 어떠한 고찰도 여러 실존적 삼극일치를 고려해야 한다. 이것들이 (첫째 근원 중심과 연결하여) 모든 절대 사실성과 모든 무한 잠재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진화하는 최상위는 유한한 존재 수준 속에서, 그리고 그 수준에서, 잠재하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변질―변화―시키는, 절정에 이르고 몸소 의지(意志)하는 초점이다. 실재 삼극일치와 잠재 삼극일치는 여러 우주에서 성장하는 상호 관계의 총체를 포함한다.
115:4.2 (1264.1) 최상위의 근원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영원하고 실재하고 나눠지지 않은 신―에 있다. 첫째로 최상위는 한 영 성격자요, 이 영 성격자는 삼위일체로부터 파생된다. 그러나 둘째로, 최상위는 성장하는―진화로 성장하는―신이며, 이 성장은 사실성의 삼극일치와 잠재성의 삼극일치, 이 두 가지로부터 얻는다.
115:4.3 (1264.2) 무한한 삼극일치들이 유한 수준에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면, 멈추어서 그들의 바로 그 무한성은 자체 속에 유한한 것의 잠재성을 담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라. 무한은 가장 낮고 가장 제한된 유한 존재로부터, 가장 높고 제한 없이 절대적인 실체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포함한다.
115:4.4 (1264.3) 무한한 것이 유한한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이 무한한 것이 유한한 것에게 실제로 나타나는가 이해하는 것보다 어렵지 않다. 그러나 필사인에게 깃드는 생각 조절자는, 절대적 하나님조차도 (절대자로서) 의지를 가진 모든 우주 생물 가운데 가장 낮고 가장 작은 자와도 바로 접촉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는 영원한 증명 중에 하나이다.
115:4.5 (1264.4) 실재하는 것과 잠재하는 것을 집단으로 둘러싸는 삼극일치들은, 최상 존재와 관련하여, 유한 수준에서 명시된다. 그렇게 나타나는 기법은 직접과 간접, 두 가지이다. 삼극일치 관계들이 최상위 안에서 직접 반사되는 한, 직접이고, 그 관계들이 초한자의 궁극에 이른 수준을 통해서 얻어지는 한, 간접이다.
115:4.6 (1264.5) 최상의 실체는 유한한 실체의 총합이며, 바깥 공간의 무제한 잠재성과 만물의 중심에 제한되지 않은 사실성 사이에, 힘차게 성장하는 과정에 있다. 그러므로 유한한 영토는 파라다이스와 시간 세계에서 최상 창조 성격자들의 초한(超限) 대리자들의 협동을 통해서 사실이 된다. 세 명의 큰 잠재 절대자의 제한된 가능성을 성숙하게 만드는 행위는, 총 우주 건축가들과 그 초월 동료들의 초한 기능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말이 어떤 성숙된 점에 다다랐을 때, 최상 창조 성격자들은 진화하는 우주들을 사실의 존재로 만드는 과제, 오랜 세월에 걸치는 과제에 손대려고 파라다이스로부터 솟아나온다.
115:4.7 (1264.6) 최상위의 성장은 삼극일치들로부터, 최상위의 영 성격은 삼위일체로부터 얻는다. 그러나 전능자의 권능 특권은 칠중 신이 신으로서 성공하는 데 바탕을 두며, 한편 전능 최상위의 권능 특권을 최상위 하나님의 영 성격과 합치는 것은 합동 행위자가 베푸는 봉사의 덕택으로 일어나며, 그는 최상위의 지성을 이 진화하는 신 속에서 합치는 요소로서 수여했다.
115:5.1 (1264.7) 최상 존재의 성격 및 영 성품의 실체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존재와 활동에 절대로 의존한다. 최상위의 성장은 삼극일치 관계의 문제이지만, 최상위 하나님의 영 성격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 의존하고, 그로부터 파생된다. 삼위일체는 완전하고 무한한 안정의 절대 중심이자 근원으로서 항상 남아 있고, 그 둘레에서 최상위의 진화적 성장이 점진적으로 펼쳐진다.
115:5.2 (1265.1) 삼위일체의 기능은 최상위의 기능과 관계된다. 이는 삼위일체가 최상위의 기능 수준을 포함하여, 모든 (총) 수준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보나 시대가 초우주 시대에 길을 양보함에 따라서, 직접 창조자인 삼위일체의 탐지 가능한 활동은 파라다이스 신들의 자식들이 창조 행위를 하도록 길을 양보한다.
115:6.1 (1265.2) 사실성의 삼극일치는 하보나 이후 시대에 계속하여 직접 작용한다. 파라다이스의 인력은 물질 존재의 기본 단위들을 붙잡고, 영원한 아들의 영 인력은 영 존재의 근원적 가치에 대하여 직접 작용하며, 합동 행위자의 지성 인력은 지적 존재에서 중요한 의미 있는 모든 것을 틀림없이 붙잡는다.
115:6.2 (1265.3) 그러나 창조 활동의 각 단계가 지도(地圖)에 없는 공간을 통해서 바깥으로 진행함에 따라서, 그 활동은 중앙에 자리잡은 창조 세력과 신다운 성격자―절대적인 파라다이스 섬과 거기에 거주하는 무한한 신―들의 직접 행동으로부터, 갈수록 더 멀리 작용하고 존재한다. 따라서 우주가 존재하는 이 연속되는 여러 수준은 무한의 세 절대자의 잠재성 안에서 생기는 발전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115:6.3 (1265.4) 최상 존재는 영원한 아들이나 무한한 영에게서, 또는 파라다이스 섬의 비성격 실체들에서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우주에 봉사하는 가능성을 포함한다. 이 세 가지 기본 사실이 절대적인 것을 마땅히 존중하고서 이렇게 진술하지만, 최상위의 성장은 이 신 및 파라다이스의 사실성에 의존할 뿐 아니라, 또한 신 절대자, 우주 절대자, 무제한 절대자 안에서 생기는 발전과도 관련된다.
115:6.4 (1265.5) 최상위는 진화하는 여러 우주의 창조자들과 사람이 하나님다움에 도달함에 따라서 성장할 뿐 아니라, 이 유한한 신은 또한 생물과 창조자가 대우주의 유한 가능성을 통달하는 결과로서 성장을 체험한다. 최상위의 움직임은 두 가지이다: 파라다이스와 신을 향하여 집중하여, 그리고 잠재성의 절대자들의 한없음을 향하여 광범위하게 움직인다.
115:6.5 (1265.6) 현재 우주 시대에 이 두 가지 움직임은 대우주에서 내려오는 성격자와 올라가는 성격자들 속에 드러난다. 최상 창조 성격자들,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모든 신다운 동료는 외향적이고 확산되는 최상위의 움직임을 반영하며, 한편 일곱 초우주 출신의 하늘 가는 순례자들은 안을 향하고 집중되는 최상위의 경향을 가리킨다.
115:6.6 (1265.7) 유한한 신은 파라다이스와 거기에 있는 신들을 향하여 안쪽으로, 그리고 무한과 거기에 있는 절대자들을 향하여 바깥으로, 언제나 이중의 상호 관계를 찾는다. 창조 아들들 안에서 성격이 되고 동력 통제자들 안에서 동력을 얻는 파라다이스의 창조적 신이 힘차게 분출하는 것은 최상위가 잠재성의 영토로, 크게 바깥으로 용솟음치는 것을 의미하며, 한편 대우주에서 하늘 가는 인간의 끝없는 행렬은 파라다이스 신과 하나되는 방향으로 최상위가 힘차게 안에서 용솟음치는 것을 증거한다.
115:6.7 (1265.8)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에 미치는 효과를 지켜봄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움직임을 때때로 식별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대우주의 성격자와 원본들에게 생기는 그러한 진화적 반응을 지켜봄으로, 우주에서 우리는 최상위의 움직임과 경향을 탐지하기를 배운 지 오래 된다.
115:6.8 (1266.1) 우리는 확신하지 않아도, 파라다이스 신의 유한한 반영으로서, 최상위는 바깥 공간으로 영원히 진보하는 일로 바쁘다고 믿는다. 그러나 바깥 공간의 세 절대자의 잠재성이 제한된 것으로서, 이 최상 존재는 언제까지나 파라다이스와 일치되기를 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이중 운동은 현재 조직된 여러 우주에서 생기는 기본 활동의 대부분을 설명하는 듯하다.
115:7.1 (1266.2) 최상위 신 안에서 아버지인 스스로 계신 이는 무한한 지위, 영원한 존재, 절대적 성품에 본래 있는 한계로부터 비교적 완벽한 해방을 얻었다. 그러나 최상위 하나님은 오직 우주에서 활동할 때 체험적 제한에 지배됨으로 모든 실존적 한계로부터 풀려났다. 체험 능력을 얻으면서 유한한 하나님은 또한 체험할 필요성에 지배된다. 영원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면서 전능자는 시간의 장벽에 부딪친다. 최상위는 오로지 미완성 존재이자 불완전한 성품의 결과로, 즉 절대적이 아닌 존재가 되는 결과로, 성장과 발전을 겪을 수 있다.
115:7.2 (1266.3) 이 모두가 아버지의 계획에 따른 것임이 틀림없고, 그 계획은 유한한 진보를 노력에 근거를 두고, 인간의 성취는 참을성에, 인격의 개발은 믿음에 근거를 두었다. 이처럼 최상위의 체험적 진화를 예정함으로, 아버지는 유한한 인간이 우주에서 존재하게 하고, 체험적 진보를 통하여 언젠가 최상위의 신성에 이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115:7.3 (1266.4) 일곱 절대자의 무제한 가치를 제쳐놓고, 최상위, 그리고 궁극위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실체는 상대적이다. 최상위가 계신 사실은 파라다이스의 동력과 아들의 성격과 합동자의 행위에 근거를 두지만, 최상위의 성장은 신 절대자, 무제한 절대자, 우주 절대자와 관계된다. 그리고 통합하고 통일하는 이 신―최상위 하나님―은 파라다이스 아버지, 즉 첫째 근원 중심의 헤아릴 수 없는 성품을 무한히 통일함으로써, 대우주에 가로질러 던져진 유한한 그림자가 성격화된 것이다.
115:7.4 (1266.5) 삼극일치가 유한 수준에서 직접 작용하는 범위까지, 그 삼극일치는 최상위에 부딪치며, 최상위는 실재 절대자와 잠재 절대자의 성품에 부과한 유한한 제한이 신으로서 집중되고 우주에서 합계한 것이다.
115:7.5 (1266.6)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절대로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곱 으뜸 영은 삼위일체에게 불가피한 것인 듯하다. 최상위의 권능ㆍ지성ㆍ영ㆍ성격이 사실이 되는 것은 진화적 필연임이 틀림없다.
115:7.6 (1266.7) 최상위 하나님은 제한 없는 무한 속에서 불가피했던 듯 보이지 않지만, 모든 상대성 수준에서 불가피한 듯하다. 그는 진화의 체험을 집중하고 요약하고 포함하는 불가결한 분이며, 그의 신 성품 속에서 효과 있게 이 형태의 실체 파악 결과를 통일한다. 그리고 불가피한 결말의 출현, 즉 궁극위 하나님의 초월 체험과 유한을 초월한 명시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그가 이 모든 일을 하는 듯하다.
115:7.7 (1267.1) 근원ㆍ기능ㆍ운명, 즉 기원을 주는 삼위일체, 활동하는 우주, 그리고 직접 닥치는 운명인 궁극 삼자일체와 가지는 관계, 이 세 가지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최상 존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115:7.8 (1267.2) 합동 행위자의 지성은 성격을 가진 아들의 신다운 영적 성향과 파라다이스 원본의 변치 않는 에너지를 통합하고, 우주 절대자의 계심은 신 절대자의 활성화와 무제한 절대자의 반응을 통일한다. 이와 같이, 진화하는 체험을 더하는 과정을 통해서 최상위는 유한자와 초한자를 연결한다. 이 통일성은 처음 아버지이자 원인이요, 만물과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원본의 최초의 통일성이 탐지되지 않고서 작용함을 드러내는 것이 틀림없다.
116:0.1 (1268.1) 사람이 그의 창조자―직속 감독자―들이 신다우면서 또한 유한하다는 것, 시공의 하나님이 진화하며 절대적이 아닌 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이 세상이 불평등하다는 모순은 이제 더 깊은 종교적 역설(逆說)이 되지 않을 것이다. 종교적 믿음은 이제 더, 사회에서 혜택을 받지 못한 불행한 희생자에게 금욕주의적 단념을 권장하는 데만 쓰이면서, 운이 좋은 자의 사회적 자만을 조장하는 데 팔리지 않을 것이다.
116:0.2 (1268.2) 지극하게 완전한 하보나 구체들을 바라볼 때, 완전ㆍ무한하고 절대적인 창조자가 이를 만들었다고 믿는 것은 이치도 있고 논리적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이치와 논리는 어떤 정직한 존재라도, 유란시아의 소동과 불완전과 불공평함을 볼 때, 절대 이하이고 무한 이전이고 완전하지 않은 창조자들이 너희 세계를 만들고 관리하고 있었다는 결론을 어쩔 수 없이 내리게 할 것이다.
116:0.3 (1268.3) 체험적 성장은 사람과 창조자의 협동 관계―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뜻한다. 성장은 체험하는 신의 표시이다. 하보나는 성장하지 않았다. 하보나는 있으며, 언제나 그대로 있어 왔다. 하보나는 그 근원인 영구한 신들처럼 실존적이다. 그러나 성장은 대우주의 특징을 나타낸다.
116:0.4 (1268.4) 전능 최상위는 권능과 성격을 가진, 살아 있고 진화하는 신이다. 그의 현재 영토인 대우주는 또한 권능과 성격이 성장하는 영역이다. 그의 운명은 완전이지만, 현재 체험은 성장하는 요소와 불완전한 지위를 포함한다.
116:0.5 (1268.5) 최상 존재는, 1차적으로 중앙 우주에서 한 영 성격으로서, 2차적으로 대우주에서 전능한 하나님, 권능을 가진 성격자로서 활동한다. 총 우주에서 최상위의 3차 활동은 지금 숨어 있고, 오로지 알려지지 않은 잠재 지성으로서 존재한다. 최상 존재의 이 셋째 발전이 도대체 무엇을 드러낼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 더러는 초우주들이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될 때, 최상위가 전능하고 체험을 겪은 대우주의 군주로서 유버르사에서 활동하고, 한편 바깥 우주들에서 초월적 전능자로서 힘을 확대할 것이라 믿는다. 더러는 최상위의 셋째 단계는 셋째 수준의 신의 명시를 수반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우리 중에 아무도 정말로 알지 못한다.
116:1.1 (1268.6) 모든 진화하는 사람의 인격이 겪는 체험은 전능 최상위가 체험하는 한 단계이다. 초우주의 모든 물리적 구역을 총명하게 지배하는 것은 전능 최상위의 성장하는 통제력의 일부이다. 권능과 성격의 창조적 합성은 최상위 지성의 창조 욕구의 일부이며, 최상 존재 안에서 진화로 성장하는 통일성의 바로 그 본질이다.
116:1.2 (1269.1) 최상위의 권능과 성격 속성을 통합하는 것은 최상 지성의 작용이며, 전능 최상위의 진화가 완성되면―신다운 속성을 느슨하게 조정한 어떤 연합이 아니라―통일되고 성격을 가진 한 신을 낳을 것이다. 더 넓은 견지에서 볼 때, 최상위와 동떨어져서 어떤 전능자도 없고, 전능자와 따로 어떤 최상위도 없을 것이다.
116:1.3 (1269.2) 여러 진화 시대에 걸쳐서 내내, 최상위의 물리적 동력 잠재성은 일곱 최상 동력 지휘자 속에 투입되었고, 지성 잠재성은 일곱 으뜸 영 안에서 쉰다. 무한한 지성은 무한한 영의 기능이요, 우주 지성은 일곱 으뜸 영이 베푸는 봉사이다. 최상위 지성은 대우주가 조정되면서 사실화되는 과정에 있고, 칠중 신의 계시 및 달성과 기능적으로 연합되어 있다.
116:1.4 (1269.3) 시공의 지성, 즉 우주 지성은 일곱 초우주에서 다르게 작용하고 있지만, 최상 존재 안에서 어떤 알려지지 않은 연합 기법에 따라서 조정된다. 전능자의 전반적 대우주 통제는 순전히 물리적ㆍ영적 일은 아니다. 일곱 초우주에서 그 통제는 주로 물질적ㆍ영적이지만 또한 최상위의 지적ㆍ영적 현상도 있다.
116:1.5 (1269.4) 이 진화하는 신의 어떤 다른 모습보다도 우리는 최상위의 지성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적다. 물어볼 것 없이 그 지성은 대우주에 두루 활발하고, 총 우주에서 활동하는 잠재 운명을 가졌다고 믿어지며, 거기서 활동의 범위는 광대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안다: 체격의 성장은 끝에 다다를지 모르고, 영은 완전히 발육될지 모르지만, 지성은 결코 진보를 멈추지 않는다―지성은 끝없이 진보하는 체험적 기법이다. 최상위는 체험하는 신이며, 따라서 결코 지성의 달성을 끝마치지 못한다.
116:2.1 (1269.5) 전능자가 우주의 권능으로서 계심이 나타나는 것은, 진화하는 여러 초우주의 높은 창조자와 통제자들이 우주의 행동 무대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때에 일어난다.
116:2.2 (1269.6) 최상위 하나님은 그의 영과 성격 속성을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로부터 얻지만, 창조 아들, 옛적부터 늘 계신 이, 으뜸 영들의 행위 속에서 권능을 현실화하고 있으며, 그들의 집단 행위는 일곱 초우주에 대하여, 그리고 거기서 전능한 군주로서, 그의 성장하는 권능의 근원이다.
116:2.3 (1269.7) 시공에서 진화하는 인간은 제한이 없는 파라다이스 신을 이해할 수 없다. 영원과 무한은 시공의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신 실체를 의미한다. 신의 무한성과 절대적 통치권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안에 본래부터 있으며, 삼위일체는 필사 인간이 얼마큼 이해할 수 없는 한 실체이다. 우주 관계들을 파악하고 신성의 의미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시공의 인간은 기원ㆍ관계ㆍ운명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파라다이스 신은 파라다이스 바깥에서 일어나는 신성(神性)의 성격화를 묽게 만들고 달리 제한하며, 이처럼 최상 창조자들과 그 동료들이 존재하게 만든다. 이들은 늘 생명의 빛을, 여러 진화 세계에서 수여 아들들이 땅에서 인생을 살면서 그 빛의 가장 멀고 아름다운 표현을 찾을 때까지, 그 파라다이스 근원으로부터, 멀리멀리 가지고 간다.
116:2.4 (1270.1) 이것이 칠중 신의 기원이며, 필사 인간은 다음 순서로 이들의 연속된 수준과 마주친다:
116:2.5 (1270.2) 1. 창조 아들 (그리고 창조 영).
116:2.12 (1270.9) 처음 세 수준은 최상 창조자들이다. 마지막 세 수준은 파라다이스 신들이다. 최상위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체험적 영 성격이 된 것으로서, 파라다이스 신들의 자손인 창조자들의 초점, 진화적으로 전능한 권능의 체험적 초점으로서, 늘 사이에 낀다. 최상 존재는 일곱 초우주에 대하여, 그리고 현재 우주 시대에, 신이 최대로 계시된 것이다.
116:2.13 (1270.10) 필사자가 논리를 따지는 기법으로, 칠중 신의 처음 세 수준의 집단 행동을 체험으로 다시 통일하는 것은 파라다이스 신 수준과 대등하게 될 것이라 추론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파라다이스 신은 실존적 신이다. 최상 창조자들은 그들의 권능과 성격이 신답게 통일된 가운데 체험하는 신의 새로운 권능 잠재성을 구성하고 표현한다. 그리고 체험적 기원을 가진 이 권능 잠재성은,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체험하는 신―최상 존재―와 불가피하게, 달아날 수 없이 통합됨을 발견한다.
116:2.14 (1270.11) 최상위 하나님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아니며, 초우주 창조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모두도 아니며, 그들의 기능적 활동은 그의 진화하는 전능한 권능을 실제로 통합한다. 최상위 하나님은 삼위일체에서 기원을 가지지만, 오직 칠중 신의 처음 세 수준의 조정된 기능을 통해서, 권능을 가진 성격자로서 진화하는 인간에게 표현된다. 영원 속에서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의 뜻에 따라서 합동 행위자가 번쩍 생긴 것 같이, 전능 최상위는 최상 창조 성격자들의 활동을 통해서 시공에서 사실화되고 있다. 칠중 신의 처음 세 수준에 있는 이 존재들은 전능 최상위의 권능의 바로 그 성질이요 근원이다. 따라서 그들은 늘 그의 행정 행위를 따라가고 유지해야 한다.
116:3.1 (1270.12) 파라다이스 신들은 대우주에서 두루, 그들의 인력(引力) 회로에서 직접 행동할 뿐 아니라, 또한 여러 대리자와 다른 명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활동한다:
116:3.2 (1270.13) 1. 셋째 근원 중심의 지성 집중. 에너지와 영의 유한한 영토는 합동 행위자 지성의 계심으로 인하여, 글자 그대로 함께 유지된다. 지역 우주의 창조 영을 비롯하여 초우주의 거울 영들을 거쳐서, 대우주에 있는 으뜸 영들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참말이다. 다양한 이 지능 초점들로부터 방사되는 지성 회로들은 사람이 선택하는 우주 무대를 대표한다. 지성은 인간과 창조자들이 아주 쉽게 조종할 수 있는 신축성 있는 실체이다. 지성은 물질과 영을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이다. 셋째 근원 중심이 지성을 수여하는 것은 최상위 하나님의 영 몸과 진화하는 전능자가 체험으로 얻는 권능을 하나로 만든다.
116:3.3 (1271.1) 2. 둘째 근원 중심의 성격 계시. 합동 행위자의 지성 계심은 신의 영과 에너지 형태를 통일한다. 영원한 아들과 파라다이스 아들들이 자신 수여로 육신화하는 것은 한 창조자의 신다운 성품을 한 인간의 진화하는 성품과 통일하고, 실제로 융합한다. 최상위는 지음 받은 자이자 창조자이다. 그가 그렇다는 가능성은 영원한 아들, 그리고 그와 동급이거나 그에 부속된 아들들의 자신 수여 행위에서 드러난다. 수여 계급의 아들, 미가엘과 아보날은, 여러 진화 세계에서 실제로 사람의 생애를 살아 봄으로 그들의 것이 되어 버린, 진정한 인간 성품과 함께 그들의 신다운 성품을 실제로 확대한다.
116:3.4 (1271.2) 3. 첫째 근원 중심의 깃드는 계심. 지성은 영 원인을 에너지 반응과 통일한다. 자신을 수여하는 봉사는 신이 내려오는 것과 인간이 올라가는 것을 통일한다. 우주의 아버지의 깃드는 분신들은 진화하는 인간을 파라다이스에 계신 하나님과 실제로 통일한다. 수많은 계급의 성격자에게 깃드는 아버지의 그러한 계심은 허다하며, 필사 인간의 경우에 하나님의 이 신다운 분신은 생각 조절자이다. 신비의 훈계자와 인간의 관계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와 최상 존재의 관계와 같다. 조절자는 절대 기초이며, 절대 기초 위에서 자유 의지의 선택은 영원자 성품의 신다운 실체, 즉 사람의 경우에는 최후자 성품, 최상위 하나님의 경우에는 신의 성품이 진화하도록 만들 수 있다.
116:3.5 (1271.3) 파라다이스 계급의 아들이 생물에게 자신을 수여하는 것은, 이 신다운 아들들이 우주 생물의 실제 성품을 얻음으로 아들들의 성격을 강화하며, 한편 그러한 수여는 바로 그 생물에게 신성을 얻는 길, 파라다이스로 가는 길을 어김없이 드러낸다. 우주의 아버지가 조절자를 수여하는 것은 의지를 가진 사람의 인격을 아버지를 향하여 끌어당기게 만든다. 유한한 우주에서 이 모든 관계에 두루, 합동 행위자는 지성이 베푸는 봉사의 상존(常存)하는 근원이며, 그 덕택으로 이러한 활동이 일어난다.
116:3.6 (1271.4) 이것과 기타 많은 방법으로 파라다이스 신들은, 시간 세계의 진화가 공간의 회전하는 행성에서 펼쳐짐에 따라서, 모든 진화의 결과, 최상위 성격의 결과가 마침내 나타나는 동안 그 진화에 참여한다.
116:4.1 (1271.5) 최상위 총체의 통일성은 유한한 부분들의 점진적 통일에 의존한다. 최상위가 사실이 되는 것은 최상의 요인들―여러 우주의 창조자ㆍ생물ㆍ지능ㆍ에너지―가 바로 이렇게 통일됨으로부터 생기고, 또 그러한 통일을 낳는다.
