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8 편무덤에 있던 시간
유란시아 서
제 188 편
무덤에 있던 시간
(2012.1) 188:0.1 예수의 필사 육체가 요셉의 무덤에 놓여 있던 하루 반,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한 사이의 기간은 미가엘이 땅에서 지낸 생애에서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장(章)이다. 우리는 사람의 아들이 무덤에 묻힌 것을 이야기하고 이 기록에 부활과 연결된 사건들을 적을 수 있지만, 금요일 오후 3시부터 일요일 새벽 3시까지, 약 36시간에 달하는 이 기간에 무슨 일이 정말로 벌어졌는가, 우리는 신빙성 있는 정보를 많이 제공할 수 없다. 주의 생애에서 이 기간은 로마 군인들이 그를 십자가에서 끌어 내기 조금 전에 시작되었다. 그는 죽은 뒤에 거의 1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려 있었다. 두 도둑을 처치하는 데 지연되지 않았다면, 더 일찍 끌어내렸을 것이다.
(2012.2) 188:0.2 유대인 통치자들은 도시 남쪽, 게헤나의 노천 무덤 구덩이에 예수의 시체를 던지게 하려고 계획했다. 십자가에 못박힌 희생자를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 계획을 따랐더라면, 주의 몸은 사나운 짐승들에게 노출되었을 것이다.
(2012.3) 188:0.3 그 동안에, 아리마대 요셉은 니고데모를 데리고 빌라도한테 가서, 적절히 장사지내려고 예수의 시체를 그들에게 넘겨 주기를 요청했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의 친구들이 그런 시체를 소유하는 특권을 얻으려고 로마 당국에게 뇌물(賂物)을 바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요셉은 사립 무덤에 예수의 시체를 옮길 허락을 얻는 데 돈이 필요하게 될 경우에 쓰려고, 큰 돈을 마련하여 빌라도 앞으로 갔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것 때문에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 요청을 듣자, 그는 요셉에게 골고다로 가서 주의 몸을 즉시 완전히 소유하도록 인가하는 명령서에 재빨리 서명했다. 그 동안에, 모래 폭풍이 어지간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예수의 시체가 노천의 공동 무덤 구덩이까지 도둑들의 시체를 따랐는가 확인할 목적으로 산헤드린을 대표하는 유대인 무리가 골고다를 향해서 이미 떠났다.
(2012.4) 188:1.1 골고다에 다다랐을 때, 요셉과 니고데모는 군인들이 십자가에서 예수를 끌어내리고 있고, 예수의 추종자들 중에서 아무도 그의 시체가 범죄자들의 무덤 구덩이로 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처리하려고 산헤드린의 대표자들이 대기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요셉이 주의 시체를 가지려고 빌라도의 명령을 백부장(百夫長)에게 내밀었을 때, 유대인들은 그 시체를 소유하려고 소동을 피우고 아우성쳤다. 날뛰면서 그들은 시체를 가져가려고 사납게 애썼고, 그들이 이렇게 하자, 백부장은 군인 넷을 자기 옆에 불렀다. 시체가 땅에 놓인 대로, 그들은 칼을 뽑아 들고, 주의 몸 좌우에 버티고 섰다. 그들이 성이 머리끝까지 치민, 이 성난 유대인 폭도를 밀어내는 동안 백부장(百夫長)은 다른 군인들에게 두 도둑을 버려 두라고 명령했다. 질서를 다시 찾고 나서, 백부장은 빌라도로부터 받은 허가증을 유대인들에게 읽고, 옆으로 걸어 나와서 요셉에게 말했다: “이 시체는 네 것이니 좋은 대로 처리하라. 아무도 간섭하지 않도록 나와 내 군인들은 대기하겠노라.”
(2013.1) 188:1.2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유대인 공동 묘지에 묻힐 수 없었고, 그러한 과정을 금하는 엄격한 법이 있었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이 법을 알았고, 골고다로 가는 길에 단단한 바위에서 깎아 새긴, 요셉의 새 가족 무덤에 예수를 묻기로 작정했고, 이것은 골고다의 북쪽에 짧은 거리에, 사마리아로 이어지는 길 건너에 있었다. 아무도 이 무덤에 묻힌 적이 없었고, 그들은 주가 여기에 쉬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요셉은 정말로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리라고 믿었지만, 니고데모는 몹시 의심했다. 산헤드린의 이 옛 회원들은 예수를 믿는 것을 얼마큼 비밀로 지켰다. 하지만 그들이 회의에서 사퇴하기 전에, 동료 산헤드린 의원들은 오랫동안 그들을 의심해 왔다. 이제부터 계속, 그들은 온 예루살렘에서 가장 과감하게 말하는 예수의 제자들이었다.
