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4 편 진리의 영을 수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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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서

제 194 편

진리의 영을 수여하다

194:0.1 (2059.1) 1시쯤에 신자 120명이 기도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모두가 이상한 것이 방에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동시에 이 제자들은 모두 새롭고 깊은 느낌, 곧 영적 기쁨ㆍ안전ㆍ자신감을 의식하게 되었다. 영적 힘을 이렇게 새롭게 의식하고 나서, 나가서 하늘나라 복음, 그리고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좋은 소식을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려는 강한 욕구가 뒤따랐다.

194:0.2 (2059.2) 베드로가 일어나서, 주가 그들에게 약속했던 진리의 영(靈)이 오신 것이 틀림없다고 선언하고, 그들이 성전으로 가서 그들의 손에 맡겨진 좋은 소식의 선포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베드로가 제안한 그대로 하였다.

194:0.3 (2059.3) 이 사람들은 그들이 전해야 하는 복음이 하나님이 아버지요 사람이 아들이라는 것을 훈련받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영적 환희와 개인적 승리를 느낀 바로 이 순간에, 이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식, 가장 큰 뉴스는 주가 부활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에서 권능을 받고, 떠나가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예수를 통하여 구원받는 것까지도―전파했지만, 뜻하지 않게, 복음 말씀 그 자체를 복음과 연결된 얼마큼의 사실로 바꿔치우는 잘못에 빠졌다. 베드로는 생각지 않고 이 실수에 앞장섰고, 다른 사람들은 계속 바울에 이르기까지 그의 뒤를 따랐으며, 바울은 좋은 소식의 신판(新版)으로부터 새 종교를 만들어냈다.

194:0.4 (2059.4) 하늘나라의 복음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 그리고 이와 함께 그 결과로 사람들이 아들이요 형제라는 진리이다. 그날부터 발전된 바와 같이 기독교는, 살아나고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와 함께, 신자의 친교 체험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아버지라는 사실이다.

194:0.5 (2059.5) 주를 죽이고 그의 가르침의 영향을 말소하려고 애썼던 세력을 이겼다는 느낌을 표현하려고 영을 받은 이 사람들이 이 기회를 낚아챈 것은 당연하다. 이와 같은 때에, 예수와 함께 가졌던 개인적 관계를 기억하고, 주가 아직도 살아 계시다, 그들의 우정은 끝나지 않았다, 주가 약속하신 대로 그 영이 정말로 그들에게 왔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쁨에 떨기가 더 쉬웠다.

194:0.6 (2059.6) 이 신자들은 갑자기 자신들이 다른 세상으로 옮겨갔다, 기쁨ㆍ권능ㆍ영광에 싸인 새로운 존재로 변했다고 느꼈다. 주는 그들에게 하늘나라가 권능을 가지고 오리라 일렀고, 더러는 그가 무슨 의미로 말씀했는가 비로소 깨닫는다고 생각했다.

194:0.7 (2059.7) 이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어떻게 이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버지요 사람이 형제라는, 예전에 전한 말씀 대신에 예수에 관한 새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는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1. 오순절 설교

194:1.1 (2060.1) 사도들은 40일 동안 숨어 있었다. 이날은 마침 유대인의 오순절(五旬節) 축제일이었고, 세계의 온 구석으로부터 수천의 방문자들이 예루살렘에 와 있었다. 많은 사람이 이 축제 때문에 도착했지만, 대다수는 유월절 뒤에 도시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겁이 난 이 사도들이 몇 주 동안의 은둔 생활에서 솟아나서 이제 대담하게 성전에 나타났고, 거기서 메시아가 살아났다는 새로운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사도가 마찬가지로 얼마큼 새롭게 통찰력과 힘을 영적으로 받았다는 것을 의식했다.

194:1.2 (2060.2) 2시쯤에, 베드로는 주가 이 성전에서 마지막으로 가르쳤던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열렬하게 연설하였고, 그 결과로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설득했다. 주는 가셨지만, 그들은 주에 관한 이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큰 힘을 가졌다는 것을 갑자기 발견했다. 그들이 전에 예수에게 헌신한 것이 옳았음을 입증하고, 동시에 사람들이 그를 믿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이야기를 더욱 선포하도록 계속 마음이 이끌린 것은 당연하다. 사도들 가운데 여섯 명, 베드로안드레야고보요한빌립마태가 이 모임에 참석했다. 그들은 한 시간 반이 넘도록 이야기했고, 말씀을 그리스어ㆍ히브리어ㆍ아람어로 전했으며, 또한 말할 만큼 익숙한 다른 언어로도 몇 마디 하였다.

194:1.3 (2060.3) 유대인 지도자들은 사도들이 대담해진 것에 놀랐지만, 사도들의 이야기를 믿는 큰 무리 때문에 그들을 건드리기를 두려워했다.