116:4.2 (1272.1) 최상위의 통치권이 시간이 걸려 발전을 거치고 있는 시대에는, 최상위의 전능한 권능은 칠중 신이 신(神)으로서 하는 행위에 의존하고, 한편 최상 존재와 합동 행위자 및 그의 1차 성격자인 일곱 으뜸 영 사이에, 특별히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 무한한 영은 합동 행위자로서 진화하는 신의 불완전함을 보충하며, 최상위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활동한다. 이 밀접한 관계는 어느 정도 모든 으뜸 영이, 그러나 특히 으뜸 영 7번이 함께 가지며, 그는 최상위를 대신하여 말씀한다. 이 으뜸 영은 최상위를 안다―그와 친히 접촉을 가진다.
116:4.3 (1272.2) 초우주 창조 계획을 예측하면서 일찍부터, 으뜸 영들은 거울 영 49명을 공동으로 창조하는 일에 조상인 삼위일체와 함께 하였고, 동시에 최상 존재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및 파라다이스 신의 창조하는 자식들의 통합된 행동을 완성하는 자로서, 창조하는 일에 활동했다. 위엄자가 나타나서, 그 뒤로 늘 최상 지성의 우주 계심을 집중하였고, 한편 으뜸 영들은 우주 지성이 널리 봉사하도록 근원 중심으로서 계속한다.
116:4.4 (1272.3) 그러나 으뜸 영들은 거울 영들을 계속 감독한다. 일곱째 으뜸 영은 (중앙 우주로부터 오르본톤을 전반적으로 감독하는 작업에서) 유버르사에 자리잡은 일곱 거울 영과 친히 접촉한다 (그리고 그들을 전반적으로 통제한다). 초우주 사이 및 초우주 내부의 통제 및 행정에서, 그는 각 초우주 서울에 자리잡은 자기 종류의 거울 영들과 거울 작용으로 접촉을 가진다.
116:4.5 (1272.4) 이 으뜸 영들은 최상위의 통치권을 지지하고 확대할 뿐 아니라, 다음에 그들은 최상위의 창조 목적에 영향을 받는다. 대체로, 으뜸 영들이 집단으로 창조한 것들은 준(準)물질 계급이며 (동력 지휘자와 기타), 한편 개별로 창조하는 것들은 영적 계급이다 (상천사와 기타). 그러나 으뜸 영들이 최상 존재의 뜻과 목적에 반응하여, 집단으로 일곱 회로 영을 낳았을 때, 이 창조 행위에서 나온 자식은 물질이거나 준물질이 아니라, 영적 자식임을 살펴야 한다.
116:4.6 (1272.5) 그리고 여러 초우주의 으뜸 영들의 경우와 같이, 이 초월 우주들의 삼자일치 통치자―옛적부터 늘 계신 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시공에서 삼위일체의 응보와 판단이 이렇게 성격화된 것들은 최상위의 전능한 권능을 동원하기 위한, 현장의 지레 받침이며, 이것은 시간과 공간의 영토에서 삼위일체 통치권의 진화에 일곱 초점으로서 쓰인다. 파라다이스와 진화하는 세계들의 중간에 있는 유리한 위치로부터, 삼위일체 기원을 가진 이 군주들은 양쪽을 보고, 양쪽을 알며, 양쪽을 조정한다.
116:4.7 (1272.6) 그러나 지역 우주는 진짜 실험실이요, 그 속에서 지성의 실험, 은하계 모험, 신성의 전개(展開), 인격의 진보가 해결되어 나가고, 우주에서 합계했을 때 이것들은 체험 속에서, 그리고 체험으로, 최상위가 신의 진화를 성취하는 그 실제 기초를 이룬다.
116:4.8 (1272.7) 지역 우주에서는 창조자도 진화한다: 합동 행위자의 계심은 하나의 살아 있는 권능의 초점으로부터 한 우주 어머니 영의 신다운 성격의 지위로 진화한다. 창조 아들은 실존적 파라다이스 신의 성품으로부터 최상 통치권을 얻는 체험적 성품에 이르기까지 진화한다. 지역 우주는 참된 진화의 출발점이요, 예정된 바와 같이, 스스로 공동 창조자가 되는 자유 의지 선택을 부여받은, 진정한 불완전 인격자들이 태어나는 장소이다.
116:4.9 (1273.1) 진화 세계에 자신을 수여하는 심판 아들들은 물질적 인간 성품의 가장 높은 영적 가치와 체험적으로 통일하면서 궁극에 파라다이스 신을 표현하는 성품을 얻는다. 이 수여와 기타 수여를 통해서, 미가엘 창조자들은 마찬가지로 그들의 실제 지역 우주 자녀들의 성품과 우주 관점을 얻는다. 그러한 주 창조 아들들은 최상 이하 체험의 완수에 접근한다. 그들의 지역 우주 통치권이 관련된 창조 영을 포함할 만큼 커질 때, 그것은 진화하는 대우주의 현재 잠재성 안에서 최상의 한계에 접근한다고 말해도 좋다.
116:4.10 (1273.2)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내는 새 길을 수여 아들들이 드러낼 때, 그들은 신에 이르는 이 길을 창조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들은 최상위의 계심을 거쳐서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몸까지 인도하는, 진보하는 영원한 대로를 비춘다.
116:4.11 (1273.3) 지역 우주는,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성격자, 따라서 우주에서 가장 가파르게 영적 상승을 체험할 수 있고, 자신들을 공동으로 창조하는 데 최대한으로 체험으로 참여할 수 있는 인격자들의 출발점이다. 마찬가지로, 바로 이 지역 우주들은 내려가는 성격자들에게 가능한 가장 깊은 체험을 마련해 주며, 이들은 이 방법으로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것이 하나의 진화하는 인간에게 의미하는 것과 똑같이, 그들에게 의미 있는 무엇을 성취한다.
116:4.12 (1273.4) 칠중 신이 마침내 최상위로 현실화하는 동안에, 필사 인간은 이 신의 집합이 완전히 활동하는 데 필요한 듯하다. 최상위의 전능한 힘을 진화시키는 데 똑같이 필요한, 많은 다른 계급의 우주 성격자들이 있지만, 여기에 기술한 것은 인간의 훈육을 위하여 제시되며, 따라서 필사 인간에게 관계된 칠중 신의 진화에 작용하는 요소에만 대체로 국한된다.
116:5.1 (1273.5) 너희는 칠중 신과 최상 존재의 관계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고, 칠중자가 대우주의 창조자 뿐 아니라 통제자들도 포함한다는 것을 이제 헤아려야 한다. 대우주의 이 일곱 가지 통제자는 다음을 포함한다:
116:5.4 (1273.8) 3. 최상 동력 지휘자.
116:5.9 (1273.13) 이 일곱 집단은 기능적으로 칠중 신과 분리할 수 없고, 이 신 연합에서 물리적 통제 수준을 구성한다.
116:5.10 (1273.14) 일곱 으뜸 영이 뭉쳐서 집단으로 창조하는 첫 행위에 들어갔을 때, 초우주 의미에서 에너지와 영이 두 갈래로 (영원한 아들과 파라다이스 섬이 공동으로 존재함으로부터 파생된다) 갈라지는 것을 상징하였다. 이 사건은 일곱 최상 동력 지휘자의 출현을 입증한다. 그와 동시에 동력 지휘자가 감독하는 물리적 활동과 반대로 으뜸 영들의 영적 회로가 구별되었고, 물질과 영을 조정하는 새 요소로서, 즉시 우주 지성이 나타났다.
116:5.11 (1274.1) 전능한 최상위는 대우주의 물리적 동력을 전반적으로 통제하는 자로서 진화하고 있다. 현재 우주 시대에 이 물리적 동력의 잠재성은 일곱 최상 동력 지휘자에 집중되는 듯하며, 이들은 동력 중심들의 고정된 위치를 통해서, 그리고 물리 통제자들의 움직이는 계심을 통해서 작용한다.
116:5.12 (1274.2) 시간 지역의 우주들은 완전하지 않다. 그것이 그 우주들의 운명이다. 완전을 위한 싸움은 지적ㆍ영적 수준 뿐 아니라, 또한 물리적 수준, 에너지와 질량에도 관계된다. 일곱 초우주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는 것은 그 우주들이 물리적 안정에 도달했음을 미리 가정한다. 물질의 균형을 마침내 이루는 것은 전능자의 물리적 통제가 진화를 마쳤음을 뜻한다고 추측된다.
116:5.13 (1274.3) 우주를 짓는 초기에는 파라다이스 창조자들도 1차적으로 물질의 균형에 관심을 가진다. 한 지역 우주의 형태는 동력 중심들이 활동한 결과일 뿐 아니라, 또한 창조 영의 공간 계심 때문에 모습을 갖춘다. 지역 우주를 짓는 초기 시대를 통하여 내내, 창조 아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물질 통제 속성을 나타내며, 지역 우주가 대체적 균형을 얻을 때까지 그의 서울 행성을 떠나지 않는다.
116:5.14 (1274.4) 모든 것을 고려하건대, 모든 에너지는 지성에 반응하며, 물리 통제자들은 지성 하나님의 자식이요, 이 하나님은 파라다이스 원본을 활성화시키는 분이다. 동력 지휘자들의 지능은 물질을 통제하는 과제에 쉴 사이 없이 전념한다. 에너지의 관계와 질량의 운동을 물리적으로 지배하려는 투쟁은, 그들의 영구한 활동 분야인 에너지와 질량에 대하여 유한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 결코 그치지 않는다.
116:5.15 (1274.5) 시공에서 영의 투쟁은 (인격을 가진) 지성이 중재함으로 영이 물질을 지배하는 진화와 상관이 있다. 우주들의 물리적 (비인격) 진화는 우주 에너지를 영의 전반적 통제 밑에서 지성의 균형 개념과 조화시키는 것과 상관이 있다. 대우주 전체의 총 진화는 에너지를 통제하는 지성, 그리고 영이 조정한 지능, 이 두 가지를 성격이 통일하는 문제이며, 그것은 최상위의 전능한 동력이 완전히 나타남으로 드러날 것이다.
116:5.16 (1274.6) 동태적 균형 상태에 이르는 어려움은 성장하는 우주의 사실에 본래부터 있다. 물리적 창조의 확립된 회로들은 새 에너지와 새 질량이 나타남으로 계속 위협을 받는다. 성장하는 우주는 안정되지 않은 우주이다. 따라서 세월이 충분히 지나서 일곱 초우주가 물질적으로 완성된 것을 입증할 때까지, 전체 우주의 어느 부분도 진정한 안정을 찾을 수 없다.
116:5.17 (1274.7)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우주에서는 기대하지 않은 큰 중요성을 가진 아무런 물리적 사건이 생기지 않는다. 물질 창조에 대하여 비교적 완전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안정된 우주와 진화하는 우주들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아직도 우주 동력 지휘자들의 솜씨에 계속 도전한다. 그러나 대우주가 드디어 진화적 표현의 절정에 가까워짐에 따라서, 이 문제들은 새로운 창조 활동이 줄어드는 것과 함께 차츰 사라질 것이다.
116:6.1 (1275.1) 진화하는 초우주에서는, 성격자의 경우를 제외하고 에너지와 물질이 지배하며, 성격자 안에서는 지성의 중재를 통해서 영이 주도권을 쥐려고 싸운다. 진화하는 우주들의 목표는 지성으로 에너지와 물질을 정복하고 지성과 영을 조정하는 것이며, 창조적이고 통일하는 성격의 덕택으로 이 모두가 일어난다. 따라서 성격과 가지는 관계에서 물리적 체제들은 종속되어 있고, 지성 체계들은 서로 나란히 있으며, 영 체계들은 지휘하게 된다.
116:6.2 (1275.2) 이 권능과 성격의 연합은 최상위 안에서, 그리고 최상위로서, 신 수준에서 표현된다. 그러나 영의 지배가 실제로 진화하는 것은 대우주의 창조자 및 생물들의 자유 의지 행위에 바탕을 둔 성장이다.
116:6.3 (1275.3) 절대 수준에서 에너지와 영은 하나이다. 그러나 그러한 절대 수준에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차이가 나타나고, 에너지와 영이 파라다이스로부터 공간을 향하여 움직임에 따라서, 그 사이의 간격은 지역 우주에서 어지간히 갈라질 때까지 벌어진다. 에너지와 영은 이제 더 동일하지 않고 비슷하지도 않으며, 지성이 그것들을 서로 연결지으려고 간섭해야 한다.
116:6.4 (1275.4) 통제 성격자들의 행위로 에너지의 방향이 정해질 수 있다는 것은 에너지가 지성의 행위에 민감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바로 고삐를 쥐는 이 개체들의 행위를 통하여 질량이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은, 질서를 낳는 지성의 계심에 질량이 민감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의지를 가진 성격 안에서 영 자체가 에너지와 물질을 통달하기 위하여 지성을 통해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유한 창조가 통일될 가능성이 있음을 드러낸다.
116:6.5 (1275.5) 온 우주에 두루, 모든 물력과 성격자는 서로 의존한다. 창조 아들과 창조 영들은 지역 우주를 조직하는 데 동력 중심과 물리 통제자들의 협동하는 기능에 의존한다. 최상 동력 지휘자들은 으뜸 영들의 전반적 통제가 없이 불완전하다. 한 인간 존재에서 육체 생명의 작용은 (성격을 가진) 지성의 지시에 어느 정도 민감하다. 바로 이 지성은 다음에, 의도하는 영의 인도함에 지배될 수도 있고, 그러한 진화적 발전의 결과는 최상위의 새로운 자식을 생산하는 것이요, 이는 몇 종류의 우주 실체를 새로이 성격으로 통일하는 것이다.
116:6.6 (1275.6) 그리고 부분의 경우와 같이, 전체의 경우에도 그렇다. 완성된 신이 되고 삼위일체와 연합하는 운명을 얻기 위해서, 최상위의 영 몸은 전능자의 진화적 힘을 필요로 한다. 시공의 성격자들이 그 노력을 기울이지만, 이 노력이 절정에 이르고 성취되는 것은 전능한 최상위의 행위이다. 이처럼 전체의 성장은 부분들의 집합된 성장의 합계이지만, 마찬가지로 마땅히 부분들의 진화는 전체가 의도한 성장이 분할되어 비친 것이다.
116:6.7 (1275.7) 파라다이스에서, 일력(一力)과 영은 하나와 같다―이름이 아니고는 구별할 수 없다. 하보나에서 물질과 영은 구별할 수 있게 다르지만, 동시에 본질적으로 조화되어 있다. 그러나 일곱 초우주에서 큰 차이가 있다. 우주 에너지와 신다운 영 사이에 넓은 간격이 있다. 따라서 물리적 형태를 영적 목적과 조화시키고 궁극에 통일하는 데, 지성이 활동할 더 큰 체험 잠재성이 있다. 시간 지역에서 진화하는 여러 공간 우주에는 신성이 더 묽어지고, 풀어야 할 어려운 문제들이 더 있고 이를 해결하는 체험을 얻을 기회가 더 크다. 이 초우주 상황 전체는 진화로 존재하는 더욱 큰 경기장이 생기게 하며, 그 속에서 우주적 체험의 가능성은 인간과 창조자에게―최상의 신에게도―똑같이 소용된다.
116:6.8 (1276.1) 영의 지배는 절대 수준에서 실존적이지만, 유한 수준에서, 그리고 일곱 초우주에서 진화하는 체험이 된다. 필사 인간으로부터 최상 존재에 이르기까지, 이 체험을 모두가 함께 한다. 성취하는 일에 모두가 애쓰고, 몸소 애쓴다. 모두가 운명에 참여하고, 몸소 참여한다.
116:7.1 (1276.2) 대우주는 물리적으로 웅장하고 영적으로 숭고하고 지적으로 위대한 물질 창조일 뿐 아니라, 또한 훌륭하고 민감한 살아 있는 유기체이다. 활기에 넘치는 우주에서 광대한 창조의 기계 작용에 두루, 맥박치는 실제 생명이 있다. 우주의 물리적 실체는 파악할 수 있는 전능한 최상위의 실체를 상징한다. 신경(神經) 감각 경로의 망이 인간의 몸을 통과하는 것처럼, 지성 회로들이 물질적이고 살아 있는 이 유기체에 침투한다. 이 물질 우주가 에너지 길로 채워져 있고, 동화(同化)할 수 있는 영양 에너지 산물을 순환하여 분산함으로 인간의 몸이 영양과 에너지를 받는 것처럼, 에너지 길은 효과 있게 물질 창조를 움직이게 만든다. 광대한 우주는, 인체의 작용에서 섬세한 화학적 통제 체계에 견줄까 싶은 중심, 훌륭하게 전반적으로 통제하는 조정 중심들이 없지는 않다. 동력 중심의 체격에 관하여 얼마큼 알기만 한다면, 우리는 유추(類推)함으로 물리적 우주에 관하여 훨씬 더 많이 일러줄 수 있다.
116:7.2 (1276.3) 필사자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태양 에너지에 기대는 것과 비슷하게, 마찬가지로 대우주는 물질의 활동과 공간의 우주 운동을 유지하려고 아래 파라다이스로부터 방사되는 어김없는 에너지에 의존한다.
116:7.3 (1276.4) 신분과 인격을 스스로 의식하도록 지성이 필사자에게 부여되었다. 그리고 지성은―최상 지성조차도―유한자의 총체 위에 수여되었고, 이렇게 함으로 우주에서 솟아나는 이 인격의 영은 에너지와 물질을 통달하려고 늘 애쓴다.
116:7.4 (1276.5) 대우주가 영원한 아들의 널리 퍼진 영 인력의 붙잡는 힘에 반응하는 것 같이, 필사 인간은 영의 안내에 민감하며, 이 힘은 시공의 유한한 우주에서 모든 창조의 영원한 영적 가치가 보편적 초물질로 일체가 된 것이다.
116:7.5 (1276.6) 인간은 파괴할 수 없는 총 우주 실체와 영구하게 자아를 동일시하는 능력―깃드는 생각 조절자와 융합하는 능력―이 있다. 마찬가지로, 최상위는 최초의 신, 곧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절대로 안정된 것에 영구하게 의존한다.
116:7.6 (1276.7) 파라다이스의 완전함에 이르려는 사람의 욕구, 하나님께 도달하려는 사람의 투쟁은 살아 있는 우주에서 신성의 진정한 긴장을 일으키며, 이 긴장은 오직 불사의 혼을 개발함으로 풀릴 수 있다. 이것이 단일 필사 인간의 체험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대우주에서 모든 사람과 모든 창조자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도달하고 신다운 완전함을 얻으려고 애쓸 때, 깊은 우주의 긴장이 쌓이며, 이것은 오로지 전능한 권능을 모든 사람의 진화하는 하나님, 즉 최상 존재의 영 성격의 전능한 힘과 숭고하게 통합하는 데서 해결을 찾을 수 있다.
117:0.1 (1278.1) 우리가 어떤 우주 정거장에서 존재하더라도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범위까지, 그만큼 최상위의 전능한 잠재성은 한 걸음 더 사실에 가까워진다. 하나님의 뜻은 첫째 근원 중심의 목적이요, 이는 세 절대자 안에서 잠재성이 되고 영원한 아들 속에서 성격이 되고, 무한한 영 안에서 우주 활동을 위하여 연결되고, 파라다이스의 영원한 원본에서 영원하게 된 바와 같다. 그리고 최상위 하나님은 하나님의 총 의지의 최대의 유한한 명시가 되고 있다.
117:0.2 (1278.2) 대우주에 사는 존재들이 모두 언제라도 하나님의 뜻을 충만히 행하는 일을 비교적 성취한다면, 그때 시공의 창조들이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될 것이다. 그때 최상위의 신 잠재성인 전능자는 최상위 하나님의 신다운 성격이 솟아나면서 사실이 된다.
117:0.3 (1278.3) 진화하는 지성이 우주 지성의 회로에 조율이 될 때, 진화하는 우주가 중앙 우주의 모습을 따라서 안정될 때, 진보하는 영이 으뜸 영들의 통합된 봉사와 접촉할 때, 하늘 가는 필사 성격자가 깃드는 조절자의 신성한 이끄심에 마침내 조율이 될 때, 이때 최상위의 사실성은 여러 우주에서 한 눈금만큼 더 현실이 된다. 이때 최상위의 신성은 우주에서 실현을 향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117:0.4 (1278.4) 대우주의 부분과 개인들은 최상위의 총 진화가 반영(反映)된 것으로서 진화하며, 한편 다음에 최상위는 모든 대우주의 진화를 통합한 누적 합계이다. 필사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둘은 서로 진화적ㆍ체험적으로 돕는 자이다.
117:1.1 (1278.5) 최상위는 물리적으로 조화된 아름다움이요, 지적 의미를 가진 진리요, 영적 가치를 가진 선(善)이다. 그는 참된 성공의 단 맛이요, 영구한 성취에서 얻는 기쁨이다. 그는 대우주의 대혼(大魂)이요, 유한한 우주의 의식(意識), 유한한 실체의 완성이요, 창조자와 인간의 체험이 성격화된 것이다. 모든 앞날의 영원을 통하여, 최상위 하나님은 신의 여러 삼자일체 관계에서 의지(意志)한 체험의 실체를 표현할 것이다.
117:1.2 (1278.6) 최상 창조자들의 몸을 입고서 신들이 파라다이스로부터 시간과 공간의 영토로 내려왔으니, 이는 거기서 파라다이스에 다다를 능력으로 아버지를 찾아서 그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인간을 창조하고 진화시키려는 것이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내려오는 창조자, 그리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올라가는 인간들로 이루어진 이 우주 행렬은 최상위가 신으로 진화함을 드러내며, 그분 안에서 내려오는 자와 올라가는 자 모두가 서로 이해하고, 영원히 보편적으로 형제임을 발견한다. 최상 존재는 이처럼 원인인 완전한 창조자의 체험과 완전하게 되는 인간의 반응 체험을 유한하게 통합한 것이 된다.
117:1.3 (1279.1) 대우주는 완벽한 통일 가능성을 담고 있고, 늘 이를 추구한다. 이것은 이러한 우주적 존재가 아무 제한 없이 통일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창조 행위와 권능이 내린 명령의 결과라는 사실로부터 생겨난다. 바로 이 삼자일체의 통일성은 최상위 안에서 유한한 우주에서 표현되며, 그의 실체는 우주들이 삼위일체와 동일시하는 최대 수준에 도달함에 따라서, 갈수록 더 분명해진다.
117:1.4 (1279.2) 창조자의 뜻과 인간의 뜻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이것들은 체험적으로 비슷하니, 이는 인간과 창조자가 우주의 완전을 이룩하는 데 함께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연결하여 일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 영원한 최후자를 함께 창조한다. 하나님은 아들들이 육신화될 때 인간으로서도 일할 수 있고, 이 아들들은 이렇게 함으로 인간이 되는 최고의 체험을 얻는다.
117:1.5 (1279.3) 최상 존재의 경우에, 창조자와 인간은 하나의 신 안에서 뭉치며, 그의 뜻은 하나의 신다운 성격을 표현한다. 네바돈의 주 아들의 최고 의지가 이제는 신과 인류의 뜻의 조합보다 더 큰 무엇인 것과 같이, 최상위의 이 뜻은 인간이나 창조자의 뜻보다 더 큰 무엇이다. 파라다이스의 완전함과 시공 체험의 연합은 실체의 신 수준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닌 가치를 낳는다.
117:1.6 (1279.4) 최상위의 진화하는 신다운 성품은 대우주에서 모든 생물과 모든 창조자의 비할 데 없는 체험을 충실히 나타내는 그림이 되고 있다. 최상위 안에서, 지은 자의 신분과 지음 받은 자의 신분이 한 몸이 된다. 모든 유한한 창조가 불완전의 사슬을 벗어나 완전과 해방을 찾아서 영원한 길을 추구하는 동안, 그들을 괴롭히는 다양한 문제의 해결에 따르는 변천에서 생긴 바로 그 체험으로 인하여 그들은 언제까지나 뭉쳐진다.
117:1.7 (1279.5)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은 영이 베푸는 봉사, 파라다이스의 웅장함, 아들의 자비, 그리고 최상위의 체험 안에서 서로 상관된다. 최상위 하나님은 진리요 아름다움이요 선이니, 이러한 신성 개념이 관념적 체험의 유한한 최대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신성의 이 삼자일치 품질의 영원한 근원은 유한 초월의 수준에 있지만, 한 인간은 그러한 근원을 초월 진리, 초월적 아름다움, 초월적 선으로만 겨우 파악할 수 있다.
117:1.8 (1279.6) 창조자 미가엘은 창조자로서 아버지가 지상의 자녀들에 대하여 품는 신의 사랑을 드러냈다. 이 신의 사랑을 발견하고 또 받았으니까, 사람들은 육체를 입은 동포에게 이 사랑을 드러내는 포부를 품을 수 있다. 인간의 그러한 애정은 최상위의 사랑을 참되게 반영하는 것이다.