(2013.2) 188:1.3 4시 반쯤에 나사렛 예수의 장사(葬事) 행렬이 골고다에서 길 건너 요셉의 무덤을 향하여 떠났다. 그 시체는 네 사람이 날랐다시피, 리넨 시트에 둘둘 싸였고, 갈릴리에서 온 충실한 여인 구경꾼들이 뒤따랐다. 무덤까지 예수의 물질 몸을 지고 간 사람들은 요셉, 니고데모, 요한, 로마인 백부장이었다.
(2013.3) 188:1.4 그들은 시체를 무덤으로 날랐는데, 이것은 가로 세로가 약 3미터 되는 방이었고, 거기서 장사 지내려고 서둘러 시체를 준비했다. 유대인들은 죽은 사람을 정말로 묻지 않았고, 실제로 방부(防腐) 처리를 하였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몰약(沒藥)과 앨로를 잔뜩 가져왔고, 이제 이 용액으로 적신 붕대로 시체를 감았다. 방부 처리가 끝났을 때, 얼굴 둘레를 냅킨으로 동였고, 시체를 리넨 시트로 둘둘 감고, 엄숙하게 시체를 무덤에 있는 선반에 두었다.
(2013.4) 188:1.5 시체를 무덤에 둔 뒤에, 백부장은 군인들에게 돌 문을 무덤 입구 앞으로 굴리는 것을 도우라고 신호했다. 그리고 나서 군인들은 도둑들의 시체를 가지고 게헤나를 향하여 떠났고, 한편 다른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유월절을 지키려고 슬피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2013.5) 188:1.6 이 날이 준비일이고 안식일(安息日)이 막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장례는 어지간히 서두르고 성급하게 처리되었다. 남자들은 도시로 서둘러 돌아갔지만 여인들은 아주 어두울 때까지 무덤 가까이 남아 있었다.
(2013.6) 188:1.7 이 모든 것이 진행되는 동안, 여인들은 가까이 숨어 있었고, 그래서 이를 모두 보고 주가 어디에 누웠는가 지켜보았다. 이처럼 몰래 온 것은 여인들이 그런 때에 남자들과 상관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여인들은 예수가 매장을 위해서 적절히 준비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요셉의 집으로 돌아가서, 안식일 동안 쉬었다가, 향료와 연고(軟膏)를 준비하고, 시체를 안치하기 위하여 주의 몸을 적절히 준비하려고 일요일 아침에 돌아오기로 자기들끼리 합의를 보았다. 이 금요일에 무덤 가에서 이렇게 머문 여인들은 막달라 마리아, 클로바의 아내 마리아, 예수의 또 다른 이모 마르다, 세포리스의 레베카였다.
(2013.7) 188:1.8 다윗 세베대와 아리마대의 요셉을 제쳐 놓고,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거의 아무도 그가 사흘째에 무덤에서 일어나도록 예정되었다는 것을 정말로 믿거나 알아듣지 못했다.
(2014.1) 188:2.1 예수의 추종자들이 사흘째에 무덤에서 일어나리라는 약속을 무심코 흘려들었다면, 적들은 그렇지 않았다. 대사제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그가 사흘째에 일어나리라는 그의 말에 관하여 보고받았음을 기억했다.
(2014.2) 188:2.2 이 금요일 밤, 유월절 저녁 식사 뒤에, 자정쯤에 유대인 지도자들의 무리가 가야바의 집에 모였고, 사흘째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리라는 주의 주장에 관하여 걱정되는 것을 의논했다. 예수의 친구들이 무덤에 손대지 못하도록 그의 무덤 앞에 로마인 경비원 한 명을 배치하라는 산헤드린의 공식 요청(要請)을 지니고, 이튿날 일찍 빌라도를 방문하기로 된 산헤드린 위원회를 지명하고서 이 모임이 끝났다. 이 위원회의 대변인은 빌라도에게 말했다: “주여, 이 사기꾼 나사렛 예수가 아직도 살아 있는 동안에 ‘내가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나리라’하고 말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나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사흘이 지난 뒤까지, 그 무덤을 그 추종자들이 가까이 못하도록 안전히 지키게 할 명령을 내려 달라 요청하려고 우리가 당신 앞에 왔나이다. 우리는 그의 제자들이 와서 밤에 그를 훔치고 나서,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사람들에게 선포하지 않을까 크게 걱정되나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우리가 버려 둔다면, 이 잘못은 그를 살려 둔 것보다 훨씬 더 나쁘리이다.”