194:1.4 (2060.4) 4시 반이 되어서, 2천 명이 넘는 새 신자들이 사도들을 따라서 실로암의 못으로 내려갔고, 거기서 베드로안드레야고보요한은 주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군중에게 세례 주기를 마친 것은 어두워졌을 때였다.

194:1.5 (2060.5) 오순절은 세례받는 큰 축제요, 대문에서 전향자(轉向者), 즉 야웨 섬기기를 소망하는 이방인과 사귀는 때였다. 따라서 큰 무리의 유대인과 이방(異邦) 신자들이 이날에 세례받는 것이 더 수월했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어떤 면에서도 유대 신앙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이 뒤에도 얼마 동안, 예수 믿는 자들은 유대교 안에 있는 한 종파였다. 사도들을 포함해서 그들 모두가 유대인 예식 체계의 기본 요건에 아직도 충성했다.

2. 오순절의 중요성

194:2.1 (2060.6) 예수는 땅에서 살았고, 사람이 악마의 자식이라는 미신으로부터 사람을 되찾고 하나님의 아들, 믿음의 아들의 위엄까지 올려놓은 복음을 가르쳤다. 예수가 전한 말씀은 당대에 그가 전도하고 실천한 바와 같이, 말씀했던 시절에 사람의 영적 문제에 대한 효과적 해결책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세상을 떠났으니까, 그는 자기 대신에 진리의 영을 보낸다. 이 영은 사람 속에서 살고, 새로운 각 세대를 위하여 예수의 말씀을 다시 진술(陳述)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그래서 땅의 표면에서 나타날 새 집단의 필사자마다 새로운 최신판 복음을 가지게 될 것이요, 바로 그러한 개인적 깨우침과 집단을 위한 지침은 사람의 늘 새롭고 다채로운 영적 문제에 효과적 해결책인 것이 입증될 것이다.

194:2.2 (2060.7) 물론, 이 영의 첫 사명은 진리를 육성하고 개인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니, 이는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높은 형태의 인간의 해방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이 영의 목적은 신자에게서 고아라는 느낌을 없애는 것이다. 예수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았으니까, 진리의 영이 사람의 마음 속에서 거하려고 오지 않았다면, 모든 신자가 외로운 느낌을 맛볼 것이다.

194:2.3 (2061.1) 아들의 영을 이렇게 수여한 것은 온 인류에게 나중에 아버지 영(조절자)의 보편적 수여를 위하여 모든 정상(正常) 인간의 지성을 효과적으로 준비시켰다. 어떤 의미에서, 이 진리의 영우주의 아버지창조 아들, 이 두 분의 영이다.

194:2.4 (2061.2) 퍼부어진 진리의 영을 뚜렷이 지적으로 의식하게 되기를 기대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그 영은 결코 영 자신을 의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미가엘, 곧 아들을 의식하게 만든다. 처음부터 예수진리의 영이 스스로 말하지 않으리라 가르쳤다. 그러므로 네가 진리의 영과 친교한다는 증명은 이 영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가엘과 향상된 친교(親交)를 가지는 체험에서 발견된다.

194:2.5 (2061.3) 그 영은 또한 땅에서 사신 주의 일생을 비추고 다시 풀이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도와서 주의 말씀을 회상하고 알아듣게 하려고 왔다.

194:2.6 (2061.4) 다음에, 예수가 육체를 입고 살았던 것 같이, 또 영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세대, 지나가는 각 세대의 신자 한 사람 한 사람 속에서 지금 다시 새로이, 거듭하여 사는 것 같이, 진리의 영은 신자가 예수의 가르침과 일생이 현실이었다고 증언하는 것을 도우려고 왔다.

194:2.7 (2061.5) 그래서 진리의 영은 정말로, 모든 신자를 모든 진리로, 하나님의 아들, 하늘 가는 영원한 아들이라는 현실을 생생하게, 그리고 차츰차츰 영적으로 의식하는 체험을 더욱 알도록 이끌려고 오는 것처럼 보인다.

194:2.8 (2061.6) 예수는, 누구라도 글자 그대로 따르려고 애쓸 본보기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복종한 사람을 드러내는 일생을 살았다. 육체로 산 이 일생은, 십자가에서 죽고 나중에 부활한 것과 함께, 당장에 사람을 악마의 손아귀로부터―기분 상한 하나님으로부터 죄가 있다고 판결받지 않도록―사람을 도로 사려고 이처럼 몸값을 치렀다는 새 복음이 되었다. 그러나 비록 그 복음이 크게 왜곡되었어도, 예수에 대한 이 새 소식이 초기의 하늘나라 복음의 근본 진리와 가르침을 많이 지녔다는 것이 사실이다. 머지 않아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사람이 형제라는 이 감추어진 진리가 솟아나서 온 인류의 문명을 효과적으로 바꿀 것이다.