117:1.9 (1279.7) 최상위는 대칭으로 포함하는 성질이 있다. 첫째 근원 중심은 위대한 세 절대자 안에서 잠재하며, 파라다이스에서, 아들 안 에서, 영 안에서 실재한다. 그러나 최상위는 실재하면서 잠재하며, 최상의 성격과 전능한 힘을 가진 존재요, 인간의 노력과 창조자의 목적에 똑같이 민감하고, 우주에 대하여 스스로 행동하고 우주의 총합에 대하여 스스로 반응하며, 동시에 최상의 창조자이자 최상의 생물이다. 최상위 신은 이처럼 유한자 전체의 총합을 표현한다.
117:2.1 (1280.1) 최상위는 시간 지역에 있는 하나님이다. 시간 지역에서 사람이 성장하는 비결은 그에게 속한다. 불완전한 현재를 정복하는 것, 완전하게 되어 가는 미래를 완성하는 것이 또한 그에게 속한다. 모든 유한한 성장의 마지막 열매는 힘, 즉 통일하고 창조하는 성격이 계시는 덕택으로, 지성을 통해서 영이 통제하는 힘이다. 이 모든 성장이 마침내 가져오는 결과는 최상 존재이다.
117:2.2 (1280.2) 필사 인간에게, 존재는 성장과 마찬가지이다. 더 큰 우주 의미에서도, 정말로 그러한 듯 보일 터인데, 영의 지도를 받는 존재는 체험적 성장―지위의 확대―를 초래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우주 시대에 인간 존재의 특징을 나타내는 지금의 성장은 최상위의 한 기능이라는 의견을 우리는 오랫동안 지녀왔다. 이 종류의 성장은 최상위가 성장하는 시대에 특이한 것이며, 최상위가 성장을 마침과 함께 종결되리라고 우리는 똑같이 주장한다.
117:2.3 (1280.3) 인간이 삼자일체 체험으로 낳은 아들들의 지위를 생각해 보아라. 그들은 현재 우주 시대에 태어나고 산다. 그들은 지성ㆍ영 재산과 함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체험을 겪고 그 기억을 지니지만, 하늘 가는 자처럼 자라지 않는다. 인간이 삼자일체로 낳은 이 아들들이 현재 우주 시대에 있지만, 정말로 그들은 다음 우주 시대―최상위의 성장이 끝난 뒤에 다가올 시대―의 출신이라고 우리는 믿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불완전하고, 따라서 성장하는 최상위의 현재 상태의 시점에서, 그들은 최상위 안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현재 우주 시대의 체험적 성장에 참여하지 않고, 다음 우주 시대를 위하여 예비로 남아 있다.
117:2.4 (1280.4) 내 자신의 계급, 막강한 사자들은 삼위일체의 품에 안겼으니까, 현재 우주 시대의 성장에 참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실로 삼위일체의 고정된 아들인 것처럼,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지위는 지난 우주 시대에 속한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의 지위는 삼위일체의 품에 안김으로 고정되었고, 체험은 이제 더, 궁극에 성장을 낳지 않는다.
117:2.5 (1280.5) 이것은 최후자나 최상위의 성장 과정에 참여하는 계급, 진화하고 체험하는 계급에 속하는 어떤 다른 자들에게는 참말이 아니다. 유란시아에서 지금 살며, 파라다이스에 이르고 최후자 지위를 얻는 큰 뜻을 품을 수도 있는 너희 필사자들은, 너희가 최상위 속에 있고, 그에게서 나왔고, 따라서 최상위가 성장하는 주기(週期)에 참여하기 때문에, 다만 그러한 운명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117:2.6 (1280.6) 언젠가 최상위의 성장이 끝날 것이다. 그의 지위는 (에너지와 영 의미에서) 완성될 것이다. 최상위의 진화가 이렇게 그칠 때 또한 최상위의 일부로서 인간의 진화가 끝나게 될 것이다. 어떤 종류의 성장이 바깥 공간 우주들의 특징을 나타낼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일곱 초우주가 진화하는 현재 우주 시대에 우리가 보아 온 어떤 것과도 매우 다른 무엇일 것이라 우리는 아주 확신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바깥 공간자들이 이렇게 최상위의 성장으로 혜택을 받지 못한 결핍을 메워 주는 것이 대우주에서 진화하는 시민들의 역할일 것이다.
117:2.7 (1280.7) 현재 우주 시대가 끝나고서 계실 최상 존재는 대우주에서 체험적 군주로서 활동할 것이다. 바깥 공간자―다음 우주 시대의 시민―들은 초우주 이후의 성장 잠재성을 가질 터이고, 이것은 전능한 최상위의 통치권을 미리 가정하는, 진화로 얻은 능력이며, 따라서 현재 우주 시대의 권능과 성격을 합성하는 데 인간이 참여하는 것을 막는다.
117:2.8 (1281.1) 이처럼 최상위의 불완전성은 미덕으로 여겨도 좋으니, 이는 그것이 현재 여러 우주에 있는 인간과 창조의 진화적 성장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비어 있는 것은 미덕이 있으니, 빈 것이 체험으로 채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117:2.9 (1281.2) 유한한 철학에서 가장 흥미를 자아내는 물음 중에서 하나는 이것이다: 최상 존재는 대우주의 진화에 반응하여 현실이 되는가, 아니면 최상위가 차츰 현실이 되는 데 반응하여 이 유한한 우주가 점진적으로 진화하는가? 아니면 성장하려고 그들이 서로 의존하는 것, 그들이 진화에서 서로 돕는 자이고, 하나가 다른 하나의 성장을 일으키는 것이 가능한가? 다음에 대하여 우리는 확신한다. 높고 낮은 생물과 우주들은 최상위 안에서 진화하고 있고, 그들이 진화함에 따라서 이 우주 시대의 유한한 활동 전체의 통일된 합계가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최상 존재의 출현이요, 모든 성격자에게 최상위 하나님의 전능한 힘이 진화하는 것이다.
117:3.1 (1281.3) 최상 존재, 최상위 하나님, 전능한 최상위, 이렇게 여러 가지로 일컫는 우주 실체는 태어나는 단계에 있는 모든 유한 실체를 복잡하게 보편적으로 통합한 것이다. 영원한 에너지, 신다운 영, 우주 지성의 방대한 분화는 최상위의 진화에서 유한한 절정에 이르며, 그는 모든 유한한 성장의 총합이요, 유한하게 최대로 완성하는 신 수준에서 스스로 실현한 것이다.
117:3.2 (1281.4) 최상위는 공간에서 은하계의 전체 광경 속에 구체화되는 삼극일치들의 창조적 무한이 흐르는 신성한 경로이다. 그 광경을 배경으로 시간 지역에서 훌륭한 인격자의 드라마가 벌어지는데, 곧 지성의 중재를 통하여 영이 에너지와 물질을 정복하는 드라마이다.
117:3.3 (1281.5) 예수는 말했다: “나는 생명의 길이라,” 그래서 그는 자의식을 가지는 물질 수준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는 영적 수준까지 이르는 생명의 길이다. 예수가 자아로부터 하나님께 도달하기까지 올라가는 이 생명의 길인 것 같이, 최상위는 유한한 의식으로부터 의식을 초월하기까지, 아니 초한(超限) 통찰력까지도 달성하는 생명의 길이다.
117:3.4 (1281.6) 너희의 창조 아들은 실제로, 인간이 신에 이르는 그러한 생명의 경로일 수 있으니, 이는 그가 이 요수아 벤 요셉, 즉 사람의 아들의 참된 인간성으로부터 네바돈 미가엘, 즉 무한한 하나님의 아들의 파라다이스 신성에 이르기까지 우주에서 진보하는 이 길을 몸소 한껏 거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최상 존재는 유한한 한계를 초월하는 우주 접근법으로서 활동할 수 있다. 이는 그가 사람의 모든 진화, 진보, 영적 변화를 사실로 구현한 것이요, 몸소 요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파라다이스로부터 내려오는 성격자들의 대우주 체험조차도 최상 존재가 겪는 체험의 일부이며, 바로 이것은 시간 순례자의 하늘 가는 체험을 그가 총합한 것을 보완한다.
117:3.5 (1281.7) 필사 인간은 비유로 하나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진 것보다 더한 존재이다. 물리적 관점에서, 이 말은 도저히 참말이 아니지만, 어떤 우주 잠재성에 관하여 이것은 실제로 있는 사실이다. 온 우주에서 광대하게 더 큰 규모로 일어나는, 진화로 달성하는 바로 그 드라마와 비슷한 무엇이 인류에게 펼쳐지고 있다. 사람, 즉 의지를 가진 인격자는, 최상위의 유한한 잠재성이 있는 가운데, 비성격 개체인 조절자와 연락하여 창조성을 가지며, 그 결과로 한 불사의 혼이 자란다. 여러 우주에서 시공의 창조 성격자들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비성격 영과 연락하여 활동하며, 이렇게 함으로 신 실체의 새로운 동력 잠재성을 창조하게 된다.
117:3.6 (1282.1) 최상 존재는 신이요, 필사 인간은 지음받은 자이니까, 최상 존재와 똑같지는 않지만 사람의 진화는 어떤 면에서 최상 존재의 성장과 비슷하다. 사람은 자신이 내리는 결정이 얼마나 강하고 힘차고 끈질긴가에 따라서, 물질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을 향하여, 의식하면서 자란다. 사람은 또한 조절자가 영적 수준에서 상물질 혼의 수준으로 손을 뻗으려고 새로운 기법을 개발함에 따라서 자란다. 일단 혼이 생기면, 혼은 그 자체로서 저절로 자란다.
117:3.7 (1282.2) 이것은 최상 존재가 성장하는 방법과 얼마큼 비슷하다. 그의 통치권은 최상 창조 성격자들의 행위와 성취에서, 그리고 그로부터 성장한다. 그것은 대우주의 통치자인 그의 웅대한 권능이 진화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신 성품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선재하는 통일성에 의존한다. 그러나 최상위 하나님의 진화에 아직도 또 다른 모습이 있다. 그를 창조자가 진화시키고 삼위일체가 파생시켰을 뿐 아니라, 그는 또한 스스로 진화하고 스스로 유래한다. 최상위 하나님 자신이 신으로 사실화하는 데 의도하여 창조에 참여한 자이다. 인간의 상물질 혼은 마찬가지로, 자체의 불멸화를 의도하는 공동 창조에 협동자이다.
117:3.8 (1282.3) 파라다이스의 에너지를 조종하고 그 에너지를 최상위에 반응하도록 만드는 데, 아버지는 합동 행위자와 더불어 일한다. 아버지는 창조자인 성격자들을 낳기 위하여 영원한 아들과 함께 일하고, 이들의 활동은 언젠가 최상위의 통치권을 마침내 성취할 것이다. 최상위의 진화가 완성되어 그가 그 통치권을 맡을 자격을 갖추게 할 때까지, 대우주의 통치자로서 활동할 삼위일체 성격자들을 창조할 때 아버지는 아들과 영, 두 분과 함께 일한다. 최상위의 진화를 촉진하면서 이것과 기타 여러 방법으로, 아버지는 신 및 신이 아닌 동급 존재들과 협동하지만, 그는 또한 이런 문제에서 홀로 활동한다. 그리고 그가 혼자 하는 활동은 아마도 생각 조절자 및 관련된 개체들이 베푸는 봉사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117:3.9 (1282.4) 신은 통일성이요, 삼위일체로서 실존적이고 최상위로서 체험하며, 필사자의 경우에는 조절자 융합으로 인간이 실현하는 것이다. 필사 인간 속에 생각 조절자가 계심은 우주가 본질적으로 하나됨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사람, 가능한 가장 낮은 부류의 우주 성격자는, 그 몸 안에 가장 높고 영원한 실체, 아니 모든 성격자의 처음 아버지의 실제 분신조차 품고 있다.
117:3.10 (1282.5) 최상 존재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와 연락하는 덕택으로, 그리고 그 삼위일체의 자식인 창조자와 행정가들이 신으로 성공한 결과로서 진화한다. 사람의 불멸하는 혼은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신다운 계심과 교제함으로, 그리고 인간 지성이 내리는 인격 결정에 따라서,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진화시킨다. 삼위일체와 최상위 하나님의 관계는 조절자와 진화하는 사람의 관계와 같다.
117:3.11 (1282.6) 시공의 창조 대리자들이 유한한 행동 가능성을 소모한 경우를 제쳐놓고, 현재 우주 시대에 최상 존재는 창조자로서 직접 활동할 수 없는 듯하다. 우주 역사에서 이제까지 이런 일은 오직 한 번 벌어졌다. 우주 반영의 문제에서 유한한 행위의 가능성이 소모되었을 때, 이때 이 최상위는 모든 선행하는 창조자의 행위를 창조적으로 완성하는 자로서 활동하였다. 선행(先行)하는 창조권이 창조 활동의 적절한 주기를 마쳤을 때는 언제든지, 미래 시대에 완성자로서 그가 다시 활동하리라고 우리는 믿는다.
117:3.12 (1283.1) 최상 존재는 사람을 창조하지 않았지만, 사람은 글자 그대로, 최상위의 잠재성으로부터 창조되고, 사람의 바로 그 생명은 거기서부터 파생되었다. 그는 사람을 진화시키지도 않는다. 그래도 바로 최상위가 진화의 바로 그 본질이다. 유한한 관점에서 볼 때, 최상위가 우주 안에 계신 가운데 우리는 실제로 살고, 움직이고, 우리의 존재를 가진다.
117:3.13 (1283.2) 최상위는 최초의 원인 작용을 비롯할 수 없는 듯하지만, 모든 우주 성장의 촉매인 듯하며, 겉보기에 체험으로 진화하는 모든 존재의 운명에 관하여 총체의 완성을 마련하도록 예정된 듯하다. 아버지는 유한한 우주 개념을 비롯하신다. 창조 아들들은 창조 영들의 찬성과 협동을 얻어서, 시공에서 이 개념을 사실로 만든다. 최상위는 유한자 총체를 완성시키며, 그 총체와 초한자 운명의 관계를 안정시킨다.
117:4.1 (1283.3) 완전한 지위를 얻고 신다운 존재가 되려는 창조된 생물의 끊임없는 투쟁을 보건대, 우리는 이 끝없는 노력이 최상위가 신성한 자아 실현을 위하여 끝없이 투쟁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최상위 하나님은 유한한 신이며, 그는 유한이란 말의 총 의미에서, 유한자의 문제들과 씨름해야 한다. 공간 세계의 진화에서 세월의 변천과 우리가 벌이는 싸움은, 그의 진화하는 성품이 가장 바깥 한계의 가능성까지 확대하고 있는 행동 분야 안에서, 그가 자아의 실체와 완성된 통치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반영한다.
117:4.2 (1283.4) 대우주에서 두루, 최상위는 표현하려고 애쓴다. 그의 신다운 진화는, 존재하는 모든 성격자의 지혜 및 행동에 어느 정도 근거를 둔다. 한 인간이 영원히 살아남기를 택할 때, 그는 운명을 함께 창조한다. 이 하늘 가는 필사자의 생애에서, 유한한 하나님은 성격의 자아 실현이 늘어나고 체험적 통치권이 커지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영원한 생애를 싫다고 거절하면, 이 사람의 선택에 의존했던, 최상위의 그 부분은 피할 수 없이 지연되며, 이 결핍은 갈아치우거나 평행하는 체험으로 보충되어야 한다. 살아남지 못하는 자의 인격에 대해서 말하면, 그것은 창조의 대혼(大魂)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최상위 신의 일부가 된다.
117:4.3 (1283.5) 하나님은 사람을 무척 신뢰하고 사랑하므로, 보호하고 자아를 실현하라고 신다운 성품의 한 조각을 인간의 손에도 맡긴다. 필사 존재의 선택과 상관 없이, 아버지의 성품, 조절자의 계심은 파괴할 수 없다. 그러한 그릇 인도된 자아의 인격, 잠재적으로 통일하는 인격이 최상위 신의 한 요소로서 지속할 터인데도, 최상위의 아이, 진화하는 자아는 멸망할 수 있다.
117:4.4 (1283.6) 사람의 인격은 인간의 개성을 참으로 파괴할 수 있고, 비록 우주적 자살인 그러한 인생에서 가치 있었던 모든 것이 지속하겠지만, 이러한 품질은 개별 인간으로서 지속하지 않을 것이다. 최상위는 여러 우주에 있는 인간들 속에서 다시 표현을 찾아내겠지만, 결코 다시 그 특정한 인격자로서 표현되지는 않는다. 하늘 가지 않는 자의 독특한 인격은 물 한 방울이 바다로 돌아가듯 최상위에게 돌아간다.
117:4.5 (1284.1) 유한자의 인격 부분들이 어떤 고립된 행동을 하더라도, 최상위 총체가 궁극에 출현하는 데 비교적 상관이 없지만, 그런데도 전체는 다양한 부분의 총 행위에 의존한다. 개별 필사자의 인격은 최상위의 총체가 계신 앞에 하찮은 것이지만, 각 사람의 인격은 유한자에 있는 갈아치울 수 없는 의미와 가치를 대표한다. 인격은 일단 표현되고 나서, 살아 있는 그 인격자가 계속 존재할 경우를 제외하고, 결코 다시 동일한 표현을 찾지 못한다.
117:4.6 (1284.2) 그래서 우리가 자아를 표현을 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최상위는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와 함께, 신을 표현하려고 애쓰고 있다. 우리가 아버지를 찾아내는 것 같이, 마찬가지로 다음에 최상위는 만물의 파라다이스 창조자를 찾아냈다. 우리가 자아를 실현하는 문제를 통달하는 것 같이, 마찬가지로 체험하는 하나님은 시공의 여러 우주에서 전능한 최상 지위에 도달하고 있다.
117:4.7 (1284.3) 인류는 우주에서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올라가지 않는다. 의도하여 총명하게 활동하지 않고는 최상위도 진화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단지 수동적 태도로 완전을 얻지 않으며, 최상위의 영도 유한한 창조에 그침 없이 봉사를 베풀지 않고서 전능자의 힘을 사실로 만들 수 없다.
117:4.8 (1284.4) 사람이 최상위와 현세에 가지는 관계는 우주 도덕성, 곧 의무에 대한 보편적 민감성을 기르고 의무를 받아들이기 위한 기초이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현세의 감각을 뛰어넘는 도덕성이다. 그 도덕성은 자의식하는 인간이 체험하는 신에 대한 체험적 의무를 이해하는 데 직접 달려 있다. 필사 인간과 모든 다른 유한한 생물은 최상위 안에서 존재하는 에너지ㆍ지성ㆍ영의 살아 있는 잠재성으로부터 창조된다. 조절자인 필사 승천자는, 최후자의 불멸하는 신다운 인품을 창조하는 것을 최상위에게 의존한다. 최상위의 바로 그 실체로부터, 인간 의지의 찬성을 얻어서, 조절자는 하나님의 하늘 가는 아들의 영원한 성품을 무늬로 엮는다.
117:4.9 (1284.5) 사람의 인격을 영적으로 변화시키고 영원하게 만드는 일에 조절자 진보의 진화는 최상위의 통치권을 직접 확대한다. 인간의 진화에서 그러한 업적은 동시에, 최상위가 진화로 현실화하는 업적이다. 인간이 최상위 없이 진화할 수 없다는 것이 참말이지만, 모든 인간의 완성된 진화와 상관 없이 최상위의 진화가 결코 완전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아마 참말일 것이다. 여기에 자의식하는 인격자들의 큰 우주 책임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최상 신은 필사자의 의지의 선택에 달려 있다. 사람의 진화와 최상위의 진화가 함께 나아가는 것은, 탐구할 수 없는 우주 거울 작용을 거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에게 충실하고 충분하게 표시된다.
117:4.10 (1284.6) 필사 인간이 닥친 큰 도전은 이것이다: 너는 우주의 체험할 수 있는 가치 의미를 바로 너의 진화하는 자아 속으로, 개인용으로, 투입하려고 결심할 것인가? 아니면 살아남기를 거절함으로, 어떤 다른 때에 유한한 하나님의 진화에 인간의 기여를 자기 방법으로 시도할 또 다른 사람의 행동을 기다리면서, 너는 최상위의 이 비밀이 누워서 자도록 버려둘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너의 기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최상위에게 기여한 것이겠다.
117:4.11 (1284.7) 지금 우주 시대의 큰 싸움은 잠재하는 것과 실재하는 것 사이에 있다―아직까지 표현되지 않은 모든 것이 사실이 되기를 구한다. 필사 인간이 파라다이스 모험을 향하여 나아가면, 그는 시간의 움직임을 따르고 있고, 시간은 영원의 냇물 속에서 물살로서 흐른다. 필사 인간이 영원한 생애를 싫다고 거절하면, 그는 유한한 우주에서 사건들의 흐름을 거슬러 움직이고 있다. 기계적 창조는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펼쳐지는 목적에 따라서 용서 없이 계속 움직이지만, 의지를 가진 창조는 영원의 모험에 인격이 참여하는 역할을 받아들이거나 물리치는 선택이 있다. 필사인은 인간의 존재에서 최고의 가치를 파괴할 수 없지만, 그가 몸소 겪는 체험에서 이 가치의 진화를 아주 분명히 막을 수 있다. 인간의 자아가 이렇게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데 참여하기를 거절하는 한, 바로 그 한도까지 최상위는 대우주에서 신을 표현하는 데 늦어진다.
117:4.12 (1285.1) 필사 인간에게 보관하라고 파라다이스 아버지가 조절자의 계심을 맡겼을 뿐 아니라, 또한 최상위의 미래의 극미 부분의 운명을 통제하는 권한도 맡겼다. 왜냐하면 사람이 인간의 운명에 도달함에 따라서, 마찬가지로 최상위도 신 수준에서 운명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117:4.13 (1285.2) 그래서 한때 우리 각자를 기다렸던 것 같이, 결정이 너희 하나하나를 기다린다: 너는 유한한 지성이 내리는 결정에 무척 의존하는, 시간 세계의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릴 것인가? 너는 동물처럼 후퇴하는 게으름으로 우주들의 최상위 성격자의 기대를 저버릴 것인가? 너는 각 사람에게 그토록 의존하는, 모든 인간의 위대한 형(兄)의 기대를 저버릴 것인가? 우주 생애의 황홀한 경치―파라다이스 아버지를 신성하게 발견하고, 최상위 하나님을 찾아서, 그의 진화에 신답게 참여할 기회―가 네 앞에 놓여 있는 마당에, 너는 실현하지 못한 자의 영토로 자신이 사라지도록 버려둘 수 있는가?
117:4.14 (1285.3) 하나님의 선물―그가 실체를 수여하는 것―은 그의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창조를 멀리하지 않지만, 파라다이스를 도는 여러 창조에서 긴장을 일으켰다. 하나님은 먼저 사람을 사랑하고 그에게 불사의―영원한 실체가 되는―잠재성을 수여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함에 따라서, 사람은 사실로 영원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신비가 있다: 사랑을 통해서 사람이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수록, 그 사람의 현실성―사실성―은 더욱 커진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물러날수록, 더욱 가까이 그는 비현실―존재의 그침―에 접근한다. 사람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그의 뜻을 거룩히 바칠 때,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그 신분보다 더 위대하게 만든다.
117:5.1 (1285.4) 위대한 최상위는 대우주에서 우주적 대혼(大魂)이다. 최상위 안에서 우주의 질과 양은 신(神)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그의 신 성품은 진화하는 여러 우주에 두루, 모든 생물과 창조자 성품의 광대한 총합을 모자익으로 복합한 것이다. 그리고 최상위는 또한 현실화되고 있는 신이며, 진화하는 우주 목적을 포함하는 창조 의지를 구현(具現)한다.
117:5.2 (1285.5) 유한자의 지적 자아, 잠재 인격인 자아들은 셋째 근원 중심으로부터 태어나며, 시공에서 유한한 신의 통합을 최상위 안에서 이룩한다. 사람이 창조자의 뜻에 복종할 때, 그는 자기 인격을 덮어 가리거나 버리고 항복하는 것이 아니다. 유한한 하나님의 현실화에 참여하는 개별 인격자들은, 그렇게 활동함으로 의지하는 자아를 잃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인격자들은 신의 이 큰 모험에 참여함으로 점진적으로 커진다. 신(神)과 그렇게 뭉침으로 사람은 그의 진화하는 자아를 최고의 자리 바로 그 문턱까지 높이고, 강화하고, 영답게 변화시키고 통일한다.
117:5.3 (1286.1) 사람의 진화하는 불멸의 혼, 곧 물질 지성과 조절자가 합동으로 창조한 것은 그런 자격으로 파라다이스까지 올라가며, 나중에 최후 군단에 소집되었을 때, 최후자 초월이라고 알려진 체험 기법으로, 어떤 새로운 방법으로 영원한 아들의 영 인력(引力) 회로와 연합된다. 이처럼 그러한 최후자는 최상위 하나님의 인격자로서 체험적 인정을 얻기에 적절한 후보자가 된다. 최후 군단의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래 임무에서 이 필사 지능들이 일곱째 단계의 영 존재에 다다를 때, 그러한 이중 지성은 삼자일치가 된다. 하나는 인간이고 하나는 신, 조율된 이 두 지성은 이때 현실화된 최상 존재의 체험적 지성과 연합한 가운데, 영화롭게 될 것이다.