(2014.3) 188:2.3 산헤드린의 이 요청을 들었을 때 빌라도는 말했다: “너희에게 군인 10명의 경비대를 주겠노라. 너희는 가서 무덤을 안전하게 만들라.” 그들은 성전으로 돌아갔고, 자체 경비대 가운데 10명을 확보하고 나서, 이 유대인 경비원 10명과 로마 군인 10명과 함께, 이 안식일 새벽에도 이들을 무덤 앞에서 보초(步哨)로 세워 놓으려고 요셉의 무덤으로 행진했다. 이 사람들은 무덤 앞에 또 다른 돌을 굴려 놓고서,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방해받을까 걱정하여, 빌라도의 봉인(封印)을 이 돌들 위에, 또 그 둘레에 눌러 놓았다. 이 스무 명은 부활의 시간까지 경계하며 남아 있었고,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날라다 주었다.
(2014.4) 188:3.1 이 안식일 내내, 제자와 사도들은 숨어 있었고, 한편 온 예루살렘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건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이 때 로마 제국의 온 구석과 메소포타미아에서 거의 150만의 유대인이 예루살렘에 와 있었다. 이 때는 유월절 주간의 시작이었고, 이 모든 순례자가 예수가 부활했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그 보고를 가지고 갈 것이었다.
(2014.5) 188:3.2 토요일 밤 늦게, 요한 마가는 열한 사도를 몰래 아버지의 집으로 오라고 호출했는데, 그들은 거기서 자정 바로 전에, 모두 주와 함께 이틀 밤 전에 마지막 만찬을 들던 바로 그 위층 방에서 모였다.
(2014.6) 188:3.3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룻과 유다와 함께, 해가 지기 바로 전, 이 토요일 저녁에 가족과 합치려고 베다니로 돌아갔다. 다윗 세베대는 니고데모의 집에서 남아 있었고, 거기서 일요일 아침 일찍 그의 사자들이 모이도록 주선한 적이 있었다. 예수의 몸에 방부 처리를 계속하려고 향료(香料)를 준비했던 갈릴리 여인들은 아리마대 요셉의 집에서 머물렀다.
(2014.7) 188:3.4 나사렛 예수가 요셉의 새 무덤에서 쉬고 있다고 생각된 이 하루 반의 기간에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어떤 다른 사람 이 같은 상황에서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십자가에서 똑같이 자연사한 듯하다.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하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들었다. 그의 생각 조절자는 성격화된 지 오래 되었고, 예수의 필사의 몸과 따로 존재를 유지했으니까, 그러한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넉넉히 이해하지 못한다. 주의 성격화된 조절자는 어떤 의미에서도 그가 십자가에서 육체로 죽은 것에 영향을 받을 수 없다. 예수가 한동안 아버지의 손에 맡긴 것은, 인간 체험의 기록부를 저택 세계들로 옮기기 위하여 필사 지성을 영으로 만드는 과제에서, 조절자의 초기 행적의 영 사본(寫 本)이었음에 틀림없다. 예수의 체험 속에는 구체(球體)들에서 믿음이 성장하는 필사자들의 영 본질, 즉 혼과 비슷한 어떤 영적 실체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의견일 따름이다―우리는 예수가 아버지께 무엇을 맡겼는지 모른다.
(2015.1) 188:3.5 우리는 주의 육체 형태가 일요일 새벽 3시쯤까지, 요셉의 무덤에 거기서 쉬었다는 것을 알지만, 이 36시간 동안 예수 인격(人 格)의 지위에 관하여 전적으로 분명치 않다. 얼마큼 다음과 비슷하게, 때때로 이것들을 우리끼리 감히 설명하려 해 보았다:
(2015.2) 188:3.6 1. 미가엘의 창조자 의식은 풀려난 채로 있고, 신체로 육신화한 데 들어 있던, 관계된 그 필사 지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음이 틀림없다.
(2015.3) 188:3.7 2. 우리가 알건대 이 기간에 땅에 계셨고, 집합한 하늘 무리들을 몸소 지시했던, 예수의 예전 생각 조절자.