194:2.9 (2061.7) 그러나 지능의 이러한 잘못은 어떤 면에서도 신자(信者)가 영적으로 크게 진보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진리의 영이 내린 뒤 한달이 채 안 되어, 주와 함께 몸소 사랑에 넘친 관계를 가졌던 거의 4년 동안보다, 사도들 하나하나가 영적으로 더 진보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유익한 복음의 진실예수가 부활한 사실로 이렇게 갈아치운 것도, 그들의 가르침이 빠르게 전파되는 것을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의 인물과 부활에 관한 새로운 가르침 때문에 예수의 말씀이 빛을 잃은 것은 좋은 소식의 전파를 크게 용이하게 만든 듯하였다.

194:2.10 (2061.8) “영의 세례”라는 용어는 이 무렵에 아주 널리 쓰이게 되었는데, 다만 이렇게 진리의 영이 수여된 것을 의식하여 받아들이고, 이 새로운 영적 능력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이전에 겪은 모든 영적 영향이 확대된 것임을 개인적으로 인정함을 의미한다.

194:2.11 (2061.9) 진리의 영이 수여된 이후로 사람은 아버지의 영, 즉 생각 조절자, 아들의 영, 즉 진리의 영, 의 영, 즉 성령, 이렇게 세 가지 영의 가르침과 안내에 지배된다.

194:2.12 (2062.1) 어떤 면에서, 인류는 우주 영(靈)의 일곱 가지 영향력이 미치는 이중 세력에 지배된다. 초기의 진화 종족의 필사자는 지역 우주 어머니 영의 일곱 보조 지성 영의 점진적 접촉에 지배를 받는다. 지능과 영적 인식의 눈금에서 사람이 위로 올라감에 따라서, 궁극에 일곱 가지 상급 영적 세력이 사람 위에 떠돌고, 사람 안에 거하게 된다. 그리고 진보하는 여러 세계에 있는 이 일곱 영은 다음과 같다:

194:2.13 (2062.2) 1. 우주의 아버지가 내리신 영―생각 조절자.

194:2.14 (2062.3) 2. 영원한 아들의 영적 계심―온 우주의 영 인력(引力), 모든 영의 교통에 쓰이는 확실한 경로.

194:2.15 (2062.4) 3. 무한한 영의 영적 계심―모든 창조에 널리 있는 영 지성, 모든 진보하는 지성 존재가 가진 지적(知的) 인척 관계의 영적 근원.

194:2.16 (2062.5) 4. 우주의 아버지창조 아들의 영―진리의 영, 이것은 대체로 우주 아들의 영으로 여겨진다.

194:2.17 (2062.6) 5. 무한한 영우주 어머니 영의 영―성령(聖靈), 이것은 대체로 우주 영의 영으로 여겨진다.

194:2.18 (2062.7) 6. 우주 어머니 영의 지성 영―지역 우주의 일곱 보조 지성 영(靈).

194:2.19 (2062.8) 7. 아버지아들들과 들의 영―영에게서 태어난 필사자의 혼이 파라다이스생각 조절자와 융합한 뒤에, 그리고 나중에 파라다이스 최후 군단에서 신답고 영화로운 지위에 이른 뒤에, 그 영역에서 하늘 가는 필사자가 가지는 새로운 이름의 영.

194:2.20 (2062.9) 그래서 진리의 영이 내린 것은 하나님을 찾아서 승천하는 탐구를 도우려고 고안된 최종의 영 재산을 세상으로, 또 거기 있는 민족들에게 가져왔다.

3. 오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94:3.1 (2062.10) 야릇하고 이상한 많은 가르침이 오순절 날에 대한 초기의 이야기와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 진리의 영, 즉 새 선생이 인류와 함께 거하려고 온 이날에 일어난 사건들은 후세에, 어리석게도 감정 중시 주의가 갑자기 확산되는 것과 혼동되었다. 쏟아진 이 아버지아들의 영의 주요한 사명은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자비로움에 관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신다운 모든 다른 신격 특성보다 사람들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신성(神性)의 진실이다. 진리의 영은 1차적으로 아버지의 영 성품과 아들의 도덕적 품위를 드러내는 데 관심을 가진다. 창조 아들은 육체를 입고서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드러냈다. 진리의 영은 마음 속에서 창조 아들을 사람들에게 드러낸다. 일생에 “영의 열매”를 맺을 때, 사람은 다만 땅에서 산 자신의 일생에서 주가 나타낸 특성을 내보이는 것이다. 땅에 살았을 때, 예수는 하나의 인격자로서―나사렛 예수로서―일생을 살았다. 사람에게 깃드는 “새 선생”의 영으로서, 오순절 뒤로, 주는 진리를 가르침 받은 각 신자의 체험 속에서 일생을 새로이 살 수 있었다.