117:5.4 (1286.2) 우주의 아버지가 땅에서 예수의 일생에서 그렇게 드러난 바와 같이, 영원한 앞날에, 최상위 하나님은 하늘 가는 사람의 영답게 변화된 지성, 불사의 혼 속에서 현실이 될 것이다―창조적으로 표현되고 영적으로 묘사될 것이다.
117:5.5 (1286.3) 사람은 최상위와 하나되어 그의 인격 신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체험으로 우주에 반응한 것은 이처럼 최상위가 신으로서 겪는 체험의 일부를 이룬다. “행동은 우리가 하고 결과는 하나님이 정한다.”
117:5.6 (1286.4) 진보하는 인격은 여러 우주에서 올라가는 수준을 통과함에 따라서, 현실화된 실체의 자취를 남긴다. 시간과 공간에서 성장하는 우주들은, 지성이든 영이든 에너지이든, 그들의 영토를 통하여 인격이 진보함으로 수정된다. 사람이 행동할 때, 최상위가 반응하며, 이 거래는 사실로 진보가 된다.
117:5.7 (1286.5) 에너지ㆍ지성ㆍ영의 큰 회로들은 결코 하늘 가는 인격자의 영구한 소유물이 아니다. 이러한 봉사는 언제까지나 최상위의 일부로 남는다. 필사자의 체험에서 인간의 지능은 보조 지성 영들의 리듬 있는 맥박 안에 거하며, 이 봉사 안에서 회로가 연결되어 생긴 무대 안에서 지능이 결정한 것을 집행한다. 필사자가 죽고 나서 인간의 자아는 보조자 회로에서 영구하게 떨어져 나간다. 이 보조자들은 결코 인격자들 사이에 체험을 전달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그들은 칠중 신을 거쳐서 최상위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결정과 행위에 대하여 비인격 반응을 전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한다. (적어도 이것이 예배 보조자와 지혜 보조자에게 참말이다.)
117:5.8 (1286.6) 영적 회로의 경우에도 그렇다: 사람이 여러 우주를 거쳐 올라가면서 이 회로들을 이용하지만, 결코 그의 영원한 인격의 일부로서 회로들을 소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적 봉사를 베푸는 이 회로들은, 진리의 영이든, 성령이든, 또는 초우주 영들의 계심이든, 하늘 가는 인격자 안에서 태어나는 가치를 받아들이고 그에 반응하며, 이 가치는 칠중자를 거쳐서 최상위에게 충실하게 전달된다.
117:5.9 (1286.7) 성령과 진리의 영과 같은 영적 영향은 지역 우주에서 베푸는 봉사이지만, 그들의 안내는 한 주어진 지역 창조의 지리적 한계에 온전히 국한되지 않는다. 하늘 가는 필사자가 자기가 태어난 지역 우주의 경계를 지나서 갈 때, 승천하는 동안 위기가 있을 때마다 “이것이 길이라” 늘 말하며 파라다이스 순례자를 어김없이 지도하면서 물질 세계와 상물질 세계의 철학적 미로를 거쳐서 항상 가르치고 안내한 진리의 영의 봉사를 사람은 통째로 빼앗기지 않는다. 네가 지역 우주의 영토를 떠날 때, 태어나는 최상 존재의 영이 베푸는 봉사를 통해서, 초우주 반영 시설을 통해서,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길에 파라다이스에서 수여된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 위로하고 지도하는 영이 여전히 너를 안내할 것이다.
117:5.10 (1287.1) 우주에 봉사하는 이 다양한 회로들이 어떻게 최상위 안에 진화로 얻은 체험의 의미와 가치와 사실을 기록하는가? 우리는 꼭 확신한다고 할 수 없지만, 파라다이스에서 기원을 가진 최상 창조자들의 몸을 통해서 이러한 기록이 일어난다고 믿으며, 그들은 이 시공의 회로들을 직접 수여하였다. 일곱 보조 지성 영의 지적 체험의 축적은, 그들이 물리적 수준의 지능에게 봉사를 베푸는 동안 신성한 봉사자의 지역 우주 체험의 일부이며, 이 창조 영을 통해서 그 축적된 것들이 아마도 최상위의 지성 안에 기록된다. 마찬가지로 필사자가 진리의 영 및 성령을 겪는 체험은 아마도 비슷한 기법으로 최상위의 몸에 기록된다.
117:5.11 (1287.2) 사람과 조절자의 체험조차 최상위 하나님의 신성 안에서 반응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체험을 겪음에 따라서 조절자들은 최상위와 비슷하며, 필사인의 진화하는 혼이 최상위 안에서 그런 체험을 얻을 선재하는 가능성으로부터 창조되기 때문이다.
117:5.12 (1287.3) 이 방법으로 모든 창조의 다양한 체험은 최상위의 진화의 일부가 된다.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동안, 사람들은 다만 유한한 것의 질과 양을 이용한다. 그렇게 이용해서 생기는 비인격 결과는 살아 있는 우주, 즉 최상위의 몸의 일부로 언제까지나 남는다.
117:5.13 (1287.4) 인격의 소유물로서 사람이 몸에 지니는 것은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면서 대우주의 지성 회로와 영 회로를 사용한 체험이 인품에 미친 결과이다. 사람이 결심할 때, 이 결정을 행동으로 옮길 때, 사람은 체험하며, 이 체험의 의미와 가치는 유한 수준으로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수준에서 언제까지나 그의 영원한 인품의 일부이다. 우주에서 도덕적이고 신답게 영적인 인품은, 성실한 예배로 빛을 받고, 지적 사랑으로 영화롭게 되고, 형제에게 봉사함으로 완성된 개인적 결정을 사람이 자본으로 축적한 것을 가리킨다.
117:5.14 (1287.5) 진화하는 최상위는 유한한 인간이 언제라도 온 우주와 제한된 체험 접촉을 가진 것보다 더 성취할 수 없는 것을 궁극에 보상할 것이다. 인간은 파라다이스 아버지에게 도달할 수 있지만, 진화로 얻은 그들의 지성은 유한하니까, 무한하고 절대적인 아버지를 정말로 이해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체험이 최상위 안에 기록되고 그의 일부이니까, 모든 사람이 유한 존재의 마지막 수준에 다다를 때, 우주 발전 전체가 실제 신으로 계신 최상위 하나님께 그들이 도달할 수 있게 만든 뒤에, 이때 그러한 접촉을 가진 사실에 본래부터, 총 체험과 접촉이 생긴다. 시간 세계의 유한자는 자체 안에 영원의 씨앗을 품고 있다. 진화가 충만히 진행되고 우주의 성장 능력이 다 소모되었을 때, 유한자 총체는 궁극위인 아버지를 찾아서, 영원한 생애의 여러 초한(超限) 단계를 시작할 것이라고 우리는 가르침을 받았다.
117:6.1 (1287.6) 우리는 여러 우주에서 최상위를 찾지만, 그를 찾아내지 못한다. “그는 움직이며 고요하며, 모든 사물과 존재 안에, 또 그 바깥에 계시느니라. 그는 신비 속에 가려 알아볼 수 없고, 멀어도 가까우니라.” 전능한 최상위는 “아직 빚어지지 않은 것의 형체요, 아직 짓지 않은 것의 원본이라.” 최상위는 너희의 우주 집이요, 너희가 그를 찾아낼 때, 이는 마치 집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는 너희의 체험하는 부모요, 인간의 체험에서 그런 것 같이, 그는 신으로서 부모 체험을 하면서 성장해 왔다. 그는 너희를 알고 있으니, 이는 그가 창조자 같을 뿐 아니라, 인간 같기 때문이다.
117:6.2 (1288.1) 너희가 참으로 하나님을 발견하고 싶으면, 너희는 최상위 의식을 머리 속에서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너희의 신다운 아버지인 것 같이, 최상위는 너희의 신다운 어머니요, 그분 안에서 너희는 우주의 인간으로서 너희의 생애 동안 내내, 양육 받는다. “최상위는 얼마나 보편적인가―그는 사방에 계시도다! 창조의 한없는 사물이 사는 것은 그의 계심에 의존하며, 그는 아무도 싫다고 물리치지 않도다.”
117:6.3 (1288.2) 미가엘과 네바돈의 관계는 최상위와 유한 우주의 관계와 같다. 그의 신성은 아버지의 사랑이 바깥으로 모든 창조에게 흘러나가는 큰 길이요, 그는 유한한 인간이 아버지를 찾아서 안으로 거쳐가는 큰 길이며, 아버지는 사랑이다. 생각 조절자조차 그와 관련되어 있다. 최초의 성품과 신성으로 보면 조절자는 아버지와 같지만, 공간의 여러 우주에서 시간 세계의 거래를 체험할 때 조절자는 최상위와 같아진다.
117:6.4 (1288.3) 인간이 창조자의 뜻을 행하려고 선택하는 행위는 우주적 가치가 있으며,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디에나 있는 어떤 조정 세력이 즉시 반응하는 그러한 우주 의미가 있고, 그 세력은 아마도 최상 존재의 늘 확대되는 행위의 작용일 것이다.
117:6.5 (1288.4) 진화하는 필사자의 상물질 혼은 정말로 우주의 아버지의 조절자 행위에서 생긴 아들이요, 최상 존재, 곧 우주의 어머니의 우주 반응에서 생긴 자식이다. 성장하는 그 혼이 지역 우주에서 지내는 어린 시절을 통해서 내내, 어머니의 영향은 그 인격을 지배한다. 신 부모의 영향은 조절자와 융합이 있은 뒤에, 초우주 생애 동안에 더 비등해지지만, 시간 세계의 인간이 영원한 중앙 우주를 통과하기 시작할 때, 아버지의 성품은 갈수록 더 명백히 나타나며, 우주의 아버지를 인식하고 최후 군단에 들어가고 나서 최대로 유한하게 명시(明示)된다.
117:6.6 (1288.5) 최후자를 달성하는 체험 속에서, 그리고 그 체험을 통하여, 하늘 가는 자아의 체험적 어머니 성질은 영원한 아들의 영적 계심과 무한한 영의 지성 계심과 접촉하고 주입을 받음으로 엄청나게 영향을 받게 된다. 그리고 나서 대우주에서 최후자의 활동 영역에 두루, 최상위의 잠자는 어머니 잠재성의 새로운 각성, 체험의 의미를 새로이 깨닫는 일, 하늘 가는 생애 전체의 체험적 가치의 새로운 통합이 나타난다. 최상위가 어머니로서 주는 유산이 아버지의 조절자 유산과 유한한 동시성을 얻을 때까지, 여섯째 단계 최후자의 우주 생애에서 이러한 자아 실현이 계속될 듯하다. 흥미를 자아내는 이 대우주 활동 기간은 하늘 가는, 완전해진 필사자의 연속되는 어른 생애를 의미한다.
117:6.7 (1288.6) 여섯째 단계의 존재를 마치고, 일곱째이자 마지막 단계인 영 지위에 들어가고 나서, 체험이 풍성해지고, 지혜가 성숙하고, 신성을 깨닫는 상급 시대가 아마도 뒤따를 것이다. 최후자의 성품에서 이것은 아마도 영의 자아 실현을 위하여 지성의 투쟁을 마친 것, 하늘 가는 사람의 성품을 유한 가능성의 한계 안에서 신다운 조절자 성품과 조정하는 일을 마친 것과 대등할 것이다. 그러한 훌륭한 우주 자아는 어머니 최상위가 우주에서 기른 영원한 아이일 뿐 아니라, 이렇게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영원한 아들 최후자가 되며, 그 아이는 창조되었거나 창조하고 있거나 진화하는 사물 및 존재들의 유한 행정부에 관계되는 어떤 활동이나 사업에서도, 우주와 성격자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을 대표할 자격을 갖춘 우주 자아이다.
117:6.8 (1289.1) 혼을 진화시키는 모든 인간은 글자 그대로,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최상 존재인 어머니 하나님이 낳은 진화의 아들이다. 그러나 필사 인간의 혼이 그의 신다운 혈통을 의식하게 될 때까지, 신과 친척 관계를 가졌다는 이 확신을 믿음으로 얻어야 한다. 인간의 사는 체험은 우주의 고치이며, 그 속에서 최상 존재의 우주 재산과 우주의 아버지의 우주 계심이 (어느 것도 성격이 아니다) 시간 세계에서 상물질 혼, 그리고 우주 운명을 가지고 영원히 봉사할 인품, 인간이자 신다운 최후자 인품을 진화시키고 있다.
117:6.9 (1289.2) 하나님이 인간의 존재에서 가장 큰 체험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잊어버린다. 다른 체험의 성질과 내용은 한정되어 있지만,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이해하는 능력이 제한된 것을 제외하고 아무 한계가 없으며, 바로 이 체험은 그 자체로서 능력을 키운다. 하나님을 찾을 때, 사람들은 모든 것을 찾고 있다. 하나님을 찾아낼 때, 그들은 모든 것을 찾아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은 사랑을 아낌없이 주는 것이요, 거기에는 주어야 할 새롭고 더 큰 사랑을 놀랍게 발견하는 일이 뒤따른다.
117:6.10 (1289.3) 모든 참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사람은 신의 사랑을 받으며, 이것은 마치 사람이 이 사랑을 동료들에게 주는 것과 같다. 사랑은 힘차다. 결코 사랑은 붙잡아 둘 수 없다. 사랑은 팔팔 살아 있고, 자유롭고, 가슴 두근거리게 하며, 언제나 움직인다. 사람은 결코 아버지의 사랑을 붙잡아서 마음 속에 가두어 둘 수 없다. 아버지의 사랑은 오직 필사 인간이 다시 이 사랑을 동료들에게 베푸는 동안, 그 사람의 인격을 거쳐 감으로 그에게 현실이 될 수 있다. 사랑의 큰 회로는 아버지로부터 오며, 아들들을 거쳐서 형제들에게, 그리고 여기서부터 최상위에게로 간다. 아버지의 사랑은 깃드는 조절자가 봉사함으로 필사 인격 안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을 아는 그러한 아들은 이 사랑을 우주의 형제들에게 드러내며, 이 형제 사랑은 최상위의 사랑의 본질이다.
117:6.11 (1289.4) 체험을 통하지 않고서 최상위에게 가까이 가는 길은 없다. 현재의 창조 시대에는 인간이 최상위에 다가가는 길이 오직 세 가지 있다:
117:6.12 (1289.5) 1. 파라다이스 시민은 영원한 섬으로부터 하보나를 거쳐서 내려오며, 거기서 파라다이스와 하보나 실체의 차이를 지켜보고, 그리고 으뜸 영들로부터 창조 아들들에 이르기까지, 최상 창조 성격자들의 다양한 활동을 탐구하여 발견함으로 그들은 최상위를 이해하는 능력을 얻는다.
117:6.13 (1289.6) 2. 최상 창조자들의 진화 우주로부터 올라오는 시공의 승천자들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통일성을 더욱 이해하기 위한 준비로, 하보나를 거치면서 최상위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117:6.14 (1289.7) 3. 하보나 원주민은, 파라다이스로부터 내려오는 순례자, 그리고 일곱 초우주로부터 올라가는 순례자들과 접촉함으로 최상위를 이해하게 된다. 하보나 원주민은 본래부터, 영원한 섬의 시민과 진화 우주의 시민의 관점, 본질적으로 다른 관점들을 조화시키는 자리에 있다.
117:6.15 (1290.1) 진화하는 인간에게는 우주의 아버지께 도달하는 일곱 가지 주요 접근법이 있고,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이 여러 길은 각각, 일곱 으뜸 영 가운데 하나의 신성을 통과한다. 그러한 각 접근법은 그 으뜸 영의 성품을 반영하는 초우주에서 사람이 봉사한 결과로서, 체험 감수성이 커짐으로 가능하게 된다. 이 일곱 가지 체험의 총합은 최상위 하나님의 실체와 사실성을 인간이 의식하는, 현재 알려진 한계이다.
117:6.16 (1290.2) 사람이 유한한 하나님을 찾아내지 못하게 막는 것은 바로 사람의 한계 뿐이 아니다. 우주의 불완전성도 또한 그렇게 만든다. 모든―지난날ㆍ오늘날ㆍ앞날의―생물의 미완성조차 사람이 최상위를 접근할 수 없게 만든다. 하나님을 닮은, 신다운 수준에 이른 어떤 개인도 아버지 하나님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완전을 달성함으로 모든 사람이 동시에 발견하는 그 아득한 시절까지, 최상위 하나님을 어느 한 사람이 결코 개인적으로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117:6.17 (1290.3) 너희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발견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할 것이다. 이처럼 현재 우주 시대에, 너희가 최상위를 개인적으로 발견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인데, 그런데도 파라다이스에 올라가는 것과 그 뒤의 우주 생애는 너희의 의식 속에서, 모든 체험의 하나님이 우주에 계시고 우주에서 활동하심을 차츰 인식하게 될 것이다. 영의 열매는 인간의 체험에서 깨달을 수 있는, 최상위의 본질이다.
117:6.18 (1290.4) 사람이 언젠가 최상위에 도달하는 것은 사람이 파라다이스 신의 영과 융합하는 결과로서 생긴다. 유란시아인에게 이 영은 우주의 아버지가 조절자로 계시는 것이다. 비록 신비의 훈계자가 아버지로부터 오고 아버지 같더라도, 그러한 신의 선물조차 무한한 하나님의 성품을 하나의 유한한 인간에게 드러내는 불가능한 과제를 해낼 수 있는가 우리는 의심이 든다. 조절자가 앞날에 일곱째 단계의 최후자에게 드러낼 것은 최상위 하나님의 신성과 성품일 것이라 우리는 추측한다. 그리고 이 계시(啓示)와 유한한 인간의 관계는 무한자의 계시와 절대 존재의 관계와 같을 것이다.
117:6.19 (1290.5) 최상위는 무한하지 않지만, 아마도 유한한 인간이 일찍이 정말로 이해할 수 있는 무한성 모두를 품는다. 최상위를 넘어서 더 이해하는 것은 유한보다 크게 되는 것이다!
117:6.20 (1290.6) 체험으로 창조된 모든 것은 그들의 운명을 실현하는 데 서로 의존한다. 오로지 실존적 실체가 스스로 충분하고 스스로 존재한다. 하보나와 일곱 초우주는 최대의 유한한 달성을 위하여 서로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유한자의 초월을 얻기 위하여 그들은 언젠가 바깥 공간의 미래 우주들에 의존할 것이다.
117:6.21 (1290.7) 하늘 가는 사람은 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다. 총 우주에서 체험 지위에 상관 없이, 하나님은 실존적이며, 따라서 실재한다. 그러나 모든 승천자가 이 최상위의 발견에 동시에 참여할 자격을 갖출 만큼 우주에서 최대로 성숙해졌을 때까지, 혼자서 하늘 가는 사람은 누구나 결코 최상위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117:6.22 (1290.8)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하늘 가는 아들 하나하나, 그는 우주의 개인으로서 대우한다. 마찬가지로 최상위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그는 체험하는 자녀들을 단일 우주 총체로서 대우한다.
117:6.23 (1290.9) 사람은 마음 속에서 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지만, 그는 모든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서 최상위를 탐구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최상위의 사랑을 완전히 드러낼 때, 이때 그는 모든 사람에게 한 우주 실체가 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우주들이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리라는 것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117:6.24 (1291.1) 모든 인격자가 완전하게 된 자아 실현에 이르고, 또 우주에 두루, 완전하게 된 균형을 얻는 것은 최상위에 도달하는 것과 동등하며, 불완전한 존재의 한계로부터 모든 유한한 실체가 해방됨을 증언하는 것이다. 모든 유한한 가능성을 그렇게 소모하는 것은 마침내 최상위에 도달하는 결과를 낳고, 이것은 바로 최상 존재가 진화로 현실화를 완성한 것이라 달리 정의(定義)해도 좋다.
117:6.25 (1291.2) 지진이 바위를 쪼개듯, 사람들은 갑자기, 볼 만하게 최상위를 발견하지 않는다. 그러나 강이 그 밑에 있는 흙을 조용히 닳아 없애듯, 사람들은 최상위를 천천히, 참을성 있게 발견한다.
117:6.26 (1291.3) 네가 아버지를 발견할 때, 여러 우주에서 네가 영적으로 올라가는 큰 원인을 발견할 것이다. 네가 최상위를 찾아낼 때, 너는 파라다이스로 진보하는 생애의 큰 결과를 발견할 것이다.
117:6.27 (1291.4)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어떤 필사자도 우주를 통해서 가는 나그네 길에 쓸쓸하지 않을 터이니, 이는 그 길의 걸음걸음 아버지가 옆에서 걷고, 한편 그가 거쳐 가는 바로 그 길이 최상위의 계신 앞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117:7.1 (1291.5) 모든 유한한 잠재성이 완벽하게 실현되는 것은 모든 진화적 체험이 완벽하게 실현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최상위가 우주에서 전능한 신의 계심으로서 마침내 솟아나는 것을 가리킨다. 이 발전 단계에서, 최상위가 영원한 아들처럼 따로 성격화되고, 파라다이스 섬처럼 구체적으로 동력화되고, 합동 행위자처럼 완벽하게 통일되리라, 그리고 현재 우주 시대가 완성될 때, 이 모두가 최상위의 유한 가능성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라 우리는 믿는다.
117:7.2 (1291.6) 이것은 최상위의 앞날에 대하여 전적으로 적절한 개념이지만, 우리는 이 개념에 본래 있는 어떤 문제들에 주의를 불러일으키고 싶다:
117:7.3 (1291.7) 1. 최상위의 무제한 감독자들은 그가 진화를 마치기 전 어떤 단계에서도, 도저히 신이 될 수 없다. 그래도 바로 이 감독자들은 지금도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우주들에 대하여, 어느 한도 안에서 최상의 통치권을 행사한다.
117:7.4 (1291.8) 2. 최상위의 우주 지위가 완결된 사실이 될 때까지, 그는 궁극 삼자일체 안에서 도저히 활동할 수 없다. 그래도 궁극 삼자일체는 지금도 제한된 실체이며, 너희는 궁극위의 제한된 대관들이 존재하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었다.
117:7.5 (1291.9) 3. 최상위는 우주 생물에게 완벽하게 현실은 아니지만, 파라다이스에 계신 우주의 아버지로부터 지역 우주의 창조 아들과 창조 영들에 이르기까지, 그가 칠중 신에게 상당히 현실이라고 추론할 많은 이유가 있다.
117:7.6 (1291.10) 유한자의 위쪽 한계에서 시간은 초월 시간과 합쳐지는데, 거기서 순서가 얼마큼 흐려지고 섞이는 일이 있는지 모른다. 최상위는 그의 우주 계심을 이 시간 초월 수준까지 예측하고, 그리고 나서 예측된 미완성자의 내재(內在)로서, 이 미래 예측을 거꾸로 창조된 수준까지 반영함으로, 어느 한도 안에서 앞날의 진화를 예상하는지 모른다. 생각 조절자가 깃드는 사람들이 겪는 체험의 경우와 같이, 그러한 현상은 유한한 것과 유한을 초월하는 것이 접촉하는 데는 어디서나 관찰될지 모르고, 조절자는 모든 영원을 통해서 사람이 앞날에 우주에서 무엇을 달성할 것인가를 진정하게 예측한 것이다.
117:7.7 (1292.1) 필사 승천자가 파라다이스의 최후자 군단에 입단 허가를 받을 때, 그들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게 선서하고, 이 충성 선서를 하면서 이것으로 최상위 하나님에게 영원한 충절을 서약하는 것이며, 그는 모든 유한한 사람의 인격이 이해하는 삼위일체이다. 나중에, 진화하는 우주들에 두루, 최후자 중대(中隊)들이 활동함에 따라서, 지역 우주들이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되는 그 중대한 시절까지, 그들은 오직 파라다이스 기원이 있는 명령에만 복종할 의무가 있다. 완전하게 된 이 우주들의 새 정부 조직이 최상위의 태어나는 통치권을 비로소 반영함에 따라서, 우리는 바깥에 있는 최후자 중대들이 이때 그러한 새 정부의 사법 권한을 인정하는 것을 관찰한다. 최상위 하나님은 진화하는 최후 군단의 통일자로서 진화하는 듯하다. 그러나 궁극 삼자일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최상위가 이 일곱 군단의 영원한 운명을 지휘할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
117:7.8 (1292.2) 최상 존재는 우주에서 분명히 나타날 때 유한을 초월하는 세 가지 가능성을 품는다:
117:7.9 (1292.3) 1. 첫째 체험적 삼자일체에서 초한(超限) 공동 작업.
117:7.10 (1292.4) 2. 둘째 체험적 삼자일체에서 공동 절대적 관계.
117:7.11 (1292.5) 3. 가장 높은 삼자일체에서 공동으로 무한히 참여하는 것. 그러나 이것이 정말로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는 흡족한 개념이 없다.