(2015.4) 188:3.8 3. 처음에는 그의 생각 조절자가 직접 기울인 노력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끊임없이 아버지의 뜻을 그가 선택함으로 이루어진 것 같이, 나중에는 이상적인 필사 존재의 육체적 필요와 영적 요구 사이에 자신이 완전히 조절함으로써, 나사렛 사람이 육체를 입은 일생 동안에 쌓아 얻은 영 신분이,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보호 속에 맡겨졌음이 틀림없다. 이 영 실체가 부활한 성격의 일부가 되려고 돌아왔는지 그렇지 않은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랬다고 믿는다. 그러나 외계 우주의 조직되지 않은 영역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우주들과 연관하여, 밝혀지지 않은 운명 속에 네바돈 최후 군단을 지휘하기 위하여 나중에 해방되려고, 예수의 이 혼 신분(身 分)이 “아버지의 품” 속에서 지금 쉬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우주에 있다.
(2015.5) 188:3.9 4. 우리는 예수의 인간 의식, 즉 필사자로서 가졌던 의식은 이 36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기간에 우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인간 예수가 하나도 몰랐다고 믿을 근거를 가졌다. 필사자의 의식이 깨닫기에는 아무런 시간의 경과가 없는 듯하다. 즉 생명(生命)의 부활은, 똑같은 순간에, 죽음의 잠을 따랐다.
(2015.6) 188:3.10 이것이 무덤에서 이 기간에 예수의 지위에 관하여 우리가 기록할 수 있는 거의 전부이다. 우리가 암시할 수 있는 서로 관계된 여러 가지 사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도저히 이것들을 해석할 능력이 없다.
(2015.7) 188:3.11 사타니아의 첫째 저택 세계의 부활실에 있는 광대한 안마당에는, “미가엘 기념관”이라고 알려졌고 지금은 가브리엘의 봉인을 지니고 있는, 훌륭한 물질 및 상물질로 이루어진 구조를 지금 볼 수 있다. 이 기념관은 미가엘이 이 세상을 떠난 뒤 얼마 있다가 지어졌는데, 이 비문을 지닌다: “유란시아에서 나사렛 예수가 사람으로서 이동한 것을 기념하여.”
(2016.1) 188:3.12 1백 명으로 이루어진 구원자별 최고 회의가 이 기간에, 유란시아에서 가브리엘의 사회(司會)를 보는 가운데 집행 회의를 열었다는 것을 보이는 기록들이 존재한다. 또한 유버르사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이 이 시간에, 네바돈 우주의 지위에 관하여 미가엘과 교통했다는 것을 보이는 기록도 있다.
(2016.2) 188:3.13 우리는 주의 몸이 무덤에 누워 있는 동안에, 미가엘과 구원자별에 계시는 이마누엘 사이에 적어도 한 통신문이 지나갔다는 것을 안다.
(2016.3) 188:3.14 예수의 몸이 무덤에서 쉬는 동안에 열린 회의, 예루셈에서 있던 혹성 영주들의 체계 회의에서 어떤 성격자가 칼리가스티아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을 믿을 만한 좋은 이유가 있다.
(2016.4) 188:3.15 에덴시아의 기록들은 놀라시아덱의 별자리 아버지가 유란시아에 있었고, 무덤에 있던 이 시간에 미가엘로부터 지침을 받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2016.5) 188:3.16 그리고 겉보기에 육체적으로 죽은 이 시간에, 예수의 성격 전부가 잠들어 무의식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키는 많은 다른 증거가 있다.
(2016.6) 188:4.1 예수는 필사 인간이 지은, 종족의 죄책감을 대속하거나, 달리 기분을 상하고 용서 없는 하나님에게 일종의 효과적인 접근을 마련하려고 십자가에서 이렇게 죽지 않았다.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죄 많은 사람이 구원받는 길을 열어 놓으려고 희생물로서 자신을 내놓지 않았다. 대속(代贖)하고 신을 달랜다는 이 아이디어들이 그릇되기는 하지만, 그런데도 십자가에서 예수가 이렇게 돌아가신 데 부여된 중요성, 지나쳐서는 안 될 중요성이 있다. 유란시아가 사람이 사는 다른 이웃 혹성들 사이에서 “십자가의 세계”라고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2016.7) 188:4.2 예수는 유란시아에서 육체를 입고 필사자의 일생을 한껏 살기를 바랐다. 죽음은 보통, 삶의 일부이다. 죽음은 필사자의 연극에서 마지막 막(幕)이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의미(意味)를 거짓되게 풀이하는 미신 같은 잘못을 피하려고 좋은 뜻으로 노력하면서, 너희는 주의 죽음의 참된 의미와 진정한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2016.8) 188:4.3 필사 인간은 결코 대사기꾼들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예수는 여러 구체(球體)의 배반한 통치자와 타락한 영주들의 손아귀에서 몸값을 치르고 사람을 되찾으려고 죽지 않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필사자의 혼을 그 조상의 잘못 때문에 벌하는 것처럼 상스러운 불법(不法)을 결코 생각해 내지 않았다. 주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인류가 하나님에게 지게 된 빚을 하나님께 갚으려는 노력으로 이루어진 희생물도 아니었다.