194:3.2 (2062.11) 인생을 사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이 이해하기 힘들고, 이 우주에서 진리가 지배하고 그 속에서 올바름이 승리한다는 관념과 조화시키기가 어렵다. 너무나 흔히 중상(中傷)ㆍ거짓말ㆍ부정직(不正直)ㆍ불의―죄―가 이기는 것처럼 보인다. 궁극에 믿음이 악ㆍ죄ㆍ불의를 이기는가? 이긴다. 예수의 일생과 죽음은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의 선이 진실하고 그의 믿음이 언제나 정당화되리라는 영원한 증명이다. “하나님이 와서 구원할 것인가 보자” 하면서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비웃었다. 십자가에 처형되는 그날은 어둡게 보였지만, 부활의 아침은 영화롭게 밝았다. 오순절 날은 더욱 밝고 더욱 즐거웠다. 비관적으로 절망하는 종교들은 인생의 짐에서 벗어나기를 찾으며, 끝없이 잠자고 쉬는 가운데 멸종되기를 바란다. 이것들은 원시의 두려움과 공포에서 생긴 종교이다. 예수의 종교는 허덕이는 인류에게 선포해야 할 새로운, 믿음의 복음이다. 이 새 종교는 믿음ㆍ희망ㆍ사랑에 바탕을 둔다.

194:3.3 (2063.1) 필사의 일생은 예수에게 아주 힘들고, 아주 모질고, 아주 심한 타격을 입혔다. 이 사람은 믿음과 용기,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흔들리지 않는 결심으로 이 절망스러운 직무에 대응하였다. 예수는 모든 끔찍한 현실 가운데서 인생을 살고―죽을 때에도―인생을 통달하였다. 인생에서 해방되려고 종교를 사용하지 않았다. 예수의 종교는 또 다른 존재에서 기다리는 더없는 기쁨을 누리려고 이 생명에서 벗어나기를 추구하지 않는다. 예수의 종교는 사람이 육체를 입고 지금 사는 인생을 높이고 고상하게 만들기 위하여 또 다른 영적 존재의 기쁨과 평화를 마련해 준다.

194:3.4 (2063.2) 종교가 사람들에게 아편이라면, 그것은 예수의 종교가 아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감각을 마비시키는 약을 마시기를 물리쳤고, 모든 육체에 쏟아진 그의 영은 사람을 위로 이끌고 앞으로 재촉하는, 힘찬 세계적 영향이다. 앞을 향하는 영적 욕구는 이 세상에 있는 가장 힘센 추진력이다. 진리를 배우는 신자는 땅에서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다.

194:3.5 (2063.3) 오순절 날에 예수의 종교는 민족의 제한과 종족의 사슬을 모두 깨뜨렸다. 이것은 언제까지나 진리이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해방이 있다.” 이날에 진리의 영은 주가 모든 필사자에게 친히 주신 선물이 되었다. 이 영은 하늘나라 복음을 더욱 효과 있게 전파하라고 신자들에게 자격을 주는 목적으로 내렸지만, 그들은 쏟아진 영을 받는 체험이,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면서 형성하는 새 복음의 일부라고 잘못 생각했다.

194:3.6 (2063.4) 진리의 영이 모든 성실한 신자에게 수여되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라. 이 영 선물은 사도들에게만 내린 것이 아니다. 위층 방에 모인 남녀 120명은 모두, 온 세상에 두루, 마음이 정직한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새 선생을 받았다. 이 새 선생은 인류에게 수여되었고, 진리를 사랑하는 데 따라서, 그리고 영적 실체를 깨닫고 이해하는 능력에 따라서, 모든 사람이 받았다. 마침내, 참 종교는 사제(司祭)들과 모든 신성한 계급의 보호를 받던 처지에서 벗어나 한 사람 한 사람의 혼 속에서 그 진정한 표현을 발견한다.

194:3.7 (2063.5) 예수의 종교는 가장 높은 부류의 영적 인격을 만들어내고 그 사람의 신성함을 선포하므로, 가장 높은 종류의 인간 문명을 육성한다.

194:3.8 (2063.6) 오순절에 진리의 영이 온 것은 과격하지도 보수적이지도 않은 종교를 가능하게 만들며, 그런 종교는 낡은 것도 새로운 것도 아니다. 늙은이나 젊은이에게 지배되어서도 안 된다. 예수가 땅에서 살았다는 사실은 시간을 표시하는 닻을 내리기 위하여 고정된 점을 마련해 주며, 한편 진리의 영을 수여한 것은 그가 실천한 종교와 선포한 복음을 영구히 확장하고 끝없이 성장하게 만든다. 그 영은 모든 진리로 안내하며, 영은 끝없이 진보하고 신성하게 펼쳐지는 종교, 확대되고 늘 성장하는 종교를 가르치는 선생이다. 이 새 선생은 진리를 찾는 신자에게 사람의 아들의 인격과 성품 안에 아주 거룩하게 접혀 있던 것을 언제까지나 펼쳐줄 것이다.