117:7.12 (1292.6) 이것이 최상위의 앞날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설 중에 하나이지만, 현재 우주가 빛과 생명의 지위에 이른 뒤에 최상위와 현재 대우주의 관계가 무엇인가에 관하여 또한 많은 추측이 있다.
117:7.13 (1292.7) 여러 초우주의 현재 목표는, 하보나가 그렇듯이, 그들의 상태 그대로 그들의 잠재성 안에서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완전은 물리적ㆍ영적 달성에, 아니 행정ㆍ정부ㆍ친교의 발전에도 관계된다. 다가올 시대에 불화(不和), 그릇된 조절, 잘못 적응하는 가능성은 초우주에서 궁극에는 없어지리라고 믿어진다. 에너지 회로들은 완전히 균형된 상태에 있고, 지성에 완전히 복종할 것이며, 한편 성격이 있는 가운데 영은 지성의 지배를 마쳤을 것이다.
117:7.14 (1292.8) 아득히 먼 이 시절에, 최상위의 영 성격과 전능자의 달성한 권능은 나란히 발전했을 터이고, 최상 지성 속에서, 또 이로 인하여 통일되어, 그 둘은 최상 존재로서 사실이 되리라고 추측된다. 그는 우주에서 완성된 사실이다―모든 생물의 지능이 지켜볼 수 있고, 모든 창조된 에너지가 그에 대하여 반응하고, 모든 영적 개체 안에서 조정되고, 모든 우주 성격자가 체험하는 그런 사실이다.
117:7.15 (1292.9) 이 개념은 대우주에서 최상위가 실제 통치권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현재 삼위일체 행정가들이 그의 대행(代行)으로서 계속하는 것이 아주 가능성이 있지만, 일곱 초우주 사이의 현재 경계는 차츰 사라질 터이고, 대우주 전부가 완전하게 된 하나의 총체로서 작용하리라 우리는 믿는다.
117:7.16 (1292.10) 이때 아마 최상위는 오르본톤의 본부 유버르사에서 몸소 거할지도 모르고, 거기서부터 시간 세계의 우주들의 행정을 지휘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이것은 정말로 추측일 뿐이다. 그래도 확실히, 최상 존재의 성격을 어떤 특정한 위치에서 분명히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계신 그의 신 존재는 아마도 온 우주를 계속해서 스며들 것이다. 그 시대의 초우주 시민들이 최상위와 무슨 관계를 가질 것인지 우리는 모르지만, 하보나 원주민과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사이의 현재 관계와 비슷한 무엇일지도 모른다.
117:7.17 (1293.1) 그 미래 시절에 완전해진 대우주는 현재 그 처지와 방대하게 다를 것이다. 공간에 있는 은하들의 조직에서 벌어지는 가슴 떨리는 모험, 불확실한 시간 세계들에 생명을 심는 일, 그리고 혼돈으로부터 조화를, 잠재성으로부터 아름다움을, 의미로부터 진리를, 가치로부터 선을 진화시키는 일은 사라질 것이다. 시간 세계의 우주들은 유한한 운명을 달성했을 것이다! 아마도 어느 공간에는 휴식이 있으리니, 이는 진화로 완전을 얻으려고 오랜 세월에 걸쳐 벌인 투쟁으로부터 쉬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 쉬지 않는다! 그들의 진화의 선조, 투쟁하는 선조가 한때 최상위 하나님을 찾는 일에 도전을 받은 것 같이, 분명히, 확실히, 용서 없이, 솟아나는 신, 즉 궁극위 하나님의 수수께끼는 안정된 여러 우주에서 완전하게 된 이 시민들에게 도전할 것이다. 새롭고 더 높은 수준에서, 사람의 궁극의 체험에서 드러나는 우주의 아버지에게 도달하는 추구, 사람을 유혹하는 초한적 추구의 초월적 장려함을 드러내려고 우주 운명의 커튼이 활짝 열릴 것이다.
118:0.1 (1294.1) 신의 몇 가지 성품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해도 좋다:
118:0.2 (1294.2) 1. 아버지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아이다.
118:0.3 (1294.3) 2. 아들은 함께 존재하는 자아이다.
118:0.4 (1294.4) 3. 영은 결합되어 존재하는 자아이다.
118:0.5 (1294.5) 4. 최상위는 진화하고 체험하는 자아이다.
118:0.6 (1294.6) 5. 칠중자는 스스로를 분배하는 신성(神性)이다.
118:0.9 (1294.9) 칠중 신은 최상위를 진화로 달성하는 데 필수이지만, 최상위는 또한 궁극위가 궁극에 솟아나는 데 꼭 필요하다. 최상위와 궁극위, 두분의 계심은 절대 이하의 파생된 신의 기본 관계를 이루는데, 이는 그들이 운명을 달성하는 데 서로 의존하면서 보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함께 총 우주에서 모든 창조적 성장의 시작과 완성을 체험으로 이어주는 다리이다.
118:0.10 (1294.10) 창조적 성장은 그치지 않지만 늘 만족을 주며, 범위가 끝이 없어도 일시적 목표를 달성하는, 인격을 만족시키는 그 순간들이 이따금 사이에 낀다. 그러한 순간은 우주에서 성장하고 우주를 탐구하고 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모험으로 사람을 동원하는 전주곡으로서 아주 효과 있게 쓰인다.
118:0.11 (1294.11) 수학의 영역은 질적 한계에 부딪치지만, 수학은 유한한 머리에게 무한을 곰곰이 생각해 볼 개념의 기초를 마련해 준다. 유한한 머리가 이해하기에도, 수에는 아무런 양적 한계가 없다. 아무리 큰 수(數)를 생각해도, 너희는 언제나 거기에 하나를 더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또한 그 수가 무한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너희가 이해할 수 있으니, 이는 아무리 여러 번 너희가 그 수에 이 덧셈을 거듭해도, 여전히 언제나 하나 더 얹을 수 있기 때문이다.
118:0.12 (1294.12) 동시에, 무한한 시리즈는 어느 고정된 점에서도 합계할 수 있고, 이 총합은 (소계(小計)가 더 알맞다) 어떤 일정한 개인에게 어느 특정한 시간과 상태에, 목적을 달성하는 단맛을 충분히 마련해준다. 그러나 머지 않아, 바로 이 인격자는 비로소 갈급해지고 새로운 더 큰 목표를 바라며, 성장하는 그러한 모험은 시간이 충분히 지나고 영원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언제까지나 앞으로 닥쳐올 것이다.
118:0.13 (1294.13) 이어지는 각 우주 시대는 다음 우주 성장 시대로 인도하는 문간방이요, 각 우주 시기는 모든 이전 단계를 위하여 바로 닥치는 운명을 마련해준다. 하보나는 그 자체로서 저절로 완전하지만, 완전하도록 제한을 받은 창조이다. 하보나의 완전함은 바깥으로 진화하는 초우주들 속으로 확대되면서, 우주의 운명 뿐 아니라, 또한 진화 이전 존재의 한계로부터 해방됨을 발견한다.
118:1.1 (1295.1) 신과 우주의 관계를 가능한 대로 모두 이해하는 것이 사람이 우주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절대적 신의 성품은 영원하지만, 신들은 영원 속에 있는 하나의 체험으로서, 시간과 관계된다. 진화하는 우주에서 영원은 현세가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이다―영구한 현재이다.
118:1.2 (1295.2) 필사 인간의 성격은 아버지의 뜻 행하기를 선택하는 기법을 통해서 깃드는 영과 자신을 일체화함으로 영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뜻을 거룩하게 바치는 것은 목적이 영원의 실체임을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은 순간들이 연속되어도 사람의 목적이 고정되었음을 뜻한다. 달리 말하면, 순간들의 연속이 사람의 목적에 아무런 변화를 입증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1백만이나 10억의 순간이[1] [90] 지나도 아무런 차이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목적에 관하여, 수(數)의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선택과 하나님의 선택을 더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와 파라다이스 아버지가 영구하게 봉사할 때, 궁극에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성품이 결코 끝없이 연합된 영원한 현실이 된다.
118:1.3 (1295.3) 어느 특정한 지능 안에서도 성숙과 시간을 의식하는 단위 사이에 직접 관계가 있다. 시간 단위는 하루, 1년, 또는 더 긴 기간일 수 있지만, 피할 수 없이 시간 단위는 의식하는 자아가 인생의 상황을 평가하는 기준이며, 파악하는 지능은 그 기준으로 현세에 존재하는 사실을 재고 평가한다.
118:1.4 (1295.4) 체험ㆍ지혜ㆍ판단은 필사자의 체험에서 시간 단위가 길어짐과 함께 생기는 것들이다. 인간의 머리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서 계산할 때, 머리는 지난 체험을 현재 상황에 비춰 보려는 목적으로 지난 체험을 평가한다. 생각하는 머리가 앞날을 알려고 손을 뻗음에 따라서, 머리는 가능한 행동이 미래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평가하려고 애쓴다. 이렇게 체험과 지혜를 모두 계산에 넣었으니까, 인간의 의지는 현재에 판단과 결정을 내리며, 이렇게 지난날과 앞날로부터 태어난 행동 계획이 존재하게 된다.
118:1.5 (1295.5) 발달하는 자아가 성숙하면서, 지난날과 앞날이 함께 모여 오늘의 참 뜻을 비춰준다. 자아가 성숙함에 따라서, 머리는 체험을 찾아서 점점 더 과거로 손을 뻗으며, 한편 그 지혜의 예측은 알려지지 않은 미래 속으로 점점 더 깊이 파고들려고 애쓴다. 그 파악하는 자아가 이렇게 과거와 미래로 더욱 멀리 손을 뻗음에 따라서, 판단이 순간적 현재에 의존하는 일이 더욱 적어진다. 이 방법으로 결정과 행위는 움직이는 현재의 사슬을 벗어나기 시작하며, 한편 과거와 미래 중요성의 모습을 가지기 시작한다.
118:1.6 (1295.6) 짧은 시간 단위로 생각하는 필사자가 참을성을 연습한다. 참된 성숙은 진정한 이해에서 생겨난 자제하는 태도로, 참을성을 초월한다.
118:1.7 (1295.7) 성숙하게 되는 것은 현재에 더욱 맹렬하게 사는 것이요, 동시에 현재의 한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지난 체험에 기초를 둔 성숙한 계획은, 앞날의 가치를 향상하는 방법으로 현재에서 태어나고 있다.
118:1.8 (1295.8) 미숙했을 때의 시간 단위는 현재와 비현재―지난날과 앞날―의 참 관계를 현재와 분리하는 방법으로, 현재 순간으로 의미와 가치를 집중한다. 성숙했을 때의 시간 단위는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동등한 관계를 드러내도록 비례가 맞아서, 자아는 비로소 사건들 전체에 대하여 통찰력을 얻고, 비로소 넓어진 시야로 전체 광경의 견지에서 시간의 경치를 바라보고, 아마도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한 연속체가 있는가 비로소 의심하는데, 그 연속체의 조각들을 시간이라 부른다.
118:1.9 (1296.1) 무한자와 절대자의 수준에서, 현재의 순간은 미래의 모든 것 뿐 아니라 과거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스스로 계신 이는 또한 스스로 계셨던 이요, 스스로 계실 이를 의미한다. 이것이 영원(永遠)과 영원한 자에 대하여 우리가 가진 최선의 개념이다.
118:1.10 (1296.2) 절대적이고 영원한 수준에서, 잠재하는 실체는 실재하는 실체와 똑같이 중요하다. 오로지 유한 수준에서, 시간에 제한된 사람들에게, 그렇게 방대한 차이가 있어 보인다. 절대적인 하나님에게는, 영원한 결정을 내린 하늘 가는 필사자는 이미 파라다이스 최후자이다. 그러나 우주의 아버지는 또한, 깃드는 생각 조절자를 통해서, 이처럼 의식하는 데 제한을 받지 않지만, 동물 같은 수준에서 하나님 같은 수준의 존재로 사람이 올라가는 문제와 벌이는 모든 현세의 싸움을 알 수 있고, 그에 참여할 수 있다.
118:2.1 (1296.3) 신이 어디에나 계신 성질을 신의 두루 계심의 궁극성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우주의 아버지는 시공에 어디에나 계시고 시공을 초월하여 두루 계시는 성질이 있으며, 최상위ㆍ궁극위ㆍ절대자가 이러한 성질을 시간도 공간도 없는 그의 보편ㆍ절대적 계심으로 보상하고, 이와 조정하고, 통일하는 것이 우주의 아버지의 뜻이다. 그리고 신이 어디에나 계시는 성질은 아주 흔히 공간과 관련되지만, 반드시 시간에 제약을 받지는 않는다는 것을 너희는 기억해야 한다.
118:2.2 (1296.4) 필사자이자 상물질 승천자로서 너희는 칠중 신이 베푸는 봉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차츰 식별한다. 하보나를 통해서 너희는 최상위 하나님을 발견한다. 파라다이스에서 너희는 그가 한 성격자임을 발견하며, 다음에 최후자로서 너희는 당장에 그가 궁극위인 것을 알려고 애쓸 것이다. 최후자이니까, 궁극위에 다다른 뒤에 추구할 과정이 오직 하나 있는 듯이 보이고, 이는 절대자를 찾기 시작하는 것이겠다. 아무 최후자도 신 절대자에 도달할까 하는 불확실성에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을 터이니, 최상ㆍ궁극의 승천 끝에 아버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절대자 하나님을 찾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최후자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똑같은 하나님을 발견할 뿐이리라 믿을 터이니, 그는 무한에 더욱 가까운 보편적 수준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파라다이스 아버지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절대적인 하나님에 도달하는 것은 성격자들의 마지막 아버지 뿐 아니라, 우주들의 시초 조상을 드러낼 것이다.
118:2.3 (1296.5) 최상위 하나님은 신이 시공에 두루 계심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지 모르지만, 그는 글자 그대로 신이 어디에나 계심의 분명한 표현이다. 창조자의 영적 계심과 물질로 나타난 창조 사이에는 어디서나 되어 가는―진화하는 신이 우주에서 솟아나는―광대한 영토가 있다.
118:2.4 (1296.6) 최상위 하나님이 언젠가 시공 우주의 통제를 직접 맡는다면, 그러한 신의 행정이 궁극위의 전반적 통제 밑에서 작용할 것이라 우리는 확신한다. 그러한 경우에 궁극위 하나님은 전능한 최상위의 행정 기능에 관하여 초월 시간 및 초월된 공간에 전반적 통제권을 쥐는 초월 전능자(만능자)로서, 시간 세계의 우주들에게 비로소 명백히 나타날 것이다.
118:2.5 (1297.1) 필사자의 지성은 우리처럼 물을지 모른다: 대우주에서 행정 권한을 얻기까지 최상위 하나님이 진화하는 데 궁극위 하나님의 명시가 늘어나는 일이 따른다면, 바깥 공간에서 생길 것이라고 가상된 여러 우주에서 그에 해당하는 궁극위 하나님이 출현할 때도 비슷하게 뒤이어 절대자 하나님의 계시가 늘어날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정말로 모른다.
118:3.1 (1297.2) 오로지 어디에나 있는 성질로 신은 유한자가 이해하도록 시공에서 명시되는 모습을 통일할 수 있는데, 이는 시간이 순간의 연속이요, 한편 공간은 관련된 점들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결국, 너희는 분석함으로 시간을 파악하고, 종합함으로 공간을 파악한다. 너희는 인격자의 통합하는 통찰력으로, 다른 이 두 개념을 조정하고 관련을 짓는다. 동물 세계 전체에서 오직 사람이 이 시간과 공간을 파악하는 능력을 소유한다. 동물에게는 운동이 의미가 있지만, 운동은 오로지 인격 지위를 가진 인간에게만 가치를 나타낸다.
118:3.2 (1297.3) 사물은 시간에 조건을 받지만, 진리는 시간을 초월한다. 너희가 진리를 알면 알수록, 너희가 진리이면 진리일수록, 지난날을 더욱 이해하고 앞날을 더욱 파악할 수 있다.
118:3.3 (1297.4) 결코 죽거나 형식이 아니며, 언제나 살아 움직이고 적응할 수 있지만―빛을 내며 살아 있지만―진리는 흔들릴 수 없는 것이다―영원히 모든 일시적 변천에서 면제된다. 하지만 진리가 사실과 연결될 때, 시간과 공간은 모두 그 의미를 제약하고 그 가치를 서로 연결 짓는다. 사실과 밀착된 그러한 진리의 실체는 개념이 되며, 따라서 상대적 우주 실체의 분야로 지위가 떨어진다.
118:3.4 (1297.5) 창조자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와 현세의 유한한 사람이 사실로 겪는 체험을 연결하는 것은 궁극에 최상위의 새로운 태어나는 가치가 된다. 최상위 개념은 신성하고 변치 않는 위 세계를 유한하고 늘 바뀌는 아래 세계와 조정하는 데 필수이다.
118:3.5 (1297.6) 공간은 모든 비절대 사물 중에서 절대성에 가장 가깝다. 공간은 절대로 궁극의 것인 듯하다. 물질 수준에서 공간을 이해하는 데 우리가 겪는 진정한 어려움은, 물체들이 공간 속에 존재하지만, 공간이 또한 바로 이 물체들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공간에 관하여 절대적인 것이 많아도, 이는 공간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118:3.6 (1297.7) 비교해서 보건대, 공간이 결국 모든 물체의 한 속성이라는 것을 너희가 추측하고자 하면, 공간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따라서 한 물체가 공간을 통해서 움직일 때, 그것은 또한 자체의 모든 속성을, 그러한 움직이는 물체 안에 있고 그 물체에 속한 공간까지도, 가지고 간다.
118:3.7 (1297.8) 실체의 모든 형태는 물질 수준에서 공간을 차지하지만, 영 형태는 오직 공간과 가지는 관계에서만 존재한다. 영 형태는 공간을 차지하거나 밀어내지 않으며, 공간을 담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공간의 큰 수수께끼는 개념의 형태에 관계된다. 우리는 지성 영토에 들어갈 때 많은 수수께끼에 부딪친다. 한 개념의 형태―실체―는 공간을 차지하는가? 정말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개념의 형태는 공간을 담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비물질인 것이 반드시 공간에 없다고 가정하는 것은 도저히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118:4.1 (1298.1) 사람들이 겪는 신학적 문제점과 형이상학의 딜레마 가운데 많은 것은 사람이 신의 성격을 그릇된 위치에 놓고, 그 결과로 무한하고 절대적인 속성을 하위 신성에, 그리고 진화하는 신에 할당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참된 처음 원인이 있는 한편, 또한 나란히 있고 종속된 원인, 부수되고 2차적인 원인의 집단이 있음을 너희는 잊어서는 안 된다.
118:4.2 (1298.2) 1차 원인과 2차 원인의 중대한 차이는, 1차 원인들이 최초의 효과를 낳는 것이며, 이것은 어떤 선행(先行)하는 원인 작용에서 생긴 어떤 요인으로부터 아무것도 물려받지 않는 것이다. 2차 원인은 다른 이전의 원인으로부터 물려받은 결과를 변함없이 드러낸다.
118:4.3 (1298.3) 무제한 절대자 안에 본래 있는 순전한 정적(靜的) 잠재성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행위로 생기는, 신 절대자의 원인 작용에 반응한다. 우주 절대자가 계신 앞에서 이 원인의 씨앗을 받은 정적 잠재성은 당장에 활발해지고 어떤 초월 대리자들의 영향에 민감해진다. 이 대리자들의 행동은 이 활성화된 잠재성을, 발전할 참 우주 가능성, 즉 사실화된 성장 능력을 가진 상태로 변화시킨다. 그러한 성숙한 잠재성 위에, 대우주의 창조자와 통제자들은 우주를 진화시키는, 결코 그치지 않는 드라마를 연출한다.
118:4.4 (1298.4) 실존적인 자들을 무시한다면, 원인의 기본 구성은 세 가지이다. 원인이 현재 우주 시대에 작용하는 바와 같이, 이 일곱 초우주의 유한 수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해도 좋다:
118:4.5 (1298.5) 1. 정적 잠재성의 활성화. 신 절대자의 행위로, 우주 절대자 안에서 운명이 정해지는 것. 신 절대자는 무제한 절대자 안에서, 그리고 그에게 작용하며, 파라다이스 삼위일체가 의도하는 명령의 결과로서 작용한다.
118:4.6 (1298.6) 2. 우주를 만들 능력이 궁극에 생기는 것. 이것은 차별되지 않은 잠재성을 분리되고 규명된 여러 계획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이것은 궁극위 신, 그리고 초월 수준에 있는 다양한 대리자들의 행위이다. 그러한 행위는 총 우주 전체의 미래 필요 사항을 완전히 예상한 행위이다. 잠재성을 분리하는 것과 관련하여, 총 우주 건축가들은 우주들에 대한 신의 개념을 진정하게 구현(具現)한 것으로서 존재한다. 그들의 계획의 범위가 궁극에 공간에서 총 우주 개념의 경계에 제한을 받는 듯하지만, 계획으로서 달리 시간이나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118:4.7 (1298.7) 3. 우주에 실재하는 것들의 창조와 진화. 수용 능력을 만들어 내는, 궁극위 신의 계심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한 우주 위에, 성숙한 잠재성을 체험적인 실재물로 시간 속에서 변질시키려고 최상 창조자들이 작용한다. 총 우주 안에서, 잠재하는 실체의 현실화는 모두 궁극의 발전 능력에 제한을 받으며, 마지막 출생 단계에서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는다. 파라다이스로부터 나가는 창조 아들들은 사실로, 우주 의미에서 변화시키는 창조자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면에서도 그들이 창조자라는, 사람의 개념을 무효로 만들지 않는다. 유한한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확실히 창조할 수 있고, 또 창조한다.
118:5.1 (1299.1) 신이 전능(全能)하다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을 행하는 힘을 뜻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서, 필사자가 이해하는 지적(知的) 기준점에서 볼 때, 무한한 하나님조차 네모난 동그라미를 만들거나 본래부터 착한 악을 만들 수 없다. 하나님은 신답지 않은 일을 할 수 없다. 철학 용어의 그러한 모순은 비존재에 상당하며, 아무것도 그렇게 창조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성격의 모습은 동시에 하나님다우면서 신답지 않게 될 수 없다. 공동 가능성은 신의 힘에 본래부터 있다. 이 모두가, 전능한 성질은 성품을 가진 사물을 창조할 뿐 아니라, 또한 모든 물건과 존재의 성품에 기원을 준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118:5.2 (1299.2) 처음에는 아버지가 모든 일을 하지만, 무한자의 뜻과 명령에 반응하여 영원의 전체 광경이 펼쳐짐에 따라서, 생물이, 아니 사람들조차, 최후의 운명을 실현하는 데 하나님과 협동자가 되리라는 것이 더욱 명백해진다. 이것은 육체를 입은 인생에서도 참말이다. 사람과 하나님이 협동 관계에 들어갈 때, 그러한 협동 관계의 미래 가능성에 아무런 한계를 지울 수 없다. 사람이 영원히 진보하면서 우주의 아버지가 짝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가 깃드는 아버지의 계심과 융합할 때, 그는 정신적으로 시간의 사슬을 깨뜨렸고, 우주의 아버지를 추구하면서 영원히 진보하는 길에 이미 들어간 것이다.
118:5.3 (1299.3) 필사자의 의식은 사실로부터 의미까지, 그리고 다음에 가치에 이르기까지 나아간다. 창조자의 의식은 생각과 가치로부터, 말씀과 의미를 거쳐서, 행위하는 사실로 나아간다. 언제나 하나님은 실존적 무한에 본래 있는 무제한 통일의 정지 상태를 깨뜨리려고 행동해야 한다. 언제나 신은 원본이 되는 우주, 완전한 성격자들을 마련하고, 신 아래에 있는 창조들이 얻으려고 애쓰는 최초의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 마련해야 한다. 나중에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내도록, 하나님은 반드시 먼저 사람을 찾아내야 한다. 우주의 아들들, 그리고 그 결과로 우주의 형제 단체가 있을 수 있기 전에, 우주의 아버지가 반드시 계셔야 한다.
118:6.1 (1299.4) 하나님은 참으로 전능하지만 모든 일을 행하지 않는다―행해지는 모든 일을 몸소 하지 않는다. 전능은 전능한 최상위와 최상 존재의 권능 잠재성을 포함하지만, 최상위 하나님이 의지하는 행위는 무한자 하나님이 몸소 하시는 일이 아니다.
118:6.2 (1299.5) 원초적 신이 만사를 행한다고[2] [91] 주장하는 것은 수많은 집단을 이루어 협력하는 다양한 다른 계급의 창조 조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거의 1백만 명의 파라다이스 창조 아들들의 특권을 빼앗는 것과 같을 것이다. 우주 전체에서 원인 없는 원인이 오직 하나 있다. 모든 다른 원인은 이 하나의 위대한 처음 근원 중심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 철학 중에 아무것도 광대한 우주를 통해서 흩어져 있는, 신의 수많은 아이들의 자유 의지를 조금도 다치지 않는다.