(2016.9) 188:4.4 예수가 땅에서 살기 전에는, 너희가 그러한 하나님을 믿어도 아마도 정당화되었을지 모르지만, 주가 너희 동료 필사자들 사이에서 살다가 돌아가신 뒤에는 그렇지 않다. 모세는 창조자 하나님의 위엄과 응보를 가르쳤지만, 예수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 주었다.
(2016.10) 188:4.5 동물적 성질―악행을 향한 성향―은 물려받을지 모르지만, 죄는 부모로부터 아이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죄는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법을 거슬러서, 의지를 가진 개별 피조물이 의식하여, 깊이 생각한 끝에 반항하는 것이다.
(2017.1) 188:4.6 예수는 꼭 이 한 세계의 종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우주 전체를 위하여 살다가 돌아가셨다. 여러 영역의 필사자들은 예수가 유란시아에서 살다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구원을 가졌지만, 그런데도 이 세상에 그가 자신을 수여한 것은 구원의 길을 크게 비춘 것이 사실이다. 그의 죽음은, 육체를 입고 죽은 뒤에 필사자가 살아남는다는 확실성을 언제까지나 분명히 밝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2017.2) 188:4.7 예수를 희생자, 대속자, 또는 구속자(救贖者)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적당하지 않아도, 구원자라 고 언급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그는 언제까지나 구원받는 (살아남는) 길을 더욱 뚜렷하고 확실하게 만들었다. 네바돈 우주의 모든 세상에서 모든 필사자를 위하여 구원의 길을 더욱 낫게, 더욱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2017.3) 188:4.8 하나님이 참되신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관념, 예수가 일찍이 가르친 유일한 개념을 너희가 일단 깨달으면, 일관성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이 기분을 상한 군주요, 첫째 가는 기쁨이 잘못하는 백성들을 찾아내고, 자신과 거의 비슷한 어떤 존재가 그들을 위해서 고통받고, 대체물로서, 그들 대신에 죽으려고 자청하지 않으면 그들이 알맞게 벌받도록 조치를 취하는 엄하고 전능한 통치자라는 모든 원시 개념을 너희는 당장에 완전히 버려야 한다. 몸값을 내고 대속한다는 관념 전체는, 나사렛 예수가 가르치고 본보기를 보인 그 하나님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은, 신다운 성품 가운데 어느 것보다 못하지 않다.
(2017.4) 188:4.9 대속(代贖)하고 희생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 모든 개념은 이기심에 뿌리를 박고 근거를 두었다. 예수는 사람이 동료들에게 봉사를 베푸는 것이 영적 신자들의 형제 정신의 가장 높은 개념이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믿는 자들은 구원을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 신자(信者)의 으뜸가는 관심은 개인이 구원받으려는 이기적 소망이 아니라, 예수가 필사 인간들을 사랑하고 섬긴 것 같이, 사람의 동료들을 사랑하고, 따라서, 섬기려는 사심 없는 욕구이어야 한다.
(2017.5) 188:4.10 진정한 신자들은 죄에 대하여 앞날에 벌받는 것을 그렇게 많이 걱정하지 않는다. 진정한 신자는 오늘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에만 아랑곳한다. 지혜로운 아버지가 아들들을 꾸짖을 수 있다는 것이 참말이지만, 사랑으로, 고치는 목적으로, 이 모든 것을 행한다. 그들은 성이 나서 벌을 내리지 않으며, 징벌로 꾸짖지도 않는다.