194:3.9 (2064.1) “새 선생”을 주신 것과 관련되어 나타난 현상,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함께 모였던 여러 종족과 민족의 사람들이 사도들의 전도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예수의 종교가 보편성이 있음을 가리킨다. 하늘나라 복음은 어떤 특별한 민족이나 문화나 언어와도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이 오순절 날은 예수의 종교를 자체가 물려받은 유대인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려고 영이 크게 노력했음을 입증했다. 모든 육체에 영이 쏟아지는 이 전시가 있은 뒤에도, 처음에 사도들은 개종한 사람들에게 유대교의 요구 조건을 부과하려고 애썼다. 바울조차도 이방인을 이 유대 관습에 복종시키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형제들과 다툼이 있었다. 어떤 계시(啓示)된 종교도 어떤 민족 문화에 젖게 되거나, 아니면 기존의 종족ㆍ사회 또는 경제 관습과 연결되는 심각한 잘못을 저지를 때에는 온 세상에 퍼질 수 없다.

194:3.10 (2064.2) 진리의 영의 수여는 어떤 형태와 예식과 신성한 장소에도, 그 영이 충분히 나타난 것을 맛본 자의 특별한 행위에도, 달려 있지 않다. 그 영이 위층 방에 모인 사람들에게 닥쳤을 때, 그들은 말없이 기도에 막 들어갔으니까, 그저 거기에 앉아 있기만 했다. 그 영은 도시 뿐 아니라 시골에도 내렸다. 사도들이 그 영을 받기 위하여, 몇년 동안 혼자서 명상하려고 외로운 곳으로 따로 갈 필요가 없었다. 언제까지나 오순절은 영적 체험의 관념과 특별히 유리한 환경에서 얻는다는 개념을 별개의 것으로 만든다.

194:3.11 (2064.3) 오순절은, 그날 영적으로 부여된 것과 함께, 언제까지나 주의 종교를 물리적 세력에 전혀 의존하지 않도록 해방하려고 고안되었다. 이 새 종교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이제 영적 무기를 갖추었다. 그들은 어김없는 용서, 견줄 데 없는 선의(善意), 풍부한 사랑으로, 나가서 세상을 정복해야 한다. 그들은 선으로 악을 이기고, 사랑으로 미움을 정복하고, 진리 속에서 용감하고 팔팔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길 장비를 갖추었다. 예수는 그의 종교가 결코 소극적이 아니라고 이미 추종자들에게 가르쳤다. 제자들은 봉사를 베푸는 데, 사랑을 드러내는 데, 언제나 활발하고 적극성이 있어야 했다. 이 신자들은 이제 더 야웨를 “만군의 주”로 바라보지 않았다. 이제 영원한 을 “하나님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아버지”로 여겼다. 하나님이 또한 누구에게도 영적 아버지라는 진리를 충분히 깨닫는 데 어느 정도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적어도 거기까지 진보했다.

194:3.12 (2064.4) 개인적으로 상처받은 것을 용서하고, 가장 지독한 불의(不義) 한가운데서도 부드러움을 유지하며, 끔찍한 위험이 앞에 닥쳐도 차분히 있으며, 두려움 없이 사랑과 인내의 행위로 미움과 진노의 악에 도전하는 힘을 오순절은 필사 인간에게 주었다. 유란시아는 그 역사 속에서 파괴적인 여러 대전쟁의 상처를 겪었다. 이러한 끔찍한 투쟁에 참여한 모든 편이 패배했다. 승자는 오직 하나 있었다. 이 모진 투쟁에서 평판이 높아져 솟아난 유일한 승자가 있었으니―곧 나사렛 예수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그의 복음이었다. 더 좋은 문명을 세우는 비결은 인간이 형제라는 주의 가르침, 사랑하고 서로 신뢰하는 선의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194:3.13 (2065.1) 오순절이 닥칠 때까지, 종교는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을 드러냈을 뿐이다. 오순절 이후에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을 찾고 있지만, 하나님이 또한 사람을 찾고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내고 나서 그 사람 안에서 거하라고 자신의 영을 보내는 광경이 온 세상을 비추고 있다.