118:6.3 (1299.6) 한 지역의 틀 안에서, 의지(意志)는 원인 없는 원인으로서 작용하는 듯 보일지 모르지만, 독특하고 최초이고 절대적인 처음 원인들과 가지는 관계를 확립하는, 물려받은 요인을 어김없이 나타낸다.
118:6.4 (1299.7) 모든 의지는 상대적이다. 창시하는 의미에서, 오직 아버지인 스스로 계신 이가 최후의 의지를 소유한다. 절대적 의미에서 오직 아버지ㆍ아들ㆍ영이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공간에 제한되지 않는 의지의 특권을 나타낸다. 필사 인간은 자유 의지, 즉 선택하는 힘을 부여 받고, 비록 그러한 선택이 절대적이 아니지만, 그런데도 유한 수준에서, 택하는 그 인격자의 운명에 관하여 상대적으로 최종이다.
118:6.5 (1300.1) 절대자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수준에서도, 의지는 선택하는 힘을 행사하는 바로 그 인격을 구성하는 한계에 부딪친다. 사람은 선택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선택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사람보다 더 크게 되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 그는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 되기를 선택할 수 없다. 우주에서 올라가는 배를 타겠다고 택할 수 있지만, 이것은 인간의 선택과 신의 뜻이 어쩌다가 이 시점에서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아들이 원하고 아버지가 뜻하는 것은 확실히 일어날 것이다.
118:6.6 (1300.2) 필사자의 인생에서, 다른 행위의 길은 줄곧 열리고 닫히며, 선택이 가능한 시절에 인격자는 이 여러 행동 과정 중에서 항상 결정을 내린다. 현세의 의지는 시간과 연결되어 있고, 그 의지는 표현할 기회를 찾으려고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시간의 연속을 얼마큼 벗어나는 데 성공했으니까, 영적 의지는 시간의 사슬로부터 비로소 해방을 맛보았으며, 이는 영적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스스로 한편이 되기 때문이다.
118:6.7 (1300.3) 의지, 선택하는 행위는, 이전의 상급 선택에 반응하여 현실화된 그 우주 틀 안에서 활동해야 한다. 인간 의지의 범위 전체는, 한 가지 세부를 빼고, 엄격하게 유한하고 제한되어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와 같이 되기를 택할 때, 그러한 선택은 유한을 초월한다. 이 선택이 또한 초한(超限)을 초월하는가는 오직 영원이 밝힐 수 있다.
118:6.8 (1300.4) 신이 전능함을 인식하는 것은 너희가 우주 시민으로서 겪는 체험을 안전하게 누리는 것, 파라다이스로 가는 긴 나그네 길이 안전하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신이 모든 것을 행한다는 허위를 받아들이는 것은 범신론(汎神論)이라는 막대한 잘못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118:7.1 (1300.5) 창조자의 의지와 인간 의지의 작용은, 대우주에서, 으뜸 건축가들이 지정한 한계 안에서, 그리고 그 가능성에 따라서 작용한다. 그러나 이 최대 한계를 이처럼 미리 예정한 것은, 이 테두리 안에서 인간 의지의 주권을 조금도 줄이지 않는다. 궁극의 선견(先見)도―모든 유한한 선택을 충분히 허락하면서―유한한 의지를 취소하지 않는다. 성숙하고 멀리 내다보는 인간은 어떤 나이 어린 동료의 결정을 아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선견은 바로 그 결정을 내릴 자유와 진정한 성질을 전혀 빼앗지 않는다. 신들은 미숙한 의지(意志)의 행동 범위를 지혜롭게 제한했지만, 그런데도 그것은 이 정해진 한계 안에서 참된 의지이다.
118:7.2 (1300.6) 모든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선택을 최대로 서로 상관시키는 것조차 그러한 선택이 진정한 것을 무효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미리 예정된 우주의 경향을 가리키며, 모든 실체가 체험으로 현실화하는 데 기여하는 역할을 택할 수도 있는 존재나 그렇지 않은 존재, 그런 의지하는 존재들이 선견이 있음을 암시한다.
118:7.3 (1300.7) 유한한 선택에서 생기는 잘못은 시간에 묶이고 시간에 제한을 받는다. 그 잘못은 오직 시간 속에, 최상 존재의 진화하는 계심 안에 존재한다. 그러한 그릇된 선택은 시간적으로 가능하고, (최상위의 불완전성 외에도) 자유 의지로 실체와 접촉함으로, 미숙한 인간이 우주에서 진보하기 위하여 부여 받아야 할 어떤 선택 범위가 있음을 가리킨다.
118:7.4 (1301.1) 시간에 제약 받는 공간 속에서 죄가 일어나는 것은 유한자의 의지가 현세에서 자유를―아니 방종까지도―가졌음을 증명한다. 죄는 우주 시민권이 주는 최고의 의무와 임무를 깨닫지 못하면서, 미숙한 자가 비교적 자주적인 인격 의지의 자유에 현혹되는 것을 묘사한다.
118:7.5 (1301.2) 사악함은 유한한 영토에서 하나님과 한편이 되지 않은 모든 자아의 일시적 현실을 드러낸다. 오로지 사람이 하나님과 한편이 됨에 따라서, 우주에서 참으로 실재하게 된다. 유한한 인격은 스스로 창조한 것이 아니지만, 초우주의 선택 무대에서 스스로 운명을 결정한다.
118:7.6 (1301.3) 생명의 수여(授與)는 물질 에너지 체계들로 하여금 스스로 영속하게 하고, 스스로 번식하고, 스스로 적응할 수 있게 만든다. 인격의 수여는 살아 있는 유기체들에게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진화하고, 신의 융합 영과 자아가 일체가 되는 늘어난 특권을 나눠준다.
118:7.7 (1301.4) 인격이 없는 살아 있는 존재들은, 처음에는 물리 통제자로서, 다음에는 보조 지성 영으로서, 에너지와 물질을 활성화시키는 지성이 있음을 가리킨다. 인격의 부여는 아버지로부터 오며, 살아 있는 체계에 독특한 선택할 특권을 나눠준다. 그러나 인격이 의지함으로 실체를 확인하려고 선택하는 특권이 있고, 이것이 참되고 자유로운 선택이라면, 진화하는 인격은 또한 자신을 혼동시키고, 자아를 교란하고 자아를 파괴하게 되는 선택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진화하는 인격이 유한자의 의지를 참으로 자유롭게 행사하려면, 우주에서 스스로 파멸하는 가능성은 피할 수 없다.
118:7.8 (1301.5) 따라서 하급 존재 수준에 두루, 인격자의 선택 한계가 좁아지면서 안전성이 늘어난다. 여러 우주를 올라감에 따라서 선택은 갈수록 더 자유롭게 된다. 하늘 가는 인격자가 신의 지위에 도달하고, 우주의 목적에 최고로 헌신하며, 우주 지혜를 달성하고, 하나님의 뜻과 길과 인간이 최종으로 일체화를 완성할 때, 궁극에 선택은 신의 자유에 접근한다.
118:8.1 (1301.6) 시공의 창조에서 자유 의지의 둘레에는 제한 조치로, 한계로, 울타리가 쳐져 있다. 물질 생명의 진화는 처음에는 기계적이고, 다음에는 지성으로 활성화되고, (인격을 받은 뒤에) 영의 지도를 받을지 모른다. 생명 운반자들이 최초에 물질 생명을 심은 것들의 잠재성은 사람 사는 세계에서 유기체의 진화를 물리적으로 제한한다.
118:8.2 (1301.7) 필사 인간은 기계요, 살아 있는 기계 작용이다. 사람의 뿌리는 참으로 물리적 에너지 세계에 있다. 인간의 여러 반응은 기계적 성질이 있고, 생명의 많은 부분이 기계와 같다. 그러나 하나의 기계 작용인 사람은 기계보다 훨씬 더 크다. 그는 지성을 부여 받고 그에게 영이 깃든다. 비록 그가 물질적 인생을 사는 동안 내내, 그의 존재의 화학 및 전기 작용을 피할 수 없어도, 깃드는 생각 조절자의 영적 충동을 집행하는 데 인간의 지성을 거룩하게 바치는 과정으로 인하여, 그는 어떻게 이 물질적 생명 기계를, 체험이 지휘하는 지혜에 굴복시키는가 더욱 배울 수 있다.
118:8.3 (1301.8) 영은 의지의 기능을 해방시키고 기계 작용은 이를 제한한다. 기계 작용으로 통제되지 않고 영과 일체가 되지 않은 불완전한 선택은 위험하고 불안정하다. 기계적 지배는 진보하지 않는 대가(代價)로 안정을 보장한다. 영과 연합하는 것은 선택을 물리적 수준에서 해방시키고, 동시에 늘어난 우주 통찰력과 증가된 우주 이해로 생긴 신다운 안정성을 보장한다.
118:8.4 (1302.1) 인간을 따라다니는 큰 위험은, 생명 작용의 사슬에서 해방을 얻으면서 영과 조화되는 기초적 연락을 이룩함으로 이 안정의 손실을 보상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기계적 안정에서 비교적 해방되었을 때, 인간의 선택은 더욱 영과 한편이 되는 것과 상관 없이, 더욱 자아의 해방을 시도할지 모른다.
118:8.5 (1302.2) 생물학적 진화의 총 원칙은 사람 사는 세계에서 원시인이 어떤 자제하는 큰 자질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진화를 의도한 바로 그 창조적 설계는 시공의 외부 제한, 즉 배고픔과 두려움을 마찬가지로 마련해 주어야 하며, 이것들은 교양이 없는 그러한 인간이 영적 수준 이하로 선택하는 범위에 실질적으로 선을 긋는다. 사람의 머리가 점점 더 어려운 장벽을 넘는 데 성공함에 따라서, 바로 이 창조적 설계는 또한 종족 유산, 곧 피땀 흘려서 얻은 체험적 지혜가 천천히 쌓이도록 마련하였다―다시 말해서, 감소되는 외부 제한과 증가하는 내부 제한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게 만들었다.
118:8.6 (1302.3) 진화, 즉 인간의 문화가 느리게 진보하는 것은 그 브레이크―물질적 타성―이 효과 있음을 증거하며, 이것은 위험한 진보 속도를 늦추도록 아주 효과 있게 작용한다. 이처럼 시간 그 자체는, 인간의 행위를 둘러싸는 다음 장벽을 때 이르게 벗어나는 결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치명적일 결과를 완화시키고 분산시킨다. 문화가 너무 빨리 진보할 때, 물질적 성취가 예배 및 지혜의 진화를 앞지를 때, 이때 문명은 그 속에 퇴보의 씨앗을 품기 때문이다. 체험적 지혜가 빠르게 늘어나서 뒷받침하지 않으면, 그러한 인간 사회는 높지만 때 이르게 도달한 수준에서 물러설 것이요, 지혜의 공백 기간, “암흑 시대”가 자아의 해방과 자제(自制) 사이의 불균형을 용서 없이 원상태로 회복할 것이다.
118:8.7 (1302.4) 칼리가스티아의 사악함은 점진적으로 인간을 해방하는, 시간 조절 장치를 피해 간 데 있다―제어하는 장벽을 까닭 없이 파괴했고, 그것은 그 시대의 필사 지성들이 체험으로 건너지 못한 장벽이었다.
118:8.8 (1302.5) 시간과 공간을 어느 정도 단축할 수 있는 지성(知性)은, 바로 그 행위로, 뛰어넘은 자제의 장벽에 준하여 효과 있게 쓰일 수 있는 지혜의 씨앗을 자체가 소유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118:8.9 (1302.6) 루시퍼는 비슷하게 지역 체계에서 때 이르게 어떤 자유를 얻는 것을 억제하도록 작용하는 시간 조절 장치를 깨뜨리려고 애썼다.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한 지역 체계는 어떤 관점과 통찰력을 체험으로 성취했으며, 이것은 바로 그 영역이 안정되기 전 시대에 질서를 어지럽히고 파괴적일 많은 기법(技法)의 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118:8.10 (1302.7) 사람이 두려움의 쇠고랑을 떨쳐 버림에 따라서, 사람이 기계로 대륙과 대양을 좁히고, 그의 기록으로 여러 세대와 세기(世紀)를 좁힘에 따라서, 성장하는 인간 지혜의 도덕적 명령에 따라서, 그는 뛰어넘은 각 제한을 새롭고 자진해서 부과한 제한으로 갈아치워야 한다. 스스로 부과한 이 제한―응보의 개념과 형제 정신의 이상―은 인간 문명의 모든 요소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도 가장 약하다. 사람은 감히 동료 인간을 사랑할 때 자제하는 자비의 옷을 입을 자격까지 갖추며, 한편 자신이 받고 싶어 하는 대로, 아니 하나님이 인간 동료를 어떻게 대접할 것이라 생각되는 대로 그들을 대우할 때, 비로소 영적 형제 정신에 도달한다.
118:8.11 (1303.1) 우주의 자동 반응은 안정되어 있고, 어떤 형태로서 우주에서 계속한다. 하나님을 알고 그의 뜻을 행하기를 바라는 자, 영 통찰력을 가진 인격자는, 신답게 안정되어 있고 영원히 존재한다. 우주에서 사람의 큰 모험은 그의 필사 지성이 기계 같이 정지된 안정 상태에서 영적으로 힘찬 신성으로 넘어가는 데 있으며, 사람은 인생의 상황 하나하나에서 “주의 뜻을 이루는 것이 내 뜻입니다”하고 선언하면서, 자기 인격이 내린 결정의 힘과 집요함으로 이 변화를 이룩한다.
118:9.1 (1303.2) 시간과 공간은 총 우주에서 한데 붙어 있는 하나의 장치이다. 시공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자와 우주에서 함께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장치이다. 유한한 인간은 시간과 공간으로 인하여 절대 수준과 효과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차단하는 매체가 없이 아무 필사자도 존재할 수 없으며, 이 매체는 유한한 행위의 범위를 제한하도록 직접 작용한다. 시간과 공간이 없이 아무 생물도 행동할 수 없지만, 모든 생물의 행위는 분명히 시공에 제한을 받는다.
118:9.2 (1303.3) 상급 지성들이 만들어낸 기계 장치는 그 창조 근원을 해방하도록 작용하지만, 모든 종속된 지능 존재의 행위를 어느 정도 어김없이 제한한다. 우주의 생물에게 이 제한은 우주들의 기계적 장치로서 분명해진다. 사람은 구속 받지 않은 자유 의지가 없다. 그의 선택 범위에 한계가 있지만, 이 선택의 반경 안에서 그의 의지는 비교적 자주권이 있다.
118:9.3 (1303.4) 필사 인격자의 생명 장치, 곧 인체는, 필사를 초월하는 창조적 설계의 산물이다. 따라서 사람이 스스로 결코 인체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오로지 하늘 가는 사람이 융합한 조절자와 연락하여, 인격 표현 작용을 스스로 만들어낼 때, 인체를 완전히 통제할 것이다.
118:9.4 (1303.5) 대우주는 유기체일 뿐 아니라, 기계적이고 살아 있는 장치이다―최상 지성이 활성화시키고, 최상의 영과 함께 조정하며, 최상 존재로서 권능과 성격을 통일하는 최대 수준에서 표현을 찾는, 살아 있는 장치이다. 그러나 유한 창조가 기계적 장치임을 부인하는 것은 사실을 부인(否認)하고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118:9.5 (1303.6) 여러 기계 장치는 지성, 곧 우주 잠재성 위에, 그 안에서, 행위하는 창조적 지성의 산물이다. 기계 장치들은 창조자의 생각을 단단하게 구체화한 것이며, 그들에게 기원을 준 의도한 개념에 늘 충실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어떤 기계 장치라도 그 목적은 기원에 있고, 기능에 있지 않다.
118:9.6 (1303.7) 이러한 기계 장치는 신의 행위를 제한하는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바로 이 기계학에서 신은 한 단계의 영원한 표현을 이룩한 것이 참말이다. 기본적 우주 장치들은 첫째 근원 중심의 절대적 뜻에 반응하여 존재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것들은 무한자의 계획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어 영원히 작용할 것이다. 이것들은 정말로 바로 그 계획의 형태, 의지(意志)가 없는 형태이다.
118:9.7 (1303.8) 우리는 파라다이스의 장치가 어떻게 영원한 아들의 성격과 서로 상관되는가 얼마큼 이해한다. 이것은 합동 행위자의 기능이다. 우리는 무제한자의 이론적 기계 장치와 신 절대자의 잠재적 몸에 관하여 우주 절대자가 무슨 작용을 하는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그러나 진화하는 최상위와 궁극위의 신 속에서 우리는 어떤 비성격 단계들이 의지를 가진 그들의 짝과 실제로 뭉쳐지고 있으며, 이처럼 형태와 몸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진화되는 것을 지켜본다.
118:9.8 (1304.1) 과거 영원에 아버지와 아들은 일치하여 무한한 영을 표현한 가운데 연합하였다. 미래 영원에 만약 시공의 지역 우주의 창조 아들과 창조 영들이 바깥 공간 영역에서 창조적 연합을 이룬다면, 그들의 신다운 성품의 통합된 표현으로서 그들이 하나됨은 무엇을 창조할 것인가? 여태까지 밝혀지지 않은 궁극 신의 명시, 즉 새로운 부류의 초월 행정가를 우리가 구경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존재들은 성격을 가진 창조자, 비성격인 창조 영, 필사 인간의 체험, 신성한 봉사자의 점진적 성격화의 연합이니까, 고유한 성격 특권을 지닐 것이다. 그들이 성격 및 비성격 실체를 포함하고, 한편 창조자와 인간의 체험을 통합할 것이므로, 그러한 존재들은 궁극의 존재일 수 있다. 바깥 공간의 우주들에서 활동할 것이라고 가정된, 이 여러 삼자일체의 그런 셋째 성격자들이 무슨 속성을 가졌든, 그들은 무한한 영이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과 유지하는 바로 그 관계와 비슷한 무엇을 그들의 창조 아버지와 창조 어머니들에 대하여 유지할 것이다.
118:9.9 (1304.2) 최상위 하나님은 모든 우주 체험의 성격화, 모든 유한한 진화의 집중, 모든 인간 실체의 극대화, 우주 지혜의 절정, 시간 세계 은하들의 조화되는 아름다움을 구현한 것이요, 우주 지성이 가진 의미의 진실, 최상의 영 가치를 가진 선이다. 지금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안에서, 이 여러 가지 유한한 다양성이 절대 수준에서 실존적으로 뭉쳐 있는 것 같이, 영원한 미래에 최상위 하나님은 이를 체험으로, 의미 있는 하나의 전체로 종합할 것이다.
118:10.1 (1304.3) 섭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미리, 모든 것을 정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 일을 할 수 없으니, 그것이 우주의 전제(專制) 정치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비교적 선택하는 능력을 가졌다. 신의 사랑은 사람의 자녀들을, 멋대로 하도록 버려두고 버릇없이 기를 그러한 근시안적 사랑도 아니다.
118:10.2 (1304.4)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삼위일체로서―전능한 최상위가 아니지만, 전능자의 최상 성질은 결코 이분들 없이 나타날 수 없다. 전능자의 성장은 사실성의 절대자들에게 집중하고, 잠재성의 절대자들에 바탕을 둔다. 그러나 전능한 최상위의 기능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기능과 관련을 가진다.
118:10.3 (1304.5) 최상 존재 안에서, 이 체험하는 신의 성격은 모든 단계의 우주 활동을 부분적으로 다시 통일하는 듯이 보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삼위일체를 한 분의 하나님으로 보기를 바랄 때, 그리고 이 개념을 현재 알려지고 조직된 대우주에 국한한다면, 우리는 진화하는 최상 존재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부분 초상(肖像)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 최상위 신이 대우주에서 유한한 물질ㆍ지성ㆍ영을 성격으로 통합한 것으로서 진화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118:10.4 (1304.6) 신들은 속성을 가졌지만, 삼위일체는 기능을 가졌으며, 삼위일체처럼 섭리는 하나의 기능이니, 이것은 온 우주의 통제, 전반적 비성격 통제의 복합체이며, 전능자의 힘 속에서 통합되고 있는 칠중자의 진화 수준으로부터, 궁극위 신의 초월 영역을 거쳐서, 위로 뻗는다.
118:10.5 (1304.7) 하나님은 각 인간을 한 아이로서 사랑하며, 그 사랑은 만세(萬世)와 영원을 통해서 각 인간을 감싼다. 섭리는 전체에 관하여 작용하며, 기능이 전체에 관계되는 대로, 어떤 인간의 기능도 다룬다. 어떤 존재에 관하여도 섭리로 간섭하는 것은, 어떤 총체가 진화로 성장하는 데 관계되는 대로 바로 그 존재의 기능이 중요함을 가리킨다. 그러한 전체는 민족 전체, 국가 전체, 행성 전체, 또는 더 높은 전체까지도 될 수 있다. 하나의 인격자로서 인간의 중요성이 아니라, 그 인간의 기능의 중요성이 섭리에 따른 간섭을 일으킨다.
118:10.6 (1305.1) 그런데도, 한 성격자로서 아버지는 어느 때라도, 모두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에 어울리게, 하나님의 사랑에 자극 받는 대로, 우주 사건들의 흐름 속에 아버지다운 손을 집어넣을지 모른다.
118:10.7 (1305.2) 그러나 사람이 섭리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나 흔히 자신이 상상하는 결과요, 우연한 여러 상황이 어쩌다 옆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가 존재하는 유한한 영역에서 실재하고 태어나는 섭리가 있으니, 이 섭리는 공간의 에너지, 시간의 움직임, 지능이 품는 생각, 인품을 나타내는 이상, 영적 성질의 욕망, 그리고 진화하는 인격자들이 일부러 의지한 행위의 상호 관계를 참되게 현실화하는 것이다. 물질 영역의 여러 상황은 최상위와 궁극위의 맞물리는 계심 속에서, 마지막으로 유한하게 통합된다.
118:10.8 (1305.3) 대우주의 장치가 지성의 전반적 통제를 통해서 마지막으로 정밀한 점까지 완전하게 됨에 따라서, 사람의 지성(知性)이 영과 완전히 통합함으로 신에 도달하는 완전한 수준까지 올라감에 따라서, 그리고 그 결과로 최상위가 이 모든 우주 현상의 실제 통일자로서 솟아남에 따라서, 마찬가지로 섭리는 점점 더 식별할 수 있게 된다.
118:10.9 (1305.4) 진화 세계에서 때때로 생기는 놀랍게 우연한 어떤 조건들은 차츰 솟아나는 최상위의 계심 때문일지 모르고, 이것은 그의 미래 우주 활동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필사자가 섭리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섭리가 아니다. 그러한 문제에 대한 판단은, 인생의 여러 상황의 참 의미까지 멀리 내다보는 시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대단히 지장을 받는다. 필사자가 행운이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많은 것은 정말로 불운인지 모른다. 벌어들이지 않은 여가와 받을 자격이 없는 재산을 주는 행운의 미소는 인간의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것일지도 모른다. 고통받는 어느 필사자에게 시련을 퍼붓는, 잔인하게 보이는 부당한 운명은, 실제로 물렁한 쇠처럼 미숙한 인격을 단련된 강철 같은 참 인품으로 변화시키는, 단련의 불인지 모른다.
118:10.10 (1305.5) 진화하는 여러 우주에 섭리가 있고, 인간이 진화 우주들의 목적을 파악하는 능력을 얻은 바로 그 한도까지, 인간은 이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 우주의 목적을 식별하는 완벽한 능력은 인간이 진화로 완성되는 것과 같으며, 달리 말하면, 불완전한 우주들의 현재 상태의 한계 안에서 최상위에 도달했다고 표현해도 좋다.
118:10.11 (1305.6) 아버지의 사랑은 개인의 마음 속에서, 모든 다른 개인의 행위나 반응에 상관 없이, 직접 작용한다. 그 관계―사람과 하나님―은 개인적이다. 신의 비성격 계심(전능한 최상위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은 부분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체에 대한 존중을 나타낸다. 최상위가 전반적으로 통제한다는 섭리는 유한한 운명에 도달하는 데 우주에서 진보하는 연속된 부분으로서 갈수록 더 명백해진다. 체계ㆍ별자리ㆍ우주ㆍ초우주들이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됨에 따라서, 최상위는 벌어지고 있는 모든 사건을 뜻 있게 상관시키는 자로서 점점 더 솟아나며, 한편 궁극위는 만물의 초월 통일자로서 차츰차츰 솟아난다.
118:10.12 (1306.1) 진화하는 세계에서 처음에는 물질 체제의 자연 현상과 인간의 개인적 소망은 흔히 반대되는 듯이 보인다. 진화 세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것은 오히려 필사 인간이 이해하기 어렵다―자연 법칙은 너무나 흔히 겉보기에 모질고 무정(無情)하며, 인간이 이해하는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모든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나 행성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인류가 진보함에 따라서, 우리는 이 관점이 다음 요인 때문에 수정됨을 지켜본다:
118:10.13 (1306.2) 1. 사람의 확대되는 상상력―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를 더욱 이해하게 되는 것. 시간 세계의 물질적 사실, 생각하는 중요한 관념, 영적 통찰력을 가진 귀중한 이상을 이해하는 능력이 커지는 것. 사람들이 오직 물리적 성질을 가진 사물의 자로 재는 한, 그들은 결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조화를 발견할 희망이 없다.