(2017.6) 188:4.11 하나님이 응보가 최고로 다스리는 우주에서 엄격하고 정당한 군주라 하더라도, 죄지은 위반자 대신에 결백한 희생자를 바꿔치는 어리석은 계획에 만족해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2017.7) 188:4.12 예수의 죽음에 관하여 큰 일은, 인간 체험을 부유하게 하고 구원의 길을 넓히는 데 관계되다시피,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죽음을 대한 더할 나위 없는 태도와 견줄 데 없는 그 정신이다.
(2017.8) 188:4.13 대속한다는 이 몸값 아이디어 전체가 구원을 비현실 수준에 놓으며, 그러한 개념은 순전히 철학적이다. 인간의 구원은 실재하며, 구원은 피조물의 믿음으로 붙잡고, 그로서 개별 인간의 체험 속으로 합병될 수 있는 두 가지 실체에 근거를 둔다. 즉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 그리고 그와 관계되어, 사람이 형제라는 진리이다. 결국은 “너희에게 빚진 자들을 너희가 용서하는 것 같이, 너희의 빚도 용서를 받으리라”는 것이 참말이다.
(2017.9) 188:5.1 예수의 십자가는 참 목자가 그의 양 떼 가운데서 자격 없는 구성원에게도 최상으로 헌신함을 한껏 보여 준다. 그 십자가는 언제까지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모 든 관계를 가족의 기초 위에 둔다. 하나님은 아버지요 사람은 아들이다. 사랑, 즉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는 그 사랑은, 창조자와 피조물의 우주 관계에서 핵심 진리가 된다―악을 행하는 백성이 고통을 받고 벌받는 데서 만족을 추구하는 임금이 내리는 응보는 그렇지 않다.
(2018.1) 188:5.2 십자가는 죄인들을 향한 예수의 태도가 정죄(定罪)도 묵인도 아니지만, 오히려 영원하고 사랑하는 구원임을 언제까지나 보여 준다. 예수의 삶과 죽음이 사람들을 선하고 올바르게 살아남도록 설득한다는 의미에서, 그는 참으로 구원자이다. 예수는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그의 사랑은 인간의 가슴 속에서 사랑의 반응을 일깨운다. 사랑은 참으로 전염성이 있고 영원히 창조성이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죄를 용서하고 모든 악행을 삼킬 만큼, 충분히 힘찬 신성한 사랑을 본보기로 보여 준다. 예수는 이 세상에게 정의보다―단지 엄밀한 의미에서 옳고 그른 것보다―더 높은 품질의 올바름을 드러냈다. 신의 사랑은 다만 잘못을 용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잘못을 흡수하고 실제로 없애 버린다. 사랑에서 나오는 용서는 자비로 베푸는 용서를 완전히 초월한다. 자비는 나쁜 일을 행한 죄를 한쪽으로 몰아놓지만, 사랑은 그로부터 생기는 죄와 모든 약점을 언제까지나 없애 버린다. 예수는 새로운 생활 방법을 유란시아에 가져왔다. 악에 저항하지 말고 그를 통해서 악을 효과적으로 없애 버리는 선을 찾으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예수의 용서는 묵인이 아니라, 정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이다. 구원은 잘못을 무시하지 않으며, 잘 못된 것을 옳게 바꾼다. 참된 사랑은 미움과 타협하거나 미움을 묵인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을 없애 버린다. 예수의 사랑은 결코 그냥 용서하는 것만으로 만족해하지 않는다. 주의 사랑은 회복, 영원히 살아남는 것을 뜻한다. 너희가 이 영원한 회복을 의미한다면, 구원을 죄값 치르기로 언급하는 것이 전적으로 적절하다.
(2018.2) 188:5.3 사람들을 몸소 사랑하는 힘으로, 예수는 죄와 악의 위력을 깨뜨릴 수 있었다. 이로서 더 나은 생활 방법을 선택하라고 사람들을 해방하였다. 예수는 과거로부터 구원받음을 묘사했고, 구원은 그 자체로 앞날의 승리를 약속했다. 용서는 이렇게 구원을 마련했다. 신의 사랑의 아름다움은, 일단 인간의 마음에 충분히 인정을 받으면, 언제까지나 죄의 매력과 악의 힘을 없애 버린다.
(2018.3) 188:5.4 예수의 고통은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실제로 나사렛 예수는 정말로 맹렬하게 필사자로 존재하는 십자가에서 약 25년을 보냈다. 십자가의 참된 가치는 십자가가 그의 사랑의 최고이자 마지막 표현, 그의 자비의 완성된 계시라는 사실에 있다.