194:3.14 (2065.2) 오순절에 절정에 이른 예수의 가르침이 있기 전에, 더 오래 된 여러 종교의 교리에는 여자에게 거의 또는 아무런 영적 지위가 없었다. 오순절 이후에, 하늘나라의 형제 단체에서 여자와 남자는 동등하게 하나님 앞에 섰다. 이렇게 영의 특별한 방문을 받은 120명 가운데 여인 제자가 많이 있었고, 그들은 이 축복을 남자 신도와 똑같이 나누어 가졌다. 예배 의식을 주관하는 성직을 이제 더 남자가 감히 독점할 수 없다. 바리새인은 “여자나 문둥병자나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계속 감사드릴지 모르지만, 예수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여자는 성에 근거를 둔 온갖 종교적 차별에서 언제까지나 해방되었다. 오순절은 종족의 특징, 문화의 차이, 사회 계급, 또는 성(性) 편견에 근거를 둔, 모든 종교적 차별을 없애버렸다. 새 종교를 믿는 이 신자들이 “주의 영이 있는 곳에 해방이 있다”하고 늘 외쳤던 것이 당연하다.

194:3.15 (2065.3) 예수의 어머니와 아우가 120명의 신자들 사이에 있었고, 이 보통 제자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또한 쏟아부은 영을 받았다. 이들은 좋은 선물을 동료들보다 더 많이 받지 않았다. 아무런 특별한 선물이 땅에서 예수의 집안 사람들에게 내려지지 않았다. 오순절은 특별한 사제 계급과 신성한 가족에 대한 온갖 관념의 종말을 고했다.

194:3.16 (2065.4) 오순절 이전에, 사도들은 예수를 위하여 많은 것을 버렸다. 집과 가족과 친구, 속세의 물건과 지위를 바쳤다. 그들은 오순절에 하나님께 헌신하였고, 아버지아들은 자신들을 사람에게 줌으로―사람 안에서 살라고 그들의 영을 보내어―응답했다. 자아(自我)를 버리고 영을 얻는 이 체험은 감정적 체험이 아니었다. 총명하게 자아를 포기하고, 아낌없이 거룩하게 바치는 행동이었다.

194:3.17 (2065.5) 오순절은 복음을 믿는 자들 사이에 영적 단결의 부름이었다. 그 영이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에게 내려왔을 때, 똑같은 일이 필라델피아알렉산드리아에, 참 신자들이 거하는 모든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신자 무리 가운데 오로지 한 마음과 혼이 있었다”는 것이 글자 그대로 참말이었다. 예수의 종교는 세상이 일찍이 본 가운데, 가장 강력한 통일하는 영향력이다.

194:3.18 (2065.6) 오순절은 개인ㆍ집단ㆍ나라ㆍ종족들의 자기 주장을 줄이려고 예정된 것이다. 긴장이 너무 고조되어 이따금 파괴하는 전쟁으로 터져나오는 것은 이 자기 주장의 정신이다. 인류는 오직 영적 접근으로 통일될 수 있고, 진리의 영은 세계에 보편적 영향력이다.

194:3.19 (2065.7) 진리의 영이 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받는 자를 오직 하나님의 뜻과 사람들의 복지에 마음을 다하는, 일생의 목적을 표현하도록 인도한다. 이기심(利己心)이라는 물질적 정신은 영적으로 새로이 내려준 이 사심없는 정신에 먹혀 사라졌다. 그때에도 지금도, 오순절은 역사 속의 예수가 실제로 체험하는 신의 아들이 되었음을 가리킨다. 쏟아진 이 영을 받는 기쁨을 인간 생활에서 의식하며 맛보았을 때, 이는 건강에 좋은 강장제요, 지성에 자극이요, 혼에 한없는 에너지이다.

194:3.20 (2065.8) 기도가 오순절 날에 영을 데려오지 않았지만, 기도는 각 신자의 특징을 나타내는, 영을 받는 능력을 결정하는 데 많이 상관되었다. 기도는 아낌없이 영을 내리도록 신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지만, 아주 흔히 더 크고 더 깊은 길을 파며, 그래서 그 길로, 성실한 기도와 참된 예배를 통해서, 잊지 않고 창조주와 끊임없는 교통을 유지하는 사람의 가슴과 혼으로, 신이 내려주시는 것이 흘러갈 수도 있다.

4. 기독교 교회의 시작

194:4.1 (2066.1) 예수가 그렇게 갑자기 적들에게 붙잡히고, 그렇게 빨리 두 도둑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사도와 제자들은 완전히 사기(士氣)가 꺾였다. 주가 체포되고 묶이고 채찍 맞고 십자가에 달렸다는 생각은 사도들에게도 너무 지나쳤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과 경고를 잊어버렸다. 그는 정말로 “하나님과 모든 사람 앞에서 행위와 말씀이 힘찬 선지자”였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희망했던 대로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할 메시아는 도저히 될 수 없었다.