118:10.14 (1306.3) 2. 사람의 증가하는 통제―물질 세계의 법칙에 대한 지식의 점진적 누적, 영적 존재의 목적, 그리고 이 두 실체를 철학으로 조정하는 가능성. 사람, 야만인은 자연력의 공격을 받고서 무력했고,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에 불쌍하게 지배되어 노예 같았다. 반(半)문명화된 사람은 자연 영역의 비밀이 쌓인 창고를 비로소 열고 있으며, 과학은 느리지만 효과 있게 미신(迷信)을 깨뜨리고 있고, 한편 동시에 철학의 의미와 참된 영적 체험의 가치를 이해하기 위하여, 새롭고 확대된 사실적 기초를 마련해 주고 있다. 문명화된 사람은 언젠가 행성의 자연력을 비교적 통달하는 일을 성취할 것이다.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함은 동료 인간에게 주는 사랑으로서 실질적으로 퍼부어질 것이요, 한편 인간 존재의 가치는 필사자 능력의 한계에 가까이 갈 것이다.
118:10.15 (1306.4) 3. 사람의 우주 통합―인간의 통찰력이 높아지고 그 위에 인간의 체험적 성취가 증가하면, 사람을 최상위의 통일하는 계심―파라다이스 삼위일체와 최상 존재―와 더욱 조화되게 만든다. 바로 이것이 빛과 생명 속에 오랫동안 안정된 세계들에서 최상위의 통치권을 확립한다. 그렇게 진보된 행성들은 정말로 조화의 시(詩)요, 우주 진리를 추구함으로 얻은 선, 성취한 선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그림이다. 그러한 일이 한 행성에서 일어날 수 있다면, 이때 대우주에서 한 체계와 상급 단위에, 그들도 또한 유한한 성장 잠재성이 소모되었음을 가리키는 정착된 상태에 도달함에 따라서, 더욱 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118:10.16 (1306.5) 이 진보된 체제에 속하는 행성에서, 섭리는 하나의 사실이 되었고, 생명의 여러 상황은 서로 상관되지만, 이것은 사람이 세상의 물질 문제를 지배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우주의 경향을 따라서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우주의 아버지께 도달하기까지 최상위의 길을 따르고 있다.
118:10.17 (1306.6)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다. 이 나라가 한 세계의 각 사람 마음 속에서 사실이 될 때, 이때 하나님의 통치는 그 행성에서 사실이 되었다. 이것이 최상 존재의 통치가 달성된 것이다.
118:10.18 (1306.7) 시간 세계에서 섭리를 깨달으려면, 사람은 완전을 성취하는 과제를 마쳐야 한다. 그러나 만물의 아버지를 추구하는 길에서 하나님을 아는 필사자의 전진을 위하여, 선하든 악하든, 만물이 함께 일한다는 우주의 사실을 곰곰이 생각할 때, 사람은 지금도 이 섭리의 영원한 의미를 미리 맛볼 수 있다.
118:10.19 (1306.8) 사람이 물질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위로 손을 뻗을 때, 갈수록 더 사람은 섭리를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완성된 영적 통찰력에 이르는 것은 하늘 가는 인격자로 하여금, 이때까지 혼돈이었던 것 속에서 조화를 탐지할 수 있게 만든다. 상물질의 상지혜조차 이 방향으로 진정한 진보가 있음을 가리킨다.
118:10.20 (1307.1) 섭리는 부분적으로, 미완성 우주에서 불완전한 최상위의 전반적 통제력이 나타나는 것이며, 따라서 늘 이러함이 틀림없다:
118:10.21 (1307.2) 1. 부분적이다―최상 존재의 현실화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118:10.22 (1307.3) 2. 예측할 수 없다―인간의 태도가 변동하기 때문에. 인간의 태도는 늘 수준에 따라서 달라지며, 따라서 최상위 안에서 대응하여 겉보기에 변하는 반응을 일으킨다.
118:10.23 (1307.4) 사람들이 인생의 여러 상황에서 섭리의 간섭이 있기를 빌 때, 그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인생에 대한 그들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섭리는 변덕스럽지 않고, 환상이나 요술도 아니다. 섭리는 유한한 우주들의 강력한 군주가 천천히, 확실히 솟아나는 것이요, 진화하는 인간은 우주에서 진보하면서 때때로 그의 위엄 있는 계심을 탐지한다. 섭리는 처음에 최상위에, 다음에 궁극위에, 그리고 아마도 절대자 안에 있는 영원의 목표들을 향하여, 공간의 은하와 시간 세계의 성격자들이 확실하고 분명하게 행진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한 속에 똑같은 섭리가 있다고 믿으며, 이것이 수많은 우주에서 우주의 전체 광경을 이처럼 동원하는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뜻이요, 행위요, 목적이다.
119:0.1 (1308.1) 나는 네바돈 저녁별들의 우두머리요, 네바돈의 우주 군주 미가엘이 일곱 번 자신을 수여한 이야기를 계시하는 사명을 띠고 가브리엘에게서 유란시아로 배치를 받았으며, 내 이름은 가발리아이다. 이 글을 발표하면서, 나는 내 직책이 부과한 제한을 엄격하게 준수하겠다.
119:0.2 (1308.2) 자신을 수여하는 속성은 우주의 아버지의 파라다이스 아들들에게 본래부터 있다. 하급 생물의 사는 체험에 가까이 가려는 소망으로, 다양한 계급의 파라다이스 아들들은 파라다이스 부모의 신다운 성품을 반영하고 있다.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가운데 영원한 아들은 이 관습에 길을 안내하였고, 시공 세계에서 온 첫 필사자 그랜드판다가 승천하던 시절에, 하보나의 일곱 회로에 자신을 일곱 번 수여하였다. 영원한 아들은 공간의 지역 우주들에게, 그의 대표자인 미가엘과 아보날 아들들의 몸을 입고서 자신을 계속하여 수여한다.
119:0.3 (1308.3) 계획중인 한 지역 우주에 영원한 아들이 한 창조 아들을 주실 때, 그 창조 아들은 그 새 우주를 완성하고 통제하고 조직하는 총 책임을 맡으며, 이것은 그가 일곱 번 생물로서 자신 수여를 마치는 데 성공하고, 관할 초우주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인가를 받기까지 그 새 우주의 완전한 통치권을 쥐지 않겠다고 영원한 삼위일체에게 드리는 엄숙한 서약을 포함한다. 우주를 조직하고 창조하는 일에 종사하려고 파라다이스로부터 밖으로 떠나가기를 자청하는 미가엘 아들은 모두 이 의무를 진다.
119:0.4 (1308.4) 이렇게 생물로 육신화하는 목적은 그러한 창조자들로 하여금 지혜롭고 동정심 있고, 공정하고 이해심 있는 군주가 되게 만들려는 것이다. 이 신다운 아들들은 날 때부터 공정하지만, 연속해서 자신을 수여하는 이 체험의 결과로서 이해심을 가지고 자비로워진다. 그들은 날 때부터 자비롭지만, 이 여러 체험은 새롭고 추가된 방법으로 그들을 자비롭게 만든다. 이 자신 수여는 신다운 정으로, 그리고 공정한 판단으로 지역 우주를 다스리는 숭고한 과제를 위하여, 그들이 받는 교육과 훈련에서 마지막 걸음이다.
119:0.5 (1308.5) 이 수여에 영향을 받고 혜택을 얻는 다른 계급의 우주 지성 존재들 뿐 아니라 여러 세계ㆍ체계ㆍ별자리에는 부수되는 수많은 이익이 생기지만, 그래도 수여는 1차적으로 바로 창조 아들이 친히 받는 훈련과 우주 교육을 마치도록 고안되어 있다. 이 수여는 한 지역 우주를 지혜롭고 공정하고 효과 있게 관리하는 데 꼭 필요하지 않지만, 다채로운 형태의 생명과, 지적이지만 불완전한 무수한 생물이 가득한 그러한 우주를 공정하고, 자비롭게, 이해심을 가지고 관리하는 데 절대로 필요하다.
119:0.6 (1308.6) 미가엘 아들들은 그들이 창조한 다양한 계급 존재들에 대하여 충분하고 공정한 동정심을 가지고 우주를 조직하는 일을 시작한다. 그들은 이 모든 다른 생물에게 베풀려고 자비를 엄청나게 축적해놓았으며, 스스로 만든 이기적 수렁에 빠져 실수하고 버둥거리는 자들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까지도 가졌다. 그러나 그러한 응보와 올바름을 부여하는 것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판단하기에 넉넉하지 않을 것이다. 초우주의 이 삼자일치 통치자들은, 창조 아들이 자신이 만든 생물이 존재하는 환경 속에서, 바로 이 지음 받은 자로서 실제로 체험을 겪어서 그들의 관점을 정말로 얻기까지, 결코 한 창조 아들을 우주 군주로 인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방법으로 그러한 아들들은 총명하고 이해심 있는 통치자가 되고, 그들이 다스리고 우주 권한을 행사하는 이 다양한 집단을 알게 된다. 실제 체험을 겪음으로, 그들은 체험을 겪는 지음 받은 존재에서 태어난 실용적 자비, 공정한 판단, 참을성을 스스로 가진다.
119:0.7 (1309.1) 네바돈 지역 우주는 자신 수여 봉사를 마친 한 창조 아들이 지금 다스린다. 진화하고 완전하게 되는 자기 우주의 광대한 영토 전체를 그는 공정하고 자비로운 최고 위치에서 다스린다. 네바돈 미가엘은 시공의 우주들에게 영원한 아들이 611,121번째 보낸 분이며, 그는 4천억 년쯤 전에 너희 지역 우주의 조직을 시작하였다. 미가엘은 유란시아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을 때, 약 10억 년 전에, 첫 수여 모험을 준비했다. 그의 여러 수여는 약 1억 5천만 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났고, 마지막 수여는 1천 9백 년 전에 유란시아에서 일어났다. 나의 직권이 허락하는 만큼 충실하게, 나는 이제 이 여러 수여의 성질과 특징을 펼쳐 보이겠다.
119:1.1 (1309.2) 거의 10억 년 전, 그가 (미가엘이) 아무 말 없이 임무를 띠고 자리를 비울 동안, 형 이마누엘이 네바돈에서 곧 권한을 쥘 것이라는 미가엘의 발표를 네바돈 우주에 모여든 지휘자와 우두머리들이 들었을 때는 구원자별에서 엄숙한 때였다. 이 일에 대하여 달리 아무런 발표가 없었고, 다만 별자리 아버지들에게 주는 작별 방송이 다른 지시 중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 기간에 내가 파라다이스 아버지가 명하신 것을 행하려고 가는 동안, 나는 너희를 이마누엘의 보호와 관리 하에 두노라.”
119:1.2 (1309.3) 이 작별 방송을 내보낸 뒤에, 그가 혼자 왔다는 것을 제외하고 이전에 여러 경우에 유버르사나 파라다이스를 향하여 떠나려고 준비할 때 한 것과 똑같이, 미가엘은 구원자별의 파송하는 들판에 나타났다. 그는 이 말씀으로 출발 선언을 맺었다: “나는 잠시 동안만 너희를 떠나노라. 내가 알건대 너희 가운데 여럿이 나와 함께 가고 싶어 하지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으로 올 수 없느니라. 내가 바야흐로 하고자 하는 것을 너희는 할 수 없느니라. 나는 파라다이스 신들의 뜻을 행하려고 가고, 내 사명을 마치고 이 체험을 얻고 나서, 너희 가운데 내 자리로 돌아오겠노라.” 이렇게 말하고 나서, 네바돈 미가엘은 모여든 모두의 눈앞에서 사라졌고, 표준 시간으로 20년 동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온 구원자별에서, 오로지 신다운 봉사자와 이마누엘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알고 있었고, 늘 하나된 이는 그의 비밀을 오로지 그 우주의 최고 집행자, 곧 찬란한 저녁별 가브리엘과 나누었다.
119:1.3 (1309.4) 구원자별의 모든 거주자, 그리고 별자리와 체계의 본부 세계에서 거하는 자들은 그 임무에 관하여, 그리고 창조 아들이 어디 계신가에 대하여 무슨 소식을 들을까 바라면서, 각자의 우주 정보 수신소(受信所) 둘레에 모였다. 미가엘이 떠난 뒤 사흘째가 되기까지, 가능한 중요성을 가진 아무 소식도 수신되지 않았다. 네바돈에서 멜기세덱 계급의 본부인 멜기세덱 구체로부터 구원자별에, 그날 한 통신문이 기록되었는데, 그것은 단지 놀랍고 결코 전에 들어 본 적이 없는 이 사건을 기록했을 뿐이다: “오늘 정오에 이 세계의 접대하는 들판에 한 이상한 멜기세덱 아들이 나타났는데, 그는 우리 집단의 출신이 아니지만 온전히 우리 계급과 비슷하다. 그에게는 유버르사로부터 신임장을 지닌 전천사(全天使)가 혼자 뒤따라 왔는데, 그 전천사는 우리의 우두머리에게 주는 명령서를 제출했다. 이것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로부터 내려왔고, 구원자별의 이마누엘의 동의를 받았으며, 이 새 멜기세덱 아들을 우리 계급으로 받아들이고, 네바돈 멜기세덱들의 비상 근무에 배치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렇게 하라고 명령이 내렸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119:1.4 (1310.1) 그리고 이것이 미가엘의 첫 자신 수여에 관하여 구원자별의 기록에 나타나는 거의 전부이다. 유란시아 시간으로 1백 년이 지날 때까지 아무 일도 더 나타나지 않으며, 그때 미가엘이 돌아와서 아무 선포 없이, 우주 사무의 지휘를 다시 맡았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멜기세덱 세계에 이상한 기록이 발견될 터이니, 그 시대의 비상 군단에서 이 독특한 멜기세덱 아들이 봉사한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기록은 지금 아버지 멜기세덱의 집 앞뜰을 차지하는 어느 소박한 성전에 보존되어 있는데, 그것은 24가지 우주 비상시 임무에 배치된 것과 관련하여, 잠시 있던 이 멜기세덱 아들이 봉사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아주 최근에 이 기록을 들여다보았는데, 이렇게 끝을 맺는다:
119:1.5 (1310.2) “그리고 오늘 정오에, 이전에 선포가 없이, 우리 단체 중에서 오직 셋이 구경했는데, 우리 계급을 방문한 이 아들은, 그가 왔을 때처럼 오로지 한 전천사의 수행을 받고서, 우리 세계에서 사라졌다. 이 방문자는 한 멜기세덱으로서 살았고, 멜기세덱의 모습을 입고서 멜기세덱으로서 일했으며, 그가 우리 계급의 비상시 아들로서 맡은 임무를 모두 충실하게 수행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이 기록을 마감한다. 보편적 찬성을 얻어서 그는 멜기세덱들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견줄 데 없는 지혜와 최고의 사랑으로, 임무에 훌륭히 헌신함으로, 우리의 사랑과 찬미를 얻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우리와 함께 수고하였으며, 언제까지나 우리는 그에게 충성스럽고 헌신하는 동료 멜기세덱이니, 이는 우리 세계에서 이 낯선 이가 이제는 영원히 멜기세덱 성품을 가진 우주 봉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119:1.6 (1310.3) 미가엘의 첫 자신 수여에 관하여 너희에게 일러 주도록 허락받은 것은 이것이 전부이다. 우리는 물론, 10억 년 전에 멜기세덱들과 함께 어떻게 그렇게 신비스럽게 수고한 이 이상한 멜기세덱이 다른 분이 아니라, 첫 수여 사명으로 육신화한 미가엘이었음을 익히 알고 있다. 그 기록은 독특하고 유능한 이 멜기세덱이 미가엘이었다고 꼬집어 말하지 않지만, 우리는 보편적으로 그였다고 믿는다. 아들별의 기록 외에, 그 사실의 실제 진술은 아마도 발견할 수 없고, 그 비밀 세계의 기록은 우리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오직 신다운 아들들이 거하는 이 신성한 세계에서 육신화와 수여의 신비를 충분히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미가엘이 여러 번 수여한 것이 사실임을 알지만, 그 수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한 우주의 통치자, 곧 멜기세덱들을 지으신 이가,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신비스럽게, 그들 무리의 하나가 되고, 그들 가운데 하나로서, 1백 년 동안 한 멜기세덱 아들로서 그들 사이에 살고 일할 수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어쩌다가 그런 일이 있었다.
119:2.1 (1310.4) 미가엘이 멜기세덱으로 자신을 수여한 일이 있은 뒤 거의 1억 5천만 년 동안, 네바돈 우주에서 모든 일이 순조로웠는데, 이때 37번 별자리의 11번 체계에서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는 체계 군주인 어느 라노난덱 아들의 오해가 관련되었고, 그것은 별자리 아버지들의 판결을 받고, 늘 충실한 이, 곧 그 별자리의 파라다이스 상담자의 승인을 받았지만, 항의하는 체계 군주는 그 판결을 충분히 달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1백 년이 넘도록 불만을 품은 뒤에, 그는 창조 아들의 통치권에 대항하여 네바돈 우주에서 일찍이 선동되었던 바 가장 널리 퍼지고 비참한 반란 중 하나에서 동료들을 이끌었으며, 이 반란은 유버르사에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행위로 판결을 받고 종결된 지 오래다.
119:2.2 (1311.1) 이 반역한 체계 군주 루텐시아는 그의 본부 행성에서 네바돈 표준 시간으로 20년이 넘도록 최고로 군림하였다. 그리고 나서, 유버르사로부터 승인을 얻고서 최고자들은 그를 격리하라고 명령하였고, 싸움으로 분열되고 혼란에 빠진, 그 체계에 속한 사람 사는 세계들의 지도를 담당할 새 체계 군주를 지명해달라고, 구원자별의 통치자들에게 요청하였다.
119:2.3 (1311.2) 구원자별에서 이 요청을 받음과 동시에, 미가엘은 우주 본부에서 자리를 비울 뜻을 표시하는 둘째 특별 선포를 시작했는데, 이것은 “내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명을 실행”하려는 목적이었고, “때가 되면 돌아오리라”고 약속하면서, 파라다이스 형인 늘 하나된 이, 이마누엘의 손에 모든 권한을 부여하였다.
119:2.4 (1311.3) 그리고 나서, 멜기세덱 수여와 관련하여 떠났을 때 본 것과 똑같은 기법으로 미가엘은 그의 본부 구체를 다시 떠났다. 설명이 없이 이 휴가를 떠난 뒤 사흘째에, 네바돈의 1차 라노난덱 아들의 예비군 사이에, 새롭고 알려지지 않은 구성원이 나타났다. 이 새 아들은 아무 발표도 없이 정오에 나타났고, 3품 천사 한 명의 수행을 받았는데, 그는 유버르사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로부터 가져온 신임장을 지녔다. 이것은 구원자별의 이마누엘의 인가를 받았으며, 이 새 아들이 폐위된 루텐시아의 후계자로서, 새 군주가 임명될 때까지 체계 군주 대리로서 전권을 가지고 37번 별자리의 11번 체계에 배치하라고 지시하였다.
119:2.5 (1311.4) 지역 우주 시간으로 17년이 넘도록, 낯설고 알려지지 않은 이 임시 통치자는 혼란에 빠지고 사기(士氣)가 꺾인 이 지역 체계의 사무를 관리하고 어려운 일들을 지혜롭게 판결하였다. 아무 체계 군주도 일찍이 더 뜨겁게 사랑을 받거나, 더 널리 명예와 존경을 받지 못했다. 응보와 자비 면에서 이 새 통치자는 그 시끄러운 체계에 질서를 가져왔고, 한편 모든 백성에게 힘들여 봉사하였으며, 모반한 선임자에게 그가 경솔했던 것을 이마누엘에게 사과하기만 한다면, 그 체계 권한의 보좌를 나눠 가지는 특권을 제안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루텐시아는 새롭고 낯선 이 체계 군주가 다른 이가 아니라 미가엘, 그가 아주 최근에 반항했던 바로 그 우주 통치자임을 잘 알고서, 이렇게 자비로 꺼낸 말을 걷어찼다. 그러나 그릇 인도받고 속았던 그의 추종자 수백만 명은 이 새 통치자의 용서를 받아들였고, 이분은 팔로니아 체계의 구원자 군주로서 그 시대에 알려졌다.
119:2.6 (1311.5) 그리고 나서 새로 임명된 체계 군주가 도착한 그 중대한 날이 다가왔는데, 그는 폐위된 루텐시아의 영구한 후계자로 우주 당국으로부터 임명받았고, 네바돈에서 알려진 가장 고귀하고 가장 인자한 체계 통치자가 떠나는 것을 온 팔로니아가 슬퍼하였다. 그는 체계 전체의 사랑을 받고 동료인 모든 라노난덱 아들 집단의 찬미를 받았다. 그가 떠날 때 예식이 없지는 않았다. 그가 체계 본부를 떠났을 때, 큰 잔치가 열렸다. 잘못한 그의 선임자조차 이 말을 남겼다: “당신의 모든 길에서 당신은 공정하고 올바르나이다. 나는 파라다이스의 통치를 계속 거부하지만, 나는 당신이 공정하고 자비로운 행정가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나이다.”
119:2.7 (1312.1) 그리고 나서 모반한 체계의 이 임시 통치자는 행정을 맡는 일로 잠시 머물렀던 그 행성을 떠났고, 그 뒤 사흘째에 미가엘은 구원자별에 나타나서 네바돈 우주의 지휘를 다시 시작했다. 미가엘의 통치와 권한의 높아지는 관할권을 가리키는 셋째 유버르사 선포가 곧 뒤따랐다. 첫째 선포는 그가 네바돈에 도착할 때 내렸고, 둘째는 멜기세덱 수여를 마친 뒤에 곧 있었으며, 이제 셋째 선포는 둘째 임무, 즉 라노난덱 임무가 종결되고 나서 있었다.
119:3.1 (1312.2) 구원자별의 최고 회의는 61번 별자리, 87번 체계, 217번 행성에서, 그들을 돕도록 한 물질 아들을 파송해 달라는 생명 운반자들의 요청의 심의를 막 마쳤다. 이제 이 행성은 또 다른 체계 군주가 타락해 버린, 사람이 거하는 세계들을 다스리는 체계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때까지 온 네바돈에서 그러한 두 번째 반란이었다.
119:3.2 (1312.3) 미가엘의 요청을 받고 나서, 이 행성 생명 운반자들의 탄원에 대한 조처는 이마누엘이 고려하고 이에 대하여 그의 보고가 있을 때까지 연기되었다. 이것은 비정상 과정이었고, 우리 모두가 무언가 특별한 일이 있으리라 어떻게 기대하였는가 나는 잘 기억하는데, 우리는 오랫동안 마음을 졸이지 않았다. 미가엘이 나서서 우주의 지휘를 이마누엘의 손에 맡겼고, 한편 하늘 세력의 지휘를 가브리엘에게 맡겼으며, 이렇게 행정 책임을 처리하고 나서 그는 우주 어머니 영에게 작별을 알리고, 앞서 두 경우에 했던 것과 똑같이, 구원자별의 파송하는 들판으로부터 사라졌다.
119:3.3 (1312.4) 기대된 바와 같이, 그 뒤 사흘째, 아무 발표 없이, 61번 별자리, 87번 체계의 본부 세계에, 2품 천사 혼자의 수행을 받고서, 한 낯선 물질 아들이 나타났는데, 그는 유버르사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승인을 받고, 구원자별의 이마누엘의 인가를 받았다. 즉시, 체계 군주 대리는 새롭고 신비스러운 이 물질 아들을 217번 세계의 행성 영주 대행으로 임명했으며, 이 임명은 당장에 61번 별자리 최고자들의 확인을 받았다.
119:3.4 (1312.5) 이처럼 독특한 이 물질 아들은 격리된 세계, 탈퇴와 반란이 있던 세계에서 어려운 경력을 시작했는데, 그 세계는 바깥 우주와 아무런 직접 통신이 없이 두절된 체계에 자리잡았고, 그는 행성 시간으로 온전히 한 세대 동안 혼자서 일했다. 이 비상시 물질 아들은 직무를 이행하지 않는 행성 영주와 그의 참모진 전체를 뉘우치고 회복하도록 만들었고, 여러 지역 우주에서 확립된 대로 파라다이스 통치에 충성스럽게 봉사하는 길로 그 행성이 회복되는 것을 구경하였다. 시간이 되자 한 물질 아들과 딸이 새로 활력을 얻고 회복한 이 세계에 도착했으며, 그들이 눈에 보이는 행성 통치자로서 정식으로 취임하고 나서, 임시 영주, 즉 비상시 행성 영주는 어느 날 정식으로 떠났으며 정오에 사라졌다. 그 뒤 사흘째, 미가엘은 구원자별에서 그의 눈에 익은 자리에 나타났고, 바로 뒤에 여러 초우주 방송은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넷째 선포를 내보냈는데, 이것은 네바돈에서 미가엘의 통치권이 더욱 진전된 것을 발표하였다.