(2018.4) 188:5.5 사람이 사는 수백만의 세계에서, 도덕적 투쟁을 그만두고 훌륭한 믿음의 싸움을 버리라고 유혹받았을지 모르는 수십조에 이르는 진화하는 피조물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다시 한 번 보고 나서, 다음에 하나님이 사심(私心) 없이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 바쳐진 그의 육신화된 목숨을 버리는 광경을 보고서, 영감을 받고 착실히 전진하였다.
(2018.5) 188:5.6 십자가 위에서 죽음이 가져온 승리는 예수를 공격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에 나타난 정신에 모두 요약된다.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소서, 저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나이다”하고 기도했을 때, 그는 십자가를 사랑이 미움을 이기고 진리가 악에 승리하는 영원한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 사랑의 헌신은 광대한 우주에 두루 전염되었다. 제자들은 주로부터 그 헌신을 전염받았다. 이 봉사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라고 요청받은, 주의 복음을 가르친 최초의 선생은,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 때 말했다, “이 죄를 저희들의 책임에 돌리지 마소서.”
(2018.6) 188:5.7 십자가가 사람의 가장 좋은 성품에 최대로 호소하는 것은 자기의 동료 인간에게 봉사하는 데 목숨을 기꺼이 버린 사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 을 기쁘게 버리려 하는 것, 사람은 이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질 수 없다―예수는 적들을 위하여 목숨을 기쁘게 버리는 그런 사랑을 가졌고, 이것은 땅에서 그 때까지 알려진 어떤 것보다 더 큰 사랑이었다.
(2019.1) 188:5.8 유란시아와 마찬가지로 다른 여러 세상에서,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서 인간 예수가 죽는 이 숭고한 광경은 필사자들의 감정을 휘저었고, 한편 천사들의 가장 높은 헌신을 일깨웠다.
(2019.2) 188:5.9 십자가는 신성한 봉사, 사람이 자기 동료들의 복지와 구원에 목숨을 바치는 것을 나타내는 높은 상징이다. 십자가는 죄지은 사람들 대신에, 기분을 상한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 결백한 하나님의 아들을 희생함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광대한 우주를 통해서 두루, 선한 자들이 자신을 악한 자들에게 수여하고, 그로서 바로 이 사랑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구원하는 신성한 상징으로서 언제까지나 서 있다. 십자가는 가장 높은 형태의 사심 없는 봉사를 나타내는 표시로서, 죽음, 십자가의 죽음 속에서도, 진심으로 베푸는 봉사에서 올바른 생명을 충분히 수여하는 최고의 헌신(獻身)을 나타내는 표시로서 서 있다. 예수의 수여 생명의 큰 상징이 된 바로 그 광경은, 우리 모두가 가서 마찬가지로 하고 싶어하도록 참으로 영감을 준다.
(2019.3) 188:5.10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는 예수를 바라볼 때, 생각 있는 남녀는 하찮은 골칫거리와 순전히 허구(虛構)인 많은 불만은커녕, 인생의 가장 혹독한 어려움에도 자신이 불평하도록 다시는 도저히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삶은 너무 영화롭고 죽음은 아주 승리에 넘쳐서, 우리 모두가 이 두 가지를 기꺼이 나누도록 마음이 이끌린다. 소년 시절부터, 십자가에서 죽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이 광경에 이르기까지, 미가엘의 자신 수여 전체에는 마음을 끄는 참된 힘이 있다.
(2019.4) 188:5.11 그러면 너희가 십자가를 하나님의 계시(啓示)로서 바라볼 때, 원시인의 눈으로나 후일의 야만인의 관점을 가지고 보지 않도록 하여라. 이들은 하나님을 엄격하게 응징하고 엄밀하게 법을 집행하는 무자비한 군주로 여겼다. 차라리 너희는 광대한 우주의 필사 종족들에게 수여하는 일생의 사명에 예수가 쏟은 사랑과 헌신의 마지막 명시를 십자가에서 꼭 보도록 하여라. 사람의 아들의 죽음 속에서, 필사자 구체들에 사는 아들들에게 쏟는 아버지의 신다운 사랑이 펼쳐지는 그 절정을 보아라. 이처럼 십자가는 그러한 선물과 헌신을 기쁘게 받는 자들에게 기꺼이 애정을 바치고 자진해서 구원을 주는 것을 묘사한다. 십자가에는 아버지가 요구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오로지 예수가 아주 기쁘게 준 것, 피하려 하지 않은 것만 있었다.