194:4.2 (2066.2) 다음에 부활과 함께 절망에서 벗어나고, 그들이 주의 신성을 믿는 신앙이 회복된다. 거듭해서 주를 만나고 주와 함께 이야기하며, 그는 그들을 올리브산으로 데리고 나가서, 거기서 작별(作別)을 알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간다고 일러준다. 그들이 권능을 부여받을 때까지―진리의 영이 올 때까지―예루살렘에서 머물라고 이른다. 그리고 오순절 날에 이 새 선생이 오고, 그들은 당장에 새 힘을 얻어 복음을 전파하러 나간다. 죽어서 패배한 지도자가 아니라, 살아 계신 주를 대담하고 용감하게 따르는 사람들이다. 주는 이 전도자들의 가슴 속에 살아 계신다. 하나님은 이들의 머리 속에 있는 교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혼 속에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

194:4.3 (2066.3) “날마다 저희는 굳세게 마음을 합하여 성전에서 계속 모였고 집에서 빵을 나누었더라. 먹을 것을 기쁨으로, 한 마음으로 받았고, 저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모든 사람의 지지를 얻었더라. 저희 모두가 영으로 충만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으며, 믿은 군중은 한 마음과 한 뜻을 가졌고, 저희 가운데 한 사람도 무엇을 가졌든지 제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함께 썼더라.”

194:4.4 (2066.4)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사람이 서로 형제라는 하늘나라 복음을 나가서 전도하라고 예수가 세웠던 이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들은 새 복음을 가졌고, 새 체험으로 불이 붙었으며, 새로운 영적 에너지로 가득 찼다. 그들이 전하는 말씀은 살아나신 주를 선포하는 것으로 갑자기 바뀌었다: “나사렛 예수, 막강한 행적과 이적으로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 하나님이 미리 아신 것 같이, 굳게 결의한 법정이 넘겨준 주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죽였도다. 그는 모든 선지자의 입으로 하나님이 미리 알려준 것들을 이처럼 이루셨느니라. 하나님이 이 예수를 살렸고, 하나님은 그를 주, 그리스도로 만들었느니라. 하나님의 바른 손으로 높임을 받고, 아버지로부터 영의 약속을 받았으므로, 그는 너희가 보고 듣는 영을 퍼부었도다. 너희의 죄가 지워지고, 아버지가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그리스도를 보내도록 회개하라. 모든 것이 회복되는 시절까지 하늘은 그 예수를 받아들여야 하느니라.”

194:4.5 (2066.5) 하늘나라 복음, 예수가 가르친 말씀은, 갑자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질되었다. 그들은 이제 예수가 살다가 죽고 부활한 사실을 선포했고, 그가 시작한 일을 마치려고 이 세상으로 빨리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전파했다. 그래서 초기 신자들이 전한 소식은 그가 처음에 오셨던 사실에 관하여 전도하는 것, 그리고 그가 다시 오신다는 희망을 가르치는 것과 상관되었고, 그들은 그의 두 번째 오심이 아주 가까이 다가올 사건이라고 생각하였다.

194:4.6 (2067.1) 그리스도는 바야흐로 급속히 형성되는 교회의 신조가 되려고 했다. 그는 살아 있고, 사람들을 위해 죽었으며, 영을 주었고, 다시 오신다. 예수는 신자들의 모든 생각을 채웠고, 하나님과 그밖에 모든 다른 것에 대하여 모든 새로운 개념을 좌우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 예수아버지”라는 새 교리에 너무 열중해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아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랑의 아버지이라”는 예전에 전하던 말씀에 아랑곳할 수 없었다. 형제 사랑과 전례 없는 선의가 신자들의 이 초기 공동체에서 놀랍게 표현된 것은 참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를 믿는 신자들의 친교였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가족 국가에 속하는 형제들의 친교가 아니었다. 그들의 선의(善意)는 예수가 수여되었다는 개념에서 태어난 사랑에서 솟아났고, 필사 인간이 형제임을 인식한 데서 생겨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쁨으로 충만하였고, 모든 사람이 예수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에 이끌리는 그러한 새롭고 독특한 인생을 살았다. 하늘나라 복음 대신에, 그 복음에 관한 활기있고 해설적 논평을 사용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것조차도 인류가 일찍이 알게 된 가장 위대한 종교였다.