119:3.5 (1312.6) 혼란에 빠진 이 행성에서 이 물질 아들이 참을성 있고 꿋꿋하고 솜씨 있게 시련의 상황에 부닥친 것에 대하여 이야기할 허가를 받지 못해서 나는 서운하다. 이 고립된 세계를 다시 찾은 것은 네바돈에서 두루, 구원의 연대기에서 가장 아름답게 감동을 주는 장(章)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임무가 끝날 때가 되자, 그들의 사랑하는 통치자가 어째서 어느 하위 계급의 지적 존재의 모습을 입고 이러한 수여에 거듭 종사하기를 택하는가 온 네바돈이 분명히 알게 되었다.
119:3.6 (1313.1) 멜기세덱 아들로서, 그리고 나서 라노난덱 아들로서, 다음에 물질 아들로서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한 것은 모두 똑같이 신비스럽고 설명할 수 없다. 각 경우에 그는 갑자기, 수여되는 집단에서 충분히 성장한 개인으로서 나타났다. 그러한 육신화의 신비는, 아들별의 신성한 구체에서 안쪽의 기록 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자들을 제외하고, 아무에게도 결코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119:3.7 (1313.2) 고립되고 반란이 있던 세계의 행성 영주로서 이렇게 놀라운 수여가 있은 뒤로, 네바돈의 어떤 물질 아들이나 딸도, 그들의 임무에 대하여 불평하거나 행성 임무가 어렵다고 비난할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언제나 물질 아들들은 우주의 창조 아들 속에, 이해하는 통치자이자 공감하는 친구, 즉 그들이 단련과 시험을 받아야 하는 것 같이, “모든 면에서 단련과 시험을 받은” 자가 있음을 알고 있다.
119:3.8 (1313.3) 이러한 각 임무에, 그 우주에 기원을 가진 모든 하늘 지성 존재가 더욱 봉사하고 충성하는 시대가 뒤따랐으며, 한편 뒤잇는 각 수여 시대는 우주 행정의 모든 방법과 정부의 모든 기법이 향상되고 개선되는 특징을 나타냈다. 이 수여가 있은 뒤에 어떤 물질 아들이나 딸도, 결코 알면서 미가엘에 맞서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의식하면서 그를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헌신하여 그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오직 속임수와 궤변을 통해서, 근래에 상급 부류의 모반 성격자들이 아담들을 그릇된 길로 이끌었다.
119:4.1 (1313.4) 유버르사에서 1천 년마다 있는 정기 점호 중 하나가 끝나자, 미가엘이 나서서 이마누엘과 가브리엘의 손에 네바돈 정부를 맡겼다. 그리고 물론 그러한 행위에 뒤이어 지난 시절에 일어났던 것을 상기하면서, 우리는 모두 미가엘이 넷째 수여 임무를 띠고 사라지는 것을 구경하려고 준비했다. 우리는 오래 기다리지 않았는데, 그가 곧 구원자별의 파송하는 들판으로 나가서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119:4.2 (1313.5) 이 수여로 사라진 뒤 사흘째에, 유버르사로 보내는 우주 방송에서, 네바돈의 천사 본부로부터 우리는 이 중요한 뉴스 항목을 보았다: “어느 알려지지 않은 세라핌이 예고 없이 도착했음을 알린다. 그에게는 상천사 하나와 구원자별의 가브리엘이 따라왔다. 등록되지 않은 이 세라핌은 네바돈 계급의 출신으로 자격을 갖추었고, 유버르사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준 신임장을 지녔으며, 이것은 구원자별의 이마누엘의 인가를 받았다. 이 세라핌은 지역 우주의 최상 계급 천사에 속하는 것으로 검사 결과가 나왔고, 교육 상담자 군단에 이미 배치되었다.”
119:4.3 (1313.6) 이번에 천사로 자신을 수여하는 동안, 표준 우주 달력으로 40년이 넘도록 미가엘은 구원자별에서 자리를 비웠다. 이 기간에 그는 교육에 관하여 상담하는 천사로 부속되었고, 이것은 26명의 다른 주요 선생들에게 너희가 개인 비서라 부를 만한 직책이었는데, 그는 22개의 다른 세계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마지막 임무, 즉 최종 임무에는 네바돈 우주에서 3번 별자리, 84번 체계, 462번 세계에서, 어느 삼위일체 교육 아들의 수여 임무에 부속된 상담자이자 조수로서 배치되었다.
119:4.4 (1314.1) 7년 동안 이 임무를 통하여 내내, 이 삼위일체 교육 아들은 그의 천사 동료의 신분에 관하여 온전히 납득이 간 적이 없었다. 그 시대에 모든 세라핌이 특별한 관심과 훑어보는 눈길에 대상이 된 것이 참말이다. 우리의 사랑하는 군주가 세라핌으로 꾸미고서 우주에 나가 있음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의 신분을 결코 확신할 수 없었다. 이 삼위일체 교육 아들의 수여 임무에 부속될 때까지 그는 결코 분명히 신분이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대 전체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우리가 생물로서 자신 수여 임무를 띠고 온, 우주의 군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맞아들이는 주인이었던 것을 발견할까 저어하여, 최상 세라핌들은 언제나 특별한 배려로 보는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천사들에 관하여, 그들의 창조자요 통치자가 “모든 면에서 천사 성격의 모습을 입고서 단련과 시험을 받았다”는 것이 언제까지나 참말이 되었다.
119:4.5 (1314.2) 이 연속되는 수여가 갈수록 더 낮은 형태의 우주 생명의 성질을 가짐에 따라서, 가브리엘은 이러한 육신화 모험에서 점점 더 동료가 되었고, 그는 수여된 미가엘과 우주 통치자 대행 이마누엘 사이에 우주 연락원으로서 활동했다.
119:4.6 (1314.3) 이제 미가엘은 그가 창조한 우주 아들들, 즉 멜기세덱, 라노난덱, 물질 아들, 이 세 계급에서 자신을 수여하는 체험을 거쳤다. 그 다음에 의지를 가진 가장 낮은 형태의 생물, 즉 시공의 진화하는 필사자의 하늘 가는 생애의 여러 단계에 눈을 돌리기 전에, 그는 황송하게도, 한 최상 세라핌으로서 천사 생명의 모습으로 성격화된다.
119:5.1 (1314.4) 유란시아에서 시간을 계산하는 대로 3억 년보다 조금 더 전에, 우리는 우주 권한이 이마누엘에게 또 한 번 이양되는 것을 목격하고 미가엘이 떠나려고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번에는 그의 목적지가 오르본톤 초우주의 본부, 유버르사임을 선언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경우들과 달랐다. 때가 되자 우리의 군주는 떠났지만, 초우주의 여러 방송은 결코 미가엘이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법정에 도착한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구원자별을 떠난 뒤 얼마 안 되어, 유버르사 방송에서 이 중요한 발표가 나타났다: “아무 발표도 번호도 없이, 네바돈 우주로부터 필사의 기원을 가진 하늘 가는 순례자가 오늘 도착했는데, 그는 구원자별의 이마누엘의 인가를 받고 네바돈의 가브리엘을 동반하였다. 신분이 확인되지 않은 이 존재는 참 영의 지위인 것을 제시하며, 우리는 그를 받아들여 친교하였다.”
119:5.2 (1314.5) 너희가 오늘 유버르사를 찾아본다면, 에벤톳이 거기에 머무르던 시절의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을 들을 터인데, 시공 세계에서 온 이 특이한 미지의 순례자는 그 이름으로 유버르사에서 알려졌다. 하늘 가는 이 필사자, 적어도 하늘 가는 필사자의 영 단계와 똑같은 모습을 입은 한 훌륭한 인격자가, 유버르사에서 오르본톤 표준 시간으로 11년 동안 살고 활동하였다. 이 존재는 오르본톤의 여러 지역 우주에서 온 동료들과 공통으로, 한 영 필사자의 과제를 받고 임무를 수행하였다.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면에서 그는 시험과 단련을 받았으며,” 모든 경우에 그는 상관들의 신임과 신뢰를 받기에 마땅함을 증명하였고, 한편 그는 어김없이 동료 영들의 존경과 충성스러운 찬미를 받았다.
119:5.3 (1315.1) 구원자별에서 우리는 더 할 나위 없이 흥미를 가지고 이 영 순례자의 생애를 따라다녔고, 가브리엘의 계심 때문에, 티 내지 않고 번호도 없는 이 순례자가 남이 아니라, 우리 지역 우주에서 자신을 수여한 통치자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필사자 진화의 한 단계의 역할로 육신화한 미가엘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온 네바돈을 오싹하게 하고 황홀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일을 들어 본 적이 있지만, 이제 우리는 그런 일을 구경했다. 그는 유버르사에 충분히 성장하고 완전히 훈련받은 영 필사자로서 나타났고, 그런 상태로 하보나로 가는 한 무리의 승천 필사자들이 진급하는 계제까지 그의 생애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즉시 가브리엘의 수행을 받고서 갑자기 아무런 예식 없이 유버르사를 떠났고, 그 뒤에 곧 구원자별에서, 익숙한 그의 자리에 나타났다.
119:5.4 (1315.2) 이 자기 수여를 마칠 때까지, 가장 높은 멜기세덱으로부터 시공의 여러 진화 세계에 있는, 피와 살로 된 필사자에 이르기까지 미가엘이 아마도 여러 계급의 우주 성격자의 모습을 입고 육신화하려 한다는 것이 마침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 무렵에 멜기세덱 학부들은 미가엘이 언젠가 육체를 입은 필사자로서 육신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비로소 가르쳤고, 설명할 수 없는 그러한 자기 수여를 이루는 가능한 기법에 관하여 많은 추측이 오갔다. 미가엘이 하늘 가는 필사자의 역할을 친히 수행했다는 것은 지역 우주와 초우주를 거쳐서 맨 위까지 사람을 진보시키는 계획 전부에 대하여 새로이 흥미가 늘어나게 만들었다.
119:5.5 (1315.3) 그래도 연속하여 자신을 수여하는 이 기법은 신비로 남아 있다. 가브리엘도 이 파라다이스 아들인 우주 창조자가 뜻대로, 자신의 하위 생물 중 하나의 성격을 받고 그 생명을 사는 데 어떤 방법을 썼는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119:6.1 (1315.4) 온 구원자별이 다가오는 수여의 준비 사항에 익숙했기 때문에, 미가엘은 본부 행성에 머무르는 자들을 불러모았고, 처음으로 육신화 계획의 나머지를 펼쳐 보이면서, 그가 제5 별자리의 본부 행성에서 최고 아버지들의 법정에서 한 상물질 필사자의 생애를 보내는 목적으로, 구원자별을 곧 떠나리라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나서 일곱째이자 마지막 수여는 필사자 육체의 모습을 입고 어떤 진화 세계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발표를 우리는 처음으로 들었다.
119:6.2 (1315.5) 여섯 번째 자신 수여를 위하여 구원자별을 떠나기 전에, 미가엘은 그 구체의 모인 거주자들에게 연설하고, 혼자인 세라핌과 네바돈의 밝은 아침별을 수행하고, 모두가 완전히 보는 가운데 떠났다. 우주의 지휘는 이마누엘에게 다시 맡겨졌지만, 행정 책임이 더 널리 분산되었다.
119:6.3 (1315.6) 미가엘은 5번 별자리의 본부에, 하늘 가는 지위를 가진, 완전히 성장한 상물질 필사자로 나타났다. 번호가 없는 이 상물질 필사자 생애의 세부를 내가 드러내지 못하게 금지되어서 나는 서운하다. 이는 그것이, 유란시아에서 그가 눈부시고 비극이었던 체류도 제외하지 않고서, 미가엘의 수여 체험에서 아주 특별하고 놀라운 시기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직책을 받아들이면서 나에게 지워진 여러 제한 가운데, 엔단툼의 상물질 필사자로서, 미가엘의 이 놀라운 생애의 세부를 펼치는 일을 금지하는 제한이 있다.
119:6.4 (1316.1) 미가엘이 이 상물질 수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우리의 창조자가 동료 생물이 되었다는 것, 우주 군주가 또한 그의 영역에서 가장 낮은 형태로 지음받은 지성 존재에게도 친구요, 공감하고 돕는 일꾼이라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명백했다. 우리는 이보다 앞서 우주 행정이 이렇게 점진적으로 지음 받은 자의 관점을 얻는 것을 주목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차츰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물질계 필사자로 수여를 마친 뒤에 그것이 더 명백해졌고, 유란시아에서 목수 아들의 생애를 마치고 그가 돌아온 뒤에 더군다나 명백해졌다.
119:6.5 (1316.2) 미가엘이 상물질 수여에서 풀려나는 시간에 대하여 우리는 미리 가브리엘로부터 통지를 받았고, 따라서 구원자별에서 적절한 접대를 준비했다. 수백만의 존재가 네바돈의 별자리 본부 세계들로부터 모여들었고, 구원자별에 인접한 세계들에 머무르던 자들의 대다수가 우주 통치자 신분으로 그가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려고 함께 모였다. 자기가 지은 존재들에 대하여 지대하게 관심을 가진 군주를 환영하는 여러 연설과 감사하는 표현에 답하여 그는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나는 단지 내 아버지의 일을 보살피고 있었노라. 자기가 지은 존재들을 사랑하고, 이해하기를 갈망하는 파라다이스 아들들이 즐겨 하는 일을 내가 하고 있을 뿐이라.”
119:6.6 (1316.3) 그러나 그날부터, 사람의 아들로서 유란시아 모험에 발을 내디딘 그 시각까지, 그가 머무른 별자리 전체의 물질 세계로부터 모인 동료들처럼 모든 점에서 시험을 받으면서, 진화로 승천하는 상물질 필사자로 수여되어 육신화한 자로서 엔단툼에서 활동하는 동안에 그들의 군주 통치자가 세운 많은 공훈에 대하여 온 네바돈이 계속 논의하였다.
119:7.1 (1316.4) 수만 년 동안 우리는 모두, 미가엘의 일곱째이자 마지막 수여를 기대하였다. 가브리엘은 이 최종 수여가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이루어지리라고 우리에게 가르쳤지만, 우리는 절정에 이르는 이 모험의 시간ㆍ장소ㆍ방법에 관하여 전혀 알지 못했다.
119:7.2 (1316.5) 마지막 수여가 일어날 극장으로서 미가엘이 유란시아를 택했다는 공식 발표는 아담과 이브의 실수에 대하여 우리가 소식을 들은 뒤에 곧 있었다. 따라서, 3만 5천 년이 넘도록, 우주 전체의 회의에서 너희 세계는 아주 눈에 띄는 자리를 차지하였다. 유란시아 수여의 어떤 단계와 관련해서도 (육신화의 신비를 제쳐놓고) 아무런 비밀이 없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미가엘이 최상의 우주 군주로서 구원자별로 마침내 승리해서 돌아오기까지, 작아도 상당히 영예로운 너희 세계에서 벌어진 모든 일이 충분히 우주에 알려졌다.
119:7.3 (1316.6) 이것이 그 방법일 것이라 우리가 믿었지만, 바로 그 사건 자체가 일어날 때까지, 우리는 결코 미가엘이 그 영역에서 힘없는 아기로서 땅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때까지 그는 언제나 수여로 선택받은 성격자 무리 가운데 충분히 성장한 개인으로서 나타났는데, 구원자별의 방송은 베들레헴의 아기가 유란시아에 태어났음을 알리는 가슴 떨리는 발표였다.
119:7.4 (1316.7) 그리고 나서 우리의 창조자이자 친구가, 하나의 힘없는 아기로서 겉보기에 이 자신 수여에 그의 지위와 권한에 대한 위험을 무릅쓰면서, 그의 생애 전체에서 가장 아슬아슬한 걸음을 내딛고 있음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우리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필사자로 자신을 수여하면서 겪는 체험은 네바돈 우주에서 논쟁할 여지 없는 최상의 군주인 그를 영원히 보좌에 앉힐 것을 또한 이해했다. 지구 시간으로 1세기의 3분의 1동안, 이 지역 우주의 어느 구석에서도 눈이 다 유란시아에 집중되었다. 마지막 수여가 진행되고 있음을 모든 지성 존재가 깨달았고, 사타니아에서 있었던 루시퍼 반란과 유란시아에서 칼리가스티아의 불만을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시피, 우리의 통치자가 황송하게도 비천한 형태로,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서 유란시아에 육신화했을 때 뒤따를 투쟁이 얼마나 맹렬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잘 이해했다.
119:7.5 (1317.1) 유대인 아기 요수아 벤 요셉은, 이 특별한 아기가 신다운 파라다이스 아들이요 사물과 존재들로 이루어진 이 온 지역 우주의 창조자, 네바돈 미가엘의 육신화라는 것을 제쳐놓고, 그 전과 후에 태어난 모든 다른 아기와 똑같이 잉태되고 세상에 태어났다. 예수의 인간 모습 안에서 신이 육신화되는 이 신비는 다른 면에서 세상에서 자연스러운 기원을 가졌고, 언제까지나 풀리지 않은 채로 남을 것이다. 영원 속에서도 너희는 결코 그가 어떻게 지은 생물의 형태와 모습을 입고서 창조자가 육신화되는가 그 기술과 방법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아들별의 비밀이요, 그러한 신비는 자신 수여 체험을 거친 신다운 아들들이 독점하는 재산이다.
119:7.6 (1317.2) 땅에서 어떤 지혜로운 사람들은 미가엘의 강림이 가까워옴을 알았다. 한 세계가 다른 세계와 접촉함으로, 영적 통찰력을 가진 이 현자들은 미가엘의 유란시아 수여가 다가오는 것에 관하여 알게 되었다. 중도인(中道人)들을 통해서, 그 세라핌은 한 무리의 갈대아 사제들에게 발표했는데, 그들의 지도자는 아드논이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 사람들은 갓난아기를 찾아보았다. 예수의 출생과 연결된 유일한 초자연적 사건은, 첫째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예전에 부속되었던 세라핌이 아드논과 그 동료들에게 이렇게 발표한 것이었다.
119:7.7 (1317.3) 예수의 인간 부모는 그들이 살던 시대와 세대에 보통 사람이었고, 육신이 된 이 하나님의 아들은 이처럼 여자에게서 태어나고, 그 민족과 시대의 아이들처럼 평범한 방법으로 자랐다.
119:7.8 (1317.4) 미가엘이 유란시아에서 머무른 이야기, 너희 세계에서 창조 아들이 필사자로 자신을 수여한 이야기는, 이 이야기의 테두리와 목적을 넘는 문제이다.
119:8.1 (1317.5) 유란시아에서 미가엘이 마지막으로 자신 수여에 성공한 뒤에, 그는 네바돈의 군주 통치자로서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인가를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스스로 창조한 지역 우주의 확립된 지휘자로서 우주의 아버지의 인정을 받았다. 구원자별로 돌아오고 나서, 사람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아들, 이 미가엘은 네바돈의 안정된 통치자로 선포되었다. 유버르사로부터 미가엘의 통치에서 여덟째 선포가 내려왔고, 한편 파라다이스로부터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의 합동 선언(宣言)이 왔는데, 이것은 이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그 우주의 유일한 우두머리로 만들며, 구원자별에 주둔하는 늘 하나된 이에게 파라다이스로 물러갈 뜻을 알리라고 지시하였다. 별자리 본부에 있는 늘 충실한 이들도 또한 최고자 회의에서 물러나라고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미가엘은 상담하고 협조하는 삼위일체 아들들이 물러나는 데 찬성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구원자별에 그들을 모으고 네바돈에 언제까지나 남아 있으라고 친히 부탁했다. 그들은 이 요청에 따르겠다는 소망을 파라다이스에 있는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알렸고, 그 뒤에 얼마 안 되어 파라다이스의 분리 명령이 내렸는데, 이것은 중앙 우주에서 온 이 아들들을 네바돈 미가엘의 법정에 영원히 부속시켰다.
119:8.2 (1318.1) 미가엘이 수여 생애를 마치고 자신이 창조한 우주에서 최고 권한을 마침내 안정시키는 데 유란시아 시간으로 거의 10억 년이 걸렸다. 미가엘은 창조자로 태어나고, 행정가로 교육받고, 집행자로 훈련을 받았지만, 그의 통치권을 체험으로 얻는 것이 요구되었다. 이처럼 너희의 작은 세계는 온 네바돈에서 두루, 자신이 만든 우주에 대하여 제한 없는 통제 및 지휘 권한이 주어지기 전에, 모든 파라다이스 창조 아들에게 요구되는 체험을 미가엘이 마친 경기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지역 우주를 올라감에 따라서, 너희는 미가엘의 이전 수여에 관계된 성격자들의 이상에 대하여 더 배울 것이다.
119:8.3 (1318.2) 지음 받은 인간으로 자신 수여를 마치면서, 미가엘은 그의 통치권을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또한 최상위 하나님의 진화하는 통치권을 확대하고 있었다. 이 여러 수여 과정에서 창조 아들은 생물 성격자의 여러 성품을 내려가면서 탐구하는 데 종사했을 뿐 아니라, 또한 파라다이스 신들의 여러 가지 다양한 뜻을 계시하였고, 그분들의 종합된 통일은, 최상 창조자들이 드러낸 바와 같이, 최상 존재의 뜻을 드러낸다.
119:8.4 (1318.3) 신들의 이 다양한 의지(意志)의 모습은 일곱 으뜸 영의 다른 성품에서 영원히 성격이 되었고, 미가엘의 각 수여는 이 신의 모습 가운데 하나를 특별히 드러냈다. 멜기세덱으로 자신을 수여할 때 그는 아버지ㆍ아들ㆍ영의 하나된 뜻, 그리고 라노난덱 수여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뜻을 나타냈다. 아담으로 자신을 수여할 때는 아버지와 영의 뜻을, 천사(天使)로 수여할 때는 아들과 영의 뜻을 드러냈다. 유버르사에서 필사자로 자신을 수여할 때 그는 합동 행위자의 뜻을, 상물질계 필사자로 수여할 때는 영원한 아들의 뜻을 묘사하였다. 그리고 유란시아에서 육체로 자신을 수여할 때, 피와 살을 입은 하나의 필사자로서, 그는 우주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다.
119:8.5 (1318.4) 일곱 번 이렇게 자신 수여를 마친 것은 미가엘의 최고 통치권을 해방하고, 또한 네바돈에서 최상위 통치권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미가엘의 어느 수여에서도 그는 최상위 하나님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모두 일곱 수여의 총합은 최상 존재를 새롭게 네바돈에서 계시한 것이었다.
119:8.6 (1318.5)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내려오는 체험에서 미가엘은 동시에, 유한 행위의 부분적 명시로부터 최상 수준까지, 그리고 그의 초한 활동 잠재성의 최종 해방을 체험하였다. 창조 아들 미가엘은 시공에서 창조자이지만, 칠중의 주아들 미가엘은 궁극 삼자일체를 구성하는 한 신다운 집단의 구성원이다.
119:8.7 (1318.6) 일곱 으뜸 영에게 나타난 삼위일체의 뜻을 계시하는 체험을 거치면서, 창조 아들은 최상위의 뜻을 드러내는 체험을 거쳤다. 최상위의 뜻을 계시하는 자로서 활동하면서, 미가엘은 모든 다른 주 아들과 더불어, 그 자신 최상위와 영원히 한편이 되었다. 현재 우주 시대에 그는 최상위를 계시하며, 최상위의 통치권을 사실화하는 데 참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다음 우주 시대에 바깥 공간에서 생길 우주들을 위하여, 그리고 거기서, 첫째 체험적 삼자일체 안에서 최상 존재와 함께 일하리라고 믿는다.
119:8.8 (1319.1) 유란시아는 온 네바돈에서 감상을 일으키는 성지(聖地)요, 사람 사는 1천만 세계에서 으뜸이다. 그리스도 미가엘, 온 네바돈의 군주, 그 영역에 멜기세덱 봉사자요, 한 체계의 구세주, 아담인 구원자, 천사 동료, 하늘 가는 영들의 친구요, 상물질 진보자,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었던 사람의 아들이요,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가 필사자로 있던 집이다. 너희의 기록이, 바로 이 예수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수여한 세계, 십자가의 세계로 언젠가 돌아오리라 약속했다고 할 때, 그 기록은 진실을 일러 준다.
119:8.9 (1319.2) [그리스도 미가엘이 일곱 번 자신을 수여한 것을 그리는 이 글은 한 시리즈의 발표 중에서 63번째 글이며, 이 시리즈는 필사 육체의 모습을 입고 미가엘이 땅에 나타날 때까지, 유란시아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수많은 성격자의 후원을 받았다. 이 여러 논문은 만투시아 멜기세덱의 지휘 하에 활동하는, 12자로 이루어진 한 네바돈 위원회의 허가를 받았다. 우리는 유란시아 시간으로 서기 1935년에 우리의 상관들이 허가한 기법에 따라, 이 이야기를 쓰고 영어로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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