(2019.5) 188:5.12 사람이 달리 예수를 고맙게 여기고 땅에서 그가 자신을 수여한 뜻을 이해할 수 없다면, 적어도 예수가 필사자로 고통을 같이 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이 현세에서 받는 고통의 성질이나 한계를 창조자가 모른다고 결코 아무도 걱정할 수 없다.
(2019.6) 188:5.13 우리가 알건대, 십자가에서 죽음은 사람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과 아들의 끝없는 자비를 사람이 깨닫도록 자극하고, 이 보편적 진리를 온 우주에 퍼뜨리기 위한 것이다.
유란시아 서
- 표제지
- 제 1 부 중앙 우주와 초우주
- 제 2 부 지역 우주
- 제 3 부 유란시아의 역사
- 제 4 부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
- 제 120 편미가엘의 유란시아 수여
- 제 121 편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했던 시대
- 제 122 편예수의 탄생과 아기 시절
- 제 123 편예수의 어린 시절 초기
- 제 124 편예수의 어린 시절 후기
- 제 125 편예루살렘에 가신 예수
- 제 126 편결정적인 두 해
- 제 127 편청년기 시절
- 제 128 편예수의 어른 시절 초기
- 제 129 편예수의 어른 시절 후기
- 제 130 편로마로 가는 길
- 제 131 편세계의 종교
- 제 132 편로마에서 머무를 때
- 제 133 편로마에서 돌아오는 길
- 제 134 편과도기
- 제 135 편 세례자 요한
- 제 136 편세례와 사십일
- 제 137 편갈릴리에서 기다리는 때
- 제 138 편하늘나라 사자의 훈련
- 제 139 편열두 사도
- 제 140 편열두 사도를 세움
- 제 141 편대중 전도의 시작
- 제 142 편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보내다
- 제 143 편사마리아를 거쳐서
- 제 144 편길보아와 데카폴리스에서
- 제 145 편사건이 많았던 나흘을 가버나움에서
- 제 146 편갈릴리에서 첫 전도 여행
- 제 147 편막간의 예루살렘 방문
- 제 148 편전도사 훈련을 벳세다에서
- 제 149 편두 번째 전도 여행
- 제 150 편세 번째 전도 여행
- 제 151 편바닷가에서 머무르며 가르치다
- 제 152 편가버나움 위기까지 이끈 사건들
- 제 153 편가버나움에서 위기가
- 제 154 편 가버나움에서 마지막 며칠
- 제 155 편갈릴리 북부를 거쳐서 달아나다
- 제 156 편티레와 시돈에서 머무르다
- 제 157 편케자리아 빌립비에서
- 제 158 편변모의 산
- 제 159 편데카폴리스 여행
- 제 160 편알렉산드리아의 로단
- 제 161 편로단과 계속한 토론
- 제 162 편천막 축제에서
- 제 163 편 마가단에서 칠십인을 세우다
- 제 164 편헌당 축제에서
- 제 165 편페레아 선교가 시작되다
- 제 166 편마지막 북 페레아 방문
- 제 167 편필라델피아 방문
- 제 168 편나사로의 부활
- 제 169 편펠라에서 있은 마지막 가르침
- 제 170 편하늘나라
- 제 171 편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 제 172 편예루살렘으로 들어가다
- 제 173 편월요일에 예루살렘에서
- 제 174 편화요일 아침 성전에서
- 제 175 편마지막 성전 강연
- 제 176 편화요일 저녁 올리브 산에서
- 제 177 편수요일, 쉬는 날
- 제 178 편 캠프에서 마지막 날
- 제 179 편마지막 만찬
- 제 180 편작별의 말씀
- 제 181 편마지막 훈계와 경고
- 제 182 편겟세마네에서
- 제 183 편배반, 그리고 예수가 잡히다
- 제 184 편산헤드린 법정 앞에서
- 제 185 편빌라도 앞에서 받은 재판
- 제 186 편십자가에 못박히기 바로 전
- 제 187 편십자가에 못박힘
- 제 188 편무덤에 있던 시간
- 제 189 편부활
- 제 190 편예수가 상물질 모습으로 나타나심
- 제 191 편사도와 다른 지도자들에게 나타나심
- 제 192 편갈릴리에서 나타나심
- 제 193 편마지막 출현과 승천
- 제 194 편진리의 영을 수여함
- 제 195 편오순절 뒤에
- 제 196 편예수의 믿음