194:4.7 (2067.2) 새로운 친교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믿은 군중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친교, 빵을 같이 먹고 기도하기를 꾸준히 계속하였더라.” 그들은 서로 형제와 자매라고 불렀다.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인사했고, 가난한 자를 보살폈다. 그것은 예배할 때뿐 아니라 살면서 가지는 친교였다. 그들은 법령 때문에 공동체인 것이 아니라, 재물을 동료 신자와 함께 나누려는 소망 때문에 공동체였다. 자기 세대 안에 아버지의 나라를 세우는 일을 마치려고 예수가 돌아올 것이라 자신 있게 기대했다. 땅에 있는 소유물을 자진하여 이렇게 나누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직접 나타난 특징이 아니었다. 할 일을 마치고 하늘나라를 완성하려고 그가 언제라도 돌아오리라고, 이 남녀들이 아주 진지하고 자신 있게 믿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생각이 모자라는 이 형제 사랑을 좋은 의도로 이렇게 실험한 마지막 결과는 비참했고 불행을 낳고 있었다. 수천의 성실한 신자들이 재산을 팔고 그들의 자본재(資本財)와 기타 생산적 자산을 처분해버렸다. 시간이 지나자, 기독교인들의 “똑같이 나누는” 재산은 줄어들어 종말에 이르렀다―그러나 세상은 종말에 이르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안티옥의 신자들은 예루살렘의 동료 신자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돈을 걷고 있었다.

194:4.8 (2067.3) 이 시절에 그들은 주의 만찬(晩餐)을 제정된 방식에 따라서 축하했다. 다시 말해서, 사이 좋게 친교하는 회식을 위하여 모였고 식사가 끝날 때 성찬을 들었다.

194:4.9 (2067.4) 처음에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거의 20년이 지나서 “아버지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기 시작했다. 세례가 신자의 친교에 가입하는 데 유일한 조건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아무런 조직이 없었고, 단지 예수를 믿는 형제 단체였다.

194:4.10 (2067.5)예수 종파는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고, 다시 한 번 사두개인들이 그들을 주목했다. 그 가르침 가운데 아무것도 전혀 유대 율법의 준수를 방해하지 않는 것을 알고서, 바리새인들은 그 상황을 꺼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예수 종파의 지도자들을 감옥에 넣기 시작했고, 이것은 유력한 랍비들 중의 한 사람, 가말리엘의 조언을 받아들이라고 설득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가말리엘은 이들에게 조언하였다, “이 사람들을 멀리하고 버려두라. 이 회의나 이 일이 사람에게서 생겨났다면 뒤집히려니와 하나님에게서 생겨났다면, 너희가 뒤집어엎을 수 없을 것임이라. 아마도 너희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는 것까지 발견될까 두려우니라.” 그들은 가말리엘의 조언을 따르기로 결정했고, 예루살렘에서 평화롭고 조용한 시간이 뒤따랐으며, 이 동안에 예수에 관한 새 복음은 빨리 퍼졌다.

194:4.11 (2068.1)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인들이 큰 무리를 지어 올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만사가 순조로웠다. 로단의 생도 두 명이 예루살렘에 도착했고, 헬라파 사이에서 사람을 많이 개종(改宗)시켰다. 그들이 초기에 개종한 사람들 가운데 스테반바나바가 있었다. 이 유능한 그리스인들은 그다지 유대인의 관점을 가지지 않았고, 유대인 형태의 예배와 기타 예식 절차를 잘 따르지 않았다. 이 그리스인 신자들의 행위 때문에, 예수 단체와 바리새인 및 사두개인들 사이에 평화로운 관계가 종결되었다. 스테반그리스인 동료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더 가깝게 전도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유대인 권력자들과 직접 충돌하게 만들었다. 스테반의 한 대중 설교에서, 그가 강연의 못마땅한 부분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모든 재판 형식을 걷어치우고, 나서서 그 자리에서 그를 돌로 쳐 죽였다.

194:4.12 (2068.2) 스테반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믿는 자들 중에서 그리스 거류민의 지도자였고, 이렇게 새 신앙의 첫 순교자요, 초기 기독교회를 정식으로 조직하는 구체적 원인이 되었다. 이 새로운 위기로 인하여 신자들은 이제 더 유대 신앙 안에 있는 한 종파로서 계속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불신자들과 따로 독립해야 한다고 모두 찬성했다. 스테반이 죽은 지 한 달 안에,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의 지도 하에서 조직되었고, 예수의 아우 야고보가 그 교회에서 이름으로는 우두머리로 임명되었다.

194:4.13 (2068.3) 그리고 나서 유대인들의 새롭고 무자비한 박해가 터졌으며, 예수에 관한 이 새 종교를 안티옥에서 나중에 기독교라고 불렀는데, 그래서 이 종교를 활발하게 가르치는 선생들은 떠나서 예수를 선포하면서 제국의 끝까지 갔다. 바울의 시절 이전에, 이 소식을 가지고 가는 주도권은 그리스인의 손에 있었다. 이 첫 선교사들은 후일의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옛날에 알렉산더가 행진한 길을 따라서, 가자티레를 거쳐, 안티옥, 다음에 소 아시아를 지나서 마케도니아까지, 그런 뒤에 계속 로마까지, 그리고 제국의 가장 먼 구석까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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